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닐 게이먼] 스타더스트

일루젼 2023. 9. 27.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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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닐 게이먼 / 나중길
출판 : 노블마인
출간 : 2007.07.25


       

2007년이 벌써 16년 전이라는 사실이 쉽사리 믿기지가 않는다. 체감하는 시간의 밀도는 사람마다, 시기마다 달라지겠지만- 한 시대를 온전히 감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젊음의 특권 아닐까 싶다. 어느 시간대에서건 자신만의 추억과 함께 존재하게 될 때, 실제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없이 그 사람은 젊음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20대 때 <스타더스트> 영화를 봤었다. 당시에는 조금 기발한 페어리 테일이라고 생각하고 흘려 넘겼었는데, 문득 생각이 나곤 해서 소설을 읽어보았었다.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시간이 흘러 다시금 재독하고 리뷰까지 끄적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하다. 

 

참고로 다시 읽게 된 계기는 <닐 게이먼 베스트 컬렉션>에서 <스타더스트>의 발췌문을 읽게 되어서이다. (리뷰 순서는 조금 바뀌었지만) 역자가 다른 만큼 두 장면의 번역 또한 다르므로 각각 읽어보시길 권한다. 개인적으로는 나중길 역자의 번역 쪽이 좀 더 취향이었다.

 

동화처럼 읽어도 좋고, 알레고리로 읽어도 좋고, 여러 동화들의 패러디이자 풍자로 읽어도 좋다.

사랑은 세상을 구하지만, 세상에서 사랑만이 가장 중요한 것만도 아니다. 다양한 삶들과 가치관들이 담겨 있어서 좋았다. 이제는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즐거웠다.    

 


   


가거라, 떨어지는 별을 잡아라.

맨드레이크의 뿌리로 아이를 가져라.

모든 과거가 어디에 있는지,

누가 악마의 발을 갈라놓았는지 내게 말해다오.

인어의 노래를 듣는 법을,

질투의 쓰라림에서 벗어나는 법을 내게 가르쳐다오.

그리고 정직한 마음을 부추기는 바람을 찾아라. 

 

 

 

- 만약 그대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꿰뚫어 보는 신비한 시력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무수한 낮과 밤을 보내라. 그대의 머리가 온통 백발이 될 때까지. 그대는 내게 돌아와 그대가 겪은 모든 기이한 일들을 털어놓겠지. 그리고 이 세상 어디에도 참되고 순수한 여자는 없다고 맹세하며 말하겠지.

 

- 길을 따라 남쪽으로 쭉 내려가면 숲을 벗어난 지점에서 아스팔트로 포장된 진짜 도로가 나온다. 그리고 그 도로를 따라 좀 더 내려가면 도시와 도시를 오가는 자동차와 트럭들로 하루 종일 넘쳐나는 큰 도로가 나온다. 그 도로를 따라 계속 달려가면 런던에 닿지만, 그곳까지 가기 위해서는 밤새도록 차를 몰아야 한다. 

 

- 월 마을 사람들은 원래 말수가 적다. 이들은 마을의 터전이 된 화강암 바위처럼 잿빛 피부에 키가 크고 체격이 탄탄한 토박이들과 오래전에 마을로 흘러들어와 터를 잡고 대대로 살아온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 마을 아래의 서쪽은 숲이고 남쪽에는 북쪽 언덕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들이 모여 이루어진 호수가 있다. 호수는 기가 막힐 정도로 맑고 잔잔하다. 북쪽의 언덕 위에는 양들이 풀을 뜯는 들판이 있다. 그리고 동쪽 역시 숲이다.

 

- 마을의 바로 동쪽에는 잿빛 바위를 높게 쌓아 올린 성벽이 있다. 월이라는 다음 이름도 거기에서 나온 것이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그 성벽은 화강암 덩어리를 사각형으로 대충 다듬어서 투박하게 쌓아 올린 것으로 숲에서 뻗어 나와 마을을 둥그렇게 휘감고 다시 숲으로 들어가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성벽에는 통로가 딱 한 군데 있다. 마을에서 봤을 때 조금 북쪽에 있는 그 통로는 너비가 180센티미터 정도 되는 자그마한 문이다. 마을에서는 그 문을 통해 성벽 밖의 넓은 초원과 그 너머에 있는 개울, 그리고 그 건너편의 나무들을 볼 수 있다. 저 멀리 떨어진 나무들 사이에서 사람인지 동물인지 모르지만 가끔 어떤 형체들이 보일 때가 있다. 크고 작은 이상한 형체들이 번쩍하고 나타나 한동안 희미하게 가물거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 성벽 밖에는 정말 멋진 목초지가 펼쳐져 있지만 마을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곳에 동물을 풀어놓아 풀을 뜯게 하는 사람은 없다. 또 그곳에다 씨를 뿌리고 농작물을 가꾸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대신 그들은 수백 년, 아니 어쩌면 수천 년 동안 문의 양쪽에 보초를 세우고 아무도 지나가지 못하게 지킬 뿐, 초원을 이용할 생각은 아예 엄두도 내지 않는다.

 

- 오늘날에도 마을 사람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여덟 시간씩 돌아가며 밤낮으로 그 문을 지킨다. 보초를 서는 사람들은 나무로 만든 묵직한 곤봉을 하나씩 들고 마을 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그들이 맡은 주요 임무는 마을 아이들이 문을 통해 초원과 그 너머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가끔은 혼자서 어슬렁거리는 사람이나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을 타일러서 되돌려 보내는 경우도 있다. 

 

- 아이들은 곤봉을 치켜드는 몸짓만 보여도 달아나지만, 어슬렁거리는 사람이나 마을을 찾아온 사람에게는 잔꾀를 좀 더 부려야 한다. 그들은 씨앗을 뿌려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거나 고삐 풀린 소가 미쳐 날뛰며 돌아다닌다는 얘기를 해서 사람들을 돌려보낸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해도 통 먹혀들지 않을 때에만 마지막 수단인 물리력을 행사한다.

- 어떤 특별한 목적이나 사정이 있어서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매우 드물게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간혹 마을로 들여보낸다. 그렇게 찾아온 사람들은 눈빛만 보고서도 충분히 판단할 수 있고 그러한 판단은 틀리는 경우가 거의 없다. 

- 20세기에 들어서 그 문을 통해 어떤 물건을 빼내가거나 들여오는 사건은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또 그 점을 뿌듯해한다.

 

- 보초를 세우지 않는 날이 9년에 딱 하루 있는데, 그날은 바로 9년에 한 번씩 오월제를 맞이하여 초원에서 장이 열리는 날이다. 

- 여기에 소개하는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 빅토리아 여왕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다. 앨버트 공이 세상을 떠나 빅토리아 여왕이 검은 베일을 쓰기 전의 일이다. 그때만 해도 여왕의 두 뺨은 능금처럼 발그스름했고 발걸음은 용수철을 달아놓은 듯 활력이 있었다. 그래서 젊은 여왕은 총리 멜버른 경으로부터 경박하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여왕은 사랑에 푹 빠지긴 했지만 결혼을 하지는 않았다.

 

- 당시 찰스 디킨스는 자신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를 연재했고, 드레이퍼는 처음으로 달을 카메라에 담아 달의 창백한 얼굴을 차가운 인화지 위에 옮겨놓았으며, 모스는 전선을 통해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만일 여러분이 그들에게 마법이나 요정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면 그들은 분명 별 시답잖은 소리를 다 듣겠다는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어쩌면 아직 새파랗게 젊어서 턱수염조차 나지 않은 찰스 디킨스만은 감상에 젖은 눈빛으로 여러분을 바라보았을지도 모르겠다. 

 

-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세븐스 맥파이 여관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는 브리짓 콤프리를 사이에 두고 작년에 그녀와 데이트를 한 토미 포리스터와 어떤 사내 사이에서 기싸움이 벌어졌다. 체구가 거대하고 눈이 새카만 그 사내는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작은 원숭이를 데리고 있었는데, 브리짓이 자기 앞을 지날 때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던졌다. 술집 안에서는 단골손님들이 외지 사람들과 어색하게 앉아서 얘기를 나누었다. 
"9년에 딱 한 번밖에 안 열립니다."
"옛날에는 해마다 한여름에 장이 섰다고 하더군요."
"브로미오스 씨한테 물어보면 잘 알 수 있을 겁니다."

- 키가 크고 올리브색 피부를 지닌 브로미오스는 검은 곱슬머리에 녹색 눈동자를 지닌 청년이었다. 마을 아가씨들이 흠모하는 눈길로 바라보아도 쉽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제법 오래전에 이 마을로 흘러들어와 눌러앉은 그는 포도주를 잘 만들어 마을 사람들로부터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다. 

 

- 이미 전날 밤 비단 모자를 쓴 신사가 했던 말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오자 던스턴은 성벽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마치 가장 큰 금기사항을 깨뜨리는 사람처럼 바짝 긴장하면서 문을 통과했다. 그때 옆에서 어떤 신사가 고개를 까딱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검은색 비단 모자를 쓴 신사였다. 
"오, 집주인 양반, 그래, 오늘은 기분이 어떠신가?"
"아주 좋습니다."
"같이 다니며 구경이나 하세. 전에 여기에 와본 적 있나?"

그들은 풀밭을 가로질러 천막들이 세워진 곳으로 걸어갔다.

"9년 전 장이 섰을 때요. 제가 아주 어렸을 때죠."
"그렇다면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남들이 주는 선물을 함부로 받아서는 안 되네. 자네는 손님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돼. 그러면 이제 자네한테 나머지 숙박료를 지불하겠네. 약속을 했으니까 말이야. 내가 주는 선물은 효력이 오래가는 거라네. 자네와 자네가 낳는 첫째 아이, 그리고 첫째 손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거지. 그 선물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계속해서 유효한 거야.” 
"그게 뭐죠?"
"자네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는 거지."
던스턴은 신사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했고 두 사람은 장터로 걸어갔다.

- 꽃들은 서로 부딪히며 쨍그랑 소리를 냈는데 그것은 멀리서 들려오는 유리 종소리 같았다. 

 

- "어서 오세요. 장에 오신 걸 환영해요."
진열대 뒤편에 세워놓은 포장마차에서 주인이 기어 나오며 말했다. 거무스름한 얼굴의 여자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던스턴은 여자의 눈동자와 검은 곱슬머리 밑으로 드러난 귀를 보는 순간 외지에서 온 여자라는 걸 단박에 알아차렸다. 여자의 눈동자는 짙은 보라색이었고 부드럽게 굽은 귀는 가느다란 귀밑머리로 덮여있어서 마치 고양이 귀처럼 보였다. 어쨌든 상당한 미인이었다. 
던스턴은 진열대에서 꽃을 하나 집어 들었다.
"참 아름답군요."
제비꽃이었다. 그가 그것을 집어 들자 물에 젖은 손가락으로 포도주잔을 가볍게 문지를 때 나는 소리 같은 게 들렸다.

- "이건 가격이 얼마죠?"
여자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기쁜 마음에 그런 몸짓을 하는 게 분명했다.
"가격은 처음부터 얘기하지 않는 법이에요. 손님이 예상했던 것보다 가격이 비싸면 손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릴 거잖아요. 그럼 손님이나 저는 허탈감만 느끼겠지요. 이 제품에 관해 먼저 얘기나 나눠보죠."
던스턴은 입을 다물었다. 그때 마침 검은색 비단 모자를 쓴 신사가 진열대 앞을 지나갔다. 던스턴을 발견한 신사가 말했다.
"아, 여기 있었군. 그럼 이제 자네한테 진 빚은 다 갚았네. 숙박비를 전액 지불했단 말일세." 

- 던스턴은 마치 어지러운 꿈을 떨치기라도 하려는 듯 고개를 흔들고는 꽃 피는 젊은 여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꽃들은 어디서 가져온 겁니까?"
여자는 그런 질문을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캘러몬 산의 기슭에 가면 유리꽃이 자라는 숲이 있어요. 하지만 그곳까지 가는 길은 위험하고 돌아오는 길은 더 위험하죠."
"그런데 이 꽃들은 언제 사용하는 거죠?"
"이 꽃들은 주로 장식을 하거나 감상을 하려고 사지요. 이것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기뻐진답니다. 존경과 애정의 표시로 애인한테 선물할 수도 있고요. 그리고 꽃이 내는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빛을 반사하는 모습도 정말 아름답고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블루벨 한 송이를 들어 햇빛에 반사시켰다. 그 순간, 던스턴은 자줏빛 크리스털에 반사된 빛이 그녀의 눈동자에 어린 광채나 색깔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군요."

 

- "주문을 외워 마술을 걸 때도 이 꽃들을 사용해요. 혹시 손님은 마술사가...?"
던스턴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 그는 그 젊은 여자에게 특이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그러시군요. 마술사가 아니시더라도 이 꽃들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미소를 지었다.

- 던스턴이 깨달은 특이한 점이란 그녀의 손목에 감겨 있는 가느다란 은사슬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무릎에까지 내려와 있었고 진열대 뒤편에 있는 포장마차 안으로 이어져 있었다. 던스턴이 그 사슬을 가리키자 여자가 말했다.
"이 사슬 말이에요? 이것은 저를 진열대에 매어 두려는 거예요. 저는 이 진열대 주인인 마녀의 노예랍니다. 저는 오래전에 아빠가 다스리는 영토에서 마녀한테 유괴를 당했어요. 깊은 산속에 있는 폭포가에서 놀고 있었는데 예쁘장한 개구리로 변신한 마녀가 저를 계속 유혹했죠. 손으로 잡으려고 하면 개구리는 폴짝폴짝 뛰어서 달아난 거예요. 저는 개구리를 잡으려다가 그만 아빠의 영토를 벗어나게 되었고요. 그러자 마녀는 본모습을 드러내더니 저를 잡아서 자루 속에 집어넣더군요." 
"그럼 당신은 영원히 그 마녀의 노예가 된 건가요?"
"영원히는 아니에요."
그 말을 하면서 요정 같은 여자는 미소를 지었다.
"달이 자기 딸을 잃어버리는 날, 저는 자유를 되찾게 돼요. 두 먼데이가 하나가 되는 주에 그렇게 된대요. 저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때를 기다리는 중이에요. 그때까지 저는 명령에 따라서 행동하고 꿈을 꾸죠. 젊은 손님, 그럼 이제 이 꽃을 사시겠어요?" 

 

- "저는 던스턴이라고 합니다."
"이름을 들으니 정직하신 분 같군요."
여자는 놀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집게가 있으신가요, 던스턴(동명이인인 10세기에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던스턴은 영국 국왕들의 잘못을 솔직하게 지적했던 올곧은 인물로 철공예가이기도 했다. 악마를 능란하게 다룬 그의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 옮긴이 주)님? 악마의 코를 그걸로 잡아보시겠어요?" 

- "그런데 아가씨 이름은 어떻게 되죠?"
던스턴은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저는 이제 이름도 없어요. 노예가 되면서 이름까지 빼앗겼죠. 저는 그냥 '이봐', '아가씨', 또는 '이 바보 같은 년아' 등 온갖 저주의 말로 불릴 뿐이에요." 
던스턴은 비단옷이 몸에 착 달라붙어 우아한 곡선이 그대로 드러난 그녀와 몸과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에 침을 꿀꺽 삼켰다.

- 던스턴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동전을 싼 손수건을 꺼냈다. 이미 여자를 똑바로 보지 못하게 된 그는 서둘러 손수건을 풀고 진열대에 동전을 쏟아놓았다.
"이 꽃의 가격만큼 가지십시오."
그는 진열대에서 새하얀 아네모네 꽃을 집어 들며 말했다.
"저희는 돈을 받지 않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동전을 그에게로 밀어놓았다.
"돈을 안 받는다고요? 그럼 무엇을 받죠?"

 

- 이제 그는 속이 탔다. 그가 할 일은 데이지 헴스톡에게 가져다줄 꽃 한 송이를 빨리 사서 그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그런데 젊은 여자가 그의 심기를 극도로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제가 대가로 받을 수 있는 것들은 손님의 머리 색깔, 세 살 이전의 모든 기억, 아니면 왼쪽 귀의 청력이에요. 만일 제가 손님의 청력을 갖게 되면 손님은 음악이나 시냇물 흐르는 소리, 바람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없을 거예요."
던스턴은 고개를 저었다.
"그도 아니면 손님한테서 키스를 받을 수도 있어요. 제 뺨에 한 번만 키스해 주시면 돼요."
"그래요? 키스라면야 기꺼이 해 드리죠!"
던스턴은 진열대 너머로 몸을 기울이고 유리로 만든 꽃들이 내는 맑은 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부드러운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녀에게서는 향기가 났다. 마치 사람을 취하게 하는 어떤 마법의 힘이 담긴 향기가 그의 머리와 가슴, 그리고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 "이제 됐어요."
여자는 아네모네를 그에게 건넸다. 유리꽃을 건네받는 순간, 그는 여자의 손이 요정의 작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 손과는 전혀 달리 갑자기 크고 투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밤 달이 질 때 여기서 다시 만나요, 던스턴 쏜. 여기로 와서 올빼미 울음소리를 내세요. 그렇게 하실 수 있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러면서도 자기성이 ''쏜"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뺨에 키스했을 때, 그녀는 그의 성뿐만 아니라 마음등 다른 것들도 함께 그에게서 빼내어갔던 것이다. 

 

- "오, 데이지, 던스턴은 아주 약간 마법에 걸렸을 뿐이란다. 그러니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까지는 없어."
데이지의 어머니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랬다. 그러고는 자신의 풍만한 가슴에서 레이스 손수건을 꺼내더니 딸의 눈물범벅이 된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닦아주었다. 데이지는 고개를 들고 어머니를 바라보다 손수건을 낚아채 코를 킁하고 풀었다. 그리고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 잠시 후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모습을 본 그녀의 어머니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엄마, 어쨌든 저는 던스턴의 키스를 받았어요."
데이지 헴스톡은 유리꽃을 자신의 모자 앞부분에 꽂으며 말했다. 꽃은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쨍그랑 소리를 냈다.

 

-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데이지의 아버지와 던스턴의 아버지는 비로소 유리꽃을 팔고 있는 진열대를 발견했다. 그러나 진열대에는 어떤 할머니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할머니 옆에는 이국적이고 매우 아름다운 새 한 마리가 가느다란 은사슬로 발목이 횃대에 묶인 채 앉아 있었다. 두 남자는 할머니에게 던스턴의 일을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 할머니하고는 도무지 얘기가 되지 않았다. 할머니는 던스턴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고 준 그 꽃은 자기가 가장 아끼던 꽃이었다는 얘기와 요즘같이 각박한 세상에 그런 선물을 주었는데도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따지려는 두 사람의 태도가 괘씸하다는 얘기만 늘어놓았다. 

 

- 밤하늘에 흩뿌려져 빛났다. 그는 다시 한번 올빼미 울음소리를 냈다.
"그건 전혀 올빼미 소리 같지 않아요."
여자가 그의 귀에 대고 꾸짖듯이 속삭였다.
"흰 올빼미나 원숭이 올빼미 같아요. 잔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저는 수리부엉이가 내는 소린 줄 알았을 거예요. 어쨌든 그건 쇠올빼미 울음소리가 아니에요." 

 

- 던스턴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약간 바보스럽게 씩 웃었다. 요정 같은 그녀는 던스턴의 옆자리에 앉았다. 던스턴은 그녀에게 취했다. 그는 피부의 모공을 통해 그녀를 느끼고 그녀의 향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녀가 그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던스턴, 당신은 자신이 마법에 걸렸다고 생각하세요?"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맑은 시냇물처럼 주변에 있는 바위와 돌 위로 퍼져나갔다.
"당신은 마법에 걸린 게 아니에요, 귀여운 사람. 당신의 별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그녀는 풀밭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던스턴도 차가운 풀밭에 그녀와 나란히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은 분명히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다른 때보다 색깔이 더 진해 자그마한 보석처럼 빛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무수히 작은 별, 즉 성운들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까. 하여튼 밤하늘의 별들은 이상하면서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때...

 

- "당신은 인생에서 바라는 게 뭐예요?"

요정 같은 아가씨가 물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는 다시 자유를 얻고 싶어요."
던스턴은 팔을 뻗어 그녀의 손목에서 발목까지 드리워진 은사슬을 만져보았다. 그러다가 풀밭에서 일어나 사슬을 홱 당겨보았다. 사슬은 보기보다 억셌다.
"이 사슬은 고양이의 입김과 물고기의 비늘, 그리고 달빛을 은과 한데 뒤섞어 만든 거예요. 마법의 효력이 다할 때까지는 절대 끊을 수가 없어요."

 

- "이 사슬에 개의치 않고 살 수는 있어요. 아주 길거든요. 하지만 내가 사슬에 채워져 있다는 생각만 하면 진저리가 쳐져요. 아빠가 다스리는 땅도 그립고요. 게다가 마녀는 마음씨가 아주 고약한..."
거기서 그녀는 말을 멈췄다. 던스턴은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이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매만졌다. 뜨거운 눈물이 축축하게 손에 닿았다. 

 

- 방앗간 집 아들 해롤드 크러치백은 목소리가 허스키한 청년으로 트리스트란보다 예닐곱 살 정도 많았다. 환하게 미소 짓는 브로미오스 아저씨는 머리칼이 검고 곱슬곱슬했으며 녹색 눈동자를 지녔다. 그에게서는 포도와 포도주스, 그리고 보리와 밀 냄새가 풍겼다. 

 

- "어서 오게, 던스턴. 별일 없지?"
브로미오스의 인사에 던스턴 쏜은 간단히 대꾸를 한 뒤 날씨 얘기를 꺼냈다. 날씨가 나빠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큰일이라는 등 호랑가시나무 열매와 주목나무 열매를 보니 이번 겨울은 혹독하게 추울 것이라는 등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다. 두 사람의 얘기를 듣는 동안, 트리스트란은 초조하고 막막해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혀를 깨물고 잠자코 있었다.

 

- 마침내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브로미오스 씨, 그리고 해롤드, 두 분 모두 제 아들 트리스트란을 잘 아시죠?"
트리스트란은 어색하게 중절모를 벗으며 인사했다. 트리스트란이 인사를 하고 나자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두 분 모두 트리스트란의 출생을 잘 아실 겁니다."
브로미오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롤드 크러치백은 얘기를 들어본 적은 있지만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고 대답했다.
"그래요. 그 이야기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별이 떨어졌는데..."
트리스트란이 상황을 설명하려고 끼어들자 그의 아버지가 헛기침을 하여 아들의 말을 잘랐다.
브로미오스는 턱을 쓰다듬던 손으로 검은 곱슬머리를 이마 위로 쓸어 올렸다.

- 한편 트리스트란의 아버지는 아들의 손에 무언가 차가운 것을 쥐어주며 말했다.
"가져가거라. 그리고 가서 별을 가지고 돌아오너라. 아무쪼록 하느님과 모든 천사들이 항상 너와 함께 하시길 빌겠다."
그날 보초인 브로미오스와 해롤드 크러치백은 트리스트란이 지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순순히 비켜주었다.

 

- 싸늘하던 밤 기운이 어느새 조금씩 누그러졌다. 언덕 꼭대기 숲으로 들어가자 달빛이 나무들 사이를 환하게 비추었다. 그는 무척 놀랐다. 이미 한 시간 전에 달이 졌는데, 지금 둥그스름한 황금색 보름달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시간 전만 해도 하늘에 떠있던 달은 홀쭉하고 끝이 날카로운 은빛 초승달이었는데! 

- 그의 손에서 차가운 것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마치 유리로 만든 자그마한 성당의 종소리처럼 소리가 맑았다. 그는 손을 펴고 그것을 달빛에 비추어보았다.
유리로 만든 아네모네 꽃이었다.

 

- 따스한 바람이 불어와 트리스트란의 얼굴을 간질였다. 바람에서는 박하와 까치밥나무 이파리, 그리고 빨갛게 익은 자두냄새가 났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엄청난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떨어진 별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 또 별을 찾는 동안 어떻게 해야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지 생각하지도 않고 무턱대고 집을 떠난 것이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마을의 불빛들이 마치 열기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가물가물 흔들거리는 모습이라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자신이 지금 발길을 돌려 마을로 돌아가면 모두가 비웃을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혹시 이해할지 몰라도 빅토리아 포리스터는 비웃으면서 '가게 점원인 주제에'라는 말로 놀려댈 것이다. 별똥별은 아무나 찾는 게 아니라는 식으로 야유를 하겠지. 

 

-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빅토리아의 입술과 잿빛 눈동자, 그리고 웃음소리가 떠올랐다. 그는 어깨를 꼿꼿이 세우고 유리로 만든 아네모네 꽃을 풀어헤친 외투의 맨 위쪽 단춧구멍에 꽂았다. 두려움을 느끼기에는 모르는 게 너무 많은 트리스트란 쏜은 우리가 알고 있는 들판을 지나 요정의 땅으로 들어섰다.

- 휴온 산 봉우리를 깎아 만든 스톰홀드 성은 제1기 말엽과 제2기 초엽에 나라를 다스렸던 스톰홀드 성 초대 통치자의 작품이다. 그의 뒤를 이은 스톰홀드 통치자들은 계속해서 성을 확장하고 고치고 동굴을 만들어 이제 스톰홀드 성은 거대한 화강암 괴물의 날카로운 송곳니처럼 하늘을 할퀴는 듯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성의 꼭대기는 검은 구름이 지상에 비와 번개, 그리고 엄청난 재앙을 퍼부으며 아래로 내려가기 전에 머무르는 곳에 있었다.

 

- 스톰홀드의 81대 통치자는 썩은 이빨에 난 구멍처럼 가장 높은 봉우리를 깎아서 자기 처소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 너머에서도 죽음이 있던 때였다. 그는 자신의 처소로 자식들을 불러들였다. 이미 죽은 자식들과 아직 살아 있는 자식들이 한 곳에 모였다. 아버지의 싸늘한 대리석 방에 모인 그들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덜덜 떨며 죽은 자식들은 침대 왼편에, 살아 있는 자식들은 침대 오른편에 다소곳이 서 있었다. 그의 자식들 가운데 네 명, 그러니까 세컨더스, 퀸터스, 콰터스, 섹스터스는 이미 죽은 아들이었다. 그들은 실체가 없는 잿빛 형상들로 꼼짝도 하지 않고 말없이 서 있었다.

 

- 한편 아직 살아 있는 아들은 프리머스, 터티어스, 셉티머스 등이었다. 방의 오른편에서 그들은 불편해하며 딱딱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들은 말없이 서 있는 죽은 형제들이 못마땅한지 몸의 중심을 왼발에서 오른발로 번갈아 옮기는가 하면 손을 들어 뺨과 코를 긁적이기도 했다. 그리고 죽은 형제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아버지와 자기들만 이 차가운 방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창문은 화강암을 뚫어서 만든 커다란 구멍들로, 그곳을 통해 차가운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 아버지는 살아 있는 자식들이 죽은 자식들을 애써 무시하고 모른 체하는 까닭을 알지 못했다. 죽은 형제들이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러는지, 죽은 형제들을 살해한 죄책감 때문에 그러는지, 자신들의 범행이 발각될까 두려워서 그러는지, 유령을 두려워해서 그러는지 아버지는 알지 못했다. 사실 살아 있는 형제들은 각자 형제를 한 명씩 제거했다. 셉티머스만 귄터스와 섹스터스 두 명을 살해했다. 퀸터스를 죽일 때는 양념을 한 뱀장어 요리에 독약을 넣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섹스터스를 죽일 때는 별다른 계획도 세우지 않고 단번에 제거했다. 섹스터스와 함께 천둥 번개가 펼치는 장관을 감탄하며 지켜보다가 섹스터스를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버린 것이다.
 

- 81대 통치자는 자기가 숨을 거둘 때쯤 일곱 명의 왕자들 중 단 한 명만 살아남기를 내심 바랐다. 살아남은 그 한 명이 82대 통치자가 되어 높은 바위산을 다스릴 수 있기를 바랐다. 사실 그도 수백 년 전에 그런 식으로 81 대 통치자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자기가 젊었을 때와는 달리 요즘 젊은이들한테는 무언가를 기필코 쟁취하려는 욕심이나 뚝심, 패기만만한 기백 같은 게 없었다. 

 

-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 머지않아 내 시대는 막을 내릴 것이다. 내가 죽거든 산속 깊은 곳에 마련해 둔 조상들의 무덤으로 내 몸을 가져가서 여든한 번째 무덤, 다시 말해 유일하게 비어 있는 무덤에다 나를 묻도록 해라. 만일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너희는 모두 저주를 받을 것이고 스톰홀드 성도 무너져 버릴 것이다." 
살아 있는 세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죽은 아들 넷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기네의 몸은 독수리 밥이 되었다든지 급한 물살에 휩쓸려 내려가 결국 먼 바다까지 흘러가 시신조차 찾지 못한다든지 하는 사실을 원망하고 한탄하는 소리인 것 같았다. 

 

- 크고 낡은 침대 하나와 바퀴 달린 침대 두 개에는 담요가 한 장씩 덮여 있었다. 요리 기구들과 한쪽 구석에는 나무로 만든 커다란 새장이 비어 있는 채로 놓여 있었다. 창문은 얼마나 더러운지 밖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였고 집안의 모든 물건에는 기름때가 묻은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아 있었다. 
집에서 유일하게 깨끗한 건 검은 유리로 만든 거울이었다. 한쪽 벽에 기대어 놓은 거울은 교회 출입문만큼이나 폭이 넓었고 웬만한 남자의 키만큼이나 컸다. 

 

- 그 집에는 나이 든 여자 셋이 살고 있었다. 여자들은 돌아가며 큰 침대에서 잠을 잤고 저녁을 차렸으며 숲에 올가미를 설치해서 작은 동물들을 잡는가 하면 집 뒤쪽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왔다. 그런데도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 그 집에는 또 다른 세 여자가 있었다. 그들은 몸매가 날씬하고 피부가 검었으며 표정이 밝았다. 그들이 쓰는 방은 오두막집보다 몇 배나 더 컸다. 방바닥은 줄마노로 되어 있었고 기둥은 검은 돌로 되어 있었다. 그들의 뒤편에는 뜰이 있었고 하늘이 훤히 보여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었다. 뜰에 있는 분수의 인어 조각상은 기쁘게 입을 쫙 벌린 채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인어의 입에서 나오는 맑고 검은 물은 아래쪽 연못에 떨어져 연못에 비친 별들을 뒤흔들었다.

- 세 여자와 그들이 쓰는 방은 검은 거울 속에 들어 있었다.
늙은 여자 세 명은 숲에서 사는 마녀여왕 릴림이었다.
거울 속의 세 여자 역시 릴림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늙은 세 여자의 후계자들인지, 아니면 그들의 그림자에 불과한지 알 수 없었다. 또 숲에 있는 오두막집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뜰에서 별을 희롱하는 인어 모양의 분수를 갖추고 릴림이 검은 방에서 살고 있는지 어느 누구도 확실히는 알지 못했고, 그러한 것들은 릴림 외에는 어느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다. 

 

- 그러자 짐승을 손질하던 노파가 짐승의 머리 부위를 잡고서 목에서 사타구니까지 칼로 배를 쫙 갈라 내장을 도마 위에 꺼내놓았다. 붉은빛과 자줏빛, 그리고 자두 색깔의 내장과 물기에 젖은 보석 같은 몸의 주요 기관들이 먼지가 낀 도마에 모습을 드러냈다. 
노파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빨리 와, 빨리!"

 

- 아까 화장실에 갔다 왔던 가장 나이 어린 노파가 낡아빠진 서랍장으로 지독히도 느리게 걸어가더니 허리를 굽혔다. 그러고는 맨 밑의 서랍에서 녹슨 철제함을 꺼내 들고 두 언니에게 가져왔다. 상자는 낡은 끈 세 개로 묶여 있었다. 각각의 끈을 맨 매듭은 저마다 달랐다. 세 노파는 각자의 매듭을 풀었다. 잠시 후 상자를 가져온 노파가 뚜껑을 열었다.
상자 밑바닥에서 무언가가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얼마 안 남았어."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숲이 바다 밑에 있을 때부터 이미 노파였던 가장 나이 어린 여자가 말했다.
"새 걸 찾아서 다행이야, 안 그래?"
가장 늙은 노파가 손톱이 긴 손을 상자 속에 집어넣으며 날카롭게 말했다. 황금빛이 나는 무언가가 그녀의 손을 피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노파는 눈빛을 번뜩이며 꿈틀거리는 그것을 콱 움켜잡더니 자신의 입을 벌리고 그것을 입속에 던져 넣었다.

 

- 거울 속에서는 세 여인이 밖을 빤히 내다보고 있었다. 
모든 사물의 중심이 부르르 떨렸다. 
이제 검은 거울 속에서 밖을 바라보는 여인은 둘 뿐이었다.

- 오두막집에서 두 노파는 부러움과 희망이 뒤섞인 표정으로 키가 크고 아름다운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머리와 눈이 검고 입술은 새빨갰다.
"세상에...  여기는 너무 지저분하군."

 

- "여기 있군."
그리고 주홍색 가운을 들어 올린 뒤 침대 위에 던져놓고 입고 있던 누더기 옷을 벗었다. 두 여동생은 그녀의 발가벗은 몸을 부러운 듯 바라보았다. 
"내가 그녀의 심장만 가져오면 우리 모두 젊음을 되찾는 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두 여동생의 털이 난 턱과 움푹 들어간 눈을 못마땅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으로 꼬리를 물고 있는 작은 뱀 모양의 주홍색 팔찌를 손목에 찼다. 
"별이 필요해."
여동생 하나가 중얼거렸다.
"맞아, 별만 있다면."

다른 여동생이 맞장구를 쳤다.

 

- 트리스트란이 한 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10월은 멀어져 갔다. 그는 자신이 지금 여름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숲 속에 난 오솔길은 길 한쪽으로 산울타리가 높게 쳐져 있었다. 그는 그 길을 따라 걸었다. 그의 머리 위에서는 별이 반짝였고 보름달은 잘 익은 옥수수처럼 황금빛으로 환하게 빛났다. 산울타리 속에는 찔레꽃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피어났다. 

 

- 그는 별들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별들이 복잡한 춤을 품위 있고 우아하게 추고 있는 무용수들로 보였다. 그는 별들의 얼굴을 또렷이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얼굴이 창백한 별들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그 높은 곳에서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이 뒤엉키는 모습을 너무도 오래 보았고, 또 우리 모두가 그렇듯 자신을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가소로운 인간을 너무도 많이 보았다고 생각하면서 짓는 냉소 같았다. 

 

- 그러다가 그는 잠이 들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침실에 들어갔는데 이상하게도 그곳은 월 마을에 있는 교실이기도 했다. 여선생 체리 부인이 칠판을 탁탁 두드리며 학생들에게 모두 조용히 하라고 소리쳤다. 트리스트란은 무슨 과목을 공부하는지 궁금해서 자신의 석판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곳에 써놓은 글을 읽을 수가 없었다. 여선생 체리는 그의 어머니와 꼭 닮았는데 그는 그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고 무척 놀랐다. 하여튼 체리 선생은 트리스트란을 큰소리로 부르더니 영국의 모든 왕과 여왕들의 즉위 연도를 아이들 앞에서 외워 보라고 지시했다. 

 

- "이보게."
그때 누군가가 그의 귀에다 대고 작고 털이 묻은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꿈을 좀 조용히 꿀 수 없겠나? 자네의 꿈이 내 꿈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어. 나는 연대를 외우라면 골이 지끈지끈해지는 사람이야. 정복왕 윌리엄 1066년, 나는 그것까지는 외울 수 있어. 하지만 나는 왕 같은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거든."
"음?"
트리스트란은 잠에서 깨어나며 어리둥절해했다.
"미안하지만 꿈 좀 조용히 꾸라고 했네."
어떤 사람이 트리스트란에게 주의를 주었다.

"미안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의 꿈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 "아침식사 시간이야."
그의 귀 가까이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생 마늘과 버터에 튀긴 버섯요리야."
트리스트란은 간신히 눈을 떴다. 찔레나무 울타리 사이로 햇살이 비치면서 풀밭은 황금색과 녹색으로 얼룩덜룩했다. 그는 자신이 마치 하늘나라에 와 있는 것 같았다. 

 

- 트리스트란은 눈을 껌벅이며 양철그릇을 들고 손가락으로 커다란 버섯을 하나 집어 들었다. 매우 뜨거웠다. 그가 버섯을 조심스레 한입 베어 물자 버섯에서 나온 즙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그가 먹어본 음식 가운데 가장 훌륭했다. 그는 음식을 씹어서 삼킨 다음, 훌륭한 음식이라고 느낀 대로 말해 주었다. 
"마음씨가 착하구먼."
아침 공기 속에서 타닥거리며 연기를 피워 올리는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작은 사내가 말했다.
"맘씨 착한 친구임에 분명해. 하지만 알다시피 그건 야생버섯 튀김일 뿐이야. 그 어떤 것도 덧붙이지 않은 그저 그런..."

"좀 더 있습니까?"
몹시 배가 고팠던 트리스트란은 그렇게 물었다. 대단치 않은 음식도 무척 맛있게 느껴질 때가 간혹 있는 법이다.
"오, 예의가 바른 친구구먼."
늘어진 모자를 쓰고 후줄근한 외투를 입은 사내가 말했다.
"좀 더 있느냐고? 죽은 지 일주일이나 되어 고양이도 건드리지 않는 동물 같은 냄새가 나는 버섯인데 마치 영양고기 훈제나 삶은 메추라기 알을 더 달라고 하는 것 같군. 하여튼 예의는 바르군."
"괜찮다면 정말 버섯을 하나 더 먹고 싶습니다."


- 사내가 정말 사람인지 트리스트란은 확신이 없었다. 어쨌든 그 사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 불 위에서 지글지글 끓고 있는 냄비 쪽으로 손을 뻗어 칼로 커다란 버섯 두 개를 찍어서 트리스트란의 그릇에 놓아주었다. 
트리스트란은 입김을 후후 불어 음식을 식힌 다음 손가락으로 음식을 집어먹었다.
"대단해. 정말 버섯요리를 좋아하는 것처럼 아주 맛있게 먹는군."

키가 작고 털이 많은 사내의 목소리에는 자부심과 우울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트리스트란은 손가락을 빨며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사람에게 지금껏 먹어본 것들 중에 가장 맛있는 버섯요리였다고 말했다.
"지금은 그렇게 말하지만 한 시간만 지나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걸세."
사내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덧붙였다.
"인어를 봤다는 남편의 말을 믿지 않는 아내처럼 사람들은 분명히 자네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거야. 개러몬드에서 나누는 얘기를 스톰홀드에서 들을 수 있지. 말이란 그런 거야. 난 좋은 얘길 듣지 못했네." 

 

- "파플라고니아(흑해 남안, 소아시아 북부에 있던 고대 국가 - 옮긴이 주)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 양반은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면 살아 있는 뱀을 한 마리씩 집어삼켰다고 해. 그 양반은 뱀을 삼키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뱀까지 먹었으니 그날은 그보다 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사람들은 지네를 한 사발 그에게 먹인 다음 그 사람의 목을 매달았지. 그러니 그 사람이 했던 말이 결과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었지." 

- 사내는 모자를 벗어 가슴에 대고 트리스트란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참드'라고 해."
그렇게 말하면서 사내는 자기 가방의 옆구리를 톡톡 두드렸다. 거기에는 '참드'라는 이름과 함께 이해할 수 없는 글자들이 씌어 있었다. 사내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나는 한때 마법에 걸린 적이 있어. 자네는 그게 어떤 건지 알고 있겠지?"
그렇게 말하면서 사내는 곧바로 길을 걷기 시작했다.

- "이봐요! 좀 천천히 걸을 수 없어요?"
그 큰 가방에도 불구하고 '참드'인가 뭔가 하는 그 사내는 마치 다람쥐가 나무를 기어오르듯 걸음이 무척 재빨라 트리스트란과의 거리가 점점 벌어졌다. 트리스트란은 사내의 짐을 보자 <천로역정>에 나오는 기독교인의 짐이 생각났다. 체리 선생님은 월요일 아침마다 <천로역정>을 아이들에게 읽어주며 비록 땜장이(<천로역정>의 저자 존 버니언은 가난한 땜장이의 아들로 태어남  -옮긴이)가 쓴 책이긴 하지만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트리스트란의 말소리에 키 작은 사내는 가던 길을 급히 되돌아와 물었다.
"왜 그러나?"
"너무 걸음이 빨라서 도저히 못 따라가겠어요. 정말 빠르시네요."

 

- "그렇다면 그런 얘기는 건너뛰기로 하세. 하여튼 아름답다 치고, 그 아가씨는 도대체 어떤 어리석은 일을 하도록 자네를 이곳까지 보낸 건가?" 
그 순간 트리스트란은 나무로 만든 찻잔을 내려놓고 기분이 상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거만하고 경멸하는 어조로 물었다. 
"어째서 그 아가씨가 저한테 바보 같은 심부름을 하도록 보냈을 거라고 짐작하시는 거죠?"
사내는 흑옥 같은 새카만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네 같은 젊은이가 어리석게도 요정의 나라 경계를 넘었다면 그런 이유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곳에 들어올 만한 사람은 음유시인이나 사랑에 빠진 사람, 아니면 미치광이들뿐이니까. 그리고 내가 보기에 자네는 전혀 음유시인 같지 않아.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자네는 치즈 부스러기마냥 그저 평범한 사람인 것 같아. 그러니 사랑 때문에 이곳에 왔다고 쉽게 추측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야." 
"하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은 누구나 가슴에 미치광이가 들어 있고 머릿속에 음유시인이 들어 있죠."

- 트리스트란이 말의 사내가 미심쩍은 듯이 대꾸했다.
"그럴까? 그 점은 전혀 몰랐네. 어쨌든 자네가 살던 마을에는 아가씨가 있었고 그 아가씨가 돈을 벌어오라며 자네를 여기로 보낸 것 아닌가? 지극히 통속적인 이야기지. 자네는 사방을 헤매고 다니는 젊은 친구들을 쉽게 만날 수 있을 거야. 어떤 불쌍한 괴물이나 귀신이 수백 년 세월 동안 모아놓은 황금을 찾겠다고 말이야."
"아닙니다. 저는 금을 찾아 나선 게 아닙니다. 저는 방금 말씀드린 그 아가씨한테 한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저는... 아니 우리는 서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장담을 했습니다. 바로 그때 별이 하나 떨어지는 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별을 찾아서 그녀에게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별은 저 산너머에 떨어졌고요." 
그는 손을 들어 해가 떠오르는 방향에 있는 산맥을 가리켰다. 사내는 턱을 긁었다. 아니 주둥이 부위를 긁었다고 해야 정확할 것 같다.
"내가 자네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그야 모르죠."
그렇게 대답한 트리스트란은 가슴속에서 희망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 사내는 코를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대답했다.
"나라면 그 아가씨한테 가서 돼지우리에 얼굴이나 처박으라고 말했을 거야. 그리고 그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지 않을 다른 아가씨를 찾아 나섰을 거야. 자네는 그런 아가씨를 찾아야 해. 자네 마을이도 아가씨는 수도 없이 많을 텐데."
"다른 아가씨들은 다 필요 없습니다."
트리스트란이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자 사내는 코웃음을 쳤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짐을 꾸려서 함께 걷기 시작했다.

- "정말 별똥별을 가져올 생각인가?"
"예."
"내가 자네라면 그런 얘기는 어느 누구한테도 안 했을 거야. 그런 얘기에 이상할 정도로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거든. 그런 얘기는 함부로 입 밖에 내지 말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필요까지는 없어."
"그럼 저는 어떻게 말해야 하죠?"
"음... 예를 들어 사람들이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으면 그냥 저 뒤쪽에서 왔다고 대답하게. 그리고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보거든 그냥 저 앞으로 가는 중이라고만 말해."
"알겠습니다."

- 그들이 걷는 길은 이제 점점 어두워져서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찬 바람이 불어와 트리스트란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놓았다. 그는 추워서 몸을 덜덜 떨었다. 길은 가냘프고 창백한 자작나무들로 이루어진 회색 숲으로 이어져 있었다.
"별이 떨어진 곳까지 거리가 얼마나 될까요?"
"바빌론까지는 몇 킬로미터나 되나? 저번에 이곳을 지나갔을 때는 이 숲이 없었는데."
사내는 엉뚱한 말을 했다.

 

- 두 사람이 잿빛 숲 속을 걸을 때, 트리스트란은 <바빌론까지는 몇 킬로미터나 되나?>라는 시를 암송했다.

 

 

"110킬로미터 정도 되지.
촛불을 들고서 거기까지 갈 수 있을까?
그래, 가서 돌아올 수도 있지.
발걸음이 가볍고 빨리 걷기만 한다면,
촛불을 들고서 거기까지 갈 수 있지."

 


- "바로 그거야."
사내는 무슨 생각에 사로잡힌 듯, 아니면 마음이 조금 불안한 듯 머리를 좌우로 갸웃거렸다.
"이건 그냥 동요일 뿐입니다."
"동요일 뿐이라고? 내 말을 믿게. 요정의 나라에는 그런 대단치 않은 주문을 가르쳐주기만 해도 7년 동안 힘든 일을 해주겠다는 사람들이 있지. 그런데 자네가 떠나온 마을에서는 그런 동요를 아무 생각 없이 아기들에게 들려주고 있나 보군... 추운가?"
"그렇게 물어보시니까 조금 추운 것 같은데요."
"주위를 둘러보게. 길이 보이는가?"
트리스트란은 눈을 껌뻑였다. 잿빛 숲으로 빛과 색깔, 그리고 거리를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들이 길을 따라 걷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길을 보려고 아무리 애써도 길은 마치 환각처럼 어른거리다가 사라져 버렸다. 그는 이 나무, 저 나무, 그리고 저 바위를 길의 이정표처럼 마음에 새기며 바라보았다. 하지만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어둠과 어스름, 그리고 창백하게 서 있는 나무들뿐이었다. 

- "우리가 걸려들었어."
사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달릴까요?"
트리스트란은 모자를 벗어 가슴 앞에 들고 물었다.
사내는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쓸데없는 짓이야. 우리는 제 발로 덫에 걸려든 거야. 이제 뛰어봤자 여길 빠져나갈 수는 없어."

- 사내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무로 다가갔다. 그리고 자작나무 같아 보이는 키가 크고 허연 나무의 둥치를 힘껏 발로 걷어찼다. 그러자 메마른 나뭇잎이 몇 개 떨어지면서 가지에 매달려 있던 어떤 하얀 것이 메마른 휘파람 소리를 내며 땅에 굴러 떨어졌다.
트리스트란은 그쪽으로 다가가 바닥을 살폈다. 그것은 깨끗하고 새하얗게 말라버린 새의 해골이었다.
사내는 몸을 부르르 떨며 트리스트란에게 말했다.
"나는 여기에다 성을 쌓을 수도 있어. 하지만 함께 성을 쌓을 사람이 없어. 그런 사람이 나타날 가능성은 우리가 여기를 빠져나갈 수 있는 가능성만큼이나 희박해. 하늘을 날아도 이곳을 빠져나갈 수가 없어. 저 새를 보면 알 수 있잖아."
그는 짐승의 앞발 같은 자신의 발로 새의 해골을 툭툭 건드렸다.
"그리고 자네 같은 사람은 굴을 뚫는 방법도 모르지 않나. 하기야 그런 방법을 쓰더라도 여기를 빠져나갈 수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말이야." 
"우리가 철저히 무장을 하면 어떨까요?"
"무장을 한다고?"
"놈들이 나타나기 전에 말입니다."
"놈들이 나타나기 전에? 이 멍청한 친구야, 그 자들은 이미 우리 곁에 있어. 나무들이 바로 우리의 적이란 말이야. 우리는 죽음의 숲에 걸려든 거라고."
"죽음의 숲이라고요?"
"모두 내 탓이야. 우리가 통과하는 곳이 어디인지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어. 이제 자네가 별똥별을 가져오긴 글렀군 그래. 나도 찾고 있는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없게 되었고 말이야. 언젠가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자가 우리의 새하얀 해골을 발견하게 되겠지."

- 트리스트란은 주위를 살펴보았다.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나무들은 어둠 속에서 더욱 울창해진 것 같았다. 그는 사내가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거나 관한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그때 뭔가가 그의 왼손을 콕 찔렀다. 벌레일 거라는 생각에 반사적으로 그 부위를 툭 쳤다. 내려다보니 옅은 노란색 이파리였다. 이파리는 땅에 떨어지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의 손등에서는 붉은 핏줄이 부풀어 올랐다.
숲은 두 사람에 관해 소곤거렸다.

 

-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을까요?"
"내 생각에는 아무것도 없네. 우리가 진짜 길을 찾을 수만 있다면... 죽음의 숲이라 해도 진짜 길까지 파괴하지는 못하거든. 다만 진짜 길을 숨기고, 우리가 길에서 벗어나도록 유혹할 뿐이지."
사내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트리스트란은 손을 들어 이마를 문질렀다.
"저... 저는 길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저쪽이에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사내의 구슬 같은 검은 눈이 반짝 빛을 냈다.
"확실한가?"
"예, 확실합니다. 저 잡목숲을 통과해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길이 나옵니다."
"그걸 어떻게 알지?"
"그냥 알고 있습니다."
"좋아, 가보세!"
사내는 짐을 들고 트리스트란이 따라올 수 있도록 천천히 달렸다. 트리스트란은 가슴이 쿵쾅거렸고 숨이 차서 헐떡거렸다. 가죽 가방은 자꾸만 흔들리면서 그의 다리에 부딪혔다. 

 

- "자네 술 같은 건 안 갖고 다니지? 혹시 따뜻하고 달콤한 차라도 있나?"
"죄송하지만 그런 건 없습니다."
그러자 사내는 코를 킁킁거리며 자신의 짐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잠시만 돌아서서 있게. 훔쳐볼 생각일랑 말고."
트리스트란은 몸을 돌렸다.
부스럭거리며 짐을 뒤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가방의 자물쇠를 채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젠 돌아서도 좋네."
사내는 유약을 바른 병을 하나 들고 마개를 빼내려고 무진장 애를 썼지만 제대로 안 되는 것 같았다.
"제가 한번 해볼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트리스트란은 자신의 말에 사내가 자존심을 상하지 않았길 바랐다. 하지만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다.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병을 선뜻 건네주었던 것이다.
"한번 해보게. 자네는 손가락이 있으니까 가능하겠지."

- 트리스트란은 병의 마개를 붙들고 당겨서 뽑아냈다. 순간 병에서 장작 연기와 정향을 꿀과 뒤섞은 것 같은 지독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그는 사내에게 병을 건넸다.
"이렇게 귀하고 좋은 걸 입을 대고 마신다는 건 죄악이지."
사내는 그렇게 말하면서 벨트에 매달린 나무 컵을 푼 다음 떨리는 손으로 노르스름한 액체를 컵에다 조금 따랐다. 그리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은 뒤 한 모금 마시더니 작고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아, 이제야 살 것 같군."
사내는 컵을 트리스트에게 건넸다.
"조금씩 천천히 마시게. 아주 귀한 거니까. 파르스름한 빛이 나는 커다란 다이아몬드 두 개, 노래를 부르는 기계장치가 되어 있는 파랑새 한 마리, 그리고 용의 비늘을 주고서 겨우 얻은 술이야."
트리스트란은 술을 조금 마셔보았다. 순간 발바닥까지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면서 머릿속에서 미세한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떤가, 좋지?"
트리스트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지만 이건 자네나 나 같은 사람에겐 어울리지 않는 귀한 술이야. 그래도 지금과 같은 큰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한잔 해야 되지 않겠나. 자, 이제 이 숲을 빠져나가도록 하세.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지?"
"저쪽입니다."
트리스트란이 왼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내는 술병의 마개를 막아주머니에 찔러 넣고 가방을 어깨에 둘러멨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잿빛 숲 사이에 나 있는 녹색 길을 따라 함께 걸어갔다.

- 몇 시간 뒤, 하얀 나무들이 듬성듬성 보이기 시작했고 그들은 죽음의 숲을 벗어나 높은 둑을 따라 늘어선 나지막한 돌담 사이를 걸었다. 자기들이 걸어온 길을 트리스트란이 돌아다보았을 때 숲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직 자줏빛 관목으로 뒤덮인 언덕들이 보일 뿐이었다.
"여기서 좀 쉬었다 갈까. 할 얘기도 있으니까. 자, 앉게."
사내는 커다란 짐을 내려놓고 그 위로 앉아서 길가의 바위에 앉은 트리스트란을 내려다보았다.
"나로선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어. 자, 말해 보게. 자네는 어디에서 왔지?”
"월 마을에서요.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부모님은 누구신가?"
“아버지는 던스턴 쏜, 어머니는 데이지 쏜이십니다." 
"음... 던스턴 쏜 씨라. 그래, 자네 아버지를 한 번 만난 적이 있네. 나를 하룻밤 재워줬지. 괜찮은 사람 같더군. 하룻밤 잠자리를 찾는 사람에게 충분한 친절을 베풀지는 않았지만." 
그는 입 주변을 긁었다.
"그래도 이해가 안 돼... 자네 가족 중에 무언가 특이한 사람은 없는가?"
"제 여동생 루이자가 귀를 꿈틀거리는 재주가 있습니다."
그러자 사내는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자신의 크고 털이 많은 귀를 그 자리에서 흔들어 보였다.
"아니, 그런 것 말고. 가령 할머니가 한때 유명한 마법사였다던가, 아니면 삼촌 중에 그런 사람이 없었는가 말이야. 그도 아니면 자네 집안사람들 중에 요정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 있지 않은지 묻는 거네." 
"제가 알기로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트리스트란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사내는 말머리를 돌렸다.
"월 마을은 어디에 있나?"
사내의 물음에 트리스트란은 손가락으로 마을 쪽을 가리켰다.
"그럼 디베이터블 언덕은 어디에 있지?"
트리스트란은 주저 없이 다시금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캐터베리안 섬은?"
트리스트란은 이번에는 남서쪽을 가리켰다. 사내가 말하는 캐터베리안 섬이나 디베이터블 언덕은 트리스트란으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의 위치를 그는 자신의 왼발이나 코의 위치만큼이나 확신을 가지고서 대답했다. 
"흠, 그렇다면 여왕 폐하의 광활한 암소 농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
트리스트란은 고개를 저었다.
“여왕 폐하 암소 농장의 트랜스루미나리 성은 알고 있나?"
트리스트란은 확신을 가지고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러면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 말이네."
트리스트란은 잠시 생각해 본 다음 대답했다.
"월 마을이 저쪽이라면 파리도 분명히 그쪽 방향일 겁니다."
"놀랍군."
사내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 "요정의 나라에서 자네는 어디든 찾아갈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자네가 살아온 실제 세계에서는 그렇지가 못해. 월 마을을 제외하고 말이네. 그것이 자네의 한계지. 자네는 사람을 찾을 수 없어. 하지만 이보게, 젊은이. 자네는 떨어진 별을 찾을 수 있겠나?" 
트리스트란은 즉각 한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입니다."

 

- "가방엔 뭐가 들었나?" 
트리스트란은 여행 가방을 열어서 보여주었다.
"사과와 치즈, 빵 반쪽, 그리고 어묵이 한 통 있습니다. 주머니칼과 갈아입을 속옷, 그리고 모직 양말 두 켤레 하고요. 옷을 좀 더 챙겨 올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묵은 남겨두게."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머지 음식을 정확하게 반으로 잘랐다.
"자네 덕을 많이 보는군."
그렇게 말하면서 사내는 사과를 한입 베어 먹었다.
"나는 도움을 받으면 절대 안 잊는 사람이네. 우선 자네의 옷부터 손보기로 하세. 그러고 나서 그 별을 찾으러 함께 떠나는 거야. 괜찮겠나?"
"정말 고맙습니다."
트리스트란은 힘차
게 말하고 나서 치즈를 썰어 빵 위에 얹었다.

 

- 트리스트란 쏜, 자기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어리석은 약속을 했다네.
바지도 외투도 셔츠도 다 찢어지고, 비참한 신세가 되어 여기에 앉아 있다네. 

머잖아 사모하던 아가씨의 조롱감이 되겠네. 

얼간이 멍청이 트리스트란 쏜.

- "어서 꺼져버려, 이 바보 같은 것들아!"
트리스트란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손에 당장 잡히는 게 없어서 그들을 향해 모자를 집어던졌다.

- 레벌리 마을에 들어갔던 사내가 돌아왔을 때, 트리스트란은 산사나무 덤불 옆에서 담요를 둘러쓰고 모자를 잃어버린 것을 몹시 슬퍼하며 앉아 있었다. 아득한 옛날부터 음침하고 칙칙한 마을을 왜 '환락'을 의미하는 '레벌리'라고 이름을 붙였는지 아무도 몰랐다.
"제가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사람들이 험담을 했어요. 빅토리아 포리스터 말이에요. 어떻게 감히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거죠?"
"그 자그마한 친구들은 무슨 일이든 자기들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야. 헛소리도 많이 하고. 하지만 그들이 하는 얘기에도 일리는 있어. 그들이 하는 얘기에 무조건 귀를 기울이는 것도 위험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무시하는 것도 위험해." 
"머잖아 사모하던 아가씨한테 제가 조롱을 받을 거라고 했어요."

"정말로 그렇게 말하던가?"
사내는 그렇게 물으면서 갖가지 옷을 풀밭 위에 펼쳐놓았다. 달빛 속이었지만 트리스트란은 늘어놓은 옷들 가운데 어느 것도 자신이 맡겼던 것과 비슷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월 마을에서 남자들은 갈색과 회색, 그리고 검은색 옷을 입었다. 안색이 매우 불그스레한 농부들이 두른 새빨간 목도리라도 햇볕과 비로 인해 곧 색이 바래지고 수수한 색깔이 되어버렸다. 트리스트란은 풀밭 위에 늘어놓은 빨간색과 적갈색, 그리고 황갈색 옷들을 바라보며 순회극단 배우들의 복장이나 그의 사촌 조안이 알아맞히기 게임을 할 때 함 속에 넣어둔 옷들 같다고 생각했다. 
"제 옷은요?"
"이제 이것들이 자네 옷이야."
사내는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자네가 입던 옷들과 바꿔왔지. 이 옷들이 훨씬 좋아. 보게, 쉽게 찢어지지도 않아. 그리고 아직 이만하면 새것이고. 이제 더 이상 이방인 표시를 내서는 안 돼. 이곳 사람들은 이런 옷들을 입어."

- 트리스트란은 교과서에 나오는 야만스런 원주민처럼 담요로 몸을 감싼 채 사내에게 옷을 다시 가져오라고 요구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부츠를 벗어버리고 담요를 땅에 내려놓고는 사내의 지시대로 곧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 새 부츠는 지금까지 신던 부츠보다 발에 더 잘 맞았다. 옷도 확실히 더 깨끗하고 좋아 보였다. 흔히 하는 말처럼 옷이 사람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멋진 깃털이 멋진 새를 만드는 것도 아니지만 옷은 간혹 요리를 할 때 들어가는 양념 같은 역할을 해줄 때가 있다. 새빨간 옷과 밝은 황색 옷을 입은 트리스트란은 외투와 수수한 옷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던 예전의 트리스트란과는 확실히 달랐다. 걸을 때에도 저도 모르게 으스대며 걷게 되었고 발걸음에는 예전에 없던 활기가 넘쳐흘렀다. 이제 그는 턱을 당당히 치켜들었고 예전에 중절모를 쓰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빛이 두 눈에 반짝였다. 사내가 레벌리 마을에서 가져온 훈제송어, 갓 삶은 콩, 건포도 케이크 몇 조각, 그리고 맥주 한 병으로 식사를 마쳤을 무렵, 트리스트란은 새 옷이 무척 편안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자네는 별이 떨어진 곳이 정확히 어딘지 알고 있지?" 
트리스트란은 망설이지 않고 어두운 지평선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렇다면 별이 있는 곳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아나?" 
트리스트란은 이제까지 거기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자기도 모르게 다음 말이 튀어나왔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잠을 자기 위해 간혹 걸음을 멈추고, 달이 여섯 번 정도 차고 이우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험준한 산을 넘고 뜨거운 사막을 건너면 별이 떨어진 곳에 닿을 겁니다." 
그것은 평소 그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와는 전혀 달랐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네." 

 

- "그리고 별을 찾아 나선 사람은 자네뿐만이 아닌 것 같은데. 예전에 내가 한 말 기억하지?"
"똥을 눌 때는 땅을 파서 묻으라는 얘기 말입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럼 제 이름과 목적지를 어느 누구한테도 밝히지 말라는 말씀말인가요?"
"그 얘기도 아니네."
"그럼 무슨 얘기 말입니까?"
"바빌론까지는 몇 킬로미터나 될까?"
사내가 읊조렸다.
"아, 예. 이제 기억납니다."
"촛불을 가지고 그곳에 갈 수 있을까? 갔다가 돌아올 수도 있지. 대부분의 초로는 불가능해. 하지만 이것은 다르지."

 

- 사내는 짐가방에서 돌능금 크기의 양초를 꺼내 트리스트에게 건넸다.
트리스트란은 그것을 들고 여느 초와 다른 구석을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수지초가 아니라 밀랍초였으며 자주 사용한 탓인지 많이 녹아버린 상태였다. 중앙의 심지도 까맣게 탄 흔적이 있었다.
"이걸로 어떻게 하죠?"
"사용해야 할 때가 있을 거야."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서 짐에서 다른 것을 꺼냈다.
"이것도 받게. 나중에 필요할 거야.”

- 그것은 달빛을 받아 빛이 났다. 트리스트란은 그것을 받아 들었는데 사내가 건넨 것은 양쪽 끝에 고리가 달린 가느다란 은사슬이었다. 은사슬은 차가웠고 미끈거렸다.
"이게 뭐죠?"
"별것 아냐. 난쟁이들이 고양이 입김과 물고기 비늘, 그리고 물방아용 연못에 비친 달빛을 섞어 만든 거지. 별을 가져오려면 그게 필요할 거야."
"그래요?"
"그럼."
트리스트란은 은사슬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바라보았다. 그것은 순간순간 모양이 바뀌는 것 같았다.

 

- "이제 자네는 다음과 같이 해야만 해. 오른손에 초를 들게. 불은 내가 붙여줄 테니까. 그리고 별을 찾으러 가게 별을 가지고 올 때, 그 은사슬을 이용하도록 하고. 초에 심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서둘러야 할 거야. 꾸물거렸다간 나중에 후회하게 될 거야. 가볍고 빠르게 걷는 거야,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트리스트란은 기대감에 차 있었다.
사내는 한 손을 뻗어 초에 불을 붙였다. 위는 노랗고 아래는 파란 불꽃이 일었다. 그때 한바탕 바람이 불어왔지만 촛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 트리스트란은 촛불을 손에 들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촛불은 그의 주위를 대낮처럼 밝혀주어 모든 나무와 덤불, 그리고 풀잎까지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한 걸음을 내딛자 그는 자신이 연못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촛불은 물 위를 환히 비추어주었다.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 ...

 

- "그렇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은사슬의 한쪽 고리를 풀어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에 채웠다. 그녀는 은사슬이 손목을 죄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비통한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분노와 증오의 수준을 넘어선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뭐예요? 지금 대체 뭐 하는 거예요?"
"당신을 우리 마을로 데려가려는 겁니다. 그렇게 하기로 맹세를 했거든요."
바로 그 순간, 촛불이 약해지면서 파르르 떨리더니 심지의 끝부분이 밀랍이 고인 자리에 떠다녔다. 한순간 촛불은 높게 타오르면서 골짜기와 아가씨, 그리고 그의 손목과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연결한 은사슬을 환하게 비추었다.
다음 순간, 촛불은 꺼져버렸다.

 

- 아가씨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게 있어요. 당신은 누구이고, 또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인지 모르지만 나는 당신을 도와줄 생각이 조금도 없어요. 그리고 나는 할 수 있는 한 당신의 계획을 좌절시킬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감정이 실린 말을 한마디 덧붙였다.
"바보 멍청이."

 

- "당신들도 잠을 잡니까?”
"물론이죠. 하지만 밤에는 자지 않아요. 밤에는 반짝여야 하니까."
"그렇군요. 저는 잠을 좀 자 둬야겠습니다.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군요. 이래저래 저한테는 무척 힘겨운 하루였습니다. 당신도 잠을 좀 자두는 게 좋을 겁니다. 먼 길을 가야 하니까요."
날이 훤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트리스트란은 골짜기에 가죽가방을 내려놓고 그것을 베고 누웠다. 그리고 은사슬로 연결된 파란색 옷차림의 아가씨가 내뱉는 온갖 모욕과 경멸의 말을 무시하려고 최대한 애썼다.


- 그는 자기가 돌아가지 않으면 그 키 작고 털 많은 사내가 어떻게 할 것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빅토리아 포리스터는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녀는 자기 아버지의 농가에 있는 자기 방 침대에서 아마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또 6개월 동안 걷는 거리는 얼마나 멀고, 가는 동안 무엇을 먹어야 할지도 생각해 보았다.
별은 도대체 무엇을 먹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 "나는 이것에 맞았던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옷 속에 손을 넣어 커다랗고 누르스름한 돌을 꺼냈다. 그것은 은사슬 길이의 두 배나 되었다.
"이 돌에 맞아 제 옆구리는 멍이 들었고 나는 하늘에서 떨어졌어요. 그리고 이제 나는 이것을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해요."
"그건 왜죠?"
그녀는 곧바로 대답을 하려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입을 꽉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오른편에서는 시냇물이 졸졸졸 그들과 보조를 맞추며 흘러갔다. 

 

- "좀 편한 길은 없나요? 제대로 된 길이라든지 평원 말이에요.”
참다못해 별 아가씨가 물었다.
그제야 트리스트란은 대꾸할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한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으로 800미터 정도만 가면 길이 나옵니다."
그는 몸을 돌려 다른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잡목숲을 넘어가면 평원도 나오고요."
"길을 잘 알아요?"
"예. 아니, 당신이 물어보니까 문득 대답이 떠올랐을 뿐입니다."

 

- 공터의 한가운데, 그러니까 그들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진 풀밭 위에서 화려한 황금 왕관 하나가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왕관에는 빨갛고 파란 보석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트리스트란은 그것들이 아마도 루비와 사파이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왕관이 놓여 있는 곳으로 건너가려고 했을 때, 별 아가씨가 그의 팔을 건드리며 말했다. 
"잠깐만요, 북소리 안 들려요?"
그제야 그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깨달았다. 낮게 둥둥 울리는 그 소리는 두 사람을 둘러싼 사방에서 들려왔다. 어떤 것은 가까이에서, 또 어떤 것은 멀리서 들려왔는데, 그 소리는 여러 언덕에 메아리쳤다. 

- 곧이어 공터의 저쪽 끝에서 나무들이 부딪히며 내는 커다란 소리가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다음 순간, 숲에서 아주 커다란 흰 말 한 마리가 옆구리에 피를 철철 흘리며 튀어나왔다. 말은 평원 한복판으로 달려 나오더니 몸을 돌려 머리를 숙이고는 자신을 쫓아오는 상대와 마주 섰다. 말을 쫓아오는 상대는 사방을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를 내며 평원으로 달려 나왔다. 트리스트란은 그 소리만 듣고서도 온몸이 그 자리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 말을 뒤쫓아온 것은 다름 아닌 사자였다.  

- 말은 겁을 잔뜩 집어먹은 것 같았다. 말의 갈기는 땀과 피에 젖어 엉망이었고 두 눈은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라했다. 그때 트리스트란은 말의 이마 한가운데에 상아빛 뿔이 길게 솟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그것은 전설상의 동물인 일각수, 즉 유니콘이었다. 말은 뒷발에 몸을 싣고 앞발을 하늘로 한껏 치켜세우더니 콧김을 내뿜으며 히힝 길게 울었다. 그러면서 편지를 박지 않은 날카로운 앞발로 사자의 어깨 부위를 걷어찼다. 그러자 사자는 마치 뜨거운 물에 덴 커다란 고양이처럼 울부짖으며 화들짝 놀라 황급히 물러났다. 이제 사자는 자신을 겨누는 유니콘의 날카로운 뿔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유니콘의 주변을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맴돌았다. 
"싸움을 말려요. 저러다가 둘 다 죽을 거예요."
별 아가씨가 속삭였다.

 

- "제발 어떻게 좀 해봐요. 저러다 유니콘이 죽겠어요."
별 아가씨가 다급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트리스트란은 한껏 사나워진 두 짐승한테 다가가면 자신은 뿔에 받히거나 발길질을 당하고,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 잡아먹힐 것이라고 그녀에게 설명하려고 했다. 또 설령 죽지는 않는다 해도 물한 양동이도 없는 상황에서 자기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하려고 했다. 전통적으로 월 마을에서는 싸우는 두 짐승을 떼어놓을 때 물 한 양동이를 퍼붓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하지만 이러한 생각들이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평원의 한가운데, 그러니까 손만 뻗으면 두 짐승에게 곧장 닿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다. 사자한테서 풍겨 나오는 강렬한 동물적 냄새만으로도 살이 떨렸지만 그는 코앞에서 유니콘의 애원하는 검은 눈빛을 보았다. 사자와 유니콘은 왕관을 차지하려고 싸우는 거야. 트리스트란은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하며 오래된 동요를 기억해 냈다.

 

사자가 유니콘을 쫓아온 마을을 휘젓고 다니네.
사자가 유니콘을 한 번 물어뜯고 두 번 물어뜯고 온 힘을 다해 물어뜯네. 
사자는 세 번이나 물어뜯었는데 아직도 힘이 남아 있다네. 



- 그리고 그는 풀밭에서 왕관을 집어 들었다. 왕관은 납처럼 무겁기도 하고 부드럽기도 했다. 그는 두 동물에게 다가가서 아버지의 농장에서 기르던 심술궂은 숫양과 흥분한 암양한테 얘기할 때처럼 사자에게 말했다. 
"자, 자, 이제 그만 화 풀어라. 이 왕관을 줄 테니까..."

사자는 마치 고양이가 스카프를 물고 흔들듯 유니콘의 목을 물고 흔든 뒤 무척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트리스트란을 바라보았다. 

"자, 자."
사자의 갈기에는 나무 부스러기와 이파리가 묻어 있었다. 트리스트란은 묵직한 왕관을 사자에게 내밀었다.
"네가 이겼어. 그러니 이제 그만 유니콘을 놓아줘."
그는 한 걸음 더 사자에게 다가가서 떨리는 두 손으로 사자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었다.

- 사자는 납작 엎드린 유니콘의 몸에서 천천히 기어 내려와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말없이 평원을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숲 가장자리에 다다른 사자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새빨간 혀로 상처를 핥은 다음, 마치 지진이 일어날 때처럼 몸을 부르르 떨고는 숲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 별 아가씨는 부상을 입은 유니콘에게로 절뚝거리며 다가가 엉거주춤 풀밭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부러진 다리를 한쪽 옆으로 뻗은 뒤 유니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불쌍한 유니콘."
그녀의 말에 유니콘은 눈을 뜨고 검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무릎 위에 머리를 올려놓더니 다시금 눈을 감았다.

- 그날 저녁, 트리스트란은 마지막으로 남은 딱딱한 빵조각을 먹었다. 별 아가씨는 여전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다만 유니콘의 옆에 있어줘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는 그녀의 의견에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 이제 평원은 어두워졌다. 그들의 머리 위로는 수천 개의 별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별 아가씨도 은하수가 스치고 지나간 것처럼 몸에서 빛이 났다. 유니콘도 구름에 가린 달처럼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을 냈다. 트리스트란은 거대한 유니콘 옆에 누웠다. 동물이 발산하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별 아가씨는 유니콘을 사이에 두고 저쪽 편에 누웠다. 그녀는 유니콘을 위해 무슨 노래인가를 흥얼거렸다. 트리스트란은 그 노랫말을 좀 더 똑똑히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간간이 들려오는 노랫소리는 이상하게도 감칠맛이 났지만 소리가 너무 작아 도무지 무슨 노래를 하는지 그로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 그는 손가락으로 두 사람을 이어놓은 은사슬을 만져보았다. 그것은 눈처럼 차가웠고, 물레방아용 연못에 비친 달빛이나 저물녘에 먹이를 찾아 물 위로 튀어 오르는 송어의 은빛 비늘처럼 가냘픈 사슬이었다. 
그는 이내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 마녀여왕은 마차를 끄는 흰 염소 두 마리가 힘들어할 때마다 채찍으로 옆구리를 내리치면서 숲 속의 오솔길을 내달렸다. 거의 1킬로미터 전방의 길가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불꽃을 본 그녀는 자기와 같은 종족 가운데 한 사람이 피운 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녀들이 피운 불은 독특한 색깔을 띠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밝은 색으로 칠한 집시 포장마차에 다다르자 염소들의 고삐를 끌어당겨 마차를 멈췄다. 머리가 잿빛인 노파가 불 옆에 앉아 꼬챙이에 꿴 산토끼를 돌려가며 굽고 있었다. 토끼의 벌어진 배에서 기름이 뚝뚝 떨어지면서 지글거렸기 때문에 주변의 공기는 고기 굽는 냄새와 나무가 타면서 내는 연기 냄새로 뒤섞였다. 

- 잿빛머리의 노파가 마녀여왕에게 말했다.
"저는 단지 꽃을 파는 불쌍한 노파에 불과하고 어느 누구한테도 해를 끼친 적이 없는 늙은이지만 화려하고 멋지게 꾸민 당신 같은 사람을 보면 왠지 두렵고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군요."
"당신을 해치지는 않겠어요."
마녀여왕의 말에 얼굴이 추한 노파는 눈을 가늘게 뜨고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말은 그렇게 하시지만,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하는 이 늙은이가 어떻게 그 말을 믿을 수 있겠어요? 한밤중에 내 모든 것을 훔쳐 달아나거나 그보다 더한 일을 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노파가 꼬챙이로 불씨를 뒤적이자 불은 다시 활활 타올랐다. 고기 굽는 냄새가 바람 한점 없는 밤하늘에 진동했다.

"오, 그렇게 얘기하지 마세요."
빨간 드레스를 입은 마녀여왕이 말했다. 
"우리의 자매 관계, 릴림의 권력, 그리고 내 입술과 가슴, 처녀성을 걸고 맹세하건대 절대로 당신을 해치지 않고 귀한 손님을 대하듯 할게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요. 이리 와서 앉으세요. 금방 저녁을 차려서 내놓을게요."
노파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맙게 초대를 받아들일게요."
마녀여왕이 대답했다.

 

- "멋진 염소들이네요."
노파가 그렇게 말하자 마녀 여왕은 고개를 숙이며 겸손하게 웃었다. 그녀의 손목에 감긴 작은 주홍색 뱀 모양의 팔찌가 불빛에 반사되어 빛났다.
노파가 계속해서 말했다. 
"이제 내 눈이 도무지 예전 같지 않지만 내가 볼 때 저 친구들 중에 하나는 처음에 네 발이 아니라 두 발로 걸었던 친구 같은데, 그렇지 않나요?"
"그런 일도 있다고 하더군요."
마녀여왕이 순순히 시인했다.
"당신의 저 화려한 새도 그렇지 않나요?"
"저 새는 내가 거의 20년 전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을 하나 주고서 받은 거예요. 그런데 그 뒤로 저 새가 얼마나 골치를 썩이는지 말도 못 해요. 그래서 해야 될 일이 있거나 꽃 가판대를 운영할 때가 아니면 저렇게 새가 되어 지내도록 한 것이지요. 힘든 일도 마다 않는 튼튼하고 착실한 하인을 구하면, 저 새를 평생 저렇게 살도록 만들어 버릴 참이에요." 
횃대에 앉아 있는 새가 구슬프게 짹짹거렸다.

- "사람들은 나를 마담 세멜이라고 부르지요."
'계집아이였을 때는 모두들 당신을 도랑물 샐이라고 부르며 놀려댔지.'
마녀여왕은 속으로 비아냥거렸지만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대신 이렇게만 말했다.
"저는 모와네그라고 해요."
그녀가 밝힌 이름은 사실 노파를 놀려주려는 가명에 불과했다. 모와네그는 바다의 파도를 의미하는데, 그녀의 진짜 이름은 차가운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지 오래되었다.

- 마담 세멜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 안으로 들어가더니 색깔을 칠한 나무그릇 두 개와 나무손잡이가 달린 칼 두 개, 그리고 약초를 말리고 빻아서 녹색가루로 만든 작은 병을 가지고 나왔다.
"나는 싱싱한 나뭇잎을 접시 삼아 손가락으로 먹으려 했어요."

노파는 그렇게 말하며 그릇 하나를 마녀여왕에게 건넸다. 그릇에는 해바라기가 그려져 있었지만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렇지만 당신같이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경우가 얼마나 자주 있겠어요? 그래서 최고급 식기들만 내왔지요. 자, 머리와 꼬리 중에 어느 쪽을 드시겠어요?"

- 마담 세멜은 뼈가 앙상한 손가락으로 자신의 몸을 껴안고 앞뒤로 흔들며 탄성을 질렀다.
"별의 심장이라고? 호호! 그렇게 귀한 거라면 당연히 내가 차지해야지. 그것을 실컷 먹고 나도 젊음을 되찾아야겠어. 잿빛 머리를 예전의 금발머리로 되돌리고 젖가슴도 다시금 풍만하고 봉긋하게 만들어야지. 그러고도 남는 게 있다면 월 마을의 장터로 가져가 팔아야겠다. 좋아!" 
"그런 짓을 해선 안 돼."
마녀여왕이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안 된다고? 손님이면 손님답게 굴어야지. 네 스스로 맹세했잖아. 내가 만든 음식도 맛보았고. 우리의 자매 관계 규칙에 따르면 이제 당신은 어떠한 해도 내게 끼칠 수 없다고."
"흥! 너를 해칠 수 있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아, 도랑물 샐. 이것만 알려주지. 림버스 풀을 먹은 사람은 몇 시간 동안 진실만을 말하게 되지만 한 가지 더..."
그녀가 말을 하는 동안 멀리서 번개가 번쩍였고 숲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마치 모든 잎과 나무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았다.
“분명히 얘기하겠는데, 당신은 올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정보를 훔쳤지만 그러한 정보는 아무 소용도 없을 거야. 왜냐하면 당신은 별을 볼 수도, 인식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것을 만지거나 맛을 보거나 발견하거나 죽일 수 없기 때문이지. 설사 다른 사람이 별의 심장을 도려내어 당신한테 준다고 해도 당신은 그것이 무엇인지, 당신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거야. 이것은 지금 진실만을 얘기해야 하는 내 입에서 나왔으니 거짓말이 아니야. 또 한 가지 알려주지. 우리의 자매 관계 협정에 걸고 당신을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내가 그런 맹세만 안 했다면 당신을 딱정벌레로 만들어 다리를 하나씩 모두 떼어내 새들이 주워 먹도록 했을 거야. 나한테 감히 이런 모욕을 안긴 대가로 말이야." 


- 마담 세멜은 겁에 질려 한껏 커진 눈으로 불꽃 너머에 앉아 있는 손님을 건너다보았다.
"당신 누구야?"
"내 동생들과 카나딘을 통치하던 나를 잊었느냐?"
빨간 드레스를 입은 마녀여왕이 말했다.
"그럼 당신이...? 하지만 당신은 오래전에 죽었는데..."
"사람들은 릴림이 오래전에 죽었다고들 말하지. 하지만 거짓말이야. 다람쥐가 참나무로 자라날 도토리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거든. 그 참나무는 베어져서 어떤 아기의 요람을 만드는 데 쓰이겠지. 자라나서 나를 살해할 아기 말이야."
그녀가 그 말을 하는 동안 활활 타오르는 불에서 은빛 섬광이 일었다.

- 그때 마녀여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토끼고기가 담긴 그릇을 불속에 집어던졌다.
"당신은 그렇게 될 수 없어. 내 얘기 못 들었어? 내가 이곳을 떠나자마자 당신은 나를 만난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할 거야. 당신은 이 모든 일을 잊어버릴 거라고. 내 저주까지도. 오래전에 손발이 잘려나간 부위가 가렵듯이 기억을 못 한다는 사실로 한동안 괴롭고 짜증이 나겠지. 앞으로는 손님을 정성껏 대접하도록 해.” 
그때 나무그릇이 불꽃을 일으키며 타올랐다. 불꽃이 높게 타올라 저 높은 곳에 있는 참나무 잎사귀까지 태워버릴 것 같았다. 마담 세멜은 꼬챙이로 새까맣게 변한 나무그릇을 불속에서 꺼내더니 풀밭에서 발로 밟아 불을 껐다.
"그릇을 불속에 던져버리다니,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지?"

- 그녀는 횃대에 앉아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은 새에게 말했다.
"점점 늙어가고 있어. 어떻게 손을 써볼 수도 없고 말이야."

새는 횃대 위에서 불편한지 몸을 옆으로 움직였다.
빨간 다람쥐 한 마리가 약간 망설이다가 불빛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도토리 한 개를 주워서 앞발에 쥐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다가 다람쥐는 얼른 달아났다. 도토리를 땅에다 파묻고 잊어버리기 위해. 

- 화강암 바닥에 세워진 스케이스 에브는 자그마한 항구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상인과 목수, 돛 만드는 사람들, 손가락이나 팔다리가 없는 늙은 선원들이 살고 있었다. 늙은 선원들은 자신들이 술집을 운영하거나 그런 술집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 지냈다. 이들은 턱수염이 허옇게 세어버린 지 꽤 되었는데도 여전히 수염을 길렀다. 이 마을에는 매춘부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을 매춘부라고 여기는 여자도 없었다. 하지만 추궁을 당한다면 이 배를 타는 남편과 6개월, 또 저배를 타는 남편과 몇 개월 몸을 섞으며 지낸다고 실토할 여자가 적지 않았다. 
배는 9개월마다 항구로 되돌아와 한 달가량 머물렀다.

- 대다수 사람들은 이러한 생활방식에 만족했다. 그리고 자기 여자가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동안 바다에 나갔던 남편이 돌아오면 싸움이 일어나긴 했지만, 다행히 싸움에서 진 사람은 술집에서 마음을 달랬다. 선원들은 이러한 생활방식에 불만을 품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생활하면 설령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아내 한 사람만은 자기의 죽음을 슬퍼해 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내도 자신의 남편이 역시 부정한 짓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알고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바다를 상대로 경쟁을 벌일 수는 없었다.

 

- 그들을 뒤따라오다가 가끔 자신의 커다란 이마로 별 아가씨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전날 사자의 공격을 받아 얼룩무늬가 있는 옆구리에 붉은 꽃처럼 생겨난 상처는 이제 말라서 밤색이 되었고 그 위에 딱지가 앉았다. 

 

- 한편으로 트리스트란은 유니콘을 타고 간다는 생각은 신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니콘은 말이 아니라서 인간과 말 사이의 오래된 계약의 적용을 받지 않았다. 유니콘의 검은 눈에는 야성이 깃들어 있었고 이리저리 튀듯이 걷는 걸음걸이는 위험하고 길이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다른 한편으로 트리스트란은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유니콘이 별 아가씨를 걱정하고 돕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잠깐만요, 걸음을 뗄 때마다 아가씨가 내 계획을 망가뜨리겠다는 얘기를 떠올리지만 유니콘을 타고 잠시만이라도 가는 게 어떨까요? 유니콘이 괜찮아한다면 말입니다."
별 아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때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트리스트란은 몸을 돌려 유니콘의 우물 같은 검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내 말 알아듣겠니?"
그렇게 물었지만 유니콘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 "옳지! 별이 제 발로 오고 있군." 
산길을 따라 불어온 바람이 마치 그녀의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윙윙 소리를 냈다.

- 두꺼운 검은색 망토를 걸치고 꺼져가는 불 옆에 앉아 있던 프리머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검은 말 한 마리가 잠에서 깨어났는지, 아니면 꿈을 꾸는지 콧김을 뿜으며 히힝거리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프리머스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추워 보였다. 그는 덥수룩하던 턱수염이 그리웠다. 그는 꼬챙이로 불씨 속에 들어 있는 진흙 공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양 손바닥에 침을 뱉은 다음 뜨거운 진흙을 갈라 고슴도치의 살점에서 나는 달콤한 냄새를 맡았다. 그가 잠들어 있는 동안 타다 남은 장작불 속에서 천천히 익은 고기였다. 그리고 고기를 발라먹고 나면 자그마한 뼈를 불속에 버리면서 꼼꼼하게 아침식사를 했다. 그는 단단한 치즈와 약간 신맛이 나는 백포도주를 가지고 고슴도치를 씻어 내렸다. 

- 그는 음식을 먹고 나서 손을 옷에 문질러 닦은 뒤 스톰홀드의 광활한 영토와 바위가 많은 마을들에 대한 통치권을 안겨줄 토파즈를 찾기 위해 마법의 기호들을 던졌다. 그런 다음 작은 사각형 모양의 붉은 화강암 조각들을 혼란스러운 눈길로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그것들을 다시 집어 손가락이 긴 손안에 넣고 흔든 다음, 땅바닥에 던지고 다시금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프리머스는 깜부기불을 향해 침을 뱉었다. 그러자 느리게 칙칙 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조각들을 쓸어 모아 벨트에 달린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 트리스트란 쏜은 꿈을 꾸었다. 
그는 사과나무에 올라가 창문을 통해 옷을 벗고 있는 빅토리아 포리스터를 훔쳐보고 있었다. 그녀가 원피스를 벗자 탱탱한 몸을 감싼 속옷이 드러났다. 그때 트리스트란은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나뭇가지가 부러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다음 순간, 그는 달빛을 받으며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는 달 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달이 그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달은 그의 어머니 목소리를 약간 상기시키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발... 그 애를 지켜줘. 내 아이를 지켜달란 말이야. 우리 아이를 해치려는 자들이 있어.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어."
그리고 달은 뭐라고 더 얘기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은 저 아래 연못에 비쳐 번들거리는 달빛으로 변했고 그는 작은 거미 한 마리가 자신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깨닫고 목에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손을 들어 거미를 뺨에서 조심스럽게 쓸어냈다. 아침해가 그의 눈에 들어왔고 세상은 황금색과 초록색으로 온통 빛나고 있었다. 

- "꿈을 꾸었구나."
그의 위쪽 어딘가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억양은 이상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는 머리 위에서 너도밤나무 잎사귀들이 부딪히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예..."
그는 나무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도 일단 그렇게 대답했다. "꿈을 꾸었어요.”
"나도 간밤에 꿈을 꾸었어."
그 목소리가 말했다.
"꿈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숲 전체가 보이더라. 그리고 거대한 무언가가 그 사이를 뚫고 움직이고 있었어. 그것은 점점 가까이로 다가왔지. 마침내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어." 
그녀가 갑자기 거기서 말을 멈췄다.
"그게 뭐였는데요?"
트리스트란이 물었다.
"모든 것이었지. 그건 판(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목양신 - 옮긴이 주)이었어.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말이 많은 다람쥐였는지 까치였는지, 아니면 물고기였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판이 이 숲 전체를 소유하고 있다고 했어. 그래, 사람들이 생각하는 소유하고는 개념이 다르지. 숲을 누군가에게 팔거나 숲 가장자리에 담을 쌓는 것도 아니니까." 
"함부로 나무를 벨 수도 없을 테고요."
트리스트란이 동조하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둘 다 말이 없었다. 그는 여자가 어디로 가버린 것이나 아닌지 궁금했다.
"여보세요? 어디 가셨어요?"
그의 머리 위에서 다시금 잎사귀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
여자가 일렀다.
"미안합니다."
트리스트란은 자신이 무엇을 사과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그렇게 말했다.

 

- "판이 이 숲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래 맞아.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야. 사실 모든 것을 가질 수도 있어. 그것이 자신의 소유라는 걸 알고 그냥 내버려 두기만 하면 돼. 판은 그런 식으로 이 숲을 소유하고 있어. 그런데 꿈속에서 그 사람이 나한테로 왔어. 너도 내 꿈에 나타났고. 어떤 불쌍한 아가씨를 사슬로 묶어 데려가더군. 그 아가씨는 참 불쌍한 아가씨였어. 판이 나더러 너를 도와주라고 했어."
"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속이 따뜻해지며 내 잎사귀 끝에서부터 뿌리까지 온몸이 따끔거리며 흥분에 젖는 것을 느꼈어. 그렇게 잠에서 깨어났는데 네가 내 둥치 옆에 머리를 눕히고 곤하게 잠들어 있더군. 킁킁거리는 돼지처럼 코까지 아가면서 말이야." 

 

- "글쎄요. 숲의 요정이었을 때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신은 아주 멋진 나무예요."
나무는 즉각 대답하지 않고 나뭇잎을 흔들어 아름답게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냈다.
"나는 요정이었을 때도 제법 깜찍했어."
그녀가 수줍어하며 말했다.

- "그런데 정확히 어떻게 도와주라고 하던가요?"
트리스트란이 그렇게 말한 뒤 변명을 덧붙였다.
"제가 지금 불평을 하는 게 아니라 사실 지금 저는 어떤 도움이든 받아야 해요. 하지만 나무는 그러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잖아요. 당신은 저랑 이 자리를 떠날 수도 없고, 제게 먹을 것을 줄 수도 없고, 별을 여기로 데려올 수도 없고, 또 제가 사랑하는 아가씨를 만날 수 있도록 월 마을로 보내 줄 수도 없잖아요. 비가 온다면 저를 위해 비를 막아줄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비도 내리지 않고..."
나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말해 줄래?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없을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도록 말이야."

- 트리스트란은 반감이 일었다. 그는 별 아가씨가 자기한테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유니콘이 달리는 속도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겪었던 일을 한가하게 늘어놓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자신이 모험에 나선 이후 지금까지 그런대로 순탄하게 오게 된 것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 그래서 그는 나무 아래에 주저앉아서 너도밤나무에게 생각나는 대로 자신에 관한 모든 얘기를 들려주었다. 빅토리아 포리스터를 향한 자신의 순수하고 진실한 사랑에 관해. 두 사람이 다이티스 언덕에 있을 때 떨어지는 별을 보았고 그 별을 가져다주기로 그녀에게 약속했던 것을 말해 주었다. 또 마을을 나와 요정의 나라에 들어선 일, 털이 많고 키가 작은 사람과 자신의 모자를 가지고 달아난 작은 요정들, 마법의 촛불과 별 아가씨를 숲 속의 공터에서 만난 사실, 사자와 유니콘의 이야기와 별 아가씨를 잃게 된 사연을 자세히 말했다.

- 그가 이야기를 마치자 한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너도밤나무의 잎사귀들은 처음에는 산들바람에 흔들리듯 부드럽게, 그다음에는 폭풍에 휘둘리듯 강하게 몸을 떨었다. 그런 다음 나뭇잎들의 흔들림은 격렬하지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일 그 아가씨를 사슬로 묶어두었는데 그 아가씨가 어떻게 해서 스스로 달아났다면 나로 하여금 너를 돕도록 만들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야. 판이나 영국 여왕 자신이 내게 그런 부탁을 했더라도 나는 꿈쩍도 안 했을 거야. 하지만 네가 그 아가씨의 사슬을 풀어주었기 때문에 나는 너를 도와줄 마음이 생겼어."
"하여튼 고맙습니다."
"그럼 이제 세 가지 진실을 말해 줄게. 두 가지는 지금 얘기해 주겠지만 나머지 한 가지는 네가 꼭 필요로 할 때 알려줄게. 그때가 언제인지는 너 스스로 판단해야 해."

 

- "첫째, 지금 별 아가씨는 큰 위험에 빠져 있어. 숲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순식간에 가장 멀리 떨어진 경계에까지 알려져. 나무들이 바람에게 소곤거리면 바람은 자기가 들은 말을 가장 먼저 닿는 숲에 전하거든. 별 아가씨에게 해를 입히려는 세력들이 있어. 이건 단순히 해를 입히는 정도가 아니야. 그러니 너는 별 아가씨를 찾아내서 보호해 줘야 해." 
트리스트란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나무가 말을 계속했다.
"둘째, 숲 속에는 길이 하나 있어. 저기 서 있는 전나무를 지나 몇 분만 가다 보면 그 길로 마차 한대가 내려오는 게 보일 거야. 서둘러야 해. 그렇지 않으면 마차를 놓쳐버릴 테니까."
나무가 또다시 얘기했다.
"그리고 셋째, 두 손을 이리 내밀어 봐."
트리스트란은 나무의 말에 따라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머리 위에서 너도밤나무의 구릿빛 이파리 하나가 뱅글뱅글 돌면서 미끄러지듯 떨어지다가 그의 오른쪽 손바닥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자, 그럼 됐어. 그걸 잘 보관해. 그리고 가장 필요로 할 때 나뭇잎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봐. 이제 마차가 거의 다 왔어. 자, 빨리 뛰어가! 빨리!"

- 트리스트란은 가방을 집어 들고 뛰어가면서 잎사귀를 상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숲 속에서 땅을 박차고 점점 가까이로 달려오는 동물의 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이제 마차를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절망했지만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해 숨 가쁘게 뛰었다. 그의 귀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가슴이 쿵쾅거리며 요동을 치는 소리와 숨을 급히 들이마시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내뿜는 씩씩거리는 소리밖에 없었다. 그가 무성하게 자란 고사리 덤불을 헤치고 쏜살같이 달려 마침내 길에 다다랐을 때 저쪽에서 마차가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새까만 말 네 필이 끄는 검은색 마차였다. 마부석에는 기다란 검은색 망토를 걸친 얼굴이 창백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트리스트란이 서 있는 지점에서 마차까지의 거리는 이제 스무 걸음 정도 되었다. 트리스트란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마차를 소리쳐 부르려 했다. 하지만 입안이 바짝 말라버려 바람소리만 입에서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는 크게 소리치려고 애써봤지만 이번에도 색색거리는 목쉰 소리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마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의 곁을 그냥 지나쳐버렸다.

- 트리스트란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가다듬었다. 그러다가 그는 별 아가씨가 걱정이 되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숲 속에 나있는 길을 따라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그렇게 걷기 시작한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그는 아까 그 검은 마차를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 웬만한 나무 둥치만 한 거대한 나뭇가지 하나가 참나무에서 떨어져 말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혼자서 마차를 타고 가던 사람은 길을 가로막고 있는 참나무가지를 길가로 치우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 "이런, 빌어먹을."
기다란 검은색 망토를 걸친 사내가 투덜거렸다. 트리스트란은 사내의 나이가 40대 후반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폭풍은커녕 바람도 안 불었는데 나뭇가지가 툭 부러지면서 앞길을 막는 통에 말들이 깜짝 놀랐잖아."
그의 굵고 낮은 목소리는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 트리스트란은 사내를 도와 말들의 고삐를 마차에서 풀어낸 다음 참나무 가지에다 묶었다. 트리스트란과 사내가 나뭇가지를 밀고 말들은 앞에서 끌어당겨 결국 길 옆으로 나뭇가지를 끌어낼 수 있었다. 트리스트란은 가지를 떨어뜨려 길을 막아준 참나무와 너도밤나무, 그리고 숲의 주인인 판에게 마음속으로 감사를 한 다음, 사내에게 숲을 벗어날 때까지 자기를 좀 태워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길가는 사람을 함부로 태우지 않는데." 
사내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제가 없었다면 아저씨는 아직도 여기에서 옴짝달싹도 못하셨을 것 아닙니까. 신이 저를 아저씨께 보낸 것처럼 아저씨를 제게 보내주신 게 틀림없습니다. 저는 아저씨가 가시는 길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길을 가시다 보면 또 도움을 받고 반가워하실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사내는 트리스트란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런 다음 그는 벨트에 달린 벨벳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네모 모양의 빨간 화강암 조각들을 한 줌 꺼내며 말했다.
"이 중에서 하나를 집어보게."
트리스트란은 돌조각 하나를 집어서 거기에 새겨진 기호를 사내한테 보여주었다. 
"흠."
사내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또 하나 집어보게."
트리스트란은 사내의 말대로 또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하나 더.”
사내는 다시금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좋아, 마차에 올라타게. 기호들을 보아하니 마음이 놓이는군. 위험은 있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가다 보면 또 나뭇가지가 길에 떨어져 있을 거야. 그리고 원한다면 이 앞쪽 마부석에 앉아도 돼. 나랑 나란히 앉아서 얘기나 나누며 가세."


- 트리스트란은 마부석에 자리를 잡으면서 참 신기한 일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마차에 올라타서 처음 안쪽을 흘깃 들여다보았을 때 그는 얼굴이 창백한 다섯 명의 신사가 얼핏 그의 눈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신사들은 하나같이 잿빛 얼굴에 슬픈 표정을 짓고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금 안쪽을 들여다보았을 때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 마녀여왕의 말을 이해한 것 같은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생명이 없는 것들은 항상 생명이 있는 것들보다 변화시키기가 힘들어. 생명 없는 것들의 영혼은 더 늙고 어리석어서 설득하기가 까다롭단 말이야. 내가 예전처럼 젊기만 하다면... 이 세상의 개벽 무렵에는 나도 산을 바다로, 그리고 구름을 궁궐로 변화시킬 수가 있었어. 또 해변의 조약돌을 가지고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도시를 만들 수 있었는데. 아, 다시 젊어지기만 한다면..." 
그녀는 한숨을 내쉬면서 한쪽 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파란 불꽃이 한동안 일었다. 그녀가 손을 내리고 허리를 구부려 마차에 손가락을 갖다 대자 불꽃은 사라졌다. 그녀는 똑바로 섰다. 그녀의 칠흑 같던 머리에는 이제 드문드문 잿빛 머리카락이 보였고 눈 밑으로도 검버섯들이 보였다. 하지만 어느새 마차는 사라지고 그 대신 자그마한 여관이 서 있었다. 

 

- "유니콘을 보았다고 했나?"
트리스트란은 유니콘을 만난 얘기를 모두 해주려고 하다가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간단히 대답했다.
"예, 무척 기품 있는 짐승이었습니다."
"유니콘은 달의 피조물이지. 나는 아직 한 번도 유니콘을 본 적이 없지만 얘기를 듣자 하니 유니콘은 달을 섬기면서 달의 지시에 복종한다고 하더군. 우리는 내일 저녁쯤에 저 산에 닿을 수 있을 거야. 오늘은 해질녘쯤 되어서 마차를 세워야겠네. 원한다면 마차 안에서 자도 좋아. 나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옆에서 잘 테니까."
사내의 어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트리스트란은 사내가 무엇인가를 무척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속으로 놀랐다. 그날 밤, 산 정상에서는 번갯불이 번뜩였고 트리스트란은 마차의 가죽의자에서 귀리 자루를 베고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는 유령과 달, 그리고 별들을 보았다. 

 

- 벽난로 앞에는 주석으로 만든 욕조가 있었는데 여주인은 욕조 주위로 종이 칸막이를 세워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어떤 물로 목욕을 하고 싶어요?”
여주인이 부추기듯 그렇게 물었다.
"미지근한 물, 뜨거운 물, 아니면 펄펄 끓는 물 가운데 어떤 게 좋아요?"
"전 잘 모르겠어요."
토파즈가 달린 은사슬만 허리에 두르고 나머지 옷을 모두 벗은 별아가씨가 말했다.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보고 그녀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한 번도 목욕이라는 걸 안 해봤거든요."
"한 번도 안 해봤다고?"
여주인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 세상에... 그럼 물을 너무 뜨겁지 않게 해야겠네. 물이 더 필요하면 언제든지 나를 불러요. 부엌에서 물을 좀 더 데우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목욕을 마치면 향료를 넣고 데운 포도주랑 달콤하게 절인 순무를 갖다 줄게요." 


- 별 아가씨가 자신은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는 얘기를 하려 했으나 여주인은 그녀를 욕조에 남겨두고 서둘러 방을 나가버렸다. 그녀는 주석 욕조에 앉아 부목을 댄 다리를 물 밖으로 내밀어 다리 세 개짜리 의자에 올려놓았다. 처음에는 물이 정말 뜨거웠지만 차차 온도에 익숙해지자 그녀는 온몸이 나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하늘에서 떨어지고 나서 처음으로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오, 아가씨. 이제 기분이 좀 어때요?"
여주인이 다시 돌아와서 말했다.
"아주 좋아요. 고마워요."
"아가씨의 심장은요? 심장은 느낌이 어때요?"
"제 심장 말인가요?"
별 아가씨는 안주인의 질문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관주인은 진정으로 걱정해 주는 듯 보였다.
"좋은 것 같아요. 근심걱정 없이 편안하고 기분이 좋네요."
"잘됐네요. 다행이에요. 그럼 이제 심장이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도록 할까요. 아가씨의 가슴속에서 밝게 타오르도록 말이에요." 

 

- "목욕을 마치면 이걸 입도록 해요. 아, 서두를 건 없어요. 이걸 입으면 포근하고 따뜻한 기분이 들 거예요. 아가씨의 예쁜 옷이 마를 때까지만 이걸 입고 있도록 해요. 그리고 욕조에서 나오고 싶을 땐 소리쳐 부르기만 하세요. 그러면 와서 도와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여주인은 차가운 손가락으로 별 아가씨의 가슴 사이를 툭 건드렸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튼튼하고 좋은 심장이네요."

- 이 미개한 세상에도 마음씨 착한 사람들이 확실히 있구나, 하고 별 아가씨는 생각했다. 그녀는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여관 밖에서 비바람이 휘몰아치면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마차그림 간판이 붙은 여관의 내부는 모든 것이 따뜻하고 포근하기만 했다.

 

- 여주인은 별 아가씨를 기다란 나무탁자로 데려갔다. 탁자의 한쪽 끝에는 도끼 모양의 칼과 기다란 칼이 놓여 있었다. 두 개 모두 자루는 뼈로, 그리고 칼날은 검은 유리로 만든 것이었다. 별 아가씨는 여주인에게 몸을 기댄 채 다리를 절뚝거리며 탁자로 가서 그 옆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았다. 밖에서는 강한 바람이 한 차례 휘몰아치자 벽난로의 불은 너울너울 춤을 추며 녹색과 파란색, 그리고 하얀색으로 타올랐다. 그때 여관 밖에서 비바람 소리를 뚫고 낮은 목소리로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십니까? 음식과 포도주, 그리고 불이 필요합니다! 마부는 어디에 있습니까?"

 

- "아가씨는..."
그는 망설이다가 곧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아가씨가 우리 아버님의 보석을 가지고 있군요. 스톰홀드 성의 권력을 말입니다."
별 아가씨는 파란 하늘 같은 눈으로 프리머스를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요? 그럼 가져가세요. 저는 이 따위 괴상한 거 필요 없으니까요."
그때 여주인이 급히 다가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손님을 귀찮게 하시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 그 순간,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두 칼이 프리머스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스톰홀드 성의 금고에 들어 있는 너덜너덜한 두루마리에 그 칼들의 그림이 이름과 함께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 칼들은 이 세상의 제1기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아주 오래된 것들이었다. 

 

- "프리머스 아저씨!" 
트리스트란이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저 사람들이 나를 독살하려 했어요!"
순간 프리머스는 자신의 단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그가 검을 잡기도 전에 마녀여왕이 긴 칼을 칼집에서 뽑아내어 한순간에 그의 목을 노련하게 그었다. 

 

- 트리스트란은 얼른 바닥에 주저앉아 벽난로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의 왼손에는 그를 이곳까지 이끌어준 양초가 쥐어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말랑말랑해질 때까지 손에 꽉 쥐고 있었다.
"이게 효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트리스트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그 나무가 이런 상황까지 예상해 주었길 바랐다.
그의 뒤에서 유니콘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댔다.
트리스트란은 조끼의 레이스 부분을 찢어 그것으로 양초를 감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엉금엉금 기어서 트리스트란 쪽으로 다가온 별 아가씨가 물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마녀가 괴성을 질렀다. 그 순간, 유니콘의 뿔이 마녀의 어깨를 관통했다. 유니콘은 당당한 모습으로 마녀의 몸을 바닥에서 들어 올렸다. 유니콘은 바닥에 마녀를 내동댕이친 다음 날카로운 발굽으로 밟아서 죽여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뿔에 찔린 마녀가 몸을 휙 돌리며 긴 칼의 끝부분으로 유니콘의 눈을 찔렀다. 칼끝은 유니콘의 두개골에까지 닿았다. 
유니콘의 몸은 마룻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유니콘의 옆구리와 눈, 그리고 벌어진 입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안간힘을 써보다가 숨이 끊어지면서 유니콘은 마침내 바닥에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얼룩덜룩한 혀를 쑥 내밀고 죽은 유니콘의 모습은 너무나도 처참했다. 

- 마녀여왕은 실내를 빙 둘러보다가 벽난로 옆에 웅크리고 있는 트리스트란과 별 아가씨를 보자 천천히, 아주 천천히, 비틀거리며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한 손에는 여전히 칼을 들고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은 채. 
"두려워서 팔딱거리는 심장보다는 편안한 가운데 화끈 달아오른 심장이 훨씬 더 나은데."
얼굴이 피로 범벅이 된 마녀여왕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두려움에 벌벌 떠는 별의 심장이라도 없는 것보다야 백번 낫지."

- 트리스트란은 오른손으로 별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일어나요."
"일어설 수가 없어요."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 둘 다 죽어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그가 말했다. 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그에게 기댄 채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일어나지 않으면 둘 다 죽는다고?"
마녀여왕의 목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오, 불쌍한 것들아. 너희는 그대로 앉아 있는 자리에서든 일어나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다. 나한테는 그 둘이 아무 차이도 없단다, 얘들아."
그러면서 그녀는 두 사람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자, 그럼 이제 걸어요!"
트리스트란은 한 손으로는 별 아가씨의 팔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양초를 든 채 말했다.

 

- 그리고 그는 왼손을 불속에 집어넣었다.
손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끼며 그는 비명을 질렀다. 마녀여왕은 미치광이를 바라보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레이스로 만든 심지에 붙은 불이 파란 불꽃을 내며 타올랐다. 그들 주위의 세계가 어른거리며 빛나기 시작했다.

 

- "제발 걸으세요. 제 몸에서 떨어지지 말고요."
그는 별 아가씨에게 애원했다.
그녀는 힘들게 한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러자 두 사람은 여관을 벗어나 있었고 마녀여왕이 뒤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그들의 귀에 쟁쟁하게 들려왔다.

- 그들은 땅속에 들어와 있었다. 촛불이 축축하게 젖은 동굴 벽에 반사되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이 위태롭게 또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두 사람은 달빛 아래 하얀 모래가 펼쳐진 사막에 와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걸음을 내딛자 두 사람의 몸은 하늘 높은 곳에 와 있었고 저 아래로 언덕과 나무, 그리고 강줄기가 내려다보였다. 
양초 덩어리가 트리스트란의 손에서 완전히 녹아버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양초가 타들어가면서 생기는 뜨거운 기운을 트리스트란은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불꽃이 사그라지고 말았다. 

 

- "만일 내 손으로 형을 죽였다면, 나는 형을 이곳에서 썩도록 내버려 뒀을 거야. 하지만 그러한 즐거움은 이미 다른 누군가가 차지해 버렸기 때문에 나는 형의 시체를 가져가서 높은 낭떠러지 위에 놓아두겠어. 독수리가 와서 파먹도록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끈적이는 프리머스의 시체를 힘들게 끌어와서 조랑말 등에 실었다. 그리고 시체의 벨트에 묶여 있는 주머니를 뒤적여 마법의 돌을 꺼냈다. 
"이건 고맙게 받을게, 형."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시체의 등을 토닥거렸다.
"내 목을 벤 그 년한테 복수하지 않으면 넌 그 돌에 목이 걸려 죽어버릴 거다."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기 위해 잠에서 깬 산새들의 소리로 프리머스가 말했다.

 

- 그들은 작은 마을 크기 정도 되는 짙은 뭉게구름 위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들이 앉아 있는 구름은 부드러웠지만 약간 차가웠다. 구름 속으로 들어갈수록 더 차가웠다. 그래서 트리스트란은 화상을 입은 손을 구름 속으로 최대한 깊숙이 밀어 넣었다. 구름은 처음에 약간 저항을 했지만 곧 그의 손을 받아주었다. 구름의 내부는 스펀지 같으면서 냉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면서도 실체가 없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을 주었다. 어쨌든 구름은 손의 통증을 그나마 덜어주어 이제 그는 좀 더 또렷하고 분명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 "그 여자는 어디 있지? 여자를 어떻게 한 거야?" 
첫 번째 얼굴이 짜증을 내면서 물었다.
"네 꼴을 좀 보란 말이야! 우리가 모아둔 젊음을 남김없이 가져갔잖아. 내가 오래전에 별의 가슴에서 떼어낸 젊음이었는데. 그때 별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면서도 그렇게 살아 있더군. 그런데 지금 네 꼴을 보니 젊음을 이미 다 써버린 것 같군."
두 번째 얼굴이 말하자 마녀가 웅덩이 속의 자매들한테 말했다.
"성공을 코앞에 두고 있었어. 그런데 이 놈의 유니콘이 나타나 훼방을 놓았어. 이제 유니콘의 머리를 가지고 있으니 내가 가져가도록 할게. 유니콘의 뿔을 갈아먹은 지도 꽤 되었잖아."
"유니콘의 뿔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어! 별은 어떻게 된 거야?"

가장 나이 어린 자매가 투덜거렸다.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어. 아무래도 요정의 나라를 빠져나간 것 같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 "아냐."
자매들 가운데 하나가 말했다.
"그 여자는 아직 요정의 나라에 있어. 하지만 월 마을에서 열리는 장으로 갈 거야. 그리고 그곳은 성벽 너머의 세상에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일단 그 여자가 그 세상으로 들어가 버리면 우리는 그 여자를 영원히 놓쳐 버리게 돼."
별이 일단 성벽을 넘어 사람들이 사는 평범한 세계로 들어가 버리면 그 순간 그것은 예전에 하늘에서 떨어질 때처럼 곰보자국이 나 있는 차가운 금속성 암석 덩어리로 변해 버려 자기들에게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는 점을 그들 모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디고리 수로로 가서 기다려야겠다. 월 마을에 가려면 누구나 그곳을 지나쳐야 되니까 말이야."

 

- 웅덩이 속의 두 노파는 못마땅한 눈길로 밖을 내다보았다. 마녀여왕은 혀를 이리저리 움직여 이를 더듬었다. 윗니 한 개가 흔들리는 정도로 봐서 해질녘이 되기 전에 빠져버릴 것 같았다. 마녀여왕은 피가 고인 웅덩이에 침을 탁 뱉었다. 웅덩이에서 잔잔한 물결이 일면서 늙은 릴림 두 명의 얼굴이 완전히 지워졌다. 이제 웅덩이는 하늘과 흐릿한 흰 구름만 비추고 있었다.

 

- 트리스트란은 뾰족하게 솟은 구름의 꼭대기에 올라앉아 왜 자신이 그토록 즐겨 읽던 통속소설의 주인공들은 어느 누구도 배고파하는 법이 없었는지 궁금하게 생각했다. 그의 뱃속에서는 연신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손도 몹시 아팠다. 
소설에서 주인공들의 모험은 그런대로 재미있었지만 배고픔이나 견디기 힘든 고통에 관해서도 써야 사실적으로 느껴질 텐데.
어쨌든 그는 아직 살아 있었고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 "내가 필요로 하는 일이라고요?"
"예, 당신은 되돌아가고 싶어 하셨지 않습니까? 하늘 속으로 돌아가 밤마다 빛을 반짝이고 싶어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해보자는 겁니다."
그녀는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은 불가능할 거예요. 일단 땅에 떨어진 별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당신이 하늘로 돌아가는 첫 번째 별이 되면 되잖습니까.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글쎄 그런 일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니까요. 저 아래에 아무도 없는데 당신이 소리를 질렀다고 해서 누가 여기로 올라올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그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내가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사실이 그런데 어쩌겠어요. 그보다도 손은 좀 어때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도 쓰라립니다. 나보다 다리는 어떻습니까?"
"나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전처럼 많이 아프지는 않아요."

- "내리는 지점은 월 마을과 가까운 곳일세. 그렇지만 거기에서 10주 정도는 쉬지 않고 가야 할 거야. 어쩌면 그 이상이 걸릴 수도 있고. 하지만 매고트 얘기로는 자네 여자친구의 다리가 만족스러울 만큼 회복되었다는군. 머지않아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을 거야." 
선장은 그의 곁에 나란히 앉더니 파이프 담배를 뻑뻑 빨았다. 그의 옷에는 담뱃재가 얇게 덮여 있었다. 선장은 담배를 피우지 않을 때면 파이프의 빨대를 질근질근 씹거나 끝이 날카로운 철사 같은 것으로 파이프 안을 파내기도 하고 담배를 새로 파이프에 꾹꾹 눌러 담기도 했다. 
저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며 선장이 말했다.
"우리가 자네를 찾아낸 것은 우연은 아니었네. 사실, 우리가 자네를 찾아낸 것은 행운이었지. 아니, 내가 자네를 찾으려고 어느 정도 살피고 있었다고 해야 옳은 말이겠지. 나뿐만이 아니라 몇몇 사람들이 그 부근을 살펴보고 있었어."
"그건 왜죠? 저를 어떻게 아시게 되었죠?"
트리스트란의 물음에 선장은 반들반들한 마룻바닥에 맺힌 물기를 손가락으로 찍어 어떤 형태를 하나 그렸다.
"성 같아 보이는군요."
그러자 선장이 그를 향해 윙크를 하며 주의를 주었다.
"그렇게 큰소리로 얘기해선 안 되네. 심지어 이 하늘에서도 말이야. 자네만 알고 있게."

 

- 트리스트란은 선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혹시 털이 많고 키가 작은 사람을 아십니까? 모자를 쓰고 온갖 물건이 들어 있는 큰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 말입니다."
선장은 뱃전에 대고 파이프를 탁탁 두드렸다. 손가락으로 그린 그림은 이미 손으로 지워버리고 없었다.
"알지. 자네가 월 마을로 돌아오길 기다리는 사람은 그 친구뿐만이 아니야.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데 자네 여자친구한테 일러두게. 본모습을 남들한테 들키고 싶지 않으면 음식을 먹는다는, 그리고 무슨 음식이든 가리지 않고 먹는다는 인상을 남들에게 심어줘야 한다고 말이야."
"저는 선장님이 계신 자리에서 월이라는 마을 이름을 한 번도 입밖에 낸 적이 없습니다. 어디서 왔느냐고 선장님이 물으셨을 때 저는 '저 뒤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셨을 때 '저 앞으로 갑니다'라고 대답했지요." 
"그랬지. 맞아." 
트리스트란의 말에 선장은 선선히 인정했다.

 

- 여섯째 날에는 강한 폭풍우가 몰려왔고 선원들은 여섯 개의 멋진 번개를 낚아 구리상자에 담았다. 일곱째 날, 배는 항구에 도착했다. 트리스트란과 이베인은 퍼디타 호의 선장과 선원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매트는 트리스트에게 초록색 연고가 담긴 작은 통을 건네면서 화상 입은 손에도 바르고 이베인의 다리에도 발라주라고 말했다. 선장은 말린 고기와 과일, 약간의 담배, 그리고 칼과 부싯돌 같은 물건들이 잔뜩 들어 있는 가죽가방을 트리스트란의 어깨에 매어주면서 자기들은 새로 보급품을 받게 되니 아무 염려 말고 가져가라고 말했다. 한편 매트는 은색의 작은 별들과 달이 수 놓인 파란색 비단가운을 이베인에게 선물로 주면서 그런 옷은 자기보다 이베인에게 훨씬 더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 배는 하늘을 항해하는 다른 10여 척의 선박들 옆에 정박했다. 그곳은 어떤 거대한 나무의 꼭대기였는데 나무의 줄기는 수백 가구가 들어가서 살 수 있을 만큼 크고 넓었다. 그곳에서는 일반사람들, 난쟁이, 땅의 요정, 숲의 요정, 그리고 그보다 더 기괴하게 생긴 생명체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줄기 주변에는 계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트리스트란과 이베인은 천천히 그 계단을 밟고 내려왔다. 다시금 탄탄한 땅에 발을 내딛게 되자 트리스트란은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것은 마치 아주 귀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 두 사람이 꼬박 사흘을 걸었을 때, 항구의 나무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해가 지는 서쪽을 향해 걸어갔다. 폭이 넓고 먼지가 많이 이는 길이었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산울타리 옆에 누워 잠을 잤다. 트리스트란은 그동안 과일과 덤불이나 나무에서 딴 열매를 먹었고 맑은 시냇물을 마셨다. 

- '언덕 아래 심콕'이라는 마을에 들렀을 때, 트리스트란과 이베인은 사람들을 강제 징집하는 일을 맡은 요정과 마주쳤다. 트리스트란으로서는 땅속에서 끝없는 싸움이나 벌이면서 남은 생을 보낼 수도 있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베인의 기지와 독설 덕분에 그러한 위기를 간신히 넘길 수 있었다. 

 

- 풀크스톤에 있는 술집에서는 트리스트란이 몇 가지 암송을 해서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그는 영국의 시인 콜리지의 <쿠빌라이 칸>, <구약성경>의 시편 23장,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자비의 본질'이라는 연설, 그리고 불타는 갑판에 홀로 서 있는 어떤 소년에 관한 시를 암송했는데, 이것들은 모두 어릴 때 학교에서 배웠던 것들이다. 트리스트란은 그러한 시와 산문을 억지로 외우게 만든 체리 여선생에게 마음속으로 고마워했다. 풀크스톤 사람들은 그에게 영원토록 마을에 머물러도 좋다고 말하면서 그를 마을의 음유시인으로 지명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트리스트란과 이베인은 한밤중에 마을을 몰래 빠져나와야 했다. 그들이 마을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마을의 개들이 당분간 짖지 않도록 이베인이 설득을 해둔 덕분인데 트리스트란으로서는 그녀가 어떤 방법으로 개들을 구워삶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어느 날 저녁, 깊은 숲의 가장자리에 잠자리를 마련하다가 트리스트란은 그때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구슬프면서도 이상한,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노래를 듣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머리를 환상으로, 그리고 그의 마음을 경외심과 기쁨으로 가득 채우는 음악이었다. 음악은 그에게 무한한 공간과 거대한 크리스털 공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 공은 말할 수 없이 느린 속도로 광활한 우주 공간을 돌아가는 광경을 머리에 떠올리게 해 주었다. 음악은 그를 황홀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는 자제력을 잃고 말았다. 

 

- 몇 시간이 지난 다음, 아니 실제로는 단 몇 분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노래가 끝났을 때, 트리스트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멋진 노래군요."
그가 그렇게 말하자 별 아가씨의 입술이 무심결에 움직이며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두 눈은 반짝 빛이 났다.
"고마워요. 여태까지 나는 노래를 부를 기분이 아니었어요."
"그런 노래는 처음 들어봅니다."
"어떤 밤에는 자매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어요. 방금 부른 노래와 우리 어머니에 관한 노래, 그리고 시간의 본질과 빛을 내는 일의 기쁨과 쓸쓸함에 관한 노래들이었죠."
"미안합니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적어도 나는 이렇게 아직 살아 있잖아요. 요정의 나라에 떨어진 게 다행이었어요. 그리고 당신을 만난 것도 아마 행운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별 아가씨는 한숨을 내쉬며 나무들 사이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트리스트란은 아침식사로 먹을 만한 것들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어린 말불버섯 몇 개와 너무 익어서 말라버린 자줏빛 자두가 주렁주렁 매달린 자두나무를 한 그루 찾아냈다. 바로 그때 풀숲에 새 한 마리가 숨어 있었다. 그는 새를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몇 주 전, 저녁식사로 구워 먹으려고 회색과 갈색 털로 뒤덮인 커다란 산토끼 한 마리를 잡으려다가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토끼는 숲의 가장자리로 달아나다가 멈춰 서더니 혐오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쏘아붙였다. 

 

- 하지만 노파는 이베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트리스트란은 노파가 이베인을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월 마을까지 태워주지. 그리고 내 명예와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데 여행 중에 어떠한 해코지도 하지 않을게."
"마땅히 행동을 해야 할 때 하지 않거나 간접적인 행동을 해서 해를 끼쳐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하지."
트리스트란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확실히 그는 노파를 신뢰할 수가 없었다.
"저희를 지금과 똑같은 모습과 상태로 월 마을까지 태워주고 가는 동안 숙식도 제공해 주겠다고 맹세하세요."
노파는 쳇하고 혀를 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마차에서 내려와 칵하고 땅바닥에 침을 뱉었다. 노파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침 덩어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젊은이 차례야."
트리스트란은 노파의 침 옆에다 침을 뱉었다. 그러자 노파는 두 덩어리의 침을 발로 긁어모아 땅에 문질렀다.
"자, 그럼 이걸로 협상은 이루어진 거야. 이제 꽃을 줘."

- 노파의 얼굴에 드러난 탐욕과 갈망이 너무도 뚜렷해서 트리스트란은 더 나은 조건으로 협상을 맺을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노파에게 자기 아버지가 준 꽃을 건넸다. 꽃을 건네받자, 노파는 갑자기 이빨 빠진 구멍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 빌어먹을 년이 20년 전에 줘버린 꽃보다 이게 낫군."

노파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봐, 젊은이. 자네는 단춧구멍에 꽂고 있던 이것이 어떤 것인지나 알고 있었나?"
"꽃이잖아요, 유리꽃."
그러자 노파가 너무나 갑작스럽게 큰소리로 웃어 젖혔다. 그 모습을 본 트리스트란은 혹시 노파가 저러다가 목이 막혀버리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이건, 얼어붙은 마법이야. 이 꽃에는 마력이 깃들어 있어. 이런 것은 주인만 제대로 만나면 놀랍고 신기한 일을 할 수 있지. 자, 잘 봐."

노파는 꽃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가 천천히 내리면서 트리스트란의 이마를 건드렸다.

 

- 그 짧은 순간, 트리스트란은 피가 흘러야 할 혈관에 끈적끈적한 검은 당밀이 흐르고 있는 것 같은 아주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다음순간 온 세상이 달라 보였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커져서 우뚝 솟아올랐다. 노파까지 이제 거인으로 보였다. 그리고 시야가 흐려지면서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거대한 두 개의 손이 내려와 그를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이 마차는 자네를 태울 만큼 크지가 않아."
그녀의 목소리는 저음으로 느리게 울리는 우레와 같았다.
"그리고 나는 맹세한 것들을 정확히 지키겠어."

- 디고리 수로는 석회질 구릉 사이에 깊게 패인 곳이다. 양쪽의 높고 푸른 언덕에는 파란 풀과 불그스름한 땅이 백악기 지층을 뒤덮고 있지만 나무가 자라기에 충분할 만큼의 흙은 없다. 멀리서 보면 수로는 초록색 벨벳 판자에 하얀 금이 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 그 지방의 전설에 따르면, 수로는 디고리 마을의 어떤 사람이 월마을을 나와 요정의 나라로 가면서 어떤 검의 날을 녹여 만든 삽으로 하루 종일 파낸 것이라 한다. 그때는 웨이랜드 스미스(북유럽 민화에 나오는 요정들의 왕으로 대장일의 명인 - 옮긴이 주)가 대장 일을 시작하기 전이었다. 그 검이 플랑베르주(칼날이 파도치듯 휘어진 검 - 옮긴이 주)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발뭉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디고리가 누구였는지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그 전설 자체가 허무맹랑한 것일지도 모른다. 

- 어찌 되었든 월 마을로 가려면 디고리 수로를 통과해야 했다. 도보로 여행하는 사람이든 바퀴가 달린 운송 수단을 이용하는 사람이든 여기에는 예외가 없었다. 수로의 양측 비탈은 하얀 벽 같아 보였고 그 위의 언덕은 마치 거인의 침대에 놓여 있는 파란 베개 같았다. 

-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지난 이틀 동안 가파른 비탈의 꼭대기에서, 그리고 가능할 때는 수로로 좀 더 내려와 가까이에서, 그 오두막을 철저히 감시했다. 그 오두막에는 노파가 한 명 살고 있었다. 노파는 친구도 없고 특별히 하는 일도 없었다. 혼자서 여행하는 사람과 수로를 따라 짐을 옮기는 사람들을 멈춰 세워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 노파는 특별히 위험한 인물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외모만 보고 상대를 판단했다면 셉티머스는 자기 가족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 노파가 프리머스의 목을 베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 복수의 철칙은 생명을 잃었으면 그 대가로 생명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다만 생명을 어떻게 빼앗을 것인지 그 방법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셉티머스는 독살에 타고난 소질이 있었다. 칼이나 폭발물을 사용하는 것도 나름대로 괜찮은 방법이었지만 작은 병에 담긴 투명한 액체를 음식에 섞어 아무런 맛이나 냄새도 느낄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그의 주특기였다. 

- 안타깝게도 노파는 자신이 직접 준비한 음식이나 덫을 놓아 잡은 동물이 아니면 어느 것도 먹지 않는 듯 보였다. 그래서 그는 잘 익은 사과와 치명적인 식물로 만든 파이를 만들어 오두막집 문 앞에 놓아둘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별다른 효과를 거둘 것 같지 않아 그만두었다. 또 언덕 위에서 바위를 굴려 오두막을 깔아뭉갤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바위로 정확히 노파를 맞힐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마법의 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능력 가운데 사람을 찾아내는 능력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었고 지난 몇 년 동안 몇 가지 대수롭지 않은 마술을 배우거나 훔치긴 했지만 그런 것들은 지금 그에게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는 홍수나 태풍, 그도 아니면 벼락을 일으키는 능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셉티머스는 쥐구멍을 노려보는 고양이처럼 밤낮으로 몇 시간이고 노파의 오두막을 지켜보기만 했다. 

- 달도 없어 캄캄한 어느 날 밤, 자정이 지난 시각에 셉티머스는 드디어 나무막대기로 쌓은 오두막집 문을 향해 살금살금 기어갔다. 한 손에는 불씨가 담긴 통이, 그리고 다른 손에는 시집 한 권과 전나무방울이 깔린 지빠귀 둥지가 들려 있었다. 허리 벨트에는 참나무 몽둥이가 매달려 있었는데 몽둥이의 머리 부분에는 쇠못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그는 문밖에서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규칙적인 숨소리와 이따금 잠꼬대하는 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 이베인은 그 사실을 트리스트란에게 말했다.
"그렇군요. 나도 봤습니다. 정말 끔찍하네요.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어 보이네요."
그들은 풀밭을 가로질러 성벽 문으로 갔다.
"먼저 부모님을 찾아뵈어야겠습니다. 나만큼이나 그분들도 나를 그리워하셨을 테니까요."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트리스트란은 이번 여행 중에 부모님 생각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 트리스트란은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왜냐하면 빅토리아 포리스터에게 별을 가져다줘야겠다는 과거의 생각과 별은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물건이 절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진짜 사람이라는 현재의 생각을 서로 조화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사랑한 아가씨는 아직도 빅토리아 포리스터였다.

- 어쨌든 그것은 나중에 해결할 문제라고 생각되었다. 일단은 이베인을 마을로 데려가야 하고 일이 벌어지면 그때 가서 해결하면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기분이 한껏 들떠 있었다. 그리고 쥐가 되어 보낸 시간은 이미 희미한 꿈처럼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마치 부엌의 난로 앞에서 낮잠을 자다 깨어난 것 같았다. 그는 브로미오스 씨의 최고급 맥주를 머리에 떠올리며 입맛을 다시기까지 했다. 하지만 빅토리아 포리스터의 눈동자가 어떤 색이었는지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깨닫고 그는 죄책감을 가졌다.
 
- 별 아가씨가 망설이며 물었다.
"정말 이렇게 하셔야겠어요?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그래요."
"긴장할 것 없어요. 당신이 불안해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나도 가슴이 떨려 미칠 지경입니다. 우리 어머니의 응접실에 앉아 어머님이 내놓는 차를 마시게 되면 훨씬 기분이 나아질 겁니다. 아, 차가 아니면 다른 거라도 내놓으시겠죠. 멀리 떠난 아들이 귀한 손님과 함께 돌아왔으니 어머니는 가장 귀한 찻잔으로 차를 대접하실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트리스트란은 안심을 시키려는 듯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부드럽고도 애처롭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당신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가야죠."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성벽 문으로 다가갔다.

- 이베인은 배가 고프지 않다며 여자의 제안을 간신히 사양했지만 트리스트란은 여자가 내놓는 음식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그리고 평소의 그 답지 않게 트리스트란은 유리병에 들어 있는 백포도주도 적잖게 마셨다. 포도주를 마시면서 그는 방금 짠 포도즙 같이 알코올 도수가 높지 않은 것 같다며 자기는 아무리 마셔도 끄떡없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렇지만 그 작고 땅딸막한 여자가 자신의 마차 뒤편의 공터에서 자라며 잠자리를 제공했을 때, 트리스트란은 술에 취해 금방 잠에 곯아떨어졌다. 

- 날씨가 맑고 쌀쌀한 밤이었다. 별 아가씨는 한때 자신을 납치했다가 나중에는 길동무가 되어버린 트리스트란 옆에 앉아서 그를 향해 한때 품었던 자신의 적개심이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궁금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잠이 오지 않았다. 

 

- 그녀의 뒤편에서 풀잎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카락이 검은 어떤 여자가 다가와 이베인의 옆에 섰다. 두 사람은 그렇게 나란히 서서 트리스트란을 내려다보았다.
"저 젊은이에게는 아직 쥐의 흔적이 남아 있군."
검은 머리의 여자가 말했다. 귀 끝이 고양이처럼 뾰족한 그 여자는 나이가 트리스트란과 별로 차이가 없어 보였다.
"가끔 나는 그 노파가 사람을 동물로 변화시키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동물을 발견하고서 그것을 밖으로 풀어놓는 것인지 궁금했어. 내 속에는 본래 밝은 빛깔의 새 같은 게 들어 있는 것 같아. 그게 무엇일지 생각을 많이 해봤지만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했지." 

- "그 아가씨 자신도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더군요. 임신한 지 한 달, 아니 두 달은 된 거 같아요."
"맙소사, 그걸 어떻게 아시죠?"
이번에는 별 아가씨가 어깨를 으쓱했다.

- "실은 당신이 빅토리아 포리스터와 결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전 기뻤어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솔직히 말했다.

- 다시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비를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저는 별이고, 당신은 인간이에요."
"사실 저는 반만 인간입니다."
트리스트란이 유익한 정보를 알려주듯 말했다.
"저 자신에 대해 생각했던 모든 것, 이를테면 제가 누구이며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은 모두가 거짓이었어요. 그렇게 거짓을 믿을 때 얼마나 홀가분한 느낌이 드는지 당신은 아마 모를 겁니다."
"당신이 무엇이건 간에, 우리는 절대 아기를 가질 수 없을 거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 그 순간, 트리스트란은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팔 위쪽을 잡았다. 그는 그녀와 마주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만 아시면 돼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 별 아가씨도 파란 하늘 같은 눈을 뜨고 그의 눈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눈을 보고서 자신은 이제 그녀와 절대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은사슬은 이제 연기나 증기와 다름없었다. 잠시 동안 그것은 연기가 되어 피어올랐으나 매서운 바람과 비에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것 좀 봐. 노예 계약의 조건이 모두 충족되었으니까 이제 당신과 나는 아무 상관도 없는 거야."
출렁거리는 검은 머리에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활짝 켜던 여자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노파는 무력한 표정으로 검은 머리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럼 난 어떡하라고? 나는 이제 늙어서 혼자 이 진열대 일을 볼 수가 없어. 나를 이렇게 내팽개치고 가려고 하다니 이 사악하고 바보 같은 년!"
"이제 당신 문제는 나랑 아무 상관도 없어. 나도 본래 이름이 있는데 이제 더 이상 나를 갈보 같은 년이니, 종이니 뭐니 하면서 함부로 불러선 안 돼."

 

- "난 당신의 마법과 계약 조건에 묶여 지금껏 살았지만 이제 그런 것은 완전히 끝났어. 이제 당신은 내게 사과하고 본래 이름으로 나를 불러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나는 평생 당신을 쫓아다니며 당신이 아끼는 것들은 물론이고 당신과 관계된 것들은 모조리 박살내 버리겠어."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노파가 먼저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그렇다면 갈보 같은 년이라고 부른 건 사과할게요, 레이디 유나."

그녀는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낱말 하나하나를 쓴 톱밥처럼 내뱉었다.
 
- "좋아. 그럼 이제 일이 다 끝났으니 내가 봉사한 대가를 받아야지."

이러한 일들에도 나름의 원칙이 있다. 이 세상 모든 일에 원칙이 있듯이 말이다. 

- 트리스트란은 여행 중에 만났던 키 작고 털 많은 사람을 아는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서 가능한 상세하게 그 사람의 외모와 차림새를 설명했다. 몇몇 사람이 예전에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있지만 이 시장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 그러자 여자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귀를 움찔했다.
"트리스트란, 나는 지난 18년 동안 너한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처음으로 정말 사소하기 짝이 없는 부탁을 하나 하는데 너는 그걸 야박하게 거부하는구나. 그럼 묻겠다, 트리스트란. 네 엄마를 이런 식으로 대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건 아닙니다, 어머니."
트리스트란이 얼른 부인했다.
그러자 그녀는 약간 감정이 누그러진 듯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좋다. 나는 너희 젊은 두 사람이 자기 집을 가지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거리도 있어야겠지. 만일 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떠나도 좋다. 너를 스톰홀드 성의 권좌에 묶는 은사슬 같은 건 없으니까." 

 

- 그 말을 들으니 트리스트란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이베인은 그 말을 듣고도 별다른 감명을 받지 못한 듯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은사슬의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또한 시어머니 될 사람과 말다툼을 벌이는 것으로 트리스트란과의 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현명치 못한 처사라는 것도 알았다. 

- "죄송하지만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이베인은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면서 그렇게 물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트리스트란의 어머니가 우쭐대는 것을 보고서 자기가 괜한 걱정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스톰홀드 성의 레이디 유나라고 한다."

 

-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그녀는 옆구리에 매달린 작은 가방 속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유리로 만든 장미꽃 한 송이를 꺼냈다. 그것은 빨간색이 너무 짙어 흔들거리는 불빛 속에서 거의 검은색으로 보였다. 
"이것은 내가 노예생활을 한 대가로 마녀한테서 받은 것이다. 나는 60년이 넘도록 종으로 일했다. 그 노파는 이걸 나한테 주는 걸 못내 아쉬워했지만 규칙은 어디까지나 규칙이지. 만일 노파가 규칙을 어기고 대가를 주지 않았다면 노파는 마법을, 아니 그보다 더한 것을 잃었을 거야. 이제 나는 이걸 가지고 우리를 스톰홀드 성으로 데려가 줄 가마를 얻을 생각이다. 제법 거창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말이다. 그동안 스톰홀드 성을 내가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가마를 운반할 사람들과 시종들, 그리고 코끼리도 한 마리 구해야 한다. 위풍당당한 코끼리를 한 마리 앞세우고 가면 '길을 비켜라!' 하고 굳이 소리칠 필요도 없을 거다."

 

- "어머니는 가마를 타고 가십시오. 원하시면 코끼리는 낙타, 하여튼 아무 동물이든 앞세우고 가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베인과 저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원하는 속도로 그곳까지 가겠습니다." 
그러자 레이디 유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베인은 두 사람의 논쟁이 계속되는 동안 자신은 자리를 피해 주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멀리 가지 않고 좀 걷다가 금방 돌아오겠다고 두 사람한테 말했다. 트리스트란은 가지 말고 자기 곁에 있어 달라고 애원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이것은 트리스트란이 직접 싸워서 이겨야 하는 논쟁이고 자기가 없으면 그가 더 잘 싸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 그녀는 절뚝거리며 어두워지는 장터를 돌아다니다가 음악과 박수소리가 흘러나오는 어떤 천막 옆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천막 안에서 따끈한 황금빛 꿀 같은 불빛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때 허리가 굽고 머리가 백발인 노파가 절름거리며 별 아가씨에게 다가와 잠시 자기와 얘기를 나누자고 말했다. 노파의 옅은 청록색 눈은 앞이 보이지 않았다.

- "무슨 얘기를요?"
별 아가씨가 물었다.
나이가 들어 이제 어린아이 정도로 몸피가 줄어든 노파는 마디가 부어오르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기 키 만한 구부러진 지팡이를 꽉 붙들고 있었다. 노파는 성한 한쪽 눈과 푸르스름한 다른 쪽 눈으로 별 아가씨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너의 심장을 가져가려고 왔어."
"그래요?"
"그래. 저번에 산길에서 거의 손에 넣었는데 말이야."
노파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목 안쪽 깊숙한 곳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로 깔깔 웃었다.
"기억 안 나?"

- 노파는 등에 혹 같은 큰 짐을 지고 있었다. 상아빛의 뿔이 짐에서 삐죽 솟아 있었는데 이베인은 그것을 예전에 어디에서 보았는지 기억이 났다. 별 아가씨가 몸집이 작은 노파에게 말했다. 
"당신이었군요. 당신이 칼을 가지고 설쳐대던 바로 그 여자죠?"
"그래, 바로 나야. 그런데 나는 여행을 하느라 젊음을 모두 소진해버리고 말았어. 마법을 써먹을 때마다 내게서 젊음은 조금씩 사라졌지. 그리고 이제는 그 어느 때보다 늙은 모습이 되었지." 
"제 몸에 손을 대면, 손가락 하나라도 제 몸에 대면 평생 후회하게 될 거예요."

 

- 별 아가씨가 경고하자 노파가 말했다.
"너도 내 나이가 되면, 모든 일이 후회스럽다는 것을 깨닫게 될 거야. 그리고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결국에는 후회밖에 남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될 거야."
노파는 코를 킁킁거렸다. 한때 새빨갛던 노파의 옷은 세월이 흘러서인지 이제 여기저기 기운 자국이 많이 보였고 색도 형편없이 바랬다. 그리고 한쪽 어깨에는 생긴 지 수백 년이나 된 것 같은 주름 잡힌 흉터가 드러나 보였다. 

- "하지만 한 가지 알고 싶은 것은 왜 내 마음속에서 너를 더 이상 찾을 수 없는가 하는 것이야. 너는 아직 거기에 있어. 하지만 너는 유령이나 도깨비불 같아. 얼마 전에 너, 아니 너의 심장이 내 안에서 은빛 불꽃처럼 타올랐어. 하지만 여관에서의 그날 밤 이후 그것은 누더기처럼 희미해졌고 지금은 거기에 있지 않아."
이베인은 자신이 죽기를 바라는 노파가 불쌍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찾는 심장은 이제 내 것이 아닌데 어쩌죠?"


- 노파는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노파는 기침을 하면서 몸 전체가 흔들렸고 경련을 일으켰다.
별 아가씨는 노파가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린 다음 말했다.

"저는 심장을 다른 사람에게 이미 줘버렸어요."
"그 젊은 놈한테? 여관에서 보았던 그놈? 유니콘과 함께 있던 그 녀석한테 줘버렸단 말이냐?"
"그래요."
"그때 그걸 나한테 줬어야지. 내 여동생들과 나를 위해서. 그랬다면 우리 자매들은 다시 젊어졌을 테고 다음 시대까지 젊게 살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 젊은 놈은 그것을 망가뜨리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잃어버리고 말 거야. 그런 놈들은 항상 그런 식이니까."
"어쨌든 말이에요. 내 심장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어요. 저는 당신이 심장을 가지고 돌아가지 않았다고 해서 여동생들한테 구박받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 바로 그때 트리스트란이 이베인한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더니 노파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모든 일이 잘 해결되었습니다. 이제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마는요?"
"예, 어머니는 가마를 타고 가실 겁니다. 우리도 조만간에 스톰홀드 성으로 가겠지만 가는 길에 충분히 여행을 즐기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가스등, 그리고 촛불이 창문들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트리스트란에게 그 모습은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세상처럼 멀고도 알 수 없는 공간처럼 보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월 마을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마을을 보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겠지. 그는 떨어진 별과 나란히 서서 마을의 불빛들을 말없이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몸을 돌려 동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봉투를 뜯고 편지를 읽었다. 편지의 수신자는 그녀로 되어 있었고 인사말 다음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세상의 보아야 할 수많은 것들이 저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네요. 그렇지만 곧 뵙게 될 겁니다.] 
편지에는 트리스트란의 서명이 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지문이 찍혀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별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그림자나 어둠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났다. 편지 내용은 그것이 전부로, 레이디 유나로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그 내용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 그 부부 여행객이 요새와 같은 산속으로 영원히 돌아온 것은 그 일이 있고부터 5년 뒤였다. 그들은 먼지를 뒤집어쓴 몰골에 한껏 지쳐 있었고 옷은 누더기가 다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라 전체에 창피한 얘기지만 그들은 처음에 떠돌이나 사기꾼 취급을 받았다. 남자가 목에 걸고 있던 토파즈를 내보이고 나서야 레이디 유나의 독자임을 사람들이 알아봤을 정도였다. 

- 성주 임명식과 그 뒤를 이은 축하행사가 거의 한 달간 있고 나서 스톰홀드의 82대 통치자인 젊은 성주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국가적 결정을 가능한 한 적게 내렸다. 하지만 그가 내린 결정은 당시에는 특별히 지혜롭게 보이지 않았어도 모두가 슬기로운 결정이었다는 것이 나중에 드러났다.

 

- 트리스트란이 죽은 뒤에 몇몇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들은 스톰홀드 성과 동맹관계를 맺었고 '언실리 코트'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과 그 밖의 잡다한 주장은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죽자 모두 사라졌고 그 뒤로는 어떤 식의 주장도 제기되지 않았다. 

 

- 그 뒤로는 이베인이 스톰홀드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녀는 평화로울 때는 전쟁을 치를 때든 누구도 감히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군주임을 스스로 입증했다. 그녀는 남편과 달리 늙지 않았다. 눈은 언제나 새파랬고 머리칼은 언제나 황금빛이 도는 은발이었다. 그리고 스톰홀드에 사는 일반 사람이라면 가끔 발견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녀는 트리스트란이 오래전 물웅덩이 옆 공터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성격도 불같았고 상당히 날카로웠다. 

- 그녀는 오늘날까지도 다리를 절뚝거리며 걷는다. 그러나 스톰홀드 사람들 가운데 그 점을 가지고 쑥덕거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녀가 이따금 어둠 속에 있을 때 몸에서 빛을 반짝이며 환하게 빛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그녀는 하루 일을 마치면 밤마다 혼자 절뚝거리면서 궁전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산꼭대기의 차가운 바람은 개의치 않고 몇 시간이고 서 있곤 한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슬픈 눈으로 무수한 별들의 느린 춤을 지켜보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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