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자크 아탈리] 언제나 당신이 옳다 - 이미 지독한, 앞으로는 더 끔찍해질 세상을 대하는 방법

일루젼 2023. 11. 16.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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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자크 아탈리 / 김수진
출판 : 와이즈베리
출간 : 2016.03.08


       

        

개인적으로는 아주 만족스러운 책은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는 지독히 프랑스적인 시선이라고도 평할 수 있겠다. 

 

<언제나 당신이 옳다>의 저자 자크 아탈리는 그럭저럭 먹고살만하게 만들어주는 복지에 기대어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날카롭게 조언한다. 그 대신 자신의 취향, 성별, 이름, 국적까지 모든 것을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믿음의- 제약에서 벗어나 스스로 고찰해 결정하고 선택할 것을 권한다.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사회적인 분위기가 그러니까, 종교서에 그렇게 적혀 있으니까 같은 것들은 모두 핑계일 뿐이다.

 

믿을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 뿐이다.

 

그리고 이 고독함을 받아들임이야말로 진정한 바닥 -나 자신이라는 깊은 뿌리- 에서부터 뻗어나갈 수 있는 힘이 된다고 설명한다. 공동체의 윤리나 가족 내의 암묵적 위계 등으로 스스로를 한계 짓는 행위는 오히려 전체를 질식시키고 고사시키는 나태와 무지가 될 수 있다. 언뜻 만인에 대한 투쟁을 연상케 하는 이런 '개별화'를 통해 진정한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될 때, 오히려 완전한 조화에서 나오는 안정과 만족이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전체적 차원에 깃들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얼핏 모순적인 것처럼 들리기도 하는 그의 주장은 '나 자신 되기 devenirsoi'라는 고유명사 하에서 자기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밸런스와 자유를 향해 달려간다. 체제 순응에 대한 대가로 보다 값싼 서비스와 안락을 요구하지 말지니.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예시로 코란, 성서, 길가메시에서 출발해 데이비드 소로와 융, 블레즈 상드라르와 빌리 팁톤을 오가며 다양한 문화권과 인물들을 끌어온다. 사전식 나열처럼 느껴져 다소 지루해질 즈음, 다소 급작스럽게 '여러분도 할 수 있어요' 식의 실천강령을 제시하기도 한다. 

 

저서 초반부, 더 이상 정계인사들이 자신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며 저자는 우려 섞인 불만을 털어놓는다. 제3국의 독자로서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저자는 개개인이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서 빛나는 개별적 지성들의 향연을 꿈꾸는 듯하지만, 그 단계까지 나아가기 위해 겪어야 할 혼란과 갈등이 두렵다. 물론 그것들은 나를 속박하는 제약이기도 하다.

 

가볍게 일독. 끝. 

 


   

 

- 먼저, 한국에서 이 책이 출간되어 크나큰 영광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고 타인의 생각에 구애받지 않으며 용감하게 행동하기.

나는 바로 이러한 사상이 한국 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국이 위대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고 확신한다. 

 

- 불교 승려이자 시인이었던 만해 한용운 선생은 1913년에 발표한 그의 저서 <조선불교유신론>에서 한국 불교가 쇠퇴한 이유는 '모든 것이 하늘에 달려 있다'는 불교 엘리트층의 믿음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불교 지도자들이 그와 같은 미신의 노예가 되었다고 비판하며 '모든 것이 다 나에게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국 불교의 개혁을 이끌 원칙으로 오직 자신만을 믿고, 오로지 자신을 탓하며, 자존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 물론 상황은 다르지만, 이는 내가 오늘날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한용운 선생의 주장처럼, 가장 적대적이고 힘겨운 세력에 맞서게 되는 상황을 무릅쓰더라도 자유롭게 사유하고 자유인으로서 행동해야 한다. 

- 진정한 자신이 되는 길이야말로 타인에게 가장 유용한 사람이 되는 길이다. 한국은 일본 침략의 그늘을 벗어나고 자국의 고유한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매일같이 그 길을 걸어왔다. 그리하여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문화와 제품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 이 책의 주제인 '자기 자신 되기'와 관련하여, j@attali.com으로 한국어나 영어, 프랑스어로 연락한다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 우리는 이미 끔찍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머지않아 이곳은 더욱 살기 힘든 곳이 될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니 이제 각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할 때다.

 

- 국가에 사회보장제도나 수당을 요구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일상과 습관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이 선택해 준 인생과 다른 사람이 그려준 운명에서 탈피해야 한다. 당신의 삶을 직접 선택하라!

- 당신이 세상 어디에 있든, 남자든 여자든, 사회적 위치가 어떻든 상관없다. 이제 권력자들에게 더 이상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라. 당신에게 불가능이란 없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말이다. 절대 체념하지 마라! 세계가 느끼는 경제적 공포를 그저 비난하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기지 마라. 격분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같은 태도는 세속적인 무기력함만 보여줄 뿐이다.

 

- 당신의 앞날을 스스로 개척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자 한다면, 자신감을 가져라. 자기 자신을 존중하라. 당신 앞에 감히 모든 것이 열려 있다고 생각하라. 용기를 내어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이미 수립된 질서라 해도 다시 한번 흔들어보라. 당신의 삶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험이라고 간주하며 살아라. 

-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얻으려면, 미래를 결정짓는 순간 하나하나를 깊이 고민해야 한다. 그러면 생각보다 자신이 훨씬 자유롭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누구건, 나이가 몇이건, 재력, 성별, 출신, 사회적 지위가 어떻건 상관없다. 당신은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어려움과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의 운명, 당신이 사랑하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운명, 그리고 당신의 행복과 안전을 짊어지고 있는 미래 세대의 운명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그런데 특히 여성들의 경우 많은 장애물로 앞이 가로막혀 있다. 그래서 이들이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데 일단 성공하기만 한다면, 세상은 완전히 바뀌어버릴 수도 있다.

 

- 이 책에서 이야기하려는 주제는 프랑스어나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언어로도 그 의미를 한 마디로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다. 저항이나 회복 탄력성, 해방, 소외의 극복, 완전한 의식과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두고 '자기 자신 되기 devenirsoi'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나는 이제 각 개인에게 고하고자 한다.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파스칼의 내기를 실천하라고 말이다!



- 프랑스의 위대한 천재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드러나 있는 사실들과는 별개로 신의 존재를 믿는 쪽으로, 즉 증거는 없지만 믿는 쪽으로 내기를 하라고 제안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잃을 것이 없는 내기이기 때문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신을 믿었다고 벌을 받지 않을 것이고, 반대로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신을 공경한 대가로 상을 받을 것이라는 얘기다.

 

- 오늘날에도 이와 같이 행동하기를 제안한다. 다른 사람들의 불확실한 행동은 상관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지배하는 쪽에 내기를 걸라고 말이다. 그러면 어떤 가정을 하더라도 잃을 것이 없다. 국가나 지도층이 현재 직면한 여러 문제를 대하는 태도는 두 가지로 나뉜다. 그중 가장 가능성 있는 한 가지는 공공 분야건 민간분야건 권력층이 여러 쟁점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 없는 경우다. 우리는 각자가 알아서 그들의 무능력함을 최소한으로 메울 수 있도록 제때에 적절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 

 

- 반대의 경우도 가정해 볼 수 있다. 권력층이 현재의 환경, 윤리, 정치, 사회, 경제 분야의 과제를 정면으로 해결하려 나서는 경우다. 이때에도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그들이 실패하게 되어 앞서 가정했던 첫 번째 경우로 돌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성공하는 경우다. 그러면 잃는 것 없이 풍요로움을 회복하여, 잘하면 우리 각자가 주도적으로 이 풍요의 혜택을 누릴 수도 있다. 

- 물론 궁극의 목표가 되는 자유는 지금이나 앞으로나 제한적이다. 이번에도 파스칼의 주장을 빌리자면, "우리 인생은 출생의 조건과 죽음의 제약으로 둘러싸인 감옥 안에서 전개된다". 여기서 감옥의 벽을 넓게 확장시키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또한 파스칼은 인간의 자유를 농부의 자유에 비교했다. 농부가 거두는 수확은 그의 권한 밖에 있는 강수량과 토지의 비옥한 정도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에 못지않게 그의 노동에 따라서도 결정된다.

 

-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지배하는 쪽에 내기를 거는 것, 즉 '자기 자신 되기'에 승부를 거는 것을 당연시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그저 체념한 채 일생 동안 남들이 정해준 모습대로 사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은 태어났을 때 남들이 제시해 주었거나 우연히 정해진 삶을 살아간다. 두렵고, 게으르고,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잘하면 살아남아 때때로 자신의 운명 속 소소한 일상에서 희미한 행복을 찾기도 한다. 

 

- 한편, 어떤 사람들은 분노를 느끼는 것으로 자신이 수동적인 삶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비판하고 시위하고 저항한다. 그러나 분노를 표출하는 데 그칠 뿐, 실질적으로 행동을 취하는 일은 결코 없다. 결국 그들은 어디에 있건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멋진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는 일만 할 뿐이다. 

 

- 마지막으로, 사회와 종교, 가족, 사회계층, 태어난 나라, 재력, 성별, 유전이 정해주는 운명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윗세대의 말에 복종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공부와 직업, 외모, 성性적 지향, 언어, 배우자, 전투, 이상, 윤리를 선택한다. 때로 그들은 가족과 조국을 떠나기도 하면서 자신의 뛰어난 면을 찾는다. 그들은 마음속에 유토피아를 간직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좀 더 완곡하게 표현하면, 더 이상 타인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물론 모두가 성공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적어도 자유로움을 맛볼 수 있다. 

 

- 물론 이렇게 권고한 대로 따르기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수천 년 동안 신의 이름으로 왕과 사제들은 자신의 권한을 남성들에게 강요했고, 남성들은 자신의 변덕을 여성과 아이들에게 강요했다. 오늘날에도 거의 모든 인간, 특히 여성과 아이들의 운명은 불가항력이라 할 만큼 압도적인 힘에 좌우된다. 그 힘은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을 수도 있으며, 물질적이거나 비물질적이기도 하다. 또 경제적이거나 이념적일 수 있으며, 금융적이거나 정치적이기도 하고, 종교적이거나 군사적이거나 기후적인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이처럼 권력 외에도 다른 사람의 열의와 욕망, 광기, 폭력, 무관심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기도 한다. 

 

- 이렇듯 외적인 요인 때문에, 심지어 부유한 국가에 사는 중산층 중에서도 환경, 평화, 전쟁, 성장, 고용, 기후 변화, 기술 발전과 같이 삶을 이루는 근본적인 것에 대해 자신이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실현하지 못하며 산다. 한 번쯤은 예술가나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기도 하지만 현재 그 꿈을 이루지 못했고, 앞으로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 그런데 실제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될 능력을 지니고 있다. 남자든 여자든 가장 약한 사람이든 빈곤한 사람이든, 세상을 차지하려 다투는 다양한 세력들 때문에 기진맥진한 사람들이든, 모두 '자기 자신'이 될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을 발휘하려면 여러 방해 요소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야 한다. 그런 다음 단념하지 않고 저항하는 법을 배워서, 자신을 통제하는 결정론적 사고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그 방법을 내면적 삶과 이성의 작용 속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 이 같은 인식은 많은 사건을 통해 순간순간 나타날 수 있다. 물질적 상황이 개선되거나 악화될 때, 죽음이 임박했거나 건강이 매우 회복되었을 때, 고요한 사색에 잠기거나 실존의 위기를 느낄 때, 깊은 슬픔이나 행복감에 젖어 있을 때, 고독한 순간이나 첫눈에 반하는 순간이 찾아올 때, 자신의 욕망이나 타인의 욕구를 느낄 때 그렇다. 사실 타인은 본질적으로 그 존재만으로도 나와 단절되어 있다.

- 이것은 회복 탄력성, 그 이상의 무엇이다. 

 

-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일구는 것이 진정 가능한 일일까? 정말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걸까? 그보다는 우리 능력 밖에 있는 역사를 그저 관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우연이나 다른 사람의 손에 운명을 맡기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국가와 기업주 같은 힘 있는 자들에게 창출된 부를 최대한 공정히 분배하라고 요구하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좋지 않을까? 

 

- 세상 어디를 보아도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느껴져 개인의 성공에 대해서는 일말의 기대도 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곳곳에 만연한 폭력은 가히 충격적이다. 중동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극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우크라이나에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과거에는 예상치도 못했던 곳에서 폭력이 난무한다. 또 점점 많은 민간인과 여성, 아동이 폭력에 희생되고 있다. 분쟁지역의 군 참모들이 이들을 노예나 병사, 포로, 인간 방패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 실업은 전 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증가하고 있다. 특히 심각한 현상은 고학력자들을 포함하여 점차 많은 청년층을 강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류의 절반에 가까운 인구는 빈곤 상태에 처해 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벗어날 희망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빈부 격차는 이미 엄청나게 심각한데도 그 간극은 좁아질 기미가 없다.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85명이 소유한 부가 가장 가난한 35억 명이 소유한 부와 같은 것이 작금의 상황이다.

 

- 반면, 유럽 국가의 인구는 대부분 감소하리라고 예상된다. 향후 2050년까지 불가리아는 인구의 30퍼센트, 우크라이나는 25퍼센트, 러시아는 15퍼센트, 독일은 12 퍼센트 줄어들 것으로 추산된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인구가 15퍼센트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21세기 중반이 되면 지구상에는 독일인보다 프랑스인이 더 많아질 것이고, 그 이후로도 이 같은 추세가 지속된다면 중국인보다 나이지리아인의 수가 많아질 것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인구 변화의 방향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도시와 농촌의 인구 격차가 더욱 벌어져서 금세기 말이 되면 도시 인구는 70억 명, 농촌 인구는 30억 명이 될 것이다.

 

-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장차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일자리, 먹을거리, 잠자리, 이동수단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20억 명에 달하는 노년 인구 모두에게 은퇴 후 품위 있는 생활이 보장되리라는 것은 아예 기대조차 못한다(게다가 노년 인구는 다른 연령대에 비해 두 배나 가파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더구나 기후나 정치적인 이유로 망명을 선택하는 사람이 최소 10억 명은 되는데, 모두가 그들을 점잖게 이주시켜서 받아줄 것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 그뿐만이 아니다. 현재 아시아 중 일부 국가에서는 아직도 남아선호 사상이 팽배해 있고, 과학기술의 발달로 태아의 성별에 따라 선택적 낙태가 가능하여 남아와 여아의 균형이 깨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이런 추세를 되돌려서 여아의 출생률을 늘리고 남아와 균형을 이루도록 만들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모든 변화는 각 개인의 운명을 결정짓지만, 오늘날 그 어떤 국가도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막지는 못한다. 

 

- 그들은 자신이 처한 여건을 바꾸고 개선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할 수도,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국가에 안전, 즉, 국방, 치안, 보건, 교육을 통한 고용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들은 최저가로 최상의 서비스를 요구하고, 최소한의 세금을 내면서 최대한 많은 공공지출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그들은 남들에게 베푸는 것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이기적인 공공 서비스 소비자들이다. 특히 우리 다음 세대들은 지금의 어른들과 연대하지 않으려 든다. 일본과 그리스에서는 청년 두 명 중 한 명 꼴로 선배들이 물려준 부채를 지불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 이같이 민주주의 사회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체념하고 요구하는 자 resignesreclamants'라고 이름 붙일 것이다. 그들은 지레 체념한 채 자신의 인생을 선택하지 않고, 동시에 그들이 속박받는 것에 대해 대가를 요구한다. 

 

- 참 희한한 세상이다. 겉보기에는 개인주의가 점차 팽배하는 사회이건만,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풍요가 남긴 부스러기 따위를 요구하는 것에 순순히 만족하고 있다. 그러다가 오락이나 수집, 목공예 같은 활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풍요의 부스러기로 연명하던 상황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 선진적인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 특히 풍요의 부스러기를 요구한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선거에서 누구를 찍을지 선택하는 주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더 이상 인기 없는 개혁을 실시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지키지도 못할 공약에 새로운 공약을 덧붙이기를 일삼으면서 비굴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 이는 이념적으로 포퓰리즘이 세계를 장악하게 된 이유다. 항상 공공의 안전을 더 우선시하고 점차 폐쇄적인 경향을 보이는 포퓰리즘 안에서 개인들은 헛된 확신에 사로잡혀 있다. 즉, 외국인혐오와 치안을 명분으로 내세운 통제적 전체주의는 '체념하고 요구하는 자'의 기대에 부응한다. 

- 하지만 시장이 세계화되면서, 국가 주도의 계획경제를 주장하며 가장 폐쇄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국가에서조차 점차 그와 같은 보호조치를 보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공공의 안전을 우선시하고 외국인을 혐오하는 민족주의적 포퓰리즘 또한 실패하게 될 것이다. 

 

- 이미 시장에서는 규범을 따르면서 자기 자신을 체념하도록 하는 수단을 판매하고 있다. 합법적인 시장에서는 안전을 보장하고 유행을 따르고 체중을 유지하는 방법을 상용화하고 있다. 또 체념하고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으로서 오락거리를 제공하여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 오늘날에는 갖가지 형태의 자유를 요구하는 다양한 사상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제 수많은 개인은 권력층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다. 그들은 스스로 어려움을 헤쳐나가고 자신의 인생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자기 자신 되기' 작업이 진행 중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용기를 내어 타인의 욕망에 따라 자신의 삶이 착취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사물이든, 서비스든, 정치든 이를 소비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 이와 같은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역사상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5세기 유럽에서는 왕과 주교, 황제와 교황이 백성들의 영혼과 육체에 대한 지배를 공공연히 선포했다. 각 지방의 백성들은 고위 성직자와 그 심복, 그리고 제후와 그 군사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겼다. 교황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고대 로마제국의 유산을 두고 서로 다투었다. 프랑크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 영국은 좁은 영토에서 오늘날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무자비한 전투를 벌였다. 분쟁과 전염병, 화형, 폭력이 횡행했다. 무관용이 사회를 지배하고, 종교전쟁이 맹위를 떨쳤다. 병에 걸리면 치료를 시도해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했다.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의 전 지역이 차례로 붕괴되어 갔다. 

 

- 14세기말, 음악가이자 시인인 오를레앙 공작의 용기 있는 조언자, 외스타슈 데샹은 <베르트랑 뒤 게스클랭의 죽음에 대한 발라드>를 썼다. 의사이자 파리 교회의 사무장인 자크 데파르는 권력자들의 태만을 비난했다. 브르타뉴 공작의 침실 시종이면서 주로 시인으로 활동한 장 메시노는 <침묵하는 사람들의 론도>라는 뛰어난 작품을 썼다. 이들은 하나같이 그들 앞에 놓여 있던 새로 시작될 16세기가 오늘날의 21세기만큼이나 끔찍할 것이라 생각했다. 현재 상황이 얼마나 끔찍한지는 앞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 반면, 페트라르크 보카치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또는 알베르 르그랑), 토마스 아퀴나스, 장 보댕, 장 픽 드 라 미랑돌 같은 저자들의 글을 읽어보면, 비록 희미하기는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약속을 드러내는 신호가 감지되기도 한다. 특히나 롬바르디아, 베네치아, 플랑드르가 그 중심지였다. 사람들은 당시 봉건 지배세력의 권한 밖에서 이성을 자각하고, 부유해지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되었다. 다양한 사상운동이 일어나고, 육체가 해방되고, 그리스 사상과 유대, 아랍 사상이 복귀했다.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있게 되고, 초상화가 탄생하고, 인쇄술과 회계와 같은 기술 혁신이 이루어졌다. 또한 이와 함께 신대륙이 발견되고, 새로운 사회적 주체가 생겨났다. 기업가, 상인, 금융가 발견자, 선주, 지도제작자, 시인, 음악가, 화가, 철학자, 학자가 등장하여 사람과 사물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들의 삶을 재창조했다.
 

- 마지막으로, 이러한 고무적인 신호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예전에는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점차 그 수가 늘어가고 있다. 그들은 자유란 사라져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마냥 기다리고 있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또한 스스로 부를 창출하지 않으면 빈곤이 그들의 운명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스스로 결심만 하면 자신의 삶이 하나의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고 여긴다. 

 

- 끔찍한 암흑의 15세기 한가운데서 삶을 재창조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체념하거나 애걸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이제 스스로에게만 기대를 건다. 타인이 원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시장의 압력과 가식적인 민주주의, 종교지도자나 장군의 독재가 순종을 강요하는 틈바구니에서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된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조국이나 가족을 떠난다. 어떤 것에도 순종하지 않으며 종교, 국적, 사랑, 전공, 직업, 거주국, 성별, 사회적 지위를 스스로 선택한다. 그들이 속한 사회와 정치, 그들의 부모, 스승, 상사, 성직자가 원했거나 강요했던 모습과는 다르게 말이다. 

 

- 한편,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사람들도 있다. 어떤 이들은 청소년기부터 동성애자임을 밝히는 반면, 어떤 이들은 오랫동안 이성애자로 산 다음 뒤늦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기도 한다. 

- 뉴욕 주 롱아일랜드의 유대인 집안 출신인 하비 밀크는 청소년기부터 자신이 동성애자였음을 알고 곧바로 커밍아웃한다. 그로 인해 그는 평생 직업으로 삼고 싶었던 미 해군에서 쫓겨난다. 1978년에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에 선출된 그는 동성애자들이 시민권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던 중, 동료 시의원에 의해 암살된다. 그 후 그는 동성애자 권익 보호 투쟁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 중국은 2001년까지만 해도 동성애가 정신질환으로 간주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여론의 배척을 받는 국가다. 그런데 이 땅에서도 공식적으로 동성 간 결합의식을 감행하는 몇몇 중국인들이 있다. 2010년 청두에서 결혼한 건축가 정안취안과 군인 판원제 커플의 경우가 그렇다.

- 경제 대공황 시절에 미국의 유명한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색소폰연주자였던 빌리 팁톤과 가스펠 가수였던 윌머 브로드낙스는 그들이 사망한 이후에야(각기 1989년과 1994년에 사망함) 사실은 남장 여성이었음이 밝혀졌다.

 

- 중세시대의 수녀로서 철학, 음악, 의학, 문학 등에 조예가 깊었던 힐데가르트 폰 빙엔, 이탈리아 초기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카라바조, 이탈리아 출신 철학자·수학자·천문학자이자 신비주의자였던 조르다노 브루노의 경우가 그렇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출신 배경에 따라 결정된 운명에서 과감히 벗어날 줄 알았다. 중세 독일에서 귀족 집안의 열째로 태어난 힐데가르트는 수녀가 된 후, 당시의 관례를 타파하고 교황과 황제에게 조언을 했으며 신의 계시를 받은 음악가가 되었다. 석공의 아들로 태어난 카라바조는 모든 시대를 걸쳐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서민과 도둑, 범죄자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살인죄로 쫓겨 살았던 그 자신도 이탈리아의 한 해변에서 살해되어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추정된다. 도미니코 교단에 들어가 사제가 된 브루노는 어느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소설가였으며 셰익스피어에게도 영감을 준 인물이다. 그는 태양이 우주에 있는 여러 은하계 중 하나에 속한다는 사실을 긍정했다는 이유로 1600년 2월 17일 로마에서 교황의 명령에 따라 산 채로 화형에 처해졌다. 

 

- 드니 디드로는 자신을 신부로 만들려 했던 아버지에 반항하여 위대한 무신론 소설가가 되었다. 그는 양심과 타협하기를 일체 거부하고 심지어 교회의 주적이 되었다. 

- 앞서 살펴본 사례들을 통해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삶일지라도 충분히 거기서 벗어날 수 있고 체념하지 않아도 되며, 다른 사람들에게 온전히 기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나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더 이상 '체념하고 요구하는 것'에만 안주하지 않을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내가 주장하는 '자기 자신 되기'에 성공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 세계가 저항할 수 없는 악의 부상을 저지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다.

-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사람들은 척박하고 힘든 환경에서도 눈부시게 또는 차분하게, 정신적·예술적·철학적·물질적인 업적을 모두 이루었다. 그중 일부는 소명에 이끌려 행동했고, 일부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결과 마음의 변화를 일으켰으며, 또 일부는 긴박한 필요성을 느끼고 결단을 내린 사람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어떤 매뉴얼이나 이론을 알고서 그렇게 행동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용기와 직관, 때로는 막다른 상황에 몰려서 급하게 즉흥적으로 움직였다. 

- 하지만 반대로 다음과 같은 문제에 대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사람들도 분명 많다. 어떤 이론과 실천을 통해야 자기 자신 되기에 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자신의 자유와 조건의 한계를 동시에 만족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을까?
그 과정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밝힌 신학자·철학자·소설가는 셀 수 없이 많다.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거나, 반대로 체념하고 운명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교리를 제시하고 그런 접근법을 드러낸 책들도 많다. 

 

- 무엇보다도 모든 종교는 개인이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자유를 행사하고 주어진 운명을 거스르면서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 인간은 신 또는 신들에게 종속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신의 것이기 때문에 신의 변덕과 신이 주인 노릇 하는 자연의 변덕에 순종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은 이승과 저승에서 자신의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없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인간의 운명은 오직 신이 결정하는 '신비'이기 때문이다. 
 
- 성직자는 바로 그 신의 이름을 앞세워 그들의 조건을 남성들에게 강요한다. 그러면 이번에는 남성들이 자신들의 조건을 여성과 아이들에게 강제한다. 결국 인류는 자신을 위해 생각하기를 단념하고, 자유의지의 운신의 폭이 좁아져도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주체가 되는 것'에만 국한시킨다. 많은 신학자들은 자유를 행사하면 경쟁과 폭력으로 이어지게 된다고 여겼다. 

- 게다가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진정한 '자기 자신 되기’는 죽은 후에야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것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서 인간이 해야 할 단 한 가지는 살아 있을 때 최선을 다해 신의 계명을 지키고 신을 표현하는 자연의 요구에 충실히 임하는 것이다. 만약 거역하는 자가 있다면 신은 그에게서 이승에서의 성공을 박탈한다.
 
- 기원전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만들어진 <길가메시의 서사시>는 최초로 '자기 자신 되기'에 대해 언급한 글이다. 여기에는 영원불멸을 찾아 나서는 내용이 담겨 있다. 길가메시는 3분의 2가 신이고 3분의 1이 인간인 혈기왕성한 우루크의 왕인데 신들로부터 노여움을 산 인물이다. 그는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불사불멸의 존재를 만나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자신의 조건을 받아들인다. 

 

- 시베리아와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권에는 시베리아에서 건너와 애리조나 호피족을 이루게 된 아나사지 문화를 비롯해서 많은 뛰어난 문화가 번성했다. 그 문화권에서는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자유가 있지만 처신을 잘못하고 있기 때문에 영원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자격이 있는 몇몇 인간은 한 우주에서 다음 우주로 건너갈 수 있고, 그때마다 제대로 처신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고 여겼다. 신들은 이런 자격 있는 인간들을 먼저 토크펠라 Tokpela라고 하는 '무한 공간'으로 보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신에게 불복하고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려 들고 서로 다투게 되어 토크펠라는 파괴된다. 

- 그중 신성을 존중하고 신에게 가장 순종하는 자들만이 살아남아 두 번째 세계인 푸른빛의 토크파 Tokpa, 또는 '암흑의 밤'으로 넘어간다. 이곳에서도 신은 인간이 행복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둔다.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자유로워지기를 원하고, 물질적 재화를 축적하는 데에만 골몰하고, 마을을 건설하고, 더 이상 신을 경배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싸우는 데 골몰한다. 그 결과, 토크파는 꽁꽁 얼어붙어 버리고 만다.

 

- 또다시 신에게 충실했던 소수의 인간만이 구원되어 붉은빛의 세 번째 세계인 쿠스쿠르자 Kuskurza로 들어간다. 하지만 이번에도 인간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정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대도시를 건설하고 권력욕에 굴복하여 또다시 서로 대립한다. 결국 인간에게 경쟁은 자유가 낳은 결과다. 이리하여 세 번째 세계는 홍수로 물에 잠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자들은 네 번째 세계인 투와콰치 Tuwaqachi로 건너간다. 이 세계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앞선 세계에서와 마찬가지 이유로 곧 사라지게 될 것이다. 네 번째 세계가 사라지면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세계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번 세계는 인류에게 주어지는 최후의 기회가 될 것이다. 

- 불멸에 대한 기대와는 별개로 '자기 자신 되기'라는 문제를 제대로 제기하고 있는 거의 최초의 세계관이 바로 유대교다. 유대교는 '자기 자신 되기'의 근대적 개념을 이루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유대교에 대해 다소 긴 지면을 할애할 필요가 있겠다.

- 유대교의 입장에서 볼 때, 천지창조의 의미와 땅 위 인간의 역할은 신이 불완전하게 남겨둔 세상을 고쳐서 회복시키고(티쿤 올람 tikkun olam), 동시에 신이 불완전하게 남겨둔 인간을 고쳐서 회복시키는(티쿤 하아담 tikkun HaAdam) 것이기도 하다. 이는 모세가 히브리 민족에게 계명을 전달하기 훨씬 이전에 있었던, 히브리 민족의 시조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담겨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모세에 관한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도 분명 상징적이며 상상의 산물이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아브라함이 되는) 아브람이 자신의 운명을 완수하기 위해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는 우상을 숭배하던 과거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세계관과 새로운 민족을 창시하는 길을 걷는다.  

- '네 의지를 떠나라, 네게로 가라'로 번역할 수 있다. '땅'을 가리키는 단어 'Erets'는 '의지'를 가리키는 단어 'Ratson'과 같은 뿌리를 가지기 때문이다. 즉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려면 가장 먼저 욕망의 환상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의지라고 믿는 것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체념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해방에 이르기 위한 첫 번째 단계다. 

- '자기 자신 되기'의 두 번째 단계는 이 성경 구절대로 '고향'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태어났을 때부터 자신의 문화 속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가장 내밀한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라는 비유다. 특히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신념을 버려야 한다.

- 세 번째 단계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가정교육을 버리라는 뜻이다. 이 해석이 가장 정당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가정교육은 앞선 세대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우리도 이를 구현하고 영속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가정교육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아버지의 집'에서 숭배했던 우상도 버리라는 의미다. 

- 달리 말하면, 아브람은 단념하고 자기의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의 세계관을 잊어야 하고, 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해서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신념을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 특히 생물학적인 가족이든 정신적인 가족이든, 가족의 의지에서 벗어나야 한다.

 

- 그런데 아브람이 해방된다고 한다면, 해방의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 '땅'을 의미하는 단어 Erets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번역한 경우를 보면, 그가 해방되는 이유는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기 위해서"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땅이 어떤 땅인지는 정확히 설명되어 있지 않다. 정복되지도 약속되지도 않은 땅, 그저 네게 보여줄 익명의 땅으로만 언급되어 있다. 

- 그런데 여기서도 '땅' 대신 '의지'라고 생각하고 텍스트를 다시 읽으면 '내가 네게 보여줄 의지를 향해'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아브람이 여행하는 목적은 어떤 장소에 가려는 것이 아니라 욕망, 신념, 문화를 초월한 신의 의지에 다가가기 위한 것이 된다. 인간의 해방은 인간이 전적으로 자유로워지거나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 이 두 가지 중에서 선택할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거나 거부할 자유가 있다. 달리 말하면, 자유는 하느님이 원하는 바대로 타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유의지를 제한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 사실 아벨과 카인의 이야기처럼, 소유 때문에 야기되는 경쟁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려면 이러한 선택이 필요하다. 


- 훨씬 뒤에 모세를 통해 인간에게 계명이 내려졌을 때, 성경은 이 계명을 단지 인간의 자유를 확인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어떤 주석(미드라시)에 따르면, 십계명은 히브리 텍스트에서 관례적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처럼 "바위에 새겨진 것"이 아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새겨진'을 뜻하는 단어와 '자유'를 뜻하는 단어의 철자가 같기 때문에 '새겨진' 대신 '자유'라는 단어로 해석하면, 십계명은 '바위 위의 자유'가 된다.

- 요컨대, 신의 의지가 표현된 유대교의 계명은 '자기 자신이 되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해 준다. 즉, 경쟁을 통제할 수 있는 조건에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방법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 힌두교에서 유일하게 가치를 인정받는 '자기 자신이 되는 법'은 윤회에서 벗어나서 해탈에 도달하는 것이다. 윤회란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 고통 속에서 모습을 바꿔가며 생과 죽음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 즉 환생이 순환되는 것이다. 해탈은 빛 또는 영혼의 최종적인 해방을 뜻한다. 해탈에 이르게 해주는 것은 오직 깨달음(산스크리트어로 '프라마남pramanam')뿐이다. 주체의 심오한 본성과 진정한 자유는 주체를 객체와 하나 되게 하여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인데, 깨달음이 있어야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너는 그것"이라는 말은 힌두교의 경전 <베다>의 일부인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경구 중 하나다. <라마야나 Ramayana>와 함께 인도의 2대 서사시로 꼽히는 <마하바라타 Mahabharata>에서 비슈누 Vishnou 화신인 크리슈나 Krishna는 특히 호전적인 왕 아르주나에게 '자기 자신이 되는' 한 방법이 바로 요가라고 가르친다. 

- 불교에서 말하는 '자기 자신이 되는' 이상적인 방법은 인간을 세 가지 욕망으로부터 야기된 세 가지 번뇌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세 가지 욕망이란 영혼의 궁극적 소멸에 대한 욕망, 존재에 대한 욕망, 의미에 대한 욕망을 말한다. 이러한 욕망 때문에 생긴 번뇌에서 벗어나야만 내면의 평화 상태인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 이처럼 해방된 상태에 이르려면, 부처가 말한 사성제, 즉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깨우쳐야 한다. 사성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존재는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둘째, 모든 고통에는 원인이 있다. ... 

- 율리시스, 즉 오디세우스다. 그는 전쟁에서 평화로, 증오에서 사랑으로 혼돈에서 조화로 추방에서 귀환으로, 악한 삶에서 선한 삶으로 옮아간다. 칼립소가 불멸을 제안하지만 그는 이를 거절한다. 자신의 왕국 이타케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아내에게 구혼하기 위해 궁전을 차지하고 있던 구혼자들에게 복수할 계획을 짠다. <오디세이아? 20권을 보면 이 대목에서 오디세우스가 스스로에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인내하라, 나의 심장이여!" 그러면서 그는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길을 걷기 시작한다. 

 

- 그 후 기원전 6세기 무렵, 에페소스의 헤라클레이토스 역시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자유를 행사하는 조건이 되며, 지혜를 발견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 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101번째 어록 <Fragments>에서 "나는 나의 참모습을 찾았다"라고 했다. 그리고 112번째에서는 로고스 logos 또는 이성이 나의 참모습을 찾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덧붙인다. 그는 "진실한 것"을 말하고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본성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116번째에서는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고 지혜를 드러낼 수 있다"고 덧붙였다.  

 

-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는 같은 시기에 생성된 힌두교와 불교 사상에 가깝다. 이들에 따르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 선택하려면 먼저 자기 손에 달려 있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죽음이 바로 그렇다. 이것을 제대로 파악해야만 자신의 행동에 따라 좌우되는 일에 그만큼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Letter a Menecee>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죽음은 우리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죽음이 찾아오면 그때는 우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디오게네스는 초기 불교에서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택할 만한 유일한 삶은 금욕, 즉 사회적 관습과 필요 이상의 안락함을 포기하여 '최고의 선'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검소하게 살아야 하며, 욕망을 버리고, 필요한 것을 엄격하게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 마찬가지로, 디오게네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플라톤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고 참된 내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고 전제한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문구는 소크라테스가 델포이의 아폴론 사원 입구에 적혀 있던 격언을 계승하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자기 자신을 알려면 가장 먼저 문답법을 통한 산파술로 자신의 유한성과 세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인간의 유한성은 히브리스, 즉 과도한 교만에 빠지지 않는 한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플라톤이 보기에 자유로운 자기 자신이 되는 유일한 방법은 무제한적인 사고의 세계(즉, 자기 자신)를 탐험하는 데 있다. 이러한 사고의 세계는 우리 안에 있는 동시에 신에게서 나오는 영원한 진리와도 접해 있다. <티마이오스> (기원전 90년)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한 사람이 전적으로 과학과 지혜를 사랑했고, 그가 자신의 능력 중에서 유독 신의 영역에 속하는 불사불멸에 대해 생각했다고 하자. 이때 그가 만약 진리에 도달한다면, 인간의 본성이 불멸에 참여할 수 있는 한 인간은 아무 문제 없이 불멸에 이를 수 있다."  

 

(역자 주 : Hybris. 고대 그리스에서 오만, 방종, 불경을 뜻하는 말로, 인간이 자신의 능력에 대해 교만해지면서 신 앞에서조차 건방지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오만방자함은 반드시 벌을 받는다고 믿었다.)

 

-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도 '자기 자신이 되는' 유일한 방법, 즉 조화로운 우주와 양립하면서 비극적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방법은 '관조적인 삶'을 사는 것이라고 했다. 관조적 삶이야말로 우리가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조건에서 최소한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어 우리를 '완전한 행복'으로 인도해 준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것에만 사고의 틀을 한정해야 하고,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멸하는 것에만 생각을 제한하라고 충고하는 자들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가장 고귀한 부분을 기준으로 삼아 살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가능한 한 불멸해야 한다."

- 그리스도교의 경우, 유대교나 그리스 사상과 교집합을 이루는 부분이 있다. 인간에게는 선과 악을 선택할 자유가 있으며,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자가 제시하는 구원을 따르거나 거기서 멀어지는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자기 자신이 되는' 과정 중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유일한 한 가지는 구원받는 것, 다시 말해 부활하는 것이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문다면 너희는 진정한 나의 제자가 된다.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복음 8장)

 

- 달리 말하면, 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을 추구하면 구원의 문이 닫힌다는 것이다.

- 인간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은 이슬람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찍이 카디리파, 무타질라파, 아슈아리파, 마투이디파가 이문제를 놓고 서로 대립했다. 오늘날 이슬람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수니파 교리에 따르면, <코란>에는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고 가르친다. 인간의 소관이든 아니든, 즉 인간에게 책임이 있든 없든 <코란>에 모두 적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역자 주 : 카디리파. 이슬람 최초의 신비주의 교단으로 초기에는 카디리야로 불렸다.
무타질라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이슬람 종파로서, 그리스의 논리적 사고방식으로 코란을 해석하고 '코란창조설'을 주장했으며, 인간의 이성, 자유의지를 기조로 삼았다. 
아슈아리파. 무타질라파와 대조적으로 코란은 창조된 것이 아니며, 인간의 이성보다는 신의 계시가 우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마투리디파. 아슈아리와 함께 이슬람 수니파를 구성하는 2대 종파로, 아슈아리파에 비해 인간의 이성을 조금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입장이다.)

 

- 신은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알고 있는 반면, 인간은 자신의 미래를 모른다. 다만 선으로 가는 길과 악으로 가는 길만 알 뿐이다. 그리고 이 두 갈래 길 중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인간의 자유다. "그렇다. 그(인간)가 감사하건 배은망덕하건 우리는 그를 인도했다."(코란, LXXVI, 3) "우리가 그를 이 두 갈래 길로 인도하지 않았는가?"(코란, XC, 10) 인간은 자신의 이성과 인식 능력, 신에게서 받은 자유를 통해 최악과 최선에 대해 배우고, 그것을 이해하고, 그중에서 결정을 할 수 있다. 인간은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책임을 지게 되고 저승으로 갈 때 심판을 받는 것이다. "영혼과 영혼을 조화롭게 만든 자, 영혼에 불멸과 동정에 대한 영감을 준 자! 영혼을 정화시킨 자가 이기고, 영혼을 부패시킨 자가 졌도다."(코란, XCI, 7-10) 

 

- 그리고 비로소 제1천년기가 끝나갈 즈음, 마침내 인간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갈고닦고, 인생의 주인이 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여건이 모두 마련되었다. 

 

- 인간이 종속적 상태를 즐기고 있다는 의미다. 폭군이라 해도 "똑같이 눈 두 개, 손 두 개, 몸 한 개만 가지고 있으니 그의 생김새는 무한히 많은 백성들 중 최하위층과도 전혀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압제자가 모든 백성에게 명령을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그는 복종을 '자기 자신 되기'의 일종으로 생각했다. 

- 드라 보에티의 친구였던 미셸 드 몽테뉴는 고대 그리스 사상으로 돌아가서, 자기 자신에 대한 글을 쓰지 않고서는 참된 자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내 모습을 그릴 때는, 처음의 내 색보다 더 선명한 색으로 나를 그린다. 마찬가지로, 내가 내 작품을 만든 것보다 내 작품이 나를 만드는 데 더 큰 역할을 했다. 책은 그 책의 저자와 일심동체다."(<수상록>, 2권 18장)

- 그는 마지막 장(3권 13장)에서 잘 사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가장 아름다운 삶은 (...) 기적적이거나 기상천외한 것이 아니라 질서 있는 공동의 인간적 모델을 따르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거나 그저 시간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지 말고 각자 자신의 삶을 충만하게 살라"고 독려한다. "(삶이) 우리를 압박하고 부질없이 사라져 버린다면 불평해야 할 대상은 오직 우리 자신뿐이다. (...) 특히 지금 내 삶의 시간이 이렇게 짧다고 인식되기에, 나는 삶의 무게를 늘리고 싶다. 신속하게 달아나는 인생을 재빨리 잡아서 멈추고 싶다. 서둘러 흘러가는 인생을 알차게 보내어 보상받고 싶다. 삶을 소유하는 시간이 짧은 만큼 더 깊이 있고 충만하게 삶을 소유해야 한다." 그러려면 모든 즐거움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즐길 것"이 아니라, 매사에 "공부하고 음미하고 되새겨야" 한다. 특히, "현재를 지나쳐가는 사람들과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그리고 환상이 낳은 의혹과 공허한 이미지 때문에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지나쳐버리는 사람들처럼 더 나은 미래를 꿈꾸기만 하고 그것을 실현하지 않을 것"이 아니라, 행동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춤출 때 춤추고, 잠잘 때 잠잔다. 아름다운 숲에서 나 홀로 산책할 때를 생각해 보자. 이때 낯선 상황을 보게 되어 한동안 여기에 생각이 사로잡혔다면, 다른 한동안은 산책과 숲, 달콤한 고독, 그리고 나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어야 한다."

- 한 세기가 흐른 후, 셰익스피어와 몰리에르의 뒤를 이어서 피에르드 마리보와 줄리앙 드 보마르셰가 청춘 남녀의 해방을 완성한다. 같은 시기에 또 다른 방랑객 장 자크 루소는 그의 저서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중 <세 번째 산책>에서 자기 자신에게 인도하는 길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자기 자신 되기'는 경험이 주는 교훈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선한 변화가 될 수밖에 없다. 그는 아테네의 현인 솔론의 문장으로 글을 시작한다. "나는 끊임없이 배우면서 늙어간다." 그런 다음 사람들과 사회를 접하면서 겪었던 모욕과 불행, 환멸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고는 새로운 행동 방침을 정한다. 

 

- 같은 시기에 민주주의의 새싹이 막 돋아난 미국 땅에서는 소설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자기 자신이 되는 방법'을 탐구한다. 그가 내린 결론은 자기 자신이 되려면 세상을 떠나 혼자 살기로 마음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1817년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나 하버드대학교에서 수학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학력에 맞는 커리어를 포기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 후 1845년에서 1847년까지 매사추세츠 주민들과 동떨어져서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서 살았다. 서구식 생활방식에 매우 비판적인 입장이었던 소로는 <숲 속의 생활>에서 '고독한 반항'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고독한 생활이 자아를 세우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을 부패시키는 것이 바로 사회이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대도시에 살면서도 인간은 고독을 느낀다고 주장했다. 그 후로 서양 문학은 자기중심적인 자아 탐색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게 된다.   

- '자기 자신을 찾는' 작업은 19세기말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발전시킨 정신분석이론으로 이어졌다. 정신분석이론 역시 무의식과 초자아 사이에 일어난 투쟁의 결과로 생긴 소외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했다. 여기서 무의식은 차마 말로 할 수 없거나 사회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욕망이 포함되어 있는 정신적 공간을 말하며, 초자아는 그런 욕망을 검열하는 공간이다. 이 둘 사이의 갈등이 신경증(자아의 일부를 억압하는 자아)이나 인간을 마비시키는 정신병(현실의 일부에서 벗어나 자아에 활용되는 자아)으로 발전될 수 있다. 이러한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정신분석치료를 하는 동안 환자는 아무런 제약 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단어를 이야기하도록 한다. 그래야 환자의 무의식 속에 들어 있는 문제 행동이나 사고의 원인을 알 수 있다. 이 치료를 하는 목적은 환자가 자신의 과거를 재발견하여 과거의 흔적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결국 신경증을 상위 감정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다. 

 

- 마르셀 프루스트도 글쓰기를 통해 '자기 자신이 된다'고 했다. 글은 그에게 삶과 세상을 드러내 보여주며 잃었던 과거를 되돌려줬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그가 자신의 자질을 발견했을 때를 회상한 글이다. 이 글은 롤랑 바르트가 말했듯 "글을 쓰고 싶은 욕망"에 대한 이야기다.

 

- <밤 끝으로의 여행>과 <외상 죽음> 같은 상상력이 풍부한 자전적 소설을 쓴 루이 페르디낭 셀린은 자신처럼 의사이자 소설가인 페르디낭 바르다뮈라는 인물을 통해 저자의 체험을 재창조한다. <외상 죽음>은 저자의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헌정하는 저작으로, 입대하고 싶어 하는 바람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반면 <밤 끝으로의 여행>은 성인이 된 저자의 경험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저자는 20세기 초를 뒤덮은 착취와 죽음이 점철된 사건과 변화에 직면했다. 즉 제1차 세계대전, 아프리카 식민지배, 포드의 생산제일주의, 교외 지역의 빈곤을 목도했다. 이 같은 경험은 저자를 지독한 '자기 자신 되기'로 인도했다.

 

- 인생을 한 편의 영화라고 한다면 자기 인생의 영화감독 노릇을 한 또 한 사람이 있다. 블레즈 상드라르(본명은 프레데릭 소세 알)는 24세 때부터 그의 형제인 조르주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영감을 얻는 것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기 인생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는 생사가 달린 문제다. 그런데 영감을 얻고 자기 인생을 건설하는 이 두 가지 문제는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상드라르는 1940년대에 쓴 4부작 <벼락 맞은 남자 L'Homme foudroye>, <절단된 La Main coupee>, <방랑자 Bourlinguer>, <하늘 분양 Le Lotissement du ciel>을 스스로 "기억으로 남지 않는 기억"이라고 표현했다. 이 4부작에는 제1차 세계대전, 유럽의 항구와 '내부 세계의 길'을 거쳐가는 여행이 언급되어 있다. 

 - <벼락 맞은 남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글을 쓰려면 자신을 소모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내 고독에 불을 놓았다. (...) 글쓰기는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불사르고 한데 섞여 있는 이미지들을 태워서 불꽃이 튀는 숯과 땅에 떨어지는 재로 만드는 작업이다. 하지만 불꽃이 사그라지기 시작하면서 불의 원래 모습은 신비로 남게 된다. 글쓰기란 활활 타는 것이기도 하지만, 불사조같이 타고 남은 재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가 본명을 두고 상드라르라는 이름을 선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프로이트의 뒤를 이어 카를 구스타프 융은 자아 Moi와 자기 Soi를 구별한다. 자아는 의식의 중심을 이루는 것으로, 이성적 존재가 되기를 추구하는 서양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을 아우르는 것으로, 한 인간의 개성을 포괄한다. 융에 따르면 삶의 목표는 의식과 무의식의 조화, 즉 자기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융은 <자아와 무의식의 변증법>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기는 인생의 목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자기는 개인이라 불리는 운명의 조합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 이 대목에서 에마뉘엘 레비나스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 따르면, '자기 자신이 되려면' 타자를 인식해야 하며, 이는 주관성(자기 자신이 되는 자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고 한다. 

- 마찬가지로 폴 리쾨르도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에서 타자는 단순히 자신의 상대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미를 긴밀하게 구성하는 데 참여한다고 했다.

- 오늘날, '자기 자신 되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자기 몸과 마음의 주인이 되고, 체중을 조절하고, 금연이나 금주를 하고, 감정을 조절하고, 참된 자신을 발견하고,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알려주는 사례나 방법론이 넘쳐나고 있다. 혹자는 자기 몸을 제대로 아는 것이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몸은 정신과 달리 거짓말을 하지 않고 도착점이 없는 길로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수양하여 인식을 개선할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고 한다. 

 

- 미국에서는 수십 년 전부터 '자기 자신 되기'에 관한 책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의 저자들은 자기 자신 되기가 행복해질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이라고 이야기한다. 수많은 성공한 기업인, 인생 코치, 정신과 의사들이 관련 주제를 다루는 글을 발표했다.
그중에는 최고의 자기 계발 코치로 손꼽혔던 미국 기업가 짐 론이 있다. 1930년에 출생해서 2009년에 사망한 그는 아이다호의 농가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그의 대표작은 1991년에 출간된 <다섯 가지 중요한 인생 퍼즐 The Five Major Pieces to the Life Puzzle>이다. 이 책에서 그는 다섯 가지 삶의 원칙이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철학(생각하는 방식), 태도(사물로부터 감정을 느끼는 방식), 활동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행동하는 방식), 결과(목표와 비교했을 때 현재의 위치), 그리고 삶의 방식이다. 론은 인생이 짧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우리는 주어진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의무가 있고, 자신의 인생을 꾸려가는데 규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 하버드 대학교의 마거릿 무어와 폴 해머니스 교수가 2011년에 발표한 저서 <하버드 마음 강좌>도 흥미롭다. 이 책에는 내면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시켜 주는 다섯 가지 원칙이 소개되어 있다. 즉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리고, 한 번에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고, 집중력을 해치는 환경에 효과적으로 반응하고, 단기 기억을 최대한 활용하고, 한 가지 임무에서 다른 임무로 신속하게 옮아갈 것을 권하고 있다.  

 

- 2013년에 타계한 정신과 의사 윌리엄 글래서는 '선택이론'과 '현실치료'를 주창한 인물이다. 선택이론은 세 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행동으로 나타나며 거의 모든 행동은 선택의 결과이고, 인간의 다섯 가지 기본 욕구가 행동의 동기가 된다는 원칙이다. 다섯 가지 기본 욕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장기간 애정 관계를 맺는 데 실패한 사람은 불행하다고 한다. 이러한 애정 결핍은 정신착란, 폭력, 중독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박사는 타인과 지속가능한 관계를 맺으려면 일곱 가지 태도가 필요하다고 한다. 즉 들어주고, 받아주고, 존중하고, 신뢰하고, 격려하고, 지지하고, 협상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창안한 현실치료는 바로 이 일곱 가지 태도를 실천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 지금 세상에는 종말과 미래, 잔혹함과 자애로움이 공존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혼돈의 시대에 누가 세상을 차지할까? 앞서 살펴보았던 수많은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답은 적절한 시기가 되면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 기대하는 태도를 버리고,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기 인생을 최고의 것으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다. 또한 운명론이나 숙명이라는 가면을 쓴 채 약하고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압제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하는 사람이다. 자유와 행복을 누리고 자기 인생을 선택해야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도 포함된다. 

 

- 진정으로 원하고 시간을 들여 충분히 고민한다면 어디에 있건 누가 되었건, 꿈꾸던 직업을 가지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는 게 가능하다. 자신의 외모와 연인과 성 정체성과 사는 곳과 언어를 선택하고, 진정한 자신을 찾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선택은 한평생 살면서 여러 차례 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선택을 동시에 하거나 연속해서 할 수도 있다. 

- 반면, 스스로 선택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하거나 아예 선택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체념하고 요구하는 자'로 계속 남아 있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정기적인 수입이 줄어들고 국가의 부채가 점점 늘어나서 취약 계층을 지원할 마지막 재원마저 사라지면, 이런 사람들은 생활수준이 낮아져서 회복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 국가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선택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하거나 아예 선택을 원하지 않는 국가는 점점 피도 눈물도 없이 경쟁이 치열해지는 세상에서 쇠퇴와 타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자신의 미래를 선택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 국가를 버리게 되면 쇠퇴는 더가속화될 것이다.

- 반대로, 이런 기질을 지닌 사람들을 충분히 받아들인 국가의 경우 점차 침체 상태에서 벗어나 활기찬 민주주의가 정착될 것이다.

- 그렇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물론이고 국가적으로도 가능하다.

- 이렇게 가능하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여러 위협이 도사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앞에는 엄청난 가능성과 잠재력이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르네상스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의 기술력은 그 어느 때보다 창의적이고 막강하다. 특히 언제나 역사를 움직이는 주요 동력이 되었던 자유에 대한 갈망이 정치·경제·사회·과학·윤리·문화·이념 등 전 영역에 걸쳐 존재하고 있다..

- 매일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갈구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그 사례를 앞에서 충분히 확인했다. 이제 미래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자유를 열망하며 자기 인생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 그렇다면 우리라고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어째서 다른 사람들이 더 나은 운명을 만들어주기를 기다리려고만 하는가? 왜 지금 당장 행동하지 않는가? 물질·재정·이념·종교·문화·윤리·기술 등 수천 가지 형태의 현대적 소외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내면의 원동력으로 삼아 살을 빼기로 결심하고, 금주와 금연을 실천하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고, 타성에서 벗어날 용기를 얻는 것일까? 정기적인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체념하고 요구하는 자'의 지위를 버리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일까? 기업이나 국가가 모든 것을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자리를 스스로 창출하는 힘은 무엇일까? 내면의 목소리에 충분히 귀를 기울임으로써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재능을 발견하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 다른 사람이 자신을 대신해 주리라 기대하지 않고, 단념하기보다 직접 저항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무엇일까? 협력하기보다 저항하며, 선거 당선자를 비판하기보다 직접 출마하고, 타인을 저주하기보다 참된 자기 자신이 되는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 오늘날 세계 어떤 곳, 어느 누구라도 교육을 통해 자기 자신이 되고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어떤 사회에서도 아이들에게 자기 자신이 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들이 기존 사회를 재생산하도록 가르칠 뿐이다. 부모들 중에는 자녀가 자기만의 성공 모델을 선택하게끔 모험을 감행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 그들은 대체로 부모 자신의 모델을 자녀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학교와 대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진로 교육도 참담한 결과를 낳고 있다. 현대 교육 시스템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진로지도는 개인 안에 잠자고 있는 특별한 천재성을 발견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 그것을 발견하려면 일반적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갑작스런 충격을 하나의 사건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느리게 진행되는 변화도 사건이 될 수 있다. 찰나에 지나가는 변화의 계기 또는 오랜 시간 이어지는 성숙, 자극이 되는 충고 또는 용납할 수 없는 구속, 엄청난 물질적 풍요 혹은 극단적인 빈곤, 스승을 만나게 되는 경우 혹은 가족이나 익숙한 환경을 떠나야 하는 경우, 팔을 걷어붙이고 스스로 나서게 만드는 상황 또는 숨 막히는 일상, 절대적으로 자기 자신이 되고 싶은 의지 또는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는 거스를 수 없는 욕구, 자신과의 만남 또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자 자기와의 단절을 야기하는 타자와의 만남,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있다. 

- 그런데 이런 사건이 무엇이건 대체로 사건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특히 '자기 자신 되기'가 모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적어도 정신적인 측면에서 한순간 단절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침묵과 집중, 명상의 단계인 '휴지기'다. 이 휴지기 동안에는 다음과 같이 다섯 단계로 이루어진 '길'을 거치는 것이 적합하다.

 

- 첫 번째, 인간이 처한 상황과 주변 상황, 다른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삶에 가해진 속박과 한계를 파악한다. 
두 번째, 스스로를 존중하고 존중받도록 한다. 우리에게는 멋진 삶과 멋진 시간을 보낼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세 번째, 자신의 고독을 인정한다.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가 사랑하거나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앞의 단계들을 떠올리며 고독을 행복의 원천으로 여기면서 산다. 
네 번째, 자신의 삶이 유일한 것이며 누구도 보잘것없는 존재로 낙인찍히지 않을 자격이 있고, 각자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또한 일생 동안 여러 재능을 동시에, 혹은 차례로 발휘할 수 있다는 것도 인식한다. 
다섯 번째, 이렇게 하면 마침내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스스로 선택하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 이 길은 평생 동안 몇 번이고 다시 걸을 수 있고, 또 걸어야 하는 길이다. 이 길을 완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이 될 수도 있고 몇 년이 될 수도 있다. 얼마가 걸리든 이 길의 끝에 이르면, 예전의 종속적 상태에서 해방되고 해독되고 빠져나온 것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누군가가 이야기한 '눈부신 깨달음'이나 '온전한 인식'과 비슷한 것으로, 나는 여기에 '르네상스'라는 이름을 붙이겠다. 사실, 이상적으로는 유년기부터 이렇게 깊이 있게 생각해야 훗날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제 시작하더라도 늦은 것은 아니다. 

- 우리는 일생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이런 식으로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곰곰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여러 사건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선택을 할 때마다 매번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 새로운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가 아마도 우리가 살고 있는 매 순간에 해당할 것이다. 인생의 모래시계에서 아직 떨어지지 않은 모래를 담고 있는 윗부분은 불분명한 상태에 있다. 

- 우리 인간은 자신의 출생일이나 출생지, 출신 환경을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배경들을 두고 자부심을 가질 필요도 저주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들은 그저 하나의 주어진 자료, 구속, 자유에 대한 제약일 뿐이다.

 

-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까다로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자기 자신에게 거짓으로 대답하지 않도록 한다. 나는 음식이나 술, 마약으로부터 마음이 멀리 있는가? 이념이나 경제·정치·종교적 권력과도 거리가 먼가? 마음만 먹으면 이런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완전히 종속되어 있는가? 오늘 이 순간까지 인생을 살면서 나는 무엇을 했는가? 나는 자유롭게 내 성공의 기준을 선택했는가? 내가 살 곳, 공부할 것, 현재 내 감정을 공유하는 감정적 동반자, 직업, 자녀를 자유롭게 선택했는가? 진정으로 나의 재능을 발굴하고 이를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가? 어떤 슬픔과 행복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는가? 나는 재력이나 게으름 때문에 제약을 받았는가? 나는 내가 극복해야 했던 비극의 희생자인가, 아니면 그 비극을 초래한 장본인인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중요하게 생각하느라 내 자신이 구속되지는 않는가? 자신이 하찮은 존재로 낙인찍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삶을 살아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혹시 체념하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체념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은가? 만약 지금 눈앞의 모든 것이 사실은 안 지키면 그만인 인생 계획과 마찬가지로 그저 마음을 편하게 하려고 스스로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라면 어떻겠는가? 

- 이런 질문을 던지면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대답을 회피하려 한다.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다.)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사회구성원 개개인이 이런 의문을 갖지 않도록 부추긴다.

- 이런 질문에 답하려면 자신의 역사, 조상들의 역사, 물려받은 문화, 가능하다면 가족의 비밀까지 정면으로 용감하게 마주해야 한다. 적어도 자신의 하루 매 순간을 돌아보면서 어떤 때가 정말로 자유로웠고 자신이 선택한 시간이었는지 확인해보아야 한다. 또한 더 용기를 낼 수 있다면 자유로워질 수 있는 순간이 언제였는지도 되돌아보아야 한다.
  

- 지금까지 이야기한 첫 번째 단계를 밟는 데에는 장시간의 분석이나 특별한 치료 기술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 과거는 질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가능하면 혼자서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위의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자신만의 내면의 길을 따라가 보도록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구, 전문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 대화를 매개로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 

 

- 어찌 되었건, 이 첫 번째 단계를 통해 우리를 정해진 장소와 시간에 태어나게 하고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사실로부터 자신이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사상과 개념, 가치, 물려받은 신앙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도 인식할 수 있다. 결국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 범위와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분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인식한다고 해서 반드시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신념이나 유산을 포기하게 되거나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자체만으로는 삶을 변화시키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체념하고 요구하는 자'라는 지위를 포기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 심지어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답을 거부하거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이런 대답이 과도하게 절망적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음악 그룹 포브 Fauve는 <타이거 샤크 Requin Tigre〉라는 노래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나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로도 가지 않지. 나는 화석처럼 굳어 있지. 다른 모습의 나는 절대로 있을 수 없지. 그러니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아야만 하지..."


- 이 노래의 가사와 같은 선택을 하면 첫 번째 단계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체념하고 요구하는 자'의 지위에만 머물게 된다.
하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에 정면으로 맞서는 데 성공하면, 이 첫 번째 단계를 통해 각 개인이 타인의 소외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인식할 수 있게 된다.  

- 가령, 아이를 낳는 것은 아이에게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지위를 주어 소외시키는 것이다. 부모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아이들에게 그들의 존재 이유가 오로지 자신들이 시작한 일을 계속 추진하거나 자신들이 실패한 것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라고 믿게 만든다면, 그 부모는 아이들을 소외시키는 것이다. 

- 좀 더 일반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순종하거나 우리의 욕망에 굴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때 우리는 그들을 소외시키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 이처럼 한계를 인식하면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감을 가지는 길로 접어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 단계를 잘 수행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결과다.

 

- 우선, 자신이 얼마나 소외되어 있는지 평가하고 자기 인생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인식한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깨닫고, 자신의 인생 역정과 본인이 가지고 있는 욕구와 힘을 분석한다. 일단 자기 몸과 마음을 온전히 인식하고, 이러한 인식을 통해 자신감을 향해 한걸음 더 나아가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가진다. 그래야 자존감을 중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 '자존감을 가지다'. 이 말의 어원을 따져보면, 뒤를 돌아보고 자기 자신을 존경하고 존중한다는 뜻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스스로 자신감을 가질 만하다고 평가하고, 자기의 인생을 자신과 타인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 자존감을 가지려면 먼저 자기 몸을 제대로 인식한 후 자신의 몸을 유지관리하고 일체의 중독을 거부해야 한다. 운동을 하고, 외모를 가꾸고, 거울이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이미지를 사랑하도록 한다. 더 나아가 자기 몸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건강관리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건강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하는 증상인 심기증은 자존감의 여러 측면 중 하나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 이외에도 자존감을 가지려면 선악을 기준으로 자신의 가치를 명확하게 알고, 다양한 형태의 가치에 위계질서를 세워야 한다. 또한 어떤 사안에 대해 타협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과 부차적인 것, 즉각적 만족과 장기적 투자를 서로 구별해야 한다.

- 자존감을 정착시키는 데 유용한 연습 방법이 하나 있다. 자신이 존중받고 싶은 것을 단어로 나타내는 것이다. 예를 들면, 번영, 우아함, 정직, 진정성, 예의, 친절 같은 단어가 그렇다. 자존감이 생기게 하려면 이러한 단어들과 그 안에 담겨 있는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그 단어들 안에 내포되어 있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 더불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쉬지 않고 인격을 연마하고 개혁하며, 우수한 존재가 되도록 쉼 없이 노력해야 한다.

- 자존감이 있으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자신에게 너그러워지지 않는다. 자신의 실수를 분석하고 깨닫게 되고, 책임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 파악하고, 자신과 자신의 결점에 대한 진실이나 가족의 비밀을 교묘히 회피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죽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게 된다.

- 자존감이 생기면 자신에 대한 증오가 사라지고 자기 자신을 경멸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에게도 가치를 부각시킬 만한 무언가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한다. 실망할 것은 없으며, 각자가 멋진 인생과 멋진 시간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여긴다.
어떻게 해서든 위로와 동정을 받으려 하지 않고, 나쁜 소식이나 어두운 전망이더라도 현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불안해하지 않고 불행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불행 속에서도 새로운 기회를 잡을 준비를 한다.

- 자존감이 있으면 내면의 힘을 발견할 수 있고, 통찰력과 내면을 성찰하는 능력, 공명정대함과 용기가 생긴다. 살고 싶은 욕망이 강해지고, 극단적인 낙관주의나 비관주의 없이 불확실한 인생을 있는 그대로 직면할 수 있다.

- 자존감이 있으면 주위 사람들에게 평화롭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전달하고 그들로부터 존중받는다. 사실, 자기가 자기를 존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의 존중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 결국, 자존감을 갖게 되면 마치 거울에 비춰보는 것처럼 자신도 타인을 존중하게 되어 서로 존중하는 결과를 얻게 된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단계를 통한 결실이다.

-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소외를 파악한 다음, 자존감이 얼마나 필요한지도 절실히 느꼈다. 이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용기를 끌어내어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의 세 번째 단계를 밟으려 한다. 이번 단계의 핵심은 자신의 고독을 인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 인생은 짧다는 사실과 함께, 인정하기 가장 힘든 인간의 조건 중 하나가 바로 고독이다.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지극히 어렵다. 이 우주에 살고 있는 한 종으로서도 그렇고 지구상에 살고 있는 한 개인으로서도 그렇다. 모든 개인은 소외의 희생자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소외가 발생하는 원인은 종교·정치·경제·가족·감정적 차원에서 수많은 책략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종교·정치·경제·가족은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고 믿게 하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 자신이 아닌 그 누구도 자신의 열망을 규정하고 자신의 인생 계획을 선택할 자격이 없다. 10분 후, 이틀 후, 또는 10년 후에 자신이 되고 싶은 것을 자기 자신보다 더 잘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 따라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하다. 이제 가족이나 친구, 지인, 권력층으로부터 사랑도, 돈도, 지지도 필요치 않다. 특히 기업주나 국가의 도움은 조금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이런 지원은 가장 필요한 순간에는 오지 않으며, 만약 온다고 하더라도 우연히 딸려올 뿐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사는 용기도 필요하다.

-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 그들을 무시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아무런 보답도 기대하지 않고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주는 애정에 손익계산을 끌어넣지 않는다는 의미다. 친분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들을 지원받을 인맥으로 간주하지 않고 상호신뢰와 교류를 위한 인맥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 기업주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당한 보수를 달라는 요구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국가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도 권력층의 절대적 명령에 모두 굴복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를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더 그렇게 하라는 의미다. 다시 말하면, 최악의 상황이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점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도움과 이해를 기대할 수 있는 사람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런 최악의 상황은 충분히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안 좋은 상황에 직면하면 고독이 사람을 더 약하게 만드는 법이다. 

- 따라서 자신이 고독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무엇이 정말로 위협이 되는지 알게 되고, 다소 편집광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단계를 실행하여 얻게 되는 결과다.

- 좋은 삶, 즉 '나만의 의미 있는 삶'은 언제나 자신의 참모습을 추구하고, 수천 번 자신의 참모습을 찾았다 잃었다 하는 삶이다. 인생은 단지 그것이 유일하다는 이유만으로 언제까지나 유일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네 번째 단계의 결과다.

- 이 스승은 그에게 대화를 나눌 방으로 우선 기어들어가라고 말한다. 그래야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그의 자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자기 자리를 찾는 일은 앞서 살펴본 네 가지 단계를 거쳐서 다다른 결과다. 그러므로 앞서 지나온 길은 이런 삶의 선택, '자기 자신되기'가 통합되고 단단히 뿌리를 내리기 위해 필요한 일임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권력과 국가의 무능, 자신의 고독과 실패에 대해 분노로 반응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그렇다, 나는 할 수 있다. 그렇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훌륭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마음의 평화와 자신감이 필요하다. 그렇다. 나는 행동할 수 있다! 그렇다, 나는 성공할 수 있다!

- 이제 용감하게 마지막 단계를 지나면, 아직 개발되지 않은 신체적·예술적·지적 재능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동안 억눌려 있었던 열정 중 어느 것을 발휘할지 선택할 수 있다.

- 이런 선택을 할 때 나이 든 경제 여건이든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제약을 받아서는 안 된다. 앞에 소개되었던 사례를 보면, 성공은 가난한 사람에게나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에게나 똑같이 찾아오며, 삶을 선택하는 순간은 언제든지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눈 깜짝할 사이든 10년 동안이든 그런 선택을 위해 쏟아부은 노력과 열정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 특히 직업을 선택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깊숙이 숨어 있던 자질이 드러나기도 한다. 또는 한낱 오락거리, 운동, 시간 때우기에 불과했던 활동이 풀타임 일거리로 바뀌기도 한다. 그러려면 앞에서 살펴본 네 가지 단계가 자양분이 되어 호기심 자극하기, 진로 지도, 교육으로 이어져야 한다. 

- 어떤 이들은 창업을 선택하여 '열정적 기업인'이나 '생계형 기업인'이 되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경우, 큰 열정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한 분야에 어느 정도의 관심을 기울인 끝에 기업을 경영하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열정은 그들에게 아이디어를 주고, 그들이 기회를 엿보다가 확실히 원하는 분야에서 창업하여 이윤을 추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후자는 주로 생존이나 더 나은 삶을 위해 기업을 경영하는 경우다. 그래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자녀의 학비를 대고, 빈민촌을 벗어나고, 해고 후 재취업을 위해 우연한 분야에서 기업을 운영하기 시작한다. 물론 어떤 사람은 전자와 후자의 경우 둘 다에 해당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 해도 일자리를 찾는 것이 주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서비스를 제공할 고객을 찾고, 아직 없는 서비스가 무엇인지, 그리고 사람들이 기꺼이 투자할 만한 서비스가 어떤 것인지 찾아야 한다.

- 이밖에 성 정체성, 사랑, 조국도 선택할 수 있다.
 
- 그런데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사생활에서건 직장생활에서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더 이상 속박을 정당화하거나 핑계를 대지 않고 '체념하고 요구하는 자'의 지위와 안락한 소외로 다시 돌아가는 쪽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선택의 불안에 사로잡혀서 자유가 오히려 독재보다 더 견디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자칭 인생 계획이라고 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자신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 이로써 가까이 있든 멀리 있는 모든 사람들은 완전하고 충만하고 유망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돕는 길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장년층은 잠들어 있는 보물과 같고, 청년층은 지켜야 할 약속과 같으며, 이들 모두 찾아내야 할 천재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들을 돕는 것이 자신의 행복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가 베풀어주는 사람들에게서 우리도 많은 것을 받기 때문이다. 이렇듯 배우려면 가르쳐야 한다. 지식을 공유하는 것은 자신 안에 묻혀 있던 생각들이 솟아나게 하는 아주 멋진 방법이다. 특히나 아이들이 자신의 참모습을 찾고, 어떤 점에서 자기가 유일한 존재인지 파악하도록 돕는 일만큼이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다.

- 하지만 모든 동전에는 양면이 있는 법이다. 다른 사람들이 참모습을 발견하도록 도와주기로 할 경우, 그로 인해 적을 만들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건 또 누가 되었건, 빚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또 빚진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빨리 빌려 준 사람들을 잊어버리고 심지어 증오하는 경우도 있다. 
 
-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참된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했다면, 질투와 배은망덕을 겪게 될 것을 각오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지금까지 소개한 길을 잘 걸어왔다면, 이런 위험이 생기더라도 미소를 지으며 담담히 받아넘길 수 있을 것이다.

- 결론 : 지금 당장, 인생의 주인이 되자

- 나는 이제 독자 여러분이 일상에서 벗어나 참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으리라 기대한다. 우리 인생에서 최소한 한 번쯤은 말이다. '자기 자신 되기' 실천 단계를 실행함으로써 자신의 인생만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도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조국이 성공하고, 세계가 풍요로워지는 데에도 일조할 것이다.

- 구약성서의 <전도서>에는 "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있다. 이는 우리가 그저 똑같은 것을 반복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는 뜻일까? 우리 조상들의 인생을 그대로 답습해야 한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성서학자들의 의견이다. 오히려 새로운 것이 태양 위에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용기를 내어 규칙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즉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 따라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고자 한다.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순응적인 태도와 이념과 윤리 등 모든 종류의 결정론에서 해방되도록 하라. 더 이상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라.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행동할 용기를 지녀라. 체념하고, 기정사실을 받아들이고, 개인적인 어려움에 대한 해결책을 다른 사람에게 들으려고 기다리는 태도는 조금도 정당화될 수 없다. 특히 권력층이나 국가에게 기대를 가지는 것은 더욱 안 될 일이다. 좋은 삶이란 끊임없이 자신의 참모습을 찾고, 계속해서 혹은 동시에 자기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는 삶이다.

- 만약 당신이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면, 당신 자신과 가족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늘날보다 훨씬 더 나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쁜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 일단, 일상생활 속에서 행동을 취하라.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고, 자신이 소외되어 있다는 것과 미리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라. 당신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인식시켜 줄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하는 행운이 없더라도, 타인 덕분에 자의식을 가지게 되는 행운이 없더라도, 당신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하고 이를 실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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