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다와다 요코 / 최윤영
출판 : 책읽는수요일
출간 : 2023.05.10
타인이 꾸는 꿈을 들여다 본 듯한 소설.
다와다가 구사하는 언어는 상징적이다. 서술되는 대로 따라가는 것만으로는 이야기의 표피- 피부의 외곽조차 제대로 더듬기 어렵다.
등장인물은 타인에 의해 정의되고 경계 지어지는 정체성을 '사진 속의 나'로 인식한다. 실제 자신을 끊임없이 타인의 기준에 맞추어 보여주려고 하지만, 거기서 발생하는 고통은 스스로를 죽여 비늘을 만들어낸다. 외부에 보여져서는 안되기에 벗겨내고, 화장으로 덮지만, 그녀는 역설적으로 비늘을 통해서만 외부로부터 보호받으며 경계 지어질 수 있다.
배가 너무 고파 자신을 먼저 챙긴 여인은 온몸에 비늘이 돋는 벌을 받는다. 그럼에도 자신의 아이를 위해 한 번 돋은 비늘마저 벗겨질 정도로 헌신하지만 결과는 죽음이다. 그녀는 이미 공동체에서 기대되는 역할을 한 번 저버렸었기 때문이다.
비늘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비늘을 가진 자들 뿐이다. 자기 자신을 '나'라고 인식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스스로 정의하는 -주체적인 것 같아 보이는, 독일 여성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행위는 어머니를 비롯한 외부로부터의 제제를 불러온다. 그들은 그녀에게서 아무것도 볼 수 없다. 크산더는 자신이 기대하는 이미지대로 그녀를 화장시키고 낙인찍는다. 카메라로 상징되는 시선. 그런 행위는 '총을 쏘듯' 폭력적이지만 사진처럼 만연해 있으며 형태가 없다.
괴리로 인한 고통도, 비늘로 인한 고통도 두려운 그녀는 '아무것도 아님'을 선택한다. 모든 것은 빛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딱딱하게 굳은 상처와 딱지들을 부드럽게 녹여줄 수 있는 것은 '따뜻한 우유', '모유'로 상징되는 수용적 사랑이지만 그것은 이미 죽은 여인들에게서나 풍겨오는 흐릿한 냄새로만 존재한다. 어머니에게서도, 사랑을 말하는 크산더에게서도 기대할 수 없다. '난 따뜻한 우유 냄새를 맡으면 속이 메스꺼워.'
그녀의 안으로 흘러들어온 것들을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모든 행위는 중단된다. '나'가 사라질 때 '나'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의미 또한 소실된다. 육체의 경계는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어디까지가 '나'인가. 이 모든 질문 또한 함께 의미를 잃는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사라지는 것' 뿐이다.
'나'로도, 나로도, '너'로도 존재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말 그대로 투명해지는 수밖에 없다. 그 투명함은 있는 그대로를 비춰내는 것일까, 모든 것을 투과시켜버리는 것일까.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그 무엇으로부터도 더 이상은 영향받지 않을 수 있는 거대한 하나의 비늘, 스스로를 위한 관. 그 단단함은 절망이자 구원이다.
인상깊게 읽었다.
- 인간의 몸은 팔십 퍼센트가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거울 속에 매일 아침 다른 얼굴이 비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마와 뺨의 피부는 매 순간 그 아래에서 흐르는 물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지는 늪의 진창과 그 위에 발자국을 남기는 인간의 움직임처럼 변한다.
- 거울 옆에 있는 액자에는 내 얼굴 사진이 걸려 있다. 나는 거울 속 모습과 사진 속 모습을 비교하는 것으로 매일 일과를 시작하고 이 차이를 화장으로 고친다.
- 사진의 신선한 느낌과 비교해 보면 거울 속 내 모습은 핏기가 없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그래서 거울의 액자 틀은 내게 관의 틀을 연상시킨다. 촛불의 불빛 아래에서 나는 내 몸의 비늘을 발견한다. 작은 풍뎅이 날개보다 더 작은 비늘이 피부를 뒤덮고 있다.
- 나는 엄지손가락의 긴 손톱으로 이 비늘을 긁어낼 수 있었다. 비늘은 고등어 냄새가 났다. 비늘을 하나하나 긁어낸 뒤 잠옷의 단추를 열자 얼굴뿐 아니라 가슴과 팔에도 비늘이 자라나 있는 것이 보였다. 이걸 전부 다 손톱으로 긁어낼 수는 없었다.
나는 우선 목욕탕에 가 비늘을 물에 불린 다음 밀어내기로 결심했다.
- 옛날에 쌀농사를 지을 수 없던 산골짜기 어느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임신한 어떤 여자가 물고기 한 마리를 보고 배가 고파서 혼자 이 물고기를 날로 다 먹어버렸다. 마을 사람들과 나눠 먹을 생각을 하지 않고서 말이다. 이 여자는 예쁜 아들을 하나 낳았다.
- 그 아이는 강에 사는 엄마에게 찾아가 이 이야기를 했다. 엄마는 기뻐하면서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아이는 계획을 그림으로 그려 암석을 부술 자리를 정해놓았다. 엄마는 큰 비늘로 뒤덮인 몸을 시도 때도 없이 암석에 들이받았고 결국 암석은 차츰차츰 부서졌다. 밤이고 낮이고 엄마는 몸뚱이로 쉬지 않고 암석을 들이받았다. 들이받을 때 떨어져 나온 비늘들은 피 묻은 벚꽃이 날리듯 하늘에서 춤을 췄다. 바로 이 때문에 벚나무 한 그루 없는 이 마을이 '벚꽃 마을'이라 불리게 되었다. 마침내 논이 만들어졌고 사람들은 이제 더는 배를 곯지 않았다. 그러나 비늘을 모두 잃어버린 엄마는 다시 매끈한 피부를 가지는 대신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죽고 말았다.
- 나는 잠옷을 벗었다. 전화가 울렸다. 나는 벌거벗은 채로 수화기를 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어떤 남자 목소리가 물었다.
나는 잠깐 생각을 하고 나서 대답했다. "아닌데."
"네가 아니면 도대체 너 누구야?"
나는 수화기를 말없이 내려놓았다.
이것이 오늘 내가 나눈 첫 대화였다.
- 나는 오른쪽 엄지발가락부터 천천히 뜨거운 목욕물 안으로 집어넣었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물이 아무리 뜨거워도 참을 수 있었다. 나는 두 눈을 감고 숨을 참은 채 긴 욕조 속에 머리끝까지 몸을 푹 가라앉혔다. 눈을 떠봤다. 물은 투명한 불처럼 떨고 있었다. 그 순간 물에 장사 지내는 것도, 땅에 장사를 지내는 것도 좋지만 화장은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 욕조에서 나왔다. 비늘이 아주 부드러워졌다. 나는 때밀이 돌로 비늘을 밀어냈다. 비늘은 놀랄 만큼 쉽게 밀려 나왔다. 나 같으면 암석에 몸뚱이를 들이받는 일은 하지 않겠다. 아들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 서두르지 않으면 직장에 늦을 것이다. 나는 마지막 여드름을 짜냈다.
그 결과 남은 것은 매끈한 피부가 아니라 바람 빠진 풍선으로 가득한 인적 없는 사막 풍경이었다. 거울 속에서 내 등 뒤의 하늘이 점차 밝아왔다.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수화기를 받아 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나는 하얀 모래로 세수를 했다.
사막이 되어버린 내 피부는 이걸로 세수를 해야 다시 매끈하게 만들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 모래가 공룡의 뼈로 만든 것이라고 했고 바다의 물결이 오랫동안 씻어내고 햇볕이 말린 뼈라고 말했다. 나는 이 뼈를 손바닥 위에 펴 바른 후 두 손바닥을 얼굴에 댔다. 손바닥은 살을 뚫고 내 뼈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두 손으로 내 두개골의 형태를 정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빛으로 된 피부와 물로 이루어진 살 이외에 또 하나의 몸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아무도 이 몸을 안아볼 수 없을 것이다.
때때로 나는 다른 사람의 두개골을 볼 수 있었다. 그런 순간에 나는 사랑에 빠졌다.
- 나는 우유 로션을 건조한 피부 위에 펴 발랐다. 내 거울 속 모습은 드디어 사진 속 모습과 비슷해졌다. 이 로션은 제약 회사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진짜 모유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피부를 매끈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진정시켜 주면서 동시에 강화시켜 준다.
- 메이크업을 끝낸 뒤 머리를 빗었다. 나는 꿈결 속에서 바람에 밀려 날아온 독버섯 종균과 날개 달린 풍뎅이 껍질을 머리에서 꼼꼼하게 빗어냈다. 어렸을 적 나는 머리를 되도록 빗지 않으려 했다. 머리가 점점 비어가는 느낌이 들어서 그랬다. 우리는 머리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그때는 머리카락을 말한다.
- 사람들은 머리카락 속에 비밀스러운 힘이 들어 있다고 말한다. 옛날에는 머리를 한 뭉텅이 잘라서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부적으로 선물을 했다. 사람들은 낯선 사람의 머리카락을 만지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 사람들은 머리카락이란 피부가 죽어 경화된 부분이라고 이야기한다. 내 몸 중 일부는 그러니까 이미 죽은 것이다.
- "포스터 사진을 찍으려 하는데요. 혹시 좀 더 일본풍으로 카메라를 보면 안 될까요?"
다시 플래시가 터졌다. 카메라는 부엌칼로 고기를 자르듯 시간을 얄따란 조각으로 저몄다. 이 조각들을 사람들은 손에 쥘 수 있다.
하나하나 보면서 먹을 수도 있다. 재미로 혹은 알리바이로, 그러나 무슨 이유로 알리바이가 필요하지? 나는 그때까지 살인 사건에 엮여 들어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크산더가 말하기를, "눈은 카메라를 보고 있어야 합니다."
- 오랜 명성의 라이카 카메라가 나와 마주 선 상황에서 카메라는 내 눈을 들여다보고자 했다. 이 카메라가 심리 치료사처럼 내 영혼의 비밀들을 캐내고자 한다면 나는 아주 조용하게 지금처럼 그대로 있기만 하면 된다. 왜냐하면 나는 비밀이 없으니까.
- 며칠 뒤에 크산더가 카메라를 들고 내 집에 왔다. 그는 말했다.
"당신이 없던데요. 사진 위에."
"어떻게 그런 일이? 카메라가 고장 났었어요?"
"카메라는 괜찮은데요. 배경도 아주 잘 나왔고요. 그런데 당신만 없었어요."
한동안 우리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진짜로 피부가 색깔을 갖고 있다고 믿나요?"
크산더는 웃었다.
"무슨 질문이 그래요. 아니면 당신은 혹시 색깔이 살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나요?"
"살도 마찬가지로 색깔이 없죠. 색깔은 피부 표면에서 빛의 유희로 생겨나는 거예요. 우리 안에는 어떤 색깔도 없어요."
크산더가 대답했다.
"그렇지만 빛은 당신들 피부 위에서는 우리들 피부 위에서와는 다르게 유희하던데."
"빛은 모든 피부 위에서 다르게 유희해요. 어떤 사람들이나 어떤 순간에나 어떤 날이나 다 달라요."
"그러나 그 문제만 해도 사람들은 모두 자기 안에 자기만의 소리를 가지고 있죠. 우리 안에요..."
"우리 안에는 아무런 소리가 없어요. 우리 몸 바깥에 있는 공기가 진동하는 것일 뿐이죠."
- 크산더는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생각하더니 다시 얼굴을 들고 물어봤다.
"혹시 화장을 좀 해도 될까요?"
- 그가 내 머리카락을 염색한 후에 크산더는 내 뺨 위에 X라고 썼다.
"내가 어렸을 때는요, 소중한 것에는 모두 다 X를 써놓았어요. 그러면 내 것이 돼요."
그리고 크산더는 이 글자 위에 입맞춤한 뒤 나를 벽 앞에 세우고 총을 쏘듯 거리낌 없이 플래시 스타터를 작동시켰다. X라는 글자는 내 살을 먹고 파고들었다. 이 글자는 빛의 유희를 끝내버렸고 한 일본 여자의 모습이 사진 위에 현상되었다.
- 생선을 통째로 조각으로 잘라서 통조림으로 만드는 기계를 수출하는 회사였다. 그 사람들은 오전에 전화해 그날 병가를 낸 통역사 일을 대신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 큰 호텔 레스토랑의 창문에서는 가까이에 있는 호수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긴 탁자에는 각기 두 회사의 대표 다섯 명이 아이들이 전쟁놀이를 할 때처럼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나는 일본 측 회사의 사장 옆자리에 앉았다. 이 사장은 약간 등이 굽었고 머리를 세차게 끄덕이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편에는 독일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여자 두 명과 남자 세 명이었다. 여자들 중 하나는 어깨를 훤히 드러낸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고 다른 한 여자는 딱 달라붙는 치마를 입은 채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둘 다 턱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그들은 여유롭게 천천히 눈을 깜박거렸다. 머리를 끄덕일 때면 입가에 작은 주름이 생겨났는데 그들이 하는 일이 지겹다는 듯한 인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턱을 다시 앞으로 내밀면 이런 인상은 사라졌다. 일본 측에서는 정장을 입은 중년의 남자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나에게 자기가 본 인상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저쪽 독일에서는 여자들이 일을 할 때도 저렇게 섹시하게 옷을 입네요..."
이 말 때문에 좌중의 침묵이 깨졌기 때문에 독일 사람들의 시선은 호기심을 가득 담고 나에게로 향했다.
- 한 명이 더 참지 못하고 물어봤다.
"저 사람이 뭐라고 해요?"
나는 아무도 하지 않은 말로 통역했다.
"저 오래된 도자기가 너무나 아름답다고요."
- 일급 레스토랑에서 일할 때면 나는 언제나 혀넙치(Seezunge)를 주문했다. 혀넙치는 대구처럼 밋밋한 맛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잉어처럼 기름지지도 않았다. 내게 그것보다 더 맛있는 유럽 음식은 없었다. 그러나 내가 혀넙치를 주문한 것은 맛 때문은 아니었다. 혀넙치라는 이름 안에 들어 있는 혀라는 말 때문이었다. 혀넙치를 먹으면 내가 말을 버벅거릴 때 다른 혀 하나가 나를 위해 계속 말을 해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은 모두를 위해 커다란 생선 한 마리를 주문했기 때문에 내가 혀넙치를 시킬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다.
- 그들은 내 귀에 부어지는 독일어 단어들을 일종의 정자 같은 거라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우연한 만남이란 없다.' ..."
- 대화는 활기찼다. 모두 내 입을 거쳐 말을 했다. 모든 소리는 내 위에서 압축되었다가 다시 나왔다. 소리의 발자국은 내 뇌 속까지 울렸다. 위 속에 있던 생선 조각들이 메스꺼워졌고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내 위가 수축했고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말을 더듬을 때 나는 기분이 아주 좋아진다. "그그그그것은..." 내 위벽이 알프스 요들송 백파이프처럼 오므라들었다가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그그것은, 말, 말, 말이에요..." 내가 더듬거린 것이 더 많았는지 웃는 것이 더 많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편안했다. 다른 사람들이 나의 변화를 눈치채고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었다.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곁눈으로 사장을 보면서 나에게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 문들이 계속 줄지어 있었다. 그중 하나에는 귀부인의 실루엣이 걸려 있었다. 나는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창가 아래에 있는 라디에이터에 몸을 기댔다. 두 눈을 감았다. 내 귓속 저울이 몸을 떨다가 한쪽으로 엎어졌다. 나는 바닥이 없는 계곡 속으로 떨어졌다.
- 저 멀리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두 눈을 뜨려고 했지만 몸속에서 눈꺼풀을 찾을 수 없었다. 모세혈관의 쇠창살 뒤에서 나는 아무 얼굴이나 하나 떠올리려 애썼다.
- 내 목구멍은 바싹 말라버렸고 딱지투성이였다. 입천장과 혀는 서로 딱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코를 통해서만 숨 쉴 수 있었다. 이제 우유 끓이는 냄새가 났다. 우유에는 설탕이 많이 들어 있었다. 캐러멜화되는 설탕의 냄새가 났다. 입속이 점차 촉촉해지기 시작하면서 혀를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 그 여자는 손바닥을 내 손바닥 위에 얹었다.
"당신도 혼자 사나요? 혼자 살면 전혀 외롭지 않죠. 그렇지만 이 말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마세요. 그러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죽여버리거든요. 누군가에게 무엇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거의 항상 위험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질투를 너무 잘해요."
멀리서 어떤 초보자가 색소폰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말하는 것 자체를 관뒀어요. 그게 내가 사무실 일을 그만둔 이유기도 해요. 사무실에서는 입 다물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그렇지만 그건 호텔의 일과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래도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누군가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끔찍한 일들만 눈에 들어오죠. 당신도 눈을 조심하셔야 해요!"
- 그녀의 눈에는 촛불의 불꽃이 반사되었다. 이 불꽃들은 펄럭거리다 그녀의 눈에서 빨간 열대어처럼 헤엄쳐 나와 귀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기에 불꽃은 없었고 귀걸이만 하나 있었는데 빨간 열대어였다.
- 귀걸이가 떨어진 촛대가 넘어졌다. 방 안의 다른 초들도 하나하나 넘어졌다. 여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 "이게 뭐예요?"
"네 어릴 때 물건들이다."
"왜 이것들을 버리지 않았어요? 전부 다 비늘투성이네."
"곰팡이투성이라고 말하려 했던 것 아니니?"
엄마는 한 번도 뭘 버린 적이 없었다. 전쟁을 겪고 자란 사람은 아무것도 버리지 못한다고 엄마는 늘 이야기했다.
- 나는 엄마의 젖이 기억나지 않았다. 언제 내가 엄마 몸을 마지막으로 만져봤더라?
- "나는 돌아오지 않아요. 그리고 내가 만약 돌아오면 그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일 거예요."
"너, 너는 누구니?"
"무슨 말씀이세요? 물론 나예요."
"언제부터 네가 너를 그렇게 쉽게 나라고 불렀니?"
엄마는 갑자기 몸을 웅크리더니 울기 시작했다.
"그럼 내가 나를 뭐라고 불러요?"
"왜 너는 그렇게 고집스럽게 말하니?"
엄마는 부러진 피리처럼 울었다.
- 마침내 구름은 완전히 사라졌다. 지구가 다시 보인다. 불바다.
유령 스튜어디스가 손에 주전자를 두 개 들고 날아서 지나간다.
"커피 하시겠습니까? 차 하시겠습니까?"
- 그건 나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혀가 없으니까. 스튜어디스는 등에 아기를 업고 있다. 아기는 배가 고파 젖을 달라고 운다. 나 역시 우유가 먹고 싶다. 커피도 차도 필요가 없다. 크산더의 목소리가 말한다.
난 따뜻한 우유 냄새를 맡으면 속이 메스꺼워.
이 순간 스튜어디스의 주전자에서 종이처럼 하얀 우유가 흘러 지구를 감싼 전쟁의 불을 끄고 재와 같이 섞여 지구에 스며든다.
전쟁의 불이 완전히 꺼지자 우유는 남은 게 없다.
- 크산더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나는 시험을 볼 때처럼 신경을 곤두세운다.
"너는 사랑이라는 외국어의 의미를 우산이라는 외국어의 의미처럼 잘 알아들어야 해. 야만인들만 이 단어를 모르지."
완전히 동의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칼을 비늘에 꽂는다. 바람 종들이 입을 다무는 모습이 마치 쪼그라든 피범벅 자두들이 도로 위에 떨어지는 것 같다. 비늘 새는 죽었다. 그러나 칼은 쉬지 않고 공중에서 어지럽게 춤을 추고 내 오른쪽 눈을 찌른다.
안구의 거죽이 자두의 껍질처럼 찢어지고 내부에서 놀랍게도 빨갛고 연약한 것이 솟아 나온다.
- 사춘기의 소녀들만 거울이 없으면 화장을 하지 못한다. 성숙한 여자들은 거울이 필요하지 않다. 피부가 있는 곳은 만져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손을 뻗어 어디에서 이 세계가 끝나는지를 느낀다. 거기가 내 피부다. 피부는 이 세계를 저 세계와 떼어놓는 막이다. 나는 피부가 투명해질 때까지 특별한 화장을 한다. 물론 얼굴만 문지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얼굴만 보이지 않으면 몸은 목이 잘린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어떤 곳도 무시하지 않는다.
- 피부가 마침내 투명해지고 나면 그 뒤에서 저 죽은 여자의 형상이 나타난다.
나는 항상 자러 가기 전에 화장을 한다.
내가 집에서 나가지 않으면 그들이 이상하다고 여기며 묻기 때문이다.
"너는 애인도 없니?"
그러나 나는 너무나 오래 잠을 자기 때문에 집 밖으로 나갈 시간이 없다.
- 매일 밤 그 여자는 내 피부를 통과해 이 세계를 방문한다. 나는 그 여자를 볼 수가 없다. 전등이 고장 나서 방이 어둡기 때문이다. 나는 그 여자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나는 뼈가 떨림을 계속 전달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다음에 나는 숨을 멈추고 뼈의 떨림에 집중한다. 음악이 될 수 없는 소리, 아니다, 소리가 될 수 없는 진동이다.
아침에 그 여자가 가버렸고 나는 침대에 오래 누워 있었다. 진동의 여운이 완전히 멈추면 나는 일어나야 할까 하고 자문해 본다. 밖은 이미 어두워졌다. 나는 목욕탕으로 들어가 조심스레 화장을 하고 다시 침대로 간다.
- "어떤 일을 하십니까?"
사람들은 모두 내가 자지 않을 때 무엇을 하는지를 궁금해하고 이제까지 내가 치른 시험들과 논문들의 제목을 알고 싶어 한다. 마치 내 이력서에 그것들을 기록해 죽는 날짜를 위한 자리를 확보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죽는 날짜로 시작하는 이력서도 있어야 한다. 나는 혀가 없기 때문에 통역을 할 수가 없고 저 여자가 말한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을 할 수도 없다. 글자들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이제 타이피스트도 아니다. 글자들은 모두 똑같아 보인다. 녹슬고 구부러진 못들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는 이제 다른 사람들의 시조차도 베낄 수가 없다. 나는 이제 분명히 사진 모델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사진 위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투명한 관이다.
- 예를 들어 화학의 세계는 무궁무진할 것이나 크게 유기화학과 무기화학으로 나눠볼 수 있다. 일단 개념상으로 경계를 딱 지어놓으면 둘의 차이가 분명해지고 각 개념은 차이를 통해 유효한 실체로 다가온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무기화학과 유기화학의 경계가 유기와 무기의 기, 즉 생명을 기준으로 한다면 생명체인 인체에 있는 혈액의 주요 성분인 철분은 어디에 속할까?
- 경계 긋기는 정체성 파악에는 많은 이점을 가져다주지만 과연 경계가 존재하는지, 경계가 실제로 둘을 갈라놓는지, 아니면 경계에서 둘은 차라리 만나고 섞이고 비슷해지지 않는 것인지, 도대체 왜 경계를 나누는지 등등 우리는 많은 질문을 계속 던지게 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경계 긋기의 체계를 유린하는 것을 '비체(abject)'라고 부르며 비체에 대한 혐오 뒤에서 작동하는 사회와 문화의 권력의 존재와 분류의 의도를 문제시했다.
- 다와다는 이러한 경계에 대한 질문을 신기하게도 사람 혹은 사물, 지구 등의 몸(육체)을 가진 대상을 상대로 던진다. 몸도 피부와 살, 골격 등 다양하게 문제시한다. 몸의 끝단이라고 할 수 있는 피부는 빛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나와 외부 세계가 만나거나 나와 세계의 분리를 확정해 주는 분명한 경계가 되지 못한다. 또한 살은 그 안의 구성 성분인 수분 등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다. 주인공은 공룡 뼈로 된 모래로 세수하면서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며 얼굴 안쪽에 느껴지는 자신의 두개골을 더듬는다. 그리고 이를 빛에 따라 변하는 피부, 수분에 따라 변하는 살에 이은 또 하나의 몸이라고 부른다. 몸은 다와다의 세계에서는 이미 하나의 단수(單數)가 아니라 복수(複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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