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박서련] 마법소녀 은퇴합니다

일루젼 2023. 11. 6.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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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서련
출판 : 창비
출간 : 2022.04.10


       

        

아... 미친 것 같다...!! 행복한 클리셰 비틀기. 어른들을 위한 현실적 동심 파괴와 블랙 유머.

아니, 미쳤다. 박서련 작가님, 사랑해요. 

 

내가 이 작품에 대해 뭐라 더 말할 수 있을까 고민한 시간만 한 달여.

결론은 그냥 한 줄이다. 

 

<마법소녀 은퇴합니다>를 읽읍시다. 

 

 

생활에 찌든 사회인이여.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삶에 짓눌린 현대인이여. 

우리 모두, 그래, 까짓것 마법소녀가 됩시다.

 

글쎄... 개개인에게 와닿는 바는 다 다르리라고 생각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저 클리셰만 모아놓은 글이라고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한순간을 위해서 지난했던 그 길고 질척한 과거가 필요했다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그 한순간을 느껴봤다면. 

 

 <마법소녀 은퇴합니다>는 무척 기억에 남을 만한 작품이 될 것이다. 

 

아무리 머리를 싸매어봐도 더이상 뭐라 덧붙일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행복하게 읽었다. 

 

음... 일해라, 토가시?

괜찮아. 당신에겐 <세일러문>이 있다.

 


   

- 가능한 한 폐 안 끼치고 죽는 방법 없을까?

 

-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해. 주어진 건 많지 않았지만 최대한 낭비 없이 노력해 왔다고. 내 발로 여기까지 왔지만 누구에게 떠밀려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겠지.

 

- 인터넷에서 '사랑으로 이어지는 서른여섯 가지 질문'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뉴욕타임즈의 글이었는데, 말 그대로 모두 대답하고 나면 어떤 사람하고든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서른여섯 개의 질문들이 담겨 있었다. 그중 7번 문항이 이러했다. 
"당신이 어떻게 죽을지에 대한 예감이 있나요?"

- 아마 나는 아무도 모르게 죽을 거야. 그러기를 바라고 그럴 거라 믿고 있으니까. 살면서 내가 빌었던 소원 중 정말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는 건 이것뿐.

그리고 소원을 이룰 기회는 정말 가까이에 있다.

- 화요일 새벽 세시 사십일분 마포대교 지나가는 차량은 분당 0.3대꼴. 텅텅 비어 있는 교량 위를 지나는 차는 당연하다는 듯 모두 총알 같고, 난간에 기대앉은 나는 운전자들 눈에 띄지도 않겠지. 나는 두 시간 전부터 여기 앉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지나간 건 사십 분쯤 전.

 

- 굉장히 친절하게 들리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리볼빙 총 액수는 조금씩 조금씩 늘어나게 되어 있어. 어렵사리 구한 단기 알바로는 리볼빙 최저한도 빚을 갚기도 급했고.

 

- 리볼빙이라는 이름 때문인가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러시안룰렛을 하고 있는 것 같았어. 할아버지, 러시안룰렛이 뭔지 알아?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총알을 하나만 넣은 권총을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게임이야. 휴, 이번 달은 살았다.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네. 하지만 과연 다음 달에도 무사할 수 있을까? 그런 조마조마한 심정. 쌓인 빚은 어차피 다 내가 쓴 돈이라서 누구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도 없는데 언젠가 터져버릴 것 같은 생각에 늘 불안했어. 

 

 

사람이 살아 있는 데에는 돈이 들어...
그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 데 너무 오래 걸린 것 같아.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식도 되지 않던 다리 위의 가로등들이 온통 그 여자를 향해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것처럼 보였다. 눈부시게 하얀 여자가 말했다. 
"당신은 지금 죽을 운명이 아니에요." 

 

- 살짝 소름이 돋았다. 내가 죽으려는 건 어떻게 알았지?라고, 당시에는 생각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누가 봐도 죽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는 것을 자각한 것은 조금 지나서의 일. 하지만 조금 지나서라는 것은, 자신을 아로아라고 소개한 그 여자가 그 시각 그 자리에 내가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찾아왔다는 것까지 이해한 시점을 말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무것도 몰랐던, 그저 누군가 지금 내게 말을 걸어준 게 기적이라 생각했던 나는 울면서 물었다.
"내 운명에 대해 알아요?"
"그럼요.”
정말 믿음직하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아로아는 다가와서 아주 소중한 것을 만질 때처럼 부드럽게 내 손을 감싸 쥐고 말했다.
"당신은 마법소녀가 될 운명이에요."

 

- "활발하게 활동 중인 마법소녀들이 대부분 소녀인 것은 맞아요. 그렇지만 모든 마법소녀가 정말로 소녀는 아니기도 하고요. 외견상 반드시 소녀여야 각성하는 것도 아니고, 소녀 시절에 각성했더라도 계속해서 나이를 먹기 마련이니까요."
하긴 한국에서 제일 오래 활동한 마법소녀는 이미 할머니라고 불러도 좋을 나이라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애초에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소녀라고 불러야 맞죠? 초경을 해야 소녀인가요? 초경을 하면 더 이상 소녀가 아닌가요? 키가 160센티미터를 넘으면 어른이 되나요? 백육십까지 자라지 못하는 사람도 많은데요? 몸은 물론 마음의 성장도, 모든 사람의 소녀 시절이 조금씩 다르지 않나요?" 

 

- 그런가, 그러고 보니 나의 소녀 시절은 몇 살 때부터 몇 살 때까지였지? 언제부터였다고 잘라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그 시절이 끝난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것 같았다. 삼 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따지고 보면 그때도 이미 일반적인 의미에서 소녀라 하기에는 나이가 많았지만, 적어도 그때까지 나는 스스로를 전혀 어른이라 여기지 않고 지냈다. 그래도 됐기 때문이다. 

-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고 하지요. 마법소녀들에게는 복잡한 일이 많이 있어요. 가령 활동 과정에서 일어난 기물 파손의 책임 소재나 보험사의 가입 거절 문제 같은 것들 말이죠. 성인 마법소녀의 경우에는 더하죠. 앞서 말씀드린 사례들의 경우 법정대리인이 될 수 있는 성인보호자가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성인 마법소녀들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해요. 그래서 연대체가 필요했죠." 
보험 얘기가 나와서 그런 건지 말을 술술 잘해서 그런 건지, 아로아야말로 내게 보험을 영업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저랑은 무슨 상관인데요?"

 

-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예언의 마법소녀 아로아입니다. 직책은 간사, 현재 맡은 임무는 사상 최강의 마법소녀를 찾는 것입니다."
아로아의 거울로는 그 순간의 내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런데도 왜 거울이라고 생각했을까? 그것도 별일이다) 아마 내 얼굴에는 그게 뭔데, 어떻게 하는 건데,라고 쓰여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로아의 다음 말을 듣는 순간 모든 것이 이해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로 지금 이 순간만이 아니라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의 내 인생의 모든 요소, 그 하나하나의 빌드업이 모조리 다. 
"우리는 시간의 마법소녀야말로 사상 최강의 마법소녀가 될 거라고 믿고 있어요."

 

- 천직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너무 잘해서 그 일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보일 때 쓰는 말. 소녀 시절 나의 꿈은 시계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실은 여전히 늦지 않았다고도 생각한다. 

 

- 그래서 아로아가 하는 말은 정확히 나를 향한 것처럼 여겨졌다. 지금껏 시계를 만들기 위해서 태어난 줄 알았던 내가, 사실은 시간을 통제하는 능력을 지닌 마법소녀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는 건, 누가 봐도 말이 되는 이야기 같았다. 너무나 앞뒤가 잘 들어맞는 이야기라서, 아주 정교한 수리 작업 끝에 초바늘이 톡, 하고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을 때와 같은 쾌감이 느껴졌는데, 심지어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나라면...
너무 설레서 방금 전까지 죽으려 했던 것마저 깜빡 잊어버릴 뻔했다. 

 

- "시간의 마법소녀라고요?"
재차 물은 까닭은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그렇게도 중요한 사람이라는 말을 더 듣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아로아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네,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사상 최강의 마법소녀가 될 거예요."

 

- 도대체 마법소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이제부터 나는 마법소녀야,라고 선언하는 것만으로 되는 일은 아닐 텐데. 물론 내게 그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만으로 감사하긴 했지만, 그다음을 가르쳐줄 사람 역시 간절히 필요했다.

 

- "기다리고 있었어요."
전화를 걸자 아로아는 여보세요가 아닌 말로 통화를 시작했다. 조금 고마웠고 꽤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그런가, 사흘간 연습했던 말 대신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마법소녀가 되면 뭐가 좋아요?"

- 말하고서야 진짜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나도 깨달았다. 나를 사흘이나 끙끙 앓게 한 문제는, 어떻게 해야 마법소녀가 될 수 있을지가 아니라 마법소녀 같은 게 되거나 말거나 신용카드 리볼빙 빚 삼백만 원은 그대로라는 것. 그대로 삼백이면 오히려 고맙겠지만 사실은 지체할수록 조금씩 늘어난다는 것.

 

- "지금 데리러 갈게요."
"네?"
그건 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닌데요.
"말했잖아요, 기다리고 있었다고. 필요한 걸 보여줄게요.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거예요."

 

- 아로아가 나를 처음 발견해 집에 데려다준 날에도 어렴풋이 생각했듯, 아로아처럼 잘 차려입은 사람이 우리 집처럼 낡은 건물 반지하로 내려와 손수 문을 두드리는 건조금 이상한 일 같았다. 어쨌든 아로아는 십분 만에 나타났고 나는 허둥지둥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집에 밴 나의 생활의 냄새가 전혀 마법적이지도 소녀스럽지도 않을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 "이 사람들이 전부 마법소녀예요?"
"그렇지는 않아요. 마법소녀도 있지만 마법소녀를 지원하는 에이전트들이 더 많죠. 마법소녀나 에이전트를 지망하는 사람들은 그보다 더 많고." 

 

- 아로아가 가리킨 마법소녀 경호원 에이전트 부스 맞은편에는 공교롭게도 '마법소녀 사유화에 반대하는 모임'도 있었다. 내가 그쪽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아로아는 내 어깨를 감싸 돌려세웠다. 
"그쪽은 종교단체예요."
"위험한 곳인가요?"
"아직까지 위험하다고 볼 순 없지만, 마법소녀를 신격화하는 게 건강한 믿음은 아니기도 하잖아요? 마법소녀가 되는 건 조금 보기 드문 자격증 하나를 따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변호사나 플로리스트를 숭배한다고 생각해 봐요. 이상하지 않아요?"

 

- "종교색을 빼고 생각하면 전마협의 입장과 일맥상통하는 주장이긴 해요. 마법소녀의 힘은 개인을 위해서 쓰여서는 안 된다는 거. 왜냐하면 노력으로 주어진 게 아니니까."
끄덕이던 고개가 점점 느려졌다. 노력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면 자격증 취득과는 역시 다르지 않나...  

  

- "그러면 학원에서는 뭘 가르쳐요?"
"마법소녀로 각성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능력을 잘 사용하는 법을 알려주겠죠. 잘은 모르겠네요. 조합원 중에도 마법소녀 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마법소녀의 자질이 없는 사람더러 노력하면 될 수 있다고 사기를 치는 건 아니라고 들었어요. 입학 테스트로 재능을 평가하고, 안 되겠다 싶으면 불합격을 주는 거죠. 정 관련 업종에서 일하고 싶다 하면 에이전트 과정을 권하거나." 

 

- "저도 저기 다녀야 하지 않을까요?"

말하고서야 학원비 생각이 났다. 그렇지만 내겐 아로아가 보증하는 마법소녀의 자질이 있고, 일단 마법소녀로 각성하고 나면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보다 많다고 하니 그쯤은 대수롭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로아는 지금까지처럼 방긋이 아니라 깔깔 소리 내서 웃었다.
"비둘기나 독수리가 참새에게 나는 법을 배울 수는 있겠죠. 나는 법을 정 모르면 그럴 수 있어요."

나로서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기분이 조금 상했다. 아로아는 너무 웃어서 고인 눈물을 닦아내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페가수스나 드래곤은 참새한테 배울 게 없어요."
끝까지 듣고 보니 칭찬 같기는 했지만 여전히 알쏭달쏭했다. 아로아는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따라와요. 조금 있으면 전마협에서 중요한 발표를 할 거예요."

 

- "아 죄송. 지금 마법소녀가 제일 많은 곳이 어딜까 생각하면서 왔더니 너무 눈에 띄는 곳에서 튀어나와 버렸네요. 용건만 말할게요. 마법소녀 딱 세분만 나오세요. 테러리스트 잡으러 갑시다, 이상."

 

- 아로아는 내 어깨를 짚으며 힘주어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지켜줄게요."

당신... 예언의 마법소녀잖아요. 위급 상황에서 무슨 수로 날 지켜준다는 거예요... 그렇게 대꾸하고 싶었지만 그 말을 하는 아로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바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하고 싶던 말은 최희진의 입에서 좀 더 신랄한 모양새로 튀어나왔다.  

 

- 눈을 부라리며 묻는 최희진과 생글생글 웃으며 대꾸하는 아로아 사이에서 불꽃이 튀는 게 느껴졌다. 누구 내 입장 궁금하신 분은 없나요? 나는 그냥 사라지고 싶거든요... 해외에는 난생처음 나와보는데 이런 상황인 거, 나도 전혀 달갑지 않다고요. 

 

- "저는 혼자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할게요. 먼저 갑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 사람은 향기의 마법소녀 차민화였다. 향기... 같은 것이 주된 능력이면 더더욱 혼자 다녀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했지만, 마비향이나 환각향 등을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마법소녀들이 휩쓸리지 않게 늘 단독으로 움직이는 편이라고 아로아는 설명해 주었다.

 

- 우리는 한동안 별 대화 없이 공항 안을 느릿느릿 달렸다. 이 사람, 말도 별로 없는 편이구나. 나도 아무 말 않고 있으면서 그런 생각도 속으로 했다. 하도 어색해서 차라리 테러리스트라도 나와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 "모두 능력이 달라서 다른 사람의 능력은 작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실제로 작은 능력들도 있고요. 하지만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낼 수 있죠."

 

- "예언 능력이 실전에서 별 쓸모가 없는 건 사실이에요."

딴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아로아의 말에 조금 정신을 차렸다. 할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아까 최희진이 한 말이 역시 마음에 남아 있었나 보다. 
"그렇지만 언제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아는 건 상당히 중요한 능력이죠. 제게는 가능한 미래가 동시에 몇 가지씩 떠올라요. 지금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테러 진압에 실패하는 경우가 몇 가지, 부분적으로 성공하는 경우가 몇 가지, 대성공하는 경우가 한 가지. 이건 일단은 제게만 보이는 미래이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줘야 할 때는 아로아미러를 사용하죠."
그 거울에 그런 기능도 있구나. 여전히 창밖의 풍경에 정신이 팔려 아로아의 말은 조금 건성으로 들으면서 생각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키 작은 마법소녀가 물었다. 
"지금은 대성공 상황에 얼마나 가까운가요?"
"사실 이번에는 대성공 루트와 대실패 루트가 중간까지 거의 비슷해요." 

 

- "저..."
두 사람이 중요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 창밖을 바라보던 내게는 보였으니까. 비행기 한 대가 우리 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광경이. 공항에 와본 적도 없고 당연히 비행기도 타본 적 없어서 확신은 없지만, 저 비행기가 날아오르려는 게 아니라 이쪽을 들이받으려 한다는 건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네, 바로 지금."

 

- "얼떨떨해요. 제가 받아도 되는 돈인지 모르겠고."
공로순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내 몫으로 돌아올 격려금 액수는 그리 대단치 않았지만 섭섭할 정도도 아니었다.
"당연히 받아야죠. 견학이 아니었다면 나도 가지 않았을 거고, 내가 가지 않았다면 수빈 씨가 적재적소에서 비행기를 날려 보낼 수도 없었을 테니까. 인명피해는 거의 없었겠지만 공항은 손쓸 도리 없이 망가졌을 거예요."

한편 내게는 그 돈이 꼭 필요했다. 아로아에게 신용카드 리볼빙이라는 개념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꾹 참았다. 대신에 나는 다른 얘기를 했다. 

 

- 사람이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은 대체로 네댓 살 무렵. 그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지만 그건 대체로 만들어진 기억이라고 한다. 아주 어렸을 때 너는 뜨거운 걸 잘 먹는 애였어. 이 사진을 봐, 항상 노란 담요를 끌고 다녔단다. 그런 말들을 듣고 가짜 기억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상상하다 보면 그게 기억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펄펄 끓는 뚝배기에서 막 건져낸 숟가락을 겁도 없이 합, 무는 어린 아이나 한참 전에 어디 갔는지도 모르게 된 노란 담요의 질감과 무늬 같은 것. 하지만 그걸 정말 가짜 기억이라고 불러도 좋을지는 모르겠다. 기억은 원래가 다 주관적인 것이니까. 어른들이 들려준 말 한 마디나 사진 한 장만으로 아주 생생한 감각을 떠올릴 수 있는 건 그것과 아주 유사한 기억이 사람의 몸 어딘가에 꼭꼭 숨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걸 완전히 가짜라고 볼 수 있을까? 

 

- "이게 사라져도 괜찮겠어요?"
"사라지다니요?"
"가장 소중한 기억을 마구로 바꾸는 작업을 할 겁니다. 그러니 정확히는... 사라진다기보다, 또 다른 소중한 것으로 전환되는 거라고 해야겠지요."
"그게 꼭 필요한 건가요?"
좀 전까지는 오래된 전자시계가 보잘것없어 보일까 봐 부끄러운 마음뿐이었는데 막상 사라질 수도 있다 하니 아쉽고 아깝게 느껴졌다.
"꼭 마구가 필요하지는 않지요,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 의장님이 눈짓을 하자 아로아가 아로아미러를 꺼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알고 싶어요, 이다음엔 무슨 일이 일어나죠? 내일은 우리 모두 행복할 수 있을까요? 대답해 드릴게요! 예언의 마법소녀, 아로아! 변신!"
아로아미러를 중심으로 뻗어 나온 빛이 사무실을 한가득 채웠고, 그 빛 속에서 아로아의 새하얀 드레스가 무지개색으로 빛을 튕겨내는 기묘한 재질의 의상으로 바뀌었다. 이게 마법소녀의 변신이구나. 그런 생각이 우선 들었고 곧바로, 아니 그럼 평소에 입고 다니던 옷은 마법소녀 의상이 아니고 자기만의 멋이었던 거야? 하는 황당한 깨달음이 뒤따라왔다.  

 

- "평소에 제가 능력을 사용하는 걸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마법소녀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 변신이 필수적이지는 않아요. 마구를 갖게 되면 변신을 할 수 있게 되고, 변신을 할 수 있게 되면 능력을 사용하는 것도 곧 익숙해지죠."

 

- "마구가 없고 따라서 변신을 하지 않는 마법소녀들도 많답니다. 자연적으로 각성해서 마구를 따로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지요. 힘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져서 마구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도 있고요. 예언의 마법소녀 아가씨처럼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각성한 뒤에 힘을 더 잘 사용하기 위해 나를 찾아와 마구를 만드는 경우도 있고 우리가 급해서 마구를 먼저 만들어주는 경우도 있지요." 

 

- "우리는... 세계가 종말의 세대에 이르렀다는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 "잠깐만요, 종말이라니... 대마왕이나 외계인 같은 게 나타났나요? 아니면 곧 큰 전쟁이 일어나나요? 그걸 마법소녀들만 알고 있는 거예요?"
"아닙니다. 모두가 알고 있어요. 진짜 위기는, 재앙은, 기후 변화의 모습으로 온다는 것."
의장님의 너그럽던 눈빛이 갑자기 무섭게 변했다.
"지구는 대마왕 때문에, 외계인 때문에 끝나지 않아요. 적어도 당장은. 하지만 기후 위기는 실제로 지구에 닥친 최대의 재앙입니다."

 

- “시간의 마법소녀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지요. 이런 작전들이 있습니다. 시간의 마법소녀가 지구의 시간을 정지해 놓는 동안 전 세계의 마법소녀들이 협력해 지속 가능성을 저해하는 시설을 제거한다든지, 시간의 마법소녀가 만년설의 시간을 되돌려 지구 기온 회복을 도모한다든지... 또한 최후의 수단으로는."
의장님이 목이 먼 듯 말을 멈추자 아로아가 이어받았다.

"특정 시점으로 지구를 초기화하는 작전도 있어요. 이것이야말로 시간의 마법소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죠."
"오히려 그게 세계멸망이 아닌가요?"
"그러니까 최후의 수단인 거지요."

- 약간 소름이 돋았다. 시간의 마법소녀가 된다는 건, 시간의 마법소녀로서 능력을 마음껏 사용하게 된다는 건, 지구를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되는 거구나. 그리고 이 사람들은 가능한 한 그 힘을 세계멸망 저지를 위해 사용하기를 원하는 거고.

 

- 아로아와 의장님의 얼굴에 기쁨이 번지는 것을 나도 뿌듯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내가 중요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설렘과 어쩌면 이 일로 잘 먹고 잘 살게 될 수도 있다는 계산적인 마음을 넘어, 처음으로 사명감 (그렇게 불러도 될까?) 비슷한 게 가슴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까짓것 해보자고요, 마법소녀.

 

- "마구는 마법소녀의 마음의 모양에 가장 가까운 형태로 출력됩니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주세요."

 

- 공중으로 떠오른 그것은 분명 카드였다. 한쪽 면에는 마그네틱 띠가 붙어 있고 다른 한쪽 면에는 내 이름이 양각으로 새겨진, 그러나 어떤 은행의 이름도 적히지 않은... 검정색 카드. 

- 어째서 시간의 마법소녀의 마구가 신용카드 모양인지 우리 모두 궁금한 게 분명했는데, 누구 하나 함부로 입을 열지는 못했다. 

신용카드 모양의 마구는 사뿐히 내 손 위에 내려앉았다. 나와 아로아 그리고 의장님은 한동안 말없이 그것을 뚫어지도록 쳐다보았다.

 

- "이건 좀..."
의장님이 나를 배려하느라 적절한 말을 고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의장님은 우아한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
"독특하군요."
딱히 나쁘지 않은, 굳이 따지자면 좋은 말이었지만, 아기나 강아지를 보고 예쁘다거나 귀엽다는 말이 도저히 나오지 않을 때 하는 '참 튼튼해 보이네요' '똑똑해 보이네요' 같은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래서 너무 부끄러웠다. 마구가 마법소녀의 마음과 가장 닮은 형태로 출력되는 게 사실이라면 내 마음은 신용카드 모양. 머리 한쪽, 마음 한구석이 항상 신용카드 리볼빙 빚에 대한 생각과 불안에 저당 잡힌 사람인 걸 생각지도 못한 계기로 적나라하게 드러내버리게 된 거였다. 

 

- "그럼 이제 구체적인 변신 주문을 만들면서 해볼까요?"

"방금 그게 변신 주문이 아니에요?"
"엄밀히 말하면 주문이 맞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뭐라고 해야 할까... 그건 부싯돌로 불 붙이기 같은 거예요. 되고 싶은 마법소녀의 기조를 떠올리면서 직접 만든 주문을 읊는 건 라이터로 불을 켜는 셈이고요."
"그럼 그 라이터 주문은 어떻게 얻어요?"
"직접 생각해 내야죠."
아로아가 이상한 걸 물어본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런 창피한 걸 직접 생각해내야 한다고...?

 

- "가장 오래되고 그 무엇보다 강력한 존재, 시간의 힘을 집행합니다."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시간의 마법소녀 변신."
상쾌한 기운이 몸 주변을 감싸고, 몸속에서는 보다 긍정적인 피가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이지 그런 느낌) 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몸이 조금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성공한 걸까?

 

- "내 예언은 한 번도 빗나간 적 없어요."
덜컥하며 가슴 어딘가가 어긋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잘못되고 있구나.
사실 그건 낯선 감각이 아니었다. 내게는 늘 일이 잘못되어 가는 게 더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마음이 아픈 동시에, 이상하게도, 아로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내심 짐작할 수 있을 듯했다. 아로아는 큰 소리로 울면서 말했다. 

 

- 내가 조금 더 진지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조금 더 집중했더라면 조금 더 재능이 있었더라면, 딱 10초, 5초, 아니 1초라도 빨리 각성했더라면, 아로아의 예언이 빗나가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 제일 먼저 당신을 만났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말해볼게요. 
시간의 마법소녀의 등장을 얼마나 고대해 왔는지 몰라요. 우리 전마협을 비롯해 전 세계 모든 마법소녀의 연대체들이 모두 시간의 마법소녀를 기다렸지만, 그 누구도 나만큼 열렬히 시간의 마법소녀를 원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예언의 마법소녀란 언제나 무엇이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존재이겠지만, 이것이야말로 내가 가장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예요. 나보다 더 시간의 마법소녀를 기다린 사람은 세상에 없다는 사실. 

 

- 그건 말할 것도 없이 예언이 미래를 가리키는 일이기 때문이에요.
또한 동시에 현재를 항상 과거로 만드는 일.
나의 일은 시간의 힘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고, 관점에 따라서는 예언의 마법소녀가 시간의 마법소녀의 하위호환적인 존재라고 할 수도 있는 거죠. 누구보다도 내가 그렇게 믿고 있어요.  

 

- 사실 보이지 않는 힘을 다루는 마법소녀들에게는 모두 비슷한 콤플렉스가 있어요.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같은 마법소녀들 사이에서조차 조금은 무시를 받기도 하고, 스스로도 자신의 힘을 잘 믿지 못하는 경향이 다들 있죠. 예언의 마법소녀인 내가 그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요. 예언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내 힘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니까요. 그래서 더욱 시간의 마법소녀를 찾고 싶었던 거예요. 시간의 마법소녀는 그 자체로도 대단한 존재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예언의 마법소녀인 나를 완전하게 해 줄 단 하나의 마법소녀이기도 하기 때문에. 

 

- 그렇지만 당신에게는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혼란스러웠을 거예요. 내가 미웠을지도 몰라요. 그랬다고 해도 이해해요. 내가 당신이었다면 반드시 예언의 마법소녀를 미워하게 됐을 거예요.

- 아로아가 미워진다고? 그럴 리가. 그 일이 있은 뒤 내 마음에도 미움이 솟기는 했지만 그건 아로아나 다른 누군가에게로 향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겨냥하는 것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내가 쓸모 있는 존재가 된 줄 알았는데. 단순한 쓸모를 넘어 너무도 중요하고 유일해서 대체불가한 존재가 된 줄 알았는데. 내가 시간의 마법소녀일지도 모른다는 걸 의심조차 하지 않았는데.

 

- 모든 걸 망친 건 아로아가 아니라 나였다.
어쩌면 내 불운이 너무 강해서 아로아의 절대적인 예언조차 빗나가게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아로아는 내 마음이 그럴 거라는 사실까지도 내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 아로아미러에 따르면, 당신과 내가 만나야 했던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거예요. 난 그것만은 의심하지 않으려고 해요. 예언의 마법소녀로 산다는 건, 끔찍한 운명론자가 된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이기도 하거든요. 우리 사이에는 모른 척하기엔 너무나 강한 운명이 있어요. 당신도 그렇게 믿어줬으면 좋겠어요. 

 

- 예언의 마법소녀에게 예상치 못한 사건이 주는 불안감이 얼마나 큰지 이해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나는... 이 불안감이 왠지 마음에 들어요. 정말이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요.

 

- 한 박자 늦게 내가 이 말을 하는 바람에 점장은 친정아버지 이야기를 한참 더 늘어놓았다. 거봐, 내가 아가씨 착한 거 알아봤지, 하면서 붙드는 통에 거절할 수도 없었다. 해 질 무렵 들어갔던 편의점에서 어둑어둑해질 무렵에야 나왔다. 면접 질문은 단 하나뿐이었는데도. 
나오면서는 착하다는 게 뭘까, 거절을 잘 못하는 게 착한 걸까 생각했다. 거절할 수 없었을 뿐 속으로 꼭 좋은 생각만 하지는 않았는데.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는 것까지는 진심이었지만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아버지가 아프다는 얘기가 우리 할아버지 아팠던 것만큼 슬프지는 않은데. 

 

- "독심술이나 사이코메트리가 아니라 예언인걸요.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서 알 수는 없어요. 집중한 주제에 대한 파편적 정보를 얻는 정도예요."
자기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늘 대단했던 아로아가 그렇게 말하니 사실일지라도 안쓰럽게 느껴졌다.

 

-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내 의중을 알았다는 듯이 빙긋 웃었다.
"우리 편이 아니면 무서운 사람."
흠, 만나봤다는 거구나. 아마도 나보다 어리겠지? 마구 없이도 스스로 각성한 사람이니 능력도 대단하겠지.
"우리 편이면?"
"좋을 텐데."
아로아는 엉뚱한 대답으로 문장을 완성했다. 

 

- "마법소녀의 자연각성에는 대체로 계기가 있어요. 트리거(trigger)라고 하죠. 학생이 한 명뿐인 작은 학교에 다니던 시골 아이가 '친구를 만들고 싶다'는 소망을 강하게 품었을 때 제작의 마법소녀가 되고, 예기치 못한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아이가 사고를 미리 알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끈질기게 생각하다가 예언의 마법소녀가 되는... 그런 거죠."

 

- "시간의 마법소녀는 어떻게 각성한 건가요?"
내가 묻자 아로아는 곧바로 되물었다.
"사람은 어떤 순간에 '지금 이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까요?"

 

- "글쎄요... 너무 아프거나 뭔가 끔찍한 경험을 했을 때도 시간이 멈추길 바라겠지만,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면 그 고통을 계속 겪어야 하잖아요. 그럴 때는 시간을 돌려서 다른 선택을 할 기회를 만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말이에요. 행복한 시간은 여러 번 멈추거나 아니면 느리게 흐르도록 하고." 
아로아는 다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조금 떨구고 걷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시간의 마법소녀는 정확히 반대의 선택을 했어요."

 

- 그래서였구나. 내가 시간의 마법소녀와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해서 의아한 눈으로 본 거였구나. 그야 뭐 나는 시간의 마법소녀가 아니니까. 그건 이제 나와는 별 상관없는 일이어서 아로아가 나를 그렇게 쳐다본 게 딱히 신경 쓰이지 않았다. (정말로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도 아예 하지 않았겠지만.) 

- "시간의 마법소녀는... 그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몸을 빼냈고, 자신이 어떤 능력을 얻었는지를 곧바로 깨달았어요. 각성하자마자 그 정도로 능력을 컨트롤할 수 있는 마법소녀는 별로 없는데..."
마치 태어나자마자 똑바로 서서 걷는 네발동물처럼 말이지. 역시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시간의 마법소녀가 되어서 잘된 게 아닐까. 아니다, 무능하지만 우리 편인 거랑 유능하지만 우리 편이 아닌 것 중에는 전자가 좀 낫지 않나. 

 

- "시간의 마법소녀가 그 얘기를 다 해줬어요?"
"그건 내가 '본' 거예요. 시간의 마법소녀가 각성하던 순간에."
나는 머리를 감싸 쥐고 운동장에 주저앉던 아로아를 떠올렸다. 직접 겪기에도 고통스러운 일이었겠지만,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충격이 컸을 텐데. 그날 갑자기 떠나버린 아로아를 조금이나마 원망스러워했던 게 후회되었다.

 

- "이런 세계에서 마법소녀가 무조건 선하기를 바라는 건 동화에 나오는 요정이 진짜 있다고 믿는 것보다 더 비현실적이에요. 그걸 이해해 버리니까... 힘드네요."

 

- 이 세계에 존재하는 마법소녀들은 무조건 착할 수 없고 착할 필요도 없다. 이건 만화가 아니니까. 사랑과 희망, 선의 같은 것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우주에서 온 외계인이나 어떤 마법세계에서 온 존재들과 맞서는 게 아니라, 먹고사는 일에 몸과 마음을 다쳐가면서 보통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마법의 힘을 물리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만큼은 만화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불행하게도 모든 것이 만화 같지는 않아서, 이 세계에서 마법소녀와 누군가가 싸우면 누군가는 다친다. 누군가는 피를 흘린다. 그 누군가란 필연적으로 마법소녀와 같은 인간. 그렇지만 싸우지 않을 수도 없다. 시간의 마법소녀가 각성한 사례가 그렇듯, 마법소녀로서의 최초의 싸움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전투니까. 

 

-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나한테 그걸 물어봤었죠, 소녀가 아니어도 마법소녀가 될 수 있느냐고." 
아로아가 문득 말했다. 아, 응, 네. 생각에 잠겨 걷다가 급하게 대답했더니 아로아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론이라기엔 너무 어설픈 얘기지만, 내 생각은 이래요. 뭐랄까, 세계의 의지가 힘의 균형을 이루려 하는 거예요."

"균형?"
"마법소녀가 생겨나는 이유는 그 사람에게 그 힘이 가장 필요했기 때문이니까. 거꾸로 말하면, 각성 직전의 마법소녀란 세계에서 가장 취약한 존재."


- 어느덧 집 앞이었다. 잠깐 앉아서 차라도 한잔 하겠느냐고 권하고 싶었지만 (여전히 우리 집에는 권할 차가 없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그래도 고백을 받은 직후여서 들어오라고 하기가 민망했다.
"가장 약한 존재들에게 가장 필요한 힘이 부여되기 때문에 소녀들에게만 마법의 힘이 부여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 그게 내 생각이에요."
아로아는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점점 멀어지고 작아지더니 골목길을 돌아 사라지는 아로아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계속 손을 흔들었다.  
 

- 멀리서 관찰할 수 있다면, 이런 것을 보고도 균형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어떤 대륙에서는 산불이 타오르는데 동시에 어떤 대륙에서는 대홍수가 일어나는 것. 이 행성 표면의 어느 한 점이 극도로 고온건조해졌을 때 다른 편 또 어느 한 점은 대야에 떨어진 종잇조각처럼 흐물흐물하게 젖어서 퍼져버리는 것. 한파도, 무더위도, 해수면 상승도 토네이도도 이 거대한 구체의 어느 한 점 위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 그 모두를 합치면 그저 평균이 된다... (되겠지?) 한 행성의 기온과 습도의 평균. 

 

- 저녁에 출근은 어떻게 하지? 
새삼 다른 사람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길에 빗물이 넘치는데도 누군가 자꾸 현관문을 여닫는다는 것은, 비가 이렇게 오는데도 위층 사람들이 생활을 지속한다는 의미니까. 출근하고 퇴근하고 필요한 것을 사러 가게에 다녀오고, 그런 일들을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 보통이라도 되기 위해서는 보통만큼의 노력은 해야 하는 거다. 그 보통 사람만큼의 노력이라는 것이 하필 큰비가 여러 날 이어지는 와중의 첫 출근이라는 게 조금 억울하고 기막히지만...

 

- "멋지죠? 마법소녀 워크숍 중에 비행 훈련이 있어요. 나중에 들어봐요. 능력을 최적화하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거든요. 능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날아오를 수 있을지 창의적으로 떠올려야 하니까요." 
"아로아도 날 수 있어요?"

"제 경우엔 어떻게 해야 죽지 않고 낙하할 수 있을까에 가깝긴 하지만... 관점에 따라서 가능은 하죠."

 

- "있잖아요. 혹시 일이 잘 안 풀리면..."
나는 옆에 서 있는 아로아를 보았다가 공중에 떠 있는 의장님과 이미래를 보았다가 하느라 바빠서 아, 네, 하고 건성으로 대꾸했다. 아로아는 재차 내 손을 꾹 쥐어 잡아당기며 더욱 긴밀한 어조로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이기적인 사람이 되려고 해 봐요. 나만 살면 된다. 그렇게 생각해 줘요, 알겠죠."
그게 무슨 소리람. 여기에서 가장, 가장이라기도 민망하지, 유일하게 힘없는 존재인 내가 혼자 살아남겠다고 발버둥질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그보다 이렇게나 마법소녀가 많고, 그 잘났다는 시간의 마법소녀는 마비된 상태인데 일이 안 풀려봤자 얼마나 안 풀릴 수가 있겠어.
대충 알았어요 알았어, 하고 잡은 손을 흔들어주었지만 아로아는 호응하지 않았다. 의장님이 떨고 있듯 아로아도 떨고 있었다. 그제야 아로아가 예언의 마법소녀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 "기억 못 하시는 건 아무래도 그쪽이 아닐까 싶은데요. 저는 이런 게 기억나거든요.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는 힘을 지닌 마법소녀들은 생각만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신 것." 

 

- "저에게 세계멸망을 막을 힘이 있다고 해놓고도 저를 자극한 건, 그때는 과대평가하고 지금은 과소평가하는 걸로 느껴지는데요. 아무튼 저도 기다리던 참이긴 했습니다. 마법소녀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저를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번거롭지 않겠어요." 

 

- "마법소녀도 머리가 좋고 볼 일이에요, 그렇죠?"

- "저는 제가 꽤 선의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해요. 가령 여러분의 심장을 동시에 멈추게 하는 것도 가능한데 그러지 않잖아요. 얼마나 더 친절해야 한다는 거지? 욕심이 너무 많으신 것 아닌가요." 

 

- "그런데 제가 혼자 연구하다가 깨달은 게 있어요. 단순히 시간을 멈춰서 마비를 시키면 그 사람의 마음과 감각도 멈춘다는 거. 제가 처음으로 처치한 사람은 그러니까 아마 아무 통증도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 나는... 나 혼자 살 방법은 찾을 수 없었다. 뛰어서 도망친들 부처님 손바닥 안일 테고, 운 좋게 이 공간 어딘가 몸을 숨기는 데에 성공하더라도 무한한 시간을 가진 시간의 마법소녀한테는 어떻게든 들키고 말겠지. 시간의 마법소녀를 물리치지 못하면 나 혼자라도 살아남는다는 뜻은 절대 이룰 수 없었다. 그런데 시간의 마법소녀를 물리치면 아로아도, 의장님도, 최희진도, 안수빈도, 유다솜도, 차민화도... 여기에 모인 모든 마법소녀들까지 구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가장 이기적인 선택이 절대 이기적일 수 없는 선택이 되는 거였다.  

그러나 어떻게?

 

-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를 이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는데, 그 상대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다. 

 

-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금세 알아차렸다. 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으니까. 각성이 시작되려는 거였다. 하필이면 지금,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나를 들켜서는 안 되는 지금. 
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러는 거야?

 

- 아니, 그보다 인류멸망이 결국 저지된 거라면, 나한테는 지금 이게 문제가 아닌데?

- "지금 몇 시죠?"
"열 시 조금 넘었어요. 왜요?"
맥이 탁 풀려서 헛웃음이 나왔다.
"출근해야 했는데 망했네요."
아로아는 내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흔한 얘기인걸요, 세계를 구하고 본인은 망하는 거."

 

 

 

- "제가 생수 한 병을 요구하면 가장 합리적이고 비용이 적은 루트를 통해서 제 소망이 이루어져요. 반드시 값을 치르죠."

 

- 의장님이 양손을 모아 탁자에 괴며 단전에서부터 길어 올린 듯한 깊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 "만약 제가 터무니없는, 예를 들어 티파니 반지나 까르띠에 시계 같은 걸 갖고 싶다고 하면 제 신장이나 각막 같은 게 없어지거나 하지 않을까 해요. 지금 제게는 그만한 물건을 살 돈이나 능력이 없으니까요."

 

- "제 능력은 엄밀히 말해서 저의 능력이 아니니까요. 대가를 치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어서."
나는 카드를 다시 주머니 속에 넣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저는 이 능력을 앞으로는 사용하지 않으려고 해요."
의장님을 비롯한 중견 마법소녀들은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 "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능력이면 사용하지 않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어요. 더 희생할 마법소녀도 이제 많지 않잖아요. 그래서 저는... 각성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은퇴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스물아홉 살에도 마법소녀가 될 수 있다면 시계 디자이너가 되기에 늦은 나이도 딱히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까. 나는 아로아의 손가락들 사이에 내 손가락들을 엮으며 가만히 말을 골랐다. 
"나는요, 사실 어릴 때부터 한 번도 꿈이 바뀐 적 없는데..."
할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내 꿈에 대해 말하는 건 아주 오랜만이라는 걸 나는 조금 뒤에 깨달았다.

 

 


 

 

- 마법소녀 소설 씁니다. 


-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단군 할아버지가 터 잡으시고.
단군 할아버지는 환웅의 자식이고 환웅은 천상의 제왕 환인의 후계자였는데 환웅이 강림할 때 환인으로부터 받은 세 가지 보물을 천부인이라 하며 그것은 다름 아닌 청동검과 청동거울과 청동방울이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청동으로 만든 이 물건들이 지배계층의 권위를 드러내며 종교적, 제례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석한다. 

- 다시 말해 환웅이 천계로부터 가져왔다는 세 가지 물건은 신묘한 힘이 담긴 기다란 무기, 둥근 도구, 작은 장신구... 친숙하게 들리는 게 착각은 아닐 것이다. 마법소녀의 요술봉 마법소녀의 변신 거울, 마법소녀의 액세서리참(charm). 요즘은 마법소녀의 아이템 범주가 무척 넓어졌는데 천부인은 기준을 조금 강경하게 잡더라도 넉넉하게 합격선에 든다. 

- 요술봉과 같은 시그니처 아이템을 갖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마법소녀를 정의하는 중요한 특징이다. 사실상 마술사 소녀지 마법소녀는 아닌 '천사소녀 네티'가 은근슬쩍 마법소녀 카테고리에 들어 있는 것이나, 변신을 하지 않는 '카드캡터 체리'를 마법소녀라 부르는 데에 사회적 합의가 따로 필요 없는 점 등을 감안하면, 

 

그러니까 놀랍게도 우리는...
마법소녀의 민족이다.
받아들여.

 

 

- '역시' 세일러문. 앞서 소개한 거의 모든 작품을 합쳐서 견주어도 모자라지 않을 그 존재감.

 

- 내가 아는 한 마법소녀의 탄생과 운명이 신화적이며 영웅적인 서사로 승화된 첫 사례는 <달의 요정 세일러문>(이하 <세일러문>)이다. 그전에도 많은 작품이 세계의 평화를 주제로 삼았으나, 대개는 마법 문명의 근거지인 다른 차원 또는 외계 행성의 평화 혹은 그 세계와 지구 사이의 균형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 마법소녀는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존재라는 인식을 대중적으로 만든 것도 <세일러문>이라고 본다. 지구의 운명, 나아가 온 우주의 무거운 내일을 나랑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는 언니들이 걸머지고 있음을 심각하게 고뇌하게 했던 작품. 그 언니들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2D이고 나는 시청자이며 입체 인간이었지만, 우리는 모두 소녀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 세계를 구하는 건 소녀들의 숙명, 받아들여.

그러나 어떻게?

 

- '소녀'라는 단어는 '세계'라는 말과 병치되기에는 너무 작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 또한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 친숙하다. 이상할 것도 없지, 개인과 세계 사이 갈등과 화해는 근대 이후 모든 서사의 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굳이 길게 꼬아 말했지만 <세일러문>이 재미있는 건 운명적이라는 이야기다. 

 

- 어떻게 그런 걸 그릴 생각을 했지? <세일러문>의 원작자 다케우치 나오코는 취미로 광물을 수집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가공되지 않은 원석, 세공을 마친 보석, 그런 광물, 어쩐지 보석 수집이라고 쓰면 럭셔리하면서도 여성스러운 취미 같은데 광물 수집이라고 하면 보다 스케일이 크고 순수하게 학술적인 목적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무튼 그것을 실마리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세일러문>을 신화 또는 영웅 서사로 분석하게 하는 요소에는 극적 전개뿐 아니라 행성과 보석들의 이름이 유래한 희랍신화적 배경도 있는데 그것은 일본 문화계에서 크게 부흥한 (또한 영향력 높은 서브컬처 등을 매개로 전 세계에 퍼진) 소녀적-운명론적 감수성에 연결된다.  

 

- 긍정적 전망이나마 될 수 있는 가능성.
그건 원래 이 세계에 있던 건데, 지어낸 이야기인 척 내가 누설해 버린 거라고 믿는다.

 

- 마법소녀 장르를 '아직도 좋아하는 성인'이라는 점이 그렇게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숨겨야 할 만큼 부끄러운 일도 아니라고 여긴다. 인정해야 할 약간의 부채 의식은 본래 어린이들의 것이었던 장르를 약탈해 온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맥락에 있는데, '누구나 마법소녀가 될 수 있다’는 넉넉한 명제가 어린이들에게도 기쁘게 받아들여졌으면 한다. 실상 마법소녀 장르의 주인공은 대충 십대부터인데 '누구나' 마법소녀가 될 수 있다면 더 어린 사람에게도 가능성이 열린다. 이론상 갓난아기도 마법소녀가 될 수 있고 임신부도 마법소녀가 될 수 있으며 별로 놀랄 것도 없이 남자도... 이미 환웅 얘기를 하지 않았나? 

- 자신을 마법소녀로 여기는 데에 불편을 느끼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마법소녀가 될 수 있다. 그러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마법소녀 되기에는 유년기 문화적 자산으로서만이 아니라 성인이 된 이후에도 계속 유효한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마법소녀들은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끝없이 사유하고, 본인에게 주어진 놀라운 힘을 개인적 편의만이 아니라 세계를 위해 사용한다는 점에서. 

- 이 제안이 '참여 가능한 환상'으로서 수용되기를 기대한다. 당신도 마법소녀가 될 수 있고 그 사실에 만족하기를 당신은 종말론만 있고 맞서 싸울 이는 없는 이 암울한 세계를 밝힐 촛불이다. 

 

그리고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 한편 나는 이 작품의 원고료로 마법소녀 고전 완구를 몇 점 샀다. 그렇게 해야만 완결 지을 수 있는 개인적인 서사가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 그 이야기를 할 기회도 있겠지. 그럼 이만. 


2022년 봄 박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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