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아닐 세스 / 장혜인
출판 : 흐름출판
출간 : 2022.06.30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된다는 것 Being You>는 TED 강연이 계기가 되어 저술하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메타버스>와 비슷한 느낌이다.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이슈 타겟팅 도서라는 느낌.
<내가 된다는 것>은 인간의 의식에 관한 여러 이론과 실험을 소개한다. '의식'이란? '의식'을 측정할 수 있을까? 연구자들은 어떤 방식과 기준으로 '의식'을 정의하고 실험하는가? 등에 관한 내용을 친숙한 소재들을 이용해 설명한다. 저자의 주목적은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펼치는 것이 아닌, 어떤 담론들이 있어왔는지를 소개하는 것으로 보인다. 해서 자신의 생각이 어느 쪽에 가까운지 언급은 하지만 딱히 해당 이론을 깊게 파고들지는 않는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이란 뇌라는 컴퓨터에서 작동하는 동물기계적인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예측을 통한 감각 기반의 (하향식) '지각'과 더 연관이 깊다. 하향식이란 사물을 '내가 예상하는 대로' 감각하는 방식에 가깝다. 순간적으로 물체를 잘못 본다거나, 상대적인 색 차이로 인해 같은 색을 더 어둡게 인식하거나 더 밝게 인식하는 등의 예시를 들 수 있겠다. 물론 그것이 절대적이고 유일한 방식은 아니다. 뇌는 가장 확률이 높은 예측 결과로 감각하지만, 곧 상향식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감지- 자극과의 중첩된 보완 작용으로 수정된 결과를 내놓는다.
이런 방식으로 인식하는 정보들이 '경험'을 만들어내는데, 인간은 이 경험들이 축적된 서사적 기억을 통해 자신을 '나'라고 감각한다. 하지만 일시적 정신착란 상태나 치매 등의 질환 상태, 혹은 장기기억 장애 상태에 놓인 이들에게 '나'란 지금까지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정의될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확실한 정의를 회피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일시적인 상태라 할지라도 그 순간 그들에게 '나'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그렇게 일시적으로 항상성을 잃은 상태에서도 유지되는 '나'라는 일인칭 의식에 대해 집중한다.
그에 따르면 만약 복제된 나와 원래의 내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할 경우, '나'는 둘 모두이다. 스스로를 일인칭으로 감각하는 우리에게 진짜 '나'는 언제나 단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라는 의식은 현 상태에서 가장 이상적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외부와 내부를 감각-제어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 탄생한 집합적 현상이다.
이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유의지'의 존재에 관해서도 다루게 되는데, 저자는 조심스럽게 '자유의지란 환상이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개인적으로는 자유의지란 '행하느냐 아니냐'의 순간적인 가부 판단 정도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뭔가를 원한다, 해야겠다는 충동이나 의지는 벤저민 리벳의 실험에서처럼 의식되기 전에 이미 결정된다. 발생한 충동대로 행하느냐 아니냐 정도만이 주어진 선택권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시간이 하나의 방향성을 갖지 않는다고 가정할 경우 그마저도 큰 의미가 없어진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좀 더 다양하게 퍼져나가는 '나'들을 위해 분기점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유지하기로 선택할 뿐이다.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끝.
- 몇 년 전, 나는 인생에서 세 번째로 소멸했다. 간단한 수술을 받느라 뇌에는 마취제가 가득 찼다. 온통 암흑이었고, 세상에서 떨어져 무너지는 듯했던 느낌을 기억한다. 전신마취는 잠이 드는 상태와는 상당히 다르다. 사실 그래야 한다. 수술 중 마취되지 않고 잠이 든다면 수술칼이 닿자마자 깨버릴 것이다. 깊은 마취 상태는 의식이 전혀 없는 혼수상태나 식물인간 상태와 비슷하다. 깊은 마취에 빠지면 뇌의 전기적 활동이 대부분 사라지는데, 이런 일은 깨어 있든 잠들어 있든 일상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마취과 의사가 환자의 뇌에 변화를 주어 어렵지 않게 깊은 무의식 상태에 들어갔다 나오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은 현대 의학의 기적 중 하나다. 마취는 일종의 변신이자 마술이며, 사람을 사물로 바꾸는 기술이다.
- 전신마취는 뇌나 마음에만 작용하지 않는다. 우리 의식에도 작용한다. 마취는 머릿속 신경 회로의 섬세한 전기화학적 균형을 바꿔 '무언가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기저 상태를 일시적으로 사라지게 만든다. 이 과정에는 과학과 철학의 가장 큰 미스터리가 있다.
- 우리 뇌는 아주 작은 생물학적 기계인 수많은 뉴런의 활동을 결합해 의식적 경험을 만든다. 뇌가 만드는 의식적 경험은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는 당신의 의식적 경험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어째서 우리는 삶을 일인칭으로 경험할까?
- 어린 시절, 욕실 거울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내가 된다는 그 순간의 경험도 언젠가는 끝나고, 그러면 '나'는 죽는다는 사실을 난생처음 깨달았다. 여덟아홉 살 때쯤이었을 터라, 어린 시절의 다른 기억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당신이 과학자는 아니든 의식은 중요한 미스터리다. 의식적 경험은 우리에게 전부다. 의식적 경험이 없다면 세상도, 자기도, 내부도, 외부도 없다.
- 그리 머지않은 미래의 내가 일생일대의 거래를 제안한다고 상상해 보자. (미리 말해두지만, 이는 철학적 문제다.) 자, 당신의 뇌를 모든 면에서 똑같은 기계로 대체할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도 차이를 구별할 수 없다. 이 새로운 기계에는 장점이 많다. 썩지도 않고, 당신을 영원히 살게 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미래의 나도 실제 뇌에서 어떻게 의식이 발생하는지는 알 수 없으므로, 당신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의식적 경험을 하게 된다고 장담할 수 없다. 의식이 뇌 회로의 동력이나 복잡성 또는 기능적 능력에만 의존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겠지만, 의식이 뉴런 같은 특정 생물학적 물질에 의존한다고 생각한다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물론 기계-뇌는 모든 면에서 원래 뇌와 똑같이 작동할 것이므로, 제안을 받아들여 새로 태어난 당신에게 의식이 있는지 질문하면 당신은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더라도 당신에게 삶이 더는 일인칭이 아니라면 어떨까?
- 그렇다면 당신은 거래를 거절할 가능성이 크다. 의식이 없다면 5년을 더 살든 500년을 더 살든 큰 차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는 동안 당신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 말이다.
- 우리의 의식적 경험은 신체나 세상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다. 그리고 삶이 끝나면 의식도 사라진다. 이렇게 생각하면 나는 전신마취를 받았던 경험 (경험하지 못한 경험)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망각은 위안이 되지만, 그래도 망각은 망각이다. 소설가 줄리언 반스 Julian Barnes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완벽하게 표현했다. "의식의 끝이 온다고 겁먹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말 아무것 nothing 도 없다."
- 의식이 있는 생물에게는 그 생물이 되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무언가가 있다. 내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인지, 당신이 되는 것은 어떤 것인지, 양이나 돌고래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그 무엇이다. 의식이 있는 각 생물에게는 주관적 경험이 일어난다. 이 주관적 경험은 내가 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려준다. 하지만 박테리아나 풀잎, 장난감 로봇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거의 알 길이 없다. 이들에게는 (아마도) 주관적 경험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내면의 우주도 인식도, 의식도 없다.
- 유기체가 의식을 지니려면 그 자체로 일종의 현상이 있어야 한다. 어떤 경험, 어떤 현상학적 속성도 다른 것만큼 중요하다. 경험이 있으면 현상성이 있다. 그리고 현상성이 있으면 의식이 있다. 짧은 시간밖에 살지 못하는 생물이라도 그 생물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무언가가 있는 한, 비록 찰나의 고통이나 기쁨만 느낀다 해도 그 생물은 의식적이라 할 수 있다.
- 오늘날 이런 견해에 완전히 동의하는 철학자나 과학자는 거의 없다. 하지만 많은 이들, 특히 서구 사람들에게 이원론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의식적 경험을 비물질적으로 보는 직관은 매력적이지만, 이렇게 '보는' 방식은 사물의 실체에 대한 믿음을 끌어내며 '안일한 이원론'을 조장한다. 앞으로 이 책에서 살펴보겠지만, 사물의 겉모습은 사물의 실체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지 못한다.
- 특히 큰 영향력을 미치며 유행하는 물리주의 중 하나는 기능주의 functionalism다. 물리주의와 마찬가지로 기능주의도 많은 신경과학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일반적인 가정이다. 물리주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대부분 기능주의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기능주의는 불가지론적이고 다소 미심쩍다. 기능주의에 따르면 의식은 시스템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물리적 구성)가 아니라, 시스템이 무엇을 하고, 어떤 기능을 수행하며, 어떻게 입력을 출력으로 변환하는지에 달려 있다. 마음과 의식은 뇌가 실행할 수 있는 정보처리 형태지만, 그 정보처리에 생물학적 뇌가 꼭 필요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기능주의로 이어진다.
- 두 가지 '주의'만 더 살펴보면 끝난다. 먼저 범심론 panpsychism이다. 범심론은 의식이 질량-에너지나 전하처럼 모든 곳에 편재한 우주의 근본적 속성이라고 본다. 어떤 이들은 인간에게 의식이 있듯 돌이나 숟가락에도 의식이 있다는 말이냐며 범심론을 비웃기도 하지만, 이는 범심론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고의적인 오해다. 범심론을 정교하게 변용한 사례 중 일부를 좀 더 살펴볼 것이다. 하지만 겉보기에 기이해 보이는 것이 범심론의 진짜 문제는 아니다. 터무니없는 생각이 결국사실이거나 유용하다고 밝혀지는 경우도 많다. 범심론의 주된 문제는 범심론이 실제로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며, 검증 가능한 가설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점이다. 범심론은 어려운 문제가 제기한 명백한 미스터리를 손쉽게 회피하며 의식과학을 실증적 연구가 불가능한 막다른 길로 몰고 간다.
- 마지막으로 철학자 콜린 맥긴 Colin McGinn 이 주장한 신비주의 mysterianism가 있다. 신비주의는 의식을 물리적으로 완벽히 설명해 차머스의 어려운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지만, 우리 인간은 이 문제를 해결하거나 심지어 초능력을 가진 외계인이 답을 준다 해도 그 답을 이해할 만큼 현명하지 못하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고 본다. 의식을 물리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개구리가 가상화폐를 이해하지 못하듯 인간도 의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신비주의의 주장이다. 인간 정신의 한계 때문에 우리는 의식을 인지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 뇌라는 물리적 시스템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뇌가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으므로, 분명 존재하지만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의식을 인간이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영역에 미리 가두어버리는 신비주의의 주장은 분명 비관적이다.
- 인간의 의식 수준을 측정하는 일은 누군가가 깨어 있거나 잠들어 있는지 판단하는 것과는 다르다. 의식 consciousness 수준은 생리적 각성 wakefulness과 다르다. 의식과 각성은 보통 높은 상관관계가 있지만 의식(인식 awareness)과 각성(깨어 있음 arousal)은 여러 방식으로 구분될 수 있고, 동일한 생물학적 근거를 따르지 않는다. 예를 들어 꿈을 꿀 때 우리는 의미상 잠들어 있지만, 풍부하고 다양한 의식적 경험을 한다. 식물인간 상태('무반응성 각성 증후군 unresponsive wakefulness syndrome'이라고도 알려져 있음) 같은 비극적인 상태도 있는데,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사람은 여전히 수면과 각성주기를 반복하지만 의식적 인식이 있다는 행동 징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집에 가끔 불이 켜지지만 아무도 없는 것과 같다.
- 의식을 불이 켜졌다 꺼지는 것처럼 '모 아니면 도'로 볼 것인지, 아니면 의식이 있는 상태와 없는 상태 사이에 명확한 경계가 없는 '점층적인' 것으로 볼 것인지 묻는 질문도 비슷하다. 이 질문은 마취 중 망각이나 꿈꾸지 않는 수면에서 깨어날 때도 적용되지만, 진화나 발달 단계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창발 emergence에도 적용된다. 이는 흥미롭지만 잘못된 질문이다. 의식이 '모 아니면 도'나 '점층적인 것' 중 하나일 필요는 없다. 나는 진화나 발달단계든, 일상생활에서든, 신경과 병동에서든, 일단 내면의 빛이 희미하게라도 있다면 전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어느 정도 의식이 있는 상태로 재빨리 전환되어 여러 정도나 크기로 의식적 경험이 나타난다고 보는 관점을 선호한다.
- 통합 정보 이론은 의식에 대한 '공리적 접근법'이다. 통합 정보 이론은 실험적 데이터보다 이론적 원리에서 출발한다. 논리학에서 공리 axiom는 부가적인 논증 없이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자명한 진실인 명제다. 그리스 철학자 유클리드 Euclid가 "같은 공간을 똑같이 채우고 있는 두 도형은 같은 도형이다"라고 말한 것이 공리의 좋은 예다. 통합 정보 이론은 의식적 경험이 통합적이고 정보적이라는, 의식에 대한 공리를 주장한다. 그리고 이 공리를 이용해 의식적 경험의 기반이 되는 메커니즘이 가져야 하는 속성을 제시한다. 통합 정보 이론에 따르면 뇌든 아니든, 생물학적이든 아니든, 이런 속성을 가진 모든 메커니즘은 파이가 0이 아니며, 따라서 의식을 가진다.
- 이론은 이 정도만 살펴보자. 통합 정보 이론에서도 다른 이론들처럼 실험으로 검증 가능한지가 문제가 된다. 통합 정보 이론의 주요 주장은 어떤 시스템의 의식 수준을 파이로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주장을 검증하려면 실제 시스템에서 파이를 측정해야 하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파이를 측정하기는 매우 어렵고 실제로 대부분 불가능하다. 통합 정보 이론이 '정보'를 특이한 방식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 통합 정보 이론은 독창적이고 야심차며 지적으로 풍부하다. 통합 정보 이론은 여전히 의식의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 진지하게 시도하는 유일한 신경과학 이론이다. 통합 정보 이론은 분명 이상하다. 하지만 이상하다고 해서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과거 물리학에 비해 현대 물리학은 더 이상하지만 덜 틀렸다. 하지만 현대 물리학이 이제는 덜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실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통합 정보 이론의 문제가 있다. 파이와 의식 수준이 동등하다는 통합 정보 이론의 핵심 주장이 가진 대담함은 실험으로 검증할 수 없다는 큰 문제가 있다.
- 이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의식적 경험이 정보적이고 통합적이라는 통합 정보 이론의 근본 통찰은 유지하면서, 평균 분자 에너지가 온도를 나타내는 것처럼 파이가 의식을 나타낸다는 비유는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의식적 경험의 구조를 바라보는 통합 정보 이론의 통찰력을 실재적 문제라는 관점에 맞추어 재조정할 수 있다. 이런 관점을 받아들이면 2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살펴본 복잡도 측정과 많은 공통점을 갖게 될, 실질적으로 적용 가능하며 대안적인 파이라는 측정법을 개발할 길이 열린다.
- 우리는 의식의 '통합'과 '정보성'을 의식이 실제로 '무엇'이라는 공리적 주장이 아니라, 설명할 수 있는 의식적 경험의 일반적 속성으로 본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의식을 온도가 아니라 생명 같은 것으로 본다.
- 의식의 수준을 탐험하는 우리의 여행은 마취 상태나 혼수상태의 망각에서 출발해, 식물인간 상태나 최소 의식 상태라는 오지를 지나고, 수면과 꿈이라는 단절된 세상을 지나, 완전히 깨어 있는 인식의 빛으로 나아가고, 심지어 더 멀리 환각이라는 기묘한 초현실로 뻗어 나왔다. 의식의 여러 수준을 연결한다는 아이디어는 모든 의식적 경험이 정보적이고 통합적이며,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복잡한 중간지대에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이런 핵심 아이디어는 물리학과 현상학의 간극을 실재적 문제 방식으로 설명할 다리를 놓으면서도 실질적으로 유용한 PCI 같은 새로운 측정법을 낳았다. 통합 정보 이론을 통해 우리는 가장 흥미롭고 논란을 일으키는 의식과학의 최전방에 도달했다. 여기서 통합정보 이론의 대담한 주장은 실험으로 검증하지 못한다는 한계에 부딪혔고, 의식과 온도의 비유는 마침내 무너졌다. 나는 이 도발적인 이론의 대담한 주장에는 회의적이지만, 토노니와 젤라토를 먹으며 토론했던 몇 년 전보다 이 이론이 어떻게 발전할지 보고 싶은 마음은 더욱 간절해졌다.
-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더 깊이 파고든다. 비트겐슈타인이 앤스컴에게 전하는 진짜 메시지는 사물의 실체를 더 깊이 이해하더라도 일정 수준에서 사물은 여전히 똑같이 보인다는 점이다. 언제나 그렇듯 태양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보인다.
- 감각은 마음과 무관한 현실을 보는 투명한 창을 제공하고, 지각은 감각 데이터를 '읽어내는' 과정처럼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내 생각에) 사실은 전혀 다르다. 지각은 상향식이거나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며, 주로 하향식이거나 안에서 바깥으로 향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감각 신호의 원인에 대한 뇌의 예측, 즉 '최선의 추측’으로 구축된다. 코페르니쿠스 혁명과 마찬가지로 하향식 지각 관점은 여러 증거와 일치하며 모든 관점을 바꾸지만, 사물이 보이는 여러 양상은 그대로다.
- 이런 관점이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는 아니다. 하향식 지각 이론이 희미하게나마 처음 드러난 것은 고대 그리스 플라톤의 동굴 우화다. 평생 동굴에 묶인 채 빈 벽을 바라보아야 하는 죄수들은 불 앞을 지나가는 사물이 드리우는 그림자의 움직임만 볼 수 있지만, 죄수들에게는 그림자가 현실이므로 그들은 그림자에 이름을 부여한다. 동굴 우화는 의식적 지각이 그림자처럼 우리 가결코 직접 만날 수 없는 숨겨진 원인의 간접적인 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 플라톤보다 천 년쯤 후, 하지만 지금보다는 천 년쯤 전, 아랍학자 이븐 알하이삼 Ibn al Haytham은 지금 여기의 지각은 객관적 현실에 직접 다가가도록 돕지 않고, 오히려 '판단과 추론' 프로세스에 따라 달라진다고 주장했다. 다시 수백 년 후 이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는 시공간 같은 선험적(a priori, 아프리오리) 틀처럼 이미 존재하는 개념으로 구조화되지 않는 한, 무제한적인 감각 데이터의 홍수는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칸트는 '물자체 Ding an sich'를 의미하는 누메논 noumenon이라는 용어를 통해 감각의 베일 뒤에 숨겨져 인간의 지각으로는 접근 불가능하며 마음과 무관한 현실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 신경과학에서 이런 논의는 독일 물리학자이자 생리학자인 헤르만 폰 헬름홀츠 Hermann von Helmholtz로 이어진다. 19세기 후반, 영향력 있는 여러 공헌을 한 헬름홀츠는 '무의식적 추론 unconsciousinference' 과정으로서의 지각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헬름홀츠에 따르면 지각의 내용은 감각 신호 자체가 제공하는 것이 아니므로, 감각 신호를 감각 원인에 대한 뇌의 예측 또는 믿음과 엮어 추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헬름홀츠는 이 과정을 무의식이라고 부르며, 우리는 지각적 추론이 발생하는 메커니즘을 인식하지 못한 채 오직 결과만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감각데이터가 들어올 때 우리는 지각적 판단('무의식적 추론')을 통해 지각적 최선의 추측을 능동적으로 계속 갱신해 세상의 원인을 추적한다. 헬름홀츠는 지각을 통해서는 세상의 사물을 직접 알 수는 없다는 칸트의 개념을 과학적으로 변용해, 인간은 감각의 베일 뒤에 숨겨진 사물을 추론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지각과 환각은 서로 다르지만,
둘 사이의 경계가 어디인지 묻는 것은
낮과 밤의 경계가 어디인지 묻는 것과 마찬가지다.
- 신경생리학자에게 물어보면 우리는 색에 민감한 망막 원추세포가 일정 비율로 활성화될 때 특정한 색을 지각한다고 말할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현상의 전모와는 거리가 멀다. 색에 민감한 세포의 활성과 색 경험은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 우리가 경험하는 색은 사물 표면에서 반사되는 빛과 환경의 전반적인 조명 사이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상호작용에 따라 달라진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색은 뇌가 이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방법을 어떻게 추론(최선의 추측)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흰 종이를 실외나 실내에서 보면 실외의 푸른빛이 도는 햇빛과 실내의 (노란빛이 도는) 조명의 차이 때문에 종이가 반사하는 빛은 매우 다른 스펙트럼 구성을 갖지만, 흰 종이는 여전히 흰색으로 보인다. 시각 체계는 주변 빛의 차이를 자동으로 보정한다.
- 즉, 색은 사물 자체의 절대적인 속성이 아니다. 오히려 색은 빛이 변하는 조건에서 뇌가 사물을 인식하고 따라갈 수 있도록 진화가 고안해 낸 유용한 장치다. 방구석에 있는 빨간 의자를 보았다는 주관적 경험이 있다고 해서 의자가 정말 빨갛다는 의미는 아니다. 의자가 빨강 redness 같은 현상학적 속성을 갖는다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가? 의자 자체는 못생기거나 구식이거나 아방가르드 스타일이 아닌 것처럼 빨강 자체가 아니다. 대신 뇌는 지각 메커니즘을 통해 의자 표면이 빛을 반사하는 방식 way-in-whichit-reflects-light이라는 특별한 속성을 추적할 수 있을 뿐이다. 빨강은 이 프로세스에서 일어나는 주관적이고 현상학적인 속성일 뿐이다.
- 이중 변환은 바깥세상의 '빨강'이 망막에서 전기적 활동 패턴으로 변환된 다음, 내면의 '빨강'으로 재구성(다시 변환)된다는 관점이다. 데닛이 지적했듯, 이런 추리는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못한다. '뇌 속에서' 빨강이 있다고 감각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이곳에 지각적 경험의 기반이 되는 메커니즘이 있기 때문이다. 이 메커니즘은 물론 빨강 자체는 아니다. 내가 빨간 의자를 볼 때 경험하는 빨강은 의자의 속성과 내 뇌의 속성에 따라 달라진다. 이 경험은 특정 표면이 빛을 반사하는 방식에 대한 일련의 지각적 예측 내용이다. 세상이나 뇌에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빨강 redness-as-such은 없다. 폴 세잔 Paul Cézanne이 말했듯, "색은 우리 뇌와 우주가 만나는 장소다."
- 더 넓게 본다면 이런 관점은 색 경험이라는 영역을 훨씬 뛰어넘어 모든 지각에 적용된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지각하는 장면의 몰입적인 다중 감각 파노라마는 뇌에서 세상으로, 감각을 읽어낸 만큼 써내며 뻗어나간다. 지각적 경험의 총체는 지각적 최선의 추측, 즉 제어된 환각을 계속 만들어내며 세상과 얽혀 있는 신경적 환상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항상 환각 상태에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환각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현실이라 부를 수 있다.
- 똑같은 이미지를 보고도 사람마다 이처럼 다른 경험을 하고 자신의 경험을 확신한다는 사실은 세상에 대한 지각적 경험이 개인의 고유한 생물학적 특성과 내력에 따라 내적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설득력 있는 증거가 된다. 우리는 모두가 대체로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본다고 가정하며, 대부분은 그 가정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런 현상은 빨간 의자가 정말 빨강이기 때문은 아니다. 우리 뇌가 지각적 최선의 추측을 할 때 발생하는 미세한 차이는 드레스 색깔 논란 같은 특이한 상황에서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두 번째 사례는 많은 사랑을 받는 시각적 착시 현상인 애덜슨 체스판 Adelson's Checkerboard이다. 이 사례는 지각에 미치는 예측의 영향이 드레스 색깔 논란 같은 기묘한 상황에서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나 항상 일어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이 사례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다시 투톤 이미지로 돌아와도 우리 눈에 도착하는 감각 신호는 처음 이 이미지를 보았을 때와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바뀐 것은 감각 데이터의 원인에 대한 뇌의 예측뿐이지만, 이 예측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보는 것도 바꾼다. 이런 현상은 시각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사인파 말소리 sine wavespeech'라는 주목할 만한 청각적 사례도 있다. 말소리에서 정상적인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만드는 고주파를 모두 잘라내면 사인파 말소리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든 사인파 말소리는 시끄러운 휘파람 소리처럼 전혀 알아들을 수 없게 된다. 투톤 이미지의 청각 버전이다. 그다음 처리되지 않은 원래 말소리를 듣고 다시 '사인파' 버전을 들으면 갑자기 모든 말이 명확하게 들린다. 투톤 이미지처럼 감각 신호의 원인에 대한 강한 예측은 지각적 경험을 바꾸고 풍성하게 한다.
- 세 가지 사례는 분명 의도적으로 만든 단순한 사례이지만, 지각이 생성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즉, 지각은 능동적인 감각 신호이자, 이 감각 신호를 상황에 맞게 해석한 것이며, 감각 신호와 연관된다. 앞서 살펴보았듯 지각적 경험이 뇌 기반 예측으로 구축된다는 이론은 시각이나 청각뿐만 아니라 모든 지각에 항상 어디서든 적용된다.
- 이 원칙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우리가 세상을 '그 자체로' 경험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칸트가 누메논이라는 개념으로 지적했듯, 세상을 그 자체로 경험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알기 어렵다. 앞서 살펴보았듯, 색 같은 기본적인 것조차도 세상과 마음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방금 살펴본 사례들처럼 지각적 환상이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진 것과 실제 존재하는 것 사이의 불일치를 드러낼 때 놀라겠지만, 지각적 경험을 단지 현실과 직접 일치한다는 '정확성'으로만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정확한, 또는 '진정한' 지각은 망상이다. 지각 세계의 제어된 환각은 개념적 이해가 불가능한, 바깥 현실로 난 투명한 창이 아니다. 제어된 환각은 우리의 생존 가능성을 강화하려고 진화가 고안한 것이다. 다음 몇 장에 걸쳐 이런 생각을 좀 더 깊이 살펴볼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몇 가지 반론을 막아야겠다.
- 베이즈 추론의 강력한 특징은 최선의 추측을 갱신할 때 정보의 신뢰성 reliability을 고려한다는 점이다. 신뢰할 수 있는 (또는 신뢰할 수 있다고 추정된) 정보는 신뢰할 수 없는 (또는 신뢰할 수 없다고 추정된) 정보보다 베이즈 믿음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 어떤 사람들은 변화맹이 철학적 딜레마를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영상 일부의 색이 변한 다음에도 (이제는 보라색으로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빨간색을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제는 보라색을 경험하는 것일까?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면, 이전에 경험했던 것은 대체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질문의 전제를 부정하고, 변화를 지각하는 것과 지각이 변화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변화를 경험하는 것은 또 다른 지각적 추론이고, 또 다른 제어된 환각이다. 그리고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 지각적 추론이라면, 시간을 경험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 참가자는 디스플레이에 장착된 카메라를 통해 방을 둘러보게 된다. 어느 순간 우리는 카메라를 전환해 실제 장면이 아닌 미리 녹화된 영상을 보여준다. 그러면 놀랍게도 참가자 대부분은 자신이 보는 영상이 이제는 '실제'가 아닌데도 실제라고 느낀다. 이 설정을 이용하면 사람들이 주변 환경을 실제라고 경험하는 상황을 실험할 수 있고, 무엇보다 의식적 경험의 보편적인 양상을 무너뜨리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검증이 가능하다. 이런 현상은 망막 잔상뿐만 아니라, 세상과 자기의 현실에 대한 경험을 전반적으로 상실하는 이인증 depersonalisation이나 비현실감 장애 derealisation 등 심신 쇠약 장애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
- 형태나 냄새, 의자성, 변화, 지속 시간, 인과성 등 우리가 지각하는 세상의 모든 면은 흄이 말한 투사, 즉 제어된 환각의 양상이다.
- 달리 말하면, 지각적 속성이 하향식 생성 모델에 의존하더라도 우리는 모델을 그저 모델 자체로 경험하지 않는다. 우리는 생성모델을 이용해, 생성 모델을 통해 지각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단순한 메커니즘에서 구조화된 세상이 발생한다.
- 자기, 즉 당신 자신은 지각할 수 있는 '어떤 것 thing'으로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자기는 아주 특별한 종류의 지각, 통제된 환각의 일종이다. 과학자나 누군가의 아들이라는 개인적 정체성에서부터 몸을 가졌다는 경험, 단순히 몸이 '된다'라는 경험에 이르기까지, 자아의 여러 요소는 생존을 위해 진화가 고안한 베이즈 최선의 추측이다.
- '원격 이동 역설 tele-transportation paradox'이라는 이 사고실험은 '자기가 된다 to be a self'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 고찰할 때 갖게 되는 선입견을 일부 드러낸다. 원격 이동 역설이 제기하는 철학적 문제는 두 가지다. 일반적인 의식 문제는 복제 인간이 의식적 경험을 하는지, 즉 내면의 우주는 없지만 완벽하게 똑같이 기능한다고 확신할 수 있을지의 문제다. 이 문제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복제 인간이 분자 하나하나까지 똑같이 정교하게 복제되면 원본과 완전히 똑같은 의식을 가진다는 사실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복제 인간이 완전히 똑같지 않다면, 종류만 다른 철학적 좀비 논쟁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 더 흥미로운 문제는 개인의 정체성 문제다. 화성의 에바(에바2)와 아직 런던에 있는 에바(에바 1)는 같은 사람인가? 그렇다고 치자. 에바 1이 실제로 런던에서 화성으로 순간 이동했다면 에바2는 에바1과 모든 면에서 똑같이 느낄 것이다. 이런 개인의 정체성에서 중요한 것은 신체적 연속성이 아니라 심리적 연속성이다. 하지만 에바1이 증발하지 않았다면, 어느 것이 진짜 에바인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둘 다 진짜 에바라는 것이 정답이다.
- 우리는 직관적으로 자기의 경험을 세상의 경험과 다르다고 여긴다. 당신이 된다 being you라는 경험이 지각의 집합이라기보다 사물의 진정한 속성(이 경우에는 진짜 자기 an actual self)을 드러낸다는 직관을 버리기는 어렵다. 진짜 자기라는 존재가 있다고 가정하면 자기란 둘, 셋 또는 여럿이 아니라 딱 하나라는 직관적인 결론으로 이어진다. 자아는 어떻게든 분리될 수 없고 불변하며, 초월적이고 고유 sui-generis 하다는 생각은 비물질적인 영혼이 있다는 데카르트적 이상을 반영하며, 이런 생각은 특히 서구 사회에서 여전히 깊은 심리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철학자나 종교 지도자, 최근에는 환각제 연구자나 의료인, 신경과학자의 끊임없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다.
-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Critique of Pure Reason>에서 자기라는 개념을 '단순 실체 simple substance'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 주장했고, 흄은 자기를 '지각의 묶음 bundle of perception'이라 말했다. 최근에는 독일 철학자 토머스 메칭거 Thomas Metzinger가 <아무도 아닌 Being No One>이라는 멋진 책에서 단일한 자아를 완전히 해체했다. 불교에서는 오래전부터 영원한 자기 같은 것은 없다며 명상을 통해 완전한 무아의 의식 상태에 도달하려고 애썼다. 남미에서 시작해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아야와스카 의식에서는 신비한 의례와 디메틸트립타민이라는 약물로 사람들을 흥분시켜 자아감을 벗겨낸다. 신경학에서는 올리버 색스 Oliver Sacks 등이 뇌 질환이나 뇌 손상을 겪은 환자의 자기 분리 양상을 연대기적으로 기록했으며, 3장에서 살펴본 분할 뇌 환자의 사례는 하나의 자기가 둘로 분리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가장 이상한 사례는 신체적으로 결합되었을 뿐만 아니라 뇌 구조 일부도 공유하는 머리 붙은 두개유합 샴쌍둥이 craniopagus twins의 사례다. 한쪽이 오렌지 주스를 마시는 것을 다른 쪽에서 느낄 수 있다면 개인적 자기란 무슨 의미일까? 당신이 된다는 것은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
- 방식은 다르지만 개인의 이런 복잡한 정체성은 우리에게도 발생한다. 우리 어머니의 정체성은 섬망을 겪으며 극적으로 바뀌었고, 어머니 당신은 이제 회복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마치 두 에바처럼 예전과 다르기도 하고 전과 다름없기도 하다. 에바1과 에바2의 관계는 지금의 나와 10년 전의 나, 또는 10년 후의 나와의 관계와도 비슷하다.
- 정상적인 환경에서 이런 자아의 다양한 요소는 하나로 결합해 당신이 된다 being you라는 중요한 통일된 경험을 이룬다. 이런 경험의 통일된 특성은 우리가 빨간 의자를 볼 때 색깔과 모양을 결합해 지각하는 것만큼 자연스러우므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 하지만 그것은 실수다. 빨강을 경험한다고 바깥세상에 '빨강'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듯, 통일된 자아를 경험한다고 '진짜 자기'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통일된 자아가 된다는 경험은 금세 풀려버릴 수 있다. 치매나 심한 기억상실증을 겪으면 서사적 자기에 바탕을 둔 개인의 정체성 감각이 완전히 약해지거나 사라질 수 있으며, 병원성이든 아니든 섬망을 겪을 때는 정체성 감각이 뒤틀리고 왜곡된다.
- 두 경우 모두 전정 입력(전정계는 균형 감각을 다룬다)과 다중 감각 통합에 관여하는 뇌 영역에 비정상적인 활동이 일어난다는 점이 비슷하다. 이런 시스템의 정상적 활동을 방해하면 뇌는 자아의 다른 측면이 그대로여도 일인칭 관점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독특한 '최선의 추측'을 하게 된다. 간질 발작에서도 유체 이탈과 비슷한 경험이 일어나는데, 이 경험도 같은 프로세스가 방해받을 때 일어난다. 이런 경험은 보통 주변 환경을 다른 관점으로 보는 자기 상시 환각 autoscopic hallucinations과 자신을 다른 관점으로 보는 자기 환시 환각 heautoscopic hallucinations(도플갱어 환각)으로 나뉜다. 이런 경험에 대한 기록이 수백 년 전부터 수없이 많다는 사실은 일인칭 관점이 유연하다는 증거다.
- 유체 이탈 경험 같은 일은 초자연적이고 이상해 보이지만 우리는 이런 보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보고를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그 현상을 경험했을 수 있다. 하지만 유체 이탈 경험이 수천 년 전부터 있었어도, 무형의 자기나 불변의 영혼이 실제로 물리적 신체를 떠났다는 의미는 아니다. 유체 이탈 경험에 대한 보고로 알 수 있는 점은 일인칭 관점이 우리가 직접 주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복잡하고 일시적이며 불안정하게 결합해 있다는 사실이다.
- "웨어링에게는 더는 내면의 서사가 없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삶을 영위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가 피아노를 치거나 아내 데버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그 순간에는 그가 웨어링 자신이며 완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은혜로운 순간이 있지만 웨어링의 상황은 의심할 여지없이 비극적이다. 서사적 자기가 파괴된다는 것은 단순한 기억 결핍 이상이다. 자기를 연속적으로 지각하지 못하고, 그 때문에 우리 대부분에게는 극히 당연한 개인의 정체성이라는 근본적인 느낌이 사라진다. 기억은 자아의 모든 것이자 궁극적인 전부가 아니다. 하지만 웨어링의 이야기, 또는 치매나 알츠하이머라는 암흑에 빠진 친구나 가족을 통해 알고 있듯, 자기 지각 self-perception의 지속성과 연속성을 위해서는 기억이 꼭 필요하다. 정체성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 웨어링 부부가 보여준 사랑의 힘은 우리를 '사회적 자기'로 이끈다.
- 다른 동물처럼 인간도 사회적 동물이다. 모든 사회적 상황과 태도에 있어 다른 사람의 마음 상태를 지각하는 것은 사회적 생물에게 중요한 능력이다. 때로 '마음 이론 theory of mind'이라 불리는 이 능력은 흔히 인간에게는 다소 천천히 발전한다고 여겨지지만, 삶 전체에서 우리 대부분에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때로 상대방이나 친구, 동료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할 때, 우리는 사회적 자기를 정확히 자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적 상호작용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때도, 타인의 의도, 신념, 욕망을 지각하는 능력은 배경에서 항상 작용해 행동을 유도하고 정서를 형성한다.
- 심리학, 사회학, 그리고 최근에는 사회신경과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아우르는 여러 분야에서 사회적 지각과 마음 이론에 대한 방대한 문헌이 나오고 있다. 이 문헌 대부분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유도한다는 측면에서 사회적 지각과 마음 이론의 중요성을 검토한다. 하지만 나는 눈을 안으로 돌려, 나를 지각하는 타인을 내가 어떻게 지각하느냐에 따라 내가 된다 being me라는 경험이 실질적으로 어떻게 달라지는지 생각해보려 한다.
- 사회적 지각(타인의 정신 상태에 대한 지각)은 그저 다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거나 생각하지 않는지 명시적으로 추론하거나 '생각해 보는' 것과 다르다. 사회적 지각은 대부분 자연스럽고 직접적이다. 우리는 고양이, 커피잔, 의자, 심지어 우리 몸에 대한 지각만큼 쉽고 자연스럽게 타인의 신념, 정서, 의도에 대한 지각을 형성한다. 내가 와인을 한 잔 더 따랐을 때 친구가 빈 잔을 가까이 가져온다면, 친구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성적으로 알아낼 필요가 없다. 친구도 와인을 더 마시고 싶어 하고, 친구의 잔을 먼저 채워줬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금세 지각한다. 반드시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런 정신 상태를 와인잔 자체만큼 쉽게 지각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내 생각에 답은 역시 뇌가 예측기계이고, 지각을 감각 신호의 원인을 추론하는 프로세스라고 여기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 시각적 지각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지각도 상황과 예측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감각 데이터 (능동적 추론의 대인 관계 형태)를 바꾸고 예측을 갱신해 '사회적 예측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다. 사회적 지각에 대한 능동적 추론은 우리가 예측하거나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의 정신 상태를 바꾸려는 행동이다. 우리는 나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동료의 기분을 바꿔주려고 미소 짓기도 한다. 우리는 생각을 다른 사람의 마음에 집어넣기 위해 말을 한다.
- 사회적 지각에 대한 이런 생각은 다음과 같이 사회적 자기와 연결된다. 다른 사람의 정신 상태를 추론하는 능력에는 모든 지각적 추론과 마찬가지로 생성 모델이 필요하다. 이미 살펴보았듯 생성 모델은 특정 지각적 가설에 해당하는 감각 신호를 생성할 수 있다. 사회적 지각에서 이 지각적 가설은 다른 사람의 정신 상태에 대한 가설이다. 즉, 높은 수준의 호혜 reciprocity다. 당신의 정신 상태에 대한 내 최선의 모델에는 나의 정신 상태에 대한 당신의 모델도 포함된다.
- 다시 말해, 당신이 내 마음속 내용을 어떻게 지각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에만 나는 당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타인의 마음에 반사된 자기를 지각한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자기다. 사회에 포함된 예측적 지각은 인간으로서 자기가 되기 위한 전반적인 경험의 중요한 부분이다. 사회적 자기를 이렇게 해석하면 자기 인식 self-awareness(서사적·사회적 측면을 모두 포함하는 자아의 높은 단계)에 반드시 사회적 맥락이 필요하다는 흥미로운 의미가 드러난다. 만약 우리가 다른 마음들이 없는 세상에 존재한다면, 즉 연관된 마음이 전혀 없다면, 뇌가 다른 사람의 정신 상태를 예측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따라서 자신의 경험과 행동이 자기에게 속한다고 추론할 필요도 전혀 없다. "인간은 누구도 섬이 아니다"라는 영국 시인 존 던 John Donne의 17세기 잠언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다.
- 당신은 어제와 같은 사람인가? 더 좋은 질문으로 바꿔보자. 당신은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경험하는가? 아마도 하룻밤 사이에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지난주, 지난달, 지난해, 10년 전, 당신이 네 살이었을 때, 아니면 94세가 되었을 때도 당신은 같은 사람인가? 그렇게 보일 것인가?
- 놀랍지만 의식적 자아에서 흔히 간과되는 측면은 우리가 보통 시간이 지나도 연속적이고 통일된 자기를 경험한다는 점이다. 이것을 자기의 주관적 안정성 subjective stability of the self이라고 한다. 자전적 기억의 연속성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몸이든 개인의 정체성이든 자기 자신이 매 순간 지속된다는 더 깊은 경험을 통해서도 주관적 안정성이 유지된다.
- 자기 지각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이 되고 있다. 자기 지각은 끊임없이 변한다. 지금의 당신은 이 장을 읽기 시작했을 때와는 약간 달라져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변화를 지각하지 않는다.
- 변화하는 자기를 보지 못하는 주관적인 명목은 자기가 직관의 집합이 아니라 불변하는 실체라는 잘못된 직관을 조장한다. 하지만 진화가 자아 경험을 그렇게 설계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다. 나는 서서히 변하는 몸과 뇌를 보지 못하는 변화맹을 넘어 자기의 주관적인 안정성이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과장되고 극단적인 형태의 자기 변화 맹목 self-change-blindness을 가지고 산다.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우리가 일인칭으로 자기를 지각하는 이유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알기 위해 자기를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제어하기 위해 자기를 지각한다.
-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대로 본다. - 아나이스 Anais Nin
- 자기 지각은 세상이나 여기, 몸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게 아니다. 자기 지각은 생리적 제어와 조절, 즉 생존을 유지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왜 그런지, 그리고 자기 지각이 우리의 의식적 경험 모두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이해하려면, 생명과 마음의 연관성에 대한 아주 오래된 논쟁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물질과 생명체가 이루는 중세 기독교적 계층인 존재의 대사슬 Great Chain of Being 맨 꼭대기에는 신이 있다.
- 특히 의식적 자아가 어떻게든 자연과 별개라는, 즉 의식적 자아는 물질적 바깥 세계를 내다보고 비물질적인 내적 관찰자가 실재한다는 직관은 어려운 문제에 가까우며, 사물이 어떻게 보이는지와 사물이 실제로 그러한지 사이에 더 큰 혼란을 만들 뿐이다.
- 수 세기 전, 데카르트와 라메트리가 생명과 마음의 관계를 논할 때 문제가 된 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유무였다. 그리고 어쩌면 놀랍게도, 동물기계 이론에도 이와 비슷한 영혼 이야기가 있다. 영혼은 형태 없는 본질도, 합리성을 짜낸 정신적 정수도 아니다. 자아를 신체 및 지속적인 생명의 리듬과 긴밀하게 얽힌 것으로 보는 동물기계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마음과 물질을, 이성과 비이성을 분리한 데카르트 이전으로 돌아가 계산적 마음 computational mind이라는 자만에서 해방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영혼'이라 부르는 것은 마음과 생명 사이의 깊은 연속성에 대한 지각적 표현이다. 우리가 체화된 자아, 즉 '그저 존재한다 just being'는 불완전한 느낌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받아들일 때 갖게 되는 경험이다. 이런 관점을 영혼의 메아리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힌두교의 아트만 Atman (절대 변치 않는 가장 내밀하고 초월적인 자아-옮긴이 주)처럼, 우리 인간 내면의 정수를 생각이 아닌 호흡이라고 여겼던 오래된 생각이나 개념을 부활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지하는 컴퓨터가 아니라, 느끼는 기계다.
- 자유에너지 원리와 예측 프로세스 사이의 이런 깊은 연관성은 매력적이다. 직관적으로 보아도, 능동적 추론을 통해 예측 오류를 최소화하면, 생명계는 자신이 놓이리라고 예측하거나 예상한 상태에 자연스럽게 놓인다. 이렇게 볼 때 예측적 지각과 제어된(또는 제어하는 환각이라는 개념은 생물학 전체를 설명하려는 프리스턴의 야심찬 시도와 매끄럽게 일치한다.
- 이를 종합해 보면 생명계는 자신의 세상과 신체를 능동적으로 모델링해, 매 순간 심장박동이 뛰거나 매년 생일을 맞는 것처럼 시스템이 살아있다고 볼 수 있는 특정 상태로 계속 되돌아온다. 프리스턴에 따르면 자유에너지 원리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감각증거를 최대화하기 위해 감각 정보를 수집하고 모델링하는 유기체에 대한 원리다. 아니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나는 나 자신을 예측한다. 고로 나는 나다."
- 살아 있는 유기체 같은 복잡한 시스템에서 하나가 유지되려면 다른 것은 변해야 한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아침 식사를 만들려면 움직여야 하고, 그렇게 할 때 쓰러지지 않으려면 혈압이 올라가야 한다. 이것이 앞 장에서 살펴본 예측적 제어(이상성)라는 예상 형태다. 장기적으로 감각적 예측 오류를 최소화하려면 어두운 방에서 벗어나거나 조명을 켜야 한다.
- 자유에너지 원리에 대한 공통적인 우려는 실험 데이터로 자유에너지 원리가 틀렸다고 입증할 수 없으므로 반증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이는 사실이지만 이런 걱정은 자유에너지 원리에만 해당하지도 않고 특별한 문제도 아니다. 자유에너지 원리를 생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설 검증으로 평가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이론이라기보다는 수학철학의 일부로 보는 것이다. 내 동료 제이컵 호위 Jakob Hohwy가 말했듯 자유에너지 원리는 '존재를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룬다.
- 당신이 가장 끈질기게 매달리는 당신이 된다는 것 being you의 모습은 무엇인가? 대부분은 행동을 통제하고, 생각의 주인이 되는 느낌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지만 복잡한 개념이다.
- 이언 매큐언은 손가락을 구부리는 단순한 행동에서도 이런 복잡성을 발견한다. 열세 살 브리오니 탈리스는 손가락을 구부리는 것 같은 의식적인 의도가 신체 행동, 즉 실제 손가락 구부림을 유발한다고 느낀다. 의식적 의도에서 신체적 행동으로 이어지는 선은 명백한 인과관계를 보인다. 그리고 브리오니는 이 과정에 자신이 된다는 것, 즉 자아의 정수가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브리오니가 이 감정을 더 깊이 파고들면, 사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 움직임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마음속, 아니면 손가락에서부터 일까? 어떤 의도나 브리오니 '자신'이 행동을 유발했을까, 아니면 의도를 경험한 것은 움직이기 시작한 손가락을 지각한 결과일까?
- 브리오니 탈리스처럼 이 질문을 곰곰이 생각한 사람은 많다. 철학과 신경과학에서 자유의지만큼 끊임없이 논쟁을 일으키는 주제는 거의 없다. 자유의지가 무엇인지, 존재하기는 하는지, 어떻게 발생하는지, 중요한지 같은 문제에 대한 합의를 이루기 어려웠다는 점은 과장이 아니다. 자유의지가 하나의 경험인지, 관련된 경험의 집합인지, 사람마다 다른지 등 자유의지라는 경험자체도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이런 혼란 속에도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생각이 있다. 철학자 갈렌 스트로슨 Galen Strawson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자유의지를 발휘할 때는 '선택과 행동에 있어 급진적이고 절대적이며 강제적인, 나에게 달렸다 up-to-me-ness'라는 느낌이 있다. 쐐기풀에 찔려 손을 뗄 때처럼 그저 반사적인 반응이 아닌, 행동을 유발하는 인과적 역할을 바로 자신이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것이 손가락을 구부리거나, 차를 마시기로 하거나, 새로운 직장에 도전하는 등의 자발적인 행동에 자유의지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이유다.
- 내가 행동을 '자유롭게 의도'할 때 나는 나 자신 my self이 그 행동의 원인이라고 경험한다. 다른 어떤 경험보다 의지의 경험은 물질적인 세계를 조종하는 비물질적인 '자기'가 있다고 느끼게 한다. 사물은 이렇게 보인다. 하지만 의지를 경험한다고 물리적 사건을 일으키는 인과적 힘을 지닌 비물질적 자기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내가 보기에 의지의 경험은 자기 관련 지각의 독특한 형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발적 행동과 연관된 자기 관련 지각이다. 자기와 관련이 있든, 세상과 관련이 있든, 의지의 경험은 다른 지각처럼 베이즈 최선의 추측에 따라 구성되며, 행동을 인도하는 데 중요하고도 필수적이다.
- 먼저 무엇이 자유의지가 아닌지 명확히 하자. 자유의지는 우주, 더 구체적으로는 뇌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사건의 흐름에 개입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을 일어나게 만들지는 않는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따르는 이 '유령 같은 spooky' 자유의지는 인과법칙에서 자유롭기를 요구하면서도 그 대가로 어떤 설명적 가치도 주지 ...
- 1980년대 초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학교의 신경과학자 벤저민 리벳 Benjamin Libet이 수행한 자발적 행동의 뇌 기반에 대한 일련의 실험은 지금까지도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리벳은 준비전위 readiness potential'라는 잘 알려진 현상을 이용했다. 준비전위는 운동 피질에서 발생하며 자발적인 행동에 앞서 나타나는 작은 오르막 뇌전도 신호다. 리벳은 자발적 행동 이전뿐만 아니라,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려는 의도를 깨닫기 전에 이 뇌 신호를 식별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 데이터는 명확했다. 여러 실험 결과의 평균을 낸 결과, 손을 움직이려는 의식적 의도가 나타나기 수백 밀리초 전에 이미 준비전위가 나타났다. 즉,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의도를 깨닫는 순간 준비전위는 이미 높아지고 있었다.
- 리벳의 실험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자유의지란 없음을 입증'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유령 같은 자유의지로 본다면 분명 나쁜 소식(더 나쁜 소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아니지만)이다. 의지를 경험해야 자발적인 행동이 일어난다는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리벳은 자신의 실험 결과가 이런 암시를 줄까 봐 걱정했다. 그래서 리벳은 움직이려는 충동과 그 결과인 행동 사이에 유령 같은 자유의지가 행동에 개입하고 행동을 막을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다는 기발한 생각을 했다. 지금 보면 자유의지에 대한 필사적인 구조 시도 같다. 리벳은 진정한(즉, 유령 같은) 자유의지가 없다면 '자유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재치 있는 해석이지만 제대로 된 설명은 아니다. 의식의 억제는 본래 의식의 의도와 마찬가지로 어떤 기적이 아니다.
- 의지의 지각적 경험은 자기실현 지각적 예측이며, 또 다른 독특하고 제어된 환각이자 제어하는 환각이다.
- 우리가 자발적인 행동을 이렇게 경험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의지를 지각적 추론으로 보는 관점과 이원론적 마술로 보는 관점이 분명하게 나뉘는 이유다. 의지의 경험은 현재의 행동을 인도하는 데는 물론이고 미래의 행동을 유도하는 데도 유용하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자발적 행동은 매우 유연하다. 많은 자유도를 제어할 수 있다는 말은 어떤 자발적 행동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다음에 비슷한 상황에서는 다른 행동을 시도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월요일 출근길에 지름길로 가려고 시도했는데 길을 잃어서 회사에 늦게 도착했다면, 화요일에는 더 길지만 잘 아는 길을 선택할 것이다. 의지의 경험은 자발적 행동 사례에 꼬리표를 달아 행동의 결과에 주목하게 하고, 미래의 행동을 조정해 목표를 더욱 잘 달성하게끔 한다.
- 나는 앞서 자유의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우리가 '다르게 할 수 있었다'라고 느끼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언급했다. 의지의 경험이 가진 이런 반사실적 측면은 미래 중심적 기능에서 특히 중요하다. 다르게 할 수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고 실제로 다르게 할 수 있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유용한 것은 대체 가능성의 현상성이다. 비슷하지만 똑같지는 않은 미래의 상황에서 내가 실제로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 이 자체만으로도 화요일에 다시 출근할 때 내 뇌가 자유도를 조절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하다. '다르게 할 수 있었다'라는 느낌은 다음에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유용하다.
-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인가? 여기서 문제의 '당신'은 당신이 된다는 경험을 집합적으로 구성하는 자기 관련 사전 신념, 가치관, 목표, 기억, 지각적 최선의 추측 모음이다. 이제 의지의 경험자체는 자아 집합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볼 수 있다. 즉, 의지의 경험은 자기 관련 제어된, 또는 제어하는 환각의 일종이다. 종합하면 '자유의지'를 발휘하고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은 행동하고, 선택을 내리고, 생각할 수 있는, 당신 고유의 능력이다.
- 그렇다면 자유의지는 환상인가? 보통은 조심스럽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저명한 심리학자 대니얼 웨그너 Daniel Wegner는 저서 <의식적 의지라는 환상 The Ilusion of Conscious Will>에서 같은 대답을 내놓 ...
- 16세기 후반 프라하에서는 랍비 유다 뢰브 벤 베잘렐 Judah Loewben Bezalel이 블타바 강둑에서 점토를 가져다 사람을 닮은 골렘 golem을 만들었다. 요제프 혹은 요젤레라 부르는 이 골렘은 반유대주의 대학살로부터 랍비의 백성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고, 아주 효율적으로 작동했다. 일단 마법 주문으로 깨우면 골렘들은 움직이고, 인지하고, 복종했다. 하지만 일이 크게 잘못되어 아둔하게 복종만 했던 골렘은 폭력적인 괴물로 변했다. 결국 랍비는 마법 주문을 되돌렸고, 골렘은 회당 마당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어떤 이들은 골렘의 잔해가 지금도 프라하의 묘지나 다락방 어딘가에 숨어 다시 깨어나기를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랍비 뢰브 벤의 골렘은 우리가 지적이고 지각 있는 생물, 즉 우리 자신의 이미지나 신의 마음을 따른 창조물을 만들 때 불러들이는 자만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일이 제대로 풀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 지난 10여 년 동안, 인공지능의 급부상으로 기계의 의식에 대한 논의가 긴급해졌다. 인공지능은 이제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 뇌 구조를 닮은 신경망 알고리즘으로 구현되는 휴대전화, 냉장고, 자동차 등 어디에나 인공지능이 내장되어 있다. 이 새로운 기술의 영향에 대해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다. 인공지능이 우리 일자리를 빼앗을까? 인공지능이 우리 사회의 구조를 해체할까? 인공지능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든, 프로그래밍의 예지력 부족으로든, 지구 전체의 자원을 엄청난 양의 클립으로 바꿔버리거나 결국 우리를 파괴하게 될까? 이런 여러 우려, 특히 더 실존적이고 종말론적인 우려의 바탕에는 발전이 가속화되어 어느 시점에 이르면 인공지능이 의식을 갖게 될 것이라는 가정이 있다. 이것이 바로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골렘의 신화다.
- 수술이 끝나고 겨울밤의 어둠을 헤치며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의식의 어려운 문제에 대한 데이비드 차머스의 설명을 떠올렸다. "우리는 경험이 물리적 기반에서 발생한다는 데는 전반적으로 동의하지만 경험이 어떻게, 왜 발생하는지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대체 왜 물리적 프로세스가 풍부한 내면의 삶을 일으켜야 하는가? 그래야 하고, 어쨌든 그렇게 한다는 말은 객관적으로 불합리해 보인다."
- 이 미스터리를 마주한 철학은 범심론(의식은 대개 어디에든 있다)에서부터 제거적 유물론(최소한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의 의식은 없다), 그리고 그 사이의 다양한 선택권을 주었다. 하지만 의식과학은 호화로운 레스토랑에서 노련한 요리사가 내오는 정해진 메뉴에서 음식을 고르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꺼내 만든 요리에 가깝다. 철학, 신경과학, 심리학, 컴퓨터 과학, 정신의학, 머신 러닝 등의 다양한 조각들이 이리저리 결합하고 재조합되어 새로운 것으로 바뀐다는 점에서 그렇다.
- 이것이 의식에 대한 실재적 문제 접근법의 정수다. 실재적 문제는 의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한편, 의식적 경험이 구조화되는 방법과 형태 등 의식의 다양한 현상학적 속성이 어떻게 몸속에 체화되고 세상에 내재한 뇌의 속성과 관련되는지 질문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 뇌 활동 패턴과 의식적 경험 사이의 관계를 확인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지만, 그렇게 끝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우리의 과제는 메커니즘과 현상학사이에 점점 견고해지는 설명의 다리를 놓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우리가 끌어온 관계가 자의적이지 않고 이해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이해된다'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다시 말하지만 설명하고, 예측하고, 제어하는 것이다.
- 역사적으로 이 전략은 생명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통해 생명계의 속성을 파악하고 각각의 속성을 기본 메커니즘의 관점에서 설명해 생기론의 마술적 사고를 초월한 방법과 맥락이 닿는다. 생명과 의식은 물론 다르지만, 지금쯤은 이 둘이 우리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기를 바란다. 어느 쪽이든 전략은 같다. 의식의 어려운 문제를 정면으로 해결하려 하거나 의식의 경험적 특성을 모두 무시하기보다 실재적 문제 접근법을 적용하면 물리적인 것과 현상학적인 것을 화해시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해체할 수 있다는 새로운 희망을 보게 된다.
- 우리는 측정법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고 의식의 수준(예를 들어 혼수상태에 있거나 완전히 깨어 있어 인식할 수 있는 상태의 차이)을 먼저 살펴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인과적 밀도나 통합 정보 같은 측정법 후보들이 자의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들은 모든 의식적 경험에 잘 보존된 속성을 포착한다. 즉, 모든 의식적 경험은 통일적이면서도 동시에 다른 의식적 경험과 구별된다. 모든 의식적 장면은 '동시에' 경험되고, 모든 경험은 있는 그대로이지 다른 식으로는 아니다.
- 그다음 우리는 의식 내용의 본질, 특히 의식적 자기가 된다는 경험을 살펴보았다. 나는 의식적 지각에 대해 새로운 포스트 코페르니쿠스적 관점을 채택하도록 유도해, 사물이 보이는 방식을 해석할 일련의 과제를 제시했다.
- 첫 번째 과제는 지각이 바깥 현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고 보지 않고 능동적이고 행동 중심적으로 바깥 현실을 구축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각한 세상은 객관적인 바깥 현실보다 덜하거나 더하다. 뇌는 베이즈 최선의 추측을 통해 세계를 창조하고, 이 세계에서 감각 신호는 끊임없이 생성되는 지각 가설을 억제한다. 우리는 정확성이 아니라 유용성을 위해 진화가 고안한 제어된 환각 속에 살고 있다.
- 두 번째 과제는 이런 통찰을 내면의 자기 경험에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체가 어떻게 지각, 즉 제어된 환각의 일종인지 탐구했다. 시간에 따른 개인의 정체성과 연속성 경험에서부터, 단순히 살아 있는 몸이라는 불완전한 감각까지, 이런 자아의 조각은 모두 안에서 바깥으로 향하는 지각적 예측과 바깥에서 안으로 향하는 예측 오류 사이의 섬세한 춤에 기대고 있다. 비록 이 춤의 대부분이 지금은 몸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일어나기는 하지만 말이다.
- 마지막 과제는 의식적 지각이라는 예측 기계의 기원과 주요 기능이 세상이나 신체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리적 상태를 제어하고 조절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지각과 인지의 총체성, 즉 인간의 경험과 정신적 삶이라는 전반적인 파노라마는 깊이 내재한 생존이라는 생물학적 동력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주변 세상과 그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을 살아 있는 몸으로, 몸을 통해, 몸 때문에 지각한다. 이것이 질리앵 오프루아 드 라메트리가 제안한 '인간 기계'의 21세기 버전(또는 반전)인 나의 동물기계 이론이다. 그리고 의식과 자아에 관한 생각에 가장 깊은 변화가 일어나는 곳도 바로 이 지점이다.
- 하지만 이제 우리는 두 경험을 지각적 예측이라는 동일한 원리를 서로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이해가 가능하다. 두 경험에는 연관된 예측 종류의 차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현상성의 차이가 있다. 일부 지각적 추론은 세상의 사물을 알아내는 데 초점을 맞추는 반면, 다른 추론은 신체 내부를 제어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 그리고 이제 의식과학, 그리고 그 일부인 동물 기계 이론은 인간 예외주의의 마지막 보루, 즉 우리의 의식적 마음은 특수하다는 가정을 파괴하는 동시에 인간 예외주의가 자연의 넓은 패턴에 깊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 모든 의식적 경험은 일종의 지각이며, 모든 지각은 일종의 제어, 또는 제어하는 환각이다. 이런 사고방식에서 나를 가장 흥분시키는 것은 이런 생각이 우리를 얼마나 멀리 데려갈 수 있는지 여부다. 자유의지의 경험은 지각이다. 시간의 흐름도 지각이다. 어쩌면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의 3차원 구조나 지각적 경험의 내용이 객관적으로 실재한다는 감각도 지각의 한 측면일지 모른다. 의식과학의 도구를 이용해 우리는 칸트의 누메논처럼 우리 역시 일부인, 궁극적으로 알 수 없는 현실에 점점 더 다가간다. 이런 생각은 모두 실험으로 논증할 수 있으며, 실험 결과가 어떻든 인식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일어나며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이해하는 우리의 관점을 다시 형성하는 질문을 던진다. 모든 단계는 의식이 엄청나게 거대한 해결책을 찾는 엄청나게 거대하고 단일한 미스터리라는, 매력적이지만 도움은 되지 않는 생각을 조금씩 걷어낸다.
- 실질적 의미도 많다. 의식의 수준을 측정하는 방법은 이론적 영감을 받아 새로운 의식의 '측정법'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측정법을 이용하면 행동적 반응이 없는 환자에게서도 잔여 인식(내현적 의식 covert consciousness)을 측정할 수 있다. 예측적 지각의 계산 모델은 환각과 망상에 근거해 새로운 빛을 주며, 정신의학적 증상 치료부터 원인 해결에 이르는 변화를 이끈다. 인공지능, 뇌 기계 인터페이스, 가상현실에 이르는 수많은 기존 기술과 최신 기술에도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의식의 생물학적 기초를 찾는 일은 매우 유용하다. 이렇게 볼 때 인식의 신비를 마주하는 일은 몹시 개인적인 여정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의식과학이 우리 개인의 정신적 삶과 우리 주변의 내면의 삶을 새롭게 조망하게 해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이것이 실재적 문제의 진짜 약속이다. 결국 실재적 문제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든 이 길을 따라가면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그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을 의식적으로 경험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내면의 우주가 자연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자주 떠올리지는 않겠지만, 내가 된다는 제어된 환각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일어날(또는 일어나지 않을) 일과 새롭게 화해하게 된다. 망각은 그저 전신마취를 받아 의식의 강으로 가는 길을 방해받았을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 언젠가 발생했던 영원으로 회귀하는 것임을 깨달을 때 말이다.
- 그리고 이 이야기의 끝에 덧붙인다면, 일인칭의 삶이 결말에 도달했을 때 미스터리가 조금은 남아 있어도 아마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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