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미야모토 테루] 금수

일루젼 2023. 9. 28.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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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미야모토 테루 / 송태욱
출판 : 바다출판사
출간 : 2016.01.10 


       

오랜만에 책 선물과 추천을 받았다. 처음 접하는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등대>를 쓴 저자였다. 앞으로 몇 작품을 더 찾아 읽게 될 것 같다. 

 

사실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낯선 책을 선물 받는 것은 반갑기도 하지만, 조금 곤혹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취향에 맞지 않는 책을 억지로 읽는 일은 꽤나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싫어하는 음식을 선물로 받는 기분과 비슷하지 않을까) 언젠가부터는 깜짝 선물보다는 상대가 원하는 걸 선물해 주게 된 것 같다. 서로가 좋아할 만한 것을 알게 되면 전해주기는 해도,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을 권하는 일은 드물다. 그래서인지, 그러다보니인지, 어느새 내 주위에는 자신만의 취향이 확실한 이들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금수>는 다행히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역자의 후기나 추천인의 설명은 '다자이 오사무'를 연상시킨다는 것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동의하기 어렵다. <금수>의 아리마는 전락해 가면서도 끝없이 몸부림친다. 사업을 벌이고, 머리를 숙여 돈을 구한다. 현재는 동거 중인 여성에게 숙식을 제공받고 있지만 계속해서 무직 상태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실격>의 요조나 <무진기행>의 윤희중에게는 그렇게 '땀을 흘릴' 의지가 결여되어 있다. 그들의 세계는 훨씬 무기력하고 자기 연민적이다.

 

20대에 <인간실격>에 강하게 매료된 적이 있었다. 지금 다시 읽는다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현재는 '나쓰메 소세키' 쪽에 조금 더 마음이 기운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책의 아리마 야스아키는 <그 후>의 다이스케와 더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다이스케의 고등유민적인 모습보다는 결심 이후의 모습과) 전반적인 분위기나 인물의 인간성보다는 초반에 언급되는 정사(情死) 때문에 다자이 오사무가 연상되는 것 같다. 

 

<금수>는 이혼한 지 10년 후, 우연히 재회하게 된 남녀가 주고받는 십 여편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각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서로의 모습이나 과거의 추억, 그리고 상대는 알지 못하는 과거와 현재에 관한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주로 지나간 일들에 대한 회상과 설명 중심이던 편지가 각각 레이코와 기요타카라는 '현재와 미래'를 상징하는 인물들에게로 초점이 옮겨가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지나간 과거는 변하지 않지만, 그것에 발목 잡혀 있기만 해서는 변하지 않는 현재가 이어질 뿐이 아닐까. 아키는 현재를 과거와 미래 사이에 끼어있는 찰나의 틈이라고 표현하지만 나는 과거와 미래는 꿈이라고 생각한다. 존재하는 것은 지속되고 있는 현재뿐이다. 

 

저자의 다른 작품들을 읽지 못해 의도를 짐작하는 것이 주저되지만, 나는 작가가 두 사람의 선택과 결말을 통해 반복되어 온 업보를 끊어내는 모습을 그려내고 싶었다고 본다. 설사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지 못하더라도 그 상황을 맞이하는 인물의 내면만은 달라져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그 여관에서의 하룻밤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삶은 수많은 단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함께 사는 부부간에도 각자에게는 자신만의 -그리고 때로는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삶이 존재한다. <금수>의 화두가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은 다르지 않다'였다면 이 책을 읽은 후의 내게 남은 화두는 '같은 것을 같지 않게 만드는 것에서 시간이 생겨난다'이다.  

        

그런 점에서 가끔은 예상을 벗어나는 즐거움도 좋은 것 같다. 가끔은.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 아리마 야스아키 님께
전략.


- 자오의 달리아 화원에서 돗코누마, 그로 오르는 케이블카 리프트 안에서 설마 당신과 재회할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저는 너무 놀란 나머지 돗코누마의 승강장에 도착할 때까지의 20분간, 거의 말을 잊어버린 상태가 되었을 정도입니다. 

 

- 아들과 함께 도쿄 역까지 갔고, 거기서 또 자오의 관광포스터를 봤습니다. 마침 단풍철이라 커다란 사진 가득히 각양각색의 수목이 가지를 뻗고 있었습니다. 자오라고 하면 겨울 수목밖에 모르는 저는 도쿄 역의 중앙 홀에 멈춰 서서 곧 얼음이 되어 버릴 무수한 수목이 지금 선명하게 변색하여 하늘 가득한 별 아래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애가 타서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된 저는 몸이 자유롭지 못한 아들에게 어쩐 일인지 맑고 시원한 산의 모습과 수많은 별을 보여 주고 싶어졌습니다. 기요타카에게 그 말을 하자 아주 기뻐하며 가고 싶어, 가고 싶어, 하며 눈을 빛내며 졸라 댔습니다.

 

- 그래서 우리 모자에게는 다소 모험이라고 생각되기는 했지만, 역 안에 있는 여행 대리점으로 가서 야마가타까지 가는 표와 자오 온천의 여관을 예약하고, 게다가 센다이에서 오사카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까지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만석이라 표를 끊기 위해서는 예정을 변경하여 자오나 센다이에서 하룻밤 더 묵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저는 자오에서 이틀을 묵기로 하고 우에노 역으로 향했습니다. 만약 자오에서 하룻밤만 묵었다면 당신과 만나는 일도 없었겠지요. 지금 저에게는 그게 무척이나 신기한 일처럼 생각됩니다.

 

- 하지만 저는 뭘 어떻게 대답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뭘 물어도 당신과 세오 유카코 씨에 대해서는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비서 오카베 씨의 집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큰일이 일어났네. 아라시야마까지 내 차로 당장 와 주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 아버지는 오카베 씨에게 병원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며 전화를 끊고는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채 저를 보더니 다시 바깥 경치에 시선을 던졌습니다. 그 순간 아버지의 얼굴과 병원 복도의 유리창으로 보였던 동틀 녘의 풍경을 어쩐 일인지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아버지는 그런 표정을 띤 채 공허한 동작으로 돌연 담배를 입술로 가져갔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제가 열일곱 살 때였는데, 저는 의사가 어머니의 임종을 알린 순간 머리맡에 앉아 있던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대담한 데다 나약한 구석을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이 없는 아버지가 멍한 상태로 가슴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습니다. 생각건대 그것은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뜻밖의 동작이었습니다. 

 

- 아버지는 어머니의 임종 때와 똑같은 몸짓과 표정으로 병원의 긴 복도에 서서 이른 아침의 푸르스름한 겨울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불길한 것을 느끼고 핸드백에서 성냥을 찾아 꺼내서 아버지의 담배에 불을 붙여 드렸습니다. 그때 제 손은 차갑게 얼어붙은 것인지 계속해서 미세하게 떨렸습니다. 아버지는 떨고 있는 제 손을 한번 힐끗 보고는 이렇게 툭 한마디를 내던졌습니다. 
"죽어도 상관없다. 그렇지 않느냐?"
하지만 저는 그런 걸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일까요? 달리 뜻밖의 사고라면 또 모를까 남편이 왜 클럽의 호스티스와 동반자살을 해야 했을까요? 

 

- 남편으로서보다는 자신의 후계자로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당신도 잘 알고 있었을 줄 압니다만, 대를 이을 사람이 없는 아버지는 당신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상당히 강제적인 형태로 당신을 호시지마 건설의 후계자로 삼기 위한 진영을 갖춰 놓았던 것입니다. 당연히 회사 안에는 그것을 저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 그러나 아버지 한 대에 쌓아 올린 호시지마 건설은 발전해 가면서 아버지 한 사람의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동생을 전무에, 사촌 동생을 상무에, 조카를 영업본부장에 앉히는 식으로 일족으로만 구성하고 있던 회사에 고이케 시게조 씨라는 능력이 출중한 사람을 부사장에 앉힘으로써 양상이 조금은 바뀌고 있었다는 것을 당신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아버지에게 이를테면 희망의 별이었던 것입니다. 당신을 외동딸의 남편으로 선택할 때 아버지가 얼마나 신중하게 고르고 조사했는지 알면 분명히 놀랐겠지요. 저는 그 이야기를 당신과 헤어지고 한참 지난 후에야 인편에 들었습니다.

 

- 하지만 아버지가 단지 그 이유만으로 결혼을 허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흥신소에 의뢰하여 당신이라는 사람을 철저하게 조사했습니다. 그것도 한 곳이 아니라 세 곳에 의뢰하여 철저히 조사했습니다.

 

- 그러고 나서 실제로 당신과 만난 아버지는 나름의 감식안으로 주의 깊게 관찰했겠지요. 어떤 사람에게 당신에 대해 이런 말을 흘렸다고 들었습니다. 아리마 야스아키는 남이 좋아할 만한 점을 갖고 있다. 인간으로서 큰 장점일 것이다. 다만 그것이 사업가로서 일급 자질인지 어떤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나는 딸의 남편으로서가 아니라 호시지마 건설의 후계자로서 선택하려고 하기 때문에 급한 결단을 내리기가 힘들다.  

 

- 너무나도 저다운 공상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를 알아챈 당신은 실소를 금치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럴 때의 직감이라는 것을 저는 믿고 있습니다.

 

- 그러고 나서 우리는 병원 뜰로 나가 봄이 한창인 듯한 따사로운 햇볕 속을 걸었습니다. 저는 자신이 냉정하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물이 흘러가는 것을 고요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아아, 그렇게 행복했었는데, 하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그렇게나 평온하고 만족스러웠는데,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무슨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멍하니 하고 있었습니다. 뭐가 잔뜩 취해서란 말인가, 그렇다면 나도 모르는 체해 주지.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가운을 걸친 당신과 나란히 미루나무 나목 사이를 걸었습니다. 

 

- 왜 당신과 세상을 떠난 그 여성 사이의 진짜 사정을 추궁해 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저는 지금도 가끔 합니다. 당시에는 그런 제 마음을 잘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좀 더 자세히 분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저는 연인 시절부터 신혼 시절에 걸친 당신과의 세월 위에, 이혼을 목전에 두었으면서도 여전히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고 싶었습니다. 그런 마음속 깊은 곳에는 당신에 대한 희미한 동정심이 있었고, 그것을 몇 배 상회하는 증오도 몸을 서리고 있었습니다. 
 

- 당신은 정말 쓸쓸해 보였습니다. 중상을 입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있을 때도 그런 얼굴은 아니었습니다. 강한 눈빛에 뭔가 어둡고 지치고 자포자기한 분위기가 떠돌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게 걱정되어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 며칠을 보내고 나서 당신에게 편지를 쓰자는 시시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아무 관계도 없는 우리 사이라고는 해도, 이혼으로 서로가 불행해졌다는 식의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과 헤어질 결심을 한 날 아버지 회사의 사장실에 앉아 생각한 것이 단순히 불길한 예감만은 아니었다는 것이 되고 맙니다.  
 

- 그리고 장애를 가진 아이를 갖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당신이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당신만 그런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이혼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당신의 아이를 낳고 평온하게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을 게 아닌가. 모두 당신이 나쁜 거다. 나는 아버지가 권하는 대학 조교수와 재혼하고 기요타카라는 남자아이를 낳았다. 기요타카 같은 아이를 낳은 것은 당신과 헤어져 가쓰누마 소이치로라는 사람과 결혼했기 때문이 아닌가.

 

- 저는 정말 이렇게 생각하며 종종 수심에 잠겼습니다. 저는 당신을 증오했습니다. 당신은 터무니없이 엉뚱한 화풀이라고 말할 게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는 진심으로 기요타카라는 아이의 어머니가 된 원인을 당신의 부정과 그와 관련된 피비린내 나는 사건을 연관시켜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안 당시의 충격, 슬픔, 동요가 가라앉고 드디어 어머니로서의 새로운 애정과 투지가 느껴지자 당신에 대한 증오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당신의 모습은 제 안에서 점점 엷어져 갔습니다.  

 

- 저는 당신과 이혼해서 불행해졌다는 생각은 결코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치 뭔가에 대한 오기처럼 계속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이 불행해지기를 결코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것 역시 오기처럼 마음속으로 늘 빌었습니다.

 

- 그럼 이만 줄입니다.


1월 16일
가쓰누마 아키  올림

 


 

- 유카코의 책상에는 전기스탠드와 조그만 나무 상자, 그리고 도자기로 만든 인형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저는 지금도 어딘가 소녀 취향의 그 배치를 떠올릴 때가 있습니다. 그녀를 둘러싼 풍문과는 동떨어진 유치하고 다소곳한 분위기가 다다미 여섯 장짜리 방 여기저기에 떠돌고 있었지만, 바닷물에 젖어 검게 빛나는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볼에 난로의 열을 받고 있는 유카코에게서는 어둠을 동반한 어떤 색향 같은 것이 발산되고 있었습니다. 제 눈에는 금방 목욕하고 나와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는 성숙한 여인이 가만히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것처럼 비쳤습니다. 아니, 그때 그렇게 비쳤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편지를 쓰면서, 그러니까 20여 년 전 중학생이었던 세오 유카코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리면서 지금 제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야 맞겠지요. 

 

- "왜 바다에 뛰어들었어?”하고 제가 물었습니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고는 그 사람하고 둘이서만 있는 게 싫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둘이서 있고 싶지 않았다면 왜 그 사람 배에 타려고 했느냐고 저는 캐물었습니다. 그녀는 악바리 같은 시선을 던지며 말없이 저를 쏘아보았습니다. 그러고는 오라고 했는데도 가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따라다닌다. 지금까지도 몇 번이나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집요하게 오라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 저는 제가 들은 그녀에 관한 풍문을 말하고 진짜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녀는 진짜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고 하며 오늘 일어난 일은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덧붙였습니다. 조그만 난로의 열기가 이마, 볼, 손바닥을 따뜻하게 해 제 몸에서는 드디어 떨림이 멈추었고 그와 동시에 뭔가 느긋한 기분이 물밀듯이 몰려드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유카코와 제가 마치 친한 소꿉친구라도 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그런 소문이 나는 것은 마음에 틈이 있어서 무의식 중에 남자의 유혹을 부르는 아양을 떨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미의 말을 했습니다.

 

- "그런 게 아니야." 그녀는 강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며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한참 동안 저를 노려보았습니다. 그 눈은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여 그녀가 가진 아름다움을 한층 돋보이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으니 저는 문득 평소의 억누르기 힘든 적요감에 휩싸였습니다. 세오 유카코라는 소녀가 발산하는 신기한 어둠은 일본해에 면한 외진 항도의 모습과 동질의 것이었습니다. 저는 유카코에게 마이즈루라는 동네가 얼마나 싫은지, 그리고 얼마나 오사카로 돌아가고 싶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 날이 저물어 방이 어두워졌고 난로의 붉은 니크롬선만이 소용돌이치는 모양으로 구불구불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쓰고 있으니 그때의 정경이 마치 어제 일처럼 떠오릅니다. 저는 그때의 추억을, 어떤 환상적이고 꿈같고 덧없으며 둘도 없는 것으로 마음속에 계속 간직해 왔습니다. 성인이 되고 사회인이 되어 당신과 결혼하고 나서도 저는 그 추억 속에 잠기곤 했습니다. 

 

- 그녀는 두 손을 내밀어 제 양 볼을 잡고 차분한 동작으로 이마를 들이밀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채 제 눈을 들여다보고 킥킥 소리 죽여 웃었습니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열네 살 소녀의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한순간의 놀람이 지나자 저는 넋을 잃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 이제 와서 생각하면 열네 살에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남자에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세오 유카코라는 사람이 갖고 있던 하나의 업보였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업보라는 말이 대체 얼마나 깊은 의미를 숨기고 있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 말은 유카코라는 여자를 떠올릴 때 가장 적절한 울림을 갖고 제 마음에 떠오릅니다. 

- 옛날 생각이 난다. 난 여기서 유카코와 딱 마주쳤고 낯선 남자가 나를 바다에 내던졌지. 그때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오가타 부부에게 맡겨져 마이즈루까지 왔고. 마음속에 쓸쓸함과 불안을 가득 안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건 그렇고 세오 유카코라는 소녀는 얼마나 이상한 소녀였던가. 저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언제까지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습니다. 그 순간 유카코라는 소녀의 망령이 제 안에서 갑자기 빠져나와 사라졌습니다. 확실히 제 안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저는 그것을 확실히 느꼈습니다. 저는 어쩐지 마음이 즐거워져 담배를 여러 대나 피우면서 역 앞의 여관으로 돌아갔습니다. 

 

- 눈앞에 백화점이 있어서 차를 기다리게 해 놓고 문병 선물로 멜론이라도 살까, 하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과일 매장에서 멜론을 포장하고 있을 때 문득 이 백화점의 침구 매장에 유카코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그러자 가슴이 두근두근했습니다. (결혼한 지 1년도 안 된 아내가 있는데도 정말이지 혼자 우쭐댄 것인데, 그게 남자라는 동물이라고 이해해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6층의 침구 매장으로 올라갔습니다. 말을 나눌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냥 한번 보고 싶다, 유카코가 어떤 여성이 되어 있을까,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습니다. 침구 매장에 있는 여점원의 얼굴을 훔쳐보면서 서성거려 봤지만 유카코인 듯한 여성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들 유니폼의 가슴 쪽에 이름표를 달고 있었는데, 세오라는 이름의 점원은 없었습니다. 그때 제가 그대로 돌아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이따금 합니다. 하지만 그게 인생이 갖고 있는 저항할 수 없는 올가미 같은 것이겠지요. 

 

- 저는 제 이름을 말하고 유카코의 표정을 살폈습니다. 당연히 그녀는 수상쩍다는 듯이 저를 마주 보았습니다. 저는 몇 주전에 마이즈루에서 유카코의 어머님에게 한 것과 같은 말을 빠른 어조로 지껄이고 우연히 이 백화점에 들른 터라 반가운 마음에 찾아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곧 저를 떠올렸습니다. 떠올리자마자 유카코의 얼굴에는 10여 년 전 소녀였던 무렵과 같은 분위기의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백화점 유니폼을 입은 유카코는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수수한 용모였습니다. 하지만 눈을 크게 뜨고 웃으니 거기에 몇 가지 화려한 풍문을 불러일으켰던 미모가 되살아났습니다. 그건 확실히 유카코였습니다. 하지만 어딘가 망가진 것을 갖고 성인이 된 여자 특유의 저속함이 없는 의외일 정도로 청순한 모습에 저는 약간 당황했습니다. 그녀는 저를 보고 무척 반가워하며 이런 데 서서 얘기하는 것도 이상하다며 백화점 옆에 있는 카페로 저를 데려갔습니다. 20분쯤이라면 자리를 비워도 별 지장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카페에서 마주 앉고 보니 대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저는 끝없이 마이즈루에서의 추억담만 되풀이했습니다. 이야기가 끊겼을 때 그녀는 이런 말을 툭 던졌습니다. "나, 곧 일하는 거 그만둘 거야."  

 

- 이만 총총.


3월 6일 

아리마 야스아키 올림

 


 

- 이미 수령이 퍽 오래되었다고 생각했던 뜰의 은엽아카시아가 올해도 노랗고 미세한 솜털 같은 꽃을 가득 피웠습니다. 가루 같은 그 꽃을 좋아해서 적당한 가지를 잘라 꽃꽂이를 하려고 가위를 들고 뜰로 나섰습니다. 살짝 닿기만 해도 부스스 꽃잎이 흩어지기에 자른 가지를 가만가만 조용히 옮겼는데 그래도 흩어져 떨어지는 바람에 서둘러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은엽아카시아 가지를 손에 들 때마다 저는 늘 순간적으로 애달픈 듯한, 서글픈 듯한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설마 답장이 올까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당신이 보낸 두툼한 편지를 손에 들었을 때는 가슴이 두근두근해서 봉투를 뜯는 것조차 두려웠습니다. 다 읽고 나서는 마치 은엽아카시아 꽃이 흩어져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을 때와 같은 기묘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낭만적인 답장을 보내 줄 줄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터라 이 편지를 쓴 이는 아리마 야스아키라는 사람이 아니라 전혀 딴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서글퍼지기도 하고 애달파지기도 했습니다. 대체 당신은 그 편지로 저에게 뭘 알려 주고 싶었던 걸까요? 저는 그 편지로 뭘 알 수 있다는 걸까요? 당신은 기분 좋게 전주곡만 연주하고 앞으로 진짜 음악이 시작되려고 할 때 지쳤다면서 갑자기 피아노 덮개를 툭 닫아 버렸습니다. 사람을 다소 바보로 만드는, 달콤한 선율의 긴 전주곡이었습니다. 

 

- 그리고 더욱 알고 싶은 것이 생겼습니다. 당신은 왜 자오 같은 델 갔을까? 당신은 지금 뭘 하며 지내고 있을까? 어떻게든 그것들을 알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저는 그게 알고 싶어서 편지를 보냈는지도 모릅니다만, 당신이 보낸 뜻밖의 답장은 뭔가 자고 있는 아이를 깨우고 마는 효과를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 그럼 이만 줄입니다. 

 

3월 25일 

가쓰누마 아키 올림

 


 
- 편지는 잘 받아 보았습니다. 당신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고 저도 답장을 보내고 나서 다소 자기혐오에 빠졌습니다. 나잇값도 못하고 안이한 내용을 썼다는 생각에 부끄럽고 한심해서 며칠간 착잡한 심정으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당신에게 더 이상 편지를 계속 쓸 생각이 없습니다. 편지를 보내는 것은 솔직히 말해 달갑지 않은 일입니다. 저에게 유카코와의 전말을 써야 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성가신 일은 거절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었으면 합니다.

- 이만 총총.


4월 2일
아리마 야스아키 올림



 

- 삼가 올립니다. 
찌무룩한 장마철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두 번 다시 편지를 보내지 말라는 편지를 받은 지 아직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질리지도 않고 이렇게 다시 펜을 들고 말았습니다. 주저하고 망설이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당신은 읽지 않고 버려 버릴지도 모르겠군요. 대체 이 여자는 왜 이렇게 끈질기게 편지를 보내는가 하며 어이없어 하겠지요. 하지만 사실 저도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편지를 씀으로써 대체 제가 뭘 얻으려고 하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 알 수는 없습니다만, 저는 어쩐 일인지 당신이 제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충동에 사로잡혀 신기할 정도로 기분이 고양되어 있습니다. 당신에게 편지를 보냄으로써 어쩌면 저는 10년 전, 그러니까 당신과 이혼한 직후의 심리 상태로 돌아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보 같은 여자라고 비웃어도 좋습니다. 폐가 된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고 읽어 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각오하고 역시 저는 써 보기로 했습니다.  

 

- 한신전철역에서 집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좁은 강이 흐르고 있지요. 당신과 정식으로 이혼하고 나서 두 달쯤 된 무렵이었을까요? 당신도 아는 그 강변의 다마가와 서점이 가게를 접었고 그 자리에 '모차르트'라는 카페가 생겼습니다. 이쿠코 씨가 누군가에게 들은 모양인지, 예순 살쯤 되는 부부가 운영하는 가게인데 모차르트의 곡 이외에는 틀지 않는다는 게 원칙이라며 산책하는 김에 그 가게에서 커피라도 마시고 오면 어떻겠느냐고 집요할 정도로 권하는 겁니다.

 

- 장마가 끝나고 햇볕이 강렬히 내리쬐는 날이었습니다. 도중에 안면이 있는 부인 두세 명과 마주쳤지만 고개를 숙여 가볍게 인사만 할 뿐, 그쪽에서 무슨 말인가 하려는 것을 무시하고 눈부신 길을 걸어갔습니다. 당신이 보고 싶었습니다. 반사된 열기에 제 이마나 등 언저리에 땀이 뱄고 가벼운 현기증 같은 걸 느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보고 싶다고 저는 몇 번이나 생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이 뭐란 말인가. 산산조각이 난 항아리면 또 어떻다는 말인가. 내가 좀 더 큰 사람이었으면 좋았을걸. 그러면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돌리는 일 따위는 세상에 아주 흔한 일이지 않은가.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하고 말았다. 아아, 어떻게든 당신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걸었습니다. 암암리에 우리를 헤어지게 하려고 한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그리고 본 적도 없는, 게다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유카코라는 여성에게 온몸의 피가 출렁출렁 물결칠 만큼 증오를 느꼈습니다. 

 

- '모차르트'는 피서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펜션풍의 건물이었습니다. 외관도 가게 안도 갈색 나무껍질의 아름다움을 강조하여 마치 산속의 오두막집 하나가 오도카니 서 있는 것 같은 카페였습니다. 굵은 통나무를 그대로 써서 일부러 노출시킨 천장의 들보에도, 손작업으로 조립한 것 같은 나무 의자나 테이블에도 어지간히 알아보고 고른 것으로 보일 만큼 운치 있는 나뭇결이나 옹이의 형태가 있었는데, 그것이 아담하지만 확실히 돈을 들이고 공들여 만든 가게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 테이블에 물을 놓은 주인에게 "모차르트 곡밖에 틀지 않는다면서요?"라고 말을 걸자 검은 테의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쓴 주인은 웃으면서 "음악을 좋아하시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좋아합니다만 클래식은 잘 모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자 주인은 "저희 가게에 1년만 들르면 모차르트 음악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모차르트를 알면 음악을 이해한 셈이지요." 은색의 커다란 쟁반을 가슴에 안고 주인은 혈색 좋은 얼굴을 천장으로 향하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그 말투가 이상해서 제가 킥 웃자 주인은 "지금 튼 레코드는 교향곡 제41번입니다"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제가 "<주피터>죠?"라고 말하자 "아, 이거, 정확히 알고 있군요. 맞습니다. <주피터>, 41번 C장조, 모차르트 최후의 교향곡인데 제1, 제2악장의 소나타 형식을 받아들이기 위해 최후의 제4악장에서 푸가를 도입해 강력한 피날레를 장식한 걸작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자, 여기부터입니다. 이제 최후의 악장으로 들어갑니다"라며 목소리를 죽였습니다. 

 

- 저는 커피를 주문하고 모차르트의 웅장하고 화려한 교향곡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가게 안을 둘러보았습니다. 모차르트의 초상화 복제품이 액자에 넣어져 장식되어 있고, 그 옆의 조그만 선반에는 모차르트에 관한 책 몇 권이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가게 안에는 손님이 저뿐이어서 <주피터>가 끝나자 뭔가 빨려들 것만 같은 정적이 저를 감쌌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기묘한 정적일까요? 저는 그 정적 속에서 또 당신이 몹시 보고 싶었습니다. 곧 다른 곡이 흘러나왔습니다. 주인이 다가와 학교 선생님이 어린 학생에게 가르쳐 주는 듯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게 <39번 심포니. 16분 음표의 기적 같은 명곡입니다. 다음에 오실 때는 <돈 조반니>를 틀어 드리지요. 그다음은 <G단조 심포니>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모차르트라는 사람의 기적을 알게 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 커피도 맛있었고 주인의 인품에도 호감을 가져 저는 이삼일 있다가 다시 '모차르트'에 갔습니다. 그날은 손님이 많아서 주인은 혼자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저에게 마음을 쓰면서도 카운터 안에서 커피를 끓이거나 주스를 만들거나 모차르트의 곡이 끝날 때마다 서둘러 다른 레코드를 걸러 가는 등 무척 분주한 것 같았습니다. 첫날에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부인이 주문받은 것을 나르거나 컵의 물이 줄면 보충하거나 테이블 위를 정리하거나 했습니다. 제가 모르는 곡이 흐르는 동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채 도취하여 듣고 있는 젊은 남성의 모습이 굉장히 장엄하게 보여 저는 커피 잔을 두 손으로 입 언저리로 가져간 채 멍하니 그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뭔가 거대한 것에 기도를 올리는 듯한, 아니면 무척 무서운 사람에게 꾸중을 듣고 온몸으로 참회하는 듯한 것으로도 보이는 표정과 자세로 청년은 조용한 심포니를 열심히 듣고 있었습니다. 

 

- 저는 그때까지 거의 클래식 음악에 흥미가 없었고 주인이 말한 모차르트라는 사람의 기적을 이해할 감성도, 소양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청년의 모습과 가게 안에 흐르는 조용한 심포니를 듣는 중에 문득 한 단어가 뇌리에 스쳤습니다. '죽음'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왜 그런 말이 뇌리에 스쳤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 순간 죽으려고 생각한 것도 아니고, 죽음이라는 것에 대한 공포에 휩싸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확실하게 '죽음'이라는 두 글자가 마음에 떠오르더니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 저는 커피를 홀짝이면서 '죽음'이라는 말을 머리 어딘가에 둔 채 모차르트의 음악에 처음으로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나의 음악에 그렇게 진지하게 귀를 기울인 것은 아마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아무것도 아니었던 심포니 한 곡이 비할 데 없이 아름답고 신묘한 선율, 그리고 동시에 어찌할 수 없을 만큼 덧없는 세계를 암시하는 불가사의한 선율처럼 느껴졌습니다. 2백 년이나 전에 어떻게 서른 살 안팎의 청년이 이토록 아름다운 곡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게다가 말을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이다지도 열렬하게 슬픔과 기쁨의 공존을 사람에게 전할 수 있었을까? 저는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채 어린잎이 난 큰길의 벚나무 가로수를 창 너머로 보고 있었습니다. 이미 죽어 버린, 얼굴도 본 적이 없고, 분명히 저보다 훨씬 아름다운 사람이었을 세오 유카코 씨의 용모며 표정을 멋대로 상상하면서 모차르트 심포니의 잔물결 같은 선율에 몸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 슬슬 저녁을 준비할 시간이어서 저는 커피 두 잔 값을 테이블에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주인도 일어나면서 조금 전에 모차르트라는 사람의 기적을 알 것 같다고 했는데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려 달라고 웃으며 물었습니다. 어제오늘 모차르트를 접한 저에게 그걸 말로 표현하는 것은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았고, 모차르트 음악에 매료되어 수천 번, 또는 수만 번 곡에 귀를 기울여 온 주인에게 저 같은 사람이 경솔한 감상을 말할 수 있을 리 없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진지한 주인의 눈빛에 그만 무심코 말해 버렸습니다.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은 어쩌면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아주 불가사의한 것을 모차르트의 부드러운 음악이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 말을 사용하지 않고 슬픔과 기쁨의 공존을 사람들에게 전해 줄 수 있었다, 그걸 묘한 음악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선율로 싸서 아주 간단히, 게다가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면서 표현할 수 있었다는 것이 모차르트라는 사람의 기적이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주인의 눈에 꼼짝 못 하고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표현으로 대답했습니다. 어쩌면 조금 전에 갑자기 제 머릿속에 떠오른 '죽음'이라는 말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어서 저는 그 말에 조종되어 실제로 생각하지도 않은 말을 해 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 "허어, 그렇습니까...?" 주인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언제까지고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저는 여름날의 길게 뻗은 황혼의 햇살 속을 잰걸음으로 돌아갔습니다만, 제가 했던 말이 대체 뭘 의미했는지도 모른 채 다시 유카코 씨를 뇌리에 떠올렸습니다. 어떤 여성이었을까? 왜 당신과의 교합 뒤에 목숨을 끊은 것일까? 저는 어쩐지 녹초가 되어 집에 도착했습니다.

 

- 아무쪼록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만 줄입니다.

 

6월 10일

가쓰누마 아키 올림

 


 

- 그런 공상에 빠져 있는 저를 뿌리치듯이 굉음과 함께 불티가 뿜어져 나왔고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손바닥으로 세차게 뺨을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불길 대신 대량의 연기에 휩싸이기 시작한 모차르트의 잔해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조용한 어조로 저에게 말했습니다.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은 어쩌면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모차르트 음악이 그런 우주의 불가사의한 구조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호시지마 씨는 이렇게 말했지요."

갑자기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하고 저는 가만히 주인의 입 언저리를 쳐다보았습니다. 주인은 잠깐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곧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모차르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이상으로 모차르트를 들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만큼 모차르트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차르트 음악을 호시지마 씨가 말한 것처럼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저는 그 이후로 내내 호시지마 씨가 한 말의 의미를 생각했고 지금 그걸 알았습니다. 호시지마 씨가 말한 대로입니다. 모차르트는 아마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음악으로 표현하려고 한 것이겠지요." 

 

- 말을 하는 중에 흥분한 것인지 주인의 얼굴은 어느새 무서울 정도로 굳어졌고 평소 온화하던 안경 너머의 눈은 강한 빛을 띠었습니다. 제가 즉흥적으로 했던 말은 주인이 반복한 것과 일부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한 말 중에는 아마 우주의 구조라는 건 없었을 것입니다. 주인은 제가 즉흥적으로 한 말을 오랫동안 반복해서 생각하는 중에 어느덧 제가 하지 않았던 말까지 덧붙이고 만 것이겠지요. 그래서 저는 "우주의 구조라는 말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라고 말했습니다. 주인은 미심쩍다는 듯이 얼굴을 보며 "아뇨, 말했어요. 전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불가사의한 구조라고 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 저는 이따금 자신의 예감이 적중하는 것에 내심 놀라거나 득의양양해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감이 좋은 아내가 어떻게 1년간이나 지속된 당신의 부정을 눈치채지 못했을까요? 당신이라는 사람은 상당히 종잡을 수 없는, 게다가 연기력이 풍부한 연기자였다고 지금은 제가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 그럼 이만 줄입니다.

 

7월 16일

가쓰누마 아키 올림

 


 

- 당신과 헤어지고 난 후 10년간 정말 다양한 일을 하며 살아왔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다양한 일을... 말입니다. 그 10년간의 일을 다 쓴다면 2년이고 3년이고 걸리고 말 겁니다. 전락한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10년간 저는 서서히 하지만 확실히 전락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당신과 결혼하고 1년쯤 지나 제가 교토의 가와라마치의 백화점에 멜론을 사러 들어갔다가 문득 유카코를 생각해 내고 6층 침구 매장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저는 전략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근무한 회사는 열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없을 정도고, 시작한 사업도 서너 번이 넘습니다. 관계를 가진 여자도 몇 명 됩니다. 그중에는 3년이나 저를 먹여 살려 준 여자도 있습니다. 지금도 저는 한 여자와 살고 있습니다. 이 성가신 남자를 소중히 여겨 주는 마음씨 곱고 자상한 여자지만, 저는 애정을 느끼고 있지 않습니다.

 

- 저의 10년간을 설명한다면 꼭 스모에 비유되는데, 다가가면 내동댕이쳐지고, 덤벼들면 받아넘겨지고, 상대방의 팔 바깥으로 허리띠를 잡아 던지려고 하면 상대방 이제 팔 안쪽으로 허리띠를 잡아 던져 버리고, 밭걸이로 넘어뜨리려고 하면 상대방은 안걸이로 되받아치는 형국이었습니다. 뭘 하든 예상과는 달라졌습니다. 뭔가 귀신이라도 들린 듯한 상태였습니다. 당신과 자오에서 재회한 것은, 이를테면 최악의 상태에 빠져 있던 시기였습니다.  

 

- 저는 자오 온천에 도착하자 유황 냄새에 휩싸인 온천 마을의 완만한 언덕길을 올라갔습니다. 길 양쪽에는 여관이 여러 채 늘어서 있었습니다만, 얇은 지갑을 생각하면 그런 여관에 묵을 수는 없었습니다. 담배 가게에서 산 위쪽에 숙박할 수 있는 산막이 없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돗코누마 옆에 그런 곳이 있다고 해서 저는 리프트 승강장으로 가는 길로 갔습니다.

 

- 돗코누마 옆에 그런 곳으로 보이는 건물이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 이삼일 묵었으면 하는데 숙박비가 얼마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예상한 가격보다 좀 싼 편이어서 저는 안심하고 지저분한 긴 의자에 앉았습니다. 비수기여서 다른 손님이 없어 별다른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먹는 것도 평소에 먹는 것밖에 없는데 그래도 괜찮겠느냐고 묻기에 저는 알았다고 하고, 겨울에는 젊은이들로 가득 차는 2층의 방으로 올라갔습니다. 1층은 매점과 식당이고 2층에 숙박 시설을 갖춘, 산막이라 불리기에는 다소 큰 건물로, 겨울이 되면 2층이 출입구가 된다고 젊은 주인이 말해 주었습니다. 눈은 늘 4미터 이상이 쌓여 1층은 파묻히고 만다는 것이었습니다. 온천을 이용하고 싶으면 리프트를 타고 여관 거리까지 내려가면 되는데, 마을에서 운영하는 싼 공중 욕탕이 있다고 했습니다. 

 

- 이른 저녁을 마치고 저는 다시 리프트를 타고 내려가 언덕길 중간에 있는 공중 욕탕의 유황 온천에 몸을 담근 후 조그만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다시 돗코누마 옆의 산막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신이 첫 편지에도 썼던 것처럼 그날 밤은 달도 별도 보이지 않아 저는 8시경에 이불속으로 들어가 정신없이 잤습니다. 정말 정신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 다음 날 아침 저는 아침을 먹고 커피가 마시고 싶어 다시 리프트를 타고 여관 거리까지 내려가 전날 밤에 들렀던 카페로 갔습니다. 점심때까지 빈둥거릴 생각이었으나 오사카의 친구에게 연락을 취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카페의 전화를 쓰려고 했으나 제가 만든 회사의 공동 경영자인 친구도 저와 마찬가지로 돈을 마련하려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을 테고, 어쩌면 불량배에 쫓겨 어딘가로 도망쳤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행방을 감췄다고 한다면 그곳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친구에게는 처자식이 있었지만 은밀히 만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여자 맨션의 전화번호를 적어 둔 수첩은 저의 작은 여행 가방에 들어 있는데 그 가방을 숙소에 놓고 나온 것입니다.

 

- 저는 서둘러 달리아 화원까지 돌아갔습니다. 다음 케이블카를 기다린다고 해도 별로 시간 차이는 나지 않았지만, 마음이 급한 상태라 누군가 이미 타 있는 케이블카에 서둘러 올라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천만 뜻밖에도 당신과 우연히 만난 것입니다. 눈앞에 앉아 있는 고상한 옷차림의 여성을 봤을 때 제가 놀란 것은 어쩌면 당신이 느낀 것 이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수염도 깎지 않고 지저분한 신발을 신었으며 커터셔츠의 목덜미에는 때가 끼었고 게다가 안색이 진흙 같았습니다. 누가 봐도 제가 놓인 처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겠지요. 저는 당황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당신 앞에서 모습을 감추고 싶었습니다. 리프트에서 내리자 그리운 당신을 돌아보지도 않고 서둘러 산막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가 창가에 숨어 당신과 목발을 짚고 있던 아드님이 천천히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 "내일이 되면 내가 자는 사이에 돌아갈 거지?" 저와 유카코는 잠시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항상 돌아가잖아. 항상, 자기 가정으로 돌아가지. 나한테 돌아오는 일 같은 건 절대 없어..." 이번에는 고개를 숙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남자도 돌아가잖아. 자기 집으로." 제가 이렇게 말하자 유카코는 고개를 숙인 채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냉정했습니다. 이것으로 헤어지자고 생각했습니다.

 

- 아주 오래전부터 유카코는 불쌍한 아가씨였던 것 같았습니다. 유카코는 아름답고 누구에게도 없는 독특한 애처로움을 가진 여자였는데, 그게 유카코를 불행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구슬려서 돈을 내게 하면 되는 거야. 상대는 부자잖아. 별 볼일 없는 남자하고 엮이는 것보다 그게 이득이지 자기 가게를 갖고 열심히 돈을 버는 거야." 이렇게 말하고 나서 저는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지만 마이즈루에서 그녀를 처음 만난 날부터 계속 좋아했다고 솔직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난 너한테 사랑이라는 걸 배웠어. 그 답례도 못하지만, 그 대신 앞으로 두 번 다시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 제 안에는 두 가지 마음이 있었습니다. 역시 거품처럼 일어나는 질투, 그리고 안도감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아무런 말썽도 없이 헤어질 수 있다는 염치없는 안심감이 저에게 묘하게 어른 같은 대범한 태도를 취할 수 있게 했습니다. 우리는 그대로 이불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습니다. 한동안 잠들지 못했습니다만, 머지않아 저는 잠들었습니다. 오른쪽 가슴 어딘가에서 묵직한 통증과 열 같은 것을 느끼고 눈을 떴을 때 유카코가 제 옆에 앉아 길게 째진 눈초리를 치켜뜨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다음 유카코가 저를 덮쳐 온 순간 목에 뜨겁게 달궈진 부젓가락이 닿은 듯한 격통이 느껴져 저는 무의식적으로 유카코를 밀어젖히며 일어났습니다. 미끈미끈한 것이 목덜미와 가슴 언저리로 흘렀고 이불에 피가 떨어지는 게 보였습니다. 저는 유카코의 얼굴을 아주 잠깐 쳐다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대로 시야가 어두워져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 아무것도 모르게 되고 나서 좀 지났을 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서서히 몸에 차가움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어설픈 차가움이 아니었습니다. 온몸이 으드득 소리를 내며 얼어 가는 듯한 차가움이었습니다. 가공할 만한 한기 속에서 저는 제 자신의 과거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표현 외에 달리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일찍이 이룬 것, 제가 일찍이 마음에 품었던 것이 다양한 영상이 되어 맹렬한 속도로 되돌아갔습니다. 엄청난 속도였지만 어느 것이나 선명한 영상으로 제 안에서 비춰졌습니다. 저는 이상한 한기에 휩싸여 다양한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그러는 사이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확실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틀린 건지도 모르겠는걸"이라는 말이었습니다.

 

- 얼마 후 흘러가던 영상은 속도를 잃었고, 그와 동시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엄습해 왔습니다. 영상은 제가 한 행동이나 사고에서 어떤 것만을 끄집어내 저를 거기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 어떤 것이란 제가 행한 악과 선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이런 말 외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단순한 도덕적인 악이나 선이 아닙니다. 생명에 물들어있던 독소와 그것과는 정반대인 청정한 것이 구분되어 저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게다가 그때 죽어 가는 제 모습이 보였습니다. 자신이 행한 악과 선의 청산을 심한 고통과 함께 강요받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또 하나의 제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꿈이었을 거라고 말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결코 꿈을 꾼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는 병원 수술실에서 수술을 받고 있는 제 모습을 조금 떨어진 데서 확실히 봤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했던 말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회복하고 나서 의사에게 수술실에서 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의사는 놀라며 "들렸습니까?" 하며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들렸던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다른 곳에서 저와 의사와 간호사와 수술실의 무수한 도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광경을 확실히 보고 있었습니다. 의사의 말을 들었던 것은 수술대에 누워 있던 제가 아니라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죽어 가는 자신을 보고 있던 또 하나의 저였던 것입니다.

 

- 더구나 심한 고통에 허덕이고 있던 것은 수술대에 있는 제가 아니라 그것을 보고 있던 저였습니다. 저는 조금 전에 자신이 행한 악과 선의 청산을 격렬한 고통과 함께 강요받고 있는 자신을 보고 있었다고 썼습니다. 그건 잘못된 말입니다. 지금 이 편지를 쓰면서 기억을 깊이 파헤쳐 보니 자신이 행한, 아니 행하지 않았더라도 마음속에 품은 악과 선의 청산을 강요받고 정신이 이상해질 만큼의 고뇌와 적요감과 정체를 알 수 없는 회환에 심한 가책을 받았던 것은 죽어가는 자신을 보고 있는 또 하나의 저였습니다. 저는 아마 그때 아주 짧은 순간 죽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저는 뭐였을까요? 저의 육체에서 벗어난, 저의 목숨 자체였던 건 아닐까요?  

 

- 누가 믿든 말든 이것이 10년 전에 제가 체험한 사실입니다. 저는 이 신기한 체험을 오늘날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평생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편지에 쓰여 있던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은 어쩌면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는 구절을 본 순간 저는 이상한 흥분과 오랜 생각에 빠졌습니다.

 

- 죽음에 의해 그 생명의 모든 것이 사라져 없어진다는 사고는 어쩌면 인간의 오만한 이성에 의해 만들어진 큰 착각이 아닐까? 저에게는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됩니다. 제가 살아남으로써 자신을 보고 있던 또 하나의 저는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만약 죽어 버렸다면 그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육체도 정신도 아무것도 갖지 않은 생명 그 자체가 되어 이 우주에 녹아들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자신이 행한 악과 선을 지닌 채 끝없는 고뇌의 시간을 계속 보내고 있지 않았을까요? 되풀이해서 말하자면 제가 본 것은 결코 꿈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목숨이라는 것의 생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조차 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을 때 "아무런 생각도 추리도 섞지 않는다"라고 말해 두었습니다. 하지만 약간의 제 생각에 의한 해석을 섞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 이만 총총.

 

7월 31일

아리마 야스아키 올림

 


 

- 저의 긴 두 통의 편지를 읽어 주신 것, 더구나 답장까지 주신 것, 정말 감사합니다. 아마 다음에도 답장을 주시겠지요? 예의 제 감입니다. 당신이 또 저의 편지를 읽고 답장을 써 줄 거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무척 행복한, 그런데도 어딘가 패덕의 냄새를 풍기는 두근거림이 느껴집니다. 당신은 쓴웃음을 짓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는 것은 (당신이 답장을 주신다는 전제하의 이야기입니다만) 언젠가 끝나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 그럼 이만 줄입니다.

 

8월 3일

가쓰누마 아키 올림

 


- 늘 무척 달필이던 당신의 글씨가 가늘게 떨리고, 마지막으로 가면서 기묘하게 무너지거나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저는 오랫동안 발길을 하지 않았던 역 뒤의 싸구려 술집 카운터에 혼자 앉아 문을 닫을 때까지 계속 술을 마셨습니다. 그렇게 마신 것은 오랜만의 일입니다. 술을 마시면서, 과연 삼단논법으로 말하면 당신에게 선천적인 장애를 가진 아이를 갖게 한 것은 분명히 제가 될 거라고 자조 섞인, 묘하게 무거운 마음으로 생각했습니다. 

 

-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중학교 때 부모를 여의고 오가타 부부의 양자가 되려고 히가시마이즈루 역에 내린 일이 이렇게나 많은 사람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었던가 하는 암담한 생각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그 싸구려 술집에 오는 손님은 야쿠자 출신의 근처 파친코 가게 점원이라든가 조그마한 동네 공장에서 일하는 부루퉁한 공원이라든가 정규직을 얻지 못하고 그때그때 돈벌이를 찾아다니며 경륜장이나 보트레이스장에 죽치고 있는 똘마니들뿐입니다. 가끔은 좀 제대로 된 사람이 마시러 와도 좋을 텐데, 하고 질려할 만큼 그런 패거리의 단골들만 지저분한 공기 속에서 마구 담배를 피워 대면서 주인의 젊은 아내(손님에게는 숨기고 있지만 저는 두 사람이 부부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습니다)에게 손을 대거나 외설스런 말을 주고받으며 시시한 농담에 호들갑스럽게 웃어 대거나 하면서 대부분 문을 닫는 시간까지 돌아갈 생각을 안 했습니다.

 

- 이만 총총.

 

8월 8일

아리마 야스아키 올림

 


 

- 왜 어떤 사람은 건강하고 어떤 사람은 병에 시달리는가, 왜 어떤 사람은 아름답게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추하게 태어나는가... 기요타카라는 인간을 낳은 어머니로서 저는 이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불합리한 불공평이나 차별의 진정한 원인을 알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소용없는 일이겠지요. 소용없는 일이겠지만 당신의 편지를 보면서 저는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 업보라는 말을 저는 알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것도 단지 쉬운 말로서가 아니라 어떤 준엄한 법칙으로서 저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저는 필시 누군가와 결혼해도 딴 여자에게 남편을 빼앗기는 업보를 갖고 있는 것이겠지요. 가쓰누마와 헤어져 또 다른 사람과 결혼해도 아마 같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걸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당신이 업보라는 말을 써서 그게 자신의 목숨 자체에 들러붙어 있던 악과 선의 결정과 어딘가에서 연결되어 가는 것 같았다는 구절을 읽었을 때 저는 당신을 잃은 것도, 가쓰누마가 다른 여자에게 마음이 옮겨 간 것도 다 제 업보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저의 에고이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업보라는 말을 운운하기 전에 저는 여자로서의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 당신은 으레 저에게 말했습니다. "너 같은 건 싫어." 하지만 저는 자만심이 강한 사람이라 '흥, 사실은 내가 좋아서 견딜 수가 없는 주제에' 하고 생각하며 더욱 심술궂은 태도를 취했습니다. "너 같은 건 싫어." 레이코 씨는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인가 보네요.

그럼 이만 줄입니다. 

 

8월 18일 

가쓰누마 아키 올림

 


 

- 유카타를 입고 다시 뜰에 면한 창가의 소파에 앉아 맥주를 따서 컵에 따랐습니다. 조금 전 여종업원이 깔아 두고 갔을 폭신하게 부푼 요와 여름용의 얇은 이불 한 채가 방 한가운데에 있고 그 위로 모기향 연기가 꾸불꾸불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고 손가락 끝으로 목의 흉터를 만져 보았습니다. 10년 전의 그날 밤 이곳 기요노야의 한 방에서 뭔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게 뭐였는지 저는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당신과의 이별, 그리고 저라는 인간의 전락 같은 것이 아닌, 좀 더 커다란 뭔가가 시작되었습니다. 

 

- 죽어 가던 내가 본 것은 뭐였을까? 그건 제 목숨 자체였다고 저는 당신에게 보낸 편지에 썼습니다. 그렇다면 목숨 자체란 뭐였을까요?

 

- 모든 인간이 죽음을 맞이할 때 각자가 한 행위를 보고 각자의 삶에 의한 고뇌나 안온을 이어받고, 그것만은 소실되지 않는 목숨이 되어 우주라는 끝없는 공간, 시작도 끝도 없는 시공 속으로 녹아드는 것이 아닐까? 저는 어둠 속에서 그곳만 창백한 빛이 비치고 있는 도코노마에 눈을 주고 유카타를 입은 유카코가 엎드려 죽어 있는 모습을 눈앞에 보면서 망상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누가 그것을 망상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누가 그것이야말로 진실이라고 우리에게 보여 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가 죽으면 알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인생에는 틀림없이 죽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숨어 있을 것입니다.

 

- "꽃이 활짝 핀 것 같은 어여쁜 분이셨어요."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만 총총. 

 

9월 10일

아리마 야스아키 올림

 


 

- 가능한 한 정상적인 사람에 다가갈 수 있도록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을 열심히, 진지하게 살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요? 기요타카와 같은 아이를 가진 어머니로서 저는 단연코 허무나 체념의 세계로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부디 지켜봐 주세요. 저는 반드시 기요타카를 남 밑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까지 키워 보일 테니까요. 

 

- 그만 기요타카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어쩐지 설교 같은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부디 그렇게 받아들이지 말아 주세요. 왜냐하면 당신은 과거에 사로잡힌 나머지 '지금'을 잊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아버지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사람은 변하는 법이야. 시시각각 변해 가는 신기한 동물이지."

 

- 아버지의 말대로입니다. '지금' 당신의 생활 방식이 미래의 당신을 다시 크게 바꾸게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과거 같은 건 이제 어쩔 도리가 없는, 지나간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엄연히 과거는 살아 있어 오늘의 자신을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와 미래 사이에 '지금'이 끼여 있다는 것을 저도, 당신도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 그럼 이만 줄입니다. 

 

9월 18일

가쓰누마 아키 올림

 

- 추신

잊어 먹고 쓰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읽으면서 어쩐지 즐겁게 키득키득 웃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당신이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 저는 당신의 편지에 찍혀 있는 소인을 보면서 도착한 순서대로 늘어놓고 레이코에게 읽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에게서 온 편지를 함부로 남에게 읽게 한 것에 대해서는 사죄를 드립니다. 당신에게서 온 편지 몇 통을 읽으면 제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레이코는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아무튼 긴 편지뿐입니다. 그것도 일곱 통이나 됩니다. 레이코는 처음에 테이블로 가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사이에 계속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슬슬 저녁밥을 주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만, 레이코는 편지를 집어삼킬 듯이 계속 읽었습니다. 밖에서 밥을 먹고 와도 되느냐고 묻자 레이코는 편지를 주시한 채 조그맣게 네, 하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가까운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그곳에서 나와 역 앞에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셨습니다. 30분쯤 지나자 몸을 주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카페 지배인에게 메모지와 볼펜을 빌려 거래처를 1백50 곳으로 늘리기 위해서는 앞으로 어떤 방법을 고안해야 할까, 다음 달 홍보지에는 어떤 기사를 실으면 좋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며 현재의 적자액, 남아 있는 저금 액수 등을 써넣었습니다. 

 

- 레이코는 당신에게서 온 편지 일곱 통을 읽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보낸 다섯 통의 편지 내용은 전혀 모릅니다. 하지만 레이코는 저에게 달라붙어 "전 당신의 부인이었던 사람이 좋아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냥 그 말만 하고 난 뒤에는 제가 아무리 말을 걸어도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 혼자 말없이 담배를 피우면서 일곱 통의 편지 다발을 바라보았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편지를 주고받는 것도 언젠가 끝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올 거라는 걸 알고 있다,라고 썼습니다. 잠들었는지, 아니면 아직 풀쩍거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레이코에게 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슬슬 그때가 왔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마 이 편지는 제가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되겠지요.

 

- 이만 총총.

 

10월 30일

아리마 야스아키 올림

 


 

- 아버지는 그 여자는 돈도 있고 꽤 미인이고 머리도 좋은 수완가지만 목소리가 안 좋다고 말했습니다. 목소리야 안 좋아도 상관없지 않나요, 하고 제가 대답하자 아버지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목소리는 중요해. 그 사람의 본질이 드러나거든"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좋은 의사는 목소리의 미묘한 울림으로 환자의 그날 건강 상태를 헤아리는 법이야, 하고 덧붙였습니다. "저 여자의 목소리에는 품위가 없어." 아버지는 칠기에 담긴 교토 요리에 젓가락을 대면서 이렇게 말하고는 얼굴에 웃음을 띠었습니다.

 

- 식후의 과일을 먹고 좀 있으니 아버지가 정원 너머를 가리키며 저기에 돌계단이 있다. 다 올라가면 조그만 사당이 지어져 있는데 그 근처에서 보는 단풍이 일품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뜰로 나가 요릿집의 게다를 신고 "너도 같이 가자"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저에게 뭔가 할 이야기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같이 정원으로 나가서 아버지 뒤를 따라갔습니다. 아버지 말대로 커다란 소나무 뒤에 긴 돌계단이 있었습니다. 둘이서 나란히 올라갈 수 없을 만큼 폭이 좁은 계단이었습니다.

 

- 초록색이나 갈색이 가을 햇빛 속에서 춤을 추며 떠드는 듯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아버지에게 가쓰누마와 헤어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가쓰누마를 떳떳하게 그 여성의 남편으로, 세 살짜리 여자아이의 아버지로 만들어 주는 게 어떨까요? 이제 결혼 같은 건 하지 않겠습니다. 기요타카만 열심히 키우겠습니다. 아버지, 저를 도와주세요. 

 

- 아버지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고 다 피우고는 땅바닥에 비벼 껐습니다. 아버지는 내내 서 있는 저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짓고는 "좋아" 하며 일어나더니 이끼 낀 긴 돌계단을 내려갔습니다. 

 

- 이 편지를 쓰면서 저는 당신에게서 받은 모든 편지를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것들이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어느 것이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저만의 마음의 무늬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딱 하나 글로 전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자신의 목숨이라는 것을 본 당신은 그것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무서워졌다고 썼지요. 하지만 사실은 짧다고 하면 짧다고 할 수 있고 또 길다고 하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이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가장 강력한 양식이 되는 것을 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이 편지를 대체 어떻게 맺어야 좋을지 저는 펜을 쥔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 그건 그렇고 저는 왜 모차르트의 음악에서 그런 말을 생각해 낸 것일까요?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은 어쩌면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마치 어딘가에서 떨어져 솟아난 것 같은 뜻밖의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편지에 툭 써넣은 일이 당신에게서 제가 몰랐던 많은 것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결코 말하지 않았을 말, '모차르트'의 주인이 마치 저에게서 들은 것으로만 착각했던 말. 우주의 불가사의한 구조, 생명의 불가사의한 구조라는 말이 지금 저에게 깊은 전율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 당신이 고양이에게 먹히는 쥐를 봤던 바로 그 시각에 근처 달리아 화원의 벤치에 앉아 무한한 별들을 바라보았던 저와 기요타카.

 

- 우리의 생명이란 얼마나 불가사의한 법칙과 구조를 숨기고 있는 것일까요? 

 

- 안녕히.

그럼 이만 줄입니다. 

 

11월 18일

가쓰누마 아키 올림

 

 



- 김승옥과 다자이 오사무를 좋아하듯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을 좋아한다. 그의 <금수>도 좋아하지만 번역하고 싶은 마음으로 그치는 듯했다. 이동진의 '빨간책방' 덕에 <환상의 빛>이 다시 나와 팔리기 전까지는. 결과적으로 '빨간책방'이 <금수>를 번역하게 만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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