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히가시노 게이고] 매스커레이드 게임

일루젼 2023. 9. 2.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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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출판 : 현대문학
출간 : 2023.06.23


       

정신없는 주말이다. 벌써 9월이라는 게 실감이 나지 않다가도, 문득 아직 10월이 아니라는 것이 의아하다. 계절감과 시간감이 흐트러진다. 

 

이번 리뷰는 <매스커레이드> 시리즈의 네 번째 이야기, <매스커레이드 게임>이다. 자못 의미심장한 결말로 끝을 맺지만 여기서 더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닛타 경감을 사랑하던 분들께는 다소 아쉬운 결말일지도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괜찮은 마무리라고 본다. 이 시리즈는  지금까지 경찰 대 호텔리어라는 가치관적 대립 구도를 유지해 왔었고 그 양축을 담당했던 것이 닛타와 나오미다. '아즈사 경감'이라는 새로운 캐릭터에게 전작의 닛타 포지션을 맡긴 만큼 아무래도 <매스커레이드 게임>은 전체적으로 경찰보다는 호텔 쪽에 치우친 시각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경찰 내부의 신념 충돌로 그려내기에도 무리다. 아즈사 시점에서 전개되는 장면이 거의 없기 때문에 나오미의 등장을 늦추는 것만으로는 밸런스가 조절되지 않는다.

 

<매스커레이드 호텔>에서 닛타를 두고 노세와 나오미가 나누었던 것과 비슷한 대화가 이번에는 닛타와 노세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닛타의 성장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지만... 경찰로서나 중간관리자로서의 성장이라고 보기에는 전작에서 등장했던 다른 경찰 측 캐릭터들은 크게 변한 점이 없다. 그보다는 나오미와의 교류를 통해 호텔리어적인 관점, 혹은 경찰이 아닌 외부인으로서의 관점을 내재화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 이것을 과연 '성장'이라고 볼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변화'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즉, 호텔리어 측의 무게감이 훨씬 강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충분히 납득이 갈 만한 그리고 복선이 너무 많이 깔려있었던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캐릭터들 자체의 매력을 고려할 때 상당히 만족스러운 결말이기도 하다. 다만 집필 시기를 고려할 때,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상당히 최근에 쓰여진 작품임에도 중간중간 다소 아쉬운 부분들이 조금씩 보였다. 뭐... 이건 개인의 가치관으로 인한 감상이니 사람마다 다를 것 같다.) 

 

<매스커레이드 게임>이 지난 시리즈 작품들과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라면 작품 전반에 드러나는 갈등 구조일 것이다. 주요 인물들 간의 구도는 앞서 언급한 바대로 변화했지만, 이번에는 특히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입장 차이가 부각된다. 범행 동기 자체가 '옳은 결말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정의인가?'에 대한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충분히 사람마다 다른 답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본다면 아즈사와 닛타, 나오미의 구도가 다소 새로워진다.

 

나와는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에 대한 수용, 납득이 어렵더라도 받아들이고 책임지는 자세는 작품 전반에서 제시된 '사회 시스템에 대한 신뢰'로 이어진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납득이 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상적인 정답으로 끌고 가려는 작가의 의도만이 드러나지 않았나 싶다. 주요 인물인 닛타를 통해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지켜야만 하는 것'을 강조하고, 덧붙여지는 비하인드와 설정을 통해 '하나의 특수한 사례'를 통해 전체를 미화하려 했다는 인상이다. 그 방향성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그 지점으로 유도하는 방향표시등이 너무 반짝였다는 거지.

 

즉,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가 이 책의 주요 메시지라고 거칠게 요약할 수 있겠다. CCTV가 없는 곳이 드물고, 지문으로 간단하게 신원확인이 가능하며, 휴대폰이 곧 신분증에 가까운 한국에서는 당황스러운 부분도 있겠지만 '익숙한 것'이 곧 '옳은 것'은 아니니까.

 

이 마지막(?) 권을 읽기 위해 달려온 애정의 무게(?)에 비해서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충분히 재미있었고 매력적이었다. 

끝.    

         

 


   

- 별 기대도 없이 주문한 국산 레드와인이 의외로 맛있어서 놀랐다. 아니, 그렇게 느낀 것은 요리가 맛있기 때문일까. 

- 닛타 고스케는 오목한 그릇에 젓가락을 내밀었다. 말고기 육회를 낫토에 버무린 것이었다. 입에 넣자 생고기와 낫토 향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코끝으로 빠져나갔다. 부드럽게 씹히는 고기와 낫토의 끈끈함이 혀에 감기는 느낌이 적당히 야성적이어서 지나치게 고상한 척하는 게 없다. 거기서 저절로 와인 잔으로 손이 나갔다. 레드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역시 요리의 힘이구나, 확신했다.

 

- 구운 고기에 특제 소금 소스를 찍어 입에 넣자 육즙과 함께 고소함이 입안 가득 퍼졌다. 또다시 와인 잔으로 손이 나갔지만 벌써 비어 있었다. 죄책감을 느끼며 한 잔 더 주문했다. 이 잔이 마지막이야...

 

- 오후 10시가 지나자 슬슬 손님이 줄어들었다. 닛타도 코스 마지막 요리를 입에 넣었다. 말고기 국물 맛을 살린 우동으로, 이 또한 더할 나위 없었다. 가늘게 뽑은 면은 고토 우동인 모양이다. 

(역자 주 : 나가사키 고토(島) 열도의 특산품, 반죽에 동백기름을 넣어 숙성시켜 가늘면서도 쫄깃한 식감이 특징이다. 일본 3대 우동의 하나.) 

 

- 가미야 후미카즈는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고 사건 후 1년여 만에 사망했다. 그래서 이리에의 죄목은 상해가 아니라 상해치사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판결이 수정되는 일은 없었다. 사망과 인과관계를 증명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되었다.  

 

- 실은 닛타가 수사관에게 미리 넌지시 지시해 둔 게 있었다. 만일 가미야 요시미가 이리에 유토를 아들을 죽인 범인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어떻게 그 이름을 알았는지 자세히 물어보라는 것이었다. 소년 범죄로 보호처분을 받았기 때문에 이름은 발표하지 않았고 피해자 측에도 개인정보는 공개하지 않았을 터였기 때문이다. 가미야 요시미의 대답은 "따로 알아봤다"는 것이었다. "아들이 사망한 뒤에 민사 소송을 하려고 알아봤어요. 상대 이름을 모르고서는 소송할 방도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결국 그 소송은 단념했다고 한다. 시간 낭비라고 주위에서 다들 설득한 모양이었다.

 

- "나도 한 가지 당부할 게 있어." 오자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단독범인지 여러 명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만일 범인 혹은 범인들이 이번 일련의 범행을 정당한 행위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라면 매우 오만한 착각이자 형사사법 시스템에 대한 모독이야. 그런 짓은 결코 용납해서는 안 돼. 반드시 체포해서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 자네들은 이번 일이 경찰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을 특히 명심하고 수사에 임해주기를 바란다. 이상." 
수사 1과 과장의 한마디 한마디에 회의실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목소리를 내어 대답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어서 다들 말없이 머리를 숙였다. 

 

- "과장님 생각이 맞는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닛타가 말했다. "범인은 이걸 정당한 행위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마땅히 죽여야 할 사람을 죽였을 뿐이라는 거겠죠." 
"복수라는 얘기지? 실은 우리 팀 쪽 사건에 관해서라면 그럴 가능성이 충분해." 모토미야가 동의했다. "고사카 요시히로가 20년 전에 저지른 사건의 재판에서 피해자 유족 전원이 사형을 원했더라고, 유족의 심정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 강도 살인은 대부분 최저 무기징역이야. 근데 판결은 겨우 징역 18년이 나왔어. 애초에 검찰의 구형 단계에서부터 사형이 아니었거든. 사람을 죽였는데 겨우 18년 만에 사회에 나올 수 있다는 건 이상하지 않느냐고 억울해하는 것도 당연하잖아? 나라에서 사형에 처해주지 않는다면 교도소에서 나온 뒤에 내 손으로 죽이자고 마음먹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겠지. 그야 물론 우리 팀도 피해자의 전과를 파악하고 그런 가능성을 가장 먼저 의심했어. 하지만 과거 사건의 피해자 유족에게는 모두 다 알리바이가 있더라고." 

- "자세한 것까지는 모르지만, 아즈사 경감이 아주 실력 있는 형사라고 소문이 났던데요?"
"우수한 사람이지. 야심도 있고. 그 나이에 수사 1과 팀장이 됐잖아. 닛타 씨에 필적할 만한 엘리트야. 여자로서 핸디캡이 없지 않았을 텐데 그걸 힘들어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아. 대단한 인물이야." 
상사를 칭찬하면서도 얘기 상대를 추켜세우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능숙한 말솜씨는 여전히 건재한 것 같았다. 

 

- "구가... 숙박부장님 말씀이십니까?"
"아, 그새 바뀌었나요? 예전에 프런트 오피스 매니저였던 분인데. 닛타라는 자가 왔다고 전해주시겠습니까? 경시청의 닛타라고 하면 아실 겁니다." 
"닛타 님이시라고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여성 클러크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냈다. 내선 전화를 쓰는 것보다 더 간편하고 빠른 것이리라.

 

- "사무동이 어디인지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어요."
지겨울 만큼 잘 알고 있다,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노세가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가 상황을 설명했다. "내가 같이 가도 될까?"
"물론이죠."

 

- "로비를 둘러보고 왔는데, 컨시어지 데스크가 없어졌더라고요."
닛타의 질문에 구가는 슬쩍 턱을 당겼다.

"프런트 클러크가 겸하는 게 좋겠다고 얘기가 됐습니다. 실제로 해보면 배우는 게 많을 테니까요."
"그렇군요."
"실은 그건 공식적인 이유일 뿐이고, 한마디로 경비 절감 때문이에요."
아, 하고 닛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네요."

 

- 구가는 큰 한숨을 내쉬더니 알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닛타 씨를 비롯한 수사팀이 몇 번씩 우리를 구해주셨잖습니까. 믿을 만한 분이라는 건 잘 알지요. 그러니 오늘은 호텔의 공식적인 대응이 아니라 저의 개인적 판단에 따라 보여드리는 걸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법적 증거로 필요할 때는 정식으로 신청해 주시는 것으로 하고."

"네, 그거면 충분합니다. 고맙습니다."
구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가더니 노트북을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닛타와 노세 앞에서 키보드를 두드려 화면을 이쪽으로 돌려주었다.
"현재의 숙박자, 그리고 오늘 이후의 예약자 목록입니다."

 

- 경시청 회의실, 오후 4시 20분이었다.
"글씨가 개발새발이네. 조금 더 잘 써줄 수 없어?" 화이트보드를 마주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나무라는 소리가 날아왔다.
닛타는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마음에 안 들면 모토미야 씨가 직접 쓰시든지요."
"이런, 내가 썼다가는 훨씬 더 알아먹기 힘들지."
"그러면 잔소리를 하지 마시든가요." 
"닛타 씨, 역시 내가 써야겠네." 노세가 미안한 듯 몸을 일으켰다.
"아뇨, 괜찮습니다, 제가 쓸게요. 다른 팀의 주임님을 부려먹으면 아즈사 경감에게 미안해서 안 돼요."
"뭐야, 다른 팀의 팀장을 부려먹는 건 괜찮고?" 모토미야가 으르대듯이 말했다. 
"그야 사람에 따라 다르죠."
"이런 망할."
"쓸데없는 말씨름하지 말고 얼른 적기나 해." 이나가키가 답답한 듯한 목소리를 냈다. "글씨가 어떻든 상관없어. 알아보기만 하면 돼."
네,라고 대답하고 닛타는 다시 화이트보드를 향해 메모해 온 내용을 쏙쏙 적어 내려갔다. 

 

- "그런 앱이죠. 이른바 사라지는 SNS라는 건데, 들어본 적 없으세요?"
모토미야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닛타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들어봤어?"

"일단 알고는 있죠. 텔레그램이라든가."
"네, 그런 거예요." 아즈사는 코끝을 바짝 치켜들며 말했다.

"안 되겠네, 나는 그런 쪽은 도통 따라갈 수가 없어." 모토미야가 탄식했다.
"하지만 대화를 나눈 곳은 그런 특수한 인터넷 공간이었더라도 그들이 만나게 된 계기는 일반적인 인터넷상의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거예요." 여전히 자신에 찬 어조로 아즈사는 말했다. "어떻게든 그걸 알아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어려운 얘기는 아즈사 경감 팀이 맡아요. 우리는 실제 무대를 맡을 테니까."

모토미야의 말에 아즈사는 "실제 무대?"라고 의아한 듯 미간을 좁혔다.
"각자 특기 종목이 다르잖아요. 안 그래, 닛타?"

모토미야가 닛타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이 선배 팀장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닛타는 금세 알아들었다. 말없이 화이트보드를 응시했다.
또다시 그 호텔인가...

 

- 드디어 후지키가 얼굴을 들었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수사관이 어떤 스태프로 위장할 예정입니까?"
아무래도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한 걸음 전진이다. 옆자리의 이나가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기척이었다. 닛타는 옆에 둔 파일에서 다시 서류를 꺼냈다.   
"대략 이 정도 규모입니다. 프런트 한 명, 벨 데스크 두 명, 하우스키퍼 두 명, 그밖에 예비 스태프로 네 명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우스키퍼는 일반 고객과 직접 마주치기 때문에 호텔 유니폼을 착용하지만 실제 작업을 하는 건 아니고 용의자들의 객실을 청소할 때 입회하는 것뿐입니다. 예전 사건 때도 그건 허가해 주셨지요? 용의자 이외의 다른 객실에 들어갈 예정은 현재로서는 없습니다. 벨보이도 마찬가지여서 기본적으로 용의자 세 명 이외에는 다른 고객에게 접근하지 않도록 할 계획입니다."

 

- "프런트 클러크 한 명..." 구가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세키네 경사라고 적혀 있군요."
"지난번 사건 때 벨보이로 위장했던 수사관이에요. 구가 부장님도 기억하실 것 같은데요? 호텔 사정도 잘 알고 있으니까 나름대로 그럴듯할 겁니다. 영어도 좀 할 줄 알고요. 오늘밤 안으로 훈련을 받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벨보이와 프런트 클러크는 하는 일이 전혀 다릅니다. 짧은 영어로는 프런트 클러크를 담당하기가 어려울 텐데요."

구가는 역시나 전 프런트 오피스 매니저인 만큼 신중하게 응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텔 업무는 실제 스태프들에게 맡기고 세키네는 되도록 관여하지 않도록 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당장 내일이 크리스마스 이브예요. 평소보다 더 붐비는 데다 다양한 고객님이 찾아오시죠. 어떤 돌발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어요. 솔직히 말하면, 불안한 점이 많은데..."

구가는 의견을 청하듯이 후지키 쪽을 돌아보았다. 후지키는 심각한 표정 그대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구가 부장의 말처럼 프런트에 서는 이상, 여차할 때 최소한의 대응이 가능한 분이 아니면 곤란합니다. 고객님 입장에서는 호텔리어 중 한 명으로만 보일 테니까요. 그건 닛타 씨가 누구보다 잘 알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닛타,라고 이나가키가 옆에서 말했다. "자네가 맡아."
"예?”
"프런트 클러크 말이야. 자네가 하면 돼. 총지배인, 구가 부장, 어떻습니까?"
흠, 하고 후지키는 턱을 당겼다. "그렇게 해주시면 저희도 안심이 되기는 하지요."
"저도 동감입니다." 구가도 수긍했다.
"아니, 잠깐만요." 얘기가 척척 진행되는 바람에 닛타는 급하게 손을 저으며 이나가키에게 말했다. "저는 사무동 대책본부에서 지휘를 해야 하는데요."
"그건 모토미야가 맡으면 돼. 후방 지원과 정보 분석은 아즈사 경감이 담당할 거야. 그쪽 팀에는 노세 경위도 있잖아. 지금 비상사태야. 이러니 저러니 할 것 없이 그렇게 하도록 해."

"그래도..."
이나가키가 날카롭게 스윽 쏘아보았다. 아직도 할 말이 있나,라는 눈빛이었다.
"서로 간에 그게 가장 좋겠지요." 

후지키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하지만 단호하게 밀어붙이듯이 말했다. 

 

- 시계를 확인해 보니 오후 10시 가까운 시각이었다. 호텔 로비에는 레스토랑에서 디너를 마친 손님들이 드문드문 나와 있을 것이다. 지방에서 출장 온 비즈니스맨들이 돌아올 때쯤이기도 하다. 호텔 스태프들은 대부분 근무를 마쳤고, 원래는 지금부터 아침까지 호텔로서는 조용한 시간이 흘러갈 터였다. 하지만 2층 연회장에서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호텔스태프로 위장한 수사관들이 저마다 붙여준 교육 담당자에게 세세한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이다. 남성 수사관들은 이미 전원이 머리를 단정하게 손질했다. 

 

- 닛타도 그중 한 명이었다. 말투와 매너뿐만 아니라 걸음걸이와 행동거지까지 세심하게 지도를 받았다. 담당자는 낮에 닛타에게 말을 건넸던 젊은 여성 프런트 클러크였다. 태도도 말씨도 부드러웠지만 지시에는 일절 타협이 없었다. 손님에게 머리를 숙일 때의 허리 각도에서 합격이 나올 때까지 몇 번이나 되풀이해야 했다. 그래도 닛타는 일단 경험이 있어서 얼마 안 가 트레이닝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다른 형사들은 자정까지 길게 이어질 모양이다. 가르치는 쪽도 여간 힘든 게 아닐 것이다.

 

-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도미나가에게 다가갔다. 그의 시선은 이쪽을 향하고 있었지만 곧바로 닛타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한 박자 늦게야 놀란 표정을 지었다. 
"팀장님? 와아, 소문에 듣던 대로네요."

"소문이라니?"
"아니, 형사보다 호텔리어 쪽이 더 잘 어울린다고..."

닛타는 미간을 찌푸렸다. "참나, 어이가 없네. 그보다, 어떻게 됐어?" 
"가미야 요시미는 오른편 안쪽 자리에 앉았어요. 아직까지는 혼자예요."
"뭘 마시고 있지?"

"예?"
"음료 말이야. 가미야 요시미가 주문한 게 뭐였어?"
"그것까지는..."

"알았어." 

 

- 닛타는 스마트폰에 가미야 요시미의 얼굴 사진을 띄웠다. 운전면허증 데이터베이스에서 슬쩍 가져온 것이다. 수수하지만 단정한 용모였다. 
바로 들어가 천천히 통로를 건너갔다. 자리를 채운 손님이 40퍼센트쯤이나 될까. 대부분이 커플이었다. 오른편 안쪽 창가에 중년 여성이 혼자 앉아 있었다. 벽을 등지고 이쪽을 향하고 있어서 간단히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미야 요시미가 틀림없었다. 운전면허증으로 보면 나이는 50대, 자그마한 얼굴의 상당한 미인이다. 좀 더 젊었다면 말을 건네는 남자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 가미야 요시미는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다. 테이블에 놓인 건 셰리주 잔이었다. 반쯤 남은 게 반드시 셰리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술이라는 건 분명했다. 무알코올 칵테일을 저런 잔에 내놓지는 않는다. 가미야 요시미가 술이 센 편인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오늘 밤은 특이 행동을 취할 가능성이 낮아졌다. 뭔가 저지를 생각이라면 술을 마실 리 없는 것이다. 

 

- 닛타가 유니폼 차림으로 얼굴을 내밀자 그는 흐뭇하다는 듯이 실눈을 뜨고 웃었다. 
"오, 멋있네. 닛타는 역시 허름한 형사 옷보다 그쪽이 더 잘 어울린다니까." 도미나가와 똑같은 소리를 했다.
"두 번 다시 이 옷은 안 입을 생각이었는데요." 닛타는 7대 3으로 반듯하게 빗어 넘긴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총지배인 측에서 하는 말도 이해가 돼. 아마추어 티가 팍팍 나는 호텔리어가 프런트에 서 있으면 손님들도 수상하게 여기지. 자칫하면 호텔 평판에도 금이 가게 돼. 범인들이 의심할 우려도 있고, 수사를 위해서는 우리한테도 이게 최선책이야."
닛타는 칫하고 혀를 찼다. "남의 일이라고 참 쉽게 말씀하시네요."

"어허, 그런 태도는 일류 호텔리어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모토미야가 느물느물 웃으며 지적질을 했다. 

 

- "우선 전과부터 조사해 보면 되잖아요. 우리의 추리가 맞는다면 알아내야 하는 건 네 번째 표적이 된 인물입니다. 이전의 세 건과 마찬가지로 천벌을 받아도 마땅할 만한 인간이라면 반드시 전과가 있겠죠."
"그거야 자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지. 지금 그걸 조사하고 있어. 오늘 밤 숙박객과 내일부터 예약한 손님 중에도 전과자가 있었어. 근데 대부분 교통 위반이나 경범죄야. 그런 걸로 천벌을 받는다는 건 이상하지." 

 

- "유족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힘들 수도 있겠지.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데 교도소에도 안 가고 끝났으니까. 하지만 교통사고의 경우에는 피해자도 마음이 복잡하기 마련이야. 무턱대고 비난할 수 없는 경우가 많거든. 졸음운전 같은 게 전형적이지. 음주운전과는 달리 일부러 사고를 낸 게 아니잖아." 
분명 천벌을 받을 만하다,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 건도 좀 더 자세히 알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물론이지. 나도 그럴 생각이야."
"그밖에는 또 없었어요?"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직 찾지 못했어. 애초에 본인 확인부터 애를 먹고 있어. 운전면허증 데이터베이스를 조회해 일치하는 이름이 있는지 체크 중인데, 얼굴 사진과 비교해보지 않고서는 본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거든. 반대로 데이터베이스에 없다고 반드시 가짜 이름이라고 할 수도 없어. 요즘에는 운전면허를 따지 않는 사람도 많으니까." 
"신용카드로 결제한 고객이라면 체크인 때 호텔 측에서 카드를 복사해 뒀을 거예요. 그리고 인터넷 결제를 했다면 사전에 카드 번호나 명의가 밝혀질 텐데요." 
"그거야 알지. 호텔 측에서 정보를 제공했어. 현재까지는 숙박자 이름과 카드 명의가 다른 경우는 없었어. 하지만 닛타, 그런 경우도 가짜 이름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어." 
"그렇죠. 타인 명의의 신용카드를 쓰고 그 이름을 사칭할 수도 있으니까."
"맞아, 바로 그거야."
"전화번호 쪽은 어떻게 됐습니까?"
"일단 통신사에 임의로 정보 제공을 요청했어. 뭐, 항상 그렇지만 영장 없이도 협조는 해줄 것 같아. 근데 한두 건이 아니라 수백 건에 달하잖아. 과연 곧바로 답이 올지는 모르겠다." 모토미야는 입술을 깨물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 예약 때 가짜 이름을 썼다고 해도 전화번호는 실재할 가능성이 높다. 호텔 측에 숙박에 관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연락이 안 되면 난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신사에 계약자 정보의 개시를 의뢰하기로 했다. 그걸 입수하기만 하면 전화 명의인은 판명된다. 하지만 그것도 수백 명분이라면 통신사로서도 보통일이 아니다. 모토미야의 말처럼 요청에 응해준다고 해도 사건 발생 전까지 자료가 들어올지는 아무래도 미심쩍었다. 

 

- "게다가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어." 모토미야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뭔데요?"
"모든 손님이 혼자 숙박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야."

아하, 하고 닛타는 금세 알아들었다.
"여러 명이 숙박할 경우, 대표자 이름만 기입하지요?"

"그렇지."
"그런 경우가 몇 팀이나 돼요?"

"대략 200팀이야. 대부분 트윈이지만 엑스트라 베드를 이용해 세 명이 이용하는 경우도 있어. 아마 가족 손님이 많을 텐데, 그렇다고 사건과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지."
"그러네요."

 

- "IT 쪽 얘기라면 나는 완전 먹통이야. 말이 나온 김에 말인데..." 모토미야가 주위를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 아즈사 경감이 나는 영 어렵더라고." 
"그래요?"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것도 그렇고, 자기주장이 너무 강해. 아, 결혼은 했는지 모르겠네."
"결혼반지는 안 끼었던데요."
모토미야가 찬찬히 닛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잘도 봤네. 관심 있는 거야?"
"허 참 말이 되는 소릴 하세요."
잠시 그런 시답잖은 얘기를 주고받는데 입구 쪽에서 수고하십니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노세가 들어오는 참이었다. 뒤따르는 두 명의 젊은 형사는 양손에 편의점 봉투를 들고 있었다. 삼각 김밥이며 샌드위치 등을 사 온 모양이었다. 회의실에 있던 자들에게서 환성이 나왔다.

"오늘은 꼬박 밤을 새는 분도 많을 텐데 든든하게 먹어둬야지요." 그렇게 말하면서 노세가 닛타 쪽으로 다가왔다. 그도 편의점 봉투를 들고 있었다. 하나 고르라고 안을 보여주었다. 여러 종류의 음료가 들어 있었다. 

 

- "허가가 필요합니까?"
"당연하죠. 바의 내부를 몰래 촬영하다니, 호텔 측에 알려졌다가는 소송이 들어와요."
"괜찮아요, 아무도 카메라인 줄 모를 테니까. 테이블 위에 볼펜이나 자동차 키가 놓여 있는 걸 수상하게 생각할 사람이 있겠어요?"
이른바 스파이 카메라라는 기기를 이용한 모양이다.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죠."
"촬영한 동영상을 외부에 유출하면 문제가 되겠지만 수사에 쓰는 것뿐이에요. 보고서에도 남지 않는다니까요. 그보다 닛타 경감께 부탁할 게 있어요."

 

- "프런트 클러크라면 쉽게 가져올 수 있죠? 부탁할게요. 그게 아니면 마스터키라도 좋아요."
"키를 받아서 뭘 하려고요?"
그러자 아즈사는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로 닛타를 올려다보았다.
"뭘 하다니, 당연히 짐을 조사해 봐야죠. 모리모토 마사시는 아직 입실 전이니까 우선 가미야 요시미의 방만이라도 괜찮아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호텔 측에서 그런 걸 허락해 줄 리가 없잖아요."
다시금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아즈사는 어깨를 으쓱 쳐들었다. "왜요?"
"왜냐니, 아무리 용의자라도 영장도 없이 마음대로 방에 들어갈 수는 없어요."

"하지만 하우스키퍼로 위장한 수사관도 있다면서요. 그쪽은 원하면 언제든 객실에 들어갈 수 있잖아요. 그거하고 똑같은 거 아닌가요?"
"아니, 전혀 다르죠." 닛타는 손을 가로저었다. "실제 하우스키퍼가 청소 때 외에는 객실에 드나들지 않는 것처럼 하우스키퍼로 위장한 잠입 수사관도 무단 입실은 절대 금지예요. 그래서 마스터키는 우리 쪽에 내주지도 않았고 가져올 수도 없습니다. 호텔 측과 협의 끝에 그렇게 정한 거예요."
"그걸 곧이곧대로 지키겠다고요?"
"당연하죠."

"객실에 들어간 거, 호텔 측에 발설하지 않으면 되잖아요."

"발설하지 않아도 분명히 들킵니다. 룸 인디케이터라는 걸로 전체 객실 상태를 모니터링하고 있어요. 가미야 요시미 일행의 행동을 감시하는 건 경찰뿐만이 아닙니다. 호텔 측도 그들을 중요 인물로 인식하고 각각의 객실을 24시간 체크할 거라고요. 고객이 바에 있는데 그 방의 문이 열리거나 불이 켜지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게 틀림없죠. 참고로 말하자면, 언제 키를 사용했는지 모조리 로그 기록으로 남아요. 불법 침입에 대한 증거로 재판에서 충분히 통용되는 기록입니다."

 

- "닛타 경감, 진짜 잘 아시네요. 완전히 호텔 측 사람 같아요."

닛타는 일단 아즈사에게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똑바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천만에요,라고 말했지요?"
"제가요?"
"아까 저녁때 관리관에게 그렇게 대답하던데요? 천만에요,라고. 호텔 스태프는 그렇게 대답해서는 안 됩니다. 정확하게 천만의 말씀이십니다,라고 해야죠."
아즈사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닛타는 그녀의 뾰족한 턱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말해두겠는데요, 경찰이 아무리 잠입 수사를 요청해 봤자 원래 호텔 측은 절대로 허가해주지 않아요. 좀 더 시간을 두고 사전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하겠죠. 이번에 호텔 측에서 허가해 준 건 지금까지 함께해 오면서 신뢰 관계를 쌓았기 때문입니다. 그건 간단한 일이 아니었어요. 전에는 우리도 범인을 체포하자는 생각 하나로 이런저런 규칙을 위반하면서 호텔 측과 충돌했죠. 그때마다 서로 상의하고 교섭하면서 조금씩 신뢰를 쌓아갔어요. 지금 그게 무너지면 모든 게 엉망이 되고 수사고 뭐고 할 수도 없어요. 새겨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즈사의 눈에 분노의 빛이 서리는 것을 보고 닛타는 발을 돌려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 오전 0시 정각까지 프런트를 지켰지만 더 이상 체크인 손님은 없을 것 같았다. 닛타는 사무동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예약 손님은 캔슬한 경우를 빼고는 전원, 체크인을 마쳤다. 워크인, 즉 예약 없이 찾아오는 손님이 있을지 모르지만, 살인 계획을 세운 자들이 그럴 리는 없다.   
 

- "두 사람은 술을 얼마나 마셨지?"
그건, 이라면서 도미나가가 수첩을 펼쳤다. "제가 거기 들어간 뒤로 가미야는 칵테일 두 잔을 추가로 주문했고, 모리모토는 하이볼을 세 잔 마셨습니다."
"꽤 많이 마셨네? 역시 아침까지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을 것 같다. 수고했어, 피곤하겠네. 수면실에 가서 쉬도록 해."
네,라고 대답하고 도미나가는 안도한 표정으로 회의실을 나갔다.

 

- "괜찮으시면 닛타 경감도 같이 보실래요?"
"그래도 돼요?"
"물론이죠. 몰래 촬영에 저항감이 없으시다면 얼마든지."
"그 문제는 일단 접어두기로 하죠." 닛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식으로 일하는 것에는 찬성할 수 없지만, 봐둬서 손해 날 것은 없다.

 

- "걱정 마세요. 바에 있던 손님 모두 촬영했으니까." 아즈사가 태연히 말했다. "숙박객이라면 방으로 올라갔을 테니까 방범 카메라 영상과 조합해 보면 어느 방인지 객실 번호를 알 수 있겠죠. 신원이 판명되면 알려드릴게요." 노트북을 덮더니 가볍게 집어 들었다. "촬영한 동영상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닛타 경감, 기꺼이 빌려드릴 테니까." 
닛타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뭔가 대꾸하고 싶었지만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 "왜 저래?" 모토미야가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튼 머리 회전은 엄청 빠른데 말이야."
"빠르긴 하죠." 그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난 수면실에서 잠깐 눈 좀 붙여야겠어. 자비로 호텔 방 잡을 여유도 없는 신세니까. 닛타도 좀 쉬는 게 좋아, 내일은 힘든 하루가 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 입구 쪽에서 덜컹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고 노세가 얼굴을 내밀었다. 
"엇, 경찰서로 안 가셨어요?"
호텔 수면실은 수용 인원이 한정되어서 대부분의 수사관은 관할서에 돌아가기로 했던 것이다.
"분명 닛타 씨는 잠도 못 잘 거라고 생각하니 가만있을 수가 있어야지." 노세가 다가왔다. 이번에도 편의점 봉투를 손에 들고 있었다. "아까는 캔커피였지만 지금은 이런 게 딱 좋을 것 같아서." 봉투에서 꺼낸 것은 캔에 든 하이볼이었다. 

- "너무 좋죠." 닛타는 냉큼 받아 들었다. 캔을 따자마자 꿀꺽꿀꺽 마셨다. 탄산의 자극이 온몸의 세포를 다시 살아나게 해주는 것 같았다.
"나도 하나, 실례."
노세는 캔맥주를 마셨다. "캬아, 기가 막히네."
"그나저나 그쪽 팀장에게 한 방 먹었습니다." 
노세는 빙긋이 웃었다. "바에서 몰래 촬영한 거 말이지?"

"벌써 얘기 들었어요? 빠르네요."
"지시도 보고도 신속하게,라는 게 우리 팀의 모토야. 성가실 만큼 메시지가 자꾸 들어온다니까."
"노세 씨가 말했던 대로예요. 분명 우수한 사람이던데요. 그런 식으로 아슬아슬하게 규칙을 위반하는 것에는 찬성할 수 없지만."
"앞으로도 찬성할 수 없는 일이 이래저래 많이 생기지 않을까 싶네." 
의미심장한 노세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이를테면 어떤?"

 

- "경찰에 들킬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는 게 이상하다는 얘기지? 그 점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범행을 저지르고 있다..."

 

- 가슴속에 생겨난 석연치 않은 느낌은 하이볼의 힘을 빌려도 사라지지 않았다. 

 

- 스마트폰 알람이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를 듣고 고장 난 거 아닌가,라고 닛타는 생각했다. 잠자기 전에 맞춰둔 것은 틀림없지만 아직 시간이 그만큼 지났을 리 없다. 침대에 몸을 눕히고 눈을 감은 게 바로 방금 전인 것이다. 

 

- 하지만 스마트폰 알람에는 설정한 그대로 시각이 표시되어 있었다. 오전 6시 30분. 눈 깜짝할 사이에 네 시간 넘게 흘러간 모양인데 잠을 잤다는 실감은 전혀 없었다.

 

- 샤워를 하고 이를 닦은 뒤 수면실로 돌아와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역시 아즈사에게서 메일이 와 있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어젯밤 바에 있었던 손님들의 성명이 모두 밝혀졌습니다. 가미야 요시미와 모리모토 마사시 이외의 숙박객은 전원 오늘체크아웃 예정입니다. 따라서 이번 사건과 관계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선 알려드립니다. 7팀 아즈사'
메일 수신 시각이 새벽 2시 25분으로 찍혀 있었다. 아즈사와 7팀 형사들은 그 뒤에도 방범카메라 영상과 몰래 촬영한 동영상을 일일이 비교해 숙박객을 특정해 나갔던 것이다. 모토미야가 부루퉁했던 이유를 알았다. 아즈사 경감이 빠른 일처리를 일부러 과시한다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닛타 역시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 "그 옷은 어디서 조달하셨습니까. 저희 호텔 유니폼과 매우 비슷합니다만."
아즈사는 불쾌한 듯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호텔 직원으로 안 보인다는 건가요?"
"호텔 직원? 말도 안 돼."

닛타는 몸을 크게 젖힌 뒤,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 다시 얼굴을 가까이 댔다. "세상 어디에 로비 소파에 버티고 앉아 태블릿이나 들여다보는 호텔 스태프가 있습니까. 게다가 근무 중에. 코스프레를 하고 싶다면 당장 일어나세요." 

 

- "아즈사 경감은 호텔 측의 교육에 참가하지 않았잖아요."

"교육?"
"어젯밤 연회장에서 실제 스태프가 해준 교육 말입니다. 말투와 행동거지, 고객을 대할 때의 중요한 점 등을 배우는 시간이었어요." 
"아, 그거요? 대략적인 건 우리 팀 형사한테서 들었어요. 한마디로 기품 있게 행동하라는 거잖아요. 괜찮습니다, 그 정도는 교육받지 않아도 할 수 있어요, 성인이니까요."
"호텔 업무를 허투루 생각하면 안 되죠. 고객들은 다 지켜봅니다. 아즈사 경감 한 사람 때문에 호텔에 대한 평판이 별 다섯 개에서 별 한 개로 떨어지면 어떻게 책임질 겁니까?"
"또 선배 행세를 하시려고요, 닛타 경감? 그렇게 호텔 업무가 중요하다면 이참에 직업을 바꾸시는 게 좋겠네요."
"수사를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잘 들어요. 수사관이 호텔 스태프로 위장한 것을 눈치채면 범인들은 틀림없이 계획을 수정할 겁니다. 하지만 단념하는 게 아니라 뒤로 미룰 뿐이겠죠. 그럴 경우, 그다음 움직임을 알아낼 수 있다는 보증이 없어요."

"그런 건 굳이 말씀하시지 않아도 잘 알아요. 걱정 마세요. 차림새는 이렇지만 일반 고객에게는 절대로 접근하지 않을 거니까. 수상쩍은 손님이 있을 때만 되도록 가까이에서 감시하려는 것뿐이에요."
닛타는 '손님이 아니라 고객님'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차마 입밖에 내지는 못했다. 

- 또 한 가지,라고 말하고 닛타는 검지를 번쩍 들었다. "몰래 촬영은 앞으로도 계속할 작정입니까?"
"물론이에요." 아즈사는 주저하는 기색 따위,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가장 효과적인 정보 입수 수단이잖아요. 호텔 측이 설치한 방범카메라만으로는 세세한 움직임을 체크할 수 없고 사각지대도 많아요. 메일로도 보내드렸지만, 어젯밤에 바에 있었던 손님 전원의 신원을 확인한 것도 우리 팀 형사들이 촬영한 동영상 덕분이었어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몰래 촬영은 명백한 위법이에요. 호텔 측에 무단으로 방범카메라를, 게다가 교묘히 숨겨서 설치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닛타 씨가 호텔 측과 협상해 주시든가요."

"소용없어요. 허락해 줄 리 없습니다."

"어째서요?"
"만일 고객에게 알려졌다가는 문제가 커지기 때문이죠. 몰래 촬영하는 호텔이라고 SNS에 퍼지기라도 하면 그 즉시 평판이 땅에 떨어져요."
"호텔 측은 알지 못했던 일로 하면 되잖아요."
"그걸 고객들이 믿어준다는 보증도 없고, 아시다시피 SNS에서 정보가 확산될 때는 반드시 허위 과장이 따라붙어요. 그게 어떤 것이든 호텔 측에 좋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꼭 협상이 필요하다면 총지배인과 담판을 벌여도 좋겠죠. 근데 방금 말했던 이유로 총지배인은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허락은커녕 레스토랑이나 바의 스태프들에게 수상쩍은 행동을 취하는 자가 있다면 그게 설령 경찰이라도 주의를 줘서 못 하게 하라고 지시할 게 틀림없습니다. 자칫하면 앞으로 일절 협력을 거부할 수도 있어요."

아즈사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납득한 게 아니라는 것은 반격의 기미가 짙게 느껴지는 그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알고, 이해해 주시죠."

아즈사는 코끝을 쓱 올렸다. 그러더니 "생각해 볼게요"라는 말을 던지고 로비로 돌아갔다.  

 

- "바에서 두 사람 어땠어?" 이나가키가 물었다. 목소리가 부루퉁하게 들리는 것은 수사에 진전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제가 보고 드리겠습니다." 아즈사가 손을 들었다. "저희 팀 두 명을 바 안에 잠입시켜 가미야 요시미와 모리모토 마사시의 일거수일투족을 촬영했습니다. 나중에 분석해 봤지만 둘이서 스마트폰 등으로 뭔가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판단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 두 사람이 조식을 위해 방을 나왔으나 각각 다른 식당으로 갔습니다. 두 군데 식당에 저희 팀 형사를 보내 어젯밤과 똑같이 동향을 촬영했습니다. 아직 분석은 못했지만, 제가 본 바로는 스마트폰을 터치하는 타이밍이 서로 맞지 않아서 역시 접촉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잠깐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무슨 일이지?"
"아즈사 경감이 일하는 방식, 저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몰래 촬영한 것 말인가?"
"네. 호텔 측에 알려졌다가는 곤란해집니다."
"아즈사 경감은 영리한 친구야. 들키지 않게 잘할 거야."
"본인은 그렇더라도 밑에 있는 수사관이 자칫 실수하면 큰일이잖습니까. 실제로 카메라를 다루는 건 그 사람들인데요."

"혹시라도 호텔 측에 들킨다면 일부 수사관이 임의로 한 일이라고 하면 돼."
"그런 말을 후지키 총지배인이 받아들일 리 없습니다. 앞으로 일절 수사에 협력하지 않겠다고 나오면 정말 난처해져요."
"이 호텔에서 사건이 터지면 난처해지는 건 후지키 씨도 마찬가지야. 협력하지 않겠다느니 하는 얘기는 못 할걸? 예전 사건 때도 그랬잖아.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의지할 곳은 경찰밖에 없다는 거, 그쪽도 잘 알아. 능구렁이야, 그 사람." 
"호텔 고객이 몰래 촬영을 알아챌 위험성도 큽니다. 그 자리에서 따지고 들기라도 하면 범인들이 경찰의 개입을 알게 될 우려가 있어요."
"그럴 때는 자네들 잠입 수사관이 나서줘야지. 그런 고객은 즉각 격리해서 사정을 설명하고 입을 막도록 해. 이름과 연락처를 알아두면 수사를 방해하는 일은 없을 거야."
"우선 당장 수사를 방해하지는 않겠지만 사건이 해결된 뒤에라도 전말을 인터넷에 올리면 위법 수사라는 비난이 쏟아집니다."
"자네도 알겠지만 몰래 촬영을 금지하는 법률은 없어. 기껏해야 조례가 있을 뿐이지. 게다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문제 될 일도 없어. 그냥 무시하면 돼. 항상 그래 왔잖아."
"그래도..."
호텔 측에 민폐를 끼치게 된다,라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자네는 누구 편에서 일하는 거냐고 나무랄 게 틀림없다.
"왜, 아직도 할 말이 있나?"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만 실례합니다." 경례를 하고 닛타는 그 자리를 나왔다.

 

- 여자가 얼굴을 이쪽으로 돌렸다. 그 표정에도 환한 미소가 있었다.
닛타는 순간적으로 혼란에 빠져 할 말을 잃었다. 몇 번이나 눈을 깜빡거린 끝에 저도 모르게 "어, 어떻게 여기에?"라고 중얼거렸다.
"유령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시네요, 닛타 씨."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면 제가 누군지 까맣게 잊어버리셨나요?"
"만일 그렇다면 내가 다시 소개해드릴까?" 후지키가 입가를 풀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뇨, 물론 기억하죠." 닛타는 심호흡을 한차례 한 뒤에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어떻게 여기에?"
"실은 내가 불렀어요." 후지키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녀의 능력이 꼭 필요한 때라고 생각했으니까요."

 

- 닛타는 그녀, 야마기시 나오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길쭉한 눈에 승부욕 강한 빛이 서린 것은 몇 년 전에 만났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우아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에는 한층 기품이 더해졌다. 나이와 함께 경험도 쌓인 것이리라. 
"잘 오셨습니다!" 닛타는 왠지 그런 말이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 난 볼일이 좀 있어서, 하고 후지키는 방을 나갔다. 아마 눈치껏 빠져준 것이리라. 어렵게 자리를 마련해 준 마음을 감사히 받기로 했다. 응접용 소파에서 닛타는 야마기시 나오미와 마주 앉았다. 


- "공항에서 곧장 여기로 온 거예요?" 벽 쪽에 캐리어가 있는 것을 보고 닛타가 물었다.
네,라고 야마기시 나오미는 쾌활하게 대답했다.
"총지배인이 연락하신 게 정말 한밤중이었어요.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서 즉시 돌아와라, 그쪽 관계자들에게는 내가 설명하겠다고 하시더군요. 자세한 사정은 메일을 보낼 테니 비행기 안에서 읽어보면 된다면서요." 
"그래서 곧장 공항으로?"
"네, 뭐가 뭔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급한 일이구나 싶어서 그야말로 허둥지둥 준비를 했죠. 코르테시아로스앤젤레스 호텔의 직원용 숙소에서 공항까지 약 10분 거리거든요. 결국 새벽 4시에 나리타행 비행기를 탔어요."


- 로스앤젤레스와의 시차가 17시간이니까 야마기시 나오미는 이쪽 시간으로는 어젯밤 9시에 출발한 셈이다. 닛타는 예전에 로스앤젤레스에 살았던 적이 있어서 비행시간이 약 11시간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오늘 오전 8시경에 나리타에 도착했을 테니까 입국 수속을 끝내자마자 이쪽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아, 맞다." 야마기시 나오미가 퍼뜩 생각난 듯 손목시계를 풀었다. 시계 바늘을 돌리고 있었다. 시차를 수정하는 것이다.
"손목시계가 바뀌었는데요?" 닛타가 말했다. "전에는 할머님의 유품 시계를 찼는데."

"그걸 아직도 기억하시네요. 네, 그랬죠. 근데 결국 고장이 나서 로스앤젤레스에서 새 시계를 샀어요. 역시 정확한 게 좋더라고요. 덕분에 탑승 시각 직전까지 커피를 마실 수 있었어요."
"힘들었겠네요. 피곤하지 않아요?"
"전혀 피곤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잖아요." 야마기시 나오미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눈빛은 긴급 사태를 충분히 이해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리뷰자 주 : 개인적으로는 여기서 같은 시계를 사용하되 10분 정도 느리게 맞추는 장면으로 묘사하는 게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싶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아끼던 고인의 유품을, 특히나 자신의 신념과 연결해 사용하던 인물이 이렇게 산뜻하게 말한다는 건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전작의 사건을 계속 연상시켜서 새 시계로 바꾸었으나 그런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하는 설정일 수도 있으나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전후로 별다른 추가 언급이 없다. 단지 시간을 맞추는 모습만을 위해 소모된 것처럼 보여서 아쉽다.)

 

- "두 번 벌어진 일은 세 번째도 있다고 하던가요? 뭐, 그나마 이 호텔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경찰과 공조하는 데는 익숙해졌을 테니까."
"그건 아니죠. 호텔은 직원이 들고나는 게 심한 곳이에요. 예전 사건을 경험했던 직원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총지배인이 저를 부르셨을 거예요. 닛타 씨가 말한 대로 경찰과의 공조 담당으로."

 

- "어디까지 알고 있어요?"

"제가 듣기로는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서로 협력해 당사자 이외의 사람이 대신 복수해주고 있다던데요. 지금까지 일어난 사건의 피해자 세 명이 모두 과거에 사람을 죽게 한 전력이 있었고, 그 사망한 사람의 유족은 사건 당일에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다, 그리고 그 세 명의 유족이 오늘 밤 이 호텔에 숙박할 예정이다..."
닛타는 눈이 둥그레졌다. "여전히 대단하시네."
"뭐가요?"
"복잡한 내용을 이해하고 간략하게 설명해 내는 능력 말이에요. 코르테시아로스앤젤레스 호텔에서 일부러 호출해 올 만합니다."

 

- 야마기시 나오미는 턱을 당기며 살펴보는 듯한 눈빛을 던졌다.
"닛타 씨, 그거 진심이에요? 놀리는 거 아니고?"
"물론 진심이죠. 저는 도저히 그렇게는 못 해요. 현재 상황을 거의 모자라거나 넘치는 것 없이 설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조금 더 덧붙인다면 그 상황에서 우리 수사진이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것이겠죠."
"네, 정말 궁금한 점이에요."
"밝혀야 할 포인트는 두 가지입니다." 닛타는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들었다.

 

- "그렇겠네요. 두 번째 포인트는?"
"그들이 협력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어디서 서로 알게 됐는가 하는 점입니다. 물리적인 인간관계에 관해서는 이미 철저히 조사했지만 현재로서는 연결점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분명 인터넷 쪽일 것으로 판단하고 관련 사이트와 SNS 등을 조사 중입니다." 
야마기시 나오미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건 후지키 씨에게도 얘기했습니다."
"메일에 그런 내용은 없었어요. 그렇군요,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훨씬 더 복잡한 것 같네요. 실은 메일을 봤을 때는 과거 사건보다 대책을 강구하기 쉬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용의자 세 명이 밝혀졌으니 어쨌든 그 사람들의 동향만 감시하면 되겠구나, 살해 대상이 누군지 아직 모르더라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후지키 씨도 처음에는 그렇게 알고 계셨어요. 하지만 그 정도로 끝날 일이라면 제가 이 옷까지 차려입고 나서지는 않았겠지요." 닛타는 상의 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
"정말 그러네요. 여전히 너무 잘 어울리시지만." 
또다시 똑같은 말을 들었지만 닛타는 그냥 흘려듣기로 했다. 

 

- 야마기시 나오미는 두통을 막으려는 듯이 오른손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고 닛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은 잘 알았습니다. 체크인 타임인 오후 2시까지 아직 시간이 좀 남았지만 저도 곧바로 준비할게요. 현재 스태프들과 인사도 하고 변경된 시스템을 알아둘 필요가 있으니까요."
야마기시 나오미가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닛타도 따라 일어섰다. 다시 한번 잘 부탁드린다고 말하고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그녀는 놀란 듯 눈이 둥그레지더니 이내 빙긋이 웃으면서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공손히 마주 인사를 건넸다. 세련된 진짜 호텔리어의 풍모였다. 

 

- "아까 말했는데? 방 안을 살펴봐야 한다고." 어느새 존대는 생략한 말투였다. 
"실례지만 어떤 목적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하우스키퍼로 위장한 형사님이 청소 때 입회할 거라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이변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뿐이고, 이를테면 고객님의 짐에 손을 대는 등의 일은 절대 금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 고객님이 입실하지 않은 방에서 대체 뭘 살펴본다는 말씀일까요?" 
"그걸 댁이 알 필요는 없어요. 우리 지시대로 따라주시면 됩니다." 아즈사의 빠른 말투에는 명백히 짜증이 섞여 있었다.


- 아즈사가 노리는 게 뭔지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문제의 소지가 다분하다고 나오미는 감지했다. 이런 일을 쉽게 승낙해서는 안 된다.
한 호흡 멈췄다가 나오미는 입을 열었다.
"잠입 수사에 관해서는 닛타 경감이 지휘한다고 들었습니다. 이건 그분도 알고 계시는 일일까요?"
그러자 아즈사는 눈을 크게 뜨고 턱을 치켜들었다.
"나는 닛타 경감 밑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움직입니다. 일단 말해두겠는데, 나도 경감이에요. 지금은 내 지시를 따라주세요."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용의자라고 해도 아직 혐의 단계일 뿐이지요? 즉 저희로서는 다른 고객님들과 똑같은 분입니다. 그 고객님이 쓰시게 될 방에 스태프 이외의 사람을 먼저 들일 수는 없어요. 꼭 들어가시겠다면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아즈사는 입을 한일자로 꾹 다물고 날카로운 시선을 던져왔다. 나오미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받았다.
야스오카가 돌아와 "키를 준비했습니다"라면서 카드를 내밀었다.
아즈사는 차가운 얼굴로 그 카드키에 시선을 던졌지만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 "그 1105호실, 마에지마 다카아키를 위해 따로 챙겨두세요. 절대로 다른 손님에게 내주면 안 돼요. 아시겠어요?"
"방에는 가보지 않아도 괜찮겠지요?" 나오미는 확인하듯이 물었다.
"안 된다는데 어쩔 수 없잖아요? 일반인에게 수사 내용을 밝힐 수도 없고." 툭 던지듯이 말하고 아즈사는 출입구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하지만 나가기 전에 뒤를 돌아보았다. "명심하세요. 수사에 참견 말고 조용히 협조하셔야지, 안 그러면 나중에 크게 후회할 거예요."
"협력은 하겠습니다. 다만 모든 고객님이 쾌적하게 지내시도록 한다는 것을 전제로..."
나오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쾅하고 문이 닫혔다. 

 

- 손목시계의 바늘이 오후 1시를 가리키는 것을 보고 닛타는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왔다. 프런트에 나가기 전에 얼굴과 옷매무새를 단정히 가다듬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고쳐 매면서 영 마음에 걸리는 것을 되짚었다. 조금 전 아즈사가 돌아와 이나가키에게 뭔가 귀엣말을 했던 것이다. 얼굴 표정이 험상궂은 게 명백히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 넥타이 위치를 가다듬으면서 이런, 하고 고개를 저었다. 드디어 본격 작전에 돌입하는 참에 이렇게 내부 인물에게 휘둘려서야 결과가 좋을 리 없다. 우선은 내가 맡은 일에 최대한 집중하도록 해야 한다. 

 

- "그거, 다른 팀 수사관으로 교체해." 이나가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예? 교체라니, 무슨 말씀이신지..."
"하우스키핑에 입회할 수사관을 바꾸라는 얘기야. 자네 부하는 다시 불러들여."
"잠깐만요, 왜 갑자기 일이 그렇게... 누구로 교체하라는 겁니까?"

 

- 닛타가 그렇게 말하는 참에 스마트폰이 울렸다. 표시를 보니 이와세에게서 온 것이었다. 잠깐 실례합니다,라고 이나가키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닛타야. 무슨 일이지?"
"팀장님, 실은 지금 7팀의 경사가 와서..."
청소 때의 입회를 자신이 맡겠다고 한다, 누구 지시냐고 물어보니 관리관이라고 대답했다는 얘기였다.
"알았어. 거기서 대기하고 있어. 내가 다시 연락할게."

 

- 닛타는 전화를 끊고 이나가키를 내려다보았다. "교체는 아즈사 경감이 제안한 겁니까?"
"결정한 건 나야."
"왜요? 우리 팀 형사는 미덥지 않습니까?"
"그런 말은 한 적 없어."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결정을? 7팀 형사는 뭔가 특별한 작전이라도..."

거기까지 말한 참에 닛타는 흠칫했다.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관리관님, 혹시?"
"아니, 질문은 안 받을 거야."

 

- "단순한 입회가 아니라 가미야 요시미와 모리모토 마사시의 가방을 수색할 생각이군요? 하우스키퍼의 눈을 피해서."
"내 쪽에서 그런 지시는 내린 적 없어." 이나가키는 부루퉁하게 내뱉었다.
"지시는 내리지 않았지만 손님 가방에 손대지 말라는 주의도 하지 않았다... 그렇죠?"
이나가키는 피곤하다는 듯이 입가를 삐뚜름하게 틀었다.
"수사 방식은 아즈사 경감에게 전적으로 맡긴다고 했을 뿐이야."
닛타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찰 뻔했지만 가까스로 꾹 참았다.
"잊으셨습니까? 지난번 사건 때 모토미야 씨가 그런 일을 했다가 총지배인에게 엄청난 항의를 받았잖아요."
"그걸 잊지 않았기 때문에 아즈사 팀에 맡긴 거야. 자네 팀 형사라면 여차할 때 변명할 수도 없을 테니까. 혹시 호텔 측에서 항의하더라도 자네는 전혀 몰랐던 일이라고 하면 돼. 아즈사가 독단으로 결정한 일로 하자고."
"저는 책임을 모면하려는 게 아니라..."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나도 알아. 하지만 닛타, 지금은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야. 어떻게든 그자들의 꼬리를 잡아야 할 거 아냐. 입바른 소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 "하우스키퍼 맡기로 했던 수사관에게 전화해." 이나가키는 닛타가 손에 든 스마트폰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간이 없어. 어물거리다가는 가미야와 모리모토가 방에 돌아올 거야. 이건 명령이야. 얼른 연락해."
닛타는 스마트폰을 움켜쥐고 한차례 호흡을 가다듬은 뒤, 이와세에게 전화했다. 내내 기다렸는지 단 한 번의 신호음에 연결되었다.
"닛타야. 관리관에게 확인했다. 그 일, 7팀 수사관에게 넘겨. 옷 갈아입고 도미나가 쪽에 합류하도록 하고."
알겠습니다,라는 대답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이나가키를 보니 누군가와 한창 통화 중이었다. 이 얘기는 이걸로 끝이라고 그 등이 말하고 있었다. 
닛타는 고개를 저으며 그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 "자네 심정은 잘 알지만, 이번에는 참아. 관리관도 좋아서 저러는 게 아니잖아."
아무래도 아까 나눈 대화가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그건 저도 알죠. 그래서 지시대로 따랐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지? 그게 걱정이야. 다음에 또 무슨 일이 있더라도 괜히 속 끓이지 마. 자네는 경찰 측 사람이야."
뭔가 거슬리는 그 말에 닛타는 모토미야를 마주 보았다.
"다음에 또? 뭡니까, 또 다른 게 있어요?"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미리 못을 박아두려고 하는 말이야. 잘 들어, 절대로 폭주하면 안 돼."
"폭주하는 건 아즈사 경감 쪽이죠."
"아니, 아즈사 경감은 냉철해. 그러니 그런 일도 할 수 있지. 아무튼 어깃장 놓을 생각은 접는 게 좋아. 이건 자네 팀만의 사건이 아니잖아. 아무리 일하는 방식이 마음에 안 들어도 서로 힘을 합치는 수밖에 없어. 알았지?"
닛타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 "정확하게는 침대 뒤쪽에 붙였죠. 실제 하우스키퍼가 다시 청소하러 와도 아마 못 찾아낼걸요." 
"아즈사 경감,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기나 해요?"
"위법 수사라고 떠들고 싶다면 좋으실 대로 하세요. 단 그건 사건이 해결된 뒤에 해주실래요? 지금 나한테 최우선 사항은 범인들의 계획을 저지하는 거예요. 혹시 닛타 경감은 그런 건 머릿속에 없나요?"
"이거, 관리관도 알고 있어요?"
"우리 팀을 청소에 입회하게 해 주면 용의자들에 관한 정보를 최대한 입수할 아이디어가 있다는 말씀만 드렸어요. 전적으로 내가 책임지겠다는 말도 했고요."
도청이라는 단어는 꺼내지 않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나가키는 분명 짐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모토미야도, "다음에 또 무슨 일이 있더라도 괜히 속 끓이지 마"라고 한 말은 지금이 상황을 예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 "닛타 경감이 여기 왔다는 건 내 마음 속에만 담아두죠. 우리 팀원에게도 외부에 일절 발설하지 말라고 지시할게요. 그러니까 여기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닛타 경감은 전혀 몰랐던 것으로 하셔도 됩니다."
"그런 걸 걱정하는 게 아닙니다."

 

- "그럼 대체 뭐가 문제죠?" 아즈사가 냉소를 던졌다.

"도청을 중단할 생각은 없는 거네요."
"네, 전혀. 이 게임에 규칙은 없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이기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거예요. 좀 더 확실하게 게임에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닛타 경감이 제시해 주신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잠입한 거 아닙니까."

"하지만 용의자 방에는 들어갈 수 없다면서요? 내가 보기에 잠입 수사는..." 잠깐 틈을 두었다가 아즈사가 다시 말했다. "별다른 성과도 없이 게임오버를 맞이할 가능성이 높아요." 
옆에 앉은 형사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번졌다. 헤드폰을 썼어도 대화 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건가.
닛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호텔 측에 절대로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이죠. 누군가 밀고하지 않는 한, 들킬 일은 없어요." 아즈사가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괜히 떠들고 다니지 말라는 경고인 모양이다.

 

- 여성 형사에게 양보하고 닛타는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모리모토 마사시는 짐을 들고 외출했다. 그녀가 뭘 조사하겠다는 것인지, 여간 마음에 걸리는 게 아니었다. 분명 아즈사가 뭔가 특별한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 여성 형사는 손에 장갑을 끼고 데스크로 다가갔다. 그 위의 메모지를 집어 들더니 한 장만 떼어내 호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야마기시 나오미가 숨을 헉 삼키는 기척이었지만 항의는 하지 않았다. 메모지는 호텔 비품일 뿐 숙박객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떼어낸 것이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백지였다.

 

- 닛타는 욕실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세면대와 변기와 욕조가 한 세트로 이어진 구조였다. 대강 둘러본 바로는 핸드타월을 한 장 사용했을 뿐 그밖에는 손을 댄 흔적이 없었다. 
욕실 쓰레기통을 살펴보려고 했을 때였다. "그건 뭡니까!"라는 나오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 급히 나가보니 창가에 선 나오미가 여성 형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쓰레기를 주웠을 뿐인데..."
여성 형사가 대답했다.

"잠깐 보여주세요." 나오미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여성 형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 "무슨 일이죠?" 닛타가 물었다.
"이분이 침대 밑에서 뭔가를 꺼냈어요. 제가 창밖을 내다보는 틈을 노린 모양인데 유리창에 다 비쳤어요."
침대 밑... 어떤 사정인지 금세 알 수 있었다.
"어서 보여주세요. 그냥 쓰레기라면 못 보여줄 이유가 없잖아요." 나오미가 재차 추궁했다. 드물게도 매우 엄격한 말투였다. "아니면 뭔가 중요한 물건이라서 저한테 보여주실 수 없는 건가요?"
여성 형사는 침묵한 채였다. 오른손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결국 닛타가 나서서 말했다. "보여드리세요."
여성 형사는 얼굴을 들고 놀란 듯 둥그런 눈으로 닛타를 보았다.
얼른, 이라고 닛타는 다시 지시했다.

 

- "간단히 말하면, 도청기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닛타는 여성형사 쪽을 향했다. "아즈사 경감이 이걸 회수해 오라고 지시한 건가?"
"그게 아니라 위치를 바꾸라고... 집음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서요."
혀를 차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짓까지 하다니.

 

- "닛타 씨도 알고 계셨어요?" 나오미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는 것이다.
후우 숨을 토해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고 있었어요."
"설마 이런 짓을... 아무리 용의자라도 확실한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일반 고객님으로 봐달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던 가요? 저를 속인 거예요?"
"미안해요. 마음이 편치는 않았지만 수사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다른 분... 다른 두 고객님의 객실에도 도청기를?"
여기서 거짓말을 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 네,라고 닛타는 대답했다.

 

- 아즈사는 스위치를 끄고 녹음기를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 "왜 말하지 않았습니까? 7팀의 아즈사가 독단으로 처리한 일이라고."
닛타는 양팔을 펼치며 말했다. "그런 얘기를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죠? 나는 도청기에 대해 알면서도 야마기시 나오미 씨에게 숨겼어요. 그러니 속인 거나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이 대화만 보면 마치 닛타 경감이 도청기를 설치하라고 지시한 것처럼 들리잖아요. 야마기시 나오미 씨라고 했던가요, 그분도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 오해는 풀어주시는 게 좋지 않나요?"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이냐니..." 아즈사의 시선이 좌우로 흔들렸다. "그야 이런 오해는 닛타 경감도 원치 않던 일이잖아요."
"아니, 나는 이게 오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잠입 수사의 책임자는 나예요. 원했든 원치 않았든 이 호텔에서 하는 모든 수사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질 각오로 임하고 있습니다. 그런 배려는 안 해도 돼요. 게다가 관리관과 모토미야 씨도 녹음기에 모리모토의 목소리가 담긴 것에 대해 아무 언급도 없었잖습니까. 언제 어떻게 녹음했는지 묻지도 않았어요. 은연중에 아즈사 경감이 일하는 방식에 찬성하시는 거겠죠." 
아즈사는 코끝을 쓰윽 올리고 닛타를 바라보았다.
"닛타 경감은 어떠세요? 찬성하십니까?"
"아뇨, 찬성은 못 합니다. 하지만 몇 번이나 말했듯이 책임은 질 겁니다. 아즈사 경감이 게임 플레이어라면 나는 게임 매니저니까."

닛타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7시 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급해서 이만 실례합니다." 아즈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복도로 나갔다.

 

- 사무동을 벗어나 호텔에 들어선 참에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돌아보니 노세가 서 있었다.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번에는 노세 형사님이에요? 무슨 일이시죠?"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노세는 엄지와 검지로 조그만 것을 집는 시늉을 해 보였다.
"뭐, 좋습니다."
닛타는 흘끗 프런트 쪽을 살펴보았다. 야마기시 나오미가 돌아와 손님을 상대하고 있었다. 이쪽은 못 본 것 같았다.
"조용한 위층으로 가죠."
에스컬레이터로 2층으로 올라갔다. 사람이 없는 예식 코너로 들어가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 팀장, 대하기 껄끄러운 사람이지?"
노세의 그 말에 닛타는 흠칫 놀랐다.
"혹시 아까 한 얘기 들으셨어요?"
"계단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듣게 됐어. ... 뭐, 믿지는 않겠지만." 노세가 혀를 쏙 내밀었다.
"엿들으신 거예요? 그거, 별로 좋은 취미 아닌데요."
"미안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 그래서, 어때?"
"아즈사 경감 말입니까?"
응, 하고 노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에 더 이상 장난스러운 기색은 없었다.
"같은 경찰이라도 저마다 생각하는 건 다를 수 있겠지요. 수사에 임하는 자세도 그렇습니다. 몰래 촬영이나 도청 같은 건 내 성격에는 전혀 안 맞지만, 어쨌든 모리모토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는 큰 성과가 있었어요. 그건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세는 온화한 얼굴로 테이블 위에서 천천히 두 손을 깍지꼈다.
"전에도 말했지만 아즈사 경감은 우수한 인재야. 근본부터 형사인 사람이지. 아즈사 경감 본인은 별로 밝히고 싶어 하지 않지만, 실은 아버님도 형사였어." 

 

- "아버님은 아들을 원했는데 딸만 둘이었어. 장녀는 얌전하고 섬세한 성품이어서 둘째 딸 쪽에 기대를 걸었던 모양이야. 어릴 때부터 다양한 무예를 가르쳤고 특히 합기도는 상당한 수준의 실력이야." 
"형사 영재교육을 시킨 거네요."
결혼 상대를 찾기가 어려울지 모른다는 걱정은 안 했을까. 닛타는 얼핏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내가 보기에는 아즈사 팀장이 그런 아버님의 기대에 훌륭하게 부응하고 있는 것 같아. 남자였으면 아마 훨씬 더 승진이 빨랐을걸? 우리 팀장은 그 장벽을 뛰어넘어 어떻게든 보란 듯이 성과를 내려는 야심이 있어. 그러자면 남자 형사와 똑같이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겠지. 상사들이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위법에 가까운 수사 기법을 동원해 그동안 수많은 사건을 해결해 왔어. 아, 하지만 꼭 승진을 바라고 그러는 건 아니야. 우리 팀장이 바라는 건 아주 단순 명쾌해. 정의를 관철한다, 내 손으로 악당을 잡아들인다. 그냥 그것뿐이야. 실은 닛타 씨하고 밑바탕은 똑같다는 얘기야." 
닛타는 노세의 둥근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저절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야, 내가 웃기는 얘기를 했나?"
아뇨, 아뇨,라고 닛타는 손을 내저었다.
"노세 씨가 아즈사 경감 밑에서 성실히 일하시는 이유를 알겠네요. 정년퇴직까지의 시간을 이 사람에게라면 바칠 수 있겠다,라는 것이죠?"
"바치다니, 에이, 그런 대단한 건 아니고." 노세는 얼굴 앞에서 손을 가로저었다. "게다가 이런 중늙은이의 남은 시간 따위, 무슨 도움이 되겠어. 그냥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는 얘기야. 마지막으로 모시게 된 상사가 출세에 목을 매는 인간이 아니라서 다행이지." 

 

- "그러니 닛타 씨가 좀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이해하고 말고요. 정말 좋은 말씀이에요. 아즈사 경감도 노세 형사님에게는 마음을 열어준 모양인데요? 그러지 않고서야 이름의 의미를 가르쳐주지도 않았겠죠." 
"글쎄, 그건 잘 모르겠네. 뭐, 그런 거라면 나도 참 흐뭇하지." 쑥스러운 듯이 노세는 실눈이 되어 빙그레 웃더니 "그런데 실은..."이라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 "우수한 형사라는 건 분명한데 어째 좀 아슬아슬할 때가 있어. 옆에서 누가 무슨 말을 하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밀고 나가는 강한 의지력은 물론 훌륭하지. 하지만 자칫 거기에 집착한 나머지 폭주할 우려가 있어. 게다가 난감하게도 폭주하는 자신은 그걸 깨닫지 못한다니까. 그래서 나는 어떤가 하면, 이렇게 바꿔 말할 수도 있어. 늙은 경찰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난폭한 망아지를 조련하는 데 쓰고 싶다..."

닛타는 크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네, 그렇죠, 그게 더 노세 형사님답네요."

 

- 약간은 강제적인 수사를 하더라도 눈감아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건 어떤가... 나오미는 도청기를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 만일 이런 게 있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나중에 범인이 체포된 뒤에야 사실은 객실에 몰래 달아둔 도청기 덕분에 사건을 해결했다는 얘기를 듣는다면 나는 그걸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수사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건이 해결되었으니 다행이다,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오미는 고개를 저으며 도청기를 다시 챙겨 넣었다. 분명 그런 식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그 반대의 경우만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반대의 경우란, 그 고객들이 범인이 아닐 때의 일이다. 

- 범인이 아니라면 도청한 내용은 즉각 처분할 것이고 본인에게 도청했다는 것을 밝힐 일도 없을 테니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라고 경찰 측에서는 주장할 게 틀림없다. 하지만 고객의 프라이버시가 침해되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사건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지극히 흥미로운 사적인 대화가 객실 내에서 오고 갔다면? 도청한 경찰이 그걸 어느 누구에게도 흘리지 않는다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 그녀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조용히 물었다.
"누군가를 마음속 깊이 증오해 본 적 있어요?"
"마음속 깊이..."
"그래요, 가능하면 내 손으로 죽이고 싶을 만큼."

"글쎄요, 제 경우에는 기억에 없습니다만."
"그래요? 참 다행이네."
"죄송합니다..."
"증오라는 건 인생에 아무런 보탬도 안 돼요. 오로지 무거운 짐일 뿐이지. 하루 빨리 내려놓고 싶은 짐 덩어리. 그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어요. 그런데 나는 그것도 놓쳐버리고 말았어요."

 

-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눈물을 훔치며 빙긋이 웃음을 건넸다. 
"내가 이상한 소리를 했네. 그냥 잊어버려요."

 

- 방을 나와 복도를 걸어가는데 엘리베이터 홀 앞에 사람이 서 있었다. 스태프 유니폼을 입고 있지만 진짜가 아니라는 건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서 있는 자세가 전혀 다른 것이다. 
상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오미 쪽으로 다가왔다. 가미야 요시미의 방에 도청기를 설치한 수사관에게서 보고를 받고 찾아온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버티고 서있는 호텔리어는 없습니다, 아즈사 경감님." 옆으로 다가온 형사에게 나오미는 말했다.
아즈사가 오른쪽 손바닥을 내밀었다.
"돌려주시죠. 그거, 경찰 비품이 아니라 내 개인 물품이거든요."
무슨 말인지 금세 알아들었다.

 

-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로비가 내려다보이는 장소로 아즈사를 데려갔다.
"도청기는 내 개인 물품이라고 말씀드렸죠? 즉 도청 지시를 내린 건 닛타 경감이 아니에요." 아즈사가 말했다. "전적으로 내 개인의 판단에 따라 결정한 일입니다. 지난번에 말했었죠, 나는 닛타 경감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랬나요? 하지만 나한테는 어느 쪽이건 마찬가지예요. 고객님에 대한 그런 비열한 행위를 그냥 못 본 척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비열하다?"
"아닙니까?"
아즈사는 난간에 팔꿈치를 얹으며 나오미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살인자예요. 내일 아침이 되기 전에 이 호텔에서 누군가를 살해하려 하고 있어요. 그걸 가로막기 위해서는 지금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죠. 그런 정도는 나오미 씨도 잘 아시잖아요?" 
"범인으로 판명된 게 아니라 용의자 단계라고 들었는데요."

"증거는 없지만 확실해요. 그러니 어떻게든 체포해야죠, 살인 미수 현행범으로, 그런 점을 좀 이해해 주시면 안 돼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신다는 건 잘 알겠어요. 하지만 저에게도 호텔리어의 자세라는 게 있습니다."
"호텔리어의 자세?" 아즈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얼굴을 갸우뚱했다. "그게 뭐죠?"
"호텔을 찾아주신 고객님은 하나같이 가면을 쓰고 계십니다. 그 가면을 지켜드리는 것이 우리 호텔리어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동시에 가면 뒤의 얼굴을 믿어드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설령 경찰에서 용의자로 단정했다고 해도 저희 고객님은 범인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응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게 호텔리어의 자세예요."
"훌륭한 마음가짐이네요.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래서 말씀드리는데, 죄송하지만 남은 또 하나의 도청기도 어떻게든 회수할 생각이에요."
"그건 안 된다고 한다면?"
"총지배인에게 보고하겠습니다. 이 일은 아직 저만 알고 있지만, 총지배인이 아시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저 혼자 가슴속에 묻어두는 게 최대한의 양보라는 거, 이해해 주세요."

 

- "그럼 실례합니다."
목례를 건네고 계단을 향해 걸음을 뗐지만, "아, 한 가지만 더 얘기하죠"라는 아즈사의 목소리가 뒤에서 날아왔다. 나오미가 돌아보자 여성 경감은 말을 이어갔다. "도청 건, 닛타 경감은 반대했었어요. 내가 독단으로 설치한 것을 알고는 화를 냈죠."
"그렇습니까. 하지만 왜 그런 얘기를 저한테 하시죠?"
"나오미 씨는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게 아니면, 모르는 편이 나았을까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잠시 생각해 본 끝에 솔직하게 말하자는 마음이 들었다.
고맙습니다,라고 나오미는 대답했다.

 

- "그것도 우리 팀 수사관에게서 보고받았어요. 아즈사 경감이 엘리베이터 홀에서 나오미 씨를 기다리고 있었다면서요. 아즈사 경감과는 어떤 얘기를 했어요?"
"도청을 중단해 달라고 부탁했고, 남은 또 한 개의 도청기도 회수하겠다고 통보했어요. 그리고..." 야마기시 나오미는 잠시 망설이듯이 틈을 두었다가 뒤를 이었다. "아즈사 경감이 얘기하더라고요, 닛타 씨는 도청에 반대했었다고."
"그래요?" 닛타는 머리를 긁적였다. "결국 중단시키지는 못했잖아요. 나오미 씨에게 경멸당해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경멸 같은 건 안 해요. 힘든 일이겠구나, 새삼 실감했죠."

"고맙습니다..." 닛타는 저도 모르게 뒷목을 비비며 말했다. 

 

- "증오라는 건 인생에 아무런 보탬도 안 된다... 그런 생각을 가진 분이 원한을 풀겠다고 살인을 저지를까요? 저는 경찰 측의 추리에 뭔가 근본적인 오류가 있는 게 아닐까, 자꾸 그런 느낌이 들어요."
"그 말이 본심에서 나온 거라면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꼭 본심이라고 하기는 어려워요. 나오미 씨를 속이기 위한 연기였을 수도 있으니까."
야마기시 나오미는 난감하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 "부친의 영향으로 권투에 흥미가 있었다는데 정식으로 배운 건 아니지만 평소에 자기 식대로 꾸준히 맹연습을 해온 아이였어요. 집에 직접 만든 샌드백이 있었다더라고요. 체포된 뒤에는 이렇게 진술했다는군요. 권투 연습의 성과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기회가 생기면 누군가를 연습 대상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길에서 잔소리를 하길래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다, 일단 주먹을 들었으니 녹다운시켜야 된다고 생각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예상 못 했다... 그 진술은 가미야 요시미도 간접적으로 들었을 겁니다. 모친으로서 어떤 심정이 들었겠습니까."

 

- "그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는데 그것도 놓쳐버리고 말았다는 건?"
"후회하는 걸까요. 복수를 남의 손에 맡긴 것을 증오하던 상대가 죽으면 고통에서 풀려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역시 내 손으로 죽였어야 한다, 그렇게 원통해하는지도 모르겠네."

 

- 야마기시 나오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한테는 그런 식으로 들리지 않았는데..."
"미안해요, 의심하는 게 내 직업이라서."
그러자 야마기시 나오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흘렸다.
"닛타 씨 쪽 사람들의 그런 부분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겠지요. 예전에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어서 형사들이란 어쩌면 저렇게 마음이 뒤틀렸을까, 어이가 없을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배울 점도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호텔에서 예전에 일어났던 두 번의 사건에서는 모두 다 범인이 뜻밖의 인물이었잖아요. 나는 그 사람들을 전적으로 믿었고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어요. 더구나 나 자신이 위험한 꼴을 당하기도 했고, 물렁했던 거라고 반성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번에 또 속아 넘어간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 "인간은 누구라도 변하게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야마기시 나오미는 일단 입을 한일자로 다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저도 조금쯤은 성장해서 사람을 보는 눈도 정확해졌다고 자부하고 있어요. 그래서 역시 저는 가미야 고객님을 믿어드리고 싶어요." 
닛타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네, 나오미 씨는 그러시는 게 좋아요."

 

- "도청기에 대한 거, 총지배인에게 보고하지 않아도 괜찮습니까?"
야마기시 나오미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보고할까요?"
"아뇨, 그건 좀..."
닛타가 말끝을 흐리자 야마기시 나오미의 입 양쪽 끝이 올라갔다.
"소소한 문제들을 일일이 위에 보고했다가는 한이 없죠. 경찰도 그렇지 않나요?"
"네, 그야 당연히."
그녀는 검지를 바짝 세웠다. "닛타 씨, 저한테 한 번 빚지신 거예요."
닛타는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네, 기억해 두겠습니다."

 

- "안 됩니다, 닛타 씨. 더 이상은 안 돼요." 야마기시 나오미가 급하게 만류하고 나섰다. "가방에는 손대지 마세요. 부탁드립니다." 애원하는 말투였다. 
닛타는 금속 탐지기를 종이봉투에 넣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호텔 측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고객들을 위해서도 범행을 미연에 방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잖습니까."
"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하지만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 그 가방을 열어본다고 반드시 범행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만일 이 가방에 흉기가 들어 있다면 앞으로 마에지마만 집중 감시하면 되니까 범행을 막을 가능성이 단연 높아져요."
"그런 흉기가 없다면? 그때는 무단으로 가방을 열어봤다는 사실만 남게 돼요."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건 우리 둘 뿐이에요."

야마기시 나오미는 눈을 부릅떴다. "그러니 나한테 입 다물라는 건가요? 중대한 규칙 위반인데도 못 본 척 넘어가라는 거예요?"
"수사에 협조해 달라고 부탁하는 겁니다."
"호텔리어의 프라이드도 신념도 버리라는 말씀이네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흥분하려는 것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 그 프라이드와 신념이 그토록 중요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한순간 닛타의 머릿속을 스쳤지만 금세 깨끗이 사라졌다. 중요한 것이다, 이 여성에게는 그건 닛타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닛타 씨는 아직도 만만하게 보시는군요." 야마기시 나오미가 목소리 톤을 낮췄다. "우리 일에 대해."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호텔에는 다양한 고객님이 찾아오십니다. 그중에는 예민하고 의심 많은 분도 계세요. 자신이 방을 비운 사이에 종업원이 무단으로 들어와 짐을 뒤져볼까 봐 외출 때마다 캐리어나 가방에 자물쇠를 채우는 분도 적지 않아요. 자물쇠 없는 가방일 때는 누군가 열어보면 흔적이 남겨지게 미리 손을 쓰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하우스키퍼들은 고객님의 짐에 최대한 접근하지 않고, 혹시 짐을 옮겨야 할 때도 지퍼나 잠금장치 등은 절대 만지지 않도록 주의합니다. 혹시라도 오해를 사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예요. 마에지마 씨가 그런 고객님이 아니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닛타 씨가 가방을 열었다가 자칫 마에지마 고객님이 눈치채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까요? 실제 범인일 경우에도, 혹은 범인이 아닐 경우에도, 매우 곤란한 상황이 되겠죠. 호텔 측에도 경찰 측에도." 
말투는 담담했지만 합당한 얘기고 설득력도 있었다. 닛타는 반론이 떠오르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사건 해결을 위해서는 어찌 됐든 도박이라도 해봐야 한다는 것 정도일까. 하지만 그런 유치하고 거친 논리가 통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제가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예요." 야마기시 나오미는 말했다. "그다음은 닛타 씨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 문이 탁 닫히는 것을 지켜본 뒤에 닛타는 가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면서 바닥에 무릎을 짚고 앉아 지퍼 주위를 관찰했다. 열어보면 흔적이 남도록 뭔가 손을 써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 [원통한 엄마입니다. 앞으로 그 계정은 이리에 유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체크해 봐야겠네요. 여러분의 정보, 고맙습니다.] 
[멀티밸런스 님과 관련된 내용. 고사카 요시히로의 근황. 고마에 시의 산업 폐기물 공장에 취직한 듯. 주소는 아직 모르겠네요.] 
[고마에 시라면 제가 사는 동네예요. 꼭 확인해 볼게요. 지인 중에 건축 관계자가 있거든요.] 
[멀티밸런스입니다. 멤버님들, 감사합니다.] 
[산업 폐기물 업자가 된 게 마음에 걸리는군요. 재활용 수거를 위해 각 가정을 방문하는 업무라면 못된 버릇이 나올 수도 있잖아요.] 

 

- 오하타는 한 편 두 편 읽어보는 사이에 '팬텀 모임'의 목적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단순히 서로 위로하고 위로받는 자리가 아니었다. 범죄 내용에 합당치 않은 가벼운 처벌만으로 자유를 얻은 범인들의 근황 정보를 멤버들이 힘을 합쳐 수집하고 교환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애매하고 불확실한 정보라도 여러 사람이 다양한 각도에서 검증하다 보면 점차 정확해지는 것이다.

특수한 앱을 이용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런 사이트가 경찰당국의 눈에 띈다면 엄중한 주의를 받을 게 틀림없다.

 

- 그 즉시 반응이 있었다. 몇 가지 키워드를 힌트로 인터넷을 검색해 어떤 사건인지 알아본 끝에 거짓이 아니라고 확인했던 것이리라. 모두가 안타까워해 주었다.  

 

- "알려줄 게 있어. 지금 어디 있지?"
"내 방이야. 근데 무슨 일이야?"
"전화로는 설명하기 힘들어. 지금 방으로 갈게." 

대답은 기다릴 것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 아즈사는 한순간 불만스러운 표정을 보였지만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한 걸음 쓱 다가오더니 닛타의 상의 앞깃을 여며 단추를 채워주고는 빙긋이 웃었다. 
"닛타 경감의 호텔리어 모습도 이제 못 볼 것 같군요."
그녀답지 않은 행동에 닛타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섭섭해하는 건 아직 일러요, 아즈사 경감."
"하긴 그렇죠?" 뒤로 물러서며 아즈사는 엄격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닛타는 발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 "믿을 수가 없네. 정말로 현역인 거야?"
"글쎄 의심스러우면 수첩을 확인해 보라니까."
"아, 잠깐, 잠깐. 그러니까 이런 거야? 현역 경찰인데 호텔리어로 위장했다, 위장한 것뿐만 아니라 실무도 맡았다?"

"맞아."
"이럴 수가. 닛타에게 그런 재능이 있었다니."
"나를 의심했던 거 아니야? 호텔 여성 스태프에게 꼬치꼬치 캐물었다던데."
"닛타가 호텔에 전직한 것 자체는 전혀 의심하지 못했어. 아니, 진짜 완벽한 호텔리어로 보이잖아. 내가 궁금했던 건 이 호텔과 경찰의 관련이었어. 뭔가 특수한 파이프라인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했는데."

 

- "입소한 뒤로 많이 좋아졌지만 그전에는 며칠씩 침대 밖에 나오지도 못했어. 사는 게 싫어져서. 이혼한 것도 그게 원인이었어."

 

- 환한 말투로 그렇게 설명했다. 그게 더욱더 그녀의 괴로운 마음속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 "괴로워했다... 어떤 식으로?"
"늘 죄의식에 시달렸지. 하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복잡해. 왜냐면 기억이 나질 않는다잖아.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연인이 죽었고, 죽인 건 자신이라는 얘기를 들은 거야. 참회나 반성을 하려고 해도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거야. 죄의식이 없다는 것 자체가 죄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어." 

 

- "단순히 마음에 든 정도로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지. 나는 답을 찾고 싶었어."
"무엇에 대한 답을?"

 

- "죄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방법이랄까..."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닛타를 보았다. "너는 언제부터 경찰이 되기로 마음먹었어?"
"왜 그런 걸 묻는데?" 
"됐어,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네."

 

- "자신이 범한 죄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서는 처벌이라는 건 아무 의미도 없어. 결국 피고인의 동반자가 된다는 점에서 변호사가 더 낫다는 생각에 검사직도 사퇴했어. 하지만 변호사도 무력하다는 걸 통감했을 뿐이야. 재판이란 죄의 경중을 놓고 검찰과 변호인 측이 게임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죄를 저지른 인간의 내면 따위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더라고. 나는 이대로 괜찮은 건가. 이런 걸 위해 그토록 노력해 왔나."

 

- 닛타 역시 동의할 만한 부분이 있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범죄자를 체포해 왔다. 그들의 공판에서는 증언대에 선 적도 있었다. 하지만 피고인이 진심으로 반성한다고 생각했던 케이스는 손꼽을 정도밖에 없었다. 대부분은 변호사가 일러준 대로 반성하는 척 연기를 할 뿐이었다. 어쩌다 무릎을 꿇는 피고인도 있었지만 그것도 반성이나 참회보다는 형량 구걸에 가까웠다.

 

- "그녀는 말 그대로 자신의 죄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었으니까. 아니, 마주할 방법이 없었다고 해야겠지. 그런 그녀가 피해자 유족과 연결되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바뀔까, 그걸 알고 싶었어."

 

- "닛타 경감, 제안 하나 할게요. 5분만 기다리기로 하죠."
"기다려요? 뭘 기다린다는 겁니까?"

 

- 거기까지 말한 참에 퍼뜩 깨닫고 닛타는 자신의 상의를 확인했다. 

 

-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좋잖아요. 5분만 기다려주면 돼요. 5분 뒤에 방에 진입해서 아직 살아 있다면 체포하는 걸로, 어때요?" 

 

- "대체 뭐 하는 겁니까!" 닛타는 아즈사의 어깨를 잡아채려고 했다.

다음 순간, 팔목이 비틀리는가 싶더니 몸이 붕 떴다. 정신을 차려보니 바닥에 엎어져 아즈사에게 깔린 채 양팔은 등 뒤로 붙잡혀 있었다.

 

- 가족은 멀리 이사했습니다. 불기소 처분이 내려졌다고 해도 장녀가 살인 사건을 저질렀으니 평소처럼 주변 사람들과 살아가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죄송하고 얼굴을 마주할 염치가 없어서 면회는 안 오셔도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도 이따금 찾아오십니다. 그때마다 서로 어색한 시간을 보낼 뿐이지만.

 

- 그리고 이제는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고 물었습니다. 모두 다 털어낸 거냐고. 
세이야 씨를 떠올리지 않은 날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마음과 언제까지나 잊지 않고 싶은 마음, 양쪽 다 있었습니다. 내가 죽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아직도 현실로 실감하지 못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 단순한 슬픔이나 분노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든 뛰어넘으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그런 글을 받을 때마다 너무도 고통스럽고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시선을 돌려서는 안 된다고 나 자신을 타일렀습니다. 이건 내게 주어진 형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매일같이 다양한 사건이 일어나지만, 그 피해자 유족들의 고통이 이토록 다양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게다가 그 고통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치유되는 일 없이 유족들의 마음을 잔인할 만큼 파먹는다는 것을 통감했습니다. 

 

- 대화를 지켜보며 오로지 죄송한 마음뿐이었습니다. 나는 갱생한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범행 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해 반성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설에서 조용히 살아간다고 해서 그게 죄를 갚는 일이 될 리는 없습니다. 

 

- 간밤에는 정말 행복한 기분이었습니다. 이제 몇 시간 뒤에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다, 모든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껏 마음이 들떴습니다. 

 

- 그냥 죽게 내버려 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도 그 생각뿐입니다. 내가 죽으면 모든 게 끝났을 테니까요.
하지만 잘못된 생각이었을까요? 제가 살아 있을 의미, 제가 구원받을 길이라는 게 정말로 있을까요? 

 

- 닛타는 야마기시 나오미 본인에게는 물론이고 호텔 측에도 정식으로 사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건 사과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야... 
일반인을 수사에 끌어들인 데다 부상까지 입힌 것이다. 구급차에 실려가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SNS로 뭐든 알려지는 시대 아닌가, 이번만은 조용히 넘어가기 어렵다. 잠입 수사 자체의 잘잘못을 따지고 들 우려도 있다. 분명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일이다. 

 

- "그건 아직 못 들은 거예요?"
"아뇨, 확인 차 여쭤보는 겁니다. 가미야 씨께 직접 들었으면 해서요."

 

- "그곳에 가입하고 큰 위로를 받은 듯한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에요. 같은 고통을 가진 사람들이 내 심정을 이해해 준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싫어지는 것도 훨씬 덜했어요." 

 

- "누군가를 계속 미워한다는 거,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에요. 게다가 거기서 새로운 뭔가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도 아니지요. 그걸 잘 알면서도 계속 미워하는 나 자신이 너무도 미련한 것 같아 점점 싫어지더라고요. 하지만 팬텀 모임을 통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같은 심정이라는 것을 알고 어쩐지 마음이 놓였어요. 미움이라는 건 약한 마음에서 생겨나지만 그 약함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 "마음 속이 복잡했어요. 증오를 들이댈 상대가 갑자기 사라졌으니 어리둥절하다고 할까, 뭔가 빠져버린 것 같다고 할까, 아무튼 공중에 붕 떠버린 것처럼 허망했어요. 어쩌면 이제 나도 해방되고 모든 게 끝나려나 했는데 실제로는 그런 느낌은 없고 계속 마음속이 답답하더라고요." 

 

- 야마기시 나오미는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 표정은 아직 굳어 있었다. 후지키 총지배인이 닛타를 호출한 이유가 자신의 부상 때문인가, 하고 내심 걱정하는지도 모른다. 

- 사건 내용이 상세히 보도되고, 범행의 특이성 때문에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경찰 수사 방식을 문제 삼는 목소리도 커져갔다. 무엇보다 일반인을 수사에 끌어들여 부상을 입혔다는 게 가장 뼈아픈 대목이었다. 상부에서는 여론의 추이를 지켜보자는 입장이었지만,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 없이 넘어갈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책임을 지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닛타는 마음을 정했다. 수사 1과장은 물론이고 이나가키 관리관도 그런 닛타를 만류하지 않았다. 닛타도 형사로서의 프라이드를 존중해 준 것이라고 감사히 받아들였다.

 

- 단 한 사람, 항의한 자가 있었다. 아즈사 마히로였다. 얘기할 게 있다면서 전화로 호출했다.
그녀는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닛타 경감이 사표를 내는 건 이상하잖아요,라고 말했다.
"누가 보건 잘못한 건 나였어요. 사와자키 나오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한순간 망설이다가 크게 잘못된 판단을 내린 건 내 인생 최대의 실수였습니다. 그때 닛타 경감이 사와자키 나오에게 했던 말을 듣고 비로소 깨달았어요. 죄인을 어떻게 처벌하느냐는 것뿐만 아니라 구해내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속죄하는 것과 스스로를 구하는 것은 똑같다고. 그걸 알지 못했던 어리석음, 아마 평생 후회할 거예요. 징계를 받아야 할 사람은 접니다. 관리관에게도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그랬더니 관리관이 뭐라고 하셨지요?"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그러셨을 거예요. 내가 제출한 보고서에는 그때의 아즈사경감 얘기는 없습니다. 그 자리에 아예 없었던 걸로 되어 있어요. 현장에 없었던 사람을 징계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버님은 건강하시지요?" 아즈사의 말을 가로막으며 닛타는 물었다.
"예?"
"아버님 말이에요. 전에 형사로 일하셨다던데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평온한 은퇴 생활을..."
"다행입니다." 흐뭇한 웃음이 번졌다. "아즈사 경감이 사표를 내더라도 실질적 수사 책임자였던 내가 징계를 피할 수는 없어요. 사직은 한 사람만 하면 됩니다. 아즈사 경감은 계속 경찰에서 뛰어주셔야죠. 아버님을 실망시켜서는 안 되잖아요."

 

- 나오미는 문을 열고 실례합니다. 하고 목례를 했다.
"닛타 씨를 모셔왔습니다."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낫타는 안으로 들어갔다. 
후지키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닛타 씨, 바쁘실 텐데 오시라고 해서 미안하군요." 

 

- 닛타는 의자에 앉기 전에 등을 반듯하게 세우고 정면으로 후지키를 마주했다.
"총지배인님,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번에 수사에 협조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또한 직원 분들의 안전은 반드시 보장하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아니, 아니, 그건 됐어요. 사과라면 이미 이나가키 씨에게서 충분히 받았어요. 나오미 씨도 그리 큰 부상은 아니었고, 그 얘기는 이쯤에서 끝내기로 하지요. 자자, 일단 앉으십시다." 

 

- "그럼 저는 이만." 나오미가 사무실을 나가려고 했지만 후지키는 "아니, 자네도 여기 있어"라고 말했다. "자네도 같이 들어야 할 얘기니까."
"알겠습니다." 나오미는 몇 걸음 물러나 뒤쪽에 섰다.

 

- 후지키가 닛타의 맞은편에 앉아 부드러운 웃음을 건넸다.
"이나가키 관리관에게 사직 얘기는 들었어요. 경시청은 우수한 인재 한 명을 잃었더군요."
닛타는 어깨를 움츠렸다. "우수한 인재였다면 사표를 낼 일도 없었겠지요."
"경찰도 어차피 관청이지요. 융통성 있게 규칙을 적용한다는 발상이 없다니까. 그런 점에서 호텔은 전혀 달라요. 무엇보다 규칙을 만드는 건 우리가 아닙니다." 

"규칙을 만드는 건 고객님이라고 하셨던가요?"
"맞아요. 그렇습니다." 후지키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중요한 건 고객님을 얼마나 쾌적하게 지내시게 하느냐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한층 더 안전한 환경을 마련할 필요가 있어요. 이번 일로 새삼 통감했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현재의 경비 체계를 보다 공고하게 정비하기로 했어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외부에만 의지하느니 우리 호텔에도 전문경비팀을 신설하기로 했습니다."

 

- "네, 그래서 닛타 씨를 오시라고 했어요." 

 

- 너무 뜻밖이라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고회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닛타는 도움을 청하듯이 나오미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최상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닛타 씨, 잘 오셨습니다. 호텔 코르테시아도쿄에."

 


 

- <매스커레이드 게임>은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이다. 시종 흥미롭고 편안하게 읽히는 안정감이 좋다는 독자 평이 많았다. 명석한 두뇌와 패기 넘치던 신입 형사 시절의 닛타는 이제 신중한 중재력으로 팀을 이끄는 중간 관리직까지 승진했다. 선배와 후배 사이에서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인내하며 그만큼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다. 코르테시아로스앤젤레스 호텔에서 구원투수로 다급히 호출된 야마기시 나오미도 사람 보는 눈이 성큼 자란 원숙한 모습이다.

 

- 이번 작품에 새롭게 등장한 여성 경감 아즈사의 신속한 결단은 중요한 고비마다 정확한 정보를 캐치해 내는 원동력이 된다. 예전의 닛타를 보는 느낌이다. 하지만 노련한 노세 형사의 말처럼 열정이란 세월과 경험을 통해 '길들여져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게임 플레이어는 오로지 사건 해결이라는 승리의 정의를 향해 폭주하지만 게임 매니저는 좀 더 높은 곳에서 전체를 부감하며 가장 바람직한 관용의 정의를 도출해 내는 것이리라.

 

- 매스커레이드 시리즈는 사회인, 직장인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스토리라는 생각이 든다. 호텔리어의 자세를 견지하려는 나오미와 형사로서 반드시 사건을 해결하려는 닛타나 아즈사의 신념이 부딪치지만 그들이 나아가는 방향성은 동일하다.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태도가 인간으로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건강한 흐름으로 알게 모르게 독자의 의식 속에 스며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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