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팀S&S] 라디오스톰 1-4 (완)

일루젼 2023. 11. 20.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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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팀S&S
출판 : 디앤씨웹툰비즈
출간 : 2023.03.10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었는데, 발췌를 정리하다 보니 최초의 감상과는 결이 많이 다른 단상들이 남았다. 

 

우선 작품 자체는 무척 매력적이다. 깔끔하고 강약이 있는 그림체, 신선한 설정, 구원 서사까지. 

저자들의 이전 작품인 <모리타트>를 읽어보았더라면 좀 더 깊이 있는 캐릭터 이해가 가능했겠지만 -작중 두 인물은 <모리타트>의 제스와 로로 보인다- 지금은 읽어볼 수가 없으니 암시적인 부분들은 모두 배제하고 이야기해보려 한다. 

 

먼저,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는 점을 명백히 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여성성과 남성성이 혼재한다. 신체적인 특징들로 성별 구분은 가능하지만, 사실 정신적인 부분뿐 아니라 신체까지도 반드시 완벽하게 한 쪽 성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보편적으로 이러이러하다는 특성들이 다수 중첩이 될 뿐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외사랑>에서 표현되었던 바처럼 이 또한 일종의 스펙트럼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리고 <라디오스톰>의 두 주인공은 외양적인 면은 어떨지 몰라도, 정서적인 측면에서는 모두 특정 성별 쪽에 훨씬 가깝다고 보인다. 

 

물론 그것이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이성(異性)이 서술하는 이성(異性)은 언제나 이상(理想)적일 수밖에 없다. 작가가 창조하는 인물들에게는 반드시 작가의 일부분이 녹아들어 가지만, 또한 그렇기에 작가에게 미지(未知)인 것들은 피상적으로 그려지게 마련이다. 이는 당연한 일이고, 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 번 강하게 인식한 뒤로는, <라디오스톰>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다가왔다.

무엇을 겹쳐 읽을 것인가는 독자의 선택이다. 그리고 내게 작품 안에서의 갈등은 굉장히 현실적이고 다양한 이슈들을 담고 있었다. 

 

특정 성별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차별.

양보의 미덕이 실종된 무한 경쟁 사회.

사회-직장이라는 시스템에 의한 복지와 보호, 혹은 세뇌와 구속.

미래 세대에 대한 절망과 부채감.

가치의 재분배에 관해 나타나는 다양한 폭력성. 

그에 더해 몇 년간 세계적으로 경험해 온 팬데믹 사태와 이성형과 감성형의 소통까지.

 

각각의 캐릭터들은 상황에 따라 특정 입장을 대변하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한다. 특정 캐릭터가 평면적인 성향을 보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싶은 욕망이나 절대적 애정에의 갈구 같은 -그 자체는 범인류적인- 욕망을 풀어나가는 방식은 거의 모든 캐릭터들이 여성성 쪽에 가깝다고 보였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리마의 감정선과 언행은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하기 어려워하지만 상대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수동적 표현법, 삭이 가진 코어와 그 변형은 강력한 수동 공격성처럼도 보인다. 

 

그래서 좋다거나 싫다거나 문제라거나 아니라거나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야기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새롭게 읽혔다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에서 어떠한 감흥을 느꼈다면, 어쩌면 그건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던 내면 아이의 상처를 울렸을지도 모르겠다는 것.

그리고 가능한 한 많은 이들이 같은 고통과 인식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으면 한다는 것. 

 

말하고자 한 건 조금 다른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쓰면 쓸수록 멀어지는 듯 하니 이쯤에서 마친다. 

끝.    

 


   

 

- 다정한 인사와 반가운 미소.

살갗의 온도를 확인하기 위한 접촉이나 마음이 그곳에 있는지 묻는 질문.

 

- "어이없어... 코어 보유자가 된다는 건 언제든 전쟁에 차출될 수 있다는 뜻이잖아. 그래서 그 많은 혜택을 받는 건데, 그 따위 코어를 대체 어디다 쓸 수 있다는 거야? 이건 불공정해...!"

 

- "혹시 저도... 선배가 계신 연구소로 들어갈 순 없을까요?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할게요. 물론 급료 같은 건 전혀 없어도 괜찮아요. 그냥 저... 여기서 나갈 수만 있으면..."

"삭. 너 자신을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고 했지. 그렇게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사람에게 무슨 일을 맡길 수 있겠어?"

 

- "삭. 이 학교에 들어올 때 했던 선서를 기억하니? 지금도 그 사명을 지킬 각오가 되어 있니?"

 

-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예? 그게 무슨..."

"이미 들었겠지만 '학교'는 포화 상태예요. 매해 나오는 정부의 예산도 한정되어 있죠. 그런 상황을 고려했을 때..."

"뭐...?"

"저기 서 있는 터너 형제 중 동생인 레사 터너 군과 삭 군의 코어는... 굳이 둘 다 '입학'시켜 국민의 혈세를 투자할 정도의 가치가 있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오랜 논의 끝에 둘 중 하나만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삭 군에게 이 선택권을 주는 건 터너 형제 중 형 쪽인 제럴드 터너 군의 입학이 이미 확정되었기 때문이에요."

 

- "저, 저기... 잠깐만. 삭이라고 했지? 부탁이야... 양보해 주면 안 될까? 우, 우리 고향은 분쟁 지역이야. 하루가 머다 하고 폭격이 일어나. 아까 듣기로 네가 살던 곳은 그 정도는 아니라던데... 응? 제발... 이 은혜는 어떻게든 갚을 테니까. 제발 내 동생 좀 살려 줘..."

 

- 지금도 후회하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그때 그 자리에서 죽지 못한 것. 

그리하여 너를 이 지옥으로 끌어들인 것...

 

- 하지만 이것만은 믿어 줘. 

만약 그때 내가 언젠가 널 만날 걸 알고 있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거야. 

... 정말이야.

 

- "네 자리를 양보하면 되잖아."

"... 뭐?"

"네 입학 통지가 먼저 나왔기 때문에 내게 우선권을 주겠다는 건 바꿔 말하면 네 자리를 확보해야 해서 의자가 부족하다는 뜻이야. 그러니 동생을 살리고 싶다면 네 자리를 동생에게 주면 돼. 그럼 나도, 네 동생도 '학교'에 있을 수 있어."

"아니... 무슨 소리야! '코어'가 모자란 건 너희 둘이고, 나는 이 학교에 꼭 필요한 인재니까 어쩔 수 없었던...!"

"네가 그렇게 필수불가결한 인재라면 당연히 네 동생부터 받아 줬겠지."

 

- "네가 잘못 이해한 거야. 이 제안은 처음부터 나와 네 동생, 둘만을 향한 게 아니야. 너까지 포함해서 셋 중 둘이야."

 

- "어머... 눈치가 꽤 빠르네. 삭 군의 말이 맞아요. 어느 쪽이든 우리는 상관없습니다. 이미 나간 '입학' 통지는 무를 수 없지만... 혈육에게 자리를 양보한 경우는 꽤 있었어요. 다만 그 점이 좀 궁금했어요, 터너 군. 삭 군이 정말로 양보한다면 그 '은혜'는 대체 어떻게 갚을 건가요? '학교'에서 나오는 지원금을 모조리 삭 군에게 보내 주기라도 할 건가요? 터너 군의 가족들은 어쩌고? 설령 그렇게 한다 한들, 삭 군이 '학교'에서 얻을 수 있는 안전에 갈음할 가치가 있는 돈일까요? 혹시 '언젠가는' 갚겠다는 약속으로 끝낼 생각은 아니었겠죠?"

"..."

"어서. 구체적으로 말해 보세요. 뭘 어쩌려는 거였나요?"

 

- "'코어'의 현재 정의는 이거야. '물리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정신 에너지.' 그렇다면 이 초월적 에너지는 대체 어디에서 기인할까?"

 

- "순순히 가는군요."

"... 착한 애니까요."

"착한 아이라..."

"입학 면접 때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삭에게 들었습니다. 터너 형제와 저 아이를 대면시킨 건 당신 생각인가요?"

"음? 왜 그렇게 생각하죠? 알아서 똑똑한 대답을 하고 '입학'한 케이스로 아는데."

"타인의 의자를 빼앗아 입학했다는 낙인을 찍으려 했던 거죠. 그래야 나중에 저 애를 유용하게 써먹을 테니."

"아- 알겠다. 마음이 좀 불편하군요? '진저'. 당신이 직접 꼬드긴 어린양이 지옥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니까. 이미 다 지난 일을 끄집어내 나를 비난함으로써 지금 느끼는 찜찜함을 줄여 보고 싶은가요? ... 그런 건, 마음대로 해도 좋아요. 얼마든지 들어드리죠. '학교'는 당신의 공을 높이 사니까요."

 

- "... 그나저나 착각하지 말아야 할 텐데요. 발신자를 마주한 코어 보유자들은 대체로... 자신이 느끼는 애정과 신뢰를 발신자들 역시 똑같이 가질 거라 믿는 경향이 있더군요. 마치 부모가 당연히 자신을 사랑할 거라 믿는 어린아이들처럼. 하지만 발신자들 입장에서 볼 때, 우리의 사랑스러운 코어 보유자들은..."

 

- "그저 이 험난한 세상에 너무나도 흔해 빠진 망상증 환자 정도로 보이지 않으려나?"

 

 - "상황 파악했으면 이제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고 대답해. 이해했어?"

"이해는 했는데... 네가 굳이 이런 수고를 할 필요 없어. 난 뭐든 솔직히 대답할 거고 너한테 해가 되는 일은 절대로 안 할 거야."

"..."

"혹시나 나한테 무슨 꿍꿍이가 있을까 봐 일단 공포심을 주려 한 거지? 아프면 겁을 먹어서 다루기가 쉬워질 테니까. 그런데 내가 너를 조금도 원망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아서 당황한 것 같은데... 맞아?"

 

- "정신 에너지가 어쩌고 하는 소리가 다 사실이라 치자. 그렇다고 접촉도 안 했는데 병이 옮는다고? 세상천지 어느 병이 그따위 루트로 전염된다는 거야? 그 '학교'인지 뭔지에선 보건 수업도 안 해?"

"... 미,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야... 실제로 그렇게 전염된 사례가 이미 있..."

"그리고 네 말대로라면 그 '학교'가 제일 위험하잖아? 나 같은 '발신자'가 밖에서 병에 걸리면 학교 내부의 초능력자인지 뭔지도 쓰러진단 소리 아니야. 그럼 내가 '학교'에 들어가는 순간 전염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해? 이미 구석구석 오염돼 있을지도 모르는데."

"... 그... 그러네?"

 

- 어라. 이상하다. 평소에는 선배를 떠올리면 선배의 마음에 들고 싶은 생각뿐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그 사람이 뭐라 말했든 내게 뭘 요구하고 기대했든.

그게 중요한가?

 

- "삭.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어. 대체로 발신자들은 코어 보유자들을 꺼리거나... 심각한 경우 혐오하기도 해. 코어 보유자들에게 '발신자'의 존재를 비밀로 해온 것도 그런 이유야. 발신자가 있다는 걸 알면 대부분 만나고 싶어 하고, 일단 만나게 되면 지나치게 집착하거든. 누구든 생판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달라붙어서 도 넘는 애정을 보이면 경계하지 않겠어?"

 

- "쏘지 않을 테니 모조리 벗고 꺼지라고 했더니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던데. 이름 한 번 거창하네. 미카엘이라."

"... 그래서 그냥 놔줬어?"

"왜. 죽였을 것 같아?"

"그야. 죽이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 사람이 널 기억하고 있다면 나중에라도 네게 해를 끼칠지도 모르잖아."

"... 관두자."

"어?"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좀 우습긴 한데 소름 끼친다, 너. 기분 나쁘다고."

 

- 늘 궁금했다. 

절망은 왜 익숙해지지도 않는 걸까.   

 

- "뭐라는 거야? 그런 상태면 네가 혼자 가도 별 수 없잖아."

"난 괜찮아. 감염되지 않으니까. 몰래 가서 물과 식량만 조금 훔쳐 올게. 금방 올게."

 

- "... 먹을 걸 가져온다고? 역병 환자가 우글대는 쉘터에 가서?"

 

- "이 새끼 설마 진짜 간 거야? 감염자가 가득한 쉘터에서 가져온 물과 식량이라니, 그걸 나한테 먹이겠다고?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라, 고사를..."

'도망치려고 수를 쓴 건가? 억지로 붙잡아 둔 것도 아닌데. 아니면 정말 나를 감염시키려고...'

 

- 잠복기부터 풍기는 이 냄새를 아마도 나만 맡을 수 있는 거야. 이 쉘터 사람들은 이미 모두 감염됐어. 아마 같은 물과 식량을 나눠 먹어서...

"... 아!"

'정신이 없긴 없었네... 멍청하긴. 애초에 여길 왜 온 거야? 환자가 돌아다니는 곳에서 물이며 식량을 가져가겠다니 말이 돼? ... 한심하다, 진짜. 내 입장이 유리하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서 쉘터에 가면 다 얻을 수 있다고, 나를 이용하면 이렇게 편하다고 말하고 싶어서...'

 

- "이사장님은 오늘 안 계실 겁니다."

"... 아. 체스터 씨."

 

- "부디 험담으로 여기지 말고 들어주셨으면 합니다만 전 이제 그분이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이런 계획이 잘될 거라 믿고 있는 걸까요? 삭은... 그 애는 분명 좋은 점이 많지만 그 애를 모르는 사람이 받아들이기엔 어려운 부분도 많이 가지고 있어요. 만약 당신들 대본대로 풀리지 않으면요? 그래서 삭이 행여나 나쁜 마음이라도 먹게 되면. 그때는 상황이 더..."

"아. 그러니까, '발신자'가 끝내 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쩔 거냐-. 뭐 그런 뜻이군요? 쓸데없이 말 늘이며 시간 낭비하는 습관은 여전하네요, 진저."

 

- "딱 봐도 '렌탈'이구만."

"레... 렌탈? 그게 뭔데...?"

"... 태어나자마자 팔려서 대여되는 아기를 말하는 거야. 갓난아기를 안고 있으면 동정을 사기 쉬우니까 그날 번 돈의 일부를 상납하는 대가로 아기를 빌리지. 좀 크고 나면 혼자 구걸을 보내기도 하고, 다른 방법으로 쓸모를 만들어 주기도 해."

"... 다른 방법?"

 

- "선택해. 총을 들고 영광을 위해 싸우는 전사가 될래? 다리 하나 자르고 평생 렌탈로 살래?"

영광이고 뭐고 관심 없었고, 더 나은 선택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다만 나보다 먼저 여덟 살이 되었던 다른 렌탈이 녹슨 도끼로 절단한 다리가 썩어 들어가 죽은 게 일주일 전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내 인생에서 옳은 선택을 할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나쁜 선택과 더 나쁜 선택을 끝없이 반복하며 언젠가 재수 없게 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꾸역꾸역 살아갈 뿐이겠지.  

 

- "어린애는 불쌍하잖아... 태어나 봤자 지옥인 걸 알면서도 부모들이 생각 없이 낳은 거니까... 불쌍하고... 이해할 수 없어. 이런 세상에서 고통만 받으면서 살고 있는데 왜 자기 아이를 낳는 건지... 그래서 아이를 보면 도와주고 싶어... ... 터너도 당연히 그럴 줄 알았어. 직접 동생을 지킬 방법이 있다는 걸 알려 주면 그 길을 선택할 줄 알았는데..."

 

- "... 확실한 거야?"

"어...?"

"잘 생각하고 대답해. 잠복기란 건, 바이러스가 아직 체내에만 있는 상태를 말하는 거야. 개보다는 좀 못한 후각이라며? 개도 그런 건 못할걸? 그 냄새니 뭐니 하는 거 역시 네 망상 아니야?"

 

- "단순히 코가 예민하다고 초능력자라 하는 것도 이상했지만 그러려니 했어. 하지만 하는 말이 모조리 앞뒤가 안 맞는다면 얘기가 다르지. 너, 정말 그 '학교'인지 뭔지에서 나온 건 맞아?"

그 순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지금 납득할 만한 대답을 듣지 못하면 여기서 나를 죽일 생각이구나. 

 

- "뭔가 있을 거야."

"... 뭐?"

"연구를 위해 코어 보유자를 일단 모조리 입학시키는 시스템이라면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심사와 선별 과정이 있었다면서? 심사에 오른 코어 보유자 두 명의 능력이 변변치 않아서 개중 한 명만 받겠다? 개소리지. 그럴싸한 효용이 없다면 둘 다 탈락시키면 돼.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어. 널 뽑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쇼를 한 이유도 있었을 거고. 그리고 넌 지금 세상에 퍼지기 시작한 병을 혼자서만 사전에 감지하고 있지."

 

- "목숨 따위를 아까워하지 마라! 오직 이 성전의 대의만을 생각해! 죽음은 끝이 아니다! 죽음 뒤에는 너희 따위가 평생 얻을 수 없는 피에 젖은 영광이 있어! 신께서 너희를 가호하신다!"

우리는 그의 말뜻을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도 우리가 이해하길 바라고 뱉어 댄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가 싸운 것은 단지 빵 한 조각을 먹고 싶어서였고 그를 따른 것은 그가 빵을 가진 자였기 때문이다.

그저 궁금했다. 인간의 삶이 이렇게까지 비참해도 되는 걸까?

이런 비참한 생을 받는 인간은 어디서부터 정해지는 걸까? 

 

- "그딴 걸 누가 무슨 권리로 정하는데? 누구 맘대로 그 애를 팔고 빌려줄 수가 있단 말이야? 뭘 잘못해서? 뭘 어쨌다고...! 그런... 그런 비참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생을, 누가 무슨 권리로 강요할 수 있단 거야? 누가..."

 

- 어느 순간부터 경종이 울렸다. 이 이상 비틀어지기 전에 죽여야 한다고. 처음 만난 순간 머리통 날려 버려야 했어. 

아니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당장이라도.

... 제발 이제라도.

 

- "있... 있잖아. '코어'는... 그러니까 내 초능력은 네 덕분에 쓰는 거잖아. 그... 네가 가진 정신 에너지가 나한테 전해져서..."

"알아, 그게 뭐?"

"그렇다면 지금... 내가 네 생각... 느낌을 알 수 있는 것도 어쩌면... 비슷하지 않았을까?"

 

- "갑자기 든 생각인데... 항상 가난하고 배를 곯았지만 부모님은 날 사랑했고... 분쟁 지역도 아니었고, 그러니까... 그런데도, 그런데도 나는 늘 그런 생각만 했어. 순간순간 정말... 참을 수 없이 화가 나고 서러운 때가 있었어. 그게 혹시 네 생각이... 나한테 전해져 온 거였다면."

"...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나 때문에 좆같았다는 소리라면 안 됐지만 내가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

"... 미안해. 일찍 알았다면 더 빨리 찾으러 나왔을 텐데... 내가 다 듣고 있었는데. 너인 줄을 몰랐어..."

비참한 생을 받는 인간은 어디서부터 정해지는 걸까.

"... 뭐라는 거야? 네가 나와 봤자 뭘 어쩔 수 있었다고..."

이 의미 없는 생명은 무슨 이유로 주어지는 걸까?

"네깟 게 알았다 한들..."

오래전부터 머릿속을 갉아먹던 질문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 "모조리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이 미친 짓을 정말 하고 있을 줄은 몰랐지."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요."

 

- "걱정 마세요.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순조롭다고? 그건 보통 아무 대책 없이 태평한 놈들이나 입에 담는 말이야."

 

- "..."

"왜 그러고 봐?"

"내가... 좋고 싫고를 말해도 되는 거였어?"

"... 그건 또 뭔 소리야..."

"난 네가 나한테 뭔가를 풀고 있다고 생각했어. 설마 좋을 거라 여기고 했다는 거야? 어째서? 왜 그게 나한테 좋을 거라 생각했어? 그렇게 아픈데."

 

- "왜 나를 괴롭히는 거야?"

"... 너 지금 뭐랬냐?"

"나를 볼 때마다 욕하고 때리는 이유가 뭐냐고."

"너... 이 개새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너 때문에 내 동생...!"

"동생?"

 

- "네가 버린 동생을 왜 나한테서 찾아?"

 

- "이해가 안 돼. 동생에게 양보하지 않은 건 네 선택이었잖아. 그게 왜 내 탓이라는 거야?"

"- 지금 그딴 게 뭐가 중요해!"

"... 그럼 대체 뭐가 중요한데?"

 

 - "리마, 우린 매일같이 사람을 죽이고 있어. 죽은 신체를 이용하는 게 그것보다 나빠?"

 

- 누가 제 시체를 건드리는 게 싫어서 도망칠 한다는 에코가 그러니 죽은 친구의 팔을 잘라 이용하겠다 말하고 있었다. 

구태여 지적하지 않았던 건, 

단지 찰리보다 에코와 더 오래 지냈기 때문이다. 

 

- "그 정도로 노려봐서 내 얼굴이 타겠어? 할 말 있으면 그냥 해."

"별거 아니야. 당신도 그 시답잖은 초능력자인가 해서."

"그게 왜 궁금한데?"

"이 좁은 곳에 사람을 태우면서 총도 빼앗지 않았으니까."

"총? 쏠 테면 쏴 봐. 방아쇠 당기자마자 너희 둘 다 터뜨려 버릴 테니까."

"못할걸? 굳이 여기까지 행차하신 걸 보니 우리를 죽일 수 없는 이유가 있는 모양인데. 특히 이 녀석은."

"... 뭐. 그건 맞아."

 

- "힘 빼지 말고 너도 잠이나 자. 거리는 멀지 않지만 길이 다 끊어져서 빙 돌아가느라 네다섯 시간은 가야 해. 하여튼 제일 귀찮은 일만 떠넘기고 개 같은 새끼들... 다시 말하지만 경계할 거 없어. 지금 가는 곳은 '학교'가 맞아. 이 엉망진창인 세상에서 안락한 잠자리와 따뜻한 식사가 보장되는 유일한 기관이지. 기대해도 좋아."

"... 기대."

 

- '학교'는 당장은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학교'는 안락한 잠자리와 따뜻한 식사를 보장한다.

'학교'까지 가는 길은 험하게 꼬여 있다. 

 

- '학교'는 언젠가 너희에게 위해를 가할 것이고 잠자리와 식사는 보장해도 안전은 보장하지 않으며 도망칠 기회는 지금뿐이다.

말 마디마다 섞어 던지는 암시를 그럭저럭 알아듣고도 얌전히 있었던 것은 어깨에 닿은 체온이 아직도 뜨거웠기 때문이다. 

약을 얻어 치료를 받은 후에도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안일하게 믿었던 탓이다. 

 

- "상대가 아무 배운 거 없이 좆도 모르는 천애고아라고 이따위로 뻥카를 쳐도 되냐? 애초에 걔를 연금할 명분도 권리도 없잖아, 니들은."

"그런 건 세상이 멀쩡하던 시절의 상식이니까요. 배운 거 없는 천애고아 처지를 원망해야지, 방법이 없어요."

"쓰레기네, 진짜."

"새삼스레."

 

- "왜 당신이 방금 건넨 두 질문에서 다른 답이 나오리라 생각해요? '학교'가 소중히 여기는 건 삭이 아니에요. 하나, 당신의 말대로 여긴 '연구소'입니다. 당연히 가장 중요한 건 '연구 결과'이고요. 삭은 이제 결과를 내야 합니다."

 

- 리마를 다시 만나고 싶다면 이 문으로 들어가야 해.

'학교'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더 이상 리마를 만날 수 없어. 

이게 뭔가... 뭔가 이상한 일이라는 건 알겠어. 시키는 대로 따르면 안 된다는 것도 알겠어. 하지만 따르지 않으면?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또 뭐가 있지?

 

- "참고로 네 발신자는 '학교'에 불려 올 때 어느 정도 이 사태를 예감했던 것 같아."

"... 네?"

"그는 여기에 오면 자신이 구속 조치될 걸 알고 있었어. 수감될 때도 놀라지 않았고."

"무슨... 소리예요? 그런데 왜..."

"쉘터가 모두 파괴됐다는 소식을 들어서겠지. 널 치료할 수 있는 곳이 '학교' 밖에 없으니까."

 

- "어떻게 생각하니, 삭? 그 애는 널 위해서 이렇게까지 했어."

 

- "저녁이라도 같이 먹자."

"왜?"

"왜... 라니. 그야 서로 할 말도..."

"할 말? 어떤 거?"

"... 어떤 거냐니... 난 네가 내 동생 일에 아직 신경 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 네 동생? 내가 네 동생 일을 신경 쓴다고? ... 그래야 하는 거야?"

"당연하지!"

"어째서?"

"양보할 수 있는데 안 했으니까!?"

"그건 네 얘기 아냐?"

 

- "내, 내년에... 내년에도 입학 기회는 있어... 넌 아직 어리니까 내년에 와도 되... 될 거야."

 

- "나도 알아! 내가 살고 싶어서 동생을 저버렸어! 나도 안다고! 찜찜하고 꺼림칙해서 미치겠어! 그래서 너한테 이러는 것도 맞아! 하지만 너는? 너도 선택할 수 있었어! 그 어린애가 분쟁 지역으로 돌아가지 않게 할 기회는 너한테도 있었잖아! 그런데 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난...! 난 네가 조금이라도 내 눈을 피하고, 나처럼 찜찜해하면서 동생 얘기를 물으면... 그러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어. 어쩔 수 없다고, 살고 싶은 건 다 마찬가지라고. 그걸 너한테 확인받고 싶었단 말이야..."

"... 대체 왜 내가 거기에 맞춰 줘야 하는데?"

"그야... 사람이니까... 사람이면 응당 그러는 거잖아..."

 

- "지금 이게 바로 그 답을 얻기 위한 테스트예요."

"뭐..."

"당신이 처해 있는 이 상황은 사람이란 누군가의 예상 그대로 움직여 주는 편리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비롯됐어요. 터너 군이 감염되었을 때 우리가 기대한 것은 발병한 터너 군, 당신과 적절한 신뢰 관계를 형성해 온 교사, 그리고 당신이 한 공간에 있을 때 당신이 터너 군에게 코어 능력을 쓰는 거였죠."

 

- "하지만 한편으로는 확신을 심어 주었죠. 당신은 우리가 찾던 '치료제'가 틀림없다고."

리마.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때 조금 기뻤어. 그 말이 꼭 사실이었으면 했어. 그럼 네게도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어. 

... 그건 내가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마음이었을까?

 

- "... 무슨 처벌을 받게 될지 무섭지도 않아? 총살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 뭘 몰라서 하는 소리야, 아니면 내가 뭘 모를 거라 생각해서 하는 소리야? 고아 하나 죽였다고 나를 총살한다고? 그보단 강제로 파병하든가 노역장에 보내겠지. 그게 훨씬 남는 장사니까. 전쟁이 없던 시절이면 모를까, 요즘 같은 때에 나처럼 젊고 튼튼한 인력을 그딴 이유로 죽일 것 같아? 절대 그럴 리 없어. 대단히 힘 있는 가문의 도련님이면 몰라. 아무 연고도 없는 렌탈 따위를 위해 정의를 실현하려 들 사람은 없다고. 그러니 뭐 대단한 책임감이나 사명으로 이러는 게 아냐. 어차피 시시한 처벌로 끝날 걸 아니까 굳이 내가 한 짓을 부정하지도 않는 거지. 알아들었으면 그 녀석만 잠깐 만나게 해 줘. 대충이라도 설명은 해 줘야 할 거 아니야."

"... 강제 파병이나 노역장이 시시한 처벌이라니, 그거야말로 뭘 모르는 소리 아닌가? 지옥 같은 전쟁터에서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데?"

"그게 뭐? 여태 내 인생이랑 별로 다를 것도 없어."

 

- "있잖아. 나도 매일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 비록 그 사람은 날 보고 싶어 하지 않지만."

"누가 네 얘기 궁금하다고 했어...?"

"어쩔 수 없어. 내가 그 사람 부모를 죽여 버렸거든."

"..."

"처음에는 날 용서해 줬어. 갑작스럽게 코어가 폭주했을 뿐이라는 사실도 이해하고 납득하는 것 같았지. 어쩔 수 없었던 거구나. 그렇게 말하며 날 안아 줬어. 원망하지 않겠다면서. 그런데 어느 날... 연구원에게서 그날 내가 폭주한 원인을 듣고 만 거야. 우리 둘의 거리가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탓이었다는 걸."

 

- "그날부터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어. 이해는 해. 온전히 내 탓일 때는 품어 줄 수 있었지만, 자신의 책임도 있다고 자각하는 순간 견딜 수가 없게 된 거지. 그 무시무시한 사고를 나눠 지기엔 너무 여리고 다정한 사람이었거든."

 

- "그래서... 너도 예상했겠지만 삭은 '학교'에 꽤 중요한 인물이야."

"삭이? 아니면 그 녀석이 가진 능력이?"

"아, 당연히 후자야. 같은 코어를 가진 다른 인물이 나타난다면 '학교'는 주저 없이 삭을 놓아줄 거야."

"... 삭에게는 별개의 결격 사유가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정확해."

 

- "발신자, 세계를 위험에서 구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 뭐라고 생각해? 정의감, 그리고 공명심이지. 나의 정의로운 행보가 세상에 이바지하고 그리하여 후세에 오래도록 칭송받으리라는 확신이 없는 한 사람은 절대 자신을 내던지지 않아. 그런데 말이야.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는데 그 사람에게 조금의 정의감도 공명심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너, 한 번이라도 벌레에 물려 본 적 있니?"

"... 잘 모르겠어요."

"모르겠다니?"

"벌레에 물려 힘들었던 기억은 없지만... 단순히 눈치채지 못했을 뿐인지도 모르니까요."

 

- "네게 우리가 찾는 소질이 있단 걸 증명하면 너와 가족들이 모두 편하게 살 수 있어. 어떻게 할래?"

"편하게 살 수 있다는 게 어떤 거예요?"

"음... 일단 매일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고, 안전한 잠자리도 보장되지."

"가족들도 다 데려가나요?"

"가족들에겐 따로 지원금이 나올 거야. 지금보단 훨씬 나은 생활을 할 수 있게. 왜, 다 같이 데려가고 싶니?"

"아뇨, 그건 아니고... 제 부모님은 운이 좋다 싶어서요. 생긴 아이를 낳았을 뿐인데 갑자기 편한 생활을 하게 됐네요."

"... 다시 말해 두지만 네가 테스트에 통과했을 때의 이야기야."

"알아요. 하지만 왠지... 당신이 찾던 게 뭐든 아마 저일 것 같아요."

"그건 예감이니?"

"희망사항이에요." 

 

- "아니라면 다행인데, 혹시 이 애라면 일이 좀 복잡해지겠어. '하나'와 완전히 비슷한 유형이네."

"전부터 여쭤보고 싶었는데... 그 유형이라 함은 공감 능력이 부족한 케이스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음... 아니, 완전히 반대야. 공감 능력이 모자란 사람들의 특성은 대체로 본인을 엄청나게 과대평가한다는 거야. 자신이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조차 본인이 뛰어나기 때문이라 생각하는 거지. 저 사람보다 내가 똑똑해서, 이성적이어서...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오히려 다루기 쉬워. 타인의 평가에 매우 집착해서, 조금만 추켜세워 주면 좋다고 부나방 짓을 하거든. '하나'는 아니야. 그 애는... 남들의 평가에 관심이 없어. 그러니 남들의 기대에 부응할 생각도 없고, 지금과 다른 내가 되려 애쓰지도 않지. 그런 사람에게 어떤 역할을 맡기기는 쉽지 않아. 그나마 하나에게는 사랑하는 동생이라도 있었는데... 신입생에게는 그마저도 없다니 어찌해야 하려나?"

 

- "... 발신자가 감염되면 코어 보유자도 감염된다고..."

"그보다 중요한 건 코어 보유자가 바이러스를 '발신자'를 향한 위험으로 해석하느냐 마느냐였어."

 

- "너 머리가 좀 이상해진 것 같다. 아니, 원래도 이상했지만 지금은 아예 정상이 아니야. 그러니까 바꿔 말하면 네가 가진 코어인지 뭔지로 감염자란 감염자는 모조리 죽이는 게 네 역할이란 거야? 세계의 석학이란 인간들이 모여서 하는 짓이 치료제 개발이 아니라 감염자 몰살 계획이라고?"

 


 

 

- "심층면접 결과 성인보다 아이에게 약간의 연민을 보이기는 합니다."
"아이?"

"정확하게 말하면 아이 자체를 향한 연민이라기보단 그 부모를 향한 경멸에 가까운 감정인데요."

 

- "애들은 모두 불행하잖아요. 식량과 식수는 턱없이 모자라고 전쟁과 전염병은 끊이지 않고 누구 하나 편히 살 수 없는데. 이런 세상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건 아이의 삶이 고통으로 가득 차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겠다는 거죠. 어디든 팔아서 제 입에 풀칠이라도 하겠다는 목적도 있을 테고요. 그런 멍청하고 이기적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으니 가엾잖아요."

 

- "... 그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으면 되는 건가?"

"네?"

"안전하고 풍족한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면 아이를 낳을 자격이 생기는 거야? 그 애 기준에서 말이야."

"글쎄요. 그것까진 잘..."

"그거 알아? 멸시는 때로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지. 한번 찾아볼까? 멍청하고 이기적인 부모가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낳은 불행하고 가여운 아이를."

 

-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거야. 코어 보유자가 원래 그래. 발신자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안위 같은 건 신경 안 쓰거든."

"당신도 그래?"

"..."

 

- "공명심이 없다...? 진저가 그래?"

"그래서 내 존재가 필요하다는 뜻 같았어."

"네가 있어야 전염병을 없애려 몸 바칠 거라고? 틀린 말은 아니지. 네가 보기엔 어땠는데? 삭에게 정의감이란 게 전혀 없어 보였어?"

"... 글쎄... 오히려 그 녀석은... 나와 관련된 일일 때 가장 정의에서 멀었는데."

 

- "그건... 네가 그러고 싶어 했잖아..."

"... 뭐라고?"

"네가... 그 애를 보자마자 불쌍하다고 생각했잖아. 말로는 버리고 가자 했지만 속으로는 망설였고 내가 네 의견에 반대하는 걸 괘씸하게 여기면서도 안도했잖아. 부모를 찾아 주자고 할 때마다 그런 게 있겠냐고 말하면서도 내심 그러기를 바랐잖아. 네가 그 애를 동정하면서도 입으로는 다른 말을 하고 나를 핍박하면서도 내가 꺾이지 않기를 바라는 것도, 네가 그 애한테 너 자신을 비춰 보고 있다는 것도, 나는 다 알았어. 그래서 네가 원래 하고 싶어 했던 일을 대신 한 거야."

 

- "발신자란 건 그렇게 절대적인 존재가 아냐. 그것부터 인정해야 내 얘기가 이해가 갈 거야."

"인정했어. 그래서?"

"인정 못한 것 같지만 그래, 차치하고. 즉, 굳이 너여야 할 필요는 없었다는 거야. 소질만 있으면 누구라도 괜찮아."

 

- "발신자란, 상대에게 자신의 정보를 증폭시켜 전달하는 소질을 가진 사람을 통틀어 이르는 거야."

 

- "중요한 건... 타인을 내게 몰입시키는 거야. '어쩐지 눈이 간다'는 표현이 있잖아. 그런 게 다 재능인 거야. ... 발신자로서의."

"..."

"짚이는 일이 있나 보지?"

 

- "코어 보유자일 가능성이 있다는 거야? 분명 나를 노리고 날아온 수류탄이었어. 그 녀석이 날 끌어안고 몸으로 막았지. 과다출혈로 죽었는데, 마지막까지 웃고 있었어. 너라도 살아서 다행이라면서. 이해가 안 갔어. 그 녀석을 살기 위해 친구의 시체까지 토막 냈던 놈이야.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자기 목숨을 버릴 수가 있어?"

"... 뭔가 특출난 재능이나 뛰어난 신체 능력 같은 게 있는 친구였어? 머리가 지나치게 좋다든가."

"... 기억력이 좋긴 했어. 어려운 말도 많이 알았고. 하지만 평범의 범주에서 벗어날 정도였던 것 같진 않아."

"코어 보유자가 아니었다고 믿고 싶어? 정말 널 살리기 위해 죽은 걸까 봐?"

"... 그보다 당신 말대로라면 발신자의 병이 코어 보유자를 감염시키는 이유는 뭐야? 아차피 아무나 발신자가 될 수 있는 거면 상관없잖아."

 

-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 이 관계를... 끊기 위해선."

"의외네. 충격 안 받았어?"

"뭔 충격?"

"내심 기쁘지 않았어? 절대적이고 대체 불가한 인연이 있다는 사실이. 오로지 너만이 앉을 수 있는 의자라고 믿었을 거 아냐. 그게 아니라는 게 서운하지 않아?"

 

- 그날 처음으로, 나도 네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옥 같은 네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진다면...'

 

- 실혈사는 전장에서 제법 운 좋은 죽음에 속한다. 

"왜?"

"의식이 먼저 흐려지거든. 대체로는 고통과 위험이 비례하는데, 과다출혈은 예외야. 아차 하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 죽지. 제일 고약한 건 정신은 멀쩡한데 고통은 극심하고 그렇다고 곧장 죽지도 않는 그런 상처야. 팔다리 절단이나, 화상... 차라리 죽여 달라고 울부짖는데 보다 못해 총구를 들이밀면 대장이 화를 내곤 했어."

"병사가 아까워서...?"

"아니, 총알이 아까워서.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쳐서 죽이면 되니까 총알 낭비하지 말라더라고."

 

- "그래, 바이러스를 종식시키면 바이러스로 죽을 일은 없겠지. 하지만 세상이 이 꼴인 게 오직 바이러스 때문인가?"

 

- "이봐, 발신자. 일을 쉽게 만드는 건 지략이 아니야. 발언권이지. 그리고 이런 세상에서 발언권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뭔지 알아?

절대적인 무력.

내가 너희를 여기서 빼낼 수 있다고 자신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해. 내가 가장 강하기 때문이지."

 

- "이봐, 난 너희의 호위도 겸하고 있는 거야. 무슨 일이 벌어져도 내가 지켜 줄..."

"웃기지 마. 난 평생을 길에서 살았어. 바깥이 어떤 곳인지는 내가 잘 알아.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날 죽일 수 있단 건 믿어도, 여차할 때 나나 삭을 보호해 줄 거라고는 안 믿어. 알아들었으면 내 총 가져와. 그러기 전까지는 한 발짝도 안 나가."

"... 에이- 농담한 거야. 정색할 거 없어. 네 총이라면 이미 차에 실어 놨어."

 

- "뭐, 나도 확 잘라 버리고 싶기는 한데 내 맘대로 그럴 수가 없어. 내 코어에 대해 조사하던 연구원 하나가 머리카락도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 게 5년 전이거든. 그래서 내 머리가 내 힘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게 증명되기 전에는 못 잘라."

"... 그 연구가 아직 진행 중인 거야?"

"설마. 말 꺼낸 놈도 이미 까먹었을걸. 그냥 내 사소한 편의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거지. 코어 보유자라는 게 원래 그런 존재야."

"... '학교' 놈들이 참 일관적이네."

"하하, 그렇지?"

 

- "한 번은 이사장을 직접 만날 기회가 있어서 대놓고 물어봤거든. 바이러스를 종식시킨다는 대의를 위해서라면 그 수단이 될 사람들이야 아무래도 좋은 거냐고. 그랬더니 그 사람이 뭐라는지 알아?"

 

- "그럼 반대로 묻겠는데요, 하나 양. 전 세계적 팬데믹이라는 미증유의 재해 앞에서 우리가 세울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는 어디까지일까요? 우리는 이 바이러스와 벌써 십 년 넘게 싸우고 있어요. 그 최전방에는 언제나 세계의 석학들이 있었죠. 평생을 공부하고 연구해 바이러스와의 싸움에 몸을 바친 재원들의 인고의 노력으로 울타리를 치면 경고를 무시하고 감염 지역에 들어간 사람이 기어코 그 울타리를 부숴 버려요. 그러다 감염돼 놓고는 너희처럼 똑똑한 인간들이 왜 책임을 다하지 않는 거냐고 호통을 치죠. 그때마다 난 생각해요. 어째서, 누구보다 인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들이 저런 멍청한 인간들을 치료하느라 죽어가야 하지?"

 

- "그러면 누군가가 이런 대답을 해요. '그게 힘을 가진 자의 의무이니까.' 하지만 누군가를 구할 힘을 가진 사람만이 내가 지킬 상대를 선별할 수 없다는 건 이상한 논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인간의 이타성에 대한 이론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인간이 타인을 돕는 것은, 인류 전체의 생존율을 높여 종을 보존하기 위해서라고. 그렇다면 일부를 도태시켜야만 인류 전체의 생존율을 높일 수 있다고 가정했을 때, 어느 쪽을 안고 가야 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나요? 난 별로 당신에게 대의를 위해 희생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동생을 살리고 싶다면 내 편에 붙으라는 거죠. 그게 다예요."

 

- "그때 완전히 질린 거지.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어. 그 뒤로는 죽은 듯 살면서 기회만 봤고."

"..."

 

- "... 있잖아, 리마. 아까 하나가 한 말... 어떻게 생각해?"

"뭐? 니네 이사장이 같이 살 인간을 선별하네 뭐네 한 거?"

"... 으응."

"생각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다 개소리지. 멍청하고 돈 없는 인간들 다 죽여서 바이러스를 막으면 세상에는 똑똑하고 돈 많은 인간들밖에 안 남는다는 건데 그럼 누가 지들을 위해 건물을 짓고 오물을 치워? 애초에 선별을 위해 죽어갈 인간 모두가 바이러스를 퍼뜨린 주범이라는 근거는 또 어디 있고? 모조리 궤변일 뿐이야. 그러니 하나도 환멸을 느낀 거잖아."

"..."

 

- "뭘 원해서 여기까지 온 건지 알겠어요. 이해했으니 이제 돌아가도 돼요. 굳이 피를 볼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삭!"

"하나, 나는. 나는 당신과 같아요. 당신을 이해해요. 그래서 처음부터,"

 

- "당신이 우리를 놔줄 생각 따위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내가 당신이라면 그 말을 듣는 순간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충성했을 테니까요. 환멸을 느꼈다고? 그럴 리 없어. 내가 나타난 시점에서 '학교'의 계획은 완성 단계애 접어들었고, 당신은 이제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요. 우리를 도와줄 이유는 전혀 없는 거죠. 그럼 이런 거짓말을 해 가며 우리에게 바깥을 보여 주는 이유가 뭐지? 아마도 보여 주는 일 자체에 의미가 있는 거겠지."

 

- "한 가지 확실히 해 두고 싶은 게 있는데 나는 말했어. 발신자는 몰라도, 너를 속이지는 못할 거라고. 그런데도 막무가내더라. 어떻게든 나는 너희를 도와주는 역할로 남고, 어디까지나 은근하게.. 불행한 사고를 유도하랬어. 아마 네가 '학교'에 조금이라도 나쁜 감정을 품는 걸 막고 싶었겠지. 근데 나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소용없을 거라고. 네 말이 맞아. 안내인은 없어. 내 동생도 안 올 거야. 당연한 거 아냐? 미치지 않고서야 내가 그 애를 '학교' 밖으로 내보낼 것 같아? 내 동생처럼 아무 힘없는 사람이 약탈과 폭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잠들 수 있는 장소는 '학교' 뿐인데."

 

- 그러니까 이런 말을 하고 싶다는 거지. 너희끼리 도망쳐 봐야 뭘 어쩔 건데?

온 세상에 시시각각 진화하는 바이러스가 창궐해 있고 식량도 돈도 물도 없는데 우리를 등지고 나가서 대체 뭘 할 수 있어?

 

- "물론 그딴 건 다 상관없다고 말하고 싶겠지. 하지만 생각해 봐, 발신자. 넌 삭과 달라.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하지 않지. 그 생각은 해 봤어? '학교'를 배신하고 도망쳤는데 너 혼자 병에 걸려 죽어 버리면 삭은 어떻게 되지?"

 

- "처음 보면 놀라지만 정말 별거 아니야. 피도 이제 멎었지? 지원 병력 요청했으니 조금 쉬다가 돌아가자."

"나 들으라고 그렇게 주절주절 떠드는 거야?"

"- 아니라는 말이 바로 나오질 않네..." 

"그러니까 당신은... 사람이 이 꼴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별일 없을 테니 괜찮다고 말했던 거군."

"... 말해 두겠는데 나도 겪었던 일이야. 현재도 겪고 있고."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늘 궁금했던 게 있거든. 세상이란 원래 다 이렇게 춥고 배고프고 고통스러운 건가?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생각해 보니까... 나한테 고통을 주는 건 모두 사람이더라고. 내 식량을, 담요를 빼앗고 내 몸을 잘라 가지려 하고 나를 부려먹고 때리고 전쟁터에 밀어 넣는 그게 전부 사람이었어. 그래서 어느 날부터인가는 직접 물어봤지. 나한테 왜 이런 고통을 주는 거냐고. 그럼 다 똑같이 대답하더라."

 

 

"나도 너처럼 그랬어."

 

 

 

- "'나도 너처럼 혹은 너보다 더 고통스럽게 살아왔어.' 그래서 네게도 묻고 싶은데 말이야. 대체 네가 겪은 고통이 삭과 무슨 상관이지? 왜 네게 고통을 겪게 한 놈들은 멀쩡히 내버려 두고 너한테 아무 잘못한 것도 없는 삭을 너와 똑같은 구렁에 빠지게 하는 거야?"

"... 그러게. 네 말이 맞네. 내 고통은 너희와 상관이 없어. 내가 삭을 데려가고자 하는 것도 같은 이유지. 너희가 고통스럽거나 말거나 내겐 아무 상관없기 때문이야. 난 그저 내 동생을 살리고 싶을 뿐이고 그 외에는 어떤 이유도 목적도 정의도 없어. 미안. 실수로도 같은 말은 다신 하지 않도록 조심하지."       

 

- 아. 틀렸어. 아니, 사실 알고 있었지. 타인의 고통을 생각하는 살람만이 이용당하는 거야. 내가 아닌 타인의 괴로움과 비참함에 흔들리는 사람만이 충분한 힘을 가지고도 아무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언젠가 숨이 끊어지는 그날까지 찢기고 부서지고 뭉그러지는 거야. 

 

- "난 멀쩡히... 아니, 멀쩡히 살고 있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내 삶을... 적당히 수긍하고 타협하고 있았어. 네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불쑥 나와서 온갖 헛소리로 사람을 휘저어 놓지만 않았으면 앞으로도 그렇게 살았을 거야."

'리마.'

 

- '너는 나를 만난 것을 후회하고 있지만 내가 후회하는 건 하나뿐이야.'

"그만두라니까!"

"미안해. 널 만나기 전에 죽지 못해서... 몇 번이나 기회가 있었는데..."

 

- "하나, 만약에 나나 양이 진심으로 당신을 죽이려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죽어 줬겠지. 그게 그 애가 정말 원하는 거라면."

"맞아요. 그게 보통 코어 보유자들의 사고방식이죠. 하지만 증폭기를 잃은 코어 보유자들은 머리로는 당신처럼 생각하면서도 반격을 해 버립니다. 자신의 목숨을 우선하고 마는 거죠. 증폭기가 파괴된 후 발신자들이 코어 보유자에게 살해당한 건 모두 그 경우예요. 실험 당시 코어 보유자와 발신자가 서로를 죽고 죽이는 상황까지 가는 현상을 관측하던 어느 연구원이 '마치 전파폭풍 같다'-고 말했죠. 그게 바로 연구소에서 말하는 전파폭풍... 즉, <라디오스톰>입니다."
  

  

 


 

- [나는 사람들이 왜 운명을 믿는지 궁금해.]

 

- "아마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유령 믿는 놈이 할 말이냐?"

"그거랑은 다르지!! 어떻게 살아갈지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는 게 말이 돼? 그럼 우리 같은 애들은 뭘 위해 태어난 거야?"

"뭘 위해 태어나긴? 누가 낳았으니 태어나지. 뭔가를 위해서 태어나는 사람이 따로 있긴 하냐?"

 

- "바이러스가 퍼지기 전,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대. 그러니 이 생을 제대로 살아야만 다음 생에서 부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도."

"착하게 살라는 거잖아. 좋은 말이네."

"그렇게 생각해? 바꿔 말하면, 지금의 생을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은 그게 모두 전생에 나쁘게 살아서라는 뜻이잖아. 살면서 아무리 부당한 일을 당하고, 어떤 부조리를 겪어도 그게 다 자신의 업보를 돌려받을 뿐이라고 세뇌하는 게 이 교리의 목적이라고."

"...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야?"

"결국 이런 신념으로 이득을 보는 게 누구겠어? 기득권이야! 힘닿는 데까지 사람을 착취하고 괴롭히면서도 네 탓이라고 말할 수가 있으니까! 알겠어, 리마? 밑바닥에서 태어난 인간일수록 운명이란 개념에 저항해야 돼! 그래야 이길 수 있어!"

 

- "모르겠다, 나는. 네가 기어코 이런 일을 벌일 줄은 예상 못했거든. 내가 널 너무 과대평가했군. 좀 더 똑똑할 거라 생각했는데."

 

- "너 말이야. 네 눈에는 삭이 어떻게 보여? 발신자를 족쇄로 채워 놓지 않은 상황에서 윤리적이고 옳은 선택을 할 사람 같아?"

"... 허. 윤리적인 선택? 그러지 말라고 목줄 끊은 건데 무슨 소리야?"

"... 어리석긴."

 

- "착각이야. 삭을 뭐 하러 굳이 기절시켜? 맨 정신이어도 충분히 끌고 갈 수 있는데. 의심할 거 없어. 너도 같이 가면 되지. 이번에도 총은 우리한테 맡겨 줘야겠지만."

"..."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이나 저 세 치 혀에 속아 넘어갔던 것은 그러는 편이 편했기 때문이다. 

 

- 어쩌면 저 말이 맞지 않을까? 포기하고 따라가는 게 내게도 좋은 일 아닐까?

 

- "... 애초에 삭을 그의 손에 넘겨준 게 실수였네요."

"내 실수를 인정하기 싫어서 하는 말은 아닌데, 난 그가 삭을 업고 있는 편이 오히려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어."

"왜죠?"

"나라면 나나를 업고서 그런 짓은 절대 못하니까."

"삭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겠죠."

"나도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해. 너희는 절대 나나를 해치지 못한다고. 하지만 나나의 등을 너희의 총구가 있는 방향으로 들이미는 건 전혀 다른 문제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그놈은 위험해. 삭을 죽일지도 몰라."

 

- "하..."

'저건 하필 하나뿐인 웅덩이 위에 엎어져서 죽고 그러냐... 삭한테라도 먹일까?'

 

- 그런 순간은 다시는 안 오는 건가...

 

- 삭에게 네가 그런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견딜 수 있겠어? 더 이상 네가 그 애의 발신자가 아니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어?

어리석긴.

 

- '내가 또 뭔가 실수한 건가...?'

"괜찮아. 네 친구는 나를 떠보려고 한 것뿐이야. 그렇지? 상대를 도발해서 감정을 동요시키는 건 아주 기초적인 싸움 기술이란다. 그게 뜻대로 안 풀려서 잠깐 짜증이 난 거지. 하지만... 그래.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는 호의는 경계하는 게 어쩌면 현명한 거지..."

 

- "저 사람한테 뭔가 기대하는 거 아니냐고."

"?"

"얼마나 친했는지는 몰라도, 이 상황에서 믿고 의지하는 건 멍청한 짓이야. 지금은 일단 필요한 것만 빼앗아서 도망치는 게 맞아."

"..."

"왜, 뭐 불만 있어?"

"불만이 아니라...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어. 내가 저 사람한테 뭘 기대한다는 거야?"

"좋은 사람이라며?"

"그게 왜..."

"뭘 가지고 좋은 사람이라 말하는데? 먹을 걸 줘서?"

"..."

"... 냉정히 말하자면 우리를 본 사람을 살려 두는 게 맞는지도 고민해야 할 판이야. 죽이지 않으려면 그냥 새벽에 뜨는 게 나아."

'... 아. 이 애는 지금.'

 

- '불안하구나.'

"그럼 죽이자. 저 사람이 거슬려서 제대로 쉴 수 없는 거면 죽이는 게 낫잖아."

'그리고 불안한 이유는 잘 몰라서구나.'

 

- 태어나 만난 타인은 언제나 같은 말을 했다.

"너는 이상해. 보통은 너처럼 생각하지도 행동하지도 않아."

뭐가 그렇게 다르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는 다르니까 다르다고 하겠지.

그렇다고 온전히 고립되지도 않았다. 내가 태어난 세상에서 살아 있는 인간이란 식량을 사이에 둔 경쟁자이자 그 자체로 귀한 자원이기도 했으므로. 

그래서 매일 의문이었다. 

그들 말대로 내가 잘못 만들어진 인간이어서 제대로 만들어진 인간 사이에서 열외 되고 배척받는 게 당연하다면, 그들은 왜 내게서 끊임없이 '필요'를 찾으려 하는 걸까?

 

- 내게 곁을 주지 않으면서 나를 지우지도 않는 수많은 자들의 혀와 손과 찰나의 온기가 아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으나 대단히 절실했던 적도 없었다는 걸 리마를 만나고서야 알 수 있었다.

 

- "내가 너의 무엇이든 상관없어. 저 사람이 신이라 해도 너랑은 안 바꿔. 그러니 죽이자. 그래야 네가 잠시라도 마음 놓고 잠들 수 있다면 그렇게 하자. 아무 걱정도 하지 마, 리마. 나는 널 위해 태어났어."

아마도 생에서 거의 유일했을 호인을 눈 하나 깜짝 않고 죽이겠다 말하는 그 애를 보면서, 머리칼이 쭈뼛 서도록 밀려드는 안도감과 쾌감을 어찌 다루어야 좋을지 몰라 그저 눈을 감고 있었다. 

이 녀석이 잘못 만들어진 인간이라면 아마도 나 역시 정상은 아닐 거야.

 

- "이번에 시야에 들어오면 무슨 수를 써서든 확보해. 여차하면 다리 하나쯤 날리면 되잖아."

"... 어느 쪽을요?"

"방향이야 알아서 하고."

"아뇨, 코어랑 발신자 둘 중 어느 쪽 다리를 말씀하시는 거냐고요."

"어느 쪽이 뒤탈이 적을까?"

"말해 뭐 합니까..."

 

- "코어 쪽만요?"

 

- "이번 케이스는 발신자가 전투 능력이 있으니 그쪽을 먼저 제압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그래서 코어 보유자 눈앞에서 발신자를 다치게 하겠다?"

"... 아."

"여러 번 말했지. 코어는 완전히 정신적인 영역에 있는 능력이야. 함부로 자극하는 건 좋지 않아. 발신자를 두고는 더더욱."

 

- ... 괜찮아.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어. 괜찮아. 

혹시 상태 안 좋은 거 들켰다가는 저거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어...

'전부 감염시키고 편하게 탈출하자!'

저 녀석 사고방식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 "...뭐지?"

"위협이겠지. 지금부터 잡으러 가겠다는. 당황해서 서두르길 바라는 거야. 일단 침착하자. 괜찮아. 차근차근 내려가면 도망칠 수 있어."

'... 그럴까? 내가 하나라면 절대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을 때만 이런 일을 할 거야. 리마는 정말로 이 상황에 희망이 있다고 믿나? 리마, 나는... 역시 방법은 한 가지뿐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어쩐지 내가 그걸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

 

- "너, 우리가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하지?"

"..."

"네가 그렇다면 아마 하나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겠지. 그래서 이런 여유를 부리는 거야. 이 상황을 이용하면 분명 방법이 있어. 그러니까 도망쳐 보자."

 

- "리마, 나는... 저들이 너를 다치게 하는 순간 한 사람도 살려 두지 않을 거야. 기필코 그렇게 할 거야."

 

- "... 일단. 몇 번째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진정 좀 해. 무슨 뜻인지 알겠으니까. 있잖아, 삭. 내가 보기에 넌 지금 살짝 정신이 나가 있어."

"... 응?"

"물론 원래도 네가 제정신은 아니지만. 사람 여럿을 손 하나 까딱 않고 죽여 보니 쉽게 느껴지겠지.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일이 쉬우면 쉬울수록 안 죽일 방법을 찾아야 해."

"... 왜?"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나는 네가 어떤 인간이든 널 포기하지 않아. 하지만 저들은 네 인간성을 재단한 결과 널 포기하고 사살할 가능성이 있어. 그러니 남들 앞에서는 조금이라도 감춰 봐."

"...... 알았어."

 

- 겨냥하고 있어. 아예 양다리를 쏘면 내가 끌고 가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거야. 숨만 붙여 놓으면 앞으로 다리를 못 쓴대도 상관없다는 거야. 

아. 젠장. 두고 봐라. 시체 한 점도 주지 않을 테니까. 내가, 차라리 내가 전부 집어삼키는 한이 있어도.

 

- "세상을 구할 기회를 이런 식으로 날려 버리고 정말 만족하나? 인류는 또다시 기약 없는 고통을 견디며 무고한 희생자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렇게까지 해서 손에 넣은 게 기껏 죽을 때까지 도망 다니는 삶이겠구나. 꼴좋다."

"... 아마 당신이 지금 화가 난 건 꿈꿔 왔던... 동생과의 행복한 삶이 허무하게 사라져서겠지? 내가 당신의 친구였다면 안타깝게 여겼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친구가 아니고, 나에게 중요한 건 이 손에 쥔 것뿐이야." 

 

- "극적인 스트레스 상황에 놓인 코어 보유자가 '사고'를 내는 경우는 많이 있었지만... 그런 식으로 코어의 성질 자체가 변해 버린 건 처음이었고 그때부터는 코어 보유자에게 지나친 신체적 고통을 주는 게 금지됐었죠." 

 

- "마지막까지 성실하군요, 진저. 당신의 미래는 이미 끝났는데."

"인류의 미래가 끝난 마당에 제 미래 따위야..."

"무슨 소리야? 난 포기할 생각 없어."

"... 늘 생각하지만 이사님도 의외로 성실한 분이시네요."

"그야, 뭐... 오래 살고 싶으니까. 내가 오래 살아야 저것도 오래 살 것 같거든요."

 

- "꼭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야만 거짓말을 하나. 거짓말은 어차피 감정적인 선택이야."

 

- 눈을 깜박일 때마다 스며드는 후회와 숨 쉬는 순간마다 차오르는 애정.

사실은 언제나 네게 묻고 싶어. 

지금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기어코 이 고통 가득한 생으로 너를 내동댕이친 나를

우리가 지나 온 천 번의 안도 속에서

단 한순간이라도 원망한 적은 없었는지. 

 

 

결국은 같은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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