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오윤희
출판 : 고즈넉이엔티
출간 : 2023.03.03
3권 이후로 더 읽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꾸 눈에 띄어 4권까지 읽게 되었다.
스쳐가는 음악이나 향기에서 문득 추억이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그보다는 드물지만 책에서도 불쑥 과거와의 연결점이 떠오르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삼개주막 기담회>를 읽고 있으면 어쩐지 <항설백물어>나 <별순검>, <한성별곡>이 떠오른다. 그 기분이 좋아서 자꾸만 찾아 읽게 되는 것 같다.
(<전설의 고향>이 아닌 이유는, 저자가 한(恨) 이외에도 제각기의 감정과 사연을 녹여내려 애쓴 부분들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괴담이 아닌 기담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4권에서는 이전 작들에서 등장했던 인물이나 사물이 다시금 등장하며 인연들이 얽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전까지의 이야기들이 마무리되는 느낌을 받았는데, 해서 만약 5권이 나온다면 이전까지와는 다른 형식적 변화가 필요할 것 같다.
선노미는 소설 내에서 일종의 패관(稗官)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나름의 기연으로 인해 별다른 노력 없이도 다양한 기담을 접하고 전해왔지만, 이제는 '이야기의 힘'을 사용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으로 보아 본격적인 이야기꾼 활동을 하게 될 듯하다. '끼가 없다', '언문을 안다', '글을 써라' 등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방향성이 정해졌으니 앞으로는 선노미가 기담집을 쓰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는데... 이전과 동일한 구성이되 언패(諺稗)라고만 묘사해서는 자기 복제를 피할 수 없다.
또한 아직 어리다고는 하나 선노미가 자신에게 지워진 부채감에만 집중하는 모습도 아쉬운 부분이다. 만약 그가 진정으로 자신의 일을 '죄'라고 인식하고 있다면, 설사 만춘이 악인이었다고는 하나 그의 명복을 빈다거나 사죄하는 모습이 등장했어야 하지 않나 싶다. 만춘에게 악함을, 선노미에게 정당성과 선함을 부과하고 싶었던 것은 이해하지만 그가 지속적으로 '살인자가 되었다'는 사실에만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다소 의아하다. 마치 '너 때문에 내가 살인자가 되고 말았잖아'라고 괴로워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아쉬움들이 있지만, 그래도 아는 맛이 무섭다고 매번 즐겁게 읽게 된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나루터 이야기와 휘영청 보름달이 떠오른 물 이야기가 나왔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다.
즐겁게 읽었다.
아. <한성별곡> 다시 보고 싶다.
- 선노미는 우생을 빤히 쳐다보았다. 우생은 영달이 사라진 게 분명한데도 아무런 동요가 없어 보였다. 머물던 객이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갑자기 자취를 감췄는데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자신이 사라지게 한 게 아니라면?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선노미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어쩌면 우생도 만춘 같은 자인지 모른다. 청나라에서 자신이 죽여버리고 말았던 사람. 만춘은 파도에 떠밀려 온 연암과 선노미를 보살피는 척하면서 눈을 멀게 하고 정신까지 마비시키려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우생이 암자에서 머물게 한 것도, 춘식이나 영달 같은 뜨내기들을 조건 없이 받아들인 것도 모두 수상했다. 예전엔 호의라고 여겨졌던 것들이 지금은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워졌다. 혹시 오갈 데 없는 사람들 데려다 몰래 어딘가로 팔아버리는 건 아닐까, 하고.
- 만약 우생에게 무슨 흑심이 있는 거라면 어서 빨리 여길 벗어나는 게 좋겠다. 지금이라도 그만 떠나겠다고 할까? 아냐, 섣불리 그랬다간 눈치채고 수를 써서 막으려 할 수 있어. 다른 사람들처럼 몰래 떠나는 게 나을 거야. 하지만 그들은 제 발로 떠난 게 아닐지도 모르는데... 머릿속이 복잡해 선노미는 아침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 누군가 선노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내저었지만, 고통을 참느라 이를 악물고 내뱉은 험악한 목소리는 분명 그림 속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끔찍하고 처절한 비명이었다. 귀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선노미는 직감했다. 이 소리는 귀를 통해 들리는 게 아니었다. 알 수 없는 힘으로 인해 이 지옥 같은 광경의 소리들은 오직 선노미에게만 들리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들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구해줄 수 없다면 너도 여기로 와! 누군가 악에 받친 음성으로 소리쳤다. 그래, 너도 들어와! 너도 죄를 지었잖아!'
한기가 선노미의 온몸을 타고 내렸다. 분노와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금방이라도 그림 속에서 튀어나와 자신의 멱살을 틀어쥘 것 같았다.
- 땅땅.
한 번 더 내리치는 소리가 들리자 그림 속 인간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췄다. 그 상태 그대로 그림 속에 붙박였다.
- 사람들을 제압한 이는 벽화 양쪽 귀퉁이에 그려진 두 괴물이었다. 하나는 사람 몸에 소의 머리를 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역시 사람 몸에 말 머리를 하고 있었다. 둘 다 각각 한 손엔 삼지창을, 다른 한 손엔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우두나찰, 마두나찰!'
- 나루터에서 자란 선노미는 두 나찰의 존재가 낯설지 않았다. 뱃사람들 중엔 배를 타기 전에 절이나 사당을 찾아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게 물길이라 어디든 기도를 올려 안위를 빌고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어 했다. 언젠가 삼개주막에 들렀던 뱃사람들 얘기에서 선노미는 두 나찰이 죄인들을 지옥에 가두는 일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지옥도... 라고요?"
"그래, 지옥에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린 그림 말이다.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하기 위해 그린 거지. 그림을 본 사람은 나쁜 마음을 먹지 못할 테니까."
(리뷰자 주 : 받을 벌이 두려워 억제되는 것이 과연 교화일까? 그보다는 관련된 모든 이들을 이해하게 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하다면 거리낌없이 선택할 수 있게 될 때가 진정한 탈(脫)이 아닐까 싶다.)
- "지옥도..."
선노미는 우생의 말을 되뇌었다. 하긴 그림 제목을 몰라도 자신이 본 게 지옥이 아니면 뭘까 싶기도 했다. 그 끔찍한 광경이 지옥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을 지옥이라고 불러야 할까.
"스님 눈에도 그림이 움직이는 게 보이나요?"
조금 마음이 가라앉은 선노미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뜻밖에도 우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 속 사람들이 꿈틀대거나 나를 사납게 노려보는 모습이 보인다. 저 그림의 힘을 못 느끼는 건 아마도 불필 정도겠지. 그 아이 눈에는 그냥 무서운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만 보일 게야."
- "죄를 짓지 않아 마음이 깨끗할 테니까."
우생이 잠깐 뜸을 들였다가 씁쓸하게 덧붙였다.
"더 나이를 먹고 마음의 때가 타면 그때는 불필이도 그림이 움직이는 걸 보게 되겠지만 말이다."
- "저런... 혹시 연유를 여쭤봐도 되겠소?"
"... 보시다시피 병이 깊어 살날이 길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가족들 곁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진명은 말을 아꼈다. 누구에게나 말 못 할 사연이 있을 테니까. 가족과 불화가 있을 수도 있고, 형편이 찢어지게 가난해 곧 죽을 사람 약값이라도 덜자는, 애틋한 마음으로 일부러 집을 나왔을 수도 있다.
- "두 번 다시 붓을 손에 쥐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도 집을 나올 때 제일 먼저 집어든 게 이 붓이었습니다. 얼마나 징글징글한 굴레인지..."
목소리에 깊은 회한이 묻어났다.
'사연이 깊겠군.'
진명은 더는 캐묻지 않기로 했다.
- 그 뒤로 박현은 한동안 암자에 머물렀다. 예술가는 성격이 괴팍하고 예민해 타인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고 들었던지라 진명은 조금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예의 바르고 모난 구석이 없었다. 그렇다고 함께 지내기 쉬운 사람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술에 탐닉하는 버릇 때문이었다.
박현의 낯빛이 누렇게 뜬 것도 아마 술을 많이 마셔 간이 망가진 탓일 거라고 진명은 생각했다.
그런 지경에도 그는 눈만 뜨면 술을 찾았다.
- "죽기 전에 고백할 게 있습니다..."
"고백이라니?"
"저 그림은... 지옥도는... 보통 그림이... 아닙니다."
"아무렴, 보통 그림이 아니지. 내가 비록 그림에 문외한이긴 하나, 머리털 나고 저렇게 훌륭한 그림은 처음 보네. 자네는 참으로 뛰어난 재주를 가졌어."
"... 그런 뜻이 아니라..."
박현이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저건...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 "실제로 일어났다고?"
진명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 눈썹을 치켜떴다. 저런 지옥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이 실제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아마... 지금쯤... 일어나고 있겠지요. 혹은 조만간... 벌어지거나."
도통 무슨 뜻인지 진명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생사의 문턱에서 정신이 혼미해지는 걸로만 보였다.
"말짱한... 정신으로... 하는 말입니다."
-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은 진명의 표정을 보며 박현이 덧붙였다.
"제가 그리는 그림은... 언젠가는... 모두... 현실이 되어버리니까요."
"그림이 현실이 되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
-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잘 그려 박현은 천재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붓을 들기만 하면 마치 흘린 것처럼 순식간에 한 폭의 그림을 완성했다. 무얼 그릴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한 존재가 잠시 그의 머리와 몸을 빌려 붓을 움직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화가로서 크게 성공할 거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그의 재능엔 저주가 함께 따라왔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저주란, 그가 그린 그림은 빠르건 늦건 간에 모두 현실로 이뤄진다는 거였다.
- 처음엔 그저 기막힌 우연이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연은 계속해서 쌓였고, 더는 우연으로만 치부하기 어려워졌다. 백발백중 현실이 되는 그의 그림은 오히려 예언이라고 불릴 만했다.
- 그렇다면 아름다운 것, 기쁜 일만 그리면 될 것 아닌가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본인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손에 든 붓은 자꾸만 추악하고 슬픈 장면들만 그리고 있었다. 그래서 박현은 자신이 그린 그림인데도 완성본을 보고 화들짝 놀란 적도 많았다.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억지로 그릴 수 없는 반면,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것들은 애써 그리려 하지 않아도 희한하게 손이 술술 잘 움직였다. 물론 그 그림 속에서 벌어진 일이 현실이 되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 이런 기이한 일들이 반복되자, 박현은 그림 그리는 게 무서워졌다. 하지만 입소문이 나서인지 멀리서도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져 그림을 마음대로 그만둘 수도 없었다. 박현이 점쟁이라도 되는 양 그에게 제 미래를 그려달라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도 그 정도는 양반이었다. 앙심을 품고 누군가를 해코지하는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을 볼 때마다 박현은 인간이 선하게 태어난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세상은 악의로 가득 차 있다고 몸을 떨었다.
- 세상의 더러움을 알게 되면서 박현은 저주받은 재능이 원망스러워졌다. 술을 마시기 시작한 건 그 무렵부터였다. 차라리 그림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장사라도 해볼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한동안 붓을 잡지 않으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그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 열망에 사로잡혀 무언가를 그리게 될 때까지.
그러면 또다시 그린 그림을 보고 괴로워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지독한 괴로움이 밀려오는 만큼 비워내는 술병도 늘어만 갔다.
- 박현의 마음에 불안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저주받은 재능...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맞아떨어졌다.
아들은 사람의 배우자를 보지 않고도 정확히 그리는 희한한 재주를 갖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이 묘한 방식으로 대물림된 것만 같았다. 얼마 안 가 그의 집은 어린 아들에게 미래 배우자를 그려달라고 몰려오는 사람들 때문에 문지방이 다 닳아버릴 지경이었다.
- 신이 나서 떠벌리는 을순의 얘기를 귓전으로 들으며 박현은 절망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미래를 그릴 줄 아는 재능이 결국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리라는 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들까지도 나랑 같은 운명을 걷게 된단 말인가.'
박현은 하늘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 "어째서 그렇게 귀신에 흘린 표정이냐."
우생이 선노미의 안색을 살피며 잠시 이야기를 멈췄다. 아닌 게 아니라 선노미는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다니.
예전에 삼개주막을 찾았던 팔생이라는 보부상이 배우자 얼굴을 그려주는 화가 노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미래를 볼 수 있는 건 축복이 아닌 저주라고 말했다던 노인. 그 노인이 박현이라는 화가의 아들이었던가.
- "그런데 화가는 왜 저런 지옥도를 그린 건가요?"
자신이 그린 그림이 현실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 "지옥을 보았으니까."
- "지옥이란 건 저승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이 세상에도 있지. 어쩌면 이 세상의 지옥이 더 끔찍할지도 모르고."
- "죽은 진이 엄마요. 진이가 제 엄마 물건이라는 건 아는지 늘 갖고 다니면서 만지작거리더라고 짜증이 나다가도 그런 걸 보면 또 안쓰럽고 그래요."
"그 아이한테는 중요한 물건이었겠어."
박현이 비녀를 보며 중얼거렸다. 맨 정신이 아닌 아이라 늘 품고 다니는 물건이 안 보이면 불안할 것이다. 이걸 찾아다니다 위험한 데서 길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 진이네 집은 마을 어귀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야 했다. 이웃들과도 동떨어져 교류도 없을 것 같은 외진 곳이었다. 동네 아낙들이 오다가다 한 번씩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면 좋으련만, 박현은 그마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 우생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뭔가 죄를 지은 모양이구나."
덤덤한 목소리에 비난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선노미는 호된 꾸지람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단박에 풀이 죽었다.
- "그래도 그들이 널 데려가지 않은 걸 보면 가벼운 죄였겠지."
선노미는 목구멍까지 나온 '아니오'라는 말을 가까스로 꿀꺽 삼켰다. 무겁기로 치자면 기껏해야 작당하고 절을 털려했던 춘식과 영달보다 사람을 죽인 제 죄가 훨씬 더 무거울 것이었다. 하지만 우생 앞에서 그런 얘기까지 다 털어놓을 순 없었다. 갑자기 의문이 선노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도 어째서 난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은 거지?'
- "어쩌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우생의 목소리에 선노미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우생이 은은한 시선으로 선노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너는 네가 한 일 때문에 괴로워하고 반성하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그게 그림 속으로 끌려 들어간 악인들과 너의 가장 큰 차이겠지."
- 겨우 그것 때문이라고? 벌을 안 받은 이유가!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선노미는 우생이 하는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 "너는 이미 가슴속에 지옥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우생이 선노미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 '가슴속 지옥이라고...?'
선노미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연경(燕京)에서 만났던 서양인 선교사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았다. 어둠이 마음을 좀먹게 내버려 두지 말라고. 그 역시 잘못을 저지르고 번뇌하던 제 가슴속을 꿰뚫어 보았나 보다.
- "이미 저지른 잘못을 돌이킬 순 없다. 하지만 반성하고 죄를 갚을 순 있어."
선노미 머리 위에서 우생의 위엄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 어떻게 해야 죄를 갚을 수 있나요?"
선노미가 어렵게 입을 뗐다.
"세상에 선한 영향을 끼치는 것도 죄를 갚는 방법 중 하나다. 네가 저지른 잘못을 갚을 수 있을 만큼 앞으로 착한 일을 많이 하도록 해라. 타고난 재주와 능력을 사용해서 말이다."
- "하지만..."
선노미가 당혹스러움에 말꼬리를 흐렸다.
"전 딱히 할 줄 아는 게 없는데요."
우생은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네가 아직 깨닫지 못한 것뿐이야.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필요 없다'는 이름을 가진 불필이조차 틀림없이 쓰일 곳이 있어."
- 하지만 선노미는 마음이 조금 든든해진 것 같았다. 새로운 목표가 생겼으니까. 자신의 쓸모를 찾아 어떻게 그것을 살릴지, 어떻게 세상에 선한 영향을 끼칠지 선택하는 것. 그러니 앞으로의 방랑은 무작정 떠돌던 이제까지와는 다를 터였다.
- 선노미가 웃으며 불필의 까칠까칠한 민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나중에 반드시 훌륭한 스님이 될 거야. 벌써 나한테 큰 깨달음을 줬으니까."
"정말?"
영문도 모른 채 좋아하는 불필과 걱정 어린 얼굴로 배웅하는 우생을 뒤로하고 선노미는 암자를 나섰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가을 하늘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파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 선노미는 세상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 "우리 입장에서도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거야. 네 얼굴 보려고 오는 여인네들도 꽤 생길 거 같거든."
칠성이 선노미의 곱상한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며 덧붙였다.
- 칠성의 제안은 솔깃했다. 이들 무리에 섞이는 편이 훨씬 안전하고 덜 고달플 것 같았다. 그렇지만 별다른 재능도 없는데 무작정 받아들여달라고 하는 건 너무 염치없는 짓이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칠성이 크게 괘념치 않는 투로 다독였다.
- 칠성이 선노미 어깨에 장구를 메어주고 꽹과리를 손에 들린 다음, 위아래로 쓱 훑어보았다.
"그러고 서 있기만 해도 제법 그림이 되네. 어쩌면 꽤 인기가 좋겠어. 사람들은 가무를 잘하는 미소년을 좋아하거든."
칠성은 동료들에게 선노미를 잘 가르치라고 이른 뒤 자리를 떴다.
- 하지만 칠성의 야무진 계획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노미는 자신이 심한 음치에다 박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노미를 가르치는 광대 영일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 "넌 흥이나 끼가 전혀 없어. 이 일을 하려면 그게 제일 중요하거든. 그런데 그건 가르쳐준다고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선노미는 잠자코 머릿속으로 어머니 주모 김 씨 얼굴을 떠올렸다. 말투와 행동거지가 퉁명스럽고, 밤낮으로 소처럼 일만 하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자신이 흥 같은 것과 거리가 먼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연습하면 어느 정도까진 늘 테니 너무 실망하지 말고."
영일이 꽹과리를 든 손을 고쳐 잡으며 말했다. 마치 선노미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다독이는 것처럼 들렸다.
- "저래서야 몸 파는 일 말곤 아무것도 못 하겠는걸."
"길상아, 말이 너무 심하잖아!"
영일이 남자를 다그치며 선노미를 힐끗 보았다.
길상이라고 불린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심하긴 뭐가 심해. 사당패가 매춘하는 게 비밀도 아니고.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으면 몸뚱이라도 팔아야지."
길상이 매서운 눈빛으로 선노미를 쏘아보았다. 말투만큼이나 날이 서 있었다.
"칠성 형님이 무슨 생각에서 널 받아들이겠다고 했는지 모르지만 넌 여기 안 어울려. 등 떠밀려 쫓겨나기 전에 알아서 나가라고."
- 혼자 남은 선노미는 주저앉아 고개를 푹 떨궜다. 길상이 내뱉은 말이 제법 아프게 들렸다. 하지만 길상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건 저도 잘 알았다.
- 선노미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길상이 잃은 건 다리만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갈고닦은 재주와 미래까지 한꺼번에 잃어버렸다. 밥값을 할 수 없으면 몸을 팔거나 사당패를 떠나야 한다고 했던 말은 어쩌면 스스로에게 한 말인지도 몰랐다. 앞길이 막막한 길상의 처지가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 오빠가 당한 일을 보고도 줄타기에 대한 마음을 꺾지 않는 덕임이 어딘가 신기하게도 느껴졌다.
"무섭지."
덕임이 덤덤하게 말했다.
"사실 오빠 사고를 보고 더 무서워졌어."
"그런데 왜 줄타기를 하려고 해?"
"하고 싶으니까."
- 덕임은 줄타기가 마치 타고난 운명이라도 되듯이 말했다.
"넌 그런 거 없어?"
- 선노미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나에겐 없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말려도,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꼭 이루고 싶은 것이. 만약 그런 게 있었더라면 이렇게 낯선 곳을 헤매고 다니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고 싶은 게 있어서 좋겠다."
- 낯빛이 검고 눈매가 음험한 남자였다.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들어 길상은 남자를 무시하려 했다.
"상문(喪門)이 열렸구나."
남자는 분명 길상의 눈을 보며 말했지만, 어떤 대답이나 반응을 구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눈을 통해 길상의 내면 어딘가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조만간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나겠어."
- 얼토당토않은 말에 길상이 결국 무시하지 못하고 버럭 언성을 높였다.
이 인간은 누구길래 일면식도 없는 내 앞에서 이런 흉한 소리를 하나 싶어 쏘아보았다.
"좋은 걸 하나 알려주지."
남자가 길상 곁에 바짝 붙어 섰다. 눅눅한 남자의 숨결이 길상의 뺨에 와닿았다. 길상은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죽은 자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한 마디만큼만 잘라 와. 그러면 그 사람을 계속 만날 수 있을 테니."
"이봐, 당신 누구야? 누구길래 그런 헛소리를 늘어놓는 거야?"
"나?"
남자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키득키득 웃었다.
"널 도와주려는 사람이지. 날 만나려면 여기로 찾아와. 곧 만나고 싶어질 테니까."
- 남자는 길상의 귓전에 제가 사는 곳을 일러주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길상은 남자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노려봤다. 객쩍은 소리라고 흘려듣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영 찜찜했다. 남자가 한 말이 귓가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 "정말 명옥이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건가요?"
"아직도 못 믿겠어?"
무당은 의심하는 길상의 표정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믿음이 없는 자는 신령님이 도와주지 않으신다네. 그러니 믿도록 하게나."
길상이 꿇어앉은 채로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은 머리를 조아리고 빌고 있으라 하고선 딸랑딸랑 방울을 흔들며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덕임은 그간 길상이 태연해 보였던 까닭을 알 것 같았다.
죽음이 비통한 건 죽은 자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지만 죽은 후에도 매일같이 만날 수 있다면, 슬픔에 젖거나 상실감을 느낄 이유가 무엇일까. 길상은 그렇게 명옥과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아니 더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알리자, 언니가 돌아온 걸 보면 다들 좋아할 거야."
"그건 안돼."
길상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 "계속 그렇게 지낼 수 있을 줄 알았어. 바보처럼."
덕임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 하지만 그런 마술 같은 일이 언제까지고 계속될 리는 없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겪는 죽음의 이별을 혼자서만 비껴갈 순 없는 것이다. 잠시는 그런 행운을 누릴 수 있겠지만, 그건 그저 손등에 잠깐 내려앉았다가 포르릉 날아가버리는 새와 같았다. 내 손에 넣었다 싶은 순간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길상과 덕임은 어리석게도 그런 사실을 몰랐다.
- 그럼 그렇지, 재수가 거짓말을 한 거야.
조금 전까지 가슴을 짓누르던 갑갑한 게 갑자기 걷히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길상은 자신 있게 줄에 한 발을 내디뎠다.
- "여보게, 그 위에 있으니 기분이 어떤가?"
밑에서 어릿광대 덕임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날 올려다봐주니 기분이 좋네."
"자네가 사람들을 내려다봐서 기분 좋은 게 아니고?"
관중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게 그 말이지. 하늘에서 내려보니 세상이 다 내 것 같네. 임금이 된 기분일세."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닐세. 임금이 뭐 별 건가. 사람들 머리 꼭대기 위에 있는 게 임금이지. 그러니 광대나 임금이나 별 차이 없어."
덕임의 말에 관중들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 명옥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었다. 모래성이 허물어질 때처럼. 한순간 무너져 내리는 모래성과 달리 명옥의 몸은 서서히 엷어져 연기처럼 허공 속에 녹아들고 있었다. 이미 몸 반쪽은 연기가 돼 사라졌고, 남은 반쪽도 마치 안이 들여다보일 것처럼 옅어져 투명해지고 있었다.
- '어, 어째서...'
길상은 숨을 들이켰다. 머리는 어째서냐고 묻고 있지만, 속마음은 명옥이 사라지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부질없는 믿음이 깨졌기 때문이다. 애써 피하려 했던 현실을 마주해 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니라고 도리질 쳐도 이미 깨달아버린 사실을 부정할 순 없었다. 현실에 눈을 떴으니 허상이 사라지는 건 어쩌면 너무도 당연했다.
- "그 이유도 없진 않지만, 예전부터 줄 타는 게 멋있어 보였어. 하늘과 가깝잖아."
덕임이 아득한 옛날을 돌아보는 것 같은 눈빛을 했다.
"오빠도 그렇게 말했었어. 줄 위로 날아오르면 한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다고. 그 짧은 순간 동안은 마치 새가 된 것 같다고."
- "아냐, 믿어, 네 얘기."
"정말?"
덕임이 미심쩍어하며 물었다.
"세상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일도 많이 일어나니까."
진심이었다. 자신은 이보다 더한 일도 듣고 겪어왔는데 덕임의 말이 지어낸 얘기라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 "그러고 보면 진짜 이해가 안 가. 박수무당이 사기꾼이었다 치더라도 오빠랑 나는 명옥 언니를 정말로 봤잖아. 우리가 본 명옥 언니는 대체 뭐였을까? 귀신?"
- 그보단 그리움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니었을까, 선노미는 짐작했다. 명옥의 혼은 이미 저세상으로 떠났지만, 차마 망자를 놓아주지 못한 길상의 간절한 마음이 기억 속 명옥의 잔상들을 끌어모아 허상을 만들어낸 거라고. 명옥을 친언니처럼 따랐던 덕임 역시 오빠와 같은 마음이었기에 명옥의 허상을 볼 수 있었던 거라고.
- 명옥은 길상이 박수무당의 정체를 깨닫고 현실을 자각하는 순간, 사라져 버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길상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니까. 하지만 제 생각을 입 밖에 내는 대신 선노미는 침묵을 지켰다.
- '저런 선비가 왜 이런 곳에?'
선비는 어딘가 모르게 낯이 익은 것 같았다. 분명 전에 어디선가 그를 본 적이 있었다. 대체 어디서 봤더라...
'아, 세진 도련님!'
(리뷰자 주 : 선노미는 한 번 보고 들은 건 잊지 않는다고 설정되어 있다.)
- "이야기의 힘이지."
세진이 말했다.
"이야기의 힘이라고요?"
"그래, 네가 내 이야기를 여러 사람에게 들려주지 않았니. 덕분에 나는 이야기 속에서 계속 기억되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선노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가 갈 듯 말 듯한 말이었다.
"너랑 나는 이야기를 통해 이어져 있어. 그래서 이렇게 만나게 된 거야."
어쩐지 들으면 들을수록 알쏭달쏭했다.
- "그래,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되겠지."
세진은 선노미의 마음을 읽은 듯이 말했다.
"이해 못 해도 된다. 다만 두 가지만 부탁하고 싶구나."
선노미를 똑바로 바라보는 눈빛이 진지했다.
"앞으로도 이야기의 힘으로 나를, 다른 사람들을 기억해 주겠니?"
역시 무슨 뜻인지 완전히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선노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진의 어조가 꽤 간절하게 들려서였다.
- "그리고 하나 더."
선노미는 잠자코 세진이 말을 잇길 기다렸다.
"나처럼 과거에 갇히지 말거라."
이번엔 세진의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앞으로, 앞으로 나가야 해."
세진이 힘주어 말했다. 세진이 진지한 눈으로 선노미를 바라보았다. 선노미도 피하지 않고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게 나도 조금씩 내 자리를 찾아야지."
마치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는 말투였다. 길상이 진지한, 하지만 예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선노미를 바라봤다.
"너도 어서 찾아. 네가 있어야 할 자리를."
길상은 그 말을 남기고 절뚝절뚝 자리를 떴다.
- "넌 분명 재능이 있어. 다만 그 재능이 우리랑 맞지 않았을 뿐이야. 어딘가엔 네 재능을 쓸 데가 분명히 있을 거야."
칠성이 덧붙였다.
- "긴가민가했는데 맞구나. 너, 한양주막집에 있던 아이지?"
선노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너처럼 예쁜 사내에는 별로 없지. 그때도 사내 녀석이 참 곱게도 생겼다. 생각했으니까."
- 스산한 가을바람이 불어와 옷깃을 파고들었다. 한실은 옷깃을 여미면서도 잰 발길을 늦추지 않았다.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렇고말고'
한실은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어서 빨리 이 외진 숲길을 지나 의원나리 댁에 당도해야 한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나리와 함께일 테니 안심이 될 것이다.
'보름밤이라 환자를 안 보겠다 하시진 않겠지?'
한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 괜한 걱정을 떨쳐버렸다. 언제나 환자를 으뜸으로 여기시는 나리가 그럴 리가 없어. 아버지를 봐주시고 나면 오늘은 우리 집에서 주무시고 가시라 해야지. 행여나 돌아가시는 길에 보름달 마귀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 "저 아이 말이 맞습니다."
등 뒤에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거적을 덮은 시신 옆에 꿇어앉아 있던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흔이 좀 넘었을까.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조금 여윈 남자였다. 인상은 온화한데 얼굴에 지친 티가 역력했다. 하지만 맑은 눈만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한실이가 이 정도 피를 흘렸다면 틀림없이 범인의 옷도 피투성이가 됐을 겁니다. 하지만 저 아이는 옷이 말짱하지 않습니까."
- 그런 수호를 막은 게 병오였다. 오갈 데 없는 아이 같은데, 가두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라며 차라리 자기가 데려가겠다고 했다. 어차피 혼자 사니 가족들 눈치 볼 일도 없다면서.
수호는 떨떠름한 듯했지만, '자네가 그렇게까지 한다면야'라며 마지못해 병오의 말을 들어주었다.
- 알고 보니 병오는 오작인(仵作人)이었다. 사망 원인이 분명치 않은 시신을 검시(檢屍)하는 사람. 오작인은 죽은 자가 자살인지 타살인지, 만약 타살이라면 어떻게 살해당했는지를 면밀하게 조사하는 일을 맡아한다고 했다. 검시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지만, 시신을 만지는 일이다 보니 사람들은 오작인을 천하게 여겼다.
- 병오가 냉소적인 어조로 말했다.
"세상에 마귀나 귀신같은 건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말을 꺼내려다 선노미는 입을 다물었다. 대꾸하는 게 지금은 적당하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병오를 납득시키려면 자신이 이제껏 겪었던 일까지 다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선노미는 굳이 그런 번거로운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 "다들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 맞닥뜨리면 귀신 짓이다, 마귀 짓이다, 하는데 그건 핑계에 불과해. 우리가 그 상황을 이해할 만큼 지혜롭지 못할 뿐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마귀 짓이라고 해버리면 그건 진짜 살인자가 밖에서 활개치고 다니도록 그냥 내버려 두는 거나 마찬가지야."
선노미는 움찔해서 몸을 움츠렸다. 살인자라는 말이 뇌리에 박힌 것이다. 머릿속으로 피투성이가 된 만춘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돌로 그의 머리를 내려찍을 때 느꼈던 생생한 감촉, 축 늘어진 만춘의 몸...
- "인간이 왜 살인을 저지르는지 아니?"
느닷없는 물음이라 선노미는 뜨끔해졌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멀거니 병오 얼굴만 쳐다보았다.
"이유는 딱 두 가지야. 욕망 아니면 분노다. 그 사람이 가진 걸 뺏고 싶거나, 그 사람을 증오하거나."
병오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후자라고 선노미는 생각했다. 자신과 연암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는 하나, 그 순간만큼은 만춘이 견딜 수 없이 미웠으니까.
"어느 쪽이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
선노미가 고개를 푹 떨궜다. 한동안 잊고 있던 죄책감이 되살아나 날카로운 바늘처럼 제 가슴을 마구 찌르는 것 같았다.
- "그건 저주 내린 가면이에요. 그 가면을 쓰면 마음속으로 생각만 하던 걸 진짜 행동에 옮기게 된다고요!"
선노미가 언젠가 주막에서 들었던 가면 이야기를 두 사람에게 들려줬다.
- "이럴 게 아니라 관아로 가자. 네가 아는 걸 고해야 하지 않겠니."
정근이 무턱대고 선노미 손을 잡아끌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나리들이 믿을 것 같은가."
병오가 만류했다.
"믿든 안 믿든 그건 그때 가서 일이고, 이런 얘길 듣고서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는가."
정근은 병오가 말린다고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거야 원."
병오가 어쩔 수 없다 여겼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가면은 어느 천재 장인이 만든 작품이다. 장인은 가장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해 죽어가면서 이 가면을 만들었다. 가면은 '나를 써'라고 달콤한 목소리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라고 했다. 유혹에 빠져 가면을 쓰면 가면은 자신을 쓴 사람 마음속에 숨겨진 음험한 욕망과 충동을 그대로 밖으로 드러냈다. 원래 얼굴을 가리기 위해 만든 가면이 본래 용도와는 정반대로 쓴 사람이 누구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도구가 된 것이다.
"흐음..."
이야기를 다 들은 원님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과연 이 말을 믿어야 할지, 믿는다면 대체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곤란한 눈치였다.
- "그게 다 저 가면 때문이라고 하지 않는가. 심신상실 상태로 저지른 일에 어떻게 죄를 묻겠나. 따지고 보면 유혹에 넘어가 가면을 쓴 저 청년도 피해자인데."
"하, 하지만 사람들을 해칠 생각을 품고 있었으니..."
머뭇머뭇 나선 정근의 말을 원님이 중간에서 툭 끊었다.
"음험한 생각을 한 게 죄가 될 순 없지. 그렇게 따지면 세상에 벌안 받을 인간이 어디 있겠나. 너는 나쁜 마음을 먹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느냐?"
- 상황을 지켜보던 선노미는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가면의 정체를 안다고 한 건 저주받은 가면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본래 의도와는 달리 제 말이 기껏 잡은 보름달 마귀를 변호하는 수단이 돼버렸다.
- 선노미의 생각은 병오와 좀 달랐다. 세상엔 마음이라는 게 없는 사람도 존재한다는 걸 선노미는 주태를 보며 처음으로 깨달았다. 주태를 그토록 괴롭힌 정체가 무엇인지는 끝까지 알 수 없겠지만, 적어도 그건 죄책감은 아닐 거라고 선노미는 확신했다.
- 저주받은 가면은 그것을 쓰는 사람들이 감춰왔던 어두운 마음을 밖으로 드러내게 한다. 하지만 가면을 오래 쓰다 보면 숨겨왔던 검은 속마음이 어느새 가면을 쓴 사람을 잠식하고 지배하게 된다. 선노미는 가면이 실룩실룩 움직이며 주태의 얼굴을 파고들었던 장면을 떠올렸다. 가면은 아마도 그렇게 주태의 내면까지 파고들었을 것이다. 둘이 하나가 될 때까지.
- "넌 나이도 어린데 사람을 참 잘 이해하는구나."
병오의 칭찬에 노미는 쑥스러워 얼굴이 붉어졌다.
"어쩌면 네가 모은다는 기담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뜻밖의 말에 선노미는 어리둥절했다.
"나는 이제껏 그런 이야기를 믿지 않았어. 말도 안 되는 미신 취급했지. 하지만 그 안엔 어리석고, 서글픈 인간의 본성이 녹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너한테서 들은 저주받은 가면 이야기도 마찬가지고."
- 인간의 본성이 녹아 있다고?
선노미는 방금 들은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문득 언젠가 자신이 연암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는 어떤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을 할 때 사람들은 울고 웃었습니다. 저도 먼발치서 이야기를 엿들으며 속으로 같이 기뻐하고, 화를 냈습니다. 그러니 황당하고 뜬구름 잡는 얘기라도 얕잡아볼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
어쩌면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으며 울고 웃었던 이유가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일그러지고 뒤틀렸지만, 때로는 안쓰럽고 기특하기도 한.
- "밤낮으로 시신 보는 법을 연구했어. 어떤 독을 썼는지, 자상이 어떤 모양을 띠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면 모든 범죄를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거든.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던 것 같구나."
- 하지만 같은 주막이라도 삼개주막과는 분위기가 완연히 달랐다. 주막의 간판이라 할 수 있는 주모의 성격부터 차이가 났다. 무뚝뚝한 어머니에 비해 반월댁은 손님들한테 사근사근했다. 혼자서 술 마시는 사람에겐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술을 따라주고, 일행이 있으면 끼어들어 넉살 좋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단골처럼 보이는 사람에겐 추임새를 넣어가며 술주정이나 푸념까지 들어주곤 했다. 손맛은 도저히 어머니를 따라잡을 수 없었지만, 이런 건 반월댁이 한수 위였다.
- 반월댁은 손님들이 없을 때면 혼자 널따란 평상 위에 앉아 담배를 피우곤 했다.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얼굴로.
'대체 뭘 하던 사람이었을까.'
선노미는 이따금 반월댁의 과거가 궁금했다. 평범하고 순탄하게 살아온 아낙은 아닐 것 같았다. 손님 대접이 능숙하니 나이 들어 기방에서 나온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반면 반월댁은 선노미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관심이 없는 건지, 불편할까 봐 그런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어디서 왔는지. 왜 집을 나왔는지 한 번도 캐묻지 않았다. 언젠가 딱 한 번 이렇게 물은 걸 제외하고는.
- "이를테면 코로 휘파람을 불 수 있다든지."
"엥?"
만기가 기가 찬 듯 얼빠진 소리를 냈다.
"사람을 거들떠도 안 보는 길고양이들이 희한하게 나만 보면 따라온다든지."
어이없어하는 사람들 반응은 개의치 않고 무용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게 딱히 쓸모는 없고, 때에 따라 거추장스럽다고 느끼는 기술이나 능력을 사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거지요."
알쏭달쏭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도 무용의 표정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 "예끼, 여보쇼! 그딴 걸 누가 사려고 한단 말이오?"
무용의 얘기를 들었는지 건너편에 앉아 있던 술꾼 하나가 핀잔을 줬다.
"그렇게 단정 지을 순 없지요. 나한테는 필요 없는 능력이라도 남한테는 필요할 수 있으니까요."
- "너한테 꽤 재미있는 능력이 있는 것 같구나."
"네?"
선노미가 어리둥절해서 무용을 마주 봤다.
"네 주변엔 기이한 일들이 자주 일어나지 않니?"
- 선노미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 선노미도 어깨너머로 조금 전까지 무용이 하는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참 별난 사람도 다 있네' 생각했을 뿐 무용의 말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그가 한 말만은 흘려들을 수 없었다. 실제로 자신은 기이한 일들을 계속 보고 겪고 있으니까.
- "아마도 네가 그런 걸 끌어당기는 게지. 하지만 불가사의한 일들을 경험하는 건 꽤 성가실 거야."
무용의 눈이 교활하게 반짝거렸다.
"어떠니, 그 능력을 내게 팔지 않겠니?"
- 정말이지 기이한 이야기를 수집한 이후로 선노미에겐 성가신 일들이 꽤 많이 일어났다. 아니, 사실 성가시다는 말론 부족하다. 인생이 통째로 바뀌었으니까. 만약 기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더라면, 연암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청나라에 오지 않았더라면, 때로는 그런 후회와 원망이 스스로를 괴롭히곤 했다.
- 하지만 기담 덕분에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넓어졌다는 사실 역시 부인할 수 없다. 언문을 깨치고, 청나라 사절단으로 따라갈 수 있었다. 조금씩이지만 삶을 배우고 성장할 수 있었다. 기담은 선노미에게 동전의 양면 같은 의미였다.
- "그럼 이런 건 어떻소."
만기가 제 앞에 있던 막걸리 잔을 끝까지 쭉 들이킨 다음 상에다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난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소. 오죽하면 별명이 개코라니까. 그걸 팔리다."
무용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쓸모없는 재주라고 할 순 없을 것 같은데요?"
"쓸모없어. 눈이 안 보이거나 귀가 안 들리는 건 당연히 불편하지. 말 못 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후각이 예민한 게 무슨 필요가 있겠소? 오히려 성가실 때가 더 많다고. 특히 한여름 발 냄새, 땀 냄새, 머리 냄새 같은 건, 어휴 차라리 코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싶을 때도 많아."
만기가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무용의 말을 믿어서는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어떻게 나오는지 한번 보자는 심산이었다.
- "첫째, 일단 팔면 도로 가져갈 수 없소."
만기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필요 없다고 내놓은 걸 왜 도로 가져가겠소."
"둘째, 기어이 판 걸 가져가려 한다면 다른 누군가가 내놓은 걸 함께 가져가야 하오."
- 순간 만기가 멈칫했다. 누군가 쓸데없다고 내놓은 걸 떠안아야 하는 게 꺼림칙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만기가 호쾌하게 내뱉었다.
"좋소. 어차피 다시 가져갈 일 없으니 아무런들 어떻소."
사실은 '어차피 말도 안 되는 소리니까'라고 하고 싶었지만, 만기는 무용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 호언장담했다.
- "그렇다면 보기 싫은 것만 보는 능력은 어떻소."
"그것도 능력이오?"
만기는 어이가 없었다. 대체 어디 사는 누가 저런 걸 팔았을까. 그런 건 고려해 볼 가치도 없다. 보기 싫은 것들만 골라서 보이다니. 상상만 해도 삶이 지옥일 것 같았다.
"흐음."
무용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남은 건 하나밖에 없소."
"그게 대체 뭐요?"
만기가 불안함을 억누르며 물었다.
"어딜 가든 꽃가마를 끄는 능력."
- "그걸로 하겠소."
만기가 고개를 끄덕이자 무용이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만기는 뭔지도 모르는 채 속은 건 아닐까 싶어 등골이 오싹했다. 어쩐지 무용이 그 뒤에 뭘 숨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 중얼중얼중얼.
다시 중얼거리기를 반복했다. 이번에도 젓가락을 집어넣어 병 안을 헤집었다. 안에 든 게 미꾸라지처럼 팔딱팔딱 날뛰기라도 하는지 무용은 아까처럼 손쉽게 집어내지 못했다. 한참 애를 쓰던 무용이 마침내 원하는 걸 잡았다는 듯 손을 멈추더니 천천히 호리병에서 젓가락을 꺼냈다.
- 만기는 얇은 막 같은 것이 자신을 감싸는 것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속으로 열까지 셌을 때 낯선 느낌은 사라졌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조금 전 주위를 두르고 있던 얇고 부드러운 막 같은 것이 녹아 제 몸에 쏙 흡수된 것 같았다.
- 만기는 주변을 둘러보다 마침 반월댁이 들고 가는 육개장을 가로챘다.
반월댁이 뭐라 할 틈도 주지 않고 만기는 그릇에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뜨끈한 고깃국물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후각을 잃은 뒤로 밥맛이 없어 며칠간 밥술을 뜨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오랜만에 얼큰한 냄새를 맡으니 곧장 식욕이 동했다. 옆에 있는 술병 주둥이에도 코를 대봤다. 바로 시큼한 막걸리 냄새가 올라왔다.
- "돌아왔어, 돌아왔다고!"
만기가 기쁨에 겨워 소리를 질렀다. 당장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니 다행이구려."
무용이 얼굴에서 묘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 "내 걸 분명 한 냥에 사가지 않았소. 그 돈은 이미 돌려줬는데 뭘 더 달라는..."
"그건 환불이고."
무용은 만기의 말허리를 뚝 끊고 끼어들었다.
"방금 하나를 더 가져갔으니 돈을 내야 할 것 아니오."
당연한 걸 요구하듯 무용의 말투는 천연덕스럽기 짝이 없었다.
- "아니, 그런 법이 어딨소? 얘기가 다르지 않소."
만기가 더는 못 참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얘기가 다르기는. 한번 판 건 다시 못 돌려받는다, 기어이 받으려고 하면 호리병 안에 든 걸 하나 더 가져가야 한다고 말했소, 안 했소?"
"그리 말은 했지만..."
그거랑 두 냥 더 내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냐고 따지려는데 무용이 말을 가로막았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소, 설마 하니 상인이 자기가 취급하는 걸 공짜로 가져가라 했겠소? 나이도 먹을 만큼 먹고서 순진하시긴."
- 문득 무용이 했던 말이 떠오르자, 선노미는 무용의 빈자리가 어쩐지 견딜 수 없을 만큼 섬뜩하게 느껴졌다.
- 만덕이 떠난 뒤 주막 분위기가 내내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만기네 가족에게 벌어진 일은 그날 주막을 찾은 단골들 사이에서도 화제였다. 다들 '이봐, 만기 얘기 들었어?' 하며 흥분해서 떠들다 끝내는 '괜찮은 사람인데 어쩌다 그런 일을 겪었나' 하고 혀를 끌끌 찼다.
- 반월댁도 드물게 종일 어두운 표정이었다. 늦은 밤,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텅 빈 주막에 앉아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별 잘못도 없이 큰 불행을 겪은 만기를 생각하니 절로 술이 당기는 모양이었다. 일을 마친 선노미는 반월댁에게 주무시라 인사하고 먼저 들어가 쉬려 했다. 그런 선노미를 반월댁이 불러 세웠다. 그러더니 대뜸 물었다.
"내가 왜 주막 밖에 서 있던 너한테 말을 걸었는지 아니?"
뜬금없는 질문에 노미는 어리둥절했다.
"그거야. 제가 송 생원 나리가 보내신 일꾼인 줄 알고..."
선노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반월댁은 후후후 웃었다.
"송 생원 나리란 분은 없어."
"네?"
무슨 소린가 싶어 선노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 훗날 반월댁은 훈이를 잃은 자신에게 분노의 대상이 필요했던 것처럼 남편 역시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했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좀처럼 펴지지 않는 살림살이와 고단한 일상, 수시로 느껴지는 무력감을 가까이 있는 만만한 상대에게 화풀이함으로써 떨쳐버리고 싶었던 거라고.
- 실수한 걸 굳이 하나 꼽자면 자신이 가진 재주를 너무 하찮게 여겼다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가진 재주는 뭘까, 하고 선노미는 생각했다. 기억력이 좋다는 점, 기이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 얘기한다는 점, 언문을 좀 안다는 점.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먹고사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다.
- "그럼 그걸 글로 써보지 그러니?"
"글로 쓴다고요?"
"그래, 다들 이야기는 좋아하니까. 혹시 아니? 나중에 그걸로 밥벌이를 하게 될지."
반월댁이 싱긋 웃으며 술잔에 술을 따르다 술이 다 떨어진 걸 알고 끌끌 혀를 찼다. 이미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게 취기가 제법 오른 모양이었다.
술김에 불쑥 내뱉은 이야기인지도 모르지만 선노미는 반월댁이 한 말을 곰곰이 곱씹었다. 왜 이제껏 그 생각을 못 했을까.
- 병오는 속마음을 드러내주는 가면 이야기를 듣고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지 깨달았다고 했다. 이제껏 딱히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보고 들은 걸 기록해 둔다면 우생 스님이 말했던 선한 영향을 떨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 처음 연암을 만났을 때 했던 말도 생각났다. 어떤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울고 웃었노라고 했던 말. 사람들이 울고 웃던 이야기를 글로 남겨 더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줄 수 있다면, 자신이 가진 소소한 재주로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어쩌면 그게 평생 치러야 할 속죄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 "어머니한테 돌아가."
뜻밖의 말에 선노미는 당황해 반월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취기는 있었지만, 정신은 말짱해 보였다.
"마음 같아선 계속 있으라고 하고 싶지만 같은 어미로서 그렇겐 못하겠네. 더 이상 어머니 속 썩이지 말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렴."
말을 마친 반월댁은 '아, 오랜만에 너무 많이 마셨나' 늘어지게 하품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노미는 반월댁이 비틀비틀하는 걸음걸이로 방 안에 들어가는 걸 멍하니 바라봤다. 어머니 얘기를 해서인지 반월댁의 뒷모습에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어머니 모습이 겹쳐 보였다.
- 주위에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았다. 무용은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 걸 느꼈다. 동틀녘부터 주막을 나와 계속 걸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마음 같아선 따뜻한 아랫목에 조금 더 누워 있다 떠나고 싶었지만, 조만간 만기네 집에 사달이 날 테니 어쩔 수 없었다.
- 꽃가마라는 말에 별생각 없이 비극을 선택한 만기를 생각하자 무용은 저도 모르게 슬며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리석긴.'
사람들은 늘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 자기가 가진 걸 소홀히 하고, 그걸 잃어버렸을 때 후회하며, 자신의 실수를 수습하고자 더 큰 우를 범하곤 한다. 그리고 마치 새카맣게 잊은 듯 그 일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 '하긴 그 덕분에 내가 밥벌이를 하는 거지만.'
이번엔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부지런히 발길을 옮겼다.
- "난 보지 않고도 사람들 배우자를 그리는 재주가 있다오."
무용이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정말로 성가신, 아니 성가시다는 말로는 부족한 저주받은 재주지."
씁쓸하게 읊조리는 노인의 표정은 진지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갈고닦은 무용의 감이 노인의 말이 사실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좀처럼 보기 드문 희귀한 재주임이 분명했다.
"좋습니다. 두 냥 어떠십니까?"
"가능하다면 공짜로라도 가져가라고 하고 싶소."
노인은 값은 얼마가 되든 좋다는 투였다. 무용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거래가 성립됐습니다."
무용이 짐꾸러미에서 급하게 호리병을 꺼내 들었다.
- 돌아오는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덕임이 불쑥 말을 꺼냈다.
"어쩐지 다른 사람 같지 않아?"
선노미도 같은 생각이었다. 오래 본 건 아니지만 지금껏 알고 있던 연홍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한텐 여러 가지 얼굴이 있다. 어쩌면 방금 봤던 연홍은 이제껏 감춰왔던 또 다른 얼굴인지도 몰랐다.
"우리가 몰랐던 다른 모습일 수도 있지."
선노미는 그리 큰일도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그런 게 아냐!"
덕임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언성을 높였다.
- 서른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호리호리한 체구지만 근육이 붙은 몸은 꽤 단단해 보였다. 온몸이 비에 흠뻑 젖었는데, 한 손으로 옆구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움켜쥔 부위의 옷이 붉게 번진 걸 보니 상처가 심각할 것 같았다.
남자가 비틀거리며 문지방에 몸을 기댔다.
- "이보시오, 어쩌다 이렇게 다친 거요?"
칠성이 부리나케 다가왔다. 손을 떼어내 옆구리를 살펴보곤 단원들에게 자리를 깔고 상처를 동여맬 깨끗할 천을 가져오라 일렀다.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일단 상처라도 치료해야겠다 싶었던 것이다.
- 고통이 심한지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방 안에 한 발을 들여놓았다. 고개를 숙이자 풀어헤쳐 앞으로 잔뜩 흘러내린 머리칼이 흔들렸다. 머리칼 사이로 남자의 얼굴이 슬쩍 드러났다. 하얀 얼굴에 단정한 이목구비, 수려한 외모지만 눈빛은 섬뜩했다.
- 남자는 예전에 삼개주막에서 만났던 타내였다. 짝사랑으로 가슴앓이하던 선노미에게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 분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남자. 하지만 주인의 폭압으로 분이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다. 타내가 양반들을 죽이는 살주계(殺主契) 일원이라는 건 그가 주막을 떠난 후 현상수배 전단지를 들고 온 포졸들을 통해 알게 됐다.
타내가 선노미를 돌아보았다. 서로 얼굴을 확인한 순간, 타내는 정신을 잃고 자리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 선노미는 그 상처를 알고 있었다. 분이를 지키려다 분이 대신 끓는 물을 뒤집어쓰는 바람에 생긴 상처다.
말로만 들었는데 직접 보니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힘들게 살았나 보구나."
- "두려워도 해야 하는 게 있지."
먼저 입을 뗀 사람은 타내였다.
"그게... 뭔가요?"
"네 인생을 사는 것."
선노미는 타내를 멀거니 쳐다봤다.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 "네가 사람을 죽인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건 아무리 부정해도 마찬가지야. 그렇다고 계속 지금처럼 도망만 다닐 순 없잖니. 언젠가는 현실을 마주 봐야 해."
타내가 속을 꿰뚫어 볼 것처럼 진지한 시선으로 선노미를 바라봤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속 어둠이 너를 삼켜버릴 거다."
"마음속 어둠..."
선노미가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연암 나리와 헤어지기 전, 연경에서 만난 서양인 선교사도 그렇게 말했었다. 어둠이 마음을 좀먹게 내버려 두지 말아요, 하고.
"너무 늦기 전에 그걸 깨달았으면 좋겠구나. 나처럼 되기 전에."
타내는 상처가 아리는지 끙 신음을 흘리며 다시 자리에 드러누웠다.
- 옆 동네까지 가는 동안 연홍은 쉬지 않고 조잘거렸다. 선노미와 덕임은 적당히 맞장구를 쳤지만 대화가 겉도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분명 연홍인데 어쩐지 다른 사람이랑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석연치 않은 건 또 있었다. 의심을 품고 봐서 그런지 연홍이 사람들 발길이 뜸한 외진 길만 일부러 골라 가는 것 같았다.
'일부러 사람들 눈을 피하는 걸까?'
선노미는 변함없이 고운 연홍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 저도 모르게 눈물이 울컥 솟아 선노미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차돌이가 겪었던 지옥 같은 현실을 접하고 나니 앞서 봤던 그림이 어쩐지 달라 보였다. 유난히 밝고 행복한 허구의 세계. 어쩌면 차돌은 지옥 같은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그런 이야기에 매달렸던 것인지도 몰랐다. 삶을 견디기 위해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왜 언문을 배우고 싶냐고 물었을 때 '사라지니까'라고 했던 말도 떠올랐다.
'너한테 이야기란 게, 글이란 게 그런 의미였구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차돌은 도와달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른들에게, 제 불행에 무관심한 타인에게.
- '미안해, 너무 늦게 알아서.'
흐르는 눈물을 닦으려다 선노미는 결국 엉엉 소리 내 울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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