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히가시노 게이고] 매스커레이드 이브

일루젼 2023. 8. 30.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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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출판 : 현대문학 
출간 : 2015.08.21 


       

<매스커레이드> 시리즈의 두 번째 이야기, <매스커레이드 이브>. 세 번째 이야기가 <매스커레이드 나이트> 임을 떠올려보면 어쩐지 더 의미심장한 제목이다. 어쩌면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에도 작가는 그다음 날을 구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작중 시간대로는 이전작 <매스커레이드 호텔>로부터 약 3-4년 전의 이야기로, 아직은 더 젊고 미숙했던 두 주인공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지나가듯 언급되었던 일화들이 '현재 시점'으로 진행되므로 독자들은 '나만이 아는 이야기'를 발견해 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이 일이 앞으로 어떻게 연결될지, 혹은 어떤 상황에서 다시 떠오를지를 아는 것은 작품 밖에 존재하는 작가와 독자뿐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두 주인공의 모습이다. 몇 년 후의 모습과 비교하자면 실수도 잦고, 성급한 면도 있지만 본질적인 '인간성'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몇 년 뒤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는 주인공이 과거에는 이렇게 생각했고, 이런 감정을 느꼈었다는 사실을 훔쳐보고 있자면 어딘지 모르게 뭉클하다.

 

반면 서로의 모습이 뒤바뀌는 면도 있다. <매스커레이드 호텔>에서 볼 수 있었던 닛타와 나오미의 모습은 <매스커레이드 이브>에서의 모습과 교차되어 겹쳐진다. 그건 각자가 이미 자신의 영역에서는 중간급 이상으로 성장했지만, 상대의 영역에서는 '외부자'였기에 드러나는 미숙함 때문일 것이다. 또한 <호텔>에서 보여준 중간관리자로서의 주인공들과, 지금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이브>의 상사들을 비교하며 읽는 것도 색다른 재미를 준다.   

 

아, 그리고 도중에 한 번 크게 당황했었다. 틀림없이 '도쿄타워'가 보이는 도쿄의 고급 호텔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오사카 이야기가 나와서 '설정 오류인가?' 싶어 잠시 이전작과 앞부분을 뒤적여보기도 했다. 전작과 소소하면서도 섬세하게 연결된 포인트들이 많았던 터라 많이 놀랐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전체 시리즈를 읽는 동안 가장 놀랐던 순간이었다. 조금 더 읽다 보면 의문은 곧 해소가 된다. <매스커레이드 이브>도 잡지 연재가 진행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회를 처음 읽던 순간의 독자들 또한 당황했을 것을 생각하면 일부러 설명을 뒤에 배치한 작가의 짓궂음이 의뭉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이런 오해도 독서의 재미라면 재미다. 

 

즐거웠다.         

 


   

- 오후 6시를 넘어설 무렵부터 프런트를 찾는 손님이 부쩍 늘었다. 거의 비즈니스맨으로 보이는 남자 손님들이다. 이 시간대에 체크인하는 손님은 대부분 표정이 밝다,라는 건 상사인 프런트 오피스 매니저의 설이다. 상담이든 영업이든 일이 잘 풀리지 않고서야 이런 시간에 호텔에 들어오는 경우는 없을 테니까,라는 게 그 이유였다. 

- 차례차례 찾아오는 투숙객들의 얼굴을 보면서 그 설이 어느 정도 맞는지도 모르겠다고 야마기시 나오미는 생각했다. 그들의 표정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안도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에 비해 밤늦게 나타나는 손님들 중에는 단순한 피로의 기색과는 또 다른, 초조함이라고 해야 할 것을 풍기는 사람이 많다. 그런 때는 최소한 이 호텔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편히 지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 한 여자 손님이 다가왔다. 나이는 이십 대 후반쯤일까. 긴 머리에 웨이브가 들어갔고 단정한 얼굴의 여자다. 스타일도 좋아서 회색 원피스가 무척 잘 어울렸다. 나오미는 그 옷을 폭시 매장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들고 있는 백은 아마도 프라다일 것이다.

 

- "딱히 의식하는 건 아닌데..." 
"아마 자기도 모르게 호기심이 발동하겠지. 이런 시티 호텔에 젊은 여자 혼자 무슨 일로 찾아오나 하고.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상대를 관찰해 버리는 거야." 
정확히 맞힌 말이었다. 특히 상대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일 경우에는 이런저런 상상력을 발휘하여 옷차림이며 소지품 등을 체크하는 버릇이 있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호텔을 찾는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있어. 손님이라는 가면 그걸 벗기려고 해서는 안 돼."
"네, 주의하겠습니다." 나오미는 살짝 머리를 숙였다.

 

- 나오미는 몰래 코를 찡그리며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역시 어려운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남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이 직업을 선택했는데 상대에게 너무 지나치게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된다니. 

- 나오미가 코르테시아도쿄 호텔에 취직하고 4년 남짓 지났다. 하지만 처음에 희망했던 프런트 오피스에 배속된 것은 지난달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체크아웃 업무를 맡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기본적으로 요금을 계산해서 정산해 주는 것뿐이라 신입에게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그래도 이따금 실수를 범하곤 했다. 이를테면 부녀간으로 보이는 손님에게 정산을 해줄 때, 여자 쪽이 디즈니랜드 팸플릿을 보고 있길래 "이제부터 따님과 디즈니랜드에 가십니까? 좋으시겠어요"라고 남자 쪽을 향해 말해버렸다. 나오미의 말이 들렸는지 여자가 풋 웃음을 터뜨렸고 남자 손님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즉시 나이 차 많은 커플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수습할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아 어색한 분위기 속에 수속을 마쳤다. 웃음을 띨 여유조차 찾지 못해서 틀에 박힌 '편히 다녀오십시오'라는 인사도 하지 못했다. 

 

- 이용 요금을 소리 내어 말했다가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 경우도 있으니까 주의해야지"라고 혼이 난 적도 있다. 파격 할인 패키지 요금을 함께 온 여자에게는 숨긴 모양이었다. 이 일은 나중에 구가에게서도 재차 주의를 받았다. 

 

- 그래도 무난히 일을 해낸 끝에 지난주부터는 체크인 업무로 옮겨 왔다. 이쪽은 체크아웃 업무에 비해 훨씬 더 일이 까다롭고 신경이 쓰였다. 손님들이 요구하는 것도 천차만별이어서 때로는 괜한 트집을 잡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임기응변을 발휘해 트러블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처해 나가는 것이 프로급 프런트 클러크다. '안 됩니다'라는 말은 호텔맨에게는 금지어다. 

- 진짜 프로가 되는 건 언제쯤일까. 과연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나오미는 그렇게 불안해졌다.

 

- 그들 뒤쪽으로 왜건을 밀고 오는 벨보이의 모습이 보였다. 왜건에는 캐리어가 실려 있었다. 아무래도 해외여행을 가는 모양이다. 여기 호텔에서 일박하고 내일 나리타 공항으로 향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코르테시아도쿄 호텔은 공항에의 접근성이 좋아서 바로 옆에 공항행 리무진버스 터미널이 있다. 

 

- "아, 죄송한데요, 오늘은 더블과 디럭스 더블, 모두 만실입니다. 그다음은 스위트, 혹은 그 이상의 방입니다만... 알겠습니다. 그러시다면... 아, 손님, 오늘은 스위트도 없군요. 프레지덴셜 스위트라면 준비해 드릴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놀라서 단말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스위트는 물론이고 더블이나 디럭스 더블에도 빈방이 몇 개나 있다. 게다가 프레지덴셜 스위트는 이 호텔에서는 로열 스위트 다음으로 급이 높은 방이라서 일박 정규 요금이 18만 엔이나 된다. 

- 하지만 전화한 사람이 구가의 제안에 응한 모양이었다. 상대와 통화하던 그의 목소리 톤이 갑자기 높아졌다.

 

- 이름에 연락처, 도착 예정 시각, 나아가 신용카드 번호까지 구가는 묻고 있었다. 직전에 예약 취소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러면 저희 호텔에서 뵙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에 구가는 전화를 끊고 나오미를 향해 한 눈을 찡긋했다. "도박을 했는데 성공했어." 

 

- "그 손님, 용케 오케이 해주셨네요. 그렇게 비싼 방은 필요 없다고 거절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니 도박이지. 하지만 목소리를 듣자마자 딱 감이 왔어. 이 손님은 어떻게든 우리 호텔에서 묵어야 할 사람이야. 여자와 함께 갑작스럽게 숙박할 곳이 필요한데 방을 구하지 못해 쩔쩔매는 눈치였거든." 
"그렇다고 프레지덴셜 스위트를 추천하다니..." 나오미는 선배의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대단하시네요.”
"단 5분 만에 18만 엔의 매상을 올렸잖아." 구가는 손목시계를 내밀어 보이며 웃었다. 

- 호텔에서 가면을 쓰는 것은 손님만이 아니다. 호텔맨의 가면을 벗기면 그 밑에는 장사꾼의 얼굴이 있다. 나오미는 그런 생각을 했다.

 

- 이번 주는 저녁 당번이라 내일은 오후 4시까지 출근하면 된다. 집에 가는 길에 항상 들르는 편의점에서 뭔가 먹을 것을 사 들고 가자고 생각했다. 본가의 어머니는 "밥은 잘 챙겨 먹니? 날마다 외식이나 도시락만 먹으면 균형 잡힌 영양을 섭취할 수 없어"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집에 돌아가면 샤워하고 편의점 도시락을 먹고 그대로 쓰러져 잔다. 잠이 지금의 자신에게는 가장 좋은 영양분이다. 

 

- 말을 듣고, 그러고 보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휴대전화는 고등학생 때부터 갖게 됐지만 그 이후로 내내 똑같은 번호였다. 그리고 미야하라도 마찬가지인 것이리라. 그래서 나오미의 휴대전화에 착신 표시로 그의 이름이 찍힌 것이다. 

 

- "전화로는 얘기할 수 없어. 잠깐 방으로 와줄 수 없을까?" 
"방이라니... 저는 지금 근무 중이 아니니까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글쎄 안 된다니까." 미야하라는 절박함이 담긴 목소리를 냈다. "나오미, 너 아니면 안 돼. 누구든 괜찮다면 프런트에 전화했겠지. 그게 안 되니까 폐가 될 줄 알면서도 너한테 전화한 거야. 난 지금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야." 

- 그럼 내가 지푸라기라는 거야,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걸 꾹 참고 "하지만 저는 이미 근무시간이 끝나서 손님께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해보았다. 
"도움이 될지 말지, 얘기를 들어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잖아. 너라면 어떻게든 해줄 수 있을 거야. 아무튼 지금 좀 와줘. 호텔에서는 범죄 같은 게 아닌 한, 손님의 요구에 응해줘야 하지? 노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데잖아. 옛날에 네가 그렇게 말했었어."

미야하라의 말에 나오미는 반론할 수 없었다. 분명 그런 말을 했던 게 기억난다. 그리고 그것이 호텔맨의 철칙이라는 건 사실이었다.  

 

- "아무튼 기다리고 있을게. 그리고 이 일은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말아 줘. 상사나 동료들에게도."
"그건 좀... 일의 내용에 따라서는 보고해야 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걸 좀 부탁한다니까. 내 평생 소원이야." 

 

- 애걸복걸하는 미야하라의 말에 나오미는 까마득한 옛날에도 똑같은 말을 들었던 게 생각났다. 데이트에서 돌아오는 길, 그녀를 집 앞까지 데려다준 그가 잠깐 들어가게 해달라고 두 손을 맞대고 애걸복걸했었다. 그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 육체관계는 없었다.

평생소원은 그때 들어줬잖아,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대목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일단 제가 지금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 나오미는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상의를 집어 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건가.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호기심이 발동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 나오미는 눈을 거듭 깜빡이다가 걸음을 옮겨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이 활짝 열려 있고 창밖으로는 멋진 야경이 펼쳐졌다. 창문 옆의 소파에 앉았다. 손님 앞에서 소파에  앉는 건 금기지만, 이 남자에게 손님 대접을 해줄 마음은 이미 없었다. 다시 한번 테이블 위를 보았다. 오르되브르 접시 귀퉁이에 하얀 크림이 듬뿍 남아 있었다. 

 

- "아무리 그래도 나는 마음에 짚이는 게 없어. 게다가 지금 이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야. 그녀를 찾아내는 게 선결문제라니까." 미야하라는 답답한 듯 무릎을 달달 떨었다. "그녀가 전에도 몇 번 일을 저질렀단 말이야." 

 

- "은퇴는 했지만 지금도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히어로야. 모두가 그를 응원하고 있어. 그런 팬들의 꿈을 망가뜨려서는 안 되잖아." 
단호히 말하는 미야하라의 표정에는 스스로를 비하하는 듯한 기미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아, 그렇구나,라고 나오미는 생각했다. 이 사람에게는 이런 방식의 삶이 잘 맞는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희생해서라도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결과적으로 자신의 행복과 연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이다. 

 

- "오야마 씨의 바람기를 끊게 하자는 생각은 못 해?" 나오미의 물음에 미야하라는 어깨를 으쓱 쳐들었다. "그날까지 당신은 계속 그를 지켜줘야겠네?" 
"그야 이제 좀 끊어준다면 더 바랄 게 없지. 하지만 내가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어. 그런 사람은 누군가의 충고로 자신의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아.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만한 실적을 남길 수 있었던 거야. 바람기 따위는 자신의 인생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스스로 깨닫는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 "그게 내 일이니까." 그렇게 말하고 미야하라는 조금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지금 이 이야기, 꼭 비밀로 해줘."
나오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내가 이런 얘기를 떠들고 다니겠어?" 

 

- "내가 대타로 나섰다는 것을 미리 알았으면서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이 물음에 나오미는 대답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깐 망설였다. 애매하게 얼버무리는 것도 가능하기는 하다. 하지만 상대는 다름 아닌 옛 연인이다. 현재의 자신을 알려주기 위해서도 그 말만은 꼭 들려주고 싶었다. 
"호텔맨은 고객의 가면을 벗기려고 해서는 안 돼."

"가면?"
"설령 그 가면이 지독히 조잡해서 민낯이 훤히 보이는 것이라고 해도." 
미야하라는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이윽고 얼굴을 풀며 빙긋이 웃었다. 

"그렇구나. 너는 너대로 지금 하는 일에 단단히 자부심을 품고 있는 거야."
"물론이지."

 

- "그럼 조심해서 잘 다녀오십시오." 그녀는 등을 꼿꼿이 세우고 말한 뒤, 공손히 인사했다. "다시 찾아주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 "그래서 히스테리를 일으킨 척하며 방을 뛰쳐나갔군요."
"궁여지책이었어요. 근데 의외로 그리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던 것 같아. 미야하라 씨에게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전에도 몇 번 자살 소동을 벌였거든요. 이번에도 또 그런 걸로 생각해 주기를 바랐는데 내 작전이 딱 맞아떨어졌죠."
자신의 자살 미수에 대해 태연히 말하는 그녀를 보며 나오미는 퍼뜩 생각난 게 있었다. 
"혹시..." 

 

- "물론 연극이었어요. 오야마 마사히로 같은 거물급을 사로잡으려면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해야죠." 서슴없이 말하고 나서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근데 바보 같은 실수를 했지 뭐야. 가모타 씨가 룸서비스로 돔 페리뇽을 사준다는 바람에 신이 나서 또 캐비아를 주문했는데 사워크림을 빼달라는 잔소리는 붙일 일이 아니었어. 설마 그런 데서 들통이 날 줄은 몰랐네."

"사워크림을 싫어하세요?"
"그렇지도 않아요. 단지 처음 주문했을 때 캐비아가 아까운 생각이 들었어요. 비싼 캐비아인데 그 맛만 즐기는 게 훨씬 더 좋죠, 당연히. 그래서 사워크림을 덜어냈어요. 주방에 말 좀 하세요, 고급 캐비아를 구했을 때는 쓸데없는 건 끼워 넣지 말라고." 
 

- "그러니까 이런 말씀이시군요. 혹시 가모타 씨에게서 당신에 대한 질문을 받더라도 절대 사실대로 말하지 말아 달라는."
"간단히 말하면, 네, 그거예요. 입을 다물어준다면 가모타 씨가 당신에게 줄 돈의 두 배를 줄게요. 물론 무사히 그와 결혼한다면 그러겠다는 얘기." 
나오미는 자신의 뺨이 딱딱해지는 것을 느꼈다. 가슴속이 불쾌감으로 뜨끈해지면서 거친 말을 내뱉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것을 억누르고 애써 입 끝을 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아무리 많은 돈을 쥐여줘도 고객의 가면 뒤에 감춰진 진짜 얼굴을 다른 분께 발설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그 민낯이 아름답다면 또 모르지만 추할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지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요코타 소노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것은 가면조차도 아니고, 그래서 더더욱 그녀의 내면에 존재하는 거센 증오가 넘쳐 나오는 것 같았다.


- 하지만 몇 초 뒤에 그 가면은 차갑게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
"그래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요코타 소노코는 로비를 둘러보았다. "꽤 좋은 호텔이었어요. 두 번 다시 올 일은 없겠지만." 
"만족하셨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나오미는 그렇게 말하고 머리를 숙였다. "그럼 조심해서 가십시오."
상대의 대꾸는 들리지 않았다. 

 


 

- "어이, 바람둥이. 이제야 잠이 깼나." 모토미야의 컬컬한 목소리가 들렸다.
"진즉 일어났죠. 뭡니까, 바람둥이라니."
"그 말뜻 그대로야. 어제 화이트데이였으니까 분명 어딘가의 언니하고 호텔에서 죽치고 있겠지. 바다가 보이는 시티 호텔 같은 데서."
"에이, 무슨 말씀을, 그럴 리가 있습니까." 닛타는 전화기를 귀에 댄 채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로 다가갔다. 소파 등받이에 검은 스타킹이 걸쳐져 있는 것을 곁눈질하면서 커튼을 열자 바로 앞에 도쿄 만의 바다가 보였다. "어제는 밤늦도록 제방에서 승진시험을 대비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흥, 바람피우는 것보다 출세욕이 더 강한 거야? 미국 물 먹은 엘리트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
"그보다 웬일이십니까, 이렇게 아침 일찍, 설마 사건은 아니죠?" 

 

- "나도 몰라. 회사 나가보면 알겠지."
모토미야를 비롯해 수많은 경찰관이 자신들의 직장을 회사라고 말한다. 외부에서 이야기할 때, 주위 사람들에게 경찰 관계자 ...

 

- 첫 특별수사본부 회의 종료로부터 약 한 시간 뒤, 닛타는 얼그레이 찻잔을 마주하고 있었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상대로서는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 건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리라. 

 

- 다도코로 미치요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약간 고개를 떨구고 있었지만 소파에 앉은 자세는 등이 꼿꼿해서 강단 있게 느껴졌다. 나이는 서른일곱 살이라고 했는데 좀 더 젊게 보였다. 오늘은 약간 수수한 인상이지만 화장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화려하게 변신하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 "12시 전이에요. 40분쯤 들여서 7킬로미터를 달린다는 얘기를 자주 했었어요."
러너로서는 그리 대단하지는 않네,라고 닛타는 머릿속에서 시간을 계산해 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마흔여덟 살이라는 나이를 고려하면 대부분 그런 정도일 것이다. 

 

- 닛타는 주위로 시선을 내달렸다. 눈앞에 놓인 것은 얼핏 보면 단순한 유리 테이블이지만 밑받침으로 흰 대리석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검은 가죽 소파는 아마도 니콜레티 브랜드일 것이다. 본가에서 집 인테리어를 새로 할 때, 카탈로그에서 본 기억이 있다. 너무 뻔한 선택이라면서 아버지는 싫어했지만 닛타는 나쁘지 않은 소파라고 생각했었다. 

- 역시 이번 피해자는 상당히 성공한 인물인 모양이다. 고급 타워 맨션을 올려다봤을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둘이서 살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거실로 안내를 받아 이렇게 조명이며 장식품을 바라보는 사이에 그 생각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 "회사 쪽은 어떻습니까, 남편분이 다양한 외식 사업을 하셨다던데, 혹시 인간관계에서 다툼이 있었다든가 하는 얘기는 못 들으셨습니까." 
"글쎄요, 저는 남편이 하는 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모토미야는 손끝으로 가느다란 눈썹 끝을 긁적였다. 눈썹 위에 5센티미터 정도의 흉터가 있다. 

 

- 닛타는 벽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마도 이탈리아제인 듯한 사이드보드 위에 투명한 케이스가 놓였고 그 안에 여섯 개의 검은 와인 잔이 줄지어 서 있었다. 
"바카라의 '다크사이드 컬렉션 왕 파르페'로군요." 닛타는 말했다.
"네?" 다도코로 미치요가 붉어진 눈으로 이쪽을 보았다.
"사이드보드 위의 와인 잔 말이에요. 여섯 개의 잔 중에 완성품은 한 개뿐이고 나머지 다섯 개는 어딘가 결함이 있는 불량품이지요? 일부러 완전한 한 개와 불완전한 다섯 개를 한 세트로 만들어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한 상품이라고 하던데요. 상당히 희귀한 물건입니다만, 직접 구입하신 건가요?"  

 

- "오호, 그렇군, 재떨이를 내놓는 곳에 가보면 담배꽁초가 가득한 재떨이가 줄줄이 늘어서 있어. 거기라면 담배꽁초쯤은 마음대로 골라잡을 수 있지." 모토미야는 먼 곳을 응시하며 커피를 소리 내어 서둘러 마시고 닛타를 흘끔 쳐다보았다. 
"제법이네. 신입 주제에."
"나쁘지 않은 추리였지요?"
"좋아, 그렇다면 클럽 탐문 조사는 나중으로 미뤄도 되겠어. 우선은 계장님에게 보고부터 해볼까."
"선배님의 아이디어라고 하셔도 괜찮습니다."

 

- 닛타의 말에 "뭐야?"라고 모토미야가 쓱 노려보았다. "이 녀석, 지금 나를 우습게 보는 거야?"
"앗, 죄송합니다!" 서둘러 사과했다. "선배님이 그런 쩨쩨한 짓을 하실 리가 없지요, 남의 공을 가로채는 그런 짓을." 
모토미야는 엉덩이를 쳐들고 팔을 쭉 뻗어 닛타의 넥타이를 잡았다.
"이봐, 신입, 왜 우리가 둘이서 움직이는지 알아? 원래는 자네나 나나 관할 경찰과 한 팀으로 일할 거였어. 그러면 괜히 손만 많이 가는 일거리는 죄다 관할 경찰에게 떠넘기고 나는 나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고. 근데 위에서 신입을 잘 돌봐주라고 얘기하니까 이렇게 한 팀으로 뛰어주는 거란 말이야."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닛타는 계속 머리를 숙였다.
"신입 교육이라는 귀찮은 일을 받아들였을 때는 나도 뭔가 특전이 있어야 할 거 아냐. 남의 공을 가로챈다고? 그런 쩨쩨한 짓, 당연히 해야지."
"예?" 닛타는 얼굴을 들었다. 모토미야는 넥타이를 놓아주고 으스스한 웃음을 건넸다. "알았으면 얼른 본부로 돌아가자고."

 

- 요코모리가 요리교실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작년 가을부터였다. 어느 날 문득 내 손으로 직접 빵을 구워보자는 마음이 들어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다도코로 미치요의 요리교실이 나왔다. 그리고 첫 수업 날 그녀와의 만남은 요코모리의 말에 따르자면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 사이트에서 사진을 봤을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직접 만나본 다도코로 미치요는 멋진 매력을 가진 여자였다. 겉모습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상대를 감싸주는 따스함이 있고 세심하게 배려할 줄 아는 총명함이 있었다. 요코모리를 대할 때는 특히나 다정다감했다. 그가 조금 실수를 하면 곧바로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그 목소리에는 누나가 남동생에게 보이는 듯한 친밀함이 담겨 있었다...

 

- "글쎄, 정말 그랬을까요." 요코모리가 이야기하는 도중에 닛타가 끼어들었다. "그 여자가 다정다감했던 건 당신이 요리교실 수강생이었기 때문이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대했던 거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요코모리는 입을 툭 내밀었다. "나한테는 특별했어요. 빵 반죽을 할 때, 내 뒤에 서서 손을 잡고 가르쳐줬습니다. 그렇게 해준 사람은 나뿐이에요." 

"그건 당신이 너무 서투르니까 그냥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겠죠."
"아니라니까!" 요코모리는 책상을 내리쳤다.

 

- "한마디로, 당신은 그 요리교실 선생에게 한눈에 반했다는 얘기네."
요코모리는 불끈했다. "한눈에 반한 게 아니라 그건 운명적인 만남이었어요." 

 


 

- 코르테시아도쿄 호텔의 체크인은 오후 2시부터다. 시곗바늘이 살짝 그 시각을 넘어선 무렵, 그 남자들이 로비에 나타났다. 그들이 눈에 들어온 순간 나오미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아, 싫다. 제발 이쪽으로 오지 마'라고 생각했다. 다루기가 영 힘든 유형이었기 때문이다. 

 

- 그들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명백히 마흔을 넘은 것으로 보이는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나이를 가늠하기도 힘든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공통된 분위기가 있었다. 그것을 극단적으로 구체화한 것이 선두에 선 남자였다. 두툼한 체크무늬 재킷은 목까지 단추를 단단히 채웠고 등에는 갈색 데이백을 짊어지고 있다. 부스스한 머리칼에 창백한 얼굴, 거기에 검은 테 안경. 나오미는 유명 여성 아이돌 그룹의 팬 사인회가 우선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 곳에 자주 출몰하는 인종이었기 때문이다. 하긴 나오미는 그런 곳에 가본 적도 없어서 실제로 어떤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 그들은 멈춰 서서 뭔가 두런두런 얘기하다가 이윽고 줄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프런트 쪽으로 다가왔다. 나오미는 저절로 몸이 긴장되었다. '프런트 클러크는 저쪽에도 있잖아. 제발 나한테는 오지 마'라고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하지만 그 기원도 헛되이, 남자들은 나오미 앞으로 밀려들었다. 어쩔 수 없이 "어서 오십시오"라고 인사를 건넸다. 

 

- 검은 테 안경에 메구로目黒라니, 웃기려고 지은 이름인가. 

 

- "다치바나 사쿠라요. 오늘부터 이 호텔에 투숙할 거잖아요." 이누카이는 불그죽죽한 얼굴에 흐릿한 웃음을 지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방이 어디지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좀 알려주면 안 될까요?" 
무슨 얘기인지 그제야 겨우 알아들었다. 다치바나 사쿠라라는 이름은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인기 아이돌쯤 되는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그런 문의에는 답변해드리지 않는 것이 저희 호텔의 규칙입니다. 양해 바랍니다." 다시 머리를 숙였다.

 

- 이누카이가 혀를 끌끌 찼다.

"에이, 빡빡하게 구시네. 좀 알려주면 좋잖아요." 
"내가 안 된다고 말했죠." 메구로가 다시 돌아와 이누카이의 팔을 잡았다. "이런 호텔에서는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다니까요. 우리끼리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는 수밖에 없어요." 
"쳇, 좀 알려주면 어때서." 이누카이는 짜증 난다는 얼굴로 나오미를 노려본 뒤에 불퉁불퉁하면서 엘리베이터 홀 쪽으로 사라졌다. 

 

- "다치바나 사쿠라가 뭐 하는 사람이지? 혹시 알아?"
후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모르겠는데요.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면 나오지 않을까요."
"응, 그래야겠네."

 

- 언더그라운드 아이돌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뜻밖에도 작가였다. 여성이라는 점과 생년월일 외에는 모두 비공개로 되어 있었다. 다치바나 사쿠라라는 이름은 한자가 아니라 가타카나 표기였다. 본명을 그렇게 읽는 것인지 어떤지도 밝혀져 있지 않았다. 작가 데뷔는 올봄으로, 유명한 신인상을 탄 모양이었다. 거기까지 읽은 뒤에야 나오미도 생각이 났다. 누군가 꽤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얘기했었다. 책이 상당히 잘 팔리는 것 같았다. 일단 청춘 소설 장르에 들어가지만 실은 과격한 성묘사가 많아서 그게 인기의 비결이기도 하다고 했다. 생년월일로 계산해 보니 아직 스물일곱 살이었다. 
저 남자들이 노리는 게 이 여류 작가인가.

 

- 나오미는 단말기로 예약 고객을 알아보았다. 다치바나 사쿠라란 이름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류 작가가 이 호텔에 투숙한다고 확신하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결코 적은 액수라고 할 수 없는 요금을 지불해 가며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다치바나 사쿠라가 이 호텔에 투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성별과 생년월일 외에는 아무것도 공개된 게 없는 작가인데 어떻게 그토록 열광할 수 있을까. 그럴 만큼 작품이 훌륭했던 걸까. 

 

- 컴퓨터를 끄고 담당 프런트로 돌아왔다. 로비를 쳐다보고는 흠칫했다. 그새 메구로와 이누카이까지 내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앉아 있었다. 시선은 진지함 그 자체였다. 아마도 다치바나 사쿠라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 여류 작가의 얼굴은 비공개 상태다. 설령 나타난다고 해도 어떻게 알아볼 생각인 걸까. 

 

- 가만 보니 그들은 모두가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휴대전화로 통화나 검색을 하는 게 아니라 젊은 여자가 지나갈 때마다 그 화면과 비교해 보는 것 같았다. 

 

- 구가는 단말기 앞에 앉아 빠른 속도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예약 목록을 불러내 눈으로 주르륵 훑으면서 스크롤해 나갔다.
이윽고 그 손이 멈췄다. "아하, 이거네."
 
- "결제 방법을 읽어봐. 청구서가 '히토쓰바시 출판사' 앞으로 되어 있어." 
"거기라면 유명한 출판사잖아요.”
"게다가 투숙객 이름이 '다마무라 가오루', 예약자와는 별개의 인물이야. 전에도 출판사에서 이런 식으로 우리 호텔을 몇 번 이용한 적이 있어. 며칠씩 투숙하면서 집필하는 거야. 하우스키퍼에게 슬쩍 물어봤는데 작가가 며칠째 꼬박 글을 쓰는 것 같고, 방에 원고지와 자료 더미를 잔뜩 들고 왔다고 했어." 
아, 하고 나오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로는 들은 적이 있어요."
"요즘에는 그런 식으로 호텔 방을 이용하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 나오미 씨는 잘 모르지. 일단 다치바나 사쿠라라는 작가의 작품을 좀 알아봐. 분명 히토쓰바시 출판사와 깊은 관계가 있을 거야."
나오미는 즉시 인터넷으로 확인했다. 구가가 말한 대로였다.

 

- "고객을 사적으로 알아보는 짓은..."
"네, 그런 짓을 하실 리는 없죠. 하지만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니까요. 그러느니 아예 사실대로 밝히고 도움을 받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도움이라면..." 그의 말에 나오미는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어떤 도움을 드려야 할까요."

 

- "네, 저도 인터넷에서 봤습니다. '복면 작가'라고 하는 것 같던데요."

"변명하는 것 같지만 사실 처음에는 우리도 속았어요. 응모 원고에는 분명히 여성이라고 적혀 있었으니까요. 작품을 보고 다들 흥분했죠. 정말 재미있고 에로티시즘이 넘쳤으니까요. 기대했던 대로 그 작품이 수상작으로 뽑혔습니다. 수상자에게 전화를 했는데 아주 귀여운 목소리였어요. 우리가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죠."

 

- "프로필을 거짓으로 써넣은 건 상을 타기 쉬울 것 같아서였다고 사과하더군요. 전화를 받은 건 고등학생 딸이었대요. 문제가 된다면 상을 반납하겠다고까지 말하는데,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편집부에서 상의한 결과, 오히려 이걸 역으로 이용해 책을 팔아보자는 쪽으로 얘기가 마무리됐어요. 즉 중년 아저씨를 여류 복면 작가로 데뷔시키기로 한 겁니다." 

 

- "실은 이게 결정적인 실수였어요. 우리가 너무 오버한 거죠."

"무슨 말씀이신지."
"다치바나 사쿠라가 큰 인기를 끌다 보니까 이 작가의 생김새에 대한 논의가 특히 인터넷을 중심으로 번져갔습니다. 그중 가장 많은 의견이, 실제로는 엄청 못생긴 여자다, 그래서 얼굴을 드러내지 못한다,라는 거였어요. 처음에는 그냥 무시했는데 점점 분하더라고요.

 

- "이번 호텔 투숙만 해도 그래요, 출판사 내에서도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데..."
"그거 말인데요, 왜 다마무라 님을 호텔에?" 
나오미의 질문에 모치즈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야 어떻게든 원고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죠. 단편소설을 청탁했는데 마감일이 진즉에 지났는데도 도무지 주지 않고 있어요. 다치바나 사쿠라의 신작은 다음 호의 가장 중요한 원고라서 뺄 수도 없고, 우리로서는 다급한 상황입니다. 오늘까지 합해서 앞으로 나흘이 한도예요. 그 안에 어떻게든 써내지 않으면 정말 곤란합니다. 그런데 이 다마무라라는 사람이 잠깐만 눈을 떼면 금세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버려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호텔에 연금하기로 한 겁니다." 

 

- 아, 하고 나오미는 납득했다. 호텔 전화에 걸어보면 방에 있는지 없는지 외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힘드시겠어요, 편집부 일도."
"동물원 사육 담당자하고 똑같아요." 모치즈키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습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때로는 추어주고 때로는 나무라면서 계속 함께 가야 합니다." 
이런 때에 웃는 것도 이상한 듯해서 "네에, 그러시군요"라고 대답해 두었다. 

 

- "방금도 말씀드렸지만 그자들을 만만하게 봐서는 안 돼요. 동경하는 마돈나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꼭 그 다섯 명만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그들 말고도 다른 자들이 호텔 안팎에서 은밀히 활동할 가능성이 농후해요. 아무튼 가장 큰 문제는 호텔 방 번호가 알려지는 겁니다." 

 

- "우리, 오늘 밤에도 이 호텔에서 묵기로 되어 있는데요, 방을 좀 바꿨으면 좋겠어요."
나오미는 입가에 웃음을 지으면서도 몸이 저절로 긴장했다. "지금 쓰시는 방에 뭔가 문제가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니고 우리가 따로 원하는 방이 있어서 그래요."
그렇게 대답하는 메구로의 뒤쪽에서 이누카이가 끼어들었다. "추가 요금이 필요하면 낼 겁니다."
"방의 등급을 올리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죠." 메구로가 말했다. "그쪽은 방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아마 이래저래 특별할 거 같은데.”
"그쪽 방이라면 어디를 말씀하시는지..."
"별관 쪽요." 다시 이누카이가 말을 끼웠다. "저기 앞의 건물." 

 

-  "별관요?"
"그래요, 돈만 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다섯 명의 남자들이 적개심이 담긴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왜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냉큼 말을 들어주지 않느냐고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 "다치바나 사쿠라는 만나지 못했어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만족한다네요. 원 참, 무슨 소린지."
나오미는 퍼뜩 깨달았다. 이마무라라고 이름을 댔던 그 남자인 게 틀림없다.  

 

- "지금까지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나오미는 인사를 건넸다.
"아니, 나오미 씨에게 이래저래 폐가 많았지요. 다시 이런 식으로 호텔을 이용하는 일이 있을 텐데, 부디 이번 일로 질렸다고 하지 말고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예, 그야 물론입니다. 꼭 다시 찾아주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나오미의 입가에는 저절로 웃음이 번졌다. 자신이 키워냈다고 생각한 복면 작가가 몇 년 뒤에 가면을 벗었을 때, 모치즈키는 과연 어떤 얼굴을 할까. 그걸 상상하니 너무도 재미있었다. 

 

- 방금 전까지 부루퉁하던 남자 손님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팔짱을 낀 여자 쪽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커플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 신입이 질문을 던졌다. "기념일이란 걸 어떻게 아셨어요?"
"말의 억양을 통해 알았지. 아까 써준 숙박표 좀 볼까?"

 

- "역시 간사이 사람이야. 전차로 기껏 한 시간 거리잖아. 별다른 일이 아니라면 하룻밤에 몇만 엔씩 하는 오사카의 호텔에 와서 잘 리가 없지. 근데 그들은 여기까지 찾아왔어. 새로 문을 연 고급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은 마음 때문이겠지만, 나는 당일 예약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어. 내일도 아니고 모레도 아니고 꼭 오늘이어야 하는 사정이 있었겠지? 즉 오늘이 아주 중요한 날이라서 뭔가 이벤트를 준비했어야 하는데 남자는 깜빡 잊고 있었다. 그래서 서둘러 호텔을 예약했다. ... 뭐, 그 정도로 추리를 해봤어.
신입 프런트 클러크는 눈이 둥그레졌다.
"듣고 보니 정말 맞는 말씀이에요. 그렇다면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죠." 

"근데 생일이라면 뭔가 선물을 사줬을 거야. 나는 결혼기념일 쪽이라고 생각했어. 여자 손님이 약지에 반지 두 개를 끼고 있었거든." 

 

- 아하, 하고 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오미 씨, 잠깐 동안에 자세히도 보셨네요." 
"실은 고객을 지나치게 관찰하는 바람에 몇 번이나 주의를 받기도 했어. 그나저나 그 사람들이 스키퍼일 거라고 생각한 거야?"
스키퍼 체크아웃 수속 없이 호텔 요금을 떼어먹고 도망치는 손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스키퍼까지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당일 예약인데 예치금도 안 받는 건 역시 나중에 문제가 될 것 같아서요. 그래서 2만 엔만 받아둘까 하고..."

나오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결혼기념일에 지갑에 만 엔짜리 한 장 넣고 아내와 놀러 나가는 건 너무 쓸쓸한 일이잖아. 그 이상은 쓸 생각이 없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고객을 믿을 거라면 철저히 믿어드리는 게 좋아. 어중간한 건 안 되지."  

- 젊은 신입은 고개를 움츠리며 네,라고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코르테시아오사카 호텔이 마침내 문을 연 지도 이제 곧 한 달이 되어간다. 직원들이 일하는 모습에도 조금씩 여유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정도라면 원래 예정대로 연말까지는 도쿄로 돌아갈 수 있겠다고 나오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 오사카로 지원을 나가달라는 얘기가 들어온 것은 개관 한 달 전이었다. 총지배인 후지키에게서 직접 지시가 내려온 것이다.
"사전에 직원 교육을 철저히 했다고는 하는데, 역시 한 사람 한 사람의 경험 부족은 부정할 수 없는 모양이야. 그래서 계열호텔에서 지원을 해주기로 했어. 미안하지만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를 때까지 좀 도와줬으면 하네." 
평소에 번번이 도움을 받아온 후지키 총지배인의 지시라서 거절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이에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 단순히 지원만 하는 게 아니라 젊은 직원들의 교육까지 겸하는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 "교육은 제가 그리 잘하는 편이 아닙니다. 아니, 그런 쪽으로는 전혀 소질이 없다고 하는 게 맞습니다."
"거, 이상하군, 숙박부장에게서도 프런트 오피스 매니저에게서도 그런 보고는 받은 적이 없는데? 오히려 후배에 대한 충고가 적확하고 알기 쉬운 데다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가는 일은 없다는 식으로 들었지. 아, 약간 지나치게 엄격한 면은 있는 모양이지만." 
나오미는 아픈 곳을 찔린 듯한 기분이었다.
"엄격하게 할 마음은 없는데 저도 모르게 심한 말을 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저를 피합니다."
핫하하, 하고 후지키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교육 담당이란 원래 그런 거야. 뭐, 때로는 다른 직장을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자신을 위한 교육이기도 하다고 생각하고 몇 달만 열심히 뛰어줘." 
아무래도 후지키의 생각은 바뀔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나오미는 각오를 다지고 네,라고 짧게 대답했던 것이다. 

 

- 하지만 코르테시아오사카에 막상 와보니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이 많았다.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건 다를 게 없지만, 도쿄 쪽 손님들과는 미묘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그건 아마도 이 지역에 기대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라고 나오미는 짐작했다. 이를테면 지방에 사는 사람이 업무차 도쿄에 오는 경우, 아무래도 일본의 중앙지에 임한다는 마음에 적잖이 긴장하면서 저절로 기를 쓰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오사카를 찾는 손님들에게서는 그런 게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편하고 수더분한 것을 원하는 기미가 있다. 그 전형적인 사례가 이 호텔에 온 뒤로 자주 듣게 된 인근 맛집에 대한 문의였다. 게다가 고급 요리가 아니라 대개는 다코야키나 오코노미야키, 우동 가게를 알려달라고 한다. 즉 타지에서 오사카를 찾는 손님들이 이 지역에서 대표적으로 기대하는 게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덕분에 나오미는 첫 일주일 사이에 호텔 주변의 그런 가게들을 샅샅이 파악하게 되었다. 

 

- 그런 생각들을 더듬고 있는데 한 여자 손님이 프런트로 다가왔다. 민소매 회색 니트를 입었다. 거기에 날씬한 다리를 강조하는 슬림핏 청바지다. 머리 길이는 어깨보다 조금 아래, 큼직한 토트백을 어깨에 걸고 있었다. 서른 살 정도로 보이지만, 침착한 분위기여서 조금 더 나이가 든 듯한 느낌도 들었다. 어쨌거나 상당한 미인이다. 특히 새까만 기운이 강한 눈빛은 가슴이 철렁할 만큼 신비로운 인상을 주었다. 
여자가 이름을 밝혔다.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 그 순간, 달콤한 향기가 나오미의 콧구멍을 간질였다. 결코 나쁜 느낌이 아닌 향기다. 달콤함과 함께 홍차 향 같은 우아함이 있었다. 
"왜요?" 나오미가 멈칫 동작을 멈췄기 때문인지 여자 손님이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손님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서요. 장미 향기인가요."
여자 손님의 표정이 환해졌다. "맞아요, 장미, 약간 강했나."

"아뇨,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수속을 마치고 나오미는 여자 손님에게 카드키를 건넸다. 안내해 드리라고 벨보이를 부르려고 했지만 그녀는 사양하고 혼자 엘리베이터 홀로 향했다. 이런 호텔을 이용하는 데 익숙한 것이리라. 

 

- 그 뒤에도 차례차례 투숙객이 찾아와 체크인 수속을 했다. 그럭저럭 괜찮을 만큼 손님이 붐벼서 현재로서는 코르테시아오사카 호텔은 성공적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다. 여전히 빈방이 약간 남아 있는 것이다. 새로 문을 연 호텔이니 가급적 평일에도 만실에 가까운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으면 싶었다. 

 

- 내일 회의는 좀 우울하겠다고 생각했다. 총지배인으로 취임한 인물이 운동부 스타일의 활력 넘치는 야심가다. 며칠 전에는 영업 실적이 좀 염려스럽다면서 아침 일찍부터 괴상한 슬로건을 복창하라고 했다. 혹시 투숙객들에게 들리지나 않을지 불안하기만 했다. 그 짓을 또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어딘가로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 업무 인계를 마치고 프런트로 나갔다. 곧바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나이는 사십 대쯤일까. 나이에 비해 탄탄하고 다부진 체격에 미남형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었다. 지적인 인상을 풍기는 것은 안경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옅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지만 불결한 인상은 아니었다. 
 
-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다음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음, 나야말로."
남자 손님을 배웅하고 있으려니 엘리베이터 홀에서 한 여자가 나타났다. 어제 나오미가 체크인 수속을 했던 장미 향기가 나는 여자다. 그녀도 지금 체크아웃을 하려는 것이리라. 

 

- 호텔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온다. 나오미는 새삼 생각했다. 그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다. 호텔맨은 결코 그 가면을 벗기려고 해서는 안 된다―. 

 

- 건물 안으로 들어선 순간, '과학실 냄새다!'라고 닛타 고스케는 생각했다. 그러고서 가장 먼저 떠오른 기억이 초등학생 때의 것이었다. 5엔짜리 동전을 도금해 은색으로 만드는 실험을 했다. 그 실험에 대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하면 안 된다고 선생님은 말했다. 동전을 가공하는 게 법률 위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더욱더 흥미가 났다. 도금한 5엔짜리 동전은 얼핏 보면 50엔짜리 동전 같았다. 가게에 가서 사용하면 들킬까. 눈이 안 좋은 할머니라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아닐까. 상상하니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 그 5엔짜리 동전을 실제로 써봤는지 어떤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실험이 아직도 또렷이 생각나는 것은 그게 위법행위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모두가 규칙을 위반하는 데서 적잖이 흥분을 느낀다. 죄악감과 쾌감은 종이 한 장 차이다.

 

- "교토에 가셨었다고 들었습니다. 학회에 참석하셨다고요?"
닛타의 물음에 난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실은 내일까지 교토에 있을 예정이었는데."
"그렇군요. 피곤하실 텐데 죄송합니다만 잠깐 몇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난바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괜찮고 말고요."

 

- 오카지마라는 인물의 인상에 대해 난바라는 딱 한 가지 다른 사람과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말을 했다. 특별히 재능 있는 연구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축적하는 것으로 가설을 입증하는 타입이었어요. 그런 의미에서는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지나치게 신중한 면이 있어서 논리의 비약이나 기발한 발상이라고 할 만한 것에는 그리 좋은 얼굴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자주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난바라 씨는 항상 꿈같은 제안을 한다, 꿈만으로는 연구가 진척되지 않는다고, 나는 꿈을 좇지 않고서는 새로운 길은 개척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에요."  

 

- "의견이 맞지 않아 대립하신 적도 있습니까?"
난바라는 얼굴 앞에서 홰홰 손을 저었다.
"대립이라는 건 맞지 않는 말이지요. 서로 의견이 다를 때는 토론을 합니다. 그게 연구자의 올바른 자세예요. 거기서부터 다음을 향한 첫걸음이 시작됩니다. 개발 중인 신소재에 대한 얘기는 들으셨습니까." 

 

- "그런 소리 하지 마. 자네를 그녀와 한 팀으로 묶어주라고 지시한 건 계장님이야."
"이나가키 계장님이? 대체 왜요."
"기대감의 표현이지. 자네는 간부 후보생이니까 말이야. 해외 경험자이기도 하고, 승진 시험에도 별문제 없이 척척 합격할 엘리트잖아. 앞으로 여자 형사도 많아질 텐데 일찌감치 사람 다루는 법을 배워두라는 뜻일 거야. 말하자면 부모 같은 마음으로 신경을 써준 거라고." 
닛타는 머리를 긁적였다. "귀찮게만 하는 부모 마음이네요."

"하지만 리사 씨의 말도 완전히 틀린 건 아냐. 범인이 사체의 발견을 늦추려고 했던 건 틀림없으니까. 문제는 그 목적이야."
"그 점은 저도 계속 고민 중인데 뚜렷한 답이 나오질 않아요. 며칠씩 늦추는 거라면 또 모르지만, 이번에 쓴 방법은 기껏 하루이틀 늦추는 것뿐이에요. 그게 범인에게 무슨 이득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 호즈미 리사는 검지와 엄지를 턱에 대고 그 손의 팔꿈치는 다른 손으로 받쳐 든 채 서 있었다. 생각에 잠긴 듯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정말로 만났던 거예요, 유부녀를."
닛타는 의자에서 떨어질 뻔하다가 겨우 버텼다. "그거, 진짜로 하는 말이야?"
"살인 혐의자로 몰리면서도 여전히 상대가 누군지 밝히지 않잖아요. 불륜이 아니고서야 그럴 리 없는 거 아닌가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살인 계획을 짜고 그걸 실행하려는 때에 불륜이라고? 그런 인간은 없어."

 

- 닛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 
"왜요?"
"생각을 좀 해봐. 그 사람, 살인 혐의를 받고 있어. 알리바이를 증명해서 혐의를 벗을 수만 있다면 불륜이 드러나는 것쯤은 별일도 아니라고. 게다가 난바라는 현재 독신이야. 여자 쪽의 가정을 지켜주겠다고 그렇게까지 버틸 리는 없단 얘기야."
"그러니까 엄청 대단한 여자인 거예요. 불륜이 드러나면 난바라 씨의 인생도 끝장날 만큼 대단한 여자. 이를테면 대학 총장 부인?" 
닛타는 흥 코웃음을 쳤다. "설령 대학에서 해고되더라도 살인자로 인생이 끝장나는 것보다는 나아."
"그거야 본인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겠죠. 난바라 씨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건 모르는 거잖아요."

 

- 엘리베이터 홀에서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어가며 걸어왔다. 그가 한 시간쯤 전에 체크인한 것을 야마기시 나오미는 기억하고 있었다. 수속을 담당한 건 지금도 그녀 옆에 서 있는 다시로라는 젊은 프런트 클러크다. 노인의 발걸음은 느릿느릿 찬찬하지만 그 표정으로 보아 뭔가 못마땅한 일이 있는 것 같았다. 험한 표정인 채로 곧장 프런트를 향해 다가왔다. 


- "이봐." 노인이 다시로를 노려보았다. "대체 뭔가 그 방은."

웃음을 담고 있던 다시로의 뺨이 그 즉시 팽팽히 긴장했다.

 

- 이건 대답하기 어렵다고 나오미는 생각했다. 실은 사진 속 인물을 본 기억이 있었다. 
어때요,라고 호즈미 리사가 물어 왔다.
"3일에는 못 봤던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고 사진을 내려놓았다.
"역시 그렇죠?" 예상했던 대답이었는지 호즈미 리사는 딱히 실망하는 기색도 없이 사진을 집어 들었다. "다들 못 봤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둔감해서야,라고 나오미는 혀를 차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사람, 경찰로서 제대로 일할 수 있을까.

- "네, 본 적이 없습니다." 되풀이해서 말하고 다시 뒤를 이었다. "10월 3일에는."
호즈미 리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진을 가방에 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직전에 어라, 하는 얼굴로 나오미를 보았다.

"10월 3일에는? 그러면 다른 날에는 봤다는 건가요?" 
요시무라가 짐짓 헛기침과 함께 눈짓을 했다. 나오미가 쓸데없는 말을 할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그녀는 요시무라를 향해 고개를 슬쩍 끄덕이고 나서 호즈미 리사를 보았다. 

 

- "체크아웃 때 잠깐 얘기한 것뿐이에요. 전날에 숙박을 하신 모양인데 깜빡 호텔 타월을 자기 가방에 넣어 왔다,라고 하셨어요. 타월은 제가 받아서 돌려줬죠. 그런 일이 있어서 기억이 납니다."
"그 밖에는?"
"딱히 없었어요. 그냥 그것뿐입니다."
"이 사람을 본 건 그날 한 번 뿐이었어요?"
"제가 기억하는 건 그날뿐이에요."

 

- 나오미는 요시무라와 함께 응접실을 나왔다. 걸음을 옮기면서 요시무라는 "사진 속 남자를 봤다는 얘기는 안 해도 됐을 텐데”라고 약간 못마땅한 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분이 좀 딱해서요. 도쿄에서 일부러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 수확도 없는 것 같아서."
"그런 어린 아가씨에게 맡길 정도의 수사인데 수확이 없는 것도 당연하지. 나오미 씨가 걱정할 거 없어."
"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대답을 하면서도 나오미는 가슴속에 뭔가 응어리가 남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질문한 것에는 솔직히 대답했다. 하지만 질문하지 않은 것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말 그걸로 괜찮은 걸까. 

 

- 여성 경찰관이 신기했는지 하타케야마 레이코는 흥미 깊은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본 뒤 "어서 앉으세요"라고 오른손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공기가 사르르 닛타 쪽으로 움직였다. 
실례합니다,라고 말하고 소파에 앉아 반대편의 하타케야마를 마주 보았다. 그 순간, 여자의 눈빛에 마음이 후욱 빨려 드는 듯한 감각이 있었다.

 

- "어떤 일로 저를 찾아오셨을까요." 하타케야마가 물었다.
사고가 일시 정지해 버린 것을 닛타는 자각했다. 급히 자세를 바로잡고 혀로 입을 적셨다.
"실은 현재 우리가 어떤 사건의 수사를 담당하고 있는데, 그러던 중에 하타케야마 씨에게 꼭 확인해야 할 사항이 나왔습니다." 

 

- 닛타는 하타케야마 레이코의 아주 작은 표정 변화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그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동요나 낭패의 빛은 발견되지 않았다. 

 

- "아뇨, 아직 확실한 건 아니라서..." 말끝을 흐렸다. 마음속으로는, 당신 아내의 불륜 상대인지도 모른다,라고 중얼거렸다.

 

- "아내는 사업에 성공하는 데 필요한 세 가지를 갖고 있어요." 하타케야마는 오른쪽 손가락 세 개를 들었다. "사랑, 용기, 그리고 행운. 누구나 조금씩은 갖고 있지만 아내가 가진 그 세 가지는 보통 강한 게 아니에요. 그게 한꺼번에 모이면 정말 신비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사람 마음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가능하니까요. 나야 뭐, 입 다물고 조용히 따라가는 것뿐이죠. 그래서 데릴사위가 되는 것에도 전혀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참 잘하신 것 같은데요. 게다가 강한 사랑까지 있으시다면. 부인께 그만큼 사랑받으신다는 얘기잖아요."  

 

- "당연하지. 계장님이나 주임님이 수사원의 면면을 판단해서 적재적소에, 그리고 부담이 공평하게 돌아가도록 업무를 나눠주는 거라고. 뭐, 시험 삼아 그 친구하고 교환해 보시든지. 그쪽 일이 얼마나 힘든지 금세 알..."

거기까지 말한 참에 닛타의 머릿속에 뭔가가 퍼뜩 떠올랐다. 그는 튕기듯이 벌떡 일어섰다. 
흠칫 놀라며 호즈미 리사가 주춤 몸을 물렸다. "왜, 왜요?"
하지만 닛타는 대답하지 않고, 선 채로 눈을 감았다. 방금 퍼뜩 떠오른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어딘가에 모순점은 없는가. 서로 어긋나는 건 없는가. 

 

- 이윽고 닛타는 눈을 떴다. 호즈미 리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시는데요,라고 조금 겁이 난 기색으로 물었다.
"답을 찾아냈어." 그렇게 말하고 닛타는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 "바로 그 점인데요, 남편분은 당신과 난바라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그리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그러자 하타케야마 레이코는 얼굴을 좌우로 흔들었다.

"벌써 몇 년째 부부 관계가 없는 사이예요. 그래도 남편과 나는 최고의 동료이자 서로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이입니다. 남편에게도 사귀는 여자가 있지만 나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요. 그래도 우리가 이혼하지 않은 건 그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게다가 부부라는 직함은 사업상 이래저래 편리하죠." 
"이른바 가면 부부라는 건가요? 하지만 남편분은 당신을 사랑한다고 했어요."
"물론 나도 그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항상 사이좋게 지냈어요.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하타케야마 레이코는 코끝을 치켜들며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 "좋은 소식이에요. 남편분의 의식이 돌아왔다는군요."
그녀는 눈을 감고 일단 가슴에 고인 숨을 천천히 토해냈다. "아, 다행이다..."
"남편분은 범행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전언이 있었어요."
"전언?"
눈꺼풀을 연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닛타는 말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사실인 모양이군요." 
하타케야마 레이코는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요"라면서 빙긋이 웃었다. 

 

- "설명하자면 얘기가 길어지는데..."
그렇게 전제를 한 뒤에 호즈미 리사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뜻밖의 내용이었다. 그녀의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느 총명한 여성 프런트 클러크였다. 그 여자는 호즈미 리사가 보여준 사진 속 남자가 7월 10일에 호텔에서 숙박했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게다가 ...

 

- "그건 위험한 거짓말이었어. 사건이 해결되었으니 망정이지, 혹시 그 프런트 클러크의 추리가 어긋나기라도 했으면 큰일 날뻔했잖아."
"그렇죠? 네, 진짜 다행이네요." 호즈미 리사는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웅웅,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뭘 남의 일처럼 얘기하고 있어? 그래서, 이름은?" 

 

- "이름을 말하라고, 그 프런트 클러크의."
그러자 호즈미 리사는 천만의 말씀이라는 듯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말 못 해요."
"왜?"
"절대로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어요. 여자 대 여자의 약속이에요." 그렇게 말하고 두 손으로 입을 가려버렸다. "게다가 그 여자, 이제 그 호텔에 없어요. 어제 내가 감사하다는 인사라도 하려고 전화했는데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하더라고요." 
닛타는 쳇 하고 혀를 찼다.
"한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그 총명하신 여성 프런트 클러크."

 

- "엄청 미인이에요. 언젠가 또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닛타는 입가를 구부린 채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도쿄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사건 하나를 이제 막 해결하고 난 참인데도 뭔가가 시작되는 전조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코르테시아도쿄로 돌아와 한 달 가까이 지났다. 역시 오사카와는 분위기가 미묘하게 다르다. 처음 돌아왔을 때 적잖이 당황했을 정도다.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실은 잘 알지 못한다. 굳이 말하자면 이쪽에서는 더욱더 빈틈을 보일 수 없다는 것 정도일까. 

-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정면 현관으로 한 여자가 들어왔다. 삼십 대 중반쯤일까. 면바지에 검은 니트 셔츠와 카디건이라는 차림새였다. 요즘은 밤이면 완연히 날이 쌀쌀해졌다. 그 옷차림으로 춥지나 않을지, 남의 일이지만 내심 걱정스러웠다.

 

- "간단히 알려줄 수 없다는 건 나도 잘 알아요." 나오미의 경계심을 눈치챘는지 여자가 즉각 말했다. "하지만 나를 믿으셔도 돼요. 사정이 있거든요." 
"어떤 사정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 본심을 말하자면 그 여자 편을 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호텔맨으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아무리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라도 그게 호텔 손님이라면 그들이 쓰고 있는 가면을 지켜주는 게 호텔맨의 임무인 것이다. 

 

 


 

- 제각각 일그러진 가면이기에 더 추하고 아름답다.

 

- 두뇌를 작동시켜야 하는 수많은 오락 중에서도 추리소설은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림이나 영상 없이 오로지 문자만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페이지를 읽어 내려가면서 독자는 상상력으로 서서히 가상의 세계를 구축한다. 거기에 추리력을 더하여, 작가가 치밀하게 깔아 둔 복선을 하나하나 정복하며 꽁꽁 감춰둔 문제의 정답(범인)을 찾아내고 나아가 그 의미를 길어 올린다. 그래서 추리소설에서는 다른 어떤 오락보다 자발적인 지성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추리소설에 유난히 시리즈물이 많은 것은 일단 두뇌 안에 구축된 세계에 다시 다양한 인물과 새로운 사건이 더해지면서 추리의 신경세포가 유기적으로 확장되고 그만큼 연속성을 가진 재미를 만들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가 데뷔 25주년을 기념하여 2012년에 <매스커레이드 시리즈>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가가 형사 시리즈>와 <갈릴레오 시리즈>의 뒤를 이어 오랜만에 나온 새 시리즈라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호텔이라는 한정된 장소를 무대로 설정한 것도 앞으로의 전개에 큰 기대를 품게 했다. 오만하지만 두뇌 명석한 '엄친아' 형사 닛타 고스케와 투철한 프로 의식을 가진 총명한 호텔리어 야마기시 나오미.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적인 두 주인공이 서로 갈등과 화해를 거듭하며 '아직 벌어지지 않은 사건'을 쫓는 독특한 주제의 매스커레이드 호텔이 그 첫 작품이었다.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작가가 독자에게 밝힌 소회를 인용해 보자. 

 

- [언젠가 호텔을 무대로 한 소설을 써보자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무대로 사용할 뿐만 아니라 호텔 그 자체가 주역이 되는 소설입니다. 기사나 보고서를 쓸 때의 규칙에 5W1H라는 것이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왜, 어떻게 했는가'를 명확히 밝히자는 규칙입니다. 미스터리의 경우, 이런 요소 중 몇 가지를 수수께끼로 만들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게 재미있는 점이지만, 이번에는 '어디서'라는 것만은 애초부터 호텔이라는 장소로 정해졌습니다.] 

 

- [하지만 호텔을 무대로 한 이야기가 지금까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는커녕 영화 등에서는 수많은 명작이 탄생했습니다. 그 대표 격은 뭐니 뭐니 해도 영화 <그랜드 호텔>이겠지요. 동일한 장소에 모인 복수의 인물들이 갖고 있는 각자의 드라마를 동시 진행으로 묘사한다는 기법이 매우 참신해서 그 뒤 '그랜드 호텔 형식'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소설로 말하자면 군상극입니다.]

 

- [이번에 호텔을 무대로 한 소설을 쓰면서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이 그랜드 호텔 형식을 채택하느냐 마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독자의 눈에 보이지 않게 진실을 감춰둔다는 목적을 생각하면 이 형식은 매력적입니다. 다양한 인간의 시선을 통해 호텔을 묘사한다는 것도 큰 장점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숙고 끝에 이 형식은 채택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랜드 호텔 형식은 소설가에게는 매우 편안하고 편리한 기법입니다. 호텔을 무대로 한 소설을 쓰자고 생각했을 때, 얼른 기대고 싶었던 마법의 도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것을 채택하지 않는 것으로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 것입니다.]

 

- [거기에서 시점을 두 사람의 인물로 좁혔습니다. 형사와 호텔리어입니다. 그들의 눈을 통해 차례차례 찾아오는 손님들을 그려내는 것으로 호텔이라는 세계를 전달해보고자 한 것입니다. 당연히 그들은 서로에 대해서도 관찰합니다. 형사의 시점에서 본 호텔리어는 어떤가, 호텔리어에게 형사는 어떤 인간으로 비치는가. 극히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주제는 '프로페셔널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중략] 
독자 여러분께서도 멋진 호텔의 세계를 충분히 즐겨주셨으면 합니다.]

- 히가시노 게이고 <청춘과 독서> 2011년 9월호에서


- 무대를 '호텔'이란 공간으로 제한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사연이 펼쳐진다. 나아가 그 중심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매스커레이드(가면)'다. 인간은 누구라도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 전제가 시리즈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거기에 가면을 지켜주려는 호텔리어와 가면을 파헤치려는 형사의,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협력하는 관계가 수수께끼를 증폭시키는 주요한 요소가 된다. 호텔, 가면, 대립하는 두 주인공- 대형 추리물 시리즈를 받쳐주는 탄탄한 삼각 구조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 2년여 만에 출간된 이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은 특이하게도 첫 책의 그다음 이야기가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닛타 형사와 나오미 호텔리어가 만나기 이전의 사건을 펼쳐 보인다. <매스커레이드 시리즈>의 전야(前夜 eve)이자 닛타와 나오미라는 주인공 콤비의 탄생 비화인 셈이다.

 

- 닛타도 아직 신입 형사였고 나오미 역시 입사 4년 차의 새내기 호텔리어로 일하던 시절이라 곳곳에서 좌충우돌, 아직 미숙하면서도 순수한 힘이 엿보인다. 다른 시리즈의 주인공들보다 한층 젊은 나이에, 매우 개방적이고 자기주장에 거침이 없다. 투철한 직업의식과 섬세한 관찰력, 대담한 발상의 전환으로 사건을 풀어나가는 가운데, 서로가 서로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묘하게도 두 사람에게는 접점이 있었다. 만난 듯 만나지 않은 듯, 아슬아슬한 이 접점이 재미있다. 게다가 서로를 의식하기 전부터 두 주인공이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지키려는 자'와 '파헤치려는 자'로서의 갈등이 사건 해결에 중요한 단서로 작용하고, 독자의 눈에 보이지 않게 감춰두는 치밀한 복선이 여기에 숨어 있다. 

 

- 작가도 앞서 언급한 바 있는 '그랜드 호텔 형식'은 영어권에서는 앙상블 캐스트 ensemble cast라고 불리기도 한다. 주인공을 한 사람으로 한정하지 않고 여러 명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스토리 라인을 병행하여 이끌어 가거나 에피소드별로 다른 캐릭터에 초점을 맞추는 기법이라고 한다. <매스커레이드 시리즈>에 '노세 형사'와 '호즈미 리사 형사'가 중요한 조역으로 등장한 것은 이 기법을 매우 유효하게 활용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법에 주목하면서 읽어보면 소설을 읽는 재미가 배가될 것이다. 나아가 추리소설을 쓰고자 할 때, 의지할 단초가 될지도 모른다. 

- 살다 보면 누구나 가면을 쓰게 되지만 그 표정은 어느덧 제각각의 모양으로 일그러진다. 세월과 사람과 상황에 부대끼면서 제각각 일그러졌기에 더욱 추하고 더욱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애써 지켜주려는 영웅의 가면이 있는가 하면 이기심으로 그것을 이용하려는 추한 가면이 있다. 선량한 가면 밑에 감춰진 추한 민낯을 똑똑히 봐버렸는데도 그것을 미처 다 파헤쳐내지 못하는 분함도 있다. 소설의 성공을 위해 씌워준 복면과 소중한 가족을 위해 뒤집어쓴 가면, 열광하는 자들이 쓴 위장의 가면이 뒤얽히면서 흥미로운 추리의 공간이 펼쳐진다. 

 

- 양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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