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카렌 암스트롱] 신의 역사 - 신의 탄생과 정신의 모험

일루젼 2023. 10. 3.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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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카렌 암스트롱 / 배국원 / 유지황

출판 : 교양인
출간 : 2023.07.24


 

재미있었다.

 

뉴턴에 관한 부분에서는 저자와 생각이 상당히 다르지만, 그 외의 부분에 관해서는 대체로 무척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수녀로 생활하다가 종교학자로 환속한 저자는 특정 종교의 시각을 벗어나 다양한 관점에서의 '신'의 의미와 변천사를 조감한다.

 

<신의 역사>에는 다양한 시대상 속에서 '신'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변화해왔으며 당대에 가장 주류가 되었던 '믿음'은 어떤 것이었는지가 알기 쉽게 정리되어 있다. 기본적으로는 기독교적 유일신에 관해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신비주의, 무신론의 관점에서 저술하는데 때로는 신랄하고 현대적인 평가가 곁들여진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깔끔하고 잘 정리된 책이라고 생각한다.

 

종교인에게도, 비종교인에게도 교양서로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제프리 버튼 러셀이나 다른 종교학자들의 책이 기본적으로 신앙적인 색채가 꽤나 강한 편이었다면, 이 책은 서두에서 저자가 직접 밝히는 바와 같이 '신앙(faith)'이 분리되어 있다. 종교인들께도 -저자의 조사와 설명을 일종의 공격으로 받아들이지만 않는다면- 자신의 신앙과 믿음에 관해 더 깊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무엇을 '믿는가', 무엇을 '믿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해 숙고하는 것은 진정 부끄러움 없이 나와 이웃, 그리고 그 모두를 사랑하는 신을 사랑할 수 있는 '믿음'으로 가는 길이 아닐까. 사랑하는 존재를 더 알기 위한 다가섬은 죄가 될 수 없다. 

 

"오 신이시여, 만일 제가 지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당신을 섬긴다면 차라리 저를 지옥 불에 태워 없애소서. 만일 제가 낙원에 대한 욕심 때문에 당신을 섬긴다면 저를 낙원에서 쫓아내소서. 그러나 만일 제가 오직 당신의 영광을 위해 당신을 섬긴다면 당신의 영원한 아름다움의 은총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즐겁게 읽었다.  


   

- 어린 시절 나는 몇 가지 확고한 종교적 믿음을 지녔으나 신에 대한 신앙은 깊지 않았다. 일련의 명제에 대한 '믿음(belief)'과 그 명제를 신뢰할 수 있게 하는 '신앙(faith)'은 구분되어야 한다. 나는 은연중에 신의 존재를 믿었고, 성체성사에서 그리스도의 실재적 현존을 믿었으며, 성사가 효과적이라는 것과 연옥이 객관적으로 실재한다는 것과 영원히 정죄받을 수 있음을 믿었다. 그러나 궁극적 실재의 본성에 관한 이러한 종교적 견해들을 내가 믿었다고 해서 이 지상에서 누리는 삶이 좋다거나 은혜롭다고 확신한 것은 아니다. 유년 시절 내게 로마 가톨릭은 꽤 무시무시한 교의였다.

 

- 나는 커 가면서 종교에는 두려움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인들의 전기, 형이상학파의 시, T.S. 엘리엇의 작품, 신비주의자들의 좀 더 단순한 글을 읽었다. 예배 의식의 아름다움에 감동했고, 신이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가능하며 바로 이러한 비전이 창조된 현실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느꼈다. 이 변화를 위해 수녀원에 들어갔고 수련 수녀를 거쳐 수녀가 되었으며 신앙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곳에서 변증학, 성서, 신학, 교회사를 공부하는 데 전념했다. 수도원 생활의 역사를 탐구했으며, 모든 수녀가 철저히 암기해야 했던 우리 교단의 규율을 두고 세세하게 토론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신은 이러한 것들 어디에서도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의 관심은 부수적인 사항이나 종교의 주변적인 측면에 집중되어 있는 듯했다. 

 

- 나는 신과의 만남에 마음을 집중하기 위해 기도에 몰두했다. 하지만 신은 마치 내가 수도원 규칙을 어길 때마다 잡아내는 엄격한 감독관처럼 느껴지거나 애태우는 부재자로 느껴졌을 뿐이다. 나는 성인들이 신을 만났을 때 경험한 황홀경에 관해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큰 좌절을 맛보았다. 불행하게도 나는 내 종교 경험이 얼마나 빈약한지 알았고, 그 경험마저도 나 자신의 감정과 상상력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낸 것임을 깨달았다. 가끔이나마 생겨난 헌신의 감각은 그레고리오 성가와 예배 의식의 아름다움에 대한 심미적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초월한 어떤 근원으로부터 나에게 실제로 '일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결코 예언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이 묘사한 그 신을 만나지 못했다. '하느님'보다 훨씬 많이 언급하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도 내게는 고대 후기와 밀접하게 연관된 전적으로 역사적인 인물로만 여겨졌다. 또 나는 교회의 몇몇 교리에 심각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인간 예수가 육화한 신이라는 사실을 도대체 누가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으며 그러한 믿음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약 성서는 정말로 그 까다로운 -그리고 대단히 모순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가르치는가, 또는 그 교리는 다른 많은 교의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가 사망한 이후 수 세기 동안 신학자들이 만들어낸 산물인가? 

- 결국 나는 아쉬워하며 수녀원을 떠났고, 좌절과 부적응이라는 짐을 벗어버리자 신에 대한 믿음이 조용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최선을 다해 신을 느끼려고 했지만 신은 결코 내 삶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내가 신에 대해 더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조바심을 내지 않자 신은 너무 멀어져 그만 실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종교에 관한 관심은 계속되어 나는 초기 기독교 역사와 종교 경험의 본질에 관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시리즈를 만들기도 했다.

 

- 종교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종교에 대한 나의 오랜 의문들이 정당한 것 같았다. 어릴 때 의심 없이 받아들인 교리들은 실제로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것이었고 인간이 만든 것이었다. 자연과학은 창조자 하느님을 폐기해버린 것 같았고, 성서학자들은 예수가 결코 스스로 신성하다고 주장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내가 경험한 섬광과 같은 환상은 뇌전증으로 인한 신경적 결함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성인들의 환상과 황홀감도 단지 정신적 기벽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차츰 신이란 존재는 인류가 성장하면서 흥미를 잃게 된 일탈 행위처럼 보였다.

 

- 하나의 신 개념이 의미가 없어지거나 더는 적절하지 못한 것이 되었을 때 그 개념은 조용히 폐기되고 새로운 신학으로 대체되었다. 근본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부정하는데, 본질적으로 근본주의는 반역사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모세와 후세의 예언자들이 모두 오늘날의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신을 경험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세 종교를 살펴보면 '신'에 대한 객관적인 견해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각 세대는 자신들에게 효과적인 신의 이미지를 창조해야 했다.

 

- 무신론도 마찬가지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는 명제는 항상 역사의 각 시기마다 약간씩 다른 의미였다. 과거 '무신론자'로 불린 사람들은 늘 신에 관한 특정한 생각을 부정한 자들이었다. 그렇다면 현대의 무신론자들이 거부하는 '신'은 무엇인가? 유대 부족장의 신인가, 예언자의 신인가, 철학자의 신인가, 신비주의자의 신인가, 아니면 18세기 이신론자의 신인가? 이 모든 신이 역사의 다양한 시기에 성서와 쿠란의 신으로서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에게 경배받아 왔다. 우리는 이 신 개념들이 서로 매우 다르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무신론은 종종 과도기적 상태를 뜻했다.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은 모두 신성(神性)과 초월에 관한 혁명적인 관념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당시 이교도로부터 '무신론자'로 불렸다. 이와 비슷하게 현대의 무신론도 우리 시대의 문제에 더는 적합하지 않은 '신'을 부정하는 것일까? 

 

- 종교는 초세속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대단히 실용적이다. 우리는 특정한 신 개념이 논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타당한지보다 '효과적'인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신 개념은 효과가 없어지면 곧 바뀌는데 때로는 급진적으로 달라지기도 한다. 

 

- 어떤 이들은 신이 '멀리 가버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인류학자들은 이런 신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고귀해서 결과적으로 열등한 영들과 더 접근 가능한 신들로 대체되었다고 설명한다. 슈미트의 이론에 따르면 고대에 지고신 역시 이교(토속 신앙)의 더 매력적인 신들로 대체되었다. 따라서 태초에는 유일신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 이론이 사실이라면 유일신교야말로 삶의 신비와 비극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이 개발한 가장 최초의 개념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 개념은 또한 그러한 신이 직면해야 했을 몇 가지 문제를 나타낸다. 

 

- 원시 유일신론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종교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이 제기되어 왔다. 신들을 창조하는 작업은 인간이 항상 해 왔던 일인 듯하다. 어떤 종교적 개념이 더는 효과적이지 않으면 곧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다. 천신의 경우처럼 효과적이지 않은 개념은 큰 야단을 떨지 않고 조용히 사라졌다. 지금 우리 시대의 많은 이들은 수세기 동안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이 섬겨 온 신 역시 천신만큼이나 멀어졌다고 말할 것이다.

 

- 어떤 이들은 사실상 신이 죽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확실히 신은 점점 더 많은 이들의 삶에서, 특히 서유럽인의 삶에서 잊혀 가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그들의 의식 속에 한때 신이 차지했다 사라져 생긴 '신의 빈자리(God-shaped hole)'에 대해 말한다. 비록 어떤 면에서는 무의미해 보일지 몰라도, 신은 우리 역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위대한 개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 지금 우리가 무엇을 잃어 가고 있는지 이해하려면 -즉 신이 정말로 사라지고 있다면- 사람들이 이 신을 숭배하기 시작했을 때 무엇을 했는지, 신이 무엇을 의미했고 어떻게 상상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신 개념이 점차 생겨나던 약 1만 4천 년 전 고대 중동의 세계로 돌아가볼 필요가 있다.

 

- 오늘날 종교가 인간사와 무관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유 중 하나는 대다수 사람들이 더는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것에 둘러싸여 있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 문명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물리적, 물질적 세계에만 관심을 두라고 가르친다. 세계를 관찰하는 이러한 방법은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결과 중 하나는 우리가 '영적인' 것 또는 '거룩한' 것에 대한 감각을 말하자면 편집해버렸다는 것이다. 그 감각은 더 전통적인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에 속속들이 배어 있었고 인간이 세계를 경험하는 데 본질적인 요소였다. 남태평양제도에서는 이 신비로운 힘을 '마나(manna)'라고 부르고, 다른 사람들은 '영(靈)'이나 '영기(靈氣)'로 경험한다. 때로는 방사능이나 전기의 형태를 띤 비인격적인 힘으로 느껴졌다. 부족장 내부에, 식물이나 돌, 동물 속에 머무는 힘이라고 믿기도 했다. 라틴인은 성스러운 숲에서 누멘(numen, 영)을 경험했고, 아랍인은 보이는 풍경 속에 진(jinn, 정령)이 있다고 느꼈다. 자연히 사람들은 이 실재와 접촉해 도움을 받고 싶어 했고, 또는 그저 숭배하고 싶어 했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힘을 인격화해 바람, 태양, 바다, 별과 연관되면서 동시에 인간의 특성도 지닌 신들을 만들었을 때, 그들은 보이지 않는 실재와 주변 세계와의 친밀감을 표현한 것이다. 

 

- 존재하는 생명의 물리적 기원에 대한 사실적 설명이라기보다 위대한 신비를 암시하고 그 성스러운 힘을 드러내기 위한 상징적 시도라고 볼수 있다. 어느 누구도 이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창조의 사건들에 참여할 수 없었기에 있는 그대로 창조를 설명하기란 불가능했으며, 유일하게 적합한 설명 방법은 신화와 상징이었다. <에누마 엘리시>를 보면 수세기 뒤 창조자 신이라는 관념을 낳은 영성에 대한 약간의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비록 창조에 대한 성서와 쿠란의 설명이 매우 다르기는 하지만, 이 기묘한 신화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훨씬 뒤에 유일신론적 언어의 옷을 입고 다시 한번 신의 역사에 나타나게 된다. 

 

- 이야기는 신들의 탄생에서 시작하는데, 이 주제는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유대교와 이슬람 신비주의에서 아주 중요하게 등장한다. <에누마 엘리시>는 태초에 신들이 형태가 없는 끈적끈적한 흙에서 쌍으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바빌로니아 신화 -후대의 성서도 마찬가지다- 에서 '무(無)로부터 창조'라는 개념은 없었다. 이 개념은 고대 세계에서는 낯선 것이었다. 성스러운 원료는 신이나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인 영원 전부터 존재했다. 바빌로니아인은 태고의 신성한 물질이 끊임없이 홍수가 범람해 인간의 취약한 성취를 쓸어버리던 메소포타미아의 끈적끈적한 땅과 닮았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에누마 엘리시>에서 혼돈은 화염에 싸여 소용돌이치는 물질이 아니라 모든 경계, 규정, 정체성이 결여된 질척한 무질서다. 

 

- 유출(emanation)이라 불리는 과정을 통해 이들로부터 다른 신들이 잇따라 출현하는데, 이 과정은 서구의 '신의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해진다. 짝을 지어 새롭게 출현한 신들은 각각 진화가 진행됨에 따라 이전보다 더 분명하게 규정되었다. 처음으로 라흐무와 라하무가 나왔다(이들의 이름은 '실트 silt'를 뜻하는데, 여전히 물과 흙이 섞인 상태를 말한다). 그다음에는 하늘의 경계선 안샤르와 땅의 경계선 키샤르가 나왔다. 그다음에는 아누(하늘)와 에아(땅)가 나오면서 유출 과정이 완결되는 것처럼 보였다.

 

- 신의 세계는 하늘, 강, 땅이 분명하게 분리되었다. 그러나 창조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고통스럽고 끊임없는 투쟁만이 혼돈과 분열의 힘을 막을 수 있었다. 더 젊고 동적인 신들이 부모에 대항해 반기를 들었는데, 에아는 압수와 뭄무를 무찌를 수 있었지만 자신을 대신해 싸워줄 기괴한 괴물들을 낳은 티아마트를 꺾을 수는없었다. 운 좋게도 에아는 훌륭한 아들을 얻는데, 신의 혈통에서 가장 완벽한 모범인 태양신 마르두크였다. '신들의 모임'에서 마르두크는 신들의 통치자가 되는 조건으로 티아마트와 싸울 것을 약속했다. 마르두크는 길고 위험한 전투에서 수많은 위험을 극복한 후에야 겨우 티아마트를 죽일 수 있었다. 이 신화에서 창조력은 곧 투쟁이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힘에 대항해 힘들게 성취하는 것이다. 
 

- 그러나 바알은 불운을 겪는다. 죽어서 죽음과 불임의 신 모트의 세계로 내려가게 된 것이다. 아들의 운명을 알게 된 최고신 엘은 자신의 보좌에서 내려와 상복을 입고 자기 뺨을 때리지만 아들을 구하지는 못한다. 바알의 연인이자 누이인 아나트가 신성한 왕국을 떠나 자신의 쌍둥이 영혼을 찾아 나서는데, "마치 암소가 송아지를, 혹은 암양이 어린양을 찾는 것처럼" 그를 바랐다. 바알의 시신을 발견해 장례 의식을 거행한 아나트는 모트를 잡아 칼로 갈라 키질하고 태운 후 옥수처럼 으깨어 대지 위에 뿌린다. 다른 위대한 여신인 이난나, 이슈타르, 이시스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들 모두 죽은 신을 찾아내고 대지에 새 생명을 가져온다. 그런데 아나트의 승리는 매년 의례를 통해 지속되어야 한다. 자료가 불충분하여 어떤 방법으로 바알이 다시 생명을 얻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이후 바알은 생명을 되찾고 아나트의 곁으로 되돌아온다. 남녀의 결합으로 상징되는 일체성과 조화에 대한 이러한 숭배는 고대 가나안에서 제의적인 성행위로 경축되었다. 이렇게 신들을 모방함으로써 남자와 여자는 불임에 대항하는 투쟁을 공유하고 창조성과 세계의 풍요를 얻으려 했다. 신의 죽음, 여신이 찾아 나섬, 신성한 세계로의 의기양양한 복귀는 많은 문화에 공통된 종교적 주제이며,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의 독특한 유일신 ...

 

- <출애굽기>에서 찾을 수 있는 최초의 성서 저자들은 아마 기원전 8세기 또는 그보다 조금 더 일찍부터 활동한 것 같다. 한 집단은 신의 이름을 '야훼'라고 일컬었기에 'J'로 알려졌고, 다른 집단은 더 공식적인 칭호인 '엘로힘'을 선호했기에 'E'로 알려졌다. 기원전 8세기에 이스라엘인은 가나안을 두 왕국으로 나누었는데, J는 남부 왕국 유다에서, E는 북부 왕국 이스라엘에서 각각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지도 2번 참조). 모세오경의 다른 두 자료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설명하는 <신명기> 저자(D)와 사제 저자(P)의 문서- 는 2장에서 다룰 것이다.

 

- 우리는 J와 E 모두 여러 면에서 중동 이웃들의 종교적 관점을 공유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J와 E 문서는 기원전 8세기에 이르러 이스라엘인이 그들 나름의 독특한 비전을 개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령 J가 신의 역사를 기술하기 위해 도입한 세계 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에누마 엘리시>와 비교해볼 때 놀랄 만큼 피상적이다. 

 

- J는 평범한 역사적 시간에 더 관심을 두었다. <창세기> 첫 장의 장엄한 창조 이야기는 기원전 6세기에 P라고 불리는 저자가 쓴 것이다. 사실 그 전까지 이스라엘에서는 창조에 대해 별반 관심이 없었다. J는 야훼가 진정 하늘과 땅의 유일한 창조자인지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다.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J가 인간과 신의 확실한 차이를 깨닫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adam)은 그의 신과 같은 신성한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땅(adāmah)에 속한 존재다.

 

- J는 이웃 이교도들과 달리 세속의 역사를 신들의 성스러운 태고의 시간과 견주어 비속하고 약하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그는 선사시대의 사건들을 서둘러 기술해 노아의 홍수와 바벨탑 이야기 등과 관련된 신화시대를 지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의 시작에 이른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창세기 12장에서 갑자기 시작한다. 야훼가 훗날 아브라함(군중의 아버지)이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되는 아브람에게 가족을 이끌고 오늘날의 튀르키예 동부에 있는 하란에서 지중해 인근의 가나안으로 이주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이교도였던 그의 아버지 데라도 가족을 데리고 우르에서 서쪽으로 이동했다. 이제 야훼는 아브라함에게 그가 특별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언젠가 강대한 민족의 시조가 될 것인데, 그의 후손은 하늘의 별보다도 더 많아지고 가나안 땅을 자신들의 땅으로 차지하리라는 것이었다.

 

-  J 문서의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은 이야기는 이 신의 미래사에 관한 논조를 대변한다. 고대 중동에서는 제사와 신화를 통해 신성한 마나를 경험했다. 마르두크, 바알, 아나트가 그 숭배자들의 평범하고 속된 삶에 개입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신들의 행위는 성스러운 시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은 실제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재의 사건에 자신의 힘을 유효하게 발휘했다. 그는 지금 바로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명령으로 경험되었다. 야훼 자신을 드러내는 첫 계시는 다름 아닌 아브라함이 동족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야 한다는 명령이었다. 

 

- 그런데 야훼는 누구인가? 아브라함은 모세가 섬긴 신과 같은 신을 섬겼을까, 아니면 다른 이름으로 그를 알았을까? 이 문제는 오늘날 우리에게 지극히 중요하지만, 성서는 이상하게도 이 문제에 대해 모호해 보이고 상반된 대답을 하기도 한다.  J는 아담의 손자 때부터 사람들이 야훼를 섬겨 왔다고 말하지만, 6세기의 P는 '불타는 떨기'에서 야훼가 모세에게 나타나기 전까지 이스라엘인들은 야훼에 대해 결코 들어보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P 문서에서 야훼는 자신이야말로 진정 아브라함이 섬긴 신과 같은 신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 구절은 논란의 여지가 큰데, 야훼는 모세에게 아브라함이 자신을 '엘샤다이'라고 불렀고 야훼라는 신성한 이름은 몰랐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의 저자들이나 편집자들이 이 차이를 지나치게 걱정한 것 같지는 않다. J가 그의 신을 일관되게 '야훼'라고 부른 것은, 그가 기술할 당시 야훼가 이스라엘의 신'이었음'을 말해주며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실용적이었고 우리가 걱정하는 것 같은 사변적인 세부 사항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브라함이나 모세가 그들의 신을 오늘날 우리가 믿는 방식처럼 믿었으리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서의 이야기와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가끔 후기 유대 종교에 관한 지식을 초기 역사적 인물들에게 투영하려는 경향이 있다.  

 

- 이스라엘의 초기 족장이었던 아브라함, 그의 아들 이삭(이사악), 그의 손자 야곱이 단 하나의 신을 섬긴 유일신론자였으리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사실상 이 초기 히브리인들을 가나안의 이웃들과 여러 종교적 믿음을 공유한 이교도로 보는 편이 아마도 더 정확할 것이다. 그들은 확실히 마르두크, 바알, 아나트 같은 신의 존재를 믿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신을 섬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브라함의 신, 이삭의 '두려운 분', 야곱의 '강하신 이'는 별개의 세 신이었을 수도 있다. 

 

- 좀 더 나아간다면 아브라함의 신이 가나안의 '최고신' 엘이었을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신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엘샤다이 ('산의 신')라고 소개하는데, 이는 엘의 전통적 칭호 중 하나다. 다른 곳에서는 엘 엘리온('가장 높은 신') 또는 엘 베델('베델의 신')로도 불린다. 가나안의 '최고신' 엘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나 이스마엘 같은 히브리 이름에 남아 있다. 이스라엘인이 신을 경험한 방식은 중동의 이교도들에게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이스라엘인들은 몇백 년 후 야훼의 마나 곧 '거룩함'이 두려운 경험임을 발견한다. 

 

- 가령 시나이산에서 야훼가 천둥과 번개가 치는 중에 두려움을 자아내며 모세 앞에 나타날 때 이스라엘인은 멀리 물러서 있어야 했다. 이에 비해 아브라함의 신 엘은 굉장히 온화한 신이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친구처럼 찾아오고 심지어 인간의 모습을 하기도 한다. 현현으로 알려진 이런 종류의 신성한 환영(幻影)은 고대 이교 세계에서 상당히 흔한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신들이 인간의 삶에 직접 개입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으나 신화시대에 어떤 특권을 지닌 자들은 그들의 신과 대면할 수 있었다. <일리아스>는 그러한 현현으로 가득하다. 신들은 그리스인과 트로이인의 꿈에 나타났는데, 꿈속에서는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 사이의 경계가 느슨해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 그리스인들은 영웅들의 황금시대를 돌아보며 영웅들이 신들 -결국 인간과 동일한 본성을 지닌- 과 아주 가깝게 지냈다고 여겼다. 현현에 관한 이런 이야기들은 이교도들의 전체론적 비전을 나타내는데, 신이 인간이나 자연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 때는 대단히 야단 떨지 않아도 경험할 수 있었다. 예기치 않게 언제 어디서든지 지나가는 낯선 이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신들로 세상은 가득찼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이러한 신성한 만남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 같다. 이를 생각하면 기원후 1세기 말 오늘날 튀르키예의 리스트라 지방 사람들이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 바르나바를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오인했다는 <사도행전>의 이상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의 황금시대를 돌아보며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그들의 신과 가깝게 지냈다고 여겼다. 엘은 마치 족장처럼 그들에게 자상하게 충고했다. 방랑 생활을 인도하고 누구와 결혼할지 말해주고 꿈속에 나타나 계시했다. 때때로 그들은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을 보았던 것 같은데, 이는 나중에 이스라엘인에게 저주스러운 생각이 된다. <창세기> 18장에서 J는 엘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 나타났다고 기술한다. 하루 중 가장 더운 시간에 아브라함이 천막 어귀에 앉아 있다가 낯선 세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중동의 전형적인 예법에 따라 아브라함은 급히 음식을 장만하고 손님들에게 앉아 쉬기를 간청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아주 자연스럽게 손님 중 한 사람이 가 언제나 '야훼'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의 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다른 두 사람은 천사였다. 이 사건에서 아무도 신의 정체가 드러난 사실에 특별히 놀란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문서가 만들어지던 기원전 8세기의 이스라엘인은 아무도 신을 이런 식으로 '보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충격적인 발상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J와 동시대인인 E는 족장들이 신과 가까웠다는 옛이야기가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신과 맺은 계약을 이야기할 때, E는 그 사건에 거리를 두고서 옛 전설에 담긴 신인동형의 요소를 줄이는 쪽을 택한다. 그 결과 E 문서는 신이 천사를 통해 아브라함에게 말씀했다고 기술한다. 그러나 문서에는 이러한 결벽증 없이 원시적 현현의 고전적 특징이 보존되어 있다. 

 

- 야곱 또한 많은 현현을 경험했다. 어느 때 야곱은 하란으로 가서 친척 중에 부인을 맞이하려고 결심했다. 그 여정의 첫날 밤 그는 요르단 계곡 근처 루즈에서 돌을 베고 잠들었는데, 꿈에서 땅에서 하늘까지 이어진 층계로 천사들이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오르내리는 것을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마르두크의 지구라트를 떠올리게 된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듯한 그 탑 정상에서 인간은 신을 만날 수 있었다. 야곱은 그 층계 꼭대기에서 엘을 만나는데, 엘은 야곱을 축복하고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반복했다. 

 

- 또한 엘은 야곱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또다른 약속을 한다. 이교 신앙은 보통 지역과 관련이 깊어서, 한 신은 특정 구역만 관할할 뿐이고 만약 낯선 곳에 간다면 그 지역의 신들을 섬기는 것이 언제나 현명한 일이었다. 그런데 엘은 야곱에게 가나안을 떠나 낯선 땅을 방랑할 때에도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주리라." 이 초기 현현에 대한 이야기는 가나안의 '최고신'이 더 보편적인 의미를 얻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 야곱은 그 거룩한 땅을 그 지역의 전통적 이교 관습에 따라 봉헌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기가 베고 잔 돌을 가져다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어 축성했다. 이후로 그곳을 더는 루즈라 부르지 않고 베델, 곧 엘의 집으로 부르게 된다. 선돌(立石)은 가나안 사람들의 다산 숭배에 나타난 공통점이었는데, 기원전 8세기까지 베델에서 성행했다. 후대의 이스라엘인은 이런 형태의 종교를 강하게 비난했지만 베델의 이교적 신전은 야곱과 그의 신에 대한 초기 전설과 관련되어 있다.

 

- 신에 대한 이스라엘인의 믿음은 철저히 실용적이다. 아브라함과 야곱이 엘을 신뢰한 것은 엘이 그들을 위해 힘써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앉아서 엘의 존재를 증명하려하지 않았다. 엘은 철학적, 추상적 개념이 아니었다. 고대 세계에서 마나는 삶의 자명한 사실이었고, 신은 마나를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다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것이었다. 이러한 실용주의는 신의 역사에서 항상 중요한 요소가 된다. 사람들은 특정한 신 개념을 과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타당하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유용하기 때문에 받아들인다. 

 

- 대부분 영적인 존재들이 그러하듯 동이 틀 무렵이 되자 이 대적자는 그만 놓으라고 했지만 야곱은 놓지 않았다. 야곱은 그가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말했다. 고대 세계에서는 누군가의 이름을 알게 되면 그를 제어할 힘이 생긴다고 믿었기에 이 낯선 사람도 이름을 밝히기를 주저했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야곱은 자신의 대적자가 다름 아닌 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이스라엘인은 야훼를 '우리 선조들의 신'이라고 불렀지만 야훼는 족장들이 숭배한 가나안의 '최고신' 엘과는 꽤 다른 신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스라엘의 신이 되기 전 다른 민족의 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처음 모세에게 나타날 때 야훼는 본래 자신이 '엘 샤다이'로 불렸으나 자신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신이라고 거듭해서 상당히 장황하게 강조한다. 이런 주장은 모세가 섬긴 신의 정체를 두고 꽤 이른 시기에 벌어졌던 논쟁의 여운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야훼는 본래 오늘날의 요르단인 미디안에서 섬기던 전쟁 신, 화산 신이었다는 주장이있다. 그런데 만일 정말로 야훼가 완전히 새로운 신이었다면 우리는 이스라엘인이 어디서 그를 발견했는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문제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하지만 성서 저자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고대 이교 세계에서 신들은 자주 합쳐지고 뒤섞였고, 어느 한 지역의 신이 다른 민족의 신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출애굽 사건이 야훼를, 그의 기원이 어디든 간에 이스라엘의 최고 신으로 만들었으며, 이 사건 덕분에 모세가 이스라엘인에게 야훼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사랑한 바로 그 엘과 동일한 신이라고 확신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 이른바 '미디안 설' -야훼가 원래는 미디안인의 신이었다는 가설- 은 오늘날에는 대개 믿지 않지만 모세가 야훼를 처음 만난 곳이 미디안이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노예를 못살게 굴던 이집트인을 죽여서 이집트를 떠나야 했다. 그는 미디안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결혼했고 장인의 양떼를 돌보던 중 떨기에 불이 붙었는데도 타지 않는 기이한 광경을 본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려 했을 때 야훼가 모세의 이름을 불러 그가 대답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이 대답은 전적인 관심과 충성을 요구하는 이 신을 만날 때면 이스라엘의 모든 예언자가 하는 말이었다.

 

- 성서는 이스라엘인들이 계약에 충실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전시, 즉 야훼의 능숙한 군사적 보호가 필요한 때에는 계약을 기억했으나 평시에는 옛 관습을 좇아 바알, 아나트, 아세라를 숭배했다. 야훼 숭배는 근본적으로 다른 역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종종 오래된 이교 신앙의 표현에 기반해 자신을 드러냈다.

 

- 솔로몬 왕은 아버지 다윗 왕이 여부스인에게서 빼앗은 도시 예루살렘에 야훼를 위한 성전을 지었는데, 그 모양이 가나안 신들의 신전과 비슷했다. 성전은 정방형의 세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성소로 알려진 작은 정육면체 모양의 방으로 이어지는데, 방 안에는 이스라엘인이 광야에서 수년 동안 가지고 다녔던 이동식 제단인 법궤가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가나안 신화에서 원시 바다를 상징하는 커다란 놋대야가 있었고, 풍요의 여신 아세라 숭배를 의미하는 12미터 기둥 두 개가 우뚝 서 있었다. 이스라엘인은 가나안인에게서 이어받은 베델, 실로, 헤브론, 베들레헴, 단의 옛 신전을 계속 이용해 야훼를 숭배했는데, 그곳에서는 자주 이교 의식이 거행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놀랄 만큼 비정통적 행위들이 있었지만, 그곳은 곧 특별한 장소가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을 야훼의 천상 궁전의 복제품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가을에 큰 축제를 열었는데, 속죄일에 희생 제의로 시작해서 닷새 후에는 한해의 수확을 감사하는 초막절로 이어졌다. <시편>의 일부는 초막절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야훼의 즉위를 축하한 시라는 이야기가 있으며, 마치 마르두크처럼 야훼가 태고의 혼돈을 정복하는 과정을 재연했다.

 

- 갑자기 이사야는 예루살렘 성전, 천상의 궁전을 지상에 복제한 그곳의 바로 위쪽 하늘의 보좌에 야훼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야훼의 옷자락이 성전을 덮고 있었고, 야훼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날개로 얼굴을 가린 스랍(치품천사)들이 그를 모시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야훼,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 그들의 음성으로 인해 바닥이 뒤흔들리고 성전이 온통 연기로 가득 찼다. 연기는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두터운 구름이 되어 야훼를 감쌌는데, 마치 시나이산에서 모세가 보지못하게 야훼를 가렸던 그 구름과 연기와 비슷했다. 오늘날 우리는 '거룩한'이라는 말을 보통 도덕적으로 탁월한 상태를 가리키는 데 쓴다. 그러나 히브리어의 '카도시(Kaddosh)'는 도덕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타자' 곧 철저한 분리를 의미한다. 시나이산에 나타난 야훼의 환영은 인간과 신의 세계 사이에 갑작스럽게 벌어진 엄청난 간극을 강조했다. 이사야가 본 스랍들도 이렇게 외쳤던 것이다. "야훼는 다르시다! 다르시다! 다르시다!" 이사야는 주기적으로 인간을 덮쳐 와 매혹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는 누미노제라는 감각을 경험한 것이다. 루돌프 오토는 그의 고전적 저작 <성스러움의 의미>에서 초월적 실재에 대한 이런 전율하는 경험을 '두렵고 매혹적인 신비'라고 기술했다.

 

- 이 압도적인 경험에 합리적인 부분은 하나도 없다. 오토는 이것을 음악이나 성적인 경험에 비교했는데, 이 경험에 따라오는 감정은 말이나 개념으로 적절히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전적인 타자'에 대한 이런 감각은 심지어 '존재한다'고 말할 수조차 없는데, 우리가 지닌 현실에 관한 보통의 도식 안에는 그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축의 시대의 새로운 야훼는 여전히 '만군의 신'이었지만 더는 단순한 전쟁의 신이 아니었다. 또한 야훼는 그저 이스라엘만 열렬히 편애하는 부족의 신도 아니었다. 야훼의 영광은 '약속의 땅'에 국한되지 않고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 

 

- 일부 이스라엘인은 야훼가 다른 신들처럼 부인이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최근에 고고학자들은 "야훼와 그의 아세라에게"라고 적힌 비문을 발굴했다. 호세아는 특히 이스라엘이 바알 같은 다른 신들을 섬김으로써 그 계약의 조건을 깨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걱정했다. 새로 등장한 모든 예언자와 마찬가지로 호세아는 종교의 내적 의미를 중시했다. 그는 야훼의 말을 전했다.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헤세드 hesed)이다. 번제가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앎(다아트 엘로힘)이다." 호세아는 신학적앎을 말한 것이 아니다. 다아트(daath)라는 단어는 '알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동사 야다(yada)에서 왔는데, 이 단어는 성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가령 ] 문서에는 아담이 그의 부인 하와를 '알았다'고 적고 있다. 고대 가나안 종교에서 바알은 땅과 결혼했고 사람들은 제의적 난교축제로 이 사실을 축하했다. 그러나 호세아는 계약 이래로 야훼가 바알의 자리를 대신하고 이스라엘 백성과 결혼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 땅에 풍요를 가져다주는 이가 바알이 아니라 야훼임을 알아야 했다. 야훼는 연인처럼 그녀(이스라엘)에게 계속 구애하며, 바알의 꾐으로부터 그녀를 다시 유혹해 데려올 작정이었다.

 

- 기원전 597년에 처음 추방당한 사람들 중에 에스겔(에제키엘)이라는 사제가 있었다. 그는 거의 5년 동안 집에 홀로 머물며 아무하고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다 야훼에 대한 충격적인 환상을 보았고, 이는 말 그대로 그를 때려 눕혔다. 에스겔이 처음에 본 환상을 자세히 묘사하는 것은 중요하다. 7장에서 보게 되겠지만 수 세기 뒤 유대 신비주의자들에게 매우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 에스겔은 번갯불이 번쩍이는 빛나는 구름을 보았다. 북쪽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 폭풍우 치는 어둠 속에서 그는 네 마리 힘센 짐승(그룹)이 끄는 큰 '전차'(메르카바)를 본 듯 -그는 이 형상화의 잠정적 성격을 주의 깊게 강조했다- 했다. 그들은 바빌론의 궁전 출입문에 조각된 짐승을 닮긴 했으나 에스겔은 거의 상상하기 불가능하게 묘사한다. 각 짐승마다 얼굴이 넷인데 각기 인간, 사자, 황소, 독수리의 얼굴이었다. 전차의 바퀴들은 각각 다른 방향으로 굴러갔다. 이런 묘사는 단지 그가 표현하려고 애쓰던 환상의 생경한 충격을 강조하는 역할을 했다. 짐승들의 날갯소리는 귀청이 떨어질 정도였다. "큰 물소리 같았고 전능하신 분(샤다이 Shaddai)의 음성, 곧 천둥소리 같았으며 싸움터에서 나는 고함 소리처럼" 들렸다. 전차 위에는 보좌 '같이' 보이는 것이 있었고, 그 위에 "사람 같은 모습이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은 놋쇠처럼 빛났고 사지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으며, "야훼의 영광(kavod)처럼" 보이기도 했다. 에스겔은 즉시 땅에 엎드려 자신에게 말하는 야훼의 음성을 들었다.  
   
- 메르카바(merkavah). 신의 '전차' '보좌'를 뜻하는 히브리어, 예언자 에스겔의 환상에서 유래되어 초기 유대 신비주의자들에게 묵상의 대상이 되었는데, 1세기에 팔레스타인에서 번성하기 시작해 7세기부터 11세기까지 바빌로니아에서 성행했다. 이들의 신비주의를 통칭해 '메르카바 신비주의'라고 부른다.

 

- 새로운 유대교의 구심점이던 성전을 잃은 것은 큰 슬픔이었으나, 돌이켜보면 그리스화된 디아스포라 유대인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은 이런 재앙을 이미 준비한 것 같다. 거룩한 땅 이스라엘에서 생겨난 여러 종파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예루살렘 성전과 자신들을 단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세네파의 쿰란 공동체는 성전이 타락하고 부패했다고 믿었고 따로 떨어져 나와 사해 주변에 수도원 같은 분리된 공동체를 세웠다. 그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성전을 짓고 있다 -손으로가 아니라- 고 확신했다. 그들의 성전은 '영의 성전'이 된다. 그들은 오래된 동물 희생 제의 대신 세례 의식과 공동 식사를 통해 자신들을 정화하고 죄에 대한 용서를 구했다. 신은 돌로 만든 성전이 아니라 형제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된 것이다.

 

- 팔레스타인 유대인 중 가장 진보적인 종파는 바리새파였는데, 그들은 에세네파의 해결 방식이 너무 엘리트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신약성서에는 바리새인이 회칠한 무덤과 같은 뻔뻔스러운 위선자들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1세기에 예수와 바리새인(삼마이 학파)이 벌인 논쟁이 왜곡되어 전해졌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은 열성적으로 영성을 추구한 유대인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전체가 사제들의 거룩한 나라가 되도록 부름받으며, 신은 성전뿐만 아니라 가장 초라한 움막에도 존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바리새인은 성전에서나 적용되던 특별한 정화법을 집에서도 지키며 정식 사제처럼 살았다. 모든 유대인의 식탁은 성전 안에 있는 신의 제단과 같다고 믿었기에 제의적 순결성을 지키며 식사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들은 일상의 가장 하찮은 부분에서도 신의 임재에 대한 감각을 발달시켰다. 유대인은 이제 사제 계급의 중재나 복잡한 의례를 거치지 않고도 직접 신에게 다가설 수 있었다. 이웃에 대한 자애로운 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죄를 속죄할 수 ...

 

- 거대하고 규정할 수 없는 '무엇'에 대한 상상적인 묘사일 뿐이다. 세계 속의 신의 임재를 논하면서 랍비들은 신이 우리가 볼 수 있도록 허락하는 신의 자취와 접근할 수 없는 더 큰 신성한 신비를 구분하는 데 성서의 저자들만큼이나 신중했다. 그들은 야훼 (YHWH)의 '영광'(카보드)과 '성령'이라는 이미지를 좋아했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신이 신성한 실재의 본질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 랍비들이 애용한 신을 뜻하는 말들 중 하나는 '세키나(shekinah)'였는데, 이는 '거주하다' '자신의 천막을 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시간(shakan)'에서 나왔다. 이제 성전은 파괴되었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방랑할 때 동행한 신의 이미지를 통해 신에게 다가가는 것이 가능했다. 일부 랍비들은 지상의 사람들과 함께 거한 셰키나는 성전이 파괴되었을지라도 여전히 성전 안에 거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랍비들은 성전의 파괴가 오히려 세키나를 예루살렘에서 해방해 세키나가 전세계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셰키나는 신의 '영광'이나 '성령'과 마찬가지로 별개의 다른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에 임한 신으로 이해되었다. 랍비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돌이켜보며 셰키나가 언제나 자신들과 동행했음을 발견했다. 

 

- 바빌론 유수기에 유대인은 자신들을 둘러싼 세계가 가혹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신이 임재한다는 감각이 그들이 자애로운 신에게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갖도록 도와주었다. <신명기>에서 말한 대로 성구함(聖句函, 테필린)을 손과 이마에 차고, 술(치치트)이 달린 옷을 입고, '셰마 구절을 담은 상자'인 메주자를 문에 못질할 때, 유대인들은이 특이하고 별난 관행을 남들에게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시도는 그 행동의 가치를 떨어뜨릴 뿐이었다. 그 대신 유대인들은 이 미츠보트를 행함으로써 자신들을 보호하는 신의 사랑을 깨달으려 했다. "이스라엘은 사랑받고 있다! 성서는 그들을 계율로 감싸고 있다. 이마와 손에 테필린을, 문에 메주자를, 옷에 치치트가 있지 않는가." 그것들은 마치 왕이 왕비를 더 아름답게 꾸미려고 하사한 보석 같았다. 물론 이런 확신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탈무드에 따르면 어떤 사람들은 신이 이런 암울한 세상에서 무슨 대단한 차이를 만들 수 있을지 의심했다. 랍비들의 영성은 예루살렘을 떠난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전부터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에게도 규범이 되었다. 이는 랍비들의 가르침이 탄탄한 이론적 근거를 갖췄기 때문이 아니었다. 율법의 많은 관행은 아무런 논리적인 의미가 없었다. 랍비들의 종교는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졌다. 랍비들의 비전이 이스라엘인들이 좌절에 빠지는것을 막았던 것이다. 

 

-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영성은 남성만을 위한 것이었다. 여성은 랍비가 되는 것도, 토라를 연구하는 것도 시너고그에서 기도하는 것도 요구할 수 (그리고 허락받을 수도) 없었다.  

 

- 가장 이른 시기에 쓰였기에 보통 가장 믿을 만하다고 여겨지는 <마가복음>은 예수를 형제자매가 있는 가정을 둔 지극히 평범한 인간으로 묘사한다. 그가 태어날 때 천사들이 나타나 그의 탄생을 알리거나 찬양하지도 않았다. 어린 시절이나 청년기에 그에겐 눈에 띄는 점이 없었다. 예수가 가르침을 펼치기 시작했을 때 그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마을 목수의 아들이 갑자기 대단한 천재가 된 것에 당황했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공적 생애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예수는 본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을지 모른다. 세례 요한은 아마도 에세네파에 속한 방랑 금욕주의자였을 것이다.  

 

- 예수의 사명이 본래 무엇이었는지를 두고 매우 다양한 추측이 있었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실제로 한 말이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다. 복음서의 자료들은 대부분 예수 사후 바울이 세운 교회가 이룬 발전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렇지만 복음서에는 예수의 공적 생애가 근본적으로 유대적 성격을 지녔다는 단서들이 있다. 먼저 신유 치료자들은 갈릴리 지방에서 매우 친숙한 종교인이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예수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떠돌아다니면서 설교하고 병든 자들을 고치고 악령을 쫓아내는 수행자였다. 예수처럼 그들도 자신을 지지하는 많은 여성 제자들을 데리고 있었다.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 바리새인이었으며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했다고 주장한 바울처럼, 예수도 힐렐 학파에 속한 바리새인이었을지 모른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분명히 예수의 가르침은 바리새인의 주요 교리와 일치한다. 예수도 사랑과 자애가 가장 중요한 계율(미츠보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 바리새인처럼 예수도 토라의 권위를 믿었고 많은 동시대 사람들보다 훨씬 엄격하게 율법을 준수하라고 설교했다고 한다. 예수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격언 속에 율법의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고 강조한 것은 그가 '힐렐의 황금률'과 비슷한 교훈을 가르쳤음을 말해준다.

 

-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쓸모없는 위선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해 아주 거칠고 볼썽사납게 비난을 퍼붓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중상 모략적 왜곡이며, 예수의 사명을 특징짓는 '사랑'에 명백히 어긋난다. 특히 예수가 바리새인에게 맹비난을 퍼붓는 장면은 거의 확실히 믿을 만하지 못하다. 가령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바리새인을 비교적좋게 평가했는데, 만약 바리새인이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불구대천의 원수였다면 <사도행전>에 나오는 것처럼 바울이 자신이 바리새인이라고 자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유대교에 대한 반감은 (기원후 1세기) 80년대에 유대인과 기독교인 사이에 발생한 긴장 관계를 반영한 것이다. 복음서들은 종종 예수와 바리새인의 논쟁을 보여주지만 그런 논쟁은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려져 있거나 더 율법주의적이던 삼마이 학파 사람들과 예수의 의견 충돌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 예수가 사망한 후 그의 추종자들은 예수가 신이었다고 결정지었다. 이 결정은 즉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예수가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이었다는 교리는 기원후 4세기에 이르러서야 확정된다. 성육신에 대한 기독교 신앙은 점진적으로, 복잡한 과정을 거쳐 발전했다. 분명히 예수는 스스로 신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가 세례를 받을 때 하늘로부터 들려온 음성이 그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아마도 그가 사랑받는 메시아임을 확인해주려는 것이었던 듯하다. 하늘로부터 들려온 선포 자체에 대단히 특별한 의미가 있지는 않았다. 랍비들은 그들이 밧콜이라고 부른 것을 자주 경험했기 때문이다. 밧콜이란 좀 더 직접적인 예언인 '계시'를 대신하는 영감의 한 방식이었다. 

 

- 밧콜(bat gol).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음성의 딸'이라는 의미인데, 평소 목소리보다 작은 목소리를 가리킨다. 구약에서 '신의 음성'을 가리킬 때 쓰이는 말이다. 

 

- 디아스포라 유대인 중 어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 랍비들이 발전시킨 탈무드 중심 유대교를 받아들였고, 또 어떤 이들은 토라의 위상과 유대교의 보편성에 대해 자신들이 품은 의문에 기독교가 답을 준다고 믿었다. 기독교는 특히 신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매력적이었는데, 613개나 되는 계율(미츠보트)을 지켜야 하는 부담 없이도 '새로운 이스라엘'의 정식 구성원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기원후 1세기 동안 기독교인은 마치 유대인처럼 신을 생각하고 신에게 기도했다. 그들은 랍비처럼 논쟁했고 그들의 교회는 유대교 시너고그와 비슷했다. 기원후 80년대에 유대인과 시너고그에서 공식적으로 내쫓긴 기독교인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기독교인들이 쫓겨난 이유는 율법 준수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 이전에 유대교에 끌렸던 이교도들은 이제는 기독교로 돌아섰는데 그들은 대체로 노예나 하층 계급이었다. 2세기 말이 되어서야 고등 교육을 받은 이교도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새로운 종교에 의심을 품은 이교 세계 사람들에게 비로소 새 종교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 처음에 로마 제국 내에서는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로 여겼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은 이제 더는 시너고그의 구성원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힌 후 기독교는 광신자의 '종교'로 경멸받았다. 

 

- 고대 로마의 전기 작가인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70~160)는 기독교를 비합리적이고 별난 운동 즉 '새롭고 타락한 미신'으로 보았다. 그것은 참으로 '새로웠고' 그래서 '타락한 것'이었다. 

 

- 교육받은 이교도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종교가 아니라 철학에 기대를 걸었다. 플라톤, 피타고라스, 에픽테토스 같은 고대의 철학자들이야말로 그들에게 성인이며 선각자였다. 그들은 이 철학자들을 심지어 '신의 아들'로 보았다. 예를 들어 플라톤을 아폴론의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철학자들은 종교에 대해 차분하게 존중하는 태도를 유지했으나 자신들이 하는 일과 근본적으로 다른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철학자들은 상아탑에 갇혀 늙어버린 학자가 아니라 동시대인들을 자신들의 특정 학파가 세운 학문으로 끌어들여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명을 짊어진 이들이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모두 자신들의 과학적, 형이상학적 연구가 사람들에게 우주의 영광에 관한 통찰력을 불어넣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들의 철학을 '종교적'으로 대했다. 그리하여 1세기경 지적이고 사려 깊은 사람들은 삶의 의미에 관한 설명, 영감을 주는 이념, 윤리적인 동기 등을 철학자들에게서 얻으려 했다. 기독교는 야만적인 교의로 보였다. 기독교의 신은 인간사에 비합리적으로 간섭하는 사납고 원시적인 신으로 보였다. 그 신은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가 말한 멀리 떨어져 있고 변함없는 신과 공통점이 전혀 없었다. 플라톤이나 알렉산드로스 대왕 같은 걸출한 인물이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로마 제국 어느 한심한 변방에서 치욕스러운 십자가형을 당한 유대인 청년이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 플라톤주의는 고대 후기에 가장 인기 있는 철학의 하나였다. 1, 2세기의 플라톤주의자들은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사상가 플라톤보다 신비주의자 플라톤에게 매력을 느꼈다. 플라톤의 가르침은 인간의 영혼을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해 신성한 세계로 비상하게 함으로써 진정한 자기를 실현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플라톤 철학은 우주론을 연속성과 조화의 이미지로 사용한 고귀한 체계였다. '일자(一者)'는 시간과 변화의 황폐함을 초월해 거대한 존재의 사슬의 정점에서 조용한 관조에 몰입해 있다. 모든 존재는 그 순수한 존재의 필연적 결과로서 '일자'로부터 유래했다. 영원한 형상은 '일자'로부터 유출되었고, 다음에 해, 달, 별을 각각의 영역에서 움직이게 했다. 마지막으로 '일자'를 돕는 존재인 신들이 인간이 사는 하위 세계에 신성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플라톤주의자는 신이 갑자기 세계를 창조하기로 마음 먹는다든지 소수의 인간과 직접 대화하기 위해 기존 질서를 무시하는 그런 유치한 이야기를 원하지 않았다. 십자가형을 당한 메시아를 통한 기괴한 구원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모든 사물에 생명을 부여한 신과 인간은 닮았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노력을 통해 신성한 세계로 상승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 영지주의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최초의 타락과 참상을 묘사했다. 일부는 마지막으로 유출된 소피아(지혜)가 접근 불가능한 '신 본체'의 금지된 앎을 탐냈기 때문에 은총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그 주제넘은 무례함 때문에 소피아는 플레로마에서 쫓겨났으며, 소피아의 비탄과 고뇌에서 물질세계가 형성되었다. 추방당한 소피아는 향방도 모르는 채 자신의 신성한 원천으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하며 우주를 떠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처럼 오리엔트의 관념과 이교적 관념을 잘 혼합해 우리의 세계가 천상의 왜곡이며 무지와 이탈로 인해 생겨났다는 자신들의 심오한 판단을 전했다. '신'은 추악한 물질과 아무런 관련도 없기 때문에 물질세계를 창조한 것은 결코 '신'이 아니라고 가르친 영지주의자들도 있었다. 물질세계를 창조한 것은 그들이 데미우르고스(창조자)라고 불렀던 아이온의 작업이었다. 데미우르고스는 '신'을 질투하여 자신이 플레로마의 중심이 되기를 꿈꾸었다. 그 결과 그는 타락하고 반항적인 걱정으로 세상을 창조했다. 발렌티누스가 설명하듯 데미우르고스는 "앎 없이 하늘을 만들었고, 인간에 대한 무지 가운데 인간을 빚었으며, 지상에 대한 이해 없이 지상에 빛을 가져왔다." 그러나 아이온들 가운데 하나인 '로고스'가 구원을 위해 지상으로 내려와 신에게 돌아가는 길을 인간에게 가르치고자 예수라는 육체적 형상을 취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폈던 기독교인들은 결국 탄압받았지만, 나중에 보게 되듯이 후대의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은 이러한 유형의 신화로 되돌아갔다. 이런 신화가 '신'에 대한 그들의 종교 경험을 정통 신학보다 더 잘 나타낸다고 보았던 것이다.  

 

- 이러한 신화들은 결코 창조와 구원에 관한 문자 그대로의 이야기로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내적 진리의 상징적 표현이었다. 즉 '신'이나 '플레로마'는 '저편 어딘가에 있는 외적 실재'가 아니라 우리 내면에서 발견해야 하는 것이었다. 
 

- [신과 그의 창조물과 또는 그런 비슷한 것에 대한 탐구를 그만 중단하라. 그 대신 너 자신을 살펴보기 시작함으로써 그분을 찾으라. 네 안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그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분이 누구인지, "나의 신, 나의 정신, 나의 생각, 나의 영혼, 나의 육체"라고 말하는 분이 누구인지 배우라. 슬픔과 기쁨, 사랑과 증오의 원천을 배우라. 어떻게 인간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깨어 있거나 잠들 수 있는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화내고 사랑할 수 있는지 배우라. 네가 이 모든 것을 조심스레 관찰한다면 너는 그분을 네 안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 플레로마는 영혼의 지도를 나타낸다. 신의 빛은 만약 영지주의자가그것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안다면 이 암울한 세상에서도 감지할 수있을 것이다. 소피아 또는 데미우르고스가 최초의 타락을 저질렀을 때 신성한 불꽃도 플레로마에서 떨어져 나와 물질 안에 갇혔다. 영지주의자들은 영혼 안에서 신성한 불꽃을 발견할 수 있고, 본향을 찾아가도록 도와줄 신적 요소를 내면에서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영지주의자들은 기독교로 새로 개종한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유대교로부터 전수받은 전통적인 신 개념에 만족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그들은 이 세상을 자비로운 신이 만든 '선한' 세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기독교인은 그런 생각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반면에 260년에서 272년까지 안티오키아(안디옥)의 주교였던 사모사타의 파울루스는 예수는 단지 인간이었을 뿐이며 신의 '말씀'과 '지혜'가 성전 안에 머물듯 예수 안에 머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비정통으로 간주되었다.  파울루스의 신학은 264년 안티오키아 교회회의(시노드 synod)에서 이단으로 판정받지만 파울루스는 팔미라의 여왕 제노비아(240?~270?)의 도움으로 주교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예수가 신적 존재였다는 기독교인의 확신과 하느님은 오직 단 한 분이라는 강한 믿음을 조화시키는 길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 오리게네스는 플라톤주의자로서 신과 영혼의 동족성을 확신했다.라서 신에 관한 삶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 앎은 특별한 훈련을 통해 '상기되고 각성될 수' 있었다. 플라톤 철학을 셈족의 성서에 적용하기 위해 오리게네스는 성서를 상징적으로 읽는 방법을 개발했다. 가령 그리스도가 처녀 마리아의 자궁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영혼 속에 신의 지혜가 태어났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했다. 또 오리게네스는 영지주의자들의 생각도 일부 받아들였다. 본래 영적 세계의 모든 존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을 관조하고 성찰하도록 만들어졌다. 신은 자신을 로고스 즉 신의 ‘말씀'과 '지혜'를 통해 드러냈다. 그러나 이들은 신에 대한 완벽한 관조가 지겨워져 신성한 세계로부터 육체의 세계로 전락했으며 육체는 그들의 감옥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영혼은 죽음 뒤에 길고도 꾸준한 여행을 통해 신에게로 상승할 수 있다. 영혼은 점차 육체의 질곡을 벗어버리고 성별도 초월해 순수한 정신이 된다. 영혼은 관조(테오리아)를 통해 신에 대한 앎(그노시스 gnosis)을 쌓는데, 이 일은 플라톤이 가르쳐준 것처럼 영혼이 신성을 획득할 때까지 계속 ...

 

- 기독교는 플라톤적 사고가 우위를 차지한 세계에서 인정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나중에 기독교 사상가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경험을 설명하려 할 때 플로티노스와 그의 이교도 제자들이 가꾼 신플라톤주의적 견해를 이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비인격적이고 인간의 범주를 초월하면서도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깨달음에 관한 생각은 플로티노스가 공부하러 가고 싶어 했던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의 이상과 가까웠다. 겉으로는 차이가 두드러져 보여도 실재를 보는 유일신론의 관점과 다른 관점들 사이에는 심오한 공통점이 있었다. 절대(자)에 대한 인류의 사유는 매우 유사한 생각과 경험을 공유한 것처럼 보인다. '닙바나' '일자' '브라흐만' 또는 '신'이라 불린 이 궁극적 실재 앞에서 느끼는 현존, 황홀, 공포의 감각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우며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정신 상태이자 인식 상태였던 것이다. 

 

- 그리스 문화와 화해하려고 노력한 기독교인도 있었고 그리스 문화에 전혀 상관하지 않으려 한 기독교인도 있었다. 170년대에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오늘날 튀르키예의 프리기아 지방에서 몬타누스라는 예언자가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신의 화신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나는 인간이 되어 강림한 전능자 신이요, 아버지이자 아들이며 보혜사(保惠師)이다"라고 외쳤다. 그를 돕는 두 여성 사제 프리스킬라와 막시밀라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몬타누스 주의는 무시무시한 신의 초상을 표현한 열렬한 종말론적 신조였다. 신봉자들은 세상을 등지고 독신 생활을 해야 했을 뿐 아니라 순교만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가르침을 들었다.

 

- 타고난 능력을 바탕 삼아 관조를 통해 신에게 올라갈 수 있다고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에 기독교인들은 타락하기 쉬운 물질세계로 내려온 육화한 말씀을 본받아야 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만일 신이 유일하다면 어떻게 로고스도 신일 수 있나?

 

- 오늘날 튀르키예의 동부 지역인 카파도키아에서 활동한 세 명의 탁월한 신학자가 이 문제를 다루어 해결안을 제시했는데, 이는 특히 동방 정교회를 만족시켰다. 그들은 카이사레아의 주교 바실리우스(329~379)와 그의 동생인 니사의 주교 그레고리우스(335?~395), 그리고 그의 동료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329~390)였다. 이들은 흔히 '카파도키아 교부들'이라고 불리는데 매우 영적인 사람들이었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철학적 사유에 심취하기도 했으나 오직 종교적 경험만이 신에 관한 문제를 풀 열쇠를 제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들은 그리스 철학의 틀 속에서 철저히 교육받았기에 진리의 사실적 측면과 불가해한 측면의 중대한 차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스 철학의 초기 합리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에 주의를 기울였다. 플라톤은 (이성에 의해 표현되고, 그러므로 증명이 가능한) 철학과, 신화를 통해 전승되어 온 중요한 (그러나 과학적 증명을 비켜 가는) 가르침을 비교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신비 종교의 입문자들이 요구받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둘을 구분했다.

 

- 바실리우스는 진리 이해에 관한 그리스의 철학적 통찰을 이용해 기독교적 진리를 '도그마(dogma)'와 '케리그마(kerygma)'로 구분해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케리그마는 성서에 근거한 교회의 공개적인 가르침이고, 도그마는 오직 종교적 경험을 통해 파악되고 상징적 형태로만 표현될 수 있는 성서적 진리의 더 깊은 의미를 가리켰다. 그는 복음서에 담긴 명확한 가르침 외에 그리스도의 제자인 열두 사도로부터 신의 신비에 관해 전해 내려오는 비전적(祕傳的) 전통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가르침'이었다.

- [우리의 거룩한 교부들은 인간적인 불안과 호기심을 막고 신비의 성스러운 특징을 보호하기 위해 침묵 속에서 '사적이고 비밀스런 가르침'을 간직해 왔다. 이 비전적 가르침에 입문하지 못한 자들은 글로는 결코 드러낼 수 없는 의미를 지닌 신의 신비적 특성을 깨달을 수 없다.]

 

- 전례의 상징과 예수의 명료한 가르침 뒤에는 신앙에 대한 더욱 발달된 이해를 드러내는 비밀스러운 도그마가 있었다. 

- 비전적 진리와 공개적 진리의 구분은 신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비단 동방기독교인뿐 아니라 유대인과 무슬림도 나름의 비전적 전통을 발전시켰다. '비밀스러운' 교리라는 생각은 사람들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실리우스는 프리메이슨의 초기 형태를 말한 게 아니다. 다만 그는 모든 종교적 진리를 명료하게 논리적으로 표현하거나 정의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환기했을 뿐이다. 어떤 종교적 통찰에는 내적 울림이 따르는데 그 울림은 오로지 각 개인이 자기만의 시간에 플라톤이 '테오리아'라고 부른 것, 즉 관조를 행할 때 ...

 

- 프리메이슨(Freemason). 중세의 석공 길드에서 비롯한 세계적인 박애 단체. 18세기 초 영국에서 창설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기원을 이스라엘 왕국의 솔로몬 왕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흔히 비밀 결사로 알려져 있는데 조직 운영이나 규율이 아닌 입사식의 과정, 절차가 비밀이다.

 

- 동방기독교인들은 아우구스티누스를 위대한 교부로 생각하고 존경했으나 그의 삼위일체 신학에는 의심을 품었다. 그 신학이 신을 지나치게 합리적이고 의인화된 모습으로 보이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접근 방법은 동방 교회처럼 형이상학적이지 않고 심리학적이고 매우 인간적이었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서구 정신의 기초를 닦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을 제외하고 서구 문화에 아우구스티누스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신학자는 없다. 신을 발견한 자신의 경험을 열정적이고 감동적으로 기록한 <고백록> 덕분에 오늘날 그는 고대 후기 사상가들 중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주 젊은 시절부터 유신론적 종교를 추구했다. 그는 <고백록> 서두에서 "신은 당신을 위해 우리 인간을 만드셨으며, 우리의 마음은 당신 품에 안길 때까지 안식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할 만큼 신이 인간에게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가르치며 지내던 중 메소포타미아 계통의 영지주의인 마니교로 개종했으나, 얼마 후 마니교의 우주론에 불만을 느껴 그것을 버렸다. 본래 그는 기독교의 성육신 교리도 신의 개념을 더럽히는 것으로 보아 불쾌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지내는 동안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339~397)의 가르침을 통해 기독교와 플라톤 철학이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성육신과 같은 여러 기독교 교리를 인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인이 되기 위한 마지막 단계인 세례를 꺼렸는데, 기독교가 금욕을 강조하는 종교라고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기 직전에 “주여, 내게 정결함을 주시되 지금 당장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곤 했다.)

 

- 서구에서 신은 늘 인간에게 쉽게 오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 체험에는 회심의 격통이 사라진 후 회심자가 신의 품에 지쳐 쓰러져 안긴 채 느끼는 일종의 심리적 정화가 뒤따랐다. 그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갑자기 어딘가에서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라고 노래하는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의 계시임을 직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벌떡 일어나 ...

 

- 마지막 위대한 스승은 플로티노스 철학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프로클로스(412~485)였다. 그리스 철학은 지하로 숨어들었고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에 패배한 듯했다. 그러나 학교가 폐쇄되고 4년 후에 신비주의적인 네 편의 글이 발견되었다. 그것들은 사도 바울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한 최초의 그리스인이었던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가 쓴 것이라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6세기경에 익명을 원한 그리스 기독교인이 쓴 것이었다(이 익명 저자를 위僞디오니시우스'라고 부른다).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라는 가명에는 실제 저자의 정체보다 더 중요한 상징적 힘이 있었다. 위-디오니시우스는 신플라톤주의에 용케 세례를 베풀고 그리스 철학의 신과 성서의 셈족 신을 조화롭게 결합했다. 

 

- 위-디오니시우스는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의 후계자이기도 했다. 그는 바실리우스처럼 케리그마와 도그마를 철저히 구분했다. 그는 한 서신에서 사도들로부터 나온 두 가지 신학 전통이 있다고 단언하면서, 명료하고 인식 가능한 복음으로서 '케리그마'와 침묵과 신비의 복음으로서 '도그마'를 구분했다. 하지만 그에게 케리그마와 도그마는 상호의존적이며 기독교 신앙에 본질적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도그마는 "상징적이고 입문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케리그마는 "철학적이고 논증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것과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날실과 씨실이 하나로 엮이듯 결합된다." 케리그마는 명료화된 진리로써 우리를 설득하고 훈육하지만, 도그마는 신의 초언어적이고 감추어진 신비를 암시함으로써 우리에게 입문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도그마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 입문을 통해 신과 인간 영혼의 합일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요지로 쓰인 위-디오니시우스의 글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연상시킨다.

 

- 신은 '(모든) 존재를 초월하는 신비'이자 '신'을 넘어서 있기에, '신'이란 말 자체도 신에 관해 말하는 데 부적절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은 신이 모든 하찮은 존재들로 이루어진 위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존재, 최고 존재(Supreme Being)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사물과 인간은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별개의 현실 또는 대안적 존재로서 신과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니다. 신은 존재하는 사물 중 하나가 아니며, 우리가 경험하는 그 어떤 것과도 같지 않다.

 

- 사실상 신은 '무'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하다. 신은 "우리가 이해하는 의미의 단일체도 아니고 삼위일체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신을 삼위일체라 불러선 안 된다. 사실상 신은 '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신은 모든 존재를 초월한 존재일 뿐 아니라 모든 명칭을 초월한 존재다. 그러나 위-디오니시우스는 신에 관해 말할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을 이용해, 인간 본성의 '신화(神化)'(테오시스)와 다를 바 없는 신과의 합일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신은 자신의 이름 중 '성부' '성자' '성령' 같은 이름들을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했다. 이러한 계시의 목적은 신 자신에 관한 정보를 우리에게 주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신을 지향하도록 이끌어 신성을 공유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 위-디오니시우스는 <신의 이름들>의 각 장을 신에 의해 계시된 케리그마적 진리, 즉 선함, 지혜, 부성 같은 신의 이름들을 언급하면서 시작했다. 그런 후 그는 비록 신이 이런 여러 이름을 통해 자신을 조금 드러냈지만, 신이 드러낸 것은 신의 본질 자체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 따라서 위-디오니시우스가 보기에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유출은 자동적 과정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의 분출이었다. 그가 말한 부정과 역설의 신학적 방법은 인간이 행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이기도 했다.

 

- 플로티노스에게 엑스타시스는 어쩌다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는 평생 두세번 정도 엑스타시스를 경험했다고 한다. 그러나 위-디오니시우스는 엑스타시스를 기독교인에게 지속될 수 있는 의식 상태로 보았다. 그는 엑스타시스가 성서와 예배 의식 속에 비전적 형태로 감추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미사 집전자가 제단을 떠나 신도들 사이의 통로로 걸어 나가기 전 성수를 제단에 뿌리는 것은 단순한 정화의례가 아니었다. 신이 초월적 처소를 떠나 자신의 피조물(인간)과 합치함으로써 경험하는 엑스타시스를 모방하는 행위였다. 아마도 위-디오니시우스의 신학은 신에 관해 확언할 수 있는 것과, 신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상징일 뿐이라는 인식 사이에서 펼쳐지는 영적인 춤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유대교에서처럼 위-디오니시우스의 신에게는 두 측면이 있었다. 하나는 인간을 지향하며 세계속에 자신을 드러내는 신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과 멀리 있으며 인간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신이다. 신은 창조된 세계에 내재해 있는 동시에 영원한 신비 속에서 '자기 안에 머물러' 있다. 그는 세계에 덧붙여진 '또 다른' 존재가 아니다. 위-디오니시우스의 신학적 방법은 동방 기독교 신학의 규범이 되었다. 그러나 서방 기독교에서는 신학자들이 계속해서 신에 관해 논의하고 설명하곤 했다.

 

- 그러나 어떤 때는 신의 계시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불분명했다. "때때로 그것은 내게 마치 종소리의 뒤울림처럼 다가오는데, 그것이 내겐 가장 힘들다. 메시지를 깨달은 후에야 그 울림이 잦아든다." 이슬람 고전 시대의 초기 전기 작가들은 종종 우리가 아마도 무의식이라고 불러야 할 것에 무함마드가 열심히 귀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사실 시인이 자기 정신의 깊은 곳에서 점차 표면화되는 시를 '듣는' 과정을 묘사한 것과 같다. 쿠란에서 신은 무함마드에게 주의 깊게 그리고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가 '현명한 수동성'이라고 부른 자세로 일관적이지 않은 의미를 들으라고 말한다. 그는 적절한 시기에 진정한 의미가 저절로 드러날 때까지 단어나 특정한 개념적 의미를 서둘러 부여해서는 안 된다. 
 

- 모든 창조성과 마찬가지로 이는 어려운 과정이었다. 무함마드는 종종 무아지경에 빠지곤 했고 때때로 의식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추운 날에도 땀을 많이 흘리곤 했으며, 종종 큰 슬픔 같은 내면의 압박으로 인해 머리를 무릎 사이로 넣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무함마드는 알 수 없었겠지만) 동시대의 유대 신비주의자들이 다른 의식 상태로 들어갈 때 취하던 자세였다.

 

- 그는 형언할 수 없는 신의 말씀을 아랍어로 옮겼다고 믿었는데, 쿠란은 기독교에서 '예수'나 '로고스'처럼 이슬람 영성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어떤 종교의 창시자보다 무함마드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으며, 각 '장'(수라sura)의 연대를 비교적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쿠란을 통해 그의 비전이 점차 진화하고 발전하면서, 그 범위가 점점 더 보편화되어 간 과정을 볼 수 있다. 무함마드는 처음부터 자신이 성취해야 할 모든 것을 알지는 못했지만, 이는 그가 일어나는 사건들의 내적 논리에 반응함에 따라 조금씩 그에게 계시되었다. 쿠란에서 우리는 한 종교(여기서는 이슬람교)의 시작에 관해 동시대에 이루어진 해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종교의 역사에서 유례가 없다. 이 성스러운 책에서 신은 전개되는 상황에 대해 언급하는 것 같다. 신은 무함마드의 비판자 중 일부에게 대답하고, 초기 무슬림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전투와 갈등의 의미를 설명하고, 인간 삶의 신성한 차원을 지적한다. 쿠란은 오늘날 우리가 읽는 순서대로 무함마드에게 전달된 것이 아니라, 사건들이 지시하는 대로 그리고 무함마드가 그 사건들의 깊은 의미에 귀 기울이는 대로 무작위적인 방식으로 왔다.

 

- 특히 초기 수라에서는 인간 언어가 신에 의한 충격으로 부서지고 쪼개진 듯한 인상을 준다. 무슬림은 번역된 쿠란을 읽으면 아랍어의 아름다움이 전혀 전달되지 않아 다른 책을 읽는 것 같다고 종종 말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쿠란은 소리 내어 암송하기 위한 책이며 언어의 소리는 그 효과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무슬림은 모스크에서 쿠란을 외는 소리를 들을 때, 소리의 신성한 차원에 둘러싸인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는 무함마드가 히라산에서 가브리엘에게 감싸 안겼을 때나 그가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지평선 위의 가브리엘만 보였을 때 받은 느낌과 같다. 쿠란은 신의 감각을 경험하기 위한 것이므로 빠르게 읽어서는 안 된다.

 

- 올바른 방법으로 쿠란을 대할 때, 무슬림은 초월에 대한 감각, 즉 세속의 일시적이고 덧없는 현상 너머에 있는 궁극적 실재와 힘의 감각을 경험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쿠란을 읽는다는 것은 영적 훈련이다. 유대인, 힌두교도, 무슬림에게 히브리어, 산스크리트어, 아랍어가 성스러운 언어이듯. 기독교인에게는 그런 성스러운 언어가 없기에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기독교인에게 '신의 말씀은 예수이고 신약성서를 기록한 그리스어에는 아무런 거룩함도 없다. 그러나 유대인은 토라에 대해 비슷한 태도를 보인다. 그들은 성서의 처음 다섯 권을 읽을 때 단순히 눈으로 훑어보지 않는다. 그들은 자주 소리 내어 암송하고, 신이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할 때 직접 전했다고 여겨지는 말들을 음미한다. 때때로 그들은 마치 성령의 숨결 앞에 불꽃처럼 앞뒤로 흔들리기도 한다. 이런 방식으로 성서를 읽는 유대인은 모세 오경의 대부분을 몹시 지루하고 모호하게 보는 기독교인과는 달리 같은 책을 매우 다르게 경험하는 것이 분명하다.

 

- 무함마드의 초기 전기 작가들은 아랍인들이 쿠란을 처음 들었을 때 느낀 경이와 충격을 끊임없이 묘사한다. 많은 사람이 오직 신만이 이 놀랍도록 아름다운 언어를 설명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 자리에서 개종했다. 개종자들은 종종 그 경험을 감춰진 갈망을 건드리고 감정의 홍수를 터트린 신성한 침입이라고 묘사한다.

 

- 쿠라이시족의 젊은이 우마르 이븐 알-카타브는 무함마드의 맹렬한 반대자였다. 그는 오래된 이교 신앙에 헌신했고 예언자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이슬람의 사도 바울 같은 존재가 될 이 무슬림은 쿠란의 말씀으로 개종했다. 그의 개종 이야기는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둘 다 주목할 만하다. 하나는 우마르가 몰래 무슬림이 된 누이가 새로운 수라의 낭송을 듣고 있는 것을 발견한 이야기이다.

 

- 알-라트(여신)와 알웃자(권능의 신) 그리고 홍해 연안 쿠다이드에 성소가 있었던 알마나트(운명의 신)인데, 유노나 아테나처럼 완전히 인격화된 신은 아니었다. 그들은 종종 바나트(알라신의 딸들)라고 불렸지만, 이는 신의 개념이 완전히 발달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랍인들은 추상적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이러한 친족 용어를 썼는데, 가령 바나트 알–다르('운명의 딸들')는 그저 불운이나 우여곡절을 뜻했다.

 

- 바나트 알라는 '신성한 존재들'을 의미했을지도 모른다. 이 신들은 각 성소에서 사실적인 조각상이 아니라 고대 가나안 사람들 사이에서 성행한 것과 비슷한 거대한 선돌로 표현되었고, 아랍인들은 이 신들을 단순하고 조잡한 방식으로 숭배하지 않고 신성의 중심으로서 섬겼다. 따라서 메카의 카바처럼 타이프, 나클라, 쿠다이드의 성소들은 아랍인들의 정서적 풍경에서 매우 중요한 영적 장소가 되었다. 그들의 조상들은 태곳적부터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이 의식은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안도감을 주었다.

 

- '악마의 시'에 관한 이야기는 쿠란이나 초기 구전과 문헌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는다. '예언자'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전기인 이븐 이샤크의 <시라>에도 등장하지 않으며, 10세기경에 활동한 역사가 아부 자파르 알-타바리(923년 사망)의 작품에만 나타난다. 그 작품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여신 숭배를 금지한 후 대부분의 쿠라이시족과 불화를 겪으며 고통받았고, 그러던 중에 '사탄(악마)'에게 영감을 받아 바나트 알라가 천사처럼 중재자로 숭배받는 것을 허용하는 몇몇 이상한 구절을 말했다. 이 소위 '악마의' 구절에서 세 여신은 알라와 동등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편에서 알라에게 탄원할 수 있는 더 낮은 차원의 영적 존재였다. 그러나 나중에 알-타바리는 가브리엘이 예언자에게 이 구절들이 '악마'에게서 나왔기에 쿠란에서 삭제하고 바나트 알라가 단지상상의 투영이자 허구일 뿐이라는 구절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고 썼다. 

 

- 무함마드는 '악마의 시' 사건 - 설령 정말로 일어났더라도- 에서 다신교에 양보하지 않았다. 또한 이 사건에서 '사탄'의 역할이 잠시나마 쿠란이 악에 물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슬람교에서 사탄은 기독교의 사탄보다 훨씬 더 통제하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쿠란은 사탄도 최후의 심판 때 용서받으리라 말하고, 아랍인들은 '샤이탄(사탄)'이라는 단어를 유혹하는 사람이나 자연의 유혹을 언급하는 데 자주 사용했다. 

 

- 여기서 '이를테면'은 쿠란의 신 담론이 본질적으로 상징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빛'(안누르)은 신 자체가 아니라, 개인(벽)의 마음속에서 빛나는 특정한 계시(등잔)로 신이 부여한 깨달음을 가리킨다. 빛 자체는 빛을 받아 간직하는 것들 중 어느 하나와 완벽하게 동일시될 수 없지만 그것들 모두에 공통된다. 쿠란의 무슬림 주석가들이 초기부터 지적했듯, 빛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신성한 실재를 표현하기에 특히 좋은 상징이다. 이 구절에서 올리브 나무의 이미지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와 다양한 유형의 종교적 경험 -동서양 어느 전통이나 지역으로 동일시될 수도 국한될 수도 없다- 으로 가지를 뻗는 계시의 연속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 무함마드는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이 그들 나름의 진정한 계시를 받았기에 특별히 개종을 원하지 않는 한, 알라의 종교로 개종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쿠란은 계시가 이전 예언자들의 메시지나 통찰을 무효화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고 오히려 인류의 종교적 경험의 연속성을 강조했다. 이를 강조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오늘날 많은 서구인들이 관용을 이슬람의 덕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무슬림은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보다 계시를 덜 배타적으로 보았다.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비난받는 이슬람교의 불관용은 여러 종교가 신에 관해 내놓은 경쟁적 비전 때문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원인에서 비롯한 것이다.

 

- 쿠란은 다른 종교 전통을 거짓이라거나 불완전하다고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예언자가 선대의 통찰력을 확인하고 계승하는 것을 보여준다. 쿠란은 신이 땅 위의 모든 민족에게 사자를 보냈다고 가르친다. 이슬람의 전통은 그러한 예언자가 12만 4천 명에 이른다고 말하는데, 이는 무한을 상징하는 수이다. 따라서 쿠란에는 이 말씀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며 무슬림은 오래된 종교들과 친족 관계임을 강조해야 한다는 지적이 반복해서 나온다. 

 

- [성서의 백성을 인도함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논쟁하지 말라. 그러나 그들 중에 사악함으로 대적하는 자가 있다면 일러 가로되 우리는 우리에게 계시된 것과 너희에게 계시된 것을 믿노라. 우리의 하느님과 너희의 하느님은 같은 하느님이시니 우리는 그분께 순종함이라.]

 

- 쿠란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예언자였던 아브라함, 노아, 모세, 예수처럼 아랍인들에게 친숙한 사도들을 자연스럽게 언급한다. 또한 미디안과 타무드의 고대 아랍인들에게 보내진 후드와 살리흐도 언급한다. 오늘날의 무슬림은 만일 무함마드가 힌두교와 불교를 알았더라면 그 종교의 현자들도 포함했을 것이라 주장한다. 힌두교도와 불교도들은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 제국에서 유대인과 기독교인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종교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같은 원리로 무슬림은 쿠란이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호주 원주민의 샤먼과 성인도 존중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 무함마드는 이전에는 다소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예언자들의 연대기를 처음으로 정확하게 알게 되었으며, 아브라함이 모세나 예수 이전에 살았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무함마드는 아마도 유대교와 기독교가 한 종교에 속한다고 생각한 것 같지만, 서로 심각한 차이가 있음을 이해했다. 아랍인 같은 외부인에게 두 입장은 이거나 저거나 거의 비슷했고, 참된 아브라함의 종교인 하니피야에 토라와 복음서의 추종자들이, 가령 랍비가 정교화한 구전 율법과 불경스러운 삼위일체 교리 같은 거짓된 요소를 넣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보였다. 또한 무함마드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경전에서 금송아지를 섬긴 우상 숭배자로 불리는 것도 알게 되었다. 비록 쿠란은 '먼저 계시받은 민족'이 모두 오류에 빠진 것은 아니며 본질적으로 모든 종교는 하나라고 주장하지만, 쿠란에는 유대인에 대한 논박이 잘 발달해 있으며, 이는 무슬림이 유대인의 거부로 인해 얼마나 위협을 느꼈는지 보여준다.

 

- [카바 주위를 돌고 가까이 다가가면 당신은 작은 개울이 큰 강에 합류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물결에 실려 땅에서 멀어지게 된다. 갑자기, 홍수에 실려 떠내려간다. 중앙에 가까워지면 군중의 힘이 당신을 강하게 압박하고 당신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당신은 이제 백성의 일부다. 당신은 살아 있고 영원한 사람이다. 카바는 세계의 태양이며 그 얼굴이 당신을 그것의 궤도로 끌어당긴다. 당신은 이 우주 체계의 부분이 된다. 알라 주위를 돌면 곧 자신을 잊게 된다. 서서히 녹아 사라지는 입자로 변모한다. 이는 절정에 이른 절대적인 사랑이다.]

 

- 유대인과 기독교인 역시 공동체의 영성을 강조했다. 하지는 무슬림 각 개인에게 신을 중심으로 삼은 움마의 맥락에서 개인적 통합의 경험을 제공한다. 대부분의 종교와 마찬가지로 평화와 조화는 순례의 중요한 주제이고, 순례자가 성전에 들어가면 모든 종류의 폭력이 금지된다. 순례자는 벌레도 죽일 수 없고 상스러운 말도 삼가야 한다. 1987년 하지에 이란 순례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402명이 죽고 649명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하자 무슬림 세계가 분노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 알라의 종교는 더 진보한 종교의 특징인 동정심의 에토스를 도입했는데, 형제애와 사회 정의가 중요한 덕목이었다. 강력한 평등주의는 계속해서 이슬람의 이상을 특징짓는다. 무함마드의 생애 동안에는 이 평등주의에 성평등도 포함됐다. 오늘날 서구에서는 이슬람을 본래 여성혐오적인 종교로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알라의 종교는 원래 여성에게 우호적이었다. 

 

- 무함마드는 여성들이 움마 내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도록 장려했고 여성들은 자신들의 견해가 반영되리라 확신하면서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했다. 한번은 메디나의 여성들이 '예언자'에게 쿠란 공부에서 남성들이 자신들을 앞서고 있다고 토로하며 따라잡을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요청하자 무함마드는 그렇게 했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는 여성도 신에게 순종했는데 쿠란은 왜 남성만 언급하는가였다. 그 결과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언급하고 도덕적, 영적 측면에서 양성의 절대적인 평등을 강조하는 계시가 내려왔다. 이후에도 쿠란은 자주 여성을 명시적으로 언급했는데, 이는 유대교나 기독교 경전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나중에 이슬람교는 기독교처럼 여성에게 부정적인 방식으로 경전을 해석하는 남성들이 장악했다.

 

- 본래 쿠란은 모든 여성이 아니라 무함마드의 아내들에게만 지위의 표시로 베일을 쓰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일단 이슬람이 문명 세계에 자리 잡자 무슬림은 여성을 2등 시민으로 강등하는 오이쿠메네의 관습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여성에게 베일을 씌우고 하렘에 가두는 관습을 페르시아와 기독교의 비잔티움에서 받아들였는데, 그곳에서는 오랫동안 여성을 이런 식으로 사회에서 소외시켰다. 압바스 칼리파 국가(750~1258) 시대에 무슬림 여성의 지위는 유대교나 기독교 사회의 자매들만큼 낮았다. 오늘날 무슬림 페미니스트들은 남성들에게 쿠란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고 있다. 

 

- '책의 민족'으로서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종교적 자유를 누리며 보호받았다. 그러다 압바스 칼리파들이 개종을 권장하기 시작하자 제국 내의 많은 셈족과 아리아인이 이 새 종교를 열심히 받아들였다. 기독교에서 예수의 실패와 굴욕이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처럼, 이슬람교에서는 성공이 그런 역할을 했다. 세속적인 성공을 불신하는 기독교의 경우와 달리, 무슬림 개인의 종교적 삶은 정치와 무관하지 않았다. 무슬림은 자신들이 신의 뜻에 따라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헌신한다고 생각한다. 움마는 억압과 불의로부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이 같은 노력에 신이 축복을 내렸다는 '징표'로서 성례적 중요성이 있었다. 무슬림의 영성에서 움마의 정치적 건전성이 차지하는 위상은 기독교인의 삶에서 특정한 신학적 선택지(가톨릭, 프로테스탄트, 감리교, 침례교)의 위상과 거의 같다. 만일 기독교인이 무슬림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이상하게 여긴다면, 난해한 신학적 논쟁에 대한 자신들의 열정이 유대인이나 무슬림에게 똑같이 이상하게 보인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 책의 민족(Ahl-al-Kitab). 이슬람교에서 성전에 기초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 일반적으로 토라, 성서, 아베스타를 지닌 유대인, 기독교인, 조로아스터교도를 뜻한다. 

 

- 9세기에 아랍인들은 그리스 과학과 철학을 접하게 되었고, 그 결과 유럽식으로 표현하자면 르네상스와 계몽주의가 혼합된 문화적 번영을이뤄냈다. 그것은 번역가들이 -그들 대부분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다-그리스어 텍스트를 아랍어로 훌륭하게 옮긴 데서 비롯되었다. 이후 아랍 무슬림은 천문학, 연금술, 의학, 수학을 연구했고, 결과적으로 9세기와 10세기경 압바스 왕조 시대에 이전 어느 시대보다 많은 과학적 발견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사파'라고 불리는 새로운 유형의 무슬림이 등장했다. '팔사파(falsafah)'라는 말은 보통 '철학(philosophy)'으로 번역되지만, 더 광범위하고 풍부한 의미를 지닌다.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필로조프)처럼 파일라수프(Faylasuf, 철학자)는 우주를 지배하고 삼라만상을 통해 드러나는 법칙이 있다고 믿었고 그 법칙에 따라 합리적으로 살기를 원했다. 처음에 그들은 자연과학에 몰두했고, 그 다음에는 필연적으로 그리스 형이상학으로 관심을 돌려 그 원리를 이슬람교에 적용하고자 했다. 그들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신이 알라와 같다고 믿었다. 

 

-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자(原子, Prime Mover)' 존재 증명을 사용해 합리적인 세계에서는 모든 것에 원인이 있다고 주장했다. 공을 굴리기 시작하려면 '부동의 동자'가 반드시 필요했다. 이 제일원인은 변하지 않고 완전하고 파괴할 수 없는 존재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고서 알-킨디는 '무(無)로부터 창조'라는 쿠란의 교리를 고수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벗어났다. 알-킨디는 모든 움직임은 무로부터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신 고유의 특권이자 능력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신은 참된 행위의 유일한 주체이며 세계 내 모든 존재와 행위의 궁극적 원인이었다. 

 

- 이슬람 역사상 최고의 비순응주의자로 알려진 아부 무함마드 이븐 자카리야 알-라지(930년경 사망)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거부했고, 영지주의자들처럼 창조를 데미우르고스의 작업으로 보았다. 물질은 전적으로 영적인 신으로부터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또 쿠란의 계시와 예언의 교리뿐 아니라 원동자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해결책도 거부했다. 오직 이성과 철학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었다. 알-라지는 사실 유일신론자가 아니었으며, 아마도 신 개념과 과학적 관점이 양립할 수 없다고 여긴 아랍 최초의 자유사상가였다. 오늘날 이란의 라이에서 태어난 알-라지는 고향에서 다년간 의술을 펼친 뛰어난 의사이자 의학자였으며 친절하고 관대한 사람이었다.

 

- 대부분의 파일라수프는 합리주의를 그처럼 극단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한 보수적인 무슬림과 벌인 논쟁에서 진정한 파일라수프는 전통에 의존할 수 없고 이성만이 우리를 진리로 이끌 수 있기에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계시된 교리에 의존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었다. 같은 교리에 대해 모든 종교가 동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느 것이 옳은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러자 상대방 -다소 혼란스럽게도 이 보수적인 무슬림도 "알–라지"라고 불린다- 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다수는 철학적 사고와 거리가 먼데, 그러면 그들은 길을 잃고 오류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말인가? 여기서 짐작할 수 있듯이, 팔사파는 이슬람 내에서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에 머물렀다. 팔사파는 일정 수준 이상의 지적 능력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무슬림 사회를 특징짓기 시작한 평등주의 정신에 어긋났다.

 

- 튀르크게 파일라수프 아부 나즈르 알-파라비(980년 사망)는 철학적 합리주의를 다룰 능력이 없는, 교육받지 못한 대중의 문제를 다루었다. 진정한 팔사파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알-파라비는 이슬람교의 이상이 지닌 매력적인 보편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우리가 '르네상스적 교양인'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의사였을 뿐 아니라 음악가이자 신비주의자였다. 또한 그는 <이상도시론(理想都市論)>이라는 책에서 이슬람 영성의 핵심인 사회적, 정치적 관심을 보여주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합리적 원칙에 따라 통치하고 그러한 원칙을 보통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철학자가 사회를 이끌 때 좋은 사회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알파라비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플라톤이 그렸던 바로 그런 통치자'라고 주장했다. 무함마드는 시간을 초월한 진리를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상상의 형태로 표현했고, 그런 점에서 이슬람교는 플라톤의 이상 사회를 건설하기에 적합했다. 나아가 이슬람교의 여러 형태 중에 현명한 이맘을 숭배하는 시아파야말로 그러한 이상 사회를 이루기에 가장 적합한 것처럼 보였다. 알-파라비는 실천적 수피였지만 계시를 전적으로 자연적 과정으로 보았다. 그의 신은 계시를 담은 전통적 교리가 암시하는 바와 달랐고 오히려 그리스 철학자들의 신과 유사했다. 그 신은 인간의 관심사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으며 인간에게 직접 말을 하거나 세속의 일에 개입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신이 알-파라비의 주요 관심사에서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신은 그의 철학의 중심이었고 그의 글은 신에 대한 논의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의 신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로티노스의 신,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서 신이었다.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위-디오니시우스)의 신비주의 철학을 주입받은 그리스 기독교인이라면, 신을 그저 하나의 존재로 -신이 우월한 본성을 지니고 있는데도- 만드는 이론에반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알-파라비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심취해있었다. 그는 신이 '갑자기' 세계를 창조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이는 영원하고 정적인 신을 부적절한 변화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그리스인들처럼 알-파라비는 '일자(一者)'로부터 열 가지 연속적인 유출물 또는 '지성체(예지)'로 나아가는 존재의 사슬을 보았는데, 각 지성체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구(天球)를 하나씩 생성했다. 바깥 하늘 그리고 항성, 토성, 목성, 화성, 태양, 금성, 수성, 달의 영역. (그리고 마지막 지성체는 달 밑의 세계를 관장하는 '능동 지성체'이다.) 달의 천구 아래에 있는 우리 자신의 세계에 도착하면, 우리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즉 무생물에서 시작해 식물과 동물을 거쳐 인간 -인간의 영혼과 지성은 신성한 '이성'에 참여하지만 몸은 땅으로부터 온다- 에서 정점에 이르는 존재의 위계를 알게 된다. 플라톤과 플로티노스가 설명한 정화의 과정을 통해 인간은 지상의 속박을 벗어던지고 본향인 신에게 돌아갈 수 있다. 

- 실재에 대한 쿠란의 비전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지만, 알-파라비는 예언자들이 사람들에게 호소하기 위해 시적이고 비유적으로 표현한 진리를 이해하는 데 철학이 우월한 방법이라고 여겼다. 팔사파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0세기 중반에 이르러 비전적(秘傳的) 요소가 이슬람교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팔사파는 그러한 비전적 훈련의 하나였다. 수피즘(이슬람 신비주의)과 시아파도 '신성한 법'과 쿠란만 고집하는 울라마(이슬람 성직자)와 다르게 이슬람교를 해석했다.

 

- 다시 말하지만 파일라수프, 수피, 시아파 모두 자신들의 교리를 은밀히 간직한 것은 대중을 배제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들의 비전이 오해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팔사파의 공리, 수피의 신화, 시아파의 이맘론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거나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은 궁극적 진리에 대한 상징적·합리주의적·상상적 접근이 가능한 능력이나 기질을 갖추지 못한 사람, 이를 위해 훈련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었다. 이러한 비전적 삶을 위해 입문자들은 어려운 개념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정신과 마음의 특별한 훈련을 통해 신중하게 준비해야 했다.

 

- 우리는 동방 기독교인들이 '도그마'와 '케리그마'를 구분하면서 비슷한 개념을 발전시켰음을 보았다. 서방 기독교는 비전적 전통을 발전시키지 않았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케리그마적 해석을 고수했다. 서방 기독교인들은 소위 일탈자들을 은둔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박해했으며 비순응주의자들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에서 비전적 사상가들은 보통 제명대로 살다 죽을 수 있었다.

 

- 알-파라비의 유출론은 파일라수프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다. 앞으로 보겠지만 신비주의자들도 무로부터 창조보다는 유출론에 더 동조했다. 철학과 이성을 종교와 적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더 상상적인 형태의 종교를 추구한 무슬림 수피와 유대 카발리스트는 종종 파일라수프의 통찰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는 시아파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시아파는 비록 이슬람교의 소수파로 머물렀으나 10세기는 시아파의 세기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 그들이 제국 전역에서 지도적인 정치적 지위를 확립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장 성공적인 모험은 바그다드의 수니파 칼리파 국가에 대항해 909년 튀니스에 시아파 칼리파 국가를 세운 것이다. '파티마 왕조' 또는 '7이맘파' -열두 이맘의 권력을 인정하는 다수의 '12이맘파'와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로 알려진 시아파의 분파 이스마일파가 세운 업적이었다. 이스마일파는 765년 6대 이맘 자파르 알-사디크가 죽은 후 12이맘파에서 갈라져 만들어졌다. 자파르는 장남 이스마일을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그는 요절했고 12이맘파는 자파르의 동생 무사의 권력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스마일파는 이스마일에게 계속 충실했으며 그와 함께 계보가 끝났다고 믿었다.  

 

- 파라비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구를 주재하는 물질세계와 신 사이의 열 가지 유출물을 상상했다. 이제 이스마일파는 '예언자'와 이맘들을 천상 세계의 '영혼들'로 만들었다. 첫째 하늘의 가장 높은 예언자의 영역에는 무함마드가 있고, 둘째 하늘에는 알리가 있으며, 일곱 이맘들이 그 아래 영역을 순서대로 주재했다. 마지막으로 물질세계와 가장가까운 영역에는 무함마드의 딸이자 알리의 아내인 파티마가 있었다. 여기서 파티마는 이슬람교의 어머니이자 신성한 '지혜'인 소피아에 해당했다. 이 신격화된 이맘의 이미지는 시아파 역사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이스마일파의 해석을 반영했다. 이 역사는 단지 외부적, 세속적 사건들 -그중 상당수는 비극적이었다- 의 연속이 아니었다. 이 지상에서 빛나는 인간들의 삶은 원형적 질서인 메녹에서의 사건들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 이란의 시아파를 연구한 프랑스 역사가 앙리 코르뱅(Henri Corbin)은 '타월' 훈련을 음악의 화성 훈련에 비유했다. 마치 '소리' -쿠란이나 하디스의 한 구절-여러 음조에서 동시에 들을 수 있는 것처럼, ...

 

- 이러한 이상은 시아파의 세기에 바스라에서 태동한 '순결형제단'에서도 공유되었다. 순결형제단은 아마 이스마일파의 분파였을 것이다. 이스마일파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정치적 행동뿐 아니라 과학, 특히 수학과 천문학에도 전념했다. 또한 이스마일파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삶의 감추어진 의미인 바틴을 탐구했다. 철학적 과학의 백과전서가 된 그들의 서간집은 대단히 인기가 있었으며 멀리 에스파냐까지 퍼졌다. 순결형제단은 과학과 신비주의를 결합했고, 수학을 철학과 심리학의 입문 과정으로 보았다. 다양한 숫자는 영혼에 내재한 여러 특질을 나타냈고 숙련자가 자신의 정신 작용을 의식할 수 있게 하는 집중의 방법이었다. 자기 이해가 신 이해에 필수 불가결하다고 여긴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자기에 대한 깊은 이해는 이슬람 신비주의의 중추가 되었다.

 

- 이스마일파가 가장 친밀감을 느꼈던 수니파 신비주의자 수피는 "자신을 아는 자가 그의 주를 안다"는 것을 공리로 삼았는데, 이는 순결형제단 서간집 1권에 인용되었다. 그들은 영혼의 수(數)에 관해 명상함으로써 인간 마음의 핵심에 자리한 자아의 궁극적 근원인 원초적 존재에 이르고자 했다. 순결형제단은 파일라수프와도 매우 가까웠다. 무슬림 합리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모든 곳에서 추구되어야 하는 진리의 유일성을 강조했다. 진리를 좇는 구도자는 "과학을 피해서도 안 되고, 책을 경시해서도 안 되고, 하나의 신조에만 광적으로 매달려서도 안 된다." 그들은 신플라톤주의적 신 개념을 전개해 신을 형언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자'로 보았다. 파일라수프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무로부터 창조라는 쿠란의 전통적 교리보다 플라톤의 유출론을 고수했다. 세계는 신의 이성을 표현하는 것이고, 인간은 자신의 합리적인 능력을 정화함으로써 신성에 참여하고 일자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 팔사파(철학)는 서양에서 아비켄나로 알려진 아부 알리 이븐 시나(980~1037)에 의해 절정에 이르렀다. 중앙아시아 부하라 인근에서 태어난 그는 시아파 관리 집안 출신이었으며 아버지를 찾아와 논쟁을 벌이곤 했던 이스마일파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이븐 시나는 신동이었다. 열여섯 살에 저명한 의사들에게 조언을 하는 의사였고 열여덟 살에 수학, 논리학, 물리학을 통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어려워했지만 알-파라비의 <형이상학의 목적에 관하여>를 접하면서 마침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변덕스러운 후원자들에게 의지해 이슬람 제국을 떠도는 유랑 의사로 살았다. 한때 그는 오늘날 서부 이란과 남부 이라크 지역을 통치한 시아파의 부와이 왕조의 재상이 되기도 했다. 탁월하고 명석한 지식인이었던 그는 메마른 현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관능주의자였는데, 지나치게 술과 성을 탐닉한 탓에 다소 이른 나이인 쉰여덟 살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이븐 시나는 계시 종교를 팔사파보다 열등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무함마드 같은 예언자는 인간 이성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신에 관한 삶을 향유했기에 어떤 철학자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이 앎은 수피의 신비주의적 경험과 유사했고 플로티노스가 지혜라는 최고 형상으로 묘사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인간의 지성이 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븐 시나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근거해 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해냈는데, 이 증명은 이후 중세 시대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철학자들에게 하나의 표준이 되었다. 파일라수프처럼 이븐 시나도 신의 존재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 이성이 아무런 도움 없이 최고 존재에 관한 앎에 도달할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성은 가장 고귀한 활동이었는데, 신의 이성에 참여하며 종교적 탐구에서 분명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븐 시나는 이성이 신에 대한 이해를 다듬고 미신과 신인동형론에서 벗어나도록 할 수 있기에, 지적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스스로 이성을 통해 신을 발견하는 것은 하나의 종교적 의무라고 여겼다. 신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하는 데 전념했던 이븐 시나와 그의 후계자들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이른바 무신론자들과 논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성을 사용해서 신의 본질에 관해 가능한 많은 것을 발견하고 싶어 했다.

 

- 이븐 시나의 신 존재 '증명'은 인간의 정신이 작동하는 방식에 관한 고찰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세상 어디를 보더라도 다양한 많은 요소로 구성된 복합체들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무는 목질, 껍질, 고갱이, 수액, 잎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은 어떤 대상을 이해하고 싶을 때 그것을 더는 나뉘지 않는 구성 요소로 분해해 '분석'한다. 단순한 구성 요소를 일차적인 것으로, 복합체는 부차적인 것으로 보고 더는 나뉠 수 없는 존재 그 자체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단순성을 추구한다. 실재는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는 전체를 형성한다는 것이 팔사파의 공리였는데, 이것은 단순성을 향한 끝없는 추구는 사물을 전체적으로 반영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모든 플라톤주의자와 마찬가지로 이븐 시나도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다양성은 원초적 단일성 덕분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우리 정신은 복합적인 것들을 부차적이고 파생적인 것으로 여기는데, 이 경향성은 그것들 밖의 단순하고 더 우월한 실재인 어떤 것에 의해 야기되어야만 한다. 다양한 것들은 우연적으로 발생하고 우연적인 존재들은 그것들이 의존하는 실재보다 열등하다. 마치 가정에서 자녀들이 그들을 존재하게 한 아버지보다 지위가 열등한 것과 같다. 단순성 그 자체인 어떤 것은 철학자들이 '필연적 존재(NecessaryBeing)'라고 부른 것, 즉 존재하기 위해 다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일 것이다. 

 

- 오직 자신만 관조할 수 있으며 자신보다 덜 중요하고 우연적인 존재를 인지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이는 만물을 알며 창조의 질서 안에서 존재하고 활동한다고 알려진 계시의 신과 일치하지 않았다. 이븐 시나는 타협을 시도했다. 신은 너무도 고귀해서 인간 같은 비천한 개별적 존재와 그들의 행위에 관한 삶을 향해 내려오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보는 것보다 보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어떤 것들이 있다." 신은 지상에서 벌어지는 정말로 하찮고 사소하고 자잘한 일로 자신을 더럽힐 수 없다. 하지만 신은 영원한 자기인식의 행위를 통해 자신에게서 비롯된 모든 것과 자신이 존재하게 한 모든 것을 파악한다. 신은 자신이 우발적인 피조물의 원인임을 안다. 신의 사고는 너무 완벽해서 생각과 행동이 동일한 행위이고, 그래서 자신에 관한 영원한 관조는 파일라수프가 설명한 유출의 과정을 발생시킨다. 그러나 신은 인간과 인간의 세계를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에서 알 뿐이며 개별적으로 대하지 않는다. 

- 그러나 이븐 시나는 신의 본질에 관한 추상적 설명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신자들 즉 수피(신비주의자)와 바티니(신적 지혜의 탐구자)의 종교적 경험에 연관시키려 했다. 종교 심리학에 관심이 있던 그는 예언자의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플로티노스의 유출 도식을 사용했다. 일자로부터 이어지는 존재 하강의 열 단계에서, 이븐 시나는 열 가지 지성체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열 가지 천구를 각각 움직이게 하는 영혼들 또는 천사들과 함께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간 영역을 형성한다고 추측했다. 이는 바티니가 상상한 원형적 실재의 세계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이 지성체들도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 

 

- 인간은 신에 관한 가장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우리 영역의 마지막 열 번째 지성체는 빛과 앎의 원천이자 가브리엘로 알려진 <요한계시록>의 성령이다. 인간은 현실 세계를 다루는 실천적 지성과 가브리엘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며 존재하는 관조적 지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은 실천적이며 추론적인 이성을 초월해 지성체들이 향유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신에 관한 직관적이고 상상적인 앎을 얻을 수 있다. 수피의 경험은 바로 이처럼 인간이 논리나 합리성 없이 철학적으로 견실한 신에 관한 비전에 도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수피들은 삼단논법 대신에 상징주의와 형상화라는 도구를 사용했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신성한 세계와 직접 결합할 수 있었다. 다음장에서 살펴보겠지만 더 철학적인 성향의 수피들은 비전과 계시에 관한 심리적 해석을 통해 자신의 종교적 경험을 논할 수 있게 된다.  

 

- 사실 이븐 시나는 말년에 스스로 신비주의자가 된 것 같다. 그는 <지시와 충고의 서>에서 자신에게 좌절감을 안겨준 신에 대한 합리주의적 접근에 분명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는 자신이 '동방 철학'이라고 부른 것으로 눈을 돌렸다. 여기서 동방이란 지리적 위치가 아니라 빛의 근원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는 추론뿐만 아니라 조명(이슈라크 ishraq)의 훈련에 근거한 방법으로 비전적 내용의 논문을 쓰고자 했다. 우리는 그가 이 논문을 썼는지 확신할 수 없다. 썼더라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다음 장에서 보겠지만 이란의 위대한 철학자 야흐야 수흐라와르디는 이븐 시나가 구상한 방법으로 철학과 영성을 융합한 조명학파를 세우게 된다. 
 

- 그곳에서 알-가잘리는 자신이 찾던 것을 발견했다. 이성을 포기하지 않고도 -그는 과장된 형태의 수피즘을 불신했다- 신비주의 수련이 '신'이라 불릴 수 있는 무엇인가에 대한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감각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발견했다. 영국의 종교학자 존 보우커(John Bowker)는 '존재'를 뜻하는 아랍어 단어 우주드(wujud)가 그것을 '발견했다'라는 뜻의 와자다(wajada)에서 파생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주드'라는 말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그리스어의 형이상학적 용어보다 더 구체적이었지만 무슬림에게 많은 재량을 주었다. 아랍어를 쓰는 철학자는 신 존재 증명을 위해 신을 많은 대상 중의 또 다른 대상으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저 신이 발견될 수 있음을 증명하면 되었다. 신의 '우주'에 관한 단 하나의 절대적인 증거는 인간이 사후에 신의 실재를 대면할 때 나타날 -혹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지만, 이 생에서 신의 '우주'를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예언자들이나 신비주의자들의 이야기도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했다. 수피는 자신들이 신의 '우주'를 경험했다고 분명하게 주장하면서 이 경험 상태를 가리켜 '와즈드(waid)'라는 말을 썼다. 와즈드는 신이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실재라는 주장에 확실성을 주는 망아적 신 이해를 표현하기 위한 용어였다. 물론 그들의 주장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알가잘리는 10년 동안 수피로 살면서 종교적 경험만이 인간의 지성과 두뇌의 활동을 넘어선 실재를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달았다. 신에 관한 수피의 삶은 합리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앎이 아니라 옛 예언자들의 직관적인 경험과 유사했다. 

 

- 이는 마치 음감이 없는 사람이 음악을 스스로 감상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음악이 허상이라고 주장하는 것만큼 터무니 없는 일이다. 우리는 추론 능력과 상상력을 통해 신에 관해 무언가를 배울 수 있지만, 최고 수준의 삶은 예언자들이나 신비주의자들처럼 신이 준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만 얻을 수 있다. 엘리트주의적으로 들리지만 다른 종교 전통의 신비주의자들도 선(禪)이나 불교의 명상 같은 수행에서 요구하는 직관적이고 수용적인 자질이 시를 쓰는 재능에 비견할 만한 특별한 재능이라고 주장해 왔다. 모든 사람이 이런 신비적 재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알-가잘리는 신비적 재능을 통해 얻는 앎을 오직 창조자만이 존재한다는 (혹은 존재를 지닌다는) 의식으로 묘사했다. 그 앎은 자기는 사라지게 하고 신에게 몰입하게 했다. 신비주의자들은 재능이 부족한 보통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은유의 세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 신은 합리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외적이고 객관화된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을 감싸는 실재이자 궁극적 존재이다. 신에게 의존하고 신의 필연적 존재에 참여하는 다른 존재들을 인식하듯이 신을 인식할 수는 없다. 신을 인식하려면 특별한 '보는' 방식을 계발해야만 한다. 
 

- [신성한 원리는 장차 접촉해 결합해야 할 사람을 기다린다. 예언자와 성인의 경우처럼 그 사람의 신이 되어야 할 때를 기다린다. 이는 마치 태아가 충분한 활력을 얻어 온전한 실체로 성장할 때를 기다려 그에게로 들어가는 영혼과 같다. 마치 토양에 힘을 쏟아 초목을 생산할 수 있도록 온화한 기후를 기다리는 자연과 같다.]

- 이것은 인간 특히 유대인이 신과 단절된 자율적 존재가 아니며, 신이 낯선 침입자와는 상반된 모습으로 유대인에게 임한다는 뜻이다. 신은 인간성의 완성, 인간이 지닌 잠재력의 성취로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이 마주하는 '신'은 고유하게 그 자신의 것인데, 이 개념은 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할레비는 유대인이 경험할 수 있는 신과 신 그 자체의 본질을 구분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예언자들과 성인들이 '신'을 경험했다고 주장할 때, 그들은 신을 그 자체로 아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이고 접근 불가능한 실재가 남긴 일종의 잔광인 신성한 활동을 통해 아는 것이다.

- 그러나 팔사파가 알-가잘리의 논박에 의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코르도바에서 한 저명한 무슬림 철학자가 팔사파를 되살려 종교의 가장 높은 형태라고 주장하고자 했다. 유럽에서는 아베로에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아부 알-왈리드 이븐 아흐마드 이븐 루시드(1126~1198)는 유대인과 기독교인 모두에게 권위가 있었다. 그의 저서는 13세기에 히브리어와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그의 주석은 마이모니데스, 토마스 아퀴나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같은 저명한 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19세기 프랑스의 종교학자 에르네스트 르낭(Ernest Renan)은 그를 맹목적 신앙에 맞선  합리주의의 옹호자이자 자유로운 정신으로 칭송했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에서 이븐 루시드는 다소 주변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경력과 사후 영향력에서 우리는 신에 대한 접근과 이해에 있어 동방과 서방의 갈림길을 볼 수 있다. 이븐 루시드는 팔사파에 대한 알-가잘리의 비판과 그가 비전적 문제들을 공개적으로 논의한 방식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바로 앞 세대인 알-파라비나 이븐 시나와 달리, 이븐 루시드는 철학자였을 뿐 아니라 샤리아 법의 법관이었다. 

 

- 울라마(이슬람 성직자)는 항상 팔사파와 팔사파의 신 -자신들의 신 이해와 근본적으로 다른- 을 의심스러워했다. 하지만 이븐 루시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더 전통적인 이슬람 신앙과 결합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종교와 합리주의 사이에 모순이 전혀 없다고 확신했다. 둘 다 같은 진리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고, 둘 다 같은 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철학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그렇기에 팔사파는 지적인 엘리트만을 위한 것이었다. 팔사파는 대중을 혼란스럽게 하고 영원한 구원을 위태롭게 만드는 오류로 이끈다. 따라서 이 위험한 가르침을 받아들이기에 부적합한 사람들을 그 가르침으로부터 지키는 비전적 전통이 중요했다. 수피즘과 이스마일파의 바티니 탐구도 마찬가지였다. 만일 부적합한 사람들이 이러한 정신적 훈련을 시도하면, 몸이 심각하게 아프거나 심리적 장애가 발생할 수 있었다. 칼람도 마찬가지로 위험했다. 칼람은 참된 팔사파에 못 미쳤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바람직한 합리적 논의에 참여하고 있다고 오해하게 만들었다. 칼람은 결과적으로 무익한 교리 분쟁을 불러일으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의 신앙을 약화하고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 뿐이었다. 

 

- 다시 말해 쿠란은 신이 '앎'과 같은 속성을 지녔다고 말하지만 인간이 이해하는 앎의 개념은 필연적으로 인간적이고 부적절하기에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쿠란이 신은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할 때, 그 주장이 철학자들과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 이슬람 세계에서는 신비주의가 중요했기에 엄격한 합리주의 신학에 바탕을 둔 이븐 루시드의 신 개념은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이븐 루시드는 이슬람 사회에서 존경받았지만 주도적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중요했다. 이븐 루시드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를 발견하고 더 합리주의적인 신 개념을 발전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서구 기독교인은 이슬람 문화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고, 이븐 루시드 이후의 철학적 발전에 대해 무지했다. 그래서 종종 이븐 루시드의 죽음으로 이슬람 철학이 막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이븐 루시드의 생애 동안 이슬람 세계에 크게 영향력을 끼치게 될 두 저명한 철학자가 이라크와 이란에서 저술 활동을 하고 있었다. 야흐야 수흐라와르디와 무히 알-딘 이븐 알-아라비는 이븐 루시드보다 이븐 시나의 발자취를 따라 철학과 신비주의적 영성을 융합하려고 시도했다. 다음 장에서 이들에 대해 다룰 것이다. 

 

- 그러므로 인간이 신의 실재 자체를 고찰할 때, "그것을 '무(無)'로 부르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적 공허(Void)의 상태는 무로부터 창조적 변화를 야기하며, 그로부터 창조된 모든 각각의 피조물은 "영적 임재로서 신의 현현으로 볼 수 있다." 신은 인간의 모든 사고의 틀을 초월하므로 우리는 신의 본질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창조된 세계에 생기를 불어넣고 꽃이나 새나 나무나 다른 인간 존재로 자신을 드러내는 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같은 에리우게나의 접근 방법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악은 어떻게 할 것인가? 힌두교도의 주장처럼 악도 이 세상에 나타나는 신의 현시인가? 에리우게나는 악의 문제를 충분히 깊이 다루지 않았지만, 후대 유대 카발리스트들은 신 안에서 악의 자리를 찾아내려고 했다. 또한 카발리스트들은 에리우게나의 책을 접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에리우게나의 설명과 대단히 비슷한 방식으로 신이 무라는 상태에서 유로 나아가는 것을 묘사하는 신학을 발전시켰다. 

 

- 에리우게나는 라틴계 서방 기독교인들이 그리스계 동방 기독교인들에게 배울 것이 많음을 보여주었지만 1054년 대분열로 인해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는 관계가 끊어졌다. 당시에는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이 분열은 영속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겠지만 이 갈등은 정치적 차원도 있었으나 삼위일체에 관한 논쟁도 중요했다.

 

- 796년 서방 교회의 주교들이 주도한 프리울리 교회회의(노드)에서 니케아 신조에 필리오케 구절을 삽입했다. 이는 성령이 성부로부터뿐만 아니라 성자로부터도 나온다는 것이었다. 라틴 주교들은 성부와 성자의 동등성을 강조하고 싶어 했는데, 일부 신도들이 아리우스파의 견해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틴 주교들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 모두에게서 나오게 만듦으로써 성부와 성자의 동등한 지위를 강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방의 황제가 될 샤를마뉴는 이 신학적인 문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새로운 구절을 승인했다. 동방기독교인들은 이를 비난했지만, 서방 기독교인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자신들의 '교부들이 이 교리를 가르쳤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을 이어주는 사랑으로 보고 삼위일체 유일성의 원리로 해석했다. 그러므로 성령이 둘로부터 나왔다고 말하는 것은 옳았고 새로운 구절은 세 위의 본질적 유일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 그러나 동방기독교인들은 언제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 신학이 지나치게 신인동형적이라는 이유로 불신했다. 서방 기독교에서 신의 유일성 개념에서 출발해 유일성 안의 세 위를 강조했다면, 동방 기독교인들은 항상 세 히포스타시스에서 시작해 신의 유일성 -신의 본질이 우리의 이해 너머에 있음- 을 선언했다. 그들은 서방 기독교인들이 삼위일체를 너무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다고 생각했고, 또한 라틴어가 이 삼위일체의 사상을 충분히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동방기독교인들은 필리오케 구절이 세 위의 유일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신의 본질적 불가해성을 드러내기보다 오히려 삼위일체를 너무 합리적 개념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신을 세 측면 혹은 세 존재 방식을 지닌 하나로 만들었다. 사실 서방 기독교인의 주장은 동방 기독교인들의 아포파시스적 영성에 맞지 않았지만 이단적인 것은 아니었다. 평화에 대한 의지가 있었다면 갈등이 봉합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동방과 서방의 긴장은 십자군 전쟁 동안 고조되었다. 

 

- 삼위일체는 동방 교회에서와 달리 서방 교회에서는 영성의 중심인 적이 없었다. 동방 기독교인들은 서방이 이런 식으로 신의 유일성을 강조함으로써 신 자체를 인간이 철학적으로 논증하고 규정할 수 있는 하나의 '단순한 본질'로 만들었다고 느꼈다.

 

- 다음 장에서 우리는 서방 기독교인이 삼위일체 교리에 관해 자주 불안해했으며,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그 교리를 완전히 놔버렸다는 것을 살펴볼 것이다. 서방 기독교인들은 모든 면에서 삼위일체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유일신 안에 세 위가 있다는 교리를 이해하기 힘들다고 불평했고 동방 기독교인들에게는 그것이 요점이었음을 깨닫지 못했다. 

 

- 베르나르가 설교한 십자군 원정은 부분적으로는 상식과 동떨어진 이상주의에 의존하고 기독교의 동정의 에토스를 노골적으로 부정했기에 재앙이 되었다. 아벨라르에 대해 베르나르가 취한 행동은 사랑이 결여되어 있었으며 그는 십자군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이교도를 죽이고 그들을 성지에서 몰아낼 것을 강력히 권하기까지 했다. 신의 절대적 신비를 설명하려 하고 경외와 경이의 종교적 감각을 희석할 우려가 있던 합리주의의 위험에 대한 베르나르의 지적은 옳았다. 하지만 자신의 편견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 실패한 억제되지 않은 주관성은 종교의 최악의 폭한 행위를 초래할 수 있었다. 기독교 신앙에 필요한 것은 지성을 폭력적으로 억압하고 동정심을 포기하는 껍데기 '사랑'의 주정주의가 아니라 이성의 능력으로 무장한 감정적 주관성임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 그들의 신은 신화 속의 원초적이고 성스러운 시간이 아니라 역사의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유일신론자들이 신비주의에 의지할 때 신화는 종교 체험의 주요한 수단으로 부활했다. 이 점과 관련해 먼저 우리는 '신화(myth)' '신비주의(mysticism)' '신비(mystery)' 이 세 단어의 언어적 관련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이것들은 모두 '눈을 감다' '입을 닫다'는 뜻의 그리스어 동사 '미오(myo)'에서 나왔다. 즉 이 단어들은 암흑과 침묵의 경험에 어원을 두고 있다. 사실 이 말들은 현대 서구 사회에서 그다지 통용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신화'라는 단어는 종종 거짓말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통속적으로 말하면 신화는 사실이 아닌 어떤 것을 가리킨다. 흔히 정치인이나 유명 연예인이 자신과 관련된 불명예스러운 이야기들을 신화란 말로 일축하며, 학자들도 과거의 학문적 오류를 '신화적'이라고 표현한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 '신비'라는 단어는 명확하게 정리될 필요가 있는 것, 뒤죽박죽인 생각과 연관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미국에서는 미궁에 빠진 어떤 사건을 만족스럽게 해결하는 탐정소설 장르를 '미스터리'라 부르기도 한다. 앞으로 보겠지만 계몽주의 시대에는 종교인들조차 '신비'를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여겼으며, 마찬가지로 '신비주의'라는 단어를 괴짜나 돌팔이, 어쭙잖은 떠돌이 유랑인을 가리키는 데 사용했다. 신비주의가 성행한 다른 대륙을 정복한 시대에도 서구인들은 종교적 영성의 본질을 이루는 신비주의 원리와 수행에 별 관심이 없었다.

 

- 그러나 흐름이 바뀔 수 있다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1960년대 이후로 서구인들은 특정 유형의 요가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있으며, 유일신론에 오염되지 않은 불교 같은 종교가 유럽과 미국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미국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의 신화학 연구도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서구에서 번진 정신분석학에 대한 열광은 일종의 신비주의를 향한 욕구로 볼 수 있는데, 둘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점이 있었다. 신화학은 종종 인간의 내면 세계를 설명하려는 시도였고, 지크문트 프로이트와 카를 융은 자신들의 새로운 과학을 설명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그리스의 오이디푸스 이야기 같은 고대 신화로 눈을 돌렸다. 어쩌면 서구인들은 순전히 과학적인 세계관에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고 느끼는지도 모른다. 

 

- 신비주의 종교는 주로 인간의 사고에 근거한 이성적 신앙보다 더 직접적이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더 효과적인 도움을 주곤 한다. 신비주의 수련은 숙련자가 태초의 시작인 '일자(一者)'로 되돌아가 지속적으로 임재의 감각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나 2세기와 3세기에 유대인이 매우 힘들었던 시기에 발달한 초기 유대 신비주의는 신과 인간의 유대감보다는 거리를 더 강조했다. 유대인들은 박해받고 소외되는 현실 세계에서 정의와 진리가 실현되는 강력한 신의 영역으로 관심을 돌렸다. 초기 유대 신비주의자들은 신을 일곱 하늘을 통과하는 위험한 여행을 거쳐야만 접근할 수 있는 전능한 왕으로 상상했다. 신비주의자들은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랍비들의 방식 대신에 거창하고 장대한 웅변술을 강조하는 독자적인 수련법을 발전시켰다. 랍비들은 신비주의 영성을 싫어했으나 신비주의자들은 랍비들과 적대 관계가 되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른바 이 '메르카바 신비주의(Merkavah Mysticism)'는 12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새로운 유대 신비주의인 카발라에 흡수될 때까지 위대한 랍비의 학문적 전통과 함께 계속 번성했는데, 분명 중요한 종교적 필요를 채워줬음에 틀림없다. 5세기에서 6세기경 바빌로니아에서 편집된 '메르카바 신비주의'의 고전적 텍스트는 자신들의 경험에 대해 말을 아꼈던 신비주의자들이 랍비 전통에 강한 친밀감을 느꼈음을 암시한다. 그들이 랍비 아키바 랍비 이스마엘, 랍비 요하난 같은 위대한 율법학자(탄나임 tannaim)를 이 영성의 영웅으로 길러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백성을 대신해 신에게 이르는 새로운 길을 개척함으로써 유대 정신에 새로운 극단성을 드러냈다. 

-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신비주의자들뿐 아니라 랍비들도 놀랄 만한 종교적 체험을 했다. 예를 들어 랍비 요하난과 그의 제자들은 '신의 전차'를 본 에스겔의 이상한 환상의 의미를 논의하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불길 같은 성령을 체험했다. 에스겔이 언뜻 본 전차와 보좌 위에 앉아있던 신비로운 존재에 대한 환상은 초기 유대 신비주의에서 사색의 주제였다. '전차 연구'(Ma'aseh Merkavah, 마세 메르카바)는 창조 이야기(Ma'aseh Bereshit, 메세 베레시트)의 의미에 관한 사색과 연결되었다. 엄청난 위험이 도사린 영적 여행을 통해 가장 높은 하늘에 있는 신의 보좌에 도달한 랍비의 이야기는 탈무드에 실려 있다.

- [우리 랍비들의 가르침이다. 네 사람이 과수원에 들어갔는데, 벤 아자이, 벤 조마, 아헤르, 랍비 아키바였다.

랍비 아키바가 그들에게 말했다. "순수한 대리석에 이르렀을 때, '물이다! 물이다!'라고 말하지 마시오. 거짓말하는 자는 나(신)의 앞에 서지 못하리라는 말씀 때문이오."

그런데 벤 아자이는 그것을 바라보다 죽었다. 이에 대해 경전은 말한다. "아께 충실한 자의 죽음은 주께서 귀중히 보시도다."

그런데 벤 조마는 그것을 바라보다 (정신)병에 걸렸다. 이에 대해 경전은 말한다. "그대는 꿀을 발견했는가? 그것을 충분히 먹되 너무 많이 먹어 토하지 않도록 하라."

한편 아헤르는 뿌리를 잘랐다. (즉 이교도가 되었다.)

랍비 아키바는 평화롭게 떠났다.]

- 오직 랍비 아키바만이 충분히 성숙하여 그 신비로운 여정에서 별 탈없이 살아남았다. 정신의 심연을 향한 여행은 큰 위험을 안고 있다. 거기서 발견한 것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종교는 신비적 여행에 전문가의 지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그 체험을 감시하고 관찰할 수 있는 전문가는 초보자가 위험한 장소를 통과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불쌍하게 죽어버린 벤 아자이나 미쳐버린 벤조마처럼 초보자가 자신의 힘을 넘어서지 않도록 도왔다. 모든 종교의 신비주의자들은 지성과 심리적 안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선(禪)의 대가는 신경증 환자가 치료하기 위해 참선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오히려 병세를 악화시킬 것이라고 말한다. 신비주의자로 추앙받았던 유럽 가톨릭 성인들의 행위는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고 따라 할 수 없는 난해한 점이 있었다. 앞에서 본 탈무드의 현자들에 관한 비전적 이야기는 유대인들이 일찍부터 그 위험성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유대인들은 젊은이들이 충분히 성숙하기 전까지는 카발라 훈련을 허락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성적으로 건강함을 확실히 하기위해 반드시 결혼을 해야만 했다.
 
- 유대 신비주의자는 일곱 하늘의 신화적 영역을 거쳐 신의 보좌를 향해 여행해야 했다. 그러나 이 여행은 상상의 비행이었다. 결코 문자 그대로의 여행이 아니라 정신의 신비적 영역을 통과하는 상징적인 상승이었다. '순수한 대리석'에 대한 랍비 아키바의 불가사의한 경고는 수도자가 상상의 여행 중 여러 중요한 고비에서 외쳐야 하는 암호를 가리킬지도 모른다. 이 이미지들은 정교한 수행의 일부로 마음속에 그려졌다. 오늘날 우리는 무의식이 꿈이나 환각에서 그리고 뇌전증이나 조현병 같은 정신병이나 신경증에서 표면화되는 다량의 이미지 덩어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유대 신비주의자들은 그들이 '실제로' 하늘을 날아 신의 궁전에 도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들의 정신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여러 종교적 이미지를 드러내고자 노력했다. 여기에는 고도로 발전된 일종의 숙련된 기술과 훈련이 필요했다. 다시 말해 수련자가 뒤얽힌 심령의 미궁 속에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선(禪)이나 요가 수행 같은 종류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바빌로니아의 현자 하이 벤 세리라(939~1038, 하이 가온으로 알려져 있다)는 탈무드의 네 현자 이야기를 당대의 신비적 수행 방법으로 설명했다. 그 이야기 속 ‘과수원'은 영혼이 신의 궁전인 '천상의 궁정'(헤칼로트 hekhalot)으로 가는 신비로운 상승을 가리키는데, 이 상상의 내면 여행을 원하는 사람은 "천상의 전차와 높은 곳에 있는 천사들의 궁정"을 바라보고자 한다면, "자격 있고" "특정한 자질로 축복받은" 자여야만 한다. 그것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 그는 전 세계의 요가 수행자나 명상가들이 수행하는 것과 유사한 특정한 수련을 해야 한다.

- 가온(Gaon). 히브리어로 '뛰어난 자'라는 뜻을 지닌 말이며 복수형은 게오님(Geonim)이다. 율법(토라)과 탈무드 등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자로서 유대인들에게 영적 지도자로 여겨졌다. 

- [그는 일정 기간 금식을 해야 하며, 땅을 바라보면서 신을 찬양할 수 있도록 머리를 무릎 사이 아래로 구부린 채 스스로 속삭여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속 깊은 내면을 통찰하고, 마치 눈으로 직접 일곱 하늘의 궁정을 찾아 궁정 사이를 오가며 진리를 발견하는 것 같은 의식에 도달한다.]

- 비록 '메르카바 신비주의' 초기 문헌들은 2세기나 3세기에 그 기원을 두고 있지만, 이런 종류의 명상은 더 오랜 역사적 기원을 지녔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 속한 한 사람"을 언급했는데, 그는 14년 전에 셋째 하늘까지 붙들려 올라갔다. 사도 바울은 그의 환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그의 체험을 믿었다. "그는 낙원으로 붙들려 올라가서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

- 환상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일상적 개념을 초월하는 형언할 수 없는 종교 체험에 이르는 수단이다. 환상은 특정한 신비주의 전통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유대 신비주의자는 일곱 하늘의 환상을 보게 되는데, 유대인의 종교적 상상력이 이 특정한 상징들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불교도는 붓다나 보디사트바의 다양한 이미지를 볼 것이고, 기독교인은 성모 마리아의 환상을 볼 것이다. 그러므로 환상을 체험하는 자가 이러한 정신적 환영을 객관적 실상으로 여기거나 초월의 상징과 무관한 객관적 실상으로 여기는 것은 큰 오류다. 환각은 종종 일종의 병리적 상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고도로 집중된 명상과 내적 성찰 과정에서 드러나는 상징을 다루고 해석하려면 상당한 기술과 정신적 균형이 필요하다.

- 초기 유대인의 환상 가운데 가장 특이하고 논쟁적인 것은 <시우르 코마(Shiur Qomah)>(최고 존재자의 측정)에서 볼 수 있다. <시우르 코마>는 5세기경의 문헌인데, 에스겔이 보았던 보좌 위 신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시우르 코마>는 이 존재를 '창조주'라고 부른다. 이 신의 환상에 대한 독특한 묘사는 아마도 랍비 아키바가 가장 좋아했던 <아가> 구절에 근거를 둔 듯하다. 여기에서 신부는 자기 애인을 이렇게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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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이 시를 신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았다. <시우르 코마>는 신의 팔다리 하나하나까지 측정을 시도해 여러 세대 동안 많은 유대인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 문서는 인간의 정신이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신의 크기를 측정한다는 것이 대단히 곤혹스러운 일임을 보여준다. 기본 측정 단위는 1000만 '파라상'인데, 이는 1800억 '핑거'와 같고, 1핑거는 지구의 양극단 거리를 가리킨다. 이러한 거대한 차원은 정신을 압도해 그 묘사를 따라가거나 그러한 크기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조차 포기하게 만든다. 이것이 핵심이다. <시우르 코마>는 우리에게 신을 측정하거나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더 중요한 점은 그 문헌이 신 이해에 대한 인간의 유한성을 지적하는 데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신을 특정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아 신의 초월성을 새롭게 체험할 수 있음을 지적한 데 있다. 당연히 대다수 유대인은 전적으로 영적인 신을 측정하겠다는 이 괴상한 시도를 불경스럽게 여겼다. 그렇기에 <시우르 코마> 같은 비전적 텍스트는 숨겨져 전수되었다.

 

- 맥락을 따져보면 <시우르 코마>는 영적 지도자의 가르침을 받으며 올바른 방식으로 접근할 준비가 된 숙련자들에게 모든 인간적 범주를 넘어서는 신의 초월성에 관한 새로운 통찰을 전해준다. 이것은 결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어떤 비밀스러운 정보를 전달하는 것도 아니다. 경외와 경이를 자아내는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불러 일으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 <시우르 코마>는 신의 신비적 묘사에 담긴 두 가지 본질적인 요소를 우리에게 소개해주는데, 이는 세 유일신 신앙 모두에 공통되는 것이다. 하나는 본질적으로 상상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형언할 수 없다는 점이다. <시우르 코마>에 묘사된 신의 모습은 신비주의자들이 상승의 마지막 단계에서 본 보좌에 앉은 신의 이미지이다. 이 신은 부드럽거나 사랑스럽거나 인격적인 면이 전혀 없으며, 그의 거룩함은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신비주의자들은 환상 속에서 신을 보았을 때 본능적으로 시를 지어 노래했다. 비록 신의 모습을 그려낼 수는 없으나 자신들이 받은 압도적인 느낌을 노래를 통해 드러냈다. 

- [거룩함과 권능, 경외와 경악과 공포의 속성은 우리의 창조주이자 면류관을 쓰신 이스라엘의 신, 아도나이(Adonai, 주님)가 걸치신 옷의 속성에 불과하도다. 그의 옷 안팎에 모두 야훼(YHWH)라는 글자가 아로새겨져 있나니. 혈육을 가진 인간의 눈으로나 그분에게 시중드는 천사들의 눈으로나 그 누구의 눈으로도 바라볼 수 없도다.] 

- 우리가 야훼의 옷이 어떠한지 상상할 수도 없다면 어떻게 신 자신을 바라볼 수 있을까?

- 초기 유대 신비주의 문헌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5세기경에 쓰인 <세페르 예치라(Sefer Yetzirah)>(창조의 서)일 것이다. 여기에는 창조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다. 이 설명은 뻔뻔할 정도로 상징적이며 마치 신이 직접 책을 쓴 것처럼 언어를 통해 세상을 창조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언어가 완전히 변형되면서 창조의 메시지는 이해하기 어려워졌다. 신비주의자들은 히브리어 알파벳 각 문자에 숫자 값을 부여했는데, 문자와 성스러운 숫자를 결합하고 무한한 조합으로 재배치함으로써 단어를 일반적 의미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렇게 한 목적은 지성을 우회하고 사람들에게 그 어떤 단어나 개념도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재를 나타낼 수 없다고 상기시키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언어를 인간의 사고 한계까지 밀어붙여 비언어적 의미를 만들어 냄으로써 신의 타자성을 지적하는 것이 의도였다. 신비주의자들은 인간적인 정감을 지닌 친구이자 아버지로 경험하기보다는 압도적인 거룩함 자체로 경험한 신과 직접 대화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 그러나 '메르카바 신비주의'가 독자적인 것은 아니었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아라비아에서 예루살렘 성전까지 '야간 여행'을 했을 때, 메르카바 신비주의자들과 유사한 경험을 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어느날 밤 잠을 자던 무함마드가 천사 가브리엘에게 이끌려 천상의 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그곳에서 아브라함, 모세, 예수와 다른 여러 예언자에게 인사를 받았다. 그런 후 그는 천사 가브리엘과 함께 각 층마다 예언자 한 사람이 지키고 있는 일곱 하늘을 향해 사다리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신이 있는 하늘에 올랐다. 여기서부터 무함마드의 신비 체험 이야기는 침묵한다. 

 

- 울라마(이슬람 성직자)는 이슬람교만이 유일한 참 신앙이라고 주장하며 다른 종교들과 뚜렷이 구분하기 시작했지만, 수피들은 대체로 모든 올바르게 인도된 종교는 일체성을 지닌다는 쿠란의 원칙에 충실했다. 예를 들어 많은 수피들이 예수를 훌륭한 내적 삶의 모범을 보여준 예언자로 존경했다. 심지어 일부 수피는 샤하다(shahadah, 신앙 고백)를 수정하기도 했다. "알라 외에 신은 없으며, 예수는 그의 사자다." 이는 엄밀히 말하면 맞지만 대담한 표현이었다. 쿠란은 두려움과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정의의 신에 대해 이야기한 반면, 초기 여성 금욕주의자 라비아(801년 사망)는 기독교인들이 친숙하게 여길 만한 방식으로 신을 향한 사랑을 표현했다. 

 

-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이기적으로, 그리고 당신에게 어울리는 방법으로. 이기적인 사랑은 무엇을 생각하든 당신만 떠올릴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베일을 걷어 올려 나의 사모하는 눈길을 허락함이 가장 순수한 사랑입니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칭찬은 내 것이 아닙니다. 두 가지 모두에서 칭찬은 당신 뿐입니다.]

- 이 글은 라비아의 유명한 기도문과 유사했다.

"오 신이시여, 만일 제가 지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당신을 섬긴다면 차라리 저를 지옥 불에 태워 없애소서. 만일 제가 낙원에 대한 욕심 때문에 당신을 섬긴다면 저를 낙원에서 쫓아내소서. 그러나 만일 제가 오직 당신의 영광을 위해 당신을 섬긴다면 당신의 영원한 아름다움의 은총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 신에 대한 사랑은 수피즘의 핵심이 되었다. 수피는 근동의 기독교 금욕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무함마드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계시받을 때와 비슷하게 신을 체험하고 싶어했다. 당연히 그들은 무함마드가 체험한 하늘로의 신비적 상승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이는 그들의 신 체험의 모범이었다.
 

- 수피는 또한 각지의 신비주의자들이 초월적 의식 상태에 도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수행 기법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무슬림 율법의 기본 요건에 금식, 철야 기도, 신의 이름을 외는 만트라 낭송을 추가했다. 새로 추가된 수행법은 때때로 괴상하고 유별난 행동을 초래해 신비주의자들은 '술 취한 수피'라 불리게 되었다. 최초의 '술 취한 수피'는 아부 야지드 알-비스타미(874년 사망)였다. 알-비스타미는 라비아처럼 연인으로서 신에게 접근하고자 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소유와 소망을 포기하는 것처럼, 그도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를 이루기 위해 그가 채택한 내성적 훈련은 인격신 개념을 넘어서도록 이끌었다. 알-비스타미는 자아의 핵심에 다가갈수록 신과 자기 사이를 가로막는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다. 사실상 그가 '자아'로 이해한 모든 것이녹아내리는 듯했다. 
 
- [나는 내가 사랑하는 그이며, 내가 사랑하는 그는 나입니다. 우리는 한 몸에 거하는 두 영혼이기에, 당신이 나를 바라볼 때 당신은 다름 아닌 그를 바라보는 것이며, 당신이 그를 바라볼 때 당신은 하나가 된 우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 이 시는 그의 스승인 알-주나이드가 '파나'라고 부른 합일의 전제 조건인 '자아 소멸'의 체험을 대담하게 표현했다. 그는 신성 모독죄로 체포되어 죽음 앞에서도 신비주의 신앙 철회를 거부했다.

- 처형당하기 전, 앞에 놓인 십자가와 못을 바라본 후 그는 둘러선 무리에게 돌아서서 다음과 같은 말로 마지막 기도를 했다. "천지를 주관하시는 신이시여, 당신에 대한 열정과 당신의 호감을 얻기 위한 열망에 사로잡혀 저를 죽이고자 이 자리에 모인 당신의 종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만일 당신이 제게 드러내신 것을 저들에게도 보이셨다면 진실로 저들이 제게 행한 것을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만일 당신이 저들에게 감추신 것을 제게도 감추셨다면, 제가 이런 고통의 수난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행하시는 모든 것과 당신이 뜻하시는 모든 것에 영광을 돌리옵나이다." 

- "내가 진리다!"라고 외친 알-할라즈의 주장은 신비주의자들의 신이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매우 심오한 주관적 실재임을 보여준다. 훗날 알-가잘리는 알-할라즈가 신성 모독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지혜롭지 못하게도 보통 사람이 오해할 수 있는 비전적 진리를 표현했을 뿐이라고 평했다. 샤하다의 구절처럼, 알라 외에 참된 실재는 없으므로 모든 인간이 본질적으로 신성한 실재에 귀결되고 종속되는 것은 당연하다. 쿠란도 신이 자신의 신성한 속성을 반추하기 위해 자신의 형상대로 아담을 창조했고, 천사들에게 아담에게 머리 숙여 경배할 것을 명했다고 가르친다. 무슬림은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신의 속성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수피는 오직 예수 한 사람만 육화를 통해 신성한 속성을 부여받았다는 기독교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들은 신과 하나가 되는 신비 체험을 통해 인간 내면에 있는 신의 속성을 재발견함으로써 태초의 본원적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이 중시하는 '거룩한 하디스'도 신이 마치 무슬림 개인 속에서 현현하는 것처럼 서술했으며, 신에게 몰입하는 상태를 이렇게 가르쳤다. "내가 그를 사랑할 때, 나는 그가 듣는 귀가 되어주고, 그가 보는 눈이 되어주며, 그가 잡는 손과 그가 걷는 발이 되어준다." 그러나 알-할라즈의 순교는 신 개념과 계시에 대해 제각기 다른 이해를 보이던 기존의 이슬람 세력과 신비주의자들 사이의 깊은 적대감을 드러냈다. 신비주의자들에게 계시는 인간의 영혼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었으나, 기존의 울라마에게 계시는 과거에 일어난 확고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11세기에 이븐 시나와 알-가잘리 같은 무슬림 철학자들은 신에 관한 외적이고 객관적인 설명이 불충분하다고 생각해 신비주의로 기울었다. 알-가잘리는 수피즘이 진정한 형태의 이슬람 영성임을 보여줌으로써 기존 이슬람 세력이 수피즘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 그는 이븐 시나가 계획했던 '동방' 종교와 이슬람교의 연결에 평생을 바쳤다. 그의 말을 따르면 고대 세계의 모든 성인은 단 한 가지 교리만을 가르쳤다. 그 교리는 본래 헤르메스에게 제일 먼저 계시되었다(수흐라와르디는 헤르메스를 쿠란에서 '이드리스'로 알려진 예언자 또는 성서의 '에녹'과 동일시했다). 이후 그리스에서는 플라톤과 피타고라스를 통해 전달되었고, 중동에서는 조로아스터교의 마기(사제)를 통해 전해졌다. 그 교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철학적이고 지적인 형태로 발전해 의미를 해석하는 데 어려움을 낳았으나, 알-비스타미와 알-할라즈를 거쳐 수흐라와르디 자신에게까지 전해졌다. 이 영속 철학은 신비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했지만 이성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수흐라와르디는 알-파라비만큼이나 지적으로 엄격했으나 진리에 접근하는 데 직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쿠란이 가르친 대로 모든 진리는 신으로부터 나오므로 찾을 수 있는 곳 어디에서든 찾아야 했다. 유일신론 전통뿐만 아니라 이교와 조로아스터교 안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여러 종파의 논쟁을 초래하는 교리 종교와 달리 신비주의는 신에게 도달하는 많은 길이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수피즘은 타인의 믿음을 이해하는 데 탁월한 길이다. 

 

- '순수한 이미지의 세계'인 알람 알-미탈(alam al-mithal)의 문을 열어줌으로써 사람들이 신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 수흐라와르디는 고대 페르시아의 원형적 세계의 믿음 -게틱(지상세계)의 모든 사람과 사물은 그것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이 메녹(천상세계)에 있다- 에 의지했다. 신비주의는 세 유일신 종교가 표면적으로 폐기한 오래된 신화를 되살린 것이다. 수흐라와르디의 도식에서 알람 알-미탈이 된 메녹은 인간 세계와 신의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 영역이었다. 이 영역은 이성으로도 감각으로도 지각할 수 없었다. 쿠란에 대한 상징적 해석이 참된 영적 의미를 드러낸 것처럼, 우리는 오직 창조적 상상력을 통해 숨은 원형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에게 알람 알-미탈은 지상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참뜻을 밝혀주는 이스마일파의 영적 사관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알람 알-미탈에 관한 그의 이해는 이후 모든 이슬람 신비주의자들이 자신의 신비적 경험과 환상을 해석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 수흐라와르디는 여러 다양한 문화의 샤먼, 신비주의자, 황홀경에 빠진 사람에게 나타나는 놀랍도록 유사한 환상 체험을 연구했다. 최근 이 현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융은 '집단 무의식' 개념을 통해 모든 인간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상상적 체험을 한층 더 과학적으로 탐구했고, 루마니아계 미국 종교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같은 학자들은 고대 시인의 서사시나 우화 속에 담겨 있는 환상적 여행이나 신비적 비상의 영적 의미를 밝히고자 시도했다. 수흐라와르디는 신비주의자들의 환상이나 '천국' '지옥' '최후의 심판' 같은 성서의 상징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현상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존재하지만 다만 존재 양태가 다를 뿐이라고 주장했다.

 

- 그의 주장을 보면, 그것들은 경험적으로 입증될 수는 없으나 지상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영적 의미를 인식하게 하는 고도의 상상력을 통해서는 식별될 수 있다. 불교 승려들이 도덕적, 정신적으로 깊은 수련을 거치고서야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것처럼, 신비 체험은 필요한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다. 그들은 현실 세계의 모든 생각과 이념과 소망 그리고 꿈과 환상에 상응하는 알람 알-미탈의 실재를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자신을 신성한 세계의 문턱까지 이끌고 갔던 야간 여행을 통해 중간 영역인 알람 알-미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유대 메르카바 신비주의자들이 영적 훈련을 통해 환상 체험을 할 때도 다름 아닌 순수한 이미지의 세계에 몰입했다. 따라서 신에 이르는 길은 파일라수프의 주장처럼 이성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고 신비주의자들이 중시하는 창조적 상상력을 통해 가능하다. 

 

- 오늘날 서구의 많은 이들은 저명한 신학자들이 신이 어떤 깊은 의미에서 상상의 산물이라고 말할 때 당혹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상상력이 중요한 종교적 능력임은 분명하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상상력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했다.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 또는 아직 존재하지 않으나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것을 그려볼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바로 이 상상력을 통해 인간은 종교와 예술뿐 아니라 과학과 기술에서 큰 업적을 성취할 수 있었다. 특히 부재하는 실재의 가장 대표적인 예인 신 개념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신비적인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수천 년 동안 인류의 삶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에게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상상력을 통해 신 존재에 관한 상징을 해석하는 일이다.  

 

- "신은 인간을 자신을 가리는 베일처럼 창조했다. 그러므로 베일과 같은 인간의 실상을 아는 자는 신성한 존재에 도달할 수 있으나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신성한 세계를 향한 문을 열 수 없다." 이렇게 이븐 알-아라비도 수피즘을 신봉하는 이슬람 신비주의자들과 유사하게 인간의 상상력에 중심을 둔 고도의 개인적 영성 수행에서 출발해 초인격적 신 이해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는 신 이해와 관련해 여성의 이미지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남달랐다. 그는 궁극적으로 신을 지향하는 사랑을 인간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여성이기에, 여성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지혜의 화신이라고 믿었다. 물론 이 믿음은 근본적으로 남성 중심적 사고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주로 남성적 의미로만 신을 이해하는 종교에 여성적 차원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 쿠란에서 신은 자신에 관한 특별한 지식을 알-키드르에게 주었다. 모세는 알-키드르에게 신의 지식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으나, 알-키드르는 모세에게 자신이 받은 신에 관한 앎이 모세의 신 체험보다 더 강렬하고 깊어서 모세가 감당하지 못하리라고 말했다. 이는 인간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종교적 '정보'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는 뜻이었다. 알-키드르는 '푸른 자'를 의미하는 듯하다. 

 

-  이러한 영적 훈련은 사람들에게 인격적 단일 개념의 신 이해보다는 인간 내면에 있는 신에 대한 깨달음을 주었다. 어떤 교단은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음악과 춤을 사용했으며 그들의 '피르'(pir, 스승)는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 수피 교단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마우라위야(Mawlawiyyah)였다. 이들은 서양에서는 '빙빙 도는 수행승'으로 알려졌다. 그들의 당당하고 위엄 있는 춤은 정신을 집중하는 방법이었다. 빙글빙글 돌아감에 따라 수피는 자아의 경계가 해체됨을 느끼고, 춤에 빠져들어 감에 따라 파나(자아 소멸)의 상태를 미리 맛본다. 이 교단의 창시자는 잘랄 알-딘 루미(1207~1273)였는데, 그는 제자들에게는 마울라나(Mawlana,'우리의 주인')로 알려졌다. 

 

- 루미의 신비주의 신앙은 몽골족의 침입으로 인해 많은 무슬림이 알라에 대한 신앙을 상실한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 그는 동시대인이었던 이븐 알-아라비와 유사한 사상을 지니고 있었으나, '수피의 성서'로 알려진 그의 시집 <마스나위>는 일반 무슬림에게 큰 호응을 받았으며, 신비주의 신앙을 널리 전파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244년에 루미는 방랑 수도사 샴스 알-딘을 만나 그를 당대의 '완전한 인간'이라고 여겼을 정도로 그에게 매료되었다. 샴스는 스스로 자신을 무함마드의 환생이라 믿었으며, 자신을 '무함마드'라고 부르라고 요구했다. 그는 수상쩍은 평판을 얻었고 이슬람교의 신성한 법전인 샤리아를 지키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은 그런 하찮은 것을 초월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루미의 제자들은 당연히 그들의 '주인'이 샴스에게 '홀딱 빠져 있는' 것을 깊이 우려했다. 

 

- 다시 말해 루미는 신이 인간 세계와 동떨어진 어딘가에 근엄하게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단지 인간의 주관적 경험의 실체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인간의 신 이해가 지닌 개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모세와 그를 따르던 목동 이야기를 자주 사용했다. 어느 날 모세가 우연히 목동이 아주 친근한 어투로 신에게 말하는 것을 엿듣게 되었다. 어느 곳에 있더라도 신의 옷을 빨고 이도 잡아주며 잠자기 전 손발에 키스를 해주는 일 같은, 신을 도울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노라는 내용이었다. "제가 당신을 기억하며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아이이이이(ayyyy)와 아흐흐흐흐흐흐(ahhhhhh)일 뿐입니다." 목동은 이렇게 기도를 끝맺었다. 모세는 경악했다. 도대체 저 목동 녀석은 누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하늘과 땅의 창조자인가? 모세에게는 그가 자기 삼촌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렸던 것이다. 모세에게 질책받은 목동은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깊은 슬픔에 젖어 사막을 방황했다. 하지만 신은 모세를 불러 자신이 원하는 것은 틀에 박힌 정통 교리적 기도가 아니라 자신을 향한 불길처럼 타오르는 사랑과 겸허함이라고 말하면서 모세를 나무랐다. 이렇게 루미는 신에 관해 말하고 기도하는 방법에는 정도가 없다고 주장했다.  

 

- [네게 그르게 보이는 것이 그에게는 옳을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독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꿀일 수 있다.]

 

- [예배할 때 순수와 비순수, 태만과 열심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이런 것들을 초월했다. 예배 방법 중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쁠 수 없다. 힌두교도에게는 그들의 예배 방법이 있다. 인도의 드라비다족 무슬림은 그들의 예배 방법이 있다. 모두가 나를 찬양하는 것이다. 모두가 옳은 것이다. 예배를 통해 영광을 받는 자는 내가 아니다. 바로 예배자다!]

 

- [나는 너희들이 말하는 말을 듣지 않는다. 나는 인간의 내면을 본다. 자기를 거꾸러뜨려 몸을 여는 겸손이야말로 '실재'다. 언어가 아니다! 고상한 어법 따위는 잊어라. 벗이 되라. 너를 불태워라. 너의 생각을 불태우고 고정된 표현 형식을 태워버려라!]

 

- 신에 관한 이야기는 어떤 것이든 그 목동처럼 비합리적이다. 신자가 베일을 통해 사물의 참 모습을 들여다볼 때 자신의 모든 인간적인 선입견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깨달을 수 있도록 고안된 특별한 방법으로 기도했는데, 눈을 꼭 감고 이를 악문 채 정신 산란을 막기 위해 머리를 수건으로 둘렀다. 그들은 단순히 기도문을 반복해 외우지 않고 기도문을 구성하는 각 단어의 문자들을 세면서 그것들의 숫자 값을 계산해 언어의 문자적 의미를 벗어남으로써 신을 향한 신비 의식을 유도하고자 노력했다.   

 

- 그러나 반유대주의 박해가 없었던 이슬람 제국의 유대인들은 훨씬 행복했고, 아슈케나지의 경건주의 같은 염세적 신앙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슬람 신앙의 발전에 대응하는 새로운 형태의 유대 신앙을 발전시켰다. 유대 파일들이 성서의 신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려 했던 것처럼, 그들은 신비적이고 상징적인 해석을 통해 신을 설명하고자 했다. 초기에 이 신비주의자 무리는 아주 소수였다. 그들은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전승된 비전적인 훈련을 했는데, 그것을 카발라라고 불렀다. 점차 카발라의 신은 많은 이들의 호응을 받았고, 철학자의 신이 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유대인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신을 인간 삶에서 멀리 떨어진 추상적 존재로 만드는 철학을 멀리하고, 합리적인 이해보다 더 깊은 차원의 인간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비주의적 신 이해를 제시했다. 특히 인간 삶에 초연한 신의 영광을 바라보는 데 만족하는 '메르카바 신비주의'와 달리 카발리스트들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신성한 세계를 꿰뚫어 보고자 했다. 신의 본성과 신과 세계의 관계라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이성적 추론이 아닌 인간의 상상력에 초점을 맞추었다. 

- 수피들처럼 카발리스트들은 계시와 창조를 통해 나타난 신과 본질적 신을 영지주의와 신플라톤주의에 근거해 구분했다. 그들은 신을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비인격적 존재라 보고, 신비적 존재인 숨은 신을 아인 소프(Ein Sof, '끝이 없다')라고 불렀다. 그들은 아인 소프에 관해 인간은 아무것도 알 수 없으며, 심지어 아인 소프는 성서나 탈무드에도 언급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13세기 어느 익명의 신비주의자는 아인 소프가 인간에게 드러나는 계시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고 썼다. 아인 소프는 야훼(YHWH)와 달리 문자로 기록된 이름이 없다. '그'는 인격체가 아니다. 신 본체(Godhead)는 '그것(It)'이라고 부르는 쪽이 더 정확하다. 아인 소프는 성서와 탈무드에 나타난 인격신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른 신 이해를 제시했다.

 

- 카발리스트는 새로운 종교 의식의 세계를 밝히기 위해 독자적인 신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아인 소프와 야훼가 별개의 존재라는 영지주의의 오류에 빠지지 않고,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조화롭게 설명하기 위해 성서를 상징적으로 읽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또한 그들은 수피들처럼 숨은 신이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는 과정을 상상했다. 아인 소프는 알 수 없는 신 본체의 헤아릴 수 없는 심연에서 유출된 신성한 실재의 열 가지 다른 측면이나 세피로트(sefiroth, '세는 법')로 유대 신비주의자에게 자신을 드러냈다. 여기서 각 '신적 속성(세피라 sefirah)'은 상징적 이름이 있으며 아인 소프가 전개하는 계시의 각 단계를 나타내면서 동시에 전체 신비의 실상을 표현한다. 카발리스트는 성서의 모든 단어를 아인 소프의 열 단계 세피로트와 연결했으며, 각 구절은 신 자신의 내적 삶에 대응하는 사건 또는 현상을 묘사한다고 생각했다.

- 이븐 알-아라비는 신의 연민의 탄식을 세계를 창조한 '말씀'처럼 신이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믿었다. 마찬가지로 카발리스트들도 열 가지 세피로트를 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이름이자 세계를 창조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열 가지 세피로트는 한편으로 전체적으로 ...

 

- 인간의 신 개념으로는 결코 신의 실재를 온전히 표현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 그러나 세피로트의 세계가 신 본체와 현실 세계 사이 '저편 어딘가'에 있는 또 다른 실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의 각 단이 아니라 오히려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현실세계의 저변을 가리킨다. 신은 무소부재의 존재이므로 세피로트는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 살아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세피로트는 또한 신비주의자가 자신의 마음속으로 내려감으로써 신에게 올라가는 신비로운 의식 단계를 표현한다. 그렇지만 다시 신과 인간은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어떤 카발리스트들은 세피로트를 신이 본래 의도한 원초적 인간의 사지(四肢)로 보았다. 성서에서 인간이 신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말할 때의 의미였다. 이승의 세속적 현실은 하늘 세계의 원형적 실재에 해당한다. 나무나 인간으로 묘사된 신의 이미지들은 합리적인 개념화를 거부하는 실재의 상상적 묘사였다. 카발리스트들은 팔사파에 적대적이지 않았지만 대다수가 사아디아 가온, 마이모니데스 같은 인물을 존경했다. 그들은 신의 신비를 깨닫는 데 형이상학보다 상징주의와 신화가 더 만족스럽다고 생각했다.

- 가장 영향이 컸던 카발라 문헌은 <조하르>(광명의 서)였다. 이 책은 아마 1275년경에 에스파냐의 신비주의자 모세스 데 레온이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세스는 젊은 시절 마이모니데스에게 깊게 빠졌으나 나이가 들면서 점차 카발라의 비전적 전승 같은 신비주의에 매료되었다. <조하르>는 3세기경 탈무드 교사였던 시므온 벤 요하이가 아들 엘리에자르와 함께 팔레스타인 지역을 방랑하며 제자들에게 전한 신, 자연, 인간 삶에 대한 가르침을 묘사한 일종의 신비주의 소설이다. 신이 아무런 사고 체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저자는 전체 구조를 주제에 따라 체계적으로 분류해 구성하지 않았다. 이븐 알-아라비처럼 모세스는 신이 신비주의자 각자에게 고유하고 개별적인 계시를 내려 주기에 토라를 해석하는 방식에는 제한이 없다고 믿었다. 카발리스트가 나아감에 따라 의미의 층들이 드러난다.

 

- <조하르>는 열 가지 세피로트의 신비적 유출을 단계를 비인격적인 아인 소프가 인격적 실체로 변화하는 과정으로 보여준다. 세 가지 최고 세피로트인 케테르-엘리온, 호크마, 비나에서 아인 소프는 계시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려고, 말하자면 막 '결정'했을 때에 신의 실재를 '그'라고 부른다. '그'가 중간 단계의 세피로트, 즉 '헤세드' '딘' '티페레트' '네자' '호드' '예소드'를 통해 자신을 낮추며 '그'는 '당신'이 된다. 끝으로 '당신'으로서 신은 마지막 신의 속성인 세키나에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며 '나'로 존재한다. 바로 이 마지막 단계는 신이 개별적 존재로 변화함으로써 계시를 완성하고, 그 과정에서 인간이 신비 체험의 길을 떠나기 시작하는 단계다. 이 단계에서 인간은 내면 속 자아의 심연을 통찰해 그 안에 존재하는 신의 존재를 깨달음으로써 자기 중심적 한계를 넘어 비인격적 신의 세계에 몰입하게 된다. 인간이 절대적 신 존재의 한낱 껍데기에 불과한 현실 감각 세계를 벗어나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신비적 실체가 머무는 피안의 세계로 접어드는 단계이다. 

- 수피즘과 마찬가지로 카발라의 창조 교리는 우주의 물질적 기원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조하르>는 <창세기> 이야기를 아인 소프 자체 위기의 상징적 설명이라고 본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신은 무한한 깊이의 내성에서 솟아 나와 자신을 계시했다. 

 

- 이 지점은 모든 피조물의 이상적 형태를 담고 있는 둘째 세피라 호크마(지혜)이다. 이 지점은 궁전이나 건물로 발전해 셋째 세피라인 비나(지성)가 된다. 이 세 가지 최고 세피로트는 인간적 이해의 한계를 나타낸다. 카발리스트들은 신이 비나 단계에서 모든 질문의 맨 앞자리에 놓이는 위대한 '왜?'로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답을 얻을 수는 없다. 아인 소프가 제한된 인간의 이해 영역으로 자신을 점차 드러낸다 해도 우리는 그가 도대체 '누구'인지 알 방법이 없다. 우리가 더 높이 올라갈수록 '그'는 더 어둠과 신비 속에 빠지게 된다. 

- 다음 일곱 세피로트는 <창세기>의 창조 7일에 해당한다고 해석한다. 성서 시대에 야훼는 결국 고대 가나안의 여신들과 그들에 대한 성적인 숭배에 맞서 승리했다. 그러나 카발리스트들은 신의 신비를 표현하기 위해 애쓰면서 비록 변형한 형태일지라도 오래된 신화를 다시 끌어왔다. <조하르>는 비나를 '어둠의 불꽃'이 그의 자궁을 뚫고 들어가 일곱 세피로트를 낳게 한 '천상의 어머니'로 묘사했다.

 

- 아홉 번째 세피라 예소드(토대)는 남근을 상징하기도 했다. 신성한 생명력이 신비적 출산 행위에서 우주로 쏟아지는 통로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 번째 세피라 세키나에서 고대의 성적인 창조의 상징과 신들의 계보가 가장 잘 나타난다. 본래 탈무드에서 셰키나는 중성적 존재였다. 성도 젠더도 없었다. 그러나 카발라에서 세키나는 신의 여성적 측면을 상징한다. 초기 카발라 문헌의 하나인 <바히르>(1200년경)에서 세키나는 소피아의 영지주의적 모습과 동일시되었다. 셰키나는 플레로마에서 떨어져 나와 길을 잃고 신 본체로부터 소외되어 이제 세상을 떠도는 최후의 신성한 유출물이다. <조하르>는 이 '셰키나 추방'을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타락과 연결한다. 아담에게는 생명 나무에 있는 '중간 세피로트'와 지식 나무에 있는 셰키나가 보였다고 한다. 그는 일곱 세피로트를 함께 숭배하지 않고 대신 대신 셰키나만 홀로 숭배하기로 선택했다. 그리하여 지식에서 생명을 떼어내고 세피로트의 일체성마저 깨뜨렸다. 결국 신성한 생명은 신성한 근원에서 고립된 지상 세계로 더는 흘러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공동체는 토라를 따름으로써 아담에게서 비롯된 세키나의 추방을 치유하고, 세상을 다시 신 본체와 통합시킬 수 있었다. 당연히 많은 엄격한 탈무드주의자들은 이를 혐오스러운 생각으로 여겼지만, 신성한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떠도는 여신을 숭배한 고대 다신 종교들의 신화를 되풀이한 셰키나의 추방은 카발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요소 중 하나가 되었다. 여성적 세키나는 지나치게 남성적인 신 개념에 균형을 제시했으며 확실히 중요한 종교적 욕구를 충족해주었다. 

- 신의 추방이라는 생각은 수많은 인간적 불안의 원인이 되는 소외감을 설명하는 주요 원리가 되기도 했다. <조하르>는 변함없이 악을 어떤 관계에서 소외되거나 적절치 않은 관계에 연루된 것으로 정의했다. 사실 유일신 종교의 윤리적 해석의 문제 중 하나는 악을 고립시킨다는 점이다. 우리의 신 안에 악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인간도 악을 품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반영해 악의 요소를 비인간적이고 괴물화한 어떤 대상에게 돌린다. 서구 기독교에서 내세우는 흉악한 사탄의 이미지가 바로 그런 비틀린 투영이다. 그러나 <조하르>는 악을 신에 내재하는 요소인 다섯 번째 세피라 딘(엄격한 심판)에 속한다고 보았다. 딘은 신의 왼손으로 묘사되고, 헤세드(사랑)는 신의 오른손으로 묘사되었다. 딘이 신의 자비와 조화롭게 작용하는 한 긍정적이고 유익한 것이다. 그러나 딘이 헤세드와 분열하고 다른 세피로트에서 분리된다면 파괴적인 악이 된다. 그러나 <조하르>는 이 분리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후대의 카발리스트가 악의 문제를 어떻게 성찰하는지 볼 것이다. 그들은 악을 신이 계시를 시작한 초기 단계인 태초에 일어난 '사건'의 결과로 보고, 악에 대해 경전에 근거한 문자적 해석보다는 인간의 심리 상태를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신화적 해석을 중시했다. 카발리스트의 신은 15세기에 에스파나의 유대인이 엄청난 박해의 수난에 직면했을 때 그들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 우리는 카발리스트의 심리적 예리함을 에스파냐의 신비주의자 아브라함 아불라피아(1240~1291?)의 저작에서 볼 수 있다. 그의 저작 대부분이 <조하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쓰였지만, 아불라피아는 신의 본성 자체보다는 신의 감각을 얻을 수 있는 실천적 방법에 집중했다. 그가 강조한 방법들은 현대 정신분석가들이 정신 계발을 위해 고안한 비종교적 방법들과 매우 유사하다. 수피가 무함마드와 유사한 신 체험을 하기 원했던 것처럼, 아불라피아는 예언자적 영감을 성취하는 방법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호흡이나 만트라 낭송이나 특별한 자세같은 일상의 집중을 이용한 일종의 유대교의 요가를 발전시켜 신비의 의식 상태에 이르고자 했다. 사실 그는 유별난 카발리스트였다. 서른 한 살에 압도적인 종교 경험을 한 후 신비주의로 회심하기 전까지 이미 토라, 탈무드, 팔사파에 통달한 매우 박식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뿐 아니라 기독교인이 고대하는 구세주 메시아라고 믿고 제자들을 모으기 위해 에스파냐부터 당시 유대인 박해가 심했던 중동 지역까지 일종의 전도 여행을 했으며, 1280년에는 유대교 사절로서 교황을 방문하기도 했다. 종종 기독교에 신랄한 비난을 퍼붓기도 했지만, 카발리스트의 신 이해와 기독교인의 삼위일체 신학이 유사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세 가지 최고 세피로트는 성부로부터 유출되는 로고스와 영, 신의 지성과 지혜, 접근할 수 없는 빛 속에서 잃어버린 무를 연상시킨다. 아불라피아 자신도 삼위일체 방식으로 신에 관해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 아불라피아는 신을 발견하려면 반드시 "영혼을 묶고 있는 매듭을풀어 영혼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여기서 '매듭을 푼다'는 표현은 티베트 불교에서도 사용되는 중요한 구절이며, 세계 각지의 신비주의자들이 한결같이 강조하는 신 체험을 위한 하나의 전제 조건이다. 또한 정신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복합적 혼돈의 심리 상태를 치유하려는 현대 정신분석가들의 시도와 유사한 점도 있다. 그러나 아불라피아는 카발리스트였기 때문에 영혼이 감지할 수 없는 전체적 창조 과정에 활력을 불어넣는 신적 기운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감각적 인식에 근거한 개념에 집착해 있는 한 인간은 삶의 초월적 차원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요가 훈련을 통해서만 일반적인 의식 세계와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가 주창한 방법 하나는 신의 명칭에 담긴 신의 속성을 명상하는 호크마 하체루프(Hokhmah ha-Tseruf, 문자 조합의 과학)였다. 그것은 세속적 관심에서 벗어나 한층 더 초월적인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 신의 명칭을 여러 가지로 조합해 명상하는 훈련이었고, 카발리스트에게 큰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이러한 훈련을 음조 대신 문자가 가락을 구성해 이루는 음악적 화음 청취에 비유해 설명했다. 그리고 연상 방법도 사용했는데, 딜루그(dillug, 도약)와 케피차(kefitsah, 건너뜀)라고 불렀다. 그것은분명히 '자유연상'이라는 근대적인 정신분석의 실천과 비슷하다. 그 방법은 놀라운 결과를 성취했다고 한다. 아불라피아가 설명한 바를 보면, 그것은 숨겨진 정신 사고의 저변을 밝히고, 카발리스트들이 "유한한 자연 세계의 한계를 벗어나 초월적 신의 세계로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훈련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영혼의 '봉인'이 풀렸고 입회자는 심리적 힘의 원천을 찾아냈으며, 이 힘은 정신을 밝혀주고 마음의 통증을 누그러뜨려 주었다. 

- 아불라피아는 오늘날 정신병 환자 치료에 의사의 통제와 지도가 필요한 것처럼, 신비주의자의 수도 행위도 숙련된 지도자의 감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을 절망으로 몰아갔던 황폐한 종교 체험의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오늘날 환자들은 종종 분석가가 나타내는 힘과 건강을 적절하게 표현하기 위해 분석가 개인을 내적으로 모방하려 한다. 마찬가지로 카발리스트도 자신의 내면에 침투해 그 내면의 문을 열어주는 영적 지도자의 인격을 '보고' '들을' 때에만 신의 근원에서 분출되는 듯한 강력한 내적 변화의 물결을 체험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의 제자는 이러한 황홀경을 경험한 신비주의자가 자신의 구세주 메시아가 됐다는 또 다른 해석을 제시했다. 황홀경을 통해 그 신비주의자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해탈의 경지에이른 자아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 [예언의 정신은 오로지 예언자의 것임을 알라. 그 정신 안에서 그는 자신 앞에 놓인 자아의 모습을 불현듯 보고 자아를 잊어버림으로써 자아에서 풀려나게 된다. 이러한 비밀에 관해 우리의 탈무드 스승들은 "인간을 신에 비유하는 예언자의 능력이 위대하다"고 말했노라.]

- 유대 신비주의자들은 신과의 신비적 합일을 주장하는 것을 늘 주저했다. 아불라피아와 그의 제자들은 영적 지도자와의 합일을 경험하거나 개인적 해탈 체험을 통해 카발리스트가 간접적으로 신과 접촉했다고 말할 뿐이었다. 중세 신비주의와 현대 정신분석학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지만, 둘 다 새로운 치유 방법과 인격의 내적 통합을 위한 방법들을 발전시켰다.

 

- 서방 기독교인의 신비주의 전통은 더디게 발전했다. 그들은 비잔티움 제국이나 이슬람 제국의 유일신론자보다 뒤처져 있었기에 아마도 이 새로운 신앙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14세기에 북유럽을 중심으로 신비주의 신앙이 폭발적으로 등장했다. 특히 독일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7), 요하네스 타울러(1300~1361), 위대한 게르트루데(1256~1302), 하인리히 수소(1295~1366) 같은 매우 탁월한 신비주의자를 배출했다. 영국 또한 이러한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는데, 영국에서뿐만 아니라 대륙에서도 빠르게 신봉자를 끌어모은 네 명의 위대한 신비주의자를 배출한 것이다. 햄폴의 리처드 롤(1290~1349), <무지의 구름>을 쓴 익명의 저자, 월터 힐튼(1346년 사망), 노리치의 귀부인 줄리언(1342?~1416)이 그들이다. 이 신비주의자들 중 일부는 다른 이들보다 더 멀리 나아간 모습을 보였다. 예를 들어 리처드 롤은 특별한 감각을 키우는 데 몰두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의 영성은 때때로 일종의 자기 중심주의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신비주의적 통찰은 대부분 동방 기독교인, 수피, 카발리스트가 이미 성취한 것들이었다.

- 예를 들어 타울러와 수소에게 큰 영향을 끼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위-디오니시우스와 마이모니데스의 영향을 받았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탁발 수도사였던 에크하르트는 파리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가르친 뛰어난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1325년에 신비주의 가르침으로 인해 쾰른의 대주교와 갈등을 빚었다. 대주교는 그가 신의 선함을 부정하고 신의 인간 영혼 태생설과 세계의 영원성 같은 이단 사생을 설교했다고 고발했다. 하지만 그의 가장 신랄한 비판자들 중에도 그가 정통파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의 발언 중 일부를 상징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해석한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에크하르트는 역설과 은유를 대단히 즐겨 사용한 시인이었다. 그는 신을 믿는 것이 합리적이라 믿었지만 이성만으로는 신에 관한 적절한 개념을 도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알 수 있는 것의 증명은 감각이나 지성으로 가능하나, 신은 비육체적이기에 감각적 지각에 의해 논증될 수도 없고, 인간이 알 수 있는 어떤 형태도 없기에 지성에 의해 논증될 수도 없다." 신은 일반적인 사유의 대상처럼 증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신을 무(無)라고 규정했다. 이는 신이 환영이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알고 있는 어떤 존재보다 더 풍부하고 충만한 존재라는 뜻이었다. 에크하르트는 신을 '어둠'이라 불렀는데, 이는 빛이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밝은 것이 존재함을 가리키기 위해서였다. 또한 그는 '사막' '광야' '어둠' '무' 같은 부정적 용어로 가장 잘 지칭할 수 있는 '신 본체'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이해되는 '신'을 구분했다. 서방 기독교인으로서 에크하르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 비유를 즐겨 사용했다. 그는 삼위일체 교리를 이성으로는 알 수 없을지라도 신을 삼위로 인식하는 것은 오직 인간의 지성뿐이라고 암시했다. 일단 신비주의자가 신과 합일을 이루면 그는 신을 '일자'로 보았다. 동방 기독교인들은 이 생각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에크하르트는 삼위일체가 본질적으로 신비적인 교리라는 생각에 그들도 찬성하리라 여겼다. 그는 마리아가 잉태함으로써 그리스도가 태어났다기보다는 성부 신이 영혼 속에 탄생시켰다고 가르쳤다. 루미 역시 예언자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신비주의자의 마음속 영혼 탄생의 상징으로 보았는데, 에크하르트는 동정녀 탄생을 영혼과 신의 협력을 비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 신은 신비 체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마이모니데스가 제안한 것처럼 신에 대해서는 부정적, 소극적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 인간은 감각의 경험에 근거한 편견과 인간 중심적 사고의 틀을 포기함으로써 신 이해를 정화해야 한다. '신'이라는 말조차 사용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에크하르트가 제시한 "인간 최후의, 그리고 최고의 이별은 그가 오로지 신을 위하여 신으로부터 떠날 때 일어난다"라는 말에 담긴 의미였다. 그것은 신이 무(無)이기 때문에 신과 하나가 되려면 인간도 무의 상태가 되어야 하는 힘겨운 고통의 과정이다. 수피가 파나(자아소멸)를 주장한 것처럼, 에크하르트는 '이탈' 또는 오히려 '분리되어 있음'의 과정을 강조했다. 무슬림이 신 이외의 다른 것이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코르도베로의 사상은 이븐 알-아라비와 물라 사드라의 일원론과 매우 유사했다.

 

- 사페드 카발리즘의 영웅이며 성인으로 추앙받은 이삭 루리아(1534~1572)는 신에 관해 이제까지 정식화된 것 중 가장 놀랄 만한 생각으로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역설을 더 완전하게 설명하고자 했다. 대부분의 유대 신비주의자들은 신비 체험에 대해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의 체험이 형언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기꺼이 기록하려고 하는 것은 충분히 모순으로 보일 만했다. 카발리스트들은 이를 경계했다. 루리아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자신의 문하로 많은 제자들을 끌어들인 최초의 차디크(Zaddik, '의로운 자')였다. 루리아는 글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 하임 비탈(1542~1620)의 <에츠하임<(생명 나무)과 요세프 이븐 타불이 기록한 대화를 통해서만 그의 사상을 알 수 있다(이 대화록은 1921년에야 출판됐다).

- 루리아는 수 세기 동안 유일신론자들을 괴롭혀 온 질문들을 마주했다. 어떻게 완전하고 무한한 신이 악에 물든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는가? 악은 어디에서 왔는가? 루리아는 아인 소프가 숭고한 내적 성찰에 몰입할 때, 즉 세피로트의 유출 이전에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상상함으로써 답을 찾았다. 루리아는 아인 소프가 세계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자신 안에 한 영역을 비웠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움츠림' 또는 '물러남'(짐줌tsimtsum)의 행위를 통해 신은 자기 안의 빈 공간을 창조했다. 이 공간은 신의 자기 계시와 창조의 동시적 과정에 의해 채워질 수 있었다. 이는 '무(無)로부터 창조'라는 어려운 교리를 설명하려는 대담한 시도였다. 아인 소프의 첫 행위는 자신의 일부로부터 스스로 추방된 것이다. 말하자면 신은 자신의 존재 속으로 깊이 내려가 스스로 한계를 정한 것이다. 이 신 개념은 기독교인들이 삼위일체로 생각했던 원초적 케노시스, 즉 신이 자기 표현 행위로 자신을 비워 그의 아들로 흘러 들어갔다는 설명과 다르지 않다. 16세기 카발리스트들에게 '짐줌'은 창조된 모든 존재의 구조 바탕에 있는 추방 -아인 소프 자신도 경험한- 의 상징이었다. 

- 신의 '물러남'에 의해 창조된 '빈 공간'은 아인 소프로 둘러싸인 원으로 상상되었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언급한 무정형의 빈 공간, 토후보후였다. 본래 짐줌이라는 움츠림이 있기 전에 신의 모든 다양한 '힘'(이후에 세피로트가 되는)은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져 있었다. 그 힘들은 서로 구별되지 않았다. 특히 신의 헤세드(사랑)와 딘(엄중한 심판)은 신 안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짐줌 과정 중에 아인 소프는딘을 다른 속성에서 분리해 자신이 떠난 빈 공간으로 밀어 넣었다. 따라서 짐줌은 자기를 비우는 사랑의 행위일 뿐 아니라 일종의 신성한 정화로도 볼 수 있다. 신은 자신의 분노와 심판(<조하르>가 악의 뿌리라고 본)을 자신의 가장 깊은 존재로부터 제거한 것이다. 그렇게 신의 최초 행위는 자신에게 가혹함과 무자비함을 보여주었다. 딘은 헤세드와 다른 신의 속성과 분리됨으로써 잠재적으로 파괴적이었다. 그러나 아인 소프는 그 빈 공간을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다. 신성한 빛의 '가는 줄기'가 그 원을 뚫고 들어가, <조하르>가 '아담 카드몬' 곧 최초의 인간이라 부른 형태를 이루었다.

- <조하르>와 달리 그다음엔 세피로트의 유출이 일어났다. 루리아는 '아담 카드몬'에서 세피로트가 형성되었다고 가르쳤는데, 세 가지 최고 세피로트 -케테르(왕관), 호크마(지혜), 비나(지성)- 는 아담 카드몬의 '코' '귀' '입'에서 각각 유출되었다. 그러나 그다음 루리아가 '그릇들의 깨짐'이라고 부른 재앙이 일어났다. 세피로트는 서로 구별하고 분리되기 위해, 그리고 이전의 일체성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특별한 그릇에 담겨야 했다. 이 '그릇' 또는 '관'은 물론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세피로트의 순수한 빛을 위한 외피(클리포트) 역할을 하는 두터운 빛으로 구성되었다. 세 가지 최고 세피로트가 아담 카드몬에서 발산했을 때 그들의 그릇은 완벽하게 기능했지만, 그다음에 여섯 가지세피로트가 그의 '눈'에서 나왔을 때는 신성한 빛을 담을 정도로 강하지 못해 부서졌다. 그 결과 빛은 흩어졌다. 일부는 위로 올라가 신 본체로 돌아갔으나 일부 신성한 '불꽃'은 빈 공간으로 떨어져 혼돈 속에 갇혔다. 그 이후로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잡지 못했다. 세 가지 최고 세피로트마저 이 재앙으로 인해 더 아래로 떨어졌다. 본래의 조화는 파괴되었고 신성한 불꽃은 신 본체로부터 추방된 무정형의 빈 공간 토후보후로 사라졌다. 

- 이 낯선 신화는 최초의 이탈을 그린 초기 영지주의 신화를 연상시킨다. 이 신화는 전체 창조 과정에서 나타나는 긴장을 설명하는데, <창세기>에 묘사된 평화롭고 질서정연한 과정보다는 오늘날 과학자들이 상상하는 빅뱅에 훨씬 가깝다. 그것은 아인 소프가 고통의 과정 없이는 스스로 자신을 드러낼 수 없음을 밝히려 한 것이었다. 유대 랍비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것이 탈무드에 나타난다. 그들은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기 전에 다른 세계를 만들어 파괴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일부 카발리스트는 이 '깨짐'을 탄생이나 꼬투리의 터짐에 비유했다. 파괴는 단지 새로운 창조의 서곡이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지만 아인 소프는 티쿤(Tikkun) 곧 '통합' 과정을 거쳐 이 혼돈 속에 새 생명을 가져올 것이었다.

 

- 재앙 이후 아인 소프에서 새로운 빛줄기가 발산해 아담 카드몬의 '이마'를 뚫고 나왔다. 이때 세피로트가 새로운 구조로 재구성되었다. 세피로트는 더는 신의 일반화된 속성이 아니었다. 각각은 기독교 삼위일체의 세 위(位)와 같은 방식으로 신의 전 특성이 구별되어 드러나는 '모습'(파르주프)이 되었다. 루리아는 스스로 사람으로 태어난, 불가해한 신에 대한 오래된 카발라의 개념을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티쿤의 과정에서 루리아는 인간의 잉태, 탄생, 발달의 상징을 사용해 신의 유사한 진화를 이야기했다. 이것은 복잡해서 아마도 아래처럼 정리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티쿤이라는 재통합에서 신은 다음 단계에 따라 열 가지 세피로트를 다섯 가지 '모습들'(파르주핌)로 재구성해 질서를 회복한다.

 

- 파르주프(parzuf). '모습', '얼굴'을 뜻하는 히브리어, 복수형은 파르주핌(parzufim). 기독교 삼위일체의 페르소나와 비슷하다. 일부 카발리스트들은 불가해한 신이 수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낸다고 상상했다. 각각의 모습은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 딘(심판), 헤세드(사랑), 라하민(동정심), 네자(인내), 호드(위엄), 예소드(토대)가 모두 넷째 파르주프가 되고, 제이르 안핀('참을성 없는 자')으로 불린다. 마지막 세피라 말쿠트(왕국) 곧 셰키나가 다섯째 파르주프가 ...

 

- 그들은 논리와 형이상학을 중시하는 새로운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발견시키고 있었다.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와 달랐는데, 이 새로운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적 내용에는 그의 합리적 방법만큼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자명한 논리에 근거한 삼단논법의 추론을 통해 논리정연한 기독교 신앙 체계를 구성하기 원했다. 물론 종교개혁가들은 신에 대한 이런 종류의 합리주의적 논의를 모두 거부했기에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후대 칼뱅주의의 예정설은 신의 역설과 신비가 더는 시로 읽히지 않고 무서운 논리로 해석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성서를 상징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 시작하면 그 신을 이해하기는 불가능해진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말 그대로 책임이 있는 신을 상상하는 것은 모순을 초래한다. 성서의 '신'은 초월적 실재의 상징이 되기를 멈추고 잔혹하고 독재적인 폭군이 된다. 예정설은 그러한 인격화된 신의 한계를 드러낸다.  

- 칼뱅을 종교적 경험의 바탕으로 삼은 청교도들은 신을 투쟁으로 이해했다. 신은 그들에게 행복도 동정심도 불어넣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남긴 글과 전기를 보면 그들이 예정설과 구원받지 못하리라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회심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는데, 그것은 '죄인'과 영적 지도자가 함께 치러야만 하는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 드라마였다. 흔히 참회자들은 신에 대한 전적인 의존을 인식할 때까지 심한 굴욕을 겪거나 신의 은총에 대해 완전히 절망해야 했다. 종종 회심은 극도의 슬픔에서 기쁨에 이르는 건강하지 못한 심리적 정화를 의미하기도 했다. 지옥과 저주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과도한 자기 반성과 결합해 많은 사람들을 병적 우울증으로 내몰았고 자살이 만연했다. 청교도들은 이 현상을 그들의 삶에서 신 못지않게 강력한 것으로 보인 사탄의 탓으로 돌렸다. 청교도주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는데, 그동안은 노예로서 일을 해 왔다면 이제는 '소명'으로 여기며 자부심을 갖게 되었고, 절박한 종말론적 영성이 일부 사람들에게 신세계 식민지 개척의 영감을 주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에 청교도의 신은 불안과 가혹한 불관용을 불러일으켰다.

 

-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는 서로 상대를 적으로 간주했지만 사실 신에 대한 이해와 경험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했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이후 가톨릭 신학자들은 신에 관한 연구를 자연과학으로 축소한 새로운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에 몰두했다. 예수회를 창시한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1491~1556) 같은 종교개혁가들은 프로테스탄트가 강조한 직접적인 신 체험과 계시를 적절히 수용하고 자신만의 것으로 삼아야 할 필요성에 공감했다. 이그나티우스가 예수회 수도사를 위해 처음 고안한 '영신 수련'은 회심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는 극도로 즐거울 뿐 아니라 몹시 괴롭고 고통스러운 체험일 수 있었다. 수련자와 지도자가 일대일로 짝을 이루어 진행된 이 30일간의 피정은 자기 성찰과 개인적 결단을 강조했고, 청교도의 영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신 수련은 체계적이고 대단히 효율적인 신비주의 단기 수련 과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신비주의자들은 현대의 정신 분석가들이 사용하는 것과 유사한 방법을 종종 개발했는데, 그래서 이 수련을 가톨릭과 성공회 기독교인들이 일종의 대체 요법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 그러나 이그나티우스는 그릇된 신비주의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루리아와 마찬가지로 이그나티우스는 그의 책 <영신 수련>에서 평정과 기쁨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제자들에게 일부 청교도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던 감정의 극단에 대해 경고했다. 그는 수련자가 피정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여러 감정을 신에게서 비롯된 감정과 악마에게서 비롯된 감정으로 나누었다. 신은 평화, 희망, 기쁨, '정신의 격상'으로 경험해야 하는 반면, 불안, 슬픔, 메마름, 심란은 '악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그나티우스의 신에 대한 감각은 예민해서, 그는 기쁨으로 눈물을 흘리곤 했고 신에 대한 감정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는 감정의 격렬한 변화를 불신했고 새로운 자기를 향한 여정에서 수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칼뱅처럼 그는 기독교를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보았고 영신 수련 속에 그 만남을 그렸다. 그 정점은 '사랑을 얻기 위한 묵상'이었는데, 이는 "모든 것을 신의 선함의 창조물이자 그 반영"으로 보는 것이다. 이그나티우스에게 세상은 신으로 가득했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시성하며 이렇게 회상했다. 

- [우리는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마저 그의 영혼을 신에게로 들어 올리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아주 작은 식물이나 나뭇잎, 꽃, 열매, 하찮은 벌레, 작은 동물을 보는 순간에도 이그나티우스는 하늘 위로 자유롭게 올라 감각 너머에 있는 것들에 닿을 수 있었다.]

 

- [교리보다는 도덕에 관해 더 많이 가르쳐주는 종교, 인간을 불합리하게 만들기보다는 의롭게 만드는 종교, 불가능하고 모순적이며 신과 인간 모두에게 해를 끼치는 것들을 믿도록 강요하지 않는 종교, 상식을 지닌 사람에게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협박을 가하지 않는 종교는 없는가? 처형자들에 의해 믿음을 유지해 나가지 않는 종교, 이해할 수 없는 궤변 때문에 세상을 피로 물들이지 않는 종교는 없는가? 유일신을 찬미하면서도 정의와 관용과 인간애를 가르치는 종교는 없는가?]

- 교회가 이 같은 도전을 받게 된 것은 오로지 교회 자신의 책임이었다. 수 세기 동안 주체할 수 없이 많은 교리로 신도들에게 부담을 지워왔기 때문이다. 반동은 불가피했고 오히려 긍정적인 것일 수 있었다.

- 사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신의 관념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거부한 신은 영원한 지옥 불로 인간을 협박하는 냉혹한 존재로 묘사된 정통 교리의 신이었다. 또한 그들은 이성과 동떨어진 신비주의 신앙의 신을 거부했다. 그러나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최고 존재'로서 신에 대한 믿음은 간직했다. 볼테르는 페르니에 예배당을 짓고서, 그 상인방에 "볼테르, 신을 위해 이것을 지었다"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고,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고까지 말했다. <철학 사전>에서 그는 고립된 마을이나 공동체에 살았던 인간은 본래 유일신을 섬겼고 다신교 신앙은 이후에 발달한 것이라 말하면서 유일신 신앙이 다신교 신앙보다 인간에게 더 합리적이며 자연스럽다고 주장했다. 또한 과학과 합리적 철학 모두 최고 존재를 암시한다고 생각했다.

 

- 보텀리는 죄의 거룩함이라는 대단히 흥미롭고 전복적인 교리를 펼치기도 했다. 신이 만물에 깃들어 있다면 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의 주장은, 당대의 성적 규범을 노골적으로 위반하고 공개적으로 다른사람을 저주하고 신성 모독 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로런스 클라크슨과 앨러스테어 코프(Alastair Coppe) 같은 랜터파의 주장처럼 큰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코프는 심한 주벽과 흡연으로 악명이 높았다. 랜터파가 된 뒤 그는 걸핏하면 마구 악담을 쏟아내곤 했다. 런던의 어느 교회 설교단에서 한 시간 내내 저주와 독설로 일관한 적이 있었고, 어느 선술집 여주인에게 심한 저주를 퍼부어 몇 시간을 공포에 떨게 만들기도 했다. 코프의 행동은 인간의 죄를 지나치게 강조해 사람들을 억압했던 청교도 윤리에 대한 반발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 조지 폭스와 퀘이커 교도들은 죄는 결코 불가피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폭스는 친우회의 동료들에게 죄를 지으라고 권하지 않았으며 랜터파의 부도덕함을 혐오했지만, 낙관적인 인간관을 강조하고 균형을 회복하려 노력했다. 로런스 클라크슨은 <바른 눈>(1650년)에서 신이 만물을 선하게 만들었으므로, '죄'는 오직 인간의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성서를 보면 신이 직접 자신이 어둠을 빛으로 바꾸었다고 주장하지 않던가. 사실 전체론적 관점을 찾고자 노력한 신비주의자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유일신론자들은 죄의 실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를 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 중세 시대 영국의 신비주의자였던 노리치의 줄리언은 죄란 일종의 필요악이라 생각했고, 카발리스트들은 죄가 불가사의한 방식으로 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믿었다. 코프나 클라크슨의 극단적인 자유지상주의는 그때까지 분노하고 심판하는 신을 강조하는 교리를 통해 기독교인을 억압해 온 기독교를 떨쳐버리려는 조잡하고 거친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합리주의자들과 계몽주의 기독교인들 또한 신을 잔혹한 권력자로 제시하는 종교의 구속에서 벗어나 온유한 신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 사회사 학자들은 세계 종교 중 서방 기독교의 특징으로 억압의 시기와 관용의 시기가 폭력적으로 교체되어 왔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억압국면일 때 신앙 부흥 운동이 발생했다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서구 많은 지역에서 계몽주의 시대의 느슨한 도덕적 풍토 다음에 빅토리아 시대의 억압이 이어졌는데 이 변화에는 더욱 근본주의적인 종교성의 고양이 수반되었다. 또한 20세기 들어서도 1960년대의 관용적 사회가 1980년대 들어 청교도 윤리가 지배하는 사회로 대체되었고 그와 동시에 기독교 근본주의 운동이 탄생했다. 이 복잡한 현상에 한 가지 원인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서구인들이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신 개념과 연결 짓고 싶게 만든다. 중세 신학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은 '사랑의 신'을 말했는지 몰라도 성당 문 위에 새겨진 지옥에서 고문받는 사람들의 모습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서구에서 신의 의미는 종종 어둠과 투쟁으로 특징지어진다. 클라크슨과 코프 같은 랜터파는 마녀사냥의 광기가 유럽 여러 나라에 퍼지고 있던 시기에 기독교의 금기들을 공공연히 어겼으며 죄의 거룩함을 주장했다. 크롬웰 시대에 영국의 급진적 기독교인들 또한 지나치게 엄격하고 무서운 신에 대해 반발했다.
 

- 나탄도 샤베타이 체비와 마찬가지로 이삭 루리아의 카발라를 공부했다. 스미르나 출신의 문제적 유대인을 만난 나탄은 그가 악령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며 그의 캄캄한 절망은 그가 메시아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나탄의 신비주의적 해석에 따르면, 체비가 겪는 캄캄한 절망의 고통은 곧 그가 '다른 쪽'의 사악한 힘과 맞서 싸우고 있기 때문이며 그는 오직 메시아를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한 영역에서 신성한 불꽃을 뿜어내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나탄의 말을 믿지 않았으나 결국 나탄의 유려한 설득에 넘어갔다. 

 

- 1665년 5월 31일, 갑자기 조증기에 접어든 샤베타이 체비는 나탄의 격려를 받으며 자신의 메시아 사명을 선언했다. 지도층 랍비들은 그의 메시아 주장을 위험한 허튼 소리로 여기고 묵살했으나, 팔레스타인의 많은 유대인이 그를 지지해 몰려들었다. 급기야 그는 이스라엘 12지파를 심판할 제자 열두 명을 선발했다. 아울러 나탄은 팔레스타인 지역 외의 이탈리아,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 오스만 제국의 유대인들에게 편지를 띄워 메시아의 도래를 알렸다. 유대인 사회에 메시아를 향한 열망이 급속히 번졌다. 이 상황은 지난 수 세기 동안 박해와 추방에 시달리며 주류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살아온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세계의 미래가 유대인에게 달려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 특히 에스파냐에서 추방당한 유대인의 자손인 세파르딤은 루리아의 카발라를 신봉했고 최후 심판의 날이 임박했다고 믿었다. 이 모든 것이 샤베타이 체비 숭배를 부추겼다. 사실 유대인 역사를 통틀어 메시아라고 자칭한 사람들은 적지 않았으나 체비만큼 엄청난 지지를 받은 자는 없었다. 설령 그의 메시아 주장에 의구심을 품었다 할지라도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내는 것이 위험할 정도였다. 그의 지지자들은 부자와 빈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를 막론하고 유대인 사회의 각계 각층에서 나타났다. 메시아가 나타났다는 기쁜 소식을 담은 소책자와 전단이 영어, 네덜란드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로 만들어져 퍼져나갔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는 체비에게 경의를 표하는 시가행진이 벌어졌으며, 오스만 제국에서는 체비가 보좌에 앉아 있는 환상을 보았다는 유대 예언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사업을 중단했다. 튀르키에의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오스만 제국의 술탄 대신 샤베타이 체비의 이름을 넣어 기도했다. 결국 체비가 1666년 1월 이스탄불에 도착했을 때, 오스만 제국은 그를 반역죄로 체포해 갈리폴리에 투옥했다.

 

- 수 세기에 걸친 박해, 추방, 모델 끝에 희망이 나타났다. 이로써 세계 곳곳의 유대인들은 내적인 자유와 해방을 경험했는데, 그것은 카발리스트가 세피로트의 신비로운 세계를 명상할 때 몇 분간 경험하는 황홀경과 흡사했다. 이제 구원의 경험은 더는 소수의 특권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유 재산처럼 보였다. 처음으로 유대인은 자신들의 삶이 가치 있다고 느꼈다. 구원은 더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현재 삶에 실재하는 것이자 의미 있는 것이었다. 구원이 도래했도다! 이 갑작스러운 운명의 전환은 지울 수 없는 인상을 주었다. 그리하여 유대 세계의 모든 시선이 샤베타이 체비가 있는 갈리폴리에 고정되었다. 그는 자신을 체포해 가둔 사람들에게조차 인상적인 인물이었다. 

 

- 완벽하게 거꾸로 뒤집었다. 그는 영지주의자들처럼 두 신이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이스라엘에 계시된 신과 보통 사람들에게 계시된 신이 있었다. 모든 문명에서 사람들은 '제일원인'의 존재를 증명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인 '제일원인'은 이방 세계 전체에서 숭배받았다. 이 신적 존재는 종교적 의미가 없었다. 이 신은 세계를 창조하지도 않았고 인간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 신은 성서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모세와 이스라엘의 여러 예언자에게 나타난 신은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이 신은 무로부터 세계를 창조했으며, 이스라엘을 구원할 이스라엘의 신이었다. 카르도소의 주장에 따르면, 추방 기간 동안 이방인에게 영향받은 마이모니데스나 사아디아 같은 유대 철학자들이 두 신을 혼동해 유대인들에게 두 신이 동일한 존재라고 잘못 가르친 것이었다.  

 

- 그렇다면 두 신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 카르도소는 이 추가적인 신을 설명하기 위해 유대교의 유일신론을 포기하지 않고 삼위일체 신학을 전개했다세 가지 히포스타시스 또는 파르주핌으로 이루어진 신 본체가 존재했다. 첫째는 '아티카 카디샤(Atika Kadisha)'라고 불렀던 '거룩한 태고의 자'이다. 이것이 '제일원인'이었다. 여기서 유출된 둘째 파르주프는 '말카 카디샤(Malka Kadisha)'라고 불렀고, 이스라엘의 신이었다. 셋째 파르주프는 셰키나(신의 임재로 이삭 루리아가 묘사한 것처럼 신 본체에서 추방된 것)이었다

 

- 카르도소는 이러한 세 가지 신의 모습은 제각기 분리된 채로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나 신 본체 속에서 하나로 합치되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카르도소는 온건한 샤베타이 숭배자였다. 그는 샤베타이 체비가 이미 모든 유대인을 대신해 배교라는 고통스러운 과업을 수행했기 때문에 자신은 배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삼위일체론적 신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유대교의 금기를 깼다. 수세기에 걸쳐 유대인들은 삼위일체론을 신성모독이자 우상 숭배로 보고 증오해 왔으나 이제 놀랍게도 많은 유대인이 카르도소의 해석에 매력을 느끼고 동조했다. 세월이 흘러도 현실세계에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자 샤베타이 숭배자들은 메시아 대망에 관한 자신들의 전망을 수정해야 했다. 네헤미아 하임(Nehemiah Hayim), 사무엘 프리모(Samuel Primo), 요나탄 아이베쉬츠(JonathanEibeschütz) 같은 샤베타이 숭배자들은 '신 본체의 신비'가 1666년 샤베타이 체비의 이슬람 개종을 통해 완전히 계시된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일찍이 루리아가 예언했듯이 셰키나가 '흙먼지' 속에서 일어서기 시작했지만, 아직 신 본체로 돌아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구원은 점진적으로 진행될 것이며 이 이행의 시간 동안 유대인은 은밀히 메시아 신앙을 고수하면서 동시에 전통 율법을 준수하고 시너고그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이것은 18세기에많은 랍비들이 샤베타이 메시아 신앙을 간직하면서 동시에 전통적 유대교 신앙을 지킬 수 있는 교리적 근거가 되었다. 

- 배교를 실행한 좀 더 과격한 자들은 성육신 신학을 수용함으로써 유대교의 또 다른 금기를 깼다. 그들은 샤베타이 체비가 메시아였을뿐 아니라 신의 화신이라고 믿었다. 기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믿음은 서서히 발전했다. 아브라함 카르도소는 부활 후 예수의 영광에 대해 설파한 사도 바울과 유사한 교리를 가르쳤다. 카르도소는 구원의 역사가 "신성한 자(말카 카디샤)인 체비가 자신을 들어 올려 하늘 위 본원적 신에게 복귀함을 상징하는" 그의 이슬람 개종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그는 샤베타이 체비가 본원적 신의 둘째 파르주프인 이스라엘의 신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를 기독교 삼위일체론의 성자 예수와 같은 의미로 해석했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돈메'는 카르도소의 이러한 해석을 더욱 발전시켜, 이스라엘의 신이 지상으로 내려와 샤베타이 체비의 몸으로 나타났다고 믿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이 자신들의 지도자들이 모두 메시아가 환생한 자라고 믿게 되면서 그 이후로 아마도 시아파의 열두 이맘과 같은 방식으로 그 지도자들은 화신이 되었다. 배교자의 각 세대는 지속적인 메시아 환생 신앙을 간직하게 되었다.

 

- 1759년에 자신의 아슈케나지 제자들에게 기독교 세례를 받도록 인도한 야쿠브 프랑크는 한때 자신이 신의 화신이라고 암시했다. 폴란드에서 태어난 유대인인 프랑크는 유대교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인물로 묘사되곤 한다. 그는 자신의 학식이 부족한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는데, 어둠의 신화를 발전시켜 당시 유대교 신앙에서 공허함과 불만을 느끼던 많은 유대인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유대교의 옛 율법은 폐기되었다고 가르쳤을 뿐 아니라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모든 종교를 폐지하고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해 커다란 지지를 받았다. 프랑크의 가르침을 모은 책 <주의 말씀>은 샤베타이 숭배를 허무주의로까지 이끌어 갔다. "아담의 발길이 닿은 모든 곳과 내 발길이 닿을 모든 곳이 파괴될지니, 그것은 내가 이 세상을 파괴하고 멸망시키러 왔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기 위하여 이 땅에 왔노라던 예수 그리스도의 말과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예수와 사도 바울과는 달리 프랑크는 과거 전통의 권위를 완전히 무시했다. 이러한 그의 허무주의적 신조는 그와 동시대 인물로 그보다 어렸던 사드 후작(Marquis de Sade)의 생각과 별 차이가 없었다. 즉 인간이 위로 올라가 '선한 신'을 만나려면 먼저 타락의 심연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인데, 모든 기존 종교를 부정할 뿐 아니라 자기 비하와 도덕 상실로 이어지는 종교적 '기행'을 저지르는 것을 의미했다. 

- 프랑크는 카발리스트(신비주의자)는 아니었으나 카발라에 근거했던 카르도소의 신학을 조잡한 형태로나마 종종 주장했다. 그는 카르도소가 제시한 삼위일체론의 세 파르주핌이 지상에서 각각 다른 메시아에 의해 대표된다고 믿었다. 프랑크가 '최초의 자'라고 불렀던 샤베타이 체비는 '선한 신' -카르도소의 아티카 카디샤('거룩한 태고의 자')-의 화신이었다. 프랑크 자신은 둘째 파르주프, 즉 이스라엘의 신(말카 카디샤)의 화신이었다. 셰키나의 화신인 셋째 메시아는 프랑크가 '동정녀'라고 부른 여성이었다. 프랑크는 당시 세계가 악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허무주의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리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이 신을 향해 올라가려면 먼저 예수와 샤베타이 체비처럼 어둠의 심연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악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으나,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율법과 관습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왔노라. 나의 사명은 선하신 신이 당신을 드러내실 수 있도록 세상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악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고 신을 만나고 싶다면 그동안 신성시해 온 모든 율법을 어겨 심연을 향해 한 걸음씩 하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원의 전사가 되기를 원하는 자들이여, 종교를 파괴하라. 그대들의 자유를 억압해 구원의 길을 막는 종교를 파괴하라." 

- 신을 체험할 수 있으며, 사람은 누구나 악마의 무리가 아닌 바람결과 작은 풀잎 속에도 존재하는 신에게 둘러싸여 있으므로 늘 기쁨과 구원의 확신을 품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 베슈트는 이삭 루리아가 세계 구원을 위해 세운 원대한 계획을 거부했다. 하시드는 그저 자신의 사적 세계에 있는 모든 것, 즉 아내와 하인, 가구, 음식 같은 것들에 내재해 있는 신성한 불꽃을 재결합시키기만 하면 되었다. 그의 제자 힐렐 자이틀린은 하시드가 자기 주변 세계에 특별한 책임을 진다는 것에 대해, 오로지 그만이 행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사람은 제각기 자기 세계의 구원자다. 그는 오직 그가 보아야만 할 것과 그만이 보아야 할 것을 바라보며, 그가 개인적으로 느껴야만 할 것으로 선택된 것만을 느낀다." 이것은 어디에서나 신의 현존을 느끼도록 도와주는 카발리스트의 집중수련(데베쿠트 devekuth)과 관련이 있다. 17세기 사페드의 어느 카발리스트는 신비주의자들은 율법 연구에서 벗어나 홀로 고요히 앉아 시간을 두고 "마치 자신이 이글거리는 셰키나의 불빛 속에 있는 것 같은 상상의 세계에 몰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슈트는 바로 이러한 상상의 수련 속에서 우러나는 강렬한 망아적 기쁨을 제자들에게 일러주면서, 그러한 기쁨은 특권을 지닌 소수의 신비주의 엘리트만이 아니라 데베쿠트에 전념하는 모든 사람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무소부재한 신의 임재를 믿어야 하며, 데베쿠트를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곧 신과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부정함으로써 우상 숭배와 다름없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 때문에 베슈트는 기존 유대교 지도층과 갈등을 빚었다. 

 

- 열광적인 기독교 종파들처럼 하시디즘도 고독한 종교가 아니라 강렬한 공동체적 성격을 띠었다. 하시드는 신에게 접근하기 위해 차디크의 모범을 따르고자 했다. 폴란드의 정통파 랍비들이 차디크 숭배에 경악한 건 당연했다. 차디크 숭배는 결국 인간을 숭배하는 것이었고, 아주 오랫동안 율법의 현신으로 여겨져 온 학식 있는 랍비를 완벽하게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차디크 숭배 반대 운동을 이끈 사람은 빌나의 가온인 랍비 엘리야 벤 솔로몬 잘만(1720~1797)이었다. 당시 일부 유대인들은 샤베타이 체비의 배교 사건 때문에 신비주의에 극도로 적대적이었는데 빌나의 가온은 그에 비해 합리적인 신앙의 대변자로 보였다. 하지만 그는 탈무드 전문가일 뿐 아니라 열정적인 카발리스트이기도 했다. 그와 가까운 제자였던 볼로친의 랍비 하이임은 잘만을 "탁월한 데베쿠트, 고매함, 사랑에 대한 열정, 신의 위엄에 대한 두려움으로 무장한, 카발라 신비주의 문서 <조하르>에 통달한 인물"이라고 칭송했다. 잘만은 이삭 루리아에 관해 말할 때마다 전율할 정도였다. 그는 여러 놀라운 꿈을 꾸고 계시를 보았으나, 자신은 주로 율법 연구를 통해 신과 소통한다고 항상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잠재된 직관을 해방하는 꿈의 목적을 두고 놀라운 해석 능력을 발휘하곤 했다. 이에 대해 랍비 하이임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꿈에 대해 종종 이렇게 말했다. 신은 인간이 일상적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통찰력을 인간에게 부여하기 위해 꿈을 창조했다. 잠을 통해서만 인간 영혼은 육체와 결합할 수 있다."

 

- 사실 신비주의 신앙과 합리주의 신앙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차이가 크지 않다. 

 

- 빌나의 가온이 잠에 관해 말한 것을 보면 그가 무의식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문제의 해결책을 찾고 싶다면 '잠을 자면서 생각해보라'고 권했는데 이것은 깨어 있는 동안에는 의식에 잡히지 않는 해결책을 잠자는 동안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신이 수용적이고 이완된 상태일 때 정신의 깊은 곳에서부터 생각이 떠오른다. 이것은 아르키메데스 같은 과학자가 목욕탕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그 유명한 원리를 발견했을 때 직접 경험한 것이기도 하다. 참으로 창조적인 철학자나 과학자는 신비주의자가 그러하듯이 창조되지 않은 실재의 어두운 세계와 무지가 드리운 그림자와 직접 대면해 그것을 뚫고 나아가고자 한다. 논리와 개념을 붙잡고 씨름하는 한, 이미 정해진 생각의 틀이나 견해에 반드시 갇히게 된다. 새로운 발견은 종종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처럼 보이며, 그러한 발견을 해낸 이들은 환상과 영감에 관해 말하곤 한다. 예를 들어 본래 종교적 열광주의를 혐오했던 에드워드 기번도 폐허가 된 고대 로마의 유적을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던 중 갑자기 영감을 얻어 <로마 제국 쇠망사>(1776~1788년)를 쓰게 되었다. 20세기의 위대한 역사가인 아널드 토인비는 이것을 가리켜 "그가 자신을 관통해 흐르는 거대한 역사의 물결과 자신의 영혼을 뒤흔드는 격랑의 소용돌이를 직관적으로 인식함으로써 이루어낸 교감"이라고 평하고, 그가 받은 영감은 "신이 드러낸 절대적 미를 인간 영혼이 깨달은 환상 체험과 유사하다"고 표현했다. 그와 비슷하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신비주의가 "모든 참된 예술과 과학의 출발점"임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 [최고의 지혜와 가장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만 우리의 둔한 능력으로는 오직 그것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만 이해할 수 있는 불가해한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 이런 앎, 이런 느낌이야말로 모든 참된 종교성의 핵심이다. 나는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 나 자신이 독실하게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 이런 의미에서 베슈트 같은 신비주의자들이 찾은 종교적 깨달음은 이성의 시대에 이루어진 다른 어떤 성취들과 유사해 보인다. 그것은 더 단순한 보통 사람들이 근대성의 신세계에 정신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해주었다.

- 1780년대에 리아디의 랍비 슈네우 잘만(1745~1813)은 하디시즘의 감정적 충일이 지적 탐구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성적인 관조와 신비주의를 결합해 새로운 형태의 하시디즘을 창시했다. 이 새로운 하시디즘은 신의 세 가지 속성의 첫 글자를 따서 '하바드(Habad)'로 알려졌다. 즉 호크마(지혜)의 H, 비나(지성)의 B, 다트(지식)의 D였다.

 

- 철학과 영성을 결합한 초기 신비주의자들처럼 잘만은 지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형이상학적 사색이 기도의 필수적 예비 단계라고 믿었다. 그는 만물 안에 존재하는 신이라는 근본적인 하시디즘 비전에서 출발해,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신만이 유일한 실재임을 깨닫도록 이끌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무한자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 만물은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니며 무(無)일 뿐이다." 창조된 세계는 생명력의 원천인 신과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세상 만물과 신이 분리되어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오직 우리의 유한한 인식 때문이며 착각일 뿐이다. 신은 실재의 다른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초월적 존재가 결코 아니다. 신은 이 세계의 밖에 있지 않다. 

 

- 다른 작품들에서는 이런 신을 전적으로 타자인 신, 세계의 창조자인 새로운 신으로 변화시켰다. 그 신은 현실 세계로 내려와 인간 예수의 모습으로 죽는다. 심지어 그 신은 인간의 적인 사탄이 되기까지 한다. 영지주의자, 카발리스트, 초기 삼위일체론자들처럼 블레이크는 고독한 천상에서 내려와 이 세계에서 육화한 본체의 케노시스(자기 비움)를 마음 속에 그렸다. 신에게 이질적인 인간의 활동은 없다. 심지어 교회가 억압하는 섹슈얼리티조차 예수 자신의 수난에서 나타난다. 신은 예수 안에서 자발적으로 죽음을 맞았고, 초월적이고 이질적인 신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의 죽음이 완성될 때 '인간의 신성'이 드러날 것이다. 

 

- [예수가 묻기를, 당신은 당신을 위해 죽지 않은 자를 사랑합니까? 당신을 위해 죽지 않은 자를 위해 죽을 수 있습니까? 만일 신이 인간을 위해 죽지 아니하고 영원히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이 사랑인 것처럼 인간도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서로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 그것이 곧 신의 형상 안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존재해야 할 것은 서로에게 부어주는 형제애입니다.]

- 블레이크는 제도적 교회에 반기를 들었지만 몇몇 신학자들은 낭만주의의 비전을 공식 기독교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그들은 인간세계와 동떨어진 초월적인 신 개념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했고 인간의 주관적 종교 체험을 중시했다.  
  

- 19세기의 무신론 철학자들이 이런 신에게 반기를 드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많은 동시대인이 그들의 비판에 영감을 받아 같은 길을 갔다.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은 종종 자신도 모르게 과거에 다른 유일신론자들이 내놓았던 오래된 통찰을 반복하곤 했다. 

 

- 게오르크 빌헬름 헤겔(1770~1831)은 어떤 측면에서는 카발라와 매우 유사한 철학을 전개했다. 그가 유대교를 잘못된 원시적 신 개념을 만들어낸 조악한 종교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헤겔의 관점에서 유대교의 신은 견딜 수 없는 율법에 절대적 복종을 강요한 폭군이었다. 예수는 이러한 비도덕적인 노예 상태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려 노력했으나 기독교인들은 유대인과 똑같은 덫에 걸렸고 신성한 '전제 군주'로서 신 개념을 장려했다. 헤겔은 이제 이 야만적인 신을 치워버리고 인간 조건에 대해 좀 더 계몽된 시각을 발전시킬 때라고 보았다. 헤겔의 이 같은 부정확한 유대교 이해는 신약 성서의 논박에 기반한 것이었으며 새로운 유형의 형이상학적 반유대주의였다. 칸트처럼 헤겔은 유대교를 모든 것이 잘못된 종교의 사례로 여겼다. <정신현상학>(1807년)에서 그는 세계의 생명력의 근원이 전통적인 신이 아니라 '정신(Geist)'이라고 주장했다. 카발라와 마찬가지로 헤겔의 '정신'은 참된 영성과 자의식에 이르기 위해 먼저 자기 한계와 추방을 겪어야 하며, 또 자기 실현을 위해 세계와 인간에게 의존한다.

 

- 헤겔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특징이기도 한 오래된 유일신론적 통찰을 반복했다. 그것은 '신'은 이 세계에 더해진 것, 일상적 현실과 분리된 것이 아니며 인간과 불가분하게 얽혀 있다는 통찰이었다. 블레이크처럼 헤겔은 이러한 통찰을 변증법적으로 표현했다. 그에게 인간과 '정신', 유한자와 무한자는 상호 의존적이며 같은 자기 실현 과정에 관여하는 단일한 진리의 두 반쪽이었다. 헤겔은 인간 세계와 동떨어져 존재하면서 이질적이고 불필요한 율법을 강요하는 신을 거부하고 사실상 신성이 인간성의 한 측면이라고 선언했다. '정신'의 케노시스에 대한 헤겔의 견해, 즉 '정신'이 자신을 비움으로써 세계에 내재하게 되고 실현된다는 생각은 세 종교에서 발달한 성육신 신학과 공통점이 많았다. 그러나 헤겔은 낭만주의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계몽주의적 사상가였고, 그래서 상상력보다 이성을 중시했다. 여기서 그는 또다시 자신도 모르게 과거의 통찰을 되풀이했다. 파일라수프처럼 그는 이성과 철학이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종교는 사고의 재현 양식에 갇혀 있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파일라수프와 마찬가지로 개별 정신의 작용으로부터 절대자에 관한 결론을 이끌어냈는데, 여기서 개별 정신은 전체를 반영하는 변증법적 과정에 휩쓸린 것으로 묘사되었다.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1788~1860)는 헤겔의 사상이 터무니없이 낙관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발표한 1819년에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의도적으로 같은 대학에 있던 헤겔의 강의 시간과 같은 시간을 택할 만큼 헤겔을 싫어했다. 쇼펜하우어는 세계에는 어떤 절대자도 이성도 신도 정신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삶에 대한 잔혹한 본능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낭만주의 운동의 이면을 뒤집어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종교의 모든 통찰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 지크문트 프로이트(1856~1939)는 신에 대한 믿음은 성숙한 사람이라면 내버려야 할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신 개념은 거짓말이 아니라 심리학으로 판독해야 할 무의식의 장치였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격 신은 고귀한 아버지 상(像)에 다름 아니다. 그러한 신을 향한 욕구는 곧 강력하고 자신을 보호해주는 아버지를 향한 유아적 동경, 정의와 공정함, 영원히 지속되는 삶에 대한 유아적 동경에서 비롯한 것이다. 인간은 평생 지속되는 무력감을 견디기 위해 강력한 아버지인 신을 찾고 두려워하고 숭배한다. 종교는 인류의 유아기에 형성된 것으로 이를테면 어린아이가 성숙해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이며 사회 유지에 필수적인 윤리적 가치들을 장려한다고 프로이트는 보았다. 그러나 이제 인류는 성년에 이르렀으므로 종교를 버려야 한다. 새로운 로고스인 과학이 신을 대신할 수 있다. 이제는 과학이 우리에게 새로운 윤리적 기반을 제공해주고 우리가 두려움에 맞설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과학에 대한 프로이트의 믿음은 거의 종교적이라 할 만큼 강했다. "아니, 우리의 과학은 결코 환상이 아니다! 과학이 우리에게 줄 수 없는 것을 다른 어딘가에서 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환상이다." 

 

- 모든 정신분석학자가 프로이트의 신관(神觀)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알프레트 아들러 (1870~1937)는 프로이트처럼 신을 인간 소망의 투영이라고 생각했으나, 그와는 달리 신이 인간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믿었다. 아들러에게 신은 인간이 추구하는 탁월성을 보여주는 훌륭하고 효과적인 상징이었다. 카를 융(1875~1961)의 신은 각 개인이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심리적 진실이었다는 점에서 신비주의자의 신과 닮았다. 1959년에 BBC 기자 존 프리먼이 스위스로 융을 찾아가 진행한 그 유명한 대면 인터뷰에서 융은 신을 믿느냐는 질문에 단호히 답했다. "나는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이 존재한다는 걸) 아니까요!" 그가 신앙을 계속 유지한 것을 보면 자아의 심연 속에서 존재의 기반과 신비롭게 동일시되는 주관적인 신은 정신분석적 과학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을 영원히 미성숙 상태로 붙잡아 두는 인격화된 신, 신인동형의 신이었다면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 다른 많은 서구인처럼 프로이트는 이 내면화된 주관적인 신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도 그는 종교를 폐지하려는 시도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타당하고 통찰력 있는 주장을 펼쳤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사람들은 각자 준비가 되었을 때 신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미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무신론이나 세속주의를 강요하면 건강하지 못한 부정과 억압이 나타날 수 있다. 앞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두려움을 투영하는 것과 묻어 둔 불안에서 우상 파괴가 야기될 수 있음을 보아 왔다. 신을 폐지하고 싶어 했던 일부 무신론자들은 확실히 긴장의 징후를 보였다. 동정심의 윤리를 옹호했으나 현실의 인간들을 감당할 수 없었던 쇼펜하우어는 오로지 자신의 푸들 '아트만'하고만 소통하는 은둔자가 되었다. 니체는 자신이 그린 '초인'과 전혀 다르게 마음이 여리고 고독했으며 건강이 좋지 않아 힘들어 했고 결국 미쳤다. 그리고 우리의 상상과 달리 그는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신의 죽음을 맞지 못했다. "두려워 떨며 자기를 비틀어댄 후에 쓴" 시에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로 하여금 신에게 돌아와 달라고 탄원하게 만들었다.

 

- 헤겔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니체의 이론도 후대 독일인들에 의해 국가사회주의(나치즘) 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당했다. 이것은 무신론적 이데올로기도 '신'의 개념만큼이나 잔혹한 십자군의 윤리로 이어질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서구에서 신은 늘 투쟁 중이었다. 그의 죽음에도 긴장과 슬픔과 경악이 따랐다. 

 

- 1917년에 오스만제국이 몰락한 이후 등장한 튀르키예라는 새로운 국민국가의 지도자 무스타파 케말 -이후 케말 아타튀르크로 알려지게 된다- 의 서구화 노력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이슬람교를 국교의 지위에서 끌어내리고 종교를 순전히 사적 영역의 문제로 만들었다. 수피 교단은 해체되어 지하로 잠적했다. 마드라사(전통적인 이슬람 교육 기관)는 폐쇄되었고 울라마(이슬람 성직자)의 국가적 양성도 중단되었다. 이러한 세속화 정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페즈 금지 조치였다. 이것은 종교적 계급 차이를 눈에 덜 띄게 만드는 조치였으며 심리적으로 사람들에게 서구식 복장을 강제하려는 시도였다. 페즈 대신 모자를 쓴다는 것은 '유럽인처럼 된다'는 뜻이었다. 아타튀르크를 존경했던 이란의 샤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는 그와 비슷한 정책을 폈다. 이란의 무슬림은 베일을 금지당했다. 물라(mullah, 종교 지도자)는 강제로 수염을 깎고 터번 대신에 케피를 써야 했다. 열두 이맘과 순교자 후사인을 기리는 전통적 제의도 금지되었다.  

- 프로이트는 현명하게도 어떤 식으로든 종교를 강제적으로 억압하는 것은 파괴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섹슈얼리티와 마찬가지로 종교도 삶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끼치는 인간의 욕구에 해당한다. 종교에 대한 억압은 극심한 성적 억압 못지않게 폭발적이고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무슬림은 새로운 튀르키예와 이란의 개혁을 환영하면서도 그에 못지않게 커다란 의혹을 품고 바라보았다. 

- 신과 대화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신과 인간 사이의 심연에 다리를 놓아주는 것은 토라의 계율뿐이다. 이것들은 결코 이방인들이 상상하듯이 단순히 '하지 말라'는 식의 금지령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넘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존재의 근저에 있는 신적 차원을 가리키며, 그것을 향해 유대인을 인도하는 성례이고 상징적 행위다. 로젠츠바이크는 랍비들처럼 토라의 계율은 분명히 상징적이므로 -왜냐하면 종종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기에- 우리를 우리의 제한된 언어나 개념을 넘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 자체로 인도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것들은 인간이 존재의 근원을 깊이 숙고하는 기다림과 귀 기울임의 경건한 자세로 이끈다. 그러므로 미츠보트(계율)는 자동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개인에 의해 적절하게 실천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하면 각각의 미츠바는 외적 명령을 그치고, '나의' 내적인 태도와 '나의' 내적인 '당위'를 표현하는 것이 된다. 물론 토라는유대인의 특별한 종교적 실천이지만 계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로젠츠바이크는 전통적 유대교의 상징을 통해 신을 만났으나 기독교에도 신을 만날 수 있는 다른 상징 체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신에 관한 교리는 신앙 고백적인 진술이 아니라 내적 태도의 상징이었다. 예를 들어 창조와 계시의 교리는 신과 세계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에 관한 문자 그대로의 설명이 아니었다. 계시 신화는 신에 대한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표현했다. 창조 신화는 존재의 근원인 신에게 의존하는 인간 존재의 절대적 우연성을 상징했다. 창조자로서 신은 피조물 하나하나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피조물에 관심을 두지 않지만, 만약 신이 창조자 즉 모든 존재의 근거가 아니라면 종교적 경험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 장 폴 사르트르(1905~1980)는 신이 언제나 존재했던 인간의 의식 속 '신의 빈 자리'에 대해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는 신 개념이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므로, 설령 신이 존재할지라도 신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통 종교는 완전한 인간이 되려면 인간에 관한 신의 생각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인간을 자유의 화신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무신론은 위안을 주는 신조는 아니었지만 다른 실존주의자들은 신의 부재를 긍정적인 해방으로 보았다. 모리스 메를로퐁티(1908~1961)는 신이 인간의 경이를 고취하는 대신 오히려 부정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신은 절대적인 완전함을 표현하기에 우리가 할 일이나 이룰 일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알베르 카뮈(1913~1960)도 인류애를 구현하기 위해 신을 부정해야 한다는 영웅적 무신론을 역설했다. 늘 그렇듯이 무신론자들의 말은 일리가 있다. 실제로 과거에 신은 인간의 창조성을 억압하는데 쓰였다. 만일 신이 가능한 모든 문제와 우연한 상황에 포괄적인 대답을 한다면 오히려 신은 우리의 경이나 성취의 감각을 억누를 수 있다.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무신론은 따분하고 부적절한 유신론보다 훨씬 종교적일 수 있다. 

 

- 1950년대 A. J. 에이어(1910~1991) 같은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신을 믿는다는 것이 이치에 맞는지 물었다. 에이어는 오직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자연과학만 신뢰할 수 있는 앎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했으므로, 신이 존재하는가보다는 신 개념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질문했다. 에이어에 따르면, 어떤 명제가 그 진위를 가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그 명제는 무의미하다. 예를 들어 "화성에 지적 생명체가 존재한다"라는 말은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기술적 방법이 있으므로 의미를 지닌다. 마찬가지로 하늘에 있는 전통적인 노인(신)을 믿는 단순한 신자가 "나는 신을 믿는다"고 말할 때, 무의미한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은 뒤에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좀 더 지적인 신자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어떠한 의미로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말의 인간적 의미에서 선하지 않다"라고 말할 때다. 이런 말은 너무 모호하고 검증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무의미하다. 에이어는 "유신론은 너무 혼란스럽고 '신'이 나타나는 여러 문장도 일관되지 않고,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해 믿음(belief)·불신(unbelief), 신앙(faith)·불신앙(unfaith)에 대해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했다. 무신론은 유신론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고 무의미하다. '신'이라는 개념에는 부정하거나 의심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 실증주의자들은 프로이트처럼 종교적 믿음을 과학이 극복해야 할 인간의 미성숙함으로 보았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언어철학자들은 에이어가 '검증 원리(verification principle)'라고 부른 것 자체가 검증 불가능함을 지적하면서 논리실증주의를 비판했다. 오늘날 우리는 물리적 자연 세계만을 설명할 수 있는 과학에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을것이다.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과학이 자연 세계를 인간과 명백히 분리된 것으로 본 시기에 스스로를 과학자로 규정했다고 지적했다.  

 

-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개혁가들 모두 신비주의를 불법화하거나 주변으로 몰아냈고 과학적 이성주의 시대에는 이러한 인식 방법을 장려하지 않았다. 1960년대 이후 요가, 명상, 불교에 대한 열정으로 표현되는 신비주의에 새로운 관심이 일어났지만 신비주의 신앙은 경험적이고 객관적인 사고방식과 쉽게 융화되기가 어렵다. 신비주의자의 신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전문가의 지도 아래 고도로 난해한 훈련이 필요하다. 그것은 작품 완성에 심혈을 기울이는 예술가처럼 집중적인 노력을 통해 신으로 불리는 실재에 대한 독창적인 체험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미리 준비되어 대기 중인 신 체험을 표방하지 않기에 무엇이든지 빨리 대면하고 처리하려는 현대 사회의 일반 대중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신앙 형태이다. 이러한 신비주의 신앙의 신은 예배에 참석한 신도들을 손뼉 치게 하고 방언하게 만드는 부흥 강사가 만들어낸 즉각적인 황홀경 체험 속에서 느껴지는 신이 결코 아니다. 

 

- 그러나 비록 고도의 집중적 신비주의 수련을 받지 않더라도 누구나 신비주의적 태도를 지닐 수는 있다. 신비주의자의 높은 의식 상태에 도달할 수 없더라도 신이 단순한 감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또는 '신'이라는 단어가 표현할 수 없는 초월적인 실재의 상징일 뿐임을 배울 수 있다. 신비주의적 불가지론은 우리가 독단적인 확신을 품고 이 복잡한 문제에 뛰어드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이 개인적 신앙에 적절히 통합되지 않을 경우, 간접 신비주의라는 무의미한 추상으로 보일 가능성도 있다. 간접 신비주의는 시의 원문을 읽지 않고 비평가의 글을 읽는 것만큼 불만족스러울 수 있다. 신비주의는 일반 대중을 배척해서가 아니라 이 진리가 특별한 훈련을 받은 후에만 마음의 직관적인 부분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능력이 접근할 수 없는 특정한 경로로 다다를 때 만날 수 있다.

-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자신들의 신비 체험을 신 체험으로 규정하기 시작한 이래 유일신론자들은 자신들을 위한 신을 창조해 왔다. 신은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존재처럼 자명한 사실로 여겨진 적이 거의 없다.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상상력을 발휘하려는 의지를 잃어버린 것 같다. 물론 이것이 재앙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종교적 관념은 타당한 가치를 제시하지 못하면 슬며시 사라지곤 했다. 오늘날의 신 개념이 더 유효하지 않다면 그것은 버려질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사람들은 항상 영성의 초점 역할을 하는 상징을 창조해 왔다. 인간은 삶의 경이와 표현할 수 없는 의미에 대한 감각을 키우기 위해 항상 자신을 위한 믿음을 창조해 왔다. 오늘날 사회에 팽배한 목적상실, 소외, 문화적 혼돈과 폭력은 현대인들이 이 시대에 걸맞은 신 개념을 창조하지 못하고 절망에 빠져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 미국인의 99퍼센트가 신을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근본주의와 묵시론, '순간적인' 은사 운동 형태의 종교가 널리 퍼져 있어 안심할 수 없다. 건강하지 못한 미국 사회의 징후는 증가하는 범죄율, 마약 중독, 사형 제도의 부활을 통해 드러난다. 유럽에서도 한때 인간 의식에 존재했던 신의 빈 자리가 커지고 있다.

 

- 신이 사라진 삶의 황량함을 토마스 하디(Thomas Hardy)는 영웅적 무신론을 주장한 니체와는 다른 형태로 표현했다. 20세기를 눈앞에 둔 1900년 12월 30일에 쓴 <어둠 속의 개똥지빠귀>라는 시에서 하디는 믿음이 더는 삶에 의미를 제시하지 못하는 영혼의 죽음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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