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키쿠치 히데유키 / 김진수
출판 : 이야기
출간 : 1999.09.30
저자 : 키쿠치 히데유키 / 김진수
출판 : 이야기
출간 : 1999.10.05
저자 : 키쿠치 히데유키 / 김진수
출판 : 이야기
출간 : 1999.10.15
저자 : 키쿠치 히데유키 / 김진수
출판 : 이야기
출간 : 1999.10.29
저자 : 키쿠치 히데유키 / 김진수
출판 : 이야기
출간 : 1999.11.17
저자 : 키쿠치 히데유키 / 김진수
출판 : 이야기
출간 : 1999.12.08
한창 추억의 책들을 탐독하고 돌아왔다.
빠져들어 있는 대상이 변하면 사소한 일상까지도 따라 변하는 듯하다. 식성, 자세, 습관과 취향들까지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왔다.
초부난가도 아니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계절이 변해 있어 그저 아득하기만 하다.
<마계도시 블루스>는 <마계도시 신주쿠>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소설로, 한글 번역서는 6권 완결로 표기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수십 권에 달하는 미완결 시리즈다. 동제의 <마계도시 블루스>만 해도 22년 17권에 해당하는 금수의 장까지 발간되었고, 그 외 등장인물을 공유하는 <마계 의사> 및 <마진> 시리즈들을 합하면... 여전히 신간이 발간되고 있어 더욱 무시무시하다.
너무나 마음에 드는 세계관을 창조한 다음 그 안에 갇히는 작가들을 간혹 보곤 한다. 사실 '갇히다'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세계에 대해 써야 할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면 당연한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지금 떠오르는 작가들로는 J.R.R. 톨킨이나 조앤 K. 롤링, 안제이 사프콥스키, 아서 코난 도일 등이 있다.
그들이 사랑한 세계는 활자의 세계를 벗어나 영상이나 게임 같은 다양한 미디어 매체들을 통해 수많은 이들에게 함께 사랑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구현'된 세계는 자체적인 생명을 얻기라도 한 것처럼 세월의 흐름을 비껴가며 계속 살아남는다. 때로는 새롭게 덧그려지기도 하고, 때로는 변형되고 재창조되기도 하지만 그 세계를 사랑하는 이들이 남아 있는 한 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해당 세계의 창조자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 보자.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는 세계로부터 자유로워지기란 쉽지 않다. 단순한 분량의 문제가 아니다. 스스로 '이제 다 되었다'라고 느낄 만큼 향유하지 못한다면, 완전히 놓아 보낼 수도 없는 것이다. 아예 새로운 것을 창작하고 싶더라도 마찬가지다. 거대한 기틀부터 세세한 터럭까지 공을 들여 만들어 둔 '익숙한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일런지.
그런 점에서 완결되지 않은 거대 세계관을 여럿 유지하는 작가들을 보면 경이롭다. 그 세계가 얼마나 완성도 있느냐와는 관련이 없다. 향유자들이 '같지 않다'고 느낄 정도로 다르기만 하다면 충분하다. <뱀파이어 헌터 D>와 <마계도시> 시리즈를 현재까지도 이어서 집필하며 간간히 다른 작품도 쓰는 키쿠치 히데유키나, <왕좌의 게임> 같은 세계를 열어두고서도 전혀 다른 SF 세계관과 여타의 세계들을 창조해 내었던 조지 R.R. 마틴, 천재적인 창조자였던 로저 젤라즈니 등등의 작가들이 그 예시다.
아, 나는 결코 어떤 작가들이 어떤 작가들보다 뛰어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특정 작가 집단이 가진 특성이 내게는 무척이나 대단하게 느껴진다는 것뿐. 다른 누군가에게는 다른 작가들의 다른 특성이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키쿠치 히데유키의 두 세계관이 완전히 다른가? 하면 사실 그렇지는 않다. 대부분의 이야기를 한 줄로 요약해 보면 대동소이하다.
"모든 이들이 경탄할 만큼 잘생기고 초인적인 젊은 미남자 이야기"
배경이 되는 세계관 또한 마인과 마물, 요수들이 자유롭게 등장할 수 있는 -매 이야기마다 일회성 설정을 사용하고 지나갈 수 있는- 아포칼립스적인 설정으로 동일. 하지만 D와 아키 세츠라가 같은 인물로 느껴지냐 하면, 내 경우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인물의 성격이나, 주로 경험하는 사건의 구조가 거의 동일하게 흘러가는 데도 그렇다.
누군가의 창작물은 반드시 창작자를 반영한다는 말이 있다. 최근에는 특정 캐릭터에 작가 자신이 강하게 투영된 경우를 '자캐', '오너캐' 등의 단어로 부르는 것 같은데, 반드시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모든 창작물은 창작자를 내포하고 있다. 설사 그 창작자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해서 한 작품을 즐겁게 즐긴다고 해서 그 작품의 모든 것을 좋아하거나 수긍해야 할 필요는 없다. 자신과 맞지 않는 부분은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면 그뿐이다. 그보다는 자신 안의 어떤 것이 건드려지는지, 무엇이 그 부분을 건드리는지에 집중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호'는 그저 '호'로 끝나지 않을 때 유의미하며, 또한 생산적이다. -물론 단순히 즐기고 싶어서라면 그 자체로도 좋다-
이야기가 상당히 장황하게 흘러가는데...
요약하자면 누구나 자신의 '호/불호' 포인트에서 자유롭기 힘들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제대로 '인식되었을 때', 또는 '충분히 감각했을 때' 변화한다.
이를 바꿔 말하자면, 내가 동시에 다양한 세계를 창작하는 작가들에게 경탄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호/불호'를 상당히 유연하게 다룰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영역은 그들에게 지배권을 내어준다. 즉, 그들은 자유다. 그런데다 그 창조물들이 매혹적이기까지 하다니.
아. 역시 한 달여의 휴식기는 너무 길었다.
하고픈 말들을 편안하게 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일단 끝.
bgm이라고 하긴 좀 뭐하지만.
<Petshop of Horrors>의 <Delicious>가 어울리는 이야기들이 몇 편 있다.
마침 생각난 김에 첨부.
- 11월치고는 따뜻한 오후였다. 이런 날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깊숙이 눌러쓴 검은 모자와 옷깃을 세운 코트 옷차림만 보면 사카에초 거리를 지나다니는 평범한 통행인 같았다. 하지만 창백한 피부색과 충혈된 두 눈이 다른 사람과 달랐다.
- 사실 이 도시에서는 그런 모습을 흔히 볼 수가 있었다. 그렇긴 해도 피부가 창백해서 충혈된 눈이 더욱 눈에 띄었다. 망상에 가까운 집념에 사로잡힌 듯한 눈빛이었다.
- 그것만으로도 거리를 지나다니는 주부나 학생들은 기분 나쁜 듯이 길을 피했다. 그러고는 거리가 꽤 떨어진 후에야 비로소 주저주저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더 불쾌했던 것은 남자의 코와 입을 가리고 있는 커다란 마스크였다. 주변의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는 평범한 흰 마스크. 그렇지만 얼룩 하나 없는 마스크인데도 이 남자가 걸치니 가부키초 근방의 정체 모를 병균이 섬유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통행인들 중에는 노골적으로 코와 입을 막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 살을 에는 듯한 매서운 바람만 아니라면 낮잠이라도 한숨 자고 싶게 햇살이 따뜻한 날씨였다. 하지만 이렇게 따뜻한 햇살조차 이 남자에게 닿으면 독기가 되어 증발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이타다키 의원'이라는 간판이 대문 기둥에 붙어 있었고, 그 앞에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목조 건물의 상점이 있었다.
금이 간 곳에 테이프를 붙여놓은 낡은 유리문 앞에서 긴 머리의 청년이 7, 8세가량의 여자아이와 마주 보고 있었다.
청년은 장신의 호리호리한 몸을 구부린 채 양손을 소녀의 얼굴 앞에 펼치고 있었다. 하얀 손가락 사이로 소녀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봐서 실뜨기 놀이를 하고 있는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실은 보이지 않았다.
- 남자는 걸음을 멈추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데다, 청년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햇살을 가득 담은 듯한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은 어딘지 멍해 보였다. 하지만 실로 무서울 만큼 수려한 외모였다.
빨려 들어갈 듯 깊이 있는 칠흑의 눈동자, 자연이 빚은 절묘한 조각 같은 콧날과 입술. 그 얼굴이 자신을 정면으로 응시할 때 뜨거운 전율을 느끼지 않을 여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뿐이리라. 아니, 그런 어린 소녀조차 조그마한 가게의 젊은 주인이라는 인간적인 분위기가 없었다면 멀리서 뜨거운 시선을 보낼지도 모른다.
- 그 청년에겐 푸른색의 터틀 네크 스웨터와 스트레이트 블루진이 잘 어울렸다. 그렇지만 그를 한 번 본 사람은 간절히 원하게 될 것이다. 그에게 정장을 입혀 상류 사회의 호화로운 파티에 참석시켜 보고 싶다고. 턱시도와 나비넥타이 차림이라면 대체 몇 명의 미녀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 내기를 해보고 싶어지는 위험한 아름다움이었다.
- "아뇨. 여기는 제 가게이고, 병원은 옆입니다."
"그게 아냐."
남자는 신음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며 다시 한번 낡은 가게를 가리켰다.
나무 테를 두른 유리 케이스에 낯익은 과자들이 채워져 있었다. 검게 그을린 흔적이 식욕을 돋구는 두꺼운 가타야키, 유리 파편 같은 설탕을 마구 뿌린 자라메, 검은 김을 말아놓은 이소베마키 등이었다.
"이곳이 아키 센베과자점, 아키 DSM 센터의 사무실이라고 들었다."
"맞습니다만."
청년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제가 소장인 아키 세츠라입니다. 저어, 일을 맡기러 오셨나요?"
- "그러나 넘버 원은 자네라고 들었다. 믿을 수는 없지만."
"본업은 센베 과자점입니다."
세츠라는 쑥스러운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신주쿠에서 제일 오래된 가게죠. 올해로 153년째가 됩니다. 아, 이 과자 아주 맛있답니다. 하나 드셔보세요. 마진(魔震 ) 이후로 장사가 잘 안 돼서 부업으로 맨 서처를 시작한 겁니다. 하하하."
"자네의 집안 사정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어."
의뢰인은 생각지도 못한 강한 어조로 내뱉듯이 말했다. 세츠라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런 타입의 남자에게 친절한 속삭임을 듣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편이 훨씬 기뻤던 것이다.
- "사흘 안에 이 여자를 내 집까지 데려와줬으면 한다. 돈은 규정의 두 배를 내겠다. 이름은 사나에 내 아내다."
"호오, 미인이군요."
사진을 집어든 세츠라는 감탄하듯 말했다.
사진 속에서 요염하게 미소 짓고 있는 여성은 그만큼 아름다웠다. 공처럼 통통한 뺨에 반소매 블라우스 아래로 보이는 하얀 팔. 몸매 그 자체가 먹어버리고 싶을 만큼 육감적이었다. 나이는 스물 전후로 보였는데, 육감적인 몸매와 나이에 걸맞지 않는 요염함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평평한 사진 속에서 그녀만이 입체적으로 튀어나온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도 이 젊은 맨 서처보다 아름답지는 않았다.
"실례지만 부인이 도망친 이유는?"
- "그렇지만 이것 한 가지는 대답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것도 규정이라서요. 사흘 안에 부인을 데려오지 못할 경우 구루리 씨에게는 어떤 일이 생기는 겁니까?"
"아내가 나를 죽이겠지."
구루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세츠라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 과자도 맛있답니다. 저, 사흘 후에 부인이 구루리 씨를 죽이러 온다 이 말씀이군요. 그렇다면 그때 잡는 게 어떨까요? 아니면 살인 청부업자를 고용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이 거리에는 사람을 죽일 수만 있다면 돈도 필요 없다며 나설 녀석들이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질문에는 이미 대답했다. 더 이상 대답할 의무는 없겠지. 유감이지만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는 짐작할 수 없다. 그녀는 구외(外)의 인간이니까. 뒤는 잘 부탁한다."
- "보는 사람도 없고. 신주쿠에서는 사람이 잡아먹히는 것 따위는 다반사다. 사람에게 먹힌다면 기동경찰이 움직이겠지만, 들키지 않으면 마찬가지지. 자, 그게 싫으면 얌전히 따라와라."
"싫어요."
- 이 균열이야말로 어느 의미로 마계도시의 이름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0년 전 심야, 새벽 3시에 진도 8.5 이상으로 추정되는 대지진, 이른바 '마진(魔震)'이 신주쿠를 덮쳤다. 그것은 신주쿠 전체에 처참한 손톱자국을 남겼다. 그러나 좀 더 기분 나쁜 것은 외부와의 경계선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이 균열이었다.
진도 8.5의 마진이 신주쿠를 덮쳤을 때, 구외에서는 미진조차 감지되지 않았었다. 마진은 명확하게 신주쿠만을 노렸던 것이다.
- 그렇다. 198X년 9월 13일, 금요일. 모든 것은 그때 시작되었던 것이다.
부흥 작업 중이던 자위대원 69명이 사망했던 '자동소총 발광 난사 사건', 조사를 담당했던 과학자들이 귀환 버스째 실종된 '귀환 버스 소멸 사건', 그리고 마계도시의 이름을 확고하게 만들었던 '위령제·승정 백골화 사건'. 그 모든 것은 악(惡)과 마(魔)를 불러들이는 이 도시에 어울리는 장엄한 팡파레였다.
- 와세다, 니시신주쿠, 요츠야에 건설된 세 개의 다리를 통해 구외와 연결되어 있는 이 도시는, 평온한 일상을 꿈꾸며 밤마다 무시무시한 감시탑의 빛에 비춰지는 불야의 마성(魔城)처럼, 짙고 사악한 광채를 내뿜고 있는 것이다.
- 세츠라가 미호를 찾아온 것은, 그녀가 배수 파이프에 몸을 숨긴 지 이틀째 되는 날 밤이었다.
휴대용 램프의 희미한 빛을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미호는 붙임성 있는 얼굴로 웃고 있는 세츠라를 본 순간, 어떻게 찾아낸 것일까 하는 의아함보다 안도감을 느꼈다. 이 미청년은 방어 태세를 갖출 기분조차 들지 않을 만큼 봄바람 같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 "이곳을 잘도 찾아냈군요."
그녀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말했을 텐데요. 저는 맨 서처. 양복 단추에서 대형 제트여객기까지, 이 마을에서 잃어버린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찾아내죠."
"난 잃어버린 것이 굉장히 많아요."
미호는 조용히 말했다.
"찾아주겠어요?"
"좋아요."
측면에서 흘러가는 물소리를 들으며, 세츠라는 주저하지 않고 대꾸했다.
- "농담이에요."
미호는 웃으며 말했다.
"잃어버리면 끝인 것도 있죠. 그러는 편이 좋은 것도요."
"어떻게 이런 곳을 찾아냈습니까? 우연인가요?"
미호는 고개를 저으며 어둠의 저편을 바라보았다.
작은 빛들이 이동해 간다. 오후 8시. 거리를 지나다니는 자전거들의 불빛이다.
- "저기는 어디쯤일까."
"히가시 나카노, 저 빛이 보이는 쪽이 니혼가쿠."
"어떻게 알죠?"
"간단해요."
세츠라는 파괴된 구멍의 상단에서 4, 50cm 아래로 드리워져 있는 강철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건 중앙선의 선로예요. 이곳을 지나 나카노 구로 들어가죠."
- "유키에가 가르쳐줬어요."
파이프의 발견자를 말하는 것이다.
"동생이에요. 이 마을에서 나보다 훨씬 오랫동안, 훨씬 괴로운 일을 당했죠. 당신과 마찬가지로 많은 것을 알고 있었어요."
- 사립 대학에서 환경 생리학을 공부하고 있던 유키에는 마계도시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유키에는 어느 날, 곧 돌아온다는 편지를 남긴 채 사라져, 여름방학이 끝나도 아파트에 돌아오지 않았다. 미호는 동생이 갈 만한 곳은 한 군데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동생을 찾아 신주쿠에 들어왔다. 그동안 사귀던 남자와 헤어진 것도 그 확신을 깊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범죄자, 정신이상자, 관광이 목적인 구외 거주자 외에, 마계도시에 들어오는 자는 정신적인 상처를 입고 있을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던 것이다. 마음의 빈틈에 마(魔)가 달라붙는다는 말은 역시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 지도에 의지하여 코마 극장 앞을 어슬렁거리고 있던 미호에게 말을 걸어온 것이 마니야였고, 우수한 맨 서처라며 소개받은 것이 야지마와 오리구치였다. 공기마저 오염시키는 요기와 기괴한 주민들. 불안에 떨던 미호에게는, 정상적인 양복 차림의 세 사람이 뱃속까지 정상으로 보였다. 가벼운 성격의 아가씨는 아니었다. 신주쿠의 요기가 이성을 혼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 1970년대에 후반에 이미 극비리에 완성되었다. 이제는 식량 위기에 대한 대비책으로 새로운 가축의 증산을 가능하게 만드는 수준에까지 도달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을 식료품으로, 그것도 식욕과 성욕을 동시에 유발시키는 마력을 지닌 식료품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은...
- 기묘한 의뢰인은 신주쿠의 수많은 매드 사이언티스트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세츠라도 몇 사람인가 알고 있었다.
모든 물체를 황금으로 바꾸는 비법을 알아낸 후, 그것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를 황금으로 만든 영국인. 그는 지금 니시구치 공원의 위험 지대에서, 아무런 불안도 없이 심오한 우주의 철학에 잠겨 있을 것이다.
스스로를 실험체로 만든 자는 그나마 낫다. 강제로 실험체가 된 자의 비탄을 누가 알 것인가.
-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먹으며 지냈는지는 알고 있겠죠?"
"아아."
세츠라는 대답하고 싶지 않은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호는 입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코트 아래는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나체였다.
세츠라는 멍하게 입을 벌렸다.
놀라움보다는 공포 때문일 것이다.
- 플라스틱으로 된 받침대까지 붙어 있었다. 발사장치도 개조하여 전자동 사격도 가능한 것이 틀림없었다. 언뜻 보기에는 그다지 파워가 없는 22구경이라도, 장탄량과 파워를 증가시키고 하이들러 쇼크 같은 충격 팽창탄을 사용하면 인간 따위는 한방에 쓰러뜨릴 수 있다. 전자동으로 총알 세례를 받으면 다가서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 "자, 잠자코 따라오시지."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총을 고쳐 잡으며 세츠라를 향해 한마디 덧붙였다.
"아, 넌 됐어."
생긋 웃는 것으로 봐서 이 미청년은 관리국에서 내린 지령을 알고 있는 듯했다. 검은 양복의 사내는 수염투성이의 입가에 황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착각하지 마. 너는 이곳에서 죽는다. 관리국에는 우리들이 말렸는데도 총을 들고 덤비는 바람에 쏴 죽였다고 말하면 돼. 두목의 명령이야. 야지마의 방에 있던 세 사람도 네놈의 짓이지? 불쌍하게도 오오자와는 마니야와 두목의 일을 너에게 불었다는 이유로 지금쯤 교통사고를 당했을 거다. 하지만 어째서 너 같은 애송이 녀석 때문에 그렇게 벌벌 떠는 걸까. 네놈 얘기만 나오면 떨려서 입도 열지 못하더군."
세츠라는 느닷없이 십자가를 그으며 아멘하고 중얼거렸다.
"뭐야, 너 크리스찬이냐?"
"아뇨, 농담입니다."
- 세츠라의 얼굴이 서서히 변해 갔기 때문이었다.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며 지내는 듯한 평소의 느긋한 인상이 사라지고, 그 아래에서 뭔가 별개의, 뭐라 말할 수 없이 무시무시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외모는 변함없이, 인격만이 변한 것이다.
"그전에 너희들부터 벗는 게 어떨까."
그의 목소리는 아름답고 조용했다. 하지만 따뜻함과 부드러움은 털끝만치도 없었다.
-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의 총구가 움직인 순간,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울렸다.
그것이 신호이기라도 한 듯, 남자들의 옷은 천조각이 되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야쿠자들의 비명소리가 동굴 안에 퍼졌다. 그러나 그들은 드러난 몸을 가릴 수도 방아쇠를 당길 수도 없었다. 격렬한 통증이 온몸을 덮쳐왔던 것이다.
"너희들이 오기 전에 바닥에 깔아 두었다."
세츠라는 야쿠자들의 고통을 즐기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특수 강철 실이다. 거미줄보다 가늘지만 레이저로도 자를 수 없지. 괴로운가? 조금 느슨하게 해 주지. 자, 움직여봐라."
- 이번에는 개가 선두에 섰기 때문에 복잡한 파이프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던 두 사람도 깨끗하게 잡히고 말았다. 10m의 거리를 두고 고성능 저격용 소총으로 위협하는 전법이 효과를 거둔 것이었다. 세츠라의 수법을 알고 있는 살아남은 남자의 계책이었다.
날이 밝자 세츠라와 미호는 엄중하게 신체 조사를 받은 후 요츠야사몬초의 모퉁이에 있는 케라네 조직 사무실까지 끌려갔다.
사방이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지하실에서, 오리구치 테츠야의 독살스러운 웃음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는 다 되어 있지. 자, 어떠냐."
- 오리구치가 기세등등하게 가리키는 물건을 바라본 세츠라는 질린듯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지난밤의 마성적인 분위기는 사라지고, 붙임성 있고 평범한 미청년으로 돌아와 있었다. 단, 어느 쪽이 진짜 그인지는 알 수 없었다.
- 가스레인지와 조리대, 하얀 접시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식기대, 테이블과 의자.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평범한, 그렇기 때문에 사정을 아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기분 나쁠 수 없는 풍경이었다.
- 느긋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미남 청년은 신주쿠 제일의 맨 서처인 것이다.
-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쿠로베는 돈과 가제 시노부에 관한 자료가 들어 있는 봉투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부탁하네. 나도 여러 가지로 조사를 해볼 테니까."
그리고 나서 사무실의 출입구인 아키 센베과자점 뒷문을 나서더니, 두 손을 비비며 따라 나온 세츠라에게 물었다.
"자신의 의지로 신주쿠에 들어와서 행복한 얼굴로 나간 녀석은 없다고들 하더군. 자네도 본 적 없나?"
세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 희망을 가슴에 품고 오는 자는 없다.
기쁨을 안고 나가는 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신주쿠는 그 이름에 어울리는 것이다.
마계도시라는 이름에.
- 저녁놀이 공기를 물들여가는 대지에, 낮은 신음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단순히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원한이 담긴 저주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땅 끝에서 건너와 땅 끝으로 사라지는 신음소리.
그것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 "구외의 사람은 안전지대에서 관광이나 하는 게 좋아요. 위험한 일은 전문가에게 맡겨두는 게 현명하죠."
"그럴 수야 없지. 시노부에 관한 일인데."
- 세츠라는 햇빛 아래 어지럽게 피어 있는 식물들을 아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 멀리 시부야 구와의 경계에 있는 대균열의 주변에는 정체불명의 독초와 괴생물이 생식하고 있다. 그러나 신주쿠문, 오오키도문 부근에 생식하고 있는 생물들은 태양 아래서 보면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마진이 베푼 얼마 안 되는 선행(善行) 중의 하나이다.
"그렇게까지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요?"
- "이 거리를 나갈 때의 얼굴은 세 종류죠."
쿠로베가 머리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세츠라가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며 조용히 말했다.
"우는 얼굴은 한 걸음 내디딘 순간 나갈 때, 무표정은 반년 이상을 지낸 후 나갈 때. 그리고 그 이상 지나면 부모가 봐도 누군지 알아보지 못해요. 이곳은 출발지가 아닙니다. 종착역이죠."
"인생의 종착역이라. 그런 노래를 불렀던 녀석이 있었지. 이 도시에 어울리는 노래일지도 몰라."
"시노부 씨는 종착역에서 2년을 보냈습니다."
-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쿠로베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흡사 성난 곰이 이빨을 드러낸 것 같았다.
"자네, 그 녀석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나? 노래라는 것은 단순한 음표의 나열이 아니야.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의 영혼이야. 자신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시노부의 노래를 생으로 들려주고 싶군. 녀석의 입에서 나오면, 어떤 노래라도 생명을 갖게 되지. 빌리 홀리데이나 에라 피츠제랄드는 댈 것도 아니야. 가수라는 것은 노래를 낳는 사람을 말하는 거야. 녀석만이, 가제 시노부만이 진정한 가수였어."
쿠로베는 아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연예계를 기어올랐던 남자도 꿈을 쫓는 것은 가능하다. 그의 꿈은 지금 마계도시의 한 구석에서 잠자고 있다.
"그 녀석과 내가 무명시절에 어떤 캠페인을 했는지 자넨 모르겠지. 옷을 벗으면 잘 팔릴 거라고, 싫어하는 그 녀석에게 억지로 수영복을 입혀서 번화가를 돌아다녔다네. 자네에게만 하는 얘기지만 그 녀석은 빵집에서 빵을 훔쳐온 적도 있어. 그래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지. 시노부의 실력을 눈치챈 큰 프로덕션에서 자기네 소속의 아이돌 가수가 인기를 잃게 될까 봐 큰 레코드사와 방송국에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야. 그래도 꿋꿋하게 작은 레코드 회사에서 한 곡을 내놨을 때 우리들은 밤새도록 울었지."
- 스피드로 미루어보아 강화 수술을 받았음이 틀림없었다. 길이 1km 이상의 콜트 가바멘트를 빼는 데 백분의 일 초도 걸리지 않는다. 무면허 의사도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수술이다.
- "나를 처치하기 위해 쿠로베 씨의 뒤를 밟은 모양이지? 마침 잘됐군. 나도 야쿠자를 죽이고 싶어서 견딜 수 없던 참이니까."
'저'에서 '나'로, 존댓말에서 반말로. 차갑고 요기 어린 목소리는 더 이상 센베 과자점의 젊은 주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대답해라. 너에게는 실을 감아두지 않았다. 너에게 명령을 한 사람의 이름은?"
- 세츠라는 배를 움켜잡고 신음했다.
세츠라는 낮게 신음하며 발 밑의 기와를 어루만지듯 오른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순간 쿠루지마는 세츠라의 손 끝에서 무수한 빛을 본 듯해 눈썹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그는 세츠라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오른손을 입가로 가져가는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는 확고한 자신이 있었다. 식육충은 이미 수백 마리로 번식하여, 5분도 지나지 않아 이 아름다운 마인을 백골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 세츠라의 입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오른손을 거둬들였다. 세츠라의 아름다운 입술 안쪽에서 이상한 하얀 물질이 넘쳐 나왔다. 쿠루지마는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꿈틀거리는 하얀 벌레들이었던 것이다.
"내장을 태우지 않고 벌레만 태워 죽이느라 고생했다."
- 동이 터올 무렵. 두 사람의 남자가 다리 옆에 서 있었다.
장대한 땅의 균열에 의해 격리된 신주쿠를 구외와 연결해 주는 세 개의 통로 중 하나인 요츠야 게이트까지 쿠로베를 전송한 세츠라였다. 여전히 태평한 얼굴이다.
- "괜찮으니까 받아두게. 보너스라네."
"이제부터 어쩔 셈이죠?"
"구외로 나가면 그 프로덕션을 상대로 한바탕 소란을 벌여볼 생각이네. 이쪽에는 증인도 있으니까 허튼수작은 부릴 수 없을 거야."
"당신의 도움을 받을 줄이야. 쿠루지마도 운이 좋은 녀석이군요."
"그 대신 실컷 이용해 줘야지. 신인 가수의 홍보 활동에."
"신인가수?"
세츠라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맞아, 아직 소개하지 않았지. 이봐, 이리 나와."
세츠라는 다리 그늘에서 나타난 흰 원피스의 소녀를 보고는,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우리 사무실의 비서잖아요!? 오늘 쉰다고 하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미안하지만 비서 일은 끝일세."
쿠로베는 가볍게 윙크하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쿠로베 가요 사무실의 간판스타라네. 놈들의 주식을 이용해서 실컷 돈을 거둬들일 생각이야. 언젠가는 시노부에게 지지 않는 대가수가 될지도 몰라."
"이건 너무 적어요."
쿠로베는 봉투를 바라보며 실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세츠라의 어깨를 힘 있게 툭툭 쳤다.
"안녕, 잘 있게."
쿠로베가 손을 흔들고, 소녀가 머리를 숙이고, 두 사람은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세츠라에게서 냉혹한 마인의 흔적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 손님이 왔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선 세 명의 호스티스는 가게 안으로 들어선 청년을 본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손님은 정교한 조각에 생명을 불어넣은 듯한 미청년이었다.
"아, 저는 아키 세츠라라고 합니다. 아키 DSM-디스커버맨 센터의 소장입니다. 카라키 씨가 당신이 이 사진의 인물을 알고 있다고 해서."
"아아, 그래요? 당신, 탐정?"
"아뇨, 맨 서처입니다."
"그게 그거죠."
- 젊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하프 코트에 같은 색의 터틀 네크 스웨터와 바지. 검은색으로 통일한 복장이 아니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절세의 미녀 뺨치는 외모에 어딘가 멍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문으로 들어오다니 대담하군요."
"성격입니다."
- 그 남자가 자칭 신주쿠 최고의 맨 서처 아키 세츠라를 찾아온 것은 이틀 전 밤이었다.
세츠라는 자기도 모르게 "와아"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의뢰인의 외모가 그만큼 훌륭했던 것이다.
고귀한 혈통이 느껴지는 하얀 얼굴에는 아름다운 콧수염이 있었고, 캐시미어로 된 체스터필드 코트는 잘 닦인 가죽 구두에 지지 않을 만큼 화사하게 빛나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카츠마타. 그는 세츠라가 준비한 센베 과자와 차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말했다.
"아내를 찾아주시오."
"구외에서 오셨습니까?"
- "네 상대는 우리들이다. 젊은 남자만 보면 항문에 뭔가를 꽂아 넣고 싶어서 안달하는 녀석들이 있지. 순순히 털어놓기만 하면 이 자리에서 편안하게 해 주겠다."
세츠라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가 고개를 떨군 채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냉혹 무도한 야쿠자들의 등줄기에 처음으로 오한이 흘렀다.
문득 방아쇠를 당기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무시무시한 격통이 남자들을 사로잡았다.
어느새 고개를 든 세츠라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아름다운 사신의 미소가.
아름다운 얼굴은 그대로 인격만이 변하기 시작했다.
"항문을 좋아하는 것은 너희들만이 아니야."
야쿠자들은 얼음 기둥마저 얼어붙어버릴 듯한 차가운 목소리에 아픔조차 잊고 눈앞의 아름다운 적을 바라보았다.
세츠라와 그들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도 항문에서 복부에 걸쳐, 바늘을 찔러 넣은 듯한 격통이 느껴지는 것이다.
말 그대로였다.
남자들의 항문을 통해 직경 천분의 일 미크론도 되지 않는 특수강철 실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조종하는 것이 눈앞의 젊은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선글라스의 남자를 제외한 세 명의 남자들은 위도 내장도 갈기갈기 찢겨 바닥에 쓰러졌다. 입과 코에서 흘러나오는 선혈이 땅을 적셨다.
- "물론 의뢰인과 직접 거래를 하러 갈 생각이다. 우리들이 만든 아야코-유우코를 데리고. 그녀의 남편은 국보급 가면 제작자라지? 한번 이야기를 나눠볼 가치는 충분하지 않겠나?"
"미야베는 어떻게 했지?"
세츠라는 조용히 물었다.
이 의외의 질문에 센바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 바보 녀석 말이냐. 네 특기가 공수도라는 바보 같은 정보를 제공한 죄로 영원히 잠들게 해 줬다."
"호오, 겨우 그것 때문에? 지금 어디에 있지?"
"요츠야역 근처의 폐허에 묻혀 있다. 왜 그렇게 그 녀석의 안부를 걱정하는 거지?"
세츠라의 미소에 센바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 "들어가라."
센바가 명령했다.
세츠라는 순순히 센바의 명령에 따랐다.
묘지 안으로 들어선 순간, 힘이 쫙 빠지며 현기증이 온몸을 덮쳤다. 온몸의 기관이 거꾸로 뒤집히는 듯한 감각. 세츠라는 식은땀을 흘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만약 네가 그곳에서 빠져나온다면 진심으로 감탄해 주지. 하지만 다이소 사원의 묘지에서 그리 간단히 빠져나올 수는 없을걸."
남자들은 비웃음을 던지며 사라졌다.
-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여자는 분명히 걷고 있었다.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문과의 거리는 전혀 좁혀지지 않는 것이었다.
"소용없어."
너무나도 괴이한 현상에 망연자실하여 서 있는 여자의 등뒤에서, 세츠라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묘지는, 마진에 의해 시공간이 일그러져서 폐쇄공간처럼 되어 있다. 밖에서 들어올 수는 있어도, 안에서 나갈 수는 없어."
"폐쇄라니. 그럼 우리가 갇혀 있다는 건가요? 그럼 어떻게 걸어갈 수 있죠?"
"건너편과 접촉할 수 없는 것뿐, 유한한 공간의 내부는 무한하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말아요! 그럼 밖에서 사람이 들어오지 않는 한, 우린 이대로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건가요?"
"정답."
세츠라는 자신의 고통을 즐기는 듯했다. 하지만 여자는 화가 나기보다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 아름다운 청년이 실은 기괴한 세계의 생물인 것은 아닐까.
- 그것은 마유미의 목소리였던 것일까.
50배를 벌 수 있으면서 왜 자신의 얼굴로 일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던 것일까.
- "남자는 여자의 인격 따위는 보지 않아요. 여자는 얼굴과 몸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죠. 그건 이 도시의 남자들에 한해서라고 해둘까요? 하지만 나는 구외에서의 생활을 견딜 수 없어서 이 도시에 왔어요. 결국 이곳이나 구외나 다른 점은 전혀 없었지만. 나, 이 가면이 증오스러웠어요. 번이나 갈기갈기 찢으려고 했는지 몰라요. 하지만 이 가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어요. 그러는 동안 어떻게 됐는 줄 알아요? 거울이 무서워졌어요. 내 얼굴을 보는 것도, 이 얼굴을 보는 것도."
세츠라의 뇌리에 거울이 없는 방과 거울을 치우는 여자의 모습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러나 세츠라는 얼음 같은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센바가 나를 처치하게 만들고 모습을 감출 속셈이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지?"
"당신은 아름다운걸요."
침묵이 흘렀다.
"이렇게 아름다운 남자가 나를 찾고 있다는 것이 기뻤어요. 그래서 잠시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아파트에 데려가서 유우코가 실종됐다고 믿게 한 후 나도 어디론가 가버릴 생각이었어요. 당신과 함께 오토바이에 탔을 때가 내겐 제일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 질문은 하나였다.
그 저택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는가.
대답도 하나였다.
- 홀에는 샹들리에의 수정이 던지는 빛이 반짝이고, 벽에는 스텝을 밟는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출석자는 전원 10대 후반에서 40대까지의 남녀로, 그들 사이에는 티끌만 한 연관성도 없었다.
파티의 초대장과 함께 남자에게는 연미복, 여자에게는 이브닝드레스가 보내져 왔다. 마치 치수를 잰 것처럼 꼭 맞는 옷이었다. 사람들은 이 귀족이 어떤 조사기관과 재단사를 고용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했다.
- "드레스에는 댄스 머신이 장치되어 있죠."
이제 막 20세가 된 건어물상의 딸은 그렇게 말했으며,
"아뇨, 마법에 걸려 있었어요."
18세의 찻집 소녀는 이렇게 말했다.
- 누구나 춤을 출 수 있었다.
가벼운 스텝은 마법의 드레스와 구두 덕분이라 해도, 드레스와 연미복을 휘날리며 반짝거리는 복도에 희미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은 막 완성된 신사와 숙녀인 것이다.
- 풀 밴드는 때로는 장중하게 때때로 가볍게 <문 라이트 세레나데>와 <인 더 무드>를 연주하고, 최후에 집사인 사이토가 나타나 라스트 왈츠를 선언한다.
<올드 랭 자인 Auld Lang Syne>
반딧불의 빛.
연주가 한 소절 끝날 때마다 조명은 하나씩 꺼져가고, 사람들은 홀에서 나와 서서히 닫히는 문이 긴 라스트의 선율과 어둠에 싸인 홀을 차단하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 그 하룻밤은 대체 무엇을 위해서였던 것일까.
왜 자신들이 선택된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이미 본래의 생활로 되돌아와 있으니까.
"꿈을 꾼 거예요."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꿈을.
- 입구에서 야기 미야비를 찾자, 부친이 튀어나왔다.
"네 녀석이냐, 내 딸을 데리고 나간 놈이? 아니면 한패냐? 말해 두지만, 우리는 팔리지 않는 책을 전문으로 팔고 있는 서점이다. 돈은 한 푼도 없어!"
"그건 보면 압니다."
- 단발 장총을 쥔 남자들의 육체는, 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눈에도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실을 사용하여 먹이의 신경계를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아름다운 마인에게.
아키 세츠라. 어떤 사람은 그를 이렇게 부른다.
인형술사라고.
- 닮은 곳이라고는 전혀 없는 두 개의 그림자가 넓은 복도를 미끄러져 간다.
백작은 세츠라가 발소리를 내지 않는 것에 상당히 감탄한 모양이었다.
- "요 몇 년 동안 나는 매우 우울했다."
스위치를 누르며 백작은 추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푸른 섬광이 두 사람을 감쌌다.
"만족할 수 없는 작품을 세상에 내보내서 얼마 되지 않는 수입을 손에 넣는 것이 참을 수 없었지. 그래서는 안 돼. 내 온 힘을 기울인 '교육'의 성과는, 그에 걸맞는 인간이 몸에 지녀야만 하는 것이다."
빛 속에서 기괴한 방과 장치가 형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전혀 소질 없는 뒷골목의 계집애 하나를 훌륭한 숙녀로 만드는데 얼마만큼의 노력이 필요한지 아나?"
백작의 벌레 같은 손이, 세츠라조차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들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최면 학습 장치. 뇌파질 기능 증폭기. 전부 내가 개발한 것일세. 종래의 제품보다 150%가량 더 효율적이지. 하지만 아무리 지식을 익히고 교양을 높여도 숙녀에게 어울리는 기품만큼은, 그것만큼은 천성의 자질과 그 목적에 맞는 교육 기간이 필요하다. 알고 있겠지, 자네라면."
"소재의 문제인가."
- "밤마다 무도회를 왜 열었겠나? 그날그날을 벌레처럼 살아가는 녀석들에게 한 벌에 50만 엔이나 하는 드레스를 보낸 이유가 무엇이겠나? 모든 것은 진실한 숙녀가 될 소녀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네."
처음으로 세츠라는 하나의 의지를 담고 추악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녀들은 이렇게 말했었다.
아름다운 꿈이었다고.
감사하고 있다고.
자신들이 밟았던 우아한 스텝이, 정숙한 섹스용 노예의 선별의식이었다는 것을 누가 알 수 있을 것인가.
- "왜 무도회를 연 거냐?"
세츠라가 물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또는 그 밖에는 물을 것이 전혀 없는 것처럼.
"나는 춤을 출 수가 없으니까. 이 몸으로는 춤을 추는 것이 불가능하거든. 하지만 그들은 하룻밤의 스타가 될 수 있다. 숙녀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 정도의 도락은 허락될 것 같아서."
우아하게 춤추는 거리의 사람들 중에서, 아름다운 노예를 선택해 낸다. 그것은 자신의 추악함에 대한 슬픔 때문일까, 아니면 일그러진 원념 때문일까.
- "이미 초보 교육은 완료되어 있다. 고전 교양은 베르길리우스의 시에서 오마르 사이의 경구까지. 댄스는 왈츠밖에 못 추지만 세계선수권대회에 나가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다. 또 하나, 다른 즐거움도 있지만."
-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여자라네."
"상품이겠지."
- "몇 사람이지?"
세츠라가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물었다.
"스무 명쯤. 얼마 되지 않지. 하지만 진정한 숙녀는 본래 드문 것이 당연한 법. 나의 작품들은 단 한 번도 손님의 불평을 받은 적이 없다네."
"손님은 오오누키가 찾아오나?"
"물론, 듣지 못했나? 우리들은 서로 손을 잡고 일을 하고 있다네. 나는 교관이지, 영업은 오오누키 같은 사기꾼이 맡으면 돼. 리스트를 봤나?"
세츠라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보수당 간부, 교육계의 거물...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 정도일세. 상대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때로는 자네에게 충고를 했던 녀석들처럼, 사사로운 도움이 되는 소도구도 준비할 수 있으니까 말이지."
- "이 신주쿠에서 경찰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백작은 물끄러미 세츠라를 바라보았다.
끈끈한 시선이었다. 마치 사랑스러운 것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자네를 발견하게 된 것은 신주쿠에서 얻은 최대의 수확이다."
- 네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모두 무시무시한 근육을 지닌 전라의 남자였다.
"남자를 '교육' 하는 것도 가능하거든."
백작은 자랑스럽게 웃었다.
요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자와 비교하면 상당히 간단하지. 남자는 근육과 그곳만 튼튼하면 전부 걸작이 되니까. 이 녀석들도 본래는 뼈와 가죽밖에 없는 말라빠진 신주쿠의 부랑자들이었다네. 싸움에 걸맞는 작품들이지."
백작은 남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 급소를 쳐서 기절시켜라.”
- 반년 전.
대체 언제를 기준으로 반년 전인 것일까. 알 수 없다. 이 도시에는 규칙적인 시간 따위 존재하지 않으니까.
어제는 오늘, 오늘은 내일, 내일은 어제.
사람들은 그 속에서 살아간다.
- 차가운 바람이 창을 흔들고 지나간다.
마계도시의 겨울은 구외의 겨울보다 30% 정도 더 춥다. 요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시공간이 일그러졌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확한 원인은 아직도 모른다.
- 손님들은 혀보다 눈을 더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시선의 중심에 한 청년이 있다.
남자도 여자도 끈끈한 시선이었다.
- 청년은 매우 아름다웠다.
약간 멍한 표정을 띤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는 관찰자들의 눈에는 황홀한 빛이 어려 있었다.
누구도 모른다.
이 청년의 아름다움이 두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가 또 하나의 가면을 썼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 아키 세츠라였다.
여자들은 무심하게 국수를 먹는 그의 입가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저 입술로...
아마도 그런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20대 초반의 아가씨들이었다.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 땀을 뻘뻘 흘리며 국물을 마시고 있는 노동자들까지도 여자들과 똑같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 미나코의 얼굴이 의뢰인답게 변했다.
"이건 어떤가요?"
미나코는 발 밑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습격 도중에 몸을 돌린 괴물은 이 순진한 부인의 기묘함을 꿰뚫어 본 것일까.
- 세츠라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미나코가 나타났을 때부터,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거예요. 이것을 되찾아주셨으면 해요."
달빛을 반사하는 대지 위에, 여자의 그림자는 없었다.
"이것을 훔친 남자를 찾지 못하면, 나는 행복하게 될 수 없어요."
미나코의 목소리가 흐느낌처럼 변했다.
그녀의 그림자를 훔쳐달라고 의뢰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 "그때까지 기다렸다가는 너무 늦어요."
세츠라는 발걸음을 돌렸다.
"어이, 조심하게."
등뒤에서 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 이상하게 그림자가 엷어."
- 하야카와는 그림자의 목 부분에서 바늘 같은 것을 빼냈다.
"어째서 날 괴롭히는 거죠? 이 이상 대체 뭘 원하는 건가요?"
"아무것도."
하야카와는 얼굴에 난 무성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돈 따위는 필요 없어. 너의 몸에도 미련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죽도록 원하는 것은 아냐. 뭐, 굳이 말하자면 이 도시의 인간이 행복하게 되는 걸 원하지 않을 뿐이지."
- "이 도시의 녀석들은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나만 남겨지는 것은 싫어, 녀석만 행복하게 되도록 내버려 둘 줄 알고, 이렇게 말이지. 그야 겉으로는 행복을 빈다는 둥, 두 번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말라는 둥 지껄이지만, 헤헤, 본심은 이런 거야. 이 도시에 살던 자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어. 3개월만 지나면 다들 도망치듯 되돌아오지. 돌세례와 경멸의 시선에 떠밀려."
"난 달라요."
미나코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 도시에서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기뻐하며 전송해 주고 싶어요. 운 나쁘게 되돌아온 사람이 있어도, 그것은 당신 탓이 아니라고 위로해 주고 싶어요. 이 도시의 사람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러니까 나는 이곳을 떠나겠어요. 부탁이에요, 더 이상 날 괴롭히지 말아 줘요. 조용히 보내줘요."
- 그림자는 움직였다. 세츠라는 머리 위로 실을 날려 날아오는 실을 방어했다. 자신의 그림자와 싸우는 경험 따위는, 이 도시가 아니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싸우면 좋단 말인가.
그림자가 실을 날렸다.
세츠라의 옆에 있던 테이블의 그림자가 두 조각으로 잘라졌다. 그러자 몇 초 후 본체 또한 잘라져 바닥을 진동시켰다.
본체를 자르면 그림자도 잘리고, 그림자를 자르면 본체도...
세츠라는 아무런 공격도 할 수 없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 그때 문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문을 여는 소리.
빛이 들어오면 그림자가 생긴다.
세츠라의 적이.
- "내게 새로운 그림자가 생겼다. 따라서 너는 이제 나의 그림자가 아니다."
- 주인을 배신한 그림자는 불안한 듯이 희미한 어둠 속에 윤곽을 드리우고 있었다. 주인으로부터 결별을 선고받은 순간, 그림자는 모든 힘을 잃었다.
세츠라의 오른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 "이상한 기분이로군."
세츠라는 냉혹한 표정에 어울리지 않는 쓴웃음 섞인 감상을 중얼거린 후, 곧 문으로 향했다.
멍청하게 실내의 사투를 지켜보고 있던 관리인과 가스 공사원이 당황하며 좌우로 비킨 것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아름다운 마인은 더욱더 거세게 쏟아지기 시작한 저녁비 속으로 사라졌다.
- "어서 들어와."
미나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문을 닫기 전, 미나코는 바깥을 바라보았다.
"저쪽에 서 있는 두 사람은 누구지? 친구?"
조금 생각한 후, 미나코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살짝 닫힌 문이 거센 비를 막아주었다.
- 5개월 후, 세츠라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 편지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처음 만났던 하나조노 신사에서 만났으면 합니다.'
날짜의 지정과 서명도 있었다. 밤. 하나조노 신사에서.
- 세츠라는 지시에 따랐다. 그러나 미나코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 통의 편지에 담겨 있는 글은 진실이었던 것일까. 그녀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다시 한번 그 모든 것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였을까.
여자는 행복하게 된 것일까.
천천히 걷기 시작한 세츠라의 아름다운 옆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 <신주쿠일보>에는 사망 기사가 많이 실린다. 신문 전체 다섯 페이지 가운데 세 페이지를 차지할 정도다. 사망 기사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폭력단 관계자들이나 부랑자들이다. 죽은 자들의 이름, 주소, 사망 원인 등은 '하이에나'라고 불리는 기자들의 조사에 의해 낱낱이 밝혀진다.
죽음의 날개가 결코 평등하지는 않으므로 약한 자들이 먼저 습격당하기 마련이라는 것은 이곳 마계도시에서도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2월 초 두 남자의 사망 기사가 신문에 실렸을 때 신주쿠의 주민들은 매우 당황하고 말았다.
- 사무실에서 장부를 정리하고 있던 센베과자점의 젊은 주인은 문득 7개월 전 여름을 떠올리고 있었다.
2월의 마지막 의뢰인은 점잖은 양복을 입은 남자였다.
"경찰의 의뢰는 받지 않습니다."
세츠라가 말했다.
"언제나 값을 깎으려고 드니까요."
"그러지 말고 내 얘기를 좀 들어주게. 여자를 한 사람 찾고 있네. 자네도 아는 여자야."
형사는 테이블 위에 한 장의 합성사진을 올려놓았다.
"모르겠는데요."
세츠라는 사진 속의 소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갈색 피부와 검은 눈동자의 소녀였다.
"시치미 떼지 말게. 여름 내내 자네 가게에 센베 과자를 사러 드나들었던 집시 소녀일세. 특히 시나가와마키를 좋아했었지."
"제게 의뢰를 하고 싶으시면 자신의 조사 능력을 자랑하는 것은 그만두시죠."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것뿐이네. 신주쿠 경찰의 정보 수집 능력을 총동원해도 한 사람의 맨 서처에게는 미치지 못하더군."
"사정을 물어봐도 될까요."
- 그날 밤늦게 아케보노바시 근처의 누드 클럽 스즈네에서는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검은 코트 차림의 아름다운 청년이 클럽 안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가게 밖에서 속옷 차림으로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던 스트립 걸들도 넋 나간 표정으로 앞을 다투어 가게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무슨 일인가 하고 뛰쳐나온 경호원들조차 멍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췄다. 그만큼 청년의 얼굴은 아름다웠던 것이다.
"아키 세츠라라고 합니다. 후루카와 사장을 만나 뵙고 싶은데요."
- "오랜만이군."
후루카와는 세츠라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세츠라는 아무 말없이 후루카와의 악수를 무시했다.
"잊고 있었군. 자네는 옛날부터 악수는 하지 않는 주의였지."
후루카와는 기분이 상한 기색도 없이 손가락으로 입가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의 등뒤에 두 명, 그리고 세츠라의 등뒤에 세 명의 부하들이 서 있었다.
"당신하고는요."
- 그러나 나츠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오직 가로등 아래에 서 있는 한 청년만이 보일 뿐이었다.
어둠이 오랜 시간을 들여 빚어낸 듯한 아름다운 청년만이.
- 나츠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청년도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슬플 만큼 얼어붙어 있었다.
그녀는 발걸음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만남의 인사도 없었고, 또 지금 이별의 인사도 없었다.
그녀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가로등 아래 서 있던 청년은 비로소 몸을 움직였다.
어둠조차 술렁이게 만드는 아름다운 얼굴.
아키 세츠라였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후루카와 저택을 바라보았다.
"또 한 사람."
그의 중얼거림이 가로등의 불빛 속에 녹아들었다.
"쓰레기는 몇 명을 죽여도 상관없지만 이제 여름은 되돌아오지 않아."
- "니나는 어디에 있죠?"
세츠라가 물었다.
"몰라. 설사 알고 있더라도 자네에게만은 가르쳐줄 수 없어."
"함께 있나요?"
"노 코멘트."
"2월에 두 사람의 남자가 죽었습니다. 오늘 석간신문에는 세 번째 피해자의 사망 기사가 실릴 겁니다. 전부 거물 야쿠자입니다. 네 번째는 누구일지 알고 싶습니다."
"또 사망 기사를 읽으면 될 거 아닌가."
- "나는 그 애가 좋았다. 이 극단 사람들은 누구나 그랬지. 자네가 뭘 알고 싶은지, 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그런 질문은 경찰에게나 하는 것이 좋을 거야."
"어제 니나와 만났습니다."
감독은 계절이 갑자기 여름으로 변해 버린 듯한 표정으로 세츠라를 바라보았다.
그는 가슴에서 북받쳐오르는 감정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어째서 이곳에 얼굴을 내밀었지?"
어린아이를 꾸짖는 아버지 같은 말투였다.
- 여름. 7월의 기억.
세츠라의 가게에 하루에 세 번씩이나 드나들던 소녀.
소녀의 주문을 받고 하나조노 신사에 산더미 같은 센베 과자를 배달했던 세츠라.
그때마다 소녀는 춤을 추고 있었다.
금실은실로 짠 스커트 햇빛과 달빛에 반짝거리는 수정 가루.
그녀의 눈부신 미소는 당신이 이곳에 있는 것이 기뻐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매번 세츠라는 매정하게 발걸음을 돌렸고 소녀는 그를 좇아 나오곤 했다.
- "신주쿠를 떠나기 전에 니나는 자네에게 프로포즈를 했었지. 그때 자네는 뭐라고 대답했나? 그것만으로도 자넨 이곳에 올 자격도 니나에 대해 물을 자격도 없어. 그 애의 성격은 한눈에 알았을 텐데. 안아주지도 않을 거면서 어째서 매일 그런 것을 들고 여길 찾아왔던 거지?"
- "손님의 부탁을 받으면 배달해 주는 것이 제 일이니까요. 이번 일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후에 어떻게 됐나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은빛 광선이 세츠라의 오른쪽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등뒤에서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가 울렸다.
- "하지만 기억해 둬요. 당신은 당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받고 있는 것뿐이에요. 우리들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다는 건가요? 춤으로 전송해 드리죠. 집시의 춤엔 죽은 자의 여행길을 축복하는 의미가 있죠. 설령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 "혹시나 하고 오오츠키를 감시하고 있길 잘했군. 얘기는 전부 들었다. 이번에는 나만을 위해 춤을 춰다오. 물론 술은 마시지 말고."
오우기마치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어째서 이곳에 온 거냐?"
그는 세츠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미행하는 것은 익숙하지만 미행당하는 것은 서툰 모양이군요. 얼마 전 극단을 방문했을 때 당신의 몸에 실을 감아두었습니다."
- 세츠라는 니나와 만났던 날 밤 그녀의 몸에 실을 감아두지 않았다. 니나가 남자들을 살해한 이유를 형사를 통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세츠라는 살짝 시선을 돌려 하염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슬픈 얼굴을 외면했다.
지난 여름날 그녀의 맑은 미소와 슬픈 바이올린 선율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또 가버릴 생각이군요. 나를 남겨두고. 당신이 떠나버린 후 나는 죽으려고 생각했어요. 그걸 막아준 것이 진이었어요. 진 덕분에 나는 겨우 살아갈 수 있었어요. 하지만."
세츠라의 발이 멈췄다.
니나의 얼굴은 눈물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나는 도저히 당신을 잊을 수 없었어요. 진은 모르고 있었지만 꿈에 나타나는 것은 언제나 당신의 얼굴이었어요. 두 번째 남자를 죽인 날 밤, 난 당신의 집 앞을 지나갔었죠. 눈치채지 못했나요? 옛날 것과 같은 향수를 뿌리고 있었는데."
세츠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그에게 문득 여름의 기억이 떠오른 것은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온 옅은 향기 때문이었던 것일까.
- "알고 있는 거예요, 당신은."
니나는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마음도, 나를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될지도 당신은 다 알고 있는 거예요. 진은 아무것도 몰랐어요. 당신은 모든 것을 알면서도 언제나 등을 돌릴 뿐이군요. 기쁨으로부터도, 슬픔으로부터도, 분노로부터도, 한탄으로부터도. 그것이 이 도시의 방식인가요? 당신은 뼛속까지 마계도시의 주민이에요."
최후의 한마디는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니나는 울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흐느낌으로 흔들리는 그녀의 어깨 위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말이 맞아."
- "형의 진짜 적이 누군지 이제야 겨우 알았다. 널 이대로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어."
"그만둬."
세츠라는 짧게 말했다.
평소의 세츠라가 아닌 또 하나의 세츠라의 목소리로.
- 이완이 던진 칼이 세츠라의 왼쪽 어깨에 꽂혔을 때 이완의 목에서도 피가 뿜어져 나왔다.
니나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이완에게 뛰어갔다.
세츠라는 말없이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슬픔과 죽음만을 남기고.
바깥은 하얀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그것이 어느 여름날과 닮은 듯한 기분이 들어 조용히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계도시의 주민에게는 어떠한 과거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자네도 한 모금 마셔보지 않겠나? 내가 마시던 거지만."
"단것을 좋아하나?"
세츠라가 물었다. 이런 상태에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지금의 세츠라에게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유스케는 그것을 물론 알지 못했다.
"물론."
"백 엔을 빌려주는 게 아니었는데."
"미안하군."
- 두 사람은 잠시 함께 걸었다.
주택가에서 벗어났을 무렵 세츠라가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따라올 생각이지?"
"어디까지라도 상관없어. 지금 당장 헤어져도 상관없고, 실은 자네가 너무 잘생겨서 잠시 넋을 잃고 말았다네. 알고 있나?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자네처럼 아름다운 청년을 달에게 사랑받은 남자,라고 한다네. 자, 그럼."
"어디로 가는 거지?"
- 그녀는 상당한 비용과 시간을 들여 재단한 듯한 고급스러운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쓸데없는 장식품이 전혀 없는 심플한 디자인이 그녀의 기품과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해 주었다. 오른손 약지에서는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카나에의 친정아버지는 무츠시로 가문을 능가하는 거대한 기업의 총수였다.
"아는 사람의 병원에 입원시켜서 치료를 받게 하고 있습니다. 안심하세요. 2~3일만 지나면 다시 산책을 즐길 수 있을 테니까요."
"산책이라."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던 그녀의 얼굴에 문득 밝은 표정이 되돌아왔다.
"그이답군요. 커다란 사무용 책상에 앉아서 시거를 피우고 있는 것보다 훨씬 어울려요. 그건 그렇고 산책 코스는 언제나 정해져 있나요?"
"거기 놓여 있는 리포트와 CD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입니다."
"당신에게서 직접 듣고 싶어요."
노래를 부르는 듯한 어조였다.
- 세츠라는 고개를 끄덕인 후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산책은 12시를 넘어서 시작됩니다. 먼저 아파트를 나와 근처의 스낵바에서 간단한 식사를 한 후, 그곳에서 300m 정도 떨어진 슈퍼마켓에서 쇼핑을 하죠. 첫날은 책을 샀고, 다음날은 쿠키와 탄산음료, 그리고 주간지를 몇 권 샀습니다. 센베 과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사흘째에는 아무것도 사지 않았습니다. 사흘 내내 지켜봤지만 물건을 사건 사지 않건 정말로 즐거운 듯이 물건을 ..."
- "돌아갈 생각은 없나요?"
"그럴 거면 처음부터 오지도 않았다네."
"회사가 망하면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될 사람이 많은 것 같던데요."
"내가 있어도 마찬가지야. 아버지의 방식을 계속 고집하다가는 언젠가 끝나게 되어 있어. 기업의 경영 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거니까. 결국은 자멸할 수밖에 없게 되겠지."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골치 아픈 얘기로군요.”
"나는 내일 이곳에서 나갈 거야. 놈들과 마주치는 게 무서워서 도망치거나 숨기만 한다면 이 도시에 온 보람이 없으니까."
"정말 못 말리겠군요."
"신세 많이 졌네. 자네의 이름은 결코 잊지 않을 거야."
세츠라는 유스케가 내민 손을 힘껏 잡았다.
- 사람은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없다. 타인의 의지로 쉽게 바뀔 정도라면 그것은 살아가는 방법이기는 해도 삶의 방식은 아닌 것이다. 이 도시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 "믿을 수 없어. 녀석에게 뭘 보증받았나? 현금은 없을 테고, 내가 은퇴한 후 후지오미 가문과 손을 잡고 회사를 손에 넣으면 한 자리 주겠다고 약속하던가?"
"그는 돌아갈 생각 따위 없는 것 같던데요."
"마계도시의 맨 서처치고는 상당히 감상적인 말을 하는군.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는 살인자의 말을 믿을 수 있나? 그 애는 아들이야."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요."
"나와 녀석의 관계는 알고 있나?"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저도 여러 가지로 조사를 해봤으니까요."
"나는 그 애에게 제왕학을 가르치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미국과 유럽에 보냈지. 그런데 녀석이 배워온 것은 젊은 떠돌이들의 제멋대로인 생활 방식뿐이었지. 쓰레기 같은 녀석. 그리고는 도망을 치고 말았네. 하필이면 내가 일생을 건 프로젝트를 실현하기 직전에. 아무리 쓰레기라도 지금 나에게는 그 녀석이 필요해."
"쓰레기를 필요로 하는 인간은 쓰레기 이하가 아닐까요?"
- 세츠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모르는 사이에 감각을 혼란시키는 환술의 포로가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약물과 광학 처리에 의한 물리 수단인지 정신력에 의한 것인지 그것조차도 알 수 없었다. 충분히 성가신 사태였다. 구청의 방범과에서는 환술사의 단골손님리스트를 5년이 넘도록 작성하고 있지만 아직도 완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위에서 압력을 넣었다는 소문이었다. 경관 중에도 흑마술을 사용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 이대로 굶어 죽게 할 생각인 것일까, 아니면 다른 공격을 해올 것인가.
영리한 상대라면 전자를 택했으리라.
- 좌우에서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미녀들이 기와더미를 넘어 나타났다. 모두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몸매를 하고 있었다. 환각의 미녀들이다.
그러나 이 세계 자체가 환상인 이상 이곳에 살고 있는 여자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환상은 세츠라 쪽일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죠?"
세츠라가 정중하게 물었다.
"“이리 와요. 우리들과 함께 가요."
여자들은 달콤한 꽃에 몰려드는 벌떼처럼 세츠라에게 다가왔다.
"우리들과 함께 가요. 생명이 끝날 때까지. 우리들은 동반녀, 영원히 당신의 곁에 있답니다."
여자들의 달콤한 체취가 풍겨왔다.
- "자네답지 않은 말은 그만두게. 이곳은 어떤 기묘한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는 마계 도시니까."
소년은 유스케의 등뒤로 숨어버렸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애가 놀라지 않나."
- "겁내지 마라."
세츠라는 몸을 굽히며 말했다. 그러나 소년은 여전히 유스케의 등 뒤에 매달려 있었다. 세츠라는 할 수 없이 화제를 바꿨다.
"오늘밤엔 무슨 일을 할 생각인가요?"
"요 앞에 새로운 슈퍼마켓이 생겼다길래 구경하러 가는 중이야. 스파게티와 맥주가 다 떨어졌거든. 그리고 나서 새로 문을 연 피아노 바에 갈 생각이라네. 피아니스트가 미인이라더군. 게다가 그녀가 연주하는 '다뉴브 강의 물결'은 끝내준다지 뭔가. 그곳에서 멋진 조개 수프와 차가운 콜라를 마실 거야. 그 후에 두 시간 정도 신오오쿠보 근처를 어슬렁거릴 작정이지."
"맥주는 싫어하지 않았었나요?"
"내가 아니야. 이 애가 마실 거라네."
- "단 한 사람의 손님을 위해 열려 있는 가게일지도 모릅니다. 빨리 가보지 않으면 '체인징 파트너'는 처분될지도 몰라요."
"조만간 들를 예정이라네. 산책 코스는 언제나 변하니까."
- "기꺼이."
세츠라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잠시 눈을 감고 여름의 거리 위에서 달빛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안녕히."
여자가 말했다.
"안녕히."
세츠라가 말했다.
- "나는 후지오미 가문의 딸이자 무츠시로 유스케의 아내예요. 당신의 말대로 차가운 여자랍니다. 그이가 택한 길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내게 이런 전화를?"
"모르겠습니다. 그저 남편 되시는 분의 밤 산책에 대해 나와 부인이 같은 의견을 갖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생각해 보겠어요. 안녕히."
- "천만에요. 앗, 휴식 시간이다. 난 잠깐 쉬고 올 테니 기다려줘요. 아키 세츠라 씨라고 했죠?"
젊은이는 윙크를 하며 몸을 돌렸다. 바람을 가르는 듯한 날카로운 동작이었다. 검은 턱시도에 감싸인 날씬한 몸은 강철의 용수철을 연상시켰다.
가게 안쪽으로 걸어가는 그에게 호스티스로 보이는 여자가 나타나 뭔가 말을 걸었다. 하지만 젊은이는 손을 흔들며 문 안쪽으로 사라졌다.
여자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방문객을 향해 다가왔다.
- "실례합니다만."
방문객의 옆을 스쳐 지나갈 때 어딘지 느긋해 보이는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여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여자는 그대로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방금 가게 안으로 들어간 청년을 바라볼 때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그보다는 좀 더 순수한, 재능 있는 화가가 절세의 모델이나 예술품을 처음 봤을 때 같은 표정이었다.
아키 세츠라였다.
- "지금 그 남자는 서브 매니저인가요?"
"아뇨 밴서예요."
밴서란 가드맨을 가리키는 말이다. 미국의 클럽이나 바에서는 가드맨을 밴서라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
-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름을 묻는 것을 잊어버렸지만 친절한 분이로군요."
"그래요. 잡일을 하는 아주머니나 보이에게도 친절하죠. 그러면서도 윗사람들에게는 할 말은 확실하게 하는 편이고요."
여자는 잠시 말을 멈췄다. 눈앞에 서 있는 청년의 아름다운 얼굴이 만들어낸 최면이 청년에 대한 상념에 의해 풀어진 모양이었다. 여자의 날카로운 눈이 어린아이처럼 동경의 눈빛으로 반짝거렸다.
"게다가 굉장히 강해요."
"호오."
"우리 가게는 가부키초에서도 상당히 문제거리가 많은 편에 속하죠. 하지만 그 사람 혼자 모든 것을 처리하고 있어요. 그런 멋진 싸움은 이 거리에서도 보기 힘들죠. 다들 그라면 메피스토 병원의 원장이나 신주쿠의 맨 서처와 싸워도 막상막하일지 모른다고 수군거리고 있어요."
"이름이 뭐죠?"
"미나즈키 호우마. 다들 팬서(표범)라고 부르고 있어요. 어울리죠?"
"정말 어울리는군요."
세츠라의 눈 속에는 검은 턱시도 소매를 칼날처럼 펄럭이던 청년의 모습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 호스티스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이제 가보세요."
- 세츠라는 약속된 골목으로 향했다.
스쳐 지나가는 몇몇 사람들이 창백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멈췄다. 그래도 세츠라는 태연히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했다.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남자 여자 상관없이 데이트를 신청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 "네놈이 아키 세츠라냐?"
한 남자가 물었다. 다른 남자들에 비해 몸집은 작았지만 눈빛만은 훨씬 박력 있었다. 오른손에는 가느다란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그런데요."
세츠라는 졸린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면 머리가 이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태연한 태도였다. 다섯 명의 남자는 전신에 광기를 풍기고 있었다.
"가엾게도. 네놈이 두 번 다시 이상한 얘기를 물어보고 다닐 수 없도록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왔다.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도록 해라."
지팡이를 든 남자가 턱으로 신호를 보내자 남자들이 세츠라를 둘러쌌다.
"곤란한데요."
- 약간 어눌하긴 했지만 어젯밤과 비교하면 훨씬 유창한 말투였다.
"이봐."
호우마는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세츠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맨 서처가 미행을 당하다니, 이 무능한 사부 같으니라고. 당장 사제의 인연을 끊읍시다."
"미안합니다. 기꺼이 그렇게 하죠."
세츠라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 "얘기는 여기서 끝이다. 남은 얘기는 이 녀석을 처리한 후 계속하도록 하지. 나중에 연락하겠다."
"그렇게는 안 될걸."
아카츠바야시는 털북숭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모처럼 만났는데 이런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고맙습니다, 세츠라 씨. 어젯밤 당장 가르쳐주지 않은 것은 조금 원망스럽지만 덕분에 호우마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 의뢰비는?"
"필요 없습니다. 제가 찾아낸 것이 아니니까요."
"감사합니다."
아카츠바야시는 어린애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이제 놓치지 않겠다. 지금 당장 죽여주마."
아카츠바야시는 의문에 찬 세츠라의 얼굴을 흘낏 바라보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 독을 듬뿍 포함한 약품의 향기는 매우 자극적이고 달콤한 법이다. 호화 저택의 넓은 방 안에서 수많은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대개는 남자와 여자의 그림자였다. 여자와 여자도 있었고, 수는 적지만 남자와 남자도 있었다.
- "하아."
아키 세츠라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듯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아키 DSM 센터-아키 디스커버맨 센터의 사무실.
멍청하게 입을 벌린 그의 얼굴은 여전히 꿈속의 귀공자처럼 아름다웠다.
그는 지금 의뢰인과 마주 앉아 있는 중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센베 과자와 녹차가 놓여 있었다.
의뢰인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이름은 A라고 합니다. 한자로 설명하는 것은 귀찮으니까 생략하겠습니다. 알파벳 A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동생은 B."
- "실례지만."
세츠라가 물었다.
"네?"
"그 모자 안은 가득 차 있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A 씨는 단호하게 대꾸하며 몸을 구부리고 사무실을 나갔다.
- 세츠라는 예의상 문 밖까지 배웅한 후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센베과자를 두세 개 한꺼번에 입 안에 던져 넣고, 과자가 부서지는 소리와 이에 느껴지는 감촉을 즐겼다. 지극히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얼굴만 보면 장엄한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고 있는 젊은 예술가로 보인다. 아무도 센베 과자를 먹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리라.
- "메모해 주시겠습니까? 사진은 레이저 팩스로 보내겠습니다."
"알았어."
수화기 건너편에서 기계음이 울렸다.
"됐어."
세츠라는 A 씨가 건네준 봉투를 열고 안에 든 자료를 꺼냈다.
사진 한 장과 신상 조사서였다.
세츠라는 사진과 신상 조사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신상 조사서에는 단 한 줄밖에 써 있지 않았다.
- 성명:B.
검은 모자와 맹인용 선글라스, 수염, 프린스 알버트 코트, 그리고 지팡이.
A 씨와 꼭 닮은 아니, 똑같은 인물이었다.
- "정정하겠습니다."
세츠라는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진만 보내겠습니다. 그걸로 조사해 주세요."
"드문 일이네. 당신이 실수를 하다니."
토야 요시코가 기쁜 듯이 말했다.
- "설마 의뢰인의 이름은 에이라고 하지는 않겠지?"
"당신의 천리안에는 언제나 감탄할 뿐입니다."
"이상한 의뢰로군."
토야가 말했다. 그래도 그만두지 않는 것이 마계도시의 인간이다. 이 정도의 일도 해내지 못한다면 정보통 따위는 당장 때려치워야 한다.
- 세츠라는 산책이라도 할까 하고 코트를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12월 초.
눈이 오려면 아직 멀었지만 바람은 제법 쌀쌀했다.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오후 2시. 텅 빈 거리는 나른한 햇살로 가득 차 있었다.
세츠라는 가게 앞 거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 "생각해 보지."
"까불지 마."
세츠라는 병원에서 나왔다.
- 세츠라는 만약을 위해 토야의 집에 전화를 걸어 자세한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는 택시를 타고 스미요시초로 향했다.
운전수가 세츠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손님, 정말 잘생겼다.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덮치고 말았을 텐데. 그런데 왜 그렇게 떫은 표정을 하고 있수? 꼭 결사대 같은 표정이로군."
운전수는 계속해서 주절주절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다가 세츠라가 차에서 내린 지 2분 후, 항문에 격렬한 통증을 느끼고 전봇대를 들이박아 전치 2주의 부상을 입었다.
- 세츠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사람 다음에는 네 사람. 네 사람의 다음에는 열여섯 사람. 그다음이 256명, 그리고 단숨에 65,536명. 그걸 확인하고 싶어서 오늘까지 기다린 겁니다. 항상 제곱으로 늘어나더군요. 하지만 한 사람의 제곱은 영원히 한 사람이죠. 두 사람이 함께 오겠다는 말을 거절하면 당신은 당신뿐입니다. 어젯밤 가로우회에도 전화를 걸어서 확인을 해봤습니다. 인원을 늘려서 찾아오겠다고 하면 어떤 야쿠자든 마음대로 하라고 대답하는 법이죠. 하지만 두 번 다시 오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B 씨는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 B 씨는 오랫동안 겨울 햇살을 받으며 서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는 겨우 생각난 듯이 손뼉을 쳤다. 그러더니 오랫동안 풀지 못했던 방정식을 겨우 푼 어린아이처럼 말했다.
"생각났다. 나는 A였어."
- 청년은 묘한 눈길로 세츠라를 바라보았다.
의혹 때문도 두려움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극히 친밀한 감정이었다. 은인이 아닌 동료를 보는 시선.
"딱 한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녀가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죠. 밝고 따뜻한 가게더군요. 다시 한번 가보고 싶었지만 바빠서."
"그렇습니까."
청년은 곤란한 듯이 세츠라를 바라본 후 곧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녀에 대해서는 저도 아는 게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세츠라는 적의와 호의의 표정이 교차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세츠라의 얼굴은 개운한 듯한 표정이었다.
- "밤이 되면 가합전이 열립니다. 그때 또 와주십시오."
그리고는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세츠라 씨. 담배 피우시죠?"
"네."
"이걸 사용해 주십시오."
그는 세츠라에게 작은 성냥을 내밀었다.
세츠라가 성냥을 받아 들자 청년은 인사를 한 후 몸을 돌렸다. 세츠라는 성냥을 주머니에 넣은 후, 코마 극장 앞에 있는 '애니서비스 센터'에서 담배 한 갑을 샀다.
그는 봉투를 뜯고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 후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폐에 연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서 담배를 피우며 성냥 뒷면을 바라보았다.
카페 브람. 와카바 3번지라는 주소가 적혀 있었다.
- 여자는 그 말은 무시하고 전혀 상관없는 말을 했다.
"즐거웠어요. 이렇게 자유로운 도시는 처음이에요. 좀 더 빨리 알았더라면..."
"기쁜 마음으로 이곳에 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츠라는 어둠의 도시를 열창하기 시작한 군중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행복한 기분으로 나가는 자도 없습니다. 이곳은 그런 도시입니다."
"슬픔의 도시라, 하지만 그것은 행복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죠. 내게는 굉장히 좋은 곳이었어요."
여자는 세츠라를 바라보았다. 긴 속눈썹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좀 더 이곳에 있고 싶었어요, 당신과."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말을 계속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세츠라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단 하나뿐이었다.
- "당신이 남긴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봐요, 그들은 거대하고 정당한 불합리를 이겨냈습니다. 당신에게서 배운 대로."
-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그저 내가 알고 있는 것, 그리고 믿고 있는 것들을 사람들에게 얘기했을 뿐이에요."
세츠라의 머릿속에 밝고 조그마한 편의점의 광경이 스쳐 지나갔다.
카운터에 턱을 괴고 앉아 있던 여자,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젊은이들.
- "버뮤다의 지배인과 만났었습니다."
"어머, 건강하게 잘 있던가요? 거칠지만 남자다운 사람이었죠."
"멱살을 잡힐 뻔했습니다."
"어머나, 미안해요."
"하지만 굉장히 효과적인 약이 있더군요. 당신의 사진."
"그런..."
"당신 덕분에 종업원들의 급료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고 투덜대더군요. 정기 검진을 의무적으로 받게 만든 것도 당신이었다고요. 지금은 니시 와세다 최고의 우량업소입니다. 당신이 한 일은 모두 의미 있는 일이었어요."
"기뻐요.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기뻐요."
- 한 소녀가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비정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 도시에는 기묘한 인간들이 어디에고 널려 있었다. '신주쿠 거리'나 '야스쿠니 거리'에서 돌을 던지면, 비명을 지르는 녀석이 대부분 기묘한 모습을 한 녀석일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를 본 몇몇 부인들은 대체로 상점 여주인이었지만 급히 시선을 돌리고 그녀를 피해 갔다. 그것은 그녀의 모습이 혐오스러워서가 아니라 같은 여자로서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거리에 넘쳐흐르는 햇빛이 그녀의 매끄러운 피부에 반사되고, 여름의 기운을 살짝 머금은 봄바람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그때마다 그녀의 몸에선 하얀 꽃잎과 달콤한 향기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통행인들은 남의 눈에 띄고 싶어서 환장한 녀석들이나 퍼포먼스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봄의 여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강림한 듯한 건강미 넘치는 육체에는 눈길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소녀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소녀는 이미 멀리 사라지고 없었다.
남아 있는 것은 봄바람과 햇빛, 그리고 멀리서 울려오는 빛의 구슬 같은 웃음소리뿐이었다.
- "뭐?"
아키 세츠라는 막 펼쳐 든 조간신문에서 눈을 떼며 눈썹을 찡그렸다. 평소의 느긋한 표정도 아름다웠지만, 곤란한 듯한 표정도 일품이었다. 막 철이 든 어린 소녀부터 독재 국가의 냉혹한 황후까지, 목숨을 걸고 그 고민을 해결해 주고 싶다고 간절히 바랄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 가게를 맡고 있는 아르바이트생 소녀가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그리고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는 세츠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 "버스 회사의 보고에 의하면 타고 있던 승객은 38명. 모두 관광객이었지."
무츠키는 고개를 돌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혼잣말이라면 누군가가 들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마키코도 얇은 입술에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친구라는 이유로 정보 불법 유출을 눈감아 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다만 이 도시에서 사람을 찾는 일에 관해서는, 눈앞의 아름다운 청년이 경찰의 조직력을 능가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세츠라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움을 받는 동안에는 선물을 보내는 등 신경을 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버스 회사의 레코더를 분석해 보면, 버스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 정각. 그 후 운전사의 보고도 없었고, 레코더에는 비명 하나 기록되어 있지 않다나 어쨌다나. 기록된 것은 버스가 찌그러지는 소리뿐이었어. 눈 깜짝할 사이에 뜻밖의 재난이 일어났다는 얘긴가."
무츠키는 말을 마친 후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세츠라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자네 여기에 웬일이지?"
"그냥 지나가던 길입니다."
- "분명히, 분명히 처리했다고... 당신들이 말했잖아요."
"그게, 되살아난 모양이야. 우리들도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상담하러 왔어. 어떻게 할까? 다시 죽일까?"
료코는 귀를 막으며 주저앉았다.
"그만둬요. 말하지 말아요."
"울어도 소용없잖아."
- "용서를 빌어?"
"달리 뭘 할 수 있죠? 죽여서 미안하다고 용서를 빌 수밖에 없잖아요."
"바보냐, 넌."
두 사람은 비웃으며 말했다.
"죽이기 전이라면 몰라도, 이미 죽여 버린 딸에게 머리를 조아린다고 해서 용서해 줄 거라고 생각하나? 그보다 현재의 생활을 지키는 게 어떨까?"
"남편과 딸에게는 전부 털어놓겠어요."
"이봐, 그런 짓을 하면 우리가 곤란해져. 위험한 장사에서 겨우손을 씻고 사업도 궤도에 올랐는데. 역시 알리러 오는 게 아니었어. 처리해 버린 다음에 보고하는 게 좋았을 것을."
두 사람은 마주 보며 눈길을 교환했다.
"이렇게 되면 당신도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군. 그게 싫으면 우리들에게 딸의 처리를 맡기겠다고 말해."
- 그는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다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다른 한 개비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술주정뱅이의 손에 쥐어 주었다.
"얘기를 들어주는 보답으로 이것밖에 줄 게 없군."
"눈을 뜨면 깜짝 놀랄 거예요."
여자는 술주정뱅이를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틀림없이 이상하다고 생각할걸요."
"글쎄, 이 담배에 불을 붙이자마자 곧 잊어버릴걸."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우리들의 일 따윈 기억해 주지 않겠죠."
"그 편이 이 사람을 위해서도 좋아. 우리 일은 우리들이 처리하지 않으면 안 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살기로 약속했었죠."
여자는 콜라잔을 들며 말했다.
"하지만... 갈 곳은 있나요?"
- "그게 언제적 일이죠?"
여자가 매달리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는 더 이상 얼버무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20년도 더 지난 일이야. 내가 신주쿠에 온 지도 벌써 5년이 지났군.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
"네."
- "마계도시에서라면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도 않더군. 정직하게 말하자면 구외에서 살아가는 것은 더욱 자신이 없어."
"어떻게든 될 거예요. 우린 함께인걸요."
여자의 목소리에 담긴 자신감에 남자는 매우 놀랐다. 적응력은 여자 쪽이 한수 위라는 것을 지금껏 아무도 그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쫓기고 있긴 하지만 울면서 나가는 것도 아닌걸요. 난 지금 기뻐요."
"기쁘다고?"
"이 도시에서 나갈 수 있으니까요."
- "예전의 나라면 이 도시의 생활에 그런대로 만족하며 살아갔을 거예요. 사고 싶은 것을 사고,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면서... 아마 당신과 함께 살 집보다 백 배나 호화로운 방에서 살 수 있겠죠. 봐요. 내 피부에는 상처 하나 없어요. 신주쿠에 있으면 줄곧 이대로 살 수 있어요. 돈만 있으면 나이를 먹지 않을 수도 있죠. 하지만 당신과 함께 가면 어떻게 될지 알아요?"
"알고 있어."
남자는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여자도 함께 웃었다. 대화의 내용을 생각해 보면 상당히 이상한 반응이었다.
- "당신과 함께 있으면 1년도 지나지 않아 손톱 색깔이 변하겠죠. 피부가 거칠어지고 땀구멍도 커질 거예요. 매일 약용 크림을 발라도 소용없을 정도로... 그리고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난 얼굴에 기미가 잔뜩 끼고 주름살투성이인 할머니가 되어 있겠죠. 아마 하루에도 몇 번씩 당신과 함께 도망친 것을 후회하며 벌이가 신통치 않다고 불만을 터뜨릴 거예요. 죽을 때까지 함께 있을 자신 따윈 없어요."
"맞는 말이군."
"이 도시에서 기쁜 얼굴로 나가는 사람은 없어요. 그것은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다들 신주쿠를 닮은 존재이기 때문이죠. 독을 품은 공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좋아하고, 아무것 도생각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고. 나도 나 자신이 그런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아니었어요. 당신이 가르쳐 준 거예요. 이 부패하고 괴물 같은 도시를 떠나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요. 그러니까 기쁜 거예요."
남자는 가만히 응시했다. 여자는 옆 테이블의 주정뱅이를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듣고 있나요? 아마도 당신과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겠죠? 나는 이 사람과 함께 가겠어요. 이것도 뭔가 인연이라면 우리들을 지켜 주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 남자는 곧 험악한 얼굴의 손님들에게 둘러싸였다.
"이 자식, 혼자 심각한 척은 다 하고 있잖아."
"우린 뭐 속이 없어서 실실거리고 있는 줄 알아? 하다못해 한잔 마시고 있을 땐 억지로라도 즐거운 척해야 할 것 아냐!"
가게 안의 기온이 급속히 낮아지기 시작했다. 손님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 때문이었다.
- 카운터 건너편에 있는 주인이 무뚝뚝한 얼굴로 커다란 원통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120mm 로켓 런처였다. 이 거대한 무기의 파괴력은 이 도시의 주민이라면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잘 알고 있었다. 손님들은 억지로 살기를 누그러뜨렸다.
"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말고 술이나 마시는 게 어때? 당신도 빨리 그 여자를 데리고 나가. 행운을 빌겠네."
남자는 재빨리 여자의 어깨를 안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는 문을 닫기 직전에 카운터를 향해 말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없어. 당신의 그 심각한 얼굴이 마음에 들었거든. 억지로 웃는 얼굴에는 이제 질려서 말야."
주인은 변함없이 무뚝뚝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 여자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와카바초 1번지로 가 주세요."
"하지만..."
여자는 그 말만을 남기고 가 버렸다.
의뢰인치고는 너무나도 어이없는 태도였다. 아키 세츠라는 갑자기 차가운 곳으로 나와 김이 피어오르는 얼굴에 수많은 물음표를 떠올리며 멍청하게 서 있었다.
어디선가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지는 아름다운 5월의 달밤이었다.
- 세츠라는 와카바초에서 버스를 내렸다. 원래 주택가였던 이곳은 재개발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아 한동안 폐허인 채 방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자칭 예술가와 철학자들이 모여들어 텐트와 판잣집 생활을 하기 시작해서 지금은 그런 무리들의 집단거주지로 변해 있었다.
덕분에 어느덧 이곳은 그들의 그림과 조각을 찾는 호사가와 관광객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 일종의 명소가 되어 있었다.
- 아마 세츠라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등줄기가 서늘하게 얼어붙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노인은 느닷없이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하지만 얼굴은 제법... 마음이 내키면 아틀리에로 오게. 뒷골목당이라고 말하면 누구나 알 거야."
그 말을 남긴 후, 노인은 세츠라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힘차게 걷기 시작했다.
- 검은 옷의 남자들은 세츠라와 노화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중 나왔습니다."
정중한 말투였다.
"수고하는군."
남자들은 험악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화가를 좌우에서 보호하며 재빨리 사라졌다. 화창한 봄 햇살 아래에서 세츠라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저건 분명히 긴세이회(會)의 배지. 아무것도 그리지 않는 화가와 야쿠자라. 만화 제목으로도 써먹을 수 없겠군."
그는 그들이 사라진 곳과 같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와카바초에서 나와 신주쿠 거리에서 버스를 탈 생각이었다.
- 세츠라는 거리까지 10m 정도 남았을 때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에 어젯밤에 찾아왔던 기묘한 의뢰인이 서 있었다. 태양 아래에서도 어둠이 낳은 청순함과 요염함은 여전했다. 요염한 디자인의 푸른 원피스가 생생한 육체의 라인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 남자는 찾았나요?"
세츠라는 또다시 머리를 긁적였다. 오랜만의 경험이었다. 이 정도로 자기 페이스를 잃는 것은 세츠라에겐 극히 드문 일이었다.
- "아직 젊은데 좀 더 많이 드시는 게 어때요?"
"당신도 그렇게 나이가 많지 않은 것 같은데요. 지금 절약 중이거든요."
"결혼 자금? 당신이라면 얼마든지 여자들이 다가오지는 않겠군요.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오히려 주눅이 들고 말 거예요."
- "연인은 진짜로 존재하나요?"
"네."
"당신의 주소는?"
"모르겠어요."
"이래서는 아무런 소득도 없군요. 시간 있으십니까?"
"네."
"좋은 병원이 있습니다. 제가 보니 의뢰인께선 일종의 기억상실증이 아닐까 하는데요. 거기서 치료를 받아 보는 게 어떨까요?"
"좋아요."
여자는 요염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당신처럼 아름다운 의사가 있을까요?"
"얼굴이라면 끝내 주는 녀석이 있습니다."
세츠라는 단호하게 말했다.
"단 성격도 정말 끝내 줍니다."
"신주쿠는 무서운 곳이로군요."
그때 출입구 쪽에서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실례할게요."
여자는 잠시 뒤를 돌아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백을 손에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 그녀가 화장실로 가 버린 후, 곧 문에서 양복 차림의 남자가 들어와서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커피."
주문을 하는 목소리도 침착하고 품위가 있었다.
- 오후의 빛 아래에서 보아도 그것은 폐옥에 가까웠다.
석재 돔이라고는 해도 세월의 풍화를 벗어날 수는 없는 법이다. 녹슨 철문에서 이어지는 앞뜰은 잡초의 푸른 유린에 몸을 맡긴 지 오래였다.
이 폐옥에 남아 있는 아틀리에로서의 흔적은 오직 둥근 천장의 경사에 뚫려 있는 별 모양의 창문뿐이었다.
- "요즘에도 무도 선생의 그림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남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네."
노인은 황홀한 듯 세츠라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곳은 중앙 화단에서 영원히 모습을 감춘 천재 화가의 그림을 보존하는 사설 미술관이었다.
- "무도 씨의 그림은 지나치게 리얼했지. 자네도 알겠지만, 그건 이미 그림이라고는 할 수 없어. 여자 그 자체야. 그가 생애 단 한 번 열었던 전람회에서는 그림 아래에 받침대가 놓여 있었지. 그림 안의 여자가 밖으로 나오고 싶어 졌을 때 편히 나올 수 있도록. 그 말을 들어도 웃는 녀석은 한 사람도 없었어. 진짜 천재는 드문 법이지만, 무도 세이이치로는 천재 이상이었지. 당연히 세간의 바람도 거세졌지. 아마다 센조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지. 예술가니 뭐니 해도, 인간의 시기와 질투는 변함없는 법이거든. 언젠가 평지풍파가 일어날 거라고 예상을 하고 있었지. 아니나 다를까."
- 아마다 센조의 수많은 제자들 중에 사카키라는 남자가 있었다. 어느 날 그 사카키라는 남자가 아마다에게 기괴한 호소를 했던 것이다. 무도가 남몰래 그의 아내를 그렸다는 것이었다.
무도의 그림이 모두 나체화였기 때문에 그 사건은 화단 전체에 퍼졌으며, 결국 무도는 화단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불쾌하고 기분 나쁜 소문도 몇 가지 퍼졌다. 소문의 내용인 즉, 사카키가 아마다의 명령을 받고 무도에게 아내를 접근시켰다. 그런데 무도는 한 번도 사카키의 아내를 안지 않고, 그녀와 닮은 얼굴과 육체를 지닌 여자와 동침을 계속했다. 그러자 참을 수 없어진 사카키의 아내는 자살했다.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 "찾아온 것은 그 때문이겠지?"
"아, 네."
세츠라는 멍하게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노인은 아틀리에에 들어서자 골동품 가게에서도 인수하지 않을 듯한 긴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옷을 벗고 누워."
"하하하."
세츠라는 애매하게 웃었다.
"뭘 멍청하게 있는 게야. 나체가 되기는 싫은가?"
"아무래도 보는 건 괜찮지만."
"이 근성 없는 놈. 나는 나체밖에 그리지 않아. 하지만 남자이기도 하고, 뭐 상관없겠지. 옷을 입고 있을 것을 허락한다."
"감사합니다."
세츠라는 왜 인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하고 생각하며 머리를 숙였다.
- 이런 완고한 노인을 어떻게 다루면 좋을지는 잘 알고 있었다. 웬만하면 거역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르다가 마음의 허점을 발견하는 것이 상책이다.
"코트를 입고 있어도 될까요?"
"나체가 아니라면 갑옷을 입고 있어도 상관없어."
"하아."
세츠라는 애매한 표정으로 긴 의자에 앉았다.
- "뭐야, 그 포즈는? 취직 면접을 보러 온 게 아니야. 한 손을 등 뒤에 걸쳐, 그래, 그리고 양 다리를 의자에 올려놓고 오른쪽 다리를 굽혀 봐. 코트 자락을 다리에 조금 걸치고. 음, 왠지 음란해 보여서 좋군. 좋아, 그대로 움직이지 마."
세츠라가 해방된 것은 3시간 후였다. 마음의 허점을 발견하고 말고 할 새도 없었다. 세츠라가 아픈 어깨를 문지르고 있자니 노화가는 못마땅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쯧쯧, 요즘 젊은 것들이란. 예술 창작을 도왔다고 생각하면 아픔따윈 곧 날아가 버리련만."
세츠라는 반론을 포기해 버렸다.
-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며 부인하고 싶지만, 자네가 보기 드물게 뛰어난 모델임을 감안해서 사실대로 털어놓지. 자네 말이 맞아. 시시한 여자들이라도, 뇌가 없는 야쿠자나 부자들에게는 만족스러운 모양이더군. 긴세이회 놈들은 한 달에 한 사람을 제공하는 것만으로 불우한 예술가가 생활을 꾸려 갈 수 있게 해 주었지. 물론 경찰에게는 비밀이지만."
- "요즘 모델은 엿보기도 하나 보지. 꿈이라도 꾼 게 아니냐고 발뺌 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세츠라는 약간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손을 들어야죠."
지금 새로 실을 보내서 탐색한 결과 이 방 어디에도 리카의 모습은 없었던 것이다.
"알았으면 빨리 돌아가. 모델료는 지불할 테니."
"필요 없습니다. 대신 그림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마음대로 해. 그런데 내일 다시 한 번 와 줄 수 없겠나?"
"그러죠."
"좋아, 그걸로 완성이다. 나는 외출하겠다. 문을 닫고 돌아가."
- 고요한 실내에 조명은 벽에 걸린 전자등뿐이었다.
아키 세츠라는 그것에 의지하여 아무렇게나 그림을 보고 있었다. 그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벽에 기대어 있는, 혹은 바닥에 쌓여 있는 캔버스 앞에 서면, 두꺼운 천이 저절로 차례차례 벗겨지며 세츠라의 시선에 맞는 위치로 그림이 스스로 이동했다.
거의 한 시간 동안 세츠라는 방 안에 쌓여 있는 그림들을 낱낱이 훑어보았다. 전부 생생한 나체의 여인들을 그린 그림이었다. 기묘한 것은, 어느 캔버스 더미나 최초의 한두 장은 마치 그림이 빠져 나간듯한 하얀 면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 달은 누군가를 비추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듯 어슴푸레하게 빛나고 있었다.
만약 그 달에게 지상에서 누군가 한 사람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지금 작은 섬나라의 작은 미술관을 찾아온 어둠의 색을 지닌 청년에게 하얀빛의 화살을 쏠 것이다.
- 세츠라는 작은 홀을 지나 전시실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은 전시실 앞에서 멈췄다. 무수한 달콤한 목소리들이 작은 파도처럼 어둠 속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여자들의 목소리였다.
- 몸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물감 덩어리로 변하여 바닥 위에 요란하게 녹아내렸다.
신키치는 목에서 내장이 튀어나올 듯한 표정으로 문을 통해 달아났다.
약 한 시간 후, 미친 듯이 뛰고 또 뛰어서 사무실에 도착하여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순간, 그의 목은 어이없이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 "그 녀석의 캔버스도 발견했었나?"
노화백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물었다.
"제일 커다랐으니까요."
세츠라는 멋없게 대답했다.
-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화백은 아무 말 없이 한 장의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청춘의 야심과 패기가 넘치는 젊은 시절의 노화백을 그린 그림을 리카가 조용히 안고 있었다. 그녀는 거인의 공격에서 그 캔버스를 지켜내려 했던 것이다.
세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밖은 화창한 5월의 저녁이었다.
- 어느 날, 와카바초 1번지에서 늙은 화가의 모습이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대신 봄이 끝나 갈 무렵, 마을 주민들은 푸른 하늘 아래를 산책하는 젊은 남녀의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살짝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두 사람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고 한다.
- 하지만 때때로 빼어난 외모를 지닌 검은 옷의 청년이 이곳을 방문할 때면 마치 그림에서 빠져나온 듯한 매력적인 웃는 얼굴로 인사를 나눈다고 한다.
- "그렇게 해서 그날 밤 호텔에 묵게 된 겁니다."
세이조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더운 것이 아니었다. 부끄러웠다. 40대 중반을 넘어선 구외의 회사원은 지독한 순정파였던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 눈을 떠 보니 침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데이트 요금도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황해서 가게로 달려가 봤지만, 사장도 점원도 당신 같은 사람은 본 적도 없고, 우리 가게에는 카오루란 애도 없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겁니다."
"하아."
아키 세츠라는 멍하게 맞장구를 쳤다.
- 세이조는 탁자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좋은 차로군요. 다시 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세츠라는 애매하게 웃으며 말했다. 실은 평소보다 싼 차를 다른 차보다 맛있다고 소문난 찻집의 문구에 끌려 샀기 때문이었다. 세츠라는 아직 맛이 있을지 없을지 두려워서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결국 이 손님이 실험대인 셈이다. 손님의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맛은 합격인 모양이었다.
- "그럼 지갑 안은요?"
세츠라는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물었다.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하아."
"그 여성에게 그런 감정을 갖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느낌으로는 지갑에 별 이상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 세츠라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곳은 신주쿠였다. 게다가 세이조가 갔던 바 '블루 레이디'는 사상 최악이라고 불리는 악명 높은 거리인 가부키초 남단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일하는 호스티스가 서비스료도 거절하고 하룻밤을 보낸 손님의 지갑도 훔치지 않고 사라졌단 말인가. 아니, 그렇다면 왜 가게 사람들은 그녀의 존재를 숨기는 것일까.
"일부러 휴가까지 얻어 그 여성을 찾고 계시는데 찬물을 끼얹는 것 같습니다만, 하룻밤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합니다."
세츠라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주쿠의 주민치고는 그 여성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틀 전의 일이라고 하셨죠? 혹시 몸에 이상한 점은 없습니까?"
"아뇨, 별로. 왜 그러십니까?"
"구외의 사람은 때때로 이상한 목적에 이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생물의 알을 심어 놓는다거나."
"하아?"
세이조는 눈앞에 앉아 있는 청년이 현기증이 날 만큼 아름답긴 하지만 결국 이 거센 도시에서 살아온 주민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그러고 보면 신주쿠에서만 서식하는 위험한 품종을 구외의 관광객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구외로 운반하고 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있었다.
뉴스에 의하면 관광객을 납치한 야쿠자들은 장을 통째로 들어낸 후 같은 기능을 지닌 요물을 심어 놓는다고 한다. 구외로 돌아와서 잠시 시간이 지나면, 본래의 의식을 되찾은 요물이 최면 파동으로 관광객을 조종하여 신주쿠에서 들어간 조직이 있는 곳으로 운반한다는 것이다. 운반된 물건은 그곳에서 화학 처리를 해서, 하루 500g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만든다. 문제는 원소 전환의 소재가 인간의 피와 살이라는 것이다.
- 순간 여자의 입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더니 점점 가게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푸른빛이 어두운 가게 안과 검은 옷의 청년을 감쌌다.
수압이 고막을 압박하고, 천을 통해 차갑고 축축한 감촉이 스며들어 왔다. 세츠라의 입에서 물거품이 뿜어져 나와 서로 얽히며 상승해 갔다.
세츠라는 바닥을 박차고 문을 향해 헤엄쳐 갔다. 여자는 계속해서 물을 뿜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세츠라의 검은 코트는 매혹적인 해저 생물처럼 움직였다.
- "과연."
사장은 한 손에 유리잔을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도시에서라면 있을 수 있는 일이지. 하지만 카오루는 유령이 아니야. 그건 가게 안의 모든 사람들이 보증할 수 있어."
"그럼 어째서 그 남자분을 피하는 겁니까?"
"모르겠네."
- "이유 따윈 필요 없어. 싫으니까 만나지 않는 거겠지. 그렇다면 그대로 놓아두는 게 신주쿠의 스타일 아닐까? 이봐, 자넨 좋아서 이런 곳에 온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나? 다들 구외에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곳을 찾아온 거야. 여기까지 와서 그것을 따지려 든다면 마계도시의 의미가 없어. 하지만..."
- 비록 얼굴에 피로의 기색이 짙었지만 피부에서 느껴지는 젊음만은 감출 수 없는 법이다.
"이렇게까지 닮다니 기분이 나빠지네요. 갖고 돌아가 주시지 않겠어요?"
세츠라는 그녀가 내민 사진을 받아 들며 물었다.
"탄게 씨는 다시 한번 당신을 만나 보고 싶어 합니다. 괜찮으시다면 부탁을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후지코는 고개를 저었다.
"부인과 닮은 여자를 우연히 발견해서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만난다고 해서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 사람은 구외에 살고 계시는 분이죠. 나는 그곳에서 도망쳐 온 여자예요. 다시 만나도 내가 부인과는 다른 여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뿐인 것 아닐까요? 만약 그날 밤의 일로 내게 좋은 감정을 품고 있다면, 계속 그대로 간직해 주길 바랄 뿐이에요."
- "이 도시에서는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 한 번의 우연한 만남만으로도."
- 후지코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아름다운 청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뒤에는 허무한 빛만이 가득 찬 부엌이 있을 뿐이었다. 방으로 돌아가도 겨울의 어둠 같은 이미지만을 남기고 조각 같은 청년의 모습은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것은 모두 그렇다.
목소리는 조용하게 계속됐다.
"그것을 잊어버리려 하는 사람도, 잊어버리지 않으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버려 두면 그뿐이지만 당신이 고집을 꺾으면 뭔가가 이루어질지도 모릅니다."
- "만나라."
목소리에 협박의 기색이 섞였다. 후지코가 저항할 수 없는 울림이었다.
"그렇게 만나고 싶어 하는 녀석이라면 네 눈빛 하나로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어. 나도 또다시 포식을 할 수 있다는 얘기지."
-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뻐하는 남자를 앞에 두고 있는 것치고는, 세츠라의 말투는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무감동한 어조였다.
하계의 기쁨이나 슬픔을 그저 바라볼 뿐인 아름다운 천사라는 것이 있다면, 어쩌면 세츠라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저는 잘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게 기쁘십니까?"
"그야 물론이죠. 전 그녀가 아내의 환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흔히 있잖습니까? 이 도시에서는."
"그렇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만나 버리는 경우가 더 많지만 말입니다."
세이조는 그 말의 불길한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오후의 햇빛 속에서 바닥에 드리워진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 "아내가 죽었을 때 나는 반쯤 미쳤습니다. 그녀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 새삼 깨달았죠. 하지만 사랑이 조금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미치지 않았으니까요. 지금 나는 이렇게 새로운 아내를 발견해서 기뻐하고 있죠. 기쁜 동시에 나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만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물론 그녀만 괜찮다면 같이 구외로 갔으면 합니다. 아니, 반드시 데려갈 겁니다."
"지금 말씀드린 대로 사에구사 씨는 부인과 꼭 닮았지만 다른 사람입니다. 실례지만 당신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군요. 이 도시에서 꾼 꿈은 이곳을 나가면 곧 깨지게 됩니다. 당신은 구외에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그렇다면 나도 이 도시로 옮기겠습니다."
"관광객 이외에 신주쿠에 오는 자는, 마계도시에 어울리는 인간뿐입니다. 웃으며 이곳에 오는 자도 없지만, 웃으며 떠나는 자도 없습니다."
- 평온한 오후의 햇빛이 급속히 얼어붙었다.
세이조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그는 자신이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깨달은 것이다. 눈앞에 서 있는 검은 옷의 청년은, 실수로 검은 옷을 입은 천사가 아니라 이 도시 자체가 낳은 검고 아름다운 악령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당신 같은 의뢰를 하는 분이 처음이 아닙니다."
세츠라는 조용하게 말을 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시를 읊는 그림자 같았다.
"구외에서 잃어버린 것을 이 도시에서 발견했다는 사람들... 그들은 대부분 하나같이 자신도 그것을 떠안고 이곳에 살고 싶어 합니다. 그중에서 어떤 사람은 두 번 다시 아물지 못할 상처를 안고 떠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바람대로 이곳에 머뭅니다. 채 못 다 꾼 꿈을 안고 스러지는 것도 좋겠죠. 하지만..."
- 세츠라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이다. 그 여자 마도사는 아무리 세츠라라 해도 동류를 쓰러뜨리기 위한 비술을 일반인에게 교사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알았어, 수정구가 가르쳐 줬어. 그 여자에게 붙어 있는 녀석은 인사이더야. 인간의 체내에 둥지를 트는 괴물 녀석이지. 이 신주쿠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드문 존재야. 틀림없이 밖에서 데리고 온 거겠지."
후지코의 아파트에서 그녀에게 감아 놓은 한 가닥의 실이 방안에 남은 남녀의 기묘한 대화를 세츠라에게 전한 사실은 물론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 "퇴치 방법은 여기 써 있어. 오래된 처방이지만 효과는 시간을 넘을 걸세."
"감사합니다."
메모를 향해 뻗은 세츠라의 손에 검버섯투성이의 갈색 손이 겹쳐졌다.
"돈 따윈 필요 없어. 어때, 오늘밤."
"일이 끝나면요."
손이 떨어졌다. 세츠라가 뗀 것인지, 레인의 의지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 세츠라로서는 드문 질문이었다. 그 이외의 모든 맨 서처도, 조사를 의뢰받은 상대의 과거를 어지간하면 건드리지 않는다. 향수병의 대부분은 정신의 나락에 펼쳐진 검고 어두운 심연에, 달콤한 냄새를 뿌리며 추락해 있기 때문이다.
"비밀이에요."
"보복하는 겁니까."
"그래요."
-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습니까?"
"그래요. 앞으로도 만날 일은 없겠죠. 이봐요, 당신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나요?"
"하아."
"그건 YES의 하아, 아니면 NO의 하아?"
"모르겠는데요."
"언젠가 내가 이곳에서 나갈 마음이 생긴다면, 의뢰인을 만나게 해 주겠죠?"
"전해 두겠습니다."
"부탁해요. 그럼 8시에 봐요."
- "어머, 세츠라 씨, 무슨 일이시죠?"
아르바이트생 소녀가 과자를 종이 봉지에 담으며 물었다. 여자아이를 아르바이트생으로 채용하면, 열 명이면 열 명 모두 세츠라가 가게에 나오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다. 세츠라는 그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지금은 저쪽 현관을 사용하셔야죠. 이쪽에는 오지 말아 주세요."
- 그렇게 말하고 있는 동안 가게 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세츠라를 본 통행인들과 관광객들이 형광등에 몰려드는 벌레처럼 황홀한 표정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거 봐요. 난 몰라. 빨리 저쪽으로 가주세요!"
소녀의 샐쭉한 표정에는 손님 정리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불만과, 명확한 질투의 기색이 담겨 있었다.
- 한쪽으로 내쫓긴 세츠라는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후에 아르바이트생 소녀가 다가왔다.
"겨우 다들 돌아갔어요. 이제 제발 느닷없이 가게에 나오지 말아 주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소녀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러고 보니 평소 같으면 세츠라 씨가 얼굴을 내밀면 다들 다가오기도 전에 떨곤 했는데, 오늘은 갑자기 다가오더군요. 손님들을 끌어들이는 얼굴 표정이라도 생각해 냈나요?"
"옛날 일을 생각했지."
-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예상하지 못했던 충격을 받은 듯 물끄러미 아름다운 세츠라를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얼굴은 시간마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들어 버린다. 어릴 때건 미래의 일이건 이 외에 얼굴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라보는 쪽의 옅은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한순간 세츠라는 시간을 초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 사람에게도 과거가 있었던 것이다, 하고 차 향기가 피어오르는 좁은 세 평짜리 응접실에서 소녀는 생각했다.
- 이 가게에서 태어났던 것일까. 그때 그는 어떤 목소리로 울었을까. 마계도시를 상징하는 듯한 매혹적인 아름다움이 푸른 봄을 맞이하여 한층 아름다운 색채를 발했을까.
- 소녀는 점점 감수성 짙은 소녀다운 생각에 잠겼다. 무엇보다도 이 남자는 다른 사람처럼 사랑을 해 본 적이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이 미쳐 버린 이 도시에서 살면서, 간절하게 돌아가고 싶은 장소와 시간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 "돌아가고 싶어?"
그것이 자신의 물음이 아니라 세츠라의 질문이라는 것을 알고 소녀는 가슴이 뜨끔했다.
"네."
자신도 모르게 대답이 나왔다. 마진 후 소녀는 신주쿠에서 태어났다. 비록 요괴와 악덕과 나태의 도시지만 사람은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소녀의 내부에서 특별한 생각을 품었던 사람의 얼굴이 몇 개인가 떠올랐다.
"누구에게?"
세츠라의 질문은 계속됐다. 어느 시절의 기억이 소녀의 가슴에 솟구쳤지만, 곧 자신에 대한 평가를 냉정하게 내리고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덕분에 세츠라 씨에게,라고 말하지 않고 끝날 수 있었다.
"첫 남자에게."
그렇게 말하고 나서 조금 뺨을 붉혔다.
"처음으로 좋아했던 사람에게."
그렇게 그녀는 정정했다.
- "돌아가지 못한다면..."
세츠라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그쪽이 너에게 올까?"
"그렇다면 좋겠지만."
두 사람 사이로 바람이 지나갔다. 조금 열린 창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이었다.
-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어요. 저쪽은 내 얼굴도 이름도 잊어버렸을 테니까요. 하지만 와 준다면 좋겠다고 언제나 생각하고 있어요. 자세히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틀림없이."
"저쪽은 이름도 잊어버리고 있다라... 너는?"
"기억하고 있어요. 이름도 얼굴도 말투도 좋아하는 여자 타입까지도."
그대로다. 뭐든지 기억하고 있다, 그 남자에 대해서라면. 그러니까 그는 결코 오지 않으리란 것도 알 수 있다.
"고마워."
그렇게 말하고 세츠라는 소녀에게도 차를 권했다.
- "돌아갈 마음이 생겼나요?"
"네."
"잘됐군요. 의뢰인도 기뻐할 겁니다. 보너스가 나올지도 모르겠군요. 저도 기쁜데요."
"잘됐네요."
아키호는 살포시 웃으며, 느닷없이 세츠라의 손을 잡고 방안으로 유혹했다.
세츠라는 바닥 위에 깔린 이불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누워요."
아키호가 말했다.
"의뢰인에게 면목이 없습니다. 그리고 돈도 없고요."
"오늘은 프로가 아니에요. 돈은 내가 내겠어요."
"저도 프로가 아닙니다."
"미안해요.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요."
- "결단을 내리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이 도시에서 나간다면 당신이 데려가 줬으면 좋겠어요."
"나갈 생각 따윈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조금 지쳤어요. 좋은 기회일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
- "역시 돌아갈 생각은 없나요?"
겨울의 달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물었다.
"다, 당신은? 어, 어떻게..."
"어느 정보통에게서 당신의 능력에 대해 미리 들었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병원에서 누가 옮겨 붙어도 자신을 잃지 않는 약을 받아 왔죠."
"그럼, 당신을 조종한 것은?"
"물론 당신입니다. 단 제가 인정한 한계 안에서요. 무모한 짓을 하셨군요. 본래 놈들은 모두 아무 관계없는 구민을 죽인 적이 있는 쓰레기들입니다. 그래서 신경 쓸 것은 없지만 말이죠. 아아, 니카이도의 총을 맞을 때만은 총을 살짝 움직였습니다."
아키호는 핸들에 얼굴을 묻었다. 이것도 꿈, 저것도 꿈. 자신은 평생 악몽 속에서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난 어떻게 되는 거죠?"
"별로, 마음대로 하십시오. 구외로 가고 싶으면 저를 찾아와 주세요."
- "당신의 의뢰인, 유키인가요?"
"글쎄요."
세츠라가 대답했다.
"당신의 의뢰인에게 고맙다고 전해 줘요."
- "하늘로 솟은 걸까, 땅으로 꺼진 걸까."
토야 요시코는 여섯 겹의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마치 배에 타고 출항이라도 한 것 같아."
그녀는 내일이 되면 새로운 정보가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세츠라는 오후 늦게 니시 신주쿠로 돌아와, 센베 과자를 구웠다. 평화로운 한때였다.
- 곧 저녁이 되었다.
가게 밖으로 나와서 저녁놀을 바라보았다. 검은 빌딩의 실루엣 저편에 진홍빛이 타오르고 있었다. 작은 그림자 몇 개가 세츠라의 발밑을 이동해 갔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구름의 그림자였다. 신주쿠의 저녁놀은 있을 수 없는 각도로 하늘에 떠 있는 것들을 지상에 새겨 놓았다.
역 쪽에서 온 노파가 세츠라를 보자 양손을 모으고 합장을 한 후 사라졌다. 저녁놀 속의 젊은이가 어떻게 보였는지는 모른다.
그 아름다움을 밤에 넘겨주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처럼 태양은 오랫동안 세츠라를 붉게 물들였다.
- "세츠라 씨."
세츠라는 부르는 소리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두 번째 불렀을 때 돌아보자 시나 노인이 서 있었다.
"익숙하지 않아서요."
세츠라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변명했다.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이상하리만큼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나 노인은 화가 난 것처럼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 "지금 부른 노래 말입니다."
"노래?"
세츠라는 약간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제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나요?"
병원의 복도에서 메피스토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콧노래였습니다만, 어디서?"
노래를 부른 기억이 없습니다,라고 세츠라가 대답하자 시나 노인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 "그렇죠. 전설에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노래를 들은 선원은 육지 위에서 몇 번이나 그것을 흥얼거리지만 자신은 깨닫지 못한다더군요."
"뭡니까, 그건?"
"세이렌의 노래."
시나 노인이 말했다.
"나는 민속학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세계 각지의 민화와 전설을 채집하기도 했죠. 그중에 틀림없이 지금 당신이 흥얼거린 곡이 있었습니다."
- 간신히 살아 돌아온 사람들도, 뭔가에 홀린 것처럼 기묘한 노래를 흥얼거리며 1년도 되지 않아 항구의 암벽에서 바다로 몸을 던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 한 사람의 친구였던 음악가가 가사와 멜로디를 써서 시나 노인이 방문한 독일 항구도시의 오래된 여인숙의 벽을 장식하고 있다고 한다.
- "세이렌의 노래를 들은 것만이라면 살아 돌아오는 것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곡을 흥얼거리면 또다시 바다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당신은 바다의 마녀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혹시 저 시체는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역시. 세이렌은 당신을 찾고 있는 겁니다. 당신의 주소를 모르기 때문에 당신을 알고 있는 시체를 이곳으로 보낸 겁니다. 곧 그녀가 찾아오겠죠. 전설대로, 달이 밝은 밤에."
"그런 바보 같은..."
"이곳은 마계도시 신주쿠입니다."
세츠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나 노인은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단 하나 살아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신은 멜로디만 흥얼거리고 가사를 읊조리지는 않았으니까요.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마녀의 집념을 끊어 땅에 묻혀서 죽일 수 있을지도 ..."
-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절한 목소리였다. 마음이 약한 남자라면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걸음을 멈출 만한 목소리였다.
- "가지 말아요, 사랑스러운 분. 놓치지 않겠어요. 당신이 나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동안은."
"일방적인 의지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좋지 않은 생각입니다."
세츠라는 달리면서 말했다.
귓속에서 파도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말하는 것을 멈추자 그 노래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구두굽을 통해 이질적인 감촉이 전해져 왔다. 멈춘 발 끝이 묘하게 무거워지고 눅눅한 습기가 느껴졌다.
- 세츠라의 전방, 검은 물과 파도 소리의 저편으로 안개는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세츠라도 처음 보는 장소였다. 이쪽저쪽에 놓여진 투광기의 덕분에 물과 해안의 경계선은 잘 보였다. 물결에도 해안의 끝에도 투광기광점은 몇 개나 빛나고 있었지만 그 끝을 보는 것은 어려웠다.
- 강철 순양함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새로운 삶을 얻었는데 자신에겐 그것조차 불가능한 것일까.
이 도시가 나쁜 것이다. 남작은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지금은 뛰어난 기교의 마술보다도 화려하고 요란한 쇼가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시대인 것이다. 붉은 페인트를 덕지덕지 바르고 제트 전투기용 엔진을 단 10톤 덤프트럭 같은 그런 구경거리가 이 도시의 전매특허였다. 그런 통속적인 상품 가운데에서 자신의 섬세하고 우아한 기술 따위가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 남작은 의자에 앉아서 작은 화장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동안 탄력 없이 처진 눈가와 검버섯투성이의 피부를 두꺼운 화장으로 감추어 왔다. 하지만 그에겐 이미 죽음이 멀지 않아 보였다. 이대로라면 차라리...
남작은 여기저기 금이 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간의 저편에서 노도 같은 박수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 아주 오래전, 피가로 지(紙)는 남작에 대해서 이렇게 평했던 적이 있다.
'메스멜 남작의 무대는, 1905년 5월 니진스키가 점프한 샤트레좌(座) 이래 가장 우레 같은 박수를 받으며 성공을 인정받았다.'
다시 한번 그 박수 소리를 듣고 싶었다. 아니, 연극 평론계의 대부인 란슈트라세 씨의 한 마디.
'메스멜 남작은 이 세상에 한 사람밖에 없다.'
그 말을 다시 한번 들을 수만 있다면 당장 죽어도 좋았다.
- "저는 잘 모르겠지만, 원인은 정신적인 문제에 있다고 하더군요."
아름다운 청년은 조용히 말했다.
"즉, 정신이 육체가 되살아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뿐이 아닙니다. 이미 완쾌된 육체를 다시 기능 정지 상태로 되돌리려 하고 있다는 겁니다. 현실도피증 환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케이스라고 하더군요. 의식이 있으면 설득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의사소통은 불가능한 모양입니다."
"의식 불명의 환자에게도 전기 충격 같은 것으로 신호를 보내는 기계가 있을 텐데."
"그것도 사용해 봤지만, 소용없었다고 하더군요. 의사의 얘기로는 그녀가 무의식 중에 거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원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의식 불명 상태에 빠져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하더군요."
"정말 현실로 돌아오고 싶지 않은 모양이로군."
"틀림없이 그럴 겁니다."
- 세츠라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노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덕분에 '위대한 메스멜'의 실력을 볼 수 있었습니다. 4층에서 뛰어내려도 상처 하나 입지 않도록 자신에게 암시를 건 것도 훌륭했습니다. 방금 그것은 순간최면이죠?"
"잘 알고 있군."
남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보기 좋게 한 방 먹긴 했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세츠라의 멍한 분위기 때문인지 속세를 초월한 듯한 아름다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덕분에 살았습니다. 이런 말씀드리기는 뭐 하지만 구해 주신 김에 한 사람만 더 구해 주실 수는 없나요?"
남작은 눈을 감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
- 과거역행이란 일반적으로 인간의 의식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당시의 상태로 변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그것을 좀 더 진행시키면 태어나기 전의 자신, 즉 전생의 자신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최면술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기 시작했을 무렵, 이 정신적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자 학계에 일대 논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지금은 피실험자가 이전에 주입된 지식을 바탕으로 일종의 무의식적인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라며 과거역행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대부분 학자들의 입장이었다.
그런데 지금 남작은 그 확인되지 않는 실험을 실제로 해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 "이 사람들은 무섭지 않은 걸까?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것이... 나는 구외 출신이거든. 지금은 많이 익숙해졌지만 아직도 가끔 움찔움찔하며 생활하고 있지. 이런 시간에 저렇게 태연한 얼굴로 슈퍼마켓의 비닐봉지를 들고 폐허 앞을 지나다니는 것은 불가능해."
"언젠가 여길 떠날 생각이십니까?"
양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은 채 묵묵히 걷고 있던 세츠라가 문득 입을 열었다.
"뭐라고?"
"일단 살아가겠다고 결심하고 나면, 그곳이 어떤 곳이라도 무섭지 않은 법이죠.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것은 틀림없이 다른 곳에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겁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나는 이곳에 뼈를 묻을 생각이었지만... 어쩌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곳에서 굉장히 좋은 일이 있었나 보죠?"
세츠라가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남작은 깜짝 놀라며 뺨을 붉게 물들였다. 그 순간 세츠라는 걸음을 멈추고 턱으로 앞을 가리켰다.
- "역시 난 여기서 실례하겠네. 내게는 너무 벅찬 일이었어."
"알겠습니다."
세츠라는 더 이상 남작을 붙잡는 것을 단념했다.
"뒷일은 저 혼자서 처리하겠습니다. 하지만 나루미 씨는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룻밤만이라도 메피스토 병원에서 머물러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네."
"그리고 제가 힘이 더욱 강력해지도록 암시를 걸어 주시겠습니까? 적은 최면술을 이용해서 괴력을 발휘하고 있으니까요."
"그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 "아무리 최면술을 사용한다 해도, 인간의 육체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야.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도, 손목을 자르면 비명을 지르고 전신에 화상을 입으면 죽게 되어 있어. 즉 중요한 것은 정도의 문제인 셈이지."
세츠라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럼 아무리 괴력을 발휘한다 해도, 육체는 상당히 무리를 하고 있다는 말이로군요. 그렇다면 자기 암시를 푼 후에 후유증이 있을 수도 있나요?"
"상당히 깊은 최면 상태가 아닌 이상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순간적인 자기 암시 따위는 임기응변에 불과하거든. 순간적으로 근육을 강화시켜도 큰 충격을 받으면 나중에 내장이 파열될 수도 있지."
- "결코 지지 않겠다. 다른 사람의 명령 따위... 들을 수 없다."
"아니, 너는 내 명령에 따라야 한다. 어서 저 소녀를 치료해라."
지금 이 하얀 병원의 한 병실에서 시간을 초월한 힘과 힘의 대결이 벌어지고 있었다.
- 그때였다. 야에가키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흙은... 흙으로."
- "그, 그, 그만 사장님의 부탁을 받고 조사하고 있다고 말해 버렸어요. 너, 너무 무서워서 그만..."
야조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눈을 감는 세츠라를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실례지만 이런 멍청... 아니, 초보자를 쓰리라고는..."
- 유미코가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흥, 나는 아키 세츠라와 아는 사이야,라고 대문짝만 하게 쓰여 있었다. 야조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풀어 주라고 명령했다.
야조와 세츠라, 그리고 유미코는 사무실 안의 프라이빗 바로 들어갔다.
- "의뢰인은 누구지?"
이미 체념한 것일까, 세츠라의 물음에 유미코는 전화로 의뢰를 받은 것뿐이라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의뢰인은 목소리로 봐서는 중년의 인텔리 남성으로 추측된다고 했다. 그는 하루에 한 번씩 유미코에게 전화를 걸어서 조사에 대한 결과보고를 듣는다고 했다. 그때마다 유미코는 그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중년 신사의 의뢰 내용은 골든 카나본이라는 영국인을 찾아 달라 는 것이었다.
- "짚이는 데라도 있습니까?"
압생트주를 스트레이트로 마신 야조가 불꽃같은 입김을 토해 내며 물었다.
"시탄카멘의 저주."
"네?"
"이집트 왕가의 계곡에서 발견된 미라의 이름입니다. 그 소년 왕의 미라를 발굴한 것은 카터라는 미국인입니다. 그런데 발굴에 관련됐던 사람들이 차례차례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시탄카멘의 저주 때문이라고 했죠."
- "그때 카터를 원조하고 있던 스폰서가 카나본 경(卿)이라는 사람입니다. 골든 카나본이라는 사람은 그의 후손일지도 모릅니다."
"그 카나본 경은 어떻게 됐나요?"
"모기에게 물려 열병으로 죽었어. 아마도 최초의 희생자였을 거야. 그건 그렇고 유미코, 골든에 대해 얼마나 알아냈지?"
"의뢰인이 이름을 지우고 보낸 FAX가 있는데 나중에 보여 드리죠. 카나본 경에게는 에드워드라는 아들이 있었어요. 그는 이집트와 인도를 돌아다니다가 80여 년 전 일본으로 건너와 야시키 신사에 얹혀살았던 모양이에요. 그가 영국의 모친에게 쓴 편지가 FAX로 들어왔어요. 그 편지에는 자신은 신주쿠의 신사에서 살고 있으며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여 골든이라는 아이를 낳았다고 쓰여 있어요. 편지에 적혀 있던 날짜는 1930년. 만약 골든이 그 해에 태어났다면, 노인이지만 살아 있을 가능성은 있어요. 그래서 전 조사를 하기 위해..."
틀림없이 무네시바 카츠키치도 그녀와 똑같은 조사를 하고 있었으리라.
- "신사에서는 그를 기억하고 있던가?"
"아뇨. 아무래도 너무 오래전에 일이고, 또 신주(神主)도 제신(祭神)도 바뀌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어떻게 할 생각이었지?"
"예전의 신주가 살고 있는 곳을 찾아가 볼 생각이었어요."
"좋은 생각이지만, 이제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 세츠라는 눈을 가늘게 뜨며 진저에일이 담겨 있는 유리잔을 집어 올렸다.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이집트의 카터에게서 시탄카멘의 묘를 발견했다는 연락이 왔을 무렵, 카나본 가문에 정체불명의 검은 짐승이 나타났다더군. 온 집안사람이 총출동하여 그 짐승을 쫓았지만, 결국 잡지 못한 채 카나본 경은 이집트로 여행을 떠났대..."
"아무래도 동생이 검은 사냥개에게 당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군요."
- 세츠라는 야조회에서 나와 택시를 잡았다. 유미코의 아파트는 1급 위험지대인 카와다초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요초우초에 있었다.
"위험한 곳에 살고 있군."
"집세가 싸거든요. 아아, 맨 서처를 그만두면 뭘 해서 먹고살아야 하나. 사장님, 절 먹여 살려 주시지 않겠어요? 아, 역시 무리한 부탁인가요?"
"잘 있어."
세츠라는 무심하게 대꾸하곤 대기시켜 놓은 택시가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장님이 사건을 해결한 후, 제게 의뢰비의 일 할만 떼어 주시면 좋을 텐데. 사실은 한 번이라도 좋으니 같은 프로로서 함께 일해 보고 싶었어요."
그 말을 들은 것일까 듣지 못한 것일까. 아름다운 청년은 아무 말 없이 택시 안으로 사라졌다.
- "사장... 님, 그... 녀석은..."
"걱정 마, 처리했어."
세츠라는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밀랍처럼 창백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 요? 그럼... 이제 저는 안전하겠... 죠? 다시 맨 서처를 시작해도 되겠죠? 저, 사장님..."
"응?"
"함께 일해요."
그녀의 웃는 얼굴에서 생명의 빛이 점점 사라져 갔다.
세츠라는 붉게 물든 그녀의 몸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함께 일해요, 라..."
- "그래서 저희도 곤란해하고 있습니다. 한 놈만 잡으면 이유를 알아낼 수 있을 텐데, 놈들은 땅굴을 파는 것이 특기라 그게 좀처럼 쉽지가 않더군요."
학자들 중에는 원인들의 터널이 신주쿠뿐만 아니라 일본 전체와 아시아, 그리고 북아메리카에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신주쿠의 원인들은 태고의 선조들이 발견하여 확장시켜 온 지하의 거대한 터널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뭐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야조회 습격 당시에 남아 있던 터널은 적어도 그들이 직접 파 냈던 것이리라.
- "그 아가씨의 일은 참으로 안 됐더군요."
대화가 중단되자, 야조가 어색한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유미코가 죽은 것은 어제 오후. 죽음이 일상사처럼 되어 버린 이 도시에서는 소문이 퍼지는 속도도 상당히 빠른 법이다.
"그래서 이 사건을 조사하기로 마음먹은 겁니까?"
세츠라는 아무 말도 없이 신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당신이 도와주신다니 마음이 든든하군요. 그 아가씨에게는 미안하지만, 덕분에 이렇게..."
야조는 느닷없이 걸음을 멈췄다. 그의 상체가 급브레이크를 밟은 자동차처럼 앞으로 기울더니 갑자기 뼈가 부러질 듯한 기세로 뒤로 꺾어졌다.
공포에 질려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야조의 귀에 아키 세츠라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과 똑같은, 그러나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내 앞에서 두 번 다시 그 애의 얘기를 꺼내지 마."
야조는 겁에 질린 나머지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저항할 수 없는 죽음의 날개가 야조의 코 앞에서 퍼덕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사신(死神)은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겨울 아침 속으로 사라졌다.
- 신사의 돌계단을 내려왔을 때, 야조가 뒤따라오며 외쳤다.
"조금 전에는 매우 실례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세츠라는 평소에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인 적이 없을 야조가 자신을 향해 깊이 고개 숙이며 쩔쩔매는 꼴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세츠라의 죽음의 날개는 사라지고 없었다.
"사죄의 뜻이라고 하기엔 뭐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쓸데없는 참견입니다."
세츠라는 느긋하게 대답했다.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도 당신의 일에는 참견하지 않을 테니까요."
보통 사람이라면 큰 싸움이 벌어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야쿠자의 얼굴에는 도리어 안도의 미소가 떠올랐다. 정중한 말투로 돌아간 것을 보면 일단 위험은 사라진 셈이다.
- 승부는 한순간. 세츠라도 검은 짐승도 그렇게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더 정확히 따지자면 세츠라 쪽이 불리하다고 둘 다 느끼고 있었다.
단숨에 뼈까지 자르지 않으면, 검은 짐승의 발톱과 이빨은 쉽사리 세츠라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놓으리라.
- 그때 한 발의 총성이 어둠을 꿰뚫었다.
기회를 포착한 세츠라는 옆으로 뛰어올라 검은 짐승의 공격을 피하며, 균형을 잃은 검은 몸통에 힘껏 칼을 꽂아 넣었다.
한 차례 긴 비명을 지른 후 검은 짐승은 경내로 뛰어들어갔다.
- "기다려."
뒤를 쫓으려던 세츠라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또다시 입을 벌린 심연 아래서, 무시무시한 포효가 들려왔던 것이다. 상처 입은 먹이에게 달라붙은 육식 짐승들의 울음소리였다.
"한 마리가 아니었단 말인가."
세츠라는 망설이지 않고 오른손을 휘둘렀다.
견신 봉인용 칼은 길게 빛을 발하며 암흑 속으로 떨어졌다. 저 심연 속에 시간은 존재하는 것일까? 또는 깊이는?
세츠라는 무시무시한 절규를 뒤로 하고 경당에서 나왔다.
바닥이 꺼지고 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몇 미터 앞쪽에 늘어서 있는 나무들 사이로 도약한 세츠라의 등 뒤에서 경당은 서서히 잔해로 변해 가고 있었다.
-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전의 원인에 대한 얘기인데요, 놈들 중에 우리 조직의 부하와 문제를 일으켰던 녀석이 섞여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조사해도 모를 수밖에요. 지금은 반 정도 원숭이 상태니까요. 그걸로 포기한 줄 알았더니,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지금 놈들은 제 방 바깥에 몰려와 있습니다. 맨션 바닥에도 터널을 뚫어 놓은 걸까요? 어쨌든 이제부터 놈들을 상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걸로 실례하겠습니다. 살아 있으면 다시 만나 뵙도록 하죠."
세츠라는 일방적으로 통화가 끊긴 수화기를 바라보며 이런 이런, 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경찰서의 전화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 주민들은 누구나 그를 돈키호테라고 불렀다. 본명은 따로 있었고 다들 그 본명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에게 돈키호테라는 별명이 너무나도 잘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 광대뼈가 드러난 길쭉한 얼굴, 180㎝를 넘는 장신에 넓은 어깨, 그리고 언제나 단정하게 차려입고 있는 말끔한 스리피스 슈트.
그가 돈키호테라고 불리는 이유는 직업에 어울리지 않는 슈트 때문이 아니라 길게 뻗은 콧날 아래서 턱까지 돋아 있는 멋진 수염 때문이었다. 그것은 처음 보는 사람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돈키호테의 슈트는 아르마니의 걸작품이었고, 그의 직업은 청소부였다.
- 스페인의 작가가 창조해 낸 불멸의 영웅처럼, 니시 신주쿠의 돈키호테에게도 항상 위엄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긴 빗자루로 담배꽁초와 요물들의 비늘을 쓸어 모을 때에도 그는 결코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주정뱅이의 구토물과 짐승의 배설물을 처리할 때에도 호스에서 쏟아지는 물이 아닌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백으로 씻어내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대부분 그런 태도는 사람들에게 오만불손하다는 인상을 주는 법이지만 그의 경우 성실한 태도와 남다른 이력으로 주위의 평판이 좋은 편이었다.
- 요츠야 3번가의 '귓불'은 신주쿠에서는 보기 드물게 건전한 가게였다. 그는 그곳에서 사장으로 가게를 운영하며 귀이개를 팔고 있었다.
구외에서 무적의 파워를 자랑하는 45구경 매그넘이 신주쿠에서는 호신용밖에 되지 못하는 것처럼, 단순한 대나무 막대기에 불과한 귀이개는 이 도시에서는 큰 상점을 경영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효력을 발휘하는 물건이었다. 인간에게 들러붙는 습성을 지닌 요물 중에, 귀를 통해서 출입하는 녀석들이 이상하게 많았던 것이다. 그 전형적인 예가 '체자레'라는 이름의 기생충이었다. 그것은 굵기 1㎜ 길이 30cm의 몸체를 자벌레처럼 꿈틀거리며 귀를 통해서 체내로 침입하여 대뇌 안에 일종의 마취약을 분비, 인간의 움직임을 컨트롤한다. 체내에서 머무는 초기 3개월 간은 체자레의 성장을 위한 식량을 구하거나 작은 요물들을 포획하는 데 전념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피해는 없다. 하지만 ...
- 구청으로부터 판매 독점권을 따낸 돈키호테의 가게는 더욱 번창해 갔다.
그러던 그의 가게가 어째서 망하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꿈에서 깨어난 것일까 혹은 악몽에 빠져 든 것일까. 옛날부터 평범한 귀이개 가게의 주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우아하고 고고했던 그는 하룻밤 사이에 거리의 청소부로 변했다.
- 그런데도 그의 동작이나 말투는 예전과 전혀 변함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동정하거나 또는 비웃었다. 하지만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잘난 척하지도 않으며 현재의 상황을 성실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그의 태도를 보고 사람들도 점차 그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 언제나 새것처럼 말끔한 단벌 양복을 입고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정중한 인사를 보내는 청소부는 곧 니시 신주쿠의 명물이 되었다.
그가 담당한 지역은 10초도 지나지 않아 티끌 하나 없이 반짝반짝해졌다. 그리고 때로는 그가 센베 과자나 쿠키를 사서 아이들과 노인에게 선사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니시 신주쿠의 돈키호테'는, 인간이 환경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하나의 산 증인이었다.
- 그런 그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모습을 감춘 것은 한 해가 저물 무렵의 회색 월요일이었다.
그리고 니시 신주쿠 자치회 회장이 아키 세츠라를 방문한 것은 돈키호테가 실종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 세츠라는 난로가 붉게 피어오르는 거실에서 노인을 만났다.
"찾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노인은 쑥스러운 듯이 콧등을 문질렀다.
"앉으시겠습니까?"
세츠라는 노인의 권유대로 의자에 앉았다.
"아내가 곧 차를 내올 겁니다. 그래, 무슨 일이십니까?"
노인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말했다. 세츠라는 그런 노인을 온화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제 임무도 끝났군요."
"무슨 뜻입니까?"
"당신이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더 이상 제가 나설 이유는 없습니다."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호감이 담긴 눈빛으로 세츠라를 바라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단 하나. 이 생활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다들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을 겁니다."
- 여자가 일본 차를 날라 왔다. 세츠라는 바구니에 들어 있는 센베과자 하나를 집어 들고는 평소의 그 답지 않게 감격하며 말했다.
"최강의 콤비네이션이군요."
"니시 신주쿠의 센베 과자점에서 산 거예요."
여자는 조용히 말했다.
"호오, 그곳은 평판이 좋은 가게죠. 과자도 상당히 맛있고."
"직접 만든 제품을 팔고 있는 것 같더군요. 주인이 굉장히 핸섬해서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다나 봐요. 제가 갔을 때에는 주인은 없고 아르바이트생만 있더군요."
"그거 유감이군요."
세츠라는 조금 엄숙한 표정으로 과자를 베어문 후 차를 마셨다. 그 모습이 그림처럼 묘하게 아름다웠다.
- "아무 데도 가지 말아 주세요, 여보."
여자의 목소리에는 세츠라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절실함이 담겨있었다.
"물론이야. 달리 갈 곳도 없는걸."
"다행이에요."
- 참고로 그곳은 7층이었다.
"상식이 없는 여자로군."
세츠라도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낙하하는 세츠라의 눈에,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과 속도로 볼 때 표범의 등에 올라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세츠라는 추적할 마음을 잃고 가볍게 지상에 내려섰다.
"이번에는 내가 의뢰의 표적이란 말인가..."
가로등 아래에서, 달빛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조금 어두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표적'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 그러자 세츠라의 옆에서 그와 막상막하로 아름다운 얼굴이 속삭였다.
"의사가 되는 게 어때?"
지금 세츠라가 앉아 있는 곳은 메피스토 병원의 진찰실이었다.
"의사라면 다른 사람의 원한을 사는 일도 없을 테고, 적어도 절개하고 봉합하는 일은 나보다 잘할 수 있을 테니까."
- 세츠라는 하얀 얼굴의 의사를 흘끗 노려본 후,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두드렸다.
메피스토는 의자에 앉아 있는 검은 옷의 청년에게 다가가, 하얀 목덜미의 가운데, 제6경골과 제7경골 사이를 탄력 있는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피부와 피부가 닿았다. 그러자 그 언저리가 안개라도 낀 것처럼 환상적으로 흐려지더니 주변의 공기마저 무지개 빛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창에서 새어 들어온 겨울 햇빛이 비커와 프래스코에 반사되어 생긴 자연현상인지도 모른다.
하얀 손가락이 천천히 목덜미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희미한 광점(光點)이 긴 선을 그리며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를 뒤따라갔다.
"내 침이 아니라 자네의 실을 넣어 두었지만, 효과는 어땠어?"
"덕분에 살았어."
세츠라는 보기 드물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 그것은 분명히 그의 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체내의 '밀궁(密宮)' -태고의 현인들이 찾아내려고 애썼지만 결국 꿈으로 끝나고 만 혈도- 에 봉인해 넣었던 것은, 다름 아닌 마계의사 메피스토 ...
- "당신을 위해 준비한 향기예요."
시릴의 빨대에 노란색 액체가 빨려 올라왔다.
- "그래요. 일단 들이마시면 72시간 내에 죽게 되어 있어요. 나를 이기면 치료법을 가르쳐 드리죠. 물론 이 병원에서는 치료가 가능하겠지만. 어때요, 살려 달라고 원장에게 울며 매달려 볼 생각인가요?"
"그렇게 하도록 하죠."
세츠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만 기다려요."
시릴은 세츠라의 코트 자락을 잡아끌었다. 상당히 당황하고 있는 눈치였다.
"당신은 자존심도 없나요? 그저 편안한 길을 택하고, 나를 이기기 위해 목숨을 걸 생각은 없단 말인가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일단 생명을 유지하고 볼 일이다,라는 속담이 있죠."
"지금 가 버리면 나를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걸요?"
세츠라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직 얘기해 줄 마음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 "알고 싶으면, 내 요구를 들어주게."
마른 나뭇가지 같은 팔이 뻗어 와 세츠라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세츠라는 재빨리 손을 빼며 말했다.
"곤란합니다."
"싫은가? 하룻밤만 내 상대가 되어 주면 원하는 것은 뭐든지 가르쳐 주지. 신주쿠의 어떤 살인 청부업자가 습격을 해도 자네에게 손끝 하나 댈 수 없게 될 거야."
"음..."
세츠라는 욕정으로 빛나는 노인의 눈을 바라보며 살며시 중얼거렸다.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어때?"
세츠라를 향해 몸을 기울이던 노인이 깜짝 놀라며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무수한 붉은 점이 공중에 떠올라 있었다. 그러다가 겹쳐진 꽃잎이 소리 없이 벌어지며 커다란 진홍의 장미로 변했다.
-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입술만 움직여서 말씀해 주세요."
몇 초가 지났다. 미동조차 하지 않고 반쯤 감긴 눈으로 쿠로몬을 내려다보고 있던 세츠라가 이윽고 눈을 커다랗게 뜨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쿠로몬이 무슨 말을 했던 것일까.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인이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약속대로 나와 하룻밤을..."
세츠라는 노인의 손을 살짝 어루만지며, 보기 드물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안 됩니다."
- 세츠라는 택시 정류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메피스토 병원에 갈 생각이었다.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걷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는 살인 청부업자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는 듯한 긴장감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릴은 십중팔구 보이지 않는 표범을 이용해서 세츠라를 미행하여 세츠라의 행선지를 파악한 후, 반드시 공격을 해 올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세츠라의 걸음걸이에서는 긴박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 어디선가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정원의 풀'.
핀란드 민요 중에서도 가장 널리 사랑받고 있는 노래 중 하나였다.
- 셔터가 내려진 가게 앞에서 붉은 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가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이른바 스트리트 뮤지션이었다. 발 밑에 놓아둔 모자 속에서는 몇 개의 동전이 빛나고 있었다. 상당히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음정도 별로 어긋난 곳이 없고, 게다가 무엇보다도 '인간적'이었다. 이 도시에는 이상한 요괴가 들러붙어 이보다 백 배나 훌륭하게 노래를 부르는 녀석 따위가 널리고 깔려 있다. 따라서 '인간적'이라는 점이 무엇보다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 세츠라는 아무 말 없이 남자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문득 노래 가사가 귓가를 때렸다.
여름의 마지막 장미...
순간 세츠라의 뇌리에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는 가슴을 움켜잡았다. 걸음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 여름의 마지막 장미. '정원의 풀'의 원제였다.
시릴의 짓이었다. 그 한 마디를 키워드로 표적의 심장을 정지시키는 술법을 사용한 것이었다.
세츠라는 눈앞이 암흑으로 뒤덮이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메피스토의 방어법이 전혀 듣지 않을 줄이야.
- "그 시합이라면 당신의 부전승입니다."
"뭐라고?"
세이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을 때, 문 밖에서 거친 발소리가 들렸다.
- 세츠라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문득 아득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저도 봄을 좋아해서 말이죠."
- 밖으로 나갔다. 거리에 새하얀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은 눈보라 속에 녹아들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이에요."
여자가 말했다.
"오늘 밤에야말로 결판을 내겠어요. 빨리 그 애를 찾아 줘요."
"더 이상 당신과 관련되고 싶지 않습니다."
세츠라가 손을 들어 휘몰아치는 눈보라로부터 눈을 보호하며 말했다.
"조용히 이 도시를 떠나 주시지 않겠습니까?"
"좋아요. 그 애를 처리한 후라면."
"또 오면 되지 않습니까."
- 눈보라가 뺨을 두드렸다. 가로등 불빛을 받고 서 있는 세츠라의 모습은 마치 수정 속에 봉인된 것처럼 아름다웠다.
"당신은 사라지고 그 소녀가 온다. 그 소녀가 사라지면 이윽고 당신의 차례가 돌아온다. 세계는 그렇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졌어요."
겨울의 미녀는 슥 하고 뒤로 물러났다.
"조금 더 기다리겠어요. 빨리 찾아 줘요, 맨 서처."
세츠라의 오른손에서 보이지 않는 실이 날아올랐다.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날려 보낸 한 가닥의 실은 예상대로 허무하게 되돌아왔다.
- 그가 구외의 사람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치즈코는 그래도 그에게 균열 너머 구외로 돌아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코헤이는 상처가 회복되자 곧 신주쿠 2번가의 바(bar)에 일자리를 얻었으나, 출근한 그날로 상처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2번가는 지금도 게이들의 천국이었다. 그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2번가를 무대로 활동하는 여러 게이 폭력조직 중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그렌디'의 보스였다.
- "이 도시가 어떤 곳이든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룰이라는 게 있는 법이야. 이유 없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 입힌 사람은 그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돼. 그건 구외에서도 신주쿠에서도 마찬가지야."
치즈코는 코헤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녀의 신고를 접수한 것은 꽃무늬 셔츠를 걸친 애꾸눈 형사였다. 그는 그녀가 사정을 이야기하자 그날로 당장 보스를 체포하고 재판 수속을 해 주었다.
"남은 패거리들에게는 잘 얘기해 두었으니까, 보복할 염려는 없을 거요. 아무튼 신주쿠의 호스티스 중에 댁처럼 똑 부러지는 여자가 있을 줄은 몰랐군."
"지금 그 말은 일종의 성추행이에요."
- 키쿠이치초는 아직 희미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그 어둠을 뚫고 미스기의 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오더니 이상한 노래를 중얼거리며 주택가를 행진하기 시작했다.
전원이 길고 검은 예복을 두른 채 한 손에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반대쪽 손으로는 관을 받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그것은 장례행렬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얗게 뻗어 있는 거리 위에는 영구차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미스기의 문 앞에도 화관 하나 놓여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기묘한 것은 성스러워야 할 장례행렬로부터 발산되어 나오는 형용하기 어려운 요기(妖氣)였다.
"이것은... '베라미스의 장례의식'이로군요."
치즈코의 말에 세츠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코헤이 군은 아마도 저 관 속에 있을 겁니다."
- '베라미스'는 고대 앗시리아의 암흑신을 신봉하는 사교단(邪敎團)의 명칭이었다. 그들의 장례의식(儀式)은 동트기 전 산 제물을 가둬 두었던 곳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광장에서 행해진다고 한다. 산 제물은 고대의 의식에 따라 죽은 자로 분장된 다음 관속에 눕혀진 채 죽음의 제단으로 운반된다. 재미있는 것은 사교에 대한 탄압이 가장 엄격했던 고대 앗시리아에서 법률 기관의 눈을 속이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다른 종교의 예복을 입었던 습관이 아직도 남아서 장례의식 때 그 나라에서 가장 유력한 종교의 의상을 두른다는 점이다. 지금도 모두들 검은 예복에 고작 해야 횃불 따위나 들고 있었다. 의식치고는 너무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 "아?"
뒤를 돌아본 미후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흑백의 콤비가 있을 줄이야. 그녀의 등 뒤에는 아키 세츠라와 닥터 메피스토가 서 있었다.
"구급차를 대기시켜 놓았다."
닥터 메피스토가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 "음, 그전에..."
세츠라는 일부러 가리드의 말을 중단시켰다.
"어떻게 제가 그 카페에 있다는 걸 알아내셨습니까?"
"미라... 아니, '검은 신의 딸'이 도망쳐 나온 박물관을 줄곧 도청,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일세. 덕분에 경찰의 움직임도 파악할 수 있었지만, 자네를 알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행운이었지. 이걸로 대답이 됐나? 그럼 본론에 들어가도록 하겠네."
"'검은 신의 딸'이란 무엇입니까?"
"그건 이제부터 설명하겠네."
가리드는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눌렀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이상한 맨 서처였다.
- "잘 알고 있겠지만, 우리 이집트의 절대신은 태양신 아몬 라일세. 하지만 이 나라에도 8백만 명의 신들이 있는 것처럼, 이집트에도 본래는 아몬 라에 필적하는 힘을 지닌 사악한 신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네. 인간을 작은 구슬로 만들어 피안의 강가에 쌓아 올리는 것이 취미인 '소테프트', 눈을 뜨면 나일강의 물을 단숨에 마셔 버린다고 하는 '슈기와리', 하늘을 잡아뜯어 먹어치우는 것이 취미인 '가슨'. 그들은 그 사악함 때문에 이집트의 역사에서 소외되어 버렸고, 지금은 이름을 알고 있는 자들조차 거의 없지. 하지만 신의 본질은 두려움과 경외심. 그들도 얼마 되지 않는 열광적인 신자들을 거느린 암흑 신앙의 형태로 명맥을 유지해 왔다네. 시간은 흘러, 몇천 년 동안 사악한 신들은 대부분 신자들과 함께 사라졌지만, 그중에서 유일하게 소수 신자들의 열광적인 신앙에 힘입어 계속 존재해 온 신이..."
"검은 라 세나."
누구나 알고 있는 이름인데도, 가리드와 그의 옆에 서 있는 하얀 터번을 두른 두 남자는 핏기를 잃었다.
"그럼 그 미라의 정체는?"
세츠라는 좀 더 겁을 주려는 생각으로 물었다.
"아이시스. 라 세나 신단의 무녀일세."
- 가리드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언제부터인지 신단에 거주하며 사악한 신의 의지를 신자들에게 전파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고 한다. 아이시스는 무서운 힘의 소유자로, 그녀가 한 손을 들면 여름에 눈보라가 친다고 한다. 그녀는 또한 모세보다 훨씬 이전에 홍해를 가른 적도 있으며, 작은 칼과 바늘과 실로 사자의 목에 말의 몸통과 양의 다리를 이어 붙이기도 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녀는 나이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집트 왕가에 소거되지 않고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아이시스는 2백 년에서 5백 년 동안에 걸쳐 21, 22 세의 젊음을 유지했다고 한다.
- "그런 힘의 소유자가 결국 신자 이외의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결국 라 세나의 힘이 가장 약해지는 수확기에 라 세나 신단은 사람들의 습격을 받았고, 아이시스는 산 채로 부활을 방지하는 용액에 담가 두었던 천에 싸여 관 속에 봉인되었다네."
"그런 무서운 힘을 지닌 무녀를, 일반인들이 어떻게 그렇게 만들 수 있었죠?"
세츠라가 너무나도 당연한 질문을 던졌다.
"민중의 편에 선 한 사람의 마도사, 정확하게는 역사상 최초의 배신자라고 불리는 남자 때문이었지. 그는 아이시스에게서 마력의 모든 것을 배우고, 그녀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기술을 익혔다더군. 그는 바로 사악한 신의 종인 그녀가 유일하게 마음을 허락한 그녀의 연인이었지."
- 어느 날 그녀의 나라와 같은 넓이를 지닌 깊은 균열에 둘러싸인 토지에서 부활하여 사악한 신 라 세나의 힘으로 그 땅을 지배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1만 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라 세나의 신앙을 유지해 온 신관의 자손도 이 사실을 알고 그녀가 부활할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 녀석의 이름은 히에라콘. 자네도 알다시피 상당한 힘을 지닌 마도사일세. 우리들은 아몬 라의 이름 아래, 라 세나의 부활을 막기 위해 활동하고 있네. 어느 쪽이 정의인지, 이걸로 자네도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글쎄요."
세츠라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 쪽이 정의이건 알게 뭐냐, 게다가 정의란 게 대체 뭐지,라는 표정이었다. 이곳은 마계도시인 것이다.
- "자,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세츠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리드도 경비원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관의 후손 히에라콘의 의뢰를 받은 이상, 세츠라에게 있어서 이곳은 적진인 것이다. 언제 공격을 당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문이 열리고 작은 석궁을 든 험상궂은 얼굴의 세 남자가 나타나 세츠라를 둘러쌌다. 조금 전 카페에서 마주쳤던 무리들이었다. 가리드의 옆에 서 있던 두 사람의 경비원도 자동권총을 뽑아 들었다.
"의뢰인을 바꾼다면 아무 짓도 하지 않겠네."
- 히에라콘은 자줏빛 소매를 펄럭이며 오른쪽 벽으로 향했다. 그가 손을 대자, 돌벽은 모래처럼 무너지며 반짝이는 거울로 변했다.
그는 나지막하게 주문을 외웠다. 거울 표면에 황량한 계곡과 그 사이를 걷는 하얀 그림자가 비쳤다.
"저것은?"
"닥터 메피스토리는 이름의 의사입니다."
히에라콘이 대답했다.
"저것은 카노포스의 계곡. 그는 설마..."
"틀림없이 알고 있겠죠. 라 세나의 신이 건재하고, 그가 상응하는 마력을 구사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어떤 걱정도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저 자는 개인이 아닙니다."
아이시스는 그 불가사의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거대하고 깊고 무시무시한 존재, 제 눈에는 하나의 도시가 보입니다. 그는 이 도시를 상징하는 두 사람 중 하나입니다. 흔히 마계의사라고 불리죠."
- "지금 상태로는... 조금 전에도 저는 가리드로 인해 순간적으로 신의 보호를 잃었습니다. 물론 신의 힘은 이미 상당히 회복되어 있습니다만, 상대가 이 도시, 아니 저 남자라면 문제는 다릅니다. 이제 신주쿠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수단은 단 하나. 이 도시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상징 아키 세츠라를 말살하는 것입니다."
- 부디 당신의 입술로 나에게 입 맞춰 줘요
사랑이 스스로 눈을 뜰 때까지는
일부러 깨우지도 말고
그 잠을 방해해서도 안 된답니다
- 이번엔 보라색 장의를 입은 신관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날 밤, 내 영혼이 사랑하는 자를 방문했다
나는 그를 방문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그를 불렀지만 대답은 없다
- 높이는 100m 이상, 그 벽면에 거대한 두 개의 신상(神像)이 세워져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계곡에서 이 신상을 발견한 여행객은, 두 번 다시 걸을 기력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 틀림없으리라.
- 양쪽 다 괴이하기 짝이 없는 형태였지만 그러면서도 보는 사람에게 신을 표현한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엄숙한 신비함을 갖추고 있었다.
오른쪽의 신은 왼쪽 신의 목덜미에 칼을 내리치고 있었고, 왼쪽의 신은 양손에 들고 있는 창으로 오른쪽 신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사투(死鬪)-서로가 동시에 서로를 죽이는 순간.
- 대체 어느 시대에 조각된 것일까, 표면이 마모되어 윤곽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에서 풍겨 나오는 요기(妖氣)는 이 신상(神像)에 돈황(敦煌)의 마애불보다 훨씬 생생한 인상을 부여해,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이 계곡에서 이 신상들이 방금 전까지 쉴 새 없이 싸워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게 하는 것이었다.
- 그러나 신상도 신상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메피스토도 그에 못지않게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대체 그는 언제 어떻게 해서 이곳에 오게 된 것일까. 이곳은 이집트의 고도 멤피스에서 남쪽으로 50km가량 떨어져 있는 금단의 계곡 '카노포스'이다. 일본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초음속 제트기로도 12시간은 걸린다. 그가 세츠라와 헤어진 것은 일본 시간으로 어제저녁 무렵. 그로부터 이미 14~15시간은 지나 있으니 이곳에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그는 심야까지 병원에서 볼일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 이집트인 청년이 병원에 실려 왔을 때, 그는 어떤 예감을 느꼈다. 그래서 무조건적으로 세츠라를 불렀던 것이다. 환자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가 막연히 가슴속에 품고 있던 느낌이 더욱 강렬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원장실에서 태곳적의 신과 무녀, 그녀를 배신한 연인, 그리고 전설 등에 대해 조사를 했던 것이다.
- 메피스토는 하얀 망토 자락과 길고 우아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작은 녹색의 돌항아리를 꺼내 들었다.
"신주쿠에 오늘 아침 마진을 일으킨 것은, 둘 중 하나겠지. 내 생각에는 오른쪽인 것 같군."
오른쪽의 칼을 내리치고 있는 신상(神像)의 가슴 부근이 깊게 파여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인공적인 폭발에 의한 것 같았다.
"왼쪽의 신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당한 것일까. 틀림없이 그 순간 아몬 라의 창은 지금보다 더 깊숙이 오른쪽 신, 라 세나의 심장에 들어가 박혔겠지. 그렇다고는 해도 신주쿠를 파괴하려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는 오른손에 든 항아리를 크게 휘둘렀다.
"이것이 마계의사의 치료다."
항아리는 포물선을 그리며 사악한 신, 라 세나의 신상을 향해 날아갔다.
- '박물관으로 와 줘요.'
그녀는 그 말 한마디만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맑게 개어 있던 하늘이 납빛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고, 구름 사이에서 내리치는 번개가 검은 옷의 청년을 청백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 천둥소리가 울렸다. 거대한 해머로 철판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였다. 곧 비가 올 것이라는 것을 예감한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뛰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세츠라는 박물관 안으로 들어섰다.
- 세츠라는 패널 건너편에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자신과 나란히 걷고 있었다.
세츠라는 별 이유도 없이 같은 곳을 향해 걷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 패널과 패널 사이에는 몇 cm 정도의 틈이 있었다. 그곳에 눈을 대면 이집트 청년의 얼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츠라는 왠지 눈길조차 돌리려 하지 않았다.
- 세츠라는 중앙 전시실 입구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패널도 그곳에서 끊겨 있었다.
- 중앙에 놓여 있는 관 옆에, 하얀 의상을 두른 아이시스가 서 있었다. 갖가지 색깔의 보석을 이어 만든 목걸이가 목덜미에 무겁게 늘어져 있었고, 어깨에는 등나무로 짠 바구니를 메고 있었다.
- "드디어 왔군요."
여자가 말했다. 입술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럭저럭."
세츠라가 말했다.
- 전신에 투지를 불태우고 있는 여자의 눈이 빛나는 것을 바라보며, 세츠라는 어째서일까 하고 의아해했다.
아이시스는 양팔을 벌렸다. 그것은 세츠라를 향한 것일까, 아니면...
- "잘 와 주었어요. 아니, 잘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군요. 어서 오세요, 사랑스러운 배신자."
그녀의 목소리에 이끌리기라도 한 것처럼, 세츠라는 앞으로 나아갔다.
동시에 패널 건너편에서 걷던 사람도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래도 세츠라는 돌아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무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깨가 닿았다. 신경 쓰지 않고 걸었다.
- 세츠라는 그가 자신의 몸에 녹아드는 것을 느꼈지만 개의치 않고 계속 걸었다. 굉장히 오랜 옛날부터 이렇게 될 것이 정해져 있었던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어서 와요, 파이람. 아니, 파이스."
아이시스가 말했다.
그것은 세츠라의 이름이기도 했다.
- "그날 이곳에서 당신의 얼굴을 봤을 때, 그리고 더러운 가게에서 당신의 손에 닿았을 때, 나는 확실하게 알았어요. 백 세기의 시간을 넘어, 이번에야말로 당신에게 배신의 대가를..."
이번에야말로 세츠라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시스가 들고 있는 바구니에서 회색 천들이 그를 향해 날아왔다.
세츠라는 그것에 포함되어 있는 독소의 효과와 성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파이스였던 것이다.
아름다운 청년은 조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연인을 배신한 마도사의 속죄의 감정 때문이었다.
그의 목에 천이 감겼다. 순간 작은 반짝거림이 일어나며, 무수한 천조각은 모두 절단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그곳에 있는 것은 아키 세츠라였다.
- 그 손은 무참하게 갈라지고 주름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보지 말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새 늙은 여자의 갈라진고 쉰 목소리로 변해있었다.
그녀는 팽이처럼 몸을 돌려 관을 향해 다가갔다.
"아이시스, 나도 함께 가겠어!"
검은 허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가냘픈 모습을 쫓아 그렇게 외친 것은 세츠라였을까 파이스였을까.
- 번개가 내리쳤다. 섬광이 번쩍이다가 사라지기까지의 짧은 순간동안에, 세츠라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1만 년 전, 그녀가 파이스의 손을 잡았던 것이 아니라 파이스가 그녀의 손을 잡았던 것이다. 그는 영원한 어둠 속으로 연인을 홀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함께 가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운명은 아이시스의 손만을 남기고 무정하게 관뚜껑을 닫아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세츠라가 아이시스의 손을 잡고 암흑으로 함께 몸을 던지려 한 순간, 관은 또다시 그의 눈앞에서 허무하게 닫혀 버렸다.
-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경비원 제복을 입은 덩치 큰 남자였다.
세츠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부터 꿈쩍도 하지 않던데, 자네 대체 여기서 무슨 짓을 하고 있..."
경비원은 세츠라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나머지 미처 말을 끝맺지 못하고 말았다.
- 소년은 언제나 혼자였다. 친구가 필요하긴 했지만 친구와 함께 노는 것은 귀찮았다. 실은 때때로 친구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지만, 그렇게 자신이 원할 때만 그를 받아들여 주는 편리한 친구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혼자 있는 것을 선택했다.
- 폐허에는 흐린 하늘이 어울린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기와더미가 초현실주의적으로 보이지 않아?"
그렇게 말하자 친구들은 모두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소년을 남기고 가 버렸다.
그건 그걸로 좋았지만, 소년은 그때부터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되었다.
- 그는 항상 기다려 왔다. 뭔가 일어나지 않을까. 이 시시한 세계에서, 자신만을 위한 뭔가 특별한 일이.
그래서 하늘을 뒤덮은 회색 구름 속에서 한 여자가 내려왔을 때, 소년은 놀라기는커녕 됐다,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뛰었다.
- 여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구름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함께였다. 너무나도 천천히 내려왔기 때문에, 소년은 그녀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까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윽고 멀리서 그녀가 착지하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몇 번이나 기와더미에 걸려 넘어지면서 정신없이 달렸다.
그녀는 소년이 떨어졌으리라고 예상한 지점보다 훨씬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소년이 도착했을 때 여자는 이미 지상에 서 있었다.
- "어떻게 알았죠?"
여자는 미소를 지었다. 어떤 남자라도 단숨에 영혼을 빼앗길 만한 미소였다. 청순하고 기품이 있는 얼굴이었지만, 몸에 딱 달라붙는 붉은 슈트에 둘러싸인 풍만한 육체는 음란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요염한 분위기를 풍겼다.
"직감입니다."
세츠라는 시치미를 떼며 용건을 물었다. 그러자 여자는 스케치북을 꺼내 들며 말했다.
"저는 텐도 시즈카라고 해요. 이런 얼굴을 한 사람을 찾고 있어요."
"사진은 없습니까?"
"없어요. 실은 전 기억상실증이거든요. 언제 이 도시에 왔는지, 그때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
- "하아."
세츠라는 스케치북을 펼쳤다.
"이런데도 기억에 없다는 겁니까?"
스케치북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단 한 장뿐이었으나 사진보다 훨씬 정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연필로 그린 그림이었지만, 이름난 화가라도 이렇게 훌륭하게 그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사람에 대한 기억만은 어렴풋이 남아 있어요. 나는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 "내키지 않는 모양이군요?"
시즈카는 웃으며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여자의 직감."
시즈카는 약간 짓궂게 말했다.
"이곳을 찾아오기 전에 사람들에게 당신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어요. 당신이라면 이런 조건에서 사람을 찾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고 다들 입을 모아 말하더군요."
"하아."
"그런데 어째서 내키지 않아 하시는 거죠?"
"맨 서처의 직감."
세츠라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역시 거절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 "죄송하지만 돌아가 주십시오."
시즈카는 세츠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곧 탁자를 돌아 세츠라의 옆에 앉았다.
"무슨 짓을 해도 안 되나요?"
그녀는 요염한 눈으로 호소했다. 반쯤 열린 입술이 말할 수 없이 섹시했다.
하얀 손이 세츠라의 무릎을 어루만졌다.
- "이렇게 핸섬한 남자라면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을 리가 없는데, 아무래도 생각이 나질 않는단 말야. 혹시 마진 이전의 주민이나 구외의 인간이 아닐까."
"또 한 사람 쪽은?"
세츠라가 물었다.
"이건 세츠라군에게만 해 주는 얘기야."
"알고 있어요."
"이 여자에 대한 정보도 전혀 알아낼 수 없어. 텐도 시즈카라는 것은 아마 가짜 이름일 거야. 이 여자는 틀림없이 구외의 인간이야."
"구외..."
세츠라가 약간 지긋지긋해하면서 중얼거리자, 토야는 심술 맞게 웃으며 말했다.
"푸하하, 신주쿠의 주민조차 정신이 아득해질 만한 미남자가 구외에 가면 과연 어떻게 될까. 남녀를 불문하고 당신을 본 사람들은 모두 미쳐 버리고 말겠지. 구외로 한 발자국만 들어가면 당신은 위험한 병원체와도 같은 존재야. 돌 맞고 쫓겨나기 전에 빨리 고향으로 돌아오도록 해."
- "굉장해, 마치 녹아드는 것 같아."
"그래요?"
- 이 도시에서는 언제나 기묘한 일이 일어난다.
소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는 죽어 버린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이곳에 있으면 언젠가 또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소년은 미소를 지으며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그녀는 품위 있는 동작으로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손녀 미와가 이상해지기 시작한 것은 일주일 전부터였다고 한다. 전문대생인 그녀는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다음날 등교할 때까지 종일토록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청하게 벽만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손녀가 애달픈 표정으로 한숨짓는 것을 본 메유끼는 손녀가 이상해진 원인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 그녀는 성인식도 지난 손녀의 연애 관계에 미주알고주알 참견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라고 생각해서 그저 곁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무엇보다 미와는 죽은 며느리와는 달리 상당히 의지가 강한 아가씨였다. 그런 점에서 메유끼는 자신을 닮은 손녀를 무척이나 아끼고 믿었다. 게다가 사랑이란 이루어지건, 파국을 맞게 되건 간에 나름대로 인생의 경험이 되는 법이라고 생각했기에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 "지나치게 아름다운 남자라고 생각했어요. 인간이란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불현듯 저 남자는 미와의 상대로는 너무 벅차다, 미와가 감당할 상대가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죠.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이 되어도 미와는 돌아오지 않았답니다."
- 찾아야 할 상대와 목적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미와의 일기장 여백에 '아키 세츠라 신주쿠 사람'이라고 적혀있었던 것이다.
- "자기에겐 너무 벅찬 남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겠죠. 하지만 여자는 자기에게 어울리는 남자보다도 이런 남자의 유혹에 쉽게 마음이 움직이는 법이랍니다."
카바네 형사는 메유끼의 말에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곧 세츠라에게 고개를 돌리며 사무적으로 물었다.
"너 뭐라고 유혹한 거냐?"
"말도 안 되는 소리."
- "하지만 목격자가 있어. 그게 아니라면 알리바이라도 있나?"
카바네 형사는 일방적으로 물었다.
"이틀 전이라... 고추잠자리가 많이 날아다니고 있었죠."
"상당히 당황하고 있군. 경찰서로 오도록 해. 머리를 식혀 주마."
카바네 형사는 검은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세츠라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카바네 형사의 손목을 메유끼가 붙잡았다.
"무슨 짓이죠?"
카바네 형사는 메유끼를 바라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나는 그를 경찰서에 끌고 가 달라고 하진 않았어요."
- 카바네 형사가 빙긋 미소를 짓자, 이제 일이 어떻게 되어 갈지 짐작이 간 세츠라는 푸우-하고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메유끼가 두 사람을 노려보며 이어 말했다.
"내게는 하나밖에 없는 귀여운 손녀입니다. 죽은 그 애의 부모를 위해서라도, 그 애를 제대로 된 남자에게 시집보낼 책임이 있습니다. 당신들 같으면 손녀딸이 남자에게 속아서 이런 무서운 곳으로 끌려왔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갈 수 있겠습니까?"
애꾸눈 형사는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맨 서처를 고용하십시오."
- "이 도시에 잘못 뒤섞여 들어온 사람을 찾으려면, 이 도시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인간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주쿠를 알고 신주쿠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신주쿠의 마성과 대화를 나누고, 신주쿠의 어둠을 노래할 수 있는 남자만이 이 도시에 삼켜진 인간의 절규를 들을 수 있지요."
"그 사람이란..."
"다행히도 그는 저와 절친한 사이입니다. 요금은 싸게 해 드리죠. 분명 고령자는 특별히 할인된 가격으로 모시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세츠라의 물음에 카바네 형사는 딱 잘라 대꾸했다.
"오늘부터."
- "잘 보게."
점장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눈물샘 하나, 솜털 하나하나까지 진짜 얼굴과 똑같이 만들어져 있지. 근육이나 대머리가 벗겨진 형태까지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다네. 하지만..."
점장은 마스크를 벗었다. 그리고는 다른 것을 집어서 다시 얼굴에 뒤집어썼다.
- 마스크의 표면이 잔물결 치듯 움직였다. 윤곽이 변하고 이목구비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변화가 멈췄을 때, 마스크는 세츠라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몇 초 지나지 않아 일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두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추악한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마스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세츠라를 향해 점장은 흥분된 얼굴로 말했다.
"봤지? 이렇게 되어 버린다네. 마스크가 잘못 만들어진 게 아니야. 지나치게 잘 만들어진 거지. 그저 그런 마스크라면 적당한 얼굴로 변하고 끝났을 텐데 말야. 자네는 지나치게 아름다워. 아무리 정교한 변장술로도 재현할 수 없을 만큼 말이야."
- 점장은 히죽히죽 웃으며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입이 헤벌어진 걸 보니 듣기 싫지만은 않은가 보지?"
- 그러자 벽이 우측으로 스르르 돌아가더니 비밀장소가 나타났다.
블랙홀 같은 공간에 몸을 들여놓자, 검은 의상은 소멸하고 하얗고 아름다운 얼굴만이 어둠 속에 떠올랐다.
세츠라는 열 발자국 정도 걸은 후, 막다른 곳에 있는 문을 똑똑 두드렸다. 좌우의 벽에는 적외선 경보기와 감시용 비디오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열려 있어."
어디선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갑자기 자극적인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소독약 냄새다.
전후좌우 사방에서 수많은 세츠라가 세츠라를 맞이했다. 심지어 천장에서도 내려다보고 있고, 바닥에서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 황홀한 광경을 보았다면 평생 이곳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전면이 거울로 된 방이었다. 소파와 딱딱한 유리 책상이 놓여 있는 것을 보면 대합실인 듯했다.
"오랜만이군요."
세츠라는 느긋한 어조로 인사했다. 그리고는 코트에서 종이로 포장한 선물을 꺼내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별것 아니지만 받아 주십시오."
"정말 오랜만이군."
노인이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 "때때로 얼굴을 내밀지 않으면, 신주쿠에 검은 옷차림의 맨 서처를 우글우글 풀어놓겠어."
"그 일 때문에 왔습니다. 벌써 한 사람 풀어놓은 것 아닙니까?"
주저하는 기색이 전해져 왔다. 그러더니 잠시 후 도어 정면의 거울이 왼쪽으로 열리며 하얀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실례하네."
- "이런 건 어때?"
노인이 말을 끝마치자, 벽면과 천장에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태어날 때부터 줄곧 찬사 속에서 살아온 듯한 자신감과 교만함이 넘치는 표정이 나름대로 매력적이었다.
"지아로 콘티니, 23세. 이탈리아 출신의 슈퍼모델이지. 작년과 재작년에 '세계 잡지 협회'가 주최한 슈퍼모델 월드 콘테스트에서, 프로, 아마추어를 통틀어 No. 1으로 뽑힌 남자야."
"흐흥."
지아로 콘티니인지 뭔지가 들으면 노발대발할 만한 반응을 보이는 세츠라를 보며, 노인은 갈라진 목소리로 웃었다.
"남자는 마음에 안 드나? 그럼 이건 어때?"
순간 이탈리아인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서서히 다른 형태와 색깔로 바뀌어 갔다.
- "3일 후, 이 집에는 어느 방문자가 찾아옵니다. 손녀따님을 데려온 것은 그 녀석을 없애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녀석이 처음으로 하야다 가(家)를 방문한 것이 언제였는지는 모른다. 증조부가 소년 시절에 쓴 일기에도 이미 그 방문자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정체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것은 그 녀석은 하야다 가의 당주가 바뀔 때마다 10년에 한 번씩 나타나며, 그때마다 호화로운 식료품과 술, 그리고 의상을 잔뜩 준비해 두지 않으면 돌아갈 때 집안에서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이 행방불명된다는 것뿐이었다.
보통 집에 달라붙는 귀신은 호화스러운 접대를 받는 대신 행운이나 복을 가져다준다고 하지만, 녀석의 경우에는 그것도 아니었다.
그 오랜 방문자는, 늦여름의 저녁 무렵에 나타나서, 가세가 기울 정도로 호사스런 대접만을 받은 후, 또는 한 사람을 삼킨 후, 아무런 보답도 하지 않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 "그러고 보니, 귀신이 달라붙을 만도 한 집이군요."
메유끼는 천천히 거실을 둘러보며 실례가 될 수도 있는 말을 거리낌 없이 했다.
"신주쿠 전체가 마진 때문에 허허벌판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낡은 집이 용케도 남아 있네요."
-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 집안이 멸망하면 그 끔찍한 녀석은 다른 집안을 찾아갈 거란 얘기죠. 나는 그 악순환을 완전히 막아 내고 싶습니다. 손녀 따님은 제 얘기를 듣고 납득한 끝에 협력해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어쩔 생각이죠?"
"녀석에게는 이상한 습관이 있습니다. 집 앞에서 반드시 이 집이 하야다 씨의 집이냐고 묻는 겁니다. 그것이 관례입니다. 집안사람은 미리 밖으로 나가서 녀석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때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집을 가르쳐 주면, 두 집안 모두 무서운 재난을 당하게 됩니다. 녀석의 질문에 대답을 한 후에는 집안으로 안내해서 대접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손쓸 방도가 없게 되죠."
"그렇다면 그 역할을 미와가..."
메유끼의 질문에, 세이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을 속일 수 있는 인간이 필요했습니다. 선조들도 줄곧 찾아 헤맸지만, 끝내 그 힘의 소유자를 찾아내지 못하고 녀석에게 당하고 말았지요. 우리에게 그런 사람을 찾아낼 능력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포기하고 있었겠지만..."
"동생에게 감별 능력이 있었던 것은, 저주받은 역사에 종지부를 찍으라는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미가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정원에 접해 있는 정자 건너편에서, 대나무 숲이 바람에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하지만 그 애가 그렇게 어마어마한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요. 우리 미와는 아무 아쉬운 것 없이 오냐오냐 자라 온 애랍니다."
"그건 괜찮습니다."
세이지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문자를 봉인하는 방법은, 작년 뒤뜰에 있는 창고를 허물었을 때 발견한 고문서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고문서에 의하면, 최초의 질문에 잘 대답하기만 하면 녀석은 반드시 별채로 따라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녀석을 그 안에 집어넣고 문을 잠그기만 하면, 영원히 나올 수 없게 됩니다."
세이지는 메유끼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깊게 머리를 숙였다.
"위험한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부디 미와 씨를 앞으로 사흘간만 이곳에 있게 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 메유끼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곧 눈을 뜨고 세이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 애가 정말로 그 일을 허락했는지 어떤지, 그것만 확인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세츠라와 노파, 두 사람은 세이지의 안내를 받아 별채로 향했다.
별채라기보다는 대피소나 고분(古墳)이라는 표현이 훨씬 어울릴듯한 석재 건물이었다.
- 메유끼가 벽과 구분이 되지 않는 문 앞에 서서 미와를 부르자, 어떤 장치에 의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와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할머니, 저예요.”
메유끼는 손녀의 목소리를 듣자 손수건으로 눈시울을 훔쳤다. 미와는 할머니 앞에서 모든 것을 알고 납득한 끝에 스스로 일을 맡게 되었다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느닷없이 이곳에 갇혔을 때는 너무 황당했지만, 이제는 진정이 됐어요."
메유끼도 납득한 듯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미와가 스스로 이 일을 받아들인 이상,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단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나도 이 댁에 머물게 해 주세요. 내 손으로 미와를 데리고 돌아가지 않으면, 나중에 저세상에 가서 저 애 부모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건..."
세이지와 하루미는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 그때 세츠라가 손가락으로 메유끼의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아, 그렇군요. 당신의 일은 이제 끝난 거로군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해해서 미안했습니다. 잔금은..."
"아뇨, 그게 아니라 손녀 따님을 데리고 도망치는 편이 좋을 겁니다."
세츠라의 성격을 아는 사람이 들으면 발광할 만한 발언이었다.
이 아름다운 마인이 타인에게 의뢰와는 관계없는 충고를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어째서입니까?"
메유끼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세이지와 하루미는 아직도 곤란한 표정으로 망설이고 있는 중이었다.
"손녀 따님을 별채에서 가둔 채 내보내려고 하지 않으니까요."
"그건 만의 하나라도 도망치면 곤란하니까 그런 거겠죠. 요즘 젊은 애들은 변덕스러우니까요."
"할머니가 손녀딸을 찾아 구외에서 신주쿠까지 왔습니다. 본래는 유괴였지만, 미와 양은 기꺼이 협조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렇다면 손녀딸과 할머니를 한 번이라도 만나게 해 주는 것이 인간의 도리 아닐까요? 최소한, 할머니에게 연락이라도 할 수 있게 해 줬어야죠."
지금 하늘이 꺼지고 땅이 솟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답지 않은 말을 한 세츠라를 향해, 메유끼는 잠깐 놀란 듯한 눈길을 던졌다. 그리고는 이내 손을 휘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분들에게도 사정이 있겠죠, 아키 씨. 상대방의 사정을 헤아려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구외에서든 신주쿠에서든 변하지 않는 인간의 도리죠."
"구외에서든 신주쿠에서든 이상한 짓을 꾸미는 녀석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변하지 않는 법칙입니다."
"그건..."
노파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할 수 없는 일이죠. 어쨌든 나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앞으로 3일간 참아 보겠습니다."
- 세츠라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아, 그건 곤란합니다. 당신도 함께 있어 주세요. 나 혼자서는 불안하거든요. 물론 의뢰비는 지불하겠습니다."
"유감이지만 제 일은 이미 끝났습니다."
세츠라의 냉정한 대답에, 메유끼는 아름다운 청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주름투성이의 얼굴은 불가사의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메유끼는 이윽고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그럼 가 보세요. 그러고 보니 당신은 지금까지 별다른 도움이 되지도 못했으니까요."
세츠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 "역시 우리가 잘못 생각한 거야. 몇백 년, 몇천 년이나 계속되어 온 관례를 깨려 하다니... 우린 신의 벌을 받은 거야."
음침한 분위기가 주위를 사로잡았다. 그때였다.
"그만둬요."
느닷없이 들려온 씩씩한 목소리에, 누나와 동생은 얼굴을 들고단정하게 앉아 있는 노파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거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음울한 공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 "당신들이 하려고 하는 일은 천지신명께 맹세코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기특한 일이라고 칭찬을 하면 했지, 벌을 내릴 신은 없습니다. 그런 약한 생각을 하는 것은 녀석이 내뿜는 기(氣)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나쁜 쪽, 어두운 쪽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녀석은 기뻐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루미 씨, 당신이라면 알고 있겠죠. 현관과 맞은편 창을 통해 검은 기운이 흘러 들어오고 있군요."
"어떻게 그것을..."
하루미는 깜짝 놀란 얼굴로 동생과 메유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역시..."
세이지는 감동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 "나는 이 할머님께 미와 씨와 같은 힘을 느꼈어. 연로하신 데다 더 이상 폐를 끼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잠자코 있었지만, 이분에게도 그 일이 가능해."
"그렇습니다."
메유끼는 단호하게 말했다.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남매에 비해, 정좌를 하고 있는 노파의 모습은 매우 엄숙해 보였다.
- "길이 연결되어 있는 것은 오늘 밤 오후 6시까지야. 그때까지 그 아가씨를 구해 내지 못하면 출입구가 닫혀 버리게 돼. 그렇게 되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가 없어. 조심해."
톰브는 약간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충고한 후, 뒤뚱거리며 복도 안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곧 세츠라의 귀에 하마를 연상시키는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작게 중얼거린 후 복도 안쪽으로 향하는 세츠라의 얼굴은, 어둠 저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운명 따윈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술 한 잔만 주십시오."
"네?"
메유끼의 말에 하루미는 자기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용기를 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몸을 정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전국시대의 군인들은 출전하기 전에 술잔을 교환하여 체내의 더러움을 씻어 냈다고 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무엇보다도 머리띠를 졸라매고 근처 고물상에서 급하게 빌려 온 듯한 언월도를 손에 든 메유끼의 모습이 70세 노파라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기백에 넘쳐 있었기 때문에, 하루미는 곧 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메유끼의 주량은 의외로 굉장했다. 하루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제법 좋은 술이군요."
"정말 잘 드시네요."
- "야쿠자 주제에 무례하군. 빨리 돌아가게. 이곳에 있다가는 자네까지 말려들게 될 거야."
메유끼는 고개를 돌려 등 뒤에 서 있는 토도누마를 노려보았다.
어차피 그가 나설 자리도 없을 테고 이곳에 있어 봤자 위험하기만 할 텐데 어째서 돌아가지 않는 것일까.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야쿠자였다.
현관 입구에 서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하루미는, 문득 이 야쿠자가 메유끼를 걱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 "곧 4시군요. 방문자가 올 시간입니다."
토도누마가 조용하게 말했다.
"그런데 대체 이 기분은 뭘까요. 나는 신주쿠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괴이한 사건들을 여러 번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조용하고 그리운 기분은 오랜만입니다. 옛날에는 다들 이랬었죠. 공터에는 여기저기 본오도리(음력 7월 15일 밤에 남녀가 모여서 추는 윤무)의 행렬이 생기고, 차가운 두부 요리와 완두콩을 안주 삼아 한잔하곤 했죠. 저 골목 안쪽에서 불꽃놀이를 한 적도 있어요. 그중에는 불꽃놀이를 하다가 집을 태워먹은 아이도 있었죠."
- 그러나 이어서 그녀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더욱 황당한 것이었다.
"내 심장이에요."
"하아."
- "이 도시에서는 흔히 있는 얘기죠?"
"하아."
세츠라는 애매하게 대답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트랜실베니아의 전설에 나오는 요괴 스트리고이나 중에, 심장을 다른 장소에 보관한 채 몇백 년이나 살아가는 녀석이 있는 것 같더군요."
리지아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런 얘긴 처음 들어요. 게다가 지금 한 얘기는 전부 농담이에요."
"하아. 하지만 이건..."
세츠라는 상자를 어루만져 보았다.
- "당신 손이 미라처럼 변하는 것은 틀림없이 숲 저편의 나라의 병일 거예요."
"전부 농담은 아니었다는 겁니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요."
세츠라의 눈동자에 궁금해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아기가 고개를 들고 메피스토를 노려보았다. 제법 박력 있는 눈빛이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은 그 눈빛 때문일지도 모른다. 닥터 메피스토가 환자 이외의 사람에게 미소를 지을 줄이야. 메피스토가 아기를 안아 들며 물었다.
"아빠가 좋니?"
아기는 뾰로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의사는 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하지만 너희 아빠는 남자의 마음을 몰라주는 사람이란다."
이것은 어린아이의 이해력을 초월하는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아기는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며 메피스토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이봐. 애한테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마."
세츠라가 참견을 하고 나섰다.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잖아."
"그런 걸 아는 사람은 너희 일족만으로 충분해."
세츠라는 아기를 뺏어 들었다.
"차가운 남자로군. 하긴 또 하나의 자네도 그런 짓은 죽어도 용서하지 않겠지."
"교육상 좋지 않아. 돌아가겠어."
세츠라는 아기를 안고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애 엄마는 왜 도망간 거지?"
"도망간 게 아니야."
"그럼 자네한테 정이 떨어졌다던가?"
"..."
- "남자와 여자는 영원히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야. 그래서 이 세상도 미쳐 있는 것이 틀림없어."
"논문으로 정리해 봐."
세츠라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문을 열었다. 아이가 세츠라의 어깨너머 메피스토를 향해 혀를 날름 내밀었다.
세츠라도 뒤를 돌아보며 메피스토를 향해 말했다.
"지금 처음으로 깨달았는데... 너 남자였냐?"
- "... 그렇게 된 겁니다."
다음 날 세츠라는 신주쿠 경찰서를 찾아가서 사정을 설명했다. 아마도 관광객이 잃어버리거나 버리고 간 아이인 것 같다는 설명까지 덧붙였지만 아무래도 경찰들은 쉽게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담당경찰은 컴퓨터의 키위드를 두드리며 말했다.
"미아 보호실 또는 분실물 센터에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신고는 없군요. 게다가 아까부터 듣고 있자니 당신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 같던데요."
"아니, 저 그건..."
"요즘 자신의 아이를 미아라고 속이고 경찰에 맡기고 가는 사례가 상당히 많아졌죠. 분명히 아이를 맡기는 데 이만큼 안전한 장소는 없으니까요."
"오해입니다."
세츠라는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세츠라의 꿈처럼 ...
- 어떻게든 이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네에서 내려와 세츠라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발자국 앞으로 나온 후 곧 발걸음을 멈췄다. 세츠라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동작이었다.
"깜빡 잊은 물건이 있어. 잠깐 가지러 갔으면 좋겠는데..."
"나중에 하시죠."
"안 돼, 없으면 곤란한 물건이야."
"뭡니까?"
- "내 심장은 인공 심장이야. 어제 오후 네 시가 교환 기한이었거든. 신품으로 바꾸지 않으면 3분도 버티지 못할 거야. 곧 가지고 오겠네."
"안 됩니다."
"그러지 말고 보내 주게."
"곤란합니다."
"무거워서 말인가?"
"네?"
다음 순간, 세츠라는 풀밭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 "이것은... 토야의 포옹."
세츠라는 왠지 내키지 않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토야의 포옹'. 살아 있는 자를 덮치는 군령(群靈)에는 무수한 종류가 있지만, 이 영은 신주쿠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 영에게 기습당한 인간은 아무 기척이나 질량도 느끼지 못하다가 돌연 수 킬로에서 수십 톤의 무게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신주쿠에서 가장 유명한 뚱보의 이름이 붙은 것도 당연했다. '신주쿠 어원'에서 200kg 가까이 되는 낚시꾼이 눈 깜짝할 사이에 납작하게 짜부라지는 것을, 세츠라도 목격한 적이 있었다. 수가 얼마 되지 않기도 하고 소음과 빛을 싫어하기 때문에 거리에 출현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지만, 최고위험지대라면 얘기가 다르다. 단 이 영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령(死靈)·생령(生靈)에 유효한 부적을 몸에 지니고 있는 세츠라에게는 일어날 리 만무한 현상이었다.
- "맨 서처 정도라면 악령을 쫓는 부적 타리스만 정도는 지니고 있겠지. 그런데도 소용이 없는 것은, 이 영이 신형이기 때문이지. 보통이 녀석들은 하나나 둘 정도가 달라붙지만, 자네 위에 올라타고 있는 것은 어림잡아 50개. 즉, 50인분이야. 알겠나?"
"모르겠는데요."
세츠라가 대답했다. 배짱이 있는 건지 딴청을 피우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말투였지만, 호흡은 거칠어져 있었다. 200kg 가까운 무게를 필사적으로 견디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형태도 촉감도 없이 무게만이 존재하는 영(靈)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 아름다운 청년은 예외였다. 떠는 것은 고사하고 사이고와 부하들이 대체 어떤 자들인지조차 모르는 것처럼 태평해 보이는 것이다.
지나치게 아름다우면 이렇게 되는 것일까. 사이고는 내심 세츠라의 아름다움에 황홀하게 취했다.
"알겠네."
사이고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해 버렸다. 그것은 어쩌면 대낮에도 저녁놀을 받아 매혹적으로 빛나는 듯한 세츠라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 방으로 들어가자, 세츠라는 센베 과자와 차를 준비했다. 부하들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드십시오."
"고맙군."
사이고는 멍청한 표정으로 과자를 한 입 베어 먹었다.
"음, 맛있군. 직접 구운 건가?"
"네, 그렇습니다."
"굉장하군. 이 차도 최고급품인 것 같고... 자네와 어울려."
세츠라는 작게 웃었다. 억양이 거의 없기 때문에 대부분 예의상 웃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래 봬도 본인은 상당히 기뻐하고 있는 중이다.
- "그건 그렇고, 오늘 만났던 그네 타던 남자 기억하나? 그 남자를 잊어 줬으면 하네."
"아... 안 됩니다."
봄바람이 부는 듯한 말투에, 사이고의 눈 속에 감돌던 살기가 문득 수그러들었다.
- "맨서처?"
스미디는 능청을 떨며 새끼손가락을 세웠다.
"아아, 그 검은 옷을 입은 미남 청년 말인가 뭐야, 자네 이거였나? 하긴 그렇게 아름다운 청년이니 자네가 홀딱 넘어간 것도 무리는 아니지. 하지만 일에는 지장을 초래하지 않도록 하게."
"그가 그저 평범한 미남이라면 이런 말은 하지 않을 겁니다, 사장님."
사이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느닷없이 공기가 싸늘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스미다는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 "그는 우리들과는 다른 세계의 인간입니다. 그 얼굴을 보십시오. 아름답다는 둥 잘생겼다는 둥, 그렇게 말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그런 단어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아름다움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녀석은 우연히 이 세상에 내려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손을 대서는 안 됩니다. 여차할 때까지 내버려 두십시오. 그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운명뿐일 겁니다."
"운명이라..."
스미다는 눈을 크게 떴다.
"자네, 자신의 직업이 뭔지 자각하고 있나? 운명 따위를 신경 쓰다가는 끝장이야. 이 세계에서 발을 뺄 수밖에 없어. 뭘 두려워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것은 이미 시작되고 말았다."
- 다음 날 오후, 세츠라는 가게 안쪽의 세 평짜리 방에서 후쿠히코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후쿠히코는 마치 지금이 세츠라와 함께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유달리 세츠라를 귀찮게 굴었다. 뒤뚱뒤뚱 걸어와서 서류 작성 중인 키보드를 잡아당겨 일을 엉망으로 만들고, 화를 내면 깨물고, 그러다가도 상대를 해 주면 천사처럼 웃는 얼굴로 세츠라를 바라보았다. 기가 막혀하면서도, 세츠라도 아주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 센베 과자점의 벨이 울렸다. 세츠라는 후쿠히코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상하게도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어라."
세츠라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후쿠히코가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후쿠히코는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신이 아직 인간에게 절망하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담고 태어난다.
"곧 돌아올게."
세츠라는 잠시 후쿠히코를 바라본 후 가게로 나갔다.
- 가게 앞에는 품위 있는 슈트를 입은 부인이 서 있었다. 이틀 전 신주쿠 관광을 위해 이곳을 방문했을 때, 가게 앞에서 아이를 잃어버렸다고 말했던 부인이었다.
"아이?"
"남자아이입니다. 이름은 후쿠히코라고 합니다."
세츠라의 얼굴에 옅은 그림자가 흔들렸다. 그것은 슬픔이었을까.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 세츠라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후쿠히코가 웃는 얼굴로 세츠라를 맞이했다.
"널 데리러 왔다는구나."
세츠라는 후쿠히코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 가게로 돌아오자 여전히 부인이 서 있었다. 이틀 전에 찾아왔던 여자와 많이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 같기도 했다. 문득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역시 이 부인은 이틀 전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해 찾아왔던 바로 그 여자였다.
- "아, 네."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만 것은,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질문을 하는 사장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기 때문이었다.
- 아내 에미는 비가 오면 언제나 이상해지곤 했다. 창가에 걸터앉아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는 그 모습이 손에 잡힐 듯이 눈앞에 어른거려, 스즈끼는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
"결혼한 지 얼마나 되셨나요?"
사장이 또다시 물었다.
"한 달도 채 안 됩니다. 게다가 호적에 올리지도 않았답니다."
"어라."
사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나 봄바람 같은 분위기에 자고 있는 건지 깨어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구석이 있었지만, 때때로 보여주는 이런 어린아이 같은 반응에 스즈끼는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 사장은 가게에 걸려 있는 낡은 벽시계와 바깥에 쏟아지는 비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손님도 없을 것 같은데, 오늘은 빨리 돌아가시는 게 어떨까요?"
말은 고마웠지만 그렇다고 얼씨구나 하고 돌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스즈끼는 정해진 퇴근 시간까지 일을 마친 후 가게를 나왔다. 셔터를 내리고 있을 때, 사장이 나와서 그를 불렀다.
"이거 부인께 가져다 드리세요."
뒤를 돌아보니 사장이 커다란 센베 과자 봉지를 내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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