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이창현, 유희]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2

일루젼 2023. 9. 12.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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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창현 / 유희
출판 : 사계절 
출간 : 2023.07.17 


 

음. 1권과는 조금 달라진 포인트들이 보인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틀림없이 2권도 즐겁게 웃으며 읽을 수 있겠지만, 1권에서 느꼈던 '미친 거 같아!!'의 카타르시스까지는... 그래도 무척 재미있다.

 

1권처럼 전체를 묶는 스토리 라인은 없지만, 소소한 듯하면서도 핵심을 짚는 '독서의 현실'이 잘 소개된 것 같다. 중심인물이 도서관 사서인 것에 비해서는 도서관 에피소드가 많지는 않지만 초반 페이지들의 흡입력은 상당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빵 터진 장면은 '처음 만난 자리(독서 중독자 버전)'이었다. 비슷한 자리를 몇 번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인데, 보통 어느 한쪽이 접어주고 들어가지 않는 이상 양측 모두 만족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서로 그렇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보통 관심 주제이지만 상대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신나게 말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공감됐던 장면은 '블라인드 데이트 위드 어 북'. 이 장면을 보자마자 '읽은 책이면? 취향에 안 맞으면?'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기획 자체는 매력있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이런 형태로 판매하는 독립서점들도 있다는 것도 알고, 즐거워하고 만족하는 구매자들도 많다는 것도 안다. 다만 내 경우에는 스스로 사는 일은 없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이미 사놓고 안 읽고 있는 책이 두 권이 되면 얼마나 속이 쓰리겠는가...)

 

!! 이런 깜짝 추천의 즐거움은 확고한 취향이 형성되기 전에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니, 독서에 이제 막 흥미가 생기신 분들이나 해당 주제를 처음 읽어보려는 분들이시라면 블라인드 이벤트로 세계가 확장되는 놀라움을 누려보셨으면 좋겠다. !!       

 

여기서 잠시 드는 의문. 나는 여전히 내가 '독서 중독자'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중독'이라고 부르기엔 깊이도 애정도 너무 얕은 게 아닌가 싶다. 그냥 책 읽기를 좀 좋아하는 마니아 정도가 스스로 마음편히 인정할 수 있는 범주인 것 같다. 그럼에도 예전에 이상형을 정할 때 십진분류표의 비율을 사용해 봤던 적이 있는데... 

 

0-200 : 10%

300-500 : 15%

600-900 : 75%

 

정도의 비율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스스로 생각할 때 주로 문학 중심으로 읽는 편이라고 여겨서, 내가 읽는 책들도 대략 이 정도 비율일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오늘 독서 기록 어플을 통해 확인해보니 20:25:55 정도의 비율이라 살짝 당황스럽다. 음. 뭐지. 

 

당분간 여유가 생길 줄 알고 인문 철학 역사 관련 도서들에도 도전해보려 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새 직장이 생겨버렸다. 가을을 만끽하기엔 다시 바빠질 듯 하다. 소장 도서를 줄이고 싶은데, 아직도 양서를 골라 읽는다거나 필요한 부분만 발췌독 한다는 갸륵한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욕심이 많으면 고생을 해야지. 

 

흠흠. 즐겁게 읽자. 

끝. 

  

 


   

 

 

 

- 아무도 책을 읽지 않는 집안에서 혼자 책을 좋아했다. 
독서에 재미를 못 붙인 집에 책이 늘어날 까닭이 없으니 별 수 없이 같은 책을 반복해 읽었다.
어느 날 집 근처 도서관의 존재를 알게 된 뒤로,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 고요한 자료실에서 십만 권의 책 속을 유유히 걷고, 한적한 서가에 꽂힌 오래된 책의 먼지도 가끔 쓸고, 그런 직장 생활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 '아아, 살려 줘. 그만 당겨, 얘들아.'

"분명 제목 잘못 알고 있는 걸거야. 어떤 공룡 좋아해?"

 

- '이게 끝일 리 없지. ... 한 번에 그렇게나 많이? 다 읽고 아무 데나 꽂지만 말아 줘.'

- [생물학 무기 테러와 그 처리 과정은 비위가 약한 독자를 위해 그리지 않았습니다. 도서관 장서를 깨끗하게 읽읍시다.]

- '도서관 이용자 시절에는 몰랐다. 게시판, 독서-문화 프로그램, 곳곳에 붙은 안내문과 행사 포스터가 사서들 작품이었다는 것을...'

 

- "설기 씨도 이것 좀 봐 봐요. 근처 문화센터 회원 모집 전단인데..."

[자기 개발은 자위행위일 뿐. 자기 파괴 만이 해답이다!!]

"..."

'포스터 뭐야? 이걸 공공도서관에 게시하라는 거야? 디자이너는 어떤 인간인 거지? 의도가 뭐냐고. 회원 늘릴 마음 있는 거 맞아? 독서클럽이라며!'

- '그냥 도서관을 이용하던 시절이 좋았지. 지금은 책에 둘러싸여 있지만 근무 시간에 읽을 순 없고... 퇴근하면 쓰러지고. 도서관이 직장이 되고부터 독서량이 줄었어. 책이 좋아 사서가 됐는데...' 

 

 

- [책은 인간과는 달리, 마음을 짓누르거나 수다를 떨거나 떼어 버리기 어렵지가 않다. 책은 불러내지 않으면 다가오지 않는다. 마음 내키는 대로 이 책이나 저 책을 집어 들 수 있다. 책들이 자기들의 의견을 말하면 그도 자신의 견해를 말했다. 그들은 나름의 생각을 발언하고 그에게 생각하도록 자극한다. 그가 침묵하면 전혀 그를 방해하지 않고 오직 그가 물어볼 때만 말을 한다. 책과 그의 관계는 다른 모든 일과의 관계가 그렇듯이 자유의 관계였다.

 

- 슈테판 츠바이크 <위로하는 정신>]

 

 

- "그래도 모처럼 신입 회원이 왔는데,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

'아아... 몽테뉴 평전이라면 '역사'일까 '철학'일까... 철학으로 분류한다면 한국십진분류법으로 100. 서양철학이니 160. 슈테판 츠바이크니까 저자 기호는 저자명 첫 글자 '츠'에... 그래서 청구 기호는... 위치는 대략 1층문헌정보실 서가 왼편에...'

'이쪽도 만만치 않군. 뭐 그럼 된 건가.'

 

- '그냥 순서대로 인사했을 뿐인데 이상하게 재밌어! 회원들도 처음엔 비사교적이고 무서워 보였는데, 별명으로 부르고 나니 (비사교적이고) 괜찮은 사람들 같아!'

 

- "아...!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이제, 책을 읽다가 아니다 싶으면 주저 없이 내려놓을 수 있게 됐어요. 재미없는 영화나 드라마는 쉽게 중도 하차하면서 책은 왜 그렇게 못 했는지..."
"오, 그 단계까지 왔다면 '읽고 싶은 부분부터 읽기'도 금방이지." 
"흠, 그런가요?"

"그런 거지."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은 책이 오히려 드물걸."

"응. 소설이나 희곡을 제외하면, 나도 마찬가지."
"다크 섹시는?"

"음. 요즘엔 주로 책 제목만 읽게 돼서... (업무상)"

'고... 고수?'

 

- "그래도 '읽다가 중도 포기하는 것'과 '순서를 무시하고 읽는 것'은 별개 문제 같아요." 

"소설 말고 다른 책 가져온 거 없어?"
"아, 네. 역사책 한 권..."

 

- "나라면 6장부터 읽겠어. 마침 요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을 읽고 있거든. 같이 읽으면 도움도 되고 재밌을 것 같아."

"난 7장이랑 10장만 딱. '잘 알아서 끌리는 주제'와 '잘 몰라서 끌리는 주제'를 각각 골랐지."

"그렇게 중간부터 읽으면 앞의 내용을 모르잖아요! 주요 개념이나 사람 이름 같은..."

"뭘 모르는군. 어차피 우리 나이쯤 되면, 처음부터 읽어도 앞의 내용 따위 기억나지 않는다고!"

 

- "아니 그게 무슨 논리예요?"
"내 다마고치보다 어린 자네에게는 와닿지 않을 수 있지."
'그럴 땐 책 뒤 색인란을 살펴보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왠지 저기 끼어들기 싫어. ...'

 

- "근데 설기 씨, '블라인드 데이트 위드 어 북'이라는 거 알아요?" 

[블라인드 데이트 위드 어 북 (blind date with a book) : 서점 직원들이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을 선정해 표지를 가리고 진열·판매하는 이벤트. 제목과 저자를 숨긴 대신 짧은 감상이나 키워드를 소개.

 

- "우리 도서관에서도 이런 행사를 해 볼까 하는데... 어떨까요?"

"궁금해서 책에 관심도 더 가고... 반응 좋을 듯한 예감이 들어요."

"그쵸?"

"네. 완전 '깜짝 선물' 받는 기분일 것 같아요."

 

- "가끔 TV 켤 때가 있잖나."
"뭐, 간혹."

"뉴스를 보다가... 전문가 인터뷰 장면이 나올 때마다 배경에 보이는 책장에 무슨 책이 있는지 확인하게 되지 않아? 저 양반은 뭘 읽나..."

"응. 인터뷰 내용은 들리지도 않지."

"헤헤. 저도 그래요."

 

- "로렌스... 자넨 방금 독서 중독자들이 가장 난처해하는 질문을 투척했어. 거의 급조 폭발물 수준이라고. 관심 분야가 무엇인지, 어떤 배경 지식을 갖췄는지 등의 정보도 주지 않고... 다짜고짜 책을 추천해 달라니!!"

"무리다, 로렌스 놈아."

"!! 로... 로렌스 놈..."

 

- "받는 입장도 난처하긴 마찬가지야. '책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알려지면 책을 선물로 받을 때가 있지."

 

- "생일 축하해"

"고마워." 

'와, 무슨 책일까?'
[어 린 왕 자]

"..."

터벅 터벅.

철컹.

끼이이이.

휙~

 

- "역시 책을 추천하거나 선물하는 건 어려워. 상대의 소장 도서 목록을 내가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남방 우편기>를 달라고."
'<어린 왕자>를 주고받을 나이면... 30년 전 이야기를 꺼낸 건가...'

 

- "뭐, 누굴 난처하게 만들 의도로 책 추천을 부탁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선물은 당연하고. 그런데 독서 중독자란 족속은..."

 

- [처음 만난 자리(일반 버전)]

"영화... 좋아하세요?"

"좀비 영화 좋아해요."

"저는..."

 

- [처음 만난 자리(독서 중독자 버전)]

"..."

"..."

"..."

"..."

"음. 최근에 <파우스트>를 다시 읽었는데, 특히 2부의 스콜라적 전개가 좋더군요."

"좋죠! 백과사전적 야심이 있는 작품들. <부바르와 페퀴세> 같은."

"오, 저는 <모비 딕>!"

"<특성 없는 남자>!"

"<율리시스>!"

'역시 문학 취향이 같은 것만큼 사이를 가깝게 해 주는 것도 없지.'

"<유리알 유희>?"

"..."

'으윽. 다른 계열인가...!'

"..."

"..."

 

- [수십 년간 '헤비'하게 책을 읽어 온 결과, 독서 중독자들의 책 취향은 복잡하고 확고하고 제각각이다.]

 

- "그래서 중독자일수록 책 추천을 어려워하는 면이 있지."

"음.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해요. 그럼 여자 친구한테 뭘 선물할까요?"

"그런 건 또래한테 물어, 다마고치야!"

"자네 친구 없지?"

"내 여친이냐?"

"...."

 

- "어제 그 '블라인드 북' 기획이요."

"네, 설기 씨."

"다시 생각해 보는 거 어떨까요?"

"네?"

 

- "등장하는 잠수함은 어떤 종류지? 뱅가드급? 아스튜트급?"

"그런 건 잘 모르는데요. 그냥 큰 잠수함?"

"음. 그렇군. 계속하게."

"예."

 

- [독서 중독자들은 고전, 특히 <신곡> 같은 텍스트가 언급되면...]

'녹. 는. 다.'

 

- "이후 유사한 일을 몇 차례 더 겪고 나니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사람들은 자세한 사정도 모르면서 성급히 판단을 내리고 다짜고짜 분노할까? 그런데 그게 남 일이 아니었습니다. 돌이켜 보니 저 역시 전후 맥락도 모르고 육감으로만 결론 내릴 때가 꽤 있더군요. 그런 판단 오류를 해결할 방법을 이 책에서 찾았습니다." (대니얼 스텔더, <판단하지 않는 힘>)

"판단하지 않는 힘... 331.1... 문헌정보실 2층..."

 

- "사실 가장 강력한 방법은 친절하게도 제목에 나와 있습니다. 저는 원서 제목을 검색하는 편인데요. 두 제목을 종합해 보면... 다른 사람도 당신처럼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맥락을 살펴볼 것! 그리고 판단을 뒤로 미룰 것! 현재 전 세계가 골머리를 앓는 가짜뉴스에 대처할 때도 좋은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

"독서 중독자들은 절대 가짜뉴스에 넘어가지 않아!"

"..."

'그래. 독서를 통해 논리적 추론 능력이 강화됐을 테니...'

"독서 중독자들은 책 읽느라 그딴 거 볼 시간 없어!"

"..."

"..."

'감동 포인트 무엇?'

 

- "그 연체자는 통화도 안 돼요. 휴대폰 번호는 모르고, 집 전화는 자동 응답기로 넘어가고."
"요즘도 그런 걸 쓰는 사람이 있어요?"
"자동 응답기에서 녹음용 카세트테이프 돌아가는 소리도 들렸다니까요."

- [여기서 잠깐! '카세트테이프'가 뭔지 모르는 독자가 있다면 자신의 무지를 탓하지 마십시오. 검색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젊음을 누리시길.]

 

-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시리즈에 나온 독서법들은 문학 작품을 읽을 때 적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소설, 시, 에세이를 주로 읽는 분은 만화 속 캐릭터들이 이야기하는 독서 관련 팁에 공감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골고루 읽자'는 취지이긴 하지만, 독자 대다수가 문학 작품만 읽는 현실에서 너무 무책임한 처사 아니냐는 비난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SNS를 하지 않습니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시리즈에서 이런 면이 아쉬웠던 분은 강유원 선생님의 <문학 고전 강의>를 읽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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