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김경진 / 진병관 / 윤민혁 / 신재호 / 손중극
출판 : 씨앗을뿌리는사람들
출간 : 2009.06.25
완연한 봄이라 생각했는데, 아직도 바람결엔 찬 기운이 감돈다.
올해 가을까지는 그대로 유지하려 했던 일상에 변화가 생길 것 같다. 새로운 운동을 하나 시작하고, 근무 환경을 좀 바꿀 예정이다. 불안함보다는 기쁨이 더 큰걸 보니 잘한 결정인 모양이다.
<데프콘> 2부 한일전쟁은 아무래도 다소 국수주의적인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또 전편과는 다르게 한국은 먼저 전쟁을 시작하는 침략국의 입장이기도 하다. 어떤 입장에 이입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읽는 동안 내심 개운하기도 해서, 꽤나 복잡한 마음이었다.
아마 저자가 서술하고 싶었던 건 '전쟁에 과연 승자란 존재하는가?'였던 것 같다. 전술과 전략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승전국'에도 사망자와 다양한 손실-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즉, 단기적으로 봤을 때는 양측 모두에게 엄청난 손해인 상황이 전쟁이다. 그런 피해를 감수하면서도 얻기 위한 것이란 과연 무엇일까? 나를 공격하는 적은 몇 분 전 내가 공격한 이의 동료다.
하지만 아무래도 한일전쟁이라는 설정과, 재미를 추구하는 장르 소설이라는 입장 상 그런 메시지가 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이런 딜레마는 일선의 병사들보다는 주로 전체적 상황을 지휘하는 장성급의 짧은 소회를 통해 언급되는 정도. 전쟁을 중재하려는 미국의 입장조차 세계평화라는 기치 아래 자국의 최대 이익을 감추고 있다.
예전에 읽었을 때 무척 인상적이었던 잠수함 전투는 3부 한미전쟁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2부 한일전쟁을 기반으로 약간의 자체 보정을 섞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당시의 감동과 충격이 조금 빛을 바랜 것 같아 아쉽. 하지만 다시 읽으며 얻은 즐거움도 있었으니까.
여러 차례 수정을 한 듯, 앞뒤 문장이 다른 의미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예를 들면 전체 내용은 '지금은 공격을 하지 말자'는 의미인데 시작 문장은 '하라'라던지. 맥락을 놓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잠깐잠깐 당황스럽기는 했다.
발췌를 정리하면서 나는 왜 리뷰를 남기는 걸까에 대해 생각했다. 방문해주시는 분들께는 정말 감사하지만, 아무래도 내 리뷰들은 읽히기 위한 리뷰보다는 나 자신을 위한 독서 기록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다시 찾아보고 싶어 졌을 때, 당시의 내가 생각하고 느꼈던 것들과 인상 깊었던 문장들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때때로 기억 속의 책과 실제로 읽는 도중의 책, 그리고 나중에 다시 읽어보는 발췌문은 모두 다른 것들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 관한 기록이 다른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즐거움이나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무척 기쁠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냥, 그런 생각들을 하며 지내고 있다.
끝.
- 12월 7일 03 : 10 북위 37도 14분, 동경 131 52분
[상륙 준비! 침묵 상태 유지]
스피커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상어급 소형 잠수함 내부는 너무 비좁았다. 지난 1996년, 강릉에 침투했던 바로 그 잠수함과 같은 급이다.
지금 독도 주변에는 이것 말고도 같은 상어급 잠수함 3척이 접근하고 있었다. 이들은 잠수함 모함인 충성 2호와 송림호, 해당화호 등에서 출발하여 포항급 코르벳 경주함 밑에 숨어서 잠항한 지 5시간 만에 드디어 목표해역에 도착한 것이다.
- 서울경찰청 소속 김상철 경사는 인민무력성 정찰국 요원들이 잠수복으로 갈아입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정신을 차렸다. 이번 작전의 주체는 인민군 특수부대가 아니라 그를 포함한 경찰, 전쟁 시에 민간인으로 분류되는 경찰이었다. 어쩌다 보니 황당하게 그가 이런 일에 나서게 되었다.
김 경사도 잠수복을 입고 방수가방을 어깨에 둘러멨다. 시위 진압할 때 입는 청점퍼 등 두툼한 기동대 복장을 하고 그 위에 잠수복을 입었기 때문에 동료들이 모두 펭귄 같아 보였다. 소형 잠수정에 서너 명씩 매달려 갈 계획이라 애써 헤엄칠 필요는 없었다.
- 희미한 전등 아래에서 잠수함 승조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함장은 따로 있었지만 인민무력성 정찰국 해상처 소속 지도원이라는 군관이 사실상 함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잠수함 승무원들도 해상처 소속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지도원이 김 경사를 포함한 경찰들을 보더니 마지막으로 작전지역 상황을 브리핑했다.
- 12월 7일 03:20 경북 울릉군 울릉도 나리분지
"도대체 무슨 비상이 이리 밤새도록 계속될까요? 전군 비상령도 아니고 해군과 공군만 비상이라니. 중국이 재침공하는 것도 아닌 모양인데 도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통일한국 해군 제1전투비행단의 조종사 대기실에서 TV를 보던 김종구 대위가 투덜댔다. 간이침대에 앉아 책을 읽던 황인호 중령이 잠시 책을 내리고 벽에 붙은 스피커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다른 조종사들은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지금 독도를 수복하고 있나 보지."
- "예? 독도를요? 일본 놈들이 곧 물러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김종구가 챙이 달린 파란색 모자를 돌리며 물었다. 해군항공대장교용 주황색 유니폼과 잘 어울리는 모자다. 해군은 병과마다 가지각색의 복식이 있고 계절별로,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다른 옷을 입는다. 기본적인 옷만 동정복, 하정복, 근무복 세 가지가 있는데, 이것들은 각각 청색, 백색, 흑색이다.
김종구는 해군에 전속된 다음 진해에 가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곳 카페에 앉은 20여 명의 해군 중 같은 복장인 사람은 빵떡모자를 쓴 오리지널 수병 딱 두 명뿐인 것을 보고 질리고 말았다.
"곧, 곧이 벌써 두 달째 아냐. 이젠 자존심 문제도 있고 말야. 글쎄? 정부가 자신감이 붙었을 수도 있겠군."
- 한국의 분위기는 정부보다 여론이 더 강경했다. 수십 년 간 쌓인 감정도 있고 해서 이번 기회에 일본과 일전불사를 하겠다는 것이다. 통일한국군이 독도를 수복하는 과정에서 대량학살극이 발생한다면, 또는 독도 주위에 대치하고 있는 한일 함대끼리 우발적인 전투를 벌인다면, 그 즉시 한일 간의 전면전으로 비화할 우려가 있었다. 이것은 일본보다는 어쩌면 한국이 바라는 바일지도 모른다고 황인호는 생각한 것이다.
- "그럴지도 몰라. 일본하고 전쟁이 붙으면 김 대위는 누가 이길 것 같아?"
"당연히 정의가 승리합니다."
김종구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렇겠지. ... 나도 그게 걱정이야."
"예?"
김종구가 황인호의 농담을 이해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었다.
- "다행이군. 계속 감시하게!"
독도 주변 해상을 살피던 포항급 코르벳 경주함의 부함장이 보고하자 함장 최우형 중령이 야시경에서 눈을 떼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아마도 마이즈루 지방대일 듯한 일본 함대와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들로 이뤄진 연합함대는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한중전쟁이 끝나고서부터 한 달 넘게 이렇게 대치하고 있으니 일본 측도 꽤나 무뎌졌을 것이다.
- 함장은 일본 자위함대의 위협보다는 함교를 가득 메운 기자들이 혹시라도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추워서 모두들 함교에 모여 있기는 했지만, 독도수복이라는 엄청난 기삿거리 앞에서 기자들이 섣부른 행동을 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최 중령은 작전진행보다는 기자들을 감시하는 것이 더 신경 쓰였다. 물론 유리 반사광 때문에 플래시를 터뜨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소한 실수 하나가 대국을 그르치는 법이다.
- 잠시 후, 물속에서 솟아오른 그림자들이 서서히 선착장 위로 올라와서 구석으로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일 단계 작전은 성공이었다.
- 정식 명칭은 군대가 아니지만 그래도 정규군인 일본 자위대에 맞서 경찰이 투입된다는 것이 김 경사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난 한중전쟁 때 자위대가 독도를 침탈한 것을 통일한국 정부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정부는 일본 군인들의 독도 진주를 불법점거로 억지 해석해서 이른바 '불법밀입국자'들을 체포하여 국외로 추방하기 위해 경찰력을 투입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일본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한 계책이었다. 이들은 위험시에 대비한 살상용 무기는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 만약 작전이 실패하는 날에는 소대원 모두 자위대의 총탄에 전멸하거나 바다에 뛰어들어 물고기밥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경찰 중에서는 특수부대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지난 시절 데모진압이나 하던 기동대 병력으로는 사실 거의 불가능한 작전이었다. 김경사는 작전이 실패하면 이를 국민적 분노를 일으킬 기폭제로 삼아 일본과 일전을 벌이려는 한국 정부의 고육지책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 그러나 한국 입장에서 자위대의 한국상륙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국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이 과정에서 핵미사일 수십 기를 보유하자 일본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그러나 핵미사일은 쓰지 못할 무기, 적국의 핵공격을 막을 방어무기일 뿐이다. 적이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해 보유하는 모순적인 병기가 핵무기인 것이다.
그러나 일본을 상대로 핵을 쓸 수는 없었다. 일본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 보호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재래전인데, 해·공군에서 우세한 일본이 한국을 해상봉쇄하고 말려 죽일 거라는 건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 잠시 긴장이 흐르자, 홍지영이 오석천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본한테는 우리가 이길 방법이 없어요. 나도 일본 놈들을 때려죽이고 싶소. 하지만 어떻게 현해탄을 건넌단 말이오?"
"해군이 부산 앞바다에 집결하고 공군이 엄호하면 한 번에 2개 사단씩 일본땅에 올려 보낼 수 있습니다. 다른 민간 선박도 동원한다면 일주일 내에 20개 사단도 충분합니다."
홍지영이 오석천을 노려보았다. 처장은 스크린에서 눈도 떼지 않고 있었다. 독도에 잠입한 경찰들이 바야흐로 준비를 마치고 목표를 향해 도약하는 사자처럼 자세를 갖췄다.
- 홍지영은 정치에 입문할 때부터 정치적으로 당당했다. 선거에서 다물선양회에 빚을 지긴 했지만 전임자들과 달리 지역이나 사상, 능력 면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리고 그는 비록 보충역 출신이지만, 병역 문제에 있어서도 떳떳할 수 있었다.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군사정권에 빌붙어 정치에 발을 담그지도 않았고, 빽이나 돈을 써서 병역을 기피하지도 않았다.
- 아마도 육군 병장 출신일 그 젊은 기자를 힐끗 본 최우형 중령은 함대무전교신을 통해 전투준비가 아닌 대기명령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음탐반에서는 주변 바다 밑에 일본 잠수함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알려 왔다. 함장은 일본 잠수함들이 틀림없이 이 해역에 있을 텐데도 탐지하지 못한 거라고 생각했다. 일본 초계기 두 대가 주변 해역 상공을 선회하고 있지만 하늘로부터의 위험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 "현대 해전에서는 멀어질수록 위험합니다. 물론 적의 5인치 포도 무시하진 못합니다만, 미사일이 더 무섭죠."
'젠장!'
최우형 중령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발언 중에 일본을 적으로 지칭한 것이다. 그도 이번 일이 순탄히 끝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아마도 저 기자들은 미사일이 만능인 줄 알 것이다. 미사일을 발사해 바로 눈앞에 있는 적함을 격파할 수 있다고 거짓말해도 이들은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 최 중령은 화상전화에 다시 나온 해군 작전사령관의 얼굴을 보았다. 박준우 제독은 입술이 바짝 탄 모습이었다. 이 상황에서 만약 최 중령 자신이 작전사령관이나 동해함대 사령관이라 하더라도, 이런 작은 포항급 코르벳 하나쯤 희생시켜서라도 어떻게든 일본과의 전쟁을 막으려 할 것이다. 최 중령은 씁쓸한 듯 박준우 제독이 보는 앞에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하지만 여기는 민간인, 해군분야에는 무식하지만 그래도 밤을 새우며 열심히 취재 중인 기자들이 잔뜩 타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기사를 전송하고 있지만, 몇몇은 방송국이나 신문사로 직접 필름을 가져가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함장은, 아니, 군인은 당연히 이 민간인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 "예! 그렇습니다. 일본은 우리 측의 선제공격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계속 도발해 올 경우 어떤 상황이 될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어떻게든 싸우면 안 돼! 지금 전쟁이 나면 안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일본하고 전쟁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함장은 지금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잔뜩 호기심 어린 기자들의 눈길을 받으며 함장은 화상전화와 피아(彼我) 위치를 확인키 위한 표정판으로 연신 시선을 돌려댔다. 일본 자위함대는 계속 통일한국함대에 접근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불안해진 최 중령은 서둘러 갑판 아래의 전투정보실로 발길을 돌렸다.
- "아닙네다. 해군작전사령부래 통참 예하부대니끼니 해작사령관을 불러야 합네다. 동무! 해작사령부 연결하라야."
통신 오퍼레이터인 여군 장교가 해군작전사령부를 호출했다. 홍지영은 그제서야 해군 참모총장에게 원래 통일 전부터 군령권이 없음을 깨달았다. 명령은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서 국방장관, 통일참모본부, 다시 예하 직할부대로 전달된다. 해참총장은 지휘 라인에서 배제되고 군정권만 남은 것이다.
[박준우 중장입니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해군 작전사령관이 통신화상에 나타났다. 육군 방위 출신인 홍지영이 보기에 해군식 거수경례는 멋있는 듯하면서도 약간은 촌스러워 보였다. 저 사람이 사실상 통일한국 해군 전체를 지휘하고 있는 것이다.
- "독도는 문제없겠죠?"
홍지영이 듣기에도 애매모호한 질문이었다. 여러 가지 뜻을 담고 있는 동시에 매우 무책임한 언사이기도 했다.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했으니 함대는 귀환하게 해 주십시오.]
해작사령관은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그런 상황을 촉발시킨 정치권에 대한 무언의 항의이기도 했다. 그러나 영해를 지키는 것이 또한 해군의 임무인지라 직설적으로 불만을 표출할 수는 없었다. 당연히 함대가 독도 작전에서 경찰특공대들을 엄호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일본 측의 도발에 맞대응할 수도 없었다. 잘못하면 전쟁으로 이어질 판이었다.
- "박 수병! 저건 신호탄이야. 나도 무지 놀랬어."
"으휴휴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경주함의 전투정보실에서 전방 2연장 30밀리 포탑을 원격조종하고 있는 박 상병은 놀라서 아직도 손을 덜덜 떨었다. 그는 자위대 호위함 다카스키가 공중으로 발사한 신호탄을 하픈으로 잘못 알고 하마터면 30밀리 포를 발사할 뻔했던 것이다. 76밀리 주포를 담당한 오 중사도 쏠 뻔했는지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 뒤에 서 있던 포술장은 거의 얼어붙어 양손을 올리고 꼼짝하지도 못했다.
지금도 일촉즉발의 순간이 계속되었다. 구축함 다카스키를 따라온 동급 기쿠즈키와 소해정 두 척, 그리고 해상보안청 순시정들이 끊임없이 독도 근해로 도발해 왔다.
- 남북한이 통일되면서 200만에 달하는 육군을 보유하고, 중국과의 전쟁 중에 예비역을 동원해 병력을 약 500만으로 늘렸지만 어디까지나 지상군 이야기였다. 그러나 바다에서는 달랐다. 일본은 정식 군대는 없지만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해군왕국이다. 만약 일본과 한국 사이에 재래식 전쟁이 터진다면, 한국은 일본에 손도 못 대고 굶어 죽을 것이다. 그리고, 도시오는 한국해상을 충분히 봉쇄할 만한 전력을 가진 막강한 해상자위대 고급간부인 것이다.
- "가쓰오 이좌는 대잠폭뢰를 쓰겠다는 건가? 적의 영해에 대해 무기를 쓰면 영토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될 텐데?"
도시오 해장이 웃으며 반문하자 가쓰오 이좌가 쑥스러운 듯 웃었다. 역시 통하는 데가 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방법도 알 것이다. 도시오가 확인하듯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지금 잠수함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일단 초계기를 부르고 한국 해군에게 통보해야겠군."
- 12월 7일 04 : 00 독도 인근 해상
"일본 대잠초계기가 다수 접근하고 있습니다!"
"대기! 진정해!"
함장 최우형 중령은 동요하는 경주함의 승무원들을 다잡느라 바빴다. 한국에도 있는 P-3C 대잠초계기는 기본적으로 잠수함을 사냥하는 비행기이지만 하픈이나 일본제 대함미사일인 ASM-1을 최대 10발이나 탑재할 수 있다. 현대 해상전에서 만약 함대가 제공권을 잃거나 항공호위를 받지 못한다면 단 한 대의 적 항공기에게 전멸당할 수 있다. 함대공미사일의 사정거리는 비행기에서 발사하는 공대함미사일의 사정거리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항공기는 대공미사일 사정거리 밖에서 대함미사일을 발사하고 수평선 아래로 숨어버리면 함대로서는 대책이 서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 독도해상에 있는 한국 해군함대에는 대공미사일을 갖춘 함정이 단 한 척도 없었다.
"자위대에서 무선통신 요청입니다!"
"뭐야? 줘!"
통신장교가 보고하자 함장이 통신기를 낚아챘다. 최우형 중령은 일본 함대에서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더듬거리는 영어로 자위대에게 경고했다.
"여기는 한국 해군 경주함. 귀 함대는 도발행위를 즉각 중단하고 영해에서 물러나라!"
- "뭐야? 잠수함은 이 해역에 없는데 무슨 소리야?”
"다카스키 함수에서 뭔가 발사됐습니다!"
쿠쿵!
갑작스런 충격이 경주함을 뒤흔들자 함장 최 중령이 바닥에 쓰러졌다가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 외쳤다.
"이런! 대기!"
"적의 공격입니다! 발사준비!"
누군가의 비명이 들리고, 그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모든 무기체계가 발사 대기상태에 들어갔다. 상황은 급박하고 목표는 분명했다. 다른 자위함대와는 달리 한국 함대에 접근한 다카스키의 커다란 함교가 조준기에 잡혔다.
"안 돼! 쏘지 마!"
"으악! 발포해 버렸습니다!"
30밀리 기관포 포수 박 상병의 외침에 함장이 사색이 되었다.
- 12월 7일 04 : 03 독도 인근 해상
"저 멍청이. 포술이 엉망입니다."
해상자위대 호위함 다카스키의 함장 가쓰오 이등해좌가 아깝다는 듯이 투덜댔다. 경주함에서 발사된 30밀리 기관포탄 몇 발이 빛줄기가 되어 다카스키를 향했지만 형편없이 빗나가 다카스키 앞에 하얀 물보라 몇 개를 일으켰을 뿐이다. 도시오 해장이 초조해졌다. 이 정도 해도 안 되면 할 수 없었다.
"오마쓰 군. 절대 발포하면 안 되네."
"예!"
마이즈루 지방대 총감 도시오 해장이 방금 대답한 오마쓰 이등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침묵이 흐르자 포술장 오마쓰 이등위가 잠시 당황하더니 결단을 내렸다. 오마쓰가 마이크를 잡고 함수의 5인치 포탑을 담당한 자위대원에게 명령을 내렸다.
"5인치 포, 목표 경주함. 발사!"
- 충격이 일고, 잠시 후 중앙 스크린에 잡힌 경주함 함교에 섬광이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오마쓰 군. 자넨 명령불복종 죄를 범했네."
"예! 죄송합니다, 해장! 실수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오마쓰는 잔뜩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자칫하면 이 젊은 해상자위대 간부는 덤터기를 쓸 수가 있었다. 반대로 해장의 눈에 띄어 승진가도를 달릴 수도 있었다. 모든 건 해장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셈이다.
"나도 자네의 명백한 실수라고 인정하네. 지금까지 상황은 모니터 됐으니까 문제는 없을 거야. 한국 해군이 먼저 쐈으니까 말야."
"감사합니다, 해장!"
"경주함에 무선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야마모토 삼등위가 보고하자 지방대 총감 도시오 해장이 이미 예상했다는 듯 차분하게 말했다.
"상부에 보고하도록. 상륙 병력이 없는 게 안타깝군."
-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홍지영은 이제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숨소리가 가빠졌다.
"한중일 삼국은 당분간 인구증가율이 억제되겠습니다."
- 대통령의 말은 왠지 어폐가 있는 것 같았다. 어느 전쟁에서든 사망자는 전체 인구 중에서 극히 일부분이다. 전사로 인한 인구억제효과는 거의 없다는 뜻이다. 물론 기아와 혼란으로 인해 전쟁기간 동안 인구증가가 억제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쟁이 끝나면 금방 원래의 인구증가율로 회복되기 마련이다. 양석민 국방장관이 물었다.
"전사자들이 많이 나와서 말씀입니까?"
"그것보다는... 앞으로도 남아선호사상이 기승을 부릴 테니까요. 군사 문화가 우세한 사회에서는 사내아이가 양육과정에서 우대받고, 게다가 산모들 영양상태가 나빠지면 남자아이를 많이 낳게 됩니다. 인구증가율은 남자 숫자와는 별로 관계없고 오히려 가임여성 숫자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아니겠소?"
- "그럼 대통령께서는 일본과 일전을 불사하시겠다는 뜻입니까?"
최창식 국무총리가 뚱뚱한 몸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물었다. 매사에 무딘 총리는 대통령의 결단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싸우고 싶지 않아도 여론이 가만히 있지 않겠죠. 일본도 기세등등할 테고, 난 걱정이오.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우리나라가 또 전쟁에 말려든다면..."
"대통령님! 그럼 미국은 어떡하시겠습니까? 미국의 국익이 걸린 만큼 당연히 개입할 겁니다."
- 대통령은 요즘도 국정원 사람들에게는 전폭적인 신뢰를 보낼 수 없었다. 수십 년 간의 공작정치 때문이기도 했지만, 권력에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국정원 요원들은 권력자가 원하는 것이라면 정치사찰이든 정치공작이든 가리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즉, 홍지영이 보기에 국정원은 이스라엘 국민의 사랑을 받으며 민족과 운명을 같이 하는 모사드이기보다는 팔레비 왕정을 수호하기 위해 국민을 체포·고문하고 감시했던 이란 정보기관 사바크인 것이다. 이런 막강한 조직이 그의 손아귀에 있다는 자체가 약간은 야릇한 느낌이었다.
- 홍지영은 전임자인 지효섭 국정원장이 작년 여름 그를 차장으로 천거했기 때문에, 그리고 20년 간 해외정보 수집에 몸 바쳐 해외정보에 정통하기 때문에 그를 신임 국정원장에 임명한 것뿐이지, 결코 그를 믿어서는 아니었다. 대통령은 신임 국정원장도 권력에 무조건 아부하는 해바라기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김 원장. 그거야 당신이 할 일 아니오? 월급 받으면서 뭐 하는 거요? 그런 공작 하나 하지 못하고."
홍지영은 국무위원들과 군 고위 장성들이 있는 곳에서 대놓고 그에게 면박을 주었다. 국무위원들이 수군거리고 고위 장성들 가운데는 킥킥대는 사람도 있었다. 직급이야 부총리급에 불과하지만, 한국에서 국정원장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 홍지영은 이 기회에 국정원장을 확실히 휘어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12월 7일 06 : 15 서울 금천구 시흥 2동
"일본 자위대 전 병력은 현재 비상령이 내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한국의 일본상륙전을 가정한 비상계획령 제3호에서는 한국군의 상륙예상 지점을 큐슈(九州) 북단 후쿠오카(福岡)와 혼슈(本州) 서남단 야마구치(山口) 현 일대로 잡고 있습니다."
통일참모본부 정보참모부장 김평국 중장은 여느 인민군 출신 장령과 달리 문화어를 잘 구사했다. 홍지영 대통령과 최창식 국무총리, 국가정보원장을 비롯한 일부 각료들은 북한 TV방송을 시청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박정석 상장이 한 달 전부터 세밀하게 준비한 작전계획을 설명했다. 해상자위대와 항공자위대의 격렬한 저항을 누르고 일본 서부 큐슈와 주고쿠(中國)에 상륙한 한국군이 3개월에 걸쳐 일본을 점령해 나간다는 계획이었다. 박 상장은 비교적 단기간에 일본의 항복을 받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병력을 일본 영토에 상륙시켜야 하는데, 상륙능력에 문제가 많다고 솔직히 실토했다.
- 전략시뮬레이션이 전개되자 화면에는 각종 표지를 단 한국군이 푸른 화살표가 되어 노란색으로 표시된 일본군을 격파하며 차근차근 북동쪽으로 진군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진격로는 일본 지도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측 가능한 시모노세키(下關)-교토(京都)-도쿄(東京)-아오모리(靑森)였다. 홋카이도(北海島) 상륙전은 새로운 상륙작전이라는 이유로 설명에서 빠졌다.
화면 오른쪽에는 동원 가능한 한국군 전력이 표시되었다. 지상군만 총병력 60만에 전차 1,500대, 장갑차 2,500대, 야포 2,000문, 기타 수송용 차량 20,000대였다. 해군과 공군은 예비역까지 총동원된 대역사였다.
- "통참은 오늘부터 정동행성이오. 겨울이라 가미카제(神風)는 결코 불지 않을 것이오. 유사 이래 최초로 일본땅을 공격하는 만큼, 기필코 승리를 쟁취합시다."
대통령 홍지영은 이렇게 된 마당에 반드시 승리하자며 참모들을 격려했다. 자신이 후세에 히틀러로 보이든 광개토대왕으로 추앙 받든 상관없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숙적 일본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홍지영이었다.
"전에 '일본정벌기'라는 소설이 있었지요."
대통령이 운을 떼자 국무위원들과 참모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임진왜란 직후, 조선이 비밀리에 대군을 동원해 일본을 공격한다는 내용으로, 1999년에 발간된 가상역사 소설이었다. 노량해전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순신 장군이 왜군으로서 조선에 항복한 김충선 등의 도움을 받아 일본땅에 진공해 들어간다는 내용은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자객 몇 명 파견에 그친 비슷한 제목의 다른 소설들과는 아예 다른 내용이었다.
"소설과는 달리 진짜로 일본땅을 정벌하는 것이오."
대통령은 이번 전쟁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국정홍보처장 오석천은 대통령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역사에 제대로 기록되지 않아서 그렇지, 한반도에서 일본 정벌을 간 예는 적지 않았다. 일본 고대문화의 성립시기부터 그 이후에도 백제, 신라, 고구려, 가야에서 꾸준히 일본에 진출하여 일본 사회의 지배계급을 형성했다고 믿었다.
- "일본을 점령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장 기본적인 의문이었다. 보통 대규모 전쟁의 기본적인 양상은 점령전이다. 그러나 점령해서 얻는 것이 적다면 구태여 점령할 필요는 없다. 이쪽 정치집단의 의사를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것, 즉 정치의 연장이 전쟁이라고 한 사람이 클라우제비츠였다.
"일본점령은 기술적으로도 불가능하고, 정치적으로도 위험합니다. 다른 나라들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다른 나라는 당연히 미국이었다. 물론 중국이나 러시아도 통일한국의 일본점령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지만, 미국이 한국의 일본점령을 미국 국익이 침해받는 상황으로 간주하여 핵공격을 가할 수도 있다는 것이 정 대장의 걱정이었다. 홍지영도 일본 배후에 있는 미국을 겁내지 않을 수 없었다. 세력이 상당히 약화됐다고 하지만 아직도 세계경찰을 자처하는 유일한 초강대국이다. 일본을 점령하면 미국이 개입하게 될 것이 당연했다.
- "전략적으로 정치적 목적을 충분히 취하되 외국의 개입을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게 무엇이오?"
홍지영과 이종식이 동시에 정지수에게 물었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꼭 이긴다는 보장도 없고, 이기더라도 외국의 개입은 필연적이었다. 그렇다고 독도 인근 해상에서 발생한 사건을 그냥 두고 넘기기에는 국민감정이 용납하지 않아 곤란했다. 막강한 함대로 계속 한국의 해상통상로를 위협하는 일본을 두고 볼 수도 없었다. 한국은 이 난국을 타개해야 했다.
"지고도 이기는 방법입니다, 대통령님. 자, 권 대장!"
- "이번 작전의 군대의 해체와 부수적으로는 일본 산업시설의 철저한 파괴입니다."
장내에 작은 웅성거림이 있었다. 패배를 목표로 한 작전이라는 말에 군인으로서 당연히 반발이 있었지만, 일본 군대를 약화시키고 일본 내에 있는 산업시설 기반을 파괴한다면 정치적 목적은 충분했다. 이 작전이 성공만 한다면 일본은 당분간 한국에게 군사적으로 열세에 놓이게 되고, 향후 군비를 증강하느라 경제적으로도 한국과 경쟁하기 어려울 것이다.
- 산업기반의 파괴는 일반적으로 대규모 전쟁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수반된다. 전시체제가 되면 중공업뿐만 아니라 모든 산업이 군수동원체제가 되어 군수물자를 생산하게 되며, 폭격과 포격, 전선의 이동에 따라 전반적인 생산능력이 떨어지고 산업은 피폐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은 없었다. 산업시설 공격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군사시설이 아닌 산업시설을 주요 공격목표로 한다는 것은 군인에게 있어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한국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어쩌면 일본의 산업시설 파괴인지도 몰랐다. 한국의 산업은 일본의 하청산업에서 간신히 벗어나기는 했지만 아직 일본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고 있으며, 수출시장에서도 일본의 견제를 심각하게 받고 있었다.
- "주요 산업기지와 수도인 도쿄를 점령하는 데에는 지상군 약 5개 사단에 시간은 일주일이면 충분합니다. 원정군이 패배하건 일본 측에서 유리한 휴전조건을 제시하건 말건 전략목표는 이미 완수됩니다."
완전한 승리를 목표로 하지 않는 군인이 있었던가. 홍지영은 정지수 대장과 권대현 대장의 주장에 잠시 어지러웠다. 분명, 군인들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이 아니었다. 그들 뒤로 뭔가 어두운 그림자가 느껴졌다. 그러나 견디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 "60만 병력이라고 해도 자위대에 비해 압도적인 병력차로도 산구(山口 : 야마구치현)에서 동경(東京 : 도쿄)까지 가는 데 3개월이 넘게 걸립네다. 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뤄진다고 가정해도 말입네다. 장장 2천 키로메타에 달하는 대장정을 어드러케 5개 사단으로 일주일 만에 수행합네까?"
대다수 국무위원들과 참모들이 박 상장의 주장에 수긍했다. 한국군이 일본을 점령하려면 대규모 기갑부대가 활동하기에 비교적 수월한 평야지대로 진격해야 한다. 그렇더라도 만만치 않은 육상자위대에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수많은 도시와 좁은 도로망을 감안하면,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퍼부어지는 항공자위대의 폭격을 가정하면 7일 만에 도쿄를 점령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게다가 배후를 위협하는 큐슈도 완전 점령하지 않고는 안전한 진격이 보장되지 않는다. 보급로를 위협받는 군대치고 승리한 군대는 없는 법이다.
- "우리가 반드시 큐슈나 시모노세키 인근에 상륙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바로 이곳!"
상륙전은 상륙하기 가장 좋은 곳을 선정해야 한다. 작전반경이 짧은 한국 공군기들의 지원, 한국군의 상륙능력을 따져볼 때 혼슈서남단 이외의 대안은 없었다. 그러나 권대현 상장이 지목한 곳은 엉뚱하게도 혼슈 북부, 교토 바로 북쪽인 후쿠이(福井) 현 쓰루가(敦賀)였다.
"그기... 가능하갔소?"
- 쓰루가항은 대규모 하역을 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가진 항구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너무 멀었다. 수송수단을 갖추더라도 그렇게 멀리까지 해상자위대의 전투함이나 잠수함들을 피해 도착하기는 어려울 게 분명했다. 게다가 막강한 항공자위대의 F-15] 전투기들이 일본에 접근하는 한국군의 상륙선단을 결코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쓰루가에 상륙할 수만 있다면 일본을 공격하기에는 아주 좋은 위치였다. 산업시설이 밀집한 교토와 나고야(名古屋), 오사카(大阪, 고베(神戶) 일대가 모두 전장의 중심이 되어 철저한 파괴를 피할 수 없는 곳이었다.
"상륙전에서는 제공권 보유가 필수인데, 작전반경이 짧은 F-16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항속거리가 긴 수호이 전투기는 겨우 3개 대대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호석 통신전자 참모부장이 공군 출신답게 문제점을 지적했다. 일본의 주력전투기가 F-15J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상륙전 때의 제공권 확보는 가장 큰 문제였다.
"최근에 도입한 수호이 전투기와 이번에 취역한 중형 항모 이순신함, 그리고 울릉도 기지와 공중급유기를 이용해 상륙지점을 엄호하면 가능합니다. 제공권은 상륙 당일 단 하루만 확실하게 장악하면 됩니다. 또한, 상륙지점에 비상활주로를 건설할 계획입니다."
권대현 대장이 짧게 답변을 마치고 상륙작전에 동원될 부대와 진격로를 조목조목 상세히 설명했다. 상륙작전의 선봉은 역시 해병대였다. 그러나 주공은 기동력과 화력이 우수한 기계화보병사단과 독립기갑여단이었다.
"해병 1개 사단과 1개 여단이 나고야와 교토 일대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형성하여 혼슈 서쪽에 집중된 육상자위대 주력을 상대로 지연전을 펼칩니다. 그 사이에 2개 기계화보병사단과 1개 기갑여단이 도쿄를 점령하는 작전입니다. 진격로는 1,000km 미만입니다!"
- "음... 그럼 도쿄를 점령하고 나서 휴전협정에 조인하면 된다 이거요?"
홍지영은 전혀 의외의 상황이 되자 갑자기 즐거워졌다. 총력을 기울이지 않고 소규모 병력만 동원해도 일본의 콧대를 꺾을 수 있다는 사실이 매력적인 일로 느껴졌다. 그리고 미국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설득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잘하면 지난 100여 년간 한민족이 느꼈던 열등감을 깨끗이 씻고 동북아시아의 맹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렇습니다. 휴전이 되면 원정군은 도쿄만(灣)에서 당당하게 우리나라로 귀환하게 됩니다. 단기전이기 때문에 보급선이 차단될 염려도 없습니다. 만약 일본이 휴전에 응하지 않거나 원정군이 패배한다면, 우린 투입된 병력만큼만 피해를 입는 셈입니다. 그러나 일본 중심부는 완전히 폐허가 됩니다.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닙니다."
- 지난달 중순, 치료가 적당히 끝나자 두 사람은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처가와 본가 양쪽에서 반대가 이만저만 심하지 않았다. 충남 홍성에 있는 처가를 인사차 방문했을 때 가새비(장인)와 처갓집 오마니(장모)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싸우를 맞았고, 최고 어른인 가시할머니(祖母)는 못마땅했는지 아예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도 않았다. 심지어 늦둥이인 적은이(처남)는 그를 가리키며 빨갱이 괴뢰군을 때려잡자고 장난감 총으로 쏘는 시늉까지 해서 가슴이 아팠다.
각시가 본가에 왔을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부모님은 그나마 나았지만 동생 마누라인 오르만(제수)은 각시를 미제 초콜릿을 많이 얻어먹어 피부가 까무잡잡하냐고 놀리기까지 했다. 누이는 미제의 개, 남반부 국방군 각시를 오라반댁(올케)으로 부를 수 없다는 것인지 일이 바빠서 못 온다는 거짓부렁까지 했다.
- 그러나 결국 결혼은 이뤄지고 요즘은 단꿈 같은 신혼을 보내고 있었다. 인민군 예비역 중좌로 예편한 그는 비록 핵미사일기지 침투공작에 실패했지만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에서 자력으로 빠져나온 공을 인정받아 한국군에 소령으로 임관했다. 지상군이 완전 통합된 지금은 국방대학원에서 특수전 분야를 교수하고 있었다.
- 그는 결코 이 행복을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정호근이 옷을 갈아입고 출입문을 나섰다. 다음 주에 있을 도로주행시험이 걱정되었다. 이번에 붙어야 승용차를 살 텐데... 아직 익숙하지 않은 의족이 신경 쓰였지만 걷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 그러나 한국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하고 실질적 협상권한을 가진 진정한 특사는 김온 국가정보원장이었다.
"그렇다면, 김 원장. 한국이 영토적 야심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보증하겠소?"
"미국은 일본에 중대한 국가이익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우리 한국은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일 안보조약이 파기되지 않은 줄 압니다. 그땐 조약 의무사항을 이행하십시오."
"그럴 경우 핵공격을 해도 좋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소."
"물론입니다."
국무장관은 일견 냉혹해 보이기까지 한 김온 국정원장을 보며 씨익 웃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국가이익을 위해서 일본을 어느 정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직접 나설 수는 없었다. 그 역할을 한국에게 떠맡기고, 미국은 그저 바라보고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서태평양에서 미국의 주도권만 위협받지 않는다면 이만한 조건이 또 있을 수 없었다.
- 그는 며칠 전에 정훈 장교로부터 교육받은 내용이 기억났다. 상륙일이 12월 23일로 잡혔다는 것이다. 전쟁준비에 그만큼 소요되고, 마침 토요일이라 적당한 날이었다. 그리고 연이은 크리스마스 연휴와 연말연시로 일본과 잠재적인 방해꾼 미국의 사회 분위기가 온통 들뜰 때이니 그보다 적당한 날은 없었다.
그러나 기밀사항인 상륙일자는 위관급 장교들에게 노출할 만한 정보는 아니었다. 오성윤은 그 날짜가 제대로 된 개전일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이 귀여운 아가씨가 일본 스파이는 아니겠지만, 그가 진실을 말하면 언제든 일본의 귀에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잘못된 정보를 주면 이 아가씨가 큰 손해를 볼 수 있었다.
"다들 23일 정도로 알고 있는데요. 혹시 아닌가요?”
- 오성윤은 지휘부의 핵심 요원인 것처럼 실제 아는 것 이상으로 아는 척했다. 작전계획을 본 것도 아니고 그가 예상한 것인 만큼, 양심상 거리낌은 별로 없었다.
- 12월 10일 02 : 14 경상남도 거제군 일운면, 지세포
겨울 남해바다는 약간 푸른 기가 더해진 독특한 초록색으로 바꿔 입었다. 대우조선소가 있는 옥포 남쪽, 장승포 바로 아래인 지세포로 수많은 트레일러와 크레인을 장착한 트럭이 몰려들었다. 벌써 며칠째 14번 국도에서 마진고개 남쪽 일부 구간은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며 차량통행을 통제하고 있었다.
만선기를 휘날리며 귀항하는 어선들과 부산으로 가는 여객선 승객들로 활기가 넘치는 장승포와 달리, 이곳 지세포에는 며칠째 민간인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었다. 트레일러에 올라타서 하역 작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회색 점퍼차림을 한 기술자와 군인들이었다.
- 트레일러 적재함을 두텁게 감싼 방수포를 걷어내자마자 작은 크레인과 지게차들이 나무로 포장된 박스에 달려들어 항구에 접안한 배들 위로 내려놓았다. 항만에 가득한 배들은 예전처럼 파도마저 잠든 바다를 항해할 꿈을 꾸며 쉬고 있는 어선이 아니었다. 그보다 조금 더 크고 함수가 날카롭게 솟아오른 고속정이었다. 그 위에서 군인들이 하얀 철제 상자 같은 조립식 구조물을 제자리에 붙이기 위해 창백한 백색 용접불꽃 속에서 바삐 움직였다. 부둣가에 접안한 고속정들과 이들 뒤로 순번을 기다리는 고속정에서 피어오르는 백색과 오렌지색 용접불꽃이 조용하던 항구 전체를 환하게 밝혔다.
- "속도가 얼마나 납니까?"
"저게 청진급이디요. 백 톤이 안 됩네다만, 놀라다 마시라요. 37노트 아니 40노트까진 문제없디요. 기럼요."
"대단합니다. 공화국 고속정... 지난 세월 우리하고 숨바꼭질도 많이 했지요."
인민군 정치호 상좌와 한국 해군 오성문 중령이 사이좋게 담배를 나눈 후 서로에게 불을 붙여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사이에 가장 선두에서 작업을 하던 청진급 고속정이 4,000마력이 넘는 디젤 엔진 굉음을 울리며 후미로 빠져나가고, 다시 신흥급 어뢰정이 부두로 천천히 들어왔다.
- 지세포 내항 안으로 빽빽이 들어찬 고속정의 수는 어림잡아도 200여 척에 가까웠다. 지세포는 거제도의 다른 곳들과는 달리 옥녀봉 아래로 이어지는 가파른 경사 때문에 인적이 드물었다. 포구 앞에 지심도라는 섬까지 있어서, 이 앞을 지나는 배들도 지세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 힘든 곳이었다. 이 시간에는 지세포뿐만 아니라 포항인근 구룡포와 방어진까지 고속정들로 우글거릴 것이다.
이틀 전에 발령된 어선 소개령으로 배를 장승포에 정박시킨 이곳 주민들은 야간 통행금지로 발이 묶인 가운데 창문 너머로 벌어지는 지세포의 희한한 야경을 밤새 구경했다. 아마도 임진왜란 이후로 이만큼 많은 배가 한꺼번에 이 항구에 정박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 "3주 정도만 버티면..."
혼란스런 회의석상에서 조용히 앉아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요시다 겐스케 방위청 장관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습니다. 그때쯤이면 한국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비겁한 미국의 긴급전개군은 별로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고마쓰 육막장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요시다는 머리를 숙이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힘없이 일어섰다. 간단히 병력이동 배치를 승인한 요시다는 화요일과 금요일 오전 9시 40분에 총리관저에서 열리는 정례 각료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회의장을 나섰다. 막료장들과 통막 간부들이 어깨가 늘어진 요시다 방위청 장관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동안 사토 과장이 서류철을 뒤지며 말했다.
"미국이 방관할 우려가 있긴 합니다."
민간인들로 구성된 내각대신이나 일본 국민들에겐 충격적인 발언이 될지는 몰라도 자위대 고위 간부들로 이뤄진 통막 인사들은 그 말에 별로 흔들리지 않았다. 고마쓰 육막장은 신경 쓸 것 없다는 투로 말했다.
"어차피 일본은 일본군이 지켜야 합니다."
- 그러나 일본에서 자위대는 그런 위치에 있지 않았다. 일본 국민들 보기에 일본을 적국의 침략으로부터 수호해 주는 것은 지위도 어정쩡한 자위대가 아니라 점령군인 미군이었다. 그리고, 보통의 대다수 일본 시민들이 도쿄 같은 대도시에서 마주치는 휴가장병도, 훈련 중인 군대도, 언론보도에 나오는 군대 이야기도 대부분 자위대가 아니라 주일미군이었다. 그러나 주일미군 움직임이 이상했다. 곧 이동할 것처럼 짐을 꾸리는 모습이 일본 곳곳의 미군기지에서 포착됐다.
- 12월 15일 10 : 05 일본 도쿄 수상관저
일본 수상 히데키 요시오는 요시다 겐스케 방위청 장관으로부터 짤막하게 보고를 받았다. 각종 정보를 분석한 결과 한국이 12월 18일쯤 일본에 대한 공격을 개시할 것 같다는 것이다. 최초의 전투는 해상과 공중의 조우전으로 시작해서 쓰시마가 점령당하고, 약 3개 사단에 달하는 병력이 먼저 시모노세키에 상륙을 시도할 것 같다는 것이다. 요시다 방위청 장관은 현재 자위대와 한국군의 전력으로 볼 때, 한국군의 일본 본토 상륙작전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새삼 강조했다. 상륙군은 쓰시마 인근 해상에서 막강한 해상자위대와 항공자위대에 의해 모조리 수장당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쓰시마가 전쟁의 중심부에 들어 어쩔 수 없이 상당한 피해를 받을 것 같다는, 어찌 보면 상당히 낙관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한국 제2의 도시인 부산을 쑥밭으로 만들면 손해 볼 것도 없습니다."
- 일본에는 오래전부터 주 5일제 근무가 정착되어 사무직원들은 토요일에도 대부분 출근하지 않는다. 승객들 모두 주말이어서 그런지 대부분 느긋한 표정들이었다. 대신에 형형색색의 스키점퍼를 입고 스키를 든 젊은이들이 웃고 떠드는 것이 눈에 많이 띄었다. 아마미나미자오 일대에 널려 있는 스키장에 2박 3일로 놀러 가는 모양이었다.
'삿포로 눈이 최고로 좋은데... 홋카이도 사람이 혼슈로 스키 타러 가다니.'
실소를 지은 이와나이는 그래도 젊은 사람을 이해하는 편이었다. 아무래도 다른 고장으로 놀러 가야 노는 맛이 나는 법이다. 어쩌면 저들은 스키장이 붐비지 않는 주중을 이용해 홋카이도에서 스키를 즐기고 지금은 집으로 돌아가는 대학생들일 수도 있었다.
이와나이는 생선상자를 바닥에 놓고 자리에 앉았다. 열차가 출발하자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기차가 잠시 출렁거리다가 가속을 붙였다.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 12월 15일 17 : 35 큐슈, 기타큐슈(北九州) 외곽 1.5km 해상
"목표 13이 증속, 좌회전 시작합니다. 목표 5는 감속, 방위 0-3-0으로 전환을 끝냈습니다. 함장님."
"4노트로 감속. 아깝게 지붕이 날아가는군. 좋아. 다음 목표를 기다린다. 8번 목표의 위치는?"
"6시 방향, 속도 11노트, 거리 1,500미터로 추정됩니다."
"좋아. 목표 8을 기다렸다가 따라붙는다. 우리 위치는?"
"고쿠라(小倉) 부두를 방금 지나쳤습니다. 간몬(關門) 입구까진 아직 3,000미터 남았습니다."
한국 해군 잠수함 장보고의 부함장인 김철진 소령이 전술상황판을 응시한 채 대답했다. 진해에서 출항한 지 벌써 14시간이나 지났다. 쓰시마 남쪽 이키섬 해역에서 유조선 밑에 붙어 이곳 기타큐슈(北九州)까지는 4시간이 더 걸렸다. 기나긴 항해 끝에 잠수함은 드디어 기타큐슈와 시모노세키를 좌우로 두고 혼슈와 큐슈를 가로지르는 간몬해협 입구에 도착한 것이다.
- 장보고함은 여수에서 출발한 7,000톤급 유조선 닛포마루 2호 뒤를 이키섬에서부터 배 밑에 붙어 좇아왔다. 자국 항구에 초대형 유조선을 입항시키지 않고 한국 해역에서 원유를 소형 유조선으로 나누어 반입하는 그들의 환경정책 덕분에 여수-큐슈 항로에는 항상 이런 유조선들이 붐볐다.
지금 막 닛포마루 2호에서 떨어져 나온 장보고함은 해협 통과에 이용할 보다 크고 느린 배를 기다렸다. 이렇게 커다란 배 밑에 숨어버리면 장보고함이 내는 기관음과 항주 중에 발생하는 잡음을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수면 위에 떠 있는 배나 비행기에서 거대한 쇳덩어리가 바다 속에 잠겨 있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최소폭이 1km가 안 되는 간몬해협과 그 주위 수중에 설치된 음향감시라인(SOSUS)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신중함이 필요했다.
- 김철진 소령이 식어서 걸쭉해진 커피를 단숨에 들이킨 다음 함장을 바라보았다. 잠시 고개를 도리질한 후 항해장교와 해도에 코를 박으며 함장이 이번 작전도 자원한 건 아닐까라는 의문에 빠졌다. 함장 서승원 중령은 능히 그럴 만한 사람이었다. 두 달 전의 텐진 공격작전에서도 그랬지만, 이렇게 적지 깊숙이 침입하여 귀환하기 어려운 작전만큼은 정말 싫었다. 그렇다고 서승원 중령이 공명심이나 출세욕에 눈이 멀어 위험한 임무를 자원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기 때문에 함장을 욕할 수도 없었다.
- 지난번 중국과의 전쟁에서 서승원 중령은 함장으로서 최선을 다했고 그가 지휘한 장보고함은 많은 공훈을 세웠다. 부함장 김철진 소령과 승무원 모두가 일계급 특진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서승원 중령은 승진하지 못하고 훈장 하나만 달랑 받고 말았다. 김철진은 서승원이 잠수함을 더 오랫동안 타기 위해 승진을 거부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서 중령이 승진 문제를 놓고 잠수함전대 사령관인 윤재완 소장과 한바탕 싸웠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원래 장보고급 잠수함은 해군 대령이 함장을 맡았다. 그의 계급이 중령이니 비교적 빨리 함장이 된 것이다. 그러나 대령이 되고 나면 순환보직 체계상 해군작전사령부나 잠수함전단의 참모가 되기 쉽고, 곧 준장 승진문제가 닥친다. 대령은 잠수함 함장이 될 수 있지만 준장이 되고 나면 더 이상 잠수함에 탈 수가 없다. 그래서 서승원이 중령 승진연한 내에는 승진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 것이다. 그가 승진하지 않는 대신 그는 윤재완 소장에게 빚을 졌고, 이번에 그 빚을 갚는 것이 아닐까, 김철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목표 8이 접근합니다. 200미터 뒤쪽입니다."
"목표 8에 따라붙는다. 9노트로 증속, 심도 30미터로."
- 12월 15일 17 : 55 세이칸(靑函) 터널 다쓰히 龍飛 역
세이칸 터널은 쓰가루해협 밑바닥인 140미터 깊이에서 다시 해저 밑 100미터에 터널을 뚫어 철로를 가설했다. 이 터널은 세계에서 가장 긴 해저터널이기도 하다. 1946년에 지질조사와 함께 준비작업이 시작되었고, 1964년부터 본격적으로 공사를 진행했다. 공사비 7,000억 엔이 든 이 대역사는 지질조사부터 최종완성하기까지 42년이 걸린 1988년에 개통되었다. 세이칸 터널의 총길이는 53km이고 이 중 해저 부분이 23.3km이다.
세이칸은 한자로 靑函이다. 아오모리(靑森)의 靑과 하코다테(函館)의 자가 합해져서 이뤄진 이 단어는 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를 연결하는 연락선이 부관(關) 페리호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발음은 전혀 다른 세이칸이다.
- 12월 15일 20 : 10 충청북도 청주, 청주국제공항
청주국제공항은 며칠 전부터 폐쇄되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이용객 감소로 인한 민간 항공회사들의 적자노선 폐쇄이지만, 사실은 군사적인 이유였다. 지금 공항 대합실과 청사 앞 주기장에는 완전무장한 병력이 수송기 탑승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활주로에 늘어서 있는 수송기들은 이미 이륙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거대한 C-130과 CN-235M기들이 금방이라도 이륙할 듯 활주로에 도열했다. 제117특공여단 제5대대 병력은 주기장 구석에 열을 지어 앉아 탑승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3중대 추재국 하사는 그들을 태우고 일본으로 날아갈 CN-235 수송기를 유심히 살폈다. 스페인제 2기 프로펠러인 이 수송기는 화물 4.2톤, 또는 무장병력 42명을 태우고 3,300km나 비행할 수 있다. 관성항법장치에 위성항법수신체계까지 갖췄으니 정확히 목적지에 그들을 떨굴 것이다. 게다가 전자교란장치까지 갖췄으니 수송기치고는 어느 정도 방어력도 있는 편이다.
- 하지만 추재국 하사는 수송기를 타는 게 불안했다. 하긴, 여객기도 마찬가지였지만, 비행기를 타면 승객은 짐짝과 다름없이 완전히 무력한 존재가 된다. 배나 기차, 자동차를 탈 때는 사고가 나더라도 어떻게든 살려고 수단을 강구할 수 있지만 비행기 사고는 그야말로 몰살인 것이다. 낙하산을 지급받았지만 만약 적 전투기로부터 공격당하면 낙하산을 펼칠 사이도 없이 한꺼번에 불덩어리가 되고 말 것이다. 추재국은 그것이 불안했다.
- "뭔가 이상한데? 하지만 더 머무를 수가 없군."
"글쎄요, 별다른 징후는 안 보이는군요."
흰색 제복이 옆에서 거들며 기타무라 일등공좌에게 조종실과 통하는 인터폰을 건넸다. 이제 임무지역으로 다시 복귀해야 할 시간이었다.
"이게 아닌데. 이곳이 너무 조용하지 않소? 이쪽 공역은 민간기들로 항상 붐비던 곳인데 말이요."
통제관이 바로 옆 디스플레이를 확인했다. 부산 상공에 E-2C 조기경보기가 떠 있고 한국 팬텀기들이 이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것 빼고는 한국 상공에 날아다니는 물체는 없었다.
- "미, 미사일이다! 미사일이 조선 남부, 충청북도에서 발사됐습니다. 한두 발이 아닙니다!"
"뭐라고? 미사일 종류는? 탄도를 빨리 계산해!"
놀란 통제관이 급히 명령했지만 미사일의 유형을 파악하는 데는 아직 시간이 걸렸다. 미사일은 최고점에 도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아직 확실치 않았다. 통제실에 경보가 울리며 사색이 된 오퍼레이터들이 컴퓨터를 동원해 탄도를 추적하고 계산하기 시작했다.
"열다섯, 열여섯. 맙소사! 총 28기입니다!”
"코스 확인. 탄도미사일입니다. 로동미사일로 판단되는 부분궤도 탄도탄 28기!"
레이더 디스플레이에 모두 28개의 반짝이는 휘점이 나타나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기내의 중앙 디스플레이에이 모든 것이 전술기호화되어 혼슈 북부에 있는 츠키기지의 방공지휘센터로 보내졌다. 이 화면은 지금 비상대기 상태에 있는 국가안보회의와 자위대 통합막료회의 회의실에도 실시간으로 전송되고 있었다.
- "조선이 미사일을... 전쟁이..."
기타무라 일등공좌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남하하는 팬텀에 맞서 F-15J 편대가 북진하는 사이 E-767 3번기는 남쪽에 새로운 감시라인을 만들기 위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제 이곳 하늘에 귀중한 조기경보기가 머물 수는 없었다. 곧 일본 각지의 방공포대에서 탄도미사일 감시레이더와 패트리어트 방공미사일 대대가 모든 정보와 통제권을 인수받게 된다. 아마이키섬의 이지스 호위함들은 상당히 바빠질 것이다.
- 12월 16일 04 : 59 쓰시마 북쪽 32km 해상
한국 해군 제61전대 소속 프리깃 3척이 급격히 가속을 시작했다. 5만 마력의 개스터빈 엔진을 최대출력으로 높이자 울산급 프리깃 서울함은 30노트가 넘는 고속으로 남쪽을 향했다. 2,000톤이 넘는 함정이 최고속도에 이르자 함수가 물 위를 튕기며 하얗게 물보라를 일으켰다.
부산 상공의 한국군 E-2C가 확인한 쓰시마 해역의 자위대 함정 위치가 데이터 링크로 전송되고 30초가 채 지나기 전에 서울함 중간 부분에서 화염이 치솟았다. 짙은 배기 연기가 흩어지고 서울함의 윤곽이 뚜렷해지자 다시 화염과 함께 하픈 함대함 미사일이 하늘로 솟구쳤다. 서울함에서 발사된 8발의 하픈 미사일은 고체 로켓추진재가 소진되자 부스터가 떨어져 나갔다. 다시 미사일 하단부에서 공기흡입구가 열리고 터보팬 엔진이 작동하면서 속력을 얻은 하픈이 수면가까이 내려앉았다. 미리 지정된 경로를 따라 마하 0.9의 속도로 바다 위를 스치듯 아슬아슬하게 질주했다.
서울함 3km 전방을 앞서 달리던 울산급 프리깃 충남함과 포항급 코르벳 목포함에서도 화염이 치솟았다. 총 16발의 하픈과 2발의 엑조세 대함미사일이 일본 해상자위대의 쓰시마 분함대를 목표로 힘차게 날아갔다.
- 12월 16일 05 : 00 쓰시마 서쪽 70km 해상
견장 금색 바탕에 흰 별 세 개가 붙어 있다면 인민군 해군 중장이다. 이 인민군 중장은 포항급 코르벳 천안함의 함교에서 검은 수평선만 응시하고 있었다. 파도는 3미터 정도로 먼바다치고는 비교적 잔잔했다. 그러나 연안에 비해서는 아주 높은 편이었다. 이 낮은 파도에도 만재배수량 1,200톤짜리 전투함은 끊임없이 요동쳤다. 시계를 확인하던 천안함 함장 유재만 중령이 중장에게 보고했다.
"공격시간입니다. 제독님."
"명령을 전파하게."
한 달 전까지 서해함대 사령관이던 장태석 중장이 손목시계를 보며 명령을 내렸다. 천안함 함미에서 노란 신호탄이 치솟고 함교 좌우 갑판에서 점멸신호가 깜빡였다. 신호를 수신한 주변 함정들이 일제히 항해등을 켰다. 어둠 속에서 숨죽이고 가만히 있던 쾌속정들이 일제히 빠른 속도로 남동쪽을 향해 나아갔다.
"다시 확인한다. 제4호위대군의 정확한 위치는?"
"04:30까지 보고로는 이전과 일치합니다. 아군 E-2C가 20분 후 이곳에 도착한 뒤 최종적인 위치를 데이터 링크받을 수 있습니다. 제독님."
- 남북한 해군통합 이후 장태석 중장에게는 이 배가 네 번째 기함이었다. 두 달 전에 있었던 중국과의 전쟁에서도 그는 줄곧 한국 해군 구축함을 탔다.
그가 북한 해군에 있을 때 탑승했던 기함은 나진함이었다. 통일과 함께 남북한 해군이 재편되면서 창설된 통일한국 해군 서해함대는 인민군 해군 장령인 그가 지휘를 맡았다. 그러나 나진함은 남한해군이 가진 대형 구축함을 지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서해함대 전체를 지휘할 통신시스템이 부실하기도 했지만 함대사령관이 그토록 방어력이 빈약한 함정에 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남한 해군 구축함을 기함으로 삼았지만 중국과의 전쟁 내내 마음이 편하지는 못했다.
나진함은 지난번 전쟁에서 격침당했다. 미사일에 맞아 격침당하는 나진함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장태석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가 나진함에 타지 않았던 게 다행이랄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탄 기함이 안전했던 것도 아니었다. 중국군 잠수함들과 사투를 벌이던 전북함은 침몰하고 함장은 전사했다. 나진함이 침몰한 날 충북함은 중국군이 발사한 대함미사일이 함 바로 위에서 폭발하는 바람에 전자장비가 모조리 파괴되었다. 그리고 나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훨씬 신형인 문무대왕급 김유신함에 탑승하게 되었다.
이번에 장태석 중장은 다시 한번 기함을 바꿔 탄 것이다. 전쟁 이후 네 번째 기함이다. 두 달도 채 안 되는 기간이니 신기록으로 남을 일이었다.
- 천안함은 전에 타던 나진함과 비슷했다. 크기와 배수량이 비슷하고 함대 기함치고는 너무 작고 위험하다는 점도 비슷했다. 하지만 이번 작전을 위한 지휘함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데다가 직접 미사일 고속정을 이끌며 지휘하는 데 적당한 함이었다.
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천안함은 20노트를 넘어서고 있었다. 장태석 중장이 초조한 듯이 주변에서 달리는 고속정을 보다가 표정이 일그러졌고, 점점 호흡이 가빠졌다.
- "저 앞에 저거 있잖소. 저것만 세워."
장태석 중장이 가리킨 곳에는 오사(OSA) 형 미사일정이 30노트가 넘는 속도로 물 위를 튀듯 달리고 있었다. 작은 배가 그 정도 속도로 달리니 물 위에 떠 있는 시간보다 하늘에 떠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는 고속정을 바라보며 함장이 난감해하는 사이에 다시 장태석 중장이 호통쳤다.
"뭐 하는 거요, 함장! 빨리 세우라니까!"
"제독님. 무선봉쇄 중입니다. 연락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조명탄을 쏘든지 예광탄을 쏘면 될 게 아니오? 머리 위로 날리고 점멸신호를 보내. 다른 배는 속도를 유지하고 그놈만 남아있으라고 해."
- 천안함 함교 바로 아래 40밀리 기관포에서 불꽃이 일자 시뻘건 빛줄기가 앞서가는 오사형 고속정 옆에 하얀 물보라를 튀겼다. 깜짝 놀란 고속정이 급선회하자 천안함에서 점멸신호가 번쩍거렸다.
잠시 후 멈춰 선 오사형 미사일고속정 옆으로 천안함이 접근했다. 재빨리 줄사다리가 내려지자 장태석 중장이 둔중한 체구에 비해 날렵한 몸짓으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부관이 허겁지겁 그를 따랐다. 뭔가 연락임무를 부여받을 줄 알고 정지한 고속정장(長)은 갑작스런 제독의 승선에 놀라 황급히 경례를 붙였다.
"자네 이름은 뭔가? 자네 배에 신세 좀 지겠네."
- 미사일 낙하 속도는 마하 6,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소요시간은 10초도 채 되지 않았다. 미사일을 유도하는 지상기지 요원이나, 그것을 감시하는 E-767 조기경보기의 승무원 모두 바짝 긴장하며 애타게 명중을 기다렸다.
하늘에서 여섯 개의 섬광이 일었다. 탄두 하나는 패트리어트에 맞았지만 폭발하지 않고 떨어지며 기지 북쪽 활주로를 향했다. 확실히 파괴되지 않은 미사일은 낙하에너지만으로도 위험했다. 새벽하늘에 밝게 빛나는 여섯 개의 섬광 사이로 로동미사일 세 발이 빠져나와 기지에 떨어졌다.
- 미사일 요격은 예상외로 성공에 가까웠다. 오퍼레이터들이 뜻밖의 높은 명중률에 환호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미사일이 연속 지면에 낙하하며 충격음이 기지를 울렸다. 마음을 졸이던 커다란 폭발음은 없었다. 예상 밖의 작은 충격음에 기지 요원들이 의아했다. 또 다른 로동미사일이 유류저장고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러시아 제어계측연구소와 국립과학연구소가 공동개발한 위성위치파악 시스템이 길이 15.2미터에 달하는 로동미사일을 정확하게 유도했다.
- 러시아제 그로나스(GRONASS) 시스템은 미국제 냅스타(NAVSTAR)와 같이 지구궤도 위에 인공위성 24개가 쏘아져 지표면을 향해 전파를 발사한다. 지표면 어느 곳에서나 그로나스 위성 3개가 발사하는 전파를 수신하게 되는데, 이 세 가지 다른 전파를 삼각측량해서 정밀도 1~2미터로 정확한 위치를 산출하게 된다. 개발팀 리더였던 니콜라이 이바노프 박사가 한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미사일 유도장치 개발이 힘들었을 거라고 토로한 적이 있었다. 충격에 견뎌야 하는 탄도미사일 유도용 전자장비는 그만큼 제작이 어려운 것이다.
- 로동미사일 특유의 다른 문제도 하나 있었다. 미국 국가정찰국이나 군사전문지 제인스 디펜스 위클리가 지적했듯이, 원래 로동미사일은 궤도수정용 모터가 없었다. 그래서 원형공산오차가 3~4km에 달하고, 미국이 로동미사일을 전략용이 아닌 테러용이라고 비난하는 이유가 되었다.
이것을 한국 항공기술자들이 해결했다.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회피행동을 하는 전투기를 요격하는 대공미사일이 아닌 만큼 고도의 정밀도는 필요 없었다. 마침 뒷날개 부근에 공간도 충분해서 소형모터를 달아 간단히 정밀도 문제를 해결했다.
떨어진 탄두는 핵탄두도 고폭탄도 아니었다. 텅스텐 프레임으로 둘러싸인 770kg짜리 탄두는 시속 8,000km로 콘크리트 방호벽을 뚫고 연료탱크 내부에서 폭발했다. 그리고 텅스텐 내부에 가득 찬 테르밋이 발화해서 항공유에 옮겨 붙었다. 연료탱크 윗부분의 두터운 콘크리트와 충격흡수판을 관통하도록 만들어진 이 폭탄은, 첫 번째 지면 격돌로부터 2초가 지난 후 인화하도록 지연신관을 장착하고 있었다.
극초음속으로 돌입한 탄두가 방호벽을 깨뜨리고 연료탱크 내부로 들어가서 폭발하자, 충분한 양의 산소가 공급된 항공유가 맹렬한 기세로 불타 올랐다. 연료탱크 상부의 거대한 콘크리트가 팽창하는 압력으로 산산이 깨지고, 불길이 항공유를 계속 끓는점 이상으로 온도를 급상승시켰다. 밀폐된 저장탱크에서 급속히 팽창하며 기화한 항공유가 폭발하자 거대한 열폭풍이 몰아쳤다. 순식간에 주변 산소를 빨아들인 맹렬한 불길이 대류현상으로 말미암아 하늘로 밀려 올라갔다. 시커먼 구름이 핵폭발 때처럼 하늘에 뭉게구름을 만들었다.
- 그리고 다른 폭풍이 지면에서 폭심을 향해서 불어닥쳤다. 대규모 연소 현상에서 발생하는 진공 현상이 주변 공기를 엄청난 속도로 끌어들인 것이다. 주기장에서 이륙준비를 하던 제303 비행대 소속 F-15J 전투기 두 대가 쉘터 옆으로 내동댕이쳐지며 폭발했다.
활주로 전체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 같은 진동과 폭발, 그리고 폭풍으로 아비규환이었다. 그 속에서 일본 항공자위대가 근 20년에 걸쳐 쌓아 온 항공기 운용 노하우를 쥔 수많은 간부와 일선 자위관들이 속절없이 죽어갔다. 수천 킬로리터의 연료가 불붙는 동안 북쪽 활주로에서는 F-2, F-15J 전투기들이 황급히 이륙하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시간이 부족했다. 불과 몇 분 전에 발령된 경보로 미리 이륙해 있던 전투기는 채 10여 대를 넘지 않았다.
전투기들이 상공에서 동료들을 걱정하는 듯 기지 주변을 맴도는 사이, 혼란 속에서 살아남은 전투기들이 이륙을 시도했다. 그러는 동안 북쪽 격납고에서는 아까 명중했지만 폭발하지 않았던 로동미사일 탄두 한 발이 폭발하며 활주로로 진입하던 오라이언에 파편이 쏟아졌다.
- 12월 16일 05 : 15 서울 금천구 시흥2동, 통일참모본부
"큐슈로 발사된 로동미사일 중 3발이 명중했습니다. 뉴타바루에 3기입니다. 츠키기지는 명중이 불확실합니다. 뉴타바루 현지에서 발신되고 있는 IIS 신호와 레이더 전파는 모두 멈췄습니다."
"혼슈에 발사한 미사일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E-2C 호크 아이 수색범위 바깥이라서 불가능합니다만 해군에서 확인해 주기로 했습니다."
"해군 61전대가 쓰시마 분함대에 대한 공격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전과는 3척 모두 격침입니다. 아군 피해로 포항급 코르벳 목포함이 다치카제가 발사한 하픈에 피격당해 침몰했습니다."
소형 프리깃과 코르벳함들이 막강한 화력과 방어력을 갖춘 구축함 다치카제와 이소유키 등을 격침시키다니, E-2C로부터 지원을 받고 불시의 기습이긴 하지만 대단한 전과였다.
"강습부대들은 어떻게 됐나?”
"현재 쓰시마 북방 80km 지점에 접근 중입니다."
- 호령과 복창, 그리고 상황보고가 복합된 요란한 소음 속에서, 통일참모본부 의장 이종식 차수는 왠지 알 수 없는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것을 느꼈다. 젊은 장교들이 특히 그랬다. 조국이 타국을 침략하고 있다는 사실을 수치스러워해야 할 장교들이... 그는 젊어서 해방전쟁에 임했을 때도 저들과 같았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가 일개 전사였을 때에는...
그러나 전쟁 후에 군관이 되어 모스크바로 유학까지 다녀온 그는, 모스크바에서 자신과 인민군대가 행한 그 '영웅적인' 행동이 국제 사회에서는 어떻게 통하고 있는가를 깨달았다. 모스크바 시절 나치 전범처벌에 관련된 책을 구해서 읽었는데, 거기에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당시 정해진 한 가지 법령이 인쇄되어 있었다.
'군인을 포함한 모든 국가의 국민은 자국이 침략 행위를 하려 할 때 이에 항거할 의무를 가진다.'
- 이게 말이나 되는가? 그렇다면, 조국이 침략전쟁을 할 때는 무조건 거부해야 하는가? 이 법령은 영국과 미국, 그리고 그들의 우방이었던 소련이 손을 잡고 만든 법령이었다. 더 이상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는 명분하에서!
그는 책을 읽으며 이것이 사실은 나치독일에 대한 분풀이에 불과하고, 단지 몇몇 독일 군부 지도자를 처단하기 위해 만든 법령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왠지 마음속 깊이 남는 앙금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 분명히 침략전쟁은 옳지 못한 일이고, 그것을 저지르는 자들은 처벌받아 마땅했다.
그도 처음 남조선해방전쟁에 참전했을 때는 그 전쟁이 제국주의 침략자를 몰아내는 해방전쟁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전선에서 그가 겪은 것은 해방전쟁이 아니라 침략전쟁, 정복전쟁이었다. 그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뉘른베르크 법령은 일생 무거운 짐이 되어 남았다. 그것이 아무리 악의를 가지고서 만들어지고 해석된 악법이라 하더라도 그 법 자체의 이상이 갖고 있는 도덕적인 무게를 이겨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공산주의 이론에 대해서는 단지 군사학원에서 배운 정도밖에 모르는 순수한 군인이자 이상가인 그로서는 더욱 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직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전쟁을 막는 것이 자신의 임무임을 깨닫게 되었다.
- 그러나 지금은? 그는 전쟁을 막지 못했다. 막지 못한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선봉에 서야 했다. 침략전쟁을 벌이는 국가의 군사령관으로서 침략을 직접 지휘해야 했다. 그는 군인으로서의 영광스러운 인생을 금색 글자로 기록한 책을 거대한 먹물병 속에 집어던지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 그도 저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힘을 쓰는 자, 그 힘을 과시하는 입장에 있는 이들의 기분은 초보적인 전략 전술적 행위를 해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전쟁뿐만이 아니다. 여름에 남의 텃밭에 숨어 들어가 수박서리를 해봤거나, 친구 여럿이서 한 아이를 패는 집단구타 행위를 해보았거나, 아니면 시험공부를 열심히 해서 시험을 잘 보았을 때, 그때의 기분을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완전히 이길 때, 그때의 쾌감이란...
그것을 직접 구사하는 이들이 아니라도, 그것을 관전하거나 미력하나마 그것에 간접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인간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욕망인 파괴본능과 정복욕을 같은 인간이 어찌 이해하며 감당하겠는가. 저 젊은 장교들은 이미 그 정복욕이라는 쾌감을 맛본 것을... 하지만, 그 쾌감에 사로잡혀 있다가는 영원히 그 즐거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이종식 차수는 한숨을 내쉬며 전용 디스플레이를 조작하여 작전정보를 다시 열람하기 시작했다. 돋보기를 쓰고도 눈이 침침해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날을 샜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이 탓일까?
- 12월 16일 05 : 35 쓰시마 남동쪽 50km
"도대체 민간인들은 왜 이 모양이야? 대피명령이 떨어진 게 언젠데..."
일본 해상자위대 제4호위대군의 기함 히에이의 함교에서 호위대군 사령관 시마즈(島津) 해장보가 주변 바다 위를 살피며 툴툴거렸다. 자그마한 통통배들이 기를 쓰고 일본 본토 쪽으로 몰려가는 것이 망원경에 잡힌 것이다.
"쓰시마에서 조업하던 어선들이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전쟁이 난 것을 이제야 안 모양입니다."
곧 전투에 돌입한다는 긴장감이 함장의 목소리를 떨리게 했다. 그러나 자신감에 넘친 시마즈 해장보는 활력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적 고속정대 위치는?"
"방위 3-0-5, 70km 지점입니다."
"이상하군. 이미 하픈 사정거리 내에 들어왔는데도 아직 조용하다니."
- 시마즈(島津) 해장보는 전투정보센터로 내려오자마자 요원들에게 주변 상황을 물었다. 빅 아이 3에 탑승한 정보장교로부터 한국 해군 고속정대가 급속 남하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그들이 가진 대부분은 기관포만 탑재한 빈약한 고속정인 데다 미사일 고속정은 몇 척 되지 않았다. 쓰시마가 위태로운 마당에 가만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국 해군이 시도하고 있는 것은 인해전술이라고 판단했다. 고속정대가 장비한 10여 발의 미사일로 아군 함대를 공격한 후,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밀어붙여서 자위함대를 쓰시마에서 떨어지게 만들 계획일 것이다. 하지만 막강한 방공능력을 자랑하는 이지스함 초카이를 대동하는 이상 항공자위대 전투기들이 엄호만 해주면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깟 대함 미사일 10여 발쯤이야 충분히 저지가 가능했다.
사정거리가 긴 하픈을 탑재한 한국 해군 미사일정은 3척뿐일 텐데 아직도 발사하지 않았다. 중국과의 전쟁에서 많이 잃었기 때문일까? 북한제 고속정이 가진 스틱스는 문제도 아니었다. 사정거리가 겨우 40km 남짓할 정도로 짧은 데다 요격도 훨씬 쉬웠다.
"시 호크 6으로부터 보고는?"
"곧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 도달합니다. 나머지 시 호크들은 착륙을 완료한 후 무장을 교체하고 있습니다."
"멍청한 놈들! 바로 옆에 위험은 못 보고 엉뚱한 잠수함이나 찾아 헤맸으니..."
기함 히에이의 헬기 수용능력은 컸다. 3대의 SH-60J 시 호크 대잠 헬리콥터 중에서 하나는 고속정대를 감시하러 보내고 대잠초계중인 나머지 두 대를 급히 귀환시켜 대함미사일을 장착하도록 명령했다. 그들이 유효사정거리로 들어오기 전에 대형 미사일들만 먼저 해치울 작정이었다.
- 함대함미사일이 개발된 후 수상전투의 양상은 웃기게 되었다. 조그마한 쾌속정도 하픈을 장비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그 타격력은 웬만한 구축함에 필적하게 된다. 물론 전체적인 공격력은 훨씬 약하겠지만, 하픈에 맞고도 무사할 전투함은 이 세상에 없다. 이스라엘 구축함 에일러트는 작은 오사급 쾌속정에서 발사한 스틱스 대함미사일에 맞고 침몰했다. 이스라엘은 비용 대 효과면에서 엄청난 손해를 본 것이다. 이것이 전 세계적으로 대함미사일 쇼크를 유발시켜 한창 대함미사일 개발붐이 일었다.
"좋아. 스틱스 경계하면 돼. 그것들 사거리는 정확히 얼마나 되나?"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사령관님."
사령관이 데이터 링크와 연동된 디스플레이를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전투정보실 한쪽 벽에 붙은 커다란 컬러 화면에는 한국 남해안부터 큐슈에 이르는 지도와 함께 등록된 모든 함정과 비행기가 기호로 표시되었다. 접근하는 고속정에 새로이 미사일 사거리를 나타내는 붉은색 띠가 둘러지고 화면 오른쪽 윈도에 스틱스라는 문자와 사정거리가 나타났다.
"아군 전투기가 도착하려면 얼마나 남았나?"
"5분입니다, 사령관님. 그들이 기관포로 해치울 수 있습니다."
"자, 놈들 공격기들도 몰려온다. 방공태세 확인하고 초카이와 링크해 놓게."
초카이에서 추적 중인 한국 전투기들이 또 다른 화면에 나타나자 컴퓨터가 자동으로 공격 우선순위를 배정했다. 여기까지 접근해서 공격해 오는 것들 대부분을 항공자위대 친구들이 해치우고 나머지는 얼마 안 될 것이라고 시마즈 해장보는 예상했다.
- 12월 16일 05 : 39 쓰시마 남서쪽 40km
고속정대 선두 그룹으로 달리는 서흥형 고속정 정장 박현호 상위는 차가운 새벽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25밀리 포탑 앞에 서 있었다. 이제 어선인 것처럼 보이는 위장행동은 끝났다. 곧 일본 함대와 결전을 벌이는 것이다. 구 소련 코마(Komar)급 고속미사일정의 북한제 복제품인 서흥형 고속정은 SS-N-2A 스틱스 대함미사일 2발을 적재할 수 있다. 박 상위는 이 미사일들이 이번 해전에 단단히 한몫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저 멀리 수평선 위에 무엇인가 붉은 점이 떠올라 이쪽으로 날아왔다. 바다 위로 떨어지지 않고 여러 개가 한꺼번에 날아오는 것으로 봐서 별똥별은 아니었다.
- "출력 최대로 급속 변침! 아니, 변침 대기하라!"
서둘러 하늘을 향해 신호탄을 발사한 박 상위가 선실로 뛰어들며 다급하게 외쳤다. 35노트로 다른 고속정에 보조를 맞추던 서흥형 고속정이 최대 출력으로 올리자 40노트를 넘어서서 42노트로 치달았다. 검은 하늘에 시뻘건 신호탄이 천천히 떨어지며 주변 고속정들에게 경고를 발했다.
박현호 상위는 저 미사일 가운데 최소한 하나가 선두에 선 그의 고속정을 노릴 것으로 예상했다. 박 상위는 80톤밖에 안 되는 이 고속정이 대함미사일에 맞으면 산산조각 날 것이라는 상상하자 잠시 아찔했다. 그는 어떻게든 미사일을 피하고 일본 함대에 접근해서 스틱스를 날려야 했다.
일단은 공격을 피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공격하는 것은 살아남고 나서의 이야기였다. 시뻘건 불덩이가 점점 접근했다. 정장은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전투기가 하는 미사일 회피기동을 배운 적은 없었지만 가장 적절한 시간에 반사적으로 명령했다.
"채프발사! 급속 변침, 좌현 구심도!"
남조선 해군이 장착해 준 두 방짜리 채프발사기가 터지며 200미터 앞에 은박 알루미늄 호일이 뿌려졌다. 다시 한 발을 마저 쏘고 나서 왼쪽으로 급격하게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40노트가 넘는 고속에서는 적당히 선회하지 않으면 배가 뒤집혀 박살 나고 만다.
- 정장 박현호 상위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 인간의 균형감각은 오른쪽으로 기울기보다 왼쪽으로의 기울기에 능숙하다. 급격한 좌회전에 엄청난 물보라를 튀기는 코마형 고속정의 좌현 하갑판이 물과 수직에 가깝게 되자 박 상위는 아찔했다. 시뻘건 불덩이가 고속정바로 위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알루미늄 호일에 깜빡 속은 하픈 함대함미사일이 다시 목표를 찾았다. 프로그램에 따라 임의로 재설정된 목표는 서흥형 뒤에 따라오던 수많은 고속정 중 또 하나였다. 다른 고속정들도 급격히 산개하며 회피운동에 들어갔지만 박 상위처럼 능숙하지는 못했다.
- 하픈은 차호급 고속정에 달려들었지만 이렇게 작은 목표에 정확히 명중하기는 어려웠다. 아슬아슬하게 빗나가는 순간 근접신관이 작동하면서 20미터나 떨어진 거리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그러나 200kg이 넘는 폭약에 차호급 고속정은 견뎌내지 못했다. 폭풍과 파편이 휩쓸고 미사일의 남은 연료까지 불붙자 차호급 고속정은 그대로 35노트로 날아오르는 불덩이가 되었다.
- 다가오는 미사일은 한두 발이 아니었다. 하픈을 피한 함정은 얼마 되지 않았고, 누군가 피하면 다른 고속정이 대신 미사일을 얻어맞았다.
"공군은 언제 오는 거야! 개새끼들!"
박현호 상위가 쌍안경을 내리고 하늘을 향해 주먹을 흔들었다. 하픈 12발이 날아와 8척의 고속정은 사라졌지만 더 큰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배에서는 아직 그것을 알 수 없었다.
- 12월 16일 05 : 41 부산광역시 김해 부원동, 남해고속국도
김해 시가지 바로 남쪽 남해고속국도가 어제저녁부터 통제되었다. 마산과 창원지역에서 출발한 트럭 운전사들은 교통경찰들의 유도에 따라 투덜거리며 남해고속도로 남쪽에 있는 남해지선 고속국도나 김해 시청 방면으로 우회했다. 도로공사를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한 트럭 기사들이 김수로왕릉 앞을 지날 때 이상한 것을 보았다. 남해고속국도 쪽 하늘에서 시뻘건 불덩어리들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광경이었다.
고속국도에서는 전투기들이 이륙하고 있었다. 황해도 과일비행장과 평안남도 순안비행장에 배치되었던 미그기들은 일본 조기경보기들의 눈을 피해 어제저녁부터 한 대씩 이곳에 집결했다.
- 간이휴게소 주차장을 비상 대기 구역으로 이용하여 재급유와 무기 장착을 마친 미그-19, 21 전투기와 미그-23 전투기들은 휴게소 옥상에 자리 잡은 관제탑의 지시를 받아 차례로 휴게소를 빠져나갔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미그-21 편대였다. 이어서 미그-23과 19 전투기들이 이륙을 시작했다. 이들은 김해공항과 포항시 외곽의 비상활주로에서 이륙한 F-5E, F-4E 팬텀 편대와 모여서 빠르게 남하했다. 도합 200여 기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 '짜식들, 빠르군.'
그러나 호소카와는 한국 전투기들은 엄호기인 F-15 편대가 맡아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호소카와는 신중히 목표를 선택해 매브릭 미사일을 발사했다. 발사된 미사일은 불꽃을 뿜으며 급강하하더니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 호소카와는 매브릭 미사일 공격을 마치면 마지막으로 기관포 세례까지 퍼부을 예정이었다.
- 고속정대 뒤쪽에 쳐져 있는 이놈은 다른 고속정에 비해 상당히 컸다. 아마 하픈을 탑재한 백구급이나 스틱스로 무장한 오사급 같았다.
- '뭐? 이렇게 빨리! 젠장!'
선두에 선 한국 공군 전투기가 발사한 알라모-E 미사일이 최대사거리인 이곳까지 마하 3의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한국 전투기들은 F-15J 편대가 막아 줄줄 알고 계속 고속정을 공격하던 F-2 편대는 갑작스런 장거리 미사일 공격에 놀라 허둥댔다. 미사일의 추적을 받던 F-2 한 대가 급기동을 하며 간신히 그 미사일을 떨궜다.
"적기는 미그-29다. 아군 F-15 가 요격할 것이다. 잠시 고도를 낮추고 상공을 선회하라. 레드 투! 뒤로 빠져나와라."
[빅 아이 투다. 함대로 향하던 모든 전투기들이 레드를 향하고 있다. 남쪽에서 대기하라. 반복한다. 공대함 무장기들은 포인트 23에 집결하라. 숫자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빨리 물러나라!]
- 실수였다. 그도 깜빡했다. 한국 공군은 2~3년 전만 해도 없던 장거리 타격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매브릭 6발 가운데 한 발밖에 발사하지 못한 호소카와가 입맛을 다시며 휘하 편대를 불러 모아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고속정대에 대한 공격은 한국 전투기들을 물리친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호소카와가 기수를 내려 급강하했다. 다른 편대기들도 그를 따라 고도를 낮춰 남쪽을 향했다. 갑자기 편대 무선통신망이 비명으로 가득 찼다. 호소카와는 아직도 위기를 실감하지 못했다.
- 12월 16일 05 : 46 쓰시마 상공
전투 결과는 참혹하고, 일방적이었다. 수십 년 전에 개발된 반능동 공대공 미사일 스패로와 사이드와인더 밖에 장비하지 못한 F-15J 전투기들은 사정거리가 훨씬 길고 기동력이 좋은 알라모 계열 미사일에 속수무책으로 격추되었다. 능동 레이더 유도방식의 R-27EA(알라모E)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 사이에 섞여 레이더를 발사하지도 않고 조용히 날아오는 R-27ET(알라모D)는 장거리 미사일의 유도방식치고는 특이하게도 적외선 유도방식이었다. 능동형 미사일은 미리 레이더 경보를 받고 회피할 수 있었지만, 적외선 유도 미사일은 눈앞에 보이기 전까지는 대책이 없었다.
동료기들이 공중에서 불꽃으로 사라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미사일을 떨치기 위해 황급히 회피기동을 하던 항공자위대 소속 F-15J전투기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한국 해군의 수호이-35 전투기들이 이미 가시거리까지 쇄도하고 있었다.
- F-15J 전투기들은 수적 열세를 깨닫고 황급히 후퇴했지만 이번에는 단거리용 R-73(아처)가 날아왔다. 엄청난 고기동 성능이 있는 이 미사일은 플래어로 한두 번 속여도 다시 집요하게 추적해 왔다. 미처 도주하지 못한 F-15J 전투기들은 어쩔 수 없이 근접전에 대비했다. 그러나 양측 전투기들끼리 접근하자 이번에는 더 큰 재앙이 자위대 전투기들을 덮쳤다. 200여 기에 달하는 구식 전투기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F-15J 전투기들에게 달려들었다.
- 12월 16일 05 : 52 쓰시마 남서쪽 30km 상공
이한봉 중좌의 미그-29 전투기가 F-2의 꼬리를 향해 접근했다. 이미 장거리 미사일을 소모한 뒤였기 때문에 미그-29 전투기들은 부담을 무릅쓰고 일본의 F-2기들에 달려들었다. F-2의 숫자가 반으로 줄자 자신감을 얻은 미그기들이 격투전을 건 것이다. 고속정대를 노렸던 F-2 편대는 지금까지 그들을 호위해 주던 F-15J가 김해 등에서 발진한 대규모 전투기 편대와 접전 끝에 패퇴한 뒤에도 악랄하게 저항했다. 단거리 미사일이 1회 교차하고 나서 전투기들은 서로를 좇아 마구 뒤섞였다.
"이 간나이. 무지 빠르구만!"
F-2와 서로 꼬리잡기 비행에 들어간 이한봉이 편대통신망에 대고 혼잣말처럼 외쳤다. 이것은 사실 자존심 강한 이한봉이 윙맨 강성순소좌에게 도움을 청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강 소좌는 대답이 없었다. 아마도 격추된 모양이었다.
- 마지막까지 아꼈던 한 발의 R-73(아처) 미사일은 이한봉 중좌의 헬멧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떨어져 나갔다. 헬멧에 연동된 미사일 발사 시스템은 목표의 적외선을 포착하기 전에 헬멧이 가리키는 지시 방향으로 선회를 한 다음 목표를 수색한다. 적절한 각도에서 미사일은 스스로 적기를 좇아나가게 된다.
[장산곶매입네다! 뒤에 찐드기가 따라붙었습네다! 떼버릴 수가 없습네다!]
이한봉 중좌의 윙맨 강성순 소좌의 절규가 헬멧을 울렸다. 강소좌는 아직 살아 있는 모양이었다. 어느 놈인지 궁금했지만 자신의 뒤를 따라붙은 녀석이 먼저였다. 기회는 왔다. 이한봉의 미사일에 쫓기던 F-2가 아래쪽으로 기체를 회전시켜 급격한 선회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가 뒤를 잡을 수 있었다. 공격모드를 기관포로 설정하고 기체의 중심선으로 적기를 몰아넣었다. 헬멧이 가리키는 지시선이 나머지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정확한 탄착군을 사격 컴퓨터가 계산하고 나서 자동으로 전투기를 움직였다.
- 교환훈련으로 탑승해 보았던 F-16의 기관포보다 훨씬 묵직했다. 비교해서 듣고 보니 30밀리 기관포는 왠지 유탄발사기 같다는 F-16 조종사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강력한 탄두의 30밀리 기관포 수십 발이 쏟아져 나가자 그중 두 발이 F-2에 명중했다.
"잡았다. 기다려 장산곶매! 10시 방향으로 돌아라. 내가 아래쪽에 있다!"
이한봉은 목표가 격추됐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강 소좌의 전투기 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오른쪽 날개와 엔진에서 파편이 튀었던 그놈은 아마도 날개가 반은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30밀리 고폭탄이 기체에 맞아 터지면 알루미늄 합금으로 제작된 비행기 날개 정도는 순식간에 두 조각이 날 정도로 미그-29의 기관포는 강력했다.
- 그러나 그 사이에 여유를 찾은 강 소좌가 급강하로 가속한 뒤에 급상승해서 F-2의 꼬리를 잡고 있었다. 이 중좌는 기관포 발사 구호를 듣자마자 기체를 오른쪽으로 꺾었다.
발포! 발포!
동료기인 윙맨과 협공작전을 할 때 이런 경우에는 자리를 비켜주어야 한다. 자칫하면 아군기의 기관포에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조심하고 피해 있으라는 경고인 셈이다.
- 말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편대기 중 두 대가 F-15J가 발사한 중거리 미사일 AAM-4에 얻어맞고 F-2와의 공중전에서 또다시 두 대를 잃었다. 하지만 슬퍼할 시간은 없었다. 이미 충분한 복수를 했고, 이들이 차지한 공역은 나중에 진입하는 다른 아군 전투기들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적 전투기들을 쫓아버리는 게 임무였고, 임무는 충분히 완수했다.
이한봉 중좌의 기체가 서서히 북쪽으로 순항고도를 잡았다. 맞은편에 귀환을 시작한 수호이 편대가 보였다. 공화국 공군이던 시절 가장 타고 싶었던 전투기가 바로 수호이-33이나 35였는데, 지금은 통일한국 해군이 몰게 됐다. 배가 좀 아팠다.
- 12월 16일 06 : 01 쓰시마 남동쪽 40km 해상
"어떻게 된 거야! 저놈들이 노린 것은 우리가 아니잖아!"
해상자위대 제4호위대군의 기함 히에이의 전투정보센터에서 시마즈 해장보가 뜻밖의 상황에 놀라 물었다. 한국 남부에서 대거 이륙한 전투기들은 제4호위대군을 공격하지 않고, 예상 밖으로 전원 항공자위대 전투기들과 공중전을 벌였다. 전투기 절반, 공격기 절반으로 예상했는데, 이것들이 전부 전투기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일본 전투기들이 수적으로 압도될 게 뻔했다.
함대를 향해 수십 발의 공대함미사일이 날아오지 않은 대신에 결과적으로 함대 상공에 항공자위대가 펼쳐 놓은 우산은 날아가 버렸다. 대공지휘관이 예상외로 전개되는 상황에 안도 반, 우려 반 섞인 설명을 했다.
"그렇습니다. 모두 공대공 무장의 전투기들인가 봅니다. 우리를 지원해 주던 항공자위대만 박살 났습니다."
"망할! 그럼 주공이 고속정대란 말인가? 기가 막히는구만."
함대를 노릴 것으로 알았던 한국 공군이 고속정 사냥에 열중하던 F-2를 공격하자 이들은 허무하게 당하고 말았다. 이제 바삐 움직여야 했다. 고속정 사냥은 이제 스스로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하픈 발사준비. 목표 좌표 입력되는 대로 몽땅 발사해 버려! 그리고 침로를 남쪽으로 돌린다. 거리를 적당히 띄운 다음에 함포와 헬리콥터로 처리하는 거다."
"사령관. 어선단이 몰려옵니다. 12노트로 남하 중입니다."
"바보 같은 놈들! 여태까지 안 피하고 뭐 하는 거야? 빨리 신호를 보내. 이쪽을 지나서 후쿠오카(福岡)든 가라츠(唐津)로든 빨리 꺼져버리라고 해!"
- 12월 16일 06 : 02 쓰시마 남동쪽 40km 해상
일본 군함으로부터 반짝거리는 신호를 받자 통통배 갑판 위에서 인민무력성 정찰국 소속 김현수 중좌가 씨익 웃었다. 일본 자위함대는 아직 이쪽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뒤를 돌아 눈짓을 하자 하사 하나가 선장을 끌고 왔다.
"무전기는 다 부쉈으니 허튼 짓은 하지 말라고 해. 배 한 척만 남길 테니까 그것으로 피하라고 전하게."
통역을 마친 하사는 선장을 끌고 가서 구명조끼를 입힌 뒤 바다 위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플래시를 깜빡이자 앞서가던 어선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바다로 뛰어내렸다. 그들에게 다가가서 긴 고리에 달린 링을 내리자 부하들이 능숙한 솜씨로 기어 올라왔다.
5척에서 내린 검은 그림자들이 차가운 바다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뜨거운 입김을 몇 차례 토하고는 각자 자리로 빠르게 움직였다.
- 지난 저녁에 사로잡은 그들 덕분에 일본 함대에 접근하기가 수월했다. 하지만 일본 함대에 이쪽이 일본 어선임을 확인시키자마자 어부들은 바로 풀어줘야 했다. 그들은 어차피 도망가더라도 공격이 시작되면 한패로 몰려 죽을 게 분명했다. 부하들도 그들을 억류하는 일에 낭비할 수는 없었다.
"전투준비!"
김현수 중좌가 짧게 외치자 대원들이 뱃머리에 덮어두었던 위장막을 벗겨냈다. ZSU-23-4 고사기관포가 장착된 포가에 두 명이 잽싸게 올라탔다. 추적 레이더와 사격통제 레이더 등을 빼고, 필요 없는 철제 부분을 뺀 앙상하게 알맹이만 남은 기관포가 포구를 이지스함 쪽으로 돌렸다. 김성헌 상위가 방아쇠를 잡고 조준간에 시선을 집중했다. 다른 전사 하나가 죽어라고 열심히 핸들을 돌려댔다.
권필순 중사와 다른 전사 하나가 고기창고에서 AT-6 스파이럴 대전차미사일을 꺼내 기관포 옆에 설치했다. 김현수 중좌가 이지스함 초카이의 공격 우선순위를 지정했다. 기관포가 천천히 포구를 돌리다가 딱 멈췄다.
- "포반을 연결해. 당장 주변에 어선들을 쏘라고 알려줘!"
초카이나 다른 배에 달린 포와 달리 히에이의 주포는 유인포였다. 어서 육안으로라도 조준해서 함대를 공격하는 어선들을 날려야 했다. 시마즈 해장보가 외치자 수병 하나가 쪼르르 달려가 인터폰을 연결했지만 주포 쪽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천억 엔짜리를 저런 싸구려로 공격하다니!'
시마즈는 분노가 일었다. 그때 연속된 폭발음이 울리면서 히에이가 가볍게 떨렸다.
- 12월 16일 06 : 04 쓰시마 남동쪽 40km 해상
"그래 잘 쏜다! 이번엔 위쪽 안테나. 쏘아!"
김현수 중좌가 신이 나서 외쳤다. 4연장 23 밀리 고사포가 초당 66발씩 탄환을 쏟아내자 초카이는 순식간에 이곳저곳이 벌집이 됐다. 권 중사는 먼저 함교에 대전차미사일을 먹이고 다음엔 접시형 안테나가 달린 후방 구조물을 노렸다. 대전차미사일이 날아가는 동안 걱정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함교에 두 방, 후방 구조물에 한 방을 먹이는 사이에 거리가 가까워졌고 기관포가 다시 불을 뿜었다.
"이번엔 함교 바로 아래, 불쑥 튀어나온 벽이야."
"저도 압네다, 대장님. 이지스 레이더 앙입네까?"
김성현 상위가 기관포를 신나게 발사했다. 발사진동이 심한지 그의 턱이 덜덜 떨렸다. 녹색 예광탄 줄기 네 개가 좌우로 빨랫줄처럼 팽팽하게 날아가 함교 아래쪽에 꽂혔다.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방전이 됐는지 여기저기서 스파크가 일었다.
- 초카이는 상부 구조물 위에 있는 레이더와 안테나가 얻어맞자 눈뜬장님이 되어 버렸다. 함포도 레이더로 작동하는 자동포이기에 추적용 레이더가 맞자 무용지물이 되었다. 대공레이더와 이지스 레이더, 위성통신 안테나와 추적용 레이더까지 깨끗하게 쓸어버리자, 김성헌 상위는 명령을 기다릴 것도 없이 함교 앞쪽에 붙은 팰렁스 포탑을 향해 갈겨대기 시작했다.
- 김현수 중좌는 이지스함 초카이에서 반격이 없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문일호 소좌팀이 담당한 히에이 쪽 상황을 살폈다. 몇백 미터 떨어진 히에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구축함 히에이는 함체에 예광탄 줄기가 수없이 꽂히고도 반응이 없었다. 정신 차린 함수의 2번 포가 문일호 소좌팀의 어선을 향해 포탑을 돌렸지만 포대장은 조준도 하기 전에 불벼락을 맞았다. 관측용 창을 통해서 23 밀리 고사포탄이 20여 발이나 쏟아져 들어갔고, 폭발이 일어나며 그의 몸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 다시 1번 포를 향해 불을 뿜는 사이에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포탄이 날아왔다. 히에이를 갈기고 있는 문 소좌팀의 어선 옆에 하얗게 물기둥 서너 개가 치솟았다. 작은 어선이 파도에 심하게 출렁이며 물벼락을 뒤집어썼다. 3km 떨어진 1,500톤급 호위함 요시노에서 76 밀리 포가 불을 뿜은 것이다.
"가이새끼들! 저놈부터 해치우라야!"
김성헌 상위가 기관포를 돌려 호위함 요시노를 향해 쏘기 시작했다. 4연장 23밀리 포가 불을 뿜자 예광탄 줄기가 타원을 그리며 표적에 미치지 못하고 바다로 떨어졌다. 다시 편차 수정을 위해 표적 위로 조준했지만 이번엔 다른 배들이 모든 사실을 알아 버렸다. 주위 호위함들에서 76밀리 속사포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텅 빈 바다 위에 있던 문 소좌팀 어선이 십자포화를 맞았다. 어선은 속사포가 일으킨 물기둥에 갇혀 꼼짝 못 하고 갑판 여기저기 기관포탄이 박혔다.
"틀렸습니다. 피해야 "틀렸습니다.
김성헌 상위가 외치면서 다시 조준을 한 후 요시노의 함포를 노렸다. 검은 바다 위로 흐릿하게 보이는 실루엣을 조준했다.
"좌현으로! 초카이 쪽으로 가자. 장님 곁에 숨는다!"
또 한 번 불꽃줄기가 뻗어나가며 요시노를 향했다. 함수에 예광탄이 꽂히자 다시 포신을 "틀렸습니다. 어선이 최고속도로 나아가자 함수가 출렁이며 포구가 위를 향했다.
- "동지! 잠깐만 서 주십쇼! 한 방 먹일 수 있습네다!"
"망할! 이판사판이다. 감속해!"
부서진 선수로 물이 들어와서 배는 앞쪽으로 기울었다. 출력을 줄이면서 출렁임이 멈추고 서서히 앞으로 밀려가는 사이 김성헌이 다시 기관포를 조준했다. 예광탄 줄기가 다시 뻗어나가서 요시노의 뱃머리에 맞자 불꽃이 튀었다. 정지하는 배에서 일정한 방향으로 기관포탄이 날아가고 나머지는 공산오차가 해결했다. 함포에 포탄이 박히기 시작하고 연약한 방탄유리로 가려진 주포 조종실은 순식간에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겨우 막았군..."
김현수 중좌가 한숨을 내쉰 후 문일호 소좌의 배를 찾았지만 그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배를 다시 가속시키고 이지스함 초카이 옆으로 바짝 붙였다. 이 거대한 함은 조용했지만 곧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이 멀고 귀가 먼 초카이가 서서히 움직이자 김 중좌의 배도 따라 움직였다.
- 이지스함 초카이가 눈이 멀고, 아직 초카이의 함교 위로 아무도 올라오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김 중좌의 특무팀은 남쪽을 향해 움직이는 배를 따라 언제 끝날지 모를 휴식을 가졌다.
이제 곧 아군고속정들이 밀려오면 그들도 큰일이었다. 잘못하면 아군들의 오인공격으로 죽게 될 판이었다.
그러나 어디로 피한단 말인가! 초카이 함의 그늘만 벗어나면 당장 일본 호위함들의 집중공격을 받게 되어 있었다. 김현수 중좌의 마음을 읽은 듯 그를 바라보는 김성헌 상위의 눈빛이 처량했다.
"김 상위! 뭐 하는 기야? 날래 잠수복이나 준비하라!"
김현수 중좌가 갑판에 미리 준비된 잠수복으로 갈아입으려 하자 부하들이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김성헌이 항의 비슷하게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부산까지 헤엄쳐 가실 생각이십네까?"
- 12월 16일 06 : 09 쓰시마 남남서쪽 35km 해상
"사령 동지! 물개로부터 연락입네다. 우산 두 개를 걷어냈답네다. 그중 하나는 큰 것입네다."
한국 해군 고속정대 오사형 고속정에 김현수 중좌팀이 성공했다는 전문이 도착했다. 성공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예상한 타이밍에 공군이 보호해주지 못해 피해가 컸던 함대에게는 기쁜 소식이었다. 큰 것 하나는 강력한 방공능력을 가진 이지스함 초카이를 의미했다. 방공우산이라... 장태석 중장이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리고 웃었다.
"백구에 연락해라. 지금 쏘고 빠지라고."
"알갔습네다. 사령 동지."
- 오사급 미사일정으로부터 청색 신호탄이 피어오르자 함대 후미에 그동안 아끼고 아꼈던 한국 해군 소속 백구급 고속정에서 하픈 미사일이 솟았다. 세척에서 발사된 하픈 미사일 12기가 고도를 정하고 순항비행에 들어간 후 백구급 고속정 3척은 다시 최후미로 빠졌다.
사거리가 130km인 하픈 미사일을 여태까지 아낀 이유가 있었다. 산발적인 미사일 발사로는 효과를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나씩 발사하면 역시 하나씩 요격되어 사라지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 빠르게 움직이는 고속정대가 일본 함대와 거리를 좁혀가자 이번에는 스틱스 미사일을 장비한 함정들이 발사대기에 들어갔다. 시속 35노트로 이동하는 선단에게는 50km도 아직은 멀고 먼 거리였다.
10분 후, 선두에 선 오사, 소주, 코마형 고속정들이 다시 미사일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들이 가져온 120발의 스틱스 미사일중 이제 남은 것은 60발이었다. 모질게 살아남은 고속정에서 스틱스 미사일들이 먹이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 사이에는 한국 해군 소속 백구급 고속정 3척도 끼어 있었다. 이들은 하픈이 아니라 특이하게 스탠더드 암(Standard ARM : 대레이더미사일) 대함미사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들이 2발씩 발사한 다음재장전하고 다시 두 발씩 더 쏘았다.
시 돌핀급 고속정 50여 척은 중간 그룹을 형성하고 달렸다. 이들은 아직까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필사적으로 물 위를 날듯 항주했다.
-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도 목표를 놓친 적이 없었다. 저 미사일도 아마 완벽히 명중할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적 레이더가 아직 자신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고도를 높여 재빨리 방향을 돌렸다.
30초 뒤, 쓰시마 최고봉인 다카노 산 정상에 설치된 쓰시마의 대공미사일 레이더가 파괴되었다. 잠시 뒤 또 다른 폭발이 일어났다. 부하들이 발사한 AGM-45 매버릭 미사일과 KCBU-58 클러스터 폭탄이 작렬하는 섬광이었다.
- 폭격은 정밀했다. 매버릭 미사일과 클러스터 폭탄은 효과적으로 쓰시마에 배치된 병기들을 휩쓸었다. 불과 30여 초의 공습으로 호크 4개 포대와 20밀리 고사포들이 전투능력을 잃었다. 사실상 방공전력을 완전히 상실한 쓰시마는, 이제 하늘로부터 공격에 대해 그대로 벌거벗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 원래 만약의 사태가 벌어질 경우 24시간 이내에 쓰시마에는 큐슈제 4사단이 첨단 방공장비들과 함께 긴급 증파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개전과 동시에 쓰시마에 대해서 가해지는 공격에 대해서는 조기경보기의 관제를 받는 항공자위대와 해상자위대 제4호위대군이 그 책임을 져야 했다. 그 정도로 쓰시마 자체의 방위력은 형편없다. 그리고, 그나마 이번의 공격이 가해짐으로써 그 방위력은 지상군 1개 중대병력만이 남게 되었다. 이들은 자위대의 최정예라는 레인저병들이지만 숫자가 너무 적었다. 이제 이곳에 추가병력이 파견되기 전까지 이 섬을 지킬 수 있는 전력은 그들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당장 이 섬으로 닥쳐올 규모 불명의 한국군에 맞서 싸워야만 하는 형편이었다.
- 12월 16일 06:18 쓰시마 남동쪽 30km 해상
다가오는 하픈에 대응하는 동안 일본 해상자위대 제4호위대군에 또 다른 경보가 울렸다. 총 60기에 이르는 스틱스 함대함미사일이 포착된 것이다. 함대는 바짝 긴장했다. 조금 전에 기함으로부터 끔찍한 소식이 각 호위함 함장들에게 전해졌다. 기함 히에이와 이지스함 초카이의 레이더와 센서가 부서지고 데이터 링크장치까지 파괴되자 다른 함과 연계할 수 있는 수단이 모두 끊어져 버렸다. 이들은 스스로의 무기도 다룰 수 없는 무력한 상태가 된 것이다.
제4호위대군의 임시 기함이 된 구축함 하루사메의 함장 고야마다(小山田)가 한숨을 내쉬었다. 함대 방어와 공격력의 중추인 초카이가 격침당하지는 않았지만 방공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사실을 알고 기가 막혔다. 함대방공을 책임진 초카이가 무너지자 갑작스럽게 대함미사일 공격에 매우 허약해졌다고 판단한 고야마다가 연속적으로 명령을 발했다.
"전속력으로, 방위 1-2-0으로 변침한다. 시 스패로를 통제 완료 즉시 발사하라."
- 함대는 오던 길로 다시 방향을 돌렸다. 이제는 한국 고속정단으로부터 도망칠 때였다. 항공자위대가 제공권을 확보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쓰시마를 보호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한국군 헬기들이 대규모로 쓰시마에 접근하고 있었지만 항공자위대 전투기가 다시 날아오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공격 우선순위 부여중... 완료됐습니다."
하루사메의 전술컴퓨터가 목표를 식별한 후 공격순위 배정을 마쳤다. 이 배가 장비한 신형 대공지휘 시스템은 유사시에 대비해서 동료함이 장비하는 대공미사일과 기타 무기들도 함께 통제할 수 있었다.
- "함장! 속력을 줄여야 합니다."
"뭐야? 부함장."
미사일 요격을 지휘하느라 정신없는 함장에게 부함장이 이의를 제기했다.
"이 속도에서는 팰렁스가 목표를 사격할 수 없습니다. 미사일 요격을 마칠 때까지 속력을 줄여야 합니다."
함장은 난감했다. 대공미사일이 실패한 적 미사일을 최후에 방어해야 하는 팰렁스가 30노트에 가까운 속도에서는 대응할 수 없었다. 급격한 피칭운동으로 함이 출렁거리면 팰렁스 벌컨포가 정확한 사격을 할 수 없게 된다. 게다가 하쓰유키와 아사기리급 구축함은 팰렁스 발사각도가 후방으로는 없다. 헬리콥터 격납고가 가리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방을 향해서만 2기의 팰렁스가 효력을 발휘한다.
"맙소사! 저들로부터 떨어져야 되는데. 젠장! 감속 12노트 함대팰렁스 요격 최적코스로 각자 산개하라!"
함장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금 당장 도망쳐야 하지만 접근하는 미사일이 더 위험했다. 하루사메와 함께 다른 배들도 속도를 줄이고 각자 장비한 시 스패로 미사일을 발사했다. 수면 위 3미터의 초저공으로 날아오는 하픈을 요격하기 위해 솟구친 시 스패로 미사일들이 다이빙을 시작했다. 그리고 시 스패로가 놓친 목표에 대비해 팰렁스가 자동사격 모드로 설정되면서 미사일에 대한 추적을 시작했다.
- 하루사메가 장비한 팰렁스는 2기였다. 함교 구조물 앞뒤에 장착한 20밀리 개틀링 포가 오른쪽으로 향한 뒤 불을 뿜었다. 맞은편에 있던 하루유키는 이미 미사일을 향해 함수를 돌렸다. 어쩔 수 없었다. 측면으로 미사일을 받으면 반대쪽 팰렁스는 무용지물이었다. 함장은 멀리서 반짝이는 함대함 미사일을 보며 어쩔 줄 몰랐다. 하픈 몇 방이 시 스패로에 저격되어 시꺼먼 폭염을 만들어냈고, 그 사이를 헤치고 또 다른 미사일 수십 발이 쇄도하는 것을 노여움 속에 지켜봐야만 했다.
- 12월 16일 06 : 20 쓰시마 남동쪽 35km
제4호위대군은 하픈은 간신히 모두 요격했지만 뒤를 이어 날아온 스틱스에 또 세 척이 당했다. 방공미사일이 다 떨어지자 채프로 하늘 가득히 구름을 만들고 팰렁스가 불의 장벽을 만들었지만 결국 세 척은 피할 수 없었다.
함대 가장 외곽에서 방어에 임하던 4,200톤급 구축함 하마기리는 스틱스 함대함 미사일을 요격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시 스패로가 연이어 발사되고 20밀리 팰렁스가 스틱스 두 발을 잡았다. 후지쯔 OLT-3 재머가 구식 스틱스의 레이더 시커를 속이고 채프가 하늘을 뒤덮었지만 달려드는 미사일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가장 먼저 하마기리에 타격을 입힌 것은 백구급에서 발사한 대레이더 미사일이었다. 스탠더드 암(Standard ARM)이 하마리가 발신하는 레이더 전파를 탐지해서 함교 위의 레이더 철탑에 명중했다.
- 이번 공격작전은 장태석 중장이 입안한 후 수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고속정대를 전멸시키고 말 것이란 질타와 반박 속에서 그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쓰시마해협 인근에 버티고 선 2개 자위함대를 격파할 복안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그들도 대답하지 못한 것이다.
- 원래 계획은 잠수함과 전투기를 이용해 자위함대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대잠능력을 자랑하는 일본 자위함대를 잠수함으로 공격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전투기를 대거 동원하여 일본 초계기들이 이륙하지 못하게 한 다음, 잠수함으로 자위함대를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항공자위대 전력이 만만치 않음은 물론, 한국에서 전투기가 위협적인 숫자 이상 발진하면 자위함대는 혼슈 쪽으로 도망친다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일본 잠수함도 재래식 치고는 엄청난 능력을 갖춘 대형 잠수함이었다. 209급 잠수함의 한국식 버전인 장보고급이 아무리 소음이 적더라도 일본 잠수함의 방어막을 뚫고 자위함대에 접근하기는 힘들었다.
- 잠수함과 신예 구축함을 몽땅 투입하는 등 한국 해군이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간신히 2개 함대를 격파하더라도 다른 2개 함대가 지원하러 올 것이 분명했다. 결국 그렇게 되면 항모와 상륙부대가 일본에 접근할 때 이들을 호위할 전력이 없게 된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는데 장태석이 200여 척의 고속정을 동원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인민군 해군다운 전술이지만 사정거리가 짧은 스틱스 대함미사일이나마 갖춘 인민군 고속정은 50척에 불과했다.
그가 요구한 것은 간단했다. 남조선 고속정대를 자신의 휘하부대로 배속시키고, 남해상에 며칠간 조업금지 명령을 내리고 일시적으로 한일협상을 경색시키라는 조작이었다. 그리고 헬리콥터에 장비하는 그것을 싹싹 긁어모아 달라는 것이었다.
- 그가 한눈팔고 있는 사이에 선두에 선 신흥형 어뢰정으로부터 화염이 피어올랐다. 말이 소형 고속어뢰정이지 이미 미사일고속정으로 개조된 상태였다. 신흥형 어뢰정이 탑재하고 있던 미사일을 모두 쏘고 나서는 뒤로 빠지지 않고 그대로 앞으로 밀려나갔다. 제2공격제파가 미사일 발사를 끝마칠 때까지 그들은 미끼 역할이라도 해야 했다.
북조선 해군, 지금은 당당히 통일한국 해군이 된 그들을 중심으로 한 커다란 전략적 승리가 눈앞에 와있었다.
- 12월 16일 06:36 쓰시마 남동쪽 40km
해상자위대 제4호위대군 소속 구축함 하루사메의 전투정보센터에서 함장 고야마다는 입술을 깨물었다. 항공자위대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1차 공격대가 허무하게 물러간 뒤 재급유와 재무장을 하고 있는지 아직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것이다. 미자와에서 출발한다는 항자대 전투기들도 레이더에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철저히 당했다.
제4호위대군은 이제 함포로 고속정에 견제사격을 가하며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함대가 30노트 가까운 속도로 남동쪽을 향하는 사이 고속정의 대집단이 제4호위대군과의 거리를 계속 좁히고 있었다.
- 인해전술을 구사한 한국 해군 고속정대에 이제 미사일은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저들이 숫자를 믿고 몰려오는 것은 고속정에도 여러 가지 구경의 포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정거리와 정확도에서 자위함대를 당할 수는 없었다. 함장은 고속정들이 함대에 접근하기 전에 전멸시킬 수 있다고 자신했다.
"현재 적과의 거리는 17km... 헬기 발진준비는?"
"절반밖에 마치지 못했습니다. 히에이는 격납고에 받은 기관포공격으로 항공요원 다수가 사망했고 헬기도 계류 중에 대파됐습니다. 나머지 3대는 당장 이륙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륙시켜. 상공에서 대기하라고 해."
"예! 지금 이륙시키겠습니다."
헬기는 만약을 위해서 피신시켜 놓아야 했다. 당분간 3호위대군으로 보내면 되겠지. 자, 그래 이놈들 불똥맛을 보여주마. 고야마다 함장은 초반에 크게 당하긴 했지만 포격전이라면 아직 자신이 있었다.
- 제4호위대군 대부분 함정이 장비한 오토 멜라라(Oto Melala) 76밀리 자동속사포는 저지능력이 뛰어났다. 레이더가 탐지한 목표의 방위와 속도, 고도까지 계산해서 이동 예측지점을 정확히 산정한 후 76밀리 유탄을 분당 120발이나 때려 넣을 수 있다. 그가 항해사관으로 림팩에 참가했던 시절에 한국 해군은 똑같은 포로 미사일까지 잡지 않았는가? 하긴, 그 2년 후에 자위대는 표적대신에 그 표적을 끌고 비행하는 미 해군 A-6 인트루더 공격기를 20밀리 팰렁스로 잡아 버렸다. 국제적 망신이었지만 어쨌든 격추는 격추였다.
이제 중요한 것은 속도와 회피와 시간이었다. 제3호위대군이 구원하러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 "멍청한 놈들. 탄도 계산하고 위치를 파악해! 저놈들부터 잡아버리자 6척밖에 안 된다."
명중당하지는 않았지만 물보라가 주위에 치솟자 위협을 느낀 함장이 백구급을 먼저 잡으라고 명령했다. 하루사메와 한국 해군 백구형 고속정이 장비한 76밀리 함포는 똑같다.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같은 회사 제품이었다. 하지만, 같은 함포라도 사격통제장치가 우수한 쪽이 유리했다. 탄도 계산이 끝나고 백구의 위치가 파악되어 사격을 개시하려는 순간, 소함정군에서 화염이 치솟는 것이 스크린에 잡혔다.
"뭐, 뭐야? 저건..."
"레이더에 시그널 파악, 고속으로 수면 위를 스치고 있습니다!"
"저들에게 이제 미사일은 없어. 도대체 저건 뭐냐구?"
- "미사일 200기 이상!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맙소사!"
함교 우현으로 보이는 고속정의 대군이 급속하게 방향을 돌리고 있고, 그들이 쏜 200여 발의 미사일이 다가오는 것이 눈으로 확실하게 보였다.
"저들이 언제 미사일을..."
고야마다 함장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 헬리콥터 격납갑판에 떨어진 선두의 미사일들이 미처 이륙하지 못한 헬리콥터를 우스꽝스럽게 터뜨렸다. 항공요원들이 헬기를 격납고 안으로 필사적으로 집어넣으려 했지만 반쯤 들어가던 시 호크헬기보다 미사일이 먼저 격납고에 들어간 것이다. 장난감처럼 박살 나는 것은 헬리콥터뿐이 아니었다. 함미로 나머지 미사일이 모두 쏟아지자 하루사메도 순식간에 폭발로 이어졌다. 고야마다 함장은 더 이상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상공의 시 호크 3 대만이 살아남아 두려움에 떨면서 생존자를 수색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기함 히에이와 초카이 주위로 고속정 몇 척이 접근하며 기관포 사격을 시작했다. 헬기 쪽으로도 총탄이 날아오자 헬기들은 3함대 방향으로 도망가기 바빴다.
- 12월 16일 06 : 39 쓰시마 남쪽 30km 해상
"사령 동지! 보시기요, 대성공입네다. 다섯 척 모조리 날아갔습네다!”
상기된 홍조가 볼과 눈가에 그대로 남은 고속정장 장재영 상위의 목소리가 떨렸다. 눈가에도 경련이 약간 일었지만 제독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장태석 중장이 흥분을 억제하고 간신히 냉정을 찾으며 또 다른 명령을 내렸다.
"통참으로 보내는 전문을 작성해라. 내용은 [길이 뚫렸다. 1번 국도가 탄탄하다. 우리는 3번을 저지하러 이동하겠다.]"
"네, 알갔습네다. 사령 동지, 기런데 3번이라면..."
장재영 상위가 대답을 하고서도 의아했다.
"침로 1-0-5로 다시 재선정, 전함대 25노트로 감속하라. 이 명령은 평문으로 전파해."
침로 일공오라면 당연히 해상자위대 제3호위대군의 위치였다. 제독이 제정신일까? 장거리 대함미사일을 모두 소진했는데 뭘로 공격한단 말인가. 나머지 스쿠아 150 발로 제독이 미사일 절반만 발사하란 것이 이것 때문이었는가? 장재영 상위의 눈 초점이 잠시 흐려졌다.
- 12월 16일 06 : 40 서울 금천구 시흥2동, 통일참모본부
"[길이 뚫렸다. 1번 국도가 탄탄하다. 우리는 3번을 저지하러 이동하겠다.] 방금 장태석 중장으로부터 수신된 전문입니다. 의장님."
"장 중장이 성공했구만! 각 군 수뇌부로 데이터 링크하기요. 기런데 3번을 저지하다니? 무슨 말인가?"
이종식 차수가 성공소식에 기뻐하는 것도 잠시, 전문 뒷부분을 듣자 의아해했다.
"장 중장이 다른 것을 꾸미는 모양입니다. 3번을 목표로 한다면... 바로 여깁니다!"
인민군 해군 출신인 박정석 전략기획 참모부장이 나섰다. 그는 장 중장의 심중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박 상장이 말을 이으려다 말고 재빠르게 참모회의 구성원들에게 손짓했다.
"의장님 예하 통일참모본부 여러분, 장태석 중장이 새로운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우리가 도와줘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우리가 덫을 만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 "아셨군요, 의장님. 그는 지금 도박을 하는 것입네다. 현재 3함대와 4함대가 포진한 남해에서 최초의 계획으론 두 함대 모두 격파하는 것이었습네다. 하디만 이들이 연합 행동을 하디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대했습니다만... 3함대가 예상보다 너무 뒤로 빠져있었습니다. 기래서 이 부분을 남반부 해군 잠수함이 맡기로 했디요. 저지만 해주기로 하디만 이 작전은 성공 가능성이래 너무 희박합네다. 아울러 항모 항공단이 대함공격에 투입되어야 하니끼니 손실이 지나치게 크게 됩네다. 기리고 상륙지점에 대한 공중지원도 줄일 수밖에 없게 될 것입네다."
박정석 상장이 벌떡 일어나 원탁에 투사된 쓰시마 인근 해상 지도에서 제5고속 타격임무부대의 현 위치를 지시봉으로 짚었다. 참모들이 그 위치를 보자 박 상장이 설명을 시작했다.
"이제 장태석 중장의 계획을 제가 대신 여러분께 제안하갔습네다. 지원이 절대 필요합네다. 여러분. 작전은 다음과 같습네다. 이쪽을 주목해주시기요."
- "현재 마이즈루 제3호위대군에 위치는 이곳입네다. 방금 전에 확인된 아군 초계기 정찰로는 급속하게 서진중이랍네다. 제4호위대군이 궤멸당한 시기에 이들 위치는 동쪽 140km 떨어져서 합류하려 했습니다만, 이들이 4호위대군의 궤멸을 알게 되면 쓰시마 동쪽에 다시 저지선을 설정해설랑 우리 항모와 상륙전대를 방어할 것입네다. 장태석 중장이 지금 이들을 더 동쪽으로 밀어붙이려는 것입네다. 여기를 봐주십시오, 여러분. 이곳에는 공화국 해군... 아! 죄송합네다. 동해함대 소속 로미오급 잠수함들이 포진해 있습네다. 이들은 현재 18척이 전개되어 포항-미시마(見島) 라인 동쪽에서적 함대를 경계하는 임무에 투입되어 있습네다. 이 라인을 통과해서 동해에서 활동 중인 일본 잠수함은 다행히 한 척밖에 없고 이것을 남해함대 소속 잠수함 최윤덕함이 추적 중입네다."
- 최윤덕은 고려 말부터 세종 때까지 무관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장군에게는 재미있는 일화가 많이 남아 있다. 그는 20세에 무과시험을 준비하다가, 왜구가 쳐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 동래까지 달려가 왜구와 싸우느라 결국 시험을 치르지 못했다. 그리고 남해안에 계속해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느라 바빠 계속 무과를 치르지 못했다. 태종이 그를 무과시험 급제자 명단에 올렸으나, 장군은 불합리한 처사라며 거부하고 29세에 기어이 무과에 응시하여 합격한 고지식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종무와 함께 왜구들의 소굴인 쓰시마 정벌에 나선 그는 쓰시마주가 성문을 굳게 잠그고 농성을 준비하자 성 앞에 방책을 치며 장기전에 대비하는 듯한 기만책을 실시했다. 식량이 부족한 쓰시마주는 조선군이 장기전을 준비하는 것으로 속아 저항 한 번 못 해보고 며칠 만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는 무술뿐만 아니라 전략적 식견이 뛰어난 장군이었다.
말년에 그는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승진이 제한된 조선시대 무관 출신으로서는 대단한 출세였다. 김종서, 권율 등 조선시대 유명한 장군들이 문관 출신임을 감안하면, 그는 조선시대 유일의 무관출신 정승이다. 그러나 그는 정치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안에서는 정승, 밖에서는 장군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지만, 정치는 정치가의 몫이라며 왕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정치적 발언도 하지 않았다.
- "장태석 중장은 이 포항-미시마 라인으로 3호위대군을 몰 생각입네다. 장태석 전단이 압박을 가하게 되면 호위대군이 정면충돌을 원할 가능성은 매우 적습네다. 4호위대군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장태석 전단에 대해 츠키와 고마쓰 기지의 잔여기들을 이용해서 항공공격을 실행할 가능성이 큽니다. 3호위대군은 결코 접근전을 허용하지는 않을 것입네다, 분명히..."
일본 해상자위대가 아무리 바보라도 당연히 두 번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심현식 중장은 일본 항공자위대 전투기들의 치열한 공격 앞에 무방비로 노출될 고속정들이 걱정되었다. 미시마(見島)는 야마구치현 북쪽에 있는 섬이다.
"기렇다면 이 해역 북쪽에서 대기 중인 로미오를 이곳에 투입합네다. 3호위대군을 로미오에 맡기자는 것입네다. 항모와 상륙군 호위는 남해함대의 잠수함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여러분!"
씩씩거리는 박정석 상장을 앞에 두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열변을 토한 박 상장에게 잠시의 침묵이 한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가 지금 허가되지 않은 작전에 대해서 브리핑을 해버린 것이다.
-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오?"
한국 공군 출신인 이호석 통신전자 참모부장이 가장 먼저 정적을 깨뜨렸다.
"로미오가 그쪽으로 빠지면 우리 상륙전단이 위험에 노출될 것입니다.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한국 해군 출신 심현식 중장은 소극적이었다. 그는 항모와 상륙전단이 잠시라도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상륙전단은 이번 전쟁의 주력이며, 항모는 대한민국 해군이 처음 갖게 된 대단히 귀중한 무기였다.
"심 중장, 절대 그렇지 아니합네다. 제3호위대군을 저지하면 동해는 완전히 우리 것이 됩네다. 제주도 남방에 전개한 2호위대군이 동해에 진입하려면 하루 이상 걸립네다. 기동안 동해는 완전히 우리 것입네다."
"그것은 마찬가지요. 남해함대의 잠수함이..."
"아닙네다. 잠수함이 완벽하게 차단해 줄 수는 없습네다. 기쪽도 손실이 막대할 것입니다. 내래 얘기하는 것은, 당신네 배들이 위험에 덜 노출될 것이란 말이외다! 우리 로미오가 이 작전에 투입되면 위험도 우리가 무릅씁네다. 심 중장."
논쟁이 심현식 중장과 박정석 상장 사이에서 격발 되었다. 통일한국 해군의 통합지휘권은 물론 통일참모본부 예하 해군작전사령부에 있다. 남북한 해군의 지휘권은 이미 통합되었지만 그렇다고 다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자기 자식이 더 귀한 법 아닌가.
"뭐요? 내가 우리 배만 위험에서 빼자고 이러는 줄 아시오? 우리 항모 호위전력에서는 한 척도 뺄 수 없소!"
"심 중장! 장태석이가 스스로 미끼가 되어 목숨을 건 도박을 실행했는데 고작 항모의 안위가 걱정이라니. 어차피 3호위대군을 붕괴시키면 항모와 상륙부대의 항진도 일사천리요! 정말 당신 바보로군!"
"뭐야? 이 자식이!"
흥분한 심 중장이 벌떡 일어서서 박 상장에게 달려들었지만 이호석 중장이 어깨를 손으로 잡았다. 돌아가는 꼴을 보다 못한 이 차수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왜들 이러시오! 우리가 적을 앞에 두고 지금 싸울 때요? 다들 진정하기요!"
통참이 생긴 이후 이 차수가 이렇게 화를 내기는 처음이었다. 머쓱해진 장군들이 주춤주춤 자리에 앉았다. 통참의 최고 어른인 이종식 차수는 지난번 한중전쟁을 승리로 이끈 최고의 전쟁영웅이었다.
- "심 중장. 로미오 중 일부만 빼갔소, 남쪽에 전개된 9척만 주시오. 북쪽 로미오에게 이동초계를 명하리다. 그들이 발각된다면 결국 일본의 공격을 유도할 것 아니오. 기럼 그때 그놈들 잠수함을 치시오. 됐소? 9척만 주시오."
이종식 차수가 간곡하게 부탁하자 심 중장도 누그러들었다.
"하지만 의장님, 항모전단은 중요합니다. 잠시라도 배를 빼돌리는 것은... 아직 상륙작전은 시작도 못했습니다. 우리는 항모와 상륙전단을 호위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만 합니다."
"알고 있소. 장 중장의 모험은 가치가 있소이다. 실패한다면... 남은 로미오가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줄 것이오."
- '젠장할 영감. 로미오가 일본 잠수함으로부터 항모전단을 지켜준다고? 그 골동품 잠수함이?'
심현식 중장이 속으로 투덜거리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어차피 로미오가 호위임무에서 많은 역할을 기대할 것으로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들과 남해함대 소속 장보고급 잠수함들이 맡은 각자의 구역에서 정확한 협동작전이 로미오가 할 역할이 아닌가? 로미오가 1차 방어선에 서고 장보고급이 후위에 빠져서 로미오가 유인하는 먹이를 물기로 했잖은가. 망할 놈의 이호석, 두고 보자...
심현식 중장이 입을 다물자 변경된 계획에 맞춰 각 군의 세부계획이 수정됐다. 이호석 중장과 박정석 상장이 전투기와 잠수함에게 새로운 지령을 내리기 시작했고 심현식 중장도 해군에 연결해서 초장파(ELF) 통신을 이용해 바닷속에서 대기하는 장보고급 잠수함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하달했다.
- 오늘 밤은 무척 길었다고 생각하며 이종식 차수도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아까의 흥분으로 뒷머리가 당겼다.
'망할 놈에 심현식이! 3, 4 호위대군을 인민군이 모두 까부시는 게 겁나서 그러는 거디? 장태석이 너도 돌아오기만 해 봐라. 종간나. 지 맘대로 놀고 있구만. 묵사발을 내줄 거이야, 간나이...'
이종식 차수가 한편으론 장태석 중장의 안위를 걱정하며 그렇게 혼란스러운 통참 요원들을 물끄러미 돌아다보았다.
-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이지스함 초카이의 함장 야마나시 일등해좌가 전투정보센터 바로 위쪽에서 들려온 폭음에 놀라 물었다. 순간, 퍼뜩 불길한 생각이 든 함장은 놀란 눈을 하고 있는 무기사관을 불러 세웠다. 함장이 목에 걸린 무기고 열쇠를 건네주며 재촉했다.
"빨리 무기고를 개방해서 수병들에게 소총을 지급하라. 어이! 너희들, 같이 내려가!"
할 일이 없던 레이더 조작병과 방공지휘팀이 무기사관을 따라서 재빠르게 내려갔다. 야마나시 함장은 큰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마지막 대함미사일 공격이 시작될 때, 승무원들을 무장시켰어야 했다. 눈이 먼 초카이에서 아등바등 회피만 생각할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전투함에서 백병전을 해야 하다니!'
- "식당으로 내려가는 출입구를 빼고 모두 폐쇄하라. 그리고 부함장. 지금 바로 기관실로 내려가서 엔진을 파괴시켜! 놈들이 노리는 것은 우리가 아니고 바로 배다!"
- 현대전에서 해군은 갤리선 시대의 백병전 같은 낡아빠진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않는다. 누가 총을 들고 싸운단 말인가? 모두 기술자들 뿐이었다. 컴퓨터 단말기나 레이더를 조작하거나 헤드셋을 끼고 음파에 몰두하는 그런 요원들이 현대 해전에 필요한 군인이었다. 해병대원이 자동소총을 들고 함을 경비하는 것은 미국이나 하는 짓이었고, '언더시즈'처럼 테러집단이 전함을 나포하는 것은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 그런 상황이 발생했다.
- 약간만 마셨을 뿐인데 숨이 막혔다. 목구멍이 따갑게 조여지며 망치로 가슴을 두들겨 맞은 듯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무릎을 꿇은 함장의 손에 걸린 권총을 누군가가 발로 걷어찼다.
"역시 남반부 최루탄이 강력하구만요. 전원 무장해제 완료입네다."
방독면을 쓰고 쓰러진 함장의 오른쪽 어깨를 밟은 사나이가 외쳤다. 다른 승무원들은 볼 것도 없었다. 다들 얼굴이 벌게진 채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녔고, 일부는 구토까지 해댔다. 보고를 받은 김현수 중좌가 무전기를 꺼냈다.
"CIC는 제압했다. 함교는 어떤가?"
- 김현수 중좌가 무전을 마치고 엎어진 장교를 일으켜 세웠다. 금줄이 네 개였다. 이놈이 함장인가?
"대좌구만."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운 야마나시 함장은 눈물 콧물을 흘리며 켁켁댔다. 잠시 그를 안쓰럽다는 듯이 쳐다본 김 중좌가 물었다.
"귀관의 관등성명은?"
야마나시 일좌가 대답을 못하고 계속 콜록거리자 뒤통수를 후려갈기려다 멈췄다.
'아참, 조선말을 알 리가 없다!'
김현수 중좌는 멋쩍게 웃었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못 알아듣더라도 처음으로 대하는 외국 정규군 포로였다.
"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김현수 중좌다. 귀관을 포함한 15명은 지금부터 통일한국 해군의 포로다. 귀관과 부하들은 제네바 협정에 의거해서 정규군 포로 대우를 받을 것이다."
상대방이 알아듣거나 말거나 김 중좌는 서둘러 말을 마쳤다. 원래 그들 팀은 포로를 남기지 않는다. 자신들보다 많은 수의 포로를 통제하려면 임무를 계속하는 데 치명적인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 12월 16일 06 : 43 쓰시마 남동쪽 40km
"사령 동지! 초카이에서 평문 통신입네다. 사령 동지를 찾는데 바꿔드릴까요? 김현수 중좌랍네다.”
"바꿔 대라우!"
불타는 일본 전투함 잔해 사이로 고속정들을 진입시키며 흐뭇해하는 장태석 중장에게 통신병이 보고했다. 장 중장은 김현수 중좌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 통신병이 넘긴 수화기를 덥석 집어 들었다.
[물개 애비입네다. 큰 우산에 올라타고 있습네다. 지금 두목을 잡았고 전체를 제압 중입네다. 지원이 필요합네다.]
"메이 어드래? 우산에 올라탔다고? 데렌! 알았다. 지원을 보내갔다."
[걱정했습네다. 이곳에도 유도탄이 떨어질 줄 알았습네다. 이 독한 놈들이 기관실을 파괴했습네다. 아참! 작은 우산은 살아 있습네까? 길타면 진압하시라요, 왕대빡은 기대로 있을 겁네다.]
이런! 입이 벌어지다 못해 눈물이 글썽거렸다. 공격과 방어능력을 잃어버린 초카이와 히에이를 마지막 공격에서 제외시킨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장태석은 김현수 중좌팀이 이미 차가운 바다에서 동태가 됐을 것으로 짐작하고 수색을 지시했던 참이었다.
"알았어. 작은 우산은 내래 맡갔어. 동무는 무리하게 들어가디 말라우. 내래 지원팀을 보낼 테니끼니 그때까진 자중하라. 알갔나!”
[예, 알갔습네다. 기다리갔습네다!]
- 장태석은 김현수 중좌와의 교신을 끊고 잠시 멍청하게 서 있었다. 그는 갑자기 발로 바닥을 몇 번 구른 후에야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랑스러운 부하들을 두었다며 뿌듯해졌다. 그는 명령을 내리면서 그 어느 때보다 당당했다.
"호출하라우, 황구전대에서 6척, 풍산개전대에서 4척을 차출하라우, 황구를 지금 히에이로 보내서 점령시킨다. 풍산개는 초카이로 보내서 김 중좌를 지원하도록 하라야!"
장태석 중장의 명령을 받은 장재영 상위가 다시 통신기 앞에서 바빠졌다. 그리고 속으로 덧붙였다.
'해적이구만...'
입이 찢어진 것은 장 중장이었다. 한껏 입을 벌리고서 새벽 바다냄새를 받아 마셨다. 입을 아귀처럼 벌리고서 한바탕 웃음 뒤로 수많은 고속정 가운데 몇 척이 빠져나와 초카이와 히에이로 향했다.
- "제4호위대군의 명예를 지켜야 합니다. 끝까지 함을 사수해야 합니다! 자침은 절대 안 됩니다!"
해장보의 간단한 질문에 부함장이 속사포처럼 대답했다. 시마즈 해장보가 피식 웃었다.
"그럼 적에게 나포되란 말인가? 그게 명예일까? 히에이는 이미 죽었네. 자넨 빨리 나가서 퇴함을 지휘하게."
부함장은 잠시 부들부들 떨더니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부함장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차렷자세를 취하더니 장중하게 거수경례를 붙였다. 정보정보센터에 있는 승무원들 전원이 일어나 사령관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승무원들은 함대사령관을 전투정보센터에 남겨두고 천천히 빠져나갔다.
- 함장은 전사하고 호위대군 사령은 자폭하는 함에 남았다. 막강한 제4호위대군은 완전히 사라졌다. 함대는 이제 패잔병 300여 명이 물 위에 떠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다. 부함장은 파도 위에 천천히 밀려가는 구축함 히에이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다. 노를 젓는 수병들도 말없이 구축함의 최후를 목격했다.
만재배수량 5,050톤에 헬기 3대를 탑재하는 거대한 구축함은 동시에 세 군데에서 시뻘건 불기둥이 치솟았다. 구축함이 있던 곳을 중심으로 섬광의 파문이 검은 바다 위를 빠르게 동심원을 그리며 번졌다. 폭음이 파도와 하늘을 진동시켰다. 함수 전방에 있던 주포가 반쯤 찢겨져 하늘로 튀어 오르더니 불탄 종이마냥 너울거리며 날아갔다.
다시 한번 함교 아래에서 대폭발이 일어났다. 갈기갈기 찢긴 구조물이 화염에 녹으며 공중에서 폭발을 일으키며 함수와 함미가 바다 위 한가운데에서 부딪혔다. 굉음을 내며 사라져 가는 기함을 보며 승무원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 12월 16일 06 : 48 도쿄도 미나토쿠 롯폰기
"이럴 수가! 4호위대군이 궤멸입니다."
하토야마 해막장이 놀란 목소리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곧이어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된 오퍼레이터들이 놀라운 소식들을 전했다.
"E-767 3번기로부터 보곱니다. 현재 한국 해군 고속정대가 제3호위대군으로 급격히 접근 중, 거리 130km입니다. 총수효는 170척, 속도 30노트."
"이지스함 초카이가 4척의 북조선 고속정과 함께 북상 중 나포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기함 히에이는 자폭한다고 알려왔습니다."
오퍼레이터들의 비명이 이어지자 통합막료회의 전체가 경악했다. 시마즈 해장보가 기함과 함께 자폭하다니, 과연 사무라이의 후예다운 장렬한 전사이긴 했다. 그러나 막강한 호위대군 하나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충격적인 소식들이 순간적으로 통합막료회의장을 침묵에 빠뜨리자, 의장 이토 히사오 육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으나 비명과 다를 게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하토야마 해막장."
"저들 고속정 가운데 장거리 대함미사일을 장비한 것은 얼마 안 됩니다. 우리는 저들을 항공공격과 결합한 양동공격으로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실제 주공이었습니다."
"아니, 주공이라니. 대함미사일을 장착한 고속정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했잖소? 어떻게 저들에게 당했단 말이오?"
이토 육장의 질문에 하토야마 해막장은 침통할 수밖에 없었다.
"저들은 4호위대군에 15km까지 접근한 후, 포격전을 치른 지 불과 몇십 초 지나지 않아서 미사일을 발사하고 그대로 동진 중입니다."
"사정거리 16km의 미사일이라니. 그런 대함 미사일을 저들이 장비하고 있나요? 하토야마 해막장."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지 모든 게 불분명합니다. 하나 저들이 쏘았다는 미사일은 시 스쿠아 미사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분명히 급거 개조한 물건입니다."
"헬기용 대함미사일이라니. 그런 소형 미사일에 함대가 모두 박살 났단 말이오?"
“200발 이상이 발사됐단 말입니다. 그런 숫자엔 어쩔 도리가 없지 않겠소?"
하토야마 해막장이 안 그래도 폭발하려는 분기를 가까스로 억제하는 참에 이토 육장의 질문 공세에 짜증을 버럭 냈다. 그렇다고 분노로 해결할 일이 아니었다.
- 남은 상급 지휘부와도 전혀 연결이 되지 않았다. 분견대 본부에 설치되어 있던 통신망 IDDN은 첫 공습 때 일찌감치 파괴되어 버렸고, 남은 것은 중대용 단거리 통신기뿐이었다. 이걸로 기를 쓰고 연결을 시도한다면 후쿠오카의 4사단 정도와는 교신이 가능하겠지만, 해봤자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뭐지? 이 소리는..."
문득, 낯선 소리가 들리는 느낌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터빈 엔진의 부릉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바로 뒤에서 작업하던 한 자위관이 그를 향해서 소리쳤다.
"일등위님, 엎드려요!"
쉬익 하는 로켓 발사음이 귀를 울렸다. 급히 몸을 날려 땅바닥에 엎드리는 순간, 등뒤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에 하늘을 향해 솟구친 파편과 흙먼지가 등뒤로 우수수 쏟아졌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어느새 10여 대의 Mi-24 하인드 공격헬기와 500MD 헬리콥터가 나타나 조명탄을 떨어뜨리고는 신나게 기관포와 로켓탄을 뿌려대고 있었다.
"제기랄! 건십(gunship)이라니..."
공격헬기 중 하나는 바로 그의 코앞 30m에서 고도 10m로 내려와 하버링 하면서 요시오 일등위 왼쪽에 있는 단거리 통신설비를 향해 기관포탄을 날리고 있었다. 곧 엄청난 폭음과 폭풍이 그를 향해 불어왔다. 잠시 머리를 싸잡고 푹 숙이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오른쪽을 보니 그쪽에는 조금 전에 완성된 참호가 하나 보였다. 헬리콥터는 기관포를 계속 그의 왼쪽 방향으로 꺾어놓은 채 새로운 목표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벌떡 일어나서 버려진 참호를 향해 달렸다.
- 하인드에서 로프가 내던져지고, 위장복을 입고 얼굴에 무광 흑색크림을 칠한 병사들이 강하자마자 공항을 점거하기 위해 관제탑과 터미널을 향해 뛰었다. 병력을 모두 내려준 하인드 공격헬기들은 다시 고도를 올려 언제 있을지 모를 화력지원 요청에 대비해 주변 상공에 대기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사격할 기회가 없었다. 쓰시마 공항청사에 녹색 통일한국기가 게양되었다. 일본에 정착한 한반도 도래인(渡來人)들의 중간기착지였던 쓰시마, 조선시대 초에는 경상도 관할이었다가 수백 년 동안 독립정치세력을 유지했던 쓰시마가 다시 한국인의 점령지가 된 것이다.
- 12월 16일 06 : 53 포항 남동쪽 해상 100km
한국 해군 제1항모기동전대의 기함이며 한국 최초의 중형 항공모함인 이순신함 함교가 잠시 적막에 휩싸였다. 통참으로부터 평문전언통지문 하나와 고속으로 데이터 링크된 파일을 받은 항모전단장 윤도선 소장이 잔뜩 긴장하며 전통의 내용을 훑었다. 파일이 암호해독기에서 해독되는 사이 전문을 읽는 윤도선 소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개떼 작전이 성공했다!"
- 윤도선 소장이 함교 승무원들에게 발표하자 여기저기에서 환성이 일었다. 승무원들은 그들을 수십 년 간 짓눌렀던 일본 해상자위대에 대한 열등감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대형 전투함들로 구성된 호위대군 하나가 고속정들의 공격에 전멸했다는 게 아직 믿기지 않았지만, 이제는 자신감이 생겼다. 한국에는 작긴 하지만 항공모함도 있지 않은가!
- 암호해독기에서 작업이 끝난 파일은 분량이 많았다. 통신병이 프린트해서 들고 온 자료를 건네받은 윤 소장이 안경을 집어 들었다. 물론 앞의 16페이지는 모두 가짜였다. 진짜 작전은 짧은 몇 마디 로그 속에 묻혀 있었다. 통참 의장이 인민군 출신이라 난수표를 어지간히 좋아한다고 투덜거리면서 윤도선 소장이 라인 해독표를 들었다. 시간에 따라 줄을 선택하게 되어 있는 복잡한 방법으로 필요한 문장 세 개를 찾아내며 무심코 안경 끝을 입으로 물었다.
'3호위대군 유인... 3호위대군 유인이라.'
윤도선 소장이 한참 중얼거리다가 항모비행단장을 급히 불러들였다. 눈앞에 떡을 둔 상황에서도 자칫 치명적인 실수를 걱정하는 윤 소장의 신중함이었지만, 이번 사냥에서는 타이밍이 중요했다. 그도 그런 위험을 알고 있었지만 서두르는 가슴에서 두근거림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 비행갑판에서 대기 중이던 수호이-33 전폭기에 긴급명령이 내려졌다. KH-35, 하픈과 비슷하다고 하픈스키란 별명이 붙은 이 공대함미사일을 장착한 수호이 전폭기가 재무장 명령을 받고 공대공 무장으로 교환하느라 정신없었다. 격납고 내에서 공대공 무장을 마친 수호이 전폭기들도 남는 시간에 기체를 정비하느라 비좁은 공간에서 숨 돌릴 틈이 없이 바빴다.
통일한국 해군항공대 황인호 중령은 정비요원들이 공대공미사일을 장착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미사일 자체의 결함으로 발사되지 않거나 목표에 명중해도 폭발하지 않는 경우가 있지만, 장착이 잘못되어 발사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기장님. 동체 밑에 알라모 다시 체크 좀 해줘요. 그놈이 제일 중요한데 말입니다. 그리고 엔진소리가 좀 이상해요."
“방금 둘 다 점검했습니다. 맘 놓으십시오, 중령님."
기장이라고 불린 나이 든 원사가 말은 그렇게 무뚝뚝하게 했지만 싫지는 않은지 짧은 미소를 띠었다. 군에서는 기체 정비를 맡은 정비요원 중에서 최상급자를 기장(機長)이라고 부른다. 원래 정비를 맡은 하사관들이 정비팀장에게 붙인 말이다.
- 정비요원들 시각에 따르면, 전투기의 주인은 그들 정비병들이고, 조종사는 단지 기체를 잠시 빌려 타는 손님에 불과하다. 전투기가 이륙할 때 정비요원들이 도열하는 것은 조종사의 무훈을 비는 것도 아니고, 장교인 조종사를 존경해서도 아닌, 그들이 정을 듬뿍 준 기체가 안전하게 돌아오길 비는 것이다. 서투른 조종사가 그 기체를 탔을 때는 기체에 탈이 날까 봐 정비요원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만큼 기술하사관들은 자존심이 강하다. 민항기 회사에서 자주 스카우트 손길을 뻗치지만, 그 좋은 조건을 마다하고도 군에 남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과 직업의식에 자부심이 크기 때문이다.
- "으휴, 선배님. 말투 좀 제발 고치십쇼. 죽었다 살아온 후배한테 하시는 말씀이..."
"그러니까 착함 좀 잘해보란 말야. 울릉도에 착함 유도등까지 세팅해 놓고 눈물 나게 고생했으면 나아져야지, 그게 뭐야? 이젠 잘못하면 맥이야, 꽥! 오리 엉덩이에 비누칠하면 물에 빠져 죽는 거 알지? 우린 해군이지만 물에 빠지면 죽는 오리 해군이야. 왜! 왜!"
김종구 대위는 조금 전 착함에서 두 번이나 어레스팅 후크를 걸지 못했다. 갑판에 설치된 착함용 강철 와이어에 비행기 후미에 달린 고리를 걸지 못하면 착함한 뒤 제동을 할 수 없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다시 이륙하는 수밖에 없다. 아슬아슬하게 재연소 장치를 켜고 날아올라서 다시 착함을 시도했지만 또다시 실패하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자위대 F-15 전투기 두 대를 잡고 기체에 킬마크를 그리려면 김종구는 살아서 착함해야 했다. 항모 착함은 전투기부터 여객기까지 다양한 항공기를 조종한 경력이 있는 황인호 중령도 아직 익숙하지 못했다.
"나야 예전에 홍콩 카이탁 공항에서 보잉 747로 눈물 나게 맞춰봤지. 거기도 랜딩 미스하면 바다에 꼬라박는 건 마찬가지였어. 킥킥~"
황인호는 매사 태평했다. 그들이 짧은 기간 울릉도에서 훈련하는 동안 프랑스 해군에 위탁 교육까지 검토됐었지만 예상외로 빠른 전황이 그 기회를 무산시켰다. 그리고 애초에 미국은 한국이 항공모함을 갖는 것 자체를 반대했다. 중국이 항모 4척을 보유하고 일본도 중형 항모를 건조 중이었지만 주변국 간의 군사균형을 무너뜨린다는 주장이었다.
- 12월 16일 06 : 53 쓰시마 동쪽 100km 해상
"침로 3-5-0, 속력 9노트."
추적하던 일본 잠수함을 놓친 지 30분이 지났다. 한국 해군 잠수함 최윤덕함의 사령실에는 간간이 함장 최승호 상좌의 명령만 짤막하게 떨어질 뿐, 사령실 전체에 고요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 포항과 미시마를 잇는 한국 해군의 저지선 안으로 스며 들어온 일본 잠수함도 이제는 전쟁이 일어난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한국해군 항모전대에 가장 근접한 그 잠수함이 공격행동을 취하면 아군함대는 위험에 처할 것이 분명했다. 긴장한 최승호 상좌의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일본 잠수함이 수중항주 중에 끌고 다니는 예인소나를 경계해서 직후방 추적이 아닌 열 시 반 추적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즉 목표를 315도 방향에 놓으면 목표가 이쪽을 탐지하기 어렵지만, 목표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거나 하면 이쪽이 목표를 계속 추적하기도 훨씬 어려워지는 것이다. 복잡한 침로로 수중을 항주하는 잠수함에게 이런 추적방식은 어려운 일이었고, 지금 그런 상황이 진해중이었다.
- [음탐실입니다. 방위 0-0-5에서 미약한 진동!]
"어디 보자."
드디어 기다리던 소식이 왔다. 최승호 상좌가 마이크를 곽일준 소령에게 넘기고 음탐실로 급히 뛰어갔다. 잠수함의 눈과 귀인 음탐실은 사령실 옆에 붙어 있다. 음향 탐지 작업은 고도의 정숙함이 필요하기 때문에 두터운 방음구획으로 감싸여 있다.
"여기 보십시오. 미약한 진동음입니다. 파장으로 볼 때 디젤엔진구동음입니다."
음탐선임하사 박 중사가 헤드폰을 벗으며 콘솔을 조작하자 화면에서 그래픽으로 바뀐 음문이 컬러로 변환되어 나타났다.
"기럼 디젤엔진이란 말이다. 기래. 잡았다. 부장 동지! 공격준비하라우요."
- 최승호 상좌는 스스로 직감이 뛰어난 편이라고 자부했다. 어려운 추격전에서 세 차례나 목표 잠수함을 놓쳤지만, 결국 그가 찍었던 방위가 들어맞았다. 물론 50퍼센트 확률이고, 만약 추적에 실패했다면 빨리 항모에 다가가서 육탄방어를 해야 했다.
역시 그의 직감이 옳았다. 7시간 동안이나 헤맸지만 보람이 있었다. 저 디젤 잠수함은 드디어 숨을 쉬러 수면으로 올라온 것이다.
"스노클링 시간은 5분이갔다?"
"예! 4분에서 5분입니다."
"음탐장, 추정거리는 얼마인가?"
"대륙붕 지형이라 산란파가 심합니다. 거리는 장담할 수는 없지만 30km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함장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우리 소나와 제 귀를 통틀어서 50km 이상은 무립니다."
음탐반에서 감각이 뛰어난 박 중사가 몇 마디 덧붙였다. 수심이 깊은 심해에서는 소나 효율이 좋아지지만 이런 대륙붕 지형에서는 해저에 난반사되는 음향이 해저와 수면 사이에서 교란되기 때문에 거리측정에 애를 먹게 된다.
- "부장 생각은 어떻소?”
"저놈은 아까운 먹이입니다. 그리고 거리가 항모전대에 너무 가깝습니다."
"길티. 하디만 우리가 저놈을 좇아 너무 깊이 들어가면 당초 명령을 수행하는 데 지장이 있지 않갔소? 3호위대군에서 멀어디면 앙이 되오."
최승호 상좌가 난감한 듯 이마를 손으로 비볐다. 이런 경우에는 적 잠수함은 포기해야 했다. 최윤덕함의 첫 번째 임무가 3함대 저지이기 때문이다. 항모로 접근하는 목표에 대해서는 항모전대에 경고만 발령해 주기로 했었다.
그렇다고 잠수함을 그냥 놓아줄 수는 없었다. 숨어 있는 잠수함을 탐지하여 격침시키는 것은 수상함이나 대잠헬기에 너무 힘든 일이다. 만약 잠수함이 탐지되기 전에 공격을 가한다면, 한국 해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공격하기 전에 오라이언을 부르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장보고의 새로운 보고로는 이 해역에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두 척이 더 있을 것 같답니다. 노출하기엔 상황이 불투명합니다. 합동공격 세부좌표는 이미 세팅해 놓았습니다. 함장님."
부함장 곽일준 소령이 대답을 마쳤다. 그의 의견은 무리가 따르더라도 1회의 항공공격을 제안하는 것이다. 쓰시마 동해상 제공권이 혼전을 거듭하는 가운데 양측의 대잠초계기들은 발이 꽁꽁 묶였다. 대잠헬기나 대잠초계기는 잠수함에게는 무서운 존재이지만 전투기 앞에서는 말 그대로 밥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해군 오라이언에게 협동을 요청하기는 너무 부담스러웠다.
"바보들이 뜰라고 하갔소?"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해역에서 제공권 장악 여부가 불투명합니다. 최악의 상황이라면 아군과 일본 놈들 모두 대잠초계기가 뜰 수 없습니다. 우선 항모 호위전대에 연락을 취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놈들을 쉬게 하면 안 됩니다. 그들도 밥벌이는 해야 합니다. 함장 동지."
곽일준 소령이 웃자 최상좌도 웃었다.
"남반부 동지들이래 웃음이 헤프구만? 좋아. 1회 공격을 요청하갔시요. 공격좌표와 8과 우리 좌표를 입력해서 통신기를 띄우시오. 자자, 빨리 서두르라우!"
- 6미터 길이의 어뢰를 빼고 넣기는 쉽지 않았다. 진땀을 흘리며 어뢰반원들이 하픈을 밀어 넣은 후 개폐구를 닫았다.
핵잠수함이 아닌 재래식 잠수함에게는 디젤엔진 구동을 위해 스노클을 수면 위로 올릴 때가 가장 취약한 시간이다. 스노클이나 ESM 안테나가 적 대잠초계기의 레이더에 걸릴 우려도 있고, 디젤기관에서 뿜어지는 뜨거운 공기가 적외선 탐지기에 포착될 우려도 있다. 오야시오의 디젤 발전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가며 수중항행에 필요한 전기를 축전지에 충전하는 동안 다카노 함장은 무척 초조했다.
"충전 상태는 어떤가?"
"현재 95퍼센트 완료입니다. 20초면 다 끝낼 수 있습니다. 함장!"
기관장의 보고를 받으며 다카노 함장은 이 해역에 대잠초계기의 활동이 없는 것이 의아스러웠다. 아군이 제공권 장악에 실패했던가, 아직 어느 쪽도 일본해의 항공우세를 선점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스피커를 통해 수측실에서 보고가 들어왔다.
"방위 1-9-0에 감도 증가. 예인소나에 뭔가 잡힙니다."
"뭐라고?"
그쪽 방향에 있던 북한 로미오급 잠수함은 떨쳐 버린 지 오래였다. 그 구식 잠수함들을 해치울 구레 4호위대군은 이미 박살 났지만 그렇다고 로미오를 잡는 데 오야시오가 나설 수는 없었다.
- 로미오는 구 소련제 구식 잠수함이다. 한국이 분단됐던 시절 남한의 상선대 습격을 위해 배치된 그 잠수함은 일본 잠수함을 상대하기에는 소나와 전투정보 시스템, 무기 등 모든 것이 구식이었다. 가장 큰 위협은 한국이 장비한 독일제 잠수함이었다.
- 바다 깊숙한 곳에서 활동하는 잠수함에는 일반 통신 주파대의 전파가 도달하지 않지만 파장이 수 킬로미터에서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초장파 통신은 가능하다. 그 대신 초장파는 짧은 문장밖에 처리할 수 없다.
"수신코드 확인. 내용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간신히 추적 중인데, 보내라는 오라이언은 오는 기야 앙이 오는야? 도대체 무신 명령이란 말이디?"
투덜거리는 함장 뒤로 통신반 요원들이 느릿느릿 수신되는 명령문을 해독하느라 바빴다.
- "함장 동지! 명령문 수신 완료했습네다."
"됴아. 날래 가져오기요..."
어눌한 평안도 사투리로 보고가 올라왔다. 통신장 유 중위는 부산 출신이지만 평안도 출신 함장 밑에서 근무하다 보니까 어느새 평안도 사투리가 입에 배었다. 처음에는 다른 동료들처럼 장난으로 함장 말투를 흉내 내다가 나중에는 함장의 실력에 반한 것도 그 이유였다. 최 상좌는 그만큼 남한 출신 승무원과의 교감도 빨랐다.
"3번을 유인중. 로미오 10에서 18번까지 아홉 마리가 3번 먹이에 할당. 아앗, 함장 동지!"
유 중위가 이제야 수신이 끝난 음어 명령을 읽으며 외마디 고함을 질렀다.
"큰일 났간? 기습은 어케 됐네? 날래 말하라우. 유 중위!"
최 상좌가 눈이 휘둥그래지며 유 중위를 재촉했다.
"함장 동지! 작전 성공입네다. 제4호위함대 궤멸. 상륙부대도 예정대로 출발했습니다. 기리고..."
"이 간나이. 이리 내노라우!"
최 상좌는 놀랬다는 듯이 한숨을 삼키고 유 중위의 머리를 한 대 가볍게 쥐어박은 후 전문을 읽어 내려갔다. 머리를 긁적거리는 유중위는 그래도 좋다고 씨익 웃었다.
- '젠장, 어드래 작전이 이 모양이간? 로미오가 자리를 비운다고?'
함장이 골똘하게 생각에 빠진 사이 유 중위의 이야기를 들은 사령실 요원들 사이에 흥분이 파문처럼 번졌다.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던 고속정들이 떼 지어 몰려들어 막강한 일본 해상자위대의 1개 호위함대를 박살 냈다는 것이다.
"목표 5의 행동을 보고하라."
함장이 마이크를 잡고 음탐실에 물었다. 음탐실에서 미리 예상했는지 즉각 대답이 왔다.
"현재 0-3-5도로 침로, 속도 유지. 침묵상태로 이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로미오 8번과 목표 5의 거리는?"
"25km 정도입니다. 아직 발각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작도판에서 씨름하고 있던 항해장도 즉시 대답했다. 로미오 8은 마지막 후위였다. 포항 - 미시마 라인에서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8은 침묵을 유지하며 다가오는 위험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좋아. 오라이언을 기다립세다. 놈들이 반응한 다음에 목을 치기요."
함장 최승호 상좌는 시간을 벌기로 했다. 오라이언이 오지 않는다는 연락도 없었잖은가.
- "음탐실입니다. 추정방위 0-7-0에 새로운 탐신음. 거리 불명입니다."
"잉? 이곳에 일본 잠수함이 한둘이 아니구만 기래? 호위대군을 치기 전에 안방부터 정리해야 하디 않았서? 도대체 어드렇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구만."
최승호 상좌가 씩씩대며 다시 음탐실에 들어섰다. 박 중사는 음탐실로 들어서자마자 소나 디스플레이에 눈을 고정시킨 채 함장에게 보고했다.
"무음잠항 중입니다. 소음 레벨은 목표 5와 조금 다릅니다. 비교적 소음이 큽니다. 예전의 음문 데이터와 비교해 보겠습니다."
박 중사가 키보드를 조작하며 10여 년 간 일본 잠수함을 추적해서 저장한 음문 그래픽 데이터와 하나씩 대비했다. 스펙트럼 파장처럼 소나로 탐지한 목표 잠수함의 소음도 그래프로 변환되어 눈으로 읽혀졌다.
"하루시오급 초기형 같습니다. 하야시오와 비슷한 음문입니다."
"비교 데이터가 하야시오 음문인가?"
"그렇습니다, 함장님. 추적번호 6을 부여합니다."
"추정거리는?"
"40km로 추정됩니다. 이놈은 더 빠르게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동 방위는 조금 있어야 확실해질 것입니다만 항모전대를 향하는 것입니다."
"항모 호위부대들은 대체 뭐 하는 기야? 이거 우리가 다 맡아야 하누? 이거 난리구만. 부장 증속하라. 6노트로 침로 0-2-5도!"
[증속, 6노트로 침로 0-2-5!]
툴툴거리던 함장이 마이크를 잡고 사령실에 명령을 내렸다.
"동력, 연료전지 발전모드로 전환한다. 30퍼센트 가동."
[동력, 연료전지 발전모드, 연료전지 가동, 출력 30퍼센트로!]
- 최윤덕함이 탑재한 연료전지 중 1/3이 작동하며 수소와 산소를 빨아들인 후 전기를 만들어냈다. 노트 속도에 필요한 전력과 함의 전자장비를 작동한 후 나머지 전력은 배터리를 충전했다. 연료전지 반응에서 생긴 물이 관을 따라 전방구역에 있는 물탱크로 흘러갔다. 요원들의 샤워에 필요한 물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승무원들이 마시는 물이 북한산 신덕샘물인 것을 최 함장이 알게 된 것은 바로 며칠 전이었다.
한국 해군 잠수함은 조용히 물속을 항진했다. 새벽부터 계속된 추격전은 이제 새로운 양상으로 펼쳐지게 되었다.
- 다카노 함장이 부함장에게 설명했으나 1차 공격은 하픈으로 시작했어야 했다. 그러나 상공에 있는 한국 해군 오라이언에게 발각당할 위험이 너무 컸다. 그가 거리를 좁히기로 한 결정이 오히려 잘된 것이었다. 미사일이 오라이언의 눈에 띄면 오야시오의 위치도 바로 드러나고 말 것이다.
"공자대는 뭐 하는 건가. 이곳에 적 대잠기가 날도록 허용하다니. 그렇다면 우리 오라이언들은 왜 활동하지 못하는 건가?"
[수측실입니다. 적 항모전대, 음향으로 분류가 가능해졌습니다. 추적번호 부여를 시작하겠습니다.]
"됐어. 드디어 우리가 추적할 수 있게 됐군. 부함장."
"예. 함장님."
"오라이언이 물러가면 하픈 공격을 실시한다. 2번 발사관을 빼고 모두 하픈이 장전됐겠지?"
"완료됐습니다. 발사 후엔 바로 어뢰를 재장전하게 됩니다."
"좋아. 수측조에서 항모를 추적하는 즉시 공격을 실시한다. 오라이언은 신경 쓰지 말게. 이 정도 속도에서 오야시오는 절대 발각되지 않는다."
- 오야시오 선체 곳곳을 둘러싼 음향흡수코팅은 능동소나 탐색에서 반사음을 줄여 쉽게 발견되지 않는 장점이 있는데다 내부에서 발생하는 소음도 줄여주는 효과를 낸다. 이미 함 주위에 뿌려진 오라이언의 디카스(DICASS : 능동형 소노부이)가 한 시간 수명의 배터리를 다 소진했는지 음향이 점점 미약해지고 있었다. 수동형 소노부이인 디파(DIFAR)도 같이 깔렸겠지만 오야시오가 이 정도 속도로 움직일 때는 거의 발견하기 힘들 것이다.
함장 다카노 이해좌가 걱정하는 상황은 항모전대를 공격한 후에 몰려올 대잠헬기였다. 좁은 지역을 상대로 한 수색에는 대잠초계기보다 대잠헬기가 오히려 더 위험했다. 소노부이와 달리 헬기에 감아서 수납할 수 있는 디핑 소나는 추적능력이 훨씬 뛰어났다.
문제는 제공권이었다. 항공자위대가 이곳 하늘을 확실히 지켜주지 못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카노 함장은 최적 공격거리를 다시 한번 골똘히 생각했다. 물론 항모도 격침시키고 오야시오도 빠져나와야 했다.
- 12월 16일 08 : 09 쓰시마 동쪽 100km 해상
"오라이언 두 대가 소노부이만 뿌리고 그냥 도주합니다. 함장님."
잠수함 최윤덕함의 사령실에서 곽일준 소령이 물 위의 상황을 최승호 상좌에게 보고했다.
"멍청한 간나들, 뿌렸으면 책임을 지고 가야디 기냥 날르면 어카자는 기야. 부장 동지. 길티 않소?"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자위대 전투기 2개 편대가 급속 북상 중이랍니다. 자기들 잠수함을 호위하기 바쁘군요. 놈들이..."
- 잠망경 심도로 부상한 후, 전파수집용(ESM) 마스트가 올라가고 2분 동안 많은 전자정보가 수집됐다. 다행히 이곳에서는 일본 초계기의 활동이 없었다. 최승호 상좌는 다시 잠항을 명령했다.
[목표 방위가 변합니다. 초계기 존재를 알고 빠져나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침로 0-1-5도, 약간 감속했습니다. 노이즈가 희미해집니다.]
"목표와의 정확한 거리는?"
"소음 수준이 낮아졌습니다. 현재로선 정확한 거리 불명. 추정거리 25km입니다.]
그 이상의 정보를 음탐실에 바란다는 것은 무리였다. 이 근처는 심도가 너무 낮은 데다가 목표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좋소, 발사관 주수합세다. 명령하기요."
"발사관 주수하라. 1, 5번과 4, 8번 주수 한다."
부함장 곽일준 소령이 세부사항을 보완했다. 잠을 잘 때도 목표침로와 예상침로, 공격방위 등을 천장에 그리는 그도 젊었을 적에는 그 자리에 녹색 당구대와 당구공을 그렸었다. 잠수함을 탄 이후부터는 천장에 당구공 대신 어뢰를 그리기로 했다. 당구보다 속력과 방향이 훨씬 중요한 게 잠수함과 어뢰였다. 그것은 생명에 직결됐다. 그리고 무척 재미가 있었다.
- "로미오 8과의 거리는?"
"10km 정도일 것입니다. 거리가 멀어지고 있습니다."
"8이 겁먹었군. 죽은 듯이 잠자코만 있다니..."
"예․ 북동쪽으로 좀 더 빠질 생각인 것 같습니다."
부함장이 작도판으로 나아가 컴퍼스를 빼들었다. 일본 잠수함과 항모전단 사이의 거리는 70km밖에 되지 않았다. 오야시오는 오라이언이 바다에 소노부이 저지선을 깔자 소극적으로 변했다. 아마 뒤로 물러서 매복을 하려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하지만 잠수함은 항모전단이 하픈 사거리 내에 들어왔는데도 아직 공격을 시작하지 않았다. 놈이 노리는 것은 항모를 직접 추적해서 공격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 거리에서 어뢰 배출음이 들리겠소? 부장?"
"거리는 충분합니다만 들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최저 레벨로 스윔 아웃하면 어뢰항주음은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거리에서 공격할 수는 없습니다. 거리가 너무 멉니다."
- Swim-Out은 어뢰가 발사관에서 자기 추진으로 빠져나오는 방식이다. 미국과 일본이 압축공기를 사용하여 어뢰를 발사하는 방식에 비해 소음이 매우 적은 장점이 있다. 곽 소령이 의아해하며 나섰지만 함장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로미오 8에게 저놈을 노출시킵세다. 기리고 뒤를 차단합세."
"네? 그렇다면 목표 6, 하루시오급 잠수함은 어떡합네까?"
"부장. 목표 5는 그들에게 맡깁세다. 대신 우리가 도와주는 거외다. 어뢰 속도를 8노트로 산정, 이곳으로 밀어 넣은 후, 이놈이 반응하면 아군 대잠헬기나 잠수함이 칠 수 있을 것이오. 우리는 목표 6을 맡은 다음 3호위대군으로 갑세다."
최 상좌가 가리키는 손가락이 최윤덕함에서 길게 타원을 그리며 오야시오의 오른쪽 옆구리를 향했다.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식별부호는 로미오 8이었다.
- "로미오 뿐입니다."
"기렇소. 로미오가 막아줄 것이오. 어뢰 발사, 유선유도로 세팅. 발사 방위 0-4-5."
'이런! 이게 북한식 잠수함 전술인가? 로미오 8은 진짜 소모품이군...'
곽일준 소령이 의아해하며 함장의 냉혹한 명령을 받아 어뢰실에 지시했다. 명령은 명령이었다.
- "알겠습니다. 5번 어뢰관 개방하라. 개방 25초 후 발사한다. 유선세팅. 사격지휘장치와 데이터링크 점검하라."
어뢰의 방위와 속력이 결정되고 다시 최윤덕함의 사격지휘 컴퓨터에 연결되어 통신상태가 점검됐다. 그리고 전투정보시스템과 연결되자 목표표시 시스템에 어뢰 유도장치에서 수집한 정보가 나타날 수 있도록 새로운 윈도와 접속표시가 나타났다.
"발사준비 완료!"
- "수중에 돌발음! 방위 1-7-0도에서 고속항행 노이즈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뭔가? 그놈인가?"
경보에 따르면 70km 가까이 접근했을 일본 잠수함을 아직도 발견하지 못하자 함장 손현식 중령은 잠시도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음탐실에서 보고를 듣자마자 그는 냅다 음탐실 쪽으로 뛰었다.
"캐비테이션 노이즈(항주잡음)입니다. 거의 20노트에 가까운 속도로 보입니다."
졸린 듯 마른 목소리로 음탐장이 설명했다. 어젯밤 출항하면서부터 감시를 했던 임 상사는 교대직전에 총원전투배치에 들어가자 그대로 눌러앉았다. 교대를 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교대할 수도 없었다.
- "무엇인가에 쫓기고 있습니다. 최윤덕함의 추정방위는 보다 뒤쪽입니다. 목표는 20노트를 넘었습니다."
"방위 산정하고 음문 분석해. 최윤덕은 아니겠지? 빨리 링스에 공격명령 하달하라!"
함장의 명령을 받은 대잠지휘관이 상공의 링스를 호출했다.
[여기는 링스 7, 목표해역에 도착하려면 15분 정도 걸린다.]
"제기랄! 빨리 도착하지 않으면 먹이는 달아나게 된다. 어서 서둘러!"
[음탐실에서 추적정보를 데이터 링크해 주기 바란다. 접속회선을 개방하겠다. 서두르려면 차근차근히 해주기 바란다. 이상.]
링스의 조종사 권우찬 소령에게 한 방 먹었다. 급하게 서두르기만 했던 대잠지휘관이 음탐실과 연결하는 정보전송 시스템을 가동하자 소나에서 추적하는 상황이 그대로 링스에게 전송되기 시작했다.
- "미친 듯이 달아나고 있습니다. 어뢰에 쫓기는 것 같습니다."
"어뢰? 최윤덕함이 공격하기엔 사거리가 너무 멀군요. 목표로부터 25km 정도 떨어져 있고, 사정거리가 30km라도 이동하면 무용지물이 될 텐데요."
대잠지휘관이 옆에서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함장은 뭔가 골똘히 계산하는지 계속 묵묵부답이었다. 잠시 후 함장이 입을 열었다.
"누군가 로미오에게 몰고 있군. 최승호 상좌인가? 부장. 최윤덕함 함장이 누구지?"
"최승호 상좌가 맞습니다.”
"최 상좌가 지금 로미오가 해치워 주기를 바라고 밀어붙이는 건가? 내 참..."
손현식 중령이 툴툴거렸지만 덕분에 일본 잠수함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링스가 도착하려면 앞으로 14분. 을지문덕함은 어뢰 사정거리까지 도달해야만 공격할 수 있었다. 치명적인 약점이지만, 을지문덕에게는 애스록(ASROC) 대잠발사 로켓시스템이 없기 때문이다. 함대 최선단에서 대잠초계는 애스록을 가진 KDX-2, 문무대왕급에게 넘겼어야 했지만 그들에게는 함대 방공이 더 중요한 임무였다. 과거 계획입안자들이 멍청했기 때문이었다. 필요한 게 무엇인지 몰랐던 국방부 구매 담당자들과 육군 우선론자들...
손현식 중령이 입맛을 다시며 소나를 주시했지만 고속으로 가까워지는 적 잠수함에게 아직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 "이순신함 함재 헬기들이 지원을 온답니다. 도착 예정시간은 23분입니다."
"좋아. 최윤덕이 추적하던 목표 6은 아직 탐지 안 됐나?"
손현식 중령은 목표 5, 오야시오급만큼이나 위험한 하루시오급 잠수함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거리가 너무 멉니다. 아직 파악할 수 없습니다."
"좋아! 증속 19노트로 임 상사! 소나 효율이 떨어지면 바로 얘기하게 대공 경계태세에 들어간다. 시 스패로 발사 대기, 골키퍼 작동 대기시키게."
을지문덕함이 다시 증속하며 일본 잠수함이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구축함이 속도를 올리자 함수 부분이 파도에 부딪히며 펑펑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 12월 16일 08 : 22 쓰시마 동북쪽 150km 해상
"어뢰 충돌 60초 전!"
스톱워치를 손에 든 일본 잠수함 오야시오의 부함장이 외쳤다. 함장 다카노 일등해좌는 아직도 얼굴이 노랬다. 어디서 발사된 어뢰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9km 뒤에서 갑자기 시작한 독일제 어뢰는 그때서야 예인소나에 포착된 것이다.
"아직 어뢰 속도는 안 떨어졌나? 이제 사정거리가 거의 다 됐을 텐데..."
가까스로 침착함을 보이려는 듯 다카노 함장이 혼잣말을 했다. 사령실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 질문에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뢰 속도, 35노트입니다. 어뢰 충돌 20초 전!"
부함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함장은 자기도 모르게 잠망경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고 작전사관은 작도 테이블로 슬금슬금 몸을 옮겼다. 노이즈 메이커 두 개가 사출 됐지만 아무도 그 독일제 어뢰를 속일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충돌 5초 전, 4, 3, 2..."
더 이상 세지 못하고 부함장은 입을 다물었다.
- 투웅-
승무원들이 내지른 소리 없는 비명이 사령실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 조심스럽게 눈을 뜬 다카노 함장에게는 주위의 모든 것이 똑같았다. 하얀 날개가 달린 어린아이도, 방망이를 든 붉은 거인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폭발하지 않았잖아!"
"불발탄입니다."
사령실 이곳저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지는 것도 잠시, 함장이 긴급하게 명령을 내렸다.
"출력, 순간 정지! 감속하라."
- 함장은 어뢰 회피에 급급한 나머지 너무 위험한 곳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아마 주위에 몰려 있는 한국 해군함정과 초계기들이 정신없이 도망치는 오야시오에서 발생한 소음을 이미 다 들었을 것이다.
함장의 명령에 순간적으로 반응한 조함지휘관이 전동기로 공급되는 전원을 내렸고 오야시오는 밀려오던 관성으로 계속 20노트의 속도로 미끄러져갔다.
"적 항모와의 거리는?"
"55km입니다."
"도대체 어떤 놈이 어뢰를 쏜 거야? 로미오인가?"
"그럴 리는 없습니다. 로미오가 후방에 그토록 가까이 붙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 도대체 뭐야? 아무도 없었잖은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 때문에 함장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 [수측실입니다. 어뢰 분석이 끝났습니다. SUT입니다.]
"장보고급 잠수함이군. 우리가 꼬리를 밟혔다니..."
분노한 다카노 이좌가 잠망경을 후려쳤으나 그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좋아. 시간이 없다. 빨리 쏘고 빠진다. 하픈 발사준비! 데이터 링크 좌표 그대로 관성좌표 입력하라."
"함장님. 발사심도로 부상해야 합니다."
"발사심도로!"
- 어뢰와 달리 하픈은 강한 수압에 견뎌낼 수 있도록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정 심도 이상으로 올라와야 했다. 함장은 그 점을 깜박 잊은 것이었다. 오야시오가 서서히 발사심도로 부상하는 사이,ㅍ함수에 장착된 6문의 어뢰발사관 중 5문이 열렸다.
"발사한다. 발사 순서는 1, 6, 5, 4, 3번, 급속 발사한다."
오야시오가 예비용 압축공기에 무리가 가는 급속 발사를 시작하자 함이 떨면서 5초 간격으로 두 발씩 하픈을 쏟아냈다. 마지막 한 발이 발사되자 잠수함은 다시 온도층 밑으로 잠항을 시작했다.
[수측실입니다! 전방에 돌발음. 돌발음! 매우 가깝습니다!]
"전방 어디? 또 뭐란 말인가?"
[잠수함입니다! 발사관 개방음입니다. 너무 가깝습니다!]
- 뒤에 따라온 나머지 4발의 어뢰들이 충격음과 근접신관의 작동으로 연이어 폭발하기 시작하자 거대한 충격파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아마 이 소리는 최윤덕함에 있는 최승호 상좌에게도 명확하게 들릴 것이다.
- 오야시오에서 발사한 하픈 미사일은 이런 일과는 상관없이 각자임무를 수행했다. 물 위로 빠져나온 원통형 케이스가 수면 위로 20미터쯤 솟구친 후에 캐니스터가 두 쪽으로 갈라지고 그 속에서 하픈 미사일이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보통의 하픈 미사일과 똑같이 엔진을 점화시켜 추진력을 얻고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항모전단을 향했다.
- 12월 16일 08:23 쓰시마 동북쪽 125km 해상
[음탐실입니다! 방위 0-1-5에서 폭발음입니다. 연속 폭발음! 상당히 큽니다.]
잠수함 최윤덕함의 음탐선임하사 박 중사가 헤드폰을 벗고 마이크만 입으로 가져가서 보고했다. 커다란 음향에 귀가 아직도 멍멍했다.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박 중사 뒤로 어느새 함장 최승호 상좌가 다가왔다.
"어케 됐네? 로미오가 해치운 거이간?"
"그런 것으로 추정됩니다. 폭발음이 6개 이상 이어졌습니다. 고속터빈 어뢰 4발의 음향은 파악이 됐습니다."
"로미오가 맞다. 53-56VA 어뢰구만. 무식하게 부숴놨군. 우하하!"
"그 어뢰, 혹시 대 수상함용 무유도 어뢰 아닙니까?"
어뢰공격에 일가견이 있는 곽일준 소령도 의아했다. 잠수함을 2차대전식 무유도 어뢰로 잡는 것은 총으로 말하면 일등저격수와 같은 정밀함이 필요했다. 곽 소령은 기가 막혀 할 말이 없었다.
- "자, 뭣들 하나? 목표 6을 사냥해야디. 이건 우리가 잡은 거이 앙이야. 동무들도 봉급값은 해야디 않았어? 날래 움직이라우."
최 상좌의 재촉에 머릿속에 파란 바닷물을 배경으로 어뢰의 항적을 그리던 곽일준 소령이 후다닥 사령실로 뛰었다.
- "부장. 독일제 어뢰가 상당히 뛰어나구만. 놈이 9km까지 접근하도록 몰랐잖은가?"
"예. 성능이야 뛰어납니다. 근데 더미어뢰를 발사하다뇨?"
"기거 자네가 알려주지 않았어? 탄두에 폭약 대신 배터리만 꽉꽉 채운 테스트용 어뢰가 있다고. 나는 적 잠수함을 좇기만 하려 했는데 사거리가 기렇게 길디는 몰랐어. 암튼 다행이야. 내래 로미오에 탔을 때 이 배와 만났다면 나도 무사하다 못했을 기야."
최 상좌가 목표에 20km도 다가가지 못한 SUT Mod 2 어뢰를 자동 유도로 전환하라고 했지만 부함장은 케이블이 끊어질 때까지 유선유도를 고집했다. 15km짜리 유도케이블이 모두 풀려나간 뒤에야 어뢰는 자동유도로 전환됐다.
- "긴데 놈이 가기 전에 하픈 5발을 발사했디?"
최 상좌가 다시 부함장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남의 전투였다. 최윤덕함의 승무원들은 구경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예. 5발입니다. 그것을 막느냐 못 막느냐는 이제 우리가 간여할 바가 아닙니다. 항모전단이 잘 방어하겠죠."
최윤덕함이 서서히 북동쪽으로 침로를 변경했다. 하루시오급으로 추정되는 목표 6도 언제 하픈을 발사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잠수함이 발사하기 전에 저지해야 했다. 지금 발사하고 도망친다면 어쩔 수 없지만...
- 12월 16일 08 : 27 쓰시마 북동쪽 100km 해상
한국 해군 제1항모기동전대 김유신함이 최윤덕함에서 발한 경보를 수신했다. 추적 중인 일본 잠수함이 공격거리에 접근한 것이 밝혀지자 함대는 즉각 대잠헬기를 투입하고 방공태세에 들어갔다. 항모 항공단 소속 E-2C 호크 아이가 위험해역을 향해 집중적인 감시망을 펴자 일본 잠수함이 발사한 하픈 미사일의 존재도 조기에 발견할 수 있었다.
- 윤형진(輪型陣)으로 배치된 강력한 방공구축함이 기함인 이순신함과 수송선단을 크게 에워쌌다. 다가오는 하픈 미사일은 모두 다섯발, 남쪽에 배치된 문무대왕급 구축함 두 척과 을지문덕함이 미사일이 날아오는 쪽을 향했다.
"우리가 맡는다. 김구와 신채호함은 항공자위대에 대한 방공경계 때문에 서쪽으로 처졌다는군. 이 소령 추적해!"
함장 고재일 대령이 E-2C로부터 전송되는 KNTDS(Korean NavalTactical Display System) 컬러 전술정보화면으로 하픈 미사일의 접근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해군이 수십 년 간 애용한 아크릴제 표정판은 그 역할이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예. 알겠습니다."
이영택 소령이 대공감시 레이더의 작동을 지시한 다음 스탠더드미사일의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발사 가능상태로 대기시켰다. 함수와 함미의 골키퍼 근접방어 기관포도 마찬가지였다.
"추적 시작합니다. 목표 총 5기, 방위 1-7-5도로 급속 접근 중. 목표속도 마하 0.9. 확인합니다. 도합 5기입니다."
- [여기는 신채호함이다. 목표 공격을 인계받겠다.]
"뭐라고?
[미사일 발사를 우리 쪽에서 통제하겠다. 물러나기 바란다.]
평문 음성통신으로 전달되는 새로운 명령에 이영택 소령이 함장을 돌아다보았다. 이 위치에서는 김유신함과 강감찬함이 최적의 요격위치에 있었다. 레이더 추적 능력도 마찬가지인데 굳이 신채호함이 나서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합동교전 시스템을 점검해 보겠다는 것이군."
"지금 상황에서 합동교전시스템이라니... 무리가 아닙니까? 우리가 최적의 추적위치입니다."
이영택 소령이 이의를 제기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명령이었다. 약간 위험이 따르지만 진수되고 나서 운용시험도 제대로 거치지 못한 신채호함은 지금이 시스템을 점검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해군은 상상도 못 할 자신감이었다.
- "목표 조준이 시작됩니다."
김유신함에서 스탠더드 SPG-51 사격지휘 레이더가 빙글 돌아 미사일 쪽을 향했다. 강력한 펄스파를 미사일에 쓴 다음 함교 전방에 장비한 스탠더드 수직발사기가 화염을 뿜었다.
"빌어먹을! 손가락이나 빨아야 하는군요."
이영택 소령이 투덜거렸다. 목표를 향해 발사된 미사일은 도합 6발이었다. 2km 좌측에 떨어져 있는 강감찬함에서도 5 발의 스탠더드 미사일이 날아올랐다. 솟구친 미사일은 완만한 각도로 빠른 상승을 하다가 일정 고도에 이르러 하픈을 향해 강하하기 시작했다.
"목표 1과 3 명중, 강감찬이 발사한 미사일이 목표 4, 5를 명중시켰습니다. 이런! 아직 한 발이 남았습니다."
스탠더드 미사일의 탄막을 피한 하픈 대함미사일 한 발이 곧장 김유신함 정면으로 향했다. 수면 바로 위 3미터의 초저공으로 비행하는 하픈 미사일을 향해 또다시 두 발의 미사일이 더 치솟았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다이빙 코스에 들어가기 전에 미사일이 안쪽으로 파고 들어왔다.
- "골키퍼 자동대응합니다!"
전술디스플레이에 나타나는 붉은색 점은 그 자체로는 시뮬레이션 게임이나 전자오락에서 보는 평범한 점일 뿐이었다. 컬러 디스플레이는 목표에 대한 방위와, 침로, 속도, 고도를 뚜렷하게 알려주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한낱 오락으로만 보일 것이다. 위험과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는 것은 그들뿐이었다.
"골키퍼 사격 시작합니다."
30 밀리 7 총신 개틀링포인 골키퍼의 GAU-8 기관포가 고속으로 회전하며 탄환을 토해냈다. 팰렁스 20밀리 벌컨보다 두 배의 사정거리를 가지는 이 기관포는 그만큼 멀리서 대함미사일의 위협을 제거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2,000미터 거리에서 지름 1미터의 집탄성을 가지고 있는 골키퍼 근접방어 기관포가 레이더 조준으로 갈겨대는 30밀리 기관포는 1초당 포탄 70발을 1,500미터 거리에서 지름 1미터 동심원에 쏟아부었다. 거기에다 강감찬함에 탑재된 골키퍼도 가세했다. 십자포화를 얻어맞은 하픈 미사일이 갈갈이 찢겨져 폭발했다.
"명중!"
- "대공방어태세 해제한다. 레이더 전파봉쇄. 전파침묵에 들어간다."
이영택 소령이 지시하자 김유신함도 다른 배처럼 다시 레이더를 끄고 침묵에 들어갔다. 오로지 바닷속에서 들려오는 음향에 귀만 내민 채 조용히 나아갔다. 상공에는 조금 전의 전투에서 최초로 잠수함 발사 하픈을 발견한 E-2C가 천천히 선회하고 있었다.
- 12월 16일 08 : 29 시모노세키 동북쪽 100km 해상
'이렇게 마냥 도망치라니. 놈들을 어디서 저지한다는 건가...'
제3호위대군 기함 하루나의 전투정보센터에서 다구치 해장보가 혼잣말로 중얼거렸으나 명령에 불복할 수는 없었다. 시마즈 해장보의 제4호위대군이 무참히 깨진 지금 한국 항모전대를 저지할 세력은 3호위대군밖엔 없었다.
'왜 우리가 이런 식으로 차례차례 소모되어야 하는가? 왜 집중운용을 할 수 없었던 걸까?'
자신에게 던지는 의문에서도 해답은 쉽지 않았다. 해상자위대는 애초에 한국의 수상함 전력을 너무 얕봤다. 아니, 초기 작전 설정부터 그들이 가진 고속정부대를 무시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남북한을 합쳐 한국에 고속정이 너무 많았다. 연안경비용으로나 쓰이는 고속정을 함대간 전투에 동원하다니. 다구치 해장보는 기가 찼다.
- 제주도 남방에 전개한 2호위대군이 올라오려면 최소한 하루는 걸린다. 그동안 한국군 상륙전단은 바로 남하해서 큐슈에 상륙하게 될 것이다. 잠수전대도 4분의 1이 2함대와 함께 행동 중이었다. 구레와 요코스카의 나머지 잠수전대가 세토 내해를 거쳐 간몬까지 나오려면 역시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방법이 없었다. 그들이 상륙을 원한다면 바다에서 맞붙어야 했다. 항공자위대가 우산 씌워 준다면 함대가 가진 대함미사일로 공격이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도 불투명했다.
"고속정단 위치는?"
"쓰시마 동쪽 80km 지점입니다. 우리와 100km 떨어졌습니다."
"저놈들이 끝까지 따라오는군. 우리를 여기서 몰아내겠다는 건가? 멍청한 놈들. 약속한 공자대 공격기로부터 연락은 없나?"
"09 : 05에 공격한답니다."
"헬기들 무장은 완료됐는가?"
다구치 해장보는 항공자위대의 지원에 맞춰 소속 헬기를 투입해 고속정대를 완전히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함대가 가지고 있는 시 호크 헬기는 11대였다. 물론 4호위대군 소속 대잠헬기 중 3대가 살아남아 3호위대군에 가세했지만 아직 약간 부족했다. 그러나 반복공격을 가하면 저지력은 충분한 편이었다.
"전 기체 하픈 장착이 완료됐습니다."
함대 작전참모가 대답하면서 사령관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대답 없이 침묵에 빠져들고 있었다.
- 폭발 후에 그곳에 남은 것은 물 위에 떠 있는 약간의 플라스틱과 헝겊조각뿐이었다. 1996년에 취역한 만재배수량 9,500톤의 이지스함 묘코는 1톤도 안 되는 쓰레기만 남겨둔 채 사라진 것이다.
시커먼 불기둥이 이곳저곳에서 치솟는 가운데 후미로 쳐졌던 구축함 하루나는 하마유키와 묘코가 만든 사각으로 숨을 수 있었다. 나머지 어뢰들이 목표를 몇 척 더 파괴한 다음에야 동료 함정들이 대신 어뢰를 맞아준 덕택에 살아난 함정의 승무원들은 갑자기 텅 빈 바다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해졌다.
- 12월 16일 09 : 06 시모노세키 북동쪽 126km 해상
어뢰를 발사했던 인민군 로미오들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애스록은 Mk-46 어뢰로 돌변해서 로미오급 잠수함들을 파고들었다. 가까이서 존재가 노출된 그들 역시 피할 수 있는 여유는 없었다.
근접신관이 작동한 Mk-46 어뢰의 40kg짜리 탄두가 급속잠항하는 잠수함 함미 부분 바로 앞에서 폭발했다. 충격파가 함체를 때려 잠수함 내부에서 들리는 소리는 엄청났지만 잠수함이 받은 충격은 별로 크지 않았다. 로미오급 잠수함이 약간 진동했을 뿐이었다. 놀란 잠수함이 전속력으로 항주했다.
그러나 소형 어뢰가 폭발하며 만들어 낸 구멍 속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기관실 파이프 두세 개가 터지며 이미 차가워진 냉각수가 뿜어져 나왔다. 외부에서 쏟아져 들어온 물은 구멍을 점점 크게 벌리고, 여기서 다시 바닷물이 콸콸 쏟아져 들어와 기관실을 침수시켰다.
승무원들이 서둘러 방수구획을 밀폐하고 밸러스트 탱크에서 급히 물을 내뿜으며 부상을 시도했지만 출력이 부족했다. 로미오급 잠수함은 너무 구식이었다. 쏟아져 들어온 바닷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잠수함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수압이 강해지자 함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철판 찌그러지는 소리가 잠수함을 울리며 천장에 있는 배관 파이프들이 동시에 터졌다.
- 침몰하는 잠수함은 대부분 물속에 숨어 있던 로미오급들이었다. 아주 운이 좋은 잠수함들은 살아남았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어뢰를 발사하고 나서 아예 물 위에 떠 있던 배짱 좋은 로미오급 몇 척은 모두 살아남았다.
- 12월 16일 09 : 10 시모노세키 북동쪽 117km 해상
하루나와 몇몇 호위함들이 살아남아 남서쪽으로 침로를 돌렸다. 충격을 받은 다구치 사령관을 의무실로 호송하고 함장인 가타야마(片山) 일등해좌가 함대 지휘권을 임시로 인수했다.
이번에도 항공자위대 전투기들의 가세가 늦었다. 하지만 변명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로미오가 이만큼이나 투입됐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장거리 예인 소나선 히비키가 수집한 정보로도 이곳까지 접근할 잠수함이 없었다. 전쟁은 일주일 전부터 이미 철저하게 계획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동안 잠수함들이 숨죽이며 이곳에서 전쟁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12월 16일 11 : 30 니가타현 니가타시 상공
"여기 아닙니까? 연료가 얼마 안 남았습니다!"
조종석에서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들리자 각기 앞 좌석을 붙들고 있는 병사들이 사색이 되었다. 이은경 소령이 비행기 유리창을 통해 아래를 쳐다보더니 한참 지도와 대조했다.
"여기도 아닌게벼."
이은경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농담조로 나폴레옹 흉내를 내자 긴장해 있던 병사들 사이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중대장 이은경이 탄 비행기를 다른 20여 대가 뒤따랐다. 거의 10분쯤 헤매고 있었지만 목표로 한 니가타 공항은 보이지 않았다. 이은경은 아무래도 적당한 곳에 불시착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세 시간 넘게 멀미를 심하게 하느라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니기미! 싸구려 GPS 하나 안 달아주다니."
이은경이 잔뜩 투덜댔다. 징발된 쌍발기에는 계기비행용 항법장치가 장착되어 있지 않았다. 원래 쌍발기 프로젝트 자체가 시장 판매를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기체에는 기본적인 비행용 계기만이 장착되어 있었다.
위성항법장치를 갖춘 선도기는 일본에 거의 도착할 때쯤 어디론가 사라졌다. 덕택에 항로를 잃은 경비행기 수십 대가 일본 혼슈 서해안에서 이렇듯 헤매고 있는 것이다.
- 오는 중에 문제도 많았다.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풍이 불어 몇 대가 북쪽으로 밀려났다. 초경량 항공기 조종을 할 줄 알거나 항공대학교 항공운항학과 재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끌려와 단시간에 양성된 조종사들의 조종실력은 신통치 않았다. 그리고 빈약한 쌍발 경비행기는 믿음직하지도 않았다. 구름 속을 뚫고 비행하는데 겁을 낸 조종사들이 바다 가까이로 자꾸 고도를 낮췄다. 결국 바다에 떨어진 비행기가 속출했고, 이은경이 확인한 것만도 3대가 넘었다.
그나마 일본 해안에 도달한 것만도 다행이었다. 선도기가 사라지자 경비행기들이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래도 계속 중대장기를 따라온 비행기가 20여 대는 됐다. 그러나 이제 연료가 부족했다. 조종사 포함해서 8명이 탈 수 있는 비행기에 연료를 더 싣느라 조종사 포함해서 6명이 탑승했지만 여기저기 헤매다 보니 어느새 연료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결국 경비행기 대편대는 일본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셈이다.
"아! 시가지 북동쪽에 활주로가 보입니다!"
-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복도 양쪽 벽과 천장이 탄흔으로 벌집이 되고 일본 경찰들은 모두 쓰러졌다. 추 하사가 발사한 총은 USAS-12라는 전자동 산탄총이었다.
"야! 너, 너무 심하다. 1인당 50발씩은 맞았겠다."
"아마 더 많이 맞았을 겁니다. 불쌍한 놈들..."
미국에서 대량파괴무기로 낙인찍혀 판매가 금지당한 이 살벌한 자동 산탄총은 대우정밀에서 만들었다. 구경 12 게이지는 20밀리에 필적하는데, 탄알 하나마다 쇠구슬이 50개가량 들어 있다.
- 12월 16일 12 : 05 일본 도쿄도 미나토쿠 롯폰기
일본 자위대 통합막료회의에서는 니가타시와 공항을 점령한 한국군에 대해 장시간 토론을 거쳤다. 막료장들은 혹시 니가타가 한국군의 상륙지점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쪽에는 육상자위대 병력도 없고, 400km만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면 수도 도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가타는 현재 한국군 상륙함대의 위치와 너무 멀고, 탄도미사일 공격에서 살아남은 항공자위대 기지들이 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에 한국군의 보급선 유지가 곤란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겨울철에 쌓인 눈도 한국군의 기동을 방해할 것이다.
결국 한국군의 상륙지점은 혼슈 서부 주고쿠 일대라는 애초 예상 그대로, 방어작전계획에 따라 육상자위대의 병력 이동을 독려했다.
- 소방차와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활주로를 내달렸다. 전투기들이 입은 피해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한 대는 전소되고 한 대는 경미한 파손에 그쳤다. 그러나 손상된 활주로를 복구하려면 몇 시간은 걸리게 되었다. 기체에서 나온 조종사들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곳곳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는 활주로를 살폈다.
- 12월 16일 23 : 20 후쿠이(福井)현 쓰루가(賀) 북서쪽 50km 해상
상륙함대는 항공모함 이순신함과 헤어진 후 쓰루가만으로 향했다. 항모 호위함대도 구축함 3척, 프리깃 2척을 남기고 상륙함대에 따라붙었다. 상륙함정과 수송선이 가운데 밀집하고 주위로 구축함과 프리깃함이 주변 해역을 경계하며 일본 잠수함과 전투기들의 공격에 대비했다.
- 쓰루가 북서쪽 50km 해상에 이르자 가장 먼저 바빠진 배는 아세아 비전호였다. 현대해운 소속인 이 자동차 운반선은 승용차와 화물차 적재구획에 각종 트럭과 사륜구동차, 전차를 가득 싣고 있었다. 자동차 6,000대를 적재하는 세계 최대의 자동차 운반선인 아세아비전호는 7일 전에 징발되어 짧은 사이에 수송함으로 변신했다. 현대조선 설계팀은 함에 전차를 적재할 경우 내부구조가 지탱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시간이 없어 하갑판을 강판으로 대충 보강하고 바다로 내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 먼저 좌현에서 커다란 출입문이 열리고 이어 받침대가 내려졌다. 10노트 가까운 속도에서 받침대가 수면에 닿자 강한 물보라가 일었다. 그리고 여기서 북한제 호버 크래프트가 미끄러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각각 중무장한 1개 소대가 탑승하는 폭 6미터, 길이 20미터짜리 공방형 호버 크래프트는 좁은 문을 빠져나오는 데 애를 먹었다. 호버 크래프트가 내는 강한 바람 속에서 적재담당 승무원 수십 명이 달려들어 좌우에서 밀며 입구로 밀어붙였다.
공방형 호버 크래프트는 강한 바람을 일으키며 수면에 착지하자 몇 차례 기우뚱거린 후 자세를 잡았다. 나머지도 내려오기 시작했다. 30분 사이에 100여 척 이상이 배에서 빠져나왔다.
호버 크래프트들이 무리지어 가속하기 시작했다. 속도가 50노트에 이르자 수많은 공방형 호버 크래프트가 내는 물보라가 잔잔한 쓰루만에 자욱하게 안개를 일으켰다.
- 함대 남쪽에 자리잡았던 중량물 운반선 시 턴(Sea Tern)호에서도 공방형보다 조금 작은 황해급 호버 크래프트가 쏟아져 나왔다. 사이프러스 선적인 이 배를 몇 년 전에 매입한 범양상선도 해군의 징발명령을 피할 수는 없었다. 회사는 이 배가 제발 무사하기만을 빌 뿐이었다. 전쟁에 투입된 배가 가라앉으면 영국의 로이드 보험에서 보상받을 수도 없고, 전쟁을 치르느라 막대한 전비를 지불하고 있는 정부가 보상해주기도 힘들었다.
- 한때 중국이 수입한 러시아제 킬로급 잠수함을 통째로 싣고 다니던 시 턴호의 외형은 기묘했다. 이 배는 선수와 선미의 선교 구조물을 빼놓고 선체 중간부분에는 아무것도 없이 움푹 패여 있었다. 전에는 이곳 저상 갑판에 잠수함이 실렸지만, 지금은 호버 크래프트가 가득했다.
한국 해군이 장비했던 대형 호버 크래프트가 K-1 전차 한 대를 간신히 싣고 뒤뚱거리며 저상갑판을 미끄러져 내려왔다. 다른 호버크래프트도 장갑차를 싣고 좌현과 우현으로 일제히 빠져나왔다. 호버 크래프트 30여 척으로 빽빽해져 있던 갑판이 순식간에 텅 비어버렸다.
- 컨테이너 수송선에 헬리콥터와 수직이착륙기를 탑재하는 것은 결코 특이한 발상이 아니다. 1982년 포클랜드 상륙전 당시 영국군은 컨테이너선 애틀랜틱 컨베이어호에 시 해리어 전투기와 헬리콥터, 병력 약간을 싣고 상륙작전에 투입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 방법은 현대에 이르러 마땅한 상륙함선이 없거나 부족한 국가가 부득이 상륙작전을 감행할 경우에 가장 확실한 상륙수단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 한국군 역사상 최대의 헬리본 작전이나 다름없는 작전규모였다. 최소한 강습상륙작전으로서는 최대규모의 작전이 틀림없었다. 적어도 그가 탄 컨테이너 수송선 '한진 런던'호에만 8사단 수색대대 총인원의 절반을 실어 나를 헬리콥터 20대가 대기하고 있었고, 그 외에도 모두 5척의 컨테이너 수송선이 헬리콥터 100대를 띄울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작전참가 몇 주 전부터 헬기를 타게 될 것이라는 소문은 돌았지만, 정작 본격적인 헬리본 훈련은 겨우 일주일 남짓밖에 받지 못했다. 주로 지상에 내려온 헬리콥터에서 긴급전개하는 요령을 집중적으로 교육받았고, 진짜 하늘을 날아본 것은 하루에 두 번 꼴로 총 10번밖에 없었다.
물론 그 정도의 훈련이라면 짧은 기간 동안에 받은 훈련치고는 강훈련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헬리본이라는 현대 보병전술에 완전히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선봉에 나서야 했다.
- 이들 중에서 후쿠이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주둔하던 동부방면대 12사단 병력은 이미 주고쿠로 이동해 있었다. 12사단은 담당 방어선인 이즈모(出)시에서 육상자위대의 다른 사단들과 마찬가지로 전투기의 맹렬한 공습과 침투한 특수부대의 기습을 받아 고전하고 있었다. 같은 동부방면대 소속 1사단은 도쿄 방위임무를 맡고 있어서 다른 곳으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결국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부대는 동북방면대 예하 센다이주둔 6사단이 전부였다. 6사단은 주고쿠로 이동할 준비를 끝내고 있었으므로 언제라도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병력이동에 필요한 차량을 충분히 보유하지 못한 자위대 특성상 이들 병력의 절대 다수는 철도를 통해 이동해야 했다. 더구나 자위대의 실질적 주력인 북부방면대의 주장비인 90식 전차는 일본의 거의 모든 교량이 견디지 못하는 중량급 전차이기 때문에 천상 철도를 이용하지 않으면 이동 자체가 곤란하다. 그런데 몇 시간 전부터 일본 곳곳의 철도가 공습을 받아 파괴되거나, 특수부대의 파괴활동에 의해 부서지고 있었다.
- 결국 지금 당장은 전국에 거미줄처럼 깔린 고속국도와 일반국도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도로폭파는 철로폭파에 비해서 쉽지 않고, 이 전쟁에 미치는 효과도 적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철도에 비해 운용에 큰 융통성이 있었다. 충분한 자동차, 가능하면 트럭이나 버스 종류가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작전지역에 병력을 보낼 부대들은 하나같이 자동차가 충분치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주고쿠로 이동한 3사단에서 대전차대와 제37보통과연대를 보냈다. 사단 차량 중에서 당장 보낼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긁어모아서 먼저 보낼 수밖에는 없었다.
- 육상자위대 1개 사단에는 정예부대인 갑종사단이라도 보통과(보병)중대가 16개밖에 없고, 을종사단에는 12개뿐이다. 중대 바로 상위부대로 연대 혹은 연대전투단이라 부르는 단위부대가 있는데, 이것들은 보통과중대 4개로 구성된다. 전시에는 여기에 전차중대 하나와 특과대대(포병대대) 하나가 붙어서 연대전투단을 구성하도록 되어 있다.
이런 규정에 따라 제37 보통과연대에 배속된 제5전차중대와 제3특과대대는 지금 보통과연대 본대보다 몇십 킬로미터나 뒤쳐진 채 서둘러 이동하고 있었다.
- 그렇게 해서 한국군 상륙예상지점인 이곳에 파견된 3사단 병력이 제37보통과연대 예하 4개 보통과중대, 그리고 무반동포를 장비한 사륜구동차 14대까지 포함한 병력이 전부였다. 연대전투단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부족한 전력이었다. 이들은 이곳에 도착한 지 30분도 지나지 않아 진지공사도 아직 기초밖에 하지 못했다.
- 연대장 오카야마 시게요시 일등육좌가 진지를 둘러보면서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그는 약 5km 남짓한 해안선을 4개 보통과중대로 방어할 수 있을까 같은 의문은 품지 않았다. 상륙부대는 아무래도 그 장비가 취약할 수밖에 없고, 이들에게는 14대의 무반동포 사륜구동차 외에도 칼 구스타프 84 밀리 무반동포도 있었다. 설사 한국군 전차가 일시에 중대 단위로 상륙한다고 해도 두려울 것은 없었다.
- 문제는 하늘이, 지붕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이었다. 제대로 된 유개호를 만들지 않으면 상륙작전 전에 당연히 가해질 엄청난 규모의 포격과 폭격에 완전히 노출되고 만다. 그러나 유개진지를 만들려면 시설대(공병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 시설대는 따라오지 않았다.
시설대가 움직이려면 병력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장비까지 함께 움직여야 하는데, 공병대 장비는 몇 가지 트럭을 제외하고는 전차들과 마찬가지로 트레일러를 이용해서 수송해야 한다. 즉, 사단 소속 전차대가 움직이는 동안에는 시설대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그나마 트레일러라는 수송수단도 굼뜨기는 마찬가지다.
오카야마 일좌는 부대가 도착하기가 무섭게 지도에 나타난 해안선에서 약 20미터 후방에 모두 9개소의 소대방어진지를 만들도록 지시했고, 그 배후에 차량탑재 무반동포를 기동예비로 두도록 대전차중대장에게 연락했다.
- 최대의 적은 상륙군이 아니라, 상륙부대를 직접 엄호해줄 어둠이었다. 아니, 아군에게도 도움이 된다. 방어진지의 은폐만 제대로 된다면 공격측도 유리하지는 못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연대 정보참모 시게미쓰 삼등좌가 손으로 북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연대장! 저기 저쪽 수평선에서 불꽃이 보입니다."
정보참모가 가리키는 방향 수평선 멀리에서 오렌지색 섬광이 수십 개씩 일어나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연대장이 놀라 고함을 치려고 했지만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4~5초 지나자 비단 찢는 긴 소리와 함께 포탄이 날아왔다. 5인치 함포에서 발사된 고폭탄이 여기저기서 요란하게 작렬했다. 아직 개인호를 다 만들지 못한 자위관들이 포격에 놀라 엄폐물을 찾아 사방으로 흩어졌다.
- 12월 16일 23 : 50 일본 후쿠이현 미하마 북쪽 15km 해상
[발사!]
전송관을 통해서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강원함이 가진 6개의 포문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귀를 보호하기 위해서 귀마개(ear protecter)를 끼었지만 오랜만에 듣는 발사소리에 귀가 멍멍했다. 더구나 쇳덩어리로 밀폐된 함포 내부에서는 훨씬 큰 소리가 났다.
백유신 예비역 해군 병장도 배를 울리는 폭음이 시끄러웠지만 세번째, 네 번째 탄을 장전하고부터는 차분해졌다. 해군으로 다시 징집되어 다 썩어 버린 배에 오르자 그를 반겨준 것은 선창에 가득한 쥐들이었다. 그 많은 쥐들이 그동안 뭘 먹고 그렇게 포동포동 살이 쪘는지 궁금했다.
- 구식 기어링급 구축함인 강원함은 동급의 다른 함보다도 함체 부식이 심했기 때문에 재개장 공사에서 제외되어 한 달 전에 퇴역했던 함이었다. 해군 근대화 계획으로 배치된 신형 구축함들 사이에서더 이상 쓸모 없는 고철이었기 때문이다.
- 백유신 병장이 일주일 전 재소집되어 배치받은 배가 바로 강원함이었다. 해군에서 일반예비군은 재소집대상에서 제외되지만 몇몇 주특기는 달랐다. 백 병장 같은 고참 포술병은 인력이 적은 한국 해군에서도 중요한 소집대상이었다.
- 주위에 다른 함정들도 강원함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모든 포문을 열었다. 광개토대왕급과 문무대왕(KDX-2)급 구축함이 가진 127 밀리자동포와 울산급, 포항급 전투함이 가진 76밀리 속사포까지 불을 뿜었다. 엄청난 오렌지색 향연이 미하마의 하늘을 수놓았다.
상륙준비사격에 훨씬 앞서 발진했던 호버 크래프트들이 쓰루가만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함대 배후에서 발진했던 이들은 함포사격과 동시에 빠져나온 수많은 상륙용 주정에 앞서 곧바로 만으로 진입했다.
- 어느새 구축함에서 발사한 상륙준비사격이 멈추고 4,000톤급 악어급 LST와 운봉급 전차상륙함들이 발포하는 40밀리 기관포탄만이 해안선에 작렬했다. 그리고 또 다른 명령을 받았는지 해안선 가까이 접근한 몇 척의 포항급 코르벳함에서 76밀리 속사포가 다시 불을 뿜었다.
상륙함들의 옆을 날카롭게 스쳐 지나가는 포탄소리에 함교 승무원이 놀랐지만 레이더로 정밀하게 조준된 포탄들은 군데군데 남아있는 위험한 구조물을 교묘하게 때렸다. 그리고 강원함과 다른 기어링급 구축함에서 발사한 연막탄의 소나기가 다시 쏟아졌다.
- 12월 16일 23 : 55 후쿠이현, 쓰루가만 입구
"저기 좀 봐. 등대다."
쓰루가만 입구를 형성하고 있는 곶(串)의 해안선 맨 끄트머리에 등대 불빛이 보였다. 전시라면 당연히 꺼져 있어야 할 등대의 불빛이 지금은 헬리콥터 강습부대의 항로기점 역할을 충실하게 해주고 있었다.
권경준 병장은 그것을 내려다보면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걸 누가 가동시켰을까 생각했지만, 일본이 등대를 켜놓고 있을 리는 만무했다.
권 병장은 잠시 분대원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긴장한 얼굴들에 공포감 같은 것도 어렴풋이 보였다. 분대에 따로 파견된 경기관총사수와 부사수 얼굴도 창백하긴 마찬가지였다.
- 헬기는 등대 상공에서 방향을 바꿔 정남으로 향했다. 기체 좌측에 어두운 밤바다를 배경으로 거대한 구조물 몇 개가 보였다. 불이 꺼진 어둠침침한 그곳에 도카이(東海) 핵재처리공장의 신형원자로 후겐이 있으며, 방사능 누출사고로 폐쇄됐다고 알려진 쓰루가 원자력발전소라는 사실을 그는 당연히 알 수 없었다.
- [엘지에 도착했다. 지금부터 하강한다. 엘지는 프로야구팀이 아니라 랜딩 존(Landing Zone : 착륙지점)이다. 자, 다들 꽉 붙잡으라구!]
장난기 어린 헬기 기장의 목소리와 함께 갑자기 헬리콥터가 기우뚱하면서 강하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움직임이라 병사들이 당황하며 주변 기물을 붙들고 착륙자세를 잡았다. 헬리콥터는 어느새 주변 건물보다 낮은 고도까지 내려와 있었다. 권 병장이 탄 헬리콥터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비행했다. 요란한 진동에 탑승한 병사들 모두가 멀미를 할 것 같았다. 분대원 가운데 가장 나이가 적은 최용수 이병이 권 병장에게 외쳤다.
"분대장님! 우린 어디에 내리는 겁니까?"
"항구에!"
질문한 병사는 그 대답에 잔뜩 얼굴을 찡그렸다. 전투가 아니라 경비임무가 분명했다. 살아남을 가능성은 크겠지만, 당연히 재미없고 지겨울 것이다.
- 잠시 들썩이는 느낌이 들더니 헬리콥터가 자세를 바로잡고 그 자리에 멈췄다. 착륙하자마자 양측 문이 드르륵 열리고, 병사들이 누가 시키기도 전에 훈련받은 대로 튀어나갔다. 제일 먼저 분대지원화기사수와 중대 지원소대에서 파견나온 경기관총사수가 좌우로 뛰어나가 사격위치를 잡았다. 뒤이어 소총수들이 앉은 순서대로 쏟아져 나가 엄폐물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제일 마지막에 분대장 권경준 병장이 헬리콥터에서 내려 주변 상황을 살폈다.
- "이번 작전 기본단위는 분대다. 지금 소대장 지휘받고 있을 시간은 없어!"
이런 중요한 사항 하나도 숙지시켜 놓지 않고 그냥 내려놓고만가다니! 분대장이 군단장이나 사단장급의 작전계획을 모두 알 필요는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각개 목표와 관련된 사항 몇 가지 정도는 철저하게 숙지시켜 놓아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권 병장은 분대원들을 추스르기가 무섭게 구보로 항만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기습임무라서 군장은 최소로 간략화시킨 채 왔는데도 총이며 군복이며 케블라제 헬멧이며 무거워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한참 뛰었더니 정말 미칠 것 같았다.
- 권 병장은 분대장도 할 짓이 못된다고 생각했다. 만사가 귀찮았다. 그는 하사도 아닌데 억지로 분대장 교육을 받고 분대장이 되었다. 하긴 요즘 누가 단기사에 지원할까마는, 그래도 하사는 교육이라도 충분히 받은 인적 자원이다. 물론 다른 기술병과는 하사관이 많다. 그러나 보병은 하사관 수가 절대 부족해서 병장이 분대장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씨팔! 월급이나 많이 주든지..."
- 12월 17일 00 : 10 동해상, 후쿠이현 미하마 북서쪽 1.8km 해상
시커먼 어둠과 검은 바닷물만이 가득한 공간에서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흰색 물보라뿐이었다. 멀리 해안선 쪽에서 오렌지색 불빛이 보였지만, 그것이 2km 이상 떨어진 이곳 바다 위까지 밝히지는 못했다. 그 어둠 속에 악어처럼 생긴 괴물 수십 마리가 떼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LVTP-7은 미국이 설계하고 지금껏 주력으로 사용하고 있는 수륙양용장갑차이다. 한국군도 이 차량을 지금까지 20년에 걸쳐서 주력상륙용 차량으로 사용해왔다. 이 장갑차는 20명 가까운 병력이 탑승하는 거대한 덩치로 유명하다.
해병대 1개 분대 이상씩의 보병을 싣는 이 장갑차 60대는 해안선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시속 6노트라는 느릿느릿한 속력이 답답하긴 했지만, 이들이 먼저 상륙해서 해안선을 점령해주지 못하면 전차나 다른 중장비를 상륙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 밤중이라서 다른 것은 잘 보이지 않고 다른 차량들이 바다를 가르면서 만들어내는 흰 궤적만이 보였다. 들리는 것은 부르릉거리는 추진기 소리와 그 추진기를 돌리는 엔진의 요란벅적한 소음, 진동과 파도소리뿐이었다. 병사들은 장갑차 안에서 오로지 침묵만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는 헬리콥터 몇 대가 날고 있었다. 반짝이는 비행등만 어두운 하늘에서 빛날 뿐이어서 그리 위협적인 모양새는 나지 않았지만, 씨잉~ 하는 공격헬기 특유의 엔진소리가 존재를 과시했다.
- 12월 17일 00 : 12 동해상, 후쿠이현 미하마 북서쪽
[여기는 알파 1. 해안선이 아주 뜨겁다. 엉망진창이다. 생선토막이 여기저기 조금씩 흩어져 있다. 빨리 가서 회를 치라는 명령이다.]
"수신했음. 즉시 공격을 개시하겠다!"
공격헬기 코브라 4번기가 바다를 급히 날았다. 1번기가 해안선을 훑다가 기총사격을 당했는지 고공으로 재빨리 솟아오르면서 조명탄을 투하하는 것이 보였다. 노랗게, 빨갛게 타오르는 조명탄이 낙하산에 매달려 천천히 낙하했다. 삽시간에 해안선은 대낮처럼 밝아졌다.
몇 초 지나지 않아 4번기도 다른 헬리콥터들과 비슷하게 해안선 상공에 도달했다. 오렌지색 예광탄이 해안선 곳곳에서 날아왔다. 수평선상에 있는 구축함에서도 연락을 받았는지 수십 발의 조명탄을 발사해서 하늘은 이제 대낮보다 더 밝았다. 눈이 아플 정도로 빛나는 하늘 속에서 한철희 대위가 먹이를 찾기 시작했다.
- "탤리호! 차아지(Charge)~!"
헬리콥터는 항공기병(Air-Cavalry)이다. 여우사냥 나온 영국 사냥꾼처럼 '탤리호(사냥감 발견)' 신호를 보낸 기장 한철희 대위는 자기가 영국 창기병대 선봉인 양 영어로 목이 터져라 돌격을 외쳤다. 약간 과장된 것 같아 보이지만 그의 얼굴은 진지하고 조종 역시 ...
- 1991년 걸프전 당시, 해병대의 AH-1W와 육군의 AH-64의 조종사들이 30밀리 체인건이나 20밀리 개틀링으로 이라크군 한 사람에 1발씩의 포탄을 날려 사람만 사살하고 장비를 건드리지 않은 채 공격을 끝낸 사건이 몇 번 있었다. 반전론자들은 미군의 잔학성을 드러내는 범죄행위라고 비난했지만, 실전에서는 탄약 소모의 효율성을 기하고 적의 전의를 꺾는 데 아주 유용한 전술로 인식되고 있었다. 또한, 조종사나 사수 개인의 기량을 과시하는 데에도 유용했다.
- 12월 17일 00 : 40 후쿠이현, 쓰루가 제1부두 항만관리소
"씨발...여기도 텅 비었잖아."
한국군이 여기로 오고 있다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을 텐데, 도대체 왜 이렇게 텅 비어 있을까.
정말로 기습이 성공한 것일까? 권경준 병장은 막 뛰어들어온 항만관리소 통제실을 샅샅이 살피고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항만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만난 것이라곤 아군부대 병사가 거의 전부였고, 그동안 만난 일본인은 술에 취해 부두 입구에서 곯아떨어진 부랑자 하나가 유일했다.
- 한국군은 이곳 지리에도 익숙하지 못하거니와, 시간대도 야간이어서 더욱 힘들었다. 결국 한국군을 지금까지 막은 것은 익숙하지 않은 일본어와 한자로 된 각종 표지판, 그리고 어둠이었다. 그것들이 지금까지 마주친 유일한 적이었다.
- "분대장님. 이 유리창 깨도 됩니까?”
분대지원화기사수 박 상병이 기관총을 거치하기 위해 창문을 깨뜨려도 되느냐고 물었다. 전투상황이라면 굳이 물어올 것도 없었지만 아무래도 이 시설에서 전투가 벌어질 것 같지 않다는 것이 박 상병의 생각이었다. 만약 아군이 다시 쓸 시설이라면, 유리 하나라도 건들지 않는 게 좋았다. 지금은 화끈하게 추운 겨울이니까 나중에 이 건물을 사용할전우들을 위해서라면 유리는 깰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 "예! 전투도 없이 그냥 점령했습니다. 접수는 했는데 여기 방어진지 구축할까요?"
[그럴 필요 없어. 곧 항만관리부대가 올 테니까. 그때까지 그냥 거기서 기다리고 있으라구.]
"그냥 대기하란 말씀이십니까? 전투에 대비할 필요는 없겠습니까?"
[없어. 조금 이따가 관리대가 도착하면 그때 다시 연락하도록. 그럼 다음 집결장소를 지정해줄 테니까, 거기서 합류한다. 이상.]
- 12월 17일 00 : 52 후쿠이현 미하마
또다시 구축함대가 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포탄 착탄점이 해안선 쪽으로 약 1백 미터 정도 더 이동해서, 바다에서 겨우 2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낙하하기 시작했다.
포탄이 떨어져 폭발하고 나면 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났다. 연막탄 사격이었다. 어느새 밤하늘은 다시 어두워졌고, 조명탄이 낙하하지 않는 해안선은 불타는 몇몇 잔해들의 불빛만이 남아 있을 뿐, 암흑에 뒤덮여 침묵할 뿐이었다.
그 연막을 방패삼아 수십 대의 LVTP-7A1 수륙양용장갑차가 해안선을 향해 돌진했다. 장갑차가 얕은 바다에 이를 무렵 포격이 중지되고, 장갑차의 수상항주용 추진기가 육중한 장갑차에게 추진력을 주는 대신 캐터필러가 바닥을 긁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중량 22톤의 거대한 강습상륙장갑차가 속력을 내어 굉음과 함께 육지로 기어 올라왔다. 녹색과 갈색, 검은색과 흰색의 복잡한 위장무늬를 칠한, 악어 형상을 한 바다 괴수가 육지로 기어 올라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둠의 장막도 그 거대하고 육중한 형상을 완전히 가려주지 못했다.
- 자위관 하나가 소총을 들이댔다가 곧바로 개머리판을 휘두른 한국군에게 얻어맞아 턱이 부서진 채 그대로 나자빠졌다. 하마터면 자길 죽일 뻔했다는 분노감에 해병대원이 소총을 들이대고 그냥 방아쇠를 당겼다. 5.56밀리 소총탄 3발이 그대로 자위관의 안면을 박살내고, 피와 뇌수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 상륙전면에 자위대 병력이 거의 없다는 게 행운이었다. 해병대 김태환 일병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상륙교두보를 거의 전투 없이 점거했기 때문에 일이 쉽게 풀렸지, 만약 자위대가 1개 대대라도 제대로 된 진지에 제대로 된 방어계획을 세운 채로 배치되어 있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났다. 그랬다면 지금쯤 그는 차가운 바다 위에 시체가 되어 둥둥 떠다니거나, 쏟아지는 기관총 세례를 받아 옆구리에 피를 흘리며 모래밭에 누워 하늘의 별을 세고 있을 것이다.
- 지금까지 인류가 치렀던 수많은 전쟁에서 있었던 수많은 상륙작전에서, 방어 준비를 거의 갖추지 못한 수비군을 공격하는 과정에서도 상륙군은 큰 희생을 치렀다. 김태환 일병은 상륙작전을 앞두고 불안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그는 상륙하는 동안 죽지 않을까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일반적으로 전쟁이라면, 그리고 상륙전이라면 해안선에 진을 치고 있는 적의 포화를 몽땅 뒤집어쓸 걸로 예상했지만 그는 몸에 상처 하나 입지 않은 것이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는 꼭 살아서 돌아가고 싶었다.
- 바다 쪽을 바라보니 운봉, 개봉, 북한, 화산 등 대형 LST들이 해안선에서 1km도 되지 않는 가까운 곳까지 와 있었다. 선발 전차중대를 상륙할 LCVP 12척이 흰 물살을 가르며 해안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눈으로도 똑똑히 보였다. 전차 12대가 도착하고 나면 상륙교두보는 확실히 다져진다. 그런 다음에 추가병력이 순서대로 상륙되면 거의 한시름 놓게 될 것이다. 설사 일본군들이 떼거지로 몰려오더라도 일방적으로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고, 그럼 그는 살아서 고향에 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 상륙함으로 돌아가 다음 전차를 또 싣고 내려야 하니까 앞으로도 LCVP들은 상당히 바쁠 것이다. 저들이 내려놓아야 할 전차를 다 합치면 약 90대 정도 된다. 그리고 전차를 내리고 나서도 자주포, 차량, 그리고 병력의 수송임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가엾은 수송부대. 앞으로 4시간 이내에 해병대 1개 사단분의 장비를 내려야 했다.
- 12월 17일 01 : 20 시가(滋賀)현 마키노마치
마치(町)는 한국식 행정구역으로 읍(邑) 정도 되는 곳이다. 물론 원어는 한국어의 마을이다. 일본어에 무수히 남아 있는 한국어는 현대에도 끈끈히 그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UH-60P 헬리콥터 총 50여 대가 마키노마치의 밤하늘을 날았다.
- 하지만 다른 나라, 특히 미국 해병대원들은 헬기를 주요 수송수단으로 삼는다. 한국에서 해병대 강습부대는 1980년대에 사라지고나서 이번에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헬기강습훈련을 한 번도 받지 못한 이 준장으로서는 아직 어쩔 수 없었다.
"별로 좋지가 않아. 하여튼, 앞으로 교토에서는 전투가 없길 빌어야겠군."
"적에게 전차만 없으면 우린 무적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겁니다."
자신감에 넘친 참모가 말하는 동안 기내등이 꺼졌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서 스피커가 울렸다.
[지금부터 기내등은 모두 끄겠습니다. 그리고 멀미가 나시면 좌석 밑에 있는 구급상자에서 멀미약을 꺼내 드십시오.]
- 12월 17일 01 : 30 도쿄도(東京都) 미나도쿠 롯폰기(六本木), 자위대 중앙지휘소
"IDDN은 지금도 대부분 불통이어서 확실한 전황보고를 받을 수 없습니다. 특히 지상군의 경우에는 더 심합니다. 마이즈루와 이타미, 이 두 곳에 있는 중계국과 몇몇 회선이 공습으로 완전 파손되는 바람에 서부방면대 및 서부로 파견된 각 방면대와의 통신은 일단 위성중계에 의존해야 합니다. 그나마 현재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위성이 몇 개 안 돼서 문젭니다."
최근에 태양 흑점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기 때문에 정지궤도 통신위성 중 상당수가 사용불능이 되었다. 부서지지는 않더라도 통신이 몇 시간씩 불통되는 게 보통이고, 심하면 위성의 기능이 완전히 ...
- 헬리콥터가 없다면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에 그렇게 깊숙이까지 병력을 이동시킬 수는 없다. 고마쓰 육막장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 사이에 저렇게 깊이 들어오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적 상륙부대의 기동력이 아주 뛰어나군요. 이제 적군을 상륙지점 일대에서 격퇴할 희망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일단 상륙은 허용하게 됐다고 치고, 앞으로 육상에서의 방어계획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요시다 겐스케 방위청 장관이 물었다. 그는 엄연히 문관 출신이다. 부대를 지휘한 경험도, 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물론 없었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방위청 장관 자신이 잘 아는 문제였고, 실제로 일본은 군사력에 대한 문민통제원칙을 준수하기 위해 군사경험이 전혀 없는 방위청 장관을 임명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평시라면 몰라도 이런 방식은 유사시에는 군 통솔이 제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통합막료회의가 있는 것이다. 문민통제원칙 때문에 통합막료회의는 지휘권이 없지만, 대신에 방위청 장관의 판단에 조언을 하는 등 간접적으로 전쟁을 지휘할 수 있다. 번거로운 절차이긴 하지만 급박한 상황만 아니라면 아무런 무리가 없다. 다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짜증만 나고 일은 다 망치기 쉽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 "적의 상륙을 해안선에서 격파하지 못했다면, 당연히 내륙에서 격파하면 됩니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오?"
뭔가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있는 줄 알고 이토 의장에게 매달린 장관이 허탈하게 말했다. 의장이 천천히 이야기하며 자위대의 지휘체계에 대해 장관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런 법을 만든 것도 방위청장 같은 정치인, 바로 국회의원들이었다.
"그 당연한 것. 그게 전략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전략단위 판단을 내리는 게 일이고, 세부적인 전술을 세우는 것은 각 자위대 막료감부나 방면대 총감부가 할 일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당장 의논해야 할 것은 적의 전략 목표를 파악하고, 그들의 움직임을 예상하여 대국적인 견지에서 대책을 세우는 것입니다."
"음, 알겠소. 그럼 의견들을 모아 봅시다."
요시다는 내각회의에서 수상의 진노를 사겠지만 그래도 할 말이 많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전투는 이들 군인에게 맡기고, 내각은 전략을 논하면 되는 것이다.
- 12월 17일 02 : 04 후쿠이현 쓰루가만
쓰루가만 양쪽의 점령이 완료되자 상륙선단이 천천히 입항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상륙정이 아니라 거대한 수송선들 차례였다. 만의 좌우로 포항급 코르벳 함이 늘어서서 76밀리 포탑을 해안도로 쪽으로 겨누었지만 발포하지는 않았다.
항구를 이미 장악한 팀이 소형 예인선을 끌고 나왔다. 수송선단 중에 쓰루가항에 익숙한 선원은 드물었다. 유럽과 미주노선을 왕복하는 컨테이너선 선원들은 많았지만 가까운 일본 항로에 대한 경험은 대부분 없었다. 쓰루가항은 한국과 중요한 교역항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헬기로 강습부대와 같이 투입됐던 부산항 항만관리요원 중에는 능숙한 파일럿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항으로 항로를 안내하는 소형 예인선인 터그 보트 조합원이나바로 그 배에 탑승하여 직접 뱃길을 안내하는 사람들 모두 파일럿이라 불린다. 이들은 쓰루가 내항의 수심과 수로가 자세히 표시된 해도가 손에 쥐어지자 능숙하게 수송선들을 유도했다.
-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상선과 컨테이너에서각종 장비와 차량을 끌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륙작전에서는 하역 시간에 상륙군의 전 생명이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객선에 나눠 타고 도착한 기계화부대 전투원들이 지상에서 전차를 몰고 전장을 누비는 것도 오로지 하역작업에 달려 있었다. 한때미 해군 군사해상운송부대(MSC) 소속 대형 차량운반선이었던 대우로열호도 터그 보트에 이끌려 제1부두로 진입했다.
- 12월 17일 02 : 08 쓰루가 남동쪽 4km, 8번 국도 주변 언덕
"저 녀석들 꼼짝도 않네? 얼어붙은 거야, 아니면 우리도 모르게 빠져나간 거야? 도대체..."
제15사단 수색대대 2중대장 오영환 대위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시간 30분이 넘도록 자위대는 처음에 기습받은 그 자리에 못 박혀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꼼짝 않는 것 같았다. 을씨년스러운 겨울 바람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피아간에 숨을 죽이고 가만히 대치하고 있는 상태였다.
양쪽 모두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한쪽에 응원군이 오면 아무리 소수라도 결정적일 수가 있다.
- 8시간 뒤부터 본격적인 작전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그들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고구려 멸망 이래 최초로 외국을 정벌하는 것이다. 이종무와 최윤덕의 대마도 정벌도 따지고 보면 도둑잡기나 영토회복에 불과했고, 6진 개척이나 동북 9성 등은 정벌이라기보다는 '개척'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이번 작전은 정말 엄청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고구려 이래 최초로 시도하는 대대적인 대외 정벌이었다. 고려가 일본정벌에 나선 적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몽고의 강요 때문이고 고려 조정은 적극성을 띠지 않았다.
그러나 의장이나 다른 장군들 모두의 가슴속에는 벅차오르는 희열과는 또 다른 감정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이번 전쟁은 군인으로서 근본적인 회의가 없을 수 없는 전쟁, 침략전쟁이었다. 이유야 얼마든지 댈 수 있지만, 그들은 군인이 가장 불명예스럽게 생각하는 침략전쟁을 지휘해야만 하는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이다.
- "항만시설을 피해 없이 접수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 행운입니다. 만약 작전개시가 2시간만 늦어졌어도 쓰루가에서 전투를 벌였을 테고, 그랬다면 상륙이 불가능하거나 최소한 하루쯤 늦어졌겠지요. 정말 다행입니다. 이제 상륙작전은 성공이 확실시되는 것 같습니다.”
"이제까지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소. 해군도 공군도, 육군도 아주 잘 해내고 있어서 다행이오. 앞으로도 그렇게 되길 빌어야 되갔소. 이 작전은 단순히 실력만으로는 결판을 낼 수 없으니까 말이외다."
정보참모부장 김평국 중장의 말에, 한 나라의 군대 전체를 지휘하는 총사령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엉거주춤한 말투로 이종식 차수가 한마디했다. 묘하게 여운이 남았다. 말을 마치고 물 한 모금을넘긴 이 차수는 새삼스레 주변을 돌아보았다. 통일참모본부 작전기획참모부장인 권대현 대장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권대현 대장은 지금 일본원정군 총사령관도 겸임하고 있어서 당분간 출석은 할 수 없다. 원거리 화상통신으로라도 회의에 출석할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바쁜 모양이었다.
- "권 동지는 바쁘디 아니한 모양이구만..."
이종식 차수가 약간 섭섭한 듯 말했다. 원정군이 어려움에 처해있다면, 권대현 대장이 시도 때도 없이 화상통신으로 지원을 요청했을 것이다. 북한에서 바쁘다는 말은 어렵다, 곤란하다는 뜻이다.
- 12월 17일 02 : 15 교토(京都)현 교토
천년고도(千年古都)라는 말에 걸맞은 도시는 전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드물다. 한국의 경주와 평양, 중국의 장안성과 낙양성, 이탈리아 로마 정도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도시일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 천년고도가 있다면 바로 이곳 교토가 유일하다. 일본의 정치 및 경제적 수도가 도쿄라면, 이곳 교토는 정신적·문화적 수도이다. 일본에서 가장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고, 가장 고전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대도시이기도 하다.
그 교토의 밤하늘에 갑자기 수십 개의 비행등이 나타났다. 그것들은 교토시 북쪽에서부터 이어지는 367번 국도와 그 가로등의 불빛을 표적으로 삼아 날아오고 있었다. 다카노 강을 가로지르면서 고도를 초저공으로 낮춘 헬리콥터들은 가로등을 따라 민첩하게 움직였다.
- 미우라 순사장은 아주 언짢은 표정으로 풋내기 가네모도를 째려보았다. 근무시간에, 그것도 전시상황에 음악이나 듣고 있는 것은 아주 큰 문제였다. 음악을 들으면서라도 주변 상황에 신경을 계속 쓰고 있다면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분명히 교토는 최전방은 아니니까. 그러나 지금처럼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정도로 음악에 몰입해서는 정말로 곤란했다.
미우라 순사장이 처음 순사 노릇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일본 경찰에는 이런 녀석들이 전혀 없었다. 아니, 사회에서도 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일반 사회뿐만이 아니라 경찰이나 자위대 안에서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지금 가네모도 같은 종류의 인간이었다. 저런 변종들이 생긴 건 일본의 잘못된 소비문화 때문이라며 미우라 순사장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여튼, 지금은 그런 것 가지고 따질 여유는 없었다. 그는 오른쪽 창 밖으로 보이는 불빛들을 가리켰다.
"저기 저 비행등 보이나?"
"에? 예. 헬리콥터 같은데요?"
"그래. 그런데 그 수가 좀 많은 거 같지 않아?"
- "진짜 그렇네? 혹시 자위대에서 급히 헬리콥터로 부대를 공수해온 거 아닐까요?”
"그랬다면 연락이라도 있었겠지. 혹시 한국군 아냐?"
"에이, 설마요"
신호가 바뀌려고 할 때 갑자기 학교 쪽에서 하얀 설상복을 입은사내 서너 명이 불쑥 나타났다. 미우라는 바짝 긴장했다. 모두들 손에 총 비슷한 것을 들고 있었다. 그냥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달아나버릴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갑자기 저쪽에서 총 비슷한 물건을 들이댔다. 순간,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다.
"가네모도, 고개 숙여!"
- 12월 17일 02 : 33 교토현, 교토
"짜식들! 경찰차에도 에어백은 달아놓는다 이거냐?"
해병대용 세무 전투화를 신은 발로 순찰차 앞문을 마구 걷어차면서 김 상병이 투덜댔다. 에어백이라는 건 민간용 차에나 붙이는 것이지, 이렇게 순찰차에까지 갖춰져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리뷰자 주 : 현재는 한국도 갖춰져 있다.)
- 한때 잭 루머스(Jack Lummus)라 불리던 대우 로열호는 미군이 철수할 때 빼앗기다시피 넘겼던 함정이었다. 사전 배치선으로 7함대의 기갑장비를 적재하고 항구에 대기하는 것이 임무였던 이 배는 유사시에는 분쟁지역으로 여단병력의 전투장비와 물자를 실어 날랐다.
- 통일 직전에 미 제2사단이 오키나와로 철수하면서 사용하던 구형 IPM-1 전차와 구식 M-113A3 장갑차를 비싼 값으로 한국에 강매했지만 한국도 그때 강공수를 띄웠다. 북한의 전쟁위협이 극심했던 통일 직전, 요코스카에서 부산으로 이동배치된 잭 루머스호도 같이 넘기라고 요구한 것이다. 탑재한 전차와 장갑차, 야포도 그대로였으니 그 장비까지 팔아 넘기라고 우겼다. 또한 당시 특수를 누렸던 대우자동차의 대형 특장차 운반선이 필요하다는 이유도 덧붙였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압류였는데, 이를 갈던 미국은 모양새 좋게 해결하기 위해서 양도되는 물품에서 M-1 전차는 제외하는 것으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전쟁 직전까지 실제로 대우자동차의 대형 트럭을 세계로 실어 날랐던 우여곡절의 이 배는 이제 군사임무에 멋지게 복귀한 것이다.
- 바닥으로 내려진 컨테이너와 함께 후갑판의 램프가 열리고 전차가 내려왔다. 바다 위 요동에서 쏠리지 않도록 강철 케이블로 바닥에 고정된 K-1 전차와 K-200 장갑차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정신없이 움직이는 전문가들이 필요했다. 군복 입은 노무자들과 현역 공병부대원들이 사방을 뛰어다니며 해머로 케이블 고리를 내리쳐서 핀을 뽑아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어차피 다음 수송을 위한 재정비는 귀로에 해야 했다. 강하게 고정된 케이블이 순간적으로 풀리면서 강철 채찍이 되어 허공을 갈랐다. 순간 귀를 스치는 바람소리에 정기용 일병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멍청했다. 맞은편에서 휘두르는 해머의 방향을 주시해야 되는데 전차에 타는 것에만 급급했다. 얼굴 옆을 스쳐간 강철도로 된 케이블은 K-1A1 전차의 공구박스를 회초리로 종아리를 치듯 예리한 자국을 남겼다.
- 소도시 야마자키마치가 위치한다. 이곳 바로 북쪽 상공에서 F-4E 팬텀기 1대가 아슬아슬하게 저공으로 비행하고 있었다.
어두운 밤하늘에는 별빛도 없어서 이 둔중한 60년대 전투기의 날개와 꼬리날개에 그려진 국적 마크를 확인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호위전투기도 없이 단 한 대의 도깨비 비행기만이 날아가는 이 하늘은 놀랍게도 아주 깨끗했다. 공중조기경보기뿐만 아니라 지상기지 대공레이더 전파도 전혀 잡히지 않았다.
"멍텅구리들 아냐? 전쟁이 시작된 지 벌써 하루가 넘었는데."
WSO(후방석 화기관제장교) 양철호 중위가 일본군을 비웃었다. 전시상황에 일본 내륙까지 이렇게 파고들어 왔는데도 저지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 양 중위가 이 전쟁은 이미 다 이긴 것이 아닐까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 [그래도 조심해야 해. 우린 신출내기들이야.]
앞좌석에서 조종사 곽성한 중위가 그렇게 말했다. 전방석 조종사도 후방석과 같은 중위였다. 공군 조종사에게 중위는 가장 계급이 낮은 신참이다.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면 전투조종사교육을 받게 되는데, 교육기간이 거의 2년에 달하기 때문에 전투비행단 조종사 중에는 소위가 있을 수가 없었다.
원래 팬텀기는 숙련된 고참 조종사들에게만 배정되는 기체이기 때문에 이 조종석에는 소령 이상 계급이 아니면 앉아 볼 수도 없는 자리였다. 그러나 F-16이 배치된 뒤부터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급기야 얼마 전에는 팬텀을 조종하던 고참 조종사들 상당수가 새로 도입될 모종의 전투기로 기종전환훈련을 받게 되고, 그 자리를 곽성한 중위나 양철호 중위 같은 신참들이 채우게 되었다.
- [우린 어디까지나 미사일 플랫폼을 몰기만 하면 되는 신세라구. 알겠어, 철호야? 우린 죽어도 상관없는 신출내기란 말이야.]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신참 조종사일수록 살아서 경험을 쌓아야 한다. 그러나, 상부에서는 어렵지 않고 단순한 임무이면서도 죽을 위험 자체는 꽤 높은 스탠드 오프-핀 포인트 공격(안전거리-특정지점 정밀공격)에 곽 중위 같은 신참 조종사를 투입하는 결단을 내린 셈이다. 바보짓이다. 정말 바보짓이다.
- F-4가 살짝 하늘로 솟아오르나 싶더니, 날개 아래에 달려 있던 두 개의 길쭉한 쇠뭉치가 갑자기 불을 뿜으며 날개와 분리되어 날기 시작했다. 마치 만년필 비슷하게 생긴 이 비행체는 곧바로 고공으로 상승해서 마하 1.5의 속력으로 날기 시작했다. AGM-142 공대지미사일 최초의 공식적인 실전투입이었다.
이 미사일은 전략공격용 미사일로, 통상 사거리는 100km이다. 명중오차는 플러스 마이너스 1미터. 이스라엘이 개발한 이 미사일은 현존하는 스탠드 오프 공대지미사일 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무기에 속한다. 걸프전 당시에도 미군의 B-52에 의해서 사용되긴 했으나, 중동지역의 반미감정을 촉발시킬까 봐 사용 사실은 현재까지도 비밀에 붙여지고 있었다. 이 미사일의 보유국은 미국과 이스라엘, 오스트레일리아와 한국, 4개국뿐이고, 이 중 가장 많은 탄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과 한국이었다. 이 중 2발이 일본의 모처를 향해서 발사됐다.
- 12월 17일 03 : 54 야마구치(山口)현 미시마(見島)섬 북쪽 70km
"김철진 소령을 아십니까?"
곽일준 소령이 최승호 상좌에게 말을 건넸다. 일본 잠수함에 대한 최윤덕함의 무료한 추적이 15시간이나 계속됐다. 목표 6은 쉽사리 꼬리를 세우지 않았다. 항모와 상륙전단은 지금쯤 벌써 목표해역에 도착해서 상륙했을 시간이었다.
목표 6은 항모전대가 쉬운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보내준 것이다. 사무라이처럼 목 뒤를 후려치려고 할 것이다. 그 때문에 신중한 목표 6은 엄청난 먹이를 앞에 두고도 덤벼들지 않은 것이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뉘기요?"
"장보고함 부장인데, 제 동기입니다.”
"아! 장보고 함장 동지가 서 중령이디요? 톈진을 묵사발 냈던 그 잠수함에 부장이구만요. 기런데 왜?”
"아직 소식이 없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기렇디. 구레에서 빠져나오는 놈들을 막았는지 실패했는지 분명해질 시간이디요.”
최승호 상좌가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를 쓸어냈다. 세수도 하지 못했다. 목표 6이 항모를 공격할 수 있는 거리에서 계속 맴도는 동안 놈을 잡으려고 애썼지만 침묵을 지키는 바람에 실속도 없이 힘만 쓴 꼴이었다. 놈이 어디에 있을지 궁금했다. 지금 최윤덕함으로서는 해역을 선회하며 일본 잠수함이 내는 조그만 음파를 잡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구레의 제 1 잠수전대가 예상보다 빠르게 간몬을 빠져나온다면 상륙군이 힘들어지지 않습니까. 목표 6이 숨은이유는 이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곽일준 소령이 말을 마치며 김 소령을 떠올렸다.
- 유능한 동기였던 김철진은 너무 드센 함장을 만났다. 함장 서승원 중령은 장난도 심했지만 집착과 모험심도 강했다.
사실 잠수함 승무원으로서 모험심은 금물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일본과 해전이 무리라는 것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위험한 임무에 목숨을 걸고 싶은 자가 누가 있겠는가. 김철진 소령이 결정한것이 아니라서 문제였지만 누구든 나서야 할 일이었다.
- 하얀 벚꽃으로 무성한 해군작전사령부는 군항제 기간에는 외부인에게 개방되었다. 그 아가씨는 바람이 일 때마다 함박눈처럼 떨어지는 벚꽃에 계속 탄성을 지르다 해작사 건물을 보고는 들어가고싶다고 졸랐다. 20세기 초에 고풍스런 제정러시아 양식으로 지어진 해작사 본부 건물은 사령부 내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하얀 벚꽃 사이로 붉은색 건물이 참 잘 어울렸다. 물론 그곳은 진짜로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는 요지였다. 결국 조르다 지친 그 아가씨도 내부는 구경할 수 없었다.
'젠장, 왜 여자 이야기는 꺼내 가지고...'
- 북한군 출신들과 어울리면서 언어 소통도 문제가 있었다. 특히 에미나이란 표현은 아주 거슬렸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북한장교들의 눈을 보면 욕이나 속어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곽 소령이 함께 한 북한군 장교들은 사생활도 청렴했다. 최승호 상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말한 것은 아마도 좋은 뜻이리라.
"알갔소, 그만하디. 아무래도 안 되갔소. 소노부이를 쓰고 남쪽으로 빠집세다."
"걱정입니다. 장보고가 봉쇄에 성공해서 시간을 끌어줬어야 하는데."
"우리가 이놈에게 시간을 낭비한다면 간몬 입구를 막을 수 없게 되오. 이제 자리를 옮길 시간이오. 6번 발사관을 소노부이로 재장전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어뢰실 나오라."
- 어뢰실로 통하는 인터폰을 들고 부함장이 명령하자 발사관에서 다시 어뢰를 빼내고 소노부이 투사기가 장전됐다. 일명 소노버스(Sono-Bus)라 부르는 이 시스템도 한국 해군이 국방과학기술연구소에 위탁해서 개발한 새로운 소노부이 살포 시스템이다.
- 낡은 마크-44 어뢰의 동체 중간에 AN/SSQ-77 소노부이 6개를 탑재한 뒤 발사하자 어뢰가 지정된 침로를 주행하며 소노부이를 뿌렸다. 원통형으로 묶인 6개의 소노부이가 하나씩 빠져나오면서 수면 위로 떠올라 바다 속의 음향을 정찰한 뒤 전파를 송신했다. 소노부이가 발신하는 전파가 지상의 기지국까지 전달되어야 하는데 이 부분이 매우 힘들었다. 미약한 전파도 수신할 수 있는 전자전 정찰기를 항시 띄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소노부이가 발신하는 정보 중 중요한 것이 있으면 다시 ESM으로 잠수함에서 수신할 수 있다.
구조적으로 결함이 많은 이 시스템을 채택한 이유가 나름대로 있었다. 남해와 같이 육지와 가까운 연해에서는 확실히 효력을 낼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결국 일본 함대를 잡기 위해 쓸 수 있는 온갖 잡동사니를 다 들고 나온 셈이었다.
- 12월 17일 04 : 20 도쿄도 네리마구(練馬區)
동부방면대에서 현재 유일한 가용사단은 제1사단뿐이었다. 자위대 최정예사단 중 하나인 이 사단이 현재 봉착한 최대의 문제점은 차량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총 병력 9,000명의 갑종 사단인 1사단 예하에서 실제로 당장 차량으로 이동해야 할 병력은 보통과 12개 중대, 즉 4개 대대와 포병 4개 대대가 전부였지만, 이들을 수송할 차량도 사단 전체에 충분히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방금 육상자위대 동부방면대 총감부에서는 이들 사단에게 중부방면대의 방어구역인 나고야(名古屋)로 이동하여 이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국군의 주된 진격로로 예상되는 지역에 있는 첫 번째 대도시이고,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 일본 육상자위대의 고질적 약점은 병력 부족과 동시에 기동력 부족이다. 충분한 차량이 지급된 사단은 홋카이도의 4개 사단이 고작이고, 나머지 사단들은 필요한 차량의 60% 이상을 지급받은 사단이 드물다. 1996년부터 일본식 고기동차가 양산되어 대량배치되고 있지만, 그것이 트럭이나 APC 같은 구실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 "자네 말이 맞네. 나고야는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야."
"예? 예."
"우리가 빨리 이동해봤자 오늘 오후에나 나고야에 들어갈 텐데 말야. 사단 잔여 병력 전부 통틀어 봤자 보통과 12개 중대뿐이고, 그나마 한꺼번에 움직이지도 못하는 걸 갖고 도대체 뭘 하겠나? 적상륙군이 헬리콥터부대까지 가지고 있다니 보통과 연대 두세 개로는 막아내기 힘들 거야. 방면대 전력 하나를 몽땅 투입해도 적 보병사단 하나 간신히 막을까 말까야."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후지(富士) 근처에서 후지교도단과 연합작전을 펼치는 쪽으로 작전이 바뀔 거야. 그동안 우리는 후지교도단과 합류해서 방어하기 좋은 지역으로 이동하면 그만이고. 나고야에는 수비병력도 없고 하니 적이 진입만 하면 점령당할 걸세. 길어야 앞으로 6시간 이내에 떨어질 거야. 한 7~8시간 뒤면 새로운 명령이 내려오겠지."
교도단은 교육여단으로, 후지교도단은 자위대의 훈련부대 중에서도 최대규모의 제병과 교육부대이다.
"그럼 부대 이동명령 및 목적지는 이에 맞춰서 설정할까요?"
"아니, 아니. 그럴 것 없어. 어차피 우리가 후지 근처에 도달할 때쯤 명령변경이 있을 테니까. 빠르면 한두 시간 내에 통막에서 육막장한테 명령변경을 지시할지도 모르고... 육막장 고마쓰 군이나 통막의장 이토 일급육장, 그 사람들도 나만큼은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 "근데... 우리 기갑부대를 보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권대현 대장이 화제를 돌렸다. 허철화 상장은 인민군에서 31년을 복무한 고참이었다. 줄곧 기갑부대 지휘관으로서 복무하긴 했지만 T-54/55, T-62 같은 인민군의 낙후된 전차들과반생을 보내왔던 인민군 장령에게 최신예 기갑차량을 장비한 국군 부대가 맡겨진 것은 사실 허철화 상장의 능력을 믿은 권 대장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원 덕이었다.
- 이번 전쟁에서는 인민군이나 구 소련군 스타일의 전격적인 돌파전 전문가가 필요했다. 한국군의 상륙능력이 취약해서 충분한 기갑전력을 일본 본토에 상륙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전격전 같은 기습전술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한국군도 인민군이나 소련군에 비해 그다지 뒤지지 않는 공격적인 작전개념을 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도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공세적 작전의 수립과 실행을 맡을 만한 고위 장성은 여전히 드물었다. 예컨대 수준은 별 차이가 없지만 선수층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한국 육군의 뿌리 깊은 보병제일주의사상이 크게 한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 그러한 전격적인 공세작전에 맞는 지휘관은 인민군이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지난 50년 간 인민군은 전격적인 돌파 및 기동전에 치중한 반면 한국군은 주로 방어전과 그 이후에 진행되는 역습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한국군의 공격적인 작전개념도 이러한 역습단계에 치중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이 단계의 작전은 다른 병과들이 준비된 지원 아래 실시된다. 지원전력에 그렇게 여유가 없는 현재 상황에서는 그다지 적절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 그러나 문제는 아직 인민군에 대해 여전히 불안한 느낌을 가진 한국군 고위 장성들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들 역시 이런 작전에는 인민군 방식의 전격적인 기동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민군 장성에게 한국군 지휘를 맡긴다는 것은 그런 인식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양군의 통합이 거의 완료된 현재에 있어서도 지휘권 문제만은 아직 잡음이 많았다. 통일참모본부에서 사실상 한국군 참모들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정지수 대장의 반발이 가장 컸다. 권대현 대장은 한국군에 허철화 상장보다 나은 기갑전 지휘관이 있으면 소개시켜달라고 반발함으로써 정지수 대장의 반발을 무마할 수 있었다.
- "고조~ 아주 좋습네다."
허철화 상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그것 한마디뿐이었다. 권대현 대장이 기대했던 만큼의 대답은 전혀 아니었다. 물론 권 대장이 그냥 인사치레 같은 걸 바란 건 아니었다. 권 대장이 약간 실망스러워하는 표정을 짓자 허 대장이 씩 웃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땅크는 다 똑같습네다. 적 땅크를 까부술 수 있느냐 없느냐만 중요하디, 기 이상은 필요 없다요. 59식 땅크나, 88땅크나 상관없습네다. 적 땅크를 확실히 까부술 수 있고, 필요한 만큼 속도를 낼 수만있으면 그만이디요. 중요한 건 대가리 숫자 앙이갔습네까?"
- 2차대전 이후로 전세계 기갑부대 지휘관들의 전술 사상은 거의 모두 일치한다. 전차 차종이나 성능만을 맹신하지 않고 그것의 운용전술을 신봉하는 편이다. 화력이 너무 뒤떨어져서 적 전차를 도저히 격파할 수 없는 전차만 아니라면, 그리고 각 시대의 기준에 맞는 정도의 속력으로 움직일 수 있는 전차라면, 적을 압도할 숫자와 작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기갑부대를 지휘하는 군인들 공통된 신념인 것이다.
- 권 대장은 허 상장의 말을 한국군 기갑부대가 인민군 방식의 작전개념을 실천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썩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전차이기만 하다면 그게 어떤 어중이떠중이든 상관없다는 뜻인 것이다. 입맛이 썼지만 권 대장은 얼굴에 그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좋소, 이만 가보도록 해요. 그럼 이따가 나고야에서 봅시다. 나고야에서 아침이나 같이 하는 게 어떻소?"
"좋디요. 통일!"
- 2월 17일 05 : 07 스호 역, 이키섬 인근 해역
"무슨 일이십니까? 함장님."
김철진 소령이 함장실로 들어서자 테이블에 앉은 서승원 중령이그를 맞았다.
"앉게."
장보고함의 함장실은 구축함과는 많이 달랐다. 비좁은 공간의 한쪽 벽에 접는 침대가 달려 있고, 그것을 접어놓아야만 테이블을 펼 공간이 남았다. 그 옆 사물함에 몇 가지 책과 사진, 그리고 잡다한 개인물품이 빽빽했다. 테이블은 물론 두 명이 간신히 마주할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그러나 일반 사관들도 3층 침대에 겹겹이 누워 자는 것에 비교하면 엄청난 넓이였지만, 잠수함에서는 모든 것이 그렇게 비좁았다.
- "이번 작전이 종료돼도 귀환하지 않는다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의아해하는 김 소령에게 대답 대신 서 중령이 일어서서 왼쪽 벽에 붙여진 해도 옆으로 걸어갔다.
"여기야."
서승원이 가리킨 손가락은 규슈 남단과 시코쿠 사이에 위치한 오스미 해협이었다.
- "사세보 2호위대군이 급속히 북상중인데 1호위대군과 합류를 한다면 이곳일 가능성이 커. 사령부에서는 1, 2호위대군의 연합행동을 절대 방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봐."
"사세보 2호위대군을 저지하라는 것이군요."
"그래. 예상외로 3, 4호위대군이 쑥밭이 됐나 봐. 사령부에서는 제 1 잠수대군을 놔두고 사세보 2호위대군을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야."
"동해 진입을 저지하려는 것인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시간끌기 밖에는 되지 않잖습니까. 다른 지원은 없습니까?"
"없어."
김철진 소령은 벽에 걸린 규슈 남단의 해역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더 이상의 훈장은 싫었다. 톈진공격으로 수여받은 훈장을 떠올릴 때면 흥분보다 그때의 공포가 앞섰다. 대잠 포위망을 헤치고 나오는 데 필요한 신중함과 끝없는 기다림은 피를 말린다. 누군가 그랬다. 잠수함 승무원은 30대가 넘으면 환갑이라고. 독일인이었던가? 중년 나이가 보여주는 신중함과 정교함은 잠수함에서는 예외였다. 긴장 속에서 더 중요한 것은 체력이기 때문이다.
- "곧 세부 저지선을 설정해주게. 이들과 조우할 곳은 멀지 않을 거야. 아마 놈들은 2잠수대군 소속 잠수함은 바로 동해로 진입시키겠지만 2호위대군은 그렇지 않을 거야. 함정을 만들자구."
"예. 준비하겠습니다. 함장님."
대답은 쉽게 나왔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 "근데 1 잠수대군이 아직 안 걸리는군. 모두 빠져나와 있는 것은 아닐까?"
서 중령이 스스로에 던진 의문인지, 김 소령에게 질문한 것인지 불분명했다.
"아직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구레에 2개 전대의 잠수함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로테이션(임무교대)이 이루어진 게 얼마 안 됐잖습니까. 그리고 제주도 남방에서 북상중인 2 잠수대군은 2개 전대가 작전중입니다만... 4척뿐입니다."
"좋아. 잠수함을 상대하지 않는 게 오히려 다행일지도 몰라. 덫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우리로선 이제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 커피메이커에서 향이 좋은 모카를 뽑은 서 중령은 먼저 김철진 소령에게 잔을 건넸다. 뚜껑이 달린 머그잔은 함이 급격하게 기울어져도 쏟아지지 않게끔 받침에도 고무 패드가 붙었다. 모처럼만의 따뜻함이 긴장된 몸을 풀어주었지만 하품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 "방위 0-8-5에서 새로운 시그널. 추진 잡음이 아닙니다. 간헐적인 탐신음입니다. 소나 유형은 고주파 탐신음입니다. 이건 소해정 같습니다. 히다치의 기뢰수색용 소나라는 데 걸겠습니다. 아! 또 하나 있습니다. 방위, 거리 동일합니다."
"목표 13, 14를 부여한다. 좌표 확인!"
"다시 조용해집니다. 소나를 멈춘 것 같습니다."
- "짜식들! 기본기가 탄탄하군. 속도와 다른 시그널 위치는?”
"속도는 17노트, 간헐적으로 액티브 소나 탐신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거리 15km 이상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들이 소나탐신을 시작하기 전, 또 다른 두 개의 목표를 체크했습니다. 디젤구동음입니다만 잠수함으로 판단됩니다."
작전사관이 요약한 상황을 함장에게 보고했다. 이제 해상자위대 전투함들이 전방 기뢰밭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소해정을 앞세웠지만 이동속도가 빨랐다. 신중한 접근은 아니었다. 이 지역에 기뢰를 예상하지 않는 게 당연할 테지만 그들로서도 서둘러 동해에 진입해야 할 것이다.
- "거리 정확히 산정할 때까지 기다린다."
"함장님. 지금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물러나는 것이..."
"아냐. 소해정과 잠수함을 같이 날려야 해. 잠수함만 날리게 되면 우리가 위험해지네."
장보고가 이곳까지 어렵사리 매달고 온 기뢰 컨테이너가 두 곳에 깔려 있었다. 각각 30개의 기뢰를 장비한 컨테이너 용량은 장보고의 어뢰실 공간만큼 기뢰를 탑재했다. 자체 부력조절 탱크로 장보고의 부력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그것을 매달고 오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좋아. 1번 컨테이너에 안전장치를 해제한다. 침저기뢰들은 1차 폭발이 있은 후에 터지도록 세팅이 되었으니 문제없고... 유도 기뢰의 안전장치만 해제한다. 확인한다. 1번 컨테이너만이다."
"알겠습니다. 1번 컨테이너, 안전장치 해제."
부함장이 복창한 후 콘솔을 조작하자 1번 컨테이너까지 연결된 유선 케이블을 통해 안전장치가 해제되고 컨테이너 상부 덮개가 열리면서 호밍 기뢰인 스웨덴제 P85가 빠져나간 후 바닥에 가라앉아 목표를 기다렸다. 이미 컨테이너를 떼놓기 전에 부설해 놓은 국산기뢰들은 호밍 기뢰가 먼저 폭발을 한 후에 안전장치가 해제되도록 이미 조정되었다. 자체 항주능력이 있는 이들 스웨덴제 기뢰들이 때맞춰 폭발해준다면 나머지 기뢰들의 안전장치까지 해제되어 동시에 여러 잠수함을 한꺼번에 공략할 수 있었다.
- "됐어. 이제 빠져나가자. 우리도 살아야지."
함장이 명령하자 장보고함은 서서히 움직였다. 5km 정도로 짧게 늘여진 예인 소나가 당겨지며 바닥에서 몇 번 끌린 후에 팽팽하게 당겨져 올라왔다. 예인 소나를 끊어 먹지 않으려면 주의해야 했다.컨테이너와 연결된 유선 케이블도 끊어지고 장보고는 이제 자유롭게 빠져나갔다.
[음탐실입니다. 예인소나 45, 46, 58번 트랜스듀서가 작동불능입니다. 바닥에 긁혀서 깨진 모양입니다.]
"그 정도면 지장 없겠지? 증속한다. 6노트로, 심도 50미터."
[음탐실입니다. 방위 0-1-0에서 폭발음입니다. 폭발 심도는 해면 부근입니다. 목표 13과 14의 시그널 감도가 없어졌습니다.]
"제대로 들어맞았다. 빨리 빠져나가자. 이제부턴 튀는 게 상책이야. 증속, 9노트로."
- P85 기뢰가 터지면서 낸 폭발음이 충격파가 되어 주변에 흩어진나머지 기뢰들의 안전장치를 해제시켰다. 먼저 기뢰원으로 진입한 목표 9가 걸려들었다. 강한 자성과 수압변화, 음파를 감지해서 폭발하는 국산 K-702 기뢰의 위력은 훨씬 강력했다. 음파를 잡은 기뢰의 2차 안전장치가 풀리고 마지막으로 자기탐지기가 작동하자 중량6 00kg에 가까운 폭약이 터졌다. 엄청난 수압으로 인한 충격파가 바로 위를 지나던 잠수함 아키시오의 가운데를 덮쳤다. 용골 가운데에 걸린 충격파가 밀어내는 물의 압력은 공기 중의 폭풍보다 수십 배나 더 거셌다. 용골이 부러지고 복각선체의 내측압벽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곧 이어 잠수함은 침수되고 승무원들은 그대로 150미터 깊이의 수압이 복부에 가하는 압력으로 찌그러들었다.
- "연대 잔존병력 규모는?"
"예. 막료진은 전멸입니다. 1중대와 4중대는 매복에 걸렸을 때 거의 전멸당했습니다. 그때 우리 2중대와 3중대는 피해가 적었습니다만, 다시 헬기공격 때 3중대가 거의 전멸했습니다. 2중대도 남은 병력은 48명입니다. 연대 전체에 남은 전투병력은 54명이고요. 연대장과 저를 포함해서 중상자는 모두 제외했습니다. 중상자까지 하면 생존자는 142명입니다."
"4개 중대에서 142명이라... 무반동포중대와 중박격포중대는 어떻게 됐나?"
"4중대와 함께 전멸했습니다."
머리 위에서 부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시니 일좌는 부관 미야자와 삼등위의 품이 의외로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다그치기만 하고 별로 잘 해주지 못했다는 자책이 이제야 조금씩 들었다.
- 대답하는 다치바나 일등위도 고통을 참기 힘든 것 같았다. 5.56밀리 소총탄에 어깨를 맞았는데, 출혈도 그리 심하지 않았고 지혈도 했다. 그러나 생명에 지장은 없는 정도의 상처라고는 하지만 진통제없이 그 고통을 견디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연대장은 문득 이제 자신의 연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지금도 자위관인 이상 그들에게는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가 있고, 그 의무감은 지금 중상을 입은 그의 어깨를 거부할 수 없는 무게로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고통이 너무 심했다. 이를 악물어 고통을 참고 간신히 한마디 내뱉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나?"
"대치하고 있던 적 부대가 날아가 버렸으니 그 후속 부대가 오길 기다렸다가 그치들한테 항복을 하든가, 아니면 적이 버린 고지를 점령하고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든가, 그 둘 중 하나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 12월 17일 05 : 31 일본 도쿄도 미나토쿠 롯폰기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단 말인가?"
하토야마 해막장이 책상을 난폭하게 내리쳤다. 방금 들어온 보고엔 구레에서 전개중인 1 잠수대군 소속 제잠수대의 아키시오와 나츠시오가 가미노세키(上關)를 빠져나오기도 전에 기뢰에 당했다고 했다.
"간몬을 통과해서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개전 이틀 전부터 완벽하게 봉쇄되었습니다. 1km도 안 되는 해협인데 우리 SOSUS를 돌파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 어디로 들어왔다는 말인가? 오스미해협으로? 남쪽으로 들어왔다고?"
"모르겠습니다. 적은 아마도... 1급 경계태세가 발동하기 전에 침투한 것 같습니다."
더듬거리는 부관이 잘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토야마 해막장은 울분을 터뜨릴 상대가 필요했다.
- "제1소해대가 소해작업을 진행중입니다. 적은 교묘했습니다. 선두에 있던 소해함 마키시마와 구메지마를 먼저 제거했습니다. 뒤따르던 잠수함들이 회피를 시도했습니다만 이미 기뢰원에 깊숙이 들어온 이후였습니다. 원격 조작을 한 것 같습니다."
"원격 조작이라고? 그렇다면 근처에 있다는 거잖아. 수색은 하고있는 거야?"
"예, 그렇습니다. 오스미에서 발진한 HSS-2B 시 킹까지 동원하여수색을 하고 있습니다."
- "2호위대군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지금 오스미 해협으로 진입중이지 않습니까?"
"그렇소, 진입중입니다. 1호위대군도 곧 진입하게 됩니다."
"이곳에 기뢰가 부설됐다면 소해작업을 다 마쳐야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회할 수는 더더욱 없소이다. 큐슈 남단을 다시 돌기에는 너무 멉니다. 항모전단과 상륙전단에게 일본해(동해)를 빼앗겨 버렸는데 우회하자면 하루가 넘게 걸립니다. 젠장."
"그렇다면 강행 돌파를 하겠단 것입니까? 츠키지 항공단과의 연합공격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야마다 공막장은 집요했다. 하지만 다혈질인 하토야마 해막장이 분이 풀릴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한국 해군 항모전단에서 다수의 구축함 전대가 떨어져 나와 미시마로 향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 12월 17일 05:45 도쿄도 이치가야
"자네 정신이 제대로 있기나 한 건가? 이런 상황에서 1사단을 나고야로 이동시켜?"
"..."
육상자위대 동부방면대 총감 노미야마 세이이치(見野山征) 육장이 막료장 오카자키 노부도시 육장보에게 대놓고 삿대질을 했다. 고혈압 기운이 약간 있는 50이 넘은 방면대 총감이 이렇게 흥분하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다며 옆에 서 있는 부관이 안절부절 못했다.
"지도하고 상황보고서를 똑똑히 보라구! 적군은 헬리콥터로 대규모 병력을 공수하고 있는 상황이잖아. 상륙하고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 상륙교두보 외부방벽이 만들어졌는데, 이 정도면 지금쯤 나고야에 적군이 들어왔을 건 당연하잖나?"
"..."
"명령이야 번복하면 되는 거지만, 그 군령의 번복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는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옛부터 군령은 간단해야 하고 번복이란 없어야 한다고 했는데, 자네가 지금!"
"죄송합니다. 하도 경황이 없어서..."
"경황이 없어? 그래, 얼마나 경황이 없었으면 막료들은 다 어떻게 하고 자네 독단으로 결정하고 명령을 내렸나? 그거나 좀 들어 보세나."
"..."
대놓고 빈정대는 데에는 젊은 사람도 참기 힘들 정도였다. 오카자키 육장보가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할 말이 없었다. 분명히 소집돼 있던 막료들의 의견은 물어 보지도 않고 바로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방면대 총감이 어젯밤부터 통합막료회의에 가서 자리를 비운 동안 임시로 방면대 지휘권을 행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던 그로서 응당 취해야 할 조치였지만, 역시 너무 성급했다.
- 노미야마 총감도 분을 삭일 수밖에는 없었다. 내려진 군령을 번복해야 하는 것은 이제 기정사실이다. 그런데 계속 화만 내고 있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결국 총감의 얼굴에서 노기는 사라졌다.
물론 그보다 10년이나 연하인 막료장을 총감부 막료들이 보는 앞에서 모욕을 줘서 좋을 것은 전혀 없었다. 막료장에 대한 불신감을 심어주기 쉽기 때문이다. 이는 어느 나라 어느 병법에서든 기피하는 일이었다. 죄는 확실히 다스려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휘관, 혹은 고급참모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것은 그 군의 와해를 부르기 십상이다.
- "상황도를 투영하게!"
낡아빠진 건물에 배지 시스템과 링크된 방공장비부터 시작해서 최첨단 C3I 설비를 갖춘다는 게 왠지 우스웠다. 노미야마 총감은 이 건물을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다. 1920년대부터 구 일본제국 육군성으로 사용됐던 건물이다. 가문이 전통적으로 제국군인 집안이었고, 아버지도 육상자위대 출신으로 퇴임할 때까지 동부방면대에서 근무했다. 때문에 이 건물은 그와 여러 모로 인연이 많았다. 그러나 그래 봤자 1920년대 건물이었다. 1945년에는 엄청난 소이탄 벼락도 뒤집어써 봤고, 점령군에 의해서 일시 폐쇄되기도 했던 건물이다. 그런 건물을 지금 동부방면대 총감부 건물로 쓰고 있는 이유는 전통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틈은 없었다.
- 과연 한국군은 어떤 길을 따라서 전진해올까? 일단 국도를 살폈다. 미하라까지는 8번 국도로 오고 있음이 이미 확인됐다. 그럼 미하라에서 21, 22번 국도를 따라 나고야까지. 나고야에서는 1번 국도를 타고 도쿄까지 직통으로 진격해올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도메이(東名) 고속도로를 따라서 진격할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미하라까지의 진격로는 같다.
아니면, 만약 한국군이 도쿄를 노리지 않는다면 어떨까. 계속 8번 국도를 따라 오사카로 한국군의 전략적 의도는 아직 불분명했다. 뭐든지 확실한 건 전혀 없었다.
- "그렇다면 차라리 후지에서 막자는 말인가?"
아무도 말하려 하지 않았다. 전술적으로 볼 때는 시즈오카현에서 막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했다. 차라리 시즈오카현도 상당수는 내주고, 야마나시현과 시즈오카현이 서로 인접해 있는 후지 일대에서 저지하는 것이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는 자위대 최대의 기동훈련장인 후지 기동훈련장이 있었다. 위치도, 지형도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우려되는 문제가 있긴 했다.
- "우리 훈련장에서 싸우자는 게로군."
"이번 싸움은 부서져도 우리집 유리창이 깨지는 싸움입니다. 차라리 항상 부서지는 훈련장이 부서지는 게 더 낫겠죠."
상식적으로 도시는 최고의 방어거점이다. 도시의 파괴는 전쟁에서는 피할 수 없으며, 대신 도시를 파괴하는 만큼 공격군도 희생을 치러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그 도시를 파괴하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지난 50년에 걸친 성장의 산물을 날려 버리길 원하지 않는 것이다.
"죽어도 우리만 죽고 말입니다."
"..."
막료들이 전멸을 각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은 노미야마 육장은 말문이 막혔다. 민간인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시즈오카현안의 도시들 모두를 비저항도시(非抵抗都市)화 하자는 의견이었다. 아니, 시즈오카만이 아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동부방면구 안의 모든 일본 도시가 비저항도시화 하는 것일 것이다. 최악의 경우 도쿄까지도 그렇게 하자는 의견임이 분명했다.
- "어차피 이 전쟁, 우리 국민의 생명은 침략군의 아량에 의존해야 하는 전쟁임이 틀림없으니까요. 그리고 훈련장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지형이고 인근에는 후지산을 비롯한 높은 산이 많습니다. 평야와 산이 적절히 배합되어 있으니까 전차와 보병부대 수가 거의 동등한 우리 사정을 살리기엔 딱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교도단 방공훈련부대와 우리 고사특과단 전력이면 적 공군이 함부로 접근하기 힘들게 만들 수 있습니다. 잘만 해낸다면 북부방면대가 가나가와(神)현에 도착할 때까지 적을 붙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적을 격파할 수 있습니다!"
- 그건 꿈일 뿐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마 막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옥쇄(玉碎)라... 웬지 어감이 이상했다. 황군 해산 이후 영원히 없어진 단어인 줄 알았는데, 이제 총감 자신과 부하들의 눈앞에 끔찍한 현실로 닥쳐온 것이다.
- 12월 17일 06:00 아이치현 나고야
"하룻밤 사이에 헬기 탑승 두 번! 강하 두 번이다!"
15사단 수색대대 대대장 박정민 중령이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대대 작전참모에게 투덜댔다. 올해 나이 42살, 슬슬 노화증상이 나타날 만한 나이에 헬리콥터를 탄다는 건 결코 편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초저공으로 도로를 따라 비행하는, 이리저리 마구 흔들리는 헬리콥터란 정말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대대장님. 대신 승진은 확실하겠는데요?"
작전참모가 씩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도 그렇다. 매우 중요하면서도 쉽고 간단한 임무만 계속 맡고 있으니 이번 전쟁이 끝나고 나면 대망의 대령 승진이 눈앞에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육사 동기들 중 군에 남은 대부분이 대령 계급을 달고, 빠른 친구는 벌써 준장까지 달았다. 그동안 줄곧 야전에서만 구르면서 공도 많이 올렸지만 사고도 많았다. 탈영병 한두 놈, 군기사범 한두 놈 때문에 인사고과표에 벌써 몇 개 빨간 줄까지 친 몸이라 이번 전쟁에서 확실히 공을 세워야 승진이 가능했다. 겨우 중령으로 군복을 벗는 것은 아무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식들과 친구들, 친지들 보기에도 부끄럽지 않게 준장이나 소장 정도는 달고 전역을 하고 싶었다.
- 50대나 되는 거대한 블랙 호크 헬리콥터가 어슴푸레 밝아오는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았다. 17세기 일본을 통일하여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약칭 장군이라고 불리며 일본의 실질적 지배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이래 1860년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 있을 때까지 일본을 지배했던 도쿠가와 집안 대대로의 수도였던 유서 깊은 도시가 나고야이다. 그리고 지금은 일본 최대의 자동차 메이커 중 하나인 도요타 사를 비롯한 일본 굴지의 중공업 업체들이 밀집해 있고, 그러면서도 일본 고래의 문화유산이 수없이 많이 남아 있는 중소도시들을 위성도시로 갖고 있는 이 대도시 상공이 삽시간에 붉은색과 녹색 비행등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단지 공업지대 규모만으로 본다면 중부 일본에서 첫째인 거대 공업도시 나고야가 개전 2일째 되는 날 새벽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한국군 손에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 12월 17일 06 : 14 시즈오카현 후지(富士)
"이 사람들 제정신인가?"
후지교도단 사령 다카가와 고이치로(高川一郎) 육장보는 명령을전해 듣고 어이없다는 듯이 간단히 내뱉었다. 동부방면대에서 날아온 명령은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판이하게 틀렸기 때문이다.
그는 즉각적인 공세로 들어가길 원했다. 그는 예하에 있는 5개 전차중대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기동부대를 움직일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앞서 1시간쯤 전에 날아온 방위청 명의로 된 전문에 의하면 후지교도단은 지금부터 동부방면대의 지휘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 전문에 의거하여 다카가와 육장보는 부하들을 다그쳐 출동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명령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움직여서 적을 찾아 격파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보고 움직이지 말란다. 훈련장에서 적을 맞아 싸우겠다는군. 길을 막지 않으면 적은 우리 훈련장으로 기어 들어오려하지도 않을 텐데. 시설단도 없는데 말야."
막료장도, 교도단 간부들도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전술교관들일 뿐인 교도단 간부들이나, 아직 초년 간부인 부관이나 이런 상황을 판단할 능력은 부족했다. 막료들은 모두 행정막료들이지 전투를 믿고 맡길 만한 막료는 없었다. 하여튼, 총감부에서 뭘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긴 하지만 명령은 따라야 했다.
- "교토 점령이 방금 확인됐습니다. 데이터 링크를 위한 시설이 아직 완전히 가설되지 않은 탓에 원정군사령부에서 위성통신기를 이용해서 음성으로 송신해왔습니다만. 해병기동여단장의 보고가 조금 전에 원정군사령부에 도착했습니다. 20분 뒤에 을호작전 제2단계를 위한 정치공작이 시작됩니다."
"..."
소리 없는 탄성이 울렸다. 이제 작전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아직까지 자위대가 제대로 저항하거나 반격을 가하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루 전부터 일본에게 위치를 드러낸 채 이동해왔다고 믿었던 한국군에게 있어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일본이 한국군의 상륙지점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 한국군이 진행중인 혼슈 서부에 대한 각종 공격 때문에 혼슈 서부로 이동한 육상자위대가 미처 혼슈 중부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상륙작전은 완전한 성공이었다.
- "최종적으로 현재 1차 상륙선단의 상륙작업이 거의 끝나갑니다 .원정군에서 2차 상륙선단의 출항을 요청했습니다."
이종식 차수가 대통령이 있던 자리를 힐끗 보고 다시 그를 응시하는 20여 개의 눈과 마주쳤다. 대통령 홍지영은 지금 옆 방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다. 한국군 최고통수권자는 잠시 유고상태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군인의 일이었다. 대통령은 국민의 뜻을 들어 전쟁을 결정하기만 하고, 실제 전투는 군인들이 하는 것이다. 당연히 전략전술을 잘 모르는 대통령은 모든 일을 참모들에게 맡기고 시시콜콜 간섭하지 않기 위해 억지로 잠을 자는 것이라고 이종식 차수는 생각했다. 조금이나마 부담을 던 이종식 차수가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다.
"좋소, 출항시키도록 하시오. 호위는 철저하게 붙여서... 자그마치 1개 사단과 1개 려단 병력이나 되니끼니."
- 12월 17일 06 : 50 교토 니시(西京區), 고류지(廣隆寺)
NHK 교토지국 당직기자인 사와무라 에이지는 새벽부터 걸려온 전화에 몸살을 앓았다. 교토 시내에 한국군이 쫙 깔려 있다고 시민들이 빗발치는 전화제보를 한 것이다. 하지만 방송국 출입문에도 한국군들이 살기를 띤 표정으로 경비를 서고 있어서 시내 취재도 나가지 못했다.
6시쯤 지국장이 이상한 전화를 받았다. 자신을 한국군 통역장교라고 소개하면서, 교토 시내의 모든 언론사는 취재팀을 우쿄쿠(京區) 종합청사 앞에 있는 고류지에 보내라는 전화였다. 발음이 어색한 걸로 봐서 일본인은 분명 아니고, 아마도 이번 소동의 주범인 한국군이 틀림 없었다. 지국장은 사와무라 에이지 기자를 포함한 취재팀을 위성중계 방송차와 함께 보내고 전국 생방송을 준비했다.
- 방송국을 빠져나간 중계차가 교토의 아침거리를 내달렸다. 교토역을 지나 산조 거리에 이르기까지 게이후쿠 전철의 노면전차나 자동차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곳곳에 설치된 바리케이드가 차량통행을 철저히 막았다. 뜻밖에 검문소 초병들이 방송국 차량은 무조건 통과시켜 주어서 시간에 맞춰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마 언론사 보도차량은 통행증 없이도 통과시키라는 명령을 받은 모양이었다.
- 고류지는 교토에 있는 수많은 고찰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절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 금당(金堂)에는 일본의 국보 중에서도 국보로 알려진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보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쇼토쿠(聖德)태자상이 안치되어 있는 등 문화재의 보고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게다가 이곳은 봄, 가을의 일요일, 또는 경축일에만 공개되는 곳인데, 무엄하게도 한국군들이 경내에까지 무장을 하고 들어와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었다.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국군 해병대 여단장 이택규 준장입니다."
장군은 또렷한 일본어로 인사부터 시작했다. 기자들이 바짝 긴장하고 그의 다음 발언을 기다렸다.
"저는 군 지휘체계상 명시적인 명령을 받들어 교토를 점령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교토는 우리 한국군에 의해 완전 점령됐으며, 그 과정에서 다행히 어떠한 유혈사태도 없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생업에 종사하시되, 군사작전상 필요에 의해 군이 일부 도로를 봉쇄하고 철도를 차단했으니 이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점령군 장군치고는 상당히 예의바른 발언이었다. 적국 장군이라고 해서 다 고압적인 악당은 아닌 모양이라고 사와무라 기자는 생각했다.
"여러분들께서 무척 놀라셨겠지만 전쟁은 일주일 이내에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동안만 불편함을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일주일이라는 말이 기자들을 웅성거리게 했다. 이택규 준장이 공언한 일주일이라는 말은 아마 일본의 항복이거나, 한국군의 일본 완전점령을 뜻하는 것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지금 쓰루가뿐만 아니라 니가타와 마이즈루에서도 상륙작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곧 시모노세키와 큐슈에도 상륙작전이 전개됩니다. 60만 이상의 한국군이 일본 전역에 상륙할 예정입니다."
사와무라 기자는 마이크를 들고 중계팀 쪽을 돌아보았다. 위성 안테나가 작동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일본 전역에 이 회견이 생방송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 "한국군은 중요 군사목표를 점령하고 자위대를 무장해제시키되,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존시켜 드리고 생활에 불편을 드리는 일은 최소화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60년 전에도 일본인 여러분들께서 주장하셨듯이, 한국과 일본은 원래 같은 민족 아니겠습니까?"
기자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한국군은 일본 본토의 영구점령을 노린 것이 틀림없다고 기자들이 수군댔다.
- 이택규 준장은 한국군의 전과를 절대 과장하지 않았다. 아마 일본 전역에서 일본 국민들이 이 방송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 정부에서 실시하는 선전도 치열한 만큼, 섣불리 거짓말해서 탄로나면 앞으로도 일본 시청자들에게 신뢰감을 줄 수 없을 것이다.
"NHK의 사와무라 기잡니다."
사와무라가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질문을 요청했다. 이 준장이 가볍게 손을 뻗어 그를 지목했다.
"다케시마(竹島) 때문에 이번 전쟁이 일어난 겁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것도 한 가지 이유이기는 하지만, 한일 양국은 숙적이라기보다는 형제국 아닙니까? 기자회견장을 이곳 고류지로 잡은 이유가 그것입니다. 여기에서 보관하고 있는 일본 국보인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한국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거의 흡사합니다. 여러분은 이 불상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아십니까?"
기자들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스카시대에 제작된 이 아름다운 불상은 지극히 은은한 미소로 유명하다. 1980년대 초반, 어느 관람객에 의해 불상이 훼손된 적이 있는데, 이때 떨어져 나간 손가락 부분을 학자들이 정밀조사했다.
"나무 재질은 붉은 껍질을 가진 한국산 적송(赤松)입니다. 나무를 한국에서 가져가서 일본에서 만들었든, 아니면 아예 한국에서 불상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왔든 간에 당시 백제와 일본은 거의 같은 나라였습니다. 즉, 한국과 일본인은 원래 같은 민족이란 뜻입니다. 이제 미래를 위해서라도 한일 양국은 같은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번 군사작전의 목적입니다."
그는 결코 전쟁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자위대를 군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국가간 전쟁이 아니라 통일을 위한 내전 정도로 평가한다는 뜻이었다. 기자들이 잠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의미를 곱씹는 동안 다른 기자가 질문에 나섰다.
- "교토 케이블TV의 수다 히로십니다. 장군님 부대의 임무는 무엇입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저희 여단은 교토를 점령한 다음 서쪽으로 진군해서, 시모노세키 쪽에 상륙한 아군 병력 주력과 합세해 혼슈 서부에 몰려 있는 육상자위대를 포위공격할 계획입니다. 일단 이들만 섬멸하면 혼슈에는 2개 사단에 못 미치는 육자대 병력만 남게 됩니다."
"홋카이도에 육자대 주력 4개 사단이 있는데도요? 저는 후지TV 기자 무라마쓰 미노룹니다."
"세이칸 터널이 사고로 무너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쓰가루 해협을 배로 건너야 할 텐데, 해협에 기뢰가 깔리고 잠수함이 습격하면 건너지 못할 겁니다. 아참, 이 기회에 일본 국민 여러분께 말씀드리지만, 홋카이도와 아오모리 사이를 운행하는 세이칸 연락선은 타지 않으시는 게 만수무강에 지장이 없으실 겁니다."
사와무라 기자는 세이칸 터널이 한국군의 폭파공작에 의해 붕괴된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러나 침략군 장성에게 직접 대놓고 질문할 만한 용기는 없었다.
- "언제쯤 출발할까?"
그것이 궁금했다. 게으른 말년 병장 몸으로 생각하는 거라고는 다치지 않고 무사하게 귀국해서 제대하는 것뿐이다. 원래 며칠 전에 제대해야 했는데,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제대를 하지 못했다. 전쟁이 그 전에 끝나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그럴 가능성은 전무했다. 만약 그런 장기전 상황이 된다면 나라는 망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능하면 별다른 전투 없이 전쟁이 끝나기만 바랐다. 어느 정도 우열이 판가름나면 정치가들이 나서서 전쟁을 끝낼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올라왔다는 소식에 일본이 지레 겁을 먹고 항복할지도 몰라.'
- "넌 내 아들이나 다름없는 조카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비밀조직을 유지했지만, 이제 표면에 나서야 할 때다. 그러나 넌 나와의 관계 때문에 정리에 쉽게 굴복할 수가 있다. 핏줄관계도 없고 우리에게 굽신거리지도 않을, 전혀 새롭고 뛰어난 인물을 세워야 한다."
"예. 삼촌의 근심 알고 있습니다. 저는 대통령 아들이나 동생이 아닙니다. 계속 어둠 속에서 묵묵히 눈을 뜨고 있겠습니다."
"그래. 절대로 사리사욕을 위해 조직을 움직여서는 안 된다. 우리 민족으로서는 5천 년 만에 맞은 호기야. 이 중요한 때에 작은 것 때문에 놓칠 수는 없어."
중년 사내는 지난 여름 신륵사 대웅전 처마 아래에서 보았던 제비둥지를 생각했다. 어미 두 마리가 열심히 새끼들을 위해 먹이를 물어 날랐다. 새끼 세 마리 중에, 유독 가운데에 앉은 놈만 피둥피둥살이 찌고, 옆에 있는 놈들은 불쌍할 정도로 비쩍 야위었다. 그것이 자연계의 법칙이다. 부모들은 가장 생존 가능성이 큰 새끼를 편애하는 것은 생존법칙이니 부모새를 탓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한 놈만 남고 다른 놈들은 죽으리라 걱정했지만, 나중에 보니 큰놈은 쥐가 물어 갔는지 보이지 않고 작은 두 놈만 남아 있었다. 새끼 제비 두 마리는 무럭무럭 자라 가을에 강남으로 날아갔다.
- 12월 17일 07 : 31 독도 북동쪽 350km 해상
완전히 동이 튼 아침 하늘을 배경으로 수호이-33 전투기들이 바다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비행했다. 이 전투기들은 한국 최초의 중형 항공모함 이순신함으로부터 여기까지 300km 넘게 저공비행을 하고 있었다.
고속으로 비행하는 전투기들이 밀어내는 공기 흐름이 수면에 부딪혀 바다 위로 거대한 물방울 장벽을 만들었다. 이 벽은 전투기들을 좇아 동쪽으로 길게 늘어지면서, 서쪽 벽은 천천히 사그러들었다. 일정한 지점에 이르자 수호이 전투기 편대가 일제히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 [목표 거리, 60km 목표 조준하라.]
황인호 중령의 목소리가 이어폰을 울리자 김종구 대위가 그동안 아꼈던 레이더를 켰다. 배경으로 보이는 바다 표면이 산란시켜 발생한 노이즈 사이에 몇 개의 휘점이 또렷하게 나타났다. 러시아제 전투기는 다른 것은 다 좋은데 레이더가 답답하다고 김종구 대위는 항상 툴툴댔다.
- 선도를 섰던 황인호 중령의 수호이-33 전폭기에서 화염이 뿜어졌다. 러시아제 Kh-35 대함미사일이 길게 불꽃을 끌며 명렬한 속도로 가속했다. 그런 다음 일정 속도에 이르자 Kh-35의 터보팬 엔진은 짧은 화염을 뿜으며 수면 위로 낮게 가라앉아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
[파렌하잇, 샛바람. 공격항로를 계속 유지한다! 기관포 무장을 점검하도록.]
미사일을 발사한 편대는 항로를 계속 유지했다. 공격팀이 받은 명령은 대함미사일 공격 후 육안 확인까지 마치는 것이었다. 마이즈루 지방대 소속으로, 이번 전쟁의 발단이 된 독도분쟁에 투입됐던 호위함 두 척과 해상보안청 순시선들이 그들의 목표였다.
- 전투기가 탑재하는 기관포탄 가운데 점검용 탄환은 있기 마련이다. 수호이 같은 요격기들은 대체로 미사일 공격으로 끝나지만 이번에 잡을 목표는 대함미사일에 대한 방어체제를 거의 갖추지 못한 호위함들이었다.
'하픈스키라고? 암튼 이름은 잘도 갖다붙여.'
조종간의 기관포 발사버튼에서 손을 뗀 김종구가 중얼거렸다. Kh-35 대함미사일은 공군에 복무할 당시 교육받았던 하픈과 발사방식이 비슷했다. 공격 방법도 비슷하고 미사일의 비행방식도 비슷했다. 이 미사일이 러시아에서 개발되자 나토의 무기 분류 관계자들은 형식명칭을 의미하는 코드네임(code name)을 하픈의 이름에서 따 버렸다.
- 김종구가 다시 목표 리스트를 점검했다. 만재배수량 2,500톤인 아부쿠마와 치쿠마, 모두 아부쿠마급 호위함이고 마이즈루 지방함대의 주력함이었다. 그리고 해상보안청 소속의 대형 순시함이 1척, 소형 순시정이 2척이었다. 편대기인 수호이-33 세 대가 가져온 하픈 공대함미사일은 모두 여섯 뿐이니 나머지는 기관포로 처리해야 했다.
- 김종구도 적외선 전방감시장치(IRST)를 조작했다. 조종석 바로 앞부분에 사마귀처럼 불쑥 튀어나온 적외선 전방감시 시스템에 미사일 폭발광이 잠시 화면을 가득 채울 테지만, 살아남은 놈들을 찾기 위해서는 이 장치가 가장 효과적이었다. 차가운 겨울 동해바다에서 일본 호위함들이 내뿜는 적외선은 또렷하게 비쳤다.
아부쿠마급 호위함은 대공미사일은 없지만 팰렁스 근접방어시스템을 후갑판에 장착하고 있었다. 적외선 백업장치가 붙어 있는 개량형이면 좋았을 테지만 아부쿠마가 장착한 팰렁스는 레이더 단일 유도모드만을 가진 구형이었다. 핑크빛 아침 하늘에 팰렁스가 내뿜는 빨간 예광탄 줄기가 수평선을 향해 빨랫줄처럼 뻗어나갔다.
- 김종구 대위가 페달을 밟으며 조종간을 기울여 수호이-33 전폭기를 왼쪽으로 빙글 뒤집은 다음 조종간을 당기자 비행기는 바다로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전투기들이 고도를 내릴 때 이렇게 복잡한 방법으로 하강하는 것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전투기가 급격한 기동을 할 때 조종사가 느끼는 중력가속도는 피가 머리쪽 또는 발쪽으로 쏠리는 것이다. 인간은 피가 위쪽에서 발쪽으로 내려가는 포지티브 G보다, 유원지 바이킹에서처럼 몸이 아래로 곤두박질치며 피는 머리 쪽으로 몰리는 네거티브 G를 세 배나 힘들게 느낀다. 이것이 전투기가 반 바퀴 회전하고서 거꾸로 하강하는 이유인 것이다.
- 12월 17일 07 : 34 독도 북동쪽 410km 해상
"파렌하잇입니다. 두 척이 남았습니다. 요것들이 동쪽으로 열나게 튀고 있습니다. 아작내겠습니다!”
공격지점에 들어간 김종구 대위가 전투기를 초저공으로 몰아 도주하는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정에게 달려들었다. 조준은 헤드업 디스플레이(HUD)로 해야 했다. 헬멧에 연동된 조준기인 헬멧 마운티드 디스플레이로 조준을 했다가는 조준점을 일치시키기 위한 미세한 조정을 전투기의 컴퓨터가 직접 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자칫하면 전투기가 바다에 처박힐 수도 있다.
- 독도 인근해상에서 집요하게 한국 어선들을 괴롭히던 와카사는 과거부터 악명이 요란했던 순시정이다. 일본 영해에 접근한 어선뿐만 아니라 일본으로 밀항하려던 한국 배들이 이 순시정에 나포된 적이 많았다. 이들은 전쟁이 발발한 것을 알고 본국 근해로 도망치려 했지만, 남쪽의 한국 항모전대 때문에 북쪽으로 크게 우회해야 했다. 해군 항공대가 구태여 순시정을 공격할 필요는 없다. 이 순시정이 당한 것은 함께 있는 마이즈루 지방대 소속 호위함 아부쿠마와 치쿠마 때문이었다. 하픈 함대함미사일을 장착한 이들 호위함에 위협을 느낀 이순신함의 함재기들이 몰려온 것이다.
- 어쩌면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가슴 한구석에서 슬슬 피어났다.
그러나 다치바나는 곧 그 유혹을 억눌렀다. 전차를 잡는 건 지금 전력으로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장갑차를 때려잡는 거라면 가능했다. 한두 대, 많으면 너덧 대 정도는 해치울 자신이 있었다.
'겨우 장갑차 너덧대, 40명 정도 잡자고 백 명도 넘는 부하들을 희생시켜? 그래도 되는 걸까?'
-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전차는 느긋하게 그들의 정면을 통과했다. 마지막 전차가 연대 화망으로 슬슬 진입해 들어왔다. 저 전차가 화망을 벗어나는 시점에 사격을 개시해야겠다는 생각에 다치바나는 슬그머니 소총을 집었다. 총류탄 발사기는 이미 끼워 놓고 유탄도 장전해 놓았다. 사격해서 명중시킬 수 있을까. 아니, 명중하더라도 격파할 수나 있을까?
- "한국군 부대 일부, 혹은 대다수가 도쿄로 진격해올 가능성이 농후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나고야까지 적이 진출한 것은 확인됐고, 나고야에서부터 도쿄까지는 일사천리로 진격이 가능합니다. 도로망이 워낙 잘 되어 있다는 것이 전시에는 문젭니다."
"그 정도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뭐 특별히..."
"전쟁이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대로 흘러가는 거니까요. 다만, 직접 당할 때까진 웬만한 사람은 예상은커녕 현상파악도 못한다는 게 문제겠지요."
- 고마쓰 육막장이 가볍게 핀잔을 주려다가 역으로 핀잔을 들었다. 다케자와 육장보의 말이 맞다. 전쟁의 흐름은 누구든지 예측할 수 있다. 최소한 전쟁이 끝난 뒤에 그 전쟁의 흘러간 경과표를 보면 왜 그렇게 해야만 했는가는 그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다만, 실제 그런 상황에 부딪혔을 때도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다케자와 자신도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다.
"도쿄까지의 아군 수비병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알 수 있습니다. 안 그래도 병력이 적은 우리 사단인데, 그나마 당장 수비에 임할 수 있는 병력은 1사단이 고작입니다. 그나마 연대 하나를 잃어 지금은 겨우 3개 연대전투단, 병력으로는 7,000명이 간신히 넘는 형편입니다. 을종사단 정도 규모죠. 거기에 후지교도단과 교육단, 방면대 대전차헬기단, 공정단 병력이 가용한 전 병력입니다. 병력으로는 한국군 1개 사단 규모입니다. 전차 숫자만으로는 한국군 1개 기계화보병사단보다 조금 많지만, 우리가 상대할 적은 그보다 훨씬 많을 겁니다. 거기에 동북방면대에 남은 제6사단이 있지만, 이 친구들은 시간 맞춰서 그들과 합류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이동을 시작하더라도 말입니다. 천상 도쿄에서의 전투에나 투입할 수 있습니다."
- "알겠습니다. 결론만 말씀드린다면, 한국군의 전략적 목표는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우리 수도권뿐입니다."
"!"
일순간 회의실 전체가 정적으로 가득 찼다. 단말기용 냉각팬과 컴퓨터의 냉각장치가 내는 나지막한 저주파 소음과 그 소음에 묻힌 숨소리가 이 회의실 내의 공기 진동, 즉 음파의 전부였다. 그 정적을 고마쓰 육막장이 깨뜨렸다.
"한국은 부산에 20개 사단 이상의 병력을 대기시켰고, 어선을 징발하고 있네. 이건 어떻게 설명할 텐가? 작은 어선 수천 척에 보병을 태우고 해협을 건너면?"
"간단합니다. 더미(dummy)입니다."
- 일본이 최악의 상황으로 여기는 것이 한국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이다. 만약 한국군이 부산 일대에 동원한 병력의 절반이라도 일본 본토에 상륙시킨다면 지상 전력이 약한 일본은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다. 해상자위대와 항공자위대가 한국군의 상륙을 막아줘야 하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일본에게도 희망은 있었다. 한국군의 상륙능력, 상륙작전능력이 별로 없는 것이다. 부산에 있는 20여 개 사단 외에 수많은 전투사단은 현해탄을 건널 수단이 없는 것이다. 한국군 입장에서는 '바다가 육지라면'이겠지만, 일본이 지금 믿는 것은 해상자위대도 항공자위대도 아닌 한국군의 상륙능력 부족이었다.
"한국군은 쓰시마를 점령하고 큐슈 일대의 아군 공군력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네. 이건?"
"굳이 현지에 상륙할 필요가 없더라도 그들에겐 자국 영공방어를 위해서 이 지역의 아군 항공력을 소탕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상륙선단 보호에도 필수적입니다. 이건 어떻게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한국군이 혼슈에 상륙할 경우 필요한 조치입니다. 한국군은 큐슈 북단, 혼슈 서부에 교차 상륙을 시도해야 합니다. 각각의 지역에 병력을 올려 보내려면 항해해야 할 거리는 200km에 달합니다. 구식 어선들로도 항속거리는 충분합니다만, 10시간 이상 계속 항해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이 해역은 겨울에는 소형 선박이 다니기 좋지 않습니다. 700여 년 전처럼 가미카제는 불지 않았지만, 겨울 현해탄은 작은 어선들에게는 가미카제가 항상 부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 사실이었다. 상륙 자체가 쉽지 않았다. 상륙작전을 하려면 충분한 숫자의 대형 선박이 필요했다. 그리고 한국군에는 그런 대형 선박이 별로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한국군처럼 현대화도 늦고 경량화도 늦는 군대의 경우, 사단 하나를 상륙하는 데 필요한 수송선의 총톤수는 약 8~9만 톤입니다. 기계화보병사단의 상륙 규모가 이 정돕니다. 통상적인 보병사단이면 아마 5만 톤 이내에서 끝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정작 군 장비의 특성이라는 것은 웃겨서 전차를 제외하고는 모든 장비가 중량에 비해서 부피가 큽니다. 즉 10만 톤급 수송선에 병력과 장비를 만재도 4~5만 톤밖엔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그건 무슨 소린가?"
"결국, 적이 3개 사단, 약 15만 톤을 수송하기 위해서 필요로 한 상선 총 톤수는 약 30만 톤은 너끈히 넘어갈 거라는 겁니다."
"한국 전체 상선 보유량의 몇 퍼센트나 될까?”
"연안수송선까지 한다면야 5%도 채 안 됩니다. 그러나, 한국이 가진 자체의 원양수송선만 가지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전차나 중장비를 실을 수 있는 대형 특수선박들만 따진다면 30%는 충분히 넘어갑니다. 더구나 이건 예비 연료와 탄약, 식량을 생각하지 않은 규모입니다. 이런 것까지 생각한다면 약 40~50%를 쓰루가 일대 상륙에 모두 동원했다는 뜻이 됩니다."
"..."
"즉, 이들이 아무리 큰 규모의 상륙작전을 시도하더라도, 앞으로 24시간 이내에는 이번에 혼슈 중부에 상륙시킨 병력 이상의 상륙부대를 투입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과연 한국군이 투입 가능한 총 병력이 아군에 비해서 얼마나 우세한가라는 거죠."
- "이 정도 병력에 추가병력이 또다시 오려면 적어도 이틀은 걸립니다. 수송선에 다시 병력을 싣고, 함선도 연료를 급유하고... 더군다나 보급도 따로 생각해야 하므로 실제 한국군은 이틀에 한 번씩밖에는 병력을 올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
"그리고 시모노세키와 큐슈에 상륙을 시도하려면 혼슈 중부에 작전을 시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 지역엔 이미 우리의 상륙대비 병력전개가 이뤄져 있으니까요. 한국군이 제공권을 잡고 있지만 쉽게 기어 올라오진 못할 겁니다."
"그렇다면..."
"한국군은 이미 확보한 교두보로 병력을 밀어 넣을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계속해서 밀어 넣는 것도 무리고, 아마 1회 정도 반복할 능력밖에 없습니다. 한국군에는 의외로 정예화, 현대화된 지상군 부대가 부족하니까 이들 정예 병력 중에서도 지난 전쟁에서 상처를입지 않은 병력을 전부 투입하는 정도로 끝낼 것으로 봅니다. 한중전쟁 때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기계화사단인 21기계화보병사단과 그 외 2개 보병사단, 해병여단 혹은 해병사단 1개가 올라올것이 확실시됩니다. 기계화사단은 보통 보병사단보다 50~100% 가량 장비와 물자소요가 많으므로 이것만으로 필요한 수송선단 규모는 5개 보병사단 규모에 달합니다. 아마도 여기에 기갑여단 하나가 더 추가될 것 같군요. 기계화보병사단 하나는 전차가 겨우 120여 대 정도밖에 없고, 한국군이 가진 다른 기계화보병사단은 대부분 중국과의 전쟁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니까요. 또한 한중전쟁 때 급조된 기갑사단 두 개는 이런 상륙작전 초동단계에 투입하기엔 규모가 너무 큰데다가, 지난 전쟁에서 피해도 적지 않게 입었습니다. 그러니 한국군의 전통적인 전략예비부대인 기갑여단을 투입할겁니다. 1개 기갑여단, 전차 90대쯤 더해서 전차 210대 가량을 주축으로 하는 기동부대가 상륙하겠지요."
"그렇게 많은 건 아니군. 우리 자위대가 전력을 동원할 수 있는 상황만 된다면 말일세."
- 그가 개전 전에 추산한 한국군 상륙규모와 대충 일치했다. 전략목표 선정 역시도 비슷했다. 물론 그가 한국군 계획을 잘못 판단하고 있을 가능성도 크다. 다만, 지금 자위대가 처한 상황이 한국군이 의도한 대로 진행되어 왔다면 한국군이 투입한 병력은 결코 적은 게 아니었다.
- "물론 이것은 현재까지 상륙한 것으로 보이는 한국군 병력만을 생각한 최소한의 수치이지만, 이 이상 상륙할 가능성도 별로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전차 210대가 전부는 아닙니다. 해병사단에 전차 80대, 2개 보병사단에도 각 40대씩 총 160대의 전차가 있으므로 370대 가량의 전차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이들 전차의 각개 성능까지 검토한다면, 저들이 올려보낸 기갑부대 전력은 현재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전 기갑전력과 동등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제 사견입니다만, 한국군은 1,000대가 넘는 3세대 전차를 보유하고 있고, 지난 전쟁에서도 4분의 1이상은 소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상륙전 특성으로 볼 때, 상륙전부대는 다른 한국군 사단들에 비해 더 우수한 장비로 특별히 개편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88전차만 400대 남짓이라면, 현재 우리의 기갑전력으로 제압하기는 사실 쉽지 않습니다. 자위대가 보유한 1,200대의 전차 중 88전차와 실제 맞상대가 가능한 90식 전차는 300대 남짓이니까요. 게다가 제공권도 상당한 지역에서 한국군이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도, 이들 전력을 모두 동시에 투입할 수는 없다는 게 지금 자위대 최대의 약점입니다."
- 상륙부대에 해병사단 하나, 그리고 어쩌면 전차대대 하나쯤은 더 있을지도 몰랐다. 그에 비해 서부방면대와 중부방면대, 동부방면대의 거의 모든 전차는 2세대 전차인 74식 전차뿐이다. 방어력도 화력도 모두 열세이기 때문에 웬만한 규모의 수적 우위를 점하지 않으면 한국군 K-1 전차에 맞설 수 없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이 갖춰진다 하더라도 제공권의 열세라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수적 우위로는 도저히 만회할 수 없는 차이였다.
"물론, 한국 해병대 병력으로는 이 방어선을 유지하기에도 부족한 병력입니다. 장기전을 하면 결국은 우리가 유리합니다. 제공권이 한국군에게 있다 하더라도 공세능력은 한정돼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전력은 아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합니다. 약간의 항공지원만 있어도 아군은 한국 해병대를 제압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약간의 항공지원이라는 것이 쉽지 않은 형편입니다만."
- "자. 해병대의 목적과 능력에 대한 것은 다 말한 것 같으니, 이제 다시 한국군의 전략적 목표에 대한 판단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결국 한국군의 목표는 간단하게 나옵니다. 해병 1개 여단으로 아군의 주력군을 잠시나마 붙들고, 단기간 내에 아군의 동부방면대 잔여병력을 격파한 다음 도쿄를 점령해서 우리의 정치적 위신을 최대한 깎아내리고, 동시에 경제적 혼란도 유발시키겠다는 게 저들의 목표입니다. 절대 장기전 혹은 정복전을 염두에 두고 있는 건 아닙니다. 병참 능력의 한계라는 것이 의외로 심각하게 작용할 만한 지형적 여건을 가진 일본이니까요. 그리고, 이들이 일본 내에 군사적 교두보를 확보할 목적으로 병력을 올려보냈다면 전 병력을 한 번에 큐슈에 상륙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을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 일본에 주는 충격은 심대할 테니까 말입니다. 결국..."
"그들은 소규모 병력으로 우리 일본에 치명타를 입힐 심산이란 뜻인가? 단 한 번에?"
고마쓰 육막장이 확인하듯이 물었다. 이미 더 이상 들을 이유는 없었다. 그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별다른 허점이 없었다. 설사 틀렸다고 하더라도 당장 국가의 중추에 가해질 위협에 대해서 최대한의 대응책을 생각해두는 것은 필요한 조치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단기승부를 낸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말입니다. 현재 우리는 북부방면대를 전투에 투입할 수 없고, 동부방면대와 동북방면대 병력 상당수를 중부방면대 수비구역으로 파견한 상태라서 한국군이 수도권을 공격할 경우 그들을 전면 저지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형편입니다. 한국군이 병력을 어느 정도 분산할 여유가 있다면 후방에서의 추적도 불가능할 테고요. 한국군의 전략목표는 뜻밖에 간단한 거였습니다. 개전 초에 세이칸 해저터널이 붕괴되고 북부방면대 병력이 홋카이도에 붙박인 것, 그리고 전부터 한국이 혼슈 서부로 병력을 밀어 넣을 것인 양 행동한 것에 놀란 우리가 병력을 혼슈 서부로 이동시킨 바람에 우리 군이 전략적으로 분할될 위기에 놓였을 때부터 짐작했어야 할 문제인데, 그걸 이제서야 파악한 저나 우리 참모회의 모두가 너무 둔감했던 겁니다."
- 모두 말이 없었다. 그가 지적한 것들은 이미 전쟁 발발 직후, 즉 한국군이 실제로 상륙하기 20시간 이상 전부터 파악하고 있었던 것들이 많았다. 한국군의 투입가능 실병력 수 같은 것은 전쟁 전부터 예측할 수 있었다. 다케자와 육장보는 아예 한국군의 예비사단은 언급하지도 않았다. 실제로 이들의 실전능력은 미지수 중의 미지수였는데, 상륙능력이 부족한 한국군이 주력 전투사단을 놔두고 동원사단을 일본에 보낼 리도 만무했다.
"대책은?"
결국 이토 일급육장이 물었다. 마음속에 세워둔 계책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계책이라는 것이 워낙 간단하고 당연하면서도 동시에 성공확률이 희박했다. 때문에 도무지 의견 제시를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통막 안에서는 제일 유능하다는 축에 드는 이다케자라면 어떤 다른 의견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물어 보는 것이다. 그러나, 다케자와 역시 별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책이랄 게 뭐가 있습니까? 일단 교토 쪽으로 이동한 한국군 해병대 병력은 서부에 집결한 병력을 총동원해서 격파하고, 이들로 하여금 도쿄로 진격해오는 한국군 주력을 추격하게 해야죠. 물론 추격은 결코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만.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세이칸 터널을 복구하고 북부방면대를 전투에 투입해야 합니다."
- "이틀이라... 짧진 않군요."
다케자와의 말, 즉 2일이라는 시간 동안에 한국군이 도쿄까지 진격해올 수 있다는 말에는 그 누구도 반론을 걸지 않았다. 실제로 2차대전 당시에는 하루 90~100km 이상을 싸우면서 돌파한 독일 기갑부대도 있었다. 현대전차는 당시 전차보다 2배 이상 빠르다. 덤으로 당시 독일군은 도로도 없는 벌판을 달려야 하는 상황에서 그런 일을 이뤄낸 것이다. 그에 비하면 일본은 잘 뚫린 넓은 길로 거미줄처럼 이어진, '교통의 천국'이었다.
"게다가 JR을 비롯한 일본 국내의 국·사철 노선 모두가 현재 한국군 특수부대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 형편입니다. 커브 구간 대부분이 이미 폭파당했습니다. 복구에 있는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만, 북부방면대 4개 사단을 도쿄까지 모두 이동시키는 데 5일 이상이 소요될 것이라는 말씀밖에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는 우리 방위시설청만의 판단이 아니라 내각 관계부처 모두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 "즉, 우리가 벌어야 할 시간은 5일입니다. 5일 정도만 한국군이 도쿄로 진입할 수 없게 만든다면, 그리고 도쿄 이동 지역의 제공권만 완전히 잃지 않는다면 도쿄는 수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한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그리고 5일 이내에 병력이 모두 이동할 수 있다는 것도 확실한 건 아니고 말입니다. 자칫하면 찔끔찔끔, 도쿄에서 우리 주력군을 축차 투입하다가 축차 소모할 있습니다."
"여기서 제안합니다만, 도쿄를 포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도쿄 북동쪽에서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고, 병력을 모았다가 서부에서 추격해오는 아군과 동부에 집결한 아군 주력으로 양방향 포위섬멸을 시도하는 것이..."
"!"
모두가 놀랐다. 이토 육장도 눈을 크게 떴다. 해상막료장 하토야마 해막장은 노골적으로 분노한 표정을 지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쿄를 포기하는 것은 한국군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설청 차장은 아예 사색이 되어 버렸다.
- 12월 17일 07 : 49 오사카부(大阪) 이타미(伊丹)시
육상자위대 중부방면대 총감부 건물은 허둥지둥 철수하는 병력으로 붐볐다. 방면대에 20대밖에 없는 병력수송 헬리콥터들이 제공권을 잃은 상황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병력과 장비를 안전지대로 수송하고 있었다. 언제 한국군이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자위관들은 모두 필사적으로 행동했다.
- 12월 17일 09 : 27 아이치현 나고야 히로고지, 식당 다카라지마
권대현 대장과 허철화 상장은 식사를 하면서도 휴대용 자동차 도로망 지도책을 들여다보며 계속 작전을 숙의했다. 호위병들은 게눈감추듯 식사를 마치고 계속 식당 종업원들에게 살벌한 눈길을 뿌렸다. 종업원들이 슬슬 눈길을 피하며 종종걸음으로 식당을 가득 채운군인 손님들의 서빙에 바빴다.
"상륙 전 작전회의에서도 부탁드렸지만 이번 공세에서 성급함은 절대 금물입니다. 추가 병력도 없이 보병사단과 기보사단, 해병사단을 합쳐 겨우 4개 사단과 2개 여단 병력으로 전선 두 개를 형성해야 합니다. 내가 봐도 무모하기 짝이 없는 작전이지만, 우리 상륙능력으로는 거기까지가 한계요. 덕분에 주공인 장군의 부대는..."
"신중하게, 그러면서도 빠르게."
"그렇습니다. 아주 어려운 일이죠. 신중함과 신속함은 일치하기가 힘든 조건이지만 일치시켜야 하는 게 우리 입장입니다."
- "그리고... 동지는 롬멜과 쿠르벨을 알고 있습니까?"
몰라서야 기갑부대 지휘관이 아니다. 롬멜은 북아프리카에서 활약한 그 유명한 '사막의 여우'이고, 쿠르벨은 1941년 말부터 1942년 5월까지 롬멜의 예하 부대 가운데 실질적인 주력인 아프리카군단 군단장 자리를 맡아 용전분투한 사람이다. 롬멜은 쿠르벨에게 가용병력 전부인 아프리카군단 지휘를 완전히 맡기는 경우가 많았고, 쿠르벨은 사령관의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었다.
"알고 있습네다만."
"난 나 자신이 롬멜에 비견될 만한 사람이라곤 보지 않습니다. 장군도 물론 쿠르벨과는 다를 거요. 하지만 지금 우리 입장은 그때 그 두 사람하고 아주 비슷합니다. 난 전적으로 장군을 믿습니다. 도쿄를 점령할 때까지 진공작전은 장군에게 전적으로 일임하겠소."
"..."
- 출발 전날의 회의석상에서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애초부터 그렇게 할 작정이었지만, 중요한 역할을 인민군에 맡기지 않으려는 상부의 반대를 피하기 위해 이제껏 그 결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밝히지 않았다. 권 대장은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대단위 기갑부대 지휘 경험은 나도 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저돌적인 공격작전은 당신만큼은 경험이 없어요."
"경험은 무슨, 사령 동지나 저나 이런 일에 있어서는 실전경험이 없는 건 마찬가지가 아닙네까."
- 두 달 전에 끝난 중국과의 전쟁에서 두 사람은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전략예비부대를 지휘하고 있던 그들은 중국군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계속되는 중국 전투기들의 폭격을 받으면서도 악착같이 기갑부대를 압록강변에 집결시킬 때쯤 전황은 갑자기 한국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승리를 자신하며 지휘부의 공격명령을 기다리는 동안 전쟁은 허탈하게 끝나 버렸다. 그렇게 보면 완전히 실전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허철화 상장은 타고 있던 천리마 전차에서 대공기관포를 직접 잡고 중국군 J-5 공격기를 격추시켰고, 권대현 대장은 압록강 야산에 숨은 중국군 패잔병들을 소탕하는 작전을 측면에서 지원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기갑부대 고유의 작전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최소한 장군은 이런 상황에 대비한 경험은 있었을 테니까요. 나는 기동방어나 준비된 역습이라면 자신 있지만 이런 공격 일변도의 신속 과감한 작전에는 별로 자신이 없소."
- 권대현 대장이 은근히 통일 전의 남북한 전략을 상기시켰다. 휴전선에 배치된 인민군 정예 4군단과 2군단 후위에는 강력한 기갑군단들이 후속해서, 2군단이 서울을 점령하면 발달된 도로망을 따라 820 기계화군단이나 815 기계화군단 등이 전격전을 펼치는 것이 인민군의 이른바 남반부 해방전쟁의 개요였다.
"저는 후위를 맡을 생각입니다. 뒤는 걱정 말고 일을 잘 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령 동지..."
"잘 하세요 이 전쟁의 승패는 당신 어깨에 달린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권 대장은 씩 웃어 보였다. .
- 두 사람이 일어서자 부관이 재빨리 카운터에 가서 계산을 마쳤다. 식당 주인이 억지로 웃으며 한사코 사양했지만, 권총을 들이대며 돈을 받으라는 부관을 결국 거역하지 못했다. 갈비 세트는 1인분에 1,000엔, 인민군들이 주로 먹은 도시락 세트는 겨우 800엔밖에 하지 않았다. 2만 엔으로 가뿐하게 계산을 마친 부관이 서비스로 받은 사탕과 껌을 호위병들에게 돌렸다.
- "그럼 나는 이만 오사카 쪽으로 가 보겠습니다. 거기에서 약간... 당신이 근무했던 군대에서 '정치공작'이라고 하는 걸 좀 해야 할 것 같으니까요.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는 짐작이 가시리라 믿습니다."
"알고 있습네다. 여기 일을 도와주시려는 거이갔디요."
"그럼 이만 가보겠소."
권대현 대장이 부관과 함께 사륜구동차에 올라탔다. 호위병도 참모장도 데리고 다니지 않는 소탈한 사령관의 모습에 허철화 상장은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곧 그것이 무척 편안한 느낌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떠나가는 사령관을 가볍게 배웅한 허철화 상장은 본인에게는 결코 좁지 않은, 그러나 남반부의 평균적인 인민들에게는 심각하리만큼 비좁은 러시아제 MT-LBU 지휘통신차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 12월 17일 09 : 42 효고(兵庫)현 야마자키마치(町)
고베(神戶) 북서쪽 야마자키마치는 그다지 크지 않은 소읍이다. 일본에서는 소읍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읍사무소 소재지보다는 훨씬 더 현대적인 모습을 갖춘 지방자치단체다. 서구적인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는 일본의 전형적인 마을인 셈이다. 이곳은 주고쿠 자동차도로가 통과하는 곳이라서 다른 소도시들보다는 조금 더 도시다운 냄새가 나는 곳이기도 했다.
이 마을의 서쪽 2km 지점이 해병 헬리본대대의 착륙지점이었다. 해발 1,000미터 상당의 산이 주변에 산재해 있는 이곳은 보병의 전투지역으로는 최적격인 셈이었다. 그러나 헬리콥터가 내리기에는 그다지 지형이 좋지 못해서 헬리콥터들은 도로 위에 병사들을 내려놓았다. 50대가 넘는 헬리콥터들이 길을 따라 한 줄로 죽 늘어서서 병사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 시간이 없어 대대장 박윤환 중령은 일단 내리기부터 했다. 그러나 그래 놓고 보니 왠지 찜찜했다. 근처에 부대를 배치할 만한 곳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정작 헬리콥터에서 내려보니 어느 쪽으로 가든 진지를 만드는 데 한 30분은 걸릴 것 같았다.
"저기, 저 산 산자락이 좋겠습니다. 도로가 팬저파우스트 유효 사거리 안에 들어오고, 나무나 다른 지형지물도 적당하게 깔려 있습니다. 경사도 적당하고요."
작전참모가 길 오른쪽의 산자락을 가리켰다. 위치가 썩 좋았다. 길도 약 200미터 정도 서쪽까지 완만한 오르막이라 적의 접근을 어느 정도 거리에서 먼저 확인할 수 있었다.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약간 여유 있게 대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변 지형도 작전참모 말대로 아주 괜찮았다. 대대 1중대가 마침 산자락에 가까이 있었다.
"1중대보고 저 산자락에 진지 만들라고 지시해. 2중대는 그 맞은편 산자락에 진지를... 헬기들이 갑자기 왜 저러지?"
1중대를 싣고 온 헬기들이 천천히 날아오르다가, 갑자기 빠르게 상승하면서 동쪽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왜들 저러는지 짐작이 쉽게 되지 않았다.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 순간적으로 육감이 발동됐다.
'적 트럭 대열 발견. 적 부대다!'
"적입니다!"
- 이 적외선 장비는 비가 오면 심각한 시계 제한이 생기는 등, 기상상태의 영향을 심하게 받는 구세대 관측장비였다.
그러나 앞에 있는 전차는 그 구식 74식 전차라면 반드시 달고 있어야 할 장비인 IR서치라이트를 달지 않았다. 거리 200미터라면 충분히 식별이 될 거리지만, 분명히 그것이 없었다. IR서치라이트를 달지 않은 74식 전차는 야간암시장비로 열영상 장치를 가지고 있다. 80년대 후반부터 소량씩 개조되기 시작해서, 이제 일본에는 구식 74식 전차는 남아 있지 않았다.
분대장은 인민군 전차에 대응하는 방법을 그대로 적용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는 상대였다. 대치하고 있는 적은 화기관제장치의 능력에 있어서는 세계 최강의 M-1 전차와 비교해도 크게 손색이 없는 물건이었다. 연막탄은 도리어 이쪽에서 공격할 수 없게 만들 공산이 컸다.
- 포격을 날린 전차는 그 위치에서 앞으로 약 20미터 정도 전진하더니 또다시 멈춰 섰다. 포탑이 조금 움직이고, 아까처럼 포구로 엄청난 가스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철갑탄을 쏠 때와는 달리 고폭탄이나 대전차 고폭탄은 발사할 때 육안으로는 발사화염을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발사와 동시에 팬저파우스트-3을 들고 전차를 공격할 준비를 하던 병사와, 그 옆에 있던 소총수 두 명이 쓰러졌다.
한국 해병대 쪽에서 반격탄이 날기 시작했다. 지름 11센티미터의 팬저파우스트-3 탄두가 74식 전차를 노리고 허공을 날았다. 그러나 발사 순간 전차는 다시 움직였다. 노출부위도 좁은 전면인데다 거리도 멀었다. 포탄은 전차 왼쪽으로 멀찌감치 떨어진 도로 위에 떨어졌다.
- 로켓탄을 모두 소모할 때까지 500MD 1대가 중박격포소대 전부와 대공소대, 그리고 방열중이던 155 밀리 FH-70 곡사포 1개 포대를 휩쓸었다. 이제 전황은 한국군 쪽의 우세로 기울었다. 그 동안, 자위대 연대가 보유한 즉시 사용이 가능한 유일한 대공무기인 FIM-92 스팅어 미사일은 단 한 번도 발사되지 않은 채 고철이 되고 말았다.
- 12월 17일 10 : 14 오사카(大阪)시, 나카노시마(中島)
[다음은 한국군 최강, 해병대 전차여단 행렬입니다!]
스피커에서 유창한 일본어가 흘러나오고 경쾌한 행진곡이 흘렀다. 축제였다. 전쟁이 시작되고 TV뉴스에서 전황이 시시각각 전해지면서 일요일 아침의 오사카 시민들은 집에 꼭꼭 숨어 있었다. 그러나 아침 내내 시내에서 계속된 음악과 오사카의 3개 TV방송 등, 각종 방송이 동원되어 조성된 축제무드가 호기심 많은 시민들을 나카노시마(中之島)로 모여들게 했다.
- 나카노시마는 오사카성 서쪽에 있는 길이 3.5km의 기다란 섬이다. 이 섬은 옛날부터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메이지(明治)·다이쇼(大正) 시대의 19세기식 건축물과 함께 현대식 고층빌딩이 늘어선 행정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이곳에 어린아이를 무동 태운 젊은 부부와 학생들이 연도를 가득 메우며 한국군의 퍼레이드를 구경했다. 이번 순서는 전차대였다. 두 대씩 짝을 지은 K-1 전차들이 빌딩 숲을 배경으로 굉음을 울리며 히고바시(肥) 쪽에서 나타났다. 비둘기떼가 빌딩 숲 사이를 날고 오색풍선이 하늘을 수놓았다. 한국군에 의해 강제로 동원된 TV방송 카메라들이 이 퍼레이드를 전국에 생중계했다.
- 흰색 위장도료를 칠한 전차 위에서 승무원들이 흰 장갑을 끼고 연단을 향해 거수경례하자 반쯤은 강제로 동원된 관중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색종이가 반짝거리며 사람과 전차로 꽉 찬 거리를 뒤덮었다. 검은색 정복에 흰 모자를 쓴 해병 의장대 20여 명이 흰색 멜빵끈이 달린 M-1 소총을 멋지게 돌리자 방송 카메라들이 일제히 연단을 향했다. 연단에 한국군 권대현 육군 대장이 만면에 미소를 띠며 거수경례로 답했다. 권 대장 옆에는 검은색, 흰색, 붉은색의 조화가 돋보이는 정복을 입은 해병대 중장이 느긋하게 퍼레이드를 감상했다. 한국에서 해병대 사령관의 계급은 중장이다.
해병대 중장 옆으로는 작은 체구에 비해 커다란 모자를 쓰고 훈장이 주렁주렁 매달린 황색 정복을 입은 인민군 대장과 상장 2명, 중장 4명이 서 있고, 한국 육군 중장과 소장 3명, 건장한 체구에 검은 베레모를 쓴 공수특전단 여단장 5명이 도열했다. 여기 단상 위에 있는 장군들의 별을 합하면 40개가 넘었다.
- [강력한 88 전차가 끝도 없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한국군의 다음 목표는 고베(神戶)입니다. 한국군을 막을 세력은 없습니다!]
연단 옆에서 진행을 맡은 이택규 준장이 마이크에 대고 신이 나게 떠들었다. 오사카 시민들은 생전 처음 보는 장관에 넋을 잃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전차 행렬은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약 3분 정도 지나자 전차 100여 대가 모두 지나가고 다음은 자주 포대대 차례였다. 거대한 155밀리 포신을 앞세운 자주포들이 탄약운반차량들을 거느리며 연단을 지나자 다시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번에는 연단보다 인도를 가득 메운 시민들로부터 시작되었다.
- "이 정도면 도저히 안 되겠지? 시민들은 지레 겁먹고 포기했어. 이제 성공이야."
권대현 대장이 뒤에 선 부관에게 말했다. 오사카 시민들은 처음에는 공포와 분노 서린 표정이 간혹 보였으나 지금은 완전히 압도되어 강력한 한국군에 대한 동경 어린 시선이 자주 나타났다. 해병대 이택규 준장이 열변을 토하며 오사카 시민들의 눈과 귀를 휘어잡았다.
[한국과 일본은 하나입니다. 다케노우치가이도(竹內街道)는 한반도 도래인들이 오사카를 거쳐 나라로 갔던 길입니다. 그 역사적인 길 옆에 있는 가라쿠니신사(神社)는 원래 한국의 한(韓)자였는데 나중에 같은 발음으로 나는 매울 신(辛)자로 바꿨습니다. 미나미(南) 번화가인 신사이바시스지(心齊橋筋)에는 예전에 신라교(新羅橋)라는 다리가 있었습니다. 오사카에는 이렇게 한국과 관련된 사적이 많습니다. 시라기(白木=新羅), 구다라(百濟), 고마(高麗=고구려)라는 이름의 다리, 하천, 사찰, 마을이 일본땅 도처에 산재해 있습니다. 한반도 도래인의 후손이 분명한 구다라(白濟), 고마(高麗), 시라기(新良貴) 등의 성씨는 여러분들 친구 중에도 많이 있을 겁니다. 그 외에도 한국땅 이름인 남바라(南原)나 충주 옛이름인 나카하라(中原) 등의 본관을 따서 지은 성씨, 성에 가(家)나 씨(氏)를 붙인 리노야(李家), 리시(李氏) 등등 무수한 한국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와 정착했습니다. 오사카 시민 여러분은 한국인의 후예들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뿌리가 하나입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사람들이 부르짖던 구호 아니었습니까? 자, 이번에는 기계화보병들의 행진입니다! 이들이 쏜 총이 한국과 일본을 하나로 만들고 말 겁니다!]
- "장군은 말을 꽤나 길게 하는군."
권대현 대장이 목에 힘줄이 돋은 이택규 준장을 보면서 싱글벙글 웃었다. 이 준장이 일본말로 떠들어서 무슨 뜻인 줄은 모르겠지만 퍼레이드 직전에 원고를 읽었기 때문에 대충 감은 잡고 있었다. 권대장이 다시 시민들 반응을 살폈다.
- 연도에 선 시민들 가운데 열광적으로 통일한국기와 일장기를 흔드는 사람들까지 보였다. 그 광기는 군중 사이로 점점 퍼져나갔다. 권 대장이 신기한 표정으로 부관에게 물었다. 일제시대 친일파를 보는 것 같은 불쾌감보다는 뿌듯함이 먼저 일었다.
"저놈들은 뭔가?"
권 대장이 열광적으로 통일한국기를 흔드는 젊은 남자들을 가리키자 부관이 대답했다.
"예. 구경꾼들 사이에 대원들을 좀 심었습니다. 테러에 대한 대비도 겸해서 말씀입니다."
"바람잡이야? 잘했네. 이제 시민들은 우리한테 최소한 적대적인 행동은 하지 못할 거야."
"예. 이번 쇼의 목적이 대충 달성됐습니다."
"그렇지. 그럼 다음 쇼를 진행해야지. 얘들아!"
권대현 대장이 옆에 도열한 한국군 각 군 장성, 그리고 한국군 장군들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인민군 장령들을 불렀다. 아무리 원정군 사령관이고 여기서 최상급자이지만 장군들을 부르는 호칭이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퍼레이드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권 대장이 씨익 웃으며 차렷 자세를 취한 장군들에게 명령했다.
"다들 수고했다. 이제 옷 갈아입고 복귀해. 장군 행세하니까 기분좋았지, 박 상병?"
- 12월 17일 10 : 19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중부방면대 관할구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자위대 시설이 이곳 히로시마의 위성도시인 카이다마치(海田町)에 위치한 13사단 사단본부이다. 주고쿠 일대에 자위대 군사기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단 이상급 부대를 일시에 지휘통제할 수 있는 통신시설이나 기타 부대시설이 갖춰진 곳은 여기 13사단 사단본부가 유일했다. 다른 중부방면대 사단 시설들은 간사이(關西)와 긴키(近機), 쥬부(中部)에 위치하고, 이 일대는 이미 한국의 통제하에 있었다. 그리고, 실병력이 있는 지역도 이 일대가 전부였다.
"한국군과 오사카 이서지역에서 교전이라고?"
"네. 30분 전에 서로 교전이 벌어졌답니다. 끝이 났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방면대 대전차헬기부대의 투입도 요청했습니다. 10분 전부터 통신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습니다."
2막료부장이 침울하게 보고했다.
"으으음..."
중부방면대 총감 다카하시 육장이 신음했다. 여기까지 오는 시간, 그리고 와서 지휘부를 다시 설치하는 데 걸린 시간이 너무 길었다.
- 12월 17일 11 : 20 도쿄도 가스미가세키 총리부
[이런 오밤중에 전화를 하시다니... 쯧쯧.]
미국 대통령 커티스의 첫마디에 총리대신 히데키 요시오는 얼어붙고 말았다. 이틀 만에 간신히 미국 대통령의 소재를 파악해서 통화가 연결됐는데, 커티스는 오하이오에 사냥 갔다가 지금은 잔다는 것이다. 아무리 시차가 다르다지만 미국에서도 초저녁일 이 시간에 잔다면서 수모를 주다니, 총리는 먼저 기가 막혔다.
"대통령 각하. 아시겠지만 한국이 일본을 공격했습니다."
총리가 전화통에 굽신거리며 공손하게 말했다. 전화 저쪽에서는 잠시 말없이 한참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요? 나도 TV 봐서 알아요.]
히데키 요시오는 기가 막혔다. 집무실에 모인 후지모토 히데오 관방장관, 가게우라 마사루 외무장관, 요시다 겐스케 방위청 장관도 통역을 통해 내용을 듣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미국은 한일 간의 전쟁에서 방관하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일본이 무력공격을 받았으니 당연히 미국이 협력해야 되지 않습니까? 미일 방위협력지침이 아직 유효하다는 말씀입니다. 제발 침략국 한국을 물리쳐 주십시오."
수상이 화가 나서 약간 목소리를 높이다가 흠칫하더니 다시 공손하게 애원조로 말했다. 막강한 항공자위대와 해상자위대가 무너지고 한국군이 일본땅에 상륙한 이상, 이제 믿을 것은 미국밖에 없었다.
- 그러나 커티스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미국은 우방의 영토분쟁에는 관여하지 않아요!]
이 말은 묘한 뉘앙스가 담긴 대답이었다. 세계 여러 나라를 상호방위협정으로 묶어 두고 우방의 영토분쟁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빠져나올 구멍을 만들어 놓는 것이 미국의 전통적인 대외정책 가운데 하나였다. 상호방위협정과 이 예외로 말미암아 미국은 국제분쟁에서 선택권을 갖게 된다. 미국의 국익에 따라 분쟁에 개입하거나 말거나 할 수 있었다.
"영토분쟁이 아닙니다. 한국이 막무가내로 일본에 전쟁을 걸고 상륙전을 감행했습니다."
[먼저 독도에서 분쟁이 있지 않았소? 뭐 하러 독도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여태 안 내놓은 거요? 국무부나 다른 부서에서도 지금 사건을 영토분쟁으로 보고 있답니다.]
- 미국은 영토분쟁을 조장해 국가간에 서로 견제시키고 미국의 패권유지에 적절히 이용했다. 미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조어대(釣漁臺 댜오위타이)를 통해 일본으로 중국을 견제하고, 독도를 이용해 한국으로 일본을 견제하는 수법을 썼다. 미국 정부는 그러면서도 그 분쟁이 영토분쟁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함으로써 외교정책에서 선택권을 누리는 것이다.
"분명 침략입니다! 우리 일본 정부는 일미 방위협력지침에 의거해서 미국이 적절한 조처를 해줄 것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일본인이 이렇게 단정적인 표현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믿었던 해상자위대가 절반이 전멸하고 항공자위대도 맥을 못 추자 다급해진 총리가 미국 대통령을 다그쳤다. 한참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커티스가 미일 방위협력지침을 또박또박 읽었다.
[미일 방위협력지침. 2항, 일본에 대한 무력공격 때의 대처행동. 일본은 즉각 주체적으로 행동해 침략을 배제하고 미국은 일본에 대해 적절히 협력하며, 새로운 작전과 장비기술의 진전 및 새로운 위협요소를 감안해 공동작전을 구상한다.]
"예! 그렇습니다. 그대로 해주십시오."
[좋소. 협력지침은 지키리다.]
- 총리와 각료들이 얼굴을 환하게 폈다. 미국이 개입한다면 한국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강력한 무기와 병력을 가진 미국이 개입하면 침략국 한국은 이라크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 분명했다. 병력을 파병하면서 미국이 요구하는 것이 많겠지만, 경제대국 일본 입장에서는 돈을 주고 미군을 고용하는 셈이니 자존심도 살릴 수 있었다.
"그럼 당장 지원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각하!"
총리가 연신 허리를 90도 가까이 굽히면서 고마워했다. 일본 총리처럼 상전을 많이 모시는 총리도 드물다. 헌법상 국가원수인 왕과 정계 원로, 연립내각을 구성하는 당내 계파보스들 뿐만 아니라 국제역학관계상 미국 대통령도 사실상 일본 총리의 상전이나 다름없었다. 커티스가 다음과 같이 말하자 총리와 대신들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협력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텐데요.]
- 미국이 걸프전에서 실제 지상군 작전을 실행하여 이라크를 몰아붙인 것은 95일 동안의 수송작전으로 42만여 병력과 장비를 이동시킨 이후의 일이다. 현역 지상군이 1990년대 한국군의 절반밖에 안 되는 미국은 주방위군과 예비군을 동원해야 한다. 병력을 소집하고 인원과 물자를 수송하는 데 걸리는 기간이 길기 때문에 즉각 전쟁을 수행하는 능력은 사실 일반인이 예상하는 것보다 떨어진다.
- 그러나 미국이 일본을 지원한다면 걸프전 때처럼 준비기간이 길지 않아도 된다. 원래 구 소련의 팽창에 대비한 태평양군사령부 예하에는 엄청난 육해공군 전력이 하와이와 일본, 괌 등에 주둔하고 있다. 미 해군 7함대와 3함대는 말할 것도 없고, 오키나와 가네다기지에 주둔 중인 제313 혼성항공사단과 미자와에 기지를 둔 미 공군 432전술전투비행단 예하 F-16 전투기 150대만으로도 현재의 불리한 전황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었다. 오키나와에 기지를 둔 미 제3상륙군의 3해병사단과 항공단, 1999년까지 일본에 주둔했다가 지금은 하와이로 물러난 25보병사단, 캘리포니아에 주둔하는 제9경보병사단 등은 미 공군 전략공군사령부(MAC)의 공중지원을 받아 72시간 내에 전선 투입이 가능하다.
그 외에도 강력한 화력과 기동력을 자랑하는 제 18공정군단 예하공수사단이나 공중기동사단, 기갑기병여단들과 제3기동장갑군단 예하 기병사단들이 투입되면 한국 상륙군은 그야말로 롤러에 깔린 개구리 신세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미군의 투입에 시간이 걸린다니 이상했다.
- [좋습니다. 그럼 방위협력지침 2항에 의거해서, 공동작전을 구상할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예? 파병이 아니고요?"
놀란 건 총리뿐만 아니었다. 후지모토 히데오 관방장관은 미국의 의도를 파악하고 새파랗게 질렸다.
[공동작전을 구상한다고 했지 언제 공동작전을 실시한다고 했소?]
"예?"
단순한 문구 차이에 불과하지만, 당연히 작전 실시를 염두에 두고 누구나 그렇게 받아들일 단어였지만, 이럴 때 이용되기 쉽게 애매한 단어를 이용한 것이다.
- 장성만 대위가 뒤를 돌아보았다. 바로 딱 붙어서 따라오는 전차전면에 세 개의 시커먼 얼룩이 있었다. 5시간 전에 쓰루가에서 한바탕 치렀을 때 생긴 상처지만, 영광의 상처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메탈제트가 뚫은 4센티 지름의 구멍은 이 거리에선 눈으로 보이지 않았다. 피탄지점 언저리가 시꺼멓게 그을렸기 때문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수류탄 한 방에 엔진도 약간 망가졌다. 다행히 바로 뒤에 수리중대가 예비 파워팩을 가지고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30분도 못 돼서 다시 전열에 합류할 수 있었지만, 그때 1소대장은 바지에 오줌을 싸고도 남을 정도로 겁에 질렸을 것이다. 파워팩이란 엔진과 트랜스미션을 결합시켜 놓아 정비 시의 편의를 도모한 부품이다.
"앞으로가 문제야..."
헬리본부대가 앞서 날아가면서 거점들을 확보하고 다니므로 이들이 자위대와 불시에 맞닥뜨릴 염려는 별로 없었다. 소규모 보병대라면 조우할지도 모르겠지만, 보병은 접촉해 봤자 크게 위협이 되지도 않았다. 아침 전투에서도 보병은 큰 위력을 보이지 못했다. 수류탄으로 전차 하나를 일시 정지시키긴 했지만, 그건 전차가 무작정 밀고 들어갔다가 당했을 뿐이다.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전차부대는 아무런 문제 없이 적을 유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시에 조우하지 않는 적도 문제였다. 일본 전차와 싸우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직까지 이들은 단 한 번도 K-1 전차와 맞먹는 화력을 가진 전차와 대적해 본 적이 없었다.
- 사실 실전경험 자체가 없었다. 한중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유일한 기계화보병사단이 21사단인 것이다. 적 전차부대와의 싸움에서 잘할 자신이 없었다. 더구나 상대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강력한 3세대 전차도 갖고 있었다. 그들이 가는 길에만 최소한 3개 중대, 42대가 있다는 정보 보고도 있었다.
- 12월 17일 13 : 00 후쿠이현 쓰루가시 북서쪽 13km
해병 1사단 박형규 소위는 부여받은 임무가 너무 찜찜했다. 원래 예정된 임무는 혹시나 있을지 모를 자위대 패잔병을 수색하여 상륙지인 쓰루가항을 엄호하는 것이었는데 갑작스레 핵발전소 수색을 명령받은 것이다. 그것도 사단장이 상륙하다가 핵발전소가 보여서 내린 즉흥적인 지시였다. 쓰루가 원자력 발전소는 1997년 초에 발생한 방사능 누출 사고로 인해 이미 폐쇄된 지 오래였다. 늙은 경비원 몇 명이 장기나 두고 있을 그곳에 1개 소대나 투입하다니! 병력 낭비도 이만저만한 낭비가 아니었다.
명령은 명령인지라 트럭 두 대로 좁은 지방도로를 따라 발전소를 향했다. 트럭 뒤에 탄 소대원들은 소풍이라도 가는 듯 여유만만한 표정들이었다. 하긴, 적지라고 들어왔는데 아직 총 한 방 쏘지 못했으니 당연할 것이다. 도로 오른쪽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에 푸른 바다가 보이고, 수많은 한국군 상륙주정들이 항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도로 왼쪽은 흰 눈에 덮인 산이 눈부시게 빛났다.
- 12월 17일 13 : 05 후쿠이현 쓰루가항, 1번 부두
밤새 하역작업을 진행하던 대우 로열호와 아세안 비전호의 틈바구니로 2차 상륙부대의 수송선박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나마 대우 로열호는 차량을 수납한 컨테이너가 많았기 때문에 하역이 늦어졌지만 일반 컨테이너선에 비하면 굉장히 빠른 것이었다. 상륙담당 장교들은 미국의 상륙함대가 보유하고 있는 엄청난 양의 RoRo선과 고속 차량수송선, 대형 보급선 등이 얼마나 필요한지 절감했다. 현대 전쟁은 몇 대의 전차만으로는 벌일 수 없는 것이다. 수많은 전투장비는 물론이고 각종 지원장비와 보급품, 탄약 소모품 등 모든 것은 물량전이었다.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장비를 이동시키고 마찬가지로 빠른 시간에 하역하는 것은 지상전에서 귀가 뚫어져라 들어왔던 기동전의 속도와 똑같이 중요했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는 누구나 쉽사리 귀를 기울이지 않는 법이었다.
- 12월 17일 13 : 10 후쿠이현 쓰루가 시 북서쪽 27km
"자넨 미쳤어!"
"흥! 뭐라 해도 좋아요 하던 일이나 계속하세요."
야마모토 이즈모는 중앙조정실에서 원자로 컴퓨터를 제어하면서 계속 뭐라고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키요시는 미친 게 틀림없었다. 새벽에 한국군이 쓰루가항에 상륙하자, 평소에는 얌전하고 말 잘 듣던 젊은 원자력기사 아키요시는 엄청난 테러리스트로 돌변한 것이다.
- 원자로는 엄청난 위험성을 안고 있기 때문에 갖가지 안전장치로 위험에 대비한다. 원자력발전소가 테러범에 의해 점거당하더라도 테러범들이 원자로에서 방사능을 누출시키거나 차이나신드롬을 발생시킬 여지를 가능하면 줄일 수 있도록 설계한다. 그러나 숙련된 기술자라면, 원자로 구조를 알고 원자로 운전 경험이 있는 자라면 쉽게 원자로를 파괴할 수 있다. 이것이 지금 일본과 한국, 엄밀히 말하면 교토 인근의 일본 시민들과 한국 상륙군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 있는 몇 사람 빼고는 누구도 위험을 깨닫지 못했다.
- "당신은 1997년에 삼중수소가 누출됐을 때, 사전에 사고를 미리 막을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어! 결국 도카이 공장이 폐쇄됐단 말야! 당신만 제대로 일을 했어도 우리나라는 주변 나라 눈치를 보지 않았도 됐을 거야! 한국이 우리 일본을 만만하게 보고 침략한 건 당신 때문이야!"
일본이 플루토늄을 과도하게 보유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에서 전력 대부분을 원자력발전소에서 생산한다. 그러나 일본은 필요한 양 이상으로 플루토늄을 보유해서 일본의 핵무장 가능성에 대해 세계 각국이 긴장했다. 도카이 핵 재처리시설은 몬주의 고속증식로와 함께 유사시에는 6개월, 최소한 3개월 이내에 일본의 핵무장을 보장하는 1급 국가시설이었다. 도카이 핵 재처리 시설은 1999년 7월에도 방사능 누출사고가 있었다.
- 12월 17일 13 : 25 후쿠이현 쓰루가 도카이 핵 재처리공장
한국군은 일본어를 모르고, 여기 있는 기술자들은 한국어를 몰랐다. 야마모토는 젊은 한국군 장교와 함께 5분 넘게 필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20분 이내에 여기 3중 수소가 누출되고 있는 냉각제 파이프를 고치지 않으면 원자로가 폭주해서 발전소가 몽땅 날아가게 됩니다. 시간이 없어요."
야마모토가 두 손을 크게 벌려 폭발하는 시늉을 했다. 젊은 장교는 심각한 표정을, 그 옆에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하사관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도카이 핵 재처리시설은 냉각제로 중수를 쓰지만, 이것이 핵반응에서 발생한 중성자를 포획해서 3중 수소로 변한다.
"제가 방금 적당히 조치를 취해 놨지만, 냉각제 누출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부족한 중수를 예비중수탱크에서 순환로로 공급하고 있지만 그 여분은 이제 20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누출 정도에 따라 시간은 더 단축될지도 몰라요. 원자로의 핵반응을 완전히 멈추려면 최소한 1시간은 더 필요한데 냉각제가 부족하단 말입니다. 그럼 원자로가 폭주하기 시작하고, 체르노빌보다 훨씬 심한 사태가 벌어집니다. 당신네 한국군도 무사하지 못할 거요. 20분 이내에 이 알루미늄 테이프를 이곳 파이프에 붙이면 되는 간단한 작업이긴 하지만 위험합니다. 여기는 제가 혼자 가겠습니다."
- "나도 같이 가겠습니다."
전혀 뜻밖의 반응이 젊은 장교에게서 나왔다. 아무래도 그 젊은 장교는 야마모토를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긴, 만약 야마모토가 냉각제 순환펌프를 깨뜨리기라도 하면 그 누구도 사고를 막을 수 없다. 아무래도 지금은 전쟁 중이니 일본인 기술자인 자신을 한국군이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같이 가면 당신도 죽어요. 봤죠? 온몸에서 털이 빠지고 암으로 죽어가는 환자를. 그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게 죽을 거요."
"나는 대한민국 해병대 장교로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겠소."
장교가 권총을 꺼내 실탄을 확인했다. 이것은 협박이었다. 만약 야마모토가 수상한 짓을 하면 즉각 사살하겠다는 경고였다.
- 박 소위가 야마모토를 업고 냉각실을 나왔다. 밀폐된 문을 닫고 다음 문으로 나섰다. 방사능 계수기에 표시된 이 방의 방사능은 위험치를 훨씬 넘어 빨간 부분에 바늘이 가 있었다. 서둘러 방호복을 벗고 야마모토의 방호복도 벗겨 주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온몸에 화상을 입고 기절해 있었다.
[소대장님! 이놈들이 그러는데 소대장님 하고 그 일본 놈은 허용기준치를 훨씬 넘게 방사능에 누출됐답니다.]
김 중사가 폐쇄회로를 통해 이곳 상황을 다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무척 떨렸다. 마이크 앞에 선 박 소위의 목소리도 떨렸다.
"김 중사, 나 이 방에서 기다릴 테니까 빨리 의무대에 연락해 줘요. 이곳 상황도 빨리 전하고요. 씨팔! 나, 완전히 좆됐네."
- 12월 17일 14 : 25 아이치현 나고야, 나고야(名古屋港)
이세(伊勢) 안쪽에 위치한 나고야항은 요코하마, 고베에 이어 일본 제3의 무역항이다. 원정군 사령관 권대현 대장은 오사카에서 헬기로 날아와 나고야 주변 지방자치 단체장들에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일본 관리들은 호위병들의 매서운 눈길과 권대현 대장의 몸집에 잔뜩 기가 죽어 연신 굽신거렸다.
"일본은 과연 바다의 나라요. 남극을 탐사하기 위한 관측선을 따로 만들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옛날에 신라 장보고 장군이 해외로 활발히 진출했지요."
권대현 대장이 나고야항 부두에서 지금은 남극박물관으로 사용되는 남극관측선 후지호 내부를 시찰했다. 부관이 일본어로 뭐라고 이야기하는 동안 남극에 꽂은 일장기를 배경으로 웃고 있는 탐사대원들 사진을 관람했다. 펭귄처럼 두껍게 껴입고도 코밑에 고드름이 얼어붙은 모습이 가관이었다. 선글라스 밑으로 태양광에 시커멓게 그을린 탐사대원들은 건강하고 행복해 보였다. 권 대장은 탐험가의 행복이란 이런 것이라며 부러워했다.
- "제가 여러분을 모신 것은!"
권대현 대장이 지휘봉을 옆구리에 끼고 일본 자치단체장들 앞에 우뚝 섰다. 점령지역의 자치단체장들은 감히 권 대장의 눈길을 바로 받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부관이 훨씬 더 살벌한 목소리로 통역했다.
"계속 행정을 맡아달라는 것입니다. 정책은 계속 집행하시고, 치안유지도 맡아 주십시오. 점령지의 전시치안은 원래 점령군이 맡도록 되어 있지만, 그래도 일본의 치안은 일본인이 맡아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능력을 믿습니다."
- 점령지의 치안을 피점령지의 민간인인 경찰이 맡은 경우는 역사상 많다. 영국 해외식민지를 독일이 점령했을 때나, 비시 괴뢰정부하의 프랑스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경찰은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입니다. 이 점 오해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경찰 무기고에 보관된 자동화기는 당분간 저희들이 관리하겠습니다. 최근 몇몇 지역에서 발생한 경찰의 총기난동 때문에 저희 부하들의 감정이 격앙되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십시오."
- 은근한 협박이었다. 당연히 경찰은 군대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무장 수준도 그렇고 훈련 수준도 그렇다. 권대현 대장의 고민은, 전시에 점령지에서 여러 가지 사건이 발생할 경우 일본 내 여론뿐만 아니라 국제여론도 나빠진다는 것이다. 일본 경찰이 치안을 계속 담당하면 한국군이 직접 책임지지 않는 모든 사건에 대한 책임을 일본이 지게 된다.
- 그리고 권 대장이 노리는 것은 또 있었다. 모든 점령지의 행정을 그렇지 않아도 병력이 적은 원정군이 맡을 수도 없었다. 한국군이 점령한 지역이 한국군에 적대적인 행동만 취하지 않는다면 군사 행동을 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원정군 사령관의 생각이었다.
이 소식은 곧 일본 전역에 방송을 통해 전달될 것이다. 그렇다면 진격로에 놓인 일본 지방자치단체들의 예상되는 저항을 최소화할 수 있다.
일반 시민들도 한국군에 적대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권 대장은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최소한 한국군이 이기고 있는 동안에는...
- 전차 130대 이상이 한 곳에 집결되는 것이다. 이 정도면 수치상으로는 한국군 기계화보병사단보다 더 강력한 셈이었다. 특히 포병이나 항공전력에서는 한국군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그러나 전차를 보유한 대수만으로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74식 전차는 공격력에 있어서는 한국군의 K-1과 별로 다를 것이 없지만 방어력에 있어서는 차이가 컸다. 게다가 세계 최강의 가격을 자랑하는 90식 전차는 후지산 종합화력시범 때 참가한 4대 중 3대가 자동장전장치에 문제가 발생해 사격불능사태가 벌어지는 참담한 일이 있었다. 혁신적인 신기술이라 자랑하던 자동장전장치의 신뢰성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떠벌이 언론은 90식더러 세계 최강의 전차 운운하고 많은 매니아들은 그 장단에 춤을 추어왔지만 그날 사건 현장에 있었던 다카가와 육장보에게는 모두 거짓말일 뿐이었다.
- "저거 봐라. 교육대 전차들이다."
후지교도단 전차교도대 5중대 교관 오카모토 유다카(岡本豊) 조장이 자기 전차 옆으로 지나가는 또 다른 90식 전차들을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차체 앞에 '1戰敎- 3中隊'라고 쓰는 90식 전차부대는 제1교육단 소속의 고텐바 기갑교육대 제3전차중대뿐이다. 밋밋하니 아무런 마크도 없고 도색만 제식위장으로 된 중대였다. 후지교도단의 90식 전차들은 2중대는 밋밋하지만 5중대는 멋들어진 혜성 그림을 포탑 옆에 그려 넣고 있어서 눈에 딱 띈다.
그 뒤를 이어 고텐바 기갑교육대의 2중대와 1중대가 줄줄이 따라왔다. 납작하고 조그마한, 그러나 그 내부는 하이테크의 극치에 해당하도록 개조되어 있는 전차들이었다. 전차들이 이제 합류하게 된 것이다. 전차 3개 중대, 합계가 42대였다.
- "저것 좀 봐요 90식 전차들입니다."
1사단 전차중대의 전차장 한 사람이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90식 전차는 육상자위대 기갑부대 승무원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세계적으로 우수한 3세대 전차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전차는 그 가격도 엄청났다. 자동장전장치의 신뢰성 문제로 한차례 홍역을 치른 바가 있지만 적어도 현재 상황에서는 육상자위대 기갑부대원들이 탈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안전한 전차임에는 틀림없었다. 죽는 걸 무엇보다도 싫어하는 것이 사람이지만, 군인들 중에서는 가장 죽음으로부터 떨어져 있던 육상자위대원들에게 있어서, 이 90식 전차를 타는 것은 행운이었다. 이것을 타고 있는 한 죽을 염려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 [뭘 잘 모르는군. 아무리 90식 전차라고 해도 격파당하면 끝장이야.]
"세상에... 90식을 잡을 전차가 얼마나 있다고요?"
[독일에 4,000대, 미국에 1만 대, 러시아에 8,000대. 그리고 한국에도 거의 1,000대 있지. 105 밀리 포로도 90식 전차는 격파할 수 있어. 영국하고 프랑스 스페인 등등 105밀리 포를 실은 전차가 있는 나라를 다 열거해 볼까?]
- 12월 17일 15 : 43 시즈오카현, 고텐바시 남쪽 17km
도메이 고속도로 위로 작업차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6가지의 도로장해물 가설장치로 도로에 원형 철조망과 구멍 등을 형성하는 이 차량이 지나간 곳으로 전차는 지나갈 수 없게 됐다. 공병대나 보병대가 출동하더라도 상당한 시간이 걸려야 도로를 복구할 수 있을 것이다.
도로 바로 옆으로는 길이 약 200미터 정도로 75식 도저와 소형불도저들이 필사적으로 대전차호를 파고 있었다. 대전차호의 깊이는 2미터, 폭은 6미터. 도저 10대가 동시에 투입되어 대전차호를 파고 있어서 작업은 그런대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 작업이 끝난 지역에서는 83식 지뢰부설장비를 견인하는 73식 장갑차가 돌아다니며 지뢰를 살포했다. 길이 4미터짜리인 큼지막한 지뢰살포장치가 사방으로 지뢰를 뿜어댔다. 수십 개의 지뢰가 한순간에 하늘로 뿜어져, 그것이 포물선을 그리며 30여 미터 떨어진 곳 지면으로 떨어졌다. 지금까지 부설된 1,000여 개의 지뢰들 중에서 부설 후 일정 시간 이내에 자폭하는 스마트 지뢰는 거의 없었다.
- "스마트 지뢰가 아닌 일반 대인지뢰 사용은 UN 지뢰협약 위반인데."
"침략을 당했는데 뭐 가릴 게 있을까요."
제1시설단장 히라사키 시게히데 육장보의 걱정스럽다는 말에 부관이 넉살 좋게 대답했다.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는 것이 부관의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히라사키 육장보는 걱정을 덜 수가 없었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 UN에 의해서 제재 조치라도 받게 되는 게 아닐까? 이런 류의 지뢰를 비축해 뒀다는 것도 사실 문제 삼을 수는 있었다. 대전차지뢰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대전차지뢰 제거 작업을 방해하기 위한 대량의 대인지뢰 살포가 문제였다.
- "이 정도 시설이면 차량화부대는 물론 기갑부대도 쉽게 통과하지 못할 겁니다."
부관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미 도로는 온통 장애물로 가득했다. 아스팔트에 구멍을 뚫고 박아 넣은 폭발물들이 연속해서 터지면서 길에는 지름 1미터 가까운 구덩이가 수십 개씩 생겨났다. 그 위로 원형철조망과 가시철망이 얼기설기 얽혀 폐허를 방불케 했다. 전차나 장갑차도 함부로 접근하기 힘들고 일반 자동차는 절대 통과할 수 없었다. 대전차호 앞에도 원형철조망이 깔리고 그 건너편에는 온통 지뢰가 깔렸다. 비록 폭 400미터의 장애물 형성구간이지만, 캐터필러를 사용하는 차량이 아니면 우회 통과조차도 불가능했다. 트럭으로 달리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결코 해선 안 될 것이다.
- 작업 중인 1시설단 뒤에는 1사단 특과연대가 있었다. 사단 과연대는 예하의 4개 연대전투단에 분산배속되어야 하지만, 지뢰매설작업 때문에 특과연대의 전 포병대가 이 일대에 지뢰 매설 작업에 투입되었다. 1시설단과 1사단 시설대대가 담당구역 일대의 지뢰매설 작업을 끝내고 나면 주변 지역에 무작위로 FASCAM, 야포발사 대전차지뢰를 살포할 것이다. 앞으로 1시간 이내에 이 일대는 전차고 차량이고 통과하기 힘든 지대가 될 것이다. 단 한 가지만 빼고...
"적군에 공중기동보병이 있었지?"
"그까짓 보병만으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 12월 17일 16 : 05 오스미 해협, 히부리섬(島) 남쪽 10km
종이컵에 생수를 담아 온 장보고함 함장 서승원 중령이 김철진 소령을 깨웠다.
"아이구, 제가 깨워드리기로 했는데..."
"이봐, 그렇게 해야 자네도 눈 좀 붙이지. 이거, 쫄따구 재워주기도 참 힘드는구만. 자, 이제 빠져나간다. 심도조정 30미터로, 속력 3노트 골목길 출입구는 잘 알지?"
"예. 제 구멍파기는 제 전문입니다. 심도조정 30미터, 속력 3노트, 조타각 좌현 15도!"
차가운 생수로 목을 적신 김 소령이 명령을 발하자 바닥에 붙어있던 209급 잠수함 장보고가 서서히 떠올라 움직였다. 히부리섬의 서쪽 출구였다.
- "잠망경 심도로 올라간다. ESM 마스트만 빼낸다. 가능한 살짝 뺄 수 있겠지?"
"잠망경 심도로, ESM 마스트는 내가 조작하겠다."
부함장이 복창하며 전파수집용 안테나인 ESM 마스트의 조작레버를 작동했다. 수면 위로 올라온 ESM 마스트가 3초 동안 전파를 채집하고 다시 물속으로 숨었다.
- "깨끗하군요. 똥줄 빠지게 간몬으로 달려가는 모양입니다. 함장님."
"좋아. 어뢰실, 장전 완료 됐나?"
[어뢰실입니다. 장전 완료됐습니다.]
"좌표입력, 세팅 조정한다. 10km 전방에서 레이더 작동할 수 있도록 하라."
- 하픈을 발사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공기식 사출장치가 필요하다. 장보고가 장비하는 스윔-아웃 어뢰발사기는 스크루 추진의 어뢰가 스스로 주행하여 빠져나갈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지만 하픈의 경우는 고체 로켓 부스터로 쏘아지기 때문에 함에서 일정한 거리까지 떼어놓을 수 있는 압축공기 발사기가 필요했다. 압축공기가 어뢰발사관으로 하픈 미사일을 뿜어내자 함이 약간 진동했다. 압축공기가 강하게 밀어낸 하픈 함대함미사일은 수십 미터를 벗어난 거리에서 물 위로 솟구쳤다.
- 원래 미사일이었던 하픈은 바닷속에서 어뢰처럼 움직일 수 없다. 그래서 다른 하픈 미사일과는 달리 수중발사형인 UGM-84 서브하픈(Sub Harpoon) 미사일은 어뢰발사관 크기에 맞도록 설계된 캡슐에 넣어지고, 이 캡슐은 하픈 미사일을 수면 위 20여 미터까지 운반했다.
수면 위로 솟아 나온 캡슐이 길게 두 조각으로 벌어진 뒤 떨어져 나갔다. 그 속에서 빠져나온 하픈은 이제부터 다른 하픈과 똑같았다. 자체추진 로켓으로 시속 700km 이상 가속한 뒤 로켓도 떼어내 버리고 터보 팬(Turbo Fan) 엔진을 가동시켰다. 일정한 추진력을 얻은 하픈은 다시 가라앉아 수면 위를 스치며 일본 함대를 향해 힘차게 날아갔다.
- 12월 17일 16 : 08 오스미 해협, 히부리섬(島) 남쪽 15km
[수측실입니다! 전방 5km에 돌발음입니다. 4~5초 간격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본 잠수함 유우시오급 9번함 유키시오의 발령소가 갑자기 바빠졌다. 2호위대군을 따라 함대 후미를 경계하며 따라오던 유키시오에게 뜻밖의 일이었다. 불과 5km 전방에서 원인불명의 음향이 포착된 것이다.
"뭐라고?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정확히 파악해 봐. 발사음인가? 내가 직접 가겠다."
오자키 히도시(尾崎均) 이등좌가 허둥지둥 수측실로 뛰었다.
- 유키시오급 잠수함이 장비하는 함수소나는 ZQQ-5 소나로 하루시오급 잠수함이 장비하는 소나와 동등한 능력을 가진 것이다. 미국 휴즈사와 기술제휴한 일본 오키사 제품이지만 전자기술의 최고선진국인 일본의 개량이 더해져서 미국제 소나에 맞먹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멍청하게도 그냥 지나칠 뻔했군. 이놈이 아키시오와 나츠시오를 습격한 놈인가? 유형 파악 가능한가? 그리고 이 해역에 다른 아군 잠수함이 있는지도 확인해 봐!"
오자키 함장이 혹시 모를 아군 잠수함을 고려해서 명령을 내리자 부함장이 확인했지만 이곳에 일본 잠수함은 없었다. 한국 잠수함이 확실했다. 더더구나 아군 잠수함을 함정에 몰아서 공격한 놈이었다. 복수를 해야 했다.
- "함장님, 한국 놈들 잠수함은 우리처럼 압축공기로 어뢰를 발사하지 않습니다. 저놈들이 압축공기를 쓰는 것은 하픈을 발사할 때뿐입니다!"
구하라(原) 부함장이 함장에게 진언했다. 맞는 말인데, 한국 잠수함이 어뢰를 발사할 때는 압축공기를 쓰지 않는다. 어뢰 자체가 스스로의 추진력으로 발사관을 빠져나가는 스윔-아웃 발사방식을 쓰기 때문이다. 함장과 부함장이 수측실을 빠져나와 사령실을 향했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공격방위 계산해. 3, 4, 5번 발사관, 어뢰 장전됐나? 공격준비하는 동안 경보를 띄운다. 통신부이 준비. 내용은 함대에 미사일 경보. 서둘러!"
- "어뢰 준비됐습니다. 3, 4, 5번 발사관에 89식 어뢰 3발이 가능합니다. 유선 유도 케이블 점검도 완료했습니다. 나머지 발사관에서 하픈을 들어낼까요?"
어뢰실과 직통하는 인터폰을 들고 통화한 부함장이 보고했다. 이제부터 세부적인 공격지휘는 부함장 구하라가 하게 된다.
"하픈을 옮기자면 시간이 걸리고 잘못하면 소리가 들리게 된다. 나머지 발사관은 그대로 놔둬. 공격 계산은 어떻게 됐나?"
"방위는 정확합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발사하자면 액티브 탐신을 해두는 게 좋겠습니다. 거리도 적당합니다만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 구하라가 함장에게 액티브 탐신을 요청했다. 액티브 탐신을 사용하게 되면 상대방 잠수함도 유키시오의 존재를 깨닫게 되지만 대신에 아주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레이더와 마찬가지로 방위와 거리, 심도까지 정확히 체크할 수 있기 때문에 어뢰도 목표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적어지는 것이다.
"좋아, 액티브 탐신한다. 1회에 한한다. 온도와 심도 계산해서 적정 주파수 산정하라. 그리고 공격좌표가 확인하는 대로 어뢰를 발사한다."
명령하는 오자키는 긴장해서 꽉 쥔 손에 땀이 배었다. 액티브 탐신은 잠수함 승부에서 한쪽의 완벽한 승리를 의미한다. 도망갈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않고 경고를 준 다음에 상대가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을 실컷 구경하고 목을 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퍼펙트게임이었다.
- [주파수 산정 끝났습니다. 탐신 준비 완료!]
수측조로부터 보고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오자키의 명령이 이어졌다.
"액티브 탐신!"
유키시오함이 두드리는 거대한 음파의 진동이 물살을 헤치며 앞으로 나갔다. 수중에서 음파의 속도는 1초에 1,000여 미터. 10초 후가 되면 반사음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고 한국 잠수함을 향해 어뢰가 쇄도할 것이다.
- 12월 17일 16 : 09 오스미 해협, 히부리섬(島) 남쪽 10km
피잉!
한국 해군 209급 잠수함 장보고 전체가 갑자기 둔중하면서도 날카로운 음향에 진동했다. 저주파 단발음이 짧게 울린 후에 남겨진 잔향이 기분 나쁘게 귀를 자극했다.
"무슨 소리야?"
질문하는 서승원 중령도 이미 그 소리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장보고가 하픈 공격에 몰두하는 사이 뒤에서 접근한 잠수함이 있었다.
- "이곳에 왜 잠수함이..."
[어뢰 사출음입니다. 거리 5,000미터, 침로 1-8-5!]
음탐실로부터 비명에 가까운 경보가 울리고, 김철진 소령이 반사적으로 목에 건 스톱워치로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이 정도 수심이면 일본제 89식 어뢰의 속도는 70노트에 가깝게 된다.
"시간이 없습니다! 예상 충돌 시간 160초!"
"최대속도로 증속 한다. 출력 백 퍼센트!"
서승원 중령이 다급하게 명령했지만 최고속도가 24 노트까지밖에 나오지 않았다. 70노트 속도에 사거리가 30km 가까운 89식 어뢰를 따돌릴 수는 없었다.
"온도층 경계로 진입한다. 적정심도는 100미터인가?"
- "젠장! 정말 미안하다."
부하들에게 말한 것인지, 아니면 장보고에게 던지는 말인지 모르게 서승원 중령이 장보고가 가라앉은 자리를 바라보며 터질 듯이 외쳤다. 갑자기 주변 바다에 잔물결이 동심원으로 일렁이며 위로부터 바람이 내리 불었다. 몰려든 시 호크 대잠헬기들이 구명정 주위를 감싸자 강한 헬기 바람과 물안개 때문에 승무원들은 모두 눈을 감았다.
- 12월 17일 16 : 10 미사키 북서쪽 30km 해상
제2호위대군 소속 헬기상륙함 오스미의 갑판 위는 육상기지에서 도착한 HSS-2B 대잠헬리콥터와 MH-53E 소해헬리콥터로 가득했다. 헬기상륙함인 오스미가 대잠헬기와 소해헬기를 장비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한정된 상륙작전을 시도해서 전투함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보다는 대잠작전에 오스미를 헬기모함으로 쓰도록 통합막료회의가 결정한 것이다. 오스미는 원래 목적이 보급함이지만 간단한 개조로 헬기모함이 되는 배였다.
- "저게 뭐죠? 하얀 걸 흔들어대는데요?"
사수 하나가 이상한 걸 발견하고 대대장에게 물었다. 김정민 중령이 몸을 움직여 창 밖을 내다보니, 어떤 자위관이 하얀색 천을 휘두르고 있었다. 항복 신호 같았다.
"대대 전체에 공격 중지명령 하달하고 즉시 하강하라."
김 중령은 기분이 좋았다. 연대규모의 적 병력을 사로잡게 된 것 같았다. 아까 전자전 정찰기로부터 받은 상황정보에 따르면 저건 분명히 공병부대였다. 비록 비전투부대지만, 드디어 그의 대대가 제대로 된 싸움에서 처음으로 대전과를 올린 것이다. 이 정도 전과면 승진할 만한 자격은 될 것이다.
- 헬기에서 보병들이 내리는 것을 확인한 시설단장 히라사키 시게히데 육장보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의 결단은 한국군이나 부하들 양쪽 모두에게 냉혹했다.
"저것들도 끝장이다. 즉시 좌표전송하고 사격 독촉해."
"알겠습니다."
- 12월 17일 16 : 37 시즈오카현 고텐바시 남남서쪽 6km
"미쳤어? 아군을 쏘란 말이야?"
"시설단에서 독촉이 너무 심합니다. 자기들 생각은 말고 쏘라는데요. 알아서 살아 나올 테니 빨리 포탄이나 날리랍니다. 잘하면 헬기보병 1개 대대를 섬멸할 수 있는 기회이니 사격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럴 수가!"
1사단 특과연대장 오카야마(岡山) 일등좌가 경악했다. 특과, 즉 포병이 제일 싫어하는 상황은 피아가 뒤섞인 지역에 무턱대고 포탄을 날리는 일이다. 이럴 경우 포병은 적과 아군을 다 같이 죽이게 된다. 아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가진 포병이 아군을 죽이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이었다.
- 세계 최고의 포병전력을 자랑하는 구 소련군은 1942년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장교 한 명이 고립된 벙커 주변에 몰려든 독일군 1개 대대를 포격으로 전멸시키고 그 장교에게는 상처 하나 입히지 않는 신기를 보여준 적이 있다. 미국 서부영화 스타로 출세한 오디 머피도 2차 세계대전 참전 당시, 버려진 전차에서 통신기로 포격을 유도하여 피아가 뒤섞인 전장에서 독일군 300여 명을 포격으로 살상하고, 같은 편의 인명피해라고는 그가 잘못 쏜 기관총 유탄에 스스로 부상하는 정도에 그친 일도 있다.
그러나 현대 포병은 그것이 쉽지 않았다. 정밀도는 수십 배나 올라갔지만 대신 살상범위가 너무 넓어졌다. 155밀리 포탄 1발이 반경 200미터를 감당할 수 있도록 제조되는 포탄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현용 고폭탄들은 구식 고폭탄보다 폭발력이 몇 배나 강했다.
- "할 수 없지. 전달받은 좌표보다 조금 남쪽에 포격준비. 우리 시설단 애들이 도망갈 시간은 줘야 하니까. 그리고 시설단 통신병한테 연락해서 사탄관측과 유도를 맡아 달라고 해. 얼마나 잘할지는 모르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백 배 나을 거야."
말을 마친 특과연대장 눈에 희미하게 물기가 어렸다. 절망, 슬픔, 분노가 뒤섞인 표정과 처절한 눈빛이었다. 그의 얼굴을 마주 보는 막료와 부관, 통신병들의 얼굴에도 같은 감정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 서서히 접안하는 이지스함 초카이의 위용은 실로 대단했다. 과연 일본 해상자위대가 가진 최고 성능의 전투함이었다.
"기런데 뭘로 부셨간 저렇게 함교가 개박살 난 거이네? 완전히 난장판이구만."
함교를 비롯한 상부구조물이 걸레처럼 찢겨진 것이 보이자 박정석상장이 놀랐다. 깨끗하리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눈에 들어오는 함교 좌측은 구멍 나고 검게 그을리며 수많은 파편으로 어지럽게 할퀴어져 있었다.
"걱정 마시라요. 깝질만 약간 상한 정도입네다. 제 생각에는 손상 부분을 고치고 데이터 링크를 손보아서 취역시켰으면 합네다만."
"뭐이야? 취역이라니. 돌려주자는 말은 아닐 테고, 우리가 쓰자는 말이가? 저 이지스 호위함을 말이니?"
쌍안경을 내려놓고 장태석 중장에게 돌아선 박정석 상장은 묘한 아이디어에 놀라 눈꼬리가 가늘게 치켜 올라갔다.
"물론입네다. 이름까지 생각에 두었습네다."
"장 중장! 묘안이야. 아예 우리가 먹어버리자. 일본어로 조작되는 얼마간의 기기들을 들어내고, 앙이디. 그냥 써도 돼. 내부는 모두 무사하다니 남반부 동지들 힘만 빌리면 수이 고칠 수 있을 거야. 서해함대에 배치합세. 지난 통일조국수호전쟁에서 서해함대가 방공구축함이 없어서 그렇게 당한 거이 아니갔어? 길고 우리 북조선 출신이 변변찮은 전투함도 장만하지 못했고, 당장 의뢰하갔어. 장 중장, 서해함대 기함으로 쓰는 기야. 하하하! 기런데, 이름도 생각해 뒀다고?"
박 상장도 신이 났다. 포로와 일본 해상자위대의 유력한 전투함에 대한 정보습득만으로도 엄청난 가치가 있는 초카이의 나포가 묘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사실, 우기면 안 될 것도 없었다. 서울로 올라가서 이종식 차수에게 귀띔해 준다면 그도 열성적으로 지지할 것이 분명했다. 두 달 전에 끝난 한중전쟁을 인민군과 북한 사람들은 통일조국수호전쟁이라고 불렀다.
"예. 기렇습네다. 김충선함입네다. 옛날 조선시대 장수 이름입네다."
마지막으로 깊게 빨아댄 담배를 바닥으로 던진 후 비벼 끄면서 장태석 중장이 힘 있게 말했다.
"김충선, 기게 누구디?"
"아. 모르십네까? 임진왜란 때 조선에 항복한 뒤 귀화한 왜장 있잖습네까. 조선군의 작전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고 직접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운 뒤에 선조로부터 조선 이름을 하사 받았디요. 나중에 장수로 발탁됐습니다."
"아! 기래서 김충선이구만. 이제 확실히 알갔서. 좋은 이름이구만. 조선에 귀화해서 다시 칼날을 일본으로 돌린 사무라이라. 저 배가 일본과의 전쟁에 김충선이란 이름을 받고 다시 활약하게 된다는 것은... 암튼 좋아 장 중장. 이름에 대해서도 내래 혁명적으로 지원하갔어!"
말을 마친 박장석 상장이 다시 쌍안경을 들어 초카이를 바라보았다. 김충선함. 비록 북한에서는 조선 왕조를 나쁘게 평가했지만, 그래도 김충선이라면 썩 마음에 드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부두에 계류된 초카이마저도 당당하게 보였다. 이제 인민군이 쓸 거라고 생각하니 함정의 여러 모습들도 새롭게 보이지 않았다.
이제 서해 함대도 배수량 9,000톤이 넘는 초대형 전투함을 갖게 되는 순간이었다.
- 이들은 이번이 첫 번째 실전이었지만 두려움 같은 걸 품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긴장감도 공포감도 느끼기 전에 이들은 곧바로 전투에 투입이 되었다. 본능과 육감, 그리고 고도로 훈련된 이성만이 살아 움직일 뿐, 감성은 어느새 거의 마비되고 말았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데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은 그들의 뇌리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 대전차병 황용하 상병이 팬저파우스트-3을 들고 지뢰살포기를 장치한 73식 장갑병차를 조준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난생처음 실제 팬저파우스트-3을 발사하는 그는 명중할지 하지 않을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 발사기는 3회밖에 발사할 수 없고, 단가가 200만 원 가까이 되는 값비싼 무기이기 때문에 이것을 실제 발사하는 훈련은 받지 못했다. 포탄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일직선으로 날아가 73식 장갑차 차체 측면에 꽂혔다. 거대한 폭발이 일고, 장갑이 취약한 APC들 중에서도 가장 방어력이 취약한 축에 드는 73식 장갑병차가 그대로 분해되었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돌진하던 다른 병사들이 깜짝 놀라 움찔했다.
"누구야! 그걸 누가 쏘라고 했어?"
분대장이 욕설을 퍼부으면서 K2 자동소총을 정면에 대고 자동으로 긁었다. 한국군 병사들을 향해 본능적으로 총구를 들이댄 자위관 하나가 온몸에 소총탄 벼락을 뒤집어쓴 채 뒤로 나자빠졌다. 영화에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그저 펄쩍 뒤로 튀며 나자빠지고, 그게 끝이었다.
- "저기 적 장갑차 쪽으로 지원사격!"
권 병장이 목이 터져라 소리치자, 헬리콥터 착륙지점에서 대기하고 있던 M-60 중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기관총탄이 빗발치듯 날아장갑차 측면과 근처 지면에 쏟아지고, 금속성 소음과 파쇄음이 주변 다른 총성이나 소음들과 뒤섞여 묘한 화음을 이루었다. 장갑차에 엄폐해 있던 자위대원들이 사격을 멈추고 몸을 숨기는 동안, 권 병장이 수신호로 접근명령을 내리면서 소리쳤다.
"장갑차 쪽으로 전진! 저놈들을 소탕해!"
- 백명기 상병이 기총 엄호 아래 소총병 두 명을 이끌고 장갑차 쪽으로 다가가서 그 너머로 수류탄을 까서 던졌다. 상대방이 수류탄을 받아넘기지 못하게 안전핀을 뽑고 레버를 튕긴 다음 2초 뒤에 던지는 것을 백 상병은 잊지 않았다. 수류탄은 장갑차 뒤로 넘어가는 것과 동시에 폭발했다. 흙먼지가 하늘로 솟구치며 폭음과 비명이 뒤섞여 들려왔다.
- 12월 17일 18:00 시즈오카현 시마다(島田) 시
각종 한국제 차량은 미국제와 아주 유사한 실루엣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권에서 만든 MT-LBU 지휘차는 한국제 차량과는 아주 이질적인 형태를 하고 있었다. 한국군 기갑부대 행렬 속에 끼어 있는 공산국가제 장갑차는 어딘지 모르게 불균형적이었다. 그러나 그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부대는 평균속도 시속 15~20km 정도로 쉬지 않고 움직였다.
"8사단 수색대대로부터 보고입니다. 1번 국도를 파괴하던 적 공병부대를 소탕했으나 도로 사용은 불가능하다는 내용입니다."
"기놈들이 길을 막고 있구만기래."
군단참모장의 보고에 군단장 허철화 상장이 낮게 중얼거렸다. 상식적으로 자위대의 행동은 한국군의 진격로를 막는 데 있다고 판단해야 했다. 도로파괴는 진격로 차단의 기본인데, 지금 도쿄로 가는 가장 가까운 도로들은 모두 파괴되어 사용이 불가능해졌다. 이제는 다른 우회로들 차례일 것이다.
- "다른 우회로가 있나?"
"기계화부대라면 그냥 후지산 밑으로 통과하면 됩니다. 넓은 평야지대라서 단기간에 지뢰를 매설하고 차단하기 불가능하니까요. 하지만 자동차부대라면 후지산도 돌아서 우회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그 도로도 적이 차단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좁은 차 안은 참모장에겐 고통스러웠다. 참모장은 보고하면서도 계속 허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비좁은 장갑차 안에서 그는 허리를 있는 대로 구부린 채 거의 10시간 가까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팠다. 그는 나이가 들면 요통으로 적지 않게 고생할 것 같았다.
- "기래. 나라도 기렇게 하겠다. 어차피 기갑부대만으로 수도공략이 쉽지 않을 거라는 건 그들도 알 테니까 말일세. 이번 작전에서 우리 기갑의 임무는 진격로 확보라는 것을 적은 이미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당연한 이야기지만, 후지산 일대에는 적 기계화부대가 있갔나?"
"아마도 그럴 겁니다. 후지산 일대에 한국군 전투교육사령부에 해당하는 후지학교와 예하 훈련부대인 후지교도단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전차를 연대규모로 보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적 보병사단이 전차부대를 파견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우리 전면에는 최소한 1개의 적 보병사단이 있습니다."
"좋아. 기럼 아마 오늘밤이나 내일 아침쯤 전면 기갑전을 한번 치러야 되갔군. 멋진 후지산을 배경으로..."
"그렇게 되겠죠. 멋있을 겁니다."
- 허철화 상장은 좁은 장갑차 안에서 다시 한 번 비비적대고 움직이면서 지도책을 펼쳤다. 장갑차 안에서 지도를 보려면 지도보다는 지도책이 유리했다. 한 장짜리 지도로 보려면 너무 넓은 면적이 필요하다.
"기래, 바로 요기야. 여기 후지까지 1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이동목표지점을 고텐바로 잡도록 지시하게."
- [해상자위대 제1, 2 연합 호위대군 간몬해협 통과, 총 23척 귀 함대가 저지할 것. 제5고속 침투대가 남하해서 쓰시마 남동쪽에서 합류할 것임. 연합작전으로 효과적인 방어전에 임할 것. 반복한다. 절대 무리하지 말고 방어전에 충실하라. 특히 이 해역에 일본 잠수함과 아군 잠수함이 혼재하므로 대잠작전에 특히 유의하기 바람.
통일참모본부 의장 차수 이종식]
- 전문을 다 읽은 홍성하 소장이 종이를 구기다가 다시 펴서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타오르는 전문을 손으로 툭툭 치며 제삿날 제문 태울 때처럼 공중에서 끝까지 태웠다. 완전히 재가 된 전문을 휴지통에 넣은 홍 소장은 이것을 발로 밟아 완전히 가루로 만들었다. 수병들은 제독의 보안의식에 질려 멀거니 쳐다보았다.
- 홍성하 소장은 항모와 상륙함대에서 구축함과 프리깃을 절반이나 끌어 모았다. 그가 탑승한 김구함와 윤관함, 김유신함이 대공미사일을 장비한 구축함이고, 나머지는 울산급 네 척에 포항급 다섯 척이었다. 강력한 방공능력을 자랑하는 KDX-3 1번함인 김구함까지 가세했지만 해상자위대 제1, 2호위대군에 정면 대결로 맞붙긴 어려웠다. 지금까지처럼 양국 공중전은 거의 무승부로 끝나거나 승부가 나더라도 서로 대함공격을 하긴 어렵고, 한국 잠수함은 숫자가 너무 적었다. 자위대 3, 4호위대군을 격파하는 데 수훈을 세운 고속정단은 정체가 폭로되어 더 이상 중요한 역할을 맡기기 어려웠다.
"헬기 갑판에 비조를 대기시키게."
홍성하 소장은 비조를 띄울 생각이었다. 한국군은 두 가지 무인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제 대레이다 파괴 무인기인 하피(HARPY)와 대우중공업에서 개발한 무인 정찰기 비조(飛鳥)였다.
- E-2C가 항모전대에서 바쁜 만큼 지상배치 E-2C도 바빴지만, 비조 덕택에 함대는 직접 정찰을 시도할 능력이 있었다.
한국과 일본 모두 이 해역에서 항공공격이 어려웠다. 일본에 정예 전투기가 남아 있지만 로동미사일로 기지를 공격한 이후 급격하게 숫자가 줄었고, 한국군 F-16 전투기는 항속거리가 짧은 편이다. 이제 각자가 방공무장을 한 채 상대방 전투기가 공격해 오기만을 기다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비슷한 사거리를 가진 미사일을 주무장으로 하는 전투기라 미사일을 이용한 공중전에서는 장점과 단점이 너무 비슷했다.
- 이륙하기 위해 약간의 활주거리가 필요한 이 무인기는 헬기갑판에서 이륙한 다음, 속도를 얻기 위해 함교 위를 한 바퀴 선회하고 남서쪽으로 향했다. 중간에 격추당하지만 않는다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잠수함과 합동작전을 다시 한번 검토하세."
비조의 발사를 확인한 홍성하 소장은 참모와 함께 함교를 나와 전투정보센터로 내려갔다. 충분한 운용시험을 거치지 않고 급조한 함이라 여기저기 도색도 못 마쳤고 바닥에도 케이블이 어수선했다. 기존 광개토왕급의 선체에 미국이 아닌 네덜란드로부터 도입한 방공미사일 체제가 실전을 치르는 순간이었다. 미사일은 KDX-2와 같은 스탠더드 미사일이지만 유도장치와 레이더, 전투정보 시스템은 완전히 별개였다. 스탠더드 미사일 48기와 애스록 8기, 그리고 발전형 시 스패로 미사일 32기가 탑재되었다. 이 미사일은 특이하게 발사기 하나에 미사일이 4개가 수납되어 한정된 공간에 미사일 탑재량이 비약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 애당초 미국이 제공하기로 한 이지스 시스템을 정치적 목적으로 방해한 것도 미국이었다. 그러자 한국은 새로운 방공 시스템을 개발 중인 네덜란드와 독일에 잽싸게 접근했다. 그런 다음 이들이 개발한 APAR 방공 시스템을 채택한 것이다.
"최윤덕의 위치는?”
입에 볼펜을 물고 자근자근 씹던 홍성하 소장이 작전참모에게 물었다.
"이키섬 남쪽에서 대기 중입니다. 정확히 45분 뒤 데이터 링크를 하게 됩니다. 모두 잠망경 심도로 올라와서 명령을 수신할 겁니다."
- 12월 17일 21 : 25 혼슈(本州) 야마구치 현 미시마(見島) 섬 해저
"장보고래 당했다는구만."
- 츠키기지의 전투기를 제압해 주면서 효과적으로 1, 2함대까지 공격해주어야 했다. 62구축함 전대도 남하했지만 이들도 수적으로 열세였다.
"하픈을 빼기요. 어뢰실을 호출하시오."
"어뢰실 나오라. 3, 4, 5, 6번 발사관에서 하픈을 빼고 어뢰를 장전한다. 하지만 재장전 레일에 하픈을 두도록. 어뢰를 쏜 후 하픈을 바로 장진한다."
부함장이 인터폰을 들어 어뢰실을 호출했다. 명령문에는 적에게 최대한 접근하여 어뢰공격을 하라고 되어 있었다. 어차피 무릅쓸 위험이었지만 최승호 상좌는 거리낌 없이 장전된 하픈을 모두 빼내라고 명령했다.
- "좋아. 이제 우리 최윤덕의 진가를 보여주기요. 맞디요? 우리 최윤덕이 세계에서 가장 조용한 잠수함이란 거이?"
최 상좌가 배에 힘을 주고 다소 과장되게 이야기하자 곽 소령이 그제서야 씩 웃었다.
"맞습니다. 연료전지 추진 시스템은 우리가 처음입니다. 독일 친구들이 애써 준 덕택이지만 우리 잠수함은 발전기를 돌릴 필요도 없고 완벽한 무음으로 발전과 추진이 가능합니다. 함장님께서 저희 잠수병 학교에서 배우신 게 다 맞습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조용합니다."
- "자, 기럼 장고보에 복수를 시작해야디. 전진 반속, 속도 3노트로 예정 포인트까지 시간이 얼마 없디 않간? 일본 놈 옆을 지나 뒤를 칩세다. 침로 재설정하기. 해안선에 붙어 내려갑세."
- "길고 오늘부로 자넨 내 부관이야. 이 점도 유념하기요. 당분간 정장과 부관을 겸하는 기야. 알간?"
"예! 알갔습네다.”
장태석 중장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사실 얼마 없었다. 그는 또다시 전투에 내몰아야 하는 부하들에게 가능한 많은 것을 주고 싶었다. 이번 투입은 기습도 아니니 그만큼 더 위험했다. 신이 나서 좋아하는 부관을 바라보며 장태석 중장은 어쩐지 미안했다. 그가 입안한 작전이지만 부하들에게는 내몰린 호랑이 아가리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고속정들이 어둠 속에서 남쪽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장태석 중장이 다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 12월 17일 23 : 04 시즈오카현 아시타카야마(愛應山) 북북서 쪽 4km
일본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 중 하나가 후지산이다. 해발 3,776미터로 일본에서 최고봉이자 최고 관광명소이기도 한 후지산과 마주 보고 있는 산이 해발 1,187미터인 아시타카(愛應) 산으로, 이 두 산 사이에 폭이 조금 좁지만 상당히 평탄한 도사토키 고원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이 일대는 풍경과 지형이 좋기 때문에 아주 훌륭한 골프코스를 갖춘 컨트리클럽들이 있다. 그 외에도 등산코스 몇 개와 큼지막한 유원지, 온천지대 등이 있어서 일본에서는 가장 크고 유명한 휴양지이자 관광지로 명성이 높다. 또한, 전차들끼리 맞붙는 대규모 전차전을 벌이기에 세계에서 가장 적합한 지역 중 하나이다. 전반적으로 폭이 좁긴 하지만.
- "씨부럴! 왜 하필 이런 밤중에..."
21기보사단 기갑정찰대대 전차중대장 장성만 대위가 투덜대면서 야시경을 쓰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K-1 전차에 탑재된 전차장용 독립관측장비는 같은 세대의 동급 전차가 공통적으로 갖추고 있는 야간암시기능이 없다. 때문에 야간에는 3세대 전차의 가장 핵심적인 기능인 헌터-킬러 기능을 사용할 수가 없다.
- 헌터-킬러 기능이란 포수가 목표를 조준하고 공격(킬러)하는 동안에 전차장이 별도로 다른 목표물을 추적(헌터), 공격을 준비할 수 있는 기능(킬러)이다. 3세대 전차 중에서 이 기능이 없는 것은 M-1 패밀리 중 M-1A1까지 뿐으로, 그 외의 3세대 전차는 모두 이 기능을 갖고 있다. 심지어 2세대 전차 중에서도 이 기능을 가진 전차가 있는데, 독일의 레오파르트 1A4가 바로 그것이다. K-1은 이 레오파르트 1A4의 것과 같은 프랑스 SFIM사의 차장용 독립관측장비를 탑재하고 있는데, 하필이면 이것은 주간 전용이었다. 야간에는 꼼짝없이 헌터-킬러 기능을 전방에 한해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결점을 보강하기 위해서 장 대위는 광증폭식 야간암시경을 쓰고 있었다. 대낮이라면 굳이 할 필요가 없는 행위였다. 최근 들어 대량공급되기 시작한 야간암시경 때문에 전차장은 어느 시간대에든 차 밖으로 몸을 내놓는 것이 위험해졌다는 사실에 미뤄보면, 이건 자살행위는 아니더라도 바보짓임에는 틀림없었다.
- 전방만 관측할 것이라면 포수용 조준경을 공유해도 되지만, 전차장의 임무는 모든 방향에서 닥쳐오는 위기상황을 재빨리 감지하고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해봤자 얼마나 도움이 될까? 광량증폭식 야간암시경으로는 아무리 멀리 봤자 몇백 미터에 불과했다.
- 12월 17일 23 : 32 고텐바시 서쪽 10km, 동후지 연습장
"사단 제2전차중대가 적과 접촉했습니다."
1사단 임시 사단본부에서 막료장이 음산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82식 지휘통신차 바로 바깥에 임시로 세워둔 24인용 텐트 안은 막료와 통신원들로 북적댔다. 테이블에 펼쳐진 지도에 붉은색 표지가 놓여졌다. 여기저기 흩어진 푸른색 표지는 자위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단장 마쓰무라 육장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예상보다 빨리 접근해 왔군. 그나마 병력전개는 다 마쳐서 다행이긴 한데. 전투는 지금도 진행 중인가?"
"조금 전에 끝났습니다. 적과 접촉할 경우 신중히 행동하고 위험하다 싶으면 즉시 물러나도록 미리 지시를 내려놓았기 때문에 적에게 약간의 압박을 가하다가 바로 물러났습니다. 전차 4대를 잃었고, 대신 적 전차 3대를 격파했다는 보고입니다. 손해는 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잘했네."
- 막료장에게 간신히 한마디 던진 사단장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들 정도 나이밖에 되지 않는 중대장들이 갑자기 측은하게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젊은이들이 싸우다 죽어가고 있다. 새삼스레 전쟁에 대해 회의가 일었다. 그러나 그런 회의를 품기엔 너무 때가 일렀다. 전쟁을 혐오하는 것은 전쟁이 끝난 다음에나 해도 될 일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나쁜 사단장을 본 부관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사단장은 대답 대신 고개를 내젓고는 허리를 더듬었다. 가죽 홀스터에 든 금속제 권총의 느낌이 손에 와닿았다. 문득 그것을 사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권총을 사용하고 싶은 대상이 생각나지 않았다.
- 12월 17일 23 : 38 혼슈 야마구치현 츠노 섬 해저
"옵니다."
소나 상황을 지켜보던 곽일준 소령이 함장을 불렀다. 소나에 수집된 새로운 시그널이 계속 디스플레이에 추가되었다.
"좋아, 조금만 더 따라붙기요. 감속 노트 침로 조정한다. 조타각 우현 40도로."
이미 일본 잠수함들은 로미오급과 장보고급 잠수함들이 포진한 북쪽으로 몰려갔다. 덕택에 212급 잠수함 최윤덕은 어렵지 않게 저지망을 돌파해서 일본 잠수함의 뒤로 돌아온 것이다.
- "공격 전에 추적했던 잠수함 좌표정보를 저장해서 통신부이에 입력시키기요. 공격과 함께 사출 하는 기야요."
늦지 않겠지만 어쩌면 최윤덕함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만약에 어뢰로 공격하기 전에 1, 2호위대군의 전투함에게 최윤덕함이 당한다면 격침기록도 없이 남해해전에서 퇴장당하는 것이다. 여태까지 최윤덕함이 올린 전과는 모두 도움전과였지, 직접 격침기록은 아직 없었다.
"그동안 많이 도와줬으니 이번에는 우리 차례다. 거럼..."
부함장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함장도 똑같이 말하고 있었다. 역시 긴장상황에서는 생각하는 것도 같아지는 것일까?
- [새로운 목표입니다. 예인소나에 걸립니다. 방위 1-9-0도 잠수함입니다.]
"후위 잠수함이군요 어쩌면..."
"기래. 저놈일지 모르디요."
209급 잠수함 장보고가 뒤에서 당한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은 장보고가 당한 것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뒤를 좇다가 다시 뒤를 물린 장보고처럼 최윤덕함도 그럴지 몰랐다.
"제기랄! 공격좌표 다시 세팅하겠습니다."
습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뒤에 또 다른 사냥꾼이 붙은 것이다. 이미 탈출 코스까지 설정해 놓았지만 이렇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 1, 2호위대군을 저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최후의 경우까지 몰려도 대안이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잠수함은 다른 문제였다. 잠수함 하나를 상대하려면 다섯 배의 수상함 전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해군의 중론이다. 최 상좌는 고민할 문제를 가볍게 떨궈냈다.
"양쪽 함대가 어느 정도 가까워졌소?"
"추정치입니다만 적어도 150km는 떨어져 있습네다."
곽일준 소령이 대답하며 다시 해도 위로 컴퍼스를 가져갔다.
"침묵상태 1을 발령하기요. 침로 유지, 감속 2노트로!"
"알겠습니다."
- 침묵상태 1이란 최고의 정숙성이 필요할 때 지시하는 명령이다. 실내등이 점멸을 시작하면 비번인 승무원은 모두 침대로 들어가야 한다. 필요 없는 장비도 사용이 금지된다. 취사와 세탁도 금지되며 임무를 직접 수행하는 승무원을 빼놓고는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는 단계이다.
함에 적색등이 점멸하기 시작하고 남아 있는 승무원들은 입을 다물었다. 거의 움직이지 않는 최윤덕함 뒤로 일본 잠수함이 계속 가까워졌다.
- "함수를 적과 마주 보게 하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아니오. 기다립세다. 지나칠 때까지."
뒤에서 오는 잠수함을 기다리는 동안 그동안 추적했던 호위함이 내는 소음이 점점 멀어졌다. 곽 소령은 아까웠지만 다가오는 잠수함에 대한 공격준비도 바빴다. 그 잠수함은 속도가 빨랐다. 앞서는 호위대군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였지만 10노트가 넘는 속도는 최윤덕함에 유리했다. 속도를 내면 낼수록 소나의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 30분 후, 최윤덕함의 예인소나를 지나친 일본 잠수함이 300미터까지 접근했다. 최윤덕함도 계속 예인소나를 감아 당겼다. 일본 잠수함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 잠수함 유키시오는 최윤덕을 앞서서 600미터를 벗어났을 때 공격소나음을 받았다. 곧이어 발사된 세 발의 SUT Mod 2 어뢰는 유키시오에게 피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급속 부상하며 기만장치인 디코이를 사출 했지만 대방해능력이 강력한 SUT 어뢰는 속지 않았다. 35노트로 일본이 사용하는 89식 어뢰의 절반 속도인 이 독일제 어뢰는 속도 대신에 장거리 항주능력과 뛰어난 추적으로 훨씬 집요했다.
커다란 폭음과 함께 유키시오가 침몰하고 앞서가던 호위함이 황급히 대잠 헬리콥터를 띄웠지만 최윤덕함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 12월 17일 23 : 53 시즈오카현 후지시 북쪽 3km
한국군 제21 기계화보병사단 예하 3개 여단 중 선두에 선 62기갑여단은 이미 전투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러나 무조건 전진하는 것만이 상책이 아니라고 판단한 사단장이 기계화부대에게는 걸맞지 않은 정지명령을 내렸다. 기계화부대의 생명은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이라는 사실로 미뤄볼 때, 결코 옳은 판단은 아니었다.
- "그딴 건 우리가 알 바 아니잖아. 중요한 건, 잠시라도 쉴 수 있게 됐다는 거야."
62기갑여단 109기보대대 2중대 3소대 2분대장 이건규 병장이, 기계화부대의 전술 운운하면서 잘난 척하는 차장 김만득 병장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했다. 그 말에 김 병장은 머쓱해졌는지 그냥 머리를 긁적이다가 씩 웃었다. 장갑차 바깥에 나와서 잡담하는 모습이 완전히 군기 빠진 일반예비군 꼴이었다.
- 이 근처의 12월 평균기온은 영상 3~4도로, 한국군의 표준 동계군복을 입고 있다면 노숙을 해도 괜찮은 기온이다. 새벽에 쓰루가에서 처음 맞은 차가운 바닷바람과는 느낌이 전혀 다른 산들바람이 가볍게 불어왔다.
나고야를 떠난 지 이제 12시간을 간신히 넘었다. 그동안 거의 200km 이상을 달려왔다. 중간중간에 휴식시간이 있긴 했지만, 차에서 내려 느긋하게 뭔가를 하고 있을 만한 여유는 없었다. 설날이나 한가윗날 길 막히는 것보다도 더 지독하게 길이 막히는 형국이고, 게다가 언제 어디서 적과 접촉할지 모른다는 불안감까지 겹쳤다. 게다가 지금은 전투를 눈앞에 둔 상황이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지금쯤 잔뜩 긴장해 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이상할 만큼 분대장은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피로 때문에 상황 판단력이 흐려질 정도로 지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투경험이 풍부한 사람도 아닌 이건규 병장이 이렇게 초연할 수 있다니. 김만득 병장은 쉽사리 믿어지지 않았다.
여태까지 전술 운운한 것도 실은 불안해서 그런 거였다. 불안감을 달래자니 말이 늘 수밖에 없고,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음담패설 아니면 전투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성향 문제로 김 병장은 음담패설을 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그러다 보니 전술 이야기로 넘어간 것이었다.
- "에구구. 그나저나 오늘 밤중에는 싸울 일이 없을 것 같은데."
한 번 쏘아주고 나서 철모를 벗고 머리를 긁던 이 병장이 갑자기 그렇게 말하자 김 병장이 약간 놀라며 분대장을 쳐다보았다. 지치지도 않은 얼굴, 공포에 질리지도 않은 얼굴, 무덤덤한 분대장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야간전투는 우리 전문이 아니야. 그렇지?"
"네. 하지만 기갑부대는 빨리 움직이고 때리는 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우리 부대가 사단급이라는 건 쪽발이들도 짐작하고 있지 않겠어? 그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해. 기계화사단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너도 잘 알잖아? 걔네들 병력이 우리보다 많다면 몰라도 말이야."
대부대 운용전술에는 깜깜할 것 같은 새까만 분대장 주제에 그래도 말을 조리 있게 했다. 김 병장이 분대장을 우러러보았다.
"그러니까 오늘밤에는 경계만 잘하면 된다 이거라구."
- 사방에서 저지선이 뚫리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아예 공고를 기함으로 정해 버리고 올라탔다. 주위함을 효율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데이터 링크가 하루나에 있었지만 대공방어력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한 정면충돌에서는 무엇보다도 대함미사일에 대한 방어력이 중요했기 때문에 강력한 대공방어력을 가진 이지스 호위함에서 지휘해야 했다.
"됐어. 대잠헬기를 모두 띄워! 샅샅이 수색해! 이쪽 공역도 이젠 어느 정도 안전하니까 오라이언도 출동시켜. 확실히 청소하라고 해!"
가토 해장이 노발대발하며 함대가 보유한 대잠헬기를 모두 이륙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그는 한국 구축함대에만 전념하려 했다.
"한국 함대의 위치는?"
"145km입니다."
"놈들도 똑같은 하픈이지. 이건 애숭이 장난도 아니고 전함끼리의 포격전도 아니고 대체 뭔가..."
자조 섞인 한숨을 내뱉고 다시 해도를 살폈다. 이제 공대함미사일을 장착한 전투기라는 변수도 없고 잠수함이란 변수는 무시했다. 똑같은 사거리의 무기를 앞세운 동일한 펀치력의 두 상대가 머뭇거림도 없이 서로를 향해 폭주하고 있었다.
- "고속정대를 내보내!"
해상자위대가 보유한 유일한 고속정 세 척이 앞서 나갔다. 이탈리아의 스파비에로형 수중익선과 동일한 선체의 PG-01, 02, 03호가 40노트 속도로 수면 위를 미끄러져 갔다. 오직 요격만이 필요한 게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 저지선을 치고 막아서는 한국 구축함대도 이런 것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토 해장이 노리는 것은 회전(會戰)이었다. 어쩌면 똑같이 파멸할 수도 있고, 가토 해장의 자위함대가 이길 수도 있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은 함대의 대공방어력에 달렸다. 하지만 자위함대는 모두가 자함방공능력을 갖춘 함대공미사일이있고 한국 해군은 일부만 있을 뿐이었다. 정면돌파하면 수적으로 우세한 쪽이 유리하다. 그리고 그는 이 틈으로 잠수함대를 밀어 넣을 생각이었다.
"선두에 고속정대가 사거리에 접근했습니다."
작전참모가 공격명령을 기다렸다.
"발사시켜. 나머지 모든 호위함도 미사일 발사 대기시켜. 한꺼번에 발사한다."
가토 해장이 침착하게 명령했다.
- 선두에 선 PG형 고속정으로부터 90식 대함미사일 SSM-1B가 발사됐다. 각기 네 발씩 장비한 이 미사일은 하픈과 비슷한 사거리와 비슷한 파괴력을 가졌지만 독자개발한 유도장치와 추적 시스템을 갖췄다. 하픈과 마찬가지로 수면에 가라앉아 이키섬 북쪽의 한국 함대를 향해 날아갔다.
5분 뒤, 하픈 사거리에 이른 모든 호위함에서 미사일이 치솟았다. 5초 간격으로 각기 장비한 미사일 8발을 모두 발사하자 함대가 장비한 모든 함대함미사일이 한꺼번에 날아갔다. 하늘에서 본다면 다연장 로켓이 날아가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지방함대 소속으로 하픈을 가지고 있던 하쓰유키급과 아부쿠마, 이시카리급까지 도합 22척이 쏟아낸 172발의 하픈 미사일이 한국함대를 노리며 비행했다.
- 12월 18일 00:12 미시마 북서쪽 90km 해상
"대함미사일 다수 접근 중! 요격 실시하겠습니다."
김구함의 방공담당관 조완희 소령이 다가오는 90식 대함미사일에 조준을 마치고 미사일 사격을 시작했다. 김구함이 장비한 레이더는 별도의 사격지휘 레이더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능동형 페이즈드 어레이 레이더라는 명칭 그대로 위상배열된 레이더에서 나오는 전파빔이 미사일 조사용 빔이었다.
- 함교 전방의 마크-41 수직발사기에서 스탠더드 미사일이 솟아올라 다가오는 대함미사일을 향했다. 윤관과 김유신함에서 치솟은 스탠더드 미사일도 김구함의 사격통제 레이더인 에이파(APAR)가 지시하는 목표를 향했다. 윤관, 김유신함은 김구함으로부터의 또 다른 미사일 발사명령이 없자 자체 사격관제 레이더로 만약을 대비한 다음 골키퍼 근접방어 기관포를 준비시켰다.
"E-2C의 보고입니다. 이런! 다수의 대함미사일 추가 발견입니다. 거리 110km. 숫자가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데이터 링크 오퍼레이터가 놀라 외쳤다. 이미 디스플레이에 표시되는 대함미사일 식별 부호가 100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전 함정 하픈 발사!"
표정에 변화가 없는 홍성하 소장이 발사를 명령했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남해에서의 소모적인 항공전이 또다시 무승부로 끝난 다음, 마구잡이로 밀고 들어오는 일본 함대에 승무원들이 경악했다. 양쪽이 서로의 위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같이 죽자는 것인가?
- 홍성하는 자위함대가 남쪽으로 물러날 것으로 예상했지만 기대가 무산됐다. 그는 만약 한일 함대가 전면적 전투에 돌입하면 양쪽 모두 거의 괴멸적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다면 이번 해전에 전력을 투입한 일본 해상자위대는 거의 전멸한다. 홍성하 소장은 손해 볼 것 없다는 생각으로 공멸을 각오했다.
- 울산급 네 척이 장비한 하픈을 합쳐 모두 56발의 하픈 함대함미사일이 검은 하늘로 솟구쳤다. 포항급 코르벳 일부가 장비한 엑조세 미사일은 사정거리 훨씬 밖이었다. 망할! 포항급 코르벳함에도 하픈을 장비해야 한다고 얼마나 우겼던가. 평소에도 현대 해전에서 엑조세는 간첩선이나 잡을 미사일이라고 생각하는 홍성하 소장은 다시 울화가 치밀었다.
그런 다음 김구와 김유신, 윤관함이 탑재한 링스헬기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이제 함체에 장비한 대함미사일은 없기 때문이다. 세 대의 헬리콥터가 떠올라서 여섯 발의 하픈 미사일을 추가했다.
- 홍성하 제독은 일본 이지스함 공고의 방공능력이 두렵지는 않았다. KDX-3 김구함의 능력도 공고급에 버금간다. 그러나 공격력이 문제였다. 자위대 2개 호위대군이 발사할 수 있는 하픈은 200발을 넘는다. 한국 함대가 보유한 대공미사일 숫자를 초과하는 막강한 타격력이었다.
먼저 접근한 90식 대함미사일은 김구함이 유도하는 스탠더드 미사일의 방어벽을 뚫지 못하고 모두 30km 전방에서 피격된 다음 바다로 처박힌 뒤 커다란 물기둥을 일으켰다.
"에이파 추적 범위에 들어왔습니다. 목표 우선순위 식별 중. 위험순위 부여합니다. 현재 60km에 접근 중입니다."
조완희 소령이 소장에게 보고하는 목소리는 떨렸다. 함정에 탑재한 방공레이더는 수면에 근접한 물체일수록 원거리에서 탐지가 어렵다. 수면에 붙어 달려오는 하픈 미사일은 수평선에 가리기 때문에 60km 정도에 접근해야 요격을 위한 추적을 할 수 있다.
- 에이파(APAR) 레이더에 의해 보다 정확하게 추적된 일본 측 하픈 미사일 정보가 상세히 나타나자 전투정보실 요원들이 경악했다. 90식 대함미사일을 모두 요격했지만 이번에 몰려오는 미사일은 모두 170 발이었다. 김구함이 장비한 요격미사일 수를 훨씬 넘어서는 숫자이다.
홍성하 소장은 아무 말이 없었다. 물량전을 가능성에 넣어도 그만큼의 피해도 일본에게는 치명적이기 때문이었다. 이쪽에서 발사한 60여 발의 하픈 미사일도 일본 함대에게 치명적이었다.
- "미사일 요격 시작합니다."
170기의 미사일에 대한 공격지령은 하나하나 수동으로 내릴 수 없다. 대량의 위험목표에 대한 분석과 공격에 이르는 과정 모두 자동으로 설정하면 김구함 전체가 하나의 자유로운 컴퓨터가 되어 다가오는 미사일을 스스로 요격했다. 원거리에서 가능한 많은 미사일을 떨궈내야 했다. 윤관함과 김유신함, 그리고 김구함이 장비한 모든 스탠더드 미사일이 발사를 시작했다. 2초 간격으로 수직발사기에서 솟아오른 스탠더드 미사일은 수평선 쪽으로 몰려오는 미사일을 향해 날아갔다.
"공격목표 1에서 16까지 동시 요격 중입니다."
조완희 소령이 사령관에게 보고했지만 대응할 수 있는 스탠더드 미사일이 곧 바닥날 것이라는 내용은 덧붙이지 않았다. 48기의 스탠더드 미사일 중 이미 20발이 날아가고 있었다. 김유신함도 마찬가지였다. 32발의 스탠더드 미사일 중 김구함의 요격지휘 하에 15발이 날았고 다시 후방의 목표에 대해서 자체 사격 지휘 레이더가 8발의 미사일을 또 날렸다.
- "스탠더드 미사일이 다 떨어졌습니다. 시 스패로가 발사 대기합니다."
조 소령과 방공담당 오퍼레이터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이어졌다. 이미 함대가 가진 모든 스탠더드 미사일이 발사되었다. 수평선 멀리서 목표가 파괴되는 것을 알리는 섬광이 일었지만 거리도 점점 가까워졌다.
"시 스패로 발사!"
사정거리가 짧은 시 스패로는 마지막 저지선이었다. 함대 외곽 14km 안쪽까지 파고들어 오는 시간에 맞추어 32발이 장착된 마크41 수직발사기에서 또 다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1개 발사기마다 4 발씩 장착된 발전형 시 스패로 미사일(Envolved Sea Sparrow Missile)이 거의 동시에 튀어 올랐다. 시스패로는 각각 두발씩 한 점으로 다가오는 미사일을 향해 화염을 내뿜으며 돌진했다.
- "젠장! 너무 많습니다.”
조 소령이 소리 질렀다. 스탠더드 미사일이 70발에 가까운 목표를 떨궜지만 이제 김유신함과 윤관함이 장비한 미사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김구함이 장비한 시 스패로도 선두의 하픈 미사일 10여 기에 몰려갔지만 뒤에 몰려오는 또 다른 80 발의 하픈 미사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윤관함입니다. 함포와 골키퍼로 대응 중입니다. 목표가 너무 많습니다.]
[김유신함입니다. 링스를 대피시키겠습니다.]
"다른 함들과 모두 연결해. 함포로 화망을 구성한다. 서둘러!"
상황을 지켜보던 홍성하 소장이 소리쳤다. 오퍼레이터가 곧바로 키보드를 조작하자 울산급과 포항급이 가진 76밀리 속사포가 김구함의 통제에 놓여졌다.
- "시 스패로 18기에 명중, 나머지 이탈합니다. 젠장! 빨리 자폭시켜!"
목표를 잃은 미사일을 자폭시켜 봤자 이미 늦었지만 조 소령의 고함에 오퍼레이터가 요격에 실패한 시 스패로 미사일들을 자폭시켰다.
이미 시 스패로의 방어막을 통과한 하픈 미사일이 무수한 폭발을 뒤로한 채 팝업(Pop-up) 비행에 들어갔다. 관성좌표에 입력된 한국함대의 추정위치에 들어서자 고도를 약간 높여서 자체 레이더를 작동시켰다. 군집 동물 같은 하픈 미사일의 떼가 각자의 방위에서 가장 가까운 목표를 임의로 설정하여 레이더 유도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은 미사일은 목표를 향해 스스로 움직였다.
김구함이 가진 76밀리 자동속사포가 분당 120발의 엄청난 속도로 포를 쏘았다. 김유신과 윤관함이 장비한 127 밀리 자동포와 울산급에 탑재된 2문의 76밀리 속사포, 그리고 포항급도 같은 무기로 신들린 듯 포탄을 쏟아냈다. 첫 번째 12km로 설정된 저지라인에 포탄들이 다다르자 수면 위 3미터 고도에서 일제히 폭발했다. 탄막사격, 포탄으로 이루어진 장막이었다. 근접신관과 함께 시한신관이 뇌관을 터뜨리고 12km 전방에 밝은 불빛이 솟았다.
- 조완희 소령이 신음성을 내뱉은 뒤 몸을 던져 홍성하 소장을 엎드리게 했다. 이를 악문 홍 소장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5기의 하픈 함대함미사일이 김구함에 차례대로 명중하며 폭발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하픈이 연돌과 헬리콥터 격납고에 부딪치자 300미터 높이까지 폭염이 치솟았다. 나머지 미사일이 함수와 찢어진 선체 가운데로 파고들며 김구함을 산산이 부서뜨렸다. 근처에 있던 김유신함과 울산급 및 포항급 함정 모두 서너 발씩 하픈을 맞고 거대한 불꽃이 되어 가라앉았다. 폭발이 일으킨 화염이 컴컴한 바다를 밝힌 것은 잠깐이었다. 순식간에 폭발하며 부서진 한국 해군 전투함들은 바닷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김유신함에서 떠올라 고공으로 피해 있던 수퍼 링스 대잠헬기가 생존자를 찾아 수면 가까이 내려왔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김구함에서 미처 이함하지 못하고 폭발로 튕겨나간 민 소령의 헬기가 아직 가라앉지 않았지만 일그러진 로터와 박살 난 조종석만 보일 뿐 생존자는 없었다.
- 연료가 충분하지 못한 김유신함 소속 수퍼링스 헬리콥터가 쓰시마로 귀환할지 부산으로 귀환할지를 가늠하다가 쓰시마로 방향을 정했다. 항모전대에 합류해서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항모는 너무 먼 곳에 있었다.
- 12월 18일 00 : 14 노섬 북방 20km 해상
"함대로 미사일 접근 중입니다. 목표는 총 62기. 하픈 미사일로 추정됩니다. 거리는 55km!"
이지스함 공고의 방공담당관 구보야마의 메마른 목소리가 전투정보센터에 울렸다.
"각 함정, 자함방어 시스템을 가동시킨다. 요격 시작!"
가토 해장이 시계를 들어보았다. 한국 해군은 이미 불세례를 뒤집어썼을 시간이었다.
- "스탠더드 미사일 발사!"
선두에 있던 방공구축함 하타카제와 사와카제가 먼저 미사일을 쏘아 올렸다. 스탠더드 미사일을 발사하기 위해 별도의 일루미네이터가 필요한 일본 호위함들도 이렇게 몰려오는 대량의 미사일에는 효율적으로 대응하기가 힘들었다. 짧은 거리에서 미사일 하나를 요격해야 다음 미사일에 대해 공격을 할 수 있는 순차적 요격 시스템은 초저공으로 진입하는 하픈 앞에서는 자칫 방어 전면부터 뚫릴 가능성이 있었다.
가토 해장은 이 점을 잘 알고 있기에 이지스 방공함인 공고를 함대 뒤쪽으로 옮겼다. 기함이자 해상자위대가 보유한 가장 강력한 전투함은 위험에서 배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지스는 구 소련의 중고도 순항 미사일의 집단 공격에 대응하도록 만들어진 것이지 하픈과 같은 저고도 스키밍 미사일의 집단공격을 가정한 시스템은 아니었다.
- "어쩌면..."
가토가 중얼거린 것과 동시에 치솟은 스탠더드 미사일이 선두의 하픈에게 접근했다. 한 번에 3발씩 공고의 일루미네이터는 위험 순위가 높은 하픈부터 공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다음 목표로 즉시 전환되어 표적이 확정되지 않은 채로 발사됐던 후속 스탠더드 미사일을 유도했다.
- 한국 해군이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레이더 탐지 세팅을 효과적으로 잡은 것이 자위대에게는 불운했다. 목표 함대를 위치별로 4등분하여 각각의 섹터에서 다른 미사일이 중복되지 않도록 레이더 추적 장치에 설정한 것이다. 탐지거리가 20km에 이르는 하픈의 레이더 탐지장치가 일본 함대에 6km까지 접근해서야 작동하도록 일부러 타이밍을 늦게 세팅한 데다 각 함정별로 4등분한 목표에서 1개 섹터만 노리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공고가 능숙하게 요격을 진행하는 것과는 달리 다른 함정들은 그렇지 못했다. 가까이 접근하는 미사일에 시 스패로 미사일을 쏘았지만 아사기리형 호위함의 미사일 유도장치는 스키밍 목표에 대해서 정확히 요격하지 못했다.
- 돌진하는 미사일을 모두 요격하지 못한 선두의 사와카제와 세토기리는 두 방씩 얻어맞았다. 바로 옆에서 팰렁스 근접방어기관포로 하픈을 요격하던 무라사메는 분투했다. 시 스패로 미사일로 하픈을 두 발이나 떨궜던 무라사메가 이번에는 기관포로 하픈 미사일을 500미터 거리에서 저지했지만 새로운 미사일이 뒤를 잇따랐다. 팰렁스 기관포의 열 개틀링 총신이 맹렬하게 회전하자 정미기에서 토해지는 쌀알처럼 탄피가 쏟아졌다. 거대한 폭염 사이를 스치고 들어온 새로운 하픈 미사일을 요격하던 팰렁스가 드럼형 탄창에 수납된 980 발의 기관포탄을 모조리 소모하는 순간 명중에 성공했다. 다만 거리가 너무 가까운 것이 문제였다.
80미터 거리에서 명중한 하픈미사일이 일으킨 지름 200미터짜리 파편과 폭풍덩어리가 날아오던 관성으로 무라사메를 강타했다. 순식간에 함교 외부에 부착된 레이더와 헬리콥터 격납고가 찢겨 날아갔다. 강철로 만들어진 함교 구조물이었지만 고폭탄 파편덩어리, 그리고 미사일 잔해들이 꿰뚫고서 승무원을 살상했다.
- "사와카제와 무라사메, 세토기리가 피격당했습니다. 이제 2선에 위치한 호위함에게 미사일이 돌입합니다."
공고의 함장인 미시마(三島) 일좌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실제로 강력한 방공능력을 가진 공고가 전면에 나서서 미사일 요격을 지휘해야 했다. 하타카제형 호위함들에게 전면을 맡기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는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머지 호위함은 근거리 방공용 시 스패로밖에 없었다.
"남은 하픈은?"
가토가 함장에게 물었다. 미시마의 신경질이 의미하는 바를 가토 해장도 알고 있었다. 함대 소속 전투함들을 위험에 내몬 자책감보다는 전체 전황을 생각해야 하는 책임감이 앞섰다.
"23발입니다. 도달 시간은 25초 정도입니다."
- 하픈 미사일이 동시에 부채꼴로 돌진할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발사된 미사일이 늦게 도달하는 것은 방어 측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인 일이다. 대답을 들은 가토 해장이 디스플레이를 주시하고 있는 동안에도 하픈 미사일은 2선에 위치한 하타카제와 아사기리형 호위함에 달려들고 있었다. 공고도 계속 스탠더드 미사일을 쏘아 올렸지만 전면에 47호위대 소속 전투함들에 가려 있는 상황에서 이들 앞으로 달려드는 초저공의 하픈을 요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23 발의 하픈 가운데 공고와 다른 호위함이 발사한 방공미사일과 팰렁스의 방호벽을 뚫은 11발이 호위함들에 골고루 명중했다.
"젠장! 6척이 피격됐습니다. 하타카제와 야마유키, 마쓰유키, 사와기리, 이와세에 지원함인 사가미가 맞았습니다. 세부적인 피해상황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미시마 일좌가 가토 해장에게 돌아서서 소리쳤다. 일본 함대는 지금까지 9척이 명중당했다. 이들이 상대한 한국 함대에 주력 전투함인 KDX급 구축함이 3척밖에 없고, 나머지는 포항급 등 소형 전투함임을 감안하면 대형함으로 구성된 일본 함대 입장에서는 엄청난 손해를 본 셈이다.
"좋아. 작전은 성공이다. 급속 변침한다. 방위 2-1-0으로 간몬해협으로 들어간다. 구조작업을 빨리 서두르게."
"예엣?"
미시마 일좌가 놀랐다. 여기서 다시 간몬해협으로 돌아간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시마 일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는가?"
"제독! 우리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저는 왜 공고를 방어전면에 투입하지 않았는지 궁금할 뿐입니다."
미시마 일좌의 원래 소속인 62호위대 소속 사와카제도 당했다. 그가 아꼈던 후배들이 그곳에서 당하자 눈에 불똥이 튀었다.
"이제 우리는 잠수함을 일본해로 투입할 수 있게 됐네. 그리고 우리는 간몬을 지나서 쓰가루해협까지 우회한다. 분노는 그때 터뜨리게. 공고는 그때 선두에 서게 해 주지. 됐나?"
"알겠습니다."
번뜩이는 가토의 눈을 마주친 미시마 함장이 고개를 숙였다.
"공자대를 호출해서 한국 고속정대 위치를 다시 체크해. 침로와 속도 계산에서 이번에는 실수 없도록. 그리고 이와쿠니31 항공군을 연결해서 투입 가능한 구난비행정을 모두 동원해! 우리가 구조할 시간은 없어. 센다이와 미쿠마만 남겨. 알았나?"
- 십 분 때문에 자위함대가 유유히 퇴각하도록 허용하고 만 것이다. 많은 피해를 입고 이제 150척으로 줄어든 고속정대가 북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함대가 받은 명령대로 고속정대는 최고 속도로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장태석 중장이 울분을 토하는 동안 장 상위가 혼자서 통신실로 내려가서 명령을 전파한 것이다.
장 중장은 누구보다도 빨리 사태를 깨달았다. 그가 시작하고 입안한 동해 장악계획이 이제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무너진 구멍으로 일본 잠수함들이 몰려가면 상륙군에 대한 보급선은 더 이상 안전할 수는 없었다.
- 12월 18일 04 : 57 시즈오카현 도사토키 고원
일본 랜드하이웨이는 도사토키 고원 북쪽을 469번 국도와 거의 평행하게 가로지르는 미나미후지 스카이라인과 496번 국도를 사다리 중간 턱과 같은 모양으로 이어주고, 이 도로를 통해 후지산 정상에서 바로 700미터 아래까지 올라가는 오나카에로 이어지는 도로로, 국도번호는 176번이다. 정상 남남동에서 북북서로 달리는 이 길은 경사 35~40도의 후지산 산세에 맞춰 도로를 만들었기 때문에 지독히 구불구불하다. 산악철도나 산악 자동차도로가 지그재그 모양으로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지금 이 도로는 일본 측 방어구역과 한국군 점령지역을 구분 짓는 경계선 구실도 하고 있었다.
- 몇 시간 전, 이 도로와 469번 국도의 연결점 서쪽 1km 지점에서 한국군 21기계화보병사단은 전차 5대를 잃었다. 기습을 가한 자위대 전차중대에게 한국 기갑정찰대대의 전차중대는 그야말로 철저히 기습을 당했고, 전차 10대 중 5대가 격파됐다. 그중 2대는 공격당해 그 자리에 버려졌다가, 전투지점까지 급히 진출한 62기갑여단에 의해서 회수됐다. 자위대도 한국군을 격퇴하기가 무섭게 현지에서 철수했기 때문에 이 전차들에는 특별히 사보타주가 가해지지 않았다. 전차를 버릴 때 승무원들이 포구에 수류탄을 밀어 넣은 것과 캐터필러 파손이 유일한 상처였다.
전차를 버린 승무원들도 멀리 가지 못하고 전원 전사했기 때문에 수리가 끝나더라도 당장 움직일 인력은 없었다. 이 전차들은 전차를 회수한 62여단의 예비차량으로 편입되었다.
그 62기갑여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벽 5시가 다 되어 가는 밤하늘은 이제 궁극적으로 어둠에 잠겨 들고 있었다. 달마저도 기운지 이미 오래였다. 지금 이 시간은 달이 지고 해가 뜨는 두 가지 자연현상 사이에 끼어 가장 어두움을 유지하는 시간대였다.
- 야간에 전차부대를 움직이는 것은 그리 현명한 일이 못 된다. 양군 전차는 모두 야간전 수행능력이 있고, 특정 부분에서는 방어 측인 자위대가 더 우수한 면이 있었다. 사소한 차이이므로 무시할 수는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국군으로서는 상당히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문제였다. 야간의 어둠이 진격을 은폐해주지 못하는 데다가 어느 한쪽은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붓는 형국이었다. 자위대 방어선이 어느 정도의 튼튼함만 갖추고 있다면, 그리고 한국군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수준의 대전차화기를 갖추고 있다면 이것은 거의 자살행위에 가까울 수도 있었다. 더구나 한국군 기갑부대의 방어력은 결코 훌륭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K-1의 방어력은 3세대 전차로서 손색이 없는 수준에 달해 있지만, 문제는 자위대의 대전차공격력이 현대 3세대 전차와 싸우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데 있었다.
양군 모두 맞으면 죽는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방위 관측이 불가능한 야간에 함부로 움직인다는 것은 공격 측 입장에서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 지상정찰기로 적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면 작전에 크게 도움이 된다. 적의 위치를 파악하여 지형과 연계해서 적 방어선 위치를 분석하면 쉽게 공격방향을 산정할 수 있다. 그러나 호크 800XP 정찰기의 정찰능력으로는 현재 전투준비 상태에서 몸을 숨기고 있을 것이 분명한 자위대 전차부대 하나하나를 포착해 낼 능력이 없었다. 그 정도 능력은 미국의 E-8 조인트 스타즈만이 갖고 있었다.
"독일군한테는 옆구리에 엄청나게 얻어맞아도 주저앉기는커녕 더 기세가 살아서 소련군을 닥치는 대로 때려잡은 괴물 전차가 있었지만, 우리한테는 그런 괴물딱지는 없구만."
62기갑여단장 최주현 대령이 K-277 지휘장갑차 상부해치를 열어제치고 목을 내민 채 중얼댔다. 후지산의 밤공기는 무척 차가웠다. 해발 1,000미터의 산악지대라서 그런지 평지보다 훨씬 추웠다. 시속 20km로 움직이는 장갑차 상면으로 차가운 바람이 쌩하니 스치고 지나갔다.
- 육군사관학교 재학 중 3학년 때 독일 육군사관학교로 유학 갔던 최 대령은 2차대전 기갑전사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동부전선 전투에 관심이 많아 군복무를 하는 동안에 상부에 러시아로 파견근무를 신청하기도 했고, 가끔 생기는 휴가기간에는 독일과 영국,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면서 당시 전쟁에 대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라 지금 상황을 보면서도 2차대전 전사에 비춰 생각하고 있었다. 평야라고 하기는 조금 이상한 고원지대였다. 두 개의 상당히 높은 산 사이에 형성되어 두 산정을 잇는 직선을 축으로 삼아서 동서로 나지막한 경사가 형성되어 있고, 그 축에 약 20미터 남짓 어중간한 평지가 가로놓여 있는 꼴이므로 어느 쪽이든 공격군이 그 경사선을 넘어가는 순간 집중포화를 얻어맞게 되어 있었다.
'이곳과 비슷한 싸움 기록이 어디에 있었더라...?'
잠시 생각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나 생각나는 게 없었다. 소규모 전투라면 그런 지형에서 싸운 기록이 수도 없이 많고, 그런 지형을 적절히 이용해서 이긴 기록이 있다. 그러나 대규모 전투에서는 전반적으로 그런 지형에서 싸운 기록이 없는 것 같았다.
- 최 대령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62기갑여단의 선두전차가 바로 그 축선을 넘어섰다. 본래 주간전이라면 전차가 아니라 보병이 먼저 고개를 내밀어서 전방을 살피고 나서 그다음에 전차가 넘어갈 것이다. 그러나 현대 보병의 야간암시능력으로는 야간에 그런 임무를 수행할 수가 없기 때문에 전차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주간이든 야간이든 전차가 더 멀리까지 볼 수 있지만, 노출되는 면적이 보병보다 훨씬 넓기 때문에 적에게 선공을 허용할 수 있었다. 최소한 포탑 전체를 지면 위로 넘기거나 지형에 따라서는 전차 자체가 능선을 넘어서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능선 아래에서 사격을 가하는 적에게 집중포화를 얻어맞게 될 가능성이 컸다.
- 포착된 한국군 전차대대가 31대이므로 수적으로 크게 차이는 없지만, 질적인 면에서 보면 너무나도 열세였다. 지금 그들을 지원하는 1개 소대 규모의 보병용 대전차미사일은 사실 있으나 마나 한 상대이니 그 전력차는 더욱 치명적이었다.
[아직 더 기다려. 적이 1,000미터까지 들어오면 명령에 따라 발포하라.]
중대장의 통신이 들어왔다. 역시 중대장도 같은 생각이었다. 접근해 오는 적에게 단숨에 충분한 타격을 주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쪽이 철저하게 깨질 가능성이 높았다. 당장 아군의 배치 현황으로 보면 이들이 각개격파 당할 경우 모든 것은 끝장나기 때문에 마찬가지였다.
- 이 대공자주포는 일본에서도 겨우 1개 대대 규모밖에 생산하지 못한 장비다. 가격에 비해 효용이 떨어진다는 것이 중평이기도 하다.
그 물건 다음으로 비싼 것이 바로 90식 전차였다. 일본 육상자위대가 자랑하는 중형전차인 중량 49톤의 이 전차는 형태를 독일 레오파르트-2를 본뜬 것이라는 평을 듣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니었다. 독일 측 설계사상과 같은 방식으로 설계되었을 뿐, 내부장비나 자체 성능면에선 레오파르트-2를 능가하는 장비이다. 가격은 11억 엔. 한국돈으로 80억 원을 상회하는 가격이다. K-1 전차가 30억 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약 3배에 달하는 고액의 장비이다. 때문에 이 장비는 '돈이 아주 많은' 육상자위대에서도 지난 10년 동안 겨우 300여 대밖에 구매하지 못했다. 육상자위대 7기갑사단용으로 230여 대, 2사단 제2전차연대용으로 28대, 그리고 후지교도단용으로 28대와 고텐바 기갑교육대용으로 14대가 그것이다. 이 중에는 사고로 인한 손실량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육상자위대가 실제 보유한 90식 전차는 채 300대가 되지 못한다.
그중에서 이곳 전역에 42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후지교도단 전차교육대 2중대와 5중대, 그리고 고텐바 제1교육단 기갑교육대 소속 전차 3중대가 그것이다. 이들은 지금 한국군과의 전투를 눈앞에 두고 히든카드 역할을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 순간적으로 머리끝이 쭈뼛하니 섰다. 90식 전차는 결코 얕볼 수 없는 상대였다. 아직 그들과 교전해 본 적은 없지만, 교전하지 않더라도 그 수준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사격통제장치, 세계 최고의 화력, 세계 최고의 기동력에 방어력도 세계 수준급이다. 세계에서 제일 뛰어난 전차 3대를 꼽으라면 1위는 몰라도 3위는 할 수 있는 전차였다. K-1A1과는 급이 틀렸다.
"빌어먹을! 대대장님! 적의 새로운 전차부대가 나타났습니다. 90식 전차 같습니다!"
"90식이라고?"
17대대장 이영태 대령도 긴장했다. 90식 전차가 여기에 있다는 건 알았지만 정작 맞부딪쳤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일단 여단장에게 보고해야겠고, 전술적으로도 취할 명령을 선택해야 했다. 적극적으로 움직일까, 아니면 소극적으로 움직일까?
"대대, 일단 현 위치에서 적과 맞서 싸워라. 명령이 있을 때까지 기동을 멈추지 말고 적과 계속 맞서도록!"
- 12월 18일 05 : 17 시즈오카현 고텐바시, 구 1교육단 본부
"후지교도단 전차 3중대가 독단적으로 우리 사단 전차 2중대와 3중대를 구원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이건 명백한 명령위반입니다만..."
"괜찮아. 움직여도 상관없네. 지금쯤 적 예봉을 꺾을 때가 됐어. 그놈들을 움직이라고 교도단 쪽에 명령을 내릴 생각이었네. 지금은 탐색전인데 시작부터 너무 깨져 버리면 탐색전이 바로 전력투구 공세가 될 수도 있으니까. 탐색전에 대비해서 전차를 소규모로 둔 건데 적이 갑자 기 공세를 걸면 분산된 우리 전차부대가 각개격파 당할 수가 있어. 그 친구들이 멋대로 움직인 게 어떻게 보면 차라리 잘된 것일 수도 있어."
통신장교의 보고에 사단장 마쓰무라 육장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쯤에서 한국군이 탐색전을 마치고 물러가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는 강력한 신형 전차 중대규모의 출현이 적절했다.
"교도단 전차 3중대에 명령을 내리게. 적이 달아나더라도 추격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계속 사격을 가하라고. 잘못 좇아가면 오히려 그 친구들이 당하니까."
- 12월 18일 05 : 18 시즈오카현 도사토키 고원, 전투지역
"후퇴! 후퇴!"
23 전차대대장 조정훈 중령이 통신기에 대고 악을 쓰면서 그의 전차 역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탐색전이라는 임무를 완벽히 수행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싸운 것만 놓고 보면 어느 정도 임무는 완수한 셈이었다. 때문에 조 중령은 전투에 대한 아쉬움 같은 것은 없었다.
이미 앞에 포진하고 있던 자위대 74식 전차들은 절반쯤 깨져나갔고, 살아남은 전차들은 달아나고 있었다. 차체를 앞으로 돌리나 뒤로 돌리나 한국군의 120밀리나 105 밀리급 전차포에 맞으면 격파를 피할 수 없는 74식 전차들은 후진하지 않고 아예 전속력으로 반대쪽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대신 90식 전차가 한 10여 대 정도 다가오고 있었지만 이것들은 화력과 방어력을 최대한 이용할 생각인지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약 2,000미터 거리에서 포탄을 날려대고 있었다.
이 정도 거리라면 90식 전차가 전투를 벌이기에 가장 좋은 조건이었다. 2,000미터라면 120밀리 R-120 주포로 K-1을 격파하기에 적당한 거리이고, 또한 90식 전차의 방어력으로 K-1A1 전차가 장비한 120밀리 주포탄의 관통을 확실하게 방어할 수 있는 가장 짧은 거리였다.
- 약 3분 간 전차전이 더 이어졌지만 양측은 더 이상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한국군이나 자위대나 계속해서 열심히 싸울 의향도, 필요도 없었다.
한국군은 전력 탐색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고, 자위대 역시 1차 공격을 격퇴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함과 동시에 한국군기갑부대의 실제적인 공격력을 직접 몸으로 경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 12월 18일 09:49 시즈오카현 도사토키 고원
새벽의 전장에서 북서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이곳 미나미후지 스카이라인 길 옆 경사면에 한국군 21사단의 임시 사단본부가 마련됐다.
사단장 이철희 소장과 예하 참모들은 꼬박 밤을 새며 계속 업무에 열중했다. 앞으로의 작전방향을 잡아야 했다. 어디로 어떻게 치고 어느 부대를 언제 투입할 것인가 같은 기본적인 문제에서부터, 사소하게는 전사자나 파손당한 차량의 처리계획까지 전투 전에 미리 수립해 놓아야 했다. 도쿄를 코앞에 둔 지금 상황에서는 사후처리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피해야 하는 것이다.
"일단 공세는 62여단을 중심으로 펼치고, 63여단과 65여단이 좌우에서 보조하도록 하세. 62여단이 정면에서 공격하는 동안 63, 65여단이 적 좌우익을 돌파하거나, 62여단 정면 외에 적이 없다면 그냥 우회해서 그대로 적 주력에 대한 포위망을 형성하는 거야. 당연하겠지만 말야."
"독일식이군요."
사단장의 작전계획안에 참모장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독일군이 핀서 클로우라고 불렀던 이 전술은, 전격전에 있어서는 가장 기본적인 전술에 속한다. 사단 예하 연대 단위에서부터 전략단위인 집단군 단위에 이르기까지 이 전술은 기동전술의 기본적인 운용교리로 2차대전 전 기간에 걸쳐 사용되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현대전에서도 그 점은 변하지 않았다. 실은 한니발의 칸네(Canne) 회전에서부터 사용되어 왔던 오래된 전술이다.
- "그래. 정확하게는 한니발식이지. 다른 의견 있나?"
이견은 없었다. 자세한 작전계획안에 대해서 특별히 논의할 것도 없었다. 이것은 육군사관학교는 육군대학이든 반드시 한 번은 짚고 넘어가는 전술이었다. 기갑지휘관들은 너무나 잘 아는 내용이기 때문에 자세한 계획을 특별히 설명하지 않더라도 모두들 그것을 적용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자위대 역시 이 전술에 대응하는 술책을 알고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근접신관은 악명이 높다. 세계에서 제일 정확한 미사일 가운데 하나인 패트리어트의 근접신관이 작동하는 날에는 어떤 전투기도 끝장이었다. 탄두중량도 무지막지해서 이것이 폭발하면 반경 100미터 안에 있는 비행기는 상당한 상처를 입는다. 회피기동도 아주 조심해야 했다.
김종구는 그를 향해 날아오는 미사일 2발을 육안으로 확인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은 후지산을 끌어안듯 산자락을 돌아 나오는 수호이-33 편대를 포착하고 돌진해 왔다. 그는 급격히 기수를 숙이며 폭탄을 버렸다. 수호이-33이 아무리 운동성이 좋더라도 패트리어트같이 정밀하고 강력한 미사일을 회피하는 데는 아무래도 가벼운 쪽이 좋았다.
- 거리가 300미터 정도까지 접어들었다 싶을 때 김종구가 채프를 연속으로 투사하면서 기체를 뒤집어 좌선회 하면서 급강하를 시작했다. 산악지형이라 지면과 기체의 고도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기동은 매우 위험했다. 그가 기체를 뒤집는 것과 동시에, 아까 버린 폭탄들이 지면에서 작렬하는 것이 김종구의 눈에도 들어왔다.
기체가 뒤집혔다가 그대로 급강하 코스로 접어들자 전신에 엄청난 중력가속도가 가해졌다. 김종구는 미칠 것 같았다. 다리와 배, 가슴을 압박하고 있는 G-슈트가 부풀어 오르면서 김종구의 몸을 압박했다. 괴롭더라도 참아야 했다. 중력가속도를 못 이겨 실신했다가는 그대로 지상에 충돌하게 된다.
- 미사일이 그대로 날다가 채프구름 사이를 통과하고 급강하코스로 접어들었다. 채프에 현혹될 패트리어트 미사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김종구도 그것은 예측하고 있었다. 급강하 코스로 계속 비행하던 김종구는 지면과의 고도차가 300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스피드브레이크를 걸고 기수를 최대한 들어 올렸다. 갑자기 브레이크가 걸리는 것처럼 기체가 튕기는 느낌이 오고, 기수가 번쩍 들어 올려졌다. 수호이 전투기가 산 사면에서 겨우 1백 미터도 되지 않는 곳을 스치듯 지나쳤다.
순간 김종구는 다시 스피드 브레이크를 풀고 엔진을 최대출력으로 가동시키면서 급선회 상승을 시도했다. 미사일은 기수를 들려다가 자체 속도 때문에 기회를 놓치고 그대로 지면에 충돌했다. 대폭발이 일어났지만 그 파편 비산범위 안에 김종구의 수호이-33은 없었다.
- 12월 18일 10 : 33 시즈오카현 도사토키 고원
"해군항공대가 더 이상 지원을 해줄 수 없답니다. 벌써 전투기 한 대를 잃었는데, 더 잃을 수는 없다는군요. 우리가 적 대공미사일들을 제거해 주기 전에는 더 보내지 않겠답니다."
21사단장과 참모들은 모두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지도만 계속 응시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사단장과 참모들이 불같이 화낼 일이었다. 날라리 공군, 또는 빽빽이 오리 같은 해군항공대 놈들이라고 욕을 하고, 사단장은 전화통을 붙들고 상대 쪽 장교에게 강아지, 송아지, 망아지 하면서 욕설을 퍼부을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약간 다혈질인 사단장 이철희 소장도 지금은 평정을 유지했다. 해군항공대는 이 일대에서 할 일을 거의 다 해준 상태였다. 수호이 전투기로 구성된 해군항공대가 이 지역 제공권을 완전 장악했고, 아직 한국군이 자위대 항공기에게 공습받은 일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 해군항공대에게 염치없게 더 이상 지원을 요청할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지 뭐. 이대로 치는 수밖에. 부대 전개는 다 끝났나?"
"포병의 전개 및 사격계획 수립이 좀 늦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정된 공격시간까지는 끝낼 수 있습니다. 목표 위치 확인도 거의 끝났으니까 포병문제만 해결되면 공격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럼 예정대로 13 : 00시에 작전을 시작한다."
- 아무리 강력한 90식 전차의 방어력이라도 측면이 노출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120밀리가 아니라 보병용 대전차로켓에도 격파당할 만큼 90식 전차의 측면장갑은 약했다. 50톤 이하로 중량이 엄격하게 제한된 상태에서 강력한 전면 방어력을 갖추려면 측면을 약하게 할 수밖에 없다.
- 한국군과 자위대 전차대는 삽시간에 거리 1,000미터까지 접어들었다. 서로 발사하면 초탄부터 명중탄이 나올 거리였다. 한국군의 K-1A1이나 자위대의 90식, 또는 74식 전차 모두 사격통제장치의 성능은 아주 뛰어난 편이다. 이 정도의 사격통제능력이면 거리 1,000미터 이내에서는 명중률 90퍼센트 이상을 발휘할 수 있다.
"쏴!"
구령을 붙일 필요도 없었다. 포수와 차장은 이미 말하지 않아도 서로 통할 수 있을 정도로 재빠르게 행동을 하고 있었다. 적의 거리와 방향을 복창하는데 드는 시간마저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서, 차장들은 그냥 사격명령만 내렸다.
- 이 전장에서 싸우는 전차들 중 자위대의 74식 전차를 제외한 모든 전차는 똑같이 헌터-킬러 시스템, 자위대는 유도조준장치라고 부르는 장비를 가지고 있었다. 차장이 새 목표를 선택하는 동안, 포수는 스스로가 이미 고정한 목표물을 공격할 수 있다. 목표공격이 끝나면 차장이 선택한 목표가 새로이 포수용 사격통제장치에 전달되어 바로 공격에 임할 수 있는 이 시스템의 강점을 양군은 아주 적절하게 이용했다. 구태의연하게 복창을 붙이면서 시간을 낭비할 게 아니라 차장은 계속 목표를 추적하기만 하고, 포수는 그냥 조준되는 대로 쏴 버리면 그만이었다. 서로 뭐라고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차장과 포수 모두 상황을 철저히 파악하고 있었다. 어차피 전차의 포 발사음, 그리고 포수용 사격통제장치의 데이터 전송요청으로 모든 것은 대체된다.
죽어나는 것은 조종수뿐이었다. 차장의 명령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조종수지만, 지금 차장과 포수는 그야말로 바빴다. 포수는 쏘느라, 차장은 쏠 목표를 찾느라 차의 움직임에는 도무지 신경을 쓸 여지가 없었다. 덕분에 조종수들은 아군 전차들끼리 들이받지 않으면서 지그재그로 달리는 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 12월 18일 13 : 24 시즈오카현 고텐바시, 구 1교육단 본부
"전차부대와 적 기갑여단이 현재 접전 중입니다. 아군 전차부대가 적 기갑여단의 정면에 돌입했답니다!"
순간적으로 환호성이 일었다. 한국군의 공격 예봉을 꺾었다는 섣부른 판단이 막료들 중 상당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간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 작전 전체를 총괄하는 마쓰무라 육장은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았다.
"바보 같으니! 적의 목표는 그냥 정면돌파가 아니다. 분명히 또 다른 돌파부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건가?"
그제서야 막료들도 간신히 생각해 냈다. 한국군 기계화보병사단은 3개 여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중 최소한 1개 여단은 지금 우회기동중일 것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예비부대도 두지 않고, 그대로 3개 여단을 총동원해서 공격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놈들은 핀서 클로우를 형성하려고 할 거야. 즉시 교도단에 명령 내려, 적이 포위하기 전에 전투 중지하고 빠져나오라고!"
"곤란합니다. 이미 적과 엉켜서 빠져나오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못 빠져나오면 전차 130대가 고스란히 날아간다. 그래도 좋은가?"
- 한국군이 그런 포위망을 형성한다면, 천상 그 포위망을 바깥에서 치고 들어갈 기계화부대가 필요했다. 내부에 있는 부대가 단독으로 포위망을 뚫는 것은 전술단위에서나 전략단위에서나 쉽지 않다. 특히 전술단위에선 더욱 어렵다. 전차 한 대 한 대의 움직임에 있어서 차량의 방향이란 매우 중요하고, 이런 탈출공작에서는 그 방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상대방에게 꽁무니를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것은 전차부대에게 있어서 매우 치명적인 타격이다.
- 12월 18일 13 : 38 시즈오카현 후지산 상공
"다시 돌아왔다. 이 개자식들아!"
해군항공대가 후지산 일대로 다시 돌아왔다. 좀 전의 실패를 교훈 삼아 이번에는 엄청난 전파방해의 도움을 받았다.
전투기가 각각 달고 있는 ECM 포드에서 뿜어내는 엄청난 방해 전파는 최신형이라는 패트리어트 미사일 자체의 레이더를 교란하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최소한 패트리어트를 사격하기 위해 먼저 목표물을 추적할 대공수색 레이더를 교란하는 데는 충분한 출력이었다.
황인호 중령이 이끄는 수호이-33 전투기 8대가 동체 밑에 각종 폭탄을 주렁주렁 달고 날아왔다. 동체와 날개 밑에 RBK-500, 500kg짜리 클러스터 폭탄을 달 수 있는 한도껏 달아 놓고 보니 대공미사일을 겨우 2발 달고 있긴 하지만 사실 하늘에서 싸울 일은 이제 거의 없었다.
- "어때, 자위대 전차대 위로 한 번 날아가 볼까?"
[좋죠!][연료도 널널한데 한번 가보죠.]
다른 조종사들 모두가 의견이 일치하는 것에 고무된 황인호 중령이 기수를 돌려 남서쪽의 웨이포인트 3으로 향했다. 웨이포인트 3은 예정대로라면 30분쯤 전에 신나게 폭탄을 퍼부었어야 할 지점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가서는 안 될 지점이었다. 연료를 아낀다는 문제도 있고, 적군에 대해서나 아군에 대해서나 안전을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
명령받지 않는 항로로 비행하는 것은 명백한 불군기(不軍紀) 비행이었다. 하지만 승리감에 도취된 통일한국군 조종사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수호이-33 조종사 8명은 이미 목적지 상공에 접근하고 있었다. 조종사들은 땅을 기어 다니는 거북이들을 때려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며 가슴을 설레며 서서히 고도를 낮췄다.
- 이미 전투는 끝나가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90식 전차 5대와 74식 전차 23대가 그야말로 불 맞은 맹수처럼 앞으로 돌진했다. 한국군 전차들이 필사적으로 조준하고 사격을 퍼부어도 엔진이 터질 것을 각오하고 달려오는 이 전차들을 명중시키기에는 너무 느렸다.
- 미나미후지 스카이라인 길 옆 경사면에 자리 잡은 사단본부 전체가 순간적으로 환호성에 뒤덮였다. 50을 바라보는 장년의 사단장도 이 순간만은 젊은이가 된 듯 박수를 치면서 환성을 질렀다.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사단장이 참모들에게 말했다.
"됐어! 이제 군단 작전대로 병력을 전개한다. 예하 여단에 각자 지정된 좌표로 시간 내에 이동하도록 지시해! 이봐 박 중령. 자네 계산이 거의 정확했구만 그래. 14 : 30 무렵에 싸움이 끝났으니 말일세."
작전참모가 머리를 긁적였다. 전차 300여 대가 일시에 격돌한 전투가 겨우 1시간 30분 사이에 결판이 날 것이라는 계산은 스스로가 해놓고도 황당했다. 한국 지형에서의 기갑전은 상당한 시간을 소모하는 복잡한 머리싸움이 된다. 자연히 한국군 기갑부대 지휘관은 지형지물을 교묘하게 이용한 복잡한 싸움에 익숙하다. 그러나 일본 기갑부대의 선공으로 시작된 이번 싸움은 넓고 평탄한 지역에서 벌어졌다. 사격에 장애물이 될 만한 지형지물이 별로 없는 곳에서의 싸움이었다. 전투거리가 넓어지고 아무리 움직여도 상대의 조준을 피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번 전차전은 타격력과 맷집 위주의 싸움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결과는 1시간 30분 남짓의 진짜 난타전, 그리고 방어 측인 일본 육상자위대의 일방적 패배로 마무리지었다. 이제부터 싸움터는 후지산이 아닌 그 동쪽 기슭에 위치한 교통요지인 고텐바시가 될 예정이었다.
이제부터의 싸움은 이번 전투와 전혀 다른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혼슈에 있는 자위대 전차는 이미 대부분 소모된 것이다.
- 12월 18일 15 : 59 시즈오카현 고텐바시
자위대 1사단 1연대는 방위부대 전 전력의 예비로서 전선에서 빼돌려져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남아 있었다. 다만 주장비인 전차와 곡사포는 모두 독립부대에게 빼주는 바람에 1연대에 남은 것은 보통과 자위관 800명이 전부였다.
"후퇴명령이군."
일단 후퇴하라는 명령서가 내려와 있었다. 연대장 고가 일등좌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연대 막료들을 돌아보았다. 연대 막료들 모두 얼굴을 찡그렸다. 이대로 가면 싸우지 않고 이곳 고텐바에서 물러나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은 고가 일등좌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여기에서 싸우다가 죽기를 원했다.
- 12월 18일 16 : 00 시즈오카현 도사토키 고원, 469번 국도 갓길
거의 3km에 가까운 긴 거리를 두고 한국 육군 21기계화보병사단의 포병단이 전개하고 있었다. 한국산 K-9 155 밀리 자주포 18문씩 3개 대대, 거기에 세계 최강의 다연장로켓포인 M-270 MLRS가 18문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런 장비를 갖춘 21 기사단의 포병단 화력은 미군 보병사단이나 기계화보병사단의 그것과 비교해 큰 손색이 없는 수준이었다. 사실상 세계 최강의 화력이다.
"사격개시!"
포병단장 오유성 대령의 명령이 내려지자 동시에 모두 54 문의 K-9 자주포가 버스트 사격을 시작했다. 10초당 3발의 포탄을 연사로 날리는 이 포격기능은 실전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이다. 성능 좋은 자동장전장치가 갖춰지지 않으면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포격방식이었다. 삽시간에 155밀리 포탄 162발이 허공으로 뿜어져 나가고, 10초 간 사격한 뒤에는 20초마다 1발씩 통상적인 발사속도로 발사하기 시작했다.
K-9 자주포들이 그렇게 1분 30초 간 포탄을 발사한 뒤에 M-270 18량이 일제히 각각 12발씩의 로켓탄을 발사했다. 거대한 로켓탄이 오렌지색의 긴 화염과 흰 연기를 끌며 허공을 가르고, 그 소음이 주변 대기를 뒤흔들었다. 이 포격은 후지산 일대에서 벌어진 대전투의 마지막 마무리에 해당할 고텐바 공략전의 서막이었다.
- 12월 18일 20:12 타이완 지룽항 북쪽 250km 해상
"전쟁이라니. 난리가 아니군요. 홍콩으로 되돌려야 하는 게 아닙니까?"
한진 글로리호 이태근 항해장이 갑판장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일등 항해사 이 씨는 전쟁발발을 알고 놀랐지만 항로를 유지하라는 선장에게 더욱 놀랐다.
"그러게 말입니다. 선원들도 동요하고 있어요."
갑판장 조 씨는 배에서 나이가 가장 많았다. 이미 60줄에 가까웠지만 지난 30여 년을 바다에서 보냈다. 새하얗게 변한 머리와 턱수염이 보기 좋았고, 덕분에 다른 선원들로부터 바다의 노인이라는 멋진 별명까지도 얻었다.
"본사에서 강행을 요구했어요. 중국 영해에 최대한 접근해서 텐진까지 올라오랍니다. 망할!"
- 오늘 새벽 위성 채널로 본 CNN 뉴스는 가관이었다. 남해에서 일본 해군을 묵사발을 만들더니 일본 본토에 상륙했다고 했다. 뿌듯한 마음보다도 한국으로 들어갈 걱정이 앞섰다. 동지나해 입구를 틀어막은 일본 해상자위대에게 걸리면 운명을 장담할 수 없었다. 전쟁 중인데 이런 민간인 선박이라고 무사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한진 글로리호는 한진 그룹이 어렵사리 사업권을 받은 LNG(액화 천연가스) 운반선이었다. 이 배가 싣고 가는 액화천연가스는 중요한 자원이기 때문에 더욱 걱정했고, 본사에서도 중국 항로에 붙어서 빠른 시간 내에 입항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항해장님. 공용주파수로 통신입니다. 일본깁니다."
"뭐라고? 일본 놈이라고? 빨리 선장님을 불러!"
- [여기는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초계기다. 귀 선박의 국적과 기항지를 밝혀라. 반복한다. 귀 선은 현재 교전지역으로 항해하고 있다. 귀 선박의 국적과 기항지를 밝혀라.]
"뭐? 이런 개자식들 보게. 여기는 일본 영해에서 한참 떨어진 공해인데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이 새끼들..."
엉뚱한 요구에 이태근이 어이없다는 듯이 외쳤다. 뒤에 서 있는 갑판장 조 씨의 얼굴도 어두웠다. 이태근이 답변할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한 다음 송신기를 집어 들었다.
"여기는 한진 글로리호. 라이베리아 국적이고 본선은 공해를 항해 중이오. 전시 민간인 선박 규정에 의거해서 우리는 중국으로 대피 중입니다."
- 세계의 대형 화물선은 대부분 라이베리아나 파마나 선적이다. 세금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선미에 이상한 깃발이 게양되어 있더라도 이것이 꼭 국적을 밝히는 것은 아니다. 한진은 일본어 같기도 하고 중국어 발음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 초대형 LNG선이 향하던 방향이 문제였다.
[귀 선박은 교전지역으로 들어왔다. 규정에 의해서 우리가 선박을 안전지역으로 유도한다. 침로를 0-8-0으로 돌려라. 반복한다. 우리가 안전지역으로 유도한다. 침로를 0-8-0으로 돌려라.]
"뭐, 공팔공? 일본이잖아? 이런! 선장님 빨리 모셔 와!"
일본 초계기에서 원하는 의도는 명백했다. 한진 글로리호를 나포하려는 것이다. 어쩔 줄 모르고 전전긍긍하는 항해장 뒤로 선장이 헐떡거리며 뛰어왔다.
- "선장님. 일본 초계기입니다. 우리가 교전지역에 들어왔답니다. 항로를 일본으로 돌리랍니다."
"뭐라고? 젠장. 강반장! 빨리 본사를 호출해! 일본 초계기와 접촉했다고 보고하고, 대기하고 있어. 빨리 호출해!"
다급하게 명령한 선장이 송신기를 집어 들었다.
"한진 글로리호 선장입니다. 당신들의 지시에는 따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공해를 통과 중이고 한국이 아닌 중국으로 입항할 예정입니다. 항로를 변경할 수 없습니다. 본사의 명령입니다."
[다시 한번 반복한다. 귀 선박은 교전지역을 침범했다. 우리가 안전지역으로 호송하겠다. 우리의 명령을 무시하면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
더듬거렸지만 일본 초계기의 영어에는 오만함이 배어 있었다.
- 본사와 연결된 송신기를 집어든 선장이 보고를 시작했다. 본사로부터의 대답은 선장의 생각과 똑같았다. 초계기라면 무시하라. 공해상에 있다는 점과 목적지가 중국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항로를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본사로부터 최종 지시를 받아 든 선장이 다시 일본 초계기와 연결되는 송신기를 집어 들었다.
"본사로부터 확인을 받았습니다. 본선은 천연가스를 장비하고 있으며 최종 목적지는 중국 텐진입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본선은 공해상에 있으며 분명히 제3국행 화물을 선적하고 제3국을 향하고 있습니다. 본선은 항로를 유지하겠습니다."
한진 글로리호 선장의 목소리가 마지막에 이르러 약간 떨렸다.
- 12월 18일 20:15 타이완 지룽항 북쪽 250km 해상
"뭐라고? 조센징들이 말을 안 듣는군."
해상자위대 제9항공대 소속의 P-3C 오라이언기가 명령을 받고 긴급 이륙한 것은 한 시간 전이었다. 동지나해로 진입하는 한국 상선을 수색하여 북상을 막으라는 것과 경고를 위반하는 함정에 대해서 공격을 허가한다는 내용이었다. 오키나와 나하 기지에 파견 근무 중인 미야자키(宮崎) 이등좌는 안 그래도 주말부터 크리스마스까지의 휴가를 오사카의 가족들과 보낼 계획이었는데 한국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취소되어 울화가 치민 상태였다.
"이봐, 부기장. 중국 놈들이 LNG를 수입해서 쓰나?"
미야자키는 잠시 확인해야 했다. 마쓰시마(松島) 부기장에게 물어봤다.
"글쎄요, 제가 알기론 중국이 LNG를 중동에서 퍼다 쓰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렇지. 여우 같은 놈들. 감히 우리를 속여! 부기장. 본부를 호출해 주게. 난 잠깐 통제실과 해둘 일이 있네. 통제실 나와라. 대잠통제관을 대주게."
미야자키가 눈을 번뜩이며 아래쪽의 한국 LNG 운반선을 다시 한번 살폈다.
- "나야. 자세한 상황 기록해 둬. 한국 국적으로 추정되는 선박 한 척이 유도명령을 거부하고 있다. 본부를 통해서 내가 공격 허가를 받을 테니 자세한 확인을 해두고 최적 공격위치를 산정해 주게. LNG 운반선이라 터지면 엄청날 거야."
- "여기는 시 버드 13이다. 현재 한국 국적으로 추정되는 LNG 운반선을 포착, 정선을 명령했으나 도주 중이다. 공격 허가를 주기 바란다."
[확인한다. 한국 선박이 분명히 정선 명령을 거부했는가? 현재의 항로를 다시 확인해 주기 바란다.]
"정선을 거부하고 도주 중이다. 반복한다. 현재 항로를 급격히 바꿔 중국을 향하고 있다. 반복한다. 정선 명령을 거부했다."
[좋다. 공격을 허가한다. 하픈으로 공격하기 바란다.]
"물론이다. 하픈을 멋지게 먹이겠다. 목표 상공으로부터 10km 후방으로 물러나서 공격할 예정이다. LNG 탱커가 폭발하는 멋진 장면을 비디오에 담아 가겠다. 이상."
통신을 마친 미야자키 이등좌가 싸늘하게 웃었다. 그는 오사카에서 자라며 자주 접해온 한국인들을 경멸했다. 일본에 와서 지저분하게 살아가는 한국 놈들만 없었다면 오사카는 참으로 깨끗한 도시가 될 수 있었다. 지저분한 항구 뒤편에서 웅성거리며 일자리를 기다리던 한국인 노무자들을 볼 때마다 가까운 경찰에 신고하곤 했었다. 재일한인뿐이 아니라 불법체류자까지 나돌아 다니는 것은 더욱 보아 넘기기 어려웠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 오사카는 그 더러운 한국군 수중에 있었다!
- 일본 항공자위대 소속 오라이언 대잠초계기는 아랫부분의 수납고에 대잠 어뢰와 소노부이를 가득 실었지만 날개 끝에 두 발의 하픈 공대함미사일도 장착하고 있었다. 좌측 파일런에서 떨어진 하은 20여 미터를 떨어진 뒤 자체 엔진이 점화하며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하픈은 이미 세팅된 대로 3km 전방까지 45도 각도로 하강한 뒤 수평비행으로 들어가서 바다 위를 스치며 날아갔다. 너무나 공격하기 쉬운 목표였다. 상공에 떠 있는 오라이언이 파악한 위치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1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한진 글로리호에 당도한 하픈 미사일이 우현을 관통하고 들어가 두 번째 탱크에 명중했다. 대형 LNG 탱크 세 개가 나란히 붙어서, 흔히 볼 수 있는 배와는 다른 모양을 가진 한진 글로리호는 폭발도 다른 배들과는 달랐다. 9만 5,000 입방미터의 액화천연가스를 탑재한 한진 글로리호는 튼튼한 구조와 강한 압력에도 견딜 수 있는 탱크를 갖고 있었지만 미사일 공격까지 상정하고 설계된 것은 아니었다. 두 번째 가스탱크에 명중된 하픈 미사일은 가스탱크의 내부에서 정확하게 폭발하며 엄청난 불꽃을 만들어냈다.
- 12월 18일 21:38 큐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현 후쿠오카시 북서쪽 30km 해상
"함장 동지! 부상 시간입네다."
통일해군 소속 로미오급 잠수함 소년3호의 부함장 박승훈 소좌가 시계를 보며 송두호 상좌에게 확인했다.
"좋아. 밸러스트 탱크 배수. 잠망경 심도로 상승한다."
송두호 상좌가 명령을 내린 후 잠망경 쪽으로 다가섰다. 물속에 숨어 있다가 해상으로 부상하는 순간만큼은 언제든 긴장되기 마련이다.
잠수함 승무원은 조용한 물속에 갇혀 있는 것에 상반된 이중적 감정을 느낀다. 숨을 쉴 수 없는 컴컴한 바닷속에 갇히는 폐소공포증과 함께 바다가 주는 은신처로서의 편안함이 그것들이다.
- "전파관측조 상황보고하라."
함장이 전파관측조를 호출했다. 공격 예정시간까지는 10분이 남았다. 만약 대잠초계기의 위험이 있다면 그것은 공군이 약속한 작전이 실패했다는 것을 뜻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 됐습네다. 주변 전파 상황입네다. 각각 후쿠오카 공항과 항만에서 나오는 레이더 전파신호가 포착됩네다만 기 외에 다른 전파는 없습네다. 남동쪽에 일본의 E-2C 조기경계기로 판단되는 UHF 밴드 파장에 전파도 있습네다만 강도가 미약합니다. 해수면 목표 파악은 어려울 걸로 판단됩네다."
전파통신 담당 군관이 관측 결과를 빠르게 보고했다. 구식 로미오가 장비한 ESM 관측 장비들은 장보고급 잠수함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일일이 손으로 비교 분석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렸지만 의외로 빨랐다. 주위에 그만큼 식별해야 할 전파신호가 적었던 것이다.
- "좋아. 부상한다. 준비한 포격조래 확실하갔다. 시간 재서 정확하게 보고한다고 전하라."
송두호 상좌가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9분 남았다.
"부상한다. 포격조 서두르라고 전하라!"
물 위로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더니, 로미오급 잠수함이 해상으로 솟아올랐다. 조선인민군이 1993년에 중학생들의 성금을 모아 중국에서 구입한 예비역 R급 잠수함으로, 지난 한중전쟁 때 죽은 김정일이 직접 '소년3호'라고 이름 붙여준 이 잠수함은 근처 해역에 침투한 4척의 잠수함 가운데 한 척이었다.
- 함장 송 상좌는 발령소에서 사령탑 위로 박 소좌와 함께 올라가 바깥으로 통하는 해치를 열었다. 해치 주위에 고여 있던 바닷물이 좍 쏟아지고, 함장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해치로 기어올라갔다. 전방에 있는 다른 잠수함 최선단 해치에서도 군관과 하사관 몇 명이 올라왔는데, 이 중에는 해군 군관이 아닌 지상군 포병군관이 끼어 있었다.
해상 시계는 흐린 날씨 때문에 매우 나빴다. 더구나 달도 없는 밤이기 때문에 사실상 시계는 완전히 제로였다. 레이더만 없다면 그 어느 것도 이 조그맣고 은밀한 로미오급 잠수함을 수상에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갑판 해치로 기어 나오는 승무원과 포병들을 바라보았다. 수병과 포병들은 갑판 위에 대충 고정된 대형 사각형 물체를 뒤덮고 있는 방수 캡슐을 열기 위해 먼저 완전 밀폐된 연결부의 볼트를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 볼트로 고정된 금속제 연결부를 들어 덮개를 열고 다시 이중으로 밀봉된 방수포를 벗겨냈다.
그러자 거기에서 나타난 것은 40연장 122밀리 로켓포발사기, 중국제 88식 다연장로켓포 발사대였다. 간단한 육안 조준기 이외에는 조준기가 없는, 원래 중국제만도 못한 이 로켓포가 잠수함에 설치된 까닭은 단 하나뿐이었다. 육상에 있는 목표물에 대한 포격을 위해서였다.
- [아직 어떤 종류의 레이더 신호도 미약합네다. 본함을 탐지할 수 있는 감도에 레이더 신호는 없습네다.]
마지막으로 전파관측조의 확인보고가 함장이 쥐고 있던 마이크로폰을 통해서 울렸다. 잠수함의 모터가 멈추고 배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선체가 파도에 약간씩 떠밀려가고 있었지만 별 문제는 없었다. 포술군관이 휴대용 GPS시스템을 꺼내 들고 해도와 대조하며 잠수함의 정확한 현재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이 구식 로미오급 잠수함에는 항법용 GPS가 장착되어 있지 않아서 사람이 휴대용 GPS를 쓰거나, 혹은 최근까지 실제로 해왔던 것처럼 육분의, 또는 경위의를 사용해서 모든 것을 스스로 계산해야 했다.
- 현재 위치의 방위좌표를 확인한 포격조가 빠르게 움직였다. 포병들은 목표 방위를 눈감고도 외울 정도였다. 포격장인 고 상위는 있지도 않은 핸들조작까지 해보라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내 포병들을 선실에서 훈련시켰다. 함장 송두호 상좌가 어제저녁에 본 것도 땀을 뻘뻘 흘리며 공격좌표를 복창하고 엉거주춤 의자에 앉은 듯한 자세로 허공을 손으로 홰홰 돌리는 포병들이었다.
[본함 위치 확인, 포 방열 완료됐습네다. 명령만 내려주시라요!]
"알갔소. 고 상위, 잠시만 기다리기요."
실제 작전은 포병들이 수행하지만 포격 명령은 함장이 직접 통제했다.
- 서둘러야 했다. 로켓발사기를 매단 채 물속을 항주 하면 잠수함이 속도를 내는 데도 문제가 있지만 둥그런 원통들이 어떤 기괴한 소리를 낼지도 몰랐다. 송 상좌의 명령을 들은 고 상위와 다른 요원들이 모두 1번 해치로 들어가고 해치가 덜컹거리면서 잠겼다.
"발령소 함장이다. 잠항한다. 이제 제대로 숨는 기야."
함장이 외친 후 사령탑에 남아 있던 부함장과 함께 발령소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사령탑 해치가 굳게 잠긴 다음 어느새 차오른 바닷물이 사령탑을 뒤덮었다.
- 소년3호는 로미오가 들어갈 수 있는 최대한의 심도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거추장스런 로켓포 때문에 깊은 수심으로 잠항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가벼운 몸으로 마음껏 바닷속을 누빌 수 있었다.
"심도 재조정. 백 메다. 침로는 2-3-0도, 속도 8노트. 날래 가자!"
첫 번째 임무를 무사히 마친 함장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 있었다. 출항하기 전에 진주에 대기 중인 북조선 전투기들이 직접 상공을 엄호해 준다고 확약했다. 이곳에 일본의 대잠초계기와 함대가 없는 이상 구식 로미오가 종횡무진 활약할 수 있었다. 로켓발사가 진행되는 동안 디젤엔진을 가동해서 완벽하게 충전을 마쳤기 때문에 동력 걱정도 없었다. 더더구나 남조선이 장착해 준 신형 배터리는 확실했다. 남조선의 서통전지에서 장착해 준 니켈-수소 축전지의 장착 비용이 무려 100억 원에 가깝다는 것까지 송 상좌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남한제 납축전지도 성능이 뛰어난 데다 새로 전지를 축전할 수 있는 전력이 엄청나다는 것은 알았다.
- 얕은 바다 속에서 뭔가 작고 시커먼 것이 쑥 올라왔다가 다 시들어갔다. 잠시 후 거품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곧 수면은 원상태로 돌아왔다. 하지만 뭔가가 물밑에서 움직이는지 희미한 항적 같은 것이 생겼다.
"어? 저게 저거 뭐죠?"
"뭐가?"
가네야마 일등사는 부하 자위관의 물음에 무심코 적외선 카메라에 포착되는 영상을 보고 눈을 비비적댔다. 뭔가 모래사장과 비슷한 색깔의 두루뭉실한 물체가 꿈틀대고 있었다. 만약 지금이 전시가 아니라면 조난자가 해안선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것으로 봤을 테지만 지금은 평시가 아닌 전시였다.
"빌어먹을! 저런 놈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이봐, 몇 번 토치카야?"
"3번요, 오른쪽으로 제일 외곽입니다. 그쪽에는 지금 고바야시 삼등사가 장비 점검하러 나가 있는데요."
"이런, 사단 사령부에 통신 연결해!"
- 조선인민군 특수전부대 중에서 313지대는 통일 과정에서 해체된 몇 개의 제한전부대 가운데 하나이다. 해안침투와 요인암살, 후방교란, 전투정찰을 수행하는 것이 주요 임무인 313지대는 1982년 다대포침투로 유명해진 부대이다. 그러나 정작 이 부대가 해산되던 그날까지 부대원 명단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4호 청사에서 직접 관리하여 담당자인 몇 명의국가보위부 고위 군관들을 제외하고는 인민무력성이나 다른 곳의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 한때 그 313지대에서 지도원으로 복무했던 최형석 상사는 따뜻한 바닷물에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그가 근무했던 원산지도소의 바닷물은 정말로 차가웠지만, 이곳 일본 바다는 따뜻해서 그의 신체 효율이 최대로 발휘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물론 한두 번 스쿠버 다이빙을 맛본 일반인이라도 이 정도 수온에는 기겁을 할 테지만 이들은 이 정도 물은 따뜻한 목욕물로 느꼈고, 30초 사이에 기온을 60도 이상 변화시켜도 큰 문제가 없을 정도로 냉온 전환에 적응해 있었다. 그가 모래사장에 바짝 붙어 기어가는 모습은 마치 바다뱀이 육지로 올라와 모래사장을 기는 것 같았다.
- 그는 아무런 소리 없이, 제3토치카까지 접근했다. 토치카의 총안 안쪽은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기관총이 삐죽이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토치카 바로 앞까지 기어 들어가 토치카그늘 사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슴에 달린 주머니에서 작은 깡통 모양의 수류탄을 꺼냈는데, 곁에는 VX라는 알파벳이 적혀 있었다. 신경가스 수류탄이다.
최 상사는 안전핀을 따고 약 3초를 기다렸다. 수류탄을 총안 속으로 살짝 집어넣고 다시 어둠 속에서 포복하여 뱀처럼 기기 시작했다. 수류탄이 토치카 바닥에 떨어지는 달그락 하는 소리와, 그 직후 수류탄이 점화되는 피시식 소리가 들렸다. 그 안에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지만 모두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 분명했다. 신경가스를 호흡기로 들이마시면 최루가스와 마찬가지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다. 아무런 소리도 내기 힘든 것이다.
소음은 없었다. 그는 누군가가 가스 수류탄을 발견하고 죽기 직전에 비명이라도 올리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자칫 걸릴 뻔했다. 이놈들은 눈치를 챘어. 최 상사도 폐쇄회로 산소흡입기를 가져왔어야 했어. 서두르자우. 나머지 초소도 밟아 버리라우."
윤 중사를 뒤따라온 양 소좌가 최 상사 팀을 재촉했다. 최 상사가 가진 산소흡입기는 뱉어낸 공기가 물 밖으로 빠져나갔기에 물거품을 일으켜 해안경계부대에 쉽게 발각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양 소좌가 가진 호흡기는 뱉어낸 공기를 다시 탱크로 저장하게 된 폐쇄회로 흡입기라 이런 경우는 막을 수 있었다.
"보급이 되야 말이요. 복귀하면 강력하게 요청해 주시라요. 총만 이딴 걸 주면 뭐 하갔시오."
최 상사가 퉁명스럽게 말을 뱉은 후 나머지 초소를 장악하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수중에서 발사가 가능한 APS 수중돌격총을 쥐고 낮게 움직이는 그림자들은 빠르면서도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 중간에 식사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데 쓴 시간도 적지 않았다. 덕분에 장병들의 피로도는 매우 낮았다. 대신, 장교부터 말단 장전수까지 한 가지 큰 불만을 품게 됐다. 이런 식이면 적과 싸울 일이 없을 것 같았다. 훈장은커녕, 나중에 제대해서 학교 동기들이나 여자친구, 동생들한테 자랑할 것이 없다면 일본까지 온 보람이 없는 것이다.
부하들과 달리 여단장 차영진 준장은 제발 이대로 전쟁이 끝나길 바랬다. 그가 지휘하는 제5기갑여단은 아직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지만 훈장은 필요 없었다. 다만 부하들이 무사히 집에 돌아갔으면 하는 희망뿐이었다.
- 12월 19일 06 : 43 가나가와현 야마가타마치
K-200 장갑차가 야마가타마치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전조등을 켠 장갑차들은 시속 20km의 느릿느릿한 속력으로 움직였다. 움직이다 멈춰 서서 주변을 경계하고, 다시 움직이는 식으로 무척 조심해서 전진하고 있었다. 병력을 하차시키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면 상당히 주의하면서 전진하는 셈이다. 장갑차 한 대가 전진할 때 다른 장갑차 10여 대가 그 장갑차를 지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식으로 좁은 길목에서도 절묘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들도 장갑차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열두 개의 눈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 "장갑차다. 탱크는 없는데?"
오하라 육사장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고 도시의 어둠은 짙기만 했다. 이미 대부분의 주민은 후지에서 전투가 벌어진 어제를 기해 모조리 피난을 가 버렸다. 덕분에 이 소도시는 거의 텅 비었고, 안심하고 싸울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중대장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해볼 만한 상황이잖아?"
"무반동포가 없어서 아깝군요."
- 오하라 육사장이 부하 하나의 말대꾸에 입을 다물었다. 마땅한 대전차화기가 없었다. 장갑차를 잡는데도 대전차화기는 매우 유효한데, 지금 남은 대전차화기라고는 팬저파우스트 발사기 하나가 전부였다. 그나마 지난 싸움에서 방아쇠를 두 번 당겨서, 이제는 한 번 밖에는 발사 기회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할 수 없지. 장갑차 한 대라도 잡고 보자고. 우리 병력도 겨우 여섯 명이잖아."
장갑차 한 대만 잡으면 모두 항복해도 된다. 본전은 뽑는 셈이다. 아니, 잘하면 장갑차 하나를 잡고 탄약과 무기를 탈취해서 재무장하고 며칠 더 싸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된다면 최소한 그동안 받아먹은 월급값은 하는 셈이다. 한국군이 항복을 쉽게 받아 줄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공격준비, 발사!"
구령과 함께 팬저파우스트 사수 이시다 이등사가 방아쇠를 당겼다. 실내였지만 후폭풍이 그리 세지 않은 팬저파우스트였기에 사격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탄두가 오렌지색 꼬리를 끌며 날아장갑차 측면에서 멋지게 작렬했다. 대폭발이 뒤이었다.
"잡았어! 사격개시!"
오하라의 외침과 동시에 창문가에 숨어 있던 자위관들이 환호성을 올리면서 가진 화기를 총동원해서 맹렬하게 퍼붓기 시작했다.
- "아닙니다. 폐하께선 속히 이곳을 떠나 주시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이로운 일입니다."
- 12월 19일 08 : 42 도쿄도 시부야 롯폰기, 방위청 청사
자위대 중앙지휘소도 구내에 포함하고 있는 이곳 방위청 청사에 정장차림의 타 부서 행정관료 10여 명이 몰려들었다. 그 사내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젊은 공무원들도 따라왔다. 지금 이곳 방위청에는 일본의 모든 장관급 대신들과 그 보좌관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참의원과 중의원들은 이미 소개를 마쳤습니다."
"그런대로 빠르구만."
천황을 간신히 설득하여 2시간 뒤에 도쿄를 떠나도록 설득한 이토 육장은 그야말로 온몸이 식은땀으로 푹 절었다. 신경 굵은 통막의장은 소매깃만 버리는 정도로 그친 모양이었다.
- 총리는 너무 불운했다. 예법에 따라 옆모습이나 뒷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옆으로 게걸음을 걸어 물러 나오다가 실신하여 일본 역사상 최초로 천황 앞에서 게걸음 중에 실신한 대신이 됐다. 과거에는 게걸음 연습 중 실신한 사람이 있었다지만, 실제로 천황 앞에서 실신하긴 히데키 총리가 처음이었다. 벌써 10여 년이나 옛날의 일이지만, 게걸음을 연습하다 쓰러진 사람이 있었다. 일본의 정치관행에 따르면 중의원과 참의원 각 의장과 부의장은 개회에 앞서 천황을 알현해야 하는데, 마침 중의원 부의장이 된 자민당의 한 원로가 긴장한 나머지 실수를 할까 두려워 연습을 한 적이 있었다.
-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지난 3일 간 통틀어 겨우 5시간밖에 잠을 자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쉬고 싶었다. 그러나 쉴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는 더 바빠질 게 틀림없었다.
- 12월 19일 09 : 28 가나가와현 하다노(秦野) 시
"남은 건 전부 긁어모았는데 겨우 이 정돕니다."
임시 사단장 대리 야마자키 마사오 일등육좌는 보고를 받고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미 사단의 잔존병력 모두가 흩어진 상태라 이해가 되긴 하지만, 그래도 당장 사단본부가 직접 지시해서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이 1개 중대 남짓에 불과했다.
"그나마 중화기는 넉넉하군."
사단 전체에 82식 지휘통신차는 이것과 1연대본부의 차, 합계 두대만이 남았다. 그의 지휘통신차는 바로 19시간 전까지만 해도 전임사단장 마쓰무라 육장이 사용하던 것이다. 19시간 전까지 차 안을 채우고 있던 사람들 중 세 사람이 이미 죽었다. 그들은 사단장, 부사단장, 그리고 통신반장이었다. 방금 받은 구두보고에 의하면, 지금 야마자키 일등육좌가 직접 통솔할 수 있는 병력은 부상병 및 이들을 간호하고 후방으로 수송할 인원을 제외하고 190명이고, 이들에게는 모두 84밀리 무반동포 14문, 팬저파우스트 발사기 29기가 있었다. 한국군을 상대하기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부대 규모로 볼 때는 과도할 만큼 충분한 화력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1개 중대병력이라는 숫자만은 변하지 않았다.
- "수도야 당연히 떨어질 겁니다만, 그런다고 끝날 전쟁은 아닙니다.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일단 움직이기부터 하죠. 언제 적군이 들이닥칠지 모르니까요. 이것 한 가지만 말해 두지요. 적에겐 장기전 능력이 없다는 거 말입니다."
"..."
"참. 움직이기 전에 대충 무선통신 한 번 때려줍시다. 우리가 완전히 해산됐다는 식으로요. 남은 부대는 이제부터 개별 저항에 들어간다고 해두면 상관들이든, 아랫놈들이든, 적군이든 간에 듣는 놈마다 각각 뭔가 생각이 나겠죠. 그럼 웬만한 문제는 다 풀릴 겁니다. 통신 보낸 다음에 연대장 통신차는 버리도록 합시다."
고가 연대장은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사단장 대리가 별로 미덥지 않았다. 어제 전투에서는 사단지휘권을 인수받자마자 부대 전체를 수습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여기까지 지휘차로 달아난 인물이었다. 이런 사람이 싸울 생각을 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남의 지휘차에서 통신을 보내고 그 지휘차를 아무 데나 유기하라고 명령하다니,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이런 자를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었다.
- 그러나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먼 옛날 조선과 일본의 전쟁 중에는 왜군 앞에서 도망친 전력이 있는 장수인 이일, 조대곤 등도 정작 제대로 된 병력을 지휘하자 용감히 싸워 전공을 올린 적이 있었다. 또한 그가 방위대학에서 교훈 삼아 열심히 공부했던 인물 중에도 그런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프러시아 중흥의 영웅인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The Great)도 평생 치른 16회의 대전투 중 거의 절반은 참패한 인물이었다. 앞에 선 42세의 보잘것없는 사내, 야마자키 일등육좌라고 해서 그런 사람들과 다르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 그리고 어느 정도의 기갑전력도 가지고 있는 육상자위대 중부방면대 입장이라면, 결국은 남쪽의 평야지대로 밀고 들어가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미에현에서 공세를 펴기엔 우리 보통의 기동력이 너무 부족합니다. 적 보병은 상당한 수준의 기동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니 우리도 보전합동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곤란한데, 보통과의 지금 기동력으로는 아무것도 못 합니다. 그러니 천상 쓰루가를 공격해야 하고, 그러려면 시가(滋賀) 현 전체를 공격해서 점령해야 합니다. 물론 적도 그걸 염두에 두고 있을 건 분명합니다."
막료장의 얼굴 표정에 결의 같은 것은 없었다. 사무적인 무표정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것은 대단한 결단력이 필요했다. 막료장으로서는 그 이유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었다. 나도 바보는 아니다라는 사실을 밝혀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적은 미에현에 두었을 적 주력부대를 방어 목적으로 시가현에 돌리진 못해. 아마 반격을 시작하겠지. 그리고 그건 우리한테는 아주 치명적이 될 거야."
"그렇겠죠. 우리가 공격을 시작하면 훤히 드러난 우리 옆구리를 찌르려고 할 겁니다."
- "도시 안에서라면 특별히 준비하지 않아도 웬만큼은 싸울 수 있지 않겠어? 이 근처 길은 내가 좀 아는데, 우리가 들어온 길로 적이 들어올 가능성이 높으니까 여기서 막자구. 잘하면 전차 한 대나 장갑차 두세 대는 주저앉힐 수 있을 거야."
"좋아. 중화기 있는 거 다 모아서 길목에 깔아 두자. 젠장! 간부 한두 녀석만 더 있어도 웬만큼은 하겠는데. 이 동네 지도도 없고... 야, 누가 시청에 가서 지도 좀 뜯어와라. 시청이 어딘지 모른다고? 알아서 찾으란 말야! 내가 하나하나 다 일러줘야 해? 이 바보 같은 자식아!"
- 1사단 32 연대전투단의 마지막 패잔병 1개 소대병력을 인솔하고 있던 육사장 두 사람이 결정을 내렸다. 여기서 죽는다. 이미 죽음의 공포와 한 차례 직접 마주쳐본 적이 있는 자위관들은 더 이상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전투에서 죽으면 죽는 거고, 살면 좋은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두려움이 극에 달했다가 풀어진 다음에는 대체로 그 두려움과 다시는 마주치기 싫어하는 것이 인간 본성이라지만 이들은 이미 그 수준도 넘어서고 있었다. 극에 달한 두려움조차도 이젠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 12월 19일 13 : 10 니가타현 니가타시 북동쪽 40.5km, 도리사카(鳥坂: 439m) 산
"씨팔! 졸나리 많네."
제117 특공여단 3중대장 이은경 소령은 망원경으로 멀리 북쪽을 살피며 투덜거렸다. 정상 부근에서는 해안선을 따라 진행하는 1개 국철(JR선)과 3개 일반국도, 그리고 1개 지방 포장도로가 시야에 잡히고, 멀리 113번 국도가 동서로 이어져 산맥 안쪽으로 달렸다. 상당히 기계화된 것으로 추정되는 자위대 대부대는 해안도로인 113번 국도가 아니라 국철과 평행하게 달리는 1번 국도를 통해 쾌속진군하고 있었다. 이미 한 시간에서 30분 전에 첨병분대, 첨병소대에, 첨병중대까지 지나갔다. 최소한 연대병력은 넘을 것 같았다.
"적 병력이 너무 많습니다. 잘못하면 상륙거점이 위협받겠습니다."
중대 행정보급관 최성환 상사의 말 그대로였다. 저 대병력은 통일한국군 제117특공여단이 형성한 저지선을 몇 차례나 돌파했을 것이다. 이 소령의 팀까지 무너진다면 자칫 한국군이 상륙하고 보급거점으로 삼고 있는 쓰루가까지 그대로 밀고가 도쿄로 진군하고 있는 상륙군이 배후를 차단당할 우려가 있었다.
- 공중지원을 요청했지만 울릉도에서 너무 멀고 작전반경이 넓은 수호이는 폭격능력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이 소령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전쟁 첫날 이들이 경비행기로 강습할 때 공중급유를 받은 F-16 전투기 몇 대가 호위해주지 않았던가? 아마도 공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거나 다른 곳 지원에 바쁜 모양이었다.
"공군지원은 없어요. 적당히 치고 빠지죠."
"안 됩니다! 우리 뒤쪽에서는 이들을 막을 힘이 없습니다, 중대장."
최성환 상사가 강력하게 재고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은경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은경은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는 안 된다며 단호했다. 최 상사는 잔뜩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 6·25 때, 장교와 하사관, 일반 병의 사상자 숫자를 보면, 하사관들이 입은 피해가 압도적으로 많다. 일반 사병이나 소대장 같은 초급장교가 많이 죽는다고 보통 알고 있지만 전쟁기간 동안 하사관 사상자 수는 병의 2배가 넘는다. 구성비율로 따져보면 실로 엄청난 피해였다. 전쟁은 장군이 지휘하고 전투는 하사관이 지휘한다는 금언이 있다. 총알이 빗발치는 최전선에서 사병들을 지휘하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솔선수범하는 하사관은 당연히 피해가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49년 개성 송악산전투에서 산화한 육탄 10용사나 1997년 강릉잠수함 침투사건의 예에서 보듯이, 한국군 하사관들도 가장 위험한 곳에서 가장 위험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왔다. 이것이 군사전문가들이 한국군의 허리인 하사관의 처우개선을 한 목소리로 외친 이유이기도 하다.
"최 상사님도 집에 돌아가서 애들 재롱을 보셔야죠. 김 중위는 다음 달에 장가가야 하고."
"하지만 중대장님!"
최 상사가 대꾸했다. 하사관은 개인보다는 전체를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군의 고참 기술하사관들이 민간기업들의 스카우트 공세에 응하지 않는 것은 이런 희생정신 때문이었다.
"이번엔 제 말씀대로 하세요! 그리고 우리는 시간만 벌면 됩니다. 쓰루가로 가는 도로나 교량은 이미 상당히 파괴됐을 겁니다. 이놈들이 거기까지 가려면 한 달은 걸릴 거예요."
- 1사단과 함께 싸운 부대들 중에서 현재 통신이 재개된 부대는 없었다. 있더라도 통신을 보내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한국 공군이 아직 제공권을 거의 잡고 있는 상황이므로 함부로 통신을 보냈다가 공습이라도 받으면 끝장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의외로 하늘에 한국 전투기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은 이곳 통막과 항공자위대 부대들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정작 핵심인 육상자위대는 막료감부를 제외하고 그 사실을 아는 이들이 없다시피 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만, 현재 적의 움직임은 거의 파악되고 있습니다. 언론사가 아주 필사적으로 협조를 해주고 있습니다. 보도보다는 보고가 먼접니다."
NHK 기자들이 이 전쟁에서 새로운 수훈을 세우고 있었다. 기자증을 갖고 있으므로 한국군에게 포로가 되더라도 정보를 전달했다는 사실만 발각되지 않으면 신변보장을 받을 수 있다. 한국군은 실제로 기자들을 이용해서 언론플레이를 계속하고 있으니, 서로 잘 이용해 먹는 셈이다. 그들은 그 신분을 이용해서 적지와 아군 지역을 번갈아 움직이고 있었다. 취재차들이 먼발치에서 촬영한 한국군 차량대열의 모습이 지금도 NHK-1의 뉴스특보 시간에 방송되고 있었다.
- 12월 19일 14 : 52 야마나시(山梨) 현 오츠키(大月) 시 동쪽 12km, 주오(中央) 고속도로
"무선전화기로 연결한 노트북으로 인터넷에 접속, 그리고 자위대 모병사이트 운영자 수신 메일박스로 우리 부대의 보고서를 전송한다...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잘했다, 류타로."
류타로는 아버지의 칭찬에 머리를 긁적였다. 뭐라고 한마디 하긴 해야 하는데, 생각나는 건 밥 이야기뿐이었다.
"그냥 공짜로 밥 얻어먹는 게 싫어서요. 히히히."
류타로 자신이 생각해도 자랑스러웠다. 군용 무선통신주파수는 모두 추적되고 있으므로 즉각 공격받을 수 있었지만, 민간용 통신채널은 달랐다. 특히 무선모뎀이 장착된 노트북이라면? 휴대폰에 연결한 노트북 컴퓨터라면?
- 물론 한국은 모든 이동통신 주파수를 추적, 감청할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작업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작해야 1분 내지 4분 동안 이어지는 의미 없는 잡음전파 송출까지 감시하지는 않을 가능성이 컸다. 모뎀을 이용한 데이터 통신을 일반 수화기를 통해서 들으면, 칙칙 거리는 소음만 들린다. 현대 사회에서 일반적인 민간용 이동통신에서 코드 전송을 하는 경우는 팩시밀리밖에 없다. 그리고 팩시밀리와 모뎀통신은 다르다. 불규칙적으로 변화하는 음향이 무엇인지 깨닫더라도 모두 수신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무엇이 의미가 있고 무엇이 의미가 없는지를 파악하는 것도 문제고, 송수신 대상이 텍스트가 아니라 바이너리 파일인 경우 그 의미는 더더욱 알기 힘들다. 파일의 각 바이트 하나하나를 전부 다 재구성하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더군다나 그게 압축까지 돼 있다면 더 문제였다. 물론 컴퓨터가 알아서 처리해 줄 수가 있다고 하지만, 처음으로 나타난 신호의 의미를 상대측이 알아내고 시작부터 감청할 가능성은 없었다. 최소한 처음 나타난 잡음은 그냥 무시할 것이다.
한 4~5차례 정도 같은 지역에서 같은 방식의 소음이 나타나는 통신을 감청한다면 그 의미를 눈치채겠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정도의 감청이 실제로 할지도 의문이었다. 음성통신에는 지금쯤 감시의 초점이 맞춰져 있겠고 방위청과 연결된 모든 통신망은 추적중일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 전체까지 감시할 능력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 "행운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모르겠군. 모두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이미 그들은 보유 탄환의 절반을 소모했고 재보급도 받지 못했다. 쾌속진격의 부작용을 철저히 감수해야 했다. 물과 식량만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지만 탄약이 부족했다. 하루에 8회의 전투를 치르게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장갑차에 있는 실탄보관함이 텅 비었다. 그들이 기계화보병이 아니라 일반 보병이었다면 휴대한 실탄으로는 전투 3번도 못했을 것이다. 이 병장은 부하들을 끌고 장갑차로 돌아갔다. 다른 분대원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전장정리를 시작했다.
"지휘관도 없이 저렇게 싸우다니, 저게 자위대 맞나요?"
"맞으니까 저기 저렇게 엎드려 있겠지."
차장 김만득 병장의 질문에 이 병장은 건물에서 끄집어내어져 길가에 대충 치워진 시체들을 가리켰다. 자위대는 소문대로의 당나라 군대는 아니었다. 미숙하지만 전의가 넘쳤다. 그리고 용감했다. 절대 총 한 방 못 쏴 보고 겁에 질려 달아나는 겁쟁이는 아니었다. 저들은 강병이나 정예병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용감한 군인이라는 말을 듣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 12월 19일 17 : 32 시즈오카현 고텐바시, 구 1교육단 본부
군단장 허철화 상장은 지도를 내려다보면서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바로 몇 시간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자위대 패잔부대의 완강한 저항 때문에 선두에 선 2기갑여단은 예하 기계화보병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매번 적을 격파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나가면 몇 시간 이내에 보병대대 하나는 너끈히 날려 버릴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이제부터 전진해 나갈 지역은 도시와 야산이 적절히 배합된 수도권이었다.
간토(關東) 평야는 이미 말뿐이었다. 현재 평야지역의 약 80% 가까운 지역이 도시나 마을이 되어 있었다. 도시가 들어서지 않은 지역은 평야 속에서는 보기 드문 구릉지대였다. 함경남북도나 강원도의 남성적인 산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야트막한 야산들이지만 전차에게는 오히려 어중간한 산이 더 치명적이었다. 전차가 못 다닐 만큼 험한 지형이라면 아예 전차가 들어가지 않으니 전차에게 위험한 지대는 아니다. 그런 야산에 대전차미사일을 휴대한 보병이 단 몇 명이라도 숨어 있으면 부대 전체의 진격속도가 뚝 떨어질 게 분명했다.
"진공부대의 주력은 전차부대인데 하필 수도권 바로 코앞에서부터 적의 저항이 심합니다. 자위대 북부방면대 병력이 언제 내려올지 모르는데 말입니다."
- "빨리 도쿄를 점령해야 합니다만, 지금 부대편성으로는 도저히 작전을 신속하게 수행할 수 없습니다. 기계화보병으로 도시를 청소하면서 전진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참모장의 탄식 섞인 말에 허 상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국군 소장인 참모장은 이런 상황에 부대가 놓이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것 같았다. 한국군의 수도방어전이 이런 양상으로 진행되기 쉽기 때문에 한국군 수방사 예하 보병들은 이런 수비전에는 익숙했다. 그러나 한국군 기갑부대나 보병들은 이런 상황에서 공격 측으로서의 훈련이나 교육은 받은 적이 없었다.
- "우리 인민군대가 서울을 공격할 때 상정했던 문제 그대로 당하는 셈이오, 참모장 동지."
"해결책이 있겠습니까?"
"기건 참모장이 생각할 문제 같은데... 서울이 목표였을 적에는 그 거리가 짧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소. 겨우 20키로 남짓만 시가전이고 나머지는 평야니끼니. 기런데 여기서는 적어도 80키로 이상을 그런 시가지에 적과 씨름하면서 전진해야 하갔군."
"..."
"우리가 서울을 목표로 상정했을 적에는 20키로를 하루 안에 주파할 수 있었소. 물론 지금은 서울 공격을 가상할 때보다는 편해. 적병력도 적고 밀도도 얕은 데다 대전차전력도 취약하니끼니. 하디만 고만큼 우리 병력도 적고, 지원화력이 부족하단 말이외다. 서울 공격이라면 방사포 수천 문이 지원해듀갔다만 여긴 아니란 말이야. 정말이지 미치고 환장하겠구만!"
- 거기까지 말하고 허 상장은 맞은편 벽에 걸린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평상시에는 참모장에게 항상 경어를 썼지만 이제는 그럴 정신도 없는 것 같았다. 그가 들여다보는 일본 수도권의 1/100,000 지도는 벽 전체를 차지할 만큼 커다란 지도로, 지금 주력부대의 위치인 가나가와현부터 도쿄 북쪽의 사이타마, 동쪽의 지바, 북동쪽의 이바라기 현까지 나와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내일 중에 도쿄에 입성해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진격하든 아니든 진격은 가능하겠지만, 피해가 너무 커! 시간이야 맞춘다고 하디만, 한 명이라도 더 살아서 돌아갈 수 있어야 하갔는데... 지금 식으로 그저 전초부대만 세우는 식으로 전진해서는 소도시 하나를 통과할 때마다 소대 하나씩은 날아가는 걸 감수해야 한단 말이군..."
- "할 수 없다. 유태 돼지들과 소련 동지들이 쓴 방법을 응용해서 쓸 수밖에 없소. 유태 놈들이 베이루트에서 어드렇게 싸웠는지 알고 있소? 스따린그라드에서 독일 파시스트들이 붉은군대하고 시가전을 어떻게 치렀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 시가전에서의 일반적인 양상은 도시의 건물 하나하나를 점거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적이 저항의 거점으로 삼을 수 있는 요충인 각개 건물을 피를 흘려가면서 점령하는 것은 공격자가 방어자보다 수적으로나 화력 등 모든 면에서 우세할 때만 효과적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대책이 별로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군과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맞붙은 적이 있고, 이스라엘군이 PLO를 상대로 베이루트에서 싸운 적이 있었다. 그때 양자는 모두 공통적으로 건물 하나하나를 점령해 나가는데 무지막지한 방법을 사용했다.
"기걸 응용하는 게요 즉시 21사단에 명령해서 임무부대 하나를 만들라고 하기요. 전차대대, 자주포 2개 대대, 보병 2개 대대를 차출해서... 아, 기계화보병여단 하나에 자주포 2개 대대를 편입시키면 되갔군. 이 병력으로 지나가는 길목마다 있는 모든 건물을 청소시키도록 하시오. 길 뒤쪽 건물들은 아군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없으니 무시하고, 길가에 있는 건물들에 155밀리 고폭탄을 한두 방 먹이고, 120밀리나 105밀리 전차포로도 대전차고폭탄을 먹이는 게요. 그런 다음에 보병들이 들어가서 수색하고, 그러는 동안 자주포와 전차가 같은 일을 맞은편 건물에 가하는 거다. 이런 걸 소대나 중대단위 부대다수로 계속 반복시키는 게요."
"건물 하나하나를 모두 파괴하자는 거로군요."
"그 수밖엔 없소. 건물에 상처를 주지 아니하고 점거할 만한 여유도 없거니와 시간도 없어요. 시가전의 기본 교범대로 하는 거긴 하디만, 돌파 위주요 각 도시 전체를 장악하는 게 아니라 주요 이동로 주변의 건물들만 청소하는 거요. 시간을 더 쓰게 되긴 하갔디만, 희생을 조금 더 줄일 수는 있갔디. 애초에 우리 전략적 목표인 일본의 주요 도시 및 기간시설 파괴는 기보사단이 아니라 보병사단이 하게 되어 있었디만, 지금 상황에선 어쩔 도리가 없소."
- 12월 19일 19 : 30 오사카부 이타미시
12월 17일 오전에 육상자위대 중부방면대 총감부가 철수한 이래 이곳 총감부 건물은 계속 비어 있었다. 오사카를 점령했던 한국군은 방송에서 실컷 떠들며 그들 말대로 고베 방향으로 가긴 했지만 정작 고베는 점령하지 않고 한국군은 모두 사라졌다. 그 덕택에 자위대의 주요 지휘시설을 비롯해서 도시 전체의 기간 시설들은 일부 한국군이 조직적으로 파괴한 곳을 제외하면 별다른 손해 없이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곳 앞으로 13사단 46연대전투단의 전차중대 행렬이 이어졌다. 74식 전차 12대와 82식 지휘통신차가 줄지어 달리고, 그 뒤로는 연대 보통과 자위관들이 가득히 들어찬 군용 및 민간용 트럭과 버스들이 따라 달렸다. 이들은 여기까지 오면서 단 한 차례의 저항도 만나지 않았다. 한국군은 어디에도 없었다.
"정말로 비었군."
연대장 아마노 다다노리 일등좌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82식 지휘통신차는 맨 선두에 선 전차중대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차체 상부 해치 밖으로 몸을 내민 연대장은 이미 캄캄해진 주변을 살피며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사카는 이제 탈환한 것 같았다.
- 그러나 그보다도 더 걱정되는 것은 아마노 일등좌의 46연대전투단을 포함한 13사단 병력이었다. 그의 예상이나 상부의 예상이나 모두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다. 이제 한국군 기동예비부대가 오사카를 다시 공격할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이 강력한 한국군 부대가 오사카를 공격하여 점령하고는 자위대주력부대 뒤로 우회해 들어가 포위섬멸전을 기도할 것이라는 우려가 고위 간부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것을 저지할 임무가 13사단에 내려진 것이다.
- 12월 19일 19 : 31 교토현, 교토시 동쪽 40km 상공
한국군에 겨우 10대밖에 없는 호크 800XP 정찰기가 일본에서 24시간 작전하려면 천상 일본 하늘에는 동시에 2대 이상 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이 전자전기의 최대 체공시간은 5시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기체수명을 대폭 감수할 것을 각오한 행동이었다.
실제로 어제는 호크 800XP 7번기가 비행 중 고장을 일으키는 바람에 추락할 뻔했다. 다행히 울릉도 비행장에 긴급불시착을 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대형사고만은 면했지만, 최소한 호크 정찰기들에게 위기가 닥쳐왔음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었다. 이미 한중전쟁에서 이 정찰기들은 극도로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24시간 쉬지 않고 하늘에서 작전을 펼쳤기 때문에 기체도 승무원들도 파김치가 되어 버린 상황이었다. 기체를 전면 오버홀해야 할 정도로 혹사시켰는데도 두 전쟁 사이의 간격이 너무 좁았던 나머지 기체는 모두 통상적인 수준의 정비밖에는 받지 못했다. 승무원들도 채 기력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시 전쟁에 투입된 것이다.
- "결국 오사카 시내로 적 차량이 진입했습니다. 대충 상부의 예상과 맞아떨어졌군요. 총 1개 연대규모의 차량이 이동했습니다. 자위대의 연대편성으로 미뤄보건대 한 2개 연대전투단 정도는 진입한 것 같군요."
호크 800XP 2번기의 3번 오퍼레이터 박준후 대위가 그렇게 말하면서 선임 오퍼레이터를 돌아보았다. 선임인 고양겸 소령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공습을 가했더라면 좋았을걸. 적어도 연대전투단 한두 개는 잘 튀긴 메뚜기를 만들어 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일세. 저 녀석들 뒤에 따라붙은 패트리어트 포대들이 문제인가?"
"모르죠, 상부 사람들이 뭘 생각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나저나 지금 교토로 진입하는 적 부대가 더 급할 것 같습니다. 병력도 많고 밀집도가 높아서 공습을 가한다면 아주 좋겠는데요. 게다가 그 친구들은 지금 우리 병력이 제일 적게 배치된 지역으로 진입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상륙항구로요."
- 3일 동안 대대장 이하 전원이 잠도 못 자고 유개진지를 만들어 둔 덕분이었다. 자위대가 쏘아댄 포탄은 거의 전부 클러스터 포탄이었기 때문에 유개진지에 포탄이 직격 하더라도 안에 있는 병사들에게는 피해를 입힐 수가 없었다.
제1해병사단 1연대 3대대장 김성한 중령은 대대본부 유개호에 만들어둔 총안구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바깥이 어두워서 야간암시경을 착용해서 주변을 살폈다. 주변을 돌아보는 동안 통신장교가 대대장에게 보고했다.
"유선이 모두 끊어졌습니다. 통신병을 보내서 전화선을 다시 연결하겠습니다."
"그래. 그만하길 다행이군. 3중대도 별 피해가 없는 것 같아.
- "대대장님, 박격포 사격입니다!”
외침소리와 거의 동시에 대대본부 바로 아래쪽, 3중대가 포진한 산중턱에서 오렌지색 불꽃이 이는 것이 보였다. 박격포탄이 폭발하는 것이다. 폭발과 동시에 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어둠 속에서도 확실히 구분할 수 있는 흰색 연기가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연막탄이었다.
"3중대와 빨리 통신선을 먼저 연결해. 3중대 손에 우리 대대 전체의 목숨이 걸려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 통신장교가 엄폐호 밖으로 나갔다. 통신병은 일반인이 생각하듯 편하고 안전한 보직이 결코 아니다. 전쟁영화 같은 데서는 무거운 무선통신기를 등에 메고 지휘관을 따라다니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실제 각 전투부대에서는 통신방수를 막기 위해 유선전화를 더 많이 사용한다. 전화선 가설, 보수작업이 지뢰지대를 가로지르며 진행되는 경우가 많고, 이 작업은 위험하고 급박한 전투 중에도 포화에 온몸을 드러내 놓고 진행해야 한다.
- 12월 19일 22 : 52 다다니봉 남서쪽 14km
[이봐요, 포격지원을 중단하면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우리 보고 박격포 연막만 믿고 적 진지로 그냥 뛰어들라는 겁니까? 우린 탱크중대도 다 잃고 한 대 밖엔 없소. 당신네 포병대가 적군 진지를 적당해 두들겨 줘야 무슨 일이든 해볼 수나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공격할 수 없는 상황이오. 적 포병대가 우릴 노리고 있단 말요! 대체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요? 우리 보고 죽으라는 겁니까? 탱크가 있고 없고는 당신네 사정이고, 우리도 우리대로 사정이 있단 말입니다!"
- "무인표적기까지 어디에 쓰겠다는 거야?"
"공격은 아니죠. 저걸로 무엇을 하려는 모양인데요. 정찰인가요?"
히라누마 이등위가 대답인지 질문인지 흐릿한 말을 뱉었다. 항공자위대 무인 표적기대대의 통신 담당인 히라누마 옆으로 선임인 일등위도 바쁘게 움직이는 활주로의 상황이 어지러웠다. 국외로 빠져나가지 못한 일본항공(JAL)과 전일본항공(ANA) 소속 대형 여객기들이 계류장에 꽁꽁 묶여 있었다. 고마쓰기지에서 건져온 중요한 무기와 정비시스템을 실은 각종 컨테이너들이 격납고 주변을 차지했고, 크레인들은 쉴 새 없이 트레일러에서 박스를 들어 내렸다. 대낮같이 환한 공항에서 이곳 북쪽 활주로만 등화관제를 실시해서 깜깜한 가운데 차례로 이륙하는 UF-104의 화염만이 밝았다.
- F-4 팬텀이 장비하는 쌍발엔진 중 엔진 한 개만을 장착한 단발/단좌 전투기인 F-104는 한때 최후의 유인전투기라 불리었을 정도로 초음속능력이 뛰어난 전투기였지만, 레이더를 이용한 전투와 현대공중전에서도 여전히 격투전이 중요하다고 인식된 월남전 이후 그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는 박쥐 같은 구식 전투기로 전락했다. 일본에서 80년대 초반까지 운용된 이 전투기가 일선에서 퇴역한 후 새로 찾은 일거리가 무인 정찰기, 또는 표적기 임무였다. 항공자위대의 공대공미사일 실전 연습용 상대가 된 이 전투기들은 이륙하는 모습만은 멋있었다.
팬텀과 같은 날카롭고 카랑카랑한 엔진음을 내뿜으며 마지막 무인기까지 이륙을 마치자 기다리다 지친 F-15J 전투기들이 쏜살같이 활주를 시작했다.
- 12월 20일 04:44 혼슈 도야마 현 상공
[호크아이 7이다. 1-3-0에서 접근 중인 목표는 980노트로 증속 했다. 2분 후에 미사일 요격권에 들어간다. 발사대기하라. 발사는 우리가 통제한다.]
"조기경계기가 좋긴 좋군요. 쏘는 시간까지 알아서 맞춰주잖아요?"
김종구 대위가 속해 있는 제2비행대는 조장호 대령의 지휘하에 남동쪽에서 다가오는 목표를 맡았다. 아직 항모에서 이륙 중인 백범수 대좌의 제1비행대는 북동쪽 목표를 맡을 계획이었다.
[괭이갈매기다. 이건 F-16이 아니다. 랜턴 포드가 없으니 착각하지 마라. 산에다 처박지들 말라구.]
조장호 대령이 주의를 주었다. 일본 정찰기들이 이 대화 내용을 분석하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수호이 조종사들이 초보자란 것을 알게 될까? 투덜거린 김종구 대위가 헬멧에 장착된 미광용 고글을 내렸다. 대낮같이 훤히 보이는 F-16의 랜턴(LANTIRN)과는 비교가 될 수는 없지만 그런대로 쓸 만했다. 무엇보다도 수호이는 최고의 기동력을 가진 전투기가 아닌가.
동체 밑에 장착한 4발의 R-27AE(알라모E) 미사일의 안전장치를 해제했다. 레이더는 아직 켤 수 없었지만 명령이 떨어지면 켠 다음 각각 담당구역을 향해 미사일을 조준하고 발사하면 그만이었다.
- 고도 1만 피트로 상승하자 산맥의 윤곽선이 밤하늘에 대비되어 또렷해졌다. 해안선을 따라 길게 불빛이 보인다고 생각한 김종구는 잠시 후 불빛이 이어진 선이 바다와 육지의 경계라고 정정했다.
잠은 이미 확 달아나 있었다.
- [호크아이 7이다. 미사일 사격 허가한다.]
두 발씩의 알라모 미사일이 수호이-33 전투기에서 떨어져 나와 화염을 내뿜으며 목표를 향했다. 동료기에서 발사된 미사일들이 검은 하늘로 사라졌다. 김종구가 레이더를 확인했다.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미사일이 역시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목표를 향했다.
'어렵쇼? 회피기동을 안 하는군.'
김종구 대위가 갸웃거렸다. 두 번째 목표에 락온하는 사이에도 레이더에 보이는 목표는 똑같은 침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파렌하잇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회피기동을 안 하는데요?"
[복숭아다. 빨리 쏘고 빠져야 해! AAM-4에 걸려서 직접 회피기동하고 싶어?]
황인호 중령이 재촉했다. 일본에서 개발한 신형 중거리 공대공미사일 AAM-4는 추적장치에 이미지 호밍 추적기능까지 부여하여 강력한 추적능력을 자랑한다.
시간을 놓쳐 머뭇거린다면 자위대 전투기들이 발사한 AAM-4 미사일에 혼쭐날 것이다. 수호이 전투기들은 사정거리에서 우월한 알라모의 이점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다른 기체들은 제2목표를 조준하고 나머지 미사일을 날리기 시작했다.
'젠장, 분명히 이상하잖아.'
투덜거리면서 김종구 대위도 락온이 끝난 두 번째 목표에 조종간 버튼을 두 번 누르자 나머지 알라모 미사일이 떨어져 나갔다.
- [파렌하잇이다. 적기는 공격기가 아니다. 구식 전투기 F-104다. 이런 구닥다리 스타 파이터가 있다니!]
[여기는 호크아이 7. 자위대는 F-104를 안 쓴다. 무슨 소린가?]
[복숭아다. 지금 한 놈 뒤에 따라붙었다. 무인기다. 반복한다. 무인기다. 우리는 무인기를 쏘았다. 지랄! 다트(표적기)까지 끌고 오는군.]
[후속기가 레이더를 켰다. APG-63의 시그널이다. F-15야!]
"쓰벌! 당했다."
김종구 대위는 미사일 락온 경보가 울리자 급격하게 하강을 시작했다. 수호이-33의 최적 회피기동이 뭐였더라?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 액티브로 추적해 오는 AAM-4 미사일 두 개가 김종구의 꽁무니에 따라붙었다. 하나, 둘, 셋 숨을 쉰 후 조종간을 당기자 강한 중력이 걸리며 눈앞이 깜깜해졌다. 선회 시에 걸리는 중력가속도로 인해서 피가 머리에서 발 쪽으로 쏠리는 블랙아웃 현상이었다. 순간적으로 멍해진 김종구 대위의 전투기가 주춤하자 전투기 후방에 접근한 AAM-4 미사일 가운데 한 발이 기어이 근접신관을 작동시켰다.
30미터 거리에서 폭발한 미사일 파편이 수호이의 뒷부분을 파헤쳤다. 왼쪽 엔진에 수많은 파편 조각이 박히며 불이 붙기 시작했다. 김종구는 잽싸게 스로틀을 조작해 왼쪽 엔진을 정지시켰다.
[파렌하잇 정신 차려. 파렌하잇, 파렌하잇!]
- [잔말 말고 착륙이나 잘해!]
항모 함교 꼭대기 항공관제소에서 착륙을 지시하던 조장호 대령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소리는 무선기를 통해 들렀지만, 김종구는 항공관제소 창문을 보면서 움찔했다. 이제 마지막 순간이었다. 착함갑판이 눈에 가득 차는 순간 아래쪽으로부터 기체에 충격이 왔다. 드디어 갑판에 착륙한 것이다. 착함하는 전투기를 멈추게 하는 어레스팅 와이어가 급속도로 운동에너지를 흡수하며 풀려나갔다. 갑판 끝에 펼쳐진 초과저지망 직전에서 전투기가 멈췄다. 조종사인 김종구, 갑판에 늘어선 착함요원들, 구급차, 소방차, 항공관제소에 있던 사람들 모두 동시에 같은 소리를 냈다.
"휴우~"
- 12월 20일 05 : 08 쓰루가 북쪽 160km 해상
쏟아지는 새로운 정보들로 정신이 없는 이순신함의 전투정보센터를 전술정보담당 오퍼레이터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깔린 케이블을 뛰어 넘어가며 바삐 움직였다. 전투정보센터의 한쪽에 있는 대잠지휘센터에서 작전을 지휘하던 박태선 준장에게 함대사령관 윤도선 소장이 다가왔다.
"링스 6이 포착했답니다. 전남함도 급속 접근 중입니다."
"전남함에 접근하지 말라고 하고 최영함이 애스록 공격을 시작하라고 하게."
박태선 준장이 목표로 접근하려는 전남함을 제지했다. 전남함은 목표 잠수함에 가장 가까이 있는 전투함이지만, 어뢰 사거리까지 접근해야 하기 때문에 자칫 마지막 발악에 당할 수 있었다. 대신에 로켓으로 어뢰를 날릴 수 있는 애스록 시스템을 가진 을지문덕함이 나섰다.
"헬기, 공격 대기하라. 애스록이 떨어지고 난 다음 회피운동할 때 추적한다. 폭뢰도 가지고 갔겠지?"
"예, 그렇습니다. 링스 3도 목표를 향합니다. 4분 후면 도착합니다."
"좋았어. 이번엔 깨끗하게 해치우는 거다. 최영함이 아직 발사하지 않았나?"
"지금 발사합니다. 아! 2기 발사했습니다. 어뢰 분리까지 50초입니다."
대잠전 장교가 목에 걸린 스톱워치를 눌렀다. 비좁은 이순신함에 함대 대잠지휘팀까지 들어와 있었다. 박태선 준장도 이 때문에 항모에 옮겨 탔다. 그가 탔던 KDX-3 김구함을 62구축함 전대에 내주고 직접 대잠지휘에 전념하고자 이순신함에 남은 것이었다.
- 최영함에서 발사된 애스록이 15km를 날아가 입력된 위치에 다다르자 로켓모터가 떨어져 나가고 어뢰가 달린 앞부분이 추진력을 잃고 떨어지다가 하얀 낙하산을 펼쳤다. 조그만 낙하산을 이용해 천천히 떨어지던 어뢰가 물 위에 닿자 낙하산이 달린 머리 부분의 캡을 떼어내고 탐지장치를 작동한 후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물속을 항주 하기 시작했다. 어뢰는 점점 깊이 나선형을 그리며 잠수함을 찾아 내려갔다.
- 잠수함 사냥에 몰두하던 박태선 준장의 대잠팀뿐이 아니라 전 통제실에 비상이 발령됐다.
[여기는 최영함, 우리가 목표를 추적하겠습니다. 발사된 어뢰 5기. 확인합니다. 5기입니다. 속도 58노트, 침로 0-8-0. 모두 그쪽으로 향합니다. 도달시간 2분 20초.]
"당했어. 속았다구! 급속 변침해야 돼. 함장! 방위 0-8-0도로, 어뢰를 뒤로 맞는다. 어뢰 기만장치 작동시켜! 사령관님."
박태선 준장은 윤도선 소장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박 준장이 직접 지휘한 잠수함 저지라인이 실패한 것이다. 너무 억울했다. 함대 깊숙이 숨어 들어온 새로운 잠수함에게 분노가 일었다. 포항-미시마 라인이 뚫린 후에 일본 잠수함들이 동해로 숨어 들어왔다. 한국 해군은 그동안 기대 이상으로 잘 싸웠지만, 결국 수적·질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다.
- 새로운 항공작전을 비행단장 백범수 대좌와 의논하던 윤도선 소장은 덤덤했다. 작도판에서 떨어져 대잠상황을 바라보는 그에게 감정변화는 없었다. 차라리 박태선 준장은 무슨 욕이라도 해주기 바랐지만, 이제는 그럴 시간도 부족했다.
"어뢰 피격, 1분 40초 전."
아까는 애스록의 공격 시간을 재던 대잠전장교가 이번에는 일본제 89식 어뢰의 도착 시간을 재고 있었다. 장교가 이번에는 손을 떨었다. 이순신함의 방수격벽들이 모두 잠기며 피탄 후의 침수에 대비했지만 어뢰 5발에 맞으면 항모는 가루가 될 것이다. 경보를 받은 승무원들 모두 충격에 견딜 수 있도록 몸을 굽혔다. 몸을 웅크리고 대피 자세로 수그린 조장호 대령이 기어이 한마디 던졌다.
"멍청한 해군들 같으니! 해군으로 오는 게 아니었어. 망할 놈의 항모만 아니었어도..."
"동무! 조용히 하기요."
백범수 대좌가 나지막이 조 대령을 꾸짖었다. 박태선 준장은 너무 안타까웠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어야 했다. 2,000명에 가까운 승무원, 강력한 전투기들, 그리고 한국 최초의 항모를!
- 12월 20일 05:10 쓰루가 북쪽 161km 해상
이순신함 맞은편에서 맹렬한 속도로 접근한 북한제 소호급 프리깃으로부터 다연장 로켓 10여 기가 불을 뿜으며 하늘로 솟았다. 구소련이 자랑하는 대잠 로켓시스템 RBU-1200 로켓이 항모를 향하던 어뢰를 그물처럼 감싸며 떨어졌다. 작은 물기둥 다섯 개가 이어지며 치솟았다. 5발이 연결된 로켓발사기가 수직으로 서더니 밑부분에서 새로운 로켓이 올라와 자동으로 후미에 장전되자 발사기가 빙글 돌며 다시 어뢰 쪽을 향해 로켓을 뿜어냈다.
어뢰의 침로와 속도를 신중하게 추적한 소호급 프리깃은 정확하게 예정 위치로 로켓을 날렸다. 어뢰 100미터 앞에 떨어지기 시작한 탄두 34kg의 폭뢰가 지정된 수심인 40미터에서 폭발하기 시작하자 거대한 물기둥이 수면 위로 치솟았다. 폭발하는 물기둥에 이어져 더 큰 폭발이 일어난 곳에서는 어뢰도 폭발한 것이다. 89식 어뢰는 미국제 MK-48 ADCAP 어뢰를 기술제휴한 것이라 탑재 폭약도 260kg짜리 대형 폭약이었다. 20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물기둥 두 개가 일었다.
- 이제 어뢰는 소호급 프리깃에 700미터까지 접근했다. 또다시 로켓이 불을 뿜고 400미터의 짧은 거리를 포물선을 그리며 물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번에 조정된 심도는 70미터였다. 로켓발사기는 더 이상 재장전을 할 수 없었다. 어뢰가 너무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대신, 함장 김성일 대좌가 결단을 내렸다. 항모의 함미 방향으로 급선회한 소호급 프리깃이 함수를 어뢰 쪽으로 들이밀었다.
- 두 번째 폭발이 시작했다. 소호의 전방 300미터에서 물기둥이 치솟았고 또다시 두 개의 거대한 물기둥이 치솟았다. 가장 앞부분에 떨어진 마지막 로켓이 물속에 떨어지며 또다시 폭발을 일으켰지만 더 이상의 폭발은 없었다. 어뢰 한 발이 남은 것이었다.
맹렬한 기세로 달려드는 89식 어뢰는 소음도 굉장히 컸다. 강력한 터빈엔진이 연료를 폭발시킨 후 내뿜는 배기가스가 커다랗게 항적으로 남아 수면 위에 하얗게 솟았다. 김성일 대좌는 문득 결정이 옳은 것인가 다시 생각해 봤지만 오래 생각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 1980년대에 나진조선소에서 처음 건조됐지만 설계실수로 후기함이 건조되지 않은 이 유일한 소호급 프리깃, 소호는 이제 끝장이었다. 다시 정신을 차린 이순신함에서 구조헬기가 뜨고 뒤쳐졌던 최영함이 소호 곁으로 다가갔지만 함수가 박살 난 프리깃은 이미 가라앉고 있었다.
- 12월 20일 05 : 11 쓰루가 북쪽 161km 해상
"개새끼들. 죽여 버려."
그동안 감정을 억제했던 윤도선 소장이 그제서야 폭발했다. 오야시오급으로 추정되는 신형 잠수함이 어뢰를 발사하자마자 최영함이 추정위치로 애스록을 무더기로 쏘았다. 거기에다 하루시오급 잠수함을 해치운 링스 6도 가세했다.
[링스 6. 어뢰 명중했습니다. 1발 명중했습니다. 피해를 확인하겠습니다.]
"최영함을 그리로 보내. 가루로 만들어 버리겠어."
박태선 준장이 통신기를 들고 최영함을 호출했다. 그도 부끄러움과 노여움이 엇갈렸다. 완전히 당했다는 모멸감에서 소호함에 대한 복수심이 불같이 피어올랐다. 살아남았다는 기쁨도 잠시, 분노한 해군에 놀라 갑자기 기가 죽은 조장호 대령이 슬금슬금 전투정보센터를 빠져나갔다.
- [링스입니다. 밸러스트 탱크에 공기를 주입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탱크가 파손된 모양입니다만, 놈이 부상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죽여버려."
[폭뢰밖에 없습니다. 어뢰는 이미 썼습니다.]
"뭐든지 당장 투하해! 그리고 최영함이 접근할 때까지 놈이 무슨 짓을 하는지 계속 감시하라. 놈을 죽여 버리고 말겠어."
[알겠습니다. 폭뢰 투사 코스로 들어갑니다. 라저 아웃.]
링스 6이 적 잠수함의 마지막 방위를 계산한 뒤 민감한 소나를 감아올린 후 서쪽으로 300미터를 이동해서 폭뢰 투하 고도에서 호버링(헬기의 공중 정지)을 시작했다.
"심도 지정, 110미터로 방위 고정. 셋, 둘, 하나, 투하!"
링스의 좌측 파일런에서 떨어져 나온 원통형 물체가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폭뢰는 계속 가라앉다가 심도 110미터에 이르면 폭발해서 강력한 수압의 폭풍을 만들어낼 것이다.
- 쿠쿵.
수면이 무덤처럼 불룩 솟은 다음 다시 평평해졌다. 몇십 초를 기다렸지만 침몰을 나타내는 부유물이나 기름이 올라오지 않았다. 잠수함이 침몰하면 이런 것들이 제일 먼저 위로 솟는다.
"다시 감청 시작한다. 소나 내려!"
링스 6의 기장인 김준호 소령이 조종간을 기울이자 헬기가 서서히 내려앉아 수면 바로 위에 정지했다.
"씨팔! 아직 살아 있잖아? 여기는 링스 6. 놈이 아직 살아 있다. 지원을 요청한다."
[여기는 최영함이다. 목표에 최고 속도로 접근 중이다. 3분이면 도착한다. 놈을 감시하고 최적 코스로 우리를 유도해 주기 바란다. 폭뢰로 해치운다.]
"아주 박살을 낼 생각이군. 죽어도 싸지. 자, 그럼 시작해 볼까?"
김준호 소령이 히죽 웃더니 소나를 감아올린 후 다시 200미터 북쪽으로 비행했다. 정확한 추적을 위해 삼각 측정을 하려는 것이다.
- "여기는 링스 6. 최영함 나와라. 최적 코스를 유도한다."
[빨랑 말하고 비켜주기 바란다.]
"이 목소리는 손현식 중령 아냐? 어지간히 급하시군."
링스가 다시 이동해서 목표를 측정하고 예상 이동위치까지 정확히 계산해 냈다.
"링스 6이다. 어두운데 우리가 잘 보이도록 전조등을 켜겠다. 우리를 기점으로 5시 방향으로 진입하라."
[알았다. 거리는?]
"5시 방향으로 진입 후 100미터부터 깔아라."
[오케이. 이제 비켜주기 바란다. 우리 배 마스트에 안 부딪치게 날개를 좀 더 퍼득거리게나.]
뚱뚱한 오리가 날개를 퍼득이며 나는 장면을 연상한 최영함 승무원들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통신망을 통해 들려오자 김준호 소령이 잠시 불끈했다.
- 시체까지 떠오르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래도 해군 승무원들은 적군의 시체를 볼 일은 거의 없다. 링스 같이 대잠헬기 승무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전투는 따지고 보면 기계들끼리 부서지는 것이다. 김 소령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기체를 돌려 모함인 최영함으로 향했다. 연료도 얼마 남지 않아서 전투예비연료까지 써야 될 것 같았다.
- 12월 20일 06 : 20 서울 금천구 시흥 2동
"대통령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이호석 중장이 통일참모본부 회의장이 떠나갈 듯 고래고래 소리쳤다. 대통령 홍지영이 아침잠을 깨어 잠시 이곳에 들르자, 김평국중장과 교대로 불침번을 서며 전황을 살피던 이 중장이 소파에 아무렇게나 누워 자는 참모들을 깨웠다. 비몽사몽 헤매던 참모들이 벌떡 일어나 대통령을 맞았다.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대통령 홍지영이 천천히 가운데 자리에 앉으며 잠시 상황판을 살피더니 남의 일처럼 물었다.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통일참모본부에서도 자세한 전황은 파악할 수는 없었다. 자다 깬 참모들이 쭈뼛거리자 당직 김평국 중장이 보고했다.
"지금은 약간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습네다만, 권대현 동지 보고에 따르면 도쿄가 오늘 중에 떨어질 것 같습니다."
"그럼 우리가 이기는 거요?"
-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한국군이 도쿄를 점령하면 일본이 항복하거나 최소한 휴전협상을 요청할 줄 알았는데 그것은 오판이었다. 대통령이 목이 빠지도록 기다린 전화기는 여지껏 울리지 않았다. 일본 총리와 연결되는 핫라인은 통일참모본부에 있는 임시 대통령 집무실에서 개통 이래 낮잠만 자고 있는 것이다.
"물론, 최악의 경우라도 우리에게 이익이오. 이기지 못하더라도 말이오. 하지만 여러분! 이번 기회에 확실히 이겨야 합니다. 다시는 일본이 감히 우리를 넘보지 못하도록..."
- "혹시 쿠데타는 아니오?"
"아닙니다! 적이 분명합니다, 대통령님!"
홍지영이 음울한 목소리로 묻자 정지수 대장이 불쾌한 듯 강하게 부정했다.
"나는... 저번 전쟁에서도 이런 상황을 맞았소 내게도 권총을 주시오."
대통령 홍지영이 어둠 속에서 다시 음침하게 말했다. 그는 청와대가 기습받을 때 죽기 직전까지 몰렸고, 서울이 핵공격을 받을 때 국방부 건물이 붕괴해 그 안에 갇혀 죽을 뻔했다. 이제 또다시 위기를 맞았지만 결코 무섭지 않았다.
대통령은 국무총리와 주요 국무위원들 대부분이 지금 임시 종합청사로 쓰고 있는 논현동 석유개발공사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안심했다. 대통령이 유고상황에 빠지더라도 국정이 마비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참모본부가 붕괴되면 혹시나 일본에서 싸우고 있는 부대에 병참지원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기관총발사음이 길게 이어졌다.
- 야마토는 다섯 가지 신분을 갖고 있는 하나부사가 미덥지 않았지만 이 작전은 그가 지휘해야 했다. 이제 한국 내에 있는 일본 정보망은 전적으로 하나부사에게 일임되었다. 야마토는 이 작전이 성공하더라도 살아남을 것이라는 희망 같은 것은 품지 않았다. 작전에 참가하여 총기를 난사하고 있는 대원들, 전쟁 직전에 한국에 잠입한 자위대 제1공정단 병력들도 마찬가지였다. 조만간 아래쪽에 있는 한국군 경비부대가 대통령을 구하기 위해 들이닥칠 것이다.
- 12월 19일 10 : 24(현지 시각) 알류샨 열도 남방 460km 해상
일등 항해사 강신열은 갑작스런 보물찾기 놀이에 아직도 뭐가 뭔지 가늠할 수 없었다. 3,000톤급 석유탐사선 '블랙 골드'는 임무에 맞지 않게 대륙붕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에서 조산대를 뒤지고 있었다. 탐사선 선교에서는 석유개발공사 직원과 과학기술처 공무원, 대학교 자원공학과와 지질학과 교수 및 연구원들이 선장에게 지시를 내려 석유가 전혀 없을 만한 곳만 뒤졌다. 그리고 이런 민간 석유탐사선에는 웃기게도, 현역 해군 대령이 연구원들을 지휘했다. 그리고 이번 출항은 엄연히 군사작전이고, 이들이 맡은 임무는 수행 후에도 반드시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서명까지 했다.
- 환태평양 조산대 북서쪽 해구는 작은 지진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이다. 거대한 태평양판이 대륙과 만나 그 밑으로 들어가면서 깊숙한 해구를 만들며, 크고 작은 지진을 만들었다. 그 지진은 비단 이곳 근처뿐만 아니라 멀리 남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까지 그 영향을 미친다. 물론, 지진파가 그곳까지 전달되어 피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전혀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며, 그것은 수만 년 간 태평양 인근해안지역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찾았습니다! 여깁니다!"
탄성파를 조사하던 연구원 한 명이 기쁨에 겨워 크게 외쳤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디스플레이를 보며 환성을 질렀다. 디스플레이에는 다른 해저구조와 달리 단층이 엇갈리고 미세하게 진동을 발하는 활성단층이 분명히 나타났다.
- "여기서 해저지진이 난다고 일본에까지 피해를 주겠나?"
선장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일본 북쪽에서도 3,000km나 떨어진 이곳에서 지진이 발생한다 해도 일본에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그럼 해일을 일으켜요? 해일도 좀 가까운 데서 지진이 나야 해안에 도착하겠죠."
강신열은 도대체 왜 이런 도깨비놀음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 쓰나미(津波)는 해저지진이나 화산분출로 생긴 에너지가 해표면을 타고 시속 1,000km 가까운 속도로 퍼져, 그동안 농축된 에너지가 해안에 도착하고 나서야 갑작스럽게 엄청난 높이의 파도를 발생시키는 현상이다. 지금까지 관측된 쓰나미의 최고 파고(波高)는 30미터에 불과하지만, 그 파괴력은 일반적인 해일보다 훨씬 강하고 광범위하다. 워싱턴 인근 지역을 고고학과 지질학을 동원해 조사한 결과, 수천 년 전에 발생한 30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쓰나미가 워싱턴 부근을 휩쓸어 이 지역 삼림지대를 초토화시킨 증거가 발견되었다.
- 소문을 들었다. 중국의 침공에 맞서 중국인만을 골라 죽이는 세균을 만들거나 화학약품을 수원지에 풀어 모두 죽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과 유전자 배열이 거의 비슷한 일본인에게는 인종특화무기를 쓰기 어려웠다. 강신열은 인종특화무기나 쓰나미 같은 자연재앙을 일으키는 환경무기나 마찬가지로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너무 비인도적이야. 강경파 장군들과 과기부장관이 시킨 모양일세."
"무섭군요."
"그래. 저들은 사상 최대의 쓰나미를 발생시켜 일본 동해안을 직격 할 작정이야. 이게 왜 군사작전인지 이제 알겠지?"
- 벽면에는 똑같은 호출번호가 벽지로 도배하듯 가득 채워져 있었다. 새로 가설한 유선전화로 국방부와 정보사단 등 여기저기 상황을 전달하던 최세용은 별생각 없이 번호를 눌렀는데, 의외로 사용 중인 호출번호라서 혹시나 하고 이쪽 번호를 입력하고 호출했던 것이다. 최 병장은 호출기 주인이 부모나 다른 가족이면 여기 쓰러져 있는 사람이 전사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애인이면 전사소식을 전해주면서 혹시나 건수가 걸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벽면 가득 호출번호를 쓸 정도면 당연히 가족은 아닐 테고, 애인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최 병장이었다.
- 경비실 안에 절명해 있는 주검을 잠시 살피다가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이 창 밖을 보며 외면했다. 남의 죽음이었지만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국내에서도 이렇게 전사하는 사람이 생기고, 이럴 경우 재수 없는 병사만 죽는다고 생각했다. 최 병장은 경비실이라는 것이, 특별한 상황이 생기면 적을 막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써 적의 침입을 아군에게 알리는 데에 있다고 자조했다.
- "그럴지도 모르지."
최 병장은 제대일이 가까워지자 분대장직을 예 병장에게 넘겼다. 그러나 제대 직전에 중국이 침공하고, 다시 제대하려니까 이번에는 일본과 전쟁이 터졌다. 최 병장은 재수가 없다고 치부했지만, 정말 재수 없는 사람은 최 병장과 거의 비슷한 상황이었으면서 이 자리에 죽어 넘어진 박민기 병장이었다.
- 12월 20일 07 : 42 도쿄도 하치노지(八子) 시
자위대 제1교육단 잔존 병력은 하치노지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어젯밤 8시에 도쿄에 도착한 이들은 잠시 휴식을 취했고, 그 휴식이 끝나기 무섭게 이곳 하치노지에 진지를 치고 혹시 시로 진입할지 모르는 한국군에 대해서 방어선을 형성해 방어하라는 명령이었다. 이곳에는 이미 방어를 위해서 6사단 21연대전투단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이들은 도시 중심부의 우에노마치(上野町)에서 혼마치(本町) 일대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 지역으로 이어지는 철도노선과 20번 국도가 이곳을 교차하면서 통과하기 때문인데, 한국군 기계화부대의 주 진격로로 예측되어 동부방면대 총감부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결국 1교육단은 이들 21연대전투단 후방에 대기하면서 2차 방어선을 구축하게 되었다. 전투병력을 갖추고는 있지만 실제 전투능력이 의심스러운 교육부대인 그들은 엄밀히 말해서 21연대전투단의 예비병력으로 편입된 셈이다.
- 12월 20일 09:45 아이치현 도요타(豊田) 시
한국군 점령지역에 남아 패잔병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은 부대는 일본 원정군에서도 특이한 존재인 육군 제159 기계화보병대대였다. 말이 기보대대이지, 실제로는 전차 1개 소대, 155밀리 자주포 1개 포대, 105밀리 견인포 1개 포대와 K-200 장갑차에 탑승한 2개 중대가량의 보병과 공병중대를 예하에 둔 특이한 편성이었다. 소속도 일본 원정군 사령부 직할부대였다.
"발사!"
대대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포대장이 지휘차에서 발포를 명령하고, 자주포 4대와 곡사포 4기가 동시에 포를 발사했다. 목표는 거의 도시처럼 넓게 퍼져 있는 도요타 자동차 공장이었다. 원래 도요타 시에 자동차 공장이 있어서 도요타 자동차가 된 것이 아니라, 최근에 시민과 시의원들이 주도하여 시 이름 자체를 도요타로 개명한 것이다. 지금 이 대규모 공장에 자위대 패잔병 몇 명이 숨어 들어가 이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포격을 퍼붓고 있었다.
- 무너진 건물 잔해를 치우고 새로 공장을 짓는 것보다는 다른 곳에 짓는 것이 싸게 먹힐 정도로 파괴는 철저했다. 이것이 제159 기계화보병대대의 임무였고, 이는 어쩌면 일본 원정군 전체 부대의 임무 가운데 절반에 해당하는 중요한 임무였다.
- 12월 20일 15 : 20 대마도 북동쪽 80km 해상
청해진함 후방에서 잠수함 최윤덕함이 접근했다. 가까워지는 두 배의 갑판에 승무원들이 올라와서 북적거렸다. 최윤덕함을 청해진함의 좌현에 붙들어 매려는 것이다.
"전진 미속, 우현으로 조타각 2도. 주의하라. 거리는 이제 200미터 남았다."
잠수함 사령탑 위로 올라온 곽일준 소령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는 비좁은 사령탑 위에서 사령실과 연결되는 송신기를 들고 세세한 조함 지휘를 해야 했다. 항구 접안보다 해상에서 배들끼리 접안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지금처럼 파랑이 약간 일 때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
6일 만에 떠오른 동해의 공기는 맑다고 느끼기에는 너무 찼다. 잿빛으로 컴컴한 하늘에서는 가느다란 눈발이 내리는 데다 시야도 깨끗하지 못했다.
- "기관 정지. 좌현으로 조타각 1도 갑판팀, 확실히 하는 거다!"
곽 소령이 사령실에 미세한 조정을 명령하고 바로 함수 쪽에 위태롭게 대기하던 갑판요원들에게 소리 질렀다. 잠수함의 둥그런 갑판 위에서 미끄러지면 그대로 차가운 바다에 빠진다. 난간도 없기 때문에 갑판 요원들은 로프를 들고 발을 넓게 벌린 후, 청해진 함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한국 해군이 장비한 209급 잠수함이 장보고급이란 그룹명을 갖고 잠수함 구난함이 통일신라시대에 장보고의 해상제국이 위치했던 청해진이란 이름이 부여된 것은 의미심장한 이름 짓기였다. 심해에 좌초한 잠수함 승무원을 구조하기 위해 심해 잠수정과 각종 구난장비, 수색장비를 갖춘 청해진함은 첫 번째 실전 임무로 최윤덕함을 맞이했다.
"계류!"
최윤덕함의 갑판 요원이 커다란 복창소리와 함께 총류탄 발사기를 쏘자 묵직한 쇠고리가 청해진함으로 날았다. 사령탑 뒤쪽에서 발사된 쇠고리도 로프를 끌며 청해진함의 갑판 위에 떨어졌다.
"조심해! 천천히, 야 임마! 로프에서 발 떼! 죽고 싶어?"
곽일준 소령이 무심코 케이블을 밟고 있던 수병을 향해 고함을 지르자 놀란 백 상병이 황급히 발을 뺐다. 풀려나간 로프 끝은 강철제 계류용 케이블에 이어져 있었다. 가느다란 로프를 계속 잡아당기면 강철제 케이블을 갑판 위의 고정장치에 걸고, 최윤덕함은 청해진함에 완전하게 밀착하게 된다.
-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곽일준 소령이 쳐다보자 난간에 정윤철 소령이 나와 있었다.
"어? 선배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자네 무사했군. 함장은?"
소문난 주먹패인 정 소령은 고된 잠수함 근무로 정신감정에서 탈락한 뒤 지원임무로 보직이 변경되었지만 한때는 잘 나가던 잠수함 승무원이었다. 몇 달씩 집을 비운 덕분에 다른 남자를 사귄 아내에게 소송까지 걸어서 이혼했지만, 많은 상처를 껴안기도 했다.
"함장실에 계십니다. 근데 올라갈 수는 없겠는데요. 빨리 준비나 해주세요, 선배님."
곽 소령이 서둘러 못을 박았다. 아직도 잠수함에 미련이 많은 정소령이 이것저것 집요하게 물어볼까 겁났다.
- "알았어. 안 물어본다고. 대신 초특급으로 준비를 해주지. 야. 곽소령. 배를 좀 더 띄워야겠다. 아래쪽 어뢰발사관이 물에 잠겼잖아!"
"오케이. 주문대로 해드리겠습니다. 빨리 배달해 주십쇼!"
"어뢰 여덟 발에 하픈 두 발. 빨리 배달해 드리지. 자장면은 안 먹을 거야? 연료상태는 어때?"
리스트를 펴든 정 소령은 깔끔하고 신속한 성격이었다. 아마 어뢰와 하픈을 보급해 주면서 직접 잠수함을 다루고 싶은 아쉬움을 느낄 것이다. 언젠가는 정 소령도 잠수함에 복귀해야 했다. 지원 임무를 맡기에는 아까운 사람이었다.
- 출항 시 탑재했던 연료전지 구동용 액화산소와 액화수소를 보충받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청해진함이 갖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바다 위에서 쉽게 할 작업은 아니었다. 비점이 영하 254도인 액화수소는 자칫 잘못 다뤘다가는 엄청난 폭발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 "보급 시작합니다. 어뢰실에 연락해 두었습니다. 바로 어뢰장진부터 합니다. 후갑판에 디젤유 보급도 지시했습니다."
이미 함수 쪽으로 장진 크레인에 매달린 SUT 어뢰가 내려가는 중이었다. 미국이나 일본 잠수함들은 어뢰를 함수 해치를 통해 어뢰실로 운반할 수 있지만 발사관이 앞부분에 모여 있는 최윤덕함은 발사구로 어뢰를 장전한다.
[날래 서두르기요. 30분 안에 끝낼 수 있갔소?]
- 30분에 어뢰 8발을 장전하는 작업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크레인에 걸려 내려오는 첫 번째 SUT 어뢰 뒷부분을 발사관 입구에 맞추자 보트를 타고 어뢰발사관 옆에서 미리 대기하던 어뢰실 요원들이 익숙한 솜씨로 어뢰를 밀어 넣으며 고정 케이블을 벗겨냈다.
몇 차례 부산을 떤 후에 어뢰와 하픈을 모두 장착하고 최윤덕함은 청해진 함과 연결된 케이블을 풀어냈다.
"갑판입니다. 모든 작업 완료했습니다. 잠항 준비하십쇼."
곽 소령이 모든 작업이 마무리된 것을 확인한 후 발령소로 이어지는 인터폰을 들고 보고했다.
- 곽일준 소령이 재빠르게 해치로 미끄러져 들어가려는 순간 위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야 임마! 인사도 안 하고 가는 거냐?"
정윤철 소령이었다. 씨익 웃는 얼굴 밑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오른손이 멋졌다.
"담에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짬뽕으로... 무사하십시오, 선배님!"
"알았다. 우리 청해진이 최 상좌의 배는 구조하고 싶지 않다고 전해주게. 건투를 빈다."
악담인 듯 하지만 최윤덕함이 청해진함의 구조잠수정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침몰이나 좌초를 의미했다. 생각만 해도 오싹한 ...
- 12월 20일 23 : 55 가나가와현 아츠시 북동쪽 4km
"좌표 입력. 사격준비 완료했습니다."
"좋아. 사격개시!"
18량의 K-9 자주포가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다. 장거리사격용 특수탄인 BB탄, 즉 베이스 블리드 포탄을 장전한 이들의 사격목표는 조금 전부터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마치다시 역전 일대였다. 관측부대도 현지에 있고 K-9의 사격통제 시스템은 현재 기준으로 수준급에 속하므로 사격정밀도는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18문의 포가 계속해서 사격을 퍼부었다. 포대는 10초 사이에 포탄 3발을 버스트 사격으로 한 점에 날렸다. K-9가 자랑하는 단독 TOT 사격이었다. 포 1문이 포탄 3발을 동시에 한 지점에 착탄 시킬 수 있는 포는 세계에서도 드물고, 그중에는 한국의 K-9 자주포도 있었다. 그 매서운 펀치력이 한곳에 집중적으로 퍼부어졌다.
- 12월 20일 23 : 56 도쿄도 마치다시, 츠쿠시노
갑자기 들려온 엄청난 폭음에 두 사람이 깜짝 놀라 자전거를 세웠다. 포탄이 폭발하는 요란한 소리가 바로 가까이 5백 미터도 되지 않는 곳에서 울려 퍼졌다. 남서쪽에서 커다란 불길과 화염이 솟구치는 것도 보였다. 한국군이 도시에 포격을 시작한 것이다. 마치 폭죽이 터지는 것 같은 빠바방하는 소음이 들렸다. 동시에 수십 발이 터지는 것 같은 폭음이었다.
"한국군이 도시를 다 날려 버리려고 작정한 모양인데?"
히카루는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 말괄량이를 데리고 여기서 빨리 빠져나가 적당한 곳에 숨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빨리 여길 벗어나자. 금방 불바다가 될 거야."
- "이제 슬슬 우리 동부방면대 총감부도 후퇴할 때가 됐습니다."
막료장의 말에도 총감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총감부 건물에 끝까지 남아 있던 다른 자위관들도 지금 상황에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철수를 진언한 막료장조차도 그런 점에서는 다른 자위관들과 차이가 거의 없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이나 총성 때문에 유리창이 끊임없이 가볍게 흔들렸지만 그것조차도 오히려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것처럼 느꼈다. 이제는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거나 포로가 될 일만 남았다.
- 총감은 아무 말 없이 주머니에서 작은 권총을 꺼내 들었다. 독일과 스위스 총기회사의 연합체인 지크-자우어(Sig-Sauer)사에서 개발한 P-220 권총의 일본 국내 라이선스인 이 권총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신품이었다. 사실 총감은 이 권총을 사격해 본 적이 없었다. 나이가 사십을 넘은 뒤로 그는 총을 쏘지 않고 단지 펜대만 굴렸다.
"권총 쏘는 법이야 잊지는 않았지만, 45구경하고는 잡는 맛이 다르군 그래. 그건 젊어서 많이 쏴 봤거든. 이놈 쏘는 맛은 얼마나 차이가 날까? 막료장! 자네는 아나?"
"89식 소총보다는 훨씬 쓰시기에 좋을 겁니다."
막료장은 그렇게 대답하고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 역시 권총을 사용한 경험은 별로 없었다. 그가 웃자 총감도 따라 웃었다. 적막함이 감돌던 총감부 지휘실에 약간 생기가 돌았다.
-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총감은 권총에 탄환 9발을 장전하고 있었고 예비 탄창 따위는 없었다. 총감부 안에서 근무하는 다른 자위관들도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얼마나 잘 싸울 수 있을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싸우다 죽는 것이다.
폭음과 기관총의 속사음이 건물 주변과 실내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한국군이 건물에 병력을 투입하기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각급 부대와 통막에 통신 넣어, 동부방면대 총감부 지금 이 시간부터 기능정지. 이후의 현지부대 지휘통제는 통막에서 맡아줄 것. 알았나?"
"알았습니다. 지금 타전합니다!"
- 12월 21일 00 : 21 도쿄도 신주쿠 이치가야, 자위대 동부방면대 총감부
"복수다! 싸그리 날려 버려!"
15사단 수색대대장 김정민 중령이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 주먹을 내질렀다. 그의 대대도 8사단 수색대대와 함께 도쿄 제압작전에 투입됐다.
8사단 수색대대는 롯폰기로, 15사단 수색대대는 이치가야로 날아가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들은 본국에서 급거 투입된 특전사 병력을 앞세우고 이곳 동부방면대 총감부 건물 앞까지 뛰어든 것이다. 특전사 병력은 건물 바로 위에서 호버링하는 헬리콥터에서 라펠링을 하면서 총감부건물 옥상으로 바로 뛰어내렸다. 철(凸) 자 모양으로 우뚝 솟은 구 일본 육군성 건물의 좌우 낮은 부분에 각각 뛰어내린 특전사 병력이 옥상의 비상구를 C4폭약으로 날려 버리고 건물로 뛰어드는 동안, 15사단 수색대대원들은 건물 바로 앞에 뛰어내려 주변을 제압했다.
- 방위청 경비부대인 히노키마치 경비대장 오마에 일등좌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총리대신, 각 성의 대신과 고관들, 그리고 현재 자위대의 지휘부 전체가 이곳 방위청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군이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아군에게 심리적 타격을 주려는 목적에서 방위청을 강습하려 한 것일까?
오마에 일등좌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하 병력 중에서 남은 것은 겨우 2개 소대. 이 병력으로 넓은 방위청 청사 전체를 방어할 수는 없었다.
"일단 각료들을 헬리포트로 모시도록. 거기에서 기다리시게 했다가 헬기가 도착하는 대로 태워서 모셔 가도록 하세. 다음엔 우리 차례고."
이토 의장이 느긋하게 말했다. 당장 한국군이 닥쳐오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한 모습에 육막장이나 해막장은 기가 막혀 쳐다보기만 했다. 어느새 의장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담배 한 대들 피우시겠소? 이게 살아서는 마지막 담배일지도 모르는데 말요."
저 노인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살고 싶은 생각이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항공막료장 야마다 공막장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면서 권총을 뽑아 들었다. 언제 이것을 써야 할지는 모르는 노릇이었다. 다만, 그 정도 지위의 고급간부에게 권총은 전투용 무기가 아니라 자살용 장비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 12월 21일 00 : 32 도쿄도 시부야 롯폰기
방위청 근처에는 30대의 헬리콥터가 안심하고 내릴 만한 마땅한 넓은 장소가 별로 없었다. 당초 예측대로 방위청 청사 건물 지붕이 텅 비어 있었다면 헬기가 차례로 방위청과 주변 건물 옥상에 병력을 내려놓으면 될 일이지만, 지금 방위청에는 자위대 전투부대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격추당한 그 헬기는 특전사 병력이 타고 있었단 말야! 다른 헬기는 떨어져도 좋지만 그 친구들은 살았어야 했는데, 어떤 미친 새끼가 금쪽같은 그 애들을 총알받이로 세운 거야? 누가 그런 명령 내렸어. 내가 내렸어? 아니잖아! 이 바보 돌대가리 새끼야!]
"죄송합니다. 제 판단착오였습니다."
수색대대장이 통신기에 대고 죽어라고 빌었다. 방위청 청사를 접수하기 위해 미리 철저하게 훈련받은 특수부대원들이 탄 헬리콥터가 조금 전에 격추당한 것은 엄연히 이들을 선두에 세워서 진입하도록 명령한 8사단 수색대대장 책임이었다. 통신기에서 8사단장 이규환 소장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그 친구들 없으면 너희 대대 힘으로 해. 알았어? 방위청 청사를 30분 이내에 점령하란 말야!]
"알겠습니다. 30분 이내에 점령하도록 하겠습니다."
- "대대장님이 허벌나게 욕먹으시는구만."
권경준 병장이 킬킬대며 웃었다. 포성과 총성이 아련히 들려오긴 했지만 그래도 밤의 도시는 고요했다. 피난민도, 겁에 질린 민간인도 없는 거의 무인지경인 대도시 도쿄였다. 그 속에서 대대장과 사단장의 목소리가 요란하게 주변 대기를 뒤흔들었다.
-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총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남은 것은 부산히 움직이는 한국군 뿐이었다.
"전쟁이 끝난 거냐구."
아무도 말하려 하지 않았다. 이따위 전쟁, 더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들 어떻게든 빨리 끝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싸우란다면, 난 절대 안 싸울 거야. 총살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야."
- "게다가 스미다가와, 아레카와에 있는 다리들도 모두 폭파하지 못했습니다. 한국군은 언제라도 두 강을 건널 수 있고 그런 다음에는 우리가 의지할 만한 자연적 장애물이 없습니다. 개울 정도 되는 강들이 있지만, 모두 가교전차나 부교 정도로 해결이 가능합니다. 지금은 겨울이라..."
강은 전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형요소다. 강을 건넌다는 것은 공격군에게 있어서는 가장 취약한 순간이고, 방어군에게 있어서는 적 공격세력을 최대한 약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이제 일본 육상자위대에게 있어서 의지할 만한 특별한 지형지물은 없었다.
자위대는 전술 선택을 잘못했다. 도쿄 서부를 내준 뒤에도 도쿄동부에서 항전할 수 있도록 다리를 폭파하고 강변을 따라 병력을 배치해 두었어야 했다.
- "할 수 없지. 후퇴하는 부대의 접수는 포기합시다. 그리고 일단 적의 진격예상지점 일대에 있는 다리는 최대한 폭파하도록 합시다. 반격 때에 필요하긴 하지만, 당장 시간을 벌려면 달리 방법이 없소."
- "피는 멈췄지만, 이대로 두면 곪을까 봐 걱정이야. 집에 항생제도 없고 다른 것도 없는데..."
- 섭섭했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일단 71연대가 빨리 전개해서 언제 가해질지 모를 한국군의 공세에 대비해야 했다.
지금 71연대를 싣고 온 기차 뒤에는 홋카이도의 4개 사단을 모조리 실은 기차들이 쉬지 않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철도에서 모두 내리기 전에 한국군이 공격해 오면 모든 것이 만사 수포로 돌아갈 것이 뻔하므로, 이들의 임무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북부방면대 총감부의 계산에 의하면, 모든 부대가 하차해서 전투준비를 갖추는 데는 약 12시간 정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이론상의 최고속도였다. 지금도 한국군 특수부대는 계속해서 철도를 공격했고, 때문에 기차는 계속 연착하고 있었다.
- 12월 21일 04 : 35 혼슈 아키타현 아키타시 서쪽 270km 해상
"동무들. 건투를 빕네다. 꼭 성공할 기야요."
마지막 준비작업으로 바쁜 승조원들 사이에서 오성천 상좌가 김오한 소좌에게 힘주어 말했다. 잠수함 모선 동전애국호에 탑승해서 끝까지 따라온 오 상좌였다. 인민무력성 정찰국 해상처 소속 고급간부인 오성천이 잠수정에 탑승하는 요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다 해준 셈이었다.
"부국장 동지, 수고하셨습네다. 기필코 임무를 완수하갔습네다."
김오한 소좌가 거수경례를 붙이고 재빠르게 잠수정 위로 올라탔다.
- 수중배수량이 110톤밖에 안 되는 유고급 잠수정은 길이 20미터에 무장은 없는 침투전용의 소형잠수정이다. 90년대에 건조된 상어급이 등장하기 전까지 북한의 특수 작전용 잠수함의 주력이었던 유고급 잠수정에 다시 탑승한 것도 오랜만이었다. 이 잠수정이 모선인 동전애국호에 격납된 채 이곳까지 온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일본 측 초계기에게 발견될 경우 즉시 이순신함의 전투기들이 구원하러 오기로 약속했었지만 다행히 아무런 문제 없이 목표해역에 도착한 것이다. 이순신함의 조기경보기 E-2C 호크 아이와 수호이 전투기들이 무리하게 전방으로 투입되어 전투 공중초계를 확실히 해준 덕분이었다.
"동무들에 귀환작전도 내래 직접 지휘할 기야요. 꼭 성공해서 다시 만납세다. 동무들의 건투에 우리 인민군 해군의 존망이 달려 있시요. 자, 이제 출발하기요."
동전애국호와 유고급 잠수정에 연결된 계류용 로프를 오 상좌가 직접 풀렀다. 그러자 디젤엔진을 가동한 잠수정 네 척은 스크루를 역회전시키며 동전애국호의 후방 개폐 램프를 향해 미끄러져 내려갔다. 서서히 잠수를 시작한 잠수정들은 동전애국호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스노클 심도로 잠수를 시작했다. 잠수정의 디젤엔진을 가동하기 위해 흡배기관만을 수면 위에 살짝 내려놓고 나머지 선체는 이제 완전히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 한국으로서는, 특히 북한의 특수부대가 가담하는 작전으로 벌써 네 번째였다. 그리고 이번 작전이 성공한다면 해상자위대의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을 것이었다. 주위에 다른 함정들도 몇 척 있었다. 해금화호, 송림호와 충성 1,3호에서 3~4척씩의 유고형 잠수정들이 빠져나온 다음 모두 물속에 스노클만 내놓고서 최대속도로 동쪽을 향했다. 짙은 어둠 속에서 이들 잠수정을 발견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발각되지 않아야만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다.
- "자, 돌아간다. 침로 2-5-0으로 날래 빠져나가자. 후방문 폐쇄하라!"
마지막으로 잠수를 마친 유고급 잠수정을 확인한 다음에야 오상좌가 함교에 명령을 내렸다. 선체가 서서히 오던 길로 선회를 시작하고 동전애국호의 후부 문짝이 닫혔다. 작전이 성공한다면 오던 길만큼 긴장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상좌는 그제서야 담배를 꺼내 물었다.
- 12월 21일 05 : 24 도쿄도 치요다쿠, 나가다쵸
한국 육군 제8사단 23연대는 이 전쟁에서 가장 영예로운 부대가 될 것이 확실해졌다. 23연대의 애초 임무는 롯폰기로 진출해서 사단수색대대를 구원하고, 그 뒤로는 빠른 속도로 동진해서 스미다카와, 아레카와를 도강하거나 최소한 강 서안에 포진하고 도쿄 동쪽으로 진출할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롯폰기에 진출해서 8사단 수색대대와 합류한 김에 아예 정북으로 진로를 틀어 버렸다. 그곳은 치요다쿠로, 이곳의 남단인 나가다쵸에는 일본 국회의사당을 비롯, 수상관저와 총리부가 위치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볼 수 있는 가장 고풍스럽고 우아한 서양식 건물들이 모인 곳이다. 덤으로 바로 옆동네인 가스미가세키에는 일본의 주요 행정부서가 모두 몰려 있었다. 건설성, 법무성, 외무성, 대장성, 문부성, 통산성, 후생성, 농수성, 그리고 우정성 등, 방위청과 방위시설청 같은 특수한 총리부 직속기관을 제외하면 모든 행정부 청사가 이곳 가스미가세키에 밀집되어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이 모든 정치적, 행정적으로 중요한 기관들을 모두 합친다 하더라도 거기서 4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오래된 대형 건축물 하나의 가치에는 절대 미치지 못했다.
400미터 북쪽, 치요다쿠의 한가운데에는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3천 년의 일본 역사 전 기간에 걸쳐서 일본의 형식적 군왕으로서 존재했던 자, 천황의 궁전인 고쿄(皇屋)가 있었다.
- 지금의 장소에 일본의 황궁인 고쿄가 들어선 것은 겨우 17세기의 일이다. 16세기,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까지는 교토에, 그 전인 14세기 초까지는 지금의 도쿄에서 상당히 가까운 가마쿠라에. 그보다 앞서서는 그야말로 수십 년에 한 번꼴로 일본 전국의 도시들을 떠돌아다닌 일본 왕실의 역사는 파란만장했고, 이곳 도쿄, 당시로서는 에도(江戶)에 천황이 자리 잡은 뒤부터야 안정적으로 왕실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 일본 왕실이 역사에서 처음으로 주역이 된 것도 이곳 도쿄의 에도성에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에도였던 이곳에서 메이지 천황과 토막 인사들은 일본의 개혁과 현대화를 위한 대혁명을 일으켰고, 그 뒤 이곳은 그야말로 에도 시대나 그보다 앞선 모든 시대보다도 몇 배나 더욱 성스러운 곳이 되었다.
일본의 살아 있는 신인 천황이 머무는 곳인 고쿄는 성스럽다는 말만으로는 도저히 묘사할 수 없는, 절대 그 어느 외적도 범접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미국이 일본을 점령했던 시기에도 이곳만큼은 점령군인 미군에게도 출입제한 구역이었다. 그만큼 이곳은 일본인에게 신성불가침의 장소였다.
- 그 짙은 어둠 속에서 고교의 불빛은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도쿄의 다른 곳들과는 달리 단전이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단전이 되었든 안 되었든 간에 등화관제도 하지 않다니! 불야성을 이룰 정도는 아니었지만 전시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전시라 해도 등화관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고쿄다. 태평양전쟁 당시에도 미군은 고쿄 폭격만은 철저히 금했고, 그 뒤로 고쿄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위협을 받지 않았다. 심지어 천황제 폐지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던 시위대도 고쿄 앞에서만큼은 절대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고쿄는 공격에 대비하지도 않는다는 불문율 같은 것이 생겼다. 고쿄 주변의 모든 가로등은 도쿄 전체에 전기공급이 중단되어 꺼져 있었지만, 자체발전장치가 갖춰진 것이 분명한 고교의 모든 건물 창문에서 밝은 불빛이 새어 나왔다. 그런 배경을 알 리 없는 우 대령은 불안감을 느꼈다.
"적이 매복하고 있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저 녀석들 정신이 있는 건가?"
- 당연한 소리! 말할 필요도 없었다. 세계 최초로 일본의 왕궁을 점령하는 부대가 되는 영광을 다른 부대에게 넘겨줄 수는 없었다.
일본 왕궁은 수도인 도쿄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곳이며, 일본을 정복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세계에 공표할 상징적인 곳이기도 했다. 군인으로서 그의 자존심으로서는 도저히 다른 부대에 양보할 수 없는 곳이었다.
- "어차피 왕궁 안에서 전투가 벌어질 일도 없고 전투도 거의 끝나가니까, 남은 중대병력은 대오를 갖춰서 질서 정연하게 걸어 들어간다. 그런데, 왕궁 정문은 어느 쪽인가?"
"동쪽입니다. 마루노우치(丸內), 도쿄 철도역 쪽에 해자를 건너 궁 앞 광장으로 갈 수 있는 다리가 있습니다. 서쪽에도 다리가 있지만 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진짜 정문은 동쪽입니다."
일본 여행을 온 적이 있다는 연대 정보참모가 말했다. 우 대령이 웃으며 가슴을 폈다. 이제 그의 일생에서 가장 명예로운 순간이 눈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가슴이 떨릴 정도로 기뻤다.
"그럼 그쪽으로 가자구. 모두 차에서 내려서 행군한다! 국기하고 연대기, 사단기도 준비해!"
- 12월 21일 05 : 24 도쿄 왕궁(皇居)
"한국군이다."
궁내부 관리실장 다무라 기요마사는 고쿄 안으로 질서 정연하게 진입해 들어오는 한국군 부대를 바라보면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궁내부 직원 중 고쿄 내부에 남아 있는 사람은 다무라를 포함해서 모두 10명이었다. 주요한 인원과 기자재, 문서류는 이미 어제 도쿄 철수를 마쳤고, 이들은 고쿄를 한국군에게 넘겨주는 문제로 여기에 남아 있었다. 그 임무는 한국군이 도쿄를 점령하고 고쿄를 접수하는 과정에 있어서 고쿄의 주요 시설이 파괴되거나 하지 않도록 한국군에게 요청하는 것이었다. 또한 한국군이 허용한다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곳을 관리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물론 두 가지 모두 확실히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했다. 일본의 상징이며 역사인 이곳이 전쟁 때문에 파괴당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 선두에서 자위대와 교전한 1소대장이 보고하자 중대장이 씩 웃었다. 이동 중에 갑자기 마주친 적을 기습한 것치고는 전과가 좋았다. 1소대장이 의기양양하게 중대장에게 농을 걸었다.
"귀를 잘라다가 목에 걸까요? 적 절반은 우리 분대지원화기 사수가 잡았습니다."
"크... 우리가 베트콩이야?"
"그럼 임진왜란 때 왜군들처럼 귀하고 코를 잘라서 소금에 절이면 어떨까요? 좀 더 모아서 항아리에 담아 대통령님께 바치는 겁니다."
"농담 그만하고 빨리 전과 보고한 다음 이동하자구. 우리 임무는 여기서 죽치고 적이나 잡는 게 아니야.”
- 12월 21일 06 : 00 도쿄도 치요다쿠 나가다쵸
국회의사당의 거대한 윤곽은 아직도 어둠에 잠겨 또렷이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도쿄의 거의 모든 구역이 현재 단전 상태이기 때문에, 자체발전기를 가동시킨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그야말로 전 도시가 어둠에 묻혀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한국군 뿐이었다.
- MT-LBU 지휘장갑차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임시로 배치된 초병들이 장갑차를 향해 받들어 총을 하며 구령을 붙였다. 차체 전면에 붙은 외눈박이 헤드라이트를 켠 채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장갑차 뒤로 K-200 장갑차와 통신차량이 바짝 붙어 달려왔다. 통일한국군 일본원정군, 그중에서도 도쿄 공략을 전담한 도쿄군단 군단장의 행차가 분명했다. 혼슈 동부 일대에서 볼 수 있는 구소련제 장비는 군단장의 전용 지휘차가 유일했다.
- 장갑차는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멈췄다. 따라서 멈춘 K-200에서 먼저 중무장한 인민군들이 뛰어내리고, 그들이 나와서 경계 자세를 취한 다음에야 MT-LBU의 후부 해치가 열렸다. K-200이나 M-113과 같이 자동으로 열리는 문이 아니라 안이나 밖에서 여는 구식 수동문이 끼익 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리자, 그 속에서 키가 작은 인민군 장성이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군단장님."
8사단장 이규환 소장과 23연대장 우병철 대령이 군단장 허철화 상장을 맞았다. 함께 MT-LBU에서 내린 참모장과 부관은 두 사람을 보면서 어쩐지 주객이 전도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건장한 체구의 우 대령이나 8사단장 이 소장 모두 군단장보다 키가 20센티는 더 컸기 때문이다.
"원래는 15사단이 여길 점령 했어야 했는데, 8사단이 점령을 했구려.”
"급히 진격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군단장님."
사단장이 그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군단장 허 상장은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면서 크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화가 잔뜩 난 것 같았다.
"기래, 기래서 15사단이 돌파 못한 지역 바로 뒤를 통과하면서 전투 한 번 안 치렀다는 거요? 당신들이 그냥 통과를 하는 바람에 15사단은 겨우 한 시간 전에야 전선을 돌파했단 말이요!"
- "정신 차리기요! 8사단의 원래 임무는 도쿄 동부로 빠르게 전개해서 스미다카와, 아레카와의 다리 모두를 장악하는 거 아니었소? 기런데 여기서 지지부진이라니, 잘들 하는 노릇이외다!"
"..."
"15사단이 할 일은 15사단에게 맡기든가, 15사단을 도와줄 거면 15사단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게 도와주든가. 동지들이 15사단 할 일까지 다 맡아하면서 15사단은 15사단대로 고생하게 내버려 두고! 기러니 일이 다 헝클어지고 있지 않소?"
결국 사단장도 연대장도 잔뜩 얼어붙어서 꼼짝 못 했다. 군단장은 혼자서 열을 퍽퍽 내고, 함께 따라온 참모들도 모두 그 자리에 굳어진 채로 가만히 있었다. 허 상장이 이렇게 화를 내는 광경은 난생처음 보는 것이다.
"일단 죄 디나간 일이니 할 수 없다 치더라도 이렇게 노닥거리는 꼴은 내 못 보갔소. 이런 데는 기냥 버려요. 기냥 버려두고, 날래 진격해설라무네 최단시간 내에 도쿄 동쪽으로 진격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도록 하기요. 다리를 확보하고 땅크를 건너 보낼 준비를 하란 말요! 방위청하고 적 중앙지휘소 근처에만 소탕부대를 조금 남겨 놓고, 나머지는 전부 강을 건너 보내시오!"
"알겠습니다!"
사단장은 풀이 죽었고 23연대장은 아예 실망한 나머지 얼굴이 거의 울상이 되었다. 일본 왕궁을 점령하고 주요 정부기관들을 피해 없이 접수했으므로 어느 정도 치하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가 못했다. 돌아온 건 질책뿐이었다. 부대를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았다고 화를 내는 군단장 때문에 모두 기분을 잡치고 말았다.
그러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멋대로 명령을 위반한 때문에 차후의 작전에 상당한 장애가 생기고 말았다.
- [적기 내습!]
한국 공군에게 있어서 F-5는 이제 퇴물 중의 퇴물로 전락해 있었다. 비록 레이더를 개장하고 HUDWACS를 추가한다든가 해서 업그레이드도 했지만 아무래도 기골이 낡아 버린 전투기는 이제 더 이상 공중전에 투입할 수는 없었다. F-4와 마찬가지로 F-5도 공중전 임무에서 거의 해제되다시피 했다. 대신 F-5의 최초 개발 시에 맡겨졌던 임무와 일치하는 대지공격 임무에 집중 투입되었다.
"목표 발견. 전차 10대 이상에 트럭이 한 40대. 멋진 먹잇감이다."
[무장이 모자라겠는데요? 안 그렇습니까, 백호?]
- 그의 콜사인이 강백호가 된 것은 강 씨라는 이유와, 그의 전투기가 F-5F 타이거-Ⅱ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한국 공군의 F-5들은 공통적으로 기수 좌우측에 백호의 머리를 두 개씩 그려 넣는 전통이 있었다.
"무장이 모자라면 기관포로 갈겨라. 기관포탄까지 모자라진 않을 거다. 사이드와인더도 쏠 테면 쏘고, 우리 비행단에 사이드와인더는 넘치니까 말이야. 그럼, 전기 병기사용 자유 공격 개시!"
농담처럼 말하면서 편대장이 조종간을 밀었다. 기체가 급강하 자세로 들어가고, 후방석의 화기관제사가 전투기에 탑재하고 있는 AGM-65D 매브릭의 목표물을 찾기 시작했다. 행렬 맨 뒤에 위치하고 있던 대공레이더 차량이 F-SF의 사격통제장치에 의해 추적되기 시작했다. 목표물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열파까지 감지하는 AGM-65D의 시커가 목표물의 형상을 확실히 잡았다.
[목표 고정 완료!]
- [곧 아군기들이 그쪽 상공으로 간다. 접전하지 말고 2-8-0으로 회피하라!]
조기경보기가 F-5 전투기들의 안위를 걱정하며 바다 쪽으로 빠지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바다에 도달하기도 전에 속도가 빠른 일본전투기들에게 뒤를 붙잡힐 것 같았다.
"미사일 버려! 공대공 전투준비!"
[한 시 방향에서 미사일 접근 중! 회피기동 실시합니다!]
윙맨의 외침과 함께, 바로 앞에서 지상을 향해 두 번째 미사일을 발사한 F-5F가 상승했다. 동체 아래쪽, 엔진 바로 밑에 달린 채프/플래어 디스펜서에서 은박 조각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였다.
그제서야 강 소령도 멀리서 날아오는 흰색 미사일을 보았다. 겨우 3km 정도 거리였다. 이제 회피기동을 시작해야 했다.
- F-5F 한 대가 미사일을 피하기 위해 채프를 계속해서 여섯 번 뿌린 다음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은색으로 흉측하게 빛나는 미사일이 마치 먹이를 노리는 청상어처럼 재빠르게 날아들었다.
- 그러나 목표 전투기는 아직 속도가 느린 데다 선회율이 워낙 좋아 자칫하면 오버슛 할 것 같았다.
신국환이 속도를 줄이지 않고 전방속도 벡터를 줄이기 위해 브레이크 하며 한 바퀴 회전했다. 거대한 F-15J 전투기가 아래쪽에 보였다. 적기에 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신국환이 적기가 옆으로 빠져나갈 때까지 꾹 참고 기다렸다. 겨우 1초 정도 기다렸으나, 그 아슬아슬한 시간이 몇 시간은 되는 것 같았다.
목표도 한 바퀴 빙글 돌며 전방속도를 줄였다. 속도는 줄이지 않고 상대방의 뒤를 잡기 위한 기동이었다. F-15J가 강력한 가속력과 유리한 선회율을 이용하여 신국환의 기체 꼬리를 노리자 신국환도 같이 회전에 들어갔다. 다시 기수를 올려 고도를 올렸다가 내리며 두 번 연속회전을 실시했다. 전투기 두 대는 완전히 시저스 기동에 들어갔다. 서로 꼬리를 잡기 위해 전투기들이 꽈배기처럼 꼬였다. 그러나 이 기동에서는 F-15J에 비해 한국 공군 F-16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 "시저스 기동에서 탈출하겠다!"
신국환이 이를 악물고 기수를 왼쪽으로 틀며 하강했다가 상승했다. 자위대 전투기는 계속된 오른쪽 선회를 풀고 F-16을 찾아 헤맸다. 순간적으로 신국환의 기체를 놓친 것이다. 신국환이 기체를 하강시키며 F-15J를 정면으로 보며 달려들었다. 예상대로 F-15J는 횡전선회하며 속도를 100노트가량 잃고 가속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곧 장산곶 편대가 간다! 조금 더 버텨!]
한참 바쁜 신국환 대위는 조기경보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했다. F-15J가 도주하려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신국환 대위를 향해 기수를 돌렸다. 그 짧은 시간이 신국환 대위를 살렸다.
- 12월 21일 07 : 32 서울 강남구 논현동, 통일참모본부
"도쿄 점령을 완료했다는 원정군 총사령부의 보고입니다."
통신장교가 보고하자 이종식 차수를 제외한 모든 참모들이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었다. 전쟁에서 적국 수도 점령이란 소식보다 기분 좋은 소식은 없었다. 그들만이 아니라, 통일참모본부에서 근무하는 모든 장병들이 똑같이 전승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이제 곧 남북한의 모든 언론기관을 통해 도쿄 점령 소식이 전국에 보도될 것이다. 전 국민이 일본 수도를 점령한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아직 좋아하기엔 이르오. 전쟁이 끝난 건 아니니 말이외다."
"이미 일본은 수도를 잃었습니다. 우린 전략적 목표를 달성한 것이니, 이제 전쟁은 이긴 겁니다."
인사군수참모부장 정지수 대장이 말했으나, 이종식 차수는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오히려 점점 굳어졌다.
"이겼든 졌든, 전쟁이 끝난 건 아직 앙이라 했소."
- 이종식 차수가 웃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도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삽시간에 회의실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잠시 적막이 흐르자 이종식 차수가 손수 단말기를 조작했다. 중앙 디스플레이에 일본 육상자위대의 병력표가 디스플레이됐다. 그중 이미 격파된 1사단과 6사단을 전력표에서 삭제했다. 그러나 아직 11개나 되는 육상자위대 사단급 부대가 건재했다.
"동지들! 보면 아시갔다만, 아직 일본 육상자위대는 주력이 건재하오. 우리가 격파한 건 겨우 2개 사단에 교도단 뿐이오. 해자대와 공자대를 거의 섬멸하다시피 했지만, 지금 같은 전쟁에서는 당연히 육전이 승부를 가르는 법이오."
"하지만 전략적 목표를 달성했으므로..."
"전쟁에서 이긴 것이다? 아니오, 아직 그렇게 되긴 이르오. 생각을 해보시오. 도쿄를 점령한 아군 부대가 끝내 일본 육상자위대의 손에 섬멸당한다면 어케 될 것 같소?"
- 말할 것도 없었다. 일본은 군사적 승리를 쟁취함과 동시에 정치적으로도 역전의 기회를 잡게 된다. 아직까지는 한국이 일본에 대해서 제해권과 제공권에서 우위를 잡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시로 계속 병력을 일본에 투입할 방법이 없었다. 통일한국의 경제력으로는 더 이상의 장기전을 수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동해에 숨어 들어온 일본 잠수함들 때문에 바다에 지원부대는커녕 일본원정군에 반드시 필요한 보급선을 띄울 상황도 아니었다.
- "만약 투입한 지상군이 전멸당한다면, 최소한 적에게 패퇴하기라도 한다면 결국은 전쟁에서 우리가 지는 기야. 일본 전역이 아무리 파괴당하더라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외다. 일본도 기걸 모를 리가 없디 않소."
"어차피 우린 전략적 목표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을 해냈잖습니까. 일본의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하디만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 패하면 어케 되갔소? 일본 배후엔 미제놈들이 있소. 미 제국주의자들이 우리에게 정치적·경제적·군사적으로 압력을 넣을 거요. 그럼 우리나라는 일본보다도 더 큰 피해를 입고 마침내는 19세기 때의 조선과 같은 운명에 놓이게 될 거요."
"..."
"생각들을 해보기요. 지금은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오. 종전 교섭이야 정부에 맡기더라도, 우리는 일본에 대해서 확실한 군사적 승리를 거둬야 합네다. 최소한 일본 육상자위대에 실질적 주력을 완전히 격파하거나, 그전에 종전을 하지 못하면 이 전쟁은 지는 거요."
- 이종식 차수는 차가운 목소리로 선언했다. 70을 넘어선 노장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져 있었다. 한중전쟁 때에도 이렇게까지 굳어진 표정을 지은 적은 없었다. 그는 지금 상황을 일대 위기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금 한국군은 전승개선문 앞이 아닌 승패의 마지막 갈림길에 놓여있다고 믿는 얼굴이었다.
"지금 우리가 일본에서 유지하고 있는 군사력은 겨우 4개 사단이오. 자위대엔 아직 11개 사단이 남아 있고, 덤으로 그중 하나는 전차사단이란 말이외다. 자위대에게는 땅크가 1,000대나 남아 있지만, 아군에겐 300대밖엔 없소."
"그중 7개 사단은 우리 해병사단에게 큐슈에서 붙들려 있습니다. 이들은 빼셔야 합니다."
"기래도 일본 동부에 있는 병력비는 3 대 4요. 병력은 우리가 많다고 하고 싶소? 일본 4개 사단은 군화에 흙 한 번 묻히지 않은 부대지만 우리 사단들은 거의 나흘이나 밤잠도 못 자고 싸운 부대들이오. 게다가 적에겐 우리 3개 사단이 가진 땅크 전부를 합친 것보다도 많은 땅크가 1개 사단 안에 있단 말이오."
"..."
"최소한 이것들을 격파하기 전에는, 섣부른 승전축하는 하디 맙세. 남반부는 88년도에 올림픽을 하면서 너무 일찍 흥분해서 낭패를 보아 놓고도 아직 그 교훈을 못 배운 거요?"
- 12월 21일 07 : 50 일본 미에(三重) 현 미사토시 북서쪽 3km
일본원정군 사령관 권대현 대장은 직접 지휘하는 해병 1개 사단과 1개 여단 병력을 비와호 남쪽 미에현에 집결시키고 때를 기다렸다. 겨우 1개 연대 병력으로 수비되고 있는 호수 북쪽 시가현일대를 공격하는 육상자위대에 역습을 가할 기회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곧 올 것이라고 권 대장은 계산하고 있었다.
- "글쎄요."
권 대장은 약간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뭐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도쿄 전선에서의 승산을 아직 확실히 점치지 못하고 있었다. 현지 사령관인 허철화 상장도 아직 그에 대해서는 특별한 보고를 해오지 않고 있는 형편이었다.
[글쎄라니오. 동지는 원정군이 그깟 자위대를 까부술 수 없다고 생각합네까?]
"아닙니다.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약간은 힘이 들겠지만 말입니다."
권대현 대장은 간단하게 생각을 밝혔다. 이길 수는 있었다. 자위대가 공격해 온다면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권 대장의 말에 화면 속 통일참모본부 의장 이종식 차수의 얼굴이 밝게 펴졌다. 화면의 전환이 늦기 때문에 그만큼 표정의 변화가 또렷하게, 그와 동시에 어색하게 인식됐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스템의 한계일 뿐이었다. 지금 빌려 쓰고 있는 부관의 노트북 컴퓨터는 구식 펜티엄 200이고 모뎀도 56,000 bps짜리였다. 돈 좀 들여 진작 업그레이드 좀 해두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 [고조~ 기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외다. 지금 우리 통참에서는 동부전선에서의 전면 공세를 검토하고 있소.]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쿄 군단으로 하여금 일본의 주력부대에 대해 전면적 공세를 실시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소. 당연히 세부 계획은 현지 부대에 맡길 생각이고 말이오.]
"..."
말뜻을 잘못 이해했구나. 권 대장은 어디까지나 자위대의 반격을 막아낼 수 있다는 뜻으로 말을 한 것이었는데, 이 차수는 자위대 주력을 쳐서 격파할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런 뜻은 절대 아니었다.
- [물론 도쿄군단 병력만으로 일을 하라는 건 아뇨. 공군 지원을 최대한 제공할 테고, 필요하다면 지원병력도 투입할 거요. 지금까지는 위험부담 때문에 피해왔던 것들이지만, 적의 북부방면대만 격파하면 이 전쟁에서는 완전한 군사적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될 테니 한번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오.]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북부방면대만 격파할 수 있다면 전쟁은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권 대장은 솔직히 공세전에서 이길 자신은 없었다. 가능하면 그런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자신의 권한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이라면 막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막지 않더라도 그런 상황을 피할 길은 있었다.
- "그렇긴 하겠습니다만... 그나저나, 정전협상은 언제 시작됩니까?"
권 대장은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정전은 언제 이뤄지는가? 도쿄를 점령한 지금, 전쟁을 더 오래 끌 이유는 이제 없었다. 권 대장이 입안한 일본 공략계획은 모두 완수됐고, 일본 자위대가 아직까지 걸려들지 않은 서부전선 일대도 사실상 한국군의 통제 아래에 놓여있는 판국이었다. 이미 다 이긴 전쟁이니, 이제 슬슬 끝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정전이라... 기건 정치인들에게 맡겨둘 문제요. 정전이 이뤄지든 이뤄지지 않든, 우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필요가 있어요.]
"그렇겠지요. 그럼, 우리가 공세를 펴기 전에 정전이 되길 빌어야겠군요. 사람이 하나라도 덜 죽게 말입니다."
- 12월 21일 09:42 니가타현, 니가타
한국군 117 특공여단 3중대는 개전 첫날에 니가타 공항을 점령했다. 19일에 자위대 5사단 제4연대전투단을 니가타 북쪽에서 막다가 대부분을 통과시키고 나서, 이들이 지나간 뒤에 중대를 수습한 다음 니가타 시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니가타 시가지는 어젯밤까지 거의 대부분을 한국군이 장악하고, 니가타 현청사에만 일본 경찰 20여 명이 남아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별로 큰 위협이 아니라고 판단한 중대장 이은경 소령은 오늘 새벽부터 시청을 포위하고 대치하는 중이었다.
추재국 하사는 RPG 발사기를 메고, USAS-12 전자동 산탄총을 들고 낑낑대면서 니시니가타의 안개 낀 구 시가지를 헤맸다. 니가타는 일본에서 가장 긴 강이라는 시나노가와(信濃川)가 바다와 만나면서 도시를 반으로 나누고, 도시는 다리 몇 개로 연결되어 있었다. 니가타는 운하와 버드나무와 미인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는데, 시민들이 집에 꼭꼭 숨는 바람에 추재국은 아직 미인은커녕 여자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 간밤에 하얗게 내린 눈이 도시 전체를 고요 속에 감쌌다. 196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雪國)'의 무대답게 동해에서 수증기를 머금은 눈구름이 잔뜩 눈을 뿌리는 지역이라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어차피 스키 타러 온 것도 아니고, 다만 졸병들 입장에서는 이동하기 불편할 뿐이었다. 특히 없어진 동료를 찾는데 더 힘들었다.
- 여기는 한국도 아니고 적지인 일본이었다. 게다가 전쟁 중에 마약을 복용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군 지휘부 입장에서는 군의 약체화를 걱정하겠지만, 추 하사 같은 졸병 입장에서는 강 일병이 제정신을 차려 살아남길 진정으로 바라고 있었다. 틀림없이 일제 필로폰(히로뽕) 주사를 맞고 어딘가에 처박혀 있으리라 짐작한 추재국 하사는 강 일병을 찾기만 하면 주리를 틀고 싶은 심정이었다.
- 12월 21일 13 : 35 요코스카 남쪽 180km 해상
[기장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착륙하겠으니 안전벨트를 매주시기 바랍니다.]
기내 통화용 헤드셋을 쓴 해상막료장 하토야마가 고개를 끄떡인 다음 안전벨트를 맸다. 그를 태운 해상자위대 소속 UH-60 호크 수송용 헬기는 1, 2연합호위대군의 기함인 시라네의 TACAN(Tactical Air Navigation : 전술 항공기용 단거리 항법장치) 신호를 받아 정확하게 접근했다. 헬리콥터 호위함인 시라네는 지난 한중전쟁 기간 중 발생한 독도분쟁에서 격침당한 구라마와 같이 기준배수량 5,200톤의 대형 호위함이고, 탑재하는 3기의 대잠헬기를 이용한 강력한 대잠능력을 보유한 함정이었다.
"가토 해장이 시라네함으로 옮겼군."
기내 창문으로 바깥을 살피던 하토야마 해막장이 혼자서 중얼거렸다. 어느새 UH-60 호크 수송헬기는 착함유도원의 신호를 받으며 시라네함의 뒤쪽 비행갑판에 내려앉았다.
- 가토도 간단히 말하고 앞장서서 하토야마를 안내했다. 시라네는 제1호위함대의 기함이기도 했기 때문에 함대사령관의 개인실이 따로 있었다. 함장실보다 훨씬 쾌적한 사령공실은 함교 건물의 제1층, 애스록(ASROC)의 탄약고 후방에 위치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티크 원목으로 만든 커다란 책상이 한켠에 있고 그 위에는 노트북과 키보드가 깨끗이 놓여 있었다. 컴퓨터광인 가토는 불편한 노트북 자판 대신에 애용하는 키보드를 따로 연결해서 썼다.
"도쿄가 00:50시부로 점령됐네."
검정색 양피 가죽이 입혀진 회의용 소파에 털썩 앉자마자 하토야마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 "가장 큰 문제는 탄약과 연료보급입니다. 함정 중의 40퍼센트가 무장 보급을 마치지 못했습니다. 요코스카까지 잃는다면 우리 해자대는 끝장입니다."
가토가 화를 내는 것은 무리도 아니었다. 전 함대가 하픈을 90퍼센트나 소모했다. 대함미사일의 보급이 없이는 막강한 해상자위대의 호위함대는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 "남조선 해군에서 제공해 준 소노부이 정찰용 부이(bury)로 놈들이 뿌린 소노부이의 타입과 간격을 파악해 두었습네다. 곧 충전 준비하갔습네다."
박 소좌가 말하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지만 잘 사용하면 유용한 정찰도구였다. 해상자위대의 오라이언이 쓰는 잠수함 수색용 소노부이는 음향탐지상황을 무선으로 계속 모기인 오라이언에 송신한다. 이것에 착안하여 주변에서 초계기가 뿌린 소노부이가 내는 전파를 측정하여 소노부이의 위치를 역추적하는 것이었다. 박 소좌가 정리해서 밝혀진 안전한 지역은 극히 일부였다. 하지만 그 짧은 지역에서 최소한의 시간을 이용해서 충전을 마쳐야 했다. 잠항한 채로 흡배기관만 올려 디젤 엔진을 가동하려면 모험이 필요했다. 여태까지 아슬아슬하게 이곳으로 침입할 수 있었던 것도 북쪽으로 많은 거리를 우회했기 때문이었다.
"됴아. 30분 후에 하면 되갔나? 전지들을 가득 충전하는 기야."
송 상좌는 모험을 하지 않으면 얻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남조선 해군이 장착해 준 새로운 전지를 신뢰하기도 했다. LG산전에서 제공한 신형 발전기와 서통산업의 리튬-이온 전지는 이 구식 잠수함에 엄청난 지구력을 가져다주었다. 지속 잠항시간이 6배나 늘어난 것이다.
- 30분 후 소년3호는 배터리 충전을 위해 스노클을 수면 위로 올린 채 20분 간 떠올랐다. 상공을 정찰하던 해상자위대 소속 대잠초계기는 수면에 나타난 조그마한 시그널을 무시하고 다시 대만해협을 따라 올라오는 선단으로 향했다.
- "시간 맞춰서 잘될 겁니다. 우리 공병대의 능력은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하자 참모장 오 대령도 조금 수긍하는 듯했다. 오 대령은 청천강방어전 당시 12사단의 연대 하나를 지휘했기 때문에 12사단 공병대대의 활약을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보병 출신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5기갑여단에 참모장으로 부임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일에는 빠르게 적응했다.
차영진은 문득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성환 대령은 차영진 준장보다 부대 지휘경험이 더 많았다. 그런 사람이라도 없었다면, 차영진은 꽤 고생을 했을 것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벼락출세한 사람이었다.
- 12월 21일 15 : 07 도쿄도 시부야) 롯폰기(六本木), 시마다(嶋田) 병원
주변 건물은 모두 불이 꺼져 내부가 어두웠지만 시마다 병원만은 밝게 빛났다. 병원에서 전기와 물 공급이 끊어졌을 때 보조전원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수술 중이거나 위독한 중환자들이 사망할 수도 있다. 때문에 당연히 병원은 보조전원과 예비 물탱크를 갖추고 있었다.
"자, 이 군복도 모두 소각장에서 태우도록 해요. 한국군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요."
- 자원봉사자들에게 군복을 맡기면서 외과의사 오카모토가 신신당부했다. 병원에서 받아들인 자위대 부상병 49명의 신원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한국군은 아직 주변 병원을 수색하지 않았지만 이제 곧 시작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만약 그런 사태가 진짜로 벌어진다면 자칫 이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다른 환자들에게 누를 끼칠지도 몰랐다. 최악의 경우에는 애꿎은 환자가 자위관으로 오인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자위관들을 철저하게 환자로 위장해야 했다. 아니면 한국군이 요구할 경우 부상당한 자위관들을 넘겨줘야 하는데, 그것은 의사로서의 양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때문에 원장 이하 모든 의사들은 자위관들을 숨겨주는 쪽으로 결심을 굳혔다.
- 군복은 모두 적출물소각장에서 소각하고, 그들이 소지한 총기를 포함한 각종 총기류는 모두 거두어 창고 한켠에 숨겼다. 창고를 샅샅이 뒤지더라도 찾아내기 힘들게 하기 위해 총기류는 경상을 입은 자위관들에게 분해하도록 했다. 기타 군장류도 꼼꼼하게 숨겼기 때문에 일단 한국군이 눈치챌 염려는 없었다. 방금 들어온 부상병 5명분의 군장은 아직 완전히 숨기지 못했지만...
"부상병은 전부 다 총상환자인데 들통나지 않겠어요?"
"걱정 없어요. 어차피 총상환자가 무조건 군인이라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요. 전투현장 주변에서 생긴 민간인 부상자라고 둘러대면 그만이오. 환자 신원도 일단은 허위기재해 놓았으니 들키진 않을 겁니다."
"꼼짝 마라!"
갑자기 알아듣지 못할 외침 소리가 들렸다. 오카모토가 급히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병원 안으로 얼룩덜룩한 군복을 입은 군인 수명이 들어와서 그들에게 총을 겨눴다. 간호사들이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자 젊은 레지던트 한 명이 나섰다.
- 12월 21일 15 : 53 혼슈(本州) 시마네(島根) 현 시마네섬 북동쪽 80km
[탐신음입니다. 예인 소나에 미약한 시그널. 탐지방위는 2-5-0도 상당히 강한 충격음입니다. 거리는 확인할 수 없지만 80km 이상입니다.]
"뭐라고? 그곳은 아군 잠수함이 있는 곳이잖아!"
음탐장 민두기 상사의 급박한 보고에 김병륜 대령이 일어섰다. 80km 이상 떨어져 있는 한국 해군 구축함 강감찬함에서 들릴 정도면 상당히 큰소리였다.
[폭발음은 아닙니다. 하지만 상당히 소리가 큽니다. 음탐실로 잠시 와주십시오.]
모든 소리가 녹화되어 다시 반복된 다음 그래픽 처리된 음문을 분석해봐야만 했다. 먼 거리라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곳에서 수중 돌발음이란 무엇인가 일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함장 김병륜 대령이 서둘러 사령실의 한켠에 밀실처럼 꾸며진 음탐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아군 잠수함 정운함이 있잖은가. 정운함이 무슨 일이라도 당한 것인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폭발음은 아닙니다. 충격음입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음탐장 민두기 상사가 녹화한 테이프를 틀고 조작하자 스펙트럼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음문 그래픽이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보십시오. 폭발음향은 훨씬 짧고 강하게 진동합니다만 이 소리는 첫 번째 충격음과 함께 공명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커다란 물체에 충돌하여 울리는 현상입니다."
민두기 상사가 짧게 말하고 다시 헤드폰을 들어서 녹음한 음파를 확인했다. 무엇인가 문제가 생긴 것은 분명했다.
"헬기를 띄운다. 그리고 김 소령에게 조사를 시키고 만약에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을 경우에는 수중전화로 직접 통신을 시도하라고 전하게. 빌어먹을... 이순신함과 연결하라. 대잠 지휘센터에도 녹음한 사운드 파일을 전송해."
김병륜 대령이 서둘렀다. 이 거리에서의 돌발음이라면 일본 잠수함과 연관 있을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그곳에 있을 정운함이 위기에 처했을지도 몰랐다.
잠시 후, 강감찬함의 갑판에서 연료를 재보급받던 수퍼 링스 헬리콥터가 날아올라 서쪽으로 향했다.
- 12월 21일 16 : 08 혼슈 시마네현 시마네섬 북쪽 20km
정운함과 충돌한 일본 잠수함은 최신형 2,700톤형 잠수함인 오야시오급 3번함 오시오함의 함장인 구메 데츠로(久米哲郎) 일등해좌는 어이가 없었다. 기껏 추적하던 한국의 209형(장보고급) 잠수함이 난데없이 튀어나와서 잠수함끼리 충돌해 버린 것이었다. 서둘러 충돌했던 지점을 빠져나왔지만 함수 소나는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잠수함의 함수에 소나가 위치하는 공간은 수압을 이겨낼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음파를 통과하는 소나돔(sonar dome)은 얇고 그 속의 소나룸에는 물이 차 있다. 그리고 소나 트랜스폰더가 장착된 안쪽 벽면이 수압을 이겨낼 수 있는 내압구조이다. 그래서 허약한 소나돔은 순식간에 찌그러지고 그 안쪽에 있는 고성능 ZQQ-SB 소나는 완전히 일그러져서 아무 쓸모도 없게 되었다.
"이 자식. 너 졸았지?"
구메 일좌가 주먹으로 수측조원의 귓불을 후려쳤다. 의자 위에서 넘어진 시라토리(白鳥) 일등해조가 대꾸하려다 말고 손바닥으로 귀를 가렸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분을 참지 못한 구메가 하필이면 귀가 생명인 수측조원의 귓불을 후려친 것이다.
- "말씀드렸잖습니까! 한국 잠수함이 매스커(masker) 시스템을 쓰고 있다고 말입니다. 녀석의 위치가 예상보다 너무 가까웠던 것은 바로 그... 그 탓입니다."
시라토리는 거의 울상이 돼서 주저앉으려 했다. 매스커 시스템은 공기를 물속에 분출시키면 미세한 기포방울이 함 주위를 감싸며 배가 내는 소음을 차단시키거나 산란시키는 장치이다. 하지만 이 시스템을 사용하는 것은 대부분은 수상함정들이다. 잠수함의 경우에는 사용가능한 공기 양을 제한받기 때문이다. 귀중한 압축공기를 매스커 시스템에 사용할 만큼 디젤추진의 통상형 잠수함은 공기가 충분하지 않으니 잠수함에 매스커 시스템이 있기는 어렵다.
"젠장! 프레리 매스커라니..."
- 추진 스크루에까지 미세한 구멍을 뚫어 추진축에 연결한다. 그리고 그것에 압축공기관을 연결해서 스크루에 매스커 시스템을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 해상자위대의 기술이었다. 그런데 한국 잠수함, 기껏 독일제 잠수함을 라이선스로 부품을 들여와 조립건조나 한 주제에 그들 잠수함도 이런 장비를 가진 것이다.
"함수 소나가 작동할 수 없으면 공격도 못한다."
구메는 아주 작은 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오시오는 측면에 대형의 평면형 소나를 3기씩 6기나 가지고 있지만 공격소나는 아니었다. 장거리 추적용이지 목표를 확인하고 공격방위를 탐지해 낼 수 있는 공격 탐신 기능은 없기 때문이다.
"한국 해군이 몰려올 거야. 최대한 깊이 잠항해서 빠져나간다. 어서 서둘러!"
- 12월 21일 16 : 20 혼슈 시마네현 시마네섬 북쪽 25km
[링스6 나오라. 여기는 시에미다. 아군 물개한테 연락이 왔다. 그곳에는 일본 잠수함이 함께 있다. 반복한다. 일본 잠수함이 함께 있다. 주의하기 바란다.]
"뭐? 같이 있다고?"
예정된 수색지역으로 접근하던 수퍼 링스 헬리콥터의 김준호 소령은 무전기로 울리는 의외의 내용에 반문했다.
[우리 물개가 일본 물개하고 충돌했다. 충돌했다. 정말 개 같은 일이다. 우리 물개는 추진기 손상, 일본 물개는 함수부를 손상받은 것으로 보인다. 도망치고 있다. 그리고 아군 물개는 수면 심도에서 대기한다고 전해왔다. 유의하라.]
- 김준호 소령은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바다 속이라고 충돌사고가 안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흔히 있는 일은 아니지만 적 잠수함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놓치지 않기 위해 거리를 좁히거나, 혹은 순간적으로 추적하던 잠수함을 놓치게 된 상태에서 적 잠수함이 급격히 감속을 하게 되면 이런 일이 생기게 된다. 러시아의 북양함대가 위치한 바렌츠 해에서도 미국 로스앤젤레스급 공격원잠이 구 소련의 델타급 탄도미사일 원잠을 추적하다가 들이받은 일도 있고, 심지어는 동해에서 작전중인 미국 항모인 키티호크에 태평양함대 소속 빅터급 공격원잠이 들이받은 일도 있었다.
순간적으로 소나가 탐지능력을 상실하거나 소리를 잃었을 경우에는 종종 일어나는 사건이었다.
- "어디 보자. 부기장. 이곳에서 작전하는 잠수함이 장보고급이던가?"
"예. 그렇습니다. 장보고급입니다."
"이런~ 말은 해놨지만 골치 아프군. 이렇게 되면 어뢰가 액티브 탐신 모드로 추적할 수 없잖아."
김 소령이 툴툴거렸다. 목표에 도착하기 전부터 난감했다. 원래 대잠수함 작전은 세 가지 방법으로 입체적인 수색이 가능하다. 하늘에서의 대잠초계기와 대잠헬기, 바다 위에서의 구축함과 프리깃함, 바닷속에서의 잠수함이 그것이다. 하지만 협동작전을 제대로 못 펴면 이 세 가지 수단은 함께 있음으로써 더 큰 제약이 된다. 모든 것을 소리만으로 파악해야 하는 대잠수함전에서 적 잠수함과 아군 잠수함이 같은 위치에 있다면 아군을 확실히 판단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칫 오인공격을 할 가능성도 컸다.
- "목표지역입니다. 디핑 소나로 수색 시작하겠습니다."
김준호 소령이 골똘하게 생각하는 사이 부기장인 임오현 대위가 헬리콥터를 수면 위 5미터 지점에 호버링 시킨 후 동체에서 케이블에 매달린 소나를 내렸다. 민감한 소나 트랜스폰더가 밀집돼 있는 AQS-18V 소나는 소음만을 추적하는 패시브 탐색과 음파를 진동시켜 반사음으로 목표를 추적하는 액티브 수색의 양쪽 모드를 다 가지고 있다.
"하나가 걸립니다. 탐지방위 040도! 거리 1,300미터!"
"가보자! 어느 놈이든 확인을 해야지. 소나 감아올려!"
케이블을 감아서 AQS-18 디핑 소나를 다시 기내에 수납한 뒤 수퍼링스 대잠헬기는 한 바퀴 빙글 돌아서 오던 길인 북동쪽을 향했다.
"시에미에게 공격허가를 받아놔."
"예. 알겠습니다."
- 12월 21일 16 : 23 혼슈 시마네현 시마네섬 북쪽 26km
피잉~
정운함의 승무원들 모두 낯익은 소리가 잠수함을 울렸다. 해군 합동 대잠수함 훈련 때마다 마지막에 져주는 것이 당연하게 되어버린 잠수함들 승무원으로서는 가상적군인 대잠헬리콥터의 소나 탐신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 이게 뭐야? 이건..."
진종훈 중령이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정운함의 위치까지 보고했는데 난데없는 탐신음이었다.
[아군 수퍼 링스의 AQS-18 소나의 탐신음입니다. 그런데 공격방위 측정에 사용하는 고주파영역입니다.]
음탐수가 보고하면서 예상치 못한 진행에서 무엇인가를 직감한 듯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 "이런! 수면에 떠오르기로 했는데 지금 부상하지 않았다고 우리를 일본 잠수함으로 생각하는 것인가? 급속 부상한다. 밸러스트 탱크 개방, 압축공기 주입하라!"
부상하겠다고 했지만 일본 잠수함에게 자칫하면 육안확인 공격을 받을 염려가 있었다. 수중에서 복잡한 운동을 하는 잠수함에는 유도어뢰와 고성능의 추적 소나가 필요하지만 일단 수면에 부상한 것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만 있다면 소나 없이도 언제든 어뢰를 날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부상했어야 했어. 근데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공격 준비부터 하는 놈은 도대체 뭐야? 개새끼들!”
진종훈 중령이 사령실의 한쪽에 있는 부력조정 콘솔 앞에서 서두르는 부하들을 바라보다가 욕지기를 내뱉었다. 그때였다. 음탐수가 뒤를 돌아보며 함장을 다시 불렀다.
"함장님! 음성 통신입니다. 링스 6이랍니다. 대답을 안 하면 어뢰를 발사하겠다는데요?"
"워라고? 이런 씹새끼들이! 수중전화 연결해. 어서!"
- "여기는 정운함이다. 반복한다. 정운함이다. 일본 놈은 남쪽으로 튀고 있는데 지금 뭐 하는 거야? 우리를 다 죽일 셈인가?"
수퍼 링스의 AQS-18 소나에 수중전화 모드가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마지막으로 확인을 해보고자 음성으로 확인에 들어간 것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일본 잠수함 승무원이라면 한국어에 능통하다는 가정은 어려웠다.
[여기는 링스 6. 시에미로부터 지시받기는 수면 심도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부상한다더니 지금 뭐 하는 건가?]
"암튼 확인이 됐으니 다행이다. 놈들 방위는 우리도 추적하고 있다. 남동쪽으로 향했다. 빨리 뒤쫓기 바란다."
진종훈 중령은 진땀이 났다. 자칫 한순간의 판단 미스로 잠수함을 수장시킬 뻔한 것이다. 얼버무릴 시간도 없었다. 어서 아군 대잠헬기를 일본 잠수함으로 유도해야 했다.
- 12월 21일 16:44 혼슈 시마네현 시마네섬 북동쪽 60km
[남쪽에 또 다른 목표입니다. 잠수함으로 판단됩니다. 거리 15km 미만입니다. 디젤엔진 가동음!]
강감찬함 전투정보센터에 음탐수의 급박한 보고가 이어졌다. 이곳에 또 다른 일본 것으로 추정되는 잠수함이 있었다. 도대체 몇 척이나 동해로 들어왔는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확실히 격침한 리스트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이곳에 있는 것 같았다.
- "매스커 시스템 가동해!"
"예. 알겠습니다."
김병륜 대령은 구축함에 매스커를 씌우고 적 잠수함에 직접 접근하고 싶었다. 한국 해군의 DX-2, 함대 방공 미사일함인 문무대왕급의 7번함이자 최종함인 강감찬함은 40발의 스탠더드 대공미사일과 8발의 애스록(ASROC) 대잠미사일을 탑재했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도 알 수 없는 데다가 이 거리는 애스록의 사정거리 밖이었다.
강감찬함의 선체 중간부와 후방의 두 곳에 홀수선부터 저까지 이어져 약간 튀어나온 장치가 있었다. 선체에서 만들어내는 압축공기는 지름 2~3밀리미터의 무수한 구멍을 통해서 뿜어져 나왔고, 이 구멍에서 나온 기포방울들은 강감찬함이 저속에서 내는 디젤엔진의 엔진구동음과 추진기 소리를 꽉 틀어막았다.
- "속도 6노트. 링스 6을 호출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멍청한 녀석! 상처 입은 잠수함 하나를 아직도 해치우지 못하고 있다니."
부함장이 링스 6의 호출을 제안했지만 아직 정운함과 충돌한 잠수함도 사냥하지 못한 채였다. 김병륜 대령이 계속 툴툴거렸다.
- "좋아. 또 날아보자구."
김준호 소령이 다시 헬기에 올라탔다. 소노부이가 부족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비싼 가격의 소노부이가 바다에 뿌려진 채, 제시간에 회수하지 못하면 위치를 알리는 전파도 끊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소노부이를 회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쟁은 원래 그랬다. 수억, 수십 억짜리 장비들이 먼지처럼 가볍게 사라졌다.
- 12월 21일 18 : 04 혼슈 시마네현 시마네섬 북쪽 90km
[돌발음입니다. 큰소리입니다. 하지만 남쪽입니다.]
"남쪽에서 동무들이 시끄럽구만. 뭔 일이 벌어딘 모양이디요?"
음탐수의 보고에 최승호 상좌가 부함장을 돌아보았다. 몇 시간 전부터 70km가량 남쪽에서 일어나는 돌발음들로 함대가 일본 잠수함과 전투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최윤덕함의 공격지역이 아니었다. 이 구역을 어기면 자칫하다가는 아군에게 공격당할 위험이 있었다. 요청이 없는 한 섣불리 몰려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 최승호 상좌는 이 상황이 걱정스러웠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문제였다. 항모전대를 호위하기 위해서 시마네섬의 저지선까지 밀려 내려온 한국 잠수함대가 수적으로도 많은 일본 잠수함을 발견했다고 1 대 1로 따라잡기를 시도할 수도 없었다. 함장이 결국 포기하자 최윤덕함은 천천히 선회해서 다시 시마네 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잠시 후 통신부이가 떠올라서 추적에 실패한 잠수함의 사운드 파일과 자세한 정찰보고 등이 초고속으로 잠수함대 사령부에 전달됐다.
- 12월 21일 19 : 02 홋카이도 하코다테(函館) 시 남서쪽 17km(쓰가루해협)
"2번기 편대 진형으로 합류하라. MAD 탐색에 들어간다."
아라키 고헤이 이등해좌가 다른 대잠초계기들에게 명령한 다음 자기 탐지기(MAD: magnetic anomaly detector)를 조작하자 오라이언의 동체 끝부분, 수직꼬리날개 아래에서 기다란 막대기가 튀어나왔다. 거대한 강철이라 할 수 있는 잠수함은 수천 톤의 강철 때문에 지구자장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잠수함이 바닷속에 숨어 있어도 주변의 자장계를 혼란시키게 되는데, 여기서 나타나는 자기 이상을 감지하여 잠수함의 존재를 탐지하는 것이다.
- 잠수함으로 인한 자기 변화는 멀리에서는 탐지하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아라키의 오라이언기는 보통의 소노부이 투사고도보다 훨씬 낮은 초저공으로 비행했다. 위험하지만 이래야만 자기 탐지기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협동작전을 수행하기로 한 또 다른 오라이언은 아직도 편대진형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아라키가 한 번 더 재촉하려고 송신기를 집어드는 순간, 8항공대 소속의 오라이언이 이쪽으로 선회하는 것이 보였다.
"멍청한 놈들! 큐슈에서 노는 놈들이 여기서도 말을 안 들으면 어떡하겠다는 거야. 9항공대 놈들은 만만한 민간선박이나 격침시키고 다니질 않나."
부기장 우메즈 뎃산 일등위가 옆에서 거들었다. 8항공군은 이와쿠니(岩)에 배치된 대잠 초계비행대였다. 이들이 소속한 하치노헤의 제4항공대와는 다른 감시지역을 가진 부대였다. 하지만 큐슈 혼슈 남쪽의 제공권이 불확실하게 되자 이 지역의 항공군이 아예 이곳으로 이동배치된 것이다. 9항공대도 마찬가지였다. 오키나와현 나하에 배치된 이 비행대도 대잠작전에 투입되는 것이 아니라 동지나해의 봉쇄에 투입됐다. 일본으로의 유도를 거부하고 도주하는 한국 국적의 선박들은 모두 수장시키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100대의 대잠초계기 오라이언을 보유한 해상자위대로서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막강한 대잠능력을 가진 오라이언들이 정작 투입되어야 할 지역에는 한국 공군 전투기 때문에 손도 쓰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서야 대부분의 대잠기들이 하치노헤기지로 옮겨와서 사냥감을 노렸지만 별 소득을 못 올리고 있었다.
- [기장님! B17지역입니다. 31번 DIFAR가 미약한 노이즈를 잡았습니다.]
오라이언의 조종석 후방, 대잠작전실에서 음탐수의 목소리가 급박하게 울렸다. B17 지역이면 여기서 150km 남쪽이었다. 매드탐색을 하기 전에 깔아 두었던 소노부이가 드디어 무엇인가를 잡아낸 모양이었다.
"알았다. B17 지역으로 이동하겠다. 디카스(DICASS) 준비하고 정밀 추적에 대비하라."
갑자기 오라이언의 대잠 작전실이 바빠지면서 아라키는 하치노헤의 제4항공대 대잠작전지휘소를 호출했다. 기체를 남쪽으로 선회시키면서 아라키는 대잠작전지휘소에 지원을 요청했다. 근처에 동원 가능한 모든 오라이언을 불러 모아야 했다.
- 12월 21일 21 : 18 동지나해 센카쿠열도 북동쪽 70km
"됴아. 공격하갔어. 발사관 개방! 발사 순서는 1, 3, 5, 2, 4, 6! 자, 발사!"
송두호 상좌가 잠망경을 열고 계속 발사를 지시했다. 무유도 어뢰인 53-56VA 어뢰는 침로를 미리 정해줘야 한다. 소년 3호는 어뢰를 한 발씩 발사할 때마다 진동으로 선체가 떨렸다. 그리고 미세하게 방향을 바꾸어 선단을 향해 부채꼴 형태로 어뢰를 발사했다.
"급속 변침! 우현 180도로!"
송두호 상좌가 급속 변침을 지시했다.
- 12월 21일 21 : 34 시가현 다다니봉 남서쪽, 367번 국도변 언덕
[피하겠다고 지랄 발광을 떠는데요?]
코브라 헬기의 사수 김현식 중위가 조준기에 눈을 고정시킨 채 말했다. 기장 한철희 대위는 미사일이 제대로 목표물을 잡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포수 김 중위는 한국군 대전차헬리콥터 사수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였다.
- 미사일은 74식 전차의 포탑 좌측면에 정확히 들이박혔다. 토우-2A형 탄두가 작렬하면서 엄청난 섬광이 일었다. 폭발과 함께 74식 전차의 포탑 오른쪽으로 길게 메탈제트 한 줄기가 뻗어 나왔다. 강력한 토우 미사일의 관통력으로 불길이 반대쪽 포탑까지 뚫고 나온 것이다. 다음 순간 포탑 아래와 해치로 불길이 마구 뿜어져 나왔다. 명중당한 전차는 몇 미터 더 덜컹거리며 전진하더니 우뚝 멈춰 섰다.
- 대통령이 그것을 액면 그대로 말하지 않고 돌려 말했지만, 오석천이나 과기부 장관은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자칫 사실을 알면 미국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십 개에 달하는 태평양 연안국들이 벌떼처럼 일어설 것이 분명했다.
"능력 있으면 터뜨려 보라고요? 좋소, 두고 봅시다. 아직 육상자위대하고 잠수함이 남아 있다고 큰소리치는 모양인데, 그것들이 제대로 힘을 쓰나 두고 봅시다. 만약 우리 원정군이 패하더라도 당신들 나라는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겠소. 고베 지진에서 3만 명이 죽었다던가?"
대통령이 일본 총리를 은근히 협박했다. 현대에 들어서 지진으로 인한 건물 붕괴보다 더 무서운 것이 도시가스 배관의 폭발이다. 도시에 거미줄처럼 깔린 도시가스 배관이 폭발하면서 일으킨 화재가 대부분의 인명피해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 대통령이 수화기를 내렸다. 아무래도 협박은 먹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홍지영이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해상통상로 대부분이 봉쇄된 지금, 국민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제 전쟁을 끝낼 때였다. 도쿄를 점령함으로써 한국의 위신은 크게 세워지고 일본은 콧대가 꺾였다. 그러나 전혀 뜻밖에, 일본이 강한 나라 통일한국에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홍지영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다. 지금 일본원정군을 다시 한국에 되돌아오게 할 수도 없었다.
- 12월 22일 18 : 21 이바라기현 쓰치우라시 서북서쪽 4km
한국군 제21기계화보병사단은 17일 밤부터 18일 낮에 걸친 후지산 전투와, 그 뒤에 있었던 몇 차례의 사소한 시가지 전투에서 전차 30대를 잃었다. 이제 남은 전차는 62여단의 K-1A1 42대, 63여단의 K-1 29대, 65 여단의 K-1 28대, 거기에 기갑정찰대대 전차중대에 남은 5대를 합쳐 총 104대가 전부였다. 이것은 한국군 기갑여단의 표준편제 전차 정수보다 9대 많은 것에 불과했다. 이미 21 기보사단은 전차의 25% 가랑을 잃은 것이다. 기계화보병여단의 손실까지 계산한다면 21사단은 이미 사단으로서의 능력은 거의 잃은 상태였다. 이제 후방으로 물러나 휴식을 취하며 재편성과 인원보충을 할 때였다. 그러나 한국군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 대통령 홍지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을 맞았다. 훤칠한 키에 약간 마른 이 러시아인은 한국이 중국의 침공을 받았을 때 엄청난 역할을 한 반전전사집단 피스의 연락관, 암호명 짜르였다. 짜르가 2달 만에 예비역 통역관 인한수 대위를 대동하고 이곳 국무회의장에 나타난 것이다.
한참 인사말이 오가고 나서 짜르가 대통령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홍지영은 당연히 무슨 질문이든지 하라며 정성껏 대답해 주겠다는 등, 일본 총리와 전화통화할 때와 180도 다른 태도를 취했다. 홍지영뿐만 아니라 다른 국무위원들도 피스가 한국을 위기에서 구해준 공로를 높이 사고 있었다. 한국은 피스에 큰 빚을 진만큼, 피스 부대원들에 대한 대우도 각별했다. 중국과의 종전협정이 체결되고, 만주지역에 유엔군 파병문제가 거론되었을 때 홍지영은 피스를 믿고 평화유지군 역할을 피스 지상군 부대에게 맡길 정도였다.
- "대통령님. 민간인 비정구기구로 피스만한 무력집단을 보유할 수 있을까요?"
홍지영이 한참 고민했다. 홍지영도 한중전쟁 내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 했으나 결국 미궁에 빠졌다. 그 질문이 지금 짜르의 입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럼 러시아요? 러시아가 우릴 도운 거요?"
러시아는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수십 년 간 긴장상태를 유지했다. 중국이 통일한국을 점령하면 러시아의 국가안보에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시키기 때문에 러시아의 개입은 개연성이 충분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짜르의 대답은 달랐다.
"글쎄요, 러시아군 출신 의용병도 많았지만 미군 출신 조종사들도 많았죠?"
"그럼 미국과 러시아가 짜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아닙니다. 미국이 배후조종하고 러시아가 지분을 얻고 참여한 겁니다. 현실은 냉정합니다."
-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이 할 말을 잃었다. 한중전쟁은 결국 미국 손아귀 안에서 놀아난 셈이었다. 거대한 나라 미국의 힘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눈앞의 러시아인이나 호주, 네팔 등의 각국 용병들은 거의 위장용이었다. 중요한 역할은 미국이 도맡은 것이다. 홍지영은 미국이 왜 그리 약한 모습만 보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미국과 중국 사이의 핵전쟁을 방지하고, 한국과 중국 양쪽에 무기를 팔아먹기 위한 수단이라고 대충 이해할 뿐이었다.
-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제 적당히 일본에서 물러나 달라는 것입니다. 일본을 충분히 깼으니 한국의 위상도 올라갔고, 지금은 별로 어렵지 않은 부탁이라고 들었습니다."
"빌어먹을!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럴 기회가 없단 말이요. 미국 대통령이 중재를 해준답니까?"
"아닙니다. 미국은 표면에 나서지 않겠답니다."
한일 양국 사이에서 중재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군사적 개입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의아스런 표정을 짓던 홍지영이 뭔가 알겠다는 듯 짜르를 노려보았다. 하긴, 한중전쟁 때처럼 미국이 직접 나설 필요는 없었다.
"그럼 피스 함대를 동원하겠다는 거요?"
짜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묘한 손님과 국무위원들 사이에 번졌다. 중형항모를 취역시킨 한국 해군 입장에서 피스의 항공모함은 상대하기 어렵지 않았다. 핵미사일도 한국이 다수 보유했으니까 더더욱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뒤가 문제였다. 미국이라는 막강한 빽이 피스 함대의 배경에 있는 것이다.
- 대공포의 탄막을 뚫은 황인호 중령이 폭격을 마치자 2번기인 김종구 대위의 수호이 전폭기가 황인호의 비행코스와 엇갈린 진입코스로 하강하며 폭탄을 투하했다. 수호이에서 떨어져 나온 네이팜탄들은 바로 감속낙하산이 펴지며 해안방어 거점들인 엄폐 토치카 위로 떨어졌다. 이런 초저고도에서는 일반 자유낙하식 폭탄을 투하할 경우, 그것을 투하한 전투기도 폭염에 휘말려 기체가 손상받을 위험이 많다. 이 위험을 피하는 방법 하나가 소형 낙하산이다. 폭탄 뒤에 감속 패러슈트가 펼쳐지면서 수호이가 투하한 네이팜탄들은 표적상공에서 속도가 뚝 떨어진 다음, 토치카 위로 흔들거리면서 천천히 낙하하다 지면에 충돌했다. 순식간에 길이가 200미터에 이르는 시뻘건 화염덩어리가 마치 화산에서 용암이 넘치듯 강하고도 빠른 불막대기를 만들어냈다. 휘발성이 강한 연료성분에 점성이 강한 팜유 등이 배합된 인화성 강한 젤(gel)이 땅 위에 달라붙은 다음 맹렬하게 타올랐다. 벙커 주변에 허리만큼 쌓인 눈이 불타며 천천히 녹아들었다.
- "다 죽지 않았다면 질식사했을 거야. 저 화염은 주변에 있는 산소를 모두 한꺼번에 소진시키거든."
[공군에 오길 잘했군요. 적어도 공군은 저런 폭격에 비참하게 타 죽진 않잖아요.]
"낄낄! 무슨 소리야. 공군이 화력이 강한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다구. 아마 공군기지에는 핵폭탄도 떨어질걸? 자! 가자구. 미자와에서 스크램블이 떴어. 저놈들 꽤 놀랐나 봐. 20대 가까이 오는데?"
폭격을 마친 5대의 수호이 전투기들이 바다를 향해 저공으로 가볍게 날았다. 전투기들은 긴급 요격을 위해 미자와 항공자위대 기지에서 발진한 F-15J 전투기 편대를 피해 남서쪽으로 항로를 잡고 있었다.
- 12월 23일 03:30 혼슈 아키타현 아키타시 북쪽 10km 해안
수면 위로 기다란 막대기가 솟아 나온 후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다시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남북한이 통일되기 전에 북한에서 특수전부대를 해안을 통해 남한에 침투시킬 목적으로 건조했던 유고형 잠수정이었다. 이것은 길이 20미터에 수중배수량이 110톤쯤 나가는 소형 잠수정이지만 전략적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미묘한 장비였다. 60년대부터 육대소리 조선소에서 48척이나 건조해 대량 장비된 이 잠수정은 같은 공산권이었던 유고슬라비아의 기술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유고형이라 불렀다. 승무원 4명에 수중침투원 7, 8명 정도가 탑승한다. 상어급 잠수함의 겨우 3분의 1 정도 크기지만 침투용 잠수정으로서는 상당히 대형이었고, 남한을 상대로는 남해안까지도 침투시킬 수 있는 항속력을 가지고 있었다.
- 함수부의 개조된 여압탱크에 대기하던 침투원들이 밸브를 열어 탱크 내에 물을 가득 채운 후 바깥으로 통하는 해치를 열고 한 명씩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들은 수중에서 발사가 가능한 러시아제 APS 수중기관단총을 들고 등에는 육중한 폐쇄회로 방식의 산소호흡기를 메고 있었다. 이 호흡기는 사람이 호흡한 공기를 다시 압축시켜 탱크에 저장하기 때문에 수면 위로 거품이 솟지 않는다.
이들이 다 빠져나가자 유고형 잠수정은 여압탱크에 고였던 물을 다시 빼내고 되돌아갈 준비를 했다. 잠수함을 빠져나온 8명의 침투조는 잠수정 위로 헤엄친 후 상갑판에 고정된 유고제 R-1 잠수용 비클(vehicle)을 풀기 시작했다. 해안에 침투해서 쓸 중화기와 폭약들이 모두 밀봉된 방수케이스에 담겨져 R-1 잠수용 비클의 뒤에 적재되어 있었다.
- 한 요원이 조종석에 앉아 조작하자 전기모터로 움직이는 길이 3.7미터의 수중추진기가 서서히 해안 쪽으로 나아갔다. 마치 어뢰에 조종장치만 갖다 붙이고 말잔등에 올라타듯이 그 위에 사람이 올라앉은 꼴이었다. 무거운 중량의 무기를 뒤에 실은 R-1 형 잠수정은 시속 노트 수영할 때보다는 훨씬 빠른 속도로 해안을 향했다.
- 항만관리사무소 앞 주차장을 살피던 김 소좌는 입가에 피식 미소를 띄었다. 대형 트레일러들 사이에 교묘하게 장갑차가 1대씩 숨겨져 있었다. 자위대 녀석들이 그렇게 머리가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다. 경비부대가 장갑차까지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작원으로부터도 전해 듣지 못한 정보였다. 멋모르고 덤벼들었다면 큰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김 소좌는 시계를 봤다. 작전개시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몇 분 동안 대원들은 머리를 맞대고 작전을 다시 한번 검토한 다음 2명씩 한 조가 되어 조용히 사라졌다.
- 간부들이 정신을 제대로 차리기도 전에 유탄 2발이 잇달아 떨어져 폭발했다. 기관총 2정과 유탄, 그리고 소총의 일제사격에 소대급 병력이 순식간에 전투력을 상실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서 부상자들이 신음소리를 내며 피바다 속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두운 바다 가운데 정박하고 있던 해상보안청 소속 대형 초계함에서 섬광이 번쩍이더니 잠시 후 포성이 들려왔다. 초계함에서 함포를 쏘기 시작한 것이었다.
- 무전기로 탄착수정지시를 한 김 소좌의 입에서 함박웃음이 피었다. 해상작전조가 해상보안청 소속 초계함을 탈취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막강한 화력을 손에 넣었으니 이제부터의 작전은 훨씬 쉬워질 것이다.
- "예. 가토 해장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화면은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가토도 어딘지는 모르지만 새로 옮긴 통합막료회의의 분위기는 아직도 어수선해 보였다.
[방금 긴급 정보가 들어왔네. 아키타가 지금 대규모 공습에 노출되고 있다네. 일부 특수전 부대의 침투까지 있는 모양이야. 지금 육상자위대 일부 부대가 대처하고 있네만, 본격적인 상륙작전일 가능성이 크다는 보고야.]
하토야마가 이야기한 것은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한국군이 어떻게 아키타까지 손을 뻗친단 말인가. 현재 도쿄 방면과 나고야 방면의 상륙병력 외에 또 다른 예비 병력이 부산 일대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군은 상륙용 함선이 부족하고, 현재 동해에는 일본 잠수함이 많지는 않지만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추가적인 상륙은 없는 줄 알았는데, 만약 아키타에 한국군이 상륙하면 자위대는 궤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한국군이 아키타에 상륙하게 된다면 혼슈는 북쪽 끝까지 한국군이 누비게 된다. 이곳 오미나토항이 있는 아오모리현의 바로 남서쪽이 아키타현이었다. 그런데 만약 이곳까지 한국군이 오면 해상자위대는 기항할 곳이 없었다. 아무리 바다를 누비는 해군이라도 보급과 정비를 위해서는 항구가 필요했다.
"자세한 전황이 어떻게 됩니까, 선배? 한국군이 아키타에 추가 상륙작전을 전개하는 겁니까?"
[아직 확실한 건 아닐세. 하지만 지난번 후쿠오카에 대한 공격보다 강도가 훨씬 높다는군. 멍청한 육자대 놈들은 정확한 게 아무것도 없어. 다만, 대규모 공습을 동반하고 있네. 그들의 항공모함 항공단이 본격적으로 가담했다는 말일세. 이번 폭격에 수호이가 동원됐단 말야.]
화면 건너에 보이는 하토야마가 목뒤를 손수건으로 쓸어내고 있었다. 가토도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지금 심정이라면 하토야마도 차라리 호위함을 타고 바다로 나서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을 것이다.
- "아군 잠수함의 공격을 해주어야만 이쪽에서 몰아낼 수 있습니다."
"한국군이 대잠기를 모조리 시마네섬 주위로 투입하고 있네. 그들의 포항급 대잠 코르벳도 거기에 집중 투입됐고. 나는 우리 잠수함이 피해를 많이 입어서 신중하게 접근하라고 했네. 항모전대에 우리 잠수함을 붙이기도 전에 당할 수는 없지."
- 한국 해군도 마찬가지였다. 쓰가루해협을 중심으로 서쪽 300km까지 해상자위대의 소해정과 오라이언을 몽땅 투입한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항공자위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잠수함 사냥에 열중이었다. 잠수함은 발견하기도 어렵지만, 단 한 척만 숨어 있다가 선공을 해도 아군 함대가 치명적인 손실을 입을 수 있었다. 그건 어느 나라 해군이나 마찬가지였다.
- "그렇다면..."
가토가 하토야마가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홋카이도 주둔 사단의 일부 연대가 아직 세이칸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네. 이들을 지금 하코다테항으로 이동시키는 중이네. 하코다테로 가서 이들을 호위해 가게. 이토 의장의 명령이야. 그리고 아직은 시간이 아니다. 항모의 위치를 파악하기 전에는 일본해로 진입하지 말게. 병력을 준비하고 대기하게나.]
"설마 아키타에 역상륙을... 준비하자는 말씀입니까?"
가토가 의아해서 물었다. 그렇다면 그곳은 한국 항모의 제공권 하에 있게 된다. 지금은 수적으로도 한국 공군에 밀리지만, 동등한 숫자로 싸우더라도 F-15J로는 수호이를 잡기 힘들었다. 그럼 어떻게 상륙병력을 준비하라는 말인가. 바다에 모조리 수장시키려고? 역상륙은 간신히 성공하더라도 동원된 병력은 전멸을 각오해야 하는 어려운 작전이다. 그런데 제공권이 한국에 있다면 자위대 병력이 상륙지점에 접근하지도 못하고 전멸할 게 분명했다.
[아키타는 아니네. 이토 히사오 의장의 생각으로는 즉시 가능한 상륙병력을 가지고 아키타에 최대한 가까운 곳을 선택해서 저지선을 펴자는 것이야. 도호쿠지방까지 뚫리면 북해도 사단의 배후까지 적의 기동전력에 노출시킬 우려가 있어. 어차피 세이칸의 수송능력으로는 북해도의 4개 사단을 도쿄로 보내기에도 바빠. 육로로 아키타로 보낼 수는 없다는 말일세. 무슨 말인지 알겠나?]
- 여우 같은 이토는 해상자위대의 상륙함정들을 버스로 이용할 생각인 것이다. 통막 의장은 해자대에서 맡아야 했다. 육상막료장인 고마쓰와 통막의장인 이토 히사오 모두 육장이었다. 고마쓰의 입김이 이토 히사오에게 너무 많이 작용하는 것 같았다. 한솥밥을 먹는 식구들끼리 짜고 논다며 가토 해장이 툴툴댔다.
"알겠습니다. 상륙함정들을 추려서 하코다테로 보내겠습니다. 하지만 오미나토에서 하코다테까지 시간도 시간입니다만, 7사단 녀석들에게 싣고 가고 싶은 것은 모두 여섯 시간 안에 실어야 된다고 전해주십쇼. 자칫하다가는 아키타에 가까이 가는 우리까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최대한 빨리 도착해야 합니다. 고마쓰 육막장에게도 꼭 주지시켜 주십시오."
-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이미 세이칸을 통과한 북해도 사단 병력들 가운데 2사단은 벌써 도쿄 근방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비록 끊어진 교량과 파괴된 터널이 많지만 일부 병력을 얼마든지 우회시킬 수 있었다.
혼슈 북동쪽의 한국군 특수전 부대는 거의 소탕한 모양이었다. 시간을 상당히 빼앗기긴 했지만 이제 기습받을 걱정은 한시름 덜었다. 하지만 전차 트레일러 등 수송수단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리고 혹시나 한국군 잔당들로부터 공격받을까 두려운 고마쓰와 이토는 상륙함을 이용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바다로 수송할 작전을 세운 모양이었다. 세이칸 해저터널이 좁아서 아직 해협을 건너지 못한 사단의 일부 병력을 가토 해장이 수송해 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그러나 그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7사단에게는 상륙함들만 내줄 생각이었다. TV에 비친 한국 해병대 장군이 공언한 것과는 달리, 쓰가루해협에는 잠수함이나 기뢰가 없을 것이라는 게 가토 해장의 판단이었다.
- 12월 23일 13 : 12 홋카이도 오시마(渡島) 현 하코다테시 남서쪽 100km
"좋아. 다시 시작해 볼까?"
440톤급 소해정인 마에지마의 정장 도쿠토미 유자부로(德富蘇峰) 일등해위가 부하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승조원들은 가능한 두툼하게 껴입었지만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바람이 햇빛에 그을린 승조원들 얼굴을 빨갛게 달아오르게 했다. 유명한 홋카이도 바람이 엄청난 속도로 불어오며 물보라를 하얗게 하늘로 날렸다. 승조원들은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열심히 작업에 매달렸다. 이 작업은 한국 해병대 이택규 준장이 나고야에서 쓰가루해협에 기뢰가 깔려 있다고 언론에 발표한 이래 며칠째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기뢰가 발견된 적도 없고, 어선이나 소해정이 기뢰에 접촉해 피해를 입은 적도 없었다.
- 후갑판 끝에 매달린 길쭉한 부이가 바다에 떨어지면서 지름 2미터의 롤러에 감긴 케이블이 풀려나갔다. 후갑판에서 작업하는 소해반원들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케이블이 몇십 미터 끌려나가자 양쪽에 놓여 있던 커다란 기구들을 차례대로 케이블에 연결했고, 케이블에 고정된 기뢰 처리기구들은 케이블과 함께 순식간에 바닷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 뒤에 대기하고 있던 두 척의 소해정, 하하지마와 가미시마는 마치 저인망 어선 두 척이 양쪽에서 그물을 끌고 가듯 같은 속도로 케이블을 끌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쪽에 이어진 케이블에는 방수피복 속에 수많은 코일이 감겨 있어서 이곳에 전기를 통하면 강력한 자장을 발생시킨다. 소해정 하하지마와 가미시마가 1,440마력짜리 미쓰비시제 디젤엔진의 출력을 높이자 속도가 빨라지면서 수중에 강한 자력을 만들어 냈다.
거대한 배가 지나면서 만드는 자장의 변화로 신관이 작동하는 자기 기뢰(滋氣機雷, maganetic mine)의 센서에 자극을 가해 폭파시키려는 의도였다.
- 소해정 마에지마에서는 이미 케이블이 다 풀려나가서 팽팽하게 당겨졌다. 양쪽으로 나뉜 두 줄의 강철 케이블 끝에는 부표가 달려있어서 케이블 끝을 수면에 띄워주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수면 아래에는 날카로운 강철 커터들이 케이블에 줄줄이 매달려 활짝 펴진 채로 계류기뢰(繫留機雷: moored mine)의 와이어를 노렸다. 바닷속에 무거운 추에 매달려 케이블에 고정된 채로 수중에 떠있는 계류기뢰 사이로 마에지마의 강철 와이어가 지나가면 중간에 매달린 커터가 계류기뢰의 케이블을 끊어 버리고, 그렇게 되면 기뢰가 수면 위로 떠오르거나 폭발하는 기뢰제거 방법이다. 소해정들은 쓰가루해협 인근 해역에 집중투입되어 소해정 본연의 임무인, 바다를 청소한다는 말 그대로의 소해(mine sweeping) 작업을 하고 있었다.
"좋아. 여기는 없군. 다시 돌아간 다음에 B지역으로 이동한다. 변침. 좌현 180도로 엔진출력 60퍼센트!"
- "좋아. A지역을 다 훑었다. 우리는 B지역으로 이동한다. 자기 기뢰는 하나도 남기지 말기 바란다."
도쿠토미 일등해위가 송신을 마치고 마에지마함은 다시 B지역으로 이동했다. 사실 계류기뢰 중에 자기로 반응하는 기뢰가 있을 경우에는 아무리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더라도 마에지마함도 위험해진다. 자기 기뢰를 피하기 위해서 마에지마함의 선체는 강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고 선체 내부의 전기장치에도 각종 자기 제거장치들이 있었지만 완벽하게 작동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더군다나 음향으로 작동하는 유도기뢰인 경우에는 대응할 수가 없었다. 방어 수단도 없고 배수량도 작은 소해정은 불꽃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다. 소해정은 마에지마는 탑재한 히다치 ZQS-3 고주파 소나를 탐신하며 수중에 매여 있을 기뢰를 더듬었다.
- 원래 가장 먼저 계류기뢰의 제거에 투입되는 것은 소해정이 아니었다. MH-53E 시 드래건 헬기가 케이블을 끌면서 계류기뢰를 절단하게 되어 있었지만 해상자위대가 보유한 소해헬기 가운데 여섯 대의 시 드래건 헬기들은 이미 한꺼번에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다음이었다. 나머지 4대 중 이곳으로 옮겨온 2대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도쿠토미는 음향기뢰에다 유도기뢰까지 떠올리자 온몸이 전율했다. 음향으로 작동하는 이런 기뢰는 마찬가지로 최대한 긴 케이블에 음파발신기를 끌고 이 잡듯이 누벼야 폭발시킬 수 있다.
헬기가 부족해 더 위험해졌지만, 변수가 많고 위험부담이 큰 소해작업은 어차피 모험이었다.
- 함교로 올라온 가토 해장이 주위를 돌아보았다. 함정의 전체 크기는 작았지만 시라네함의 함교는 공고보다 훨씬 널찍했다. 청명하기로 이름난 무쓰(陸奥) 만도 출렁이기 시작했다. 날씨가 갑자기 나빠지고 있었다. 맑았던 하늘에 구름이 잔뜩 껴서 어느새 하늘은 잿빛으로 어두웠다.
"쓰가루해협의 전 지역에서 소해작업이 완료됐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기뢰지대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상륙선단이 22 : 50까지 하코타테를 출발합니다."
사카에 무네미쓰(酒井光) 해장보가 직접 보고했다. 애초에 1호위대군의 사령권을 쥐고 있던 것이 사카에 해장보였지만 가토 해장이 1, 2호위대군을 통합하여 직접 지휘를 하자 사카에는 참모진으로 남았다. 가토 해장과 비교할 수 있는 냉정함과 정밀함을 갖춘 사람이었다.
- "그런가? 적 항모의 위치를 아직 파악할 수 없지요? 아군 정찰 위성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겠소?"
한국 해군이 제해권을 잡고 있는 동해로 진입하기로 결정한 이상 모든 것에 주의해야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 항모의 위치 파악이었다.
북쪽으로 이동하는 중이라는 마지막 보고 이후 한국의 항모 이순신함은 자위대 조기경보기의 감시구역을 벗어나 있었다. 그리고 무선 봉쇄를 하고 전투기의 착함을 위한 유도 신호까지 포함해 모든 전파발신원을 봉쇄해 버렸다. 어디론가 빠져나가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아울러 항모 호위함대 일부분과 몇몇 대형 함선도 사라졌다는 정보였다. 그것이 미자와 기지에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E-3 조기경보기를 통한 정찰 보고였다.
"현재로서는 불확실합니다. 카메라 정찰위성인 버드 아이(Bird Eye) 6호가 다시 궤도에 진입하려면 두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만, 현재 기상상태가 급속히 나빠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이제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게 됩니다."
사카에 해장보의 우려는 항모를 중심으로 한 한국 해군이 새로운 작전을 꾸미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한국 해군 항모전단이 북쪽으로 진행한 것은 잠깐의 눈속임에 불과했다. 이들이 어디로 갈지 아직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항모전단이 동해에 불어오는 눈바람을 이용할 것은 확실했다.
- "젠장. 러시아제 해양감시 위성이라도 있다면..."
3년 전에 하시모토 총리가 언론에 공표한 뒤 본격적으로 추진된 일본의 군사위성 도입계획은 결국 카메라 정찰위성과 통신 첩보위성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해상자위대가 강력하게 요구했던 해양감시 레이더 위성은 취소되고 만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대출력의 전력을 소모하는 레이더 감시위성은 필요한 전력을 자체 전지나 태양전지판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수소와 산소를 이용한 연료전지도 위성의 전력생산에 중요한 에너지원이 되지만 레이더 감시위성에는 턱없이 부족할 뿐이었다. 가장 확실한 해결책은 원자로가 탑재된 위성이었다.
그러나 2차대전 패전국 일본에서는 핵무기를 보유할 수도 없고, 원자력발전소 외에는 상업적인 이용도 힘들었다. 그 정도라면 외국의 눈치는 볼 필요도 없었지만, 국내 여론이 좋지 못했다. 다 미국이 태평양전쟁 막판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때문이었다.
- 가토는 답답했다. 카메라 감시위성은 목표해역에 눈구름이 끼면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된다. 원자로를 탑재한 레이더 감시위성 발사계획이 최소화된 것이 이렇게까지 아쉬울 수 없었다.
"전쟁만 끝나면 바로 레이더 감시위성 도입을 추진합시다."
"예엣?"
혼자 중얼거리던 가토 해장이 불쑥 이야기하자 영문을 모르는 사카에 해장이 멀뚱거렸다.
- "아니오. 그건 그렇고, 놈들 항모의 의도를 추정해 봅시다. 한국군 상륙거점인 쓰루가 주변에서 후방지원에 전념하던 항모가 갑자기 북쪽으로 이동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소? 혹시 한국군을 아키타에 상륙하려는 게 아니오?"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조금 전에 잠수함대 사령부와 연락을 취했습니다. 항모에 접근하던 아군 잠수함 오키시오가 한국 로미오급 잠수함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대응해서 한 척을 격침시켰습니다. 하지만 한국 대잠초계기들의 집중공격을 받고 격침당했답니다. 한국의 항모 이동은 공중지원의 손실을 무릅쓰고라도 북쪽으로 대피하는 것일 겁니다."
사카에 해장보의 의견은, 한국 해군 항모가 북쪽으로 옮긴 이유는 자위대 잠수함의 위협 때문이라고 분명히 못 박았다. 한국 항모가 만약 항공자위대의 작전반경 안에 있는 아키타 인근 해역까지 북상을 시도한다면, 쓰시마와 쓰루가 근해에 있던 전투함까지 항모 호위에 투입되어야 하고, 그렇게 된다면 쓰루가 근방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상륙거점을 지켜야 할 한국 해군이 그렇게 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렇다면 한국의 항모는 아마 울릉도 근해로 물러서거나, 또는 니가타 근처까지만 북상할 것으로 보였다. 육상자위대 입장에서는 아키타에의 추가상륙을 겁내겠지만, 한국 해군에 항모만 없다면 아키타 상륙은 꿈도 꾸지 못할 게 분명했다.
- "좋소. 예정대로 접근합시다. 다만 사카에 군이 맡아서 잠수함대와의 합동공격을 새로 짜보기 바라오. 잠수함대가 무리를 해서라도 크게 우회해서 항공모함의 도주로를 차단하시오. 혹시나 우리 연합함대의 공격에서 살아남아 항모가 도망가더라도 한국 근해로 도망가지 못하게 저지해야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사카에 해장보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해상자위대 입장에서는 한국의 항모를 격침시키거나 최소한 한국 영해 가까이로 몰아붙여야 도쿄 상공의 제공권을 항공자위대가 획득하게 된다. 그렇게만 된다면 홋카이도에 주둔했던 4개 사단이 대반격을 실시해서 도쿄를 찾고 한국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 12월 23일 22 : 20 홋카이도 오시마현 하코다테 항구
북쪽 부두에 접안한 미우라급 상륙함으로 육상자위대 병력이 속속 탑승하고 있었다. 기준 배수량이 2,000톤이 넘는 이 상륙함은 전차상륙함이었다. 74식 전차 10대를 실을 수 있었고, 병력도 200명이나 탑승시킬 수 있었지만 짧은 거리에다 긴박한 상황이기 때문에 2개 중대나 되는 300명의 인원이 밀려들어갔다.
- "2중대, 전원 탑승한다. 모두 정렬하라!"
덜덜 떨며 담배를 계속 피워댔지만 결국 안토는 수송함의 앞쪽으로 터진 입구로 들어섰다. 마치 입을 크게 벌린 악어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 안토는 기분이 나빴다.
- 늦어진 만큼 수송선단은 최고속력을 냈다. 선단이 하코다테 항을 빠져나오자 호위대군과 합류하기 위해 상륙함들이 최고속도로 내달았다. 13노트로 치닫는 상륙함들은 가득 실은 화물과 병력 때문에 상당히 무거워 보였다.
- 12월 24일 05 : 12 혼슈 후쿠이 현 쓰루가 북쪽 300km 해상
"함대, 전속력으로!"
한국 해군 최초의 항공모함인 이순신함의 항해함교에 올라와 있은 윤도선 소장이 드디어 명령을 내렸다. 기함 이순신의 마스트에 속도깃발이 바뀌어 올라갔다. 함대진형으로 항진할 때 주위함에게 속도표시를 해주기 위한 방법인데, 지금처럼 무선봉쇄 중인 이순신함은 이런 방법으로 연락을 해야만 했다.
- 12월 24일 13 : 28 흔슈 아키타현 아키타시 서쪽 500km 해상
"전투기들이 귀환 중입니다. 정면으로 바람을 맞도록 좌현으로 선회하겠습니다."
이순신함의 함장 김동완 대령이 윤도선 소장에게 보고하고 좌현으로의 조타를 명령했다. 항모의 함재기가 이착함 시에는 바람을 정면으로 받아야만 이착륙 거리가 짧아진다. 게다가 착함은 훨씬 위험했고, 이순신함의 함재기 조종사들은 아직 착함 실력에 문제가 있었다. 바람을 맞받으며 착함 속도를 확실히 줄여야 했다.
- 좌측으로 선회한 이순신함이 한겨울의 북서풍을 정면으로 맞게 되자 상공에서 대기하던 수호이 전폭기들이 하나씩 착함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김종구 대위를 포함한 1편대의 전투기들이 착함을 시작했다. 착륙관제등이 함미에서 반짝이고 접근하는 수호이 전투기의 받음각과 착륙속도가 적합한지를 판정한 뒤 적정할 경우에는 푸른 신호등이 켜졌다. 미사일을 발사하지도 못했던 2, 3공격조의 전폭기가 달고 있던 Kh-35 주렁주렁 매단 채 그대로 어레스팅 기어에 걸려서 30미터쯤 강철 와이어를 끌고 간 후 유압제동기의 힘으로 멈췄다.
- [파렌하잇. 이젠 착함이 부드럽구만 기래요]
상공에서 착함 순서를 기다리던 인민군 출신 권한진 상위가 착륙을 마친 김종구 대위의 기체에 대고 야유를 보냈다. 다음으로 오병철 대위가 항모에 천천히 접근하면서 착륙을 시도했다. 그 순간이었다. 이순신함 좌측으로 뭔가 하얀 항적이 길게 이어졌다.
- "걱정 말게. 이순신함의 방어 구획은 치밀하다는 것을 알잖은가. 이 정도로 가라앉지는 않아. 자네가 여기에 남아서 해줄 일이 있네. 참. 아직 상공에서 대기하는 전투기는 얼마나 되는가."
윤 소장은 막무가내였다.
"여덟 대입니다."
어뢰에 항모가 피격되는 통에 지금 상공에 남아 있는 전투기들은 착함할 수가 없었다.
"모두 니가타로 보내. 특공여단 병력이 니가타공항을 장악하고 있댔지? 그곳에 비상착륙 시켜! 상륙부대로부터 협조도 구하고. 어서 서두르게."
"사령관님. 연기만 걷히면 착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상공의 녀석들은 남은 연료가 충분합니다. 대기시킬 수 있습니다. 이미 대기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아니야. 철수시켜야 하네. 상공의 E-2C도 빼버려!"
예상 밖의 명령에 함장이 의아했지만 사령관의 생각은 단호했다. 상공을 감시해 줄 조기경보기까지 니가타로 비상착륙시키라니, 그렇게 되면 함대의 경보망이 걷히게 될 것이다.
"잊지 말게. 그리고 상륙군 사령부에 확실하게 당부를 해둬. 우리 전투기들을 잘 지켜 달라고. 니가타에 착륙하는 대로 재급유를 하고 대기하라고 하게. 꼭 평문통신으로, 긴급회선을 이용해서 하게. 알겠나?"
- 김동완 대령은 무엇인가를 느꼈지만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평문통신이라니, 도청될 가능성을 알고서 하는 얘기인가?
- "여기를 보아주십시오. 탄약고 구획은 세 군데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 중 가장 뒤쪽의 탄약고에 바닷물을 주입합니다. 그렇게 되면 탄약고 유폭을 막을 수 있습니다."
에비역 중령의 해결방법은 명쾌했다. 불을 끄는 데 매달릴 것이 아니라 탈 것은 타게 놔두고 인접한 시설 중에 포기할 것은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함을 구하면 복수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당분간 한국군은 일본에서의 제공권과 제해권 일부를 잃을 가능성이 컸다.
"좋아. 하지만 후부 탄약고 연료탱크에 바닷물을 주입하면 함 균형이 더 쏠리지 않겠는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좌현 쪽에서 방수구획 몇 개를 더 터뜨리면 됩니다. 물론 이순신함은 선체 하부가 누더기가 되겠지만 힘의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전투기의 이착함도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사령관이 듣기에도 비상관리실장의 의견은 그럴듯했다. 특히 전투기의 이착함이 가능할 정도로 좌현이 가라앉아 균형을 맞춰 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알았네. 자네 의견대로 실행하게. 3, 4번 연료탱크에서 연료를 몽땅 비워 버려. 그리고 후부 탄약고는 물을 채워 넣고 후부 항공기 연료탱크도 비워 버리게. 그리고..."
"옛! 사령관님."
"화재를 진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 "무슨 말인지 모르겠나? 불을 내버려 둬도 이순신함에 치명적이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말일세."
"예. 그렇습니다만... 연기가 심하게 나겠지만 몇 시간, 혹은 열 시간 정도 태우면 꺼지긴 할 겁니다."
"좋아! 그럼 불길은 끄지 말게. 위험하다고 판단될 때만 불길 일부만 죽이도록 하게. 앞으로 대여섯 시간... 내가 별도 지시를 내릴 때까지 불길을 그대로 두게 알았나?"
"옛! 알겠습니다."
"그리고, 함수 쪽에도 우현 중 적당한 곳을 터뜨려서 불길을 내게. 멀리서도 두 줄기의 검은 연기를 확인할 수 있도록.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엉뚱한 명령을 내리고 뒤돌아가는 윤도선 소장을 바라보며 비상관리실장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불길을 놔두라니. 끄지 말고 그냥 태우라니.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지만, 이 예비역 중령은 설마 했다.
- 12월 24일 14 : 54 혼슈 아오모리현 쓰가루반도 서쪽 70km 해상
"버드 아이 5로부터 정찰 결과가 나왔습니다. 우리 잠수함이 이순신함에 제대로 한 방 먹인 모양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사진을 전송받고 있습니다."
"이런!"
통신 사관으로부터 보고를 듣자 연합함대 기함 시라네의 함교에 있던 가토 해장이 손바닥을 주먹으로 치며 소리를 내고 벌떡 일어섰다.
"어서 가져오게!"
- "새로운 보고입니다. 노토 반도에 남아 있는 통신감청부대에서 보냅니다. 다수의 항공기들이 북동쪽에서 날아와 니가타 쪽으로 착륙하고 있답니다. 호크 아이의 레이더와 수호이-33의 사격통제 레이더로 확인됐습니다."
가토 해장에게 보고하는 통신 사관의 목소리에도 그 의미가 짙게 배어 있었다. 항모의 함재기들이 착함에 실패하고 가까운 니가타로 대피하고 있는 것이었다.
"즉시 확인하라. 항공자위대의 빅 아이를 호출해. 이쪽으로 긴급배치 해달라고 말야. 현재 상황을 설명해 주고 가능한 거리까지 접근해서 놈들의 항모 위치를 확실히 알아내라고 해!"
'빅 아이'라면 항공자위대의 E-3 조기경보경계기를 의미했다. 가토가 한 번 더 신중하게 검토했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서 들어오는 정보는 한결같았다. 항모는 완전히 전투불능에 빠진 것이었다. 이순신함은 착함능력까지 잃고 탑재기들도 대피시키고 있었다.
"추적합시다."
가토가 흥분을 간신히 억제하고 사카에 해장보에게 말했다. 동해로 진입하면서도 정말 이런 명령을 내릴 기회가 있을까 의심했던 명령이었다.
- 지금까지 이 중형 항모는 임진왜란 때의 이순신 장군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약체로 평가되던 한국 해군이 중형 항공모함 한 대에 수호이 전투기 몇 대를 싣자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며 일본의 하늘과 바다를 완전히 제압해 버린 것이다.
- "함대 전속력으로! 놈들을 추적한다. 상처 입은 곰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은신처로 숨기 전에 숨통을 끊어놔야 돼! 그리고 잠수함대 사령부를 호출해. 우리가 몰 것이라고 알려라. 미자와에 스크램블을 한 번 더 요청하고. 어쩌면 공중급유기를 이용해서 한국 본토에서 전투기를 투입할 수도 있어."
가토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려했다. 하지만 변수는 없었다. 항모전대가 북상하면서 그 속력으로 잠수함대를 동반할 수는 없었다. 이제 항모가 한반도의 그늘로 숨기 전에 몰아붙여서 해치워 버려야 했다.
- 전 함대가 32노트에 달하는 속도로 추격을 시작했다. 앞서 있는 한국의 항모가 절름발이였지만 따라잡기 위해서는 급히 서둘러야 했다. 그리고 공포감에 정신없이 도망치도록 밀어붙여야 했다. 이번에 만약 항모를 잡는다면 해상자위대는 일본을 구할 영웅으로 떠오를 기회였다. 그리고 그 기회는 바로 눈앞에 있었다. 절대 놓칠 수 없었다.
- 12월 24일 15 : 24 혼슈 아키타현 아키타시 서쪽 500km 해상
"동무들. 이제 모든 열쇠를 우리가 다시 갖게 됐소. 황 중령동지의 공격 명령과 시간제어가 핵심이란 것을 절대 명심하기요."
백범수 대좌가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이제 항모에서 발진할 수 있는 전투기는 16대뿐이었다. 그동안 동해에 떨어진 전투기와 니가타로 비상착륙시킨 전투기를 뺀 나머지였다. 윤도선 소장은 이 정도 숫자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을까? 덕분에 남은 16대의 수호이가 모두 빠져나가면 이순신함은 방공전투기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이순신함은 이제 스스로 자신을 보호해야만 했다.
- "예. 알겠습니다. 자, 모두들 일어서자. 멋도 모르고 슬금슬금 몰려오는 놈들의 숨통을 끊어주는 거야!"
몇 달 전까지 여객기 조종사였던 황인호 중령이 벌떡 일어섰다. 예비역 중령인 그가 한국군중 수호이에 완전히 적응했다는 것이 백대좌로서도 신기했다. 조장호 대령이 니가타로 빠져나간 지금 황인호가 비행대 지휘임무도 해내야 했다.
브리핑을 마친 파일럿들이 비행갑판에 올려져 있을 전투기를 향해서 서둘러 작전실을 빠져나갔다. 해군항공대 특유의 느슨한 오렌지색 비행복이 바람에 팔랑거렸다.
- 12월 24일 15:56 혼슈 아키타현 아키타시 서쪽 410km 해상
이순신함에는 두 개의 일렉트로펄트 시스템이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함의 후방을 가격한 어뢰는 뒤쪽 일렉트로펄트로 공급되는 주동력선에 손상을 입혔다. 전기로 작동되는 일렉트로펄트 항공기 사출 시스템은 하나밖에 작동하지 않았다. 한 대의 사출간격이 30초였기 때문에 탑재한 모든 비행기를 띄우려면 10분은 걸렸다. 그나마 탑재기가 적어서 긴 시간도 아니었다.
- "호크 아이를 먼저 띄워서 전진시켜 주시오. 전파봉쇄를 지시하게. 아직은 감시를 재개할 시간이 아니야."
관제소로 올라온 비행전단장 백범수 대좌가 사령관의 지시대로 호크 아이를 호출했다. 백 대좌도 이번 공격을 직접 지휘하고 싶었지만 윤 소장이 나서 극구 만류했다. 하지만 역시 복좌형 수호이-33UB 전폭기에는 백 대좌보다 더 유능한 공격 오퍼레이터가 탑승해야만 했다. 전투기 관제센터의 창문 아래로 비행갑판을 내려다보는 윤도선 소장의 눈길은 뜻밖에 차분했다. 전방갑판에 일부러 일으켜 놓은 화재를 진압해서 함교의 시야도 깨끗했다. 비행갑판에 늘어선 16대의 전투기와 2대의 호크 아이 조기경보기가 보였다.
- 가장 먼저 호크 아이 1번기가 이륙시작 지점에 자리 잡고 앞바퀴에 캐터펄트의 연결장치를 걸었다. 이함 요원들의 수신호는 미국 해군과 똑같았다. 갑판에서는 어차피 손으로 모든 신호를 해야 했고, 이는 항모 운용경험이 풍부한 미국 해군의 전통적인 '선상 위의 발레'가 가장 효율적이었다. 이함 요원이 손을 쫙 펴서 공중으로 크게 한 바퀴 돌린 뒤 앞을 가리키자 일렉트로펄트를 담당하는 하사관이 작동버튼을 눌렀다. 이 사출장치는 증기 캐터펄트처럼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는 것도 아니었다. 조용히 미끄러지기 시작한 호크 아이는 급격한 속도로 가속되어 바다 위로 튕겨졌다.
일본 호위함대는 어느새 250km 거리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저공에서 선회시킨다면 해상자위대는 호크 아이가 울릉도에서 출격한 것으로 착각할 것이다. 이제 일본의 정찰위성이 다시 상공을 통과할 시간이지만 알아차렸더라도 그들이 손을 쓰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 호크 아이가 또 한 대 이륙했다. 이제 대기하고 있던 대함공격조인 수호이-33 전폭기들이 이륙지점으로 진입했다. 잠시 후 수호이 전투기들도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정확히 10분 후에, 호크 아이에게 감시를 재개시키게."
윤도선 소장이 시계를 쳐다본 뒤 사라져 가는 전투기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 12월 24일 16 : 34 혼슈 아키타현과 아오모리현 경계선 상공
"놈들의 항모가 앉은뱅이가 됐단 말이지."
기타무라 슈쓰이 일등공좌가 중얼거렸다. 항공자위대의 유일하게 남은 E-3 조기경보경계기 3번기가 아오모리현 상공에서 아키타현으로 내려왔다. 그동안 골칫거리였던 한국 해군의 항모가 피격된 사실은 정찰위성의 사진으로도 확인되었다. 한국의 항공모함이 어뢰 두 발을 맞고 드디어 도망치고 있었다.
- 그러나 숫자가 많고 속도가 너무 빨랐다. 그렇다면 무엇인지 분명했다. 다만, 기타무라는 그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항공기 숫자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탐지고도는 저공입니다. 거리는 300km, 속도는 400노트, 침로는... 1, 2호위대군을 향합니다. 호위대군과의 거리가 200km도 채 안 됩니다!"
"이런 일이! 어디서 나타난 비행기인가. 한국 본토에서 이륙했을 리가 없어. 즉시 호위대군에 경보를 띄워!"
"통제관님! 미자와에서는 아직 준비가... 스크램블을 할 수 있는 요격기가 부족합니다. F-15 전투기들은 니가타에 비상착륙한 한국의 항모함재기를 소탕하기 위해 출발한 F-2 편대를 호위하러 나갔습니다. 나머지 F-2 지원기는 대함무장으로 마쳐 놓은 상태입니다..."
"당했다!"
기다무라 일등공좌가 레이더 화면을 확인하며 사색이 되었다.
- 백남억 중좌가 지휘하는 3대가 상공에 남고 다른 2대의 전투기는 텅 비어버린 이순신함을 지키기 위해 되돌아갔다. 그 사이에 마지막 제3공격제파인 최라일 소령이 미사일 발사속도를 주기 위해 애프터버너를 키고 기체를 급가속시켰다.
[소양강대다! 버너 온(burner on : 후연소기 가동)! 발사준비 완료!]
"바로 발사한다. 준비하라. 셋, 둘, 하나, 발사!"
별도의 카운트 시간을 갖지 않았던 소양강대의 편대기들이 각각 네 발의 미사일을 차례대로 두 발씩 떨궜다. 미사일이 뒤에서 노란 화염을 뿜으며 날아갔다.
- Kh-31A, 나토 코드명 AS-17 미사일은 마치 마하 2.5의 초고속 대함미사일인 Kh-41(3M 80 Sun-Burn)을 축소한 것처럼 생겼다. 선번이 수상함에 탑재하는 미사일이고 자중이 4톤에 가까워 백파이어 등 중폭격기만이 탑재할 수 있는데 반해 Kh-31은 자중 600kg의 하픈스키와 비슷한 크기였다. 하지만 추진방식은 선번과 똑같은 고체로켓-램제트 복합추진이었다. 선번과 비슷한 외형으로 동체 둘레에 4개의 공기흡입구를 가진 이 미사일은 고체로켓의 연소시 발생하는 공동현상을 램제트 엔진의 연소실로 사용하는 통합식 로켓/램제트 엔진으로 초고속의 스피드를 냈다.
급강하하여 수면 위 20미터의 고도에 이른 Kh-31 미사일은 이런 초저공에서는 내기 힘든 마하 2.5의 순항속도로 앞서가던 하픈스키 미사일들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소총탄의 속도와 맞먹는 마하 2.5는 초저공에서는 공기의 저항 때문에 내기 쉬운 속도가 아니다. 강력한 내열 유리섬유를 가진 탄두 부분이 공기와의 마찰로 일어나는 고온의 열을 막아주고 내부의 레이더를 보호했다.
- "바보 같은! 초저공에서 마하 2.5라니..."
조기경보기 통제관 기다무라 일등공좌는 놀란 나머지 함대와 통하는 핫라인을 들고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모두 다 바다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가는 시 스키밍형 미사일이었다. 이곳 하늘에 띄워진 공중조기경계기에서는 저고도의 비행물체를 발견할 수 있지만 함대가 보유한 대공 레이더는 아직 탐지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아무리 이지스함 공고라 하더라도 수평선 너머 그늘 밑을 날아오는 미사일을 탐지할 수는 없었다. 레이더는 목표가 수평선을 넘어서는 거리, 50에서 60km까지 다가온 다음에야 탐지할 수 있었다.
미사일의 이동 정보는 계속 공고에게 데이터 링크되고 있었다. 하지만 사격지휘 레이더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한 공고도 손을 쓰지 못하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12월 24일 16:58 혼슈 아키타현 아키타시 서쪽 148km 해상
"함대 방공대형으로! 어서 아마기리와 우미기리를 합류시켜!"
다급해진 가토 해장이 크게 소리쳤다. 조기경보기 빅 아이로부터 전송받은 대함미사일의 좌표가 연합함대에 급속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거리는 약 70km, 이지스함 공고가 아직 추적을 할 수 없는 거리였다.
"젠장! 스탠더드 미사일이 부족해. 망할..."
연합함대 기함이기도 한 헬기호위함 시라네는 시 스패로 미사일 여덟 발을 온전히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요격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은 기껏 두 발 정도, 팰렁스가 잘해준다 해도 겨우 네 발까지 요격할 수 있을 뿐이었다. 가토는 현대 해전이 위치 싸움과 기만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 12월 24일 16 : 59 혼슈 아키타현 아키타시 서쪽 151km 해상
해상자위대 연합함대 선두에서 항진하던 이지스함 공고로부터 스탠더드 미사일이 연이어 치솟았다. 선두로 접근해 오는 20기의 대함미사일은 공고의 메인 컴퓨터인 UYK-43에 침로와 속도가 계산되어 즉시 지휘결정 시스템 Mk-1로 전달되고, 함이 보유한 3기의 SPG62 사격지휘 레이더를 가동했다. 일정 좌표까지 입력된 지점을 향해 관성항법장치의 유도로 비행한 스탠더드 블록 3형 대공미사일이 바다에 착 달라붙어 쇄도하는 하픈스키 대함미사일을 덮쳤다. 직접 가격 당한 Kh-35 하픈스키가 있는 반면에 근접신관으로 폭발한 스탠더드 미사일의 폭발로 비산하는 파편에 레이더 추적장치가 파괴된 하픈스키 대함미사일은 진행방향 그대로 내달았다. 그러나 이것들은 예정된 지점 8km 전방에서 자체 레이더를 작동시키지는 못할 운명이었다.
탐지장치가 파괴된 하픈스키 미사일이었지만 정상궤도로 비행할 경우에 그것을 추적하는 공고함에서는 장님 미사일이란 사실을 인식할 수는 없었다. 또 다른 스탠더드 미사일이 상처받은 하픈스키 미사일을 향해 날아갔고, 이것이 파괴된 다음 새로운 목표를 찾았다.
그때였다. 후방에서 초고속으로 하픈스키를 뒤따르던 Kh-31 대함미사일이 수평선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시속 3,000km에 가까운 이 미사일은 존재가 드러난 다음부터 목표까지 도달하는 시간이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초고속 저공 목표 20기 탐지. 본함에 급속 접근 중!"
이지스함 공고의 전투정보센터 요원들이 경악했다. 방공담당관 구보야마가 새로운 위협에 놀랐지만 이 순간에는 대공 미사일 사격을 이지스 컴퓨터에 그대로 맡기는 게 더 나았다. 너무 빠른 침투속도를 가진 대함 미사일을 인력으로 대응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만약에 컴퓨터가 오작동이라도 일으킨다면 끝장이었다.
- 하픈스키보다 약간 높은 고도를 가진 Kh-31 미사일은 속도가 워낙 빠른 대신에 추적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아음속 미사일을 전제로 60년대에 개발됐던 스탠더드 미사일 시리즈는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신형 미사일에 대응하기에는 운동성이 나빴다는 것이 문제였다. 마하 2에 가까운 속도를 자랑하는 스탠더드 미사일이지만 그보다 더 빠른 Kh-31 대함미사일을 완벽하게 요격할 수는 없었다. 첫 번째 탄막을 빠져나온 12발의 대함미사일이 어느새 함대 15km까지 접근했다. 이번에는 전방의 Mk-41 발사기에 장착된 발전형 시 스패로 미사일이 치솟기 시작했다.
- 한국 해군 KDX-2급이 장비한 발사기와 똑같은 마크41 수직발사기 하나에서 스탠더드 대신 시 스패로 대공미사일이 4발씩 튀어나와 마지막으로 팝업 비행을 시작하는 Kh-31 대함미사일을 향해 떼를 지어 달려들었다. 대함미사일이 최후 유도를 하기 위해서는 목표를 레이더로 확인할 필요가 생긴다. 저고도로 침투하는 미사일로서도 목표함정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내기 위해서는 수면 위로 가능한 높게 상승해야만 했다. 팝업(pop-up), 혹은 합업(hop-up)이라고도 부르는 이런 비행 방식은 팝콘기에서 마치 옥수수가 튀어 오르는 듯하다고 해서 붙여진 비행방식이다. 잔뜩 달궈진 옥수수처럼 대함미사일이 튀어 오르며 중고도에서 목표인 공고와 시라네 등을 확인한 뒤, 다시 다이빙 코스로 바뀌며 함대로 돌진했다.
"시 스패로 대응 중입니다. 제3파가 25km까지 접근했습니다. 현재로서는 추적할 수 없습니다."
- "팰렁스 요격 개시!"
함교 아랫부분에 장비한 팰렁스 20밀리 개틀링 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적외선 백업 모드를 가진 신형 팰렁스는 레이더로 추적하는 목표에 적외선 이미지를 추가해서 초당 50발의 20밀리 포탄을 쏟아부었다.
"채프 발사!"
전방 팰렁스의 옆에 장착된 Mk-36 SRBOC 채프 살포 로켓 시스템이 펑펑 터지며 하늘에 알루미늄 은박을 가득 뿌렸다. 6연장의 이 로켓을 양쪽에 2기씩 4기를 장비한 공고는 장전된 24발의 채프를 모조리 쏘아 올렸다. 수백 킬로그램의 알루미늄 호일이 공고함의 수백 미터 앞에 휘날리며 다가오는 Kh-31과 Kh-35 대함미사일의 추적 레이더를 혼란시켰다.
- 하지만 연합함대는 팰렁스를 쓰든지 채프를 쓰든지 양자택일해야 했다. 마지막에 이르러 이 두 가지 시스템은 서로의 작동을 방해했다. 맹렬히 불을 뿜는 팰렁스 앞을 거대한 알루미늄의 구름이 가려 버리자 Kh-31과 Kh-35 미사일은 커다란 목표인 이지스함을 포착했지만 팰렁스는 전자적 구름에 가려 상대적으로 작은 대함미사일을 포착하지 못했다. 가려진 구름사이로 다가오는 미사일을 놓친 팰렁스 기관포가 리셋모드와 추적모드를 반복하면서 대공사격을 가하지 못했다. 게다가 가까이 접근한 K-31 미사일에 채프를 발사하는 것은 이미 너무 늦었다. 대함미사일이 2km 전방에서 채프의 구름 속에 숨은 공고함을 향해 그대로 직진해 버린 것이었다. 마하 2.5의 속도, 그리고 추진연료가 소모되어 중량이 400kg으로 줄어든 Kh-31 미사일은 그 운동에너지만으로도 위험했다.
- 대함미사일 몇 발에 스탠더드 미사일과 시 스패로 미사일의 대응 숫자, 공격 성공률이 분류됐다. 이번 공격을 모니터 한 자료로 유추할 수 있는 정보는 많았다. 최적의 요격코스 대함 미사일의 유효한 침투 코스, 한국군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함정탑재 미사일 시스템의 보완이나 대함미사일의 자체개발, 대전자방어책, 기술 등 여러 방면에서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다. 벌써부터 미국은 실전에 투입된 각종 무기들의 평가보고서는 물론이고 비디오나 DVD에 저장된 각종 전투의 1차 소스까지도 정중히 요구했다. 아마도 미국제 무기시스템의 보완에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엄청난 오작동과 형편없는 명중률을 자랑하는 시스템이 외국에 알려지는 것을 방해하려는 의도도 숨어 있었다.
- "살아남았다니! 모질구만. 지 소령. 항모에서 호출할 수 있는 비행기는?"
살아남은 목표의 속도가 20노트라면 전투력이 온전한 호위함이 있을지도 몰랐다.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이번에 반드시 숨통을 끊어놔야만 했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만 하면 당분간 일본은 해군전력이 거의 0에 가깝게 된다. 그렇게 되면 혹시나 있을지 모를 상륙부대의 추가투입도 쉽게 이뤄지고 지상지원도 훨씬 안전하게 수행될 것이다. 그 효과는 꼭 이번 전쟁에 국한되지 않았다. 앞으로 발생할지도 모를 독도분쟁이나, 일본이 자의로 직선기선을 취해 조업 중인 한국어선이 억울하게 나포되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 "어서 호출해. 대함 미사일 네 방이면 적은 분량이 아니야. 정 안되면 기관포 공격이라도 시켜!"
- 12월 24일 17 : 15 혼슈 아키타현 아키타시 서쪽 170km 해상
"잠망경 심도로 부상한다!"
"잠망경 심도로 부상! 상승한다!”
최승호 상좌는 확인을 하기로 결심했다. 최윤덕함의 X자형 종횡타가 움직이고 잠수함은 마치 비행기가 상승하듯 물의 흐름을 바꿔 천천히 수면을 향해 치솟기 시작했다.
몇 분 전의 커다란 폭음은 20km 이상 떨어진 이곳의 최윤덕함에서도 명확하게 포착되었다. 추정방위로는 일본 함대일 가능성이 유력하지만 역시 확인을 해야 했다.
"잠망경 올려!"
- 곽일준 소령이 잠망경을 해상 수색모드로 바꿔서 최 상좌가 발견한 목표를 확인했다.
"공격 준비하기요."
"예?"
곽 소령이 갑자기 공격하라는 명령에 함장을 돌아보았다.
"하픈과 어뢰를 같이 씁세다. 먼저 어뢰 공격, 그리고 어뢰의 도달시간에 동시 착탄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픈을 쏘는 기야요. 하픈 네 발과 어뢰 세 발씩 준비하기요."
"알겠습니다. 공격 방위 산정. 2, 3, 5번 발사관 주수한다. 모두 유선 유도 움직이고 있는 두 놈 중 앞쪽 팔팔한 녀석에게 두 발, 뒤엣놈에게 한 발이다."
명령이 떨어지자 어뢰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발사관에 물이 주입되고 세 발의 SUT 어뢰의 유도장치와 최윤덕함의 사격통제장치가 연결되자 푸른색 링크 표시등이 깜박였다.
- 어뢰를 발사하는 최윤덕함은 진동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발사관 속에서 SUT 어뢰가 스스로의 추진력으로 부드럽게 빠져나온 뒤 장거리 목표를 추적할 수 있도록 순항속도인 24노트로 일본 함대를 향해 빠르게 멀어져 갔다. 이 어뢰는 순항속도 50여 km를 자랑하는 장거리 어뢰였다.
"그럼 계속 발사심도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이제 40분 정도 후가 되어야만 SUT 어뢰는 목표지점에 도착할 것이었다. 짧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어뢰가 20km 거리를 도달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어뢰는 유선 유도 케이블이 모두 풀려나가는 15km 지점에 이르러서야 최고속도로 마지막 접근을 할 예정이었다.
"앙이오. 온도층 밑으로 잠시 내려간 다음, 정확히 35분 후에 하픈 공격을 시작합네다. 심도 120미터로 변경하기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탐지 확률이 높은 잠망경 심도에 계속 대기할 수만은 없었다. 최윤덕함은 다시 깊은 바다로 조용히 미끄러져 들어갔다.
- 12월 24일 17 : 22 혼슈 니가타현 니가타시 북서쪽 170km
[웨이포인트 재설정 방위 0-1-0, 거리 300km. 적 수상함대 도주 중, 괭이갈매기가 잔여 미사일을 쏟아붓는다. 신속히 행동하라.]
니가타에서의 연료보급작전은 혼란스럽게 수행되었다. 수호이-33이 장비하는 률카 AL-31F 엔진은 민간항공기의 터보팬 엔진보다 훨씬 고농도의 연료를 써야 했지만 니가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연료는 아니었다. 우선 이륙한 다음 항모에 가까워지면 공중급유용 장비를 갖추고 항모에서 이륙한 수호이-33으로부터 연료보급을 받기로 했을 정도로 연료문제에 신경을 썼는데 지금 호크 아이에서는 공격임무를 하달한 것이었다.
"뭐야? 미사일 네 발로 공격하라는 거야?"
조장호 대령은 조기경보기로부터의 새로운 지시에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명령은 명령이었다. 윙맨에게 수신호를 보낸 다음 Kh-35 미사일을 장비한 두 대를 편대의 가장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 12월 24일 17:40 혼슈 아키타현 아키타시 서쪽 180km 해상
[방위 0-9-5에 무엇인가 있습니다. 함장!]
수측실에서 무엇인가를 잡아낸 모양이었다. 유우시오급 8번함인 2,300톤급 잠수함 다케시오의 함장은 직감적으로 한국군 잠수함이란 것을 느꼈다. 수 차례나 추진 노이즈를 추적하다가 사라진 적이 있었다. 이것이 다케시오에서 동쪽, 혼슈에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을 알고 기겁했다. 그만큼 최윤덕함은 조용히 움직였다. 한국 해군 잠수함이 가진 공기불요 추진 잠수함이 문제였다. 작전행동 중에 전혀 부상하지 않는 데다 발전을 하는데도 엔진 구동이 필요하지 않은 독일제 212형이었다. 함장은 진작에 일본에서도 공기불요 추진 시스템을 도입하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다.
- "수중전화 연결해!"
야마다 일등해좌가 수중전화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거리가 1km 넘게 떨어졌지만 감도는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치카와(市川)네. 그쪽에서도 탐지했나?]
공동행동 중인 유우시오급 10번함 사치시오였다.
"우리가 북쪽으로 우회하겠다. 자네가 남쪽에서 밀어주겠나?"
[알았다. 놈을 밀어 올리겠다.]
야마다가 마이크를 내려놓은 후에 작도판으로 걸어갔다. 먼저 발견한 이상 그에게 유리했다. 더구나 이쪽은 공동작전을 펼 수 있는 동료 잠수함이 있었다.
- "9분."
포수 박 병장의 물음에 박철호 대위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더 이상 길게 늘여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도 부하들이나 자기 자신의 긴장을 풀기 위해선 뭐라고 좀 말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동안은 의기양양하게 '난 싸우러 왔노라'라고 주절대면서 돌아다녔는데, 정작 전투를 눈앞에 두니 몸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 그는 왼쪽 가슴에 단 독일군 전차돌격기장을 매만졌다. 그의 승리, 생존 마스코트와도 같은 물건이었다. 2차대전 때 5회 이상 전차를 타고 전투에 참가한 전차병에 한해 수여했던 기장이 전차돌격기장이었다. 박철호 대위는 독일 육사 유학 시절에 어렵사리 진품을 하나 구했다. 물건을 판 장사꾼은 SS 1기갑사단 '아돌프 히틀러 친위연대'의 그 유명한 13 중대에서 복무한 전차병의 물건이라고 했다. 독일에서는 이런 진품의 거래가 금지되어 있었지만, 돈만 있으면 구할 수 없는 것은 없었다.
주석으로 만들고 구리를 입힌 전차돌격기장은 상당히 묵직했다. 기장의 무게에 군복이 구겨지기 때문에 겨울 군복이 아니면 멋이 나지 않았다.
- 74식 전차들은 유기압식 현가장치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해 차고를 255센티미터까지 낮춘 상태에서 공격해오고 있었다. 3개 전차중대, 총 42대가 여기저기서 집중적으로 사격을 가해오고 있었다.
- 12월 25일 07 : 10 도쿄도 시부야 롯폰기, 구 자위대 중앙지휘소
"두 공격방향 모두에서 적과 접촉했습니다. 각각 중대에서 대대규모의 적 전차대와 교전 중인데, 쌍방 간에 피해는 아직 거의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작전참모의 목소리에는 억양이 없었다. 전투는 이제 시작단계에 불과했기 때문에 뭐라고 단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직까지 피해가 없다는 것이 허철화 상장에게는 그나마 희망적인 소식이었다.
- "21사단 쪽이 걱정이구만기래."
"보병사단들이 따라가기엔 아직 좀 이른 것 같디 않아? 보병사단들에는 일단 대기명령을 내리고, 21사단하고 5여단에 명령을 내리기요. 적의 방어선을 속히 격파하고 전진하도록."
기갑부대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서 적을 격파하는 것이다. 허철화 상장은 예하의 두 개 기갑부대가 그 명령을 따르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특히 21사단은 후지 전투에서는 잘했지만 이번 공세에서는 아무래도 불안했다. 후지 전투에서 입은 피해가 너무 컸다. 게다가 다른 부대들에도 문제는 많았다. 무엇보다도 보급선이 불안정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당장 가지고 있는 물자만으로 일을 끝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실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더 많은 물자가 필요했다. 통참에서는 이미 선편으로 물자를 보냈다고 하지만 그게 과연 도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이미 제5기갑여단이나 제15보병사단은 이동 중에 일본 잠수함대에게 피해를 입었었다. 새로 올 보급선단이라고 그런 운명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해전은 확실히 이긴 모양이지만, 아직 일본 잠수함은 동해에 쫙 깔린 상태였다. 그 숨어 있는 일본 잠수함들 때문에 적지 않게 골치가 아팠다.
- 문득 허철화 상장은 지금의 공세 양상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기억을 더듬던 허 상장은 곧 한 가지 전투를 기억해 냈다. 1942년 8월 30일 밤, 북아프리카의 알람 엘하르파 지역에서 펼쳐졌던 독일군의 최후공세와 비슷했다. 2개 기갑사단을 주축으로 하는 주력부대가 영국군 전선 두 곳에 허점을 찌르고 파고 들어가려 했던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잘 구축된 영국군 방어 진지에 걸려들었다. 영국군에게도 상당한 피해를 입혔지만 독일군은 견디기 힘들 만큼 큰 피해를 입은 데다가 보급마저 끊겨, 채 이틀을 공격하지 못하고 공세를 전면 중단했다. 한국군과 마찬가지로 독일군은 보급선이 열려 있었지만, 그 열린 보급선으로 도착하는 물자는 한국군처럼 부족했다. 실질적으로는 끊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 그런 조치를 취해준다 해도 너무 늦었다. 이미 미국의 군수물자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항구는 거의 없었다.
"일단 있는 걸로 해볼 수밖에는 없소. 한국군 보급선은 아직도 열려 있는데, 우린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구만. 잠수함들이 그쪽 보급선을 좀 막아 줬으면 좋겠는데..."
- 현대 전차전에서의 중요한 특징은 초탄명중률과 피탄시 격파확률이 크게 올라갔다는 데 있다. 2차대전 당시의 초탄명중률은 1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고, 실제로 독일 기갑부대의 주력전차 중 하나인 6호전차 티거(Tiger)의 경우 포탄을 92발 실어도 모자라 나중에 탑재랑을 110발까지 끌어올려야 했을 정도였다. 또한 티거의 믿음직스러운 88밀리 대공포조차도 주된 상대 전차인 T-34나 KV-1을 1발로 격파하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관통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은 둘째 치고, 관통되더라도 당시의 철갑탄은 차내의 승무원을 휩쓸어 버리는 능력에 있어서는 현대전차포에 비해서는 너무나 약했다.
- 그러던 것이 1950년대에서 60년대를 지나면서 크게 변모했다. 초탄명중률은 이미 2세대 전차 시점에서 50%에 도달했고, 사용하는 포탄도 관통력에서 매우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면서 내부 충격과 파괴효율도 크게 올라갔다. 또한 전차의 내부 구조가 복잡해지면서 늘어난 유압시스템에 인화되는 일도 잦아져 그만큼 전차승무원들의 사상률은 크게 올라갔다. 따라서 사용되는 포탄의 총소모량은 1990년대 걸프전 시점에서는 거의 30%~50%까지 감소했다. 미군의 주력전차인 M-1A1은 상대전차인 이라크군 T-72를 어느 거리에서든 격파할 수 있었고, 또한 초탄명중률도 75%에 달했기 때문에 실제 포탄소모율은 거의 30% 선까지 줄어들었다. 설사 상대전차가 2세대 전차인 T-72가 아닌 다른 나라의 3세대 전차였다 하더라도 소모율은 2차대전의 50% 미만으로 끝났을 것이다.
- 그러나 그와 동시에 전차의 휴행탄수는 그에 정비례해서 계속 감소해 왔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전차의 통상 휴행탄수는 약 60발 수준이었다. 그러던 것이 70년대 들어 55발이 평균으로 굳어지고, 80년대에는 50발, 90년대에는 다시 40발까지 줄어들었다. 포탄소모율이 절반으로 줄어든 대신에 휴행탄수도 거의 절반 수준으로 감소한 것이다. 이것도 공간이 넉넉한 편인 미군 전차에 한한 이야기이고, 한국군 전차는 80년대에 약 50발, 90년대에 새로 등장한 K-1A1 전차의 경우 겨우 30여 발 정도까지 감소했다. 자위대도 사정은 비슷했다. 74식 전차는 휴행탄수 55발로 그런대로 넉넉한 편이었지만, 90식 전차부터는 포탑 내에 있는 자동장전장치에 16발을 장전하고, 차내에 채 20발이 못 되는 포탄을 추가로 탑재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어야만 했다.
- 일부 치수에 한해서는 K-1 전차보다도 작은 90식 전차이기 때문에 이것은 심각한 무리를 불러왔다. 그 대가로 90식 전차는 차체 하부의 장갑판이 취약해져 지뢰에 대한 대책이 거의 전무한 실정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래도 16발이 기본적으로 장전되어 있으면 전차 16대는 격파할 수 있지 않은가 반문할 수도 있지만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초탄 명중률이 아무리 높아도 상대가 같은 3세대 전차라면 이것으로 실제 격파할 수 있는 전차는 거의 10대 미만, 최악의 경우 1대도 격파할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할 수 있다. 특히 피아간의 거리를 최대한으로 유지하면서 벌어지는 포격전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매우 심했다. 이미 25일 오전의 전투에서 그것은 여실히 증명되고 있었다. 쓰치우라에서 방어하던 자위대 전차중대는 포탄을 거의 300발 가까이 소모하고도 한국군 전차를 5대밖에 격파하지 못했다. 물론 이것은 한국군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한국군은 정도가 더 심했다. 이런 상황의 타개책은 충분한 휴행탄수와 탄약의 원활한 보충밖에 없었다.
- 이미 이런 문제점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던 이스라엘은 메르카바 Mk-3에 120 밀리포를 탑재하면서 휴행탄수를 기본적으로 50발로 유지했다. 거기에 차체 후부의 병력 수송 공간에까지 포탄을 수납해서 최대 85 발이라는 가공할 숫자의 포탄을 채워 넣었다.
- 이는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현용의 챌린저-2 전차의 경우 장약과 탄체를 분리하여 공간을 절약하면서, '50발 이상'이라는 휴행탄수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공통적으로 충분한 포탄을 실은 탄약보급차 다수를 전차와 함께 행동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영국군이나 이스라엘군 이야기였다. 한국군도 자위대도 휴행탄수는 30발가량이었고, 서로 보유하고 있는 예비포탄수는 5만 발을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도 3세대 전차와의 전차전에서 가장 중요한 포탄인 APFSDS는 서로 1만 발 남짓밖에 보유하지 못했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는 많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결코 많은 것이 아니었다. 21세기 초까지 한국에 주둔하던 미 육군 제2사단은 예하 150대의 M-1A1 전차가 1주일 간 사용할 포탄으로 수만 발 이상의 APFSDS를 비축하고 있었다.
- 따라오는 8사단 보급부대까지 찾아가야 했다. 그나마 거기서도 120밀리 전차포탄은 구할 수가 없었다. 8사단에는 105밀리 전차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보급부대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도쿄점령으로 모두들 전쟁이 끝나는 것으로 알았지 이렇게 육상자위대 북부방면군과 정면대결하게 될 줄은 몰랐다. 도쿄점령작전 기간 동안 전차포탄을 낭비한 감은 있었지만, 그때는 충분했었다. 다만, 지금 바다에서 한국군의 보급선을 차단한 일본 잠수함들이 가장 큰 문제였다.
- 결국 구세주는 군단본부에서 보내준 헬리콥터가 됐다. 헬리콥터들이 군단본부에 남아 있던 120밀리 포탄 재고 중 일부를 이곳으로 실어왔다. 그 탄약으로 대충 보급을 끝내고 나니 벌써 3시간이나 지난 것이다. 그 시간 동안 차량의 정비와 수리도 마쳐 놓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늦은 게 사실이었다. 여단장 차영진 준장은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깊이 후회하고 있었다. 적은 지금쯤 2차 방어선까지 달아나서 전투준비를 마쳤을 것이다. 탄약보급을 완료하지 못했더라도 이동을 시작했어야 했다. 대대 하나의 보급문제 때문에 여단 전체를 멈추게 한 것은 큰 실책이었다. 다시는 이런 실책을 범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즉시 이동 개시. 3시간이나 늦었으니 우린 할 말이 없겠다."
"알겠습니다."
통신병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갑차 바로 옆에서 우르릉 대는 엔진소리를 울리며 후방에서 대기하던 32대대의 전차들이 길로 나섰다. 차영진도 지휘용 K-277 장갑차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 F-16 전투기들은 항속거리가 짧아 일본과의 전쟁에서는 사실상 도움이 되지 못했다. F-4 팬텀은 최대한 대지공격 임무에 동원되었지만 기체가 너무 낡아 보유대수에 비해 출격 횟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결국 수호이 전투기들만 혹사를 당하고, 이제 수호이 전투기들만으로는 한계에 달한 것이다.
- 한국 최초의 항공모함 이순신함이 일본 잠수함에게 피격당한 것은 동해의 제해권과 혼슈 북동쪽의 제공권을 상실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상 이번 지상전을 실패로 이끈 주요 원인이었다. 폭격으로 지상군을 조금만 도와주었다면, 아니면 최소한 제공권을 장악하여 한국군 전자전 정찰기가 자위대의 부대배치를 파악했더라면 이런 실패도 없었을 것이다.
- 마지막으로 항모가 위력을 발휘한 것은 쓰가루해협을 통과하는 제1, 2호위대군의 연합함대를 격멸한 전투였다. 이것은 지상출격 전투기의 호위를 받지 못하는 수상함대가 공중공격에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준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순신함은 독(dock)에서 수리 중이고, 동해는 일본 잠수함들이 활개 치는 바다가 되었다. 한국 해군 구축함과 대잠초계기, 헬기와 잠수함들이 동해를 샅샅이 뒤졌지만, 결정적인 순간까지 대잠초계기들의 눈을 피해 꼭꼭 숨어 있다가 수송선을 공격하는 일본 잠수함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이 잠수함들이 한국군의 추가적인 상륙을 막아, 일본원정군을 위기에 빠뜨린 것이다.
- 물론, 도쿄를 점령하기만 하면 일본이 항복할 줄 착각한 전쟁지휘부, 특히 통일참모본부의 판단착오도 한국군의 패배에 큰 몫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승패를 떠나서 일본원정에 동원된 한국군 병력을 온전히 수습해야 했다. 한국군이 전략적 목표를 달성한 지금, 가능하면 최대한 병력을 한국으로 빼내오는 것이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전쟁을 지휘하는 장군들 입장에서는 더 큰 승리를 원하는 것이 당연했고, 이 아쉬움이 장군들의 발목을 잡았다.
- [도쿄에서 시가전을 벌인다는 말씀입니까? 물론 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패전으로 돌아가는 이 전쟁의 흐름이 더욱 빨라질 뿐입니다. 설마 완전 패주해서 원정군 모두가 사살당하거나 포로로 잡히는 불상사를 바라진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권대현 대장이 통일참모본부 지휘부의 욕심을 확실히 견제했다. 일본을 공격한 원정군 대다수가 포로로 잡힌다면 전략적으로 승리를 쟁취한 통일한국 입장에서도 수치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부담이 될 것이 분명했다.
- 이종식 차수가 한숨을 푹 쉬었다. 너무 욕심을 부렸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북부방면대 병력을 격파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싸움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다만, 힘든 일이었을 뿐이다. 실패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실패라는 것은 어떤 종류의 일에서든 가능한 것이다. 이번 일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실패할 확률만큼 성공할 확률 또한 있었다.
이번 전투에서 한국군이 크게 패했지만, 전략적 목표를 달성한 만큼 이제 손해 볼 것은 없었다. 통일한국 입장에서는 아직도 엄청나게 많이 남는 장사였다. 작전이 워낙 예상 밖으로 잘되다 보니까 더 큰 욕심을 부려 약손해를 입었지만, 일본의 국방력이 절반 이하로 저하된 지금 한국군은 그 정도의 패배쯤은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었다.
"알갔소, 권 동지. 동지 생각대로 하기요. 이미 전쟁은 다 끝난 셈이외다. 이제부터는 남은 병사들을 안전하게 돌아오게 하는 일이 중요하오. 병력서껀, 장비까라, 죄다 돌아오긴 힘들갔지만, 동지들에 건투를, 용전분투를 빌갔소. 꼭 돌아오기요."
- 대장이 이번 작전을 기안한 만큼 그도 모든 속사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종식 차수는 일본원정군 모두가 포로로 잡히더라도 권대현 대장만큼은 꼭 한국으로 돌아오길 빌었다. 물론 권대현 대장은 부하들을 버리고 혼자 돌아올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종식 차수는 그의 기백이, 전략적 식견이 아까웠다. 그런 사람은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꼭 구출하고 싶었다.
- "자, 이제 전쟁은 다 끝나가는 것 같습네다. 수령 동지께서, 아! 실수했습네다. 대통령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는 모르갔다만, 반대하디는 않으실 겝네다. 반대하시더라도 도리는 없갔다만."
이종식 차수가 실언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을 했지만 그의 실수에 웃음을 보이는 참모는 없었다. 지금 일본원정군이 처한 상황은 상당히 심각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도쿄 사수명령을 내리는 게 좋겠습니다. 틈을 보아 반격 기회를 잡을 수도 있습니다!"
정지수 대장은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이 차수도 그 미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직 승리의 기회는 남아 있었다. 앞서 생각했던 것처럼 어느 작전이든 실패와 성공의 확률은 거의 같은 법이었다. 도쿄에서 방어전을 펼친다면 자위대 주력을 격파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미련과 더불어 의무감 또한 강하게 일었다. 더 이상 젊은이들을 죽게 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전략적 목표는 달성한 뒤였다.
"그만둡세다. 이미 전쟁은 끝났소이다. 이제 훈장 줄 사람들 명단이나 뽑아봅세. 우리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훈장하고 진급뿐이니끼니 말이외다. 길티만 그네들이 살아서 받을지, 앙이면 국립묘지에서 추서될지 디금은 모르갔소."
회의실 내에 정적이 감돌았다. 일본원정군의 전멸을 각오할 정도로 이종식 차수는 현재의 전황을 상당히 어둡게 보고 있었다.
- "지금 상황에서는 딱 한 번밖에 쓰지 못합니다, 대통령님."
이호석 중장이 못을 박았다. 물론 경고용으로 써야 하지만, 이 경고가 일본 정부에 먹혀들지 않으면 대책이 없다는 뜻이었다. 대통령이 한숨을 푹 쉬었다.
- 일본은 중국과 달리 미국을 믿고 한국의 핵위협에 굴복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만약 미국이 개입하지 않더라도, 도쿄가 점령됐는데도 항복하지 않았듯이, 핵미사일 한두 발 맞고도 일본 정부가 항복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만약 일본이 한국의 핵위협에 굴복하지 않는다면 한국은 얻는 것도 없이 국제적으로 고립될 위험이 있었다.
- 12월 25일 20 : 14 히로시마현, 구레
한국 해군 서승원 중령은 구레에 있는 일본 해상자위대 제4호위대군 지상기지 막사에 며칠째 억류되어 있었다. 다른 부하들처럼 영창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17일에 일본의 포로가 된 이후로 기분은 별로 좋을 수가 없었다. 부상당한 머리는 일본 군의관이 치료해 줬지만 아직도 머리가 빠개질 듯 아팠다.
포로대우는 예상외로 좋았다. 한국 전투기들이 이 기지를 폭격할 때마다 해상자위대 수병들이 그를 보는 눈이 살벌해진다는 것쯤은 참을 만했다.
- 그러나 부하들이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곳으로 끌려온 이후, 서승원은 부하들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야 고급장교이며 함장이니까 괜찮겠지만, 1997년에 갑작스럽게 직선 영해기선을 적용하여, 그 후에 계속 나포한 한국 선원들을 폭행했던 일본인들이 전쟁포로를 가만 놔둘 리가 없다는 걱정이 자꾸 들었다.
- 어떻게든 장보고함과 다른 승무원들을 살리려고 기관실에서 목숨을 던진 두 사람이 생각나자 서승원이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이번 전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한국 전투기들이 상공에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봐서 아직 한국이 이기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졌다. 누가 이기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 "예. 알겠습니다. 잠항관! 잠항 시작한다. 심도 조정. 250미터. 바닥까지 내려간다."
최윤덕함이 서서히 바닷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잠수함이 균형을 잃지 않도록 하는 추진장치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윤덕함을 계속 움직였다. 잠시 후에 잠수함이 해저 바닥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동해는 3,000미터를 넘는 심해도 있지만 대부분 해역은, 특히 해안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은 대체로 500미터 이하이다. 울릉도와 독도 사이 해저가 깊은 것은 두 섬이 해저 밑바닥에서 솟아오른 화산섬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구 소련 잠수함들이 남태평양으로 빠져나가는 통로 구실을 한다.
"자. 비상대기 해제합세다. 당직 근무체제로 전환! 사령실에 음탐수 한 명만 남기고 모두 한 잠 자두시라요."
- 최승호 상좌는 절대 경솔하게 자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비상대기로 일주일이 넘자, 탈진상태가 된 최윤덕함의 승무원에게 수면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지만 철두철미한 최승호 상좌가 깜박 잊은 것이 있었다.
최윤덕함의 사병용 침실은 물론이고 사관용 침실도 3단으로 빽빽한 데다 교대조가 근무하는 동안만 쉴 수 있도록 승무원 수의 꼭 절반에 이르는 침상만 있을 뿐이었다. 교대근무자의 체온으로 뜨끈뜨끈한 침대마저 모자라게 생긴 것이었다. 동료 수병이 잔 뜨거운 침대라는 뜻인 잠수함 수병용 핫 베드가 처음으로 모자라는 상황이 되었다. 승무원들은 식당 탁자든 바닥이든 비좁은 공간을 죄대한 활용해서 누울 수 있는 공간은 모두 파고들었다.
협공을 하려는 일본 잠수함이 신중하게 이곳까지 다가오려면 아직까지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짧을 수도 길 수도 있는 휴식이었다.
- 함장실로 가던 최 상좌는 곽일준 소령까지 끌고 갔다. 부함장이 사관실에서 엉키도록 내버려 두기는 싫었다. 수병들이 누운 복도를 지나 함장실 문을 열며 최승호 상좌가 곽일준 소령에게 물었다.
“곽 소령. 예전에 어느 소설에선가 읽었는데 이런 말이 있디요. '전쟁도 잠만 충분히 재워준다면 그다지 나쁜 것은 아니다'라고. 동지는 그 말을 들어봤소?"
"함장님. 그건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 나온 말입니다."
함장실 바닥 침낭 속에 몸을 눕히며 곽일준 소령이 대답했지만 벌써 최상좌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최윤덕함은 그렇게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 철저히 당했으리라는 사실은 누구라도 부인하지 못했다. 주로 산업시설 파괴임무를 맡아 그동안 묵묵히 일해온 159 기계화보병대대원들은 추정 배수량 6만 톤짜리 괴물을 보고 벌린 입을 채 다물지 못했다. 대대장의 호통이 떨어지고 나서야 공병중대가 정신을 차리고 출동했다. 항공모함 주요 부분에 폭탄을 설치한 공병중대가 작업을 마치자 대대장의 의례적인 경고방송이 있었다. 이것은 지극히 형식적인 절차이며, 어쩌면 비겁한 짓을 한다고 생각하는 한국군 병사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조치에 불과했다.
[거기 숨어 있는 자위대 패잔병은 어서 항복하라. 시간을 주겠다.]
- 자주포는 함미부터 확실히, 차근차근 부쉈다. 시간은 앞으로 한참 더 필요할 것 같았다. 항모의 붕괴보다는 자주포의 포탄이 먼저 떨어질 것 같아 대대장이 초조하게 항모를 지켜보았다. 공병대가 휘발유를 부은 곳 외에는 공격당한 전투함에서 흔히 발생하는 화재도 나지 않았다.
[포격 중지! 독 수문을 열어라. 바다에 처넣어야겠다.]
초조해진 대대장이 명령을 내렸다. 한국군이 급거 후퇴하기도 전부터 이곳은 이미 한국군의 점령지역이 아니었다. 다다니봉에 대한 공세가 좌절된 중부방면대는 주력을 우에노 쪽으로 방향을 돌렸고, 이틈에 해병 1개 대대와 헬기강습대대의 엄호를 받은 159기보대대가 마이즈루까지 밀고 들어올 수가 있었다. 이제 돌아갈 때였다. 이곳은 언제 육상자위대 부대가 덮칠지 모르는 위험한 지역이어서 포탄도 적정량을 보유해야 했다. 159기보대대가 보유한 자주포들은 이미 포탄이 거의 떨어졌다. 쓰루가로 돌아가면 마지막 포탄보급을 마치고 상륙작전을 엄호하는 임무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반쯤 잠긴 독에서 천천히 기울어지는 일본 항모를 보며 159기보대대원들은 아쉬움 속에서 마이즈루 히다치 조선소를 떠났다.
- 12월 28일 09:29 혼슈 아키타현 아키타시 서쪽 270km
[다가옵니다. 340도 거리 8km.]
최윤덕함의 음탐선임하사 박 중사가 다시 귀를 감싸고 집중했다.
"남쪽에 있던 목표 18은 어떻게 됐소?"
다가오는 목표는 하나뿐이었다. 최윤덕함이 숨은 후 거의 이틀이 가깝도록 일본 잠수함들이 주위를 배회하다가 드디어 한 척이 최윤덕함을 향해 정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른 한 척은 추적할 수가 없었다. 함장 최승호 상좌는 다른 한 척의 잠수함이 불안했지만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이제 잠수함은 항구로 돌아갈 때였다.
"6번 발사관을 쓰기요. SUT 어뢰를 링크시키기요!"
"알겠습니다."
점점 다가오는 일본 잠수함은 이쪽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절호의 기회였다. 최 상좌가 어뢰를 링크시키라고 명령했다. 조금 지나자 공격용 콘솔에 어뢰와 최윤덕함의 메인 컴퓨터가 연결되었음을 알리는 파란색 발광 다이오드가 깜빡거렸다.
"공격 즉시 급속 부상해서 북쪽으로 빠져나갑세다. 기리고 안전을 확인한 다음 스노클 심도로 부상해서 공기를 순환시킨 다음 배터리를 충전시키기요."
- [거리 7km입니다.]
"함장님 공격하시는 게..."
곽일준 소령은 공격하기에는 적절한 거리라고 생각했다. 현재 위치한 최윤덕함의 수심이 꽤 깊었지만 어뢰발사에 수압발사모드와 스윙아웃 발사모드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지장은 없었다. 만약 공기압 발사식이나 이의 변형인 수압발사 방식의 어뢰발사관이었다면 이 정도 깊은 심도에서 어뢰를 발사할 때 다량의 압축공기를 소모한다.
"아직은 가깝소. 완전히 다가온 다음 놈을 치기요. 그래야만 가라앉아 숨이 끊어지는 놈의 그늘을 통해서 빠져나갈 수 있게 되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남은 한 놈의 위치를 모른다는 거이 아니갔소?"
최승호 상좌는 신중했다. 하지만 다가오는 잠수함을 코앞까지 오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손에 땀을 쥐는 일이었다. 사령실 승무원 모두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꽉 쥔 손아귀로 진땀이 배고 있었다.
[거리 4km입니다.]
- 벌떡 일어난 조합사관이 함장에게 고함을 퍼부었다. 조합사관은 이빨을 덜덜 떨면서 눈은 초점을 잃고 있었다. 겁에 질려 이성을 잃은 것이다.
[거리 500미터, 25초 뒤에 충돌합니다!]
밑에서 파고든 SUT 어뢰 두 발은 잠수함 다케시오가 피할 틈을 주지 않았다. 복각선체의 일본 잠수함이라도 대형 탄두에 대한 피탄성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복각구조의 바깥쪽 철판은 압력을 이겨낼 수 있는 구조가 아닌 비내압 구조이기 때문이다. 안쪽의 철판과 바깥쪽 철판 사이의 공간에는 밸러스트 탱크와 연료 탱크들이 위치한다. 탄두 위력이 40kg 정도인 헬리콥터 투하 경어뢰라면 모르지만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대형 어뢰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 10km 맞은쪽에서 천천히 접근하던 다케시오의 동료 잠수함 사치시오가 다케시오가 있던 자리로부터 들려오는 거대한 폭음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어뢰를 발사한 최윤덕함의 소리는 폭발 음향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음향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시 기다린 사치시오는 사고가 난 해역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겁을 집어먹고 슬금슬금 동쪽으로 수중항주 했다.
- 아무래도 핵을 터뜨려 일본을 해일로 공격한다는 작전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막아 보고 싶었다. 그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기로 작정했다.
- "어쨌든 우린 이겼소. 물론 원정군 전 병력이 안전하게 돌아온다면 완전한 승리를 거머쥐는 거지만, 일본이 철저히 당한 만큼 우리도 적당히 져주는 것도 괜찮다고 봅니다."
"하지만, 대통령님."
- 커티스는 일부러 다른 사람들이 한국 대통령이 하는 말을 듣지 못하게 통화를 개방하지 않았다.
"개입해 달라고요? 이제 와서 뭐 하러요? 지금 미국 신속전개군이 태평양을 횡단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오. 당신네 나라를 위해서나 전쟁을 말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호방위조약이 유효한 우방국 일본을 위해서요. 이 점을 명심하시오."
커티스가 확실하게 말했다. 이미 3개 항모전단이 제주도 남쪽 해상에 전개 중이었다. 신속전개군 투입은, 일본에 상륙한 한국군뿐만 아니라 여차하면 한국 본토를 공격하겠다는 위협적인 경고였다.
- 호블랜드 국무장관은 이번 한일전쟁으로 인한 득실을 보고하기 위해 중앙정보국과 국방정보국(DIA)이 작성한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일본은 앞으로 몇십 년 간 동북아시아의 맹주로 나설 수 없다는 내용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한중일 3국 중에서 가장 약한 한국이 적당히 군사적인 이니셔티브를 가져도 상관없었다는 내용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차피 한국은 해군과 공군이 약한 육군국이라서 미국에게는 가장 만만한 나라였다. 만약 미국이 한국을 친다면 미군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도 막대한 피해를 한국에 안길 수가 있었다. 중국이나 일본이라면 도저히 그런 계산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 한국은 해군의 절반 이상, 공군의 3분의 1이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한국도 미국에 큰소리칠 수가 없었다. 이제 동북아시아는 확실히 미국의 영향권 아래에 들게 되었다.
- "이곳 해안선에서 파고 38미터요."
이수형 박사가 지도에서 도쿄 동쪽, 지바현이 있는 보소 반도 동쪽의 뾰족 튀어나온 지역을 가리켰다. 한자로 요자라는 소도시가 있는 지역으로, 일본어 발음으로는 조시라고 읽는다. 해군 대령과 과학자들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때 이 박사가 한마디 덧붙였다.
"태평양 바닷물이 도쿄만까지 넘칠 거요. 나리타(成田) 공항은 물바다가 되고 말이오. 우하하!"
- 대령과 다른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이 끔찍한 재난을 일으키는 데 협조했다는 사실에 경악했을 때 블랙 골드호의 1등 항해사 강신열이 박사에게 항의했다. 대령과 다른 과학자들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수형 박사가 강신열 항해사를 싸늘하게 노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인공적인 자연재해를 일으키면서 인간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소? 이것은 시간이 중요합니다. 지진의 강도는 적당히 예측할 수 있어도 쓰나미의 파장과 속도는 예측할 수 없소. 나는 그나마 쓰나미의 에너지를 일본 열도에 집중시켰소. 다른 태평양 연안 지역에는 거의 아무런 피해가 없을 것이오."
- 12월 30일 13 : 48(현지시간) 하와이, 힐로(Hilo) 시
"쓰나미 발생!"
하와이 쓰나미경보센터에서는 북태평양 곳곳에 뿌려진 부이가 보내온 자료를 전송받아 비상태세에 돌입했다. 2개의 쓰나미가 거의 동시에 발생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직원들이 진원과 쓰나미의 규모를 파악하고 피해집중이 예상되는 지역을 찾기 위해 컴퓨터와 씨름했다.
"진앙지는 알류산 열도 인근입니다. 캄차카반도 동쪽 아투(Attu) 섬 남방 270km와 남동쪽 360km입니다."
"13분 전에 발생했군. 파고가 30cm를 넘는 것이 하나, 약간 안 되는 것이 하나라... 쓰나미경보를 발할 필요는 없겠는데?"
연구소장 탐 카이저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얼마 전에 이 쓰나미 경보센터에서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일대에 쓰나미 경보를 발했다가 톡톡히 망신당한 경우가 있었다. 경보센터는 1933년에 요코하마와 호놀루루를 휩쓸어 대재앙을 일으킨 파고 10미터짜리로 예측했다. 경보를 받은 사람들이 겁에 질려 고지대로 피신하고 나서 확인한 것은 모래사장에 찰랑거리는 겨우 30cm에 불과한 잔파도 물결이었다.
- "에이. 도대체 어떤 새끼가 헬기를 타고 이 지랄이야? 이거 눈을 뜰 수가 없잖아.”
중대장이 소매로 눈을 가리며 건물 쪽으로 뒷걸음치는 사이에 헬리콥터에서는 누군가 내리자마자 중대장과 박재동 상병이 있는 곳으로 뛰어왔다.
"항만관리요원들은 어디 있는가? 이곳 책임자는 누군가?"
사람들을 내린 헬기는 다시 날아올랐고, 중대장이 소매를 내리자 앞으로 다가온 군인은 뜻밖에 장군이었다. 그 뒤로 부관인 듯한 젊은 장교가 뛰어왔다.
- 예비군 중대장이 고개를 들어 훤칠한 키의 장군을 올려보았다. 별이 자그마치 네 개였다. 권대현 대장이 직접 온 것이다.
"이곳이 난장판이라더니 정말 엉망이군. 내가 직접 지휘하겠네. 내 옆에서 도와주도록. 알겠나?"
"옛. 알겠습니다."
얼떨떨한 예비군 중대장이 부동자세로 대답했다. 역시 전역을 한지 오래된 40줄이었지만 4성 장군 앞에서 이등병 같은 군기를 보이자 박재동 상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좋아. 부관. 저 뒤쪽에 전차들이 61기보 소속인가?"
"예! 그렇습니다. 2대대 K-1A1 전차입니다."
부관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제61 기계화 보병여단의 주력전차 중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최대한 가져가야 했다. 지난 이 주일 사이에 일본 땅에서 잃은 한국군 전차는 한국의 1년 전차 생산량을 넘었다. 전차보유량이 원 상태로 돌아오려면 현대정공 전차공장이 앞으로 1년 간은 밤을 새야 할 것이다.
- "차량들은 모두 버리고 간다. 철수할 때까진 62기보의 전차부대가 마지막 저지를 해줄 것이고 나머지 운반 가능한 모든 전차는 끌고 들어간다. 귀관. 무슨 말인지 알겠나? 트럭은 버리는 거야. 그러니 주위의 병력들을 모두 따로 집결시키게 통신을 전파해. 그리고 61기보는 트럭을 깔아뭉개든, 밀치든 배에 탑승하는 거야. 그리고 전차 상륙함들을 부두로 불러 모은 것은 누군가? 저건 그냥 해안에서 탑재할 수 있잖아. 빨리 주변 가까운 모래사장으로 재집결시켜 달라고 요구해 후속 부대들 중 기계화장비는 그쪽으로 유도하라구!"
권대현 대장이 예비군 중대장에게 이르고는 부관과 함께 야적장으로 내려갔다. 모든 부대들이 혼란스러운 그곳을 사령관이 직접 통제할 생각인 것이다.
- 밀물처럼 사방에서 공격을 퍼붓다가 썰물처럼 한순간에 물러난 것을 알고 온갖 예측을 다했으나 도저히 이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덩케르크에서 포위당한 영국군이 항복하길 기다리는 독일군처럼 자위대가 한국군이 항복하길 기다리는 것일까 생각해 봤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권대현 대장은 승선을 마친 수송선부터 빨리 쓰루가를 빠져나가라고 재촉했다. 마지막까지 후퇴하는 부대를 엄호하며 쓰루가 외곽을 방어하던 해병 1여단 병력이 속속 승선하기 시작했다. 맨 마지막에 권대현 대장이 걸어서 수송선에 오르자, 문이 닫히며 수송선이 출발했다.
- 권대현 대장이 점점 멀어지는 쓰루가 시내를 살피며 길게 한숨을 지었다. 작전은 반쯤 성공이었다. 정치인들은 충분한 승리라고 좋아하겠지만, 완전한 승리를 장담했던 그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한국군은 예상외로 잘 싸웠지만, 솔직히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었다. 일본 육상자위대를 너무 우습게 본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가 일었다.
갑판에서는 하사관들이 망원경으로 바다를 살폈다. 근처 해역에 일본 잠수함이 한 척이라도 있으면 한국군은 거의 몰살을 당하게 된다는 불안감이 원정군 병사들의 가슴을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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