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닐 게이먼] 닐 게이먼 베스트 컬렉션 - 독자들이 직접 선정한 최고의 작품 52편

일루젼 2023. 9. 27.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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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닐 게이먼 / 정지현
출판 : 하빌리스
출간 : 2023.03.25 


       

처음 집어들 때 그 두께와 무게에 한 번 놀라고, 다 읽은 후에는 그마저도 아쉬워서 다시금 놀라게 되는 책이다. 9월 초에 다 읽었지만 발췌 정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근 한 달을 소요하게 만든 책이기도 하다. 

 

이 책만으로 닐 게이먼의 매력을 모두 알게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가 가진 매력이 얼마나 크고 다양한가를 느껴볼 수는 있으리라 본다. 개인적으로는 강력히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수록된 글들 중에는 그 자체로 완결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장편 중 일부를 발췌한 이야기도 몇 편 섞여 있다. 글의 길이와 관계없이 강력한 흡입력과 저마다의 매력, 긴 여운을 자랑한다. 개중에는 같은 인물이 등장하거나 세계관이 유사한 글들도 있지만 배치된 순서와 내용적 연결성은 없는 듯하다. 저자 본인이 순서에 상관없이 내키는 대로 읽어주길 권했는데, 아마도 워낙 다양한 분위기의 글들을 써왔기에 특정 분위기나 톤을 맞춰 정돈할 필요성은 못 느꼈던 게 아닐까 싶다.

 

<스타더스트>나 <잠자는 미녀와 마법의 물렛가락> 같은 경우는 이미 읽었었지만 새로운 기분으로 다시 읽었다. 크리스 리들의 삽화가 빠진 점은 아쉽지만 이미지 없이 활자로만 읽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사로잡힘 없이 읽을 수 있어 지난번에는 놓쳤던 소소한 부분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여러 작품들이 좋았지만 등장인물들 중에서는 '섀도'와 '카라바스 후작'이 꽤 매력적이었다. <신들의 전쟁>부터 시작하고 싶은데 그전에 <스타더스트>부터 재독 하게 될 것 같다. 

 

사족을 하나 덧붙이자면,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샌디(shandy)'에 중독된 것 같다. 

책도, 샌디도 강력 추천! 


   

- 닐 게이먼 때문에 나는 길을 가다 거미를 보면 걸음을 멈춘다. 거미를 쫓아 버리거나 죽이려고 하는 대신, 얼어붙은 채로 서서 이 다리 8개 달린 형제가 무언가를 털어놓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나는 거미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하고 싶지만 그러면 이 추천사는 <아난시의 아들들>만을 위한 글이 되어 버릴 테니 여기까지 하겠다. 이 책에는 훨씬 더 많은 작품이 한 자리에 모여 있으니 말이다. 

 

- 나는 아직도 내 세계보다 게이먼의 세계에서 더 많이 살고 있다. 나 같은 사회부적응자들에게는 그의 세계로 탈출하는 것만이 현실 세계를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닐 게이먼은 읽는 이가 집착하게 만드는 작품을 창조하는데, 사실 이조차 내게는 너무 단순한 표현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에는 헌신적인 팬들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특히나 게이먼은 장르에 상관없이 모든 작가들과 괴짜들에게 말해 주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언젠가 떠나야 한다고 말하는 이 경이로운 세계를 절대 놓지 않아도 된다고. 물론 최고의 작가들은 일찌감치 깨달은 진실이기도 하다. 현실 세계의 맞은편에 환상의 세계가 있는 게 아니라 그 모두가 현실이라는 것을, 우화가 아니라 진짜라는 것을 말이다. 

 

- 하지만 그 소설이 나에게 준 것은 탈출이 아니었다. 그 소설은 훨씬 더 급진적인 것을 제안했다. 잊혀진 신들이 쇠퇴기에 제대로 적용하지 못한 채 여전히 우리 주위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우리가 더 이상 그들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를 건드리지 않는 건 아니라는 점이 있다. 이는 신들의 교묘한 책략이 아니라 신화의 중요성이 계속되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신화는 한때 종교였고 그 이전에는 현실이었으며 여전히 우리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닐 게이면은 신화 창조자인 동시에 꿈의 복원가였다. 나는 내가 민간전승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구원받는 캐릭터를 원한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다. 닐 게이면이 거의 잊힌 어린 시절의 노래를 가져다가 살아 숨 쉬는 전투적인 영혼을 불어넣기 전까지는 그런 다음에 그는 그 영혼들을 전혀 준비되지 않은 현실로 던져 버렸다. 

 

- 이 컬렉션에는 환상적인 짐승들, 이상한 힘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 평범한 투쟁을 하는 이상한 사람들, 지상 세계, 지하 세계 등 당신이 생각했을 때 현실적이지 않은 현실 세계가 가득하다. 어떤 이야기들은 3페이지에 걸쳐 이상한 세계들을 안내한다. 또 어떤 이야기들은 끝이라기보다는 잠시 멈춘듯하고, 어떤 이야기들은 시작하기보다는 멈춰 선 채 당신이 따라오기를 기다린다. 도시 전체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도 있고 오직 방안에서만 일어나는 이야기도 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어른이 되어서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 주거나 어른이 아이다움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주기도 한다. 경고만 하고 독자를 놓아주는 이야기도 있고 너무 꽉 붙들어 매 벗어나는 데 며칠씩 걸리는 이야기도 있다. 

 

- 그 캐릭터들은 작품의 배경이 되어 이름만 나올 뿐 실제로 등장하지 않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그들이 우리의 상상력에 강력한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 이야기에서 느끼는 공포가 사실은 이전 이야기에서 안고 간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위대한 컬렉션은 바로 그런 효과를 낸다. 이미 전에 읽었던 이야기들에 새로운 맥락을 더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읽히게 한다. 이야기들이 이렇게 나란히 붙어 있으면 서로 떨어져 있을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측면이 드러난다.

 

- 사람들은 닐 게이먼을 비롯한 모든 훌륭한 이야기꾼의 특징이 그들이 결코 어른이 되지 않아서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예전에 닐 게이먼의 작품을 읽으면 오히려 어른스러운 느낌이 들곤 했다. 당신이 나만큼 오랫동안 그의 작품을 읽었다면 그 세계가 당신에게 어른이 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는 다소 짓궂은 아이러니를 이해했을 것이다. 그의 작품 속 캐릭터들은 초능력이 있거나 환상을 보거나 상상 속의 세계 출신이거나 기묘하거나 멋지거나 때로는 끔찍하다. 하지만 그들은 내적인 문제를 안고 있고 개인적인 갈등으로 가득하며 복잡한 선택에 따라 살고 죽기도(다시 살아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그의 작품을 읽으며 요정은 단순하고 인간은 복잡한 존재라고 생각하곤 했다.

 

- 하지만 나는 닐 게이먼의 작품을 읽을 때 러브크래프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나, 크툴루>에서도 그렇다. 내 눈에 보이는 유령은 오히려 보르헤스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마찬가지로, 닐은 사변 소설을 쓰지 않는다. 그는 초현실적인 세계에 너무 빠져 있어서 그 세계에 대해 추측하는 것을 초월해 아예 그 안에 산다. 그는 보르헤스처럼 이미 일어난 일처럼 보이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쓴다.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으며 마치 확실한 진실을 전달하듯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위대한 소설은 그 세계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게 아니라, 이미 우리가 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믿게 만든다. 허구의 세계가 사실은 '진짜' 세계라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닐 게이먼의 세계다. 


- 말런 제임스, 부커상 수상 작가  

 

 


 

- 택시 기사들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무척 곤란해진다. 택시 기사가 "무슨 일을 하세요?"라고 물으면 나는 "아, 글을 씁니다."라고 대답하는데, 그러면 곧 이런 대화가 이어진다.
"어떤 글요?"
"음, 이것저것요." 

내가 생각하기에도 꽤나 확신 없는 목소리다.
"이것저것이라고요? 소설, 논픽션, 대본?"
"네, 뭐 그런 것들이죠."
"그래서 어떤 종류의 글을 쓰는데요? 판타지, 미스터리, 공상과학? 순수문학? 아동서? 시? 평론? 웃긴 얘기? 무서운 얘기? 어느 쪽이에요?"

"전부 다요."
그러면 택시 기사는 거울로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장난을 친다고 생각해서인지 말을 끊는다. 하지만 가끔 계속 말을 이어 가는 기사들도 있는데 대부분 이런 질문을 던진다. "내가 알 만한 책이 있으려나?"

 

- 이런 식으로 나는 미스터리나 유령 이야기처럼 한 가지 종류의 글만 쓰는 작가가 아니라는 사실에 곤란함을 느낀다. 택시 기사에게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그런 작가가 아니라는 점이 말이다. 이 컬렉션은 모든 택시 기사들을 위한 책이다. 하지만 그들만을 위한 책은 아니다. 나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에 이어 무슨 글을 쓰는지 물어본 사람들, 내 어떤 책을 읽어 봐야 할지 궁금한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이다.

 

- 이 책의 이야기들은 인기순이 아닌 출판된 순서로 되어 있다. 가장 오래전에 쓴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초기 작품들을 보면 다른 작가들의 모자와 안경을 쓰고 나에게 잘 어울리는지 살펴보면서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찾으려 애쓰던 내가 있다. 그러다 마침내 내가 누구였는지를 깨달아 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순서대로 읽지 않는 방법을 추천한다. 순간적으로 끌리거나 읽고 싶어지는 이야기부터 읽으면 된다.   

 

- 나는 작가라서 행복하다. 왜냐하면 글을 쓸 때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규칙도 없고 한계조차 없다. 재미있는 이야기, 슬픈 이야기, 거대한 이야기, 작은 이야기 그 무엇이든 쓸 수 있다. 독자를 행복하게 해 줄 수도 있고, 온몸을 차게 식히며 소름 끼치게 할 수도 있다. 솔직히 내가 항상 지난번과 비슷한 느낌의 책을 1년에 한 권씩 냈다면 상업적으로 더 큰 성공을 거두었을 테지만 작가로서 누리는 재미는 훨씬 덜했을 것이다.

 

- 나는 곧 60세가 된다. 스무 살 때부터 전문적으로 글을 써 왔다. 앞으로 20년, 아니, 30년은 더 글을 쓸 수 있기를 희망한다. 아직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 이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쓴다면 택시기사를 비롯해 그 누구에게라도 내가 어떤 작가인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

나 자신도 그 답을 알게 될지 모르고.

 

- 오래전부터 나의 여정을 함께하며 새로운 이야기와 소설이 나올 때마다 읽어 준 독자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그렇게 해 주어 감사하다. 그리고 이 컬렉션을 통해 나를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면 책에서 뭔가 찾길 바란다. 재미, 잠시 현실을 잊는 시간, 경이로움, 생각거리, 또는 그저 계속 읽고 싶은 마음, 그중 어떤 것이라도 좋다. 

 


 

- 소크라테스의 그리 유명하지 않은 제자 아리스티포스는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인 선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피터 핀터는 키레네 학파의 창시자인 아리스티스를 알지 못했지만, 여태껏 바로 그 교훈에 따라 평온한 삶을 살았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남자였다. (특가 세일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는 딱 한 가지만 빼면. 솔직히 그건 누구라도 솔깃할 얘기이지 않을까?) 피터는 어느 모로 보나 극단적인 것과 거리가 멀었다. 점잖은 말씨에 말이 많지도 않고 과식하는 일도 거의 없으며 술도 사회생활에 딱 필요한 만큼만 마셨다. 부자는 아니지만 절대 가난하지도 않았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들도 그를 좋아했다. 과연 이런 남자가 런던 북동쪽 지저분한 동네의 싸구려 술집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청부 살인'을 의뢰할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애초에 이런 술집에 발 들여놓을 일 자체가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 그래서 토요일 오후에는 전화번호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찻집'과 '청소업체' 사이에 '청부 살인' 항목은 없었다. '아기 돌봄 업체'와 '약국' 사이에서도 '암살 의뢰'는 보이지 않았다. '사주'와 '심부름센터' 사이에 '살인 교사'가 없긴 마찬가지였다. 해충 박멸이 그나마 가능성 있어 보였다. 

 

- 이름처럼 아주 지저분한 작은 술집이었다. 어두침침한 실내에서 때 묻은 동키 재킷(donkey jacket, 노동자들이 입는 작업복용 재킷-역주)을 입은 면도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서서, 의심스러운 눈길로 서로 쳐다보거나 감자 칩을 먹거나 긴 잔에 담긴 흑맥주를 마셨다. 흑맥주는 피터가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는 술이었다. 최대한 눈에 잘 띄도록 겨드랑이에 <파이낸셜 타임스>를 끼고 있었지만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샌디 (shandy, 맥주와 레모네이드를 섞은 알코올 음료-역주) 반 잔을 주문해 받아 들고 구석 테이블로 갔다.

 

- 켐블이 말을 끊었다. "괜찮으시면 그런 자세한 얘긴 나중에 합시다. 비용 문제 먼저 간단하게 말씀드리죠. 우선 비용은 500파운드이고..."
피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사실은 더 비쌀 줄 알았다.


- "... 당연히 특가 제안도 있습니다." 켐블이 능숙하게 말을 끝맺었다. 피터의 눈이 반짝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흥정을 좋아해서 도무지 필요 없는 물건이라도 세일이나 특가라면 혹해서 살 때가 많았다. 이 단 한가지 흠만 빼면(보통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고) 그는 자극히 평범한 청년이었다. "특가 제안요?"
"한 명 값으로 두 명을 처리해 드립니다, 고객님."

 

- 흠. 피터는 계산해 보았다. 그러면 1인당 250파운드라는 말이니 어느 모로 보나 나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하지만 저는 죽었으면 하는 사람이 하나뿐인데요."

 

- 그날 밤 자려고 누웠을 때 까무룩 잠들려는 찰나 머릿속에 답이, 그것도 아주 분명하게 떠올랐다. 순간 벌떡 몸을 일으켜 더듬더듬 스탠드를 켰다. 까먹을까 봐 종이 뒷면에 이름을 적었다. 솔직히 고통스러울 정도로 명백한 답이라 도저히 까먹을 리 없겠지만 잠들기 전에 떠오른 생각이니까 혹시 모른다.   

 

- "없습니다, 핀터 씨."
"그건 안 된다는 건가요?"
"공짜로 해 드린다는 말씀입니다, 핀터 씨. 그건 요청이 있어야만 할 수 있거든요. 먼저 요청이 있어야만 하죠."

 

- <할인가에 싹 없애 드립니다 We Can Get Them for You Wholesale>

 

 

- 나는 셀 수도 없는 영겁의 세월도 전에, 카아잉나이흐 Khhaa'yngnaiih(어떻게 쓰는지 내가 어떻게 아냐. 그냥 소리 나는 대로 적어라) 행성의 까만 안개속 하현달 아래에서, 이름 없는 악몽을 부모 삼아 태어났다. 물론 그건 이 지구의 달이 아니라 진짜 달이었다. 어떤 날은 밤하늘의 절반을 덮기도 했지. 달은 그 불룩한 얼굴에 진홍빛 피가 뚝뚝 흘러 온통 붉게 물들면서 떠올랐어. 가장 높이 떠오른 순간에는 그 죽음의 붉은 달빛이 습지와 탑을 감쌌다. 그게 낮이었어. 

 

- 아니, 대체로는 밤이라고 할 수 있었지. 우리 행성에도 태양 같은 게 있긴 했지만 그때도 이미 너무 오래된 상태였다. 태양이 마침내 폭발해 버린밤, 다들 바닷가로 스르르 미끄러져 가서 구경한 기억이 난다. 아, 얘기가 너무 앞서가는구나. 

 

- 난 부모가 누군지 모른다. 
아버지는 나를 잉태시키자마자 어머니에게 먹혔고 어머니는 내가 태어날 때 나에게 먹혔거든. 공교롭게도 그게 내 생애 최초의 기억이다. 어머니의 몸에서 꿈틀꿈틀 빠져나갈 때 내 촉수에 남아 있던 썩기 시작한 어머니 살맛의 기억.

- 그렇게 충격받은 얼굴 하지 마라, 웨이틀리. 내가 보기엔 너희 인간도 역겹긴 마찬가지거든.

 

- 태어나 몇천 년을 그 습지에서 살았지. 물론 좋진 않았다. 그때 난 송어새끼 같은 색깔에다가 몸도 일 미터 정도밖에 안 됐거든. 슬금슬금 다가가 잡아먹거나 슬금슬금 다가온 존재에게 잡아먹히지 않게 조심하면서 살아가는 나날이었지. 

 

- 이제 우리가 뭘 할지 맞춰 봐라. 

정답이다.

쇼거스한테 먹이를 줄 거야.

- <나, 크툴루 I, Cthulhu>

 

 

- "아직도 성배를 포기하지 못했군요."
"그렇습니다. 저는 성배가 꼭 필요합니다." 갤러해드는 바닥에 놓인 가죽 꾸러미를 들어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에 놓고는 풀었다. "성배를 주시면 이걸 드리겠습니다."

 

- 검이었다. 1미터는 족히 넘는 칼날의 단면을 따라 단어와 기호가 우아하게 새겨져 있었다. 칼자루는 금과 은이었고 끝에는 커다란 보석이 박혀 있었다.
"아주 좋아 보이네." 휘태커 부인은 사뭇 의심스럽다는 투였다.
"이 검은 발뭉입니다. 태초에 대장장이 웰란드가 만든 것이고, 쌍둥이 검은 플랑베르주이지요. 이 검을 든 자는 무적이고 전쟁에서 결코 패배할 수 없습니다. 이 검을 든 자는 비겁하거나 비열한 짓을 할 수 없습니다. 칼자루 끝에 있는 것은 사도닉스 버콘인데 포도주나 에일에 탄 독으로부터, 친구의 배신으로부터 지켜 줍니다."

 

- "고맙지만 됐다우." 죽은 남편 헨리라면 꽤 마음에 들어 했을 것 같았다. 서재에 스코틀랜드에서 잡은 박제 잉어 옆에 걸어 놓고 손님들에게 보여주었을 것이다.

갤러해드는 기름 먹인 가죽으로 발뭉 검을 감싸고 하얀 끈으로 묶었다. 비탄에 잠긴 표정이었다.

휘태커 부인은 갤러해드에게 가는 길에 먹으라고 크림치즈와 오이를 넣은 샌드위치를 유산지에 싸 주었다. 그리젤을 위해 사과도 하나 챙겨 주었다. 갤러해드는 두 가지 선물에 무척 만족한 듯했다. 

 

- 갤러해드도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변덕이 심했고 어머니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마녀에 가까웠던 어머니 일레인, 마음 씀씀이는 좋으나 너무 두루뭉술했던 할아버지 펠레스 왕, 기쁨의 섬에 있는 블리언트 성에서 보낸 유년기, '잘못 만들어진 기사'라는 이름으로만 알았던 미치광이 아버지가 사실은 가장 위대한 기사인 호수의 기사 랜슬롯이 위장한 것이었다는 것, 카멜롯에서 보낸 수습 기사 시절. 

 

- 갤러해드는 식탁에 앉았다. 
그는 허리춤에 찬 가죽 주머니를 열어 동그랗고 하얀 돌을 꺼냈다. 크리켓 공만 했다.
"부인, 성배를 주시면 이걸 드리겠습니다."
부인이 돌을 들었다. 생각보다 꽤 무거웠다. 빛에 비춰 보았더니 반투명했고 안에는 무수히 많은 은색 점들이 반짝거렸다. 늦은 오후 햇살에 더욱 더 눈부시게 빛났다. 촉감은 따뜻했다. 
돌을 들고 있으니 이상한 느낌이 온몸을 감쌌다. 마음 깊은 곳에서 고요함과 평화를 느꼈다. 평온함. 그래, 평온함이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그녀는 평온함을 느꼈다.
그녀는 아쉬운 마음으로 돌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아주 좋네."
"현자의 돌입니다. 우리의 선조 노아가 어둠 속에 있을 때 빛을 밝히려고 방주에 걸어 놓은 것이지요. 비금속을 금으로 바꿔 줍니다. 다른 능력도 있고요." 갤러해드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돌 말고 다른 것도 있습니다. 보십시오." 

 

- 그는 가죽 주머니에서 달걀을 꺼내 부인에게 건넸다. 거위알만 했고 빛나는 검은색에 진홍색과 흰색 반점이 들어가 있었다. 만지는 순간 부인은 목 뒤의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멀리서 불꽃이 탁탁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세상과 멀리 떨어진 저 높은 곳에서 불꽃 날개로 급강하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달걀을 현자의 돌 옆에 내려놓았다.
"불사조의 알입니다. 저 먼 아라비아에서 온 것이지요. 언젠가 불사조로 부화할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불사조가 불꽃 둥지를 틀고 알을 낳은 뒤 죽을 거고 다시 불꽃 속에서 태어납니다."
"그런 건줄 알았어." 휘태커 부인이 말했다.

 

- "마지막으로 이걸 가져왔습니다." 갤러해드가 작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건넸다. 루비 덩어리로 조각한 사과였는데 황금색 줄기가 달렸다.
부인은 약간 긴장하면서 받아들었다. 의외로 촉감이 부드러웠다. 그녀의 손가락이 닿자 사과에 멍이 들었고 루비색 과즙이 흘러나왔다.
마법처럼 어느 사이엔가 부엌에 라즈베리와 복숭아, 딸기, 붉은 커런트 등 여름 과일의 향기가 가득 퍼졌다. 저 멀리 아득하게 노래와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헤스페리데스의 사과 중 하나입니다." 갤러해드가 나직하게 말했다. "한 입만 먹으면 아무리 중한 병과 상처라도 싹 낫지요. 두 입 먹으면 젊음과 아름다움을 되찾고 세 입 먹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 휘태커 부인은 손에 묻은 끈적한 즙을 핥았다. 잘 만든 포도주 맛이 났다. 순간 그녀는 젊어진 기분을 느꼈다. 말 잘 듣는 탄탄하고 늘씬한 육체, 숙녀답지 않게 시골길을 전력 질주하는 기쁨, 가만히 있는데도 남자들을 웃게하고 만족시키는 육체를 가진 기분이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의 작은 부엌에 매력적이고 고귀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가장 매력적인 기사 갤러해드 경을 바라보았다.
숨이 턱 막혔다.
"제가 가져온 건 이게 다입니다. 구하기가 쉬웠던 것도 아닙니다." 

 

- 부인은 루비를 식탁에 내려놓고 현자의 돌과 불사조의 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사과를 바라보았다.
그런 다음 응접실로 가서 벽난로 선반을 보았다. 작은 사냥개 도자기 인형, 성배, 상체를 벗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미소 짓는 죽은 남편 헨리의 40년 전 흑백 사진. 
그녀는 다시 주방으로 갔다. 주전자에서 쌕쌕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끓는 물을 찻주전자에 조금 붓고 휘휘 돌린 다음에 따라서 버렸다. 그다음에는 홍차를 한 사람당 한 숟가락씩 두 숟가락, 그리고 찻주전자를 위해 한 숟가락 더 넣고 남은 물을 부었다('한 사람당 한 숟가락, 찻주전자를 위해 한 숟가락'은 영국에서 홍차를 우릴 때의 전통적인 계량 법칙이다. 즉 두 사람이 마실 때는 차를 총 세 숟가락, 세 사람이 마실 때는 총 네 숟가락 넣는 식이다 - 역주). 내내 아무런 말도 없었다. 


- 부인이 마침내 뒤돌아 갤러해드를 바라보았다.
"사과는 치워요." 

 

- <기사도 Chivalry>

 

 

- 네 번째 천사가 말하니 : 
나는 이 질서로 하나가 되었으니,
인간으로부터 이곳을 수호하기 위해,
그들은 죄책감을 버렸고
그분의 은혜를 박탈당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 모든 것을 피하지 않는다면
내 검이 그들을 맞이하고
나는 그들의 적이 되어
그들의 얼굴을 불태울 것이다.

- 체스터 미스터리 연극, '창조와 아담과 이브', 1461

 

 

-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 당황스러워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담배 한 개비인데요, 뭐. 평소에 남들한테 공짜로 나눠 주면 나중에 담배가 떨어졌을 때 저도 공짜로 받을 날이 있겠죠." 사실은 농담이 아니었지만 농담이라는 듯 일부러 웃었다. "아무튼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흠. 그럼 보답으로 얘기 하나 해 줄까? 진짜 있었던 일이야. 옛날에는 신세 진 걸 얘기로 갚기가 참 좋았는데 요즘은... 안 그렇단 말이지."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 나는 벤치에 기대었다. 밤공기가 따뜻했다. 시계를 보았더니 어느새 새벽1시가 가까웠다. 영국에서는 꽁꽁 얼어붙을 것처럼 추운 하루가 또 시작되었겠구나. 눈 오는 밤을 무사히 이겨 내고 출근하는 사람들도 있겠고 늙은사람들과 노숙자들은 밤의 추위로 목숨을 잃기도 했겠지. 

 

- "내가 제일 처음 기억하는 건 단어야. 신이라는 단어. 너무 지치고 우울할땐 나를 빚어서 생명을 불어넣는 그분의 목소리를 떠올리지. 그 단어는 나에게 육체와 눈을 줬어. 눈을 떠 보니 실버 시티의 빛이 보였지. 내가 있는 곳은 방이었어. 은색 방. 나 말고 아무것도 없었지."

 

- "거기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겠어. 초조하거나 하진 않았어. 그건 기억나. 누가 부를 때까지 계속 기다려야 하는 거였지. 언젠가는 부를 거라는 확신이 있었거든. 끝내 부름을 받지 못한대도 상관 없었어. 하지만 부름을 받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네. 그때 내 이름과 직분을 알게 된다는 걸."

 

- "지금 이 모습을 보면 도저히 믿기지 않겠지만 난 아름다웠다네. 말하자면 지금은 그때보다 상당히 하락한 거지. 그땐 키가 더 컸어. 날개도 있었고, 진주색 깃털이 달린 엄청나게 크고 강한 날개였어. 어깨뼈 사이에 돋아났는데 정말 멋졌어. 내 날개 말이야."

 

- "난 그들이 첨탑 사이를 가르며 하늘로 솟아올라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실버 시티는 장관이었어. 항상 빛이 있었지. 태양 빛은 아니었어. 도시 자체에서 나오는 빛이었을 거야. 하지만 그 빛은 매번 바뀌었어. 백랍 색깔이다가 청동색이다가 은은한 황금빛이다가 차분한 자수정 색깔이다가..."
남자는 이야기를 멈추고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눈동자가 번득거려서 무서웠다. "자수정 알지? 보라색 보석 말이야."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가랑이가 불편했다.
순간 남자가 미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초조해졌다.
남자는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 "방에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시간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네. 그땐 말이야. 시간은 많고도 많았으니까.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루시퍼 천사가 내 방으로 온 거였어. 그는 나보다 큰 키에 날개가 웅장하고 깃털도 완벽했지. 바다 안개빛 피부에 곱슬곱슬한 은색 머리, 황홀한 회색 눈동자... 아, '그'라고는 했지만 참고로 그때 우리에겐 확실한 성별이 없었다네." 남자가 무릎 사이를 가리켰다. "아무것도 달리지 않았고 반들반들했거든."

 

- "루시퍼는 빛이 났어. 안에서 빛이 나왔지. 천사들은 다 안에서 빛이 나와. 내 방에서 루시퍼는 꼭 번개 폭풍처럼 활활 타올랐지. 그가 나를 보면서 이름을 주었어. 
'너는 라구엘이다. 신의 복수.'
난 고개를 숙였어. 그게 진실이란 걸 알 수 있었거든. 그게 내 이름이고 내가 받은 직분이란 걸."

 

- "루시퍼가 말했어. '누가, 어떻게 한 짓인지 찾아내 복수를 행하거라.'

그가 말하지 않아도 난 이미 알고 있었어. 범인을 추적해 응징하는 것이애초에 내가 창조된 이유라는 것을. 그게 내 존재 자체라는 것을."

 

- '그 프로젝트가 뭐였습니까?'
파누엘은 나를 쳐다보았어. '자네에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군. 우리가 개발하는 모든 개념은 소리 내어 말해질 최종적인 형태로 완성되기 전까지는 극비사항이라서.’
순간 내가 변하는 게 느껴졌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내가 달라진 거야. 더 커다란 존재로 변했지. 내 직분 자체가 된 거야. 
파누엘은 내 눈을 쳐다보지 못했어.
'나는 신의 복수, 라구엘이다.'
내가 그에게 말했지. '나는 그분을 직접 섬긴다. 이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 신의 복수를 행하는 것이 내 임무다. 내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다.'
자그만 천사는 몸을 떨면서 빠르게 말했어.
'카라셀은 파트너와 함께 죽음을 연구하고 있었다네. 생명이 정지되어 육체의 생기가 사라지는 죽음. 거의 준비가 끝나가고 있었지. 하지만 평소 카라셀은 일에 너무 깊이 빠져드는 경향이 있었어. 불안을 작업할 때도 카라셀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그는 그 전엔 감정을 작업했었거든.' 

 

- '존재의 전당에서 나갔을 때 카라셀이 위를 쳐다보고 길에 누워 있는 걸 봤네. 뭐하냐고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어. 몸에서 흘러나온 액체를 보고 말을 하기 싫은 게 아니라 못하는 것임을 깨달았지.' 

 

- "순간 또다시 그분의 권능이 나를 감싸는 게 느껴졌다네. 난 그를 내려다보면서 말했지. '당신은 거기 가게 될 겁니다. 지금 가세요.'

사라카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나를 빤히 쳐다보며 창가로 갔지. 고개를 돌려 날개를 퍼덕였어. 난 거기에 혼자 남았지."

 

- "파누엘이 서로 그의 관심을 끌려는 두 천사 사이에 서 있더군. '아무리 미학적으로 만족스러워도 안 돼.' 그가 설명했지. '뒤쪽의 방사선 때문에 그 어떤 생물체도 발 들일 수 없을 거라고. 어쨌든 너무 불안정해.'"

 

- "도시 상공에는 하늘을 선회하다가 급강하하는 한 무리의 천사들이 가득했지. 다들 불타는 검을 들고 있었는데 검을 따라 불꽃의 흔적이 길게 남아서 눈이 부셨어. 그들은 연한 핑크빛 하늘에서 동시에 움직였어. 정말 아름다웠지. 여름날 저녁에 하늘에서 춤추는 새 떼 본 적 있지? 앞으로 쭉 나아가다 곡선을 그리고 다시 모였다가 또 흩어지잖아. 움직임의 패턴을 알겠다 싶으면 금세 또 아리송해지지. 절대 알 수 없잖아? 그거랑 비슷한 데 더 멋있었어.

위에는 하늘, 아래에는 빛나는 도시, 나의 집이 있었어."

 

- "'루시퍼, 파누엘과 카라셀의 시체를 발견하기 전에 뭘 하고 있었는지 말해 주시죠.'
'이미 말했잖나. 산책 중이었다고.'
'어딜 걷고 있었나요?'
'그건 자네가 상관할 일이 아닌 것 같군.'
'말하세요.'"

- "우리 중에 가장 키가 크고 자부심이 강한 루시퍼가 잠시 멈칫했어.

'그래. 어둠을 걷고 있었네. 어둠에서 산책한 지는 꽤 되었어. 이 도시 밖에 있으면 이곳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생기거든. 이 도시가 꽤 멀리 있고 완벽하다는걸 깨닫지. 우리의 집보다 더 황홀한 곳은 없다는 것을 이만큼 완벽한 곳은 없어. 이곳이야말로 누구라도 있고 싶어 할 곳이지.'
'어둠 속에서 무엇을 합니까, 루시퍼?'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어. 

'걸어. 그리고... 어둠 속에선 목소리가 들리거든. 목소리를 듣네. 그 목소리는 나에게 약속하고 질문하고 속삭이고 애원하지. 하지만 난 무시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도시를 바라보지. 그렇게 나 자신에게 시련을 주는 것이 내가 나를 시험하는 유일한 방법이네. 나는 신의 군대를 이끄는 대장이고 거의 최초의 천사이니까 나 자신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돼.'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 '왜 그걸 진즉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는 시선을 떨구었지. '어둠을 걷는 천사는 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나 말고 다른 천사가 어둠을 걷기를 원하지 않네. 나는 어둠의 목소리에 도전하고 자신을 시험할 만큼 강하지만 다른 천사들은 그렇지 못하니까. 다른 이들은 휘청거리거나 타락할 거야.'"

 

- "'사라카엘, 카라셀이 사랑한게 누구죠? 그의 연인이 누구였습니까?' 
사라카엘은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어. 잠시 후 자랑스러우면서도 저항하는 표정으로 얼굴을 꼿꼿이 들더군."

 

- "'그런데 지금도 계속 아파요.'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소리였지. 사라카엘이 고개를 들고 턱을 잡은 내 손을 치우고는 물었지. '이제 어떡할 건가요?'

또다시 그분의 권능이 나를 휩싸고 그분에게 받은 직분이 느껴졌어. 나는 일개 천사가 아닌 신의 복수였어.

사라카엘에게 다가가 그를 안았어. 입술을 포개고 혀를 집어넣어 키스했지. 그가 눈을 감더군. 
그때 내 안에서 타는 듯한 빛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어. 루시퍼와 파누엘이 밝게 빛나는 나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게 곁눈질로 보였지. 하지만 제프키엘은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어. 내 몸에서 나오는 빛이 점점 밝아지다가 폭발했어. 내 눈과 가슴, 손가락, 입에서 새하얗게 이글거리는 불빛이 나왔지. 하얀 불꽃이 사라카엘을 서서히 휘감았고 그는 나에게 꽉 매달린 채로 불에 탔어.
이내 흔적조차 없이 소멸해 버렸어.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

 

- "루시퍼는 사라카엘이 서 있었던 지점으로 걸어가더니 무릎을 꿇고 절박하게 은색 바닥을 살피더군. 혹시라도 내가 소멸시킨 천사의 재라도, 뼈라도, 그을린 깃털이라도 남지 않았을까 바라는 듯이.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지. 그가 나를 올려다보았어. 
'이건 옳지 않아. 공평하지 않아.'

눈물이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어. 사라카엘이 처음 사랑에 빠진 천사라면 루시퍼는 처음 눈물을 흘린 천사였지. 난 그걸 절대로 잊을 수 없다네." 

 

- "'그리고 너의 복수를 행했지, 라구엘.'
'당신의 복수입니다, 신이시여.'
그는 한숨을 쉬며 다시 자리에 앉았어. 

'아, 어린 라구엘, 창조의 문제는 그들이 원래 계획보다 일을 너무 잘한다는 것이란다. 날 어떻게 알아보았지?'"

 

- "'아니, 제가 어떻게 알았는지 저도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당신께서 창조했지요. 하지만 저는 루시퍼가 가 버리고 나서야 당신이 누구인지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도요.' 
'그래, 아이야, 무엇을 눈치챘느냐?'
'카라셀을 죽인 게 누구인지요. 아니, 배후에서 조종한 게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카라셀이 작업에 과도하게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그와 사라카엘에게 사랑 작업을 맡긴 것부터가 그렇죠.' 
그는 어른이 아이에게 하듯 호기심을 돋우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지. 

'어째서 배후에서 조종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지, 라구엘?'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이유는 당신의 이유입니다. 당신이 사라카엘을 함정에 빠뜨렸어요. 물론 카라셀을 죽인 건 사라카엘이지요. 하지만 그건 제가 그를 소멸시키기 위해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럼 네가 사라카엘을 소멸시킨 것이 잘못된 일이었느냐?'
난 몇 살인지 모를 그분의 눈을 바라보았지. 

'그건 제 직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루시퍼에게 신의 부당함을 보여 주기 위해서 제가 사라카엘을 소멸시켜야만 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가 미소 지었어. 

'내가 왜 그런 일을 한단 말이냐?'"

- "'모...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어둠과 어둠 속의 목소리를 만드신 이유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그 목소리를 만드셨지요. 당신께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고개를 끄덕였어. 

'그렇다. 내가 한 일이다. 루시퍼는 사라카엘의 소멸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곱씹어야만 한다. 그리고 루시퍼는 어떤 행동을 하게 될 것이야. 착하고 가여운 루시퍼. 그 아이는 내 아이들 가운데 가장 혹독한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상황에서 그 아이가 꼭 해야 하는 역할이 있다. 아주 중대한 역할이지.'"

 

- "'그런데 신이시여?'
'왜 그러느냐, 아이야.'
'더러운 기분이 듭니다. 제가 더럽혀진 것 같아요. 모든 일은 당신의 뜻에 따라 일어나니 좋은 것이겠지요. 하지만 당신께서는 당신의 도구에 피를 묻히십니다.'"

 

- <천사 살인 사건수사 일지 Murder Mysteries>

 

 

- "난 트롤이야." 녀석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덧붙였다. "폴 롤 데 올 롤."

 

- 체구가 엄청나게 컸다. 머리가 벽돌 아치 맨 꼭대기에 닿았으니까. 몸은 반투명에 가까워서 뒤쪽의 벽돌과 나무가 희미하게 비쳤다. 내 모든 악몽이 현실화한 형상이었다. 크고 단단한 이빨, 모든 걸 찢어발길 듯한 손톱과 발톱, 털이 수북하고 튼튼한 손. 여동생의 플라스틱 트롤 인형처럼 머리가 길고 눈은 불룩 튀어나왔다. 알몸이라 다리 사이의 수북한 털 속에서 성기가 달랑거렸다. 
"네 소리를 들었어, 잭." 녀석이 바람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다리를 쿵쿵거리며 걷는 소리를 들었어. 난 네 삶을 먹을 거야."

- 그때 나는 고작 일곱 살이었지만 대낮이었던 터라 무섭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이들이 동화 속 이야기를 직접 마주하는 건 좋은 일이다. 아이들에겐 그런 상황에 대처할 능력이 있다. 

 

- "너 누나 없잖아. 여동생밖에. 여동생은 친구 집에 갔고."
"그걸 냄새로 알 수 있어?" 감탄한 내가 물었다.

"트롤은 무지개 냄새도 맡고 별 냄새도 맡아." 녀석이 애처롭게 중얼거렸다. "트롤은 네가 태어나기 전에 꾼 꿈도 냄새로 알 수 있어. 네 삶을 먹게 이리 와."

 

- <트롤 다리 Troll Bridge>

 

 

- 난 그것이 대체 어떤 인간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일단 그것은 태어날 때 제 어미를 죽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 사람들은 나더러 지혜롭다지만 난 지혜와는 거리가 멀다. 내가 예측한 것은 미래의 일부분뿐이었다. 물웅덩이 혹은 차가운 거울에 비친 정지된 순간들. 만약 내가 정말 지혜로웠다면 내가 본 미래를 바꾸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정말 지혜로웠다면 그녀를 만나기 전에, 그를 보기 전에 내가 먼저 그냥 죽어 버렸을 텐데.

 

- 지혜로운 나, 사람들이 마녀라고 부른 나는 평생 꿈에서, 그림자 속에서 그의 얼굴을 보았다. 16년 동안 꿈속에서 보았던 그가 그날 아침 말을 타고 나타나 다리 옆에서 내 이름을 물었다. 그가 나를 말에 태웠고 나는 그의 황금빛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우리는 함께 내 작은 집으로 갔다. 그는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요구했다. 왕의 권리였다. 

 

- 아이는 우리와 함께 식사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가 궁전 어디에서 식사하는 건지 알지 못했다.

 

- "부탁입니다. 움직이지도 말고 말도 하지 마세요. 그냥 차갑게 식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바닥에 누워 있기만 하세요."

 

- <눈, 거울, 사과 Snow, Glass, Apples>

 

 

- 소금기를 머금은 공기에 하얀 입김이 피어오른다. 길에 쌓인 눈은 딱딱하고 지저분하다. 구름을 보니 눈이 더 올 것 같다.

 

- 마시 스트리트와 렝 애비뉴 모퉁이에 오프너라는 술집이 있다. 지난 2주 동안 작은 검은색 창문이 달린 저 땅딸막한 건물을 스물네 번이나 지나쳤다.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지금은 술을 꼭 마셔야겠다. 게다가 저 안은 좀 따뜻하겠지. 문을 밀어서 열었다. 

 

- 거의 비어 있는 술집에선 오래된 재떨이와 김빠진 맥주 냄새가 났다. 바 자리엔 두 노인이 체스를 두고 있었다. 바텐더는 알프레드 테니슨 경의 금박 입힌 낡은 초록색 가죽본 시집을 읽는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잭 대니얼 주세요. 얼음 넣지 말고요."
"그러죠. 이 동네에 온 지 얼마 안 되셨군요." 바텐더가 책을 그대로 엎어놓고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표가 나나요?"

 

- "해장술인가요?"
여우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딱 붙여서 뒤로 넘긴 바텐더가 계속 말했다. "라이칸스로프(늑대인간의 일종-역주)는 늑대일 때 고맙다는 인사를 받거나 본명을 불리면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다고 하죠." 
"그런가요? 고맙습니다."

 

- "주인장은 뭘 믿는데요?"
"거들을 태워라."
"네?"
"라이칸스로프에겐 인간의 가죽으로 만든 거들이 있어요. 처음 변신할 때 지옥에서 주인들이 주는 거죠. 거들을 태워라." 
체스를 두던 노인 하나가 나를 돌아보았다. 앞을 보지 못하는 두 눈이 크고 튀어 나왔다.

"늑대인간의 발자국에 고인 빗물을 마시면 보름달이 뜰 때 늑대로 변해. 원래대로 돌아가는 방법은 그 발자국을 남긴 늑대를 찾아 정제되지 않은 은, 즉 버진 실버 virgin silver로 머리를 자르는 거지."
"버진요?" 내가 웃었다.

함께 체스를 두던 주름 자글자글한 대머리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애처로운 소리를 냈다. 그는 퀸을 옮기고 또 소리를 냈다. 인스머스에는 어딜 가나 이런 사람들이 있다. 

 

- 술집을 나가니 탐스러운 함박눈이 머리와 속눈썹으로 떨어졌다. 난 눈이 싫다. 뉴잉글랜드가 싫다. 인스머스도 싫다. 혼자 있을 만한 곳이 아니다. 세상에 혼자 있기 좋은 장소가 있을까. 내가 아직 찾지 못한 게 분명하다. 

 

- "그게 바로 네가 생각하는 세상의 모습이야." 뱃속에서 느껴질 정도로 저음의 어두운 목소리가 말했다. 

 

- 안락의자에 앉은 뚱뚱한 남자가 여전히 눈을 꽉 감은 채로 말을 이었다.

"우린 어리둥절한 눈으로 세상을 둘러보지. 불편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우린 스스로를 불가사의한 예배식의 학자들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세상에 갇힌 미혼의 남자들. 진실은 훨씬 더 단순해. 우리 아래의 어둠 속에 우리를 해치고 싶어 하는 것들이 있어." 

 

- "어쩌면 세상의 종말은 참 이상한 개념이지. 세상은 항상 끝나가고 있는데 사랑이나 어리석음, 아니면 단순히 바보 같은 행운이 항상 그 종말을 막고 있으니까 말이야. 뭐, 어쨌든 이젠 너무 늦었어. 고대 신들은 이미 배를 선택했어. 달이 뜨면..." 
그의 한쪽 입가에서 흘러내린 묽은 액체가 옷깃의 은색 실 가닥으로 떨어겼다. 옷깃에서 무언가가 잽싸게 외투 속으로 사라졌다.

 

- 따르릉.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루미늄 외장재 설치할 생각 없으신가요? 나는 전화를 끊었다.
내 사무실에는 난방 시설이 없었다. 뚱뚱한 남자가 안락의자에서 얼마 동안이나 잠들어 있던 건지 의아했다.

- 20분 후 전화가 다시 울렸다. 여자가 울면서 다섯 살짜리 딸이 어젯밤에 침대에서 자다가 납치당했다며 찾아달라고 간청했다. 애완견도 함께 없어졌다고. 
실종 아동 찾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안 좋은 기억이 너무 많아서요. 
또 속이 메스꺼워지는 걸 느끼며 전화를 끊었다.

- 서서히 밖이 어두워졌다. 인스머스에 온 지 처음으로 길 건너편의 네온사인에 불이 켜졌다. 타로로 운세도 보고 손금도 봐주는 점집의 마담 에제키엘이 영업을 한다는 뜻이었다. 
붉은 네온사인으로 물든 핏빛 눈이 내렸다.
작은 행동들이 아마겟돈을 막는다. 지금까지 늘 그랬다. 앞으로도 늘 그래야만 한다.

 

- "좀 천천히. 카드가 당신을 알고 사랑할 시간을 주세요. 음... 관심 있는 여자라고 생각해 봐요."

나는 카드를 꽉 잡고 그녀에게 넘겼다.

그녀가 첫 번째 카드를 꺼냈다. 늑대인간 카드. 어둠과 불꽃색 눈, 희고 붉은 미소가 보였다.

그녀의 에메랄드 같은 초록색 눈에 혼란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이 카드는 내 카드가 아닌데." 그녀가 다음 카드를 뒤집었다. "내 카드에 무슨 짓을 한 거죠?"

"아무것도요. 그냥 들고 있었을 뿐인데요."

 

- <세상이 또 끝나는 것일 뿐 Only the End of the World Again>

 

 

- 존 오브리의 <이교도와 유대교의 잔해 The Remaines of Gentilisme & Judaisme>에서 R.S.S. (1686–87), (pp 262-263)

 

- 내 친구 에드먼드 와일드에게 들은 이야기다. 친구는 패링던 씨에게 들었다는데 무척 오래된 이야기라고 했다. 딤턴이라는 마을에서 갓 태어난 여자아기가 간밤에 교회 계단에 버려져 있는 것을 다음 날 아침에 관리인이 발견했다. 이상하게도 아기는 올빼미의 펠릿(맹금류가 토해 낸 뭉치 - 역주)을 손에 쥐고 있었다. 부서진 펠릿에서는 여느 큰 올빼미의 펠릿과 마찬가지로 소화되지 않은 털이나 뼛조각 같은 것이 나왔다.

 

- 나쁜 짓을 하러 온 남자들은 사악하고 잔혹한 이들이었기에 그저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그들은 달빛 아래에서 소녀에게 달려들었다. 

 

- 그날 밤 딤튼 마을 사람들을 올빼미와 커다란 새들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 자신들이 쥐와 생쥐가 된 꿈을 꾸었다.

 

-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흥미로운 이야기라 이렇게 적는다. 

    
- <올빼미의 딸 The Daughter of Owls>

 

 

- "소문이 돌죠. 할리우드잖아요. 아시죠?"
나는 모르면서도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사람들은 저절로 쓰이는 책이 있다고들 말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책은 저절로 써지지 않는다. 생각과 연구가 필요하고 허리도 아파야 하고 메모도 해야 하고 상상 이상으로 많은 시간과 노동이 필요하다.

 

- 하지만 그 남자의 아들들은 예외였다. 그 책은 거의 저절로 써졌다. 작가들은 짜증 나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어디에서 아이디어를 얻으시죠?"
답은 '짬뽕'이다. 여러 가지가 합쳐진다. 올바른 재료들이 모이면 갑자기 마법처럼 아이디어가 나온다. 아브라카다브라!

 

- 시작은 우연히 보게 된 찰스 맨슨에 관한 다큐멘터리였다(친구에게 비디오테이프를 빌렸는데 원래 보고 싶었던 작품을 두어 편 본 다음에 그 비디오를 보게 됐다). 맨슨이 처음 체포되었을 때의 장면이 나왔는데, 그때 사람들은 맨슨이 무죄인데 정부가 괜히 히피들을 핍박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화면에 카리스마 넘치는 잘생긴 외모로 메시아처럼 연설하는 맨슨이 나왔다. 확실히 그를 위해서라면 맨발로 기어서 지옥에 가거나 살인도 마다하지 않을 것처럼 생긴 모습이었다.   

 

- 그러나 재판이 시작되고 몇 주 지나자 메시아 같은 연설가는 사라지고, 이마에 십자가 문신이 있는 어기적거리고 횡설수설하는 원숭이만 남아 있었다. 천재적인 면모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사라져 버렸다. 분명히 있었는데. 

 

- "다들 비웃었어요. 아무것도 아니었다니까!"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맨슨이 카리스마 넘칠 때가 분명 있었다. 축복이 주어졌다가 사라진다는 게 이런 것일까.

 

- 노인이 물고기 밥을 한 줌 뿌리자 잉어 세 마리가 수면으로 올라와 꿀꺽꿀꺽 먹었다.

환상 마법에 관한 책을 들고 방으로 돌아갔다.

 

- 어쨌든 그녀는 진짜였다. 진짜 살아 있던 사람이었다. 내가 묵는 호텔에서 70년 전 물고기에 입을 맞추었고 이곳을 걸어 다녔다. 영국에서는 아예 존재하지 않지만 할리우드에서는 영원한 존재였다.

 

- 책에서 발견한 두 가지 연극 마술이 나를 매료시켰다. '화가의 꿈'과 '마법의 여닫이창'. 이것들을 무언가의 비유로 활용하는 작품을 쓰자는 마음만큼은 확실한데 도대체 어떤 이야기와 연결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첫 문장을 여러 번 썼지만 첫 문단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첫 문단은 한 페이지까지 나가지 못했다. 컴퓨터로 썼는데 저장도 하지 않고 그냥 밖으로 나왔다. 

 

- 나는 비 오는 영국과

부두의 이상한 극장을 생각하고 있다.

공포와 마술과 기억, 고통의 흔적.

 

공포는 음산한 광기여야 하고

마술은 동화 같아야 한다.

나는 비 오는 영국을 생각하고 있다.

 

외로움은 설명하기가 더 힘들다.

내가 실패를 경험하는

마음속 공포와 마술, 기억, 고통의 텅 빈 곳.

 

나는 마술사와 거짓말로 위장한 진실의 타래를 생각한다.

베일을 입은 그대.

나는 비 오는 영국을 생각하고 있다.

 

모양이 기이한 후렴구처럼 반복되고

여기 검과 손이 있다.

공포와 마술과 기억, 고통의 성배가 있다.

 

마술사가 지팡이를 흔들자 우리는 창백해지고

그는 슬픈 진실을 말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나는 비 내리는 영국을 생각하고 있다.

공포와 마술과 기억, 고통의 그곳을.

 

- <잉어 연못과 다른 이야기들 The Goldfish Pool and Other Stories>

 

 

- "난 그게 무서워." 벌린다는 면 소재 원피스 잠옷을 입었다. "그 종이에 적힌 게 우리의 진짜 결혼 생활을 묘사한 거고 현실은 그냥 아름다운 그림에 불과한 걸까 봐. 거기 적힌 게 진짜고 우리가 가짜일까 봐. 내 말은..."

술기운 때문인지 어느새 그녀의 목소리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자기는 우리 결혼 생활이 현실이라기엔 너무 완벽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고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특히 오늘."

 

- 그녀는 봉투 속 종이의 자신들은 어떻게 되어 있을지 궁금해졌다. 침실 한 구석에 안전하게 자물쇠로 잠가 둔 그들이 참 외롭고 침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벨린다는 의자에 깊숙이 기대고 앉아 눈을 감고 뺨에 흉터가 피어나기를 기다렸다. 

 

- <결혼 선물 The Wedding Present>

 

 

- 길가에 차에 치여 죽은 동물이 있었다. 아빠는 그게 하얀 사슴이라고 했다. 나는 유니콘이라고 생각했지만 엄마는 유니콘은 죽지 않는다고 했다. 또 어른들의 거짓말인 것 같다.

'황혼'에 이르렀을 때 나는 소원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느냐고 물어봤다.

아빠가 무슨 소원이냐고 물었다.

생일에 촛불 끄면서 비는 소원요.

아빠는 남들에게 말하든 말하지 않든 소원은 전부 안 이루어진다고 했다. 소원은 믿을 수 없는 거라고. 

 

- 난 차에서 내리기 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눈을 꼭 감고 소원을 빌고 또 빌었다. 포니데일에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다신 어디에도 가지 않게 해 달라고, 다른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소원을 빌었다.

 

- <세상의 종말을 보러 간 우리 가족, 11과 1/4세 도니 모닝사이드 씀 When We Went to See the End of the World by Dawnie Morningside, age 11 1/4> 

 

 

- 새 한 마리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더니 지저귀기 시작했다. 

새벽의 빛이 흐릿해지면서 다시 어둠으로 변했고 안개도 걷혔다. 한 여자와 두 마리 짐승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부진 체격의 여자가 아들의 도움으로 일어났다. 깨어난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다치지는 않았다. 우산에 몸을 지탱하면서 우리를 노려보는 것으로 보아 다치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 사실이 확인되자마자 우리는 박수를 쳤다.

 

- 아니, 어쩌면 그건 그냥 기차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 <미스 핀치 실종 사건에 관한 사실들 The Facts in the Case of the Departure of Miss Finch>

 

 

- 조/조이는 내일 밤에 알약을 또 먹을 것이다. 직장에서는 100퍼센트 남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 라지트는 리부트의 성별 변화 효과를 단순히 부작용의 하나로만 인식했다. 그가 노벨상을 받은 것도 암 치료 연구 때문이었다(리부팅은 대부분 암에 효과적이지만 모든 암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 라지트는 탁월한 두뇌의 소유자이지만 대단히 근시안적이었다. 그가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꽤 있었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었다. 

 

- 성별이 바뀌느니 그냥 차라리 암으로 죽는 것을 선택하는 환자들이 있을 거라는 점이 그랬다. 특히 가톨릭교회가 리부트라는 브랜드명으로 시중에서 판매되기 시작한 그의 화학 자극제를 반대하고 나섰다. 성별 변화 시 태아 자체도 리부트가 되면서 태아의 살이 여성의 몸에 재흡수되고, 남성은 임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 밖에도 수많은 종파가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는 창세기 1장 27절의 내용을 내세워 리부트를 반대했다. 

 

- 리부트에 반대하는 종파는 다음과 같았다. 이슬람교, 크리스천 사이언스, 러시아 정교회, 로마 가톨릭교회(내부에서 의견 대립이 심했다), 통일교, 정통 트렉 팬덤, 정통파 유대교, 미국 근본주의 연합. 

- 자격을 갖춘 의사가 치료하면 괜찮다고 리부트 사용에 찬성한 종파는 다음과 같았다. 대부분의 불교 신자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그리스 정교회, 사이언톨로지 교회, 성공회(내부에서 의견 대립이 심했다), 뉴 트렉 팬덤, 자유 또는 개혁 유대교, 뉴에이지 아메리카 연합. 

 

- 리부트를 오락용으로 사용하는 것에 찬성한 종파는 처음부터 하나도 없었다.

 

- 라지트는 리부트로 인해 성전환 수술이 필요 없게 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욕망이나 호기심, 도피를 이유로 리부트를 사용할 사람이 나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리부트나 그와 비슷한 화학 자극제를 위한 암시장이 생기리라는 것도 당연히 예측하지 못했다.  

 

- <변화들 Changes>

 

 

- "제 심장요?" 

이상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진심으로 걱정되어 묻는것 같았다. 

"아까보다 행복해요. 편안하고 걱정이 줄어들었어요."
"잘됐네. 심장이 뜨겁게 타올라야 해요, 알았죠? 아가씨 심장이 뜨겁게 타올라야 해요. 안에서 밝게 빛나야 해." 

 

- 이 무지몽매한 땅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다니, 별은 마음이 따스해지고 만족스러웠다. 바깥의 산속 오솔길은 세찬 비바람이 몰아쳤지만 여관은 따뜻하고 편안했다. 여주인은 따분한 표정의 딸과 함께 와서 별이 욕조에서 일어나는 걸 도와주었다. 난로의 불빛이 별의 허리춤에 있는 은색 체인 토파즈에 비쳤으나, 곧 그녀가 걸친 두툼한 가운에 가려졌다. 

 

- "아가씨, 이제 이쪽으로 와서 좀 쉬어요." 여주인은 별을 나무 테이블까지 부축해 주었다. 테이블 상석에는 큰 식칼과 나이프가 놓여 있었다. 둘 다 칼자루가 뼈 소재로 되어 있었고 날은 까만 유리였다. 별은 절뚝거리며 테이블의 긴 의자로 가서 앉았다.

 

- 바깥의 세찬 바람은 여전했고 난롯불은 초록색과 파란색, 하얀색으로 타올랐다.    

 

- 마지막 말을 솔질해 줄 때쯤, 멍한 얼굴의 심부름꾼 소녀가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컵에 데운 포도주를 들고 나타났다. 

 

- 그는 별을 만나면 이렇게 말하기로 했다. 별 아가씨,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제 사과를 부디 받아 주세요. 그러면 별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온 마음으로 그 사과를 받아 줄게요. 이제 같이 마을로 가서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를 보여 주세요. 그녀에 대한 진실한 사랑의 증표로...

 

- 그 순간 시끄럽게 덜컹거리는 소리가 그의 상상을 깨뜨렸다. 끄트머리 칸의 하얀 말이 -트리스트란은 그게 말이 아니란 사실을 곧장 깨달았다- 칸막이 문을 발로 차 버리고 뿔을 아래로 내린 채 그를 향해 필사적으로 돌진해 오는 게 아닌가.  

 

- 잠시 후 고개를 들어 보았다. 컵 바로 앞에서 멈춘 유니콘이 따끈한 포도주 쪽으로 뿔을 내리고 있었다. 
트리스트란은 어색한 듯 일어섰다. 포도주에서 김이 솟아오르고 거품이 일었다. 순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지식이 떠올랐다. 동화였던가, 아이들의 구전 설화였던가, 유니콘의 뿔은 독을 탐지할 수 있다고 했지. 

 

- "그럴지도 모르겠군." 프리머스는 뭔가에 정신이 쏠린 듯했다. 그는 별에게 다가가 잠깐 그녀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대..." 잠깐 망설이더니 확신이 생긴 듯했다. "아가씨는 내 아버지의 보석을 갖고 있군. 스톰홀드의 힘을 갖고 있어."

 

- 프리머스의 시선이 나무 테이블에 놓인 칼로 향했다. 그는 그것들을 알아보았다. 스톰홀드의 금고에 보관된 너덜너덜한 두루마리에는 저 칼들이 그려져 있었고 이름도 있었다. 세상의 첫 번째 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아주 오래된 물건들이었다. 

 

- <스타더스트 발췌 Excerpt from Stardust>

 

 

- "받으세요."
그녀에게 할 말은 전부 준비해 두었다. 붉은색과 노란색 옷을 입고 도미노 가면을 쓴 신비로운 남자를 만날 텐데, 그 남자가 그녀를 웃게 해 주고사랑해 줄 거고 절대로 떠나지 않을 거라고(컬럼바인에게 모든 진실을 말해 주는 건 좋지 않으니까). 하지만 난 갈라진 노파의 목소리로 대신 이렇게 말한다. "혹시 할리퀸이라고 들어봤어요?"

 

- 난 망토 모자로 덮은 머리를 젓는다. "광대가 아니라오. 그는..."
그녀에게 진실을 말하려는 순간 말을 삼켜 버리고 노인네들이 그렇듯 갑자기 기침이 터진 시늉을 한다. 이게 사랑의 힘일까. 지난 몇 백 년 동안 만난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다른 여자들, 이미 죽은 지 오래된 다른 컬럼바인들은 이런 문제가 없었는데. 
난 노파의 눈을 가늘게 뜨고 미시를 쳐다본다.

20대 초반의 나이, 윤곽이 선명하고 확신이 느껴지는 인어공주 같은 도톰한 입술, 회색 눈동자, 강렬한 눈빛. 

 

- "아까 운수를 봐주신다고 하셨는데."
"할리퀸이 아가씨에게 심장을 줬지요." 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심장의 박동을 직접 찾아야 할 거야."

 

- 난 시선을 아래로 향한다. 내 옷의 다이아몬드 무늬가 희미해지고 있다. 유령 같은 하얀색, 피에로 같은 하얀색으로.

"난 이제 어떡해?" 내가 그녀에게 묻는다.

"나도 몰라. 희미해져서 사라지겠지. 아니면 새로운 역할을 찾거나...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때문에 하얀 달빛 아래에서 슬피 울면서 절규하는 남자 같은 거. 컬럼바인을 애타게 갈망하면서 말이야."

"넌데. 네가 내 컬럼바인인데."

"이젠 아니야. 그게 할리퀸 무대의 묘미잖아, 안 그래? 의상을 갈아입고 새로운 역을 맡는 거."

그녀는 날 향해 환하게 웃는다. 그러더니 모자를, 내 할리퀸 모자를 머리에 쓴다. 

 

- 어쨌든 삼켰다. 솔직히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접시에서 케첩 한 방울이 내 하얀 유니폼 소맷자락으로 떨어져 완벽한 다이아몬드 모양을 만들었다.

"샬린," 내가 주방 건너편으로 소리쳤다. "밸런타인 데이 즐겁게 보내." 그리고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 <할리퀸 밸런타인 Harlequin Valentine>

 

 

- 그때는 에릭 더 레드(그린란드를 최초로 발견하고 정착한 바이킹의 우두머리 - 역주)의 아들인 행운아 리프가 이 땅을 다시 발견하고 '바인랜드'라 이름 붙이기 백여 년 전이었다. 리프가 도착했을 때 그의 신들이 이미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외팔이 티르, 교수대의 신인 회색의 오딘, 천둥의 신 토르.

그들이 거기 있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 난 널 몰라. 섀도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우린 한 번도 만난 적 없어. 서로 완전히 모르는 사이라고. 섀도는 예전에 눈을 생각함으로써 눈을 내리게 했던 일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얼마나 쉬웠던가. 이번엔 엄청나게 필사적이었다. 섀도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 "음, 그쪽이 침울하지만 신비로운 이웃이군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샘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넌 남자 샘이 아닌 여자 샘이고, 우리 이 문제는 나중에 얘기하면 안 될까?"
"어떻게 된 건지 말해 준다고 약속하면요."
"좋아."

 

- "그래. 가르쳐 줄게. 하지만 꼭 기억해야 해. 진짜 훌륭한 마술사는 아무한테도 마술의 비밀을 말하지 않는 거야." 

 

- <신들의 전쟁 발췌 Except from American Gods>

 

 

- "여기 시간은 유동적이지." 악마가 말했다.
그는 그것을 처음 보는 순간 악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곳이 지옥이라는 것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지옥과 악마는 너무도 명백해서 도저히 다른 것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 길쭉한 방이었다. 악마는 끄트머리의 연기 나는 화로 옆에서 기다렸다. 돌 같은 회색의 벽에는 여러 가지가 걸려 있었는데, 가까이에서 살펴보는게 현명하지 못한 일처럼 느껴졌다. 천장은 낮았고 바닥은 이상하게 견고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 "이제 진짜 고통이 시작된다." 악마가 말했다.

정말이었다.

하지 말았어야 했을 행동, 자신과 남들에게 했던 거짓말, 크고 작게 상처 준 일들. 이 모든 것이 그에게서 뽑혀 나왔다. 악마는 그에게서 망각의 덮개를 벗기고 발가벗겨 진실만 남겼다. 그는 이렇게 큰 고통은 처음이었다. 

 

- "떠나는 그녀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지?" 악마가 물었다.

"제가 상처받았다고 생각했어요."

"아니, 넌 그러지 않았어." 악마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지 않았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그런 악마의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이렇게 생각했어요. 내가 그녀의 여동생이랑 바람피웠다는 걸 영영 들키지 않을 수 있겠구나."

 

- 마침내 끝이 났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첫 번째 시간에 대한 기억이 없어서 더욱더 고통스러웠다. 

 

- 이번에 그는 말을 했다. 더 이상 울부짖지 않았다. 그렇게 천 년이 지났을 때 그는 제발 악마가 벽에 걸린 것들 중에서 가죽을 벗겨 내는 칼이나 목을 조르는 초커, 손가락 죄는 나사 같은 고문 도구를 가져오길 바랐다.

"다시."
그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비명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다시." 끝나고 악마가 말했다. 마치 처음 하는 말인 것처럼.

 

- 그것은 양파를 벗기는 것 같았다. 이번에 그는 지나온 삶을 되짚으며 결과에 대해 배웠다. 자신이 한 일들이 가져온 결과, 모르고서 행한 일들, 세상에 피해를 준 일들, 알지 못하고 만나거나 마주친 적 없는 사람들에게 끼친 피해. 지금까지 중에 가장 혹독한 교훈이었다. 

 

- "다시." 천년 후 악마가 말했다.

- 그는 화로 옆에 쭈그리고 앉아 눈을 감은 채 앞으로 몸을 흔들며 살아온 인생을 이야기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전부 다시 체험했다. 무엇 하나 바꾸거나 빠뜨리지 않고 모든 걸 마주했다. 심장이 열렸다.

 

- 이야기가 다 끝났을 때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앉아서 "다시"라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눈이 떠졌다.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혼자였다.

 

- 남자를 보는 순간 그는 알 수 있었다. 
"여기 시간은 유동적이지."  

 

- <다른 사람 Other People>

 

 

- 몇 해가 지나 당신은 택시를 타고 가다가 어느 건물 출입구에서 그녀와 닮은 사람을 본다. 하지만 간신히 택시 기사를 설득해 멈추었을 때 그녀는 사라지고 없다. 당신은 그녀를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비가 내릴 때마다 그녀를 생각할 것이다.

 

- 그녀는 기다리지 않는다. 그렇다. 이제 세월은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고 꿈도 거리도 그녀에게 닿지 못한다. 

그녀는 시간의 가장자리에 남아 있다. 확고하고 상처받지 않는 채로. 어느 날 눈을 뜨면 그녀가 보일 것이다. 그 다음에는 어둠이다.

수확이 아니다. 그녀는 머리에 꽂을 깃털이나 꽃을 뽑듯이 가만히 당신을 뽑을 것이다.

 

- 좋은 포도주는 마셔야 하고 흐르는 눈물은 오직 행복의 눈물이다.

 

- 여자아이들 일부는 남자였다.

당신이 서 있는 곳에서 보면 풍경이 바뀐다.

말은 상처를 입힐 수 있고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사실이다.

 

- <기묘한 소녀들 Strange Little Girls>

 

 

- 런던에는 여전히 클럽이 있다. 클래식한 소파와 탁탁 소리가 나는 벽난로, 신문, 발표나 침묵의 전통이 있는 오래된 클럽 또는 오래된 것처럼 꾸민 클럽. 그리고 배우와 기자들이 와서 술을 마시며 언짢은 얼굴로 고독을 즐기거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그루초 클럽 혹은 그 아류들 같은 신생 클럽. 나는 두 종류의 클럽에 모두 친구가 있지만 그 어떤 클럽의 회원도 아니다. 이제는.

 

- 오래전, 지금의 절반 정도 나이였던 젊은 기자 기절, 나는 한 클럽에 가입했다. 모든 술집이 밤 11시 영업 종료 시간 이후로 술을 판매하지 못하도록 했던 면허법 때문에 생긴 클럽이었다. 디오게네스라는 이름의 그 클럽은 토트넘 코트 로드 바로 옆의 좁은 골목길에 있는 레코드 가게 위층 원룸에 자리했다. 술독에 빠진 쾌활하고 통통한 여자 노라가 주인이었다. 그녀는 상대방이 묻든 묻지 않든, 클럽 이름을 디오게네스라고 지은 이유는 자신이 아직도 좋은 남자를 찾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 주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나오는 클럽의 문은 노라의 변덕에 따라 열려 있거나 닫혀 있었다. 영업 시간이 제멋대로였다. 

 

- 그 클럽은 모든 술집이 문을 닫은 이후에 찾는 곳이었으며 딱 거기까지였다. 노라는 클럽에서 식사도 제공하려 했고 회원들에게 식사 제공 가능 사실을 알리는 월간 소식지를 야심 차게 보내기도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몇 해 전 노라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슬펐다. 놀랍게도 지난달 영국을 방문했을 때 그 골목길을 걸으며 디오게네스 클럽을 찾으려 했다가 커다란 쓸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에는 엉뚱한 곳을 착각했고 그다음엔 핸드폰 매장 위층에 있는 타파스 레스토랑과 창문을 가리는 빛 바란 초록색 천의 차양을 보았다. 차양에는 술통 속에 들어간 남자 캐릭터가 그려져있었다. 거의 외설적으로까지 느껴지는 그것을 보니 옛 추억이 떠올랐다.  

 

- 디오게네스 클럽에는 벽난로도 없고 안락의자도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야기가 있었다.

 

- <영업 종료시간 Closing Time>

   

 

- 이 작품은 <셜록 홈즈>에 H. P.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세계관을 접목시켜 오마주한 것이다.

 

- 아마도 광대함 때문일 것이다. 심연에 있는 것들의 거대함이나 까만 꿈같은. 
하지만 내 부질없는 공상이다. 용서해 주길. 나는 문학적인 소양이 그리 뛰어나지 못하다. 

 

- 나는 하숙집을 구하고 있었다. 그를 만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방세를 반씩 내고 같이 살 사람이 필요했는데, 세인트 바츠의 화학 실험실에서 일하던 공통의 지인이 우리를 소개해 주었다. "아프가니스탄에 다녀오셨군요." 나를 본 그의 첫 마디에 내 입은 나도 모르게 벌어졌고 두 눈은 커졌다.

"놀랍네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앞으로 나와 친구가 될, 하얀 실험 가운을 입은 낯선 이가 말했다. "팔을 드는 자세를 보면 알 수 있지요. 부상의 형태도 흔하지 않고요. 피부도 많이 탔고 군인 같은 자세가 있습니다. 제국의 군인이 피부가 탄 상태로 아프간 동굴 부족한테 고문받았을 때 입는 부상을 똑같이 입기란 쉽지 않죠. 당신의 어깨 부상처럼 말입니다." 

 

- 막상 듣고 보니 터무니없을 정도로 간단해 보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내 피부는 구릿빛으로 탔고 그가 관찰한 대로 나는 정말로 고문을 당했다. 

 

- 나는 얼굴이 비치는 지하 호수의 수면과 그 호수에서 나온 그것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떴다가 감기는 그것의 눈. 원을 그리듯 물속에서 솟아오르며 울려 퍼진 거대한 파리가 윙윙거리며 노래하는 듯한 속삭임. 

- 내가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었다. 어쨌든 나는 살아남았고 신경 조직이 망가진 채 영국으로 돌아왔다. 내 여윈 어깨 위 거머리 같은 입이 닿은 부분에는 개구리 같은 하얀 문신이 남았다. 한때 명사수였던 나였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지하 세계에 대한 공황발작 비슷한 공포심뿐이었다. 이 때문에 1페니밖에 하지 않는 지하철을 타는 대신 얼마 안 되는 군인 연금에서 6펜스를 내고 이륜마차를 타는 쪽을 택할 정도다.

 

- 런던의 안개와 어둠은 나에게 위안을 주었지만, 나는 여전했다. 처음 구한 하숙집은 자다가 비명을 질러서 쫓겨났다. 더 이상 아프가니스탄에 있지않은데 그곳에 있는 것 같았다. 
"저는 자다가 비명을 지릅니다." 그에게 말했다.
"저는 코를 곤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생활도 불규칙하고 종종 벽난로 선반을 사격 훈련에 쓰죠. 손님들을 만날 때는 제가 응접실을 써야 합니다. 저는 이기적이고 사생활을 중요시하고 쉽게 따분함을 느낍니다.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될까요?"
내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고개를 저으며 한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악수를 했다.

 

- 친구는 하숙집 여주인이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했다. "아무래도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인가 보군요."
"맙소사." 레스트레이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벌써 말이 새어 나간 건 아닐 텐데. 제발 아니라고 해 주십시오."

그는 접시에 소시지와 저민 훈제 청어, 케저리(커리를 넣은 밥에 생선과 달걀을 넣은 인도풍 영국 음식 - 역주), 토스트를 수북하게 쌓기 시작했지만 손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물론 아닙니다. 나는 경감이 타는 사륜마차의 바퀴 소리를 알고 있을 뿐이에요. 3옥타브 도보다 높은 올림 사조가 떨리는 소리요. 런던 경찰국의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런던 유일 자문 탐정의 응접실에 들어가는 모습을 함부로 보여서는 안 될 텐데 이렇게 찾아왔다면, 그것도 아침까지 굶고 왔다면, 평범한 사건은 아니란 게 확실하겠죠. 그러니 높으신 사람들과 관련된 일이고 국가적으로 중요한 문제겠지요." 
레스트레이드는 턱에 묻은 달걀노른자를 냅킨으로 닦았다. 나는 그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내가 평소에 생각한 형사의 모습과는 달라 보였다. 하지만 내 친구도 자문 탐정처럼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체 자문 탐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환등기로 교묘하게 이미지를 투사해 마치 '그들'의 그림자가 무대 뒤편의 하늘에 드리워지는 것처럼 보였다. (인간과 거의 비슷한 형상으로 된) 이집트의 검은 존재가 나타나고 고대의 염소와 1천 명의 부모, 통일 중국의 황제, 대답 불가능한 차르, 신세계를 주재하는 자, 북극 요새의 백의의 부인 등이 뒤따랐다. 각각의 그림자가 무대를 가로지르는 것처럼 보일 때마다 관객들의 목구멍에서는 저절로 "와!"하는 힘찬 탄성이 터져 공기가 진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달이 색칠한 하늘로 솟아올랐고 가장 높이 이른 순간 연극적인 마술의 마지막 장면이 등장했다. 달이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흐릿한 노란색에서 오늘날 우리를 비추는 것처럼 익숙한 선홍색으로 변한 것이다.
 
- "그럼 경찰이 그들을 잡을 수 있을까?"
친구는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이 틀릴지도 모르지만 그와 그의 친구는 지금 2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세인트 자일즈의 빈민굴에 있을걸세. 경찰들이 열 명 넘게 몰려다니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곳이지. 거기 숨어 있다가 소동이 좀 잠잠해지면 그때 다시 움직일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지?"
"입장 바꿔서 만약 나라면 그렇게 할 것 같거든. 그나저나 그 편지는 태워 버리게."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도 증거인데."
"선동하는 헛소리일 뿐이야." 내 친구가 말했다.

 

- 실명이 무엇이건 간에 경찰은 셰리 베르네를 잡지 못했다. 전직 군의관이라고 잠정적으로 신분이 밝혀진 존(혹은 제임스 왓슨)이라는 공범의 흔적도 찾지 못했다. 기묘하지만 그도 아프가니스탄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나는 혹시 우리가 만난 적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여왕이 만져 준 나의 어깨는 계속 상태가 좋아져 살이 다시 돋고 치유되고 있다. 곧 나는 다시 한번 명사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에메랄드 색 연구 A Study in Emerald> 

 

 

- 어느 모로 보나 나는 죽었다. 안에서는 통곡하고 소리 지르고 짐승처럼 울부짖을지 모르지만 그건 내 안쪽 깊숙한 곳의 다른 사람이었고, 그 사람은 얼굴과 입술, 입, 머리에는 다가갈 수 없었다. 그래서 겉으로 보이는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하고 미소 지으며 계속 움직였다. 만약 내가 육체적으로 죽을 수 있었다면, 아무런 반항 없이 받아들이고 마치 문으로 나오듯 간단히 삶에서 빠져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침마다 여전히 여기 존재했고, 그 사실에 실망하면서 깨어났다. 결국은 그냥 내가 아직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 가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 번, 두 번 정도 간 다음에 끊었다. 비명을 지르는 나는 깊은 안쪽에 존재했다. 

 

- "무슨 일 있어요?" 견인차 기사가 소리쳤다.
"이렇게 합시다." 인류학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쪽이 모텔에 다시 다녀오는 겁니다. 아무래도 지갑을 프런트 데스크에 놓고 온 것 같으니 지갑을 다시 갖고 와 줘요. 그때까지 내가 저 양반 비위를 맞추고 있을 테니. 5분, 5분이면 될 겁니다."

그는 순간 내 표정을 본 모양인지 이렇게 덧붙였다. "기억하세요. 누군가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예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남의 일에 휘말린 게 짜증이 났다.

 

- 그냥 그를 버리고 가고 싶었지만 인제 와서 그럴 수도 없었다. 나는 모텔로 차를 몰았다. 아까 그 야간 근무 직원이 나에게 지갑을 주었다. 우리가 나가자마자 계산대에 놓인 걸 봤다고 했다.

지갑을 열어 보았다. 신용카드 이름이 전부 잭슨 앤더튼으로 되어 있었다. 왔던 길을 찾아가기까지 30분이나 걸렸다. 그 사이 완전히 동틀 무렵이 되어 하늘이 잿빛으로 변했다. 그런데 견인차가 보이지 않았다.

 

- 타자 원고의 맨 첫 장에는 이렇게 인쇄되어 있었다.
"'좀비들에 대해 이렇게들 말한다. 영혼 없는 육신, 살아 있는 시체, 죽은 후에 다시 삶으로 소환된 존재라고.' 허스턴(인류학자이자 작가였던 흑인 여성 조라닐 허스턴을 의미함 - 역주), <내 말에게 말하라>."

 

- 나는 서류철만 챙기고 가방은 그대로 놓아두었다. 진줏빛 하늘 아래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누군가가 당신의 인생에 나타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확실하다.  

- 그가 발표하려던 논문 원고를 쭉 넘겼다. 하지만 내용물을 딱히 읽진 않았다. 페이지 5쪽의 깨끗한 뒷면에 그가 빡빡하지만 대충 알아볼 수 있게 휘갈긴 글씨가 있었다. 

"완벽한 세상이라면 마음을 주지 않고 아무하고나 잘 수 있을 것이다. 찬란한 입맞춤과 살갗의 감촉은 당신이 다시 보지 못할 또 다른 마음 조각이다. 혼자 걷는 것이(깨어나는 것이? 부르는 것이?) 견딜 수 없을 때까지."

 

- 대충 마른 옷을 입고 호텔 로비에 있는 바로 내려갔다. 캠벨은 이미 와서 진토닉을 옆에 놓고 마시고 있었다.

 

- "그럼 고개를 끄덕이면서 정말 예리한 질문이라고 말한 후 논문의 긴 버전에 자세하게 나온다고 말하세요. 지금 읽은 건 편집된 버전이라고. 틀린 부분을 지적하면서 까다롭게 구는 미친 놈이 있으면 발끈 성을 내고 유행하는 이론이 중요한 게 아니라 중요한 건 진실이라고 말하세요."
"그런 방법이 정말 통합니까?"
"당연하죠. 내가 몇 년 전에 페르시아 군대 내 인도 암살단 조직의 기원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거든요. 그게 바로 암살단에 힌두교와 이슬람교 신자가 모두 존재하는 이유이고 칼리 여신 숭배는 나중에 추가된 거라고요. 마니교의 비밀 결사대 같은 걸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 "좀비 커피 소녀 논문 쓰신 분요?"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프로그램 안내지에서 봤어요. 흥미로워요. 우리가 또 조라에게 빚진 건가요?"
"<위대한 개츠비>를 빚졌죠." 내가 말했다.
"조라 닐 허스턴이 F. 스콧 피츠제럴드와 아는 사이였나요?" 자전거 여자가 말했다. "몰랐던 사실이네요. 우리가 자주 잊어버리는 사실이지만 그때 뉴욕의 문인 사회는 무척 좁았고 유색 인종 차별이 천재에겐 비켜 간 경우가 많았죠."
영국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차별이 비켜 갔다고요? 묵인 속에서만 그랬죠. 조라는 플로리다에서 청소부로 일하다 엄청난 가난 속에서 죽은 여자라고요. 그녀가 무슨 글을 썼는지 아무도 모르죠.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같이 썼다는 것도 아무도 모른다고요. 한심해요, 마거릿." 

"후대에는 그런 것들을 더 잘 알 수 있겠죠." 키 큰 여자는 이렇게 말하고 가 버렸다.

 

-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요, 그렇게 나와야지. 베스트셀러를 쓰는 사람과 베스트셀러를 읽는 사람이 있는 법이고, 상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못받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죠. 중요한 건 인간이라는 것 아니겠어요?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가 중요하지. 살아 있다는 것."
그가 내 팔을 토닥거렸다.

 

- "그쪽은 무슨 일을 하세요?"
"난 산테리아 여사제예요. 혈통이죠. 아버지는 브라질인이고 어머니는 아일랜드계 체로키족이거든요. 브라질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와 관계를 맺어서 최고의 갈색 피부를 가진 아기를 낳아요. 모두가 흑인 노예 피를 물려받았고 모두가 인디언 부족 피를 물려받았죠. 우리 아버지는 일본인 피도 좀 섞였어요. 아버지의 형제, 그러니까 큰아버지는 꼭 일본인같이 생겼어요. 아버지는 그냥 미남이고요. 사람들은 내가 산테리아 사제의 피를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아니에요. 할머니한테 받았죠. 할머니는 체로키 족인데 옛날 사진을 보면 피부가 밝은 편이더라고요. 난 어릴 때 귀신들하고 말을 했어요. 다섯 살 땐 길에서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만한 검은 개가 어떤 남자 뒤에서 걸어가는 걸 봤죠. 아무한테도 안 보이는데 나한테만 보이는 거예요. 엄마한테 말하니까 엄마가 할머니한테 말했고요. 내가 알아야 한다고 배워야 한다고 하더군요. 어릴 때부터 나를 가르쳐 준 사람들이 있었어요. 난 유령이 무섭지 않았어요. 그거 알아요? 유령은 절대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거. 이 도시엔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게 너무 많지만 죽은 자들은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산 자들이 해치죠. 너무 위험해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 지금 나를 유혹하는 것일까. 그런 것 같진 않았다. 
"혹시 배고파요?" 그녀가 물었다.
나는 조금 배고프다고 했다.
"뉴올리언스에서 검보(고기와 해산물에 오크라를 넣어 걸쭉하게 만든 스튜로 미국 루이지애나의 대표적인 요리 - 역주)를 제일 잘하는 집을 알아요. 거기 가요." 
"이곳에선 밤에 혼자 돌아다니지 않는 게 좋다고 하던데요."
"맞아요.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 나랑 같이 있잖아요. 나랑 같이 있으면 안전해요."

 

- "오줌 마려우면 나한테 꼭 말해요."
"알았어요. 그런데 왜요?"
"관광객들이 볼일 보러 골목길로 들어갔다가 강도당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파이럿 골목에서 1시간 후에 머리는 얼얼하고 지갑은 텅 빈 채로 깨어나죠."

 

- 그녀는 검보를 싹 비우고 유난히 새빨간 혓바닥으로 숟가락까지 핥고는그릇에 내려놓았다.

"뉴올리언스에는 어린애들이 많이 와요. 앤 라이스의책을 읽고 여기에 뱀파이어가 산다고 생각하는 애들도 있고 부모한테 학대 당하는 애들도 있고 그냥 심심한 애들도 있고요. 하수구에 사는 고양이처럼 여기로 오는 거죠. 뉴올리언스에서 하수구에 사는 새로운 품종의 고양이가 발견됐거든요. 알고 있어요?"

"아뇨." 

TV 자막에 '웃음소리'라고 떴다. 제이는 여전히 씩 웃는 얼굴이었고 자동차 광고 화면으로 넘어갔다. 
"아까 그는 거리에 사는 애 중 하나였어요. 밤에 잘 곳은 있었지만. 착한 애였죠. LA에서 히치하이킹으로 뉴올리언스에 왔죠. 그냥 혼자 대마초 피우고 도어스 카세트 테이프를 듣고 혼돈 마법을 공부하고 알레스터 크로울리가 쓴 책을 모조리 읽는 걸 좋아했어요. 아, 오럴 받는 것도 좋아했고요. 누가 해 주는지는 상관없었죠. 기운이 넘치는 아이였어요."

 

- 밤에 나타나 악행을 저지르는 빅 좀비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주인이 시켜서 어둑한 동틀 무렵에 볶은 커피를 파는 소녀 좀비도 있다. 해가 뜨기 전 어둑한 거리에는 "볶은 커피 사세요!"라고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물건을 살 테니까 가져오라고 소리치는 사람들만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죽은 소녀들은 그제야 모습을 드러내고 계단을 오른다. 

 

- 앤더튼의 원고는 그 후 허스턴의 동시대 학자들, 아이티 노인들의 옛날 인터뷰 발췌 따위 같은 내용으로 이어졌는데, 내가 보기에는 상상으로 추측과 가정을 자아서 사실로 엮어 내며 이 결론에서 저 결론으로 뛰어넘었다. 

 

- 중간 정도 읽었을 때 자전거를 탈 것처럼 생긴 그 키 큰 여자가 들어와서 나를 가만히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앤더튼이 아니란 걸 눈치챘구나. 그래도 원고를 계속 읽어 나갔다. 뭐, 달리 어쩌겠는가? 
끝까지 읽은 후 질문이 있느냐고 물었다.
누군가 조라 닐 허스턴의 연구 관행에 관해 물었다. 나는 참 좋은 질문이라면서 지금 발표한 것은 편집본이고 최종 버전의 논문에 자세하게 적혀 있다고 대답해 주었다. 

 

- 이번에는 작은 키에 통통한 여자가 일어나 좀비 소녀의 존재는 말도 안된다고 했다. 좀비 약과 가루는 감각을 마비시키고 죽은 것 같은 최면 상태를 일으키지만, 기본적으로 생각을 바꿔 놓아 자신이 죽었고 자유의지가 없다고 믿게끔 만든다고. 그녀는 네다섯 살 어린아이들이 그런 것을 믿게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커피 소녀는 인도의 로프 마술처럼 과거의 다른 도시 괴담일 뿐이라고.


- 개인적으로 나도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주장도 일리가 있으며 잘 알겠다고 했다. 순수하게 인류학적인 내 관점으로 보자면 쉽게 믿을 수 있느냐가 아니라 진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도 했다.

 

-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발표가 끝나고 수염 있는 남자가 자신이 편집자로 있는 저널에 싣고 싶다면서 논문 복사본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다. 순간 뉴올리언스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회에 불참했다면 앤더튼의 경력에 불리했을 것이다.

 

- 꿈을 꾸다가 자정이 지나 깨어났다.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가 말했다.

"그 애는 도어스 카세트 테이프와 크롤리의 책, 손으로 적은 혼돈 마법 관련 비밀 인터넷 주소를 들고 이곳으로 왔지. 모든 게 다 좋았어. 신도들까지 생겼지. 똑같이 가출한 아이들. 원할 때마다 거시기를 빨아 주는 여자들도 있고, 사는 게 아주 좋았어. 그러다 자기가 정말 뭐라도 된다고 믿게 된 거야. 자기는 진짜라고, 선택받은 자라고 말이야. 고양이 새끼가 아니라 크고 강한 살쾡이라고 믿게 된 거지. 그래서 파헤쳤어... 다른 사람이 원했던... 무언가를.

그는 자신이 파낸 무언가가 자신을 지켜 주리라고 생각했어. 바보 같은 녀석. 그날 밤, 잭슨 광장에 앉아 타로 점성술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 그들에게 짐 모리슨과 카발라 얘길 하고 있는데 누가 어깨를 쳐서 돌아보니 가루를 뿌린 거야. 그는 그 가루를 들이마셨지.

전부 다는 아니지만, 어떻게든 하려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 온몸이 마비되어 버렸거든. 그 가루에는 복어, 두꺼비 껍질, 뼛가루 등 온갖 것들이 다 들어 있었어. 그걸 들이마신 거야. 그는 응급실로 옮겨졌지만 거기서 별다른 조치를 해 주진 않았어. 흔히 보는 집도 없이 거리에서 떠도는 약쟁이라고 생각한 거지. 다음날에는 다시 몸을 움직일 수 있었지만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2~3일이 걸렸어. 
문제는 그 가루가 필요해졌다는 거야. 절실히 원하게 됐지. 그는 좀비 가루에 커다란 비밀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 비밀에 거의 가까이 다가간 상태였어. 헤로인 같은 게 들어갔다는 말도 있었지만 굳이 뭐하러 그러겠어. 아무튼 그는 그 가루를 간절히 원했어."  

- 모든 스치는 인연에는 이유가 있다. 

 

- "그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야 하고 우리가 여기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일어났을 때 방안은 여전히 꽤 어둡고 고요했다. 불을 켜고 빨간색이든 하얀색이든 리본이나 미키 마우스 해골 귀걸이가 있는지 베개를 살폈지만, 간밤에 침대에 나 말고 누가 또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다.

 

- <비터 그라운드 Bitter Ground>

 

 

- 그녀는 그날 밤 또 꿈을 꾸었다. 

- 꿈에서 그녀는 형제자매들과 함께 전장의 끄트머리에 서 있다. 여름이고 풀이 유난히 선명한 초록색이다. 크리켓 구장 혹은 해안에서 북쪽으로 갈 때 펼쳐지는 사우스다운스 구릉지 같은 기분 좋아지는 진짜 초록색.

 

- 풀밭에 시체들이 있다. 그중에 인간의 시체는 하나도 없다. 그녀는 근처 풀밭에 목이 베인 채 죽은 켄타우로스를 본다. 말 부분은 선명한 밤색이다. 인간 부분의 피부는 햇살에 갈색으로 빛난다. 말의 페니스를 쳐다보던 그녀는 켄타우로스들이 어떻게 짝짓기를 할지 궁금해지고, 저 수염 난 얼굴이 자신에게 키스하는 상상을 한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베인 목과 끈적이는 검붉은 피 웅덩이로 향하고 부르르 몸이 떨린다. 

시체들 주위로 파리떼가 윙윙거린다.

풀밭에 야생화가 엉켜 있다. 어제 활짝 피어났다. 도대체 얼마 만이던가? 백년? 천 년? 만 년? 그녀는 알지 못한다. 

그녀는 전장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전부 다 눈이었는데. 
어제는 저곳이 전부 눈이었어. 눈은 항상 있는데 크리스마스는 없지.

 

- 여동생이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무언가를 가리킨다. 초록 언덕 꼭대기에 그들이 한창 대화를 나누면서 서 있다. 사자는 황금색이고 두 팔을 뒤로 깍지꼈다. 마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옷을 입었다. 마녀가 소리 지르고 사자는 그냥 듣고 있다.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아이들에겐 마녀의 차가운 분노도 저음의 현악기 같은 사자의 대답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윤기 흐르는 검은색이고 입술은 붉다. 

 

- 그녀는 꿈에서 이런 것들을 알아차린다.
사자와 마녀의 대화가 곧 끝날 것이다...

- 교수가 스스로에 대해 무척 싫어하는 점들이 있다. 이를테면 냄새가 그렇다. 그녀는 자기 할머니 같은 냄새, 그러니까 늙은 여자 특유의 그 냄새가 자신한테서 난다는 걸 용납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향기로운 물로목욕을 하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다음 겨드랑이와 목에 샤넬 향수를 뿌린다. 그녀가 유일하게 부리는 사치다. 

 

- 그녀는 스무 살이었고 자기가 무척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다...

 

- 초인종이 울린다. 그녀는 신문을 내려놓고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연다. 그녀가 처음 한 생각은 여자가 너무 어려 보인다는 것이었다. 

- 그녀가 처음 한 생각은 여자가 너무 늙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헤이스팅스 교수님? 그레타 캠피언입니다. <문학 연대기>에 실을 교수님의 프로필을 쓰게 되었어요."

 

- 나이 많은 여자는 연약하고 지긋한 눈빛으로 그녀를 잠깐 보더니 미소 짓는다. 상냥한 미소였다. 그레타는 그녀가 마음에 들기 시작한다. 

 

- 그들은 책 초반의 내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원래는 아이들만을 위한 소설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지만, 빅토리아 시대에 아동기의 순수성과 신성함이라는 개념이 생기면서아동 문학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는 주장에 관해서다. 
"순수함의 개념이죠." 교수가 말한다.
"신성화도요?" 그레타가 미소를 띠고 덧붙인다.
"신성한 척이죠." 나이 많은 여자가 바로잡는다. "<물의 아이들>을 읽으면서 움찔하지 않기는 힘들죠."

 

- 그다음에 그녀는 화가들이 아이들을 그릴 때 아이들의 몸을 고려하지 않고 덩치만 작은 성인으로 그렸으며 그림 형제의 이야기는 원래 어른들을 위해 수집한 것인데 아이들에게 읽힌다는 사실을 알고 아이들이 읽기 적합하도록 충격적인 부분을 삭제한 거라고 말한다. 그녀는 페로의 <잠자는 숲속의 공주>도 언급한다. 원래는 왕자의 어머니가 식인광이고 공주에게 자식들을 잡아먹었다는 누명을 씌우는 내용이라고. 그레타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메모하면서 교수가 강의가 아닌 대화라고, 적어도 인터뷰라고 느끼도록 참여하고자 초조한 마음으로 애를 쓴다.

 

- "처음 아동 문학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그레타가 묻는다. 교수는 고개를 젓는다. "우리의 모든 관심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요? 아이들의 책에 대한 당신의 관심은 어디에서 나오죠?"
"예전부터 아이들을 위한 책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릴 때도 그렇고 커서도요. 전 로알드 달의 소설에 나오는 마틸다 같았어요. 가족분들이 책을 좋아하셨나요?" 그레타가 말한다.
"아뇨. 가족들이 죽은 지 너무 오래되어서. 아니, 죽임을 당했다고 말해야겠네요."

 

- "그건 아니랍니다. 우린 피난민이었는데 그로부터 몇 년 후에 기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죠. 난 그 자리에 없었고요."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같네요." 그레타는 말하자마자 멍청하고 바보 같은 말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죄송합니다. 너무 생각 없는 말이었네요. 그렇죠?"

 

- "그것 말고 수잔한테 잘못된 부분이 또 있었을 거예요." 젊은 기자가 말한다. "책에서 말해 주지 않은 무언가가요. 그게 아니고서야 더 높고 더 깊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을 리가 없어요. 수잔이 사랑했던 사람들은 전부 보상을 받고 마법과 폭포, 기쁨의 세계로 갔잖아요. 수잔만 혼자 남겨지고요." 

"책에 나오는 그 여자애는 어땠는지 몰라도, 가족 중에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것은 형제들과 여동생의 시신을 확인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 "운이 좋네요. 난 시신을 보면서 '저게 내 남동생이 아니면 어떡하지?'라고 생각했어요. 남동생의 시신은 머리가 잘려 나가고 없었거든요. 스타킹과 파티를 좋아한다고 신이 나에게 파리가 날아다니는 학교 급식실에서 에드의 시신을 확인해야 하는 벌을 내린 거라면... 신이 너무 심하게 즐긴 게 아닐까요? 고양이가 잡은 쥐를 바로 죽이지 않고 마지막까지 가지고 노는 것처럼. 아니, 그렇게 큰 즐거움도 아닌가. 요즘은 그렇겠어요. 잘 모르겠네요."
그녀는 말꼬리를 흐리더니 잠시 후 다시 입을 연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더 못 할 것 같네요. 편집자에게 전화하라고 해 줘요. 약속 시간을 다시 잡아서 마저 이야기하기 하죠." 
그레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왠지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 그제야 그녀는 이게 꿈이란 걸 알아차린다. 그녀는 절대로 저 책을 집안에 두지 않으니까.

 

- 그제야 그녀는 잠에서 깬다. 

 

- <수잔의 문제 The Problem of Susan>

 

 

- 밤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글을 쓰고 있다. 

 

- 꼭대기 방의 불빛 하나가 그녀를 불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끌어당겼다. 집 뒤쪽의 울창한 숲에서는 밤의 존재들이 떠들고 꺅꺅거렸다. 그녀 뒤편의 길에서 짧은 비명이 들렸다. 희생자가 작은 짐승이길 바랐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 "왜 계속 그렇게 말하세요?" 그녀가 물었다.

"제가 뭘 계속 그렇게 말했습니까?"
"'모든 밤의 밤에'라는 표현요. 세 번이나 그 표현을 쓰셨어요."

그는 잠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뼈 같은 색깔의 손가락으로 다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녀가 집안으로 발을 들여놓자마자 그는 촛불을 그녀의 얼굴 가까이 가져가 빤히 쳐다보았다. 화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평온한 것과도 거리가 먼 눈빛이었다. 그는 그녀를 뜯어보는 듯하더니 마침내 끙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입니다." 그는 이렇게만 말했다.

 

- "어디 가는 건가요?" 그녀가 물었다.
그는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보이는 그대로인 것들도 있고 보이는 것과 다른 것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것들은 보이는 것밖에 알 수 없지요. 허버트 언쇼의 따님, 제 말을 꼭 기억해 두세요. 알겠습니까?" 

 

- "목숨을 걸고 맹세해, 에델. 내가 하는 말을 살아 있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창문에 얼굴이 있고 피로 쓰인 글자가 있었다. 깊은 지하실에는 외로운 악귀가 한때 살아 움직였던 무언가를 우적우적 씹어 먹고, 까만 밤에 여러 갈래로 갈라진 번개가 내리치고, 얼굴 없는 것들이 걸어 다녔다. 세상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 <무서운 욕망의 밤 비밀의 집 얼굴 없는 노예들의 금지된 신부들 Forbidden Brides of the Faceless Slaves in the Secret House of the Night of Dread Desire>


 
- 이 작품의 주인공 섀도는 작가의 대표작 <신들의 전쟁>의 주인공 섀도와 동일 인물이며 같은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는 별개의 작품이다. 

 

- "그녀 자신은 유령의 집이다.

그녀는 자신을 소유하지 않는다.

이따금 조상들이 와서 그녀의 눈에 비친 세상을 바라보는데 정말 섬뜩하다."

 

안젤라 카터, '사랑의 집의 여인'

 

- "내 생각에 자네는 괴물인 것 같군. 맞는가?" 작은 남자가 섀도에게 말했다.

 

- 스코틀랜드 북쪽 해안에 자리 잡은 작은 도시의 호텔 바에는 여자 바텐더를 제외하고 두 사람뿐이었다. 섀도가 혼자 앉아 라거를 마시고 있는데 남자가 와서 앉았다. 늦여름이었지만 모든 게 춥고 작고 축축하게만 느껴졌다. 섀도는 테이블에 <즐거운 동네 산책>이라는 작은 책을 올려놓고 해안을 따라 래스까지 걷겠다는 내일의 계획을 점검하는 중이었다. 

그가 책을 덮었다.
"난 미국인입니다. 만약 그런 걸 물어본 거라면요." 섀도가 말했다.

 

- 작은 남자는 고개를 한쪽으로 갸우뚱하더니 연극처럼 과장되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철회색 머리에 회색빛 얼굴, 회색 코트의 그는 꼭 소도시의 변호사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흠. 그런 뜻이었는지도 모르겠네."

스코틀랜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섀도는 'r' 발음을 강하게 진동시키는 그들의 억양과 낯선 단어들을 좀처럼 알아듣기가 힘들었는데, 이 남자의 말은 문제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강하거나 지나친 게 하나도 없을 만큼 완벽했다. 그 바람에 섀도 자신이 입안에 오트밀을 한 움큼 넣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 "저게 어디가 잘못된 줄 아나?"
"아뇨."
"거꾸로 됐어!" 남자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북쪽이 위에 있잖아. 여긴 모든 게 멈추는 곳이다, 라고 세상에 말하는 거지. 더 멀리 가지 마라, 세상은 여기서 끝난다, 하고. 하지만 말이야, 사실은 그게 아니거든. 여긴 스코틀랜드의 북쪽이 아니라 바이킹 세상의 최남단이었어. 스코틀랜드에서 두 번째 최북단 주의 이름이 뭔지 아나?" 
섀도는 지도를 힐끗 보았지만 너무 멀어서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서덜랜드!" 작은 남자가 치아를 드러냈다. "즉 사우스 랜드지. 세상에서 유일하게 바이킹에게만큼은 그곳이 남쪽이었던 거야."

 

- "역사학자이신가요?" 섀도가 물었다.

"아주 재미있군." 작은 남자가 말했다. "자네 괴물일지언정 유머 감각이 뛰어나. 그건 인정해 주지."
"전 괴물이 아닙니다."
"그래. 괴물들이 항상 하는 말이지. 난 예전엔 전문의였어. 세인트앤드루스에서. 지금은 일반의네. 아니, 과거형이지. 거의 은퇴한 셈이거든. 일주일에 이틀만 진료소로 출근해, 감을 잃지 않으려고."
"왜 자꾸 저보고 괴물이라고 하십니까?"
"그건 말이야." 작은 남자는 반박할 수 없는 주장을 펼치는 분위기를 내며 위스키 잔을 들어 올렸다. "내가 어느 정도 괴물이기 때문이지. 원래 비슷한 것들끼리 끌리는 법이거든. 우린 모두 괴물이야. 안그런가? 부조리의 늪을 이거적 어기적 건너는 장엄한 괴물들."

 

- 그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 갔다. "자네 덩치가 좋은데 클럽 경비원으로 일한 적 없나? '죄송하지만 오늘은 입장이 불가합니다. 비공개 행사가 있어서요. 그러니 그냥꺼져 주시죠'라고 말하는 직업 말이야."

 

- "없어요." 사실 섀도는 한때 고대 신의 경호원으로 일한 적이 있지만, 그건 이곳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였다.

 

- "이런 질문을 해서 미안하네만, 오해하지 말고 듣게. 자네 혹시 돈이 필요한가?"
"돈 필요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괜찮습니다." 전적으로 사실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가 돈이 필요해질 때면 세상이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해 주는 것만 같았다.

 

- 길가에 심어진 관목이 섀도를 스쳤고 공기 중에는 달콤한 라벤더 향이 가득했다. 집에서는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여긴 누구 집인가요?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요." 섀도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집에 올 테니까." 

 

- "당신이 집주인이군요." 섀도가 말했다.
"즐거운 나의 집이죠. 커피 마실래요? 아니면 다른 마실 거라도?"

"둘 다 됐어요." 섀도는 제니가 원하는 게 뭔지 의아했다. 그녀는 거의 그를 쳐다보지 않았고 웃음을 보인 적도 없었다.

 

- "조심할 겁니다." 
"바이킹들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미소 지었다. 코트를 벗어 밝은 자주색 소파에 내려놓았다. "마주칠 수도 있겠네요. 나도 자주 걷거든요."

그녀는 뒤로 올린 쪽머리를 풀었다. 풀린 머리카락은 섀도가 생각했던 것보다 길었다. 

"이 집에서 혼자 살아요?"
그녀는 조리대에 놓인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성냥불을 붙였다.

"그건 왜요? 자고 갈 거 아니잖아요?"
섀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은 언덕 맨 아래쪽이에요. 절대 못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요.집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섀도는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고 라벤더 향 가득한 길을 되돌아갔다. 잠시 멈추어 바다에 뜬 달을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했다. 내리막길을 내려가 호텔에 도착했다. 그녀의 말대로 호텔은 못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 짧은 막대에 달린 열쇠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안이 복도보다 추웠다. 

 

- 죽은 자들의 손톱으로 만들어진 배가 아슬아슬하게 안개를 뚫고 거친 바다에서 심하게 요동치며 나아갔다. 

- 갑판에 그림자 같은 형체가 있었다. 집이나 언덕만큼 커다란 남자들. 섀도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들의 얼굴이 보였다. 하나같이 키가 큰 위풍당당한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흔들리는 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제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갑판에 서서 기다렸다.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큼지막한 손으로 섀도의 손을 잡았다. 섀도는 회색 갑판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 저주받은 곳에 잘 왔네."

 

- "환영하라!" 갑판의 남자들이 소리쳤다. "태양을 가져오는 자를 환영하라! 발데르 만세!"

출생증명서에 적힌 본명이 발더 문이기는 했지만 섀도는 고개를 저었다. 

"저 아닙니다. 저는 당신들이 기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린 여기서 죽을 거야." 걸걸한 목소리의 남자가 섀도의 손을 걔속 잡은 채로 말했다.

깨어 있는 세계와 죽음의 세계 사이의 안개 낀 공간은 무척 추웠다. 회색의 배의 뱃머리에 짠 바닷물이 부딪혀 섀도는 온몸이 흠뻑 젖었다. 

 

- "우릴 다시 살려 줘." 그의 손을 잡은 남자가 말했다. "다시 살려 주든지 그냥 보내 주든지."

"전 방법을 모릅니다."

그와 동시에 갑판의 남자들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 "내가 노르웨이 출신이란 얘길 했던가요?"
"흠. 하지 않았나요?"
그녀는 사과 한 조각을 칼로 찌르고는 세심하게 그 끝을 치아로 베어 먹었다. 그리고는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오래전 일이에요."

 

- "'훌드라'가 된 기분이에요."
섀도는 그 단어를 노르웨이에서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거 무슨 트롤 같은 거 아닌가요?"
"산에 사는 요괴에요. 트롤처럼요. 하지만 숲에 살고 아주 아름다워요. 나처럼."

그녀는 자신이 아름답다고 하기엔 너무 창백하고 너무 뾰로통하고 너무 말랐다는 사실을 아는 듯 그렇게 말하면서 씩 웃었다.

"훌드라는 농부들과 사랑에 빠져요."
"왜죠?"
"그거야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래요. 어쩔 때는 농부들이 상대가 훌드라인 걸 알아차리기도 하죠. 훌드라는 소꼬리가 달렸거든요. 최악의 경우엔 뒤에 아무것도 없고요. 빈 조개껍데기처럼 텅 비었죠. 농부는 기도문을 외우거나 엄마한테든 집으로든 줄행랑을 치고요."

- "하지만 가끔 도망치지 않는 농부도 있어요. 칼을 던지거나 미소를 짓죠. 결국 훌드라 여자와 결혼해요. 그러면 훌드라는 꼬리가 떨어져요. 그래도 여전히 그 어떤 인간 여자보다 힘이 세고, 숲과 산의 집을 애타게 그리워하죠. 훌드라는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을 거예요. 절대 인간이 될 수 없으니까."

"그럼 어떻게 됩니까? 남자와 함께 나이 들고 죽습니까?" 섀도가 물었다.
그녀는 가운데 심을 두고 사과를 잘랐다. 손목을 한 번 까닥하더니 뼈대만 남은 속을 언덕 옆쪽으로 던져 버렸다. 

"남자가 죽으면... 아마 언덕과 숲으로 돌아갈 거예요."

 

-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훌드라가 농부와 결혼했는데 그 남자는 아주 나쁜 사람이었어요. 소리 지르고 농사 일도 다 떠넘기고 마을로 가서 술에 잔뜩 취해 화가 나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죠. 가끔은 때리기도 했고요. 어느 날 그녀가 아침에 불을 지피고 있는데 또 남자가 오더니, 아침 준비가 안 됐다며 소리 지르는 거예요.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도 없는데 괜히 결혼했다고 마구 화를 냈죠. 그녀는 그 말을 듣고 있다가 아무 말 없이 난롯가의 부지깽이를 집었어요. 묵직한 까만 철제로 된 거요. 전혀 힘들이지 않고 부지깽이를 구부렸죠. 결혼 반지처럼 완벽하게 동그란 모양으로. 끙끙대지도 않고 땀을 흘리지도 않고 갈대라도 구부리듯 아주 간단하게 말이에요. 그걸 본 남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아침밥 얘긴 다신 꺼내지도 않았죠. 남자는 구부러진 부지깽이를 보면서 지난 5년 동안 그녀가 자기를 저렇게 만들 수도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 손찌검 하지 않고 심한 말도 하지 않았답니다. 다들 섀도라고 부른다는 섀도 씨, 이것 좀 한번 답해 보세요. 그녀는 그런 힘이 있으면서도 왜 애초에 남자가 때려도 가만히 있었을까요? 그런 남자가 뭐가 좋다고 같이 살았을까요? 한번 말해 봐요." 
"어쩌면, 외로웠던 건지도 모르죠." 섀도가 말했다. 제니는 칼날을 청바지에 대고 문질렀다.
"닥터 가스켈이 계속 당신더러 괴물이라더군요. 그게 사실인가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안타까워라. 당신이 괴물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죠?"
"그쪽은 압니까?"

 

- "저기 열리는 파티에 가본 적 있습니까?"
"원래 현지인은 초대 안 해요. 날 초대할 리도 없고. 아무튼 그 일 하지 마세요. 반드시 거절하세요." 
"보수가 아주 두둑한데요." 그가 말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그의 몸을 접촉한 것은 그때였다. 창백한 손가락을 그의 짙은 색 손등에 갖다 댔다. 

"괴물한테 돈이 다 무슨 소용이죠?" 

그녀가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그 순간 그녀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 "자네 들어갔다 왔군." 박사가 말했다.
"들어가다니요?"
"교도소 말이야. 자네 교도소에 다녀왔어." 질문이 아니었다.

"맞습니다."
"싸울 줄 알겠어. 피치 못할 때 사람을 해칠 수 있겠군."
"누군가를 해칠 사람을 찾는다면 제가 적임자가 아닌 것 같은데요." 

- 작은 남자는 기름에 번들거리는 잿빛 입술로 씩 웃었다.

"자네가 분명히 적임자야. 그냥 물어본 걸세. 궁금한 게 죄는 아니니까 말이야. 어쨌든 저자는 괴물이야." 박사는 살점을 거의 뜯어 먹은 양고기 뼈로 저쪽을 가리켰다. 대머리 남자는 숟가락으로 하얀색 푸딩 같은 것을 떠먹고 있었다. "저자 엄마도 괴물이고."

"제 눈에는 괴물처럼 안 보이는데요."
"미안하지만 장난일세. 이 동네식 유머랄까. 이 동네에 오는 사람들한테 내 유머 스타일을 미리 경고해 줘야 하는데 말이야. 괴물 얘기를 떠드는 미친 늙은 의사가 있다고. 이 늙은이를 이해해 주게. 내 말은 그냥 한 귀로 흘려들어." 

 

- "장작 좀 더 넣어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스코틀랜드의 여름은 원래 이런가. 섀도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여긴 여름을 가질 자격이 없군.

 

- "상류층 여자 손님을 건드리지 말 것. 젊은 여자들이 와인 반 병 정도 들어가면 거친 경험을 해 보고 싶어할 수도 있거든. 혹시 그런 일이 생기면 <선데이 피플> 기자처럼 행동하면 돼."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핑계 대고 딴 데로 가 버리라고. 보는 건 마음이지만 만지지는 마. 알겠지?"
"알겠습니다."
"역시 말이 통한다니까."

 

- 섀도는 조금씩 스미스가 마음에 들었다. 물론 그것이 현명하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에도 그는 스미스처럼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고 감정에 절대 휘둘리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 본 적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호감을 주는 만큼 하나같이 위험하다는 특징이 있었다.

 

- "경호원들이 있는데 전 왜 온 겁니까?"
스미스가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었다.

"여기 오는 사람들은 자네나 내가 평생 보지도 못할 만큼이나 돈이 많아. 철통 경비를 원하는 게 당연하지. 납치 위험도 있고, 부자들은 적이 있으니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거야. 경호원들이 있으면 그럴 일이 없지. 경호원들에게 불만 있는 현지인들 처리를 맡기면 지뢰를 설치해서 무단 침입을 막는 것과 똑같으니까. 이제 알겠나?" 

 

- 거짓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스미스의 대답은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이해가 되긴 했어도 그게 진실은 아니었다. 그가 여기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제안받은 것과 다른 이유인 것이 분명했다. 

 

- 섀도는 머릿속으로 문제를 곱씹으며 자신이 여기 있는 이유를 알아내려고 애썼지만, 겉으로는 표시가 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모든 걸 안에만 담아 두는 편이었다. 거기가 제일 안전하니까. 

 

- 섀도는 스미스가 손님들을 하나씩 맞이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친숙함과 존중심, 붙임성, 런던 사람의 매력이 완벽하게 합쳐진 태도였다. 에이치 발음과 자음, 모음 발음이 상대에 따라 자유롭게 바뀌었다. 

 

- 책임자인가 보군. 섀도는 생각했다. 몸짓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스미스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소 띤 얼굴로 나긋나긋하게 말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보고하는 태도였다. 노인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효율적이면서도 조용하게 알리고 있었다. 

스미스가 섀도에게 손을 까딱했고 섀도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섀도, 이분은 앨리스 씨야."

 

- 섀도는 저택 둘레를 벗어나서까지 걸어갔다. 함정에 빠진 게 분명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 들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진짜 경호원들이 있는데 떠돌이에게 경비를 맡기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스무 명도 넘는 사람들이 섀도를 장식에 불과한 듯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스미스가 그를 앨리스 씨에게 소개한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됐다.

 

- "정찰 중입니까?" 목소리의 주인은 검은 턱시도 차림의 경호원이었다. 섀도는 그를 보지 못했었고, 이는 경호원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다른 고용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스코틀랜드 억양이었다. 
"그냥 둘러보는 겁니다."
"구조를 미리 파악해 두다니 현명하네요. 이쪽은 걱정하지 마세요. 저쪽으로 100미터 정도 가면 강이 나오고 호수로 이어집니다. 그 너머는 젖은바위만 30미터 정도 쭉 이어지고요. 아주 위험하죠." 

 

- "그럼 저쪽으로 가서 한번 둘러봐야겠네요. 오가는 길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나라면 그러지 않을 것 같은데요. 나라면요. 그쪽은 정말 위험하거든요. 한번 미끄러지면 바위 아래로 떨어져 호수에 빠질 겁니다. 그쪽은 진짜 시체도 못 찾아요." 
"그렇군요." 정말로 알아듣고 하는 말이었다.

 

- 그는 계속 저택 주변을 돌아다녔다. 경호원이 있을지 모른다고 의식했더니 그 뒤로 다섯 명이나 발견했다. 분명 놓친 경호원이 더 있을 것이다. 

 

- 그는 고용인 숙소가 있는 건물로 돌아갔다. 고용인들은 음식이 잔뜩 담긴 커다란 접시들을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놓고, 한 코스가 끝날 때마다 일회용 접시에 잔뜩 덜어서 먹었다. 스미스는 주방의 나무 테이블에 앉아 샐러드와 레어로 살짝 익힌 소고기를 접시에 담는 중이었다. 
"저쪽에 캐비어 있어. 최상급 황금빛 오세트라 캐비어. 아주 귀한 거야. 예전엔 파티 진행자들이 자기들끼리만 먹었지. 난 별로 안 좋아하는데, 많이 먹어." 
섀도는 예의상 접시 한쪽에 캐비어를 조금 담았다. 삶은 메추리알과 파스타, 치킨도 담은 뒤 스미스 옆에 앉아 먹기 시작했다.

 

- "현지인들이 들어올 만한 곳이 없던데요. 차도 쪽은 경호원들이 봉쇄했고 저택으로 오려면 호수를 건너오는 수밖에 없습니다."
"꼼꼼하게 잘 둘러본 모양인데?"
"예."
"우리 애들도 봤나?"
"예."
"어때?"
"까불다간 큰일 나겠던데요."
스미스가 코웃음을 쳤다.

"자네 같은 덩치가? 자네라면 문제없을걸."
"그 사람들은 킬러잖아요." 섀도가 간단히 말했다.
"필요할 때만 그렇지." 스미스가 말했다. 웃음기가 사라지고 없었다.
"방에 올라가 있지? 필요하면 부르겠네."
"그러죠. 필요할 일이 없으면 주말 내내 너무 편하겠는데요."
스미스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돈은 받을 거야."

 

- 어느새 손님들이 코트를 입고 장갑을 낀채 와인 잔을 들고 안뜰로 나와 있었다. 대화 내용이 드문드문 들려왔지만 알아듣기는 어려웠다. 소리는 분명히 들리는데 정확히 뭐라고 말하는지는알 수 없었다. 가끔 우아한 웅얼거림을 뚫고 분명히 들리는 말들이 있긴 했다. 한 남자가 말했다.

"그에게 말했어요. 당신 같은 판사들은 내 소유가 아니지만 내가 파는..."

여자의 말도 들렸다.

"그건 괴물이에요, 자기. 확실한 괴물이라고요. 뭐 어쩌겠어요?"

다른 여자가 "내 남자친구도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하자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 섀도에겐 두 가지 선택권이 있었다. 여기 남는 것. 탈출하는 것.

"남겠어." 그가 소리 내어 말했다.

 

- "그래서요? 어떻게 된 일인지 난 기억조차 안 납니다. 이번에 그 부자들의 손에 죽으면 영영 죽을걸요."
웬즈데이는 맥주를 다 마셨다. 다 마신 맥주병을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같은 움직임으로 흔들더니 또 노래했다.

 

- "도움이 안 되네요." 섀도가 말했다. 식당은 눈 내린 밤을 뚫고 덜컹덜컹 달리는 철도 객차였다.
웬즈데이는 맥주병을 내려놓고 의안이 아닌 쪽 눈으로 섀도를 빤히 쳐다보았다.

"패턴이야. 그들이 널 영웅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 생각하는 거지. 죽으면 베오울프나 페르세우스, 라마가 될 수 없어. 그러니까 법칙을 아예 바꿔. 체커 게임이 아니라 체스 게임인 거지. 아니, 체스 게임도 아닌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나도 모르겠어요." 섀도는 답답했다. 
저택의 복도에서 술 취한 사람들이 요란하게 움직였다. 비틀비틀 복도를 지나면서 깔깔거리고 서로 조용히 하라고 했다. 섀도는 저들이 고용인인지, 아니면 초라한 다른 부속 건물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손님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꿈이 그를 다른 꿈으로 데려갔다.

 

- "육지에 닿을 수가 없다. 떠날 수가 없어." 천둥 같은 목소리가 올려 피졌다.
"집으로 가세요." 섀도가 말했다.
"우린 우리의 사람들과 함께 이 남쪽 나라로 왔다. 하지만 그들이 우릴 떠났어. 길들여진 다른 신들을 찾아서, 우릴 잊어버렸지."
"집으로 가세요." 섀도가 다시 말했다.


-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어." 붉은 수염의 남자가 또 말했다. 옆에 든 망치를 보고 섀도는 남자를 알아보았다.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넌 우리 혈족이야, 발데르. 우릴 자유롭게 해 줘."
섀도는 자신이 그들의 혈족도 아니고 그 누구의 혈족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얇은 이불이 침대에서 떨어지고 발이 침대 끄트머리에 튀어나온데다 흐릿한 달빛이 다락방을 비춰 잠에서 깼다. 저택은 고요했다. 언덕에서 뭔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섀도는 몸을 떨었다. 

- 그는 작아도 너무 작은 침대에 누운 채 시간이 물웅덩이처럼 고이는 상상을 했다. 시간이 묵직하게 걸려 있는 곳, 시간이 잔뜩 쌓여서 고정된 장소가 있다면 어떨지 궁금해졌다. 도시는 시간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각자 시간을 가지고 몰려들 테니까.
만약 그런 곳이 있다면 사람들이 조금밖에 없어서 비통하게 그저 기다리기만 하는 잿빛 땅도 있을 터였다. 사람이 없어서 시간도 적은 곳에서는 천년의 시간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겠지. 휙휙 지나가는 구름과 흔들리는 골풀이 전부일 것이다. 

 

- "그들은 당신을 죽일 거예요." 여자 바텐더 제니가 속삭였다.
이제 섀도는 언덕의 달빛 아래 그녀와 함께 앉아 있었다. "내가 뭐라고 그사람들이 죽이고 싶어 하겠어요?"
"그들은 괴물을 죽이거든요. 그래야만 하니까. 항상 그래왔으니까."

그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가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뒤쪽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가 다시 뒤돌아 그를 보며 속삭였다. "피해요."
"당신이 내가 있는 곳으로 와요." 그가 말했다.

 

- 구름 같은 각다귀 떼가 섀도에게 내려앉아 코와 입에 작고 따끔거리는 벌레가 바글바글했다. 까만 어둠이 그를 질식시켰다.
그는 침대에 누운 채로 온몸을 비틀며 잠에서 깨어났다. 심장이 마구 뛰고 숨을 헉헉거렸다.

 - 아침은 훈제 청어, 구운 토마토, 스크램블드 에그, 토스트, 엄지 모양의 뭉툭한 소시지 2개, 정체를 알 수 없는 까맣고 동그랗고 평평한 무언가였다. 
"이게 뭡니까?" 섀도가 물었다.
"블랙 푸딩이에요." 옆에 앉은 남자가 말해 주었다. 경호원인 그는 어제자 <선>을 읽으며 식사를 했다. "피와 향신료를 섞어서 굳힌 거예요. 꼭 까만딱지 같죠." 그는 달걀을 포크로 찍어 토스트에 올린 채 손으로 먹었다. "아무튼 이런 말도 있잖아요. 소시지나 법 만드는 모습은 절대로 보지 말아라."
섀도는 아침을 마저 먹었지만 블랙 푸딩은 남겼다.

 

- 주전자에 담긴 제대로 뽑은 커피를 머그잔에 담아서 마셨다. 뜨거운 블랙커피가 잠을 깨우고 머리를 맑게 해 주었다.

 

- 서재의 책들은 쥐와 먼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유리문과 철망으로 감싸놓았다. 섀도는 벽에 걸린 수사슴 그림을 자세히 보려고 다가갔다. 안개 자욱한 협곡을 배경으로 서 있는 수사슴은 도도하고 우월해 보였다. 
"협곡의 군주." 앨리스 씨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오며 말했다. "빅토리아 시대에 가장 많이 복제된 그림이지. 원본은 아니지만 1850년대에 랜드시어가 자기 그림을 직접 복제한 거라네. 맘에 들어. 그래선 안 되겠지만 트래펄가 광장의 사자 동상도 랜드시어 작품이지." 

 

- 안뜰 중앙의 연못가에서는 파티 손님들이 통나무와 장작으로 모닥불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왜 모닥불 준비를 고용인들에게 시키지 않죠?" 섀도가 물었다. 
"재미있는 걸 하인들에게 시키면 쓰나. 그건 오후 꿩사냥에 고용인들을 보내는 것과 다를 바 없지. 모닥불을 쌓는 건 특별한 일이야. 모닥불 피울 나무를 완벽하게 쌓는다는 게 참 특별하거든. 사람들 말로는 그렇다더군. 난 해 본 적이 없어서." 앨리스 씨가 창가에서 뒤돌았다. "좀 앉지. 자넬 올려다보다가는 목이 결리겠어." 

 

-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다른 후보들도 있었지만 자네가 이 일에 가장 적임자였던 거지. 자네가 누구인지 알았거든. 신들의 선물이지. 안그런가?" 
"모르겠는데요. 제가요?"
"물론이지. 이 파티는 역사가 무척 오래됐어. 한 해도 빠짐없이 천 년 가까이 열렸으니까. 해마다 우리 쪽 인간과 그들 쪽 인간이 싸운다네. 우리 쪽 인간이 이겨 왔고. 올해 우리 쪽 인간이 바로 자네일세." 

 

- "그들은 오래전에 패배한 자들이야. 우리가 이겼어. 우린 기사, 그들은 용, 우린 거인 사냥꾼, 저들은 거인이었지. 우린 인간, 저들은 괴물이었어. 우리가 이겼고, 이젠 저들도 우릴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아. 그 사실을 다시 일깨워 주는 게 오늘 밤의 목적이고. 자넨 오늘 밤 인류를 위해 싸우는 걸세. 그들이 이기게 둘 순 없어. 절대로. 우리와 그들의 싸움일세." 
"닥터 가스켈은 저더러 괴물이라고 했는데요." 섀도가 말했다.

 

- "난 자네가 괴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네, 섀도. 영웅이라고 생각하지."

아니, 당신은 날 괴물이라고 생각하잖아. 그것도 당신 소유의 괴물이라고. 섀도는 생각했다.
"오늘 잘해 주게. 잘해 주리라고 믿지만, 이기면 대가를 지불하지. 영화배우나 유명인이나 부자가 어떻게 그 자리에 올라갔는지 궁금한 적 있을 거야. 재능이 뛰어나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겠지? 사실은 나 같은 사람을 뒷배로 둔 덕분일 때가 많다네."
"당신은 신인가요?" 섀도가 물었다.
앨리스 씨가 큰소리로 껄껄 웃었다. "재미있군, 미스터 문. 전혀 아닐세. 성공한 스트레텀 출신 소년일 뿐이지."

 

- 그들은 어두운 나무 계단을 올라 맹꽁이 자물쇠로 잠근 문을 통해 (스미스가 열쇠로 열었다) 먼지 가득한 나무 다락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뭔가가 높이 쌓여 있었다. 
"북인가요?" 섀도가 물었다.
"북이지." 스미스가 답했다. 나무와 동물 가죽으로 만든 북이었는데 저마다 크기가 달랐다. "자, 아래층으로 옮기자고."

 

- "오래된 가문들이야.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 말이야. 아주 오래된 부자들이지. 앨리스 씨가 우두머리라는 걸 그들도 알지만 그렇다고 그분이 그들의 일원이 되진 않아. 이해가나? 오늘 밤 파티에 참석하는 건 그들뿐이야. 그들은 앨리스 씨가 참석하는 걸 원치 않아. 알겠나?" 
섀도는 이해했다. 그는 스미스에게 앨리스 씨 이야기를 들은 게 후회되었다. 살아남을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섀도는 그저 이렇게만 답했다. "북채가 무겁네요." 
  

- 소형 헬리콥터가 와서 앨리스 씨를 태워 갔다. 고용인들은 랜드로버를 타고 떠났다. 스미스 씨가 마지막 랜드로버를 몰았다. 섀도는 세련된 옷차림에 미소를 머금은 손님들과 남겨졌다. 손님들은 재미를 위해 잡아다 가둬 둔 사자라도 되는 듯 섀도를 쳐다볼 뿐 말은 걸지 않았다. 
도착했을 때 섀도에게 미소를 보냈던 검은 머리의 여자가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다. 거의 날 것이나 다름없는 스테이크였다. 손으로 집어 씹어 먹으라는 듯 포크와 나이프도 없이 접시에 담긴 고기만 주었다. 그는 배가 고팠고 그래서 그렇게 먹었다. 

 

- "나는 당신들의 영웅이 아닙니다." 그가 사람들에게 말했지만 그들은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말을 거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 손님들은 안뜰 가장자리에 자리 잡더니 북채로 북을 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심장 소리처럼 느릿느릿 고동치는 깊은 울림이었지만 이내 기이한 리듬으로 거세게 내리쳤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짧고 날카로운 소리가 점점 커지며 섀도의 머리와 마음을 완전히 장악했다. 불빛이 꼭 북소리의 리듬에 맞춰 깜빡이는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저택 밖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 "난 싸우고 싶지 않아." 섀도는 잔디밭에 칼을 버리고 양손을 들어 아무것도 없음을 보여 주었다.
"늦었다. 그러기엔 너무 늦었어." 

 

- 괴물이 팔로 섀도의 얼굴을 세게 찍었다. 자신의 피 맛을 본 섀도는 증오가 붉은 장벽처럼 거세게 일어나는 걸 느꼈다. 

- 북을 치고 있는 손님들을 힐끗 보니 피에 굶주린 기색이 역력했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불었다. 하늘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느껴졌다. 죽은 인간들의 손톱으로 만든 배에서 본 거인들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이 배에 꼼짝없이 갇혀 육지에 닿지도, 떠나지도 못했던 이유가 바로 이 싸움 때문인 듯했다. 
 
- 섀도는 이 싸움이 앨리스 씨가 알고 있는 것보다도 오래되었다고 생각했다. 괴물의 발톱으로 가슴을 긁히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괴물과 인간의 싸움은 시간만큼이나 오래되었다고. 이것은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의 싸움이요, 베오울프와 그렌델의 싸움이며, 모닥불과 어둠 사이에 서서 검에 묻은 인간의 것이 아닌 피를 닦아 낸 모든 영웅의 싸움이었다. 

 

- 섀도는 생각했다. 우리 둘 다 죽일 거야. 처음에는 괴물, 그다음에는 나.  

 

- "우리 애는 좀 어때?" 여자가 물었다.
섀도가 돌아보니 괴물의 엄마가 무릎 높이의 물속에서 물가 쪽으로 걸어왔다.
"모르겠습니다. 다쳤어요." 섀도가 말했다.
"너도 다쳤어. 둘 다 피와 멍투성이구나."
"예."
"그래도 우리 애가 죽지 않았으니 썩 괜찮은 변화가 되겠어."
어느새 호숫가에 이른 그녀는 둑에 앉아 무릎에 아들의 머리를 눕혔다.

 

- 나이 든 여인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목 깊은 곳에서 쯧쯧 차는 듯한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저었다.

"네가 그들을 들여보냈어. 오랫동안 묶여 있던 그들을 들여보낸 거야."
"잘된 겁니까?" 섀도가 물었다.
"나도 모른단다, 얘야." 자그마한 체구의 여인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 불타는 저택의 열기가 호숫가에까지 전해져 알몸의 섀도를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는 유리 같은 호수에 비친 이글거리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노란달이 뜨고 있었다. 

 

- "당신의 여자가 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당신이 날 사랑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마도 언젠가는."
"정말 그럴지 같이 한번 알아봐요. 내일 같이 산책을 해도 좋고. 오래는 못하지만, 몸이 엉망진창이라."

- 이상하게도 이제 그녀는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원래의 모습인 야생의 생명체, 숲의 생명체처럼 보였다.

 

-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다. 섀도는 자신이 그녀를 강렬하게 원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훌드라에게 가장 힘든 건, 아무리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말이에요. 외롭지 않으려면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는 거예요."

 

- 기차에서 깨 보니 옆자리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페이퍼백 책을 읽고 있었던 길고 날카로운 얼굴의 남자는 섀도가 깬 것을 보더니 책장을 덮었다. 섀도가 표지를 힐끗 보니 장 콕토의 <존재의 어려움>이라는 책이었다.
"좋은 책인가요?" 섀도가 물었다.
"괜찮지." 스미스가 말했다. "전부 에세이야. 개인적인 글들이긴 한데, 작가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이게 나야'라고 할 때마다 이중 속임수 같은 느낌이 들어. 그래도 영화 <미녀와 야수>는 좋았지. 이 에세이를 읽는 것보다 그 영화를 볼 때 오히려 장 콕토가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 같군."
"표지가 다 말해 주네요." 섀도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장 콕토라는 존재의 어려움이요."

 

- 9면 하단에는 은퇴한 의사가 자살한 사건이 자그마하게 실렸다. 해안 도로의 피크닉 장소에 세워 둔 차에서 가스켈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는 위스키 라가불린 한 병을 거의 비우고 여러 종류의 진통제를 먹었다.  

 

- "혹시 화재 얘기도 신문에 실렸습니까?"
"화재라니?"
"아, 그런 거군요."
"하지만 앞으로 두어 달 동안 귀하신 분들이 끔찍하게 운 나쁜 일을 당해도 놀랍지 않을 걸세. 자동차 사고나 기차 사고, 비행기가 떨어질지도 모르지. 슬픔에 잠긴 미망인, 고아, 애인들, 아주 슬픈 일이야."
섀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앨리스 씨는 자네의 안전을 많이 신경 쓰고 계셔. 걱정이 크시지. 나도 마찬가지고."
"그런가요?"
"당연하지. 자네가 여기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잖아. 길을 건너다 미처 차를 못 볼 수도 있고 술집에서 돈 자랑하다가 잘못될 수도 있고, 모르는 거지. 아무튼 자네한테 사고라도 생기면 그 뭐야, 그렌델 엄마가 오해할 수도 있다 이거야."
"그래서요?"
"그래서 우린 자네가 영국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게 모두에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

- 섀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기차의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마침내 섀도가 말했다.
"난 여기서 내려야 해. 자네가 원하는 곳으로 비행기표를 바꿔 줄게. 물론 일등석 편도로. 어디로 갈 건지만 알려 주면 돼."
섀도는 멍든 뺨을 문질렀다. 아픔이 왠지 모르게 편안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 그는 자신에게만 들릴지 모르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집에 가야겠어요." 

- 잠시 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굵직한 빗방울이 창문을 세차게 때리고 세상이 회색과 초록색으로 번졌다. 우르릉거리는 천둥이 남쪽으로 향하는 섀도와 동행해 주었다. 거센 바람이 울부짖고 번개가 하늘에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속에서 섀도는 혼자라는 생각이 조금씩 사라졌다.  

 

- <협곡의 군주 The Monarch of the Glen>

 

 

- 이 작품은 닐 게이먼이 세계적인 뮤지션 데이비드 보위의 페르소나에 영감을 얻어 집필한 작품이다. 데이비드 보위는 시기별로 각기 다른 캐릭터를 내세워 음악 활동을 했는데, '여윈 백공작 The Thin White Duke'은 그런 데이비드 보위의 페르소나 중 하나다.

 

- 그는 그가 보살피는 모든 것의 군주였다. 밤에 궁전 발코니에 서서 신하들의 보고를 들을 때도, 소용돌이치며 반짝이는 무수히 많은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볼 때도. 그는 모든 세상의 지배자였다. 그는 오랫동안 현명하고 훌륭한 통치자가 되려고 노력했지만, 통치라는 것이 워낙 힘든 일이었고 지혜는 대개 고통에서 나왔다. 아무리 모든 생명과 모든 꿈, 모든 세상에 관심을 기울여도 무언가를 새로 만들려면 무언가를 파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까닭에 좋은 일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 조금씩 시간이 지날수록, 죽음을 경험할수록, 그는 점점 관심을 덜 쏟게되었다.

- 그는 불사의 몸이었다. 열등한 인간이나 죽는 법이고, 그는 그 누구에게도 열등하지 않은 존재였으니까.

 

-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깊은 지하 감옥에서 얼굴에 피칠을 한 남자가 공작을 바라보며 그가 괴물로 변했다고 말했다. 남자는 그 말을 하자마자 목숨을 잃었고 역사책 한 구석의 각주로만 남았다. 

며칠 동안 공작은 그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반역자의 말이 맞다. 나는 괴물이 되었어. 흠. 우리는 괴물이 되는 것인가?"

 

- 아주 오래전에는 연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제국의 여명 때 이야기였다. 황혼에 접어든 지금은 모든 쾌락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고(힘들여 얻지 않는 것은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법이다) 승계 문제를 처리할 필요도 없게 되어(언젠가 다른 누군가가 공작의 뒤를 이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신성모독에 가까웠다) 도전도, 연인도 사라졌다. 공작은 눈을 뜨고 말하는 채로 잠자는 기분이었다. 그를 깨워 주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 자신이 괴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공작이 깨달은 다음 날은 모든 세계와 모든 차원에서 공작의 궁전으로 보낸 꽃을 입고 축하하는 '기묘한 꽃의 날'이었다. 한 대륙에 걸친 공작의 궁전에서 모든 근심과 어둠을 제쳐 놓고 즐기는 가장 즐거운 날이건만, 공작은 기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기쁘시겠습니까?" 공작의 어깨에 올라탄 딱정벌레 정보관이 물었다. 그의 역할은 수많은 세계에 주인의 변덕과 지시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말씀만 내려 주시면 온 제국이 폐하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나설 것입니다. 별들도 폐하를 위해 신성을 밝힐 테고요." 
"심장이 필요한 것 같구나." 공작이 말했다.

 

- "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삶을 소중하게 여겨야 해. 깨어나야 해."
그의 어깨에서 딱정벌레가 푸르르 소리를 냈다. 딱정벌레는 만 개에 이르는 세계의 지혜를 전부 지니고 있었지만 주인이 이런 상태라면 조언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지금 만 개의 세계에서 화려하게 장식된 상자 속에서 자고 있던 전임 정보관 출신의 딱정벌레와 풍뎅이들에게 걱정을 털어놓았다. 풍뎅이들은 애석해하며 자기들끼리 상의했다. 광범위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저 생명체는 저 너머 출신입니다." 공작의 어깨 위에서 딱정벌레가 딸깍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공작 제국의 통치를 거부하는 곳, 존재와 비존재 사이, 삶과 죽음 너머의 땅이지요. 다른 행성에서 들여온 난초에 숨어 있었나 봅니다. 저것의 말은 함정입니다. 그냥 처리하시지요." 
"아니다. 놔두어라." 공작이 여위고 흰 손가락으로 딱정벌레를 딱 치자 딱정벌레의 초록색 눈이 검게 변하면서 완전히 조용해졌다. 공작이 몇 해 만에 처음 하는 행동이었다.  

 

- 그는 자그만 생명체를 양손에 담고 자신의 거처로 갔다. 생명체는 지혜롭고 고귀한 여왕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름답고 크고 위험한 괴물 거인들이 여왕을 포로로 잡아 두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공작은 별에 사는 소년이 행운을 찾아 이 세계로 왔던 일이 떠올랐다(그때는 행운이 사방에 가득해서 찾기만 하면 되었다). 자신의 젊음도 생각만큼 그리 먼 옛날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깨의 딱정벌레 정보관은 잠잠했다. 

 

- 공작은 침실로 들어가 기능이 정지된 딱정벌레 정보관을 침대 옆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하인들에게 서재로 기다란 검은 상자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그는 상자를 열고 손을 갖다 대 고문관을 활성화했다. 뱀 모양의 대고문관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공작의 어깨로 기어 올라가 꼬리를 목 아래쪽의 신경 플러그에 꽂았다. 

 

- 공작은 뱀에게 계획을 이야기했다.
"현명하지 못합니다." 이전 모든 고문관의 지성과 조언이 기억 속에 전부들어 있는 대고문관이 잠시 전례를 검토하고서 말했다.
"나는 지혜가 아니라 모험을 원한다." 공작이 말했다. 그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신하들이 실로 오랜만에 보는 웃음이었다. 

 

- "뜻이 정 그러시다면 군마를 타고 가십시오." 고문관이 말했다. 좋은 조언이었다. 공작은 고문관의 기능을 정지시킨 뒤 군마가 있는 마구간의 열쇠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천 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열쇠 줄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 한때는 군마 여섯 마리가 있었다. 밤의 군주와 여군주들이 한 마리씩 가지고 있었다. 모두 훌륭하고 아름답고 막강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후회스러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밤의 통치자라는 역할을 없애야만 했을때, 공작은 그들의 군마를 없애는 대신 세상에 위협이 될 일 없는 곳에 두었다.

 

- 공작은 군마에 올라탔다. 허벅지 사이로 차가운 강철 같은 살갗이 느껴졌다. 공작이 달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군마는 높이 뛰어오르더니 거품이 이는 물살 같은 '지하 세계'를 질주했다. 그들은 대혼돈의 서로 다른 차원을 뛰어넘었다. 공작은 '공간의 아래'를 지나고 '시간의 아래'를 영원히 이동하면서(인간의 일생에서 단 몇 초밖에 안 되는 시간이다) 아무도 들을 수 없는 그곳에서 큰소리로 웃었다. 
"뭔가 함정 같습니다." 군마가 말했다. 저 아래로 은하계가 증발했다.

"그래, 분명 그럴 것이다." 공작이 말했다.

 

- 과연 전령이 경고한 대로 궁의 수호자들은 아름답고 흉포했다.

 

- "여왕을 구한다고?" 그들이 크게 웃었다. "여왕은 접시에 담긴 네 머리를 먼저 보게 될걸. 지금까지 여왕을 구하겠다고 온 자들이 한둘인 줄 아느냐. 그들의 머리는 지금 황금 접시에 담겨 여왕의 궁전에 있지. 네 놈의 머리가 가장 신선하겠구나."
타락 천사처럼 보이는 남자들과 승천한 악마처럼 보이는 여자들이 있었다. 만약 진짜 인간이라면 공작이 분명 간절하게 원했을 만큼 아름다운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살을 갑옷에 바짝 갖다 대며 공작의 차가움을 느꼈고 공작은 그들의 따뜻함을 느꼈다.
"우리랑 같이 있자. 우리가 사랑해 줄게." 그들이 속삭이면서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가까이 가져왔다.
"너희들의 사랑은 나에게 이롭지 않을 것이다." 공작이 말했다. 금발에 반투명한 파란 눈을 가진 여자는 오래전 잊힌 누군가를 떠오르게 했다. 오래 전 그를 스쳐 간 연인을. 순간 그녀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녀가 과연 뒤돌아볼지, 자신을 기억하는지 보려고 소리 내어 부르려는 순간, 군마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후려쳐 연한 파란색 눈이 영원히 감겼다. 

 

-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간다. 기다리거라. 언젠가 돌아올 것이다."
"돌아오실 것 같지 않습니다." 군마가 말했다. "당연히 시간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지만 공작님이 걱정됩니다."

 

- 공작은 검은 강철 같은 군마의 머리에 입 맞추고 작별 인사를 했다. 그는 여왕을 구하러 걸어갔다. 세상을 지배하는 절대로 죽지 않는 괴물이 생각났다. 이제 자신은 더 이상 그 남자가 아니기에 웃음이 났다. 첫 번째 젊음 이후 처음으로 잃을 게 생겼다. 그 사실이 그를 다시 젊게 만들었다. 텅 빈 궁전으로 들어가는 그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는 큰소리로 웃었다.

 

- 그녀는 꽃들이 죽는 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상상한 모습 그대로였다. 장식 없는 하얀색 치마, 우뚝 솟은 짙은 광대, 까마귀의 날개처럼 까만 머리카락. 
"당신을 구하러 왔소."
"자신을 구하러 온 것이죠." 그녀가 정정했다. 속삭이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는 바람처럼 죽은 꽃들을 흔들었다.

 

- 여왕은 손가락을 내밀어 손끝으로 공작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공작은 허락 없이 누군가 자신을 만진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우주보다 큰 것은?" 여왕이 물었다.
"공간의 아래와 시간의 아래. 둘 다 우주를 포함하면서도 우주가 아니니까. 하지만 당신은 좀 더 부정확하고 시적인 답을 원할 것 같군. 그렇다면 정답은 마음. 마음은 우주를 품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 존재한 적 없고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도 상상할 수 있지."
여왕은 대답이 없었다.

 

- "두 번째 질문이에요. 왕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여왕이 물었다. 
"그건 당연히 공작. 왕과 교황, 수상, 황후 등 모두가 내 뜻을 따르기 때문이지. 하지만 역시나 당신은 덜 정확하더라도 상상력 넘치는 답을 원할 것 같군. 왕보다 위대한 것은 역시나 마음이요. 공작보다도 위대하고 말이지. 나는 그 누구에게도 열등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나보다 우월한 존재가 있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으니까. 아니, 잠깐! 답이 생각났소. 생명의 나무에 있는, 케테르, 왕관, 군주의 개념이 그 어떤 왕보다도 위대하오."

 

- 여왕은 호박색의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마지막 질문이에요. 절대 되돌릴 수 없는 것은?"
“내뱉은 말. 아니, 생각해 보니 말을 내뱉은 이후라도 안타깝거나 예상치 못한 일로 상황이나 세계가 바뀔 수 있지. 그러면 내가 내뱉은 말도 상황에 따라 바뀌어야 할 수밖에 없겠지. 답은 죽음이야. 하지만 난 내가 죽인 사람도 필요하다면 다시 부활시킬 수 있는데..."
여왕은 슬슬 조바심이 나는 듯했다.
"입맞춤." 공작이 말했다.
여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 "당신에겐 희망이 있어요. 당신은 당신이 내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의 답은 전부 틀렸어요. 하지만 세 번째는 나머지 두 가지처럼 틀리진 않았어요." 
공작은 이 여자에게 머리가 잘리는 상상을 해 봤다. 예상했던 것만큼 그렇게 기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죽은 꽃들이 가득한 정원에 바람이 불어오면 향기 나는 유령같지 않을까.

 

- "답은 하나뿐, 바로 심장이랍니다. 심장은 우주보다 크죠.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연민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우주는 연민을 느끼지 못해요. 심장은 왕보다 위대하죠. 심장은 왕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심장은 한 번 내어 주면 되돌리지 못해요."
"난 입맞춤이라고 했는데."
"그러니 나머지 2개보다는 정답에 가까웠어요." 

바람이 더 높아지고 거세졌다. 순식간에 대기가 죽은 꽃잎으로 가득 찼다. 갑자기 바람이 완전히 멈추고 부서진 꽃잎들이 땅으로 떨어졌다.
 

- "도망가려고요? 날 두고?"
"걸어가는 거요. 도망치는 게 아니라. 난 앞으로 걸어갈 거요. 내가 원한건 심장이었소. 안개 너머에 뭐가 있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안개 너머는 말쿠스 Malkuth, 즉 왕국이에요. 하지만 스스로 만들기 전까진 존재하지 않아요. 당신이 만들어야만 존재하게 되는 거죠. 당신이 안개 속으로 걸어간다면 세상을 창조하게 되거나 아예 당신의 존재가 사라지거나 둘 중 하나일 거예요. 가고 싶으면 가세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이거 하난 확실해요. 날 두고 가면 당신은 절대로 돌아오지 못해요."

 

- 쿵쿵거리는 소리가 여전히 들렸지만 공작은 그게 과연 거인의 발소리인지 더 이상 확신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의 심장 소리 같았다. 

- 그는 마음이 바뀌기 전에 안개 쪽으로 돌아서 빈 공간을 향해 발걸음을 뗐다. 피부에 차갑고 축축한 기운이 느껴졌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점점 하찮은 존재가 되는 것 같았다. 신경 플러그가 죽어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고 결국 자신의 이름과 지위마저 잊어버렸다. 
어떤 장소를 찾으려 하는 건지, 아니면 새로 지으려 하는 건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갈색 피부와 호박색 눈동자만은 기억났다. 별도 기억났다. 자신이 가는 곳에도 별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분명히 별이 있을 거야. 

 

- 그는 끈질기게 계속 나아갔다. 갑옷을 입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얼굴과 목에 축축한 안개가 닿았고, 얇은 코트만 걸친 그는 차가운 밤공기에 몸을 떨었다. 
발이 연석을 스치며 비틀거렸다.

 

- 아, 나의 옛 영지여. 가슴에서 애틋함이 솟아났다. 곧이어 그는 왜 베케넘에 오랜 추억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인지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그는 방금 여기 도착하지 않았던가. 이곳은 도망쳐야 할 고향으로 잘 어울리는 그런 곳이었다. 그게 핵심이었다. 

 

- <여윈 백공작의 귀환 The Return of The Thin White Duke>

 

 

- 당신은 아난시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을 것이다. 아난시의 이야기를 하나도 모르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테니까. 

- 세상이 시작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때, 모든 이야기가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할 때, 아난시는 거미였다. 그는 문제를 자초하는 것도 문제에서 빠져나오는 것도 능숙했다. 브레어 토끼의 타르 베이비(여우가 토끼를 잡으려고 타르로 인형을 만들었다는 우화 - 역주) 이야기도 원래 아난시의 이야기였다. 어떤 이들은 아난시가 토끼라고 생각하는 실수를 저지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토끼가 아니다. 그는 거미다.

 

- 아난시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처음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한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프리카에서 세상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그러니까, 동굴 벽에 사자니 곰 따위를 그리기도 전부터 사람들은 원숭이와 사자, 버펄로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것은 꿈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인간의 본능이었고,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기어 다니거나 홱 움직이거나 꿈틀거리는 것들도 전부 이야기 속으로 들어왔고, 여러 부족들이 서로 다른 생명체를 숭배했다.

 

- 아난시는 이야기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모든 이야기는 그의 것이었다. 이야기가 아난시의 것이기 전에는 한때 모두 호랑이(섬 사람들이 대형 고양잇과 동물을 통칭해 부르는 이름)의 것이었다. 모든 이야기는 어둡고 사악하고 고통으로 가득했으며 행복한 결말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 전의 일. 오늘날 모든 이야기는 아난시의 것이다.

 

- 할머니의 시신을 손수레에 태우고 오전 내내 섬을 가로지르던 그는 위스키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래서 마을의 상점으로 갔다. 무엇이든지 다 파는 이 상점의 주인은 성미가 무척 급한 남자였다. 아난시는 안으로 들어가 위스키를 마셨는데, 술이 좀 들어가니 장난을 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상점 주인에게 밖의 손수레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할머니에게 위스키를 좀 가져다주라고 부탁했다. 깊이 잠드시는 편이니 잘 깨워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리뷰자 주 : <안데르센 동화집>)

 

- 목이 마르고 머리가 아프고 입안에서 불쾌한 맛이 나고 눈은 너무 뻑뻑했다. 쿡쿡 쑤시는 치통에 뱃속에서는 불이 나고, 허리에 통증이 있는데 이상하게도 무릎부터 이마까지 아픈 느낌이었다. 머릿속에 뇌 대신 솜뭉치와 바늘, 핀이 들어찬 것처럼 무슨 생각만 하려고 하면 머리가 아팠다. 눈은 그냥 뻑뻑한 게 아니라 밤새 눈알이 빠졌다가 대가리가 넓은 루핑 못으로 다시 박아 놓은 듯했다. 게다가 이제는 공기 중에 떠 있는 작은 입자의 움직임마저도 통증을 자극했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 전화로 몸이 아픈 것처럼 들리도록 연기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곧 아픈게 아닌 다른 연기가 오히려 어려울 정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저기," 침대 옆의 누군가가 말했다. "그쪽에 물병이 있는 것 같은데 좀 줄래요?"
팻 찰리는 이쪽에 물이 없고 가장 가까이 있는 물은 화장실 세면대이지만 그전에 칫솔 담아 두는 컵을 먼저 소독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침대 옆 작은 탁자에 물병 몇 개가 놓여 있었다. 그는 남의 것처럼 느껴지는 손을 물병으로 가져간 뒤, 얼마 남지 않은 암벽을 오르기 위해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듯이 병을 쥐고 몸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그의 옆에 누운 건 오렌지주스를 섞은 보드카 같았다.

 

- "나야." 스파이더의 목소리였다. "다 괜찮아."
"혹시 회사에 내가 죽었다고 했어?"
"아니, 더 좋은 방법. 내가 너라고 했지."
"어떻게‥." 팻 찰리는 똑바로 생각하려고 애썼다. "넌 내가 아니잖아."
"나도 알지. 아무튼 내가 너라고 했어."
"나랑 닮지도 않았으면서."
"형제여, 우리 괜히 기분 잡치는 말은 하지 말자. 아무튼 다 해결했어. 어? 이제 가 봐야겠다. 두목이 부른다."
"그레이엄 코츠가? 야, 스파이더-"
하지만 스파이더는 전화를 끊었고 핸드폰 화면도 끊겼다.

 

- 그녀는 발포 소화제가 든 물컵과 뭔가가 담긴 머그잔이 놓인 쟁반을 들고 있었다.
"둘 다 마셔요. 머그잔에 든 것부터, 원샷으로 쭉."
"그게 뭐죠?"
"달걀노른자, 우스터소스, 타바스코, 소금, 보드가 약간 등을 넣은 거예요. 죽든지 낫든지. 둘 중 하나 선택해요."

어떤 반론도 용납하지 않겠다는듯한 말투였다. "마셔요."
팻 찰리는 머그잔에 든 것을 마셨다. "으악."
"좀 그렇죠. 그래도 살아 있잖아요."

 

- "지금 기억이 안 난다는 말이에요?" 그녀의 얼굴에 실망이 가득했다. "살면서 가장 좋았다고 했잖아요. 여자랑 처음 해 보는 느낌이라고. 어제 당신은 신 같고 짐승 같고 통제 불능의 섹스 머신 같았는데..."
팻 찰리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난감했다. 여자가 깔깔거렸다.
"장난 좀 쳐 봤어요. 난 그냥 당신 형제하고 같이 당신을 집에 데려와 뒤치다꺼리를 도와줬을 뿐이에요. 그 뒤론 당신도 아는 대로고요."
"아뇨. 모르겠는데요."
""당신은 완전히 필름이 끊겼고 침대가 워낙 크길래 뭐. 당신 형제는 어디에서 잤는지 모르겠네요. 황소처럼 튼튼한 체질인가 봐요. 새벽같이 일어난 것도 모자라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완전 쌩쌩하더라고요."
"그 사람은 나 대신 출근했습니다. 나라고 했대요."
"둘이 다른 사람이란 거 알지 않아요? 일란성 쌍둥이가 아닌데."
"일란성은 아니죠."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유난히 짙은 분홍색 혀를 그에게 빼꼼 내밀었다.

- 한편 스파이더는 사무실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사무실에서 일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일 자체를 거의 해 보지 않았기에 모든 게 새롭고 놀랍고 신기했다. 그를 5층으로 올려다 주는 작은 엘리베이터부터 그레이엄 코츠 에이전시의 미로 같은 사무실도. 그는 상패가 전시된 로비의 먼지 가득한 유리 케이스에 마음을 빼앗겼다. 사무실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누군가 누구냐고 물으면 "팻 찰리 낸시입니다."라고 답했다. 무슨 말이든 다 진실이 되는 신의 목소리로 말했다. 

 

- 티룸을 발견한 그는 차를 몇 잔 만들었다. 팻 찰리의 책상으로 가져가 예술적인 모양으로 배치했다. 컴퓨터 네트워크도 만지작거렸다. 비밀번호를 대라고 해서 "난 팻 찰리 낸시다."라고 컴퓨터에 말했지만 그걸로는 제한이 많았다. 그래서 "난 그레이엄 코츠다."라고 했더니 모든 게 활짝 열렸다. 

 

- "그리고 '두목'은 나를 말한 건가?"

두 사람은 복도 끄트머리에 이르러 그레이엄 코츠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제일 크고 제일 두목 같으니까요." 스파이더가 말했다.
그레이엄 코츠는 혼란스러웠다. 놀리는 말 같은데 확실치는 않아서 신경에 거슬렸다.
"일단 앉게. 앉아."

 

- 그레이엄 코츠는 그레이엄 코츠 에이전시의 이직률을 꽤 한결같이 유지하는 습관이 있었다. 금방 내보내는 사람도 있었고 고용 보장 비슷한 것이 의무가 되기 직전까지 데리고 있다가 내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팻 찰리는 지금까지 가장 오랫동안 일한 직원이었다. 1년 11개월. 이제 한 달만 있으면 퇴직 수당이나 노동법원을 이용할 수 있을 터였다. 

 

- 그레이엄 코츠는 직원을 해고하기 전에 늘상 연설을 했다. 그는 자신의 연설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다.
"우리가 살면서 말이야." 그가 입을 뗐다. "비가 꼭 내릴 필요가 있어. 구름이 있어야 뒤편에서 햇살도 비치지."
"전적으로 나쁘기만 한 일은 없죠." 스파이더가 덧붙였다.
"그래, 그렇지.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때 우리는 잠시 멈춰서 생각을-"
"첫 번째 상처가 가장 깊은 법이죠."
"뭐? 아." 순간 그레이엄 코츠는 다음 말을 까먹었다가 간신히 기억해 냈다. "행복은 나비와도 같은 법이야."
"파랑새 같기도 하죠." 스파이더가 말했다.
"그렇지. 끝까지 말 좀 해도 될까?"
"당연하죠. 얼른 하세요." 스파이더가 유쾌하게 말했다.

- "그럼 이만 다시 일하러 가 보겠습니다.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더 말하고 싶으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제 자리 아시니까요."
"행복은 말이야." 그레이엄 코츠의 목소리가 약간 잠긴 것처럼 들렸다. "내가 궁금한 건 이거라네, 찰스. 자넨 여기서 행복한가? 여기보다 다른 곳에서 더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전혀 궁금하지 않은데요. 제가 궁금한 게 뭔지 알고 싶으신가요?"

- 그레이엄 코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대개 직원들은 이 시점에서 얼굴에 실망이 가득하고 충격에 빠지기 마련이었다.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레이엄 코츠는 그들이 울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 "제가 궁금한건요, 케이맨 제도의 계좌가 무슨 용도인가 하는 겁니다. 고객 계좌로 가야 할 돈이 케이맨 제도의 계좌로 들어가는 것 같거든요. 그쪽 계좌에 따로 돈을 넣어 두는 게 체계적인 재무 관리 방법 같지도 않고요. 이런 건 처음 보는데 그러잖아도 설명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레이엄 코츠의 얼굴이 페인트 카탈로그에 나온 '파치먼트'나 '매그놀리아' 계열의 누런 흰색으로 변했다. "그 계좌에는 어떻게 접근했지?"
"컴퓨터로요. 혹시 컴퓨터 쓸 때 컴퓨터가 사장님도 짜증나게 하나요?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하죠?"

- 그레이엄 코츠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자신이 재무 경로를 상당히 복잡하게 꼬아 놓아서 사기전담반이 낌새를 채더라도 정확히 무슨 범죄인지 판사에게 증명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자부했다.

"해외 계좌는 불법이 아니네." 그는 최대한 무심한 듯이 말했다.

"불법요? 불법이 아니어야죠. 만약 제가 불법적인 일을 목격한 거라면 신고를 해야 할 테니까요."

 

- <아난시의 아들들 발췌 Excerpt from Anansi Boys>

 

 

- 그 시절 에피큐리언 클럽의 회원들은 돈도 많고 꽤나 시끄러웠다. 그들은 노는 법을 잘 알았다. 회원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 우선 어거스터스 투페더스 맥코이는 몸집은 세 사람 분에 먹는 건 네 사람 분이요, 마시는 건 다섯 사람 분인 인물이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가 톤티식 연금(다수의 출자자가 돈을 내고 한 사람이 사망할 때마다 나머지 사람들이 배당금을 나눠 갖는 방식의 연금 제도로, 가장 오래 사는 사람이 돈을 전부 갖게 된다. 17세기부터 시작해 18, 19세기까지 널리 퍼졌다 - 역주)으로 에피큐리언 클럽을 처음 세웠다. 배당금을 독식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한 것은 당연했다. 

 

- 그리고 맨덜레이 교수. 작은 체구에 항상 초조해하는 기색이며 유령처럼 온통 잿빛이다(진짜 유령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기묘한 일도 일어나니까). 그는 오로지 물만 마셨고 음식을 받침 접시에 담아 새 모이만큼 먹었다. 하지만 미식에 꼭 열정이 필요한 건 아니며, 맨덜레이 교수는 앞에 놓인 음식의 가장 중요한 부분만큼은 언제나 다 먹었다.

 

- 버지니아 부트. 음식 및 레스토랑 평론가로 한때 굉장한 미인이었다. 지금은 웅장하고 찬란한 폐허만 남았지만 그 폐허조차 여전히 즐거움을 줄 정도다. 

 

- "우린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어 보았지요." 그의 목소리에서는 애석함과 약간의 슬픔이 묻어났다. "독수리, 두더지, 과일박쥐도 먹어 봤습니다."
맨덜레이가 노트를 확인했다. "독수리는 썩은 꿩고기 맛, 두더지는 썩은 민달팽이 맛, 과일박쥐는 놀랍게도 사랑스러운 기니피그 맛이었죠."

"우린 카카포 앵무새도 먹어 봤죠. 그럼요. 그리고 대왕판다."
"오, 석쇠에 구운 판다 스테이크였죠." 버지니아 부트는 생각만으로 입안에 침이 고여서 한숨을 내쉬었다.

 

- "매머드 고기를 좀 더 일찍 맛봤어야 했는데." 재키 뉴하우스가 한숨지었다. "그 털보 코끼리가 왜 그렇게 일찍 멸종했는지 알 것 같더군요."

 

- "에피큐리언 클럽의 장정한 연간 회의록을 찾아봤습니다. 40년 전 회의록 색인에 태양새를 말하는 것 같은 내용이 있긴 한데 그 이상은 알아내지 못했어요." 
"왜지?" 크로크러슬이 꿀꺽 침을 삼켰다.
어거스터스는 한숨을 쉬었다. "회의록에서 관련 페이지가 불타 버리고 없었어요. 그 후에는 에피큐리언 클럽의 관리 업무에 큰 혼돈이 있었고요."


- "종이봉투에 든 건 반딧불이죠?" 홀리베리 노페더스 맥코이가 말했다. "예전에도 드시는 거 본 적 있어요."
"그렇단다. 꼬마 아가씨."
"그 혼돈의 시기를 혹시 기억하시나요, 크로크러슬?" 어거스터스가 물었다.
"기억하지. 자네도 기억하고. 그때 자네는 지금의 홀리베리만큼 어렸지. 하지만 어거스터스, 혼돈은 있다가도 없는 거야. 해가 떴다가 지는 것처럼."

 

- 한편 그날 저녁 재키 뉴하우스와 맨덜레이 교수는 철로 뒤쪽에서 크로크러슬을 발견했다. 그는 자그맣게 피운 숯불에 무언가가 든 깡통을 굽고 있었다.
"뭘 굽는 거예요, 크로크러슬?" 재키 뉴하우스가 물었다.
"숯이야. 피를 맑게 해 주고 영혼도 정화해 주거든."
깡통에는 작게 자른 참피나무와 히코리나무가 까맣게 탄 채로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 "훌륭한 마술이네요. 불 먹는 마술도 그런 식으로 하겠죠." 맨덜레이가 말했다.
크로크러슬은 숯 조각을 입안에 털어 넣고 날카로운 치아로 씹었다. "그렇지. 그렇고말고."

 

- "아무튼 이번 여행에 대한 불안감이 아주 큽니다." 재키 뉴하우스가 말했다. "조상님과 마찬가지로 나는 자기 보호 감각이 탁월합니다. 법이나 총든 신사들의 정당한 항의를 피해 지붕에서 떨거나 강에 숨어 있거나 할 때가 많았죠. 바로 그 자기 보호 감각이 당신과 함께 선타운에 가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맨덜레이 교수가 말했다. "난 학자라서 설명하기 힘든 그런 날카로운 감각이 발달하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 모든 게 무척이나 의심스럽군요. 태양새가 그렇게 맛이 좋다면 왜 지금까지 내가 못 들어 봤을까요?"
"자넨 들어 본 적 있다네, 맨디. 들어 본 적 있어." 크로크러슬이 말했다. 

 

- "이집트 맥주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맥주거든. 5천 년 전부터 태양새 요리에 이용되었지."
"맥주는 비교적 근대적인 발명품인데요." 방으로 들어오는 크로크러슬에게 맨덜레이 교수가 말했다. 크로크러슬은 터키 커피가 담긴 컵을 들고 있었다. 타르 구덩이처럼 새까맣고 부글거렸으며, 주전자처럼 연기가 피어 올랐다. 

 

- "아니, 별로. 맥주캔은 그렇게 새로운 발명품도 아니야. 옛날에도 구리와 주석을 섞어서 만들었거든. 은을 조금 넣을 때도 있고 안 넣을 때도 있고, 대장장이 마음이었어. 구할 수 있는 재료에 따라서도 달랐지. 고열을 견딜 수 있는 게 필요하니까 그렇게 만들어 썼어. 다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는구먼. 이 양반들아, 고대 이집트인들이 맥주캔을 만들어서 쓴 건 당연한 거야. 아니면 맥주를 어디다 보관했겠어?"

 

- 나머지 회원 세 명도 나름대로 바빴다. 재키 뉴하우스는 동네 사람들과 친분을 쌓았다. 사람들은 그의 세련된 양복과 빼어난 바이올린 솜씨에 매료되었다. 어거스터스 투페더스 맥코이는 긴 산책을 하러 갔다. 맨덜레이 교수는 바비큐장의 진흙 벽돌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발견하고 해석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그는 멍청한 이들은 무스타파 스트로하임의 뒤뜰에서 이루어지는 바비큐가 한때 성스러운 숭배 의식이었다고 믿을 거라 말했다. "하지만 난 지식인입니다. 이 벽돌이 오래 전 신전을 지을 때 사용된 벽돌이고 천년 넘도록 재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냈죠. 이게 얼마나 값진 물건인지 저 사람들은 알지도 못할 겁니다." 

 

- "아, 그 사람들도 잘 알고 있다네." 크로크러슬이 말했다. "그리고 이 벽돌은 신전에 쓰였던 벽돌이 아니라 5천 년 전 우리가 바비큐장을 지었을 때부터 줄곧 이 자리에 있었지. 그전에는 대충 그냥 돌을 사용했어."

버지니아 부트가 안이 가득 찬 시장바구니를 들고 돌아왔다. "여기요. 붉은 백단하고 파촐리, 바닐라 빈 라벤더 줄기, 세이지, 시나몬 잎, 통넛맥, 마늘, 정향, 로즈메리, 사오라고 한 거 다 사 왔어요. 다른 것도 샀고." 
제베다이아 T. 크로크러슬이 만족스러운 듯 싱긋 웃었다. "태양새가 아주 좋아하겠어."

 

- 그는 오후 내내 바비큐소스를 준비했다. 소스가 있어야 태양새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고, 태양새 고기가 원래 살짝 촉촉함이 부족할 수 있다고 했다. 에피큐리언 클럽 회원들은 그날 저녁 노상에 놓인 고들 버들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무스타파 스트로하임과 그의 가족이 홍차와 커피, 뜨거운 민트 음료를 내왔다. 크로크러슬이 회원들에게 선타운의 태양새를 일요일 점심으로 먹게 될 것이므로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전날 저녁에는 식사를 하지말라고 말해 둔 터였다. 

 

- "성냥 있는 사람?" 크로크러슬이 물었다.
그는 재키 뉴하우스가 건네 준 지포 라이터로 숯 아래쪽의 마른 시나몬잎과 월계수 잎에 불을 붙였다. 정오의 공기 중으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시나몬하고 백단이 태양새를 불러들일 거야." 

"어디에서 오는 거죠?" 어거스터스가 물었다.

"태양에서. 녀석은 거기서 잠자거든."

 

- 그 새는 정말로 태양에서 날아오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정오의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태양과 파란 하늘을 등진 검은 실루엣이었다. 하지만 햇살이 깃털을 비추는 순간 지상에서 바라보는 이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햇살에 빛나는 태양새의 깃털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장관이었다. 숨이 턱 막혀 왔다. 

 

- 태양새는 널찍한 날개를 한 차례 펄럭거리더니 무스타파 스트로하임의 카페 위로 점점 작아지는 원을 그리며 활공했다. 새가 아보카도 나무에 앉았다. 깃털은 황금색, 자주색, 은색이었다. 크기는 칠면조보다 작고 수탉보다 컸으며 왜가리처럼 다리와 목이 길었는데 대가리는 독수리와 좀 더 비슷했다. 
"정말 아름답네요. 머리에 난 기다린 깃털 한 쌍을 좀 보세요. 너무 예쁘지 않아요?" 버지니아 부트가 말했다.
"정말 아름답군요." 맨덜레이 교수가 말했다.

"머리의 저 깃털, 어디에서 많이 본 듯한데." 어거스터스 투페더스 맥코이가 말했다.

 

- "벤누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새지." 크로크러슬이 말했다. 버지니아는 식당에서 문제없이 주문할 만큼은 이집트어를 할 줄 알았지만 그 외에는 꽝이었다.

"벤누가 뭐예요? 태양새를 이집트어로 벤누라고 하나요?"
"벤누는 아보카도 같은 녹나무과 나무에 앉습니다." 맨덜레이 교수가 말했다. "머리에 깃털 2개가 달렸죠. 왜가리 비슷하게 표현될 때도 있고 독수리 비슷하게 표현될 때도 있어요. 다른 내용이 좀 더 있지만 너무 사실 같지 않은 얘기라 굳이 말해 줄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 태양새는 아보카도 나무 근처의 진흙 위에서 긴 다리로 휘청거리며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크로크러슬은 태양새의 바로 앞에 서더니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노인처럼 느릿느릿하고 삐걱거리는 움직임이었지만 어쨌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태양새도 그에게 고개를 숙이더니 진흙 위로 쓰러졌다. 크로크러슬은 성스럽게 태양새를 들어 마치 어린아이를 옮기듯 무스타파 스트로하임의 카페 뒤뜰 한구석으로 가져갔다. 나머지 사람들도 뒤따랐다.

 

- 이집트에는 홉이 없어서 고대 이집트 맥주는 카다멈과 코리앤더로 맛을 냈다. 그 맥주는 풍미가 좋고 갈증 해소에 탁월했다. 맥주를 마신 뒤라면 피라미드를 짓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었으리라. 실제로 이집트인들은 그렇게 했다. 바비큐 그릴에 올려진 맥주가 태양새의 안쪽부터 익히며 촉촉함을 유지했다. 숯의 열기가 깃털까지 전달되자 그을린 깃털이 저절로 떨어지면서 마그네슘광처럼 번쩍하고 불이 붙었다. 어찌나 밝은지 에피큐리언 클럽 회원들은 모두 얼굴을 돌려야만 했다. 

 

- "맞아, 태양새 고기가 원래 그래. 미리 준비하는 게 제일 좋아. 숯과 불꽃, 반딧불이를 먹으면서 익숙해지는 거야. 안 그러면 몸이 세 배로 힘들거든." 크로크러슬이 말했다.
 

- "지금까지 먹어 본 음식 중에 제일 맛있어요. 내 젊음의 맛이에요. 영원의 맛이에요." 그녀는 손가락을 핥고 접시에서 마지막 조각을 집었다. "선타운의 태양새. 혹시 다른 이름이 있나요?"
"헬리오폴리스의 피닉스." 크로크러슬이 말했다. "불꽃과 잿더미 속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되풀이하는 새야. 사방이 캄캄할 때 바다를 날아간 벤누. 때가 되면 희귀한 나무와 향신료, 허브로 지핀 불에 타고 그 잿더미 속에서 다시 태어나. 끝없이 계속, 종말 없는 세상이지."

 

- <태양새 Sunbird>

 

 

- 그렇게 예쁜 이름은 처음 들어 본다고 했다. 말도 참 번드르르하게 잘하는 녀석. 게다가 진심인 것처럼 들리게까지 할 수 있다니.

 

- 독일 교환 방문 때 모두의 반대 없이 틀 수 있었던 LP는 닐 영뿐이었다. 여행 내내 그의 노래 '황금 심장'이 후렴구처럼 울려 퍼졌다.

'난 순수한 마음을 찾아 바다도 건넜죠...'

 

- 그때는 지금과 달리 맥주를 좋아하지 않아서 마실 만한 게 있는지 확인하러 갔다. 큰 병에 담긴 코카콜라가 식탁에 놓여 있었다. 큰 플라스틱 컵에 가득 따랐다. 조명이 꺼진 주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여자애 두 명이 있었지만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들은 활기가 넘치고 엄청나게 예뻤다. 둘 다 검은색 피부에 머리에 윤기가 흘렀고 옷차림도 꼭 영화 배우 같았다. 외국 억양까지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내가 넘볼 수준이 아니었다. 

 

- "이름이 뭐야? 난 엔이야."
"웨인의 웨인." 분명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난 이류야."
"어, 이름이 참... 특이하네."
그녀는 크고 맑은 두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 조상도 웨인이었고 내가 그녀에게 보고할 의무가 있다는 뜻이야. 난 자식을 낳으면 안 돼."

 

- 그녀는 깍지 낀 손가락을 풀어 테이블에 올려놓고 쫙 폈다. "보이지?" 왼쪽 새끼손가락이 구부러지고 맨 위쪽 부분이 두 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다지 심한 기형은 아니었다. "내가 다 만들어졌을 때 그냥 둘 것인지, 제거할 것인지 선택이 필요했어. 운 좋게도 내가 직접 결정할 수 있었고. 완벽한 자매들은 정지 상태로 고향에 남아 있지만 난 여행을 다녀. 자매들은 일류고 난 이류야. 조만간 웨인에게 돌아가 내가 본 것을 전부 말해 줘야 해. 너희가 사는 이곳에 대한 내 감상도." 

 

- "난 이곳이 더 크고 더 깨끗하고 더 알록달록할 줄 알았어. 그래도 보석은 보석이야."

 

- 그녀는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며 하품을 하곤, 곧바로 손을 테이블에 다시 올려놓았다.

"이젠 여행하는 것도 지쳐서, 가끔은 끝나 버렸으면 좋겠어. 리오의 카니발 축제에 갔을 때, 다리 위에서 황금색에 키가 크고 곤충의 눈에 날개가 달린 그들을 봤거든. 난 너무 기뻐서 달려가 인사할 뻔했는데 그냥 인간들이 변장한 거였어. 홀라 콜트에게 '왜 저들은 우리처럼 보이려고 저렇게 애쓰는 거죠?'라고 물었더니 홀라 콜트가 '저들은 자신을 증오하거든. 분홍색과 갈색 피부에 너무 작으니까.'라고 하더라. 하지만 나 역시 그렇게 느끼는 걸. 난 자라지 않아. 아이의 세계 아니면 엘프의 세계에 머물러있는 기분이야." 그녀는 미소 짓더니 계속 말했다. "그들이 홀라 콜트를 보지 못해서 다행이었어." 

 

- "마지막 여행에서 우린 태양에 가서 고래들과 불 속에서 수영했어. 고래들의 과거 얘기도 듣고 변두리의 찬 공기에 떨다가 열이 휘몰아치는 곳까지 깊숙이 헤엄쳐 가서 몸을 녹였지. 또 가고 싶어. 이번엔 스스로 그런 맘이 들었어. 보지 못한 게 많으니까. 그런데 여기로 오게 된 거야. 넌 좋아?" 
"뭐가?"
그녀는 애매모호하게 거실을 가리켰다. 소파, 안락의자, 커튼, 켜지지 않은 가스난로.
"뭐, 괜찮은 것 같아."
"난 그들에게 지구를 방문하고 싶지 않다고 했어. 내 부모 겸 선생님은 기뻐하지 않았지. '배울 게 많을 거다.'라고 했어. 그래서 난 '태양에 또 가면 더 많이 배울 수 있을 거예요. 아니면 심해요. 제사는 은하계 사이에 거미줄을 만들었잖아요. 나도 그걸 하고 싶어요.'라고 했지. 하지만 설득력 없는 말이었어. 그래서 난 지구로 오게 됐어. 부모 겸 선생님이 날 집어삼켰고 칼슘 뼈대에 썩어 가는 고깃덩어리가 붙은 몸으로 어느 순간 여기에 와 있었어. 인간의 형상으로 바뀔 때 내 안에서 뭔가가 파닥거리고 펌프질하고 으깨지는 느낌이 들었지. 입으로 공기를 내뿜고 성대를 진동시키는 경험은 처음이었어. 부모 겸 선생님에게 죽고 싶다고 말했더니, 죽음이 여기에서 탈출하는 필수 전략이라는 걸 인정해 줬어." 

 

- 그녀는 말하면서 손목의 까만 염주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고깃덩어리속에 지식이 있어. 난 배울 생각이야."

 

- "걱정하지 마. 얘들 전부 다 여행자들이래. 교환 방문 학생들의 파티 같은 건가 봐. 우리 독일 갔을 때처럼."

 

- "뭐 마시는 거야?" 한 여자애가 물었다.
"페르노. 꼭 아니시드 볼(영국에서 파는 동그란 캔디의 일종 - 역주) 같아. 술맛은 나지만."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라이브 실황 LP에서 관객 중 누군가가 페르노를 달라고 하는 걸 들은 기억이 나서 만들어 봤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 "이름이 뭐야?" 내가 물었다.
"트리올레."
"이름 예쁘다." 확신은 없었지만 그렇게 말했다. 어쨌든 얼굴은 예뻤다.

"트리올레(triolet, 중세 프랑스에서 유행한 정형시로 8음절의 8행시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 역주)는 시 형식을 말해. 나처럼."

그녀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네가 시야?”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가 옆으로 돌렸다.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옆얼굴은 거의 평평했다. 콧대가 이마에서 바로 일자로 뻗는 그리스형 코였다.

 

- 아마 5년 후였다면 라파엘 전파 화가들이 그린 제인 모리스나 리지 시달의 그림을 떠올렸으리라. 하지만 그때 난 열다섯 살이었다.

 

-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원하면 난 시이고 패턴이고 세상이 바다에 삼켜져 버린 종족이야."
"한꺼번에 세 가지나 되려면 힘들지 않아?"
"넌 이름이 뭐야?"
"엔."
"넌 엔이야. 그리고 남자. 두발 짐승. 한꺼번에 세 가지나 되려면 힘들지 않아?"
"그 세 가지는 다르지 않잖아. 그러니까, 모순되지 않는다고."

 

- 어쨌든 여자애와 대화를 계속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만 하는 데다 진짜 이름이 트리올레가 아닐 수도 있지만 상관없었다(내 세대는 히피 같은 이름이 유행한 세대가 아니었다. 레인보우니 선샤인이니 하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은 그때 아직 여섯, 일곱, 여덟 살 정도밖에 안 되었다). 여자애가 말했다.

"우린 끝이 머지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시를 만들었어. 우리가 누구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무슨 말을 했고 무엇을 했고 무슨 꿈을 꿨고 무엇을 갈망했는지 우주에 말해 주기 위해서."

 

- "우리의 꿈을 말로 감싸고 말의 패턴을 만들었어. 그 단어들이 잊히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도록. 그리고 흐름의 패턴으로 시를 내보냈어. 시가 별의 심장에서 기다리며 고동과 폭발과 정전기로 메시지를 쏘아 보내는 거야. 때가 되면, 천 개의 태양만큼 저 멀리 떨어진 세상에서 해석되고 읽혀 다시 시가 될 수 있도록."

 

- "시를 듣는 사람은 바뀔 수밖에 없어. 그들은 시를 들었고 식민지 화하고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시에 살기도 했어. 시의 운율이 사고방식의 일부가 되었지. 시상이 계속 비유를 바꿔. 시의 구절과 관점, 염원이 그들의 삶이 되는 거야. 한 세대도 안 되어 그들이 낳은 자식들은 태어날 때부터 시를 알았고, 머지않아,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았어. 이젠 아이들이 필요 없게 됐거든. 시만 있을 뿐이었어. 살이 붙은 형상으로 걸어 다니며 이미 알려진 광활한 세계에 스스로 퍼져 나가는 시." 

 

- "우리를 환영하는 곳도 있고 즉각 격리하거나 제거해야 할 독풀이나 병처럼 여기는 곳도 있어. 하지만 어디에서 전염이 끝나고 어디에서 예술이 시작되는 걸까?"
"모르겠어." 내가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말했다. 현관 앞쪽 거실에서 쿵쿵거리며 집 전체로 퍼지는 낯선 음악 소리가 들렸다. 그때 그녀가 몸을 숙이며 다가왔다. 키스할 거라고 생각했다. 분명 그럴 거야. 

 

- 그녀가 내 귀에 뭐라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시의 가장 이상한 점은 모르는 언어라도 그것이 시라는 걸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어를 하나도 몰라도 호메로스의 시를 들으면 시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나 역시 폴란드 시와 이누이트 족의 시를 들어 본 적 있는데 둘 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는 데도 시라는 걸 알았다. 그녀의 속삭임이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무슨 언어인지 모르는데도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나를 휘감았다. 머릿속에서 유리와 다이아몬드로 된 탑, 연하디 연한 초록색 눈을 가진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모든 음절 아래에서 거세게 다가오는 바다가 느껴졌다.

 

- 그때 빅이 나를 세게 흔들었다. "얼른! 서둘러! 빨리!" 녀석은 아주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이곳으로 돌아오는 내가 느껴졌다.
"멍청아. 빨리, 얼른 움직여." 빅이 욕설을 퍼부었다. 목소리에 분노가 가득했다.

 

- 30년 전의 일이다 보니 까먹은 부분도 많고 앞으로도 점점 더 까먹어 결국에는 완전히 잊어버릴지 모른다. 하지만 사후세계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성가나 찬송가에 요약되어 있는 게 아니라 그 한순간에 전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그 순간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급하게 떠나는 빅을 쳐다보던 스텔라의 표정을 관에 누워서까지도 생각날 것 같다. 

 

- 함부로 우주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된다. 우주가 화나면 분명 그런 눈으로 쳐다볼 것 같다. 
 
- "있잖아... 아무래도 이런 것 같다. 과감하게 점점 더 앞으로 가다가 어느 순간 선을 넘으면 더는 자기가 아니게 되는 거 있잖아. 선을 넘어 버렸으니까 자기가 아닌 거야. 가선 안 되는 곳으로 들어간 거지. 아무래도 오늘 밤 내가 그런 경험을 한 것 같아." 

- 가로등에 하나씩 불이 들어왔다. 빅은 앞에서 비틀거리며 걸어갔고 나는 기억할 수 없기에 암송할 수 없는 시를 밟으며 터덜터덜 뒤따랐다. 
  

- <파티에서 여자에게 말 거는 법 How to Talk to Girls at Parties>


 
- 그런데 난 큰 움직임에는 익숙하지 않아요. 아주 작은 행동에 익숙하죠. 내가 대리석 동상이라고 생각했던 꼬마에게 웃어 주었다가 꼬마를 울린 적이 있어요. 사람들이 절대로 잊지 못하는 건 아주 작은 행동이지요. 

 

- 내 마음이 어서 빨리 당신에게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영원히 함께일 거예요. 당신은 잠시 후 뒤돌아 편지를 내려놓을 테죠. 지금도 나는 당신과 함께 있어요. 벽에 이란산 카펫이 걸린 이 오래된 아파트에서요. 

 

- 난 당신 곁에 있어요. 지금 여기에. 

- 당신이 이 편지를 다 읽고 낡은 아파트 안을 두리번거릴 때 당신의 눈에는 안도감과 기쁨이 서리거나 어쩌면 두려움으로 눈이 휘둥그레지겠죠.

나는 그때 움직일 겁니다. 아주 조금. 드디어 당신이 날 보는 거예요.

 

- <여성형 어미 Feminine Endings>



- 23. 솔직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또 소리 지르며 싸우는 거고 엄마가 곧 네리스를 달래 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24. 그렇다. 멍청한 일이었다. 특별히 멍청한 일은 아니다. 네리스다운 멍청함이니까.
25. 빛이 난다고 했다.
26. 약간 고동치는 듯한 오렌지색.
27. 네리스가 자기가 태곳적에 그랬듯이 다시 여신처럼 숭배받을 거라고 말했을 때.
28. 프라이데리 말로는 네리스가 땅에서 한 3센티미터 정도 떠 있었다고 한다. 내가 직접 보진 못했다. 네리스가 최근 들어 더 이상해졌다는 걸그렇게 표현한 건 줄 알았다.
29. '네리스'라고 부르면 대답하지 않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신의 내재' 또는 '매개체'라고 불렀다. ('매개체를 먹일 시간이다.' 이런 식으로)

30. 다크 초콜릿. 원래 우리 집에서 다크 초콜릿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프라이데리가 네리스에게 끊임없이 초콜릿을 사다 주어야 했다.

 

- 32. 그날, 해가 지고 어두워졌을 때. 문 아래로 반짝이는 오렌지빛이 새어나왔다. 꼭 반딧불처럼. 조명 쇼 같기도 했다. 가장 이상했던 점은 눈을 감고도 보였다는 것이다. 

 

- 34. 어느덧 분명하게 바뀌어 있었다. 네리스는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뭐랄까, 얼룩이 번진 것처럼 보였다. 잔상같이. 그러니까... 이런 거다. 아주 밝은 파란색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으면 노란색과 오렌지색으로 빛나는 잔상이 보인다. 네리스의 모습이 그랬다.

35. 효과가 없었다.

 

- <오렌지(경찰의 서면 질문에 대한 세 번째 참고인의 답변) Orange(Third Subject's Responses to Invesrigator's Written Questionnaire)>

 

   

- "캘럼 맥킨스는 왜 찾으쇼?"
"가이드를 부탁하려고 합니다."
"가려는 곳은?"
나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서요. 미스티섬에 있는 동굴입니다."

 

- "물 위에 왕이 있다고 하죠(영국 영토를 다스리지 못하고 망명한 채 살아야 했던 스튜어트 왕가를 가리키는 말이며 자코바이트는 이들을 복권시키고자 노력했다 - 역주)."
나는 그때 그를 잘 알지 못했고 그 후로도 마찬가지였지만 그의 눈에 경계하는 빛이 서리는 건 확실했다. 그는 고개를 한쪽으로 갸우뚱하고 물었다.

"내가 당신이 하는 말을 어떻게 믿지?" 

 

- 그녀는 동전을 좀 주면 우리의 손금을 봐주겠다고 했다. 귀찮게 구는 노파에게 저지대에서 쓰는 가장자리가 깎인 은화 하나를 건네자 그녀는 내 오른손으로 손금을 봐주었다.

"자네의 과거와 미래에 죽음이 보여."

"죽음은 미래에서 모두를 기다리지요." 내가 말했다.

노파는 잠시 말이 없었다. 우리는 겨울을 머금은 여름 바람이 울부짖으며 세차게 칼날을 휘두르는 고지대의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나무에 여자가 있었고 또 나무에 남자가 있을 거야."

"그게 저랑 상관이 있나요?"

"아마도. 언젠가. 금을 조심하고 은을 가까이 하도록 해."

여기까지였다. 

 

- "자네는 손바닥이 탄 적 있구먼."

캘럼은 그렇다고 했다.

"다른 손을 줘. 왼손." 

노파는 그의 손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시작한 곳으로 돌아가는군. 다른 남자들보다 높은 곳에 있을 거야. 자넬 기다리는 무덤은 없어."

"죽지 않는다는 뜻이요?"

"왼손으로 본 거라 지금 말한 것밖엔 몰라." 노파가 말했다. 

하지만 아는 게 더 있다는 것이 얼굴에서 드러났다.

 

남자는 우리를 쳐다보았다. 고지대는 바람이 매섭다. 뜨거운 위스키가 그의 입에서 말이 술술 나오게 해 줄 것이다. 그가 입술을 오므리더니 말했다. "그렇소. 오늘 아침에 정상에서 봤지. 그 자리에 내일도 있을지는 모르지만."

 

- 그 전날 밤이라면 어디에서 자든 다 똑같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이 트기도 전에 깨어난 나는 왠지 그 집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캘럼의 입술에 손가락을 올린 채 그를 깨웠고, 우리는 인사 없이 조용히 산속의 그 집을 떠났다. 그곳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 그 집에서 1킬로미터 넘게 떨어졌을 때 내가 말했다. "섬이 그 자리에 있느냐고 물었죠. 당연히 섬은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인데."
캘럼은 할 말을 재는 듯 머뭇거렸다. "미스티섬은 다른 섬들과 달라. 그 섬을 에워싼 안개도 다른 안개와 다르고."
우리는 수백 년 동안 양과 사슴과 때로는 사람들에 의해 다져진 길을 내려갔다. 


- "미스티섬을 날개 섬이라고도 하지. 위에서 보면 나비 날개 같아서 그렇다는데 나도 진실은 몰라." 캘럼이 곧바로 덧붙였다. "진실이 무엇이냐? 빌라도가 예수를 비웃으며 말했다."
내리막길이 오르막길보다 더 힘들었다.

- 나는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진실은 장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생각에 진실은 도시 같아요. 수백 개의 도로, 수천 개의 오솔길이 결국은 같은 곳으로 데려다주죠. 어디에서 왔는지 상관없이 누구나, 어느 길로 걸어가든, 진실에 닿을 수 있는 거죠."
캘럼은 나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틀렸어. 진실은 검은 산속의 동굴이야. 거기로 가는 방법은 딱 하나뿐. 그것도 엄청나게 고되고 험난하지. 길을 잘못 들으면 산속에서 혼자 죽는거야."

 

- 지구의 뼈, 검은 산을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뼈를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져서 관심을 딴 데 돌리려고 말했다.

"저기 몇 번이나 가 봤습니까?"

캘럼이 머뭇거렸다. "딱 한 번. 전설을 듣고 열여섯 살 때 1년 내내 찾아 다녔어. 찾으려고 하면 분명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열일곱 살 때 드디어 찾았고 들고 올 수 있는 만큼 금화를 들고 나왔지."
"저주가 무섭진 않았나요?"
"어릴 땐 무서운 게 없었어."

 

- "보기보다 힘이 세네." 

나는 바보 같은 짓을 한 자신을 욕했다. 그가 내 표정을 읽었는지 강아지처럼 세차게 몸을 흔들어 물기를 털고 말했다. 

"아들 캘럼이 그러더군. 네가 이런 얘길 해 줬다고 한던데. 캠벨 족이 쳐들어왔을때 아내가 시키는 대로 아들인 척하고 밖으로 나갔다고 말이야."
"그냥 시간이나 때우자고 해 준 이야기에요."
"과연? 몇 년 전 캠벨족 공격조가 자기들 소 떼를 가져간 사람에게 복수하려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지. 복수하러 갔다가 하나도 돌아오지 못했다던데. 너처럼 작은 남자가 캠벨족 열두 명을 죽이려면... 힘이 아주 세고 아주 빨라야 할 거야."
내가 정말 멍청했다. 아이에게 그 얘길 해 준 게 후회스러웠다.

 

- 나는 캠벨족이 나를 괴롭히러 올 때마다, 돌아오지 않는 친구가 걱정되어 찾아올 때마다, 토끼 사냥하듯 그들을 하나씩 없앴다. 내가 일곱 명을 죽였을 때 아내도 처음으로 살인을 했다. 우리는 그들을 협곡에 묻고 그들의 유령이 걸어 다니지 못하도록 그 위에 작은 돌무덤을 쌓았다. 우린 슬펐다. 왜 캠벨족은 굳이 나를 죽이러 와서 나와 아내가 그들을 죽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을까. 나는 살인을 즐기지 않는다. 그 어떤 남자도, 여자도 살인을 즐겨서는 안 된다.

 

- 물론 꼭 필요할 때도 있지만 살인은 악이다. 지금 여기에 풀어놓는 사건들을 겪고 난 후에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 그는 구해 줘서 고맙다는 말도, 둘 다 무사히 폭포를 지나게 해 줘서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심지어 그는 완전히 반대의 전혀 예상지 못했던 말을 내뱉었다.

"너는 온전한 인간도 아니고 추하게 생겼어. 분명 네 아내도 난쟁이에다 추하게 생겼겠지?” 
기분 나빠지라고 작정하고서 한 말인지도 모르지만,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그냥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아내는 키가 아주 커요. 거의 당신만 할 겁니다. 젊었을 때는 저지대에서 가장 예쁘다는 말까지 들었지요. 시인들이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와 붉은빛 도는 기다란 금발을 칭송하는 시를 썼을 정도로."

 

- 그는 이 말을 듣고 움찔하는 듯했다. 내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다. 아무래도 움찔한 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런 여자를 어떻게 네 걸로 만들었지?"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내가 그녀를 원했지요. 난 갖고 싶은 건 반드시 손에 넣습니다. 끝까지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죠. 그녀는 내가 지혜롭고 친절하다면서 성실한 가장이 될 것 같다고 하더군요. 실제로 그랬고요."

 

- "하지만 그 동굴의 금은 좋은 금이 아니야. 공짜가 아니라고. 대가를 치러야 해."
"모든 것엔 대가가 따르죠."

 

- 우리는 높은 산속의 작은 호수에 이르러 물도 마시고 커다란 하얀색의 무언가도 잡았다. 그건 새우도 바닷가재도 아니고 가재도 아니었다. 너무 높은 지대라 불을 피울 만한 마른 나뭇가지를 찾을 수 없어서 소시지처럼 그냥 씹어 먹었다. 

- 얼음처럼 차가운 호숫가의 널찍한 암붕에서 잠을 잤다. 해가 뜨기 전에 눈을 떠 보니 낮게 내려앉은 구름이 우리를 감쌌고 세상이 온통 회색과 파란색이었다.

 

- "자면서 울던데." 캘럼이 말했다.
"꿈을 꿨어요."
"난 나쁜 꿈은 안 꿔."
"좋은 꿈이었어요."

정말이었다. 딸 플로라가 아직 살아 있는 꿈이었다. 플로라는 마을 남자아이들에 대해 불평하고 언덕에서 소 떼를 본 이야기도 했다.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하면서 제 엄마를 닮은 붉은빛 도는 금발을 뒤로 넘겼다. 비록 지금 아내의 머리에는 어느덧 희끗희끗 흰머리가 생겼지만. 

 

- "좋은 꿈인데 그렇게 울 리가 있나." 캘럼은 잠시 멈추고 덧붙였다. "난 꿈을 아예 안 꿔. 좋은 꿈도 나쁜 꿈도."
"전혀요?"
"어릴 때 이후로 안 꿔."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그 동굴에 다녀온 뒤로 꿈을 꾸지 않게 되었나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태양이 떠오르는 가운데 우리는 산허리를 따라 안개로 들어갔다.

 

- 안개가 점점 더 짙어지는 듯했다. 햇살이 내리찍었지만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구름 때문이었다. 사방이 온통 반짝였다. 순간 내 앞에 유령인지 천사인지 모를, 나와 똑같이 생긴 작은 남자가 보였다. 내가 움직이면 그것도 움직였다. 빛에 둘러싸여 일렁거리는 그것이 얼마나 가까이 혹은 멀리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살면서 기적도 보고 사악함도 보았지만 저런 것은 처음이었다. 

 

- "마법인가요?" 마법 같지는 않았지만 내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빛의 특징일 뿐, 그림자 혹은 굴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나도 옆에서 나랑 똑같이 움직이는 남자가 보여."

힐끗 돌아보았지만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 캘럼이 여우가 짖듯 웃음을 터뜨렸다.

"섬사람들도 동굴의 위치를 알아. 하지만 동굴에 와서 금을 가져가진 않지. 너무 똑똑해서 말이야. 그들은 동굴이 사람을 악하게 만든다고 믿어. 금을 가져갈 때마다 동굴이 영혼의 선함을 먹어 치운다고 생각해서 동굴에 들어가지 않는 거야."

"정말 동굴이 사람을 악하게 만듭니까?"
"... 아니. 동굴이 먹고사는 건 다른 거야. 악과 선 말고. 동굴의 금을 가져갈 순 있지만 그 뒤엔..." 캘럼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모든 게 재미없어져. 무지개도 그다지 아름답지 않고 설교도 와닿지 않고 입맞춤도 감흥이 없고..." 동굴 입구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공포가 서린 듯했다. "예전보다 모든 게 시시해지지."
"그래도 무지개의 아름다움보다 금의 유혹을 더 크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요."
"내가 그랬지. 젊을 때는. 지금은 또 다르지만."
"아무튼 동굴에는 날이 밝으면 들어가겠군요."
"네가 들어가는 거지. 난 밖에서 기다리고. 겁낼 것 없어. 동굴을 지키는 괴물도 없고 주문을 외우지 않으면 금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
 

- "당신은 동굴에서 금을 가져왔고 나도 내일 그럴 겁니다. 당신은 금으로 집과 신부, 명예를 샀죠."
어둠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래. 하지만 손에 넣은 후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어. 네가 동굴에서 가지고 나올 금으로 물 위의 왕이 돌아와 우리를 다스리고 기쁨과 번영, 따뜻함을 가져다준대도 너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을 거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아무 상관도 없어질 걸."

 

- "왕을 다시 모셔 오는 건 내 평생의 목표입니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왕에게 금을 갖다주면 더 원하겠지. 왕들은 계속 더 많은 걸 원하니까. 그들은 원래 그래. 네가 동굴로 돌아올 때마다 세상의 의미가 점점 없어질거야. 무지개도 의미가 없고 살인도 아무렇지 않아지고."

 

- 어둠 속에 침묵이 흘렀다.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산봉우리에서 잃어버린 아기를 찾는 엄마의 목소리 같은 바람만 휘몰아칠 뿐이었다.

"당신이나 나나 사람을 죽여 본 적 있지요. 혹시 여자도 죽여 본 적 있습니까, 캘럼 맥킨스?"
"없어. 여자든 여자애든 죽인 적 없어."
 
- 나는 어둠 속에서 양손으로 칼을 훑으며 나무와 은으로 된 칼자루와 칼날 부분을 확인했다. 칼이 내 손에 있다. 원래는 산을 벗어난 다음에 그에게 진실을 폭로하고 그 칼을 깊숙이 찔러 넣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목구멍에서 말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한 소녀가 있었다던데요. 가시덤불에."

 

- 여기에서 내가 한마디라도 더 했다가는 그가 영영 이 주제에 대해 입을 다물어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기다렸다. 
그러자 캘럼 맥킨스가 말하기 시작했다. 마치 어릴 때 들어서 지금은 거의 까먹은 이야기라도 해 주듯 단어를 신중하게 골랐다.

"그들은 저지대의 암소가 통통하고 예쁘다고 말했지. 남쪽으로 모험을 떠나 붉은 소 떼를 몰고 돌아오는 남자는 명예와 영광을 얻는다고. 그래서 남쪽으로 갔는데 눈에 차는 소가 없었어. 그러다가 저지대의 산허리에서 최고의 소를 본 거야."

 

- "난 여자는 죽이지 않아. 그건 사실이야. 가시나무에 머리카락을 묶어 놓고 여자애의 소매에 들어 있던 칼을 빼서 땅에 꽂아 놨어. 탈출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도록 말이야."

 

- "보니까 그 여자애를 찾으려고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나 보더라고."

"찾으려고 했다던데요. 약탈자한테 납치됐다는 얘기도 있고 땜장이와 도망치거나 도시로 갔다는 얘기도 있었죠. 어쨌든 찾으려고 햇어요."

"그래. 하지만 난 똑바로 봤어. 그 사람들도 내가 서 있던 자리에 있었다면 볼 수 있었겠지. 난 악한 짓을 한 거야. 아마 그렇겠지."

"아마 그럴 거라고요?"

"안개의 동굴에서 금을 가지고 나온 뒤로 난 세상에 선이나 악이 과연 존재하는지 알 수 없게 됐으니까." 

 

- 다른 면에서 아버지를 닮은 점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못생겼지만 아버지는 아름다운 외모였다. 어머니가 딱 한 번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하지만 분명 아버지가 어머니를 속인 것이리라. 만약 내 아버지가 저지대 여관 주인이었다면 나는 동굴에서 무엇을 보게 되었을까. 

 

- "그 금은 진짜입니까, 아니면 환상입니까?"
속삭이는 목소리는 흥미가 생기는 듯했다. 

[너는 필멸의 존재처럼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라고 이분적으로만 생각하는구나. 인간이 이곳에서 보고 만지는 것은 금이다. 금의 무게를 느끼며 밖으로 가지고 나가 다른 인간들과 교환하지. 진짜 금이 있는지 없는지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어차피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고 훔칠 수 있고 그 금을 위해서라면 살인까지 할 수 있는 것을. 그들이 원하니 내가 그들에게 금을 주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께선 금을 주는 대신 뭘 받으십니까?"

[별로 큰 것은 아니지. 난 필요한 게 별로 없다. 난 늙었어. 너무 늙어서 누이들을 따라 서쪽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난 인간들의 쾌락과 기쁨을 맛보지. 그들에게 필요 없고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을 조금 먹고사는 거야. 심장을 맛보고 양심도 조금 핥거나 뜯어먹고 영혼도 조금. 그렇게 내 작은 일부는 그들과 함께 이 동굴을 떠나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그들이 죽으면 내 것을 도로 가져오지.] 

 

- "모습을 드러내 주실 수 있습니까?"
동굴 안은 깜깜했지만 나는 그 어떤 인간보다 앞을 잘 볼 수 있었다. 그림자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그림자들이 엉겨 붙어서 변하더니 내 인식과 상상의 경계에서 형체 없는 무언가가 드러났다. 당황한 나는 그런 상황에 적합한 말을 했다.

"저를 해칠 일도 없고 불쾌해 보이지도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 주십시오."
[그걸 원하느냐?]
멀리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예."

- 그것은 그림자에서 나와 텅 빈 눈구멍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바람에 변색한 듯한 상앗빛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머리카락을 제외하고 온몸이 뼈였다. 머리카락은 붉은 기가 도는 금색이고 가시나무에 묶여 있었다.

"보기가 거북합니다."
[네 머릿속에서 가져왔다.]

해골을 둘러싼 속삭임이 말했다. 말하면서도 턱뼈는 움직이지 않았다.

[네가 사랑하는 것으로 골랐느니라. 이건 네 딸 플로라, 네가 마지막으로 본 그 애의 모습이지.]
눈을 감았지만 그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 "널 구하러 오겠다. 맹세한 대로 밧줄을 가지고."

 

- <진실은 검은 산의 동굴 The Truth Is a Cave in the Black Mountains>

 

 

- 확인해 볼까 생각이 들었다. 가짜 카산드라와도 친구인지. 하지만 보고 싶지 않은 인간들이 너무 많아서 관두기로 했다. 그리곤 이 모든 게 사실은 간단한 문제였다고 설명해 주는 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잠이 들었다. 

 

- 갤러리 주인인 폴과 배리 커플은 처음 같이 일하게 된 12년 전과 다름없이 아직도 나를 '아름다운 소년'이라고 부른다. 뭐, 그때는 맞는 말이었을 것이다. 위쪽 단추를 푼 꽃무늬 셔츠를 입고 금목걸이를 했던 두 사람은 중년이 된 지금 명품 양복을 입고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주식 이야기를 늘상 한다. 그래도 나는 그들이 좋다. 1년에 세 번 정도 만난다. 9월에 그들이 내 작업실로 찾아와 그동안 작업한 그림들을 확인하고 전시회에 쓸 작품을 고를 때, 10월에 전시회 첫날 갤러리에서, 그림 대금을 정산하는 2월에.

 

- 올해 전시회의 프리뷰 파티는 금요일 저녁에 열렸다. 나는 며칠 동안 갤러리에 그림을 거느라고 상당히 초조하고 불안했다. 이제 내 역할은 다 끝났고 사람들의 반응이 좋기를, 웃음거리가 되질 않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12년 동안 배리가 알려 준 대로 했다.

"샴페인 잔은 그냥 들고만 있고 물을 많이 마셔. 술 취한 작가를 보는 것보다 수집가에게 꼴사나운 일은 없거든, 평소 술주정뱅이로 유명한 작가가 아니라면 말이야. 자긴 아니잖아. 사근사근하되 신비로운 분위기를 유지할 것. 사람들이 그림에 얽힌 얘길 해달라고 하면 '비밀입니다.'라고 해. 뭔가 있긴 있다는 느낌을 풍기는 거지. 사람들은 이야기를 사는 거거든."  

 

- 이제는 프리뷰 파티에 아는 사람들을 초대하지 않는다. 사교 모임처럼 생각하는 작가들도 있지만 난 아니다. 나는 내 작품을 진지한 예술로 여기고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가장 최근에 열린 전시회의 제목은 '풍경 속의 사람들'이었는데 내 작품을 한마디로 말해 주는 표현이다) 프리뷰 파티가 최종 구매자들 또는 최종 구매자들에게 내 작품에 대해 좋게 얘기해 줄 사람들을 유혹하는 상업적인 행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아니라 배리와 폴이 손님 명단을 관리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 우리는 내가 사는 아파트 건물 아래층에 있는 와인 바에 갔다. 그냥 와인바가 아니라 식사도 파는 곳이다. 

- 나는 어린 시절부터 알아 온 사이인 것처럼 그녀에게 말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게 아니라고 계속 스스로를 일깨워야 했다. 오늘 처음 만나는 사이이지 않느냐고.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잉크가 묻어 있었다.

우리는 메뉴판을 보고 똑같은 것을 주문했다. 비건 메제(meze, 그리스나 중동요리의 에피타이저 - 역주) 음식이 나오자 둘 다 돌마(dolma, 포도잎에 고기와 쌀을 감싼 요리 - 역주)부터 먹기 시작했고 그다음으로 후무스를 먹었다. 

 

- "내가 널 만들어 냈어."
그 말을 제일 먼저 한 건 아니었다. 그전에 우리는 그녀의 지역 극단 이야기, 폴을 알게 된 계기, 오늘 파티에서 소동을 벌이는 대가로 천 파운드를 주겠다고 한 폴의 제안, 돈도 필요했지만 무엇보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허락했다는 그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녀는 특히 내 이름을 듣고는 거절할 수 없었다고 했다. 운명처럼 느껴졌다고. 바로 그때 내가 이 말을 했다. 미친 것처럼 보일까 봐 무서웠지만 그래도 말했다.

"내가 널 만들어 냈어."

 

- "아니, 꾸민 게 아니야. 당연히 아니지. 지금 내가 진짜로 여기 있잖아." 그녀는 잠시 후 또 말했다. "날 만지고 싶어?"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 자세, 눈, 그녀는 내가 꿈꿔온 이상형이었다. 다른 여자들에게서 찾지 못했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응.무척."

 

- 그렇게 끝이었다. 얼마간은 그 사실을 떠올리기가 창피하기도 했다. 내가 그런 것에 빠졌었다니.

 

- 이 방은 너무 이상하다. 나는 왜 열다섯 살 때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던 사람이 지금도 나를 행복하게 해 주리라고 생각한 걸까. 

 

- <카산드라에 대하여 The Thing About Cassandra>

 

 

- 커다란 숄더백을 멘 늙고 하얀 유령 같은 이방인에게 일어났던 그 일은 오래전부터 이 지역의 미스터리였다. 어떤 이들은 그가 살해당했다고 생각했고 나중에는 보물을 찾아 가오 노인의 산속 판잣집 바닥을 파헤치기도 했다. 하지만 재와 불에 그을린 양철 쟁반밖에 발견하지 못했다. 

이것은 가오 노인이 사라진 후, 그리고 그의 아들이 리장에서 벌통을 물려받기 전의 일이다.

 

- 홈즈는 1899년에 이렇게 적었다. 문제는 따분함 그리고 흥미의 부재라고. 한마디로 사건들이 너무 쉽다. 범죄를 해결하는 즐거움은 도전에 있는 법이며, 해결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는 범죄가 관심을 끈다. 그런데 모든 범죄가 해결하기 쉽고 그것도 너무 쉽다면 애초에 해결할 이유가 없다.

- 보라. 이 남자는 살해당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이 남자를 죽인 것이다. 그는 한두 가지 사소한 이유로 살해당했다. 누군가를 불편하게 했거나 누군가 탐낼 만한 것을 가지고 있었거나 누군가를 화나게 했거나. 도대체 여기에 도전이 어디 있단 말인가?

 

- 굳이 경찰에 연락해서 답을 알려 줄 필요가 있을까? 나에게는 도전이 아니니 그들에게나마 도전이 되라고 그냥 넘어간 게 몇 번인지 모른다.

나는 도전과 난제가 있어야만 살아 있는 기분이 든다.

 

- 너무 높아서 산이라고도 불리는 안개 낀 언덕의 벌들이 흐릿한 여름 햇살이 내리쬐는 가운데 비탈길의 봄꽃 사이를 오가며 윙윙거렸다. 그 소리를 듣는 가오 노인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계곡 너머 마을에 사는 사촌은 벌통이 수십 개나 되고, 아직 이른 시기인데도 벌통이 이미 꿀로 채워지고 있었다. 꿀은 설옥처럼 하얗기까지 했다. 가오 노인은 그 하얀 꿀이 자기의 벌들이 만드는 비록 얼마 되지 않는 노란색이나 밝은 갈색의 꿀보다 맛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촌은 하얀 꿀을 가오 노인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가격의 두 배나 되는 가격으로 팔았다.

 

- 사촌이 사는 언덕의 벌들은 노란 갈색의 일꾼이었다.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엄청나게 많은 꽃가루와 꿀을 벌집으로 옮겼다. 반면에 가오 노인의 벌들은 총알처럼 반짝이는 검은색에 성질이 나빴고 고작 겨우내 버틸 정도의 꿀만 모을 뿐이었다. 

 

- 아내는 죽은 지 오래였다. 그는 아내를 아는 사람이 아직 살아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과부 장 씨가 가오에게 차를 가져다주면서 나이 든 이방인을 소개해 주었고, 이방인은 가방을 작은 테이블 옆에 놓아 두었다.  

그들은 차를 마셨다. 이방인이 말했다. "당신의 벌을 보고 싶습니다."

- 마이크로프트의 죽음은 제국의 종말을 의미했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우리 둘뿐이었다. 그 하얀 방에서 얇은 하얀 시트만 덮고 누운 형의 모습은 시트에 눈구멍 2개만 뚫으면 영락없이 대중적으로 흔히 묘사되는 유령의 모습 그 자체였다. 물론 병으로 쇠약해진 탓도 있겠지만 최근에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몸집이 불어난 상태였다. 손가락이 꼭 소기름을 넣은 하얀 소시지 같았다. 나는 형을 만난 저녁에 이렇게 말했었다. "형, 닥터 홉킨스가 형이 2주밖에 살지 못할 것 같다고 꼭 좀 전해 달래."

"그 인간은 멍청이야." 마이크로프트가 중간에 숨을 훅훅 내쉬면서 말했다. "난 금요일까지도 버티지 못할 거야."
"적어도 토요일까지는 살겠지." 내가 말했다.

 

- "넌 예전부터 항상 낙관적이었지. 아니, 난 목요일 저녁까지밖에 버티지 못할 거야. 그 이후 홉킨스와 스니그스바이와 멀터슨의 장의사들에게 난 실용 기하학 문제에 불과해지겠지. 이 방과 이 건물의 좁은 문과 복도로 내 시체를 과연 어떻게 옮겨야 할지 난제에 부딪힐 테니까."
"나도 그 문제를 고민한 적은 있어. 특히 계단 때문에. 그랜드 피아노처럼 창틀을 떼어 내고 아래층으로 내려야 할 것 같아."
마이크로프트가 콧방귀를 꼈다.

"내 나이 쉰넷이다. 셜록. 내 머릿속에 영국 정부가 들어 있어. 투표나 선거운동 같은 무의미한 것들이 아니라 진짜 중요한 것들 말이야. 아프가니스탄 언덕에 있는 군대의 움직임이 웨일스 북부의 황량한 해안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나 말고 아무도 몰라. 아무도 전체적인 그림을 보지 못해. 지금 세대와 미래 세대가 인도 독립을 얼마나 제멋대로 해석할지 상상이나 되냐?" 

 

-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인도가 독립하게 돼?"
"불가피한 일이지. 30년 후쯤 표면적으로는 그래. 최근에 그 주제로 제안서를 몇 편 썼거든. 그밖에 다른 주제들도 많이 다뤘지. 러시아 혁명이라든지, 장담하건대 10년 안에 일어날 거다, 독일 문제라든지. 물론 사람들이 읽어 주거나 이해해 주길 바라고 쓴 건 아니지만."

마이크로프트가 또 숨을 훅훅 내쉬었다. 그의 폐에서 빈집의 창문이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내가 죽지 않는다면 대영 제국은 앞으로 또 천 년 동안 이어져서 세상에 평화와 진보를 가져다줄 텐데."

- 어렸을 때만 해도 나는 형이 저렇게 엄청난 선언을 할 때마다 일부러 형의 화를 돋우려고 했다. 하지만 형이 죽음을 앞둔 지금은 그럴 수 없다. 게다가 지금 그가 말하는 건 결함 많은 실수투성이 인간들로 이루어진 집단, 즉 있는 그대로의 대영 제국이 아니라, 문명과 우주의 번영에 영향을 주는 그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찬란한 힘으로서의 대영 제국을 뜻하는 게 분명했다.

- 나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제국을 믿지 않지만 마이크로프트 홈즈는 믿는다. 54세의 마이크로프트. 그는 새로운 세기에 태어났으나 여왕이 그보다 몇 달은 더 살 것이다. 여왕은 그보다 서른 살 이상 많지만 여러 모로 강인한 노인이다. 나는 이 불운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이크로프트가 말했다. "당연히 네 말이 맞아, 셜록. 내가 억지로라도 운동을 했다면, 새 모이만큼 조금만 먹었다면, 커다란 고급 스테이크가 아니라 양배추를 먹었다면, 아내와 애완견과 함께 컨트리 댄스를 배웠더라면, 모든 걸 정반대로 했더라면 10년 이상의 시간을 더 벌었을지 몰라. 하지만 결국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별로 없어. 어차피 머지않아 노망이 났을 테니까. 첩보 기관이 아니라 제대로 돌아가는 일반 공무 조직을 교육하는 것만 해도 2백 년은 걸릴 거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하얀 방은 벽에 아무런 장식이 없었다. 마이크로프트가 받은 표창장, 그림이나 사진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꾸밈없는 그의 셋방과 베이커 가의 잡동사니 가득한 내 방이 너무도 비교되어 그의 두뇌에 감탄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는 본 것, 경험한 것, 읽은 것, 그 모든 것이 머릿속에 다 들어가 있어서 밖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으면 국립 미술관과 영국 박물관의 열람실이 머릿속에 쫙 펼쳐지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런 것을 생각하기보다는, 벼랑에 놓인 대영 제국의 기밀 보고서와 위건 지방의 양모 가격, 호브의 실업률을 비교하고 이런저런 정보에서 끌어낸 결론으로 누군가의 승진이나 조용한 죽음을 지시할 터였다. 

 

- 친애하는 왓슨, 
오늘 오후에 자네와 나눈 이야기를 신중하게 가슴에 새겨 보았다네. 예전의 내 생각을 바꿀 준비가 되었어.
1903년의 사건 기록을 출판하는 것을 허락하겠네. 특히 내가 은퇴하기 전에 맡은 마지막 사건을. 단, 조건이 있다네.

평소처럼 사람들의 이름과 장소를 바꾸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가 외국의 미스터리한 남자가 보낸 원숭이 혹은 유인원 혹은 여우원숭이의 고환 추출물을 접하게 된 시나리오를 아예 바꿀 것을 제안하네(프레스버리 교수의 정원을 말하는 거야. 더는 자세히 쓰지 않겠네). 원숭이 고환 추출물이 프레스버리 교수를 유인원처럼 움직이게 했다거나 아니면 '파충류 인간' 같은 걸로 만들었다거나 아니면 건물과 나무를 타고 오르게 되었다고 해도 되겠지. 꼬리가 생길 수도 있을 거고. 아마도 왓슨 자네에게는 너무 비현실적일지도 모르겠군. 물론 자네가 수사 일지에서 단조롭기 그지없는 내 삶과 일에 더해 준 화려한 미사여구들보단 덜 비현실적이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자네 글의 마지막 부분에 넣을 내 대사를 내가 직접 썼어. 내가 바보같은 인생을 연장하려고 바보 같은 짓을 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의 욕망을 통렬하게 비난하는 장면을 꼭 넣어 주기를 바라네.


'인간성에 심각한 위험을 가하는 게 있다네. 만약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젊음을 누구나 취할 수 있다면, 물질적이고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인간들은 전부 그들의 무가치한 삶을 연장하려고 할 거야. 영적인 사람들도 고귀한 무언가의 부름을 피하려고 하겠지. 결국 적합하지 않은 자들이 생존하게 되는거야. 그러면 이 가엾은 세상이 얼마나 타락하겠는가?' 

이런 비슷한 대사를 넣어 준다면 안심이 될 것 같아. 출판하기 전에 완성된 원고를 꼭 좀 보여 주게.

 

변함없는 자네의 오랜 친구, 충실한 종 셜록 홈즈

 

- 그들은 오후 늦게 늙은 가오의 벌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판잣집 뒤쪽으로 쌓아 놓은 잿빛 나무 상자가 벌집이었다. 사실 판잣집이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할 정도로 단순한 구조물이었다. 4개의 말뚝, 지붕 하나. 봄과 여름에 비와 폭풍우를 막으려고 걸어 둔 기름 먹인 천 위쪽에는 담요를 덮어서 온기를 내고 요리도 할 수 있는 작은 숯 화로가 있고, 가운데에는 오래된 도자기 베개와 함께 나무 깔판이 있었다. 이 깔판은 가오가 주로 꿀을 수확하는 늦가을에 벌들과 함께 산에서 잘 때면 침대로 쓰는 것이었다. 비록 사촌의 벌집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양이지만, 그래도 마을에서 가져온 들통과 냄비에 천을 깔아 놓고 그 위에 벌집째 으깬 것을 올려 두어 꿀을 내려받으려면 이틀이나 사흘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었다. 끈적한 밀랍과 꽃가루, 먼지, 곤죽이 된 벌 사체는 냄비에 녹여서 밀랍을 뽑아냈다. 그런 다음에 꿀과 밀랍덩어리를 마을로 가져가서 팔았다.

 

- 그는 야만인 이방인에게 11개의 벌집을 보여 주었고, 이방인이 얼굴 가리개를 쓴 채 벌집을 열어 관찰하는 모습을 시큰둥하게 지켜보았다. 이방인은 제일 먼저 벌들을, 그다음에는 육아방 벌집의 내용물을, 마지막으로 여왕벌을 돋보기로 관찰했다.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나 불편함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의 모든 동작은 여유 있고 온화했다. 그는 벌에게 한 방도 물리지 않았고 단 한 마리의 벌도 으스러뜨려 죽이거나 다치게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은 가오 노인을 놀라게 했다. 그는 이방인들이 심중을 알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이 남자는 그의 벌들을 보는 것을 너무도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 가오 노인은 물을 끓이려고 화로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숯이 뜨거워지기도 전에 이방인은 가방에서 유리와 금속으로 된 기계를 꺼냈다. 윗부분에 개울에서 떠온 물을 채운 뒤 불을 붙이자 이내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이방인은 가방에서 주석 컵 2개와 종이로 감싼 녹차를 꺼내 컵에 찻잎을 넣고 물을 부었다. 가오 노인은 그렇게 맛있는 녹차를 마셔 본 적이 없었다. 사촌의 집에서 마신 것보다도 훌륭했다. 그들은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차를 마셨다.

 

- "여름 동안 이 집에서 머물고 싶습니다." 이방인이 말했다.
"여기에서요? 이건 집이라고 할 수도 없는데. 마을에서 머무르시지요. 과부 장 씨 집에 방이 있소."
"여기 묵겠습니다. 그리고 벌통도 하나 빌리고 싶은데요."
수년 동안 한 번도 웃어 본 적 없는 가오였다. 마을에서는 가오가 웃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가오가 지금은 너무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속에서 웃음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 "농담이 아닙니다." 

이방인은 은화 4개를 두 사람 사이에 내려놓았다. 가오 노인은 그가 그걸 어디에서 났을지 의아했다. 오래전부터 중국에서 널리 쓰이게 된 멕시코 페소 은화 셋, 커다란 위안 은화 하나. 가오가 1년 동안 꿀을 팔아야 볼 수 있는 금액과 맞먹었다.

"이 돈을 드릴 테니 누군가를 시켜 음식을 가져다주십시오. 사흘에 한 번이면 됩니다."

 

- 그것들은 식물 추출물이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지속 시간이 제한적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효과는 있었는데 독성이 엄청나게 강했다. 하지만 가엾은 프레스버리 교수의 말년을 지켜보면서 -피부와 눈, 걸음걸이- 든 확신은 그가 전적으로 틀린 길로 들어선 건 아니라는 것이었다.

 

- 이것은 지적인 문제였다. 지성으로 풀 수 있는 문제. 어렸을 적 수학 가정교사가 항상 푸는 과정을 보여 주었던 것처럼.

 

- 그것들은 식물 추출물이고 치명적이었다.

치명적이지 않은 쪽으로 만드는 나의 방식은 효과가 상당히 떨어졌다. 그냥 복잡하거나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백 배는 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다가 그 식물을 인간이 소화할 수 있도록 처리하는 방법이 떠올랐다.

 

- 왓슨이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인지 가끔 궁금하다. 하긴, 그 친구의 훌륭한 둔감함은 언제나 나에게 놀라움을 선사했고 가끔은 오히려 거기에 기댈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관심을 쏟을 대상이나 조사할 사건이 없을 때 어떤 상태가 되는지 잘 알았다. 사건에 정신 팔려 있지 않으면 대단히 무력하고 화도 잔뜩 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정말로 은퇴했다는 말을 과연 믿었을까 싶다. 내 스타일을 너무 잘 아는 친구니까 말이다. 

 

-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우리는 제국이 부서지는 모습, 제대로 통치하지못하는 정부, 가엾은 영웅들이 플랑드르의 도랑으로 보내져 죽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모든 걸 보면서 내 생각에 확신이 들었다. 내가 올바른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유일한 일을 하고 있다는 걸. 
 

- 나도 당연히 초보 양봉가가 저지를 만한 실수를 전부 다 저질렀다. 수사 목적이 더해졌으니 보통 양봉가들은 저지른 적 없는 실수들도 있었다. 아마 앞으로도 실수는 계속될 것이다.

 

- 20년 가까이 연구한 끝에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내가 찾는 벌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영국에서 찾을 수 없으며 국제 소포로 받는다고 해도 그 먼 거리를 지나오는 동안 벌들이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라고. 인도의 벌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더 먼 곳까지 여행해야 할 수도.
나는 그쪽 언어를 조금 할 줄 알았다. 

 

-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도 말해 두었다.
나도 늙었으니 어쩌면 사람들은 내가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엄밀하게 말해서, 그들의 생각이 맞았다.

 

- 가오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감명을 받았다. 평생을 벌에 둘러싸여 살아온 그였지만 이방인이 손목을 아주 말끔하고 날카롭게 튕겨서 벌통의 벌을 흔드는 모습은 매우 놀라웠다. 벌들은 화가 난 것보다는 놀란 듯 그저 날거나 기어서 벌집으로 돌아갔다. 그다음에 이방인은 안에 벌집이 가득한 벌통을 벌집이 별로 없는 벌통 위에 쌓았다. 그러면 가오는 이방인이 빌려 간 벌집의 꿀을 얻게 되는 것이었다. 

- 어느 날 저녁 이방인은 가오 노인에게 그들이 만드는 벌통의 틀이 불과 70년 전에 미국인이 발명한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가오 노인에게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는 평생 아버지가 만들어 온대로 틀을 만들었고 계곡 너머 사람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었으며 분명 그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그랬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그는 이방인과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았다. 그들은 함께 벌통을 만들었고 가오 노인은 이방인이 좀 더 젊었기를 바랐다. 그랬다면 좀 더 오랫동안 이곳에 머무를 수 있고 자신이 죽으면 벌통을 맡길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두사람은 모두 머리에 얇은 서릿발이 내리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었다. 앞으로 열두 번의 겨울을 또 맞이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 이방인은 가오 노인의 벌을 스케치했다. 그는 가오 노인에게 그림을 보여주며 가오 노인의 벌들이 다른 꿀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수백만 년 동안 돌 속에 보존된 고대 꿀벌들에 관해 이야기하려 했지만 아무래도 중국어 실력이 부족했다. 사실, 늙은 가오는 관심도 없었다. 지금은 그의 벌이지만 그가 죽은 후에는 산비탈의 벌이었다. 그가 다른 벌들을 데려온 적도 있었지만, 그것들은 병에 걸려 죽거나 검은 벌들이 꿀을 약탈하는 바람에 굶어 죽었다.

 

- 됐다.
성공이다. 마치 실패한 것 같은 실망감과 승리감이 뒤섞인 이상한 기분이 든다. 저 멀리 먹구름이 내 감각을 간질이는 것 같다.
내 손을 보고 있자니 낯설었다. 내가 아는 그 손이 아니라 기억 속 젊은 시절의 손이다. 붓지 않은 관절과 하얀 게 아니라 까만 손등의 털.

 

- 너무도 많은 사람이 이 문제를 푸는 데 실패했다. 명백한 해결책이 없는 문제였다. 중국의 첫 번째 황제는 3천 년 전 그 답을 찾다가 죽었고 제국 전체가 망가졌다. 나는 얼마 만에 답을 찾았지? 20년? 

 

- 내가 한 일이 옳은 건지는 모르겠다(하지만 '은퇴' 후 몰두해 온 이 일이 없었다면 나는 미쳐 버렸을 것이다). 이 사건을 의뢰한 건 나의 형 마이크로프트였다. 나는 문제를 조사했고 예상한 대로 답을 찾았다.
세상에 밝힐 것이냐고? 아니.

- 한 가지 할 일이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목표이고 게다가 원대하지도 않다. 상하이로 가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우샘프턴으로 가는 배를 탈 것이다. 거기 도착하면 왓슨을 찾아볼 것이다. 아직 그 친구가 살아 있다면. 살아있었으면 좋겠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만약 왓슨이 세상을 떠났다면 어떻게든 내가 알았을 것이다. 그가 놀라지 않도록 연극용 화장품을 사서 노인으로 변장할 필요가 있겠지. 오랜 친구에게 차를 마시러 오라고 초대할 것이다. 
그날 오후에는 차와 함께 버터를 발라 구워 꿀을 올린 토스트를 대접해야겠다.

 

- 이방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의 가방도.
이방인은 아주 많은 것을 태운 듯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 이방인은 시럽에 색깔을 넣는 이유에 대해 서로 구분하기 위해서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구분하기 위해서인지 가오 노인은 물어보지 않았다.

 

- 가오 노인은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벌집 건더기를 모아 대충 천으로 싸서 냄비에 넣고 물을 채웠다. 화로에 올리고 물을 데웠다. 끓이지는 않았다. 이내 왁스가 위에 둥둥 뜨고 천 속에는 꿀벌 사체와 먼지, 꽃가루, 프로폴리스만 남았다.

 

- 그는 물을 식혔다.
그다음에 밖으로 나가서 달을 올려다보았다. 거의 만월이었다.

 

- 그는 자기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죽었다는 걸 마을 사람 몇 명이나 알고 있을지 의아했다. 아내가 생각났지만 얼굴은 흐릿했다. 아내의 사진도 그림도 없었다. 이 높은 산비탈에서 총알 같은 검은 벌을 지키는 것만큼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잘 맞는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은 벌의 성질을 그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 물이 다 식었다. 그는 단단한 고체가 된 밀랍을 물에서 꺼내 침대로 쓰는 나무판에 올려놓고 마저 식혔다. 먼지와 불순물이 가득한 천을 냄비에서 꺼냈다. 그러고 나서 가오 노인은 냄비에 남은 달콤한 물을 마셨다. 그도 그 나름대로는 탐정이었고 불가능한 것을 모조리 제거하고 남는 것은 아무리 믿을 수 없어도 진실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이미 꿀을 내리고 남은 건더기였지만 그래도 꿀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물은 꿀맛이 났지만 가오가 그동안 맛본 꿀과는 달랐다. 그 꿀은 연기, 금속, 이상한 꽃, 이상한 향수 맛이났다. 가오는 그것이 섹스의 맛이라고 생각했다. 

- 그의 아들 이야기를 기억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상관없었다.
그는 도시로 나갔다가 돌아오기로 했다. 돌아와서 시간과 상황이 허락하는 한 오랫동안 산속의 검은 벌을 지킬 것이다.

 

- <죽음과 꿀 사건 The Case of Death and Honey>

 

 

- 건망증이 무서울 지경으로 심해졌다.
아직까지 개념을 까먹진 않았지만, 단어를 잊어버리고 있다. 그저 개념만큼은 잃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사실 개념을 까먹는다고 해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개념을 잊어버렸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 예전부터 기억력이 무척 좋았던 내가 이런다니 웃긴 일이다. 난 모든 걸 기억했다. 가끔씩은 기억력이 너무 좋아서 아직 모르는 것까지 기억할 정도였다. 한마디로 미리 기억하는 거지. 그런 걸 가리키는 말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기억하는 거 말이다. 어떤 단어를 기억하려고 하면 밤새 누가 내 머릿속으로 들어와 가져가 버리기라도 한 것 같은 요즘과는 천지 차이다. 
 

- 모르겠다. 어느 쪽을 봐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사전을 잃어버린 것처럼 작가를 잃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그보다 더 끔찍하게도, 신이 맡긴 고작 작은 임무조차 실패한 걸지도. 내가 신을 잊어버려서 그가 책꽂이에서, 사전에서 사라지고 지금은 오직 꿈속에서만 존재하는지도.

 

- 내 꿈들. 난 당신의 꿈은 모른다. 아마 당신은 두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초원지대의 꿈은 꾸지 않을 것이다. 아마 당신은 화성이 천국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으면 거기에서 우리를 기다리다가 한밤중이 되면 우리를 찾아온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다. 길을 걸었다는 이유로 범죄자라며 체포되는 남자의 꿈을 꾸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런 꿈들을 꾼다.

 

- <레이 브래드버리를 잊어버린 남자 The Man Who Forgot Ray Bradbury>



- "소에서 짜는 진짜 우유 말이야?"

바보 같은 말이었지만 여자애는 확인시켜 주듯 고개를 끄덕였다.

답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병에 들어 있지 않은 우유를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좋을 것 같아."

 

- 할머니가 베시에게서 짠 크림 같은 우유를 한 컵 주었다. 냉각기로 들어가기 전의 그야말로 갓 짠 우유였다. 그런 맛의 우유는 생전 처음이었다. 고소하고 따뜻하고 입 안이 너무 행복했다. 다른 것들을 다 잊어버렸을 때도 그 우유 맛은 기억이 났다.

 

- 나는 이 집 여자들이 왜 전부 헴스톡인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그들이 어떻게 오팔 광부의 유서 내용을, 그가 죽기 전에 한 생각을 아는 건지 물어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들은 당연한 사실인 것처럼 너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 "가슴 주머니를 보라고 쿡 찔렀어요. 자기가 스스로 생각해 낸 건 줄 알겠지만."

"잘했네." 헴스톡 부인이 말했다. 

  

- <오솔길 끝 바다 발췌 Except from The Ocean at the End of the Lane>



- 눈이 조금씩 어둠에 익숙해졌다. 달이 거의 만월이라 계단의 높은 창문에서부터 복도로 푸르스름한 달빛이 내려왔다.

"괜찮을 거야." 내가 말했다.

"네. 아저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아이의 목소리는 굉장히 침착했다.

 

- 애어른 같은 느낌이 아까보다 덜했다. 아이가 더듬더듬 내 손을 잡았다. 마치 평생 알아 온 것 같은 편안함과 믿음으로 내 손을 꽉 잡은 아이의 손길에서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이 느껴졌다. 이 아이의 누나인 여자친구에 대한 감정이 사랑인지는 아직 확신이 없었지만 아이가 나를 벌써 가족처럼 대해 준다는 것이 좋았다. 아이의 형이 된 기분이 들어서 좀 더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썰렁한 이 큰 집이 뭔가 불길한 느낌을 주지만 겉으로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 

 

- 올이 드러난 카펫이 깔린 계단이 삐걱거렸다. 

"딸깍딸깍은 최고의 괴물이에요." 아이가 말했다.
"TV에 나오는 거야?"
"아닐걸요. 딸깍딸깍이 어디에서 오는지 아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보통은 어둠 속에서 나와요."
"괴물이 나오기 딱 좋은 곳이지."
"맞아요."

- 우리는 어둠 속에서 2층 복도를 따라 걸었다. 달빛이 비치는 곳으로만 옮겨 갔다. 집이 얼마나 큰지 실감났다. 손전등이 있었으면 했다.
"딸깍딸깍은 어둠에서 나와요." 아이가 내 손을 잡은 채 말했다. "아마 어둠으로 만들어질 거예요.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을 때 나타나서 사람을 잡아가요. 어디로 데려가느냐면... 둥지 말고 비슷한 단어가 또 있는데 뭐였더라?"

"집?"

"아뇨. 집은 아니에요."

"은신처?"

아이는 잠시 조용해졌다가 말했다. "맞는 것 같아요. 은신처. 맞아요."

 

- "징그럽다. 네가 만들어 낸 거야?"
우리는 마지막 층계에 이르렀다. 커다란 집의 안쪽 깊숙이 들어온 것이다. "아뇨."
"애들이 그런 얘길 만들어 냈다니 믿을 수가 없네."

- "덜거덕 자루 얘긴 안 물어보셨잖아요." 아이가 말했다.

"그렇지. 덜거덕자루는 뭐야?"
"그건..." 아이가 어둠 속에서 작지만 현명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딸깍딸깍이 사람을 다 마시고 나서 뼈하고 피부만 남으면 갈고리에 걸어 놓거든요. 그럼 바람에 덜거덕거려요." 

 

- "그런데 딸깍딸깍은 어떻게 생겼어?" 

나는 이렇게 질문하면서도 도로 무르고 싶었다. 물어보지 않는 게 좋았겠다 싶었다. 꼭 이런 답이 나올 것만 같아서. 커다란 거미처럼 생겼어요. 오늘 아침에 샤워할 때 본 것처럼.
나는 거미를 무서워한다.
"딸깍딸깍은 사람들이 절대로 딸깍딸깍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모습을 하고 있어요. 절대로 관심 가지지 않을 모습이요."

 

- "봐요. 이야기 맞잖아요."

다시 애어른으로 돌아와 재미있어하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이가 어른이 모르는 뭔가를 아는 척하면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나기도 한다. 뭐, 아이들에겐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냥 안 거잖아. 생각해서 알아낸 게 아니라. 그냥 머릿속으로 떠오른 거지."
 

- <딸깍딸깍 덜거덕 자루 Click-Clack the Rattlebag>

 

 

- 그곳은 여왕의 왕국에서 가장 가까운 왕국이었다. 까마귀가 날아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지만 그곳을 나는 까마귀는 없었다. 두 왕국의 국경선 역할을 하는 험난한 산맥 때문에 까마귀는 물론 사람도 그곳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건널 수 없는 곳이라고 여겼다. 

 

- 살과 피 그리고 마법으로 이루어진 강인하고 튼튼한 난쟁이들마저도 산맥을 넘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난쟁이들에게는 그것이 문제되지 않았다. 그들은 산을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산 아래로 갔기 때문이다. 

 

- 가운데 난쟁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신경은 온통 손에 꽉 쥔 돌에 가 있었다. 떨어뜨리거나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것은 돌에서 대충 잘라 낸 달걀만 한 루비였다. 세공하면 왕국 하나를 살 수 있을 정도의 값어치가 있을 테니 도리마 왕국의 최고급 비단과 맞바꾸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 난쟁이들은 젊은 여왕에게 땅에서 캐낸 원석을 직접 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면 너무 쉽고 전혀 특별하지 않으니까. 난쟁이들은 선물에 한층 더 노력을 쏟아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 여왕은 그날 아침 일찍 잠에서 깼다. "이제 일주일 남았구나. 결혼식이 일주일 후야." 믿어지지 않는 동시에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결혼하고 나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해 보았다. 만약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한다면 그녀의 삶은 이제 끝난 것이다. 일주일 뒤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질 테니까 말이다. 그녀는 백성을 다스리고 아이를 낳을 것이다. 아이를 낳다가 죽을 수도 있고 늙어서 죽거나 전장에서 죽을 수도 있다. 어쨌든 매 순간 죽음에 더 가까워지고 있음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 난쟁이들은 잠을 거의 자지 않았다. 1년에 두 번씩, 한 번에 몇 주일 정도 잤다. 오래 살아오는 동안 잠을 충분히 잤기 때문에 그에겐 잠이 전혀 특별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뭔가를 하는 도중에 갑자기 잠들어서 깨어나지 않아." 주정뱅이가 말했다. "우린 이 마을 저 마을로 피해 다니다가 여기로 온 거야."

 

- "자는 게 왜 두려운가요?" 가장 작은 난쟁이가 물었다. "그냥 잠일 뿐이잖아요. 누구나 다 자는 잠."
"가서 한번 봐 봐." 주정쟁이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술병에 든 술을 마실 수 있는 만큼 잔뜩 마셨다. 눈이 풀린 채로 고개를 내린 그는 난쟁이들이 아직 그 자리에 있어서 놀란 듯했다. "어서 가서 직접 보라니까." 그는 남은 술을 마저 마셔 버리고 테이블에 얼굴을 갖다 댔다.
난쟁이들은 밖으로 나가 살펴보았다.

 

- 난쟁이가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엉덩이를 긁었다.

"여왕님은 1년 동안 잠들어 있다가 깨어났는데 멀쩡하셨잖아요. 옆 나라에서 잠에 빠지지 않을 사람이 있다면 바로 여왕님입니다." 

 

- 그녀는 왕국 지도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산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을 찾은 뒤 전령을 보냈다. 마을 사람들이 당장 바닷가로 대피하지 않으면 여왕이 노할 것이라고. 
그녀는 총리대신을 불러 자신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 왕국을 책임질 것을 명령했다. 절대로 왕국을 빼앗기거나 파괴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했다.
그녀는 약혼자도 불렀다. 자신은 여왕이고 그는 일개 왕자일 뿐이지만 두 사람이 결혼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 서운해하지 말라고 했다. 그녀가 아름다운 왕자의 턱을 가볍게 쥐고 키스하자 왕자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 여왕은 작은 쇠사슬을 엮어 만든 갑옷을 대령시켰다.
검도 대령시켰다. 
식량과 말도 준비시킨 뒤 말을 타고 동쪽으로 향했다.
하루를 꼬박 달린 뒤에야 저 멀리 왕국의 맨 끄트머리에 서 있는 산맥이 보였다.

 

- 아니, 그건 아니었다. 깨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느리게 일어서더니 졸린 듯 머뭇거리며 어색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뒤에 붙은 거미줄을 질질 끌면서 잠든 채 걷고 있었다.

 

- 잠든 사람들은 여왕과 난쟁이들을 향해 다가왔다. 난쟁이들은 달려서, 여왕은 걸어서, 그들을 쉽게 제칠 수 있었지만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어느 길로 가든 거미줄을 뒤집어 쓴 채 눈을 감거나 뜨거나 뒤집혀서 흰자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잠든 채로 느릿느릿 걸어왔다.

 

- "우리를 의식하지도 못하는 적이랑 싸우는 건 명예로운 일이 아니야." 여왕이 숨을 헉헉거리며 말했다. "물고기나 정원, 오래전에 죽은 연인에 대한 꿈을 꾸면서 자는 사람하고 싸우는 건 명예롭지 못하다고." 

"저들이 우릴 잡으면 어떻게 할까요?" 옆의 난쟁이가 물었다.

"그게 그렇게 궁금해?"

"아뇨."
그들은 달리고 또 달렸다. 절대로 멈추지 않고 달려서 도시를 뒤로 하고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넜다.

 

- 그들은 보기도 전에 성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을 밀어 내는 거대한 잠의 파도가 느껴졌다. 굳이 헤치고 나아간다면 머릿속에 안개와 먹구름이 끼고 마음이 닳고 영혼이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는 순간 머릿속이 맑아지고 정상으로 돌아왔다.
여왕과 난쟁이들은 마음의 안개를 뚫고 더 멀리까지 나아갔다.

 

- 여왕은 줄곧 정신이 깨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숲에는 그녀가 아는 사람들, 절대로 이곳에 있을 수가 없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들이 그녀의 옆에서 걸었고 가끔 말도 시켰다. 

 

- "자연 철학이 외교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토론해 보자꾸나." 그녀의 아버지가 말했다.
"내 자매들은 세상을 다스렸지." 그녀의 계모가 철로 만든 구두를 신고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계모의 구두는 뭉근한 오렌지색으로 빛났는데 닿는 곳에 불이 붙지는 않았다. "인간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우린 쫓겨날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그들이 보지 못하는 구석에서 조용히 기다렸지. 지금은 다들 날 사랑해. 너도. 나의 의붓딸아, 너조차도 나를 사랑하는구나."
"우리 딸, 정말 예쁘구나. 눈에 떨어진 붉은 장미처럼." 이번에는 오래전에 죽은 여왕의 생모가 말했다.

 

- 때로는 옆에서 늑대들이 달려가기도 했다. 늑대들은 땅바닥의 흙과 낙엽을 흩날리며 달렸지만 늑대들이 나아가는 길은 저 앞에 장막처럼 드리워진 거대한 거미줄을 건드리지 않았다. 늑대는 나무를 통과해 어둠 속을 내지르기도 했다. 

- 여왕은 늑대가 좋았다. 하지만 난쟁이 하나가 거미가 돼지보다 크다고 소리치는 바람에 그녀의 머릿속에서 늑대가 사라져서 슬펐다. (거미가 돼지보다 큰 것도 아니었다. 그냥 시간과 여행자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끝없이 실을 잣는 평범한 크기의 거미였을 뿐.)

 

- 여왕은 가시에 찔려 죽은 이들의 유해를 보았다. 갑옷을 입은 해골, 갑옷을 입지 않은 해골. 성의 측면 높은 곳에도 해골이 보였는데, 여왕은 그들이 출구를 찾으러 올라갔다가 죽었는지, 아니면 장미가 자라면서 저 높이 올려진 것인지 생각했다.

굳이 답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둘 다 가능한 얘기였으니까.

 

- 침대의 소녀가 마치 악몽에서 깨어나려고 애쓰는 것처럼 몸을 뒤척였다. 하지만 여왕의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침대 옆 바닥에 뭔가가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주웠다. "이것 좀 봐. 마법 냄새가 나는데." 

"이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마법이죠." 가장 작은 난쟁이가 말했다.

"아니, 이것 말이야." 여왕은 난쟁이들에게 아래쪽에 실이 감긴 나무 물레를 보여 주었다. "여기에서 마법 냄새가 풍긴다고."

 

- 그때 아직 잠에 취한 소녀의 목소리가 노파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래, 내가 말했지. 얘야, 난 너에게서 잠을 빼앗을 것이다. 내가 너에게서 내가 자는 동안 날 해칠 수 있는 능력을 빼앗는 것처럼. 내가 자는 동안 누군가는 깨어 있어야 하거든. 네 가족, 친구, 네 세계가 전부 잠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침대에 누워 잠들었어. 그들도 잠이 들었지. 그들이 자는 동안 난 그들의 삶을, 그들의 꿈을 조금씩 빼앗았어. 자는 동안 내 젊음과 아름다움과 힘을 조금씩 되살렸지. 나는 자면서 더 강해졌다. 시간의 흔적을 지워 버리고 잠자는노예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만들었지."

그녀는 어느덧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앉아 있었다. 무척 젊고 무척 아름다웠다.

 

- 여왕은 소녀를 보는 순간 자신이 찾고 있던 것을 발견했다. 계모에게서 본 적 있는 눈빛이었다. 그녀는 이 소녀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 "공주가 깨어나면 사람들이 전부 깨어날 거라고 믿었는데." 가장 큰 난쟁이가 말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생각했지?" 황금색 머리의 소녀가 아이처럼 순진무구하게 말했다(하지만 그녀의 눈! 눈만은 무척이나 나이 들어 보였다).

- "난 세상이 잠들어 있는 게 더 좋은데. 더 쉽게 조종할 수 있잖아."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미소 지었다. "그들이 너희를 잡으러 오고 있어. 내가 여기로 불렀거든."


- "이 탑은 높고 잠든 사람들은 움직임이 느려. 아직 얘기할 시간이 더 있을 것 같은데, 어둠의 지배자." 여왕이 말했다.

"넌 누구야? 누군데 날 안다는 듯이 얘기하지?" 소녀는 침대에서 내려가 만족스러운 듯 기지개를 켜고 손가락을 하나씩 잡아당겨 풀어 준 뒤 황금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녀가 미소 짓자 햇살이 내리된 것처럼 어둑한 방안이 환해졌다. "난쟁이들은 그 자리에 멈춰 그대로 잠이 들 거야. 마음에 안 들어. 그리고 너, 너도 잠들 거야."

"아니." 여왕이 말했다. 
여왕은 물레를 들었다. 물레에 감긴 실은 오랜 세월 속에 까맣게 변해 있었다.

 

- "하. 너 같은 족속들은 왜 그렇게 매번 똑같을까. 항상 원하는 게 젊음과 아름다움이야. 자기들 것은 오래전에 다 써 놓고 엄청나게 머리를 굴려서 또 손에 넣으려고 한다니까. 매번 힘을 원하는 것도 똑같고." 여왕이 말했다.

- 여왕과 소녀는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금발의 소녀가 여왕보다 훨씬 더 어려 보였다.
"넌 그냥 잠이나 자지 그래?" 소녀가 교활하게 웃었다. 여왕의 계모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마다 짓던 웃음과 똑같았다. 계단 저 아래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난 1년 동안 유리관에 잠들어 있었어. 날 잠들게 한 여자는 너하고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하고 위험한 존재였지."

 

- "넌 우리 혈족은 아니지만 제법 유능하구나." 

그녀가 봄날 아침에 막 깨어난 순수한 소녀처럼 상큼하게 미소 지었다. 

"세계를 지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테지. 이 타락한 시대까지 살아남은 자매들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도 그렇고. 내 눈과 귀가 되어 정의를 실현하고 내가 바쁠 때 나 대신 일을 처리해 줄 사람이 필요해. 당연히 내가 항상 거미줄의 가운데에 있고, 넌 내 아랫사람이지만 너도 지배자가 되는 거야. 작은 왕국이 아니라 대륙을 지배하는 거지." 소녀는 한 손을 내밀더니 어둑한 방안에서 눈처럼 새하얀 여왕의 피부를 어루만졌다.
"날 사랑해라. 세상 모두가 날 사랑할 것이다. 넌 날 깨웠으니 누구보다 날 사랑해야 한다." 소녀가 말했다.

 

- 여왕의 가슴 속에서 뭔가가 꿈틀했다. 순간 계모가 떠올랐다. 계모도 사랑받는 것을 좋아했었다. 여왕은 타인의 감정이 아닌 자신의 감정을 느끼기 위해 강해지는 법을 배웠다. 힘들었지만 한 번 깨우친 것은 쉽게 잊히지 않는 법이다. 
게다가 그녀는 대륙을 지배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 소녀가 아침 하늘 같은 눈으로 미소 지었다.
여왕은 웃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자. 이거요. 이건 내 것이 아니에요." 그녀는 옆에 서 있는 노파에게 물레를 주었다. 노파가 신중하게 물레를 잡았다. 관절염 있는 손가락으로 물레의 실을 풀었다. "이게 내 삶이었어. 이 실이 내 삶이었어..."
"그래, 네 삶이었어. 네가 나한테 줬잖니. 이젠 끝낼 때가 된 것 같네." 소녀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 수십 년이 지났지만 물레 바늘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한때 공주였던 노파는 실을 한 손으로 단단히 쥔 채 물레로 황금빛 머리카락 소녀의 가슴을 찔렀다.
소녀는 가슴에서 흐르는 피가 하얀 드레스를 붉게 적시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 어떤 무기도 날 해치지 못해. 이젠 불가능하다고. 봐봐. 그냥 긁힌 것뿐이잖아." 그녀가 심통 난 어린아이처럼 말했다.

"무기가 아니야." 이제 모든 것을 알아차린 여왕이 말했다. "네 마법이야. 긁힌 정도로도 충분하고."

 

- "잘 모셔라." 여왕이 침대에 검은 나무 물레와 함께 누운 늙은 여인을 가리켰다. "이분이 너희들을 살렸다."

 

- 성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아케어 숲의 공터에 이르렀을 때 여왕과 난쟁이들은 마른 나뭇가지로 불을 피워 실을 태웠다. 가장 작은 난쟁이가 손도끼로 검은 물레를 쪼개 그 조각들도 태웠다. 물레 조각이 타면서 뿜는 매캐한 연기에 여왕은 기침을 했다. 오래된 마법의 냄새가 가득 퍼졌다. 
타고 남은 숯 조각은 마가목 나무 아래에 묻었다.

 

- "서쪽으로 쭉 가면 주말쯤 산이 나올 겁니다. 열흘 안으로 칸셀데어 왕국의 궁전으로 돌아가실 수 있어요." 수염 있는 난쟁이가 말했다.
"그래."
"늦어지긴 했지만 돌아가시자마자 결혼식도 열릴 거고요. 백성들이 전부 축하해 주고 왕국 전체에 기쁨이 넘치겠죠."
"그래."

여왕은 그렇게만 말하고 참나무 아래의 이끼 위에 앉았다. 그녀는 심장이 뛰는 소리와 함께 고요함을 곱씹었다.

- 선택할 수 있어. 난 언제나 선택할 수 있어. 그녀는 충분히 생각할 만큼 오래 앉아 있었다.
그녀는 선택했다.

 

- 여왕은 걷기 시작했고 난쟁이들도 따라갔다.
"지금 동쪽으로 가고 있는 거 알고 계시죠?" 난쟁이 하나가 물었다.
"아, 응."
"그럼 괜찮습니다."
여왕과 난쟁이들, 네 사람은 동쪽으로 걸었다. 저녁노을과 그들이 아는 땅에서 멀어져 밤을 향해 걸었다.

 

- <잠자는 공주와 물레 The Sleeper and the Spindle>

 

 

- 이 작품은 열두 달을 주제로 하는 12개의 개별적인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 달마다 저자가 트위터에 질문을 던진 뒤, 그에 대한 독자들의 답변에 아이디어를 얻어 집필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닐 게이먼이 던진 1월의 질문은 "왜 1월이 위험한가?"였고, 그가 고른 독자의 답변은 '베테랑이 은퇴하고 신입으로 대체되기 때문'이었다. 

 

- "항상 이런가요?" 신입은 방향 감각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혼란스러운 듯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조심하지 않으면 그러다 죽을 수 있다.

 

- 무언가가 촉수가 그의 다리를 휘감아넘어지는 순간, 그의 모래시계에서 마지막 모래알이 떨어졌다. 

- 그는 위를 보았다.
신입이 모래 언덕에 서 있었다. 신병 훈련 때 배우는 것처럼 다리에 힘을 주고 낯선 디자인의 로켓탄 발사기를 들고서. 최신식 디자인이라고 트웰브는 생각했다. 그는 바닷가에서 끌려 나가면서 머릿속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모래가 그의 얼굴을 할퀴었다. 둔탁하게 쿵 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의 다리를 휘감은 촉수가 휙 빠지며 괴물이 뒤쪽의 바다로 날아갔다.

 

- 트웰브 역시 허공으로 나가 떨어지는 순간, 마지막 모래알이 떨어졌고 미드나잇이 그를 데려갔다.
그는 오래전의 장소에서 눈을 떴다. 포틴이 그를 연단에 눕혀 주었다.

"어떻게 됐어?" 나인틴 포틴이 물었다. 그녀는 바닥까지 닿는 하얀 치마를 입고 하얀 장갑을 꼈다.
"해마다 점점 더 위험해지고 있어." 트웬티 트웰브가 말했다. "초, 그리고 그 뒤에 숨은 것들 말이야. 하지만 신입은 마음에 들어. 잘할 거야."

 

- 2월의 잿빛 하늘, 안개 낀 하얀 모래, 까만 바위, 흑백 사진처럼 까만 바위. 오직 노란 비옷을 입은 여자애만이 세상에 색깔을 더해 주는 듯했다.

 

- "응. 살아 계시긴 해. 요즘은 말을 하지 않으시지만. 그냥 바다만 바라 보셔. 늙는다는 건 끔찍한 일 같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 나는 코트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여자애에게 내밀었다. 

"혹시 이거야? 1년 전쯤에 바닷가에서 주웠거든. 돌아래에서."
펜던트는 모래나 바닷물에 망가지지 않은 상태였다.

- 여자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나를 껴안으며 고맙다고 했다. 그녀는 펜던트를 받아들고 작은 마을이 있는 쪽으로 안개 낀 해변을 달려갔다. 나는 그녀가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손에 할머니의 펜던트를 들고 흑백의 세상에 노란색을 끼얹었다. 그 펜던트는 내 목에 걸린 것과 한 쌍이었다.

- 나는 여자애의 할머니, 그러니까 내 여동생이 집에 돌아갔는지, 집에 돌아갔다면 예전에 내가 했던 장난을 용서해 주었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그녀는 지구에 남는 쪽을 선택하고 손녀를 대신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다.

- 증조카가 떠나고 나 혼자 남았을 때 나는 위쪽으로 헤엄쳐 갔다. 그리곤 펜던트가 나를 저 위의 광대한 공간에 있는 집으로 끌어당기게 내버려 두었다. 외로운 하늘 고래와 함께 돌아다니는 곳, 하늘과 바다가 하나인 곳으로.

 

- "우리가 아는 사실은 그녀가 처형 당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찰스 존슨, 가장 악명 높은 해적들의 강도와 살인에 관한 역사]

 

- 그녀는 남편이 죽었다고 했다. 온갖 소문이 무성했지만 아무리 뒷말하기 좋아하는 약삭빠른 사람이라도, 애니 라일리가 해적선 선장 레드 라캄의 일등 항해사인 여해적 앤 보니라는 사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남자처럼 싸웠다면 개죽음이 아니다." 이것은 앤 보니가 그녀의 아기 아빠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라고 한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렇다.

 

- 라일리 부인은 번개가 치는 것을 보았다. 멀리서 천둥이 우르릉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그녀는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피부는 보통의 부유한 여인들만큼이나 희다. 

 

- 3월의 첫 비가 내렸다. 라일리 부인은 그네 의자에서 일어나 빗줄기로 얼굴을 가져가 딸을 놀래켰다. 비가 마치 바다의 물보라처럼 그녀의 얼굴에 퍼졌다. 평소 점잖은 그녀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 오리가 당신을 믿지 않게 되었다면 당신이 녀석들에게 해도 너무 했다는 뜻이다. 

 

- "그래도 양말은 지키셨네요." 내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그해 4월, 오리들을 절대 믿어선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 나는 5월에 어머니의 날을 축하하는 익명의 카드를 받았다. 어리둥절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한테 자식이 있었던 건가?

 

- 4월에는 침대 옆 작은 탁자에서 메모가 발견되었다. 서비스에 문제가 생긴 것에 양해를 구하며 이제 우주의 모든 결함이 정정되었다는 그 메모는 '불편하게 해 드려 죄송하다'라고 끝맺었다. 

 

- 5월에 또 어머니의 날 카드를 받았다. 이번에는 익명이 아니었다.

 

- 엄마와 아빠는 통할 때가 한 번도 없다. 체질마저도. 아빠는 몸에 열이 많고 엄마는 몸이 항상 차다. 한 사람이 방을 나갈 때마다 온종일 보일러를 껐다 켰다,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나와 동생이 1년 내내 감기를 달고 사는 것도 이것 때문인 듯하다. 

 

- 엄마와 아빠는 어느 달에 휴가를 떠날 것인지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아빠는 당연히 8월, 엄마는 무조건 7월이었다. 결국 6월에 여름휴가를 떠나기로 하는 바람에 모두가 불편해지고 말았다.

 

- 참으로 불편한 여름휴가가 다가오는 가운데, 우리 자매는 그 어디든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우리는 도서관에서 들고 올 수 있을 만큼 책을 최대한 많이 빌려 와 쌓아 놓고 열흘 동안 부모님의 말다툼 소리를 들을 준비를 했다. 

 

- 그런데 갑자기 밴을 탄 남자들이 와서는 우리 집으로 뭔가를 잔뜩 옮기기 시작했다. 
엄마는 그들에게 사우나를 지하실에 설치해 달라고 말했다. 그들은 엄청나게 많은 모래를 바닥에 쏟아붓고 천장에는 태양등을 달았다. 엄마는 태양 등 아래의 모래밭에 타월을 깔고 누웠다. 지하실 벽에 모래 언덕과 낙타 사진도 붙여 놓았다. 극심한 열기 때문에 떨어져 버렸지만. 

- 아빠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큰 냉장고를 사서 차고에 놓았다. 차고가 꽉 차 버려서 아빠는 마당에 주차해야만 했다. 아빠는 아침에 일어나 아이슬란드산 두꺼운 양모 스웨터를 입고 책과 뜨거운 코코아가 든 보온병, 마마이트잼, 오이 샌드위치를 들고 얼굴에는 함박웃음을 띄운 채 대형 냉장고로 들어가 있다가 저녁 식사 때가 되어서야 나왔다. 나는 세상에 우리 가족처럼 이상한 가족이 또 있을까 싶었다. 우리 엄마 아빠는 서로 생각이 일치할 때가 한 번도 없다. 

 

- "언니, 그거 알아? 엄마가 오후마다 코트 입고 몰래 냉장고에 들어가는거."

마당에 앉아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을 읽고 있을 때 여동생이 불쑥 말했다.


- 몰랐다. 하지만 그날 아침 수영복 반바지에 가운을 걸친 아빠가 엄마가 있는 지하실 사우나로 들어가는 건 봤다. 얼굴에 바보 같은 함박웃음을 가득 담고서 말이다.
난 도무지 우리 부모님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솔직히 세상 모든 자식이 마찬가지 아닐까.

 

- 7월의 첫날, 아내가 혼자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나를 떠났다. 그날은 동네 한가운데 있는 호수에 강렬한 태양이 내리찍었다. 우리 집을 둘러싼 초원의 옥수수가 무릎에 닿을 만큼 자랐고, 독립기념일의 불꽃놀이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성급하게 터트린 폭죽이 요란하게 여름 밤하늘을 수놓았다. 나는 그날 뒷마당에 책으로 이글루를 만들었다.

 

- 양장본이나 백과사전은 너무 무거우니 잘못했다가 무너지면 큰일 날 것 같아서 페이퍼백을 이용했다. 다행히 이글루는 무너지지 않았다. 기어서 들어갈 수 있고 북극의 매서운 바람도 막아 주는 약 4미터 높이의 터널이었다. 나는 책으로 만든 이글루 안으로 책을 가지고 들어가서 읽었다. 안은 놀라울 정도로 따뜻하고 포근했다. 다 읽은 책은 바닥에 깔고 책을 더 가져 왔다. 그렇게 어느새 바깥세상의 마지막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7월의 푸르른 잔디가 다 덮였다.

 

- 책으로 만든 이글루에서 잠을 잤다. 배가 고팠다. 바닥에 구멍을 뚫고 낚싯줄을 내렸다. 기다리니 뭔가가 걸렸다. 책으로 만든 물고기였다. 펭귄 출판사에서 나온 초록색 표지의 고전 탐정 소설 시리즈. 이글루에 불이 날까봐 걱정스러워서 날것으로 먹었다.

 

- 밖으로 나가 보니 누군가 온 세상을 책으로 뒤덮어 놓았다. 온갖 색조의 하얀색과 파란색, 자주색으로 된 옅은 표지들. 나는 책의 빙원을 거닐었다. 얼음 위에 내 아내처럼 생긴 사람이 보였다. 그녀는 자서전으로 빙하를 만드는 중이었다. 
"당신이 날 떠난 줄 알았어. 날 혼자 남겨 두고."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순간 나는 그녀가 그림자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 강렬한 책들의 페이지로 만들어진 곰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하얬다. 무기가 될 수 있는 아름다운 단어들로 가득한 고대와 현대의 시들이 곰의 형상으로 설원을 서성거렸다. 종이 위에서 단어가 굽이치는 게 보였다. 곰이 나를 볼까 봐 무서웠다. 

 

- 곰을 피해 이글루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어둠 속에서 잠든 모양이다. 다시 기어 나가 얼음 위에 등을 대고 누웠다. 예상치 못한 색감으로 아른거리는 북극광을 올려다보면서, 저 멀리 신화 책 빙하가 갈라지며 요정 이야기 빙산이 만들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 노란 별의 구름 속으로 마지막 불꽃이 사라졌을 때 아내가 말했다. "나 집에 왔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나는 책으로 만든 이글루를 나와서 고양이처럼 7월의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그녀와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렸다. 한밤중에 우리가 자고 있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책으로 만든 나의 이글루가 무너졌다. 단어가 세상에서 씻겨 나갔다.
 

- 산불이 시작된 것은 그해 8월 초였다.
 

- 내가 사는 집의 주인이자 직접 요리도 하고 집도 관리하는 호주 사람 피터가 말했다.

"호주에서 유칼립투스는 생존을 위해 불을 사용해요. 산불이 나서 모든 덤불이 타 버린 후에 씨앗이 싹트거든요. 엄청난 고온이 필요한 거죠." "참 이상하네요. 불꽃에서 뭔가가 부화하다니." 내가 말했다.
"그렇진 않아요. 지극히 정상이죠. 지구가 지금보다 더 뜨거웠을 때는 훨씬 더 흔한 일이었을 겁니다."
"이것보다 뜨거운 건 상상하기가 힘든데요."
그가 콧방귀를 뀌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죠." 그는 지금보다 젊었을 때 호주에서 겪었던 극도의 열기에 관해 이야기했다.

 

- 늦은 오후부터는 나무 연기가 심하게 퍼졌다. TV와 라디오에서도 가능하다면 당장 대피하라고 했다. 피터와 나는 웃으며 맥주를 마셨다. 두려워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힘든 상황에 제대로 대처한다는 사실을 서로 축하했다. 

"우린 너무 안일해. 인류 전체 말이야. 사람들 모두 뜨거운 8월에 나무에 매달린 나뭇잎이 타들어 가는 걸 보고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잖아. 우리 제국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지." 내가 말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어."

 

- 앞쪽의 계곡까지 번진 산불은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듯했다. 우리는 시냇물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보호장치인지 깨달았다. 공기 자체가 불타고 있었다.

 

- 마침내 우리는 질식할 것 같은 연기 속에서 기침하며 벌떡 일어나 도망쳤다. 언덕을 내려가 시냇물에 이르렀을 때 그 속에 들어가 얼굴만 내놓고 누웠다.

- 우리는 걷잡을 수 없는 불꽃 속에서 부화한 그것이 일어나 날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언덕의 불타 버린 집을, 폐허를 쪼아 먹는 새가 떠올랐다. 그중 하나가 얼굴을 쳐들고 의기양양한 소리를 내었다. 나뭇잎이 타들어 가는 소리를 누르고 그 소리가 들렸다. 나는 불사조의 외침을 들었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했다.

- 시냇물이 끓기 시작하면서 수백 마리의 새 같은 불꽃이 일제히 하늘로 솟아올랐다.

 

- 어머니에게는 사자 얼굴 모양의 반지가 있었다. 어머니는 그 반지로 작은 마법을 부렸다. 주차할 자리를 찾는다거나 슈퍼마켓에서 자신이 선 줄이 빠르게 줄어들게 하거나 옆 테이블에 앉은 커플이 싸움을 멈추고 다시 사랑에 빠지게 한다거나 하는 것들이었다.

- 어머니는 돌아가시면서 나에게 그 반지를 남겼다.

- 내가 처음 그 반지를 잃어버린 것은 카페였다. 아마도 초조하게 만지작거리면서 뺐다가 다시 꼈던 것 같다. 하지만 집에 가보니 손가락에 반지가 없었다. 카페로 찾으러 갔지만 흔적도 없었다. 며칠 뒤 반지가 택시 기사를 통해 나에게 돌아왔다. 카페 앞 인도에서 주웠다고 했다. 우리 어머니가 그의 꿈에 나타나서 우리 집 주소와 어머니의 정통 치즈 케이크 레시피를 알려 주었다나.

 

- 두 번째로 반지를 잃어버린 건 다리에 기대어 아무 생각 없이 강 아래로 솔방울을 던질 때였다. 반지가 활 모양을 그리며 날아가 까만 진흙 강바닥으로 빠졌다. 퐁당 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일주일 후 술집에서 알게 된 남자에게 연어를 샀다. 그의 오래된 초록색 밴 뒤쪽에 놓인 아이스박스에서 연어를 받아 왔는데, 연어의 배를 가르자 어머니의 사자 반지가 굴러 떨어졌다.

- 세 번째로 반지를 잃어버린 것은 뒷마당에서 일광욕을 즐기며 독서를 하고 있을 때였다. 8월이었다. 선글라스, 선탠 로션과 함께 타월에 올려 두었는데 커다란 새가(까치나 갈까마귀였던 것 같지만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까마귓과였다) 내려와 엄마의 반지를 물고 가 버렸다.  


- 다음날 밤, 움직임이 서투른 허수아비가 반지를 가져왔다. 허수아비는 현관의 조명 아래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내가 짚을 채워 넣은 장갑 낀 손에서 반지를 받아들자마자 비틀비틀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이건 갖고 있으면 안 되는 물건인 것 같아." 나는 생각했다.

 

- 9월 초, 은행 계좌를 정리하고 브라질로 떠났다. 그곳에서 가명으로 웹디자이너로 취직했다.
아직 어머니의 반지가 돌아올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다음에는 어머니가 어떤 식으로 나에게 반지를 돌려줄지 몰라서 가끔은 자다가 심장이 쿵쾅거리고 식은땀이 흐르는 채로 깨어나곤 한다.

 

- "아, 시원하다." 나는 결린 목을 마지막으로 스트레칭했다.
그냥 시원한 게 아니라 엄청나게 개운했다. 그 좁아터진 램프에 너무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 이젠 램프를 문지를 사람이 절대로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었다.

- "너 램프의 요정 지니구나." 손에 광택용 천을 든 젊은 여자가 말했다.

"맞아, 예쁜 아가씨, 똑똑하네. 내가 지니란 걸 어떻게 알았지?"
"연기구름 속에서 나타났잖아. 생긴 것도 지니처럼 생겼고, 머리에 두른 터번이며 코가 뾰족한 신발이며."
나는 팔짱을 끼고 눈을 끔뻑거렸다. 지금 나는 청바지에 회색 스니커즈, 빛 바란 회색 스웨터 차림이다. 이 시대 남자들의 유니폼이라고 할 수 있지. 

 

- 그녀는 언제부터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지, 혹시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 건지 물었다. 내 어머니에 대해서도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나는 강하고 지혜롭고 불가사의한 마법의 존재 지니이므로 인간과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면 안 된다고 말해 주었다. 

 

- 그녀가 후무스를 좋아하느냐고 물어서 좋아한다고 했다. 그녀는 피타 빵을 구워서 잘라 후무스에 찍어 먹으라고 주었다. 나는 빵에 후무스를 찍어 기분 좋게 먹었다. 후무스를 보니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네가 그냥 소원을 빌면 술탄에게 어울릴 법한 진수성찬을 대령해 줄게." 내가 그녀를 도와주려는 듯이 말했다. "모든 음식이 황금 접시에 담기고 매끼 더 훌륭한 음식이 나올 거야. 음식을 다 먹고 황금 접시는 가져도 돼."
"멋지다." 그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산책하지 않을래?"

- 나는 헤이즐에게 젊은 시절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 지니들은 천사들의 말을 엿듣곤 했는데, 들키면 그들은 우리에게 혜성을 던졌다. 그 시절의 좋지 않은 추억도 이야기해 주었다. 전쟁 그리고 슐레이만 왕이 우리를 병이나 램프, 토기처럼 안이 텅 빈 물건에 가둔 것 등. 

 

- 그녀의 삶에는 결함이 보이지 않았다. 소원으로 채워질 수 있는 구멍이 하나도 없었다. 단 하나만 빼고. 
"네 삶은 참 좋구나. 하지만 너에겐 그 삶을 나눌 좋은 사람이 없어. 네가 소원을 빌면 완벽한 남자든 여자든 대령시켜 줄게. 영화배우, 부자..."
"필요 없어. 괜찮아."

 

- 우리는 핼러윈 장식이 된 집들을 지나쳐 그녀의 집으로 돌아갔다.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니야. 인간은 항상 원하는 게 있기 마련이라고." 내가 말했다.
"난 아니야. 난 필요한 게 전부 다 있는걸."
"그럼 난 어떡하라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자기 집 앞마당을 가리켰다.
"낙엽 치워 줄 수 있어?”
"그게 소원이야?"
"아니. 내가 저녁 준비하는 동안 네가 할 수 있는 일."

- 나는 낙엽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생울타리 옆쪽으로 모아 놓았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설거지를 했다. 헤이즐의 집 남는 방에서 잤다.

 

- 그녀는 그다지 도움이 필요하진 않았으나 내가 돕는 일을 허락해 주었다. 나는 그녀를 위해 그림 재료를 사 오거나 장을 봐 오는 심부름을 했다. 그녀가 온종일 그림을 그리느라 피곤할 때는 목이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나는 손힘이 좋아서 마사지를 잘한다. 

 

- 추수감사절이 지난 후 나는 집안의 남는 방을 나와 복도를 지나 큰방으로, 헤이즐의 침대로 갔다.

- 오늘 아침, 나는 잠든 헤이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잘 때의 입 모양. 그녀의 얼굴을 서서히 비추는 햇살. 그녀는 눈을 뜨고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내가 너에게 물어보지 않은 건 '너라면?'이야. 내가 너에게 세 가지 소원을 빌라고 했다면 넌 무슨 소원을 빌었을 것 같아?"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를 내 품으로 끌어당겼다.

- "괜찮아. 소원 안 빌어도 돼."

- 화로는 작았다. 네모나고 불에 검게 그을린 이 오래된 금속은 아무래도 구리나 청동인 것 같았다. 용과 바다뱀 같은 동물들이 휘감은 그 화로는 동네 차고 세일에서 엘루이즈의 시선을 끌었다. 그중 하나는 머리가 없었다. 엘루이즈는 단돈 1달러밖에 하지 않는 그 화로와 옆에 깃털이 달린 붉은 모자를 샀다. 하지만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모자를 산 것이 후회되었고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병원에서 우편물이 와 있었다. 그녀는 화로를 뒷마당에, 모자를 옷장에 놓아 두었다. 하지만 우편물을 뜯는 순간 그녀는 두 가지 물건에 대해 전부 까먹고 말았다.

 

- 몇 달이 지났다.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도 점점 사라졌다. 엘루이즈는 하루하루 지날수록 기운이 없어지고 쇠약해졌다. 걷는 것조차 힘들었고 2층으로 올라갈 때마다 기진맥진해서 아예 침대를 아래층에 있는 방으로 옮겼다. 그 편이 훨씬 간편했다.

 

- 11월이 왔다. 그녀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 그런 물건들이 있다. 버릴 수도 없고 죽고 나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남길 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태워 버려야 하는 것들.

- 그녀는 종이와 편지, 옛날 사진이 가득한 검은색 상자를 들고 마당으로나갔다. 떨어진 나뭇가지와 갈색 종이봉투 따위를 화로에 넣고 바비큐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불이 붙자 그제야 상자를 열었다. 우선 편지부터 태우기 시작했다. 특히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 편지들.

 

- 그녀는 대학교에 다닐 때 교수와 사귄 적이 있었다. 사귄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걷잡을 수 없이 암울한 잘못된 관계였고 결국 얼마 되지 않아 끝났다. 종이 클립으로 한데 묶어 둔 교수의 편지를 화로에 하나씩 넣어 태웠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같이 찍은 사진도 던져놓고 사진이 쪼그라들어 검게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상자에서 다음으로 태울 것을 꺼내려던 그녀는 교수의 이름이 무엇이었고 무슨 과목을 가르쳤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자신이 왜 그렇게 상처를 받았고 어째서 다음 해 자살 충동에 시달릴 정도였는지도.

 

- 잠시 추억에 젖으려 참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뒷마당에 참나무가 없었다.
나무 그루터기조차 보이지 않고 이웃집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으로 가득한 11월의 빛 바랜 잔디밭뿐이었다.

 

- 하지만 엘루이즈는 참나무가 있었다는 걸 알았기에 자신이 미친 게 아닐까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뻣뻣한 움직임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충격적이었다. 요즘은 늘 그랬다. 얇은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하고 얼굴은 심하게 여위었다. 

 

- 그녀는 대충 마련해 놓은 침대 옆 테이블에서 편지를 집어 들었다. 맨 위는 종양 전문의의 편지였고 그 아래로 열 장이 넘는 페이지에 숫자와 단어가 들어 있었다. 아래로 종이가 더 있었다. 전부 첫 페이지에 병원 로고가 들어갔다. 그녀는 종이를 전부 집어 들었고 병원비 청구서도 집었다. 보험이 많이 적용되긴 했지만 전액은 아니었다.

 

- 그녀는 병원 관련 우편물을 전부 화로에 던졌다. 11월의 바람을 맞으며종이가 갈색과 검은색으로 변해 재가 되는 것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종이까지 다 타 버리자 엘루이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의 거울에 비친 그녀는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풍성한 갈색 머리였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에게 미소 지었다. 마치 삶을 사랑했고 위안의 흔적을 남기며 살아 온 것처럼. 

 

- 바깥에서는 검은 뱀이 구불거리는 화로에서 나온 마지막 연기가 11월의 차가운 공기 속으로 퍼져 나갔다.

 

- 도나는 숙련된 노숙자들에게 요령을 배웠다. 그들은 낮에 어디서든 잠을 자라고 했다. 서클선 순환선 표를 사서 온종일 타고 다니며 눈을 붙이면 좋다. 저렴한 카페도 괜찮다. 행색만 어느 정도 괜찮으면 열여덟 짜리가 50펜스짜리 차 한 잔 시키고 구석 자리에서 한두, 세 시간 정도 졸아도 뭐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잠은 낮에 자고 밤에 움직이라고 했다.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데다 보통 따뜻한 곳들도 문을 잠그고 조명을 꺼 두니까.

 

- 거리 모퉁이의 여인은 도나가 전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낯익은 얼굴이었다면 그 여자에게 다가가지 못했을 것이다. 비덴덴에 사는 누군가를 이런 모습으로 만나게 된다면, 그야말로 끔찍한 악몽이 아닐 수 없다. 수치심, 엄마에게 말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하지만 엄마는 원래 말이 많지 않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속이 다 시원하다'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엄마가 아빠에게 말하면 아빠가 이곳으로 도나를 찾으러 와 집으러 데려갈 터였다. 그러면 그녀의 삶은 산산조각나고 말 것이다. 도나는 다시는 아빠를 보고 싶지 않았다.

 

- 도나는 '유령이라도 본 듯 새파랗게 질렸다'라는상투적인 표현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여자의 표정이 그랬으니까. 여자가 말했다. "너니?"

- 여자가 말했다. "도나." 도나는 그때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절대로 그럴 리 없다고, 말도 안 된다는 생각에 그냥 가만히 있었다.

 

-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너야. 미래의 너. 난 언젠가의 과거를 떠올리며 이 길을 걷고 있었어. 과거에 네가..." 여자는 말을 멈추었다. "있잖아. 네 인생은 항상 지금 같지 않을 거야. 그렇게 오래 안 걸려. 바보같은 짓만 하지 마. 돌이킬 수 없는 짓도 하지 말고. 앞으로 괜찮아질 거라고 내가 약속할게. 그 왜 유튜브 채널도 있잖아. '더 좋아질 거야' 말이야."
"유튜브가 뭐야?" 도나가 물었다.
"하하." 여자는 도나를 바짝 끌어당겨 꼭 안아 주었다.

 

- "나 너랑 같이 가면 안 돼?" 도나가 물었다.
"안 돼. 아직 거긴 네 집이 없어. 넌 아직 네가 거리에서 벗어나고 직장을 얻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어. 네 파트너가 될 사람도 아직 못 만났고. 너희 둘은 서로에게, 서로의 아이를 위해 안전한 집을 만들어 갈 거야. 따뜻한 동네에서."
도나는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이런 얘길 왜 하는 건데?"
"앞으로 나아질 거란 걸 알려 주고 싶어서. 너한테 희망을 주고 싶어."

 

- "필요 없어! 오늘 밤이 아니면, 난 지금 당장 갈 곳이 없단 말이야. 추워. 돈 좀 있어?"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녀는 핸드백에서 20파운드 지폐를 꺼냈다. 도나는 돈을 받아 들었지만 그녀가 아는 지폐와는 달라 보였다. 여자에게 물어보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손에 든 지폐도 사라졌다. 

- 도나는 몸을 덜덜 떨며 서 있었다. 처음부터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돈이 사라졌다. 하지만 하나는 남았다. 그녀는 언젠가 다 잘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결국에는 바보 같은 짓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았다. 지하철표를 사서 멈추기에 너무 늦었을 때 열차 앞으로 뛰어들 필요가 없었다. 

- 매서운 겨울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그녀는 어느 상점의 문가로 날아간 무언가를 발견했다. 주워 보니 20파운드 지폐였다. 내일은 좀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하려고 마음먹었던 것들을 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 12월의 거리는 너무도 차갑고 잔인하지만 올해는 아니다. 오늘 밤은 아니다.
 

- <열두 달 이야기 A Calendar of Tales>



- 영국 드라마 <닥터 후>의 등장인물과 세계관을 가지고 풀어낸 작품이다.

 

- 타임로드들은 감옥을 만들었다. 태어난 태양계를 한 번도 떠나 본 적 없는 존재들 혹은 한 번에 1초씩 앞으로 흘러가는 여행만 경험해 본 존재들은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시간과 장소에 그것을 지었다. 오로지 킨을 위해 지어진 난공불락의 감옥이었다. 그곳은 설비가 잘 갖춰진(타임로드들은 괴물이 아니며 기분이 좋을 때는 자비로웠다) 작은 방들이 모인 복합체였으며, 우주의 나머지 부분들과 시간적인 단계를 벗어난 장소였다. 

 

- 그곳에는 오로지 방들만 있었다. 마이크로 초 사이의 만을 건너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실 그 방들은 아주 조금 떨어져 있는 나머지 피조물로부터 빛과 열, 중력을 빌린 그 자체의 우주가 되었다.

- 불멸의 킨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 방에서 서성거리며 계속 기다렸다.
그것은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끝나 버릴 때까지도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에서 마이크로 초 떨어진 곳의 감옥에 갇힌 킨은 시간이 끝나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터였다.)

 

- 타임로드족은 블랙홀의 심장 안에 만든 접근할 수 없는 거대한 엔진으로 그 감옥을 유지했다. 타임로드족 말고는 그 누구도 그 엔진에 다가갈 수 없었다. 여러 개로 이루어진 엔진은 고장 시 자동으로 원상복구하도록 되어 있었다. 문제가 생길 일이 전혀 없었다.
타임로드족이 존재하는 한 킨은 절대로 감옥을 벗어날 수 없었고 우주는 안전했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랬다.

- 만약 무슨 문제가 생기더라도 타임로드족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만에 하나 엔진이 고장난다면, 킨의 감옥이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우주로 돌아오기 전에 타임로드들의 갈리프레이 행성에 비상 신호가 먼저 뜰 것이다. 타임로드족은 이렇게 모든 것을 미리 계획해 두었다.

 

- 그들은 정말로 모든 것을 계획해 두었다. 언젠가 타임로드도, 갈리프레이도 사라지는 날이 올지 모른다는 가능성만 제외하고 말이다. 우주에 타임로드족이 딱 한 명만 남게 되는 상황만큼은 대비하지 못했다.

 

- 고양이 가면 여자가 폴리 쪽으로 쭈그려 앉았다. "난 고양이 여사야. 몇시냐고 물어봐 주렴, 폴리."
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몇 시예요, 고양이 양?"
"너와 너희 가족이 두 번 다시 뒤돌아보지 않고 이 집을 떠날 시간이지."

그래도 그녀의 목소리만큼은 상냥했다.

 

- [이 세계는 킨의 영역이다. 너희들은 지금 무단 침입을 하고 있다.]
이상한 목소리였다. 그것은 속삭이듯 작은 소리였지만 에이미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들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 "여긴 지구야. 너희 게 아니라고. 사람들은 다 어떻게 했지?" 에이미가 소리쳤다.
[우리가 그들에게 샀다. 우리가 지구를 산 직후 그들은 자연스럽게 멸종되었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 [은하계 법에 어긋나는 건 하나도 없다. 합법적으로 정당하게 지구를 구매한 것이다. 그림자 조약의 철저한 검토로 우리의 전적인 소유권이 입증되었다.]

 

- "에이미? 지금 누구한테 얘기하는 거야?" 닥터가 물었다.

"목소리. 내 머릿속의 목소리. 넌 안 들려?"
[지금 누구한테 말하는 거지?] 목소리가 물었다.
에이미는 타디스의 문을 닫았다.

- "왜 그런 거야?" 닥터가 물었다.
"이상해.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어. 자기들이 지구를 샀다면서 그림자 조약에서도 괜찮다고 했대. 인류는 전부 자연 멸종했고. 넌 안 들렸지? 그 목소리는 네가 여기 있다는 걸 모르더라고. 네가 그들에게 감짝 놀랄 만한 요소가 될 수 있다는 뜻이지. 그래서 문을 닫은 거야."

에이미 폰드는 스트레스가 심하면 놀랄 정도로 유능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이 바로 스트레스가 가득한 상태였지만 구불구불한 뭐시기가 아니었다면 표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두 손으로 그것을 들고 상상을 거스르는 모양으로 구부리고 비틀었다. 길을 잃고 특이한 차원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 에이미는 고개를 떨구어 자기 발과 다리, 팔꿈치, 손을 보았다(그녀의 팔에서 구불구불한 뭐시기가 에셔의 악몽 같은 작품처럼 반짝였다. 그녀는 그것을 계기판에 떨어뜨렸다). 그녀는 적갈색의 머리카락을 한 줌 잡았다. "내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땐데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넌 시간 곡률적으로 정반대의 것으로 설정된 독립적인 시간의 결합지점이야." 그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시간이 흔들흔들 왔다 갔다 한다는 말이네?"
"그래. 그런 것 같아. 도착했어." 그가 진지하게 말하고 꼼꼼한 손놀림으로 나비넥타이를 가다듬었다. 약간 한량처럼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했다.
"그런데 닥터, 인류는 1984년에 멸망하지 않았어."
"새로운 타임라인이야. 패러독스지."

 

-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문명 5등급에 해당하는 행성을 차지하는 건 불가능하잖아. 정당한 이유가 없고서는 말이지." 타디스의 제어판에서 뭔가가 빙그르르 돌고 땡 소리가 또 들렸다. "도착했어. 결합지점이야. 얼른! 1984년을 탐험해 보자고."
"되게 즐거워하네. 난 누군지도 모르는 목소리한테 세상 전부를 빼앗겼는데. 인류가 멸종되고 로이도 사라졌어. 근데 넌 즐거워하고 있어."
"그렇지 않아." 하지만 닥터는 즐거운 표시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 "말도 안 돼." 집을 알아본 지 열흘째 되는 날 브라우닝 씨가 말했다.

- "간단해. 우린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걸 찾아야 해. 또는 여기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것."
"그런 게 뭔데?"
"나도 확실히는 몰라." 닥터가 턱을 긁적거렸다. "가스파초 같은 거라든지."
"가스파초가 뭔데?"

"차갑게 먹는 스프. 꼭 차가워야 해. 1984년을 쭉 둘러보고 가스파초가 없으면 그게 단서가 될 수 있을 거야."
"넌 처음부터 이랬니?"
"뭐가?"

 

- "돌려받고 싶어?"
"네, 부탁드려요." 폴리가 개 가면을 쓴 남자에게 말했다. 사생활을 침해당해서 무척 속상한 기분이었다. 남의 일기장을 읽다니. 그래도 어떻게든 돌려받아야만 했다.
"돌려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줄까?"
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 시간을 물어봐."
폴리가 입을 열었다가 건조한 입술에 침을 바르고 중얼거렸다.

- "지금 몇 시예요, 늑대 씨?" 갑자기 친구들이랑 놀이터에서 하는 놀이가 떠올랐다.
늑대 씨는 미소 짓고(가면을 썼는데 어떻게?) 입을 쩍 벌려 줄줄이 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저녁 먹을 시간."
남자가 그렇게 말하고 다가오자 폴리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비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 닥터는 기억력이 매우 뛰어났다. 문제는 기억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11개의 삶을 산 데다(더 있을 수도 있지만 그는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모든 삶마다 기억하는 방식이 달랐다. 무엇보다 가장 골치인 건 그가 나이를 얼마나 먹었든 간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이를 계산해 오곤 했지만 그것마저도 오래전에 그만두었다) 뭔가가 곧바로 생각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가면. 분명 관계가 있다. 킨. 이것도 관계가 있고. 그리고 시간.

- 모든 것의 중심에 시간이 있다. 정말 그렇다.

- "마시멜로와 3인의 오그론!" 닥터가 그녀에게 소리쳤다.
"그게 어쨌는데?"
"하나는 너무 사악하고 하나는 너무 멍청하고 하나는 딱 알맞았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
닥터는 무심코 자기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음. 상관없을지도 몰라. 어릴 때 들은 이야기를 기억해 내려는 중이야."

"왜?"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

 

- "모든 시간의 법칙을 위반했다고, 그들은 우리를 모든 피조물과 따로 떨어뜨려 놓았다. 하지만 내가 탈출했고 우리 모두 탈출했지. 우린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었어. 이미 이 세계를 구매하는 작업도 시작했고 말이야." 
"시간을 통해 돈을 재활용하는군. 이 집, 이 동네부터 시작해 지구 전체를 사들이려는 거야." 닥터가 말했다.

 

- "킨." 닥터가 말했다. "하나의 생명체로만 이루어진 인구층. 인간이 길을 건너듯 간편하고 본능적으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지. 너희는 원래 개체가 단 하나뿐이었어. 하지만 시간을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다른 시간대의 자신과 접촉해 수백 명, 수천개, 수백만 개로 만들어 행성을 차지하는 거야. 마치 썩은 나무처럼 시간의 부분적인 구조가 무너질 때까지 계속하지. 적어도 처음에는 시간을 물어봐 줄 다른 존재가 필요했지. 어떤 시공의 지역에 뿌리내려 줄 양자 중첩성을 만들기 위해."
"아주 잘 아는군. 타임로드들이 우리 세계를 완전히 에워싸고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시간대의 친족이기 때문에 우리 중 하나를 죽이는 건 종 전체에 대한 대학살 행위를 저지르는 것과 같다고 했지. 넌 날 못 죽여. 날 죽이면 우리 모두가 죽으니까."
"내가 최후의 타임로드라는 걸 알아?"
"오, 물론이지."

- "어디 보자. 너는 조폐국에서 갓 만든 돈을 가져다가 쓴 다음에 잠시 후에 돌려놓지. 시간을 이용해서 재활용하는 거야. 그리고 가면은... 확신의 장을 증폭시켜 주는 거겠지. 한 나라의 지도자가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거라면 사람들이 기꺼이 팔려고 할 테니까. 결국 넌 모든 집을 자신한테 팔게 했어. 인간들을 죽일 건가?" 
"그럴 필요 없어. 그들을 위해 예약을 해 둘 거거든. 그린란드, 시베리아, 남극... 그래도 결국은 멸종할 거야. 고작 몇천 명이 살 수 있는 자원도 없는 곳에서 수십억 명이 살아야 할 테니까. 물론...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닐 거야."

 

- "도착했다." 킨이 말했다. 에이미 폰드의 가면은 그냥 아무렇게나 그린 생기 없는 여자 얼굴에 불과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의 시작점에 왔다. 하지만 난 다른 방법을 제안할 준비가 되어 있어. 내가 해결책을 찾아줄 수 있다. 너희 모두에게."
"문을 열어라." 킨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 닥터는 문을 열었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그를 휘청거리게 했다.
킨은 문가에 서 있었다. "어둡구나."
"모든 것의 시작점이라니까. 빛이 있기 전이야."


- "내가 너를 저 텅 빈 공간으로 데려가면 넌 몇 시냐고 묻는 거야. 그러면 내가 나에게, 너에게, 온 피조물에게 말할 것이다. 킨이 지배하고 차지하고 침략할 시간이다. 내가 우주의 유일한 존재가 되고 우주가 내 것이고 내가 끝없이 우주를 먹어 치울 시간이다. 킨이 모든 시간을 통해 종말 없는 세상이자 우주의 최초이자 마지막 지배자가 될 시간이다."
"나라면 그러지 않을 거야. 내가 너라면 아직 늦지 않았어. 생각을 바꿔."

킨은 에이미 폰드의 가면을 타디스의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밖으로, 텅 빈 공간으로 나갔다.
"닥터." 그의 얼굴에는 무수히 많은 구더기가 꿈틀거렸다. "몇 시냐고 물어봐라."

- "그것보다 대답을 더 잘할 수 있는데. 지금이 어떤 시간인지 정확하게 말해 줄 수 있어. 지금은 무의 시간이야. 빅뱅 이전의 마이크로 초, 우린 태초의 시간이 아니라 태초 이전에 와 있어. 타임로드는 대학살을 좋아하지 않았어. 나도 그걸 좋아하지 않아. 결국 가능성을 죽이는 거거든. 언젠가 착한 달렉이 나온다면? 만약... 공간이 크지만 우주는 더 커. 너와 네 종족이 살 만한 행성을 찾도록 도와줬을 거야. 하지만 폴리라는 소녀가 일기장을 남겼어. 넌 그 소녀를 죽였고 실수한 거야."
"넌 그 앨 알지도 못하잖아." 텅 빈 공간 속에서 킨이 말했다.
"어린애였어. 세상 모든 아이처럼 순수한 가능성 그 자체지. 난 나에게 뭐가 필요한지 알아."

 

- "문자 그대로 넌 시간의 밖에 있다. 시간은 빅뱅이 일어나야만 시작하거든. 시간 속에서 사는 존재가 시간으로부터 제거된다면... 네 존재는 아예 지워지는 거야."
킨은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모든 시간과 공간이 원자보다도 작은 하나의 작은 입자이고 마이크로 초가 지나기 전까지, 그 입자가 폭발하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 무엇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킨은 마이크로 초가 아직 흐르지 않은 쪽에 와 있었다.
시간으로부터 고립되어 버린 킨의 나머지 모든 일부분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홀로 남은 그것은 나머지 모든 개체가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 태초에, 태초 전에는 단어가 있었다. 그 단어는 바로 "닥터!"였다.

- 하지만 문은 닫혔고 타디스는 사라져 버렸다.
킨은 천지 창조 이전의 텅 빈 공간에 홀로 남겨졌다.
영원히 홀로 그 순간에 머물러야 한다. 시간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 그는 시간의 가닥이 꼬이고 다시 꼬이는 걸 느꼈다. 시간은 무척 복잡하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이 정말로 전부 일어난 것은 아니다. 타임로드들만이 이해하는 사실이지만 뭐라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 "안녕. 네가 폴리구나. 난 에이미 폰드를 찾고 있단다."
갈래머리의 소녀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닥터를 쳐다보았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난 무척 똑똑하거든." 닥터는 진지했다.  

 

- <낫띵 어클락 Nothing O'Clock>

 


- 우리는 여름 저녁에 경사가 완만한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벌써 8시 30분이 지난 시각이었지만 아직 오후 중반 같았다. 하늘은 파랗고 태양은 지평선에 낮게 걸려 구름을 황금색과 연어 살색, 자줏빛 회색으로 물들였다.  

 

- "그래서 어떻게 끝나죠?" 내가 가이드에게 물었다.
"끝나지 않아."
"하지만 없어졌다면서요. 그 미궁 말이에요."

- 내가 달의 미궁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전국의 흥미로운 장소를 알려 주는 온라인 웹사이트의 작은 글씨로 된 설명을 통해서였다. 나는 특이한 지역명소를 좋아한다. 조잡하고 인간의 손을 거친 것일수록 더 관심이 간다. 왜 그런 것들에 끌리는지는 모르겠다. 돌이 아닌 자동차나 노란 스쿨 버스로 만든 스톤헨지, 폴리스티렌으로 만든 거대한 치즈 덩어리 모형, 시멘트 가루가 겨지는 가짜 표시가 심하게 나는 공룡 같은 것들에 말이다.

 

- "달이 어두운 시기에는 아무도 미궁을 걷지 않았나요?"
"그런 사람들도 있긴 했지. 하지만 우리 같진 않았어. 어린 녀석들이 달이 어두운 날에 손전등을 가져와서 미궁에 들어갔으니까. 서로 놀래키는 걸 좋아하는 고약한 녀석들이야. 그 녀석들한테는 1년 내내 핼러윈이었지. 그런 애들은 무서운 걸 좋아했어. 고문기술자를 봤다는 애들도 있었어."

"어떤 고문기술자인가요?" 그 단어는 나를 놀라게 했다. 아무래도 대화에서 자주 쓰는 단어는 아니니까.
"말 그대로 사람들을 고문하는 자들이겠지. 본 적은 없어."

- 언덕 위에서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코를 킁킁거려 보았지만 여름날 저녁에 어울리지 않는 로즈메리 타는 냄새도, 재 냄새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치자나무 냄새는 났다.

 

- "달이 어두울 때 미궁에 가는 건 어린애들뿐이었어. 초승달이 뜨면 좀 더 어린애들이 부모랑 같이 왔지. 부모가 애들이랑 같이 미로의 중앙까지 걸어간 다음에, 부모가 초승달을 가리키면서 하늘에 크고 노란 미소가 뜬 것 같다고 말하는 거야. 로물루스와 레무스인지 애들이 잘 아는 거 있잖아. 그럼 아이들은 웃으면서 달을 향해 손을 흔들어. 마치 하늘의 달을 가져와 얼굴에 갖다 대려는 듯. 달이 차오르면 커플들이 나와. 막 사귀는 젊은 커플이나 설레던 시절은 머나먼 과거가 되어 버리고 이제 너무 익숙해진 오래된 커플." 노인은 지팡이에 몸을 깊숙이 갖다 댔다. "하지만 열정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 사라질 수가 없어. 깊은 곳에 숨어 있겠지. 머리는 잊어도 입은, 손가락은 기억하지."

"커플들도 손전등을 가져갔나요?"
"가져갈 때도 있고 안 가져갈 때도 있고. 달이 구름에 가려지지 않은 밤이 가장 인기가 많았어. 그냥 미궁을 걸을 수 있으니까. 매일, 아니 밤마다 달빛이 환해지고 어느새 모두가 나와 미궁을 걷고 있었지. 그런 밤은 정말 아름다웠다네. 사람들은 자네가 차를 세운 저 아래에 차를 세워 놓고 걸어서 언덕을 올라왔지. 누구나 걸어갔어. 휠체어를 탄 사람이나 부모가 자식을 안고 가는경우를 제외하고. 언덕 꼭대기에 올라간 후엔 애무 좀 하고 미로를 걷지. 미로 안에는 쉬어갈 수 있는 벤치도 있거든. 거기서 또 멈추고 애무하고, 젊은 커플만 그러는 게 아니라 나이 든 커플도 그랬다니까. 서로 살을 맞대는 거야. 생울타리 반대쪽에선 가끔 소리도 들렸어. 동물 같은 소리가 들리면 눈치껏 걸음을 늦추거나 다른 벤치가 있는지 살펴보거나 했지. 요즘은 이곳에 자주 오지 않지만 어쩌다 오면 예전보다 훨씬 그 시절을 음미하게 되는구먼. 달빛 아래에서 살에 닿는 입술 말이야."

 

- "달의 미궁이 불타 없어지기 전까지 얼마나 그 자리에 있었던 건가요? 그 집이 지어지기 전부터 있었나요, 아니면 그 후인가요?"
가이드 노인이 일축했다. "전이라고도 하고 후라고도 하고 왔다 갔다 해. 미노스의 미궁도 대단하지만 이 미궁하고는 비교가 안 됐지. 미노타우로스는 외롭고 겁에 질리고 굶주린 뿔 달린 사내가 헤매는 터널 같은 것에 불과하잖아. 사실은 황소 인간도 아니었다네. 알고 있나?"
"그걸 어떻게 아시죠?"
"이빨. 소는 반추동물이야. 고기를 먹지 않아. 미노타우로스는 고기를 먹었지."
"그건 생각을 못 했네요."
"다들 그래." 

 

- 언덕의 경사가 더 심해졌다.
고문기술자는 없어, 이제는.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니다.

 

- "미궁을 이루는 덤불이 얼마나 높았나요? 진짜 생울타리였나요?"
"진짜 덤불이었어. 필요한 만큼 높았다네."

"이 동네 로즈메리가 얼마나 높이 자라는지 모르겠네요." 정말이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으니까.
"이 지역은 겨울에 포근해. 로즈메리가 잘 자라지."
"미궁을 태운 이유가 정확히 뭡니까?"
노인이 잠시 머뭇거린 후 말했다. "세상 만물이 어떻게 거짓말을 하는지 언덕 꼭대기에 도착하면 알게 될 걸세."
"어떻게 거짓말을 하는데요?"
"올라가 보면 알아."

 

- "달이 이지러지면 사람들은 사랑으로 달의 미궁을 걸었어." 가이드 노인이 말했다. "달이 차오르면 사랑이 아니라 욕망으로 걸었지. 그 차이를 설명해 줘야겠나? 양과 염소의 차이를?"
"안 해 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때론 병자들도 미궁을 찾았어. 다치거나 불구가 된 사람들도 왔지. 휠체어에 타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안긴 채 미궁을 걸어야 하는 이들도 있었고 말이야. 하지만 미궁에서 어느 길로 갈지는 안아 주거나 휠체어를 밀어 주는 사람이 아니라 당사자가 직접 선택해야 했지. 자기가 직접.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그런 사람들을 병신이라고 불렀지. 요즘은 그 말을 쓰지 않아서 다행이야. 사랑에 속태우는 사람들도 미궁을 찾았고 혼자라 외로운 사람들도 왔지. 정신병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손에 끌려오기도 했고. 달이 광기를 일으킨다고 하니 광기를 고칠 수 있는 것도 달밖에 없지 않겠나."

 

- "미궁을 이루는 덤불을 다 태워 버린 게 아니었나요?" 내가 말했다.

"태웠지. 이제 그 덤불은 생울타리는 아니지만 철이 되면 다시 자란다네. 절대 죽지 않는 것들도 있거든. 로즈메리는 강하지."

 

- "왜 로즈메리죠?" 내가 물었다.

"로즈메리는 기억하기 위함이야."

 

- 버터 같은 노란색의 달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빨리 떠오르고 있었다. 하늘의 창백한 유령 같은 얼굴의 달은 침착하고 자비로워 보였고 색깔은 백골처럼 하얬다. 

"미궁 밖으로 안전하게 나갈 기회는 항상 있어. 보름달이 뜬 밤에도. 우선 미궁의 중앙으로 가야 해. 거기에 분수가 있는데 금방 찾을 거야. 모를 수가 없지. 그다음에는 미궁의 중앙에서 다시 밖으로 나가는 거야. 들어갈 때나 나올 때나 길을 잘못 들 수도 없고 막다른 골목도 없고 실수도 없어. 지금은 나무 덤불의 키가 컸던 예전보다 미궁에서 길을 찾기가 쉬울 거야. 미궁이 모든 병을 치료해 준다네. 물론 뛰어야 할 거야."

 

- 뭔가가 있었다. 네모 주변을 따라 조용히 걷는 까만 그림자. 크기는 커다란 개만 했지만 움직임은 개와 달랐다. 

그것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달을 향해 즐겁고 유쾌한 듯 울부짖었다. 

 

- 미궁에는 패턴이 있었다.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위에서 달이 빛났다. 낮처럼 환했다. 과거에 그녀는 항상 내 선물을 받아 주었다. 그러니 끝에 나를 속이지 않을 것이다. 

"도망쳐."

 

- <달의 미궁 A Lunar Labyrinth>

 

 

- "'그리고 우린 춤출 거예요. 춤추는 거예요, 어머니...'"

 

- "나는 '크고 좋은 집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라고 그랬어. '말만 번드르르한 바보로구나.' 그리고 아들에게 바다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그 애 아버지 얘길 해 줬어. 누군가는 죽어서 바다에 묻혔다고도 하고 누군가는 암스테르담에서 매춘굴을 한다고도 하는 그이 얘기를. 이러나저러나 똑같지. 바다가 그이를 데려갔으니까."

 

- "아들은 열두 살 때 집을 나갔어. 부두로 달려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배를 탔대. 아조레스 제도의 플로레스 섬으로 가는 배였다고 하더라고. 왠지 불길한 배들이 있어. 재수 없는 배. 재앙이 날 때마다 페인트칠을 다시하고 이름을 바꿔서 부주의한 사람들을 속이지."

 

- "뱃사람들은 미신을 잘 믿어. 소문은 퍼지기 마련이지. 아들이 탄 배는 선박주의 지시에 따라 선장이 보험회사를 속이려고 일부러 좌초시켰고, 새것처럼 고친 다음에는 해적들에게 잡혔어. 그다음에는 이불을 잔뜩 싣고 떠났는데 전염병이 돌아 선원들이 다 죽고 세 명만 해리치항에 도착했어. 우리 아들은 폭풍 까마귀 배에 몸을 실었지. 드디어 집으로 향하는 항해의 마지막 구간이었어. 아직 어려서 제 아버지처럼 여자나 술에 흥청망청 돈을 쓰지 않고 그동안 번 돈을 그대로 들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폭풍우가 닥친 거야. 아들은 구명보트에 탄 사람 중에서 제일 어렸어. 제비뽑기로 공평하게 정했다지만 난 그 말을 믿지 않아. 아들이 제일 어렸으니까."

 

- "그에게 진실을 듣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드는 밤도 있어. 차라리 거짓말을 해 줬더라면."

 

- "그 사람은 내 남편하고도 나하고도 아는 사이였거든. 사실 나하고는 남편 모르게 은밀한 관계였지만. 육지로 돌아온 그들은 하나같이 내 아들이 바다가 폭풍우에 가라앉았을 때 실종됐다고 했는데, 그가 한때 나와의 정을 봐서 챙겨 둔 뼈를 주더군.

내가 그에게 말했어. '당신 정말 끔찍한 짓을 했군요, 잭. 당신은 당신 아들을 잡아먹은 거예요.'

그날 밤, 바다가 그도 데려갔어. 잭은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바다로 걸어갔어. 멈추지 않고 계속.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 당신의 얼굴에 꼭 누군가의 눈물처럼 빗물이 흐른다.

 

- <태양이 없는 바다로 Down to a Sunless Sea>



- 이 작품의 주인공 카라바스 후작은 작가의 대표작 <네버웨어>의 등장인물이며, 같은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는 별개의 작품이다.

 

- 그것은 아름다웠다. 훌륭하고 특별했다. 카라바스 후작이 지하 세계 깊은 곳에 있는, 물이 점점 차오르는 원형의 방 중앙 기둥에 쇠사슬로 묶여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코트는 30개의 주머니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7개는 잘 보이고 19개는 숨겨져 있었다. 나머지 4개는 가끔 후작마저도 헤맬 정도였으니, 다른 이는 절대 찾을 수 없었다. 한때 그는 (기둥과 원형의 방, 점점 차오르는 물 얘기는 조금 이따가 하기로 하자) 빅토리아에게 직접 돋보기를 받았다. 

 

- 사실 '받았다'라는 표현은 약간 과장처럼 보일 수도 있다. 돋보기는 매우 놀라운 물건이었다. 화려한 장식, 금박, 줄, 아기 천사와 괴물 석상. 그 렌즈는 무엇이든 투명하게 보여 주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후작은 약속한 대가를 충분히 지불받지 못했다는생각에 그 돋보기를 빅토리아에게서 슬쩍했는데, 애초에 그녀가 그것을 어떻게 얻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 어쨌든 세상에 '엘리펀트'는 단 하나뿐이고 엘리펀트의 일기장을 훔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기장을 훔쳐 낸다고 해도 엘리펀트와 캐슬로부터 탈출하는 것 역시 만만치 않았고. 후작은 빅토리아의 돋보기를 슬쩍해서 절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4개의 주머니 중 하나에 넣었다.

 

- 코트에는 특별한 주머니 말고도 완전 멋진 소매와 인상적인 칼라가 있었고 뒤쪽이 트여 있었다. 소재는 가죽의 일종으로 보였고 색깔은 비 내린 한밤중의 거리 같았다. 게다가 이 모든 것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타일이 끝내줬다는 것이다.

 

- 옷이 사람을 만든다고들 하지만 대개는 틀린 말이다. 하지만 나중에 후작이 되는 어린 소년은 처음 그 코트를 입고 거울 앞에 섰을 때 허리를 꼿꼿하게 폈고 자세가 바뀌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았을 때 그는 알 수 있었다. 이런 코트를 입는 사람이라면 평범한 어린애나 좀도둑, 부탁을 거래하는 자가 아니리라는 것을. 당시에는 너무 컸지만 그 코트를 입은 소년은 거울을 보고 미소 지었다. 언젠가 책에서 본 적 있는 뒷다리로 선 방앗간 고양이가 떠올랐다. 멋진 코트를 입고 커다란 장화를 신은 위풍당당한 고양이. 그래서 소년은 자신을 카라바스 후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 코트를 입을 수 있는 사람은 카라바스 후작뿐일 것 같았다. 그때도 그 후에도 소년은 카라바스 후작을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해서 매번 달라지기 일쑤였다.

 

-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둘 다 서로를 좋아하고 둘 다 버섯의 몸이었다면 걱정할 게 전혀 없었겠죠. 그런데 아니에요. 그녀는 까마귀 사람이거든요. 가끔 그녀가 여기로 음식을 사 먹으러 오면 얘길 나누죠. 지금 내가 당신과 얘기하는 것처럼."
후작은 동정의 미소도 짓지 않았고 움찔 놀라지도 않았다. 그는 눈썹도 거의 꿈쩍하지 않았다.

"그런 사이인데 그녀가 그쪽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거군. 참 이상도 하네. 그래서 나더러 어떻게 해 달라는 거지?"
젊은 남자는 잿빛 손으로 더플코트의 깊숙한 주머니를 뒤졌다. 그가 꺼낸 것은 투명한 샌드위치 지퍼백에 든 편지 봉투였다.
"그녀에게 편지를 썼어요. 사실 편지보다는 시에 가까운데, 별로 시인 자질은 없지만 제 마음을 담았어요. 하지만 제가 주면 읽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러던 차에 당신을 보고... 만약 당신이 세련되고 멋들어진 말과 태도로 이 편지를 전해 준다면..." 그가 말꼬리를 흐렸다.

 

- 후작은 한숨을 쉬지 않으려고 애썼다. 버섯인 여자가 그의 앞에 금 간 플라스틱 접시를 놓았다. 바삭바삭한 갈색 토스트 위에 모락모락 김이 나는 그릴로 구운 버섯이 올려져 있었다. 후작은 버섯이 완전히 익혀졌는지 시험 삼아 찔러 보았다. 다행히 살아있는 포자는 없는 듯했지만, 지나칠 만큼 조심한다고 나쁠 것은 없다. 후자은 스스로 누군가와 공생하기엔 너무 이기적인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 "그녀가 편지를 읽지 않고 치워 버리지 않도록 옆에서 읽는 것까지 봐 주세요. 그리고 답장도 받아와 주세요."

후작은 청년을 쳐다보았다. 그의 목과 뺨에는 정말로 작은 버섯들이 싹 텄고 감지 않은 머리카락은 묵직했으며 전체적으로 폐가 비슷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얼굴을 가린 텁수룩한 머리 사이로 진지한 연한 파란색 눈동자가 빛났고 키도 컸으며 그렇게 매력 없어 보이진 않았다. 후작은 온몸을 잘 닦아 버섯의 흔적을 씻어 낸 그의 모습을 상상하며 허락했다. "편지를 샌드위치 지퍼백에 넣었어요. 도중에 물에 젖지 말라고요." 

 

- "원래 아름다움이란 건 다 제 눈의 안경이거든. 인상착의를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말했잖아요. 이름이 드루실라예요. 그 이름은 한 사람뿐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손등에 꼭 별처럼 생긴 붉은 반점이 있어요."
"이루어질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사랑이군. 버섯인이 까마귀 궁의 아가씨와 사랑에 빠지다니. 그녀가 과연 곰팡이와 버섯으로 가득한 눅눅한 지하실에서의 삶을 위해 현재의 삶을 포기할 거라고 생각하나?"
버섯인 청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도 날 사랑하게 될 거예요. 시를 읽고 나면." 그는 오른쪽 뺨에 자라난 자그만 큰갓버섯을 꺾었다. 테이블로 떨어진 버섯을 주워 손가락 사이에 넣고 계속 비틀었다. "그럼 거래하는 거죠?"
"좋아."

 

- 코트가 그리웠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멋진 깃털이 멋진 새를 만들지 않는다. 어릴 때 누군가 해 주었던 말이었다. 아무래도 형의 목소리 같았다. 목소리 자체를 잊어버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갈고리 지팡이. 하수구 사람들은 그의 코트를 산 사람이 갈고리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고 했다.

 

- 그는 생각에 잠겼다.
카라바스 후작은 자신의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위험을 감수하기 전에 반드시 계산을 해 보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두 번, 세 번 거듭 계산하고 확인했다.
이번에는 네 번째로 확인했다.

- 카라바스 후작은 사람을 믿지 않았다.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 데다가 유감스러운 전례를 남길 수도 있었다. 그는 친구를 믿지 않았고 가끔 사귀는 연인도 믿지 않았으며 고용주들은 더더욱 믿지 않았다. 그가 믿는 사람은 말로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고 그 누구보다 한발 빠르게 생각하고 전략을 세우는 멋들어진 코트를 입은 멋들어진 사내, 즉 카라바스 후작뿐이었다. 갈고리 모양의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사람은 딱 두 가지 유형뿐이다. 주교 아니면 양치기. 비숍스게이트의 갈고리 지팡이는 기능성이 아니라 장식용이고 상징적인 의미였다. 그리고 주교들은 코트가 필요하지 않다. 주교들이 입는 깔끔한 하얀색 사제복이 필요하지.

- 후작은 주교들이 무섭지 않았다. 하수구 사람들이 주교들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셰퍼드 부시에 사는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자신의 코트를 입고 최상의 컨디션에 옆에서 도와줄 작은 규모의 군대까지 있더라도, 후작은 되도록 양치기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비숍스게이트에 방문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며칠 동안 그의 코트가 셰퍼드 부시에 없을 거라는 기분 좋은 상상도 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크게 한숨을 쉬고는 셰퍼드 부시로 데려다주겠다고 나설 만한 인증 받은 가이드를 찾으러 가이드 펜으로 갔다. 

 

- 런던 지하 세계의 길은 런던 지상 세계의 길과 다르다. 지하 세계의 길은 지도에 의지하지 않는 것만큼 믿음이나 의견, 전통 따위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카라바스와 닙스는 오래된 하얀 돌을 조각해 만든 커다란 아치형 터널을 걸었다. 발걸음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카라바스 후작 맞죠? 당신 유명하잖아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방법을 모르지 않을 텐데 정확히 무슨 일로 가이드가 필요한 거죠?"

"머리 하나보다는 둘이 나으니까. 눈도 둘보단 넷이 낫고."

"전에는 되게 세련된 코트를 입고 있지 않았나요?"

"그래요, 그랬지."

"그 코트는 어떻게 됐어요?"

후작은 잠시 말이 없었다.

"생각이 바뀌었소. 셰퍼드 부시 먼저 갑시다." 

 

- "날 알면 그런 소리 못하지. 나에겐 그냥 보통 수준의 반응이다. 널 찾기 위한 다른 방법도 많이 가지고 있었어."

 

- "자비를 구걸해라."
그거야 간단한 일이었다. "자비를! 이렇게 애원합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자비는 모든 선물 중에서 최고의 선물입니다. 영지의 주인이신 고귀한 엘리펀트 님, 엘리펀트 님의 발가락에 묻은 때만도 못한 저에게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지금 그거 비꼬는 말처럼 들리는 건 알고 있겠지?" 엘리펀트가 말했다. 

"아뇨.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입니다."
"비명을 질러라." 엘리펀트가 말했다.
후작은 매우 큰 소리로 오랫동안 비명을 질렀다. 최근에 목을 베인 적 있어서 쉽지 않았지만 최대한 세게, 최대한 애처롭게 비명을 질렀다.
"넌 어째 비명마저 비꼬는 걸로 들리는구나." 엘리펀트가 말했다.

 

- "물이 넘쳐 흐를 거야. 나도 다 알아봤지. 카라바스, 넌 네 삶을 잘 숨기더구나. 우리가 처음 만난 이후로 지금까지 오랫동안 넌 그래 왔어. 네 삶이 어딘가에 있는 한 그 무엇도 시도할 의미가 없더군. 런던 지하 세계에 내 사람들이 쫙 깔렸다. 그중에는 네가 같이 밥을 먹은 사람, 같이 잔 사람, 같이 웃은 사람, 빅벤 시계탑 아래에서 같이 발가벗은 사람도 있지. 하지만 그걸 계속 밀고 나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어. 네 삶이 신중하게 위험을 벗어난 곳에 자리한 이상. 그러다 지난주에 지하 세계에서 소식이 들려왔지. 네 삶이 상자에서 나왔다고. 그래서 난 캐슬의 자유를 주겠다고 발표했지. 나에게 제일 처음..."

 

- 그는 기둥에 털썩 기댔다. 이제 그는 죽을 것이다. 진짜 마지막 죽음이다. 코트가 생각났다. 
그때 누군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조용히!"
무언가가 그의 손목을 당기더니 풀어 주었다. 손목이 어찌나 세게 묶여 있었던지 죽었던 손목이 되살아난 느낌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뭐야?"
그가 마주한 얼굴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얼굴이었다. 매우 인상적인 미소, 진실하고 모험심 가득한 눈동자.

"발목." 남자가 조금 전보다도 더 인상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카라바스 후작은 충격에 빠지지 않았다. 그가 한쪽 다리를 들자 남자가 몸을 기울여 철사를 움직이더니 발목 수갑을 풀었다.
"곤경에 빠졌다고 해서 말이야." 남자가 말했다. 그의 피부는 후작과 똑같은 짙은 색이었다. 남자는 후작보다 2센티미터 정도밖에 더 크지 않았지만 누구를 만나던 더 커 보일 것처럼 당당한 자세였다.

"아니, 아무 일 없어. 괜찮아." 후작이 말했다.

"괜찮지. 내가 방금 구해줬으니까."
후작은 그 말을 무시했다.

 

- 남자는 카라바스 후작보다 키가 아주 조금 더 컸고 외모도 닮았다. 물론 후작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남자가 아주 조금 더 매력적이라고 말할 것도 같았다. "설마 내가 동생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 그냥 내버려 둘 것 같아?" 
 
 - "배수구야." 

카라바스가 저항할 틈도 없이 형은 그를 잡아서 바닥의 구멍으로 떨어뜨렸다. 놀이공원에 이런 놀이기구가 있을 거야. 카라바스 후작은 생각했다. 지상 세계에서는 이런 놀이기구를 돈 주고 타겠지. 죽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다면 말이다. 
 

- 그는 정말로 궁금한 걸 물었다. "신나하면서 내려온 거야?"
"당연하지! 넌 아니야?"
카라바스는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요즘은 무슨 이름을 사용해?"
"똑같지. 난 안 바꿔."
"본명도 아니잖아, 페레그린."
"효과적이야. 내 영역과 의도를 표시해 주는 이름이니까. 넌 여전히 후작이라고 하고 다니냐?"
"난 후작이야.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후작은 이렇게 말했지만 물에 빠진 생쥐 같은 몰골처럼 목소리 역시 자신감이 부족했다. 자신이 초라하고 바보같이 느껴졌다.
"네 선택이지. 난 이만 간다. 이제 넌 내가 필요 없으니까 몸조심해. 나한테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형이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사실이 후작의 가슴을 강하게 찔렀다.
카라바스 후작은 자신이 싫어졌다.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 페레그린."

- "그래." 페레그린은 씩 웃으며 강아지처럼 몸을 털어 사방에 물을 튀기더니 어둠으로 스르르 들어가 사라졌다.

 

- 후작은 시장에서부터 신경 쓰였던 일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버섯 청년은 왜 하필 자신에게 드루실라의 편지를 전해 달라고 한 것일까? 까마귀 궁에 살고 손에 별이 새겨진 여자가 그곳의 삶을 포기하고 버섯인을 사랑하게 할수 있는 연애편지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의심이 몰려왔다. 편하거나 너그러운 마음이 드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것보다 당장 중요한 문제가 있다. 모든 게 잠잠해질 때까지 숨어서 조용히 지내면 되겠지만 코트 생각을 해야 한다. 게다가 그 누구도 아닌 형이 목숨을 구해 주었다! 평소 같으면 절대로 도움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새 코트는 쉽게 구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그의 코트가 아니리라. 

 

- 그의 코트는 양치기가 갖고 있었다.

- 카라바스 후작은 언제나 계획을 세워 놓고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대비책 또한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계획들 아래에는 진짜 계획이 있기 마련이었다. 물론 그것은 그 자신이 알고 싶지 않은 계획이었다. 원래 계획과 대비책이 잘못되었을 때를 위한 거니까.
하지만 지금 그는 계획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속이 쓰리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좀 곤란해지면 가차 없이 버릴 수 있는 평범하고 지루하고 명백한 계획마저도 없었다. 그에겐 욕망만이 있었다. 그가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식량이나 사랑, 안전의 욕망에 좌우되는 것처럼, 지금 오로지 그 욕망이 그를 지배했다.
계획은 없지만 코트를 되찾겠다는 욕망만 있었다.

- 형이 구해 주었다는 사실이 싫어 죽을 지경이었다. 

- 원래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 갈 때는 모델이 있는 법이다. 저렇게 되고 싶어서 목표로 삼는 대상이나 절대로 저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만드는 사람 말이다. 후작이 어릴 때 절대로 저렇게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절대로 페레그린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저렇게 되고 싶다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우아하고 미묘하고 탁월해지고 싶었다. 무엇보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페레그린처럼 말이다.

 

- 문제는 후작이 듣기로 양치기들은 절대로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도망 중이던 전직 양치기에게 들은 말이니확실했다. 후작은 그 양치기가 티번 강을 건너 자유로워지도록 도와주었다. 그 후 양치기는, 강가에서 명령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대기 중이던 로마 군단을 즐겁게 해 주는 광대로 짧게나마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 양치기가 말해 주기를, 양치기들은 상대가 절대 스스로 행동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상대의 본능과 욕망이 더 커지도록 밀어붙여 매우 자연스럽게 행동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결국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도록 조종한다고 했다. 

- 그러나 그는 곧 양치기들에 대한 그 사실을 그냥 잊어버렸다. 혼자인 게 외로웠기 때문이었다.
후작은 이제야 자신이 혼자임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 놀랍게도 그는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이 몇 명 더 있다는 사실에 무척 기뻤다.
"그쪽이 여기 있어서 좋네요." 한 명이 소리쳤다.
"그쪽이 여기 있어서 좋네요." 또 다른 사람이 외쳤다.
"나도 내가 여기 있어서 좋네요." 카라바스가 말했다.

그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좋았다. 숫자에는 안전함이 들어 있다.

- "정말 그렇습니다. 함께여서 좋군요." 옆에 있는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이 사람은 어딘지 낯이 익었다. 귀가 부채처럼 컸고 코가 회색빛 도는 녹색 뱀처럼 두꺼웠다. 예전에 만난 적 있는 사람인지 후작이 열심히 기억해내려고 할 때 끝부분이 갈고리 모양인 지팡이를 든 남자가 그의 어깨를 살짝쳤다. "보조가 안 맞으면 안 되지. 그렇지?"

남자가 당연한 말을 했다. 당연하지. 후작은 이렇게 생각하며 좀 더 속도를 내어 다시 발걸음을 맞추었다.

 

- "발걸음이 안 맞으면 마음도 안 맞죠." 후작도 소리 내어 말했다. 이렇게 간단하고 기본적인 걸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의아했다. 하지만 저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의아한 마음도 막연하게나마 있었다.

 

-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친구들과 함께여서 기분이 좋았다. 그곳에서는 시간이 이상하게 흘렀지만 후작과 회색빛 초록색 얼굴에 코가 긴 친구는 정말 중요한 임무를 받았다. 원래의 쓸모가 다하고 재활용도 불가능해져서 움직이거나 보탬이 될 수 없는 구성원들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머리카락이나 지방 같은 것밖에 남지 않은 것들을 끌고 가 구덩이로 던졌다. 근무 시간이 길고 일도 고되고 지저분했지만 두 사람은 보조를 맞추며 함께 일했다.

- 자부심을 느끼며 일한 지 며칠 후 후작은 뭔가 거슬리는 것을 한 가지 발견했다. 그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듯한 누군가가 있었다. 낯선 자가 속삭였다. "난 널 따라왔어. 넌 당연히 원치 않았을 거야. 하지만 싫어도 꼭 필요한 일이 있는 법이야."
후작은 낯선 자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에게 탈출 계획이 있어. 내가 널 깨울 수만 있다면 곧바로 실행할 수 있어. 빨리 깨어나." 낯선 자가 말했다.
그러나 후작은 깨어 있었다. 그는 이 낯선 자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왜 내가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후작은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할 일이 많았다.

- 후작은 이제 그의 뒤에 서 있는 낯선 자를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뭔가가 그의 입을 철썩 때리고 두 손이 뒤로 묶였다. 그는 무척 불쾌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무리와 보조가 끊어진 느낌이었고 불평하면서 친구를 부르고 싶었지만 입이 딱 붙어 버려서 의미 없는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나야." 뒤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페레그린, 네 형. 넌 지금 양치기들에게 잡혀 있어. 여기서 도망쳐야 해. 이런."
그때 개 짖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퍼졌다. 점점 가까워졌다. 고음의 깽깽소리가 갑자기 의기양양한 울음소리로 바뀌었고 그에 답하듯 근처에서도 덩달아 길게 짖었다.

 

- 후작은 그들이 자신을 발견해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랐다. 뭔가 실수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는 무리와 보조를 맞추고 싶은데 지금 보조에서 벗어났고 본의 아니게 희생자가 되었다. 그는 그저 일하고 싶을 뿐이었다. 

 

- "영주의 문!" 페레그린이 중얼거렸다. 그들은 정확히 말해서 사람이 아닌, 사람 모양의 그림자들에 둘러싸였다. 뾰족한 얼굴에 털을 둘렀고 잔뜩 들뜬 듯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 "그가 벌써 여기에 있다니. 벌써 우리의 일원으로 말이야. 다름 아닌 카라바스 후작이! 페레그린, 난 예전부터 네 혀를 찢고 네가 보는 앞에서 손가락을 갈아 버리고 싶었지. 하지만 네 마지막 순간에 친동생이 우리 일원이 되고 네 파멸의 도구로 전락한 모습을 보는 게 더 즐거운 것 같군."
양치기는 잘 먹은 듯 포동포동했고 옷차림도 근사했다. 머리카락은 모래색깔이 도는 회색에 표정은 잔뜩 지쳐 보였다. 꽉 끼긴 했지만 코트가 무척 멋있었다. 코트는 비 내린 한밤중의 거리를 연상시키는 색깔이었다.

- 후작은 자신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거대한 것이 분노임을 알아차렸다. 분노는 후작의 안에서 산불처럼 순식간에 번지며 새빨간 불꽃으로 모든 것을 태웠다. 
코트. 그 코트는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손 내밀면 만질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 있었다.
그 코트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의 것이었다.

- 카라바스 후작은 자신이 깨어났다는 사실을 표시 내지 않았다. 정신이 돌아왔다는 걸 드러내는 건 큰 실수가 될 터였다. 후작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가 생각해 낸 아이디어는 그가 지금 있는 방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지금 그가 양치기와 그의 개들보다 유리한 점은 딱 하나, 자신이 깨어났고 스스로 생각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저들이 모른다는 것뿐이었다.

 

- 양치기는 나무 갈고리 지팡이를 들고 끈질기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세 명의 남자가 뒤를 따랐다. 그중 한 명은 코끼리 머리였고 한 명은 큰 키에 말도 안 될 정도로 미남이었으며 마지막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코트를 입고 있었다. 코트는 그에게 잘 맞았고 한밤중의 비 내린 거리를 연상시키는 색깔이었다.

 

- 셰퍼드 부시에서는 양치기와 그의 양 떼가 매서운 양치기 개들과 함께(물론 그들은 한때 인간이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양치기와 양치기 개 세 마리가 세 명의 양 떼를 이끌고 셰퍼드 부시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이들은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을 본 양 떼의 일원들은 그냥 평소 하던 일을 할 뿐이었다. 양치기들의 영향력이 약해졌다고 느꼈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그저 다른 양치기가 와서 자신들을 포식자와 세상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 주기만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혼자 남는 것은 너무나도 무서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셰퍼드 부시의 경계를 지나는 모습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계속 걸었다. 

- 후작은 지금 저 네 사람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버섯인들에게로 가서 버섯을 다시 한번 맛보고, 자기들 안에 살게 하고, 최선을 다해 버섯에 충성하고 싶은 생각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충성의 대가로 버섯은 저들의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전부 고쳐 주고 내면을 훨씬 행복하고 흥미진진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내가 그냥 죽였어야 했어." 물속을 걸어가는 양치기와 양치기 개들을 보고 엘리펀트가 말했다.
"그래봤자 아무 소용 없어. 복수의 의미도 없고. 우릴 잡아뒀던 사람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으니까." 후작이 말했다.

 

- 후작은 자신의 운을 과신하고 위험을 무릅쓴 것이야말로 그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니 페레그린은 또다시 신비롭고도 짜증나게 그림자로 슬쩍 들어가 사라진 뒤였다. 작별 인사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후작은 말없이 떠나는 사람들이 정말 싫었다.

 

- 그는 엘리펀트에게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코트가 그의 인사를 더욱더 멋지고 완벽하게 만들어 주었다. 카라바스 후작, 그가 누구이든 간에 그건 그만이 할 수 있는 인사였다. 

 

- "그나저나 코트가 진짜 멋있어요. 저도 그런 코트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전생에요."
"분명 그랬을 것 같군." 카라바스 후작은 남자에게 들은 말에 만족스러워하며 구운 버섯을 잘랐다. "하지만 이 코트는 확실히 내 것이지."

 

- 후작은 시장을 나와 계단을 내려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지나쳤고 흔하지 않은 우아함을 지닌 젊은 여자를 보고 멈추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라파엘 전파의 미녀처럼 긴 오렌지색 머리에 옆얼굴이 납작했고 한 손에는 손등에 오각형 별 모양의 반점이 있었다. 다른 손으로는 크고 쭈글쭈글한 올빼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올빼미는 특이하게도 연한 파란색의 날카로운 눈으로 세상을 불편하게 노려보았다.  
후작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어색하게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후작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을 막 깨달은 것처럼 얼른 고개를 돌렸다. 

 

- 후작은 상냥한 얼굴로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마저 계단을 내려갔다. 드루실라는 서둘러 그를 따라갔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카라바스 후작은 그녀보다 먼저 계단 맨 아래에 이르렀다. 그는 잠시 멈춰 생각에 잠겼다. 사람에 대해, 세상사에 대해, 뭐든 처음이 어렵다는 사실에 대해. 멋진 코트를 입은 그는 신비롭고도 짜증 나게 그림자로 슬쩍 들어가 사라졌다. 작별인사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 <후작은 어떻게 코트를 되찾았나 How the Marquis Got His Coat Back>


 
 - 이 작품의 주인공 섀도는 작가의 대표작 <신들의 전쟁>의 주인공
섀도와 동일 인물이며 같은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는 별개의 작품이다.

 

 

머리는 하나 혀는 10개

혀 하나가 튀어나와 빵을 집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먹이기 위해

- 옛날 수수께끼


- 술집 밖으로 장대 같은 비가 쏟아졌다. 섀도는 이곳이 술집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물론 안쪽에는 뒤편으로 술병이 진열된 작은 바가 있고 커다란 수도꼭지 같은 탭이 두어 개, 높은 테이블 몇 개,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냥 일반 가정집 방 같았다. 강아지들이 그런 인상을 더 심어 주었다. 섀도만 빼고 술집 손님들이 전부 개를 데리고 있는 것 같았다. 

 

- "견종이 뭔가요?" 섀도가 호기심에 물었다. 개는 그레이하운드처럼 생겼지만 그가 그동안 봐 왔던 그레이하운드보다 덩치가 작고 차분하고 광기도 덜하고 덜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러처(lurcher는 특히 그레이하운드를 교배시킨 '잡종견'을 말하지만 섀도는 알아듣지 못했다 - 역주])야."

술집 주인이 바 뒤쪽에서 나오며 말했다. 그는 자신이 마시려고 따른 맥주잔을 들고 있었다.

"최고의 개지. 밀렵꾼의 개. 빠르고 영리하고 치명적이고." 그는 고개를 숙여서 밤색과 흰색 얼룩무늬 개의 귀 뒤쪽을 긁어 주었다. 개는 다리를 쭉 뻗고서 주인이 귀를 긁어 주는 걸 즐겼다. 섀도는 별로 치명적으로 보이는 것 같진 않다고 말했다.

 

- 옆에 있던 남자가 손가락을 하나 치켜들고 유쾌하게 말했다. "이걸 알아야 해. 예전에는 순혈견을 키울 수 있는 사람이 법적으로 정해져 있었거든. 이 동네 사람들은 순혈견 말고 잡종견만 키울 수 있었지. 하지만 그레이하운드 잡종견은 족보 있는 개들보다 훨씬 빠르고 훌륭해." 그는 검지 끝으로 안경을 올렸다. 위는 좁고 아래가 넓은 삼각형 모양의 갈색 수염이 희끗희끗했다.
"모든 잡종견이 순혈견보다 뛰어나지." 여자가 말했다. "그래서 미국이 흥미로운 국가인 거야. 잡종들이 가득하잖아." 섀도는 그녀가 몇 살인지 좀처럼 감을 잡기 어려웠다. 머리는 백발이지만 왠지 젊어 보였다.

 

- "뭐 마실 건가?" 술집 주인이 물었다.
바 옆에는 '얼굴에 주먹이 날아가니' 손님들에게 라거를 주문하지 말라는 내용의 손글씨가 적힌 종이가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이 동네에서 제일 좋은 게 뭔가요?" 섀도는 이렇게 말하는 게 가장 지혜로운 일이라는 것을 깨우치고 있었다.
주인과 여자는 여러 현지 맥주와 사과주를 추천했다. 삼각형 수염 남자가 끼어들더니 '좋은 것'이란 단순히 악을 피하는 것이 아니고 그보다 훨씬 긍정적인 무언가,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껄껄 웃으면서 농담이라고, '선함'이 아니라 술에 관한 이야기임을 안다고 했다. 섀도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고 고개를 숙였다. 술집 주인 잡종견의 머리뒤쪽을 긁어 주었다.

 

-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죠?" 검은 머리 여자가 물었다.
"네,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 만약 섀도가 속마음을 드러내는 성격이라면, 아내가 어릴 때 개를 여러 마리 키웠었고, 개를 키우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그를 이따금 '강아지'라고 불렀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속마음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영국 사람들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상대의 속마음을 알고 싶어 하면서도 묻지 않는 것. 내면의 세계를 그냥 안쪽에 내버려 두는 것. 섀도의 아내는 죽은 지 3년이 넘었다. 

 

- "내 생각엔 사람은 누구나 개를 좋아하거나 고양이를 좋아하거나 둘 중 하나야. 그럼 자네는 고양이 쪽에 가까운가?" 삼각형 수염 남자가 말했다.

 

- 섀도는 바 쪽을 슬쩍 돌아보았다. 그를 쳐다보고 있던 검은 머리 여자가 시선이 마주치자 따뜻한 미소를 보냈다.

 

- 고양이는 갈색이었고 언뜻 힘줄과 고뇌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눈이 있어야 할 구멍에는 분노와 고통이 채워져 있었다. 가죽으로 변하기 전에 울부짖었는지 입은 활짝 벌어진 채였다.
"동물을 건물 벽에 넣는 관습은 집을 지을 때 벽에 산 아이들을 넣고 메우는 관습과 비슷하지." 뒤쪽에서 삼각형 수염 남자가 설명했다. "고양이 미라 하면 나는 이집트 부바스티스 바스테트 신전에서 발견된 고양이 미라가 떠올라. 고양이 미라가 어찌나 많았는지, 영국으로 보내면 그걸 갈아서 값싼 비료로 만든 다음 들판에 뿌렸지. 빅토리아 시대에는 그 미라로 물감도 만들었고 말이야. 아마 갈색이었을 거야."
"불행해 보이네요. 얼마나 오래된 건가요?" 섀도가 물었다.
술집 주인이 뺨을 긁적거렸다. "저게 들어 있던 벽이 1300년에서 1600년 사이에 세워졌을 거야. 교구 기록에 따르면, 1300년에는 여기에 아무것도 없었고 1600년에는 집 한 채가 있었지. 중간에 있던 건 없어졌고."

 

- [내 동족들이 걷는 곳에는 내 눈이 있지.]

섀도의 머릿속에서 숨결처럼 내뱉어진 목소리였다. 그는 잠깐 고양이 미라를 갈아서 거름을 뿌린 들판에 얼마나 기이한 곡식이 자라났을까 생각했다.

 

- "그들은 그를 오래된 집의 벽에 넣어 두었네." 올리라는 남자가 말했다. "그는 그곳에서 살고 그곳에서 죽었지. 아무도 웃지도 울지도 않았네. 건물을 안전하게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벽에 온갖 것들을 다 넣었지. 동물들, 때로는 아이들까지. 당연히 교회에서도 그랬고."

 

- 빗소리 때문에 큰 목소리로 말했다. "들판을 건너가면 되는데 오늘은 질척 거릴 테니까 슉스 레인으로 갈 거야. 저 나무는 옛날에 지벳 교수대(목을 걸어 처형하는 교수대와는 차이가 있다. 우리처럼 생긴 모양으로 교수형 당한 시신을 넣어 전시하는 데 사용되었다 - 역주)였어." 그녀가 교차로에 있는 몸통이 엄청나게 굵은 플라타너스를 가리켰다. 어두운 밤에 몇 개 남지 않은 나뭇가지가 튀어나온 모습이 마치 뒤늦게 떠오른 생각처럼 보였다.
"모이라는 20대부터 이 동네에서 살았어. 난 8년 전쯤에 런던에서 왔고. 턴햄 그린에서. 이 동네에 처음 와 본 건 열네 살 때 여행으로 온 거였는데 잊히지 않더라고. 잊을 수가 없지." 올리버가 말했다.
"이 땅은 핏속으로 들어간달까." 모이라도 말했다.
"피도 땅속으로 들어가고. 둘 중 어느 쪽이든. 저 지벳 교수대 나무도 그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까지 시체를 지벳 교수대에 걸어 놨어. 머리카락은 새 둥지가 되고 살은 까마귀가 깨끗하게 발라 먹고. 새로 진열한 시체가 생길 때까지 그대로 걸어 놨지."

- 섀도는 지벳 교수대 나무가 뭔지 대충 알 것 같았지만 그래도 물어봤다. 질문은 절대로 해롭지 않다. 게다가 올리버는 다양한 지식을 쌓고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지벳 교수대는 커다란 철제 새장 같은 모양이야. 죄인을 처형해 정의를 실현한 뒤에는 죄인의 시체를 거기에 넣어서 진열하는 거지. 잠겨져 있어서 가족이나 친구가 시체를 훔쳐내 기독교식으로 제대로 묻어 줄 수도 없었어.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본보기로 삼으려는 거였는데 솔직히 효과가 있었던 것 같진 않아." 
"어떤 사람들이 처형당했죠?"

"재수 없게 걸린 사람은 누구나. 3백 년 전에는 사형이 가능한 죄목이 2백 가지가 넘었거든. 집시는 무조건이고, 한 달 이상 여행하는 경우, 양을 훔치는 경우, 12 펜스가 넘는 물건을 훔치는 경우는 뭐든, 협박 편지를 보내는 경우도 있었지."

- 모이라가 끼어들었다. "사형 죄목이 많았던 건 맞는데 지벳 교수대로 처형된 건 이근방 살인자들뿐이었어. 시체를 20년 동안 걸어 둔 일도 있어. 살인 사건이 그렇게 많이 일어나진 않아서." 모이라는 좀 더 가벼운 주제로 바꾸었다. "지금 걷는 곳은 슉스 레인이야. 이 동네 사람들은 맑은 날 밤엔, 물론 오늘은 당연히 아니지만, 블랙 슉 Black Shuck이 쫓아온다고 믿어. 동화 속에 나오는 개하고 비슷한 거야."
"우린 한 번도 본 적은 없어. 맑은 날 밤에도 못 봤어." 올리버가 말했다. "잘된 거지. 왜냐하면 보면. 죽거든."

 

-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커플에게 하기 좋은 안전한 질문이다. 올리버가 말했다. "술집에서 휴가로 왔을 때."
"난 올리버를 처음 만났을 때 사귀는 사람이 있었거든. 둘이 짧고 열렬하게 바람을 피웠어. 결국 사랑의 도피를 하고 이루어진 거지. 우리 둘 다 평소답지 않았어."
섀도가 보기에 두 사람은 사랑의 도피를 할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이상한 구석이 있으니까.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

"집에 가면 다들 위스키맥 한잔씩 하자. 위스키하고 진저 와인, 뜨거운 물을 섞은 거야. 그리고 난 따뜻한 물로 목욕해야겠어. 안 그럼 죽을 것 같네."

- 섀도는 한 손으로 죽음을 야구공처럼 붙잡는 상상을 하며 몸을 떨었다.
빗줄기가 두 배로 거세졌고 갑자기 번개가 번쩍거리며 주변 세상을 드러냈다. 돌로 쌓은 벽의 회색 돌, 풀잎, 웅덩이, 나무가 전부 다 선명하게 보이더니 밤눈이 좋지 않은 섀도에게 잔상을 남기며 더 깊은 어둠에 삼켜졌다. 

 

- "오늘 위스키맥은 안 되겠네. 올리는 마시면 안 되겠어. 가끔은 정신이 혼미해서 기억 못 할 때도 있고 또 쓰러져 있으면서 있었던 일을 다 기억할 때도 있어. 큰일인 것처럼 부산 떨면 싫어해. 배낭은 아가(영국산 오븐 겸 히터 - 역주) 옆에 둬."
주전자가 끓었다. 모이라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을 찻주전자에 부었다.

"올리는 홍차 주고 난 캐모마일 차를 마셔야겠네. 안 그럼 오늘 잠이 안올 것 같아. 진정 좀 해야지. 자네는?"
"저도 홍차 주세요."

섀도는 오늘 30킬로미터도 넘게 걸었으니 잠이 금방 올 것이다. 그는 모이라가 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파트너가 정신을 잃었는데도 지나치게 평온하고 차분한 모습이었다. 혹시 낯선 사람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서 그러는 걸까. 특이하긴 하지만 존경스러웠다. 영국 사람들은 참 이상했다. 그래도 그는 '부산 떠는 걸 싫어한다'는 올리가 충분히 이해되었다.

 

- 처음에는 취미 삼아 돌벽을 수리하고 새로 지었는데 결국 그게 직업이 되었다. 
올리버는 벽을 만드는 일은 예술이자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훌륭한 운동도 되는 데다 제대로 만들면 훌륭한 명상 수행도 된다.

"원래 이 근방에는 돌벽 짓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수백 명이나 있었는데 지금은 진짜 실력이 좋은 열 명 정도밖에 안 남았어. 요즘은 기존 돌벽을 콘크리트나 브리즈 블록으로 수리하거든. 돌벽은 죽어 가는 예술이야.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데. 알아 두면 굉장히 쓸모가 많거든. 돌을 고를 때도 돌이 어디로 가고 싶은지 직접 말하게 해야 해. 그럼 벽에서 절대로 움직이지 않아. 탱크로도 못 허물어. 대단하지." 

 

- 모이라는 매우 부유한 편이었다. 부모가 남겨 준 신탁 덕분에 그녀와 그녀의 자매들은 일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20대 후반에 교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했다. 지금은 교편을 놓았지만 지역 사회의 일에 무척 활발하게 관여하고 있으며 버스 운행 중단 반대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기도 했다.

 

- 올리버와 모이라도 그날 밤 주방 테이블에 앉아서 섀도에 대해 알아 갔다.
결과적으로 별로 알 수 있는 건 없었지만.

- 섀도는 그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과거에 사람을 믿었다가 배신당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이 커플이 마음에 들었다. 집안에서 풍기는 빵 굽는 냄새와 잼, 호두나무 광택제 냄새도 좋았다. 섀도는 올리버를 걱정하는 마음을 품은 채 짐을 보관하는 작은 방으로 자러 갔다. 그가 아까 들판에서 얼핏 본 게 당나귀가 아니었다면? 거대한 개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정말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 "네, 푹 잤어요." 섀도는 동물원에 간 꿈을 꾸었다. 보이지 않는 동물들이 우리에서 코를 킁킁거렸다. 꿈에서 그는 어린아이였고 어머니와 함께 돌아다녔다. 안전하고 사랑받는 느낌이었다. 사자 우리 앞에 멈추었는데 우리에 있는 건 사자가 아니라 스핑크스였다. 절반은 사자, 절반은 여자. 꼬리가 휙 움직였다. 스핑크스가 섀도에게 미소를 지었는데 그 미소가 어머니의 미소로 변했다. 스핑크스는 말도 했다. 고양이 같고 억양이 있는 따뜻한 목소리였다. 너 자신을 알라.

- 난 내가 누구인지 알아. 꿈에 섀도는 우리의 쇠창살을 잡고 그렇게 말했다. 우리 안은 사막이었다. 피라미드도 보였다. 모래밭에 그림자들이 어른거렸다.
그럼 넌 누구냐, 섀도?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 거지? 어디로 도망가는거지?
당신 누구야?
그는 그렇게 잠에서 깼다. 그는 왜 자기가 그런 질문을 했는지 의아했고...

 

- 섀도는 복도를 지나쳐 화장실 앞에 서서 올리버를 불렀다. "들리세요? 괜찮으세요?"
대답이 없었다. 안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섀도는 문을 바라보았다. 단단한 나무 문. 지은 지 오래된 집이지만 옛날에는 튼튼하게 지었다. 아침에 화장실을 쓸 때 보니 자물쇠가 호크 단추식이었다. 그는 손잡이를 잡고 밀면서 문을 어깨로 힘껏 쳤다. 나무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 섀도는 교도소에서 복역할 때 죽은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아무 의미 없는 말싸움 끝에 찔려 죽은 이였다. 운동장 뒤쪽 구석에 쓰러진 시체에 흥건했던 피가 떠올랐다. 무척이나 불편한 광경이었지만 그때 그는 피하지 않고 억지로 쳐다보았었다. 시선을 피하는 것 자체가 고인에 대한 모독 같아서.

- 올리버의 온몸, 하얀색과 검은색의 리놀륨 바닥, 하얀 에나멜 욕조가 전부 피투성이였다. 그는 마치 새의 눈알처럼 두 눈을 크고 동그랗게 떴다. 그는 섀도를 쳐다보았지만 누구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 그녀는 주방 한가운데에서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듯 두리번거렸다.

"저기... 오늘 꼭 가야 해? 정해진 일정이 있는 거야?"
"절 기다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디에도요."
모이라는 1시간 만에 얼굴이 완전히 초췌해져 있었다.
"전에 이런 일이 있었을 땐 며칠 걸리긴 했지만 괜찮아졌거든. 우울증이 오래가진 않아. 그래도 혹시나 해서 말인데 계속 있어 주면 안 될까? 언니한테 전화하긴 했는데 지금 이사 중이라서. 나 혼자서는 도저히 못 버틸 것 같아. 두 번은 도저히. 그렇다고 자네한테 있어 달라고 부탁할 순 없겠지. 아무리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도." 
"기다리는 사람 없습니다. 더 있을게요. 그래도 올리버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그래, 맞아."
그날 오후 늦게 스캐슬로크 박사가 방문했다. 그는 올리버와 모이라와 친구 사이였다. 영국 시골에서는 아직도 의사들이 왕진을 다니는 건지, 아니면 친한 사이라 와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침실로 들어간 의사가 20분 후에 나왔다. 

 

- "다행히 상처가 다 얕네. 주변 사람들한테 도와 달라고 소리치는 그런 상처들이야. 솔직히 병원에서 해 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집에서 치료해도 될 것 같아. 예전에 그쪽 병동에 간호사가 열 명이 넘었는데 이젠 완전히 문을 닫으려고 해. 지역에 돌려줘야지."

 

- 섀도는 다음 마을로 운전해 간 뒤 약국을 찾아서 처방 약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이곳의 춥고 축축한 여름 날씨 때문에 잘 팔리지 않아 애처롭게 넘쳐 나는 선탠로션과 크림을 바라보며 환히 불이 켜진 통로에서 어색하게 서 있었다. 
"미국인 씨네요." 뒤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술집에서와 똑같은 올리브그린 스웨터를 입은 짧은 검은 머리의 여자였다.
"그런 것 같네요." 섀도가 말했다.
"동네 소문에 의하면 몸이 안 좋은 올리를 도와주고 있다면서요."

"소문 빠르네요."

"동네 소문은 빛보다 빠르죠. 난 캐시 버글래스라고 해요."
"섀도 문입니다."

 

- 집안은 온통 고요했다. 섀도는 검은 개가 지붕에 쪼그리고 앉아 햇빛을 가로막고, 모든 감정, 느낌, 진실을 차단해 버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분명 무언가가 이 집의 볼륨을 낮추고 컬러를 흑백으로 바꿔 버렸다. 그는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올리버와 모이라를 그냥 두고 가 버릴 순 없었다. 그는 침대에 앉아 창문에 부딪혀 흘러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 초 단위로 줄어드는 걸 느꼈다.

 

- 줄곧 비가 내리고 추웠다가 사흘째 되는 날 해가 나왔다. 따뜻해지진 않았지만 섀도는 잿빛 실안개에서 벗어나 동네 구경을 하기로 했다. 들판을 건너고 오솔길을 올라가 기다란 돌벽 담을 지나 이웃 마을로 갔다. 널빤지보다 조금 큰 다리가 좁은 시내에 걸려 있었다. 섀도는 그냥 한번에 뛰어 물을 건넜다. 언덕 아래에는 참나무, 산사나무, 플라타너스, 너도밤나무 등 나무가 많았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는 길이 맞는지 분간이 잘되지 않는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올라가 언덕의 높은 곳에 자연스럽게 생겨난 휴식 공간 같은 작은 초원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언덕을 등지니 사방이 온통 잿빛과 초록색의 계곡과 산봉우리였다. 아이들 그림책의 삽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 그가 가까이 가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어때요?" 그녀가 스케치북을 높이 들어 보여 주었다. 연필로 그린 산비탈 그림이었다.
"실력이 아주 좋네요. 화가인가요?"
"그냥 취미 삼아서요."
섀도는 지금까지 영국인들을 만나 본 경험에 비추어 그냥 취미 삼아서 한다는 말이, 정말로 그냥 취미이거나 런던 내셔널 갤러리나 테이트 모던에 작품을 전시한다는 뜻이거나 둘 중 하나임을 알았다. 
 

- "근데 사실 올리는 별로 안 됐다는 마음이 들지 않아요."
"왜죠? 그가 잡다한 지식을 늘어놔서 지루하게 했나요?”
캐시가 뻥 터지듯 웃었다.

"당신은 이 동네 뒷말을 좀 더 캐내고 다녀야겠어요. 올리와 모이라는 처음에 바람으로 만난 사이에요."
"그건 압니다. 직접 얘기 들었어요." 섀도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혹시 올리랑 사귀는 사이였나요?"
"아뇨. 올리가 아니라 모이라 쪽이에요. 대학 때부터 사귀었던 사이죠."

그녀는 잠깐 말을 멈추고 연필로 음영을 넣었다. 스케치북 위에서 연필이 부지런히 사각거렸다. 

 

- "나한테 키스할 건가요?" 그녀가 물었다.
"어..."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 생각 안 했는데요."
"흠."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고 웃었다. "생각했을 텐데. 내가 여기 우즈 힐을 알려 줬고 날 보러 온 거잖아요."

그녀는 다시 스케치북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 언덕에서 아주 사악한 일이 벌어졌다고 해요. 아주 지저분하고 사악한 일. 그래서 나도 지저분하게 한번 놀아 볼까 했죠. 모이라의 손님하고."
"복수 계획 같은 건가요?"
"계획 같은 건 아니에요. 그냥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이제 이 동네엔 날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여자로서요."
섀도가 마지막으로 여자와 키스한 건 스코틀랜드에서였다. 그녀가 떠올랐다. 마지막에 그녀가 변신한 모습도

 

- "당신 진짜 맞죠?" 그가 물었다. "내 말은... 진짜 사람 맞느냐고요."
그녀는 스케치북을 바위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한번 키스해 봐요. 맞는지."
그는 망설였다. 그녀가 한숨을 쉬고 먼저 키스했다.
쌀쌀한 산비탈만큼 캐시의 입술도 차가웠지만 입안은 부드러웠다. 혀가 맞닿자 섀도는 몸을 뒤로 뺐다.
"난 당신을 잘 알지도 못하는데."

 

- 섀도는 그녀의 그림을 보았다. "검은 개에 대해 잘 알아요?"
"슉스 레인의 검은 개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그 개 유령이 이 근방 전역에 나타났다고 해요. 이젠 슉스 레인에만 나타나고. 스캐슬로크 박사가 민간설화라고 말해 준 적이 있어요. '유령 사냥개'는 오딘의 늑대 프레키와 게리를 바탕으로 한 유령 사냥에서 나온 거죠. 내 생각엔 그보다 더 오래된 것 같아요. 원시시대 드루이드처럼요. 불의 고리 너머 어둠 속을 배회하며 혼자서 너무 멀리까지 간 사람들을 찢어 버리죠."
"본 적 있어요?"

 

- "캐시, 내 손 차가워요."
"난 모든 게 차가운데요. 여긴 차가운 것밖에 없거든요. 그냥 웃으면서 능숙한 모습을 보여 줘요."

 

- 그는 조금씩 어색함과 불확실함이 합쳐진 망설임에 굴복하기 시작했다. 이 여자에 대한 감정이 어떤지 확신이 없었다. 그가 신세를 지고 있는 모이라와 관련 있는 여자가 아닌가. 예전에 이용당한 적이 많아서 이용당하는 느낌을 싫어하는 그였다. 하지만 어느새 ...

 

- 사방에 고양이가 득실거렸다. 하얀 고양이, 얼룩무늬 고양이, 갈색 고양이, 연한 적갈색 고양이, 검은 고양이, 장모종, 단모종, 목에 칼라를 단 포동포동한 고양이, 헛간이나 야생을 전전한 듯 귀가 뜯겨 나간 고양이. 녀석들은 초록색과 파란색, 금색의 눈으로 일제히 섀도와 캐시를 쳐다보았다. 가끔 꼬리를 휙 움직일 뿐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깜빡이는 두 눈이 살아 있는 생물체임을 말해 주었다.

- "당신 일행이에요?" 그녀가 물었다.
"그 누구의 일행도 아닌 것 같은데요. 고양이잖아요."
"고양이들이 질투하는 것 같아요. 봐요. 날 싫어하는 눈빛이야."
"그건 말도..."

섀도는 '안 된다'라고 할 생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맞는것 같기도 했다. 과거 한 대륙 너머에 그를 좋아한 여자가 있었다. 여신인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그를 좋아했다. 그녀의 바늘처럼 날카로운 손톱과 고양이처럼 거친 혀가 떠올랐다. 

- 캐시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초연하게 말했다.

"미국인 씨, 난 당신이 누구인지 몰라요. 당신이 어째서 진짜 나를 볼 수 있는지, 왜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당신에게만큼은 솔직한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전부 사실이에요. 당신은 겉으로는 평범하고 조용해 보이지만 나보다 훨씬 더 이상한 사람이에요. 난 엄청나게 이상하거든요."

섀도가 말했다. "가지 말아요."

 

- 그녀는 스케치북과 연필을 들고 고양이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지나친 뒤 씩씩하게 걸어갔다. 고양이들은 그녀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가 바람에 흔들리는 풀과 나뭇가지를 헤치며 멀어지는 동안 오로지 섀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 "무슨 일이지? 바스테트, 당신 짓이야? 집에서 멀리도 왔네. 내가 누구랑 키스하든 왜 아직도 신경 쓰지?"
섀도의 말과 함께 주문이 풀렸다. 고양이들은 움직이거나 시선을 딴 데로 돌리거나 일어나거나 몸을 열심히 핥았다.
얼룩 고양이 한 마리가 섀도의 손에 얼굴을 대고 밀치면서 관심을 요구했다. 섀도는 멍한 상태로 고양이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순간 고양이가 휘어진 단검처럼 잽싸게 그의 팔뚝을 할퀴어 피를 내더니, 가르랑거리고는 돌아섰다. 바위 뒤로, 덤불로 들어간 고양이 떼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 섀도가 돌아가 보니 올리버는 방에서 나와 따뜻한 부엌에 앉아 있었다. 옆에 머그잔을 두고 로마 건축에 관한 책을 읽는 중이었다. 옷도 입었고 턱을 면도하고 콧수염도 다듬은 상태였다. 파자마 세트에 체크 무늬 가운을 걸쳤다. 
"좀 괜찮아졌어." 그가 섀도를 보고 말했다. "자네도 이런 적 있나? 우울증 말이야."
"생각해 보면 있었던 것 같아요. 아내가 죽었을 때 그 무엇도 의미가 없었죠. 오랫동안요."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 "검은 개가 진짜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가끔 들어. 침대에 누우면 푸셀리의 그림이 생각나. 잠자는 여인의 가슴에 올라탄 악몽. 아누비스처럼 말이야. 아니, 세트. 크고 까만 거. 세트가 어떻게 생겼더라? 당나귀처럼 생겼었나?"
"세트는 만나 본 적이 없어서요. 저보다 앞 세대라."
올리버가 웃음을 터뜨렸다.

"비꼬는 유머가 훌륭한데. 미국인들은 그런 농담 안 한다던데. 아무튼 이젠 다 지나갔어. 다시 멀쩡해. 세상에 나갈 준비 됐어."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좀 창피하긴 하네. 이제 바스커빌 가의 사냥개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닐 거 아냐."
"창피하실 거 하나도 없어요."

영국인은 별것 아닌 일에도 당혹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섀도가 말했다.
"그래도 바보 같은 짓이긴 했지. 아무튼 훨씬 기운이 나."

- “그녀를 어떻게 언덕으로 데려왔습니까?" 섀도가 물었다.
"캐시? 아니야. 언덕에서 만나자고 한 건 그녀였어. 그 여잔 여기 올라와서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거든. 멀리서까지도 그녀가 보이지. 이 언덕은 성스러워. 그녀는 그래서 좋아했지. 물론 기독교인들한테 성스러운 건 아니고, 정반대의 오랜 종교에서 봤을 때지만."
"드루이드교요?"

섀도는 영국에 오래된 종교가 또 뭐가 있는지 잘 몰랐다.

"드루이드교일 수도 있어, 확실히. 하지만 그건 드루이드교보다 오래 됐을 거야. 이름은 없어. 그냥 여기 사람들이 그들이 믿는 다른 종교 아래에서 실행하는 거니까. 드루이드교, 노르드교, 가톨릭, 개신교 상관없어. 그런 종교는 사람들이 립 서비스나 하는 종교지. 옛날 종교야말로 곡식을 일으키고 발기도 유지해 주고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지역에 고속도로가 뚫리지 않게 막아 주지. 지옥으로 가는 문도 서 있고 언덕도 서 있고 이 지역도 서 있어. 2천 년 넘게 다들 멀쩡하다고. 그렇게 강력한 것들을 건드리면 안 되지."

"모이라는 모르죠? 캐시가 마을을 떠난 걸로 알고 있던데요."

동쪽 하늘이 계속 밝아지긴 했지만 아직 밤이었다. 서쪽의 거무스름한 자줏빛 하늘에는 별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 주머니에서 작은 철제 도구를 꺼내 높이 올리고는 지렛대 삼아 작은 돌 하나를 움직였다. 그다음에는 정해진 순서대로 벽에서 돌을 꺼냈다. 하나 꺼낼 때마다 다음 돌을 꺼낼 공간이 생겼다. 그렇게 큰 돌과 작은 돌을 번갈아 가면서 빼냈다. 
"좀 도와줘."
섀도는 벽 속에서 무엇이 나올지 알면서도 돌을 꺼내 땅에 차곡차곡 내려놓았다.

- "흠, 그거야 당연하지." 작은 남자가 분별 있는 말투로 대답했다. "자넨 캐시에 대해 아니까. 자네가 죽으면 난 모든 걸 잊을 수 있을 거야. 드디어."

"잊어요?"
"용서하고 잊는 것. 하지만 힘들어. 나를 용서하는 건 쉽지 않지만 분명 잊을 순 있을 거야. 저거 봐. 여기 자네가 들어갈 공간도 충분해. 비집고 들어가긴 해야겠지만."

 

- "난 멍청한 사람이 아니야. 나쁜 사람도 아니고. 힘이 엄청나게 세지도 않아. 하지만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네. 내가 그런 짓을 한 건 악해서가 아니라 질투 때문이었어. 하지만 난 절대 여기 혼자 오진 않을 거야. 여긴 검은 개의 신전이야. 이곳은 최초의 신전이었지. 스톤헨지 돌기둥 이전에 말이야. 신전은 기다리고 숭배되고 제물을 받고 공포와 회유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 블랙 슉, 바게스트, 패드풋, 위시하운드. 전부 다 여기 있었고 여전히 보초를 서고 있어."
"돌로 쳐요." 캐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쳐요, 섀도, 제발."

- 그들이 서 있는 통로는 산비탈로 약간 들어가 있었는데 돌벽이 딸린 인공 동굴이었다. 고대부터 있었던 신전 같지도 않고 지옥으로 가는 문 같지도 않았다. 동트기 전의 하늘이 올리버의 주변으로 액자를 둘렀다. 그는 부드럽고 흔들림 없이 예의 바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내 안에 있고 나는 그 안에 있다."

- 그 순간 검은 개가 문가를 꽉 채우며 바깥세상으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했다. 섀도는 그것이 뭐든 진짜 개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눈에서 정말로 빛이 났는데 썩어 가는 바다생물을 떠올리게 했다. 크기와 위협적인 존재감이 늑대와 맞먹었다. 호랑이가 스라소니에게 그렇듯 위험과 위협으로 만들어진 완전한 육식동물. 그것은 올리버보다 자신만만해 보이는 얼굴로 섀도를 노려보았고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듯한 나직하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순식간에 갑자기 달려들었다.

 

- 섀도는 한쪽 팔을 올려 목을 보호했다. 개가 그의 팔꿈치 바로 아래쪽을물었다. 극심한 고통이었다. 맞서 싸워야 하는데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데다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제대로 생각하거나 집중하는 게 불가능했다. 이것에 잡아먹힐까 봐, 이것이 팔을 으스러뜨릴까 봐 두려울 뿐이었다.

- 그는 이 개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공포를 만들어 내는 것 같다는 의심이 들었다. 평소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할 정도로 공포를 느끼는 그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상관이 없었다. 개가 팔을 놔주었을 때 그는 울고 있었고 온몸이 떨렸다.
 

- 여기 저 짐승과 같이 있는다면 그는 곧 큰 고통 속에서 죽을 게 분명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리라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사실이었다.
"그래." 머릿속에서 캐시의 목소리가 말했다. "내일도 태양은 떠오를 거야. 하지만 지금 정신 차리지 않으면 넌 그걸 못 봐."

 

- 올리버가 바닥에서 돌을 하나 들어 벽의 틈새에 끼웠다.

"내 생각은 이래." 그가 두 번째 돌을 올리면서 말했다. "저건 선사시대의 이리인 것 같아. 하지만 이리보다 훨씬 크지. 인간이 동굴에 모여 살던 시절 우리 꿈이 만들어 낸 괴물인지도 몰라. 아니면 그냥 늑대였거나. 우린 지금보다 훨씬 덩치가 작아서 빨리 달아나지 못했겠지."
섀도는 뒤쪽의 벽에 기대었다. 오른손으로 왼팔을 세게 눌러 지혈했다.

"여긴 우드의 언덕이고 저건 우드의 개다. 당연히 그의 개겠지."
"상관없어." 올리버가 돌을 계속 쌓았다.

- "올리. 저 짐승은 당신을 죽일 거야. 이미 당신 안에 들어가 있어. 좋은 일이 아니야."
"올드 슉은 절대 날 해치지 않아. 올드 슉은 날 사랑해. 그리고 캐시는 벽에 있어."

올리버가 손에 든 돌을 바닥에 쌓인 돌 위로 떨어뜨렸다.

"이제 너도 그녀와 같이 벽에 있어. 널 기다리는 사람은 없어. 아무도 널 찾지 않을 거야. 널 위해 울어 주는 사람도 없을 거야. 널 그리워하는 사람도 없을 거야." 

 

- 순간 섀도는 어떻게 알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있었다. 그 좁은 벽 틈새에 둘이 아니라 셋이 있다는 걸.

 

- 그것은 섀도의 다리를 휘감더니 다친 손을 부드럽게 머리로 받았다. 가까이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억양은 낯설지만 그가 아는 목소리였다. 
고양이가 사람으로, 여자로 변신한다면 그렇게 말할 법한, 표현이 풍부하고 어둡고 노래 같은 그런 목소리였다.

[넌 여기 있으면 안 돼, 섀도. 이제 그만 행동을 해. 세상이 너 대신 결정하게 놔두지 말고.]
섀도는 소리 내어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억울하지, 바스테트."

- [그르르릉. 예쁜이, 정말 상황 파악을 못 하는구나. 넌 네가 누구이고 무엇이고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군. 네가 이 언덕의 이곳에서 벽으로 세워지면 이 신전은 영원히 서 있을 거야. 이 동네 사람들이 가진 제각각의 믿음이 뭐든 간에 그게 마법을 만들어 내겠지. 하지만 태양이 떨어지고 하늘은 잿빛으로 변할 거야. 만물이 슬퍼할 거야. 무엇 때문에 슬퍼하는지도 모른 채. 인간에게도 고양이에게도, 기억되는 자와 잊힌 자들에게도 모두 더 끔찍한 세상이 될 것이다. 넌 죽었고 또 살아났어. 넌 중요한 인간이야, 섀도. 어느 산비탈에 숨겨진 슬픈 제물로 죽음을 맞이해선 안 돼.]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섀도가 속삭였다.
[싸워. 저 짐승은 정신적인 존재야. 너한테서 힘을 가져가지, 섀도. 저건 네가 가까이 있어서 더 진짜가 됐어. 올리버를 소유할 만큼, 널 해칠 만큼 사실적인 존재가 된 거야.]
"나?"
"유령이 아무한테나 말을 걸 수 있다고 생각해?"

 

- "유령은 나방이고 당신은 불꽃이야."
"어째야 하는데? 팔도 다쳤고 목도 찢길 뻔했어."
[오, 예쁜이. 저건 그냥 그림자, 밤의 개일 뿐이야. 좀 커진 자칼이라고.]
"저건 진짜야." 섀도가 말했다. 마지막 돌이 벽을 메우고 있었다.
"아버지의 개가 정말로 무서워?" 여자의 목소리가 말했다. 여신이 말한 건지, 유령이 말한 건지 알 수 없었다.

- 하지만 그는 답을 알고 있었다. 그래, 그래. 그는 아버지의 개가 무서웠다. 왼팔은 고통만 가득할 뿐 쓸 수가 없었고 오른손은 피가 잔뜩 묻어 미끄럽고 끈적거렸다. 게다가 그는 벽과 돌 사이의 공간에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아직 살아 있었다.


- "정신 차려." 캐시가 말했다. "난 할 수 있는 걸 다했어. 당신도 빨리 해."

섀도는 뒤쪽 돌벽으로 등을 단단히 받치고 발을 올렸다. 그다음에 등산화 신은 두 발로 힘껏 찼다. 그는 지난 몇 달 동안 무수히 많은 거리를 걸은 데다 덩치도 크고 보통 사람들보다 힘도 셌다. 그 한 번의 발차기에 모든 걸 쏟아부었다. 
벽이 폭발했다.

- 절망의 검은 개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섀도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번에 공격하는 쪽은 그였다. 그는 개를 꽉 움켜잡았다.
난 아버지의 개처럼은 안 될 거야.
 
 - 섀도는 오른손으로 개의 턱을 닫은 채로 잡았다. 그 초록색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짐승은 아무래도 개가 아닌 것 같았다. 섀도는 속으로 개에게 말했다. 낮이다. 도망쳐라. 네가 뭐든 간에 도망쳐. 네 교수대로, 네 무덤으로 돌아가라, 작은 위시하운드야. 네가 할 수 있는 건 우릴 우울하게 하고 그림자와 환상으로 세상을 채우는 것밖에 없어. 네가 유령 사냥 때 겁에 질린 인간 사냥감들과 활개 치고 다니던 시절은 지났어. 네가 내 아버지의 개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그거 알아? 다 상관없어. 

- 섀도는 거기까지 말하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 뒤 개의 주둥이를 놓았다.
그것은 공격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듯 목 깊은 곳에서 거의 훌쩍임에 가까운 낑낑거리는 소리를 냈다.
"집에 가라." 섀도가 이번에는 소리 내어 말했다.

- 해가 뜨면서 산비탈의 통로로 직접 햇살이 비추었다. 섀도는 오래전 이곳을 지은 사람들이 일부러 신전과 해 뜨는 방향을 맞춘 것인지 궁금했다. 그는 옆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가 무언가에 걸려서 꼴사납게 넘어졌다.

 

- 섀도는 자신이 떨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깬 채로 꾼 꿈에서 방금 깨어난 느낌이었다. 공포, 혐오, 애도, 상처, 깊은 상처의 감정이 햇살처럼 온몸으로 퍼졌다. 

 

- 남자의 실루엣이 입구를 가득 메웠다.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선 모습이 꼭 회색 종이를 잘라 낸 모양 같았다.

 

- 섀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살폈다. 스웨터와 코트의 왼쪽 팔이 커다란 이빨로 물어뜯은 듯 찢어졌지만 살은 찢기지 않았다. 옷과 손에 피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그는 만약 검은 개에게 죽임을 당했다면 자신의 시체가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해졌다.

- "솔직히 난 당신한테 끌리지 않았어요. 조금도 미안하진 않아요. 당신의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니까."
"알아요. 당신이 살아 있었을 때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분명 그랬을 거예요. 저 안에서 힘들었어요. 이 모든 게 끝나서 후련하네요. 그리고 미안해요, 미국인 씨. 그래도 미워하진 말아 줘요."

- 다시 보니 통로에는 그 혼자였다.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 "당신 배낭하고 세탁물은 언니 차에 있어. 필요하면 차로 태워다 줄게. 전에 하던 대로 계속 걷고 싶으면 그냥 걸어가도 되고."

"고맙습니다." 섀도는 자신이 더 이상 모이라의 집에서 환영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 모이라는 이글거리는 녹갈색 눈으로 섀도를 바라보았다. 믿고는 싶지만 차마 과감하게 믿지는 못하겠다는 모습이었다. 도린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런 말도 있잖니. 호레이쇼, 천지간에는 많은 것들이 있다네(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대사로 더 정확한 표현은 '호레이쇼, 천지간에는 자네의 철학으로 상상하는 것보다 많은 것들이 있다네'이다 - 역주).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자."

 

- "머리는 하나 혀는 10개." 도린이 지금까지보다 좀 더 높고 엄숙한 목소리로 뭔가를 낭송했다. "혀 하나가 튀어 나와 빵을 집었다. 산 자와죽은 자를 먹이기 위해. 이 모퉁이와 저 나무에 적혀 있던 수수께끼야."

"무슨 뜻인가요?" 섀도가 물었다.

"굴뚝새가 지벳 교수대로 처형당한 시체의 머리뼈에 둥지를 틀고 턱뼈로 오가면서 새끼들에게 먹이를 주었어. 죽음 한가운데에서도 생명은 계속되는 거야."

섀도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 <검은 개 Black Dog>



- 원숭이는 땅으로 내려갔다. "안녕."
"네가 원숭이구나." 사람이 말했다. 그녀는 하이 칼라 블라우스를 입었고 폭이 넉넉한 치마는 거의 땅에 닿았다. 모자에 두른 띠에는 칙칙한 오렌지색 장미꽃이 꽂혀 있었다.
"그래." 원숭이는 왼발로 몸을 긁었다. "내가 세상을 다 만들었어."
"나는 레이디야, 우리는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할 거야."

"난 널 만든 기억이 없는데." 원숭이는 혼란스러웠다. "내가 만든 건 과일과 나무, 연못, 나뭇가지..."
"맞아, 넌 날 만들지 않았어." 여자가 말했다.

- 원숭이는 오른발로 몸을 긁적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땅에 떨어진 자두를 즐겁게 먹고 씨를 던졌다. 북슬북슬한 팔 뒤쪽에 박아 둔, 먹다 남은 곤죽이 된 자두도 꺼내 빨아먹었다.
"그런 행동을 해도 되는 거야?" 레이디가 물었다.
"난 원숭이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원숭이가 말했다.
"당연히 그렇겠지. 하지만 나랑 같이 있고 싶으면 그러면 안 돼."

 

- 원숭이는 생각했다. "너랑 같이 있고 싶으면?"
레이디는 진지하게 원숭이를 보더니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원숭이의 마음을 굳히게 했다. 원숭이는 그 미소를 보면서 이 사람과 함께 지내는 것도 괜찮을 것이란 결정을 내렸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 "이제 넌 옷이 필요해. 매너도 필요하고. 그리고 그것도 하면 안 돼."

"그게 뭔데?"

"네가 손으로 하는 거."


- 원숭이는 죄책감을 느끼며 자기 손을 바라보았다. 손이 뭘 어쨌다는 건지 의아했다.
손은 당연히 원숭이의 일부분이지만 원숭이가 신경 쓰지 않을 때면 당연히 으레 손이 하는 행동을 했다. 긁고 살피고 찌르고 만지고, 틈새에서 곤충을 잡고 덤불에서 열매를 따고.

- 얌전하게 행동해. 원숭이가 속으로 손에게 말했다. 손은 대답 대신 손톱을 후볐다.
원숭이는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무척 어려울 것 같았다. 차라리 별과 나무, 화산, 천둥 번개 구름을 만드는 게 더 쉬웠다. 하지만 노력해 볼 가치는 있어 보였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했다.

 

- 모든 것을 창조한 원숭이였기에 옷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사람들이 입는, 몸을 가려 주는 옷감. 옷이 존재하려면 사람들이 옷을 입고 교환하고 팔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근처에 마을을 만들어 그 안에 사람들을 채워 옷이 존재하도록 했다. 작은 시장도 만들었는데, 그러자 사람들은 시장에서 물건을 팔았다. 원숭이는 사람들이 지글지글 음식을 만들어 유혹적인 냄새를 풍기는 좌판대, 조개껍데기와 구슬을 파는 좌판대도 만들었다.

 

- "사람 흉내를 더 잘 내도록 해." 옆부분에 단추 장식이 달린 회색 가죽 구두를 신은 레이디는 이렇게 말하고 가 버렸다.

 

- 원숭이는 생각했다. 내가 사람을 만들었어. 원숭이가 더 현명하고 웃기고 자유롭고 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인간은 땅에서만 생활하는 회색의 단조로운 존재로 만들었단 말이야. 그런데 왜 내가 사람인 척해야 하지?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사람들을 지켜보고 땅에서 그들을 따라가면서 보냈다. 벽이나 나무를 오르거나 위쪽이나 저 멀리 몸을 휙 날려서 땅에 떨어지기 전에 착지하는 일 따위는 이제 없었다. 
그는 원숭이가 아닌 척했다. 이제는 누가 '원숭이'라고 불러도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이제 '사람'이라고 말했다.

 

- 그는 지상에서 어설프게 움직였다. 신발을 신도록 만들어지지 않은 발에 훔친 신발을 억지로 신어야만 나무나 건물을 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있었다. 그는 꼬리를 바지 안으로 숨겼다. 이제 그는 오직 손이나 이빨로만 세상을 만지고 움직이고 바꿀 수 있었다. 원숭이의 손도 훨씬 얌전해지고 책임감 있게 행동했다. 꼬리와 발도 가려져 있어서 찌르거나 꼬치꼬치 캐묻거나 찢거나 문지르거나 할 가능성이 작아졌다.

- 원숭이는 그 차이를 구별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지만 레이디가 시키는 대로 했다.
"어때?" 원숭이가 물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이제 직장이 필요해."

- 원숭이가 얼굴을 찡그렸다. "직장이라니?" 당연히 그는 직장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무지개, 성운, 자두, 바다에 사는 생물 등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들 때 그가 직장이라는 것도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걸 만들 때도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직장은 원숭이와 그의 친구들에게 비웃음의 대상과 같았다.
"직장이라. 먹고 싶은 걸 먹고 살고 싶은 곳에서 살고 자고 싶을 때 자는 대신,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피곤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오면서 돈을 벌어먹을 음식과 살 곳을 마련하라고?"
"그래, 직장. 잘 아네." 레이디가 말했다.

 

- 한 주의 마지막 날, 봉급을 받은 원숭이는 마지막으로 레이디를 만난 마을로 갔다. 신발은 먼지투성이였고 발도 아팠다.
그는 오솔길을 걸어갔다.
카페에 도착했지만 그곳은 비어 있었다. 그는 레이디를 본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여주인은 어깨를 으쓱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전날 마을 변두리의 장미 정원에서 레이디를 본 것 같다며 원숭이에게 한번 가 보라고 했다. 
"사람, 원숭이가 아니라." 원숭이가 카페 주인의 말을 바로잡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원숭이는 장미 정원으로 갔지만 레이디는 보이지 않았다.

- 축 처진 어깨로 다시 오솔길을 따라 돌아가던 그는 마른 땅에 떨어진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띠 부분에 칙칙한 오렌지색 장미꽃이 꽂힌 회색 모자였다. 
원숭이는 다가가 모자를 주워 들고 그 안에 레이디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없었다. 하지만 1분 정도 더 걸어간 원숭이는 다른 무언가를 발견했다. 얼른 달려가 보았다. 옆쪽에 단추 장식이 달린 회색 구두 한 짝이었다. 
같은 방향으로 쭉 걸어가니 나머지 한 짝도 나왔다. 
원숭이는 계속 걸어갔다. 이내 길가에 버려진 구겨진 여자 재킷과 블라우스를 발견했다. 치마는 마을 변두리에 버려져 있었다. 

- 해가 곧 질 것이고 달은 이미 동쪽 하늘 높이 떠 있었다. 
옷이 걸려 있던 나뭇가지가 어딘지 익숙했다. 그는 나무들 사이로 더 들어갔다.
 
- "이리 와서 달 좀 봐, 내 사랑." 그녀가 기쁨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이리 와서 달 좀 봐."

 

- <원숭이와 여인 Monkey and the La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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