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엔야 호나미] 목욕탕 도감 - 목욕탕 지배인이 된 건축가가 그린 매일매일 가고 싶은 일본의 대중목욕탕 24곳

일루젼 2023. 11. 5.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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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엔야 호나미 / 네티즌 나인

출판 : 수오서재
출간 : 2023.08.06


       

'이나가키 에미코'의 저서에도 목욕탕 커뮤니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는 일종의 단사리로서 '전기가 없는 생활'을 실천하느라 근처 대중목욕탕을 다니게 되었다고 하는데, 막상 다니다 보니 그 안에서만 가능한 인간적인 교류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고 한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로, 이름도 직업도 나이도 모른 채 그저 상대의 태도와 행동만으로 서로의 됨됨이를 가늠하는 세계.  

 

어린 시절 대중탕을 가본 경험은 있지만, 언젠가부터 타인과 알몸을 공유하는 공간은 피하게 됐던 것 같다. 그보다는 좀더 내밀하고 사적인 공간에서의 휴식이 훨씬 편안했다. 아마 개인의 성향도 영향을 주지 않을까? 목욕탕 커뮤니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외향적인 성향이 아닐까. 문득 어디선가 주워 들었던 '사우나 멤버'로 상념이 튄다. 고급 정보는 고급 사우나에서 나온다던...  

 

등등의 잡생각을 하다 <목욕탕 도감>이란 신간이 나왔다는 걸 알고 읽어보게 되었다. 조곤조곤하게 목욕탕의 특징과 분위기를 설명하는 글투도 좋지만, 두 페이지를 가득 메우는 '목욕탕 도감'의 섬세함과 정밀함에는 절로 탄성이 나온다. 페이지를 펴는 순간 눈으로나마 함께 입구부터 온탕과 열탕, 사우나와 냉탕을 즐기게 된다. 

 

저자는 초심자, 상급자, 마스터의 세 단계로 나누어 목욕탕들을 소개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어느 목욕탕이나 다 나름의 매력이 있어 꼭 단계에 얽매일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근처에 즐길 거리가 있는지, 어매니티나 타월을 제공하는지 -유/무상인지- 등등의 차이점 정도가 아닐까.  

 

여전히 커뮤니티의 일원이 되고픈 생각은 없지만 벚꽃 피는 계절의 사쿠라칸이나 깔끔한 도고시 긴자 온천은 꼭 한 번 방문해보고 싶다. 사이토유의 맥주도 마셔보고 싶고. 고요한 료칸도 좋지만, 이런 특색 있는 대중탕도 좋을 것 같다. 한국의 찜질방이나 목욕탕도 이런 개성을 추구해보면 어떨까? 코로나와 인식 변화로 어려움을 겪으며 사라져 가는 추세라지만... 어쩌면 새로운 유행이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끝. 

        

 


   

 

    

 

 

 

- 엔야 호나미. 
와세다대학교 대학원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어릴 적부터 선망해 온 건축가의 꿈을 이뤄 도쿄에 소재한 한 건축사 사무소에서 근무했다. 일의 강도는 예상보다 높았다.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은 네댓 시간에 불과했고, 초콜릿이나 영양음료로 식사를 때우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결국 건강에 문제가 생겨 휴직을 신청했다. 그때 친구가 건넨 가벼운 권유로 목욕탕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목욕탕에 얽힌 사람들과 교류하며 점차 건강을 되찾았다. 이후 목욕탕의 세계에 푹 빠져들어, 사람들에게 그 매력을 알리기 위해 2016년 11월부터 목욕탕 그림을 그려 SNS에 올렸다. 이 책은 SNS에 올렸던 일러스트 '센토도해 銭湯図解'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 목욕탕을 찾아가 레이저 측정기와 3미터 줄자를 이용해 내부를 세세히 측량하고, 직접 탕에 들어가 목욕을 한다. 이러한 취재와 체험을 바탕으로 목욕탕의 구석구석을 해부하듯 그리는 '목욕탕 도감'은 한 곳을 그리는 데에 약 20시간 이상이 소요된다. 그렇게 남다른 애정으로 그려낸 그림들은 일본 내에서 큰 관심을 받아 TBS 정열대륙 情熱大陸, NHK다큐멘터리 등 많은 미디어에 소개되었으며, <목욕탕 도감>을 원작으로 드라마  <목욕 후 스케치 湯あがり スケッチ>(2022년작)가 제작되었다. 

 

- 안녕하세요! 대중목욕탕 고스기유의 카운터를 지키며 일러스트레이터를 겸하고 있는 엔야 호나미입니다. <목욕탕 도감>을 구입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 책은 2016년 11월부터 SNS에 올렸던 일러스트 '센토도해 銭湯図解’를 엮은 것이에요. 높은 곳에서 특정한 각도로 건물 안을 내려다보는 아이소메트릭 기법으로 대중목욕탕을 그렸습니다. 

- 목욕탕을 그리게 된 계기는 번아웃이었어요. 당시 건축사 사무소를 다니고 있었는데 엄청난 업무량에 몸과 마음이 모두 탈진되었거든요. 결국 휴직하게 되었고 친구와 의사의 권유로 목욕탕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목욕탕이라는 공간과 그곳에서 만난 많은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 점점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어요. 여러분에게 추천하는 목욕법, 냉온욕의 효과도 더해져 목욕탕에 갈 때마다 점차 기력을 회복했습니다. 이후 목욕탕은 저의 가장 중요한 일과가 되었고 삶의 목표라고 생각할 정도로 빠져들었습니다. 목욕탕을 그리기 시작한 건 이렇게 좋은 목욕탕을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친구들에게 그 매력을 전하기 위해서였어요. 

 

- 놀라울 정도로 많은 것이 변했지만 '목욕탕의 매력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을 바탕으로 이 책에 초심자부터 마스터까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스물네 곳의 목욕탕을 소개했습니다. 평소 즐겨 가는 단골 목욕탕은 물론이고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추려보았어요. 여러분이 이 책을 통해 목욕탕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고 이 공간을 좋아하게 되길 바랍니다. 목욕탕을 찾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늘어나 사라져 가는 목욕탕 문화가 계속될 수 있다면 무엇보다도 기쁠 거예요. 따뜻한 탕에 들어가 천천히 시간을 보내는 목욕탕의 여유로운 기분을 떠올리며, 이 책을 즐기시길 바랍니다. 

 

- 목욕탕도감은 아이소메트릭 Isometric이라고 하는 건축도법을 사용해 대중목욕탕 건물 내부를 부감하듯 그려낸 것입니다. 실제로 목욕탕을 취재해 욕조의 넓이, 높이 및 몸 씻는 곳의 각도까지 측량해 도면을 그렸습니다. 

- 아이소메트릭이란? 대상물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으로 건축을 그릴 때 길이, 폭, 높이, 세 방향의 축이 각각 같은 120도를 이루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구도로 그림을 그리는 투시도법. 

- 욕탕이나 사우나의 종류에 주목해도 좋고, 일본 대중목욕탕의 건축이나 내부 장식을 보고 즐겨도 좋습니다. 또는 각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목욕탕을 즐기는 사람들을 살펴보는 것도 즐거울 거예요. 어떤 페이지를 펼치든 당신만의 즐거움을 찾아내길!

 

- 마루야마 미오토 작가의 벽화. 남탕에는 미우라반도에서 본 후지산, 여탕에는 니사이즈에서 본 후자산이 그려져 있다.

 

- 첫 목욕탕 도감의 무대는 내 직장인 고스기유다. 고스기유는 JR고엔지역 高円寺駅 북쪽 출구에서 도보로 5분, 빨간 아치가 이목을 끄는 오래된 상점가를 쭉 걸어 올라가면 나타나는 좁은 골목길을 마주 보고 있다. 1933년 창업, 2003년에 욕실과 대합실을 리뉴얼했지만 건물 자체는 90년의 오랜 역사를 지녔다. 

 

 

- 고스기유에는 우유탕, 제트탕, 열탕, 세 개의 욕조가 있다. 제트탕은 매주, 열탕은 매일 물의 종류가 바뀌며, 우유탕은 매일 제공된다. 맥주탕이나 영귤탕과 같은 신선한 소재의 욕탕을 기획하며 입구에선 관련 상품을 판매하기도 한다. 정기휴일이나 영업시간 전에 댄스 이벤트, 라이브공연, 토크 이벤트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 냉온욕으로도 유명하다. 열탕과 냉탕의 온도 차가 실로 절묘해 냉온욕에 안성맞춤인 목욕탕으로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방문하는 사람도 많다. 얼굴을 닦을 수 있는 작은 수건을 무료로 제공하며 샤워 공간에 샴푸, 린스, 클렌징 등의 용품도 준비되어 있다. 빈손으로 방문하기 쉽기 때문에 목욕탕에 가본 적이 별로 없는 초심자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목욕탕이다.

 

- 도쿄 아다치구에 위치한 기타센주. 이 지역은 활기 넘치는 거리도 매력적이지만 옛 모습을 간직한 목욕탕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기에 목욕탕 마니아들에겐 '목욕탕의 성지'라고 불린다. 바로 이 기타센주에 '목욕탕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다이코쿠유가 있다. 고로케집, 야채가게, 오뎅집 등 정겨운 가게들이 줄지어 들어선 상점가를 걸어가다 보면 위엄 있는 외관의 건물이 등장한다. 느긋한 곡선을 그리는 일본 전통 건축양식의 현관지붕 뒤로 두 개의 삼각형 지붕이 이어진다. 가끔 신사나 절처럼 보이는 목욕탕을 마주치지만 이렇게까지 훌륭한 건물은 드물다. 

 

 

- 1929년에 세워질 당시 '현대유 現代湯'라는 이름이었으나 현재 이곳을 경영하고 있는 시미즈의 시아버지가 1955년에 매입해 다이코쿠유라는 이름을 새로 붙였다. 그 뒤 몇 번이고 개장을 반복해 22년 전 지금의 모습이 됐다. 건물 외관은 창업 이후 그대로다. 군청색 천 가림막(노렌 暖簾. 처마 끝에 붙여 햇빛을 막는 장식이자, 그 가게의 상징)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대합실이 눈에 들어온다. 프런트 형식의 카운터 안쪽으로 일본식 거실과 작은 연못이 있다. 여탕 탈의실은 우선 그 규모에 놀라게 된다. 일반 목욕탕의 두세 배이며 천장도 높다. 격자로 이어진 나무가 지탱하는 천장에는 오랜 세월 조금씩 색이 옅어진 꽃, 새, 바람, 달 그림이 자리하고 있다.  

 

- 사우나를 지키는 핀란드 요정 '톤투 Tonttu' 모양의 아로마 디퓨저.

 

- JR닛포리역 日暮里駅에서 내려 분주한 찻길을 지나면 저층 빌딩이 이어진 거리가 나온다. 그 길을 따라 걸어가면 맞배지붕 기와가 올라간 빌딩이 눈에 띈다. 사이토유다. 새로 지은 외관이 제법 맵시 있다. 입구에는 파도 형태의 목재 간판에 '사이토유 齋藤湯' 글자가 멋지게 적혀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목욕용품과 팸플릿, 크고 작은 맥주잔이 들어선 카운터가 눈에 들어온다. 

 

- 손님들을 맞이해 준 것은 삼대째 이곳을 경영하고 있는 목욕탕 주인 사이토. 원래 다이쇼유 大正湯라는 이름이었던 이곳을 1948년에 조부가 매입해 본인의 이름을 따서 사이토유로 바꿨다고 한다. 이후 사이토 가문이 대대로 경영을 이어오고 있다. 2015년에 노후된 건물을 개축했는데 당시 목욕탕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따뜻한 물로 몸을 덥히는 것'을 0세부터 90세까지 온 가족이 즐기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물 온도를 미지근하게 설정하고 연수를 도입하는 등 많은 정성을 쏟았다.

 

- 그런 가운데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카운터를 설치한 이유는 "어른의 가장 큰 즐거움은 역시 목욕 후 마시는 맥주"이기 때문. 심지어 최고의 맥주를 마실 수 있도록 아사히 맥주에서 맥주 마이스터 공인을 받기도 했다. 맥주 서버 관리, 청소, 온도 설정 등 세심하게 신경을 쓴 덕에 비범한 맛의 맥주를 즐길 수 있다.

 

- 인터뷰를 마치고 욕실로 향했다. 설명 들은 대로 미지근한 온도의 욕탕이 있고 연수 특유의 감촉이 기분 좋게 몸을 감쌌다. 뜨거운 탕도 있는데 냉탕과의 조합이 발군이어서 냉온욕을 반복하다 보니 몸이 풀어져 연체동물이 된 기분이 들었다. 노천탕 의자에 앉아 발을 쭉 뻗으면 역시나 천국에 온 기분. 마이크로거품탕은 미세한 거품이 부드럽게 몸을 감싸 몸도 마음도 편안해진다. 

- 온몸에 청량한 수맥이 흐르는 기분을 만끽하며 카운터로 향했다. 맥주 서버에서 시원하게 따라진 맥주를 마신다. 꽁꽁 언 맥주잔을 손에 들고 우선 한 모금. 뜨끈한 몸 안으로 톡 톡 튀는 맥주 거품이 흘러 들어온다. 묵직한 거품과 믿기 어려울 정도의 상쾌함! 어느새 잔이 비어 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큰 잔을 주문할걸! 사이토유는 욕실부터 맥주까지 최고 품질을 추구한다. 여성 한정 이벤트가 있는 스페셜 레이디스데이 행사를 개최하는 등 최고를 향한 사이토유의 고집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실로 우직하고 성실한 목욕탕이다. 

 

- 전철역을 중심으로 약 1.3킬로미터의 상점가가 늘어선 도고시 긴자. 휴일엔 늘 사람들로 붐비며, 여러 식당을 돌아다니는 노점 투어를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경단, 빙수, 꼬치구이, 크로켓 등 먹을거리를 잔뜩 팔고 있어 그냥 지나치기 참 어려운 곳이다. 이 거리의 매력을 이야기하면서 도고시 긴자 온천을 빼놓을 수 없다.

 

- 골목 안쪽에 자리한 도고시 긴자 온천은 빌딩형 목욕탕으로 1960년에 창립했다. 2007년 건축가 이마이 겐타로의 설계로 리뉴얼하면서 '질리지 않는 목욕탕' 콘셉트로 여탕과 남탕이 매일 바뀌는 츠키노유(달의 탕)와 히노유(해의 탕)를 만들었다. 두 욕탕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 전혀 다른 목욕탕에 온 기분이 든다. 

 

- 내가 찾아간 날은 츠키노유가 여탕이었다. 파스텔컬러의 아르 누보 Art Nouveau 스타일의 히노유와 달리 츠키노유는 세련된 현대식 일본 스타일로 바닥부터 벽까지 검은 타일로 되어 있다. 안쪽 욕탕에는 천연온천인 검은 온천수가 뿜어져 나온다.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검은 수면에 반사되어 묘한 분위기가 연출되면 어깨에서 힘이 슥 빠지고 절로 탄성이 나온다. 위층의 노천탕은 내장재가 편백나무다.  
 

 

 

- 다이코쿠유는 피부미용에 효과가 좋다는 메타규산이 포함된 천연온천수를 모든 욕탕에 사용한다. 촉감이 부드러워 목욕을 오래 해도 질리지 않는 편안함을 선사한다. 

 

- 여탕과 남탕을 가르는 벽에는 일본 유리 공예품 '에도 기리코'가 장식되어 있다. 

 

- 스팀 소금사우나, 광활한 노천탕, 나무데크와 해먹이 있는 목욕탕. 해먹에 누워 올려다보는 도쿄 스카이트리 전망대는 더할 나위 없는 절경이다. 

 

- 안쪽에 쑥 스팀 소금사우나도 마련되어 있다. 돌로 만들어진 노천탕에는 미네랄 성분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 입욕제 '루프'가 들어가 있다. 탕 속에 오래 있기 좋을 정도로 온도가 적당해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턱을 괴고 하늘을 바라보니 넓게 펼쳐진 파란 하늘 한편에 목욕탕 굴뚝이 보였다. 입욕제가 욕조의 바위와 반응해 가벼운 유황 향기가 나서 마치 교외의 온천지로 여행을 온 기분이다. 

 

- 다이코쿠유의 가장 큰 매력은 나무데크다. 노천탕 옆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면 왼편에 나무데크가 있고 이곳에 무려 해먹이 설치되어 있다. 천장에 매달린 타입과 바닥에 고정된 타입, 두 가지가 있는데 난 바닥에 고정된 그물침대에 누워봤다. 해먹의 천이 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나긋나긋 흔들어준다. 바람은 천천히 지나가고 따뜻한 햇빛이 비춘다. 천장 저편으로 스카이트리가 보였다. 해먹에 한가로이 누워 당당하게 서 있는 전망대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천국에 온 기분이다. 넓은 노천탕, 나무데크, 해먹, 그리고 스카이트리. 이렇게 주연 배우들이 알차게 들어선 다이코쿠유는 최고의 노천욕을 경험하게 해 준다.

 

- "목욕탕 도감은 어떻게 그리나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도감의 제작은 크게 취재 → 밑그림 → 펜 그림 → 채색의 네 단계로 나눠집니다. 목욕탕 한 곳을 그리는 데 약 20시간 이상이 걸려요.  

 

- 목욕탕에 전화 또는 SNS로 취재를 요청한 뒤 개점 약 1시간 반 전에 목욕탕을 방문합니다. 우선 레이저 측정기를 사용해 욕실 전체와 욕조 등의 크기를 측정하고, 얕은 욕조나 수도꼭지처럼 세밀한 측정이 필요한 곳은 3미터 줄자를 사용해 타일의 폭까지 빈틈없이 측정해요. 

 

- 실측을 한 뒤에는 사진 촬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욕조나 수도꼭지의 위치 관계를 알 수 있는 부감 사진부터 목욕대야 같은 작은 용품까지 거의 모든 것을 찍어요. 촬영이 끝나면 대략 20분 정도 목욕탕 주인을 인터뷰합니다. 목욕탕의 역사, 최근 어떤 면에서 새로운 노력을 하고 있는지 등을 질문하는데, 짧은 시간이지만 운영자의 열정이 느껴져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순간도 있답니다. 

- 취재가 끝난 뒤에는 욕실로 들어가 목욕을 즐깁니다. 욕실을 그릴 때 충분히 표현할 수 있도록 그곳의 분위기나 일어나는 일들을 빠짐없이 관찰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최대한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싶어서 원칙적으로 직접 들어가 본 여탕을 그리고 있습니다.

 


 

- 실측 데이터를 토대로 축적을 정해 A4 용지에 밑그림을 그립니다. 직선을 보조하는 자는 대학 시절부터 애용하는 제도용 삼각자예요. 그 뒤 트레이싱지 작업에 들어가기 때문에 색이 진하고 수정이 쉬운 지워지는 볼펜 프릭션 FRIXION을 사용합니다. 타일까지 그리면 무슨 선이 어느 선인지 모르게 되기 때문에 대상에 따라 색을 구분해 사용합니다. 참고로 사람은 빨간색, 여자는 대략 165센티미터 전후, 남자는 170센티미터 전후를 기준으로 그려요. 

 

- 트레이싱 대에 밑그림과 수채화 용지를 겹치고 방수펜으로 수채화 용지에 그림을 복사합니다. 펜은 방수 잉크가 들어간 제도펜을 주로 사용해요 많은 펜을 시험해 봤지만 굴곡 없이 부드러운 직선을 그리는 데는 제도펜만 한 것이 없더라고요. 타일은 더 가는 펜을 사용해 세부까지 섬세하게 그립니다. 

 

- 마지막 공정은 투명 수채화로 착색하는 것입니다. 실제 목욕탕의 색감을 충실히 재현하기 위해 언제나 팔레트에 많은 색을 풀어놓고 실험합니다. 욕조는 배수구의 위치를 알 수 있도록 수면의 파문에 주의해서 그리고 제트탕은 뽀글거리는 거품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애를 써요. 채색할 때 가장 즐거운 것은 그림자 그리기입니다. 그림자를 어떻게 그리냐에 따라 건물의 공간감과 분위기, 질감이 결정되거든요 

 

- 물감은 윈저앤뉴턴의 투명 수채물감.

 

- 완성된 그림은 스캔한 뒤 컴퓨터로 옮겨 글자를 입력해 마무리합니다. 이렇게 도감의 제작 과정을 돌아보면서 제가 항상 세 가지를 주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첫째, 목욕탕의 모습과 정보를 정확히 전달하는 것.
둘째, 목욕탕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것.
셋째, 일러스트로써의 완성도

- 건축학과 출신의 목욕탕 지배인인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목욕탕 도감을 보는 사람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길 간절히 바랍니다. 당신에게 이 마음이 조금이라도 전달되었다면 큰 영광일 거예요.

 

- 건축가 이마이 겐타로 健太郎는 목욕탕 설계 전문가다. 도쿄 마치다시의 오쿠라 유도 그의 작품 중 하나. 마치다 역에서 버스로 15분 정도 이동해 주택가를 걷다 보면 '오쿠라유 사우나'라고 적힌 굴뚝이 눈에 들어온다. 기와지붕과 맞배지붕이 이어진 목욕탕 입구에는 나무로 된 간판이 있고 백색 천에 옅은 먹으로 (유 ゆ 목욕탕을 뜻함)'라고 적힌 멋진 천 가림막이 드리워져 있다.  

 

- 탈의실 바닥은 다다미가 깔려 있어 맨발로 디디는 감촉이 좋다. 욕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황색의 타일 벽화. 요코야마 타이칸(横山大観. 일본의 화가)의 명화 <조양영봉 朝陽靈峰>에서 영감을 받은 후지산과 구름이 그려져 있다. 

 

- 가만히 탕에 앉아 있으면 격자무늬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수면을 조용히 비춘다. 제트탕이나 전기탕과 같은 설비가 없는 심플한 구성이 정숙한 공간감으로 이어져 마음이 편안하다. 연수를 사용하고 있어 손으로 물을 떠보면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넓은 욕조의 따스한 물에 몸을 푹 담그고 반짝이며 흔들리는 수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몸도 마음도 서서히 풀어진다. 욕실 가장자리에서 타일 그림을 멍하니 바라본다. 이대로 몸 전체가 욕조에 녹아 들어갈 것 같은 위험한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건축가와 주인의 수많은 토론과 연구 덕일까? 이곳에서는 남다른 편안함과 수준 높은 공간을 경험할 수 있다. 

 

- 목욕이 끝난 뒤에는 노천 공간에서 느긋하게 시간이 흐르는 것을 즐겼다. 두 명이 겨우 들어가는 좁은 공간이지만 반투명 유리벽을 통과해 들어오는 햇살과 뺨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바람이 또다시 평온한 행복감을 선사한다. 단아하게 조경된 식물들도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고급스러운 공간 덕에 목욕 후 찾아오는 행복감의 깊이가 한층 더 진하다. 구석구석 배려로 가득 찬 오쿠라유의 건축에 새삼 큰 감명을 받았다. 

 

- 히사마츠유는 사쿠라다이역에서 도보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새하얀 벽돌로 된 사각형 현대식 건물에 유리문 같은 구조물이 있고, 세련된 목재풍의 카운터 좌우에는 수증기를 연상시키는 디자인의 천 가림막이 드리워져 있다. 욕실은 흑백 타일로 통일감을 주었고, 높은 천장은 마름모꼴 격자무늬다. 곳곳의 지붕창에서 강렬하게 쏟아지는 햇빛은 경건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 탈의실 입구에 있는 작은 정원은 마치 삼림욕을 하는 상쾌한 기분을 들게 한다. 전체적인 구조뿐 아니라 세부적인 부분에서도 목욕탕 건축을 향한 끝없는 노력의 흔적이 보인다. 가령 창가에 위치한 샤워 공간은 낮게 설비해 전망을 방해하지 않았고, 바닥에 살짝 경사를 주어 발을 얹기에도 편안했다. 사이즈가 작아도 좁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외에도 일반적인 샤워 공간에서는 볼 수 없는 층계가 마련되어 있어 건축 설계를 전공한 내게 즐거운 발견의 연속이었다. 

 

- 벚꽃의 계절이 되면 찾아가고 싶은 목욕탕이 있다. 이케가미역 池上駅에 위치한 목욕탕 사쿠라칸, 이름에 걸맞게 목욕탕 앞에 큰 벚나무가 서 있다. 여관풍의 건물과 벚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기품이 넘친다. 나무 아래 벤치에는 단정하게 차려입은 동네 아주머니들이 목욕탕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다. 21세기 도쿄의 목욕탕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옛 정취가 물씬 나는 곳이다. 

 

- 활짝 열린 창을 통해 벚나무 가지가 욕실 안까지 뻗어 들어온다. 뜨거운 수증기 때문에 나무가 상할까 봐 지금은 가지를 정리했지만 창밖의 벚꽃을 감상할 수 있다. 벚꽃 잎이 흑탕 위로 떨어져, 몽환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

 

- 사쿠라칸의 욕실은 이치노유(첫 번째 욕탕)과 니노유(두 번째 욕탕)로 나눠져 있고 매달 남탕과 여탕이 교체된다. 이치노유에는 2층에 스팀사우나, 3층엔 옥외 노천탕이 있다. 숨이 가빠질 만큼 뜨거운 스팀사우나와 바깥공기를 즐길 수 있는 노천탕이 있지만 이 계절에는 아무래도 니노유를 추천한다. 다행히도 오늘은 니노유가 여탕이었다.  

 

- 욕실에 들어가 가장자리 온천으로 향한다. 사쿠라칸에서 용출되는 '순양갈층천 純養褐層泉'은 흑갈색 덕에 일반적으로 흑탕으로 불린다. 오타구의 목욕탕에서 흑탕을 보는 일은 자주 있지만 이곳은 농도가 유독 진해서 수면에서 2센티미터 아래는 보이지 않을 정도다. 발끝으로 깊이를 확인해 가면서 욕조 안의 계단을 내려가 안쪽 벽에 등을 가져다 댄다. 기분 좋은 온도에 몸의 긴장이 스르륵 풀린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조금 높은 위치에 창문이 활짝 열려 있고 벚꽃이 만개해 있다. 바깥에서 실내까지 뻗어 들어온 나뭇가지에서 벚꽃 잎이 바람결에 살랑살랑 춤을 추며 검은 온천수에 내려앉는다. 몽환적인 광경이다. 바깥에서 들어온 바람 소리, 사람들이 몸에 물을 끼얹는 소리, 조용히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우아하게 벚꽃놀이를 즐겼다. 

 

- 유돈부리 사카에유에서는 다른 목욕탕에서는 즐길 수 없는 고급스럽고 호화로운 기분을 맛볼 수 있다. 도쿄 미노와역 三輪駅에서 약 1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이곳은 채소가게와 정육점, 술집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 위치해 있다. 1945년에 영업을 시작했으며 이후 몇 번의 개장을 거쳐 2017년 5월 유돈부리 사카에유라는 이름으로 리뉴얼 오픈했다. 돈부리(덮밥)처럼 여러 종류의 욕탕을 즐길 수 있는 곳이라 이런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 욕실 안에는 냉탕, 열탕, 약탕이 있으며 리뉴얼 때 증설한 노천탕은 초미세버블온천이다. 특히 버블탕 안에 이색적인 두 개의 항아리탕이 있다. 조심스럽게 항아리탕에 들어가 보니 넘치기 직전까지 차 있던 온수가 기세 좋게 '첨벙' 하는 큰소리를 내며 흘러나왔다. 물을 넘치게 만들어서 다른 욕조로 흘러가게 하다니! 일반적인 목욕 매너로는 상상할 수 없는 곳이다. 아주 약간의 죄책감과 함께 묘한 쾌감이 찾아왔다. 

 

- 사카에유의 호사스러움은 이것이 끝이 아니다. 사우나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넓다. 누워도 될 정도로 넓으며 3단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 또한 불그스름하게 빛나는 히말라야 소금결정이 쌓여 있는 사우나 스토브가 두 대나 들어서 있다. 노천탕을 신설하면서 원래 남성 사우나였던 공간을 여성 사우나로 통합했다고 한다. 땀을 듬뿍 흘린 뒤에는 냉수가 폭포처럼 흐르는 냉탕을 즐긴 뒤 노천탕의 벤치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면 가히 천국이 따로 없다. 

 

- 이야기를 나누며 마사지를 즐긴 지 한 시간 가량, 온몸이 구석구석 가벼워졌다. 옷을 갈아입으며 피부를 만져보니 깜짝 놀랄 정도로 윤기가 있었다. 목욕을 마친 뒤에는 피부가 건조해지기 때문에 오일을 금방 흡수한다고 한다. 내 피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윤기가 있어 행복감이 몰려왔다. 집으로 향하는 길, 제대로 호강했다는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길을 걸으니 밤바람이 유독 더 산뜻하다. 퇴근길 혹은 평소보다 조금 더 열심히 일한 날,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들르기에 딱 좋은 목욕탕이다. 

 

- 교토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다. 건축 강의를 듣기 위해 교토를 여러 번 방문한 적이 있다. 아담하고 그윽한 정취의 신사와 절이 들어선 거리 사이사이 예쁜 카페와 세련된 상점이 나란히 함께 있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도시에 새로운 문화가 채색된 모습이 마치 수채화를 보는 것 같다. 그런 교토의 이미지가 잘 응축된 목욕탕이 바로 우메유다. 

- 메이지 시대에 교토 고조라쿠엔에서 영업을 시작한 우메유는 옛 일본식 2층건물로 느긋하게 흐르는 다카세 강과 닿아 있다. 입구에는 '사우나 우메유'라고 적힌 네온사인이 밝게 빛난다. 현재 이곳을 운영하는 미나토 사부로는 스물여덟 살로 대학시절 목욕탕의 매력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많은 목욕탕이 폐업하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고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목욕탕 경영에 뛰어들었다. 그는 "사라져 가는 목욕탕을 조금이라도 남기고 싶다"라는 일념으로 새로운 도전들을 계속하고 있다. 욕실에서 라이브를 개최하거나 목욕탕 프랜차이즈를 설립하는 등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건축물에 새로운 문화를 심어나가고 있다.

 

- 목욕탕에서 많은 대화를 해보면 정말이지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느껴져요. 이렇게 목욕탕에서 나누는 대화의 순간이야말로 대중목욕탕만의 특별한 문화입니다. 직접 단골이 되어 목욕탕 커뮤니티의 일원이 될 수도 있죠. 전 언제나 같은 시간에 고스기유에 있기 때문에 매일같이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어요.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같은 욕조에 몸을 담그곤 "준조 상점가에 새로 생긴 술집이 오픈 세일로 맥주가 10엔이래요", "새로 산 황토팩이 좋던데, 쓰실래요?", "표고버섯 땄는데 드릴까요?" 같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처음엔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이 어색했어요. 하지만 같은 시간에 몇 번이고 만나다 보면 자연스레 말을 걸게 되고 지금은 이러한 대화가 편안한 일상의 루틴이 되었지요. 화제는 정말 소박한 것들이라 이 지역 이슈나 지인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에요. 저에게 이런 대화는 일상의 루틴으로 정착되어 책을 쓰느라 줄곧 집에만 있을 때나 안 좋은 일이 있어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였을 때면 목욕탕에 와서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평소의 리듬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어요.  

 

- 매일 대화를 나누는 사이지만 신기하게도 서로의 이름도 모르고 직업도 모릅니다. 평소에 입는 옷 스타일도 몰라서 밖에서 우연히 만나면 서로를 몰라 보거나 조금 멋쩍은 기분도 들어요. 그 때문에 오히려 발가벗은 채로 대화를 나누는 이 커뮤니티가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서로 발가벗은 채라면 나이도 직업도 상관없이 한 명의 사람으로서 대화를 나눌 수 있거든요. 무엇보다 욕실에서만 주고받는 대화니 그 뒤는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 그렇다고 해서 서로의 관계가 얕은 것도 아니에요.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만큼 따스하고 견고한 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래서 대중목욕탕의 커뮤니티는 남다른 점이 있어요. 이런 얕으면서도 견고한 관계에 마음이 놓이는 것은 평소 SNS를 통해 익명성 커뮤니티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도 다정하지만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는 독자적이고 특별한 대중목욕탕만의 커뮤니티를 경험해 보세요.  

- 헤이덴 온천 입구는 박공지붕형 간판이 있고, 중앙에 '목욕탕’이라고 적인 귀여운 네온사인이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아이치현의 목욕탕 조합 티셔츠를 입은 주인 부부가 반겨주었다. 다시 만난 여주인과 함께 욕실에 들어가 취재를 시작했다. 욕실 중앙에 욕조가 있고 그 안쪽에 제트탕, 전기탕, 약탕이 나란히 있다. 그리고 도쿄라면 후지산 벽화가 있었을 곳에 여러 식물들과 바위로 꾸며진 정원이 있었다. 나고야에는 욕실 내에 정원이 있는 목욕탕이 드물지 않다고는 하지만 유리벽 없이 직접 정원과 이어진 곳은 이곳뿐이다.

 

- 욕실의 습기와 열기로 온실이 만들어져 열대식물이 자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레몬나무도 심었어요." 여주인이 가리킨 곳에는 아직 녹색의 둥근 레몬이 달려 있었다. 노랗게 익으면 꿀에 절여 손님들에게 나눠준다고 한다. 이외에도 바나나, 망고, 미라클프루트 등이 심어져 있고 아기자기한 장식도 있어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 취재가 끝난 뒤에는 온천을 느긋하게 즐기고 대합실로 향했다. 카운터에 각양각색의 오리인형과 잘라서 판매하는 비누, 과자, '팬더목욕탕' 상품 등이 비좁을 정도로 놓여 있었다. 잘 보니 마스크팩도 있었다. "혼자 팩을 하면 부끄럽지만 같이하면 안 부끄러워요." 단골들이 편안하게 팩을 즐기며 담소를 나눌 수 있게 한 배려다. 목욕을 마치고 다 함께 마스크팩이라니. 그 모습을 상상하자 미소가 지어졌다.

 

- 근처 고교 양봉장의 꿀을 사용한다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주인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한 달에 한 번 전시회를 열기도 하고 동네에 재미있는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 있으면 목욕탕에서 판매도 한다. 목욕탕 팸플릿에 등장하는 여성은 단골손님인데 모델을 해준 비용으로 달걀과자를 주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그녀의 소박하고 따뜻한 인품이 느껴졌다. 목욕탕에서 받은 따스한 인상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목욕탕을 나설 때는 내게 "또 와요"라는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가깝다면 매일이고 찾아올 텐데!' 나고야 사람들이 부러워지는 목욕탕이다. 

 

- 학교 다닐 때도 과제에 너무 집착하는 바람에 건강을 해치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이때도 일에 과도하게 몰입해 식사나 수면 같은 일상생활을 소홀히 했습니다. 1년 반이 지나자 몸과 마음에 한계가 왔고 결국 이상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어지럼증과 이명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아침에 일어나도 피로가 전혀 풀리지 않았어요.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안색은 점점 어두워져 갔습니다.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니 부주의로 인한 실수도 많아졌고 점점 자기혐오에 빠져들었어요.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정신 상태가 악화되었습니다. 

 

- 결국 출근이 어려운 지경이 되자 '기능성 저혈당증' 진단을 받고 휴양을 위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기능성 저혈당은 스트레스로 인해 부신기능이 저하돼 혈당치를 조절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계속되던 컨디션 난조와 우울한 기분도 증상 중 하나였습니다. 결국 의사의 진단으로 3개월간 휴직을 하게 되었어요. 

- 휴직을 했는데도 회사에 폐를 끼쳤다는 사실과 가족을 걱정하게 했다는 죄책감에 마음 편히 쉬지 못했습니다. 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지요. 그때 우연히 친구가 목욕탕에 가자고 해서 함께 가게 됐습니다. 오랜만에 간 목욕탕은 평일 낮 시간대라 그런지 한산했고 욕조에 따뜻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밝고 커다란 욕실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공간이었어요.

 

- 같은 세대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도 마음이 안정되는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줄곧 우울한 상태였던 저를 둘러싸고 있던 딱딱한 껍질 하나가 녹아 없어진 기분이었어요. 의사도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좋다며 목욕탕에 정기적으로 다닐 것을 권했습니다. 사실 그때는 일을 쉬고 있다는 죄책감에 즐겁게 지내서는 안 된다는 쓸데없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속박하고 있었거든요. 

 

- 의사의 허락을 떨어지자 목욕탕은 죄책감 없이 갈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됐습니다. 게다가 마침 집 근처에 괜찮은 목욕탕이 있거든요. 입욕료도 단돈 500엔이라서 수입이 없던 제게 크게 부담이 되지 않았어요.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냉온욕은 기능성 저혈당증에 딱 맞는 입욕법이어서 점차 혈액순환도 좋아지며 몸이 가벼워졌습니다. 우울했던 마음도 서서히 밝아졌지요. '목욕탕에 가면 건강해진다는 것'을 실감한 뒤부터 '오늘은 어느 목욕탕에 갈까?' 하며 두근두근 설레할 정도로 목욕탕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 어느 날 친구와 우에노에 있는 목욕탕 고토부키유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역 근처에서 가볍게 러닝을 하고 목욕탕으로 향했습니다. 운동한 후라 따뜻한 물에 들어가자 몸도 마음도 풀어져 녹아내릴 것처럼 편안했습니다. 욕조에 앉아 목욕탕의 상징과도 같은 후지산 그림을 보면서 새삼 '좋은 목욕탕이구나' 생각하고 있는 순간, 이 온전한 행복감을 다른 사람에게도 소개하고 싶어졌어요. 목욕탕에 생전 가본 적이 없는 친구들에게 이 행복감을 전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 <목욕탕 도감>입니다.

 

- 처음엔 목욕탕이 직장이 된다는 건 상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중학생 때부터 제 목표는 건축가였으니까요. 심지어 목욕탕으로 이직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하지만 몸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고 목욕탕을 그리는 일을 계속해보고 싶다는 마음은 깊어졌습니다.

 

- 결국 친구 10명에게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만약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건축을 계속하기로 마음먹고요. 그런데 웬걸. 10명 모두가 "목욕탕, 이직 찬성!"이라고 답했습니다.

 

- "건축은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 좋아하는 일을 해."

"대학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잖아. 그 길이 맞는 것 같아."

 

- 친구들의 말을 들으니 제가 그림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졸업 논문으로 그렸던 마을 그림을 기뻐해주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림으로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내가 목욕탕 도감을 통해 해나가고 싶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배워온 건축 일을 수포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돌고 돌아 진정 하고 싶었던 것을 목욕탕이라는 장소에서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이런 용기가 생겨나 이직을 결정했습니다.  

 

- 이 책을 위해 반년 동안 오직 취재와 집필에 집중했습니다. 아침 7시면 일어나 밤까지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어요. 늦은 밤엔 지친 몸을 이끌고 고스기유에 다녀와 피로를 씻어내고 푹 잠에 드는 그런 나날들이었습니다. 집에서 묵묵히 작업을 하다 보면 나쁜 생각이나 과거의 안 좋은 기억들이 다시 떠올라 정신이 피폐해지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감이 한 장 완성되면 정말 자랑스럽게 느껴져 한시라도 빨리 다음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어요. 그림 그리는 것을 순수하게 즐겁다고 말할 순 없어요. 하지만 그 모든 힘듦을 감수하면서 그림 그리는 인생을 앞으로도 이어가고 싶습니다. 목욕탕 도감 작업을 하면서 마침내 그림 그리는 인생의 첫걸음을 걷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앞으로도 목욕탕 활동을 이어가며 오래오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다음에 어떤 작품으로 여러분을 만나게 될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재회할 날을 기쁘게 기다리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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