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고우리] 편집자의 사생활 - 업무일지가 이렇게 솔직해도 괜찮을까?

일루젼 2023. 9. 23. 0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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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고우리
출판 : 미디어샘
출간 : 2023.04.07


       

올여름을 휴식기로 보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쌓여온 피로라는 게 있었던 모양이다. 가을이 되면 매사 신나고 즐거울 줄만 알았는데, 막상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오히려 벌려놓았던 일들을 정리해야 할 것 같다. 재미있게 느껴지던 일들이 더는 재미있지 않을 때. 내 경우에는 이때가 바로 경고등이 켜지는 순간이다. 변화할 때가 되었거나 지쳐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이뤄진 취업도 영향을 미쳤다. 겨울까지는 기존 직장만 유지하려고 했었는데, 덕분에 서서히 속도가 붙던 독서와 피아노는 우선 순위에서 조금 밀려나게 되었다. 한 가지라도 만족스럽게 끌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일단 멈추고 방향성을 다시 설정하는 중이다. 그래도 원래 연주해보고 싶었던 한 곡은 거의 외웠으니 나름의 성과는 있었다. 

 

하반기 동안 쌓아놓기만 했던 수집(?)품들을 충분히 즐기고 소화해서 정리할 계획이었는데... 가을의 최우선은 휴식, 그다음은 여행, 더 추워지면 취미 소비로 시간을 보낼 생각이다. 최근에는 내가 조금이라도 더 많이 웃을 수 있는 방향으로 선택하려 한다. 

 

선택은 언제나 어렵다. 나 자신을 가장 잘 아는 건 나뿐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어떤 순간에는 나를 가장 모르는 게 나인 것 같기도 하다. '이게 가장 좋아'라는 감각 또한 그렇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난 이게 가장 좋아'라고 더없이 확실하게 감각했다가도, 돌연 '정말 이게 가장 좋을까? 좋았나? 다시 보니 모르겠어'라고 흔들린다. 

 

자신의 감각을 사용하는 일이 일상 단계에서 끝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취향과 감각과 센스를 직업의 영역에서 발휘해야 하는 사람들.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덧입히는 것만으로는 롱런이 어려운, 하지만 불변의 가치만으로는 -그런 것이 있다면- 통하지 않는 세계에서 매 순간 끝나지 않는 전쟁 중인 사람들. 자신의 결정을 타인을 통해 입증해야 한다는 건 언제나 변수가 너무 많은, 수많은 기적들과 불운들이 뒤섞이는 일이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이자 16년차 편집자인 -이제는 출판사 사장인- 고우리 또한 그런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눈과 감각을 믿고 한 권의 책을 만들어내는 사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최선을 선택하고, 절충하고, 타협해야만 하나의 '결과물'로 엮어질 수 있다.

 

<편집자의 사생활>은 그 과정 중의 혼란과 기쁨, 자부심과 고통에 관한 글이다. 저자의 생각과 가치관이 담뿍 녹아든. 누군가는 그 글에서 애환을 읽을 것이고, 누군가는 희망과 설렘을 느낄 것이다. 또 누군가는 결 다름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제각각인 사람들일지라도, 이 책을 집어 들었다면 그는 어떻게든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일 게다.

그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만난다.   

 

 

 

 


   

- 고우리 
노는 게 제일 좋은 탱자탱자 편집자. 2006년 여름에 편집자가 되었다. 문학동네, 김영사, 한겨레출판 등 대여섯 군데 출판사를 돌아다녔다. 16년 차가 되던 어느 날, 회사 가기 싫어서 덜컥 출판사를 차렸다. 출판에 목숨 걸진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책 만드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출판사를 차려놓고 1년째, 막막하긴 하지만, 설마 까무러치기야 하겠어 정신으로 가고 있다. 

 

- 내 출판 경력은 좀 드라마틱한 편이다.

 

- 이른바 '에듀테인먼트'가 최고로 유행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나의 철학에 의하면 공부란 원래 어렵고 힘든 것. 나의 철학에 반하여 1년 남짓 만에 퇴사하고 만다.

 

- 두 번째 회사는 성인 단행본을 만드는 회사였는데, 또 어쩌다가 거기서 어린이 그림책 브랜드를 론칭하게 되었다. 내가 그림책을 만든다고 하니 나의 친구들은 아니 된다고, 네 어두운 기운으로 어린이들을 물들이면 아니 된다고 말렸다. 그런데 그림책을 만들면서 반대로 내가 어린이화해가기 시작했다. 명랑한 어린이 그림책들을 보면서 나는 그전보다 훨씬 밝아졌다. 그림에는 뭔가 치유의 기능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줄창 외국 그림책을 번역해 만들다가 국내 어린이 책 기획으로 입문해야 할 즈음, 나는 충분히 치유가 되었는지 이만 그림책에서 발을 빼기로 한다. 

 

- 세 번째 회사는 두 번째 회사의 모회사였다. 거기서는 세계문학전집을 만들었다. 3년 반 동안 내가 참여한 책이 17~18종 정도 된다. <데미안>과 <롤리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목로주점>을 비롯한 주옥같은 책들이다. 나는 이 출판사에서 작가와 텍스트에 대한 존중을 배웠다. 대신 혹독하디 혹독한 트레이닝 기간을 거쳤다. 그때가 아마 내가 가장 집중력이 좋고 생산력이 (반강제로) 왕성할 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어찌나 극적인(?) 에피소드들이 많은지, 출판계 친구들이건 작가님들이건 당시의 내 이야기를 들으면 울고 웃는다. 

 

- 네 번째 회사는 이것저것 다 출간하는 종합출판사였다. 한 3개월 동안은 일이 너무 힘들어 울면서 다녔다. 회사 옆에는 가정집 주택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는데, 추운 겨울 혼자 계단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질질 짜곤 했다. 원래 문학을 전공했던지라 내가 행동경제학 책이나 미래학 책을 편집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정통 외국문학을 편집하다가 경제경영서, 자기계발서, 교양과학, 자연에서 이, 정치가의 평전 등 가리지 않고 다 만들었다.

 

- 그 시절을 거치니 좋은 점은, 지금은 겁나는 책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거기서 온갖 책을 섭렵하며 이른바 '포장이란 무엇인가'를 배웠고, 조직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편집자는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편집자가 아니더라도, 회사를 다니는 누구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조직은 피라미드 모양이다. 위로 갈수록 내가 앉을 자리는 점점 좁아진다. 회사를 오래 다닐 수 있을까? 편집자로서 내 수명은 언제까지일까? 이 회사에 뼈를 묻어야 하나? 아니, 뼈를 묻게나 해줄까...? 내가 멘토로 모시는 한 선생님이 그러셨다. "고우리야, 너 독립해라. 출판편집자가 나이 들면 둘 중 하나 아니겠니? 사장이 되거나 외주편집자로 빠지거나. 언제고 무슨 형태로든 독립해야 한다. 그건 시간문제다."

 

- 맞다. 내게도 그런 시점이 온 것이다. 16년 가까이 출판사에서 근무했다. 대여섯 번의 이직을 했다. 많이도 돌아다녔고 그만큼 인맥도 넓어졌다. 몇 다리 건너면 다른 회사 돌아가는 사정까지 훤히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제 더는 가고 싶은 곳도, 갈 곳도 없었다. 아, 회사생활 할 만큼 했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무엇보다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누군가의 밑에서 또는 누군가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이제 재미가 없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윗사람에게 사장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사라졌다. 그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더 이상 목표가 아니게 되었다. 나는 일하면서 나만의 목표를 세웠고, 내가 세운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나의 목표가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자유로워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 사실 출판에 목숨 걸진 않았다. 무슨 대단한 신념이나 배짱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저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래서 이제까지와 다른 길을 선택했다. 나는 이것을 '내 인생의 프로젝트'라고 부른다. 편집자가 아닌 사장으로서의 나는 어떨 것인가? 사장이 될 역량이 있는 사람일까? 아니면 버티지 못하고 중간에 무너지게 될까? 나라는 인간을 가지고 한번 실험해보고 싶었고, 나를 시험에 들게 해보고 싶었다. 나는 그저 '출판사 사장 되기'라는, 내 인생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인생 뭐 있나?

 

- 아무 준비도 없이 독립을 한다고 하니 출판을 좀 안다고 하는 분들은 이렇게 조언해 주었다. 회사 다닐 때 많이 많이 준비해 두어라. 기획도 활발히 하고 원고도 좀 쌓아두고 퇴사하여라. 책이 너무 띄엄띄엄 나오면 먹고살기 힘들다. 월급 따박따박 나올 때 작가들이랑 미리미리 계약해 두고 나가야 한다... 

- 회사에서 알면 야속하고 서운할 얘기지만, 독립하려는 편집자에겐 참으로 현실적인 조언이 아닐 수 없다. 책만 만들 줄 알았지 아무것도 모르는 나 같은 편집자가 홀로 출판계라는 맨땅에 헬멧도 없이 헤딩하러 간다는데, 이보다 더 이성적인 조언이 또 있을까. 맞다. 어떤 분은 회사 다닐 때 벌써 외서 계약을 몇 건 해두고 번역까지 진행 중이라고 들었다. 국내 저자 선생님들과 구두계약을 단단히 맺고 퇴사했다는 분도 있었다. 인디자인이나 일러스트 같은 디자인 프로그램을 마스터했다는 분도 있다고 했다. 

 

- 나의 경우는 좀 애매했다. 나는 당시 다니던 회사에서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뭘 적극적으로 준비한다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명색이 편집장 직함을 달고 있으면서 작가님들에게 연락을 돌려, 저 이제 곧 퇴사해요, 작가님, 저한테 원고 하나만 주세요,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많이 양보해서 나와 작업을 해본 친한 작가님의 경우에는 그나마 말이라도 꺼내볼 수 있을지언정, (심지어 회사에 다니면서) 일면식도 없는 작가님에게 새로 출발하는 출판사를 위해 무턱대고 원고를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작가 입장에서 그런 편집자/대표를 어떻게 믿고 일을 맡기겠는가. 나는 회사 일을 하면서 독립을 준비하는 고도의 멀티태스킹에 실패했다.  

 

- 이제 막 시작하는 집도 절도 뭣도 없는 1인출판사에게 원고를 주는 일은 작가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일 것이다. 이 조그만 회사가 자본은 얼마나 있는지, 마케팅은 제대로 해줄지, 이름 없는 출판사라 내 책이 아주 묻히지는 않을지, 나라도 이것저것 재볼 것이다. 시작하는 1인출판사에서 가장 지난한 일은 원고를 받는 일이다. 이 맘은 1인출판사 대표님들만이 안다.

 

- 나는 어쩐지 음악이 수학과 같다고 생각한다. 수학 못지않게 음악 시간을 싫어했다. 우리 아빠는 예술적 재능이 다분해서 그림도 잘 그리고 노래도 잘하는 편인데, 우리 엄마는 음주가무를 매우 즐기면서도 노래는 음치에 가깝다. 나는 기묘하게도 엄마 아빠의 열등 유전자만 갖고 태어난지라 엄마의 음치를 물려받았다. 음악 시간에 가창 시험을 보는 것이 악몽 같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고도 노래방에서 노래를 시키면 퇴사하겠다고 했다. 나는 글 쓰는 사람이나 그림 그리는 사람보다도 음악 하는 사람을 가장 신기해한다. 

 

- 그런데 페이스북에서 노래를 부르는 시인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그가 아는 체를 했다.
"실례지만 혹시, 드리외라로셸 <도깨비불> 편집하신 분인가요?"
"어머! 네! 대박! 그걸 어떻게 아세요?" (<도깨비불>은 내가 10년 전 편집한 책이다.)
"그런 걸 모르면 제가 아니죠. 요새 드리외라로셸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제가 판권을 유심히 보는 편이거든요."

 

- 편집자로서 나의 장점은 무엇이고, 그에 맞는 출판 모델은 무엇인가. 그리고 책을 콘텐츠가 아닌 제품(물건)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비즈니스로서 출판을 해본 경험을 들려주시곤 하는데, 이것은 어디서 돈 주고도 못 듣는 이야기이다. 출판사의 새내기 편집자들과 이제 막 허리 역할을 하게 된 새내기 편집장급, 출판계의 후배들에게 무엇을 물려주고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제도화하려는 그의 계획을 들으면서, 나는 급기야 감동하고 말았다. 

 

- 그런 그와 책 한 권을 작업하기로 했다. 샘플 원고를 몇 꼭지 주고받았다. 서로의 작업 방식에 대해서 이른바 '간'을 본 셈이다.

 

- 내가 가진 그릇보다 훨씬 큰 그릇을 가진 모든 저자들을 대하는 일은 어느 모로 두려운 일이다. 편집자로서 내 '밑천'이 드러나는 일이기도 하니까. 내가 가진 그릇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니까. 선생님은 아마 내가 못 미더우셨을 것이다. 나는 저자에게 으레 하는 교정교열 이상의 것을 제공하지 못했다.

 

- 편집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책'이란, '저술'이란 무엇인가. 어제는 선생님과 긴 통화를 나누었다. 하나의 주제에 관해 저자의 오랜 고민과 연구가 담긴, 한 꼭지 한 꼭지가 독립적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스토리와 기승전결이 있는 에세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게 책이 하나의 완결된 사유와 의미가 되도록 돕는 것이 편집자의 일일 것이다. 선생님이 내게 그런 과제를 내주었다. 

 

- 그가 쓰고자 하는 책의 이상, 그래서 지금까지 완성하지 못하고 있던 책의 모양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책'에 대해 고민해 왔는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편집'을 너무 안이하게 생각한 것 같아 선생님께 죄송해졌다. 그런 고민을 모두 저자에게 맡겨두었고, 심지어 그런 것을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놓치고 있었다. 나는 저자한테 지나치게 기대고 있었던 것이다. 

 

- 모든 일이 그렇다. 알면 알수록 어렵고 겁이 난다. 이번 책도 그렇다. 편집 경력이 몇 년인데, 나는 왜 이렇게 모자랄까? 왜 이렇게 버벅댈까? 그럴 때 답은 없다. 이 순간을 잊지 않도록 거듭 반성하는 것밖에. 그리고 의식적으로 씩씩함의 에너지를 발동시키는 것밖에. '부족하면 어떤가. 그러면 어떤가. 혼나면 되지. 실망시키면 되지. 그러면서 한 수 배우는 거지' 하고 마음을 다잡는다. 다만 선생님께 죄송할 뿐이다. 이렇게 모자란 편집자인 줄 모르셨을 텐데. 선생님은 어쩌면 지금 나와 계약한 걸 후회하고 계실까? 

- 인맥이니 사람 관리니 하는 말들이 있지만, 의식적으로 그런 ‘비즈니스 마인드'를 장착해 본 적은 없다. 다만 내가 경험으로 배운 '처세술'이 하나 있다면, '진심'이다. 고마운 일에는 고맙다고 하고, 죄송한 일에는 죄송하다고 한다. 반면 죄송하지 않은 일에는 절대 죄송하다는 말을 남발하지 않는다. 딱 그만큼이다. 이사님과 나의 관계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부장님과 나는 서로의 진심으로 통했다. 그간의 인연들이 그저 스쳐 지나가지만은 않는다. 절대 겸손하지 않은 나지만, 늘 이것만은 감사해한다. 나에게는 나를 도와주는 분들이 많다. 

 

- 정아은 작가와 첫 책 작업을 하고 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그에겐 배울 점이 무척 많다. 먼저 그는 활짝 열려 있는 사람이다. 그와 이전에 벌써 세 권의 책을 함께 작업했는데, 작가와 편집자가 원고를 두고 으레 주고받는 티키타카를 그와 주고받을 때면, 늘 긴장감이 넘치면서도 내가 한 뼘 성장하는 느낌을 받는다.  

 

- 원고는 작가의 '거의' 전부이다. 편집자는 원고를 통해 작가의 본질로 바로 접속하여 그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작가가 '지적질'을 일삼아하는 편집자로부터 상처받지 않기란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지적질을 생산적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다. 그가 내 코멘트를 100퍼센트 기꺼이 받아들이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내가 그것을 원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나는 100퍼센트 편집자가 아니니까. 다만 나의 의견을 제시할 뿐이고, 그가 내 의견에 대해 반박할 줄 안다면 나는 비로소 안심한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부분까지 그가 깊이 생각하여 원고를 썼다는 것을 잘 이해하게 되었으니까. 그는 편집자를 설득할 줄 아는 사람이다.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다.   

 

- 도대체 그 사람은 왜 그렇게 행동하게 되었을까, 도대체 이 현상은 어째서 일어나게 된 것일까를 쉬지 않고 분석하여 '왜'에 대한 자기만의 답을 도출해 낸다. 폭넓고 깊은 독서가 바탕이 된 그의 지성이 제 본분을 다하여 열심히 작동하는 모습을 나는 바로 옆에서 직관하고는 무릎을 친다. 세상에는 일면이 아니라 이면이 있음을 나도 함께 깨닫게 된다.

 

- 몇 통 전화를 돌리고 나니 밥이 넘어가질 않는다. 밥 한 숟갈, 고기 한 점 먹다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내게 마케터 한 명을 데리고 가라는 조언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릴 거라는 예언의 완곡한 표현이었다. 나는 결국 최악의 계약을 하고 만 것이다. 계약서에 도장도 다 찍고,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챙겨 왔는데, 나는 이제 끝난 것인가. 

- 내가 잘하는 두 가지가 있다. 우선 판단이 빠른 편이다. 다음으로 얼굴에 철판도 잘 까는 편이다. 얼굴에 철판 깔고 계약을 물려? 아아, 그럼 그 MD님은 나를 아마추어 햇병아리로 볼 텐데?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 미래의 수익이 걸려 있는데? 나는 결심하고는, 다급하게 MD 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 "제가 서점 영업은 처음이라... 매대 가격이 얼마인지 알아보려고요."

"아, 네,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총총총.
"여기 베스트셀러 매대 가장자리는 얼마고요, 저기는 얼마예요."
"아, 그럼 매대 사용 기간은 어떻게 되나요?"
"딱 한 달이에요."
"그렇구나. 그럼 저쪽 매대는 얼마인가요?"
"아... 거기는 좀 비싸요. 큰 출판사에서 미는 책이 있을 때 거의 연 단위로 계약하세요. 호호."
"아, 그렇군요. 호호."
열심히 메모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제가 이번에 신간을 냈거든요. 요기 이 책입니다."

"아, 네, 이 책이구나! 첫 책인가요?"

 

- 정확히 말하자면 열심히 하게 '됐다'. 무슨 전략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심심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이른바 '잡일'이 없어졌다. 사람들과 부대껴야 할 일도 없어졌다. 회사를 다닌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스트레스였다는 걸 프리랜서가 되고부터 알게 되었다. 나의 경우 아마도 회사 내의 '위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료'는 좋았지만 '윗사람'은 싫었다. '아랫사람'도 싫었다. 나는 동기고 후배고 선배고 사장이고 모두 '동료’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회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가 동료인 조직', 그건 아마 형용모순이거나 이상세계에만 있는 어떤 것일 것이다. 

 

- 모종의 위계가 있는 인적 네트워크. 그곳을 빠져나간다는 것은 이른바 '사람 스트레스'를 내려놓는 일이었다. 내가 혼자 일하는 작업실(우리 집)엔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와 인쇄소 부장님과 여러 작가님들과의 소통이 있지만 '정치'가 없다. 세상 평화로운 곳이 나의 작업실이다. 위계와 정치가 빠져나간 자리에, 내게 있는 줄도 몰랐던 에너지가 들어찼다. 

 

- 나의 경우 SNS를 해서 얻은 게 있다면 말 그대로 '연결'이다. 온라인 안에서가 아니라 온라인 밖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 네 번째 회사에서 나를 뽑았던 사수가 그랬다. 편집자가 좋은 것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세상 모든 사람에게 말을 걸 수 있는 것이라고. 누구에게나 책을 내자고 제안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다행스럽게도 나는 호기심이 많다. 열려 있는 편이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가장 큰 장점이 아닌가 싶다. 나의 세계 바깥에 있는 이상하고 신기한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이 편집자에게 얼마나 큰 자산인지를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SNS를 통해서 나는 그 경험을 맘껏 즐기게 되었다. 

 

- 프리랜서가 되는 일은 양날의 검이라고들 한다.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명확하다. 나의 경우 가장 좋은 점은 내 시간을 온전히 내가 알아서 쓸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점에 관하여서는 나도 겁을 많이 먹었다. 나는 퇴근하면 예능 프로그램이나 넷플릭스를 보며 침대에 뻗어 있는 것이 일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주말에도 마찬가지다. 우리 집 고양이 (이름이 '딸기'다)나 <주토피아>에 나오는 나무늘보처럼 밥 먹고 화장실 갈 때 빼고는 침대에 딱 붙어 있다. 특히 나는 아침형 인간이 아닌지라 주말만 되면 낮밤이 바뀌어 월요일 아침이 되면 비몽사몽 하기 일쑤다. 그런 내가 프리랜서, 그것도 사장이 될 수 있을까? 

- 그런데 사장이 되어보니 갑자기 나는 부지런한 사람이 되었다. 밤낮 주말 할 것 없이 일을 하는데, 일이 하나도 힘들지 않고 피곤하지도 않다. 따박따박 월급이 들어오는 일도 아니고, 심지어 내 돈을 써가며 하는 일인데 (아직은) 스트레스가 없다. 일이 없으면 오히려 심심해 미칠 지경이 되어 원고를 안 주고 계신 작가님들에게 연락을 돌려 공포에 떨게 만든다. 아, 나는 내 정체성을 미처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나는 어쩌면 워커홀릭인지도 모른다!

 

- 그에 반해 슬프게도 나쁜 점은 수두룩하다. 첫째, 폐병에 걸릴 것 같다. 나는 방에서 담배를 피우는 개망나니다. 특히 보도자료를 쓰거나 SNS에 글을 쓸 때면 줄담배를 내리 피운다. 대체 왜 글을 쓸 때는 꼭 담배를 피우게 되는지 모르겠다. 

- 둘째, 배가 나온다. 내게 운동이라곤 출퇴근 및 점심시간에 걸어 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특히 점심시간이 아니면 햇볕 쬘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회사 다닐 때도 반좀비였달까. 지금은 더 심하다. 운동이라고는 숨 쉬는 것이 전부다. 

- 셋째, 가끔 심심하다. 그러나 이건 어찌어찌 극복할 수 있다. SNS를 가지고 노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페이스북에 놀아달라고 아무리 외쳐도 나랑 놀아주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아이가 모래땅에 혼자 그림을 그리고 놀 듯, 나도 그렇게 논다. 별 재미도 없는 글을 올리곤 한다.

- 물론 가장 안 좋은 점은 돈 문제와 연관된다.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려고 차곡차곡 모아둔 몇천만 원을 책이라는 물건에 쏟아붓고 있다. 이렇게 책이 안 팔리는 시대에, 나 좋아서 말이다. 정회엽이 쓴 <책 덕후 아님>에서 작가는 교생실습을 나갔다가 충격을 받는다. 엄청난 베스트셀러의 제목을 아는 학생들도 드물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인문교양서는 비주류의 비주류"라고 한다. 아, 나는 어쩌다 비주류의 비주류를 만들겠다고 작정한 것인가.

 

- 그러니 이 가여운 프리랜서를 위해 여러분이 해주실 일이 있다. 책을 사주시는 일이다. 내 책이건 남의 책이건 상관없다. 한꺼번에 다섯 권씩 사주시면 더 좋고, 아니면 도서관 다섯 군데에 한 권씩 신청해 주셔도 봐드리겠다. 

 

- 오늘은 저자 선생님 한 분에게 호되게 혼났다. '헤어질 결심'까지 생각하고 연락하신 것이다. 전화로 한참을 통화하다가 끊고 직접 만나 뵈러 갔다. 지하철을 타고 약속 장소로 가는 길에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 우리가 엇갈린 이유는 근본적으로 이렇다. 나는 학술서에 가까운 이 책을 좀 더 대중적으로 만들어보려고 이리저리 요리를 했고, 선생님은 내 요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과연 독자를 누구로 상정하느냐는 것이 선생님의 질문이었다. 맞다. 모든 책을 대중 독자에게 팔 수는 없다. 나는 깨끗이 인정했고, 그 방향성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 어쩌면 내가 너무 타성에 젖어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혼날(?) 각오를 하고 과감하게 내 의견을 개진하는 타입의 편집자인데, 그 스타일이 맞는, 그래서 그런 방식을 환영하는 저자가 있다. 아마 나는 그런 방식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지 말아야 할 원고도 있다. 너무 정교하게 짜여 있어서 하나를 건드리면 모든 게 무너져내리는 그런 원고들. 원고를 좀 더 성실하게 읽고 더 정확히 파악했어야 했다. 텍스트가 어렵다고 어려운 부분을 몽땅 들어내는 게 답은 아니니까. 밑도 끝도 없이 빨간 줄을 그어놓고 '쉽게 써달라'고 요청하는 게 답은 아니니까. 비 내리는 창밖이 좋은 불광천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선생님은 헤어질 결심을 철회하셨다.

- 출판이 어렵다. 나는 마름모 출판사가 인문학에 투자할 수 있는 규모를 갖춘 출판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책은 그 첫 번째 시도가 될 것이다. 선생님과 작업하는 동안 의견을 나누면서 출판에 대해 장밋빛 미래를 그려본 적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 "우리가 이 책을 팔면 얼마 팔겠냐. 1,000부 팔면 잘 파는 거 아니겠느냐. 그렇다고 해도 이 책을 그런 식으로 낼 수는 없다. 이 책은 대중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쓴 책이 아니다. 적은 독자라도 그들에게 충실한 책을 썼다. 그게 바로 나란 사람이다."

선생님은 말씀하신다. 그것은 어쩌면 책을 팔아서 부자가 된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닐 것이다. 선생님은 '살아남은 자'에 속한다. 이 척박한 출판계에서, 그것도 돈 안 되는 인문학으로. 

 

- 출판이 어려운 것은 무조건 '잘 팔리는' 책으로만 살아남을 수는 없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아니 살아남을 수는 있을지라도 이름을 남길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그 두 가지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고 싶다. 이건 나만의 포부가 아니라 많은 출판인들의 희망일 것이다. 우리는 '좋은' 책을 만들고 싶다. 
 
- 언젠가 작가님 한 분이 펑펑 울었다는 글을 읽었다.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온전히 거절당한 경험을 했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나는 그 '내 편'이라는 사람이 아마도 어느 편집자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 작가는 종종 거절당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편집자에게 또는 독자에게 평가받는 사람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오롯이 보여주는 일이다. 온 세상에 내 생각과 가치관과 세계관을 드러내는 일이다. 자칫 상처받고 다칠 수도 있는 일이다. 

- 편집자 역시 작가에게 거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서로가 콘셉트를 논의하며, 원고를 고치며, 제목을 짓고 보도자료를 쓰면서 말이다. 책을 만드는 전 과정에서 내 능력과 실력, 원고를 대하는 자세와 마음, 작가에 대한 애정 혹은 무관심을 드러낸다. 아니 드러나고 만다.

- 오늘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어느 작가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나와의 작업을 접을 생각을 하고 있다. 내 능력과 실력, 원고를 대하는 자세와 마음, 작가에 대한 애정에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작가에게 거절당한 것이다. 

- 여러 가지로 마음이 복잡하다. 작가의 글을 오로지 내 '취향'에 맞게 난도질했던 것이 아닐까. 그 어려운 원고를 앞에 두고 나태했거나 오만했던 것은 아닐까. 작가님은 책에는 "어떤 층위란 게 있다"고 했다. 그런 층위가 없는 글, 계속 평평하기만 하고 어느 지점에 있어야 할 깊이가 없는 책은 잠깐 반짝할지 몰라도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라고 했다. 그 말을 오래오래 곱씹었다. 

 

- 과연 나는 그러했다. 그런 책들이 몇몇 떠오른다. 여러 층위를 가진 매력이 있는 책을 내가 너무 쉽게, 평평하게 만들어버린 경우를. 글의 개연성이나 연결 관계에만 목매달고, 이따금 움푹 들어간 깊이가 있는 어느 지점을 나는 '뜬금없다'고 여기고는 했다. 나는 그들에게 결과적으로 좋은 편집자가 아니었다. 

- 펑펑 울었다는 그 작가님처럼 나도 오늘 울었다. 이젠 편집 일이 쉬워졌다고 말하곤 했다. 그게 얼마나 용감하고 무식한 말이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나는 어쩌면 타성에 젖은 것이거나 일종의 슬럼프에 빠진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깨닫게 되는 데 한 명의 작가를 잃었다. 혹독한, 혹독한 날이다.

 

- 편집자도 여러 작가와 작업하지만, 작가도 나라는 편집자뿐 아니라 여러 편집자를 거치게 된다. 책을 많이 내고 출판 경험이 많은 작가가 그렇다. 그러면 작가는 편집자가 그렇듯 상대방을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이 편집자는 어떤 스타일인가. 원고에 손을 별로 안 대는 스타일인가, 적극적으로 고치는 스타일인가. 콘셉트는 잘 이해하고 있는가, 아니면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인가. 작가는 편집자의 역량과 스타일을 판단한다.

 

- 어제는 J작가님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편집자님은 한 꼭지 한 꼭지 흩어져 있는 원고를 기승전결로 구성하는 걸 특히 잘하시는 것 같아요. 저는 그게 편집자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보거든요. 마치 기획하고 쓴 책처럼 책을 만들어주세요."

- 그래, 맞다. 내 자랑이다. 나는 이 작가님과 책을 두어 권 만들었는데, 작가님은 그날그날 떠오른 생각을 하루도 빠짐없이 페이스북에 올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작가님과 작업을 할 때는, 주제도 내용도 천차만별, 365일 가지가지인 글을 고르고 골라 예쁘게 구성해 콘셉트가 있는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게 편집자의 일이다. 내가 그 점에서 특장점이 있다면 나는 이 작가님과 궁합이 아주 잘 맞는 것이다. 

- 같은 원고를 열 명의 편집자에게 주면 열 개의 다른 책이 나온다고들 한다. 편집에는 정답이 없다는 말이다. 누가 맞고 누가 틀린 것은 없다. 각자가 가진 역량과 감각대로 책을 '더 좋게' 만들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 과정에서 작가와 궁합이 잘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작가와 나의 세계관이 충돌할 수도 있고 합치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서로 내상을 입을 수도 있고 더욱 공고해질 수도 있다. 편집은 그처럼 인간적인 일이다.

 

- <아주 정상적인 아픈 사람들>이란 제목을 지으면서 사실은 나를 떠올렸다. 나는 아주 정상인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아픈 사람인 것도 같다. 이런저런 기억의 응어리를 풀지 못한 채 가슴에 담아두고 살아간다. 퇴근할 때면 어김없이 덮쳐오던 무기력감, 그야말로 집채만 한 허무와 우울감에 뜬금없이 눈물 흘리기도 했다. 그냥, 그냥 눈물이 났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기엔 내가 내 증상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울감을 달고 살았다. 다만, 이것이 치료해야 할 병이란 걸 이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 나의 작가인 A 작가님, 1인출판을 하는 S 대표님, 모서점의 Y과장님과 하는 일종의 모임이 있다. 별것 없이 밥 먹고 수다 떨다 헤어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스로 이루어진 모임이다. S와 Y와는 만난 지 이제 딱 세 번째지만, 내가 만난 남성들 중 손에 꼽을 만큼 젠틀하고 세련되고 지적이고 유머러스한 분들이다. 다들 출판계 사람들이라 주로 책 이야기, 출판사 이야기, 편집자 이야기, 출판 정보들을 나누고는 하는데, 역시 이들 사이에 끼어 있으면 나는 모르는 게 너무 많은 새내기 같다. 특히 S로부터는 1인출판사 선배이자 대표로서 배우는 게 많다. 
   

- 이제 4년 차 대표인 S는 책을 대하는 마음이 사뭇 진지해서 볼 때마다 신선하게(?) 느껴진다. 그가 책에 대해, 출판에 대해 말할 때는 죽은 말들, 상투적인 말들이 없다. 이를테면, 이 책 그냥 내는 거예요, 돈은 안 될 거예요, 이 업계가 다 그렇죠 뭐, 출판계에서 베스트셀러되어봤자 얼마나 번다고... 우리는 그런 말들을 한다. 그것이 우리의 정신건강과 사업에 도움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마치 제삼자의 입장에서 내 일이 아니라는 듯, 그렇게 이 지난한 판에서 거리를 두는 말들을 하곤 한다.  

 

- 그런데 S에게서는 그런 말들이 없다. 본인이 만드는 매 원고에서 희망을 발견하며, 독자에게 그 진심을 전달하려고 하고, 하물며 내가 만들 책에 대해 말할 때도 나보다 더 애정 어린 말들로 내 원고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북돋아주려고 한다. 어찌 보면 너무 반듯한 사람이라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고, 이 판에서 그처럼 사심 없고 꿋꿋한 것이 마치 만화에 나오는 캔디 같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출판계의 모든 사람이 좌절하여 하나둘씩 다른 것을 좇을 때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남아 업계를 지키면서 좋은 저자를 발굴해 내고 정성스럽게 책을 만들어낼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 그를 보면서 많이 반성했다. 자조와 냉소가 섞인 말들에 동조하고, 또 나도 모르게 그런 말들을 뱉고 있었다면, 이제 그만해야지. 그런 생각들은 쉽게 주입되고 그런 말들에는 쉽게 감염된다. 나를 죽이게 하는 말들이다. 생기를 빠져나가게 하는 말들이다. 저자의 희망을 믿고, 책의 힘을 믿지 않는다면 나도 어느새 기운 빠지는 말들이나 늘어놓는 뒷방 노인네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 의식적으로 내 생각을, 내 말을 좀 더 살아 있는 것으로 순화시키려고 노력해야겠다. 안 그러면 어쩔 텐가, 출판은 내가 선택한 판이고 내가 선택한 길이다. 상황에 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말고 다른 답은 없다. 

- <데미안>의 번역 원고는 세 번째 역자를 거치고서야 출간되었다. 첫 번째 역자는 타 출판사의 번역을 지나치게 참고했다. 나는 그것을 늦게(?) 알아차렸다는 이유로 사장님께 매우 혼났다. 계약을 파기하게 되었다. 두 번째 역자의 번역은 아름다웠다. 그런데 이것이 헤세의 문장이었던가? 아무래도 당시 회사는 세계문학전집의 후발주자였기 때문에 원전에 충실하고 꼼꼼한 번역으로 차별성을 꾀했다. 원전 대조는 물론이고 타 출판사와의 번역 비교도 편집자의 몫이었다. 그런데 이번 번역 원고는 헤세가쓰지 않은 부사와 형용사들로 문장이 오히려 미려해졌다. 이걸 어찌하지? 고민하다 사장님한테까지 보고가 되었다. 나는 또 어째서인지(?) 사장님께 매우 혼났다. 역자 선생님께 출간 방향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 계약을 파기하게 되었다. 

 

- 세 번째 역자 선생님께는 매우 촉박한 일정으로 번역 의뢰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두 달 만에 번역, 해설, 편집까지 마쳐야 하는 일정이었다. 역자 선생님은 마치 원더우먼처럼 달렸고, 대략 3주 만에 단행본 240쪽 분량의 번역을 끝냈다. 탁월한 해설은 덤이었다(꿈과 무의식에 관한 C. G. 융의 이론으로 <데미안>을 새롭게 해석한 선생님의 해설에 대해서는 나도 자부심을 느끼는 바다). 

 

-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독일어가 가능한 선배 편집자가 최종 교정을 봐주기로 했다(사장님도 일부 참여하셨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교정지를 역자 선생님께 보냈다. 일은 지금부터다. 선생님은 번역이 훌륭한 만큼 일을 깐깐하게 하기로 소문난 분이었다. 교정지를 받은 선생님이 노발대발하셨다. 이것은 나의 문장이 아니라고 했다. 편집자가 문장에 너무 많이 개입했다고 했다. 선배와 나는 후들후들 떨며 댁으로 직접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우리는 눈물이 쏙 빠지게 혼쭐(?)이 나고 다음 날 회사로 출근했다.

 

-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이번엔 사장님이 역자 선생님과 식사 자리를 만들라고 했다. 단단히 화가 난 역자 선생님의 마음을 풀어드리려는 작전이었다. 나와 선생님, 사장님 그리고 국장님이 동석했던 걸로 기억한다. 어른들(?)의 모임이라 분위기는 화기애애해 보였지만, 알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이 차려놓은 음식상 위로 떠다녔다. 당시 새내기 편집자였던 나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쭈그리고 앉아 맥주만 따라드렸다. 무서웠다. 

 

- 처음으로 연봉 협상이란 것을 했던 것은 네 번째 회사에서였다. 당시에 나는 <무엇이 행동하게 하는가>라는 제목의 행동경제학 책을 편집하고 있었고, 공교롭게도 그 책에서 연봉에 관한 은밀한 비밀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조사에 의하면 남자들은 입사할 때 자신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뻥뻥 치는 반면, 여자들은 언제나 자신의 능력치보다 자신을 더 깎아내리면서 급속히 겸손해진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연봉 협상을 할 때 거침없이 자신의 능력을 부풀리며 더 많은 연봉을 요구하지만, 여자들은 '협상'이란 것 자체에 대해서 부담감을 느끼며 마음껏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 으음, 그런가? 정말 그런 것도 같군. 어째서 그런 걸까? 그 책을 읽으면서 생전 처음으로 나 자신의 가치가 얼마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의 가격을 타인이 매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매길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게 되었다. 내 가격은 얼마일까? 나는 나를 얼마로 가격 매길 것인가? 

 

- 그런 마음으로 협상 테이블에 앉아 대표님을 마주 보았다. 용기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돈 얘기가 그렇게 껄끄러웠다. 뭔가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 그게 문제인가. 내 밥그릇이 달려 있는데. 해보자, 협상! 
"대표님! H과장님과 저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입사해서 비슷한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보다 일을 덜하거나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H는 남자였고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러니 그가 차장 직급을 달게 된다면, 저도차장 직급을 달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아, 자네 생각은 그런가?"

"네, 그렇습니다!"

"알겠네, 그럼 차장 직급을 주지."

"...!"

"그럼 연봉은 이 정도가 어떤가?"

 

- 나는 대표님이 처음 제시한 금액에서 딱 백만 원을 더 올려 받았다. '협상'이란 것을 한 것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타이밍이라면 타이밍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이 연봉을 '협상'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재(?)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나를 작게 평가하는 것이지, 따지고 보면 회사에서 나 없으면 곤란할 일이 많지 않겠는가? 어째서 그런 생각을 처음 해보았단 말인가! 내가 당시 그 책을 읽지 않았고, 연봉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였다면, 나는 회사가 정해놓은 그만큼의 가격으로 박제되는 것이었다. 아아, 협상이란 그런 것이다. 순간의 선택이다. 평생, 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밥그릇의 품질을 좌우한다. 

 

- 그때 이후로는 협상이란 것을 한다. 스카우트 제의를 몇 번 받아본 적이 있다. "저는 이만큼은 받아야지 회사를 옮기겠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내 가격을 부른다. 어디서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내가 거절한 곳도 있고, 어디서는 내 연봉이 너무 높다며 나를 거절한 곳도 있다. 후회는 없다. 그만큼 줄 만한 규모니까 그만큼 부른 거고, 아니면 됐다고 생각했다. 

- 그런 상상을 한다. 모든 편집자가 적어도 한 번은 사장님이 제안하는 연봉을 거절해 보면 어떨까? 그런다고 큰일 나지 않는다. 올려주면 좋고 아님 말고 말이다. 그러면 최소한 '너 말고도 쓸 만한 사람은 널렸어'라고 생각하는 사장님들에게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을까? 우리는 어쩌면 회사에 없으면 아쉬운 인재일지도 모른다. 아아, 이제 나도 사장인데, 이러다가 사장님들한테 몰매를 맞겠지? 하지만 나는 괜찮다. 나는 평생 1인출판사 사장만 할 거니까.

 

- 그렇다고 이 모든 기획이 다 '희소'한 것은 아니다.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소크라테스 이후로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고,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모두 유치원에서 배운다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계속 새로 나온다. 같은 이야기는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된다. 우리는 시대와 시절의 흐름에 맞게 쓰이고 또 쓰이는 책들에 다시금 공감하고 또 공감한다. 

- 폴 김과 김인종이 함께 쓴 책 <아주 정상적인 아픈 사람들>에 이런 말이 나온다.

"어떤 사람들은 깨달았다고 하지만, 그 사람의 앎이나 깨달음이 나의 정답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경험하는 답을 가져야 합니다."

 

- 어쩌면 존재해야 하는 단 한 가지 이야기(깨달음)를 저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놓은 것이 책이라는 물건일지도 모른다. 그 유일무이한 저마다의 경험들이 책이 되어서 나온다. 편집자는, 마케터는, 디자이너는 그것을 오로지 단 한 권의 책으로 보이도록 돕는 조력자일 것이다. 

- 멱살을 잡고 흔들어주고 싶을 때가 있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번역하라고? 아, 나는 번역으로 먹고사는 전문번역가가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가. 번역하는 선생님들은 참으로 고달프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고달픈 정도가 아닐 것이다. 이건 누가 대신 풀어줄 수 없는 문제다. 저자에게 직접 전화를 하거나 메일을 쓰지 않는다면, 어디 물어볼 데도 없다. 저자가 고인이라면 더더욱 편집자는 완성된 원고를 두고 지적질이나 할 뿐, 대신 번역해 주는 사람이 아니다. 번역은 온전히 혼자서 책임져야만 하는 부담이다. (그럴 때 나는 저자에게 살기를 내뿜는 역자의 내면을 느끼곤 한다.) 

 

- 둘 중 하나다. 목숨 걸고 그 문장을 번역해 내거나, 포기하고 대충 얼버무린다. 역자는 도무지 번역되어지지 않는 단 한 문장을 놓고 윤리적 고민에 빠진다. 세상에는 불가능한 것이 많다. 불가해한 것이 많다. 이 문장이 그렇다. 이런 문장은 누구라도 읽어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이 문장을 번역해 낸다고 누가 알아줄까? 혹은 번역해내지 못한다고 누가 알까? 그 고민을 현재진행형으로 목도하는 것이 편집자다. 편집자는 번역자의 윤리적 선택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게 되는 잔인하고 적나라한 친구다.  

 

- 그런데 가끔 그런 판단이 설 때가 있다. 아, 이 저자는 이 이상의 글은 쓰지 못하겠구나. 원고를 이 이상의 퀄리티로 끌어올리지는 못하겠구나. 이 역자는 여기가 한계구나. 저자의 블랙 유머와 디테일한 묘사를 구현해 내기엔 역량이 모자라는구나. 이번엔 편집자가 고뇌에 빠진다. 편집자는 저자/역자의 역량을 100퍼센트 또는 120퍼센트 끌어내는 사람이어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편집자가 '항상' 100퍼센트 또는 120퍼센트를 끌어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현실이 아닐 것이다. 특히 번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오역 또는 오역으로 추정되는 문장을 발견해 낼 수 있을지언정, 편집자가 그것을 얼마나 높은 확률로 제대로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역자가 해석하기를 포기해 버린, 개미지옥 같은 텍스트일 경우에 말이다. 

 

- 그래서 역자란 편집자가 그 역량에 가장 많이 의존하게 되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역자란 내가 아는 한 가장 어려운 직업이기도 하다. 역자는 실력을 갖추고 성실해야 하며 심지어 정직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끔 역자의 선택을 지켜보게 된다. 그가 포기해 버린, 얼버무려버린 문장들을 발견할 때면 나도 무력해지곤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저 이 문장이 이상합니다, 다시 한번 보아주세요, 요청할 수 있을 뿐이다. 

 

- '완벽한' 번역을 바랄 수는 없다. 오역이 없는 번역이란 불가능하니까. 반드시 100퍼센트의 실력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란 누구나 실수를 하면서 배워나가는 것이니까. 다만 정직해질 필요는 있다. 나는 모르겠다고, 깨끗이 인정하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그래야 다음 스텝으로 더 효율적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제2, 제3의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볼 수 있을 테니까. 그게 텍스트를 다루는 사람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윤리가 아닌가 싶다. 

 

- 편집자가 하는 여러 일이 있다면, 이은혜 편집장의 책에서는 이것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저자의 가난, 저자의 고집, 저자의 한계, 저자의 신념, 저자에 대한 존경. 이 책에 보이지 않는 플롯이 있다면 이 저자들을 한 명 한 명 거치면서 성장해 가는 편집자의 이야기다. 가장 부러웠던 것이 이 지점이다. 그의 성장의 동력에는 책에 대한 믿음이 있다. 이 편집자에게는 책, 그리고 지성에 대한 믿음이 있다. 엄청나게 굳건하고 추호의 의심도 없어서 "트렌드를 좇고 겉치레에 능한 책"들을 엄한 눈으로 바라본다. "요새 누가 좋은 책(안 팔리는 책) 만들어요?" 하는 말을 직접 들어본 적이 있고, "책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자고 무자비한 CEO와 싸워본 적이 있는 나는, 이제 책을 바라보는 저런 시선이 신선하기까지 하다. 이제 그런 말을 해주는 선배 편집자가 없다.

 

- 나는 가끔 책이 깡그리 사라져 버린 세상을 상상해 본다. 어쩌면 그곳은 어둠과 무지가 지배하는 세계라기보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인 세계, 오히려 유토피아에 가까운 세상일지도 모른다. 책이, 문자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지식이, 지성이 인간을 더 행복하게 해 줄까? 나로 말하자면 가끔 세상에 책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나는 책을 읽지 않는 편집자라고 농담처럼 고백을 한다(독서력이 달리는 건 사실이다). "편집자라고 꼭 책을 많이 읽어야 하나요?"라고 궤변을 늘어놓곤 한다. 나는 편집자 정체성을 갖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자꾸 그 정체성을 밀어내려고 한다. '편집자란 어떤 존재인가'를 알리고자 한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면, 편집자가 다 그녀와 같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그녀와 같이 책에 대한 믿음이 굳건한 사람은 없다. 이 책의 저자는 내가 아는 가장 편집자다.  

 

- 저자가 책에 쓴 것이 편집자 일의 전부는 아니지만 가장 본질적인 것은 맞다. 편집자는 저자와 함께 자라고, 그 역도 맞다. 편집자가 자라는 만큼 저자도 자란다. 그리고 독자도 자란다. 자라고 변화하고 멈추지 않고 성숙해지는 것. 저자는 책의 정신에 대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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