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고이케 마리코 / 이규원
원제 : 異形のものたち
출판 : 북스피어
출간 : 2022.08.26
<우중괴담>을 읽은 후 비슷한 분위기의 글이 더 읽고 싶어 져서 고이케 마리코의 <이형의 것들>과 <괴담>을 골랐다. 저자의 다른 작품을 읽어본 적이 있었다거나, 어떤 작가인지 알고 골랐던 건 아니었다. 늘 그렇듯 가볍게 훑어보고, 손이 가는 대로 선택했을 뿐이다.
두 책 모두 읽는 도중보다는 다 읽은 후 길게 남는 여운이 훨씬 마음에 드는 책들이었다. 끝맺은 이야기를 덮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기 직전의 틈. 그 틈들이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느낌이었다.
편집자의 후기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저자 특유의 자세한 묘사 또한 그런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어쩐지 나 또한 같은 장면 속에서 같은 공기를 숨 쉬는 기분이 든다. 비가 내리는 날의 소리와 습도, 한 여름의 그늘을 걸으며 느끼는 열기와 시원함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그 기분을 조금 더 길게 이어가고 싶어서 작중 등장하는 아라레 과자를 구매해 하나씩 집어먹으며 리뷰를 쓰는 중이다.
<이형의 것들>에 실린 이야기들은 모두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딱 떨어지게 설명되지 않는 기묘함. 하지만 오싹하고 섬뜩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독자는 이야기의 중심화자들과 비슷한 거리에서 이계와 현상계를 바라보며 어쩐지 둘 모두가 아득하게 먼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중 어느 쪽이 더 멀게 느껴지는지는 평소 그가 어디에 더 관심을 두었느냐에 달린 일일지도 모른다.
이질감이란 평소 자신이 친숙하게 느끼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만 감각할 수 있는 낯섦이다. 작가는 매끄럽고 수려한 솜씨로 일상적이고 친숙한 분위기 속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마지막 문장을 읽은 후에도 잠시 더 생각해야만 찾아오는 기묘한 위화감을 안배해 두고서.
발췌문을 다시 읽으며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붉은 창>이다. <우중괴담>의 <예고화>가 떠올랐기 때문은 아니다. 불타는 듯한 노을, 이계와 뒤섞이는 '개와 늑대의 시간', 또는 황혼의 시간(かたわれ時). 그 자체가 주는 분위기와 행간에 숨은 화자의 마음이 인상적이어서가 아닐까. 어째서 옆 집의 그녀가 화자에게만 모습을 드러내었는지를 상상해 보다 보면 마음 한켠이 쌉싸름해진다.
좋았다.
- 시선을 아득히 던져 봐도 끝 간 데 없이 편평한 풍경이다.
농로 하나를 가운데 두고 오른쪽이나 왼쪽이나 앞이나 뒤나 까마득히 멀리까지 밭이 이어진다. 곳곳에 전신주가 서 있지만 탁 트인 풍경 속에 있는 탓인지 시야에 거의 걸리지 않는다.
밭과 밭 사이로 좁은 길이 구불구불 뻗어 있다. 수십 킬로미터 전방에 푸르고 나지막한 산이라기에는 애매한 융기가 나란히 솟았는데, 맑은 하늘 아래 얕은 능선은 주변 풍경에 녹아들며 사라지는 것처럼 희뿌옇다.
밭에서 일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차량도 보이지 않는다. 고양이 한 마리 돌아다니지 않는다.
- 눈부신 초록색 풀이 농로를 따라 빽빽이 자라고 붉은 클로버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광활한 농지 여기저기에 엇비슷해 보이는 작은 잡목림 몇 군데가 동글동글 자리 잡고 있다. 솔숲이다.
왜 농지 한가운데 작은 잡목림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예전에 어른들은 '고분터'라고 했다. 옛날 이 근방에서 크고 작은 고분이 많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발굴된 고분터에 자연스럽게 잡목림이 생겨났지만, 굳이 벌채할 필요가 없어 그냥 두었던 모양이다. 무연고 묘라는 설도 있지만 주로 이 지역 아이들이 지어낸 근거 없는 풍문에 불과하다. 어느 숲을 살펴봐도 무덤의 흔적이 없어 아무도 그 풍문을 믿지 않았다.
- 요즘 같은 철이면 작은 잡목림 가운데 몇 곳에는 어김없이 매미 떼가 모여든다. 그러고 보니 매년 5월 말부터 6월 중순까지 이 소리를 들었지, 하며 그리운 마음으로 떠올렸다. 벌써 몇 년째 듣지 못했는지, 어릴 때는 맴맴 소리를 들어도 매미 잡으러 갈 생각밖에 없었는데.
- 그리운 봄매미가 지금 미친 듯이 울고 있다. 잡목림은 그리 넓지 않아도 방대한 매미가 모이므로 우는 소리가 굉장하다. 끊일 새 없이 이어지는 무수한 개구리들의 울음소리와 닮았다. 봄매미는 몸집이 작고 날개가 투명한 아름다운 매미다. 몇 마리만 울 때는 쓰르라미와 비슷한 애절한 소리가 되지만 거대한 집단을 이루면 가련한 모습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볼륨을 만든다. 이 나무 저 나무에서 경쟁이라도 하듯 울어 대면 그야말로 대합창이 된다.
- 그는 매미들의 합창에 귀를 기울이며 느린 걸음으로 오래된 한 줄기 농로를 걸었다. 매미 소리 사이로 근처 나무에서 지저귀는 다양한 들새 소리도 섞인다. 먼 산을 지나가는 바람이라고도 할 수 없는 공기의 술렁임이 느껴진다. 우러르는 눈에 파란 하늘이 비친다. 새소리는 여기저기서 들리는데 하늘을 나는 새는 보이지 않는다.
지구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다. 그런데 조금도 외롭지 않다. 기분 좋은 풍경이다. 기분 좋은 길을 걷고 있으니까. 아무도 없다는 것이 이토록 기분 좋은 일임을 그는 잊고 있었다.
- 지금 걷고 있는 외길은 어디로 이어지지? 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험 삼아 오랜 기억을 헤집어 보았다.
- 모호하다. 마치 기억에서 그 부분만 깨끗이 누락된 것 같다.
하지만 아무렴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온도와 습도도 딱 좋았다. 햇살은 강하지만 땀이 날 정도는 아니고 피부에 닿는 공기는 더없이 상쾌했다.
이대로 시간을 망각한 채 어디까지라도 계속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싶었지만 그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 돌아가는 급행열차 표를 내려올 때 미리 사 두었다. 하루 네 편밖에 없는 특급 열차다. 오후 3시 38분 발 열차를 놓치면 완행으로 주요 역까지 가서 환승하거나 밤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 특급열차를 타는 수밖에 없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도쿄 집에는 심야가 지나서야 도착하고 만다.
내일은 아침 일찍 중요한 회의가 잡혀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출근해야 한다. 회사 업무에 쫓기며 악착같이 일만 하는 매일이었다. 업무량이 많고 책임져야 할 일뿐이어서 좀처럼 당당하게 휴가를 쓰지 못했다. 토요일과 일요일도 온전히 쉬지 못할 때가 있다.
한데 어머니 유품을 정리한다는 이유로 평일에 이틀이나 휴가를 썼다.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는 좀처럼 누리기 힘든 일이다. 요행이라고 할까.
- 그의 직속 상사도 1년쯤 전에 모친을 병으로 여의었다. 모친을 자택으로 모시고 공공 서비스를 통해 간병했다는 독신의 상사는 부하의 부모가 병에 걸렸거나 타계했을 때만큼은 아량을 보여주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사소한 일로도 부하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고 툭하면 소리를 질러 젊은 신입을 울리기도 하는 상사지만, 부하 입에서 부모, 질병, 간병, 죽음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살갑게 대해 준다.
'안 그래도 유품 정리는 쉽지 않은 일이지, 게다가 외아들이지? 할 일이 산더미 같을 거야. 좋아, 시간을 충분히 내서 다녀와, 회사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심으로 그를 동정하고 응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계 문자판에 햇빛이 난반사되었다. 너무 눈이 부셔 문자판의 바늘이 보이지 않는다.
자세를 바꾸고 실눈으로 다시 시각을 확인하려고 했다. 그 직후였다. 몸속에 정체 모를 차가운 무언가가 지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손목시계에서 눈길을 떼고 조심스레 얼굴을 들었다. 조금 전까지 그토록 시끄럽게 울어 대던 봄매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 봐도 매미 소리는커녕 새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람 소리도 잦아들고 공기의 흐름도 멈춘 듯하다. 마치 텔레비전 리모컨의 무음 버튼을 눌렀을 때처럼.
- 봄매미 소리가 어쩌다 그쳤을 뿐인데 뭘 이렇게 겁을 먹나. 별일 아냐, 우연이야, 하며 그는 스스로를 달랬다. 필시 매미 떼를 위협하는 커다란 새가 가까이 날아가는 바람에 겁이 많은 매미가 일제히 소리를 멈추었겠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이미 보고 있었다.
걸어온 길이 아니라 앞으로 가고자 하는 길, 똑바로 뻗은 농로 저쪽에 사람 그림자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너무 멀어서 까만 콩알처럼 보였지만 이내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보였다.
- 작고 하얀 양산을 들고 있고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기모노는 매우 연한 갈색, 오비도 비슷한 색깔이며 헐렁하게 입어서 가슴께가 조금 깔끔하지 못하다. 그런 세세한 것까지 알아볼 수 있었던 까닭은 여인이 걷는 속도가 이상하게 빨라서 이쪽으로 확확 다가온 탓이다.
다만 미끄러지듯 품위 있게 걸어서인지 아니면 착시 때문인지 전혀 잰걸음으로 걷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여인은 어느새 그의 눈앞에 와 있었다.
양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발에는 조리를 신었지만 버선은 신지 않은 맨발이다. 나이는 알 수 없다. 가늘고 작은 체구를 가진 여인이었다.
입고 있는 기모노도 오비도 매우 낡아 보인다. 박물관 같은 곳에 전시된 낡고 헤진 기모노 같다. 그런데 작은 양산만이 새것처럼 하얗다.
- 반야면을 쓴 얼굴을 똑바로 정면으로 향한 채 여인이 조용히 그와 스쳐 지나간다.
그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아 온풍기를 틀어 놓고 제일 높은 온도로 설정한 고타쓰에 반신을 집어넣은 채 웅크린 몸은 부패가 시작된 상태였다. 사인이 명확하지 않아 부검해 보니 급성심부전으로 사후 나흘이 지난 상태였다.
- 역시 당신이 보러 갔어야 하는 건데. 왜 내가 그걸 발견했어야 하는데? 왜 나야? 보고 싶지 않았어. 평생 잊히지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글썽일 때 그는 진심으로 동감하며 미안해했다. 설마 어머니가 돌아가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 염려했었다. 아내를 보내는 게 아니었다. 역시 직접 갔어야 했다.
다만 아내의 심정은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 왜 이런 식으로밖에 말하지 못할까, 사람이 죽었지 않은가, 당신 하고는 원만하지 못한 시어머니였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당신한테 요만큼도 신세를 진 적이 없지 않은가, 불쌍하다는 말 한마디쯤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며 아내를 질책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애초에 부부 금슬이 좋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더 나빠진 것 같았다.
- 출장에서 막 돌아온 참이라 피곤했다.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사과 잘 받았다고 전하는 일이야 아무렴 어떠랴. 빨리 목욕을 마치고 맥주를 마시고 싶었다. 그는 아내에게, 내일이라도 내가 전화해 볼게,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튿날 구니히코는 깜빡하고 말았다. 회의, 상담, 외근, 다시 회의... 의 연속이라 점심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 하루였다.
- 아내에게 미안하지만 어머니 집에 가서 안부를 확인해 주지 않겠느냐고 부탁했을 때 레이코는 노골적으로 언짢은 표정이 되었다.
"내가? 혼자?"
"내가 갈 수 없어서 그래. 중요한 회의와 연수회가 매일 잡혀 있거든. 빠질 수가 없어."
"이번 주말에 당신 혼자 가 보면 되잖아."
"주말까지 기다리라고? 연락이 안 되는 상황인데?"
"경찰에 부탁하면 돼. 그게 더 빠르잖아?"
귀찮은 일이 생기면 주변에 부탁할 뿐 결코 직접 움직이려 하지 않는 레이코의 평소 성격이 엿보여서 구니히코는 내심 짜증이 났다.
"치매라면 몰라도 아직은 차를 끌고 여기저기 다닐 만큼 건강하셔. 그런데 며칠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경찰에 신고를 해? 더군다나 평소 자주 전화 통화를 한 것도 아닌데. 경찰 신고는 일러. 그전에 우리가 해 볼 수 있는 일이 많아."
레이코는 문득 표정을 없애고 그를 힐끗 노려보았다.
"당신, 꼭 이럴 때만 여유로운 척하더라."
- "미나가 열을 펄펄 내며 경련을 일으켰을 때도 그랬잖아. 내가 놀라서 당신 휴대폰으로 연락했는데 계속 받지도 않았지. 겨우 받았다 싶어서 미나가 위험하다고 알려줬을 때 당신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 태평한 목소리로, 괜찮아,라고 했잖아. 대체 뭘 근거로 괜찮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어. 당신은 그저 그런 일에 말려드는 게 귀찮았을 뿐이야. 딸이 열이 펄펄 나는 경련을 일으키든 괜찮다는 말로 얼버무려서 다른 사람한테 떠넘기고 싶어 했잖아."
오래전 이야기였다. 딸 미나가 세 살인가 할 때니까 14, 15년 전이다.
- 구니히코가 퇴근길에 종종 들르는 주점에 모처럼 마음이 잘 맞고 외모도 딱 취향인 종업원이 들어와 그만 깊은 사이가 되었다. 상대는 그때 겨우 스물둘이었다. 그녀는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오빠 같다'며 응석을 부렸고 곧 그보다 더 적극적이 되었다.
그쯤에서 그쳤으면 좋았을 텐데 마침내 그녀는 상대가 유부남이라며 한탄하기 시작했다. 구니히코가 아내나 딸 이야기를 할 때마다 '우리는 만나서는 안 되었던 거네'라며 눈물을 지었다.
그런 그녀가 귀엽다가도 조만간 헤어질 때는 몹시 귀찮아지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관계를 끊지 않고 질질 끈 까닭은 역시 나름의 매력이 있는 여자여서 놓치기가 아까웠기 때문이다.
- 미나가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는 아내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그녀와 시부야의 싸구려 호텔 객실에 있었다.
이러다 딸이 죽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 졸도할 지경이었지만 옆에 여자가 있는 만큼 애써 태연한 척했다. 그 결과가 "괜찮아"라는 참으로 얼빠진 대답이 되고 말았다.
- "또 그 얘기." 그가 내뱉듯이 말했다. "이젠 좀 그만하지."
- 아내를 향해 과거의 외도를 다시 사죄하는 남편이라는 설정을 반복한다. 사죄하고 사죄하고 또 사죄하다가 인생을 마치겠지. 이것이 내 인생인 거다.
"진짜야." 그는 내심 폭발하려고 하는 감정을 억제하며 말했다. 아내한테 폭발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일상이 망가져 버린다.
- 부모가 모두 교사였지만 아들 구니히코가 밖에서 놀기만 하고 공부를 소홀히 해도 뭐라고 귀찮게 잔소리하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는 자기 세계에 잠겨 조용히 책을 읽거나 상념에 빠지는 일이 많았고, 통통하고 명랑한 어머니는 아들의 생활에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농로 옆 집... 그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그 집에는 나쁜 기억이 전혀 없었다. 생각나는 것은 계절과 함께 변해 가는 자연 풍경, 바람 소리, 비가 개면 밭에서 풍겨오는 흙냄새, 여름날 오후 툇마루에서 간식 삼아 먹던 토마토의 맛, 덤불에서 무수한 벌레들이 우는 소리, 아이들의 환호... 그런 것들이다.
- 다만 잊을 수 없는 불가해한 기억도 하나 있었다.
그가 농로에서 놀다 왔다고 하자 어머니는 마뜩찮은 얼굴로 조금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었다. 어린 그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 어머니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들을 보며 말했다. "아무튼, 농로에서는 멀리까지 혼자 가면 안 돼. 알겠니?"
- 이상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때 한 번 뿐이었다. 그 후 어머니는 두 번 다시 그 말을 꺼내지 않았고 그도 묻지 않았다.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매사 빠릿빠릿 움직이고 걱정거리도 대범하게 웃어넘기며 어떤 일이든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어머니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 그는 의아했다.
어머니는 논밭 가운데 점재해 있는 잡목림이 무연고 묘터라는 동네 아이들의 풍문을 늘 웃어넘겼다. 학교 뒤 벼랑에 있는 동굴에서 여자 유령이 나타난다거나 체육관에서 예전에 목을 맨 잡무담당 아저씨가 괴로워하는 목소리가 들린다는 괴담에도 어머니는 혹하지 않고 "어두운 동굴이어서 착시가 일어나기 쉬울 뿐", "체육관은 소리가 울리니까 사람 목소리도 그렇게 들렸을 것"이라며 여유롭게 웃는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농로에서는 멀리까지 가지 말라고, 농로에서 혼자 놀지 말라고 한 것은 아무도 없는 농로는 여러 모로 위험하다, 이상한 자가 나타나면 큰일이라는 의미였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그런 대화를 나눈 기억조차 점차 잊혀졌다.
- 한데 구니히코가 대학에 입학한 직후 아버지의 여자 문제가 터졌다.
상대는 아버지가 근무하는 사립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20대 후반의 교사로 3년 전에 부임했다고 한다. 곱게 자란 탓인지 그냥 둔감한 탓인지 아버지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는데, 마침 비에 젖어 봉투가 찢어진 탓에 어머니가 내용물을 읽었고, 그래서 아버지의 외도가 너무나 쉽게 알려지고 말았다.
같은 직장이므로 연애편지 정도는 일터에서 건네주면 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아내인 나에게 사실을 알리고 싶었던 게지, 정말 가증스러운 여자네,라고 어머니가 울면서 아버지에게 소리쳤고, 구니히코는 다른 방에서 가만히 듣고 있었다.
어머니가 읽은 편지에는 음악회를 보고 돌아오다가 히비야공원 벤치에서 첫 입맞춤을 하던 일, 하코네 온천에 함께 묵은 일, 만나지 못하는 날에는 만나지 못하는 괴로움에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내용이 자못 로맨틱한 투로 장황하게 적혀 있었고, 덤으로 도쿄역에서 출발하는 도카이도 신칸센 지정석 차표까지 동봉되어 있었다. 행선지는 교토였다.
- 그리고 숨 막히는 정적이 집 안의 일상을 채우는 공기가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부모가 어떻게 타협했는지,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아버지가 음악교사와 무사히 헤어졌는지, 그는 묻지 않았다. 자기 인생을 사느라 바빴으니까. 부모를 걱정하며 마음고생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 하지만 아버지의 외도를 계기로 아버지나 어머니나 별장이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듯했다. 가족이 그 집을 화제에 올리는 일도 없었다.
구니히코 역시 농로가 멀리까지 내다보이고 나무에 둘러싸인, 여름이면 뜰에 토마토, 오이, 가지가 열리던 저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집이 있다는 사실을, 그 옆으로 난 기나긴 농로가 세상 끝까지 이어질 것처럼 보였던 풍경을 차차 잊고 말았다.
-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직후 어머니는 구니히코에게 "나는 그만 그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라고 말했다. 농로 변 집으로 돌아가 조용히 살고 싶다면서.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구니히코는 막 업무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고, 레이코를 만나 기분 좋은 교제를 시작한 참이었다. 남편을 여읜 어머니가 앞으로 어떤 인생을 보내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하길 바랐다.
- 이사를 하겠지만 특별히 거들 것은 없다,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어머니 말처럼 정말로 전혀 거들지 않았더니 어느 날 어머니에게 연락이 와서 벌써 여기에 자리 잡았으니 그리 알라고 했다.
목소리가 밝았다. 죽어가는 아버지를 내려다보며 꼴좋다,라고 말하던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 ... 구니히코는 지금 농로에 꼼짝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앞을 바라보고 있다. 옛 기억의 단편들이 쉴 새 없이 머릿속을 어지러이 오가고 있다. 또렷하게 살아나는 기억도 있고 전혀 의미를 알 수 없이 희뿌옇게 지나가 버리는 기억도 있다. 숨이 몹시 답답하다.
- 유품정리는 담담하게 마쳤다. 낮에는 유품을 정리하고 해가 떨어질 즈음부터는 냉장고에 넣어 둔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식사는 부엌 여기저기서 찾아낸 인스턴트 식품이나 냉동실에 있던 식재로 간단히 마쳤다. 목욕물 데우기가 귀찮아 샤워만 하고 어머니 집 서랍에 있던 손님용 담요를 깔고 잤다. 이불에서 살짝 곰팡내가 났다.
그 집에서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도 어머니처럼 매사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성향이었다.
- 어차피 유품 정리는 서두를 필요가 없다. 레이코나 미나가 도와줄 리도 없으니 이곳에 올 사람은 자기밖에 없었다.
나 편할 대로 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이틀째를 보냈다.
미닫이 벽장이나 옷장 서랍을 열 때마다 그리운 기억이 살아나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특별히 감상에 빠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순리대로 부모가 먼저 죽었을 뿐이다. 인생은 이런 거다,라고 그는 생각했다.
- <얼굴>
- 도착할 때부터 가랑눈이 흩뿌리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추위는 그다지 느껴지지 않아요. 이 근방은 신슈에서도 북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눈이 내리면 습도가 높아져 도리어 추위를 누그러뜨리지... 예전에 쓰치야 씨가 그렇게 가르쳐 준 적이 있는데, 정말 그대로입니다.
겨울 숲 냄새가 납니다. 달고 찬 민트 같은 냄새입니다.
- 그로부터 15년이나 되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나는 현실에서 일어난 일과 상실의 슬픔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돌이켜볼 때마다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을 뿐입니다.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뒤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구제할 길이 없는 인간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합니다.
- 산장 현관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에도 빨간색 노란색 낙엽이 곱게 염색된 옷감 한 필처럼 소복이 쌓여 있습니다. 그곳을 지르밟으며 걷고 호흡을 가다듬고 침착하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산장 앞까지 도착해 조심스레 건물을 둘러보았습니다.
이내 만감이 밀려왔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그 뜨거움이 목까지 차올라 와 나도 모르게 밭은기침이 터지려고 합니다. 무릎이 꺾이며 무너져 땅바닥에 양손을 짚은 채 짐승이 짖듯이 울어버리고 싶어 집니다.
아아, 하고 나는 한숨 섞인 소리를 토했습니다. 양손으로 입을 막았습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산장은 기적처럼 전혀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현관문이 열리고 쓰치야 씨가 "오오" 하며 조금 쑥스러워하는 얼굴을 내밀 것 같습니다.
- 쓰치야 씨는 신슈에 있는 텔레비전 방송사에서 인기 있는 주부 프로그램의 제작 프로듀서로 일했습니다. 밝고 건강한 사람이며, 특별히 아웃도어를 즐기는 타입은 아니었습니다. 골프도 낚시도 하지 않았지만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고 숲으로 에워싸인 이 조용한 산장에 친한 친구를 초대해서 술잔을 기울이거나 누군가가 치는 기타에 맞춰 노래하거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혼자일 때는 책을 읽거나 준비해 온 영화를 감상하는 것을 더없이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 마을 도로에서 숲으로 뻗은 기나긴 비포장 외길의 막다른 곳에 있어 주위에 민가가 한 채도 없습니다. 그 앞으로는 길다운 길도 없고 잡목림만 끝없이 이어질 뿐입니다. 잡목림을 조금 걸어가면 냇물이 흘러서 비가 많이 내린 다음이면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 게다가 오늘 구입해 두면 내일부터 외출할 필요가 없으니까 산장에서의 한때를 충분히 즐길 수 있겠지요.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확 밝아졌습니다.
- 열쇠고리는 미사키와 둘이서 오키나와에 놀러 갔다가 쓰치야 씨에게 줄 선물로 구입했습니다. 은도금은 거의 벗겨져 버렸지만 15년 전과 다름없이 닻 모양의 열쇠고리가 달린 열쇠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이 반갑고 그리워 가슴이 설레더군요.
아유미 씨는 이런 점까지 세세하게 마음을 쓰는 사람입니다. 아유미 씨도 역시 시아버지 쓰치야 씨를 많이 좋아했습니다. 급사한 쓰치야 씨를 위해 쓰치야 씨가 몹시 사랑한 이 산장을 원래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닻 모양의 열쇠고리도 남겨 두었겠지요. 아유미 씨의 따뜻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져 나는 가슴이 찡했습니다.
- 설레는 가슴으로 손잡이를 가만히 당기자 친숙한 산장 냄새가 콧구멍을 살살 간질였습니다. 뭐라고 형용하기 힘든 편안한 냄새. 누군가 조용히 살고 있는 집에 들어가면 어김없이 풍겨 오는 독특한 냄새, 겨울철 등유 난로 같은, 채소 데칠 때 부엌에 서리는 김 같은, 잘 마른 담요 같은... 그런 냄새.
아유미 씨가 바로 얼마 전에 이곳에 왔던 걸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며칠간 머물렀던 걸까. 그런 말은 전혀 없었는데.
난방은 가동되지 않았을 텐데도 집 안은 푸근하고 따듯해 서먹서먹한 느낌이 전혀 없고 마치 나를 위해 따뜻한 식사와 깨끗한 잠자리, 목욕 준비가 전부 알뜰하게 갖춰진 느낌이었습니다.
- 업무가 끝나면 종종 식사나 술자리를 함께했는데, 그러다가 사장과 자연스럽게 연애 관계가 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사장은 처자식이 있는 사람이어서 내 마음은 늘 불안했습니다. 소소한 일로 질투하고 시기심에 사로잡혀 사장을 곤란하게 만든 적도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저런 볼품없는 아저씨의 어떤 점이 좋아?라고 물을지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연애 상대로는 쓰치야 씨가 더 어울렸죠. 이혼한 독신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내가 진지하게 사랑한 사람은 사장이지 쓰치야 씨가 아니었습니다. 쓰치야 씨를 많이 좋아했지만 연애 상대는 아니었어요. 쓰치야 씨는 어디까지나 나의 '이상형 아빠'였습니다.
- 미사키에게는 사장과의 관계를 전부 이야기했습니다. 미사키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웃거나 무시하지 않고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주었습니다. 그럴듯한 충고나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촌평 따위 없이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종종 손을 뻗어내 팔과 어깨를 어루만지며, 그래, 알아, 너무 잘 알아,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때로는 재치 있는 농담으로 웃겨 주었지요.
미사키는 그런 친구였습니다. 미사키처럼 미덥고 서로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친구도 없었습니다. 내 인생의 단 한 명이었던 친구였어요.
- 사장과의 관계는 꽤 지속되었지만 만나는 횟수가 점차 뜸해지다가 어느 순간 사그라들었습니다.
지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으며 대화할 수 있고 설사 단 둘이 술을 마시러 가더라도 과거 이야기를 농담 삼아 꺼낼 수도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도 그 회사에 남아 있을 수 없었겠지요.
나는 이대로 사장 밑에서 일하며 사장과 함께 늙어 갈 것 같습니다. 사장이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서 더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면 나도 함께 은퇴하겠지요. 그때까지는 상실의 슬픔에 흔들리는 일 없이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 나는 산장 주방에 있는 냉장고를 열어 보았습니다. 특별한 것은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아주 가끔씩만 이용하는 산장이므로 당연한 일입니다. 거기 들어 있던 것은 생수 두 병과 캔맥주 하나, 유리병 올리브, 역시 유리병 딸기잼, 간장병에 담긴 간장이 전부였고, 뭐든 요기가 될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냉장고는 비어있었습니다.
- 주방의 작은 창문 너머로 흩날리는 눈이 보였습니다. 아까보다 눈발이 강해진 것 같습니다. 오늘 밤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려는 걸까요? 차량은 스노타이어로 바꾸어 놓았고 사륜 구동이므로 눈이 쌓이더라도 불안할 일은 없지만 눈 쌓인 도로를 운전하자면 신경이 많이 쓰입니다.
서둘러야겠네, 하며 나는 마음을 다잡습니다. 마을에 나가 장을 보고 그 참에 어디에서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오자. 그러면 오늘 저녁은 짓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서두르고 싶었습니다.
- 휠체어를 탄 쓰치야 씨와 그 뒤에서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있는 미사키였습니다. 쓰치야 씨는 무릎 아래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미사키의 하반신도 휠체어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나에게 던지는 시선은 분명히 느껴집니다. 심해에 있는 상어처럼 차고 무표정한 눈입니다. 화를 내는 것도 경멸하는 것도 증오하는 것도 아닙니다. 굳이 말한다면 슬픈 눈. 그리고 그 슬픔 속에는 나를 오싹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깃들어 있습니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왜?
그렇게 생각한 순간 차가운 얼음이 등에 닿은 것 같아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차량을 향해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 미사키의 표정이 못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차갑고 데면데면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을까. 적의도 증오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 무표정에는 예전에 우리가 공유하던 따뜻한 우정과 교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
- <숲 속의 집>
- 점심때가 되었는데 밥상 차리기가 싫었다. 애초에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편의점에 갔다가 사다 둔 쌀과자가 생각났다. 짭짤한 것이 당겼다. 가스미는 미지근한 바람을 보내는 선풍기 앞에 앉아 느릿느릿 과자 봉지를 열었다.
과자의 딱딱한 부분을 어금니로 힘껏 깨물었다. 순간 기묘한 감각이 입안에 번졌다. 쌀과자 아닌 다른 뭔가가 혀 안쪽으로 굴러들어가 무심코 삼켜 버릴 뻔했지만 급하게 뱉어냈다.
은색 보철물이 무릎 위로 톡 떨어졌다. 보험이 적용되는 팔라듐 합금 크라운으로, 3년쯤 전에 도쿄의 치과에서 씌운 것이었다.
- 오른쪽 어금니를 혀끝으로 조심조심 더듬어 보았다. 함몰된 구멍과 꺼칠꺼칠한 치아의 일부가 혀끝에 느껴졌다. 통증은 없지만 함몰이 심했다.
남편에게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래 심신이 다 병들었다. 식사도 만족스럽게 하지 못할 때가 많아서 어느새 잇몸까지 빠르게 야위어 버렸는지 모른다. 쌀과자를 씹는 정도로 이렇게 맥없이 크라운이 빠져 버리다니, 어이가 없었다.
- 벗겨진 크라운을 주방 싱크대에서 조심스레 씻어 낸 다음 화장지로 물기를 닦고 작은 비닐봉지에 담았다. 버릴 생각은 없었다. 혹시 이대로 재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혼 후 낯선 지방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참이라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다.
- "그래, 그럴까 생각했는데" 하고 가스미는 작은 거짓말을 했다. "마침 자전거 좀 타 볼까 하던 참이었거든. 자전거 타다가 우연히 발견했어, 그 치과. 별로 아프지도 않고, 벗겨진 걸 다시 씌우는 것뿐이니까 여기도 괜찮겠다 싶었지."
"그래? 잘했네. 좋았다니까 다행이야. 아, 갓짱, 내 잔에도 맥주 좀. 이제 감자 샐러드만 내오면 끝이니까."
"오케이" 하며 가쓰히코는 캔맥주를 따서 준코 잔에 맥주를 따랐다.
가스미는 준코를 거들려고 주방으로 가서 감자 샐러드를 담은 볼과 작은 접시를 들고 식탁으로 돌아왔다. 벌써 햄버거를 먹기 시작한 유키를 바라보며 가쓰히코, 준코와 함께 풋콩과 모로큐 오이를 된장에 버무리거나 곁들인 것, 냉두부 등을 안주로 맥주를 마셨다. 그렇게 평소와 다름없이 화기애애한 저녁 한때를 보냈다.
- 매일 저녁이라도 좋으니까 고민하지 말고 와,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저녁마다 가쓰히코 집에 찾아갈 수는 없다. 가쓰히코가 집에 있을 때만, 이라고 가스미는 정해 두고 있었다. 그래도 혼자 보내는 긴 저녁을 견디지 못하고 어느새 걸음이 이 집으로 향하고 마는 날도 적지 않다.
역시 부담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이 부부와 함께하면 잊었던 안식을 되찾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가스미의 처지를 말없이 배려해 주는 부부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이혼 이야기, 힘겨웠던 도쿄 생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질문도 받아 보지 못했다. 부부는 가스미에게 요즘 상태가 어떠냐고 묻는 일 없이 특별할 것도 없고 부담도 없는 즐거운 화제를 제공해 주었다.
- "어, 그래, 그렇게 하지."
오뎅 가게는 가스미가 일하는 잡지사에 가까운 전차 역에서 도보로 5, 6분 걸리는 곳에 있었다. 회사 동료와 퇴근길에 들른 적이 있다. 큰 도로에 면한 주상복합빌딩 지하인데, 찾기 쉬운 곳이므로 가게에서 바로 만나기로 하고 통화를 마쳤다.
- 가쓰히코는 그렇게 말하고 이미 마시고 있던 맥주를 단숨에 비웠다.
"그럼 가스미는 뭘 마실래? 청주?"
"일단 맥주로 시작할게."
가스미는 이미 안면을 튼 가게 주인에게 생맥주를 주문했다. 가쓰히코는 카운터 안쪽을 들여다보고, 나는 무랑 치쿠와랑 두부동그랑땡 주세요. 그리고 데운 청주 한병, 이라고 말했다. 나는 한펜(다진 생선살에 마 등을 갈아 넣고 반달형으로 쪄서 굳힌 식품), 곤약, 두부동그랑땡, 이라고 가스미도 주문했고, 새로 나온 맥주와 청주로 가볍게 건배했다.
- "그래서, 지금부터가 중요한데, 해체를 맡은 업자가 전화로 말하기를 그 해체 현장에서..." 하고 가쓰히코는 잠깐 뜸을 두었다. "... 이상한 게 나왔다는 거야."
"뭔데, 그게?"
"민가주택 철거 작업이었어. 대개 그런 민가는 쉽게 철거할 수 있어. 요즘은 해체한 뒤 가연성 폐기물과 불가연성 폐기물을 분리해야 하니까 예전보다 훨씬 시간이 걸리지만, 그래도 빌딩 해체하고는 차원이 다르지, 주택 해체는 힘든 작업이 아니야. 그런데..."
"......?"
"해체하던 주택 안에, 콘크리트로 튼튼하게 세운 벽이 있더래. 목조 주택인데 이상하다 싶어서 중장비로 그 벽을 쾅쾅 때려 부쉈다는데, 벽 너머로 작은 방이 나오더라는 거야."
- "부부가 운영하고 있다고 가스미가 말했었지?"
"부부인지 아닌지 물어본 게 아니니까 분명하진 않지만, 부부 같았어. 원장과 그 부인. 부인 쪽이 치위생사인 것은 틀림없어. 실제로 옆에서 치료를 거들었고."
"원장과 치위생사라는 건 맞을 거야. 하지만 그들은 부부가 아니었어. ...피를 나눈 오빠와 누이동생이었어."
가스미가 침묵하고 있자 가쓰히코는 시선을 내리고 뒷머리를 북북 긁었다.
"두 사람 다 독신이었대. 독신 상태로 함께 치과를 시작해서 함께 진료했던 거지. 그러다가 동생이 오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런 관계였다는 거지. 점점 불러오는 배를 감추고 흰 가운을 입었겠지만, 환자들 사이에 소문이 돌고, 그러다가 곧 동생이 진찰실에 나타나지 않게 되었대. 다음에 나타났을 때는 이미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두 사람 모두 진료에 열심이었다는 거야. 하지만 동생이 대체 어디서 출산했는지, 태어난 아이는 어디로 갔는지, 낙태했는지 아니면 누구에게 맡겼는지 아무도 몰라."
- 쓴물이 가스미의 목구멍으로 치받혔다. 심술궂게 가쓰히코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갓짱도 참, 꼭 직접 본 사람처럼 말하네.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지?"
"장인 장모가 작심하고 말씀해 주신 덕분이지. 당시 그곳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건이었대. 물론 준코는 막 태어난 때여서 알 길이 없었고 나도 몰랐지. 하지만 전부터 동네에 살던 사람들은 알고 있었고, 그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로 통했다는 거야. 그러다가 시간이 많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서 이제는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다는 거지."
가스미는 차분함을 잃고 카운터 안쪽에 있는 주인에게 데운 청주 한 병과 물을 주문했다. 주인이 먼저 내준 물을 꿀꺽꿀꺽 마셔보았지만 가슴속에서 빠르게 비대해지는 공포는 멈출 줄 몰랐다.
- 미지근하게 데운 청주가 나왔다. 가스미는 술병에 그려진 파란 갓파 그림을 쳐다본 채 얕은 호흡을 거듭하며 말없이 있었다.
- <히카게 치과의원>
- 일어날 기미가 없는 것이 의아했다. 일요일 아침은 대체로 늦게 일어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시간까지 누워 있다니. 나는 침실 문을 열고 밝은 목소리로 불렀다.
남편은 이불을 머리 위까지 뒤집어쓴 채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달려가 이불 위에서 세게 흔들었지만 반응이 없었다.
- 지주막하출혈에 의한 급사로 판명되었다. 최소한 두 시간 전에라도 발견했다면, 하고 검시를 맡은 의사가 말했다. 즉시 입원했다면 기적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면서. 그 말을 듣고 흐느껴 울었다.
- 활짝 갠 아침이었다. 나는 밀린 빨래를 하려고 일어나자마자 세탁기부터 돌렸다.
간밤에 귀가한 남편은 왠지 머리가 쑤신다며 두통약을 먹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피곤한 모습이라 푹 자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세탁기 소리가 침실에 들리지 않도록 세면소 문을 꼭 닫아 두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집안일을 대강 마치고 두 사람분의 아침 식사를 준비한 다음 신문을 보며 남편이 깨어나 나오기를 기다렸다.
- 나는 두고두고 자책했다. 좀 더 빨리 깨우러 갔다면 이변을 알아챘을 텐데. 한가롭게 빨래를 널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밥을 짓고 홍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조간을 훑어보던 스스로를 죽이고 싶었다.
내가 좀 더 일찍 눈치를 챘더라면. 간밤에 두통이 평소와 달리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라면. 그랬다면 남편은 지금 살아 있었을지 모른다. 나의 둔감함이 그를 죽이고 말았다...
하지만 누구 탓도 아닌 일로 그렇게 자신을 몰아세우고 눈물을 지으며 지낸다고 남편이 살아 돌아올 리 만무하다.
-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반쯤은 병자 같은 모습이지만 숨은 쉬고 있다. 먹을 게 떨어지면 장을 봐야 하고 납부할 것이 있으면 입금하러 가야 한다. 혼란스럽다고 계속 눈물로 세월을 보낸다면 앞으로 나갈 수 없게 된다... 정신을 다잡고 어렵게나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된 것도 시어머니나 남편의 직장 동료들, 친정부모의 도움을 받아 사십구재를 무사히 마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5년 전 내가 서른다섯, 남편은 마흔이 되던 해, 우리는 결혼했다. 두 사람 모두 초혼이었다.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지내던 시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당신 집을 우리에게 내주었다. 오래 살아 온 집이라 떠나기 힘들지만 역시 여기저기 하자가 생기게 마련인 낡은 주택은 관리하기가 번거롭다, 무엇보다 겨울에 너무 추워 혈압이 높은 나한테는 맞지 않는다, 이제 이 집은 앞으로 살날이 창창한 너희에게 맡기고 노후에는 교통이 편한 곳에 살고 싶다며 시어머니는 아끼는 수컷 포메라니안과 함께 역전에 새로 들어선 밝은 아파트로 주저 없이 이사했다.
- 복도고 기둥이고 전부 까만 광택이 났다. 습기가 쉽게 차는지 환기에 신경 쓰지 않으면 장마철 같은 때는 어디서부터랄 것도 없이 곰팡이 냄새가 풍겼다. 나무들이 울창한 정원은 정원사에게 아무리 전정 작업을 맡겨도 금세 가지와 잎이 자라서 여기저기 그늘을 만들었다.
현관 옆에 응접실로 써 온 서양식 방이 한 칸. 복도를 따라 다다미방이 세 칸. 독립된 널찍한 서양식 방이 한 칸, 서양식 방과 복도 맞은편에 클로젯을 겸한 작은 마루방이 한 칸. 주방은 널찍하고 중앙에 놓은 식탁에서 식사를 할 수도 있지만 겨울에는 추워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품격은 있지만 청소도 힘들고 유지 관리도 늘 신경을 써줘야 하는 집이었다.
- 결혼하면 시부모를 모셔야 된다고 여겼던 터라 마음이 무거웠었다. 낡은 집을 소중히 지키며 살아온 노인이 살림도 제대로 못하는 나 같은 사람과 함께 지내자면 매사 답답하지 않을까. 사이가 틀어지리라는 것이 불을 보듯 뻔했으므로 나는 시어머니가 역전 아파트로 미련 없이 이사하겠다고 했을 때 내심 뛸 듯이 기뻤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남편을 여의게 될 줄 알았다면 나는 기꺼이 시어머니와 함께 살았으리라. 아무리 잔소리와 핀잔이 심해도 상관없다. 아파트 같은 곳으로 이사하지 말고 제발 여기서 계속 저랑 함께 지내 주세요,라고 적극적으로 부탁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남편 사후에도 시어머니와 작은 반려견과 함께 이 집에서 남편을 그리며 조용히 살았겠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낼 수만 있다면 나는 무슨 일이든 했을 테니까.
- ... 주인을 잃은 집은 소용돌이치는 안개 속에 검푸르게 누워있는 듯 보였다. 검푸르게 비친 까닭은 지붕에 얹은 거뭇한 서양 기와가 푸른색을 띤 탓도 있지만, 내 눈에 집 자체가 이미 호흡을 멈춰 버린 것처럼 느껴진 탓도 있었다.
- 그날 아침에 피운 향은 교토의 저명한 절에서 쓴다는 특제품이었다. 향이 조금 강하여 끈 뒤에도 잔향이 진하다. 그래서 시간이 많이 지났어도 집 안에 향냄새가 남은 것처럼 느껴질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 남편은 그다지 꼼꼼한 성격도 아니고 신경질적인 구석도 없었지만 자기가 사용하는 물건만큼은 결코 함부로 간수하지 않았다. 옷이든 내의든 신발류든 벗으면 반드시 반듯하게 정돈해 두었다. 옷이라면 주름을 펴서 행거에 걸거나 개켜 두었고, 신발류는 나중에 편하게 신을 수 있도록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그렇게 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덕분에 나도 자연스레 남편과 같은 습관이 생겼다. 혼자 살 때는 물건을 늘어놓는 경향이 있었는데, 남편을 따라 옷가지는 물론이고 아무리 급할 때라도 슬리퍼를 벗으면 아무렇게나 놔두고 나가지 않게 되었다.
- 집을 나갈 때 슬리퍼를 가지런히 모아 놓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슬픔에 잠긴 나머지, 정리해 놓은 줄 알았지만 사실은 아무렇게나 벗어던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그렇게만 생각했다. 깊은 상실감이 기억력이나 의식, 시간 감각까지 바꿔 버린 모양이다. 사실 외출할 때 슬리퍼를 정돈해 놓았는지 아닌지는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오싹한 기분을 느끼거나 소름이 돋진 않았다. 공포심에 사로잡혀 비명을 지르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이해하기 힘든 현상을 목격하자 거기에 의식을 집중하려는 침착함이 발휘되었다고 할까.
- 내 남편 조노우치 아키라는 상냥한 사람이었다. 늘 상대방의 기분을 배려하며 행동했다. 못하는 일은 못한다고 사실대로 솔직히 말하지만, 그러면서도 상대방 감정을 짓밟아 버리는 짓은 결코 하지 않았다.
벗은 옷과 신발을 늘 반듯하게 정리해 두는 것처럼 그는 조피를 마지막까지 배려하여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결론은 처음부터 나와 있었고 그걸 숨김없이 밝히기는 했지만, 상대방이 납득하기까지의 과정을 결코 번거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다정하고 성실한 우정으로 조피를 이끌려고 했다. 그것만은 분명하다.
- 어떻게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남편과 조피의 그런 모습을 직접 내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겠다. 도쿄까지 찾아온 조피가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를 사모하는 모습, 그런 상대를 지켜보며 빈으로 돌아갈 때까지만이라도 부축해 주려고 애쓰던 조노우치 아키라의 모습을 내 눈으로 분명히 보았다.
- 마흔이 안 된 독신이며 연구직으로 일하는 남자가 있다, 빈 본사에서 오래 근무한 경력이 있어 독일어도 잘하고 사내에서도 평판이 좋은 남자다, 한번 만나 보지 않겠니,라는 말을 외삼촌에게 들었을 때, 마흔이 되도록 독신으로 사는 연구직 남성이라면 보나 마나 옷차림에도 무심하고 제대로 씻지도 않고 인기가 뭔지 전혀 모르는 남자일 게 뻔하다고 여겼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만나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 행여 늦지 마라,라는 외삼촌의 경고도 있어서 그날 나는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가볍게'가 키워드였으므로 복장에 특별히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데님 바지는 피하고, 평소 봄에 외출용으로 입던 연한 크림색 셔츠풍 튜닉에 네이비 팬츠라는 무난한 조합을 선택해 보았다.
- 지하철 안이었으므로 바깥은 캄캄했고 창유리에는 승객들 모습이 비쳐지고 있었다. 내 옆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이 잘 보였다.
지적인 인상을 풍기며 온순해 보이는 얼굴에 적당한 살집과 적당한 키를 가진 남자였다. 진갈색 재킷을 입고 하얀 셔츠의 앞단추를 맨 위까지 채운 모습이었다. 일본인 특유의 가느다란 외까풀 눈이지만 눈초리가 살짝 쳐진 탓인지 상냥해 보였다.
- 연구직으로 일하던 두뇌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난 조노우치 아키라가 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상사가 권하는 대로 나를 만나기로 했을까. 그리고 데이트를 겨우 세 번 하고 결혼을 결정했을까.
마흔이 되도록 유유자적 독신 생활을 즐기던 남자가 왜 갑자기 결혼하려고 했을까? 나와 결혼한 것은 나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조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 정도로 그와 조피는 깊은 관계였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나는 온갖 추측을 했다. 맞선 같은 형식으로 만나 서로가 적당히 마음에 들어 결혼한 것뿐인데 나는 종종 남편의 과거가 신경 쓰여 견딜 수 없었다.
잠자코 있으면 지나갈 일도 아니고 애초에 그런 의문을 혼자 속에 품어 두는 성격도 아니었다. 나는 결혼이 결정되자 그동안 마음에 걸렸던 외국 여자에 대하여 작심하고 물어보았다.
- 당신을 잊을 수 없었나 보군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그렇겠죠,라고 말하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첫눈에도 아주 예쁜 사람이던데, 무슨 심각한 병에 걸렸나 보다 생각했어요. 병약해진 것처럼 보여서."
"그때 거의 식사를 하지 못했어요. 돈도 그리 많지 않아서 싸구려 호텔에 묵었고, 내가 여행비를 마련해 주었어요. 병원에 가 봐야 할 정도로 쇠약해져서 내심 어떻게 하나 당황하고 있는데, 마침 그녀가 귀국하기로 결심해 주어서 정말 안심했습니다."
"그럴 때 나와 맞선을 봤군요. 그녀가 알았다면 어땠을까요."
"글쎄, 어땠을지" 하고 그는 말했다.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을 화제로 삼을 필요가 있나 하는 표정이었다. 나도 더는 묻지 않았다.
- 하지만 먼저 입을 연 것은 그 사람이었다.
"아마" 하고 그는 말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마음을 앓고 있었을 겁니다. 연구실에 아르바이트생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그걸 알고 나서부터 그녀의 언행이 신경 쓰이고 동정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남들보다 친절하게 대해 주었는데 그녀는 그걸 호의로 받아들인 모양이에요. 조피를 무시하지 못한 것은 내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었으면 하는데, 조피가 미인이라는 것은 아무 관계도 없어요. 정말 전혀요. 하지만 나는 조피를 만나면 늘 친절하게 대해 주었죠. 애초에 상처가 있는 사람을, 그런 줄 알면서도 차갑게 대할 수는 없었거든요. 그게 아무리 잘못된 일이었다고 해도."
"정말로 마음이 따뜻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친절하게 마련이라고 전에 할머니가 그러셨어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의 친절은 잘못이 아니에요."
짧은 침묵이 흐른 뒤, 고맙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 조피 베켄하우어의 자살 소식이 남편에게 날아든 것은 우리가 결혼하고 교외의 낡은 집에서 살기 시작한 지 반년쯤 지났을 때였다. 빈 본사에서 도쿄 지사의 그에게 직접 보고가 온 까닭은 조피가 남편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 본사에 많이 있기 때문이리라.
- 유서는 없었다고 하며, 구체적인 사연은 지금도 알 수 없다. 남편에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조만간 가 보는 게 좋을까, 하고 내가 물었다.
어디를, 하고 남편이 되물었다.
빈에, 하고 내가 작은 소리로 말하자 그는 왜? 하고 다시 물었다.
그야 하며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당신을 그토록... 그렇게 말하다가 말았다.
남편은 단호히 고개를 젓고 이렇게 말했다. "명복을 빌어 주면 돼."
자살 소식을 듣고도 나에 대한 남편의 언행에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충격적인 소식에 혼란스러워하거나 대놓고 슬픔에 잠기거나 뭔가 상념에 잠기는 모습을 보이는 일은 일체 없었다.
- 일련의 불가해한 현상에 규칙이라고 할 만한 것은 발견할 수 없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분명해진 사실이 있다. 밤낮없이 하루하루 조피의 기척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피의 유령에 관해 누구에게 말하거나 상의해 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말하면 그 순간부터 나의 내부에서 공포가 더욱 격렬해져 견딜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훨씬 더 무서웠다.
- 남편에게 그토록 집착하던 여자의 유령이 남편 사후에 내 집에 나타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벌벌 떨며 털어놓는다면 아마 상대방은 졸지에 남편을 잃은 여자가 망상과 헛것을 본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경우에 따라서는 "슬픔에 짓눌릴 때는 흔히 그렇게 헛것을 보게 마련입니다"라며 불쌍하게 여기겠지. 결국 나는 남편을 잃고 '마음에 병이 든 불쌍한 여자' 취급을 받으며 아무런 해결책도 찾지 못하리라.
- 이튿날 나는 폐기물 처리업자를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내어 옷장을 폐기해 달라고 전화로 의뢰했다. 급하게 부탁드리고 싶은데요,라고 재촉하자 상대방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 폐기업자는 약속대로 그날 저녁 찾아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화창하던 날이 흐려져 음울한 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폐기 작업을 위해 40대로 보이는 남자 두 명과 젊은 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찾아왔다. 말수가 없는 세 사람은 내가 지시한 대로 낡고 무거운 옷장을 내용물과 함께 창고에서 들어내 익숙한 동작으로 현관 밖으로 나가더니 요령 좋게 트럭에 싣고 떠났다.
안에 있는 옷가지는 꺼내지 않아도 됩니까?라는 물음조차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업자에게 더 엉뚱한 작업을 의뢰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옷장이 들려 나가자 방바닥에는 오랜 세월 쌓인 먼지만 네모난 흔적을 그리며 남았다. 나는 얼른 청소기를 돌려 먼지를 깨끗하게 치웠다. 그러고는 주방에서 소금을 가져다가 그 자리 주위에 뿌려 부정을 씻는 의식을 치렀다. 내친김에 향을 피워 형식적으로나마 조피에게 공양할까 하다가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종교가 다른 상대에게 그런 의식이 무슨 소용일까. 게다가 이제 와서 새삼 조피를 동정할 필요가 있을까.
- 여하튼 옷장을 처분하자 옷방이 청결해진 느낌이었다. 그때까지 고여 있던 것이 다 가시고 안에 걸려 있는 내 옷과 가방들까지 신선한 공기를 머금은 듯했다.
이제야 집요하게 들러붙어 있던 여자 유령을 몰아냈다며 안도했다. 시원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정말 안도했던 걸까. 이제 살 것 같다. 시원하다고 믿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 시어머니가 사랑하는 포메라니안 토토와 함께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열흘쯤 뒤였다.
시어머니는 안부 전화를 여러 번 했었고 "내 집에도 놀러 오렴"이라든지 "보고 싶은데, 내가 거기로 갈까?" 하며 의향을 떠 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정중하게 마다했다.
만나면 죽은 남편 이야기가 나올 게 틀림없는데, 설사 상대가 시어머니라고 해도 차를 마시며 잡담과 함께 그런 이야기를 나눌 상태는 아니었다.
- 하지만 옷장을 처분한 이래 내 마음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나아져 있었다. 토토를 데리고 놀러 가겠다는 시어머니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순순히 "네, 꼭 오세요"라고 대답했다. "저도 어머니 만나 뵙고 싶었어요"라면서.
아직 장마철은 아니지만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음울한 날이었다. 시어머니는 토토를 애견용 캐리백에 넣어 버스를 타고 왔다. 개가 무거워 변변한 선물도 못 사 왔다면서 시어머니는 역에 있는 유명 화과자점의 물양갱과 간밤에 많이 만들어 두었다는 톳 무침을 내밀었다.
- 너도 반려견을 키워 보면 어떠니, 하고 시어머니는 물었다. 의지가 돼. 소란한 아이가 생긴 것 같고. 게다가 매일 산책하러 나가게 되니까 건강에도 좋지.
좋네요, 하고 내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피차 젊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낳을 수 있었다. 나에게나 남편에게나 문제는 없었다는데도 끝내 임신을 하지 못하다가 남편을 여읜 것도 내 마음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것을 시어머니에게 암암리에 지적당한 기분이었다. 나는 모르는 척했다.
대화가 활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제법 편안해 보였다. 나는 사 두었던 아라레 과자를 내놓거나 차를 다시 타 오거나 냉장고에 하나 남아 있던 복숭아를 깎아 내놓기도 했다.
- 나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거 제 거 아니에요, 그리고 옷장도 처분했어요, 처분한 뒤 몇 번이나 청소기를 돌렸어요, 그러니까 장갑 한 짝이 옷방에 떨어져 있을 리 없어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 <조피의 장갑>
- 향년 75세. 올 2월 야마나시 현 고후 시에 있는 자택에서 요양하는 가쓰라기를 병문안한 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바쁠 텐데 뭘 여기까지 왔나, 병문안 손님 맞는 것도 성가시네, 하고 싫은 소리를 늘어놓으면서도 제자가 와 준 것이 꽤나 기뻤던 모양이다. 가쓰라기는 기세를 올린 나머지 이미 마실 수 없게 되었을 술을 마시겠다고 했다가 부인이 말리자 아이처럼 삐지고 말았다.
부인이 주방에 간 사이 다키타는 잠자코 가쓰라기에게 잔을 건네고 술을 몇 방울 따라 주었다. 혀끝으로 핥듯이 입에 물고는, "이번 생과 작별하는 미주로군" 하며 쓸쓸하게 웃어 보이던 은사의 얼굴에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역력했다.
- 본래 위악적인 구석이 있고 반골 정신이 왕성한 사람이었다. 학내에서는 붕 뜬 존재여서 적이 많고 학생 중에도 가쓰라기를 미워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다키타는 처음부터 가쓰라기와 죽이 잘 맞았다. 주저 없이 가쓰라기의 세미나 수업을 수강하고 그를 쫓아가 질문을 던지고 하다가 역 앞 싸구려 주점에서 부담 없이 술잔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가쓰라기는 철저한 합리주의자이고 가차 없는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비과학적인 것은 뭐든 혐오하고 이론상 성립하지 않는 것을 섣불리 신봉하는 행위를 지성의 타락으로 치부했다.
다키타가 현실적 논리적 사고에 충실하고자 하고, 근거 없이 사람들의 불안을 자극하는 주장을 배척하며 살아가게 된 것도 가쓰라기의 영향이 컸다.
- 가쓰라기에게는 솔직하게 심정을 털어놓았다.
가쓰라기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놀라거나 동정하지 않았다. 조언은커녕 감상조차 말하지 않고 재미있다는 듯 어깨를 흔들며 웃어젖혔다. 이래서 인생은 지루하질 않단 말이야, 하고 장난스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술을 마셨다. 그런 가쓰라기 앞에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인생의 온갖 고난을 웃음으로 넘겨 버리는 것은 그리 쉬운 경지가 아니다. 좋은 스승이었다고 다키타는 새삼 실감하며 추억을 떠올리고 은사의 죽음을 슬퍼했다.
- 통야는 고후 시 교외에 있는 절에서 치러졌다. 다키타가 도착한 것은 통야가 시작되기 10분 전이었다. 승려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문상객들이 여기저기서 수군수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대강 둘러보니 다키타가 아는 얼굴은 없었다.
- 통야를 하는 곳에는 식사를 위한 별실도 마련되어 있었다. 장의사가 그곳으로 가라고 권했지만 다키타는 향을 올리자마자 밖으로 나왔다. 공연히 오래 머물며 낯선 이들과 초밥에 미지근한 맥주를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 생명은 예외 없이 종말을 맞이하고 육신은 물론 지나 온 시간 전부가 무로 돌아간다. 광대무변한 암흑 속으로 떠난 망자에게 문상객으로서 작별인사를 했으면 충분하지 더 이상의 배려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런 마음가짐도 가쓰라기에게 배운 것이다.
- 말미에는 '다키타 씨가 심령물 싫어하는 것은 옛날부터 잘 알지만, 아무쪼록 부탁드립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런... 다키타는 쓴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서른아홉 살의 독신, 구보 미스즈라는 사랑스러운 이름으로는 상상이 안 될 만큼 일벌레다. 물 빠진 청바지와 셔츠 차림으로 아무리 조건이 열악한 로케라도 몸을 돌보지 않고 뛰어든다. 아침부터 밤까지 프로그램 제작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보다 승부욕이 강하고 약한 소리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지만 다키타에게만은 속을 터놓았고 다키타가 독립한 뒤에도 이런저런 일로 도움을 청하곤 했다.
- 재능을 인정하고 키워 준 만큼 귀엽다고 생각한 적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젠 좀 봐주라,라고 다키타는 중얼거렸다. 무엇보다 다키타가 잘하는 다큐멘터리나 토크 프로그램이라면 넓은 인맥을 구사해서 어떻게든 도와주지 못할 것도 없지만 심령특집이라면 사양하고 싶었다. 그는 폐가에 출몰하는 유령이니 악령이 깃든 고가니 하고 바람을 잡으며 진지하게 다루는 프로그램 자체를 혐오했다.
- 방송사 측이 얼마나 이용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간에는 심령물을 전문으로 하는 업자도 있다. 교묘히 합성해서 심령사진이나 동영상을 만들어 내는 건 일도 아니다. 극단에 속한 무명배우를 아르바이트로 쓰고 얼굴에 모자이크 처리를 해서 있지도 않은 체험을 진술케 하거나 공포에 떠는 모습을 촬영하는 등 하려고만 들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들이 한밤중에 심령 스폿인지 뭔지에 찾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꺄악, 꺄악 비명을 지르거나 손에 굵은 묵주를 든 자칭 심령술사가 벌벌 떨며 염불을 외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무섭기는커녕 흥이 싹 가시고 만다. 가혹하고 복잡한 현실을 살아 내는 것만으로도 경황이 없는 다키타 같은 사람에게 심령특집이란 바보스러운 짓거리일 뿐이었다.
- 망자라고 해서 무섭거나 하진 않다. 사람은 죽으면 무가 된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살아 있는 사람이 훨씬 무섭다.
- 그날 밤은 근처 숙소에서 혼자 가쓰라기를 추모하는 의미로 조용히 술이나 마시며 보낼 요량이었다. 사무소 직원에게도 짧은 휴가를 쓰겠다고 말해 두었다. 도쿄에는 내일 저녁에 돌아가면 되고, 스케줄도 미리 조정해 놨다. 요즘 들어 부쩍 바빠진 탓에 제대로 쉰 적이 없다. 회의에 회의가 이어지고 협상 자리에다 저녁이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회식을 해야 했다. 술자리에 어울리고 청탁하고 청탁을 듣고. 삿포로나 후쿠오카로 당일치기 출장을 다녀오고. ... 쉰다섯 육신에는 가혹한 날들이었다.
- "어디로 모실까요?"
"그게, 아직 정하진 않았어요. 지금 당장 도쿄로 돌아갈 건 아니고 오늘밤 이 근처에서 느긋하게 묵고 싶은데, 바빠서 예약을 못했네요. 예약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해서요. 근처에 추천할 만한 숙소가 있으면 가르쳐 주시죠."
"느긋하게 쉬시겠다고 하시니 온천이 좋을까요? 아니면 리조트호텔?"
"아뇨, 호텔은 어디나 다 엇비슷해서 피하고 싶네요. 그리고 온천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실은 온천욕을 별로 좋아하질 않아서요."
"아, 남자분들 중에는 간혹 그런 분이 계시죠."
"변두리에 외따로 있는 시골티 나는 숙소 같은 곳이 오늘 기분에 딱 맞을 것 같은데."
떠오르는 대로 말해 봤을 뿐이다. 어떤 숙소에 머물고 싶은지 생각해 두지도 않았다. 흔해빠진 온천여관이라도 상관없었던 것이다.
- 비즈니스호텔만 아니면 어디든 좋다고 다시 말할까 망설일 때였다. 기사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이 "아, 그렇지!"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시다면 아카마 산장은 어떠세요?"
"아카마 산장?" 하고 다키타는 되물었다. "아사마 산장이 아니고요? 가루이자와에 있는."
"아뇨, 손님, 빨간 방이라는 뜻의 아카마 산장입니다. 고후와 떨어져 있지만 그리 멀지는 않습니다. 조금 산속으로 들어가는 곳이지만 숲에 싸여 있어서 정말 조용하고 좋은 곳이죠. 제가 거기 여주인을 잘 알거든요. 실은 초등학교 동창이라서."
반백의 운전사는 흐흐, 하고 낮은 소리로 웃으며 휴대전화를 꺼냈다.
"빈 방이 있는지 전화해 볼까요? 어떠세요?"
- 그 아사마인지 아카마인지 하는 산장의 주인과 이자는 필시 그렇고 그런 사이겠구나, 하고 다키타는 짐작했다. 근방을 어슬렁거리는 남자 손님을 데려다주면 반백 머리의 호주머니에 얼마간의 사례금이 떨어지게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혹시 돈만 주면 그렇고 그런 '유흥'을 제공하는 산장일까. 그런 숙소는 흔하다.
출장 중에 잠시 자유로운 밤 시간을 허락받은 옹색한 샐러리맨에게는 뜻밖의 요행일지 모르지만 자신은 그런 유흥이 필요 없다고 다키타는 생각했다. 게다가 다른 때라면 몰라도 가쓰라기를 조문하러 찾아온 몸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유흥은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묵으면 되는 곳인지도 모른다. 달리 찾아보기도 번거로웠다.
"좋습니다. 그럼 거기로 가 볼까요"라고 다키타는 말했다.
- 말한 순간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상복이 아니라 검은 양복을 입고 왔다. 살이 제법 쪘는지 허리춤과 어깨가 왠지 꼭 낀다. 빨리 벗고 샤워를 한 다음 유카타로 갈아입고 시원한 맥주를 마실 수 있다면 어느 숙소든 상관없었다.
- 보나 마나 저렴한 모텔 비슷한 곳이라 분위기는 고사하고 감각도 촌스러운 곳이겠지.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카마 산장을 보았을 때 다키타가 제일 먼저 느낀 것은 가슴속을 관통하는 커다란 놀라움이었다.
- 고후 시내를 벗어나 18킬로미터 정도 달리다가 산속으로 들어가 고갯길을 조금 올라가니 왼쪽으로 목적지가 보였다. 완만한 비탈 위에 서 있는 단층 건물로, 크림색 외벽은 도색 작업을 마친 참인지 산뜻한 모습이었다. 묵직한 모습이 마치 숲 속에 남몰래 지어 놓은 작은 고급 호텔 같기도 했다.
기품 있어 보이는 건물의 모든 창에서는 부드러운 노란 조명이 흘러나와 달이 뜨지 않은 밤인데도 주위 나무들을 뒤덮은 어둠의 깊은 곳까지 녹아들고 있었다.
택시가 자청색 자갈이 깔린 정갈한 포치에 멈추자 안에서 기모노 차림의 주인이 웃는 낯으로 달려 나왔다. 60대 중반쯤으로, 과연 반백의 택시 기사 또래로 보이지만 풍만하고 피부가 하얘서 택시 기사보다 훨씬 도회적이고 몸가짐과 말투도 절도가 있었다.
"어서 오세요. 먼 데까지 와 주셨네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지방도시 변두리에 흔히 있는 싸구려 숙소를 상상했지만 관록이 깃든 품격이 느껴졌다. 우연이기는 해도 통야 뒤에 이렇게 제대로 된 숙소를 소개받아서 아무 불만이 없었다.
- "홀 건너편이 대형 욕실입니다." 사토미는 그렇게 말하며 아무 의욕도 느껴지지 않는 몸짓으로 가장 안쪽에 있는 문을 열쇠로 열었다. "식사는 나중에 객실로 가져다 드립니다. 볼일이 있으시면 프런트에 전화해 주십시오."
창밖으로 보이는 경치나 내일 날씨 등 이것저것 물어보려고 했지만 곧 체념했다. 이 젊은 여자는 손님과 편하게 대화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 사토미가 물러가자 그는 슈트를 벗어 옷장 안에 걸었다. 양식과 일식을 절충한 객실은 조금 낡기는 했지만 감각은 나쁘지 않았다. 널찍한 트윈베드룸 옆에 도코노마가 딸린 8첩쯤 되는 다다미방이 있었다. 실내에는 묵직한 흑단 좌탁과 방석이 딸린 앉은뱅이의자가 놓여 있다.
침실의 소형 냉장고에는 캔맥주와 생수 같은 음료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는 우선 캔맥주를 하나 따서 꿀꺽꿀꺽 마셨다. 냉장이 잘 되어 상쾌했다.
- 한숨 돌리고 샤워를 한 뒤 침대에 펼쳐져 있던 흰 바탕에 감색 비백 무늬가 있는 고풍스러운 유카타를 입었다. 그럭저럭 하다 보니 허기진 배가 남우세스러울 정도로 꼬르륵거리기 시작했다.
- "시원한 청주도 준비해 왔습니다. 대단한 건 아닙니다만."
"시원한 청주라. 좋죠. 한 잔 부탁할까요."
음식을 가져다주고 냉큼 물러갈 줄 알았던 주인은 전혀 물러날 기미가 없었다. 사토미에게 "수고했어요. 여긴 이제 됐어요"라고 하자 사토미는 고개를 까딱하고 객실을 나갔다.
"요즘 젊은 아이들은 무뚝뚝해서 못쓰겠어요" 하며 주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손님에게 인사 한 마디 못한다니까요. 아무리 가르쳐도 소용이 없네요."
"그건 어디나 마찬가지죠. 여자애들이나 남자애들이나 다 그래요. 예전과는 다르니까."
"정말 큰일이에요. 자, 한 잔 더 드세요."
주인은 그리 크지 않은 청주 잔을 다키타에게 건네고 술을 따라 주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청주였지만 간간한 반찬들을 집어 먹으며 마시다 보니 몸속에 깊이 박힌 응어리가 서서히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놀랐습니다" 하고 다키타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장님이 몸소 대접해 주실 줄이야."
"달리 손님이 안 계실 때는 이렇게라도 말상대를 해 드리자는 것이 저의 오래된 방침이어서요."
- <산장기담>
- 평소에는 잊고 지내다가 문득 떠올리면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기억이라는 게 있다. 그런 기억은 몇십 년이 지나도 늘 변함없는 전율을 가져다준다.
- 어릴 때 어디선가 자전거를 타고 달려온 흰 셔츠와 까만 바지차림의 젊은 남자에게 번쩍 안겨서 끌려갈 뻔한 적이 있다. 마구소리치고 비명을 지르고 몸을 버둥거렸지만 그 힘을 당해 낼 수 없었다. 남자는 어디에 숨겨 놓았는지 가는 줄을 잽싸게 꺼내 자전거 짐칸에 내 허리를 둘둘 묶었다. 귀신처럼 빠른 솜씨였다. 팔다리를 격하게 버둥거리자 내 뺨을 세게 쳤다. 나는 아프고 무서워서 비명을 질렀다.
주위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마침 널찍한 공터 한복판이었고 민가도 없었다. 피처럼 진한 저녁놀이 한여름 세상을 물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우연히 자전거를 타고 근처를 지나던 낯익은 주점 점원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 바람 한 점 없어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만큼 무더운 여름날 해 질 녘이었다. 잘 익은 토마토의 과즙 같은 놀이 서서히 잉크블루의 연한 어둠으로 변하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타오르는 듯한 심상치 않은 저녁놀이나 세상이 소리 없이 푸르스름한 밤으로 변하기 직전의 마와 같은 시간대가 무섭다. 정신이 이상한 남자에게 끌려갈 뻔하던 사건이 떠오르기 때문인데, 그게 전부는 아니다.
나의 내부에 봉인되어 있는 또 하나의 기억이 저 납치될 뻔했던 기억과 함께 되살아나는 것이다.
- 벌써 반세기나 지난 일인데도 여전히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다. 바로 지금 눈앞에 있는 것처럼 기억은 아름답고 싱싱한 색채를 띠고 있다. 나무들의 우듬지에서 정원 풀밭으로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여기저기서 그치지 않고 들려오던 벌레 소리. 풀밭에서 피어오르는 후끈한 풋내, 흙내, 비 냄새가 되살아난다.
- 그리고 여전히 소름 돋을 만큼 무서운 일이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무서움 속에는 아주 희미하기는 해도 달콤하고 차가운 물 같은, 그리운 느낌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그 그리움에 몸을 맡기고 싶어 견딜 수 없게 된다.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과 이웃하고 지내던 시절, 누구에게도 말 못 하고 홀로 두려워하던 나날이었다. 그런데 지금도 그 정체 모를 상냥함과 조용한 기척을 되살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황홀해지는 것이다...
- 쇼와 42년... 도쿄올림픽이 끝나고 3년 뒤였으니 벌써 한참 지난 일이다. 옛날이라고 해도 좋다.
남들이 시샘할 만큼 복 받은 결혼을 하고 도쿄 주택가의 오래된 주택에 살던 일곱 살 연상의 언니가 첫아기를 유산하고 말았다. 불안정한 시기에 그만 집 안 계단에서 미끄러져 굴러 떨어진 탓이었다.
- "어머, 그래? 하지만 이웃들은 일단 부자 아냐?"
나는 언니 집 마당 건너편에 있는 이웃집을 가리켰다. 언니 부부 집과 꼭 닮은 서양과 일본식을 절충한 정원 딸린 2층집이다. 다만 그 집은 임대가 아니라 주인이 살았다. 회사 사장이라는데, 남자는 그 집에 전부터 첩을 들여앉혀 놓고 있었다.
언니 집에 갔을 때 나도 몇 번 첩이라는 여자를 길에서 본 적이 있다. 일본 무용이 취미라는데 잠깐 장 보러 나갈 때도 늘 기모노 차림이었다.
언니보다 조금 연상으로 서른은 넘어 보이는 작은 체구에 빼빼 마른 여자였다. 희미한 살쩍을 드러내며 틀어 올린 머리가 잘 어울렸다. 아리따운 풍모를 보여주는 상당한 미인이었지만 어딘가 쓸쓸하고 음울해 보였다. 지나치며 인사를 나눌 때도 시선은 늘 아래로 깔았다.
"저 집은 이제 빈집이 되어 버렸어."
언니는 그때 언짢은 것이라도 보는 듯이 나를 보고 가만히 말했다.
- "말해 준 줄 알았는데. 말하지 않았나? 죽은 건 올해 2월이었나. 추운 날이었어.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이었잖아. 해서 통야도 장례식도 없이 끝냈어. 유골은 누가 거두어 갔을까, 하고 히로시 씨와 얘기했었거든. 얼마 후 남자가 서너 명 와서 트럭으로 짐을 실어 가더니 그걸로 끝이야. 드나들던 남자도 통 발길을 끊었고, 마당은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져서..."
"그랬구나."
이웃집이 빈집이 되어 버렸다니 아마 언니도 마음이 좋지 않았겠구나, 하고 문득 생각했다. 밤이나 낮이나 혼자 지내는 일이 많다면 이웃집 상황도 의외로 신경이 쓰이게 마련이다. 집은 있는데 사는 사람이 없으니 불안했으리라.
- 언니네 작은 정원 너머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던 샤미센 소리, 흘러나와 정원을 노랗게 비추던 불빛 등을 떠올리며 나는 병으로 급사했다는 여자의 짧은 생애를 생각했다.
무슨 사정이 있어 첩이란 처지를 받아들였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얼핏 보기에 품위 있어 보이는 여자였다. 여자를 첩으로 두었던 남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밤에 주위가 어두워진 뒤 운전기사가 모는 검은 승용차를 타고 왔다가 심야 시간을 보내고 돌아가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고 언니는 말했지만 나는 본 적이 없었다. 주택가에 있는 고급 단독주택을 여자에게 내주고 드나들었다면 남자는 상당한 재력의 소유자였으리라. 휴일에 찾아올 때도 있었다고 하니 어쩌면 본처가 허용한 관계인지도 모른다.
- 빨래를 널거나 2층 창가에 서면 문득 정원 너머로 이웃집이 시야에 들어오는 일이 잦고, 정원에서 잡초를 뽑다 보면 예전에 들었던 샤미센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올 때도 있었다. 비 오는 밤이면 아무도 없는 이웃집의 닫힌 덧문 틈새로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전부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를 닮아 나 역시 합리주의자였던 것이다. 비과학적인 이야기에 아이다운 호기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령 묘지에서 날아다니는 귀신을 목격했다며 호들갑을 떠는 급우의 이야기에 겁먹은 얼굴로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으로 그건 인 성분이 일으키는 현상일 뿐이라며 무시하는 구석도 있었다고 할까.
- 무서운 것은 유령이 아니라 인간이다. 유령은 악한 짓을 하지 않지만 인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니까,라고 엄마는 늘 말했고 나도 그 말이 맞다고 여겼다. 어릴 때 낯선 남자에게 납치당할 뻔한 경험이 있어서 더욱 그랬다.
- 그러므로 죽었다는 이웃집 여자 이야기도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때는 비가 잦아 어디나 습한 계절, 흠뻑 젖은 나무들 너머에 자리 잡은 떳떳치 못한 처지에 있는 여자가 살던 낡은 2층 목조주택은 괴담의 무대로 삼기에는 안성맞춤이었지만 나에게는 어디까지나 그냥 빈집일 뿐이고 거기 살던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겁을 먹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언니 부부와 동거를 시작하고 한 달쯤 지나서부터 내 생각은 조금씩 바뀌었다.
- 내가 만든 음식이 입에 맞았는지, 아니면 친동생이 말 상대가 되자 마음이 안정되었는지 언니는 식욕을 보이며 잘 먹게 되고 심신의 건강을 회복해 나갔다. 그래도 무리는 금물이라 주방에서 의욕적으로 일하다가 이튿날 도로 아미타불이 되는 일이 종종 있었고, 텔레비전에서 아기가 나오는 드라마를 보거나 연예인이 처자식 딸린 남자의 아기를 임신했다는 제목의 잡지 광고를 보면 이내 우울해져 방심할 수 없었다.
형부는 더욱 바빠지고 귀가 시간은 변함없이 늦었다. 그렇지만 혈육이 올라와 언니를 돌봐준다는 사실이 그의 기분까지 편하게 해 준 모양이다. 고맙다면서 퇴근길에 비싼 케이크나 초콜릿을 사다 주기도 해서 나는 매우 흡족했다.
- 그러던 어느 날 밤, 조금 열이 나고 감기 기운이 있다는 언니를 먼저 재우고 형부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7월인데도 습하고 쌀쌀한 것이 장마철 특유의 으슬으슬한 밤이었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도 전혀 그칠 기미가 없고 가끔 처마 끝을 때리는 빗줄기도 굵어졌다.
나는 석간을 샅샅이 훑어보고 묵은 여성지를 들춰 보고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는 등 딱히 할 일도 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이윽고 자정이 지날 무렵이었다. 바깥에서 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형부는 종종 집에서 가까운 전차역의 한 정거장 전 역에서 내려 구내택시(전차역 내부까지 들어와서 손님을 태우는 택시. 좁은 역 구내에 많은 택시가 들어오면 혼잡을 피할 수 없으므로 일정 금액을 받고 일부 택시에게만 그 권리를 주어 영업하게 하고 있다.)를 타고 돌아올 때가 있다. 근방에서 구내택시를 탈 수 있는 곳은 전 역뿐이었기 때문이다. 형부가 택시를 타고 오는 밤이면 집 앞에서 차 문이 탕, 하고 닫히는 소리가 주위에 울려 퍼지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다.
- "처제는 왜 여기에."
"택시 소리가 나서요. 형부가 돌아온 줄 알고 문 열어 드리려..."
"나는 택시 같은 거," 하고 형부는 말했다. 낮게 꺼져 가는 듯한 목소리였다. "타지 않았는데."
"그럼 역에서 걸어왔어요? 걸어와서 옆집으로 들어갔어요? 혹시 많이 취했어요?"
"아니, 전혀." 형부는 말했지만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은 표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지겹다는 듯 나를 힐끔 쳐다보고 등을 구부리며 현관으로 들어갔다.
- 그날 밤 형부는 나에게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늦게 귀가할 때면 꼭 마시는 다시마차도 마시지 않고 목욕도 생략한 채 침실로 들어갔다.
- 이튿날 아침, 말쑥한 표정으로 2층에서 내려온 형부는 간밤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행동했다. 나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언니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언니가 없더라도 형부에게 뭘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형부는 고주망태가 될 정도로 마시고 온 모습은 아니었지만 업무 때문에 몹시 지친 상태로 역에서부터 걸어왔다가 몽유병자처럼 집을 착각해 옆집으로 들어가 버렸을 것이다,라고 나는 결론지었다. 피로가 쌓이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다.
- 할 수만 있다면 가을이 깊어질 때까지 이곳에 있고 싶다. 아니, 아예 해가 바뀔 때까지, 하고 생각할 만큼 나는 언니네 집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그러므로 언니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형부를 의심하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크게 놀랐다. 언니의 평소 모습에서는 형부에게 불신을 품고 있는 듯한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네 형부 말이야, 어쩌면 바람을 피우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활짝 갠 8월 오후,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 보리차를 마실 때 언니가 불쑥 말했다. 깜짝 놀라 언니의 옆얼굴을 돌아보았지만, 언니는 평소와 다름없었고, 불안에 사로잡히거나 감정적으로 흥분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안색도 좋았다. 볼살이 도톰하게 올라 있기까지 했다.
"갑자기 무슨 엉뚱한 소리야. 왜 그런 소릴 해?"
"구체적인 증거가 있는 건 아냐. 그냥 내 직감이 그래. 왠지 자꾸 그런 느낌이 들어."
"하지만 대체 어떻게 바람을 피운다는 거야? 형부는 매일 바쁘게 일하는데. 그럴 틈도 없잖아?"
"바쁘다고 남자가 바람피우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어."
- 그로부터 1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오후 3시 무렵이었나. 갑자기 먹구름이 가득 차더니 소나기가 쏟아졌다. 거센 천둥비에 허겁지겁 빨랫줄에서 거둔 옷들을 실내에 다시 널고 있는데 소나기는 시작될 때처럼 뚝 그치더니 곧 아름다운 석양이 펼쳐졌다.
소나기 덕분에 기온이 제법 떨어져 주위에 흙냄새며 수액 냄새가 감돌았다. 어느새 시작된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인다 싶더니 곧 화염이 타오르는 듯한 색채로 변해 갔다. 그야말로 무서울 만큼 빨간 노을이었다.
언니와 나는 덜 마른 옷가지를 나눠 들고 다시 마당으로 나가 빨랫줄에 널기 시작했다. 바람은 거의 없지만 실내에 너는 것보다 빨리 마를 테니까.
- 나무들 우듬지에서 소나기의 흔적인 빗방울이 똑똑 작은 소리를 내며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바깥 도로에서는 아무 기척도 없고 먼 데를 달리는 차량이나 오토바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은 그저 타오르는 저녁놀에 물들고 있을 뿐이었다.
자기 몫의 옷가지를 모두 넌 언니는 이마에 손차양을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어쩐지"하고 말했다. "기분이 오싹할 정도로 빨간 석양이네."
"그러게." 나는 대답했다.
언니네 집 지붕과 벽과 창문도, 정원 구석구석도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언니의 얼굴도 빨개 보였다. 세상이 온통 빨간빛에 싸여 있는 듯했다.
- 불길함을 풍기는 빨간색이 주위를 지배하고 있었다. 소리가 사라지고 기척이 사그라들어 전부 빨간색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 것 같았다.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당연한 수순이었을까.
그때 나는 보았다. 비어 있는 이웃집 2층 창문을. 그곳에만 덧문이 설치되지 않고 찢어진 장지가 절반만 열려 있는 네모난 창이었다.
- 그 창에 하늘의 빨간색이 비춰지고 있었다. 주위 나무들의 우듬지나 무성한 푸른 잎이 빨간색 속에서 그림자처럼 살짝 흔들리고 있다고 느낀 순간, 그곳에서 사람 그림자가 움직였다.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는 여자 모습이었다. 기모노를 입었다. 하늘의 빨간색에 물들어 옷 색깔이 분명치는 않았지만 비백 무늬 기모노였다.
나는 매혹된 것처럼 여자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또렷이 보였다. 첩이었다는 죽은 여자다.
쓸쓸한 표정을 하고 있다. 뭔가를 기다리는 표정, 기다리고 기다리다 마음이 무너져 거반 체념했으면서도 여전히 기다리는 듯한.
나는 언니네 정원에서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죽은 여자는 내 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빨간색으로 물든 창문 너머에서 시간이 멎은 것처럼 가만히 서서 딱히 어디라고도 할 수 없는 허공에 시선을 주고 있을 뿐이었다.
- 이형의 것인 줄 알면서도 나는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이에서 딱딱 소리가 날 만큼 무서웠지만 그것은 비명을 내지르게 만드는 종류의 공포는 아니었다. 이승과 저승이 한순간 통할 때의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공포라고 하면 좋을까. 도망치고 싶어지는 공포가 아니라 그 자리에 못 박힌 듯한... 무섭지만 시선이 빨려 버리는 듯한 그런 공포였다.
- 죽은 여자는 빨간 하늘이 비치는 창문 너머에서 그녀가 생전에 갖고 있던 매력을 잃지 않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창문에 비치는 나뭇잎 그림자를 잘못 본 것도 아니고 창유리의 얼룩이 착각을 불러온 것도 아니다. 나뭇잎의 그림자나 우연의 산물은 아니었다. 비백 무늬 기모노를 입은 여자, 가끔 찾아오는 남자를 늘 외롭게 기다리던, 일본 무용에 능한 아름답고 허무한 분위기를 풍기던 그 사람이었다.
- 시간으로는 불과 몇 분... 3, 4분 정도였을까. 집 안에서 언니가 뭔가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창문 너머의 여자가 사라졌다. 그 뒤에는 빨간색으로 물든 나머지 당장이라도 활활 타오를 것만 같은 네모난 창문만 남았다.
- 청소를 마치고 손을 씻은 내가 다시 조심스레 정원으로 나와보니 그토록 무섭게 물들던 빨간 저녁놀은 거의 가신 상태였다. 대신 진한 군청색이 하늘을 지배하기 시작하고, 그 아래로 정원의 젖은 풀 위를 어지러이 날아다니는 잠자리 몇 마리가 보였다.
비어 있는 이웃집 2층 창문에는 이제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찢어진 장지도 원래대로 거기 있었다.
-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창문이 무섭게 느껴졌다. 이것을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고 지낼 수 있을까. 언니에게는 물론이고 형부와 엄마에게도, 아무에게도 고해서는 안 되었다. 내 속에만 묻어 두어야 했다.
- 빈집 2층 창가에 서서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 누군가를 계속 기다리는 죽은 첩의 심정이 나에게 전해졌던 거라고 나는 짐작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유는 모른다. 알 길이 없다.
- 하지만 죽은 첩은 분명히 나에게만 제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에는 뭔가 헤아릴 수 없는 목적이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뭔가를 호소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제 모습을 생전의 모습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을까. 육신을 잃은 채 고독에 시달리며 망연히 빈집을 헤매고 있기가 쓸쓸했던가? 이해받고 싶었던 걸까.
- 그해 가을 언니가 완전히 회복되어서 나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형부는 변함없이 바빠 보였지만 접대 골프가 없어졌다며 휴일에는 언니와 단둘이 느긋하게 쉴 수 있게 되었다.
- 딱히 보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우연이었다.
택시에 타기 직전에 문득 동작을 멈춘 형부를 나는 보았다. 택시 사이드미러에 그 모습이 비쳤다.
형부는 죽은 여자가 살던 옆집을 향해 자세를 바로 하고 양손을 몸에 딱 붙이며 살짝 목례했다. 너무 빨라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목례였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을 만큼.
그 직후 뒷좌석 언니 옆에 탄 형부는 밝은 목소리로 "자, 출발!"하고 말했다. "그래도 정든 집을 떠나자니 섭섭하네."
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뜨고 싶다고 말하는 듯했다.
택시는 조용히 출발했다. 구름이 가득한 봄날 오후였다.
- 언니는 새로 이사한 오타 구의 산부인과에서 통통하고 건강한 딸을 낳았다. 하나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하나코는 아무 탈 없이 쑥쑥 컸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하고 사생대회에서 늘 상을 받는 등 재능을 보여 주었는데,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그렸던 한 점의 그림에 관해 털어놓으며 이야기를 마치기로 하자. 그 그림은 초등학교 교사들의 열렬한 칭찬을 받고 액자에 표구되어 한동안 교내 현관 홀에 걸리게 되었다.
선명한 붉은색을 칠한 네모난 틀 안에 한 여인을 그린 것이었다. 네모난 창틀 주위에는 나뭇잎으로 보이는 검은 그림자가 무늬처럼 여러 개 흩어져 있다. 창틀 안에 그려진 여인은 뒤로 단단히 맨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두 눈을 크게 뜨고 먼 데 있는 뭔가를 응시하고 있다.
- 여자가 입은 옷이 비백 무늬 유카타임을 안 순간부터 나는 그림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그럴 리 없다, 우연이다, 하고 스스로를 타일렀지만 너무나 충격적이라 위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아이는 직접 보지 않고도 간접적인 체험을 통해, 가령 텔레비전이나 그림책이나 잡지 광고 등 온갖 매체로부터 무의식 중에 정보를 받아들인다. 하나코는 자신이 얻은 정보 가운데 우연히 뭔가를 택해서 그림을 그렸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고, 그러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 형부는 그 그림을 좋아했다. 언니는 싫어하는 기색이었는데도 형부는 딸이 그린 그림을 소중히 보관해 왔다. 보관만 한 게 아니라 집 안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걸려고 하는 것을 언니가 완강하게 반대했다고 들었다.
- 언니는 지금 일흔네 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건강하다. 사교댄스를 배우기 시작하는 둥 한시도 집 안에 가만히 있질 않는다.
그렇게 어렸던 하나코도 마흔다섯. 시즈오카의 실력이 뛰어난 개업의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얻었으며, 지금은 그림붓을 잡는 일이 없다.
인연이 없었는지 내 앞에는 왕자님이 나타나지 않아 여전히 독신이다.
엄마는 아흔아홉까지 정정하게 살다가 나와 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잠들 듯이 세상을 떠났다. 나는 종종 바닷가 높은 자리에 있는 엄마 묘를 찾는다. 그곳에는 아빠도 잠들어 있다. 바다 냄새나는 조용한 묘지이다.
아주 드문 일이긴 하지만 묘 앞에서 합장하며 나는 저 반세기 전에 내가 보았던 쓸쓸한 첩의 영혼을 위로한다.
왜 그러는지는 나도 설명할 도리가 없다. 평소에는 잊고 살아도 가끔 내 가슴에는 그 여자의 쓸쓸한 얼굴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 그리고 그럴 때마다 부모님 묘 주위에는 어김없이 어디선가 시원하고 건조한 바람이 불어온다. 여름이면 멋진 남방제비나비 한 마리가 소리 없이 묘지와 내 주위를 날아다니다 어디론가 사라진다. 가을이면 묘 주변에는 온통 금빛 은행잎이 쌓이고 뭔가 지르밟은 것처럼 서걱서걱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힘없는 햇살에 싸이는 겨울이면 선향 연기가 차가운 공기 속으로 희미하게 피어올라 쓸쓸한 나무들 너머로 스러져간다. 그럴 때면 향이 스러지는 쪽의 허옇게 바랜 겨울나무 그늘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척이 일어나 나의 동작을 문득 멈추게 한다.
- 그렇게 나는 이승과 저승을 잇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음매 같은 것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 이음매에는 언제나 그 여자가 있다. 지금까지 일어난 많은 일들을 떠올려 봐도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고 아무런 설명도 들은 적 없지만 지금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오싹해지곤 한다. 동시에 한없이 그립고 감미롭기까지 하다.
-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젊은 날의 아득한 정경이 거기 있다. 내가 죽어 재가 되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타오르는 듯한 불길한 저녁놀이 비치는 창문에 이번에는 내 모습이 비쳐지게 될까.
- <붉은 창>
- 일본의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아쿠타가와 상은 순문학 분야에서 최고의 성과를 거둔 신인이 받을 수 있는 문학상입니다. 자국뿐만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에서도 관심을 가질 만큼 매년 화제를 불러 모으는데 올해(2022년)는 후보로 선정된 다섯 명이 전부 여성 작가라는 이유로 뉴스가 되었지요. 상이 만들어지고 88년 만에 처음이랍니다. 한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후보가 전부 남성 작가였을 때는 당연하다 여겼잖아요. 여성 작가의 자서전이나 인터뷰를 읽다 보면 남성 중심의 문학계로 인해 겪은 어려움을 토로하는 일화가 자주 등장하죠. 오랫동안 여성 작가들은 스스로 작가라 칭하기를 주저하거나 작가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남성 작가들이 작가로서의 자격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글쓰기가 운명임을 깨달았다고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것과 달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판타지와 과학소설을 썼던 어슐러 르 귄의 초기 작품들이 전부 남자의 세계가 배경인 이유는, 남자처럼 글을 쓰며 남성의 관점으로 사물을 표현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주위의 여성 작가들이 남자인 척하거나 이름의 머리글자만 써야 했던 분위기에서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미스터리 장르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펼쳐 온 미야베 미유키는 데뷔하고 28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런 소재의 글을 쓰는 건 여성 작가가 잘하지"라거나 "여성 작가치고는 선이 굵직하다"는 말을 숱하게 들었습니다. 출판계에서 일하는 사람들마저도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 보며 기가 막혔다는 얘기를 인터뷰하러 갔던 저에게 들려준 적이 있어요. 흑인의 정체성 문제에 천착했던 토니 모리슨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질문을 받았습니다. 언제까지 주변부의 이야기만 쓸 거냐고.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모리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묻고 싶은 것은 '백인에 대한 책은 언제 쓰실 건가요'일 겁니다. 다른 작가들에게는 그런 식으로 물어보지 않아요. 제가 앙드레 지드에게 '언제쯤 흑인에 대해서 글을 쓰기 시작할 건가요?'라고 묻는 것이 가능할까요."
-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은 물론 영미권이나 유럽 등 해외 주요 문학상의 수상자들을 살펴보면 지금껏 경시되어 온 여성이나 성소수자, 마이너리티로 평가받아 온 작가들이 각광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1990년대부터 문학상에 여성심사위원이 늘어나면서 작품에 대한 평가가 다양해지고, 여성 작가의 작품이 특히 불합리한 편견이나 차별의 형태로 나타나는 격차를 그리고 있다는 점 등이 이러한 흐름을 가속화시켰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실력파 여성 작가들이 잇달아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평론가 사이토 미나코는 <동시대 일본소설을 만나러 가다>에서 이렇게 진단합니다. "(남성 작가 일색이었던) 문학계에서는 '이제 쓸 것이 남아 있지 않다'고까지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형무형의 벽에 의해 차단되고 차별과 편견 속에 있던 여성 작가들에게는 써야 할 재료가 얼마든지 있었다. 쓰지 않는 것 투성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무렵, 여류작가라는 단어를 사어로 만들며 일약 중심 조류를 형성해 나갔던 여성 작가들 (이를테면 기리노 나쓰오, 미야베 미유키, 오가와 요코) 중에 한 명이 고이케 마리코입니다.
- 대학에 다니며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했던 고이케 마리코의 첫 직장은 출판사였습니다. 소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하는 편이 좋겠다 싶어 입사했지만 만든 책은 <눈이 좋아지는 방법> 같은 실용서뿐. 결국 1년 반 만에 그만두고 프리랜서 편집자로 본인이 만든 기획서를 들고 출판사를 전전합니다. "그중 하나가 출판사에 근무하던 시절 여성 작가들에게 의뢰하여 앤솔러지 형식으로 만들고 싶었던 에세이였어요. 그런데 의뢰를 부탁하기도 전에 출판사를 그만두게 되었지요. 이후 그 기획서를 출판사에 들고 갔더니 사장이 저보고 직접 써 보라더군요. 작가로서 좋은 스타트가 될 수도 있겠다면서."
- 그 말을 듣고 생각을 바꾼 고이케 마리코는 불과 2개월 만에 원고를 완성하여 <지적인 악녀의 권유>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출간합니다. 내용은,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은 무시하고 원하는 대로 살아라, 결혼 따위 필요 없다, 남자에게 휘둘리지 말자 등등. 1978년에 이런 내용의 책이 나왔다니 분위기가 어땠을지 조금쯤 짐작이 되시나요. 당시 언론은 무명 저자의 '당돌한 데뷔작'을 크게 보도했는데 선정적인 제목의 기사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책은 경이적인 판매고를 기록했지만 왜 아니겠냐는 듯 '유명해지고 싶어서 안달 난 젊은 작가의 악녀 코스프레' 같은 식의 비난이 따라붙었지요. "온갖 TV 프로그램에서 출연 요청이 쇄도하더군요. 인터뷰며 강연 요청도 줄을 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연예인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TV 출연도 강연도 인터뷰도 전부 그만두었습니다. 그래도 악녀 고이케 마리코라는 허상은 몇 년 동안 끊임없이 저를 괴롭혔어요."
- 원래 자신이 가고 싶었던 길로 돌아가는 데는 7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 사이에 여러 나라의 번역 소설을 다양하게 읽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프랑스의 추리 소설 작가인 카트린 아를레와 영국 미스터리 소설계의 거장인 루스렌들의 작품이었습니다. 등장인물들 마음의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하여 점차 불안하고 긴장된 상태가 고조되도록 만드는 데 능한 서스펜스 연출의 대가들이 쓴 소설을 읽으며 '이런 장르의 소설이라면 나도 쓸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합니다. 아마도 <지적인 악녀의 권유>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으니 순문학 쪽으로는 인정받기가 어려울 거라고 판단하여 상대적으로 진입장벽이 낮은 장르 문학을 선택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리하여 소설가로 데뷔한 건 1985년 이후 여러 편의 미스터리와 호러 소설을 발표하고 1989년에는 한국에도 번역된 바 있는 <아내의 여자친구>로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지만 고이케 마리코의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아니, 평가가 나빴다기보다 작가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하겠죠. "미스터리 팬들에게는 '깜짝 놀랄 만한 반전도 없고 너무 순문학적인 거 아니야'라는 얘기를 듣고, 순문학 독자들에게는 '그저 그런 추리소설이잖아'라는 평가를 받다 보니 어느 쪽으로도 독자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고 할까요. 고민이 깊었습니다. 그래서 또 전부 그만두고(웃음) 내가 쓰고 싶은 걸 쓰자고 생각했지요."
- 그때 쓴 소설의 제목이 <사랑>, 연애 소설의 신경지를 열었다고 평가받은 이 작품으로 고이케 마리코는 일본 최고의 대중문학상인 나오키 상(1995년)을 수상합니다. "내 스스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을 비운 채로 썼습니다. 그전까지는 소설을 쓰는 동안 괴로웠어요. 손으로 모래를 퍼올리면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흘러내리잖아요. 나는 흘러내리는 모래에 대해 썼는데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은 손바닥 위에 남은 모래뿐이었다고 할까, 비유하자면 그런 느낌이었거든요. 하지만 사랑을 썼을 때는, 이것으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을 만큼 만족스러웠습니다. 뜻하지 않게 나오키 상까지 받았으니 이제부터 내가 좋아하는 작풍으로 뭐든 마음껏 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 실제로 고이케 마리코는 <사랑>을 발표한 이후로 픽션과 논픽션, 순문학과 장르 문학, 미스터리와 로맨스를 가리지 않고 다채로운 작품을 썼고 대부분이 영상화되었으며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시마세 연애문학상을 비롯하여 수많은 상도 받았지요.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받는 분야는 호러. 그녀에게는 언젠가부터 '호러 소설의 명수'라는 레테르가 붙기 시작했는데 문예평론가인 이케가미 후유키의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무섭지만 따스한 한편으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이국의 자살한 영혼이 집을 떠도는 '조피의 장갑', 모르는 사이에 이계로 파고드는 '히카게 치과 의원', 이웃집 창문에 죽은 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붉은 창'은 반전 대신 비틀림이 있는 정교한 이야기이다. 되풀이하지만,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존재에 대해 쓸 때는 고이케 마리코를 당할 자가 없다고 생각한다."
- 부지불식간에 공포를 예감케 하는 정교한 풍경 묘사, 풍부한 수사를 동반한 시적인 문체의 사용, 유미주의적 작풍, 단편에서 잘 드러나는 기교 너머의 섬세함은 여타의 호러 소설들과 구분되는 고이케 마리코만의 특징이니까 이 부분을 눈여겨보며 읽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존재에 대해 쓴 고이케 마리코의 소설은 <이형의 것들> 외에도 여럿 있지요. 부디 <이형의 것>들이 잘 팔려서 그의 소설들이 좀 더 활발히 한국에 소개되길. 아니, 북스피어에서 낼 테니까 모쪼록 잘 부탁드려요.
- 삼송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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