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이나가키 에미코] 그리고 생활은 계속된다

일루젼 2023. 10. 8.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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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나가키 에미코 / 김미형
출판 : 엘리
출간 : 2018.02.07


       

<퇴사하겠습니다>를 읽고 바로 이어서 <그리고 생활은 계속된다>를 읽었다. 제목만 봐도 전작과 연결되는 책임이 분명했다.

 

이나가키 에미코의 농담은 마스다 미리와 비슷하면서도 훨씬 밝다. 사실 조금 지나치게 밝아서, 활자가 아닌 면대면으로 만나게 된다면 살짝 부담스러울 것 같기도 하다. 자기 자신을 농담의 소재로 삼는 것은 좋은 선택이지만, 자조나 너스레가 내게는 좀 과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같은 저자의 책을 연이어 읽은 것은 그녀가 여러모로 희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저자만큼 즐겁게 '극단적인 삶'을 실천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물론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이들은 적지 않다. 당장 <인투 더 플래닛>의 저자 질 하이너스만 해도 그렇다. 커리어를 위해 한계를 벗어난 노력을 쏟아붓는 이들도, 종교적으로 고행과 참선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처럼 완전히 평범한 일상생활을 극단적으로 살아가는 경우는 드물다. 게다가 어떠한 목적도 없이 -극기나 해탈 같은- 견뎌내고 참는 것이 아닌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이렇게 독특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니.

 

해서 저자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고 싶었다. 음. 관점을 조금 달리하면, 활자인데도 이런 마음이 들게 하다니 면대면으로 만나게 된다면 상당히 인간적인 매력을 뿜어낼 것 같기도 하다. (아프로 헤어로 자꾸만 시선이 쏠릴 것 같지만) 

 

나 또한 많은 식재료들을 낭비해 왔다. 잘 챙겨 먹겠다며 의욕에 차서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는, 귀찮음과 바쁨을 핑계로 방치하다 버리기 일쑤였다. 비축용으로 구매한 건조식품들조차 유통기한을 넘기곤 했으니... 그런 점에서 '냉장고는 '언젠가'라는 인간의 욕망을 담는 상자'라는 저자의 표현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사실 아무리 고민해봐도 나는 저자와 같은 선택을 하고 싶지는 않다. 마음에서 우러나서 행한다면 모르겠지만, '옳다'는 이유로 자신을 괴롭히고 싶지는 않다. 절전을 넘어 '무전(無電)'. 에어컨과 선풍기, 드라이기와 청소기까지는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전등과 냉장고와 세탁기도 없는 삶이라니.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을 정도여야 지속가능한 삶으로 편입이 가능하다. 나는 차라리 깨끗하게 인정하겠다. 이 고통이 저 고통보다 견딜만하다.

"스스로에게 중요한 가치순으로 삶을 정렬했을 때, 나에게 환경보호와 원자력 발전과 전력은 나의 편안함과 게으름보다 아래에 있다."

 

각자의 삶의 형태는 사실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스스로가 그것을 인식하고, 의식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실천해 가는 삶을 살아갈 때 진정한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가치를 찾아가기 위한 기회가 삶은 아닐까. 현재의 나에게는 '불가능'의 영역에서 재미와 행복을 찾으며 살고 있는 저자가 놀랍고 존경스러웠다. 

 

이 책에 소개된 것들 중 몇 가지는 나도 실천해보려 한다. 이를테면 야채를 말려서 국이나 조림으로 만들어 먹는다거나, 매일 거르지 않고 요가를 한다거나 하는 것은 나 역시 갖고 싶은 습관들이다.

 

할 수 있는 만큼, 그리고 하고 싶은 만큼.

무리한 목표에 짓눌리지 않도록, 틀에 박힌 반복에 질식하지 않도록.  

 

매일 조금씩의 도전과 변화가 존재하는 삶은 '성장'하는 삶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노화하는 삶이 아니라 성장하는 삶을 살고 싶다. 

 

즐겁게 읽었다.  

 


   

- 인생 참 여러 가지, 많은 일이 있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달려왔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걱정이 끊이질 않는다. 참 많은 일이 있었고, 참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소중히 여겨왔던 것들에게 이별을 고하기로 했다.

풍족한 소비. 전기. 아끼던 물건들. 

 

- 잘 살고는 있을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든다.
달리 말하면 내 욕심을 비우다 보니, 타인의 행복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이런, 어느새 난 나 자신에 대해서는 마음을 비우게 된 걸까?
으음... 그렇구나. 어쩌면... 혼자가 된다는 건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 나는 어쩌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어떻게 평가할까, 그런 것에만 신경 쓰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혼자가 되는 걸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자가 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기로 결심한 순간.

 

- 어쩌면 엄청난 광맥을 찾아낸 것인지도 몰라, 그런 반신반의 속에 저는 오늘도 부지런히 주변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아아, 오해하지 마시길. 다른 분들에게 저와 같은 극단적인 생활을 해보라고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이것 하나만큼은 마음 한구석에 담아두고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지금 세상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입니다. 다들 그렇게 말합니다. 경기가 안 좋다, 인구가 줄고 있다, 빈부 격차는 심해지기만 한다, 어디를 보아도 사방이 꽉 막힌 느낌이다. 그런데 저는 홀로,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런 건방진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세상을 버려선 안 되는 것이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는 것을 나의 몸으로 체험하고,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놀라면서 말이지요.

 

- 전기세는 한 달에 150엔, 옷과 구두는 그 유명한 프랑스인만큼만 갖고 있고, 더위와 추위는 그냥 견디고, 집안일은 오직 내 몸과 시행착오로 버티고 있다. 식사는 휴대용 가스버너로 지은 밥, 국, 소금에 절인 야채로 해결한다. 가스도 끊어버렸기 때문에 이틀에 한 번 목욕탕 가는 것이 가장 큰 오락거리가 되었다. 
그런 독신이다.

- 내가 벌인 짓이지만, 어느새 미지의 땅에 표착해 버린 느낌이다. 솔직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고도성장기에 나고 자라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좋은 삶이라는 '인생 게임'을 아무런 의구심 없이 받아들였고 오로지 앞만 보며 달려왔다. 


- 내게도 꿈꾸던 이상적인 삶이란 것이 있었다.
그럭저럭 괜찮은 수입...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한 세련된 느낌의 볕 잘 드는 널찍한 집에는 작은 정원이 딸려 있고...
앤티크 가구들을 모아놓고 친한 친구들이 찾아와 "집 너무 멋있다"라고 칭찬해 주면 "호호호" 하고 자연스레 웃어넘기고...
인생의 동반자인 사랑스러운 반려동물을 키우고...
나이를 먹어도 멋을 부릴 줄 알고...
가끔은 예쁘게 차려입고 나가 디너 코스를 천천히 음미하며 삶을 즐기는...

- 아아, 내가 써놓고도 식은땀이... 대체 어디서 이런 이미지를 끌어모아 머릿속에 담아두고 살았는지.
지극히 평범한 월급쟁이 집안이었던 우리 집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사는 사람을 내 눈으로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현실감이라곤 요만큼도 없는, 잡지에서 엿본 연예인들의 반짝반짝 빛나는 생활을 제멋대로 재구성한 각본인 셈이다. 하지만 정보 사회의 각인 효과는 생각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양이다. 흐릿한 신기루 같은 '꿈'인데도, 아무런 의심 없이, 마치 자명한 일처럼, 그런 생활을 꿈꾸는 게 당연하다 여기며 살아왔다. 

(리뷰자 주 : 어라.)

 

- 에히메 현에 있는 이카타 원자력발전소에서 국내 최초로 '출력조정 실험'이 시행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원자력발전소에서는 정해진 양의 전기를 하루 종일 만들어내므로 수요가 적은 밤중에는 대량의 전기가 남아돈다. 그걸 쓰지 않고 버리는 게 아깝다며 출력을 조절하는 실험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원자력발전소 반대파가 실험의 위험성을 근거로 항의에 나섰다.

- 다카마쓰에 있던 시코쿠전력 본사로 전국에서 수천 명이 모여들어 떠들썩하게 시위를 했다. 한 선배 기자는 학생운동의 추억을 곱씹으며 "데모를 보는 게 몇 년 만이야"라며 흥분한 표정이었지만, 그 지역 주민들은 갑자기 나타난 이질적인 히피 집단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외지 사람들이 몰려와 감 놔라 대추 놔라 시끄럽기는...' 그런 시선.

- 나도 솔직히 말해서 싫었다. 우리의 기술력은 믿을 만하다, 사고 가능성을 따지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원자력발전소 없이 어떻게 지금 같은 편리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겠나. 당시만 해도 그런 분위기였다. 원자력발전소 반대는 일부 괴짜들의 비현실적인 주장이며 촌스러운 뉴스거리였다. 

- 실험이 무사히 끝나자 나는 내심 시원해했다. 시위 기사를 적당히 써서 넘기고 바로 본업인 경찰서 출입 기자로 복귀했다. 새벽이나 심야에 형사 집에 쳐들어가 은폐된 사건은 없는지 캐묻고 다녔다. 그것이 회사가 기대하는 특종 경쟁이자, 나에 대한 평가를 높이는 길이었다. 원자력발전소를 둘러싼 수많은 모순들에 대해서는 그 후 단 한 번도 파고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중대한 일이 벌어지는데도, 코앞에 힌트가 주어졌는데도, 사람들 장단에 맞춰 적당히 잔꾀를 부리느라 바빴던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 그랬기 때문에 원자력발전소 폭발 영상을 보았을 때, 표현할 길 없는 감정이 끓어올랐다.

- 큰 사고가 터지면 언론은 무조건 "책임자가 누구야, 나와!" 하는 논조로 추궁한다. 두 번 다시 같은 사고가 발생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절차이긴 하다. 하지만 내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기는 한 걸까. 


- '안전 신화'에 안주하고 전기가 주는 편리함에 젖어 사느라 차고 넘치는 경고를 우습게 보았다. 하잘것없는 내 이익만 추구하느라 마땅히 했어야 할 일을 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 내가 무슨 낯짝으로 '책임 추궁'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 과거를 안은 채 언론에 종사하는 것 자체가 얼굴이 달아오르는 일이었다. 

 

- 그러나 나 하나 책임지고 회사를 그만둔들 뭐가 달라지겠어, 이번엔 그런 옹졸한 변명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고개를 들었다. 나에게 제일 중요한 건 역시 나였던 것이다.

 

-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게 없진 않았던 걸까. 
이미 버스는 지나가버렸지만, 지금 와서 한심하고 촌스럽게 무슨 짓이냐는 말을 들을지언정, 무언가 해야만 했다.
먼저, 가면을 벗고 민낯을 드러내야 한다. 그다음 뻔뻔스럽다는 비판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세상에 태연히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기가 필요했다. 나를 새로이 무장해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개인적 차원의 탈원전 계획'이다.

 

- 처음엔 안절부절못했다. 있어야 할 게 없는 것 같은 쓸쓸함. 하지만 정말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그렇게 많을 리 없다. 리모컨이라는 수단을 없애고 나니, 몇 걸음 걸어가 코드를 꽂아야 하는 데서 느껴지는 사소한 귀찮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보다 더 컸다. 
이렇게 아주 쉽게, 쓸쓸함이 사라졌다.

 

- 창밖에서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가 들려온다. 이 집에 십 년 넘게 살면서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소리였다. '풍류'라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한자로는 風流, 말 그대로 바람의 흐름을 느끼면서 하루하루를 살기 시작했다. 

- 그렇다, 무언가를 없애면 그곳의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원래 거기 있었지만, 무언가가 있음으로 해서 보이지 않았던, 혹은 보지 않으려 했던 세계가. 

- 바깥세상도 완전히 달라졌다. 
회사에서도 백화점에서도 역에서도, 이제 나는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걸어서 계단을 오르내린다. 전기는 '없는 것'이니까.

 

- 알고는 있다. 너무 과장되게 들리리라는 것을. 
하지만, 있으면 편리한 것들이 어느새 꼭 있어야 하는 것들로 변한 게 아닐까.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없어지는 게 두려운 것은 아닐까. 불안한 게 아닐까. 

- 그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하고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니 (엄청나게 큰일을 한 건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어떻게든 되었다. 그 경험이 마치 포스를 손에 넣은 제다이 기사라도 된 듯이, 나의 세계관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 이상한 건 바로 나였다. 나만 왠지 감각이 달랐다. 원인은 단 하나. 나는 냉난방기기를 쓰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 냉난방 기기를 사용하다 보면 추위와 더위는 어느새 물리쳐야 할 적이 된다. 아, 덥다. 꾹. 아, 춥다. 꾹... 불쾌함은 버튼 하나로 해결한다. 적은 바로 사라지고 곧이어 균일하고 평온한 세계가 찾아든다. 하지만 냉난방을 포기하면 그러지를 못한다. 덥든 춥든 대항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 상대를 '불쾌하게' 여기거나 '적'이라고 생각하면, 남는 건 허무함뿐이다. 백만 번 항의해 봐야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냥 포기하는 수밖에. 
그야 물론 덥다는 생각은 한다. 다만 판단을 내리지 않을 뿐이다. 덥다, 끝. 그게 뭐?
다시 말하자면, 아무리 더워도 일단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 사람이든 물건이든, 받아들이기 힘든 상대를 받아들여야 할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그 상대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
자세히 보면, 싫다, 싸워야 할 적이다, 하고 일방적으로 단정하던 상대에게서 조금이나마 좋은 점, 괜찮은 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아주 조금씩이라도 상대를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다독일 수 있다. 

 

- 나는 냉난방을 포기함으로써 어느새 그런 미약한 변화를 끊임없이 찾아낼 수 있게 된 게 아닐까. 순간적인 시원함을 발견하며 소소한 기쁨에 젖어드는 훈련을 거듭하게 된 게 아닐까.

 

- 우리의 소화기관은 냉장고와 직결되어 있다. 
그것은 '혁명'이라는 단어 말고는 다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냉장고를 졸업하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 그런데 숨겨진 비밀이 있었다. 
전기화 주택의 전기요금이 비교적 저렴했던 이유는 밤 열한 시부터 아침 일곱 시까지 이용하는 '야간전력'이 매우 싸게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막대한 전력을 소비하는 게 온수인데 그 온수를 값싼 심야전력으로 이용한 것이다. 한밤중에 물을 끓여놓고 낮 동안 탱크에 보관했다가 저녁이나 밤에 목욕할 수 있게 한다. 한밤중에 끓여놓은 물을 다음 날 밤까지 저장하는 시스템이니 에너지 효율의 측면에서 매우 모순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런 방식을 취한 까닭은, 원자력발전소를 배제하면 설명할 길이 없다. 

 

- 원자력발전소는 전기를 안정되게 공급한다고 하는데, 일단 발전을 시작하면 늘 일정한 전력을 공급한다는 뜻이다. 이건 안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달리 말하면 융통성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사람들이 활동하지 않아 전력수요가 줄어드는 한밤중에도 원자력발전소는 모범생처럼 열심히 전기를 내보낸다. 전기를 축적할 수 있으면 그게 제일 좋겠지만, 현재 기술력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무도 쓰지 않는 전기는 버릴 수밖에 없다. 어차피 버릴 거라면 이 전기를 이용하자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 전기온수기이다. 게다가 가스회사를 밟고 올라갈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그런데 원전 사고로 상황이 역전되었다.

 

- 바로 조사에 착수했다. 나무에는 살균 작용이 있기 때문에 나무밥통에 넣은 밥은 잘 상하지 않는단다. 일주일 보관은 불가능할지 몰라도, 겨울이면 며칠은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당장 달려 나가 가장 작은 나무밥통을 샀다. 그리고 평소처럼 새벽에 냄비로 밥을 하고 나무밥통에 밥을 넣었다. 잠시 후 시험 삼아 집어 먹어보았다. 
마, 맛있다...

- 어디선가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나무가 불필요한 수분을 알맞게 흡수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갓 지은 밥보다 더 윤기가 나고 식감이 좋다. 밥이 한 알 한 알 저마다 독립해 살아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식은 후에도 맛이 있다! 이렇게 맛있는 밥은 처음이다. 데우지 않은 찬밥도 충분히 맛있다. 살면서, 식은 밥은 맛이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그건, 밥을 지은 다음 전기밥솥에 넣어 방치하거나 냉동했기 때문이었다. 

 

- 이렇게 훌륭한 도구를 여태껏 왜 쓰지 않았을까. 
말할 것도 없이, 전기밥솥이 등장하고 냉장고가 등장하고 전자레인지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편리함'이 모든 것을 휩쓸고 간다.
나무밥통에 넣은 밥은 오래 보관할 수 있었다. 밥이 상하지는 않고 수분만 점점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마르는 속도는 예상보다 빨랐다. 우쭐대며 일주일을 넣어뒀더니 완전히 딱딱해졌다. 음, 옛날 사람들이 전쟁터에 갖고 나갔다는 '마른밥'이 이거구나! 
그대로 씹었다가는 이가 깨질 것 같아서 죽으로 만들어 먹었다. 맛있었다. 꽤 괜찮은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다.

 

- 이렇게, 처음엔 '폭거'처럼 느껴졌던 냉장고 없는 생활도 시행착오를 거치다 보니 나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역시 인생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가 보다. 봄이 다가오고 팽팽하게 차갑던 공기가 부드러워지면서, 베란다에 둔 반찬에서 이틀이면 쉰내가 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냉장고 없는 식품 보관이라는 현실과 본격적으로 맞닥뜨려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 집으로 들어가기 전, 역 안 마트에 들러 가게 안을 한 바퀴 돈다. 하루 중 가장 마음이 놓이는, 소소하지만 행복한 시간이다. 
다채로운 마트 안은 유혹으로 넘쳐난다. 특별 할인가 상품, 서비스 상품, 계절 상품. 아, 이거, 사고 싶었어, 저것도 좀 사볼까.

 

- 하지만 이제 나는 함부로 손을 뻗을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보관할 수 없으니 그날 먹을 것만 사야 한다. 당근과 튀긴 두부를 샀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니, 충분할 뿐만 아니라 네 개들이 당근을 하루에 다 먹어치울 수는 없다. 하나를 쓰고 나머지 세 개는 절임을 하거나 말려서 보관해야 한다. 그리고 이미 나의 집에서는 그렇게 남은 야채들이 내가 돌아오기만을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고 있다. 가게 안을 어슬렁거리다가도 그 모습이 어른거려 빈손으로 나오는 일도 허다했다. 

 

- 지금까지의 장보기 방식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 냉장고가 있으면 내일, 모레, 어쩌면 일주일 후까지 내다보고 장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냉동해 두면 한 달 후 미래까지 시야를 확장할 수 있다.

 
- 그래, 냉장고란 시간을 정리하는 장치로구나. 우리는 냉장고를 소유함으로써 시간이라는, 본디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었던 것들을 '쟁여두는' 엄청난 힘까지 소유할 수 있게 되었구나.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모두 살 수 있게 되었구나. 참 좋구나.


- 머릿속으로 미래의 식탁을 상상하며 '언젠가' 먹을 것들을 열심히 장바구니에 담는다.
냉장고는 그런 '언젠가'의 꿈으로 가득 차 있다. 냉장고란 '언젠가의 상자'이자 '꿈의 상자'인 것이다.

 

- '언젠가' 먹으면 되니까. 물론 그 '언젠가'는 쉽게 잊힌다. 냉장고 안은 '언젠가 먹을 식품'으로 넘쳐나, 관리가 불가능해진다. 아니, 이제는 아무도 제대로 관리하려 들지 않는다. 냉장고는 '먹는 것'을 '살아가기 위한 중심축'이 아닌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변질시켜 버렸다. 

 

- 냉장고 안에는 사고 싶다는 욕구와 먹고 싶다는 욕구가 터질 듯이 가득 차 있다. 인간의 욕망은 멈출 줄을 모르고, 한번 들어간 대부분의 음식은 두 번 다시 꺼내지지도 않은 채 생을 마감한다. 음식은 이제 더 이상 음식이 아니다.

냉장고는 세상에 처음 나올 때에 비하면 믿을 수 없을 만큼 비대해졌다. 사람들의 욕망이 확대되어 가는 모습 그 자체이다. 

 

- 이런 상황에서 먹고사는 일의 골격은 잊히기 십상이다. 이래서는 먹고사는 게 무엇인지 아무도 알 수 없게 된다. 욕망과 욕망이 아닌 것의 경계가 애매해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내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점점 더 알 수 없어지고 사람들은 멍하니 욕망의 지배를 받는다. 상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만 점차 커져갈 뿐이다. 
그게 바로, 지금 우리의 불안의 정체가 아닐까.

-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수입이 줄어드는 게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망 그 자체를 두려워해야 한다. 폭주하는, 더 이상 스스로 제어할 수 없게 된 막연한 욕망. 

 

- 그 욕망에서 탈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그 욕망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는 일이다. 나는 어떻게 하면 정말로 만족할 수 있을까,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일이다. 냉장고가 있다고 무작정 식료품을 채우며 결국 무엇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게 정말 내가 행복해지는 길인지, 제대로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 인생이란 예상하지 못한 곳에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는 법이다. 물론 복병처럼 나타나 나쁜 쪽으로 굴러가게 만드는 일이 허다하지만, 좋은 쪽으로 굴러가게 만드는 일도 아주 없지는 않다. 드물게나마 좋은 쪽으로 굴러가게 만드는 건 어떤 때일까. 그걸 알 수만 있다면 인생이 얼마나 편할까. 

 

- 그런데 최근에 내게는 그 '법칙'이 보이는 것도 같다. 대부분의 경우, 좋은 일이 시작되기 전엔 엄청난 역경과 어려움이 덮친다. 그리고 그 어둠이 깊을수록, 무언가 큰 것을 얻게 된다. 

 

- 내 절전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끝까지 가볼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전기화 맨션'에 살게 된 경위는 앞서 얘기했다. 내가 저지른 일이기는 하지만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 나는 평범하게 살려고 해도, 집에서 밥을 먹고 목욕을 하는 최소한의 생활을 하려고 해도, 막대한 전력을 소비하게 됐다. 그때까지의 내 피나는 노력을 비웃는 악마와 같은 집이었다. 내 절전 생활 최대의 난관이었다. 

- 솔직히 말할 수밖에 없겠지. 그때, 모두 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엄청난 속도로 밀려왔다. '먹는 것'과 '목욕'은 내 최대의 오락이었다. 좋아하는 음식에 좋아하는 사케를 곁들여 천천히 음미한다. 마음껏 취해, 열어젖힌 창문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아아 숨을 내쉰다. 그리고 기뻤던 일, 마음 상했던 일을 모두 돌아보며 욕조에 오래오래 몸을 담가 하루를 정리한다. 

... 이게 없이 무슨 인생인가! 이런 소소한 즐거움이 있었기에, 나는 이 별 볼 일 없고 고독한 인생을 어떻게든 견뎌왔던 것인데. 


- 아무리 절전을 위해서라지만 먹는 것과 목욕만큼은 절대로 참거나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인생을 망가뜨리면서까지 하는 절전이라니, 너무 심하다. 너무 가혹하다.

그래서 처음엔 절전에 대해서는 잊어버릴까 싶기도 했다. 뭐 어때, 내 탓도 아닌데. 집 탓이지. 전기를 펑펑 쓰면서 요리하고 전기를 펑펑 쓰면서 목욕물을 받고... 어쩔 수 없잖아! 뭘 하든 전기를 써야 한다잖아!

 

-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잊어버리려고 해도 잊을 수 없었다. 대량 소비되는 '전기 님'을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대량 살상에 손을 댄 기분.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는 확신이 들었다. 이 넓은 땅에 나보다 전기를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게 전기란 친구처럼 피가 통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절전이란 전기를 부정하는 행위가 아니라 전기를 소중히 여기는 행위다. 반짝반짝 빛나는 전기화 주택에서는 요리를 하면서도 목욕을 하면서도, 내게 즐거움을 주던 것들을 전혀 즐길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나는 결심했다. 

 

- 관리가 편하다, 스위치 하나면 다 된다. 그런 사소한 귀찮음을 피하려고 이런 집을 분양해 온 게 지금까지의 우리였다. 원전 사고를 통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으면서도, 지금도 그 부의 유산은 여전히 남아 있고, 전기화 주택은 잘만 거래되고 있다. 이런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것도 내게 주어진 시련이 아닐까. 내가 여기서 포기하고 도망친다면 에너지를 소중히 여기는 사회를 만들자고 호소할 자격을 잃게 되는 것이다. 
좋아 그래, 까짓것, 전기화 주택에서 절전이란 걸 해보자! 이런 엉뚱한 짓을, 나 말고 대체 누가 하겠어!

 

-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아무래도 좋다. 누구 하나 칭찬해주지 않아도 좋아. 이건 내 마음의 문제니까! 
 
- 절전은 하고 싶다. 그렇다고 요리의 즐거움을 포기하거나 외식을 늘이거나 반찬을 사다 먹는 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짓이다. 그래서 나 스스로에게 부과한 규칙은, 지금까지처럼 즐겁게 먹고 싶은 것을 만든다. 하지만 전기는 가급적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다들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열공급은 IH쿠킹 히터밖에 못하는데. 가스버너를 쓰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건 열외로 했다. 그건 전면전이 아니었다. 도피 같았다. 보는 사람이 없을수록 이런 부분에서는 더 엄격해져야지, 그럼.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찌어찌 해냈다. 포기하지 않고 머리를 짜내다 보면 지혜가 생기는 법이다. 필수품이라 여겼던 가전제품들을 몇 해 동안 버려온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지혜와 용기만 있으면 인생에 불가능은 없다. (아마도) 

 

- 절전이든 인생이든 끝이 없는 벽과의 싸움이다. 벽은 너무나 높으니, 그 높이에만 집중하다 보면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 진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사소한 것이라도 몇 번이든 도전하겠다고 결심하면, 아주 미약하게나마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래.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 거야, 아마도...

 

- 나는 문득 주위를 돌아보다 무서운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헛된 월세를 지불해주고 있는 것은 전기온수기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코드를 뽑은 냉장고, 세탁기, 모두들 크기가 엄청나다. 냉정한 눈으로 다시 보니 외관상 특별히 훌륭한 것도 아니다. 아니, 딱 부러지게 말하면 못생겼다. 원래 '내게 도움이 된다' 싶으면 대체로 다 용서가 된다. 모든 게 나름 귀여운 구석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싶으면, 상황은 역전된다. 

 

- 여태껏 내 욕망을 반성하는 일 없이, 그저 편리하다는 이유만으로, 물건을 손에 넣는 것만 목표로 삼고 살아왔다. 돈을 벌어 물건을 사면 편리하고 풍요로워진다고 믿었다. 무엇이 필요한지, 정말로 필요한지, 그것이 나를 풍요롭게 하는지, 그런 사고는 완전히 멈춘 채였다. 그렇게 물건은 계속 늘어났고, 늘어난 물건들 둘러싸여 집은 점점 더 좁아졌고, 좀 더 넓은 집을 얻기 위해 더 많은 돈이 필요했고, 악착같이 일하고 경쟁하고, 시간이 모자라 더욱 편리한 것들을 원하게 되고, 또 물건이 늘어나고... 욕망은 악순환을 계속하며 커져갔다. 

 

- 그런데 욕망의 안경을 벗었더니, 내 앞에 전혀 다른 풍경이 보인다. 
그곳에는 비싼 돈을 들여가며 처치곤란 못난이 제품들을 사들이고, 그걸 놓아둘 곳을 마련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부지런히 월세를 갖다 바치는 어리석은 내가 있었다. 

 

- 전기온수기와 전쟁을 치르고 진이 빠진 나는 근처 대중목욕탕에 다니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게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입구가 되었다. 

 

- 그뿐만이 아니다. 대중목욕탕은 사회 교육의 장이기도 하다. 알몸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지위도 경력도 재산도 아닌, 오직 '태도'만이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 내가 기분 좋게 지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기분 좋게 지낼 수 있게 배려해야 한다. 옆 사람에게 물이 튀지는 않는가, 탕 안에서 조용히 매너를 지킬 수 있는가 사용하고 난 바가지와 의자는 잘 씻어서 제자리에 갖다 놓을 수 있는가. 그런 문제가 하나하나 시험대에 오른다. 다른 세대 사람들과 공존하고 서로 배우는 장소이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대중목욕탕에 다니는 아이들은 사회 속에서 살아갈 기술과 대화 능력을 키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이렇게나 훌륭한 목욕탕이, 1960년대 말을 정점으로 점점 줄다가 지금은 연간 약 이백 개씩 문을 닫는다고 한다. 단순 계산으로 보자면 이십 년 후엔 제로가 되는 숫자다. 

 

-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그것은 그것이 우리가 꿈꿔온 풍요로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다 집 안에서 해결하는 것.
다시 말해, 무엇이든 다 집 안에 '소유하는' 것. 

 

- 부모님의 추억은 소유의 꿈과 즐거움으로 넘쳐난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비교적 유복했던 외가에는 얼음냉장고가 있었다고 한다. 그걸로 수박을 차갑게 해 먹는 게 정말 맛있었다고, 냉장고가 없었던 아버지는 그게 너무나 부러웠다고 했다.

 

- 그런 얘기를 나누는 부모님 표정에선 분명 빛이 난다.
고도성장기는 '소유의 시절'이 아니었을까. 
그런 시절을 살아온 두 분의 가장 큰 꿈은 '욕조가 딸린 목욕탕'을 갖는 것이었다.

 

- 냉장고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음식을 나눠 먹었다. 세탁기와 욕실이 없던 시절, 사람들은 세탁장과 대중목욕탕에서 만났다. 그곳에는 물론 정해진 규칙이 있었을 것이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 문제아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다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장벽들을 넘어서면서, 사소한 관계들을 쌓아가면서,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내면서, 언젠가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서로 돕는 힘이 생겨났을 것이다. '내가 너'였을 것이다.
그것 역시 그것 나름의 '풍요로움'이 아니었을까.

 

- 하지만 우리는 이제 '차이'가 없으면 풍요로움을 느낄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것은 덫이다. 도달할 수 있는 목표점이 없기 때문이다. 뭔가를 손에 넣더라도, 주위를 둘러보면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손에 넣은 사람들이 있다. 겨우 손에 넣은 만족은 곧바로 불만과 비참의 원천이 된다. 집 안을 차갑게 만들기 위해 에어컨 실외기는 밖으로 엄청난 열풍을 쏟아낸다. 더운 바깥과 비교해, '참 시원하다'며 우리는 만족스러워한다. 

 

-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우리는 그저 '차이'만 만들면 되는가? 나의 풍요를 위해, 가난한 존재를 위안으로 삼으며?
그런 경쟁에 과연 도달점이 있을까? 어쩌면 그 도달점이 원전사고였던 건 아닐까? 나만 좋으면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도 좋다는 사고방식이 원전 사태를 가져왔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껏 누군가를 밟으며 살아왔다. 아니, 지금도 누군가를 밟고 있다. 

 

- 그래서 우리는 풍요로워졌는가? 다들 괴롭다고 아우성이다. 왜일까? 풍요로워지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사야 한다. 그것도 끊임없이 사야 한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해야 하니까. 끝없는 경쟁이 이어진다. 돈은 없어지고, 집은 좁아지고, 월세는 늘어간다. 

 

- 어디가 끝인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안과 밖'을 나누는 사고방식 자체를 바꾸면, 재미있게도 세상이 달라 보인다.

- 이렇게 생각하자 돈에 대한 사고방식까지 달라졌다. 
지금까진 '같은 물건이라면 조금이라도 싸게 사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싸게 사면, 나는 이득을 보지만 상대는 손해를 입게 된다. 이득을 보았으니 그걸로 됐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행동이 반복되면, 손해를 보고 얼굴이 어두워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게 된다. 친구 없는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살면서 나는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까.

 

- 내게 무언가를 제공해 주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내 쪽에서 더 많은 것을 지불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일종의 '응원 티켓'으로 내가 아니라 상대에게 이득이 돌아가게 만들겠다고 생각하면, '지불하는 것'은 돈이 아니어도 된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때로는 웃음이거나, 때로는 고맙다는 인사이거나, 약간의 나눔이거나. 그렇게 하다 보면 결국엔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이 점점 더 기운을 내게 된다. 강해진다. 친구가 되어준다. 그러면 나 역시 풍요로워진다. 그것이 이득의 진정한 모습이 아닐까.  

 

- '지역 활성화'도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좋아하는 지역으로 조금씩 바꿔가는 것. 도널드 트럼프 같은 부동산 업자가 아니어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다. 바뀌지 않는 정치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며 살지 않아도 된다. 불안과 무기력함에 지쳐 분노 속에 살지 않아도 된다. 

 

- 돈을 쓰는 것을 소비라고 생각하면, 돈을 쓰는 건 즐겁지만 동시에 괴로운 일이 되어버린다. 쓰고 나면 남는 게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비'가 아니라 '투자'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응원이란 투자니까. 투자한 돈은 줄지 않고 언젠가 나에게 돌아온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 투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으면 돈이 있든 없든 크게 연연하지 않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인생에 대한 두려움이 상당히 줄어들지 않을까. 

 

- 절전을 계기로, 내 세계는 생각지도 못한 부분까지 극적으로 변화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는 막막한 느낌은 사라졌다. 음... 그야말로 진정한 '혁신'이다. 

 

- 지금까지 여러 번 말했듯이 가전제품을 내다 버린 일은 내 생활뿐만 아니라 마음과 사고방식 자체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달리 말하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 과연 있을까 하는 '위험한 질문'이 끓어오르게 됐다. 

- 내가 절전을 하면서 내다 버린 것은 궁극적으로는 '전기'다. 기껏해야 전기, 그래도 전기. 우리는 어느새 전기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는 생활에 젖어 있다. 청소, 빨래, 요리 등등의 기본적인 삶 속에 가전제품은 마치 공기처럼 스며들어 있다. 정전이라도 되면, 사람들은 전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새삼스레 놀란다. 현대인은 코드에 연결되어야만 겨우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그러나 나는 원전 사고에 등이 떠밀려 그 생명선을 하나씩 뽑아왔다.
두려움에 떨며, 혹시 이러다 죽는 건 아닐까 무서워하며.
그런데 결과적으로 어떻게든 살고 있다.
게다가 '없으면 안 된다'고 믿었던 것들이, 놀랍게도, 없으면 없는 대로 살 만하다. 아니 '생각보다 재미있고', 아니지, '정말이지 재미있고', 아니다. '없는 편이 정말이지 속 편하다'.

 

- 그것은 절전이 고통일 것이라는 절전 생활은 인내의 생활일 것이라는 내가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세계였다.
편리한 것들에 둘러싸여 있던 내 삶은, 말하자면 필요한 영양과 약을 공급해 주는 튜브에 연결된 중환자의 삶이 아니었을까.
튜브에 연결되어 있는 한, 생명을 연장시킬 수는 있다. 안심할 수 있고. 대신 침대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

- 내가 해온 일들은 튜브를 하나둘 떼어내는 일이었다. 말 그대로 결사의 각오였다. 그리고 굳은 결의로 그 일을 해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 '자유'다.

- 그때까지 나는 돈을 많이 벌어 사고 싶은 물건을 사는 게 자유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무언가를 손에 넣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은, 자유는커녕 불안과 불만의 원천일 뿐이다. 무언가를 손에 넣으면 그다음 손에 넣고 싶은 것이 생기는 법. 목표에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다. 
진정한 자유란 그런 믿음에서 빠져나오는 것, 즉 '없어도 살 수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 더 이상 그 무엇도 갈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체득하는 것. 그것이 아닐까. 

- 그런데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에 대해 '대단하다'거나, '애쓴다'거나, '참아야 할 일이 많아서 가엾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초절전 생활을 언제까지 계속할 건지 물으며 진지하게 걱정해 준다. 하지만 그만두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누군가 1억 엔을 주며 냉장고를 써달라고 해도 나는 한 치의 주저함 없이 단번에 거절할 것이다. 정말이다! 어떻게 탈출한 감옥인데 자진해서 다시 들어가겠는가.

 

- 아니다. 나야말로 내 시간을 둘로 나누어왔다.
'쓸모없는 시간'과 '쓸모 있는 시간'으로.

- '쓸모없는 시간'이란 집안일 같은 '귀찮은 일'을 하는 시간이다. 인정도 못 받고 돈도 안 되는 일들을 하는 시간.
'쓸모 있는 시간'이란 그 반대다. 돈이 되는 시간 인정받을 수 있는 시간.

- 그렇다. 생각해 보니 나는 지금까지 풍요로워지기 위해 사람만 차별화한 게 아니었다.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남보다 위에 올라서기 위해, 내 시간을 차별해 왔다. 쓸모없는 시간을 지겹게 여기고 배척해 왔다. 그래서 노력하면 할수록 내 인생의 일부를 증오하게 되었다. 그게 '바람직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덧붙이자면, 나는 입으로는 정의로운 척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엔 쓸모없는 것과 쓸모 있는 게 있다고 나누어 생각해 왔다. 시간뿐만이 아니다. 속으로는 세상엔 도움이 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여겨왔다. 그리고 나는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쓸모없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고 늘 그렇게 생각했었다. 
 
- 무언가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건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고 훌륭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문제는 어느새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배척하고 경멸하게 된다는 것. '무언가에 도움이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나', 그것이 목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 대체 '도움이 된다'는 건 무엇일까. 세상에는 참 많은 것들이 있다.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단 한 사람에게 한순간에만 도움이 되는 것도 있다. 그리고 지금 세상에는 결국 도움이 될 기회가 한 번도 없을 것 같이 보이는 것들도 있다. 과연 무엇이 더 훌륭한 것일까.

 

- <길>이란 유명한 이탈리아 영화가 있다.

난 오래도록 이 영화를 싫어했다.
가난하고 젊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은 여자 주인공에게, 어떤 남자가 "세상에 쓸모없는 건 없어" 하고 위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남자는 주위에 굴러다니던 돌멩이를 주워 "바로 이 돌멩이처럼 말이야"라고 말한다. 그 돌멩이를 바라보며 주인공은 슬프게 웃는다. 그 남자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 정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아니, 조금만 더 쓸모 있는 걸 예로 들어주면 안 됐던 걸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나 역시 마음 한구석에서, 그 여자 주인공을 그 돌멩이 정도의 인간이라 여기고 있었다. 난 저런 사람은 되기 싫다고.  

 

- 하지만 이젠 알 것 같다.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결국엔 나에게 상처를 주리라는 것을. 늙어 죽어갈 때가 오면 사람은 누구나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 아니, 늙어 죽을 때뿐만이 아니다. 병에 걸리거나, 다치거나, 직장에서 인정을 못 받거나, 다른 사람에게 거절당하거나, 사람들은 온갖 국면에서 언제든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다들 그런 존재가 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모든 게 그리 생각처럼 잘 풀리진 않는다. 벼랑에서 떨어지는 길은 언제든 활짝 열려 있다. 그래서 다들 두려움에 떨며 살아간다. 그런 공포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단 하나뿐이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건 하나도 없다! 그렇게 믿는 것이다. 그것이 영화 속 그 남자가 열심히 하고자 했던 말이 아닐까?

 

- 일상 속 '낭비',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일들, '귀찮다'고 여겼던 일들에 정성을 쏟아부으며, 대부분 하찮은 일이지만, 어리석다는 마음을 접어두고 열심히 하다 보면 왠지 재미를 느끼게 된다. 치노팬츠 같은 걸 손으로 비벼 빨며 일희일비한다든가. 

 

- 그래서 한 번쯤 속았다 치고 직접 해보길 권하고 싶다. 결국 속았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크게 손해 볼 일은 없을 테니까. 그보다 조금만 생각해 보자. 만약 당신이 이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고 하찮다'고 여겼던 일이 쓸모가 없기는커녕 생각보다 재미있는 일이 된다면, 앞으로 살아가는 모든 시간이 오락이 되지 않겠는가! 그게 바로 혁명이다! 


- 난 더 이상 집안일을 차별하지 않는다. 절대로 쭈그려 앉아 빨래를 하는 시간을 결코 쓸모없는 시간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건 바로 나를 위해서다. 세상 한구석에서 끈 떨어진 연처럼 살아가고 있지만, 나 역시 결코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매일매일 확인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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