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요네자와 호노부] 여름철 한정 트로피컬 파르페 사건

일루젼 2024. 5. 21.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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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출판 : 엘릭시르
출간 : 2016.10.21


       

나는 내 서재를 무질서계로 활용하고 있다. 

농담인데, 진담이다. 

때때로 무너지기도 하고 새롭게 쌓이기도 하는 발 디딜 틈 없는 책탑은, 내가 들어설 때마다 다른 책을 표면에 올려두고 있다.

 

당연히 기분 탓이겠지만, 지난번에는 눈에 띈 적이 없는 책들이 가장 위쪽에 놓여져 있을 때. 

소장하고 있는 줄도 몰랐는데, 다른 곳에서 구해 읽은 책이 갑자기 나타날 때.

 

어쩐지 나만의 작은 혼돈을 만들어낸 것 같아 묘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 라는 핑계로 책들은 무한증식을 거듭하다 이제야 겨우 소강상태를 유지하는 중이다.

 

<여름철 한정 트로피컬 파르페 사건>은 20년 경에 구매했던 책인데 어느 순간 나타났다. 이어지는 시리즈인 <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 사건>이나 <가을철 한정 구리킨톤 사건>, <파리 마카롱 수수께끼>는 아직 읽지도 구매하지도 않은 상태. 당시에 함께 구매한 책들은 반 정도는 읽고 처분했고, 나머지 반 정도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음.

 

요네자와 호노부는 이 책을 청소년들도 읽기 좋은 일상 미스터리를 염두에 두고 집필했다고 한다. 아직 앞뒤 이야기를 더 읽어봐야 하겠지만, <여름철>만 놓고 보자면 목표한 바에 -좋은 의미로- 충실한 작품으로 보인다. 단 것은 취향이 아니지만 너무나도 맛있는 샬럿을 맛보는 바람에 상대의 몫까지 먹고 싶어져서 벌이는 추리 대결이라니. 그런 자신들의 본성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튀고 싶지 않아- '소시민'을 지향한다는 발상도 너무나 청소년답다. 

 

'다르지만 다르고 싶지 않은', '다르지 않지만 다르고 싶은'.

자신의 경계를 확립하고 자/타와 사회적인 교류를 경험하는 시기는 언제나 어느 정도의 혼란과 자기 시험이 발생한다.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성인이 된 이후에는 -'어쩌라고' 정신이랄까- 자아상이 생기기 때문에 혼란보다는 처세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되는 듯.

 

"그게 옳은지, 타당한지 판단하려 하지. 생각밖에 못 해." 

 

그런 것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어째서 다를까'가 '우리는 다르구나'가 되는 순간까지 모쪼록.

 

즐겁게 읽었다. 

 

+) 덧붙이는 이야기. 읽을 때는 몰랐는데 애니메이션 화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PV만 봤을 때는 두 주인공 모두 생각보다 미형으로 그려진 듯. 

애니를 볼지는 미지수. 소설로는 이어서 읽을 예정. 

   


   

 

- 소스가 눌어붙는 냄새가 났다. 그뿐이라면 좋은 향기였을지도 모르지만 간장에 기름 냄새, 설탕이 녹는 달착지근한 냄새까지 뒤범벅이 되니 아무래도 좋은 향기는 아니다. 오늘은 잿날. 동네 으뜸가는 번화가는 저녁때부터 차량이 통제되고 요란한 비닐 포렴을 내건 야간 노점으로 빼곡했다. 나는 묵직하게 수런거리는 소리와 사람들이 뿜어내는 열기 속을 느긋하게 걷고 있었다.  

- 소시민의 길을 추구해 마지않는 나, 고바토 조고로는 그런 금지령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기서 '금지하니까 가지 않는 것이 소시민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직 멀었다. 진정한 소시민이라면 '규칙은 어기라고 있는 것이다!' 하고 으스대며 축제의 밤거리에 뛰어들었다가 선생님이나 선도 위원의 모습을 보고 몰래 도망 다니는 법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야간 노점 사이를 어슬렁대고 있다. 

- 하지만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구미가 당기는 것이 거의 없었다. 축제 분위기에 들떠서 사고 싶지도 않은 걸 마구 사다가 빈털터리가 되는 게 올바른 소시민의 도리인데, 막상 싸구려 상품을 보니 식욕도 물욕도 영 생기지 않았다. 문어튀김은 역 앞 뒷골목에 싸고 맛있는 가게가 있는데. 이런 냉랭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한 도저히 축제에 취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뭐, 이 분위기를 맛보러 온 것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소스와 간장, 기름, 설탕 냄새만 가득할 뿐이지만. 

- 바람이 뜨뜻했다. 꼭 노점의 철판 때문만은 아니고, 계절이 이미 여름인 탓이다. 이만한 인파가 북적거리는 것을 고려하면 오히려 오늘밤은 제법 쾌적한 축이다.

- 딱히 그 녀석 옆에 같은 반 여학생이 나란히 서 있다고 마음을 써준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학교 밖에서도 친하게 굴 정도로 친밀하지 않다. 그 점을 그도 나도 알고 있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인간관계에 냉담하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 고등학생에게 학교라는 작은 세계의 안과 밖은 자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인간관계도, 패션도, 성격조차도. 어쩌면 그것은 가정 안팎의 차이보다 클지도 모른다. 학교 밖에서는 다른 얼굴,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사실 오늘 아는 얼굴을 몇 명 발견했다. 같은 후나도 고등학교 학생도 있고, 아득한 옛날 내가 다카바 중학교의 골칫덩어리였던 시절에 보았던 아이도 있었다. 다들 가볍게 고갯짓을 나누거나 못 본 척 지나쳤다. 이 정도 의례적 무관심은 소시민의 길 이전에 상식이라 할 수 있다. 

- 나는 학교에서는 고독한 학생이 아니지만, 학교 밖에서도 적극적으로 말을 나눌 만한 상대는 한 사람밖에 없다.
도지마 겐고, 완력과 의협심이 장점인 남자. 고등학교 입학 당시에는 얼굴만 사각이었는데 일 년이 지나자 근육이 더 붙어서 어쩐지 전체 윤곽까지 사각형이 됐다. 아니, 딱히 친한 사이는 아니다. 오히려 소원한 사이인데 분위기 파악 능력이라는 게 결여된 불쌍한 겐고는 학교 안과 밖의 매너를 모르는 것이다. 
 
- "... 어?"
여우가 있었다.
내 어깨쯤 오는 키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하얀 바탕에 빨간 선이 들어간 여우 가면. 길쭉한 코 양옆으로 검은 수염이 세 가닥씩 그려져 있다.
축제에 가면 가게가 빠지면 서운하다지만, 이 가면의 질감은 흔한 플라스틱 제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진짜 나무로 조각한 가면 같은데... 뭐지 이건?
여우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은 유카타 차림의 자그마한 아이였다. 연한 복숭앗빛 바탕에 금색 테두리를 친 하얀 나팔꽃. 소매 사이로 뻗어 나온 오른손은 내 뒷덜미를 붙잡고 있고, 왼손은 축 늘어져 있다. 그렇다면 이 가면은 손으로 얼굴에 대고 있는 게 아니라 끈 같은 걸로 단단히 고정해 놓았다는 뜻이다. 아무리 신나는 축제의 밤이지만 유카타 차림에 여우 가면이라니 너무 기분을 냈다. 
여름밤,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축젯날, 불쑥 튀어나온 오곡신의 사자. 평범한 고등학생에게 무슨 용건이십니까? 그렇게 묻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 오사나이가 연줄을 리본 모양으로 묶으며 내 쪽으로 눈을 돌렸다.
"목공소 앞에서 늘어놓고 팔던데. 너무 귀여워서 덜컥 사버렸어."
내가 아는 한 오사나이는 사물을 귀엽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드물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름답다'거나 '관심이 간다'는 넓은 의미로 '귀엽다'라는 말을 남용하는 경우가 없다. 그렇다면 오사나이는 꿈에 나올 법한 이 하얀 가면을 정말 귀엽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 뭐, 남의 취향이니 입다물자.

- 조금, 당혹스러웠다.
학교 밖에서 내게 친한 척 말을 거는 사람은 기껏해야 도지마 겐고뿐이다. 그건 거짓말이 아니다.
오사나이와 나는 종종 행동을 같이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목적이 있는 행동이다. 나와 오사나이가 내건 커다란 목표, 눈앞에 어른거리는데도 거머쥘 수 없는 육등성, '소시민'. 우리는 하루하루 평온하게 보내는 생활 태도를 몸에 익히길 갈망하고, 그것을 방해하는 일들을 완강히 회피하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리고 트러블 혹은 문제의 싹에서 빠르게 손을 떼기 위해 서로의 존재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런 오사나이가 축제의 밤거리를 함께 다니자니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그것도 한순간. 가만히 내 오른쪽에서는 오사나이를 보고 속뜻을 알았다.
"이 앞에 마주치기 싫은 사람이 있구나?"

- 아아, 괜히 쓸데없는 기억까지 되살아났다. 그날, 나는 오사나이에게 수제 과일 소스가 맛있는 요구르트를 사주겠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 약속은 아직도 지키지 못했다. 일 년이나 지난 일인데 오사나이가 과연 기억하고 있을까? 기억하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어떻게든 만회할 수단을 생각하는 게 낫겠다. 오사나이는 달콤한 디저트를 무척이나 사랑하니까.

 

- 오사나이는 달콤한 디저트를 두 번째로 사랑한다. 달콤한 디저트를 위해서라면 체력과 자금이 허용하는 한 어디까지고 달려간다.
그리고 그런 오사나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복수'다.
겉보기는 깜찍하지만 오사나이의 특기는 카운터펀치다. 보다 강력하게 반격하기 위해 누가 때려주기를 기다린다. 오사나이는 그런 자신의 성격, '늑대'의 본모습을 가둬두려 한다. 그런 이유로 소시민을 목표로 하고 있다.

- 한편 내가 고쳐야 할 점은 천성적으로 쓸데없이 참견하는 성격이다. 바둑에 훈수 두는 것처럼 남이 하는 일에 오지랖을 떨고,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잔머리를 굴려 잘난 척 떠벌리다가 결국 많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든다. 나는 이놈의 '여우'를 '소시민' 개념으로 제압해야만 한다.

- 작년 봄에서 여름 사이, 나와 오사나이는 결과적으로 공문서 위조 범죄를 폭로했다. 그게 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섯 명이 체포당했다. 단언컨대 그런 행위는 소시민이 할 짓이 아니다. 그런 반성을 바탕으로 우리는 지난여름 이후로 대단히 얌전하게 한 해를 보냈다. 소시민의 자리는 이미 획득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 "아!"
별안간 오사나이가 얼빠진 소리를 지르며 뭔가를 가리켰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눈길을 돌리니 그곳에는 솜사탕가게가.
오사나이는 비명을 지르듯 일그러진 표정으로 쥐어짜내듯이 말했다.
"솜사탕 먹는 걸 깜빡했어!"

- 오사나이는 아무래도 축제를 만끽하러 온 모양이다.
나는 눈치 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들뜬 그 모습에 찬물을 끼얹지 않을 수 없었다.
"오사나이, 솜사탕 원가가 얼만지 알아?"
"..."
"설탕 가격이 얼마나 싼지, 얼마나 적은 양의 설탕으로 솜사탕을 만드는지."

 

- 달그락. 오사나이가 나막신으로 바닥을 찍었다. 지금까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더니 힘차게 주장했다.
"비싸든 싸든, 그건 알 바 아니야. ...난 솜사탕을 먹을 거야!"
이렇게 굳은 결심을 갖고 있을 줄이야. 제가 미처 몰랐습니다.

- 결국 오사나이는 여우 가면으로 오른쪽 옆얼굴을, 나로 왼쪽 옆얼굴을, 커다란 흰색 솜사탕으로 정면을 가리며 인파 속을 걸었다. 나막신을 달그락거리며 걷는 오사나이는 이따금 솜사탕을 베어 물고 생긋 웃었다. 처음에는 얼굴을 가리려고 가면 대신 솜사탕을 산 게 아닐까 의심했지만 이 모습을 보아하니 괜한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 아무렇지 않은 척 느긋하게 걷고 있지만 사실 나는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오사나이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던 것이다.
참고로 앞쪽에 자전거를 세워두어서 마주치기 싫은 사람이 있어도 가야만 한다는 오사나이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오사나이의 옷차림은 유카타. 자전거를 타려면 옷자락을 걷어야 한다. 
뭐, 옷자락을 걷어도 보이는 건 기껏해야 장딴지 정도. 그렇다면 합리적으로 생각해 교복 치마를 입었을 때와 마찬가지라고 볼 수도 있지만 오사나이는 나막신을 신고 있다. 유카타를 입고 안장에 앉을 수는 있어도 나막신을 신고 페달을 밟기는 힘들다. 전통을 고수하고 싶다면 짚신이라도 상관없었을 텐데 굳이 나막신을 신고 온 것으로 보아 오사나이는 십중팔구 자전거로 오지 않았다. 


- 그런데 얼굴을 가리고 이쪽으로 왔다는 것은 무엇이랴. '상대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상대를 보고 싶다'는 뜻이다. 그런 상대의 얼굴이라면 나도 구경하고 싶다.
뭔지 몰라도 오사나이에게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야 당연하다. 이유가 없었다면 오사나이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지금 단계에서는 더 나은 단서가 없는 것 같다.

- 땀이 배어 나오는 것 같아 손수건으로 귀밑을 눌렀다. 긴장해서 목이 탔다. 오사나이가 따라준 차가운 보리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오사나이는 이 땡볕 속에서 심부름을 다녀온 나를 위해 평소처럼 얌전한 미소를 지으며 차가운 보리차를 내주었다. 그때 오사나이는 내가 배신할 줄은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신뢰를 배반하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다. 오사나이에게는 정말 미안할 따름이다. ... 하지만 내가 그 사실에 흥분한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자, 결심을 했으니 행동으로 옮기자. 그리고 행동하는 이상 탄로 나지 않도록 철저히 해야 한다.

- 나는 가만히, 손을 뻗었다.
지긋지긋한 더위 탓에, 모두가 이상해졌다. 나도, 그리고 오사나이도. 모든 것이 평소와 똑같았다면 감히 이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어제부터 뭔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 샬럿은 여덟 조각으로 큼직하게 자른 타르트하고 비슷하게 생겼는데, 타르트 파이 반죽과 달리 바깥쪽을 약간 노릇하게 구운 부드러운 스펀지케이크였다. 속에는 뭐가 들었을까? 하얀색인데 먹어보기 전에는 식감도 맛도 상상이 가지 않았다. 금색 마분지 받침대에 놓인 샬럿은 투명 필름으로 감싸여 있었다. 밑면도 스펀지케이크다. 위에는 루비 자몽이 얹혀 있다. 시큼할 텐데 케이크에 어울릴까? 

- 망고 푸딩은 하나씩. 샬럿은 내 앞에 하나를 놓고 오사나이의 자리에 두 개를 놓았다. 샬럿이 네 개였다면 두 개씩 먹었겠지만 세 개밖에 못 샀으니 오사나이가 두 개를 먹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딱히 오사나이가 그렇게 해달라고 말한 건 아니지만 케이크가 세 개인데 내가 두 개, 오사나이가 한 개를 먹는 것은 물이 거꾸로 흐르는 꼴이나 마찬가지다.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다. 

- 뭐부터 먹을까 조금 고민하다가 샬럿을 먼저 먹기로 했다. 망고의 단맛보다 자몽의 신맛이 더 당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샬럿이 기가 막힌 일품이었다.
나는 스푼을 쥔 채로 감동에 떨었다.

- 세상에 이렇게 맛있을 수가!
거품이 사르르 녹는 듯한 매끄러운 식감에 있는 듯 없는 듯 아련한 단맛, 스펀지케이크 안쪽은 크림치즈 풍미의 바바루아였다. 튀지 않는 부드러운 치즈 맛을 지긋이 음미하고 있으면 안쪽에 숨은 마멀레이드 같은 소스가 대번에 입안을 깔끔하게 마무리해 준다. 이 샬럿은 홀 케이크를 여덟 조각으로 자른 것이었는데, 겉으로 봤을 때는 그런 소스가 숨어 있는 줄 몰랐다. 아무래도 조각으로 자른 다음에 스포이트 같은 걸로 바바루아 안에 소스를 주입한 것 같다.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지만 확실히 깜짝 선물 같은 맛이었다. 신맛과 단맛이 이토록 잘 어우러진 케이크는 처음 먹어본다. 
사실 오사나이가 좋아하는 술맛이나 단맛이 뚜렷한 디저트는 그다지 내 취향이 아니다. 이 샬럿은 그보다는 상큼하고 가벼운 쪽을 좋아하는 내 입맛을 구체화한 듯했다. 나는 체면도 잊고 푹 빠지고 말았다.

- 모든 것은 이 지긋지긋한 더위 탓이다.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모든 것이 평소와 똑같았다면 나는 분명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심을 했으니 행동으로 옮기자. 그리고 행동하는 이상 탄로 나지 않도록 철저히 해야 한다.
오사나이가 믿도록 만들어야 한다. ... 샬럿은 처음부터 두 개밖에 없었다고.
 
- 가와나카지마 전투,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영웅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의 대결로 굉장히 유명한 전투다.
하지만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역사상 중요한 싸움은 아니다. 다섯 번에 걸쳐 가와나카지마에서 대치한 다케다 군과 우에스기 군은 자잘한 싸움을 되풀이했고, 전투라고 할 만한 규모로 싸운 것은 단 한 번뿐. 빈말로도 역사의 전환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세키가하라 전투나 오사카 전쟁과는 비교하는 것도 어리석은 노릇, 차라리 나가시마 전투가 후세에 더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후나도 고등학교에서 쓰는 교과서에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실려 있지도 않다. 

- 역사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국지전에 지나지 않는 가와나카지마 전투가 이토록 유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오로지 두 영웅의 대결이라는 낭만에 있다. 거국적으로 중요하다거나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지는 상관이 없다. 용호상박이야말로 가와나카지마 전투가 지금껏 구전되는 이유다. 


- 오사나이를 상대로 세 번째 케이크의 존재를 숨기려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이것은 나와 오사나이 사이의 전쟁이다.
오사나이라면 싸움 상대로 손색이 없다. 전혀 없다.

- 이 종이 롤을 어떻게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세 개의 롤을 전부 뜯어내 샬럿이 두 개였을 경우 있었을 위치에 도로 붙이는 것이다... 하지만 찰싹 붙어 있는 셀로판테이프를 흔적 없이 뜯어내 알맞은 위치를 고려해서 다시 붙이는 작업은 귀중한 시간을 크게 앗아간다. 그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오사나이가 돌아와 "고바토, 뭐 해?"라고 물으면 이 싸움은 내 패배로 끝난다. 
그렇다고 이걸 그대로 둘 수도 없다.

- 전부 뜯어낼까? 아니, 그 경우 샬럿 상자뿐만 아니라 망고푸딩 상자의 미끄럼 방지 장치도 뜯어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어째서 한쪽 상자에만 종이 롤이 붙어 있는지 의심할 수 있다. 그리고 다섯 개를 전부 흔적 없이 깔끔히 떼어내는 것도 대단히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 작업 시간을 최소화하면서 종이 롤에서 추리의 실마리를 얻지 못하게 할 방법은 무엇인가?

나는 상자에서 종이 냅킨을 꺼낸 다음 세 개의 종이롤 가운데 하나만 신중하고도 재빠르게 뜯어냈다. 뜯어낸 종이 롤도 주머니 속에 넣었다.
남은 두 개의 종이 롤을 관찰한 나는 만족했다. 구도가 흐트러져 무질서해 보였다. 두 개의 케이크를 고정시키는 장치로는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세 개의 케이크를 지탱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 그 밖에 케이크와 직접 관계된 물건. 스푼이다. 스푼에 묻은 바바루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는 순간적으로 두 가지 해결법을 이끌어냈다. 하나는 이 바바루아를 싹 빨아먹는 것. 이것은 가장 단순하고도 완벽한 은폐술이다. 아무리 오사나이라도 스푼에 침이 묻어 있는지 감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하지만 나는 다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오사나이의 뱃속에 들어가는 게 자연스럽지만 내게 약탈당할 운명의 샬럿으로 손을 뻗어 작은 접시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행위임을 충분히 인식하면서 스푼으로 샬럿의 한 귀퉁이를 잘라냈다. 이로써 이 스푼을 사용했다는 핑계가 성립된다. 그리고 동시에 이 샬럿은 나의 것이 되었다. 

- 스푼으로 바바루아를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배신행위를 의식해서 그런지 아까보다 훨씬 맛있게 느껴졌다.

- 오사나이는 실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해주니 기쁘네. 나도 정말 좋아해."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짓을 한 거야?"
"어... 그러니까 샬럿이 맛있어서."
"응. 그건 이미 들었어. 그런데 어째서 이런 짓을 한 거야?"

- 오사나이...
그런가. 내 입으로 듣고야 말겠다는 건가. 나는 고개를 살짝 젖혔다가 다시 떨구고 한숨을 쉬었다.
"오사나이하고 단둘이었으니까."

- 지극히 정보량이 부족한 이 말을 오사나이는 정확하게 해석했다.
"그러니까 나하고 단둘이면 마음껏 두뇌 싸움을 벌일 수 있겠다 싶어서? 날 속이면 재밌을 것 같았어?"
과연 이 년 가까이 함께 어울리면 머릿속까지 보이는 걸까? 나는 끄덕였다.
샬럿은 확실히 맛있었지만 그것뿐이었다면 오사나이의 몫을 가로챌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 잘 아는 사람이 뜻밖의 행동을 취하면 보통은 왜 저러나 의아하게 여긴다. 뜻밖의 행동이 거듭되면 상대에게 뭔가 심경의 변화가 생길 만큼 중대한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한다. 그리고 그것이 자꾸 이어지면 혹시 내가 상대를 이해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내가 오사나이에게 품은 의문이 바야흐로 그런 영역에 접어들고 있었다.

- 여름방학에 사흘이 멀다 하고 달콤한 디저트를 찾아 헤매다 급기야 장난스러운 수수께끼 문자까지. 이래서야 마치 이성교제가 아닌가.
나도 건전한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이니 연애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오사나이라면 백번 양보해도 스릴 넘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거부할 정도로 오사나이가 싫은 것도 아니다. 솔직히 내 취향은 조금 더 성숙한 용모의 여성이지만 그 부분은 타협할 수도 있다. 아니, 성격이 별로 좋지 않은 고등학생 고바토 조고로에게는 영광스러운 이야기이다. 
다만... 내가 아는 오사나이와는 아무래도 인상이 너무 다르다. 올여름 오사나이의 행동은 번번이 내 예상을 배반했다. 그렇다면 내가 오사나이를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었거나... 
나는 빨간 신호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중얼거렸다.
"뭔가 꾸미고 있거나."
그쪽에 십 달러 건다.

- 나와 오사나이가 목표로 삼고 있는 건 얼간이가 아니라 소시민이다. 하지만 굳이 바로잡지는 않았다. 소시민은 큰 소리로 내가 소시민이오, 하고 주장하지 않는다. 

- 겐고와 나는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다. 고등학교 입학 즈음, 겐고는 그 시절의 이미지로 나를 대했다. 즉 다소 통찰력이 뛰어나고 영리하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그 점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던 시절의 내 이미지로. 겐고는 고등학생 고바토 조고로에게도 일종의 탐정 같은 능력과 성향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 겐고가 그랬다. 예전의 나는 짜증 나는 놈이었지만 존경할만했다고. 그런데 지금의 나는 얌전히 지내지만 뱃속은 시커먼 불쾌한 놈이 되어버렸다고.
나도 할 말은 있다. 하지만 나와 겐고는 사고방식이 너무나 다르다. 이야기할 때마다 어긋나는 상대와 사이좋게 지내는 건 소시민이 할 일이 아니므로 한동안 말을 나누지 않았다. 겐고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내가 조금 멀리 했던 것이다. 
뭐, 도지마 겐고는 기본적으로는 좋은 녀석이지만.
 
- "그게 아니야. 방향성이 달라. 겐고는 서두르고 있었어. 그래서 이런 식으로 쓴 거야. 간략하게. 확실히 너무 간략해서 뭔지 모를 정도야. 하지만 겐고에게 그 정도로 시간이 없었던 것도 아니야. 이렇게 써도 나는 분명 알 거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쓴 거야."
하지만 오사나이는 내 견해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건 모를 일이야. 도지마 머릿속에서는 굉장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던 걸지도 모르지."
오사나이는 셰이크를 한 모금 더 빨고 마음에 들지 않는 맛에 또 얼굴을 찌푸렸다.

 

- "비할 바 없이 성스러운 순간, 인간의 머릿속에서는 비약의 한계가 사라진대."
"오..."
"죽기 직전에."
"도, 도치법이야? 게다가 죽는다는 거야, 겐고가?”
오사나이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고바토, 즐거워 보여..."
아차. 등줄기가 서늘했다. 그렇다, 나는 지금 겐고가 남긴 뭐가 뭔지 모를 메모를 해독하려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탐정 행위다. 나는 소시민이다. 소시민은 괴상한 메모를 보고 참뜻을 알아내려 애쓰지 않는다.

- 나는 오사나이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랬지. 미안해. 나는 이랬어야 했어."
메모지를 노려보는 대신 나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이 메모가 무슨 뜻인지 모른다면 본인에게 물어보면 된다. 간단한 일이다. 전화로 이렇게 묻는 것이다. '겐고, 아까 그 메모 말인데 난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어떻게 읽는지 알려줄래?' 겐고의 휴대전화에 연락했다. 신호음이 한 번, 두 번.

- "안 받네."
전화를 끊었다.
"고바토... 너무 빨리 끊었어..."
절대 그렇지 않다.
그나저나 유감이다. 겐고가 전화를 받지 않는 이상 이 메모는 직접 풀어야만 한다. 겐고는 한 여학생을 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고, 내게 도움을 청했다. 그에 응하는 것은 책임감 있는 인간으로서 극히 당연한 행동이며, 소시민으로서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어쩐지 싸늘한 오사나이의 시선을 느끼며 나는 다시 메모를 보았다. 누가 전화를 걸어왔지만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지금 전화, 도지마가..." 
오사나이가 뭔가 중얼거리는 것 같은데.

- "그러니까 첫 번째로 고려해야 할 문제는 '반 半'에서 일목요연하게 유추되는 무언가를 과연 내가 알고 있는가 하는 점이야. 겐고는 알고 있겠지. 그리고 겐고는 이 메모를 내게 남겼으니까 나도 그걸 알고 있다는 걸 전제로 삼았을 거야. 아무리 다급해도 자기밖에 모르는 내용을 메시지로 쓰는 얼빠진 짓은 아무리 도지마 겐고라도 하지 않겠지. 나는 그렇게 믿고 싶어."

- 내 경험상 모르는 문제를 풀 때 집중하면 안 된다. 물론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려면 집중해야 한다. 사고를 점차 좁혀 초점을 맞춰간다. 마침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면 이번에는 집중을 풀어야만 한다. 물론 긴장의 끈을 놓쳐서는 안 된다. 긴장감은 유지하되 사고를 확산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보는 행위와 흡사하다. 인간의 눈은 중심 부분이 어둠에 약하다. 그러므로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볼 때는 주변시를 쓴다. 상황의 본질을 파악하려면 사고를 확산시켜야 한다. 핵심을 감싸고 있는 전체상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보아야 할 답이다.  

- 사고가 슬그머니 퍼져나간다. 너무 집중해서 뭉쳐버린 시점이 분산되어 간다.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사고 방법... 
지도에는 기점이 필요하다. 그리고 겐고는 다급한 상황에서 이 메모를 썼고, 내가 당연히 이해할 거라 생각하고 건넸다.
아니, 건넨 게 아니었다.
기억 속 풍경에서 겐고는 메모를 내게 건네주지 않았다. 내가 멋대로 집어 들었다.
그렇다. 메모는, 그냥 놓여 있었다.

- 에어컨 바람이 시원한 거실에서 소파에 드러누워 문고본을 읽고 있었다. 반바지에 러닝셔츠, 변변치 못한 차림이지만 우리 집인데 뭐 어떠랴. 집에는 나밖에 없다. 더우니까 속옷 한 장만 걸쳐도 불평할 사람은 없지만 나도 체면은 있으니.

- 오늘은 푹 쉬어야겠다.
지금 읽고 있는 이 책은 아무 기대도 안 했던 작품인데 아침 식사 후에 펼친 뒤로 페이지를 넘기는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딱히 대단한 구석은 없는데 미묘한 위화감이 다음 전개를 무척 기대하게 만들고, 튀지 않는 문장이 읽기 편해 점심도 거르고 계속 읽고 있다. 손에서 뗄 수 없는 작품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건가. 이야기는 마침내 클라이맥스, 복선이 정교하게 깔려 있다는 건 알겠는데 어느 게 복선인지 모르겠다. 과연 주인공의 운명은 어디로? 결말이 궁금하면 종장에서 만나요, 하는 부분에서 훼방이 들어왔다.  

- 아아, 젠장, 전화라고는 일 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하는 녀석이 하필 종장 직전에 연락하다니, 정말이지 타이밍 나쁜 녀석! 내 목소리에는 억누를 길 없는 짜증이 묻어났다. 

- "그래서 낙담한 거야?"
겐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대단한 일은 못 해도 바로 물러나는 건 너무 빨리 포기하는 것 같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싶어서 한 번 더 만나러 갔어. 그랬는데 조고로, 나한테 뭐랬는지 알아?"
잠시 고민했다. 어지간히 쌀쌀맞은 대우를 받았겠지.
"민폐라고?"
"아니... 거치적거린다."

...

- 겐고는 면을 건져 매끄럽게 물기를 터는 사장의 솜씨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며 조금 자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각오가 부족해.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가와마타 사나에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어. 이건 위선이야..."
나는 조금 안타깝게 생각했다. 겐고는 정의로운 남자라 쓸데없는 일에 곧잘 끼어들지만, 망설이기 전에 먼저 뛰어들고 보는 단순한 적극성은 옆에서 볼 때 나름대로 재미있다. 그런 겐고가 위선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을 속박해서는 안 된다. 그 말은 조금 더 냉소적인 타입이 말해야 재미있는데. 

 

- 어쩌면 달리 지저분한 장소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거실은 깔끔했다. 근본적으로 물건이 적어서 너저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웃는 얼굴로 내주는 방석과 시원한 보리차를 대접받으니 아무래도 전에 왔을 때와는 기분이 달랐다. 오사나이의 집은 늘 너무 깔끔해서 생활감이 없는 호텔 같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그런 느낌이 하나도 없다. 보리차를 마시면서 문득 그 희박한 생활감은 공간 때문이 아니라 오사나이 본인에게 원인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사나이는 아무래도 조금, 독특하니까.  

- 물론 나도 남 말 할 처지가 아니라, 그 부분을 교정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는 소시민 계획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쟁반에 담은 전병 과자가 나왔다. 정중한 대접에 감사. 오사나이의 어머니는 낮은 테이블 맞은편에 우아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우리 유키가 늘 신세가 많아."
아닙니다, 저야말로. 정중하면서도 적당한 인사를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를 두고 값을 매기는 것만 같다. 뭘까. 저 미소 아래의 미묘한 긴장감. 노골적으로 쳐다보지는 않지만 뜨거운 시선이 느껴진다. 컵을 들었다 내려놓는 손동작까지 지켜보는 듯한.


- 나도 별 뜻 없이 웃으며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아아, 그렇구나. 당연히 눈치챘어야 했다. 그렇지, 그렇겠지, 귀여운 외동딸에게 들러붙은 게 어떤 벌레인지 가늠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예상을 뒷받침하듯 오사나이의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다행이야, 똑바른 아이 같아서."


- 눈에 든 것은 영광이지만 오사나이와 나의 관계를 오해하는 모양이다. 물론 우리가 일부러 조장하는 그 오해는 학교에서는 좋은 방패막이가 되지만 가족까지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내 걱정과 상관없이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 오사나이는 그런 일로 눈치를 볼 아이가 아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면 정말 근처에 시시한 물건을 사러 갔을 가능성이 높다. 금방 끝날 터라 약속을 앞두고도 외출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용무로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게 또 이상하다. 
이 추론을 정리하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오사나이는 이 근처에서 팔지는 않지만 나와 함께 사러 가기는 거북한 물건을 사러 갔다.

뭐, 그런 물건 한두 개쯤 있을 수 있지. 곧 돌아오겠지. 어색한 상황이지만 어중간한 미소는 유지할 수 있다. 우리 딸하고 무슨 사이냐고 캐묻는 것도 아니니 너무 긴장하지 말자. 

- 그 후로도 거실에서는 무난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오사나이의 어머니는 한번 깨진 침묵이 다시 찾아올까 봐 두렵기라도 한 듯 줄줄이 화제를 던졌고, 나는 그 질문에 싹싹하게 대답했다. 대체로 오사나이의 학교생활에 대해 물었는데 딱히 들려줄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는 없었다. 중학교 때 오사나이가 어땠는지 묻는다면 이야깃거리가 좀 있는데, 안 할 거지만.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전화가 울렸다.
 

-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그게 정말일까 하는 의혹. 적당히 거짓말을 둘러대 오사나이 가족에게서 돈을 뜯어내려는 사기가 아닐까? 그렇다면 오사나이의 어머니가 망설이지 않고 신고한 시점에서 몹시 어설픈 사기극이 되지만, 오사나이가 정말 유괴되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는 이상 의심은 해보아야 한다. 물론 진짜 유괴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 나와 오사나이는 지금까지 갖가지 트러블을 겪어왔다. 우리가 꿈꾸는 소시민은 트러블을 싫어하므로 전부 '어쩌다 휘말린' 결과다. 그것은 거의 대부분 신변의 위협을 수반하지 않는 심각하지 않은 트러블이었다.
우리는 타고난 성격 때문에 귀찮은 문제 가까이 있지만 진짜 위험은 조심스럽게 회피해 왔다. 그것은 둘 다 고배를 마셨던 중학교 시절의 경험으로 배운 호신술이기도 했다. 우리는 지난 일 년 남짓한 고등학교 생활을 대체로 평온하게 보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소시민의 영역이 아니다. 유괴는 온건한 사안이 아니다. 겐고가 남긴 '반'이라는 메모처럼 해결하지 못해도 별문제 없는 태평한 문제도 아니거니와, 샬럿을 사이에 두고 우리가 펼쳤던 장난도 아니다. 그 현실성이 오히려 내게서 현실감을 앗아가 정체 모를 공포를 안겨주었다. 

- 그뿐만이 아니다.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오사나이 유키가 유괴당했다는 말을 들은 나, 고바토 조고로가 느낀 감정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 의혹, 불안, 비현실성. 그렇다, 나는 분명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감정들의 밑바닥에 있는 발칙한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충동을 품고 만 것이 부끄러워 엘리베이터 안에서 중얼거렸다.
"이건 두뇌 싸움의 재료가 아니야... 오사나이가 실제로, 유괴당했단 말이다!"

- 나는, 흥분했다.

- 이런 일은 흔하지 않다. 영리함을 내세워 누구보다 빨리 '진상'에 다다를 수 있다고 자부하는 내게 이렇게 군침 도는 재료가 또 있을까? 재주도 호적수가 있어야 부각되는 법. 재능을 시험하려면 그에 합당한 무대와 소재가 필요하다. 오랫동안 그런 기회를 만나지 못했는데 이렇게 멋진 사건을 만나다니, 지금까지 참아왔던 지루함을 충분히 보상받고도 남는다. 유괴 만세!

 

- 요컨대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런 사고방식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상처 입히고 불쾌하게 만들었고 나 역시 비난을 받아왔는데. 그렇기에 더욱 소시민을 표방하고 얌전히 지내겠노라 결심했는데.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 오사나이가 위험하다는 사실에 비하면 정말 사소한 일이지만, 그나마 이번 일에 내가 낄 여지가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나는 기억에서 끄집어낸 사소한 단서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재주는 뛰어나지만 아무 단서도 없으면 논의할 가치가 없다.
아니, 솔직히 두어 가지 위화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걸 검증한다고 오사나이의 안전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이미 경찰이 움직이고 있다. 나의 소시민성을 따져볼 것도 없이 내가 나설 무대가 아닌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다음에야 비로소 진심으로 오사나이의 안전을 바랄 수 있었다.
오사나이, 도저히 그 나이로 보이지 않는 고등학교 2학년, 둘도 없는 친구 오사나이 유키. 어째서 그 애였을까. 진짜 유괴당한 게 맞는지조차 알 길이 없지만 부디 무사히 돌아와.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지만...
하다못해 그래, 네가 먹고 싶다던 사과 사탕을 사놓을게. 네가 돌아왔을 때 건네줄 수 있도록.
 
- 사탕이라면 함께 사러 가자고 약속했으니 그 약속을 깨고 싶은 거라면 어디로 와달라고 썼어야 한다. 게다가 카눌레라는 이름은 금시초문이다. 아마 디저트 이름이겠지만, 내가 디저트에 해박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 그런 이름을 꺼냈다는 것 자체가 뭔가 속셈이 있다는 뜻이다.
심부름시킬 목적이 아니라면, 문자는 왜 보낸 걸까? 나는 중얼거렸다.
"SOS다."
 
- 방금 전까지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를 괴롭히던 번뇌는 사라졌다. 소시민이 어쩌고 저쩌고 따질 때가 아니다. 문자를 해석해서 오사나이를 구출할 수 있다면 어찌 망설이겠는가? 나는 고민했다. 고작 이삼 초지만.
이것이 구조 요청이라면 나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이 문자를 경찰에 보여주고 수사가 진척되기를 기다려야 하는 걸까? 


- 겐고는 불쾌한 기색을 지우고 지독히 평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너, 달리 부탁할 친구는 없어?"
나는 소시민이고자 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며 얻은 친구들과는 역시 그런 관계밖에 맺을 수 없다. 내가 '여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겐고만이 여우인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 사실을 자조할 겨를도 없이 즉답했다. 
"없어."
겐고도 바로 대답했다.
"알았어. 어디로 가면 돼?" 

- 이번 일은 평범한 유괴 사건이 아니다. 무엇보다 몸값 액수가 이상했다. 요즘 세상에 제법 산다 하는 가족의 외동딸을 유괴해 놓고 몸값을 겨우 오백만 엔만 요구할 리 없다. 물론 적은 금액은 아니다. 나는 구경도 못 해본 거금이지만 유괴라는 중범죄로 얻으려는 금액 치고는 소꿉장난 같은 액수다. 
이 위험부담과 보상의 불균형을 해석하려면 범인의 지능 수준을 낮게 보는 수밖에 없다. 그것도 단순히 충동적이거나 단락적인 게 아니라, 평소에도 규범에서 벗어나 있어 자기 행동이 중범죄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패거리의 소행. 한마디로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불량배들이 저지른 짓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범인 그룹이 어떤 상대이든 유괴는 유괴, 오사나이가 위험하다는 사실에도 변함이 없다. 나는 겐고에게 눈짓을 하고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통로를 되돌아가 일단 밖으로 나간 다음 망설이지 않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 돌아오길 잘했다!
욕설을 퍼붓던 여자. 이사와가 오른손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쥐고 있었다. 오사나이 뒤에는 다른 여자애 둘이 버티고 있었는데 한 명은 오사나이를 붙잡고 있었고 또 한 명은 오사나이의 셔츠 오른쪽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었다. 이사와가 즐거워죽겠다는 듯이 웃었다. 
"나처럼 착한 애가 또 있을까! 얼굴은 안 건드리잖아. 어때. 이제 사과할래? 뭐, 여기까지 왔으니 끝장을 봐야지!" 
이사와가 오사나이의 하얀 오른팔에 담뱃불을 가져갔다. 저건 위협이 아니다, 진심이다!
 
- 오사나이가 크게 외쳤다.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홱 쳐들어 이사와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입이 웃고 있다.
저건... 어딘가 잔혹해 보이는 저 미소는.
중학교 때 몇 번 보았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들어온 뒤로는 타르트 사건 때 딱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 비웃는 것도, 오만한 것도 아닌, 어두운 기쁨이 느껴지는 엷은 미소.
비록 묶여 있기는 하지만 지금 오사나이는 소시민이 아니었다... '늑대' 오사나이 유키.
 
- "실은 여기저기 아파. 걔가 인정사정없이 배를 때렸거든."

오사나이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 말이 우스워서 웃었다. 유괴당하고 얻어맞았으니 분명 음험하게 원망할 줄 알았는데, 뒤끝은 없는 것 같았다.
어째서 이번에는 이렇게 관대할까? 물론 겉보기에만 그렇고 본심은 또 다를지도 모르지만, 오사나이는 당장이라도 콧노래를 흥얼거릴 기세였다.
나는 그 관대함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깊이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계속 마음에 걸렸던 점이 있다. 아니, 오사나이는 단지 해방을 기뻐하는 것이다. 그뿐이다. 단순한 이유다. 

- 메뉴를 보니 파르페만 해도 몇 종류나 되었는데 일단 '세실리아 특제 이그드라실 파르페'라는 엄청난 이름에 할 말을 잃었고, 이어서 여름철 한정 트로피컬 파르페의 가격에 넋을 잃었다. 내가 지금까지 내 돈으로 사 먹은 어떤 음식보다도 비쌌다.
사건 해결도 축하할 겸 여기는 내가 쏘겠다고 이미 말을 해버렸다.큰일 났다. 지금 주머니에 얼마나 있지? 하나만 시켜서 나눠 먹으면 안 될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오사나이와 파르페를 나눠 먹는 겁 없는... 아니, 낭만적인 행동을 할 자신은 없다. 그렇다고 혼자만 커피를 시키자니 주머니 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꼴이라 서글픈데 이를 어쩐다... 

- 고민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오사나이가 말했다.
"고바토 몫은 내가 낼게. 구해준 답례야."
죄송합니다.
 
- "그러네. 이 값으로 이만한 품질의 멜론을 먹을 수 있다니, 정말 놀라워."
오사나이는 스푼을 내려놓고 껍질이 붙어 있는 멜론 한 조각을 날름 먹었다. 껍질까지 먹어치울 기세다. 아이스크림이 녹으면 먹기 불편해서 완전 정복이 더욱 멀어지므로 나도 스푼을 고쳐 쥐고 아이스크림을 떴다. 
"이 아이스크림은 평범한 바닐라 아이스크림이지? 아이스크림만두고 보면 저번에 먹은 벚꽃 암자 게 맛있었는데."
우연이지만 어째서 그런 우연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볼 수는 있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만 정말 완벽한 우연은 그렇게 많지 않아. 완벽한 필연이 그리 많지 않은 것처럼. 문제는 개연성이야. 겐고와 가와마타 사나에, 이사와 하세미, 오사나이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질 만한 공통점이 내포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 화면을 오사나이에게 보여주었지만 오사나이는 힐끗 쳐다보고 바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오사나이는 내게 '사과사탕 네 개, 카눌레 하나'라고만 보냈어도 됐어. 그런데 문장 앞뒤에 세 글자씩 군더더기가 붙어 있어. 오타 하나 없고, 마침표까지 꼼꼼하게 찍어서 말이야. 아무리 봐도 유괴당해서 끌려가는 중에 범인의 눈을 피해 찍은 문자 같지 않단 말이야." 
"난 문자 보내는 속도가 정말 빨라. 그리고 이사와 패거리는 정말 멍청했어. 이러면 어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못 믿겠어."
"역시?"
오사나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오사나이는 내가 무엇을 어디까지 눈치챘는지 알고 있다. 알면서 내 입으로 들으려는 것이다. 왜 그러는지 나는 모른다. 
마저 이야기할 뿐이다.

- "오사나이가 즐겁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불러낼 리 없어."
오사나이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티스푼으로 홍차를 천천히 젓고 있다. 내 파르페는 그만 제때를 놓쳤다.
"내 자전거 짐바구니에는 아직 지도가 있어. '오사나이 여름 스위트 셀렉션'이 내 생각에 오사나이는 말실수를 했어. 기억해? 그 지도를 건넬 때 오사나이는 이렇게 말했어. '나의 올여름 운명을 좌우할' 거라고.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됐어. 그 지도를 바탕으로 나는 오사나이가 보낸 문자를 해독했고, 오사나이를 구해낼 수 있었어. 이건 우연일까? 설마, 아니야. 오사나이는 여름방학이 시작될 때 이미 '오사나이 여름 스위트 셀렉션'이 정말로 네 운명을 좌우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 오사나이와 이사와 하세미 사이에 뭔가가 있었다. 그저께에 한해 오사나이 유키인 줄 알아보기 쉬운 옷을 입고, 나를 불러냈으면서 혼자 외출했다. 그 결과 이사와 하세미에게 유괴당했지만 상식적으로는 보낼 수 없는 SOS 문자를 보냈다. 그 문자는 여름방학이 시작될 때 내가 받은 지도를 단서로 풀 수 있는 수수께끼였다.
이러한 정보를 종합해 보면 설마 싶은 가능성이 떠오른다. 나는 별로 믿고 싶지 않았다. 불쌍한 오사나이가 사나운 이사와 하세미에게 유괴당했다고만 생각하고 싶었다. 

- 하지만 나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모든 것은 우연, 오사나이가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실제로 불행한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내가 그런 일에 직접 관여한 적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대개 어딘가 믿기 어려운 불운이 얽혀 있었다. 
그래서 물었던 건데.

 

- "내가 물었지? 다음에 먹을 '오사나이 여름 스위트 셀렉션'을 사 가겠다고, 다음 게 뭐였더라 하고. 오사나이가 다음 건 팅커링커 복숭아 파이라고 해서 나는 그걸 사갔어. 하지만 오사나이, 아니잖아. 말 안 해도 알겠지? 다음에 먹을 건 무라마쓰야의 사과 사탕이었어. 산야도리 축제 당일에만 먹을 수 있는 굉장히 귀한 디저트야. 
오사나이가 풀려난 건 3시 반. 축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혹시 늦었더라도 부탁해 볼 만했어.
그런데 오사나이는 망설이지 않고 복숭아 파이라고 대답했지. 이유가 뭘까?"

- 오사나이가 숨기려던 비밀은, 당연히... 
"오사나이는 그저께 점심 전에 나가서 사과사탕을 먹었던 거지? 그래서 '다음 목표'는 복숭아 파이가 된 거야. 그날 나하고 먹으러 가기로 약속했으면서 어째서 먼저 사과 사탕을 먹었을까? 오사나이는 알고 있었던 거야. 이제 곧 행동에 제약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나하고 함께 사과사탕을 먹으러 가지 못할 공산이 크다는 사실을. 무라마쓰야가 특별히 차린 노점을 닫기 전에 풀려나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먼저 사과사탕을 먹었어. 이사와 하세미를 기다리면서."
 
- 여름방학 동안 몇 번이나 느꼈던 수많은 위화감. 내가 아는 오사나이 유키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 때문에 내가 그녀를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불안했다. 그런 행동을 정리하고 보니 유괴 대책이라는 걸 추리해 낼 수 있었고, 본인도 그것을 시인했다. 나는 역시 오사나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 물론 다소 기이한 이 소녀의 전부를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역시 '늑대'였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괜찮아. 오사나이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게 가장 중요해. 그렇게 말하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 나는 문제를 인식하는 능력은 별로 뛰어나지 않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어디가 어떻게 거짓말일까요,라는 질문은 식은 죽 먹기지만 거짓말이 아닌 척하는 문제에는 의외로 약하다.
그래도 위화감은 남는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쌓인다. 이것은 거의 직감에 가까운 판단이지만 우습게 볼 수는 없다. 방금 전 오사나이가 유괴당할 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걸 간파해 낸 것도 따지고 보면 이직감과 그에 입각해 '오사나이 여름 스위트 셀렉션'의 위화감을 의심한 것이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그 직감이 지금 다시 말해주고 있다. 뭔가 이상하다.

- 해결에 이르는 길은, 거기에 있다. 내 생각에, 이것은 오사나이를 신뢰하면 해결할 수 있다.
내가 알던 것처럼 오사나이가 늑대라는 사실을 재인식한 이상, 나는 오사나이가 내가 아는 그런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다. 

 

- 자문해 보았다.
Q. 오사나이는 약물 남용 패거리에게 원한을 살 만한 사람인가?
A. Yes. 지금이야 어쨌든 적어도 과거에는 그랬을 수 있다.
Q. 그렇다면 오사나이가 그 패거리의 정보를 지속적으로 얻을 수 있는 조직을 구축할 수 있을까?
A. Yes. 오사나이의 행동력은 알아줘야 한다. 내가 보증한다. 간단했을 것이다.
Q. 그렇다면 이사와 하세미 패거리의 악의를 감지한 오사나이는 미리 대책을 마련할까?
A. ... No. 그렇지는 않다.

- 오사나이가 사랑하는 것은 '복수'. 당한 것보다 훨씬 강렬하게 되갚아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게 내가 아는 오사나이 유키. 상대의 계획을 꿰뚫어 보고 도움을 청할 수단을 확보하는 수준에서 그쳤을 리 없다. 오사나이를 철저하게 믿는다면, 그녀가 그랬을 리 없다. 

- Q. 그렇다면 오사나이가 이사와 하세미 패거리에게 복수를 한다 치자, 그 복수는 이제부터 시작될까, 아니면 이미 끝났을까?

- 그렇구나. 그렇게 된 건가... 역시, 비밀은 한 겹 더 있었다.
역시 오사나이, 쉬운 상대가 아니다. 무심결에 미안하다는 말을 믿어버릴 뻔했다. 아니, 오사나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오사나이는 내 생각이 '오사나이는 유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고, 유괴당해도 바로 구출될 수 있도록 대책을 세워두었다'는 데서 머물도록 기특한 소리를 한 것이다. 

- 달칵, 딱딱한 소리. 오사나이가 홍차잔을 컵받침에 내려놓았다. 표정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 미안해하던 분위기, 본의 아니게 이용해서 나를 볼 면목이 없다는 태도는 싹 사라지고 없었다. 속을 모를 싸늘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다. 나는 몸을 떨었다. 그 시선에 위축되어서. 아니, 아니다. 대결을 앞두고 흥분한 것이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 "하지만 생각해 보면 묘해 몸값을 요구하는 전화를 받은 오사나이네 어머님은 상대가 '기계로 조작한 기묘한 목소리'로 말했다고 했어. 상대는 음성변조기를 썼던 거야. 그렇다면 음성변조기가 그런 곳에 있으면 이상해."
  
- "막상 현장에서 허둥거리다 말실수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그런 핑계로 사나에더러 녹음하라고 했어. 가여운 사나에. 내가 시키는 대로 테이프에 녹음하고, 그걸 또 내게 건네다니. 머리가 조금만 더 돌아가도 안 그럴 텐데."

- 동정이라기보다 연민에 가까운 말투. 나는 그 차가운 목소리에 낯선 감정을 느꼈다. 말이 터져 나왔다.

- "계획을 전부 자기가 생각해 냈다고 믿고 있거든. 그리고 내 손 안에는."
오사나이는 테이프리코더를 쓰다듬었다.
"이게 있어. 사나에가 몸값을 요구했을 때 쓴 테이프가 나는 사나에에게 협박당했을 뿐이야. 불쌍한 어린 양이야."
그렇게 말하는 표정이 어딘가 자랑스러워서. 어렵사리 찾아낸 달콤한 디저트를 자랑하는 표정과 어딘가 닮아서. 나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범죄는 과자가 아니야, 오사나이."
 
- 그렇다. 오사나이의 계획이 성공하면 이사와 하세미 패거리는 억울한 죄로 죗값을 치르게 된다. 그 아이들에게 죄가 없는 건 아니다. 오사나이를 납치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 애들의 자발적인 행동이니 어엿한 범죄다.
하지만 하지도 않은 유괴로 죗값을 치러야 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런 걸 무고죄라고 한다.

 

- "오사나이는 지금까지 이따금 약속을 어겼어. 나와 소시민이 되겠노라 약속해 놓고 잊기로 했던 집요한 보복을 좋아하는 일면을 가끔씩 드러냈지. 그걸 탓할 마음은 없어. 나도 비슷했으니까. 하지만 오사나이, 이건 선을 넘었어. 오사나이가 유괴를 선동한 것뿐이라면 그래도 실행에 옮긴 이사와 하세미 패거리가 나쁘다고 할 수 있어. 하지만 이건... 하지도 않은 죄를 남에게 뒤집어씌우다니. 이건 안 돼. 이건 못할 짓이야. 오사나이, 나는 오사나이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 특출한 관찰력과 행동력, 신중함을 남을 함정에 빠뜨리는 데 쓸 줄은 몰랐어."
 
- 오사나이는 눈을 깜빡거렸다. 잠시 장어처럼 시선을 꿈틀거리다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내가 거짓말쟁이라고...?"
"그래."
오사나이가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모자를 쓰지 않은 보브컷 소녀. 중학교 3학년 여름부터 늘 함께 있었던 오사나이. 지금까지 나는 그녀의 다양한 표정을 보아왔다. 기뻐하는 얼굴도, 화난 얼굴도, 간계를 꾸미는 얼굴도. 
하지만 오사나이의 지금 표정은 낯설었다. 웃고는 있었지만 천천히 시선을 돌린 오사나이의 미소는 차갑다기보다 어딘가 쓸쓸한, 완전히 지쳐버린 듯한 웃음이었다. 

- "그래. 나는 거짓말쟁이야. 고바토한테도, 도지마한테도 거짓말을 했어. 소시민이 되겠다는 약속도 깨버렸어. 하지만 고바토도 똑같은 거짓말쟁이야. 고바토, 알고 있어? 지금, 아까부터 날 고발한 고바토는 굉장히 즐거워 보였어. 머리를 굴려 아무리 작은 단서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고바토는 활기가 넘쳤어. 추리하기 싫다는 건 거짓말이야. 고바토가 말하는 '소시민'도 거짓이잖아." 
"그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넘어가는 게 불문율 아니었나. 좀처럼 극복하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진심으로 고치려고...
 
- 아니,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즐기고 있었다. 샬럿을 몰래 먹었을 때도, 겐고가 남긴 메모를 풀 때도, 오사나이가 유괴당했을 때도.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지금 대화조차. 
거짓말이라고 하면 반박할 말이 없다.

- 오사나이는 내뱉다시피 말했다.
"이것도 거짓, 저것도 거짓. 다들 그래, 나하고 고바토가 사귄다고. 하지만 그것도 거짓이야. 학교에서는 그래, 오사나이는 얌전하고, 고바토는 웃는 얼굴이 멋진 무난한 상대. 하지만 거짓이지. 나는 집에서도 거짓말을 해. 고바토도 분명 그럴 테지?
이렇게 온통 거짓뿐이잖아... 우리가 여우고 늑대라는 것도 거짓말이야. 그렇잖아? 고바토는 이렇게 속았고, 아직도 착각하고 있어." 

- "그런데 어째서 내가 이런 방법을 택했는지, 고바토는 아무것도 몰라. 알려고도 하지 않아. 나도 사실 이런 짓 하고 싶지 않았어. 이사와 패거리가 나를 납치하지 않으면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유괴 선동 계획은 포기했어. 일부러 위험한 꼴을 당할 필요는 없으니까. 이사와 패거리가 정말로 나를 납치했을 경우에만 더 무거운 죄를 뒤집어쓰도록 계획했다면, 이유가 오로지 복수 때문일 것 같아?"
유리를 통해 쏟아지는 여름 햇살을 받으며 오사나이는 제 몸을 감싸 안았다.
"난 무서웠어. 아무리 허세를 부려도 맞으면 아파. 상처가 깊으면 흉터가 남아. 이사와가 정말 내게 해코지를 할 사람이라면 가급적 오랫동안 멀리 떨어뜨려놓고 싶었어. 일 년이라도, 반년이라도 더 길게 내 곁에서 사라지면 좋겠어.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이사와를 '유괴범'으로 만들었어.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 거야. 그러지 않으면 무서웠으니까. 내가 한 짓이 거짓이라면, 무서운 사람에게서 달아나기 위한 거짓이었어..."

- "고바토는 나를 믿는다고 했지. 나도 지금 고바토를 믿어. 고바토는 내가 무서워했다는 걸 절대 믿어주지 않을 거야. 왜냐면 고바토는 생각만 할 수 있으니까. 공감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니까. 나하고 마찬가지야. 나도 결국 똑같아. 내 계획은 이렇게 들통이 났어. 우리가 굉장히 영리한 '여우'도 '늑대'도 아니고, '소시민'이 되겠다는 말도 거짓이라면 과연 뭐가 남을까? 고바토는 알아?"

- 사실은 여우가 아닌데 자신을 여우로 착각하고 소시민이 되겠노라 선언했다면. 그마저도 거짓말이라면.
그것은 마치 솜사탕. 달콤한 거짓말을 부풀린 것은 작은 한 줌의 설탕.
무엇이 남는지 물론 알아, 오사나이.

 

- 오사나이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남는 건 그저 오만한 고등학생 두 사람뿐이야..."

- "고바토, 우린 이제 함께 있을 이유가 없어."
그렇게 말하는 오사나이의 목소리는 내 착각이 아니라면 어딘가 비장하지만 감정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차분한 음성이었다.
오사나이는 테이프리코더를 소중하게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마치 거기에 대고 말하듯 뒷말을 이었다.
"줄곧 생각했어. 우리 약속은 서로 '소시민'이 될 수 있도록 돕자는 거였어. 문제에 휘말리지 않도록,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있도록, 고바토는 나를, 나는 고바토를 방패막이로 삼았어. 이제 누구에게도 쟤는 저런 녀석이라고 손가락질 당하지 않으려고... 중학생이었던 우리는 그 약속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어. 아마 정말 그랬을 거야. 하지만 이제는 충분해."

- "아니야. 대답 내용이 아니라, 그 방법을 말하는 거야. 고바토. 난 지금 헤어지자고 말하는 거야. 헤어진다는 표현이 커플 같다면 말을 바꿀게 관계 해소를 요구하는 거야. 고바토라면 짐작하겠지? 내가 여태껏 그렇게 생각했다면, 어째서 오늘까지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는지."
그런 건, 고민할 필요도 없다.
"이사와 하세미를 처리하기 전에 나하고 갈라서면 안 되니까."
"맞아. 그런 내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내가 거짓말로 이사와 함정에 빠뜨린 건 화냈잖아."
"이사와 문제는 규칙 위반이니까 화내는 게 당연하잖아. 하지만 오사나이가 나를 이용한 건 화낼 일이 아니야."

- 그렇게 대답하면서 나는 점점 차분해졌다.
차분할 수 있는 장면이 아닌데. 오사나이도 무척 차분했다. 초등학생 같은 얼굴에 차가운 미소를 띠고 있다.
"거봐. 우리는 상대가 변덕스럽게 헤어지자고 해도 싸울 수조차 없어. 그게 옳은지, 타당한지 판단하려 하지. 생각밖에 못 해. 화도 나지 않고, 하나도 슬프지 않아. 고바토 하고 있는 한 이대로도 상관없을지 모르지만." 

- "영원히 함께 있을 수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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