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정회엽] 책 덕후 아님 - 그래도 출판 편집자로 산다

일루젼 2023. 11. 2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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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정회엽 
출판 : yeondoo
출간 : 2021.12.06


       

        

음. <Legends Never Die>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GODS>도 좋지만 내 취향엔 역시 <Legends Never Die>다.) 

 

10년 동안 한 길을 걸어가기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정작 그런 삶을 살아낸 이들은 그저 한눈팔지 않고 걸어가다 보니 그런 결과가 나왔을 뿐이라고들 하지만, 그 '한눈'을 돌리지 않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근래에는 학창 시절 좋아했던 '추억의(?) 책'들을 다시 찾아 읽고 있어서인지 새삼 '시간을 버티는 힘'에 관해 생각이 튄다. 

 

그런 시기에 읽게 된 책이 <책 덕후 아님>이다. 이 책은 17년째 출판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는 저자의 '편집자 인생'에 관한 글들을 모아낸 두껍지 않은 책이다.

 

다만 저자가 서문에서 이미 밝힌 바처럼 '누가, 왜 이 책을 읽을 것인가'에 관해서는 마지막까지 고민을 멈추지 못한 것 같다. 이 책은 편집자를 꿈꾸는 이들에게 꿈과 희망 -또는 노하우- 을 전하기 위한 책은 아니다. 또한 편집자란 어떤 일을 하는가가 궁금한 일반인을 위한 책도 아니다. 아마도 이 책은, '정회엽'이란 저자에 관한 호기심과 애정을 지닌 이들을 위한 책이라고 칭해야 적절한 것 같다.

 

200페이지가 되지 않는 가벼운 장정이지만 한 꼭지씩 썼던 글들을 모았기 때문인지 중복되는 단락도 적지 않고, 문학적인 느낌의 유쾌한 에피소드나 너스레는 찾아보기 힘들다. 저자의 약력이나 편집 이력, 출간한 책 소개를 위한 책 속의 책인가? 싶은 순간도 있었다. 

 

헤서 독서를 '즐긴다'고 표현하기가 저어 되는 분들께 권하기는 조금 어려운 책이다. 

하지만 '이것이 나다. 힘을 좀 빼고 살아도, '덕후'라고 할 만큼 미쳐 있지 않아도, 출판 동네에서 좋은 책을 내며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저자의 메시지에 집중한다면 충분히 의미 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소개하는 책들을 이어서 읽어 보는 것도 좋겠다. (나 또한 그럴 생각이다.)

 

아마 내가 저자에게 느끼는 이 약간의 서걱함이, 저자가 출판계에서 책덕후들을 보며 느껴왔을 그런 종류의 서걱함은 아니었을까 감히 지레짐작해 본다. 나 또한 하루키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도쿄기담집>은 예외) "'이 세상에는 소설 따위 없어도 상관없다'는 쪽의 사람이었던 것이다"라는 저자의 표현에는 깊은 충격을 받고 말았다... 나는 모든 글과 책은 '이야기'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며 그 '이야기'가 하나의 메세지로 압축될 수도 -지식인문교양-, 그렇지 않을 수도 -역사문학기능- 있을 뿐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떠한 책이 반드시 '효용'이나 '유익'을 줄 필요는 없다 -아름다움은 무용에서도 나온다- 고 당연하게 믿어왔던 나와 살림지식총서로 단행본 편집을 시작한 저자는 어떤 면에서 보면 상당한 대척점에 서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나와 저자는 같은 '책의 세상'을 살고 있다. 책을 만들고 펴내는 자와 소비하고 읽는 자라는 입장 차이는 있을 지언정, 독서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거나 좋은 책을 내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같은 현상적 문제를 고민하고, 또 다른 누군가가 만들어낸 책들을 읽는다. -각자 읽는 책은 다를지언정- 

 

이런 다양성이 모인 것이 비단 책 동네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집단이 바로 조직, 사회, 국가가 아니겠는가. 

결국 다르면서도 같은, 각자만의 취향과 관심사와 깊이를 지닌 이들이 어떻게 어우러져 살 것인가- 그것이 바로 삶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서로는 서로가 어떻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그토록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지를 이렇게나마 곁눈질하며 위안과 힘을 얻어가는 것일 테다.

 

따위의 잡생각을 해보았다. 

이 잡생각의 끝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떠올릴 때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두려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숨겨야 했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믿고 싶다. 지금처럼 1인 크리에이터들이 각자의 색으로 빛날 수 있는 시대는, 타인의 취향을 스스럼없이 평가하고 분류하지 않을 수 있는 시대라고. 

 

그러므로 10년 전, 20년 전의, 좋아하던 것을 마음껏 누릴 수 없었던 내게 이제는 혼날 걱정 없이 좋아해도 괜찮다고 말해본다. 그때의 나는 시간이 지나 읽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골라 읽을 수 있는 내가 되었고, 그때 좋았던 책은 지금 다시 읽어봐도 여전히 좋다고. 비록 한 길을 꾸준하게 걸어오진 못했지만 돌고 돌아 다시 걸어도 좋은 건 여전히 좋다고. 그러니 몇 십 년 뒤의 나도 아마 계속해서 책을 좋아할 거라고. 

 

그러니, 다 괜찮다고.  

 


   

 

- 정회엽. 대학 졸업 때까지만 해도 출판사에서 일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어쩌다 출판 편집자가 되어 17년째 이 일로 밥벌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매일매일 부족함을 확인합니다. 밥값은 하는 건지 걱정하며 또 하루를 보냅니다. 

 

- 이 책을 쓰는 데 예상보다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yeondoo의 김유정 대표와 계약서를 작성할 때만 해도 금방 쓰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말이죠. 편집자 출신 저자들은 언제나 마감을 잘 지킨다고 듣고 또 겪었습니다. 저 역시 그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는데 오만이었습니다. 

 

- 하지만 역시 책을 쓰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구성이나 내용의 충실함을 떠나 한 권 분량의 원고를 쓰는 것, 그것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을 일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 처음에는 '출판사 제안으로 시작하는 것이니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써 보자,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책까지 내보겠나'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실에 앉아 하는 일이 주로 '이 책의 주요 독자는 누구인가', '이 책은 왜 내야 하는가' 같은 질문에 답을 찾는 일이다 보니, 그 질문이 제 원고를 향할 때마다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물론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출판사의 몫으로 돌리고 나는 어서 원고 분량부터 채우자며 컴퓨터 앞에 앉기도 했지만, 진도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출판사에서 일해온 15년이 조금 넘는 시간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정리해 봤지만, '그래서 이걸 누가, 왜 읽어야 하지?' 하는 물음 앞에서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 본문에서 더 이야기하겠지만, 저는 어려서부터 책을 너무나 좋아하고, 그래서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찾고 찾다가 출판 편집자가 된 경우가 아닙니다. 그야말로 어쩌다 보니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하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지나버렸지요.

 

- 경제적 측면만 놓고 보면 출판계는 그리 권할 만한 동네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동네 사람들을 움직이는 동력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더 높은 자리에 가기 위해' 라기보다는 '더 좋은 책을 내기 위해'인 경우가 많습니다. 출판일을 하는 이유도 '책이 좋아서'가 많고요. '좋아서 하는 일'의 세계에서는 그 좋아함의 정도가 바로 경쟁력이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이 일을 시작한 저로서는 경쟁력 부족을 실감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 그렇다고 제가 책이 싫은데 억지로 일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막연하긴 했지만 분명 좋아하는 편에 속했습니다. 소비자 측면에서 보면 필요하면 사 보는 딱 그 정도였고요. 그런데 이 정도의 마음가짐과 생활습관으로 이 바닥에서 살아가는 건 만만치 않았습니다. '책이 너무 좋아서', '어떡하면 좋은 책을 만들까' 항상 고민하는 그야말로 '책 덕후'들 사이에서 저는 늘 어떤 열등감을 느끼며 지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주 빈번하게 '내가 계속 책을 만들어도 되는 걸까?' 하는 질문에 맞닥트렸지요. 물론 그 질문에는 지금도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 '나 같은 사람이 책 만드는 일을 계속해도 되는 걸까?' 하는 질문을 내내 끼고 지내는 내가, 세상의 그 많은 책 가운데 어떤 새로운 책이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이 책까지 찾아 집어든 독자에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얼까? 이 질문 앞에서 숨이 턱턱 막혔습니다. 완곡하게 원고를 못 쓰겠다는 의사 표현을 김유정 대표께 전하기도 했지만(너무 완곡해서 전달이 잘 안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 대표께서는 한결같은 믿음으로 계속 응원해 주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또 한 번 배웠습니다. '아, 저게 편집자의 역할이구나. 책을 쓰는 사람이 책 쓰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 덕분에 마음을 다잡고 이 글을 시작합니다. 무슨 얘기를 할지 다시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이렇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계속 책을 만들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 속에서도 어떻게 내가 15년이 넘는 시간 출판 편집자로 지낼 수 있었는지, 그 이야기를 해보자고 말이죠. 

 

- 글이라는 게 참 신기합니다. 모든 종류의 글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에세이의 범주에 드는 글은 분명 그렇습니다. 신기하게도 글을 쓰고 나면 좀 더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거든요. 글과 글 쓰는 이의 삶이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소중한 기회를 주신 yeondoo 김유정 대표님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그리고 세상의 그 많은 책 중에서도 바로 이 책을 선택해 이 순간 이 문장을 읽고 있는 독자님, 감사합니다. 한동안 하나의 책이 한 명의 독자를 만나는 것이 필연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 필연의 공식을 찾는 게 출판사의 할 일이라 생각했고요. 하지만 요새는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여러 우연이 겹쳐야 하나의 책이한 명의 독자에게 가닿는다고 생각하니, 이것이야말로 기적이구나 싶기도 하고요. 기적을 완성해 주신 독자님들께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책에 실린 제 삶의 작은 조각들이 부디 독자님의 삶에도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 2005년 12월, 웅진그룹의 신입 공채 연수를 위해 집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사실 내 마음은 반반이었다. 그해 주요 방송국 공채 시험에서 떨어지기는 했지만, 마지막 한 곳(EBS)이 남아 있었고 그곳의 필기시험까지 보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기시험 결과 발표날 연수원 숙소 로비에 있는 공용 컴퓨터로 몰래 (당시만 해도 스마트폰시절이 아니어서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사용하는 건 아주 힘든 일이었다) 발표 결과를 확인했다. '합격'이었다. 면접일은 이틀 앞이었고, 그 면접을 보기 위해서는 연수원에서 나와야만 했다. 

 

- 조금 고민하기는 했지만, 결국 연수원에 남았다. 며칠 동안의 연수를 통해 '회사뽕'을 제대로 맞은 결과였다. 애초 관심을 둔 언론계라는 곳이 내게는 무언가를 생산하는 이미지보다는 생산된 것에 대해 비판하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그런 지속적인 비판자의 스탠스에 좀 질리기도 한 터였다. 원래 기자 지망생이었던 내가 PD 지망생으로 방향을 바꾼 것도 기자보다는 PD가 그런 비판자의 스탠스에서 상대적으로 좀 더 비껴나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는데 일반 기업의 세뇌(?)를 받다 보니 '이 사회를 위해 무언가 상품을 생산해 내는 이곳이야말로 더 중요한 일을 하는 곳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 당시 웅진에서 신입 사원들에게 필독서로 권한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도 한몫했다. 대학 시절 내내 이른바 '운동권' 주변을 배회하며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정신을 키워갔던 내게 '기업'은 비판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웅진 그룹의 신입 사원 연수를 겪으면서, '기업 역시 세상을 더 낫게 만들고자 하는 열망으로 굴러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 그런 여러 모임 중에서 출판 편집자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인문고전강독반(인강반)'이라고 불렀던 인문학 학회다. 학과 경계를 넘어 문과대 전반에 걸쳐 학부생부터 대학원생까지 두루 섞인 그 모임에서 플라톤부터 하이데거까지 철학의 고전들을 머리 싸매고 함께 읽었다(물론 세미나가 끝나고 나서는 그보다 더 긴 시간을 소주잔을 기울이며 세상의 모든 문제를 논했다). 주로 국문으로 번역된 책을 함께 읽었지만, 몇몇 선배는 희랍어나 독일어 등의 원문과 대조하며 읽기도 했다. 그러면서 번역의 문제점을 짚어 이야기하기도 하고 판별 특징에 관해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그때 태어나 처음으로 '책이 잘못될 수도 있구나, 책이라고 다 믿어서는 안 되는구나, 최초 필자의 메시지가 여러 명의 손을 거쳐 우리에게 다가오는구나'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 D단계는 편집방향이 확정된 후 참여하게 되어 짜여진 틀에서 실무만 하면 됐지만, 단계의 경우에는 샘플북 제작부터 참여해 고객 설문 조사 등을 통해 편집 방향을 확정하고 진행하는 경험도 했다. 각 호가 30쪽 내외의 분량이긴 했지만, 2주에 한 권씩 안정적으로 필름을 넘기는 프로세스를 익히면서 출판과정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고, 일정 관리에 대한 노하우도 얻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편집자로 훈련받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 그러면서 동시에 서울북인스티튜트 SBI에서 편집자 입문 과정, 교정 교열 과정 등의 기초 교육을 받았다. SBI는 한국출판인회의에서 만든 출판 관련 교육 기관인데, 이제는 그 위상이 공고해져 많은 이가 출판계 입문을 위해 꼭 거쳐야 할 코스로 여긴다. 회사 지원으로 입사 동기들과 함께 들었던 이 과정, 특히 편집자 입문 과정이 내게는 또 하나의 자극이 되었다. 한국출판인회의 주요 구성원의 면면에서도 그렇고, SBI의 설립 취지도 그렇고, 아무래도 학습물이나 전집과 같은 대형 기획보다는 단행본 중심으로 교육이 진행되었는데 주로 주요 단행본 출판사 대표들이 특강을 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당시 담임을 맡았던 마음산책 정은숙 대표뿐 아니라 휴머니스트 김학원 대표, 바다출판사 김인호 대표, 그린비 유재건 대표의 이야기가 무척 인상 깊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고는 했는데 세상을 향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어떤 이야기를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는 느낌에서였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출판사의 역할이 언론사의 역할과 별로 다르지 않고, 편집자의 역할이 기자나 PD의 역할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끼기도 했다. 그러면서 바로 반년 전에 정리했던 PD가 되고 싶은 마음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물론 다시 언론사 입사 준비를 해야겠다는 마음은 아니었다. 이왕이면 성인을 대상으로 한 교양도서, 인문사회도서의 편집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 하지만 슬럼프와 함께 찾아온 달뜬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다 '웅진 안에서 단행본 일을 할 수 있다면?’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웅진씽크빅 안에는 단행본 사업부가 따로 있었고 거기에는 웅진주니어, 리더스북 등 여러 브랜드가 있었다. 웅진의 여러 브랜드 중 세련된 인문교양서를 내는 웅진지식하우스가 눈에 들어왔다. 사내 주소록에서 웅진지식하우스 책임자로 보이는 분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 메일에 한번 만나자는 답장이 돌아왔고, 그렇게 그분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때 들은 이야기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이 '장기간 하나의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대형 기획물 편집자와 달리 단행본 편집자는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돌릴 수밖에 없다'고, '자신의 머리에도 현재 15~20개의 프로젝트가 돌아가고 있다'고 한 이야기다. 학습지나 전집 편집자와 단행본 편집자의 중요한 차이였다. 

-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지만, 내가 소속을 옮겨서 일하는 것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큰 회사의 인사가 신입 사원이 자기가 옮겨가고 싶은 부서의 책임자에게 메일 한번 썼다고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지금 되돌아보면 당시에 내 상사들이 알았다면 얼마나 불쾌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선다.

 

 

"고급 독자로서의 삶을 왜 포기하려고 하세요?"



- SBI에서 편집자 입문 과정을 듣던 시절, 수강생 중에 금융업계 종사자가 있었다. 출판업계와 비교할 수 없는 고소득의 금융업계! 은행에 다니던 그분은 여가 시간에 즐기는 독서가 너무나도 좋아서 그 좋아하는 책을 직접 만드는 출판편집자가 되고 싶어졌다고 했다. 사연을 들은 그날의 강사(그 역시 어느 출판사 대표였을 것이다)가 보였던 반응. "그 좋은 고급독자로서의 삶을 왜 포기하려고 하세요?" 이 한마디는 내가 '출판과 일'이라는 주제를 떠올릴 때면 늘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문장이다.

-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긴 했지만, 막상 출판사 직원이 되고 난 후에는 일 때문에 읽는 책들에 치여 여가로 책 읽는 재미를 한동안 모르고 살았다. 도서관에 종종 가는 편이긴 하지만, 그냥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찾기보다는 자료를 찾으러 간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아무 생각 없이 가도 어느새 진행하는 책들과 관련 있는 책만 찾아보는 나를 발견한다. 그래서 '고급 독자로서의 삶'은 늘 가슴 한쪽에 두고 지내는 장래 희망이기도 하다. 

 

- 나는 책을 좋아하는가? 좋아한다면 읽는 걸 좋아하는 것인가, 만드는 걸 좋아하는 것인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면 종종 빠지는 이 질문의 늪 속에서 언젠가 이런 생각에 이른 적이 있다. 책 읽는 것도 좋고, 책 만드는 것도 좋긴 한데, 어쩌면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건 책 동네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 아닐까 하는. 

 

 

"일정에 쫓기는 책을 진행 중입니다. 

완성도 있게 꼼꼼히 마무리하려는데 
일정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일정을 미루고도 완성도를 높이겠습니까, 
아니면 완성도를 포기하고라도 일정을 지키겠습니까?"



- 그때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다. 웅진에서의 일은 '적절한 완성도에 이를 수 있는 일정'이 시스템적으로 안착되었기 때문에 이런 갈등 상황을 접하기가 어려웠다. 가끔 야근하는 정도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었다.

- 하지만 그 질문은 답을 요구한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선언 같은 것이었다. "너는 이제 앞으로 일정과 완성도 사이에서 무수히 많은 갈등을 겪으며 이 일을 해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는. 

 

- 그때 도쿄 대형 서점에서 만난 문고 신서 코너 앞에서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서가의 규모부터 한국과 비교할 수가 없었다. 당시 살림지식총서는 서점 한쪽에 주로 회전형 전용 책장의 형태로 진열되었다. 서점에서 별도의 서가를 마련해주지 않아 마련한 고육지책이었다. 물론 공간을 내어준 만큼 매출이 생길 것이냐는 질문을 던져본다면 서점만 탓할 일은 아닐 것이다. 아무튼 그런 상황에서 만난 일본 서점 문고 신서 코너의 크기는 한국 대형 서점에서의 한 대분류(문학이랄지, 인문 교양이랄지 하는) 정도의 크기였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지식이 저장된 창고 같았다. 그리고 그 서가에는 심심찮게 사람들이 찾아와 자신의 관심사를 찾고 있었다. 서가 자체가 하나의 백과사전이고, 그 백과사전에서 자신이 알고 싶은 키워드를 찾는 것 같았다. 그때 일본 사람들은 뭔가 궁금하면 책, 특히 문고본부터 찾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이 역시 이제는 15년 가까이 지난 장면이지만...

 

- 이때 했던 생각이 "딱 200~300명만 더 있었으면..."이었다. 당시 살림지식총서의 권당 손익 분기점이 700~800부 안팎이었다. 아무리 안 팔려도 각 권이 700권씩만 꾸준히 팔려주면 손해 볼 걱정을 안 하고 시리즈를 이어갈 수 있는데 각 권의 최소 판매량은 500부 근처에 형성되었다. 물론 수천 부 이상 팔리는 책이 종종 나와서 시리즈를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손해를 보는 책은 늘어갔고, 이를 상쇄해 줄 책은 줄어만 가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알기에 다른 출판사들도 이런 시리즈에 감히 도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살림지식총서 역시 심만수 대표의 강한 의지가 아니었다면 지금껏 이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 바로 이 손익 분기점을 기준으로 출판 다양성의 차이가 확연히 난다. 만약 손익 분기점 700부인 시장에서 책들이 700부 정도씩 나가준다면 너도 나도 이 시장에 뛰어들고 그러다 보면 아주 다양한 책이 나올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시장에서 내는 책들이 내는 족족 600부만 팔리고 만다면 이 시장에 뛰어들 이는 없게 되고 결국 아예 이런 성격의 책은 씨가 말라버리는 것이다. 그 100명의 차이가 출판 시장의 다양성을 만드는 것이다. 역으로 그런 책을 기다리는 600명의 독자는 아예 그런 책을 만날 기회조차 없어지는 것이고. 

 

- 최근 1인 출판사가 많아지고 독립 출판에 대한 관심도 커지면서 출판물이 다양해졌다고 느끼는데 이는 1인 출판의 형태(사무실이 없다거나 직원을 두지 않는)로, 또 독립 출판의 형태(편집자나 디자이너 인건비 없이)로 손익 분기점을 낮췄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 도쿄 출장에서 구체적으로 기획 아이디어들을 길어오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느끼고 돌아왔다. 전체 독서인구를 늘리는 것이야말로 내가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들 수 있는, 또 내가 만든 책이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근본적 해결책이라는 것 말이다. 

 

- "요즘 애들 책 안 읽어." 이런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생각해 보면 내 학창 시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출판일이라는 걸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보는 게 옳겠다. 출판일을 하면서는 베스트셀러 편중 현상에 늘 투덜거리는 나였지만, 학교 현장에서는 그런 베스트셀러라도 아는 학생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 출판계에서 일하면서, 특히 인문 교양 분야에서 일하면서 연예인 셀럽의 에세이랄지, 자기 계발적 요소랄지 하는 것들에 대해 '그건 너무 주류의 것이고...'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런 것들마저 세상에 나가면 비주류구나 싶었다. 인문교양서는 비주류의 비주류인 것이고.  

 

- 연봉 협상의 여파라고만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만약 그때 내가 당근맛을 좀 더 봤다면 어떤 편집자가 되었을까 하는 물음은 종종 해본다. 지금쯤 실패기(?)가 아닌 성공기를 쓰는 편집자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역으로 그렇게 됐다면 회사에도 좋은 일 아니었을까? 과연 직원의 연봉은 비용일까, 투자일까?  

 

- 출판계에서는 '좋은 책을 만든다', '좋은 저자와 함께 일한다', '좋은 정신의 출판사에서 일한다' 등의 이유로 적은 보수를 감내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나 역시 그런 편집자 중 하나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게 출판계 전체에 과연 좋은 영향을 미친 걸까? '좋아하는 일을 하면 돈은 적게 받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만연할수록 결국 좋은 것은 돈을 줘야 할 쪽일 테고, 이런 식으로 업계의 연봉이 낮아지면 '그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들어올지 몰라도 '그 일을 잘할 사람'은 이 업계를 찾지 않을 수도 있다.
 

- 주변을 돌아보면 연차에 상관없이 다들 만들고 싶은 책이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알아갈수록 책에 대한 애정과 책과의 추억이 나와 비교할 수없을 정도로 깊고 풍부하다는 걸 느꼈다. 내 '책 덕후 아님' 콤플렉스가 본격적으로 발동하기 시작한 건 아마 그즈음부터일 것이다. 그래서 출판 편집자 일을 그만두자는 마음이 생겼다. 아직 30대 초반의 나이였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일을 해도 잘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도 조금은 있었다. 

 

- 아무튼 그렇게 퇴사를 몇 개월 미루고 나니 내게 여러 일이 생겼다. 먼저 후원하던 희망제작소에서 온 '퇴근 후 렛츠 3기 모집' 메일에 마음이 동했다. '10년 후 인생 설계'가 모토인 '퇴근 후 렛츠'는 30~40대 직장인들이 지금의 일 다음의 일을 미리부터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적이었다. 희망제작소에서 운영해 오던 은퇴 설계 프로그램의 노하우가 발전한 것이었다. 아무 준비 없이 사직서만 품고 다니지 말고 퇴직 이후를 차근차근 준비해 보라는 말에 홀리듯 넘어가 수강 신청을 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래, 무턱대고 그만두지 말고, 이후에 어떻게 할지 좀 더 준비를 해보자!'고 다짐하게 됐다. 수업 내용도 좋았지만, 여기서 만난 사람들이 한동안 내게 큰 힘이 되었다. 각자 자기의 위치에서 열심히 살면서도 더 나은 삶을 고민하며 다양한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 자신이 해온 일의 노하우와 그 재능을 바탕으로 사회 공헌의 방법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이들을 보며, 나 역시 고민이 '편집자를 그만두자'에서 '편집자를 그만두고 무슨 일을 하면 좋을까'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찾을 때까지는 회사 생활을 충실히 하자고 나 자신을 다독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 또 비슷한 시기에 옆 팀 선배가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면서 나를 정토회의 '깨달음의 장'에 등록해 줬다. 이 '깨달음의 장'은 내 삶의 자세에 있어서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나 자신은 '깨장 이전의 나'와 '깨장 이후의 나'가 꽤나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삶을 대하는 자세가 가벼워졌다. 그전까지만 해도 난 '노력하면 못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남들에게 그럴듯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 또한 강했다. '노력하면 못할 것이 없다'는 마음은 무언가에 도전할 때는 매우 필요한 자세이겠지만, 어떤 일이 잘 안 되었을 때 그 원인을 자신의 노력 탓으로 돌리며 계속해서 자신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부정적 측면도 있다. 누구나 살면서 느끼게 되겠지만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설령 '노력하면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해도 꼭 그것이 '해야 할 일'이었나 돌아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당시의 나는 '더 나은 나'가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압박감, '더 나은 편집자'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꽤나 심했다.

 

- 하지만 깨장 이후 '나 자신의 존재에 너무 큰 의미를 두지 말자,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거다, 내 쓰임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다, 스스로 대단한 존재라 생각지 말자,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기꺼이 응하고 그 결과에 너무 연연하지 말자' 하는 마음으로 지내려 애쓰게 되었다. 물론 이런 삶의 자세를 반대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무책임해졌다.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줄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개인적으로는 그만큼 삶의 무게가 가벼워졌고 하루하루가 훨씬 즐거워졌다.   

 

- 이제 내 목표는 '더 훌륭한 편집자'가 아니라 '런던에서 한 달 살기'가 되었다. 막연했던 꿈은 그 꿈에 집중할수록 더 선명해졌다. 나는 곧 한국출판인회의를 통해 진행되는 '출판인 해외연수사업'을 발견했다. 일정경력 이상의 편집자에게 석 달간 해외에서 지낼 수 있는 비용을 지원해 주는 사업이었다. 사업 초기에는 런던의 한 교육기관과 제휴도 있었지만, 이후에는 연수 대상자 각자가 프로그램을 짜는 방식이었다. 나는 2012년에 이 사업을 인지하고, 2013년에 준비해 (선정되어), 2014년 6월부터 석 달간 런던에 체류하고 돌아왔다. 수업은 최소화하고 서점과 도서관, 북페스티벌 등을 다닌다는 구실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게 일상이었다. 내 생애 다시는 안 올, 천국 같은 3개월이었다. 

 

- 노조가 생기니 일단 그것만으로도 든든한 측면이 있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겠지만, 당시만 해도 앞서 말한 육아 휴직의 사용에서부터 법이 보장하는 다양한 노동자의 권리가 '사용자의 선의'에 의해 보장되는 경우가 많았다. 좋은 사장을 만나면 보장받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포기해야 하는 것 투성이었다. 하지만 노조라는 뒷배가 있으니 최소한법에 나오는 것들은 지켜지겠구나 하는 안심이 되었다. 형식적으로는 같을지라도 '사장의 배려'와 '직원의 권리'는 그 차이가 꽤나 컸다. '사장의 배려'로 이뤄지는 복지는 사장의 '변심'으로 얼마든지 사라질 수 있지만, 그것이 '직원의 권리'가 되는 순간 그 복지는 반영구적으로 정착되기 때문이다. 

 

- 출판 노조 활동을 하며 다른 출판사 노조의 고충을 많이들을 수 있었는데 오너가 분명한 회사일수록 노조 활동이 힘들었다. 그런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실은 치열한 쟁점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바로 '사장의 배려 vs 직원의 권리'라는 프레임 싸움 때문인 것 같았다.  

 

- '편집자로는 여한이 없다. 출판인으로 거듭나고 싶다.'라고 편집자와 출판인을 구분해 이야기한 것은 개별 타이틀을 잘 만드는 것을 넘어 출판계 전체를 조망하면서 우리 사회에 필요한 책을 내고 그에 걸맞은 결과를 가져오는 실력을 갖추고 싶다는 뜻이었다. 이미 개별 타이틀의 책임 편집자로서는 좋은 경험을 차고 넘치게 했기에, 그 이상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자각이 든 것이다. 햇수로 13년 차가 되는 시점에 갖게 된 새로운 목표였다. 실은 진즉에 이런 목표를 세웠어야 했다. 팀장이 되던 때 이런 역량을 갖췄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고 그것이 팀의 위기를 불러왔다. 

 

- 마침 2017년이 시작되면서 조직 개편이 있었고 나는 새로운 팀원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도 나는 준비되지 않은 팀장이었다. '실패한 팀장에서 벗어나고 싶다. 번듯한 팀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만 앞서고 그에 맞는 실력은 부족했기에 새로운 팀원에게도 불필요한 부담만 지우고 말았다. 

 

- 전부터 이런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이 넘어서 계속 출판일을 하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사장과 영혼의 동반자가 되거나, 사장이 되거나.' 동반자가 될 뻔했던 사장은 떠났고(역시 오너 사장이어야 가능한 얘기다), 내가 출판일을 계속하는 길은 '사장이 되는 것' 하나만 남았다고 생각하던 즈음이었다. 하지만 사장이 되는 길을 가기에는 너무나도 준비가 부족하다고 느끼던 터였다. 팀장도 제대로 못하면서 사장은 무슨 사장. 그때 날아온 이기선 부장의 제안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 그런 마음으로 시작한 원더박스는 실제로 내게 많은 기회를 줬다. 원더박스에서 하고 싶은데 진행하지 못한 일은 없다. 다만 내 안의 확신이 부족해 못한 일이 많을 뿐. 마음에 드는 책도 많이 냈고, 독서 모임이나 도서전 참여 등의 활동도 원 없이 했다. 브랜드 운영에 있어서 다양한 고민과 실험도 충분히 했다. 하지만 성과의 측면에서 보면 실패다. 2년 정도의 실험 기간을 거치면 3년째부터는 안정적으로 굴러갈 것이라 기대했으나 4년째 실험 중이니까 말이다. 여전히 우리가 어떤 책을 어떤 식으로 내고 어떤 식으로 알려나가야 할지 그 답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좌충우돌하고 있다. 과연 언제까지 회사가 이런 우리를 기다려줄 수 있을지.

 

- 개인적으로는 이제 핑계 댈 수 있는 것이 없다 보니 나를 더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간 이래저래 조직을 탓하면서도 그런 조직의 덕을 많이 보고 있었구나, 그런 겉옷을 벗어던졌을 때 순수한 내 역량이라는 게 실제로는 많이 부족하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 

 

- 우연히 시작한 일이었지만, 참 좋은 일이었고 중간중간 그만두고 싶은 생각도 참 많이 들었지만, 어찌어찌 지금껏 이 일을 하고 있다. 출판계 안에서 많은 기회도 받았고, 그러면서 나 자신도 출판동네 사람들을 참 좋아하게 되었는데 내가 돌려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 한 책을 재미있게 읽고 나면 관련된 다른 책을 자연스럽게 읽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기획에서도 앞의 책들이 다음 책으로 가는 안내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본 것을 당신도 볼 수 있다면>이라는 책을 진행하면서 나 역시 난민 문제에 대한 관심이 늘어 관련 기획거리들이 더 눈에 들어오기도 했고, 원더박스가 이 책을 낸 출판사로 알려지면서 난민 문제를 다루는 매력적인 출간 제안도 적지 않게 받게 되었다. 원더박스가 '난민 문제 전문 출판사'가 될 수는 없기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못하겠지만, 1년에 한두 권씩은 꾸준히 관련 책들을 펴나갈 생각이다. 그렇게 기획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 같다. 

 

- 앞서서 팀에서 진행한 책들과 저자 미팅에서 들은 책 이야기가 한데 어우러져 이 책의 출간으로 이어졌다. 세상에 없던 그 무엇이 내 머릿속에서 시작된 게 아니고, 앞서 있던 책들과 우연한 만남이 새로운 기획으로 이어진 것이다. 

 

- 위에 소개한 책들 외에도 내 경우에는 많은 책이 이러한 경로로 기획되고 출간에 이르렀던 것 같다. 어떤 글을 읽고 무엇에 홀린 듯 출간을 제안하고, 제안하는 과정에서는 그간의 경험들이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고. 참여한 책이 늘어나면서 어떤 분야에서는 배경 지식이 쌓이고 그 배경 지식 위로 누군가의 이야기가 던져지면 자연스레 출간으로 이어지고. 때로는 좋은 투고 원고가 내 앞까지 전해져 오고. 

- 이렇게 보면 나는 적극적인 기획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획 실적이 없다고 하기도 힘든 것 같다. 그저 출판사에서 월급을 받으며 순간순간 눈앞의 일들을 해온 한 명의 편집자일 뿐이고, 그러다 보니 또 그만큼 성과들이 쌓였다고 할까. 그래서인지 어떨 때는 기획은 하는 게 아니라 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기획 그 자체가 생명력을 가지고 이 세상을 떠돌다 나라는 편집자를 매개로 세상에 나오는 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 그러니 오늘도 기획 스트레스로 골머리를 앓는 편집자가 있다면 너무 자책하지 말기를. 하루하루 버티다 보면 좋은 기획이 제 발로 나를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경력이 쌓이다 보면 이렇게 어느 날 <기획회의 - 기획자노트 릴레이> 코너의 청탁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내 이야기가 당신에게 작은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 당신이 지치지 않고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획회의>를 들춰 보며, 이 글을 찾아 읽는 당신 같은 사람이 출판동네에 오래오래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 책 만드는 일을 하다 보니 종종 '이 책은 잘 만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잘 만든 것 같다'는 건 단순히 '좋다', '재밌다', '예쁘다'라는 게 아니라 책이 전하려는 내용과 그 책의 형식(제목, 카피, 디자인, 장정 등)이 조화를 이룬 것처럼 보인다는 뜻에 가깝다. 무언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위해 그걸 담은 여러 요소가 일사불란하게 조직된 느낌이랄까? 물론 이 경우를 일컬어 '잘 만들었다'고 하는 건 그렇게 만들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떨 땐 책의 여러 요소가 충돌하고 어딘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모습이 더 흥미롭기도 하다. 

 

- 늘 콘텐츠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상품 가치를 수치화하는 가격 책정에서는 콘텐츠의 무게가 아닌, 그것을 물화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만을 기준으로 삼았던 건 아닌가? 

 

-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라는 책을 읽었는데 18,000원이라는 가격이 너무 싼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500쪽이 약간 넘는 분량이긴 했지만, 내가 그 책을 처음 사서 읽었던 2005년만 해도 대중교양서 성격의 책에 18,000원이란 가격은 흔하지 않았다. 나 역시 '뭐 이렇게 비싸?' 투덜거리며 샀다. 

그런데 막상 읽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책을 펼쳐 읽다 보면 대학교 강의실에 앉아 한 학기 수업을 고스란히 듣는 것만 같았다. 실제 이 책은 저자가 성공회대학교에서 '고전강독'이란 이름으로 진행한 강의를 정리한 것이다.  

 

- 당시 대학교의 한 학기 등록금이 300만 원 정도였다고 하고, 한 학기에 6~7개 수업을 듣는다고 단순히 계산하면 강좌당 가격은 40만~50만 원이다. 이를 2만 원도 안 들이고 누릴 수 있다니! 그것도 따로 노트 필기를 할 필요도 없고, 시간에 맞춰 강의실에 앉아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 출판계의 이슈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게 도서 정가제다. 책을 너무 할인해서 팔다 보면 생기는 부작용을 막기 위한 게 제도의 취지다. 많은 소비자가 왜 더 싸게 살 수 있는 길을 막냐며 반발하기도 하지만, 출판계 특히 중소 규모 출판사와 서점에는 살아남기 위한 최후 방어선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주변을 살펴보면 종이책을 자주 사서 읽는 사람일수록 도서 정가제에 대한 반발이 적고, 그 반대일수록 반발이 크다는 점이다. 

 

- 위의 단순한 계산에서처럼 신영복의 <강의>를 통해 40만~50만 원짜리 강의를 접했다고 느낀다면 이 책이 2만 원, 3만 원, 심지어 5만 원이었다고 해도 싸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저 잉크가 묻은 제본된 종이 뭉치라고 생각한다면 1만 원, 아니 5,000원이라고 해도 살 이유가 없을 것이고. 

- 과연 책의 적정 가격은 얼마일까? 오늘도 괜한 질문만 남긴다.

 

- 편집자로 지내면서 뿌듯해지는 순간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책의 편집적 요소에 대한 칭찬을 들을 때다. <확신의 함정>이라는 책의 한 출간 행사가 끝난 후 뒤풀이 시간. 그날의 게스트는 엄청난 독서가로 유명한 정혜윤 CBS PD였다. 그분께서 내게 글 중간의 중제가 참 적절하게 붙어 있고 책 끝에 부록으로 본문에서 다룬 책의 목록을 따로 정리해 실은 게 좋았다며 칭찬의 말을 건넸다. 독서계의 초고수로부터 인정받은 느낌이랄까? 그 말을 들으면서 민망해하면서도 속으로는 뛸 듯이 기뻐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뛴다. 

 

- 편집자는 저자와 독자 사이에서 이 둘을 이어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저자의 이야기가 독자에게 더 잘 닿게 하기 위해 이런저런 친절한 요소를 준비하는 게 편집이라는 과정이다. 글의 호흡에 따라 적절하게 단락을 구분하고 필요한 중제를 달거나 독자가 더 궁금해할 것 같은 정보를 헤아려 준비해 놓는 것 등은 어찌 보면 티 안 나는 아주 작은 친절일지도 모르겠다. 경우에 따라 친절이 과한 게 부담이 되기도 하고, 영혼 없이 습관적으로 베푸는 친절도 있는 것처럼 편집도 불필요하게 과하거나 관습적으로 진행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꼭 필요한 친절을 만나면 더없이 반갑고 고맙다. 

 

- 시장은 안 좋아지고 앞으로 무슨 책을 내야 살아남을지 막막한 상황에서, 이 상황을 타개할 작은 힌트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이런저런 세미나를 한동안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다다른 결론은 출판사를 중심으로 저자와 독자를 아우르는 어떤 커뮤니티를 만들어내는 곳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것. 여러 고민의 지점이 있지만, 무엇보다 '독자'라는 말 앞에서 주저하게 되었다. 우리 출판사는, 그에 앞서 편집자로서 나는 어떤 독자 커뮤니티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 숨이 턱 하고 막혔다. 그간 독자를 너무 피상적으로 대해 온 건 아닌가, 매출이라는 지표 속에 나오는 숫자로만 대해 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명 한 명의 실재하는 독자를 직접 만나고 교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과 동시에 독서 모임에 대한 요구가 급증한다는 소식도 접했다.

 

- 첫 모임에서 함께 읽은 책은 <우리는 미래에 조금 먼저 도착했습니다>였다. 기자 출신 핀란드 여성이 미국 남성과 결혼해 뉴욕에서 지내면서 북유럽 사회와 미국 사회를 비교해 써 내려간 논픽션이다. 원더박스의 책 중 시장과 독서계의 평가를 두루 좋게 받은 책이기도 해서 망설임 없이 첫 책으로 내밀 수 있었다.

 

- 두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빨리 지나갔다. 처음 만난 사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격의 없이 나눴다. 당시에 막 15개월 된 아이를 키우던 나는 특히 양육 부분에서 할 얘기가 많았다. 어떤 아이든 충분한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는 아이의 기본권 차원에서 부모의 육아 휴가도 보장하는 것이라는 점, 또한 부모도 부모의 삶을 살아가야 하기에 국가가 양질의 양육 시스템을 마련한다는 점 등은 내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었다.

 

- 가족에 경제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미국형 사회와 개인의 경제적 자립을 국가가 보장하는 북유럽형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 사회와 가족의 문제로 주제가 넘어갔다. 그리고 자연스레 다음 달의 책도 정해졌다. <이상한 정상가족>. 시장에 대한 걱정이 독자에 대한 확신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 아이가 세상에 나오고, 독자로서의 나도 변했다. 내 여러 정체성 중 부모로서의 정체성이 중심에 자리 잡게 되고, 그러다 보니 주로 읽게 되는 책에도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림책이나 육아서에 대한 수요가 늘었다. 아이의 밥은 언제 먹이고 또 잠은 언제 재우는 게 좋은지, 어떤 음식은 언제부터 먹여도 되는지, 또 열이 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아주 기본적인 것도 전혀 모르는 나를 깨닫게 되고 그때마다 책의 도움을 받았다. 

 - 역으로 딱히 육아서로 구분되지 않는 책도 육아서로 읽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바로 <이상한 정상가족>이 그런 책이다. 무엇보다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로 아이를 때리지 말자'고 다짐하게 되었으니 이보다 좋은 육아 지침서가 있을까.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체벌에 대한 아이들의 기억을 정리한 내용이었다. "상처받음, 무서움, 속상함, 겁이 남, 외로움, 슬픔, 성남, 버려진 것 같음, 무시당함, 화남, 혐오스러움, 끔찍함, 창피함, 비참함, 충격받음." 아이들이 표현한 40개가 넘는 단어 중 미안함이나 반성함과 관련된 것은 없었다고 한다. 체벌의 교육적 효과는 어른 중심의 생각일 뿐 아이들은 정서적 피해만 입는다는 것이다. 나만 해도 폭력은 나쁘지만, 사랑의 매는 필요하다는 분위기 속에서 컸는데 이제는 사랑의 매도 안 된다고 외칠 때가 된 것 같다.  

 

- 물론 이 책에 체벌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다. 자녀를 소유물로 보는 관점의 문제에서부터 복지의 많은 부분을 가족이 떠안는 현실의 문제까지 아이를 키우면서 고민하게 되는 다양한 문제를 두루 만나게 된다. 그때마다 문제의식은 더 분명해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길도 선명해진다. 부모가 될 이들이 꼭 읽었으면 좋겠다. 

 

- 편집을 하다 보면 자신이 기획하지 않은 원고를 진행하게 되는 경우도 많은데, 기획 의도나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 헤매기도 하지만, 덕분에 평소에 크게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던 분야나 저자에 대한 이해가 늘어나기도 한다. 평소의 나라면 쉽게 계약하지 못했을 <미줄라>라는 책을 통해 성폭행 피해자와 그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깊게 이해할 수 있어 개인적으로 매우 고마운 일이었다. 한편으로 존 크라카우어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도 무척 반가운 일이었다. 원고를 읽어 가면서 건조하면서도 생생한 묘사와 그로 인한 강력한 흡인력에 매료되었다. 조만간 그의 다른 작품도 읽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 "좀 더 작은 곳에서, 더욱 마음껏." 한겨레출판에서 원더박스로 옮기면서 정리한 나만의 이직 이유였다. 지인들은 왜 옮기는지 의아해하며 묻다가도 저렇게 이야기하면 대개 응원의 말을 건네줬다. 시간이 좀 더 지나서 만난 분들은 거기에 이런 질문을 덧붙였다. "그래서... 즐거워요?" 아직까지 내 답은 한결같다. "일하는 건 즐거운데, 책이 너무 안 팔려요."

- 책이 너무 안 팔린다. 내가 내는 책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이래서야 밥값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 또한 앞선다. 게다가 나름 내 마음껏 하고 있는데 결과가 이러니 어디 핑계 댈 곳도 마땅치 않다. 

- 독자가 사라진다고 한다. 하지만 새로운 베스트셀러는 계속해서 나오고 서울국제도서전 등의 행사는 관람객으로 넘쳐나고 소셜미디어에는 책 관련 사진과 글이 꾸준히 올라온다. 책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사그라든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시장에서 내가 체감하는 이 싸늘함은 뭘까 하는 게 계속되는 고민이다.

 

- 그런 고민 속에서 '팬덤을 형성하는 출판사가 되어야 한다'는 모범 답안까지는 어찌어찌 도달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 앞에서 다시 막막해진다. 그러다 '브랜딩'이라는 말을 만났다. 매력적 브랜드를 만드는 일, 출판으로 따지자면 독자들이 스스로 찾는 출판사를 만드는 것. 이미 비즈니스계에서는 대유행이었다. 

 

- '이미 많은 출판사가 있는데 우리는 왜 책을 만드는가?', '원더박스의 책을 읽는다는 건 독자에게 어떤 경험일까?', '나는 진짜 독자인가?', '우리는 어떤 집단인가?', '나는 원더박스의 팬인가?', '원더박스다움이란?' 책의 여백에는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짧은 생각들이 주로 질문의 형태로 군데군데 적혔다. 곧 이 질문들에 대한 답도 찾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 내가 편집을 맡았던 우치다 다쓰루의 책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에는 '책과 눈이 맞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기본적으로 '숙명의 책'이 되기 위해서는 '우연히 만나야 한다'면서 그런 경험을 위해서는 종이책이라는 물성과 서점이라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데 교정지를 보다가 ‘맞아, 맞아' 혼잣말을 했다. 서점에 가다 보면 어떤 때에는 처음 보지만 '이거 완전 나를 위한 책인데' 싶은 것도 있고, 딱히 당기지는 않는데 계속 눈에 밟히는 책(그래서 결국은 사고야 마는!)도 있고, 그냥 왠지 모르게 나를 잡아당기는 책도 있기 마련이다. 

- 책에 나오는 '읽기 모임에서 읽기보다 중요한 게 참여'라는 이야기나 '책 보다 중요한 게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독서 모임을 몇 차례 해본 경험에 비춰 봤을 때 진리에 가까웠다. 독서 모임이 읽기-쓰기-책쓰기라는 3단계로 이어진다는 내용도 단순히 '저자가 되어 보자'는 실용적 팁이 아니었다. 그것은 책을 읽는 시선이 독자에서 나로, 다시 저자로 옮겨가는 단계이고 책을 더 깊게 즐기게 되는 과정이라고 설명하는데 새로운 통찰을 얻는 것 같았다. 7년간 독서 모임을 진행했던 노하우를 편하게 정리한 이 책을 읽으면서 그 7년의 경험을 고스란히 전수받는 느낌이었다. 새삼 '이래서 책을 읽는구나' 다시 느꼈다. 책을 읽는다는 건 먼저 걸어간 자의 경험과 지혜를 얻는 행위라는 점에서 말이다. 이 책과 눈이 맞아 참 다행이다. 

 

- 최근에는 <26일 동안의 광복>이라는 책까지 나왔다. 1945년 8월 15일부터 9월 9일까지의 사건들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다큐멘터리 느낌의 책이다. 더 입체적이고 밀도 있게 해방 후 공간을 펼쳐 보였다. 내가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할 때 누군가는 한 발 더 나아가 새로운 길을 만들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잠잠했던 열등감이 스멀스멀 다시 올라온다. 

 

- 동료들에게 종종 하는 이야기다. 신간의 최종 데이터에 OK 사인을 내고 나면(혹은 인쇄 감리를 다녀오면) 조금 홀가분해지는가 싶다가 이내 가슴이 답답해지는데 바로 '보도 자료'라는 큰 산이 기다리고 있어서다.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찾아와서 그럴 거라고, 쓰인 글을 다듬는 건 능해도 백지에다 뭔가를 써 내려가는 건 버거운 게 편집자 아니냐며 웃으며 넘기고는 했는데 어느 순간 그렇게 웃어넘길 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 그 순간은 <편집자 되는 법>이라는 책을 읽다가 찾아왔다.

"편집의 시작 단계에 구성된 편집자의 '확신'은 보도 자료를 쓸 때까지 작업에 일관성을 유지하도록 해줍니다."

- '그래, 내 머리에 책의 내용과 의미가 확실히 자리 잡고 있었다면 그걸 다시 정리하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하는 생각은 '아, 내가 책을 이리도 불명료한 생각으로 마감했다 말인가' 하는 자괴감으로 이어졌다. 그간의 경험을 비춰 보면 정신없이 마감이란 걸 하고 나서 보도 자료 쓸 때가 되어서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생각을 정리할 때가 적지 않았다. 어떨 때는 그때 가서 더 나은 제목이 떠오르거나 책의 약점이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보도 자료 쓰기가 원래 어려운 게 아니고, 단단한 기획 아래 편집을 진행하지 않아서 어려운 것이었다니! 

- 그 문단의 조금 앞쪽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출판 편집 공정의 책임자라면 일에 목표와 방향이 있어야 합니다. 편집 공정을 진행하는 동안 자주 어려움에 봉착한다면 자신이 편집 기획 단계에서 명확히 하지 않은 것이 있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 본문 레이아웃을 정할 때, 일러스트나 표지 디자인을 발주하고 시안을 확정할 때, 제목을 정할 때, 표지 문안을 정리할 때 등 그동안 진행한 책에서 어려움에 봉착했던 무수한 순간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때 나를 힘들게 한 건 저자의 고집도, 디자이너의 역량도, 상사의 변덕도, 시장의 침체도 아닐지 모르겠구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 책을 많이 읽지도 못하지만, 읽는 책도 다양하지 못한 편이다. 주로 인문, 사회로 분류되는 책에 관심이 많았고, 시와 소설 같은 문학 분야에는 손이 잘 가지 않았다. 막상 추천받아 문학 책을 읽고 있다가도 이걸 왜 읽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책을 읽게 되는데 딱히 요약이 되는 것도 아니고 주제가 명확히 잡히는 것도 아닌 경우가 많았다. 결국 재미있더라, 재미없더라 정도의 느낌만 남았다.  

 

- 그러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한 대목을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왜 그랬는지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되었다. 하루키는 소설을 쓴다(혹은 스토리를 풀어간다)는 것은 상당히 저속의 기어로 이뤄지는 작업이며, 상당히 에둘러 가는,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라고 이야기한다. 머릿속에 선명한 메시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스토리로 치환하지 않고 곧장 언어화하는 것이 훨씬 더 빠르고 일반인이 받아들이기도 쉬울 거라고, 소설의 형태로 치환하자면 반년씩 걸리는 메시지나 개념도 직접 표현한다면 사흘 만에, 경우에 따라 10분 만에 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또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일부러 제로에서부터 스토리를 만들어낼 필요 없이, 자신이 가진 지식을 논리적으로 조합해 언어화하면 된다고 말이다.

 

- 느리고 중층적이고 복합적으로 태어나는 텍스트. 효율성은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는 텍스트. 그는 극단적으로 '소설가란 불필요한 것을 일부러 필요로 하는 인종'이라고까지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는 소설 따위는 없어도 상관없다'라는 의견이 있는 것도 당연하고 그와 동시에 '이 세상에는 반드시 소설이 필요하다'라는 의견도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건 각자 염두에 둔 시간의 폭을, 또 세상을 보는 시야의 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다를 뿐이라고. 효율성 떨어지는 우회하기와 효율성 뛰어난 기민함이 앞면과 뒷면이 되어서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성립하는 것이라고. 

- 깨닫지 못했지만, 그동안 나는 '이 세상에는 소설 따위 없어도 상관없다'는 쪽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10분 만에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왜 그 긴 이야기로 풀어내야 하냐며 다그치는 사람이었던 셈이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고 난 후 그런 나도 조금은 바뀐 것 같다. 

 

- 절판된 책에 마음이 많이 간다. 아직 읽힐 미덕이 남아 있음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사실은 수익성 때문에!) 절판되어 구하기 힘든 책을 만나면 괜히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새 책을 계속 시장에 내놓아야만 하는 직업을 가진 이라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 미국 대표 철학자 리처드 로티에게 직접 지도를 받고 돌아온 우리나라의 대표 로티 전공자, 로티의 저작과 또 다른 미국의 대표 철학자 존 듀이의 주요 저작 번역. 관련자들 사이에서는 명성이 자자하겠지만, "로티? 그게 뭐야?" 물을 수밖에 없는 보통의 우리에게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행히 로티를 아예 모르는 사람도 흥미롭게 읽을 만한 책이 있으니 바로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다. 부제는<우연적 삶에 관한 문학과 철학의 대화>. 일상에서 철학적 개념을 찾아내고 이것이 잘 드러난 문학 작품을 통해 설명하는 방식으로 한 꼭지 한 꼭지 꾸려 나가는 책이다. 예를 들어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존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엮어 '진짜 인생’을 추구하는데 필요한 것을 짚어 보는 식이다. 

 

- 저자는 <죄와 벌>같은 문학 작품을 탐독하다 철학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막상 이들이 철학에 입문해서는 무척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는 보편적이고 영원불변한 진리를 추구한 플라톤 이래 철학자들 탓이 크다고 한다. 그 세계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가 겪는 인생의 고민, 창녀 소냐가 짊어진 삶의 무게와 고통 등은 사라지고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란 무엇인가' 하는 차가운 정의만 남기 때문이다. 저자는 "철학은 삶의 구체적 문제에서 발생하는 궁극적 물음에 답해야 한다"며 "문학은 그런 일들을 잘해 온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한다. 철학과 문학의 경계에 서서 이런 책을 쓴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추상적이고 차가운 철학에 실망했다면 이 책을 통해 '삶의 우연성, 구체성, 유한성'을 끌어안은 살아 있는 철학을 만나보시길!

 

- 기억력이 안 좋아 더 치열하게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한 카피라이터의 일상을 담은 <낯선 요일의 기록>, 그런 그가 좋아하는 '여행'에 대한 낭만적인 이야기 <낯선 요일의 여행>도 무척 매력적이었지만, 내게는 온전히 '김민철'을 드러내는 하루의 취향이 가장 좋았다. 앞선 두 책을 읽으며 '부럽다' 혹은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면, <하루의 취향>을 통해서는 저자로부터 '이제 우리 함께 이렇게 살아봐요' 하는 응답을 받은 느낌이라고 할까? 내가 투고함에서 인상 깊게 만난 바로 그들에게 따뜻하면서 상투적이지 않은, 꼭 필요한 격려와 응원이 될 것 같았다.  

- 물론 그 격려와 응원은 마흔을 넘어서도 여전히 불안하고 흔들리는 내게도 꼭 필요한 것이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마음은 매일 흔들리며 어딘가에 닿고, 우리는 그것에 지갑을 열거나 시간을 쏟는다. 그 끝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때로는 절망, 때로는 후회다. 하지만 운 좋게도 몇은 내게 남는다. 내게 꼭 어울리는 형태로. 내게만 꼭 어울리는 색깔로... 내일 내 마음은 또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모르지만, 오늘 하루는 이 취향 덕분에 나다울 수 있었으니까. 근사하지 않아도, 우아하지 않아도, 대단하지 않아도, 완벽하지 않아도 바로 그 취향이 오늘, 가장 나다운 하루를 살게 했으니까."

- 이 글로 2년 가까이 계속되었던 <한겨레21> 연재가 끝났다.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책이라는 것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다운 게 뭔지, 내 취향은 어디를 향하는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내 좌충우돌 독서기가 읽는 이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길, 미숙한 편집자에게 소중한 지면을 내어준 <한겨레21>과 이 글을 다듬어 책을 낼 수 있게 이끌어준 yeondoo 김유정 대표님과 부족한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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