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바딤 젤란드 / 박인수
출판 : 정신세계사
출간 : 2010.03.22
너무 멀어져 있다 싶을 때면 어떤 방법으로든 다시 돌아오게 되는 지점이 생긴 것 같다.
기준점이라고도, 혹은 고정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둘 중 어느 것에 가까우냐는 오롯이 내 상태에 달려 있을 뿐이다.
여전히 일상에 치이기도 하고, 크고 작은 문제로 울고 웃는다. 그런 순간들이면 예전에 비해 크게 변한 건 없는 것 같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훨씬 분명해진 것들이 있다. 선택에 대한 불안이 줄어들었고, 나 자신과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에 대한 판단이 빨라졌다. 스스로를 의심했기에 '조금만 더 노력해 보자'는 마음으로 버티기만 하던 과거의 나를 떠올리면 안쓰러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찾아온다.
예전이었다면 '왜 내게 이런 일이'라거나 '너무 이상한 상황이다'라고 분개했을 일에도 그저 놀라는 정도에 그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나', '내가 계속 외면하고 있는 것이 있는가', '내가 이상하지 않다면 저 사람도 이상하지 않고,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는 마음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 중이다. 그러다 보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나의 것은 드러나고, 나의 것이 아닌 것은 흘러간다. 이런저런 변화 속에는 예전에는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자연스러움이 조금은 스며들어 있다.
사실 발췌를 정리하며 깜짝 놀랐다. 일독할 당시에도 미처 체화되지 못하고 잊혀져가는 방향성들을 다시 떠올려준다고 생각했었는데, 발췌한 문장과 예시들을 보다 보니 지난 며칠간 내가 실제로 겪고 생각한 내용들과 일치하는 것들이 많았다. 아말감 기법은 주변에도 추천하고 싶은 방법인데, 단독으로도 효과가 있지만 호오포노포노와 함께 할 때 훨씬 빠르게 익숙해지는 것 같다.
무언가를 기억하는 데에도 에너지가 소모된다. 이는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사실이다. 기억을 위한 세포와 신경물질이 소모되고 있으니까. 그러니 가능하면 불쾌하고 괴로운 것들 보다는 행복하고 감사한 것들로 자기 자신을 가득 채우는 것이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이 아닐까?
오늘은 그간의 괴로움들을 흘려보내는 날이다.
방법을 찾을 수 없어 보였던 상황은 불과 며칠 만에 예상치도 못한 해결책을 찾게 되었고, 다시 생각해 봐도 아닌 것은 '실패'가 아니라 '안목'을 확인하는 연습이었다고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어제 나를 따라 길을 건너 주었던 검은 제비나비에게 감사를 보내며.
모든 존재의 삶의 목표와 의미는 현실의 조종에 있다.
- 이제 당신의 눈앞에 <리얼리티 트랜서핑>의 네 번째 책이 놓여 있다. 그동안 <리얼리티 트랜서핑> 시리즈는 독자들에게 많은 반향을 일으켜왔다.
- 일상적인 현실에서 사람들은 상황과 환경의 지배를 받고, 사건의 진행과정에 이렇다 할 만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삶은 그저 눈앞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진다'. 그런 삶은 넋 놓고 꾸는 꿈과도 같다. 사건들은 스스로 알아서 흘러갈 뿐,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또 무엇을 원치 않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을 극복하기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뜻밖에도 그런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놀라운 출구가 존재한다. 사람은 자신이 거울의 환상 속에 갇혀 있음을 상상조차 못 하고 있는 것이다.
- 현실은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적 측면의 세계와, 지각의 한계 너머에 있으나 똑같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비물질적 측면의 세계가 그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세상은 가장자리가 없는 무한크기의 이중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한쪽 면에는 물질세계가 있고 다른 쪽 면에는 비물질적인 가능태 공간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가능태 공간은 모든 발생 가능한 사건의 시나리오를 보존하고 있는 정보체 (informational structure)다. 가능태는 좌표평면 위에 놓일 수 있는 점의 위치가 무한한 것처럼 그 수가 무한하다. 거기에는 과거에 존재했고 지금 존재하고 앞으로 존재할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으며, 꿈과 투시, 직관적 지식과 깨달음은 그곳으로부터 우리를 찾아온다.
- 거울에 홀린 사람은 거기에 비친 그림자를 진짜 현실이라고 믿는다. 이 같은 거울 효과는 외부세계가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조종 불가능한 것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그에 따라 삶은 타인이 정해놓은 규칙을 따라야 하는 게임처럼 돼버리고 만다. 물론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를 이리저리 해볼 수는 있지만, 당신에게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주사위에서 빠져나와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이 되는 방법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환상을 털어버리고 깨어나 주위를 둘러보기만 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 당신은 사건의 흐름에서 벗어나, 현실의 수많은 측면들을 반짝반짝 비추면서 천천히 돌아가는 거대한 만화경의 중심에 서 있다. 당신은 이 현실의 한 측면이며, 그와 동시에 그로부터 떨어져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그와 꼭 같이, 꿈속에서 깨어 있으면서 이제는 꿈이 당신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꿈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당신은 자신의 '독립성'을 깨닫게 된다. 이 책에서는 거울 속 그림자의 환상에서 벗어나 거울의 백일몽에서 깨어나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 사람의 사념 에너지는 특정한 조건 하에서 가능태 공간의 어떤 섹터들을 물질화시킬 수 있다. 트랜서핑에서 '영혼과 마음의 일치'라고 부르는 상태에서는 외부의도라는 신비한 힘이 탄생한다. 트랜서핑을 시도해보고 스스로 체험한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의도한 것이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실현되었으며, 현실이 정말 말 그대로 눈앞에서 확 바뀌어버렸다고.
- 말하자면, 주변 사람들이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갑자기 다정하게 대해주기 시작한다든가, 전에는 가망 없이 꽉 닫혀 있는 것처럼 보이던 문이 갑자기 활짝 열린다든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가장 흥미로운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무대장치의 뉘앙스'와, 수면의 동심원과 같은 '현실의 파문'이 바뀌는 것이다. 당신의 세계의 층은 잃어버렸던 신선함을 회복한다. 어렸을 때 먹었던 아이스크림의 맛이 되살아나고, 청춘시절의 희열에 찬 희망을 새롭게 되찾는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좋은 것은 내면에서 느껴지는 자유로움이다. 그것은 자기 신조에 따라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특권이다.
- 근저에는 이 세상만큼이나 오래된 필요성이 자리 잡고 있다. 생명체가 가장 원초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존, 자기 보존의 본능? 우리의 고정관념은 그렇게 형성되어 있지만, 그것은 올바른 대답이 아니다. 아마 번식, 종족보존의 본능이 아닐까? 그러나 그 또한 맞지 않는 대답이다. 그렇다면 대체 뭐란 말인가?
- 가장 원초적인 본능은 자신의 삶을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 통제하고 조종하고자 하는 욕구다. - 여기에 모든 존재의 행동의 근저에 놓여 있는 기본원리가 있다. 자기 보존, 번식 등을 포함한 나머지 모두는 이 원리의 결과로써 나온 것이다. 말을 바꾸면, 모든 존재의 삶의 목표와 의미는 현실의 조종에 있다.
- 그러나 주변 세계가 당신과 무관하게 존재하고, 완전히 통제불능 상태로 당신에게 적의를 품고 대든다면 현실을 조종하기란 불가능하다. 먹을것을 빼앗고 당신을 편안한 구석에서 내몰고 심지어 당신을 잡아먹으려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당신이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삶이 당신에게 제멋대로 일어나고 당신은 거기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그것은 모욕적이고 두렵기까지 하다. 바로 여기서 주변 세계를 통제해야 한다는 절박하고 종종 무의식적인 필요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 사태의 이 같은 갑작스런 반전은 많은 사람들에게 뜻밖의 놀라운 일로 보일 수도 있다. -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여태껏 자기 보존 본능이 가장 근본적인 동기라고 의심 없이 믿어왔는데, 그것이 더 근본적인 무엇의 결과일 뿐이라니!"
- 그렇지만 이것은 처음 들었을 때만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잘 살펴보면, 생명체는 무슨 일을 하든 (생존과 번식을 포함하여) 모두가 주변 현실을 스스로 통제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여기에 근본적인 동기가 있고, 온갖 생명체의 행동 근거가 되는 모든 의도의 원천이 있다.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통제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따분함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현실을 조종하고자 하는 끊임없고 꺼지지 않는 갈망만이 있을 뿐이다. 어떻게든 현실을 자신의 의지에 복종시키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놀이는 현실을 조종하는 모델로서 역할을 한다.
- 탈것을 타고 가는 것 -이 또한 일종의 조종이다. 현실은 나를 태우고 달린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인다. 다른 모든 놀이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역시 이런 규칙에 따른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놀이의 시나리오는 어느 정도 미리 정해져 있어서 상황을 미리 예측해 볼 수 있다. 물론 주도권을 쥐기 어려운 놀이들도 있다. 하지만 모든 놀이는 결국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신의 의지에 복종시키는 행위로 귀결된다.
- 눈앞의 광경을 구경하는 관찰자에게도 그것은 현실을 조종하는 모델을 제시해 주는 하나의 놀이로 보인다. 음악, 책, 영화, 텔레비전 -이 모두가 영혼과 마음을 위한 놀이기구다. 스트레스에 잔뜩 시달린 사념의 행렬이 멈추고, 멋진 음악과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가 나래를 펼치고 날아오른다. 영화 속 주인공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그것은 모두가 너무나 익숙한 현실일 뿐이다. 그래서 관찰자는 아무 걱정 없이 상상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 현실을 가지고 노는 이 놀이는 잠잘 때도 멈추지 않는다. 영혼과 마음은 꿈의 공간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꿈의 공간에서는 현실이 의도의 가벼운 숨결에도 유연하게 잘 복종한다.
-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가능한 방법으로서 공상놀이가 있다. 사람은 단지 조종놀이를 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꾸며낼 수도 있다. 기상천외한 판타지들이 그것이다. 그런 공상은 현실로 실현되기 전까지는 평범하지 않은 것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멀리 있다. 반면 평범한 현실은 가까이에 있긴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접근하기가 아주 어렵다. 거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기가 힘든 것이다.
- 일반적으로 이런 놀이들은 따분함을 해결할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날마다 하는 일상적인 일은 따분한 게 아니라 뜻대로 조종되지 않기 때문에 평범한 것이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벌어진다'는 법칙에 복종시키기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 단순하고 예측 가능한 놀이로 도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 현실은 대부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펼쳐진다. '원하는 것'마다 거기에는 "안 돼"라는 말이 붙어있다. "그걸 줘"라는 말에는 "못 받을 걸"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런 조건 아래서 도대체 무엇을 시도해 볼 수가 있단 말인가?
- 사람들은 보통 한가지 방식으로만 행동하는데, 그것은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서 주변 세상에 직접 영향을 미치려고 애쓰는 것이다. 바로 접촉해서 행하는 직접적인 행동은 조종의 한 형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며, 유일한 방법도 아니다.
-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할 것이다. 우리는 뒷짐을 지고 가만히 앉아서 세상이 우리의 소망을 위해 스스로 움직이도록 만든다. 앞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모두 그러한 방법론에 관한 것이다. 트랜서핑은 직접적인 행동을 하지 않고 현실을 조종하는 테크닉이다. 다만 놀이에서처럼 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진짜 그렇게 하는 것이다.
- 현실을 조종하는 법을 배우려면 최소한 현실이 형성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각자 가장 직접적인 방법으로 자기 세계의 층을 창조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 사람은 '모든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기를 열망하면서 그것을 위해 노력한다. 그는 자신의 단순한 원칙을 세상에 적용하려고 애쓴다. -내가 방향을 바꾸면 나는 그쪽으로 간다. 내가 압력을 가해 누르면 그 자리가 움푹 들어간다. 그러나 세상만은 왠지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한술 더 떠서, 내가 어느 한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세상은 전혀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어 달아나 버린다. 이렇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현실이 그토록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다른 방법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라는 것. 어쩌면 현실은 전혀 다른 법칙을 따르고 있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러나 사람은 멈춰 서서 주위를 한 번 둘러보려고 하지도 않고 계속 자신의 방식만 밀고 나간다. 그런 '창조 작업'의 결과로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 되는 세상'의 층이 형성된다. 내 뜻과는 반대로 대부분 '내가 원하지 않는 일'만 일어난다.
- 당신이 내린 선택의 결과를 내다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의 영혼뿐이다. 만약 당신의 마음이 '이대로 가다가는 큰일 나겠다'고 생각하고, 당신의 영혼 또한 그런 파국을 내다보고 있다면, 그것은 어김없이 현실 속에 등장할 것이다. 영혼과 마음이 함께 동조한 것은 꼭 실현되고야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부산스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의 영혼이 어떤 선택에 긍정적 신호(느낌)를 주는지를 늘 살펴야 한다. 당신의영혼은 당신이 무엇을 해야, 무엇을 가져야 행복할지를 그냥 안다. 지금까지의 방식을 뒤집어서 영혼의 순수한 의도에다 자신의 마음을 복종시킨다면, 당신은 원하는 일이 저절로 벌어지는 행운의 흐름 위에 올라타게 될 것이다.
- 만약 당신이 무언가를 밤낮으로 갈구한다면, 당신의 마음은 강렬한 '에너지의 불균형'을 초래하게 된다. 하지만 우주의 에너지 법칙은 당신이 어떤 결과를 얻든 상관하지 않는다. 우주의 입장에서는, 당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든 포기시키든, 그저 안정된 균형 상태로 되돌아가면 그뿐이다. 이것이 바로, 부추겨진 욕망들이 종종 우리를 정반대의 현실로 데리고 가는 이유이다. 외부의 그 어떤 대상이나 사건에도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하지 말라. 내면의 그 어떤 기준이나 판단, 목표에도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하지 말라. 무언가를 끌어오려는 힘겨운 노력으로 에너지의 기압차(잉여 포텐셜)를 발생시킨다면, 곧 평형 상태를 유지하려는 우주의 균형력이 가동될 것이며, 그때 당신에게는 어떤 선택권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 괴롭히는 이웃사람의 예는 양극성 효과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문제는 평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의 영역에 가장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평안한 삶을 방해한다는 데 있다. 그런데 왜 그러는 것일까? 언제 어디에서나, '착한 사람'이 조용히 살도록 가만 놔두지 않는 '나쁜 사람들'이 꼭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두 편으로 갈려서 대치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만일 "당신은 어느 편에 속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자신을 나쁜 편에 속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의 이웃들도 대부분 당신과 똑같이 정상적인 사람들일 뿐인 것이다.
- 누군가는 이렇게 반박할 수 있으리라. "젠장, 균형력은 무슨 놈의 균형력? 그냥 그 사람들이 양심을 잃어버린 것뿐이야. 그게 다야. 골치 아픈 개똥철학을 들먹이긴." 그러나 나는 지금 이것이 공허한 철학이 아님을 입증해 보이려고 한다.
- 이웃집 사람이 당신을 짜증 나게 한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혹시 당신은 그를 짜증 나게 하지 않는가? '절대로' 아닐 것이다. 왜 그런가?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자들은 원래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러나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원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평가는 비교와 대조에서 나오기 때문에 상대적인 것이다.
- 그런데도 왜 당신은 이웃을 화나게 만들지 않는 것일까? 당신이 예상치 못한 놀라운 대답을 들려주겠다. 이웃이 당신에게 짜증 내지 않는 이유는, 그들은 당신을 무시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또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바로 그거예요! 그들이 그런 식으로 몰염치하기 때문에 나쁘다는 거예요." 이런 관계 속에서 당신은 양극성을 발동시키게 된다. 당신은 새로운 불행을 계속해서 끌어당기는 전자석과 같아진다. 하지만 이웃은 당신에 대해 별 흥미가 없기 때문에 당신과 그들 사이는 물과 기름의 사이와도 같다. 그들은 당신에게 상대적인 평가를 부여하면서 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당신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당신에게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으며, 당신을 그들 세계의 층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고통받지 않는 것이다.
- 이웃은 자신의 일에 열중해 있고, 당신에게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한 당신과의 관계에서 양극성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들과 같지 않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부터 그들은 이웃으로서의 당신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비교하기 시작한다. 만일 그것이 그들을 흥분시키고 성질을 건드린다면 당신도 이제 그들을 짜증 나게 만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당신은 착한 이웃에서 못된 이웃으로 전락하고 만다.
- 더 나쁜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질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어떤 행동이 누군가를 괴롭힐 수 있다는 것을 상상도 못 하지만 그 행동은 이웃에게 불쾌감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당신은 자기도 모르게 이웃을 짜증나게 만들 것이다. 그와 똑같이 지금 당신의 이웃은 자신이 당신을 화나게 하고 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 예컨대 공동주택에서 소음은 가장 골칫거리다. 당신이 그것을 못마땅해할수록 그것은 더더욱 당신을 못살게 굴 것이다. 조용한 삶은 당신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이웃도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에너지를 적게 소모하는 삶이다. 고요를 깨뜨리는 것은 언제나 비정상적인 것이며, 그것은 텅 빈 곳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그 에너지는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 이웃이 일으키는 소음은 당신을 균형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그러면 당신은 이웃을 조용히 (혹은 소리치며) 증오하게 되고, 당신의 분개는 때맞추어서 그 에너지의 원천 역할을 하게 된다. 거기서 양극성을 일으키는 의존적 관계가 발생하는 것이다. '저 시끄러운 사람들, 미워 죽겠네!' 라는 격한 감정이 강력한 자석을 창조한다. 그 자석은 계속해서 새로운 불쾌한 자극들을 당신 쪽으로 끌어당긴다. 당신의 집 근처에 시끄러운 이웃들이 또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전의 이웃은 기다렸다는 듯이 특별히 당신의 화를 돋우기 위한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장비를 갖출 것이다.
또 하나 고려해야 할 것은, 당신 이웃의 다른 이웃들도 저마다 기여를 하며, 만일 고요를 깨뜨린 자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 서로 일치한다면 그 효과는 더욱더 배가된다는 점이다.
- 이웃의 문제는 시끄러운 소리 하나만이 아니다. 당신이 주로 혐오하는 모든 대상이 문제가 된다. 이웃은 당신 집 앞을 쓰레기로 어지럽힐 수도 있고, 불쾌한 냄새를 풍기거나 현관 입구의 벽에 낙서를 해댈 수도 있다. 그리고 이웃을 향한 혐오감은 일반적인 인간을 향할 때와 마찬가지로, 물난리나 화재와 같은 훨씬 더 강력한 결과를 촉발시킬 수도 있다.
- 다른 모든 경우에도 이와 유사하게 일종의 불운의 법칙이 작용한다. 특별한 중요성이 부여되어 있는 대상이나 특성은 반대되는 성질을 가진 대상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그런데 중요성은 잘 알려진 것처럼 비교와 대조에 의해 강화된다. 만일 어떤 것이 하나의 극성을 갖게 되면 반드시 다른 극성이 거기에 나타나야만 한다. 양극성은 불쾌한 일을 끌어당기는 자석을 만들어낸다.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이 끌려온다. 짜증나게 하는 모든 일이 늘 따라다닌다. 지독히 싫어하는 모든 일이 벌어지고 만다. 여기에 신기할 것은 하나도 없다. 이것은 법칙이다.
- 하지만 우리는 오직 트랜서핑의 기본원리만 실천하면 된다. 자신은 자기 자신으로, 다른 이들은 그들 자신으로 존재하도록 놓아두라. 세상을 모든 방향으로 풀어놓아야 한다. 꽉 쥐고 있던 손을 느슨하게 풀어놓으라.
- 자신의 욕구에 집착하면 할수록, 반대되는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자석은 더욱더 강력해진다. 말 그대로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당신은 세상의 멱살을 잡고 있고, 세상은 거기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당신에게 저항하고 있다. 억압하고 저항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상황은 더욱 악화될 뿐이다. 그렇게 하는 대신 트랜서핑의 법칙에 따라 상황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의식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 예컨대, 하다못해 잠시만이라도 이웃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다면, 그들을 비난하기를 그치고 그저 그들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보라. 이렇게 혼잣말을 하라. '이젠 신경 끄고 가만 내버려 두자!'
- 어떤 집단의 생각이 한 방향으로 초점 맞추어지고, 그 결과로 각자의 사념 에너지의 매개변수가 동일해질 때 하나의 구조체가 생겨난다. 에너지의 바다 한가운데서 하나의 독자적 에너지체인 '에너지 펜듈럼'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구조체는 독자적인 생애를 시작하고, 그 창조에 참여한 사람들을 자신의 법칙에 복종시킨다. 펜듈럼(진동)은 자신의 진동수에 동조하는 지지자를 계속 끌어 모아서 그들로부터 더 많은 에너지를 뽑아내고, 그 힘으로 더욱더 강력하게 진동한다. 게다가 다른 펜듈럼들과도 끊임없이 경쟁하고 충돌하므로, 우리는 특정 펜듈럼에 깊이 속박되어 있을수록 더 많은 갈등과 혼란, 반목과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지금 당신이 믿고 있는 모든 가치는 무수한 펜듈럼들로부터 강요된 것이다.
- 사람은 많은 일을 의식이 풀려 있는 상태에서 기계적으로 처리한다.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지고 이렇게 명징하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 '나는 지금 잠들어 있지 않으며, 내가 무엇을 하고 있고 왜 그렇게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 특히 집에 있거나 군중 속에 있을 때는 의식의 각성도가 낮다. 집에 있을 때는 높은 수준의 자기통제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이완되어 있고 거의 잠들어 있다. 오히려 집 밖의, 인간관계라는 좁은 범위 안에서만 의식이 가장 활동적이고 자기 통제적인 상태에 있다. 큰 단체에서는 사람의 행동이 다시 제멋대로가 되기 쉽고, 그뿐 아니라 대중의 충동적인 힘에 휘말려 들기 쉽다.
-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반은 이룬 것이다. 펜듈럼의 영향력은 의식의 깨어 있는 정도에 반비례한다. 당신이 눈을 뜬 채 백일몽을 꾸고 있는 한, 펜듈럼은 당신을 얼마든지 자신의 영향권 속에 가둬둘 수 있다.
-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 당신에게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펜듈럼의 파괴적인 싸움에 끼어들지 말라. 당신이 만일 군중 속에 있다면, 행동의 무대에서 객석으로 내려와 주위를 둘러보고 잠에서 깨어나라.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지? 나는 지금 상황을 명료하게 알아차리고 있나? 이것은 왜 필요하지?'
- 백일몽에서 깨어나는 것은 이처럼 절대적으로 명징해야 한다. - '지금 나는 잠들어 있지 않고, 내가 무엇을 하며, 왜 그렇게 하는지를 명확히 알고 있다.' 이렇게 상황을 명료히 알아차리고 있다면 만사는 순조롭게 풀려나갈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아주 작은 갈등 상황에서도 당신은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한 것이다.
- 예를 들어보자. 이웃사람이 당신이 끔찍이도 싫어하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당신의 성질을 돋우고 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어떤 방법으로든 펜듈럼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거기에 반응하지 않고 무심해지는 것은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감정을 죽이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 그러는 대신 당신의 주의를 딴 곳을 돌려야 한다.
자신의 음악을 한 번 들어보라. 너무 크게 틀지는 말고 이웃의 음악을 덮을 수 있을 만큼의 음량으로 들으라. 또 주의를 돌릴 수 있는 다른 방법들도 생각해 보라. 다른 데에 마음을 몰두하기에 성공한다면 이웃은 차차 조용해질 것이다.
-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다. 만약 '광대가 날뛴다'면 그것은 당신의 주의가 어떤 올가미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뜻한다. 펜듈럼의 게임에 말려든 것이다. 게임의 목적은 갈등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데에 있다. 올가미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으려면 주의의 스위치를 전환해야 한다.
- 전반적으로 보자면 상황이 그리 심하게 나쁘지는 않다. 눈을 뜬 채 잠들어 있지만 않다면 뭔가가 '악의를 품고 달려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 모두가 다 헛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어떤 존재가 당신을 조종하고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그것을 받아들이든 말든 그것은 개인적 선택의 문제다. 그리고 무턱대고 믿어야 할 것도 아니다. 스스로 관찰해 보고 결론을 내리라.
- 이 세상에서 우리는 가는 곳마다 성性에 관련된 직접 혹은 간접적인 정보들과 부딪치게 된다. 트랜서핑 모델에서는 성에 관한 주제도 다른 많은주제들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관점과는 다른 측면에서 바라본다. 사람들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성은 사람들의 개인적인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성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태도가 중요한 것이다.
- 사람들이 하나의 방향으로 에너지를 방사하도록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사고와 행동의 틀을 정해주면 된다. 규칙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물론펜듈럼이 규칙을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규칙을 만든다. 펜듈럼은 의식적으로 의도를 실현시킬 능력이 없다. 펜듈럼들은 그저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다. 규칙이 만들어지면 그것은 펜듈럼을 탄생시킨다. 펜듈럼의 규칙은 인간이 고안해낸 것들 중 가장 무시무시하고 해로운 것이다. 그 규칙은 이렇게 말한다. - "내가 하는 대로 따라 하란 말이야!"
- 물론 규칙이 항상 해로운 결과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축구경기장에서 축구광들의 물결은 플래시 펜듈럼을 일으키고 그것은 공명 에너지를 먹어치우지만, 그것 때문에 잘못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콘서트홀에서 펜듈럼은 관객들의 에너지를 배불리 먹는다. 여기에서도 해로운 것은 없다. 그러나 무대 위의 예능인들이 얼마나 자주 펜듈럼처럼 행동하는지 주의를 기울여 필요가 있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해 펜듈럼의 규칙을 가지고 대중을 흔들어놓으려고 애쓴다. "자, 두 손을 높이 올려봐요! 이제 모두 함께 불러봅시다!" 관중들은 신이 나서 손뼉을 친다. 이 에너지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공명을 이루면 콘서트홀 위에 떠 있는 거대한 괴물을 창조하게 된다.
- 사람들이 '내가 하는 대로 따라 해!'라는 괴물의 규칙을 따르고 있는 한, 괴물은 계속 살아남아 있다.
- 사람들이 섹스에 몰입할 때는 그 공명 에너지를 받아 삼키는 플래시 펜듈럼이 발생하는 것이 사실이다.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성행위 장면'이 벌어질 때 그 위에 떠 있는 어떤 에너지적인 실체를 의식해 왔고 또 그런 실체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트랜서핑 모델의 틀에서 우리가 플래시 펜듈럼이라고 부르는 그 실체는 여러 다양한 민족의 전승에서 감정적으로 채색된 이미지와 연결 지어져 왔다. 그 하나의 예는 '악마(Satan)에게 흘린다'는 것이다. 어떤 오컬트 수행법의 추종자들은 사람이 성행위를 할 때는 악마적인 난잡한 향연을 벌이는 정묘세계의 다양한 존재들을 끌어들이는 모종의 에너지가 방사된다고 굳게 믿는다.
- 겉보기야 어쨌든 당신은 이런 모든 이야기에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다. 플래시 펜듈럼은 당신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펜듈럼은 당신이 내뿜는 에너지를 받아먹을 뿐이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있다. 중요한 것은 현대적 형태의 섹스를 펜듈럼과 하나로 맺어주는 것은 펜듈럼의 규칙이라는 사실이다. 그 규칙은 이렇다. - "내가 하는 대로 따라 해!"
- 대중매체의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펜듈럼의 규칙도 더욱 완전한 지배력을 갖추게 되었다. 사람들의 심리는 매 순간 사고와 행동의 틀을 주입시키려는 은밀하고도 가장 효과적인 작업에 내맡겨지고 있다. 나는 여기서 '좀비 zombi' 라는 단어를 쓰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지만, 사실상 모든 설명이 그 단어로 쏠리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성공하고 있는지 보라. 그리고 그들을 모델로 삼아 따라 하라. 그들이 당신에게 보여주고자 애쓰는 것은 모두 '이것이 성공의 모델이다'라는 것이다. 당신은 이것을 잘 알고는 있겠지만, 그런 선전이 때로는 분명하게, 때로는 은밀하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지는 생각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특히 친밀한 상호관계에 관한 모든 것에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는 그런 상호관계가 어떠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이 아주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 주제에 관한 모든 출판물과 영상물들이 표준을 만족시키는 관계들을 본보기로 보여준다.
- 사실 어떤 고정관념의 틀을 남에게 심어주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것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늘 이런 생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내가 잘 하고 있는 것일까?' 언제나 비교의 필요성이 존재한다. 성공이란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인 것이니까. 그래서 다른 이의 성공을 보게 되면 그것을 모델로 삼으려는 경향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다.-
- 하지만 결국 잘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섹스의 본질은 이완과 해방과 몰입을 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섹스란 아무런 역할도 갖지 않고 완전히 놀이에 몰입하는 순간이다.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섹스는 다른 사람들이 정해진 대로 어떻게 하는지를 곁눈질하지 않고, 당신 자신이 스스로 정한 규칙대로 하는 놀이다. 더구나 사랑과 섹스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관념이 뒤섞여서 혼란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 이 위선적인 "사랑을 한다(make love)"라는 말을 들으면 때로 구역질이 난다. 그냥 "섹스를 한다"고 말하는 게 더 좋지 않은가 말이다. 섹스는 사랑이 아니다. 그리고 사랑은 섹스가 아니다. 이 둘은 과연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 섹스와 사랑은 서로 모순 없이 함께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한 번 더 말하자면, 사랑은 섹스가 아니고, 섹스는 사랑이 아니다.
- 펜듈럼의 규칙을 따르면서 인위적으로 사랑과 섹스를 혼동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성적인 관계에서 불행을 겪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혼동의 결과로 꼴사나운 잡종이 나오는 것이다.
- 표준과 규칙에 신경을 꺼버린다면 사실 모든 일이 아주 간단하다. 한가운데 영점이 있고 왼편으로 갈수록 애정이 커지고, 오른편으로 갈수록 공격성이 커지는 눈금 저울을 상상해 보자. 바늘이 왼편으로 기울면 사랑이고 오른편으로 기울면 섹스다. 이 말이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섹스란 부드러운 애정이라기보다는 공격에 훨씬 더 가깝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악마 같은' 본능이 깨어날 때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한다. 그들은 그것이 자연에 거스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상적인 두 사람이 만나서 처음에는 아주 일상적인 행동을 하지만, 점차 두 사람의 눈에 탐욕스러운 눈빛이 번뜩이고 그들은 틀에 맞지 않는 일을 벌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틀이란 게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바로 여기서 펜듈럼의 규칙이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규칙의 틀이 존재한다. 그것을 깨기란 쉽지 않다. 다른 한편, 그 틀 안에서는 섹스로부터 만족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규칙과 만족 둘 다를 가지려고 하는 것 같다. 그들은 표준에 맞추려고 자신의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동물적인 본능이 깨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정해놓은 틀과 그들에게 필요한 것처럼 느껴지는 의례적인 형식으로 섹스를 희석시켜 버린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일종의 구속상태를 불러오게 되어 있다. 그 코뚜레를 벗어던져야 하지만 펜듈럼의 규칙은 그러도록 가만 놔주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저울의 바늘이 공격성 쪽으로 멀리 가려고 하면 "그런데 당신 나 사랑해?"라며 애정을 확인하게 만든다.
- 그러다 보면 머지않아 동물적인 수준까지 타락할 것이라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여기에는 또다시 펜듈럼의 규칙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성이 끝나고 동물 수준이 시작되는 경계선을 누가 만들었단 말인가? 문제는 경계선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규칙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규칙을 정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당신은 인간이므로 인간성과 예절에 대한 자기만의 판단기준을 가질 권리가 있다.
- 가장 먼저, 프레일링의 첫째 원리를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받으려는 의도를 거부하고 그것을 주려는 의도로 바꾸라. 그러면 당신은 거부한 그것을 얻게 된다. 이 위대한 원리는 정확히 작용한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당신이 모르더라도 말이다.
둘째로, 어떤 식으로든 펜듈럼의 규칙을 완전히 거부하고, 그것을 트랜서핑의 규칙으로 바꿔야 한다. 트랜서핑의 규칙은 이렇다. 자신은 자기 자신으로, 다른 이들은 그들 자신으로 존재하도록 놓아두라.
- 당신도 이미 알듯이, 성적 관계에서 만족을 얻으려면 스스로 해방되어 자유로움을 느껴야 한다. 열등감과 같은 콤플렉스의 형태로 잉여 포텐셜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은 자유로움을 느낄 수가 없다.
- 자기를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도록 허용한다는 것은 완벽하지 않은 모든 결점과 함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다른 이들을 그들 자신으로 존재하게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투사한 자기의 기대를 벗겨낸다는 의미다. 그렇게 하면 서로가 다른 것을 욕망하는 상황은 오묘한 방법으로 신기하게 저절로 해결되어 버린다.
- 플래시 펜듈럼의 경우에는 이것이 쉽게 이해된다. 그들은 공명 에너지를 먹고산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행동이 동시에 일치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추종자들의 일치된 행동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장기적으로 존속하는 펜듈럼은 왜 그런 것일까?
- 우선 펜듈럼의 규칙은 사고와 행동의 규준, 즉 '정상적인' 표준을 설정한다. 사람들은 펜듈럼이 그들에게 제안하는 것이 성공의 모조품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타인의 성공은 따라 할 만한 본보기가 될 수 없다. 진짜 성공은 용감히 규칙을 깨뜨리고 자신의 길을 찾은 사람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이의 발뒤꿈치만 좇는 사람은 지는 해를 붙잡으려고 영원히 발버둥 치는 운명에 갇히고 말 것이다. 성공의 표준, 그것은 신기루다.
- 예를 들어 액체의 분자들은 결정이 생성되는 과정에서 격자 모양으로 정렬하며, 그와 같은 조직의 형성은 분자의 형태와 분자 간의 작용력에 의해 결정된다. 살아 있는 유기체들이 이 조직 안으로 통합되기 위해서는 그 조직체 외부에 존재하는 통합 요인이 있어야만 한다. 자, 바로 이 외부의 통합 요인으로서 펜듈럼이 등장하는 것이다. 펜듈럼이 어떻게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지는 아직은 잘 모르지만, 겉으로 보기에 펜듈럼들과 살아 있는 유기체사이에는 어떤 에너지-정보의 교환이 있는 것 같다.
- 펜듈럼은 사람과 같은 식으로 어떤 의도를 실현시키는 것이 아니다. 펜듈럼은 예컨대 프로그램이 자동설비의 작동을 조종하는 것처럼 조직체를 조종한다. 그러면 그 조직체의 요소들은 각각의 의식 수준에 따라 '자동적으로' 움직인다. 살아 있는 유기체가 원시적일수록 자신의 동기와 활동에 대한 인식의 정도가 더 낮아진다. 만약 어떤 존재가 혼자서 따로 산다면 그의 활동은 자신 내부의 프로그램, 즉 본능에 의해 정해진다. 그러나 그 존재가 어떤 그룹에 통합될 때 그는 외부의 프로그램인 펜듈럼에 걸려들고, 펜듈럼은 그룹 전체의 행동방식을 조종하기 시작한다.
- 서로가 먹고 먹히는 세상에서 나타나는 '공격성'은 펜듈럼의 첫 번째 법칙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다. 공격성은 펜듈럼의 산물이기 때문에 살아 있는 자연의 필수요소가 아니며, 이것은 지구 행성의 곳곳에서 확인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뉴질랜드에는 실제로 맹수가 없다.
- 별일이야 있겠는가? 물론 그것 또한 하나의 출구다. 그러나 조직의 규칙에 복종하면 자신의 개성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점은 꼭 명심해야만 한다. '다른 모든 사람'처럼 똑같이 한다면 편리와 안전은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당신은 자신의 모든 천재성을 실현시킬 수 있는 신의 선물인 영혼의 특별함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 영혼과 마음의 일치에 대해서는 이야기조차 꺼낼 수 없다. 조직체의 영향권 안에 완전히 들어가서 살고 있는 사람은 실제로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며 영혼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말은 그가 한 번도 자신만의 길을 찾지 않았고 평생 동안 그저 조직체를 위해 일할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사람이 조직을 벗어나서 살아야 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펜듈럼의 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나 산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만일 그곳에서도 눈을 뜬 채 꿈꾸는 것과 같이 무의식적으로 살아간다면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회조직 속에 머물면서도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라는 것이다. 예컨대 여름캠프에서, 펜듈럼의 규칙에 종속되지 않는 한편 왕따가 되지도 않으면서도 원하는 대로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간단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잠에서 깨어나 무대를 떠나지 않은 채로 관객의 눈으로 이 삶이라는 연극을 바라보면 된다. 그러면 펜듈럼의 '잡아끄는' 총아는 누구이며 '찔러대는' 총아는 누구인지, 또 누가 규칙을 추종하는 지지자들인지를 금방 알아볼 수 있게 될 것이다.
- 그들을 비난만 해서는 안 되며 더구나 무시해서도 안 된다. 깨어나서 상황을 인식하게 되면 흔히 '잠들어 있는' 사람들과 대치하기 시작하여 의존적인 관계가 발생하고, 그에 따라 양극성이 생겨나서 그 '깨어난 사람'은 왕따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펜듈럼의 규칙을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을 반드시 트랜서핑의 규칙으로 바꿔놓아야 하는 것이다. '자신은 자기 자신으로, 다른 사람들은 그들 자신으로 존재하도록 놓아두라.'
- 그렇게 할 때 자기 자신 안에서 의지처를 찾을 수 있다.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한다면 이미 절반은 이룬 것이다. 오직 이지식만이 자신에 대한 희망적이고 안정된 믿음을 가져다준다. 왜냐하면 불안은 미지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라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임의 규칙을 알지 못할 때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적의를 느끼고 두려워하게 된다. 그리고 그럴 때 외로움과 의기소침한 감정이 밀려들어와서 사람을 잠들게 하고, 펜듈럼의 규칙에 굴복하게 만든다.
- 자, 이 모든 것을 알고 나면 당신은 이제 삶을 의식적인 꿈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종할 수 있는 것이다. 양치기가 되든, 극단적으로는 양이 되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 자신의 입장을 확고히 지키는 방법에 대해서는 이미 트랜서핑의 기본 원리에서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첫째로 죄책감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변명하기를 그치고, 뻔뻔스럽게도 감히 당신을 심판하려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행동을 해명하려는 짓을 그만두어야 한다.
둘째, 자신의 중요성을 지키고 내보이려는 짓을 멈추어야 한다. 그와 동시에 트랜서핑의 규칙을 따른다면, 이 두 가지만으로도 자기 자신 안에서 의지처를 얻기에 충분하다. 이로써 자신의 신조와 일치된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그러나 안일한 마음으로 단순히 조직과 대치하면서 조직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반복해서 말하자면, 펜듈럼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의 꼭두각시가 되지만 말라는 말이다.
- 잠에서 깨어나면 당신은 조직이 어떤 식으로 자신의 규칙을 강요하면서 당신을 억압했는지를 느끼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살고 싶어? 살고 싶으면 나를 따라 해!") 그렇게 되면 당신은 그런 규칙들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거부할 것인지에 대해 자기만의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중요한 점은 그것을 의식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나머지 사람들은 잠에 빠져 있다. 이것이 바로 상황의 주인이 되기 위한 전략이다.
- 이 상황을 잘 드러내주는 편지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
[왜 가끔 이런 일이 발생할까요? 내 업무를 훌륭히 완수하고 오히려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했을 때는 아무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내가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그것에 대해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를 때조차도 그들은 엉뚱한 사람을 칭찬합니다. 승진문제가 거론되면 나는 마치 처음부터 계획에 없었던 것처럼 일찌감치 제외 돼버립니다. 약간 더 높은 직위나 다른 업무로 자리를 옮기려고 할 때도 어느새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리거나 아예 그 자리가 없어져버리기도 합니다. 마치 나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되어버린단 말입니다. 왜 이렇게 되는 걸까요?]
-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질문한 독자는 어떤 행정기관에서 일하는 듯하다. 어떤 조직이라도 그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펜듈럼이다. 처음에는 먼저 어떤 개념과 원칙의 복합체 형태를 띤 어떤 에너지-정보 구조체가 만들어진다. 그런 다음 그것이 물질적으로 실현되는데, 그것이 바로 조직이다.
- 대중의식을 지배하려면 유명한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것처럼 그들에게 흡착판을 붙여 배양기에 집어넣을 필요까지도 없다. 전 세계에 펼쳐진 정보망을 만들어놓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면 사람들은 각자가 스스로 알아서 그물코에 있는 자기 자리를 찾아가게 되어 있다. 정보망 속에서 각각의 그물코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회적 요소'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그것의 의식은 기본적으로 매트릭스와 같은 조직 안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위치에 조건 지워져 있다.
- 조직은 눈에 띄지 않지만, 그 사슬은 특정한 생각과 행동의 고정된 틀로써 마치 그림자처럼 그 일원들을 낱낱이 장악하고 있다. 사람은 자신이 자기 의지대로 자유롭게 행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유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의지는 조직에 의해 이미 '환경설정'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미 정해진 자기 의지에 따라 강요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각자는 자신의 의지 대로 원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자유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사람은 오직 조직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만을 원할 수 있다. 조직은 사람들을 조직에 필요한 것만을 원하게끔 가르친다.
- 이 과정에서 의지(의도)의 노예화가 생겨난다. 이 과정은 본질적으로 공동작용에 의한 것이다. 다시 말해, 펜듈럼은 스스로 의식적인 의도를 갖지 못하므로 이 과정은 저절로 형성되는 것이다. 그것은 얼음이 얼면서 결정체를 이루는 과정처럼 저절로 일어난다.
- 사람의 심리는 부정적인 자극에 더 예민하도록 되어 있다. 만약 파괴적인 펜듈럼이 일으킨 사건, 예를 들어 대참사에 관한 뉴스에 자극받고 흥분하고 동조한다면, 우리는 그 펜듈럼에 에너지를 빼앗길 뿐만 아니라 그 부정적 사건과 일치하는 사념 주파수를 방사함으로써 자기 자신도 그와 유사한 사건이 가까이 다가오는 인생트랙으로 옮겨가게 된다. 이처럼 단지 파괴적 펜듈럼의 지지자였던 사람이 마치 깔때기 속으로 빨려들 듯 점점 희생자가 되는 인생트랙으로까지 유도되는 현상을 '유도전이'라고 부른다.
- 모든 집착의 궁극적인 결과는 이렇다. 누군가가 펜듈럼의 '단골'이 되면 그는 '무리' 속으로 떨어져 들어간다. 그를 가두는 데는 울타리도 필요 없다. 주의가 펜듈럼의 올가미에 머물러 있는 한 단골손님은 한눈을 팔지 않는다. 사람이 집착하는 대상을 생각하고 있을 때는 펜듈럼의 공명주파수로 에너지가 방사된다. 예를 들어, 빚을 진 '채무자'의 모든 생각은 주기적으로 일정량의 에너지를 대출받는 방향으로 돌아간다. 그럴 때 채무자는 다른 변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펜듈럼이 그들의 주의를 놔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사로잡힐 수 있는 것은 인간 심리의 특성 때문이다.
- 포획 올가미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의지를 강화시키는 것만으로는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릴 때에만 비로소 머릿속의 집요한 멜로디에서 벗어날 수 있다. 보통 해로운 집착은 특정한 시나리오와 무대장치를 수반한다. 그런 것들 모두가 예컨대 작업 중에 피는 담배처럼 주의를 사로잡을 수 있는 전형적인 환경을 조성한다. 모든 빚을 청산하고 이 악덕한 은행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시나리오와 무대장치를 바꾸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별로 복잡한 일이 아니다. 당신의 열망과 약간의 판타지가 필요할 뿐이다.
- '채무'를 갖고 있지는 않더라도 문명의 상품을 이용하는 모든 경우에 사람은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펜듈럼에게 자기 에너지의 일부를 내준다. 사람들은 가축처럼 사육되거나, 아니면 문자 그대로 '방목'되는 것이다. 문명사회에서의 삶이란 모두 에너지를 소비하고 내어주는 연속적인 과정이다. 그리고 이 모든 에너지 교환은 펜듈럼에 의해 조종된다.
- 조직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길이 존재한다는 관념조차 상실해 버린다. 사람은 조직이 명령하는 것을 그대로 이행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조직에게 유리한 것을 원하기 시작한다. "사람은 이성을 가진 존재라서 남의 노예가 되는 것을 스스로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에 속지 말라.
이미 밝힌 것처럼 인간의 의식 단계는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데, 조직은 인간에게 남아 있는 최후의 의식마저도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감소시켜 나간다.
- 빚지고 이자 지불하기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 딱 한 가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제때에 게임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그것도 단순히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펜듈럼과의 모든 관계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져서, 펜듈럼의 주파수로 방사되는 사념을 완전히 끄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사이사이 쉬는 시간에 다른 데로 주의를 전환하고, 게임에 대한 생각은 아예 떠올리지 않는 것이다. 펜듈럼과 함께 흔들리기를 멈춘 다음에야 비로소 유도전이의 갈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게 관계를 완전히 끊은 다음에는 새로운 게임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렇지만 펜듈럼과의 게임은 대개 매우 위험하고 예측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이를 위해 필요한 단호한 결정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게임조차도 아니고 그저 그림자와 추는 춤일 뿐이다.
- 펜듈럼은 보이지 않는 냉정하고 무자비한 그림자다. 펜듈럼은 의식도 의도도 가지지 않는다. 그것에게는 영혼도 마음도 없으므로, 그것을 거스르면 발생하는 감정과 느낌, 충동, 약점 같은 것도 없다. 마치 자신의 그림자를 앞지를 수 없듯이, 당신은 단 한 번도 펜듈럼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펜듈럼은 당신이 아무 데도 도망칠 수 없음을 알고 집요하게 당신을 따라다닐 것이다. 싸워서 이 그림자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것과 노는 것도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위험한 게임을 거부하든지, 아니면 펜듈럼의 총아가 될 수 있도록 전략을 짜든지 해야 한다. - 이것은 의미가 있다.
- 사람들은 펜듈럼을 이기려고 애쓰면서 그림자를 좇는다. 이기고자 하는 모든 노력과 그에 수반되는 경험은 내부의도에 속하는 바, 내부의도는 주위를 둘러볼 생각도 하지 않고 코앞에 놓인 것만을 맹목적으로 따른다. 이런 무익한 추구를 중단하기 위해서는 멈추어 서서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고, 자주적인 행동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 그때 역할이 바뀐다. - 사람이 펜듈럼을 좇는 것이 아니라, 펜듈럼이 사람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폭 좁은 내부의도를 거부한 사람은 게임의 주인, 그림자와의 춤을 리드하는 지배자가 된다.
- 자신의 게임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게 해야 한다. 당신의 게임은 자기 생각대로 자신만의 현실을 창조하는 것이다. 당신은 이것을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이러한 특권을 갖도록 해주어야 한다. 자신의 특권을 갖게 하거나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다. 이것을 꼭 이해해야 한다.
- 그렇지만 자신을 주도자가 되도록 허용하는 것도 다는 아니다. 스타는 스스로 탄생하는 것이지만, 그들을 빛나게 하는 것은 펜듈럼이다. 만약 어떤 강력한 펜듈럼이 당신을 간택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아무리 머리가 좋아서 정말 놀랄 만한 걸작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그것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창작물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단지 그 이유만으로 유명해지지는 않는다. 문화, 학문, 예술에서 우수한 창작물은 오직 새로운 펜듈럼을 일으키거나 그것이 이전 것보다 더 유익한 경우에만 많은 대중의 관심을 끌어들인다.
- 유행이나 인기는 바로 펜듈럼이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갑자기 그 수많은 대중이 동시에 하나의 대상에 몰두하게 되었겠는가?
- 설명하자면, 각 시대에는 자신만의 독특한 특성, 사운드 뉘앙스 또는 다른 말로 카리스마가 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는 저절로 도래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능태 공간 속의 구름처럼 사람들의 의도에 의해 끌려온다. 그리고 펜듈럼은 이 집합적인 의도를 단단하게 굳힌다.
- 처음엔 크지 않은 마니아 그룹이 형성된다. 그들 개개인은 '난 이게 맘에 들어'라는 사념 주파수를 방사한다. 그러면 숭배자들의 생각을 '우리는 이게 마음에 든다'라는 한 방향으로 통일하고, 진동의 리듬을 동조시키는 펜듈럼이 만들어진다. 알려진 바대로 모든 것이 다 있는 가능태 공간에는 '모두가 이것을 좋아한다'라는 하나의 공통된 특질의 섹터 지역이 존재한다. 첫 마니아 그룹의 집단적 의도는 그 물질적 실현의 움직임을 이 지역으로 방향 맞춘다. 그 결과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현실은 새로운 시대의 뉘앙스를 획득한다. 마니아가 많아지면 펜듈럼에 힘이 모인다. 마침내 축적된 의도는 일부 비판적인 대중을 압도하고, 새로운 시대의 카리스마가 모든 물질적 현실을 사로잡는다. 펜듈럼 지지자들의 통일된 의도에 의해 끌려온 구름은 새로운 시대의 독특한 카리스마를 창조한다.
- 이제 새로운 사조의 발생 메커니즘을 아는 당신은 나머지 세상을 뒤돌아보지 않고 용기 있게 자신의 당연한 특권을 사용할 수 있다. -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 오직 그럴 때만 자신의 기회를 실현할 수 있고, 모방할 수 없는 자신만의 개성을 세상에 알릴 수 있다. 펜듈럼은 독특한 개성을 참아내지 못한다. -그들은 당신을 스타로 만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림자를 좇는 짓을 그만두고 독자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하면 펜듈럼 당신을 따르는 것밖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당신의 영혼은 독특하므로 당신은 유행의 창시자가 될 수 있으며, 가능태 공간 속에는 당신을 위한 최고급의 구름이 이미 준비되어 있다. 그것은 당신을 기다린다. 당신의 의도를 선언하라!
- 투시력과 직관적 '앎'도 역시 거기에서 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썼다. "과학의 발견은 논리적 과정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다. 논리적 형태는 그것을 나중에 기술하는 과정에서 입혀지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발견은 언제나 하나의 깨달음이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몰래 귀띔해 주는 것처럼 외부로부터 문득 찾아온다."
- 가능태 공간을 일반적으로 알려진 보통의 정보장 개념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일반적 개념의 정보장에서는 데이터가 하나의 대상으로부터 다른 대상으로 전달될 수 있다. 가능태 공간은 정적인 매트릭스, 즉 우리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의 원천(기초)이 되는 구조체다.
정통 과학은 가능태 공간을 설명할 수도 없고 그 존재 여부를 증명할 수도 없다. 오히려 그것은 전형적인 펜듈럼이기 때문에 트랜서핑 모델의 기를 꺾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시도할 것이다.
- 과학은 여러 장점과 업적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자신의 틀에 맞지 않는 것들은 몰아내버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설명이 불가능한 것을 만나면 과학은 그 곤경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힘을 다 동원할 것이고, 자신의 권좌 위에 살아남기 위해 반대자가 사실을 왜곡한다고 비난하거나, 아니면 명백한 사실을 그저 무시하여 깔아뭉개버릴 것이다. 그런데 브론니코프 뱌체슬라브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사람이 극도로 비범한 것과 지극히 명백한 것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과학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다.
- 눈을 통하지 않는 직접적 시각 현상을 관찰한 신경생리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보통의 시각, 즉 육안을 사용할 때는 신호가 들어오는 위치와 시각 사용자의 대뇌의 활동과 처리 과정이 계측장비에 기록된다. 그러나 직접적 시각의 경우에는 신호가 들어오는 곳과 대뇌의 활동은 기록되지 않고 신호처리 과정만 분명히 기록된다. 대뇌에 들어오는 신호를 차단하려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지만 모두 실패했다. 우리는 전자기적 과정과 무관한 물질적 현상을 보여주는 뭔가를 발견한 것이다."
- 가능태 공간 속에는 물질적 현실로 실현되는 구역과 실현되지 않는 구역이 있다. 직접적 시각을 얻기 위해서는 가능태 공간의 이미 실현되어 있는 구역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생리학적으로 본다면 이것은 두뇌 양반구의 특이한 동기화로 해석할 수 있다. 브론니코프 박사는 단순하고도 특수한 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했는데, 이를 통해 누구나 위와 같은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다. 그 관련 정보를 인터넷 (http://www.bronnikovmethod.com)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모두가 실제로 실현 가능한 일이다.
- 가능태 공간에는 또한 과거와 미래의 모든 가능태에 대한 정보가 보관되어 있어서 여기에 접속하면 투시능력을 얻을 수 있다. 단 하나 문제는, 가능태의 수가 무수히 많기 때문에 실현되지 않을 사건을 보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미래를 보는 투시가들이 드물지 않게 오류를 범한다. 일어난 적이 없는 일이나, 앞으로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을 볼 수도 있는 것이다.
- 이런 점에서 당신은 안심해도 좋다. 어떤 가능태가 실제로 실현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당신의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장차 현실화될 가능태 공간의 섹터를 꿈에서 보았노라고 호언장담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미래가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언제나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다는 뜻임이 분명하다. 트랜서퍼의 할 일은 지나간 과거를 안타까워하고 다가올 미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현실을 의도적으로 창조해 가는 것이 트랜서퍼의 과제인 것이다.
- 인간의 사념 에너지는 특별한 조건하에서 가능태 공간의 특정 섹터를 물질화시킬 수 있다. 트랜서핑에서 우리가 '영혼과 마음의 일치'라 부르는 특별한 상태에서는 불가해한 마법의 힘인 외부의도가 탄생한다. 마법과 관련되어 보이는 모든 것은 외부의도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 '외부' 의도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은 사람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인간의 마음에 예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떤 특별한 의식 상태에서 실제로 외부의도에 접속할 수 있다. 그 강력한 힘에 자신의 의지를 복종시키면 믿기 어려운 놀라운 것들을 창조해 낼 수 있다.
- 현대의 인류는 아틀란티스와 같은 고대 문명인들이 사용했던 능력을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렸다. 흩어진 고대 지혜의 파편들은 그 일부가 비전적 秘傳的 교의와 실천법의 형태로 우리 시대에까지 전해 내려왔다. 이 지혜를 일상의 삶에서 활용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상황이 그리 가망 없는 것만은 아니다. 트랜서핑에는 우회로가 있다. 이 우회로의 도움으로 우리는 외부의도를 작동시킬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현실을 창조해낼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특정한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 보통 인간의 마음은 거울에 비친 그림자를 바꿔보겠노라고 열심히 달려들지만 결국 헛손질만 한다. 그 그림자의 주인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말이다. 그림자의 본체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은 우리의 사념의 방향성과 특성이다. 원하는 것을 실현시키는 데는 바라고 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중거울을 다루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당신은 이제 그 방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 다만, 사람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상식'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흔들어놓아야 한다. 현실이 양면 -물질적인 면과 비물질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낡은 고정관념이 무너지면서 세계를 조망하는 시야가 더욱 분명해진다. 이중성은 우리 현실의 나누어질 수 없는 한 부분으로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영혼은 가능태 공간과 연결되고 마음은 물질세계와 연결된다. 내부의도는 물질 현실과 관계하고 외부의도는 가능태공간의 가상(virtual) 섹터들과 연결을 가진다.
- "여길 봐! 내 말을 잘 들어! 그렇게 하지 마! 이렇게 해!" 주의가 점령되면 인식의 범위가 좁아진다. 지각력이 없어지고 무의식적인 꿈의 상태와 다를 바 없는 상태로 빠져버린다. 실제로 주의의 초점을 좁은 범위에 붙들어 매 놓으면 사람은 자기 발만 보며 걷는 것처럼 살기 때문에 주변을 둘러보지 못한다. 틀에 박힌 세계관은 사람을 모든 것의 당위를 결정하는 프로크루테스 Procrustes (그리스 신화의 인물로, 행인들을 붙잡아다가 자신의 침대에 맞지 않으면 몸을 늘이거나 잘라내어 억지로 맞추었다고 함 -역주)의 고정관념 속으로 쑤셔 넣는다. 무의식적인 꿈 속에서는 주의와 지각이 극도로 고착된다. 사람은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건의 전개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절감한다. 결과적으로 꿈꾸는 사람은 사건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꿈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일어나고 그것을 어찌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시나리오는 두려움과 기대에 맞추어 저절로 펼쳐진다. 기대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간다.
- 자각몽에서는 각성도가 이미 높아져 있어서 꿈꾸는 사람이 강한 의지로써 사건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가 '이것은 모두 꿈이야' 하고 인식하면 그에게는 놀랄 만한 능력이 생긴다. 자각몽 속에서는 불가능이란 없다. 사건을 멋대로 조종할 수 있고 날아다니는 것과 같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을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주의와 지각이 고착되어 있던 대상에서 벗어나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면서 자신의 위치를 알아차리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이다.
- 그러나 눈을 뜨고 깨어 있는 동안에는 이상하게도 각성도가 다시 저하된다. 대부분의 경우 생각은 제멋대로 날아다녀서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널뛰듯 마구 돌아다닌다. 보통 불안한 걱정거리나 흥분시키는 일들이 의식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어서 늘 어느 정도 마음을 갉아먹고 있다. 이런 생각들의 방향을 제어하기란 어렵다. 최악의 예감과 부정적인 반응들이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현실을 지어낸다. 지각과 주의가 문젯거리, 괴로운 생각이나 상황에 고착되어 버린다.그 결과 사람은 마치 눈 뜨고 꿈꾸는 것처럼 자기만의 근심과 걱정 속으로 빠져든다. 아이들은 이런 식으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 어른이 된 사람은 자신의 꿈에 맞지 않는 어린아이를 우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이에게는 새로운 환경에서 생존하는 법을 가르쳐줘야 한다. 하지만 그럴 때 불가피하게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다. 물질세계의 좁은 틀속의 법칙을 익히면 익힐수록 의식의 각성도가 저하되고, 그에 따라 현실의 형이상학적 측면을 인식하는 능력이 상실되면서 사건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잃게 된다.
- 그런 꿈에서 깨어나면 사람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안도감을 느낀다. 그것이 꿈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렇다. 그것은 꿈이지만, 환상이 아니라 현실화되지 않은 형이상학적 현실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가상현실의 등장인물들이 꿈꾸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고, 그들은 꿈꾸는 자의 걱정과 기대에 맞춰 그에게 마음대로 모든 짓을 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 같은 현실에 빠진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다!
- 우주에 나가 있는 우주비행사들이 꾸는 꿈들도 지구에서 꾸는 꿈과 다르다. 겐나디 스트레칼로프는 출간된 자신의 일기장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이상한 꿈들을 꾼다. 가끔은 주제도 엉뚱한 놀라운 꿈들을 두뇌가 복잡한 컴퓨터처럼 피로에 의해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이거나,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고 영원히 보관되어 있는 우주의 정보장(field)으로부터 두뇌로 정보가 들어오기 때문일 수도 있다." 보통 사람의 지각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이런 꿈들을 꾸고 나면 우주비행사들은 가능태 공간의 존재에 대한 트랜서핑의 가정을 놀랍게 여기지 않는다.
- 카를로스 카스타네다와 테운 마레자의 책은 사람의 지각 모델에 대해서 잘 기술하고 있다. 그들은 아틀란티스의 마지막 후예인 톨텍 인디언들이 상상하는 것에 대해 묘사했다.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많은 섬유로 구성된 발광하는 에너지 코쿤 cocoon(누에고치 형상의 에너지 보호막)이 사람을 둘러싸고 있다. 그 섬유들은 견갑골쯤에 있는, 연결점(assemblage point)이라 불리는 통합 초점에서 겹쳐진다. 연결점의 위치는 지각의 방향성을 결정한다.
- 그런 모델을 트랜서핑의 개념과 합치자면, 연결점이 정상 위치에 있을 때 사람은 일상적인 현실을 지각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는 실현된 현실이 가능태 공간의 상응하는 섹터와 일치한다. 그 포인트가 옆으로 위치가 변경되면 동조 상태가 깨져서 사람이 실현되지 않은 구역을 지각할 수 있게 된다. 보통사람들에게는 그 포인트가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어떤 이유에 의해 고정된 부분이 풀리게 되면 연결점이 이동하기 시작하면서 그 사람에게는 투시 능력이 생기게 된다. 물론 꿈꿀 수 있는 것도 그 포인트가 이동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지각 초점이 옆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비정상적인 위치에 오래 머물면 정신착란이 일어날 수 있다.
- 의도로써 이 연결점을 이동시킬 수 있는 사람은 자각몽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실을 조종할 수 있다. 이런 능력은 현실에 대한 기준점을 자신에게로 되돌릴 때, 즉 진정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달을 때 자연스럽게 얻어진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만한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의 수는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일 것이다. 깨달음은, 낯선 도시에서 비좁고 복잡한 골목을 따라 길을 잃은 채 헤매 다니다가 마침내 하늘로 솟아올라 모든 길을 한눈에 확연히 내려다볼 수 있게 되는 것과도 같다.
- 트랜서핑은 당신을 모든 것이 보이는 높이까지 올려주지는 않지만, 눈감고 따라가도 될 만한, 당신만의 행로를 보여준다. 꿈속에서 깨어나려면 비교할 수 있는 기준점이 필요하다. 또 다른 진정한 현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때 이것은 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삶에서, 의식이 한 단계가 아니라 반 단계라도 상승할 수 있다는 삶은 하나의 기준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작지 않은 일이다.
- 당신이 거리를 따라 걷고 있거나 누군가와 얘기하거나 아니면 일상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하자. 깨어나라! 주위를 살펴보고 일어나는 일들을 명료히 바라보라. 당신은 당신의 의도로써 자신의 세계를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당신의 현실을 조종할 수 있다. 이것은 의지의 작은 변동에 따라 꿈의 이야기 줄거리가 유연하게 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물질적 실현은 끈적끈적한 송진처럼 불활성이 있지만 트랜서핑 원리를 이용하면 그것을 조종할 수 있다. 그러니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가장 당면한 일이다.
- 현실을 꿈처럼 인식해 보라. 오직 의식적인 꿈에서만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 현실에서 잠자고 있을 때 당신은 상황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펜듈럼과 싸우고 있다. 객석으로 내려가서 지켜보라. 관찰자로 머물고 자신을 빌려주면서 초연하게 행동하라.
- 깨어 있는 의식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의 방향을 항상 제어해야 한다. 이것이 습관이 되면 노력 없이도 자동으로 할 수 있게 된다. 꿈속에서 이미 깨어 있으면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인식시키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현실에서도 생각의 방향을 제어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러려면 처음에는 습관이 될 때까지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자신을 일깨워야만 한다.
- 깨어 있는 현실에서 초연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당신은 이미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즉 무대에서 객석으로 내려가거나 무대에서 연기하는 관객으로 남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에서 이야기한 각성의 반 계단인데, 이것만 잘해도 나머지 다른 트랜서핑의 원리를 수행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트랜서핑의 원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중요성의 수준을 낮추기'와 '가능태 흐름 타기'와 '의도의 조율'이다. 이 원리들은 여러 가지 불쾌한 것들을 피하면서 미로와 같은 삶 속에서 자신 있게 눈 감은 채 움직여갈 수 있게 해 준다. 이다음에 우리는 현실을 조종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인 이중거울을 만나게 될 것이다.
- 이 주제를 마치면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다. 만약 가능태 공간 속 어딘가에 현실을 꿈처럼 보이게 하는 연속적인 모든 삶의 바탕인 기준점이 있다면 그 기준점의 최초의 시작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틀림없이 신(God)일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영혼은 신의 일부다. 그리고 모든 삶은 신의 꿈이다.
- 예로부터 신을 잘 섬기는 사람들은 선한 자들이고, 믿지 않는 자들은 죄에 빠진 자들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해, 또 동시에 모두를 위해 자기들은 면죄를 받았다는 등의 이런 고정관념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이단자 박해와 같은 극악무도한 범죄가 신의 이름으로 행해졌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신앙은 결코 사람을 정의롭게 만들지는 않는 것 같다.
- '우리는 믿고 있고 교회에 다니면서 기도하기 때문에 밝음과 신앙의 중심이고, 당신들은 무신론자들이기 때문에 죄와 어둠에 빠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올바르고 당신들은 올바르지 않다.' 사람들은 이런 확신의 근거를 종교의 펜듈럼으로부터 얻는다. 펜듈럼에서 모든 것을 찾을 수 있다. 여기에는 죄를 용서해 주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 참회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는 것,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소망과 신자들과 화합된 느낌이 있다. 무신론자들은 자기 자신만을 믿어야 하고 죄책감을 던져버릴 곳도 없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 본다면 무신론자로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 하지만 자기 자신을 본래부터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왜 그리도 신을 찾는 것인가? 많은 경우, 사랑 때문에 신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감이 없고 두렵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다. 온 마음으로 신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환상이다. 실제로는 자기의 자아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자아는 모욕감을 느끼기 전에는 나쁘지 않고 방해도 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사람이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게 될 때, 그리고 자신이 완벽하지 않음을 발견할 때 자아가 일어나는 것이다.
- 자아의 유일한 목적은 자기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데에 있다. 그것을 확인하지 못하면 자아는 노여워하고 마음의 불편을 느끼며 그런 느낌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게 된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중요성을 높이기 힘든 상황에서 해결책은 두 가지 방법밖에 없는데, 고삐를 풀어줘서 자아를 마구 내달리게 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자아를 억압하는 것이다. 첫째 방법을 선택한 사람들은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둘째 방법을 택한 사람들은 이타주의자가 된다.
- 혼자 있을 때 그 불편함을 벗어나기 위해 자아는 흔히 극단적인 행동, 즉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행위를 시작한다. 자아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나쁜 것이니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사람은 자기 영혼에게 등을 돌리고는, 의지처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를 위해 바치려고 신이나 다른 대상에 빠져든다. 또는 반대로 자아는 공격적으로 돌변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에 범죄자, 비열한 자 또는 파렴치한 자들이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지극한 신앙을 지닌 사람이나 죄에 빠진 사람이나 모두가 자아의 산물일 뿐이며, 다만 양극성의 반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 신에게 귀의할 때, 당신은 자아에서 벗어났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을 신에게 나아가게 한 것이 바로 자아라는 사실에 패러독스가 놓여있다. 그런데 신은 밖이 아니라 당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신의 작은 파편들이 각 생명체 안에 들어 있고, 신은 그런 방식을 통해 온 세계를 다스리는 것이다. 자아는 이상하고 추상적인 상징을 숭배하면서 자기 영혼, 즉 참된 신으로부터는 등을 돌린다. 그리스도, 마호메트, 붓다, 크리슈나 -이들 모두는 신이 그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낸 최상의 화신이다. 보통 사람들은 최상의 화신은 아니더라도 그 역시 육화 된 신의 한 모습이다. 그렇다면 한 화신이 다른 화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닌가? 누가 이것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 자기 에고 ego를 벗어나기 위해 신에게로 향하는 것은 내적 중요성의 길이다. 당신 자신을 다른 사람들이 심판하게 하면 내적 중요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을 곁눈질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신에게로 가는 진정한 길이다. 남들의 눈치를 볼 필요성에서 벗어나면,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에고는 사라지며 단지 총체적인 온전한 개성이 남는다. 당신을 어떤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하고, 당신이 변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당신으로 하여금 자신을 배신하여 자기 영혼에 등을 돌리고 "나처럼 따라 해"라는 펜듈럼의 법칙을 좋게 만든다.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와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당신이 옳을 수 있는 권리를 되찾으라. 자신의 모든 것을 추상적인 신을 숭배하는 데다 바치는 것은 자기 영혼에 등을 돌리는 짓이다. 그것은 바로 종교 펜듈럼을 지지하는 행위다.
- 이것은 트랜서핑의 신학이다. 다만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을 뿐이다. 나는 절대적인 진리를 선포하지 않으며, 단순히 몇 가지 법칙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뿐이다. 누구나 자기 자신만의 결론을 내릴 권리가 있다.
- 종교는 지지자들에게 특히 모진 펜듈럼이어서, 그들에게 세상의 행복을 포기하기를 강요한다. 일반적으로 모든 영적인 길은 고행의 길로 이어져 있다. 영적 수련의 높은 단계에 올라간 깨달은 사람들은 세속사에 관심이 없어진다는 견해가 있다. 이 함정에 빠지지 말라. 각자는 자신의 풍요와 평안과 행복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지 않다면 그 사람은 어떤 도그마에 완전히 빠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종교나 철학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영적인 펜듈럼에 속한다.
- 펜듈럼의 둘째 법칙에 따라 종교는 조직의 이익을 위해 지지자가 자신을 헌신적으로 바칠 것을 강요한다. 사람이 이 미끼를 물면 그는 정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어진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영혼을 닦고 신과 대화한다는 환상에 빠져 있을 수도 있다. 실제적으로 이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영혼은 꽉 막힌 상자에 갇혀 있어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볼 수가 없다.
- 영혼은 왜 이 물질세계로 왔을까? 하늘나라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 왔을까? 말도 안 된다! 영혼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면 왜 또다시 하늘나라의 삶을 위해 준비를 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 지상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라도 할까? 이 세속적인 삶이 영혼에게는 유일한 기회다. 영혼은 물질세계의 모든 아름답고 좋은 것들을 알기 위해 영적인 세계에서 이 세상으로 오는 것이다. 영적인 세계는 언제나 들어갈 수 있다. 매혹적인 것이 많은 이 아름답고 놀랍고 훌륭한 세계가 영혼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그것을 박탈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 온 정성을 다해 신을 숭배하면 오히려 그로부터 멀어진다. 창조주는 자신의 화신인 생명체들을 통해 무수한 현실을 창조해내고 있다. 신은 창조된 현실의 모든 측면을 체험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그는 자신의 자녀들을 물질세계로 내려 보낸다. 신은 당신에게 행동의 자유를 주었다. 그 자유를 즐기고 누리라. 감방에 들어가서 많은 시간을 기도하면서 보낼 필요가 없다. 그것은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값진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신의 기쁨을 빼앗는 것이다. 이는 어린아이에게 놀지도 못하게 하고 온종일 외우기만 시키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 원래 사람에게는 형이상학적인 가능태 공간의 잠재적 가능태들을 물질적 현실로 실현시켜 자기의 세계의 층을 이루어낼 권리가 있다. 펜듈럼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인식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신의 일을 하는' 것을 '신을 숭배하는' 것으로 슬쩍 바꿔치기하여 삶의 의미 자체를 왜곡시켜 놓았다.
신은 숭배받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자녀들이 당신을 숭배할 필요가 있을까? 당신은 자녀와 친구처럼 지내기를 더 좋아할 것이다. 실제로는 삶의 목표와 신의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바로 공동 창조, 곧 신과 함께 창조하는 것이다.
-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신을 믿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신의 존재와 권능을 믿는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건가? 그들은 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신은 추상적이고 도달할 수 없으며 때로는 두려운 우상이다. 그들은 신을 숭배해야 하며, 계율을 지키는 충직한 삶으로써 아무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뭔가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사상을 주입받은 것이다.
하지만 신앙은 이해가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가 아니다. 신의 언어는 창조다. 나의 이 주장을 인정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 단 이것을 놓고 토론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므로 여기에는 덧붙일 이야기가 없다.
- 당신은 자기의 세계의 층을 만들어내면서 신과 교감한다. 당신이 창조물을 만들면서 기뻐할 때 신도 당신과 함께 기뻐하신다. 이것이 바로 신을 진정으로 섬기는 것이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그 창조적 능력을 믿는 것이다. 창조주의 한 부분이 각자의 안에 있다. 당신의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라. 당신이 자신의 능력을 믿는 만큼 신을 믿는 것이며,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
- 책 첫머리에서 말한 것과 같이, 모든 생명체의 행동 바탕에는 어느 정도 자신의 삶을 독자적으로 통제하려는 동기가 놓여 있다. 일반적으로 어떤 목적이 있는 활동이나 과정은 현실을 통제하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과 존재하는 것들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목적으로 귀결되는데, 그것은 바로 주변 현실을 어느 정도든 자신의 통제 아래 두려는 것이다.
- 무신론도 종교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무신론에서는 믿음이 모르는 것(불가지론)으로, 모르는 것이 거절로, 거절은 적극적인 거부로 변한다. 인간이 그 어떤 세계관을 택하든 간에 그 사정은 변하지 않는다.
- 종교 펜듈럼은 운명을 신의 손에 맡기는 것이고, 무신론은 그것을 어떤 예언의 손에 맡기거나, 아니면 싸워야 할 상황의 영향 아래 맡기는 것이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인간은 꼭두각시 인형의 역할을 하게 되는데,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은총만을 기다리거나, 또는 아무것도 그저 주어지지는 않으니 장애물과 전투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 간에 그의 행동이 내부의도의 틀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펜듈럼이나 상황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는 대로 얻는 것이다. 당신의 운명이 빽빽한 숲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우거진 숲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 높이 치솟아 날아갈 수 있다는 도전적인 생각을 한다면 숲 위로 솟아올라 자유롭게 날아다닐 것이다. 당신 자신 외에 당신을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 하지만 자신의 신성함을 인식하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외부의도의 도움을 받아 모든 것을 조건 없이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할 것이다. 신은 창조주로부터 숭배를 요구하는 통치자로 변했고, 그의 본질은 극단적으로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것처럼 행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통치자는 무엇을 하는가? 심판으로 정의를 지키고 행위에 합당한 상과 벌을 내리며, 신하들을 다스리고 보살피고 도움을 준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찾아볼 수가 없다. 현실적으로는 불법과 만행만이 끊일 줄 모르고 이어진다.
- 그 모든 추측을 버리고 볼 때, 신의 의도는 과연 무엇인가?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해 억측과 공론을 늘어놓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모든 생명체의 의도는 현실을 조종하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언급해야겠다. 정의의 심판을 내리는 것도 아니고, 간청과 소원을 들어주는 것도 아니며, 상과 벌을 내리는 것도 아니고 다스리고 보살피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현실을 조종하는 일이다.
- 신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은 아무도 할 수 없다. 실로 모든 것을 신이 관리한다. 다만 그는 권좌에 앉아서 중앙집중 방식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낱낱의 생명체를 통해서 조종하는 것이다. 신이 이 세상 밖에 있으면 어떻게 세상을 통치할 수 있겠는가? 각 생명체 안에 신의 일부가 있기 때문에 각 생명체의 의도가 그의 의도와 일치하는 것이다.
- 신은 자신의 일부로서 각 생명체에 영혼을 불어넣고 각자의 인식범위 내에서 현실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했다. 사람에서 광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각각 일정 수준의 의식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인간의 의식은 상위 수준에 있지만, 그 때문에 돌멩이들이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또 다른 시간적 차원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현실을 조종하는 데 기여한다. 강들은 흐르기 위해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산은 평지 가운데서 일어나고, 사막과 숲, 육지와 바다는 서로의 영역을 싸워서 차지하는데, 이 모두가 저마다 의식의 한몫을 차지하고 있으며 자기 나름대로 자신의 현실을 조종하려고 한다. 다만 자각의 수준이 높을수록 조종의 기회가 많아질 뿐이다.
- 한 예로 식물을 보자. 그들은 평범하면서도 동시에 신비스럽다. 그들이 살아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을 테지만, 그 단어의 의미만큼 그들을 '살아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간에게 식물은 영혼이 없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자기 자신과 주변을 인식하지 못하는 생물체일 뿐이다. 이것은 아주 큰 실수다. 식물은 자기만의 고유한 신경체계를 가지고 있고 식물 세포들은 서로 간에 전위차를 교환한다. 이 놀라운 생명체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향기와 맛을 구별할 줄 안다. 그 밖에도 그들은 서로 교제할 수 있으며, 기억하고 분석하고 고민까지도 할 수 있다.
- 미국의 한 연구가 클리프 백스터는 식물에 거짓말 탐지기를 연결하여 실험을 해봤다. 실험에는 두 사람이 참가했는데, 한 사람은 가지를 꺾고 나뭇잎을 뜯었고 또 한 사람은 식물을 보살피고 다정하게 대화도 했다. 그래서 그 식물은 두 사람을 구별하는 법을 배우게 됐다. 방에 나쁜 사람이 들어올 때는 식물은 비명을 질러 자동기록기의 바늘을 최대치로 올라가게 했고, 착한 사람이 다가올 때 식물은 고요히 진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실험의 결과로 백스터는 식물이 전자파의 진동뿐만 아니라 생각까지도 감지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실험 참가자가 나뭇잎을 뜯어야겠다는 생각만 해도 식물이 격렬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백스터의 실험을 다른 과학자들도 시도해 봤는데, 결과는 같았다.
- 그러한 실험을 하는 한 연구실에서, 실내의 한 꽃이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감정을 드러냈다. 꽃이 방사하는 전자기파의 파형을 측정하는 실험실의 한 여자연구원이 꽃과 다정하게 대화를 하면서 물을 줄 때, 그녀는 꽃이 '가르릉 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다른 사람들이 들어올 때와 달리 꽃은 그녀의 모습에 가득 찬 기쁨을 보였다. 그 꽃이 질투의 징후를 보여주기 시작했을 때 연구원들은 더욱 놀랐다. 꽃이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남자와 사랑의 유희를 시작하자 그 꽃은 다름 아닌 우울 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 식물뿐이겠는가! 여러 연구를 통해 DNA조차 원시적인 반응력을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다. 스펙트럼 측정기로 측정한 DNA 분자는 구조적인 정보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DNA의 '기분'에 대한 정보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DNA 분자들의 기분이 편안하면 연구가 순조롭게 진행된다. 스펙트럼 측정기 상자를 가열하면 그들은 고열에 반응하여 '깍깍거리는' 소리를 낸다. 특정한 온도에서 DNA는 파괴되면서 죽는다. 놀라운 것은 DNA가 파괴된 비어 있는 상자에서 40일 동안 그들의 '임종의 소리'가 들렸는데, 스펙트럼 측정기는 물질적으로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죽은 분자들의 유령방사파를 감지했다. 이러한 결과는 80년도 중반쯤에 소련 과학 아카데미물리기술연구소에서 연구했던 러시아 과학자 표트르 고랴예프가 최초로 발견했다. 하지만 정통 과학은 예상대로 그러한 연구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 식물은 희미하긴 하지만 우리처럼 느낄 수 있다. 우리가 그를 보호하고 돌봐주면 우리를 사랑하면서 자신의 열매로써 우리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를 화나게 한다면 그는 무엇을 느낄까?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고도로 진화한 두 발 달린 존재가 옆을 지나가다가 무정하게도 가지를 꺾을 때, 나무는 무엇을 느낄까? 두려움, 통증, 노여움일까? 그 두 발 달린 존재가 도끼를 들고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생명체에게 다가갈 때 그가 느끼는 공포감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을까? 도끼날이 몸에 박히면서 생명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떠나갈 때 나무가 느끼는 소름 끼치는 고통을 우리는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 식물을 생물학적 재료로 다루는 사람들의 가혹함을 말없이 목격하는 식물이 느낄 감정을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의식 수준이 높은 생명체들이 느끼는 만큼 예민하게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깊이 잠자고 있기를 바란다. 세상은 어쩔 수 없이 가혹하고, 한 생명이 다른 생명에 의지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다. 하지만 인간이 환상에 빠져서 오직 자기만이 영혼과 의식을 가지고 있고 다른 모든 것은 멸시해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생각이 깊어서 펜듈럼의 문명으로 타락하지 않은 민족들은 동물을 죽이거나 나무를 베기 전에 그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벌레를 밟지 않도록 항상 아래를 보고 걸어 다니고, 오솔길을 다니더라도 괜히 풀을 밟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존경받을 자격이 있고 이 세상 모든 것은 평등하다. 사람이 이런 견해를 견지하지 않는다면 그의 존재가치는 어떻게 되겠는가?
-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와 비교했을 때 인간이 상대적으로 좀 더 깨어있는 것일 뿐이다. 삶이란 일종의 꿈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는 꿈꾸는 생명체들이 살고 있는 놀라운 세상이 있다. 각자는 자신의 꿈속에서 살면서 항상 뭔가를 원하여 목표를 가지고, 또한 권리가 있어서 목표를 달성하고자 한다. 생명체는 저마다 자신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완성의 절정에 도달했다고 자만하는 인간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 '왜 그럴까? 무엇 때문에?' 목표달성의 과정이 진화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진화는 신이 친히 선택한 창조의 방법, 현실 형성의 방법이다.
- 한 가지 중요한 결론은, 신이 각 생명체에게 각자의 지각 수준에 따라 현실을 형성할 권리와 자유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 지각의 수준에 따라, 꿈꾸는 자가 무능하게 상황의 영향에 좌우되는 무의식적인 꿈속의 삶을 살거나, 혹은 의도의 힘으로 통제하고 조종할 수 있는 의식적인 꿈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선택의 자유가 있지만 모두가 그 특권을 사용하지는 못한다. 의도가 가능태 공간의 필요한 구역을 실현시킬 수 있다면 진화의 과정은 왜 그런 식으로 계속되는 것일까? 사실 모든 생명체가 깨어 있는 의식으로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의도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무의식적인 꿈속에서 흐리멍덩하게 뭔가를 원할 뿐,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명료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의 의도는 분명치 않아서, 흐릿하고 무의식적이다.
-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사람은 동물들보다 더 진화한 것도 아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펜듈럼은 생각의 힘으로 현실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앎조차 강탈해 갔다. 펜듈럼의 파괴적인 게임에 빠져버린 사람은 부정적 태도와 최악의 기대를 실현시키는 외부의도의 반작용에 만족해야만 한다.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내부의도의 비좁은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목표를 힘겹게 쟁취해야 한다.
- 그러나 높은 의식 수준을 가진 사람은 이 울타리를 벗어나 현실이 외부의 영향이 아닌 의도에 종속되는 의식적인 꿈을 꿈으로써 자기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 만약 신의 일부분이 우리 안에 내재한다면 우리의 의도는 곧 신의 의도가 된다. 우리는 자신의 현실을 형성하면서 동시에 신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다. 당신이 어떤 의도를 표명하면 그것은 곧 신의 의도다. 이것이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라고 어떻게 의심할 수 있겠는가? 이를 위해 당신은 자신의 권리만 되찾으면 되는 것이다. 간청하지 말고 요구하지도 말고 추구하지도 말고, 창조하라. 자신의 현실을 깨어 있는 의식의 의도로써 형성시켜 가는 것이다. 신이 자기 자신에게 간청할 수 있는가? 신이 자신을 부탁할 수 있는 누군가가 따로 존재할까? 그는 원하는 것을 가질 것이다.
- 당신이 신께 기도할 때, 그것은 신이 자기 자신에게 기도하는 것과 똑같다는 말이다. 신에게 무엇을 간청할 때, 그것은 신이 자기 자신에게 간청하는 것과 똑같다. 반대로 이해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당신이 자기 자신에게 기도하고 자기 자신에게 부탁하는 것이기도 하다.
당신의 의도가 신의 의도라면 당신의 두려움과 의심은 누구의 것인가? 마찬가지로 그의 것이다. 그는 당신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선택해도 되는 것이다. 어려운 길을 선택하면 온갖 장애물을 극복하며 어렵게 목표를 달성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을까? 당신이 '그냥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믿음대로 받는 것이다. 신께서 과연 그리도 무능해서 뭔가를 추구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는 다루기 힘든 현실과 안간힘으로 싸우느라 진을 뺄 필요가 없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새로운 현실을 이루어낼 능력이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이것이 가능하다고 인식하기만 하면 똑같은 능력을 얻게 된다. 그러니 꿈에서 깨어나 처음부터 갖고 있던 특권을 활용하지 않겠는가?
- 이런 식으로 사람은 자신의 생각으로써 자기 세계의 층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몇 가지 법칙으로써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 거울의 법칙을 공식으로 만들어보자. 세상은 그에 대한 당신의 태도를 거울처럼 그대로 반영해 준다. 세상은 당신이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바에 고스란히 그대로 동의한다. 하지만 왜 대개는 불길한 예감만 현실화되고 희망과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까? 거기에는 이유가 따로 있는데, 그것이 바로 두 번째 거울의 법칙이다. - 그 반영은 영혼과 마음의 일치에 의해 형성된다. 이성이 가슴의 명령과 모순되지 않을 때, 또는 가슴이 이성의 명령을 위반하지 않을 때 불가사의한 힘인 외부의도가 일어난다. 외부의도는 생각이 만들어내는 심상에 상응하는 가능태 공간의 섹터를 물질화시킨다. 영혼과 마음의 일치 속에서 그 심상은 윤곽이 뚜렷해지면서 지체 없이 현실로 실현되는 것이다.
- 하지만 실제 삶 속에서는 영혼이 어떤 것을 갈망할 때마다 마음이 그것을 의심하며 놓아주지 않고, 아니면 반대로 마음이 어떤 확실한 논거를 제시할 때 영혼은 거기에 시큰둥하여 관심을 주지 않는다. 일치가 깨지면 심상은 흐릿해지고 마치 둘로 나누어진 것처럼 보인다. 영혼은 이것을 원하는데 마음은 저것을 고집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영혼과 마음은 두려워하거나 싫어하는 등의 부정적인 일에서만 유감없는 의기투합을 보여준다. 무엇을 미워할 때, 사람은 온 영혼과 마음으로 미워하고 두려워할 때는 정말 두려움에 완전히 사로잡힌다. 마음과 영혼이 온전히 일치하여 싫어하는 가운데, 피하고 싶어 하는 심상은 오히려 뚜렷이 형성되는 것이다.
- 우리가 <리얼리티 트랜서핑> 제1권에서 언급했던 슬라이드 기법을 통해 심상을 만들어내면 물질세계라는 거울이 이를 현실로 실현시켜 줄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심상 외에도, 자기 세계의 층에서 지속적이고 좋은 환경을 조성해 주는 변하지 않는 배경을 유지해야 한다. 아마도 당신은 거울마다 자신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나 보이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얼굴은 같지만 거울마다 다른 뉘앙스를 느끼게 한다. 감정적인 뉘앙스, 기분, 심지어 심리상태까지, 미묘하지만 포착할 수 있는 뉘앙스들이 구별되어 느껴지는 것이다. 각각의 거울 속에서 그것은 착하거나 화내는 모습이거나, 건강하거나 아파 보이거나, 매력적이거나 호감 가지 않거나, 따뜻하거나 냉정하게 보일 수도 있다. 거울의 반사면은 대상의 정확한 모습을 그대로 반영해주어야 할 텐데 무엇 때문에 그러한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
- 중세시대 베네치아 인들은 거울의 독특한 매력을 발견했다. 베네치아의 유리거울은 놀라운 품질로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거울에 그런 특별한 속성을 부여했던 것은 유리가 아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람들은 보통 거울보다 베네치아 거울로 자기 모습을 비춰보는 것이 훨씬 기분이 좋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되었다. 거울에 반사된 얼굴이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알고 보니 베네치아 장인들에게는 그들만의 특별한 비법이 있었다. 그들은 거울의 반사인 아말감(거울을 만들 때 유리에 발라서 반사효과를 얻는 수은합금 -역주) 칠에 금을 섞어 넣었는데, 그래서 반사된 색의 스펙트럼에서 따뜻한 색채가 강했던 것이다.
- 당신도 자신을 위해 이중거울의 작은 한 부분을 이처럼 개량할 수 있다. 당신의 세계의 층을 아늑하게 만들어주는 자신만의 특별한 아말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과 주변 현실의 여러 환경에 대한 태도, 즉 현실에 대한 다양한 반응으로써 세계의 층을 구축한다. 이런 관계의 스펙트럼에서, 우세한 배경이 될 하나의 본선(the main line)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당신은 '세상이 나를 보살펴주고 있다'는 공식을 본선으로 선택할 수 있다. 사람들은 화날 일이 생기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불만을 토해내지만 좋은 일은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인다. 마치 조개가 반사적으로 껍질을 여닫듯이, 습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한다. 이제는 조개보다 한 단계 위로 올라가서, 꿈에서 깨어나서 의식적으로 태도를 표하는 것이 얼마나 이로운 일인지를 맛보라. 세상을 느끼는 감각의 방향을 본선에 맞추어 의식적으로 조정해 보면 그에 따라 거울이 어떻게 반응을 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현실을 조종하는 당신의 첫 번째 걸음이 될 것이다.
- 그때는 그랬던 이유는, 세상이 당신을 보살펴줬고, 당신은 그것을 어렴풋하게 느끼기만 하고 거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특별한 불만도 표하지 않았다. 당신은 마냥 좋았고, 그게 전부였던 것이다. 아이는 투정을 부릴 때도 불만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는다. 엉엉 울고 발을 구르고 두 손을 휘젓지만 세상은 살금살금 부드럽게 그를 안으면서 다정하게 말한다. "그래, 아가야. 뭐가 묻었니? 손이 더러워졌어? 자, 그럼 가서 씻자!"
- 그러나 그 순간에는 그는 자신이 삶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세월이 흐른 후에야 그는 지금보다 그때가 모든 것이 얼마나 더 좋았는지를 깨달으면서 그때를 회상하게 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왜 삶의 색채가 바래지고 그 평온감이 근심스러운 불안감으로 변해버리는 것일까? 나이가 들수록 문젯거리가 많아져서 그럴까? 그렇지 않다. 사람은 자라면서 계속 부정적인 태도를 표하는 성향을 얻어가는 것이다. 불만감은 그저 편안해하는 만족감보다 더 강력한 감정이다. 살다 보면 많은 일들이 일어나지만 사람은 자신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므로 세상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제자는 은혜를 잊고 버릇이 나빠져서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나빠!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니까! 당신은 날 위해주지 않는군!" 그는 세상에 대한 태도를 바꾼 것이다. 불만이 가득 찬 영혼과 변덕스러운 마음은 이 부정적인 태도에 있어서만은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다. 그렇지만 세상은 거울이기에, 씁쓸한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내 사랑, 네가 원하는 대로 될 거야"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결과, 현실은 그 사념을 그대로 반영하여 나쁜 쪽으로 변해간다. 그렇게 불만의 이유는 늘어가고, 그리하여 세상과 사람의 관계는 악화되어 가는 것이다. 바로 그런 식으로 한 시절의 총아로 귀여움을 받던 사람은 어느덧 소외계층으로 전락하여 세상이 자신에게 빚을 갚지 않는다고 불평만 늘어놓는 것이다.
- 참 딱한 일이다.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 모든 것을 망쳐놓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거울에 비치는 어떤 불쾌한 면을 보고 거기에 주의를 뺏겨서는 불만스러운 태도로써 반응한다. 그 결과로 모든 것이 이전보다 더 나빠지는 것이다. 반영되는 현실은 마음속의 심상을 따라 점점 더 어두워진다. 이리하여 각 사람의 세계의 층은 갈수록 그 생생한 색채를 잃어버리고 점점 더 암담하고 혼란스러워지기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을 수가 있다! 그 고요하고 평온한 느낌, 어린 시절의 아이스크림 맛, 상쾌한 기분, 밝은 희망과 삶의 즐거움으로 말이다. 그것은 매우 간단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쉬운 일이다. 하지만 믿지만 말고 스스로 한 번 시험해 보라. 스스로, 의식적으로 현실에 대한 태도를 바꾸면 세계의 층을 새롭게 창조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 당신이 외부세계에 대한 느낌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그런 세계가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날 것이다. 이것은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라는 구호가 아니라, 자신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작업방식이다.
- 이 순간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는 자신의 태도를 스스로 선택할 것을 생활의 규칙으로 삼아보라. 현재가 당신이 바라는 만큼 좋지는 않더라도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쨌든 모든 것은 그리 나쁘지 않고, 이보다 훨씬 더 나빠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늘에서 돌덩이가 떨어지지도 않았고 서 있는 땅에서 불길이 치솟지도 않았고, 야생 짐승들이 뒤를 쫓아오지도 않았으니까.
- 주변을 돌아보라.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당신을 보살피고 있다. 이 나무와 꽃들은 바로 당신을 위해 자라고 피어난 것이다. 바로 이 태양과 하늘, 구름들도 당신은 신경조차 쓰지 않지만, 이들이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 하지만 거울이 변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도 변하지 않았다. 단지 당신의 태도가 달라졌고, 따라서 당신 생각의 반영으로서 그런 현실이 나타난 것일 뿐이다.
- 이제 당신은 돌아와 세상과 함께 있으므로 모든 일도 다시금 옛날처럼 이어질 것이다. 다만 이제는 두 번 다시 배은망덕하게 충실한 옛 하인을 욕하지 말라. 그리고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일은, 재촉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 번째 거울의 법칙대로, 세상이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는 무엇보다도 참을성과 자제력이 필요할 것이다. 당신은 지금 자신의 현실을 형성시키기 위해 실질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 중임을 이해해야 한다.
- 작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많은 상황들 가운데 아주 사소한 상황을 만날 때에도,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어떤 경우에도 아말감 공식을 반복하라. 행운을 만나면 과연 세상이 당신을 염려하고 보살피고 있음을 확인하기를 잊지 말라. 사소한 일이라도 그때마다 그것을 확인하라. 불행한 일을 당할 때도 여전히 모든 것이 의도 조율의 원칙에 따라 필요한 대로 잘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당신의 반응은 한결같이 '세상은 어떤 경우에도 나를 보살펴주고 있다'는 태도여야 한다. 운이 좋으면 그 일에 특별히 주의를 보내고, 운이 안 좋을 때는 의도 조율의 원칙을 따르라. 그러면 당신은 늘 행복한 인생 트랙에 머물 것이다. 세상은 당신을 불쾌한 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다. 세상이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지는 당신이 알 수 없다. 그냥 세상을 믿어보라.
- 불신의 얼음을 깨뜨리라. 아무리 사소한 문제가 생길 때라도 '세상이 나를 보살펴주기를 바란다'고 자신에게 말해보라. 물론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앉아만 있으란 말이 아니다. 모든 것이 자기 안에 갖추어진 대로 스스로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리라는 생각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말이다. 거울은 '당신이 그리 생각한다면 그리 될 것'이라며 당신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해 줄 것이다.
- 세상이 당신의 사소한 일부터 중요한 문제까지 모두 염려하고 보살펴주도록 허락하는 습관을 만들어보라. 우산을 안 챙기고 집을 나섰는데 막비가 오려고 한다. 집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자신에게, "나는 나의 세계와 산책하러 간다"고 말하라. 당신의 세계에게 "나를 보살펴 줄 거지. 그렇지?" 이렇게 말하라. 그러면 당연히 그는 "그럼, 그럼 내 사랑"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주저 없이 그를 신뢰해도 된다. 비는 안 올 것이다. 혹시 오더라도 그는 때맞게 피할 곳을 마련해 줄 것이다. 그러나 혹시 그렇지 않아서 세상이 보살펴주지 않았다는 의심이 들더라도 노여워하지 말라. 당신은 거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 거울에, 세상에 대한 당신의 느낌이 고스란히 반영되는 것이다. 크게 낙심할 필요가 없다. 의심과 싸우는 것은 더더욱 부질없는 짓이다. 실수와 실패가 일어날 자리를 남겨두라. 필요한 것은 본선을 따라 방향을 유지하는 일이다.
- 세상이 당신을 보살펴주도록 허락하고 나면 많은 부분에서 세상을 신뢰해도 된다. 사람이 모든 문제를 혼자서 다 해결할 수는 없다. 그 문제들을 세상에게 맡기라. 세상은 당신보다 더 많은 가능성과 기회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당신의 세계의 층은 무수한 타인의 세계의 층들과 겹쳐 있기 때문에 당신의 의도만으로 모든 위험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당신의 의도를 자신의 안전에 집중하는 대신, 당신을 보살피고 보호해 주는 세계의 층을 형성하는 데에 집중하라. 그러면 당신의 세계의 의도가 작동할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가장 많이 염려하느냐에 따라 특별한 아말감을 선택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나의 세계는 나를 위해 최상의 것을 골라준다. 내가 가능태 흐름을 따라 움직이면 세계는 나를 마중 나온다. 나는 내 의도로써 나의 세계의 층을 형성한다. 나의 세계는 나를 보호해 준다. 나의 세계는 나를 문제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나의 세계는 내가 안락하게 살 수 있도록 보살펴주고 있다. 나는 주문하고, 나의 세계는 그것을 수행한다. 나는 모를 수 있지만 나의 세계는 나를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나의 의도는 실현되고, 모든 일이 되어야 할 대로 펼쳐진다.'
- 이 외에도 자신만의 아말감을 별도로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아말감 공식을 끊임없이 확언해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것이 습관이 될 때까지 집요하게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러고 나면 모든 것이 아주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이 단순한 방법 속에는 당신이 상상도 못 하는 강력한 힘이 담겨 있다. 세상에 대한 당신의 태도를 조종할 때, 당신은 현실의 조종자가 된다. 이중거울은 당신의 평온한 삶을 세상이 알아서 보살펴주는 그런 가능태의 섹터를 현실로 실현시켜 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당신은 자신에게 아주 아늑한 현실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 반갑고 유쾌한 사건들의 찬란한 물결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 나는 지금 조금도 과장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세계의 층이 당신의 눈앞에서 문자 그대로 변모할 것이고, 당신은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앞으로 당신은 세상이라는 거울을 더 이상 이전처럼 보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지금, 변화의 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당신은 느꼈을 것이다. 당신과 당신의 세계는 다시금 함께 있게 되었다. 당신의 세계가 모든 것을 알아서 챙겨줄 것임을 알라.
- 사람은 세상에 대한 자신의 느낌으로써 개별적 현실인 각자의 세계의 층을 형성시킨다. 이 현실은 그 사람의 태도에 따라 독특한 뉘앙스를 띠게 된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거기에는 일정한 '기상 조건'이 조성된다. 햇빛 눈부신 신선한 아침이 있는가 하면 흐리고 비 오는 날씨도 있고, 때로는 사나운 태풍이 불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연재해가 일어나기도 한다. 주변 현실은 어느 정도 사람의 직접적 행동의 결과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 일반적 통념이다. 하지만 사념체의 힘은 결코 작지 않다. 다만 그 작용이 그리 확연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일 뿐이다. 어쨌든 많은 문제들이 부정적인 태도에 의해 일어난다. 이렇게 비물질적인 경로로 일어난 문젯거리를 물질적으로 풀어야 하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복잡해지는 것이다.
- 일반적으로 개인적 현실의 상황은 그 사람이 주변의 모든 것을 어떤 감정을 가지고 대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동시에,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의 감정적 분위기를 좌우한다. 그래서 피드백의 순환고리가 형성된다. 사념의 심상이 물질세계라는 거울에 비쳐서 현실이 형성되는데, 그것이 다시 그 사람의 생각과 심상을 대부분 결정해 버리는 것이다. 거울 앞에 설 때 사람은 자신을 내부로부터 보려고 하지 않고, 거울 속 그림자의 모습에만 온통 주의를 기울인다. 그 결과 피드백 고리에서 사념의 심상 대신 그림자가 주인공 역할을 차지해 버리는 것이다. 사람은 마치 마법에 흘린 것처럼 자신의 복제물을 보면서 거울에 사로잡혀버린다. 원본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주의가 그림자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자신이 필사적으로 기피하던 그것을 얻고 만다.
- 일반적으로 사람의 주의는 부정적 감정에 전적으로 지배되고 있다.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생각에 온종일 사로잡혀 있다.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원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이토록 뒤틀려 있다. 하지만 거울은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혹은 원하지 않는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정확하게 더도 덜도 아닌 그 심상의 내용만을 그대로 반영해 준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자신이 필사적으로 기피하는 그것을 스스로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내 혀가 나의 적'이 아니라 '내 생각이 나의 적'인 것이다. 이 모두가 말도 안 되지만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 게다가 타고난 죄책감까지 있다면 전혀 가망이 없다. "내가 잘못했지? 내가 죽어라 일해서 갚아야 하는 거지?" - "그래, 넌 벌을 받아야 하니까 곧 죗값을 치를 거야." 달리 도리가 있겠는가? 무의식 속에서까지 자신의 잘못을 느끼고 있다면 거울에 무엇이 반영되겠는가? 에누리 없이 그에 따른 징벌일 것이다!
- 걱정과 공포가 즉시 실현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것을 두려워한다. 그중 많은 부분이 단지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 것뿐이다. 불행과 재해는 평균적인 가능태 흐름에서 벗어난 변칙적인 사건이다. 단, 그 원치 않는 사건이 흐름에서 가까우면 사람이 자신의 생각으로써 그것을 끌어당기므로 그것은 반드시 일어나고 마는 것이다.
- 의심은 이와는 반대 방식으로 작용한다. 공포는 어떤 사건의 실현 가능성에 주의를 고착시키는 반면에, 의심은 어떤 사건이 발생하지 않을 것에 대해 우려하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많은 경우에 의심하는 일은 누군가가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실현되어 버린다. 왜 고의적인 것처럼 느껴질까? 그것은 사람들이 거기에 머피의 법칙이 작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거울이 단순히 사념의 내용을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 어떤 경우든, 뭔가를 피하려는 욕망은 오히려 그것과 맞부딪칠 가능성을 증가시킨다. 모든 것이 그 반대로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번번이 화를 내며 흥분하고 심지어는 대부분의 시간을 노여움에 떨면서 살고 있다. 이 노여움이 그의 세계라는 전체 그림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결과적으로 ‘나는 심기가 불편하다'는 통합적인 심상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각각의 현실이 만들어질 때 모든 것이 이 현실에서 불편함이 지속되고 악화되는 쪽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 사람들은 자신의 비관적인 태도로써 스스로 자신의 세계의 층을 어둡게 칠하고 있다. 영혼의 열광적인 감성과 마음의 강력한 확신이 부여된 태도는 무엇이든 현실로 그대로 반영된다. 그리고 사람이 흥미든 혐오감이든 그 무엇을 표출하려고 하든 간에 그 하나하나가 현실로 반영된다. 여기에 '거울은 단지 태도의 내용에 주목할 뿐, 그 방향에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네 번째 거울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이다.
- 원치 않는 것이 실현되는 것을 볼 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마음속에 있는 심상을 보려 하지는 않고 그것의 반영에만 주의를 뺏긴 채 그것을 바꿔놓으려고 애쓴다. 그 반영이란 곧 물질적 현실이고, 거기서는 내부의도의 틀 안에서만 행동할 수 있다. 즉, 세상은 당신의 말을 듣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어서 온 힘을 다해 그것을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강제로 끌고 가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많은 경우에 아예 해결책이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반영을 붙잡아 어떻게든 해보려고 애쓰고 있다. 이 모두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 어느 쪽이든 간에 역시 당신은 그 대상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젠 그 생각의 내용만이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제 넌 꺼져 버려!" 혹은 "아, 이젠 지긋지긋해!"와 같은 미움의 감정은 대상으로부터 멀어지는 방향을 향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태도는 모두 불만의 대상을 붙들고 있다. 영혼과 마음의 일치 속에서 태어난 격한 감정은 심상에 선명한 윤곽을 그려준다. 그 결과 그 심상의 내용에 상응하는 것들이 우세하게 반영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가난한 이들은 자꾸만 더 가난해지고 부자들은 더욱 부유해진다. 그들은 모두 세상이라는 거울을 바라보면서 제각기 그것으로부터 자기 현실의 청사진을 찍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 현실은 사람을 늪처럼 빨아들인다. 연금을 받으려고 긴 줄을 서 있는 할머니, 무거운 가방을 들고 만원 버스에 몸을 싣고 있는 지친 여인,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는 환자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사념으로써 그런 우울한 현실 속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같은 시간에 어떤 사람은 인생을 한껏 즐기고 있다. 바다, 요트, 여행, 화려한 호텔, 비싼 레스토랑 - 그들은 마음이 원하는 모든 것을 누린다. 상황의 성격에 상관없이 어떤 경우든, '우리는 이렇게 살아'라는 각자의 생각이 현실 속에서 확증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 존재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산다. 거울이 그것을 확증해 주고, 그로써 심상의 내용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 인생의 초기 조건은 서로 다르다고, 즉 누구는 가난 속에 태어났고 누군가는 풍족한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이의를 달아봤자 소용없다. 물론 삶이 어떤 지점에서 출발하느냐에 따라서 전개되는 양상이 크게 결정되기는 한다. 하지만 '초기 자본'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할 수는 없다. 최하층민이 상류층으로 상승하거나, 혹은 그 반대로 되는 예가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그것은 드문 예외가 아닐까? 맞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예외가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확고부동한 법칙은 아닌 것이다. 아무리 깊은 호랑이 굴속에 들어가더라도 이것을 알아차리라. 모든 것은 극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그 방법은 전혀 몰라도 괜찮다. 구체적인 방법은 스스로 드러날 것이다.
- 당신은 자신이 바꿀 수 없는 상황에 지배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무대의 소품, 곧 환상이며, 원하기만 하면 쉽게 깨뜨릴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모두가 닫혀 있는 순환고리 안을 무의식적으로 맴돌고 있다. 닫힌 고리란 이것이다. 우리는 현실을 관찰하고 -그에 대한 태도를 표하고- 거울은 그 태도의 내용을 현실로 고착시킨다.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이 고리를 빠져나와야 하는 것이다.
- 거울 안에서는 가능성이 너무나도 적다. 그 대신 당신은 현실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럴 때 외부의도가 작동을 개시한다.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울의 반대편에는 상상하지도 못할 사건의 가능태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외부의도를 작동시키려면 '그림자로부터 사념의 심상으로 주의를 돌려야 한다'는 다섯 번째 거울의 법칙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자신의 생각을 조종해야 한다는 뜻이다. 원하지 않고 피하고 싶은 것을 생각하지 말고, 원하고 성취하고 싶은 것을 생각하라.
- 거울 속의 그림자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원시적인 반응이 멎고, 그 자리에 의도적이고 목표가 있는 심상이 반영되어 나타날 것이다. 거울 속에 보이는 것에 대해 습관적으로 불만을 터뜨리는 대신, 방향을 반대로 돌려 원하는 것의 심상을 생각 속에서 형성시키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울의 미로를 빠져나가는 방법이다. 그러면 세상이 서서히 움직임을 멈추다가, 마침내는 나를 향해 움직여오기 시작한다. 이제 나는 뛰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고, 현실이 나를 맞이하러 다가오는 것이다. 그리고 얼굴에 불어오는 바람의 느낌부터 벌써 다른데, 그것은 다름 아닌 외부의도의 바람이다.
- 유일한 어려움은 상황이 특이하다는 데 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현실을 보는' 부분이 가장 뒤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보이는 대로 말한다'는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당신이 자신의 관점을 세상으로 내보내면 세상은 메아리처럼 그 무기력함을 되돌려 보내는 것이다.
- 이 모든 혼란에 지친 거울의 독백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넌 기분이 안 좋구나. 그래, 좋아지기 위해서 뭘 원하지?'
'넌 뭔가를 원하지 않는군. 그럼 뭘 원하는지를 명확히 말해주지 않겠니?'
'뭔가가 네 마음에 들지 않는군. 그렇다면 제발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려주지 않겠니?'
- 이 모두가 사실은 참으로 단순한 것이다. -부정적인 태도를 긍정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 생각을 검열하여 '아니' 불(不) 자의 접두사를 모두 제거해야 한다. 불만, 부정적인 상념, 부인, 불찬성, 성공에 대한 불신 등이 모든 쓰레기를 쓸어 담아 쓰레기통에 던져버려야 한다. 모든 생각을 당신이 원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거울 속에 유쾌한 것들만이 반영될 것이다.
- 좋은 현실이 그 자리에서 즉시 형성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인내와 깨어 있는 의식이 필요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예전과는 다르다. 당신은 주변 현실에 반응하지 않으며, 주도권을 잡고 스스로 의도적으로 세상에 자신의 사념체를 보낸다. 반영이 부정적으로 보이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태도를 표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특이하다. 하지만 당신은 보통 사람들처럼 상황에 사로잡혀 있을 텐가, 아니면 내 마음대로 운명을 다루고 싶은가?
- 사람의 기분은 상황의 좋고 나쁨에 따라 덩달아 조성된다. 비관적인 성격은 기분이 늘 우울해져 있게 만든다. 그러나 당신은 그 반대로 해야 한다. 즉, 기분을 의도적으로 좋아지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현실을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북돋아질 수 있다. 나 자신의 의도로써 내 현실의 뉘앙스를 선택하는 것이다. 상황과 상관없이 나 스스로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외부의 자극에 원시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의식적으로 대처하는 법이다. 당신은 이런 습관을 가져야 한다. 청각적, 시각적 슬라이드가 최고의 기분을 얻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가장 이상적인 그림은, 목표가 이미 달성되어서 당신이 아주 기분 좋아하는 모습이다.
- 다른 한편, 한동안은 당신의 세계의 층에서 아무런 변화의 기미도 찾아볼 수가 없으리라는 점을 알고 있어야 한다. 오히려 여러 가지 불쾌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건 어떻게 된 일인가? 그것은 모두 현실과 새로운 관계를 갖는 차원으로 이동할 때 일어나는 일시적인 불편이다. 물질 현실의 거울이 그림자를 반영하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지 않은가. 어떤 경우에도 눈을 다른 데로 돌리지 말고 자신의 길을 견지해야 한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동안에도 침착하게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뒤돌아보지 말라. 그러면 돌이 되리라'는 어떤 이야기처럼, 뒤돌아보면 일이 허사가 되고 만다. 거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내가 내 생각 속에 형성시켜 놓은 심상은 머지않아 반영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유혹에 빠져서 뒤돌아보지 않고 내 길만 따라가면 거울 속에 나의 현실이 형성될 것이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될 것이다.
- 현실의 거울을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걸러 보기'를 새로운 규칙으로 삼으라. 그것은 좋은 것을 찾아내고 나쁜 것은 무시하는 필터로써 여과하여 보는 방법이다. 얻고자 하는 것에 주의를 집중하라. 전에는 어떻게 했는가? '난 뚱뚱하고 못생겼어. 그런 내가 싫어' 하고 반응했다. 그러면 거울은 '그래, 맞아. 그건 사실이야' 하고 맞장구치며 그것을 더욱더 움직일 수 없는 현실로 고착시켰다. 이제는 당신에게 다른 과제가 주어졌다. 당신의 모습에서 마음에 드는 특징을 찾아내고, 동시에 원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 순간부터 당신은 '날마다 더욱 더 나아진다'는 긍정적 변화의 증거를 찾아내고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방법을 규칙적으로 실천하면 곧 놀라운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이다.
- 기본적으로, 무엇보다 먼저 태도를 취하고 나서 그다음에 거울을 봐야하는 것이지 그 반대로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것을 습관화하려면 일정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게임은 큰 가치가 있다. 이제는 현실이 당신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현실을 관리하게 되는 것이다. 물질적 실현에는 관성이 작용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반영은 시간을 두고 서서히 긍정적으로 변화해 가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신의 세계의 층에 유쾌한 것들이 많이 축적되고 나면 더 이상 당신이 나서서 힘을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거울의 순환고리가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돌기 시작할 것이다. 그 순환고리를 가동해 놓은 다음 자신의 의도로써 가속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다음에는 모든 것이 매우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 지루해하는 어떤 독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야! 믿을 수 없어! 세상 일이 그렇게 간단한 거라면..." 어쩔 수 없다. 믿고 싶지않다면, 돌아가서 거울 순환고리 속의 반영을 따라가라. 행운을 빈다.
- 이제 거울 속에서 원하는 현실을 얻으려면, 사념으로써 의도적으로 심상을 만들어내고 반영이 지연되는 데에는 신경 쓰지 말고 '걸러 보기'를 하면서, 새로운 현실이 발현되는 것을 찾아내는 기본적인 작업만 하면 되는 것이다. 다만, 지연 현상을 이해하더라도 이 요상한 거울의 세계에 적응한다는 것이 좀 어려운 일이긴 하다. 현실은 손에 들린 막대기처럼 즉시 복종해야 한다거나, 아니면 아예 복종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고정관념이 사람들의 의식 속에 굳어 있다. 소망이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건 그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 아닌가. 사람들은 마법이란 그저 꿈이나 꿔볼 수 있을 뿐, 초월적인 것이고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 마법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모든 사람의 통념이다. 환상의 세계는 저 건너편 상상의 나라에 있고 여기에는 실질적인 삶이 있으니, 이는 엄연한 사실이고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다. 마법사와 초능력자들은 자기들만의 특별한 세계에서 살고 있고, 우리같이 평범한 문제를 가진 평범한 사람들은 이곳에서 평범한 삶을 근근이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이지만,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이중거울의 법칙을 알아둘 필요가 있을 뿐이다. 이 지식은 공개되어 있다. 이것은 너무나 단순하고 평범해서 '마법' 일 수가 없다. 하지만 알라딘의 마술램프도 놋쇠로 된 평범한 물건이었고 성배도 금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대한 것들은 모두가 매우 단순하고, 자기 자신을 뽐내거나 숨어 있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쓸모없고 가치 없는 것들이 항상 신비의 장막 뒤에 숨어 있는 법이다.
- 신비의 베일을 젖히고 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온 마법은 더 이상 신비의 대상이 아니다. 일상 속에 자리 잡은 마법은 그 현혹적인 신비감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상적인 현실이 일상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고 낯선 현실로 변하는 것이 트랜서핑이 가져다주는 변화의 매력이며, 당신은 이렇게 전환된 현실을 자각몽처럼 조종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울의 법칙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
- 당신이 이미 트랜서핑에 대해 다 알고 있고 목표의 슬라이드를 사용할 줄 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을 때와 같은 느낌이다. 마음은 걱정하기 시작하고 참을성이 없어진다. 내가 뭔가를 잘못하고 있는 건가? 이게 전부 엉터리인 것은 아닐까? 사실을 말하자면, 세상은 한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으며, 거울 속 반영의 실현 과정은 진행 중에 있다. 이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럴 때, 거울이 반영을 위해 뜸을 들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지식과, 직접적인 행동 후에 결과를 당장 확인하려고 하는 옛 습관 사이에서 마음의 저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결과가 안 보이면 마음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그것이 효과가 없거나 잘못되었다고 판단한다. 그런 경우에 거울은 무엇을 반영할까? 그렇다. '바로 그것'을 되비쳐준다. 따라서 과정이 지체되거나 옆으로 새는 것이다.
- 자, 이제 마음은 원하는 선물을 받기 위해 출발한다. 이제 인내심을 가지고 즐거운 준비의 시간을 보내면 되는 것이다. 영혼은 노래를 부르고 마음은 만족스러운 춤을 추고 있다. 왜 행복하지 않겠는가? 장난감을 받으러가고 있지 않은가! 트랜서핑을 실천하는 사람은 자신의 선택이 필연적으로 실현되게 하는 확고한 법칙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목표에 주의를 고정시켜야 한다.
- 금세 휙 하고 지나가는 순간적인 느낌이지만 그것을 포착해 보라. 적대적이고 말썽 많고 힘들고 불편한 세상이 갑자기 당신을 위해 즐겁고 편안한 곳이 되는, 믿을 수 없는 일을 한 번 상상해 보라. 당신이 세상에게 그것을 허락해 주라. 당신이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 행복해지려고 애쓰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속으로 행복을 들여보내라는 말이다. 불가능해 보이는 성공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만큼 당신은 행복해진다. 자신에게 행복해지라고 강요하지 말고 행복해할 수 있는 사치를 그저 허락해주라. 그냥 세상을 믿어보라. 세상은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고,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해나갈 것이다. 당신은 거울이 어떻게 마음속의 심상을 그대로 반영해줄 수 있을지, 그 방법에 대해 걱정하고 있지는 않은가? 거울 앞에 서 있을 때는 그저 보고 싶은 반영에 대해서만 생각하라. 세상이라는 거울은 완벽하게 작동한다. 다만 그 작동에 약간의 지연이 있을 뿐이다.
- 세상을 정말 믿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지 않는 경우를 위해서 거울의 법칙이 두 가지 더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더 쉬울 수 있다. 여섯 번째, 일곱 번째 법칙을 알아보기 전에 '원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원하는 것을 생각하라'는 다섯 번째 법칙을 다시 떠올려보자. 예컨대 당신이 목표를 정하고 규칙적으로 목표의 슬라이드 작업을 시작했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결과가 금방 나타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고 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거나, 일이 예상과 달리 전개되고 있다고 생각되어 마음은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런 순간의심이 온통 생각을 사로잡기 전에 깨어 있는 의식을 가동시키라, '뒤돌아보면 돌이 되리라'는 경고를 잊어버렸는가!
- 최종 목표가 이미 실현된 것처럼 주의를 거기에 고정시키라. 당신이 심상에 집중하고 있을 때 세상은 당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당신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할 수 없는 (또는 아예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거울에 비친 반영으로 눈을 돌리면 세상은 그 즉시 걸음을 멈추고, 당신은 거울의 순환고리에서 헛되고 고된 맴돌이를 다시 시작하게 된다. 거울에 반영이 나타나고, 또 반영된 이 현실로 실현되는 데는 일정한 일시정지 (puase)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 그렇게 일시 정지되어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확고히 자신의 사념을 지켜야 한다. 절망에 굴복하지 않는 만큼 보답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마법과 같은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실질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진정한 마법이다.
- 아주 일반적인 의미에서, 거울을 사용하는 법칙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공식화할 수 있다. 거울을 볼 때 반영을 바꿔놓으려 하지 말고 심상 자체, 즉 자신의 태도와 생각의 방향을 바꾸라.
- 가능태 흐름을 방해하지만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사건의 전개를 최적의 궤도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견해를 고수하려고 할 때 원시적인 마음은 손으로 물을 허우적 거리며 흐름을 거슬러 노를 젓는 경향이 있다. 이제 환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마음의 편협한 의도를 거꾸로 돌려 의연하고 늠름하게 예상 밖의 것들도 포용하면서 자신의 시나리오를 수정해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여태껏 해본 적이 없는 일일 테지만, 이것만이 새끼고양이의 수준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자, 꽉 쥔 손을 풀어놓아주고 세상이 가능태 흐름에 따라 움직이도록 허용하라. 이것이 여섯 번째 거울의 법칙이다. 내부의도는 방향을 반대로 바꾸고, 조종하기를 포기한 당신이 오히려 상황을 실질적으로 조종할 수 있게 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다.
- 관찰자의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라. 당신은 연극의 연출자인 동시에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을 간파하며 초연하게 연기를 하고 있는 배우다. 누가 당신에게 무엇을 제안해 오면 성급하게 거절하지 말라. 조언을 받는다면 그것에 대해 심사숙고해 보라.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해 성급하게 논쟁을 벌이지 말라. 누군가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그냥 놔두고 지켜보라. 상황이 바뀌더라도 경보를 울리면서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다. 변화를 받아들여보라. 무엇을 하든 간에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을 가지고 움직이라. 선택을 해야 할 상황에서는 얻기가 가장 쉬운 가능태를 고르라.
- 이것은 당신이 이 모든 것에 다 동의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눈을 감은 채 흐름에 떠밀려 내려가는 것과 의도적이고 의식적으로 흐름을 따라가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당신은 고삐를 당겨야 할 때와 의도적으로 고삐를 늦춰줘야 할 때를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세상을 풀어놓고 그것이 움직이는 것을 관찰해보라. 세상은 제자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고 가끔씩만 필요한 방향으로 살짝 떠밀어주는 지혜로운 스승처럼 움직인다. 그것을 지켜보라. 세상이 당신 주위를 돌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 이제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거울의 법칙을 배울 시간이 되었다. 거울은 완벽하게 반사하는 능력과 함께 또 한 가지 중요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거울 속에서는 오른쪽이 왼쪽이 되고, 멀어지는 공간이 실제로는 반대 방향으로 멀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 성질에 익숙해있고 생각속의 환상을 현실이라고 착각하는 법을 배워왔다. 하지만 마음은 이중거울의 환상을 아직도 감당하지 못한다. 좋은 것을 나쁘게 보고, 긍정을 부정으로 바꾸고, 자신의 행복을 불운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사실 세상은 음흉한 일을 꾸미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람들이 불쾌한 일에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이 비정상인 것이다. 자연은 에너지를 헛되이 소모하지 않는다. 가능태 흐름은 언제나 최소 저항의 경로를 찾아 흐른다. 상황은 늘 행운의 흐름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문제는 사람이 손으로 물을 첨벙대며 조용한 흐름을 거슬러 노를 저음으로써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비관적인 성향이 그에 걸맞은 심상을 만들어내고, 거울은 이것을 현실로 실현시킨다는 것이다.
- 세상은 단지 현실에 대한 당신의 태도를 완벽하게 반영해주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명심하라. 그 반영이 침울해 보일 때 당신이 거기에 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그것은 더욱더 나빠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것을 보고도 의도적으로 그것을 긍정적으로 선언한다면 선언대로 될 것이다. 모든 상황과 사건이 당신이 모르는 그러나 당신에게 유익한 -잠재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 각각의 시점에서 당신은 자신의 태도를 표함으로써 추후의 사건이 좋은 방향으로 전개될지, 아니면 나쁜 방향으로 전개될지를 스스로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니 그것이 당신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기를 선택하라!
그리고 모든 일이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 그것이 당연한 일이란 듯이 무심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모든 일이 훌륭하게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렇게 되어야 할 필요에 따라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의도 조율의 법칙'으로 알려져 있고 <리얼리티 트랜서핑> 제1권에 그 작용에 관한 내용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 세상은 언제나 당신의 말에 동의한다. 그러면 그 반대로 해보라. 자신에게 모든 일이 아주 쉽게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해보라. 온 마음을 다해 이문제를 쉬운 문제로 생각해 보라. 이것이 공식이 되게 하라.
- '당신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것은 상황에 따라 수시로 흔들릴 수 있는 믿음이 아니다. 성공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에서 나오는 자만도 아니다. 성격적 속성으로서의 낙관주의도 아니다. 이것은 현실 지배자의 의도다. 당신이 스스로 자신의 세계의 층을 형성하고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는 것이다. '자신을 움직일' 줄 알고, 또 그와 동시에 세상을 자유롭게 움직이도록놓아주면 당신은 현실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자신을 움직인다는 것은 마지막 세 가지 거울의 법칙을 따르는 것을 뜻한다. 현실의 지배자는 극성스러운 활동가가 아니라 관찰자다.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허락하는 것이 그의 의지의 다른 점이다.
- 이제 당신은 이 놀라운 이중거울의 사용법을 알고 있다. 이제는 세상사람들이 적대적이고 완강한 문제의 구렁텅이로 여기는 세상을 두려워할필요가 없다. 세상은 당신의 것이다. 세상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하라.
'나는 나의 세상과 함께 장난감을 받으러 간다!'
- 운명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운명이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운명은 정해져 있다고 믿는다. 또 다른 사람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생의 행위에 따라 하늘이 정해주는 숙명이 있다고 믿는다. 어떤 관점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 각각이 모두 다 진실에 가깝다. 이 모든 견해가 똑같이 옳다. 거울의 세계에서 그들에게 무슨 차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 거울 앞에 서면 누구나 자기 생각의 심상을 그대로 반영받는다. 내 얼굴이 우울하게 비칠지 즐겁게 비칠지를 거울에게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한편에서 생각하자면 있는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고, 또 다른 한편에서 생각하자면 나는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이다. 그러니 예정된 운명을 택하든지 자유로운 운명을 더 좋아하든지 간에 운명의 문제는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모든 것이 당신의 확신에 달려 있으며, 당신이 선택하는 대로 받게 될 것이다.
- 그러니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는 상상하기 힘든 가능태 공간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보다는, 운명이 하늘에 있는 높은 힘에 의해 예정되어 있고 운명을 '계산' 하고 예견할 수 있다는 쪽을 믿기가 더 쉬운 것이다. 사람들은 무지 속에서 사는 것이 불안하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 어떤 것이라도 암시를 받기 위해 예언가, 점성술사, 또는 점쟁이들을 찾는 것이다. 여기서 또다시 원론적인 선택의 문제가 제기된다. 나의 의도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나의 미래를 점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을 창조하는 것인가?
- 누군가가 과연 미래를 계산하고 예고할 수 있을까? 물론 할 수 있다. 가능태 공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예언자들이 과거와 미래의 단편들을 어디서 얻어낼 수 있겠는가? 사건들은 제멋대로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능태 공간의 섹터들은 인과관계의 사슬로 연결되어 인생트랙을 형성하는데, 그것은 일정한 법칙에 종속된다. 그러면 이 법칙을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을까? 천체의 위치, 꿈,타로카드의 조합, 심지어 커피 찌꺼기까지도 그것의 외면적 징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연이란 없다. 우연이란 사건의 원인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없을 때 결과를 인식하는 하나의 특별한 방식일 뿐인 것이다.
- 하지만 과거와 미래의 영화필름 보관소인 가능태 공간이 존재한다는 동일한 이유 때문에 또한 예언이 항상 맞지는 않는다. 가능태의 수는 무한하고, 그래서 '영사기에 끼워 넣어야 할 바로 그 영화필름이 선택되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우리는 확률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 반가 Vanga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불가리아의 예언자 반겔리아 디미트로바 Vangelia Dimitrova는 가장 '정확한' 예언능력자였다. 어린 시절에 시력을 잃었던 그녀는 그 대신 가능태 공간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얻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희귀한 재능으로 과거와 미래에 대해 '정확히 맞출 확률'은 70~80퍼센트 사이에서 가변적이었다.
- 그렇지만 예언자가 가능태 공간의 '바로 그' 섹터를 보았을 확률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그런 예언이 상당히 높은 확률로 적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사람의 기억에 새겨진 예언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그의 의도로 전환되기 때문일 것이다.
- 예언에 대한 여러 해석과 점성술에 대한 태도에는 특별한 뭔가가 있다. 그것은 믿음과 의심의 균형이다. 사람들은 한편에는 이런 것을 전적으로믿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잠재의식 깊은 곳의 다른 한편에는 '혹시 맞으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있다. 예언 해석의 중요성은 최소가 된다. 실현되어도 좋고 아니라도 좋다는 것이다. 이것은 게임과 같고 사람들은 일면 심각하면서도 동시에 무심하게 이 게임에 참여한다. 그 결과, 자기도 모르게 영혼과 마음의 일치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순간적이지만 명확한 심상이 형성되고, 이를 세상의 거울이 기꺼이 현실로 실현해 낸다.사람들이 자신에게 예언되었던 것을 스스로 무의식적으로 실현하기 때문에 실현되는 확률이 평균 이상이 되는 것이다.
- 반가의 생애를 보면 그녀는 어릴 때 놀이를 통해 자신의 미래 운명을 의도적으로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환자'인 이웃 어린이들을 치료하는 것이 그녀가 좋아하는 놀이였다. 또한 그녀는 이야기를 꾸며낼 줄 알았고 사람들은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 외에 반가는 이상한 게임에 열중했는데, 어떤 물건을 한적한 곳에 숨겨놓은 다음 그 물건 쪽으로 더듬어서 걸어가면서 눈 감은 채로 그것을 찾곤 했다. 이처럼 그녀가 만들어낸 심상은 매우 완벽해서 세상의 거울이 그것을 아주 정확히 현실로 실현했다.
- 반가는 예정된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바꿀 수 없다고, 즉 운명을 피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미래에 일어날 불운을 봤을 때 그녀는 그것을 막으려고 애써봤지만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죽을 것이라는 운명을 알았을 때, 그에게 여행을 가지 말라고 단념시키거나 머물러 있는 곳을 떠나라고 권유했던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도움이 되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따라서 여기에는 트랜서핑과 모순이 있다. 결국 운명이란 예정된 것일까?
- 실제로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도로써 다른 사람의 인생에 본질적으로 영향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은 오직 자신의 세계의 층만을 형성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옆에서 볼 때는 영향력 있는 정치가가 한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그를 탄생시킨 구조체의 의도를 수행하는 것일 뿐이다.
- 누구나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그 자신이 직접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적극적인 입장을 택하느냐 혹은 소극적인 입장을 택하느냐의 문제다. 운명은 하늘이 정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점집을 드나들며 살 수도 있다. 다른 한편, 어리석은 마음의 열정으로 일을 벌이면 다시는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을 만큼 잘못된 운명을 창조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손으로 물을 철버덕거리며 허우적대거나 흐름을 거슬러 노를 젓는 것이 아니라, 거울의 법칙을 따라 자기 생각의 방향을 조종하려는 의도가 바로 적극적인 태도인 것이다.
- 이러한 태도가 운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진정한 힘을 준다. 이런 경우에는 예언가의 충고도 의미를 잃고 만다. 그들의 예언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개별적인 예언이 사실로 입증되는 경우도 흔하지만 그런 예언은 자신의 삶을 무의식적인 꿈으로 선택한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일 테지만, 자신의 삶을 조종 가능한 의식적인 꿈으로 전환하고 싶다면, 그런 당신에게는 거울제조공의 도움이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 당신이 그 예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든 말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아무튼 당신은 이미 그 예언을 들었기 때문에 그것은 잠재의식 속에 머물면서 당신의 미래 운명을 꾸며내고 있을 것이다. 혹 예언가들이 돈을 요구하지는 않았다고 치자. 그렇지만 당신은 미래의 한 조각을 그냥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운명의 책은 아무 대가 없이는 들여다볼 수 없는 것이다. 이 상품에 대한 대가는 단 한 가지다. 당신은 원하든 원치 않든 이 상품을 가지고 당신 삶의 일부분을 만들어야 한다. 이 대가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운명을 상품처럼 파는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라 이 상품을 구매하는 사람들의 잘못이다. 예언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거울제조공에게 가서 거울을 사면서 당신이 오늘 그 거울을 보고 웃을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당신의 세계의 층인 거울이 이미 있고, 그것을 가지고 원하는 것을 모두 창조할 수 있다. 나의 거울과 나는 자유롭다. 원한다면 나는 현실지배자의 의도로써 패배를 승리로 바꿀 수 있고, 그까짓 예언 따위는 우습게 볼 것이다.
- 하지만 자기 현실의 지배자가 되고 싶지 않다면 거울제조공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것 또한 하나의 선택이고 존재 방법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운명의 궤도를 따라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인 것이다. 예언은 발생할 수 있는 불운을 경고하거나 성공에 대한 기대를 심어줄 수 있는 안내 신호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거울제조공은 유익한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세계적인 사건을 예언하는 자들은 가장 해로운 부류다. 닥쳐올 자연재해나 세계 종말을 예언하면서 그들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파괴적인 방향으로 고정시켜 버린다. 달리 말하면 집단의식을 프로그래밍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런 예언들은 그냥 아무 일 없이 지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과학자들도 사람들의 운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거울제조공들의 연맹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 위에서 당신은 현실을 조종하는 법칙에 대해 알게 되었다. 지금부터 그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하자. 첫째로 필요한 조건은 충분히 높은 에너지 수준이다. 이것이 없이는 트랜서핑이 전혀 불가능하다. 에너지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생리적 에너지와 자유에너지다. 생리적 에너지는 온기와 체력으로 느껴지는 것인데 이는 신진대사를 통해서 생성된다. 생리적 에너지를 필요한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음식을 충분히 섭취하고 휴식을 취하고 야외활동을 하기만 하면 된다. 자유에너지는 우주에서 내려와 에너지 통로를 흐르고 원기元氣 또는 생명력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바로 의도의 에너지이고, 이로 말미암아 사람이 적극적이고 단호한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당신이 나날의 일상적인 일을 할 정도의 기운만 남아 있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진다면 이것은 에너지 수준이 매우 낮아졌음을 알려주는 징표다.
- 왜 인간은 최고의 걸작을 인생의 전반기에 창작해 내는 것일까? 의도의 에너지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의도의 에너지를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기만 하면 어떤 나이에도 걸작을 만들어낼 수 있다. 사람이 무엇을 지향하기를 멈출 때 생명력과 창조적인 힘이 위축된다. 세상을 무관심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산전수전을 다 겪어보아서 이제는 이 권태감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들에게 이 세상은 하나도 놀라울 것 없는 속속들이 다 돌아다녀본 공원과도 같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양 무심하고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다른 사람들을 훈계한다. 그런 사람들이 일찍 늙어간다.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바라보기를 잊지 말라. 그러면 에너지가 커질 것이다. 사람이 더 이상 경탄할 줄 모르고 새로운 목표를 지향하지 않을 때, 그는 더 이상 발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퇴화하고 늙어가는 것이다. 삶이란 멈춤이 있을 수 없는 과정이다. 앞으로 가거나, 아니면 뒤로 가는 것일 뿐이다. 자연계에는 '멈춤'이라는 상태가 존재하지 않는다. 꿈쩍 않는 것처럼 보이는 바위마저도 끊임없이 모습이 변해가고 있다.
- 의도의 에너지를 활성화시키려면 목표로써 그 에너지를 낚아채야 한다. 적극적인 활동은 에너지를 타오르게 한다. 일종의 피드백 고리가 생기는 것이다. 적극적인 활동이 의도가 생기게 하고, 의도는 생명력을 타오르게 한다.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는 그저 뭐라도 시작을 하면 에너지가 생길 것이다. 한 자리에 가만히 멈추어 있을 때 새로이 움직이려면 가끔은 최초의 자극이 다시 필요하다.
- 당신에게 에너지가 부족하고, 그것을 어딘가로부터 얻어와야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실제로 당신에게는 충분한 에너지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주로부터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필요한 만큼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은, 당신은 이미 가질 만큼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 에너지가 다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라, 거의 전부가 바로 지금 어딘가에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 가장 큰 소모는 다음의 두 가지 부하를 감당하는 데서 일어난다. 그 첫 번째는 당신에게 부담을 주는 의무와 제약이다. 이렇게 상상해 보라. 당신이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의무를 가지게 되면 그 즉시 무거운 저울추가 하나 목에 걸린다. 자신에게 어떤 조건을 내세웠을 때도 또 하나가 걸린다. 자신에게 또는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약속하면 또 저울추가 하나 더 매달린다. 당신 목에는 얼마나 많은 저울추가 걸려 있는가? 그것이 많지 않을 때는 살 만하다. 하지만 어느 날 부하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이럴 때 사람은 좌절하여 구석에 틀어박힌 채 병들고 우울해지거나 곤경에 빠져 있게 되는 것이다. 그는 잔뜩 긴장한 채 두려움과 불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 결과 생각의 반영인 현실은 실제로 더욱더 우울해지고,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이어질 수도 있는 불운의 시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잉여 포텐셜의 부하가 있다. 많은 것에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할 때, 당신은 스스로 자신에게 과도한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 그리하여 모든 자유에너지는 실현되지 않고 잠자고 있는 의도(계획)를 위해 소모되어 버리고, 그것은 부담만 계속 가중시킨다. 자원의 여유를 갖기 위해서는 잠자고 있는 계획의 일부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실현시켜야 한다.
- 지금 당신이 어떤 압박을 받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잘 따져본다면 많은 저울추를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자질구레하고 무거운 많은 짐들이 언뜻 보기에는 꼭 필요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결국은 실현시키지도 못하면서 지고 다니기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예컨대 나는 무조건 최고가 되어야 하고, 항상 가장 높은 위치에 있어야 하고, 내가 최고라는 것을 모두에게 확인시켜주어야 하고, 내가 선택한 길을 꼭 걸어가야 하고, 내가 나 자신을 존경하기 위해서 꼭 승리해야만 하며, 나에게는 더 이상 실수할 권리가 없다는 생각 등이 그것이다. 그에 더해서 담배 끊기, 외국어 배우기, 또는 월요일부터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등과 같은 종류의 일이 그런 것들이다.
- 무엇을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무익한 짐이라는 점에 동의하는가? 그것을 실현하는 데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은 버려야 할 짐인 것이다. 헛되이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예컨대, 좋지 않은 버릇을 버리는 과정에 있을 때는 이를 위해 에너지가 두 배로 필요한데 한편에서는 펜듈럼에게 이자를 지불해야 하고,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자신에게 버려야 한다는 의무를 부여하여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지루한 일이 몇 년 동안 지속될 수도 있다. 자신을 괴롭히기를 그만두고 그것을 자신을 설득하는 작전으로 바꿔야 한다.
- 반대로 해보면 즉시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의도의 방향의 문제다. 그 방향을 소극적인 쪽에서 적극적인 쪽으로 바꿔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외우려고 애쓰는, 필요 없는 저울추가 떨어져 나갈 것이다.
- 당신은 혹시,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 지 오래된 엄청나게 큰 저울추가 있지만 아직도 버리지 못하여 망설이고 있는가? 그것을 버리면 얼마나 가벼워질지를 상상해 보라. 자신을 풀어주고 더 많은 자유를 누리라. 당신에게 압박을 가하는 제약들의 목록을 작성하여 그것을 어깨에서 내려놓으라. 그러면 즉석에서 의도의 예비 에너지가 생겨나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 이미 언급했듯이 목표실현 과정에서 목표는 의도의 에너지를 활성화시킨다. 물론 자신만의 목표를 찾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에너지 부족 문제는 절로 사라질 것이다. 영혼과 마음이 생기에 넘쳐 소중한 꿈을 향해 열띤 질주를 시작할 테니까. 하지만 만약 이 순간에 당신이 새로운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자신의 목표를 찾으려는 시도조차 할 필요가 없다. 이럴 때야말로 당신의 나약함을 틈타 펜듈럼이 당신에게 남의 목표를 강요하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표를 찾으려면 충분한 자유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특히 다른 사람과 자신에 대한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또한 무엇보다도 저울추로부터 자유를 얻어야 한다. 당분간은 자신의 목표를 가지지 않는 여유를 허락하라. 목표를 찾기 위해서는 자유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일이다.
- 에너지 수준을 높이려면 세 가지 방법을 이용할 수 있다. 허비되고 있는 자원을 자유롭게 풀어놓기, 에너지 흐름을 느끼는 연습, 에너지 통로의 확장 연습이 그것이다.
- 허비되고 있는 자원을 자유롭게 풀어주면 힘이 현저하게 커진다. 이전에 당신은 술, 담배와 같은 펜듈럼들에게 에너지를 주었는데, 이제는 이 에너지가 당신의 통제하에 있는 것이다. 이전에 당신은 근심과 걱정에 에너지를 바쳤지만, 이제 이 에너지는 행동하겠노라는 결정으로 전환되었다. 전에는 의심과 망설임에 에너지를 바치고 자신이 올바르게 행동하고 있는지를 고민하느라 무척이나 괴로워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당신이 스스로 결정한다. 전에는 에너지가 죄책감에서 비롯되는 걱정과 의무감에 바쳐졌었다. 이제는 그 에너지가 풀려났다. 전에는 자신의 중요성을 재확인하는 일로 쉴 새 없이 시달렸다. 이제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도록 스스로 허락했으므로 당신의 마음은 가벼워졌다. 이전에 헛되어 소모되던 에너지가 이제는 의도의 에너지가 되고, 이것으로 당신은 자신의 현실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이다.
- <리얼리티 트랜서핑> 제3권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의도 에너지는 훈련시킬 수 있다. 운동을 하면 근육이 발달하듯이 새로운 목표의 달성은 의도 에너지를 키워준다. 하지만 모든 고지가 정복되고 인생이 조용한 궤도를 따라 흐르면 의도의 에너지는 퇴화한다. 에너지 수준이 낮아지면 에너지 훈련을 통해서 그것을 보강할 수 있다. 제3권에서 기술했듯이, 운동을 할 때는 척추를 따라 흐르는 중앙 에너지 통로의 상승하는 흐름과 하강하는 흐름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좋다. 여기에다 당신의 에너지가 날마다 향상되고 있는 모습의 슬라이드를 상영하는 심상화 과정을 덧붙이면 훈련의 효과는 더 커진다. 의도의 에너지는 유도에 의해 스스로 증폭되는 것이다.
- 당신이 오늘 에너지를 높이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하고 있다면 내일의 결과를 기다려보라. 에너지가 증가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반대로 체력이 완전히 떨어진다. 그것은 오랫동안 운동을 안 하다가 갑자기 열심히 하면 그다음 날 온몸의 근육이 쑤시는 것과도 같다. 의도 에너지의 훈련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 경우에는 근육의 통증이 아니라 피곤과 침울함을 느낀다. 이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곧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에너지는 날마다 더 커진다'고 방향을 설정하라. 몇 번만 해보면 벌써 뛰고 날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 그리고 에너지를 높이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신체를 정화하고 열을 가하지 않은 천연 식품으로 식단을 바꾸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또 하나의 특별한 주제이기 때문에 다른 책에서 다루기로 하자. 당분간은 간단하게 다음과 같은 비유로써 대신하고 싶다. 에너지는 수도관에 물이 흐르듯이 몸 안을 흐르고 있다. 깨끗한 신체에서는 깨끗한 수도관 내에서처럼 수압이 세다. 따라서 신체를 정화하여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일이다. 물론 강력한 수압으로 수도관을 청소하는 다른 방법도 있다. 그것은 명상하는 사람들이 따르는 방법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렵고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나는 직접적이고 단순한 방법인 생리적 정화법을 제안하는 것이다.
- 높은 수준의 에너지는 사람에게 영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준다. 이런 상태에서 당신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천재적인 답을 찾아내고 걸작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술의 신 뮤즈가, 나방이 불을 보고 날아오듯이 찾아올 것이다. 회의심과 둔감함은 에너지가 낮은 수준임을 드러내주는 징표다. 에너지가 부족할 때 당신은 항상 세계를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이것은 반드시 현실에 그대로 반영된다. 하지만 생명력이 높을 때 당신은 세상의 거울에 성공한 사람의 강력한 심상을 전송하고, 그에 따라 행운이 스스로 당신을 찾아오는 것이다.
- 영감은 가끔씩 이상하게 작용한다. 때로는 불가능이 가능해 보이는 영적 격동의 순간이 찾아오지만 그 열정은 금방 사라져 버리고 어느새 현실주의자로 돌아와 있는 것이다. 낙천성의 모닥불은 금방 사그라지고 희망으로 보였던 생각들이 다시 절망으로 변하여 평범하고 침울한 세계가 사방에서 밀려온다. 사상누각과도 같은 이런 영감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 사실 이것은 모두가 영감이 아니라 도취상태다. 낮은 에너지 수준에서 높은 에너지 수준으로 급격히 이행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이행은 강력한 자극제를 복용한 이후나 혹은 비정상적인 정보가 상상력을 자극할 때 나타난다. 에너지의 비정상적인 방출에 의해 의식이 가능태 공간의 현재진행 중이거나 이미 실현된 섹터로부터 벗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섹터에 접속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이 가능태들도 실현될 수 있는데, 다만 이들은 가능태 흐름의 궤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실현되려면 엄청난 에너지 소비가 요구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꿈속에서는 너무나 훌륭해 보였던 아이디어들도 깨고 나면 색이 바래는 것이다. 이처럼 영혼은 꿈속에서 종종 현실과 전혀 무관한 지역을 날아다닌다. 진짜 아이디어는 안정된 의도 에너지에 의해서 생겨난다. 그리고 그것은 가능태 흐름 가까이에 있다. 의식이 물질적인 세계의 틀을 벗어나 그런 아이디어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야 하거나, 아니면 안정되고 높은 수준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높은 에너지 수준은 능력 부족을 충분히 보완해 줄 수 있는 것이다.
- 의도 에너지는 사람에게 물질세계에서 효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높은 생명력을 제공해 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것은, 에너지가 높으면 높을수록 원하는 것이 더 빨리 현실로 실현된다는 사실이다. 우주의 에너지는 사람의 인체를 통과하면서 그의 사념에 의해 변조되어 정형화된 의도 에너지의 형태를 띠게 된다. 라디오 전파송신기가 전기를 정보가 담긴 신호로 변환하듯이 말이다. 그리하여 정보적으로 정형화된 의도 에너지는 손전등 불빛처럼 그에 해당하는 가능태 공간을 '조명' 한다. 그 결과 비물질적인 가능태가 이중거울의 물질적 표면에서 현실로 발현되는 것이다. 즉, 생각이 실현되는 것이다.
- 방사되는 에너지의 출력이 높을수록 실현과정의 효율도 더 높아진다. 이미 잘 아시다시피 사념의 현실화는 즉석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만일 그랬다면 우리의 삶은 완전히 혼돈의 우주 속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과도 같았을 것이다. 거울 속에 반영이 형성되려면 영혼과 마음의 일치 속에서 태어난 정확한 심상이 필요하다. 그게 아니라면 지속적이고 의도적인 주의집중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언젠가는 '가능태 공간 실현기계'가 개발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신이 허락해 준다면 말이다. 아직도 인공지능이 충분히 개발되지 않았고, 그것이 개발되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소망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 높은 에너지 수준은 강한 힘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의 세계의 층을 효율적으로 형성시키려면 그것과 일치되는 느낌을, 나아가서는 동일성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주변 현실을 새롭게 바라보아야 한다. 나는 내 몸을 조종하듯이 현실을 조종한다. 현실과 함께 움직이면서, 급격한 변화를 기대하지 말고 차분히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꾸준히 목적을 지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어떤 경우든 오직 자신의 의도가 지향하는 그것만을 얻는다. 예컨대 근육을 키우고 싶다면 당신의 주의는 근육이 커지는 슬라이드에 집중되어야 한다. 살을 빼려고 한다면 날씬해진 몸을 생각해야 한다. 만일 당신의 목표가 의도 에너지의 향상에 있다면 에너지 흐름과 에너지 보호막에 집중해야 한다. 의도에 일정한 방향이 없이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훈련을 하면 힘과 시간만 낭비된다. 주의가 목표가 아닌 노력에 집중되어 있을 때는 단순히 생리적 에너지만 허비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노력은 목표로 가는 길이고 그것을 달성하는 방법일 뿐이기 때문이다. 거울은 심상의 내용만을 반영해 주기 때문에, 이 같은 경우 당신은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그 길만을 하염없이 걸어가고 있게 될 것이다.
- 자신의 에너지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려고 하지만, 거기에 정확한 방향을 제시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헛된 에너지가 되고 말 것이다. 평범한 전구의 빛은 가까운 공간만 비출 수 있지만, 집중된 레이저 빔은 수십 킬로미터 밖까지도 비춘다. 그러므로 당신의 에너지가 제대로 작용하기를 바란다면 목표로 가는 정확한 방향을 제시해줘야 한다.
- 목표지향성은 에너지를 한 방향으로 향하게 한다. 필요한 것은 집중, 긴장이 아닌 집중이다. 평소에 우리의 머리는 제멋대로 생각하고 있다. 생각이 저 혼자 일어났다가 무심결에 사라지고,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널뛰듯 뛰어다닌다. 마음은 '어린아이가 혼자서 다리를 흔드는 것처럼' 제멋대로다. 현실을 조종하려면 자신의 생각을 조종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습관이 든다.
- 그리고 이 습관을 기르려면 단순한 원칙 하나만 실천하면 된다. 지금이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관찰하는 습관을 기르라. 어떤 일이라도 무의식적인 생각 속에서 안일하게 그냥 넘겨버리지 말라. 의도를 선언하라. 이것은 항상 어떤 생각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생각을 언제든지 풀어놓아도 되는데, 다만 다음과 같은 원칙 아래 의도적으로 하라는 것이다. 나의 마음은 내가 허락할 때만 방황한다. 그런 다음 필요할 때는 의도적으로 집중 상태로 돌아오라.
- 중요한 것은, 당신의 생각 속 심상은 이중거울에서 보고자 하는 그림의 대부분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세계와 유기적으로 완벽히 일치된 상태를 이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체계적인 방법으로 목표 슬라이드에 주의를 고정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의 방향을 조종함으로써 현실을 당신의 의지에 복종시키는 것이다. 생각은 가끔씩 통제를 벗어나지만 거기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생각을 목표 슬라이드를 향하는 궤도로 되돌려주는 습관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의 생각을 수시로 목표로 되돌리는 습관을 획득하면 슬라이드는 당신의 변함없는 동반자가 되고, 그 그림은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상황과 늘 함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의심을 하지 않아도 된다. 심상은 형성될 것이고 세상의 거울은 필연적으로 그것을 현실로 반영할 것이다.
- 내적 중요성, 즉 병적으로 자신에게 중요성을 부여하는 짓은 좌절과 절망에 의해 제거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하는 일이 잘 안 되고 그것이 자존심을 상하게 할 때, 절망감은 당신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당신의 중요성조차 무거운 짐처럼 내던져버리게 만들 것이다. 그런데 그 즉시 당신은 가벼움과 자유로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고 나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 생각하는 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것인지를 의심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마음이 목표달성을 위한 수단과 방법을 궁리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리얼리티 트랜서핑> 시리즈에서 목표 달성의 수단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누누이 이야기했다. 목표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인지를 당신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당신이 할 일은 목표가 이미 달성되었다는 상상과 그 느낌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면 외부의도가 필요한 문을 열어줄 것이다.
- 이제 당신은 이중거울의 사용법을 알고 있으니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된다. 의심과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거울의 법칙을 실천하는 것이다. 첫째, 의도를 아말감을 유지하는 데 집중하라. "나의 세계는 나를 보살피고 있다." 둘째, 마지막 세 가지 거울의 법칙을 철저히 따르라. 예를 들어, 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시험을 잘 통과해야 한다고 하자. 시험 보기 전에 자신에게 말하라. '실패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것도 나에게는 행운이 아닐까?' 그런 다음 아무 걱정 없이 즐겁게 시험을 보러 가라. 이것을 '패배를 받아들이고 가능태의 흐름을 따르기'라고 부른다. 당신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고 동시에 결과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한다. 혹은 모든 결과가 다 성공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 '목표를 달성하고 싶지 않은 척' 하지 말라. 자신을 속일 수는 없을 테니까. 목표가 어떤 방법으로 달성될 것인지를 궁리하지도 말고, 자신의 시나리오에 집착하지도 말라. 슬라이드를 심상화하고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것만이 당신이 해야 할 일이다. 시나리오가 아니라 거울의 법칙을 준수하는 데에 마음을 집중시켜야 하는 것이다.
- 그 어떤 경우에도 성공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데 왜 걱정하는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당신의 태도는 당신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취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성공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터 당신은 비범하게 행동해 보라. 실패를 성공이라고 불러보라. 그렇게 하면 당신은 실패자의 대열에서 빠져나와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죄책감이나 중요성의 피드백 고리는 이렇게 작용한다. 주의를 거울로부터 심상으로 돌리고 그림자 쫓기를 그쳐서 거울의 순환고리를 멈추게 하라. 성공을 믿을 필요도 없고 자신을 설득할 필요도 없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법칙을 따라 의도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그 법칙들이 작용하기 시작하면 현실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의 마음은 거울이 정말로 작용하는 것을 확인할 것이다. 마음은 마침내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이 아닌 또 다른 방식으로 목표가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영혼과 마음은 차분해지고 두려움과 의심이 사라지며 거울의 순환고리가 당신을 향해 다가올 것이다.
- 당신의 세계의 층에서 버려야 할 남은 쓰레기는 비판, 불만, 거부와 불길한 예감이다. 첫째, 비판에 관련해서 잘 알아둬야 할 것은, 아무리 정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비판은 언제나 무익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이다. 균형력은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에 균형을 회복시키기 위해 비판하는 자를 피고석에 앉히려고 애쓸 것이다. 그럴만한 이유는 언제든지 찾을 수 있다. 그러니 그 어떤 종류의 비판이라도 극구 삼가야 한다.
- 그 밖의 부정적인 태도들에 대해서는 단 한 가지를 말할 수 있겠다. 당신은 '나의 세계도 마음에 들지 않고 내 인생도 마음에 들지 않아'라는 연극의 역할을 맡아서 그런 현실을 형성하고 지속시키고 있다. 당신이 거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늘 상기하라. 아말감과 마지막 세 가지 거울의 법칙은 당신의 세계의 층을 안락한 곳으로 바꿔놓도록 도와줄 것이다. 더 이상 덧붙일 말은 없다.
- 마지막으로, 예컨대 현재의 모든 상황이 열악하고 어떤 법칙도 실천할만한 힘이 없다고 하자.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그리고 어떻게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
- 인생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비참할 때가 있다. 알코올 중독자가 술에서 깨어나서 불편하고 우울한 주변의 현실을 발견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정말 전형적인 예를 들자면, 즐거운 모임이 끝난 후 우울한 아침이 오고, 당신은 이제 회사에 출근해야 한다. 연휴가 끝난 후에는 회사마다 끊임없는 문제들이 발생한다. 사람들이 일의 리듬에 적응하기 어려운 것은 이해가 되지만, 기계에조차도 이와 비슷한 일이 발생한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자동차, 컴퓨터, 기타 전자제품의 고장이 월요일에 가장 많다고 한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 사람들의 세계의 층들이 서로 겹치면서 그런 현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숙취에 시달리는 시간 동안 사람들은 펜듈럼에게 '이자'를 지불해야 한다. 자유 에너지가 부족할 때 사념의 심상은 부정적인 기운을 많이 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긴장된 분위기가 형성되고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그러면 거울이 그것을 반영하고, 그에 따라 현실은 일그러진다. 집안에서 가전제품이 고장 나는 정도는 약과고, 회사나 공장에서 일어나는 고장은 훨씬 더 큰 결과를 불러온다. 사고가 일어나고 장비가 고장 나고, 복잡하고 정밀한 장치들이 불안정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 사람이 우울하거나 의식이 변화된 상태에 있을 때, 그의 세계의 층은 가능태 공간의 불투명한 구역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의 현실은 모종의 막으로 덮여 있는 것만 같다. 주변 상황은 그대로이고 조건도 똑같고 날씨는 더 좋을 수도 있지만, 허공에 뭔가 무거운 것이 걸려 있다. 현실의 뉘앙스를 느껴보지 못했다면 그런 날에 한 번 잘 관찰해 보라. 물질세계가 당신을 냉랭한 적대감으로써 노려보고 있는 것을 느낄 것이다. 세계의 층의 성질이 변한 것이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 바로 이런 느낌의 불투명한 막이 기계를 포함한 모든 것에 드리운 채 만만찮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 불운의 순간은 자유 에너지의 부족에 의해 몸이 불편한 데서부터 비롯된다. 아니면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의 불편한 심기에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이럴 때 자신의 현실이 불투명한 구역으로 진입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높여야 하는 것이다. 에너지가 적당한 수준에 도달하면 심기가 불편한 상태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물론 앞서 말했듯이 자신의 세계의 층이 깨끗하게 유지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당신이 우울하다면 가장 먼저 현실을 바꿔야 한다. 즉 자신의 세계의 층을 불투명한 구름 속으로부터 청정한 가능태 공간 구역으로 끌어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 한 가지 처방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천재적인 아이디어와 마찬가지로 매우 단순하다. 아이가 울고 있을 때 어떻게 하면 울음을 그치게 할 수 있을까? 설득은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를 달래고 보살피고 배려해 주면서 주의를 다른 데로 돌려놓아야 한다. 당신이 기분이 몹시 안 좋을 때는 당신 안에서 한 아이가 울고 있는 것이다. 그를 돌보고 달래주라. 우리는 대부분 진지하고 점잖고 훌륭해 보이지만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어린 아이다. '당신을 회전목마에 태워주라.' 즉,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해보라. 현실교정을 위해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그 시간 동안은 그냥 쉬면서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과 놀러 가는 것이다.' 이 시간은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 세계의 층은 많은 것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것을 정화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좋아하는 음식을 사 먹으라. "먹어, 어서 먹어. 내 사랑. 먹고 기운을 차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당신을 위해 종일 시간을 보내라. 자신을 돌보고 정성스레 자신을 침대에 눕히라. "자장자장 잘 자, 내 사랑. 너의 세계가 모든 걸 알아서 해줄 거야."
- 그렇게 될 것이다. 다음날 거울의 법칙 준수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주변 현실이 따뜻하고 포근한 색채를 띠기 시작하고, 세계의 층이 불투명한 구역을 빠져나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당신이 예민한 편이라면 이 모두가 정말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랄 것이다. 예전에는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던 물질세계가문자 그대로 눈앞에서 우아하고도 유연하게 변모해 가기 시작한다. 강박적인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멈췄던 시계가 다시 움직이며, 사람들이 다시 호의를 가지고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거대한 이중거울은 놀랍게 작용한다. 현실은 가능태 공간 속을 마치 시곗바늘처럼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지만, 움직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식으로 현실의 '보수공사'가 시행된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대보수공사를 벌여보고 싶지 않은가?
- 슬라이드를 외부에서 상영되는 영화처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목표가 이미 이루어졌을 때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지, 그때 어떤 감정을 느낄 것인지, 주변에 무엇이 있을 것인지,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 등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상황 속에 당신이 이미 몸을 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이 슬라이드의 중심부에서 하려고 하는 그것을 이미 잘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라. 법칙은 단 하나다. 즉, 세상이라는 거울 앞에 서서 현실에서 얻고자 하는 것의 심상을 마음속에 형성시키는 것이다.
- 목표의 슬라이드는 가능태 흐름의 벡터(vector, 방향)를 정해준다. 이것을 체계적인 방법으로 상상 속에서 돌리면 사건과 상황의 흐름은 목표를 향해 전개될 것이다. 시작할 때 그것을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계획과 방법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수단과 방법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적절한 시기에 열려야 할 문, 곧 구체적인 진로와 가능성 (방법과 기회)이 열릴 것이고,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목표가 어떤 방법으로 달성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강한 조건을 세우면 안 된다. 당신의 일은 결과에만 집중해야 한다.
- 목표 슬라이드 외에도 제1권에서 설명했던 것 중에는 '과정의 심상화'가 있다. 목표가 어떻게 실현될 것인지를 이미 알고 있을 때, 그리고 이를 위해 물질세계에서 필요한 일을 행하고 있을 때, 즉 당신이 목표달성의 경로 위에 있을 때는 심상화를 통해서 그 과정을 촉진할 수 있다. 그 법칙은 다음과 같다. 나는 모든 것을 너무나 훌륭하게 해내고 있으며, 오늘은 어제보다 낫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을 것이다. 이것은 가능태 흐름을 따라 노를 젓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가능태 흐름의 방향이다. 당신이 상상 속에 목표의 슬라이드를 지니고 있기만 하면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더라도 모든 상황은 목표달성을 위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 슬라이드 상영은 언제든지 원하는 만큼 할 수 있다. 목표를 꼭 달성하기 원한다면 30분씩이라도 날마다 그것을 해야 한다.
- 심상화 효과를 높여주는 몇 가지 구체적인 방법이 있다. 그중 첫째는 에너지 흐름이다. 가능태 공간의 섹터는 사람의 몸을 통과하면서 사념에 의해 변조되어 의도 에너지로 변환된 에너지에 의해 실현된다. 방사되는 출력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효과는 더욱더 강력하다. 에너지 흐름에 주의를 집중하면 출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그것을 위해 복부의 신체 중심, 즉 태양신경총(solar plexus)이 있는 곳에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0.5미터 길이의 화살 두 개가 앞뒤를 향해 밖으로 뻗어 나온 모습을 상상해보라.상상해 보라. 상상 속에서 이들 중 하나를 위로, 다른 하나는 아래로 방향을 돌려보자. 이렇게 '열쇠를 돌리면' 하향과 상향의 에너지 흐름이 활성화된다. 긴장하지 말고 에너지 흐름이 척추를 따라 하나는 하늘을 향해, 또 하나는 땅을 향해 서로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을 상상해 보라. 주의의 일부분을 흐름에 고정시키고 슬라이드를 즐겁게 상영하라. 이것은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산책하면서 하는 것이 제일 좋다.
- 다음 방법은 프레임 frame이다. 목표가 달성되었을 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리고 목표 슬라이드의 빼놓을 수 없는 부분들, 즉 그 필수적인 요소와 속성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라. 예를 들어, 벽난로 옆의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 자가용 요트를 조종하고 있는 모습, 집 정원에서 장미를 심고 있는 모습, 큰 계약을 맺고 동업자와 악수하고 있는 모습 등, 슬라이드의 전형적인 부분들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이 장면을 머릿속에서 몇 번 돌려보라. 이 장면이 흘낏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와 그에 동반된 느낌을 포함한 순간적인 슬라이드의 흔적으로서 하나의 통합적 인상을 형성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프레임이다. 편리를 위해 여기에 이름을 붙일 수도 있다. 이제부터 이것을 전구 켜듯이 수시로 기억 속에서 순간적으로 켜야 한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긴장하지 않고 언제든지 켜기만 하면 된다. 프레임은 우리를 가능태 공간의 목표 섹터와 연결해 주는 또 하나의 연결 끈이다.
- 프레임의 효과를 폭발하는 파동의 도움으로 높여줄 수 있다. 머릿속에 현실로 실현시키고 싶은 프레임, 또는 단순한 그림을 만들어보라. 그다음에 당신의 에너지 보호막의 구체가 폭발하듯이 빠른 속도로 중심으로부터 사방으로 확장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 폭발하는 파동은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만큼 멀리 퍼져나간다. 이것을 지루해질 때까지 몇 번 반복해 보라.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신은 마음속에서 사념의 심상을 만들어서 그것을 주변세계로 방사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생각은 그냥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거울이 작동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만 염두에 두라.
- 또 한 방법은 외면체 만들기다. 아마도 당신은 자신의 에너지 막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당신은 그것이 의도에 따라 확장되는 것을 느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이 그것을 내부의도로써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는 당신 주변에 당신의 소유가 아닌 어떤 구체를 상상해 보라. 이 구체가 당신을 끌어당기는 것을 상상해 본다. 외부에 있는 뭔가가 당신의 몸을 잡아당겨 확장시키려고 하는 것을 느낄 것이다. 5~7미터 반경에 보이지 않는 경계막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를 약간 잡아당겼다 놓았다 반복해 보면 탄력 있게 저항하는 느낌을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제 당신은 확실히 그 구체를 느꼈다. 이것은 바로 우리를 외부세계와 연결하는 경계막이다. 구체 내부에 있는 모든 것은 당신의 것이고 그 밖의 것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동시에 구체가 당신을 잡아당기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구체는 당신에게 속한 것이다. 이제 당신의 의도는 방향이 전환되었다. 이제는 적극적인 행동이 당신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 마찬가지로 내부의도로써 어떤 대상에 작용을 가하려고 하면, 예컨대 의지로써 연필을 움직이려고 한다면, 연필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이제연필이 보이지 않는 끈을 통해서 당신을 잡아당기는 것을 상상해 보라. 바로 이 연결 끈을 통해서 연필을 움직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공중에 뜨라고 아무리 명령해도 당신의 몸은 뜨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주변세계가 당신을 공중에 뜨게 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 내부의도를 외부의도로 전환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 당신의 의지가 '세계를 복종시키려 하는' 쪽으로부터 '세계가 알아서 하도록' 만드는 쪽으로 전환되는, 그 경계를 넘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 이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이것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외부에 있는 에너지 보호막의 존재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느낌을 느껴보고, 그 느낌에 주의를 고정시킨 채 목표 슬라이드를 상영하기 시작하라. 구체는 사념 에너지를 전파하는 안테나 역할을 할 것이고, 이것은 슬라이드의 효과를 몇 배나 강화시켜 줄 것이다.
- 다음 방법은 무대장치 정합시키기다. 당신의 머릿속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목표에다 집중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생각들조차도 대개는 서로서로 맞물려서 하나의 논리적인 사슬을 이루며 정렬한다. 목표의 슬라이드로 그 논리의 사슬을 완결시키라. 당신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자주 자신에게 상기시키라. 무엇을 생각하든, 무엇을 하든 간에 자신의 주의를 항상 목표로 돌려보내라. 슬라이드는 당신 삶의 배경이 되고, 당신은 모든 사건과 정보를 그 맥락 속에서 인식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당신은 효과적으로 자신의 세계의 층을 형성하게 되고 당신의 의도는 현실로 실현될 것이다.
- 당신이 이미 그 정원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이런 효과는 주변풍경과 슬라이드가 겹쳐진 결과로 생기는 것이다. 눈은 물질적 현실을 보고 있지만 당신의 주의의 일부분은 미래의 정원이 있는 가능태 공간의 섹터에 고정되어 있다. 이럴 때 현실의 흐름이 당신의 목표의 섹터로 향하는, 일종의 흐름 변화가 일어난다. 이와 같은 순간에 사념의 심상이 현실로 실현되는 과정이 가장 활발하게 가동한다.
- 수시로 그때의 그 안락하고 무사태평했던 분위기를 떠올리면 당신의 세계는 점차 안락하고 상냥한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특별히 게으른 사람들을 위한 방법 목표 아말감이 있다. 성공적인 심상화의 중요한 조건은, 그것을 자신에게 스스로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머릿속에서 목표 슬라이드를 상영할 때 스스로 만족해하지 않고 억지로 하면 잉여 포텐셜이 발생한다. 그 결과, 균형력이 당신의 작업을 망쳐놓을 것이다. 그럴 때는 자신으로부터 이 무거운 의무의 짐을 풀어 내려서 당신 세계의 어깨 위로 옮겨놓아야 한다. 세상에게 당신을 '껴안아 달라'고 부탁하고, 당신의 선택이 실현되도록 세상이 알아서 보살펴주게끔 해야 한다.
- '내가 전혀 모르고 있는 가운데도 모든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해결될 것'이라는 의도의 지시를 자신에게 하달하라. 이러한 의도를 표명할 때 당신은 자신의 세계에 그와 같은 프로그램을 심어주는 것이며, 이 프로그램에 따라, 당신을 목표에 다가가게 만들기 위한 사건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꽉 쥐고 있던 손을 놓아서 외부의도로 하여금 목표를 실현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이제는 긴장을 풀고 그저 목표 슬라이드를 즐기면 된다. 당신은 더 이상 슬라이드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며, 당신의 세계가 그것을 대신해줄 것이다. '세상의 품'에 안긴 채, 당신이 받고자 하는 것을 세상에게 수시로 상기시켜 주기만 잊지 말라. 그리고 물론 환상에 빠져 있지는 말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물질적 차원에서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수행해야 한다.
-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당신은, '원하는 바'를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의도'를 표명하는 것이며, 목표는 당연한 결과라고 여겨야 한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라. "나는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면 적어도 "나는 가지겠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당신이 정말 주문한 대로 받고자 한다면 그 진지한 의도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아침에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려고 하는데 늦잠을 잘 수도 있다. 하지만 자명종 시계를 맞춰놓으면 자명종이 울리기 몇 분 전에 잠을 깰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 의도를 고정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 하지만 어떤 물건이 부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원래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떤 물건의 마법적인 힘은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사람이 부적 또는 어떤 의식 儀式이 마법을 부릴 수 있다고 믿으면 그로써 그는 거기에 의도를 고정시키게 된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의도를 쉽게 걸어놓을 수 있는 어떤 '걸개'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마법의식을 만들어낼 필요까지는 없지만, 당신의 적극적인 의도를 표출해 주는 구체적인 행동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일례로, 집을 갖고 싶다면 곧 이사 갈 것처럼 행동하라. 부동산 광고와 부동산 카탈로그를 살펴보고, 상점에서 가구와 전자제품을 구경하는 등, 일찌감치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라 의도를 고정시키는 것은 대단히 효과적인 방법이다.
- 슬라이드를 강화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어떤 것이 효과적이거나 덜 효과적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몇 가지 방법을 이용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그중 하나만 사용해도 된다. 선택의 기준은, 가장 마음에 들고 가장 잘 된다고 생각되는 방법이 제일 좋은 방법인 것이다.
- 방법을 실천할 때 극성스럽거나, 아니면 반대로 아예 무사안일한 태도와 같이 극단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 어떤 방법은 온 정성을 다해서 강력하게 심상화를 하라고 하는가 하면, 또 어떤 방법은 사념을 만들어서 자유롭게 날려 보내고 난 후에는 주문이 실현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그것을 기억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중용을 취하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중용이 어디에 있는지 찾는다고 애쓰지는 말고, 나에게 잘 듣는 것은 모두 옳은 것이라는 법칙을 기준으로 삼으라.
- 자신만의 방법을 스스로 만들어내어 성공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하는 일이 옳다는 데에 영혼과 마음의 뜻이 일치하게 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 마치 당신의 현실이 거울에 반사되듯이 형성된다. 거울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지는 당신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세계의 층을 당신이 편한 대로 창조하라.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 심상화를 할 때 감정적 불편을 느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외부의도는 영혼과 마음이 일치될 때만 생긴다. 일을 억지로 하려고 하면 이 일치에 도달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시간만 낭비하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게 된다.
- 목표 슬라이드의 심상화는 편안하고 즐겁게 해야 한다. 단 한 가지 조건을 붙이자면, 슬라이드를 그림 보듯이 이만치 떨어져서 바라보는 게 아니라 가상으로라도 그 속에서 살아야 한다. 당신이 슬라이드 밖이 아니라 안에 들어 있는 모습을 심상화하라. 그 나머지는 당신 마음대로 하면 된다. 하지만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 다만 규칙적으로 가끔씩 이미 목표를 달성한 것처럼 여기면서 그것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무엇이든 성공적인 결과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기분 좋지 않겠는가? 자신을 즐겁게 해 주라. 그것을 의무로 만들지 말라. 유쾌한 것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당신은 점점 목표에 다가가고 있다. 그리고 목표에 다가가고 있음을 알면 그것이 자신을 즐겁게 해 준다. 당신에게 이런 '즐거운 순환'이 일어나고 있다면 목표는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해도 좋다.
- 규칙성은 성공의 중요한 조건이다. 사념만으로 아주 쉽게 자신의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단 한 달 동안만이라도 규칙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의식적으로 목표에 집중해 본 적이 있는가? 아마도 그런 적이 없을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생각을 제멋대로 움직이도록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흐물흐물 형체 없는 혼합물처럼 공간 속으로 흩어지기 때문에 눈에 띄는 어떤 결과를 보여주지 않았다. 단지 불길한 우려가 당신의 근심스러운 사념에 끌려와서는 현실화되어 버린다.
- 이것은 현실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기본적인 방법들이다. 이것을 실천하면 재미있는 현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예컨대, 오늘 당신은 마음이 고무되어서 열심히 심상화를 한다. 그러면 다음날 현실이 어딘가 좀 이상해진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너무 키가 크거나 별난 옷을 입었거나 이상하게 생긴 사람을 하루에도 여러 명이나 만날 수도 있다.
- 비교를 위해 두 아이가 만나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한 아이는 세상이 유모차에 태워서 가고 있고, 또 한 아이는 자기 세계와 손을 잡고 가고 있다. 첫 번째 아이는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자랑스럽게 말한다. "나의 세계는 나를 보살펴주고 있어!"
다른 아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나의 세계와 함께 장난감을 받으러 가고 있어!"
차이를 알겠는가?
-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어느 날 나는 한 독자한테서 편지를 받았는데 그 내용에서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중요한 아이디어를 전해주었다. "나는 트랜서핑 기법은 잘 모르지만,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나서부터 나에겐 모든 일이 잘 되고 있고, 앞으론 더욱더 잘 될 것 같아요. 모든 일이 필요한 대로 잘 될 거라는 강렬한 느낌이 생겼어요."
당신이 모든 방법을 아예 잊어버리고서도 이런 통합된 느낌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에게는 모든 일이 훌륭하게, 필요한 대로 이루어지고 있어"라는 공식에 따른 의도의 통합은 성공의 이미지를 창조하고, 그것은 현실로 반영된다.
- 당신의 가능성은 오직 당신의 의도로써만 제한된다.
- 한편 당신을 묶어두는 것은 단 한 가지 당신의 주의다. 당신은 거울밖으로 나갈 수 있다. 거울 속은 무의식적인 꿈이지만, 거울 밖에서는 의식적으로 꿈꾸는 것이 가능하다. 이 거울은 이중거울이라서 양쪽 면에 있는 현실은 똑같다. 하지만 거울 안에서는 당신이 현실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당신을 조종한다. 그 속에서 당신은, 손을 대면 반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환상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변화는 내부의도가 외부의도로 변하는 바깥에서만 가능하다. 밖으로 나오려면 주의를 거울 속의 반영으로부터 심상으로 옮겨야 한다. 자신이 거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 당신은 자기 생각의 심상으로써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 환상에서 벗어나서 거울의 다섯 번째 법칙에 따라 '원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원하는 것'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으로부터 '마음에 드는 것'으로, 질병으로부터 건강으로, 방법으로부터 목표로 생각의 방향을 돌리라. 잘 관찰해 보면 당신은 늘 상황에 양보하고,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순종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꿈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있다. 아니면 기껏 해봤자 자신의 시나리오를 고집하면서 상황에 저항하여 가능태 흐름과 싸우고 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거울 앞에 있는 심상, 곧 자신의 태도만 바꾸면 된다. 그러면 당신은 더 이상 게임의 노예가 아니고, 게임은 당신 밖에서 당신의 의지에 따라 전개될 것이다. 당신은 이제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이 된 것이다.
- 하지만 여기에는 새로운 규칙이 있다. 주사위를 던져서 당신의 관점에서 볼 때 실패로 여겨지는 조합이 나왔을 때도 그것을 성공의 조합으로 받아들이고 또 그렇게 선언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다시 거울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면 이 규칙을 어김없이 실천해야 한다.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시나리오를 쓰는 것으로부터 시나리오를 역동적으로 교정하는 쪽으로 전환해야 한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거울의 법칙을 따르는 한, 당신은 자기 세계의 주인이다.
- 마음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할 때 보통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 현실이 시나리오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마음이 불만을 제기할 때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즉각 만사가 잘 되어가고 있다고 다짐하면서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출발점에 서 있을 때, 마음으로서는 방법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음은 무엇을 실현시키려고 할 때는 반드시 어떤 구체적인 방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온갖 부정적인 가능성들을 떠올리면서 걱정한다. 그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이 바보야,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란 걸 알아둬! 네가 할 일은 최종 목표에만 주의를 고정시키는 것뿐이야!"
-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한 바가 실현되는 것을 스스로 나서서 훼방한다. 어떤 소망을 품을 때 마음은 항상 대략적인 사건의 전개도를 미리 짜낸다. 마음의 본성이 원래 그렇다. 그런데 일어나는 사건이 시나리오와 일치하지 않으면 마치 아무 일도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두가 되어야 할 대로 이뤄지고 있다. 그런데 마음은 틀에 꽉 박혀 있어서 시나리오를 수정하기 싫어하기 때문에 스스로 모든 일을 망쳐놓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바로 여기에 모순이 있다. 주문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어야 할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사람이 그것을 알고 있노라고 주장하고 나서면 결국은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 거울의 백일몽에서도 모든 것은 똑같지만 단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거울의 백일몽에서는 현실이 그다지 빨리 반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완만한 성질을 받아들이고 익숙해지고 놀라운 일을 경험할 수 있다. 현실이 당신이 사념으로써 만들어는 내는 심상에 따라 부드럽게 변해가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당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당신은 이 세계의 밖에 있다. - 거울 밖으로 나온 것이다.
- 친애하는 독자여, 당신은 이제 현실을 조종하기 위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당신이 온 세계를 바꿔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의 개별적 현실은 당신의 손안에 들어 있다. 당신이 이중거울의 환상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거울세계의 밖으로 나오면 당신 앞에는 무한한 가능성을 담고 있는 영원이 열려 있다. 이는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가능태 공간 속에는 세 가지의 소중한 선물이 있다. 당신이 실현할 수 있는 당신의 미래, 당신을 천재로 만들어줄 수 있는 비밀의 참지식, 그리고 숨 막힐 정도로 놀라운 제3의 뭔가가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 당신은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어떤 위대한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온갖 자료를 통해서 그 답을 찾고 또 뭔가를 배운다. 이것은 끝이 없는 일이다. 모든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는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은 평생 도움을 청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어디서 그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까? 많은 책을 읽어서 그렇게 똑똑해졌는가, 아니면 특별한 재주가 있었던 것일까? 둘 다 아니다.
- 인류는 늘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 이 지식의 흐름은 끝이 없다. 하지만 발견하고 창조해 내는 사람들은 극소수이고, 나머지는 '그런 걸 어떻게 생각해 냈지?' 하며 놀란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저 사람은 선택받은 사람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사람을 선택된 자로 만들어주는 것일까?
- 그의 목표와 문은 독특해서 그것이 그만의 특유한 '길'인 것이다. 당신이 자신의 길로 갈 때도 세상의 보물들이 당신 앞에 열릴 것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쳐다보며, '저 사람은 어떻게 그런 걸 이뤄냈을까?' 하며 놀랄 것이다. 이렇게 간단하다. 이 간단한 원리는 표면에 드러나 있지만 동시에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하나의 역설이다. 새롭고 아직 정복되지 않은 것을 얻기 위해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한다고 모두들 생각은 하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을 뒤따라가면서 남의 경험을 반복하려고 한다.
- 책, 그림, 음악 등의 모든 창작물들은 가능태 공간으로부터 꺼내오는 것이다. 가능태 공간의 그 섹터에 '걸개'가 걸려야 하는 것이다. 선율을 얻기 위해서는 두세 개의 특정한 화음이 걸개가 될 수 있다. 그림을 위한 걸개는 분위기(기분)이다. 책을 위해서는 상황이 걸개가 된다. 책을 쓰기 위해서 꼭 줄거리를 생각해 내야 할 필요는 없다. 줄거리는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자만에 찬 이성을 잠잠하게 만들어놓고 주인공들이 상황 속에서 스스로 해방되도록 허용해주기만 하면 줄거리는 상황에 따라 저절로 구성되어 풀려나오는 것이다. 꾸며낼 필요가 없다. 거기에 모든 것이 이미 존재한다. 가만히 가능태 흐름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천재적이라는 것은 이처럼 너무나 단순한 것이다. 그리고 가능태 흐름은 바로 이런 단순한 길을 따라 흐른다. 단지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일 뿐이다.
- 그런 식으로 아무 계획 없이도 어떤 시발점으로부터 비롯되어 컴퓨터 프로그램도 만들어질 수도 있고 어떤 장비가 개발될 수도 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계획이 꼭 필요하다. 하지만 계획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일부 과정에서라도 가능태 흐름을 따라야 하고 구상이 스스로 실현되도록 허용해야 한다. 마음은 모든 것을 미리 계획하려 들기 때문에 일을 복잡하게 만든다. 하지만 가능태 흐름은 언제나 가장 우아한 최적의 해결책을 제공해 준다. 그 때문에 구체적인 설계도 없이 어떻게 모든 일이 그토록 잘 이루어졌는지 어리둥절해하며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꾸며내지 말고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단순하게 나아가기만 하라. 모든 일의 시발점은 아이디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고 나머지는 가능태 흐름이 완성시켜 줄 것이다. 아이디어도 개발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렇다. 같은 장소에서 온다.
-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고자 하는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스스로 그것을 의심하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면 당신의 판결은 효력을 잃고 당신은 법을 만드는 사람에서 피고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어떤 경우에도 의심을 하면 움직임이 틀려지고 만다. 얼마나 정확하게 생각하고 움직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옳다는 것에 얼마나 자신감을 가지고 있느냐가 문제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익히 지각하여 영혼과 마음이 일치하게 해야 한다. 이미 설명은 충분히 했다. 이제 추측을 지식으로 만드는 것만 남았다. 어떻게? 자신이 그것을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행동하고 확인하라.
- 다만 현실 지배자의 의도가 마음의 독재로 변질되지 않도록 경계하라. 영혼과 마음이 일치할 때만 판결이 효력을 지닌다. 자신의 영혼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창조하지 못하고 실수만 한다. 어디에 가도 뭔가를 잘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청각도 음정 감각도 목소리도 모두 안 좋은데 노래 부르기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간혹 자신이 스타라고 생각하는 명백히 재능이 부족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성공하지 못한다. 그들의 판결은 왜 효력이 없는 것일까? 그들은 가슴속에서는 잘 안 되는 것을 깨닫고 있지만 마음은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그 반대를 보여주려고 애쓰는 것이다. 재능 없는 사람은 없다. 단지 자신의 일이 아닌 것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 남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 세 번째 선물은 많은 특혜를 제공해 준다. 자신만의 판결을 내릴 권리는 압박받는 상황과 당신의 인생을 침울하게 하고 목표 도달을 방해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해준다. 이것은 진정한 자신감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의 세계는 나를 보살피고 있으며, 나는 자신에게 이 보살핌을 허락할 힘을 가지고 있다.
- 당신의 세계에서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를,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판결할 수 있는 자신의 권리를 가지는 순간부터 외부로부터 당신에게 강요되는, 트랜서핑을 포함한 모든 견해를 버려도 좋다. 당신이 의심과 망설임과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당신의 판결이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 끝으로 한 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가능태 공간 속에는 당신의 영혼과 마음이 원하는 모든 것이 다 존재한다. 하지만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영원의 문턱에는 영원 속에 있는 것을 지키고 있는 절대적인 법인, 문지기가 서 있다는 것이다. 이 엄격한 문지기는 현실의 지배자인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자신이 있는 사람들만을 들여보낸다. '내가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에 나는 할 수 있고 자격이 있다'는 당신의 판결이 당신의 출입증이 되는 것이다. 당신이 자신의 권리를 가지면 그 문지기는 당신 앞에 있는 영원의 문을 활짝 열어줄 것이다.
- 즉, 한편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힘이 당신을 절벽 아래로 끌어당기고 있고, 다른 편에서는 어떤 다른 힘이 당신을 절벽 끝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잡아당기고 있는 것이다. 결국 두려움에 의한 잉여 포텐셜을 제거하기 위해, 균형력은 당신을 절벽 끝에서 멀어지도록 잡아당기거나, 혹은 당신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그 상황을 종료시켜야 한다. 그러니까 당신이 절벽 끝에 서있는 동안 느끼는 것은 이 균형력의 작용인 것이다.
대부분의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바로 이 잉여 포텐셜을 제거하기 위한 균형력의 작용이다. 사람들은 종종 의도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결과를 얻는데, 그만큼 이 힘은 교활한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전혀 이해하지도 못한다. 바로 여기서 '머피의 법칙'과 같은 설명할 수 없는 일종의 악의적인 힘이 작용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 사람에게는 각자 자기의 삶에서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자신만의 고유한 길이 있다. 펜듈럼들은 성취하기 어려운 목표와 특권으로써 욕망을 부추기면서 사람들에게 낯선 목표를 강요한다. 당신은 잘못된 목표를 쫓아다니다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거나, 혹은 이루고 나서야 그것이 자신에게 필요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의 목표는 당신의 삶을 잔치로 바꿔놓을 무엇이다. 당신의 목표에 도달하면 다른 모든 소망은 덩달아서 이루어질 것이고, 그 결과는 당신의 모든 예상을 능가할 것이다. 당신의 문이란 당신의 목표로 당신을 데려다주는 길이다.
- 당신의 문을 통해서 당신의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면, 당신 영혼의 열쇠는 당신의 길의 자물쇠에 꼭 들어맞기 때문에 아무도 당신을 방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당신의 것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당신의 목표를 이루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있을 수 없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당신의 목표와 당신의 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트랜서핑은 그것을 찾는 법을 가르쳐준다.
- 가능태 공간의 정보체는 특정한 조건이 갖춰지면 물질화된다. 가능태 공간의 각 섹터처럼 모든 사념은 일정한 매개변수를 가지고 있다. 방사되는 사념은 거기에 상응하는 해당 섹터를 '조명' 하여 그 가능태를 실현시킨다. 따라서 사념은 사건의 전개 과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다.
가능태 공간은 형틀의 역할을 하여 물질의 형태와 운동 궤적을 결정한다. 물질적 실현 양태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변천하지만 가능태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영원히 존재한다. 각 생명체는 자신의 사념을 방사함으로써 자기 세계의 층을 형성한다. 세상에는 많은 생명체들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현실의 형성에 저마다 자신의 몫을 기여하고 있다.
- 달리 말하면, 사람은 자신의 행동과 생각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념체 (thought form)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바로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대부분의 시간을 골몰하게 만드는 물질적 문제들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트랜서핑은 문제의 형이상학적인 측면만을 다룬다.
- 다가오는 가능태 흐름의 물굽이를 가리켜 보여주는 것들은 안내 신호다. 어떤 사건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뭔가가 다가올 때, 이를 알려주는 신호가 생기게 마련인 것이다. 가능태 흐름의 방향이 바뀔 때 당신은 또 다른 인생트랙으로 옮겨 탄다. 각각의 트랙은 그 성질이 서로 어느 정도 균일하다. 가능태 흐름의 급류는 여러 트랙을 건너갈 수 있다. 인생 트랙들은 서로 간에 매개 변수가 다르다. 그것은 사소한 변화지만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이 질적인 차이를 당신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뭔가가 달라졌다'고 느끼는 것이다.
- 안내 신호는 당신이 다른 인생트랙으로 옮겨가기 시작할 때에만 나타난다. 그 개별적인 현상들을 당신은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다. 예컨대, 까마귀가 울었는데 당신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질적인 차이를 못 느꼈다면 아직도 이전의 트랙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현상이 당신의 경각심을 높여놓았다면 그것이 바로 신호인 것이다. 신호는 항상 본질적으로 다른 인생트랙으로 전환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보통의 현상과는 구별된다.
- 다른 것과 아무 관계없이 혼자서만 존재할 때는 잉여 포텐셜은 그 자체로서는 위험하지 않다. 하지만 어느 한 대상에 대해 인위적으로 지나친 평가가 부여되어 다른 것과 비교될 때 양극화가 생겨서 균형력의 바람이 일어나는 것이다. 균형력은 양극성을 제거하려고 애쓰는데, 그것의 활동은 대부분의 경우 양극성을 만든 사람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 연결점 (assemblage point)
카를로스 카스타네다의 책 <The Fire from Within>에 나오는 개념. 카스타네다에 따르면, 인간의 몸은 빛나는 알 모양의 에너지 거품으로 둘러 싸여있는데, 그 알 표면에는 어셈블리지 포인트라는 것이 있어서 거기에서 외부와 내부의 에너지 방사를 연결한다. 우리는 그 지점을 통해서 외부의 현실을 인식한다. 이 포인트를 이동시키면 현실 인식점이 변화되므로 다른 차원을 경험할 수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은 이 포인트가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 같은 현실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보통 동그란 원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포인트의 모양을 타원형으로 변형하여 길게 폭을 넓히면 다른 차원에 접속해서 그 차원의 존재와 차원을 공유하게 된다고 한다. 어셈블리지 포인트는 일반적으로 알의 4분의 3 높이의 위치에 존재하며 의도의 힘으로 위치를 변경할 수 있다. 객관적인 현실은 없으며, 우리는 각각 자신의 포인트가 어떤 에너지 방사선들을 연결하여 정렬하는가에 따라 조금씩 다른 세상을 경험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개념은 트랜서핑의 원리와도 통한다고 하겠다.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 > Book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춤의문] 연애 타로카드의 정석 - 78장의 타로카드로 내다보는 당신의 연애운 (0) | 2024.05.28 |
---|---|
[대니얼 트루소니] 천사학 1-2 (1) | 2024.05.15 |
[장재웅] 타로 해석학 개론 - 78개의 카드 속에 숨겨진 미래를 정확히 해석하는 방법 (0) | 2024.05.14 |
[케이트 뱅크스] 마술사의 제자 (0) | 2024.03.12 |
[스와미 사라다난다] 치유를 위한 손가락 요가 - 건강과 명상을 위한 요가 무드라의 모든 것 (0) | 2024.03.03 |
[브라이언 스콧] 리얼리티 레볼루션 - 어느 깨달음 중독자가 실험한 현실 창조의 강력한 도구들 (0) | 2024.0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