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케이트 뱅크스] 마술사의 제자

일루젼 2024. 3. 12.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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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케이트 뱅크스 / 피터 시스(그림) / 정회성

원제 : The Magician's Apprentice
출판 : 사파리
출간 : 2013.10.30 


       

한 남자가 어느 날 자신이 변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사내는 죽었다. 

 

'줄거리'나 '요약'이란 때때로 의도와는 달리 엄청난 왜곡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 요약에서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렸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떠올렸을 것이며 모두 아닌 다른 무언가를 생각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문득 최근 선호되는 작품들은 '플롯', 즉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나 '누가 어떻게 되었는가'에 집중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약한 내용만 보더라도 흥미진진하고, 사실은 이러저러했다는 내용 그 자체가 짜릿한.

 

하지만 그렇게 요약된 문장만으로는 읽어낼 수 없는 작품들도 존재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이런 작품들이 훨씬 크게 와닿을지도 모른다. 일례로 케이트 뱅크스의 <마술사의 제자> 또한 그러하다. "집을 떠난 소년이 성장하여 돌아왔다." 이 한 문장만으로는 도저히 이 글을 설명할 수가 없다.

 

나는 취향의 세계는 넓고 깊지만, 결국 모든 이야기는 단 하나의 문장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그 위로 겹겹이 쌓여가는 서사와 전개, 묘사와 표현들이 한 생애 전부를 바쳐도 다 읽을 수 없는 이야기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 해도.  

 

모든 인간의 생애는 '태어나서 살다가 죽었다'로 요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 중에 일어나는 무수한 일들과 다양한 희노애락들.

결국 모든 이야기는 같은 것, 즉 '생'을 노래하고 있다. 표면으로 드러난 것이 죽음이건, 결혼이건, 전쟁이건 그 무엇이건 간에. 설사 단 한 번도 인간의 존재가 언급되지 않는다 해도 그 안에서 '변화하는 무언가' 자체가 바로 '생'이다. 

 

모두가 자신만의 열쇠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리고 사실 그것은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음 또한 깨닫게 되기를 바라며.

 


   

 

 

    

 

- 마침내 약속이 맺어졌다. 지금껏 바즈에게 약속은 언제나 그렇듯 무슨 일인가를 실행하겠다는 다짐에 도장을 꽉 찍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희망과 기대 속에서 약속이 맺어졌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바즈에게 약속이란 신비한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문과 같았다. 또한 미래를 향해 돌진하게 만들고, 현재의 모습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된 듯한 느낌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즉, 바즈에게 그 약속은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 장밋빛 환상이었다. 

- 낯선 남자는 마치 알 수 없는 곳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처럼 마을에 나타났다. 남자는 반짝이는 검은색 천을 뒤집어 씌운 말을 타고 경쾌하게 말의 옆구리를 톡톡 차면서 어슬렁거리듯 마을로 들어섰다. 그는 자주 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면서 무언가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농담을 주고받기라도 하듯 미소를 짓기도 하고, 큰 소리로 껄껄 웃기도 했다. 바즈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낯선 남자가 말의 말귀를 알아듣는 것인지, 아니면 말이 남자의 말귀를 알아듣는 것인지 궁금했다. 아무튼 분명 말과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바즈는 남자가 무척 부러웠다.  

 

- 낯선 남자는 자신이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일렬로 죽 늘어선 집들 가운데 맨 마지막에 있는, 옅은 회색빛 흙과 돌로 지은 바즈의 집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기울 무렵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지친 눈을 감기 시작하고, 햇빛조차 졸음에 겨워 시들해지는 시간이어서 그랬는지 남자의 모습은 더더욱 위풍당당해 보였다. 그의 갑작스런 출현은 은연중에 낯선 남자를 더욱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 느끼게 했다. 

 

- 바즈는 딱딱한 견과를 까고 있었다. 껍데기를 벗겨 내고 그 속에든 알맹이를 꺼내 자그마한 바구니에 담았다. 지난 몇 주 동안 견과를 충분히 말려 놓아 이젠 손으로 하나하나 까서 알맹이를 빼먹을 일만 남은 셈이었다. 하지만 바즈는 그것을 다음 날 시장에 가져가 내다 팔 생각이었다. 바즈는 지금까지 시장에 갈 날만을 고대해 왔다. 화려한 가게들, 색색으로 물들인 비단과 면직물, 말린 과일과 콩, 차와 향신료, 뜨거운 햇볕에 달구어져 깨질 듯하면서도 단단한 도자기 그릇, 분주한 상인들로 가득한 시장은 그야말로 생명이 약동하는 곳이었다.

-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 계속 이어지는 곳, 전날의 그림자 속에 고즈넉이 들어앉아 있는 듯한 바즈의 마을에서 이방인은 의심과 함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반가운 침입자였다. 또한 이방인은 바즈의 마을 사람들에게 그들이 살고 있는 자그마한 땅덩이에 일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그곳이 더 크고 더 깊은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 바즈는 벌써 몇 시간째 견과를 까고 있었다. 얇지만 단단한 껍데기, 겉은 딱딱하지만 속은 부드러운 알맹이, 통통하게 살이 올라 볼록하게 솟은 부분까지, 손가락 끝에 닿는 느낌이 한결같았다. 바즈는 손가락 끝으로 딱딱한 껍데기를 더듬다가 부드러운 부분을 찾으면 재빨리 손톱으로 꽉 눌러 알맹이를 부수지 않고 꺼내는 동작에 열중하고 있었다.

- 한여름이어서 날씨가 덥고 건조했다. 더위와 건조함은 늘 붙어 다녀서 잘 구별되지 않았다. 바즈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이 일상을 깨뜨릴 만한 사건이 일어나길 하루에도 몇 번씩 간절히 바라곤 했다. 바즈는 이제 비가 내리는 건 시간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항상 그래 왔기 때문이다. 바즈는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은 자신처럼 습관을 따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자에 앉아 견과를 까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좀 더 빨리 비가 내려서 삼라만상의 옷을 갈아입히고 몇 주일, 아니 몇 달에 걸쳐 대지를 촉촉하게 적셔 주었으면 싶었다. 물론 일단 비가 내리면, 태양의 열기 속에서 그랬듯이 또 다른 지루함이 시작되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 바즈는 의자에서 일어나 석양빛을 받아서 색깔이 보다 선명해진 꽃밭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즈는 반항적인 눈길로 꽃들을 노려 보았다. 탈출을 열망하는 자신처럼 억눌린 에너지가 뻥 하고 터져서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기를 바라면서. 그러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림자 쪽으로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 

 

- 얼마나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렸던가? 바즈는 온 마음으로 기다려 온 순간을 맞이하자 무한한 기대감과 안도감을 느꼈다. 마치 기다리던 단비를 온몸으로 맞는 기분이었다. 사실 몇 해 전에도 한 남자가 말을 타고 마을에 왔었다. 그 남자는 바즈의 맏형을 데려가 일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일 년이 지나 이번에는 작은 형이 집을 떠났다. 이제 남은 건 셋째 아들이자 막내인 바즈뿐이었다. 바즈는 그때 슬픔과 부러움을 동시에 느끼며 떠나는 형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곧 네 차례가 올 거야."
형들이 떠날 때마다 어머니가 바즈에게 말했다.
"세 가지 법칙 안에서 보면 그렇단다."

 

- 세 가지 법칙이란 땅 위에서의 존재, 출생, 성별을 결정하는 법칙을 뜻했다. 바즈는 과연 어머니의 말이 옳은지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 세 가지 법칙이 그에게 작별을 명할 터였다. 


- 바즈의 두 형은 변화를 갈망하며 기쁜 마음으로 집을 떠났다.

"알아야 할 것을 모두 배우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다."

남자는 작은형을 데리고 가며 그렇게 말했다. 그때 바즈는 작은형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누구도 단 한 번의 인생 안에서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다 배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 그는 현관을 두드리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즈의 어머니는 손님이 들어오는 걸 보고는 그를 맞이하기 위해 현관 앞에 나와 있었다. 그녀는 낯선 사람을 결코 외면한 적이 없었다. 낯선 사람을 외면하는 것은 그녀나 그녀의 친척들이 지켜야 하는 삶의 규칙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 "저는 사막을 향해 가는 중입니다."
바즈의 생각에 사막은 발을 한 번 내디딜 때마다 땅의 색깔이 희미해지고 그 깊이가 점점 얕아지는 곳이었다.

- "들어오셔서 저희와 함께 차 한잔 드시지요."
어머니가 현관문을 활짝 열면서 말했다. 바즈는 남자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윽고 아버지가 나와 마을의 관례에 따라 낯선 남자에게 악수를 청하며 정중히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 말린 향신료 냄새, 비누와 양초에서 나는 쇠기름 냄새가 집안 가득 풍겼다. 바즈에게는 몸의 일부처럼 익숙한 냄새였다. 물론 낯선 남자도 그 냄새를 맡을 터였다. 하지만 바즈는 남자가 자신처럼 그 냄새에 애정과 어떤 가치를 두지 않을 것이며, 어쩌면 그 냄새를 낯설게 혹은 생경하게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바즈는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남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따라가자, 바즈의 눈에도 자기 집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벽에 걸린 거칠게 짠 직물, 선반 위에 줄 맞춰 서 있는 아버지가 만든 소박한 나무 조각상, 심지어 자신의 얼굴에 바른 견과 오일의 냄새마저도 바즈에게는 다른 세계에서 온 것처럼 생소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바즈는 습관에 의해 사물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알 것 같았다. 흰색 벽과 베이지 색 타일이 깔린 바닥에는 지나간 시간의 냉기가 스며 있었다. 하지만 나지막한 나무 탁자 주변에 놓인 붉은색 쿠션은 따뜻한 온기와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 남자는 바즈의 맞은편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뒤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바즈의 어머니는 재스민과 장미 꽃잎을 섞은 차에 달콤한 사탕 한 접시를 곁들여 내왔다. 그러고는 막내아들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남자는 목에 느슨하게 둘러맨 스카프를 서너 번 매만졌다. 그는 붉은색, 푸른색, 주황색의 넓은 줄무늬가 있는 외투를 입고 있었는데, 옷차림을 보니 특이한 부족 사람인 것 같았다. 느슨하게 짠 데다 색깔이 요란한 옷 때문에 남자는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아무래도 먼 곳에서 온 것이 분명했다. 바즈네 마을 사람들은 옷을 촘촘하게 짤뿐만 아니라, 햇빛을 반사하는 흰색이나 베이지색 혹은 상아색 옷을 입었다. 사람들은 비가 올 때만 진한 색깔의 옷을 입었다. 

- 남자는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가 마치 작은 공을 다루듯 이쪽 뺨에서 저쪽 뺨으로 굴리며 천천히 마셨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사탕 접시를 들더니 가벼운 손동작으로 사탕 한 개를 집어 입에 쏙 넣었다.
"아!"
남자가 만족에 겨운 표정으로 감탄사를 토해 냈다. 잠시 뒤 그의 시선은 찻잔에 고정되었다. 바즈의 아버지는 찻잔에 다시 차를 채웠다. 바즈 아버지의 손을 보면 누구나 그의 직업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바즈의 아버지는 나무를 조각하는 조각가이자 공예가였다. 그런데 차츰 시력을 잃어 가고 있어서 더는 일을 못하게 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 바즈의 아버지는 목공 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조용하고도 품위 있게 작업해 왔다. 그는 작업실에 있으면 자신과 자신의 조각품이 하나가 되는 것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목공 일은 자신에게 천직일 뿐, 세 아들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생각은 떠오르는 태양도 결국 저물 수밖에 없는 것처럼 확고했다. 

 

- 남자는 천천히 속삭이듯 말했다. 말하는 품새가 마치 음유시인 같았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긴장하게끔 낱말과 구절 하나하나에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듯이 말했다. 그러면서 공기를 가볍게 휘젓는 것처럼 손을 저었는데, 이 또한 그가 먼 곳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증거였다. 남자와 달리 바즈의 마을 사람들은 무언가에 억눌려 있는 데다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바즈는 찻잔을 감싸 쥐고 있는 남자의 손을 가만히 응시했다. 손이 크고 손가락 또한 길어서 우아해 보였지만, 손톱 밑에 가느다란 실 같은 때가 끼어 있었다.  

 

- "하지만 날렵해서 손재주가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나무조각가의 손은 아닌걸. 직물을 짜는 직공의 손이야. 그래, 직공의 손."
남자는 바즈의 손을 놓고 다시 찻잔을 들었다. 그는 설득의 기술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자기가 한 말이 상대방의 머리와 마음속에 자리 잡을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았다. 그는 자신이 내놓을 제안에 상대방이 어떻게 응답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참 동안 뜸을 들였다가 넌지시 제안했다. 
"너는 칼라에서 가장 훌륭한 직공의 수습공이 될 거다." 

 

- "저는 하던 여행을 계속하겠습니다."
남자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하지만 새 달이 뜨기 전에는 돌아올 겁니다."
바즈는 버즘나무 옆에 서 있는 말 쪽으로 남자를 안내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바즈가 물었다.
"나는 이름이 하나가 아니란다."
이방인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나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지. 너는 나를 뭐라고 부를래?"

바즈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말을 사랑하는 남자요."

바즈의 말에 남자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 바즈는 이별하기 전이면 밀려오는 지난날의 달콤한 향수에 젖어 자신의 열여섯 인생을 돌아보았다. 파스텔 그림 같은 불투명한 막이 바즈의 뇌리에 남아 있는 불쾌한 기억을 덮어 버렸다. 

 

-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죠."
바즈 역시 미소를 지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바즈는 약간의 긴장감을 주고 싶어서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남자는 당연히 돌아올 터였다.
바즈는 잠자리를 준비하기 위해 촛불을 밝혔다. 그러고는 마음속에서 일렁이는 불안을 비추려는 듯 흔들리는 불꽃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바즈는 눈에 힘을 주어 촛불을 꺼 보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 훅 불어서 끌 때까지 촛불은 더 높이 솟아올랐다. 

- 그날 밤, 바즈의 꿈에 물이 나왔다. 한 남자가 나타나 싱글벙글 웃으며 바즈를 사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 물이 차올라 남자를 삼켜 버렸다. 그 뒤로 그토록 길게만 느껴지던 밤이 사라져 버렸다. 다음 날, 그다음 날도 너무 빨리 지나가 달과 달 사이가 마치 몇 분 간격인 것처럼 느껴졌다. 

 

- "집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왔나요?"
바즈의 어머니가 남자에게 물었다.
"제겐 집이 없습니다. 저는 소식을 전하는 전달자일 뿐입니다. 이 세상이 제 집이랄 수 있지요."


- 그는 약간 어두운 얼굴로 바즈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깐 채 덧붙였다.
"네게 전할 메시지가 있다."

"저한테요?"
바즈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는 빛을 따르게 될 것이다."
"빛이라니요?"
바즈가 물었다.
남자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새와 나무와 바람이 내게 말하고 있구나. 내가 타고 다니는 말도 그렇게 말하고 있고. 그래서 나는 이를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믿는단다."
바즈는 남자의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바즈는 무슨 말인지 물어보려다 일단은 의문을 머릿속 깊은 곳에 넣어 두기로 했다.

- 그동안 바즈는 집을 떠나는 순간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써왔다. 생각이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이리저리 날뛰지 않도록 말이다. 하지만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자 바즈는 사랑하는 부모님과 미래에 대한 희망만이 존재하는 이 순간에 좀 더 오래 머무 ... 

 

- 바즈는 일출을 달리 보기 시작했다. 해는 항상 똑같지만 보는 위치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바즈는 사물을 보이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난생처음으로 아무런 애정 없이 사물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바즈는 산 그림자가 보라색에서 푸른색으로 바뀌는 것을 지켜보았다. 밤이 되자 산은 마치 보이지 않는 다리로 성큼 걸어온 것처럼 눈치채지 못하는 새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러다 해가 돌아올 무렵이 되면 다시 뒤로 물러나 다른 색을 띠었다. 
여행이 며칠 더 계속되자, 짙은 노란색의 겨자 밭이 밝은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저건 꼭두서니(어린잎은 먹고 뿌리는 물감의 원료나 진통제로 쓰는 덩굴풀)란다."

 

- "저들은 찾는 사람들이다."
남자가 바즈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찾는 사람들이라니요? 무엇을 찾는 사람들이에요?"
"행운, 행복, 부, 진실, 지식, 지혜, 사랑, 아름다움 같은 것."

남자는 빙그레 웃으며 점차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바즈 옆에 앉은 한 남자가 바즈를 보더니 귀엽게 생겼다면서 손을 뻗어 귀를 살짝 잡아당겼다. 바즈는 얼굴 가득 까만 점이 박혀 있는 못생긴 남자를 바라보며 낯선 환경에 익숙해지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소용이 없었다. 무엇보다 바즈의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그래, 너는 무엇을 찾고 있니?"
못생긴 남자가 바즈의 대답을 고대하는 표정으로 잠시 숨을 멈추고 물었다.
"저는 일을 찾고 있습니다."
바즈가 대답했다.
"흠, 그렇구나."
못생긴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아름다운 사람을 찾고 있단다. 하지만 나는 이 의자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아."
"정말 그래. 이 사람은 허구한 날 의자에 앉아서 방을 둘러보기도 하고, 누가 들어오는지 관찰만 한단다.”

- "모두 못난이야. 나처럼."
못생긴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이 바뀌어 내 눈앞에 아름다움이 펼쳐질 날을 기다린단다."
못생긴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러자 탁자에 둘러앉은 다른 남자들이 그의 실현 불가능한 꿈을 비웃기라도 하듯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못생긴 남자는 한순간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 그때 여관 주인이 카레를 얹은 렌즈콩과 병아리콩, 김이 모락모락 나는 납작한 빵이 담긴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 여행자들은 꼭두서니 밭처럼 붉디붉은 포도주로 목을 축이며 접시를 깨끗이 비웠다. 그러고는 설탕에 절인 생강 조각을 입에 넣고 쪽쪽 빨았다. 바즈도 생강 조각을 입에 넣었는데, 순간 입안 가득 침이 고였다. 바즈는 포도주가 입에 익숙하지 않아서 향신료의 일종인 카다멈에 아니스(과자, 카레, 빵, 알콜 음료 등의 향료로 쓰이는 한해살이풀)와 꿀을 섞은 달콤한 음료를 마셨다. 얼굴에 점이 많은 못생긴 남자도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다. 
"술은 내 판단력을 흩뜨려서 아름다움을 구별 못하게 하지."

못생긴 남자는 몸을 약간 뒤로 젖힌 채 탁자를 보며 말했다.

- 바즈는 모두에게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바즈는 어른들로부터 "너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서는 무언가 배울 게 있는 법이란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다. 
남자는 멜리시에게 주려고 설탕을 조금 가지고 나왔다. 바즈는 남자를 따라 마구간으로 향했다. 남자가 감미로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바즈는 그 노래를 알지 못했지만 부드러운 곡조에 매료되어 조그맣게 따라 불렀다. 남자의 목소리는 그의 손처럼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들으면 들을수록 아름다웠다. 

- 그 소년은 키가 크고 깡마른 데다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어두운 밤처럼 새까맸다. 소년은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바즈의 머릿속에 점이 많은 못생긴 남자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 "그때 내가 따라가겠다고 나섰어. 나는 직물을 짜기에 적합한 손을 가졌거든."

다가르는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가르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지만 바즈는 다가르에게 특출한 재능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다가르는 무늬를 어떻게 배열해야 아름다운지 잘 알고 있었다. 

 

- "결국 그 낯선 남자를 따라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바즈는 온몸에 퍼져 있는 혈관의 피가 관자놀이에 모여 솟구칠 듯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갈 거야."
"여기에 오고 나서 처음 얼마 동안은 나도 그런 생각을 했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거든. 첫 번째 감독님은 지금 감독과는 완전히 다른 분이었어. 무척 친절하셨지."
다가르는 그렇게 말한 뒤 외투를 들춰 원통 모양으로 단단하게 감은 네모난 태피스트리(다양한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를 꺼냈다. 그러고는 그것을 펼쳐서 바즈에게 보여 주었다. 바즈는 태피스트리 무늬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꽃, 나무, 동물, 별, 해, 달 등 모든 무늬가 매우 섬세하게,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짜여 있었다. 바즈는 그처럼 아름다운 태피스트리는 난생처음 보았다. 보면 볼수록 무늬가 하나하나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 채찍으로 맞아서 성한 데가 하나도 없었다.
"힘이 하나도 없는 것, 이것이 바로 죽음이지."
바즈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자그마한 동물이 고통에 겨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이 또한 크나큰 고통이었다. 바즈는 우두커니 서서 달빛이 자신과 개를 비롯해 자신을 잔인한 감독에게 팔아넘긴 낯선 남자와 자신이 지금 하려는 일의 정체를 비출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 게다가 바즈의 손가락은 캐비닛 서랍의 손잡이를 잡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길었다. 바즈는 손잡이를 당겨서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양탄자 조각들과 직물을 짤 때 쓸 염색한 천들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권총이 놓여 있었다. 바즈는 난생처음 권총을 잡아 보았다. 금속의 느낌이 차가우면서도 낯설었다. 그런데 총알이 장전되어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바즈는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 바즈는 살그머니 뜰을 가로질러서 블링크가 누워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작은 개의 두 눈은 감겨 있었다. 밝은 달빛이 바즈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바즈는 자신의 행동을 훤히 비추고 있는 달빛으로부터 몸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이윽고 조용히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발사되었다. 블링크의 몸이 위로 약간 튀어 올랐다가 떨어졌다. 뒤이어 한차례 꿈틀대는가 싶더니 이내 움직이지 않았다. 개의 숨은 끊어졌고, 바즈는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 바즈는 뜰 안 여기저기에 쌓여 있던 쓰레기 더미에서 천 조각을 주워 조심스레 블링크를 감쌌다. 블링크를 땅에 묻어 주고 싶었지만 땅을 팔 만한 도구가 없었다. 바즈는 죽은 개를 정원으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인 채 봉우리를 앙다물고 있는 여름 꽃들 사이의 흙을 손가락으로 헤쳐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흙이 메마른 데다 부드러워서 구덩이가 쉽게 파졌다. 바즈는 서둘러 일을 마쳤다. 구덩이 속에 블링크를 누이고 흙과 잡풀, 바닥에 떨어진 꽃잎을 모아 덮어 주었다. 

 

- "네가 그런 일을 할 줄 아는 아이란 걸 알았다면 미리 부탁했을 텐데." 
바즈는 그제야 감독이 블링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너는 나를 위해 아주 역겨운 일을 해 줬다."
감독이 엄지와 검지로 귓불을 만지작대면서 계속 말했다.

"어쩌면 너는 직물 짜는 일보다 다른 일에 더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너를 잃는 것이 유감스럽더라도 말이야."

감독은 그렇게 말한 뒤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덧붙였다.

"아무튼 너는 내게 그런 가능성을 보여 줬다."

- "나를 따라와라."
감독은 바즈를 초소로 데리고 가 나무 의자에 앉혔다. 그러고는 서랍을 열어 펠트 조각 하나를 꺼냈다.
"어제까지만 해도 너는 이 천 조각처럼 부드러웠다."
감독이 펠트 조각을 바즈의 왼손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러고 나서 권총을 꺼냈다.
"그런데 이제는 이것처럼 단단해졌다."
감독은 권총을 바즈의 오른손에 쥐어 주었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다. 너는 내일 나를 따라 어디론가 가야 한다."

- 감독의 목소리였다. 감독은 두 사람이 먹을 아침 식사를 준비해 왔다. 달걀과 과일, 빵 그리고 달콤한 시럽이 들어간 차도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바즈가 식사를 마친 뒤 감독에게 물었다.
"시장."
감독이 대답했다.
"날렵한 손가락을 가진 소년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지. 하지만 너 같은 아이는 높은 값을 쳐서 받을 수가 있다. 자, 어서 네 물건을 챙겨라. 대위가 기다리고 있다. 그는 너 같은 소년을 찾고 있다."

- "개를 죽이는 것과 사람을 죽이는 게 뭐가 다를까? 똑같이 생명을 앗아 가는 일인데. 안 그러냐?"
감독은 그렇게 말하며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렸다.
바즈는 어떤 운명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용병으로 팔려서 전혀 알지도 못하는 부족 간의 전투에 참전하기 위해 낯선 땅에 가야 할 처지임에 분명했다. 바즈는 예전에 그런 일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자신에게 닥치리라고는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다. 
다른 소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더러운 물이 담긴 여물통 앞에서 세수를 하고 있었다. 바즈가 소지품을 챙기려고 마구간으로 들어서자, 아이들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바즈를 바라보았다. 바즈는 얼마 안 되는 물건들을 챙긴 다음, 열쇠를 찾기 위해 건초 더미 아래로 손을 뻗었다.
"가능한 한 열쇠를 오래 가지고 있는 게 좋아. 언젠가는 쓸모가 있을 테니까." 
문득 다가르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온 꽃가루처럼 귓전을 맴도는 것 같았다.

- 바즈는 바로 얼마 전 이곳에 올 때 그랬던 것처럼 말 등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하지만 주변의 어떤 사물에도 초점을 맞출 수 없었다. 지상의 모든 인연과 모든 감정이 상처가 되어 바즈의 마음 한가운데에 실꾸리처럼 꽁꽁 감겨 있었다. 바즈는 머릿속으로 불이 붙은 듯한 붉은색 실과 주황색 실을 엮어 대담한 무늬를 만들고, 수수께끼 같은 디자인으로 신비감 넘치는 직물을 계속 짜고 있었다. 바즈는 생각했다. 더는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상처 입은 인생이지만, 어떤 부분에는 반드시 깊은 의미가 담겨 있을 거라고. 

- 타디스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 걷고 또 걸었다. 발밑으로 대지의 윤곽을 가늠할 수 있는 메마른 흙이 느껴졌다. 타디스는 벌써 며칠째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지표 밖으로 터져 나오려고 우르릉거리는 지하의 에너지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는 이따금씩 땅의 움직임에 자신을 내맡겼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몸의 중심을 잃곤 했다. 타디스는 대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지하의 우르릉거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었고, 그 역시 그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 타디스는 계속 걸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릎까지 늘어진 밝은 회색 외투가 리듬을 타며 펄럭였다. 외투에는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인류가 잃어버린 옛 문자를 상징하는 듯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타디스의 머리카락은 아주 짧았다. 이를테면 까까머리였다. 타디스는 외투 속 허리에 칼을 차고 있었는데 벨트로 몸에 단단히 묶어 놓았다. 이따금 그가 움직일 때마다 외투 자락이 벌어지면서 보석이 박힌 칼자루가 살짝 내비쳤다. 타디스는 바퀴가 두 개 달린 수레를 끌고 있었다. 그가 공연을 할 때면 테이블로 변하는 수레였다. 수레에는 공연용 소품이 실려 있었다. 타디스는 마술사였다. 

- 땅거미가 밀려오고 있었다. 어둠의 장막이 점점 더 아래로 내려올수록 그의 감각은 예민해졌다. 타디스는 밤이 다가오는 소리를 금세 알아차렸다. 밤의 정적이 어떻게 찾아오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어느 순간 타디스는 자신이 꿈속을 거닐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꿈속에서 한 소년이 머물고 있는 시장을 향해 걸었다. 그는 꿈이 곧 현실이 되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남자는 꼿꼿한 자세로 앞을 똑바로 응시하며 걸었다. 바즈는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바즈가 달아나지 못하게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바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몰랐기 때문에 남자를 믿고 의지한다면 혹시 그가 집으로 데려다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나중의 문제였다. 바즈는 숨을 깊이 몰아쉬면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려고 했다. 그때 남자가 바즈를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너는 미래에 가 있구나. 하지만 모든 일은 바로 지금, 현재에 일어난단다." 

바즈는 움찔했다. 남자가 자신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 바즈는 좋은 기회를 잃어버린 사실에 화가 나 퉁명스럽게 물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너는 나를 따라올 필요가 없다."
남자가 점잖게 말했다.
"하지만 아저씨가 저를 사셨잖아요."
바즈가 말했다.
"그래, 내가 너를 샀지. 그래서 나는 네게 나와 함께 갈 것인지, 아니면 너 혼자 떠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려고 한다."
 
- 바즈는 남자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선택하고 말고 할 게 없는 간단한 문제였는데, 막상 남자의 말을 듣고 나니 너무 막막했다. 바즈는 의구심을 품은 채 고민했다. 그런데 갑자기 땅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즈의 머릿속도 요동쳤다. 그것은 바즈가 마구간에서 멜리시와 낯선 남자와 함께 있을 때 들었던 우르릉거리는 소리와 똑같았다. 그때가 마치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인 듯 아득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 "운이 좋았네요."
바즈가 말했다.
"그래, 그런 것 같구나."
남자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물건들이 아직은 내 곁에 있어야 한다는 뜻인 듯싶다."

"이제 어디로 가나요?"
바즈는 달아나고 싶은 생각이 더는 없었다. 남자의 말이 옳았고,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그 증거였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었다. 바즈에게는 현재만 있었다. 바즈는 별안간 수레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해졌다. 

- "우리는 서쪽으로 여행할 거다."
남자가 말했다. 남자는 울퉁불퉁한 대지 위에 우뚝 선 채 어느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할지 가늠하고 있었다.
"가야 할 길이 아직 꽤 멀다."
바즈는 남자를 따라 모르는 곳으로 가느니 차라리 땅속에 묻히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바즈는 땅이 벌여 놓은 광경을 보고 이제껏 삶을 바라보던 방식을 바꾸었다. 이를테면 앞장서서 가는 남자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본보기로 삼은 것이다. 바즈의 생각에 자신은 직물을 짜는 사람 그러니까 직공이 될 운명이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이 남자와 함께할 운명도 아닐지 몰라.'
하지만 정말 그런지 어떤지는 바즈 혼자서 알아내야만 했다.
바즈는 한쪽 발을 다른 쪽 발 앞으로 내디뎠다. 어쨌든 지금 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걷는 것뿐이었다.  

- 바즈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행동하는 남자 때문에 기분이 좀 상했다.
"하지만 이름이 없는 사람도 있어요. 저는 이름 없는 남자를 만난 적이 있거든요."
그러자 타디스가 눈썹을 위로 추켜세우며 아치 모양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즈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말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말을 무척 사랑했지요."

"그럼 그 남자 이름은 말을 사랑하는 남자겠구나." 

- 바즈는 이제 그곳이 어딘지 알고 있었다.
"바로 현재예요."
바즈가 재빨리 말했다.
"맞아요, 현재. 현재에 도착해서야 사람들은 다시 자신들의 삶을 살 수 있겠지요."
 
 - 바즈는 배신의 거미줄이 자신을 단단히 동여매고 있다고 생각했다. 맨 처음 말을 가진 남자에게, 그다음 직조 공장 감독에게 어떻게 배신을 당했는지 생각하는 사이 바즈의 몸과 마음은 단단해졌다. 그런데 이제 바즈는 발을 딛고 서 있는 대지에게까지 배신을 당한 셈이었다. 
"땅도 움직여야 한단다."
바즈의 속내를 읽은 듯 타디스가 말했다.

"어느 한 곳에 붙박여 있으면 안 되니까 자리를 바꾸는 거지. 그것이 에너지의 법칙이란다. 에너지는 항상 균형을 찾으려고 하지."

 

- 바즈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수레에는 무엇이 들어 있나요?"
"속임수를 감추는 것들이지."
타디스가 말했다. 바즈는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속임수라뇨?”
바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전사는 여러 가지 속임수를 알고 있어야 한단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적들을 제압할 수 있겠니?"
"그렇긴 하네요.:
바즈는 무심결에 대답했다. 바즈는 현재에 대해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졸린 듯 단조로운 고향 마을과 부모님이 계신 집이 자꾸 떠올랐다.
'무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기다리며 잠에서 깬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래, 지금 나는 그토록 바라던 미래에 와 있는 거야.'
 
- "이미 벌어진 일을 바꾸는 속임수도 있을까요? 당연히 없겠죠?"
바즈가 조용히 물었다.
"지진을 말하는 거냐? 그래, 이미 벌어진 일은 바꿀 수 없단다. 강을 거슬러 헤엄치지 않는 한 강물의 방향을 바꿀 수도 없고 말이야. 강물을 따라가야 해. 강물과 하나가 되어야 하지. 그런데 어떤 것은 얼마든지 바꿀 수가 있단다."

바보 같은 소리로 들렸다.
바즈는 타디스의 말이

"어떻게 강물과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있어요?"

- "그런 일은 머리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란다."
타디스는 그렇게 말한 뒤 널찍한 손바닥을 가슴 한복판에 올려놓고 덧붙였다.
"바로 여기, 마음속에서 일어나지."
바즈는 여전히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대화를 그만두기로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침묵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 "혹시 칼을 다른 사람에게 줘서 아쉽지는 않나요? 필요한 물건이었을 텐데요."
바즈가 말했다.
"너는 돈을 주고 사서는 안 되는 존재야."
타디스가 말했다.
"너를 사려면 돈보다 훨씬 더 귀한 걸 지불해야 하지. 그 사내에게는 검을 갖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있었어. 소유하지 않으면 못 견딜 정도로 말이야. 그 욕망은 너에 대한 욕망보다 강했지."
"아저씨는 그 검보다 저를 갖고 싶은 욕망이 강했고요." 

- 바즈의 생각에 이 세상은 사람들의 욕망에 의해 돌아가는 듯했다. 바즈는 욕망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한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욕망의 종류도 무척 많았다. 돈을 향한 욕망, 권력을 향한 욕망, 쾌락을 향한 욕망...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터였다.
"결국 아저씨의 욕망으로 제 운명이 결정된 거군요. 그렇죠? 하지만 그건 공평하지 않아요. 그렇지 않나요?"
"네 운명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란다."
타디스가 조용히 말했다.

"저는 이제 용병이 될 거예요. 그렇게 되기를 바라니까요."

바즈가 말했다.
"누가? 누가 그걸 바라는데?"
타디스가 물었다.

"감독이요. 아니, 저 빼고 모두가요."

바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저는 전사가 될 거예요."

"그래, 언젠가는 되겠지.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방식으로는 아니야."
타디스가 말했다. 

- 바즈는 욕망이 교환의 수단이 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사실 욕망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바즈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것들을 바랐다. 하지만 그 무엇도 욕망이라고 부를 정도로 절실하지는 않았다. 물론 바즈는 앞으로 갈증과 굶주림, 향수병, 극심한 피로를 겪을 때마다 이런저런 복잡 미묘한 욕망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기회가 많을 터였다. 
어둠이 내리면서 낮에 일어난 혼란이 하나의 질서 속에서 정리되고 있었다. 사방이 어두워졌지만 타디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밤에 여행하고 낮에 쉬는 것을 좋아했다. 

 

- "생각의 한계도 사라지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지. 또한 어둠 속에서 보는 것이 밝은 빛 속에서 보는 것보다 진실에 더 가깝단다. 우리는 빛 속에서는 경계선을 긋곤 해. 그래서 어둠 속에서는 가능해 보이는 것들이 빛 속에서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거지. 그것이 바로 우리의 머리가 우리를 속이는 일종의 속임수야."  

 

- 바즈는 눈이 사물을 분간하지 못할 때는 청각이 평소보다 더 예민해지고, 촉각도 더 섬세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밤공기의 맛과 낱낱의 공기 입자 속에 갇힌 낮의 열기도 구분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바즈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앞에서 천천히 걷고 있는 타디스와 그의 수레를 확실히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은 이제 지진이 일어났던 지역에서 꽤 멀어졌다. 바즈는 타디스와 함께 걷고 있는 길의 희미한 경계는 물론, 땅에서 제멋대로 솟아난 것 같지만 바즈로서는 알 수 없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자라고 있는 게 분명한 나무들의 검은 윤곽도 볼 수 있었다. 

 

- 처음에는 불길하게만 느껴졌던 광활한 어둠이 이제는 그 위에 누워 잠자고 싶을 만큼 부드러운 검은색 새틴 커튼의 크기로 줄어 있었다. 

- 바즈는 땅바닥에 누워서 팔다리를 쭉 폈다. 등 아래에서는 차가운 기운이 올라왔고, 가슴 위로는 뜨거운 공기가 내려왔다. 바즈는 낮에 잠을 잔 적이 없었다. 그래서 햇빛 때문에 잠이 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바즈는 외투 안쪽 주머니에 넣어 둔 열쇠가 몸을 찌르는 것을 느꼈다. 

- 타디스는 바즈 옆에 앉아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편 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런 다음 바닥에 등을 대고 하늘을 똑바로 쳐다보며 누웠다. 바즈는 머리뼈가 훤히 드러나 있는 타디스의 머리를 보자 지구가 떠올랐다. 작은 개 블링크도 떠올랐다. 개의 모습이 타디스의 머리뼈처럼 뚜렷하게 보였다. 바즈는 슬픔에 잠겨 한숨을 내쉬었다. 바즈는 자신의 지친 몸이 햇빛을 신경 쓰지 않는 것에 감사했다. 이런저런 생각들도 조금 뒤에는 바즈가 깊은 잠에 들도록 잠잠해졌다. 

- 두 사람은 저녁 어스름이 깔릴 때까지 푹 잤다. 그리고 다시 여행을 시작했다. 얼마쯤 걷자 이번에는 쉬고 싶다는 욕망이 물러가고 배고픔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바즈는 타디스가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들은 밤새 걸었고, 해가 떠오를 무렵 한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에는 지진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런데 소문이 천천히 돌아서인지 사실에서 한참 비껴 나 있었다. 강물이 지형을 따라 이리저리 구부러지기도 하고 뒤틀리기도 하여 마지막 종착지에 오면 처음과 다르게 변질되는 것처럼 상당 부분 왜곡되어 있었다. 

- "나는 돈이 없단다."
타디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검을 주고 너를 산 거 기억하지?"
"하지만 음식과 바꿀 수 있는 무언가가 수레 안에 있지 않나요?"
바즈는 배고픔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위가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어서 찌릿찌릿 아플 지경이었다.
"전사는 끼니를 다 챙겨 먹지는 않는단다."
타디스가 말했다.

- 하지만 바즈의 두 눈은 산처럼 수북이 쌓인 빵 더미에 붙박여 있었고, 입안에는 침이 가득 고였다. 바즈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빵과 바꿀 만한 것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열쇠가 손에 잡히는 순간, 배고픔으로 인해 열쇠를 계속 간직하려는 욕망이 시들해졌다. 바즈는 빵 장수에게 주려고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그때 사람들이 타디스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타디스는 수레에서 꺼낸 공을 컵 속에 감춘 뒤 사람들의 눈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윽고 타디스는 공을 모아서 저글링(공을 연속해서 공중으로 던지고 받는 묘기)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이 두어 개였는데, 눈 깜짝할 새에 하나씩 늘어나 여러 개가 공중에서 움직였다.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거푸 감탄했고 타디스의 발치에 동전을 던져 주었다.  

- 타디스가 이번에는 텅 빈 외투 주머니를 뒤집어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고는 붉은 손수건을 꺼내 허공에 흔든 다음 네 모서리를 묶어서 자그마한 보따리를 만들었다. 잠시 뒤 그가 보따리를 풀자, 그 안에 과일과 견과와 빵이 가득 들어 있었다. 타디스가 다시 손수건을 접어 흔든 다음 텅 빈 것을 보여주자, 사람들은 또 한차례 환호성을 질렀다. 타디스는 곧 주머니에서 과일과 견과와 빵이 가득 든 다른 보따리를 꺼냈다. 

- "이제 보니 아저씨는 마술사군요."
공연이 끝났을 때 바즈가 말했다. 바즈는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기분이 뒤틀릴 대로 뒤틀려 있었다. 바즈는 잔뜩 심술이 나서 덧붙였다.
"그러니까 아저씨는 사실이 아닌 걸 사람들이 믿게끔 속이는 사람이죠."
"사실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지?"
 

- "사실이란 아직 출발도 하지 않은 여행 같은 거야. 사람들은 스스로 믿고 싶은 것만 믿지. 너를 아들이라고 여긴 여인에게서 그런 습성을 보지 않았니? 물론 네 말이 맞긴 하지. 나는 마술사니까 말이야."
타디스는 바즈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허리춤에 찬 주머니를 열었다.
 
- 바즈는 허겁지겁 빵을 씹어 먹었다. 빵의 질감이 입안 가득 느껴졌다. 그렇게 맛있는 빵은 태어나서 처음 먹어 보는 것 같았다. 태양은 어느새 하늘 한가운데에 떠 있었다. 바즈는 태양을 올려다보다가 먼 곳에 있는 산을 바라보았다. 어렴풋하지만 산이 꽤 높아 보였다.
"우리는 저 산을 향해 가는 건가요?"
바즈가 물었다.
타디스가 바즈의 시선을 따라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상까지 올라갈 거란다."

- "하지만 그건 착시 현상일 뿐이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산이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고. 조금만 가면 닿을 듯하지만 가다 보면 강도 있고 사막도 있을 거야. 숲도 지나쳐야 될걸. 그러다 보면 산이 우리에게 속임수를 쓰는 것처럼 느껴지지." 
"산은 사람을 속이지 않아요. 산은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니니까요."
바즈가 단호하게 말했다.
"산은 영혼을 가지고 있단다. 다른 모든 자연처럼 말이야."

타디스가 말했다.
"그 영혼을 통해 자연과 우리는 삶이라는 태피스트리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하나가 되지."
바즈는 그때까지 산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산에 영혼이 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 "많은 사람들이 산 정상에 오르려고 애쓰다 죽었대요."
바즈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생각에 잠겼다. 순간, 몸을 이루는 근육들이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네 말이 맞을 거다."

- 그는 말라서 쭈글쭈글한 잎사귀 하나를 주워 들고는 입으로 후 불어 허공에 날렸다. 그런 다음 잎사귀가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잎사귀에도 영혼이 깃들어 있단다. 그래서 잎사귀 역시 네 영혼과 하나가 될 수 있어. 네가 그걸 선택한다면 말이야."

타디스가 선택이란 말을 입에 올린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선택이라고요? 저는 제가 팔려 온 종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종은 주인의 명령을 따를 뿐이지 선택하진 못하잖아요."

바즈가 말했다.
"나는 네게 무엇을 하라, 마라 명령할 생각이 없단다. 그 누구에게든 명령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지. 하지만 누가 명령하든 결정을 내리는 건 자기 자신이란다." 
바즈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는 자기 주변에 정적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 "그 말은 제가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뜻인가요?"
"물론이지. 네가 자유를 선택한다면 말이야."
"그럼 제가 자유를 선택한다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나요?"

바즈가 얼굴을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그는 아직까지 자기 앞에 있는 남자를 완전히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건 내가 정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란다. 그것 또한 네가 결정해야지."

 

- 바즈의 생각이 바람을 타고 날다 떨어진 잎사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이리저리 뒹굴었다. 바즈는 생각이 멈추도록 땅바닥의 한 지점을 뚫어지게 보았다. 거기에는 자그마한 운모(화강암 가운데 많이 들어 있는 규산염 광물의 하나) 조각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바즈는 우두커니 선 채 그것을 응시했다. 어느 순간 바즈의 머릿속에 손잡이에 보석이 박힌 칼과 "너는 빛을 따르게 될 것이다."라는 낯선 남자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 "이게 제 운명이라면 따라야겠지요."
"나와 함께 계속 길을 갈 테냐?"
타디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네, 계속 함께하겠습니다."
바즈가 대답했다.
"좋아. 하지만 그전에 우선 쉴 곳을 좀 찾아야겠구나."

타디스가 말했다.

 

- 소년은 두 사람을 위해 차를 따르고 접시에 콩과 말린 과일을 담아 내놓았다.
"저는 날마다 여행자들이 왔다가 떠나는 걸 볼 때면 그들을 따라가고 싶어요."
소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도 한때는 너처럼 그랬어. 하지만 지금은... 글쎄, 잘 모르겠어."
바즈가 말했다.
"나는 너와 내 검을 바꾸었지. 그리고 내 공연과 이 음식을 바꾸었고. 어쩌면 너희 둘도 각자의 운명이나 처지를 서로 바꿀 수 있을 것 같구나."
타디스가 말했다.
"저는 가끔 예전의 삶이 그리워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때가요."

바즈가 타디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때는 없단다."

- "언제나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지. 그렇지 않다면 너는 여기에 있지도 않을 거야. 이 아이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만, 닷새 전만 떠올려도 많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될걸."
"어쩌면 그럴 수 있겠죠. 하지만 일이라고 해야 시시껄렁한 것뿐인데요, 뭐."
소년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건 선택의 문제야. 말하자면 네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달린 거지."
타디스가 소년이 내놓은 바구니에서 달걀 하나를 집으며 말했다.
"이 작은 달걀을 봐라."
"그건 시장에서 산 게 아니에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집에서 기르는 암탉이 며칠에 한 번씩 달걀을 낳아요."

소년이 말했다.
"그래, 암탉이 달걀을 낳는 건 대단한 사건이란다. 그 일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말이야."
타디스는 그렇게 말한 뒤 자기 앞에 놓인 찻잔에 흑설탕 한 조각을 넣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저으면서 설탕 조각이 뜨거운 액체에 녹아 하나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두 소년은 앞에 있는 남자의 행동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바즈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무화과 열매를 베어 물었다. 씨앗 몇 개가 혀 위에서 이리저리 구르다가 이 사이에 끼었다. 열매의 달콤한 맛이 퍼지면서 입안 가득 침이 고였다. 오랜 시간배가 고팠기 때문에 무화과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먹어 본 무화과 가운데 가장 맛있네요."
바즈가 말하자 타디스가 미소를 지었다.

- 식사가 끝나자 소년은 두 사람을 두 개의 매트리스가 깔린 방으로 안내했다. 매트리스는 면으로 덮여 있었는데, 햇빛이 그 위에 내려앉았다가 톡톡 튀어 오르고 있었다. 방 한쪽에는 세수용 물이 준비되어 있었고, 그 위에 달린 자그마한 벽장에는 바즈의 집처럼 꽃향기를 풍기는 비누가 들어 있었다. 바즈는 '내 삶의 향기가 이렇게 나를 따라오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만약 비누 향기를 이곳에서 처음 맡았다면, 그 향기는 당연히 이곳의 기억으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바즈에게 비누 향기는 맨 처음 그 향기를 맡았던 집의 냄새나 다름없었다. 

- 바즈는 시원한 느낌의 면 시트 위에 누웠다. 그는 자신의 몸이 낮에는 자고 밤에 여행하는 습관에 얼마나 빨리 적응했는지를 깨닫고 적잖이 놀랐다. 맨땅과는 느낌이 사뭇 다른 매트리스의 포근함과 편안함에 몸의 근육과 뼈가 굴복했다. 타디스도 바즈 옆에 누웠다. 바즈는 타디스가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를 한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하지만 그의 기도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애썼다. 왠지 무례한 짓 같아서였다. 잠시 뒤 바즈도 가족과 소중한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며 조용히 기도했다. 바즈는 기도하는 내내 자신이 그들에게 말을 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가족과 친구들이 과연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바즈는 갑자기 그것이 궁금해졌다.

 

- 타디스가 잠시 바즈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바즈는 타디스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조용히 말했다.
"가족과 친구들이 제 기도를 들을 수 있는지 궁금해요."
"그들이 들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네게 달렸다. 이를 테면 너의 의지에 달려 있지."
타디스가 말했다.
"의지라고요? 머릿속으로 그들이 제 기도 소리를 듣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는 뜻인가요?"
바즈가 말했다. 바즈는 그 같은 말을 수없이 들었다. 마을을 떠났다가 돌아온 늙은 양치기도 걸핏하면 그런 식으로 말했다.
"아니."
타디스가 말했다.
"의지란 머리에서 나오는 게 아니란다. 머리는 생각하는 곳이지. 의지는 여기, 마음에서 나오는 거란다."
타디스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그러고 나서 다시금 손을 모아 기도하기 시작했다.

- 바즈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자신의 마음 안에 무엇이 있는지 떠올려 보았다. 과거의 사건에서 비롯된 그리움과 슬픔 같은 갖가지 감정들이 들어 있었다. 거기에는 이글거리는 분노도 있었다. 분노는 바즈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었다. 분노를 떠올리자 바즈의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귓불도 빨개졌다. 그러나 마음 안에는 약간의 기쁨도 있었다. 바즈는 기쁨의 실체를 잠깐 볼 수 있었지만 어떻게 하면 그것을 얻을 수 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타디스에게 기쁨을 얻는 방법을 물어볼까 하다가 너무 피곤해서 그만두었다. 대신 바즈의 입에서 다른 질문이 튀어나왔다.
 
- "스승님은 어디에서 오셨나요?"
타디스는 스승님이라는 호칭이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단다. 어디로 가는지가 중요하지."
바즈는 타디스의 대답에 짜증이 났다.
"제발 수수께끼 같은 말씀 좀 그만하세요. 정말 지겨워요."

"그래? 그럼 말해 주지."
 
- "나는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처럼 전사가 되는 훈련을 받았단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준비를 해야 했지.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죽음이 점점 쉬운 일로 여겨지더구나. 어느 순간에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었단다. 다만 죽음이 내게 어떻게 닥쳐오는지 그것이 궁금했지. 그런 점에 있어서 나는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비하지 못한 채 그냥 사라져 버리니까. 나는 일찍이 군대에 들어갔단다. 그리고 땅을 정복해 왕국을 세우는 꿈을 꾸기 시작했지. 나는 왕이 되려고 했다. 나는 권력의 맛도 보았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환상에 불과했단다."

 

- "이윽고 여인이 내 손을 놓고는 담요를 건네며 건강을 빌어 주었지. 그 뒤 며칠 동안 그 담요는 내게 가장 중요한 물건이 되었단다. 날씨가 변덕을 부려서 하늘이 화를 내듯 비가 쏟아지면 비 피할 곳을 찾은 다음 담요로 몸을 감쌌지. 그러던 어느 날 대지의 에너지가 나를 산 위로 밀어 올렸단다. 나는 그곳에서 음식에 대한 욕망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단식을 했지. 그러다 보니 꿈과 현실이 천 조각의 날실과 씨실처럼 엮여서 눈앞에 펼쳐지더구나. 나는 여인들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 내가 살면서 만난 모든 여인들 말이야. 그 여인들이 그립더구나. 나는 어머니에 대한 꿈도 꾸었다. 어머니는 내가 잘 아는, 그만큼 익숙한 대지 위에 서 있었지. 그런데 내가 그곳으로 달려가면 어머니는 금세 사라지더구나. 나중에 나는 나무를 가지고 일하는 사람 밑에서 일했단다. 그 일은 지극히 단순하고 반복적이었지. 나는 그 일을 시시하게 생각했고, 그런 만큼 지겨워했단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난 뒤, 아니 어쩌면 몇 년이 지난 뒤였을지도 모르겠구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간 건지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는데, 아무튼 나 자신이 나무라는 걸 느끼기 시작했단다. 내 영혼이 나무로 옮아간다는 걸 알았던 거지." 

 

- "하지만 눈이 점점 나빠지셔서 조만간 나무 조각하는 일을 못하실 것 같아요."
"네 아버지는 눈이 필요하지 않을 거다."
타디스가 말했다.
"그분도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믿는다. 시력을 잃는다고 해서 나무에 대한 감각까지 잃어버리는 건 아니니까. 그분의 영혼은 그 감각을 온전히 지니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계속 일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눈이 보이지 않게 되면, 오히려 작품은 예전보다 더 아름다워질 거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바즈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타디스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 바즈가 보기에 타디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늘어놓는 괴상한 사내였다. 

- 바즈는 두 눈을 감았다. 그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가족을 생각했다. 그리고 집이 나오는 행복한 꿈을 꾸었다.
"정말로 가족과 함께 집에 있는 것처럼 생생했어요. 하지만 꿈이 현실이 되는 건 불가능하겠죠. 그렇죠?"
바즈는 잠에서 깬 뒤 타디스에게 말했다.
타디스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불가능한 일은 없단다."
타디스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기다란 나무 탁자 앞에 앉아 다시금 식사를 했다. 이번에는 나란히 앉아 소년이 내온 따뜻한 빵과 꿀을 먹었다.

 

- 바즈는 얼마쯤 가다가 뒤돌아서서 납작한 집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창가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바즈는 소년의 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스승님이 말한 여인과 우리가 만났던 여인이 많이 닮은 것 같아요."
바즈가 타디스에게 말했다.
"저는 그 여인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어요. 그리고 저 소년에게서는 저의 모습을 보았고요."
타디스가 미소를 지었다.
"그런 가운데 너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구나. 이제부터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너를 함부로 놀리지 못하겠는 걸."

- 그 뒤 며칠 동안 두 사람은 낮에 여행하고 어둠이 내리면 휴식을 취하는 방식으로 조금씩 바꿔 갔다. 바즈가 가장 이상적으로 여기는 생활 방식이었다. 바즈는 다시금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 지나가는 날수를 세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대부분의 삶이 습관대로 살아진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더는 옛날 방식대로 보지 않게 되었다. 습관은 막연한 기대를 품게 했다. 그리고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실망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매 순간 일어나는 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덕분에 바즈는 자칫 지나쳐 버리기 쉬운 주변 환경의 세세한 것들까지 하나하나 인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 식사도 바즈가 당연하게 여겨 온 하루 세끼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할 때도 있었다. 허기에 지칠 대로 지친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도 적지 않았다. 바즈는 자신이 무척 허약해졌다고 느끼다가도 새로운 마을을 발견할 때면 불끈 힘이 솟았다. 
마을마다 색깔과 풍경과 느낌이 사뭇 달랐다. 하지만 어느 마을이든 사람들의 일상은 분주하고 소란했다. 바즈는 바로 그런 일상의 힘이 이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했다. 

 

- 바즈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서렸다.
"그러니까 스승님의 마술은 눈속임에 지나지 않군요. 결국 스승님은 눈속임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고요." 
바즈가 보기에 마술은 정직하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타디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구경꾼들에게 이 세상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님을 알려 주고 있는 거란다. 세상은 생각보다 더 넓고, 비밀 역시 더 복잡하단다. 진정한 마술은 단순히 재미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과 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어 주는 것이지. 그러니까 마술사가 하는 일은 어떤 능력을 보여 주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환상을 떨쳐 내주는 거란다. 능력이나 재주는 환상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마술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는 무언가를 바꾸고 변하게 하는 능력이기도 하지. 어때, 이 정도면 무언가 교훈을 얻을 만한 가치 있는 일 아닌가? 아무튼 나로서는 마술을 할 수밖에 없어. 일단 먹고살아야 하니까."  
타디스는 마지막 말을 하면서 멋쩍게 웃었다.

 

- "스승님의 속임수를 넋 놓고 보지만 않았어도 견과를 도둑맞지 않았을 거예요."
바즈가 말했다.
"그렇다면 내 잘못이구나."
타디스가 말했다.
"아뇨, 제 잘못이에요. 제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탓이죠."

"기억해 둬라."
타디스는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마술이란 무언가를 바꾸는 능력이지만, 누군가를 특히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능력이기도 하단다."

 

- "진짜 마술이에요?"
바즈가 물었다.
"어쩌면..."
타디스가 말했다.
"이 담요가 내 인생을 바꾸었으니 마술이 맞을 것 같구나."

 

- 바즈의 물음에 타디스가 말했다. 타디스는 막대기 하나를 주워 들고는 칼을 꺼내 조각하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손에 피리가 들려져 있었다. 타디스는 그 피리를 바즈에게 건넸다.

"못 불어요. 피리를 불어 본 적이 없는걸요."
바즈가 말했다.
"아니, 볼 수 있어. 너는 생각을 바꿔야 해. 생각을 바꾸면 할 수 있어."
"어떻게 생각을 바꾸죠?"
바즈가 물었다.
"생각을 바꾸는 건 여기에서 시작한단다."
타디스가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 "생각을 바꾼 다음에는요?"
바즈는 타디스의 말에 전혀 흥미가 일지 않았다. 그래서 건성으로 물었다.
"그러면 바뀐 생각이 이 안에 저장되지."
타디스가 손을 가슴에 얹으며 말했다.
바즈는 한 손은 머리에, 다른 손은 가슴에 얹었다. 갑자기 박동하는 것은 머리이고, 심장이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즈는 뭐가 뭔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 바즈는 그렇게 말한 뒤 지친 몸을 땅바닥에 누였다. 땅속 깊은 곳에서 냉기가 올라왔지만 바즈의 발바닥은 뜨거웠다. 바즈는 두 눈을 감고 타디스가 만났던 여인이 네모난 천을 이어 만든 담요로 자신의 몸을 감싸는 상상을 했다. 그러자 마술처럼 머릿속에서 그때까지 살아온 삶의 조각들이 일정한 무늬를 이루기 시작했다.  

 

- 바즈는 사막을 본 적은 없지만, 새까맣게 그을린 채 훌쩍 늙은 얼굴로 사막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여행자들은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사막도 산처럼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 간다고 했다. 모래언덕을 오르다 길을 잃고 모래에 파묻혀 목숨을 잃기도 한다고 했다. 
녹색의 땅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자 사막이 펼쳐졌다. 사막은 마치 천 조각을 이음새 없이 붙여 놓은 거대한 담요 같았다. 바즈는 사막에 발을 들여놓자 어디가 어디인지 도통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모래언덕 사이를 걷기 시작했다.

 

- "아무래도 낙타와 안내인이 필요할 것 같구나."
타디스가 쉬기 위해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그는 곧 담요를 펼쳤다. 담요가 두 배로 커진 것 같았다. 타디스는 그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안내인을 어디서 구하죠?"
바즈가 물었다.
"아마 누군가가 나타날 거다. 운이 좋으면 낙타도 구할 수 있을 거고."
 
- "스승님은 그런 일도 일어나게 할 수 있어요?"
"일어날 가능성을 높일 수는 있어. 그런 게 마술사의 일이지. 무언가를 갖고 싶다면 머릿속으로 그것에 대해 생각해야 한단다. 마술의 네 가지 법칙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의지지."

 

- "그래,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가지려면 그전에 거미줄처럼 쳐 있는 머릿속 잡념을 걷어 내야 한단다. 말하자면 새로운 생각이 들어앉을 자리를 만들어 줘야 하지." 
"그 자리를 어떻게 만들죠?"
"조용한 가운데 가만히 있으면 돼."
바즈도 타디스처럼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러고는 사막의 서쪽에 떠올라 있는 기다란 끈 같은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바즈는 잡념의 거미줄을 걷어 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하나의 생각을 지우면 다른 생각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 "잡념을 없애는 게 잘 안 돼요."
바즈가 말했다.
"끈기 있게 노력해야 한단다. 그러면 할 수 있어."
바즈는 계속 잡념을 쫓아다녔지만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겨우 한 가지 생각을 붙잡아 살펴보려고 하면 어느 순간 다른 생각이 끼어들었다. 바즈는 가만히 앉아 있으려고 숨도 크게 쉬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숨소리가 잦아들면 생각하는 것도 느려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바즈와 타디스는 그렇게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이윽고 배가 고픈지 바즈의 배 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울려 나왔다. 바즈는 그 소리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육체는 항상 정신의 집중을 방해하는 법이란다."
타디스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견과를 꺼내며 말했다.
"그거 제 견과예요!"

- "몰래 가져가셨군요. 제 건 금세 알아볼 수 있어요."
"그래? 그렇다면 이 견과는 애초에 어디에서 왔을까?"

타디스의 눈은 장난기로 가득했고, 바즈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 바즈는 이따금 고개를 들어 안내인이 오는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마술로 사막에서 사람을 불러오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태양이 기울어 갈수록 사막이 노란색에서 낙타색, 푸른색, 분홍색으로 바뀌어 갔다.
"사막의 진짜 색깔은 무엇일까요?"
바즈가 물었다. 
"사막의 색깔은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의 움직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단다. 너의 움직임에 따라서도 변하지. 산과 마찬가지로 사막 역시 우리와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야."

"사막이 변하는 것도 환상이라는 거죠?"
"제법이구나. 모든 것은 색깔, 모양, 상태에 상관없이 무한한 존재란다. 그 존재는 하나하나 떼 놓고 보면 모두 다르지.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완전한 하나란다."

-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아세요?"
바즈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머리를 써서 알려고 하지 마라. 마음으로 느껴야 해. 사람들은 아주 쉽고 간단한 일을 어렵게 이해하려고 들지."

- 해가 지자 기온이 뚝 떨어져 쌀쌀했다. 바즈는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동쪽으로 눈길을 돌리는 순간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오는 작고 거무스름한 형체가 보였다. 바즈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안내인이 와요."
바즈가 외쳤다.
타디스는 아무 말 없이 나그네가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나그네는 머리에 까만 천을 두르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타디스는 모닥불을 피우고 양철 컵에 차를 따랐다. 컵을 건네자 나그네는 기다렸다는 듯 팔을 뻗어서 냉큼 받았다.
"사막을 건너가려면 안내인이 필요할 겁니다. 모래바람에 쉽게 길을 잃을 수 있으니까요."
나그네가 차분하게 말했다.
"호의는 고맙지만 안내인은 필요 없습니다."
타디스가 말했다. 차를 한 잔 더 따라 내밀었지만 나그네는 점잖게 사양했다.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고는 걸어온 방향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바즈는 우두커니 서서 점점 멀어져 가는 나그네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 "왜 돌려보내셨어요?"
바즈가 물었다.
"우리 안내인이 아니란다."
타디스는 그렇게 말하고 차를 마셨다. 그러고는 모닥불의 마지막 불씨가 사그라질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 이윽고 바람이 불면서 모래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추워졌다. 어둠도 더더욱 짙어져서 바즈는 타디스조차 알아볼 수가 없었다. 두려움이 바즈의 가슴 가득 몰려들었다.
"안내인을 그냥 보내서 이렇게 됐잖아요."
바즈가 투덜거렸다. 
타디스가 바즈를 자기 옆에 바짝 끌어당겨 앉혔다. 그러고는 담요로 두 사람의 몸을 감쌌다. 바람이 점점 더 거세질수록 소리도 더더욱 요란해졌다. 모래가 거센 기세로 사막을 가로지르며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바즈는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하고 생각했다. 
"이렇게 죽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바즈가 말했다.
곁에 타디스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바즈는 적어도 혼자가 아니었다. 바즈의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아까보다 더 빠르게 떠올랐다. 더는 생각을 막을 수 없었다. 

- "무서워할 것 없다."
타디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타디스는 일어나서 바즈를 이끌고 바람이 들이치지 않는 덤불숲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리 가까이 다가와라."
타디스는 바즈를 바짝 끌어당긴 뒤 자신의 몸으로 감쌌다.
'산 채로 파묻히겠어.'
바즈는 점점 더 높이 쌓여 언덕을 이루는 모래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먼 곳에 있을 안내인도 떠올렸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바즈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과연 구조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만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바즈는 문득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만약 죽는다면 마음속에 사랑을 간직한 채 죽고 싶었다. 바즈는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타디스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한 영혼에게 사랑을 느끼기도 했다. 

-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그 밤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았다. 해가 떠오르자 모래바람이 잦아들고 그와 동시에 주위도 고요해졌다. 밤에는 미처 듣지 못했던 소리가 바즈의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다. 사막에 사는 동물들의 울음소리였다. 햇빛을 받은 사막의 꽃들이 꽃잎을 여는 소리도 들렸다. 이윽고 모든 소리가 잦아들면서 정적이 깔렸다. 주변뿐 아니라 바즈의 마음도 조용해졌다. 생각이 멈추었다. 바즈는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 두 사람이 서쪽을 향해 걷고 있을 때 낙타 두 마리와 한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낙타들 뒤에서 걷고 있었다. 바즈는 낙타가 남자를 이끄는 건지, 아니면 남자가 낙타를 몰고 가는 건지 알쏭달쏭했다. 
"우리 안내인이구나."
타디스가 말했다. 바즈와 타디스는 남자를 향해 걸었다. 남자도 두 사람 쪽으로 걸어왔다. 바즈는 자신과 타디스 그리고 낯선 남자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만 같았다. 이 남자도 지난밤에 나타났던 나그네처럼 검은 천을 두르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단지 남자의 눈이 웃고 있는 것만 달랐다. 바즈는 그 눈빛을 보고 지난밤의 나그네와 다른 사람임을 알아챘다. 
타디스가 남자에게 금화 몇 닢을 건네며 사막을 건너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남자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타디스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 "사막에서 일어나는 일만으로도 족하단다. 사막은 나와 가족에게 삶을 주었어. 언젠가는 그것을 사막에게 되돌려 줘야겠지. 사막과 우리는 이런 식으로 계속 순환하고 있단다."
안내인은 손으로 원을 그렸는데, 정작 본인은 자신의 동작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사막의 일부야. 사막은 나의 일부고, 사막이 나를 버리지 않는 한, 나는 사막을 떠날 수 없단다."

- 바즈는 그때까지 자신이 무언가의 일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자신이 만들지 않은 것, 자신보다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은 당연히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바즈는 시장에서 땅이 갈라졌을 때, 자신의 삶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땅이 만들어 낸 환상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바즈는 자신과 가족 그리고 자신의 삶이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보다 큰 전체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그 전체란 타디스가 말한 완전한 하나였다. 바즈는 비로소 안내인의 말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 바즈는 낯선 사람이나 새로운 무언가를 볼 때마다 놀라곤 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이제는 입장이 바뀌어 바즈가 아이들에게 놀라운 존재였다. 바즈는 모래 위로 공을 굴리는 아이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모래 위라서 그런지 공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굴러가도 매번 엉뚱한 쪽으로 흘렀다. 바즈는 공을 똑바로 굴리려고 애썼다. 어쩌다 공이 똑바로 굴러가면 공이 자신의 생각을 읽고 그대로 작용하는 것 같았다. 

- 바즈는 사막을 여행하면서 예전에는 단 한 번도 꾼 적 없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꿈을 꿀 때마다 바즈는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리곤 했다. 어떤 때는 꿈을 꾸는 게 아니라 상상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날 바즈는 꿈에서 형들을 만났다. 
"형들을 마음에 두고 계속 생각하면 실제로 나타날까요?"

바즈가 타디스에게 물었다.
"글쎄, 잘 모르겠구나. 하지만 마음속으로 계속 생각하면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지."

- "마음의 힘이 그렇게 강한 건가요?"
"그렇단다. 마음은 야수와 용을 만들어 내는 강력한 마술도 부릴 수 있단다."
"언젠가는 부모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바즈가 타디스에게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그건 너한테 달렸다. 그렇게 하려면 마음속에 항상 두 분을 모셔 두어야 한단다."
바즈는 부모님을 마음속에 모시기 위해 눈을 지그시 감고 두 분을 떠올렸다. 그런데 바즈의 마음속에는 이미 부모님이 계셨다. 바즈는 그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 
"마음속에 다른 부모님도 계시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 "네게는 너를 낳아 주신 부모님 말고도 또 다른 부모님이 계시단다."
타디스가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아버지다."
이번에는 허리를 숙여 모래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 땅은 네 어머니다. 네가 땅에 뿌리를 내리게 해 주는 존재란다."

- 바즈는 타디스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하늘이든 땅이든 자신을 보호하는 존재가 가까이 있다는 것은 바즈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바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고 짙푸른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 박혀 있었다. 별들은 숨을 쉬듯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바즈 자신의 심장 고동에 따라 별들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 "별들이 저한테 말을 거는 것 같아요."
바즈가 말했다.
"그래, 그럴 거다."
타디스가 말했다.
"어떻게 하면 알아들을 수 있죠?"
"별들에게 물어봐라. 무슨 말을 하느냐고."
"물어봤어요. 여러 번 물어봤는걸요."
바즈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귀 기울여 듣지 않았구나. 다시 한번 귀를 기울여 잘 들어봐라, 바즈."

- 그때 바즈는 온몸으로 퍼지는 열기를 느꼈다.
"별들이 웃고 있어요. 나를 보고 웃는 건가요? 그게 가능한 일이에요?"
"너를 보고 웃는 게 아니야. 너와 함께 웃는 거지."
"별들의 기분이 좋아 보여요."

- "맨 처음 나타난 사람이 우리 안내인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바즈가 잠들기 전에 나지막이 물었다.

"그 사람은 동쪽에서 왔다. 마술사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동쪽은 죽음과 파괴의 방향이야. 지금의 안내인은 서쪽에서 왔다. 서쪽은 창조와 생명의 방향이란다." 

- "사막으로 돌아가야지. 왔던 길로 되돌아갈 거란다. 하지만 똑같은 길로 갈 수는 없을 거야. 전부 바뀌었을 테니까. 나는 지금까지 사막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횡단했는데 사막의 모습이 같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절대 되돌아갈 수는 없단다."
타디스가 웃으며 말했다.
"뒤가 없기 때문이지. 오로지 앞뿐이야. 돌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란다."

- 타디스는 수레에서 먹을 것을 꺼내 안내인에게 주었다. 게다가 돈을 이미 지불했는데도 간단한 조각이 새겨진 지팡이까지 주었다.
"길을 잃거나 했을 때 이 지팡이가 도움이 될 거요."
타디스가 안내인을 껴안으며 말했다.

 

- "나는 아무 짓도 안 했어. 공연은 네가 한 거야."

"하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저글링을 할 때 사과를 떨어뜨렸는걸요."
"그건 어제 일이지. 오늘은 오늘이야."
"그럼 하룻밤 사이에 달라졌단 말예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대체 무엇이 달라졌는지 저는 도통 모르겠어요."

"하룻밤 사이에 무엇이 달라졌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하지만 무엇이든 변하기 마련이지. 하룻밤 사이에도."

 

- "공연을 생각하거나 준비할 시간도 없었다고요. 제가 실수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 많은 사람들 앞에 내보내신 거예요?"

"너는 잘 해냈어."
타디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건 미리 생각하거나 걱정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너는 아무 생각도 걱정도 없이 그냥 해낸 거야. 마음이 너를 방해할 시간이 없었던 거지. 너는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아니, 해내지 못할 거야.' 하는 불안과 초조를 멋지게 이겼어."

바즈는 사과를 타디스에게 던졌다. 그러자 타디스가 되던졌다. 두 사람은 사과를 가지고 함께 저글링을 시작했다.
"잘 모르겠어요. 마음을 다스리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지만 자꾸 까먹거든요. 제가 그 사실을 잊고 있다 싶으면 말씀해 주세요."
"너 자신이 마음을 다스려야 한단다. 마음이 너를 다스리게 하지 말고."

- "내가 도와줄게."
바즈가 소년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소년은 거절했다.
"돕고 싶어서 그래."

- "아직 마술사는 아니야. 하지만 언젠가는 마술사가 될 거야. 저글링이 잘 안 된다고 실망하지 마. 처음부터 잘되는 일은 없잖아. 사실 저글링은 어려워. 나 역시 어제까지만 해도 잘못했어. 사과 세 개도 잘 못 받았다니까."
"정말?"
바렐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정말이야. 하지만 그건 어제 일이야. 오늘은 오늘이지."

바즈는 자신이 타디스의 말을 그대로 따라서 한 것을 깨닫고 피식 웃었다.
"그럼 나도 내일 저글링을 성공할 수 있겠네."
바렐이 말했다.
"하지만 내일은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내일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인 거야."
바즈의 말에 바렐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 마술사들은 알쏭달쏭하게 말해."

바즈가 말했다.
"왜?"
"마술사들은 원래 그렇게 말해."
바즈는 장작 쌓는 일을 마친 뒤 손을 옷에 쏙쏙 문질렀다.
"나도 알쏭달쏭하게 말할 수 있는데."
바렐이 말했다.
"그래? 그럼 너도 마술사가 될 수 있어."

- 그 뒤 며칠이 지났다. 하루하루가 천 조각으로 만들어진 타디스의 담요처럼 이음새 없이 알차게 이어졌다.
"이제껏 한 마을에서 오래 머문 적이 없었는데, 여기에서는 왜 이렇게 오래 머무는 거예요?"
바즈가 묻자 타디스가 말했다.

"다음 여정을 대비해 쉬어야 하기 때문이지."


- 바즈는 그 마을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그곳 생활에 점점 익숙해졌다. 아침에는 마술을 연습했다. 오후에는 바렐을 도와 나무를 베거나 타디스를 위해 마을의 흙길 옆 덤불숲에서 자라는 풀을 뽑았다. 타디스는 그늘에 앉아 밀짚과 마른풀로 자그마한 인형을 만든 다음 하나로 죽 연결했다. 그가 손가락을 움직이면 인형들이 신나게 춤을 추었다. 타디스는 그 인형을 마을 사람들에게 팔았다. 

- "모르겠구나. 어쨌든 아직은 떠날 때가 아니다."
 
- "사람들이 산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들어 본 적 있어?"
바렐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말했다.
"산속 깊이 들어가면 지구의 중심으로 연결되는 동굴이 있대. 그런데 그 동굴에 들어간 사람들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대."

"우리는 지구의 중심으로 가진 않을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바즈는 내심 불안했다.

- 그날 밤 바즈는 타디스에게 바렐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했다.

"바렐 말로는 산이 지구의 중심으로 이어진대요. 그리고 일단 산속 깊이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대요."

"그렇지 않단다."
타디스가 조용히 말했다. 그는 일과를 마치면 그날 하루를 무사히 보낸 데 대해 그리고 행운과 함께 돈을 벌게 해 준 데 대해 대지에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런 말은 두려움에서 나오는 거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존재, 우리보다 더 커다란 존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말이다. 진정한 마술사가 되려면 그런 두려움을 이겨 내야 한단다."

"어떻게요?"
바즈가 물었다.
"두려움을 가만히 지켜보는 거야. 그럼 두려움이 없어지는 걸 알 수 있어. 모든 것이 그렇단다. 같은 자리에 계속 머무는 건 없단다. 두려움도 마찬가지지." 

- "어쨌든 저는 지구의 중심으로 가고 싶지 않아요."
"네가 갈 필요는 없단다. 그런데 지구의 중심은 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를 거다."
그러고 보니 바즈는 지구의 중심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저는 알려지지 않은 것보다 이미 알려져 있는 것이 좋아요."

바즈가 말했다.
"알려져 있는 것 역시 환상이란다. 잘 살펴보면 알려져 있는 것도 다른 모든 것처럼 늘 변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거다."

다음 날 타디스는 남은 인형들을 줄로 연결하여 그때까지 묵었던 집의 대문에 걸었다. 인형들이 산들바람에 춤을 추었다.

"내일 떠나자."

- 타디스 말대로 둘은 다음 날 아침 동이 틀 무렵 잠자리에서 일어나 얼마 안 되는 짐을 챙겼다. 짐은 매번 바뀌었다. 두 사람은 가지고 다니던 물건은 남겨 두고 새 물건을 챙기곤 했다. 바즈는 무언가를 남기고 새로운 것을 챙길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 바렐이 두 사람을 배웅하면서 두꺼운 양초 두 개를 건넸다.

"이것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어디로 갈지는 알아. 너와 함께 산으로 가겠지."
바즈는 머뭇거리다가 양초를 받았다.
"고마워."

- 바즈는 나중에 타디스에게 말했다.
"바렐한테 선물을 받은 게 자꾸만 마음에 걸려요."
"어째서지?"
"바렐은 저보다 가진 게 없잖아요."
바즈가 생각하기에 바렐은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마음은 부자였다.

 

- "주는 법뿐만 아니라 받는 법도 배워야 한단다."

타디스가 말했다.
"그리고 바렐도 무언가를 가지고 있단다. 너는 바렐이 무얼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모양이구나."
"바렐은 아침 다섯 시부터 일이나 해야 하는 일이 있어요. 매일, 그것도 온종일 쉬지 않고 해야 하지요."
"그 애는 네게 양초를 주고 싶었고, 너는 받지 않을 수 없었어. 마음은 그렇게 움직이는 거란다.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이기도 하고."
바즈는 직접 만든 조랑말 조각상을 바렐에게 주고 싶었다. 그래서 바렐이 발견할 수 있도록 조각상을 장작더미 옆에 놓아두었다. 바즈는 자신이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았다고 느끼던 차에 그 재능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어서 기뻤다. 

- 두 사람은 몇 번이나 갈림길을 만났다. 하지만 타디스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았다.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바즈는 마음속으로 길을 고른 뒤 자신과 타디스의 선택이 일치하는지 시험해 보곤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의 일치했다. 바즈는 푸석푸석한 모래땅이 단단한 대지로 바뀔 때까지 그 놀이를 계속했다.

- "똑같은 조건이라 해도 나무마다 다르게 반응했기 때문에 모양이 다른 거란다."
타디스가 말했다.
바즈는 타디스의 말이 반가웠다. 플라타너스 나무가 모두 똑같은 모양이라면 세상이 얼마나 지루할까 생각하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 이윽고 두 사람은 숲을 지나 공터로 들어섰다. 플라타너스 숲에서 조금 멀어졌지만 산비탈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곳이었다. 말하자면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공간이었다.
"이곳이 마음에 들어요."
바즈가 말했다.
"나도 마음에 든다. 이도 저도 아닌, 그래서 가능성이 열려 있는 곳이지. 숲은 숲이고 산은 산이지만, 이런 어정쩡한 장소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단다."

 

- "산이 숲이 될 수도 있어요?"

바즈가 물었다.
"그렇단다. 숲도 산이 될 수 있고,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 세상 모든 것이 변한단다."

- 땅거미가 지면서 날씨가 쌀쌀해졌다. 바즈는 타디스를 도와 모닥불을 피웠다. 불은 길고 가느다란 실처럼 위로 솟아올랐다 움츠러들기를 반복했다. 바즈는 신기한 듯 불을 바라보았다. 바즈는 타디스와 함께 견과와 말린 과일을 먹으며 새 양철 컵에 차를 따라 마셨다. 타디스는 식사를 끝낸 뒤 모닥불 앞에 앉아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마치 그의 시선에 따라 불꽃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제가 보기엔 스승님이 불꽃을 움직이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하시는 거예요?"
바즈가 궁금한 나머지 타디스에게 물었다.
"불꽃을 움직이는 건 내가 아니야. 나와 불꽃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불꽃이 움직이는 거지."
바즈는 '또 시작이군.' 하고 생각했다.


- "이것이 바로 하나 됨의 법칙이란다. 이 법칙은 언제나 지구에 영향을 미치지. 지구만큼이나 오래된 이 법칙 때문에 너는 친구와 강아지를 생각할 때 마음이 아픈 거란다."
"다가르와 블링크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어떻게 아셨어요?"

바즈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네 잠꼬대를 들었단다."
바즈는 타디스의 말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 "다가르와 블링크를 생각할 때마다 슬퍼요. 하지만 우리를 때린 직조 공장 감독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그 사람도 하나 됨의 일부인가요?"
"그렇단다. 하지만 그 사람은 환상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걸 모르는 거지. 힘에 대한 환상, 타인과 자신은 하나가 아니라 분리되어 있다는 환상에 빠져 있기 때문이야."
"그 환상은 그 사람의 꿈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꿈과 환상은 어떤 차이가 있죠?"
"환상은 외부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꿈은 내면에서 나오는 거란다. 그 차이를 알려면 항상 귀를 열고 있어야 해."
 
- "그런 규칙을 만든 것 또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란다. 진정한 침묵은 외부가 아니라 내면에서 나오거든. 진정한 침묵의 단계에 이르면 진실을 만날 수 있단다. 그러면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 꿈을 좇을 수 있게 되지."
"무언가를 죽이는 것도 환상에 사로잡혔기 때문인가요?"

타디스가 불에서 시선을 뗐다. 그러자 불꽃이 약해지면서 부드럽게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죽이는 것은 곧 자신의 일부를 죽이는 거란다. 본인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할 뿐이지. 하지만 언젠가는 그리고 어떻게든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단다. 이 또한 삶의 법칙 가운데 하나지."

- "저들이나 나나 욕망을 채웠구나."
타디스가 말했다.
"하지만 원래 스승님 칼인데 돈을 주셨잖아요."
바즈가 말했다.
"거래는 공정해야지."
"저들은 강도인걸요."
"하지만 나는 강도가 아니지."
타디스는 그렇게 말한 뒤 바즈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칼을 허리춤에 찼다.

- "칼이 춤을 추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바즈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이 칼은 내 몸이 행동하는 대로 움직인단다. 그래서 절대 나를 해칠 수 없지. 사실 나는 이 칼을 되찾을 생각이 없었어."

"하지만 그 칼에도 운명이 있겠죠. 그 칼의 운명은 스승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요."
"당분간은 함께하겠지."


- "약간 베였구나. 이 칼이 나도 언젠가는 죽을 운명이라는 걸 깨우쳐 주는 모양이다."
타디스가 웃으며 수레의 덮개를 열고 병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 담긴 액체에서 지독한 냄새가 풍겼다.
"네가 좀 도와줘야 할 것 같구나."
"그럼요, 도와 드리고 말고요."
바즈는 상처를 깨끗이 소독한 뒤 천으로 단단히 감았다. 그는 타디스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처럼 느껴졌다. 바즈는 이제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야. 적어도 하나 됨에 가까운 상태지.'
바즈는 그렇게 생각했다.

- 타디스는 호리병에 물을 채워 바즈에게 건넸다. 바즈는 물을 허겁지겁 마셨지만 그래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타디스가 수레에서 병을 꺼내 오더니 그 안의 액체 몇 방울을 바즈의 혀에 떨어뜨렸다. 혀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감기에 걸렸구나. 균이 네 몸에 들어가 열로 바뀐 거야."

타디스는 바즈에게 담요를 덮어 주었다.
"여행을 계속해야 하지 않아요?"
바즈가 물었다.
"지금은 아니야. 게다가 서두를 필요 없단다."
"이것도 운명인가요?"
"운명이라면 운명이겠지."
바즈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는 비몽사몽간에 퍼즐 조각 같은 자신의 인생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을 보았다.

- 부모님과 형들, 다가르, 직조 공장 감독 그리고 이름 없는 남자가 꿈속에 나타났다. 평생에 겨우 한 번 만났을 뿐인 그래서 간신히 기억나는 사람들도 나왔다. 그 모든 사람들이 바즈에게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상기시켜 주었다. 

 

- 바즈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다정한 미소를 띤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기다란 겉옷에 진홍색 허리띠를 맨 젊은 남자였다. 그의 풍성한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리면서 멋지게 그을린 구릿빛 피부에 갈색 그늘을 드리웠다. 남자는 바즈의 입술 사이에 쓰디쓴 액체를 떨어뜨렸다. 
"제 꿈에 나타났던 사람이군요."
바즈가 말했다. 예전에 분명 그를 본 적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누구세요?"
"너를 도와주러 왔어."
남자가 상냥하게 말했다.
"저를 어떻게 찾았나요?"
바즈가 물었다.
남자는 미소를 짓더니 차가운 천을 바즈의 팔뚝에 갖다 댔다.

"나는 너를 찾지 않았어. 네가 나를 찾았지."

 

- "제가 지금 죽어 가고 있나요?"
"언젠가는 그러겠지. 지금은 아니야."
타디스가 웃으며 말했다.

- "꿈속에서 형을 봤어요. 형이 검은색의 쓴 약을 저한테 먹였어요."
바즈가 타디스에게 말했다.
"네 형이 맞을 거다. 그런데 꿈이 아니었단다."
타디스가 말했다.
"꿈이 아니었다고요?"
"그렇단다."

 

- "하지만 그 사람이 정말 형이었다면 저를 알아봤을 거예요. 형이 몇 년 전에 집을 떠나긴 했지만 제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으니까요."
"너는 똑같지 않아. 지금의 너는 내가 칼과 맞바꾸었을 때와도 달라. 네 형도 집을 떠날 때의 소년이 아닐 거다. 바즈, 내 말 잘 듣거라. 직조 공장 감독은 욕망 때문에 칼을 가져갔다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란다. 나 또한 욕망 때문에 그에게 칼을 넘겼던 거야."
"스승님은 왜 저를 데려가고 싶었는데요?"
바즈가 물었다.
"네게서 꿈을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꿈을 가진 이가 너뿐은 아니지. 그런데 넌 따뜻한 인간이 지니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단다.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는 능력 말이야. 나는 너의 그런 능력과 가능성을 보았던 거지."


- "저한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어떻게 확신하셨어요?"
타디스가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목소리가 말해 주었단다."
바즈는 그것이 내면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바로 '지혜'를 일컫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 바즈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줄곧 간직해 온 직조 공장 감독의 열쇠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열쇠가 없었다. 바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잃어버린 걸까? 누가 가져갔나? 그렇다면 강도 가운데 한 명일 텐데... 혹시 내게 약을 먹인 그 남자는 아닐까?'
바즈는 한참 동안 생각했다. 하지만 열쇠의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물건을 잃어버렸어요. 원래 제 것은 아니었지만요."

바즈가 고백하듯 말했다.

- 하지만 타디스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주인한테 진작 돌려줬어야 했는데..."
바즈가 침통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애초부터 주인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좋겠어요."

바즈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타디스도 따라 웃었다. 바즈는 열쇠에 대해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열쇠에게도 운명이 있는 거야. 사라졌다면 더는 내 것이 아닌 거지.'
그렇게 생각하자 바즈의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 바즈는 호리병의 물을 허겁지겁 마셨다. 그러면서 갈증이 자신을 얼마나 지치게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강렬한 욕망 또한 사람을 얼마나 지치게 하는가도 생각해 보았다. 
"갈증은 어떻게 다스려야 하죠?"
바즈가 타디스에게 물었다.
"자연의 원소들을 다스리면 된단다."
타디스는 원소들의 이름을 댔다.
"물, 나무, 불, 흙, 금속... 이것이 바로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란다. 물에서 나무가 생기고, 나무는 불을 일으키지. 불은 무엇인가를 태워서 흙을 만들고, 흙은 금속을 만들어 낸단다. 그리고 금속은 다시 물이 되고, 원소는 이렇게 끊임없이 순환하지. 마술사라면 이 같은 원소들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단다."  

 

- 하지만 바즈의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두 사람은 천천히 걸었다. 바즈는 타디스에게 어디로 가고 있는지 더는 묻지 않았다. 여행이 어서 끝나길 바라던 마음이 없어진 것이다. 마음이 바뀌자 바즈는 목적지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대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 자체를 즐기기 시작했다. 

- "사람들은 모두 같은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단다."

타디스가 말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여행 자체를 즐기는 거란다. 그것을 깨닫게 되면 비로소 진정한 마술을 배울 수 있을 거다." 

- "이제 너는 너만의 단어를 선택해야 한단다."
"단어라고요?"
"마술사가 되려면 너에게 힘을 줄 단어가 필요하단다. 너만의 단어, 네 것이 될 단어, 너 자신이 이루고 싶은 일을 깨닫게 해 줄 단어가 있어야 해." 
"스승님에게도 그런 단어가 있나요?"
바즈가 물었다.
"마술사는 모두 자기만의 단어를 가지고 있지."

- 바즈는 타디스의 단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굳이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바즈는 살아가면서 왜 이렇게 자주 상반된 욕구를 품게 되는지 생각했다.
"그 단어는 비밀로 해야 되나요?"
바즈가 타디스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 하지만 그 단어는 네 것이어야 하고, 오직 너만 그 힘을 이용할 수 있어."
바즈는 자신의 단어로 무엇이 좋을까 한참 동안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어떤 단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 "모든 것이 그렇듯 애써 찾으려고 하지 않을 때 자연스레 떠오를 거야."
바즈는 타디스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되돌아보면 타디스는 늘 옳은 말을 했던 것 같다. 덕분에 인생을 바라보는 바즈의 태도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그런데 바즈는 그간 타디스에게 배운 것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바즈는 마술 자체도 중요하지만, 마술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 두 사람은 식사를 하기 위해 오래된 나무 그늘 밑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고목의 몸통과 가지들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아래쪽 가지들은 땅을 향해 겸손하게 처져 있었고, 위쪽 가지들은 고고하게 하늘로 뻗어 있었다. 몇 달 전의 바즈라면 그 같은 고목에 관심도 없었을 터였다. 고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바즈는 고목의 장엄한 아름다움에 매료된 나머지 가슴이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마구 설레었다. 어느 순간 바즈의 뇌리에 하나의 단어가 저절로 떠올랐다. 

 

- "단어가 떠올랐어요! 제 단어는 나무예요."
바즈가 타디스에게 말했다. 바즈는 눈앞의 나무를 보며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과 나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바즈는 나무를 뜻하는 '우드(wood)'와 마술에 꼭 필요한 의지를 뜻하는 '우드(would)'가 발음이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는 나무를 선택했어요. 나무도 저를 선택했고요."

 

- "적어도 군인들처럼 싸우지는 않지. 전쟁은 혼자가 되는 거란다. 다른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는 철저히 혼자가 되어야 하지. 혼자가 된다는 건 끔찍한 일이야. 그런 상황에 처하는 건 인간의 운명이 아니란다."
"하지만 스승님은 혼자였잖아요. 저를 만났을 때 혼자 아니었나요?"
"나는 혼자가 아니란다. 너 또한 혼자가 아니고. 이 세상에 혼자인 사람은 없어. 우리 인간은 저마다 독특하고 다르지. 그러면서도 모두 같고 하나란다. 이것이 바로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지혜야."
바즈는 타디스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어떻게 우리 인간이 다르면서 같을 수가 있죠?"
바즈가 물었다.
"머리로 이유를 알려고 하면 안 돼. 그렇게 해서는 알 수 없지. 느껴야 해. 자, 보렴."
타디스는 한 손을 가슴에 갖다 댔다. 그러자 외투 속에 있던 칼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칼날이 햇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 "제게 검법을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바즈가 물었다.
"배우고 싶니?"
"네."
바즈가 대답했다.
타디스는 허리춤에서 칼을 풀어 허공에 대고 우아하게 휘둘렀다. 그러고는 칼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가 날렵하게 뒤로 뺐다. 바즈는 타디스에게서 건네받은 막대기로 스승의 동작을 따라서 했다. 그는 그때부터 숨 쉬는 것처럼 동작이 몸에 완전히 밸 때까지 검법을 매일 연습했다. 

- 땅거미가 밀려와 사방이 어둑해졌을 무렵, 두 사람은 한 마을에 도착했다. 둘은 막 문을 닫으려는 시장을 지나가며 음식과 여행에 필요한 물건을 샀다. 바즈는 화려한 색깔의 외투와 직물 허리띠를 파는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얇은 면 옷이 산들바람에 나부끼는 뒤로 한 남자가 방석 위에 앉아 샌들의 바닥을 깁고 있었다. 바즈는 타디스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오랜 여행 탓에 타디스의 신발은 해질 대로 해져 있었다.
"제가 한 켤레 사드릴게요." 
바즈가 말했다.
타디스가 빙긋 웃었다.
"됐다. 너를 구해 줬다고 해서 그동안 한 푼 한 푼 모아 놓은 돈을 나를 위해 쓸 필요는 없다. 나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단다. 나 역시 너를 통해 내 운명을 실현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살다 보면 이따금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실현시킬 수도 있단다."
그 말은 바즈도 이해할 수 있었다. 바즈는 직조 공장 감독과 다가르 그리고 블링크를 떠올렸다.
'어쩌면 그들을 만났기 때문에 내 운명을 실현시킬 수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자 슬픈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바즈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어쩌면 그들 또한 각자의 운명을 실현시키기 위해 바즈가 필요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 "개를 죽인 너 자신을 용서해야 한단다."
타디스가 바즈의 마음을 꿰뚫은 듯이 말했다.
"네 친구를 괴롭힌 감독도 용서해야 한다. 죽은 친구도 용서해야 하고. 물론 그 친구가 죽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네 친구는 자신도 모르는 방식으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한 거란다. 네가 그랬던 것처럼."
"제가 그랬다고요?"
바즈가 반문했다. 바즈는 타디스가 자신에 대해 어떻게 그리 잘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 "저는 어떤 운명을 선택한 거죠?"
"지금은 물이란다."
타디스가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바즈는 바렐에게서 받은 양초를 떠올렸다. 타디스는 그때 바즈에게 선물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바즈는 양초 생각을 접고 방석 위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신발 한 켤레를 사서 타디스에게 내밀었다.  
"이거 받으셔야 해요. 제가 스승님께 신발을 드리기로 선택했으니까요."
"좋다."
타디스는 흔쾌히 신발을 받아 든 뒤 수레에 집어넣었다.
"곧 새 신발이 필요할 텐데, 고맙구나." 

- 두 사람은 노란 꽃이 가득 핀 들판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멀리 사막에서 날아온 모래가 꽃잎마다 묻어 있었다.
"모래도 우리만큼이나 긴 여행을 했겠죠?"
바즈가 물었다.
"그렇겠지. 그런데 모래가 우리를 따라왔을까? 아니면 우리가 모래를 따라왔을까?"
타디스가 말했다.
바즈는 둘 다 맞을지 모른다고, 하지만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 "강은 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있단다. 그리고 저 사람들도 강에 생명을 주고 있지."

- 뱃사공이 천으로 된 의자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을 보더니 불룩 튀어나온 배에 양손을 얹은 채 환하게 웃었다.

"강을 건너려거든 강이 허락하는 곳에서 건너시오."
뱃사공이 말했다.
"저분 말이 무슨 뜻이에요?"
바즈가 타디스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나는 이 강에서 평생을 보냈단다."
뱃사공은 타디스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말했다.
"이 강을 다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안전하게 건널 수 있는 곳이 어딘지는 잘 알지."
바즈는 강둑에 서서 사납게 소용돌이치는 시커먼 강물을 바라보았다. 나루터에 매어 놓은 배가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마구 흔들렸다. 뱃사공이 강 건너로 안전하게 데려다 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 "홍수라도 나기를 기다리쇼? 나는 나 자신보다 강을 더 잘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오. 그러니 나를 믿으시오."
뱃사공이 이리저리 기우뚱거리는 배에 잽싸게 올라타더니 배의 움직임에 맞춰 몸을 움직이면서 균형을 잡았다. 그러고는 양손을 벌려 수레를 번쩍 들어 올린 뒤 배 한가운데에 내려놓았다.
"자, 이제 타시오."
뱃사공의 말이 떨어지자 타디스가 먼저 배에 올랐다. 바즈도 그 뒤를 이어 배에 올라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배의 흔들림에 따라 바즈의 몸도 흔들렸다. 바즈는 지진을 겪었던 때를 떠올렸다. 그러자 강물이 요동치는 것도 땅이 흔들리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스승님은 확실하지 않은 걸 어떻게 믿나요?"
바즈가 옆에 앉은 타디스에게 물었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단다. 확실하다고 믿는 것도 환상이지. 그냥 내일이 온다는 것을 믿듯이 이 강을 믿어라."
타디스의 말을 알아들은 듯 뱃사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디스가 말을 이었다.
"강에 맞서려고 하면 힘이 둘로 나뉜단다. 강과 너로 말이야. 강과 힘을 합쳐야 해. 그러면 평온을 얻을 수 있지."

"어떻게 합쳐야 하죠?"
바즈가 물었다.
"저항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돼. 지금 이 순간 일어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안 좋은 것은 뭘까?"
"우리는 결국 강물에 빠져 죽고 말 거예요."
바즈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 또한 우리의 운명이겠지."
"저는 그 운명은 받아들이지 않겠어요."
"그럼 빠져 죽을 일도 없을 것 같구나."


- "마술사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단다. 우리는 그저 가능한 것들만 다루지. 그래도 빠져 죽지는 않을 거다. 그 정도는 장담할 수 있을 듯하구나."

타디스가 말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장난하듯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는 사이 바즈는 마음이 차분해져서 뱃사공처럼 편안하게 웃었다. 배가 기우뚱거리는 것도 강물이 배 위로 튀어 오르는 것도 인식하지 못할 만큼, 바즈는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물결의 움직임에 즐거이 몸을 맡겼다.

- "똑똑한 친구군. 그런데 강도 너만큼이나 똑똑하고 현명하단다. 모든 자연은 지혜가 있지."
"아저씨도 마술사인가요?"
바즈가 뱃사공에게 물었다.
"우리는 모두 마술사란다."
뱃사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 힘차게 노를 저었다. 바즈는 뱃전에 몸을 기댄 채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배와 강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노의 움직임에 따라 강물이 뒤로 밀려나면서 춤을 추듯 출렁거렸다.

- "나는 매일 강에게 고마워한단다."
맞은편 강가에 도착했을 때 뱃사공이 말했다.
"나는 강에게서 모든 걸 배웠거든."
"저는 아직 강에 대해 잘 모르겠어요."
바즈가 일어나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내리거라."
타디스가 말했다.

- 바즈는 강둑으로 올라선 뒤에야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 강물을 들여다보았다. 일렁이는 물결 아래로 강바닥이 훤히 보였다. 바로 그때 반짝이는 금속 물체가 그의 눈에 띄었다.
"제 열쇠예요!"
바즈가 소리쳤다.
"열쇠가 왜 저기 있죠?"
"네가 강에게 주었나 보지."
타디스가 말했다.
"저는 아무한테도 열쇠를 주지 않았어요. 그냥 잃어버렸다고요. 아니면 도둑을 맞았든지... 그나저나 열쇠를 어떻게 꺼내죠?"
"지금 당장 찾고 싶다면 강바닥으로 헤엄쳐 들어가야겠구나. 아니면 강이 돌려주고 싶어 할 때까지 기다려야겠지."

"강이 돌려주지 않는다면 열쇠가 더는 저와 함께할 운명이 아니다, 그 말씀이죠?”
바즈가 조금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어쩌면 저 열쇠는 이미 네 운명에서 제 역할을 다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는 그 역할이 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뱃사공은 배를 강둑에 바짝 붙였다. 그러고는 기다란 그물을 펼쳐 강물에 던졌다가 천천히 걷어 올렸다. 그물이 다 올라왔을 때 열쇠가 보였다. 뱃사공이 그물을 헤쳐서 진흙과 함께 섞여 있는 열쇠를 꺼냈다. 
"자, 열쇠 받아라. 아직은 네가 열쇠와 헤어질 때가 아닌 모양이구나."
뱃사공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 "네 열쇠가 맞구나."
타디스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게 제 열쇠인지 어떻게 아세요? 스승님은 이 열쇠를 본 적이 없으시잖아요? 이건 원래 직조 공장 감독 거였어요."
"그전에는 이 검의 것이었다."
타디스가 외투의 끝자락을 걷어 올리며 말했다. 옷자락 밑으로 칼이 살짝 보였다. 타디스가 칼자루에 있는 자그마한 뚜껑을 열어젖히자 작은 구멍이 나타났다. 

- "이제야 열쇠가 제자리로 돌아왔네요. 열쇠를 주인에게 돌려줘야겠어요."
바즈가 열쇠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는 타디스뿐 아니라 칼에게도 말하고 있었다.
"자, 받으세요."
타디스는 열쇠를 받아 칼자루의 구멍에 넣었다.
"당분간 너는 집에 가만히 있어야겠구나."
타디스가 열쇠에게 말했다. 바즈는 타디스가 나중에 자신에게도 똑같이 말할지 궁금했다.
 
-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쯤 가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굵은 빗방울이 두 사람의 살갗을 타고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물에 대해 알아볼 기회가 또 왔구나."
타디스가 말했다.
"열쇠를 되찾게 해 준 강에게 고맙다는 말을 못 했네요. 깜박했어요."
바즈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 해도 늦지 않단다. 강물이나 빗물이나 물이기는 매한가지니까."
바즈는 손바닥을 동그랗게 오므려 빗방울을 받으면서 물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 "물은 참 경이로워요. 증기가 되기도 하고, 얼음이 되었다가도 다시 물이 되니까요."
"그래, 다른 모든 것이 그러하듯 물도 경이롭지. 물은 변신하는 능력이 있는데, 그건 우리 모두 마찬가지란다."

"그래도 물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요. 제 말이 맞죠?"

바즈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렇단다. 물은 뒷전으로 물러나 자연의 다른 요소들이 활동하도록 무대를 만들어 주기도 하지."

- 산이 바로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산이 더는 환상이 아니며, 장난을 치는 것도 아니라는 증거였다. 거대한 산자락이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을 지나 저 아래 언덕까지 뻗어 있었다. 해가 천천히 하늘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산봉우리들이 해와 숨바꼭질을 하면서 지표면에 일렁거리는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웠다. 산 그림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넓어지면서 바즈와 타디스를 감쌌다. 

- 바즈는 바렐이 산에 대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엄마가 했던 말도 기억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산 정상에 오르려고 애쓰다가 죽었대요. 정상에 오르려면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던데요."
바즈가 엄마의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래야겠지."
타디스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 두 사람은 저녁 무렵 산기슭에 도착했다. 산비탈에 있는 마을의 집들과 풀을 뜯는 양들이 노을빛에 물들어 있었다.

 

- "저분이 떠나면 늘 무슨 일이 일어난단다. 우리 마을은 원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이었거든."
바즈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는 여인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느 곳이든 항상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다만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었다. 

- "지금 저분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죠?"
바즈가 시인을 더 자세히 보려고 목을 빼고 물었다. 턱수염을 기른 시인은 젊어 보였다. 시인은 땡그랑거리는 작은 종들이 달린 무지개 색 끈을 허리에 매고, 검은 외투를 입고 있었다. 바즈는 시인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시인이 이야기를 끝내고 떠나려 하자 사람들이 그의 뒤에 섰다. 사람들은 시인의 뒤를 따르면서 그의 허리에 달린 종소리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저분은 어디로 가는 거예요? 어디에 사시죠?"
바즈가 옆에 선 남자에게 물었다.
"저분은 방랑자란다."
남자가 말했다.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아다니지. 그리고 여행 중에 시를 써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읽어 준단다. 저분은 늘 우리를 감동시키지."

- "산꼭대기에 오르지 못하고 깊은 골짜기로 떨어진 사람들도 있대요. 괴물과 악마한테 잡아먹힌 사람들도 있고요."

바즈가 말했다.
"괴물과 악마는 사람들이 상상으로 만들어 낸 것이란다."

타디스가 말했다.
"네가 그것들을 만들어 냈다면 네가 직접 없애야 해. 당연한 일이지 않느냐? 우리 인간은 뭔가를 물리치기 위해 괴물을 만든단다. 그래 놓고는 그 괴물을 두려워하지. 이렇게 인간은 모두 마술을 부린단다. 하지만 그건 진정한 마술이 아니지. 아무튼 괴물이나 악마 같은 막연한 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려야 한다." 

 

- "하지만 제가 정말로 죽으면 어떡해요?"

바즈가 물었다.
"지금 너는 단지 두려움에 빠져 있을 뿐이다. 앞에 뭐가 보이느냐?"
바즈는 앞을 자세히 살펴보려고 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시커먼 바위를 바라보는 것처럼 온통 암흑뿐이었다.
"사람은 스스로 몸을 파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영혼을 파괴할 수는 없단다. 영혼은 영원한 것이니까. 지구는 일정하게 돌고, 사람들은 태어났다가 죽고, 폭풍우는 불어왔다가 물러가곤 하지만 영혼은 그렇지 않아. 만물의 영혼은 빛 속에서 영원히 존재한단다."
바즈는 타디스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 "스승님은 산꼭대기에 다녀오셨군요." 
"그래. 그곳에서 내 영혼을 만났단다. 기분과 판단과 인식에 영향을 받지 않는 나의 일부분을 만난 거지. 여기에 있는 나의 일부분 말이다."
바즈는 타디스보다 먼저 손을 뻗어 타디스의 가슴에 댔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은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댔다.

- "나는 두려움, 죽음, 배고픔, 추위 그리고 사람이면 누구나 겪을 법한 것들의 실체를 보았단다. 나는 내게 없는 것, 그러니까 음식과 따뜻한 온기,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을 나타나게 하려고 온갖 마술을 부렸지. 하지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단다. 시련의 고통에 지칠 대로 지친 거지. 그러자 몸이 조금씩 따뜻해지더구나. 나는 내 운명이 산 정상에 있다는 걸 믿고 계속해서 올라갔지. 신발이 다 해져서 발바닥이 땅에 닿을 때까지, 더는 발과 흙바닥을 구별할 수 없을 때까지 걸었단다. 아마 그땐 형제와 적을 동시에 만났다 해도 누가 형제고 누가 적인지 구별할 수 없었을 거다. 예전에 강가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강둑을 따라 흐르는 물과 내 눈물을 구별할 수 없었지."  

- 바즈는 타디스의 말에 귀 기울이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구름이 떠 있는 듯했는데 서서히 걷히면서 새하얀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러더니 갖가지 영상이 차례로 떠올랐다. 이윽고 바즈가 눈을 뜨자 영상들이 점점 흐릿해지면서 하나씩 사라지고 깊은 정적만 감돌았다. 바즈는 끝없는 고요 속에 잠겨 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제 마음에 이런 고요가 찾아온 건 처음이에요."
바즈가 말했다.
"고요는 찾아오는 게 아니란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 네가 그걸 알아차렸을 뿐이다."

 

- "아직 못 만났단다. 하지만 희망을 버리진 않았지. 나는 여기서 살기로 결심하고, 저기 보이는 자그마한 밭과 가축을 샀단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바람이었던 듯하다. 지구의 중심에 다녀왔다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욕망이 아니고." 
남자는 일어나 찻물이 끓고 있는 불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두 사람에게 차와 달콤한 비스킷, 아몬드 밀크를 내놓았다.

- "가 보고 싶으세요?"
바즈가 타디스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그것이 내 운명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겠지."

마술사가 말했다.

- 두 사람은 깎아지른 절벽처럼 경사가 거의 수직에 가까운 산비탈을 며칠 동안 올라갔다. 옷을 겹겹이 껴입고 그 위에 담요를 둘둘 말아 둘렀는데도 몹시 추웠다. 두 사람은 해가 떠 있을 때만 조금씩 올라갔다. 그러다 도저히 추위를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걸음을 멈추고 좁은 공간에 모닥불을 피웠다. 그러고는 몸을 바짝 붙이고 앉아 서로의 온기를 나누었다. 
"이제 와서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뭔가 마법에 홀린 기분이에요."
바즈가 말했다.
"지치고 피곤해서 그래. 그러나 이것도 우리 여행의 일부라는 걸 잊지 마라."
타디스가 말했다.
"추위 때문에 산꼭대기에 올라가지 못하면 어떻게 해요?"
"우리를 산꼭대기에 오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은 추위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란다."

- 바즈는 자신이 그동안 겪은 일로 인해 용서가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 일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거나 용서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믿음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을 용서하려고 하자 눈물이 났고, 온몸을 관통해 손가락 끝까지 흐르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럭저럭 추위도 견딜 만해졌다. 용서하는 마음이 온몸에 온기를 불어넣은 것이다. 바즈는 깊고 어둡고 차가운 산비탈도 용서할 수 있었다. 그는 산비탈을 친구로 맞아들였다. 

- 두 사람은 마음이 내킬 때만 걸었다. 때로는 며칠 동안 걸음을 멈추고 자연 속에 파묻혀 자그마한 변화를 감상했다.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두 사람은 배고픔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느낌이 들 때까지 음식을 아꼈다. 바즈는 갈수록 약해졌다. 뱃속에서 먹을 것을 달라고 계속 아우성쳤다. 그러나 배고픔도 이내 지쳤는지 조금씩 몸이 가벼워지면서 힘이 생겨났다. 

- "이 여행이 언제쯤 끝나는지 알고 싶어요."
바즈가 말했다.
"무엇을 알고 싶은 것이냐? 지혜와 지식은 끝이 없다는 걸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앎이란다." 


- "모든 것이 그렇듯 지혜와 지식도 무한한 거란다. 그러니 다 알려고 하지 말거라. 이 세상 모든 것은 끝이 없단다. 너는 절대 모든 걸 알 수 없다. 나 또한 그렇고,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지혜란다."

- 두 사람이 서 있는 곳 바로 밑에 구름이 깔려 있었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그들에게 알을 제공한 새와 화살처럼 자란 밀, 작은 연못에 사는 뾰족한 물고기를 보았다. 거기에는 나무에 매달린 열매도 있었고, 차를 만들 수 있는 뿌리도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불쑥 나타났지만 모두 진짜였다.

- 더 높이 올라갈수록 공기가 맑고 깨끗했다. 바즈는 사방을 둘러보며 자신을 둘러싼 자연의 장엄한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그리고 자신도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다시금 인정했다. 바즈는 그동안 자신이 발을 딛고 선 땅과 변화무쌍한 산에 어떻게 화를 낼 수 있었는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진심으로 그것들과 화해했다.

- "희망에 대해서요. 제가 희망을 가져도 될까요?"

"당연히 희망을 가져야지. 희망은 가능성을 높여 주고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지. 그리고 희망은 산도 움직일 수 있단다."

"제게는 언젠가 목적지에 도달할 거라는 희망이 있어요."

바즈는 오랫동안 산꼭대기를 목적지로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깨달았다. 산꼭대기에 이르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산꼭대기는 그저 목적지를 상징하는 것뿐이었다.

- "너는 이번 여행을 통해 집으로 돌아갈 거다."
타디스가 말했다.
"말하자면 너 자신에게 돌아가는 거야. 거기가 네 집이니까."

 

- 이제 바즈는 평생 똑같은 일을 하며 살아온 사막의 안내인과 뱃사공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은 머나먼 거리를 여행하며 돌아다녔지만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왔다. 바즈는 예전에 시인이 산꼭대기에서 재능을 받았다고 했던 남자의 말도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시인은 산꼭대기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만난 것이다. 가장 맑고 순수하게 빛나는 자신의 가슴을. 

- 바즈는 가만히 발을 내려다보았다. 신발의 밑창이 다 해져서 양피지처럼 얇았다. 발밑으로 맨땅이 느껴졌다. 바즈는 산꼭대기에 도착할 즈음이면 신발이 다 닳아서 맨발로 걸을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 '무엇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을까?'
바즈는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봤지만 알 길이 없었다.
'희망? 사랑? 운명? 아니면 용서일까?'

어쩌면 그 모든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즈는 타디스가 허공에 날려 보낸 잎사귀, 바람에 실려 온 모래알, 나선형을 그리며 불쑥 솟아오른 산, 유유히 흐르는 강물 그리고 위대하고 놀라운 우주의 에너지에 대해 생각했다. 

- 산꼭대기는 어둡지 않았다. 밝고 또렷한 빛뿐이었다. 바즈는 그 빛 속에서 자신의 진짜 운명을 보았다. 그동안 타디스가 줄곧 보여 주었던 그대로의 운명이었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도덕이나 의무가 아니었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 산꼭대기에도 밤이 찾아왔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또한 산 아래만큼 어둠이 두껍지도 않았다. 바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들은 한 곳에 모여 있지 않고 조금씩 흩어져서 저마다 제 갈길을 가고 있었다.

- "이제 헤어지겠군요."
바즈가 타디스에게 말했다.
"그래, 나는 내 갈 길을 가고, 너 또한 그러겠지."
타디스가 말했다.
"하지만 너는 언제나 내 마음속에서 함께 있을 거다. 서로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한 우리는 절대로 헤어지지 않는단다."
바즈는 타디스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바즈와 타디스는 이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였다. 물리적인 거리는 그들을 떼어 놓을 수 없었다.

- "나는 나와 꼭 닮은 사람으로부터 능력을 받았단다."

타디스가 말했다.
"바로 창조하는 능력인데, 받은 만큼 누군가에게 가르치거나 줄 의무가 있지. 바즈, 네게 창조의 능력을 주겠다. 내가 받은 능력 그대로. 대신 이 점을 꼭 명심하거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능력은 우리의 영혼에 깃들어 있다는 걸 말이다. 그것은 환상을 걷어 내고 우리의 순수한 모습을 보게 하는 능력, 사랑하고 용서하는 능력이란다." 

 

- 타디스는 외투 속으로 손을 넣어 칼을 꺼냈다. 그러고는 칼을 바즈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이 칼이 더는 필요 없을 때가 올 거다. 사람은 칼에 의지해 살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닫는 날도 올 거고."
"열쇠는요?"
바즈가 칼자루에 붙은 자그마한 뚜껑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지금은 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타디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동안 놀랍게도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바즈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바즈는 새의 깃털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나무에서 열매가 한 움큼 떨어져 바닥을 구르더니 그들 옆에 멈추었다. 그리고 땅에서 물이 솟아올라 금세 맑은 시내를 이루었다. 바즈는 자신이 주변의 모든 것과 하나가 되었음을 느꼈다. 

- "고맙습니다."
바즈는 타디스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저도 스승님께 뭔가를 드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미 주었잖느냐. 너는 내 운명을 실현하도록 나를 도와주었단다. 나야말로 네가 고맙구나."
바즈는 부모님과 형들을 비롯해 주변의 모든 것들에 축복이 있기를 빌었다. 그리고 타디스에게도 거듭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어둠과 빛에게도 고마움을 전했다. 그러고 나서 난생처음 평온하게 잠이 들었다. 

- 잠들기 전, 바즈는 새 신발이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런데 아침에 잠에서 깨어 보니 바즈가 타디스에게 주었던 신발 옆에 새 신발이 놓여 있었다. 
바즈는 신발을 신어 보았다. 그러고는 타디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즈는 그때 처음으로 타디스의 얼굴에 주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타디스는 여전히 생생하고 아름다웠지만 그의 내면은 이미 다음 생을 준비하고 있었다. 

 

- "헤어질 시간이 다 됐구나."
타디스가 말했다.
바즈는 양팔을 벌려 마술사를 껴안았다.
"안녕히 가세요."
바즈가 말했다.

- "먼 옛날 대지 위를 묵묵히 걸어야 하는 사명을 띤 사람이 있었지. 그리고 지금도 있단다."
타디스가 말했다.
"나는 너를 얻어서 전사로 키웠다. 이제 내 사명은 끝났다. 너는 전사지만, 네 생각과는 다른 전사일 거다. 너는 이제 빛의 전사다. 바즈, 드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서 너의 진짜 운명을 실현하거라." 

- 바즈는 몇 달 동안 걷고 또 걸었다. 어쩌면 몇 년 동안 걸었을지도 몰랐다. 바즈는 수레를 끌면서 강과 사막과 초원을 건넜고, 곳곳에서 마술을 공연했다. 바즈는 마술을 공연하는 동안 사람들의 얼굴에 나타나는 놀라움을 지켜보았다. 또한 사람들의 얼굴에서 기쁨과 사랑, 고통과 증오도 목격했다. 그러나 바즈는 용서를 실천하면서 모든 것에 감사했다. 

- 바즈는 대지와 하늘에 감사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교훈뿐 아니라, 삶이 얼마나 기쁜 선물인지 일깨워 준 타디스에게도 다시금 감사했다.

- 바즈는 두 명의 안내인, 한 무리의 대상(사막이나 초원 등지에서 낙타에 짐을 싣고 먼 곳으로 다니며 특산물을 교역하는 상인 집단)과 함께 사막을 건넜다. 그는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과 물건을 주고받았다. 마땅한 물건이 없으면 마음에서 우러나는 미소나 인사말을 건넸다.

 

- 바즈는 뱃사공과 다시 만났다. 뱃사공은 눈을 반짝이며 바즈를 금세 알아보았다.
"산꼭대기에 다녀왔구나. 그래, 지금은 무얼 하고 있지?"

뱃사공이 물었다.
"그동안 사람들과 무언가를 주고받는 법을 배웠는데 지금은 그걸 실행하고 있어요."
바즈가 배에 오르면서 대답했다. 바즈는 이제 더는 강이 두렵지 않았다.

- 바즈는 한 마을의 어귀에 서 있는 나무 그늘에 앉아 마음과 생각을 가라앉혔다. 이제 바즈는 타디스가 가르쳐 준 모든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바즈는 지난 사흘 동안 꿈속에서 양탄자를 짜는 젊은이를 만났다. 그 젊은이가 왜 자꾸 꿈에 나타나는지, 그 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혹시 양탄자 짜는 사람을 아세요?"
바즈가 남자에게 물었다.
"이 마을에서 양탄자를 짜는 이는 딱 한 사람뿐이지."
남자가 손가락으로 마을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접시에서 단 일 초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바즈는 음식에 그처럼 몰두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바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뒤 마을로 향했다.

- 바즈가 마을에 들어서자 갖가지 꽃들이 그를 반겼다. 장미, 재스민, 달리아 등 바즈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꽃들이었다.
바즈는 양탄자 가게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가게 안쪽 벽면에 여러 개의 양탄자가 걸려 있었다. 양탄자는 바즈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웠다. 그때 한 젊은이가 안채에서 나와 바즈를 맞이했다. 얼굴에 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데다 손은 꼭두서니 물감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바즈는 왠지 모르게 그가 낯설지 않았다.

- "나 많이 변하지 않았어?"
바즈가 물었다.
"변해도 알아볼 수는 있지."
다가르가 말했다.

- "그때 감독한테 끌려갔다가 도망쳤어. 직공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거든. 그런데 병이 깊어져 몸이 쇠약해지자 환영이 보였고, 나는 그것을 가슴에 품었어. 바로 그 환영이 내 삶을 펼쳐 보이며 나의 운명을 알려 주었지.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도 나는 머릿속으로 계속 양탄자를 짰어. 양탄자를 짜면 짤수록 무늬가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더군. 아무튼 감독에게서 도망친 뒤 진짜 스승을 만났어. 스승이 나를 찾아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스승은 직물 짜는 법에 관해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어. 그래서 지금의 내가 여기 있게 된 거지."
다가르는 양팔을 벌리고 벽에 걸린 자신의 작품 앞으로 다가섰다. 바즈는 다가르가 작품에 자신의 영혼을 불어넣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다가르가 자그마한 나무 탁자에 차와 벌꿀 케이크를 내오며 말했다.
"사실 나는 그 사람에 대해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 모두 지난 일인걸, 뭐. 이제 네 얘기를 들려줘."
바즈는 친구가 직물을 짜는 것 외에도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했다.

 

- 바즈는 타디스로부터 받은 깊은 사랑과 그에게서 배운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이 모든 게 내 운명이야. 이제 나는 내 운명을 어느 정도 실현했어."

- 바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레의 덮개를 열고는 친구에게 무엇을 주면 좋을까 생각했다. 친구인 다가르에게 무엇이든 주고 싶었다. 그러다 외투를 걷어 올려 친구에게 칼을 보여 주었다. 바로 그때 칼자루의 구멍에서 열쇠가 툭 떨어졌다.
다가르가 열쇠를 집어 들고 물었다.
"이게 뭐지?"
"예전에 공장에서 내가 지니고 있던 그 열쇠야. 기억나?"

바즈가 물었다.

- "내가 아는 건 그 열쇠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왔고,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갈 거라는 거야. 그 열쇠도 자신만의 갈 길이 있겠지만, 지금은 네 것 같아." 
"내 것이라니? 열쇠는 칼의 것이야. 그리고 칼은 네 것이고. 그러니 열쇠도 결국은 네 것이야."
"그 열쇠를 잃어버린 적이 있는데 다시 내게 돌아왔어. 그게 열쇠의 운명이라면 언젠가 다시 내게 돌아오겠지."

- 다가르는 네모난 양탄자를 둘둘 말아 바즈의 수레에 실었다.

"여행하는 동안 필요할 거야.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 이 양탄자가 너를 따뜻하게 해 주고 행운도 가져다줄 거라고 믿어."
"그래,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있어."
바즈가 말했다.

- 바즈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마당에 서 있었다. 어머니는 흐른 세월만큼이나 얼굴 가득 주름이 잡히고 세월의 무게에 눌려 허리도 굽어 있었다. 하지만 바즈의 눈에는 집을 떠날 때 자신을 배웅해 주던 어머니와 똑같아 보였다. 

 

- 그러나 그것은 마음이 부리는 또 하나의 속임수였다. 다행히 바즈는 그 속임수가 자신에게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어머니의 모습이 어떻게 변했든 영혼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사랑과 창조의 힘으로 바즈를 이 세상에 나오게 한 그 영혼은 여전히 바즈와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 어머니가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는 몰라보게 성장한 바즈를 금세 알아보지 못했다. 바즈는 이제 머리를 짧게 깎은 건장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눈은 이내 바즈가 입은 외투를 뚫고 그의 내면을 보았다.
"바즈!"
어머니가 양팔을 벌리며 외쳤다.

- 아버지는 여전히 나무를 조각하고 있었다. 앞을 거의 볼 수 없는데도 아버지는 타디스의 말대로 계속 조각 일을 했다. 셋째 아들이 돌아온 걸 알아차리는 데 눈은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발소리를 듣고 바즈를 금세 알아보았다. 아버지도 양팔을 활짝 벌렸다. 


- 바즈의 형들도 집에 돌아와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바즈가 여행하는 동안 만났던 사람들이었다. 바즈가 감기로 고생하고 있을 때 치료해 준 사람과 산비탈 마을에서 만난 시인이 바로 형들이었다.

-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구나."
감기를 치료해 준 형이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만나곤 할 거다."
시인이 동생들을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그는 아무리 멀리 떠나더라도 운명이 계속 그들을 한 곳에 모이도록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 해가 서쪽으로 서서히 기우는 저녁 무렵, 바즈는 수레를 끌고 마을 광장으로 나갔다. 사람들이 바즈의 마술 공연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바즈의 멋진 묘기에 박수를 치면서 감탄사를 쏟아 냈다. 바즈는 속임수로 사람들을 현혹시킨다고 타디스를 비웃었던 일이 떠올라 빙긋이 웃었다. 바즈는 이제 제대로 알고 있었다. 진정한 마술사란 사람들이 갖고 있는 환상을 떨쳐주고 믿음을 전파하며,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정해 놓은 한계를 없애 주는 존재라는 사실을. 

- 멀리서 피리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바즈는 피리를 꺼내 입에 대고 연주하기 시작했다. 피리 소리만큼이나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나뭇잎, 강물, 모래알 같은 자연이 사람들을 어떻게 저마다의 운명으로 이끄는지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외투 안의 칼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 바즈의 머릿속에 열쇠가 떠올랐다. 열쇠는 앞으로도 계속 사람들 사이를 돌면서 그것을 지닌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환상의 문을 열어 줄 것이다. 그리고 미래의 어느 날 마침내 열쇠가 모든 사람의 손을 거쳤을 때 세상은 하나가 되고 인류는 밝은 빛 속을 걸어갈 터였다.

 

 

 

"지혜와 지식은 끝이 없다는 걸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앎이다.
우리는 절대 모든 걸 알 수 없다.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지혜다."

 

 

 


 

 

옮긴이의 말 


사람들에게 왜 책을 읽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할까요? 여러 가지 대답이 있겠지만 지식이나 인생의 교훈을 얻기 위해, 혹은 단순히 재미를 얻기 위해 책을 읽는다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물론 무언가를 얻기 위한 목적 지향적 책 읽기도 의미 있는 일이지요. 그러나 책 읽기는 어딘가 다른 세계로 떠나는 여행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적이나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순수하게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이 여행이라면 책 읽기도 바로 그런 행위와 다름없으니까요. 

여행이 그렇듯 책도 한 구절 한 구절 천천히 읽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단숨에 무언가를 얻으려고 조급하게 책을 읽으면 오히려 잃는 것이 더 많지요. 흔히 행간을 읽는다고 하는데 책을 읽을 때는 문단과 문단, 문장과 문장, 낱말과 낱말 사이를 살피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거기에 담긴 깊은 속뜻과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있으니까요. 말하자면 <마술사의 제자》는 그런 책입니다. 후딱후딱 단숨에 읽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음미하듯 생각하면서 읽어야 하는 책이지요.

책의 내용은 아주 간단합니다. 주인공인 소년 바즈는 누군가가 나타나 어제와 오늘이 똑같은 지루한 일상에서 자신을 구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삽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남자가 말을 타고 나타나 양탄자를 만드는 직공으로 일해 보지 않겠냐며 바즈를 도시로 데리고 가 직조 공장 감독에게 팔아넘깁니다. 그리고 감독은 바즈를 마술사에게 데려가 칼 한 자루와 바꾸지요. 그 결과 바즈는 마술사 타디스의 제자가 되어 함께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합니다. 그러다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지요. 

이렇듯 간단한 내용이지만 여기에는 가슴을 울리는 감동적인 장면이 많습니다. 그리고 졸린 듯 단조로운 생각에 젖어 있는 우리의 뇌에 신선한 파장을 일으키는 경구 같은 글도 많지요. 따라서 한 구절 한 구절 곱씹듯이 읽다 보면 흔히 경험할 수 없는 독서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 요즘은 무엇에든 실용주의의 잣대를 들이대는 세상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데도 실용성을 따지는 사람이 많은 듯합니다. 그러나 가끔은 이 책 <마술사의 제자>처럼 조금은 낯설지만 순수한 사유의 세계로 안내하는 책 속으로 빠져드는 것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책 속에서 등장인물과 대화하고 함께 고민하며 문제 해결을 모색하다 보면 바즈처럼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성숙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즈가 그랬듯 이 책을 읽고 자연과 사람을 대하는 시선이 달라졌다는 독자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런 독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 책을 번역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기쁨과 보람이 한층 커지겠지요. 


2013년 10월
정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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