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사와무라 이치] 예언의 섬

일루젼 2023. 11. 2.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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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사와무라 이치 / 이선희
출판 : 아르테(arte)

출간 : 2022.08.09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다. 중반까지는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는데, 결말까지 읽고 보니 초독이 맞는 것 같다. 

(사실 일본 소설 중에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 미스터리한 사건에 휘말리는 전개는 상당히 흔한 편이다.)

 

마침 직전에 읽었던 책이 <밤의 괴물>이었다. 주변의 시선, 암묵적인 규칙 같은 '사회적 압박'에 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일본도 그렇지만 한국 또한 10대 대부분을 '단 하나의 정답'을 찾는 연습을 하며 보낸다. 때로는 그보다 더 긴 시간을 들여서, 얼마나 많은 정답을 찾아내느냐에 따라 향후 몇 십 년의 수입과 환경적 안정이 결정된다고 믿으며. 

 

하지만 대다수의 -거의 모든- 것들은 일종의 스펙트럼으로 구성되어 있다. 절대적인 무언가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일종의 맥락적인 차원에서, 상대적 비교를 통한 그 순간의 '적절함'이 존재할 뿐이다. 사회적 합의와 개인의 자유, 타인에 대한 예의와 자신에 대한 보호. 

 

모든 순간에 절대적으로 작동하는 마스터 키는 일종의 환상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기에 개개인들은 오히려 더더욱 그런 절대성에 기대고 싶어한다. 타인의 말에 힘을 실어주는 만큼 내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 줄어든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판단과 선택이 버겁게 느껴질 때, 혹은 여러 이유로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손쉽게 타인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곤 한다.

 

강력한 권력에 대한 갈망. 나를 보호해주고, 번영시켜 주고, 내게 가장 좋은 것들을 알아서 결정해 줄 어떠한 힘. 타자에 대한 이상화와 신격화의 기저에는 그런 기대심리가 숨어 있다. 그런 틈새를 가장 잘 포착하고 공략하는 이들이 바로 사기꾼 - 예언가들일 것이다.

 

<예언의 섬>은 사실 아주 잘 쓰여진 소설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중반까지의 몰입감과 흥미로운 소재가 너무 뜬금없게 느껴지는 결말로 마무리된다. 물론 종장까지 읽고 나면 이전까지 느껴졌던 묘한 위화감이 설명되긴 하지만, 기분 좋은 감탄사보다는 미진한 수긍에 가깝다. 혈연에 의한 속박, 익숙함으로 인한 비정상화, 타인의 말에 의한 세뇌. 재료들이 완전히 녹아들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읽었다고 생각했다. 이야기 자체로만 보았을 때는 개연성이 약한 편이지만, 이야기가 다루고 있는 주제와 각 인물들의 가치관과 선택에는 더 깊게 생각해볼 지점들이 존재했다.

 

개인적으로 <예언의 섬>을 요약한다면 조금 다른 키워드들을 뽑을 것 같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제대로 보고 있는가?" 

 

'사로잡히다'라고 표현하려면 자신이 아닌 것을 믿어야 한다. 바꿔 말하면, 자신이 아닌 것을 자신이라고 믿어야 한다.

여기서 가장 큰 모순은 자신이라고 믿는 것은 자신이라는 점. 

따라서 얼마나 '자신을 제대로 아는가'는 사실 정확한 '자기 정체성'을 가졌느냐 가 아니라 -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얼마나 빠르게 '자기모순을 감각하느냐'에 달렸다고 봐야 한다.

 

재미있게 읽었다.

끝.

        

 


   

 

밖과 안이 하나가 되었을 때
빛과 어둠이 한 몸이 되었을 때
그 빛은 멈출 줄 모르고
'둥근 '고리'의 시작이 되리라

 

 

"성천님은 부처님의 친척이야. 
그러고 보면 오사요 씨 모습은 꼭 무녀 같지 않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기도든 기원이든, 
그런 건 최대한 거드름을 피우며 해야 더 믿어주는 법이거든."


- 요코미조 세이시의 <옥문도> 중에서

 

 

 

- (역자 주 : 성천. 불교의 수호신으로, 코끼리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하고 있다.)

 

- 히로는 맹장지 사이로 살며시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른들의 등이 보인다. 큼지막한 TV 카메라와 모니터도 보인다. 수많은 케이블이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다. 그중 몇 개는 맹장지 사이를 뚫고 복도로 나가 벽의 콘센트에 꽂혀 있다. 꼭 굵직한 지렁이나 발이 없는 갯지렁이처럼 보였다. 조명이 객실 안을 비추었다. 

- 그 애는 어디에 있을까? 공주님처럼 예쁜 옷을 입고 조금 전까지 나하고 얘기했던, 귀엽게 생긴 그 애는.

 

- "왜 그러세요?"

어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그러자 파락파락 하고 종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나이 많은 노파의 목소리가 들렸다.

"... 머리가 아파서 그렇다오. 어둠이 내려앉고 나선 계속 그렇구려. 강렬한 영기(靈氣)가 계속해서 뇌를 압박하고 있네, 오슬오슬 춥기도 하고. 이것 좀 보시구려."

- "그렇게 위험한가요? 강하다고 할까, 전투력이 높다고 할까..."

누군가가 물었다.
그런데 말의 내용과 달리 어딘지 모르게 무시하는 느낌이 배어있었다.

 

- 화면 안에서 노파가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얼굴을 찡그리더니, 곧바로 시선을 들어 산 쪽을 바라보았다.
"아주 강한 원한이 느껴지는구려. 엄청난 증오심도 느껴지고, 이 마을에 사는 사람, 이 섬을 찾아오는 사람을 모조리 증오하고 있어. 저쪽 세계로 끌고 들어가려고 하는구려. 자신과 똑같은 고통을 안겨주기 위해 괴롭히고 또 괴롭히면서 천천히, 서서히..."

- 죽이려고 하고 있다오.
노파는 들릴락 말락 한 속삭임으로 말을 마무리했다. 객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한 젊은 촬영 스태프 두 명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등을 떨고 있었다. 웃고 있는 것이다. 노파의 말은 거짓말이다, 엉터리라고 무시하는 것이다.

 

- 그들을 보고 히로는 어이가 없었다. 나는 노파의 말투나 태도에 압도되지 않았던가. 노파의 말을 들은 순간, 어두운 산이 떠오르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떻게 노파를 비웃을 수 있지? 그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애당초 사람이 진지하게 말할 때 웃음을 터뜨리는 건 실례가 아닌가.

 

- "어떻게 하실 겁니까? 원령과 말씀해 보실 건가요? 직접 싸우실 건가요? 아니면 수호령과 의논해 본다든지..."
"일단 산으로 가서 대화를 해보지. 잘하면 카메라에 담을 수도 있으니까."
스나가가 찜찜한 얼굴로 물었다.

"안 가시면 안 되나요?"
처음 보는 어른들... 즉, 촬영 스태프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로 마주 보았다. 손에 있는 책자를 들추며 확인하는 사람도 있었다.

"갑자기 왜 그러시죠?"
"이렇게 어두운 밤에 산에 가시면 위험하거든요. 헤헤헤."
억지웃음을 짓는 스나가의 얼굴에서 커다란 땀방울이 빛나더니 뺨을 타고 흘러내려 턱 끝에서 떨어졌다. 다른 섬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 노파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머리가 아픈지 미소가 기묘하게 뒤틀렸다. 

"내 걱정은 안 해도 된다오. 어렸을 때는 종종 산을 돌아다녔으니까. 무당이었던 어머니 손을 잡고 한밤중에 산길을 걸어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
"그래요? 그 유명한 '오소레 산'의 무당이었나요?"

"아니야."

 

- 노파가 어떻게 알았지? 이게 영감의 힘일까? 그렇다면 자신의 부모님이 그렇게 된 건 정말로...
숨을 쉴 수 없었다. 심장이 시끄러울 만큼 쿵쾅거렸다. 섬사람들의 반응에 만족했는지, 노파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감돌았다. 다음 순간, 온몸의 털이 일제히 곤두섰다.
"그래, 내 눈에는 보인다오. 강력한 원령이 이 섬을, 이 마을을 지배하고 있어. 난 그 원령에 맞서 싸워야 해."
눈을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었다. 강렬한 공포가 온몸으로 파고들었다. 노파가 말한 원령도 무서웠지만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만큼 노파도 무서웠다.

 

- 그때 기다란 치마가 눈앞을 지나갔다. 공작이 수 놓인 검은색 치마가 조용히 현관 쪽으로 향했다. 그 노파다. 사치카의 할머니다. 지금부터 히키타 산으로 가는 것이다. 
눈알처럼 생긴 공작의 날개 문양을 바라보면서 사치카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저런 건 전부 속임수 아니야...?"

 

- 오하라 소사쿠가 자신의 임대 아파트에서 자살하려고 했을 때, 아슬아슬한 순간에 막은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버지였다. 몇 달 전부터 아들과 연락이 되지 않아 걱정돼서 가보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주변 사람들에게 말한 이유는 나름대로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왜 그날 그 시간에 아들 집에 갔는지는 본인도 잘 모른다고 한다. 아침 9시에 효고 현 이타미 시의 자택에서 열차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네 시간에 걸쳐 도쿄 도 나카노구에 있는 아들 집까지 간 직접적인 동기는 과연 무엇인가? 

- 주변 사람들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들에게 가보라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요." 


- 그의 아내는 10년 전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세상에 죽은 사람의 영혼이 있을 리 없다. 따라서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아마 감이나 느낌, 육감 종류이리라.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끝까지 파고들면 '논리적이 아니다', '직감적이고 감각적이다'라는 말로 귀결되니까. 

 

- "알 수 있어. 그게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야."
"흐음..."
"부모와 자식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통하는 법이거든. 피가 이어져 있어서 서로를 느낄 수 있지. 부모라면 자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하고..."


- 준은 이미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장황한 말을 들을 때가 아니다.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그런 뜻을 드러냈다. 실제로 지금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소사쿠가 살았다는 점이다. 몇 안 되는 친구가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았다. 그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 "아무튼 다행이야. 이렇게 만날 수 있어서." 

소사쿠가 대답하지 않는 걸 보고 준은 당황해서 황급히 덧붙였다.

"이번 기회에 잠시 쉬어, 실업 급여는 나오지?"
"그래."
이번에는 대답을 했다. 준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 "네가 와서 아버님께서 많이 좋아하시지 않아? 네가 없어서 쓸쓸하다고, 작년에 만났을 때 그러셨거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소사쿠의 말투가 갑자기 거칠어졌다. 더구나 표준어다. 사투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상경한 지 15년이나 되었으므로 어쩌면 당연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이해하면서도 그의 변화가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5년 전까지만 해도 사투리가 남아 있었는데.
"서른일곱 살이나 된 아들놈이 직업도 없이 백수가 되어 돌아왔는데 좋아할 리 있겠어? 더구나 재취직은 절망적이고."

 

- 테이블을 노려보며 중얼거리는 소사쿠를 보고 일반적인 사실을 말해주었다.
"교토대 출신이 취직을 걱정하다니. 넌 경력이 좋으니까 곧 여기저기서 서로 데려가려고 할 거야."
마흔을 앞두고 회사를 그만둔 건 마이너스일지도 모르겠지만, 소사쿠의 스펙은 그것을 채우고도 남는다. 

- "이타미 대학 출신에 코딱지만 한 과자 회사의 말단 사원과 비교하면..."
"아니야." 

소사쿠는 재빨리 말을 가로막더니, 어두운 눈빛으로 준을 바라보았다. 

"나한테 있는 건 스펙뿐이야. 현실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술은 하나도 없지. 사회성도, 분위기를 파악하는 능력도, 더구나 충성심도."
"충성심?"
소사쿠가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회사에서 일하는 월급쟁이에겐 필수잖아."

 

- 그는 천천히 머리를 껴안더니, 머리칼을 마구 휘저었다.
"나도 알고 있다고! 그 녀석들 말이 틀렸다는 걸. 부하 직원을 꽁꽁 옭아매기 위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말한다는 걸. 그런 건 회사에 다닐 때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고개를 숙인 채 잠시 가만히 있더니 꺼질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 지금의 내가 정상이라곤 생각할 수 없어. 난 무능한 낙오자에다 패배자이고..."
그의 입에서 스스로를 부정하는 말이 잇따라 튀어나왔다.

 

- "그 말, 전부 거짓말이지?" 

소사쿠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앞머리 사이에서 충혈된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사실은 나를 무시하고 있잖아?"
"뭐?"
"이쪽에 있었을 때 입만 떼면 '시골의 끈적끈적한 인간관계에 파묻히고 싶지 않아', '우물 안 개구리는 되기 싫어'라고 잘난 척하며 상경하더니, 결국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와서 꼴좋다고 생각하지? 결혼도 못 하고 도망쳐온 녀석, 인생의 절정기가 대학 시절인 녀석이라고 속으로 비웃고 있잖아! 너도, 그리고 너희..." 

- 이쪽을 쳐다보는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되도록 냉정하게 말했다.

"그건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이야. 아니, 그 상사들로 인해 무의식 중에 그렇게 생각하게끔 된 거야. 물론 너도 알고 있겠지만." 
소사쿠는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 틈을 노린 것처럼 종업원이 나타나 아이스커피 두 잔을 내려놓고 곧바로 사라졌다. 

 

- 그곳에서 7년간 일한 뒤 다시 이직한 벤처 기업에서 매일 상사의 괴롭힘에 시달렸다. 한 달에 120시간이 넘게 야근하며 일한 탓에 잠자는 시간은 하루에 다섯 시간도 채 안 됐다고 한다. 

 

- "지금도 들려. '이건 부탁이 아니라 업무 명령이야'라는 말이..."

"꿈에서?"
"아니, 상사들의 평소 입버릇이었거든."
멍청한 녀석이 할 만한 말이군. 하고 코끝으로 비웃으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것은 누구보다 소사쿠가 잘 알고 있으리라.

- "여기보다 힘든 회사는 얼마든지 있어. 우리 회사는 편한 편이지."

"여기서 못 견디면 어디 가서도 일할 수 없어."
"너처럼 한심한 녀석을 어디서 받아주겠어? 여기를 그만두면 네 인생은 끝이야, 끝!"

 

- 소사쿠가 말해준 상사들의 협박 문구는 놀라울 만큼 평범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듣자마자 반박할 말들이지만, 계속 들으면 나쁜 의미에서 익숙해질지도 모른다. 소사쿠처럼. 

 

- 일종의 세뇌이고 가스라이팅이다. 폐쇄된 커뮤니티에 갇혀 있으면, 대도시인 도쿄 한복판에서도 왜곡된 가치관에 물드는 경우가 있다. 아무리 아니라고 생각해도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이다.

 

- 소사쿠가 자살을 결심한 직접적인 계기는 '회사에도, 아버지에게도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아침 7시에 퇴근해 씻은 뒤, 잠깐 눈을 붙이고 11시에 눈을 뜬 직후의 일이었다. 
"이상하단 생각은 안 들었어. 오히려 완벽한 조건이다. 이제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
욕실에 마침 유황이 함유된 입욕제와 화장실용 산성 세제가 있었다. 그 둘을 세숫대야에서 섞어 황화수소를 만든 뒤, 그걸 마시고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황화수소를 선택한 이유는, 그래야 집이 더러워지지 않아서였다. 


- 세숫대야 앞에 웅크리고 앉은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어찌할 바를 몰라서 당황하고 있을 때, 밖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연다!"
아버지였다. 다음 순간,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어 안으로 들어온 아버지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왜 방해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쳐도 돼? 진심으로 그렇게 어리석은 생각을 했어. 정신없이 고함을 지른 기억도 있고, 아버지에게 몇 대 얻어맞고 힘이 빠졌는데, 그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아." 

 

- 궁지에 몰린 사람은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에게 이를 드러내는 법일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리라.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 기억이 나는 건 전부 사소한 일들뿐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친구를 만들지 못해, 반 친구들과도 선생님과도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없었다. 새 학기가 되거나 진학한 직후에는 그나마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도 헤어져야 했다. 그런 준과 아직도 친구로 있어준 소사쿠가 지금 중대한 위기에 놓여 있다. 

 

- "여보세요."
"저기... 혹시 이타미미나미 고등학교 졸업생인 아마미야 준 씨 휴대폰인가요?"
휴대폰 안쪽에서 당황한 남자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하루오?"
준은 저도 모르게 소리치면서 황급히 휴대폰을 잡았다. 재빨리 스피커폰으로 바꾸고 방의 불을 켰다. 

 

- 준은 힘이 빠져서 어깨를 떨어뜨렸다. 동네방네 소문이 났나 보다. 마흔을 코앞에 둔 남자가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마음에 병이 들었다. 더구나 결혼도 하지 않았다고 하면 남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씹기 좋은 안줏감이리라. 
 

- "어떻게 해주고 싶은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이럴 때 '힘내'라는 말이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 말밖에 못 했어."
"그랬구나."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게 제일 좋다고 하는데... 밥 먹고 잡담하는 것밖엔 안 떠올라 공통의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겠지."


- 소꿉친구, 죽마고우, 오랜 우정... 세 사람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은 금세 떠오르지만 관계 자체에는 확고한 실체가 없다. 예측하지 못한 사태가 발생하면 구체적인 대책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준의 입에서 약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 소사쿠가 무표정하게 물었다.

"나오시마 말이야?"
순간, 방파제 끝에 떡하니 놓여 있는 거대한 호박 조형물이 떠올랐다. 노란색 표면에 크고 작은 검은색 물방울이 나란히 찍혀 있는 조형물이다. 예술가인 구사마 야요이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편집적인 문양이다. 

- 나오시마는 가가와 현에 있는 유명한 예술 섬이다.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리조트 섬인데, 대기업인 베네세가 개발해서 운영하고 있다. 가까운 데시마와 이누지마를 합친 세 섬에는 미술관이 몇 개나 있고, 옥외 여기저기에도 예술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거길 선택하다니, 뜻밖이야. 하긴 가끔은 예술을 보는 것도 좋을지 모르지."
준의 중얼거림을 듣고 하루오가 코끝으로 웃었다.
"그런 더러운 섬은 아니야."
표정은 온화했지만 눈빛과 말투는 더할 수 없이 진지했다.

"더럽다고? 무슨 말이야? 그 섬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설명하기도 귀찮아. 어쨌든 내가 말한 곳은 거기가 아니야."

"그럼 어디야? 쇼도시마?"

준은 대표적인 세토 내해의 섬을 들먹였다. 하루오의 얼굴이 느슨해지며 다시 미소가 감돌았다.

"거기도 아니야."

그는 액정 화면을 만지작거리다 휴대폰을 이쪽으로 보여주었다.

"이에시마 제도의 남쪽에 있는 섬이지, 행정 구역으론 효고 현 H 시야." 

 

- 사진 옆에는 큼지막한 글자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 무쿠이 섬 MUKUI Island 아무것도 없는 섬, 그렇기 때문에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을 수 있는 섬 ]

 

- JR 후쿠치야마 선 탈선 사고는 준이 사회에 나온 지 3년째인 2005년 4월 25일에 일어난 사건이다. 탈선한 열차가 아파트에 돌진해, 승객과 승무원을 합쳐 1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준이 아는 사람 중에는 피해자가 없었는데 상사의 친척 중에는 두 다리가 부러진 사람이 있다고 한다.

 

- 당시에 사고가 나기 직전, 열차에 타려고 한 사람을 '낯선 여성이 말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가와니시이케다 역이나 이타미 역의 플랫폼에서 옷을 잡아당기며 타지 말라고 했다, 진지한 얼굴로 "무서운 일이 일어날 거예요"라고 속삭였다, 전철을 바라보는 사이에 모습이 사라졌다. 사고 뉴스를 보고 간이 덜컹했다. 그 여성에게 고마우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아이였다거나 젊은 여성이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노파라는 소문이 가장 많았다. 그런 소문이 떠돈 건 사고가 난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부터였을까?

 

- "아줌마라니, 우리와 비슷한 것 같은데?"
"하긴 우리도 벌써 아저씨가 됐으니까. 하하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준은 슬며시 여성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어디선가 꺼낸 태블릿을 쳐다보고, 조금 전의 노인은 불쾌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다리를 덜덜 떨고 있었다. 

 

- 여성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그만두는 편이 좋아요."

농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심각해 보이지도 않고, 다만 사실을 전하는 듯한 말투와 표정이었다.
그제야 의식의 한구석에서 이해가 되었다. 조금 전 노인이 거칠게 소리친 이유는 이 말을 들어서였다. 갑자기 이런 말을 들으면 화나는 게 당연하리라. 하지만 준은 화가 나기는커녕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조금 전에 소사쿠와 나눈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소사쿠가 입을 벌린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 "더는 권하지 않겠어요. 뭐..."
여성의 시선이 준을 바라보다 멈추었다. 그러곤 새빨간 입술 끝을 살짝 올리고 "이쪽은 괜찮을 것 같네요. 강력한 수호령이 지키고 있으니까요"라고 말하더니 출입구를 지나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준은 망연한 모습으로 여성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가족에게 잇따라 일어나는 불행한 사건과 이 사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일반론이지만 여러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각각 개별적인 원인과 개별적인 해결책이 있는 법입니다. 지금은 하나하나의 문제에 차분히 대처해 보는 게 어떨까요? 가족 모두가 밝게 웃을 수 있는 날이 오길 진심으로 기도하겠습니다.]

 

- [영혼의 모습이 찍혀 있습니다. 그것도 매우 강한 원한을 가진 지박령입니다. 이곳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난 젊은 커플이 야마다 님과 친구를 몹시 질투하고 있습니다. 이 사진을 본 순간,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습니다. 이 사진의 필름이 있으시다면 곧장 저희에게 보내주십시오. 이쪽에서 공양을 올리겠습니다. 이미 필름을 처분했거나 분실하신 경우에는 당분간 아침저녁으로 불단에 물과 향을 올리며 커플의 명복을 빌어주십시오. 친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운전할 때는 안전에 신경 쓰십시오. 되도록 자동차도 개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 입에서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그렇군..."

준이 어렸을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우쓰기 유코와 출판사 편집자의 수법을 지금은 손에 잡힐 듯이 알 수 있다. 

 

- 다시 말해, 그들의 수법은 다음과 같다. 독자가 책장을 넘길 때, 맨 처음 시선이 향하는 건 섬뜩한 투고 사진이다. 손발이나 머리가 사라진 사진, 기묘한 빛이 비치는 사진, 얼굴에 보이는 음영. 독자, 특히 아이들은 일단 그곳에 시선이 가고 불안을 느낀다. 우쓰기 유코는 그런 대부분의 사진을 심령사진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한편, 투고자의 고민에는 성실하게 대답한다. 그러면 독자는 마음을 쓸어내림과 동시에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된다. 그녀를 신뢰하게 되는 것이다. 

 

- 그러다 '여기다!' 하는 곳에서 그녀는 진짜 심령사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못을 박듯이 "나는 이 사진 속 영혼의 공격을 받아서 머리가 아프다"라고 덧붙인다. 이런 걸 영장(靈障)이라고 하는 걸까? 진위는 알 수 없지만 믿는 사람은 믿으리라. 그리고 두려워할 것이다. 우쓰기 유코가 피해를 입었다면 이건 분명히 진짜 심령사진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유치하다고 할 수 없지만 너무나 단순하다. 상대를 방심하게 하고 믿게 만든 뒤 놀라게 하는, 너무도 간단한 수법이다. 

 

- 준이 반쯤 웃으면서 대답했다.

"재미있어. 이런 수법에 넘어가 춤을 추었다니."
"이 나이가 되어도 춤을 추고 있지만."

하루오의 높은 웃음소리가 배 안에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자진해서 춤을 추러 가잖아?"

소사쿠의 말투가 조금 밝아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루오가 배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데 가슴 두근거리는 사람은 우리뿐인 것 같아. 우리 말곤 그렇게 보이는 사람이 없어. 인터넷에서는 화제가 되었지만."
"당연하지. 직접 찾아가려면 돈이 들잖아."
"하긴 그래, 반대로 열렬한 오컬트 마니아라면 이미 섬에 가 있을지도 몰라."
"요즘 그런 녀석이 있겠어?"

 

- 하루오는 얼굴에서 힘을 빼고 가볍게 말했다.

"애초에 마니아가 뭐 하러 섬에 가겠어? 예언대로 사람이 죽는지 안 죽는지 확인하러? 죽으면 좋아하고 안 죽으면 실망해? 그건 말이 안 되잖..."
그때 뒤쪽에서 그의 말을 가로막는 목소리가 들렸다. 

"확인하러 가는데요?"
매표소에서 만났던 화려한 차림의 여성이 통로에 서서 이쪽을 쳐다보았다. 손에는 펜디 손수건을 쥐고 있었다. 그녀는 준의 손에 들려 있는 <심령사진 대백과 PART 4>를 눈으로 가리키면서 물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나요? 알면서도 가는 거잖아요?"
하루오가 경쾌하게 대답했다.

"뭐 그렇죠."
이런 상황에서 조금도 주눅 들지 않는 모습이 하루오답긴 하지만 웬일로 존댓말을 사용했다.

 

- "하지만 솔직히 말해 예언이 맞으면 곤란해요. 주요 목적은 위로여행이니까요. 옛날의 좋았던 오컬트 문화를 떠올리면서 상심한 죽마고우를 위로하러 가는 거거든요."  

하루오는 소사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참 독특한 모임이군요."
그녀의 입술 끝에 빈정거리는 미소가 감돌았다. 그녀는 의자 등받이를 잡고 상대를 평가하듯 한 사람씩 바라보더니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하지만 유감이네요... 예언은 반드시 맞을 거예요."

- 골치 아픈 사람과 엮이고 말았다. 지금의 상황을 새삼 깨닫고, 불안과 권태감이 가슴으로 퍼져나갔다. 다음 순간, 여성의 몸에서 뿜어 나온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싸구려 향수 냄새가 폐를 자극하며 서서히 구토증이 치밀어 올랐다.

 

-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테이블에 작은 깜장벌레가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 있는 건 5센티미터가 채 되지 않았다. 아키코 모자 사이에도, 가즈미 앞에도, 다치바나 앞에도. 물론 준 일행의 테이블에도. 
기묘한 장식이 놓여 있다. 그런 느낌이 드는 건 이 섬의 풍속이 낯설기 때문일까? 익숙지 않은 물체를 반사적으로 거부하는 이쪽의 문제일까? 위화감에 사로잡힌 채 자리에 앉았다. 

- 식사는 간소한 일본의 가정식이었다. 말린 전갱이에 건더기가 잔뜩 들어간 된장국, 채소조림, 순무 장아찌에 구운 김. 간판에서 강조한 유기농 채소가 특별히 맛있다곤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평소보다 많이 먹었다.

- "이 섬에 그런 전설이 있나요?"
"있습니다."
전원의 시선이 일제히 아소에게 쏠렸다. 아키코와 신타로는 어딘지 모르게 즐거워 보이고, 레이코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아소를 노려보았다. 소사쿠는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하루오는 테이블에 있는 깜장벌레를 만지작거렸다.
"저도 섬사람들에게서 들었습니다. 다들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아서 조각난 정보를 이어 붙이고, 군데군데 상상으로 보충했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리죠."

그는 헛기침을 하고 나서 조용하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가마쿠라시대까지 여기는 유배지였다고 하더군요. 죄인을 섬으로 귀양 보낸 거죠. 그러던 어느 날, 히키타 아무개라는 죄인이 여기로 유배를 왔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죄인들과 친하게 지냈답니다. 아는 것도 많고 학식도 높아서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합니다. 어느 고귀한 가문의 사람인 것 같다... 그런 소문이 나돌았다고 하더군요."
가끔 말을 끊을 때마다 침묵이 마음에 걸릴 만큼 식당은 조용했다. 

 

- "그러던 어느 날, 히키타는 산으로 쫓겨났습니다."

"네? 갑자기 왜요?"
아소는 한 호흡 쉬고 나서 대답했다.

"기이한 병에 걸린 탓이죠. 온몸이 퉁퉁 붓고 뼈마디가 구부러져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답니다. 얼굴에 생긴 수많은 사마귀에서는 기름처럼 번들거리는 체액이 찔끔찔끔 새어 나왔다고 합니다. 퉁퉁 부은 혀가 입에서 튀어나오는 바람에, 말을 할 수도 식사를 할 수도 없었다더라고요." 

가즈미가 파고들듯이 아소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로부터 한 달 동안, 산에서는 주변 사람들을 저주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한 달이 지났을 무렵, 히키타는 자기 힘으로 산을 내려올 수 없을 만큼 쇠약해졌죠. 이윽고 저주는 신음으로 바뀌고, 어느새 기괴한 소리만 들리게 되었습니다. 끄에엑, 끄에엑..." 

 

- "가즈미예요."
"살짝 바꾼 점이 더 수상해. 나이를 알 수 없는 점도 수상하고."

"서른 살이에요."
"생각보다 나이가 많군. 뭐, 상관없어. 그리고 한 가지 더."

레이코는 발에 힘을 주고 버티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가즈미를 내려다보았다.

"내게는 보여... 굉장하군, 당신의 수호령, 이렇게 높은 레벨의 영혼은 본 적이 없어. 신계(神界), 아니 보살계에서 내려왔나? 마더 테레사에 필적할 정도야."
두껍게 화장한 레이코의 얼굴에 천천히 황홀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야기가 갑자기 비약했다. 논리적인 질문을 하는가 싶더니, 아무런 예고도 없이 수호령이니 신계니 하는 이야기로 들어갔다. 준은 눈을 크게 뜨고 두 여성을 바라보았다.  

- 가즈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레이코 씨에게는 보이겠죠. 그래서 레이코 씨에게는 영혼이 있고 수호령도 있으며 원령도 있어요. 영감도 저승도, 신계도 보살계도 있고, 아카식 레코드도 있고요. 그 결과 예언도 있어요." 

무시하는 걸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걸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표정과 말투에는 포기의 감정이 배어 있었다. 이런 이야기는 지긋지긋할 만큼 많이 들었다고 체념하는 얼굴이다. 

 

- "그렇지는 않을 거야..." 
말문이 막힌 준을 레이코가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때에도 수호령에게 판단을 물을 건가요?"

 

- "그다음엔 민박집으로 가서 모두에게 알리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 전화번호를 교환해요, 이 자리에 있는 사람 모두." 
가즈미는 거침없이 지시를 내렸다. 안정된 태도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어제 항구에서 만났을 때와는 딴판이다.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나서 그녀는 보디백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빼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건 청록색 염주였다. 색이 바랜 파란색과 하얀색 실이 흔들렸다. 그것을 본 순간, 레이코의 큰 눈이 더욱 크게 벌어졌다. 
가즈미는 염주를 두 겹으로 해서 손에 쥐고는 조용히 손을 모아 합장했다. 그런 다음에는 눈을 감고 몸을 숙여 하루오를 향해 뭐라고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작아서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동작 하나하나에 위엄이 배어있었다. 우아함과 아름다움마저 느끼게 했다. 이것도 간호사가 하는 일일까?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때, "아... 아..." 하고 기묘한 소리를 내며 레이코가 벽에 기댔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즈미를 응시했다. 

 

- "됐어요. 이제 가요."
가즈미는 레이코를 못 본 척하며 일어섰다. 자라라락 하고 염주에서 소리가 났다.
준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순간 당황했다. 눈에 띄게 이상해진 레이코도 마음에 걸렸고, 그 이상으로 가즈미가 마음에 걸렸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잇따라 일어나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수수께끼 같은 일이 늘어나고 있다. 

 

- "확인해 보실래요?" 

가즈미가 염주를 감은 왼쪽 손목을 들어 올렸다. 

"보이기도 하고 느껴지기도 하죠?"
표정은 온화했지만 말투는 도발적이었다. 이런 분야나 레이코 같은 사람에 대한 불신감이 말의 곳곳에서 배어나고 있었다. 

 

- "정말 문을 두들겨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죠?"

"그랬어."
준은 옆길로 들어가 가장 가까운 집의 문을 두들기면서 몇 번이나 "실례합니다!"라고 말했다. 창문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지만 사람이 나오는 기척은 없었다.

 

- "봤지?"
준이 가볍게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나 부조리한 상황에서는 웃을 수밖에 없으리라.
"이해가 안 되지? 아무리 큰 소리로 불러도 어느 집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준을 바라보았다. 무리도 아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다니. 이런 일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지방의 작은 섬에서 늙은 섬사람들에게 말 그대로 배척당하고 있다.  

 

- 적당한 타이밍을 노려서 준은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이상한 질문이지만 그런 걸 믿어?"

 

- 우쓰로 레이코와 같은 인종인가? 즉, 우쓰기 유코에게 심취해 심령이니 수호령이니 떠들어대는 사람인가? 예언을 진짜라고 받아들이는 맹목적인 신자인가?

- "아뇨."

그녀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다시 돌계단을 올랐다.

"어렸을 때 깨달았어요. 영혼이니 뭐니 하는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눈에 보인다고 생각하는 사람, 영혼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나쁜 일은 영혼의 소행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을 뿐이란 걸. 할머니도 그중 한 사람이에요."  

 

- 다행이다. 나와 생각이 똑같아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 그녀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 "억지로 기운을 짜내도 해결되지 않아요. 지금은 현실을 똑바로 보고 대책을 세워야죠."
레이코는 당연한 말을 했지만 얼굴은 몹시 어두웠다. 목소리도 가라앉았다. 그녀 또한 두려워하고 있다. 기이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 섬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두려운 것이다.

 

- "똑바로 봐야 할 현실이 뭐죠? 대책은 뭐고요? 범인을 찾는 건가요? 아니면 점으로 맞히는 건가요?" 

아키코가 비아냥거림을 잔뜩 담아 물었다.

 

- "아주머니, TV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닌가요? 조셉 맥모니글이나 낸시 마이어 같은 사람의 말을 진짜로 믿고 있는 것 같군요. FBI에서 보증한 초능력 수사관 같은 사람들을 말이에요."

그녀는 아키코가 반론하기 전에 재빨리 덧붙였다.

"그런 건 전부 속임수예요. 그들이 하는 건 초보적인 사기일 뿐이죠. 그들은 숏거닝이나 바넘 효과를 비롯해 여러 가지 심리 효과를 이용해 사람들을 속인 거예요. 그들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건 아무것도 모르고 속아 넘어가는 순진한 사람들뿐이죠." 

(역자 주 : Joseph MoMoneagle, 미국 육군첩보국에 근무했던 정보관, 원격 투시와 예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Nancy Myer, 초능력자를 자칭하는 미국인 여성. 초능력을 이용해 미해결 사건 수사에 협조했다.) 

 

- "레이코 씨는 역시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군요. 그걸 영감이라고 믿는 패턴이에요. 즉, 우쓰기 유코와 똑같아요." 
"똑같다고?" 
사치카는 기쁜 표정을 짓는 레이코를 차갑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트릭을 밝히자면, 난 그냥 관찰해서 추리한 것뿐이에요. 점술사나 마술사가 콜드리딩이라고 부르는 수법이죠. 말과 행동, 표정, 내가 말했을 때 보이는 약간의 반응, 추리의 재료는 방대하지만 레이코 씨 경우는 결정적으로 부자연스러운 행동이 하나 있었어요."

 

- "시기는 거기서 추측했어요. 이런 방식을 핫리딩이라고 하죠. 레이코 씨도 이런 방식을 이용해 직접 듣지 않은 정보를 알아내고 있을 거예요. 본인에게 영감이 있다는 생각이 너무 강해서 자각하지 못한 데다, 의식의 수준까지 올라오지 않았을 뿐이에요."

 

- 세 번째 침묵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감탄과 당황함으로 가득 찬 침묵이었다.
결판이 났다. 사치카의 완승이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왜 갑자기 사치카가 레이코의 말에 태클을 걸었느냐는 점이었다.
그녀는 이성적이라기보다 감정적으로 행동했다. 거칠게 말하거나 남을 업신여기지는 않았지만 기를 쓰고 레이코... 아니, 심령이나 영감을 부정했다.

 

- "위험해." 

준이 말했다.
"그래, 안 그래도 산길은 위험한데, 지금은 땅이 더 울퉁불퉁해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자칫하면 죽을..."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을 집어삼키고 내용을 바꾸었다.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이 섬은 이상해.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어."

 

- "아니야, 옛날 일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안 돼."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도 알고 있어요. 원인은 항상 똑같고, 진실은 언제나 하나다... 그런 원시적인 사고방식이 그 사람이나 레이코 씨 같은 사람이 설치게 만드는 거예요. 가장 좋은 예가 영혼이 나온다는 곳이죠. 영혼은 그런 곳에 있는 게 아니에요. 영혼이 괴이한 현상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요. 몇 가지 기묘한 일들을 하나의 원인, 하나의 이유로 설명하려고 하면 초자연적인 존재나 초자연적인 의지를 들먹이는 수밖에 없죠. 옛날 사람들이 천재지변이나 정치적인 혼란을 전부 신이나 하늘의 뜻으로 돌린 것처럼요. 그래서 '기도합시다'라는 대책도 원시적이고, 또한..."

 

- "사치카 씨?"
준이 가까스로 끼어들자 그녀는 눈길을 피하며 입을 다물었다. 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 아까 레이코 씨에게 말할 때도 그러더니."
"... 싫어요. 영혼이나 영능력자, 영감이란 게 끔찍하게 싫어요. 그런 말을 함부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싫고요."
"그건..."

준은 입을 다문 채 잠시 생각하고 나서 물었다.

"왜?"

그녀는 쏠쏠하게 웃고 나서 대답했다.

"할머니를 끔찍하게 싫어했으니까요."

-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을 받고 손목의 염주가 연약한 빛을 뿌렸다. 그녀는 염주의 알을 손으로 잡고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촬영이다, 강연회다, 너도 같이 가야 한다,라며 항상 수업 도중에 데리고 나가고, 옷도 가방도 머리 모양도 전부 당신 취향대로 했어요. 가끔 친구가 생겨도 '저 애에겐 나쁜 영혼이 달라붙어 있어', '전생에 나쁜 사람이었으니까 이번 생에서도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라면서 억지로 떼어놓았고요. 어렸을 때는 계속 할머니에게 속박되어 있었죠. 마치..."

 

- 이 사람은 시골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도쿄 출신자에게 시골은 외지인을 배척하는 곳이란 말인가? 눈앞의 주걱턱 남자에게 가벼운 분노마저 느꼈다.


- "다른 곳은 그렇지 않겠죠. 하지만 이 섬은 그렇습니다. 믿기 힘들겠지만 민속이나 토속이란 건 그런 겁니다. 좁은 공동체에서 만들어진 독자적인 예의나 관습, 신앙, 그리고 그걸 나타내는 수많은 말들. 개인보다 공동체의 존속을 중시해서, 그걸 위해서라면 현대의 윤리관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야만스러운 짓도 태연하게 해치우죠. 그런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 "글쎄요... 확인하진 않았지만 아마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보물이 묻혀 있는 것도, 독자적으로 발전한 사이비 종교의 교주도 없고요. 규칙의 의의나 목적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잊히고, 규칙만이 이어진다... 이 또한 민속이나 토속의 형태죠. 일본적이며 섬뜩한 토속이 숨 쉬는 곳이 바로 이 무쿠이 섬입니다. 저는 이런 곳을 동경했어요. 그야말로 미쓰다이고 교고쿠이며 요코미조의 옥문도입니다..."

(역자 주 : 미쓰다 신조, 호러와 미스터리를 융합해 열광적인 마니아층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추리 작가. 교고쿠 나쓰히코, 일본의 소설가이자 요괴 연구가.)

 

- "이보게, 젊은이. 자네, 요코미조란 소설가 좋아하지? 교고쿠 뭐라든가 하는 소설가도, 미쓰다 뭐라든가 하는 소설가도 좋아하고? 자네 같은 사람이 가끔 여기에 오는데, 우리가 적당히 원령 이야기를 하며 깜장벌레를 보여주면 눈을 반짝이면서 좋아하더군. 인습은 굉장하다, 토속적인 게 최고다,라고 감탄하고는 그것만으로 만족해서 돌아가곤 하지." 
옆의 노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이런 얘기는 방패막이로 딱이야."
노파의 대각선 뒤쪽에 있는 노인이 절반만 돌아보고 덧붙였다.

"그런 자들은 무쿠이 섬 자체를 보고 싶은 게 아니야. 어디선가 보고 들은, 실제로는 어디에도 없는 섬다운 모습과 시골다운 모습을 찾고 있는 것뿐이지." 
하나 남은 은색 앞니에서 반짝 빛이 뿜어 나왔다.

"누가 아니라나? 우린 사람들이 원하는 걸 내놓은 것뿐이네. 원하는 걸 해준 것뿐이지."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상적인 섬이란 이미지를 갖고 여기로 이사 온 거잖나?"

 

- "공포의 대상이 원령이라면서 섬기거나 제사를 지내는 모습은 볼 수 없었어요. 다자이후나 쇼몬즈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영혼 신앙을 여기서는 볼 수 없더라고요. 다시 무쿠이 섬을 찾았을 때, 그 점에도 의문을 가졌죠. 알고 보니 정답은 ..."

 

- 이상함이 일상이 되어버린 섬. 문화와 풍습의 차이라는 말로 넘길 수 없는, 삶과 죽음의 차원에서 외부 세계와 다른 섬. 지금 그 섬에 있다는 현실을 새삼 깨닫고, 얼어붙는 듯한 오한이 온몸을 관통했다.

 

- "우리는 그저 보고도 못 본 척하는 수밖에 없었다네."
"어느 순간부터 그 애는 신선 같은 모습을 하게 됐어."

 

- "바보 같지? 예언 같은 건 그냥 갖다 붙인 거라고, 조금 전에 사치카 씨가 그랬는데 말이야. 내가 생각해도 정말 한심해."
준은 황급히 말하면서 튀어나온 바위를 넘어갔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앞을 향한 채 묵묵히 언덕을 내려갔다. 그녀의 침묵에 숨이 막히기 시작한 순간.

-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이상하다, 기이하단 걸 알면서도 버릴 수 없는 말. 뿌리치고 싶어도 뿌리칠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 그게 바로 저주예요. 그걸 그대로 놔두면 어느새 제대로 판단할 수 없게 되죠. 섬사람들이 유독 가스를 받아들인 것처럼요." 
우산에 가려서 표정은 보이지 않고 이야기가 어디로 향할지도 몰랐지만 진지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무슨 뜻인지도 이해가 되었다.

 

- "그 말은 곧 지금 예언에 사로잡혀 저주를 받았다는 건가?"

"그래요."

"즉, 소사쿠도 저주를 받았다는 거군."
준의 말투는 그녀에게 말했다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설명하는 것 같았다.

- 소사쿠가 받은 괴롭힘의 실태는 한마디로 말해 매도다. 말에 의한 폭력이자 세뇌다. 그 결과 그는 자살을 시도하려고 했을 만큼 벼랑 끝에 몰렸다. 이것이 저주가 아니면 무엇이랴. 속박이라고 하지 않으면 뭐라고 해야 할까. 문명이 발달한 현대에도 저주에 걸리는 사람이 있다. 소사쿠처럼. 이 섬의 사람들처럼. 

- "이 세상에 저주를 받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모두 누군가에게... 누군가의 말에 얽매이고 사로잡히며 살고 있죠. 소사쿠 씨도 마찬가지예요. 아소 씨 부부도, 아키코 씨 모자도 그렇고요."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도 부분적으로 반론했다.

"그 모자는 척 보면 알 수 있어. 서로가 서로를 얽매고 있다는 느낌이 드니까. 하지만 모두 그렇다곤 할 수 없지 않나?"
'모두'라고 하는 건 지나친 과장이 아닌가?
사치카가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인가 하려고 하더니 이윽고 포기한 얼굴로 한숨을 쉬며 다시 앞을 향했다.  

-
영감 같은 건 없어도, 영시 같은 건 불가능해도 우쓰기 유코의 말은 지금도 사람들을 움직이고 있다. 
사치카는 앞을 향한 채 대답했다. 

"그렇죠. 하지만 그것도 일종의 저주예요."
"뭐가 저주라는 거지? 반대 아니야? 레이코 씨는 구원을 받았어... 괴로움에서 벗어났잖아."


- "저주가 될 가능성을 감추고 있다고 하면 이해가 되려나요? 예를 들어 그 사람의 예언 중에 '지금 당장 자살해라'라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하면 레이코 씨는 분명히 스스로 목숨을 끊을 거예요. 망설이거나 갈등은 하겠지만 뿌리칠 수도, 무시할 수도 없죠."

 

- 그럴지도 모른다. 구원을 받았기에 저주를 받는다. 세상에는 그런 일도 있으리라. 상사의 비난이나 매도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악의가 있는 말만이 저주가 되는 건 아니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생명의 은인이 하는 선의의 말에 사로잡히는 일도 종종 있으니까. 사치카의 말은 문제의 본질을 찔렀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 이야기의 핵심이 보이지 않는다. 잡담치고는 너무나 심각하다.

 

-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어받은 것'이다.

 

- 읽고 쓰기를 배운 건 유치원에도 들어가기 전인 만 두 살 때였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할머니는 어려운 책을 읽게 했다. <천상계와 지옥>, <베일을 벗은 이시스>, <심령 강좌>, <오모토 신유>... 전부 근현대의 심령과 오컬트 분야를 다룬 책이라고 한다. 그녀는 제목을 말해주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고, 어떤 가치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전부 과장스럽게 지어낸 얘기라든지, 과장스러운 자기 자랑이라든지, 아니면 두 가지가 다 쓰여 있었어요." 

- 그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이미 할머니가 말하는 영혼이나 영감은 '신앙'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할머니가 말하는 영혼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할머니가 가지고 있다고 큰소리치는 영감도 존재하지 않는다. 콜드리딩과 핫리딩을 간파한 것도 비슷한 무렵이다. 사무실에서 의뢰인을 '영시'하는 우쓰기 유코, 의뢰인이 보낸 심령사진을 '감정'하는 우쓰기 유코, TV 카메라 앞에서 연예인의 '전생'을 맞히는 우쓰기 유코, 강연회에서 사후 세계에 관한 '진실'을 보고하는 우쓰기 유코... 그녀는 그 모든 걸 가까이에서 보았다. 할머니의 교육의 일환이었다. 

 

- "강제로 보게 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거예요. 나는 친구와 놀고 싶었고, 학교에도 가고 싶었는데 말이죠."  

- 준이 다시 정확하게 말했다. 

"미안해, 아까 그 얘기야. 저주에 관해서 다시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면서?"
솔직한 의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는지를 포함해 마음에 걸렸다. 산을 내려오면서 말해준 긴 이야기는 자신에 대해 말하기 위한 포석이 아닐까? 그런 억측마저 들었다. 확인할 시간은 지금밖에 없으리라.


- 그녀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깃들었다. 망설이는 걸까? 생각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했을 때.
"이해해 줄 것 같았어요. 왜냐하면..."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덧붙였다.

"준 씨에게는 강력한 수호령이 있으니까요."
그녀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 '말'이 가진 저주의 힘!

- 당신은 지금 다른 사람 말에 지배당하고 있지는 않은가?

- 이번 작품의 주제는 '말', 즉 '언어'가 가진 저주의 힘이다. 아무리 어설픈 말일지라도 한번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오면 누군가의 행동을 좌우하기도 한다. 우쓰기 유코의 예언은 여러 사람의 인생을 일그러뜨리기도 하고, 지속적인 가스라이팅은 상대를 극단적인 상황까지 몰아넣기도 한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말이 가지고 있는 성질과 기묘한 힘을 새로운 각도에서 파헤치고 싶었다고 한다. 

 

- 저주는 현대 사회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저주란 말이 너무나 무겁게 다가온다면 '상처받는 말'이나 '가스라이팅'으로 바꾸어도 좋다. 상대가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가 뇌리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불쾌한 말을 들으면 어떻게 될까? 자신은 패배자이고 실패자라고 생각하며 죽음까지 떠올리지 않을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소사쿠처럼. 

- 우리는 매일 누군가의 말에 상처를 받고,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는 않을까?
우리는 매일 누군가를 말로 지배하고, 누군가의 말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지는 않을까?

- 당신은 말의 지배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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