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대니얼 트루소니] 천사학 1-2

일루젼 2024. 5. 15. 20:20
728x90
반응형

저자 : 대니얼 트루소니 / 남명성
출판 : 문학동네
출간 : 2013.11.15 


   

저자 : 대니얼 트루소니 / 남명성
출판 : 문학동네
출간 : 2013.11.15 


       

   

작년 '문화가 있는 날', 도서관 서가를 훑다가 발견해 읽어본 책이다.

후속작인 <Angelopolis>는 번역 출간 예정이었으나 취소된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도 <다빈치 코드> 등이 재출간되는 등 인기를 끌자 비슷한 분위기의 소설을 찾아 출간했던 것이 아닐까 싶은데, 줄거리나 내용 자체는 딱히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매력 있는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연기와 뼈의 딸>이 많이 생각났는데, 그런 류의 천사와 인간 소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에녹서>와 영지주의 설정을 상당 부분 차용했다는 점일 것이다. 여타의 작품에서 천사들이 대체로 선한 진영으로 묘사되었다면 <천사학>에서는 중립 혹은 그 반대 입장으로 등장한다. 해서 해당 내용을 접해보지 않은 분들께는 신선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다.

 

가브리엘라는 무척 매력적인 캐릭터이지만, 그녀를 마타 하리(Margaretha Geertruida Zelle)와 분리해서 바라보기는 어렵다. 오마쥬에 가까울 정도로 -외양과 행적 모두- 마타 하리와 무척 닮아 있는데 -그래서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인지- 사랑스럽다. 그녀를 따라 겔랑의 '샬리마'를 구매할 정도로.

 

그러나 그녀와 무척 닮았다고 묘사되는 주인공 에반젤린은 무심코 읽으면 안젤라와 비슷한 외양이 연상된다 -금발에 파란, 혹은 녹색 눈-. 아마도 <천사학> 내에서는 주로 어린 시절과 수녀원에서의 활동 위주로 나타나 있어 외형적 특징이 강조되지 않아서가 아닐까 싶은데... <Angelopolis>를 이어서 읽어봐야 알게 되겠지만 아무래도 나는 그녀에게 정을 붙이지 못한 모양이다. 가브리엘라가 더 매력적이기 때문인지, 나의 취향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로서는 원서로 읽을 정도로 뒷 이야기가 궁금하지는 않다. 

 

즐거웠고, 반가웠다.

     

 


 

 

- 신학의 한 분야인 천사학(天使學)은 천사학자의 존재를 통해 완성된다. 천사학자는 천사 조직에 관한 이론적 연구와 인류 역사를 통한 예언자적 임무를 수행한다. 

- 불가리아, 로도피 산맥, 악마의 목구멍 동굴
1943년 겨울
천사학자들은 시체를 자세히 살폈다. 썩은 흔적도 없이 멀쩡했다. 피부는 양피지처럼 희고 부드러웠다. 생기를 잃은 옥색 눈동자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시원한 이마와 조각 같은 어깨 위로 흘러내린 곱슬곱슬한 금빛 머리칼은 후광처럼 보였다. 옷도 아주 깨끗했다. 옷을 짜는 데 쓰인 하얗게 빛나는 금속 재질의 실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아내지 못했다. 마치 땅속 깊은 동굴이 아니라 프랑스 파리의 병원에서 방금 숨을 거둔 시체처럼 깨끗했다.  

- 천사가 이렇게 잘 보존된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울 게 없었다. 손톱은 굴 껍데기의 안쪽처럼 무지갯빛으로 빛났다. 호리호리하고 매끈한 배에는 배꼽이 보이지 않았고 피부는 섬뜩하리만치 투명했다. 시체의 모든 것이 알고 있던 그대로였다. 심지어 날개의 위치마저 정확했다. 하지만 천사학자들이 답답한 도서관에 틀어박혀 길을 안내해 줄 지도라도 되는 양 앞에 펼쳐놓고 연구하던 15세기 그림들의 복사본 속 존재들에 비하면 훨씬 매력적이고 생기가 넘쳤다.

 

- 그들은 학자 인생 내내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 그들 중 아무도 인정하지 않겠지만, 내심 고고학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처럼 모든 뼈와 섬유조직이 분쇄된 괴물 같은 시체를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발견된 건 이런 모습이었다. 섬세하고 가느다란 손, 뾰족한 코, 얼어붙은 것처럼 굳게 다문 분홍색 입술. 천사학자들은 묘한 기대를 품고 시체 주위를 서성거렸다. 천사가 눈을 깜박이며 잠에서 깨어나길 바라기라도 하듯이.  

- 뉴욕 주, 밀턴, 허드슨 리버 밸리, 세인트로즈 수녀원
1999년 12월 23일 새벽 네 시 사십오 분
에반젤린은 해가 뜨기 전에 잠에서 깼다. 4층은 조용하고 어두웠다. 밤늦게까지 기도하다 잠든 수녀들을 깨우지 않도록 조용히 신발과 스타킹, 치마를 챙겨서 품에 안고 맨발로 공동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의 희뿌연 창문으로 새벽안개에 덮인 수녀원 마당이 보였다. 눈 쌓인 넓은 안마당은 허드슨 강가까지 이어졌다. 강가에 현수막처럼 늘어선 메마른 나무들이 수면에 비쳤다. 세인트로즈 수녀원은 위태로워 보일만큼 강에 바짝 붙어 있어서 낮에는 건물이 두 개로 보였다. 땅 위의 수녀원과 달리 물에 비친 수녀원은 너울거리는 물결에 가볍게 흔들렸다. 마치 종이를 접어 똑같이 찍어낸 그림처럼 두 건물이 이어져 보였지만, 여름에는 강을 지나는 바지선이, 겨울에는 강 가장자리에 언 얼음이 그런 환영을 깨뜨렸다. 에반젤린은 새하얗게 눈 덮인 강변을 따라 흐르는 시커먼 강물을 지켜보았다. 이제 곧 아침 햇살이 강물을 금빛으로 물들일 터였다.

- 에반젤린은 세면대로 몸을 숙이고 얼굴에 찬물을 끼얹어 꿈의 잔재를 떨쳐냈다. 꿈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 느낌만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파도처럼 밀려와 머릿속을 장막으로 덮는 듯한.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외롭고 혼란스러운 감정. 여전히 잠이 덜 깬 채 무거운 무명 잠옷을 벗었다. 썰렁한 화장실의 냉기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에반젤린은 면으로 된 하얀 팬티와 속셔츠(이 년마다 단체로 구입해 세인트로즈 수녀원의 모든 수녀에게 나눠주는 일반적인 내의)만 입고 서서 평가하는 듯한 분석적인 눈으로 거울에 비친 몸을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팔과 다리, 납작한 배, 헝클어진 갈색 머리칼, 가슴 위로는 금 펜던트가 자리 잡고 있다. 거울에 비친 그 모습은 그저 졸음을 참는 젊은 여인이었다. 

- 수녀원의 이름은 그녀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었다. 작은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는 성녀 로사의 머리 주위에는 희미한 후광이 빛나고 있었다. 성녀 로사의 삶은 짧았다. 세 번째 생일이 지나자마자 천사들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천사들은 그녀에게 귀 기울이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했다. 성녀 로사는 이교도마을에서 하느님과 천사들의 말씀을 전하다가 마녀로 몰려 죽음으로써 젊은 여자의 신분으로 성인의 자격을 얻었다. 마을 사람들은 성녀 로사를 기둥에 묶고 불을 질렀다. 놀랍게도 성녀 로사는 불길에 휩싸인 뒤에도 타지 않고 세 시간 동안 천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이들은 천사들이 몸으로 그녀를 감싸 보호했다고 믿었다. 결국 성녀 로사는 불길 속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기적처럼 시체는 전혀 훼손되지 않았다. 성녀 로사가 죽고 수백 년이 지나 사람들은 그녀의 썩지 않은 시체를 모시고 비테르보의 거리를 행진했는데 젊은 육신 그대로인 시신에는 그 어떤 시련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 수녀원 카펫 위를 벗어나 녹색 줄무늬가 있는 연한 장밋빛 대리석 바닥으로 내려서자 발소리가 사뭇 또렷하게 들렸다. 문턱을 한 발짝 넘은 것에 불과했지만 양쪽의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공기는 향내와 섞여 무거워졌고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비치는 햇빛은 푸르게 젖어 있었다. 하얀 회반죽을 바른 벽에서 커다란 석재 벽으로 바뀌었다. 천장은 높이 솟았다. 금빛으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신로코코 양식이 금세 눈에 익었다. 수녀원 건물을 벗어난 에반젤린은 공동체와 봉사의 책무를 벗고 천상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하느님과 성모마리아, 천사들의 세계였다. 

- 처음 세인트로즈 수녀원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 에반젤린은 '천사들의 마리아 성당'에 천사들의 모습이 지나치게 많다고 생각했다. 어린 그녀에게는 천사들이 위압적으로 너무 많은 곳을 장식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건물의 갈라지거나 구부러진 곳마다 천사들이 있었다. 다른 장식이 들어설 틈이 없었다. 치품천사들이 중앙 돔을 둘러싸고 있었다. 제단 양쪽 구석에는 대천사의 대리석 상이 있었다. 기둥마다 금빛 후광과 트럼펫, 하프, 작은 날개들이 상감으로 새겨져 있었다. 신도들이 앉는 긴 의자마다 양끝에 푸토의 얼굴이 빽빽하게 조각되어 박쥐 떼처럼 보이는 게 마치 최면을 거는 듯했다. 화려한 장식들이 하느님께 올리는 공물이자 헌신의 상징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에반젤린은 내심 실용성에만 충실한 수녀원이 더 좋았다. 정식으로 수녀가 되기 전에는 처음 수녀원을 세운 사람들이 못마땅했다. 그렇게 많은 돈을 왜 좀 더 좋은 일에 쓰지 않았을까. 하지만 수도복을 입은 뒤부터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호오도 변했다. 착의식(着衣式) 자체가 아주 조금씩 그녀를 획일적인 사람으로 바꿔놓은 것 같았다. 수녀로 오 년을 보내고 났을 때, 그녀 안의 어린 여자아이는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 잠시 멈춰 선 에반젤린은 성수에 집게손가락을 담갔다가 이마와 심장, 왼쪽 어깨와 오른쪽 어깨를 짚으며 십자성호를 그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 14처'와 등받이가 꼿꼿한 붉은 참나무 신도석과 대리석 기 등을 차례로 지나 좁다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 안으로 나아갔다. 아직 해가 어스름한 시간이었다. 긴 의자들 사이 넓은 중앙 통로를 따라 성배와 종과 예복들이 굳게 잠긴 벽장 속에서 미사를 기다리는 성구 보관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성구 보관실 끝에 붙어 있는 문으로 다가섰다. 에반젤린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곧 어마어마하게 밝은 빛에 노출될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 떨리는 가슴으로 차가운 놋쇠 문고리에 손을 얹고 밀었다. 

- 수녀들이 경배를 올리는 작은 예배당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방이 금빛으로 빛나서 마치 에나멜을 입힌 파베르제의 달걀 한가운데 들어온 느낌이었다. 영원한 경배 프란체스코 수녀회의 비공개 예배당은 가운데가 높이 솟은 돔으로 되어 있고 사방 벽은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예배당을 장식한 작품들 가운데 최고 걸작은 제단 뒤로 높이 걸린 '바이에른 창문'이었다. 세 개 층으로 나뉜 하늘에 속하는 천사들이 묘사되어 있었다. 첫 번째 하늘에는 치품천사, 지품천사, 좌품천사가 그려져 있었다. 두 번째 하늘은 주품천사와 역품천사, 능품천사로 채워졌고, 세 번째 하늘은 권품천사와 대천사 그리고 천사가 차지하고 있었다. 세 개의 하늘이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운 천상의 합창, 하늘의 목소리를 이루었다. 매일 아침 에반젤린 수녀는 어마어마하게 크고 번쩍거리는 창문에서 날아다니는 천사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본디 광채는 어떨지 상상해 보려 애썼다. 마치 열을 내뿜듯 스스로 빛을 발할 것만 같았다. 

- 영원한 경배 프란체스코 수녀회는 처음 수녀회를 설립한 프란체스카 수녀원장이 19세기 초에 예배를 시작한 이래 단 하루, 단 한 시간, 단일 분도 멈추지 않고 기도를 올려왔다. 거의 이백 년이 지난 뒤에도 예배는 계속 이어졌으며, 세계에서 가장 길고 고집스럽게 이어지는 예배로 기록되었다. 이곳 수녀들은 무릎을 굽히고 가볍게 묵주를 돌리고 매일 한 번씩 수녀원과 예배당을 오가는 일이 생활의 전부였다. 매시간 수녀들은 두 명씩 예배당으로 와서 십자성호를 긋고 하느님 앞에 겸허히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아침 햇살 속에서도, 촛불 아래서도 기도를 올렸다. 평화와 은혜를 위해 기도했고 인류의 고통이 멈추길 기도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대륙을 위해 기도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해 기도했다. 이 타락하고 타락한 세계를 위해 기도했다. 

- 에반젤린 수녀는 푹신한 방석에 무릎을 묻었다. 방석은 방금까지 있던 버니스 수녀의 체온으로 따뜻했다. 십 초 뒤 에반젤린과 짝이 되어 기도하는 필로메나 수녀도 옆자리에 와서 무릎을 꿇었다. 두 사람은 여러 세대 전부터 계속되어 온 기도, 영원한 희망의 고리처럼 수녀회의 모든 수녀들 사이에 이어져온 기도를 이어나갔다. 유리 덮개 안에서 맞물린 톱니바퀴들이 부드럽게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작고 복잡한 모양의 금 괘종시계가 다섯 시를 알렸다. 에반젤린의 가슴에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천상과 지상의 모든 것이 완벽하게 예정대로였다. 에반젤린은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시작했다. 다섯 시 정각이었다. 

- 평소 자주 보던 종류의 편지가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다른 편지들처럼 지난 이백 년 동안 끊임없이 경배의 기도를 드려온 수녀들을 칭송하거나 그동안 수녀원에서 베푼 자선활동 또는 세계 평화를 위한 헌신을 언급하지 않았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부를 하겠다거나 유산을 수녀원에 넘기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불쑥 요청부터 꺼냈다. 

[친애하는 세인트로즈 수녀원 관계자께
제 고객의 의뢰를 받아 조사하는 과정에서, 록펠러 가문의 안주인이자 예술계 후원자로 유명했던 애비게일 앨드리치 록펠러 여사와 세인트로즈 수녀원 이노센타 원장이 록펠러 여사가 사망하기 사 년 전인 1943년에서 1944년 사이에 잠시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최근 저는 이노센타 원장이 보낸 편지 몇 통을 우연히 발견했고 이를 통해 두 사람이 어떤 관계가 있었음을 알아냈습니다. 록펠러 가문에 대한 다른 학술자료에서는 두 사람이 알고 지냈다는 내용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 혹시 이노센타 원장이 받은 편지들이 수녀원에 보관되어 있는지 문의하고자 합니다. 보관되어 있다면제가 세인트로즈 수녀원을 찾아가 편지를 열람할 수 있게 허락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게 내어주시는 시간이 소중함을 잘 알고 있으며, 모든 비용은 저를 고용한 의뢰인이 기꺼이 부담할 것입니다. 주실 도움에 미리 감사드리며 이만 줄입니다.  

V. A. 베를렌]


- 에반젤린이 쓴 답신은 쌀쌀맞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필로메나 수녀에게서 비전문가들이 수녀원 자료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는 특별 지시를 받은 터였다. 뉴에이지에 빠진 사람들이 수호천사니 뭐니 떠들어대기 시작하더니 최근에는 아마추어 연구자들이 수녀원에 접근하는 경우가 꽤 잦았다. 사실 불과 육 개월 전에도 에반젤린은 그런 사람들이 관광버스를 타고 단체로 찾아오겠다는 요청을 거절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수녀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차별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른 수녀들은 수녀원이 보유한 천사 관련 작품들에 특별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자신들이 수행하는 엄숙한 소명에 수정구슬이나 타로카드에 심취한 아마추어가 관심을 보이는 걸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 다른 상자를 뒤져보려던 에반젤린은 성당 물품 구입 영수증 묶음 아래서 흰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꺼내보니 이노센타 원장 앞으로 온 편지였다. 보낸 사람 주소가 우아한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뉴욕 주, 뉴욕 시, 54번가 10W. 애비게일 록펠러 드림' 에반젤린은 온몸의 피가 머리로 몰리는 것 같았다. 베를렌이라는 사람의 주장이 옳다는 증거가 나온 것이다. 이노센타 원장은 실제로 애비게일 록펠러와 연락을 주고받은 사이였다.  

- 뉴욕 시, 센트럴파크 남서쪽 출입구
바삐 걷는 크리스마스 쇼핑객들 뒤로 얼음처럼 차가운 고요함 속에 존재감을 감춘 유령 같은 형체가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큰 키에 창백한 얼굴, 도자기처럼 연약해 보이는 퍼시벌 그리고리는 소용돌이치는 눈보라와 분간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는 외투 주머니에서 하얀 실크 손수건을 꺼내더니 입을 막고 격렬하게 몸을 떨며 기침을 했다. 경련을 일으킬 때마다 시야가 흔들리며 희미해졌고, 그러다 잠깐 멎으면 다시 초점이 맞았다. 실크 손수건이 파란 핏방울로 얼룩졌다. 눈 속에 박힌 사파이어처럼 찬란한 파란색이었다. 더는 부정할 수 없다. 지난 몇 달 동안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피에 젖은 손수건을 길가에 휙 집어던지는데 등의 살갗이 쏠리며 따끔거렸다. 그렇게 작은 움직임에도 어찌나 몸이 불편한지, 순간적으로 고문이라도 당하는 것 같았다. 

- 퍼시벌은 파텍필립 순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베를렌에게 연락해 약속을 확인하면서 절대 늦지 말고 열두 시 정각까지 오라고 말한 게 바로 전날 오후였다. 그런데 벌써 열두 시 오분이었다. 화가 난 퍼시벌은 차가운 공원 벤치에 등을 기대고 지팡이로 꽁꽁 언 땅바닥을 두드렸다. 상대가 누구든 기다리는 건 질색이었다. 하물며 보수를 후하게 지급하며 일을 시킨 사람을 기다려야 하다니. 전날 오후 두 사람은 통화를 하면서 별다른 인사치레 없이 형식적으로 해야 할 말만 주고받았다. 퍼시벌은 전화로 일 얘기를 하는 게 싫었다. 그런 식의 대화는 절대 신뢰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베를렌이 무엇을 찾아냈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퍼시벌과 그의 가족은 이미 오랜 세월 동안 미국에 있는 수십 개의 수도원에 대해 광범한 자료를 수집해 왔다. 그런데 베를렌이 허드슨 강 근처에서 우연히 흥미로운 걸 발견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퍼시벌은 베를렌을 갓 경영대학을 졸업하고 예술 시장에서 출세해 보려 허우적대는 사람쯤으로 생각했다. 그는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검은 곱슬머리에 옷차림은 어울리지도 않았고 자기 비하가 심했다. 퍼시벌이 보기에 베를렌의 예술적 기질은 그 나이의 남자들이 으레 가지고 있는 딱 그만큼이었다. 옷차림부터 태도까지 모든 게 미숙했고 유행에 휘둘렸다. 아직 세상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처럼. 퍼시벌이 고용할 부류의 사람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베를렌은 미술사 전문가면서 화가로 대학에서 시간강사 일을 했고 밤에는 예술품 경매장에서 일했다. 의뢰를 받아 연구나 조사를 할 때도 있었다. 틀림없이 스스로 자유분방한 보헤미안이라고 생각할 터였다. 시간관념이 부족한 보헤미안. 그럼에도 젊은 베를렌은 그동안 자신이 숙련된 전문가임을 보여주었다. 

- "건물 내부도 있습니다."

베를렌이 말했다.
"이걸 어디서 찾았지?"
"뉴욕 주 북부에 있는 카운티 법원 자료실에서 발견했습니다. 왜 이 자료가 거기 보관되어 있었는지 아는 사람도 없고 이 도면들이 사라진걸 눈치채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조사해 보니 1944년 수녀원에 화재가 난 다음 그리로 옮겨졌더군요." 

 "이건 그냥 흔해빠진 도면이 아닙니다. 여길 보세요."

베를렌은 희미한 팔각형 구조물 그림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림 윗부분에 '예배당'이라고 쓰여 있었다.

"정말 멋진 그림입니다. 비율과 입체감을 잘 아는 사람이 그린 거죠. 엄청나게 정확하고 자세합니다. 다른 것들과는 차원이 달라요. 처음에는 엉뚱한 자료가 섞였나 보다 생각했습니다. 스타일이 지나치게 달랐거든요. 하지만 다른 것들처럼 직인과 날짜가 찍혀 있었습니다." 

- 퍼시벌은 도면을 가만히 들여다보였다. 예배당 도면은 무척 공들여 그린 것이었다. 제단과 입구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듯했다. 예배당 내부에는 일련의 동심원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 중심에는 둥지 속에서 보호받는 알처럼 황금색 문장이 자리해 있었다. 여러 장의 도면을 살펴본 퍼시벌은 그 문장이 도면마다 그려져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 "그래서 좀 더 조사를 했습니다. 이건 기원전 5세기 트라키아 지방의 동전을 본뜬 겁니다. 진품은 일본에서 자금을 대서 발굴한 유적지에서 출토됐습니다. 지금의 불가리아 동부 지방인데 한때는 트라키아의 중심이었던 곳입니다. 트라키아는 5세기 유럽에서 보자면 일종의 문화적 안식처 같은 곳이었죠. 진짜 동전은 현재 일본에 있어서 이 복제품으로 조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를렌은 봉투를 열어 확대 복사한 동전 사진을 퍼시벌에게 내밀었다.
"동전이 발굴된 건 이 문장이 설계도면에 그려지고 백 년도 더 지나서입니다. 그래서 놀랍다는 겁니다. 문장뿐 아니라 도면들도요.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모양은 트라키아 동전들 가운데서도 매우 독특한 것 같습니다. 그 시대 동전에는 대부분 헤르메스나 디오니소스, 포세이돈처럼 신화 속 인물의 두상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런데 이 동전에는 악기가 그려져 있어요. 바로 오르페우스의 리라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트라키아의 동전이 여러 개 있습니다. 직접 보고 왔어요. 관심이 있으면 그리스 로마 관으로 가보시죠. 아쉽게도 이런 모양의 동전은 전시된 것이 없더군요. 이건 아주 독특한 물건입니다." 

- 아버지는 살아 있는 동안 하나밖에 없는 딸이 유령을 닮았다는 확신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에반젤린은 목걸이를 힘껏 움켜쥐었다. 리라의 날카로운 부분이 손바닥 깊이 파고들었다. 서둘러야 했다. 도서관에 있어야 할 그녀가 어디 갔는지 다른 수녀들이 궁금해할 게 분명했다. 머릿속에서 부모님 생각을 떨쳐내고 당장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했다. 

- 에반젤린은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가죽끈으로 묶은 작은 일기장이 들어 있었다. 가죽끈에는 금으로 만든 천사모양 걸쇠가 달려 있었다. 천사의 몸통은 길고 가늘었고 눈에는 파란색 사파이어가 박혀 있었다. 천사의 날개 부분을 누르자 걸쇠가 풀리며 에반젤린의 무릎 위에서 일기장이 펼쳐졌다. 가죽끈이 낡아서 제본이 헐거웠다. 첫 페이지에 '천사학'이라는 단어가 금박으로 찍혀 있었다. 에반젤린은 책장을 넘기며 손으로 그린 지도들과 갖가지 색깔의 잉크로 쓴 메모를 훑어보았다. 여백에는 천사나 악기들이 그려져 있었다. 중간에 악보만 한가득 채운 페이지도 있었다. 역사적 사실에 관한 분석이나 성서 속 이야기들이 쓰인 페이지가 꽤 많았고, 마지막 4분의 1쯤에는 에반젤린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숫자와 수식이 잔뜩 쓰여 있었다. 원래 할머니가 보관하던 일기장인데 지금은 에반젤린이 갖고 있었다. 그녀는 가죽 표지를 손으로 쓰다듬어보았다. 일기장에 쓰인 비밀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면서.
 
- 세인트로즈 수녀원은 천사에 관한 자료를 다수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신학계에서 유명했지만 에반젤린은 그런 자료를 거의 들여다보지 않았다. 수녀원이 소장한 자료들 중 일부는 1809년 수녀원이 생겼을 때부터 보관해 온 것들로 천사가 등장하는 미술작품과 천사학 서적의 역사, 중세 천사학의 도식을 옮긴 자료, 토마스 아퀴나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세계에서 천사의 역할을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한 연구자료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천사의 형체를 다룬 자료도 상당히 많았지만 내용이 매우 학술적이어서 대부분의 수녀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특히나 천사에 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젊은 수녀들은 더더욱. 수녀원은 뉴에이지 풍조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지만, 도서관에는 그런 가벼운 자료도 있었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천사 숭배를 다룬 책이나 수호천사의 현시에 관한 내용도 찾아볼 수 있었다. 삽화가 가득한 화보집도 많았다. 그중 에반젤린은 '에드워드 존스'의 작품집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 하지만 수녀원의 다른 모든 수녀처럼 에반젤린도 천사에 대해 기본적인 것은 배웠다. 천사들은 세상이 생겨나기 전에 창조됐다는 것, 그래서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천사들의 목소리가 공허 속에서 울렸다는 사실(창세기 1장 1절~5절). 또 천사들은 영적이며 찬란한 빛을 내는 천상의 존재지만 인간의 언어를 사용했다. 유대인 학자들은 천사들이 히브리어를 사용한다고 했고 기독교인들은 라틴어나 그리스어를 사용한다고 했다. 천사가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성서에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야곱이 천사와 씨름한 일(창세기 32장 24절~30절), 에제키엘의 환시(에제키엘서 1장 1절~14절), 마리아에게 예수 잉태를 알린 일 (루카복음서 1장 26절~38절) 정도이다- 그런 순간들은 놀랍고 성스러웠다.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던 거미줄처럼 미세한 장막이 찢어지고 모든 인간이 경이로운 천상의 존재를 목격하는 순간이었다. 에반젤린은 종종 육체를 가진 인간과 영적 존재인 천사가 살갗에 바람이 스치듯 실제로 만나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천사의 모습을 마음속에서 그리려 애쓰는 일은 체로 물을 뜨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결론지었다. 그럼에도 세인트로즈 수녀원의 수녀들은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천사에 관한 책들이 도서관 서가에 끝도 없이 쌓여 있었다. 

- 떨리는 손으로 자개단추 여섯 개를 아래부터 풀었다. 마지막으로 셔츠를 벗은 다음 벽에 걸린 커다란 거울 앞에 몸을 쭉 펴고 섰다.
손을 펴 가슴을 쓰다듬자 서로 겹친 여러 개의 가죽끈이 만져졌다. 정교한 가죽 그물 같은 기구가 상체를 감싸고 있었다. 가죽끈을 전부 채우면 검은색 코르셋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가죽끈은 어찌나 팽팽하게 조이는지 살 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어떤 모양으로 고정해도 가죽끈은 늘 지나치게 죄어들었다. 퍼시벌은 숨을 몰아쉬며 작은 은제 버클에 달린 가죽끈을 하나씩 하나씩 주의 깊게 풀었다. 마지막 끈을 풀자 가죽이 타일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울리고 마침내 몸을 감싸고 있던 장치가 바닥에 떨어졌다. 

- 맨살이 드러난 가슴은 매끄러웠다. 배꼽도 젖꼭지도 없는 새하얀 피부는 떼어놓은 밀랍 덩어리 같았다. 그는 굳은 어깨를 풀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어깨, 길고 마른 팔, 깎아놓은 듯한 몸통의 곡선, 등뼈 중간쯤에는 뼈가 드러난 무른 혹 두 개가 보였다. 가죽끈에 잔뜩 눌리고 땀범벅이 된 모습이었다. 퍼시벌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뭉개진 날개를 보고 놀라움과 고통을 동시에 느꼈다. 한때는 튼튼하고 풍성하고 금빛 언월도처럼 멋지게 휘던 날개였다. 겨우 뿌리만 남은 날개는 병에 걸려 시커멓게 변했고 깃털은 말라비틀어졌으며 뼈는 퇴화된 상태였다. 등 한가운데 벌어진 두 군데 상처의 피부는 벗어지고 파랗게 변했다. 상처에서 나온 피가 끈적끈적하게 굳어 시커멓게 죽은 뼈 주위에 엉겨 붙어 있었다. 붕대로 동여매기도 하고 계속 깨끗이 닦아내면서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상처는 도무지 낫지 않았고 통증도 줄지 않았다. 하지만 진정한 고통은 날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난 뒤에 찾아올 터였다. 그를 다른 사람과 구별 지어 주었던 것, 다른 이들이 부러워하던 것이 사라질 테니까.

- 처음 증상이 나타난 건 십 년 전이었다. 날개깃과 깃대가 이어지는 부분을 따라 곰팡이 같은 게 살짝 나타났다. 구리 표면에 생기는 녹처럼 녹색 인광을 띠었다. 그저 단순한 감염이라고 생각했던 퍼시벌은 날개를 깨끗이 닦고 다듬었다. 깃털을 일일이 기름으로 닦아내기도 했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채 몇 달도 지나지 않아 날개 길이는 절반으로 줄었다. 짙은 금빛을 내뿜던 건강한 날개의 빛은 바래고 말았다. 예전에는 날개를 쉽게 접을 수 있었다. 화려한 깃털들이 부드럽게 접혀 등에 가볍게 달라붙었다. 하늘하늘한 황금빛 날개는 등을 따라 난 홈으로 접혀 들어갔다. 그러면 겉에서는 날개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날개는 실제로는 몸의 일부이지만, 건강하기만 하면 겉으로는 거의 홀로그램처럼 보였다. 날개는 천사의 몸과 마찬가지로 실재하지만 물질의 법칙에 구애받지 않았다. 퍼시벌은 옷을 여러 겹 입고도 허공에 날갯짓을 하듯이 쉽게 날개를 펼칠 수 있었다. 

- 하지만 이제는 날개를 전혀 오므릴 수가 없었다. 사라지지 않는 흔적은 오히려 점점 초라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상기시켰다. 고통이 온몸을 짓눌렀다. 이제 그는 전혀 날지 못했다. 깜짝 놀란 퍼시벌의 가족은 전문가를 불렀다. 전문가들은 가족이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진단을 내렸다. 퍼시벌이 그들 사회에 퍼지던 퇴행성 질환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의사들은 퍼시벌의 날개가 죽어가면서 온몸의 근육도 힘을 잃을 거라고 했다. 그러다 결국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될 것이고, 양 날개가 완전히 사라지고 뿌리까지 녹아 없어지면 죽을 거라고 했다. 여러 해 동안 치료를 했지만 병의 진행속도를 늦추었을 뿐 멈추지는 못했다. 

- 어머니가 있는 위층은 백작 부인이 여는 야간 연회처럼 늘 꽃과 하인, 가십거리로 가득했다. 그런데 오늘은 오십 명도 더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 생각보다 훨씬 화려한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사람들 머리 위로 높이 솟은 천장에 창문이 여러 개 나 있었지만 눈이 덮여서인지 실내는 평소처럼 환하지 않았다. 벽에는 그리고리 가문이 지난 오백 년 동안 수집한 그림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대부분 그리고리 가문 사람들이 혼자 보고 즐기려고 박물관과 수집가들에게서 사들인 것이었다. 모든 작품이 걸작이었고 진품이었다. 그리고리 가문은 진품을 이 집에 걸어두고 대신 정교한 복제품을 세상에 유통시켰다. 작품들은 매우 세심한 주의를 요했다. 온도 조절은 물론 전문가들을 동원해 주기적으로 청소도 해야 했지만,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작품들이었다. 네덜란드 거장의 작품이 많았고 일부는 르네상스 시대 작가의 작품이었다. 19세기 판화도 몇 점 있었다. 거실 중앙 벽면 전체에는 그 유명한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세 폭짜리 그림 <쾌락의 정원>이 걸려 있었다. 천국과 지옥을 소름 끼치도록 묘사한 작품이었다. 퍼시벌은 이 기괴한 그림 속 모습을 구석구석 뜯어보며 자랐다. 지상에서의 삶을 묘사한 가운데 패널은 어린 퍼시벌에게 인간의 속성을 일찌감치 가르쳐주었다. 그는 특히 보슈가 묘사한 지옥에 나오는 소름 끼치는 모양의 악기들에 매료되었다. 류트와 북들을 온갖 모양으로 해부해 놓은 모습이 흥미로웠다. 현재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걸려 있는 완벽한 복제품은 퍼시벌의 아버지가 개인적으로 돈을 들여 그리게 한 것이었다.   

- 퍼시벌은 지팡이의 상아 손잡이를 꽉 쥐고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그도 평소에는 방탕한 파티를 잘 참아냈지만 몸 상태가 나빠진 지금은 거실을 가로질러가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예전 동창생의 아버지가 보여 퍼시벌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은체를 했다. 그 가족은 몇 백 년 동안 그리고리 가문과 가까이 지내왔다. 남자는 깨끗하고 하얀 날개를 드러낸 채 다른 이들과 떨어져 서 있었다. 퍼시벌은 예전에 함께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는 여자 모델을 발견하고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투명하고 파란 눈이 사랑스러운 스위스 명문가의 아가씨였다. 아직 너무 어린 탓에 날개가 돋아나지 않아서 정확한 혈통은 파악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퍼시벌은 그녀의 가문이 유서 깊고 영향력도 크다는 걸 잘 알았다. 병에 걸리기 전만 해도 어머니는 그 여자와 결혼하라며 퍼시벌을 설득하곤 했다. 언젠가 그들 사회의 강력한 구성원이 될 여자니까. 

-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집안의 친구들은 그런대로 참고 견뎌줄 만했다. 그리고 그쪽이 그도 편했다. 하지만 사교계에 새롭게 등장한 벼락부자 펀드매니저나 언론계 거물들, 또는 뭐 얻어먹을 것 없나 하며 퍼시벌의 어머니에게 매달려서 환심을 사려는 족속들을 보면 구역질이 났다. 물론 그리고리 가문과는 수준이 다른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리고리 가문이 바라는 절대적 복종과 자율적 판단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는 걸 보고 있으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은 퍼시벌의 어머니 주위에 모여 그녀더러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본보기라며 칭찬과 아부를 쏟아내곤 했다. 다음날 오후에 그리고리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에도 초대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 퍼시벌은 마음 같아서는 가문 전체가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도무지 외로움을 견디지 못했다. 퍼시벌은 어머니가 세상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린 그들 종족의 끔찍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즐거움을 좇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리 가문은 아주 오래전부터 동맹을 맺고 친구들과 친척들로 구성된 조직에 의지해 신분과 재산을 지켜왔다. 구대륙에서 그리고리 가족은 그동안 가문이 이루어온 역사와 따로 떼어낼 수 없을 만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뉴욕에서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야만 했다. 

- 여동생 오털리가 희미한 햇빛을 받으며 창가에 서 있었다. 키가 190센티미터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녀는 가슴이 깊이 파인 드레스를 입었다. 과한 옷차림이었지만 원래 취향이 그랬다. 금발은 말아 단단히 올려붙이고 입술을 밝은 분홍빛으로 칠했는데 어울리지 않게 너무 어려 보였다. 오털리도 한때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아름다웠다. 근처에 서있는 스위스 모델 아가씨보다 더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백여 년에 걸쳐 파티와 부적절한 관계를 흥청망청 즐기는 사이 아름다움은 재산과 함께 눈에 띄게 줄었다. 이제 오털리도 이백 살에 가까운 중년이었고, 감추려고 애써도 피부는 플라스틱 마네킹처럼 변해갔다. 아무리 노력해 봐야 19세기 때의 외모를 되찾을 수는 없었다. 

"어머니가 여기 계시기는 한 거냐?"
짜증스러운지 오털리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지막으로 봤을 땐 옥좌에 앉아서 찬양을 받고 있었어."

 

- 두 사람은 거실 맨 끝으로 향했다. 벽 한쪽을 차지한 프랑스식 유리창은 두껍고 투명한 유리 너머 안개가 자욱한 눈 덮인 도시 위로 날아오르라며 유혹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리 가문을 포함해 품위 있는 집안이면 모두 부리고 있는 하인 계급인 아나킴이 두 사람 앞으로 재빨리 다가와 "샴페인 더 드릴까요?"라고 묻고는 얼른 사라졌다. 온통 검은색으로 차려입은 아나킴은 주인으로 받들어 모시는 자들에 비해 키와 골격이 작았다. 퍼시벌의 어머니는 하인들이 손님들과 확실히 구분될 수 있도록, 검은 옷을 입는 것 말고도 늘 날개를 드러내고 있게 했다. 모양이나 폭 등 그들의 날개는 한눈에 봐도 차이가 확연했다. 순수 혈통인 손님들의 날개는 강인하고 깃털이 많은 데 비해 하인인 아나킴들의 날개는 얇은 막으로 되어 있어 잿빛 산광을 투영한 거미줄 같았다. 곤충의 날개처럼 아예 구조가 달랐다. 그래서 재빠르고 한 치도 틀림없이 정확하게 날 수 있었다. 노랗고 큰 눈에 광대뼈가 튀어나왔고 피부는 창백했다. 퍼시벌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아나킴이 하늘을 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독일의 런던 공습 때 대피하는 사람들 위로 하인들이 떼 지어 날다가 내려앉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겁에 질려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 사건을 목격한 퍼시벌은 왜 아나킴을 변덕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지, 왜 그들은 윗사람을 받드는 하인 노릇만 해야 하는지 이해했다. 

- 마침내 두 사람은 어머니인 스네자 그리고리 앞에 도착했다. 스네자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긴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나무틀에 뱀이 새겨진 고딕 양식의 큼직하고 아름다운 소파였다. 스네자는 뉴욕으로 이사한 뒤 수십 년 동안 꾸준히 몸무게가 늘었다. 그래서인지 헐렁한 실크 가운 같은 옷만 입었다. 깃털이 풍성하고 화사한 빛으로 반짝이는 양 날개는 가보를 전시하듯 가장 아름다운 각도로 접어놓은 모습이었다. 어머니에게 다가가던 퍼시벌은 그녀의 날개가 뿜어내는 광채에 눈이 멀 것 같았다. 우아한 어머니의 날개는 깃털 하나하나가 제각각 다른 색으로 반짝거렸다. 스네자의 날개는 가문의 자랑이었다. 그들이 가진 아름다움의 정점이자 순수한 혈통의 증거였다. 퍼시벌 외할머니의 날개는 스네자처럼 갖가지 색을 띠었을 뿐 아니라 활짝 펼치면 폭이 11미터에 달할 만큼 넓어서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했으며, 이는 그리고리 집안의 수준이 다르다는 걸 보여주었다. 프라 안젤리코나 로렌초 모나코, 보티치니가 천사를 그릴 때 모델이 돼주었다는 소문도 있을 정도였다. 스네자는 날개가 핏줄과 가문, 사회적 위치를 드러내는 상징이라고 말했다. 날개를 제대로 드러내기만 해도 권력과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오털리와 퍼시벌에게서 가문을 이어받을 후계자를 얻지 못해 스네자는 실망이 컸다. 

- 바로 이런 이유로 퍼시벌은 늘 오털리가 날개를 감추고 있는 게 불만이었다. 그녀는 다른 이들과 달리 날개를 펼쳐 보이지 않고 몸에 바짝 붙여 숨겨두었다. 미국에서 가장 명망 있는 천사 가문의 일원이 아니라 그저 그런 잡종인 것처럼 굴었다. 퍼시벌은 날개를 오므려 숨길 수 있는 능력이 훌륭한 도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른 이들과 뒤섞여 살아야 하는 사회에서는 더욱더 날개를 잘 숨길 수 있으면 들키지 않고 인간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사사로운 자리에서 날개를 숨기는 건 상대방을 모욕하는 행동이었다.

- 스네자 그리고리는 오털리와 퍼시벌을 맞으며 그들이 키스할 수 있도록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내 천사들."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스네자의 목소리에 독일 억양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어린 시절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보낸 영향이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오털리가 목에 건 목걸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분홍색 공 모양 다이아몬드 하나를 고전적으로 세공한 목걸이였다.

"아주 멋진 목걸이구나." 

스네자는 딸의 목에서 그렇게 멋진 보물을 찾아낸 것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기억 안 나요?" 

오털리가 가볍게 대꾸했다. 

"할머니가 쓰시던 거잖아요."

- 오털리는 망설이지 않고 목걸이를 빼내 어머니 손에 넘겨주었다.

"어머니가 하면 예쁠 거예요."

오털리는 이렇게 말하고는 스네자가 뭐라고 대꾸하는 게 듣기 싫은지 아니면 보석을 빼앗겨 화난 표정을 들키기 싫은지 바로 돌아서서 사람들 사이로 조용히 사라졌다. 드레스가 물에 젖은 듯 몸에 달라붙었다.

 

- "잠시 조용한 데서 드릴 말씀이 있어요."
"여기서 말하면 안 되는 거야?"
"내려가요. 여기서는 도저히 안 되겠어요." 

퍼시벌은 불쾌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스네자는 소파에서 일어나면서도 자신을 우러러보는 사람들이 하던 걸 멈추고 눈을 돌릴 만큼 멋진 장면을 연출해 냈다. 양 날개를 활짝 펼쳐 망토를 두른 것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었다. 그런 어머니를 지켜보던 퍼시벌은 질투로 몸이 떨렸다. 깃털이 풍성한 어머니의 건강한 날개는 화려하게 빛났다. 날개 끝부분의 장밋빛을 띤 작은 깃털이 등 쪽으로 갈수록 점점 커지며 번쩍거리고, 전체적으로 색깔이 조금씩 부드럽게 변하며 퍼져나갔다. 멀쩡하던 때 퍼시벌의 날개는 어머니의 날개보다 더 크고 멋지게 휘어졌다. 깃털 하나하나가 반짝거리는 금가루를 입힌 칼처럼 매끈했다. 퍼시벌은 어머니의 날개를 볼 때마다 다시 예전처럼 건강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스네자 그리고리는 손님들이 자신이 가진 천상의 미에 탄성을 올릴 수 있도록 잠시 멈춰 섰다가, 마치 게이샤가 합죽선을 순식간에 접는 것처럼 한순간에 날개를 접어 등에 바짝 붙였다. 퍼시벌에게는 그 모습이 놀라울 만큼 아름다워 보였다. 

"놀랍구나. 넌 정말 그 친구가 찾아낸 게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하니?" 

한참 뒤에 스네자가 말했다.
"무슨 말이에요?"
"넌 애비게일 록펠러와 연락했던 사람을 찾느라 더 큰 단서를 놓치고 있어."

스네자는 담배를 비벼 끄고는 다시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 설계도라는 게 바로 우리가 찾던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이리 줘봐라. 직접 확인해야겠어."

- "이미 손을 써뒀어요. 베를렌이 자기가 알아낸 걸 확인하려고 지금 수녀원으로 가고 있거든요."
"그 친구도 우리 종족이던가?"
퍼시벌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예전부터 부리던 사람도 아닌 베를렌을 필요 이상으로 신뢰하고 있다는 걸 알면 펄쩍 뛸 게 틀림없었다.

"외부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걸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아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뒷조사를 철저히 한 친구니까요."
"물론 그랬겠지."

스네자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예전에도 뒷조사를 철저히 하고 당했으니까."

- "이제 시대가 바뀌었어요."

퍼시벌은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어머니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침착하게 굴기로 마음먹었다.

"예전처럼 그렇게 쉽게 배신당하진 않아요."
"그래, 네 말이 옳아. 우린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지."

스네자가 바로 받아쳤다.

"자유롭고 안락한 시대에 살고 있어. 들킬 염려도 없고 유례없을 만큼 많은 재산도 모았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고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어. 하지만 동시에 우리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들이 자기만족에 빠져 약해진 시대이기도 하지. 질병과 퇴화의 시대이기도 하고. 너나 나나 위층에서 빈둥거리는 멍청한 녀석들 모두 언제든 정체가 드러날 수 있는 시대란 말이야." 

- 정말 많이 아파 보이는 그를 보고 왜 마음이 흔들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리는 왠지 모르게 기괴하고 불안해 보였다.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베를렌은 사람을 꿰뚫어 보는 직감이 뛰어났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도 금세 성격을 파악했고, 나중에 보면 첫인상과 다른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리를 처음 보자마자 베를렌의 몸은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리의 존재만으로도 힘이 쭉 빠졌다. 생기 없이 텅 빈 듯한 그에게서는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 오늘 오후에 만난 게 두 번째였는데 아마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수녀원을 무작정 찾아온 지금 일이 계획대로 잘 풀린다면 두 사람의 계약은 끝날 테고, 그게 아니라고 해도 그리고리는 오래 못 살 것 같았다. 낯빛이 어찌나 창백한지 파리하고 엷은 피부 속으로 이리저리 얽힌 파란 핏줄이 그대로 보일 정도였다. 열이 오르는지 눈이 시뻘게져 지팡이에 간신히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지 않고 눈보라 치는 공원에 나와 사람을 만난다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 베를렌이 생각하기에 세인트로즈 수녀원 도서관은 작고 별난 외관에 여기저기 고사리 화분이 놓여 있고 양과 아이들을 그린 괴상한 유화가 잔뜩 걸려 있을 것 같았다. 종교에 빠진 여자들 눈에는 그런 싸구려 장식들이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다. 사서를 맡은 수녀는 일흔 살쯤 먹어서 침울하고 창백한 얼굴에 온통 쭈글쭈글하고 자신이 지키는 그림들 가운데 어떤 걸 보더라도 감탄하는 법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아름다움과 쾌락, 삶을 견뎌낼 수 있도록 해주는 이 두 가지 요소를 세인트로즈 수녀원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으리라. 전에도 수녀원에 와본 적은 없었다. 베를렌의 가족은 모두 고등교육을 받은 불가지론 지지자들로 속으로 믿는 걸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자신이 믿는 바를 입밖에 꺼내면 모두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굴었다. 

- 강을 기준 삼아 살펴보니 중앙 출입문은 건물 남쪽에 있어야 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건물 서쪽에 정문을 보고 나 있었다. 지도를 보면(베를렌은 어느새 설계도를 지도처럼 생각했다) 성당과 예배당이 있는 건물이 부지 안쪽에 자리를 잡고, 수녀원은 그 앞에 좁고 긴 모양으로 서있어야 했다. 하지만 도면을 잘못 읽은 게 아니라면 실제 건물들의 배치는 전혀 달랐다.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설계도와 눈앞에 보이는 실제 건물들의 모습은 영 딴판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베를렌은 담장까지 다시 걸어 나가 멀리 건물들을 살피며 설계도와 비교해 보았다. 눈앞에 있는 두 건물은 도면과 전혀 달랐다. 설계도에서는 건물 두 채가 떨어져 있었는데 실제로는 오래된 것과 비교적 최근에 지은 것을 이어 붙인 듯한 거대한 건물 한 채가 서 있었다. 두 개의 건축물을 칼로 잘라내 초현실적 콜라주 기법으로 붙인 듯했다. 

- 그리고리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베를렌은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은 예술품 경매장이었다. 베를렌은 대호황 시대를 주름잡은 명가 소유의 그림과 가구, 책, 보석류를 경매에 붙이는 일을 돕고 있었다. 앤드루 카네기가 소장했던 고급 은제 세트, 금장식에다 헨리 플래글러의 이니셜을 새긴 크로케 나무망치 세트, 뉴포트에 있는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2세의 저택 '브레이커스'에서 나온 작은 넵투누스 동상 등이 경매에 올랐다. 경매는 활발하지 않았고 호가도 대부분 기대에 못 미쳤다. 그러나 퍼시벌 그리고리가 존 D. 록펠러의 부인 로라 셀레스티아 스펠먼, 또는 '세티'의 소장품을 높은 값에 사들이는 걸 보고 베를렌은 그에게 관심이 생겼다. 

- 베를렌은 록펠러 가문에 관해 상당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퍼시벌 그리고리가 사들인 물건들이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리고리는 그 물건들이 어지간히 갖고 싶었는지 가격을 꽤 높은 수준까지 올리며 경매에 참여했다. 마지막 물품의 경매가 끝나고 베를렌은 그리고리에게 다가가 축하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은 록펠러 가문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뒤이어 길 건너 술집에서 와인을 함께 마시며 대호황 시대의 영광이 어떻게 무너지게 되었는지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리는 록펠러 가문에 대한 베를렌의 지식에 놀라고 뉴욕현대미술관의 소장품들을 연구한다는 말에 호기심을 보이더니, 혹시 같은 주제로 자기가 의뢰하는 연구를 해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베를렌의 전화번호를 적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고용했다.

- 베를렌은 록펠러 가문에 특별한 애정이 있었다. 박사 논문의 주제도 애비게일 앨드리치 록펠러의 통찰력과 후원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을 뉴욕현대미술관의 초기 소장품에 대한 것이었다. 사실 베를렌은 미술사를 연구하기 전에 디자인을 공부했었다.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미술사 강의를 몇 개 듣는 사이 흥미가 생겼고, 그 후에는 모던 디자인에서 모더니즘의 근간에 있는 개념, 즉 전통을 깨뜨리고 과거보다 현재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프리미티비즘으로 관심이 옮겨갔다. 그리고 결국은 세계에서 가장 웅장한 현대미술관을 세우는 데 도움을 준 한 여인에게 관심을 쏟게 되었다. 바로 애비게일 록펠러였다.

 

- 베를렌은 자신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지도교수도 말했듯이 그는 진정한 학자 타입은 아니었다. 아름다움을 체계화해 이론으로 정리하고 각주를 붙일 능력이 없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보여주는 지적인 엄숙함보다는 마티스가 보여주는 생생하고 심장이 멎을 듯한 색채가 더 좋았다. 논문을 쓰기 위해 조사를 하면서도 예술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작품의 창작 동기를 알아내는 일에 흠뻑 빠졌다. 

- 베를렌은 논문을 준비하며 애비게일 록펠러의 취향에 감탄하게 되었고, 같은 주제를 몇 년 연구하고 나서는 록펠러 가문이 예술품 시장에서 진행했던 거래에 관한 한 나름대로 전문가가 되었다. 논문 일부는 작년에 한 유명 예술 잡지에 게재되었고, 그 결과 베를렌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정식으로 교편을 잡게 되었다.

- 베를렌은 펜을 잡고 편지를 베껴쓰기 시작했다. 편지를 모두 베끼고 돌려줄 때 에반젤린은 그가 뭔가 궁금해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제 만난 지 십 분밖에 안 되었는데도 그가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망설이던 베를렌이 물었다.

"이 편지지는 어디서 난 건가요?"
에반젤린은 필로메나 수녀의 책상 옆에 쌓인 두꺼운 분홍색 편지지 묶음에서 한 장을 빼내 들어 보였다. 편지지 윗부분에 바로크 양식의 장미와 천사 그림이 있었다. 에반젤린은 천 번도 넘게 본 그림이었다.

"그냥 저희가 쓰는 편지지예요. 왜 그러시죠?"
"이노센타 원장이 애비게일 록펠러에게 편지를 쓸 때 사용한 것과 같습니다."

베를렌은 새 편지지를 받아 들더니 더 꼼꼼히 살펴보았다.

"이 편지지 양식은 얼마나 오래된 건가요?"
"그 생각은 안 해봤네요. 아마 이백 년은 됐을 거예요. 수녀원의 상징인 문장은 초대 원장수녀님께서 만드셨으니까요."
"좀 가져가도 되겠죠?"

베를렌은 편지지 몇 장을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 "감사합니다."

베를렌이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이 만난 후 처음 보이는 웃는 얼굴이었다.

"이렇게 저를 도와주시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사실은 선생님을 본 순간 경찰을 불렀어야 했죠."
"어떻게든 보답을 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 그런데도 어머니는 북부 지역으로 보낸 부하들의 지휘를 오털리에게 맡겼다.
퍼시벌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털리가 전화를 받지 않자 짜증을 내며 시계를 확인했다. 동생이 먼저 전화를 했어야 할 시간이었다.

- 단점도 있었지만 오털리는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 약속을 잘 지키고 꼼꼼하고 아무리 급박한 상황에서도 매우 믿음직스러웠다. 퍼시벌의 생각이 맞다면 오털리는 이미 런던에 있는 아버지와 상의한 뒤 베를렌을 붙잡아 제거할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사실 아버지는 사무실에 앉아 전체적인 작전을 수립하고 오털리가 일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걸 제공한다고 해도 놀랄 게 없었다. 아버지는 오털리를 가장 아꼈다. 아버지가 보기에는 오털리라면 절대 일을 망칠 리 없었다. 

- 지팡이를 짚지 않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퍼시벌은 절룩거리며 책장으로 갔다. 그리고 송아지 가죽으로 장정한 책 한 권을 꺼내 당구대 위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책을 펼치자 책등이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쩍쩍 소리를 냈다. 퍼시벌은 실로 오랫동안 이 <세대의 기록>을 들춰보지 않았다. 예전에 사촌 한 명이 결혼한다고 했을 때 신부 쪽 가문과 그리고리 가문의 관계를 찾아보았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결혼식에 어떤 중요한 사람들이 오는지 모른 채로 참석하면 늘 당황스럽게 마련이다. 특히 신부가 덴마크 왕족일 경우엔 더욱더 그렇다.

- <세대의 기록>은 역사와 전설, 족보, 그가 속한 종족에 관한 예언을 한데 모아놓은 책이었다. 모든 네피림 아이가 학교를 졸업할 때 일종의 졸업선물로 한 권씩 받는 이 송아지 가죽 장정본에는 전쟁, 나라와 왕국의 건설, 충심으로 맺은 동맹, 십자군 원정, 기사도, 모험, 피를 뿌리는 정복 등 네피림들 사이에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위대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퍼시벌은 가끔 책 속 이야기의 배경인 옛날에 태어났더라면 좋았을걸 싶었다. 그때라면 네피림들의 행동이 쉽게 드러나지도 않았을 테고 감시당할 위험 없이 모든 일을 조용히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밀 유지를 통해 그들의 힘은 더욱 강해지고 승리에 승리를 이어갈 수 있었으리라. 그런 조상들의 유산이 <세대의 기록>에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 퍼시벌은 굵은 글씨로 쓰인 첫 페이지를 읽었다. 여러 이름들의 목록으로, 복잡하게 퍼진 네피림 혈통의 역사, 즉 노아에서 비롯되어 여러 왕가로 퍼져나간 가문들을 정리한 도표였다. 노아의 아들인 야펫은 유럽으로 이주했고 그의 자손들은 그리스와 파르티아, 러시아, 북유럽에 널리 퍼져 권세를 굳혔다. 퍼시벌의 가족은 야펫의 넷째 아들인 야완의 직계 후손이며 최초로 '이방인들의 섬'을 식민지로 삼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곳이 그리스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지금의 영연방 제도라고 했다. 이완에게는 형제가 여섯 명 있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모두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여자 형제도 여럿 있었지만 그들의 이름은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그 남매들이 바로 유럽 전체에 힘과 영향력을 미친 근간을 마련했다. 여러 면에서 <세대의 기록>은 세계 역사의 요약본이었다. 또는 현대의 네피림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적자생존의 기록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 여러 가문의 이름을 읽어 내려가던 퍼시벌은 그들의 영향력이 한때는 절대적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최근 삼백 년 동안 네피림 가문들은 쇠락해 왔다. 예전에는 인간과 네피림 사이에 균형이 존재했다. 대홍수 이후 인간과 네피림은 거의 비슷한 비율로 태어났다. 하지만 네피림들이 인간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더니 그들과 결혼하고, 결국 그들이 가진 가장 강력한 유전적인 특징을 희석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 결과 지금은 오히려 인간의 성질을 더 많이 가진 네피림이 흔하고 순수한 천사의 특징을 가진 네피림은 드물었다.

- 네피림 한 명에 인간은 수천 명이 태어나는 상황이 되자 명문가에서는 인간 혼혈인 가족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두고 설전이 벌어졌다. 일부는 그런 자들을 축출하거나 인간들만 사는 곳으로 쫓아내길 바랐다. 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인간의 피가 섞인 자들도 나름대로 가치가 있으며 최소한 더 큰 목적을 위해 이용할 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네피림 가문에 들어온 인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일종의 전략이었으며 때에 따라 어마어마한 성과를 거둘 수도 있었다. 네피림 사이에서 천사의 특징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태어난 아이가 나중에 네피림을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매우 드문 일이지만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런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네피림은 계급 구조를 유지했다. 부나 사회적 지위에 따른 카스트제도가 아니라 -물론 전혀 영향이 없지는 않았다- 신체적 특징과 혈통, '감시자'라고 불리던 천사 무리인 그들의 조상과 얼마나 닮았는지에 따른 계급이었다. 인간이 네피림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유전적 가능성을 품고 있다면 네피림은 자신들의 몸에 이상적인 천사의 특징을 직접 간직하고 있었다. 네피림만이 날개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퍼시벌의 날개는 지난 오백 년 동안 누구도 본 적이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 다시 책장을 넘기던 퍼시벌은 우연히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를 찾아냈다. 친가 쪽 삼촌이자 유명인인 아서 그리고리 경의 이야기였다. 어마어마한 재산가에 존경받는 네피림이었지만 퍼시벌은 아서 경을 대단한 이야기꾼으로 기억했다. 17세기에 태어난 아서 경은 대영제국의 초기 선박회사 여러 곳에 발 빠르게 투자했다. 동인도회사에 투자한 것만으로도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저택을 포함한 영지와 별장, 농장, 도시의 아파트들이 그의 성공을 증명했다. 전 세계에 벌여놓은 사업을 감독하는 데 직접적으로 관여한 적은 없지만 퍼시벌은 삼촌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보물을 잔뜩 모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퍼시벌은 어머니가 말하는 아서 경의 슬프고 가슴 아픈 죽음을 잘 알았다. 지금 퍼시벌이 걸린 병에 처음 감염된 그리고리 가문 사람이 바로 아서 경이었다. 아름다웠던 날개는 말라비틀어져 시커멓게 썩은 혹처럼 변했고, 십 년 동안 끔찍하게 고생한 끝에 폐가 다 망가졌다. 사백살이 거의 다 되어 은퇴생활을 즐길 나이에 병에 굴복하고 만 그는 굴욕과 고통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많은 이들이 아서 경이 병에 걸린 이유가 다양한 하급 인간들, 비참하게 사는 식민지 항구의 인간들과 자주 접촉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그리고리 가문 사람들은 병의 근원을 알아내지 못한 상태였다. 그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아마도 치료법이 있으리라는 것뿐이었다. 

- 1980년대에 스네자는 한 인간과학자의 연구 내용을 손에 넣었다. 특정 음악이 질병을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연구를 맡은 안젤라 발코라는 과학자는 유럽에서 활동하는 매우 유명한 천사학자 가브리엘라 레비 프란체 발코의 딸이었다. 안젤라 발코의 이론에 따르면 퍼시벌과 그와 같은 병을 앓는 자들을 다시 완벽한 천사의 모습으로 치유할 방법이 있다고 했다.

- 늘 그러듯 스네자는 아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읽었다.
"너는 일부러 병을 고치지 않으려고 용을 쓰는 것 같다만, 네가 고용한 미술사학자라는 남자가 우리를 제대로 된 방향으로 이끄는 것 같구나."
"베를렌을 찾으셨어요?"

퍼시벌은 <세대의 기록>을 덮고 어머니를 향해 돌아서며 물었다. 어머니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이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도면을 갖고 있던가요?"
"오털리한테서 연락이 오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뉴욕에 발이 묶여 기다릴 생각을 하니 분노가 치밀었다. 퍼시벌은 지팡이를 짚고 전화기 쪽으로 가 다시 한번 오털리의 번호를 눌렀다. 상대가 받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곧 힘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다시 아름답고 강력한 존재가 될 것이다. 날개만 다시 생기면 그동안 겪은 모든 괴로움과 치욕은 영광으로 남을 터였다.

- 뉴욕 주, 밀턴, 세인트로즈 수녀원
일을 하거나 예배를 드리러 가는 수녀들 사이를 지나던 에반젤린은 자신을 유심히 쳐다보는 수녀들의 눈길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세인트로즈 수녀원에서는 즐거움이나 두려움, 고통, 후회 같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거의 용납되지 않았다. 하지만 감정을 감추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매일 함께 먹고 기도하고 청소하고 쉬다 보니 한 사람이 조금이라도 행복해하거나 불안해하면 그 감정이 전체에 퍼져나갔다. 마치 모든 수녀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칼라 수녀가 화나 있으면 에반젤린도 금세 알아차렸다. 입가에 주름 세 줄이 잡히기 때문이다. 빌헬미나 수녀가 강가에서 아침 산책을 하다 졸았다면 그것도 바로 알 수 있었다. 미사를 드릴 때 눈빛에서 생기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생활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 가면을 쓴 채 남들이 너무 바빠 자신의 비밀을 눈치채지 못하길 바랄 뿐이었다. 

- 에반젤린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는 걸 보니 아버지와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에반젤린은 기쁜 마음으로 혼자 남아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가운데를 푹 찔렀다. 케이크 안쪽에는 진한 버터크림이 가득 들었는데 먹어보니 약간 밤 맛이 났다. 아버지는 먹는 것에 무척 까다로워서 케이크처럼 사치스러운 군것질에는 돈을 많이 쓰지 않았다. 그래서 에반젤린은 단것을 별로 맛보지 못하고 자랐다. 케이크를 먹을 기회는 정말 드물었다. 에반젤린은 최대한 천천히 먹으며 맛을 오래 음미하기로 마음먹었다. 케이크를 먹는 동안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맛있는 걸 먹는 순수한 기쁨에만 쏠렸다. 따뜻한 카페 안, 단골손님들이 떠드는 소리, 바닥을 비추는 밝은 햇빛, 이런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아버지가 블라디미르에게 그렇게 격정적으로 말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들의 대화에 귀 기울일 일도 없었을 터였다. 두 사람은 몇 자리 건너 창가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에반젤린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 "그들이 자네한테 진실을 숨길 권리는 없어."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그의 말에 아버지는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더니 말했다.

"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권리가 있어요. 더군다나 전 안젤라가 진행한 연구에도 일조했다고요. 안젤라는 임신 중이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저는 처음부터 함께했습니다."  

- "아직 살아 있겠죠?"

"팔팔하게 살아 있지."

블라디미르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무시무시한 놈들이래. 아주 순수한 혈통이라더군. 어떻게 이곳 뉴욕까지 옮겼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옛날에 이렇게 빨리 옮기려 했으면 배를 한 척 빌리고 선원 전부가 매달려야 했을 거야. 그들 말대로 정말 순종이라면 붙잡아둘 방법은 거의 없을 테고, 이런 일이 가능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 
"안젤라는 놈들의 육체적인 능력에 대해 저보다 훨씬 더 자세하게 알고 있었을 거예요."

아버지가 양손을 맞잡으며 말하더니 에반젤린의 어머니가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햇볕 가득한 창문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집사람이 연구하던 주제가 바로 그거였거든요. 하지만 가장 혈통이 순수한 놈들까지 포함해 네피림이 전체적으로 약해지고 있다는 데는 모두 의견이 같았어요. 어쩌면 놈들이 약해져서 쉽게 잡힌 건지도 몰라요."
 
- "안젤라는 언젠가 놈들과 인간의 피가 필요 이상으로 섞일 거라고 했어요. 지나칠 만큼 인간화돼서 놈들만의 신체적 특징을 유지할 수 없어지는 거죠. 제가 보기엔 진화가 아니라 퇴화에 가까운 것 같아요. 열등한 종족인 인간과 너무 자주 번식했기 때문이겠죠."

 

- 아버지는 피우던 담배를 플라스틱 재떨이에 올려놓고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셨다.
"천사는 다른 종족과 피를 섞지 않아야 천사의 특징을 유지할 수 있어요. 시간이 지나면 몸속에 흐르던 인간의 피가 놈들을 잠식해, 앞으로 태어날 놈들의 아이는 모두 하등하기 그지없는 생물이 되고 말 거예요. 수명도 짧고, 병에도 잘 걸리고, 윤리적인 생각을 가진 생물 말이에요. 놈들의 마지막 희망은 순수한 천사의 특징을 되살려내는 것이지만, 우리도 알다시피 그건 놈들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이미 놈들한테 인간의 특성이 퍼진 상태니까요. 안젤라는 네피림이 인간들처럼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고 했어요. 동정심, 사랑, 호의 같은 것 말이에요. 인간을 규정하는 모든 것이 그들에게도 나타나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놈들은 그것을 아주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생각해요." 


- 블라디미르는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하는 듯 의자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멸종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한참 만에 그가 말했다.

"하긴 뭐가 가능하고 뭐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겠어? 놈들의 존재 자체가 설명할 수 없는 일인걸. 하지만 자네하고 나는 놈들을 실제로 봤지. 놈들에게 많은 걸 잃었고."

블라디미르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 "안젤라는 네피림들의 면역체계가 인공 화학물질과 공해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인위적인 성분들이 감시자로부터 물려받은 세포 구조를 파괴하고 암처럼 치명적인 병을 만들어낸다고 했죠. 또 지난 이백 년간 식습관이 바뀌면서 놈들 신체의 화학적인 성질이 변하며 생식기능에도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가설 역시 세웠었어요. 안젤라는 수명이 극단적으로 줄어드는 퇴행성 질병에 걸린 네피림을 여럿 붙잡아 연구했지만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했죠. 왜 그런 병이 발생하는지는 아무도 밝혀내지 못했어요. 하지만 원인이 뭐든 놈들이 그 병을 막는 데 필사적이라는 건 틀림없어요." 
"그 병을 막는 방법은 자네가 아주 잘 알고 있지."

블라디미르가 부드럽게 말했다.
"정확히 알고 있죠. 그걸 확인하려고 안젤라는 바로 블라디미르 당신이 주장한 여러 이론을 시험하기 시작했어요. 당신이 설명한 음악학적 이론이 생물학적으로도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해 보려고 한 거였죠. 제 생각엔 집사람은 뭔가 대단한 발견을 해내려던 참이었고, 그래서 살해된 것 같아요." 

- "천상의 음악을 연구하는 학문은 무기가 아니야. 혹시 무기가 된다면 좋겠다는 정도로만 생각해야지, 반드시 그렇다고 생각하면 너무 위험해. 다른 누구보다 안젤라가 잘 알고 있었을 테지."

"위험할 수도 있죠. 하지만 놈들이 퇴화의 치료법을 찾아낸다고 생각해 봐요. 영영 못 찾아내게 막기만 한다면 놈들은 천사의 속성을 잃어버리고 좀 더 인간에 가까워질 겁니다. 병에 걸리고 결국 죽겠죠."
"그렇게까지 일이 잘 풀릴 것 같지 않아. 그건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야."

블라디미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된다 해도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지? 자네 딸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고? 확실하지도 않은 것 때문에 지금의 행복을 위태롭게 하려는 이유가 뭐야?" 
"동등해지고 싶어서죠."

에반젤린의 아버지가 말했다.

"우린 이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놈들의 기만적인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근대사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우리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멋진 꿈이군."

블라디미르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 "하지만 그건 환상에 지나지 않아. 우리는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어."
"놈들을 서서히 약화시키는 게 신의 계획인지도 몰라요."

에반젤린의 아버지는 상대의 말을 듣지도 않고 말했다.

"어쩌면 신은 놈들을 시원하게 한 방에 쓸어버리지 않고 오랜 세월에 걸쳐 멸종시키려 하는 것인지도 모르죠."
"하느님의 계획 운운하는 건 이미 오래전에 질렸어.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잖아, 루카."

블라디미르가 지친다는 듯 말했다.
"그럼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겠다는 거예요?"
블라디미르는 신중하게 말을 고르듯 상대를 한참 바라보았다.

"아까 한 말은 정말이야? 납치당했을 때 안젤라가 내 음악 이론을 시험하고 있었다고?"

- "안젤라는 네피림들이 유전적으로 약해지고 있다는 이론을 검증하는 중이었어요. 안젤라의 어머니 가브리엘라가 대부분의 자금을 지원하고 다른 기금도 마련하면서 그 일을 맡으라고 적극적으로 권하셨죠. 그렇다고 그분을 특별히 원망하는 건 아니에요. 가브리엘라는 오히려 그런 연구가 조직 내에서 가장 안전한 일이라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딸을 왜 굳이 학교랑 도서관에만 처박혀 있게 했겠어요? 가브리엘라는 안젤라가 실험실에서 모형 개발을 돕는 걸 항상 지켜보고 있었어요." 
"혹시 안젤라가 납치된 게 가브리엘라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블라디미르가 물었다.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겠어요? 안젤라는 어딜 가든 위험했어요. 가브리엘라도 안젤라를 보호할 수 없었던 게 분명해요. 하지만 분명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가브리엘라를 탓하느냐고요? 내가? 나였더라면 안젤라를 지킬 수 있었을까요? 그녀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둔 게 잘못이었을까요? 블라디미르, 제가 잡힌 놈들을 당장 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예요. 이런 내 고통, 간절히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중독과도 같은 괴로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에요." 

- 자세히 아래를 살펴보던 에반젤린은 우리에 갇힌 자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런데 정제된 금으로 만든 막을 피부에 두른 듯, 아주 강한 빛이 몸을 둘러싸고 있었다. 셋 가운데 하나는 머리가 길고 작은 가슴이 달린 데다 허리가 가는 걸 보니 여자였다. 다른 둘은 남자였다. 비쩍 마르고 머리칼이 없고 가슴이 밋밋한 남자들은 여자보다 키가 컸고 웬만한 성인 남자보다 60센티미터는 더 커 보였다. 쇠창살에는 꿀처럼 진득하고 반짝거리는 액체가 잔뜩 묻어 조금씩 흘러내리다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 여자로 보이는 녀석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우리 안에서 이리저리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입으로는 계속 남자들을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어찌나 힘이 넘치는지 움직일 때마다 우리를 지탱하는 쇠사슬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끽끽거렸다. 그러다 불쑥 여자가 거칠게 몸을 돌렸다. 에반젤린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어 껌벅였다. 여자의 길고 유연한 등 한가운데 크게 휘어지는 모양의 날개가 양쪽으로 솟아 있었다. 놀란 에반젤린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올까 봐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여자 생물이 몸을 움직이자 날개가 양쪽으로 활짝 펼쳐지며 우리 안을 가득 채웠다. 휘어진 하얀 날개에서 부드러운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쇠사슬에 매달린 우리가 천사의 무게 때문에 정체된 공기를 가르고 천천히 포물선을 그리는 모습을 보고 에반젤린은 감각이 예민해지는 걸 느꼈다. 자신의 심장박동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고 호흡이 가빠졌다. 우리 안 생명체들은 매력적인 동시에 섬뜩했다. 무지갯빛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괴물이었다.

- "저놈들이 놈들의 조상과 같은 힘을 가졌느냐는 질문이라면,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본 놈들 가운데 가장 힘이 세긴 하지만 자극제에 반응을 보여 힘을 잃는 것은 확실합니다." 
"좋은 소식이군요." 

에반젤린의 아버지가 우리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그러더니 동물에게 명령하듯 우리에 갇힌 놈들을 향해 말했다. 

"악마들."
그 말을 들은 남자 생물 하나가 정신을 차렸다. 녀석은 하얀 손가락으로 쇠창살을 움켜쥐고는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천사와 악마는 같아. 서로의 그림자일 뿐이지."
"네놈들이 이 땅에서 사라질 날이 올 거다. 언젠가는 네놈들을 모조리 없앨 수 있어."

에반젤린의 아버지가 말했다.

뉴욕 주, 밀턴, 밀턴 바 앤드 그릴
베를렌은 술집 안의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컨트리 음악 소리 때문에 머리를 망치로 두드리는 것 같던 느낌이 오히려 없어졌다. 추위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고 찢어진 손은 화끈거리는 데다 아침식사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뉴욕에 있었다면 단골 태국 식당에서 음식을 포장해 집으로 갔거나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친구들을 만나 한잔 했을 터였다. 텔레비전에서 뭘 볼까 하는 것 말고는 걱정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 어딘지도 모르는 동네의 허름한 술집에서 어떻게 하면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그래도 술집은 따뜻했고 생각할 공간이 되어주었다. 베를렌은 손가락에 감각이 돌아오길 바라며 양손을 맞잡고 비볐다. 일단 몸이 좀 녹아야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베를렌은 길거리가 내다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조용히 따로 앉을 만한 곳이 그곳뿐이었다. 햄버거와 코로나 맥주를 주문했다. 몸을 덥히려고 맥주를 단숨에 들이켜고는 한 병을 더 시켰다. 두 번째 맥주는 알코올 기운이 자신을 조금씩 현실세계로 데려가주도록 천천히 마셨다. 손가락이 따끔거렸고 언 발이 녹기 시작했다. 상처의 통증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주문한 햄버거까지 먹고 나자 베를렌은 몸이 따뜻해지며 정신이 들었고 비로소 눈앞에 닥친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 물론 이노센타 원장과 애비게일 록펠러의 관계는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어떤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했고 로도피 산맥에서 뭔가 성과를 거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산에서 발견해 가져온 게 무엇인지 알아내려면 적지 않은 조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유물만큼이나 베를렌의 관심을 끄는 것은 셀레스틴 클로셰트라는 제3의 인물이 나타났다는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연구를 하면서 들어본 이름인지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애비게일 록펠러와 함께 일했던 사람일까? 유럽 쪽 예술품 거래상이었나? 베를렌이 미술사라는 학문을 사랑하는 이유는 복잡한 삼각관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모든 작품에는 창조의 미스터리와 유통과정의 모험 그리고 세심한 보관이 얽혀 있었다. 

- 그리고리가 세인트로즈 수녀원에 관심을 보이는 것 때문에 더 헷갈렸다. 그리고리 같은 자가 예술품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찾을 리는 만무했다. 그런 사람들은 반 고흐가 경매에서 최고가를 기록한 작품을 그렸다는 사실만 알 뿐 평생을 가도 그 이상은 이해하지 못했다.  
 
- 수녀들은 수녀원에서 필요한 일 대부분을 스스로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저녁 시간 옹기종기 모여 즐거운 표정으로 허드렛일을 하는 수녀들을 보면 단순히 먼지를 털고 걸레질을 하는 게 아니라 뭔가 놀랄 만한 큰일을 함께 이루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각자 맡은 소소한 허드렛일이 아닌 훨씬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이 그랬다. 마루와 난간을 깨끗이 닦는 것은 신에 대한 봉납이자 공공의 이익을 위한 기여였다.
 
- 셀레스틴은 창가에 휠체어를 놓고 실로 뜬 담요를 무릎에 덮은 채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베일은 벗어두었는데 짧게 자른 머리는 숱이 많고 하였다. 방 한구석에 놓인 가습기가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다른 쪽 구석에서는 전기난로가 방을 덥혀 실내는 사우나 같았다. 담요까지 덮었는데도 셀레스틴은 추워 보였다. 침대에도 무릎에 덮은 것과 비슷한 뜨개 커버가 덮여 있었다. 젊은 수녀들이 원로 수녀들을 위해 뜬 것이었다. 셀레스틴은 에반젤린이 왜 왔는지 의아한 듯 실눈을 뜨고 쳐다보았다.

"책을 더 가져온 건가요?"
"아니요."

에반젤린은 셀레스틴의 휠체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말했다. 옆에 놓인 마호가니 협탁 위에 책이 잔뜩 쌓여 있고 그 위에는 돋보기가 놓여 있었다.

"아직 읽으실 책이 많아 보이네요."
"그래요. 읽을거리야 늘 많지."

셀레스틴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 셀레스틴은 하얗고 긴 손가락을 무릎에 가지런히 모으고 평가하는 듯한 차갑고 무심한 눈길로 에반젤린을 바라보았다. 약지에는 수녀원의 상징이 박힌 반지를 끼고 있었다. 셀레스틴 수녀의 나이라면 점심에 뭘 먹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이 수십 년 전 일을 기억하고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에반젤린은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오늘 오전에 자료실을 정리하다가 편지를 한 장 찾았는데 수녀님 이름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디에 보관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어떤 일에 관한 편지인지 알려주시면 제자리를 찾아 넣어두려고 해요."

- "그날은 '재의 수요일'이었어요. 수녀들 이마에 아침 미사에서 십자가 모양으로 그린 재가 남아 있어서 분명히 기억해요. 이곳 수녀님들이 보여준 따뜻한 환대는 절대 잊을 수가 없어요. 지나가는 내게 노래하는 것처럼 부드럽고 포근한 목소리로 속삭였어요. '잘 왔어요.' 세인트로즈 수녀원의 수녀들은 조용조용 속삭여줬죠. '잘 왔어요. 환영해요. 집에 잘 왔어요'라고요."
"제가 여기 왔을 때도 그렇게 반겨주셨어요."

에반젤린은 처음 수녀원에 왔던 날 오로지 아버지가 와서 다시 브루클린으로 데려가주기만 바랐던 것을 떠올렸다.
 
- "그분은 지옥으로 변해가던 유럽에서 내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주었어요."

셀레스틴이 에반젤린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한 건 처음이었다.

"난 포르투갈로 밀입국했지만 다른 동료들은 운이 없었어요. 남은 사람들이 모두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건 떠날 때 이미 알고 있었죠. 무시무시한 악마들은 우리를 찾아내는 족족 죽였어요. 그게 그들의 방식이었죠. 잔인하고 사악하고 비인간적인 것들! 그들은 우리 모두가 죽을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거예요. 지금도 우리는 쫓기고 있어요."  
에반젤린은 깜짝 놀라 셀레스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2차 세계대전이 실제로 어땠는지, 셀레스틴에게 그것이 어떤 두려움으로 남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보다 셀레스틴이 너무 흥분해 혹시라도 잘못될까 봐 겁이 났다.

"진정하세요, 수녀님. 괜찮아요. 지금은 안전하시니까요."
"안전해?"

셀레스틴의 눈이 공포로 얼어붙었다.

"그 누구도 절대 안전하지 않아. 자메(절대)."

- 셀레스틴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이는 것처럼 작았다.

"아 세트 에포크라, 일 이 아베 데 지앙 쉬르 라 테르, 에 오시 아프레 크레 피스 드 디외 퓌르 위니 오 피유 데 옴 에켈 뢰르 위르 돈 데 앙팡, 스송세에로  파뫼 도트러푸아."
에반젤린은 프랑스어를 알았다. 프랑스 사람인 어머니는 그녀에게 늘 프랑스어로 말했다. 하지만 프랑스어를 제대로 들어본 건 거의 십오 년 만의 일이었다. 
셀레스틴은 날카롭고 격렬하고 빠르게 같은 말을 영어로 되풀이했다.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한자리에 들어 그들에게서 자식이 태어나던 그때와 그 뒤에도 세상에는 네피림이 있었는데, 그들은 옛날의 용사들로서 이름난 장사들이었다."

- "뭐라고?"

셀레스틴은 처음 보는 사람처럼 에반젤린을 보았다.
"방금 말씀하신 창세기 구절이요. 저도 잘 안다고요."
"아니. 절대 모를걸."

셀레스틴의 눈빛에 갑자기 적개심이 차올랐다. 에반젤린은 셀레스틴을 진정시키려고 손을 잡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셀레스틴은 점점 더 흥분하며 화를 내더니 혼자 중얼거렸다.

"태초에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는 균형을 이루었어. 우주에는 질서가 있었지. 수많은 천사들은 엄격한 체계를 이루고 있었고 하느님이 가장 사랑해서 당신의 모습을 본떠 만든 인간 남자들과 여자들은 고통을 모른 채 행복하게 살았지. 괴로움은 없었어. 죽음도 없었어. 시간도 없었어. 그런 것들이 존재할 이유가 없었거든. 우주는 완벽하게 안정적이었고 앞으로 나아가길 거부할 만큼 순수했어. 하지만 천사들은 그런 상태가 편치 않았지. 그들은 인간을 질투하기 시작했어. 사악한 천사들이 인간을 유혹한 것은 자만에 빠진 결과였고 하느님을 괴롭히려는 목적도 있었지. 결국 천사도 인간과 함께 타락하고 말았어." 
앞뒤 없는 말을 계속 늘어놓게 놔두면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 에반젤린은 셀레스틴이 떨리는 손으로 누르고 있는 편지를 조심스럽게 빼냈다. 그러고는 편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서하세요, 수녀님. 이런 식으로 귀찮게 해 드릴 생각은 없었어요."

- 나아갈 길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 처하면 에반젤린은 젊은 여자라기보다 한 마리 거북에 가깝게 행동했다. 마음속 차갑고 어두운 공간으로 기어들어가 완벽하리만큼 차분하게 혼란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다. 그녀는 거의 삼십 분이 지나도록 자신이 쓴 단어들만 내려다보았다. '악마의 목구멍 동굴, 로도피 산맥, 창세기 6장, 천사학자.' 만일 어제 누군가가 불쑥 이 종이를 눈앞에 들이밀며 에반젤린이 쓴 단어들이라고 했다면 그냥 웃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단어들은 셀레스틴 수녀가 들려준 이야기의 핵심이었다. 자신이 발견한 편지가 암시하듯 애비게일 록펠러가 이 일에 관여한 게 사실이라면 에반젤린은 그 내용을 어떻게든 알아내고 싶었다. 

- 단어들 사이의 연관성이 자연스럽게 풀릴 때까지 머릿속으로만 고민해볼까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멍하니 기다릴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따뜻해진 도서관 안을 가로질러 책장에서 커다란 세계지도 책을 꺼냈다. 탁자 위에 책을 펼친 다음 색인에서 로도피 산맥이 있는 페이지를 찾아 펼쳤다. 로도피 산맥은 유럽 남동부에 있는 작은 산맥으로 그리스 북부에서 불가리아 남부까지 이어져 있었다. 에반젤린은 혹시 '악마의 목구멍'이라는 지명이 없는지 살펴보았지만 다른 지역보다 높은 곳이라는 의미로 짙은 음영만 군데군데 칠해져 있을 뿐이었다.

- 이 지방에 살았던 트라키아 사람들에게 미친 역사적, 신화학적 중요성 때문에 국제적인 문화재로 여겨지고 있었다. 동굴 구조에 대한 묘사도 상당히 흥미로웠지만 에반젤린은 역사나 신화와 관련된 중요성이 무엇인지가 훨씬 더 궁금했다. 그녀는 그리스와 트라키아의 신화에 관한 책 한 권을 펼쳤다. 그리고 최근 발굴된 트라키아의 유적지에 관한 내용을 한참 건너뛴 다음 아래와 같은 글을 찾아냈다.

- 고대 그리스인들은 악마의 목구멍 동굴을 신화에 등장하는 저승으로 가는 입구라고 여겼다. 트라키아 키코네스 부족의 왕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부인인 에우리디케를 하데스의 손에서 구해내기 위해 이 동굴을 통해 저승으로 간다. 그리스신화에서 오르페우스는 인간에게 음악과 문학, 의학을 주었으며 디오니소스 숭배를 장려했다고 알려져 있다. 아폴론이 오르페우스에게 금으로 만든 리라를 선물하고 연주하는 법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의 음악에는 동물을 길들이고 물체에 생명을 불어넣고 저승에 사는 존재를 포함해 모든 피조물을 위로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많은 고고학자와 역사가는 오르페우스가 평범한 인간들을 무아지경의 신비한 의식에 빠지게 했다고 주장한다. 트라키아 사람들이 디오니소스에게 바치는 광란의 의식을 벌이다 인간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는 추측도 있다. 카르스트지형으로 된 악마의 목구멍 동굴 바닥에는 썩어가는 팔다리 토막이 굴러다녔다고 한다.  

- 기원후 사람들은 악마의 목구멍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천국에서 추방당한 천사들이 떨어진 곳이라고 생각했다. 동굴 주변에 사는 기독교인들은 수직으로 날카롭게 뚫린 동굴 입구를 보고 루시퍼가 불길에 휩싸인 채 땅으로 떨어져 지옥에 처박히며 남긴 흔적이라 생각했으며 여기서 악마의 목구멍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믿었다. 또 동굴이 타락천사뿐 아니라 위경에녹서에 등장하는 '신의 아들들'을 가둔 감옥이라고 믿는 이들도 오래전부터 있었다. 에녹서에는 '감시자'로, 성서에는 '하느님의 아들들'로 나오는 이 천사들은 하느님께 불복종해 미움을 샀다. 인간 여자들과 어울려 천사와 인간의 혼혈인 네피림 종족을 탄생시킨 것이다(창세기 6장 참조). 감시자들은 그렇게 죄를 저지르고 땅속 깊은 곳에 갇혔다. 그들의 지하 감옥에 대해서는 성서에도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유다서 1장 6절을 참조할 것. 

- 에반젤린은 읽던 책을 그대로 둔 채 일어서서 도서관 한가운데 외다리 탁자 위에 놓인 신역 성서 쪽으로 갔다. 그녀는 페이지를 넘기며 천지창조와 타락,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는 부분을 지나 창세기 6장에서 멈췄다.
 
- [1. 땅 위에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2. 하느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여자들을 골라 모두 아내로 삼았다. 3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살덩어리일 따름이니, 나의 영이 그들 안에 영원히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들은 백이십 년밖에 살지 못한다." 4.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한자리에 들어 그들에게서 자식이 태어나던 그때와 그 뒤에도 세상에는 네피림이 있었는데, 그들은 옛날의 용사로서 이름난 장사들이었다. 5.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6.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 

- 아까 오후에 셀레스틴 수녀가 인용한 게 바로 이 구절이었다. 에반젤린은 전에도 성서의 창세기 부분을 수백 번 넘게 읽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큰 소리로 읽어준 창세기는 그녀가 난생처음 열중해서 들은 이야기였고, 그때까지 들어본 가운데 가장 극적이고 격정적이고 장엄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네피림이라는 이상한 생명체의 탄생이라든지, 인간이 백이십 년밖에 살지 못하는 벌을 받았다든지, 조물주가 당신의 피조물에 실망했다든지, 그래서 고의로 노아의 홍수를 일으켰다든지 하는 세세한 부분을 의식하며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공부를 할 때도, 수녀가 되려고 수련하며 세인트로즈 수녀원의 다른 수녀들과 성서를 두고 여러 차례 토론을 벌이면서도 이에 대해 거론한 적은 없었다. 에반젤린은 다시 한번 성서 구절을 읽고 깊이 생각해 보았다.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한자리에 들어 그들에게서 자식이 태어나던 그때와 그 뒤에도 세상에는 네피림이 있었는데, 그들은 옛날의 용사들로서 이름난 장사들이었다." 

그리고 다시 유다서를 찾아 읽었다. 

"자기 영역을 지키지 않고 거주지를 이탈한 천사들도 저 중대한 날에 심판하시려고 영원한 사슬로 묶어 어둠 속에 가두어두셨습니다."

- 머리가 아파와 에반젤린은 성서를 덮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그녀는 어느새 서늘하고 먼지 쌓인 창고 계단으로 돌아갔다. 메리제인 구두가 철제 계단을 사뿐사뿐 밟고 올라갔다. 날카로운 날개와 희미한 빛을 뿜어내는 살갗, 묘한 아름다움을 지닌 채 우리에 갇힌 존재가 머리 위에 다가왔다. 에반젤린은 오랫동안 그 모습은 자신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그때 본 괴물들이 실제로 존재하며 그들 때문에 아버지가 자신을 수녀원으로 데려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 에반젤린은 일어서서 도서관 뒤쪽 잠금장치가 달린 유리 진열장 쪽으로 향했다. 책장에는 19세기 책들이 꽂혀 있었다. 세인트로즈 수녀원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도서관에 있었으니 그곳에서 가장 오래된 책들이지만 다루고 있는 내용에 비하면 외형은 새 책이나 다름없었다. 에반젤린은 벽에 박힌 못에 걸린 열쇠로 진열장을 열고 책 한 권을 꺼내 조심스레 양팔로 감싸 안고는 벽난로 근처 탁자로 돌아왔다. <타락천사의 해부>라는 책이었다. 그녀는 책을 살펴보다가 부드러운 가죽 표지를 가만히 쓸어보았다. 급히 책장을 들추다 책등이 상할까 봐 염려스러웠다.

- 에반젤린은 얇은 면장갑을 끼고 조심스레 책을 펼쳤다. 천사들의 어두운 면을 다룬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내용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페이지마다 담긴 글과 그림, 판화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연계의 질서를 어지럽힌 천사들의 죄악에 관련된 것이었다. 내용은 성서의 해석부터 악령을 쫓는 의식에 관한 프란체스코회의 입장까지 다양했다. 에반젤린은 책장을 넘겨가며 교회 역사에서 악마에 대한 논의가 벌어진 부분을 찾아 읽었다. 이상하게도 이곳 수녀원의 수녀들 사이에서는 악마를 두고 토론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한때 악마는 수많은 신학적 토론의 주제였다. 예를 들어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악마들이 바람과 폭풍을 일으키고 하늘에서 불비를 내리는 능력을 가졌다고 믿는 것이 정설이라고 주장했다. 탈무드에 따르면 악마는 일흔두 개의 집단으로 나뉘고 전체 수가 7405926이나 된다고 하는데, 기독교에서 직접 산출한 바가 없으니 에반젤린이 보기에 탈무드에 등장하는 수는 그저 추측에 불과한 것 같았다. 어쨌든 놀랄 만한 수였다. 

 

- 책의 첫 장은 천사가 일으킨 반란의 역사적 정보를 담고 있었다. 기독교인과 유대인, 이슬람교도는 지난 수천 년 동안 타락천사의 존재에 대해 논쟁을 벌여왔다. 복종을 거부한 천사들에 관한 가장 구체적인 자료는 창세기에 나온다. 그러나 위경을 바탕으로 한 글들이 기원후 수백 년 동안 널리 유포되어 유대교와 기독교의 공통적인 천사 관념을 형성했다. 천사가 모습을 드러내고 인간을 찾아왔다는 이야기도 많았고, 천사의 본성에 관한 잘못된 지식도 널리 퍼졌다. 예를 들면 하느님이 인간을 감시하라는 특별한 임무를 주어 땅으로 보냈다는 천사들인 '감시자'와 <실락원>을 통해 널리 알려진 것처럼 루시퍼를 추종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천국에서 추방당한 천사들을 혼동하는 일은 매우 흔했다. 감시자들은 베네 엘로힘, 즉 '하느님의 아들들'이라는 열 번째 계급에 속하지만, 루시퍼와 반역을 일으킨 천사들, 즉 악마의 무리는 말라킴, 즉 역품천사라는 좀 더 높은 계급이었다. 루시퍼는 영원한 불속에 던져진 반면 감시자들은 언제 풀려날지 알 수 없이 그저 감옥에 갇힌 것뿐이었다. 감시자들은 구덩이나 구멍, 동굴, 지옥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는 장소에 갇힌 채 풀려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한참 책 내용에 몰두하던 에반젤린은 자기도 모르게 탁자 위에 펼친 책을 너무 꽉 누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의 시선은 책에서 떨어져 단 몇 시간 전에 처음 베를렌을 보았던 도서관 입구로 옮겨갔다. 정말이지 묘한 하루였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한 뒤 지금까지 겪은 모든 일이 현실이 아니라 꿈같았다. 너무나 강렬한 인상을 풍기며 에반젤린의 삶에 뛰어든 베를렌은 마치 가족에 대한 기억처럼 그녀의 마음속에서 만들어낸 존재처럼 느껴졌다. 현실적인 동시에 비현실적인 존재였다.
 

- "나는 조직을 떠났지만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조직을 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일을 수행해야 했죠. 나더러 미국으로 상자 하나를 운반해 뉴욕에서 어떤 사람에게 전달하라고 했어요."
"애비 록펠러군요."

에반젤린이 대담하게 말했다.
"처음에 록펠러 여사는 그저 조직의 뉴욕 모임에 나온 돈 많은 후원자에 불과했어요. 다른 수많은 사교계 여자들처럼 록펠러 여사도 원래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했을 거예요. 내가 보기엔 부자들이 난관심을 두는 것처럼 천사에 관심을 가진 것 같았어요. 열정은 넘치지만 실제 지식은 별로 없는 거죠. 솔직히 말해서 전쟁 전에 록펠러 여사가 정말 관심을 가졌던 게 뭐였는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전쟁이 터지자 아주 진지하게 우리 일에 개입하기 시작했어요. 덕분에 일이 활기차게 진행됐죠. 록펠러 여사는 유럽에 있는 우리를 지원하며 장비와 차량, 돈을 보냈어요. 우리 조직의 학자들은 전쟁에서 공공연히 어느 쪽을 편들지 않았어요. 우리는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자였고, 처음 생길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사적 자금을 운용했죠." 

- "그러니 당연한 말이지만 개인 후원자들은 우리 조직의 생존에 꼭 필요했어요. 록펠러 여사는 뉴욕에서 우리 조직원들에게 피신처를 제공했어요. 유럽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마련해 주고 직접 항구로 나와 맞아 줬죠. 우리는 그녀의 도움으로 가장 중대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어요. 바로 땅속 깊은 곳, 악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모험이었죠. 이전에 그곳의 탐사 기록을 발견한 후로 오랫동안 계획만 세우던 일이었어요. 과거의 탐사 기록은 1919년에야 세상의 빛을 보았어요." 

- "당시엔 정말 슬퍼할 일이 많았죠. 에반젤린 수녀는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유럽에서 수백만 명이 죽어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겐 당시 로도피 산맥에서의 임무가 가장 중요했어요.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죠. 나는 오직 내 일, 내 목표, 내 개인적 출세, 내 명분에만 신경 썼어요. 나처럼 젊은 학자들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는 위원회 사람들에게 잘 보일 생각밖에 안 했죠. 그렇게 맹목적이었던 건 분명 내 잘못이에요." 
"죄송해요, 수녀님. 무슨 말씀인지 못 알아듣겠어요. 임무라뇨? 위원회는 또 뭐고요?" 

에반젤린이 물었다. 에반젤린은 자신의 질문을 들은 셀레스틴의 얼굴에 조금씩 긴장감이 흐르는 걸 알아차렸다. 셀레스틴은 비쩍 마른 손을 밝은 색 담요에 문질렀다. 
"날 가르쳤던 분들이 그랬던 것처럼 있는 그대로 말할게요." 

 

- 한참 만에 셀레스틴이 말했다.

"날 가르친 선생님들은 나와 같은 이들에게 나를 소개하고 파리에 있는 천사학회의 귀중한 자료를 보여줄 수 있었어요. 나는 보고 만질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통해 배울 수 있었죠. 하지만 에반젤린 수녀는 그냥 내 말을 믿어야 해요. 선생님들은 숨겨진 세계로 나를 부드럽게 인도했지만 나는 그렇게 해줄 수가 없군요." 
에반젤린은 뭐라고 대꾸하려다가 셀레스틴의 표정을 보고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전쟁 중이에요."

 

- "인간 문명을 무대로 벌이는 영적인 전쟁이죠. 전쟁은 오래전 네피림들이 태어났을 때 시작됐어요. 네피림은 그때부터 이 지구에 살았고 오늘도 살고 있어요. 인류는 그때부터 그들과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죠." 
"창세기를 읽고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에반젤린이 말했다.

"성서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나요, 에반젤린 수녀?"

- 에반젤린은 자기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셀레스틴이 날카롭게 묻자 깜짝 놀랐다. 마치 비난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창세기 6장이 일종의 우화고 비유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나는 멋대로 해석하거나 내 경험만 가지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네피림이라는 존재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전혀 없잖아요. 여기 수녀원 수녀들이 그런 말을 하는 건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요?"
"네피림, 거인, 옛날의 이름난 장사들. 모두 옛날에 천사의 후손을 가리키던 말이었어요. 초기 기독교 학자들은 천사가 실체 없는 존재라고 주장했죠. 아름답고 창백하고 빛을 뿜어내며 일시적이고 무형이고 고결한 존재라고 정의했어요. 천사는 하느님의 사자使者고 그 수도 무한히 많아요. 하느님의 뜻을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죠. 하느님의 모습과 비슷하지만 진흙으로 만들어져 완벽하지 않은 존재인 인간은, 불꽃처럼 육체를 초월해 움직이는 천사들의 모습을 경외감에 사로잡혀 바라볼 수밖에 없어요. 몸에서 빛을 뿜어내고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존재이유 자체가 성스러운 천사들은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예요.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를 매개하는 역할에 어울릴 만큼 아름답죠. 그런데 그들 가운데 일부가 반역을 일으켜 인간과 섞였어요. 그 불행한 결과가 바로 네피림이에요." 
"인간과 섞여요?"

에반젤린이 물었다.
"여자들이 천사의 아이들을 잉태한 거죠."

 

- 셀레스틴은 잠시 말을 멈추고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확인하듯 에반젤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기술적으로 어떻게 교배가 가능한지는 오랫동안 연구 대상이 됐어요. 몇백 년 동안 교회는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고 부인했죠. 창세기의 구절은 천사에게 육체적 속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난처하기 이를 데 없는 내용이니까요. 어쨌거나 일어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교회는 천사와 인간 사이에서는 성적 접촉 없이 생식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게 됐어요. 서로 영혼이 섞인 뒤 여자가 임신을 한다는 거죠. 그러나 그 후손이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 사악하니 성모마리아의 동정녀 잉태와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어요. 내 스승 세라피나 박사님은 이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분은 천사들이 인간 여자들과 번식함으로써 스스로 육체를 가졌음은 물론 성교가 가능한 존재라는 걸 증명했다고 주장했죠. 천사의 육체는 생각보다 훨씬 인간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나중에 실제 탐사에서 우리는 천사의 생식기에 대한 증거자료를 확보하고 사진도 찍었어요. 그러니까 천사는 뭐라고 해야 하나? 말하자면 천사도 번식을 위해 인간과 동일한 기관을 갖추고 있다는 걸 확실하게 밝혀냈어요." 
"천사의 사진이 있다고요?"

결국 호기심에 굴복한 에반젤린이 물었다.

"10세기에 살해된 남자 천사의 사진이죠. 사람들 말에 따르면 인간 여자와 사랑에 빠진 천사들은 남자였어요. 그렇다고 해서 여자 천사가 존재할 가능성을 배제하는 건 아니에요. 감시자들 가운데 3분의 1은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고 해요. 그렇게 하느님께 순종한 천사들은 천국으로 돌아가 지금까지 머물고 있다 하죠. 내 생각에 그들은 여자 천사일 거예요. 남자 천사들처럼 유혹에 빠지지 않은 거죠."

- "지상에 남은 천사들은 여러 면에서 특이했어요. 그들이 얼마나 인간과 비슷했는지 알면 알수록 놀라워요. 그들이 하느님께 반기를 든 것은 자유의지에 따른 행동이었어요. 에덴동산에서 잘못된 선택을 한 아담과 이브의 행동이 연상되죠. 또한 반역을 저지른 천사들은 인간만의 독특한 사랑 방식을 터득했어요모든 걸 바쳐 맹목적으로, 무모하게 사랑한 거죠. 그들은 천국 대신 열정을 택했어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에요. 특히 에반젤린이나 나처럼 그런 사랑을 해볼 기회를 포기한 사람들은 더욱 이해할 수 없겠죠." 
셀레스틴은 앞으로 사랑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에반젤린이 딱하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렇게 생각하니 아주 멋져 보이지 않나요? 사랑을 느끼고 함께 겪어내는 그들의 능력은 그들이 저지른 그릇된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죠. 하지만 하늘은 이해해주지 않았어요. 감시자들은 가차 없이 처벌받았어요. 천사와 인간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무시무시한 괴물들은 세계에 큰 고통을 가져왔거든요." 

 

- "그리고 수녀님은 그들이 아직도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으시는군요."

에반젤린이 말했다.
"여전히 세상에 있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했어요. 현대에 접어들면서는 새로운 이름 아래 정체를 감추었고요. 오래된 가문과 어마어마한 재산 그리고 뒤를 캘 수 없는 조직의 비호를 받으며 숨어 살죠. 평범한 인간들 사이에 그들이 숨어 있다는 걸 상상조차 하기 어렵겠지만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어요. 일단 존재를 인정하기만 하면 세계 어디서나 그들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요." 

- 셀레스틴은 조심스럽게 에반젤린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한 말을 얼마나 받아들이는지 가늠해 보는 것 같았다.
"여기가 파리였다면 구체적이고 반박의 여지가 없는 증거를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목격자들이 작성한 자료를 읽을 수도 있고 어쩌면 탐사 때 촬영한 사진도 볼 수 있을 거예요. 지난 수백 년 동안 천사학을 연구해 온 성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밀턴, 단테 같은 사상가들이 남긴 방대하고 멋진 유산을 바탕으로, 에반젤린 수녀가 우리 주장을 확실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차근차근 설명해 줄 수도 있을 거예요. 대리석 복도를 지나 역사 기록을 보관해 둔 공간으로 직접 안내해 줄 수도 있고요. 우리는 각 천사의 계급을 정확히 정리한 가장 정교하고 자세한 도표를 지속적으로 작성해 보관했어요. 이런 작업을 통해 우주는 질서를 유지하는 거죠. 프랑스 사람들의 사고는 지극히 논리 정연해요. 데카르트 철학이 그 증거죠. 데카르트 철학 덕분에 프랑스 사람들이 논리적인 게 아니라요. 나는 이런 체계적인 공부를 하면서 더없이 마음의 안정을 얻었어요. 어쩌면 에반젤린 수녀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 "물론 시대가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천사학이 신학의 아주 큰 부분을 차지했죠. 왕과 교황이 신학자들의 연구를 지원하고 예술가들을 후원해 천사를 그리도록 했어요. 유럽에서 가장 명석한 학자들이 천사의 계급과 존재이유를 두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제 이 세상에는 천사가 설 자리가 없어요." 
셀레스틴은 지식을 전해주면서 전에 없던 힘이 솟는 듯 에반젤린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다가앉았다.
"한때 천사는 아름다움과 선의의 전형이었지만 우리가 사는 지금 시대는 천사에 관심조차 갖지 않아요. 물질주의와 과학이 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결국 연옥처럼 애매한 영역에 속한 존재로 만들고 말았어요. 과거 사람들은 무조건 직관적으로 천사를 믿었어요. 지성이 아닌 영혼으로 받아들인 거죠. 하지만 이제는 증거가 필요해요. 천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의혹 없이 증명해 줄 물건이나 과학적 자료를 찾죠. 하지만 만일 그런 증거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무슨 난리가 나겠어요? 천사가 존재한다는 확실한 증거가 드러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아요?" 

- 셀레스틴은 한참 말이 없었다. 지쳤거나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반대로 에반젤린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셀레스틴의 이야기는 에반젤린이 오후에 혼자 찾아보았던 신화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소름 끼치는 우연의 일치였다. 그녀는 끔찍한 괴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런 주장을 지울 근거를 원했다. 그러나 셀레스틴은 아까처럼 다시 흥분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수녀님."

에반젤린은 셀레스틴이 지금까지 한 말이 모두 자신의 환상이었다고, 지루하고 재미없는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고 털어놓길 바랐다.

"그냥 지어낸 이야기였다고 말씀해 주세요."
 
- 천사를 연구하는 학문의 관계를 알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에반젤린 자신이 그 기묘한 연결고리들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자꾸 여쭤봐서 죄송해요."

에반젤린은 말과 달리 물러서지 않는 자신이 꼭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록펠러 여사가 어떻게 우리를 도우러 오게 된 거죠?"
"당연히 록펠러 여사에 대해 알고 싶겠죠."

셀레스틴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에반젤린 수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어요."

- 셀레스틴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이야기해야겠군요. 1920년대 우리 조직에서 최선두에 있던 학자는 라파엘 발코 박사였어요. 그분은 내 스승이신 세라피나 발코 박사님의 부군이셨죠."
"저희 할아버지 성함이 라파엘 발코인데요?"

 
- 셀레스틴은 덤덤한 눈빛으로 에반젤린을 보았다.

"알아요. 그들이 결혼한 건 내가 파리를 떠난 다음이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에 라파엘 박사는 어떤 기록을 찾아냈어요. 우리 조직의 설립자 중 한 분인 클레마티스 신부가 어느 동굴에서 고대 유물인 리라를 발굴했다는 사실을 담은 자료였어요. 그 리라는 그때까지만 해도 학자들의 많은 연구를 통해 추측만 무성하던 물건이었죠. 그에 관한 전설은 널리 알려졌지만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는 확인하지 못하던 때였어요. 라파엘 박사가 자료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 동굴도 그저 오르페우스 신화와 관련이 있다고만 알려져 있었죠. 아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오르페우스는 실존했던 인물이에요. 카리스마와 예술적 재능 그리고 음악적 능력으로 명성과 권력도 누렸던 사람이죠. 그런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그는 세상을 떠난 후 하나의 상징이 되었어요. 록펠러 여사는 우리 조직에 속한 지인을 통해 리라의 존재를 알게 되었죠. 그래서 리라를 찾아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탐사를 지원한 거예요."
"예술적인 면에서 관심을 가졌다는 건가요?"

"록펠러 여사는 예술적인 취향이 훌륭한 만큼 고대 유물의 중요성도 잘 아는 사람이었어요. 나중에는 우리 조직의 대의명분을 잘 이해했겠지만, 처음에는 투자 관점에서 접근했어요."

- "록펠러 여사는 로도피 산맥에서 발견한 보물을 위험으로부터 지키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약속을 지나치게 훌륭하게 지켰죠. 보물을 넘겨받고 나서 사 년이 지난 1948년 4월 5일에 세상을 떠나고 만 거예요. 보물을 숨긴 곳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요. 리라가 숨겨진 장소는 그녀와 함께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죠." 

- "하지만 왜 일부만 해쳤죠? 그들의 힘이 그렇게 강하다면 이쪽을 전부 죽일 수도 있잖아요. 왜 수녀님이 속한 조직 전체를 쓸어버리지 않은 거죠?"
"그자들이 손쉽게 우리를 전멸시킬 수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그럴만한 힘과 방법을 분명히 갖고 있죠. 하지만 세상에서 천사학자들을 없애버리는 일은 그들의 최대 관심사가 아니에요."
"왜요?"

에반젤린은 깜짝 놀라 물었다.
"그렇게 큰 힘을 가졌지만 그들에겐 매우 중대한 약점이 있어요. 육체적인 쾌락에 완전히 눈이 먼, 음란한 존재라는 거죠. 그들은 부자에다 권력을 소유했고 아름다운 몸을 가졌으면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무자비해요. 그들은 고대부터 형성되어 내려오는 친족 관계로 묶여 있고 그걸 이용한 덕에 격랑과도 같은 역사를 겪으면서도 늘 승승장구할 수 있었어요. 전 세계 곳곳에 돈을 쌓아둔 요새를 세웠죠. 그들은 스스로 만들어낸 권력 체계의 승리자예요. 하지만 뛰어난 지력은 갖지 못했어요. 그렇다고 우리 인간들처럼 방대한 학문적, 역사적 자료들을 보유하고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죠. 그러니까 그들은 대신 생각을 해줄 상대로 우리가 필요한 거예요."

셀레스틴은 자신이 꺼낸 주제가 고통스럽다는 듯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1943년 그들의 작전은 거의 성공할 뻔했어요. 그들은 내 스승을 죽였죠. 그리고 내가 미국으로 탈출했다는 걸 알아낸 뒤에는 우리 수녀원을 포함해 십여 개의 수녀원을 파괴했어요. 나와 내가 가져온 물건을 찾기 위해서요." 

- 묘지 근처 좁은 골목에 사람들이 모여 라디오 전쟁 뉴스를 듣고 있는 카페를 지나 우리가 사는 가상디 가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가브리엘라와 나는 3층에 살았다. 3층 창문은 밤나무 가로수보다 높아 거리 소음이 들어오지 않고 볕도 잘 들었다. 넓은 계단을 올라가 잠긴 문을 열고 조용하고 환한 집안으로 들어섰다. 아파트는 상당히 넓었다. 큰 침실 두 개와 길쭉한 식당이 있고, 하인이 쓰는 방에는 부엌으로 드나드는 문이 따로 달려 있으며, 자기 욕조가 놓인 넓은 욕실도 있었다반질거리는 마루에 처음 발을 디딘 순간부터 나는 이곳이 학생들이 살기에는 지나치게 호사스러운 집이라고 생각했다. 가브리엘라는 대단한 집안 출신이어서 학교에서 최고 대우를 받았다. 내가 어쩌다 가브리엘라와 함께 이렇게 좋은 숙소에 머물 수 있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 몽파르나스에 있는 이 집은 내 삶의 큰 변화였다. 아파트에서 살기 시작한 뒤 몇 달 동안 나는 화려한 집에 푹 빠져서 집안의 모든 것을 완전무결하게 유지하려고 애썼다. 파리에 오기 전까지 그런 아파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나와 달리 가브리엘라는 늘 풍족하게 살았다. 우리는 여러 면에서 반대였고 심지어 외모도 전혀 달랐다. 나는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얀 데다 큰 적갈색 눈에 입술이 얇고 턱이 좁은 전형적인 북유럽 사람이었다. 반대로 가브리엘라는 어두운 분위기의 고전적인 미인이었다. 그녀는 옷도 잘 못 입고 클로딘 시리즈 주인공처럼 구는데도 왠지 함부로 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장학금을 받고 파리에 유학 온 나는 학비와 생활비를 온전히 기부금에 의존해야 했지만 가브리엘라는 파리에서 가장 유서 깊고 유명한 천사학자 집안 출신이었다. 나는 천사학계의 가장 뛰어난 학자들 밑에서 공부하는 일을 행운으로 생각했지만 가브리엘라는 그런 사람들 틈에서 그들의 넘치는 재능을 햇빛인 양 흡수하며 자랐다. 나는 밭 가는 소처럼 꾸준히 책을 읽으며 외우고 정리해야 했지만 가브리엘라는 원래부터 명쾌하고 눈부신 지성을 갖추고 있어서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배운 내용을 모두 노트에 적고 도표와 그래프를 그려가며 잊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내가 아는 한 가브리엘라는 필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신학 관련 질문에 척척 대답하고 내가 어려워하는 신화와 역사 문제를 명쾌하게 논술했다. 우리 둘 다 성적은 최고였지만, 나는 가브리엘라가 태어나자마자 가입해 둔 엘리트 모임에 몰래 숨어든 기분이었다. 


집안의 모습은 내가 아침에 나갈 때와 다름없었다. 가죽 장정의 두꺼운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이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내가 아침에 먹다 남긴 빵 껍질과 딸기잼이 그대로 있었다. 식탁을 치우고 읽던 책을 방으로 가져가 잔뜩 어질러진 책상 한가운데 놓았다. 책상 위에는 아직 읽지 못한 책들과 잉크병, 절반쯤 쓴 노트들이 있었다. 

- 와인 양조장의 딸로 태어난 나는 아무 걱정 없이 자란 수줍음 많은 시골 소녀로, 종교적인 신념이 확고하고 공부에 소질이 있었다. 어머니는 대대로 포도 농사를 지어온 집안 출신이었다. 어머니의 가족들은 근면하고 끈기 있게 일하며 조용히 살아남았고, 오세루아 블랑, 피노 그리를 키워서 모은 전 재산을 농가의 벽 뒤에 숨겨둔 채 또다시 전쟁이 터질 때를 대비했다.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동유럽에서 프랑스로 이민 온 외국인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한 다음 어머니의 성을 따라 이름을 바꾸고 처가의 포도 농장을 물려받았다.

- 아버지는 비록 학자는 아니었지만 내가 공부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아보고 걸음마를 뗀 후로 늘 내 손에 책을 쥐여주었다. 대부분 신학 책이었다. 내가 열네 살이 되자 아버지는 나와 함께 기차를 타고 파리를 오가며 유학 준비를 해주었다. 입학시험을 보는 날에도, 장학생으로 합격한 뒤 학교에 갈 때도 데려다주었다. 짐도 아버지와 함께 쌌다. 할머니가 쓰던 나무 트렁크에 내 물건을 몽땅 담았다. 나중에 할머니가 어렸을 때 이 학교에서 공부하길 간절히 바랐다는 것을 알고서, 내가 천사학자가 되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진 운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은 수업 시간에 늦은 집안 좋은 친구를 찾으러 다니는 신세지만 우리 가족이 있는 내 삶을 다른 사람과 바꾸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아파트에 가브리엘라가 없으면 그냥 혼자 도서관으로 가서 세라피나 박사를 만날 생각이었다.

- 내 방을 나오는데 복도 끝 커다란 욕실 안의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문이 닫혀 있었지만 김이 서린 유리 뒤에서 누군가 움직이고 있었다. 가브리엘라가 목욕을 하는 게 분명했다. 수업 시간에 목욕이라니 이상한 일이었다. 커다란 욕조의 윤곽이 보였다. 뜨거운 물이 가득 차 있는 듯했다. 더운 김이 출렁거리며 온 욕실을 휘감더니 유리문에 우윳빛 안개가 두껍게 깔렸다. 가브리엘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혼잣말을 하다니 이상하다고 여기면서도 다른 사람과 같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다. 노크를 하려고 막 손을 올리는데 엄청나게 찬란한 금빛이 번쩍였다. 유리창 너머로 거대한 그림자가 지나갔다. 믿을 수 없게도 욕실 전체가 부드러운 빛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진 나는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서서 문을 살짝 열었다. 타일 바닥에 헝클어진 옷가지가 흩어져 있었다. 하얀 리넨 치마와 무늬가 들어간 인조견 블라우스는 가브리엘라의 것이었다. 밀가루 부대처럼 구겨진 채 가브리엘라의 옷과 뒤섞인 바지 한벌이 보였다. 급하게 내던진 모양이었다. 가브리엘라는 분명 혼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돌아서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욕실 안쪽을 들여다본 나는 너무 놀라 충격에 휩싸인 채 굳어버렸다.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김 속에서 맞은편 벽에 기대선 가브리엘라를 어떤 남자가 양팔로 끌어안고 있었다. 남자의 살갗은 빛이 날 정도로 희었고, 난데없는 장면에 놀란 내 눈에는 천상의 빛처럼 보였다. 남자는 자기 몸으로 짓눌러 터뜨려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가브리엘라를 밀어붙였다. 상대를 지배하려는 듯한 행동이었지만 가브리엘라는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얀 양팔로 남자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 나는 가브리엘라가 눈치채지 못하게 살그머니 욕실을 벗어나 아파트에서 빠져나왔다. 세라피나 발코 박사에게 보고하기 전에 좀 정신을 차리려고 일부러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여러 블록에 걸쳐 넓게 자리 잡은 학교 건물들은 좁은 골목과 지하 통로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 불규칙한 모습이 묘하게도 위안이 되었다. 균형을 이루지 못한 모습이 꼭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건물들은 멋지지 않았다. 시설도 좀 열악해 -강당은 너무 작고 교실은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불편했지만 공부에 열중해 있던 나는 그런 데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 이미 파리를 떠난 교수들의 불 꺼진 연구실을 지나며 나는 가브리엘라가 애인과 함께 있는 장면을 목격한 충격을 누르려 애썼다. 아파트에 남자 손님을 들일 수 없다는 사실은 차치하고, 내가 목격한 남자는 어딘가 이상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왠지 으스스하고 비정상적인 느낌이었다. 머리로는 세라피나 박사에게 말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본 장면을 이해할 수 없기도 했고 가브리엘라에 대한 내 감정은 우정과 경쟁심이 어지럽게 뒤섞인 것이기도 해서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가브리엘라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보았다. 가브리엘라의 행동은 나를 도덕적인 궁지에 몰아넣었다. 세라피나 박사가 왜 늦었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렇다고 가브리엘라의 비밀을 누설할 수는 없었다. 가브리엘라 레비 프란체는 나의 유일한 친구이자 가장 맹렬한 경쟁자였다. 

- 하지만 모든 게 공연한 걱정이었다. 세라피나 박사의 연구실에 도착하니 가브리엘라는 이미 와 있었다. 루이 14세 풍의 의자에 앉은 가브리엘라는 어찌나 깔끔하고 차분한지 아침 내내 공원 그늘에 누워 볼테르의 작품을 읽은 사람 같았다. 연두색 크레프드신 원피스에 하얀색 실크 스타킹 차림이었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샬리마 향수 냄새가 훅 끼쳤다. 평소처럼 내 양쪽 뺨에 형식적으로 입을 맞추며 인사를 건네는 걸 보니 다행히 내가 엿본 걸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세라피나 박사가 따뜻하게 나를 맞아주며 왜 늦었냐고 물었다. 교수들의 평판은 자신의 연구 성과뿐 아니라 담당하는 학생들의 성적과 재능에도 좌우되었다. 가브리엘라를 찾으러 갔다가 게으름을 피운 꼴이 된 나는 조금 분했다. 학교에서 내 위치가 확고하다는 환상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세라피나 박사는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하겠지만, 명문가 출신인 가브리엘라와 달리 나는 학교에서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 학생들 사이에서 발코 부부의 인기가 높은 건 이상할 게 없었다. 세라피나 발코는 자신만큼이나 명석한 라파엘 발코 박사와 결혼했고, 가끔은 남편과 함께 공동으로 강의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함께 진행하는 강의에는 늘 학생들이 넘쳐났다. 원래는 1학년이 듣는 필수과목이지만 젊고 열정 넘치는 학생들이 가리지 않고 몰려들었다. 학교에서 가장 뛰어난 교수인 두 사람은 천사 고고학, 그중에서도 특히 비중은 작지만 중요한 분야인 태고 지리학 전문가였다하지만 발코 부부의 강의는 자신들의 전문 분야에 머물지 않고 천사학의 신학적 기원부터 현대 실무에 이르기까지 긴 역사를 다루었다. 두 사람의 강의를 들으면 오래전 과거가 눈앞에서 되살아나는 듯했다. 고대 동맹과 전쟁의 본질, 그리고 그런 일들이 현대 세계에 어떤 병폐로 남았는지도 명백하게 보였다. 세라피나 박사와 라파엘 박사는 학생들에게 지나간 역사는 신화나 동화처럼 먼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전쟁과 전염병, 불운에 짓밟힌 사람들만 등장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우는 힘이 있었다. 역사는 현재에도 살아 숨 쉬고 우리의 일상 속에 존재하며 우리가 흐릿한 미래의 풍경을 내다볼 수 있는 창을 제공한다고 가르쳤다. 과거를 생생하게 느끼도록 하는 그런 능력 덕분에 발코 부부는 학교에서 인기를 누리고 높은 위치를 굳건히 다졌다. 

- "어서 가야겠다. 이미 늦었어."
빠른 속도로 걷는 세라피나 박사의 구두 굽 소리가 바닥을 울렸다. 그녀는 우리를 데리고 좁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 '신전'이라고 부르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름만 보면 코린트 양식 기둥이 줄지어 서 있고 높은 채광창이 나 있는 모습이 연상되지만 우리가 공부하는 도서관은 사실 빛이라고는 들어오지 않는 지하 감옥 같았다. 창문이 없는 건물은 늘 해 질 녘처럼 어두워 석회암 벽과 화강암 바닥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강의실로 쓰는 몽파르나스의 좁은 건물 안 방들도 모두 비슷한 분위기였다. 학교는 몽파르나스 여기저기 흩어진 아파트들을 오랜 시간에 걸쳐 확보한 다음 되는대로 통로를 만들어 연결한 모습이었다. 나는 파리에 오자마자 우리의 안전은 얼마나 잘 숨느냐에 달려 있음을 배웠다. 학교가 미로처럼 복잡하다는 건 우리가 방해받지 않고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전쟁이 가까워오지만 미로 안에서는 평온함을 느꼈다. 많은 교수들이 이미 도시를 떠났을 정도인데도. 

- 음침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은 학교에 들어간 첫해 내게 큰 위안이 되어주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책들은 대부분 수십 년 동안 책장에 꽂혀 어느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채로 보관되어 있었다. 세라피나 박사는 1학년인 내게 도서관을 소개하면서 노아의 대홍수 직후에 쓰인 책까지 있으니 바티칸에서도 부러워할 정도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오래된 책들을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 자료들은 학생들이 못 들어가게 잠가두는 별도의 서가에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한밤중에 도서관으로 가서 조그만 기름등을 밝히고 구석진 곳에 앉아 책을 읽었다. 옆에 책을 잔뜩 쌓아두고 있으면 오래된 종이에서 풍기는 달콤한 먼지 냄새가 주위를 에워쌌다. 공부를 하면서도 그게 야망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새벽까지 책을 붙들고 있는 내 모습을 목격한 학생들에게는 그렇게 보였을 터였다. 나는 그저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는 책들의 존재가 새로운 삶에 적응할 수 있게 해주는 다리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도서관으로 걸어 들어갈 때면 세계의 역사가 안개 속에서 떠오르며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태어나기 수백 년 전부터 비슷한 연구를 해온 수많은 학자들과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내게 도서관은 문명화되고 정돈된 세계의 모든 것을 대표하는 존재였다. 

- 그런 나였기에 쑥대밭이 된 도서관을 보고 더욱 마음이 아팠다. 세라피나 박사를 따라 더 깊숙이 들어가자 조교 여럿이 책장의 책들을 꺼내고 있었다. 일은 매우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양도 많은 데다 귀중한 책들이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내 눈에는 도서관 전체가 더할 나위 없는 혼돈으로 추락한 듯 보였다. 탁자마다 높은 책 탑이 쌓였고 이미 거의 꽉 찬 커다란 나무상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몇 달 전만 해도 학생들이 탁자에 앉아 조용히 시험을 준비하거나 공부하던 곳이었다. 그들을 앞서간 수많은 세대의 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걸 잃어버린 듯했다. 이렇게 모든 걸 숨겨버리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나는 나만의 성역이 파괴되는 광경을 도저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 사실 앞으로 밟을 수순도 그리 놀라울 것은 없었다. 독일군이 진격해 오는 지금 이 도시에 남아 있는 건 안전하지 않았다. 학교는 얼마 안 가 수업을 중단할 테고 남은 학생들은 도시 외곽에 숨어 개별적으로 공부해야 할 것이다. 지난 몇 주 동안 대부분의 강의가 취소되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인 '천지창조의 이해'와 '천사 생리학' 강의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발코 부부만이 강의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이미 그런 상황이었지만 난장판이 된 도서관을 직접 보고 나서야 침략의 위협이 피부에 와닿았다. 

- 유명한 천사학자들이 탁자에 둘러앉아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위원회 사람들은 나도 잘 알았다. 대부분 1학년 때 초빙교수로 강의를 한 분들이었다. 하지만 그분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광경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천사학 위원회는 유럽 전역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정치가, 외교관, 사회 지도자 등으로 학교 밖에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이곳 도서관을 가득 채운 책들을 직접 집필한 학자이자, 천사의 신체적 특성과 화학적 성질을 연구해 천사학을 현대적으로 정립한 과학자였다. 검은색 수도복을 입은 수녀 -신학 연구와 현장 조사를 병행하는 천사학자였다- 옆에 가브리엘라의 삼촌인 레비 프란체 박사가 앉아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그는 천사 소환술의 전문가였다. 천사 소환은 위험하지만 흥미로워 꼭 공부해보고 싶은 분야였다.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천사학자들이 모여 앉아 우리 두 사람을 데리고 들어서는 세라피나 박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 라파엘 박사가 지도 옆에 서서 뭔가 말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매우 진중한 성격인 그는 종교인이 아닌데도 위원회에 자리를 차지한 몇 안 되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으로, 학교의 정식 교수이기도 했다. 세라피나 박사는 라파엘 박사가 13세기 영국 천사학자 로저 베이컨처럼 행정가와 학자 두 가지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르치고 파리에서 프란체스코학파의 교리를 가르친 베이컨은 지적인 완고함과 영적인 겸손함으로 학자들 사이에서 칭송을 받았는데, 내가 보기에도 라파엘 박사는 베이컨의 후계자라 하기에 충분했다. 세라피나 박사가 자리에 앉자 라파엘 박사가 잠시 멈추었던 말을 다시 시작했다.

- "우리가 보유한 모든 자료는 잘 포장해서 시골의 안전한 지역에 보관할 겁니다. 물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미래에 벌어질 불상사에 대비해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시기가 정말 좋지 않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을 미룰 수는 없습니다. 지금 당장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라파엘 박사는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방어막이 깨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전투에도 맞설 준비가 돼 있습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합니다. 더 늦어진다면 포위당하고 말 겁니다." 

- "교수님, 지도에서 유럽을 보십시오."

블라디미르라는 위원이 말했다. 레닌그라드에서 비밀리에 운영하는 천사학 아카데미에서 파리로 파견한 젊은 학자였다. 나도 소문으로만 그런 사람이 있다고 들었을 뿐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남자답게 잘생긴 외모에 눈동자에는 푸른빛이 돌고 몸이 호리호리했다. 차분하고 단호한 태도 때문인지 비교적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실제로는 열아홉 살에 불과했다.

"저희는 이미 포위당한 것 같습니다."

- "독일을 위시한 추축국과 우리 적의 술책은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레비 프란체 박사가 말했다.

"세속적인 위험은 영적 존재인 우리의 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양쪽 모두에 맞설 준비를 해야 합니다."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맞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리라를 찾아내 파괴하는 일에 좀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요."

세라피나 박사가 말했다.
박사의 단호한 말에 좌중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위원회 사람들은 세라피나 박사의 대담한 발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
 
- "지금 논의하는 지역이 얼마나 넓은 겁니까?"
"트라키아는 로마제국 동쪽에 속했던 곳으로, 나중에는 비잔티움으로 불리기도 했고 현재는 터키와 그리스, 불가리아 땅입니다."

라파엘 박사가 말했다.

"10세기에 트라키아 영토는 극심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가경자 클레마티스 신부의 탐사 기록 덕분에 어느 정도 범위가 좁혀졌습니다. 우리는 클레마티스 신부가 불가리아의 로도피 산맥 한가운데 있는 스몰랸에서 태어났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탐사 중 당신이 태어난 도시에 들렀다는 기록도 남아 있고요. 그러니까 트라키아의 북쪽 지방으로 범위를 좁힐 수 있습니다." 

- "기억할 게 있습니다."

세라피나 박사가 말했다.

"전쟁이 초래하는 위협은 단지 우리가 소장한 자료나 학교 건물이 파괴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만일 동굴이나 그 안에 있는 보물에 관한 내용이 공개되면 우리가 패할 가능성은 더 높아집니다."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적은 한시도 한눈팔지 않고 로도피 산맥을 감시하고 있어요."

수녀가 말했다.
"사실입니다. 지금 바로 탐사를 떠나야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천상의 음악 전문가인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 "왜 지금이죠?"

레비 프란체 박사가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천상의 악기들은 이미 찾아서 보호하고 있습니다. 가장 위험하다고 알려진 악기 하나만 확보하지 못했을 뿐이죠. 그런데 왜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 안 되는 거죠?" 
"나치가 해당 지역에 병력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세라피나 박사가 말했다.

"그들은 유물을 아주 좋아하죠. 더구나 나치 정권의 신화와 관련된 물건이라면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리고 네피림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으려 할 겁니다."
"리라의 힘은 악명이 높습니다."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천상의 악기들 중에서도 가장 처참한 종말을 부를 수 있는 게 바로 리라입니다. 어쩌면 나치의 만행보다 더 파괴력이 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발굴하지 않고 그냥 두기에는 너무 중요한 물건입니다. 네피림이 옛날부터 리라를 갈망해 왔다는 건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 "혹시 기적적으로 리라를 찾아낸다 해도 그걸 소유한 사람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위험할지도 몰라요. 혹은 그걸 빼앗겨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움직여서 오히려 적을 돕는 꼴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럼 리라가 몰고 올 공포를 책임져야 할 겁니다."
"어쩌면 리라의 힘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막강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수녀가 꼿꼿하게 허리를 펴며 말했다.

"그 악기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대부분의 두려움은 이교도의 신화에서 비롯된 겁니다. 리라가 불러일으킬 거라는 끔찍한 일들은 그저 전설에 불과할 가능성도 충분해요."

 

- 다른 사람들이 수녀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긴 사이 라파엘 박사가 말했다.

"어쨌든 행동에 나설지 말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무모하게 행동에 옮기는 건 현명하게 자제하느니만 못합니다."

레비 프란체 박사가 말했다. 나는 진정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려는 우리 교수님과 달리 잘난 체하는 듯한 레비 프란체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는요."

라파엘 박사가 점점 더 불안해하며 말했다.

"대책 없이 기다리는 게 더 무모합니다. 수동적으로 있다가는 끔찍한 결과를 맞을 겁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당장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겁니다. 리라를 찾아내 보호하는 게 우리 의무입니다."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 박사님은 가브리엘라와 내 쪽으로 걸어와 위원회사람들의 관심을 우리 두 사람에게 돌렸다.

"여기 두 사람을 아시죠. 혹시 모르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이들은 젊은 천사학자들 가운데 가장 똑똑한 친구들입니다. 가브리엘라와 셀레스틴은 저와 함께 자료를 다시 정리해 왔습니다. 그동안 바쁘게 자료를 분류하고 메모를 옮겨 적었죠. 그리고 이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사실 저와 라파엘 박사가 이렇게 중대한 갈림길에서 어느 쪽으로 나아갈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여기 두 사람이 과거 기록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사소한 정보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 우리 처지가 왠지 서글프게 느껴진 나는 위안이 될까 싶어 가브리엘라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때보다 차갑게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혹시 지금 위원회에서 논의하는 내용을 정확히 아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나야 그럴 일이 없지만 그녀라면 내부 정보를 접했을 수도 있다. 세라피나 박사는 내게 리라에 관한 이야기, 또는 리라가 적의 손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식의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가브리엘라는 무슨 일인지 모두 알고 이 자리에 왔다고 생각하니 질투가 끓어올랐다. 

- 다음날 아침에 회의가 있었다. 약속한 아홉 시보다 한 시간쯤 일찍 세라피나 박사의 연구실에 도착했다. 전날 밤 나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옆방을 쓰는 가브리엘라도 밤새 우왕좌왕 창문을 열었다가 담배를 피웠다가 하며 제일 좋아하는 레코드인 드뷔시의 <열두 개의 연습곡>을 틀어놓고 방안을 서성거렸다. 그녀도 나처럼 그 비밀스러운 관계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솔직히 가브리엘라의 기분은 도대체 알 수 없었다

- 라파엘 박사는 가끔 아내의 깨끗한 연구실을 찾아 별이 잘 드는 곳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며 좀 더 나은 강의를 위해 아내와 토론을 벌이거나, 지금의 가브리엘라처럼 세라피나 박사의 세브르 도자기 찻잔으로 커피를 마시곤 했다. 
가브리엘라가 나보다 먼저 연구실에 와 있었다는 사실에 실망을 넘어 화가 났다. 가브리엘라가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일부러 나를 빼놓고 박사님과 둘이서만 상의한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우리가 맡을 일에 대해 박사님과 따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으니 어쩌면 자신이 원하는 일을 미리 골랐을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떤 성과를 거두느냐에 따라 학교에서의 위상이 달라진다는 건 분명했다. 만일 발코 부부가 결과에 만족한다면 탐사대에 자리가 하나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건 둘 중 한 명뿐이었다. 

- 지금까지는 각자 잘하는 분야의 일을 맡아왔는데, 둘 다 각자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기술적인 분야, 즉 천사 생리학이나 피조물을 구성하는 물질과 정신의 비율, 초기 생물분류법의 정확성 따위에 관심이 많았던 반면, 가브리엘라는 천사학의 예술적인 분야에 흥미를 느꼈다. 천사학자와 네피림의 전쟁을 다룬 웅장한 서사시를 즐겨 읽었고 종교화에서 나라면 분명히 놓쳤을 법한 상징을 찾아냈다. 고대 문서를 분석할 때면 단어 하나의 의미가 미래의 모든 걸 바꿔놓을 수도 있으리라 믿는 사람처럼 정성을 다했다. 그녀는 선한 사람들이 진보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 학교에서 함께 1학년을 보내는 동안 내게도 같은 생각을 심어주었다. 세라피나 박사는 가브리엘라에게 신화와 관련된 자료를 내게는 보다 체계가 필요한 일을 맡겼다. 이를테면 과거에 문제의 동굴을 찾으려 시도했던 자료를 분류하거나 시대에 따른 지질학적 변화를 찾아내거나 오래된 지도를 순서대로 맞추는 일 등이었다. 가브리엘라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니 두 사람은 이미 한참 이야기를 나눈 듯했다. 사무실 한가운데 커다란 나무상자 여러 개가 보였다. 상자의 거친 모서리가 빨간색과 금색의 동양풍 카펫을 짓누르고 있었다. 안에는 급히 집어넣은 듯 연구 수첩들과 아무렇게나 묶어둔 문서들이 뒤죽박죽 담겨 있었다. 

- "가브리엘라가 얼른 시작하고 싶어 했어."

세라피나 박사가 말했다.

"둘이서 셀레스틴이 정리할 새로운 자료를 미리 좀 훑어봤지. 여기 상자에 든 자료는 라파엘 거야. 원래 그이 연구실에 있던 건데 어젯밤에 이리로 가져왔어."
박사님은 책상으로 걸어가더니 열쇠를 가져와 책장을 열었다. 선반마다 공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그리고 이것들은 내 자료. 주제와 기간을 기준으로 정리돼 있어. 학생 때 정리한 내용은 아래쪽 칸에 있고 최근 것들은 위쪽에 있어. 대개 논문에 쓴 참고 자료와 개요야. 지난 몇 년간은 연구 내용을 전혀 정리해두지 못했지. 보안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제대로 된 조수를 못 찾아서였어. 자네들은 똑똑한 학생이고 천사학의 기본적인 분야를 배울 만큼 배웠어. 목적론과 초자연적 파동, 천사 형태론과 분류학의 기초 지식 정도는 그리고 아주 얕은 수준이지만 태고 지질학도 배웠고. 자네들은 성실하고 꼼꼼하고 박식하고 재능이 많지만 전문적이지는 못해. 그런 신선한 시각으로 자료를 검토해 줬으면 해. 만일 상자 안에 우리가 놓친 뭔가가 있다면 분명히 잡아낼 거라고 믿어. 그리고 둘 다 내 강의를 듣도록 해. 기초 과목은 작년에 모두 마친 걸로 알고 있지만, 이번에 해야 할 일과 워낙 관계가 깊은 과목이니까." 

- 빼곡히 꽂힌 책들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던 박사님이 몇 권을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얼른 한 권을 집어 살펴보고 싶었지만 꾹 참고 가브리엘라가 먼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안달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 자료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거야."

세라피나 박사가 소파에 사뿐히 앉으며 말했다.

"라파엘의 자료는 제대로 분류하려면 고생깨나 할 테니까."

 

 

- "셀레스틴에게는 가브리엘라가 잘 설명해 줄 테지만, 딱 하나 다시 말해둘 게 있어. 이 공책들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자료야. 우리가 진행하는 특별한 연구의 기초 자료지. 일부를 발췌해 사용한 적은 있지만 한 권을 통째로 공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그러니 민감한 내용일수록, 특히나 옛날에 진행한 탐사를 요약한 자료들은 조심해서 다루도록 해. 미안하지만 이 자료는 연구실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어. 아주 엉뚱한 시간만 아니라면 언제든지 와서 검토해도 돼. 뒤죽박죽일진 몰라도 분명히 배울 게 많을 거야. 이 자료가 두 사람이 우리 투쟁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 운이 좋다면 우리가 찾는 걸 발견할 수도 있겠지." 
세라피나 박사가 가죽 공책 한 권을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건 내가 학생 때 쓴 거야. 강의 시간에 필기한 것도 있고, 천사학이 무엇인지,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전해 왔을지 나름대로 추측한 내용을 적은 글도 있지. 나도 들여다본 지 무척 오래되어서 두 사람 눈에 뭐가 보일지 예상하기 어렵군. 나도 한때는 포부가 대단한 학생이었고 셀레스틴처럼 아주 아주 많은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냈어. 그러던 중 도서관에 천사학의 역사에 관한 자료가 너무 많으니 좀 간단하게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써본 거지만, 순진한 어림짐작이 섞여 있을 수도 있으니 적당히 가감해서 이해해야 할 거야." 

- "고학년 때 쓴 건 그래도 좀 볼만할 거야. 여기 있는 내용을 다시 쓰면서, 뭐랄까, 이 학문의 역사를 좀 더 간단명료하게 정리했으니까. 우리 학자들과 요원들이 반드시 이뤄내려 하는 목표 가운데 하나는 천사학을 진정한 실용 학문으로 만드는 거야. 공부한 걸 구체적인 도구로 사용하는 거지. 이론은 적용할 수 있을 때만 가치가 있어. 그리고 우리가 네피림에 맞서 싸우는 데도 역사 연구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지. 나는 상당히 실증적인 사람이야. 사실 추상적인 사고에는 도통 소질이 없기도 하고. 그래서 이야기를 만들어 천사학 이론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려고 했어. 강의도 그런 식으로 했지. 우화 같은 이야기를 이용하는 건 신학의 여러 분야에서 아주 흔한 일이야. 하지만 교회는 천사들의 계급을 설명할 때 그런 식의 접근을 삼가고 있어. 두 사람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천사들의 계급체계는 교부들이 자주 끌어다 쓴 논리야. 그들은 하느님이 천사들의 계급을 만들었듯이 지상의 계급도 하느님이 만들었다고 믿었지. 하나를 보면 다른 걸 알 수 있다면서. 예를 들어 치품천사가 지품천사보다 높은 존재인 것처럼 파리의 대주교는 농부들보다 높은 존재라는 거야. 어떤 식인지 알겠지? 하느님이 계급체계를 만드셨으니 모든 사람은 신께서 정해주신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거지. 물론 세금도 내야 하고. 교회에서는 천사들의 계급을 근거로 자신들의 사회적, 정치적 구조를 공고히 했어. 거기에다 우주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 즉 우주론을 들먹이며, 겉으로 보기에 혼돈 그 자체인 일반 사람들의 삶에 질서를 제공했던 거야. 물론 천사학자들은 그런 방식에서 탈피했지. 수평 구조를 유지하고 지적 자유를 보장하고 성과를 내면 위로 올라갈 수 있어. 상당히 독특한 조직이야."  

- "어떻게 그런 조직체계가 살아남았죠? 교회가 용납했을 리 없잖아요."

가브리엘라가 물었다.
뻔뻔스럽기까지 한 가브리엘라의 질문에 놀라 나는 고개를 숙이고 손만 내려다보았다. 나라면 그렇게 직접적으로 교회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을 터였다. 그런 의문 자체가 교회가 건실하다는 내 믿음을 해칠 수도 있었다. 

- "예전에도 그런 의문은 수없이 제기되었어."

세라피나 박사가 말했다.

"천사학의 기초를 닦은 신부들이 10세기경 대규모 회의를 열어 천사학자들이 다룰 영역을 정했어. 회의에 참석했던 신부가 남긴 훌륭한 기록도 있지."

박사님은 다시 책장으로 가서 책 한 권을 가져왔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봐. 오늘 아침엔 당장해야 할 일이 많으니 안 되겠지만."


- 박사님은 책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우리 조직의 역사를 읽어보면 천사학이 단순히 연구와 토론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진지하고 영적인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현명한 결정을 내리면서 우리 사명은 시작됐어. 바로 제1차 천사 탐사를 결정한 거지. 이게 감옥에 갇힌 천사들을 찾아내려는 천사학자들의 첫 실질적 시도였고, 돌아가신 설립자 신부들이 트라키아 지방 신부들의 초대를 받아 가서 소조폴 공의회를 소집하며 본격적으로 시작됐어. 거기서 우리 규율을 처음으로 정했지. 위대한 설립자 가운데 한 분인 가경자 보고밀 신부의 말씀에 따르면 소조폴 공의회는 대단한 성공이었다고 해. 우리 사명을 정했을 뿐 아니라 그 시대의 가장 뛰어난 종교 사상가들을 한자리에 모았다는 점에서. 니케아 공의회 이후 모든 종파의 대표자들이 모인 경우는 처음이었으니까. 사제와 부제副祭, 복사, 랍비, 마니교의 성스러운 자들이 주 회의장에 모여 시끌시끌하게 교리 논쟁을 벌였지.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비밀스러운 회합이 벌어졌어. 로마에 살지만 트라키아 출신이었던 노령의 사제 클레마티스 신부가 감시자들이 갇힌 동굴을 찾아내겠다는 원대한 포부에 뜻을 같이할 신부들을 소집한 거야. 사실 클레마티스 신부는 이미 동굴 위치를 알아낼 이론을 세웠어." 

늘 칭찬받던 가브리엘라는 의견 충돌을 빚는 걸 보니 왠지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가브리엘라는 박사님이 못마땅해해도 전혀 굴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가브리엘라가 나를 경쟁 상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감 따위는 느끼지 않을 테니까. 

- 내가 얼른 일을 시작하고 싶어 안달하는 걸 알아채고 세라피나 박사가 일어섰다.

"이제 일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줄게. 어쩌면 두 사람은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뭔가를 찾아낼 수도 있을 거야. 이 자료들은 어떤 사람에게는 깊은 속내를 드러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 두 사람이 이 문제를 얼마나 민감하게 대하느냐에 달렸어. 모든 이의 정신과 영혼은 나름의 속도, 나름의 방식으로 익어가는 법이잖아? 귀가 달렸다고 해서 누구나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건 아니지." 

- 1학년 때 이미 발코 부부의 수업을 모두 들은 나와 가브리엘라는 다시 매주 수업을 들으러 갔다. 나는 질문이 오가는 열정적인 분위기와 모두가 학구적으로 하나가 된 듯한 환상에 매료되었고, 가브리엘라는 명문가 출신 2학년이라는 신분을 즐기는 듯했다. 하급생들은 발코 부부의 주장에 가브리엘라가 무슨 반응을 보이는지 가늠하는 듯 강의 시간 내내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교실은 로마식 사원 내부에 석회암으로 단장한 작은 예배당이었는데, 사원의 벽들은 마치 아래쪽에 펼쳐진 돌산에서 솟아오른 것처럼 두껍고 단단했다. 그러나 벽돌이 조금씩 부스러져서 나무 부벽으로 지탱해 놓은 예배당 천장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 [오늘 들려줄 이야기는 다들 이런저런 경험을 통해 익숙할 거예요. 천사학의 기반이 되는 이 이야기가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게다가 시적 아름다움도 흠잡을 데가 없죠.

먼저 노아의 홍수 전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하늘에서는 감시자라고 칭한 천사 이백 명을 지상으로 보내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지켜보도록 합니다. 감시자들 가운데 우두머리의 이름은 셈야자였다고 합니다. 셈야자는 아름답고 위엄이 넘치는 실로 천사다운 천사였습니다. 새하얀 피부와 파란 눈, 금빛 머리칼은 천상의 미가 무엇인지 보여주었죠. 그는 천사 이백 명을 이끌고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를 따르는 천사들 중에는 아라키바, 라멜, 타미엘, 라미엘, 다넬, 에제키엘, 바라키엘, 아사엘, 아르마로스, 바타리엘, 아나, 자키엘, 삼사피엘, 사타렐, 투렐, 요미야엘, 코카비엘, 아라키엘, 샴시엘, 사리엘 등이 있었습니다.  
천사들은 아담과 이브의 자손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게 돌아다니며 어둠 속이나 산속 등 인간이 찾아낼 수 없는 곳에 보금자리를 꾸몄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이동을 따라 지역을 옮겨 다녔습니다. 그 결과 갠지스 강과 나일강, 요르단 강, 아마존 강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문명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활동범위와 떨어진 곳에서 인간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수행하며 조용히 살아갔습니다. 
예렛의 시대였던 어느 오후 헤르몬 산에 머물고 있던 셈야자는 호수에서 목욕하는 한 여인을 봅니다. 갈색 머리칼이 그녀의 몸을 휘감고 있었죠. 셈야자는 다른 감시자들을 산꼭대기로 불러 함께 여인을 내려다봅니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셈야자가 감시자들에게 인간의 아이들 가운데서 아내를 고르자고 제안한 게 이 순간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내자마자 셈야자는 불안해졌습니다. 일찍이 반역을 저지른 천사들이 몰락하는 걸 지켜본 그는 하느님을 거역하면 어떤 벌이 따를지 알고 있었으니까요. 결국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딸들은 우리 것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너희가 나를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홀로 이 큰 죄에 대한 벌을 감당할 것이다.' 
감시자들은 지도자인 셈야자와 함께 어떤 벌도 감수하기로 굳게 맹세합니다. 그들은 그런 식의 동맹이 금지된 행위이며, 자신들이 맺은 약속이 천상과 지상의 모든 계율을 어기는 짓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헤르몬산을 내려와 인간 여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여자들은 이 낯선 존재들을 남편으로 맞아 곧 임신을 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감시자와 아내들 사이에 아이들이 태어납니다. 그들이 바로 네피림입니다. 
감시자들은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아이들은 인간 어머니들과 달랐고 천사들과도 달랐습니다. 여자아이들은 인간 여자들보다 키가 크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직감이 발달했고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겉모습은 천사들처럼 아름다웠죠. 남자아이들은 인간 남자들보다 키가 크고 강인했습니다. 합리적이고 판단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성이 천사들처럼 뛰어났죠. 감시자들은 선물 삼아 남자아이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전쟁 기술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아들들에게 불의 비밀도 전수했습니다. 불을 지피는 법과 꺼뜨리지 않고 유지하는 법, 그리고 불로 음식을 조리하거나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법을 가르쳤죠. 불 사용법은 무척 소중한 선물이어서 인간들에게 신화로 남았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프로메테우스 신화입니다감시자들은 또 아들들에게 금속 다루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천사들이 완벽하게 익혔지만 인류에게는 숨겼던 기술이었죠. 감시자들은 금속으로 팔찌와 반지, 목걸이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금과 원석을 땅에서 채취하고 손질해 가치 있는 물건을 만들어 보였습니다. 네피림은 부를 축적하고 금과 곡물을 잔뜩 저장했습니다. 감시자들은 딸들에게 천을 염색하는 법과 반짝이는 광물을 빻아 눈꺼풀에 바르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인간 여자들이 질투할 만큼 딸들을 아름답게 치장시켰습니다. 
감시자들은 자식들이 인간보다 강해지도록 금속을 녹여 검과 단도, 방패, 흉갑, 화살촉 같은 도구를 만드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도구의 힘을 알게 된 네피림들은 날카로운 무기를 많이 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냥을 해 고기를 비축하고 무력으로 소유물을 지켰습니다. 
감시자들이 남긴 선물은 또 있습니다. 아내와 딸들에게 불이나 금속을 다루는 방법보다 훨씬 강력한 비밀을 전수했습니다. 여자들을 남자들과 멀리 떨어진 깊은 산속으로 데려가 주문을 거는 법, 식물의 풀과 뿌리를 약으로 쓰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여자들은 주문을 기록하는 기호로 예술을 배웠습니다. 이내 여자들 사이에서는 두루마리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자들의 힘에 기대 살았던 여자들이 강력하고 위험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감시자들은 점점 많은 천상의 비밀을 아내와 딸들에게 누설했습니다.
바라키엘은 점성술을 가르쳤습니다. 코카비엘은 별자리를 읽고 예언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에제키엘은 구름의 형태와 움직임을 해석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아라키엘은 땅이 보여주는 신호를 읽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샴시엘은 태양의 경로를 기록했습니다. 사리엘은 달의 위상을 기록했습니다. 아르마로스는 반사 마법을 가르쳤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기반으로 네피림은 부족을 이루어 무기로 무장하고 땅과 자원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완벽한 전쟁 기술을 구사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지배력을 키워갔습니다. 스스로 이 땅의 주인이라 칭하고 땅덩어리를 큼직하게 가른 다음 왕국을 세웠습니다. 노예들을 부리고 자신의 군대를 상징하는 깃발도 만들었죠. 왕국을 구획하고 인간에게 군인, 상인, 노동자의 역할을 주고 자신들을 위해 일하게 했습니다. 영원한 비밀을 간직한 네피림은 권력을 갈망하며 인류를 지배했습니다. 
네피림의 지배하에 죽어가던 인류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도움을 청했습니다. 감시자들이 처음 땅에 내려왔을 때부터 지켜보던 대천사 미카엘과 우리엘, 라파엘, 가브리엘은 이처럼 네피림들이 세력을 펼치는 모습을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명을 받은 대천사들은 감시자들을 불로 둘러싸고 맞섰습니다. 결국 감시자들은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패배한 감시자들은 족쇄에 묶여 아무도 살지 않는 깊은 산속 동굴로 끌려갔습니다. 깊은 구덩이 끝 낭떠러지에 선 감시자들은 무거운 쇠사슬에 감긴 채 뛰어내리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지구 표면에 파인 틈으로 떨어진 그들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곤두박질치다가 결국 어둠의 감옥에 떨어졌습니다. 동굴 속에서 그들은 공기와 빛과 잃어버린 자유를 그리며 비통해했습니다. 천상과 지상에서 모두 격리당한 채로 풀려나기만을 기다리며 하늘의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리고 구해달라며 네피림을 소리쳐 불렀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의 애원을 무시했습니다. 네피림도 도우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대천사 가브리엘은 감시자들의 괴로움을 모른 체하지 못했습니다. 순간적으로 측은한 마음이 든 그는 갇힌 형제들에게 자신의 리라를 던져주었습니다. 괴로운 마음을 음악으로나마 달래길 바랐던 겁니다. 하지만 리라가 구덩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가브리엘은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깨달았습니다. 리라의 음악에는 사람을 유혹하는 강력한 힘이 있었습니다. 감시자들이 리라의 힘을 이용할 수도 있었던 겁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감시자들이 갇힌 화강암 감옥을 지하 세계나 죽은 자들의 땅이라 불렀고, 많은 영웅들이 영원한 생명과 지혜를 찾아 그곳으로 내려갔습니다. 타르타로스, 하데스, 쿠르누기아, 아눈, 그리고 지옥, 감시자들이 구덩이에 갇힌 채 풀어달라고 울부짖는 동안 전설은 점점 늘어났습니다. 오늘도 그들은 땅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 구해달라며 소리치고 있습니다.]

- "왜 네피림이 아버지들을 구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선 여러 가설이 있었습니다. 네피림이 감시자들의 도움까지 받는다면 더 강한 존재가 되었을 테니, 할 수 있다면 분명 아버지들을 풀어주려고 애썼을 겁니다. 하지만 감시자들이 갇힌 장소는 여전히 미상입니다. 이 수수께끼로부터 우리 사명이 시작됩니다." 
세라피나 박사는 타고난 달변가였다. 1학년 학생들에게 자신이 말하려는 바를 전달하는 힘이 뛰어났다. 그런 능력이 있는 교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어찌나 열정적인지 한 시간짜리 수업만 끝나도 무척 지친듯해 보였는데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박사님은 교재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더니 잠시 쉬자고 했다. 가브리엘라가 내게 따라오라고 눈짓하더니 옆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좁은 복도를 여럿 지나 아무도 없는 마당으로 나갔다. 석양이 지는 가운데 푸근한 가을 저녁 공기가 주위를 감쌌고 돌이 깔린 바닥 위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마당 한쪽에는 커다란 너도밤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나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껍질이 얼룩덜룩했다. 발코 부부의 강의는 툭하면 몇 시간씩 길어져 밤까지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바깥공기가 못내 그리웠다. 가브리엘라에게 강의를 들은 소감을 묻고 싶었다. 사실 그런 식으로 가브리엘라를 조금씩 파악해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이야기를 나눌 기분이 아닌 듯했다. 

- 가브리엘라는 재킷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내게 권했다. 언제나처럼 사양하자 그녀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스스로 즐기지 못하는 게 못마땅하다는 걸 전혀 숨기지 않는, 작지만 굉장히 신경 쓰이는 몸짓이었다. '순진한 셀레스틴. 시골 출신이니 어쩔 수 없지.'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가브리엘라는 사소한 거부 반응과 침묵으로도 많은 걸 가르쳐주었고 나는 늘 그녀를 주의 깊게 살폈다. 그녀가 어떤 옷을 입고 무슨 책을 읽는지, 머리는 어떻게 하고 다니는지. 지난 몇 주 동안 가브리엘라의 옷차림은 점점 화려해지고 노출도 심해졌다. 늘 진하게 하고 다니던 화장도 더욱 두드러졌다. 전날 오전 내가 목격한 상황이 그런 변화의 이유인 것 같았지만 가브리엘라의 태도는 여전히 내 관심사였다. 상황이 어찌 되었건 나는 여전히 가브리엘라를 언니처럼 우러러보고 있었다.

- "정말 예쁘다."

나는 가브리엘라에게서 라이터를 받아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했다. 금을 입힌 라이터가 석양에 장밋빛으로 반짝거렸다. 이렇게 비싼 라이터가 어디서 났는지 물어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그녀는 아무리 사소한 질문도 받아주지 않았다. 매일 얼굴을 맞대며 일 년을 보낸 지금도 우리는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저 사실만 말했다.

"못 보던 거네."

"친구 거야."

가브리엘라는 내 눈을 보지 않고 말했다. 그녀는 나 말고 친구가 없었다. 나와 밥을 먹고 나와 공부를 했고 어쩌다 내가 없을 때는 새로운 친구를 만드느니 차라리 혼자 있는 편을 택했다. 그래서 라이터가 그녀의 애인 물건이라는 걸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녀도 분명 내가 자신의 비밀을 궁금해한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도저히 대놓고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 "가브리엘라, 넌 지금 정신이 온통 다른 데 쏠려 있어."
"넌 내가 무슨 힘에 이끌리고 있는지 몰라."

그녀는 언제나처럼 오만하게 나를 대했지만 그 태도에서는 일말의 절망감이 느껴졌다. 내 질문에 놀라고 상처받은 듯했다.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걸 알고 있어."

아예 직접적으로 맞서면 모든 걸 털어놓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말했다. 그녀에게 그렇게 단호하게 말한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게 명백해졌다.
가브리엘라는 내게서 라이터를 낚아채 재킷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자리를 떴다. 

- 학교에 들어온 지 몇 달쯤 지났을 때 나는 발코 부부에 대해 상반된 두 가지 의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두 사람을 매우 좋아했다. 발코 부부의 유머와 마이너한 분야의 지식, 헌신적인 가르침에 이끌린 많은 이들이 그들의 말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귀 기울여 들었다. 나 역시 이 무리에 속했다. 그러나 그 외 소수의 학생들은 두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발코 부부의 연구 방식에 의심을 품었고, 두 사람이 진행하는 합동 강의를 가식이라고 생각했다. 가브리엘라는 두 무리 가운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라파엘 박사와 세라피나 박사의 강의를 듣고 느낀 점을 털어놓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위원회 모임에서 본 그녀의 삼촌과 마찬가지로 가브리엘라도 발코 부부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발코 부부는 자신들만의 힘으로 학교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간 아웃사이더인 데 반해 가브리엘라는 좋은 가문 출신에 높은 지위를 타고났다. 가끔 다른 교수들을 평가할 때도 가브리엘라는 발코 부부와 생각이 사뭇 달랐다. 

- "'제1차 천사 대재앙'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우리 학교 자료만 봐도, 그 대재앙과도 같은 전쟁이 어떻게 시작됐고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해서만 총 서른아홉 가지 이론이 있었습니다. 다들 알겠지만 이런 종류의 역사적 사건을 분석하는 방식은 계속 변하고 발전해 왔습니다. 누군가는 퇴보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그래서 솔직히 말해 저와 제 아내도 시간이 흐르면서 연구 방식을 바꾸고 다양한 역사적 관점을 포용하게 됐습니다. 어떤 자료를 읽고, 단편적인 정보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 우리는 미래의 더 큰 목표를 염두에 둡니다. 물론 미래의 학자인 여러분도 제1차 천사 대재앙에 대한 또 다른 이론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 강의가 성공적이라면 여러분은 지금 듣는 내용을 의심의 씨앗으로 삼아 개별적으로 독창적인 연구를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럴 때는 이 말을 기억하세요. 오늘 배운 모든 걸 믿고 의심하고, 받아들이고 묵살하고, 기록하고 수정하기를 바랍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천사학이라는 학문의 미래가 더욱 견고해질 것입니다."

- [높은 산꼭대기, 비를 피할 수 있는 커다란 바위 아래 네피림들이 모여 서서 셈야자의 딸들과 아자젤의 아들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습니다. 감시자들이 지하 감옥에 갇힌 뒤 네피림이 그들을 지도자로 받들었기 때문입니다. 아자젤의 맏아들이 앞으로 나서, 눈 아래 펼쳐진 계곡을 끝없이 메우고 선 하얀 피부의 거인들을 향해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전쟁의 기술을 가르쳤다. 검과 단도를 쓰는 법. 화살을 만드는 법, 그리고 적과 맞서 전투하는 법도 가르쳤다. 하지만 하늘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사방이 물바다가 될 것이다. 아무리 우리 수가 많고 힘이 세다 해도 노아의 방주처럼 큰 배를 만들 수는 없다. 그렇다고 노아를 공격해 배를 빼앗을 수도 없다. 대천사들이 노아와 그의 가족을 보살피고 있기 때문이다.' 
노아에게 세 아들이 있고 그들이 아버지를 도와 방주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아자젤의 맏아들은 노아가 배에 동물과 식물을 옮겨 싣는 해안으로 가서 어떻게든 방주에 숨어들 방법을 찾아내겠다고 선언했습니다그리고 네피림 가운데 마법 능력이 가장 강력한 셈야자의 큰딸과 함께 떠나며 말했습니다.

'형제자매들아, 산에서 가장 높은 이곳에 머물러라. 여기까지는 물이 차지 않을 수도 있으니.' 
아자젤의 아들과 셈야자의 딸은 끝없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가파른 산길을 내려가 해안에 다다랐습니다. 흑해에 도착해 보니 온통 난리였습니다. 벌써 몇 달 전부터 노아가 홍수를 경고해 왔지만 사람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마어마한 파멸이 닥쳐오는 것도 모른 채 행복에 겨워 잔치를 벌이고 춤을 추고 잠을 잤습니다. 노아를 비웃었을 뿐 아니라 어떤 이들은 방주에 다가와 배 안으로 식량과 물을 옮기는 노아를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아자젤의 아들과 셈야자의 딸은 며칠 동안 노아의 세 아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몰래 관찰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셈과 함, 야펫이었는데 서로 외모가 딴판이었습니다. 맏아들 셈은 머리가 검고 눈은 녹색이었으며 손 모양이 우아하고 말을 잘했습니다. 함은 셈보다 피부색이 짙고 갈색 눈이 부리부리하고 힘이 장사이며 판단력이 뛰어났습니다. 야펫은 피부가 하얗고 금발에 파란 눈동자, 세 사람 가운데 가장 몸이 마르고 허약했습니다. 셈과 함은 지치지 않고 아버지를 도와 동물이며 식량이 든 자루, 물동이를 배로 옮겼지만 야펫은 느릿느릿 움직였습니다. 셋 다 오래전에 결혼했고 노아의 손주도 매우 많았습니다. 
셈야자의 딸은 야펫이 자신들과 가장 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자젤의 아들에게 야펫의 몸을 취하라고 명했습니다. 두 네피림은 며칠을 두고 기다리며 노아가 남은 동물들을 방주에 싣는 걸 지켜보았습니다. 이윽고 아자젤의 아들은 거대한 방주로 살며시 다가가서는, 거대한 배의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야펫을 불렀습니다. 
노아의 막내아들이 방주 위에서 몸을 내밀었습니다. 구불거리는 금발이 이마에서 흘러내려 눈앞을 가렸습니다. 아자젤의 아들은 야펫을 데리고 해안을 벗어나 오솔길을 따라 깊은 숲 속으로 향했습니다. 방주 주위에 있던 대천사들은 배로 들어가고 나오는 생물들을 지켜보며 하느님께서 뜻하신 대로 이루어지는지 확인하느라, 야펫이 배에서 내려 빛을 뿜어내는 수상한 존재와 함께 숲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야펫이 아자젤의 아들을 따라 점점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가는 사이 비가 내리기 시작해 머리 위를 지붕처럼 덮은 나뭇잎에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울렸습니다. 야펫은 숨이 차도록 걸어 앞서가는 낯선 이를 간신히 따라잡았습니다.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겨우 물었습니다.

"저를 왜 부르신 거죠?" 
아자젤의 아들은 대꾸하지 않고 야펫의 목을 손가락으로 움켜쥐고는 목뼈가 부러지는 게 느껴질 때까지 힘을 주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거대한 홍수로 지상의 사악한 존재를 모두 쓸어버려 세상을 정화하려던 하느님의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네피림 종족의 미래가 견고해지고 새로운 세계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셈야자의 딸이 숲에서 모습을 드러내더니 아자젤의 아들의 얼굴을 양손으로 덮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서 배운 주문을 외었습니다. 그녀의 손이 닿자 아자젤의 아들의 겉모습이 변했습니다. 아름다움이 빛을 잃고 천사의 특징이 희미해졌습니다. 셈야자의 딸이 그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이자 그는 야펫의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 [방주는 다음 해 2월 27일까지 총 삼백칠십일 동안 물 위를 떠다녔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에게는 끝없는 죽음과 끝없는 물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덮은 빗물이 잿빛으로 울렁거리고, 아무리 먼 곳을 바라봐도 파도가 출렁거리는 수평선 뿐이었습니다. 단단한 땅이 모두 사라진 세상은 온통 물 천지였습니다. 얼마나 오래 물 위를 떠다녔는지 배 안에 쌓아두었던 포도주와 곡식이 모두 바닥나 달걀과 물로 연명해야만 했습니다. 
방주가 땅에 닿고 물이 빠지자 노아와 가족은 배에 실었던 동물을 풀어주고 보관했던 씨앗을 꺼내 땅에 심었습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노아의 자손들이 다시 세상을 채워갔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옮기는 대천사들이 나타나 대지를 비옥하게 하고 동물들과 여자들이 수월히 번식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태양과 비가 농작물을 키웠습니다. 가축들의 먹이도 풍부했습니다. 여자들이 아이를 낳다가 죽는 일도 없었습니다. 모든 게 잘 자랐습니다. 괴롭게 죽는 이가 없었습니다. 세상이 다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노아의 세 아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걸 차지했습니다. 그들은 족장이 되어 각자 다른 인종을 형성했습니다. 먼 곳으로 이주해 오늘날 우리도 알 만한 왕조를 세웠습니다. 맏아들 셈은 중동으로 가셈 족의 시조가 되었고, 둘째 아들 함은 적도 아래 아프리카로 내려가 함 족의 자리를 잡았습니다. 야펫, 아니 야펫으로 위장한 존재는 나중에 유럽으로 불리게 될 지중해와 대서양 사이의 땅을 차지했습니다. 야펫의 자손은 그때부터 우리를 괴롭혀왔습니다. 유럽인인 우리는 먼 조상과의 관계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그 사악한 존재와 무관할까요? 아니면 야펫의 자손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을까요?]   

- 혹시 눈치챘나 싶어 가브리엘라를 흘끔 보았지만 그녀는 뭔가를 열심히 읽느라 다행히 내 손에 있는 아름다운 노트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노트가 무엇인지는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세라피나 박사가 고학년 때 공부한 걸 최대한 압축해놓았다고 한 요약본 가운데 하나였다. 사실 내용은 강의를 필기한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첫 페이지를 펼치자 '천사학'이라는 금빛 글자가 보였다. 페이지마다 수업 시간이나 시험을 준비하며 적은 강의 요약과 박사님의 생각, 질문 등이 어지럽게 적혀 있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세라피나 박사의 태고 지질학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가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노트 곳곳에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터키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각 나라의 국경을 여행하며 산맥과 호수를 그려 넣은 듯 치밀했다. 동굴과 골짜기, 협곡의 이름들이 그리스어, 라틴어, 키릴 문자 등 해당 지역의 언어로 쓰여 있었다. 여백에 작은 글씨로 적힌 내용을 보니 탐사를 준비하며 만든 지도가 분명했다. 세라피나 박사는 학생 때부터 두 번째 탐사를 갈망했던 것이다. 박사님의 연구 자료와 이 지도들을 함께 살펴보면 클레마티스 신부의 탐사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더 읽어보니 가느다란 기둥처럼 써 내려간 글자들 사이사이에 박사님이 그린 그림들이 보물처럼 숨어 있었다. 성인의 머리 위에 나타난 후광, 트럼펫, 날개, 하프, 리라. 강의 시간에 딴생각에 빠진 꿈 많은 학생의 삼십 년 먹은 낙서였다. 천사학의 초기 저서들에서 발췌한 인용문과 그림으로 가득한 페이지도 있었다. 중간쯤 넘기다 보니 몇 페이지에 걸쳐 수표가 나왔다. 보통 마방진이라 불리는 것들이었다. 바둑판처럼 연결된 사각형 안에 수를 나열하되 가로, 세로, 대각선의 배열된 수의 합이 모두 같은 값이 되도록 만든 것이다. 물론 나는 마방진의 역사에 대해서도 훤히 알고 있었다. 페르시아와 인도, 중국에 존재했고 유럽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에 처음 등장했다. 하지만 실제로 마방진을 자세히 보긴 처음이었다.
세라피나 박사가 붉은색 잉크로 쓴 글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 가장 유명한 방진이자 필요상 우리에게 가장 널리 쓰이는 건 바로 SATOR-ROTAS 문자방진인데, 지금은 에르콜라노라고 불리는 이탈리아의 도시 헤르쿨라네움에서 최초로 발견되었다. 이 도시는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일부가 파괴되었다. SATOR-ROTAS 마방진은 라틴어로 된 회문, 즉 바로 읽으나 거꾸로 읽으나 같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통적으로 천사학에서 이 방진은 어떤 징조를 나타낸다. 보통 사람들은 그 자체가 암호라고 착각하지만 사실 이 마방진은 천사학자들에게 좀 더 크고 중요한 문제가 목전에 있음을 경고하는 표식이다. 어떤 경우에는 근처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음을 뜻할 때도 있다. 아마도 편지 따위의 메시지일 것이다. 마방진은 원래 종교적인 의식에 쓰여왔으며 이 문자 방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마방진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으므로 천사학자들이 발전시켰다고 할 수는 없다. 중국과 아라비아, 인도, 유럽에서 발견되었고, 심지어 18세기 미국의 벤저민 프랭클린도 마방진을 만든 적이 있다. 

 

 

 


- 그다음 페이지에는 '화성 마방진'이 그려져 있었는데, 마방진에 쓰인 숫자들이 자석처럼 내 눈길을 끌었다.

- 방진 아래 세라피나 박사는 이렇게 써놓았다.
[미카엘의 인장, 인장이라는 뜻의 영어 '시질 sigil'은 '도장'을 뜻하는 라틴어 '시길룸 sigilum', 또는 '영적 효과가 있는 말'을 뜻하는 히브리어 '세굴라흐 segulah'에서 유래했다. 천사학자의 소환 의식에서 인장은 백의 존재든 흑의 존재든 하나의 영적 존재를 나타내는데, 대개는 높은 계급의 천사와 악마다. 소환 의식은 주문을 외는 행위, 인장, 영적 존재와 소환자 사이의 교감으로 이루어진다. 

주의할 점: 주문을 통한 소환은 무척 위험한 행위이며 소환자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반드시 최후의 수단으로만 사용해야 한다.]

- 다른 페이지를 넘겨보니 류트와 리라, 아름답게 표현한 하프 등의 악기 그림이 잔뜩 나왔다. 앞에서 등장한 악기 그림과 비슷했다. 악기에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어떤 소리가 날지 상상이 가지 않았고 악보 읽는 법도 몰랐다. 숫자에 자신이 있어서 수학과 과학을 주로 공부했던 나는 음악에 대해선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에서 온 천사학자 블라디미르의 전공 분야인 천상의 음악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음계 같은 것들도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 그런 생각을 하다가 한참 만에 고개를 들었다. 가브리엘라가 어느새 소파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손으로 턱을 괴고 나른한 눈으로 책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보는 실크 블라우스와 통 넓은 바지가 따로 맞춘 것처럼 꼭 맞았다. 속이 비치는 블라우스의 왼팔 소매 아래로 살짝 보이는 반창고가 몇 주전 라파엘 박사의 강의가 끝난 뒤 내가 목격한 끔찍한 상처의 유일한 증거였다. 지금의 가브리엘라는 자기 팔을 불로 지지는 무시무시한 여자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 가브리엘라가 읽는 책을 살펴보니 책등에 '에녹서'라고 쓰여 있었다. 내가 발견한 걸 알려줄까 했지만 책 읽는 걸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노트의 걸쇠를 걸고 낫 모양의 천사 날개를 딸깍 소리가 나도록 힘주어 눌러 잠갔다. 얼른 맡은 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으며 길어서 다루기 힘든 금발을 땋았다. 가브리엘라처럼 머리를 아주 짧게 자르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발코 부부의 자료를 정리하는 지루한 일을 다시 시작했다. 

- 세라피나 박사는 매일 정오에 빵과 치즈, 머스터드소스가 든 바구니와 차가운 물 한 병을 우리 점심으로 가져왔다. 대개는 박사님이 언제나 오실까 기다렸지만 그날은 일에 몰두한 나머지 박사님이 들어와 탁자 위에 점심 바구니를 올려놓을 때까지 쉬는 시간이 된 줄도 모르고 있었다. 몇 시간 동안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자료에 묻혀 다른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특히 발코 부부가 젊은 시절 피레네 산맥을 수없이 돌아다니며 동굴 크기와 동굴 벽 화강암의 밀도와 색을 기록한 노트는 열 권이나 되었다. 박사님과 함께 앉아 일에서 벗어나고서야 배가 몹시 고프다는 걸 깨달았다. 탁자 위 서류를 치우고 노트들을 덮었다. 개버딘 치마를 매만지고 주홍색 비단이 덮인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 점심 먹을 준비를 했다. 

- 박사님은 바구니를 우리 앞으로 밀어주고 가브리엘라에게 말했다.

"어떻게 돼가고 있어?"
"에녹이 감시자들에 대해 말하는 부분을 읽고 있어요."
"아, 가브리엘라는 분명 에녹에 반할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가 가진 경전 가운데 가장 재미있으니까. 그리고 무척 이상하기도 하고."
"이상해요?"

나는 가브리엘라를 흘끔 보며 말했다. 흥미롭게 느꼈으면서 왜 내게 말하지 않았을까?
"정말 매력적인 내용이에요. 이런 책이 있는 줄 몰랐어요."

가브리엘라의 얼굴이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나는 그 열정적이고 지적인 표정이 늘 부러웠다.

- "언제 거죠?"

내가 물었다. 또 한 걸음 앞서나간 가브리엘라에게 적잖은 많은 질투심이 들었다.

"현대에 쓰인 건가요?"

"노아의 직계 자손이 쓴 예언서이자 위경이야. 에녹은 하느님이 데려가 천사를 직접 만났다고 하지."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현대에 들어선 그저 정신 나간 사람이 쓴 꿈 이야기라고 치부되고 있지만, 천사학에서 에녹서는 감시자에 관한 내용이 등장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야."

 

- 나는 박사님의 자료를 정리하다가 비슷한 내용을 읽은 기억이 났다. 내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박사님이 말했다.

"네가 읽고 있는 노트에도 내가 베껴놓은 에녹서 일부가 있어, 셀레스틴."

세라피나 박사는 천사 모양 걸쇠가 달린 노트를 집더니 뒤집어보았다.

"벌써 봤겠구나. 하지만 에녹서는 상당히 정교하고 멋진 정보로 가득해. 그러니 전체를 꼭 한번 읽어보도록 해. 어차피 3학년이 되면 라파엘 박사가 읽으라고 시킬 테지만, 내년에도 우리가 강의를 계속해야 가능한 일이지."

 

- "읽다가 깜짝 놀란 게 있어요."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그래? 어떤 내용이었어?"

세라피나 박사는 상당히 즐거운 듯 보였다. 가브리엘라가 한 구절을 암송했다.

"그리고 내 앞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키가 무척 컸다. 얼굴은 태양처럼 빛났고 눈은 불타는 등잔 같았고 입술 사이로는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입은 옷은 새의 깃털 같았다. 발은 보라색이었다. 날개는 금덩이보다 밝게 빛났고 손은 눈보다 희었다."

뺨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한때 그녀를 사랑하게 만들었던 가브리엘라의 재능이 이제 정반대의 감정을 불러왔다.

 

- "훌륭해. 그런데 왜 그 구절을 보고 놀란 거지?"

세라피나 박사가 즐거워하면서도 신중히 말했다.
"천사를 묘사한 글인데도 천국의 문을 지키는 통통한 아기천사나 르네상스 회화 속의 아름다운 모습과는 전혀 달라요. 공포를 일으키는 무서운 모습이에요. 에녹이 묘사한 천사는 끔찍한 괴물 같아요. 솔직히 이걸 읽고 놀랐다기보다는 겁이 났어요." 
나는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가브리엘라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아주 짧은 순간 그녀가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더 설명해 주길 바랐지만 가브리엘라는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한 번 흘낏 볼 뿐이었다. 

- 세라피나 박사는 가브리엘라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박사님이 나보다 내 친구를 더 잘 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박사님은 일어서서 책장으로 가더니 서랍을 열고 동판으로 만든 원통 하나를 꺼냈다. 흰 장갑을 끼고 얇은 구리 뚜껑을 열자 안에서 두루마리가 나왔다. 박사님은 두루마리를 탁자 위에 펼치더니 크리스털진으로 한쪽을 누르고 다른 한쪽은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손가락이 길고 가느다랬다. 나는 박사님이 펼친 누렇고 잔뜩 구겨진 두루마리를 들여다보았다. 

 

- 가브리엘라가 고개를 숙이더니 두루마리 끄트머리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원본인가요?"

그녀가 물었다.
"필사본이지."
세라피나 박사가 말했다.

"기원전 2세기경에 나돌던 이런 종류의 문서는 수백 종이 넘어, 수석 사서에 따르면 우리도 진본을 여러 개 갖고 있다고 해. 대개 오래된 문서들이 그렇듯 모두 조금씩 다르지만, 바티칸에서 에녹서를 파기하기 시작하자 여기서 잘 보존하기로 했지. 하지만 이건 서고에 보관하는 것들처럼 귀중한 건 아니야." 

- 두루마리는 튼튼하고 두꺼운 종이였고 장식적인 필기체로 라틴어가 쓰여 있었다. 여백에는 호리호리한 금빛 천사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접힌 금색 날개 아래로 은색 옷자락이 보였다. 
세라피나 박사가 우리에게 얼굴을 돌리며 물었다.

"읽을 수 있겠어?"

그리스어와 아람어뿐만 아니라 라틴어도 공부한 나조차도 그 글씨체는 좀처럼 알아보기 어려웠다. 게다가 문서에 적힌 라틴어는 이상하리만큼 낯설었다.
"언제 베껴 쓴 거죠?"

가브리엘라가 물었다.
"아마 17세기쯤 될 거야."

세라피나 박사가 대답했다.

"아주 오래된 원본을 현대에 다시 베껴 쓴 셈인데, 원본은 성서보다 더 전에 쓰였지. 그건 다른 수백 개의 중요한 문서와 함께 서고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어. 우리는 연구를 시작할 때부터 고문서를 가리지 않고 수집했지. 그렇게 축적된 자료가 우리 힘이야. 손에 쥐고 있는 진실이 우릴 보호해 주는 셈이지. 살펴보면 부분적으로 성서와 일치하는 자료가 많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물론 꼭 들어가야 할 내용이 빠진 것도 많지만."

"읽을 수가 없는데요. 혹시 불가타 성서인가요?

두루마리 쪽으로 몸을 숙이며 내가 말했다.

- "내가 읽어줄게."

세라피나 박사가 장갑 낀 손으로 다시 한번 두루마리를 판판하게 펼치며 말했다.

"그들은 나를 두 번째 하늘로 데려가 어둠을 보여주었다. 그곳에서 나는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며 갇혀 있는 자들을 보았다. 천사들은 땅속 어둠보다 더 어두운 모습이었다. 게다가 하염없이 울고 있어서, 나는 나를 데려간 자들에게 "이 사람들은 왜 계속 고통받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머릿속으로 방금 들은 구절을 되새겨보았다. 몇 년간 수많은 고문서를 읽었지만 그런 구절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게 뭐죠?"
"에녹이야."

가브리엘라가 얼른 대답했다.

"방금 두 번째 하늘에 들어선 거지."

- "두 번째?" 

나는 혼란스러웠다.
"모두 일곱 개의 하늘이 있어."

가브리엘라가 잘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에녹은 일곱 개의 하늘을 방문한 다음 거기서 본 걸 글로 남겼지."
"저기로 가봐. 맨 마지막 칸에 성서 여러 권이 있을 거야."

박사님이 벽 하나를 통째로 차지한 책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 나는 박사님이 가리킨 쪽으로 갔다. 내 눈에 가장 예쁜 성서를 골랐다. 두꺼운 가죽 표지를 수작업으로 한 땀 한 땀 꿰맨 책인데 어마어마하게 무거워서 제대로 들기도 쉽지 않았다. 간신히 들고 돌아와 박사님 앞에 놓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걸 골라왔네."

세라피나 박사는 마치 내가 그 성서를 고르리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내가 이 성서를 처음 본 건 어렸을 때였어. 위원회에서 천사학자가 되겠다고 발표한 때였지. 1919년 유럽 전체가 전쟁으로 파괴된 직후에 열린 유명한 회의였어. 나는 본능적으로 천사학자라는 직업에 끌렸어. 우리 가문에는 나 이전에 천사학자가 없었는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지. 천사학은 대개 집안 대대로 이어지는 학문이었으니까. 어쨌든 나는 열여섯 나이에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정확히 알았고 그게 전혀 부끄럽지 않았어."

박사님은 잠시 말을 멈추고 마음을 가다듬더니 말을 이었다.

"자, 가까이들 와봐. 보여줄 게 있어."

- 박사님은 탁자 위의 성서를 천천히 조심스럽게 펼쳤다.

"창세기 6장이야. 읽어봐."
우리는 한 구절을 읽었다. 1297년 기아르 데 물랭의 번역이었다.
[그 무렵 사람의 자손이 계속 번성하여 아주 아름답고 매력적인 딸들이 태어났다. 이것을 본 천사들, 즉 하늘의 아들들은 그 여자들에게 미혹되어 말했다. "자, 저 사람의 딸들 중에서 우리의 아내를 택하여 아들을 얻기로 하자."]

- "아까 오후에 읽은 내용이에요."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아니."

세라피나 박사가 말했다.

"이건 에녹의 이야기가 아니야. 에녹서에 흡사한 이야기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다르지. 이 구절이 묘사하는 장면은 창세기에 나오는 사건이자 위경 가운데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인정된, 즉 현대 종교학자들이 진실로 인정하는 사건과 일치하는 부분이야. 천사의 역사 연구에서 가장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는 게 위경이지. 한때 에녹에 대해 광범위한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독단적인 기관이 늘 그렇듯 교회는 에녹이 위협적이라고 여겨 즉시 경전에서 배제한 거야." 
가브리엘라는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왜죠? 이런 자료는 도움이 될 텐데요. 특히 학자들에게요."
"도움이 된다고?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건지 모르겠군. 교회가 그런 정보를 은폐하려 드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야."

세라피나 박사의 말투가 퉁명스러웠다.

"에녹서는 교회가 주장하는 역사를 반박하는 존재였어."

박사님은 구리 원통을 열고 두루마리를 하나 더 꺼냈다.

"이건 오랫동안 구전되어 온 전설로 이루어진 역사야. 사실은 같은 이야기를 정리한 거지. 구약 성서 대부분과 비슷한 시기에 쓰였고, 다른 말로 하자면 탈무드가 편찬되던 시절에 쓰인 글이라는 거지."

 

- "그건 교회가 에녹을 금지할 만한 이유가 못 되잖아요."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교회의 논리는 뻔해. 에녹의 이야기는 황홀경에 빠진 듯한 표현으로 가득 차 있어. 종교적인 환상의 극단이지. 이에 대해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지나친 과장이라고 생각했어. 심지어 미친 소리로 치부했지. 특히 그가 말하는 '선택받은 자'에 관한 생각은 학자들에게 상당히 불쾌한 것이었어. 에녹이 하느님과 개인적으로 나눈 대화도 자주 등장하는데, 당연히 신학자 대부분은 불경스럽게 여겼지. 솔직히 말하면 에녹은 기독교가 생겨난 초기 내내 상당한 논란의 대상이었어. 그럼에도 에녹서는 천사학 자료 가운데 가장 중요해. 인간이 기록하고 인간들 손에 전해져 내려온, 지상에 존재하는 악의 근원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니까." 

가브리엘라를 시기하는 마음은 어느덧 사라지고 세라피나 박사가 무슨 말을 들려줄지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신학자들이 에녹서를 복원하는 데 관심이 생겼을 즈음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브루스라는 탐험가가 에티오피아에서 필사본을 발견했어. 또 다른 필사본이 베오그라드에서도 발견됐고, 이런 발견이 에녹을 완전히 없애려던 교회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하지만 우리 조직이 은밀히 나돌던 에녹서를 입수해서 이곳 도서관에만 보관하는 방식으로 교회를 도왔다는 사실은 놀라울 거야. 네피림과 천사학자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싶었던 바티칸의 의지와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우리 의지가 통했던 거지. 서로 상대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기로 협정을 맺은 셈이었고 일은 아주 잘 진행됐어." 
"그렇다면 왜 지금은 교회와 협조하지 않죠?"

내가 말했다.

- "이상한 일은 아니야."

세라피나 박사가 말했다.

"한때 천사학은 종교계 전체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고 신학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분야로 여겨졌지. 하지만 상황은 순식간에 바뀌었어. 십자군 전쟁과 종교재판의 광기를 겪고 우리는 교회로부터 멀어져야 할 때라는 걸 깨달았지. 그전에도 이미 활동 대부분을 지하로 옮기고 우리만의 힘으로 네피림을 쫓고 있었어. 늘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게릴라로 네피림에 맞섰지. 우리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수록 유리해. 특히 네피림은 완벽할 정도로 모습을 감추고 있으니 더욱 그렇지. 물론 바티칸은 우리 활동을 알았지만 그냥 두기로 했어. 일단 지금은 말이야. 네피림은 사업이나 정부활동이라는 껍데기를 두르고 활동하기 때문에 겉으로는 정체가 전혀 드러나지 않아. 지난 삼백 년 동안 네피림이 이룩한 가장 큰 성과는 일반인들에게 정체를 완벽히 숨겼다는 거야. 빈틈없이 감시하고 있다가 우리를 공격하고, 전쟁이나 부정한 사업으로 이익을 얻은 다음 재빨리 모습을 감췄지. 물론 그들은 지성을 종교로부터 분리하는 아주 대단한 일을 해내기도 했어. 인류는 두 번 다시 뉴턴이나 코페르니쿠스처럼 과학과 신을 동시에 믿는 사상가를 배출할 수 없게 되었지. 무신론은 그들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야. 종교에 크게 의존했던 다윈의 연구를 왜곡해서 널리 퍼뜨린 것도 네피림이었어. 네피림은 자기들이 자연적으로 생겨났으며 자급자족이 가능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자유로운 수이 게네리스(고유한)의 존재라고 인간들이 믿게 만드는 데 성공했어. 하지만 그건 환상에 불과해. 그 환상 때문에 우리 연구가 어려워졌고 네피림을 찾아내는 것도 거의 불가능해졌지." 

 

- 박사님은 조심스럽게 두루마리를 말아 구리 통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점심 바구니를 열어 바게트와 치즈를 펼쳐놓고는 어서 먹으라고 권했다. 나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다. 빵은 아직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손으로 찢었더니 버터가 손가락에 살짝 묻어났다.
"설립자 가운데 하나인 보고밀 신부는 10세기에 최초로 천사학을 독립적인 학문으로 세워 교육을 시작했지. 네피림의 생물분류가 포함된 건 이후의 일이지만 학자들이 대개 유럽의 수도원에 기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사학 서적들은 수도사들 사이에서만 필사되고 수도원 밖으로는 전혀 유출되지 않았어. 그때가 역사상 가장 많은 성과를 올린 시기였고. 오직 우리의 적인 네피림만 연구하는 천사학자들 외에 천사들의 일반적인 특성, 힘, 존재이유를 다루는 학자도 많았지. 중세에 천사학은 큰 발전을 이루게 돼.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천사들의 힘을 가장 깊이 파악할 수 있는 시기였으니까. 성지와 조각상, 회화를 통해 일반대중도 천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어. 아름다움과 희망이 일상적인 삶의 일부가 됐지. 실제로는 모두 질병에 시달리며 살았지만. 물론 그때도 마법사나 그노시스파, 카타리파 등 천사의 존재를 지나치게 치켜세우거나 왜곡하는 부류가 있었어. 하지만 우리는 그 잡종들, 거인들의 모략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지. 교회는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믿음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 문명을 보호했어. 남편 생각은 다를지 모르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시절을 끝으로 우리가 네피림보다 우위를 점한 적이 없다고 생각해."  

- "네피림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요?"

내가 물었다.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게 됐느냐고?"

박사님이 되물었다.

"아주 간단해. 중세 이후 힘의 균형이 깨진 거야. 네피림은 사라진 이교도의 문서들을 복원했지. 그리스 철학과 수메르 신화, 페르시아의 과학과 의학에 관한 자료였어. 그리고 그걸 유럽의 지성인들에게 퍼뜨렸어. 물론 교회 입장에서 그 결과는 재앙이었지. 그런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어. 네피림은 명문 귀족들 사이에 확실하게 유물론을 심었어. 합스부르크 가는 네피림이 어떤 식으로 한 가문에 침투해 장악하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예에 불과해. 튜더 가도 마찬가지야. 기본 원칙에는 우리도 동의하지만 '계몽운동'은 네피림의 큰 승리였어. 프랑스혁명도 마찬가지고. 프랑스혁명으로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고 사람들이 정신적인 세계 대신 이성에 의존해야 한다는 환상을 갖게 됐거든. 시간이 지나면서 네피림들의 모략은 점점 더 보편화됐어. 그들은 무신론과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본주의, 다윈의 진화론, 극단적인 유물론을 장려했어. 그리고 진보라는 개념을 만들었지. 대중에게 과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준 거야. 20세기의 천재들은 모두 무신론자이고 예술가들은 모두 상대주의자야. 종교는 천여 개의 종파로 갈라진 채 서로 다투고 있지. 쪼개놓으면 다루기 쉬운 법이야. 불행하게도 우리 적은 인간사회에 완벽하게 섞여 들었어. 조직적으로 정부와 산업, 언론에 미치는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지. 수백 년 동안 아무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인류의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그들만의 제국을 건설했어. 하지만 그들이 거둔 가장 큰 승리는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거야. 그럼으로써 우리가 자유롭다고 믿게 만들었지." 

 

- "자유롭지 않은가요?"

내가 물었다.
"주위를 둘러봐, 셀레스틴."

세라피나 박사는 순진한 내 말이 약간 짜증스러운 모양이었다.

"학교 전체가 해체돼 지하에서 비밀리에 활동해야 하잖아. 기세를 올리는 그들 앞에 우리는 속수무책이야. 네피림은 인간의 빈틈을 찾아내 권력에 굶주리고 야망에 사로잡힌 이에게 들러붙어. 그리고 그 사람들을 통해 원하는 걸 이뤄내고야 말지. 네피림은 이렇게 강력하지만 다행히도 한계가 있어. 그들을 제압할 방법은 분명히 있으니까."
"그걸 어떻게 확신하시죠? 반대로 인간이 제압당할 수도 있잖아요."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

세라피나 박사가 가브리엘라를 응시하며 말했다.


- 클레마티스 신부의 탐사 기록이 발견된 건 발코 부부를 흠모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중대한 사건이었다. 1919년 라파엘 발코 박사는 그리스 북부의 한 마을에서 수백 년간 종이 뭉치 아래 묻혀 있던 클레마티스 신부의 일지를 찾아냈다. 당시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젊은 학자에 불과했던 박사는 그 발견으로 천사학자들 사이에서 최고의 지위로 올라섰다. 일지는 그 자체로도 탐사에 대한 귀중한 기록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발코 부부가 클레마티스 신부의 탐사를 똑같이 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했다. 만일 일지에 동굴의 정확한 좌표가 써 있었더라면 발코 부부는 벌써 오래전에 탐사를 떠났을 것이다. 

- "제가 보기에는 라파엘 박사님의 번역이 사람들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아요."

가브리엘라의 말은 아무리 사실이라 해도 내 귀에 약간 오만하게 들렸다. 하지만 세라피나 박사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 자료에서 탐사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아내려고 애썼지. 하지만 네 말이 옳아, 가브리엘라. 결국 클레마티스 신부의 일지는 아무 도움이 안 됐어."
"왜요?"

나는 그렇게 중요한 자료를 무시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 물었다.
"내용이 부정확했거든. 클레마티스 신부는 죽기 직전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직접 훼손해 버렸어. 그때는 동굴에 다녀온 후유증으로 반쯤 미친 상태였거든. 클레마티스 신부가 구술한 내용을 받아 적은 데오푸스 신부가 빠뜨리거나 틀린 부분도 있었고, 데오푸스 신부는 지도를 그려놓지 않았고, 처음에 클레마티스 신부가 동굴을 찾을 때 사용했던 지도는 발견된 자료에 포함돼 있지 않았지. 다양한 방법으로 자료를 살폈지만 결국 클레마티스 신부가 동굴에서 지도를 잃어버렸다는 슬픈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어." 
"이해가 안 돼요."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클레마티스 신부는 왜 지도를 베껴두지 않았던 거죠?"

- "정말 감시자들은 오르페우스의 동굴에 갇혔을까? 만일 그렇다면 아직도 리라를 갖고 있을까?"
"단순히 복종하지 않았다고 해서 천사들을 가뒀다는 게 잘 이해가 안 돼요."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불복종은 단순한 일이 아니야."

세라피나 박사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사탄도 한때는 가장 위엄 넘치는 천사였다는 사실을 잊지 마. 그 역시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하기 전까지는 고귀한 치품천사였어. 감시자들은 명령을 어겼을 뿐 아니라 신성한 기술을 땅으로 가져와 자손에게 전쟁을 가르쳤어. 그리고 네피림은 배운 걸 인간에게 전했지. 그리스의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이런 죄의 현장을 고대인 관점에서 그린 거야. 그건 비난받아 마땅한 최고의 죄악이었어. 선악과 이후 등장한, 인간 사회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도 있을 정도의 지식이었으니까. 마침 에녹서가 있으니 불쌍한 아자젤이 어떤 벌을 받았는지 한번 읽어보지. 정말 끔찍해." 

- 세라피나 박사는 가브리엘라에게서 책을 넘겨받아 읽기 시작했다.
"대천사 라파엘이 받은 명령은 이러했다. 아자젤의 손과 발을 묶어 어둠 속에 던져라. 사막을 갈라 그곳에 던져라. 아자젤의 몸 위에 거칠고 뾰족한 바위들을 덮고 그 위에 어둠을 덮어 그곳에서 영원히 살게 할 것이며 얼굴을 가려 빛을 못 보게 하라. 최후의 심판이 열리는 날 그를 불속에 던져 넣을 것이다."
"절대 풀려날 수 없다는 건가요?"

가브리엘라가 물었다.
"사실 그들이 풀려날 수 있을지, 그게 언제가 될지 우린 몰라. 천사학자들이 감시자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이 우리의 적 네피림에 관해 말해줄 수 있기 때문이야."

 

- "네피림들은 대홍수로 잃은 걸 되찾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거야. 우리는 그런 재앙을 막으려 하는 거고. 설립자들 가운데 가장 용감한 분이었던 가경자 클레마티스 신부가 야비한 적들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역할을 기꺼이 맡았지. 방식에 결함이 있긴 했지만 그분이 남긴 탐사 기록에선 배울 게 많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어도 그 자료는 더할 나위 없이 흥미롭지. 언젠가 두 사람이 자세히 읽어봤으면 해."   
가브리엘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세라피나 박사를 응시했다.

"혹시 박사님이 간과한 게 있지 않을까요?"
"새로운 걸 찾을 수 있다고?"

세라피나 박사는 가브리엘라의 말에 즐거워하며 대답했다.

"원대한 목표로군. 하지만 그럴 일은 없어. 라파엘은 제1차 천사 탐사에 관해서는 정통한 학자야. 그이와 나는 클레마티스 신부가 남긴 자료를 한 자 한 자 천 번도 넘게 검토했지만 새로운 건전혀 발견하지 못했어."

- "지금으로선 두 사람이 정리 중인 자료가 동굴 위치를 찾을 수 있는 최고의 희망이라고 할 수 있어. 물론 클레마티스 신부가 남긴 자료로 너희 행운을 시험해 볼 수도 있지. 하지만 그건 엄청난 수준의 수수께끼라는 걸 알아둬. 클레마티스 신부는 감시자의 비밀에 대한 답을 줄 것처럼 손짓하지만 결국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아. 그분은 천사학의 스핑크스야. 만일 두 사람이 클레마티스 신부의 자료에서 새로운 내용을 찾아내기만 한다면, 다른 누구보다 우선적으로 제2차 천사탐사에 동행할 수 있을 거야." 

- 탁자 위에는 포장하려고 올려놓은 수많은 책들이 펼쳐져 있었다. 귀중한 물건들이 한데 모여 있는 걸 보고 나는 일 년 전 가브리엘라와 함께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 시절 우리는 타오르는 학구열을 공유하고 서로 존중하는 친구였다. 얼굴은 인간인데 몸은 사자인 맨티코어, 하피, 용의 머리가 둘 달린 뱀, 음탕한 켄타우로스 등 그림에서 찾아낸 진기한 짐승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이런 짐승들이 어떻게 악의 예술적 상징이 되는지, 어떤 식으로 악마의 기괴함을 형상화하는지 가브리엘라는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설명해 주었다. 나는 그녀가 천사나 악마에 관해 백과사전만큼 지식이 풍부하다는 데 놀라곤 했다. 수학적 사고를 주로 하는 나로서는 학술적이고 종교적인 상징주의를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설령 박사님이 자리에 없다 해도 자신의 감상을 털어놓지 않을 터였다. 그녀는 내게서 완전히 멀어졌다. 그녀의 식견에 대한 그리움은 사실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 우정에 대한 욕망이었다. 

- "이것들은 피레네 산맥으로 갈 거야."

박사님이 못을 박아 봉한 나무상자 여러 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여기 대천사 미카엘을 멋지게 묘사한 작품은 다른 작품들과 함께 스페인을 거쳐 미국의 개인 수집가에게 갈 예정이지."

로마풍의 갑옷을 입은 천사를 그린 바로크 시대의 미술작품이었다. 긴 칼을 치켜든 천사의 은색 갑옷이 번쩍거렸다.
"이 작품들을 파신 거예요?"

가브리엘라가 물었다.
"이런 시절엔 누가 갖고 있느냐보다 누가 보호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해."

세라피나 박사가 말했다.

- 세라피나 박사는 절반쯤 채운 나무상자에서 두 장의 보호유리 사이에 넣은 양피지 한 장을 꺼내 유리 위 톱밥을 떨어냈다. 그러고는 우리를 가까이 끌어당기고 탁자 위에 가만히 올려놓았다.
"이건 중세의 천사학 문서야."

박사님의 얼굴이 유리에 비쳤다.

"현대 천사학의 최고 자료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광범위하고 세밀한 조사를 거쳤어. 다만 당시 유행을 타서인지 지나치게 장식적인 면이 있지."
중세의 물건임이 잘 드러나는 문서였다. 지엄한 천사의 계급과 하늘의 영역을 표현했는데, 아름다운 금빛 날개와 악기, 후광, 조심스럽게 쓴 글씨체가 돋보였다. 

- "그리고 이건 20세기 초에 만든 거야."

박사님이 활짝 편 손바닥 만한 그림 앞에 서서 말했다.

"정말 아름답지. 현대적인 방식으로 그린 그림인데 오직 좌품천사의 묘사에 집중했어. 천사학자들이 수백 년 동안 특별히 관심을 기울였던 계급의 천사지. 좌품천사는 치품천사, 지품천사와 함께 첫 번째 하늘에 속하고, 물리적 세계 사이의 전달자로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고 해."

- "그래, 그렇지. 우리 컬렉션은 정말 방대해. 보관할 장소를 확보하려고 전 세계의 도서관과 네트워크를 구축했을 정도야. 오슬로, 부다페스트, 바르셀로나까지. 언젠가는 아시아에도 서고를 마련하려고 해. 고서들을 보면 우리가 하는 일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보게 돼. 우리의 모든 노력은 바로 이런 자료들에서 출발한 거야. 문서화된 말씀을 따르는 것이 우주를 창조한 빛이고 우리를 안내하는 빛이니까. '말씀'이 없다면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 지도 알 수 없을 거야." 
"그게 천사학 관련 문서들을 기를 쓰고 보관하는 이유인가요? 미래로 가는 길을 알려주기 때문에요?"

내가 물었다.
"이 문서들이 없다면 우리는 길을 잃을 거야. 요한이 말하길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이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고 했어. 단 말씀이 의미를 가지려면 해석을 해야 한다는 건 말하지 않았지. 바로 그 해석이 우리가 할 일이야." 

- "저희가 여기 있는 건 문서를 해석하기 위해서인가요, 아니면 지키기 위해서인가요?"

가브리엘라가 가볍게 물었다.
세라피나 박사는 상대를 재는 듯한 서늘한 눈길로 가브리엘라를 보았다.

"네 생각은 어때, 가브리엘라?"
"우리 전통을 파괴하려는 자들에게서 지켜내지 못한다면 해석할 게 아무것도 남지 않겠죠."
"그렇다면 넌 전사구나."

세라피나 박사가 가브리엘라를 자극하듯 말했다.

"갑옷을 입고 전투에 나가려는 사람은 늘 있지. 하지만 진짜 영리한 사람은 죽음을 무릅쓰지 않고도 원하는 걸 얻는 방법을 찾아내."
"이런 시절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가브리엘라가 걸음을 뗐다.

 

- 우리는 말없이 소장품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탁자 한가운데 놓인 두꺼운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세라피나 박사가 가브리엘라를 부르더니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가브리엘라의 몸짓에서 무언가를 읽으려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족보인가요?"

책에 그려진 도표를 살펴보며 내가 말했다.

"사람 이름이 잔뜩 쓰여 있네요."
"모두 사람 이름은 아니야."

가브리엘라가 가까이 가 내용을 살피며 말했다.

"차프키엘과 산달폰, 라지엘이라는 이름이 있어."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보니 과연 가브리엘라의 말이 옳았다. 인간의 족보 가운데 천사들이 섞여 있었다.

"품계에 따라 적은 게 아니라 뭔가 다른 도식을 따른 것 같아."

- "이건 추론을 통해 만든 도표야."

그 진지한 목소리로 미루어 짐작건대 세라피나 박사는 우리 두 사람에게 다름 아닌 이 책을 보여주려고 각종 보물의 미로를 지나온 듯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도 천사학자들이 생겼지. 세 종교 모두 천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 다른 종교를 믿는 학자들도 있었어. 그노시스파나 수피파, 수많은 아시아의 종교에서 나온 사람들. 한때 연구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한 건 상상이 가지. 추론 천사학은 17세기의 명석한 유대인 학자들이 이룩한 결과야. 그들은 네피림 가문의 족보를 추적하는 데 몰두했지."

- 전통적인 가톨릭 집안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란 나는 다른 종교의 교리에 대해선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나와 달리 주위 학생들의 종교적 배경이 다양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가브리엘라만 해도 유대인이었고, 라파엘 박사 다음으로 교수들 가운데 가장 실증적이고 회의적인 사람일 세라피나 박사는 스스로 불가지론자라고 주장했으며 그 덕에 여러 교수들의 분노를 샀다. 하지만 내가 천사학의 근본 원리와 역사에 녹아 있는 여러 종교의 범위를 제대로 이해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 "천사학자들은 유대인의 족보를 주의 깊게 연구했어. 역사적으로 유대인 학자들은 매우 정확하게 족보를 기록했어. 상속법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 사람의 역사를 거슬러올라가 뿌리를 알아내는 게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했던 덕분이야. 그래서 여러 족보를 비교, 대조해 보고 확인했지. 너희 나이에 나는 좀 더 세밀한 분야를 파고들면서 특히 유대인 족보 공부를 많이 했어. 제대로 공부하겠다는 학생들에게는 같은 방법을 써보라고 권하곤 하지. 정말 놀라울 만큼 정확하거든." 
세라피나 박사는 책을 넘기다가 금테를 두른 아름다운 페이지를 찾아냈다.

"이게 바로 예수의 가계도야. 12세기에 한 천사학자가 그렸지.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예수는 아담의 직계 자손이야. 여기엔 루카가 기록한 성모마리아의 가계도가 있어. 아담, 노아, 셈, 아브라함, 다윗."

세라피나 박사님이 이름들을 손가락으로 훑어 내려갔다.

"그리고 이건 마태오가 기록한 요셉의 가문이야. 솔로몬, 여호사팟, 즈루파벨 등이 있지."

- "구약의 예언과 실제 혈통이 어떻게 들어맞는지 연구한 내용은 많았어. 아담과 아브라함, 유다, 이사이, 다윗에게 한 예언 말이야. 하지만 이건 좀 달라."
이름은 아래로 갈수록 이리저리 갈라지며 어마어마하게 많은 가지를 쳤다. 문서에 보이는 이름의 주인공들이 거대한 역사의 거미줄 위에서 어쩌면 자신의 존재 이유도 모르는 채 태어나고 죽고 신을 받들고 싸웠다는 걸 상상해 보니 무척 숙연해졌다. 

- 문서를 짚은 세라피나 박사의 손톱이 머리 위 희미한 불빛에 반짝거렸다. 수백 개의 이름이 색색의 잉크로 쓰여 있고 얇은 줄기에서 더 가느다란 가지들이 수도 없이 갈라져 나왔다.

"대홍수 후 노아의 아들 셈은 셈족의 시조가 됐어. 알다시피 예수는 셈족의 혈통을 가졌지. 함은 아프리카 인종의 조상이 됐어. 야펫, 아니 지난주 라파엘의 강의에서 배운 대로 야펫 행세를 한 녀석은 유럽 인종을 퍼뜨렸지. 물론 그중에는 네피림도 있고. 라파엘이 강의 시간에 강조하지 않았지만 수준 높은 학생이라면 이해했어야 할 무척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어. 인간과 네피림의 유전학적 분포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거야. 야펫은 인간 아내와 많은 아이를 낳았고 그 결과 수많은 후손을 보았지. 후손들 가운데 일부는 완벽한 네피림이었고 일부는 인간과 네피림의 혼혈이었어. 또한 네피림에게 죽임을 당한 진짜 인간 야펫이 죽기 전에 낳은 아이들은 순수한 인간이었고. 그러니까 야펫의 자손에는 인간과 네피림, 혼혈이 모두 존재하는 셈이지. 그들 사이의 결혼을 통해 유럽 인종이 생겨난 거야." 

- "야펫의 혈통이 셈의 후손과 뒤섞였다고 믿는 학자가 꽤 많다는 글을 읽었어요."

가브리엘라는 도표에서 추측으로 작성한 부분에 속하는 세 개의 이름을 가리키며 말했다. 에베르, 나탄, 아몬이었다.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요."
나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가브리엘라가 가리키는 이름을 읽었다.

"어떻게 이 세 명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
가브리엘라는 왠지 잔인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그런 질문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했다.

"어딘가 문서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100센트 확신할 수는 없겠지."
"그래서 이런 연구를 추론 천사학이라고 하는 거야."

 

- "현대 천사학자들은 이런 걸 절대로 믿지 않아."

나는 충격적인 정보에 대한 반응을 감추려 애쓰며 말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종교적 믿음이 강했고 그런 식으로 허술하게 예수의 혈통을 추측하는 걸 제대로 된 학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멋져 보이던 도표에 이제는 화가 났다.

"예수님 몸에 감시자의 피가 흐른다니 당치도 않아요."
"그럴지도 모르지."

세라피나 박사가 말했다.

"하지만 천사 형태론이라고 해서 이 주제만 연구하는 분야가 따로 있을 정도야. 그 분야에서는 예수그리스도가 인간이 아니라 사실은 천사라는 이론을 다루지. 어쨌거나 성모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기 전에 천사 가브리엘이 찾아갔으니까." 
"그런 글을 읽은 것 같아요. 그노시스파 역시 예수가 천사의 자손이라 믿고 있고요."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우리 도서관에도 그런 내용을 담은 책이 수백 권은 있어. 아니 있었다고 해야겠군. 개인적으로 예수의 조상이 누구인지는 상관 안 해. 내 관심은 전혀 다른 데 있으니까. 바로 이런 거. 추측이든 아니든 상당히 흥미로운 물건이야."

세라피나 박사는 우리를 다시 옆 탁자로 데려갔다. 탁자 위에는 우리가 자세히 살펴봐주기를 바라는 듯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이건 감시자에서 출발한 네피림의 피가 노아의 가족을 거쳐 유럽을 좌지우지하는 가문들로 뻗어나가는 과정을 다룬 책이야. <세대의 기록>이라고 하지."

- 나는 수많은 세대를 거쳐 사다리처럼 이어져 내려오는 이름들을 들여다보았다. 네피림이 인류 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카페, 합스부르크, 스튜어트, 카롤링거 등 유럽의 거의 모든 왕가와 피를 섞었다는 사실에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왕조별로 서술한 유럽의 역사를 읽는 듯했다.

"정말 모든 왕조와 피를 섞었는지 완벽하게 확신할 수는 없지만,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유럽의 위대한 가문에 네피림의 피가 깊숙이 침투해 있다고밖에 믿을 수 없는 증거가 상당히 많아."
가브리엘라는 세라피나 박사의 말을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귀 기울여 들었다. 시험을 앞두고 연대표를 외우는 것 같았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세라피나 박사가 우리에게 이 이상한 자료를 보여주는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내려는 듯 보였다.

 

- 가브리엘라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여기에는 거의 모든 귀족 가문이 쓰여 있잖아요. 그렇다면 이들 가문이 저지른 끔찍한 짓에 모두 네피림이 연관되어 있다는 건가요?"
"그런 셈이지. 유럽의 왕과 여왕들 중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들의 욕심이 수백만 사람들의 삶을 좌지우지했어. 자신들이 차지한 위치를 지키기 위해 정략결혼과 장자상속을 일삼고 무자비하게 군사력을 동원했지."

세라피나 박사가 말했다.

"세금과 노예, 재산을 거두고 모든 종류의 자원과 곡물을 긁어모으고 손톱만큼이라도 독립하려는 조짐을 보이는 조직은 가차 없이 공격했지. 중세에는 워낙 경쟁 상대가 없어서였는지 그전처럼 숨어 살지도 않았어. 13세기의 자료를 보면 심지어 네피림의 지휘하에 타락천사를 받드는 무리도 있었다고 해. 마녀라는 이유로 처벌받은 이들이 실제로는 네피림을 위한 의식을 치렀다가 문제가 됐다고도 하지. 사실 그들은 조상을 숭배하고 감시자들의 귀환을 기원하는 행위를 한 거야. 이런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해."

세라피나 박사는 책망하는 듯한 묘한 표정으로 가브리엘라를 보았다.

"사실 우린 그들을 아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어. 그 가운데서도 몇몇 가문은 특별히 감시하고 있지."

 

- 책에 쓰인 여러 가문의 이름을 봐도 아무 느낌이 없는 나와 달리 가브리엘라는 박사님의 말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가브리엘라는 이름들을 읽더니 두려움에 가득 차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라파엘 박사의 수업을 들으며 공포에 질리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거의 히스테리에 빠지기 직전이라는 것이었다.  


- "잘못 알고 계세요."

가브리엘라의 목소리는 한 단어 한 단어 내뱉을 때마다 점점 커졌다.

"우리가 그들을 감시하는 게 아니에요. 그들이 우리를 감시하는 거라고요."
말을 마친 가브리엘라는 돌아서서 달려 나갔다. 나는 멀어지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왜 그렇게 감정이 격해진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다시 한번 책을 살펴봤지만 그저 여러 가문의 이름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대개는 모르는 이름이었으며 일부는 아주 오래전부터 유명한 가문이었다. 함께 공부한 여느 역사책과 다를 바 없는 내용이었다. 충격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세라피나 박사는 가브리엘라의 반응을 정확히 이해한 듯 보였다. 사실 아무렇지도 않게 가브리엘라의 반응을 평가하는 듯한 아까의 모습은 반응을 예측한 정도가 아니라 계획적으로 이끌어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보면서 박사님은 책을 덮어 겨드랑이에 꼈다. 

- 책들을 아무렇게나 탁자 위에 늘어놓은 채 나는 딱딱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를 짓누르는 실망이라는 안개를 어떻게든 걷어내고 싶었다. 그런 내 노력을 무시하듯 눈물이 차올라 어렴풋한 도서관 불빛이 번지며 눈앞을 가렸다. 한 단계 더 발전하고 싶은 욕심이 나를 잠식했다. 내 능력과 학교에서의 위치, 불확실한 미래가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뒤바꿀 수 없는 정해진 운명이란 게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그저 그 길을 따라 꾸준히 걸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나의 존재 이유와 쓰임새를 알고 싶었다. 내가 부름을 받을 가치가 없다는 생각, 시골에 사는 부모님 곁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존경하는 학자들 사이에 자리 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웠다.

- 눈을 감고 나무 탁자에 엎드려 양팔에 얼굴을 묻은 채 나는 잠시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실내에서 어떤 움직임이 느껴졌다. 공기의 질감이 약간 변한 듯했다. 바닐라와 물푸레나무의 동양적이고 독특한 향수 냄새가 가브리엘라가 왔음을 알려주었다. 얼굴을 들었더니 눈물 너머로 붉은색 옷감이 번져 보였다. 얼마나 반짝거리는지 옷 전체에 루비를 박아 넣은 것 같았다. 
"왜 그래?"

가브리엘라가 물었다. 눈물을 훔치자 보석을 박아 넣은 것처럼 보이던 옷이 민소매 새틴 드레스로 제대로 보였다. 물 흐르듯 아름다운 모습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내가 놀라는 모습에 가브리엘라는 짜증스러운 표정만 지었다. 그녀는 내 맞은편 의자에 앉더니 구슬로 장식한 핸드백을 탁자 위에 던졌다. 목에는 보석 목걸이를 하고 양손에는 팔꿈치까지 덮는 검은 장갑을 껴 팔에 생긴 흉터를 가렸다. 도서관 안이 점점 쌀쌀해져 몸이 떨리는 나와는 달리 가브리엘라는 조금도 춥지 않은 모양이었다. 얇은 민소매 드레스에 실크 스타킹 차림인 그녀의 살갗에 온기가 도는 듯 보였다.  
"말해봐, 셀레스틴,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

 

- 나를 빤히 바라보는 가브리엘라가 낯설게 느껴졌다. 사실 지난 몇 주 동안 내게는 눈곱만큼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가브리엘라가 아닌가. 나는 시선을 돌리려고 화제를 바꿨다.

"어디 가?"
"파티."

내 눈을 제대로 못 보는 걸 보니 틀림없이 연인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 등뒤 탁자 위에 널린 책들이 모두 라파엘 발코 박사가 쓴 것들임을 확인한 가브리엘라는 상황을 알아차렸다.

"클레마티스 신부의 일지는 아무나 볼 수 있는 게 아니야, 셀레스틴."
"나도 이제 알아."

라파엘 박사의 책들을 다시 나무상자에 넣어두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다.
"그런 자료를 이런 데다 두지 않을 거라는 것 정도는 알아야지."

"이런 데 아니면 어디? 세라피나 박사님 연구실? 아니면 지하 창고?"

나는 시간이 갈수록 화가 치밀었다.
"클레마티스 신부가 남긴 제1차 천사 탐사 일지에는 무척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어."

가브리엘라는 우위에 선 게 기쁜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보관 장소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야."
"그럼 넌 그걸 읽었다는 거야?" 

가브리엘라가 열람이 제한된 자료를 읽었다는 데 질투가 나서 나는 신중하지 못하게 내뱉었다.

"어떻게 너처럼 연구에 별 관심도 없는 사람은 볼 수 있고, 모든 걸 바친 나는 손도 못 대는 거지?"
말을 끝내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속내를 털어놓지 않고 이어온 그간의 시간은 불편했지만 그 덕에 크게 싸우지 않고 일만 열심히 할 수 있었다. 


- 가브리엘라가 일어서서 탁자 위의 핸드백을 집어 들고는 어색할 만큼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눈으로 본 게 다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실상은 훨씬 복잡해."
"네가 연상의 남자와 어울리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지. 세라피나 박사님도 믿어주실 것 같은데."
잠깐이었지만 가브리엘라가 돌아서서 가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궁지에 몰리면 늘 그런 식으로 행동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도전적으로 내 앞에 버티고 섰다. 

"내가 너라면 세라피나 박사님을 포함해 누구에게도 그런 말은 하지 않겠어."

- "네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 누군가 눈치챈다면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엄청난 일이 벌어질 거야."
가브리엘라의 협박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목소리가 워낙 다급했고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 같아 나도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대화는 끊겼고 우리 둘 다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마침내 가브리엘라가 침묵을 깨뜨렸다. 

"클레마티스 신부의 자료에 접근할 수 없는 건 아니야. 어디 있는지만 알면 누구든 읽을 수 있어."

"아무나 볼 수 있는 자료가 아니라면서?"
"맞아. 나도 널 도와줄 수는 없어. 더군다나 내겐 도움 되는 일도 아니고. 하지만 내가 널 도와주면 너도 날 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가브리엘라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한참 동안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 "내 제안은 이거야."

가브리엘라가 도서관 밖의 어두컴컴한 복도로 나를 이끌며 말했다.

"그 자료를 찾게 해주는 대신 너는 입을 다무는 거야. 세라피나 박사님께 나에 관한 얘기, 내 행동이 어떻다는 얘기는 일절 하지 마. 내가 집에 언제 드나드는지도 말하지 말고, 오늘밤엔 좀 늦을 거야. 혹시 누가 집으로 와서 날 찾으면 그냥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해." 
"선생님한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
"그게 아니야. 사실대로 말하라는 거지. 넌 오늘밤 내가 어디 있을지 모르잖아."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왜?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내가 물었다.
가브리엘라의 얼굴에 희미한 피로감이 떠올랐다. 절망에 빠져 모든 걸 내게 털어놓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희망은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초조한 듯 물었다. 

"이럴 시간 없어."

-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무기도 의지할 데도 없는 우리가 기댈 것이라곤 사람들의 호의뿐이었다.

- [등반 중 길가에 잠시 멈춰 쉬고 있는데 일행 가운데 가장 열정적인 학자인 프란시스 형제가 이번 탐사와 관련해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했다. 그는 나를 한쪽으로 데려가더니 이번 탐사가 어둠의 영혼들이 벌인 일이라 생각한다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반란을 일으킨 천사들이 우리를 유혹한다는 것이다. 불안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사실 이번 탐사에 의구심을 표한 동료는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프란시스 형제의 말은 내 영혼까지 서늘하게 만들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묻는 대신 말없이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탐사 중 쌓인 피로 때문이라는 걸 아는 까닭이었다. 그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며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을 달래려 애썼다. 연장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지만 지금은 특히나 내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할 때였다. 역사상 가장 어려운 탐사를 앞두고 있지 않은가. 프란시스 형제를 비난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나는 남은 시간 동안 입을 꾹 다문 채 걸었다. 
나중에 혼자가 되었을 때 프란시스 형제의 괴로움을 진심으로 이해해 보려 애쓰며 프란시스 형제가 스스로 의혹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나를 인도하시고 지혜를 주시길 하느님께 기도했다. 지난 여러 번의 탐사에서 학자들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이번 탐사는 전혀 다를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하지만 '꿈꾸는 사제들'이라는 프란시스 형제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의심의 산들바람이 굳건하던 내 믿음을 흔들기 시작한다. 속으로 이런 의구심이 든다. 그동안의 노력이 모두 헛수고였다면? 이번 임무가 하느님의 뜻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탐사의 당위성을 생각하면 마음속에서 자라는 의심의 씨앗은 쉽게 무시해 버릴 수 있다. 이 전투는 지금까지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졌고 앞으로도 세대를 이어 계속될 터였다. 최근의 패배를 극복하고 젊은이들의 사기를 북돋워주어야 한다. 두려움은 예상했던 일이다. 모두가 '론세스바예스 사건'을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하느님이 산을 오르는 우리 뒤에서 우리의 몸과 영혼을 대신 움직이고 계신다는 믿음이 있다. 탐사대 사이에 희망이 되살아날 거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으리라. 우리는 이번 탐사가 지난 착오와 달리 성공리에 마무리될 거라고 믿어야 한다.] 

- [ 론세스바예스 사건. 서기 778년 피레네 산맥 탐사 중 론세스바예스의 길에서 벌어진 사건을 말한다. 그 탐사에 관해서는 대부분의 대원이 매복에 걸려 희생되었다는 것 말고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목격자들은 공격한 자들이 인간을 초월하는 힘과 월등한 무기를 지닌 거인들로 놀라울 만큼 아름다웠다고 했다. 이 묘사는 그 시대에 생각했던 네피림의 외모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 어떤 증언에 따르면 날개 달린 존재가 거인들 위로 내려와 불길을 뿜었다고 하는데 이는 대천사의 반격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학자들은 이 대목에 대단히 흥미를 보였는데, 바로 천사가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세 번째 경우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사건을 다룬 기록으로 <롤랑의 노래>가 있는데 이는 천사학자들의 시각과 사뭇 다르다. 가경자 신부들이 유럽 전역의 유적과 유물을 찾아 헤맨 이야기는 프레더릭 본이 쓴 책 <가경자 신부들의 거룩한 임무, 서기 925년부터 954년까지>에 잘 기록되어 있다.]   

- [오랜 세월 이 아이의 출생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다 하느님은 야펫의 땅을 당신의 아이들로 채우기로 하셨다. 네피림에게 더 많은 인간 아이를 보내셨고 지상의 성령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으셨다. 처음 인간 아이들이 생겨났을 때는 대개 유아기에 죽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네피림은 허약한 아이들을 돌보는 법을 알게 되었고, 따로 조심스레 키우다가 세 살이 된 뒤에야 강인한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도록 했다. 만일 어른이 될 때까지 죽지 않고 크더라도 부모에 비해 키가 머리 네 개 정도 작았다. 아이들은 태어난 지 삼십 년이 지나면 늙기 시작했고 채 팔십 년을 채우지 못하고 죽었다. 인간 여자는 출산 중에 죽었다. 질병으로 의술은 발전했지만 아무리 치료해도 인간들의 수명은 네피림 형제에 비해 턱없이 짧았다. 신성했던 네피림의 영역은 이제 더럽혀지고 말았다.] 

-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 아이들은 인간 상대를 만나 결혼했고 네피림 내에서 인간의 수는 점점 늘었다. 육체적으로 열등함에도 불구하고 야펫의 순수한 자손들은 네피림 형제들의 핍박을 견뎌내며 버텼다. 가끔 네피림과 인간이 결혼하는 일도 있고 그로 인해 혼혈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그런 식의 결합은 장려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인간아이가 태어나면 네피림은 아이를 도시의 벽 밖으로 내보내 ...]

- [일부 네피림 종족에서는 인간 아이를 제물로 삼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는 점점 늘어나 네피림 사회를 위협하는 인간의 수를 억제하는 동시에 여전히 땅속 깊은 곳에 갇혀 있는 감시자들의 죄를 용서해 줄 것을 하느님께 청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료된다.]

- [세상이 다시 태양을 향해 돌아섰고 더럽혀진 지구는 다시 빛이라는 신의 은총을 받게 되었다. 별들이 어두운 하늘을 밝히면 하느님의 아이들은 언젠가 눈앞을 가린 불의를 깨고 일어나 사악한 지배자들에게서 벗어나리라.]

- [나는 절망의 어둠에 빠져 눈이 불빛에 의지하듯 보이티우스에 의지한다. 주여, 저는 귀중한 것을 지옥 동굴에서 잃고 말았나이다.]
이 부분에서 클레마티스 신부는 보이티우스의 <철학의 위안> 가운데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에 관련된 유명한 구절을 인용한다. '지옥의 동굴을 향해 뒤돌아본다면,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아래를 보는 순간 잃고 말리라.' 


- [나는 버림받았다. 불타버린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내 목소리가 귓가에 공허하게 울린다. 내 몸은 부서진 채 쓰러졌다. 새까맣게 타고 벌어진 살에서 진물이 스며 나온다. 가볍게 떠다니는 천사의 날개에 올라 가련한 내 운명을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무참히 부서졌다. 오직 내가 본 공포를 들려주고자 하는 의지만이 새까맣게 타 짓무른 입술을 열게 한다. 미래에 자유를 찾는 당신, 미래에 정의의 신봉자가 될 당신을 위해 내 불행을 이야기한다.] 

- [여러 색깔의 곰팡이가 벽에 줄지어 피어 있었다. 프란시스 형제가 동굴 맞은편 벽 앞에 줄지어 선, 색을 입힌 암포라 항아리 여러 개를 가리켰다. 목이 좁고 길며 몸통은 크고 둥근 항아리들이 지저분한 바닥에 고니처럼 고고하게 앉아 있었다. 큼지막한 항아리에는 물이 좀 작은 항아리에는 기름이 든 걸로 보아 동굴은 예전에 임시 피난처 역할을 한 것 같았다. 양치기 사내의 말을 들어보니 내 추측이 옳았다. 하지만 누가 왜 이런 곳까지 들어와 몸을 피해야 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양치기는 더 지체하지 않고 어깨에 짊어진 보따리를 내려놓더니 두꺼운 금속 대못 두 개, 망치 한 개 그리고 밧줄 사다리를 땅바닥에 꺼내놓았다. 특히 사다리가 매우 특이해서 젊은 신부들은 주위로 모여들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삼으로 짠 긴 밧줄 두 개를 축으로 삼고 사이사이에 금속 막대기들을 볼트로 고정해 발판으로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한눈에 봐도 아주 잘 만든 사다리였다. 튼튼한 데다 갖고 다니기도 편했다. 그 물건을 보고 나는 안내인이 솜씨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양치기 사내는 망치로 대못들을 바위에 박아 넣었다. 그리고 금속 걸쇠를 이용해 밧줄 사다리를 대못에 고정했다. 동전보다 작은 걸쇠들이 사다리를 안정적으로 지탱했다. 작업을 마친 그는 사다리를 절벽 아래로 내던지고 뒤로 물러섰다. 마치 사다리가 떨어지는 높이에 놀라기라도 한 것 같았다. 절벽 아래서 바위에 부딪히는 세찬 물소리가 울렸다. 
안내인이 설명하기를 산속 지하 깊이 바위를 뚫고 흐르는 강이 있는데, 그것이 중간에 저수지를 형성하고 거기서 흘러나온 개울이 골짜기를 만나 세찬 물살을 이루며 쏟아진다고 했다. 폭포는 골짜기 모양대로 뒤틀리다가 다시 한번 미로 같은 지하 동굴로 떨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지상으로 흘러나간다. 마을 사람들은 이 강을 '스틱스' 즉 저승으로 가는 강이라고 부르며, 죽은 이들의 몸이 강바닥에 쌓여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동굴이 지옥으로 향하는 수직 통로라고 믿고 '불신자의 감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야기를 하는 안내인의 얼굴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겁이 나서 더는 안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첫 번째 징조였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이제 구멍 아래로 내려가야 할 시간이라고 말했다. 
깊은 구덩이 아래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고 우리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다리 하나에 이토록 반가워하고 경탄할 사람은 꿈속에서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하느님의 천사들을 본 야곱밖에 없을 터였다. 우리는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버려진 구덩이의 끔찍한 어둠 속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느님의 보호와 은총을 바랄 뿐이었다. 
나는 차가운 사다리 가로대를 밟고 아래로 내려갔다. 물살이 세차게 흐르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재빨리 몸을 놀렸다.]  

- [좀 더 가까이 갔다. 도저히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어찌나 강한 빛을 뿜어내는지 굴속을 들여다보려다가도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시력을 잃는 한이 있어도 불꽃의 한가운데, 푸르다 못해 하얀 부분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나도 내 눈으로 천상의 존재를 보고 싶었다. 마침내 좁은 감옥 한 칸에 천사가 한 명씩 갇혀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프란시스 형제가 내 팔을 꽉 붙들고 배로 돌아가자고 했다. 하지만 이미 격정에 휩싸인 내게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다른 사제들에게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가자고 말했다. 
우리가 굴속 깊이 들어가자 신음 소리가 멈추었다. 천사들은 두꺼운 쇠창살 안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툭 튀어나온 눈으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그들이 자유를 갈망한다는 것은 놀랍지 않았다. 쇠사슬에 묶여 깊은 땅속에 갇힌 채 풀려나기만을 기다린 것이 벌써 수천 년이 아닌가. 하지만 끔찍한 몰골은 실로 놀라웠다. 몸에서는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투명한 피부가 내뿜는 황금빛이 금빛 후광을 만들어냈다. 육체적으로는 그들이 인간보다 훨씬 우월해 키도 크고 몸매도 우아했다. 접힌 날개는 어깨에서 시작해 발목까지 내려가며 순백의 망토처럼 늘씬한 몸을 덮었다. 그런 아름다운 모습은 일찍이 보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다. 마침내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 천상의 존재들이 인간의 딸들을 유혹했는지, 왜 네피림들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몸을 그토록 찬양하는지.

감옥 한복판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한 걸음씩 들어설 때마다 기대는 더욱 커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우리 임무가 천사들의 보물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로소 무시무시한 진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하느님을 거역한 천사들을 풀어주러 이 동굴에 온 것이었다. 
우중충한 감옥 한 칸에서 금빛 머리칼이 풍성한 천사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아래쪽이 둥글고 반짝거리는 리라를 손에 들고 있었다. 양팔로 리라를 감싸 안은 천사가 현을 튕기자 고결한 천상의 음악이 울려 퍼졌다. 동굴 안이라 소리가 울려서인지 악기가 훌륭해서인지는 몰라도 리라 소리는 풍부하고 웅장했다. 황홀한 음악이 감각을 자극해 행복에 겨워 미칠 것 같기까지 했다. 곧이어 천사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천사의 목소리는 리라 소리에 맞춰 높아졌다 낮아졌다를 반복했다. 그 노랫소리가 신호라도 되는 양 다른 천사들이 합창을 시작했다. 여러 천사들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천상의 음악을 만들어냈다. 다니엘 서에 등장하는 수백만 천사들이 떠오르는 화음이었다. 우리는 천상의 합창에 완전히 무장해제된 채 얼어붙은 것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노래의 선율이 불로 지진 듯 마음속에 박혔다. 지금도 그 노랫소리가 들린다.] 

- [대천사 가브리엘의 황금 리리를 언급하는 이 대목은 가경자 클레마티스 신부가 죽음의 세계 하데스에 다녀와 쓴 글 가운데 가장 애를 태우는 부분이다. 데오푸스 신부가 쓴 편지에 따르면 클레마티스 신부는 동굴에서 빠져나올 때 원반 모양의 작은 금속 하나를 가져왔으며, 그 원반은 클레마티스 신부의 사후에 조사를 위해 파리로 보내졌다고 한다. 천상의 음악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면밀하게 조사한 결과 그 원반은 현악기, 특히 리라를 연주할 때 사용하는 픽이었다. 전통적으로 픽은 비단 끈으로 악기에 연결해 두므로 클레마티스 신부가 실제 천사의 리라나 그와 비슷한 픽을 사용하는 악기를 만졌으리란 것을 추론할 수 있다. 하지만 리라 자체의 행방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만일 클레마티스 신부가 리라를 가지고 나왔다면 동굴 입구에 떨어뜨렸거나 산에서 달아나던 중에 잃어버렸을 수도 있다. 픽이 엄연히 존재하므로 클레마티스 신부가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리라 이야기를 꾸며냈을 가능성은 없다.] 

-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노래를 시작한 천사를 바라보았다. 천사는 길고 마른 양팔을 천천히 들어 올리더니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나는 감옥 문 쪽으로 다가가 무거울 정도로 석회질이 잔뜩 낀 걸쇠를 풀었고, 천사는 나를 바닥에 쓰러뜨리며 감옥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자유를 되찾은 천사는 즐거운 표정이었다. 다른 천사들은 감옥 안에서 형제 천사의 승리를 시샘하며 포효했다. 포악하고 굶주린 천사들은 자유를 원하고 있었다.
나는 넋이 나가 천사들을 보느라 음악 때문에 동료 사제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미처 몰랐다. 프란시스 형제가 노래하는 천사들 앞으로 달려 나가는 모습을 보고야 그가 그 악마적인 음악의 주문에 걸렸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제정신이 아닌 듯 노래를 부르는 천사들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 애원했다. 풀려난 천사가 리라를 내려놓고 한순간 황홀한 음악을 멈추더니 프란시스 형제의 몸에 손을 댔다. 그러자 당황한 프란시스 형제의 몸 위로 강한 빛이 비치면서 마치 청동쇳물을 뒤집어쓴 듯 변했다. 프란시스 형제는 숨을 헐떡이더니 눈을 가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강렬한 빛 때문에 살이 타들어갔다. 나는 프란시스 형제의 옷가지와 피부가 녹아내리고 까맣게 탄 살덩이와 뼈만 남는 끔찍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조금 전까지 내 팔을 붙들고 배로 돌아가자고 빌던 프란시스 형제가 '천사의 독빛'에 죽은 것이다.] 

- [프란시스 신부의 죽음을 묘사한 이 자료와 클레마티스 신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상처를 조심스럽게 검토한 천사학자들은 프란시스 신부가 엄청난 양의 방사능에 노출되어 죽음을 맞았다고 결론지었다. 이후 마리 퀴리 가족의 막대한 기부금으로 천사들이 뿜어내는 방사능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현재는 헝가리 천사학자들이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 [놈의 아름다운 얼굴은 평화로웠다. 마치 편안한 잠에서 막 깨어난 듯한 표정이었다. 놈을 본 다른 신부들은 땅에 엎드려 기도를 올리며 애원했다. 온통 금빛으로 빛나는 천사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건 당연했다. 천사는 엎드린 신부들에게 독빛을 뿜어내 프란시스 형제처럼 죽여버렸다. 나는 무릎을 꿇고 가치 있는 임무를 위해 목숨을 잃은 형제들이 구원받기를 기도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도움이 될 만한 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양치기 사내는 메고 온 보따리와 사다리만 남겨둔 채 우리를 버리고 달아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속이 쓰렸다. 그의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천사가 나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바람이 지나간 길처럼 아무 표정이 없었다. 천사는 세상 그 어떤 음악보다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모르는 언어였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의미는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천사는 말했다.

"다시 자유를 얻느라 참으로 힘들었다. 우리를 풀어주었으니 하늘과 지상에서 크나큰 보답이 있을 것이다."
천사의 신성모독적인 말 때문에 나는 생각보다 더 화가 났다. 저런 악마 같은 녀석이 어떻게 감히 하늘의 보답을 약속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있는 대로 화가 치밀어 오른 나는 천사에게 달려들어 땅바닥에 쓰러뜨렸다. 분노의 일격을 당한 천사는 내게 우위를 내주었다. 빛을 뿜어내기는 했지만 천사도 나처럼 물질로 이루어진 물리적인 존재였다. 나는 재빨리 녀석의 거대한 날개를 잡아 뜯으며 무방비로 노출된 날개와 등 사이 부드러운 살을 움켜쥐었다. 
온기가 있는 날개 뿌리 부분의 뼈를 쥐고 녀석을 차갑고 단단한 바위 쪽으로 힘껏 밀쳤다. 워낙 흥분한 상태여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는 거라고는 내가 녀석과 싸워 이기고 동굴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힘을 주셨다는 것뿐이다. 이 늙은 손으로 어떻게 그리 잔인하게 녀석의 날개를 비틀 수 있었는지 도무지 믿어지지 않지만 어쨌든 나는 녀석을 쓰러뜨렸다. 얇은 유리병이 깨지는 것처럼 손 안에서 뭔가 부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낮은 한숨처럼 공기가 빠져나가며 천사의 몸이 내 발치에 속수무책으로 널브러졌다. 
내 앞에 쓰러진 몸뚱이를 살펴보았다. 내가 한쪽 날개를 잡아 뽑는 바람에 분홍색 속살이 드러났고 새하얀 깃털들은 엉뚱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천사는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등에 벌어진 상처에서 푸른빛이 도는 체액이 쏟아져 나왔고 가슴에서는 끔찍한 소리가 났다. 체액이 몸 밖으로 흘러나와 공기와 만나면 위험한 물질이 되는 듯했다. 가련한 녀석은 질식해 죽어가고 있었다. 날개에 생긴 상처 때문에 숨을 쉬지 못하는 것이었다. 호흡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천상의 존재와 맞붙어 폭력을 사용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척 괴로웠다.]

- [천사 날개 구조의 특징은 1907년에 발표되어 많은 영향을 미친 <천사 비행의 생리학>이라는 연구에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천사 날개의 골격 및 폐 기능을 밝힌 이 연구는 이후 감시자에 대한 논의의 시금석이 되었다. 한때 천사의 날개는 근육으로 신체 바깥쪽에 연결되어 있다고 인식했지만, 지금은 자체가 몸속의 폐가 자라난 것이며 비행에도 쓰이지만 매우 예민한 외부 장기의 기능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좀 더 연구해 본 결과 날개는 폐 조직의 모세혈관에서 비롯된 부속물로, 점차 크기가 커지고 힘이 세지면서 등 근육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완전히 자란 날개는 해부학적으로 매우 복잡한 구조를 형성해 산소를 들이마시고 날개 깃대에 난 폐포 주머니를 통해 이산화탄소를 내뿜는 호흡 작용을 한다. 천사의 호흡 작용 중 10퍼센트만이 입과 기관지를 통해 일어나므로 날개가 호흡 작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높다. 이는 아마도 천사의 신체 구조상 유일한 약점으로, 이 아킬레스건만 없었다면 천사는 완벽한 생명체였을 것이다. 클레마티스 신부는 대단히 효과적으로 이 약점을 공격했다.] 

- 끔찍한 경험을 여러 번 되짚어보고서야 불편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여러 해 공부를 하고 온갖 수업을 듣고 몇 달을 도서관에서 일하며 보냈지만, 발코 부부는 클레마티스 신부가 동굴에서 발견한 악기의 역할에 관해서는 단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제2차 탐사의 목적은 그 악기이고 나치가 쳐들어오는 걸 두려워하는 이유도 그 악기다. 그런데도 세라피나 박사님은 여태껏 그 악기가 왜 중요한지 정확히 설명해주지 않았다.

- 그런데 클레마티스 신부의 기록을 읽어보면 리라가 제1차 천사 탐사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는 사실이 확실했다. 발코 부부의 수업에서 대천사 가브리엘이 감시자들에게 리라를 주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있다. 하지만 대강 언급만 했을 뿐 리라라는 악기의 중요성은 애써 설명을 피하고 넘어갔다. 그렇게 중요한 사실을 어떻게 비밀에 부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클레마티스 신부의 자료를 이미 오래전에 읽은 가브리엘라는 리라의 중요성을 뻔히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자 불만은 더욱 커졌다. 가브리엘라도 발코 부부와 마찬가지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왜 나는 그들의 신임을 얻지 못한 걸까? 그동안 몽파르나스에서 보낸 시간을 돌이켜보았다. 클레마티스 신부는 '황홀한 음악이 감각을 자극해 행복에 겨워 미칠 것 같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도대체 그 리라 소리를 들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내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 내가 모든 걸 바쳐 진심으로 대했던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날 속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들이 내게 리라의 진실을 숨겼다면 또 다른 정보도 숨기고 있을 게 분명했다.  

- 그런 의문들을 품고 있는데 침실 창문 아래서 요란한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커튼을 슬쩍 열어본 나는 어느새 하늘이 옅은 잿빛으로 밝아지고 거리에 희붐한 새벽 기운이 내려앉은 것에 화들짝 놀랐다. 밤이 다가도록 한숨도 못 잔 것이다. 하지만 잠들지 못하고 밤을 보낸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 흰색 시트로엥 트락시옹 아방에서 내리는 가브리엘라의 모습이 보였다. 도서관에서 헤어질 때 입고 있던 새틴 드레스는 여전히 윤기가 흘렀지만, 불과 몇 시간 만에 가브리엘라는 놀라울 만큼 달라져 있었다. 머리는 지저분하게 흐트러지고 피곤한지 어깨가 축 늘어졌다. 검은색 긴 장갑을 벗고 하얀 손을 드러냈다. 가브리엘라는 어떻게 할까 고민이라도 하듯 아파트 건물을 향해 돌아서더니 차에 몸을 기대고 얼굴을 양팔로 가린 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운전석에 앉아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던 남자가 차에서 내렸지만 어쩌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보기에는 가브리엘라를 해치려는 듯했다. 

- 조금 전만 해도 가브리엘라에게 분노를 느꼈지만 본능적으로 친구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나와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내가 갈 때까지 가브리엘라가 어디론가 가버리지 않고 기다려주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현관에 이르렀을 때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남자는 가브리엘라를 해치려는 게 아니었다. 그는 흐느끼는 가브리엘라를 양팔로 꼭 끌어안고 있었다. 나는 현관 안쪽에 서서 어떻게 된 일인지 살펴보았다. 남자는 가브리엘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연인에게 하듯 말을 건넸다. 십오 년 동안 살면서 그런 식으로 날 어루만져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들키지 않도록 살짝 현관문을 열자 가브리엘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흐느끼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못 해요. 못 해요. 못 하겠어요."

절망에 빠진 목소리였다. 가브리엘라가 왜 괴로워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동안의 행동이 이제야 양심에 걸린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내가 놀란 건 남자의 말 때문이었다.

"하지만 해야 해."

남자는 가브리엘라를 더 힘주어 안으며 말했다.

"계속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 내가 아는 목소리였다.  

- 아파트로 돌아온 나는 내 방에 앉아 가브리엘라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길 기다렸다.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서서 복도로 걸어 들어오자 열쇠가 짤랑거렸다. 방으로 갈 줄 알았는데 부엌으로 향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게 커피를 타는 모양이었다. 얼른 가서 물어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 몇 시간 뒤 나는 세라피나 박사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아직 일곱 시도 안 된 이른 아침이었지만 나는 박사님이 언제나처럼 이미 나와 일하고 있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박사님은 머리를 단단히 말아 올린 채 책상에 앉아 펜을 들고 있었다. 막 뭔가를 쓰려던 참인 것 같았다. 내가 연구실을 찾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다. 지난 몇 주 동안은 매일같이 연구실 빨간색 소파에 앉아 발코 부부의 자료를 정리했다. 하지만 클레마티스 신부의 일지를 읽느라 밤을 새워 기진맥진한 데다 걱정이 있다는 게 얼굴에 드러났는지, 박사님은 내가 평소처럼 일 때문에 온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는 얼른 소파 맞은편으로 와 앉더니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탁자 위에 라파엘 박사가 번역한 책을 내려놓았다. 세라피나 박사는 깜짝 놀라 책을 집어 들고는 책장을 넘기며 아주 오래전 남편이 번역한 내용을 훑어보았다. 책을 읽는 그 모습에서 나는 보았다. 아니, 본 것 같았다. 박사님의 얼굴에 젊음과 행복이 돌아오는 것을. 책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시간이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 세라피나 박사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다는 듯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어디서 이걸 찾아냈는지 정말 궁금하구나."
"학교 지하에 있는 창고에서요."

나는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아무리 그러고 싶어도 선생님께는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 세라피나 박사에게 말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내 감정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었다.
말을 돌려야 할 것 같아 애초에 연구실에 찾아온 목적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꺼내서 죄송하지만..."

나는 박사님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말했다.

"제1차 천사 탐사에 관해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 "밤새 클레마티스 신부의 기록을 읽었어요. 여러 번 읽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알 수 없는 게 있었죠. 뭔가 걸렸는데 한참 만에야 이유를 알 수 있었어요. 바로 교수님이 제게 리라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교수다운 침착함을 되찾은 세라피나 박사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것 때문에 그이가 클레마티스 신부에 관한 연구를 포기한 거야. 그이는 십 년도 넘게 리라에 대한 자료를 찾아 헤맸지. 그리스 전역의 도서관과 골동품 가게를 죄다 뒤지고 학자들에게 편지를 보냈어. 심지어 데오푸스 신부의 친척을 찾기도 했고. 하지만 소용없었어. 만일 클레마티스신부가 동굴에서 리라를 가져왔다면 -우리는 그랬을 거라고 믿어- 아마도 그 뒤에 잃어버렸거나 부서진 것 같아. 우리가 리라를 직접 찾아낼 방법이 없으니 그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기로 한 거지." 
"만일 방법이 있다면요?"
"그럼 입 다물고 있을 필요가 없겠지. 지도만 있다면 상황은 달라질 거야."
"지도는 필요 없어요."

내가 말했다. 가브리엘라와 라파엘 박사 그리고 의심을 품고 있는 세라피나 박사까지, 나를 괴롭히던 걱정이 기대감에 모두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책을 들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대목을 찾아 펼쳤다.

"지도는 필요 없다고요. 모든 게 여기, 클레마티스 신부가 남긴 기록에 나와 있거든요."  

-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세라피나 박사는 살인을 저질렀다는 고백이라도 들은 것처럼 나를 보았다.

"우리는 여기 담긴 내용을 한 단어도 놓치지 않고 연구했어. 동굴의 정확한 위치를 나타내는 말은 전혀 없어. 그리스 근처 어딘가의 존재하지도 않는 산이 등장할 뿐이지. 하지만 그리스는 아주 넓단다." 
"물론 한 단어도 빠뜨리지 않고 보셨겠죠. 하지만 그 단어들은 엉뚱한 방향을 가리켰을 거예요. 일지 원본이 아직도 있나요?"
"데오푸스 신부가 받아쓴 원본? 물론이야. 지하 창고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지." 

세라피나 박사가 말했다.
"원본을 보여주시면 틀림없이 동굴 위치를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 클레마티스 신부가 우리 이동 속도를 알면 부러워했을 것이다. 그는 짐만 노새에 싣고 걸어 다녔다. 나는 늘 제2차 천사 탐사가 제1차 탐사에 비해 더 위험할 거라고 생각했다. 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그것도 한겨울에 동굴로 들어가려는 거니까. 하지만 클레마티스 신부는 우리와는 다른 위험에 맞닥뜨렸었다. 천사학의 창시자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숨겨야 했다. 그들이 살던 획일적인 시대에는 모든 활동에 엄밀한 감시의 눈이 따라다녔다. 결과적으로 일들이 더디게 진행되었고, 현대 천사학으로 이어질 돌파구를 전혀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연구는 수백 년 동안 고된 방식으로 진보를 이루어 지금의 내가 배우는 천사학의 기반을 닦았다. 만일 중간에 발각되었더라면 이단자로 몰려 교회에서 축출당하거나 더 심하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으리라. 박해를 받을지언정 그들이 임무를 저버리지 않았으리라는 걸 나는 잘 안다. 초기 천사학자들은 사명을 위해 많은 걸 희생했지만, 핍박은 임무 수행에 큰 차질을 불렀을 것이다. 그들은 보다 높은 분으로부터 명령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 임무를 내 사명이라고 믿듯이. 

- 클레마티스 신부가 도적과 지역 주민들의 적의를 두려워했다면 우리는 적들에게 들키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1940년 파리가 점령당하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지하로 숨어야 했고 탐사는 연기되었다. 대신 몇 년간 비밀리에 물자를 모으고 탐사 지역의 정보를 수집했다. 그러는 동안 연락 대상은 믿을 수 있는 학자들과 위원회 사람들로만 제한했다. 그들은 오랜 희생과 헌신으로 충성심이 확인된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보안 환경은 라파엘 박사가 부유한 미국인 여자를 후원자로 맞이하면서 달라졌다. 그녀는 우리가 하는 일에 존경심을 표하면서 돕겠다고 나섰다. 외부인의 도움을 받으면서 우리는 적에게 노출될 위험을 안게 되었다. 후원자의 돈과 영향력 덕분에 계획은 착착 추진되었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커졌다. 네피림이 우리 계획을 이미 알아차렸는지도 모른다. 우리를 뒤따라와 이 산속에 있을 수도 있다. 

- 몸이 부르르 떨렸다. 눈 쌓인 울퉁불퉁한 길을 거칠게 달리느라 멀미가 났다. 난방도 안 되는 자동차 안에서 꽁꽁 얼어붙어야 당연했지만 기대감으로 온몸이 따끔따끔했다. 나를 제외한 베테랑 천사학자 셋은 바짝 붙어 앉아 눈앞으로 다가온 임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과 달리 나는 왠지 자신이 없었다. 그들은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함께 연구해 온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동굴 위치에 관한 수수께끼를 풀었고 그 결과 탐사단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한때 이 자리를 두고 나와 경쟁했던 가브리엘라는 1940년 작별인사도 없이 학교를 떠나 자취를 감추었다. 아파트에서 물건만 챙겨 사라진 것이다. 당시 나는 그녀가 무슨 이유로 크게 질책을 받거나 퇴학을 당해 부끄럽게도 조용히 떠나야 했던 거라고 생각했다. 외국으로 가버린 건지 아니면 어디 숨은 건지 알 수 없었다. 탐사단에 낄 수 있게 된 것이 내 노력으로 얻은 결과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혹시 사라진 가브리엘라 대신 뽑힌 건 아닌지 남몰래 의심하곤 했다. 

- 세라피나 박사와 블라디미르는 동굴 아래로 내려갈 계획을 상세하게 검토했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펼쳐질 여행에 대한 불안에 휩싸여 대화에 끼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 모든 가능성이 내 앞에 펼쳐졌다. 어쩌면 동굴에 들어가 쉽게 임무를 완수할 수도 있고, 아니면 살아서 세상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앞으로 몇 시간 후면 모든 것을 얻거나 모든 것을 잃게 될 거라는 것.

- 멀리서 바람이 휘몰아치고 머리 위에서 비행기 엔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하릴없이 클레마티스 신부의 끔찍한 죽음이 떠올랐다. 나는 프란시스 신부가 품었던 의구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는 탐사대를 '꿈꾸는 사제들'이라 불렀다. 얼음 덮인 화강암 위를 지나 마침내 산꼭대기에 다다른 순간, 나는 프란시스 신부의 생각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에게도 들어맞는 게 아닐까 고민스러웠다. 혹시 우리는 실체 없는 보물을 찾고 있는 건 아닐까? 아무 성과도 없는 일에 목숨을 희생하는 건 아닐까? 세라피나 박사의 믿음대로 이 탐사 여행을 통해 그간의 천사학자들의 노고가 결실을 맺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프란시스 신부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상황, 즉 갈 길을 잃은 몽상가들의 집단환상으로 마무리될 수도 있는 것이다.

- 라파엘 박사와 세라피나 박사는 클레마티스 신부의 일지 내용을 철저하게 이해하겠다는 열정 때문에 내용 외적인 사실 하나를 간과했었다. 그것은 바로 데오푸스 신부가 교회에서 언어 교육을 받은 덕에 클레마티스 신부의 말을 라틴어로 받아 적 긴 했지만 본래는 트라키아 지방 출신의 불가리아 사람이라는 점이다. 성 키릴과 성 메토디오스가 9세기에 고대 키릴문자를 바탕으로 초기 불가리아어를 변형해 만든 트라키아 언어가 그의 모국어였다. 클레마티스 신부 역시 로도피 산맥에서 태어나고 공부했기 때문에 고대 불가리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사 년 전 운명의 날 밤, 나는 라파엘 박사가 번역한 책자를 읽고 또 읽으며 생각했다. 혹시 동굴에서의 끔찍한 기억을 꺼내놓을 때는 클레마티스 신부가 훨씬 편하고 쉬운 모국어로 회귀하지는 않았을까 하고. 클레마티스 신부와 데오푸스 신부는 라틴어로 쉽게 번역할 수 없는 전통적인 내용을 말할 때는 분명 모국어로 대화했을 터였다. 어쩌면 데오푸스 신부는 초고에서는 키릴문자로 고대 불가리아어 단어를 기록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배운 사람들은 라틴어를 썼기 때문에 자신의 우아하지 못한 언어가 부끄러워 후에 라틴어로 고쳐 쓴 것이다. 만일 정말로 그랬다면 고쳐쓰기 전의 원본이 있지 않을까. 라파엘 박사가 번역하며 데오푸스 신부의 초고도 참고했다면, 라틴어를 다시 현대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없는지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 이런 결론을 내린 나는 라파엘 박사가 첨가한 각주 중 일지 원본에 희미한 핏자국이 있는데 동굴에서 상처를 입은 클레마티스 신부의 것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을 떠올렸다. 정말 그렇다면 데오푸스 신부가 쓴 최초의 원고가 아직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 원고를 볼 수만 있다면 나는 여기저기 섞인 키릴문자를 찾아낼 자신이 있었다. 내 할머니 바바슬라프카는 책을 좋아해서 러시아 소설을 원어로 읽고 모국어인 불가리아어로 꽤 많은 시를 썼으며 내게 키릴문자를 가르치셨다. 원본만 있다면 키릴문자로 쓴 내용을 찾아낸 다음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고대 불가리아어 라틴어로 제대로 번역하고 프랑스어로도 옮길 수 있을 터였다. 단지 현대어에서 고대 언어로 되돌아가는 간단한 작업에 불과하지만 동굴 위치에 관한 비밀을 밝혀낼 수도 있었다. 문제는 원본을 볼 수 있는지 여부였다. 

- 내가 어떻게 이런 결론에 이르렀는지 설명하자 세라피나 박사 -그녀는 내 말이 이어질수록 점점 더 흥분하는 것 같았다- 는 나를 즉시 라파엘 박사에게 데려가 다시 설명해 보라고 했다. 세라피나 박사와 마찬가지로 라파엘 박사도 내 가설이 그럴듯하다고 인정했지만 자신은 데오푸스 신부의 원고를 매우 주의 깊게 번역했으며 원본에 키릴문자는 없었다고 했다. 그래도 두 사람은 나를 원본을 보관해 둔 도서관 지하로 데려가주었다. 둘은 흰 면장갑을 끼고 내게도 한 켤레를 건네주었다. 라파엘 박사가 선반에서 원고를 꺼냈다. 두껍고 흰 천을 걷어내 내 앞에 내려놓았다.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서는 라파엘 박사와 눈이 마주쳤다. 이른 새벽 가브리엘라와 함께 있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모든 사람에게, 심지어 아내에게까지 숨기고 있는 비밀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라파엘 박사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멋지고 박식해 보이기만 할 뿐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 나는 눈앞에 놓인 원고에 곧장 빠져들었다. 종이가 너무 약해서 손만 닿아도 바스러질 것 같았다. 잉크 위로 땀이 떨어진 흔적이 보이고 여러 장에 시커먼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생각했던 대로 데오푸스 신부의 라틴어는 완벽하지 않았다. 철자법도 가끔 틀리고 단어 변화형도 혼동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실망스러운 건 라파엘 박사의 말이 옳았다는 점이었다. 원고에 키릴문자는 없었다. 데오푸스 신부는 문서 전체를 라틴어로 작성했다.

- 이때 라파엘 박사가 천재성을 발휘하지 않았더라면 교수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탐사대에서 확실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던 나는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내가 희망을 포기하려 할 때 라파엘 박사는 오히려 더 분발해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데오푸스 신부의 원고를 라틴어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동안 익숙지 않은 단어들을 상당수 보았다고 했다. 짐작하기로는 미친 사람처럼 뱉어대는 클레마티스 신부의 말을 제대로 옮겨야 한다는 중압감에 모국어를 라틴어처럼 표현한 것 같다고 했다.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키릴문자는 데오푸스 신부가 태어나기 백여 년 전에야 겨우 체계화되었을 만큼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문자였기 때문이다. 라파엘 박사는 문제의 단어들이 무엇인지, 원고 어디쯤 있는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그 위에 만년필로 라틴문자로 쓴 불가리아어 단어들을 써 내려갔다. '금' '세계' '영혼' 등 모두 열다섯 개쯤 되었다. 

- 라파엘 박사는 여러 사전에 의존해 그 단어들을 불가리아어에서 라틴어로 바꾸고 다시 프랑스어로 옮겼다고 했다. 수많은 고대 슬라브어 문헌을 참고해 보니 실제로 그 라틴어 단어들과 발음이 유사한 단어가 있었다. 결국 앞뒤가 안 맞는 내용을 조금씩 다듬어가며 제대로 된 라틴어 단어들로 바꾸어 문맥상 말이 되도록 했다. 정확히 번역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기는 했지만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대 문서를 해석하다 보면 이렇게 추측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이 때문에 전체 언어의 통일성이 깨졌을 테고, 최악의 경우 끔찍한 오류를 저질렀을 수도 있었다.

 

 

- 함께 단어 목록을 훑어보던 우리는 곧 잘못 고쳐진 고대 불가리아어를 골라낼 수 있었다. 아주 기초적인 단어들이라 나는 바로 라파엘 박사의 만년필을 집어 들고 오류를 수정했다. 데오푸스 신부가 'злото(악마)'라고 적은 걸 라파엘 박사는 'злато(금)'이라고 생각해 결국 '온통 악으로 가득 찬'이라는 말을 온통 금빛으로 빛나는'으로 번역했다. 비슷한 방식으로 데오푸스 신부가 'Дyx(영혼)'이라고 쓴 것을 라파엘 박사는 'Дъх(호흡)'이라고 생각해 '영혼이 죽는다'를 '호흡이 멎는다'로 해석했다. 무엇보다 가장 관심이 간 문제는 클레마티스 신부가 언급한 동굴 이름인 '갸우르스코토 부를로'가 고대 불가리아어 지명인지,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잘못 쓰인 것인지의 여부였다. 나는 라파엘 박사의 만년필로 각각 키릴문자와 라틴문자로 그 단어를 적어보았다. 

- Гяурското Бърло
GYAURSKOTO BURLO

- 나는 글자가 깨지면서 속에 품은 뜻이 종이 위로 배어 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글자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애써봐도 단어가 어떻게 잘못 쓰인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갸우르스코토 부를로라는 이름에 담긴 어원을 알아내는 건 내 능력 밖이었지만, 그 이름의 역사와 그것이 번역이라는 과정을 거치며 어떻게 잘못 표현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라파엘 박사는 원고를 가죽 케이스에 넣고 다시 천으로 감쌌다. 해 질 녘 발코 부부와 나는 내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나의 고향 마을에 도착했다. 

- 옆에서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발코 부부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변함없이 예의 바르고 상냥한 라파엘 박사는 점잖은 신사의 전형 같았다. 가브리엘라와 함께 있던 그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눈앞에 있는 완벽한 신사와 자신이 가르치는 열다섯 살짜리 여학생을 껴안고 있던 호색한이 같은 사람이라니.

- 우리가 부엌의 매끄러운 나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사이 할머니는 원고를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프랑스에서 산 지 오래되었지만 할머니는 끝내 이곳에서 태어난 여자들과 비슷해지지 않았다. 머리에 화려한 면스카프를 묶고 귀에는 커다란 은 귀고리를 달고 눈화장을 진하게 했다. 손가락에는 금과 보석들이 번쩍거렸다. 라파엘 박사가 의문점을 설명하고 원고를 펼쳐 보이고 그 옆에 단어 목록을 함께 내밀었다. 단어 목록을 훑어보고 한참 원고를 들여다보던 할머니는 일어서서 방으로 들어가더니 아무렇게나 모아둔 종이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한눈에 봐도 지도들이었다. 할머니가 도피 산맥의 지도를 펼쳐 보이자 나는 키릴 문자로 쓰인 마을 이름들을 읽어보았다. 스몰란, 케스텐, 즈레베보, 트리그라드. 모두 할머니가 태어난 곳 주변이었다. 

- 갸우르스코토 부를로는 '불신자가 숨어 있는 곳' 또는 '불신자의 감옥'을 뜻한다고 할머니가 설명했다. 라파엘 박사가 라틴어를 제대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갸우르스코토 부를로라는 지역을 못 찾는 건 놀랄 일이 아니야. 그런 곳은 아예 존재하지 않으니까."

할머니는 트리그라드 근처에 있는 동굴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오랜 세월 신비로운 장소로 여겨졌고, 오르페우스가 지하 세계로 떠난 곳으로 알려졌고, 지질학적으로도 특이해 마을 사람들이 경이롭게 여기던 그곳은 우리가 찾던 동굴의 특징에 딱 들어맞았다.

"이 동굴이 너희가 찾는 곳일 거야. 하지만 이름은 갸우르스코토 부를로가 아니라 디아볼스코토 구를로, 악마의 목구멍이라는 뜻이지."

할머니는 지도를 짚은 채로 말했다.

"여기나 다른 지도에 그렇게 나와 있지는 않지만 나도 직접 이 동굴 입구까지 가본 적이 있어. 동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은 적도 있고. 연구를 하려면 이리로 가렴, 셀레스틴."


- "이제부터 우리에게 닥칠 위험은 과거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입니다. 우선 동굴 안으로 내려가는 과정만 해도 체력적으로 무척 힘들 겁니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진입해야 합니다. 실수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유용한 장비가 있지만 육체적인 위험만 감수하는 게 아닙니다. 일단 동굴 안에 들어가면 감시자들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 "가공할 만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합니다. 천사학자들은 여러 대에 걸쳐 언젠가 땅속에 갇힌 천사들과 대면하기를 꿈꿔왔습니다. 만일 성공한다면 우리는 예전에 그 어떤 이도 못 해낸 일을 이루는 겁니다."
"혹시 실패하면요?"

그렇게 묻긴 했지만 진짜 실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기 어려웠다.
"그들이 가진 힘, 인간에게 미칠 파괴력과 고통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 나는 중력에 몸을 맡기고 팔다리를 재빨리 움직였다. 동굴 깊이 내려갈수록 어둠은 차갑고 걸쭉한 수프처럼 짙어졌다. 사다리를 죽어라 움켜쥐어 하얘진 손마디밖에 보이지 않았다. 부츠의 나무 밑창이 미끄러지면서 아주 살짝 몸이 흔들렸다. 의료 장비 상자를 몸 쪽에 꼭 붙이고 속도를 늦춰 중심을 잡았다. 한 발 한 발 뗄 때마다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아득한 사다리 꼭대기를 보면 피가 귀로 몰리는 느낌이었다. 허공 한가운데 매달린 신세인 내게는 축축한 어둠 속으로 계속 내려가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없었다. 갑자기 성서 구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시끄러운 폭포 소리에 묻힐 걸 알면서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모든 살덩어리들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들로 말미암아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 찼다. 나 이제 그들을 세상에서 없애버리겠다."

- 발바닥이 사다리의 마지막 가로대를 떠나 단단한 바닥에 닿는 순간 세라피나 박사가 뭔가 중대한 걸 발견했음을 알아차렸다. 다른 천사학자들은 재빨리 짐을 풀고 랜턴을 여러 개 꺼내 동굴 바닥 여기저기에 설치했다. 드디어 깜박거리는 불빛이 어둠을 열었다. 클레마티스 신부가 천사들이 갇힌 감옥의 경계 같다고 표현한 강이 반짝거리는 검은 리본처럼 구불거리며 흘러가는 모습이 멀리 보였다. 앞쪽에서 세라피나 박사가 뭐라고 지시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폭포의 굉음이 그 소리를 집어삼켜버렸다. 

- 박사님께 다가갔더니 그녀의 발밑에 천사의 시체가 있었다. 옆에 서는 순간 나도 무아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한참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천사의 완벽한 외모에 압도당하는 것 같았다. 도서관 책에 나온 설명과 똑같았다. 가늘고 긴 몸, 수척한 얼굴, 커다란 손과 발. 살아 있는 것처럼 뺨에 생기가 흘렀다. 금속 재질의 실로 짠 새하얀 옷이 기품 넘치는 모습으로 그 몸을 감싸고 있었다.
"제1차 천사 탐사가 10세기의 일인데도 시체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 같군요."

블라디미르가 말하고는 허리를 굽히고 하얀 옷자락을 들어 올려 손가락으로 문질러보았다.
"조심해. 방사능 수치가 아주 높아."

세라피나 박사가 말했다.

블라디미르는 천사를 자세히 살폈다.

"천사는 절대 죽지 않는 존재인 줄 알았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은 쉽게 얻은 만큼 쉽게 빼앗길 수 있는 거야. 클레마티스 신부는 하느님께서 복수를 위해 이 천사를 죽이셨다고 믿었어."
"박사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내가 물었다.
"이 세상에 네피림이 태어나게 한 죄를 지었으니, 이 끔찍한 놈은 죽임을 당해 마땅하지."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네요."

나는 한 몸에 아름다움과 사악함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애쓰며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 돼요. 나머지 천사들은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아 있잖아요."

블라디미르가 시체 너머 동굴 깊숙한 곳을 보며 말했다.

- 탐사단은 둘로 나뉘었다. 절반은 시체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나머지 절반은 리라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블라디미르가 리라를 찾는 팀을 맡았고 세라피나 박사와 나는 천사의 시체 옆에 남았다. 우리는 여러 대의 카메라와 렌즈, 생체 실험 도구가 든 알루미늄 상자를 꺼냈다. 옆에서 다른 대원들이 절반쯤 땅에 묻혀 있던 백골 시신 두 구를 찾아냈다. 클레마티스 신부와 함께 왔던 동료의 것이었고 천 년 전 쓰러진 당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 세라피나 박사의 지시에 따라 보호 장갑을 끼고 천사의 머리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아픈 아이를 어루만지듯 윤기가 흐르는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고 이마를 쓰다듬었다. 장갑을 껴서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지만 살아 있는 것처럼 따뜻한 듯했다. 옷을 살살 펼쳐 쇄골 쪽의 황동 단추 두 개를 풀고 벗겨냈다. 가운이 벌어지며 평평하고 매끄러운 가슴이 드러났다. 젖꼭지는 없었다. 팽팽해 보이는 투명한 피부 위로 살짝 튀어나온 갈비뼈들이 눈에 띄었다.

-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눈짐작으로 보기에도 2미터가 넘는 것 같았다. 천사의 창시자 신부들이 사용했던 치수로 말하면 4.8큐빗이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빛 곱슬머리를 제외하면 체모는 없었다. 그리고 천사에게는 분명히 성기가 있었다. 세라피나 박사가 교수로서의 명예를 걸 정도로 중요하게 여긴 문제인 만큼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천사는 남자였다. 감옥에 갇힌 감시자들도 모두 남자였다. 클레마티스 신부의 기록을 입증하듯 날개 하나가 뜯겨나가 비뚤어진 채 간신히 붙어 있었다. 가경자 클레마티스 신부가 죽인 천사의 시체가 분명했다. 

- 손이 떨렸다. 세라피나 박사가 불러주는 수치를 틀리지 않게 큰 소리로 복창하며 받아쓴 글씨를 나조차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수치로볼 때 천사의 몸은 보통 사람보다 30퍼센트는 더 큰 것 같았다. 2미터 10센티가 넘는 키는 오늘날에도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니 오래전 그 시대에는 기적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터였다. 천사의 키가 이렇게 큰 걸 보니 거인과 관련한 고대 문화와 네피림 가운데 가장 유명한 존재였던 골리앗을 향한 두려움이 충분히 설명되었다. 

- "이 소리 안 들리세요?"

내가 물었다.
박사님은 하던 일을 멈추고 강가로 다가갔다. 한참 귀 기울이다가 돌아와 말했다. 

"그냥 물 흐르는 소리야."
"뭔가 다른 소리가 들려요. 그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가 자기들을 풀어주길 바라는 거예요."
"그들은 수천 년을 기다렸어, 셀레스틴. 그리고 우리 일이 잘 끝난다면 수천 년을 더 기다려야겠지."

- 세라피나 박사는 다시 천사의 시체로 관심을 돌리며 내게도 집중하라고 채근했다.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나는 금세 천사의 기이한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투명한 피부, 온몸에서 부드럽고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빛, 깎아놓은 듯 균형 잡힌 형태. 천사가 몸에서 빛을 뿜어내는 데는 여러 가설이 있었다. 가장 지배적인 이론은 천사의 몸이 방사능 물질을 품고 있어서 끝없이 빛을 발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보호 장갑과 옷을 착용했지만 그것은 방사능에 대한 노출을 최소화할 뿐이었고, 방사능은 제1차 탐사 당시 프란시스 신부가 끔찍한 죽음을 맞고 클레마티스 신부가 병든 원인이었다. 

- 천사의 몸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일을 최대한 피해야 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건 탐사를 준비하는 사람이 맨 처음 배우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천사의 몸에 어떻게든 더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장갑을 벗고 시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천사의 이마에 양손을 얹었다. 차갑고 물기 어린 피부가 느껴졌다. 여전히 살아있는 듯 탄력이 있었다. 부드럽고 무지개처럼 영롱한 뱀의 피부를 만지는 것 같았다. 천 년도 넘는 세월 동안 깊은 동굴에 박혀 있었음에도 밝은 금발은 여전히 빛났다. 처음 봤을 때 날 당황스럽게 했던 새파란 눈동자는 이제 오히려 반대 효과를 냈다.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천사가 내 곁에 앉아 나를 진정시켜 주고, 두려움을 모두 거두어가고, 마약에 취한 듯한 기분 나쁜 안도감을 주는 것 같았다. 

- 내가 맨손으로 천사를 만지는 모습을 보고 박사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처럼 어리고 경험 없는 천사학자조차 천사와의 물리적 접촉은 우리의 안전수칙을 어기는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천사에게 끌리기는 박사님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녀는 내 옆에 앉더니 손바닥으로 천사의 이마를 짚고 손가락을 머리카락 깊숙이 집어넣었다. 세라피나 박사가 어딘가 변하는 게 한눈에 보였다. 눈을 감은 그녀의 온몸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감정에 휘감기는 듯했다. 바짝 긴장했던 몸이 순정한 평온 상태로 녹아내리는 듯했다. 

-  천사의 한 팔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목과 팔꿈치를 잡자 세라피나 박사가 칼날 끝으로 손톱 견본을 채취했다. 손톱 조각들이 떨어져 유리병 안에 모였다. 꼭 바닷물을 건조시켜 만든 소금처럼 보였다. 이어서 세라피나 박사는 칼날을 기울여 팔뚝 안쪽의 피부를 사각형으로 절개하고는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피부가 벗겨진 자리에 근육이 드러났다. 두 개의 유리판 사이에 눌린 피부 조각이 희미한 빛을 반사시키며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 뒤에서는 세라피나 박사가 큰 목소리로 다급하게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앞쪽에서는 전혀 다른 목소리, 부드럽고 아름다운 선율을 이루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나를 불렀다. 잠시 멈춰 서서 주위의 어둠이 눈에 익기를 기다렸다. 앞쪽으로 강물이 흘러 감시자들과 나를 갈라놓고 있었다. 이미 일행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위험한 상태였다. 그러나 화강암 동굴의 심장부에서 무언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뭔지만 알고 싶었다.

- 배는 밧줄로 도르래에 묶여 있었다. 다른 사람들, 아마도 이 지역의 역사학자들이 강물을 건너보았다는 증거였다. 어쨌든 도르래와 밧줄 덕분에 노를 젓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배에 앉아 상류 쪽을 보니 폭포가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동굴 아래서 자욱한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신화에서 왜 이 강물을 죽은 자들의 강, 스틱스라고 이름 붙였는지 알 것 같았다. 밧줄을 당기며 강을 건너는 사이 내 앞에 죽음의 존재가 내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완벽하게 어두운 공허 속에서 인생 전체가 짓눌려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 강물은 이내 나를 건너편으로 데려다주었다. 도르래와 밧줄로 단단히 고정된 배를 그냥 버려두고 강둑을 기어올랐다. 강에서 멀어져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동굴 모양이 무척 다양해졌다. 바위가 뾰족하게 솟아있기도 하고, 광물이 뭉쳐 있기도 하고, 수정 결정체와 여기저기 벌집처럼 뚫린 작은 구멍들도 있었다. 나를 세라피나 박사에게서 떼어놓고 여기로 이끈 해독 불가능한 신호가 점점 또렷해져 갔다.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마치 내 발소리에 박자를 맞추는 것 같았다. 노래가 들리는 곳에 간다면 오랫동안 내 상상 속에서만 살던 존재들을 직접 볼 수 있을 터였다.

- 갑자기 발밑이 푹 꺼지면서 균형을 잡을 새도 없이 물에 젖어 미끄러운 화강암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손전등으로 바닥을 훑어보니 발에 걸린 건 조그만 가죽가방이었다. 가방을 집어 들고 열어보았다. 너무 오래되고 삭아서 금방이라도 손 안에서 바스러져버릴 것 같았다. 손전등으로 가방 안을 비춰보니 뭔가 금속성 물건이 빛을 반사했다. 낡을 대로 낡은 송아지 가죽을 들추고 그것을 잡았다. 리라는 방금까지 문질러 닦아 윤을 낸 듯 찬란한 금빛으로 빛났다. 우리가 찾아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 그러나 좀 더 가까이서 보려고 몇 발짝 걸어 들어가자 우리가 가져간 강한 전구 불빛과는 전혀 다르다는 빛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본 것이 뭔지 알아내고 싶은 욕심에 과감하게 좀 더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놀라운 모습의 존재가 서 있었다. 금방 날아오를 듯 거대한 날개를 양쪽으로 펴고서, 천사가 어찌나 밝은 빛을 뿜어내는지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눈을 진정시키기 위해 시선을 뒤로 돌렸다. 멀리 천사 무리가 서 있었다. 그들의 피부에서 나오는 부드러운 빛이 동굴 감옥의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 천사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오십 명에서 백 명쯤 되었는데 하나같이 아름답고 위엄이 넘쳤다. 피부는 금을 바른 듯 날개는 상아를 깎아놓은 듯 눈동자는 연파란색 유릿조각인 듯 보였다. 희뿌연 구름이 금빛 머리칼 주위를 감돌았다. 그들의 외모가 장엄하다는 사실은 책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고 머릿속으로 상상도 해보았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매혹될 줄은 미처 몰랐다. 두려움도 있었지만 동시에 자석에 이끌리듯 끌렸다. 돌아서서 달아나고 싶었지만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 천사들이 입을 모아 기쁨에 찬 노래를 불렀다. 동굴에 울리는 노래는 지하에 갇힌 천사들을 악마로 여겨온 그동안의 내 생각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두려움은 모두 녹아버렸다. 그들의 음악은 아름다웠고 그 아름다움은 지상의 것이 아니었다. 천국을 약속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 음악의 주문에 걸린 듯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리라를 연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무릎 위에 리라를 올려놓고 팽팽한 금속 현을 튕겼다. 악기를 연주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태어나서 음악이라곤 학교에서 천상의 음악에 관해 잠시 배운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리라는 마치 스스로 연주하듯 풍성하고 아름다운 선율을 쏟아냈다. 
 
- 반대편 기슭에 도착하자 세라피나 박사는 내가 배에서 내리는 걸 부축해 주었다.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보고 박사님의 화가 약간 누그러졌다.

"잘 기억해. 우리 일은 감시자들과 아무 관계가 없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반드시 돌아가서 살아갈 지상의 세계에 있어. 아주 많이. 강을 건너기로 한 네 결정이 무척 실망스럽긴 해도, 어쨌든 임무의 목적이었던 물건을 찾아냈으니 잘했다고 해야겠지."

-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욱신거리는 몸을 끌고 천사의 유해를 지나쳐 사다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천사는 옷이 벗겨져 낱낱이 해부된 상태였다. 이제 껍데기만 남았는데도 여전히 흐릿한 인광을 뿜어냈다.
 
- 장소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외딴곳에 있는 카페나 파리 근교의 작은 마을, 버려진 교회 등으로 정해졌다. 이렇게 극도로 주의를 기울여도 적들은 시시각각 우리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는 듯했다.
사제는 우리를 수도원 복도로 안내하더니 어느 문 앞에 멈춰 서서 문을 세 차례 짧게 두드렸다. 문이 열리자 돌벽에 여러 개의 전구가 불을 밝힌 방으로 들어섰다. 전구는 귀한 물건이지만 미국에서 보내온 달러만 있으면 암시장에서 구할 수 있었다. 좁은 창문은 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무거운 검은색 천으로 가려놓았다. 이미 회의를 시작했는지 위원회 사람들이 둥근 나무 탁자에 둘러앉아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참석자 모두 일어서서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위원회에 참석한 적이 없는 나는 보통 회의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몰랐지만, 이들이 탐사대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어 보였다. 

- 위원장 대행을 맡은 라파엘 발코 박사가 상석에 앉아 있었다. 나를 알자스에 있는 우리 집에 유배시키고 떠난 뒤로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그게 최선이었다는 걸 알지만 어쨌든 나를 버린 건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라파엘 박사의 모습은 그때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관자놀이의 머리칼이 하얗게 세었고 태도에서는 전혀 다른 위엄이 흘렀다. 길거리에서 마주쳤다면 못 알아봤을 정도였다.

- 세라피나 박사가 동굴을 상세히 묘사했다. 낭떠러지 같은 수직갱, 아래쪽에 펼쳐진 바위들, 멀리서도 분명하게 들려온 폭포 소리. 그녀는 노트를 보며 천사 시체의 치수와 외형에 관해 조목조목 설명했다. 특히 성기가 있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사진을 현상해 보면 천사의 신체적 특징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더 많이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도 했다. 제2차 탐사는 대성공이었다.

- 다른 대원들이 각자 자세히 보고하는 동안 나는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 흐린 불빛에 비친 양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동굴에서 얼음에 긁히고 추위로 온통 튼 데다 천사가 뿜어낸 빛에 덴 상태였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온몸을 휘감았다. 우리가 동굴에 다녀온 지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단 말인가? 손가락이 떨려 얼른 두꺼운 외투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마음속에서 천사가 나타나 파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색유리처럼 밝게 반짝이는 눈이었다. 세라피나 박사가 흡사 나뭇조각 다루듯 천사의 긴 팔과 다리를 들어 무게를 가늠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천사는 너무나 생기 넘치는 모습이어서 우리가 도착하기 직전까지 살아 있었던 것만 같았다. 나는 동굴에 도착하고 나서야 천사의 시체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믿지 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공부해 오면서도 실제로 천사의 시체를 보고 만지고 피부에 주사기를 꽂아 체액을 뽑아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우리 생각이 틀렸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천사의 팔에서 피부를 일부 떼어내 불빛에 비춰보았을 때 나는 두려움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자꾸만 같은 장면이 떠올랐다. 칼날이 하얀 살갗을 저미고 들어 올리는 모습. 흐릿한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피부 조직.  

- "자네 스스로도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나?"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세라피나 박사와 라파엘 박사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만족했다고 하면 거짓말이 될 테고 자세히 말하자니 세라피나 박사와 한 약속을 깨뜨리게 될 터였다. 결국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좀 더 철저히 준비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누구나 그런 순간을 위해 평생을 준비하지." 

라파엘 박사는 팔짱을 끼고 꾸짖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마침내 그런 순간이 오면 성공할 준비가 되어 있길 바라는 수밖에 없으니까."
"아니야, 아주 잘했어. 최고였다니까." 

세라피나 박사가 다시 한번 말했다.

- 젖은 돌벽을 손으로 짚으며 걷다가 울퉁불퉁한 표면이 돌이 아니라 구멍에 쌓인 뼈라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카타콤을 통해 몽파르나스 아래를 나아가고 있었다. 

- 운전사가 문을 열었다. 따뜻한 뒷좌석으로 들어가자 라파엘 박사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 좀 봐."

그는 몸을 돌리더니 차가운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잡고 뭔가 특이한 것을 찾는 사람처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처음으로 라파엘 박사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았다. 나이가 적어도 쉰 살은 된 것 같았다. 얼굴에 주름이 졌고 방금 전에 본 것보다 흰머리가 훨씬 많았다. 얼굴이 너무 가까이 있어 깜짝 놀랐다. 남자와 이렇게 가까이 있어보긴 처음이었다.
"눈이 파란색인가?"
"적갈색이에요." 

나는 엉뚱한 질문에 혼란스러워하면서 대답했다.
"좋아."

그는 조그만 여행 가방을 열어 우리 사이에 놓았다. 그리고 가방 안에서 새틴 드레스와 실크 스타킹 가터벨트, 구두 한 켤레를 꺼냈다. 한눈에 어떤 옷인지 알 수 있었다. 몇 년 전 가브리엘라가 입었던 빨간 드레스였다.
"입어."

라파엘 박사가 말했다. 깜짝 놀란 내 표정을 봤는지 곧 덧붙였다.

"이유는 금방 알게 될 거야."

- "하지만 이건 가브리엘라 옷이잖아요."

신중하게 생각할 틈도 없이 말이 나왔다. 내가 가브리엘라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하면 도저히 옷에 손을 댈 수 없었다. 라파엘 박사와 가브리엘라가 함께 있던 장면이 떠올랐다. 아무 말도 하지 말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래서?"

라파엘 박사가 물었다.
"가브리엘라가 이걸 입었던 날 밤에, 박사님과 함께 있는 걸 봤어요."

라파엘 박사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아파트 앞 길가에서요."
"어떻게 된 상황인지 전부 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라파엘 박사가 말했다.
"오해할 여지가 있나요?"

나는 작은 소리로 말하며 창밖으로 흘러가는 칙칙한 잿빛 건물들과 길을 따라 늘어선 가로등을 바라보았다. 파리의 우울한 겨울 얼굴이었다.

"무슨 일인지 뻔하죠."
"드레스 입어."

라파엘 박사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가브리엘라의 행동에 믿음을 가져. 공연히 의심하기보다는 우정을 믿으라는 거야. 이런 시절에는 우리끼리 서로 믿어야 해. 자네는 아직 모르는 게 많아. 이제 곧 가브리엘라가 무슨 위험을 안고 사는지 알 수 있을 거야." 

- 나는 천천히 두꺼운 옷을 벗었다. 얼음장 같은 산바람을 견디기 위해 입었던 바지 단추를 풀고 묵직한 스웨터도 머리 위로 올려 벗었다. 그리고 드레스가 찢어지지 않도록 몸을 비틀며 입기 시작했다. 드레스는 너무 컸다. 입자마자 알 수 있었다. 사 년 전 가브리엘라가 입었을 때만 해도 내게는 너무 작아 보였지만, 전쟁 중 몸무게가 10킬로그램이나 줄어 뼈와 가죽만 남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내가 옷을 입는 사이 라파엘 발코 박사도 옷을 갈아입었다. 그는 가방에서 나치 친위대 군복인 검은 재킷과 바지를 좌석 아래서 검은색 광택이 도는 빳빳한 가죽 부츠를 꺼냈다. 군복은 암시장에서 산 물건처럼 닳거나 퀴퀴하지 않고 깔끔했다. 아마도 나치 친위대에서 활동하는 우리 쪽 스파이가 넘겨준 것 같았다. 군복만 봐도 섬뜩했다. 옷을 갈아입자 라파엘 박사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투명한 액체를 입술 쪽에 바르고 가느다란 수염을 붙였다. 이어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 매끄럽게 빗어넘기고는 옷깃에 친위대를 상징하는 배지를 달았다. 조그만 물건에 불과했지만 위장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내 역겨움을 자아내기에도 충분했다. 

- 라파엘 박사는 실눈을 뜨고 조심스럽게 내 모습을 살폈다. 나는 몸을 숨기고 싶어 팔짱을 꼈다. 그는 내 변신이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지 어릴 때 교회에 데려가기 전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내 머리와 드레스를 매만져주었다. 몹시 부끄러웠다.

- 자동차는 빠른 속도로 달려 센 강에서 멈췄다. 다리를 막고 선 군인 한 명이 루거 권총 손잡이로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운전사가 창문을 내리고 군인에게 독일어로 말을 건네더니 서류 한 뭉치를 내밀었다. 군인이 뒷좌석을 흘깃 보더니 라파엘 박사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구텐 아벤트."

라파엘 박사가 인사를 건넸다. 완벽한 독일어 발음이었다.

- 도착한 곳은 기둥이 늘어선 고풍스러운 건물이었다. 연회장으로 통하는 넓은 돌계단을 올라가면서 아름다운 여인들을 에스코트하는 야회복 차림의 사내들을 지나쳤다. 출입구에는 독일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우아하게 차려입은 다른 여자들과 달리 너무 마르고 창백한 나는 아프고 지친 사람처럼 보일 게 뻔했다. 머리를 틀어 올리고 라파엘 박사에게서 받은 립스틱을 바르기는 했지만, 다른 여자들의 예쁘게 모양을 살린 머리와 생기 도는 얼굴과는 천지 차이였다. 따뜻한 목욕, 화장, 향수, 새 옷은 나뿐 아니라 점령된 프랑스의 어느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다. 가브리엘라는 크리스털 병에 담긴 샬리마 향수를 남기고 떠났다. 즐거웠던 시간이 떠오르는 소중한 물건이라 가브리엘라가 사라진 후로 늘 지니고 다녔지만 금세 다 써버릴까 염려되어 단 한 방울도 사용하진 않았다. 내게 안락함이란 어릴 적에나 느꼈던 일생 단 한 번의 경험, 젖니와도 같은 것이었다. 다른 여자들과 비슷해 보일 리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라파엘 박사의 팔을 꼭 잡고 차분하게 행동하려고 애썼다. 라파엘 박사는 자신감 넘치는 걸음으로 빨리 걸었다.  

- 검은색 나치 문장이 찍힌 붉은 깃발들이 연회장 전체에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 있고, 탁자 위에는 하얀 식탁보에 잘 어울리는 도자기 그릇과 꽃 장식이 놓여 있었다. 겨울, 그것도 한창 전쟁 중인 때 장미를 볼 수 있다는 것쯤은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검은색 타일이 깔린 바닥에 빛을 뿌리고 그 빛을 받은 새틴 구두가 반짝였다. 샴페인, 보석, 아름다운 사람들이 촛불 아래 모여 있었다. 연회장은 와인 잔을 들어 올리는 손으로 부산스러웠다. 춤 볼! 춤 볼! 와인이 연회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마시고도 남을 양이라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일반 식료품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점령군에 연줄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품질 좋은 와인을 구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독일군이 샴페인 수천 병을 징발했다는 소문도 있었고, 우리 시골 집 지하 창고도 텅 빈 지 오래였다. 내게는 와인 한 병도 더할 나위 없는 사치였다. 그런데 이곳에는 와인이 물처럼 흘러넘쳤다. 승리한 자들과 정복당한 자들의 삶이 얼마나 다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 높은 발코니에 앉아 흥청망청 즐기는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다른 고상한 모임과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보니 외모가 특이한 사람이 많았다. 마치 하나의 틀로 찍어낸 듯 마르고 각진 얼굴에 광대뼈가 발달하고 눈이 고양이처럼 길게 찢어졌다. 금발에 투명한 피부, 비정상적일 만큼 큰 키가 그들이 네피림임을 말해주었다.

- "이게 바로 자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광경이야."

라파엘 박사가 아래로 보이는 수백 명의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다시 한번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역겨움을 느꼈다.

"온 프랑스가 굶어 죽어가는데 이렇게 흥청망청할 수 있다니요."
"유럽 전체가 굶고 있지."

라파엘 박사가 고쳐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음식이 많죠? 어떻게 와인도 넘쳐나고 옷과 신발도 저렇게 고급일 수 있어요?"

내가 물었다.
"이제 이해하는군."

라파엘 박사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뭘 위해 싸우는지 알려주고 싶었어. 자넨 어려. 어떤 적과 싸우고 있는지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려울 테지."
거울처럼 반짝거리는 황동 난간에 몸을 기대자 차가운 금속이 닿은 팔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 "천사학은 그저 머릿속으로 두는 체스 게임이 아니야. 공부를 막 시작하고 보나벤투라나 아우구스티누스에 빠져 있을 땐 단순한 이론 싸움으로만 보이지. 하지만 우리 일은 질료형상론에 관한 토론에서 이기거나 수호천사들을 분류하는 데 그치지 않아."

라파엘 박사는 아래쪽사람들을 가리켰다.

"자네 일은 바로 여기, 진짜 세상에 있어."
라파엘 박사의 말에서 열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악마의 목구멍 동굴에서 세라피나 박사가 내게 한 말과 흡사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반드시 돌아가서 살아갈 지상의 세계에 있어.'

- "이게 그저 몇 안 되는 레지스탕스와 점령군의 싸움이 아니라는 건 알겠지. 지금까지 우리는 소모전을 치렀어. 태초부터 계속 돼온 투쟁이지.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천지가 창조되고 이십 초 후 타락천사들이 땅속으로 떨어졌다고 했어. 그들의 사악한 천성이 갓 생겨난 우주의 완벽함을 깨뜨리고 선과 악 사이에 끔찍한 균열을 만든 거야. 이십 초 동안 우주는 순수하고 완벽하고 온전했어. 그동안에 존재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 봐.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고통도, 의심도 없이 사는 거지. 상상해 봐."
나는 눈을 감고 그런 우주를 그려보려고 애썼다.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완벽한 우주가 단 이십 초간 존재했어."

라파엘 박사가 웨이터한테서 샴페인 두 잔을 받아 들며 말했다.

"우리는 그 나머지 시간을 살고 있는 거고."
차갑고 달지 않은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혀가 움찔할 정도로 놀라운 맛이었다.

- "천사학을 창시한 사람들은 적을 모조리 소탕하겠다는 계획을 세우며 즐거워하곤 했지. 하지만 그들이 스스로의 능력을 과대평가했다는 건 여러 연구에서 밝혀졌어. 그들은 전쟁이 금방 끝날 거라고 생각했어. 감시자와 그 자손들이 얼마나 사악한지, 속임수와 폭력, 파괴를 얼마나 즐기는지 몰랐던 거야. 감시자들은 천사 태생으로 본래의 타고난 천상의 아름다움을 지켜왔지만 그 자손들은 폭력에 물들었어. 그리고 놈들은 손대는 모든 것을 차례차례 물들이고 있지." 

- 라파엘 박사는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처럼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한참 후에 다시 이었다.
"인류를 멸하면서 조물주가 느끼셨을 괴로움을 생각해 봐. 아버지가 자기 자식들을 죽이는 슬픔을, 그것이 얼마나 극단적인 선택이었는지를. 수백만 생명이 물에 빠져 죽고 문명이 사라졌어. 하지만 네피림은 여전히 기세등등해. 경제적 탐욕, 사회적 불의, 전쟁, 이것들 모두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징후야. 지구의 모든 생명을 말살하는 것으로도 악을 없애지는 못했어. 그렇게 현명했던 가경자 신부들도 그런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지. 싸울 준비도 제대로 못 했고. 아무리 평생을 연구에 바친 천사학자라 해도 역사를 간과하면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예야. 중세 종교재판을 거치면서 우리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어. 곧 복구하기는 했지만. 19세기 역시 걱정스러웠어. 스펜서와 다윈, 마르크스의 이론을 왜곡해 사회를 조종하려는 시대였지. 그나마 그전까지는 잃었던 영역을 늘 되찾아왔지만 지금 상황은 점점 걱정스러워지고 있어. 우리 힘은 줄고 있어. 죽음의 수용소에는 우리 편이 넘쳐나. 네피림은 독일과 합세해 대단히 큰 승리를 거뒀어. 그들은 이런 식의 발판을 마련하려고 오랫동안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 

-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에 담아두었던 질문을 꺼낼 기회였다.

"나치가 네피림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렇지는 않아. 네피림은 인간 사회에 빌붙어 기생하는 존재야. 어차피 몸의 일부는 천사고 일부는 사람이니 자유자재로 인간들 사이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갈 수 있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들은 늘 나치 같은 무리에 붙어 사람들을 부추겼어.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하면서 성공하게 만들었지. 아주 오래전부터 써온 방식이야. 일단 승리하고 나면 네피림은 그 대가를 톡톡히 챙기고, 조용히 전리품을 나누곤 다시 사람들 눈 뒤로 숨어버리지." 

라파엘 박사가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름난 자들'이라고 불렸잖아요."
"그랬지. 실제로 놈들 가운데 유명한 자가 많고. 하지만 그들도 재산을 이용해 스스로를 보호하고 비밀을 유지했어. 여기도 그런 놈이 많아. 사실은 오늘 영향력이 매우 큰 사람을 자네한테 소개해주고 싶어."
라파엘 박사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멋진 실크 턱시도를 입은 키 큰 금발의 신사와 악수를 나누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하리만치 낯이 익었다. 어쩌면 예전에 만났던 사이인지도 몰랐다. 남자도 낯이 익은지 내 드레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아닙니다. 그냥 여기 사랑스러운 아가씨랑 시간을 좀 보냈죠. 제 조카 크리스티나입니다. 크리스티나, 이분은 퍼시벌 그리고리 씨야."
나는 일어서서 손을 내밀었다. 남자가 손에 입을 맞추었다. 차가운 입술이 내 따뜻한 피부에 닿았다.
"아름다우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내 얼굴에는 눈길 한 번주지 않고 드레스에만 잔뜩 관심이 쏠려 있었다.

- 남자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라파엘 박사에게 한 개비 권하더니 놀랍게도 사 년 전 가브리엘라가 갖고 있던 바로 그 라이터를 켰다. 남자가 누구인지 떠오르는 끔찍한 순간이었다. 퍼시벌 그리고리는 가브리엘라를 안고 있던 그녀의 애인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라파엘 박사와 그는 정치와 연극 그리고 최근 전쟁 상황에서 주목할 만한 일에 대해 가벼운 담소를 나누었다. 잠시 후 퍼시벌 그리고리는 고개를 까딱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의자에 앉아 아무리 생각해도 라파엘 박사가 어떻게 그를 아는지, 애초에 가브리엘라가 어쩌다 그와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지만 좀 더 신중해지기로 하고 말을 아꼈다. 

- "네피림은 아주 강해. 하지만 지금까지 늘 패배했고 그 순간 재빨리 모습을 감추지, 자신들이 붙어 있던 인간 숙주가 대신 벌을 받도록 두고서 말이야. 잔혹한 짓은 다 인간들이 저질렀다는 식이지. 나치에는 네피림이 득실거려. 하지만 권력을 잡고 있는 건 100퍼센트 인간들이지. 그래서 놈들을 전멸시키기가 어려운 거야. 인간은 악을 잘 알고, 심지어 원해. 우리 본성에는 악에 유혹당하는 성질이 있어. 그래서 쉽사리 넘어가지." 
"조종당하는 거죠."

내가 말했다.
"그래, 어쩌면 그 말이 더 정확하겠지. 좀 관대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나는 벨벳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부드러운 촉감이 등의 맨살을 진정시켜 주었다. 그렇게 따뜻한 느낌은 몇 년 만에 처음인 것 같았다. 음악이 시작되자 남녀가 짝을 지어 연회장 중앙으로 나와 춤을 추었다.

- "왜 제 눈이 파란색이냐고 물어보셨어요?"
라파엘 박사가 나를 보았다. 잠시 그가 어쩌면 속내를 드러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저 부드럽게 말했다. 

"내 수업을 들었다면 잘 알 텐데. 네피림이 어떻게 생겼다고 했는지 기억해? 유전적인 특성 말이야."
라파엘 교수의 수업 내용을 떠올린 나는 창피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네피림은 파란 눈에서 빛이 나고 머리는 금발에 키가 보통 사람보다 크다. 

"아, 네. 기억나요."
"자네는 꽤 키가 크지. 그리고 말랐고. 눈이 파란색이라면 검문을 더 쉽게 통과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 "물론이야. 탐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 리라였지. 하지만 왜 자네처럼 경험 없는 사람을 이런 중요한 탐사에 동행시켰을까? 위원회의 나이 많은 사람들을 제쳐두고 왜 겨우 마흔 살밖에 안 된 세라피나가 탐사대장이 되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세라피나 박사가 학문적으로 큰 야망을 품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원래부터 클레마티스 신부를 연구했던 라파엘 박사가 직접 탐사를 떠나지 않은 것이 이상하긴 했다. 내가 탐사대에 포함된 것은 동굴 위치를 알아낸 데 대한 포상이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세라피나와 나는 동굴에 젊은 학자를 보내고 싶었어."

라파엘 박사가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자네는 이 분야의 관습에 많이 노출되지 않아 탐사에 대해 예단을 내리지 않을 사람이었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나는 빈 샴페인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내가 직접 갔다면, 나는 보고 싶어 하던 것만 봤을 거야. 하지만 자네는 그곳에 실제로 무엇이 있는지를 봤지. 결국 다른 사람들이 못 본 걸 발견했고 말이야. 솔직히 말해봐. 어떻게 찾았지? 동굴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세라피나 박사님이 모두 보고하셨을 텐데요?"

문득 라파엘 박사가 왜 나를 이런 곳으로 데려왔는지 알 것 같아 긴장했다.
"그 사람은 물리적인 것만 설명했어. 자네가 얼마나 많은 사진을 찍었는지, 동굴 바닥까지 내려가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이런 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말했지.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뭔가 더 있었어. 뭔가에 두려움을 느꼈잖아."
"죄송해요. 무슨 말씀이신지 못 알아듣겠어요."

- 라파엘 박사는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의자에 등을 기댔다.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아직도 그가 잘생겼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불안했다.

"이제 안전한 파리로 돌아왔는데도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군."
나는 새틴 드레스의 매무새를 고치며 대답했다.

"정확히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동굴에는 사람을 큰 두려움에 빠뜨리는 뭔가가 있었어요. 아래로 내려갈수록 모든 게 아주... 어두워졌어요."
"당연히 그렇겠지. 동굴은 산 아래 깊이 있으니까."

라파엘 박사가 말했다.
"물리적인 어둠이 아니었어요."

어차피 시작해 버렸지만 너무 많이 말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전혀 달랐다고요. 근본적이고 순수한 어둠, 한밤중에 춥고 텅 빈 방에서 잠을 깼을 때 멀리서 들리는 폭탄 소리와 함께 느끼는 어둠.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악몽 같은 어둠이었어요. 온 세상이 타락했다는 걸 확인해 주는 듯한 어둠."

- 라파엘 박사는 나를 물끄러미 보며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악마의 목구멍에는 우리만 있는 게 아니었어요. 감시자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라파엘 박사는 계속 나를 평가하는 눈치였다. 그의 표정이 놀라움인지 두려움인지 아니면 바라건대 감탄인지 알 수 없었다.

 
- "일행과 떨어져 강을 건넜어요.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고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안 나요. 확실히 아는 건 그들을 봤다는 거예요. 그들은 어두컴컴한 감옥 안에 서 있었어요. 클레마티스 신부가 본 것과 똑같았죠. 그중 하나가 저를 똑바로 바라봤어요. 풀려나고 싶어 한다는 걸, 인간들 사이에 섞여 경애받고 싶어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그 천사는 거기서 수천 년 동안 우리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 라파엘 박사가 상석에 앉으며 내게 옆에 있는 긴 의자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반대쪽 끝에 가브리엘라 레비 프란체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 년 만이었다. 겉모습은 내 기억과 다르지 않았다. 짧은 단발의 검은 머리와 화사한 붉은색으로 칠한 입술, 주의 깊고 차분한 표정도 여전했다. 하지만 전쟁에 지쳐 빈혈 환자처럼 보이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가브리엘라는 애지중지 각별한 보호를 받은 여자 같았다. 그녀는 도서관에 모인 그 누구보다도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지내고 있었다. 
내가 라파엘 박사와 함께 들어서는 모습을 본 가브리엘라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녹색 눈동자에서 왠지 비난하는 듯한 감정이 읽혔다. 우리의 경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었다. 내가 그녀를 경계하듯이 가브리엘라도 나를 경계했다. 

- "그럼 물건은?"

라파엘 박사가 물었다.
가브리엘라가 일어서더니 탁자에 묵직한 가죽가방을 올려놓았다.

"리라는 제가 갖고 있어요."

그녀는 작은 손을 갈색 가죽가방에 얹으며 말했다.

"저는 세라피나 박사님이 탄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어요. 앞에 가던 사람들이 체포당하는 걸 보고 운전사에게 차를 돌려 몽파르나스로 가자고 했죠. 다행히 귀중한 물건이 든 가방은 제가 갖고 있었고요."

- "조건이 뭡니까?"
"교환이죠. 보물과 천사학자들을 맞바꾸자는 겁니다."
"놈들이 말하는 '보물'이 정확히 뭡니까?"

라파엘 박사가 조용히 물었다.
"정확하게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우리가 도피 산맥에서 뭔가 중요한 것을 찾아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요구를 들어줘야 할 것 같습니다." 

수녀가 말했다.

- "천사학자들이라면 우리 규칙을 지킬 거라고 믿습니다."

라파엘 박사의 말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내가 아는 세라피나라면 다른 사람들까지도 입을 못 열게 할 겁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보였다.

"놈들이 끔찍하리만큼 잔인하다는 건 알지만, 세라피나는 심문을 견뎌낼 겁니다."

-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모두 네피림이 우리 측 요원들을 얼마나 잔인하게 다루는지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원하는 게 있을 때는 더욱 잔혹해졌다. 그들이 사용하는 고문 방법에 대해서는 나도 들은 적이 있었다. 놈들이 내 동료로부터 정보를 빼내려고 무슨 짓을 할지 상상이 갔다.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몰라도 오늘밤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만일 동굴에서 찾아온 물건을 잃는다면 지금까지 한 일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그만큼 소중한 물건이지만, 그렇다고 그걸 위해 천사학자 여러 명을 희생해야 할까?

- "우리는 져서는 안 되는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창립자 신부들은 이단으로 몰릴 위험을 무릅쓰고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자행한 숙청과 화형을 견디며 문서를 보존했고, 에녹의 예언을 필사했고, 목숨을 바쳐 자료와 활동 자금을 물려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싸움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보나벤투라는 <성서 주석>에서 천사학의 창립 기반이 된 형이상학을 대단히 논리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천사들은 물질적인 존재인 동시에 영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스콜라학파의 신부들, 던스 스코터스, 수백수천의 사람들이 악한 자들의 책략에 맞서 싸웠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우리가 세운 뜻을 위해 목숨을 희생했습니까?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건 그들의 싸움입니다. 하지만 그 수백 년의 세월은 선택을 해야만 하는 바로 이 순간으로 이어졌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우리 어깨에 무거운 짐이 올려졌습니다. 우리에게 미래를 결정할 권리가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싸움을 계속할 수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라파엘 박사가 일어나 앞으로 걸어가더니 가죽가방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결정을 서둘러야 합니다. 바로 투표를 하죠."

- 모두 라파엘 박사 뒤에 조용히 앉아 있던 나를 보았다. 위원들은 가브리엘라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내 뜻으로 최종 결정이 나는 것이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이번 결정이 천사학자들 사이에서 내 자리를 만들어줄 터였다.
위원회는 내 결정을 기다렸다.

- 뒤따라온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나는 벽 아래 쪼그리고 앉아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었다. 내가 배반한 세라피나 박사와 다른 탐사대원들을 위해 울었다. 내 한 표의 중대함이 무겁게 짓누른 양심 때문에 울었다. 내 결정이 옳다는 건 알지만 누군가 희생해야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내 안에서 나 자신과 동료, 우리 사명에 대한 믿음이 산산조각 났다. 나는 선생님이자 훌륭한 조언자를 배신했다. 친어머니처럼 따랐던 사람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나는 투표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그걸 행사함과 동시에 천사학에 대한 믿음을 잃고 말았다. 

-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보려고 애썼다. 달빛 아래 가브리엘라는 더욱 아름다웠다. 검은 머리칼에서는 빛이 났고 붉은 립스틱은 하얀 피부와 극적인 대조를 이루었다. 허리에 벨트가 달린 호화로운 낙타색 외투를 입었는데 편안하게 잘 맞는 걸 보니 따로 맞춘 게 분명했다. 전쟁 중 그렇게 고급스러운 옷은 어떻게 찾아냈으며 돈은 어디서 났는지 궁금했다. 가브리엘라는 늘 아름답게 잘 차려입었다. 하지만 내게는 영화에나 나오는 옷처럼 보였다.

- 몇 년이 흘렀지만 나는 가브리엘라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이마를 찌푸린 건 블라디미르의 질문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번에는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형식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언제나처럼 침착하고 재치 있게 따끔한 금언을 섞어 대답한 게 분명했다. 블라디미르는 온 신경을 집중해 귀 기울였다. 그의 눈길은 잠시도 가브리엘라를 떠나지 않았다.

-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나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저녁부터 벌어진 상황에 가브리엘라 역시 나만큼이나 괴로웠을 터였다. 넷이나 되는 동료가 잡혀갔고 탐사의 결과물을 빼앗길지 모르는 상황을 생각하면 아무리 세라피나 박사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해도 즐거울 수는 없을 터였다. 게다가 무슨 일이 있었다 해도 두 사람은 각별하다고 할 만큼 가까웠고, 가브리엘라가 세라피나 박사를 따랐다는 건 내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뒷마당에서 본 가브리엘라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다른 표현은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몹시 힘든 싸움에서 승리한 듯한 얼굴이었다.

- 자동차 한 대가 멈추며 뒷마당에 전조등 불빛을 흩뿌렸다. 철문 사이사이로 새어 들어온 불빛이 촉수처럼 가지를 뻗은 커다란 너도밤나무를 환히 밝혔다. 한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가브리엘라가 뒤돌아보자 검은 머리칼이 종 모양으로 퍼졌다. 남자는 잘생기고 키가 컸다. 더블브레스트 재킷을 입고 잘 닦아 반짝거리는 구두를 신었다. 옷차림이 유별나게 고급스러웠다. 전쟁 중에는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온통 그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남자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자 그자가 저녁에 보았던 네피림, 퍼시벌 그리고리임을 알 수 있었다. 가브리엘라는 즉시 그를 알아보았다. 차에서 기다리라고 손짓하더니 블라디미르의 양쪽 뺨에 재빨리 입을 맞추고 돌아서서 연인을 향해 뛰어갔다. 

- 갑작스러운 광경에 나는 순간적으로 평정을 잃고 말았다.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내고 나섰다. 가브리엘라가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멈춰 섰다. 가브리엘라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위원회의 결정은 애초에 아무 상관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부터 가브리엘라는 가방을 연인에게 넘겨주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지난 몇 년 동안 가브리엘라가 보인 이상한 행동들, 즉 어디론가 사라졌던 일,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빨리 천사학계에서 지위가 높아진 일, 세라피나 박사와 사이가 틀어진 일, 어디서 났는지 알 수 없는 돈 등이 모두 이해되었다. 세라피나 박사가 옳았다. 가브리엘라는 적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 라파엘 박사가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희미한 슬픔의 그림자가 엿보였다. 내가 그에게 환멸을 느끼는 상황이 가슴 아픈 모양이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이었어, 셀레스틴."

그는 한참 만에 말하고서 내 팔을 붙잡고 다시 걸었다.

"언젠가는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가자고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 중앙 현관으로 가는 동안 끔찍한 광경을 목격해 마비된 것 같던 몸이 풀리면서 욕지기가 치밀었다. 라파엘 박사는 밤공기가 차가운 바깥으로 나를 데리고 나갔다. 파나르 르바소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돌계단을 내려가면서 라파엘 박사가 가방 하나를 내 손에 쥐여주었다. 가브리엘라가 뒷마당에서 들고 있던 것과 똑같은 가방이었다. 갈색 가죽에 반짝거리는 걸쇠까지 달려 있었다. 

- "그건 가짜야, 셀레스틴, 미끼라고. 가브리엘라는 자네가 빠져나가고 세라피나가 풀려날 수 있도록 적을 혼란시킨 거야. 탐사대에 참여한 일까지 포함해서 자네는 가브리엘라에게 많은 빚을 졌어. 이제 리라를 지켜야 해. 둘은 다른 길을 가지만 모든 게 하나의 사명을 위한 거야. 이 점을 꼭 명심해. 가브리엘라는 여기서, 그리고 자네는 미국에서 주어진 일을 해내는 거야."

- 세 번째 하늘. 
[그리고 내 앞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키가 무척 컸다. 얼굴은 태양처럼 빛났고 눈은 불타는 등잔 같았고 입술 사이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입은 옷은 새의 깃털 같았다. 발은 보라색이었다. 날개는 금덩이보다 밝게 빛났고 손은 눈보다 희었다.] 

- 에녹서. 
첫 번째 하늘.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찾아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이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노니, 지옥의 동굴을 향해 뒤돌아본다면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아래를 보는 순간 잃고 말리라.] -보이티우스 <철학의 위안>

- 두 번째 하늘. 
[그를 찬양하라, 나팔 소리로 그를 찬양하라, 솔터리와 하프로 그를 찬양하라, 탬버린과 춤으로 그를 찬양하라, 현악기들과 오르간들로 그를 찬양하라, 낭랑한 심벌즈로 그를 찬양하라, 우렁찬 심벌즈로.] -시편 150편

- 의도나 의미는 알 수 없었다. 한 카드에는 사다리를 오르는 천사가 그려져 있었는데, 천사들의 마리아 성당에 있는 천사들처럼 지나치게 장식적이지 않고 우아하고 현대적이었다. 
수녀들 대부분은 그녀와 의견이 다르겠지만, 에반젤린은 예술적인 상상력이 가미된 천사들의 모습이 더 좋았다. 성서에 묘사된 모습은 상상만 해도 무서웠다. 예를 들어 에제키엘이 본 바퀴는 에메랄드를 두른 동그란 모양으로 테두리를 따라 수백 개의 눈이 달려 있다고 했다. 그 옆에 있던 지품천사는 사람, 황소, 사자, 독수리, 네 개의 얼굴을 가졌다고 했다. 에제키엘의 환시에 나타난 천사의 모습은 지금까지 천사의 이미지로 고착된 르네상스 시대 작품과 비교하면 무섭다 못해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천사들은 나팔을 불거나 하프를 손에 들고 등에는 작은 날개를 달고 있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아무리 성서에서 말하는 현실과 동떨어졌다고 해도, 에반젤린이 소중히 여기는 천사의 모습은 이런 것이었다. 

- 에반젤린은 카드를 하나씩 살펴보았다. 1988년 12월에 보내온 첫 번째 카드에는 금빛 무늬가 있는 흰색 옷을 입고 금 나팔을 부는 천사의 그림이 있었다. 카드를 펼치자 미색 속지에 진홍색 잉크로 쓴 할머니의 우아한 손글씨가 보였다. 
[사랑하는 에반젤린,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오르페우스의 리라가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 건 시작에 불과해. 오르페우스를 둘러싼 신화가 워낙 많다 보니 우리는 그의 실제 삶이 어땠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어. 그가 태어난 해나 혈통은 물론이고 리라를 얼마나 잘 다루었는지도 몰라. 뮤즈 칼리오페와 강의 신 오이아그로스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것도 신화일 뿐이야. 신화를 역사와 분리하고 전설과 사실, 마법과 진실의 뒤엉킨 실타래를 푸는 게 우리 임무지. 그가 인류에게 시를 전했을까? 그가 지하 세계에서 리라를 발견했을까? 정말 역사가 전하는 것처럼 생전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을까? 기원전 6세기에 이르러 그리스 전역에서 노래와 음악의 대가로 알려졌지만 어떻게 천사들의 악기를 손에 넣었는지는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지. 네 엄마의 연구는 단지 리라의 중요성에 관한 오래된 이론을 확증한 것뿐이야.]

- 에반젤린은 붉은 잉크로 쓴 글이 이어지길 바라며 종이를 넘겼다. 방금 읽은 내용은 뭔가 더 긴 이야기의 일부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자신이 하는 일을 부풀려 더 근사하게 묘사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좌석 깊숙이 몸을 묻고 앉아 차분하게 하나하나 되짚어보던 베를렌은 혹시 자기가 리라 목걸이에 과잉 반응을 보인 건 아닐까 싶었다. 게다가 자동차를 습격한 자들이 그리고리와는 상관없을 가능성도 있었다. 어쩌면 오늘 벌어진 기이한 일들을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완벽한 논리가 따로 있을 수도 있었다. 

- 베를렌은 세인트로즈 수녀원 편지지를 꺼내 설계도 위에 놓았다. 두꺼운 코튼지로 만든 분홍색 편지지 윗부분에 장미와 천사를 화려한 빅토리아 시대 스타일로 공들여 표현한 그림이 있었다. 모더니즘을 선호하는 그였지만 놀랍게도 꽤 마음에 들었다. 에반젤린이 이야기할 때는 그냥 넘어갔지만 사실 이 편지지를 이백 년 전 수녀원장이 직접 디자인했다는 그녀의 말은 틀렸다. 나무 펄프를 이용해 종이를 만드는 화학적인 방식은 우편 서비스의 바탕이 된 것은 물론, 덕분에 개인이나 단체가 고유의 편지지를 따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혁신적인 기술은 185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발명되었다. 세인트로즈 수녀원의 편지지는 초기 수녀원장이 그려둔 그림을 이용해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사실 그런 일은 남북전쟁 이후 대호황을 누리던 시절에 비정상적으로 유행하기도 했다. 애비게일 록펠러와 같은 저명인사들은 파티의 저녁 메뉴판이나 명함, 초대장, 편지봉투와 편지지를 만드는 데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모두 가능한 한 최고급 종이를 구해 가문의 상징을 찍었다. 베를렌은 그런 식으로 개인이 따로 인쇄해 만든 고급종이를 경매에서 팔아본 경험이 꽤 많았다. 

- 하지만 그는 에반젤린이 틀렸다고 지적하지 않았다. 이제 와 생각하니 예상치 못한 그녀의 모습에 놀랐던 것 같았다. 완고하고 성질 나쁘고 지나치게 도서관 자료를 보호하려 드는 노인네는 상대할 준비가 단단히 되어 있었다. 자료를 보기 위해서라면 도서관 사람들에게 매달리는 일도 숱하게 해온 그는 사서를 상대해 이기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들에게서 동정을 사는 데 도가 텄다. 하지만 에반젤린을 보고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름답고 지적인 그녀는 묘하게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수녀였으니 어떤 식으로든 가까워질 수 없었다. 그녀도 아주 조금은 그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에반젤린에게 쫓겨 수녀원을 나오는 와중에도 그는 이상하게 뭔가 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베를렌은 눈을 감고 밀턴의 술집에 앉아 있던 그녀의 모습이 어땠는지 정확히 떠올려보려 애썼다. 케케묵은 수녀 복장만 빼면 평범한 밤 외출을 나온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손을 잡았을 때 살짝이지만 미소 지어 보이던 그녀를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 베를렌은 흔들리는 객차에 앉아 멍하니 공상에 빠져들었다. 에반젤린에 대한 생각에 푹 빠져 있는데 뭔가 창문을 긁는 소리가 나 퍼뜩 정신이 들었다. 거대한 흰 손이 불가사리 모양으로 손가락을 활짝 편 채 밖에서 창문을 누르고 있었다. 깜짝 놀란 그는 몸을 뒤로 빼고 다른 각도에서 창밖을 다시 살펴보았다. 다른 손이 하나 더 나타나더니 창문을 철썩 때렸다. 두껍고 네모난 플라스틱 창문이 창틀에서 쑥 빠질 것 같았다. 붉은색 깃털이 순식간에 창문을 훑었다. 베를렌은 눈을 깜박이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어 이상한 꿈을 꾸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버렸다. 기차 밖에서 두 개의 거대한 생명체가 날고 있었다. 그들은 커다랗고 빨간 눈에 살기를 잔뜩 품고 그를 노려보면서 커다란 날개를 이용해 기차와 나란히 날고 있었다.  

- 예전에는 바깥세상과 접촉해도 별 감흥이 없었다. 파리에서 살며 역겨운 인간들과 부대껴야 했던 젊은 시절 그는 인간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인간들처럼 끊임없이 허둥지둥할 필요가 없었다. 고생스럽게 일할 필요도, 뭔가를 축하하거나 즐거워할 일도 없었다. 지겨웠다. 하지만 몸이 아픈 후로 그는 변했다. 인간들을 지켜보기 시작해 그들의 이상한 버릇을 흥미롭게 살폈다. 인간들을 측은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 그리고리는 이런 현상이 보다 큰 변화의 일부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큰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경고를 받았고 이미 그 변신의 자연스러운 과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새롭고 놀라운 감정을 느끼게 될 거라고 들었는데, 정말로 고통스러워하는 인간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런 이상한 감정에 어리석게도 마음이 크게 흔들리곤 했다. 인간은 열등한 존재이며 그들이 겪는 괴로움은 우주 질서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비례해 당연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짐승의 고통은 인간보다 조금 더 겉으로 드러날 뿐이다. 하지만 퍼시벌은 인간에게서 아름다움을 보기 시작했다. 의식을 행하는 모습, 가족을 사랑하는 모습, 헌신적으로 신을 받드는 모습, 신체적인 약점에 굴하지 않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여전히 인간을 멸시했지만 인간이 처한 역경의 비극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인간들이 자기 존재가 중요하다는 듯 살아가고 죽는다는 점이었다. 이런 생각을 오털리나 어머니에게 말한다면 두 사람은 대놓고 비웃을 터였다. 

- 차가운 바람은 방해가 되지 않았다. 오로지 삐걱거리며 갈비뼈를 조이는 가죽끈과 숨 쉴 때마다 타들어가는 듯한 가슴, 뼈가 부딪치다 못해 가루로 으스러지는 듯한 무릎과 엉덩이에만 감각이 느껴졌다. 재킷을 벗고 가죽끈을 풀어 차가운 공기로 불에 덴 것 같은 피부를 진정시키고 싶었다. 짓이겨진 채 썩어가는 날갯죽지가 옷 속에서 튀어나와 있어서 꼽추나 짐승, 세상 사람들 모두가 피하는 기형적인 존재처럼 보였다. 이렇게 늦은 밤에 돌아다니다 보면 아무 근심 없이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건강한 인간과 신세를 바꾸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고통에서 해방될 수만 있다면 인간이 된다 해도 그리 억울할 게 없었다.

- 한참 걷다 보니 통증이 심해졌다. 퍼시벌은 눈에 띄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반짝거리는 황동과 붉은 벨벳으로 꾸민 멋진 가게였다. 따뜻한 실내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매캘런 위스키를 한 잔 주문하고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사람들을 지켜볼 수 있는 한적한 구석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첫 잔을 비우다가 멀리 반대편에 앉은 여자를 발견했다. 1930년대 스타일로 자른 검은 머리에 윤기가 도는 젊은 여자였다. 친구 여러 명이 여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쓰레기 같은 현대식 옷차림 -몸에 붙는 청바지에 가슴이 깊게 파인 레이스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이긴 했지만 퍼시벌이 과거 다른 시대에 알았던 여자들처럼 고전적이고 순수한 아름다움이 엿보였다. 젊은 여자는 그가 사랑했던 가브리엘라 레비 프란체와 마치 쌍둥이 같았다.

- 한 시간 동안 퍼시벌은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여자의 몸짓과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니 가브리엘라와 외모만 비슷한 게 아니었다. 그건 어쩌면 가브리엘라를 다시 보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이 너무나 간절해서인지도 몰랐다. 젊은 여자가 말없이 조용하게 있으면 분석적이고 지적이던 가브리엘라가 떠올랐다. 젊은 여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한 곳을 빤히 보면 비밀을 쌓아두던 가브리엘라가 생각났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별로 말이 없는 모습이 꼭 사람들 틈에서 늘 말이 없던 가브리엘라를 보는 것 같았다. 퍼시벌은 관찰 대상이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한다고 추측했다. 친구들은 마음껏 수다를 떨도록 두고 자신은 실험을 하듯 냉정하게 친구들의 버릇과 장단점을 분석하는 듯했다. 퍼시벌은 여자가 혼자 남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 "엄청나게 차려입으셨네요."

여자가 퍼시벌의 턱시도를 보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높고 감정이 풍부했다. 차가운 목소리에 늘 같은 표정이던 가브리엘라와는 정반대였다. 이 차이가 단번에 퍼시벌의 환상을 깨뜨렸다. 그는 가브리엘라를 찾았다고 믿고 싶었지만 이 여자는 분명 자신이 바란만큼 가브리엘라와 닮지 않았다. 그럼에도 퍼시벌은 여자와 이야기하고 여자를 바라보며 지난 과거를 재현하고 싶었다. 

- 여자에게 맞은편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잠시 망설이던 여자는 그가 입은 비싼 옷을 한 번 더 흘깃 보고는 자리에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실망스럽게도 가브리엘라와 닮은 점은 더 없어 보였다. 여자는 피부에 작은 주근깨가 많았다. 가브리엘라의 크림색 피부에는 잡티 하나 없었다. 여자의 눈동자는 갈색이고 가브리엘라의 눈동자는 밝은 녹색이었다. 하지만 동그란 어깨나 짧게 자른 검은 머리칼이 뺨을 가리는 모습은 퍼시벌의 환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퍼시벌은 그 술집에서 가장 비싼 샴페인 한 병을 시켰다.  

- 나중에 가브리엘라가 특별히 더 심한 처벌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가브리엘라가 죽기를 바랐다. 실제로 가브리엘라에게 고문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으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운이 좋았고 동료들이 특별한 계획을 세워 가브리엘라를 빼냈다. 그녀는 몸을 회복한 후 라파엘 발코와 결혼해 천사학계에서 승승장구했다. 퍼시벌은 가브리엘라가 최고의 천사학자라고 누구보다 먼저 말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들의 세계에 완벽하게 침투한 몇 안 되는 인물이었으니까.

- 그가 가브리엘라를 못 본 지도 오십 년이 넘었다. 다른 천사학자들처럼 가브리엘라도 계속 감시당하고 있었다. 낮이고 밤이고 그녀가 하는 일과 사생활은 늘 관찰 대상이었다. 퍼시벌은 가브리엘라가 뉴욕에 살고 있고 여전히 그와 그리고리 가문에 맞서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사생활은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의 가족이 가브리엘라 레비 프란체 발코에 대한 소식은 아무것도 그의 귀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이다. 


-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은 가브리엘라가 필연적으로 몰락해 가는 천사학을 되살려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하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퍼시벌은 가브리엘라도 이제 늙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답겠지만 생기를 잃었을 터였다. 그래도 지금 맞은편에 앉은 멍청하고 경박한 어린 여자와는 전혀 다를 것이다.
 퍼시벌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여자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어이가 없을 만큼 가슴이 깊게 팬 블라우스를 입고 상스러운 액세서리를 하고 있었다. 여자는 술에 취했다. 사실 샴페인을 마시기 전부터 이미 취해 있었다. 앞에 앉은 싸구려 여자는 가브리엘라와 전혀 달랐다. 

- 분명 예전에 본 적이 있는 그림인데 어디서 봤는지, 왜 이렇게 익숙한지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그림인지 알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다른 카드도 더 보고 싶었다. 잠시 후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림이 눈앞에 보였다. 천사는 보다 큰 그림의 일부였다. 

- 에반젤린은 색과 가장자리 모양에 따라 퍼즐을 맞추듯 카드를 이리저리 놓아보았다. 마침내 커다란 그림이 완성되었다. 밝게 빛나는 천사들이 천상의 빛을 향해 우아한 나선 모양의 계단을 줄지어 오르고 있었다. 에반젤린이 잘 아는 그림이었다. 바로 윌리엄 블레이크의 <야곱의 사다리>라는 수채화였다. 어릴 때 아버지가 대영박물관에 데려가 보여주었었다. 어머니는 윌리엄 블레이크를 매우 좋아해서 시집과 화첩을 모았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야곱의 사다리> 복제화를 사서 선물하기도 했다. 어머니가 죽고 두 사람이 미국으로 올 때 그 그림도 가져왔다. 소박한 브루클린의 아파트에 걸어놓은 유일한 장식품이었다.

- 에반젤린은 속지를 순서에 맞춰 늘어놓았다. 마침내 할머니의 우아한 손글씨로 쓴 커다란 편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렇게 읽어보니 에반젤린의 생각이 옳았다. 잘려 있던 문장들이 완벽히 들어맞았다.

 

- [너를 멀리 데리고 떠난 네 아버지를 원망하진 않는단다. 네 아버지가 네 보호자고 안젤라한테 그런 일까지 생겼으니까.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아무리 네가 보고 싶어도 난 널 직접 만날 수없단다. 내 존재는 너와 네 아버지를 위험에 빠뜨릴 거야. 네가 아버지 말대로 수녀원에 있다면 세인트로즈 수녀원의 선량한 수녀들까지도 위험에 빠뜨리겠지. 네 엄마가 그런 일을 당한 뒤로 나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없게 됐단다. 너도 스물다섯 살이 됐으니 이제 네 몸을 스스로 챙겨야 한다는 걸 이해하길 바란다. 네가 물려받은 유산과 운명은 한 나무에서 난 두 개의 가지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책임감도 생겼겠지.  
네가 엄마나 아버지가 하던 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구나. 내가 아는 네 아버지라면 천사학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을 테고 기초적인 기술도 알려주지 않았을 거야. 네 아버지 루카는 좋은 사람이고 좋은 의도로 네게 모든 걸 숨기려는 거지만 나라면 너를 다르게 키웠을 거야. 너는 우리 가족이 하늘과 땅 사이에 벌어진 위대한 비밀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겠지. 하지만 똑똑한 아이들은 보고 듣는 것만으로 알아차리기도 하는 법이다. 나는 네가 바로 그런 아이라고 생각한단다. 혹시 네 스스로 아버지가 숨겨온 비밀을 알아낸 건 아니니? 혹시 첫 영성체 때 페르페투아 수녀원장이 천사학 단체의 요청을 받아들여 널 맡겠다고 하기 전부터 이미 너는 세인트로즈 수녀원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는 걸 알아냈니? 혹시 너는 네가 천사학자의 딸이자 천사학자의 손녀고 우리의 희망이라는 걸 알고 있니? 만일 전혀 모른다면 앞으로 내가 할 이야기가 큰 충격일 수도 있겠구나. 에반젤린, 아무리 괴롭더라도 부디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길 바란다.
네 엄마는 화학자로 천사학에 발을 들여놓았다. 원래는 똑똑한 수학자였는데 과학 쪽에 더 큰 재능을 보였지. 정말이지 네 엄마는 기존에 정립된 이론과 기상천외하고 새로운 생각까지 두 가지를 동시에 품을 수 있는 최고의 학자였어. 첫 책에서 네 엄마는 진화론에 입각해 네피림이 멸종하는 건 불가피한 일이라고 주장했어. 네피림이 인간과 결혼해 피가 섞이면 천사의 특성이 희박해지다가 결국 사라진다는 논리적인 결론이었지. 나는 네 엄마의 접근법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내 전문 분야는 사회학과 신화였으니까- 엔트로피라는 개념이나 영혼이 육체를 이긴다는 고대의 진리는 이해했어. 안젤라가 네피림과 인간의 이종교배를 주제로 쓴 두 번째 책 -왓슨과 크릭이 기초를 세운 유전자 연구를 도입했지- 을 보고 우리 위원회는 깜짝 놀랐어. 안젤라의 지위는 금세 높아졌지. 스물다섯 살에 정교수가 되었고 그건 우리 조직에서 전례가 없는 영광이었어. 최신기자재와 최고의 연구실 그리고 무제한 연구비를 지원받았지.
명성을 얻으면서 위험도 커졌어. 안젤라가 적들의 목표물이 된 거야. 수많은 위협에 시달렸단다. 연구실 주변의 경계를 철통같이 강화했어. 내가 직접 확인했지. 그런데도 놈들은 연구실에서 안젤라를 납치했어.
아마 네 아버지는 엄마가 납치된 일을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을 거야. 말하자면 너무 마음이 아파서 나 역시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란다. 놈들은 안젤라를 바로 죽이지 않았어. 안젤라는 연구실에서 납치당한 후 몇 주 동안 스위스에 있는 네피림의 시설에 잡혀 있었어. 놈들이 자주 써먹는 방법이지. 중요한 인물을 납치하고 교환을 제안하는 거야. 우리는 늘 그런 제안을 거절했어. 하지만 안젤라가 납치되자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방침이고 뭐고 없었지. 안젤라만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면 세상 전부라도 넘겨줄 수 있었으니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네 아버지도 나와 의견이 같았다. 네 엄마의 연구 노트는 대부분 아버지가 갖고 있었어. 우리는 안젤라를 살려주는 대가로 연구 자료를 넘기기로 했지. 안젤라의 유전학 연구를 자세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것만은 확실했어. 네피림 사이에 질병이 돌아 놈들의 수가 줄고 있고 치료약을 찾고 있다는 거였지. 나는 안젤라를 납치한 녀석들에게 연구 노트에 놈들 종족을 구할 수 있는 비밀이 들어 있다고 했어. 다행히도 놈들이 교환에 응했고. 
어쩌면 놈들이 약속을 지킬 거라고 생각한 내가 순진했는지 몰라. 스위스에 도착해 놈들에게 안젤라의 연구 노트를 넘겨주고 받은 것은 내 딸의 시신이 든 관이었어. 죽은 지 며칠은 된 것 같았지. 여기저기 끔찍하게 멍들고 머리에는 피가 굳은 채 들러붙어 엉망이었어. 차가운 이마에 입을 맞추며 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는 걸 깨달았어. 안젤라가 죽기 전 며칠을 고통 속에서 보냈을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네 엄마가 죽기 전 느꼈을 공포가 마음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았어. 
이렇게 끔찍한 이야기를 들려주어 미안하구나.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비밀로 하고 아무 말 않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너도 어른이고 현실을 직시해야 할 나이야.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장 어두운 부분도 알아야 해. 집요하게 사라지지 않고 인류를 괴롭히는 악의 힘, 그리고 거기에 영합하는 우리 태도와 맞서 싸워야만 하는 거야. 하지만 절망 속에서 혼자 싸워야 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아다오.]

- [일기장에 담긴 안젤라의 이론은 음악이 신체의 분자구조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거야. 안젤라는 먼저 식물이나 곤충, 지렁이 같은 하등생물을 대상으로 실험을 시작해 점점 더 큰 생물까지 진행했어. 비망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네피림 아이의 머리칼 한 움큼을 이용한 실험까지 했다고 해. 천상의 여러 악기를 이용해서 -우리는 그런 악기를 여러 개 갖고 있었고, 안젤라는 그 악기들을 모두 다룰 줄 알았어- 네피림의 유전자 견본, 이를테면 떨어져 나온 날개 깃털이나 혈액을 가지고 실험을 했어. 안젤라는 몇 가지 천상의 악기가 만들어내는 음악이 실제로 네피림 신체 조직의 유전자 구조를 바꾼다는 걸 알아냈어. 더 나아가 특정 화음 구절을 들려주면 네피림의 힘이 약해지고 어떤 구절을 연주하면 오히려 힘이 강해진다는 것도 발견했지. 
안젤라는 자신의 이론에 대해 네 아버지와 자세히 의견을 나누었어. 네 아버지는 다른 누구보다도 네 엄마의 연구를 잘 이해한 사람이었지. 실험의 세부 내용은 매우 복잡해서 나로서는 정확히 어떤 과학적 방법을 사용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네 아버지의 도움으로 안젤라가 내린 결론을 이해할 수 있었단다. 네 엄마는 음악의 진동이 세포 구조에 믿을 수 없는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증명했던 거야. 특정 코드 진행을 연주하면 물질의 형태에 엄청난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고 해. 피아노 음악은 난초에 색소 변이를 일으켰어. 쇼팽의 연습곡을 들려주면 하얀 꽃잎에 분홍색 얼룩이 생겼고 베토벤을 들려주면 노란색 꽃잎이 갈색으로 바뀌었지. 바이올린 음악을 들은 지렁이는 몸의 마디가 늘었어. 트라이앵글을 쉴 새 없이 두드리자 많은 파리가 날개 없이 태어났지. 다른 증거도 많았어.  
얼마 전, 안젤라가 죽고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에모토 마사루라는 일본인 과학자가 비슷한 실험을 했다는 걸 발견했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을지 상상할 수 있겠지. 그 사람은 물을 대상으로 음악의 영향을 실험했어. 첨단 사진 기술을 이용해 음악이 물의 분자구조에 일으키는 변화를 확실히 알아볼 수 있도록 포착해 냈지. 그리고 음악을 들려주면 물이 새로운 분자구조로 바뀐다고 주장했어. 본질적으로 네 엄마의 실험과 같았고 음악이 만들어내는 진동이 가장 기본적인 단계의 유기물을 구조적으로 바꾼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 거야.
어떻게 보면 쓸데없는 연구지만 안젤라가 했던 천사 생물학 실험의 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흥미롭지. 네 아버지는 이상하리만큼 안젤라의 실험에 대해 말을 아꼈어. 내가 연구 노트에서 본 것 이상은 말해주지 않았지. 하지만 노트만 보고도 알 수 있었어. 네 엄마는 천상의 악기가 우리가 보유한 네피림의 유전자 견본, 주로 천사의 날개에서 떼어낸 깃털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한 게 틀림없어. 네 엄마는 천상의 악기들이 네피림 신체 조직의 가장 기본적인 유전자 구성 요소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야. 더 나아가 악기들로 특정 음악을 들려주면 세포 구조만 바뀌는 게 아니라 네피림 게놈의 안정성이 무너진다고 했어. 안젤라는 이걸 알아냈기 때문에 목숨을 잃은 게 틀림없어. 결국 놈들이 내 집까지 습격하자 네 아버지는 파리에서 네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거야. 네피림들이 모든 걸 알아낸 게 확실했지.
하지만 이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이미 입증된 안젤라의 여러 이론들에 숨겨진 한 가지 가설 때문이야. 오르페우스의 리라에 관한 가설이지. 네 엄마는 오르페우스의 리라를 1943년 애비게일 록펠러가 미국에 숨겼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자신이 발견한 천상의 악기의 힘과 오르페우스의 리라를 연결해 보자고 생각했지. 리라는 다른 악기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말이 있었거든. 네피림들은 안젤라의 비망록을 손에 넣기 전까지는 막연히 리라가 중요하다고만 생각하고 있었어. 하지만 안젤라의 연구 내용을 보자 리라야말로 네피림을 감시자들 이래 지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순수한 천사의 형태로 되돌려놓을 수 있는 물건이라는 걸 알게 된 거야. 어쩌면 안젤라는 현대에 오르페우스의 리라로 알려진 감시자의 리라를 이용해서 네피림 사이에 도는 병의 치료법을 알아냈던 것인지도 몰라.]

 
- [사랑하는 에반젤린,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오르페우스의 리라가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 건 시작에 불과해. 오르페우스를 둘러싼 신화가 워낙 많다 보니 우리는 그의 실제 삶이 어땠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어. 그가 태어난 해나 혈통은 물론이고 리라를 얼마나 잘 다루었는지도 몰라. 뮤즈 칼리오페와 강의 신 오이아그로스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것도 신화일 뿐이야. 신화를 역사와 분리하고 전설과 사실, 마법과 진실의 뒤엉킨 실타래를 푸는 게 우리 임무지. 그가 인류에게 시를 전했을까? 그가 지하 세계에서 리라를 발견했을까? 정말 역사가 전하는 것처럼 생전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을까? 기원전 6세기에 이르러 그리스 전역에서 노래와 음악의 대가로 알려졌지만 어떻게 천사들의 악기를 손에 넣었는지는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지. 네 엄마의 연구는 단지 리라의 중요성에 관한 오래된 이론을 확증한 것뿐이야. 네피림에 맞서는 우리에게 큰 진전을 가져다줄 그 가설이 결국 네 엄마를 죽음으로 몰았어. 이제 너도 모든 걸 알게 되었구나.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건 네 엄마의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거야. 나는 그 일을 완성하려고 평생을 바쳤어. 그리고 네가 내 뒤를 이어야 해. 
네 아버지는 안젤라의 연구가 우리 사명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네게 말했을 수도 있고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 그건 모르겠구나. 네 아버지는 이미 몇 년 전에 나와 연락을 끊었고 앞으로도 내게 진실을 알려줄 것 같지 않아. 하지만 너는 달라. 네가 네 엄마의 연구에 관해 자세히 알고 싶어 한다면 네 아버지는 모든 걸 말해줄 거야. 가문의 전통을 잇기 위해 네가 해야 할 일이지. 그건 네가 받은 유산이자 운명인 거야. 루카는 내가 줄 수 없는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그냥 직접 물어보기만 하면 돼. 그리고 부디 인내심을 가지렴. 진심 어린 축복을 보내며, 네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신성한 임무의 미래에 네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무시무시한 위험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명심해. 세상에는 우리가 하는 일을 끝장내고 싶어 하는 자가 많아. 그들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라면 닥치는 대로 살인을 저지를 거야. 네 엄마는 그리고리 가문이 죽였어. 바로 그자들이 네피림과 천사학자들 사이에 끊임없는 전투를 일으키고 있지. 네게 닥칠 위험을 늘 경계해야 한다. 누가 너를 해치려 하는지도.] 

-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연구실 구석에 두고 다니는 숄더백에 편지를 넣고 그만 나가려다가 흠칫 놀라 멈추었다.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편지에 확실한 내용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일부러 혼란스럽게 쓴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록펠러 여사를 치켜세우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고 있었다. 말미에서 상대의 탁월한 취향을 칭찬하는 편지가 많았다. 전에는 그저 편지를 마무리하며 쓴 형식적인 말이라고 생각해 그냥 지나친 구절들이었다. 그는 다시 가방에서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상대방의 예술적 감각을 칭찬하는 구절에 신경 써가며 살펴보았다.

- 칭찬은 대개 록펠러 여사가 선택한 그림이나 디자인과 관련해서였다. 한 편지에서 이노센타 원장은 '여사님의 완벽한 예술적 안목과 상상한 바를 항상 정확히 구현해 내시는 실력을 누구나 인정합니다'라고 썼다. 또 두 번째 편지를 마무리하면서는 '존경해 마지않는 친구인 여사님의 섬세한 표현력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늘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라고 했고 또 다른 편지에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여사님의 손은 눈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걸 표현해 내시는군요'라는 구절이 보였다.

- 베를렌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이 모든 칭찬이 무슨 예술품에 대한 거지? 애비게일 록펠러가 이노센타 원장에게 보낸 편지에 그림이나 디자인이 들어 있었던 걸까? 에반젤린은 자료실에서 찾은 편지에 다른 물건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노센타 원장은 후원자인 록펠러 여사에게서 받은 편지에 그런 물품이 있었던 것처럼 답신을 보냈다. 만일 애비게일 록펠러가 자신이 그린 그림을 여러 점 넣어 보냈고 베를렌이 그걸 찾아낼 수만 있다면 미술사학자로서 순식간에 엄청난 지위에 오르게 될 터였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베를렌은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 최근 루도비카 수녀의 관심사는 식물이었다. 화초와 대화를 나누는 일은 위험하진 않지만 정신이 점점 흐려진다는 증거였다. 그녀가 휠체어 옆에 빨간색 양철 물뿌리개를 달고 수녀원을 돌아다니며 화초에 물을 주거나 다듬을 때마다 우렁찬 목소리로 암송하는 <실낙원>을 들을 수 있었다. "인간 세계에서 말하는 낮과 밤을 아홉 번 세는 동안 / 그는 그 소름 끼치는 무리와 함께 / 불못에서 뒹굴며, 불사의 몸이지만 / 숨진 듯 녹초가 되어 누워 있었다."

- 그런 방면으로 교육을 받지 못한 에반젤린의 눈에도 실험 결과로 보이는 서류였다. 혈액검사 결과인 듯했다. 손으로 쓴 서류도 있었는데 의사가 작성한 진료 기록 같았다. 하지만 에반젤린은 늘 건강했고 단 한 번도 병원에 갔던 기억이 없었다. 사실 아버지는 그녀를 절대 병원에 데려가지 않으려고 했고, 그녀가 아프거나 다치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썼다. 서류 중에는 반짝거리는 검고 얇은 물건도 들어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놀랍게도 엑스레이 필름이었다. 필름마다 위에 그녀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에반젤린 안젤리나 카치아토레. 

- 그는 자신이 죽고 나면 오털리와 그리고리 가문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았다. 퍼시벌은 가문의 가장 큰 희망이었다. 그의 위풍당당하고 남자다운 금빛 날개는 언젠가 그가 막강한 자리에 올라 아버지의 탐욕스러운 선조들과 어머니의 고결한 피를 이어가리라는 약속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 날개마저 잃은 채 가족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있었다. 그는 가문의 위대한 수장이 되기를 꿈꾸었고, 수많은 네피림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아들들은 스네자 가문의 화려한 날개를 갖고 태어나 멋진 깃털로 그리고리 가문의 명예를 드높일 거라고 믿었다. 딸들은 천사의 아름다움을 타고날 것이며 마법의 힘을 쓰고 영리하고 천상의 예술을 익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허물어져가는 그에게 이제 남은 건 없었다. 수백 년 동안 쾌락만 좇던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알 것 같았다.
오털리 역시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기에 퍼시벌의 실패를 받아들이기가 더욱 어려웠다. 어머니가 그렇게 원했음에도 퍼시벌이 제대로 천사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것처럼 오털리는 그리고리 가문에 후손을 이어주지 못했다.
 
- 막달레나 수녀의 손가락에서 돌아가는 묵주 구슬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하늘의 천사들을 묘사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마치 예배당에 새로 생긴 것처럼 눈길을 끌었다. 유리창을 가득 채운 천사들의 크기와 세밀한 정도, 화려하고 생생한 색깔이 전과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창문에 아주 작은 할로겐 전구들이 찬양하듯 줄지어 박혀 있었다. 에반젤린은 천사가 모두 몇 명인지 세보았다. 하프, 플루트, 트럼펫 등 천사들이 손에 든 악기는 파랗고 빨간 유리창에 흩뿌린 금화처럼 보였다. 베를렌이 보여준 설계도의 문장이 찍혀 있던 곳이 바로 이 창이었다. 에반젤린은 할머니가 보낸 카드와 그 겉면에 그려진 아름다운 천사 그림들을 떠올렸다. 예배당 유리창을 그렇게 자주 올려다봤으면서 왜 한 번도 이 그림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못 했을까?

 

- 창문 중 하나의 아래쪽 돌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사람에게 바른 것을 알려주려고 그 옆의 천사가, 천 명 가운데 한 중개자가 그를 불쌍히 여겨 "그가 구렁으로 내려가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제가 그를 위한 속전 贖錢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면.] -욥기 33장 23~24절

- 에반젤린은 세인트로즈 수녀원에서 보낸 오랜 세월 동안 같은 구절을 매일 읽었다. 읽을 때마다 그 구절은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았다. 미끈거려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듯 머릿속과 마음속을 이리저리 흔들며 돌아다닐 뿐이었다. 이제 '중개자' '구렁' '속전'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셀레스틴 수녀가 옳았다. 일단 눈여겨보기 시작하면 모든 곳에서 살아 숨 쉬는 천사학을 찾을 수 있었다. 

- 누군가 어깨를 두드리는 바람에 에반젤린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필로메나 수녀가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에반젤린은 시키는 대로 예배당을 나왔다. 수치심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 밀려왔다. 수녀들은 그녀를 믿지 못하고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런 수녀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 "당연하죠. 나이 든 수녀들은 다 알아요. 우리 세대의 수녀들은 천사를 공부하는 일에 열중하곤 했어요. 창세기 28장 12절에서 17절, 에제키엘서 1장 1절에서 14절, 루카복음서 1장 26절에서 38절에 나오는 내용 말이에요. 정말이지 밤이고 낮이고 천사 생각만 했어요." 
필로메나 수녀가 앉은 자세를 바꾸자 의자가 삐걱거렸다.

"그렇게 우리는 오랜 스승인 유럽의 천사학자들이 핵심 과목으로 정한 내용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수녀원이 다 파괴되고 말았어요. 우리가 쌓아온 지식, 세상에 역병처럼 번지는 네피림을 없애려던 우리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것 같았지. 하루아침에 우리는 그저 목숨 바쳐 기도만 하는 수녀들이 되고 말았어요. 정말이에요. 나는 우리가 다시 싸울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했고 우리가 전사라고 선언했어요. 적과 맞서 싸우는 게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바보 겁쟁이들이야." 

- "1944년에 일어난 화재는 사고가 아니었어요."

필로메나 수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직접적인 공격이었지. 우리가 부주의해서 피에 목마른 미국의 네피림들을 과소평가했던 거예요. 그들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유럽에 있는 천사학자들의 근거지 대부분을 파악하고 있었어요. 우리는 미국이 예전처럼 그나마 안전하다고 착각했던 거예요. 미안한 말이지만 내 생각에는 셀레스틴 수녀 때문에 우리 수녀원이 큰 위험에 노출됐던 것 같아요. 셀레스틴 수녀가 오고 공격이 시작됐죠. 우리 수녀원만 당한 건 아니에요. 그해 미국에 있는 수녀원들은 백 차례도 넘게 공격당했어요. 원하는 물건을 찾아내려고 네피림들이 여기저기 뒤진 거죠." 
"하지만 왜죠?"
"물론 그들이 원한 건 셀레스틴 수녀였어요. 적들은 셀레스틴에 관해 아주 잘 알고 있었어요. 셀레스틴 수녀가 이곳에 왔을 때 나는 엄청난 상처를 입고 지치고 병든 그녀를 직접 봤어요. 얼마나 참혹한 과정을 거쳐 탈출했는지 알 수 있었죠. 그리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건데, 셀레스틴은 이노센타 원장께 물건 하나를 전달했어요. 여기서 우리가 소중히 지켜야 할 물건이었죠. 셀레스틴은 적들이 원하는 무언가를 이리로 갖고 온 거예요. 그들은 셀레스틴이 미국으로 달아난 건 알았지만 어디로 숨었는지 몰랐죠." 

- "이노센타 원장은 미국에서 이름 높은 학자이기도 했어요. 역대 수녀원장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클라라 원장의 제자인 안토니아 원장의 수제자였죠. 클라라 원장은 유럽의 천사학회에서 미국에 지부를 세우라는 지시를 받고 이곳 밀턴으로 오셨던 프란체스카 수녀의 방식이었죠. 기도는 그저 헌신이나 의식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불완전한 것을 고칠 수 있는 해결책이었어요. 워낙 기도의 힘을 굳게 믿는 분이라 나는 기도로 화재를 막으려나보다 생각했어요."
필로메나 수녀는 한숨을 내쉬더니 안경을 벗어 바짝 마른 하얀 손수건으로 닦았다. 그리고 깨끗해진 안경을 다시 코에 걸치고는 이야기를 더해도 될지 가늠하듯이 에반젤린을 날카롭게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갑자기 옆 통로에서 거대한 그림자 두 개가 나타났어요. 유별나게 키가 크고 마른 사람이었는데 꼭 불을 켠 것처럼 손과 얼굴이 하였어요. 멀리서도 머리칼과 피부에서 부드럽고 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게 보였죠. 여자처럼 커다란 눈은 파랗고 광대뼈가 솟았고 분홍색 입술은 도톰했어요. 구불거리는 머리칼이 얼굴을 조금 가렸고요. 하지만 어깨가 넓고 바지와 레인코트를 입었더군요. 신사처럼 차려입은 모습이 은행원이나 변호사와 다르지 않았어요. 보통 사람의 옷차림새로 보아 홀리크로스 수도사들은 아니었어요. 수도사들은 갈색 예복을 입고 삭발을 하니까요. 어쨌든 그들이 누군지, 사람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었죠. 지금은 그들이 네피림 가운데서도 전투를 맡는 계급인 기보림이란 걸 알아요. 잔인하고 항상 피에 굶주려 있는, 감정이라곤 없는 것들이죠. 그들의 천사 쪽 선조를 따라가 보면 대천사 미카엘까지 등장한다고 해요. 그렇게 끔찍한 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고귀한 혈통이지만 어떻게 그토록 기이하리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갖게 됐는지 이해가 가죠. 그자들의 정체를 낱낱이 알게 된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름다움이야말로 그들이 사악하다는 증거예요. 악마적이고 차가운 매력으로 누구에게든 쉽게 접근해서 해를 끼칠 수 있으니까요. 그들은 신체적으로 완벽해요. 하지만 하느님의 벌을 받아 불완전해진 완벽함이죠." 

- "셀레스틴은 오르페우스의 리라가 세상에 나오길 원치 않아요. 내 목숨과 영혼을 걸고 말하건대 리라가 어디 있는지 셀레스틴은 분명히 알고 있어요. 에반젤린 수녀가 나를 도와 그걸 찾아낸다면 우리는 함께 힘을 합쳐 그 괴물들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릴 수 있어요." 

- [과거에 어떤 무서운 일들이 있었는지, 지금 네가 어떤 위험에 처했는지는 이미 여러 차례 말했지만 네가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은 것 같구나. 내 이야기가 언제 네게 필요할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너는 평화롭고 조용하게 명상을 하며 깊은 믿음을 품고 세인트로즈 수녀원에서 소임을 다하고 있을 거야. 하지만 너에겐 더 큰 소명이 있어. 네 아버지가 세인트로즈 수녀원에 너를 맡긴 데는 이유가 있단다. 그리고 네가 천 년 넘게 이어온 우리의 천사학 전통에 따라 훈련된 이유도 있지. 
네가 지난 십삼 년 동안 살고 자란 수녀원을 처음 세운 프란체스카 원장은 깊은 신앙심으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세인트로즈 수녀원을 세웠어. 모든 방과 계단을 미국의 천사학자들의 필요에 따라 설계했지. 예배당은 프란체스카 원장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위업이야. 우리가 공부하는 대상인 천사들에게 바치는 빛나는 찬사라고 할 수 있지. 박아 넣은 금 한 조각 한 조각이 칭송이고 유리 한 조각 한 조각이 찬양이야. 그런데 네가 모르는 게 예배당 한가운데 있어. 작지만 가격을 따질 수 없는, 영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가치가 엄청난 물건이지.] 

- 가브리엘라는 앞장서서 빠르게 걷고 있었다. 요리조리 사람들을 피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베를렌이 따라잡기 벅찰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보니 가브리엘라의 외모는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몸집이 아담한 그녀는 150센티미터를 겨우 넘길 정도의 키에 무척 말랐으며 날카로워 보였다. 따로 맞춘 듯 몸에 꼭 맞는 검은 외투는 실크에 작은 흑요석 단추들이 줄지어 달린 에드워드 7세 풍이었다. 재킷도 어찌나 몸에 잘 맞는지 코르셋을 착용하고 입게 맞춘 듯했다. 칙칙한 옷 색깔과는 달리 보통 늙은 여자처럼 잔주름이 많은 얼굴은 분을 바른 듯 희었다. 틀림없이 일흔은 넘었을 텐데 왠지 모를 부자연스러운 젊음이 느껴졌다. 몸놀림은 훨씬 젊은 여자 같았다. 곧고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칼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고 등을 곧게 편 채 규칙적인 걸음걸이로 걸었다. 그녀의 잰걸음은 베를렌에게 따라올 테면 따라와 보라고 하는 것 같았다. 

- "위험할 때는 사람 많은 곳에 숨는 게 제일이죠. 관심을 끌지 않으려면 너무 조심스러워해서도 안 돼요."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 가브리엘라는 문에 기대선 채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실내는 어둑했지만 그녀의 피곤한 표정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가브리엘리는 눈앞을 가린 머리칼을 떨리는 손으로 쓸어 올리더니 다시 손을 가슴에 얹었다.

"이런 일을 하기에 난 정말 너무 늙었어."

가브리엘라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런 질문을 드려 죄송하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베를렌은 도무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의심을 살 만큼 많아요."

그녀가 말했다.
"의심이요?"
"인간인지 아닌지 하는 의심 말이에요." 

가브리엘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놀랍도록 맑은 녹색 눈 위로 잿빛 그림자가 무겁게 드리워 있었다.

"우리 조직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내가 '그들' 가운데 하나라고 믿어요. 이제는 정말 은퇴해야 할 것 같아요. 평생 그런 의심을 달고 살았으니."

- "어제 에반젤린이 보여준 애비게일 록펠러의 편지에 나오더군요. 애비게일과 이노센타 원장은 어떤 유물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듯했습니다. 그리스의 도자기나 트라키아의 예술품일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제 보니 그 물건이 진흙으로 만든 그릇 따위는 아닌 것 같군요."
"훨씬 귀중한 거예요."

가브리엘라가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말했다.

"하지만 그 가치는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으론 따질 수 없어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얘기예요. 이천 년이 넘도록 그걸 찾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알 수 없지만요. 아주 오래된 가치를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 "아주 오래된 물건이지만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의미가 있는 물건이죠.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고, 더 중요하게는 미래를 바꿀 수 있어요."
"수수께끼처럼 들리는군요."

베를렌이 담배를 끄며 말했다.
"퀴즈를 내려는 게 아니에요. 시간이 없어요. 지금 상황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해요. 오늘 아침 당신에게 일어난 일은 아주 오래전에 시작됐어요. 나도 어쩌다 당신이 이 일에 휘말렸는지는 몰라요. 편지가 당신을 이 상황의 한가운데로 몰아넣었다는 것 말고는." 

- "나를 믿어야 해요. 모든 걸 말해주겠지만 나도 얻는 게 있어야 해요. 일단 내 말을 듣고 나면 당신에게 자유는 없어요. 오늘밤 이후 당신은 우리 편이 되거나 숨어 살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해요. 어느 쪽을 택하든 당신은 남은 인생을 뒤쫓아오는 사람이 없는지 걱정하며 살아야 해요. 우리 사명에 얽힌 역사를 알게 되고 록펠러 여사가 어떻게 관여돼 있는지 들으면 -그건 아주 장대하고 복잡한 이야기 중 사소한 일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당신은 끔찍한 드라마의 일부가 될 테고 다시는 완전히 빠져나갈 수 없을 거예요. 과장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일단 진실을 알고 나면 인생이 180도 바뀔 겁니다. 되돌릴 길은 없어요." 
베를렌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가브리엘라의 말을 깊이 생각해 보았다. 마치 낭떠러지 끝에서 한 걸음 내디디라는 요구, 아니 펄쩍 뛰어내리라는 명령을 받은 것 같았지만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마침내 베를렌이 말했다.

"그 편지가 도피 산맥에서 발견한 물건이 어디 있는지 알려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발견한 물건이 아니라 숨겨진 물건이죠. 로도피 산맥으로 갔던 사람들의 목표는 리라를 되찾는 거였어요. 정확히 말하면 키타라죠. 잠시 우리가 가졌던 적도 있었어요. 지금은 다시 어딘가에 숨겨졌고요. 막대한 재력과 막강한 영향력으로 무장한 우리의 적도 그걸 꼭 찾고 싶어 해요." 

- "당신 집에 갔던 자들은 그들이 고용한 자들이에요. 그들에게 속한다고 봐야죠."
"퍼시벌 그리고리도 그들에 속하나요?"
"네. 확실히 그렇죠."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 베를렌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 속에서 뒤로 돌아서는 가브리엘라를 바라보았다. 두꺼운 띠를 두른 듯한 흉터가 등, 가슴, 배, 어깨를 가리지 않고 나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날카로운 푸주한의 칼에 베인 것처럼 보였다. 흉터 부위가 넓고 울퉁불퉁한 것으로 보아 제대로 꿰매지도 못한 것 같았다. 약한 빛 아래 드러난 피부는 벌겋고 거칠어 보였다. 흉터 모양으로 보아 채찍으로 때렸거나, 더 끔찍하게 생각하면 날카로운 칼날로 살을 여기저기 도려낸 듯했다.
"맙소사."

베를렌은 난도질당한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흉터는 끔찍했지만 이상하게도 굴 껍데기 같은 연한 분홍빛을 띠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한때 나는 그들보다 한수 위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더 똑똑하고 강하고 솜씨도 좋다고 말이에요. 전쟁이 벌어지던 시절 내가 파리에서 최고의 천사학자라고 생각했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다른 누구보다 빨리·윗자리로 올라갔죠. 정말이에요. 날 믿어요. 난 언제나 내가 하는 일에서는 최고였어요." 

- "젊었을 때 나는 이중간첩이었어요. 적들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한 가문의 후계자의 애인이 됐어요. 그들은 나를 주시했어요. 처음엔 매우 성공적이었지만 결국 발각되고 말았죠. 하지만 내가 아니었다면 누구도 그 가문에 침투할 수 없었을 거예요. 내게 일어난 일을 돌이켜보면 그들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있어요. 선은 언제나 승리한다는 유치한 미국식 사고방식은 당신을 구해주지 않아요. 장담하건대 당신은 끝장날 거예요." 

- "아주 좋아요."

가브리엘라가 조용히 말했다.
베를렌은 그녀가 무슨 말을 더 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대신 말없이 일어서더니 책상 서랍에서 갈아놓은 커피를 꺼내 주전자에 넣고 불위에 올렸다. 커피가 끓자 가브리엘라는 주전자를 가져와 아무 예고도 없이 팔팔 끓는 커피를 컴퓨터에 부어버렸다. 뜨거운 액체가 키보드 속으로 스며들었다. 화면이 하얘졌다가 다시 까매졌다. 컴퓨터 속에서 무언가 탁탁 튀는 끔찍한 소음이 들리다 이내 잠잠해졌다. 
베를렌은 커피에 흠뻑 젖은 노트북 옆에 서서 화를 참으려고 애썼지만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무슨 짓입니까?"
"꼭 필요한 것 말고는 사본을 남겨선 안 돼요."

가브리엘라가 손에 묻은 커피가루를 떨어내며 차분하게 말했다.

- "기계는 다시 사면 돼요."

가브리엘라의 목소리에서 미안한 감정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창가로 걸어가 팔짱을 낀 채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누구도 이 편지들을 읽어선 안 돼요. 그만큼 중요한 편지예요."

- 가브리엘라는 창밖을 내다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오래전 감시자라고 불리던 천사들이 사악한 짓을 벌인 죄로 유럽의 외딴 동굴에 갇혔어요. 죄수들을 이송하라는 명을 받은 대천사들은 감시자들을 묶어서 깊은 동굴에 집어던졌죠. 대천사들은 감시자들이 동굴로 떨어지며 지르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들었어요. 너무나도 비통한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마음이 흔들린 대천사 가브리엘이 그놈들에게 리라를 던져줬어요. 천사들이 쓰는 완벽한 리라였죠. 리라가 만들어내는 음악에는 기적적인 힘이 깃들어 있어 동굴에 갇힌 감시자들은 수백 년간 행복해하며 평화로운 마음으로 보낼 수 있었어요. 가브리엘의 실수는 심각한 결과를 낳았어요. 리라가 감시자들에게 위안과 힘을 주었던 거예요. 그들은 깊은 땅속에서 리라를 통해 시름을 잊고 지냈을 뿐만 아니라 더 강해지고 욕심도 더 커졌어요. 그들은 리라의 음악이 자신들에게 놀라운 힘을 준다는 걸 알게 됐죠." 
 
- "하느님 흉내를 내는 힘이죠."

가브리엘라는 새 담배에 불을 붙이고 말을 이었다.

"이건 천사학 아카데미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천상의 음악 수업에서만 가르치는 내용이에요. 우주는 하느님 목소리의 떨림으로 창조됐어요. 말씀의 음악으로 만들어졌죠. 그래서 우주는 하느님의 사자인 천사들이 만들어내는 음악으로 변하거나 좋아지거나 반대로 전부 파괴될 수도 있어요. 리라는 -그리고 천사들이 다루는 다른 천상의 악기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악기 여러 개를 우리도 수백 년부터 보유하고 있었어요- 그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힘이 있고요.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추측하고 있어요. 악기들이 가진 힘의 세기는 각각 달라요. 우리의 천상 음악 전문가들은 제대로 진동을 맞추기만 하면 일어나지 못할 우주적 변화는 없다고 믿고 있어요. 하늘이 빨갛게 변할 수도 바다가 보라색이 될 수도 풀밭이 오렌지색이 될 수도 있어요. 해가 공기를 데우지 않고 반대로 차갑게 식힐 수도 있고요. 아니면 악마가 온 세상을 덮을 수도 있겠죠. 그리고 리라는 아픈 사람을 낫게 하는 힘도 있다고 해요." 
베를렌은 그동안 멀쩡해 보였던 여자가 갑자기 정신이 이상해진 듯 늘어놓은 말에 어리둥절해져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이야 잘 믿기지 않겠죠."  


- [존경하는 록펠러 여사께
보내주신 서한은 때맞춰 도착했습니다. 저희는 매년 해왔듯 크리스마스를 맞아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올해 자선기금 모금행사는 예상보다 더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기부가 이어질 것 같습니다. 여사님의 도움은 저희에게 커다란 기쁨입니다. 여사님의 자비로움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으며 매시간 기도를 올려 여사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사님의 이름은 세인트로즈 수녀원의 수녀들 입에서 오랫동안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11월에 보낸 서한에서 언급하신 자선행사에 관해서는 세인트로즈 수녀원의 모두가 흔쾌히 찬성했습니다. 새로운 분들을 맞아들이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기대합니다. 최근 우리는 여러 전투를 치르며 갖은 고통과 고난을 겪었고, 오랜 시간 더할 나위 없이 위축되어 궁핍한 시절을 보냈으나, 그럼에도 무척이나 밝은 빛이 떠오르는 게 보입니다.  
훌륭한 안목은 천사의 음악과 같습니다. 정확하고 신중하고 이성을 뛰어넘는 신비로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안목의 진짜 힘은 빛을 비추는 데 있습니다. 인자하기 그지없는 여사님, 저희는 여사님의 현명한 선택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얼른 더 진행해서 알려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더 많은 빛을 볼 수 있기를, 빠른 시일 내에 저희 영혼까지 고양시키는 여사님의 편지를 받아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943년 12월 15일

함께 길을 찾는 이노센타 마리아 막달레나 피오리] 



- 베를렌이 소리 내어 읽은 다섯 번째 편지에서 가브리엘라의 관심을 끄는 구절이 있었다. 그녀는 베를렌에게 그 부분을 다시 읽어달라고 했다. 그는 뒤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

"훌륭한 안목은 천사의 음악과 같습니다. 정확하고 신중하고 이성을 뛰어넘는 신비로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안목의 진짜 힘은 빛을 비추는 데 있습니다."

- "두 분이 똑똑하고 선견지명이 있어서 안전한 장소를 찾아냈다는 사실은 축복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이제 그들이 사용한 방법을 알아내기만 하면 돼요. 리라가 있는 곳을 찾아내야죠."
베를렌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게 가능합니까?"
"애비게일 록펠러가 이노센타 원장에게 보낸 편지를 읽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어요. 확실히 이노센타 원장은 훌륭한 천사학자였어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똑똑했죠. 그분은 항상 애비게일 록펠러에게 천사학의 미래를 지켜달라고 부탁하곤 했어요. 악기들을 록펠러 여사가 간수하도록 한 일은 미래를 정확히 내다본 행동이었어요."

가브리엘라는 몸을 움직여야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처럼 방 안을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다 갑자기 우뚝 섰다.

"뉴욕 시 안에 있는 게 분명해요."
 
- "혹시 이노센타 원장이 어떤 시각적 이미지에 대해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는 걸 눈치채셨습니까? 애비게일 록펠러는 편지와 함께 도면이나 그림 또는 다른 미술품을 넣어 보낸 것 같습니다. 그건 록펠러 여사가 보낸 편지 속에 들어 있을 겁니다. 아니면 분실됐을 수도 있죠."
"맞는 말이에요. 편지들마다 뭔가 정형화된 양식이 있어요. 록펠러 여사가 보낸 나머지 편지를 찾아 읽어보면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분명 이노센타 원장이 제안한 내용을 더 발전시켰을 거예요. 아예 새로운 의견을 냈을 수도 있고요. 양쪽을 오간 편지를 옆에 놓고 비교해 봐야 전체 그림이 보일 것 같아요."
가브리엘라는 베를렌에게서 편지를 받아 외우기라도 할 것처럼 열중해서 읽었다. 그러더니 모두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정말 조심해야 해요. 이 편지들이 네피림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 그래서 편지 속의 비밀을 숨기는 게 다른 무엇보다 우선이에요. 퍼시벌이 이 편지들을 못 봤다는 건 확실해요?"
  
- "어떻게 그러시죠?"
"뭘요?" 

그녀가 도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되물었다.
"이렇게 사는 거요. 마치 이 모든 일이 이상할 게 없다는 듯 행동하시잖아요. 모든 걸 있는 그대로 인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가브리엘라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하도 오래전부터 이 전쟁에 참여해서 그런지 무감각해진 것 같아요. 이런 걸 몰랐던 시절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니까. 그들의 존재를 처음 인식하는 건 지구가 둥글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아요. 직접 보고 느끼는 것과 너무 다르니까요. 하지만 그게 사실이죠. 그들을 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채로 사는 건 상상조차 안 돼요. 어느 날 아침에 눈떠 우리가 자유롭고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란 말이죠. 이런 현실에 맞게 세상을 보도록 내 눈이 달라진 것 같아요. 나는 모든 걸 흑 아니면 백, 선 아니면 악으로 보죠. 우리가 선이고 그들은 악이에요. 우리가 살려면 그들은 죽어야 해요. 우리 쪽에도 타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긴 해요. 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대부분은 그들을 소탕하기 전에는 안심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 "그보다는 훨씬 복잡할 것 같은데요."

베를렌은 확고하기 그지없는 가브리엘라의 목소리에 놀라 말했다.
"물론 더 복잡해요. 내가 남들보다 특히 과격한 데는 이유가 있어요. 성인이 된 후로 평생을 천사학자로 살아왔지만 늘 지금처럼 네피림을 증오한 건 아니에요."

가브리엘라의 목소리는 조용하다 못해 언제라도 잦아들 듯 들렸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거의 들려준 적이 없는 이야기를 해볼까요? 이 얘길 들으면 아마 내가 왜 극단적인지 이해할 거예요. 왜 네피림을 하나도 남김없이 세상에서 쓸어버려야 하는지도 알 수 있을 테고."

- "파리 천사학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닐 때였어요. 2학년이었죠. 평생 다시없을 사랑을 만났어요. 당시에는 인정하지 않았고 중년이 될 때까지도 마찬가지였어요. 하지만 이제 이렇게 늙고 보니 -내가 보기보다는 훨씬 늙었어요- 두 번 다시 1939년 그 여름처럼 사랑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요. 열다섯 살이었으니 사랑에 빠지기엔 너무 어렸을지 모르지만요. 아니, 어쩌면 그렇게 어린 시절의 눈망울이 남아있을 때나 그런 사랑이 가능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정답은 없겠죠. 당연히." 
가브리엘라는 자신이 한 말을 스스로 곱씹어보는 듯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나는 점잖게 말해서 이상한 아이였어요. 사람들은 돈이나 사랑, 명예에 매달리는데 나는 뭐에 씐 것처럼 공부가 좋았어요. 우리 집은 부유한 천사학자 집안이었어요. 많은 친척들이 나와 같은 학교에서 공부했죠. 나는 지나치게 경쟁심이 강했어요.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성공하기 위해서 낮이고 밤이고 공부만 했어요.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성적을 올리고 싶어 했고 실제로 늘 수석을 차지했죠. 1학년 2학기쯤 보니 두 사람 말고는 눈에 띄는 학생이 없었어요. 한 사람은 나였고 또 한 사람은 셀레스틴이라는 여학생이었는데 우리는 나중에 둘도 없는 친구가 됐죠."  

 

- 베를렌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셀레스틴이요? 1943년에 세인트로즈 수녀원에 들어간 셀레스틴 클로셰트 말입니까?"
"1944년이죠. 하지만 그건 다른 이야기예요. 내 이야기는 1939년 4월의 어느 오후에 시작돼요. 파리의 4월 오후가 으레 그렇듯 쌀쌀하고 비가 내렸죠. 봄이면 자갈 깔린 도로에 빗물이 넘쳐 하수도가 막히고 정원에 물이 차고 센 강이 범람했어요. 그날 오후를 정확히 기억해요. 4월 7일 금요일 오후 한 시였어요. 오전 수업을 마치고 여느 때처럼 점심을 먹으러 밖으로 나가려던 참이었죠. 그날이 다른 날과 달랐던 건 내가 깜박하고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것뿐이었어요. 워낙 꼼꼼한 성격이라 비가 퍼붓는 봄날 우산도 없이 나오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그날은 그랬죠. 도서관을 나서고 보니 이러다간 쫄딱 젖겠다 싶었어요. 옆구리에 낀 책과 공책도 엉망이 될 게 뻔했죠. 그래서 학교 정문의 지붕 아래 서서 떨어지는 빗물만 보고 있었어요. 
쏟아지는 빗속에서 한 남자가 커다란 보라색 우산을 들고 나타났어요. 신사가 들고 다닐 법한 우산은 아니라고 생각했죠. 나는 학교 앞마당을 한가롭게 걷는 그를 유심히 지켜봤어요. 걸음걸이가 우아하고 반듯한 데다 기가 막히게 잘생긴 사람이었어요. 몸이 젖지 않게 해 줄 우산이라는 안식처가 필요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처음 보는 그 남자가 내게 다가와주길 바라며 계속 보고 있었어요. 마치 그 사람에게 주문을 거는 것처럼 말이죠. 
그때만 해도 시절이 달랐어요. 여자가 잘생긴 남자를 넋 놓고 보는 게 꼴사나운 일이었다면 마찬가지로 남자가 여자를 외면하는 것도 결례였죠. 예의라곤 모르는 놈이나 빗속에 떠는 여자를 내버려 두는 법이었어요. 그는 앞마당 중간쯤에서 내가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얼른 방향을 바꿔 나를 도와주러 왔어요. 
그가 모자를 살짝 올리자 커다랗고 파란 눈과 마주쳤어요. 쏟아지는 비를 뚫고 안전한 곳으로 모셔다 드릴까요?'라고 하더군요. 쾌활하면서도 유혹적이고 잔인하리만치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였어요. 이 한 번의 눈빛과 한마디 말에 나는 그대로 무너져버렸어요.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데려가줘요'라고 대답하고 만 거죠. 경솔한 대답이라는 걸 금세 깨닫고 덧붙였어요. '이 끔찍한 비를 피할 수만 있다면요.' 
그리고 내 이름을 묻기에 말해줬어요. 이름을 듣고 순간 기뻐하는 기색이 엿보였어요. '천사의 이름을 딴 건가요?'라고 묻더군요.
'복음을 전해주는 천사죠'라고 대답했어요.
내가 곧장 대꾸한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내 눈을 보고 웃더군요. 그의 눈은 시원하고 한없이 투명한 파란색이었어요. 평생 그런 눈은 처음 봤죠. 미소는 더없이 달콤했고요. 이미 나를 정복했다는 걸 아는 것 같았어요. 몇 년 뒤 삼촌인 빅터 레비 프란체가 이 사람을 위해 스파이 짓을 했다는 게 밝혀졌을 때, 혹시 그는 내 이름을 듣고 천사가 아니라 삼촌을 떠올리고 웃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했어요.
그가 손을 내밀며 말하더군요. '복음을 주는 천사님. 같이 가시죠.' 나는 그에게 손을 맡겼어요. 처음으로 그의 손이 닿던 그 순간, 그때까지의 내 인생은 사라지고 새로운 삶이 열렸어요. 
나중에 자신을 퍼시벌 그리고리 3세라고 소개하더군요." 

 

- "맞아요. 바로 그 사람이에요. 그때만 해도 나는 그가 누군지, 어떤 가문 사람인지 전혀 몰랐어요. 나이가 좀 더 들고 학교에서 많은 걸 배웠더라면 그 자리에서 돌아서서 달아났을 거예요. 하지만 난 아무것도 모르고 푹 빠지고 말았어요. 
커다란 보라색 우산을 쓰고 우리는 걸었어요. 그는 내 팔을 잡고 좁고 질퍽거리는 골목에 세워둔 자동차로 안내했어요. 반짝거리는 벤츠 500K 로드스터였죠. 멋진 은색 자동차는 빗속에서도 빛이 났어요. 자동차에 관심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차는 정말 대단한 물건이었어요. 당시 최고로 호화스러운 차였죠. 전동식 와이퍼와 잠금장치, 호화스러운 차체까지. 우리 집에도 꽤 비싼 차가 있었지만 퍼시벌의 벤츠 같은 차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요. 정말 귀한 차였죠. 사실 몇 년 전 2차 세계대전 이전에 만들어진 500K가 런던에서 경매에 나온 적이 있어요. 그 차를 다시 보고 싶어서 경매장에 갔었죠. 70만 파운드에 낙찰됐어요. 
퍼시벌은 마치 왕족이 타는 마차에 태우듯 과장된 동작으로 문을 열어줬어요. 나는 부드러운 좌석에 앉았어요. 젖은 살갗이 가죽 시트에 들러붙었죠. 깊이 숨을 들이마셔봤어요. 담배 냄새가 희미하게 섞인 향수 냄새가 났어요. 거북딱지로 장식한 계기판에서 버튼과 손잡이들이어서 누르거나 돌려달라는 듯 번쩍거렸어요. 계기판 위에는 운전용 가죽장갑 한 켤레가 접힌 채로 그의 손을 기다리고 있었고요. 평생 살면서 그렇게 아름다운 차를 보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죠. 좌석 깊숙이 몸을 묻고 행복을 만끽했어요. 
그가 벤츠를 몰고 생미셸 거리를 따라 시테 섬을 지나며 달릴 때 느꼈던 감정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어요. 비는 마치 우리가 자동차 안으로 무사히 피할 때까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봄을 맞은 꽃과 풀과 땅 위로 세차게 쏟아져 내렸어요. 내가 느꼈던 감정은 분명 두려움이었는데 그때는 사랑이라고 믿었어요. 퍼시벌이 위험한 사람이라는 건 알지 못했어요. 내가 아는 거라곤 위험하게 차를 모는 젊은 남자라는 것뿐이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본능적으로 그를 두려워했던 것 같아요. 어쨌든 그는 쉽게 내 마음을 사로잡았어요. 나는 그의 아름답고 창백한 피부와 기어를 조작하는 길고 섬세한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봤어요. 말도 나오지 않았어요. 그는 다리를 건너면서 속도를 높이더니 리볼리 가로 들어섰어요. 와이퍼는 요란스레 오가며 빗물 사이로 앞을 내다볼 수 있게 해 주었죠. 
'일단 점심을 먹으러 가야겠어요.' 그가 콩코르드 광장에 있는 커다란 호텔 앞에서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나를 보고 말했어요. '배고파 보여요.' 
'뭘 보고 내가 배고픈 줄 알죠?' 도발적으로 말하긴 했지만 사실 배가 고팠어요. 아침도 먹지 않은 터라 허기져 죽을 지경이었죠. 
'난 특별한 재능이 있어요.' 그가 차를 세우고 가죽장갑을 하나씩 벗으며 말했어요. '당신이 스스로 알아차리기도 전에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죠.' 
'그럼 말해봐요.' 그가 나를 대담하고 센스 있는 사람으로 보길 바라며 대답했어요. 사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지만요. '내가 가장 원하는 게 뭐죠?'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어요. 나는 첫 만남의 순간에 그랬던 것처럼 그의 파란 눈 뒤에 숨은 관능적인 잔인성을 보았어요.

'아름답게 죽는 것.'

그가 말했어요. 어찌나 조그맣게 말하는지 제대로 들었는지도 알 수 없었죠. 그는 그렇게만 말하고는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어요. 
그 이상한 말에 미처 대꾸하기도 전에 그는 내 쪽으로 와서 문을 열어줬어요. 우리는 팔짱을 끼고 식당으로 들어갔죠. 금으로 단장한 거울 앞에서 그는 모자와 외투를 벗어서 맡겼어요. 자신을 도우러 몰려든 웨이터들이 너무 굼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보면서요. 그가 움직이는 모습을 거울을 통해 자세히 살펴봤어요. 실루엣이 아름다운 연회색 개버딘 양복은 티 하나 없이 깨끗한 거울에 거의 파란색으로 비쳐 보였어요. 그의 파란 눈과 잘 어울렸죠. 피부는 죽은 사람처럼 창백해서 거의 투명해 보였어요. 그런데도 그 모습이 오히려 더 매력적이었어요. 마치 태양 아래 내놓지 않은 소중한 물건 같았죠." 

- 가브리엘라의 이야기를 들으며 베를렌은 전날 오후에 만난 퍼시벌 그리고리와 가브리엘라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남자를 연결하려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가브리엘라가 말하는 사람은 베를렌이 아는 늙고 병든 그리고리가 아니라 예전의 그리고리일 터였다. 여러 가지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베를렌은 가만히 앉아서 듣기만 했다.

- "겉옷을 받아 든 웨이터 한 명이 식당 안쪽 좌석으로 안내했어요. 정원이 내다보이는 연회장을 개조한 곳이었죠. 자리로 가는 동안 나를 뚫어져라 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어요. 내 반응을 살피는 것 같더군요.
메뉴를 보지도, 음식을 주문하지도 않았어요. 미리 준비해 둔 것처럼 와인과 음식이 나왔죠. 물론 퍼시벌은 원했던 성과를 거뒀어요. 겉으로 티 내지 않았지만 나는 정말 놀랐으니까요. 좋은 학교를 다니고 도시의 부유한 삶을 누린 나였지만 그는 내가 경험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고 보니 끔찍하게도 나는 교복 차림이었어요. 차를 타고 신나게 달리느라 생각도 못 하고 있었죠. 칙칙한 옷차림에다가 흠집투성이인 신발에 제일 좋아하는 향수마저 집에 두고 나왔지 뭐예요. 
'왜 얼굴이 빨개졌죠?' 그가 물었어요. 
나는 그저 주름치마와 빳빳한 흰 블라우스만 내려다보았어요. 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렸죠.
'당신은 여기서 가장 아름다워요. 천사 같아요.' 놀리는 기색은 전혀 없었어요.
'그럴 리가요.'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자부심이 다른 감정들을 압도했어요. '나이 많은 부자와 식사하러 온 여학생일 뿐인데요.'
'난 당신보다 별로 나이가 많지 않아요.' 그가 장난스럽게 말했어요.
'별로 많지 않은 건 얼마나 많은 거죠?' 내가 물었어요. 그는 이십 대 초반으로 보였어요. 그 정도면 그가 말한 대로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은 거였죠. 하지만 몸가짐이나 자신감 때문에 경험이 많은 사람처럼 보였어요.
'당신한테 관심이 많아요.' 내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가 말했어요. '공부는 재미있어요? 그럴 것 같아요. 우리 집이 그 학교 근처라 전에 몇 번 봤어요. 늘 도서관에 너무 오래 있다 나온 사람 같은 모습이더군요.' 
이미 내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뭔가 의심해야 마땅했지만 난 오히려 기뻐서 어쩔 줄 몰랐어요.

'날 봤어요?' 나는 이미 그의 관심을 받으려고 몸이 달아 있었어요. 
'물론이죠.' 그가 와인을 마시며 대답했어요. '당신을 볼 생각이 아니었다면 뭐 하러 거기서 서성거렸겠어요? 최근에는 좀처럼 당신을 볼 수없어 괴로울 지경이었죠. 당신도 자신이 얼마나 예쁜지는 알 거예요.' 
나는 오리 구이 한 점을 먹으려다가 잠시 멈칫했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결국은 이렇게 말했어요. 

'맞아요. 전 공부하는 게 제일 좋아요.'
'재미있는 공부라면 내게도 모두 들려줘요.' 그가 말했어요." 

- "그렇게 오후가 지났어요. 몇 시간 동안 이런저런 맛있는 요리를 먹으며 와인을 마시고 끝없이 대화를 나누었죠. 오랜 세월 동안 내게는 두 명의 친구가 있었어요.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그 두 친구뿐이에요. 어쩌면 당신이 세 번째 친구가 되겠죠. 나는 쓸데없는 잡담을 즐기는 성격은 아니에요. 그런데 퍼시벌과 얘기할 때는 잠시도 쉬지 않았어요. 마치 서로에게 들려주려고 그동안 이야기를 쌓아둔 것 같았죠. 대화를 나누고 음식을 먹으면서 점점 그와 가까워지는 것 같았어요. 어찌나 말을 잘하는지 나는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들었어요. 나중에는 육체적으로도 그만큼 사랑하게 됐지만 처음엔 그의 지성을 열렬히 사랑했어요. 
몇 주가 지나면서 난 점점 더 그에게 끌렸어요. 결국 하루라도 그를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죠. 공부에 대한 열정도 넘쳤고 천사학에 헌신하겠다고 서약했지만 도저히 그를 멀리할 수 없었어요. 우리는 학교 근처에 있던 그의 아파트에서 뜨거웠던 그해 여름의 오후들을 보냈어요. 숨 막히게 더운 여름이라 창문을 모두 연 그의 침실에서 시간을 보내느라 수업은 뒷전이었죠. 자꾸 이것저것 묻는 룸메이트에게 짜증이 났어요. 그를 못 만나게 하는 교수님들이 미웠고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퍼시벌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어요. 하지만 직감을 무시한 채 그를 계속 만나기로 마음먹고 말았죠. 그리고 처음으로 함께 밤을 보낸 날 또다시 뭔가 함정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어요. 하지만 내가 어떤 위험에 처했는지, 무슨 해를 입을지 정확히 표현할 수 없었어요. 그가 네피림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된 건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난 뒤였어요. 그때까지 그는 날개를 감쪽같이 접고 있었어요. 그동안 뻔히 볼 수 있었던 눈속임이었는데 내가 보지 않았던 거죠. 어느 날 오후 침대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날개를 펼쳤어요. 나는 금빛의 품에 안긴 것 같았어요. 그때 떠났어야 했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어요. 완전히 그의 주문에 걸려 돌이킬 수 없었죠. 말씀을 어긴 천사들과 고대의 여인들처럼 말이에요. 그들에겐 하늘과 땅을 뒤집어엎을 만큼의 열정이 있었죠. 난 그저 철없는 여자애였을 뿐이에요. 그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라면 영혼이라도 팔았을 거예요. 
어떻게 보면 영혼을 판 거나 다름없었죠. 관계가 깊어지면서 그에게 천사학회의 비밀을 넘겨주었으니까요. 그 대가로 그는 내가 빨리 출세해서 힘과 특권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었고요. 처음엔 소소한 정보를 요구하더군요. 파리에 있는 사무실 위치라든지 모임 일정 같은 열심히 정보를 넘겼어요. 점점 요구가 커졌지만 계속 협조했죠. 그가 얼마나 위험한 자인지 알게 돼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어요. 교수님들에게 우리 관계를 폭로하겠다며 협박하더군요. 나는 들킬까 봐 너무 무서웠어요. 그렇게 되면 난 내가 속한 유일한 공동체에서 추방될 테니까요. 
하지만 우리 관계를 비밀로 하기는 쉽지 않았어요. 어차피 들킬 게 뻔해졌을 때 내 스승인 라파엘 발코 박사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어요. 그런데 그분은 내가 처한 상황을 천사학에 유리하게 이용하자고 하셨죠. 나는 스파이가 됐어요. 퍼시벌은 내가 자신을 위해 일한다고 철석같이 믿었지만, 사실 난 최선을 다해 그의 가문을 무너뜨리고 있었죠. 전쟁이 계속되면서 우리 관계는 그런 식으로 점점 더 위험하게 굴러갔어요.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나는 네피림에게 천사학의 잘못된 정보를 넘기는 한편 폐쇄적인 네피림 세계의 비밀을 빼내 라파엘 박사에게 알려주었죠. 그러면 라파엘 박사는 그걸 학자들에게 가르쳤고요. 그러다가 네피림을 상대로 가장 큰 승리를 거둘 작전을 짜게 됐어요. 바로 그들에게 가짜 리라를 넘겨주고 우리는 진짜 리라를 갖는 거였죠. 
작전은 간단했어요. 세라피나 박사와 라파엘 발코 박사는 우리의 탐사 계획을 네피림이 간파했다는 걸 알았어요. 그들이 결코 포기하지 않고 리라를 빼앗으려 한다는 것도요. 두 분은 네피림을 따돌릴 계획을 세웠어요. 일단 고대 트라키아의 리라를 그대로 재현해 낼 수 있게 준비했어요. 묵직한 울림통, 두 개의 굽은 막대 팔과 그 사이를 잇는 가로대까지 똑같이 만들었죠. 악기를 실제로 만든 사람은 가장 저명한 천상의 음악학자 조지퍼트 마이클 박사였어요. 명주실을 백마의 꼬리털과 엮어서 현을 만들어 아주 세밀하게 재현하는 데 성공했어요. 물론 나중에 진짜 리라를 찾고 보니 훨씬 더 섬세했지만요. 울림통은 백금과 비슷한 금속 재질이었는데, 그때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 지상의 물질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었어요. 마이클 박사는 그 물질에 리라를 찾아내는 데 크게 기여한 발코 부부의 이름을 따서 발카인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현은 매끄러운 금색 실을 단단하게 꼬아서 만들어졌는데 마이클 박사는 대천사 가브리엘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거라고 결론을 내렸죠. 
진짜와 가짜는 확연히 차이가 났지만 발코 부부는 어쩔 수 없이 계획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진짜 리라를 담은 가방과 똑같은 가방에 가짜 리라를 넣었죠. 나는 한밤중에 천사학자들이 파리 시내를 이동할 계획이라고 퍼시벌에게 일러주었고 그는 매복 작전을 세웠어요. 모든 게 계획대로 됐다면 퍼시벌은 세라피나 발코 박사를 납치한 다음 천사학 위원회에 리라와 교환하자고 제안했을 거예요. 그럼 우리는 가짜 리라를 넘겨주고 세라피나 박사는 풀려났겠죠. 네피림은 마침내 원하던 물건을 손에 넣었다고 믿었을 테고요. 하지만 뭔가 일이 크게 잘못 돌아가기 시작했어요. 
라파엘 박사와 나는 리라와 세라피나 박사를 맞바꾸자는 데 찬성하는 쪽에 투표했어요. 우리는 위원회 사람들이 수장인 라파엘 박사의 의견을 따라올 줄 알았죠. 하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은 교환하지 않는 데 투표했어요. 계획이 엉망이 된 거죠. 결과적으로 투표가 동률로 끝나는 바람에 탐사에 참여했던 셀레스틴 클로셰트가 추가로 표를 행사했어요. 그녀는 우리가 세운 계획을 알 리 없었고 그래서 원래 규칙에 따르기로 결정했어요. 워낙 조심스럽고 세심한 성격이거든요. 결국 우리는 교환을 성사시키지 못했어요. 나는 내가 훔쳤다면서 가짜 리라를 들고 퍼시벌을 찾아가 어떻게든 해보려고도 했지만 너무 늦고 말았죠. 퍼시벌이 세라피나 발코 박사를 죽인 거예요. 
세라피나 박사 일을 후회하며 지금까지 살아왔어요. 하지만 내 슬픔은 그 끔찍한 밤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이제까지 들었으니 알겠지만 나는 그런 많은 일에도 불구하고 퍼시벌 그리고리를 사랑했어요. 아니, 어쩌면 그와 있을 때 느꼈던 감정에 지독하게 중독됐다고 할까? 지금생각하니 참 놀라워요. 나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날 잔인하게 고문하도록 내버려 둔 그를 포기할 수 없었다는 게 말이에요. 1944년, 미군이 프랑스를 해방시킬 때 마지막으로 그를 만나러 갔어요. 붙잡히기 전에 그가 달아나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작별인사를 하려고 했죠. 우리는 함께 밤을 보냈고 몇 달 뒤 내가 퍼시벌의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았어요. 무서웠어요. 내 상황을 어떻게든 숨겨보려고 나와 퍼시벌의 관계를 모두 아는 사람을 찾아갔어요. 라파엘 발코 박사였죠. 그는 내가 그리고리 가문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는지 잘 알았고 내 아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들에게서 지켜야 한다고 했어요. 라파엘은 나와 결혼해 내 아이의 아버지 행세를 했죠. 우리 결혼은 세라피나 박사를 좋아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대단한 스캔들이었어요. 하지만 어쨌든 내 비밀은 지킬 수 있었죠. 내 딸 안젤라는 1945년에 태어났어요.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안젤라는 에반젤린이라는 딸을 낳았죠." 

- 에반젤린이라는 이름을 듣고 베를렌은 깜짝 놀랐다.

"퍼시벌 그리고리가 에반젤린의 할아버지라고요?"

베를렌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요. 오늘 아침 당신 목숨을 구한 건 퍼시벌 그리고리의 손녀였어요."

"변한다고 해서 겁먹을 것 없어요. 네피림이 힘을 얻었다가 잃기를 반복하는 건 우주의 섭리입니다. 그에 저항하는 건 우리 의무이고 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적과 마찬가지로 비열해져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교양 있고 품위 있게 평화주의라는 유산을 지켜야만 합니다. 여러분, 우리 조직을 세우신 분들의 이상을 잊지 맙시다. 우리가 진정으로 전통을 소중히 여기고 지킨다면 결국 승리할 겁니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습니다!"

필로메나가 사납게 소리를 질렀다. 흥분해서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들이 금방 우리를 덮칠 겁니다. 오래전에 그랬듯이 말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짓을 잊었습니까? 더럽고 흉악하고 피에 굶주린 그 괴물들을 잊었어요? 이노센타 원장님의 끔찍한 운명을 기억 못 하는 겁니까?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 모두 짓밟히고 말 겁니다."
"경솔하게 행동에 나서기엔 우리 소명이 너무 소중합니다."

셀레스틴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에반젤린은 순간적으로 오십오 년 전 긴장한 모습으로 세인트로즈 수녀원에 도착한 젊은 여인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셀레스틴은 이야기를 하느라 기운이 다한 모양이었다. 손을 들어 입을 가리더니 기침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노쇠해지는 몸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몸은 먼지가 되어가도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환하게 불타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이. 

- "이노센타 원장님 역시 똑같은 생각이었을 겁니다. 많은 수녀들이 그분이 평화적인 저항을 위해 몸을 바쳤다는 걸 압니다." 
"평화적인 저항을 하다 어떻게 됐습니까? 그들은 이노센타 원장을 무자비하게 죽였습니다."

필로메나 수녀는 셀레스틴을 향해 말을 이었다.

"당신은 리라가 숨겨진 장소를 혼자만 알고 있을 권리가 없어요. 셀레스틴, 리라를 찾아낼 방법이 여기 있다는 걸 나는 압니다." 
"당신은 리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리라가 왜 위험한지도요."

셀레스틴의 목소리는 너무 힘이 없어서 에반젤린에게도 잘 들리지 않았다. 셀레스틴이 에반젤린의 팔에 손을 올리며 속삭였다.

"가자고. 여기서 더 싸워봐야 소용없어. 보여줄 게 있어요."

- 문 옆 벽에 달린 스위치를 켜자 드러난 모습은 에반젤린이 생각했던 대로였다. 좁고 기다란 방은 성당에서 신도들이 앉는 구역과 비슷한 크기였다. 시커먼 나무 기둥 여러 개가 낮은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다. 바닥에 진홍색, 에메랄드색, 감청색 등 다양한 색깔이 들어간 동양풍의 카펫이 깔려 있었고 벽에는 천사들을 묘사한 태피스트리들이 걸려 있었다. 금실을 아낌없이 넣어 짠 태피스트리는 어쩌면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래된 물건처럼 보였다.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탁자가 있고 그 위에 책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비밀 도서관." 

에반젤린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맞아요. 천사학 열람실이죠. 19세기에 수녀원을 방문한 천사학자와 고위 요원들은 우리와 함께 숨어 여기서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이노센타 원장님은 여기서 회의를 열곤 했죠. 그 후로 오랫동안 방치되었어요. 하지만 수녀원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에요."

- "자, 또 보여줄 게 있어요."
그녀는 수태고지를 표현한 멋진 태피스트리를 가리켰다. 대천사 가브리엘이 날개를 접고 고개를 숙인 채 성모마리아에게 예수가 탄생할 거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진정 복음을 주는 천사지요."

셀레스틴이 말했다.

"물론 듣는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그 신성함은 달라지지만, 에반젤린은 자격이 있어요. 자, 이제 저 태피스트리를 벽에서 떼어내요."

- 에반젤린은 셀레스틴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 자리에는 콘크리트 사이에 네모난 금고가 숨겨져 있었다.
"3, 3, 3, 9."

셀레스틴이 금고 다이얼을 가리키며 말했다.

"각 하늘에 속한 천사 계급의 수에 그 총합인 9를 붙인 거죠."
  
- "쉿, 에반젤린."

셀레스틴은 손을 들어 올려 에반젤린의 말을 막았다.

"줄 게 하나 더 있어요."
셀레스틴은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작은 종잇조각을 하나 꺼내 에반젤린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이 주소를 외워요. 천사학회를 이끄는 에반젤린의 할머니가 계신 곳이에요. 할머니는 에반젤린을 반갑게 맞이하고 내가 못다 한 일을 마저 해줄 거예요."

- "제가 떠나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요?"
"에반젤린이 돌아온다면 다른 이들이 위험해질 거예요. 천사학은 영원해요. 일단 시작하면 빠져나갈 수 없어요. 그리고 에반젤린은 이미 발을 담갔어요."
"하지만 수녀님은 천사학을 버리셨잖아요." 

에반젤린이 말했다.
"그 결과가 어떤지 봐요."

셀레스틴은 목에 걸고 있는 묵주를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내가 세인트로즈 수녀원에 몸을 숨겼기 때문에 에반젤린이 말한 젊은 방문객이 지금 위험에 처한 걸 수도 있어요."
셀레스틴은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보라는 듯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겁먹을 것 없어요."

셀레스틴이 에반젤린의 손을 잡았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 이 삶을 포기하면 다른 삶을 얻는 거예요. 에반젤린은 길고 영광스러운 전통의 일부가 될 거예요. 크리스틴 드피상, 아시시의 성 클라라, 아이작 뉴턴 경, 나아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뒤를 잇는 거죠. 천사학은 숭고한 부름이에요. 어쩌면 가장 고귀한 소명이라고 할 수 있죠. 선택받기 쉬운 게 아니에요. 용기가 있어야 해요." 

- "가브리엘라가 자랑스러워할 거예요."

셀레스틴이 말했다.

"나는 더 자랑스러워할 거고요. 에반젤린 수녀가 수녀원에 처음 왔을 때부터 특별한 천사학자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에반젤린의 할머니와 내가 파리에서 함께 공부할 때, 우리는 동료 가운데 누가 성공하고 누가 실패할지 정확히 골라낼 수 있었어요. 육감이랄까, 재능 있는 사람을 발견하는 능력이었죠." 
"제가 실망시켜드리지 않으면 좋겠어요, 수녀님."
"에반젤린을 보고 할머니가 떠올라 놀랄 때가 많았어요. 눈, 입, 걸음걸이까지. 이상할 정도로요. 쌍둥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가브리엘라가 그랬던 것처럼 에반젤린에게도 천사학이 잘 맞았으면 좋겠어요."

- 에반젤린은 셀레스틴과 할머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셀레스틴이감정이 북받쳐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얘기해 줘요. 할아버지가 누구예요? 에반젤린은 라파엘 발코 박사의 손녀인가요?"
"모르겠어요. 아버지가 그 얘기는 안 해주셨거든요." 

에반젤린이 말했다.
셀레스틴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 "할머니에게 내가 용서한다고 전해줘요. 그때는 쉬운 선택이 없었다는 걸 나도 안다고.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한 거예요. 세라피나 박사님 일은 할머니 잘못이 아니라고, 다 용서했다고 전해줘요." 
에반젤린도 힘을 주어 셀레스틴을 안았다. 풍성한 수녀복 속에서 느껴지는 늙은 여인의 몸은 마르고 연약했다.

- 퍼시벌은 어머니에게 따귀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분명 어머니는 그가 몸이 아파서 싸우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지못해 오털리에게 모든 권한을 내준 굴욕에 퍼시벌은 끓어오르는 화를 억지로 참고 있었다. 퍼시벌은 스네자가 잘 참은 자신을 칭찬할 줄 알았다.

- "오털리가 할 수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아."

스네자가 말했다.
퍼시벌은 어머니의 말투를 곰곰이 되새기며 속뜻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오털리가 뭘 잘못했나요?"
"아들아, 오털리가 뭘 잘못했다는 게 아니야. 큰소리치고 있다만 그 애는 끔찍한 곤경에 처했단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퍼시벌이 말했다. 멀리 수녀원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뜻이었다. 오털리가 오빠 없이도 잘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네 동생 날개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지?"

스네자가 물었다.

- "내가 말해주지. 1848년 파리에서 사교계에 데뷔할 때였어."
퍼시벌도 그때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오털리의 날개는 그때쯤 막 돋아나고 있었다. 다른 젊은 네피림들처럼 그녀도 무척 자랑스럽게 날개를 펼쳐 보였다. 스네자의 날개처럼 형형색색이었지만 크기는 아주 작았다. 시간이 지나면 크게 자랄 터였다.

- "왜 오털리가 그렇게 오랫동안 날개를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는지 궁금하겠지. 제대로 자라지 않아서야. 오털리의 날개는 어린아이들 것처럼 작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날지 못할뿐더러 제대로 펴서 보여줄 수도 없지. 그런 날개를 펼쳤을 때 오털리의 모양새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울지 상상이 되니?" 
"몰랐어요." 

퍼시벌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오털리에게 화가 났던 것은 잊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
"네 대답은 놀랍지도 않구나. 너야 오로지 혼자 즐기고 혼자 괴로워하느라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네 여동생은 백 년이 넘도록 우리 모두에게 고민을 숨기려 애쓰며 살았어.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애가 너나 나와는 다르다는 거야. 네 날개는 한때 눈부시게 아름다웠지. 내 날개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고. 오털리는 저급한 피를 타고났어." 

 

- "어머니는 오털리가 기보림들을 지휘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마침내 퍼시벌은 왜 어머니가 자신에게 오털리의 비밀을 말해주는지 알 것 같았다.

"오털리가 공격 지휘를 제대로 못 해낼 거란 생각인 거예요."
"네가 네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만 있었다면, 네가 우리 사명을 짊어질 수 있었다면, 우린..."

퍼시벌의 실패를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듯 스네자의 목소리에는 실망감이 가득했다.

- 베를렌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남자의 몸은 전날 밤기차 창문으로 봤던 바로 그 생물로 변해 있었다. 등에 달린 한 쌍의 진홍색 날개가 활짝 펼쳐져 깃털이 눈밭을 덮고 있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베를렌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덜덜 떨리는 이유가 추위 때문인지 눈앞의 충격적인 광경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 베를렌의 마음을 읽었는지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옳은 일을 한 거예요."
"총을 잡아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잔인한 살인자들이에요."

가브리엘라는 사람을 자주 죽여본 사람처럼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선과 악으로 나뉜 세상에서는 주저 없이 적을 구분해야 해요."
"저는 그런 식의 구분에 익숙하지 않아요."
"우리와 함께 있다 보면 달라질 거예요."

가브리엘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에반젤린도 조직의 일원인가요?"

베를렌이 물었다.
"에반젤린은 천사학에 대해 아는 게 없어요. 어렸을 때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거든요. 그 애는 젊고 순종적이에요. 대단히 똑똑하지 않으면 실패하기 십상인 성격이죠. 그 애를 세인트로즈 수녀원에 맡긴 건 그 애 아버지 생각이었어요. 가톨릭 신자였던 그 사람은 젊은 여자라면 수녀원 지붕 아래 숨겨둬야 안전하다는 안이한 생각을 품고 있었죠. 이탈리아 사람이라 어쩔 수 없어요. 그런 생각이 핏속에 흐르는 거예요." 
"에반젤린이 그런 아버지 말을 따랐다고요?"
"무슨 뜻이죠?"
"아버지가 하란다고 삶을 살 만하게 만들어주는 것들을 모두 포기했다는 거냐고요?"
"삶을 살 만하게 만들어주는 것들이 무엇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 같군요. 하지만 맞아요. 에반젤린은 시키는 대로 했어요. 루카는 에반젤린의 엄마이자 내 딸인 안젤라가 살해되자 에반젤린을 데리고 미국으로 왔어요. 아마 철저히 종교에 따라 키웠을 거예요. 내 생각엔 이미 어렸을 적부터 세인트로즈 수녀원에 보낼 준비를 한 것 같아요. 그러지 않았다면 이런 시대에 젊고 재능 있는 아이가 제 발로 수녀원에 들어갔겠어요?"  
"중세 시대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네요."

베를렌이 말했다.
"당신이 루카를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그리고 에반젤린도 모르죠. 둘은 유난히 사이가 좋았어요. 떼어놓을 수가 없었죠. 아버지가 시키는 거라면 에반젤린은 무슨 일이든지 했을 거예요. 자기 인생을 성당에 바치는 것까지도."

- 방으로 간 에반젤린은 서랍을 열고 중요한 물건들을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묵주와 오랫동안 모아둔 약간의 현금 말고는 별것이 없었다. 방 안을 둘러보자 가슴이 아파왔다. 며칠 전만 해도 여길 떠날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다. 남은 인생은 끝없이 이어지는 의식과 매일 똑같은 일과와 기도로만 채워지리라 생각했다. 매일 아침 기도하러 일어나고 매일 저녁 어둠에 잠긴 강을 보며 잠자리에 들 줄 알았다. 하루아침에 허드슨 강 물살에 녹아내리는 얼음처럼 확실한 것은 모두 녹아내리고 말았다.

- 에반젤린은 벽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비밀 벽돌을 빼냈다. 그 안에 천사학 노트를 넣어둔 금속 상자가 들어 있었다. 노트 사이에는 사진도 그대로 끼워져 있었다. 그녀는 노트 4분의 3쯤에 해당하는 부분을 펼쳤다. 거기에 어머니가 적어둔 실험 결과를 할머니 가브리엘라가 깨끗하고 정확하게 옮겨 쓴 내용이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노트에 쓰인 숫자들 때문에 살해당했다. 에반젤린은 자료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 갑자기 어디선가 명령이 떨어진 듯 그자들 모두가 동시에 외투를 벗어던졌다. 팔다리가 모두 맨살이었다. 그자들의 피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가 눈 위에서 번쩍거렸다. 똑바로 서자 큰 키 때문에 사람 없는 쇼핑몰에 서 있는 고대 그리스의 석상처럼 보였다. 등에 달린 거대하고 끝이 날카로운 빨간 날개를 활짝 펴자 줄기까지 선명한 깃털이 흐릿한 아침 햇살에 반짝거렸다. 에반젤린은 당장에 천사들을 알아보았다. 그들은 어릴 적 아버지를 쫓아갔다가 창고에서 봤던 그 짐승들과 비슷했다. 전과 달라진 점은 그녀가 아이에서 여인이 되었다는 것이었는데 그 차이 때문에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유혹에 사로잡혔다. 그들의 몸은 대단히 아름답고 관능적이어서 열망이 에반젤린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렇게 욕망을 느끼는 와중에도 그들의 모든 것, 그들이 선 자세부터 어마어마한 날개를 펼친 모습까지 모든 것이 괴물을 본 것처럼 소름 끼쳤다. 
  
- 불길과 연기 사이로 점점 더 많은 기보림이 보였다. 그들은 커다란 날개를 거세게 퍼덕거리며 한 마리씩 차례로 수녀원을 공격했다. 바람을 타고 높이 날아올랐다가 떨어지는 연처럼 순식간에 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무게가 없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가벼워 보였다. 그들의 움직임은 일사불란한 데다 너무 강력해 베를렌이 보기에도 도저히 대적할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은 정교한 발레 동작을 하듯 하늘을 날아 공격했다.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라 우아한 폭력의 협연을 펼쳤다. 서로 부딪치지 않도록 요리조리 피하며 치솟는 불길 사이로 움직였다. 베를렌은 그 파괴의 광경을 경외감에 차 바라보았다. 

- 녀석들 가운데 하나가 무리와 떨어져 숲 쪽에 서 있었다.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에 베를렌은 수풀에 몸을 숨긴 채 돌벽을 따라 녀석에게서 3미터쯤 떨어진 곳까지 접근했다. 더없이 우아한 모습이었다. 매부리코에 구불거리는 금빛 머리칼, 무시무시한 붉은 눈. 깊이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향긋한 체취가 느껴졌다. 가브리엘라의 말로는 놈들과 맞닥뜨리는 행운(또는 불행)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암브로시아의 향이라고 부른다 했다. 베를렌은 상대가 풍기는 위험한 매력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는 기보림이 대대로 내려온 실수가 쌓인 듯 흉측한 외모에 성스러움과 신성모독을 섞어놓은 기형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아름다울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 녀석의 눈 속에서 베를렌이 발견한 것은 예상을 넘어서는 놀라운 것이었다. 녀석의 눈빛에는 악의가 없었다. 아무 감정이 없어 더 두려워지는 동물의 눈빛이었다. 자기 앞에 무엇이 있는지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그 눈은 그저 텅 빈 유리알이었다. 녀석은 베를렌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저 숲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루터기나 나뭇잎 더미인 듯 그의 등뒤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이 생물체에게는 영혼이 없었다.

-에반젤린은 제단 계단을 기어올라갔다. 연기를 뚫고 공들여 장식한 감실을 향해 조금씩 나아갔다. 대리석 기둥 위에 놓인 감실 문에는 금으로 알파와 오메가, 즉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뜻의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감실은 작은 찬장만 해서 뭔가 소중한 것을 숨기기에 충분했다. 에반젤린은 가죽가방을 옆구리에 끼고서 감실 문을 열려고 했다. 잠겨 있었다. 

- 수녀들도 죽임을 당한 마당에 더 심한 신성모독을 저지를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필로메나는 계속 성광을 내리쳐 유리를 깨부수었다. 에반젤린은 놀라 뒤로 물러섰다. 대체 어떤 광기가 필로메나 수녀를 사로잡은 것인가. 
기보림들도 필로메나를 보았다. 그들은 숨 쉴 때마다 진홍색 날개를 들썩이며 필로메나 쪽으로 다가갔다. 갑자기 한 녀석이 돌진했다. 필로메나 수녀는 에반젤린이 상상도 못 했던 괴력을 발휘했다. 광적인 믿음에 취한 듯했다. 필로메나는 녀석의 손아귀를 한 걸음 차이로 피하더니 단숨에 한쪽 날개를 잡아 비틀었다. 커다란 빨간 날개가 기보림의 몸에서 뜯겨 나왔다. 상처에서 걸쭉한 파란색 체액이 흘러나와 바닥에 고이기 시작했고 기보림은 그 위에 쓰러져 몸부림쳤다. 녀석은 숨을 헐떡거리며 끔찍한 비명을 질러댔다. 에반젤린은 지옥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가장 신성한 장소인 예배당, 매일 기도를 올리던 사원이 더럽혀지고 만 것이다. 
   
- 문가에 수녀들이 모여 있었다. 에반젤린은 얼른 피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수녀들이 양쪽으로 갈라지고 휠체어에 앉은 셀레스틴이 모습을 드러냈다. 베일을 쓰지 않은 새하얀 머리칼 때문에 슬픔을 새겨놓은 듯한 얼굴의 주름들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한 수녀가 셀레스틴이 탄 휠체어를 제단 앞까지 밀고 들어왔다. 바닥에는 검은 수녀복과 하얀 베일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기보림들도 휠체어에 앉아 제단 앞까지 다가오는 셀레스틴을 보았다. 셀레스틴과 함께 나선 수녀들이 촛불을 여러 개 켜더니 숯으로 셀레스틴 주변의 바닥에 기호를 그리기 시작했다. 불가사의한 인장들은 에반젤린이 할머니한테서 받은 노트에 그려진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 기호들을 여러 번 봤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지 못했다. 

- "뭘 하는 걸까요?"

에반젤린은 꼼짝도 하지 않는 기보림들을 보며 물었다.
"셀레스틴은 성스러운 원 안에 마방진을 그리게 한 거야. 소환 의식을 준비하는 거지."

수녀들이 백합으로 만든 화관을 셀레스틴의 하얗게 센 머리에 씌웠다.

"저렇게 셀레스틴의 머리에 화관을 씌우는 건 소환을 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순결하다는 걸 뜻해. 소환 의식에 대해 자세히 알긴 하지만 직접 보긴 나도 처음이야. 천사를 소환하면 강력한 도움을 받아 단번에 모든 적을 무찌를 수 있어. 지금처럼 수녀원이 포위되고 수적으로 밀릴 때는 가장 유용한 수단일 거야. 아니, 유일한 방법이겠지. 하지만 상상을 초월할 만큼 위험하기도 해. 더구나 셀레스틴처럼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면 더욱더. 소환을 안 하니만 못한 경우도 있어. 전쟁을 목적으로 천사를 소환할 때는 더욱 위험해."

- "지금 셀레스틴이 하려는 게 바로 전쟁이지."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그런데 기보림들이 벌써 얌전해졌어요."

에반젤린이 말했다.
"셀레스틴이 최면을 걸었기 때문이야. 기보림 주문이라고 해, 학생 때 배웠지. 손 보이니?"
에반젤린은 휠체어에 앉은 셀레스틴을 바라보았다. 깍지 낀 양손을 가슴에 얹고 검지 두 개로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렇게 하면 기보림들이 순간적으로 멍해져. 하지만 얼마 안 갈 거야. 셀레스틴은 빨리 움직여야 해."

 

- 셀레스틴이 허공을 향해 양팔을 뻗자 기보림들이 주문에서 풀려났다. 놈들이 공격을 재개하기 전에 셀레스틴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돔형의 예배당 천장에 울리기 시작했다.
"앙겔레 데이, 퀴 쿠스토스 에스 메이, 메티비 콤미숨 피에타테 수페르나, 일루미나, 쿠스토디, 레게, 에트 구베르나(저를 지키는 수호천사시여, 인자하신 주님께서 저를 당신께 맡기셨으니 오늘 저를 비추시고 인도하시고 다스리소서)."

- 라틴어였지만 에반젤린도 익히 아는 수호천사 기도문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종의 주문처럼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부드러운 바람으로 시작되었다. 알아차리기도 어려울 만큼 약한 바람이 불더니 금세 돌풍이 신도석 사이로 휘몰아쳤다. 눈부시게 강렬한 빛과 함께 찬란하게 반짝거리는 존재가 회오리바람 한가운데서 모습을 드러내더니 셀레스틴 수녀의 머리 위로 떠올랐다. 에반젤린은 천사를 소환하는 일이 위험하다는 것도, 주위를 가득 둘러싼 괴물도 잊은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거대한 천사의 금빛 날개는 예배당 한가운데 돔까지 닿을 정도이고 모두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양팔을 활짝 펼치고 있었다. 온몸에서 강렬한 빛을 뿜어냈고 입은 옷은 불길보다 더 밝게 타올랐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수녀들을 비추고 용암처럼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천사의 몸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공중에 떠 있는 천사의 몸이 눈에 뻔히 보이는데 천사의 등뒤도 또렷하게 보였다. 무엇보다 기이한 일은 천사의 얼굴이 셀레스틴과 비슷해진다는 사실이었다. 천사는 젊은 시절의 셀레스틴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천사는 소환을 한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신을 마치고 금빛을 뿜어내는 또 다른 셀레스틴이 되었다. 에반젤린은 셀레스틴 수녀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보았다. 


- 천사는 빛을 뿜으며 차분히 공중에 떠 있었다. 입을 열자 달콤하고 경쾌한 목소리가 성당까지 울려 퍼졌다.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아름다운 떨림이었다.

"나를 불렀는가?"
놀랍게도 셀레스틴은 아무렇지 않은 듯 휠체어에서 일어서더니 촛불로 그린 원 한가운데 무릎을 꿇었다. 흰옷이 풀썩 바닥을 덮었다.

"하느님의 종으로 하느님의 역사를 위해 불렀습니다."
"성스러운 그분의 이름으로 의도가 순수한지 묻겠다."

천사가 말했다.

"하느님의 성스러운 말씀만큼 순수합니다."

셀레스틴의 목소리는 더욱 강해지고 활기가 넘쳤다. 천사의 출현이 그녀에게 힘을 불어넣은 것 같았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주님의 사자이니. 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노래한다."

천사의 목소리는 음악 그 자체였다.
한차례 회오리바람이 일더니 성당이 음악으로 가득 찼다. 천상의 합창이 시작되었다.

- "수호천사시여, 우리의 안식처가 괴물에게 훼손당했습니다. 건물이 불타고 자매들이 살해당했습니다. 대천사 미카엘이 뱀의 머리를 짓밟은 것처럼 사악한 침입자들을 물리쳐주소서."

셀레스틴이 말했다.
"알려다오. 그 악마들이 어디 숨었는가?"

천사가 날개를 흔들고 유연한 몸을 돌리며 물었다.
"그들은 바로 여기서 하느님의 신성한 안식처를 유린하고 있습니다."

 

- 바로 그 순간, 에반젤린이 미처 반응을 보일 틈도 없을 만큼 빠르게 천사는 거대한 불덩이로 변했고 불덩이는 다시 날름거리는 수백 개의 혓바닥처럼 작은 불꽃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불길 하나하나가 모두 온전한 천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에반젤린은 가브리엘라의 팔을 붙잡고 휘몰아치는 바람을 견뎠다. 눈이 매운데도 깜박거릴 수조차 없었다. 그사이 전사로 변해 칼을 든 천사들이 예배당을 가득 채웠다. 수녀들은 겁에 질려 사방으로 달아났고 셀레스틴의 천사 소환을 보고 무아지경에 빠졌던 에반젤린도 정신을 차렸다. 천사들의 공격을 받은 기보림들은 제단 위로 쓰러지거나 공중에서 날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 가브리엘라가 셀레스틴에게 달려갔다. 에반젤린도 그 뒤를 따랐다. 셀레스틴은 대리석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흰옷은 흐트러지고 백합 화관은 비뚜름하게 얹혀 있었다. 에반젤린이 손을 대보니 소환 중에 데기라도 했는지 뺨이 뜨거웠다. 가까이서 들여다볼수록 셀레스틴처럼 노쇠하고 부드러운 여인이 괴물들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인지 바람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천사의 공격이 실제 세계에는 적용되지 않는 듯했다. 밝은 촛불 불빛에 비친 셀레스틴의 얼굴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에반젤린은 셀레스틴의 흰옷을 조심스럽게 여며주었다. 조금 전만 해도 뜨겁던 셀레스틴의 손은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하루 만에 셀레스틴 수녀는 에반젤린의 진정한 수호천사가 되어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겨낼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고 그녀에게 올바른 길을 일러주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할머니의 눈에서 눈물을 본 듯했다.

"정말 훌륭한 소환이었어, 셀레스틴. 훌륭했어."

가브리엘라는 나지막이 말하며 허리를 굽혀 셀레스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살아 있을 때 반은 사람 반은 천사였다가 죽으면 온전히 사람으로 바뀌는 듯했다.

- "갑시다."

가브리엘라가 갈색 가죽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베를렌에게 말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하지만 포르셰는 좌석이 둘 뿐입니다."

베를렌도 그제야 생각이 나서 말했다.
가브리엘라도 멈칫했다. 이런 문제를 예상하지 못한 스스로에게 생각보다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 "문제가 있나요?"

에반젤린이 물었다. 베를렌은 그녀의 듣기 좋은 목소리와 침착한 태도, 가브리엘라를 빼닮은 용모에 다시 한번 매혹되었다.

"우리가 타고 온 차가 좀 작아서요."

에반젤린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하며 베를렌이 말했다.
에반젤린은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가 하루 전에 만났던 그 사람인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에반젤린이 웃음 짓자 베를렌은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두 사람은 뭔가 통하는 게 있었다. 

- [곧이어 천사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천사의 목소리는 리라 소리에 맞춰 높아졌다 낮아졌다를 반복했다. 그 노랫소리가 신호라도 되는 양 다른 천사들이 합창을 시작했다. 여러 천사들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천상의 음악을 만들어냈다.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수백만 천사들이 떠오르는 화음이었다.] -가경자 클레마티스 신부의 제1차 천사 탐사 기록

- "철수한 거야?"

스네자가 물었다.
"죽었어요." 

퍼시벌이 말했다.
"그럴 수는 없어. 가장 강한 녀석들로 백 명 가까이 보냈잖아."

그리고리 2세가 말했다.
"한 녀석도 빠짐없이 당했어요. 즉사했어요. 제가 돌아다니며 시체를 살펴봤습니다. 한 녀석도 살아남지 못했어요."
"이해할 수 없군. 내 평생 이런 참패를 당한 적은 없었어."

그리고리 2세가 말했다.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퍼시벌이 말했다.
"그럼 천사 소환이라도 있었다는 거냐?" 

스네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퍼시벌은 양손을 포개 식탁 위에 올렸다. 다행히 손은 이제 떨리지 않았다. 

"저도 그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천사 소환술을 전수받은 천사학자 중에 살아남은 자가 별로 없잖아요. 더구나 여긴 미국이니 전수할 사람도 없었고요. 하지만 이렇게 철저히 당한 데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 "오털리는 뭐라고 했어?"

스네자가 의자를 밀어내며 벌떡 일어나 말했다.

"오털리라면 분명 그들이 천사 소환을 할 능력이 있다는 걸 믿지 않을걸. 그런 건 다 옛날이야기라고."
"어머니."

감정이 격해진 퍼시벌의 목소리가 떨렸다.

"공격에 참여한 모두를 잃었습니다."
스네자가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편의 반응을 봐야 아들의 말이 정말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얼굴이었다.

- 그 눈빛은 기보림이 수녀원을 덮친 건 에반젤린 때문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수녀원을 떠날 때 그녀는 애써 눈앞의 도로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뒤돌아보지 않고 차고를 나오는 데까지는 그럭저럭 성공했다.
하지만 끝내 에반젤린은 본능을 저버리고 백미러를 보고야 말았다. 시커멓게 그을음이 내려앉은 눈밭과 강변에 모인 비참한 모습의 수녀들이 보였다. 수녀원은 폐허가 된 성채처럼 망가지고 마당에는 화재로 날린 재가 잔뜩 내려앉아 있었다. 에반젤린도 달라졌다. 단 몇 분 만에 그녀는 영원한 경배 프란체스코 수녀회의 에반젤린 수녀라는 역할을 버리고 천사학자 에반젤린 안젤리나 카치아토레가 되었다. 수녀원을 빠져나오는 길 양쪽에 선 자작나무들이 수백 개의 대리석 기둥처럼 보였다. 에반젤린은 멀리서 타오르는 불의 형상을 한 천사가 앞으로 나아가라고 손짓하는 모습을 본 것 같았다.

- 베를렌은 끝없이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에반젤린은 마치 평생 알고 지낸 사이처럼 그의 모든 질문에 기꺼이 솔직하게 대답하는 자신이 놀라웠다. 베를렌 같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잘생겼고 똑똑한 데다 그녀가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에도 홍미를 보였다. 사실 에반젤린이 남자에게 어떤 감정을 느껴본 것은 정말이지 오래전 일이었다. 남자에 대해 자기가 가졌던 생각이 갑자기 모두 유치하고 얄팍하게 느껴졌다. 베를렌의 눈에 그녀의 행동은 너무 순진해서 우스워 보일 게 분명했다.

- 에반젤린은 창문 안쪽에서 움직이는 누군가의 실루엣을 보았다. 다른 친구들이 가브리엘라 일행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에반젤린은 두꺼운 동양풍의 카펫 위에 펼쳐진 타임스지와 탁자마다 아슬아슬하게 놓인 찻잔들, 벽난로 속 불빛을 그려보았다. 어렸을 때 일요일 오후면 할머니 집에서 시간을 보냈던 그녀에게 남은 기억이었다. 물론 어린 아이일 때의 기억이고, 기억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향수와 갈망으로 왜곡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지금 집안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게 무엇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 "브루노."

가브리엘라가 남자를 따뜻하게 껴안았다. 아주 친밀한 사이 같았다. 남자는 쉰 살 전후로 보였다. 에반젤린은 남자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나이 차이가 있긴 하지만 할머니가 재혼한 것일 수도 있었다. 가브리엘라가 브루노를 놓아주었다.

"와 있었군요. 다행이에요."
"당연히 와야죠."

브루노도 팔을 풀며 말했다.

"위원회 사람들이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 현관에 서 있는 에반젤린과 베를렌을 보더니 브루노는 웃으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가브리엘라의 집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 -책과 윤기 나는 골동품에서 풍기는 냄새- 가 두 사람을 반겼다. 에반젤린은 한 걸음 한 걸음 안으로 들어갈수록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더 꽃을 자리가 없이 빼곡히 책이 들어찬 책장, 유명한 천사학자들의 초상화를 걸어둔 벽, 안개처럼 내려앉은 진지한 분위기, 모든 것이 에반젤린이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였다. 

- 에반젤린은 외투를 벗다가 복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눈앞에 보이는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생겼고 피부는 연기로 온통 시커멨다. 오늘처럼 칙칙하고 못생겨 보이긴 처음이었다. 더구나 할머니의 우아한 아파트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베를렌이 뒤에서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제였다면 에반젤린을 두려움과 혼란에 빠뜨릴 만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베를렌이 손을 거둔 것이 오히려 아쉬웠다. 
그렇게 많은 일이 벌어지는 중에도 에반젤린은 베를렌에게 마음이 쏠리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베를렌이 옆에 바짝 붙어 서 있었고 거울 속에서 그와 눈길을 마주치고 있었지만 그가 더 가까이 와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의 마음을 더 알고 싶었다.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칠 때면 그도 그녀처럼 기쁨의 충격을 느낀다고 말해주길 바랐다. 
 
- "이건 세라피나 발코 박사의 천사학 노트입니다."

가브리엘라가 노트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셀레스틴과 나는 세라피나의 마법책이라고 불렀죠. 물론 장난이었지만. 이 일기장에는 과거 천사학자들의 연구와 주문, 비법, 상상 등이 가득해요."
 
-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 낸 거지. 그런 식으로 늘 누군가 정신을 집중해서 지켜보고 있으면 픽을 훔치는 건 고사하고 찾아낼 수조차 없으니까."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1944년만 빼고요. 수녀원이 공격당해 이노센타 원장님이 예배당으로 가던 길에 기보림에게 살해됐죠."

에반젤린이 말했다.
"수백 년 동안 수녀들이 그런 식으로 연극을 하고 있었다니 정말 대단하네요."

베를렌이 말했다.
"수녀들은 연극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예요."

에반젤린이 말했다.

"수녀들은 기도와 보호,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한 거예요. 감실안에 실제로 뭐가 들었는지는 아무도 몰랐어요. 저만 해도 매일 기도를 하면서 다른 목적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요.” 

- "무슨 일이 있겠어요?"

블라디미르가 되물었다. 하지만 그렇게 묻는 그도 이미 답을 아는 것 같았다.
"리라는 천사가 만든 악기입니다."

브루노가 말했다.

"그래서 천상의 소리를 내죠. 천상의 소리는 아름다운 동시에 파괴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혹자는 불경스럽다고 표현하는 초자연적 파문을 몰고 옵니다."
"정확한 설명이군."

블라디미르가 브루노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직접 쓰신 명저에서 인용했을 뿐입니다. 이바노프 박사님." 

브루노가 대답했다.

- "픽으로 한 번 줄을 건드리기만 해도 우리가 아는 세상이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지."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세상이 지옥으로 변할 수도 천국으로 변할 수도 있고요."

브루노가 말했다.

"신화에 따르면 오르페우스는 지하 세계에 갔다가 리라를 발견해 연주했습니다. 그 음악이 인간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하죠. 학문과 농업이 발달하고 예술이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근간이 되었습니다. 오르페우스를 숭배하는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리라가 좋은 결과를 가져온 예죠." 
"그런 낭만적인 생각은 대단히 위험해요."

가브리엘라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리라의 음악은 파괴적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당신처럼 이상적인 꿈을 좇다가는 모두 멸망할 겁니다."

- 모두의 시선이 픽을 향했다. 에반젤린은 작은 물건이 가진 힘과 매력, 유혹과 욕망이 경이로웠다.
"한 가지 이해가 안 돼요."

에반젤린이 말했다.

"감시자들은 리라를 연주해 뭘 얻으려던 걸까요? 그들은 저주받아 하늘에서 쫓겨났어요. 그런 그들이 어떻게 음악으로 구원받을 수 있죠?"

- "감시자들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음악을 연주해 그분의 용서를 받으려는 게 아닐까요? 시편 150편은 하늘의 은혜를 얻고 싶어 하는 자들에게 주는 조언이니까. 만일 성공한다면 땅속에 갇힌 천사들은 본래의 자리를 되찾을지도 몰라요. 그들은 아마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걸 거예요."

브루노가 말했다.
"다르게 볼 수도 있어요."

사이토가 말했다.

"어차피 쫓겨났으니 이 세계를 파괴해버리려고 하는 걸 수도 있죠."
"그게 목표라면 분명 성공하지 못했지. 자, 이제 원래 하려던 일을 합시다."

가브리엘라가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짜증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지난 십 년 동안 우리가 유럽 곳곳에 숨겨두었던 천상의 악기들을 모두 도난당했습니다. 네피림의 짓인 것 같습니다."

- "사실 클레마티스 신부가 동굴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감시자들은 리라를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네피림을 유혹해 도움을 받으려는 속셈이었죠. 하지만 완전히 실패했어요. 네피림들은 오로지 자신들을 위해 리라를 노리고 있는 거예요." 
"그들은 병을 고치고 종족을 유지하려는 겁니다."

브루노가 말했다.

"더 강해져 인류를 노예로 만들려는 거죠."

- "나는 그들이 다른 천상의 악기들을 확보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들이 리라를 원하는 건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에요. 그들은 자기 종족을 다시 완벽하게 만들려는 거예요. 지난 몇백 년 동안 그렇지 못했거든요. 리라를 어디 숨겼는지 애비게일 록펠러가 영원히 침묵을 지키게 되어 실망스럽긴 해도 리라를 다른 자들이 먼저 발견할 가능성은 없었어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네피림이 계속 추적하고 있으니 우리도 대비를 해야 해요."

- "어쨌든 록펠러 여사는 우리를 최대한 도우려고 했던 것 같아요."

에반젤린이 말했다.
"전문가는 아니었어."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다른 부자 친구들이 자선 무도회에 관심을 가진 것처럼 천사에 흥미가 있었을 뿐이야."
"하지만 좋은 일을 한 겁니다."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전쟁 중에 록펠러 여사의 도움을 못 받았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1943년 탐사 때는 더 말할 필요도 없죠. 그분은 막대한 부가 위대한 목표를 위해 쓰여야 한다는 걸 아는 헌신적인 분이었어요."

블라디미르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 다리를 꼬았다.
"의도가 좋았든 나빴든 결국 막다른 길이네요."

 

- "이건 SATOR-ROTAS 마방진이라는 천사학자들의 인장이야."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수백 년 동안 표식으로 사용했어.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보낸 중요한 문서라는 뜻으로."

- "이노센타 원장이 아무 의미도 없는 편지를 주고받았을 리 없어요."

가브리엘라가 베를렌을 흘깃 보았다.

"이노센타는 대단히 치밀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도 자기처럼 치밀하게 행동하도록 유도할 수 있는 인물이었죠."

- "록펠러 여사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머리가 비상했던 것 같습니다."

- "현의 개수를 암호로 사용한 게 틀림없어요."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베를렌은 에반젤린, 사이토, 블라디미르, 브루노에게서 카드를 되돌려 받았다.

"자, 써주신 숫자가 2와 8, 3과 8, 3과 0, 3과 9네요. 순서대로 하면 말이죠. 만일 제 생각이 옳다면 이 숫자들은 리라가 있는 곳을 가리킵니다."   

- "그거야말로 우리가 처한 딜레마입니다."

블라디미르가 손으로 은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리라를 보관하느냐, 아니면 파괴하느냐."
"파괴한다고요?"

베를렌이 소리쳤다.

"지금까지 제가 듣기론 리라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답고 소중한 물건인데요."
"리라는 평범한 고대 유물이 아니에요."

브루노가 말했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 같은 곳에 전시할 물건은 아니죠. 아무리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해도 그보다는 위험이 훨씬 더 커요. 파괴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다시 숨겨도 되죠. 숨겨둘 장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이미 1943년에 시도했던 일이에요, 블라디미르."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하지만 그 시도가 실패한 건 자명하죠. 리라를 그냥 두는 건 미래의 인류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에요. 아무리 안전한 곳에 숨겨둔다 해도요. 없애야만 해요. 그래야 깔끔해요. 문제는 어떻게 파괴하느냐 하는 겁니다."

- "천상의 악기들이 가진 기본 특징이 있어. 하늘에서 만든 물건이니 오직 하늘의 존재만이 파괴할 수 있다는 거지."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베를렌이 말했다.
"천상의 존재 또는 천사의 피를 물려받은 존재만이 천상의 물건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겁니다."

브루노가 말했다.
"네피림도 천사의 피를 물려받았지."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그러니까 리라를 파괴하려면 어떻게든 리라에 손대지 못하게 해야 할 놈들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거군요."

사이토가 말했다.
"어려운 문제네요." 

브루노가 말했다.

- "그럴 거면 도대체 왜 그 물건을 찾으려고 하는 겁니까?"

베를렌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왜 굳이 그렇게 중요한 물건을 안전한 곳에서 꺼내 없애려는 거죠?"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요. 리라를 찾아낼 기회는 자주 오지 않아요. 이번에 찾아내 어떻게든 없애야 해요."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만일 찾아낼 수 있다면 말이죠."

브루노가 덧붙였다.
 
- 모두 일어나 재킷을 입고 목도리를 두르며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을 준비를 했다. 불과 몇 초 만에 천사학자들은 나갈 준비를 마쳤다. 계단으로 가던 가브리엘라가 에반젤린을 향해 돌아섰다.

"아무리 급해도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 잊으면 안 돼. 부디 조심스럽게 움직이렴. 네피림들이 감시하고 있을 거야. 사실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오긴 놈들도 마찬가지야. 애비게일 록펠러가 남긴 편지는 가장 귀중한 자료야, 우리가 알아낸 비밀을 눈치챈다면 네피림들은 가차 없이 공격을 시작할 거야."
"하지만 어떻게 눈치챌 수 있겠습니까?"

베를렌이 에반젤린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가브리엘라가 의미심장하고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놈들은 우리가 있는 곳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요. 온 도시에 놈들의 끄나풀이 깔렸거든.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기다리고 있어요. 지금도 가까이서 우릴 보고 있을걸."

가브리엘라는 다시 한번 에반젤린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그러니 제발 조심해."

- 실내는 널찍했고 몇 안 되는 가구는 모두 골동품이었다. 모든 가구가 소중히 간수되는 동시에 방치된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하면 가구에 신경 쓰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골머리를 썩이며 고른 듯했다. 에반젤린은 소파에 앉았다. 쿠션이 개의 체온으로 데워져 따뜻했다. 대리석 벽난로의 불꽃이 작지만 강력해 실내 온도를 높여주었다. 매끈하게 닦은 커피탁자 위 한가운데는 사탕이 담긴 크리스털 그릇이 놓여 있었다. 깔끔하게 접어둔 일요일자 타임스 지만 빼면 지난 오십 년 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했다. 벽난로 선반 위 액자에 넣은 컬러 석판화에는 한 여자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통통하고 볼이 발그레한 여자는 마치 경계하는 새 같았다. 에반젤린은 애비게일 록펠러 여사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그림 속 주인공이 그녀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 "그럼 할머니 성함이 셀레스틴 클로셰트요?"

앨리스터가 물었다.
 
- "이런, 그게 아니라오. 록펠러 여사와 이노센타 원장은 일정 기간만 물건을 보관해 주기로 의견을 모았소. 여사님은 물건을 영원히 보관하게 되길 원치 않았거든. 안전한 때가 오면 최대한 빨리 돌려주고 싶어 하셨소. 그러니까 전쟁이 끝나면 말이오. 우리는 이노센타 원장이나 셀레스틴 클로셰트가 카드를 갖고 있다가 때가 되면 정해진 순서대로 일을 진행할 거라 생각했소. 이런 방식을 택한 건 보관 중인 물건과 물건을 찾으러 오는 사람의 안전을 위해서였지." 
브루노와 에반젤린은 시선을 주고받았다. 에반젤린이 보기에 셀레스틴 수녀는 정해진 절차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게 틀림없었다.
 
- "우리는 미술관 경영진이 이렇게 급격한 변화를 꾀할 줄은 예상 못 했소. 1953년 필립 존슨이 정원을 다시 설계하면서 여사님이 알던 모습은 모두 사라졌소. 그리고 현대식 정원 하면 누구나 떠올릴 법한 상징적인 정원이 만들어졌소. 그러니까,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 몰라도 필립 존슨의 정원을 현대화하기로 한 거지. 황당한 촌극이자 끔찍한 판단 착오였소. 그들은 우선 대리석을 걷어냈소, 푸르스름한 회색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버몬트 산 대리석을 없애고 훨씬 질이 떨어지는 걸로 바꿨지. 나중에 원래 깔려 있던 돌이 더 낫다는 걸 알게 됐지만 어쩔 수 없었소. 결국 또다시 모든 걸 뜯어내고 원래 대리석과 비슷한 것으로 교체했소. 내가 손써두지 않았더라면 지켜보는 내내 정말 끔찍했을 거요."

앨리스터 캐럴은 팔짱을 꼈다. 더없이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원래 보물은 정원에 숨겨져 있었소." 

- "여사님은 조각상 아래 빈 공간에 보물을 넣어두었소. 아리스티드 마욜의 <지중해>는 받침대 속에 굉장히 넓은 공간이 있거든. 여사님은 셀레스틴 클로셰트가 몇 달, 길어야 일 년 안에 보물을 가지러 올 거라고 생각하셨소. 잠깐 동안은 조각상 안에 넣어둬도 안전할 것 같았지. 하지만 1948년 여사께서 돌아가실 때까지도 셀레스틴은 오지 않았소. 얼마 후 필립 존슨이 조각정원을 현대식으로 만든다는 계획이 잡힌 거요. 나는 사람들이 공원을 뒤집어엎기 전에 움직이기로 했소."
"쉽지 않았을 텐데요. 더구나 뉴욕현대미술관은 보안이 철통 같은 곳이잖아요."

브루노가 말했다.
"난 미술관의 종신이사요. 록펠러 여사만큼은 아니지만 미술관 어디든 접근할 수 있지. 그래서 어렵지 않게 조각상을 옮길 수 있었소. 청소를 한다고 가져와서는 내용물을 빼낸 게 다였소. 미리 그렇게 하길 잘했지. 그냥 뒀더라면 보물은 사람들 눈에 띄었거나 손상됐을 거요. 셀레스틴 클로셰트가 오지 않아 나는 그냥 보물을 보관하면서 기다리기로 했소." 

- "여사님은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 가장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셨소. 록펠러 부부는 어마어마한 공공시설을 여럿 만들었고 늘 실용성을 추구했던 록펠러 여사는 그 시설을 직접 사용하고 싶어 했지. 물론 값을 매길 수 없는 예술품이 가득한 미술관은 맨해튼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이기도 하고, 조각정원과 클로이스터스 미술관은 감시의 눈길이 멈추지 않는 곳이오. 리버사이드 교회는 보안보다는 감상적인 이유로 선택됐소. 록펠러 가문이 교회를 세운 곳은 예전에 록펠러 씨가 다니던 학교 자리거든. 그리고 록펠러 가문의 힘과 영향력을 나타내는 위대한 상징인 록펠러 센터는 뉴욕에서 록펠러 가문의 사회적 위치를 보여주는 곳이라고 할 수 있소. 그들의 힘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보여주는 거요. 록펠러 여사는 네 조각의 보물을 그냥 은행 금고에 맡겨둘 수도 있었소. 하지만 그런 방식은 그분에게 어울리지 않지. 보물을 숨긴 장소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곳이오. 미술관이 두 곳, 교회, 그리고 상업용 건물. 두 곳은 예술, 한 곳은 종교, 다른 한 곳은 돈과 관련 있는 장소요. 록펠러 여사는 자신이 그런 비율로 기억되기를 바랐소."
 
- "프로메테우스요?"

에반젤린이 물었다.
"록펠러센터에 있는 프로메테우스 상 말이오."

의자에 앉은 채 허리를 쭉 펴자 앨리스터는 조금 전보다 키가 더 크고 귀족적으로 보였다.

"원래는 이런 식으로 내가 보물을 찾으러 온 사람에게 다음 순서를 일러주고 충고와 경고를 하게 돼 있었소. 리버사이드 교회에 가면 그레이라는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거요. 록펠러 가문에 고용된 사람이오. 록펠러 여사는 그자를 믿었지만 솔직히 나는 이유를 모르겠더군. 그자가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록펠러 여사의 뜻을 받들고 있는지도 확실치 않소. 툭하면 날 찾아와 돈을 요구했거든. 내 경험상 궁핍은 별로 좋은 징조가 아니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시간만 충분하다면 그자는 건너뛰는 게 좋을 거요." 

 
- "리버사이드 교회의 제단 앞 바닥에 있는 미로 그림은 프랑스 샤르트르대성당의 미로와 비슷하지."

앨리스터가 말했다.

"전통적으로 미로는 명상을 하는 데 쓰였지만 우리는 미로 한가운데 꽃문양 아래쪽에 얕은 금고를 만들었소. 끼워 맞춘 흔적도 없고 바닥을 뜯어내지 않고도 꺼냈다가 되돌려놓을 수 있게 돼 있소. 록펠러 여사는 그 안에 울림통을 넣어두었소. 여기 적힌 대로 꺼내면 되오." 
 
- 클레먼타인은 쾌적한 전시실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여러 개의 창으로 비쳐드는 햇빛이 바닥에 깔린 마루를 환하게 비추었다. 벽에는 태피스트리 연작이 걸려 있었다. 어떤 작품인지 베를렌은 바로 알아보았다. 대학원 시절 '세계 미술사의 걸작들'이라는 수업에서 접했던 이 연작은 그 후에도 잡지와 포스터를 통해 여러 번 봤지만 직접 찾아와서 보는 건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것은 그 유명한 <유니콘 사냥>이었다.

- "아름다워요."

베를렌이 강렬한 붉은색과 화사한 녹색으로 짠 태피스트리를 자세히 살펴보며 말했다.
"잔인하기도 하죠." 

가브리엘라는 유니콘을 도살하는 장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냥꾼 절반 정도가 무심히 바라보는 가운데 나머지 사냥꾼들이 붙잡힌 유니콘의 목에 창을 찔러 넣고 있었다.

- "바로 이것이 애비게일 록펠러와 그 남편의 결정적인 차이점이죠."

베를렌이 앞에 걸린 작품을 가리키며 말했다.

"애비게일 록펠러가 뉴욕현대미술관을 세우고 피카소와 반 고흐, 칸딘스키의 작품을 사들이는 동안 남편은 중세 작품을 수집했습니다. 그는 모더니즘이라면 질색했고 모더니즘에 열정을 품었던 아내를 지지해주지도 않았습니다. 모더니즘은 세속적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현재가 잘못되었다고 탓하면서 과거는 성스럽다고 하니 웃긴 일이에요." 
"현대적인 것을 부정하는 데는 대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요."

가브리엘라는 혹시 뒤따라온 자들이 없는지 확인하듯 뒤쪽에 모여 서 있는 관람객들을 흘끔거렸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로 계속 진보해나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중세 암흑기를 못 벗어났을 겁니다."

베를렌이 말했다.
"이런, 베를렌 선생."

가브리엘라가 베를렌의 팔을 잡고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가며 말했다.

"정말 우리가 중세 암흑기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해요?"

- 베를렌은 서빈의 말에 귀 기울이는 가브리엘라의 표정에서 그녀가 서빈을 약간 무시하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냥의 우화는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를 전해준다." 

서빈이 조용히 읊조렸다. 

"자유를 누리다가 붙잡히는 짐승을 따라가라. 사냥개들을 모른 척하고, 처녀에게 수줍은 척하고, 잔인한 살육을 거부하고, 짐승이 다시 사는 곳에서 음악을 구하라. 베틀을 잡은 이 손으로 수수께끼를 짰으니 반드시 손으로 풀어야 하리. 엑스 앙겔리스 Ex angelis, 악기는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다."

- "라틴어예요."

가브리엘라가 대답했다.

"'천사로부터'라는 뜻이죠. 분명히 천사가 만든 천상의 악기라는 걸 표현하려고 그런 단어를 사용했겠죠. 하지만 좀 이상하긴 하네요."

가브리엘라는 잠시 말을 멈추고 서빈 클레먼타인에게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이제야 그녀가 두 사람 앞에 나타난 이유를 알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사실 중세에 천사학자들끼리 주고받은 문서를 보면 'EA'라는 머리글자가 찍혀 있는 경우가 많았어요. 하지만 그건 에피스툴라 앙겔로룸Epistula Angelorum, 즉 '천사들의 편지'라는 뜻으로 전혀 다른 말이죠. 록펠러 여사가 이걸 알았을 리도 없고요."

- "아니, 그 말이 아니에요."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오히려 반대죠. 애비게일 록펠러가 우리에게 헛고생을 시켰을 리 없어요. 나는 아까부터 왜 악기 하나를 숨기는 데 네 곳이나 필요했을까 의문이 들었어요. 결국 애비게일 록펠러는 리라를 숨기는 데 극도로 철저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죠. 가장 안전한 장소를 찾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더욱 안전한 형태로 숨겼을 겁니다. 어쩌면 악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형태가 아닐 수도 있어요."

- "천상의 음악학이나 천사 합창의 역사 수업을 들은 적이 있거나 천상의 악기의 구조와 연주에 관한 세미나에 참석해 본 천사학자라면 누구나 리라에서 가장 필수적인 부분이 무엇인지 잘 압니다. 바로 현이죠. 천상의 악기 대부분이 발카인이라고 하는 귀중한 소재로 만듭니다. 그중에서도 리라가 독특한 소리를 낼 수 있는 건 현 때문이죠. 소재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천사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실크와 천사의 머리칼을 섞어 만든 것이라 여겼습니다. 무엇인지 모르는 현의 소재와 현을 매는 방법 때문에 특별한 소리를 낼 수 있는 거겠죠. 사실상 현을 제외한 몸통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겁니다." 
"파리 천사학 아카데미에 다녔군요."

가브리엘라가 놀라며 말했다.
"비엥 쉬르(맞아요), 발코 박사님."

서빈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안 그러면 어떻게 이런 역할을 맡았겠어요? 기억 못 하시겠지만 박사님이 강의한 영적 전쟁 세미나에도 참석했어요."
   
- 다시 교회 위층으로 와서 어두운 복도 한쪽에 선 블라디미르는 왠지 망설여졌다. 그는 젊은 시절을 다 바쳐 천상의 음악을 공부하면서 비밀스러운 천사학의 세계에 점점 더 빠져들었다. 그런 그가 천사학계를 떠난 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였다. 그러고 나서는 작은 빵집을 열고 과자와 케이크를 만들어 팔며 단순한 일에서 위안을 얻었다. 그때는 천사학자들이 아무리 연구해 봐야 소용없고 인간의 힘으로는 네피림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브리엘라가 직접 찾아와 힘을 보태달라고 애원하고 나서야 다시 천사학자로 돌아왔다. 가브리엘라는 그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가브리엘라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게다가 그도 어두운 변화가 일기 시작하는 걸 알아챘다. 어떻게 알았는지 말할 수는 없었지만 -어쩌면 젊은 시절 철저하게 훈련받은 덕분일 수도, 단순한 직관일 수도 있었다- 블라디미르는 그레이가 신뢰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 블라디미르는 미로 위를 걸으며 돌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아래 뭔가를 숨긴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물건을 꺼내려면 바닥을 깨야 하는데 그건 그나 록펠러 여사, 아니 예술품을 아끼고 보존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하지만 어떻게요? 전혀 틈이 없는데요."  

- 에반젤린은 조각상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프로메테우스가 날아오르다가 허공에서 붙잡힌 듯한 모습이었다. 손에는 신들에게서 훔쳐낸 불씨가 이글거리고, 몸 아래쪽에는 황도 12궁을 나타내는 둥근 고리가 둘러쳐 있었다. 에반젤린은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잘 알고 있었다. 신들의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에게 제우스는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영원히 몸을 쪼아 먹히는 벌을 내렸다. 그 형벌은 지은 죄의 크기에 합당했다. 불을 선물 받은 인류는 기술 혁신을 이루었고 그로 인해 신의 의미가 퇴색했기 때문이다. 

 

- "이렇게 가까이서 프로메테우스 상을 보긴 처음이에요."

에반젤린이 말했다. 스케이트장에 켜놓은 조명을 받은 조각상은 표면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프로메테우스와 그가 훔친 불이 한 몸이 되었다.
"걸작은 아니지. 그렇지만 록펠러 센터와 완벽하게 어울려요. 폴 맨십은 록펠러 가문 사람들의 친구였소. 그래서 그의 작품 세계를 잘 알고 조각상 제작을 의뢰한 거지. 록펠러 가문의 사람들을 보면 프로메테우스 신화와 통하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소. 독창성과 무자비함, 책략, 권세 같은 것들 말이오. 맨십은 대공황 중에도 모든 역량을 동원해 록펠러 센터를 세운 존 D. 록펠러 주니어라면 이런 유사성을 알아차릴 줄 알았던 거요."
  
- "이게 놈들의 계획이에요."

가브리엘라가 쇼핑객들 사이에서 적을 찾아낼 기세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우리가 클로이스터스에서 공격받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그게 그들의 계획이었기 때문이에요. 더는 기다릴 수 없어요. 블라디미르와 사이토도 금방 도착할 거예요."

- 누군가 에반젤린을 부르는 소리에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돌렸다. 가브리엘라였다.
두 사람이 천사학자들과 합류하는 사이 앨리스터는 주변 사람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굳어갔다. 에반젤린이 그의 시선을 따라 스케이트장 끝을 보니 길고 검은 망토 속에 날개를 감춘 하얀 얼굴의 남자들이 프로메테우스 상 근처에 잔뜩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 한가운데 키가 크고 우아한 남자 하나가 지팡이에 몸을 맡긴 채 겨우 서 있었다. 

- "저자가 바로 퍼시벌 그리고리야."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에반젤린은 즉시 알아들었다. 베를렌에게 일을 맡긴 사람, 악명 높은 그리고리 가문의 퍼시벌 그리고리. 어머니를 죽인 바로 그자. 멀리서도 확연히 느껴지는 끔찍한 모습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에반젤린과는 첫 대면이었지만 퍼시벌 그리고리는 그녀의 가족을 파멸로 이끈 자였다.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네 엄마는 저자를 아주 많이 닮았지. 키, 얼굴색, 크고 파란 눈까지. 너무 닮아서 늘 걱정스러웠단다."

가브리엘라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에반젤린만 겨우 들을 수 있었다.

"내 딸 안젤라가 네피림을 닮은 것 같아서 두려웠지. 그 가운데서도 가장 무서웠던 건 안젤라가 커서 저자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거였어."
할머니의 아리송한 말, 그리고 그 말이 암시하는 소름 끼치는 예언에 에반젤린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그리고리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인파 속에 섞여 있던 기보림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에반젤린이 처음 생각한 것보다 수가 훨씬 많았다. 

- 에반젤린의 눈에 눈물이 차올라 스케이트장이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할머니의 단언과는 달리 왠지 영영 못 만날 것 같았다. 가브리엘라도 그녀의 마음을 다 아는 것 같았다. 양팔을 벌려 에반젤린을 꼭 안았다. 그리고 뺨에 키스하며 속삭였다.

"천사학은 그냥 하는 일이 아니야. 부름을 받는 거란다. 에반젤린, 이제 넌 시작이야. 넌 이미 이 할머니가 바라던 대로 잘 자랐어."
 
- 맞은편에 앉은 가브리엘라는 경멸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난 지 오십 년도 더 지났건만, 가브리엘라에 대한 퍼시벌의 감정은 그가 그녀를 잡아오라고 지시하던 날만큼이나 강렬하고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가브리엘라는 이제 그를 증오했다. 그건 너무나 분명했다. 그는 늘 그녀가 뿜어내는 강렬한 감정에 감탄했다. 그것이 열정이든 증오든 두려움이든 그녀는 온몸으로 느꼈다. 퍼시벌은 자신을 압도하던 가브리엘라의 힘은 이제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녀를 보고 있으면 자꾸만 약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가브리엘라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잃었지만 위험한 흡인력만큼은 여전했다. 그가 단번에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데도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하지만 스네자 앞에 가면 달라질 것이다. 스네자는 단 한 번도 가브리엘라를 두려워한 적이 없으니까. 

- 퍼시벌은 가브리엘라 옆에 앉은 젊은 여자를 살펴보았다. 그럴 리 없는데도 그가 아는 오십 년 전 가브리엘라와 너무 닮아서 으스스할 정도였다. 크림색 피부에 녹색 눈동자까지 똑같았다. 머릿속에서 늘 그리던 가브리엘라가 눈앞에 나타난 것 같았다. 젊은 여자는 파리에서 살 때 가브리엘라가 했던 것과 똑같은 리라 모양의 금 목걸이까지 하고 있었다. 퍼시벌은 가브리엘라가 그 목걸이를 절대 다른 사람에게 줄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걸쇠가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퍼시벌은 천사학의 역사나 마방진, 인장이 있는 익숙한 부분은 빨리 넘겨버리고 안젤라가 수학 공식을 기록해 놓은 부분에서 멈췄다.
"이 숫자들은 뭐지?"

그가 주의 깊게 들여다보며 물었다.
"잘 봐. 당신이 아는 것들이니까."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숫자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퍼시벌의 표정은 놀라움에서 기쁨으로 바뀌었다. 

"이게 숨기고 내놓지 않던 공식이군." 

그가 말했다.
"바로 그게 당신이 우리 딸을 죽이고 알아내려던 정보야."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 에반젤린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할머니가 스케이트장에서 한 수수께끼 같은 말의 의미를 마침내 깨달았다. 퍼시벌 그리고리는 그녀의 할아버지였다. 깨달음과 함께 공포가 밀려왔다. 그리고리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발작적인 기침이 막아버렸다. 한참 괴로워하다가 그가 말했다.

"네 말은 못 믿어."
"안젤라는 아버지가 누군지 몰랐어. 고통스러울까 봐 진실을 알려주지 않았지. 하지만 에반젤린은 지켜주지 못했군. 할아버지의 사악함을 직접 목격했으니 말이야."
가브리엘라를 보고 있던 퍼시벌은 에반젤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가브리엘라의 말을 모두 이해한 순간 수척한 그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 "당신이 후손을 남긴 걸 알면 스네자가 꽤나 기뻐하겠군."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인간 후손은 쓸모없어. 어머니는 오직 천사의 핏줄만 인정하지."

퍼시벌이 쏘아붙였다.
 
- 퍼시벌은 에반젤린을 향해 총구를 흔들어 보였다. 에반젤린은 리라의 부품을 차례로 챙겨 유심히 살펴보고 도로 가방에 넣었다. 손가락이 울림통의 금속 부분에 닿자 묘한 감정이 일었다. 처음에는 퍼시벌 그리고리 때문에 두려운 거라고 생각하며 무시했다. 하지만 이내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감미롭고 완벽한 음악이 그녀의 마음을 채우기 시작했다. 높고 낮은 한 한 음이 온몸에 전율을 일으켰다. 더없는 행복과 흥분을 자아내는 음악을 어떻게든 더 선명하게 듣고 싶었다. 그녀는 그리고리와 언쟁을 벌이기 시작한 할머니를 흘깃 바라보았다. 음악 소리 때문에 할머니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두꺼운 유리로 된 돔에 덮여 세상과 분리된 느낌이었다. 눈앞의 악기 말고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머리가 아찔해지는 이 음악이 자기에게만 들리는 것 같았지만 상상의 산물은 분명 아니었다. 리라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 갑자기 퍼시벌이 가방을 탁 닫고는 에반젤린에게서 채가자 악기가 그녀에게 걸었던 주문이 풀렸다. 손에 쥐고 있던 악기를 빼앗기자 절망감이 거세게 밀려왔다. 에반젤린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로 퍼시벌에게 달려들어 가죽가방을 빼앗았다. 놀랍게도 쉽게 악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온몸에서 새로운 힘이 생겨나고 조금 전만 해도 전혀 알지 못했던 활기가 느껴졌다. 시야도 또렷해졌다. 그녀는 가방을 꼭 끌어안았다. 

  
- 그녀는 리라를 한번 쓰다듬어보았다. 금속 부분은 차갑고 매끄러웠다. 실크 현도 가만히 쓸어보고 줄감개를 조절하며 음의 변화에 귀 기울였다. 픽을 꺼내 들었다. 픽이 열차 안의 쨍한 조명을 반사해 반짝거렸다. 픽으로 현을 튕겼다. 한순간에 세상의 질감이 변했다. 지하철의 소음, 퍼시벌 그리고리의 위협,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쿵쾅거리던 자신의 심장. 모든 것이 잠잠해지더니 경쾌하고 달콤한 떨림이 다시 한번 온감각을 채웠다. 아까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해진 것 같았다. 깨어 있으면서 동시에 잠든 느낌이었다. 또렷하고 생생한 현실 세계의 감각도 여전히 느껴졌다. 흔들리는 열차, 퍼시벌이 손에 쥔 지팡이의 상아 손잡이. 하지만 동시에 꿈을 꾸는 듯했다.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하고 강력한 리라 소리는 그녀를 무장해제시켰다.

- "그만."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바로 옆에 붙어 서 있는데도 할머니의 목소리는 멀리 떨어진 다른 방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에반젤린,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줄 알아?"
할머니의 모습은 마치 프리즘을 통해 보는 것 같았다. 바로 옆에 서있는 할머니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리라의 연주법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어. 네 행동이 세상에 어떤 공포를 몰고 올지 상상도 할 수 없단다. 제발 그만하렴."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퍼시벌은 고맙고 즐겁다는 표정으로 에반젤린을 응시했다. 리라 소리가 그에게도 주문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앞으로 다가선 그는 욕망으로 떨리는 손을 뻗어 리라를 만졌다. 별안간 퍼시벌의 표정이 바뀌었다.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한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경외심, 공포와 감탄이 교차했다. 
가브리엘라의 눈에 두려움이 차올랐다.

"세상에, 에반젤린. 이게 무슨 일이니?"

- 에반젤린은 할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몸을 살펴봤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그러다 뒤로 돌아서 넓고 시커먼 창문에 비친 자신을 발견하고는 숨이 턱 막혔다. 어깨 뒤에 금빛 후광을 만들어내는 우아한 날개 한 쌍이 달려 있었다. 날개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녀는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한참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근육에 살짝 힘을 주자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날개는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너무도 가벼워 혹시 빛에 의한 착각은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에반젤린은 날개를 두 눈으로 직접 볼까 해서 한쪽 어깨를 앞으로 당겼다. 깃털은 투명한 보라색에 가느다란 은색 줄무늬가 섞여 있었다. 심호흡을 했더니 날개도 움직였다. 그리고 금세 그녀가 숨 쉬는 박자에 맞춰 퍼덕이기 시작했다.

- "어떻게 된 거죠?"

에반젤린이 말했다. 자신이 변신했다는 사실을 퍼뜩 깨달았다.

"내가 뭐가 된 거죠?"
퍼시벌 그리고리가 에반젤린에게 다가왔다. 리라의 음악 때문인지 아니면 에반젤린에게 관심이 생겨서인지 퍼시벌은 허리가 굽은 채 말라죽어가는 존재에서 옆에 있는 가브리엘라가 왜소해 보일 만큼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퍼시벌의 몸속에서 불이 차올라 피부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하고 파란 눈은 번쩍거리고 등이 곧게 펴졌다. 그가 바닥에 지팡이를 내던지며 말했다.

"네 날개는 네 할머니의 할머니 날개를 닮았구나. 아버지가 들려주신 말씀으로만 알고 있는데 이런 날개는 우리 가운데서도 가장 순종이라는 걸 보여주지. 너도 우리 종족이 됐구나. 너도 그리고리 가문이었어."  
퍼시벌이 에반젤린의 팔에 손을 얹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가락에 에반젤린은 온몸이 떨렸지만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솟았다. 평생을 꽉 죄는 껍데기 속에서 살다가 단번에 빠져나온 것만 같았다. 스스로가 강해지고 살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 "나와 함께 가자."

퍼시벌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가서 내 어머니 스네자를 만나는 거야. 네 가족이 있는 집으로 가자. 네가 원하는 모든 걸 주마. 네가 꿈꾸는 모든 걸 줄 수 있어. 갖고 싶어 하던 모든 걸 다시는 뭔가 바라는 일이 없을 거야. 넌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이 모두 사라진 뒤까지 살 수 있어. 내가 방법을 가르쳐주지. 내가 아는 걸 모두 알려주마. 우리만이 네게 미래를 줄 수 있어." 
퍼시벌의 눈을 들여다보던 에반젤린은 그가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이해했다. 그리고리의 가문과 권력이 그녀의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동안 잃어버린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다. 집과 가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가브리엘라는 절대 줄 수 없는 것들이었다. 
돌아선 에반젤린은 너무나도 변해버린 할머니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가브리엘라가 갑자기 힘없고 시시한 여인, 눈물을 글썽거리는 약해빠진 인간으로 보였다. 에반젤린이 말했다. 

"할머니는 내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죠?"

- "네 아버지와 나는 네가 아주 어릴 때 검사를 했다. 네 폐가 네피림 아이들과 같은 형태로 발달했다는 걸 알았지. 하지만 우리가 연구한 바로는, 안젤라가 네피림의 쇠퇴를 연구하며 밝혀냈듯이 네피림들 중에도 날개가 아예 생기지 않는 경우가 꽤 많았어. 다 유전되는 건 아닌 거지. 다른 요인이 있을 거야."
가브리엘라가 빛나는 아름다움에 매료된 듯 에반젤린의 날개를 만졌다. 하지만 에반젤린은 몸을 빼며 물러섰다.
"날 속이려고 했군요. 내가 리라를 파괴해 주길 바란 거예요. 내가 이렇게 변할 줄 알고 있었어."

에반젤린이 말했다.
"난 안젤라가 지금의 너처럼 될까 봐 늘 두려웠다. 퍼시벌을 워낙 많이 닮았으니까. 하지만 최악의 경우 안젤라가 신체적으로 퍼시벌과 같아졌다 해도 정신적으로는 다를 거라 믿었어."
"하지만 어머니는 나와 달랐어요. 어머니는 인간이었으니까."

에반젤린이 말했다.

- 에반젤린의 머릿속이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그래, 네 엄마는 모든 면에서 인간이었어. 다정하고 인정이 많았지. 인간의 심장으로 네 아버지를 사랑했어. 내 딸이라서 이렇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안젤라는 타고난 핏줄을 뛰어넘었던 거야. 네 엄마의 연구 결과로 우리는 네피림이 사라져 간다는 것을 믿게 됐어. 우리는 인간적인 특징이 더 강해진 새로운 네피림 종족이 출현하길 바랐지. 네 엄마가 생물학적으로 네피림이라면 그 새로운 종족의 시조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건 안젤라의 운명이 아니었어. 네 운명이었지." 

 

- 열차가 덜컹대며 멈추고 다시 문이 열리자 가브리엘라는 에반젤린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에반젤린은 가브리엘라의 말을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도망가, 에반젤린."

가브리엘라가 다급하게 속삭였다.

"리라를 가져가서 파괴해. 유혹에 굴하지 마. 옳은 일을 하느냐 마느냐는 너한테 달렸어. 뛰어, 얘야. 절대 뒤돌아보지 마."
에반젤린은 잠시 가브리엘라의 품에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할머니에게서 전해지는 온기와 안정감은 엄마 품에 안겼을 때 느꼈던 안전한 느낌을 상기시켰다. 가브리엘라는 에반젤린을 다시 한번 꼭 끌어안았다가 살며시 힘주어 떼어냈다.

- 가브리엘라가 일어나 달아나려 했지만 퍼시벌은 그녀가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서 꼼짝 못 하게 무릎으로 찍어 눌렀다. 이번에는 빠져나가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퍼시벌은 양손을 가브리엘라의 심장 위에 모았다. 손바닥 아래 그녀의 심장이 작은 동물의 그것처럼 빠르고 강하게 팔딱거렸다. 

"가브리엘라, 나의 천사." 

퍼시벌이 말했다. 하지만 가브리엘라는 그를 쳐다보지도 대답을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양손을 갈비뼈로 옮기려는 찰나 그녀의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녀가 흘린 땀에 퍼시벌의 양손이 젖은 것이다. 그는 눈을 감았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녀에게 굶주려 있었다. 기쁘게도 그녀가 몸을 뒤틀며 몸부림쳤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목숨은 이제 그의 것이었다. 

- 눈을 떠 다시 보았을 때 가브리엘라는 숨이 끊어져 있었다. 감기지 않은 녹색 눈은 처음 만났던 날처럼 맑고 아름다웠다. 순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애틋한 감정에 휩싸였다. 퍼시벌은 가브리엘라의 뺨과 검은 머리칼, 가죽장갑을 낀 작은 손을 만져보았다. 그녀를 죽여서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지만 동시에 마음이 아팠다.

- 퍼시벌은 기척을 느끼고 플랫폼을 올려다보았다. 에반젤린이 화려한 날개를 활짝 펼친 채 계단 위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날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에반젤린의 등에 솟아난 날개는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그녀의 숨소리에 맞춰 떨렸다. 퍼시벌이 전성기일 때의 날개도 그만큼 위엄이 넘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도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 리라의 음악을 듣고 새로운 힘이 솟아났다. 만약 리라를 손에 넣는다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강해질 수 있을 터였다. 
퍼시벌은 에반젤린에게 다가갔다. 근육의 경련은 이제 멈추었다. 몸을 파고드는 가죽끈 때문에 걸음이 느려지지도 않았다. 리라는 에반젤린의 손 안에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리라를 잡아채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퍼시벌은 어떻게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차분하게 행동해야 한다. 에반젤린이 겁을 먹고 달아나면 안 된다. 

- "날 기다렸구나."

퍼시벌이 에반젤린을 내려다보고 웃으며 말했다. 날개가 생기면서 힘을 얻었지만 그녀는 왠지 아이 같았다. 에반젤린은 머뭇거리며 퍼시벌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떠날 수 없었어요. 어떻게 될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요."

그녀가 말했다.
"네피림이 된다는 게 어떤 건지 궁금했지? 배울 게 무척 많아. 내가 가르쳐줄 것이 아주 많다."

퍼시벌이 말했다.
몸을 꼿꼿이 세우고 선 퍼시벌이 에반젤린의 등에 손을 올리고 날갯죽지 부분의 민감한 피부를 어루만졌다. 날개와 척추가 만나는 부분에 그의 손가락이 닿자 에반젤린은 숨은 약점을 들킨 듯 불안했다.
"날개를 접어. 누가 볼 수도 있잖아. 날개는 혼자 있을 때만 펼치도록 해."

퍼시벌이 말했다.
퍼시벌이 시키는 대로 에반젤린은 날개를 접었다. 날개는 가볍게 접혀 눈앞에서 사라졌다.

- 에반젤린은 첫 번째 탑에 도착해 멈춰 섰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다리의 케이블 사이로 떨어진 함박눈이 그녀가 든 리라 위에도, 보행로 위에도, 저 아래 시커먼 강물 위에도 내려앉았다. 눈앞에 펼쳐진 도시의 반짝이는 불빛이 이스트 강의 새까만 수면에 비쳐 마치 그 작은 부분만이 끝없이 펼쳐진 빈 공간에서 생명이 살아가는 유일한 구역처럼 보였다. 다리 반대편까지 훑어보던 그녀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죽었다. 어머니, 할머니 그리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사랑하게 된 수녀원 자매들도 모두 사라졌다. 에반젤린은 철저히 혼자였다.

- 그녀는 근육을 움직여 날개를 최대한 크게 펼쳤다. 마음먹은 대로 날개가 움직이는 게 놀라웠다. 평생 날개를 달고 산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보행로의 난간 위에 올라서서 바람을 맞았다. 멀리서 반짝이는 별에 정신을 집중하고 균형을 잡았다. 세찬 바람이 불어와 넘어뜨리려 했지만 우아한 동작으로 날개를 움직여 균형을 잡았다. 날개를 멀리 뻗으며 단단한 땅을 박차고 올랐다. 바람이 그녀를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두꺼운 강철 케이블 위를 지나 밤하늘의 심연으로 올려주었다.

- 에반젤린은 방향을 아래로 바꾸어 탑 꼭대기에 내려앉았다. 멀리 아래 보이는 도로는 이미 순백의 눈에 덮여 있었다. 이상하게도 찬바람이 전혀 매섭지 않았다. 아무 감각이 없는 것 같았다. 사실 에반젤린은 더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강물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이제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 에반젤린은 리라를 양손으로 잡았다. 차가운 울림통을 양 손바닥으로 감싸고 힘을 주자 금속 부분이 점점 부드러워지고 따뜻해졌다. 더 세게 힘을 주자 발카인과 피부가 화학반응을 일으키기라도 한 것처럼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용암처럼 끓어오르며 밝은 빛을 냈다. 그녀의 손 안에서 리라는 밤하늘에 빛나는 그 어떤 별보다 밝은 불덩어리로 변했다. 순간 리라를 그대로 간직했으면 하는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 할머니의 말을 기억해 내고는 불덩어리를 앞으로 던졌다. 불덩어리는 유성처럼 강으로 떨어졌다. 불빛이 새까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미리 정해놓은 건 아니었지만 왠지 목적지에 도착한 기분이 들어 베를렌은 돌아서서 가브리엘라의 아파트로 가려했다. 바로 그때 높은 곳에서 뭔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서쪽 탑 위에 날개를 펼친 네피림 하나가 앉아 있었다. 아직 어둑한 새벽이라 끝으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날개의 윤곽만 알아볼 수 있었다. 네피림이 도시를 굽어보려는 듯 탑 끄트머리에서 일어섰다.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듯한 장엄한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보려고 눈을 가늘게 뜬 베를렌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다른 네피림들은 덩치가 컸다. 보통 사람보다 키가 크고 힘이 셌다. 하지만 다리 위에 있는 놈은 작았다. 거대한 날개를 감당하지 못하는 듯 아슬아슬해 보이기까지 했다. 베를렌은 날아오르려는 듯 날개를 뻗는 놈의 모습을 놀란 눈으로 지켜보았다. 놈이 허공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저 괴물 같은 천사는 그의 에반젤린이었다.

- 처음에는 그녀를 소리쳐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두려움과 끔찍한 배신감에 사로잡혔다. 에반젤린은 그를 속였다. 아니, 모두에게 거짓말을 했다. 혐오감을 느끼며 그는 돌아서서 뛰었다. 귓속에서 핏줄이 팔딱거리고 심장이 마구 뛰었다. 차가운 공기가 가득 찬 폐는 숨 쉴 때마다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가슴속의 고통이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에반젤린을 잃었다는 상실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 자신의 감정이야 어떻든 먼저 천사학자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브리엘라가 말했었다-그게 고작 전날 아침이었던가? 만일 그가 천사학자가 된다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베를렌은 이제야 그녀의 말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뉴욕 시,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잇는 브루클린브리지, 서쪽 탑
에반젤린은 해가 뜨기 전에 잠에서 깼다. 그녀는 부드러운 날개를 베고 잠들어 있었다. 잠이 덜 깬 비몽사몽간에 세인트로즈 수녀원에 있는 자기 방의 익숙한 풍경이 보일 것 같았다. 빳빳하게 다린 하얀 시트, 작은 나무 옷장, 창문 구석으로 보이는 허드슨 강. 하지만 몸을 일으켜 어두운 도시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등에는 커다란 보라색 망토 같은 날개가 달려 있었다. 그동안 벌어진 일이 모두 사실이었다고 생각하니 충격이 밀려왔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고,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과거의 그녀도, 그때 생각했던 미래의 가능성도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 에반젤린은 지켜보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려고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화강암 탑의 끄트머리에 올라섰다. 바람이 쉭 소리를 내며 날개를 들어 올려 부력을 불어넣었다. 온 세상이 발아래 있는 어마어마한 높이여서 순간 두려움에 휩싸였다. 하늘을 나는 건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다. 하강할 때는 끝없이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탑 끝에서 한 걸음 내디디면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 같은데도 날개가 있으니 추락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잠깐의 무중력 상태를 느끼다가 차가운 바람 속으로 날아올랐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