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박상영]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

일루젼 2023. 11. 7.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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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상영
출판 : 인플루엔셜
출간 : 2023.06.30


       

유명인과 일반인의 관계는 대개 일방적이다. 한 쪽에서만 다른 한 쪽을 잘 아는 -그렇다고 생각하는- 형태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 대상이 보여준 친근하고 다정한 면모들이 반드시 '나'를 대상으로 둔 것은 아니었음에도,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내적 친밀감으로 인해 마치 우리가 오랜 친분을 쌓아왔던 일대일의 관계처럼 착각을 하고 만다. 

 

내게는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에서의 박상영 작가가 바로 이러했다. 유머러스하면서도 꽤나 깊은 곳까지 솔직하게 드러내는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가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을 들으며 생각한 MBTI까지 들어맞으며, 내 안에서 저자는 '만난 적이 있는 사람'에 준하는 영역으로 들어와 버렸다. 격의없이 단번에 거리를 좁혀내는 힘. 나는 이것이 박상영 작가의 큰 힘이라고 생각한다. 

 

제목은 '휴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모든 이야기에 사람이 등장한다. 고등학교 친구, 대학교 친구, 심지어는 레지던스에서 만난 예술인들도 함께 술잔을 주고받으며 다양한 에피소드를 제공하기도 한다. 

 

내 성향으로서는 타인과 휴식이 연결될 수 있다는 게 정말 놀랄 노 자이지만, 문득 생각한다. 저자에게 '휴식'이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여주고 되돌려주는 소중한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채워진 힘으로 다시 서로를 지탱하며 새로운 추억을 쌓아가는 것일지도. 그렇다면 이 기억들은 저자에게는 진정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인 셈이다.

 

나와는 다른. 그리고 그래서 어여쁜 이들이었다.

서로 무척 닮은 그들이 조금 더 많이 웃고, 조금 더 든든하고 단단하게 걸어가기를 기원한다.

그래서 나도 그 삶의 한 켠을 이렇게 엿보며 같이 웃을 수 있기를, 내 웃음이 그들에게 미미하게라도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이 책을 읽는 호젓한 혼자만의 시간이 나에게는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이었다. 

좋았다. 

   


   

 

- 영화감독 K와 나는 20대에 만나 지금까지, 졸리고 재미없는 영화를 함께 보는 친구 사이로 남아 있다. 사실 K를 '영화감독'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색한 감이 없지 않은데, 그가 영화를 '감독'하지 않은 지 무려 7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이에 나는 자주 그를 '전직' 영화감독이라 놀리고는 한다.

 

- K와 나는 여러모로 참 다른 사람이다. 무릇 영화감독이라고 하면 괄괄한 목소리로 현장을 호령하는 모습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K는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지독한 내향형 인간이다. 이를테면 K는 음식점에서 주문한 음식이 잘못 나오더라도 묵묵히 그 음식을 먹는 부류의 사람이다. 나 같은 경우 메뉴가 잘못 나왔다고 어렵지 않게 말하는 것도 모자라, 반찬이라도 더 얹어달라고 너스레를 떠는 부류의, 극 외향형 인간이다. K가 수백 명의 스태프를 지휘하는 (전직) 영화감독이고, 말못해 죽은 귀신이 붙은 내가 종일 혼자 지내는 작가로 살아가는 건 좀 웃긴 일이긴 하다.

 

- 우리의 차이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K는 참 부지런한 살림꾼이다. 꽤 오랫동안 영화 작업을 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매일 청소와 빨래를 하고, 잘 모르는 레시피를 찾아 요리하기도 즐긴다. 친구들을 불러다 자신이 만든 요리를 먹이는 것을 좋아한다. 언젠가는 생일을 챙기지 않고 혼자 집에 누워 있는 나를 불러다 파스타와 미역국을 해 먹인 적도 있다. 내 경우는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가사노동만을 하고 산다. 옷은 벗은 자리에 뒤집힌 채 화석처럼 굳어 있기 일쑤이며, 설거지도 하기 싫어서 좁아터진 집에 식기세척기까지 들였지만, 버튼을 누르기가 귀찮아 컵과 젓가락이 쉬이 쌓인다. K는 이런 나를 퍽 추잡하고 한심한 사람으로 여긴다.

 

- K는 이런 나를 보며 항상 질린다는 듯한 표정으로 "도대체 언제 쉴 작정이야? 죽으면?"이라고 말하곤 했다. 내 입장에서는 쓸데없는 일(이라고 하기에는 일상을 영위하는 너무 중요한 일들이긴 하지만... 아무튼)을 하느라 정작 자신이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일(그러니까 장편 시나리오 집필)을 등한시하는 K가 이해되지 않았다. 때문에 우리는 만날 때마다 서로의 가치관이나 라이프스타일을 비방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 벚나무에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할 무렵, K는 뭔가 엄청난 결심을 한 듯 내게 말했다.
"나... 점을 보러 가야겠어!"
내가 재미 삼아 사주를 보러 다닐 때에도 (심지어 역술인이 몇몇 수상 결과나 계약의 향방을 맞혔을 때도) 심드렁한 태도를 보였던 K였는데, 갑자기 점이라니 얘가 마음이 쏠리긴 하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어 얼른 주변의 (종교에 가까울 만큼 역술을 신봉해 서울과 경기도 각지의 용하다는 점집을 꿰고 있는) 마니아들에게 연락을 돌려 가장 적절한 곳을 찾아냈다. 매콤한 일침으로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구름처럼 포근한 말로 코팅을 해준다는 고양시의 도사가 그 사람이었다. 그가 K에게 새 작품을 만들 동기부여를 해줄 것만 같았다.

 

- 그렇게 아름다운 산과 들을 넘어 찾아간 점집에서 K는 놀라운 점괘를 받아 들었다. K는 사주에 잔불이 많은데 지금껏 인생에 찾아왔던 기운들이 도와주지 않아, 타 죽을 것처럼 말라비틀어진 형국이라고 했다(K의 꽁하고 답답한 성격이 이해가 되는 대목이었다.) 다만 앞으로는 좋은 기운들이 들어와 뜻한 바를 성취해 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리뷰자 주 : 丁가 많으신가 보다.)

 

- 역술인은 나를 보고는 '제발 자신을 보러 와달라'고 외치는 보석 광산과도 같은 사주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동안에도 나는 내 인스타그램에 벚꽃 사진을 올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나를 좀 봐줬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서... 

 

- 또 역술인은 나를 향해 뜨거워도 너무 뜨겁다고 일갈했다. K가 작은 불이 잔뜩 질러진 형국이라면, 나는 뜨거운 용암을 품고 있는 태산과도 같다고 했다. 일단 한번 뭘 시작하면 죽을힘을 다해 달려들고, 화도 잘 내며, 술을 마셔도 죽도록 마시는 팔자라고.

(리뷰자 주 : 辛丑에 巳가 들어가 있으신가 보다.)

 

- 집으로 오는 길, 우리는 각자의 휴식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K는 혼자 술 한잔 하고, 친구들과 클럽에 가고, 집에서 넷플릭스를 보는 것 등이 모두 휴식이라고 했다. 나 역시도 K와 비슷한 방식으로 여가를 보내곤 한다(요리와 설거지는 안 함)고 답했다. K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 넌 쉬는 방법을 아예 모르는 것 같아."

"나? 아냐. 잠도 많고, 여행도 자주 가잖아." 
"자기 전까지 침대에서 글 쓰다 쓰러져 자고, 여행 갈 때도 노트북 챙겨 가잖아."

"... 그렇긴 하지. 근데 솔직히 현대인의 삶이 다 그렇지. 안 바쁘고 스트레스 없는 사람이 어딨냐."
"너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쉬어본 적이 있긴 해? 너를 안 지 10년 가까이 됐지만 한 번도 그러는 꼴을 본 적이 없어."

 

- K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그런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넷플릭스를 볼 때도 나는 업무 메일을 확인하거나 친구들에게서 온 메시지에 답을 한다. K가 말하는 그 온전한 휴식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나를 진정으로 쉬게 할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은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룩할 수 있을까? 

 

- 오래전부터 나는 여행이 휴식의 동의어라고 믿었다. 

(리뷰자 주 : 아니에요... 휴양 여행이어도 집 밖을 나서는 순간 에너지는 깎인다고요...)

 

- 이쯤 되면 여행이 싫다고 말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김없이 여행을 떠나고, 고통받고, 또 집으로 돌아와 다시 일상을 살아갈 일말의 힘을 얻고는 한다. 이는 바꿀 수 없는 내 삶의 패턴으로 공고히 자리 잡고 있다. 

 

- 어쩌면, 내게 있어 여행은 '휴식'의 동의어나 유의어가 아니라, 일상의 시름을 잊게 해주는 또 다른 자극이나 더 큰 고통에 가까운 행위가 아닐까? 환부를 꿰뚫어 통증을 잊게 하는 침구술처럼 일상 한중간을 꿰뚫어, 지리멸렬한 일상도 실은 살 만한 것이라는 걸 체감하게 하는 과정일 수도. 써놓고 보니 (피학의 민족 한국인답게 몹시) 변태적인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 또한 나에게 가까운 진실인 것만 같다. 

 

- 이런 내가 여행을 통해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을 즐기기 힘든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마음먹었다. 완벽을, 완벽히 폐기하리라고. 지금이 아닌 언젠가, 이곳이 아닌 어딘가를 꿈꾸는 게 아니라, 그저 작은 빈틈을 찾아보리라고. 단 1퍼센트의 '공백'이 주어지더라도 기꺼이 그것을 그러안고 즐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보리라고. 휴식이라는 행위에 어떤 완벽을 기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휴식'과는 거리가 먼 개념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 따지고 보면 Y는 내 대학 진학의 은인이기도 하다. 당시 한국은 7차 교육 과정에 막 접어들었고, 정시보다 수시 비중을 비약적으로 높일 것이라고 교육부 장관이 공언하던 시기였다. Y는 자기 객관화가 잘되는 영리한 친구였기에, 수학에 소질이 없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수시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학년 때부터 꾸준히 내신 관리를 해왔으며, 외국어 특기를 살려 영어와 일본어, 중국어 공인 성적을 땄다. 더불어 대외 활동을 하며 자신만의 포트폴리오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지방이라는 한계 때문에 (혹은 귀찮아서) 수시 제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던 나는 혼자서 모든 것을 계획하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Y가 좀 멋있어 보였다. 둘이 함께 논술 대회며 토론 대회에 나가 상을 타기도 했는데, Y의 제안 덕이었다. 그것은 훗날 분명히 내가 고향을 탈출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 스무 살, Y는 모두의 예상대로 서울대에 진학했다. 나 역시 운이 따라주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둘 다 원하는 바를 이루고 대한민국 최고의 대도시(?) 서울에 당도하였으니 방종에 가까운 자유와 환희로 가득한 인생이 펼쳐질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막 10대를 벗어난 자의 순진한 환상에 불과했다. 우리는 각각 신림과 명륜동의 쪽방에 갇혀 빛나는 청춘 대신 전공 진입과 학점의 늪에 빠져 매일 비슷한 삶을 반복해 나갔다. 그러던 중 Y가 내게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니 내랑 여름방학 때 배낭여행 안 갈래?"

 

- 책이나 영화에서만 봤던 배낭여행이라니. 다른 곳도 아닌 유럽 부표처럼 떠다니던 일상에 새로운 이정표가 생겨난 기분이었다.

 

- 호텔 투숙에 대한 합의를 마치고 난 후, Y는 가방에서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냈다. 영국의 서점에서 구매한 지리학 도서였다. 700 페이지 가까이 되는 학술서를 너무나도 집중해서 보는 Y를 보며 나는 여기까지 와서 또 공부를 하냐고 타박을 줬다. Y는 이게 무슨 공부냐고, 그저 독서일 뿐이라고 항변했다. 
"니 도대체 살면서 공부 안 한 날이 있기는 하나?"
Y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답했다.
"없었던 거 같다."
"뭐라고?"

"이번 여행 오기 전까지 공부를 안 한 날은 없었다."

- 나는 거의 졸도할 정도로 놀랐다. Y가 원체 성실하고 꾸준한 사람이라는 것은, 그래서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성취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문자 그대로 하루도 빠짐없이 공부를 해왔을 줄이야. 그것은 성실함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거의 초인에 다다른 그 경지에 나는 Y를 조금은 존경하게 되었다.
  

- 그렇게 암스테르담에 도착한 우리는 호텔 예약 사이트에서 찾은 3성급 호텔에 투숙했다. 나는 타인의 코골이를 듣지 않아도 되는 공간과 무제한으로 리필되는 수건, 누워서 TV를 볼 수 있는 침대가 허락됐음에 전율했다. 그래서 기꺼이 방에 남아 하루 종일 MTV를 볼 것이라 공언했다. Y는 기껏 사놓은 유레일 패스가 아까우므로 당일치기로 벨기에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나는 오는 길에 와플을 사 오라고 당부한 뒤 홀로 호텔방에 남았다. Y가 떠난 후 눈부신 햇살이 비쳐 드는 암스테르담의 호텔에 앉아 잔디밭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커플들의 전경을 보며 TV에서 흘러나오는 레이디 가가의 <배드 로맨스(Bad Romance)>와 블랙 아이드 피스의 <아이 가타 필링(I Gotta Feeling)>을 들었다. 

   

-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데, Y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알고 보니 우리가 무사히 오픈한 것이라고 믿었던 유레일패스는 사실 개시가 안 된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고, 애초에 시작 역인 파리 북역의 유레일패스 창구에서 티켓을 오픈하는 절차를 거쳐야 티켓을 사용할 수 있는 거였다. 프랑스인 역무원이 프랑스인답게(?) 오픈 도장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우리를 기차에 태웠다면, 암스테르담에서 벨기에로 향할 때 마주친 역무원은 매우 꼼꼼히 티켓을 확인해 부정한 사용 내역을 발각했으며, 때문에 꼼짝없이 유레일패스 값에 맞먹는 벌금을 내야만 했다고 Y가 말했다. 마치 래퍼처럼 울분에 찬 목소리였다. 나는 흥분한 Y를 토닥이며 그가 사 온 벨기에 와플을 누구보다도 맛있게 먹었다.

 

- 우리의 여행은 그 후로도 온갖 해프닝으로 점철되었다. 유럽 5개국을 오가는 힘든 여정에, 한 달 동안 200만 원도 쓰지 않았을 정도로 극도로 절약한 고생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다만 많이 웃었다. 후에 생각해 보면 초저가의 예산에 맞춰 힘겹게 계획을 짜고 통역을 하며 나를 끌고 다닌 Y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졸졸 따라다니는 나를 견뎌준 것이었다. 
 

- [야, 니 내가 그때 벨기에 가는 기차에서 30만 원 뜯긴 거 기억나나.]

[당연하지. 나는 그때 니가 에미넴인 줄 알았잖아. 8마일보다 더 절절했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니 얼마나 얄미웠는 줄 아나. 난 돈 뜯겨서 눈물 줄줄 나는데 침대에 드러누워서 레이디 가가 뮤비나 보고 있고, 내가 사 온 와플 깨작깨작 뜯어먹는데, 이 새끼는 도대체 뭐고?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기까지 와서 헛돈을 쓰고 있나 싶더라니까.]
[근데 있잖아, 니 평생 그렇게 살아온 거 모르나. 발바닥에 불나게 열심히. 빡빡하게.]
[그건 그렇지.]
[니, 혹시 요즘도 맨날 공부하나.]
[공부 같은 소리 하네. 요즘은 돈 안 주면 한 글자도 못 본다.]

 

- Y는 사법고시를 포기한 뒤, 로스쿨에 진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현재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로펌에 다니며, 돈을 아주 많이 벌지만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격무에 시달리면서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봐도 편하게 살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자기 팔자를 자기가 꼬며, 한없이 자신다운 모습으로 살고 있다. 

 

- 그리고 얼마 전 내가 영국의 부커상에 노미네이트 되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주최 측에서 비밀 유지 조약을 강조하며, 혹여 소문이 새어 나갈 시에 후보 지명이 취소될 수 있다고 메일을 보내왔다. 입이 너무 간지러웠던 나는 Y를 대나무 숲으로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Y에게 기프티콘을 보내며,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변호인과 의뢰인 간의 법적효력을 갖는다고, 수임을 강제로 단행했다. 그리고 고백했다. 내가 부커상 후보가 됐다고. Y는 비명을 지르며 축하한다고 말했다. Y는 우리가 함께 런던 여행 갔을 때 기억나느냐고, 내가 거기 서점에서 지리학 책이랑 같이 샀던 게 부커상을 받은 소설이었다고, 이제 니가 그런 소설가가 됐다고, 나보다 더 흥분해서 말했다.

 

- 나는 괜히 감상에 젖어서, 그 시절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때 우리는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 줄은, 전혀 몰랐겠지?"
Y는 조금 숨을 고르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상영이. 나는 니가 이렇게 될 거라고 항상 생각해 왔다. 고등학생 때부터, 쭉."

 

- 그렇게 말하는 Y의 말이 진실인지, 정말 열 몇 살의 그때부터 내가 부커상에 노미네이트 되는 작가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오랜 시간 동안 나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었던 내 삶을, 궤적을 누군가 믿고 지켜봐 주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 이제는 그 옛날 강남역 맥도날드 때처럼 서로 마주 보고 있지 않으니, 나는 마음껏 울 수 있었다. 
 

- 나이가 들고 서로 사는 게 바빠 예전처럼 일주일에 두 번씩 만나거나, 매일같이 문자를 하며 지내기는 힘들어져 버렸다. 어쩌면 앞으로의 삶이 우리 사이를 점점 더 멀어지게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

 

- 나중에는 전완근이 쑤시기 시작했고 나의 과감한 핸들링에 송지현은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악! 한 번이라도 상은 받아보고 죽게 해 줘!" 
나는 소리를 지르는 지현에게 정신 사나우니까 차라리 핸드폰으로 캔디크러쉬나 하고 있으라고 명했다. 은근히 사람 말을 잘 듣는 송지현은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메시지를 보내며 불안을 달래다 내게 말했다. 

 

- 그 이후로 안개가 나타날 때마다 송지현은 매번 비상등을 대신 켜주었다. 숙소에 먼저 도착한 백은선에게 전화가 왔다. 지현은 전화 너머 은선의 말을 듣다 깔깔대며 웃었다. 전화를 끊은 지현에게 무슨 얘길 했느냐고 물었다. 
"우리 상황 듣더니, '한국 문학의 큰 별이 두 개나 지겠네'라고 했어."
그 말을 듣고 덩달아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이내, 그 말이 아예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어깨가 빳빳해졌다.

 

- 강릉에 다다를 무렵 룸미러를 통해 뒤쪽에서 불빛이 번쩍이는 게 보였다. 나는 15년 차 운전자 지현에게 물었다. 
"저거 뭐야? 도로에 사이키 조명 같은 게 다 있네?" 

"응... 저건 뒤에 있는 운전자가 너 너무 느리다고, 비키라고 하이빔 쏘는 거야."
"아..."

 

- 강릉의 한 시장 부근에 있는 호텔에 도착했을 땐 새벽 1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지현은 자기 혼자 운전해서 오면 두 시간 반 걸릴 거리를 나와 함께 오느라 네 시간 걸렸다고 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내 차가 꽃가마가 아니라 꽃상여가 될 뻔했다. 

 

- 주차 자리를 찾지 못해 빙빙 돌다 간신히 차를 세운 후 시상식장에 도착했을 땐 다행히 막 시상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한옥인 허균 생가 앞에 마련된 시상식장에는 떡 케이크를 포함해 온갖 음식들이 차려진 제사상이 준비돼 있었고, 그 앞에 깔린 플라스틱 의자에는 옥색 한복에 갓을 쓴 유생분들과 양복을 입은 분들이 줄줄이 앉아 계셨다.  

 

- "송지현의 소설 속 인물들의 전복적인 모습, 이를테면 외삼촌과 딸들이 맞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으며..."
그때 나와 송지현은 눈이 마주쳐버렸고 우리는 빵 터져 웃느라 더 이상 심사평을 듣지 못했다. 소설 속 자매의 모습이 너무나도 현실을 닮아 있었기에.

 

- 곧 나는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들었다. 외삼촌과 딸들이라니. 외삼촌과 조카들이 맞지 않나? 근데 왠지 조카들보다는 딸들이 더 맞는 표현인 것만 같다. 내가 잡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송지현이 수상 소감을 발표하러 나왔다. 나는 황급히 달려나가 준비한 플라스틱 티아라를 지현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지현은 지난 몇 달간 자신이 꾼 꿈의 목록을 읊으며 (도자기를 깨부수는 꿈, 은쟁반에 구슬이 담긴 꿈 등) 이를 통해 수상을 예감했었다고 다소 무속신앙에 경도된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렇게, 시상식이 끝났다.

 

- 그러고 나는 인파를 뚫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차장을 향해 달렸다. 지역 행사의 특성상 조금이라도 타이밍을 잘못 잡았다간 주차장에서 수십 분 동안 대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30년 차 드라이버처럼 능숙하고 잽싸게 차를 뺀 후, 주차장 입구에 있으니 얼른 나오라고 지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현은 백은선의 차를 타면 되니 먼저 식당에 가 있으라고 다급하게 말했다. 나는 겨울이면 언제나 죽고 싶다고 난리를 치던 송지현이 이제는 목숨 귀중한 것을 알게 되었나 보다, 생각했다.

 

- 남들은 잘 모르지만 은근히 주도면밀한 구석이 있는 나는 <강원일보> 측에서 마련해 준 초당두부 전문점 대신테라로사 커피로 향했다. 우리 일행은 나와 송지현, 송재랑, 백은선을 포함해 (지현의 오랜 친구이자 강릉시민이기도 한 뮤지션) 나디아 부부까지 총 여섯 명이나 됐다. 주말 오후 2시의 카페에 여섯 명이 다 같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확보하기란 쉽지 않을 터. 나는 테라로사에서 커피와 빵을 시킨 뒤 커다란 테이블에 앉아 조금씩 자리를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가 식사를 마치고 도착했을 무렵, 정확히 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확보했다.

 

- 장고 끝에 낙점된 곳은 소돌해변이었다. 
30분쯤 차를 달려 도착한 해안은 과연 절경이었고, 사람도 많지 않아 가만히 바다를 구경하기 좋았다. 해안가로 내려가 파도를 만끽하던 우리는 놀랍게도 한 무리의 청둥오리가 바다에서 수영하는 것을 목격했다.  

 

- 아무리 온수풀이라고 해도 가을은 가을인지라 우리는 오들오들 떨면서 계속 전투적으로 수영을 했다(문인들은 뭘 해도 곧잘 전투적으로 변하곤 한다. 아마도 평소에 가난과 결핍이 만연한 탓일 것이다). 그렇게 밤이 깊었고 풀장에 득실대던 커플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우리의 입술도 갈수록 파랗게 질려갔지만, 이대로 수영장을 떠날 수 없다는 생각에 온수풀로 자리를 옮겼다. 때마침 수영장에 오아시스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다음 날 서울로 올라갈 때가 되자 나는 강렬한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어제의 구불구불한 고속도로를 또다시 운전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전완근이 저려오는 것만 같았다. 결국 나는 꽃가마를 태워주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송지현에게 제발 나 대신 운전 좀 해달라고 애걸했다. 송지현은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보험도 없이 차를 몰 수는 없다고 했다. 나는 악착같이 인터넷을 뒤져, 일일 운전자보험을 찾아냈고 송지현의 이름으로 24시간짜리 보험을 들었다. 송지현은 한숨을 쉬며 알겠다고 했다. 
그날 밤, 나는 내 차의 뒷좌석에 앉아 송지현이 받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꽃다발 향기를 맡으며 그야말로 꽃가마를 타고 쾌적하게 서울로 돌아왔다.

 

- 그로부터 한 달 뒤 한국일보문학상 시상식 날, 나는 오랜만에 양복 재킷을 입고 잔뜩 멋을 부린 채 시상식장으로 향했다. 송지현이 나에게 축사를 부탁했는데, 온갖 멋을 내느라 그만 예상보다 늦어버렸다. 시상식장에 도착했을 땐 막 내 축사 순서가 된 참이었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무대에 올라 축사를 읽기 시작했다. 

 

- 송지현과 저는 만 10년 정도 된 친구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 송지현은 막 등단해 소설보다 유서를 더 자주 쓰던 우울증 말기 환자였습니다. 저는 송지현을 통해 소설가가 된다는 것이 그다지 행복한 일은 아니구나 느끼며 예방주사를 맞았습니다. 우리는 대학원에서 만나 강화길을 비롯한 소설가들과 함께 '황금족발비밀결사대', 줄여서 '황족비결'이라는 스터디를 결성했습니다. 우리는 소설을 쓰는 대신 자취방에 모여서 고스톱을 쳤습니다. 할머니 어깨너머로 조기교육을 받은 지현은 압도적으로 고스톱을 잘 쳤습니다. 바르게 자라 도박을 몰랐던 저는 번번이 지고 말았지요. 지는 걸 싫어하는 저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 송지현은 제가 추울 때면 저보다 더 추운 곳에 있고...

제가 힘들 때면 저보다 더 힘든 곳에 있고....
제가 가난할 때면 저보다 더 가난하고....
제가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할 때면 저보다 더 인정을 받지 못해...

저를 마음대로 불행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본인이 더 불행하게 사는 방식으로...

 

- 저는 부모님 흉보는 게 삶의 낙입니다. 친구들 사이에서 이상한 부모님 경연 대회를 열면, 언제나 압도적 1위의 자리를 놓치지 않던 저입니다. 그러나 지현이를 만나고 저는 그 자리조차 빼앗겼습니다. 제 부모님이 아무리 이상한 행동을 하셔도... 그녀의 부모님은 그 이상을 해내곤 하셨습니다. 불행의 제왕이었던 저는 강제로 폐위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습니다...

 

- 여기까지 읽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보고야 말았다.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고 계신 지현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을. 그리고 서로 똑 닮은, 아무리 봐도 이름이 '송'으로 시작할 것 같은 한 무리의 중년 남녀들의 모습을. 등골이 서늘해지고 손에 땀이 배었다. 나는 유야무야 축사를 마친 후, 현기증을 느끼며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 옆에 앉아 있던 송지현에게 복화술로 말했다.
"왜 부모님 오신다고 말 안 했어. 어제 축사 내용 보여줬잖아!"
"괜찮아. 틀린 말 한 것도 없는데."

 

- "미치겠다. 진짜 왜 말 안 했어! 나 민망해서 너네 부모님 어떻게 봐."
"괜찮다니까. 엄마 아빠도 좀 알아야지. 자기들이 이상한 거."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송지현은 자신의 부모님에게 일침을 날리기 위해, 나를 장기 말로 이용한 거였다. 허술해 보이는 그녀가 실은 지독한 지략가라는 것을 잊은 죄로 나는 그날 시상식이 끝난 후, 송지현의 부모님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어야 했다. 

 

-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일단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내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가 이역만리 타국으로 떠난다는 것. 전화도, 문자도 하기 힘들고(그때는 무려 스마트폰이 탄생하기 전이었다) 한국과 낮밤이 완벽히 바뀐 도시로 떠난다니. 심리적으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던 우리의 고리가 느슨하게 풀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섭섭한 마음을 숨기고 애써 태연하게 '네 맘이 그렇다면 너의 선택을 지지하겠다'라고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술자리로 돌아간 나는 이상하게 자꾸만 아래로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바닥이 없는 늪 속으로 점점 빠져들어가는 기분 자리에 앉아 동기들의 술주정을 들으며 나는 문득 깨달았다. 

 

- 내가 윤주성을 질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도망치고 싶었던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학과 아이들 사이에서 겉도는 것이나, 원치 않는 공부를 하며 답답함을 느끼는 건 나도 윤주성과 같았으니까.

 

- 자아,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서울'을 꿈꿔왔었다. 나는 내가 처한 환경이 싫었다. 부모님과 학교, 나아가 대구라는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한 도시가 나를 꽉 쥐고 속박하는 것만 같았다. 고향을 떠나기만 하면, 서울로 가기만 하면 이 모든 것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내 삶에 존재하는 모든 문제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서울'이라는 도시를 지상 낙원으로 상정하고 두 눈을 가린 채 그저 앞으로만 달렸다. 

- 그렇게 도착한 곳이 낙원일 리 없었다. 한 학기라는 시간은 이상의 공간이라고 여겼던 '서울'이 실은 내가 살던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곳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기에 충분했다. 대학 생활 역시 아름답지 않았다. 당시 부쩍 어려워진 가정 형편 탓에 나는 새벽 5시에 일어나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곧바로 등교를 했으며, 수업이 끝나면 분당이나 평촌, 강남의 아파트 단지에 과외를 하러 갔다. 유럽산 그릇이 장식되어 있고 좋은 향기가 나는 과외 학생의 집에서 나와 쿰쿰한 냄새가 나고 벽지가 울어 있는 나의 반지하 방에 도착하면 밤늦은 시간이었다. 지면보다 낮은 곳에 위치한 반지하 창문을 열면 가로등 불빛이 내 방으로 새어 들어왔다.

 

- 성인으로서의 삶, 서울살이는 매일이 생존이고 투쟁이었다. 나는 매일 어떡하면 더 싸게 끼니를 때울 수 있을지 고민했으며, 마을버스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달렸다. 행여 마을버스를 놓치면 역에서 30분도 넘게 산길을 걸어 산꼭대기 종점 옆에 있는 내 집, 내 방으로 향해야 했으니까. 

 

- 도망친 곳에 낙원이 없다는 것을 배워놓고서도, 학습능력이 모자랐던 그때의 나는 윤주성으로 말미암아 어느새 미국을 뉴욕이라는 도시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나는 일을 저질러버렸다.

 

- 나는 부모님에게 알리지 않고 충동적으로 대학을 그만뒀다. 그리고 아빠가 등록금 내라고 힘들게 마련해 주신 돈을 몰래 빼돌렸다. 알바에 과외를 하며 번 쌈짓돈을 모아 미국행 티켓을 샀다. 아무런 대책도 그럴듯한 계획도 없었다. 10대의 내가 서울이라는 낙원을 꿈꾸었듯, 스무 살의 나는 뉴욕이라는 꿈의 도시를 그저 낙원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순전히 윤주성만을 믿은 채 말이다. 

 

-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더니... 상영이 니 예전에 미국 살 때 기억 안 나나."
"갑자기 뭔 소리고." 
"우리 몬토크 가서 소원 빌었잖아. 그때 니가 작가 되고 싶다고 했었다."
"진짜? 내가 그랬다고?"
"어. 니가 똑똑히 그렇게 말했어. 내가 쓴 글로 돈을 벌 수 있으면 좋겠다고."
"와 진짜 너무 소박해서 눈물이 다 날라카네."
"그게 왜 소박하노. 대단한 거지. 내 주변에서 꿈을 이룬 사람은 니밖에 없다."

우리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 떼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그저 글을 써서 돈을 벌 수만 있으면 되는 삶.
그것이 스무 살의 내가 간절히 꿈꾸던 삶이었다.

 

- 나는 지금 내가 꿈꿔왔던 미래에 당도해 있다는 것을, 윤주성의 말로 인해 새삼 깨닫게 되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가슴이 울렁였다. 마치 오래 전의 내가 오늘의 내게 작고 반짝이는 돌멩이 하나를 던져놓은 그런 기분이었다. 

 

- 가파도에서 온 초대장을 받았을 때 나는 심각한 슬럼프에 빠져 있던 중이었다.

 

- 당시 평단과 일부 독자들은 나를 '유머와 페이소스의 작가'로 칭했다. "책을 읽다 소리 내 웃어본 적은 처음이었다"라는 독자평을 보며 나는 진심으로 행복했다. 타인을 웃겨주는 건 나의 숙명이나 다름없었기에. 

 

- 회사에서 버는 돈보다 작가 생활(과 그에 수반된 여러 대외 활동으)로 버는 돈이 더 많아질 때쯤, 나는 미련 없이 회사를 그만두었다. 만 3년여의 투잡 생활은 나를 훌륭한 고도비만인이자 불면증 환자로 만들었으며,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장기간의 치료를 받게 만들었다. 이 이야기는 그 뒤 출간된 산문집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안에 담기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기뻤다. 내가 겪었던 지독히 평범하고 별 볼일 없는 불행이 작품으로, 재화로 치환된다는 사실이 몹시 행복했던 것이다. 나는 내가 더 많은 글을 쓰며 더욱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 그것은 착각에 불과했다.
이후 나는 완벽히 창조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슬럼프에 빠졌다.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았다. 

- 내가 쓰고 싶었고 쓸 수 있는 것은 앞선 세 권의 책에 모두 다 쏟아부은 것만 같았다. 더불어 나는 웃음을 잃었다. 웃음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나의 웃음이 진짜 웃겨서 웃는 웃음이 아니라 슬픈 광대가 흘리는 검은 눈물에서 배어 나오는 안간힘이나 다름없었다는 사실을. 내가 쓰는 글이 더 이상 하나도 웃기지 않았고, 누군가를 웃겨주고 싶다는 의지조차 희미해져 버린 걸 깨달았다.

 

- 주치의 선생님은 내가 겪는 문제가 흔한 번아웃 증상이니 쉬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했다.

"네? 쉬라고요? 이미 두 달도 넘게 쉰걸요? 매일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는데요?"
"그 정도 쉬는 걸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에요. 휴식에도 질이 있어요. 상영 씨는 지금 교감신경이 과도하게 항진되어 있어요. 야생으로 치면 언제나 맹수에게 쫓기거나 최선을 다해 사냥을 하고 있는 상태인 거죠. 그러니 몸과 마음 모두 쉬는 연습을 해야 해요. 생각을 멈추고 ..."

 

- 대리님을 따라 라운지 근처로 가보니 과연 전망대의 난간이며, 회백색으로 칠해진 철제문은 4년 차 건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꽤 많이 부식되어 있었다. 해풍이라는 것, 염분이라는 것의 무서움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자연과 벗하며 자연에 어우러진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지만 결국에는 자연에 의해 빠르게 부식될 수밖에 없는 그런 운명. 생각해 보면 우리의 몸에도 일정 이상의 나트륨이 존재하고 결국에는 인간의 손이 닿는 자연은 일정 부분 훼손될 수밖에 없으며, 심지어 인간의 삶은 서로가 서로를 부서뜨리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과장된 생각에까지 도달해 버렸다.

 

- 라운지의 냉장고 안이며 찬장의 칸에는 상주 작가들의 이름이 적힌 견출지가 붙어 있었다. 내가 맨 마지막에 섬에 들어온 탓인지 나를 제외한 모두가 자신의 칸에 식재료를 가득 채워놓은 상태였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프랑스 작가 줄리아의 식료품 칸이었는데 브로콜리부터 시작해 쌀과 빵, 온갖 종류의 파스타면, 당근, 버섯과 마늘, 버터와 치즈, 김과 참치에 굴 소스와 페페론치노, 올리브를 포함한 온갖 향신료까지, 전 세계를 총망라한 식재료들이 가득했다. 김연수 작가님과 유비호 작가님의 경우도 만만치 않아서 달걀과 육수 거리, 잔치 국수 면과 파, 마늘, 애호박, 온갖 종류의 라면과 맥주까지 거의 전쟁 식량을 방불케 할 만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오신 것 같았다. 내 경우는 오리엔테이션 때 지급받은 파스타 면과 소스, 컵라면과 즉석밥, 참치 통조림과 샐러드 한 봉지가 전부였다. J 매니저님에 따르면 일주일에 한 번씩 모두가 모여 서귀포에 위치한 마트로 가서 장을 본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가지고 있는 식재료들과 공용 양념 및 향신료들을 활용해 삼시 세끼 모두 파스타를 해 먹을 수밖에 없었다. 

 

-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작가들은 아침을 간단히 먹는듯 했다. 대개 아침 시간에 가장 먼저 부엌을 찾는 사람은 줄리아였다. 줄리아는 언제나 (네덜란드 특산품처럼 생겼으나 실제로 어디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는)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다녔는데, 나무 굽이 바닥을 칠 때마다 들리는 소리가 너무 경쾌하고 우아해 마치 오케스트라의 타악기 소리처럼 느껴졌다. 그는 언제나 정성 들여 커피를 내린 후, 빵 한 조각을 구워다가 천천히 음미하며 먹고는 했다. 나는 그런 줄리아를 보며 "지독히 프랑스인의 아침 식사 같다"라고 말해주었고 줄리아는 웃으며 "너는 지독히 밀레니얼 세대답게 입고 있네"라고 응수하고는 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비만 인구가 적은 도시로 알려진 파리 출신인 줄리아와 언더아머 민소매 티셔츠에 챔피언 농구 반바지를 입고 있는 나. 우리는 서로를 너무나도 정확하게 평가하고 있었고, 나는 그런 우리의 농담 섞인 아침 인사가 좋았다. 

- 곧이어 부엌을 찾은 김연수 작가님이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김연수 작가님은 언제나 체크무늬 셔츠에 통이 큰 바지 차림을 하고, 추운 듯 움츠린 자세로 커피를 내려드시고 공용 밥솥 가득 밥을 지으셨다. 작가님은 자신 몫의 밥을 퍼 담으며 무심하게 내게 말했다.
"상영도 햇반 돌려 먹지 말고 밥솥의 밥 먹어. 같이 먹으려고 많이 해놨어."

 

- 그날 밤 나는 샤워를 마친 후 개운한 기분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이따금 울리는 풀벌레 소리와 창틈으로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내 귀를 감쌌다. 고요한 마음으로 자기 전까지 교정지를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순간 뒷골에 싸늘한 기분이 느껴졌다. 방구석에서 뭔가 꿈틀댄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방구석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보았다. 거의 내 손바닥만 한 몸길이의 지네가 벽 귀퉁이에 웅크리고 있는 것을.

 

- 일순 지네의 꿈틀대던 다리와 더듬이가 멈췄다. 내 기색을 눈치챈 것 같았다. 위기 상황에서 다리 끝까지 시냅스가 연결돼 IQ가 140이 넘어간다는 벌레가 지네였던가 바퀴였던가. 아무튼 지네는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눈치가 빠른 고등 생명체임이 분명했다.

 

- 나는 비명을 지르며 손에 쥔 공으로 지네를 여러 번 꾹 내리눌렀다. 엄청난 속도로 꿈틀대던 몸과 다리, 더듬이의 움직임을 보며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고 난 후 비로소 지네가 몸을 축 늘어뜨렸다. 나는 겹겹의 휴지를 손에 쥐고 지네의 사체를 들어 올렸다. 지네의 묵직한 무게감이 손끝에 전달돼 숨을 참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휴지 뭉치를 변기 속에 집어넣고 곧장 물을 내렸으며, 손등이 벗겨지도록 열심히 손을 씻었다.  
나는 피부에 남겨진 살육의 감각에 몸서리치며 밤새 잠을 설쳤다.

 

- "이거 말하는 거야, 상영?"
벽에 붙은 지네가 붉은 다리를 현란하게 움직이며 기어가고 있는 영상이었다. 나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이것이 맞다고, 설마 줄리아의 방에서도 이 벌레가 나왔느냐고 물었다. 줄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 생명체의 움직임이 너무 아름다워 동영상으로 찍어놓았다고 했다. 지네라는 생명체에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다니, 아무리 (멕시코시티에서 자연주의 작업을 전개해나가고 있는) 시각 예술가라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김연수 작가님과 한스도 차분한 표정으로 영상을 돌려보았다. 한스가 내게 말했다.
"아, 센티피드(Centipede)를 말하는 거였군!"

 

- 손을 물리는 고충을 겪었음에도 순순히 방생까지 해주다니. 나는 줄리아와 한스에게 지네를 풀어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외쳤다. 옆에 계신 김연수 작가님 역시 특유의 조용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상영아, 지네의 붉은 다리가 너무 아름답지 않니?"

 

- "한스, 건축학적으로 이 건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한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매우 아름답지."
"그렇다면 거주자로서는?"
"흐음..."
한스는 한숨을 쉬며 어딘가 작위적인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미소 속에 해답이 있는 것 같았다.

- 하기야 건축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이토록 아름다운 건물을 지은 건축가에게 죄가 있을 리 없고, 그리마도 붉은 다리 지네도 그저 생존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을 뿐 별다른 죄가 없었다. 죄가 있다면 그들이 사는 길목에 자리를 차지한 채 눈치 없이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있을 터였다. 그 죄의 대가로 김연수 작가님과 한스는 지독한 지네 독에 시달려야 했으며, 나는 아름다움과 평화에 천착한 예술가들을 대신해 사력을 다해 벌레들을 잡아야만 하는 운명에 처했다.  

 

- P.S. 이후 김연수 작가님은 제주도에서 카페를 경영하고 있는 (절친) 문태준 시인님의 도움으로 지네를 막는 데 특효약인 '백반'을 얻어 오셨고, 자신의 방과 침대에 백반으로 된 지네 결계를 쳐놓은 후 편히 잠들 수 있었다고 한다. 

 

- 요 며칠 서울과 제주를 오가는 무리한 일정 때문에 도진 것 같았다. 창문을 열어보니 바람이 훨씬 약해져 있었는데 대신 미스트 같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단체창에 조하나가 올려놓은 스케줄에 따르면 첫날 오후는 오름과 바닷가를 유람하는 코스였다(오름? 나는 단 한 걸음도 중력을 거슬러 오르고 싶지 않았다). 몸 상태가 어떻냐고, 같이 여행을 할 수 있겠냐고 묻는 아이들의 말에 나는 일단 오늘까지 쉬어보고 합류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 [작가님, 교정지 언제쯤 입고 가능할까요. ㅜㅜ]
언제나 상대방의 감정을 우선시하고 지독히 조심스러운 그가 눈물 이모티콘까지 썼다는 것은, 이제 정말 데드라인이라는 의미였다. 나는 반쯤 남은 커피잔을 들고 다시 객실로 올라가, 미친 듯이 교정지를 보기 시작했다. 

 

- 뒷좌석에 앉아 있던 조하나가 나에게 말했다.
"너 얘네가 얼마나 웃기는지 아니?"

- 김종미와 M은 긍정적이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간들이다. 아침에 함께 비행기를 탈 때부터 "비행기가 결항되지 않고 무사히 갈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며 시작된 긍정 메들리는 온종일 계속됐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제주공항에 도착하니 "비가 와서 덥지 않고 좋지 않냐", "차가운 에어컨 바람을 쐬는 대신 창문을 열고 달릴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등의 무한 긍정의 말이 끊임없이 이어졌다고 한다. 이후 해변에 위치한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는데, 창 너머로 바람 때문에 쓰러질 것 같은 야자수를 보면서도 "이렇게 심하게 태풍이 부는데 우리는 실내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고 앞선 말들과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다행이다' 시리즈를 읊어대는 통에 조하나는 어이가 없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아무리 힘겨운 상황에서도 겨자씨만 한 행복이라도 찾아내는 것이 김종미와 M의 특기였다. 김종미와 M의 무한 긍정은 다소 대책 없는 측면이 있는 반면에 조하나와 나는 지독한 현실파에 가까웠다. 우리 넷의 관계가 10년 동안 별 탈 없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이런 밸런스 때문이 아닐까. 

 

- "상영아, 우리 고등어회부터 먹고 갈래? 거기 11시 30분에 여는데 조금만 지나도 대기 번호가 100번도 넘어. 웨이팅 한 시간은 기본이고 "
태어나서 한 번도 고등어회를 먹어본 적이 없는 나는, 오직 제주도에서만 맛볼 수 있는 진미라는 김종미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식당부터 가자고 답했다. 대신 종미가 원하는 최신 힙합곡이 아닌 에스파의 노래를 틀었다.

 

- 맞는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를 아티스트,라고 칭하는 게 너무 부끄러워 어딘가에 숨고 싶었다. 직원분께서는 실례했다고 말하며 문을 열어주셨다. 관광객을 제외하고 섬에서 거주하거나 일하는 사람 중에 나만큼 젊은(?) 사람은 처음 본지라 나는 주의 깊게 그를 지켜보았다. 설마 매일 서귀포에서 배로 출퇴근을 하는 것일까? 

 

- 궁금한 것도 잠시, 이내 나는 친구들과 함께 레지던시 곳곳을 돌아다녔다. 친구들은 내 방을 보더니 유럽의 기숙사나 정갈한 호텔 같다고 했다. 나는 아이들을 끌고 와 라운지에 앉았다. J 매니저님이 처가댁에서 따오신 귤(그렇다. 제주도민들은 정말로 한 집 건너 한 집마다 귤밭을 가지고 있었다)을 내어주시며 아이들에게 아이스커피를 내려주셨다.  

 

- 자타공인 불효자인 나는 부모님과의 반목으로 인해 명절을 챙기지 않는 사람이 되었고, 언제부터인가 내게 명절은 텅 빈 서울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몸은 더할 나위 없이 편하고 자유로웠지만 가족을 나 몰라라 했다는 생각에 마음만은 쓴 것을 씹은 것처럼 불편했다. 가족은 내게 언제나 모종의 죄책감과 찝찝함을 남기는 단어로 남아 있었다. 그나마 2020년부터는 빌어먹을 코로나 덕분에 나 말고 다른 모두가 가족을 만나러 가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고 그나마 나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 이번 추석의 경우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남들은 눈치를 보며 찾는 휴양지에서 합법적으로(?) 추석을 쇠게 되었으며, 그것도 레지던시에 기거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었다. 줄리아는 자신의 한국인 시각 예술가 친구가 레지던시를 방문해 우리와 함께 추석을 보내도 괜찮을지 물어보았다(외부인이 묵을 때 직원들과 상주 작가들에게 미리 허락을 구하는 것이 레지던시의 규칙이었다). 당연히 모두가 승낙하였고, 나는 추석 연휴 동안 스스로를 먹일 파스타 면과 주전부리, 그리고 맥주를 잔뜩 사두었다. 찬장을 열었을 때 김연수 작가님이나 유비호 작가님의 선반이 김 과자며 짜장라면 같은 것으로 채워진 것을 보면 다른 작가들도 나와 다르지 않은 처지인 것 같았다.

 

- 매일 산책을 나갈 때마다 달이 점점 뚱뚱해져 가는 게 보였다. 나는 달과 대화하는 것을 좀 즐기는 편인데, 달에게 소원을 빌었을 때 성사율(?)이 꽤 높았기 때문이다. 등단도, 첫 책의 무탈한 발간도 젊은작가상도 모두 달에 빌었던 소원의 목록이었으니 이제는 반 종교화된 의식이기도 ...

 

- "어! 반딧불이다."
숏컷의 여성분이 유리잔을 든 채 옥상을 누비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라 괜히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가 곧 빛나는 벌레를 컵 속에 가두었다. 야광별처럼 희미하게 빛나는 반딧불이가 컵 속을 유유히 날아다니고 있는 게 보였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반딧불이의 모습이었다. 김연수 작가님도 아주 오랜만에 반딧불이를 본다며 어릴 적에 심심치 않게 동네에서 볼 수 있는 벌레였는데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나는 줄리아에게 반딧불이를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줄리아는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상영, 나는 연수처럼 70년대생이야. 우리 세대에게 반딧불이는 몹시 친숙해. 거기다 난 멕시코시티에 살잖아? 거기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곤충을 다 볼 수 있다고."

 

- 나는 갑자기 장난기가 들어서 "그렇다면 연수와 줄리아도 할머니들처럼 섬에서 자라는 허브의 효능과 치료법을 모두 알고 있겠네? 두통이 오면 민들레, 허리가 아프면 라벤더... 같은 것?" 하고 물었다. 줄리아는 씨익 웃으며 김연수 작가님을 향해 말했다.
"연수, 밀레니얼들은 너무 가혹해."

 

- 나는 술버릇 중 하나인 실없는 소리를 했다. 
"슬기, 줄리아, 그거 알아? 내가 무속인 유튜브에서 본 건데, 달밤에 춤추는 건 귀신을 부르는 행위래."
줄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그렇지만 한국에는 보름달이 뜰 때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는 전통이 있다던데?"
김연수 작가님이 말씀하셨다.
"맞네, 강강술래."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그 사람이 헛소리한 건가?"

"아냐, 강강술래도 조상님을 부르는 춤일 수도 있지."
귀신 얘기가 나오자 김연수 선생님이 다소 으스스한 말씀을 하시기 시작했다.
 
- "거기가 사실은 시체 안치소래."

"네?"

"섬에서 누군가 죽었는데 바로 배를 띄우기 여의치 않을 때 그곳에 시신을 보관하는 거지."
"전 그냥 창고인 줄 알았어요."

 

- 생각해 보면 섬에서 아름다운 풍광과 바다만큼이나 자주 마주하는 게 바로 무덤이었다. 길가, 밭의 한중간, 심지어는 레지던시 건물 옆에서도 심심치 않게 무덤들을 맞닥뜨릴 수 있었다. 교통이 원활하지 않던 과거에는 섬에서 급작스럽게 사람이 죽었을 때 집 마당이나 밭과 같은 생활공간에 매장하는 것이 흔한 풍습이었다고 했다. 도시의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대상이 추상적이고 왠지 금기시되는 으스스한 종류의 것이라면 섬에서, 자연에서 죽음은 생의 일부이다. 

 

- 맥주를 다 마실 때쯤 이슬기 작가님이 유리잔 속에 담긴 반딧불이를 풀어주었다. 희미하고 어렴풋한 불빛이 하늘을 향해 떠오르기 시작했다. 

 

- 내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답했다. 
"왠지 가짜로 만들어놓은 것 같아. 관광객들 보라고."

김연수 작가님께서는 꿈결 같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씀하셨다.
"상영이는 의심이 많구나(음량 1). 사람에 대한 신뢰가 없어(음량 0.5)..."

 

- 송지현은 그 말을 듣고는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나 역시도 지현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는데, 정말이지 그것만큼 나를 완벽하게 설명하는 문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 실은 나는 보기보다 겁이 많고 소심한 사람이라 타인에게 쉽게 상처를 받고 또 오래 곱씹곤 한다. 의심이 많고 타인을 잘 믿지 않는 건 아마도 그런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일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예전부터 나는 손쉽게 타인을 받아들이고, 어렵지 않게 신뢰감을 쌓아 올리는 종류의 사람들을 동경해 왔다. 그들은 나처럼 사사로운 일에 붙들려 있지 않고 경제적으로 감정을 사용할 줄 아는 존재라는 생각에 때로 열등감을 느끼기까지 한다. 김연수 작가님을 볼 때도 그런 생각을 자주 했는데, 작가님의 여유로운 걸음걸이며 타인에 대한 긍정적인 표현, 마음 씀씀이 같은 것들이 부럽고 좋았다. 일상의 대부분을 감정이라는 괴물을 다스리는 데 허비하는 나로서는 좀체 가닿기 힘든 삶의 형태이기도 했다.

 

- "그게... 사장님이 어젯밤에 목포에서 배 탄다고 한 뒤로 연락이 끊겼어."
"뭐? 갑자기 목포는 왜?"
"비행기표가 매진돼서 기차로 목포까지 가서 배 타고 제주도로 오신대."


- 나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그런 방식으로 서울에서 제주도에 올 수 있다고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송지현이 자신의 핸드폰으로 사진 몇 장을 보여주었다. 단발머리의 젊은 여성이 커다란 위스키병을 들고 합정역, 서울역, 목포역, 그리고 목포항에서 찍은 사진이 차례대로 화면에 떠올랐다. 

"이게 뭔데?"
"초고 사장님이 보내온 사진. 우리 마시라고 저 위스키 들고 오고 있대. 아마 지금쯤 제주항에 도착했을걸?"

 

- 사실 전날 밤 우리는 거하게 술판을 벌였다. 
송지현과 내가 라운지에서 조미김과 콩자반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시는 와중에 김연수 작가님께서 물을 마시기 위해 라운지에 들른 게 이 모든 사달(?)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술자리에 빠지는 법이 없는 김연수 작가님과 자연스레 합석을 했다. 밤이 깊어가고 우리는 두런두런 수다를 떨었다. 내가 일은 서울에서 잠은 제주에서 해결하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던 와중에 김연수 작가님은 이미 가파도에 완벽히 동화되어 반 현지인이 다 돼 있었다. 섬의 역사와 문화, 심지어 주민들 간의 알력 싸움과 법정 다툼까지도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나 흥미로웠던 것은 한때 가파도를 주름잡았던 조폭 출신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여러 이권 사업과 연관된 권력자인 동시에 낭만이 있는 자객(?)이기도 했다. 세상을 떠난 뒤 그가 살았던 집의 벽지를 뜯자 벽면 가득히 시가 쓰여 있었다고 했다. 마치 임권택이나 곽경택의 영화 같은 서사라, 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분은... 언제 돌아가셨어요?"
"어제 지병으로."
지현과 나는 거의 감전된 것처럼 놀랐다.
"어, 어제라고요?"
김연수 작가님은 능청스럽게 말을 고치셨다.
"아, 실수. 몇 년 전에."

 

- "그런데 놀라운 거 하나 더 알려줄까? 사실 그 사람을 처음 검거한 형사님도 지금 이 섬에 살고 계셔. 너희들도 아는 사람이야."

 

- 영상 속의 나는 정말 다급한 표정으로 동아줄처럼 바위를 붙잡고 있었고, 그 표정이 너무나도 절실해 조금 웃겼다. 송지현은 아직까지도 우울할 때마다 그 영상을 틀어본다고, 자신의 웃음 버튼이라고 했다. 
나는 좋은 친구를 두었다.

 

- 어쩌면 사는 건 몰랐던 통증을 늘려가기도 하며, 그 통증에 익숙해지기도 하는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울적하기도, 담담하기도 한 생각이었다. 

 

- 가파도에 묵는 마지막 주, 나는 매일 산책을 했다. 
며칠 만에 공기의 냄새가 바뀌어 있었다. 섬의 식생도 바뀌었다. 모르는 꽃과 빛깔이 생겨났다. 억새가 흩날리는 방향으로 바람이 불었다. 남쪽 섬이라 가을 겨울이 별로 춥지 않을 줄 알았는데, 바람이 제법 찼다. 오히려 서울보다 더 추운 것 같기도 해서 신기했다. 

 

- 많이 쌀쌀하지만 걷기에 좋은 온도였다. 섬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한마디도 안 하고 계속 길을 걸었다. 바다만 보고 있어도, 사방을 바라보기만 해도 온갖 감정이 피어올랐다. 아쉽고도 후련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었다.  

- 실제로 이금희 선생님은 인공위성에 달린 초정밀 레이더처럼 타인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상대방에게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한 다음 그것을 채워주는 능력이 탁월했다. 친절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미소를, 대화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대화를, 당분이 필요한 학생들에게 다과를 제공하는 선생님의 모습에 나는 자주 놀랐다. '나의 말을 하고 싶어서, 나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서'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한 나는 당시 나 자신을 지키며 세상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만의 것, 내 영역, 나 자신을 애써 부르짖지 않으면 아예 내 삶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는 망상에 시달리며 방어적 태도로 삶을 살아가던 나에게, 이금희라는 존재는 상쾌한 충격을 주었다. 교과서에 등장할 만큼 뻔한 명제인 '더불어 사는 삶'의 현현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목격한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 수업 마지막 날, 이금희 선생님은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상영아, 너는 너만의 길을 가렴. 너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란다."
평범하다면 평범할 수 있는 그 한마디가 유달리 마음에 남았다.

 

- "나는 그 후에도 네가 했던 말이 몇 번 기억났어. 나를 두고 감정의 경제성이 뛰어난 것 같다고 했던 것."

- 감정의 경제성.
그것은 내가 이금희 선생님을 보면서 가장 자주 떠올렸던 키워드이기도 하다. 선생님은 모든 종류의 자극에 쉬이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다. 선생님의 삶은 지나온 과거나 먼 미래에 있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지나간 일에 머무르지 않는다. 감정의 괴물인 나라면 족히 몇 달을 잡고 늘어질 만한 사건이 닥쳐도 이금희 선생님은 금세 훌훌 털어버리고 앞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이다. 지금 좋으면 미련 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고, 그러다 인연이 다 되면 또 후회 없이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삶. 미움과 슬픔뿐만 아니라 후회, 비뚤어진 애착과 같은 감정들도 선생님의 사전 속에는 들어갈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이금희 선생님을 볼 때마다 세상만사에 통달해 언제나 웃고 있는 도인과 같은 모습이 겹치고는 했다. 

 

- "맞아요! 선생님을 뵐 때마다 가장 부러웠던 게 그거였어요. 30대가 된 지금도 전 감정 조절이 안 돼서 죽겠다니까요."
"그러니까 네가 작가가 된 것 아니겠니?"

듣고 보니 그 역시 맞는 말이었다.

 

-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상냥하고 호기심 많은 인간 이금희의 모습으로 상대방에게 질문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소화하고 또 다른 질문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것을, 그야말로 사전적 정의와도 같은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냉소를 갑옷처럼 두르고 있는 나 같은 사람으로서는, 맨몸으로 그 모든 관계의 상호작용을 받아내고 있는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생방송을 소화하고,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사려 깊게 고민하고, 또 따뜻한 미소를 전하는 그녀를 보며 한 번은 이런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선생님, 평생 전 국민이 모두 알아보는 삶은... 어떤 삶이에요?"

 

-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고, 주목받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평생 아나운서로, 방송인으로 살 수 있다니... 형용모순 같은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이제는 믿을 수 있다. 하루 대부분을 혼자 보내는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나야말로 실은 주목받는 게 어렵지 않다. 사실 나는 소심한 사람치고는 은근히 간이 큰 편이라 천 명 앞에서도 별로 떨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일대일로 사람 만나는 게 오히려 어렵다. 인간 대 인간으로 타인과 마음속 진심을 내비치며 대화하는 것은 꽤 많은 감정적 체력을 요구하는 일이다. 반평생 동안 그것을 진심을 다해 해내는 선생님이 경이롭게만 느껴졌다. 

 

- 이 글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리라.

- 작가가 되기 전까지 나는 글의 힘을 별로 믿지 않았다. 정확히는 글이, 문자 매체가 갖는 파급력에 대해서 잘 몰랐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작가가 된 지 만 7년 차가 된 지금에서야 나는 비로소 내가 쓰는 소설이나 산문이 누군가에게 '읽히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곤 한다.

 

-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우리를 연예인 출연자분들이 맞아주셨다. 그들은 나를 보더니 (방송 특유의 과장된 리액션으로) 놀란 표정을 지으며 여자 세 명과 남자 한 명이 함께 여행을 온 게 맞느냐고 거듭 물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남사친 여사친 사이라는 거죠?"
주어진 대본은 없었지만 사회생활 9단이 다 된 우리는 단번에 제작진의 의도가 무엇인지 간파하고는 그들이 원하는 키워드를 말해주었다.
"네! 저희는 함께 여행을 다니는 남사친 여사친입니다!"
(친구면 그냥 친구지 남사친 여사친은 또 뭐람...)

 

- 곧 비가 완전히 그쳤고, 구름에 가려져 있던 산의 절경이 드러났다. 메인 PD님께서 출연자들 중 원하는 사람들을 모아 운탄고도 산행을 하겠다고 했다. 친구들은 모두 등산을 하겠다고 했다. 나는... 당연히 숙소에 남겠다고 했다. 그렇게 산행을 자원한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보니, 나 말고 모든 사람이 다 떠나고 없었다.

 

- 나는 산행 대신 동네 마실에 나섰고, 제작진은 이를 놓치지 않고 카메라를 들고 나에게 따라붙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갑자기 <6시 내 고향>의 리포터처럼 동네분들을 인터뷰하고 있었다. 운탄고도의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쓰레기를 줍는 주민분들과 정자에 둘러앉아 믹스 커피를 나눠 마셨다. 그리고 아름다운 산길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 곧 양옥이 여러 채 모인 곳이 나타났고, 집 밖에 나와 산 중턱에 낀 구름 사진을 찍고 계신 주민분과 마주쳤다. 
"와, 매일 이런 풍경을 보고 사셔서 너무 좋겠어요!"
"아뇨. 저도 살면서 이런 광경은 처음인데요? 그래서 사진 찍으러 나왔지."
조금은 머쓱해져 버린 나... 중년의 주민분은 몹시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으셨다.

 

- "근데 연예인이세요?" 
"아, 아뇨... 저는 작가입니다."
주민분은 애초에 내 직업 같은 건 별 관심도 없었다는 듯, 자신이 운탄고도로 이주해 온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셨다. 원래 서울에서 태어나 50년도 넘게 한동네에서 사시다, 암에 걸린 뒤 이곳에 정착해 살기 시작했으며, 불과 5년 만에 암 완치 판정을 받으셨다고 했다. 
"여기 공기랑 물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 기적처럼 암이다 나았잖아요!" 
간증에 가까운 주민분의 이야기를 한참 동안 들으며 운탄고도의 영험함에 대해 열심히 맞장구를 쳤다. 결국 해가 질 때가 다 되어서야 마을호텔 건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트레킹을 떠났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오고, 출연자들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마침 게스트로 오신(미남으로 소문난) 뮤지컬 배우님이 노래를 불러주었다. 역시나 엄청난 가창력이었다. 고개를 돌려 조하나를 본 순간 나는 너무나도 놀라고 말았다. 조하나를 안 지 15년, 그토록 행복한 표정을 본 건 처음이었다. 나는 종미와 M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조하나를 보라고 했다. 입이 정수리까지 걸려 있는 조하나를 보고 모두 놀라워했다. 

- 주방을 비추고 있던 카메라들도 꺼지고 난 후, 나는 조하나에게 말했다. 
"하나야, 그렇게 좋니?"
조하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지금까지 내가 남자 얼굴을 안 본다고 생각했다? 근데 오늘 진짜 너무 행복했어."
"그래, 니가 그렇게 환히 웃는 거 15년 만에 처음 봤어."
우리는 냉장고에 있는 술을 모두 털어 먹으며 계속 폭풍 수다를 떨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시간은 새벽 5시, 동이 트는 것을 보며 우리는 각자의 모기장 속에서 잠에 빠져들었다. 

 

- 마지막에는 M의 추천으로 원주의 '뮤지엄 산'에도 들렀다. 입장료가 조금 비싼 거 같아 악착같이 할인이 되는 카드를 찾았는데, '예술인패스'가 할인 항목에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핸드폰에 저장된 5만 장의 사진 중 먼 옛날 만들어놓은 내 예술인패스를 찾아 내밀었다. 작가가 된 게 가장 뿌듯한 순간 중 하나였다. 

- 예고한 대로 나는 이 여행을 글로 썼다. 이 글이 또 나를,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가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안고서.

 

- M도 적잖이 늦는 편이지만, 종미는 가끔 좀 과할 정도로 심하게 늦는다. 오죽했으면 종미에게만 약속 시간을 한 시간 전으로 알려주자는 우스갯소리까지 할 정도다. 

 

- 당일, 김종미는 약속 시간이 되어도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디냐고 문자를 보내니 창동역, 이라는 답이 왔다. 그렇게 10분, 20분이 지나도 올 생각을 않는 종미. 참다못해 전화를 했는데 종미의 주변이 너무 조용했다. 나는 도대체 어디냐고 종미에게 다그쳤다. 김종미는 정말 창동역에 있었다. 창동역을 지나는 1호선 열차도, 창동역사도 아닌, 창동역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출발조차 하지 않은 채로.

 

- 애초에 약속을 깜빡했다고 하면 그냥 집에 돌아갈 수나 있었을 것을, 종미는 계속해서 가고 있다는 말로 나를 묶어두었고, 변변하게 앉을 곳도 없는 종로5가역에서 한 시간 반동안 서 있게 만들었다. 지하철 출구로 나오는 종미를 보자마자 뚜껑이 열린 나는 엄청 화를 냈던 것 같다(기억력이 꽤 좋은 편인 나지만 이상하게 그 장면만은 희미하다). 그리고 그 이후 종미는 놀랍게도 나와 만날 때 단 한 번도 늦지 않았다(후에 종미는 어머니도 평생 고치지 못한 지각하는 버릇을 내 덕에 고쳤다고 말했다). 

 

- 나는 종미에게 거듭 전화하며 위치를 체크했다. 종미가 경의중앙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고, 그 지옥의 배차 간격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너무나도 불안했다. 보딩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우리는 깊은 시름에 젖어들었다. 실은 우리 중 가장 운전 경력이 긴 파워 드라이버인 종미가 운전을 도맡아 하기로 했기 때문에, 셋 중 누가 종미 대신 차를 몰 것인가 하는 고민 때문이었다(물론 종미 걱정도 아주 조금은 했다) 

 

- 우리가 예약한 흰색 레이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업체에 연락을 하니 지금 문을 열어주겠다고 하며, 차 안에 열쇠가 있으니 그대로 사용하면 된다고 했다. 정말 차 문이 열렸고, 우리는 시종일관 주변을 두리번대며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건지 4차 산업혁명(?)이라며 모두 놀라워했다(참고로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은 모두 IT 업계에서 일하고 있다). 

 

- 김종미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상담할 것이 있다고 했다. 당시 종미는 소셜 마케팅팀의 팀장으로서 팀원들을 관리하는 동시에, 사내 유일의 쇼호스트로서 거의 투잡을 방불케 할 만큼의 엄청난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상품 선정부터 방송 기획, 세트 제작에 촬영까지 다 감당하느라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고 했다.  


- 고백하자면, 한때 자주 회사를 옮기는 종미를 보며 끈기가 없는 것 아닌가 나도 모르게 의심했던 것 같다. 세상에 너에게 딱 맞는 자리는 없다고 자리에 맞춰 너를 바꿔나가라는 주제넘고 꼰대 같은 조언을 하기도 했다. 어딜 내놔도 부끄러운 내 친구 김종미라고만 여겼었는데, 실은 내가 모르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학 시절 내내 구박만 했던 게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2, 30대 내내 여러 회사를 옮겨 다니며 방황하던 종미가 드디어 맞는 옷을 찾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빠른 속도로 팀장까지 승진한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 그러나 일견 화려해 보이는 모습 이면에 종미는 팀원들의 갈등을 조율해야 하는 어려움과 잡 포지션의 애매함에서 오는 혼란스러움을 모조리 껴안고, 견디고 있었다. 종미는 연봉을 낮춰서라도 쇼호스트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곳으로 옮기는 쪽이 낫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계속하는 것도 힘든데, 그만두는 건 더 힘들다. 심지어 그만두고 나서 다시 시작하는 건 더 힘들다. 나 역시 7년 동안 회사 생활을 하며 숱하게 고민했었고, 전업 작가가 된 지금까지도 매일 하는 고민이었다. 종미와 나는, 서른다섯 살의 사춘기를 앓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 우리는 저마다의 시선으로 종미에게 최선의 로드맵이 무엇일지, 만약 퇴사를 한다면 언제가 최적의 시점일지 고민했다. 정상회담을 방불케 하는 열띤 토론이 이어지는 와중에 김종미가 갑자기 가방에서 작은 약통을 꺼냈다. 그리고 우리에게 알약을 하나씩 주더니 녹여 먹으라고 했다. 우리는 김종미가 시키는 대로 알약을 입에 넣었고, 종미는 핸드폰을 들어 그런 우리의 모습을 찍었다.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으니 다음 주에 방송하기로 되어 있는 구강 건강유산균이라고 했다. 이 와중에도 업무를 하는 김종미를 보며 말했다. 
"종미야... 너, 정말 어른이 되었구나."
"진짜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래도 매일 술 먹고 사고 치던 시절보단 지금이 낫다고 봐, 나는."

- "난 그렇게 과거가 그립다?"
"엥? 너 대학교 때 맨날 학고 받아서 졸업도 못 할 뻔했잖아."
"대학교도 대학교인데, 고등학교 때가 그렇게 그리워."
종미를 놀리는 데서 삶의 보람을 느끼는 나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답했다.
"무슨 소리야, 너 그때 산자락에 있는 재수 학원에 감금돼서 공부하느라 죽을 뻔했다며."
"아냐,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가 훨씬 좋았던 것 같아. 그냥 주는 대로 먹고, 시키는 대로 하면 아무 문제도 없던 시절. 넌 그때가 안 그리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했다.
"절대로, 나는 10대 시절이 너무 싫었어.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죽어버릴 거야. 오죽했으면 <1차원이 되고 싶어>를 썼겠어."
 

- 조하나가 얼굴에 화색이 돌며 말했다.
"나 사실 니 소설 중에서 그걸 젤 좋아한다?"
"진짜로? 의외다."
"응, 난 그게 제일 재밌었고, 읽을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몽글몽글해져."
우리 중 가장 이성적인 조하나의 입에서 몽글몽글'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다니. 그런데 M도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나도! 그 책이 제일 좋아. 제일 뜨겁고, 장편이라서 이야기도 굵직굵직하니 좋고!"
김종미도 한마디 거들었다.
"나도! 10대 때가 엄청 생각나는 거 있지. 첫사랑의 애달픈 마음 같은 거."

 

- "1차원의 마음을 되찾도록 해."

 

- M은 백 번도 넘게 말했던 10대 시절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서른다섯 살의 나는 우리끼리 이런 얘기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부동산이며, 커리어 패스, 연봉 협상과 같은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20대 때 추억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내가 쓴 10대 시절 이야기가 친구들의 인생을 경유해 나오기도 한다. 

 

- 그날, 그 밤, 여수 밤바다는 우리가 꿈꾼 풍경과는 사뭇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소설가라는 직업을 가졌음에, 또 함께 이런 이야기를 나눌 친구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에 오랜만에 감사했다. 

 

- 계단식 논은 절벽이나 산지, 고지대의 특성을 이용한 전통적인 경작법이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남해라는 도시 자체가 절벽에 지어진 도시라는 것을. 우리가 선정한 모든 맛집과 카페, 관광지가 엄청난 경사를 자랑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더 이상 등산을 하지 말자고 다짐해 놓고 세상에서 가장 언덕이 많은 도시에 온 것이었다. 우리들 중 제일 놀란 건 조하나 같았는데, '풍경'과 '사진' '맛집' 등의 키워드만을 보고서 짠 코스였기 때문에, 이토록 가파른 경사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 그러거나 말거나 풍경은 아름다웠고, 우리는 마치 단것에 꼬이는 개미들처럼 수많은 관광객과 함께 절벽을 향해 가파른 경사를 내려갔다. 조하나는 무릎을 전부 다 펼 수조차 없을 정도로 타이트하고 두꺼운 청바지를 입고 있어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몹시 괴로워하였다. 

 

- 경사를 다 내려갈 때쯤 광활한 바다와 아름다운 조경이 펼쳐졌다. 대파잎처럼 초록 이파리를 가진 구근식물이 잔뜩 심겨 있었다. 더러는 노란색 꽃을 피우고 있었으며, 당장이라도 씨앗을 퍼뜨릴 것처럼 씨를 머금고 있었다. 사소한 기쁨도 과장되게 표현하는 재주가 있는 김종미가 외쳤다. 
"어머 이 꽃 너무 예쁘다! 무슨 꽃이지?"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종미에게 말했다.

"이거 파꽃이잖아."

 

- 그때 등산복을 입고 우리 곁을 스쳐가던 한 중년의 여성분께서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셨다.
"수선화인데~ 수선화인데~"
정체불명의 가락이 붙은 노래를 들은 우리 일행은 모두 빵 터져서 배를 잡고 웃었다. 남해의 귀인 덕분에 아름다운 꽃의 정체를 배웠다.

 

- 맛있게 밥을 먹은 뒤 커피가 절실해진 우리는 어미 새를 보는 새끼 새들처럼 조하나에게 이제 어디로 가면 되냐고 물었다. 조하나는 맛집을 갈무리해 놓은 목록을 훑다가, 찾아놓은 카페들이 죄다 여기서 멀다고 했다. 김종미와 나는 그냥 지나가다 마음에 드는 카페가 나오면 들어가자고 했고, 극강의 충동형 인간들과 함께 다니며 하나 역시 퍽 익숙해졌는지,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 "와, 그 생각은 못 했네. 하나 너 진짜 천재 기획자 아니니?"
호들갑쟁이 M은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나 역시 조하나의 마음 씀씀이에 새삼 놀랐다. 고양이 앞에서는 데면데면한 모습의 하나가 실은 우리 중에서 고양이의 상태를 가장 주의 깊게 살피고, 고양이의 생존을 위해 빠른 속도로 현실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던 거였다. 

 

- 여수공항으로 향하는 길, M은 어김없이 곯아떨어졌고, 조하나가 문득 아까 다랭이마을에서 인사한 사람과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물었다. 그냥 10년 전쯤에 같이 술 마시고 놀던 형이라고, 이제는 자주 보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어느덧 G 형과 내가 '한때 같이 놀던' 친구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와 함께 밥을 먹은 이 친구들은 여전히 같이 놀고 있는 친구라는 사실도.

 

- 인간관계라는 게 참 그렇다. 어릴 적에는 한 공간에 모여있다는 것만으로도 같은 반 '친구'가 되는데 나이가 들면 애쓰지 않고서는 얼굴 한 번 보기조차 힘들다. 연락처나 인스타그램 팔로우 목록 속에 화석처럼 남겨진 관계들도 수두룩하다. 

 

- 외적인 젊음과 내적인 열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듯, 관계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애써 노력하지 않고서는 영원할 줄 알았던 관계도 쉬이 퇴색되기 마련이다. 우리를 단단히 묶어주는 결속력의 중심에는 조하나의 마음 씀씀이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개성 강한 친구들을 하나로 묶으려는 부단한 노력이 있었던 것 같다. 마치 아픈 고양이를 돌보는 것과 같은 그런 마음 말이다. 종미와 M 못지않게 깨달음에 호들갑스러운 나는 새삼 모두에게, 심지어는 조하나에게도 조하나 같은 친구가 되어주고 싶다는 나답지 않은 기특한 생각을 했다. 

 

-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지만, 이런 찰나의 노력들이 모여 결국 우리 인생을 구성하게 되는 게 아닐까? 나는 지금이 순간의 반짝임이 곧 인생이라고 믿기로 했다.  
 

- 그러기 위해 휴식과 여행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 여정에 함께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나와 내 주변의 한없이 평범하고도 주관적인 일상이 여러분의 삶에도 짧은 쉼표를 찍어주었기를 바라며.  

 


 

- 박상영 작가와 휴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공통분모는 '우리는 잘 쉴 줄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내심 일중독에 걸린 성공한 현대인의 모습일 거라고 생각해 왔지만, 불안과 게으름 그리고 완벽주의가 만난 환장의 콜라보가 나나 박상영 같은 군상을 만든다는 생각을 했다. 공식적 딱지만 성인이지 마음은 여전히 미성숙한 20대 초반 시절은 사람들의 무의식에 거대한 불안을 드리운다. 잘 안 풀리면 그런대로 내일이 막막하고, 잘 풀리면 풀리는 대로 이런 날들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다시는 그때의 불안한 동굴 속에 갇히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우리는 점점 노예를 자처해 가는 것이다. 

 

- 박상영 작가의 이번 에세이를 통해 푹 늘어진 채로의 휴식은 못 될지언정 목적 없이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는 것 또한 어떤 인간에게는 휴식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도사리고 있는 어둡고 불안한 것들을 박상영은 특유의 자타를 향한 관찰력으로 예리하게 잡아내고, 마찬가지로 특유의 유쾌하고 산뜻한 글을 통해 영원히 엉켜 있을 것만 같은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털어낸다. 모처럼 주어진 휴가에서조차 글쓰기를 멈추지 않은 박상영의 불안과 강박이 독자들에게 정신적 휴식을 줄 것처럼, 당신의 그것들 또한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잘 다뤄진 불안은 내일을 대비하는 완벽한 방패일 테니까. 


- 김이나(작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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