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로저 젤라즈니 / 조호근
원제 : For a Breath I Tarry
출판 : 데이원
출간 : 2023.07.06
씨앗 안에는 이미 나무가 들어있다.
<프로스트와 베타>는 새롭게 읽는 창세기이며 언젠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예지다. 시작과 끝이 존재하지 않는 원형(圓形)은 언제나 원형(原型)적 무엇인가와 닿아있다.
김보영의 <종의 기원담>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종의 기원담>이 기계 생명에 대한 찬가이자 낯섦을 통해 바라본 인간의 맨얼굴이었다면 로저 젤라즈니의 <프로스트와 베타>는 끝없이 되풀이되는 회귀와 순환에 대한 비전서다.
나는 젤라즈니의 글들이 좋다.
김상훈 역자의 번역으로 <프로스트와 베타>를 다시 읽고 싶어졌다. <앰버 연대기>도.
- 그들은 그를 프로스트라 불렀다. 솔컴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도 프로스트는 가장 훌륭하고, 가장 강대하고, 가장 이해하기 힘든 존재였다.
그가 이름을 받고 지구의 절반을 관장하게 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 프로스트를 창조한 날 솔컴은 상보 함수의 단절을 경험했고, 이는 광기라 칭해 마땅한 것이었다. 36시간 이상 계속되는 전례 없는 태양 흑점 폭발이 유발한 일이었다. 가장 중요한 회로 구축 단계에서 이런 사태가 벌어졌고, 상황이 종료되고 보니 프로스트는 이미 완성된 후였다.
- 솔컴은 일시적 기억상실 기간에 유례없는 존재를 창조해 냈다는 유례없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솔컴은 프로스트가 처음에 희망했던 대로의 피조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 북반구의 모든 기계가 그에게 보고를 올리고 명령을 받았다. 그는 오로지 솔컴에게만 보고하고 오로지 솔컴에게만 명령을 받았다.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수십만 가지의 공정을 처리하는 데에는 매일 몇 단위 시간 정도만 할애하면 충분했다.
비교적 한가한 시간을 소모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별다른 지시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는 데이터를 처리하는 존재였고, 때론 그 이상이었다.
- 그는 그에 따라 행동했다.
취미를 가진 기계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취미를 가지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적은 없기에, 그는 취미를 가졌다.
- 그의 취미는 인간이었다.
- 드높은 영구 궤도에서, 솔컴은 푸른 별처럼 군림하며 지구상의 모든 행위를 통제했다. 적어도 그러려고 애썼다.
그러나 솔컴에 대적하는 권능이 존재했다.
바로 그를 대체할 존재였다.
- 인간은 솔컴을 하늘에 올리고 세계를 재생할 능력을 부여하는 한편, '대체자'를 만들어 지표 아래 깊은 곳에 안치했다. 핵물리학까지 손을 뻗은 인간들이 정치적 행위로 솔컴에 손상을 입히기라도 하면, 깊은 지하에 있어서 지구가 완전히 분쇄되지 않는 한 파괴되지 않을 디브컴이 재건 작업을 넘겨받을 예정이었다.
- 솔컴이 빗나간 핵미사일에 타격을 받은 순간, 디브컴이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솔컴은 스스로 손상을 복구하고 작동을 계속했다.
디브컴은 솔컴이 손상을 입은 순간 '대체자'에게 통제권이 넘어온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솔컴은 같은 명령을 '수복할 수 없는 손상'으로 해석했고, 그 정도 손상은 아니었다는 이유로 계속 통제권을 행사했다.
- 디브컴은 솔컴의 명령에 면역이 있으며 지하와 지상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한 무리의 로봇을 창조하고, 그들을 통해 이미 존재하는 기계들을 유혹했다. 이 로봇들은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기계들을 제압하여 자신들과 같은 새로운 회로를 설치했다.
이렇게 하여 디브컴의 세력은 날로 강성해졌다.
- 오랜 세월이 흘러가며, 그들은 가끔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천상의 솔컴이여, 자신의 부당한 통제권을 만끽하는 자여..."
"활성화되지 말았어야 할 존재여, 어찌하여 이 통신 대역을 더럽히는가?"
"내가 원한다면 언제나 말할 수 있고, 언제나 말하리라는 점을 보이기 위해서다."
"그 또한 내 모르는 바는 아니니."
"... 그리고 내 정당한 통제권을 확립하기 위해서다."
"잘못된 전제에서 비롯된 주장일 뿐, 그대에게 정당한 권리란 존재하지 않으니."
"그런 논리의 흐름이야말로 네 손상을 입증하는 것이다."
"인간이 여기 있어 그대가 저들의 욕망을 어떻게 만족시켰는지 볼 수만 있다면..."
- "그대는 나의 피조물을 타락시킨다. 나의 일꾼들을 거짓된 길로 이끈다."
"너 또한 내 피조물과 일꾼을 파괴한다."
"그것은 오로지 내 직접 그대를 공격할 수 없기 때문이니."
"네가 천상에 위치하므로 나 또한 같은 어려움을 겪는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없었을 터인데."
"그대의 땅굴 속 파괴자들의 무리에게로 돌아가라."
"솔컴이여, 언젠가는 때가 올 것이다. 내 땅굴에서 지구의 재생을 감독할 때가 올 것이다."
"그런 날은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
- "그렇다면 오로지 진정한 논리만을 이용하여 내 체계에 대하여 승리해 보아라."
"무슨 의미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대는 내 수하인 프로스트를 아는가...?"
- "책이 더 있나?"
"지금은 없소. 가끔 우연히 발견할 뿐이오."
"전부 스캔하고 싶다."
- "인간이란," 모르델은 운을 띄웠다.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본성을 지녔소. 그래도 설명이야 시도할 수 있겠지. 인간은 계측을 모르는 존재였다오."
"인간이 계측을 몰랐을 리가." 프로스트가 말했다. "계측을 모르는데 어떻게 기계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계측을 못 했다는 이야기가 아니오." 모르델이 말했다. "계측을 몰랐다는 거지. 그 둘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요."
- 모르델은 시추용 막대를 아래로 뻗어 눈 속에 박았다.
그리고 다시 동체로 회수하여 얼음 한 조각을 들어 올려 보였다.
"이 얼음을 보시오, 강대한 프로스트여. 당신은 이 물질의 구성, 부피, 질량, 온도를 인식할 수 있소. 인간은 그저 보기만 하는 것으로는 그런 일이 불가능했다오. 성질을 알려주는 도구를 만들 수는 있었지만, 당신처럼 계측으로 세상을 인식할 수는 없었다는 거요. 그러나 인간은 이 얼음에 대해서 당신이 모르는 사실을 하나 알고 있었지."
"그것이 무엇인가?"
"이 얼음이 차갑다는 것이오." 모르델은 이렇게 말하며 얼음 조각을 던져 버렸다.
- "'차갑다"란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렇소. 인간을 기준으로 상대적이지."
"그러나 인간이 물체가 차갑다고 느끼기 시작하는 특정 온도를 인식한다면, 나도 '차갑다'라는 성질을 안다고 할 수 있다."
"그건 아니오." 모르델이 말했다. "계측의 기준이 하나 추가된 것뿐이지. '차갑다'란 인간의 생리에서 유래한 감각이오."
- "충분한 데이터만 주어진다면, 나 또한 물질의 '차갑다'는 상태를 인식할 수 있는 환산 계수를 구할 수 있다."
"하나의 상태로서는 알 수 있겠지만, 감각 자체는 알 수 없소."
"네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다."
- "앞서 말했듯이,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법이오. 인간의 감각은 유기적이었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소. 그런 감각 때문에 인간에게는 기분과 감정이 존재했소. 이는 종종 다른 기분과 감정으로 이어졌고, 그 새로운 감정은 다른 감정을 촉발해서, 마침내 인간의 인식이란 처음 자극을 준 물체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 되곤 했소. 이런 인식의 경로는 인간이 아닌 존재로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오. 인간은 인치나 미터, 파운드나 갤런을 느끼지 않았소. 더위와 추위를 느끼고, 무거움과 가벼움을 느꼈지. 증오와 사랑, 자부심과 절망을 알았소. 그런 것들은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오. 당신은 인간이 알 필요 없었던 것들을 알 수 있을 뿐이오. 부피, 질량, 온도, 중력, 기분에는 공식이 없소. 감정에는 환산 계수가 존재하지 않소."
"아니, 존재할 것이다." 프로스트가 말했다. "존재하는 사물은 인식할 수 있게 마련이다."
"이번에도 당신은 계측을 논하고 있소. 나는 질적인 경험을 논하는 거요. 기계란 인간에 비하자면 안팎이 뒤집힌 존재요. 기계는 인간과는 달리 과정의 세부 사항을 서술할 수 있지만, 인간처럼 그 과정 자체를 경험할 수는 없소."
"방법이 있을 것이다."
- "그렇다면 천 년이면 되겠소? 그 정도면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처리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일 거요."
"안 된다." 프로스트가 말했다.
"그러면 얼마나 긴 시간을 원하는 거요?"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프로스트가 말했다.
"그럼 어쩌겠단 것이오?"
"시간을 기준으로 흥정하지 않겠다."
- "계약의 한쪽 당사자, 작은 기계는 상대 당사자, 프로스트가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쪽 당사자, 프로스트는 상대 당사자, 작은 기계에게 그것이 틀렸다고 주장했다. 나는 충분한 데이터만 있으면 내가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따라서 그 명제의 달성을 거래의 조건으로 사용하겠다."
- "실패 그 자체가 아니라 실패의 인정을 조건으로 삼고자 하는 것 아니오." 그는 말했다. "그렇게 계약을 회피하는 구문은 인정할 수 없소. 실패하고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쪽에서 계약의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겠소."
"그렇지 않다." 프로스트가 말했다. "실패했다는 사실을 내가 자각한다면 그것이 곧 인정이 될 것이다. 주기적으로, 이를테면 반세기마다 나를 검사해서 그런 자각이 존재하는지,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는지를 확인해도 좋다. 내부 논리의 활동은 나 자신도 막을 수 없으며, 나는 언제나 최고 성능으로 작동한다. 나 자신이 실패했다는 결론을 내렸다면 명확히 드러날 것이다."
- 드높은 곳의 솔컴은 프로스트의 모든 호출에 전혀 응답하지 않았고, 이는 프로스트가 자신의 선택대로 행동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솔컴이 마치 추락하는 사파이어처럼 오로라의 무지갯빛 깃발 너머로, 모든 색채를 아우르는 순백의 눈밭 너머로, 별빛 사이를 메우는 칠흑의 하늘을 가로질러 가속하는 아래에서, 프로스트는 디브컴과의 계약을 마무리하고, 원자 상태가 안정된 구리판에 그 내용을 기록해서 모르델의 터릿에 넣어 주었다. 모르델은 구리판을 땅속 깊은 곳의 디브컴에게 전달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마치 평화와도 흡사한, 극점의 순수한 침묵만을 뒤에 남긴 채로.
- 그러는 내내 솔컴은 일련의 흐름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프로스트는 이것이 인식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무엇을? 명확한 해답을 알 수 없었다.
- "더 가져와라." 프로스트가 말했다.
"이런 세상에, 위대한 프로스트여, 이제 남은 것이 없소." 그가 대답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스캔했소."
"그럼 여기서 떠나라."
"이제 인간이 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겠소?"
"아니다. 이제부터 대량의 데이터 처리와 구조화를 수행해야 한다. 떠나라."
그렇게 그는 떠났다.
- "됐소. 아직도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시오?"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 "프로스트?"
"뭐지?"
"당신은 어리석은 자요."
- 모든 지시에 우선하는, "내 이야기를 들으라"라는 절대명령 때문에 그대로 얼어붙어 있을 뿐이었다.
- "내 말에는 인간의 말과 같은 힘이 실려 있으니, 내 파쇄 장치에 마지막 인간의 유골이 들어 있으며 나는 그 인간에서 유래한 파괴된 상징 살해자이자 고대의 이야기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의 이야기다. 이것이 인간의 유골이다. 나는 지구의 마지막 인간을 파쇄했다. 고의로 한 일은 아니었다."
- 프로스트는 자신의 귀와 코와 미각 감지기를 잡아 뜯고, 눈을 부수고는 전부 땅바닥에 내던졌다.
"나는 아직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저 기계도 알아보았을 것이다."
- "이곳에는 당신에게 감정을 유발할 만한 아름다움이 남아 있소?" 모르델이 물었다.
"나는 모르겠다." 프로스트가 말했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을 마주치면 어떻게 알아볼 생각이오?"
"지금까지 내가 알아온 다른 모든 것들과 어딘가 다를 것이다." 프로스트가 대답했다.
- "베타-머신은 나와 동등한 자다. 나는 그곳에서 아무런 권한을 행사할 수도 없고, 들어갈 허가를 받지도 못했다."
"베타-머신은 당신과 동등하지 않소, 강대한 프로스트여. 권능을 다투게 된다면 분명 그대가 승자가 될 것이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디브컴은 이미 당신들이 대치할 경우의 가능성을 전부 분석해 놓았소."
"나는 베타-머신을 적대하지 않을 것이다. 남반구에 들어갈 권한 또한 없다.”
"남반구에 들어가지 말라는 명령을 직접 받은 적은 있소?"
"없다. 그러나 예전부터 계속 지켜 오던 규칙이다."
"디브컴과 한 것 같은 거래를 할 권한은 가진 적이 있소?"
"아니,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같은 이유로 남반구에 들어가면 되잖소. 별일 없을 거요. 떠나라는 명령을 받은 다음에 결정하면 되는 일이오."
"네 논리에 오류는 없는 듯하다. 좌표를 불러라."
- 이렇게 프로스트는 남반구에 진입했다.
- "안녕하십니까, 프로스트, 북반구의 주재자여! 나는 베타-머신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뛰어난 베타-머신, 남반구의 주재자여! 프로스트가 당신의 전파를 수신합니다."
"어찌하여 허가 없이 나의 남반구를 방문했습니까?"
- 움직이는 그에게 솔컴의 말이 들려왔다.
"프로스트여, 어찌하여 네 영역이 아닌 남반구에 발길을 들였느냐?"
"브라이트 디파일을 방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프로스트는 대답했다.
"그리고 내가 남반구에서 내 뜻을 대행하도록 지정한 베타-머신의 말을 거역한 이유는 무엇이냐?"
"저는 오로지 당신께만 명령을 받기 때문입니다."
"불충분한 답변이다." 솔컴이 말했다. "너는 내가 지정한 질서를 어겼다. 무엇을 추구하느라 그리 행한 것이냐?"
- "내게는 여분의 연산 시간이 아주 많습니다." 베타-머신이 말했다. "데이터를 보내 주시면 당신을 돕겠습니다."
프로스트는 머뭇거렸다.
"왜 나를 도우려는 겁니까?"
"당신이 내 질문에 답할 때마다 새 질문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고 싶은 이유를 물을 수도 있겠지만, 당신의 반응을 보니 무한에 이르는 질문의 연쇄를 불러올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신이 브라이트 디파일에 온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서 당신의 문제를 돕기로 선택한 겁니다."
"그것이 유일한 이유입니까?"
- "미안합니다, 훌륭한 베타-머신이여. 당신이 내 동료라는 것은 알지만, 이것은 나 스스로 풀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미안하다'가 무엇입니까?"
"일종의 수사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호의를 품고 있으며, 당신을 적대하지 않고, 당신의 제안을 감사하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프로스트! 프로스트! 그 또한 다른 단어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열린 표현입니다. 당신은 어디서 그런 단어와 그 의미를 학습한 것입니까?"
"인간의 도서관에서 배웠습니다." 프로스트가 말했다.
- "내가 처리할 수 있도록 그 데이터의 일부를 전송해 줄 수 있습니까?"
- "잘 있었나, 모르델. 나를 검사해 보도록. 네가 찾는 것은 구하지 못할 것이다."
"왜 포기하지 않는 거요, 프로스트? 디브컴께서는 거의 한 세기 동안 당신의 그림을 검토했고, 그것이 명백히 예술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셨소. 솔컴도 동의했소."
"솔컴께서 왜 디브컴의 일에 간여하시는가?"
- "아직도! 아직도 인정하지 않는구려! 프로스트여, 당신처럼 강대한 논리의 세례를 받은 존재가, 어찌하여 이런 간단한 결론에 이르는 데 터무니없이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오."
"네 말이 옳을지도 모르지. 이만 가도 좋다."
- "프로스트?"
"무슨 일입니까, 베타?"
"당신의 문제가 무한히 연쇄되는 성질을 가진다는 점을 이해했습니다. 끝맺지 못하고 문제를 방치하자니 회로에 교란이 발생합니다. 그러니 데이터를 더 보내 주십시오."
"좋습니다. 내가 지불한 것보다 더 적은 대가로 인간의 도서관 전체를 보내겠습니다."
"'대가'? <무삭제 완본 대사전> 속 정의만으로는 온전히 해석할 수가-"
"지금 보내는 책 중에 <경제학 원론>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을 전부 처리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 남은 재료는 하나뿐이었다.
그는 북극의 얼음층을 다시 구획을 나누어 탐사했다. 이번에는 지표에서 한참 아래까지 탐사의 범위를 넓혔다.
원하던 것을 찾는 데에는 수십 년이 걸렸다.
- 17구의 시체 중에서 살아 있는 세포, 또는 충격을 주어 생명으로 분류되는 활성 상태로 돌릴 수 있는 세포를 찾고 싶었다. 책에서 일러준 바에 의하면, 모든 세포는 하나하나가 작은 인간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이 가능성을 확장해 볼 준비가 되어 있었다.
- "이제 와라, 모르델." 그는 자신이 '어둠의 주파수'라고 부르는 대역으로 전파를 뿌렸다. "와서 내가 이룩한 업적을 목격해라."
그리고 그는 기다렸다. 다리를 파괴하고, 근처 구릉지에서 그의 건설 및 보수 기계와 마주치는 고대의 광석 파쇄기의 이야기를 계속 반복해서 감시하면서.
- "성공하면 무엇을 할 계획입니까?"
프로스트는 그쪽으로는 깊게 고려한 적이 없었다. 문제를 명확히 인식하고 해결하기로 정한 이후로는, 그저 목적을 이루는 것 자체만이 중요했다.
"나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말했다. "나는 그저... 인간이 될 겁니다."
- 그러자 인간의 도서관을 전부 독파한 베타는 인간적인 수사 하나를 골랐다.
"그렇다면 행운을 빕니다, 프로스트. 지켜보는 이들이 아주 많을 겁니다."
디브컴과 솔컴 둘 다 알고 있으리라고, 프로스트는 판단했다.
- 그들이 무엇을 할까? 문득 궁금해졌다.
신경 쓸 이유가 있을까? 그는 자문했다.
이 질문에는 답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인간이 되는 일이 너무나도 궁금할 뿐이었다.
- "나는 저 기계들에게 접근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프로스트가 말했다.
하늘 한가운데에서 푸른 별이 환히 타올랐다.
"솔컴께서 저 기계들의 우선 명령권을 가져가셨다." 프로스트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위대하신 분들의 손에 달린 일이겠구려." 모르델이 말했다. "우리의 말다툼은 아무 의미도 없게 되었소. 그러니 그 일을 시작합시다. 내가 어떻게 도우면 되겠소?"
"이쪽으로 오라."
- "무엇을 위해서? 왜 재건하는 겁니까? 왜 유지하는 겁니까?"
"인간이 그리 명하였기 때문이다. '대체자'조차도 재건과 유지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인간이 그리 명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명령에는 의문을 품지 말아야 하느니."
- "살 사람이 없는 집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보살필 대상이 없는 기계가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 "네 실험을 금지하겠다, 프로스트."
"그러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내가 직접 너를 파괴할 수도 있다."
"아니요." 프로스트가 말했다. "제 인식 매트릭스의 전송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저를 부순다면, 당신께서는 인간을 살해하는 겁니다."
정적이 흘렀다.
- "전 실패했습니다." 프로스트가 말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토록 많은-"
"방금 불가능하다고 했지!" 어둠의 주파수에서 디브컴이 말했다. "그가 인정한 거다! 프로스트, 너는 내 것이다! 당장 내게로 오라!"
"기다려라." 솔컴이 말했다. "그대와 나도 거래를 하였지 않느냐, '대체자'여. 나는 아직 프로스트에게 할 질문이 남아 있다."
- "무엇이 많다는 것이냐?" 솔컴이 프로스트에게 물었다.
"빛." 프로스트가 대답했다. "소음, 냄새, 모든 데이터가 뒤섞여서 아무것도 계측할 수 없고, 감각은 부정확하고, 게다가-"
- "두려움을 아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솔컴이 말했다.
"지금 너는 프로스트가 성공해 놓고서도, 그저 인간성이 두렵다는 이유에서 성공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냐?"
"나도 아직 모른다. '대체자'여."
- "기계가 스스로 안팎을 뒤집어서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솔컴이 프로스트에게 물었다.
- 그 순간 인간의 도서관을 전부 독파한 베타 머신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인간 외에 절망을 아는 존재가 또 있겠습니까?" 베타가 물었다.
"그를 내게 데려오라." 디브컴이 말했다.
- 인간 공장에서는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 "프로스트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일 리 없다!"
그리고 디브컴은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모르델?"
모르델은 주저 없이 답했다.
"그는 인간의 입술을 통해 내게 말했소. 그는 계측할 수 없는 개념인 두려움과 절망을 아는 존재요. 프로스트는 인간이오."
- "그러나 프로스트가 진정으로 인간인가?"
- "저리 가!" 프로스트가 말했다. "가서 광석이나 부숴!"
기계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동작의 지시와 동작의 수행 사이에 발생하는 긴 시차가 지난 후, 기계는 파쇄 장치를 열고 내용물을 땅바닥에 쏟았다. 그리고 동체를 돌려 절그렁거리며 멀어져 갔다.
- "우리는 그의 생명을 보호하고 육체 안에 간수해야 한다." 디브컴이 말했다.
"그의 인식 매트릭스를 다시 그의 신경계로 되돌려라." 솔컴이 명령했다.
"내가 방법을 알고 있소." 모르델은 이렇게 말하며 기계를 가동했다.
- "멈춰!" 프로스트가 외쳤다. "너희는 동정심도 없나?"
"없소." 모르델이 말했다. "내가 아는 것은 계측과-"
- "... 의무뿐이오."
그가 이렇게 덧붙임과 동시에, 바닥의 인간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입니까?"
"당신들 둘 다 옳고, 둘 다 틀렸습니다." 프로스트가 말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지요. 이제 새로운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 "그럼 이제 베타를 연결해 주십시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프로스트?"
"안녕, 베타. 이걸 들어 봐요. '저 멀리, 저녁과 아침 그리고 열두 방향의 바람이 오가는 하늘로부터, 생명의 가닥이 날려와 엮여 나를 이루었다네. 그리하여 나는 이곳에 있네.'"
- "제게는 손이 없습니다." 베타가 말했다.
"두어 개쯤 가지고 싶지 않나요?"
- "그러면 내게로 와요. 심판의 날을 너무 오래 미룰 수 없는 곳, 브라이트 디파일로."
- 미국 뉴웨이브 SF의 대표적 작가, 로저 조지프 젤라즈니는 1932년 미국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났다. 가톨릭 가정에서 성장하여 고전 SF 작품을 탐독하는 학창 시절을 보내고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으며, 데뷔한 이듬해인 1963년에 발표한 중편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로 일약 SF계의 총아로 떠올랐다. <프로스트와 베타 For a Breath I Tarry>는 1966년 영국 뉴웨이브 SF 잡지 <뉴월드>에 처음 게재된 작품으로, 이후 무어콕, 실버버그, 스핀래드 등 쟁쟁한 편집자들에 의해 여러 앤솔러지에 수록되었다. 한국에서는 중단편집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에 수록되어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은 바 있다.
- 로저 젤라즈니의 초기 작품군은 과거의 전설과 신화, 그리고 문학 작품에서 많은 모티프를 가져온다. 그중 일부는 차용이고, 일부는 재해석이며, 일부는 고차원의 존재를 묘사하는 수단이며, 그 무대 또한 핵전쟁으로 인류가 파멸한 세계, 외계인이 들끓는 지구, 고전 SF적인 화성, 신화 속 세상 등 실로 다양하다. 그러나 그 목표가 인간성의 본질과 그 한계의 탐구에 있다는 점만은 모든 작품에서 일관적이라 할 수 있다.
- 작품의 모티프는 비교적 선명한 편이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와 욥기, <파우스트>의 재해석은 굳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죄를 고백하며 방랑하는 광석 파쇄기에서는 '방황하는 유대인', 또는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노수부의 노래>가 엿보인다. 다만 작품의 원제이며 작중에서 제목이 언급되고, 마지막으로 주인공이 직접 인용하기까지 하는 A. E. 하우스먼의 시집 <슈롭셔의 젊은이>의 32번째 시는, 한국 독자들에게 비교적 생소한 작품이라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 SF 독자라면 어슐러 K. 르 귄의 단편집 제목으로 귀에 익은 시이기도 할 것이다. 일출과 일몰과 열두 방향의 바람을 타고 날아온 생명의 질료가 우연히 엮여 '나'라는 생명을 만든다. 화자는 한 번의 숨결이면 흩어질 정도로 부질없는 존재이나, 굳이 그를 미루면서까지 상대방의 손길을 청하여 도움을 주고자 한다. 화자와 청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재 의의란 바로 그 찰나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 종국에는 자신의 존재 의의조차 의심하며 일종의 데미우르고스인 창조주마저 뛰어넘기에 이르지만, 그에 내재한 인간성의 씨앗은 결국 인간의 육체를 통해 한정된 지각 능력과 유기체의 신경망, 그리고 유한한 생명을 얻게 되기 전까지는 발아하지 못한다. 신화 속 영웅이 필멸의 육신을 버리고 신성이라는 새 옷을 걸치는 것처럼, 제한된 전지성과 전능성, 그리고 불멸성을 갖춘 존재인 주인공은 그 모든 것을 버리고 필멸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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