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교고쿠 나쓰히코] 후 항설백물어 上/下 - 항간에 떠도는 기묘한 이야기

일루젼 2024. 5. 11.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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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교고쿠 나쓰히코 / 심정명
출판 : 비채
출간 : 2018.11.19


   

저자 : 교고쿠 나쓰히코 / 심정명
출판 : 비채  
출간 : 2018.12.24


 

 

발췌를 정리하며 다시 한번 <항설백물어> 시리즈를 읽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는데.

또다시 끝나 버리고 말았다.

 

아니, 끝나지 않았다.

사실 하나의 이야기가 완전히 '끝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야기의 전과 후, 그 사이사이는 언제고 덧붙이고 수정할 수 있는 빈 여백들을 품고 있다.

 

그럼에도 독자가 '끝났다'고 느끼고 마는 것은 스스로 그 이야기의 '완결성'을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으로 좋았다고. 아쉽고 애석해도 바꾸고 싶지는 않다고.

혹은 이제 더는 그 이야기의 세계에 머무를 수 없겠다고.

 

지난해 여름의 끝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다음 해 여름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그래서인지 요지로의 "여름이구나"가 마치 나의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끝없이 오고 가는 수많은 여름 중 내가 만나게 될 몇 번인가의 여름. 

그 여름들 중 많은 나날들을, 그 특유의 뜨겁고 습한 바람결과 함께, 자그맣게 울리는 '딸랑' 소리와 함께 기억하게 될 것 같다.

 

행복했다.


 

 

이하는 -사실 언제나 그러했듯이- <후 항설백물어>를 읽는 동안 떠올렸던 나의 개인적인 단상이다.

 

이번 소설의 주요 인물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이다. 구시대의 질서는 붕괴되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곳곳에서 그 영향력을 드러내고, 신시대의 질서는 아직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롭다.

그런 혼란함 속에 잠시 스쳐가는 인연.

그들과 모모스케의 모습 위로 또 다른 모습이 겹쳐진다.

 

경계는 시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낮과 밤의 경계.

다른 법칙 하에 살아가는 이들은 같은 공간에 함께 존재한다 해도 다른 세계를 살아간다.

마타이치라는 이름을 버리고 자신을 야타가라스라 소개하는 그에게서 나는 <카라스>의 오토하를 본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믿어주던 다정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믿기 위해 어째서 있을 수 없는가를 설명하는 불안함이 스며든다. 

 

봉행소 동심 출신이었던 경시청 순사 야나기 겐노신과 이제는 뽑히지 않을 검을 쥔 검사 시부야 소베, 신문물을 배우고 돌아온 유학파 고등유민 구라타 쇼마. 

이들은 제각기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것, 과거로서 사라질 것, 과거에는 없던 새로운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또 한 명.

번의 가신이었으나 현재는 무역회사의 직원이자 여전히 괴이를 사랑하는 사사무라 요지로.

 

이들은 매번 제각기의 관점에서 치열하게 토론을 벌이지만, 문제들은 신세계의 질서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결국 풀리지 않는 문제를 들고 찾아가게 되는 것은 구시대의 '이야기'이자 '모사'의 잔재, 모모스케다. 

 

모모스케는 단순히 구시대의 질서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에게는 이미 그 시대에도 해박했던 수많은 이야기와 수수께끼들이 담겨 있다. 풀리지 않는 것을 풀고자 했던, 혹은 풀려서는 안 되는 것을 묶고자 했던 그의 경험과 지식들은 새로운 시대에서도 여전히 작동한다. 모모스케의 안에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겹쳐졌던 -그립고 그리운- 마타이치 일당의 방식 또한 녹아들어 있다.

 

그리고 마타이치와 모모스케를 통해 한바탕 벌어졌던 무대들은 이제 요지로와 새로운 인물들을 통해 다시금 쓰여지고, 마무리되었다.

 

그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그저, 매번 그에 맞는 모습으로 조금씩 겉을 바꾸며 조용히 존재할 뿐이다. 

가에데 님이, 오긴이, 사요가.

이어지듯이.

 


   

 

 

이 물고기는 몸길이가 삼십 리를 넘는다. 

등에 모래가 쌓이면 떨어뜨리려고 바다 위로 올라온다.

이때 뱃사람들이 섬이라 생각해 배를 가까이 대면 물밑으로 가라앉는다.

그러면 파도가 거칠어져서 배가 이 때문에 부서진다.

큰 바다에 많이 있다.

회본백물어(繪本百物語)·도산진야화(桃山人夜話) / 제3권 24

    

 

 

- 옛날.
작은 섬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섬에는 그다지 유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가난해도 평화로운 섬이었지요.
섬 한쪽 구석에는 마을의 신을 받드는 작고 오래된 사당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언제부터인지 에비스 신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섬사람들은 이 사당을 마음속으로 의지하며 열심히 믿었지요. 

- 다만 섬에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건 정말 무시무시한 이야기였어요
에비스 신 사당에는 에비스 님의 상이 하나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에비스 상의 얼굴이 빨갛게 변하면 무시무시한 재앙이 섬을 덮치리라고, 에비스 님의 얼굴색이 붉은빛으로 물들면 섬이 멸망할 거라고, 그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지요. 
이 이야기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지요.
청년은 인습에 얽매여 있는 섬의 기질에 싫증을 느꼈습니다. 가난한 생활에도 질렸고요. 매일매일을 유유낙낙 살아가며 불평 한 마디 하지 않는 섬사람들에게 낙담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는 장난을 쳤습니다.
그게 또 하필이면 밤중에 사당에 몰래 들어가서 에비스 님 얼굴에 붉은 안료를 칠했던 겁니다.
아침이 되어 얼굴이 붉게 변한 에비스 님을 본 섬사람들은 무척 놀라고 두려워하고 허둥지둥했습니다. 모두가 믿고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울고 소리치고 무척 혼란스러워하다 결국 섬사람들 전부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모아 가족들을 데리고 섬을 나갔습니다. 
젊은이는 그 모습을 유쾌하게 지켜보았습니다.
그도 그럴 게 얼굴에 색칠을 한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 무슨 일이 일어날 리 없으니까요. 다 미신이지, 전부 가짜야 하면서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 그런데.
사람들이 섬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천지가 울리며 산이 무너지고 대지가 흔들리더니 크나큰 해일이 덮쳐서 청년과 섬을 통째로 삼켜버렸습니다.
섬은 하룻밤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황량한 바다만 남았습니다. 

- "뭐, 그 기록이 사실이라면 피해가 상당했던 모양이군. 허나 지진, 산사태, 해일, 홍수 같은 천변지이로 많은 희생이 생기는 게 드문 일은 아닐세." 
발언한 사람은 구라타 쇼마이다. 이 자는 에도 막부 중신의 둘째 아들로 서양에도 다녀온 멋쟁이이다. 다만 아무래도 종잡을 수 없는 구석이 있어 서양에 다녀온 사람의 명석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풍채가 세련된 것도 아니다. 이 사내, 실은 요지로의 옛 동료이다. 막부의 중진이었던 쇼마의 부친과 요지로가 근무하는 곳의 경영자가 절친한 사이라, 그 인연으로 쇼마도 일전에 요지로와 같은 무역회사에 들어간 적이 있다. 다만 쇼마는 일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다며 사흘 만에 그만두었다. 지금도 일하지 않고 빈둥대고 있으니, 말하자면 직업 없는 고등유민이다. 

- 쇼마가 이렇게 말을 잇자 "그렇게 몇 번씩 있어서야 미증유라고 부르지는 못하지" 하고 시부야 소베가 웃었다.
이 소베라는 자. 요지로와 마찬가지로 기타바야시 출신이지만 어릴적에 양자로 보내져 야마오카 뎃슈(山岡鉄舟)에게 검을 배운 호걸인데, 유신 후에는 사루가쿠초에서 마을 도장을 하고 있다. 검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요지로도 알지 못하지만, 확실히 강해 보이는 생김새이기는 하다.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칼잡이 일로 먹고살 수 있을 리 없으니, 도장은 파리만 날아다니고 경찰서에 나가서 순사들을 상대로 검술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 
"뭘 의심하는가? 이 기록은 요지로가 들은 전설과 같은 섬의 기록이라고."
겐노신이 언짢아하며 말했다.
"그렇지, 요지로? 자네가 들은 전설에서 가라앉았다는 섬은, 분고지방의 우류지마 아니었나?"
요지로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말대로이다.
"그 전설을 토대로 따라가서 손에 넣은 이 기록에도 이렇게 쓰여있지 않은가? 나는 이게 우연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네."
 
- "관계가 있어. 그곳에 있는 사원인 위덕사의 유래를 기록한 서면에도 같은 기술이 있다고 하네. 그때 떠내려 온 소나무 한 그루를 그 지방 사원인 위덕사 경내에 심었더니 뿌리를 내려서 나중에 명송이라고 칭송받게 되었다고 하지 않나.  <호코쿠쇼시(豊國小誌)>같은 책을 펴보면 역시 같은 일이 과거에 있었다고 쓰여 있다 하네. 근처의 다른 섬도 경장 3년 여름에 쓰루미 산 폭발로 가라앉았다고 적혀 있어. 그러니 요지로가 듣고 온, 에비스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우류지마가 멸망했다는 전설은 사실이네." 

- "왜긴 왠가. 에비스 어쩌고는 그 기록에 없지 않나?"
"아니, 기록은 없어도 사당은 있는 모양이네.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 에비스 신사라는 사당은 우류지마의 건너편에 해당하는 세이케 지방에 다시금 세워졌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하지 뭔가. 그렇다면 역시 이건 사실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 "한편에 기괴한 전설이 있고, 그 소문을 따라가다 보니 이를 뒷받침할 기록을 찾아냈다면 나도 자네처럼 생각했을 수도 있네. 하지만 겐노신, 잘 생각해 보게나. 그 전설 쪽이... 더 뒤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없나?"
"전설이 뒤라니 무슨 말인가."
겐노신이 한층 더 언짢아했다.
"전설이라 하는 것은 본디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법 아닌가. 어떠한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 전하는 것이 곧 전설이야. 바탕이 되는 사실이 없을 경우에는 풍문이나 미신이라고 하네."

- "내가 하는 말은 그러니까... 요지로가 듣고 온, 섬이 가라앉았다는 전설에 관한 게 아니네. 그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전설을 말하는 걸세."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전설이라는 게 뭔가?"
소베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러니까 말일세" 하고 꼭꼭 씹어서 입에 넣어주듯 설명했다.

"그... 에비스 상의 얼굴이 붉어지면 섬이 멸망한다는 전설 말일세. 그 미신이 실제로 우류지마에 전해지고 있었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말이야. 그런 기술은 없지 않느냐는 거지."

- 쇼마가 맞장구를 치며 "전설이라는 것에는 흔히 그런 과장이 따라다니는 법이니까" 하고 말했다.
"아무래도 신용할 수 없다는 게로군."
"우, 우연이란 건가?"
"나는 그리 생각하네. 겐노신, 아까 자네는 이건 우연이 아니라고 했지? 소베도 그렇게 말했네만, 그건 그 기괴한 전설과 거기 있는 문서의 관계가 우연이 아니라고 했을 뿐이겠지. 천재지변은 항상 이 세상의 이치에 준해서 일어나네. 신상이나 불상에 붉은 안료를 칠했다고 해서 천지가 움직이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야. 아무리 때가 잘 맞아도 지진이나 해일에 장난이나 신앙은 역시 관계없을 걸세. 사람의 힘으로 천지를 움직일 수는 없네." 
"에비스 신은 사람이 아니야."
 
- "아니, 애초에 신불(神佛)을 끄집어내 봤자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네만."
쇼마가 말을 이었다.
"마찬가지라니 무슨 말인가?"
"마찬가지야. 소베가 아까 말했다시피 먼저 천재지변이 있고 뒤에 이유가 만들어진 것이 아닌 다음에야 둘 사이에 인과관계는 발생하지 않겠지. 나는 우연이라는 결말밖에 생각할 수 없네."

- "게다가 내가 듣기에 그 이야기는 아무래도 너무 짜 맞춘 것 같네. 신심이 없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사람을 속이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묘하게 설교 냄새가 나지 않나. 성실하게 믿는 자는 살아나고 불성실한 자만 목숨을 잃는다. 나는 이 결말에서 신자를 모으려는... 그렇지, 의도 같은 것이 느껴지네만."

- "으음" 하고 겐노신은 무릎 위에 있던 문서를 손에 들고 보았다.

"하지만 노인장, 기록이고 뭐고 안 믿는다면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은 없지 않습니까?"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아니, 어찌 되었든 사실은 사실이네. 그 섬은..."
"가라앉았겠지요."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겐노신은 초장에 꺾여서 입을 다물었다.

-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은 일 아닌지요? 여러분이 그런 걸 이 노인에게 묻고자 오신 건 아닐 텐데요."
"다 꿰뚫어 보시는군."  

 

- "노인장, 노인장이 아까 비슷한 이야기가 곳곳에 있다고 하셨지 않나?"
"그렇게 말씀드렸지요." 노인이 답했다.

"예컨대 여러분은 <곤자쿠모노가타리슈(今昔物語集)>를 알고 계십니까?"

- "그 곤자쿠의 <진단(震旦) 제10권 36>에 <노파, 날마다 사리탑에 피가 묻는지 보는 이야기>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이지요. 진단이라 했으니 당나라 이야기이겠지요. 당나라 어딘가에 높은 산이 있었는데, 그 꼭대기에 사리탑이 서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리탑 말씀인가?"
그것 참 괴이하다며 네 사람은 서로 마주 보았다.
"이 산기슭에 마을이 있었는데, 거기서 마침 저 정도 되는 나이의 노파가 매일 빠짐없이 산에 올라가서 이 사리탑에 절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 "뭐, 이 나이에 산을 탄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겠지요. 저는 못합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 젊은이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파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이 사리탑에 피가 묻으면 산이 무너져서 바닷속에 묻힌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그것을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오오, 똑같은 이야기다."
소베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습니다. 젊은이는 미신을 비웃고 그것을 맹신하는 노파를 조소하며 사리탑에 피를 칠하지요. 노파는 사리탑이 피에 물든 것을 확인하고 걸음아 날 살려라 마을에서 달아납니다. 젊은이는 그 모습을 웃으면서 보고 있는 거지요. 그런데." 
"산이 무너지고..."
"네네" 하고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설을 미신이라며 믿지 않았던 무리는 하나도 남김없이 죽어 없어졌다는 이야기이지요. 이것과 같은 이야기는 <우지슈이모노가타리(宇治大納言物語) 제30권>에도 실려 있습니다." 
"우화라는 것이군요. <곤자쿠>나 <우지슈이>에 실려 있다는 말은."

- "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땅의 이치, 큰 비가 내리는 것은 하늘의 이치. 이것은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일. 그러니 쇼마 씨가 말씀했듯 에비스 얼굴이 붉어지면 그 일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는 뭐 우화겠지요. 소베 씨가 말씀했듯 일어난 뒤에 덧붙여졌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여러분. 땅의 이치, 하늘의 이치가 있듯 사람에게는 사람의 이치가 있습니다." 

- 요지로는 턱을 끌어당겼다. "사람의 이치지요" 하고 노인은 한 번 더 말했다.
"하늘의 일은 하늘에, 땅의 일은 땅에. 사람은 천지를 움직이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람 일은 다르지요. 사람의 이치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과 사람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이 세상을 이루고 있지요. 비가 오면 땅이 젖습니다. 땅이 흔들리면 대기가 어지러워져 바람도 불겠지요. 섬에 사람이 산다면, 거기에 마을이 있다면, 사람이 사는 장소에는 사람의 이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도리겠지."

- "지진이나 해일은 신심이 있고 없고 관계없이 마음대로 일어난다고 쇼마 씨는 말씀하십니다. 그건 그렇겠지요. 에비스의 얼굴을 붉게 칠한 정도로 지진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해일이나 홍수도 일어나지 않겠지요. 다만 지진이나 해일과는 무관하게 에비스의 얼굴을 붉게 칠한 것만으로 마을이 망가지는 일은 있습니다." 
노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마을이 망가진다는 말씀은?"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에비스의 얼굴이 붉어진 것만으로 괴멸된 마을을... 저는 알고 있기에."

 

- "그건... 설마 노인장이 직접?"
"그렇습니다. 제가 젊을 적에 이 눈으로 똑똑히 본 일이니까요. 그렇지. 그건 오가라는 반도의 거친 바다에 떠 있는... 에비스지마라는 섬이었지요."

- 그 섬의 신기한 소문을 들은 것은... 그렇지. 시나가와 역참의 여관 마당에 솟은 큰 버드나무에 얽힌 기괴한 소동이 일단락되고 나서 에도로 돌아가는 도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 저는 모사꾼이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마타이치라는 이름의 어행사(御行師)와 오긴이라는 이름의 산묘회와 함께 다니고 있었습니다. 모사꾼이라는 것은 요즘 말로 하면 말재주가 능하다거나 농간질에 뛰어나다거나 교활하다거나... 아니, 좀 더 나쁜 뜻으로 쓰는 말입니다. 딱 맞는 단어는 없지만, 어쩌면 사기꾼이라는 말이 가까울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마타이치라는 사람은 남을 속여서 이익을 얻으려 하거나 누군가를 함정에 빠뜨리고 기뻐하는 부류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마타이치 씨는 요즘 말하는 중개인이나 중매 같은 장사 외에도 정공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성가신 다툼거리를 돈을 얼마쯤 받고 원만하게 정리해 주는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일을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강구했는데 그 솜씨가 너무나 뛰어나서 그렇게 불렸겠지요. 
어행사란 방울을 울리면서 액막이 부적을 팔고 다니는 사람이고, 산묘회란 인형을 조종하는 거리의 예인(藝人)을 말합니다.

- 시나가와 역참에서 에도로 돌아가는 도중에 우리는 에치고(越後)의 지리멘(縮緬)을 파는 행상꾼과 같이 묵었습니다. 그 사내가 기묘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뭡니까. 데와 지방(出羽国). 지금은 우젠과 우고로 나뉘었는데, 그 우고 지방 쪽에 오가 반도가 있습니다. 그 반도 끄트머리의 뉴도자키라는 곶에서 신비한 섬이 보인다지 뭡니까.
뭐가 신비하냐면 말이지요.
그 섬은 보이지가 않는 겁니다. 해류 때문인지, 기온 때문인지, 그야말로 천지의 이치겠지만, 늘 안개 같은 것에 덮여 있어서 알아차리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 고장 사람들 중에도 아는 사람은 아주 적답니다.  
물론 바다에 나가는 어민들은 알고 있습니다. 
알고는 있지만 결코 가까이 가지 않습니다.
마의 장소라며 무서워하고 신의 영역이라며 두려워해서 누구 하나 그 섬에 다가가는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 무얼, 곶에서 그렇게 떨어져 있지도 않습니다.
이십 리쯤은 육지라면 원래 간단히 왕복할 수 있는 거리이지요. 그 정도로 가까운데 보이지 않는다니, 신기하다고 할 밖에요.
그런데 잘 들어보니, 이 행상꾼이 한층 더 신기한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까?
행상꾼 이야기에 따르면, 이 환상의 섬이 보이는 곳이 딱 한 군데 있다 합니다.
... 뉴도자키의 어느 곳에... 그곳은 깎아지른 절벽이어서 배도 드나들지 않는 험준한 장소라는데, 그 깎아지른 절벽 아래에 암굴이 뚫려있고 그 안에 작은 사당이 있다는 겁니다. 그 굴 입구에 있는 도리이 (鳥居) 한가운데에서 보면 바로 정면에 신기한 섬의 그림자가 보인다고요. 
참으로 현묘한 이야기 아닙니까? 
그 도리이에서 바라보는 환상의 섬은 실로 기이한 광경이라 아니할 수 없을 만큼 기묘한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합니다. 주위는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아니, 해수면에 가까운 쪽이 잘록하게 들어가 있어서 좀체 배를 댈 수 있는 형상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찌어찌 섬까지 갔다고 해도 낭떠러지를 기어 올라가지 않으면 상륙할 수 없고, 올라갈 수 있을 만한 낭떠러지도 아니라고요. 

- 무엇보다도 기이한 것은... 
그 섬에 사람이 사는 모습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 "하지만 노인장. 그렇게 불가해한 조수 흐름이 있다면 그 섬으로 한번 끌려 들어가면 섬에서 영원히 못 나가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어르신, 그 도쿠지로라는 사람이 불렀다는 노래에도 온 건 좋은데 돌아가지는 못한다고..." 
요지로가 끼어들었다.
"네. 절대로 못 나갑니다."
노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 "어부는 다가가지 않습니다. 그곳은 신역이라 불렸던 모양입니다. 무슨 신역인지는 잊힌 듯했지만, 원래는 에비스 신사의 신역이었겠지요 제가 간 날에는 섬이 분명히 보였습니다."
노인이 말을 이었다.
"분명히 보였다면, 그 일 년에 몇 번 뿐이라는 날에 걸렸다는 겁니까?"
겐노신의 물음에 노인은 "운이 좋았나 보지요"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곧장 "아니, 운은 나빴습니다" 하고 고쳐 말했다.

- 놀랐습니다.
놀랐고 말고요.
바닷속에 길이 생겨 있는 겁니다.
이렇게 한 줄로 쭉.
군데군데 물에 덮여 있기는 했지만, 암초가 이렇게 가늘고 길게 죽 이어져 있었습니다. 네네, 섬 쪽으로요.

- 바닷속 길은 육지 쪽으로도 똑바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저 멀리 시커먼 뉴도자키의 우묵한 굴 속에 달빛을 받은 그 도리이가 조그맣게 보였으니까요. 
길은 도리이와 섬을 일직선으로 잇고 있었던 겁니다.

- 그 가느다랗고 발 딛기 힘든 외가닥 길을 저 멀고 먼 육지까지 따라갈 기력은... 그때의 제게는 없었습니다.
아니, 마가 꼈는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냉정한 판단력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저는 빨려 들어가듯 안개가 자욱한 환상의 섬을 향해 갔습니다.

- 시간이 지나자 암초는 서서히 물에 잠기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길이 바다 위로 드러나는 시간은 매우 잠깐 동안인 듯했습니다. 제가 섬 가장자리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 신비한 길은 완전히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없었습니다. 

- 네, 지금도 확실히 기억합니다.
빛바랜 붉은 난간에 금박이 조금 벗겨진 난간법수...
다리는 연기에 싸인 듯 부옇게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수증기인 듯했습니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작은 시내인지 혹은 용수로인지 그때는 저도 몰랐습니다만, 그 물 온도가 높은가 봅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 섬을 흐르는 강이란 강은 모조리 고온의 용천, 그러니까 온천이었습니다. 이 다리는 섬 전체에 흐르는 온천강의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열탕으로 된 강에 걸린 다리였던 겁니다. 

- 네. 신기루나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제 눈앞에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아직 그것이 현실에 존재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꿈을 꾸는 듯... 아니, 아닙니다. 
그렇지, 예를 들면 거기 있는 병풍에 수묵화가 그려져 있지요? 그 수묵화 속 암자에 쑥 들어간다면 어떤 느낌이 들겠습니까?

- 긴조는 똑같은 얼굴, 똑같은 말투로 말했다.
"에비스 님의 힘이 이 에비스지마를 지키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도 다 에비스 님의 복덕 덕분입니다."
"잘 이해가 안 되네요. 복덕이란 게 뭡니까? 이곳은..."
도저히 복된 섬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모모스케는 이렇게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이 섬은 가난한 섬입니다. 토지도 메마르고, 물고기도 생각만큼 잡히지 않습니다. 허나 보십시오." 
긴조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소용돌이를, 저 조수를. 먼 바다를 흐르는 것, 본토에서 흘러나온 것, 바다 위를 흐르는 것은 전부 이 섬으로 흘러와 저 만으로 들어옵니다. 저 그물에 걸리는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복입니다."

- 표착물인가?
확실히 바다 위를 떠도는 것을 에비스라 부르는 경우가 있는 듯하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신들이 있던 시대의 전설. 그러니까 이자나기 신과 이자나미 신이 맨 처음 낳은 아이인 히루코 신을 갈대배에 태워 바다로 흘려보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히루코 신과 에비스 신은 동일한 신이라 여겨진다. 에비스 신이란 표착하는 신인 것이다. 

- 에비스 신앙 가운데에는 고래나 생물의 시체를 포함해 바다에서 떠내려 온 것에 대한 믿음도 있다. 히루코는 일본의 신인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일설에 따르면 다리를 쓰지 못했기 때문에 부모가 그를 배에 태워 바다로 흘려보냈다. 이것이 표착물을 믿는 에비스 신앙과도 연관된다. 그래서 표착물을 익사체도 포함해서 에비스라 부른다고 모모스케는 알고 있었다. 에비스는 복을 주는 신이기도 하니, 그렇다면 그것은 복이기도 하겠다. 

- "고베 님이 산다는 뜻입니까?"
"산다...?"
긴조는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농사아비 무리가 지은 곡물을 하사하는 겁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남는 물고기도 받을 수 있습니다."

"남는?"
"이 섬은 에비스 님의 섬" 하고 긴조는 말했다.
"이 섬에 있는 것은 풀 한 뿌리, 모래 한 알에 이르기까지 전부 섬아버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섬에서 나온 작물과 이 섬에 흘러온 것, 물론 섬에서 사는 저희 또한 고베 님의 것이지요. 당연합니다. 이것이 이 섬의 법도입니다."  

- "이 법도 덕분에 저희는 살 수 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긴조가 머리를 숙였다. 
모두가 고베의 것.
도민들 또한 그 남자의 것. 그러니까 소유물이라 이건가.
모모스케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 "다만 고베 님의 씨를 품은 여자는 낳은 어미로서 저택에 남습니다. 낳은 어미는 시중 무리에 내려집니다."
"시중 무리라니."
"스미는 제 아내입니다."
긴조가 말했다.
"그럴 수가..."

- 아니.
아니다.
이 섬은 모모스케가 살던 곳과는 다른 나라이다. 모든 일이 다른 이치에 따라 움직인다. 이런 일은 아마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스미라는 여자는 고베의 처가 아니었다. 그저 고베의 아이를 낳았을 뿐인 물건인 것이다.
그리고 이 긴조 또한 고베의 재산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도민을 포함한 이 섬 전부가 고베의 소유물이다. 그러니.
뭘 어떻게 하든 마음대로이다.

- 이윽고 창고가 나타났다.
입구에 에비스의 얼굴이 달린 커다란 창고였다.
창고 앞에는 가마에 탄 고베가 있었다. 가마를 이고 있는 것은 아마도 건조와 마찬가지로 시중 무리에 속한 사내들일 것이다. 이를 에워싸듯이 신관 같은 차림을 한 사내들이 네 명 서 있었다. 이들이 긴조가 말한 봉공 무리인 걸까? 
계율을 지킨다고 했으니 봉행 같은 존재일까?
"야마오카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 창고 속의 보물을 보십시다."

- "무얼 두려워하시는가?"
고베는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나, 낙인은 봐주십시오. 그게..."
"희한한 말씀을 하시는 분이다. 손님께 그런 짓을 할까."
"소... 손님."

- "이 섬에 떠내려온 것은 전부 내 것."
이렇게 말하고 고베는 두 팔을 벌렸다.
"금도, 은도, 산호도,"
몸을 빙글 돌렸다.
"갑옷도, 금화도, 고리짝, 서책도, 모두 다."


- "흘러온 것이라면 물건이든 사람이든 뭐든지 전부 내 것이야. 허나..."
고베는 모모스케를 가리켰다. 
"걸어오신 분은 손님이시다. 그렇지? 그게 세상의 도리지?" 

- 모모스케는 긴조의 얼굴을 보았다.
긴조는 태연했다.
"왜 싫은지... 모르겠습니다."
"왜냐니요."
"고베 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시키신 대로 할 수 없다면 슬프기도 하겠고 괴롭기도 하겠지만, 분부하신 일을 할 수 있으면 즐겁지 않습니까. 고베 님께서 기뻐하시니 애초에 싫다느니 싫지 않다느니, 그런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 절대 복종인가.
아니, 복종이 아니다.
강제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게 당연하다.
도민들에게는 고베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자각이 없다. 이런 감각이, 아니, 개념 자체가 없을 것이다. 강제니 복종이니, 이런 개념도 없다. 그렇다면 물론 고베에게 착취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터이다. 불만이나 저항은 이 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고베가 죽으라고 하면 네, 죽겠습니다. 하고 그 자리에서 죽을 게 틀림없다. 뭐가 되었든 그게 당연... 하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도민들에게 고베를 거역한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는 것이다. 

- 이거다.
모모스케가 조금 전에 느낀 분노와도 닮은 답답함은 그런 문제에서 기인했던 것이다.
도민은 가난하다. 지독한 삶을 살고 있다.
허나 그것이 지독한 삶이라고, 괴로운 생활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는다. 불만도 없다. 이런 것은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 이 상태에서 백 년 넘게 이 섬은 고립되어 있었다. 비교할 대상이 없다.
권태감이나 폐색감과는 다른 이 무기력함은 아무도 이 삶을 싫어하지 않기 때문에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괴롭다는 생각도 없다. 싫다는 생각도 없다. 슬프지도 않다.
그런 삶을 살고 있는데도.


- 다만 그래서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어디가 나쁜지, 모모스케에게는 알 도리가 없었다. 확실히 무언가가 잘못된 것 같지만 아무것도 단언할 수 없었다.
그 점이 모모스케는 답답했던 것이다.
부아가 났던 것이다.
당사자가 괴롭지 않다면, 싫지 않다면 그만 아닌가...
그건 그렇다.
허나.
괴롭다거나 이제 싫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감정이 없다면 즐겁다거나 기쁘다거나 편안하다는 감정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역시 이건 행복이 아니다.

- "뭐가 어찌할 수 없단 말인가?"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 사이에는 선을 그을 필요가 있어. 이건 격차가 아니라 구별이라네, 쇼마. 질서라는 것은 이렇게 알기 쉬운 구별이 있어야 성립하는 걸세." 
"과연 그럴까? 무사니, 농민이니, 직인이니 하던 시대가 옳았다고, 자네는 그리 말하는 건가? 널리 세계로 눈을 돌려보게, 겐노신. 막부는 이제 없어. 우리나라도 열강에 지지 않기 위해 방식을 바꾸었네. 사민이 평등해지지 않았는가. 이제 무사 계급도 명목뿐일세. 아무것도 없어. 그래서 질서가 어지러워졌나?" 
"어지러워지지 않았나. 유신 전후에 세상이 얼마나 어지러웠는지... 뭐, 이국에서 빈둥빈둥 놀던 자네는 모르겠지만 말일세. 게다가 쇼마, 지금도 화족은 있다네. 그 위에는 황공하게도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이신 폐하가 계시지, 평민과는 다른 삶을 살고 계시지 않은가? 똑같아서야 역시 본보기가 서지 않을 테고. 이것을 착취라고 생각하는 자도 없을 걸세."
겐노신이 답했다.
"확실히 이국에도 왕족은 있네. 격차도 있지. 하지만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아. 난 말일세, 겐노신, 그런 구조가 나쁘다는 게 아니네. 확실히 소베 말대로 이러한 방식도 있을 수 있으리라고 보네. 허나 내가 말하는 것은 정도의 문제야." 

- "옛 막부 시대에 높은 연공(年貢) 때문에 고통받던 농민들은 무엇을 했나? 봉기를 일으켜서 관아와 부잣집을 때려 부수고, 소작을 그만두고 달아나지 않았나? 어떤 사람이든 강하게 조이면 반발하게 마련이네. 이건 당연한 일일세. 위정자는 때로 난폭한 행동을 하는 법이네만, 민중은 이를 결코 용서치 않네. 악정은 반드시 바로잡아지지. 바로잡아지지 않는 경우에는 멸망하네. 이것이 세상사 아닌가. 제 말이 틀렸습니까, 노인장?"
쇼마의 물음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지독한 방식이 백 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못 믿겠다, 저는 그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한데 쇼마 씨는 젊을 때부터 외유를 하면서 이국의 모습을 보고 오신 분이지요?"
"그렇습니다."
쇼마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여쭙겠는데, 바깥에서 보면 저희가 사는 이 나라는 몹시 일그러졌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일그러진 부분도, 떨어지는 부분도 많이 있지요. 물론 뛰어난 부분도 있겠지만..."

- "진정들 하시지요. 어느 나라든지 그야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안에만 있으면 좀처럼 알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어떻다고 하지 않습니까? 물속에 있는 고기는 결코 물을 의식하지 않는 법입니다."
노인이 중재했다.
"그렇게 자랐으니까... 이 말씀이시군요."
요지로가 묻자 노인은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 "에비스지마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의심하는 일 없이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날 때부터 그런 상식 속에서 자랐지요. 고베 님을 거역하지 않는다. 죽으라고 명령하면 그 자리에서 죽는다."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겁니까?"
"제가 보는 앞에서도 죽으라는 말을 듣고 죽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거 심하군. 너무 심해. 그렇게까지 그 법도인지 뭔지를..."

소베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법도를 어기면 섬은 멸망한다고 전적으로 믿고 있으니까요. 거역하지도 않거니와 무엇보다 거역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없다?"
"없습니다. 말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에비스지마에는 화폐라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돈 많은 부자라는 개념도 없습니다. 가치라는 것이 사물과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게지요. 아시겠습니까?"

- 아니, 애당초 누구도 구해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구원받고 싶은 생각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구할 수 없다.

- 이제 모든 게 다 싫었다.
모모스케는 몸을 던질 생각이었다.
홍귤나무를 가르고 돌계단 위로 나갔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눈을 뜨자...

- 안개가 걷히고, 커다란 보름달이 밤하늘에서 빛나고 있었다.
... 보름달.
그날도... 모모스케가 이 섬에 온 날도 보름달이었다.

- 시선을 서서히 내렸다.
뉴도자키가 보였다. 그리고.
바다 위에 한 줄기 선이 떠올라 있었다.
... 길이다.

- 그때였다.
짤랑, 하는 방울소리가 들렸다.

- 고민에 고민을 한 결과 육부는 저주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계획이 영주에게 들켜버렸습니다.
불같이 화가 난 영주는 섬에 관리를 보내 섬의 우두머리를 불러서 엄격하게 고했습니다.
즉각 육부의 목을 내놓지 않으면 도민 전부를 같은 죄로 간주하고 사흘 안에 처형하겠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은인인 육부의 목이냐, 아니면 도민 전체의 목숨이냐.
도민은 당연히 번민했겠지요.
하지만 제아무리 은인이라 한들 또 법력이 강하다 한들, 육부는 어차피 외지인이니까요.

- 아, 은혜도 모른다고요.
그렇지요. 하지만 남의 목숨 살리자고 내 목숨 내놓겠습니까. 도민은 무사도 뭣도 아닙니다. 먹고사는 것도 버거운 빈민이니까, 은혜를 입었든 의를 맺었든 다른 사람까지 돌볼 수는 없지요. 
도민은 기도하고 있는 육부를 에워쌌습니다.
네. 죽창이니 뭐니 들고요.
도민 전부가 육부의 집을 에워쌌어요.
네, 여자도, 아이도, 전부 말입니다. 섬 전체의 일이니까요. 죄를 지을 때도 섬 전체가 함께한다는 거지요.
시골 마을이란 그런 겁니다.
아니, 요즘은 달라졌지만요.
시골 마을은 죽든 살든 명운을 같이 하는 법입니다.
그렇기는 해도 내키지는 않았겠지요.

- "뭐야."
고베는 긴 솜옷을 펄럭이며 돌아보더니 긴조에게 매서운 눈길을 던졌다.
"긴조, 너는... 스미가, 여편네가 죽는 건 싫으냐? 싫구나. 어떠냐. 긴조!"

- 긴조는 고베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기 계신 이헤 님 옥체에 변이라도 생겼다가는 이 섬의 중대사입니다. 부디 진정을."
"뭣이!"
고베는 충혈한 눈으로 제 아들을 노려보았다.
"칼을 넣으십시오. 부디, 부디."
"흥. 너... 나를 거역하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고베 님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헤 님도 중요합니다. 이헤 님께 만에 하나의 일이 생기면 에비스 가의 핏줄이 끊어질 수도 있습니다. 핏줄이 끊어지면 안 됩니다. 핏줄을 끊지 않는 것이 이 섬의... 법도."

- 그렇게 말한 순간.
긴조의 목에는.
칼날이 푸욱 꽂혀 있었다.

- "법도라고?"
고베는 시뻘건 얼굴로 긴조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이마에 핏대가 서 있었다. 원래부터 창백한 긴조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해갔다.
"법도... 법도 법도 법도, 뭐가 법도야! 내가 법도다!"
고베는 칼날을 한 번 깊숙이 밀어 넣고 나서 기세 좋게 빼냈다. 긴조의 목에서 대량의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뿜어져 나온 핏줄기가 달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 긴조가 앞으로 거꾸러지기 조금 전에 스미는 이혜를 감싸듯 품에 안았다. 
움직이지 않게 된 긴조는 웃고 있지 않았다.
웃고 있지는 않았지만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이 면상은 이제 두 번 다시 웃을 일도 울 일도 없다. 긴조는 끝끝내 한 번도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세상을 뜬 것이다. 

- 스미는 역시나 똑같은 표정으로 아이를 안고 있었다.
"왜 지키느냐? 왜 감싸느냐? 아이가 죽는 것이 싫은 건가? 아니면 법도이기 때문이냐!"
고베는 절규하며 스미를 향해 돌진했다.
피 묻은 칼이 스미를 꿰뚫었다. 하지만 스미는 아이를 놓지 않았다. 고베는 손에 쥔 칼자루에 힘을 주었다. 스미는 아이를 안은 채 나가떨어지듯 히루코의 샘 옆에 쓰러졌다. 
"뭐가 법도냐! 시시해. 모두 죽어라. 죽어버려."
 
- 시중 무리와 봉공무리 몇 명이 달려왔다. 예복 모자를 쓴 사내들이 스미에게 뛰어갔다. 하지만 봉공 무리는 스미를 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혜를 지키려는 것이다. 이를 눈치챈 고베는 쓰러져 있는 스미에게 달려들더니 그 팔에서 아이를 떼어 냈다. 

- "이따위 것!"
고베는.
이헤를 샘에 집어던졌다.
흰 연기가 자욱하게 올라왔다.
이 용천은... 열탕이다.

- 고베는... 스미의 얼굴을 보고 굳어 있었다.
스미의 뺨에 눈물 한 줄기가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고베는 무너지듯 주저앉더니 그 얼굴에 달려들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눈물을 핥으며...
"싫었... 느냐? 역시."

- "고베 님."
"고베 님."
"고베 님."
샘솟는 열탕 속에 가엾은 동자의 시신이 떠오른 것을 확인한 뒤 예복 모자를 쓴 사내들은 고베를 에워쌌다.
"고베 님, 몸소 법도를 어기셨군요."
"뭐라고."
"이혜 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이대로는 혈통이 끊어집니다."

- <붉은 가오리>

 

 

 

하늘불
또는 흔들불이라고도 한다.
땅에서 서른 간(間)쯤 떨어진 곳은 마도(魔道)라 갖가지 악귀가 있어 재앙을 불러온다.

회본백물어(繪本百物語)·도산진야화(桃山人夜話) / 제4권 32




- 옛날.
어느 마을에 자비롭고 고지식한 대관님이 계셨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대관님을 무척 경모하고 의지했으며 숭배하기까지 했습니다. 나이는 마흔 남짓. 다정한 얼굴은 복스러웠고 미소가 끊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랫사람들에게는 관대하신 참으로 상냥한 대관님이었습니다. 공물을 걷을 때나 노역을 배분할 때도 공정하기로 평판이 자자했고, 백성들 눈에 눈물이 날 만한 사태라도 생기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상대가 누구든 간에 백성들을 힘껏 지켜주었습니다. 

- 그런데.
그런 대관님에게도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부인 마님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대관님의 부인 마님은 무슨 업보인지 사내들에게 미쳐, 살아서 색(色)의 지옥에 빠진 가여운 분이었습니다. 부인 마님은 밤만 되면 끓어오르는 몸과 소용돌이치는 정욕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인 마님은 밤이면 밤마다 하인에게 명해서 마을 사내를 불러들이게 한 뒤 밤 시중을 들게 했습니다. 
대관님은 몹시 난감했습니다.

- 그런데.
어느 날 대단히 귀한 스님이 이 마을을 지나갔습니다.
이 스님의 가지기도(加持祈禱)는 영험하여 아무리 중한 병도 싹 낫는다고 평판이 났을 뿐 아니라 인격이 고매하여 누구라도 스님의 얼굴을 보면 합장하고 싶어지는 참으로 귀한 스님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부인 마님 때문에 골치를 썩이는 대관님이 측은해서 이 스님에게 청을 드렸습니다.
제발 대관님의 부인 마님을 색욕의 무간지옥에서 구해주십시오, 이렇게 부탁한 겁니다.

- 그래서.
스님은 대관 저택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기도를 올리기 전에 부인 마님이 그 귀한 모습을 보자마자 스님을 연모하게 되었습니다. 부인 마님은 어떻게 해서든 스님과 백년해로하고 싶다,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죽어버리겠다며 몸에 병이 날 정도로 집착했습니다. 하지만 스님은 이 또한 이 몸의 부덕, 수행이 얕은 탓이 아니겠느냐며 대단히 부끄러워했습니다. 

- 대관님은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고민한 끝에 스님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부인 마님을 지극히 아낀 나머지 죄 없는 스님을 죽이고 만 대관님은 스스로 무간지옥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관님은 실성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제정신이 아니게 된 대관님과 부인 마님은 이윽고 하늘에서 내려온 천벌의 맹화에 휩싸여...

다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 셋쓰 지방(摂津國) 다카쓰키노쇼에 있는 니카이도 마을에 불이 나타났는데, 이 불은 3월 무렵부터 7월까지 출현했다. 크기는 한 자 남짓이며 집 용마루 혹은 온갖 나무의 가지나 우듬지에 머물렀다. 가까이서 보면 눈, 귀, 코, 입 형태가 있어서 흡사 사람 얼굴 같았다. 앙갚음을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리 두려워하지 않았다. 

- 옛날 이곳에 닛코보라는 수행승이 있었다. 기도의 힘이 뛰어났다. 촌장의 아내가 앓아누웠다. 닛코보에게 기도를 시켰는데, 침실에 들어가 열이레를 비니 곧 병이 나았다. 

- 후에 수행승과 여자가 밀통했다는 말이 있어 수행승을 죽였다. 병을 고쳐준 은혜에 보답하기는커녕 살해까지 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원한은 망령 불이 되어 매일 밤 이 집 용마루로 날아와 촌장에게 앙얼을 입혀 죽였다. 
닛코보의 불을 니콘(二恨)보의 불이라 하는데... 

- "이름이 다르지 않나?"
소베가 말했다.
"아니, 분명 장소가 똑같았을 걸세. 거기서는 쓰 지방(律の国) 이야기였지 싶네. 셋슈 말일세. 이야기도 큰 줄거리는 똑같아."

요지로가 말을 이었다.
"비가 올 것 같은 밤에 동그란 불이 켜지지. 이게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날아다니네. 대개는 공 하나 크기인데, 가까이서 보면 중의 머리라 하네."
"머리라고! 머리가 불타고 있는 건가?" 하고 소베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숯덩이도 아닐 텐데. 모가지가 불타는 거라면 금세 재가 되겠지."
"아니, 그 책에는 머리가 숨을 쉴 때마다 내쉬는 숨이 불길이 된다고 쓰여 있었네. 어떤 땅에... 지명까지는 기억나지 않네만, 그곳 영주 집에 기도 법사가 있었는데, 그 중이 용모가 아주 수려한 미승이라 영주 아내가 반해버리네."

 

- "파계승인가?"
소베가 물었다.
"아니, 파계승이었다면 자업자득이겠지만, 이 중은 품행도 단정하고 색을 범한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하네. 아내가 연모한 거지. 하지만 중이 상대를 안 해주니 되레 원한을 품고 몸부림치다 남편에게 거짓 밀고를 하네. 중이 구애를 해서 못 배기겠다고. 남편은 확인도 하지 않고 닌코보를 잡아 목을 쳐버리지." 

 

- "무법일세."
이렇게 말한 사람은 그때까지 잠자코 돌아가는 사정을 지켜보던 구라타 쇼마였다.
서양에 다녀온 걸 자랑하고 싶은지 오늘은 양장을 입었지만 도통 어울리지 않는다. 얼굴 생김새가 일본풍인 것이다.
"밀통한 것도 아닐 텐데. 나무랄 사람은 다른 사내에게 반한 아내이지."
"그러니 중도 화가 났겠지. 잘린 닌코보의 목은 그대로 날아가서 빛을 발하는 물체가 되었네."
"어리석은 소리. 물론 색은 사람을 유혹하네. 여자의 집념이 때로 사내를 죽이는 일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과 이건 이야기가 다르지 않나. 아무리 원한을 품은들 잘린 목이 날거나 빛나거나 불을 뿜겠는가. 그랬으면 우에노 산은 전소했을 걸세. 쇼기타이(彰義隊)가 불을 뿜으면서 날아다니기라도 했다가는 새 정부도 마음 편히 못 자지." 

- "그런 말이 아닐세. 이건 이야기로 들으면 되네. 잘 듣게, 소베. 요컨대 내가 읽은 연보 시대의 책에도 이런 기록이 나와 있다는 점이 중요해."
요지로가 대답했다.
"어떻게 중요한가?"
"서둘지 말게. 그러니까 누가 하는 말에 따르면 ..."
 
- 은거 노인이 한적하게 살고 있는 쓰쿠모안의 별채이다.
늘 그렇듯 이야기가 막히고 늘 그렇듯 앞이 막막해진 요지로 일행은 이 또한 늘 그렇듯이 박학하고 욕심 없는 은자의 지혜를 빌리러 온 것이다.
잇파쿠 옹은 고금의 괴담과 기담에 밝으며 동서의 진기한 이야기와 세상 소문에 정통하다. 지금은 볼품없이 쪼그라들어서 마음 좋은 할아버지 같은 면모까지 보이지만, 옛날에는 제 발로 각 지방을 두루 다니며 기기묘묘한 일을 찾아다니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 노인은 껄껄 웃었다.
"물론 얼마나 되었는지 잊어버릴 만큼 오래 살고는 있지만, 그 정도로 오래된 일은 모릅니다. 연보 시대라 하면 원록 시대보다 더 옛날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백 년이나 살아있는 셈이겠지요."
맞는 말이다. 다만 오십 년 전이나 이백 년 전이나, 요지로가 보기에는 똑같이 아득한 옛날이다.
오십 년 전에 있었던 일을 보고 들은 잇파쿠 옹은 이백 년 전에 일어난 일도 보고 듣지 않았을까 하고 요지로는 착각했다. 사실 노인은 뭐든지 잘 알고 있지만 이는 배워서 아는 것이지 보거나 들은 것은 아니리라.

- "그 괴이한 불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분이 읽으신 책 외에도 실려있습니다. 야마오카 겐조(山岡元恕)가 엮은 <고콘햐쿠모노가타리효반(古今百物語評判)> 같은 데에도 나오지요. 이건 정향(貞享) 시대에 나온 개정판이니까 시대적으로는 <도노이구사>보다는 뒤이고 <혼초코지인넨슈>보다는 앞이 될까요. 이 책은 '백 가지 이야기 (햐쿠모노가타리)'라고는 해도 흔한 괴담 이야기를 모아서 기록한 형식의 책이 아닙니다. 편자의 아버지인 야마오카 겐린이라는 학자가 문하생을 모아고금에 있었던 괴이한 일을 이야기하게 한 다음 여기에 하나하나 평을 다는 형식이지요." 
"평... 이라."
"네. 이건 거짓이다, 이건 속임수이다, 여기에는 이러저러한 연유가 있다는 식으로... 꼭 여러분이 나누시는 괴담 이야기 같은 거지요. 뭐, 옛날 일이니까 요즘 같은 문명개화 시대와 비교하면 제법 거친 ..."
 
- "괴이한 불이 생기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하지요."

"거, 모르겠군."
소베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모르시겠습니까?"
"모르겠어. 유학자란 사람이 괴담 같은 이야기를."


- "괴담이 아닙니다. 무슨 일이든 세상 이치를 알지 못하고 그저 그냥 이상하다, 희한하다 하면서 무서워한다면 괴담이 되겠지만, 이는 이러저러한 이치로 일어나는 일이다, 하고 설명할 수 있으면 더는 괴담이 아니겠지요. 겐린은 넓은 바다에 보이는 불은 물속 음화(陰火) 중 하나라고 합니다. 높은 산꼭대기에 물이 있듯 물속에도 불이 있다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장소처럼 강한 집착과 원한이 남았을 경우에는 이것이 그런 불로 보일 수도 있으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노파 불과 닌코보의 불을 유사한 예로 듭니다. 이런 원한 불이 나타나는 경우에 대해서는 중국 서적에도 유사한 예가 있다고요."  
"물속에 있는 음화라고요?"
"그렇지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그 무엇도 음양오행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겐린은 주장합니다. 이건 또 다른 항목에 들어 있는데, 예컨대 두레박 내리기라는 괴이한 불은 목생화(木生火)의 이치에 들어맞는다고 합니다. 수목의 정기가 발광체로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 낮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주위가 햇빛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니 밤중이나 나무 밑의 어두운 곳에 보이는 까닭이다. 이렇게 설명합니다."


- "나무의 정기..."
쇼마가 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인이 달래듯이 말을 이었다.
"정기라는 게 불가사의한 뭔가가 아닙니다. 생명 활동의 증거라고 하면 될까요."
"하지만 수목에서 불이 생기는 것이 이치라 하신들, 온갖 나무에서 불이 나타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쇼마가 수상쩍다는 듯 말했다.
노인은 다시금 껄껄 웃었다.
"그렇지요. 아니, 겐린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음양의 변화, 오행의 상생이란 사계절이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린 나무에 불이 생기지 않는 이유는 봄이 저물고 여름이 오며 가을이 차서 겨울이 되는 것과 같이 첫 기가 차지 않으면 다음 기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라고요.  치 밖에 안 되는 나무, 한 자밖에 안 되는 나무에도 목생화의 이치는 있지만, 아직 나무의 기가 차지 않은 까닭에 불의 기가 생기지 않는다고... 약간 변명 같기도 하지요." 
쇼마와 소베는 웃었지만, 요지로는 이 이치가 지당하게 들렸다.

- "겐린이 이어서 말하기로 이 세상에 불은 세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별의 불, 용의 불, 번갯불을 하늘불이라 하고, 나무를 태우거나 돌을 비벼서 붙이는 불을 땅불이라 하며, 마음의 불, 생명의 불을 사람불이라 하지요. 이 세 종류의 불은 음화와 양화로 나뉩니다."

- "양화는 사물을 태우지만 음화는 태우지 않습니다. 양화는 음기로 끌 수 있지만 음화는 물로는 꺼지지 않습니다. 뭐, 이런 건 실재하는 사물의 이치이겠지만요."
"그건... 물리이기도 하지요."
쇼마가 턱을 내밀었다.
서양에 있었다고는 해도 고작 몇 년. 얼마나 많이 배우고 왔는지 모르지만 확실히 쇼마는 그럴싸한 것을 많이 안다.
"사물을 태우지 않는 불은 있습니다. 번개도 음양의 기가 맞부딪히는 현상이라 설명한다면, 음양오행이니 하는 것도 서양의 자연과학과 일치할지 모르지요."
"그건 그렇습니다." 

 

- "무릇 사물은 밖에서 보건 안에서 보건 있는 그대로 똑같은 법입니다. 접시는 옆에서 보면 평평하지만 위에서 보면 둥글지요. 평평하고 둥근 건 크게 다르지만, 둘 다 접시이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동양과 서양에서 보고 있는 곳이 서로 다를 뿐이지요. 보십시오, 이 찻잔..."
노인은 조금 전에 내어온 다기를 가리켰다.
"이건 바다 건너 말로 뭐라고 합니까?"
"컵 아닐까요."
쇼마가 대답했다.
"컵입니까? 뭐, 부르는 이름은 전혀 다르지만 찻그릇과 똑같은 물건을 가리키기는 하겠지요. 음양오행이나 서양 학문이나 그리 다른 결론이 나오지는 않을 겁니다."
요지로는 과연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 "아까 쇼마 이 친구가 말하기로 혼불은 그러니까 번개의 일종일 거라는데요. 노인장, 지금 하신 이야기에 따르면 하늘불 중 하나가 됩니다. 하지만 혼불은 생명의 불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사람불이 되기도 합니다."

- 네?
아니요. 물론 저는 그때 마타이치 씨가 무슨 의뢰를 받았는지도 몰랐던 데다, 물어볼 수도 없었습니다. 묻지 않는 게 규칙입니다. 네. 제가 거드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어떻게 된 사정인지 듣지 못했고 그 결과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조차 모를 때도 있었으니까요. 아니, 그게 좋습니다. 몰라도 되는 일을 아는 바람에 평범한 사람인 제게 해가 미칠 수도 있지요.
그 사람들은 그런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고 말고요.
잘 알고... 있었습니다.


- 네. 그때 이치몬지야 씨가 정확하게 지적해 준 덕분입니다. 지난번에 넘긴 게사쿠에 대한 비평을 들으려고 저는 마타이치 씨와 동행했습니다.
오사카라는 곳은 활기가 있지 않습니까? 도쿄는 지금에야 하이칼라지만 그 시절에 에도라 하면 글쎄 가난한 동네라 전혀 보기가 좋지 않았으니까요. 거리 모양도 너저분해서 빈말이라도 번듯하다고는 못했지요. 그에 비하면 교토, 오사카 일대는 풍족했습니다. 건물도 번듯하겠다, 기근이 있은 뒤인데 음식도 호화로웠어요.  

-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밤이 되면 산 쪽에 있는 묘지에서 이상한 불이 나타나 둥실둥실 날아서 강 쪽으로 간다고요. 네, 제법 떨어진 곳에서도 보였답니다. 불빛의 궤적이. 
실제로 가까이에서 본 사람도 많았어요.
얼굴이요?
얼굴은 있었다는 이도 있고 없었다는 이도 있습니다. 있었다는 사람도 도적이라느니 뭐라느니 그 얼굴이 뭐였는지에 대한 의견은 각양각색이었고, 개중에는 분명 니콘보의 불과 헷갈린 것 같은 이야기도 있었지요. 
네. 수행승이다, 도 닦는 중이다, 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야기 자체는 이미 싹 잊힌 모양인지 오랜 옛날에 원한을 품고 죽었다고만.

- 네. 이런 이야기는 단편적으로 남게 마련일 겁니다. 이름과 약간의 속성만 있으면 나머지는 어찌어찌 앞뒤를 끼워 맞추지요. 네. 요지로 씨 말씀대로 이야기라는 건 나중에 억지로 갖다 붙인 해석입니다. 
많은 경우에는.
하지만 완전히 거짓말이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나중에 갖다 붙인 해석에도 진실의 몇몇 조각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 기록뿐 아니라 이런 괴이한 불의 이름이나 기억이 그 근방 사람들 사이에 남아 있었다는 것을 봐도요.
네. 그 옛날 그 땅에 그러한 사실이... 이 경우에는 괴이한 불이 나타났다는 사실이 있었다는 뜻이겠지요. 네, 맞습니다.
제가 수소문했을 때 이건 더는 옛날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 맨 처음이 언제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아무런 전조도 없이 시작되더니 낮이고 밤이고 계속 보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것이 며칠 전에 뚝 그쳤다고 하지 뭡니까. 
네, 까닭이 있었습니다.
불쑥 나타나서 마을 변두리에 정착한 신통력을 가진 육부가 기도로 잠재웠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그렇지요. 육부라 하면 아시다시피 육십육부의 약자이지요. 각지에 있는 신령한 장소를 순례하는 반은 승려, 반은 속인인 떠돌이 수행자를 말합니다.

- 그 육부는 어느 날 갑자기 마을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아, 아니, 찾아왔다는 표현은 틀렸겠네요. 네, 떠돌아다니는 도중이니까 들렀다고 하는 편이 옳겠지요.
그렇습니다. 물론 정착하겠다는 생각으로 오지는 않았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어떤 신통력을 보여준 겁니다.
마을 사람들이 음식을 시주한 데 대한 답례로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줬다거나 뭐라고 예언 같은 말을 했는데 그게 들어맞았다거나, 그런 일이 몇 번 있었던 모양입니다. 

- 감사하는 마음에 붙들었다고 마을 사람들은 말하더군요. 네, 네. 아니, 이 사람이 단순히 구걸이나 하고 다니는 반쪽짜리 승려였다면 그렇게 환대받지도 않았겠지만, 이 육부는 진즉에 위패를 모신 절에 참배를 하고 주지승에게도 인사를 딱 올렸습니다. 
아니, 이런 건 중요합니다. 방문자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동네 사람들이 알 리 만무하니까요. 그 지역에서 가장 신뢰받는 인물이 알아보고 대접했다는 건 그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증거가 되겠지요. 특히 신앙심과 관련이 있을 경우에는 그럴 겁니다. 

- 아, 그야 스님도 기도를 올리거나 했던 모양이지만 효험은 없었나 봐요. 아, 아니, 그건 착각입니다, 겐노신 씨.
부처님은 고마우신 존재이지만 불덕이란 원래 신심이 있는 사람에게만 미치는 법입니다. 마음속으로 염불을 외는 사람은 부처님의 공덕을 얻고 가호도 받겠지요. 다만 여우, 너구리와 요괴는 불덕과 무관합니다. 
네, 맞습니다.
마을을 재앙으로부터 지키는 것과 정체불명의 괴현상을 봉인하는 일은 또 다릅니다.
애당초 조왕신을 쫓거나 귀신에 쓴 사람을 고치는 일은 절의 관할이 아니에요. 물론 없어진 물건을 찾느니 병을 고치느니 하는 기도도 스님이 할 일이 아닙니다. 괴이한 불도 매한가지입니다. 절이 이런 괴이한 일에서 지켜주기는 할 테지만요. 요물 퇴치는 전문 영역이 아닐 겁니다.


- 네. 그래서 마을 사람들도 안심하고 있기는 했던 모양입니다. 절을 신뢰한 거지요. 다만 이런 소문은 퍼지게 마련 아니겠습니까?
네. 사실 제가 거기까지 가는 도중에도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었으니까요 내버려 둘 수는 없었겠지요.
네. 그래서 그 영험함을 믿고 육부와 상의를 했습니다.
네, 괴이한 불을 퇴치해 달라고요. 
육부는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 묘지라고는 해도 평범한 묘지가 아닙니다. 저도 보고 왔는데 마을에서는 꽤 떨어진 산속에 황폐한 오륜탑 같은 게 풀에 파묻히다시피 몇 개 서 있습니다. 누구 무덤인지도 알 수가 없어요. 탑에 새긴 글자는 닳아 없어졌고요. 
네, 땅거미가 질 무렵에는 완전히 어두웠겠지요.
초롱불 같은 건 산속에서는 의지가 안 됩니다. 마을 안과는 달리 불빛이 전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습니까? 가스등과는 전혀 다르지요.
네. 그야말로 몸뚱이가 녹아 없어질 정도로 어둡습니다.
색깔도 형체도 없습니다. 한밤중의 산은. 
네, 맞습니다.
무시무시하지요.

- 산에 들어가면 말입니다. 별이 가깝게 느껴지지요. 그건 고도가 올라갔기 때문이 아니에요. 어둠이 깊기 때문입니다. 자그마한 빛이 눈부시게 느껴집니다.
네. 그러니까 가령 쇼마 씨가 말씀하신 인의 불빛 같은 것도 원래는 희미한 빛이겠지만 산속에서 보면 눈부시게 보이겠지요.
네. 야마오카 겐린이 말한 대로입니다.
같이 간 마을 대표에게 들었는데, 이 괴이한 불이 글쎄 글자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밝았다고 합니다. 이 또한 그런 상황에서 봤기 때문에 그렇게 여겨졌을 뿐일 수도 있겠지만요. 
아니, 아니군요.
그건 정말로 밝습니다.
네?
아니, 아니. 그건 또 나중 이야기이고요.

- 어쨌든 육부를 선두로 해서 네 사람은 그 무덤이 있는 곳으로 향했지요. 술시(戌時) 쯤이었다고 합니다.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답니다. 네, 불이 날아다니는 장면과 맞닥뜨린 사람은 많았던 모양이지만, 제 발로 그 불이 나타나는 곳으로 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니, 애초에 누가 묻혀 있는지도 모를 그런 산속 무덤에 해가 진 뒤에 찾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음, 기척이라 할까요. 그런 건 있습니다. 아니요. 소베 씨는 겁쟁이라 하실 테고, 쇼마 씨는 미신이라 하시겠지요. 겐노신 씨는 요마가 발하는 기라고... 아, 그런 건 아니라고요?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전부 틀렸습니다. 겁쟁이라서 기척을 느끼는 것도 아니거니와 기척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그런 건 실제로 있습니다. 특히 산에서는 강하게 느껴지지요. 다만 이는 특수한 무언가가 아닙니다. 결코 영감이나 육감으로 느끼는 게 아닙니다.
이건 오감으로 평범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저 보이거나 들리거나 하는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요즘 말로는 종합적이라고 할까요. 

- 기척이란 눈과 귀와 코와 피부처럼 바깥세상과 접하고 있는 다양한 부분이 감지한 것을 나란히 놓고 맞춰보거나 비교해서, 머리로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분명히 들리지도 않았고 확실히 보이지도 않았는데... 
어쩐지 느껴지는.
이런 것이 기척입니다. 특히 산은 사람의 오감이 예민해지는 곳이지요. 
네. 산에는 보이지 않는 게 더 많습니다. 나무가 있지요, 풀이 있지요, 물도 흐르고 곤충이나 짐승도 있지요. 그게 전부 보이지는 않습니다. 나무 그늘에 무엇이 있는지, 땅 밑에 무엇이 있는지, 산 뒤쪽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이런 건 보기만 해서는 모릅니다.  
소리나 냄새, 온도, 습기, 바람 방향으로 많은 것을 알 수 있지요. 자연스레 온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 저도 시코쿠 산속에서 상당히 무서운 일을 겪었으니까요. 네, 뭐라고 해야 하나, 인간의 틀을 초월했다고 할까. 그런 무서운 존재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 그때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척을 느꼈겠지요.

- 그때 야마오카 모모스케는 대체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하나 망설였다. 모모스케는 마타이치의 속셈을 도저히 짐작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덴교보라는 가짜 이름을 쓰고 있었지만, 이 사람이 마타이치 임을 모모스케는 금방 알아차렸다. 집단 속으로 들어가서는 눈 깜빡할 사이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은 마타이치의 주특기였다. 세 치 혀를 놀리는 모습은 청산유수 속이고, 달래고, 으르고, 어르고, 칭찬하고, 위협하고, 구슬리고... 모사꾼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 어행사의 말재주 하나면 순박한 마을 사람들을 손바닥에 놓고 움직이는 일쯤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어찌 되었든 마타이치는 작다고는 해도 지방 하나를 통째로 속인 적도 있다. 마타이치가 이 마을에 파고들어 마을 사람들의 환심을 사서 무슨 일인가를 벌이려 한다는 것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모모스케가 보기에 이 시골 마을은 평온했다. 

- 물론 외지인인 모모스케에게는 보이지 않는 일도 있다. 시골 마을이란 결국 어딘가가 닫혀 있게 마련이다. 내부 사정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밖에서 보아야 아는 일도 있다. 집 뼈대가 일그러졌다 한들 집 안에만 있어서야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밖에서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것도 일종의 기척이라 하면 될까. 
상태가 안 좋은 부분이 있으면 명확하게는 모르더라도 어쩐지 아는 법이다. 괴롭거나, 슬프거나, 덧없거나... 이런 감정은 아닌 체 꾸며도 들키게 마련이다. 그게 눈에 보이지 않는 냄새일 때도 있고 들리지 않는 비명일 때도 있다.

-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가짐이 건전하면 이런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마타이치는 이런 곳에 숨어 들어서 무엇을 할 생각일까? 확실히 마타이치는 갖은 수를 써서 사람의 틀어진 부분을 수선한다. 하지만 구멍이 나지 않은 천은 애초에 꿰맬 수가 없다. 가난을 보충하는 것은 금전과 물자인데, 이것을 마타이치가 보충할 수는 없다.  
아니면 모모스케가 느끼지 못했을 뿐, 이 마을에도 정체 모를 문제가 있는 것일까?
모모스케는 이런 생각을 곰곰이 하면서 마을 변두리에 있는 오두막의 문을 두드렸다.

- 마타이치는 예상과는 달리 -아니, 모모스케는 아무런 예상도 하지 못했지만- 평범한 인사를 했다. 아니, 너무 평범하기는 했다만.
어째서 여기 있냐고도 무얼 하러 왔냐고도 묻지 않았다. 마타이치는 "모모스케 선생, 잘 오셨습니다" 하고 마치 모모스케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역시... 당신이었습니까?"
모모스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렇게 말했다. "역시라니 무슨 소립니까" 하며 마타이치는 웃었다.

- "소생이 그렇게 눈에 띕니까?"
"눈에 띈달까... 무얼 하시는 겁니까?"
"조왕신 쫓는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이 있어달라고 해서요. 뭐, 정어리 대가리도 믿기 나름이라고 믿음이 있으면 나름의 구원을 얻는 법입니다. 소생처럼 신심이 없는 사람도 믿는 사람 눈에는 고마우신 육부님인 모양인지, 상대방이 믿고만 있으면 잃어버린 물건도 나오고 병도 낫는다. 이런 이야기이지요. 도움이 된다면 도와줘야지 하고 이렇게 영험한 육부님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마타이치가 말했다.

- "흉내라니..."
"죗값을 갚으려고요." 마타이치가 웃었다.
"혓바닥으로 사람을 속여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까놓고 말할 수 없는 일도 많이 했으니까요. 종잇장처럼 얄팍한 인생, 한 번쯤은 남에게 감사를 받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싶어서... 아차, 들어오십쇼."
마타이치는 모모스케를 방에 들였다.
안쪽은 마룻장을 깐 방이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 "속이고 있는 건 매한가지이지만, 그 덕에 갓난아기가 밤중에 우는 것이 멎었다, 할머니 허리가 펴졌다, 감사를 받으니... 뭐, 나쁜 일은 아니잖습니까?"
"그건... 나쁜 일은 아닙니다."
악행은 아니다.
그렇게 해서 터무니없는 돈을 챙긴다면 설령 효험이 있다 한들 사기가 되겠지만, 겉보기에는 마타이치가 마을 사람들에게서 기도 값 따위를 받는 낌새는 전혀 없었다. 아니, 마타이치라는 사내는 절대 이런 일로 돈벌이를 하는 사내가 아니다.  

물론 소악당이니만큼 속이거나 공갈을 하거나 뭔가를 뜯어내는 경우는 있다.
다만 그럴 경우에는 뭔가 다른 목적이 있고 이런 일은 그 수단이다. 모모스케는 적어도 돈을 목적으로 하는 사기 행각을 본 적이 없다. 마타이치 정도 되는 사람이 그럴 마음만 먹으면 구태여 귀찮은 장치를 꾸미지 않더라도 말만 가지고 곳간을 몇 채는 세울 텐데 어찌 된 셈인지 그런 일은 없다. 마타이치는 곳간은커녕 제대로 된 집도 없다. 살림살이만 보면 돈과는 전혀 인연이 없다. 

- 하지만 이는 마타이치가 욕심이 없거나 돈에 무관심해서 생긴 결과가 아니다.
모사꾼은 일한 만큼의 대가는 챙겨 받으며 결코 공짜로 일해주지 않는다. 받을 건 받는다. 소악당들은 모모스케 같은 사람보다 돈의 고마움을 훨씬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말재주만으로 돈을 버는 짓은 하지 않을 뿐이다.

- 다만 이 경우에는...
어떤 의뢰인지 알 수가 없다.
목적이 도통 보이지 않는다.
정말로 도움이 된다면 하겠다는 소악당에게는 없을 법한 갸륵한 마음으로 하는 일이라면 이도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물론 속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로 인해 누군가가 구원을 받는다면 거짓말도 하나의 방편이다.

- 하지만 모모스케가 마타이치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마타이치가 하는 일이니 나쁜 짓을 꾸미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생각하지 않지만, 마찬가지로 마타이치가 하는 일이니 속에 꿍꿍이가 없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마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모모스케 또한 속고 있을 가능성 역시 있다.

- "믿고 있는 거지요. 믿고 싶겠지요. 얼마 전까지의 참상을 선생도 아시잖습니까. 온 나라에서 모든 사람이 굶주렸으니까요. 기타바야시 같은 곳도 지독했지만, 이 부근도 상당히 지독했습니다. 오사카 시내에서까지 굶어 죽는 사람이 나왔으니까요!"

마타이치가 말했다.

"오사카에서 말입니까?"

"윗분들이 지독해서요."

이렇게 말한 순간만은 마타이치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에도는 그나마 나아요. 그곳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잘 알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지요. 하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잖아요? 작물이 말라죽으면 굶주리고, 물고기가 안 잡히면 굶주리고. 허나 오사카 부근에서는 몇 안 되는 사람들만 계속해서 재미를 봤지요."

-

"무사도 그렇지요. 쇼군 임명식에 보낼 쌀이다 뭐다 하면서 쌀을 사들이는 한편, 농민이나 장색이 제 입에 풀칠할 쌀 좀 확보했다고 암거래라면서 투옥하지 않나. 상인은 상인대로 쌀을 매점하여 가격을 끌어올려 자기들은 호화롭게 살지요. 기근이 생긴 걸 알고 그럽니다. 죽게 내버려 두고 손쓰지 않는 정도가 아닙니다. 더더욱 빼앗아 가니까 참을 수가 없지요." 
그건 알고 있다. 기근에 대해 아무런 대책도 취하지 않는 체제 측에 반발하는 목소리도 많았던 모양이다. 한때 막부의 신하였으면서도 반기를 든 오시오 헤이하치로(大平八郞)의 난은 기억에 새롭다. 
"이 나라의 형태를 잡아주는 틀은 꽤나 헐거워졌습니다. 고치의 수군 봉행이 한 말은 사실입니다. 지금의 형태는 그리 오래가지 못할 걸요. 그건 정사를 보는 놈들보다 미천한 사람들이 민감하게 알 겁니다. 이 근처는 유채 씨니 무명이니 술이니, 팔기 위해 심는 작물이 성했으니까요. 어떤 때에도 어찌어찌 해나갈 수는 있었을 테지요. 돈이 좀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번도 바보는 아니지요. 요즘은 번의 전매품이 나돌아서 오사카 시장에 나오는 물건도 반으로 줄었습니다. 저쪽에서 똑같이 나오면 안 팔리죠. 예전과 마찬가지로 좋은 물건을 만들어도 들어오는 돈은 반으로 줍니다. 구조가 바뀌기 시작했다는 건 농민들도 알아요." 
마타이치가 말했다.

- 과연.
이 나라 자체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는가.
바깥쪽이 일그러지면 안의 건전함은 오히려 거북한 느낌을 준다.

- "다들 불안한 겁니다."
"무언가를 믿고 싶다는 말씀이신지."
 
- "진기한 것이라는 말은 실례였습니까?"
마타이치가 또 웃었다.
잘 웃는다.
교토에서는 풀이 죽어 있었는데.
어느 시점에서 심경에 무슨 변화라도 있었나? 아니면 기분이 좋은 척하는 것인가?
어차피 모모스케는 알 수 없다.

- "저는 수수께끼를 쓰고 있을 뿐, 그... 게사쿠 작가라는 건..."
"알지도 못할 겁니다. 요 근방에서 수수께끼 작가라 한들 통하지도 않을 테고, 게사쿠 작가를 더 좋아할 걸요. 게다가 선생은 앞으로도 영원히 영험한 행자가 될 수는 없는 소생과는 달리 머잖아 진짜 게사쿠 작가가 될 것 아닙니까. 소생의 거짓말보다야 훨씬 더 진실미가 있지요." 
마타이치가 말했다.

- "이런, 그렇게 겸손하시다니 섭섭합니다."

마타이치가 손을 들었다.

"다름 아닌 이치몬지 너구리가 재미있다고 했잖아요. 잘 팔릴지도 몰라요."
마타이치가 화로를 걸어놓은 갈고리 너머로 지긋이 모모스케를 바라보았다.
또 하나 떨쳐버린 건가.
모모스케는 이렇게 생각했다.

- 마타이치는 무슨 일을 하나 꾸밀 때마다, 그러니까 누군가 생판 모르는 타인의 마음에 난 틈새를 들여다볼 때마다 제 속에 있는 무언가를 버리는 것 같다. 모모스케는 그러지 못한다. 모모스케에게는 뭔지 몰라도 매우 소중한 것이 있는데, 이것을 깎아 없애는 게 두려워서 꽁무니를 빼면서 살고 있다. 그래서 모모스케는 마타이치처럼 되지는 못한다. 
그렇다고는 하나.

- "선생에게는 못 당하겠습니다."
마타이치는 화롯가에 떨어져 있던 지푸라기를 하나 집더니 자기 얼굴 앞에 대고 가지고 놀았다.
"그런 건 요괴도 뭣도 아닙니다."
"뭣도 아니라니... 그럼 뭡니까?"
모모스케가 물고 늘어졌다.
"그건 산새예요.”
마타이치가 말했다.
"산새? 그럴 리 없지 않습니까? 새는 밤에 날아다니지도 않거니와, 애초에 새는 불을 발하지 않습니다."
"아니, 새는 빛납니다. 오품백로(해오라기, 五位鷺)는 파랗게 빛나고, 긴꼬리꿩은 붉게 빛나지요. 이게 날면 귀신불처럼 보이는 겁니다. 산사람들은 새불 혹은 흔들불이라고 하지요."

- "뭐, 고에몬불이죠."
"옛날 옛적의 고에몬불도 새라고요?"
"글쎄요, 소생은 모릅니다." 마타이치는 이렇게 말하고 바짝 깎은 머리를 긁었다.

"뭐, 새니까요. 겁먹지 않고 소리라도 내면 조용해지겠지요. 그날 밤은 그렇게 해서 해결하고, 다음 날 낮 동안에 새잡이 흉내를 내서 산 채로 잡았습니다요. 그랬더니 이제 안 나오네요."
마타이치가 거듭 말했다.
"새입니다. 새."
 
- "뭐, 혹 다시 나오면 그걸로 이 덴교보의 영험도 끝이지요. 그렇게 되면 얼른 작별하겠지만요."
확실히 앞뒤가 맞기는 하다.
그저 도저히 수긍할 수가 없었다. 마타이치는 두 번 다시 나올 리 없다고 단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모사꾼은 모모스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안 믿는 얼굴이네요"하고 말했다.

"의심도 참 많습니다."
"의심이 많아진 겁니다."

- 모모스케는 유학자나 불교학자도 아니고, 원래는 괴력난신에 대해 실컷 떠들고 싶어 하는 성미이다. 세상에는 괴이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은 인간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기 때문에 속임수를 싫어한다. 거짓된 괴이함을 간파하는 것은 진정한 괴이함을 판별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마타이치 일행과 만난 뒤로 모모스케는 수수께끼를 불가사의하다고 여기지도 못하고 이치에 맞는 일이라고 딱 잘라버리지도 못하게 되었다. 이는 물론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거짓이 진실인지 진실이 거짓인지, 결국 눈속임이라 모모스케 따위가 판단할 수는 없다. 
무슨 일이든지 간단히 믿지는 못하게 되었다.

- "그럼, 이런 건 어떻습니까." 마타이치가 말을 꺼낸다.
"그건... 원한의 불꽃이었습니다."
"원한의 불꽃이요?"
마타이치 씨답지 않은 말을 한다고 모모스케가 말하자 마타이치는 그렇다며 웃었다.

- "마타이치 씨는 신심이 없는 사람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선생, 믿고 안 믿고는 별개로 만약 죽은 사람의 원한이 불이 되는 일이 있다 치면, 지난번 그건 그 옛날에 무연고 무덤의 주인이 남긴 원한의 불꽃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름도 잊히고 찾아오는 발길도 끊긴 채 오랜 세월 버려졌다는 원념이 불꽃이 되어 타고 있었다면 어떻습니까?"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모모스케가 그렇게 말하자 마타이치는 왜냐고 물었다.
"왜냐니... 마타이치 씨는 원령 같은 건 믿지도 않으실 텐데요."
"소생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이 세상에 없는 건 아닐 텐데요."
"그건 그렇지만... 그럼 어떻게 없앴습니까? 마타이치 씨는 신심이 없기로는 확고한 사람 아니었습니까? 진짜 원령이라면 없앨 수 있을 리 없습니다."
"그렇지만도 않을 겁니다. 소생에게는 신심이 없지만 보시다시피 기도는 듣습니다. 죽은 넋이라고 해도 원래는 사람이죠. 살아있는 사람한테도 효험이 있었으니까 똑같이 효험이 있었다고 생각할 순 없을까요. 벼락 육부의 사기 경문도, 사칭 행사의 가짜 부적도 효과가 ..."

- "우연 치고는 너무 기막히지 않은가?"
소베가 이렇게 묻자 노인은 "네, 그렇지요" 하고 다시금 붙임성 있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우연입니다. 기우제가 효과를 발휘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때마침 비가 내릴 때도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리지 않았을 경우에는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전해지지 않는다고 하시면?"
"이건 일종의 말장난 같은 거지요. 기우제를 했는데 비가 내리지 않으면 실패라고 하지 않습니까? 실패라고 하는 걸 보면 비가 내리리라고 전제하고 있겠지요. 비가 내릴 리 없다고 전제한다면 비가 내릴 때는 그야말로 우연인 것이 됩니다."

- "하지만 내리지 않으면 실패라고 했을 때야 비로소 실패한 이유가 영험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뭐, 그게 대부분이지요. 빈다고 비가 올 리 없으니까요. 이런 실패 사례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비가 내린 이유는 영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됩니다. 이게 영험을 믿는 사람들의 생각이지요. 하지만 반면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전제하면, 다시 말해 믿지 않는 사람들 눈으로 보면 내리지 않는 게 당연하고 내리는 게 진기한 우연입니다. 진기한 일은 기록하기도 하고 기억하기도 하지만, 진기하지 않은 일은 기록하지 않겠지요."
"믿는 쪽이나 믿지 않는 쪽이나 기도를 해서 비가 내렸을 때에 대해서만 문제 삼는다. 이런 뜻입니까?"
요지로가 이렇게 묻자 노인은 기분 좋게 명답이라고 말했다.
 

- "사기꾼이잖습니까."
"아니요, 봉사정신으로 가득한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사기예요, 눈속임입니다. 영국에도 심령술사가 있지만 역시나 사기이지요. 비열한 구경거리라고요."
쇼마가 말했다.

- "맞습니다. 그 부인 마님이... 말씀드리기가 껄끄럽지만 그러니까... 음탕한 병에 걸리셨다고, 입방아 찧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수군댔던 모양입니다."
"음탕한 병이라... 그건 사내에 미쳤다는 말이군. 꽃을 밝히는 병... 음란증이라 하나. 하룻밤이라도 사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상스러운 말은 그만하게."
쇼마의 말을 소베가 막았다.


- "네. 그렇지만 쇼마 씨 말이 맞습니다. 그런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대관님 평판이 올라갔는지도 모르지요."
"동정심을 샀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대관님은 데릴사위였던 모양이에요. 부인 마님은 번의 요직에 있는 분의 따님이었나 봅니다. 이 사실이 영지의 백성들에게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야 물론 공공연히 입에 올릴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보니 시끄럽게 떠들어대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요. 뭐라고 해야 하나, 암묵적인 인식이 있었다고 할까요. 저 대관님은 부인에게는 꼼짝도 못 한다. 그걸 이용해서 부인은 매일 밤 미천한 사내를 끌어들이고 있다. 이런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걸 용케 알아냈네요."
요지로가 이렇게 말했다. 마을의 이런 사정은 보통 외지인에게는 말하지 않는다. 사람 입을 막을 수는 없다지만 이는 닫힌 집단 안에서나 그렇다. 말을 해서는 안 되는 내용은 밖에서는 들을 수 없으며 또 묻지 않는 것이 나그네의 예의이기도 하다. 이런 이야기를 캐내는 건 지난한 일이고, 묻지도 않았는데 들려왔다면 이는 그 집단이 무너지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 "어르신이 가르쳐주셨습니다. 제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드린데 대한 답례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아, 험담을 한 것은 아닙니다. 대관님의 인품을 칭찬할 때 무심코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는 느낌일까요."

잇파쿠 옹이 대답했다.
"노인장은 흘려듣지 않았군요. 타고난 호사가네요, 노인장."

쇼마가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노인이 주름을 떨면서 웃었다.

- "심부름꾼이 부인 마님의 병을 고쳐달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덴교보의 평판이 마침내 관사에까지 전해진 거지요. 이것이 그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노인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 절을 올릴 뿐이었습니다. 네. 저도 어쩐지 감사한 생각이 들었지요. 후광이 비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날 중에 덴교보 씨는 촌장님에게 이끌려 관사로 향했습니다. 관사는 어째 소란스러웠다고 합니다. 네, 부인 마님이 몸져누운 것은 사실이라서 덴교보 님은 곧장 부인 마님 방으로 안내되었다고 합니다. 네.
하루이틀 기도해서 될 일이 아니라 해서 촌장님은 밤중에 돌아왔습니다.

- 그러고 나서 이레가 지났지요.
네. 마을 사람들도 저마다 불단이나 신단에 기도를 올렸고 말고요. 물론 부인 마님의 병이 낫기를 기원한 겁니다.
그건 그렇겠지요.
그 무렵에는 이미 부인 마님의 병이 낫는다는 것은 곧 연공 문제 해결로 이어진다고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요. 아니, 단락적이라는 말씀은 마십시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겠지요.
게다가 사람이 죽기를 바라는 상황과 비교하면 훨씬 더 건전하지 않습니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이기는 해도 병마 퇴치를 비는 것이니까요.

- 일곱 날, 일곱 밤이 지나 덴교보 님은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네, 핼쑥하게 야위셨더군요.
부인 마님의 병은...
네, 싹 나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을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다만 덴교보 님은 왠지 어두운 얼굴이었습니다. 뭐, 어마어마한 기도를 마친 뒤니까 피곤하신 게지. 다들 그렇게 생각했는데...

 

- 이튿날이었을까요.
촌장님은 다른 마을의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네, 물론 소작료 문제로요. 네, 부인 마님도 완쾌되었다 하니 한 번 더 부탁을 드리러 가자는 결론이 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있던 마을의 촌장님이 대표로 관사에 갔지요.

-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건 큰 오산이었습니다.
네.

- 덴교보 님이 부름을 받은 건 대관님이 집을 비우셨을 때였습니다. 네. 이 모든 것이 대관님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네.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자면, 전부 부인 마님이 꾸민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촌장님의 아뢰는 말을 들은 대관님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빨개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대단히 온후한 대관님이 느닷없이 언성을 높였다지 뭡니까.
부인이 병에 걸렸을 리 없다. 가기 전에도 돌아온 뒤에도 지극히 멀쩡하다. 그런 헛소리를 하다니 어찌 된 일이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촌장님은 당황했겠지요. 그래서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하고 변명을 했습니다.
그러자 대관님은 점점 더 화를 내셨다고 합니다.
나는 목이 날아갈 것도 각오하고 위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는 어찌 되었든 영지의 백성들을 생각해서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데 너희가 이런 비열한 짓을 하다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촌장님은 그야말로 새파랗게 질렸겠지요. 핏기가 가신 채로 그저 용서를 빌고 변명했습니다. 

- 네, 당연하지요.
부인 마님이 병에 걸린 것도 사실, 육부가 불려간 것도 사실, 그래서 병이 나은 것도 사실. 어디 한구석 켕기는 곳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네.
대관님은 부인 마님을 부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네. 부인 마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 촌장 놈이 어디선가 보기 흉한 비렁뱅이 중을 데려오더니 수상한 기도를 하라고 했다. 바깥양반이 집을 비웠다며 내가 거절했지만 수상한 자는 괘씸하게도 방에 들어오더니 일곱 날 일곱 밤을 버티고 있다가 어제서야 겨우 돌아갔다고... 
그동안에 그 비렁뱅이 중놈은 몇 번이나 내게 무례한 짓을 하려고 했다. 필사적으로 저항하여 정조만은 지켰지만 그렇다 해도 무가의 여인으로서 참을 수 없는 갖가지 나쁜 짓으로 능욕을 당하였으니, 이대로 잠자코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바깥양반이 돌아온 뒤에도 뜻대로 변명조차 못하고 차라리 자결을 할까 생각하던 참이라고...

- 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촌장님은 너무나도 말이 안 되는 일에 정신이 아득해졌다고 합디다. 대관님은 불같이 화를 내셨지요. 이제 무슨 말을 어떻게 해도 듣지 않는 지경이었습니다. 촌장님은 이제 죽었구나 싶었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자리에서 포박을 당했거든요. 

- 네. 소식은 금방 전해졌습니다.
마을 관리는 황급히 덴교보 씨에게 달려갔습니다.
저도 갔습니다.
덴교보 씨는 각오한 듯 앉아 계셨습니다.
네, 네. 이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있었다고 합니다.

- 애초에 부인은 꾀병이었습니다. 부인은 영험한 육부에 대한 소문을 듣고 정황을 살피러 왔던 거지요. 그때 덴교보 씨의 모습을 보고... 
네.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네, 밤 시중을 들게 하겠다고 생각한 거지요. 소문은 정말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대관님이 관사를 비운 것을 이용해 덴교보 씨를 불러들였습니다. 요컨대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에 샛서방을 끌어들였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 샛서방이 도통 넘어오질 않습니다. 네, 덴교보 씨는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 부인의 유혹에 걸려들지 않았던 겁니다. 네,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인 쪽은 발정이 나서 놓아주지 않고요. 단념시키는 데 이레가 걸렸던 거지요. 
네.
아무리 유혹해도 덴교보 씨가 상대를 안 하니 부인도 단념했다고 합니다.
네, 네. 이레째 되는 날에 풀려나서 돌아온 건 좋았지만 입이 찢어져도 이 진상만큼은 마을 사람들에게 말 못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이야기를 한들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요.
세상에 알려지면 부인 마님뿐 아니라 대관님까지 창피를 당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무가의 체면에 흙칠을 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덴교보씨는 묵묵히 있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게다가 이 사실을 대관님이 알게 될 경우 누구보다 난처한 사람은 부인 마님 아니겠습니까? 네. 그래서 덴교보 씨는 부인마님의 입장을 생각해서 입을 다물기도 했겠지요.
다만 병은 나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무얼, 음탕한 불이 꺼진 덕에 풀려났으니 꼭 거짓말은 아니잖습니까. 뭐, 달리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덴교보 씨를 탓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마을 사람들도 금세 이해했습니다.
네.
음탕한 부인이 나쁘니까요.
오히려 유혹에 못 이긴 척 관계를 가지지 않은 덴교보 씨는 칭찬받아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네, 아무리 유혹당했다고는 해도 대관의 아내와 관계를 맺으면 변명할 말도 없지요. 덴교보 씨는 농민은 고사하고 호적도 없는 사람이니까요.
아니, 신분 문제가 아니군요.
이건 엄연한 간통이니까요.
거절하는 게 당연하겠지요. 달리 선택지도 없었을 테고요.

- 하지만, 하지만요.
부인 마님 쪽은 달랐습니다.
네. 사랑이 지나치면 미움도 커진다고 하지요.
구애를 거절하고 창피를 주었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육부가 미워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 모모스케는...
아연실색했다.
마타이치가 포박을 당하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마타이치는 여러 지방을 두루 다니며 잇따라 큰 계략을 성공시킨 사내이다. 대상인과 거물 악당, 불량배와 도적, 심지어는 다이묘까지 이 소악당의 혀끝에 속아 농락당하고 마음대로 조종당했다. 모모스케는 그 모습을 직접 보았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내몰리는 경우도 많았지만, 모모스케가 아는 한 마타이치 본인이 그런 처지에 몰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떤 궁지에서도 모든 일은 계산 빠른 사기꾼의 손바닥 위였다. 마타이치가 스스로 겉으로 나서는 일도 없었거니와 남모르게 빠져나갈 방법과 달아날 공간 또한 반드시 확보해 두었다. 
언제 어느 때에도 계산을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없었음이 분명하다. 
사기꾼이 마련한 교묘한 속임수에는 늘 자그마한 틈도 없었으니까.

- 그런데, 방심했나? 아니다.
이것은 일이 아니다.
마타이치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지난번에 보았던 그 흡족한 얼굴은 연기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 소란이 일어나는 동안 비틀비틀 사람들을 피하며 이리저리 밀린 모모스케는 감나무에 등을 대고 그대로 미끄러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포박을 당한 마타이치는 대관 고노스 겐바를 냉엄한 눈길로 노려보았다. 
모모스케 생각으로는 마타이치는 처음부터 겐바의 아내인 유키노가 꾀병임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을이 처한 복잡한 상황을 고려하면 그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꾀병이라고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열병이 아님을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에 마타이치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고칠 수 있는 병이라고 단언했을 것이다. 마타이치는 이미 다 알고서 관사로 갔다. 
그것은 계책이 아니다.
물론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 결과가... 

- 겐바가 끌고 가라고 소리쳤다.
이제는 저항하는 마을 사람도 없었다. 무리도 아니다.
무사에게 반항하는 농민은 없다. 그것은 목숨을 버린다는 뜻이다. 마을의 은인이든 생명의 은인이든 이렇게 된 이상 손쓸 방도가 없다.  

- "마타이치 씨."
모모스케는 간신히 이 말만 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물론 침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슬프지도 않았고 당황하지도 않았다. 놀라움이란 한순간에 찾아오기에 가능한 감정의 움직임이며, 지속된다면 더 이상 감정의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 "우리가 붙드는 바람에 저렇게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어요. 덴교보 님은 원통했을 거예요. 분했을 거예요. 그렇지 않았다면 저렇게는 안 되었겠지요. 아니, 하지만... 저래서는 해명도 할 수 없잖아요."
확실히 그렇다.
어디를 어떻게 생각해도 지붕 위에 잘린 머리를 올려둘 이유는 없다. 목을 친 이유라면 아무렇게나 갖다 붙일 수 있겠지만, 저 잘린 머리를 지붕 위에 올려놓을 의미는 없을 것이다. 
목이 스스로 올라갔다면...

 
- "착각이겠지요."
노인이 단언했다.
겐노신과 소베는 예상이 빗나갔다는 얼굴로 서로 마주 보았다. 쇼마 혼자만 유쾌하게 "그것 보게나" 하고 겐노신이 한 말을 흉내 냈다.

"차, 착각이라는 말씀입니까?"
"착각입니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그게 평범한 불로 보이지 않았겠지요. 육부님의 노여움의 불꽃, 원한의 불덩이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테니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저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뿐이지 그게 우연히 일어난 자연 현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과연 우연일까." 겐노신이 중얼거렸다.

 

- "결단코 우연입니다."
노인이 보기 드물게 강한 어조로 말했다.
"사람 마음이 천지의 이치를 좌우한다는 건 거만한 생각이 아닐까요? 사람은 고작해야 지혜를 가진 짐승, 영리하기는 하지만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신불처럼 천연 자연을 조종할 수 있을 리 없지요. 그러니까 이건 어쩌다 일어난 일입니다. 우연히 사람 마음에 부합하는 현상이 일어난 아니... 우연히 일어난 현상을 사람이 제멋대로 그렇게 해석했을 뿐일 테지요." 
"얼굴이 있는 게 아니라 얼굴을 보는 것이로군요."
요지로가 이렇게 말했다.
"좋은 말씀을 하십니다."

노인이 대답했다.
"사람은 거기서 얼굴을 보고 안심하거나 두려워하면서 자연의 이치를 자기 마음 쪽으로 끌어당기는 겁니다. 사람은 약한 존재이니까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때도 있겠지요. 그러니까 이건 쇼마 씨 말씀대로 번개의 일종이었겠지요. 그 증거로."

- "쇼마 씨 이야기에 따르면 이런 구상 번개 같은 괴이한 불은 진짜낙뢰와 함께 나타난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대기 중의 전기가 양이나 음으로 치우쳐서 불안정할 때 이런 현상은 일어날 겁니다. 그러면 이 불안정한 균형을 바로잡는 강한 작용이 일어날 테지요. 외국에서도 귀신불이 나온 전후에는 번개가 지나가는 경우가 많은 모양이에요. 그렇다면 그때도..."
"네."
잇파쿠 옹이 어쩐지 송구스러운 듯 자세를 바로 했다.
"얼마나 지났을 때일까요. 마을 사람들은 합장을 하고 있었고, 무사는 벌써 언덕 너머까지 달아나버렸습니다. 저도 무서워져서 언덕 쪽까지 물러났는데 그때... 하늘이 갈라지는 줄 알았습니다."

- "자연 현상이지요. 이 현상은 우연히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미요와 고자부로는 우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고자부로는 처음부터 유령과 귀신불을 겁내고 있었으니까 이크, 귀신이다, 하며 도망 다닙니다. 미요도 이렇게 된 이상 단념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미요는 무덤까지 파냈으니, 마찬가지로 기누 씨의 혼백이 길을 잃고 떠돈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용인들은 아무것도 모르니 그냥 불덩이라 생각하고 달아났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에 켕기는 구석이 있는 사람에게는 얼굴이 보였다..."

"맞습니다. 얼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본 겁니다."

- 보이는 게 아니라 보는 것이다. 거기서 무엇을 보는지는 보는 사람 마음에 달렸다. 이도 저도 다 노인이 이야기한 셋쓰의 괴이한 불 이야기에서 얻은 교훈이다.

- 작은 불 소동은 미요의 소행이고 구상 번개는 자연 현상이다. 한쪽은 인위적으로 일으켰고 다른 한쪽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원래 화재와 구상 번개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 둘을 잇는 것은 단 하나, 미요와 고자부로의 공포심. 그러니 뒤집어보면 죄책감 뿐이었다.
두 가지가 따로따로 일어났다고 판단하고, 나아가 이 무관한 일에서 인과관계를 꿰뚫어 봤을 때, 미요와 고자부로의 범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 그리고 이치몬지야 니조에게 노인의 이름을 들은 모모스케는 무척 놀랐다. 이 노인은 등명 고에몬이라는 것이다.
옛날에는 산 사람 같은 인형을 잘 만들기로는 따라올 자가 없다고 일컬어지던 인형 얼굴 제작의 명인이 고에몬이다. 게다가 뒤에서는 화약을 써서 에도의 뒤쪽을 좌지우지하는 거물이기도 했다고 한다. 십 년쯤 전에 손을 떼고 은둔하던 고에몬은 얼마 전에 기타바야시 번을 뒤덮은 꺼림칙한 먹구름의 부름이라도 받은 것처럼 어둠의 세계로 되돌아와 마타이치 일당과 함께 다이묘를 상대로 일생일대의 큰일을 치른 참이었다. 
그 건에는 모모스케도 깊이 관여했다.
하지만 그 커다란 계획의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에몬은 한 번도 모모스케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치몬지야가 소개하기 전까지 모모스케는 그의 얼굴을 몰랐다. 
고에몬은 모모스케의 얼굴 생김새를 음미하듯이 잠시 바라보고 나서 히죽 웃더니 등 뒤를 돌아보며 "언제까지 숨어 있는 게냐" 하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모모스케는 무슨 일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 그리고.
고에몬 등 뒤에서 장지문을 열고 들어온 인물을 보고 모모스케는 진심으로 간이 떨어질 만큼 놀랐다.
그곳에 있던 건... 
베로 된 홑옷에 흰 무명으로 머리를 감싸고 가슴팍에는 상자를 건 어행사 복장을 한 ...

-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라고 한들 부질없는 일이다. 농민들을 믿어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겐바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몇 개 없었다.
우선 증세가 결정되기 전에 저지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는 아무래도 어려웠다. 번의 재정은 빼도 박도 못하는 지경까지 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겐바는 증세 결정을 막기 위해 번에 손을 쓰는 동시에, 오사카 일대의 어둠의 세계를 잘 아는 이치몬지야에게 상담해 보았다.
이쪽을 취하면 저쪽을 잃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으니 둘 다를 취할 수 있는 계책을 마련해 달라고.
그리하여 모사꾼이 나설 차례가 왔다.

- 이번 연극에는 두 가지 중요한 부분이 있었다.
우선 어떤 사태가 되더라도 도이 번 영지의 열다섯 마을이 모반에 가담할 의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막부 쪽에 들키지 않는 것. 이것이 가장 우선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증세와 노역 부과를 회피하는 것. 이것이 두 번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관사에 감춘 대포와 함께 대관 고노스 겐바를 이 세상에서 없애버려야 했다.
이것은 자잘한 연기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몰래 대포를 꺼내어 처분한다 한들 상황은 그리 달라지지 않고, 겐바 혼자 모습을 감춘다 한들 마찬가지로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다.
우선 겐바와 마을 사람들의 관계를 마을 사람들 쪽에서 끊게 하는 것이 선결 문제였다. 그러려면 겐바를 악인으로 만드는 것. 마을 사람들이 겐바를 미워하게 하는 것이 가장 손쉬웠다.
그렇다고 해서 대관이 부정을 저질렀다는 소문을 흘릴 수는 없었다. 부정이 있다면 감사가 들어온다. 그러면 모든 것이 끝이다. 그래서 이치몬지야는 뒤쪽을 공략하기로 했다. 
대관 부인 마님은 음탕하다는 소문과 니콘보의 불 전설의 복원이다. 그리하여 모셔 온 사람이 고에몬이었다.

- 괴이한 불의 정체는 고에몬의 화약 밧줄이었다.
생각해 보면, 니조는 처음부터 괴이한 불을 고에몬불이라 불렀다. 모모스케는 고문서에 나오는 괴이한 불을 말한다고 지레짐작했지만 넌지시 정답을 암시한 것이리라. 

- 그리고 마타이치가 불려 왔다.
마타이치는 괴이한 불을 잠재우고 교묘한 말재간으로 마을 사람들의 환심을 사서 크나큰 신뢰를 얻었다. 이도 저도 다 대관에게 살해당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미리 퍼뜨려두었던 음탕한 소문이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계산이다.
대관 자신은 인망이 있다. 하지만 부인은 마을 사람들과 접점이 없다. 대관에 대한 나쁜 소문은 퍼지기 어려웠지만 부인에 대한 나쁜 소문은 비교적 퍼지기 쉬웠다. 음탕한 아내의 소문은 인망이 있는 대관을 동정하는 말이 되어 이 마을 저 마을로 퍼졌다. 
여기에 마타이치가 편승한다.

- "온통 거짓말 뿐이잖아요."
사요가 말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알지요." 사요가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모모스케 씨는 덴교보가 마타이치 씨였다는 사실조차 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잖아요. 그정도는 짐작이 간답니다. 제가 누구인데요. 우연이다, 자연 현상이다, 하면서 하고 싶은 말씀만 하셨지만, 제 귀는 못 속여요. 모모스케 씨의 시중을 몇 년 들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아니, 우연이면 됩니다. 보세요, 사요 씨, 사람이 사람을 심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어떠한 경우라도 심판하는 건 사람보다 위에 있는 존재예요. 법률이나 그런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제어할 방법이 없잖아요." 
이 말에 사요는 "그렇네요" 하며 순순히 동의했다. "그렇게 되면 힘있는 사람이 옳은 게 되니까요."
"그렇지요? 그리 되면 무시무시한 일이 생길 겁니다. 싫다, 밉다, 이런 이유로 죽임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혀서야 살 수가 없지요. 그래서 그 사람들은 결코 겉으로 나오지 않았던 겁니다." 

- 모모스케가 옛날을 그리워하듯 말했다.
"그건 하늘의 심판, 하늘에서 내려온 하늘불이었습니다. 사람이 한 짓이라는 걸 알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그것대로 되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살인사건까지 해결되었다니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 이렇게 말하자 사에는 "그 사건에는 이면이 없을까요" 하고 물었다.
"그 화재도."
"아니, 아니지" 하고 모모스케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없겠지요. 이제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마타이치는 이제 없다.
"풍류가 없는 시대이지요."

 

- 모모스케는 명장지를 열어달라고 사요에게 부탁했다.
해 질 녘 하늘이 보였다.
바람이 휙 들어오더니 늘 달아놓는 풍경이...
짤랑.
소리를 냈다.
"세상에 불가사의는 없고 세상 모든 것이 불가사의입니다."

모모스케는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듯 이렇게 말했다. 사요는 역시나 웃으며 흘려들은 모양이었다.

 

- <하늘불>

 

 

 

뱀을 반만 죽여서 버려놓으면

그날 밤 찾아와서 앙갚음한다고 하지만

모기장을 쳐놓으면 들어오지 못한다.

다음날 모기장 주위를 보면 붉은 피가 떨어져 있는데

절로 글자 모양을 이루어 원수를 갚고 싶다고 쓰여 있다.

회본백물어(繪本百物語)·도산진야화(桃山人夜話)  / 제4권 27



- 옛날 옛적에.
어느 마을에 늙은 부부와 딸 하나가 살았습니다.
노부부는 살림살이가 무척 가난했지만, 딸도 얌전한 데다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부지런히 일했기 때문에 유복한 것과는 거리가 먼 형편이기는 했어도 결코 불행하지는 않았습니다. 

- 어느 날,
딸은 산에 섶나무를 하러 갔습니다.
근면한 딸이다 보니 일심불란 열심히 섶나무를 했습니다. 하도 정성껏 베다 보니 딸은 땀이 났습니다. 땀 때문에 낫을 든 손이 살짝 미끄러지고 말았습니다. 
썩둑 소리가 났습니다.
발밑으로 피가 뚝뚝 떨어졌습니다.
당황해서 섶나무를 헤쳐보았더니 뱀 한 마리가 피투성이가 되어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딸의 낫이 뱀 대가리 아래쪽을 비스듬하게 베어버린 것입니다. 
딸은 덜컥 겁이 나서 뱀을 그냥 둔 채 집으로 달아났습니다. 

 

- 다음 날 밤, 딸 집 앞에 다친 젊은이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꽤 쇠약한 상태였지만 옷차림도 번듯하고 용모도 아름다운 젊은이였기 때문에 노부부와 딸은 남자를 집으로 데려와서 돌봐주었습니다.
극진하게 돌본 보람이 있어서 젊은이의 용태는 차도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말끔히 나을 즈음, 딸과 젊은이는 사랑에 빠졌습니다.
딸은 완쾌된 젊은이에게 이 집에 머물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노부부 또한 그러기를 바랐습니다.
젊은이는 은혜를 베풀어준 가족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다며 그 집 사위가 되었습니다.

- 그 후로,
이 집안은 대단히 번성했습니다.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아 재산은 늘고, 복이 잇따라 굴러들어 온 덕분에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노부부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생활은 즐거웠습니다.
노부부나 딸이나 정말로 재미있고 유쾌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 그런데.
유복해지면 욕심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욕심이 생기면 못된 생각도 듭니다.
못된 생각이 들면 마음이 흐트러지고, 마음이 흐트러지면 행복도 달아나는 법입니다.
그러다 보면.
질투와 선망과 의심과 경멸이 솟아납니다. 다툼과 멸시와 악담과 비웃음이 만연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딸과 노부부는 돈만 있었다 뿐이지 아주 불행했습니다.
그리고 딸은 깨달았습니다. 남자는 그때 상처 입은 뱀이라는 것을.

뱀은 복수를 하기 위해 돈 기운을 불러와서는... 딸에게서 행복을 앗아간 것입니다.

- 와타나베에 지난날 불당이었던 곳이 있다. 약사당이라 한다. 미나모토노 산자에몬 가케루의 선조의 위패를 모신 절이다. 쓰가우가 관마의 사육을 맡아보는 관청의 삼등관이었을 때 이 불당을 수리하였다. 원래 널조각으로 이었던 지붕이 오래되어 전부 썩어버린 것을 갈려고 윗부분을 떼어 내니 커다란 뱀이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커다란 못에 박혀서 긴 세월 움직이지도 않고 이렇게 있었다. 불당을 건립한 뒤부터 이때까지의 햇수를 헤아려보니 육십여 년이었다. 그동안 이렇게 못이 박혀서도 살아있는 긴 수명이란 무시무시하기 그지없다. 뱀이 있던 지붕 밑의 널빤지는 기름으로 윤을 낸 듯 반짝거렸다. 어찌 된 연유인지 확실치 않다. 이는 바로 가케루가 한 이야기이다...  

- "가케루라 가케루라 함은 미나모토노 가케루, 그 와타나베노 쓰나(渡辺綱)의 자손 말인가?"
야하기 겐노신이 물었다.
질문을 받은 사사무라 요지로는 그런 쪽에 대해서는 잘 몰랐기 때문에 "그런가" 하고 적당히 대꾸했다.
"그렇잖나. 미나모토노 산자에몬 가케루라 하면 천황의 호위무사이자 황실 장원의 관리자인 와타나베노 쓰타우의 자손이야. 사대(四代) 위가 미나모토노 요리미쓰를 모신 사천왕 중 한 사람이자 요괴 퇴치로 유명한 와타나베노 쓰나 아닌가."

 

- 겐노신이라는 사내는 도쿄 경시청 일등 순사인데도 고전 서적에 정통해서 이런 것을 괜히 잘 알았다.
반면 요지로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 그러니까 기이한 사건이나 불가해한 사건에 다소 흥미가 있는 정도이고, 오래된 책 따위를 즐겨 읽기는 하지만 역사니 뭐니 하는 데에는 통 어두웠다. 누가 누구의 손자인지 아들인지, 그런 것은 도통 모른다. 

- "와타나베노 쓰나라면 긴타로 말인가?"
구라타 쇼마가 물었다.
"그건 사카타 긴토키지. 멍청한 놈."
시부야 소베가 꾸짖듯 말했다. 
쇼마는 오늘도 서양에 다녀온 것을 자랑하는 듯 얼굴에 안 어울리는 양장 차림이다. 보다 보니 익숙해졌는지 예전에 비하면 약간 어울리게 된 듯도 하지만 결국 다다미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으니 우스꽝스럽다고 평할 수밖에.
반면 검술을 가르치는 소베는 상투를 잘라도 여전히 무사 같은 풍모가 가시지 않아 등을 쭉 뻗고 앉은 자세도 제법 잘 어울린다. 하지만 시대에 뒤떨어지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어쨌든 둘 다 거기서 거기이다. 
 
- "설화와 그냥 이야기는 다른가?"
쇼마가 물었다.
"음" 하고 겐노신이 팔짱을 꼈다. 

"그렇게 물어보면 꽤 어렵네만..."
"몇 년에 어디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기록풍으로 쓰여 있는 듯하고 게사쿠와는 달라서 완전히 지어낸 것도 아닐 텐데."

"그렇지."

- "알겠다."
쇼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런 종류는 불교 냄새가 나서 신용할 수 없다. 겐노신 자네는 이 말을 하는 거로군?"
"신용할 수 없다고는 안 했네."
비뚤어진 녀석이라며 쇼마는 자세를 풀고 다리를 쭉 뻗었다.
"어쨌든 미신이 깊은 시대에 쓰였지 않나. 나는 신심을 가벼이 여길 생각은 전혀 없네만, 무슨 일이든 신불의 영험이니 인과응보의 이치라고 해서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
"그건 해석의 문제겠지. 쓰여 있는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와 일어난 사실을 기술한 사람이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네만."
요지로가 끼어들었다.
"요지로, 자네가 하는 말은 그럭저럭 조리에 맞는 듯하지만, 그러면 귀신이 나왔니, 요물이 나타났니 하는 것도 신용할 수밖에 없어지네."

소베가 말했다.

- "왜인가?"
"똑같이 쓰여 있기 때문이네. 돌연 폭풍이 불어오더니 무슨무슨 분묘가 큰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천공에 용이 나타나... 이 모든 것은 어디 어디 산에 있는 아무개 신이 노한 까닭이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을 경우에 우리 읽는 사람들은 어디까지 믿으면 좋을지 모르게 되네. 쓴 사람은 다름 아닌 신불의 영험을 전하고 싶었을 테니 문투에 구별은 없어. 하지만 비가 갑자기 내릴 수는 있지만 용이 나타나는 일은 거의 없겠지. 그러면 분묘가 큰 소리를 낸 것은 어떻게 봐야 하느냐 이 말일세. 이게 돌연 비가 내리고 분묘가 큰 소리를 내며 움직이더니 용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기록되어 있다면 뭐 어쩌다 분묘에서 소리가 났을 거라고 하겠지만 말이야. 신심을 빼고 쓴 것이 아니면 구별이 안 간다는 말이네." 

 


- "어쨌든 요즘 시대에 <곤자쿠모노가타리슈>나 <우지슈이모노가타리>를 조사 자료로 쓰는 식자는 없을 걸세. 우리나라는 문명국이야. 알겠나, 요지로, 겐노신이 봉직하고 있는 곳은 봉행소가 아니라 도쿄 경시청이네. 죄인을 잡는 데 옛날이야기를 쓰는 건 좀 그렇다는 말이네."

- 훈계를 들을 이유는 없다. 거기에 더해 소작인들에게 합의금을 건넨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쓰카모리의 재산은 모조리 내 것이니까 양해도 구하지 않고 아랫것들에게 주는 일은 용서할 수 없다. 이것이 이노스케의 논리였다.
참 제멋대로인 주장이다.
죽기 전날 밤 이노스케는 질 나쁜 친구들을 모아 실컷 푸념을 늘어놓고 진탕 술을 마시며 주정을 한 모양이다.
그때 이노스케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쓰카모리 집안이 유복한 건 구메시치 숙부나 쇼고로가 더럽게 고지식하게 일하기 때문이라고 세상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 같지만 그건 큰 착각이야. 
쓰카모리 집안에는 숨겨둔 재산이 있어, 아무리 써도 다 쓸 수 없을 정도의 금은보화를 어딘가에 숨겨두었다. 나는 이렇게 들었어.
그건 원래 가장만이 아는 집안의 비밀이었어. 그런데 아버지가 뻗어버린 걸 구실로 빌어먹을 숙부가 보물을 독차지한 게 분명해. 그 욕심쟁이는 나한테는 땡전 한 푼 안 넘길 작정이야.
이노스케는 이렇게 말하며 길길이 날뛰었다고 한다.

- 하지만 이 이야기에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런 소문은 실제로 옛날부터 근방 일대에 퍼져 있었다고 한다.
집 뒤에 있는 분묘...
쓰카모리라는 이름의 기원이기도 한 이 분묘를 근처 사람들은 구치나와 분묘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구치나와, 즉 뱀이다.

 

- 작은 산 같은 이 낡은 분묘에 손을 대면 뱀의 지벌이 내린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쓰카모리 집안 부지 안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쓰카모리 집안사람 외에는 아무도 다가가지 않는다고 한다. 
이 무시무시한 지벌의 분묘 위에는 작은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은 쓰카모리 집안의 수호신을 모신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사당의 유래가 아무래도 꺼림칙하다는 것이다.
다만 자세한 사정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는지 아니면 세월과 함께 풍화해 버렸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저 쓰카모리의 조상이 뱀을 죽였기 때문에 저주가 남았다거나 전전대가 도적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았다는 뜬소문만 희미하게 남아있다고 한다. 어쨌든 풍문에 불과해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이다. 
왠지 모르게 꺼림칙한 인상만이 남아 있다. 그래서 아무도 다가가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진상인 듯하다.

- 하지만.
단 한 사람, 이노스케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분묘에는 돈이 숨겨져 있다."
이노스케는 질 나쁜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명색이 근방에서도 손꼽히는 큰 농가의 수호신을 모신 장소이다. 지벌이니 저주니 하는 나쁜 소문이 떠도는데도 묵인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돈을 숨긴 장소이기 때문에 일부러 나쁜 소문을 퍼뜨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 "놈들의 증언에 따르면 올라간 단계에서 사당 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던 데다 위에는 패가 붙어 있었다고 하네."
"패라니."
"부적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까. 일부는 문에 남아 있었고 뜯긴 부분은 바닥에 떨어져 있어서 증거품으로 압수했네. 절에서 찍어냈는지 아니면 신사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네만, 뭐라고 주문이 찍혀 있었어. 잘 아는 사람에게 보여주었더니 다라니 부적일 거라더군." 
"야겐보리 노인이 곧잘 이야기하던 그거로군."
야겐보리에 사는 박식한 은자 잇파쿠 옹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에 이 부적 이름이 곧잘 나왔다.

 

- "상당히 오래된 물건이었네. 꽤 너덜너덜했으니 말일세. 차양 밑에 있지 않고 비를 그대로 맞았더라면 오래전에 떨어지고 없었을 테고, 튼튼한 종이가 아니었다면 썩어버렸겠지." 
"문을 봉인하듯 붙어 있던가?"
"봉인하듯이 아니라 봉인했던 거겠지."
요지로의 질문에 겐노신이 대답했다.
"사당을 봉인하고 있었다. 이 말인가?"
"그러하네. 아니, 낡은 부적을 최근에 붙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붙어 있던 문의 상태 같은 것도 자세히 봤네만, 적어도 최근에 붙인 건 아니었어. 붙인 부분만 색이 바라지 않았고 조작한 흔적도 없었네. 붙이고 나서 적어도 십 년 이상은 지난 것처럼 보였네만."

- 하지만 측근 무리의 눈에 그것은 결코 잔재주를 부린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부적은 무언가를 굳게 봉하듯 단단히 붙어 있었다고 한다.
이노스케는 사당 앞에 있던 공물을 발로 차서 치워버리고 부적을 떼어 냈다. 좀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확실히 문 앞에는 음식물을 올리는 받침대 같은 것이 놓여 있었던 모양이야. 이노스케가 발로 찼을 때 부서졌는지 잔해가 흩어져 있었네. 받침대 위에는 술병에 든 제주와 비쭈기 나무 가지를 올렸던 것 같아. 듣자니 쓰카모리 가의 당주, 정확하게는 당주 대리인 구메시치 노인이 매일 빠짐없이 동트기 전에 올린다고 해. 이 사당을 세울 당시에 권청을 해준 행자와 약속했다던가." 

- "그런 모양이야. 아니, 분묘 자체는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 같지만 사당을 지은 건 구메시치의 형인 이사지, 그러니까 이노스케의 부친이 죽었을 때 일이라고 하네. 삼십몇 년 전 일이야. 그때까지만 해도 사당은 없었다고 하네."
"어째 수상쩍은데."
쇼마가 말했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모시지 않았다는 건가?"
"자세히 듣지는 못했네만... 아마 그전까지는 그냥 구덩이가 있었을 뿐인 듯하네. 전대인 이사지, 이 사람 역시 뱀에 물려 죽은 모양이야. 그때 지벌이다 하는 이야기가 나와서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해 구덩이 위에 사당을 세우고 뱀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런 이야기였네."

"거 보게."

- 그날 잇파쿠 옹의 분위기는 평소와 조금 달랐다.
하지만 다른 세 사람은 특별히 아무것도 못 느낀 모양이니 그렇게 생각한 사람은 요지로뿐이었을지도 모른다.
들떠 있다.
요지로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노인이 침착하지 않았던 것은 결코 아니고, 표표하고 태연자약한 태도나 경쾌하면서도 깊은 함축으로 넘치는 이야기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면 어디가 어떻게 달랐냐고 묻는다면,
아마 눈이 조금 더 반짝거리고 있는 것처럼 요지로에게는 보였다.

- 야겐보리에 있는 쓰쿠모안의 별채이다.
번번이 이야기가 막히고 번번이 이렇게 찾아온다.
요지로를 비롯한 네 사람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곳을 좋아하는 것이다. 활짝 열어젖힌 둥근 명장지 너머로 푸른 수국이 보인다. 수국 그늘에는 아마 사요가 있을 것이다.
노인의 시중을 들고 있는 이 일 잘하는 아가씨는 아까부터 수국에 물을 주고 있었다.

- "역시 여러분은 마을 사람 누군가가 그 이노스케인가 하는 사람을 죽였다.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 "네, 사람을 죽일 것 같은 자들은 결코 아닙니다. 얌전하고 온화한, 참으로 선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인상만 보고 단정하면 안 되네. 그러면 예단이 되지. 또 말하네만 자네는 포졸이 아니라 순사야, 알겠나. 근대적인 범죄 수사는 의리와 인정으로는 성립하지 않네. 우선 증거야, 증거. 증거를 모아서 진실을 밝히고 법에 비추는 걸세." 
쇼마가 말했다.
"하지만 그 법을 지탱하는 것은 정의겠지요. 정의를 지탱하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역시 인정이면 좋겠군요."
노인이 말했다.
"그건 그렇겠지만 노인장, 그게."
"법의 수호자인 경찰 순사님은 역시 정이 두터운 분이면 좋겠지요. 그런 점에서 야하기 씨가 딱인 것 같습니다. 그런 야하기 씨가 직관적으로 마을사람들은 범인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신 거지요?" 
"직관이라고 할까요... 뭐, 쇼마 말처럼 인상입니다만."
"인상이면 되었지요."

잇파쿠 옹이 웃었다.
"사람을 보면 도둑이라고 생각하라고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각박하지만도 않지 않습니까? 세상 어디 가도 인정은 있는 법, 착한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겁니다." 

- "뱀은 집념이 강한 존재."
노인은 수염 난 거친 얼굴이 하는 말을 잘랐다.
"집념이 강하다?"
"네. 뭐, 그런 미물에게 마음이 있을지 의심스러우니 이렇게 말하면 미신이겠지만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뱀은 오랜 옛날부터 숭상받지 않았습니까?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뱀은 탈피를 합니다." 
노인이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그게 무슨...?"

"시해선(尸解仙)이라는 신선이 있는데 말이지요."
"아, 네."
"낡은 몸을 벗어버리고 다시 태어납니다."

- "다시 태어난다고요?"
요지로가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나왔다.
"뭐, 불로불사의 한 형태겠지요. 이것도 탈피에서 얻은 착상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충류 가운데 일부는 쇠한 몸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까? 그게 꼭 다시 태어나는 건 아니겠지만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겠지요. 이런 일을 반복하면 불사가 되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해 뱀 같은 동물은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나는 불사의 존재라 여겨졌습니다." 

 

- 노인은 쇼마의 말도 잘랐다.

"그런 만큼 뱀과 관련된 전설은 생각 밖으로 많습니다. 뱀은 해충을 먹지 않습니까? 벌레나 쥐, 새처럼 곡물을 먹어 피해를 주는 놈들을 잡아먹지요. 익충인 셈입니다. 그러니까 죽이지 말라는 전설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요."
"아아, 그렇군요."
쇼마는 어째서인지 수긍하고 말았다.

- "하지만 그저 죽이지 말라고 해도 그게 생김새가 어여쁜 동물은 아니지요. 굳이 따지자면 징그럽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하긴 뱀이 좋다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사갈(蛇螺) 보듯 싫어한다. 이런 말도 있고 특히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게다가 독도 있고요."
노인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뱀이라는 놈은 겉보기와는 다르게 온화한 동물입니다. 포식 행동이 아니고서야 공격도 하지 않아요. 이쪽이 덤벼들지 않는 ..."

- "보소(房総)에서는 죽인 뒤에 아무리 멀리 버려도 돌아온다고 하고요. 참으로 기이하고 요사스러운 이야기지만... 요지로 씨는 아십니까, 스즈키 쇼산(鈴大正三)의 <인가모노가타리(因果物語)>에 나오는 뱀 이야기를."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 히라가나 본과 가타카나 본이 있는..."

요지로가 대답했다.
"맞습니다. 거기에는 집착을 남기고 죽은 승려가 뱀으로 둔갑한 이야기나 질투에 미친 여자가 뱀이 되는 이야기 같은 것이 많이 실려 있지요. 집착하는 마음이 강한 사람은 대개 뱀이 됩니다. 일념무량겁(一念無量劫)이라 해서 집착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죄업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보면 뱀은 엄청난 악역이지만, 그래도 익충이기는 하니까요. 제사를 지내고 모시는 경우도 많지요. 물의 신이니 죽이지 마라, 신의 사자이니 죽이지 마라, 비사문천이나 변재천의 심부름꾼이니 죽이지 마라, 돈의 신이니 죽이지 마라..." 

 

- "돈의 신입니까?”
요지로는 뱀은 돈 기운을 싫어한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자 잇파쿠 옹은 "쇳내를 싫어하는 겁니다" 하고 말했다.

"싫어하는 건 금속이지요. 똑같이 '가네'라고 읽지만 여기서 금(金)은 재산을 말합니다. 물리면 부유해진다거나 마루 밑에 있으면 집이 번성한다고 하는 지방도 있습니다."
"물리면 죽지 않습니까" 하고 소베가 말하자 "독사만 있는 건 아니네" 하고 쇼마가 대꾸했다.

- "아니지, 그 정도는 할 수 있네." 어째선지 소베가 가슴을 폈다.

"벌레 다리를 잡아뗀다든지 개구리 배를 가른다든지, 나는 곧잘 했는데 말이지. 안 그런가 요지로?"
고향이 같다고 해서 뭐든지 똑같이 취급하면 곤란하다. 다만 요지로도 그런 경험이 없지는 않았다.
"뭐, 저도 아주 오래전에는...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오래전 일이기는 하지만 꽤 고약한 짓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지벌을 받는다면 세상 많은 아이들이 제대로 크지도 못하겠지요."
"그도 그렇습니다. 나도 이렇게 별고 없이 건강하게 살고 있으니."

"소베는 지벌을 받는 편이 세상에 도움이 될 걸세." 

"시끄러워. 그럼 나와 마찬가지로 그 뱀을 잘게 썬 마을 아이들에게도 아무런 재앙이 닥치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 "그건 역시 철저하게 죽였기 때문일까요?"
겐노신의 다소 엉뚱한 물음에 "글쎄요" 하고 노인은 팔자눈썹을 만들었다.
"이 경우에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굳이 말하자면 사념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사념이요?"
"네. 아이들은 재미나고 즐거워서 어쩔 줄 모릅니다. 그것뿐이지요. 하지만 어른은 그렇지도 않으니까요. 아까 그 사에몬 시로만 해도 특별히 악행을 저질렀다고 느끼지는 않았지만 뱀은 집념이 강한 동물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수상하게 여기는 마음,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겼을 테고, 하물며 떳떳치 못한 기분까지 들면 더하겠지요."
노인은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 "뭐, 아이들이 잔혹한 놀이를 즐기는 모습을 촌장이 뒤에서 보고 있었습니다. 이자가 아주 겁을 먹었지요. 뭐니 뭐니 해도 뱀은 신의 사자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나리 신사를 세우려고 하는 신성한 땅에서 나왔으니까요. 이대로 끝날 리가 없다. 촌장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무리도 아니지. 내가 목격했어도 그렇게 생각할걸."
겐노신이 말했다.
"하지만 그 마을 아이들은 다 무사했지 않습니까?"
쇼마가 물었다. 노인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 하나 지벌을 받지 않고 무사했습니다. 하지만 지벌은... 촌장에게 나타났지요."
"어째서요? 그 촌장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잘못은 없지만 두려움을 가졌지요. 그날 밤늦게 촌장 머리맡에 열 자쯤 되는 뱀이 나타나서 크게 숨을 쉬었습니다. 무척 당황한 촌장이 사람들을 불러서 쫓아내게 했지만... 사람들 눈에는 뱀이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환각입니까? 겁을 먹은 나머지 환각을 봤다. 그렇지요?"
"아니, 쇼마 씨. 이건 분명 지벌입니다. 설사 환각이었다 한들 그게 바로 지벌, 촌장은 병에 걸려 몸져눕고 말았습니다."

 


- "하지만 지벌은 균 같은 게 아닙니다. 봤느냐 만졌느냐에 따라 정도가 달라진다는 건 이상한 이야기지요. 이 경우에는 마을 아이들이 무사했기 때문에 나았을 겁니다."
노인이 말했다.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나?"
"아니, 아닙니다. 안심한 겁니다. 촌장은 뱀을 죽이는 아이들을 보고 딱히 제 몸을 걱정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마을에 재앙이 오지 않을까, 아이들에게 화가 미치지 않을까 생각했을 테지요. 그런 마음이 더해져서 뱀의 기와 통했던 겁니다. 사리사욕 때문에 걱정하거나 회한과 사념 때문에 초조한 게 아니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뱀의 노여움이 가라앉았구나 생각했기 때문에 지벌도 사라지고 병도 나았지요. 다시 말해 지벌은 그런 것입니다." 
노인이 말했다.

- "그런 것... 이라는 말씀은?"
"지벌이란 내리는 이의 의지가 미치는 것이 아니라 받는 이의 마음가짐이 만들어내는 겁니다."
"으음."
소베는 팔짱을 끼고 신음했다. 쇼마는 턱을 쓸었다. 겐노신은 콧수염을 일그러뜨렸다. 요지로는...
'과연 그런가' 하고 묘하게 납득했다.

- "이런 게 문화입니다."
노인은 또 이런 말도 했다. 세 사람은 한층 더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다.
"예를 들어 뱀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뱀을 죽였다고 합시다. 얼마 후에 똑같은 뱀이 나왔다면 또 뱀이 나왔다고 생각할 뿐이겠지요. 지난번 뱀과 똑같은 뱀이라 생각했다 하더라도 '엥, 완전히 죽이지 않았었나' 하고 생각할 뿐일 테지요. 하지만... 뱀은 끈질기다, 좀체 죽지 않는다, 신비한 생물이다. 이런 말이 전해지는 문화를 가진 나라에서는 그러지 못합니다. 되살아났구나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동족이 복수를 하러 왔구나 합니다. 지벌이니 저주이니 하는 것은 이런 구조 속에서 생겨나는 거지요."

 

- 세 사람은 '그건 알겠지만...' 하는 얼굴이다. 정말로 알았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노인은 빙긋 웃었다.
"예를 들어 지금 뱀을 잡아 와서 지붕 밑에 못으로 박아놓았다고 해볼까요. 뭐, 뱀이니까 당장은 죽지 않겠지만 백이면 구십구, 며칠 안에 죽겠지요. 육십여 년이나 지나서 살아있을 확률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건..."
"그건 <고콘초몬주>의 기록 말씀이지요? 그러면 어르신은 그 기록은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아닙니다. 확실히 천연 자연의 이치는 불변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이치가 있고, 이 세계란 실은 그런 이치들이 이리저리 짝을 지어 이루어집니다. 어떻게 짜 맞추느냐에 따라 평소에는 생각하기 힘든 일도 일어납니다. 이럴 경우에는 보통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실제로 어쩌다 그렇게 되었겠지만요. 습도나 기온, 이런 다양한 조건이 갖추어지고... 이런 많은 우연이 겹쳤을 때 가사 상태에서 몇십 년씩 뱀이 생명을 유지하는 일도 있을 수 있겠지요." 
"있을 수 있을까요?”
"있을 수 있을 뿐입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의 경우이겠지만요. 그래서 그 옛날 미나모토노 가케루는 이렇게 지극히 드문 예와 만났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게 뱀이었다는 점이 문제였지요."

- "그렇지요. 그런 전제 아래 연관 지어서 해석해 버립니다, 우리는. 이게 소나 말이었다면 설사 그런 전례가 기록에 있었다고 해도 특수한 예로 무시하지 않았을까요?"
"그건 그래. 확실히 노인장 말씀대로야. 뱀이 아니었다면...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걸세. 설사 기록에 같은 예가 남아 있었다고 해도..."
겐노신이 위를 보았다.
"진짜 뱀과 문화로서의 뱀, 이 둘 다를 보면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어느 한쪽만 보면 잘못 보게 되지요. 알겠습니까. 겐노신 씨."

잇파쿠 옹은 등을 둥글게 말았다.
"네."
"뱀은 밀폐된 상자 속에서 몇십 년씩 살지는 못합니다. 아주 드물게 사는 경우도 있겠지만 살아있다고 해봤자 죽지 않았다 뿐이겠지요. 상자를 열자마자 튀어나와서 물어뜯거나 할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생각해 보면 이 말이 맞다.

- 이사부로 씨라는 사람은 원래는 그 마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뭐, 흘러든 사람이라고 하면 좋을지, 마을에 훌쩍 찾아온 인물이었던 모양이에요.
네, 부상을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걸 쓰카모리 집 사람이 돌봐주었습니다.
네, 그 무렵에는 농민에게 성이 없었지요. 쓰카모리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네.
구치나와 분묘 저택이라고 불렸을 뿐입니다.
저택은 그 시절부터 컸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유복하지는 않았나 봅니다. 굶어 죽느니 마느니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뭐 부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옛날 일은 몰라도 그 무렵에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사부로 씨를 돕고부터 가운이 부쩍부쩍 좋아졌답니다. 

- 네, 나쁜 소문이 퍼졌지요.
곧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사부로라는 사내는 뱀이라고.
구치나와 분묘 저택 사람들은 뱀의 혈통이라고.
혈통... 씐 혈통이라는 말입니다.
뱀이 들린 혈통의 집에 뱀이 들어갔으니 마을의 부를 가로채는 거라고.
뭐, 이런 소문이 퍼졌습니다.

- 어쩌면 이건 그 이전부터 있었던 말인지도 모르지요. 뱀이 들린 혈통, 뱀 들림이라는 건 꽤 여기저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씐 혈통이라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차별 대우를 받기도 하지만 단순한 멸시는 아닙니다.
가난할 경우에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 모양이에요.
네, 맞습니다.
갑자기 유복해졌으니까.
왜 유복해졌나.
거기까지는 모릅니다. 애당초 이사부로 씨가 큰돈을 가지고 있었다는 뜬소문도 물론 있었던 모양입니다.
네, 이사부로 씨가 뱀신의 심부름꾼이라는 뜬소문도 있었습니다. 뭐, 그런 소문이 났을 정도이니까 이사부로 씨는 구치나와 분묘 저택에 자리 잡고 살았겠지요.

- 네.
다친 곳을 보양하는 사이에 말입니다.
딸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지 씨가 들어선 건데요.
그래서.
네, 그래서 말입니다. 아이도 생겼으니 바야흐로 정착할 마음이 생긴 겁니다, 이사부로 씨는.

- 네, 뭐 그게 보통이겠지요. 부상당한 걸 구해준 은혜도 있고요. 부모님 생각도 있었을 테고, 좋아하는 여자에게 아이가 생겼는데 잘 있으라고 떠나는 남자도 없을 겁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아니. 정말로 지벌이라고 정리해도 될까요. 쇼마 씨는 미신이라 하실 테고, 소베 씨는 허황되다고 하겠지요. 겐노신 씨는 이래서야 조서를 쓸 수 없다고 하실 것 아닙니까?"
"아니, 아니." 겐노신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만큼은 이놈들이 그런 소리를 하게 두지 않을 겁니다. 아니, 안 하겠지요. 이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어째 까닭 없이 슬퍼집니다. 이노스케가 사람의 도리를 잃어버린 것도, 이사지가 발광한 것도, 그리고 이사부로가 분묘 위에서 원통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전부가 어째서인지 무척 슬퍼집니다." 

- 그 기분은 이해가 된다.
슬프다기보다는 허무하다.
지벌이라면 포기라도 되지 않을까.
과연. 지벌이란 무턱대고 무섭거나 맞서기 힘든 신비한 무언가가 아니라 그저 사람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무조건적으로 견디기 위해 마련된 것인가, 하고 요지로는 생각했다. 
물론 확증도 없고 논거도 없다.
인상이라고나 할까, 기분이기는 하다.
하지만 누구 탓도 아니다. 그렇기에 어찌할 수도 없다. 피할 수도 없고 다시 할 수도 없다. 되돌릴 수도 없고 이유가 없는 만큼 후회할 수도 없다.
이대로는 슬프다. 허무하다.
그러니까.

- 그리고 입 속으로 작게

"어행봉위"

라고 말했다.

풍경이 짤랑, 울렸다.


- <상처 입은 뱀>

 

 

 


 

 

깊은 산에 가끔 있다.

키는 두 장(丈)쯤 되고 생김새는 도깨비 같다.

나무꾼이 이자와 만났을 때 달아나면 다칠지 모른다.

부탁을 하면 섶나무를 이고 산기슭까지 데려다준다.

이것은 힘자랑이라고 한다.

 

회본백물어(繪本百物語)·도산진야화(桃山人夜話) / 제5권 37

 

 

 

- 옛날.
높은 산에는 산사내가 살았습니다.
사내라고는 하지만 산사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산의 신이자 산의 정령이며 산의 요괴이기도 했습니다.
산사내는 산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산사내는 옷 같은 건 입지 않습니다. 말을 할 필요도 없었고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새를 잡고 물고기를 먹으며 풀과 나무를 두른 채 심산유곡을 뛰어다니며 살았습니다.

- 마을 사람들은 무서웠습니다.
산에서 지내는 사람들도 물론 두려웠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산을 경외했던 것입니다. 산은 사람들에게 갖가지 은혜를 베풀어주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산은 사람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산은 또 꺼림칙한 장소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산은 현세와 내세가 바뀌는 경계에 있는 저세상이기도 했습니다. 산사내 또한 마물 중 하나임이 분명했습니다. 사람들은 산사내를 저어했습니다.
생활을 위협하는 짐승으로서.


- 그렇습니다. 산사내는 짐승이기도 했습니다.
말도 하지 않고 글자도 쓰지 않는 모양새를 보면 역시 인간이 아닙니다.
벌거숭이에 털북숭이, 힘세고 발 빠르며 하늘을 찌를 정도로 커다란 사내.
그 생김새도 흡사 짐승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야만스러운 짐승이라며 산사내를 겁냈습니다.

- 한데.
어느 날 산사내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짐승이었을까, 하고.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저 사람을 공격해서 잡아먹는 짐승이 아니라 사람들이 우러러 받들고 감사하는 신이기도 했을 텐데, 하고요. 그렇게 생각하니 산사내는 어쩐지 슬퍼졌습니다. 쓸쓸해졌습니다.

- 그 순간,
옷 한 벌 몸에 걸치지 않고 산골짜기를 뛰어다니는 스스로가 무척 천한 존재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추운 느낌도 듭니다.

- 산사내는 의복을 만들었습니다.
말도 전부 배웠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자, 정신을 차려보니...

산사내는 더는 산이 아니었습니다.

산사내는 그냥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산사내는...

이윽고 죽어버렸습니다.

- 소슈(相州) 하코네에 산사내라 불리는 자가 있다. 벗은 몸에 나뭇잎과 나무줄기를 옷처럼 두르고 깊은 산속에 살며 황어를 잡는 일을 한다. 장이 서는 날을 알아서 마을 사람들에게 가져가 쌀로 바꾼다. 사람들은 익숙해서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교역 말고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볼일이 끝나면 떠난다. 발자국을 보고 따라가는 사람도 있지만, 길도 없는 절벽을 새가 날아가듯 사라지기 때문에 끝내 사는 곳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오다와라 성주도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니 절대 조총 따위로 쏘지 말라고 명했기 때문에 구태여 산사내를 놀래는 사람도 없었다 한다... 
쓰무라 소안(津村徖庵)이 쓴 <단카이(譚海)>라는 책의 한 구절이라고 사사무라 요지로가 설명했다.
"그 쓰무라 소안은 또 누군가?"
이렇게 물은 사람은 구라타 쇼마이다.

- "유명한 분이신가, 그 사람이? 나는 도통 모르겠는데. 그럴싸하게 이름을 말해봤자 들어본 적이 없으니 대단하게 들리지도 않네. 내가 무지해서 그런가? 어때, 거기 일등 순사 양반이라면 당연히 아시겠지?"
"알고말고."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야하기 겐노신 일등 순사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도쿄 경시청에서 고서적에 정통하기로는 제일이라는 평판이 있는 사내답다.
"쓰무라 소안은 가인이네. 교토 사람이고 덴마초에 살면서 사타케 영주에게 납품하는 어용상인이기도 했던 사람이지."
"사타케 영주라고 하면 아키타 번이겠군."
이렇게 말한 사람은 수염이 숭숭한 시부야 소베이다.
메이지(명치) 유신 이래 세상은 점점 더 서양풍으로 바뀌고 있는데 소베 혼자만 시류를 거스르며 더더욱 투박한 무사의 풍모를 보인다.

- "하지만 나는 모르겠는데, 가인이라면 <단카이>라는 책에 시가가 실려 있나? 아무래도 시가로는 들리지 않는데."
"이건 시가집이 아니네."
요지로가 설명했다.
"당시의 이문풍설(異聞風說), 풍속전문(風俗傳聞)을 모은 책이야. 견문 수필이라는 놈이지."
"요컨대 잡담이로군."
요지로가 소베를 제지했다.
"아니, 아니, 나는 진심으로 칭찬하는 걸세. 그렇게 나쁘게 받아들일 건 없어. 진심으로 화내지는 말게나. 뭐, 그런 이야기이라면 나도 들은 적은 있어. 내 이야기할 테니 용서하게. 산사람 이야기 아닌가."

- "내 도장에 다니고 있는 사내 중에 옛날 다카다 번 무사였던 이가 있네. 다카다 번이니까 에치고(越後) 쪽이지. 그 부근은 산이 깊고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야. 구로히메와 묘코 같은 험준한 산이 있지 않나." 
요지로에게는 산이 있다기보다 산속에 있다는 인상밖에 없다.
"겨울이 되기라도 하면 추위도 극심한 모양이야. 장작도 많이 필요하다더군. 산을 헤치고 들어가서 땔나무를 구해 오는 것이 중요한 임무인 셈이지. 하지만 에치고 근방에는 산에 들어가서 괴이한 존재를 만나더라도 마을에서는 절대 말하면 안 된다는 법도가 있네." 

- 소베가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아니, 소베가 아니더라도 요즘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누구나가 새로운 것이나 앞으로의 일을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쇼마가 아니더라도 오래된 것, 지나간 옛날을 이야기하는 경우에는 대개 비판적으로 말하는 것이 유행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괴담 종류를 즐겁게 이야기해 주는 사람은 이제 야겐보리의 은거 영감 즉 잇파쿠 옹 정도이다.

- 하지만 설사 전해 오는 이야기나 꾸며낸 이야기라 할지라도 누군가의 입으로 직접 들으면 재밌게 느껴진다.
아니, 요지로는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엉터리라 불리든, 미신이라고 배척을 당하는 요지로는 이런 기기묘묘한 항설에 강하게 끌린다.

 

- 소베가 헛기침을 했다.
"뭐, 산에서 일어난 괴이한 일을 발설하면 대관절 그 사람에게 어떠한 재앙이 닥치는지는 그 문하생도 모르더군. 어쨌든 헛소리에 벌벌 떠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 나는 그런 미신이나 속신은 안 믿네. 그자 또한 이제 번 무사도 아니고. 나는 그 문하생에게 이런 사실을 깨우쳐주었지." 
"그래 이야기를 시킨 건가? 야비한 사내일세. 그런 건 신불을 믿는 마음과 매한가지이지 않나. 경건한 마음을 버리게 하는 것이 무사의 도인가? 그런 무도인지 뭔지가 바로 시대에 뒤떨어지는 게 아닌가." 

- "멍청한 소리 말게. 시대가 바뀌고 막부가 쓰러진들 일본 남아의 기상에 무슨 변화가 있나? 무술을 닦고 도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 어디가 시대에 뒤떨어졌는가? 새 정부는 상스러운 주술이나 미신적인 물건을 사고파는 일은 금했지만 검도 수련까지 금하지는 않았네."
"원수를 갚는 건 사 년 전에 금지되었네. 복수는 사적인 일로 공적인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라 해서 보복을 금지하는 법령도 나오지 않았나."
겐노신이 이렇게 말하자 소베가 한층 더 크게 헛기침을 했다.
"이 겁쟁이 순사 놈은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것만이 검의 도인 줄 아는가 보군. 어리석은 놈. 검의 수행은 정신의 수양이야. 무도에 뜻을 둔 자는 배짱이 두둑해야만 하네. 무사도는 미신에 벌벌 떨면서 이룰 수 있는 게 아닐세. 알겠나, 나는 억지로 이야기를 시킨 게 아니네. 그 제자가 눈을 뜬 걸세."

- 요괴를 봤다느니 흘렸다느니 하는 정도는 곧잘 듣는 이야기이지만 의사소통을 했다니 예사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산사내와 교류가 있었나?"


- "이보게. 지당하신 말씀이라고 말하고 싶네만 나는 그런 이국의 소수민족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닐세. 자네가 말하는 섬나라 이야기를 하고 있어. 쇼마, 애초에 자네가 아까 말하지 않았나? 우리나라는 변경의 작은 섬나라 아닌가? 이 섬에 사는 건 일본 민족뿐 아니었나?"

겐노신이 끼어들었다.
"그렇지가 않다는 말일세."
쇼마가 웬일로 앉음새를 가다듬었다. 평소에는 양장이라는 핑계로 영 자세가 칠칠치 못한 사내인데 말이다.
"그 섬나라 근성이 잘못되었다는 말이네. 쇄국 시대도 아니니 앞으로는 이 나라도 바깥으로 눈을 돌리고 안으로 비추어 생각해야만 할 걸세. 확실히 이 나라는 하나의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야기 아닌가. 내 말이 틀렸나?" 
"그 일과 이 일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주민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이 나라에도 복종하지 않는 민족은 있었지 않나. 정사에 얽매이지 않고 다른 신을 모시며 다른 풍속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이 섬에도 살고 있지 않았냐는 말일세." 
"태곳적 일이야. 쓰치구모(土蜘蛛)나 에미시(蝦夷), 구마소(熊襲) 이야기를 하는 거라면 그건 옛날 옛적 신화시대 일이야. 몇 백 년이나 지났는지 모르네."
 
- "에조의 땅(蝦夷地)에는 지금도 그 땅 선주민들이 있다지 않나. 그자들은 다른 말을 쓴다고 들었네. 류큐 왕국 사람들도 말과 습관이 달라. 다른 문화를 가진 민족이 산속에 남아서 살고 있다 한들 하나도 이상하지 않네."

- 요지로는 어쩐지 재미가 없었다.
원숭이 아니면 인간. 그야 그렇겠지만.
"원숭이라면 어찌할 도리가 없네. 하지만 사람이라면 좀 생각을 해봐야 하겠지. 문명개화된 세상이야. 사농공상의 구별도 없다네."
"귀족, 무사, 평민의 구별은 있어.”
"무사는 칼을 버렸고 평민도 성씨를 얻는 것이 허용되었네. 평민도 말을 탈 수 있게 되지 않았나. 하지만 그 산사내는... 만일 인간이라면 호적도 없고 집과 옷도 없다는 뜻일세." 
"보호를 하라는 말인가?"
"보호라고 해야 할지... 말도 못 하고 벌거숭이로 살아가는 비문화적인 자가 있어서야 되겠는가, 이 말이네. 일본은 문명국이 될 거야. 그자가 사람이라면 이 섬에 사는 이상이 나라 국민이네. 사람으로서 교육을 받게 하고 문명국 사람으로 생활하게 해주는 것이 국가의 의무 아닌가. 그자 또한 개화국의 일원으로 일하는 것이 의무 아니겠나."
 
- "요괴라면 어떤가?"
겐노신이 말했다.
"요, 요괴 따위는 없다고 몇 번 말해야 알겠나?"
"아니, 기다려보게. 나도 알아. 확실히 자네들 말은 지당하네. 요괴 따위는 없을 테고, 반대로 미지의 원숭이나 산에 살면서 다른 문화를 가진 인간은 있을지 모르지. 하지만 몸길이가 여섯 자가 넘고 온몸이 털투성이에 사람 말을 알아듣기는 하지만 말을 하지는 못하며 멧돼지를 맨손으로 찢어발겨서 날것으로 먹는 존재는... 대체 어느 쪽인가? 짐승인가, 사람인가? 이걸 요괴라 부르는 건 잘못인가?" 

- 사건이 일어난 곳은 무사시노의 시골 마을이라고 한다.
이 마을 부농의 외동딸이 실종된 것이 발단이었다.
실종된 사람은 노가타 마을에 사는 가모 모스케의 장녀 이네였다.
이네가 사라진 것은 삼 년 전인 명치(明治) 6년 겨울이었다고 한다. 가모 모스케라는 인물은 노가타에서도 가장 부유한 농민으로 쌀, 보리, 무 외에도 고구마와 감자 등을 광범위하게 경작하는데 이를 에도 시내에 출하해 큰돈을 벌었던 모양이다. 
원래부터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부농이기도 했지만, 유신을 계기로 농업 말고도 그 지방에서 성행하던 메밀 제분업에 손을 대는 등 꽤 활발히 일하여 재산을 모은 걸출한 인물이라고 한다. 

- 모스케의 성공 비결은 사람을 쓸 줄 안다는 것이었다.
넓은 토지를 가지고 있은들 그저 묵묵히 벼농사만 짓고 있어서야 아무 쓸모도 없다.
토지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사람이 필요하다. 모스케는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인재를 모아 적재적소에 등용했다.

 

- 모스케는 상인, 장색뿐 아니라 그보다 더 신분이 낮은 이들까지 위아래 구별 없이 고용하여 평등하게 대했으며 그들이 제 특성을 발휘할 수 있게끔 배려했다. 
사민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세상에 부합하는 새로운 방식이었으리라.
돈 계산은 상인이 잘하고, 물건 만들기는 장색이 논밭을 가는 일은 농민이 잘하며, 그 외의 일은 신분이 미천한 사람이라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모스케는 인품이 뛰어나고 사람도 잘 돌보아서 피고용인에게나 거래처에서 무척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장사도 궤도에 올랐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 하기야 모스케의 방식을 탐탁잖게 여기는 이들도 많았다.
시기와 질투도 있었을 테고, 지역 사람을 우선 고용하지 않는 모스케의 경영 방식에 대한 반감도 있었을지 모른다.
신분과 태생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천민 신분이나 한 곳에 정주하지 않는 유랑민을 오두막에 기거하게 하며 일을 주는 데에는 심한 반발이 있었던 듯하다. 말로는 영주와 하인의 차별이 없는 세상이 되었다고 하지만, 아직 세상은 막부 시대와 잇닿아 있었다. 상인이나 장색을 고용하면 또 모를까, 그때까지는 호적도 없던 이들을 쓰다니 어찌 된 일이냐는 것이다. 항의가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세간의 분위기는 명백히 반발 쪽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반발이기도 했을 것이다. 유신이 있고 거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이러한 편견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 명치 4년 8월, 정부는 다음과 같은 법령을 선포했다.
에타(穢多), 비인(非人) 등의 명칭은 폐지되니 금후 신분과 직업 모두 평민과 동일한 것으로 한다.
조문은 다음과 같다.
에타, 비인이라는 명칭은 폐지되므로 일반 평민에 편입시켜 신분과 직업 모두 동일한 것으로 취급한다. 또한 토지세 그 외를 면제하는 관례도 있으니 고칠 부분을 조사하여 대장성(大藏省)에 의한다.

- 이리하여 그때까지는 사농공상의 바깥에 놓여 멸시받던 천민 신분의 사람들이 농민이나 상인, 장색과 마찬가지로 당당한 평민이 되었다. 어디에 살든, 어떤 직업을 갖든, 누구와 부부가 되든 상관없다고 정부가 말한 것이다.
이 결정을 환영한 사람도 있고, 강경하게 반대한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어찌어찌 새 정부는 농민과 상인, 장색에 이어 피차별 계급 사람들을 해방함으로써 표면적으로나마 신분차별을 철폐했다. 

 

- 하지만 이는 역시 원칙적인 이야기였다.
확실히 사민은 평등해졌다. 날 때부터 정해진 사농공상이라는 서열은 사라졌다. 사라졌지만 생활 방식이 바뀌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농민은 쌀을 짓고 장색은 물건을 만들고 상인은 판매를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신분은 균일해졌지만 직업을 간단히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유니, 개화니, 문명이니 하며 뽐내본들 그때까지의 생활을 버리고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했다. 

- 가난하나마 일이 있는 사람은 그래도 나았다.
유신과 더불어 신분뿐 아니라 직업까지 잃어버린 계층이 있었다. 가장 위에 있던 무사와 가장 아래보다 더 아래에 있던 천민들이다. 무사와 천민은 신분 자체가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사 쪽은 그나마 나았다. 더는 지배 계급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무사에게는 조금이나마 비축한 재산이 있었다. 읽고 쓸 줄도 알고 집도 있었다. 무엇보다 거들먹거리는 법을 알았다. 
반면 싸잡아서 천민이라고 불리던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 막부 시대는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왔다. 왜냐하면 신분제도에서 제외되어 있었다고는 해도 그들에게는 신분 바깥의 신분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백정이나 망나니, 사당패 등은 계층 바깥에 있던 계층인 동시에 막부 시대에는 일종의 소임 즉 직업이기도 했다.
유신으로 인해 그 소임은 끝났다.
그 대신 일단 호적이 생겼다.
하지만 재산이나 일거리를 얻은 것은 아니다. 아니, 얻기는커녕 박탈당했다. 그들에게만 주어지던 일을 누구든지 할 수 있게 되었다.

- 신도와 불교를 구별하여 불교를 배척하는 종교 정책도 이러한 풍조를 부추겼다. 예컨대 산속에서 수행하는 불교 종파의 승려들은 종교인으로서 완전히 숨통이 끊겼다.
거지나 결승, 걸립꾼들도 지금은 그냥 실업자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직업은 없는데 호적은 있다. 호적이 있으면 세금을 내야 한다. 세리는 가난한 사람이든 차별받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무자비하게 징수해 간다. 이제 막 생긴 새로운 제도는 많이 일그러져 있었고 여러 가지 결점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한층 더 혹독해졌다. 평민이 된 천민 계층은 단숨에 그냥 극빈층이 된 셈이었기에 자유롭게 행동하기는커녕 더 부자유스러운 생활로 내몰렸다. 일부를 제외하면 그들은 하는 수없이 나쁜 곳에 모일 수밖에 없었고, 원래 살던 장소에서 원래보다 더 혹독한 조건 아래 서로 어깨를 맞대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 모스케는 이런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고용했다고 한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들였다고 한다.
먹고살기 힘든 이들을 차마 볼 수 없다는 불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보다 싼 임금으로 쓸 수 있겠다는 타산이 작용했는지, 모스케의 본심은 알 수 없다.
악의를 품고 후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위에는 더 많았던 모양이지만 고용된 쪽은 그래도 무척 감사했다고 한다. 비난이 거세기는 했어도 최소한 모스케가 악랄한 장사를 하지는 않은 듯하다. 
가모 모스케는 시샘을 받기는 해도 원망을 살 만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 모스케의 딸이 행방불명되었다.
당시 이네는 열여덟이었다고 한다.
그 무렵 모스케는 농업과 제분업 외에 간장 제조에도 손을 뻗을 계획이었다고 한다.
이미 이웃 나카노 마을에는 간장과 된장 제조에 착수한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모스케는 지방의 간장 판매업자와 사돈을 맺기로 했다. 딸도 적령기였다. 
북쪽 지방에서 우연히 딱 좋은 상대를 발견해 혼담이 착착 진행되었다. 물론 업무 제휴 건도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 "하지만 아이를 만들었다면 산사내도 사람일 테고, 짐승이 아니라면 총으로 쏴 죽일 수도 없어. 죽이지 않고 잡아서 심판하는 것이 우리 관헌이 할 일일세. 폭행, 유괴, 감금 혐의가 있는 범죄자이니까." 
"괴물이라고 해두면 되지 않나? 진상은 어떤지 모르지만 딸도 돌아왔고 손자도 무사하다면 이제 와서 불편할 일도 없을 걸세. 경시청 순사님이 나설 사건도 아니지 않나? 도깨비, 요괴 현상이 일어나는 것과 도쿄 경시청은 무관하다, 에도의 치안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임무, 괴물은 관할이 아니라고 하게 분이 풀리지 않는 마음은 알겠네만 그래도 풀고, 앞으로 조심해서 살라고 깨우쳐주면 돼." 
요지로는 생각한 대로 말했다.

- "그것도 좀... 그렇게 되면 그러니까..."
겐노신이 한층 더 풀이 죽었다.
"그러니까 뭔가?"
"요타는 괴물의 씨... 가 되어버리네. 아이에게는 죄가 없고 조만간 호적도 만들어야 할 걸세. 이제부터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태생이..."

- 확실히 문제이다.
표면적으로 평등한 세상일수록 차별은 깊숙이 뿌리내리는 법. 여기서 무신경하게 괴물의 아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리는 일은 역시 꺼려질 것이다.
사람인가, 짐승인가, 괴물인가...
"하나를 정해야만 한다네."

- "지금은 모든 사람이 평민이네. 천민 같은 말을 부주의하게 쓰지 말게나. 생각이 얕다는 말은 네놈에게 쓰라고 있는 말이야. 뭐, 그때의 분쟁은 정확히 말하면 원래 천민 신분이었던 이들과 그 외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긴 했네."
"그 외 사람들이란 건 농민인가?"
쇼마가 물었다.
"농민은 아니야. 말 그대로 그 외일세. 단자에몬(弾左衛門)의 부하도 아니고 천민 우두머리의 지배를 받는 자들도 아니야. 호적이고 출생지이고 아무것도 없는 신원을 전혀 알 수 없는 자들... 즉 유랑민들이지. 요즘에는 산카(山窩)라 부르는 모양이더군." 
"나는 처음 듣네."
소베가 말했다.
요지로는 알고 있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물고기, 거북이를 잡아서 팔거나 키를 만들면서 먹고사는 덴바모노(転場者) 말인가?"

- "이곳저곳에 간단한 임시 오두막을 짓고 사는 이들 아닌가?"

"그런 모양이네. 전국을 떠돌며 산과 들에서 기거하기 때문에 도통 실태를 파악할 수가 없어. 다만 그런 자들도 이 나라에 사는 다음에야 똑같은 평민일세. 평민인 이상 어쨌든 세금은 거둬야 하고, 개중에는 좋지 못한 행동을 하거나 절도 같은 죄를 저지르는 무분별한 자들도 있어서 말이지. 새 정부로서도 간과할 수는 없네만..." 
"그런 자들이 섞여 있었나?"
"그렇네. 산카를 몇 명 고용했던 거지, 모스케는."

- "본인들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할 뿐이지 않나? 사실상은 그게 그거겠지."
소베가 말했다.
"그건 잘못된 생각일세."
요지로가 말했다.
"그런 건 역시 그들을 멸시하는 사고방식이라고 보네, 소베."
"멸시할 생각은 없네만, 그렇게 되는가?"
웬일로 신묘해진 소베가 말했다.

- "산사내라."
노인이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표표한 말투로 말했다.
"산은 말이지요, 무서운 곳입니다."
늘 그렇듯 오늘도 쓰쿠모안의 별채이다. 요지로와 친구들은 끝이 나지 않는 논의를 실컷 하고 나면 결국 이곳에 오게 된다.

 

- "무섭고 말고요. 소베 씨는 호걸이니까 세상에 무서운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하시겠지만, 무얼, 이것만큼은 사람 힘으로 어떻게 할 수없습니다. 검의 도나 유학의 이치로는 맞설 수 없는 것이 산일 테지요. 산은 글자 그대로 살아있으니까요. 풀과 나무도 살아있습니다. 벌레와 금수도 살아있습니다. 이끼나 곰팡이도 살아있지요. 산에는 살아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땅속에도, 나무껍질에도 벌레가 있고, 물속에는 물고기와 거북이가 있어요. 설사 작은 산이라도 산은 정말이지 수많은 생명의 집결체입니다."

- "없습니다. 사체에도 벌레가 끓고 곰팡이가 피는가 하면 풀이 우거집니다. 그리고 산의 대단한 점은 아무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마을은 산이 없어지면 곤란해집니다. 강의 온도도 바뀌고 바람 방향도 바뀌지요. 땅도 마릅니다."

- "마을은 산이 있어야 하지요. 하지만 산은 다릅니다. 마을이 없어도 산은 무엇 하나 곤란하지 않습니다. 산은 산만으로 성립하지요. 산은 산을 구성하는 많은 생명 하나하나가 완결되어 있는, 하나의 생물입니다. 우리가 산에 들어가는 건 그러니까 생물의 배 속에 들어가는 일이나 매한가지예요. 산에 들어간 사람은 쓸데없는 이물로 인지되어 배제되거나 산의 생명의 일부로 동화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어느 쪽인지 선택해야만 합니다. 산이 그러라고 강요하거든요."
"배제 아니면 동화라고요?"
요지로는 어쩐지 이해가 되었다.
"강요한다고 해서 간단히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요. 그러니까 산속에서 사람은 언제나 공중에 붕 떠서 이도 저도 아닐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해도 진정되지 않는 불편함과 감싸 안기는 듯한 안심감을 동시에 느낍니다. 무언가로부터 해방되는 환희와 무언가에 붙잡힌 수인의 우울을 동시에 느끼겠지요. 그래서 무서운 겁니다." 
노인이 말했다.

- "경계로군요."
"좋은 말씀을 하십니다. 요지로 씨."
요지로가 중얼거리자 노인은 그제야 웃으며 말했다.

- "암컷, 수컷이라고 부르는 게 과연 맞을까요. 곤론 같은 사람은 짐승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만."
"역시... 사람이라고 합니까?"
"곤론이 아마 이렇게 썼지요. 무릇 산사내, 산여자라 하는 존재는 귀신의 재주가 있다고 전해지나 전혀 그렇지 않다. 곧 산중 자연에 사는 인종으로 언어를 배우지 않았기에 말하지 않고, 옷을 만들 줄 모르기에 벌거숭이라, 단지 오십 년 전 에조의 땅과 풍속이 같아 심히 어리석으니 이들에게도 사람의 도리를 잘 가르치면 어떨까 생각할 따름이다... 라고." 
"그러니까 선주민이라는 뜻입니까?"
겐노신이 달려들듯 묻자 노인은 허어, 하고 한숨으로 피하더니 다시금 사요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뭐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겠지요. 산의 요괴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산동자라 하면 여름철에는 산을 내려가서 갓파가 된다고 하고, 산도(山都)라 하면 넘어다보기 승려(見越し入道)를 가리킨다고 책에는 나와 있지요." 

- "넘어다보기 승려? 목이 죽 늘어나는 그 멍청한 장난감 말입니까?"

소베가 목소리를 높였다.
"네. 뭐, 에도 근방에서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원래는 길에 출몰하는 요괴입니다. 길 앞에 나타난 어린 승려가 이렇게 점점 커지지요."

은거 영감은 느릿느릿 천장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 "외다리라고요?"
"그렇지요. 아까 소베 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산정을 닮은 요물의 수컷을 산어른, 암컷을 산어미라 부른다고 쓰여 있습니다. 하야시 라잔(林羅山) 같은 사람도 이런 종류의 중국 서적에 등장하는 명사와 일본 이름을 비교하여 연구하는 작업을 하느라 고생을 했습니다. 산에 어른 장(丈) 자를 써서 '야마오토코'라 읽은 사람도 라잔입니다. 이것이 실려 있는 <타시키헨(多識編)>에는 외다리 요괴라는 항목도 있습니다. 일본어로 옮기기도 간단치 않지요. <와칸산사이즈에>는 <산해경(山海經)>의 영향도 있겠지만 라잔의 성과도 참고해서 편집했으니까요. 같은 산사내라도 여러분이 말씀하시는 산사내는 이 경우 오히려 들여자라고 쓰는 쪽의 산여자(野女)이지요. 그리고 목객(木客) 같은 쪽에 더 가까울 수도 있겠습니다.”
"그 산여자라는 건 산사내 암컷, 아니, 산사내 여자 같은 겁니까?"

"그것 참 묘한 표현이로군."

- "데라지마 료안은 <본초강목>을 끌어와서 이렇게 씁니다. 산여자는 일남국(日南国)에 살며 모두 암컷이고 수컷은 없다고."

"괴이한 소리로군. 그래서야 아이를 못 낳을 텐데."

겐노신이 몸을 뒤로 젖혔다.
"일남국이란 건 중국의 이웃 나라입니까?"
"그렇게 될까요. 저 같은 늙은이가 정확한 지리를 알 수는 없지만 월국(越) 쪽이니... 서양은 아니지요."
노인이 대답했다.
"동양이겠지요. 하지만 서양에는 씨를 얻기 위해 사내를 덮치는 여인족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끌고 온 사내와 몸을 섞어서 임신을 한 뒤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죽이고 여자아이만 부족의 일원으로 키운다지요. 많이 닮았군요." 

- "허허. 뭐, 거리가 꽤 있을 테니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여러분 말씀대로 사람과 교미하여 아이를 갖는 건 사람 뿐이라고 해야겠지요. 전설에서는 마물이나 짐승도 사람과 아이를 만들지만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일 테니까요. 산여자는 사람과 아주 가까운 존재일 겁니다."
노인은 말을 이었다.
"비슷한 존재로 아까 말씀드린 목객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것은 송대에 쓰인 <유명록(幽明錄)> 등에 실려 있습니다. <본초강목>에는 남방의 산속에 서식하는 비비 종류라 되어 있는데, 이게 웬걸 머리 모양이나 얼굴이 사람과 다르지 않고 말도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말을 합니까?"
"한다는 모양입니다."

- "절벽 바위틈에 살며, 죽으면 관에 넣어 매장을 하고 마을 사람들과 교역을 한다고 합니다. 교역이라고 하니까 사냥한 동물인지 뭔지를 마을에서 나는 물건과 교환하는 것일까요. <합벽고사(合壁故事)>라는 책에 실려 있는 목객은 말이지요, 시를 읊습니다. 술이 동났다 해서 그대 사지 마시게 술병이 비고 나면 내 응당 떠날지니, 도시에는 속세의 더러운 때 많으니, 산으로 돌아가서 명월을 즐기리다... 이것 참, 산요괴로 두기에는 아까운 문재입니다." 
"잠깐 기다려보십시오, 노인장."
쇼마가 끼어들었다.
"얼굴과 몸, 말까지 사람과 똑같은 데다 문화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사람 아닙니까? 그저 사는 장소가 특이할 뿐인 것 아닙니까?"
"네. 다만 손발톱이 길고 갈고리 같은데 이 점만은 사람과 다르다 합니다."
"손톱이라. 손톱 같은 거야 깎지 않으면 자랄 테고."

- "대개는 크지 않겠습니까. 산사내에 대해서는 <갓시야와(甲子夜話)>에도 나와 있는데... 요지로 씨는 읽으셨던가요?"
"저 말입니까?"

- "노인장, 마쓰라 세이잔의 기록은 신뢰할 수 있습니까?"
"글쎄요. 세이잔 본인이 봤거나 만났다는 이야기는 아니니 말이지요. 들은 내용을 썼겠지요."
"신용할 수 없겠군. 과장이나 오인도 있었을 테고."
"아니, 꼭 그렇지만은 않지요. 뭐, 그런 의미에서는 저도 세이잔과 마찬가지로 산사내를 만났다는 사람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기는 했으니까요. 그들 모두가 거짓말을 했다, 착각을 했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항설이라는 게 그런 것이지요. 스루가와 이웃해 있는 엔슈(遠州) 등지에도 산사내의 소문은 많았습니다. 아키바 산의 산사내도 컸지요."

- 노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겪은 일을 회고하는 얼굴이다.
지난날을 돌아보는 노인의 얼굴은 즐거워 보이기도 했지만 어딘지 쓸쓸해 보이기도 한다.
노인의 절반도 살지 않은 요지로는 그 복잡한 인생을 모른다. 하지만 모르면 모르는 대로 이 얼굴을 볼 때마다 노인의 심중을 헤아린다. 언젠가는 나도 이런 얼굴을 할 날이 오겠지 생각하는 것이다.

- 온갖 액을 다 태워버리는 다라니 부적을 이렇게 들고...
"어행봉위." 
그러면서 방울을 짤랑 울렸지요.
괴이한 소리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소리가 나는 것은 좋은 소식이라. 이런 굉음을 내는 것은 금수가 아니라 산의 요괴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소리가 난 쪽에 따님이 있을 것이니... 하고.

- 가보았습니다.
짐승이 다니는 길을 따라 사람은 절대 가지 않을, 아니 갈 수 없을 것 같은 산을 올랐습니다. 네, 발로 밟은 것처럼 묘하게 다져져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오간 듯한 느낌이었지요. 그러자. 
절벽 위쪽으로 나왔습니다.
울창한 숲 사이에 동굴이 있었습니다.

- 아니, 바로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동굴 입구를 가로막듯이 수령이 몇 백 년은 됨직한 거목이 쓰러져 있었거든요.
한 그루가 아닙니다. 베어 넘어뜨리기라도 했는지 몇 그루나 있었습니다. 이렇게, 몇 겹씩 착착. 아무리 봐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무꾼 몇 명이 일제히 달려들어도 도저히 하루 만에 쓰러뜨리지는 못할 만큼 큰 나무였으니까요. 
네. 소리는 아마 이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였던 겁니다.

- "아무래도 한쪽 날만 있는 칼이 아닌 듯합니다. 양날을 간, 그렇지, 서양 검 같은..."
"그건 우메가이예요."
사요가 말했다.
"우메가이... 라니?"
"산에서 사는 사람들이 쓰는 양날로 된 산칼이지요."
"산사내... 말입니까?"
"아니요, 인간입니다. 산사내는 도구를 쓰지 않아요. 물론 날붙이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에치고 이야기에서도 그랬잖아요? 산사내는 짐승을 잡아도 가죽을 벗길 수 없습니다. 추워도 불을 피울 수 없고요. 사람 말을 이해하고 마음도 통하고 하니까 결코 바보가 아니지만 산사내는 문명을 이용하지 않는 것이 규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사내는 사람이 아니라 산 그 자체인 겁니다. 그렇지요, 영감님?” 

 

- 노인은 사요를 보고 나서 작은 목소리로 "그렇지요" 하고 말했다.

"그렇지만..."

"아니요. 이번 이야기는 지금 영감님이 하신 옛날이야기와는 다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에는 분명히 밝혀야 해요. 아이에게는... 아버지가 필요하니까요."
사요가 이렇게 말했다.
잠깐 사이를 두고 노인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겐노신 씨."

- "그야 그렇겠지요. 긴로쿠 씨는 혼자 죽었으니까요. 뭐, 장소를 다카오로 정한 이유는 익숙하게 다니던 곳이기도 하고 마을에서는 꽤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참배한다는 구실로 약왕원을 오가기 쉬웠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더니 노인이 곱씹듯 말했다.
"산 같은 곳에 가는 게 아니었습니다."
"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겐노신이 물었다.
"산에는... 산의 사람이 있습니다."
사요가 말했다.
"노신 님이 산카라 하셨던 사람들... 산카라는 건 멸칭입니다. 들에서 자고 다리 밑에 몸을 누이며 토지와 정사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줄곧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덴바모노나 쇼켄시(世間師), 겐시, 겐타라고 불렀습니다. 장소에 따라서는 폰스나 폰스케 등 다양하게 불립니다만..." 

- "이네 씨는 한동안 쇼켄시와 함께 지냈을 겁니다."
"헤, 헤이자로군." 겐노신이 주먹을 쥐었다.

"산카... 아니, 쇼켄시 헤이자는 모스케의 집에서 해고된 뒤 산으로 돌아간다고 하고 떠났네. 산이라는 건 다카오산이었을지도 몰라. 그러면..."
겐노신이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사요가 이어서 말했다.
"일설에 따르면 쇼켄시는 꼭두각시를 놀리는 사람의 후예라고도 하는데, 결코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사요는 말했다.

"드물게 정주를 하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런 사람은 적었던 것 같아요. 키를 만들거나 물고기나 거북이를 잡아서 팔고, 한 곳에 머물지 않고 흘러가며 삽니다... 번에도, 마을에도, 단자에몬이나 천민 우두머리에게도 속하지 않는 산의 사람은 사농공상에서 벗어나 있다는 의미에서는 천민으로 멸시받던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지만, 막부와는 전혀 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점이나 토지에 전혀 속박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진정 신분이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불량배들처럼 두목과 부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동료들끼리만 통하는 은어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산의 법도를 지키며 살아갈 뿐."  

 

- "산의 법도... 라는 건?"
"산에서 살기 위해 지켜야 하는 규칙입니다. 두목과 부하가 없이 떠돌며 살기 때문에 영역 같은 것도 없지요. 그러면 더더욱 동료 사이의 인의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지당한 이치입니다."

- "그들은 아까 말씀드린 우메가이라 불리는 양날 산칼을 들고 다닙니다. 일설에 따르면 이건 아메노무라쿠모의 검(天叢雲劍)을 본뜬 것이라고 하는데, 확실치는 않습니다. 이 외에도 화로 위에 냄비를 걸 수 있게 되어 있는 갈고리 등 독특한 도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 "사요 씨."
노인이 짤막하게 불렀다.
"아니요. 이게 도리입니다, 영감님. 쇼켄시도... 지금은 평민이니까요. 죄를 지은 이상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제 산의 법도만 지키고 있으면 되는 시대가 아닙니다. 이제... 산은 없어져 버렸으니까요."
사요가 말했다.
노인은 우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군요. 산은 이제 없습니까."
"없습니다."
"하지만 왜 그 헤이자인지 뭔지가 긴로쿠를 죽여야 하지? 연적이라서? 산사람이라는 게 원래 그런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는 않을 텐데."
소베가 물었다.
 
- "실제로야 어떻든 구별 차별이 없는 것이 도리입니다. 그러면 살인은...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죄입니다. 죄는 심판을 받아야겠지요."
"사요 씨 말이 맞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알겠습니까, 겐노신 씨? 쇼켄시... 여러분이 말하는 산카 같은 사람들은 여전히 오해를 받고 있고, 앞으로도 오해를 받을 겁니다. 그런 편견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원래 천민이었으니 죄가 많다, 호적이 없으니까 죄를 짓는다. 이런 어리석고 못난 차별은 언어도단입니다. 산카라서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습니다. 이는 결단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점은 잘못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한편으로 죄는 죄. 이것은 이것대로 심판하는 것이 평등입니다. 원래 영주였든, 승려였든 살인은 살인으로 심판을 받아야 하고, 마찬가지로 신분이 낮은 사람도 심판을 받지 않으면 도리에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유감스럽지만 아무래도 헤이자 씨가 이네 씨를 구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 건 확실한 듯합니다." 

- "아니요, 그 아이는 긴로쿠 씨의 씨가 아닐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을 죽여서까지 구한 처자를 능욕할까요? 아무리 연모하는 마음이 있었다 한들 전부터 정을 통하고 있었다면 모를까, 이네 씨 쪽은 헤이자 씨 얼굴도 몰랐으니 말입니다. 암만 사랑을 이루고 싶다고 강하게 바랐다 해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헤이자 씨는 신분, 아니, 자기 자신에 대한 분별이 있었지 않습니까. 해고되자 미련도 불평도 없이 산으로 돌아가는 깨끗한 사람이 심신에 상처를 입은 좋아하는 사람을 괴롭히지는 않겠지요." 

- "산사람은 산속에서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사요가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 고쳐 말했다.
"아니, 할 수 있었습니다."

- "자, 나머지는 겐노신 씨 재량이겠지요."
노인은 이렇게 말한 뒤 역시 조금 쓸쓸한 얼굴로 무릎 위의 서책을 보았다.
 
- 사사무라 요지로가 혼자 잇파쿠 옹 즉 야마오카 모모스케의 집을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모모스케는 요 며칠 동안 뭐라 말할 수 없이 괴롭고 슬픈 기분이었기 때문에 이 갑작스러운 방문에 주저했다.
요지로가 왔음을 전하러 온 사요를 붙잡고 모모스케는 그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사요는 옆으로 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모모스케 씨, 아직 망설이고 있나요?"
"아직이라니... 저는."
"훌륭한 모사꾼이었습니다."
사요가 말했다.
"무슨 소리를. 저는 그저 마타이치 씨가 지금 이 명치 세상에 있었다면 노가타 사건을 대체 어떻게 다루었을까 그 생각을 했습니다."

 

- 죄 없는 이는 다치게 하지 않고, 슬퍼하는 이에게는 안도를 주며, 화내는 이에게는 평온을 선사하는, 저쪽을 세우면 이쪽이 서지 않고, 이쪽을 세우면 저쪽이 서지 않아 나란히 서지는 않는 것이 이 쓰디쓴 세상의 운명이라면, 둘 다를 세우는 것이 모사꾼이라... 
마타이치 씨라면 어떤 거짓말을 할까? 어떤 속임수를 쓸까?
어떻게 마무리했을까?
끌려가서 농락당하고 임신을 하여 제정신을 잃어버린 처녀. 아무것도 모르고 딸의 몸을 계속해서 걱정하던 아버지. 사모하던 여인을 위해 사람을 죽이고, 그 여인을 돌보다 태어난 아이까지 기른 유랑인... 
세상과의 매듭을, 마음과 마음의 매듭을 마타이치라면 대체 어떻게 지었을까...
모모스케는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 "저는 망설이지도 않았고 모사꾼의 속임수를 쓰고 싶었던 것도 아닙니다. 마타이치 씨를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지요."
이렇게 말했다.
"마타이치 씨도 똑같이 했을 거예요. 시대가 다른 걸요."
사요는 한층 더 요염하게 웃었다. 나이를 알 수 없는 처녀이다. 모모스케는 얼굴을 돌렸다.
역시 사요의 웃는 얼굴에는 약하다.
"시대가 다르다."
"모모스케 씨도 잘 알면서. 요괴라는 건 토지에 생기고, 시대에 생기는 법이지요. 장소나 시대가 바뀌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어행사 마타이치는 요괴를 쓰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면 분명 이 세상에 맞는 걸 쓰겠지요." 

- "긴로쿠의 시신이 발견된 장소는 이 숯막 바로 코앞입니다.”
조사하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모모스케는 마음속 깊이 감복했다.
"누가 긴로쿠 씨를 죽였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긴로쿠 씨의 범죄인 것만큼은 거의 틀림없다는 사실이 판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가 수수께끼 순사 겐노신다운 활약이지요."

- "어느 정도 증거를 굳혔기 때문에 겐노신은 마을 사람들을 전부 소집해서 강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신으로부터 십 년이 지난 지금, 산사내 같은 헛소리를 곧이듣고 소란을 일으키다니 우스운 일이다... 문명개화한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망언을 하는 자는 공공연히 인심을 현혹시키는 괘씸한 자라 판단하여 즉각 투옥하겠다고." 
"그것 참 과격한... 마을 사람들은 산사내를 퇴치하라, 붙잡으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까?"
"딱 그쳤습니다."
"그쳤다?"
"네. 원래부터 산사내를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겁니다."

 

- "마을 사람들은 요컨대 누군가가, 뭐든 좋으니 뭔가를 해주기를 바랐을 뿐입니다. 누구라도 좋으니 확실히 이야기해 주기를 바랐던 거지요. 훌륭하신 순사 나리의 꾸지람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얌전해졌습니다. 아니, 결코 강제로 굴복당한 것이 아닙니다. 안심한 거지요."

 

- 그런지도 모른다.
똑같다. 이것은.
마타이치의 방식과.

- "마을 사람들을 진정시킨 뒤에 겐노신은 남몰래 모스케 씨와 다메키치 씨, 그러니까 긴로쿠 씨의 아버지를 불러서 진상을 이야기했습니다. 두 사람 다 처음에는 화내고 울고 큰 일이었던 모양이지만, 이윽고 이해했습니다. 겐노신은 이렇게 말했지요. 모스케 씨는 딸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더 기뻐해야 한다, 다메키치는 아들의 품행을 부끄럽게 여기고 이 일이 세상에 퍼지지 않은 것에 감사하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이네 씨가 데리고 온 아기의 얼굴을 보라고 했습니다. 태어난 아기는 둘 다에게 첫 손자가 아니냐고요."
과연.
그렇게 되는가.

- "또 겐노신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긴로쿠가 이네에게 저지른 행위는 극악무도하고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이미 천벌이 내렸으며, 굳이 들추어내서 소란을 피운들 책임을 질 사람은 없고, 그저 이네와 모스케 부녀가 괜한 고통을 받을 뿐 아니라 아기의 앞날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인 요타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다. 따라서 긴로쿠의 죄는 묻지 않겠다고. 다만 긴로쿠를 살해한 자는 어떠한 이유가 있다 해도 살인죄일 것이고 긴로쿠 살해 사건은 별건 ..."

- "짐승 사냥이라도 하듯 산사내를 수색한들 아무 성과도 건지지 못했을 테고, 미신이라고 무작정 외면했다면 아무 성과도 없었겠지요. 하물며 산에 사는 새로운 평민을 위험한 패거리라고 곡해하여 인간 사냥 따위가 시작되기라도 했다면 낭패 아니겠습니까."
"그게 가장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사요가 결연히 말했다.
"그렇지요. 뭐, 이것도 사요 씨가 순사 나리에게 진언을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자칫 막부 시절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바뀐 척만 하곤 합니다. 다만 겐노신 이야기에 따르면 쇼켄시인 헤이자라는 사람은 어지간해서는 못 잡을 거랍니다. 산은... 아직은 우리를 간단히 받아들여주지 않을 모양입니다." 

- '과연 그럴까?' 모모스케는 생각했다.
이제 이 나라에 산은 없지 않은가. 모모스케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제부터 산은 평지보다 더 높은 장소라는 것 외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고 모모스케는 생각했다. 
앞으로 산에서 그 이상의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보는 사람의 바람이자 환상일 것이다. 그런 바람이나 환상은 현실의 어떤 부분을 은폐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하리라. 
산은 이제부터 개념의 도피처가 되어버리는가 하고 모모스케는 예상했다. 그리고 환멸을 느꼈다. 깊이를 잃어버린 산에는 이제 자연이니 천연이니 하는 얄팍한 것밖에 남아 있지 않다. 이것조차 이윽고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 "어르신.”
요지로가 불렀다.
모모스케는 유유히 고개를 들었다.
"실은... 이번 사건을 제 나름대로 음미해 보다 몇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그에 대해 무례한 질문도 포함해 두어 가지 여쭙고 싶어서 오늘은 찾아뵌 것입니다만."
요지로가 묘하게 딱딱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깨달은 것... 이요?"
"네. 아니, 저는 어르신을 추궁하러 온 게 아닙니다. 어르신이 대답하고 싶지 않으시면 일절 대답하실 필요 없습니다. 들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 "전부 하나의 커다란 속임수였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까지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치요 씨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어쩌다 보니 감금된 장소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행사와 나그네와 마주쳐서 겁이 나 달아났다... 이것도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무사히 달아났다면 그대로 마을로 가면 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가령 산과 들을 헤매고 있었다면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왜 원래 있던 동굴로 돌아갔을까요? 일부러 감금 장소로 돌아가 우리에 들어가는 건 이상하지 않습니까?" 
"과연..."
모모스케가 말을 고르는 사이에 요지로가 말을 이었다.
둑이 터지듯 쌓여 있던 말이 넘친 것이리라.
"산사내가 마타조 씨를 도왔다는 이야기가 과연 진실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히노키야 씨 일가를 덮친 비극은 고용살이 출신의 사위에게 재산을 빼앗겼다고 생각한 기스케 씨가 가게를 손에 넣기 위해 꾸민 계략이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산사내 소동은 그 음모를 역으로 이용하여 모사꾼이 그려낸 깔끔한 복수극인 게...?" 

- "어떻게 해서 쓰러뜨렸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고에몬 씨는 엔슈에 온 뒤로 줄곧 산에서 나무를 베고 있었다고 어르신은 말씀하셨습니다. 고에몬이라는 사람에 대해 어르신은 자세히 말씀하시지 않는 것 같지만, 전에 이렇게 설명하셨지요. 재주가 뛰어난 인형사로 에도의 어두운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소악당이기도 한데 원래는 무사라고도 하고 나무꾼이라고도 한다고. 제가 생각하기에 고에몬 씨가 먼저 산속 동굴에서 옥에 갇혀 있던 치요 씨를 발견하고 치요 씨 본인의 의뢰를 받은 것 아닙니까?" 
"의뢰요?"
"남편과 피고용인들의 원수를 갚아달라고요."

- 아니.
그뿐이 아니었다.
기스케는 은퇴한 주인, 그러니까 배다른 형까지 살해하려는 계획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형을 처리한 뒤에 치요를 발견해서 데리고 오는 것이 기스케가 그린 설계도였다. 
기스케는 치요에게, 조카딸에게 떳떳하지 못한 마음을 품었다. 죽이지 않고 살려서 포로로 삼은 뒤 몸만 가지고 논 게 아니라 목숨이 아까우면 시키는 대로 하라며 줄곧 협박했던 것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산사내에게 끌려간 것으로 하겠다면 원래 생활로 돌아가게 해 주겠다고.  


- 비열한 거래이다.
원래 생활이란 요컨대 기스케의 측실이 되는 것이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부부가 될 수 없는 사이이지만 과부와 후견인이라는 관계를 빙자해 죽을 때까지 기스케의 첩으로 살라는 이야기이다. 거부하면... 평생 바위굴 속 감옥에 가둬놓고 노리개로 삼겠다고 말이다...
세상에 알릴 수는 없었다.
그러면 일단 가게의 명예가 상처를 입는다. 숙부에게 강간당하고 농락당한 치요의 인생도 상처를 입는다.
다 들추어내어 기스케를 붙잡은들 좋은 일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꾸민 연극이었다.
치요를 일단 풀어준 것은 물론 산을 수색한다는 덫을 놓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시라쿠라 마을 주민 중에 있을 기스케의 동료를 끌어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기스케에게는 반드시 협력자가 있었을 터이므로.

- 치요에게는 하루에 한 번 식사가 운반되었다. 운반해 오는 사람은 치요가 본 적이 없는 사내 두 사람이었는데, 산일을 하는 사람 같았다고 한다. 동굴 감옥에 식사를 나르려면 시라쿠라 마을에서 오가는 것이 지리적으로 가장 유리하다. 
그래서 시라쿠라 마을에서도 신용할 수 있는 사내, 그러니까 마타조의 사촌인 고사쿠를 치요의 목격자로 세웠다. 돌아온 고사쿠는 온 마을에 소문을 냈다. 마을에 협력자가 있다면 우리가 부서졌는지 아닌지를 반드시 확인하러 갈 것이다.
마타이치의 예측은 들어맞았다.
기스케도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나머지는.

- "그건 그렇고 어떻게... 아셨습니까?"

"사건에서 요물을 빼보았습니다."

"뺐다?"
"네. 노가타 사건에서는 산사내라는 산의 요괴를 빼자 진상이 보였습니다. 그러면 엔슈 사건은 어떨까 생각해 봤습니다. 엔슈 사건은 산사내라는 요괴가 실제로 없으면 아무리 해도 성립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건 혹시 교묘하게 꾸민 속임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 모모스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끄덕였다.
그렇다. 그 말이 맞다.

- "그 말이 맞습니다. 산사내를 빼버리면... 거기에 남는 것은 그냥 범죄이지요. 원수를 갚는다는 건 사적인 일로 공적인 권리를 침해하는 것. 복수를 위한 살인입니다. 아니, 살인 앞에는 어떠한 대의명분도 성립하지 않지요. 그것이 올바른 모습일 겁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역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건 좋지 않은 일입니다. 설사 나라를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라고 해도 역시 죽여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전부 사요 씨 말이 맞았습니다."
모모스케는 이렇게 말했다.
마타이치였어도 역시 이렇게 했을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방식이다. 그것이 옳다.

-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사요가 시치미를 뗐다.
"이유야 어쨌든 살인은 죄. 죄를 저질렀으면 심판을 받아야겠지요. 그것이 이 세상의 규칙이니까요."

 

- 도(道)를 밀고 나가면 모가 난다. 
길에서 벗어나면 늪에 빠진다.
어슴새벽 황혼 녘 깊은 밤중에 살며시 지나는 것은 뒤로 난 길. 어차피 속세는 꿈과 환상이라고 체념하는 이 쓰디쓴 세상의 연극. 생계와 생활로 치워버리면 남는 것은 세간의 괴이한 소문...

짤랑, 하고.
모모스케의 머릿속에서 방울이 울렸다.
무척 희미한, 무척 가냘픈 환청이었다.

- "젊은 사람은... 좋겠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부터는 요지로나 사요의 시대이다. 모모스케는 창밖을 보았다. 하늘은 희고 추워 보였다.

 "사람은 계속 성장하지 않습니까? 나라와 문화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요즘 식이라는 건 어느 때나 가장 뛰어나겠지요. 다만..."
그러고 모모스케는 노래하듯 말했다.
"요괴는 완전히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 "요괴가 말입니까?"
"네, 실로 무용지물, 소베 씨나 쇼마 씨 말처럼 필요 없는 것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그것이.
모모스케에게는 조금 쓸쓸했을 뿐이다.
하지만 요지로는 그렇지 않다고 강하게 말했다.
어떤 생각에서 하는 말인지 모모스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이 또 쓸쓸해서 모모스케는 이렇게 말했다.
"그... 마타조 씨를 도와준 술 좋아하는 산사내 이야기. 그 이야기만큼은 진실이라고 지금도 저는 생각합니다."
이 말을 듣자 사요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진짜예요. 모모스케 씨."
 

- <산사내>

 

 

 

이 백로 

오품의 지위를 얻었기 때문일까. 

밤이면 빛이 나 주위를 밝혔다.

 

회본백물어(繪本百物語)·도산진야화(桃山人夜話) / 제4권 28

 

 

- 옛날.
천황이 신센엔(神泉苑)에 행차하셨을 때 일입니다.
문득 눈길을 주니 연못가에 사람 그림자가 보였습니다. 괴이한 일이로다 하며 천황은 자세히 쳐다보았습니다.

잘 보니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커다란 푸른 백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천황은 육품의 지위에 있는 관리를 불러 잡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어명을 받은 육품관은 당장 백로를 잡으러 갔지만 좀체 잡히지 않습니다.
살그머니 다가가 보아도, 위협을 해보아도, 백로는 스윽 달아나버립니다.

 

- 하지만 천황의 명령이니 놓칠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든 잡아야 한다며 육품관은 몇 번이고 거듭 백로를 붙잡으려 했습니다. 그래도 백로는 달아났습니다.
그래서 육품관은 백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명이시다.
천황의 말씀이니 움직이지 말라고 한 것이지요.

- 백로는.
딱 멈추었습니다.
그러고는 마치 잡아달라는 듯 육품관 쪽으로 다가와 얌전히 붙잡혔습니다.

- 백로는 그 자리에서 천황에게 바쳐졌습니다.
천황은 크게 놀라고 감탄했습니다.
육품관이 하는 말은 듣지 않지만 천황의 명은 듣다니 금수라고는 하나 필시 긍지가 높겠구나, 이렇게 생각하셨지요.
그래서 천황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에게 내 오품 벼슬을 내리겠다고.
백로는 오품의 지위를 얻었습니다.

- 그 뒤로 이 백로는 오품 백로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오품이라 하면 정전에 오를 수 있는 직위. 세이료덴(淸凉殿)과 당상관 집무실에 드나드는 것이 허락될 정도의 신분이었습니다. 오품 백로는 어두운 밤에 빛난다고들 하지만, 이는 괴이한 빛이 아닙니다.
백로의 신분이 높은 까닭에 그 위엄이 빛나는 것입니다. 그 빛은 괴이한 마성의 불이 아니라 아주 고귀한 빛입니다.
 
- 대개 소나무와 삼나무가 우거진 가운데 축국만 한 크기의 불꽃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경우가 있다. 구태여 인가에 해를 입히는 불로는 보이지 않는다. 혹자는 말하기를 푸른 백로가 나뭇가지에 앉아 바람에 흔들려 움직일 때마다 날개가 빛나는 것이 화염처럼 보이는 것이라 한다. 이를 바닷가에서는 백로불이라 한다. 

- 그런데 어두운 밤에 고양이털을 반대 방향으로 쓰다듬으면 빛이 나기도 한다. 이는 불이 아니라 털끝이 서로 스치면서 빛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깃털의 빛도 원래부터 있으니, 바람에 움직이고 사물에 닿아서 빛나는 것이라 어두운 밤이 아니면 빛나지 않는다...

- "이건 <우라미칸와(裏見寒話)>라는 책의 한 구절이네."
사사무라 요지로가 말했다.
"지은이는 누군가?"
이렇게 물은 사람은 얼마 전에 신설되어 명칭이 바뀐 도쿄 경시국본서의 명물 순사 야하기 겐노신이다.
"라이쇼도 센소라는 사람인 모양이네만."
"나도 모르는 이름이군. 하이쿠 시인인가?"
"아니, 나도 잘은 모르지만 아무래도 고후 성 근번(勤番) 노다 이치에몬 시게카타(野田市右衛門成方)라는 사람인 듯한데."
"고후 성 근번이라. 미묘한 부분이군."
겐노신이 수염을 쓸었다.

- "미묘하다니 무슨 소린가? 감상이 조금 묘한데?"
요지로가 되물었다.
"조금도 묘하지 않아. 좋은 듯도 하고 안 좋은 듯도 한 신분이라는 말일세."
"하지만 고후 번 영주는 대대로 도쿠가와 가문의 근친이었고, 번이 폐지된 뒤에도 가이 지방은 막부의 직할지였네. 또한 고후근번지배라 하면 노중(老中)의 직속 부하이자 원국봉행(遠国奉行) 중 으뜸 아닌가."
"그건 근번지배가 그렇고."
겐노신이 말했다.
"그 노다 아무개가 지배인가? 아니지 않나. 이보게, 고후근번이라는 건 요컨대 고후를 경비하던 파수꾼이나 다름없네. 어차피 다 고부 신구미(小普請組)야. 요직이라고는 못하지. 여력인지 동심인지는 모르네만."
"여력이라면 그 말을 하는 순사 나리보다는 격이 높을 텐데? 자네는 옛 막부 시대에 동심 아니었나.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겐노신은 지금이야 콧수염을 기르고 양검을 찬 번듯한 순사 나리이지만 유신 전에는 가문(家紋)이 들어간 검은 겉옷에 하카마를 입지 않고 칼을 차는 약식 복장이 용인되던 견습 동심이었다.

 

- "내가 문제가 아니네. 요는 신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
겐노신이 말했다.
"신분과 직위로 신용을 재다니 아무래도 자네답지 않은데, 출세하면 그런 생각을 갖게 되나?"
"그게 아닐세."

겐노신은 불만스럽게 말하고는 아주 편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

"그렇지는 않네만... 뭐라고 해야 하나."
"뭐 되었네. 하지만 그렇다면 아까 이야기한 <미미부쿠로(耳囊)>는 어떤가? 저자인 네기시 야스모리(根岸鎮衛)는 사도와 미나미마치의 봉행 같은 요직을 역임한 중진이잖나. 하타모토(旗本)이기도 하니 ..."

- 이번에는
푸른 백로라는 새는 빛이 나는가?
사람으로 변한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신슈 주변에 그런 이야기가 전해지는가?
이렇게 자못 수수께끼 같으면서도 두서없는 질문이었다.

- "애초에 말이네. 괴이한 불 종류는 지난번 불덩이 소동 때 실컷 이야기하지 않았나. 그때 서양물 먹은 쇼마 놈이 뛰어난 학설을 풀어놓았을 텐데, 뭐였더라, 그 에, 에..."
"에레키테르 말인가?"
요지로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렇지. 그 레키인지 하는 게 발생하네. 아까 요지로가 읽은 뭐라든가 하는 고후근번이 쓴 책에도 실려 있지 않았나. 고양이 털을 반대방향으로 쓰다듬으면 빛이 난다고. 깃털의 빛도 원래부터 있는 걸세."
"그럴까?"
겐노신은 미적지근한 태도이다.

- "거기 있는 성질 급한 검잡이가 아니더라도 순사 나리가 이야기하는 방식에는 이의를 달고 싶어 지네. 백로의 불이 어떻다, 신슈가 어떻다. 하면서 수수께끼만 던져놓더니 막상 찾아오니 이번에는 작자의 신분에 집착을 하지 않나. 내용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한다면 수긍하겠네만."
"자네가 한 건 신슈 이야기가 아니지 않았나?"
소베가 끼어들었다.
“나는 그냥 무역회사 직원이지 학자나 그런 게 아니야. 그렇게 편리한 자료를 찾아낼 수 있을 리 없지 않나. 그런데도 없는 지혜를 굳이 짜내 가며 궁리해서 <우라미칸와>를 발굴해 왔네. 신슈와 고슈는 이웃한 지방이니 말일세. 조금이라도 접근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알았네, 알았어. 딱히 이의는 안 달지 않았나. 고맙게 생각하네."
겐노신이 받아넘겼다.
"그런가? 아무래도 얼굴빛이 흐린데. 수수께끼 풀이만도 힘든데 신분과 가문이 어쩌니, 사람을 못 믿겠다느니 이야기를 못 믿겠다느니,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나. 거기에 막부 신하가 이러니 저러니 하면 이제 두 손 두 발 들 수밖에 없지. 뭘 알고 싶은지 도통 모르겠네."

"내 말이 그 말이야. 숨길 거라면 의논하러 오지를 말게. 의논을 하겠다면 숨기지 말고. 처음부터 다 소상하게 밝히면 이야기는 훨씬 빨라지네. 무역회사에는 휴일이 있을지 몰라도 나 같은 무사에게 그렇게 해이한 건 없어. 오늘도 도장을 비우고 온 걸세.”
"이보게, 도장에 있든 여기에 있든 달라질 게 있겠나? 문하생도 없지 않은가."
"있네."
소베가 부루퉁해하면서도 엄격히 반론하지 않는 이유는 요지로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소베는 야마오카 뎃슈에게 검술의 기초를 배웠다는 둘도 없는 호걸인 동시에 사루가쿠에서 검술 지도 간판을 내건 도장 주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도장이 인기가 없다. 그야말로 파리를 날리는 중이다. 
그래도 작년까지는 문하생이 몇 명 있었던 모양인데, 올해 들어서 완전히 끊겼다고 문제의 쇼마가 말한 적이 있다.

- "실은 말일세."

겐노신이 침울한 표정을 짓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기의 출처가 궁 쪽이라서."
"구, 궁이라니 관군인가?"
"공경(公卿) 출신 귀족님이시지. 아니, 이제 화족(華族)님이라 불러야 하나. 게다가 그 유명한 히가시쿠제(東久世通禧) 경과 동년배로, 막부 말에는 국정을 의논하는 관직을 맡기도 하셨다는 지체 높은 분이네."
"히, 히가시쿠제? 그 시, 시종장이신 히가시쿠제 경 말인가?"

- "바로 그 히가시쿠제 경과 함께 존왕양이 운동에 매진하셨다는 분이다, 이 말일세. 유신 이후에는 고문을 비롯해 몇몇 요직을 역임하셨는데, 지금은 정계에서 물러나서 국정에는 관여하지 않으시네." 
"그 그게 누군가?"
"유라 기미사 경이네."
"유라!"
소베가 또다시 큰소리로 말했다.

- 요지로는 통 모른다.
화족이니 사족(士族)이니 하는 말을 들어도 도통 감이 안 온다. 새 정부에 대해서도 모른다. 태정대신(太政大臣) 산조사네토미(三条実美)나 우대신(右大臣)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같은 이름쯤은 래도 알지만, 좌대신(左大臣)은 누구인지 모르기도 한다. 관심이 없다기보다 살기도 벅차서 거기까지 주의가 미치지 않는다. 
게다가 요지로의 경우 아무래도 옛 막부 시대의 조직과 겹쳐놓고 보게 된다.
친숙하다고 할 정도로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공경과 영주가 같은 화족님이라 한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구분해서 생각하게 된다. 

- "조신 가문이 뭐가 어쨌단 말인가? 유학에 조신, 무사가 어디 있나. 황송하게도 천자님도 유학을 배우신다네."
"그런가."
요지로는 유학이 무사의 학문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 "유라 기미아쓰라 하면 재작년에 무려 스물둘의 나이로 효제숙(孝悌塾)이라는 사숙을 연 수재 유학자이네. 일부에서는 하야시 라잔(林羅山)의 재림이라고까지 하지. 창평횡(昌平黌) 출신 사이에서도 꽤 평판이 좋고, 문하생 중에는 이국 사람도 많다더군."
"이국 사람이라. 외국인이 유학을 배우는가? 유학이라는 건 중국이나 조선이 본고장이라 들었네만, 굳이 일본에서 배울 이유는 없지 않나."
"서양인 말이네."

- "진리에 동서양이 어디 있나. 유라라는 사람은 향학심이 있는 모양이야. 외국어도 열심히 배워서 그럭저럭 잘한다더군. 불란서 사람 같은 경우는 대단히 성실하게 배운다고 들었네."
"너무 잘 아는군."
겐노신이 말했다. 정말이다.
"내 문하생이 효제숙에 다니네."
"아하, 그렇다면 문하생을 뺏긴 건가."
"뺏긴 건 아닐세."
요지로가 깎아내리자 소비는 고개를 획 돌렸다.
"검의 도는 사람의 도야. 요즘 젊은 친구들은 도통 수양이 부족하네. 논어라도 좀 배워 오라고 내보낸 걸세."

강한 척을 한다.
쇼마가 있었다면 분명 욕을 퍼붓다 큰 싸움을 벌였을 것이다. 요지로는 수염투성이 호걸과 말다툼을 할 기분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듣고 넘기기로 했다.

- 천보(天保) 시절.
사십 년이 넘어 오십 년 가까이 지난 일이다.
그 무렵의 일쯤 된다는 이야기이다.
시기가 가물가물한 이유는 물론 뚜렷이 기억나지 않기 때문인데, 그도 그럴 것이 유라 기미후사 경은 그때 아직 서너 살 된 어린아이였다고 한다.

- 떠오르는 것은 산속 풍경이다.
어느 산인지는 확실치 않다. 어쩐지 고지대였던 것만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다만 깊은 산속이라고 할 정도로 숲이 울창하게 우거진 풍경은 아니다. 그저 자작나무만이 어디까지고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주위가 밝았다는 기억은 없지만 낮에도 어두운 곳은 아니었던 듯하다. 하늘은 그럭저럭 넓었고, 별이 나오지는 않았을지언정 어둡게 맑았다 한다.

 

- 해 질 녘이었던가.
기억 속에는 물소리도 섞여 있다고 한다. 머릿속에 하천이 떠오르는 일은 없는 데다 쏴쏴 하는 강물 소리도 아니었던 모양이니 샘터나 습지 같은 곳이었을까.
고지대의 습원 느낌일까.

이상한 것은 빛이었다.
어린 기미사 경은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기미후사 경을 안고 있는 여자도 빛나고 있었다.
이것만은 뚜렷이 기억한다고 한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것이 아니다. 석유등처럼 빛을 발하지도 않았다. 그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의 몸은 연극에서 쓰는 장뇌를 태운 불처럼 이글거리면서도 반딧불이 꽁무니의 불빛처럼 어슴푸레했다고 한다.

- 기미후사 경은 여자에게 안겨 있었다.
여자는 창백했다고 한다. 어디가 어떻게 창백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낯빛이었는지, 옷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전체적으로 창백한 데다 빛나고 있었다고. 그 자신의 몸도 마찬가지로 빛나고 있었다고 기미사 경은 말했다고 한다.
그때 기미사 경은 여자의 가녀린 팔에 다정하게 안긴 채 그녀의 홑옷 같은 옷에 매달려 있었다. 손에 쥔 부드러운 천의 감촉은 지금도 어쩐지 떠오를 것 같지만, 그 살결의 온기나 냄새 같은 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전의 기억은 없다.
기억은 여기서부터 갑자기 시작된다.
얼마 동안 그러고 있었는지도 모호하다고 한다.

- 이윽고.
남자가 나타났다.
놀랐던가.
겁이 났던가.
남자는 여자를 보더니 벌벌 떨면서 송구하다는 듯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렸다.
기미후사 경은 여자의 눈높이에서 땅바닥의 진흙 속에 납작 엎드린 남자를 보았다.


- 몇 마디 대화가 오갔다.
내용은 알 수 없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다기보다 아직 나이도 먹지 않은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남자는 진흙투성이가 된 채, 마냥 머리를 조아리고만 있었고 여자는 남자에게 뭔가를 계속 이야기했다.
방울을 굴리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만큼은 똑똑히 기억난다고 한다. 

 

-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그리고.
여자는 기미사 경을 남자에게 건넸다.
남자의 옷은 까슬까슬했고 사향 같은 냄새가 났다고 한다. 남자가 받아 안은 순간. 


- 짤랑 소리가 나더니.
이어서 펄럭펄럭하는 커다란 날개 소리를 기미후사 경은 들었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넓고 넓은 밤하늘에.
커다란 푸른 백로가 날아가는 참이었다고 한다.
백로는 인광 같은 것을 발하면서 맑은 밤하늘로 사라졌다고 한다.

- 남자는 기미후사경을 꼭 안았다.
손가락이 파고들 정도로.
그 남자는... 

- "남자는 유라 다네후사, 기미후사경의 아버님이네."
겐노신이 말했다.
"아, 아버님인가? 허어."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이다.

- "가업이 뭔가? 조신이란 무사 가문이 쇼군을 모시는 것처럼 천자님을 모실 뿐인 것 아닌가?"
요지로가 물었다.
"천자님이라고 물 쓰듯 녹봉을 주시지는 않네. 가업이라는 건 뭐 한마디로 말해 지식이나 예도일세. 비파이니 축국이니, 옛 시가의 뜻풀이니 하는 것이 집집마다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이를 전수하는 것이 생계 수단이었네. 그리고 면허 발행 같은 권리가 있지. 검교(檢校)의 지위를 하사하거나, 뭐 그런 인가와 관련된 일이야." 
겐노신이 신묘하게 대답했다.

 

- "그런가? 아하, 검교가 되기 위해 맹인 비파 법사들이 교토로 가는 것은 그 때문이군."
요지로는 몰랐다.
"이제는 아니네만 검교가 되려면 그에 상응하는 돈이 필요해. 왜, 비파 법사들이 필사적으로 돈을 모으지 않나. 그것도 다 조신님에게 바칠 돈이네. 인가 비용이지."
"그렇군. 그 유라 님도 검교 쪽인가?"
"아니, 그렇지는 않네. 그런 건 집집마다 달라. 유라 가의 경우에는 유학이겠지. 유라 기미후사라는 분은 젊을 때 유학보다는 신도나 국사, 지지학 쪽에 관심이 있으셨다 하네. 스가에 마스미(菅江真澄)처럼 여러 지방을 다니며, 하야시 라잔처럼 유래나 제신에 대해 들으셨다고 해. 뭐, 여유는 없으니 그리 멀리까지 발길을 뻗칠 수는 없었던 모양이네만 실은..." 

- 겐노신은 더욱더 신묘한 얼굴이 되었다.
"기미후사 경은 그 이십 년 뒤에 시나노 지방을 방문하신 적이 있네."
"이제야 신슈가 나왔구먼."
"처음부터 나왔어. 잘 듣게 기미후사경은 그곳 신슈 땅에서 문제의 장소를 찾아내고 말았네."

- "엥? 차, 찾았나?"
"그렇다는 모양이야. 게다가 말일세. 이십 년의 세월을 넘어 기미후사경은 그 땅에서 다시금 푸른 백로를 만났다지 뭔가."
"새와?"

"새인... 여자와 말일세."

- "어르신은 계십니까?"
"물론 계시지요."
사요는 또 웃었다.
"허리, 다리가 편찮으신 것도 아니니 가끔씩은 어디 나가시는 편이 건강에 좋다고 하는데도 듣지를 않으세요. 눈이 나쁘니까 책을 그만 좀 읽으시라고 해도 역시나 듣지를 않고요." 
사요가 말했다.
"백중날이 와도, 정월이 와도 외관이고 뭐고 바뀌지를 않아요. 원래부터 술도 못 드시는 체질이라 정월부터 단 음식을 드시니까 변화가 없어서 저도 의욕이 안 생기네요." 

 

- "음력설을 쉽니까?"
요지로가 묻자 아니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연초에 왔을 때 가가미모치(鏡餅)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양력으로 바뀐 뒤에도 꽤 시간이 흘렀는데, 사회는 그렇다 쳐도 생활면에서는 좀체 친숙해지지 않는다. 요지로처럼 둥실둥실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사람에게야 실질적인 피해도 없고 실감도 없지만, 개중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실제로 많은 노인들이 음력에 맞춰 생활한다. 
"바꾸는 거 하나는 빠르거든요. 마음만은 젊으니까요."

사요가 말했다.

-

"제, 제가?"
"모모스케 씨와 똑같은 눈빛이에요. 모모스케 씨도 자주 말씀하십니다. 젊은 시절의 당신과 닮았다고."
"사요 씨, 사요 씨."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사요는 웃음을 띤 채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뜨고는 대답했다. "누가 오셨습니까?" 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요즘은 여러분이 오시지 않으면 적적해하세요."
사요는 뒤를 한 번 돌아보고 나서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낭랑한 목소리로 일렀다.
"요지로 씨가 오셨어요."

- 평소처럼 검게 물들인 사무에 위에 쥐색 겉옷을 걸친 노인이 작은 몸을 더 작게 움츠리고 앉아 있었다. 겉보기에는 아무래도 추워 보이는 방이지만 안은 그리 춥지 않았다. 
노인이 고개를 들고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혼자 오셨습니까?"
"네. 겐노신 순사는 조사를 좀 하고 나중에 오겠답니다."

- 왜 처음부터 여기에 오지 않았을까 하고 요지로는 생각했다. 요지로가 있지도 않은 지혜를 짜내거나 조사를 해본들 나오는 건 빤하다.
잇파쿠 옹은 동서고금의 기담과 항설에 해박한 사람이다. 그런 종류의 서적을 망라했을 뿐 아니라 제 발로 여러 지방을 다니며 괴담과 풍문을 수집하기도 했다. 생각하거나 조사하지 않아도 금방 유사한 이야기나 방증이 나올 것이고, 거기에서 도출되는 이치에 맞게 설명도 잘해줄 것이다.  

 

- 그런데도 요지로와 친구들은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곧장 이곳에 오지는 않는다. 일단 넷이 모여서 무익한 의논을 거듭한다. 그렇게 의논을 거듭한 끝에 막히면 고민에 고민을 하다 이곳을 찾는 것이 보통의 흐름이다. 
기껏해야 괴담이다.
하찮은 이야기이다 보니 급박한 사안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합리를 추구하는 소베나 서양식인 쇼마에게는 분한 마음이 있을 수도 있다. 또 겐노신은 원래부터 그런 불가사의한 논의를 즐기는 성격일 것이다.
요지로의 경우에는 단순한 호사가이다. 

- 유라 기미후사경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하던 도중에 요지로는 노인의 표정이 변했음을 깨달았다. 시든 얼굴에서 깊은 감정의 미묘한 움직임을 헤아리기는 어렵지만, 요즘 들어 요지로는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 산속 다른 세상의 신기한 기억...
요지로는 윤색하지 않으려 주의하면서 이야기했다.
여자가 백로로 변해 날아갔다는 데까지 이야기했을 때에야 겐노신겐노신이 굳은 얼굴로 불쑥 말했다.
 
- "그러니까 우부메야."
겐노신이 말했다.
"우부메라고?"
"우부메 말일세. 아이를 낳다가 죽은 여자가 변해서 된다고 하는 요괴야. 물론 알겠지?"
"알기는 하네만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지 통 모르겠네."
"모르겠나? 그 여자는 우부메야. 우부메가 무슨 짓을 하는가? 떠올려보게."
"아기를 안아달라고 하지요."
노인이 말했다.

 

- "그렇지요. 물가 버드나무 아래에 나타나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안고 있던 아이를 맡기려고 합니다. 대부분은 겁을 먹고 달아나지만 받아 든 사람은..."
"강한 힘을 얻는다고 하지요."
또다시 잇파쿠 옹이 대답했다.
"맞습니다. 과연 노인장 받아 들 만큼 배짱이 두둑한 사람은 힘과 부를 얻는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우부메 요괴의 정체는 푸른 백로라고도 한다, 이런 말씀입니까?"
"네, 그렇지요. 그 말씀이 맞습니다."
겐노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 "잠깐만 있어보게, 겐노신, 나는 소베나 쇼마처럼 뭐든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부정하지는 않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부메 요괴라는 말에 그렇구나, 수긍할 수는 없어. 애초에 그렇다면 기미사 경은 요물이 건넨 아이라는 이야기가 되지 않나?" 
"그렇지."
겐노신이 말했다.
"그렇다니..."
"그런 유언비어가 돌았네. 옛날에."

- "말뜻대로야. 옛날에 기미후사경은 사람의 자식이 아니라 마물의 자식이라고 중상하는 소문이 실제로 돌았다고 하네."
"노신, 아무리 그래도 그건."
"그러니까 중상이지."
겐노신은 이렇게 말하고 수염을 어루만지며 헛기침을 했다.
"현실에 그런 일은 없네. 있어서 되겠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네. 그러니까 유언비어라고 하는 거야. 잘 듣게 요지로. 그건 말이네, 시샘일세. 아무리 조신이라 해도 사람의 자식이야. 시기, 질투도 있겠지. 전에도 한 번 말하지 않았나. 많은 공경이 가난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고 지금도 대부분이 빈궁에 신음하며 살고 있네. 하지만 기미후사 경은..."
"자주 여행을 다니셨다고."
"그러하네. 여행이라는 건 여유가 없으면 할 수 없는 법이야. 유라 가는 윤택했던 거지. 유라 가는 섭정을 낼 수 있는 오대 가문(摂家)도 아니고 그다음으로 높은 일곱 가문(淸華家)이나 그다음으로 높은 세 가문(大臣)도 아닐세. 에도 시대가 된 뒤에 가문을 일으킨 새로운 가문인 데다, 앞의 세 가문을 제외하고 당상에 오를 수 있는 가문 중에서도 격은 아래이네. 그런데도 묘하게 위세가 있고 주머니 사정도 좋으니 입방아를 찧는 사람들도 생긴다는 말일세." 
"험담이라는 말인가?"
"험담이겠지."

- "험담 이상도 이하도 아니네. 다만 아니 뗀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사실이야."
"마, 마물의 자식이라는 말인가?"
"말을 함부로 하지 말게."
겐노신이 더더욱 노려보았다.
"화족님에게 그 무슨 폭언인가. 자네도 단순한 친구일세. 그러면 있는 그대로 아닌가. 험담이 되지도 않아."

- "아무래도 기미후사 경의 어머님은 기미후사 경을 낳으시고 곧장 세상을 떠난 모양입니다. 다른 아우들은 모두... 뭐, 속된 말로 하자면 후처의 아이인 셈이지요. 그쪽은 격이 맞는 다른 가문 출신의 아가씨인데 그 가문과는 아직도 친척처럼 지낸다고 합니다. 이거, 아무래도 평민들 말을 쓰게 됩니다만... 그런데 말입니다."
"뭐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아니, 아무래도 기미후사경의 어머님, 낳아주신 어머님 말인데 그분 친정과는 소원한 듯합니다. 그래서 말이지요, 다소 내키지 않기는 했지만 조사를 좀 해봤습니다. 그랬더니 이 어머님의 내력이라 해야 하나, 존재 자체를 잘 모르겠더군요." 
"조신 가문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모르겠습니다. 유곽 게이샤의 내력을 조사하는 것과는 사정이 다르지요. 범죄가 일어난 것도 아니니 캐물을 수 없는 데다 깊이 파고들 수도 없으니까요. 다만 윤곽 정도는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우선기미사 경의 어머님이 누구신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요. 적어도 다네후사 경의 정실부인으로서 천수를 누린 분은 아닙니다. 그리고 유라 가의 가계가 윤택해진 건 기미후사 경이 태어난 뒤부터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기미후사경이 마물의 자식이니 하는 중상의 근원이지요." 
겐노신이 말했다.

- "그렇겠지요."
잇파쿠 옹이 슬픈 듯 말했다.
"그럼 기미후사경이라는 분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으셨습니까?"
측은하다기보다는 미안하다는 말투였다.
그 어조에 요지로는 묘하게 가슴이 술렁거렸다.
"당사자의 귀에까지 그런 악담이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좋지 않은 소문 뒤에는 그런 사실이 숨겨져 있었지요. 아니, 사실이라 해봤자 뭔가 알아낸 것도 아니지만... 유라 가의 재원과 어머님의 내력은 다네사 경이 눈을 감은 지금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이런 사정과 기미후사 경이 기억하는 상황이 묘하게 들어맞는 것도 같아요."

- "예를 들면 어떻게?"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노인의 물음에는 겐노신의 자세를 바로잡기에 충분한 박력이 있었다.
"그, 그러니까 예를 들어 신분은 낮지만 재력은 있는 지방의 향사 같은 사람 따님과 다네사 경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고 해보지요. 그런 경우에는 보통 혼례가 성립하지 않을 겁니다. 지금도 화족님인 데다 막부 시대에는 신분에 차이가 나는 혼인은 용납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니까 사생아, 흔히 말하는 숨겨둔 자식이 됩니다. 하지만." 
"하지만 뭐지요?"
"다네후사 경이 그걸 바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내로 맞이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든 아이만은 갖게 해달라고 부탁했다면."

 

- 과연, 그런 장면이라는 말인가.
아이를 안고 있던 사람은 기미후사경의 생모.
아버지인 다네후사 경은 혼례를 치를 수 없음을 사죄하고 그래도 자기 아들만은 달라고 부탁했다 이건가?
수긍은 간다.

- "뭐, 이렇게 말하면 신분 높은 사람이 제멋대로 굴었던 것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메이지 유신 전에는 신분의 차이가 지금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분명했으니까요. 외가 쪽에서는 고마운 마음, 고마운 행동이라며 감사했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말인가?"
요지로가 묻자 겐노신이 곧장 대답했다.
"그럼 앞뒤가 맞겠지. 원래 신분이 미천한 서자 아닌가. 그걸 적자로 들이겠다고 한 걸세. 요즘 같은 시대라면 또 어떨지 몰라도 사십 년도 더 전이라면 사정이 다르네. 과분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겠지. 한편으로는 조신 가문이 가난했던 것도 사실이니, 손자의 살림살이를 생각하면 돈이든 뭐든 쥐여주지 않았겠나. 다네사 경 입장에서도 아내 없이 자식만 있다고 하면 겉보기가 좋지 않으니까 황급히 가정을 이루었다..."  

 

- "억측으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잇파쿠 옹이 보기 드물게 엄한 말투로 말했다.
"아."

겐노신이 콧수염 밑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입을 떡 벌린 채 그대로 굳었다.
하지만 노인이 "아니, 아니" 하고 말을 꺼냈을 때는 완전히 온화한 말투로 돌아가 있었다.
"아니, 겐노신 씨에게 나쁜 뜻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억측이나 짐작으로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설령 사실이라도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 좋은 경우도 있을 테고, 죽고 사는 것과 관련된 일은 신중히 다루는 게 좋겠지요. 뭐 노파심이지요."
"제가 좀 경솔했습니다."
겐노신이 사과했다.

- "기미후사경이 무슨 부탁을 하셨습니까?"
"네?"
겐노신은 덥지도 않은데 땀을 닦았다.
"그러니까 백로가 사람으로 변하거나 빛을 발하는 일이 있느냐고..."
"그렇군요. 하지만 겐노신 씨가 지금 내놓은 답은 그 물음에는 아무런 답도 되지 않는 것 아닙니까?"
"그게."

- 맞는 말이다.
요지로와 겐노신은 그런 일은 없다는 전제에서 이론을 세우고 추리를 펼치고 있었을 뿐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이면이 있을 것이다. 무슨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기괴한 기억이 생기게 할 만큼 특수한 사정이나 상황이 반드시 있을 터. 
요지로와 겐노신은 그런 사정을 뒤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 "상대방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 아니지 않을까요?"
"뭐, 그게... 그렇겠지요."
겐노신이 고개를 숙였다.
"게다가 자세히는 모르지만 자신과 자기 아버지 일이니, 이 짧은 기간에 겐노신 씨가 조사하신 내용 정도야 기미사 경도 알고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경은 자신이 겪은 일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도... 그럴지 모릅니다."

"백로가 사람으로 변하거나 빛을 발하는 일이 있는가. 요컨대 겐노신 씨와 요지로 씨는 이에 관해서는 처음부터 안중에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겐노신 씨, 겐노신 씨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선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도리이겠지요. 백로는 사람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빛나지도 않습니다, 그 일은 경의 착각일 겁니다, 하고." 

 

- 정말로 그렇다.
기미후사 경은 자기 내력을 밝히고 싶다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여자가 누구든, 그 장면이 어떤 상황이든 관계없는 일이다. 

- "변하지 않습니까? 변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리는 게... 옳겠습니까?"
요지로는 왠지 이렇게 물었다.
"그건 말이지요."
노인이 주름에 파묻힌 눈을 가늘게 떴다.
"뭐,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역시 착각이겠지요. 잘못 봤겠지요. 하지만 잘못 본 것이다, 착각이다, 하면 기미후사 경을 안고 있던 여인은 살아있는 인간이 되지 않습니까?" 
그럴 것이다.

 

- 노인이 말을 이었다.
"그러면 이야기가 당장에 세속적이 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인가 싶겠지요. 왜 그런 행동을 했냐고 하겠지요. 그러면 지금 겐노신 씨가 하신 이야기처럼 쓸데없이 뒤를 캐게 되고 투박한 억측도 생길 겁니다. 그건 좀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겐노신이 고개를 들었다. 눈썹이 팔자가 되어 있다.
"차라리 요, 요물인 걸로 해두라는 말씀입니까?"
"요물의 자식... 이건 요즘 같은 문명개화 시대에는 단순한 차별이지만, 옛날에는 다정함이기도 했습니다. 예전에는 두 가지 역할을 갖고 있었지요. 지금은 한쪽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다만 그 여자가 백로였다 해도 지금 기미사 경의 입장이 나빠지는 일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요지로 씨가 찾아오신 <우라미칸와>나 <미미부쿠로> 같은 걸 보여드리고 백로는 빛을 발하며 때로는 사람으로 변하기도 하는 존재라고 옛날부터 전해옵니다... 하고 설명해 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요지로는 늘 그렇듯 잇파쿠 옹의 말에 감복했다.
실제로 그렇게 보였다면, 그렇다고 줄곧 믿었다면 그걸로 좋지 않은가.
그렇게 비합리적인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덮어놓고 부정한다 해서 그 기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이 환시나 환청 종류였다 해도 당사자에게는 현실의 기억이다. 오히려 비슷한 예를 찾아 알려주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 쓸데없고 투박한...
'그런 게 문명개화인가' 하고 요지로는 생각했다.
"뭣하면 다른 자료도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노인은 사요를 불렀다. 그런 문헌이야 차고 넘칠 정도로 많다.
사요가 장지문을 여는 것과 거의 동시에 겐노신이 "하지만" 하고 입을 뗐다.

- "아니, 노인장의 말씀은 하나같이 다 지당하다 생각합니다. 생각은 합니다만 그러면 그 이십 년 뒤의 이야기는 뭐라 설명하면 좋을지."
요지로 입에서도 "아아" 하는 말이 나왔다.
그 문제도 있었다.
"이십 년 뒤라니 무슨 일이지요?"
노인은 무엇 때문인지 당황하더니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요를 올려다보았다.

- 주위가 순식간에 다갈색으로 변하더니 이윽고 서쪽 하늘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밤의 장막이 내려오기 조금 전.

어슴푸레한 해 질 녘 황무지의 모습을 눈앞에 두고.
기미후사경은 갑자기 잊고 있던 정경을 떠올렸다고 한다.
빛나는 여자. 그리고 빛나는 새.
땅에 넙죽 엎드린 아버지.
비명을 질렀다... 고 한다.

- 당연하리라고 요지로는 생각했다.
어릴 때 성격이 평생 간다고 한다. 서너 살 된 아이도 인격은 이미 갖추고 있게 마련이다. 그 시절부터 줄곧 머리 한구석을 지배하던 낡고 오래된 기억이 갑자기 실제 풍경으로 눈앞에 펼쳐졌다면... 그것도 우연히.
그때 기미후사 경의 마음을 상상하기만 해도 요지로는 어질어질했다.

다색 판화 속에 섞여 들어온 느낌이었을까? 소설책의 등장인물과 마주한 기분이었을까?
이것이야말로 기묘한 우연이리라.
하지만 기묘한 우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 기미후사 경은 황무지로 들어가 여기저기 걸어 다녔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비교해 볼 정도로 선명하게 장소와 정경을 기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확인하고 싶었다고 한다.
착각이었을지도 모르니까.
요지로도 그건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엇비슷한 장소는 얼마든지 있다. 어지간한 표식이라도 없는 다음에야 어디에 나 있든 나무와 풀은 나무나 풀이다. 

- 그리고.
기미후사 경은 그것을 보고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고 한다. 다리만 쓸 수 없었던 것이 아니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호흡까지 순간 멈추었다.
어둠이 서서히 짙어지는 황무지 저쪽 편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고 한다.

불꽃은 아니다. 무언가가 반사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흡사 연극에서 쓰는 장뇌 불처럼 창백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 똑같다.
직감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물론 어렸을 때 본 여자의, 백로의 빛과.

이윽고 빛 속에서 그림자가 두 개 나타났다.

하나는 역시 창백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칠흑이었다.
칠흑 같은 그림자는 전혀 못 움직이고 있는 기미후사 경에게 소리 없이 다가오더니 깊이 고개를 숙이고 이런 이름을 댔다고 한다.

[소생은 구마노 신사의 신을 모시는 야타가라스라 합니다.]

 

- 습원은 이미 짙은 어둠에 휩싸여 컴컴했다.
처음부터 검은 야타가라스는 먹으로 칠한 것 같은 칠흑 덩어리였다.
 
까마귀는 또 이렇게 말했다.
[저것은 태고부터 이 땅에 살고 있는 푸른 백로.]
[나는 스와의 신을 받드는 미나카타(南方)의 백로요.]

- 빛나고 있던 건.
여자였다. 그때와 똑같은 여자였다.

- 기미후사경은 그 시점에서 의심을 거두었다.
그 뒤로 이십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본 여자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고 기미후사경은 겐노신에게 말했다고 한다.
주변은 이미 어두웠고 남자 쪽은 새까맸지만 여자는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얼굴도 보였다고 한다.
어떤 얼굴이냐고 묻는다면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명료하게 떠올릴 수 있다고 기미후사 경은 말했다고 한다.

- [오랜만에 뵙습니다.]
야타가라스가 말했다.
[기미후사 님이 튼튼하게 자라주신 것 같으니 무엇보다 다행입니다. 
소생도 기쁩니다.
다만.
이 땅은 기미후사 님이 오실 곳이 아닙니다.]

 

- 까마귀는 기미사 경에게 이렇게 고했다고 한다.
[이곳은 다른 신이 계신 땅,
기미후사님은 이미 저쪽 세계에 속하신 분.
결코 발을 들여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 까마귀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방울을 짤랑 울렸다.
그 순간 몸을 묶고 있던 눈에 보이지 않는 사슬이 풀리더니 기미후사 경은 정신을 잃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무너져 내리는 그 짧은 순간에...
기미후사 경은 밤하늘로 날아가는 빛나는 백로를 또다시 보았다. 넓고 넓은 밤하늘로.
정신이 들었을 때 기미후사 경은 쓰에쓰키 고개 기슭의 후나토 바위라는 바위 옆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 "이것을 끝으로 기미사 경은 여행을 그만두었다고 하셨습니다."

겐노신은 이렇게 이야기를 맺었다.
겐노신이 이야기를 끝내고 나서도 노인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요 또한 노인 옆에 앉아 잠자코 있었다.

- 노인은 눈을 감고 고개를 위로 향하며 말했다.
"야타가라스라는 이름을 댔습니까?"
"그렇다고 하셨습니다만, 그게 왜?"
"아닙니다."
대답하는 노인의 목소리는 명백히 동요하고 있었다. 

"그건 언제 있었던 일입니까?"

- "아아, 그쪽은 전에 검잡이가 말했던 대로 효제숙 학생이었던 모양입니다."
"소베 씨 말씀이 맞았습니까?"
"네, 이번에는 딱 적중했습니다. 달아난 사내는 숙장인 유라 기미아쓰 씨의 동문인 야마가타라는 사족인데, 기미아쓰 씨가 한때 가르침을 받았던 유학자의 집에 살면서 가사를 도우며 배우던 제자, 말하자면 사제 같은 사람입니다. 지금은 기미아쓰 씨의 문하생이 되어 효제숙 지배인 일을 하고 있지요." 
"어쨌든 기미후사 경 아드님의 제자들이라는 말이군요. 한데 무얼하고 싶었던 걸까요?"

 

- "소베 씨가 혹시?"
"네... 문하생이 줄어든 울분도 풀 겸 아주 거칠게... 이렇게 말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뭐, 생긴 얼굴이 그렇다 보니 협박하지 말라는 게 무리이고, 얼굴을 마주하고 추궁하다 보면 대개는 협박이 되기는 합니다마는 요는 죄를 묻지 않게끔 도쿄 경시국 본서에는 자기가 잘 말해줄 테니 사실대로 불라고 마치 옛날 깡패들 같은 짓을 했습니다." 
상냥하게 물어봤을 뿐이라고 본인은 이야기하지만 그 편이 오히려 더 무섭지 않을까, 하고 요지로는 생각한다.
"전부 스승인 유라 선생님에 대한 충성심에서 비롯된 행동인 모양입니다."

 
- "사숙이라는 건 돈벌이가 안 됩니다. 뜻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렇습니다. 소베의 도장 같은 곳은 뜻이 낮으니까 동네 아이들을 그러모아 봉을 휘두르게 하고는 공돈을 우려내거나 경시국 본서에 쳐들어가서 검술 지도를 강매하기도 하고 종내에는 길거리에서 발검술을 선보이는 등, 뭐 그런 활용이 가능하지요. 하지만 효제숙이 가르치는 것은 유학입니다. 효제충신, 예를 다하고 의를 중시하는 성인군자의 가르침을 배우는 곳이니까요." 
"뭐, 유학자는 가난한 법이지요."
노인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사숙을 여는 데도 그럭저럭 자금이 들어갔어요. 사숙 쪽은 번성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빚이 도통 없어지지 않습니다. 친척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부뚜막의 불이 꺼져버려요. 하지만 한번 시작한 이상, 또 평판을 얻은 이상, 문을 닫을 수도 없습니다." 
"체면이라는 겁니까?"
"체면이지요."

- "그래서 기미아쓰 씨는 예의 보물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보물을 독차지하겠다든지 그런 건 아니라고 그 야마가타라는 지배인은 말했다고 하지만요. 요컨대 친척에게 빌린 돈도 갚고 사숙 쪽도 무료로 개방하겠다는 뭐 독장수셈을 한 겁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장소를 모르지 않나요?"
사요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서..."
"기미후사경의 신기한 추억... 이군요."
노인이 무척 슬픈 듯이 말하고 사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바로 그겁니다. 기미후사 경은 지금껏 아드님에게 그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줄곧 가슴에 품고 살아오셨습니다. 세상의 유학자들은 함부로 괴력난신을 입에 담지 않는 법이지요. 하지만 연세가 들어서 마음이 약해지셨는지, 요직에서 물러나서 기가 쇠하신 건지."

 

- "늙으면 말입니다."
잇파쿠 옹이 주름진 얼굴을 들고 노래하듯 말했다.
"어제의 숫자가 많아집니다. 내일이 오면 오늘이 어제가 되지 않습니까. 모레가 오면 내일도 어제가 되겠지요. 글피가 되면 이제 오늘도, 내일도 다 똑같아집니다. 같은 이치로, 몇십 년씩 살다 보면 옛날이라는 건 다 같은 값이 됩니다. 오랜 옛날의 기억과 어제의 기억이 같은 곳에 늘어서게 되지요. 그러니까 더 선명하고 더 생생한 기억 쪽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 추억이 가슴속에 떠오르게 됩니다. 그걸로 아, 나는 살아있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거지요." 
요지로는 그런 기분을 조금쯤은 알 것 같았다.
알기는 하지만 실감은 없다.

- "마타이치 씨라니. 그러면..."
"네, 그건 연극이었습니다."
역시.
그랬나.
요지로가 마른침을 삼켰다.

 

- "그, 그건 대체 어떤... 아, 그게."
물어서는 안 되는 일인가.
"당신도 정말 호기심이 많은 분입니다."

모모스케 노인이 요지로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저도 젊었을 때는 당신과 똑같았습니다. 그런 눈을 하고 남에게 묻기만 했지요. 그것도 엄청 망설이면서요. 망설이고 망설이다 결국 이렇게 죽지 못해 살면서도 아직 망설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은 잘 압니다." 

- 그 일은...
노인이 눈을 감고 이야기했다.

- 그 일은 말이지요.
아마도 제가 관여한... 그렇지, 마지막 속임수였습니다. 네.
그 뒤 마타이치 씨는 뭔가 큰일에 착수했는지 그대로 제 앞에서 모습을 감췄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어디 보자, 기타바야시에서 있었던 큰 사건으로부터 사 년쯤 후였을까요. 
네. 아니, 겐노신 씨가 요전에 하신 추측이 얼추 맞았습니다. 네, 과연 혜안이었지요.
다만 전부 들어맞았냐고 한다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틀린 부분도 있습니다.
빗나간 건 다네후사 경의 상대였던 아가씨의 태생입니다. 다네후사 경의 상대는 지방 향사의 따님 같은 게 아니었습니다.
네. 신분이 다른 사람끼리의 연애이기는 했지만요. 

 

- 하지만 그건 글쎄 일종의 모략... 이라고 할까요.
후우, 좋은 말을 못 찾겠습니다.
이 나라는 지금이야 하나의 나라인 척하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일전의 산사람 같은 경우도 그랬지만 조정이나 막부와는 관계없이 살던 사람도 있었나 하면 이른바 복종하지 않는 민족도 많이 있었습니다. 
조정이 모시는 신과는 다른 신을 받드는 이들도 적잖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스와 근방에서는 매우 오래된 신을 모시기도 하고, 실제로 지금도 그에 대한 신앙이 있지 않습니까. 
공들여 조사해 보면 그런 옛날 옛적의 신들이 꽤 있습니다.
아니, 모시는 존재가 다르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다른 나라인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융합되거나 대체되기도 하고 흡수되거나 내용물이 없어지기도 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타협이 이루어지는데, 그 가운데에는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네. 개중에는 가령 조정에 깊은 원한을 지닌 자도 있겠지요. 뭐니 뭐니 해도 이 나라의 신을 모시는 가장 근본은 천자님이니까요. 

- 네. 그러니까 말이지요.
조정의 적이라고 하면 막부군이 아닐까 하겠지만 그보다 훨씬, 훨씬 더 오래된 원한과 오래된 반목이라 할까요. 네. 
그런 게 남아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 아니, 아니, 그렇게 최근 이야기가 아닙니다.
네. 아니,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즈모의 신도 천손(天孫)에게 나라를 양보하셨지 않습니까.
그런 건 신화시대 이야기라고요?
그렇지요, 신화시대 이야기입니다. 신화시대에 있던 신들 사이의 반목을 계속 가지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던 겁니다. 
네, 있었습니다. 그런 일족이 천황에게 복수를 하려고 했다. 이것이 발단입니다.

- 허어, 그렇게 규모가 큰 이야기냐고요?
아니, 크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어느 시대나 그리 다르지 않겠지요. 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뭐, 그런 일족이 있었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그런데 그 무렵은 시대가 크게 변하기 전이지 않습니까? 네, 유신이 싹을 틔우기 삼십 년쯤 전 일입니다. 네, 하지만 이건 축제 전날 같은 거지요. 여기저기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흉흉한 냄새가 나는 연기가 여기저기서 피어오릅니다. 또 실제로 정부의 기반도 느슨해졌음을 알 수 있었겠지요. 
믿지 못하시겠지만, 그런 겁니다.

- 아아, 요지로 씨 같은 분은 실감이 안 날지도 모르겠네요.
요지로 씨와 친구분들은 요컨대 막부 말기에 태어나서 자랐으니까요. 안정된 시기, 천하태평이라는 걸 경험하지 못했겠지요.
저 같은 경우 인생의 절반은 세상이 견고했습니다. 시대가 바뀌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남은 반은 달랐어요. 
땅바닥인 줄만 알았던 발밑이 갑자기 뱃바닥이 되는 기분입니다. 
네. 널빤지 한 장 밑은 바다인 셈이지요. 언제 뒤집어질지 모릅니다. 정부가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예감 같은 건 백성들에게도 뭐 없지는 않았습니다. 

- 마타이치 씨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처녀는 아기를 데리고 일족에게 돌아간 것 같습니다. 그자들은 산에서 산으로 떠도는 유랑민이었는데, 그때는 교토와 비교적 가까운 가쓰라기 산 부근에 있었습니다. 
네, 금방 압니다, 모사꾼은. 산속에서 수행하는 승려에 고철 장수, 덴바모노, 머리를 깎지 않은 반반승에 염불, 산묘회까지 다들 마타이치 씨와 이어져 있습니다. 
네. 처녀는 돌아오기는 했지만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결코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네? 아, 길에서 험한 일을 당하여 아이가 생겼다. 아기에게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니 차마 뗄 수도 없어서 소임도 다하지 못한 채 마지못해 돌아왔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합니다. 
네. 사실대로 말했다면 아기는 죽임을 당했을 테니까요.
네, 이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느 쪽에도 진실을 알릴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모사꾼은 계획을 하나 짜냈습니다. 
네, 늘 하는 그거지요.
그렇습니다, 모든 일을 요괴의 소행으로 돌린다. 그걸로 원만하게 수습하기로 하고 속임수를 생각해 냈습니다.

- 그런데 말입니다.
네, 잘 안 되는 일도 있습니다.
아, 마타이치 씨가 실수를 한 게 아닙니다. 네, 그 집단이 분열되어 버렸습니다.
아니, 분열되었다는 말은 좀 틀리군요.  

- 직위를 빼앗기고 조슈(長州)로 달아났지만 유라 기미후사 경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황정복고 이후 달아난 일곱 명은 즉시 중앙으로 복귀해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기미후사 경은 구태여 서두르거나 눈에 띄는 일 없이 그저 담담히 직무를 수행한 감이 있다. 유신 후에도 곧장 정계에서 물러났다.
현실보다는 상념, 미래보다 과거, 차안보다 피안.

기미후사 경은 여행을 좋아하고 늘 책을 읽곤 했다고 한다. 그런 분에게 정치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모모스케는 기미후사 경에게서 자신과 같은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모모스케는 똑같은 냄새를 요지로에게서도 맡는다.

- "진실은 알 수 없지만요."
모모스케가 말했다.
"알 수 없습니까?"
"네,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 "뭐, 기구한 운명이라 할까요. 기미후사 경이라는 분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태생이지만, 본인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거군요. 아는 사람은..."
"저와 당신, 그리고."
 마타이치.

- "아니, 그, 이십 년 후에 기미후사경이 그 다테시나 산을 찾아갔을 때 나온 야타가라스와 푸른 백로는..."
"아아."
[야타가라스라 합니다.]

 

- 그건.
마타이치이다.
모모스케 앞에서 모습을 감춘 어행사 마타이치이다.
다테시나에서 돌아온 마타이치는 대단히 큰일을 마치고 나서 기타바야시 성 뒷산에서 등명 고에몬의 임종을 지켜본 뒤 모모스케 앞에서 사라졌다. 
떠나면서 마타이치는 야타가라스라는 이름을 댔다.
그 후의 소식은 모른다. 모모스케는 여행을 그만두고 그 뒤로는 에도에 머물며 낮의 세계에서 살아왔다.

- "그건 마타이치 씨입니다."
모모스케가 말했다.
말한 순간 눈물이 나왔다.
"마타이치 씨라니... 하지만 어르신, 이십 년이나 지났습니다. 그런데 왜..."
"마타이치 씨는 그런 사람입니다."

- "한 번 관여한 일에는 끝까지 계속 관여하고 일은 빈틈없이 완성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기미후사 경의 동향도 이십 년 동안 줄곧 신경을 쓰고 있었겠지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마타이치 씨에게 협력하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신분이 없는 자, 산사람, 물사람, 모두 모사꾼의... 아니, 야타가라스의 협력자입니다." 
"그러면 기미후사경은 감시당하고 있었다고...?"
"감시가 아닙니다."
그래, 아마도 감시한 것은 아닐 터다.
"신경을 쓰고 있었다... 고 하면 될까요."

- "알겠습니까, 요지로 씨. 한 장의 종잇조각, 세 치 혀만으로도 사람의 일생이라는 건 크게 바뀌고 맙니다. 마타이치 씨가 하는 모사꾼이란 그런 일을 의도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각오도 필요하고 책임도 필요합니다. 경솔한 말 한 마디나 생각 없이 한 분별없는 행동으로 사람은 간단히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합니다. 마타이치 씨는 그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아무래도 그런 부분이 경솔했지만요. 뭐, 어쨌든 기미후사 경 같은 경우에는 삶이 시작되는 시점에 크게 관여하기도 했고..."
"분명 어르신이나 마타이치 씨가 관여하지 않았다면... 그렇군요, 기미후사경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겠지요."
"네, 맞습니다. 그러니까 마타이치 씨가 보기에는... 그렇지, 관여하는 바람에 그 사람이 불행해진다면 그 일은 실패한 겁니다. 저쪽을 세우면 이쪽이 서지 않는, 사방이 꽉 막힌 상황에서 양쪽을 다 세우고 탈 없이 두루 원만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모사꾼의 신조이니까요." 

 

- "그래서 신경을 썼다고요? 줄곧 말입니까?"
줄곧 그랬을 것이다.
"그렇겠지요. 가령 무슨 일을 계기로 미나카타 무리가 진실을 알게 되었다면 어떤 행동을 취할지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기미후사 경에게 해가 미치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 그런 일은 가능한 한 막아야 합니다."
그렇다. 마타이치는 특히 장치를 꾸미는 것이 늦어지는 바람에 사람이 목숨을 잃는 일을 무엇보다도 싫어했다. 아니,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이건 추측인데, 마타이치 씨는 기미후사 경이 신슈로 여행을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장 뒤를 쫓았을 겁니다.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 "네, 보물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있었지요."
"그 미나카타 무리요?"
"네. 아마 미나카타 무리는 기미후사 경이 더듬어 간 길 어딘가에 정착해서 살고 있었겠지요. 기미후사 경이 그들과 접촉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뭐, 어쨌든 산사람이니까 보통은 마을 사람과 교류하지 않을 테지만, 기미후사 경의 여행은 좀 뭐랄까." 
"색달랐다는 뜻입니까?"


- 색달랐을 것이다.
모모스케는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요지로도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아니나 다를까 기미사 경은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미나카타 무리와 만나지는 않았지만 그 장소에 다다른 겁니다."
"그렇구나. 거기서 무언가를 떠올리거나 캐내기 시작하면 곤란하다고..."
"네. 찾다 보면 뭔가는 알게 됩니다. 그러면 현실에 틈이 벌어지지요. 틈이 벌어지면 현실이 거짓이 됩니다. 끝까지 속일 수 없게 됩니다. 끝까지 속이지 못하면 모사는 그냥 거짓. 거짓을 진실로 바꾸기 위해서는 끝까지 거짓말을 하는 방법 말고 다른 길은 없습니다."

- 어차피.
[어차피 사람의 세상은 슬픈 것. 그러니까 소인은...]
마타이치는.

- "그래서 다시 백로 연극을?"
"네. 그러면 기미후사 경도 더는 쓸데없이 캐내려 하지 않겠지요. 실제로 기미후사 경은 그 뒤로 여행을 그만두지 않았습니까?"
나와 똑같다고 모모스케는 생각했다.

- "그러면 그때도 역시 까마귀는 마타이치 씨, 백로는 오긴 씨... 였습니까?"
"글쎄요. 거기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모모스케는 이렇게 말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 마타이치는 살아있었다. 적어도 이십몇 년 전까지는 잘 살아있었다. 그리고 그 옛날 그 시절과 똑같이...
어쩌면.
모모스케도.
어딘가에서 보고 있었을까.

 

-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도...
지금도 역시.


- 모모스케는 고개를 들고 의미 없이 위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요 씨" 하고 불렀다.
"두 번째 백로는 어쩌면 당신의 어머니일지도 모릅니다."

"네."
사요는 조그맣게 대답했다.
요지로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렇습니까"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 <오품의 빛>

 

 

 

 

 

바람을 타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사람을 보면 입에서 노란 바람을 뿜는다.

그 바람에 맞으면 반드시 역병에 걸린다고 한다
 
회본백물어(繪本百物語)·도산진야화(桃山人夜話) / 제5권 39

 
 

- 옛날. 
백 가지 이야기라는 놀이가 유행했습니다.
누가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박식한 사람이나 호사가가 즐기던 좌흥이었습니다.
물론 놀이니까 재미있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겠지요.

하지만 이것은 그냥 유쾌하기만 한 좌흥이 아니었습니다.

 

- 왜냐하면,
무섭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 백 가지 이야기란 백 가지 괴이한 이야기, 무시무시한 이야기, 기묘한 이야기를 하룻밤 사이에 죄다 이야기하는 취지의 괴담 모임이었습니다.
게다가 단순한 괴담 모임이 아니었습니다.
백 가지 괴이한 일을 이야기하면 이야기를 마치는 찰나 그 자리에 기이한 일이 일어난다고, 이상한 존재가 나타난다고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백 가지 이야기라는 것은 괴상한 일을 일으키기 위해 고안된 관습이자 무시무시한 주술이기도 했습니다. 

- 이상한 일, 기이한 현상.
원인을 모르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치를 헤아릴 수 없는
인간의 지식을 넘어서는 불가사의한 사실, 사람은 끼어들 수 없는 이해 불가능한 사건.
이것을 사람 손으로 일으키려는 것이 백 가지 이야기의 시초였습니다.

 

- 예로부터 괴이한 이야기를 하면 괴이한 일이 생긴다고 합니다.
사람이 괴이한 일을 불러들입니다.
재앙을 끌어당깁니다.
요괴를 깨웁니다.
이것이 백 가지 이야기였습니다.

- 다만.
괴이한 일이란 대체 무엇인가, 기이한 것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를 아는 사람은 어디에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요괴가 나온다고 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망령이 깃든다고 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아니다, 그 자리에 재액이 내리는 것이다. 누군가가 죽는다고 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참가한 사람뿐 아니라 친지에게도 화가 미쳐 악령이 든다고 하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누구도 몰랐습니다.


- 어차피 놀이인 까닭에 끝까지 해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도, 아니, 완수한 사람은 다들 무서워서 이야기하지 않는다고도 했습니다. 모두 목숨을 잃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것은 세상의 소문, 항간에 떠도는 소리였습니다.  
아무도 몰랐습니다.
머지않아 사람들은 어차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백 가지 이야기는 유행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 어느 날, 어느 때.
식자와 현자가 모여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야기가 수상쩍어졌습니다. 말을 하고 논의를 하다 보니 옛날에 유행하던 백 가지 이야기의 진위를 시험해 보자는 별난 결론이 나왔습니다. 
과연 괴이한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일어난다면 그때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쯤에서 한번 담력 시험 삼아 옛날 방식에 따라 백 가지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지요.

 

- 방식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는 것은 달빛 어두운 밤.
푸른 종이를 바른 사방등에 심지를 백 가닥.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등불이 백 개.
백 개의 등이 발하는 푸르고 푸른 음광으로 방 안을 푸르게 물들이며, 자리에 모인 사람이 한 명씩 괴담이고 기담을 이야기하는 것이 다입니다.

 

- 괴이한 이야기입니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를 하나 하면.
한 가닥을 뽑습니다.
이야기를 하나 하면.
한 가닥을 뽑습니다.
푸르게 물든 방 안은 서서히 서서히 어두워졌습니다.

-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비웃었습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봤자, 암만 들어봤자 무슨 일이 일어날 턱이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요괴가 있을 리 없고, 하물며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괴이한 일이 일어날 턱도 없다. 이런 것쯤 다들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가슴 깊은 곳에서는 조금, 아주 조금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 괴담은 지어낸 이야기. 그렇지 않다면 옛날이야기. 설사 정말로 있었던 일, 이 눈과 이 귀로 보고 들은 일이라고 한들 대개는 과거에 있었던 일, 그 개인의 일. 들으면 무섭지만 남의 일. 모든 것은 이야기하는 사람에 달린 것. 이야기는 속임수. 무서워봤자 거짓말은 거짓말.

하지만.
혹여 이 자리에서 괴이한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우리 일, 현재의 일.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조금쯤 의심하고 조금쯤 겁을 먹었습니다.

- 이윽고.
밤이 깊어지자 방은 한층 더 어두워지고 어슴푸레한 불빛도 마지막 한 가닥이 남았습니다.
마지막 화자가 백 번째 이야기를 끝낸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훅, 하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던 심지의 불이 뽑기도 전에 꺼졌습니다.

- 그뿐이었습니다. 오직 그뿐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김이 빠져서 마지막에는 저마다 욕을 퍼부었습니다. 역시 미신이었다, 바보 같다, 기대해서 손해를 봤다, 겁을 내서 창피를 당했다, 어차피 얼토당토않은 허망일 뿐이었다, 하면서. 

- 하지만,
사방이 닫힌 방 안에 어째서 바람이 불었나? 왜 마지막 심지만이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딱 맞춰서 꺼졌나?
아무도 희안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바람이 불었을 뿐, 무섭지도 않거니와 곤란하지도 않습니다. 괴이쩍지도 않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누구나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누구 하나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 바람은 실은 바람신이 불게 한 바람이었습니다.
그 뒤로 신은 없어졌다고 합니다.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신은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 연향 초기, 우마야바시 성 안에서 젊은 무사들이 당직을 서고 있었다. 비가 많이 와서 무서운 밤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늘 그렇듯 괴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중에 나카하라 주다유라는 사람은 좌중의 선배이자 아주 용감한 사람이었다. 그가 제안했다. 세상에 요괴가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하여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오늘 밤은 어쩐지 무서우니 세상에서 말하는 백 가지 이야기라는 것을 해서 요괴가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시험해 보자. 하나같이 혈기왕성한 남자들이라 각자 용감하게 한번 해보자고 했다. 우선 푸른 종이로 사방등의 입구를 덮고 옆에 거울을 하나 세운다. 이것을 다섯 칸이나 안쪽에 있는 객실에 놓고, 정해진 대로 심지를 백 가닥 넣었다. 한 가닥씩 끄고 나면 거울을 꺼내어 자기 얼굴을 보고 물러나야 한다. 물론 그 사이에는 등불을 두지 않아 어둡게 한다. 이렇게 전해져 오는 형식에 맞게 방식과 절차를 정하고... 

- "잠깐."
이야기를 끊은 사람은 겐노신이었다.
"요지로, 그건 어떤 문헌인가?"
"어떤 문헌이냐고 물으면 뭐라 답하면 좋은가?"
"글쎄 여러 가지가 있지 않나."

이렇게 말하면서 순사는 얼마간 훌륭해진 수염을 정돈했다.

"지어낸 이야기인가, 수필인가, 아니면 그..."

 

- "괴담이야."
요지로가 대답했다.
이러니저러니 둘러댄들 소용없는 일이다.
어느 잘나신 분이 이야기했든, 누가 듣고 기록했든, 언제 어떤 상황에서 쓰인 문서든 간에 괴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단계에서 그것은 말 그대로 괴이해져 버린다. 

 

- 요지로는 생각한다. 정사 패사든 기이하다고 기록한 이상 그 나름의 이유가 있으리라고. 어떤 이유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일어난 일이 괴이하거나 괴이해야만 체면이나 사정이 서는 경우가 쓰는 사람, 읽는 사람에게 있기 때문에 굳이 괴이하다고 쓰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버려 두면 된다. 큰 나무가 갈라지건 분묘가 소리를 내며 움직이건 "아아, 그런가요?" 하면서 끝내면 그만이다. 그것을 그냥 넘기지 않고 괴이한 일이라고 기록할 만한 대의명분이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있을 터이다. 그리고 그런 대의명분을 낳는 배경은 시대가 바뀌면 바뀌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괴이한 일이 왜 괴이한 일로 간주되었는지는 모르게 된다. 

- "무슨 일은 있었지만 아무 영향도 없었네. 아버지는 그냥 은퇴한 노인일세. 괘념할 필요도 없어."
"끈덕지구먼. 그래서 이번에도 황족님 관련이지만 이렇게 불렀지 않나. 이제 좀 봐주게. 대관절 나는 지금 요지로가 읽은 문서에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네. 요지로가 미리 앞질러서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하니까." 
겐노신이 우는 상을 했다.
"늘 하던 짓이 있으니 그렇지."
소베가 말했다.
"요지로가 고생해서 찾아온 것에 자네들은 트집만 잡지 않는가? 요지로도 진절머리가 날 만해. 그렇지 않나, 요지로?"

- 요지로는 동의하기는커녕 약간 흥이 깨졌다.
소베는 본인만 쏙 빼놓고 말하고 있다. 확실히 겐노신도 말수가 많은 사내이지만 그나마 나은 편이고, 평소 요지로 규탄에 가장 앞장서는 사람은 주로 이 야비한 검잡이이다. 
뭔가 말을 할 때마다 꼭 한 마디씩 돌아온다. 요지로는 다른 두 사람과는 달리 놀리는 보람이 없는지 입씨름도 되지 않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지만, 소베가 나쁘게 말하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 "잘 기억나지는 않네만 자네 둘은 곧잘 백 가지 이야기라는 걸 입에 담지. 여러 지방이니, 근세이니, 태평이니, 평판이니 하는 것도 있었네. 이건 책 제목이지?" 
"책 제목이네."
겐노신이 대답했다.
"그건 전부 책 이름이야. 뭐 <햐쿠모노가타리효반(百物語評判)>은 조금 성질이 다르지만, 나머지는 비슷한 종류이기는 해. 그러니까 그 백 가지 이야기물이라는 것이 아마 어느 시기에 유행했겠지."

- "자네들, 뭘 모르는군. 백 가지 이야기 책이라는 건 백 가지 이야기의 형식을 흉내 낸 책을 가리키네. 요컨대 이야기를 백 개 모아서 정리한 책이야."
"반드시 백 가지는 아닐세. 백 개를 수록한 책은 <쇼코쿠햐쿠모노가타리(諸國百物語)> 뿐이네. 다른 건 모자라. 요컨대..."
요지로가 이의를 제기했다.
"많다는 뜻인가? 이제 좀 알겠네. 원수를 보고 백 년의 원수라거나, 술은 백약지장(百藥之長) 같은 것이구먼. 케케묵은 비유에서는 수가 많아지면 거의가 백이지." 

- "심히 의심스럽네. 요컨대 겁을 주기 위해 쓰인 글이 대부분인 셈이니, 원래는 사실이라도 꾸미기도 하고 바꾸기도 하네. 교훈도 섞이지. 그런 걸세."
"그러면 지금 읽은 것도 마찬가지 아닌가? 백 가지 이야기라는 제목은 아니지만 그것도 괴담이지 않나? 그... 늙은이의 지팡이인가 하는."
쇼마가 될 대로 되라는 듯 물었다.
"노인의 지팡이야."
겐노신이 정정했다.

- "이야기 줄거리는 차치하더라도 적혀 있는 절차에 차이는 없을 걸세. 아까 겐노신이 말하려 했지만 백 가지 이야기 괴담 모임을 다룬 이야기가 실려 있는 백 가지 이야기 책도 몇 권 있네. 다만 하나같이 비슷해서 말이야. 뭐, 가장 자세히 실려 있는 것을 소개했을 뿐이네." 
"하지만 지어낸 이야기일 경우, 절차 자체를 창작했을 가능성은 없는가?"
"없을걸."

- 평소에는 부화뇌동하여 곧장 물러나는 요지로가 오늘만큼은 아주 강경해서 조금 뜻밖이라고 생각한 듯 쇼마가 나태한 자세를 조금 가다듬었다.
"왜인가, 요지로?"
"굳이 그렇게 귀찮은 짓을 한다고 해서 이야기가 재미있어지는 것도 아니잖은가. 오히려 신빙성이 없어지지 않겠나? 들어보게. 창작이라면 더더욱 작중에 나오는 절차 묘사를 신용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네."  
"그 이유는?"
"이유고 뭐고 없네. 뭐, 이건 괴담이니까. 아까 읽은 부분 뒤에 무시무시하고 이상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때까지 들어본 적도 없는 절차가 묘사되어 있어서야 되레 흥이 꺾일 것 같지 않나?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 뒤에 일어나는 괴현상이 무서운 걸세. 아닌가?"
"뭐, 이치에 맞는군."
쇼마가 순순히 물러섰다.

- "이 <노인의 지팡이>의 기술에 따르면 거울을 하나 세운다고 되어있지 않나? 그 부분이 다른 책과 달라. 다른 책은 대체로 비슷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예컨대 아사이 료이(淺井了意)의 <오토기보코(伽婢子)>를 읽어보면."
요지로는 다음 책을 꺼냈다.
야겐보리의 은거 영감에게 미리 빌려서 준비해 둔 책이다.
"아사이 료이는 알겠지? 유명한 구사조시(草双紙) 작가이네. <오토기보코>도 괴담집인데 마지막에 <괴이한 일을 이야기하면 괴이한 일이 일어난다>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네. 이건 <오조소설(五朝小說)>에 원래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네만."
이런 지식도 잇파쿠 옹에게 배웠다. 배웠다기보다는 그대로 받아 옮기는 것이지만.

- 요지로는 낭독했다.
[예로부터 사람들이 입으로 전하는 무시무시한 일, 기이한 일을 모아 백 가지를 이야기하면 반드시 무시무시한 일, 기이한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 백 가지 이야기에는 법식이 있다. 달빛 어두운 밤, 사방등에 불을 켜는데, 그 사방등에는 푸른 종이를 붙이고 백 가닥의 심지를 밝힌다. 이야기 하나에 심지를 한 가닥씩 뽑으면 좌중은 점점 어두워지고 푸른 종이 색깔이 변하면서 어쩐지 무서워진다. 그래도 이야기를 계속하다 보면 반드시 기이한 일,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진다고 한다...] 


- "거울은 없는 모양이군. 푸른 사방등뿐일세."
소베가 말했다.
"그러하네. 뭐, 이 《오토기보코》라는 책은 백 가지 이야기 책이 유행하기 조금 전에 나온 모양이니 말이네. 이 이후에 나온 것은 전부 대동소이해. 대부분이 푸른 종이를 바른 푸른 사방등에 심지 백 가닥이라는 장치이네."
 
-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야. 평소 생활에서는 그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어. 그렇기 때문에 무서워도 아무렇지 않네. 요괴를 만날 일도 없고, 변소 앞에서 곰이나 늑대가 나오지도 않거든. 우리는 그걸 경험하고 학습했네. 그러면서 살아가지. 어린아이에게는 그게 없네. 그래서 무턱대고 겁을 내는 걸세." 
여기서 쇼마는 이마에 주름을 만든 채 눈만 치켜떠서 겐노신 쪽을 보았다.
"우리는 매일 당연함 속에서 살고 있어. 그러니까 이 당연함이 당연하지 않게 되면 무서워지네. 알겠나, 겐노신, 아니, 수수께끼 순사 나리. 수수께끼라는 건 요컨대 알 수 없는 것 아닌가."
"알면 수수께끼가 아니지."

- "그렇지. 그럼 세상에 수수께끼란 없네. 모르는 것이 있을 뿐이야. 세상의 수수께끼는 대부분 그저 우리가 모르는 일이네. 그리고 남는 건 말일세."
양장을 한 사내는 방금 매만진 자기 머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눈을 가리켰다.
"착오, 오인, 오해이네. 환각, 환청이야. 착각이지. 비정상적인 상황에 놓인 사람은 그런 것을 보고 듣네. 뭐, 보고 듣는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러니." 

 

- 쇼마가 몸을 굽혔다. 일동이 따라서 몸을 앞으로 굽혔다. 생각해 보면 이것도 충분히 묘한 정경이다.
"잘 듣게. 꽉 닫아놓은 방에 사람들이 몇 명씩이나 정연하게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선 일상적인 모습이 아닐세. 게다가 밤이야 조용하지. 거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겐노신이나 요지로가 좋아하는,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기괴한 이야기나 참으로 꺼림칙하고 음산한 이야기, 차마 듣기 힘든 내밀한 이야기이지 않나. 목소리도 낮아지고 좌중도 고요할 테지." 

쇼마의 목소리 자체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맞대게 된다.
"게다가 말이야.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네. 사위가 보이지 않게 되는 걸세."
쇼마가 드물게 신묘한 얼굴이다. 겐노신과 소베도 진지한 얼굴을 하기 시작했다.
"머잖아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누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게 되겠지. 요컨대 이건 황혼 녘이 밤으로 바뀌는 것과 매한가지야. 조금씩, 조금씩 어둠이 밀려오네. 거기에..."


- "갑자기!" 하고 쇼마가 정말로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으악."
소리를 지른 사람은 소베였다. 요지로도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겐노신에 이르러서는 숨도 못 쉬고 눈만 부라리고 있다.
"뭐, 뭔가? 노, 놀랐지 않나."
"하하하, 놀랐지? 고작 이것만으로도 자네들은 놀랐네. 이게 그 백 가지 이야기가 끝날 무렵이었다면 어땠겠는가? 소베는 오줌을 싸고 겐노신은 일어나지도 못하지 않았겠나? 그렇지, 요지로?" 
쇼마가 유쾌하게 웃으며 요지로의 무릎을 두드렸다.
"말하자면 이런 거네. 평상시와 다른 상황을 짐짓 강조하면 돼. 거울을 두는 것이나 손가락을 묶는 것도 요컨대 그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야. 다만 아무것도 모르고 해서야 난잡해질 테니 일단은 규칙이 있는 걸세. 그게 백 개의 이야기를 하고 심지를 하나씩 끄는 절차야." 

 - "어느 책에나 나온다고 하지 않았나. 백 가지 이야기를 하면 마지막에 요괴가 나온다고 했나? 괴이한 일이 일어난다고 했던가.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네만 그런 이야기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면 말이네. 백 가지 이야기를 하자고 말만 해도 그걸 알겠지. 귀찮은 설명은 필요 없을 걸세. 그러니까 그 부분은 규칙이야. 분명." 
가볍게 말하고 쇼마가 히죽 웃었다. 그러고는 몸을 뻗어 명장지를 열며 말했다.
"이거 참 후덥지근하구먼."

- "요컨대 그럴싸하게 하면 된다, 이건가."
"이해가 빠르군."
쇼마가 뺨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비라도 올 건가? 뭐, 조금 무더웠던 참이니 딱 좋네... 응, 어쨌든 그렇겠지. 그러니까 그 백 가지라는 것도 뭐 아무래도 상관없을 걸세. 짧은 이야기여도 하룻밤에 백은 많겠지. 극장에서 하는 괴담 이야기 같은 경우 밤새 이야기해도 끝나지 않을 정도로 긴 것도 있지 않나."
"백 가지는 규칙이라고 말한 건 자네야, 쇼마. 그사이 말을 바꾸는가?"
이렇게 말하자 소베는 하의를 있는 대로 걷어 올렸다.
"그게 아닐세. 백이라는 건 표면적인 원칙이야. 뭐, 많다는 의미일 텐데 이야기하지 못할 정도의 수여야만 하네. 대여섯 개면 금세 끝나버리지 않나." 

- "구실이라니."
"이보게. 아무리 채비를 잘 갖추었다 한들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 뭐, 어지간히 잘해서 모든 사람들의 간이 콩알만 해졌다 해도, 적절한 시기에 뭔가 그럴싸한 일이라도 일어나면 모를까 대개는 아무 일도 없겠지. 일어난다, 일어난다, 일어날 것 같다, 무섭다 무섭다 하다가... 아침이 되는 걸세. 그럴 때는 뭐야, 거짓말 아닌가, 하고 저기 소베처럼 센 척하는 사람이 꼭 말하겠지. 그러니까 아니다, 무사한 건 백 개를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고."  

- 요지로는 쓰쿠모안을 찾아갔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반드시 넷이 함께 갔지만 요즘은 혼자서 찾아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겐노신 순사가 바빠지기도 했고, 소베 도장의 문하생이 조금 늘어나기도 한 덕분에 넷의 시간이 좀처럼 맞지 않게 된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지만 실상은 따로 있었으니, 요지로가 단독으로 가는 경우가 많아졌을 뿐이다. 
볼일이 없어도 찾아가고 싶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원래 요지로는 한 달에 한 번 이 암자에 오가곤 했다. 맨 처음에는 상관이 동행했지만 두 번째부터는 혼자 갔다. 얼마간의 돈을 전달할 뿐인 사소한 임무였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 무렵 요지로는 상투를 틀고 허리에 칼을 차고 있었다. 현관 앞에서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작은 비단 꾸러미를 내미는 것이 전부인 사이이기는 했지만... 

- 그립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옛 막부 시대가 좋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옛날이라는 건.
좋은 옛날이든 나쁜 옛날이든, 어떤 옛날이든 사랑스럽게 여겨지는 법이다. 이는 분명 자신의 뱃속이나 가슴속이나 머릿속에만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떠올리는 옛날은 전부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된 현실이야말로 옛날이다. 
요지로는 두 번 다시 칼 같은 건 차고 싶지 않다. 앞머리를 반달 모양으로 깎고 싶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상투는 괴상한 습속이다. 잘라버리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데도 귀밑털이 부풀어 있지 않으면 묘한 느낌이 들 때가 있고 이마에 머리카락이 닿는 것이 싫을 때도 있다. 허리 부근이 몹시 가볍게 여겨질 때가 있다. 

- 풍경 장수와 스쳐 지나거나.
수로가의 바람이 버드나무를 흔들거나.
그럴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옛날 소리, 옛날 냄새, 옛날 풍경... 이런 것들이 얄팍해져서 어딘가에 들어붙어 있는 요지로의 옛날에 스며들면 찰나에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리라. 사실은 지금의 소리이고 지금의 냄새이고 지금의 풍경이므로 만들어지는 것은 모조리 거짓 이야기이지만. 
사람들이 상기하는 과거란 분명 전부 거짓이다. 무언가를 보거나 듣고, 그립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래도.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인가.
요지로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듯 야겐보리를 찾는다.

- 슬슬 여름인가.
이런 생각을 했다. 특별히 여름 느낌이 나는 무언가와 마주친 것은 아니다.
뒷골목의 흙 색깔과 나무 그림자 아이들 노는 목소리의 울림.
이런 것들이 여름다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모른다. 그러니까 이것도 그냥 그렇게 믿었거나 착각했을 뿐인 거짓 계절감인지도 모른다. 

- 아무리 봐도 쓰쿠모안 문 바로 앞에 서 있다. 오랫동안 드나들었지만 이 조용한 집을 찾아오는 손님과 마주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요지로는 슬며시 동요했다.
요지로는 머뭇거리다 일단 옆길로 빠졌다. 

- 그렇군요. 과연, 중요한 부분에 주목하셨습니다.
네, 그렇겠지요. 백 가지 이야기라고 하는 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말하자면 무대 장치입니다. 미신이라기보다 이치에 맞는 것이겠지요.
네. 요지로 씨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특히 소베 씨 같은 경우는 쇼마 씨가 피력하는 서양 지식에 이런저런 이의를 다시기도 하지만, 진리에 동서양이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합리에 오래된 것도 새로운 것도 없지요. 옛날 사람이 하는 말, 옛날 사람이 믿은 것은 하나같이 다 미망이라고 하는 건 틀린 말일 겁니다. 옛날 사람에게 합리라면 지금 사람에게도 그건 합리. 설명하는 방식, 이해하기 위해 가져오는 논리가 다른 경우는 있겠지만,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요. 하물며 외국에서라고 다르지는 않으니까요.
서양 지식이니까 전부 새롭고 옳다는 주장은 틀렸겠지만요.
서양 지식이니까 틀렸다. 이국 물이 든 사람이 하는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겠다고 하는 것도 똑같이 틀렸지요.

 

- 오래되었든 낡았든, 누가 한 말이든, 옳은 것은 옳습니다. 뭐, 천연 자연의 이치란 구부러지지 않는 법입니다.
사람의 도리나 세상 풍습은 간단히 구부러지고 바뀌지만 말입니다. 네.
그렇지요. 뭐 신경 탓이겠지요.
그러니까 쇼마 씨가 하셨다는 말마따나 그렇게나 번거로운 관례를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같은 효과가 있다면 다른 법식도 유효하겠지요.
네.
같은 원리로 짜여 있기만 하다면 뭐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쇼마 씨가 말씀했듯 누구나가 그럭저럭 알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점이지요. 


- 올바른 절차는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백 가지 이야기를 알고 있지 않습니까?
밤중에 괴담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괴담 백 개를 이야기한다는 것.
서서히 방을 어둡게 만든다는 것.
백 번째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
아니, 잘못 말했네요.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말이 있다는 것... 등이겠지요.

- 하지만요.
요괴라는 존재는 지어낸 것입니다.
에도 사람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다들 알고 있었어요.
믿지 않습니다. 아무도.

- 뜻밖이신가 봅니다. 네, 유신 이후에 오히려 더 요괴를 믿고 있습니다. 네. 그런 건 미신이다, 실제로는 없다, 유령의 정체는 알고 보면 밤에 마른 억새를 보고 놀란 거다. 다들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하지 않습니까? 네. 하지만 그렇게 진지하게 없다고 주장하지 않고는 없다는 것을 모릅니다. 
옛날에는 달랐습니다.
없다는 것을 알고서 있다고 말하지요.
풍류라고요? 네, 풍류입니다. 그래서 촌스러움과 요괴는 하코네 서쪽에나 있다고 하는 겁니다. 네. 전적으로 믿는 건 시골 사람이라며 놀리는 에도 사람들 말이지요. 
아니요, 실제로는 시골 사람들도 에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믿지 않았습니다.
네. 그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말이지요. 그렇지, 마타이치 씨가 옛날에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슬프고 괴로운 것이라고.
그래서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고 세간을 속이면서 간신히 살아간다고요.

- 즉 이 세상은 거짓부렁. 그런 거짓말이 진짜라 믿다가는 언젠가는 파탄을 맞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짓을 거짓이라고 해버리면 슬프고 괴로워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네. 그렇기 때문에 거짓을 거짓인 줄 알면서도 믿는 것 말고는 건강하게 살아갈 방도가 없다고 마타이치 씨는 말했지요. 현혹되고 눈이 멀면서도 그래도 좋다고 꿈을 꾸고, 이것이 꿈인 줄 알면서도, 알고 있으면서도 믿는 꿈 속에서 산다...
그러니까 요괴는 거짓이지만 있습니다.

 

- 네.
무언가를 이야기해서 속이면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 이 이야기를 몇 개씩 포개어놓아서 현실 자체를 이야기, 즉 속임수의 공간으로 옮기고 되돌려놓는 것이 백 가지 이야기겠지요.
네, 옮길 뿐 아니라 되돌려놓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요컨대 저쪽 편에 데려다 놓기만 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악령은 씌울 뿐 아니라 퇴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맨 처음에 말씀드린 달아날 곳이지요. 백 개의 이야기는 아흔아홉 개에서 멈출 수도 있습니다. 역시 거짓말이군, 단정할 수도 있겠지요.
네, 거짓말이다 해버리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네, 무슨 일이 일어나건 그건 사람 내부의 일이지요.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네. 그러지 못하면 주술이 아닙니다.
그렇지요. 본디 알 수 없는 영역을 사람이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것이 바로 주술의 원뜻일 테니, 데려다 놓고 되돌릴 수 없으면 자유자재라고는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네.
그러니까 백 가지 이야기는 실패하는 것도 포함해서 주술입니다.
지극히 합리적인 주술이지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그건 실패가 아닙니다.
요는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지요.

- 저는... 젊은 시절의 저는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꿈과 현실 사이를 왕래하고 밤과 낮 사이를 오가며 살지 않았습니까. 후. 하지만요. 지친 걸까요.
꿈속에 계속 있고 싶다고 생각한 걸까요.
네.
책 속에서만 살고 싶어진 거지요. 결국.
저는 백 가지 이야기를 끝내기가 싫었습니다. 백 개를 이야기한 뒤에 괴이한 일이 생기든 생기지 않든, 어느 쪽이든 싫었습니다. 네. 그러니까 보류해두고 싶었어요. 
그래서 백 가지 이야기를 개판하지 않았습니다.
 
- 네. 소베 씨가 다리를 놓았다고요. 소베 씨가 극장에 다니십니까?

허어. 스승님이 야마오카 님... 아아.
야마오카 뎃슈 님이요? 이거, 이거, 그러고 보니 소베 씨는 검술을, 칼은 야마오카 뎃슈에게 직접 사사했다고 하셨지요. 허, 아니, 물론 압니다. 막말 '삼주' 아닙니까. 
그 삼주 중 하나인 다카하시 데이슈 씨 소개로 알게 되었군요. 엔초 씨와 야마오카 씨는.
이것 참 기이한 인연입니다.
야마오카 씨라 하면 지요다 성을 내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이고, 지금은 궁내성 대서기관 아닙니까? 검술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소양이 있으시고, 한학 그리고 선에도 정통하시지요. 
네. 절도 세우셨지요. 야나카에 있는 젠쇼안도 뎃슈 님이 지으신 것 아닙니까.

- 그래서. 아, 그랬군요.
뭐, 이야기 출처가 유라 경이니까요. 말을 전하기도 쉬웠을지 모르지요.
허. 그래서 수락하셨습니까?
허어.
그렇군요. 참 멋진 이야기입니다.
더 바랄 것이 없겠군요.
천하의 명인 산유테이 엔초가 잠행을 하고 앉아 괴담을 이야기하는 것 아닙니까.
보통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이것 참.
부러울 지경입니다.
 

- 야마오카 모모스케는 조금 흥분한 상태였다.
이런 기분이 든 게 몇 년 만일까? 알 수 없었다. 우연이다. 아무래도 우연이 쌓이고 쌓여서 모모스케를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 그날 밤.
아주 오래된 그 밤.
모모스케는 기타바야시 영지의 오레구치 봉우리에서 한 번 죽었다. 물론 목숨을 잃은 것은 아니다. 위험에 빠지기는 했지만 모모스케는 그때 발을 삐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어찌된 일인지 그 이전의 모모스케와 그 이후의 모모스케는 많이도 달라졌다. 
그날 밤 이후의 모모스케 즉 지금의 모모스케가 모모스케에게는 아무래도 죽은 것 같이 여겨졌다. 이는 오로지 그 이전의 모모스케야말로 살아있었던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 어행사 마타이치. 
마타이치 일행과 지낸 것은 고작 몇 년이다.
팔십몇 년 동안 지루하게 이어진 모모스케의 인생에 비한다면 참으로 짧은 기간일 것이다. 단 한순간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순간의 모모스케는 살아있었다.

- 모모스케는 가난한 무사 집안에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인가문에 양자로 보내졌다. 하급 관리 집에서는 곧잘 있는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모모스케는 장사와는 도무지 안 맞는 성격이라 결국은 가게를 잇지 않았고 정해진 직업도 없었다. 작가 흉내로 입에 풀칠을 하며 그저 여러 지방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녔다. 
아무런 각오도 없었다.
물러나기는 했지만 가게는 에도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컸다. 싫다고 해도 돌봐주기는 했다.
그러니 먹고살 염려도 없었다. 사업상의 교제도 없으니 타인과 깊이 관계 맺을 일도 없다. 연애에도 인연이 없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무엇도 고집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민할 일도 없었다.
모모스케는 그 무렵 그저 살아만 있었다.
무위했다.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게으름뱅이에 겁쟁이, 형편없는 사내였다. 무사도 아니고 상인도 아니고 농민도 아니고 직인도 아니고 승려도 아니고, 요컨대 아무것도 아닌 채 살았다. 하지만 살아는 있었다.
마타이치와 만난 것은 그 무렵이다. 아마 에치고의 깊은 산속이었던가.
 
- 산속 외딴집에서 마타이치는...
그래.
잊을 수가 없다. 처음 만났을 때 마타이치는 백 가지 괴담 이야기를 했다.
그건 마타이치가 꾸민 교묘한 연극이었지만.
저쪽을 세우면 이쪽이 서지 않아 같이 서지 않는 둘을 나란히 세우는 것이 그 세상살이.
세 치 혀 말주변, 모사꾼이라는 이명도 속이고 어르고 부추기고 으르고 칭찬하고 달래고 충고하고 꾸짖고 이야기하고 속이는 것이 그 유래... 

- 마타이치는 이야기 한다. 속이고 이야기하고 사방팔방이 막힌 곳을 사통팔달로 만들며 사방팔방을 원만하게 수습한다. 마타이치는 속임으로써 세상의 황혼을 조종하는 사내였다. 그렇다. 어행사 마타이치는 요괴를 다루는 사람이었다. 
모모스케는 이렇게 해서 요괴가 태어나는 현장에 섰다. 그리고 때로는 거기에 가담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타이치는 사농공상의 신분에서 벗어난 사내였다.
오긴도, 지헤이와 도쿠지로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어차피 모모스케와는 다른 세상에 발붙일 곳을 갖고 있었다. 그곳에 단단히 서 있었다.

- 모모스케는 아니었다.
모모스케는 아무런 각오도 없이 경계에서 흔들흔들 흔들릴 뿐인 사내였다.
이도 저도 아닌 것은 모모스케 자신이다.

- 모모스케가 백 가지 이야기를 개판하지 않은 진정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마타이치 일행과 지낸 한 시기에는 모모스케 자신이 백 가지 이야기였다. 모모스케 앞에서 마타이치 일행이 속임수를 쓸 때마다 이도저도 아닌 중인지 속환인지는 저쪽으로 흘러갔다 이쪽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해서 괴이한 일이 속속 생겨났다. 
괴이를 이야기하면 괴이한 일이 일어난다. 정말로 그랬다. 그래서.

 

- 모모스케는 몇 번 저쪽 편으로 가려고도 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모스케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쪽 편 인간이다. 이것만은 어찌할 수가 없다. 선을 넘어가려면 커다란 각오가 필요할 테고, 모모스케가 그런 각오를 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그건 그렇다. 모모스케는 아무 쓸모도 없는 겁쟁이니까.

 

- 마타이치 일행이 모모스케 앞에서 모습을 감춘 것은 그 사실을 언제까지고 모르는 멍청한 모모스케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래도 모모스케는 한동안 깨닫지 못했다.

 

- 그리고 그날 밤.
오레구치 봉우리에서 모모스케는 두 인간의 죽음을 목격했다. 시시한 죽음이었으리라. 소극적이고 고집스럽고 슬픈 죽음이었으리라.
한 사람은 이쪽 편 인간이었다. 또 한 사람은 저쪽 편 인간이었다. 두 사람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이 야타가라스와 푸른 백로...

마타이치와 오긴이었다.

 

- 거기서 죽은 것은 덴구라고 마타이치는 말했다. 덴구가 죽었다, 이렇게 말했다. 아무 생각 없이 불쑥 나타나 치열한 죽음의 현장을 맞닥뜨린 겁쟁이 모모스케에게 너는 이렇게 죽을 수 있느냐, 그런 각오가 있느냐고 물은 것이리라. 
아니, 아마 마타이치는 처음부터 줄곧 모모스케에게 그렇게 물었을 것이다. 낮에 살든 밤에 살든 결국 도달하는 곳은 같은 장소이다. 도를 밀고 나가면 모가 생긴다. 길에서 벗어나면 늪에 빠진다. 짐승이 다니는 길은 험하고, 좁은 길은 품이 든다. 너는 어떤 길을 가겠는가, 하고. 

- 알 수 없었다.
그저 마타이치 일행이 걷는 길만은 아마 걷지 못할 것임을 모모스케는 깨달았다.
낮의 세계에서 살아갈 결심은 아무래도 서지 않았지만, 밤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신했다. 그리하여 모모스케는... 아니, 그전까지의 모모스케는 그때 왠지 모르게 죽었다. 그리고 새로운 모모스케는 아마도 태어나지 않았다. 

 

- 뭘 모색하지도 않고 다시 태어나지도 못한 채 모모스케는 지루하게 사십 년을 살았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기분도 들었고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 "어떻고 뭐고 없을 걸세. 아무 생각도 없겠지. 명부를 보니 양갓집 도련님들뿐이고, 심심파적 아니겠나. 애초에 유학을 배우는 것부터가 심심파적 아닌가."
"곤란한 녀석들일세."
소베가 신음하듯 말했다.
요지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요지로도 기이한 것들을 좋아한다. 세상에 불가사의는 없다고 누군가가 단언하면 쓸쓸하기도 하다. 수수께끼도 조금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생각하기는 하지만 역시 없으리라고 이해하고 있다. 
세상에 불가사의는 없다. 이런 건전한 위치에 서 있지 않으면 사물을 올바르게 볼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의 눈은 왜곡되어 있다. 가능한 한 올바르게 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뭐든지 왜곡되어 보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불가사의한 것도 모르게 된다. 

- "허어. 자네가 그런 말을 하는가?"
"하지. 들어보게, 소베. 요괴는 있다. 괴이한 일은 일어난다고 단단히 믿고 있다고 해보세. 그러면 대개는 낙담하게 되네. 요괴와 만나는 일은 없을 걸세. 기묘한 일도 좀처럼 일어나지 않으니 말이네. 하지만 그런 건 없다고 생각하면." 
 
- 요지로는 생각했다.
백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사실 기미후사 경이 아닐까.
지난번 푸른 백로 소동은 결국 사건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기미아쓰 씨의 측근이 다소 상궤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예상밖의 일이 있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잇파쿠 옹이 그렇게 조언하기도 해서 겐노신 또한 기미사 경에게 푸른 백로에게는 약간의 영험이 있다고 전했을 뿐이다. 
물론 그 푸른 백로의 영험 뒤에 어행사 마타이치 일당의 교묘한 속임수가 있었다는 사실은 기미사 경에게 전혀 알리지 않았다.  


- 진상을 아는 사람은 잇파쿠 옹과 사요, 요지로 세 사람뿐이다.

다시 말해.
기미후사 경은 세상에 불가사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미후사 경은 확인하고 싶은 게 아닐까.
이 세상에 사람의 지식을 초월한 존재가 있는가... 
사람의 지식을 초월하는 일이 과연 일어날 수 있는가... 

- 아닌지도 모르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거짓을 거짓인 줄 알면서도 믿는다.
현혹되고 눈이 멀면서도 그래도 좋다고 꿈을 꾼다.
이것이 꿈인 줄 알면서도, 알고 있으면서도 믿는다.
꿈속에서 사는 것 말고는...
건강하게 살아갈 방도가 없다고 어행사 마타이치는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 확실히 꿈을 계속 꿀 수 있게 해 주어야 하리라고 요지로는 생각했다.

- 첫 번째 백로의 화신은 산묘회 오긴이었다고 한다.
이십몇 년 전에 기미후사 경이 만난 푸른 백로의 화신은 사요의 어머니였다고 한다.
사요는 오긴을 쏙 빼닮았다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 요지로는 한 번 더 말했다.
"아무것도 아닐세."

- 아무 무늬 없는 병풍이 둘러 서 있다.
하얀 병풍이 푸르게 물들어 있다. 이 푸른 바탕을 물들이는 그림자 또한 짙은 푸른색이다.
온 방 안이 새파랬다. 앉아 있는 사람들도 전부 죽은 사람 같은 얼굴로 보인다.
백 가지 이야기의 무대는 요지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했다.

문을 다 닫고 푸른 사방등에 불을 넣은 단계에서 아카사카 요정의 한 방은 이 세상이 아닌 곳이 되어버렸다.

- 상석에 유라 기미후사 경, 오른쪽 옆에는 아들이자 효제숙 숙장인 유라 기미아쓰, 왼쪽 옆에는 입회인 겸 액막이 역할을 맡은 구니에다 에가쿠 스님이 앉아 있다. 스님 옆에는 몹시 경직된 이 모임 간사이자 일명 수수께끼 순사인 야하기 겐노신 순사가 그리고 정원 방향을 향하고 효제숙 학생 여섯 명이 나란히 앉았다.  

- 기미후사 경 맞은편에는 이즈부치 지로키치 즉 산유테이 엔초를 위한 방석이 놓여 있다.
방석 옆에는 작고 작은 잇파쿠 옹이 등을 굽히고 앉아 있었다.
마루를 면한 병풍 그늘에서는 죽도를 든 소베가 대기하고 있다. 장지문 바깥에는 필시 엔초와 엔초의 안내를 맡은 쇼마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요지로는 심지를 뽑는 역할이다. 잇파쿠 옹 옆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이야기 하나가 끝날 때마다 중앙으로 나가 사방등에서 심지를 뽑으면 된다.

- 이것저것 궁리는 해보았지만 요지로와 친구들은 결국 가장 간단한 형태를 고르기로 했다.
거울을 둔다. 손가락을 묶는다 외에도 액막이 검을 둔다느니 헌 모기장을 건다느니, 이리저리 보다 보니 그럴싸한 절차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지만 잇파쿠 옹의 말을 믿고 이런 것들은 다 부록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푸른 사방등만으로 충분하다.

- 이 세상이면서 이 세상이 아니다. 등은 밝혔지만 밝지 않다. 밤이면서 밤이 아니고 어둠이 있지만 암흑은 아니다. 이곳은 저쪽과 이쪽, 꿈과 현실, 저승과 이승의 경계가 되었다.
허구도 아니고 사실도 아니며 현재도 아니고 과거도 아니다. 만반의 준비가 끝난 것은 해도 다 떨어진 시간이었다.

- 심지 백 개 전부에다 불을 붙이고 나서 요지로는 사방에서 멀어졌다.
요지로의 푸른 그림자가 크게 흔들리며 퍼지더니 푸른 방을 흐늘흐늘 이동했다. 목소리 한마디 내지 않고 앉아 있는, 산 자인지 죽은 자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이들의 얼굴을 실체가 없는 요지로의 그림자가 차례차례 훑고 지나간다. 
잇파쿠 옹 옆자리로 돌아왔다.

 

- 요지로는 사방등을 사이에 두고 정면에 앉아 있는 기미후사 경의 얼굴을 보았다.
푸른빛에 흐려져 있어서 표정은 고사하고 어떤 얼굴인지도 잘 알 수 없었다.
바로 옆에 있는 노인의 얼굴조차 불확실하다. 주름이 팬 달걀귀신처럼 보였다.
요지로가 앉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 장지문이 열리더니 쇼마가 엔초를 인도해 들어왔다.

- 잇파쿠 옹이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세상에 불가사의는 없고."
노인이 불쑥 이렇게 말했다. 평소의 갈라진 목소리가 아니었다.
"세상 모든 것은 불가사의라고 합니다. 괴이한 일을 이야기하면 괴이한 일이 일어난다고도 합니다. 오늘 밤은 재미 삼아 예로부터 내려오는 절차에 준해 기이한 이야기 백 개를 하룻밤에 이야기하는 백 가지 이야기를 열고자 합니다. 우선은 야겐보리에 사는 저 잇파쿠 옹, 여러 지방을 떠돌다 나이만 먹은 은자입니다만, 우선은 제가 이 쇠약해진 다리로 걸어 다니며 꺼진 눈으로 보고 멀어진 귀로 들은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 정적이 감돌았다.

- 에치고의 팥 씻는 스님을 물에 빠뜨려 죽인 일.

하치오지에서 들 철포의 괴인을 쏴 죽인 일.

가이의 하쿠조스 여우가 승려로 둔갑해 사냥꾼을 꾸짖은 일.

고즈카하라에서 불사의 고와이가 세 번 다시 태어난 괴이함.

이즈 도모에가후치에서 목이 춤추는 괴이함.

오와리의 날아다니는 마연(魔緣)이 불기운을 부른 일.

아와지시마의 시바에 너구리가 개에 물린 일.

세토우치의 배 유령이 번 영주를 놀라게 한 일.

노토의 부자 말장수가 살아있는 말을 삼킨 일.

도사의 일곱 혼령이 내리는 앙화가 무시무시한 일.

시나가와의 버들 여인이 아기를 저주로 죽게 한 일.
오가 앞바다 큰 물고기 섬 붉은 얼굴 에비스의 괴이함.

교토 가타비라가쓰지에 죽은 여자 송장이 나타난 괴이함.

셋쓰에서 덴교보의 불이 대관의 관사를 태운 일.

엔슈에서 산사내가 사람을 습격한 일.

이케부쿠로무라의 뱀 분묘가 지벌을 내린다는 괴이함.

늙은 덴구가 불기둥과 함께 하늘로 돌아간 일.

- 잇파쿠 옹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무서운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신기한 이야기이기는 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전에 들은 것이었다.
그리고 요지로는 그 괴이한 이야기 중 몇 개의 진상을 알고 있다. 내막을 듣고 나면 신기할 것도 없는, 그냥 사기일 뿐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건 기이한 이야기가 되었다.

 

- 잇파쿠 옹이 마지막으로 이야기한 것은 오품 백로가 여인으로 변해 괴이한 일을 하고 이윽고 빛을 발하며 날아간다는 이야기였다.
요지로는 어쩐지 진정이 되지 않아 자꾸 기미후사 경을 신경 썼지만 여전히 그 얼굴과 몸 전체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스무 번 정도 요지로는 심지를 뽑았다.
옷이 스치는 소리, 작은 헛기침 소리, 방 안에 들리는 것은 이런 소리뿐이었다.
방을 감싼 어둠은 조금 더 깊어졌다.

- 이어서 인나미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인나미는 신문기자 일을 하며 수집한 갖가지 기괴한 실화를 손짓 발짓을 섞어 가며 이야기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가 많고 표현도 풍부했기 때문에 요지로는 집중해서 듣다가 때로 오싹했다.
인나미는 열다섯 개를 이야기하고 요지로는 열다섯 번 사방등을 열고 닫았다.

- 방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어느 순간 자리에 있는 사람은 망자가 되었다.
망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즉 나도 망자로 보이는 거겠지, 하고 요지로는 생각했다.

- 이어서 기하라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에도의 수필에서 소재를 가져온 괴담이었다.
요지로는... 아니, 아마 겐노신도 그것들이 실려 있는 책을 거의 다 읽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인지 알고 있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어쩐지 무서웠다.
억양을 충분히 넣은 기하라의 열띤 어조가 뛰어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뿐만은 아니었다.

- 이때쯤 방안은 이미 꽤 일그러져 있었던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뒤틀린 힘 같은 것이 압박해 왔다. 공기가 긴장하고 있는지, 아니면 어둠의 밀도가 진해졌는지, 혹은 그 자신이 희박해졌는지, 희미한 움직임이 아주 민감하게 느껴진다.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삐걱거릴 듯한 기분이었다. 

- 기하라 역시 열다섯 개를 이야기했다.
요지로는 열다섯 번 심지를 꺾고, 불빛은 반으로 줄었다.

- "바보 멍텅구리들. 머리가 나쁘면 유학보다는 검도를 하란 말일세."
소베가 느티나무 우듬지를 발로 찼다.


- 모퉁이를 돌아 골목으로 들어간다.
불현듯 구름 사이로 여름다운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여름이구나."
요지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기분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생각났다는 듯 매미까지 울기 시작했다. 그때 산울타리가 보였다. 암자 앞에서 사요가 마당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사요는 요지로 일행을 알아차리자 얼굴을 들고 무척 쾌활하게 웃었다. 

- "요전에는... 동틀 녘까지 감사했습니다."

요지로는 사요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사요는 웃으며 말했다.

"저야말로요. 다 요지로 씨 덕분이에요. 하지만."

여기서 사요는 불쑥 요지로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더니 말했다.

"모모스케 씨에게는 비밀이에요."
"네? 알려드리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있었던 걸 눈치 못 채셨어요. 등을 돌리고 계셨잖아요." 


-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어르신은... 별채이지요?"
묘한 의심을 받는 것도 싫어서 요지로는 두 사람을 두고 냉큼 암자로 들어갔다.

- 안은 어두웠다.
밖이 너무 밝았는지도 모른다.
마루와 복도는 새하얗게 보였다. 역시 여름 햇살이다.
짤랑, 하고 풍경이 울렸다.

 

- 복도를 지나 별채로 이어지는 복도를 건넜다.
삐걱삐걱 바닥이 울린다. 겨울철에는 소리가 건조하지만 여름철에는 소리가 듣기 좋게 늘어진다.
대여섯 번 이 소리를 들으면 별채 장지문 앞이다.
"어르신, 요지로입니다."
대답이 없었다. 요지로는 장지문을 열었다.

- 늘 똑같은 별채. 무수히 쌓인 책, 먼지와 종이 냄새, 등심초 향, 꾸미지 않은 좁은 방.
명장지가 활짝 열려 있다. 거기서 여름이 쏟아져 들어와 다다미 색깔을 두 개로 나누고 있다.
그 빛 속에.
노인이 누워 있었다.

- 양달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노인 노인 주위에는 수많은 책과 공책이 흩어져 있었다.
 시들고 작은 노인은 그 종이뭉치 속에서 눈을 감고 웃고 있었다. 어쩐지 어린아이 같았다.
낮은 책상 위에는 방울과 부적이 한 장 놓여 있었다. 이야기에 곧잘 나오는 액막이 다라니 부적일 것이다.

- 노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야마오카 모모스케는.
숨이 끊어진 뒤였다.

- 요지로는. 요지로는 활짝 열린 명장지 바깥에서 언뜻 하얀 사람 그림자를 보았다.
하지만 갑자기 바람이 불어 들어와서... 
그 환영도 금방 사라졌다.


- <바람신>

 


 

옮긴이의 말



<후 항설백물어>는 마타이치 일당이 활약하는 '항설백물어' 시리즈 중 세 번째 작품으로, 작가인 교고쿠 나쓰히코는 이 작품으로 130회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시대적 배경은 메이지 유신 이후 약 십 년이 흐른 1877년, 따라서 시간순으로는 시리즈의 가장 마지막에 위치하며, 마타이치 일당은 이제 칠십 노인이 된 모모스케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등장한다. 

도쿄 경시청 일등 순사인 야하기 겐노신이 기묘한 수수께끼를 가지고 오면, 그의 세 친구들, 그러니까 무역회사에 근무하며 신비로운 옛날이야기에 가슴 설레어하는 사사무라 요지로, 양행을 다녀와 새로운 지식에 해박한 구라타 쇼마, 무사 출신에 거칠지만 합리적인 시부야 소베가 이도 아니다, 저도 아니다 시끄럽게 논의를 하다, 쓰쿠모안이라는 암자에서 조용히 은거하고 있는 잇파쿠 옹 즉 모모스케를 찾아가고, 그러면 모모스케가 과거의 기록을 뒤져 현재의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 이 작품의 기본적인 구조이다. 모모스케의 과거 이야기에 나오는 기묘한 일들의 배후에 마타이치의 장치가 있었듯, 일등 순사 겐노신이 가지고 오는 현재의 사건 뒤에는 이치에 맞는 설명이 존재한다. 

요괴나 괴이를 향한 설렘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변화된 세계로 한 발 내디딜 수 있는 요지로가 새로운 시대의 마타이치 일당과 같은 역할을 해줄지도 모른다. 그 이야기는 분명 마타이치 일당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일까, <후 항설백물어>의 후반부 이야기들에는 아무래도 슬픔이 깔려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대목이 많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아니, 그보다 먼저 우리에게조차도 이미 그리운 '어행봉위'라는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올 때에는 늘 저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게 되는 것이다. 마타이치 일당이나 그들에 대한 기억이 살아있던 시대는 이렇게 끝난다. 

하지만 여전히 이야기는 남아 있다. 책이나 길거리, 소리, 풍경 같은 것에 켜켜이 쌓여 있는 시간들이 문득 지금 속에 들어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괴이한 일들도 '이야기해서 속이면' 지금 여기에 존재하게 된다. 그러니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느 별이 존재하듯 마타이치나 모모스케도 시끄러운 네 친구들도 만들어낸 허구이지만 어떠한 면에서는 있다. 낮의 세계에 발을 딛고 살아갈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타이치 일행이 가는 밤의 길을 함께 걸을 수도 없었던, 저쪽 편으로 가고 싶어도 선을 넘을 수 없었던 이쪽 세계의 인간 모모스케는 마타이치의 이야기에 두근거리면서도 흔들흔들 평범하게 현실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과도 다르지 않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모모스케처럼 은거하며 살 수 없고, 모모스케는 그런 사람들보다 훨씬 모험과 괴이에 가까이 갔었지만 말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을 위해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후 항설백물어>의 마지막 <바람신>은 백 가지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 자체로 이미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를 다른 세계로 옮겨놓았다가 다시 이리로 되돌려놓는 많은 이야기들에 대한 이야기. 요지로가 이야기 속에 들어가듯 야겐보리의 잇파쿠 영감을 찾았던 것처럼, 지금 여기에는 여전히 설레고 감동적인 꿈 속으로 독자를 인도하는 이야기꾼 교고쿠 나쓰히코의 책이 있다. 우리는 그저 펼치기만 하면 된다. 


2018년 겨울

심정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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