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하지은
출판 : 달다
출간 : 2023.02.28
내가 읽어본 하지은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이야기였다.
그 이유를 꼭 집어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는 어렵겠지만 조금이라도 풀어 설명해 보자면...
<녹슨달>은 그림을 그리는 이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소설이다.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 생업을 위해 그린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그들의 주변에는 이들의 그림을 즐기고, 감상하고, 활용하는 사람들 역시 모여든다.
그런 다양한 존재들의 이야기가 이전 작들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서 좋았다.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개개인의 삶들을 보여주고 싶어 한 것 같아서. 다소 지엽적인 듯 보이는 부분들도 '파도 조르디'라는 한 인물과 그 주변부에 관한 일대기를 담고자 했다고 생각하면 모두 의도된 것처럼 느껴진다. 조르디의 그림에, 시세로의 그림에 의미 없는 선과 붓질은 없었던 것처럼.
시세로와 레오나르, 조르디의 예술관도 흥미로웠다. 시대마다 높게 평가되던 화풍은 달라져왔지만 그럼에도 시간을 뛰어넘어 명작으로 꼽히던 그림들은 존재했다. 순위를 매기는 경연이 존재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결코 우위를 가를 수 없는 작품들 역시 존재했다.
정답이란 없는 세계.
그 안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기 위해, 걷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의 모습은 매력적이었다.
물론 아쉬운 점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내 개인의 취향의 문제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먼저 조르디의 불안정성. 그것을 예술가적인 면모라고 보자면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뭐랄까.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 같지만 기본적으로는 모두 닮아있다고나 할까.
감정선을 따라가기가 버겁다고 해야 할까.
파도 조르디의 경우,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와 열등감으로 인해 생각들이 그렇게 튀었다고 설명한다면 납득은 가능하다. 그러나 묘한 -여기서 언급하기에 적절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INFP스러움이랄까- 의식의 흐름이 거리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특히 외전을 읽으면서 비슷한 아쉬움을 다시 느꼈는데, 본편에서 레오나르의 그림을 통해 보여졌던 에드나는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에 가까운 이미지로 좀 더 차분하지만 단단한 느낌이었다. 외전에서의 에드나가 그렇지 않았다는 건 아니지만... 훨씬 감정적이고 수동적인 느낌. 다소 독특했던 설정도 개인적으로는 취향이 아니었다. 상상했던 에드나의 이미지와는 달랐던 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 또한 파도 조르디와 거의 동일한 인물처럼 읽혔기 때문이다. 본편에서는 조르디의 시선으로 바라보기에 덜하지만, 외전에서 시세로의 속내를 풀어 보여줄 때 또한 마찬가지. 결론은 다르더라도 사고방식은 동일했다고 할 수 있겠다. 가장 거리가 멀었던 건 폰 블레이젝인데, 그렇기 때문인지 생동감이 조금 약하게 느껴졌다. -딴소리지만 <파이널판타지 7>의 세피로스가 겹쳐 보인다. 다른 작품으로는 화공과 도제, 귀족가와의 관계를 다룬 만큼 <아르테>라는 작품도 겹쳐 보이지만 출간 시기 상 <녹슨달>이 훨씬 앞서니 혹시라도 오해는 말아주셨으면 좋겠다-
이런저런 아쉬움이 남지만, 결론적으로는 무척 만족스럽게 읽었다.
세련됨보다는 투박함이 남아 있는 거대 작품을 감상한 느낌.
즐거웠다.
- 말하자면 내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 그 사실을 죽도록 싫어하고 어떻게든 거기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끝내 그러지 못한, 재능도 없고 운도 따라주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 아버지는 화가였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그 일을 한다고 했지만 아버지가 그림을 그릴 때 웃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오히려 한숨을 쉬고 머리를 쥐어뜯고 물감을 내던지다 못해 끝내 울음을 터뜨리기 일쑤였다.
언젠가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렇게 괴로운 일을 왜 계속하시는 거예요?"
"언젠가는 이 괴로움이 끝날 거라고 믿기 때문이지."
"지금 그만둬 버리면, 그러면 끝나는 거잖아요."
아버지는 텅 빈 화폭으로 눈을 돌려 한동안 거기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정작 비어있는 건 아버지인 것처럼 보였다.
“그건 괴로움이 끝나는 게 아니야. 내가 끝나는 거지."
-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나도록 텅 빈 캔버스에는 선 하나 그어지지 않았다.
-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아버지는 모처럼 기분 좋게 일어나 캔버스 앞에 앉았다.
"오늘은 왠지 좋은 그림이 그려질 것만 같아."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나는 그림을 기대하겠노라 말하고 학교에 갔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여전히 텅 비어있는 캔버스를 발견했다.
그 앞에 목을 매달고 죽어있는 아버지도.
- [재능을 비관하던 화가, 스스로 목숨을 끊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렇게 신문에 한 줄로 정리되었다.
그 죽음은 말하자면 그런 죽음이었다. 세상이라는 복잡한 무대 위에서 주인공쯤 되는 누군가가 휘두르는 칼에 맞아 우수수 쓰러지는 사람 가운데 하나. 누구도 이름을 궁금해하지 않고 누구도 그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는 그런 죽음 말이다.
- "이제 끝난 건가요?"
아버지를 묻고 난 뒤 무덤 앞에 서서 그렇게 물었지만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버지가 괴로움을 끝낸 건지, 괴로움이 아버지를 끝내버린 것인지.
어쩌면 둘 다일 테고, 어쩌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을지도 모르겠다.
- 길거리에서 뭐든 하고 살았던 내게 허드렛일은 크게 어려울 것이 없었다. 다만 가문의 분위기 탓인지 하인들은 모두 조용하고 무뚝뚝했다. 스스로는 잘 몰랐지만 나는 대단히 정에 굶주렸던 모양이다. 그들과 친구 혹은 가족 비슷한 관계가 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으니. 하지만 그 바람이 한참 빗나갔음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성에 대한 궁금증으로 간질간질한 마음을 느끼며 잠을 설치던 어느 날, 평소 이름을 알고 지내던 누나뻘 되는 하녀가 나를 불러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그녀를 따라갔다가 이렇다 할 마음의 준비도 없이 여성과 처음으로 밤을 보내게 되었다. 어떤 의미로든 그것은 굉장한 경험이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성적 충족감과 더불어 앞으로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생각에 마음 한쪽이 포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기대했던 친근한 태도를 보이는 대신 깨어나자마자 냉랭하게 옷을 입고 나가버렸다. 어리둥절했던 나는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가 여러 남자 하인들과 별 감정 없이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아버지는 가끔 창밖으로 내 그림을 내다보며 웃곤 했는데, 그 단란함은 내가 열 살 때 미술 아카데미에 보내달라고 조르면서 깨지고 말았다.
"왕립 아카데미라고?"
"미술 학교예요. 거긴 천재들만 들어갈 수 있다던데 저보고 들어와도 된다고 했어요."
"누가 말이니? 언제 내게 말도 없이 시험을 본 거지?"
"시험을 본 게 아니에요. 아까 시장 바닥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어떤 분이 지나가다가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림 실력이 좋으니까 학교에 다니고픈 생각이 있으면 자길 찾아오라고요. 와서 자기 이름만 말하면 된다고 했어요. 이름이... 아, 레이번이라고 했어요."
아버지는 놀라다 못해 경악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나는 흥분해서 물었다.
"그 사람 진짜 화가가 맞아요? 유명한 사람이에요?"
"... 아니, 아니다. 그럴 리가 없어. 사기꾼일 게다."
- "되고 싶어요. 아버지처럼요."
"그럴 수 없어. 넌 재능이 없다."
틀림없이 기뻐해 줄 거라 생각했는데 아버지의 얼굴은 내 예상과 달리 너무나 싸늘했다.
"재능이 없다니요? 그분이 아카데미에 들어오라고 했는데도요?"
"학생 수가 부족했던 모양이지. 돈이 궁했거나."
- 아버지는 드물게도 크게 화를 내면서 오랫동안 고민하며 그려온 그림을 내 앞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다음 날에는 늙어가는 아비를 두고 혼자 떠날 생각이냐며 매달리고 애원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내 마음이 변하지 않자 정 그렇다면 가족의 연을 끊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좋아요. 그게 아버지가 바라시는 거라면."
아버지는 몹시 상처받은 듯했다. 하지만 그건 아버지를 두고 가려는 아들에 대한 서운함 같은 종류의 상처는 아니었다.
훗날에야 나는 그것을 이해했다. 그는 아들을 질투했던 거다.
- 결국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못했고 그 후로 아버지는 내가 그리는 그림을 다시는 쳐다보지 않았다. 나도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그리는 걸 피했고 그러자 그림 그리기가 예전보다 즐겁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의 관심과 인정이 좋았던 거다.
돌이켜 생각해도 그때의 일은 우울한 기억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버지가 죽은 뒤에야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때마다 묘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아버지를 추억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그러나 공을 들여 그 풍경들을 세세히 그려내고 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슥 지웠다. 그것이 규칙이었다. 내게는 누구에게도 그림을 보여주지 않고 화가가 되지도 않겠다는 결심이 있었다. 결코 아버지처럼 죽지 않겠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 "그리고 저 그림은 호세이즘 시대의 걸작이라고 평해지는 <고요한 침잠>이지. 아가르트의 솜씨야. 아, 저쪽에 있는 금장식은 카이손의 유작임이 틀림없구나. 어디로 눈을 돌려도 걸작들만 보일 따름이지만, 사실 이건 지나친 예술적 낭비라 해도 과언이..."
"그리고 거기서 재미있는 차림으로 수많은 걸작들을 알아보시는 그대는 엘마이다 키리오니겠구려."
무심코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봤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계단 위에서 압도적인 표정으로 우리를 내려다보는 사람이 바로 이 저택의 주인인 모슬로 라잔 경이었다. 예술 작품을 논하던 남자는 라잔 경을 신기한 무언가라도 되는 양 바라보았다.
- 키리오니는 고개를 숙인 다음 나를 힐끗 쳐다보며 웃었다.
"그럼 나중에 보지. 부러운 친구."
그가 사라지고 나서도 한동안 그가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당시엔 그를 잘 몰랐음에도 꽤나 강렬한 기억이었다.
벌써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그가 바로 훗날 대백과사전을 편찬함으로써 위대한 학자로 불릴 엘마이다(중간에 생략된 수많은 이름들은 무시하자.) 키리오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이미 모르는 것이 거의 없었고 특히 예술적 식견으로는 따를 자가 없었다.
사람들은 보통 키리오니라 하면 하얀 수염에 근엄하고 총명한 노인을 떠올리지만, 사실 그는 어딘지 공허하며 자신 외의 모든 사람들을 은연중에 경멸하는 음울한 사람이었다. 무엇이든 알고 있는 자에게는 그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 "모르지요. 이러저러한 말들이 많긴 한데 대체로 허황된 이야기들뿐입니다. 심지어 그가 교황의 숨겨둔 아들이 아니냐는 소리도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에 신사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들 중심에 앉아있던 라잔 경은 전혀 웃지 않았다. 어느 한 곳을 가만히 응시하며 파이프를 깊게 빨아들인 그는 연기와 함께 섬뜩한 말을 내뱉었다.
"농담으로 하기엔 좀 신성모독적이로군."
누군가 일부러 하려 해도 그렇게 단칼로 자르듯이 침묵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응접실의 분위기가 어찌나 싸늘했던지 숨을 내뱉는 순간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아무렇지 않게 그런 침묵을 만들어낸 라잔 경은 또다시 아무렇지 않게 침묵을 깼다.
"그가 단지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만 재미 들린 얼간이었다면 나는 그가 가진 권한과 상관없이 언제든 내 저택에서 내쫓았을 것이오. 하지만 그는 많은 것을 꿰뚫어 볼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고 때로는 존경스럽기까지 하지. 그러니 더 이상 우리 젊은 친구에 대한 불쾌한 추측들은 하지 말도록 합시다."
신사들은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렸고, 마치 그것이 의무인 양 순식간에 다른 화제들을 쏟아냈다.
- 며칠 뒤 나는 달빛 아래에서 홀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정원 한 구석 나만의 화폭에는 특별히 고르고 고른 흙이 모여 있었다. 땅을 파내려 갈수록 흙의 색이 조금씩 짙어졌기에 그것으로 서로 다른 색과 명암을 표현했다.
그날의 주제는 달빛이었다. 중앙에는 가장 곱고 연한 흙을 모아 반듯하게 달을 그렸고, 반짝이는 작은 모래 알갱이들로 은은한 빛이 퍼지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달에서 멀어질수록 땅을 깊이 파서 그림자를 만들었더니 마치 정말로 땅 위에 달이 떠있는 것 같았다.
나는 한동안 완성된 그림을 보며 감탄했고 이번만은 곧바로 지워버리기가 어쩐지 아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손을 들어 가장자리부터 흙을 덮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달 주위로 가서는 멈추고 말았다.
여기는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는 곳이다. 내일 한 번만 더 이 그림을 보고 지우면 안 될 이유도 없지 않은가.
- "일전에 비 오던 날 여기 그려져 있던 다른 그림을 보았다. 그것도 네가 그린 것이냐?"
"예. 그렇습니다."
"솜씨가 좋던데, 어째서 공방에 도제로 들어가지 않았지?"
"도제요?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화가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고결한 예술가분들이 하는 것이지요. 저 같은 것이 했다간 비참하게..."
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뻔했으나 다행히 자작이 말을 가로챘다.
"별로 그렇지는 않다. 장인들 중에 파렴치한 작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너는 상상도 할 수 없을 거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런 자들이 만들어내는 것 중에도 더러 훌륭한 작품이 있다는 것이지. 그들도 내면의 본질에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그럴듯한 흉내와 자기기만일까..."
- 소년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입이 떡 벌어졌다. 건물은 내가 일하던 저택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마당에 울리는 망치질 소리와 톱질 소리, 땀을 흘리며 자기 작업에 깊이 몰두하고 있는 사내들의 모습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문을 지나는 순간 흐르는 공기마저 달라진 것 같았다.
여기가 진짜 예술가들의 세계구나. 나는 그때 꽤나 감동했던 것 같다.
- 그의 얼굴에서는 따분하지만 어딘지 자긍심 넘치는 권태가 묻어났다. 특이한 인상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가 말했다.
"캔버스라면 저기 얼마든지 널려 있으니까 아무거나 그려봐. 물감하고 붓도 마음대로 갖다 쓰시구려."
그러고는 탁자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소년과 그를 번갈아 보았지만 소년은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 "뭐. 붓까지 갖다 쥐어주랴?"
"아니요. 전 붓으로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는데요."
소년이 푸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가 얼른 헛기침을 했다. 시세로는 한쪽 눈가를 잔뜩 찌푸린 채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그럼 뭐, 목탄?"
"아니요, 저는..."
"네놈이 뭘 가지고 뭘 그리든 관심 없어. 어쨌거나 높으신 나리께서 보내셨다니 이 몸의 귀중한 시간을 쪼개서 너한테 허비하는 중이라고. 그러니까 아무거나 있는 대로 그리고 나가."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별 이유도 없이 험한 말을 들어 어안이 벙벙했지만 이상하게 화는 나지 않았다. 다만 그제야 이 모든 게 의미하는 바가 무언지 깨달았다. 나는 주저 없이 등을 돌려 바깥으로 나갔다. 소년이 '어어' 하며 당혹스러워했지만 상관하지 않고 마당 한가운데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내 방식대로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 마침내 모든 것을 그려내고 몸을 일으켰을 때는 이미 해가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땡볕 아래에서 온종일 그림만 그렸기에 온몸이 땀에 젖어있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야 대여섯 명쯤 되는 사람들이 내 그림을 구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를 데려온 도제 소년도 있었는데 몹시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소년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몸을 홱 돌리더니 시세로가 있던 방으로 들어갔다.
- "다 그렸냐, 꼬마야?"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별 관심 없는 태도로 내 그림으로 눈을 돌렸다가 두 팔을 쭉 뻗은 채로 멈췄다. 그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이 사라지더니 그림의 끝에서 끝까지 눈동자가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나를 한 번 보고는 다시 그림을 보았다. 긴장과 기대감으로 뱃속이 이상하게 꿈틀거렸다.
"오호라. 어쨌든 제법 그리긴 하는군."
그는 그림 주위를 왔다 갔다 하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나는 그의 눈동자가 흐리다는 것을 알았다. 그림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한데 고작 정원을 보고 따라 그린 게 전부냐? 시시하구만. 화가가 되고 싶은 놈이라면 좀 더 거창한 걸 그려야지. 종교나 역사나 신화의 한 장면 같은 거 말이다. 게다가 명암 대신이랍시고 흙을 파낸 이 부분들 좀 봐라. 조악하기 이를 데 없어. 화가가 될 재능이나 있는지 의심스럽구나. 뿐만 아니라..."
- 듣고 있는 동안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나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로 그림을 싹 쓸어버렸다. 그러자 시세로의 표정이 굳어졌다.
"너 지금 뭐 하냐?"
제법 큰 그림이었기에 몇 번을 반복해야 했다. 그림을 완전히 지우고 나서 고개를 들자 시세로는 짜증스러운 듯이 나를 보았다.
"이봐, 아직 평가 중이잖아. 마음대로 지우면 어떻게 해?"
"평가받고 싶지 않습니다."
"뭐?"
"저는 그리고 싶을 때 그리고 싶은 것만을 그립니다. 화가가 될 생각은 없습니다."
- 물론 화가가 될 생각도 없고 혼자 그리는 것에 만족해 왔지만 남한테서 조악하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매우 상했다. 어릴 때 아카데미로 오라던 사람도 그렇고 자작님마저 내 그림을 칭찬했는데 진짜 화가라는 사람은 그러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규칙은 어쩌고 그렇게 보란 듯이 그림을 그렸을까. 나는 캔버스 앞에서 울고불고 안간힘을 쓰다 목매달아 죽는 일은 결코 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처럼, 그런 일은.
"역시 전 재능 없던 아버지의 재능 없는 자식이네요. 그런 저를 도대체 왜 질투하셨던 건가요?"
쓸쓸하게 웃으며 그렇게 되뇌어 보았다. 대답은 없었지만 아버지가 만족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그 사실에서 우울함과 함께 아주 희미한 만족감이 느껴졌다.
- 나는 당혹스러웠지만 어쩐지 기쁘기도 했다. 그림을 남겨두지 않는다는 규칙이 떠올랐지만 화가가 되지만 않는다면 별 상관없을 듯싶었다. 이제 나에게도 관람자가 생긴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실 저는 늘 이곳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눈에 띌까 봐 그리자마자 지웠을 뿐입니다."
"그래? 아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남지 않을 그림이라는 게 매력적이기도 하구나."
- 그 자리로 달려가면서 이미 나는 울고 있었다. 그런 시체를 본 적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런 모습이 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건, 목을 맨 사람의 모습이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딱 그런 얼굴이었다. 자작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어째서 내게 그런 부탁을 했단 말인가.
그 자리에 도착하고 나서야 나는 답을 알았다. 아직도 그곳에는 내가 그린 자작의 얼굴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다른 손님도.
- "자작님은... 자작님은 오시지 않아요."
그림을 내려다보고 있던 사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래. 알고 있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는 담담했다. 나는 자꾸 목이 메는 걸 느끼며 반문했다.
- "그분은 당신을, 그분을 당신을..."
"그것도 알고 있어."
그녀는 차분하게 대답하고 베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곤 마지막으로 자작의 얼굴을 한 번 더 쳐다보고 자리를 떠났다.
-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 서서 무너진 둑처럼 울어댔다. 거짓이든 아니든 정말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나는 항복을 외쳤다.
"알았어요! 보여주면 되잖아요, 보여주면."
그러자마자 그가 흡 하더니 울음을 뚝 그쳤다. 나는 맹세코 눈물을 그렇게 마음대로 다루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고맙군. 하지만 자네도 손해 보는 건 아니야. 내 눈물은 정말 값지거든."
- "전 화가는 안 될 거예요. 그러니 내 그림이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지 마세요."
키리오니는 부드럽게 웃었는데 마치 어린아이의 치기를 바라보는 어른 같은 웃음이었다. 그를 무시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 두 시간 가까이 걸렸음에도 키리오니는 계속 똑같은 자세로 서서 내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는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뜯어보았다. 한동안 기다리던 나는 그에게서 아무 말이 없자 초조함을 못 견디고 입을 열었다.
"이제 됐나요?"
"꽃주위에 저건 뭐지?"
그는 마치 내가 말을 걸어주길 기다린 사람처럼 황급히 물었다. 그가 가리킨 방향을 보면서 시큰둥하게 손을 털어냈다.
"그건 향기잖아요."
"향기... 라고?"
그는 그런 단어는 처음 듣는 듯한 얼굴이었다.
"네. 꽃 냄새가 아주 좋았거든요. 하지만 그림으로는 맡을 수 없으니까 어떻게든 비슷하게 표현해 보려고 한 거예요."
그는 이제 그림을 노려보던 눈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림으로 맡을 수 없는 걸 표현하려고 했다고?"
- "너는 관념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 했어."
"관... 뭐요?"
"관념!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객관적으로 증명할 순 없지만 존재한다고 굳게 믿는 것들 말이야."
- "어느 화가에게 '사랑'이라는 주제를 주었다고 치자. 그 화가가 무엇을 그려내겠니? 오, 뻔하게도 남녀 둘이서 서로를 껴안거나 그 뒤로 사랑의 여신이 나타나는 정도겠지. 그 누구도 사랑 그 자체만을 그리거나 색으로 표현하려고 한 적은 없단 말이야. 결코 신을 형상화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가들은 관념 자체를 그려내는 걸 끔찍이 두려워해. 이 모든 건 종교 탓이기도 하지. 정말이지 끝없이 예술을 억압하고 정체시키거든. 하지만 네 그림은, 네 그림은 정말이지..."
칭찬하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나는 왜인지 기분이 나빠져서 그림을 싹 지워버렸다. 그러자 그는 거의 화를 내려고 했다.
"뭐 하는 거야?"
"뭐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난 그냥 그리고 싶은 걸 그렸을 뿐이에요. 이상하게 해석 같은 거 하지 마세요. 당신이 뭘 알아냈든 그건 내가 그리려고 한 게 아니니까요. 분명히 말했죠. 평가하지 말라고요."
- "네 그림을 이곳으로 옮길 거야. 색까지 넣어서 말이지. 운 좋게도 나는 이 그림 속의 장소가 어디인지 알고 있단다. 나도 자주 가는 골짜기지. 그러니 네가 기억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대담하게도 화폭의 중앙을 붓으로 슥 그어 내렸다. 아무 망설임 없는 그 행동이 내게는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흙바닥 위라면 상관없겠지만(틀리면 단지 흙으로 덮으면 될 뿐이니까.) 내게 저런 새하얀 천 위에 그림을 그리라고 한다면 선 하나 긋기도 아주 부담스러울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마치 아이들 장난인 양 슥슥 붓을 움직였다. 거기에는 어떤 규칙도 통일성도 없어 보였다.
이를테면 내 경우엔 나무 밑동을 완성한 뒤에 잎사귀를 그리겠지만, 그는 나무줄기를 그리다가 갑자기 반대쪽에다 꽃잎을 그리고 허공에 꽃잎이 떠있도록 놔둔 채 뒤에 있는 골짜기로 이동하는 식이었다. 신기한 것은 일견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그 행동이 점차 그림을 완성해 나간다는 점이었다.
- 나는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손동작 하나하나에 온 정신이 팔려 있었다. 질감이라곤 느껴지지 않던 둥근 회색 면에 붓을 몇 번 대자 거칠고 모난 돌이 되어 순식간에 입체감을 띠었다. 뒤쪽에 어색하게 떠있던 산자락도 붓이 몇 번 왔다 갔다 하자 갑자기 안개에 싸인 비밀스러운 산맥으로 돌변했다. 게다가 그 모든 작업들이 어찌나 빠른지 잠시 눈을 감는 시간조차 아까울 정도였다.
- "네 그림은 물론 훌륭해. 흙 위라면 너만큼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다. 하지만 보다시피 우리는 캔버스 위에서 더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지. 무엇보다 색 -이건 대단히, 대단히 중요하단다- 을 넣을 수 있어."
"전 그런 거 쓸 줄 몰라요."
"배우면 돼."
- "당신 그림이라고요?"
그가 흙바닥의 그림과 자신의 그림을 차례대로 가리켰다.
"모작. 모사. 그것만이 내가 하는 일이야."
"어째서요?"
"글쎄. 아무튼 그래서 난 결코 화가로 인정받지 못해. 모사가일 뿐이지."
나는 자존심과 진실 속에서 갈등하다 결국 말해버렸다.
- "솔직히 말해서 당신 그림이 내 그림보다 더 나은걸요."
"그렇지 않아. 색을 입혔기에 그렇게 보일 뿐이야. 나는 네 그림과 똑같이 그렸어. 그것만은 내가 아주 잘하는 일이란다. 그리고 흙이기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부분들이 캔버스에 충실히 표현되었을 뿐이야."
나는 그가 한 말을 되새기며 내 그림과 그의 그림을 비교해 보았다. 그러면서 내가 붓을 쥐고 그릴 경우 어떤 것들이 가능할지 상상했다. 그것은 감미로우면서도 고통스러운 느낌이었다.
- "시세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그가 아니라도 너를 가르쳐 줄 화가는 많단다."
"그래도..."
다음 말을 꺼내기 전에 몇 번이고 망설였다. 그 이야길 이 사람에게 해도 되는 걸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렇지만 이상하리만치 신뢰가 가는 이 사람에게?
"제 아버지도 화가셨어요. 그렇지만 그림을 그릴 때마다 괴로워하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어요."
레오나드는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그는 말없이 나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건 동정일 수도 있었지만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전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요."
"누구나 그렇게 되는 건 아니야."
그는 다소 거칠게 대꾸하더니 다시 말했다.
"미안하구나. 네 아버지를 나쁘게 말할 생각은 아니었단다."
- "괜찮아요. 전 그저 확신할 수 없어요. 저에게 정말로 화가가 될 재능이 있다고 보시나요? 아버지와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어요?"
질문하면서도 그 대답을 레오나드에게 강요하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나는 정말로 절박했다. 그의 대답이라면 뭐든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는 대답을 피하지 않고 신중하게 생각한 뒤에 말했다.
"솔직히 그건 아무도 약속할 수 없어. 재능이란 건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개인적인 내 관점을 물어본다면, 그래. 난 네게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코 그것만으로 좋은 화가가 되는 건 아니야. 그 가능성을 얼마나 갈고닦느냐, 그리고 네가 마음을 얼마나 수련하느냐가 중요하지."
"마음이요? 착해져야 한다는 뜻인가요?"
"아니, 강해져야 한다는 뜻이야. 혼자 즐거워서 그림을 그릴 때는 잘 모르겠지만 정식으로 도제 과정을 밟기 시작하면 여러 가지가 힘들 거다. 그림이란 건 잘 그려질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거든. 또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될 거다. 자신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이 좋은 그림인지 나쁜 그림인지, 앞으로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 다른 사람들로부터 평가받고 이런저런 소리를 듣다 보면 그건 더욱 심해지지. 그래서 재능이나 다른 무엇보다도 여기, 이 마음이 튼튼해야 해."
- "정말 그거면 되나요?"
"그거면이라니, 그게 가장 어려운 거야. 마음이 바로 선다면 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는 약속할 수 있어."
- 나는 그래도 머뭇거릴 뿐 대답할 수 없었다. 사실 레오나드에게 말한 게 전부는 아니었다. 마음속 깊이 그보다 더 걸리는 일이 있었다. 나는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 재능과 아카데미와 관련된 일이 무엇보다도 아버지에게 깊은 상처를 냈고 그래서 아버지가...
- "그래, 파도, 반가웠다."
그는 간단히 악수만 하고 떠났다. 신경 쓰듯 꽤 많은 이야기를 해준 것에 비하면 그 태도는 너무나 냉랭해서 나는 적잖이 헷갈렸다. 그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내 이야기가 그를 언짢게 만들기라도 한 것일까?
그날 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밤새 뒤척이고 잠도 자지 못했다. 레오나드가 보여준 행동과 말들이 계속 머릿속을 떠돌았다.
훗날에야 레오나드는 그때 일을 회상하며 왜 그랬는지 이유를 말해주었다.
"내가 그런 식으로 가버리면 네가 안절부절못하고 다음 날 바로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어. 잘 들어맞았지, 안 그래?"
- 레오나드의 추천으로 시험은 면제되었으나 도제의 자격을 얻기 위해선 금화 다섯 닢을 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기절할 뻔했다. 결국 뒤벨 자작에게 받아 고이 숨겨두었던 금화 세 닢을 주고 두 닢은 훗날 갚기로 했는데, 이도 레오나드의 보증으로 가능했다.
레오나드가 누굴 추천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는지 곧바로 모두들 나를 보러 몰려왔다. 그중에는 시세로와 그를 큰 형님이라고 부르던 도제 소년도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면서 나는 만족감과 불편함을 동시에 느꼈다.
- 공방 생활은 생각만큼 자유롭지 않았다.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새벽같이 일어나야 했으며 규칙적인 식사와 운동은 필수였다. 또 정기적으로 공방 바깥으로 산책을 나가야 했는데 우울해지기 쉬운 직업의 특성상 꼭 필요한 일이라고 했다. 호칭에 대한 주의도 들었는데, 밖에서는 그들을 단순한 기술자로 보지만 공방 안에서는 그들 모두가 예술가라고 했다.
"그게 차이가 있어요?"
"큰 차이가 있지. 아직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우리는 그저 손재주로 벌어먹고 사는 노동자란다."
"전 어느 쪽이든 별로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그림에 대해 진지해진다면 네 생각도 바뀔 거야. 사실 남들이 부르는 호칭보다 자기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더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 하지만 물감을 쓰게 해달라고 조르는 내게 레오나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했다.
"그러려면 몇 년은 걸릴 거야."
"예?"
"원래 도제 생활은 힘들고 길다. 처음엔 네가 저택에서 하던 것과 별 다를 바 없는 허드렛일을 해야 해. 공방을 청소하고 다른 형제들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고, 시장에서 미술 재료들을 사오거나 캔버스를 짜고 물감을 만드는 일 등을 하지. 스승님의 시중도 들고말이다."
"그럼 저는 언제 그림을 그리는데요?"
"틈이 난다면 언제든 개인적으로 연습해도 좋아. 하지만 시간이 많이 나진 않을 거다."
- 말을 하는 내내 레오나드가 피식피식 웃고 있었으므로 나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부러 지금에 와서 알려주는 거죠?"
"이젠 알아도 어쩔 수 없으니까. 이미 금화 세 닢은 지불했고 내게 두 닢이나 빚졌다는 걸 잊지 마라."
- "아직도란 말이냐? 도저히 그 일을 잊을 날이 오지 않겠느냐?"
"오지 않을 겁니다. 언제까지고."
레오나드가 나지막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모르는 어떤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묻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결국 레오나드가 뜻을 굽히지 않자 벡리는 혀를 찼다.
- "제 생각엔 오퍼스트나 시벨이 좋을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아직 배워야 할 단계이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에는 이르다. 하지만 시세로는 거의 완벽하지. 그래, 그 성격은 어떻게 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실력은 완벽해. 저 아이가 뛰어나다면 가장 뛰어난 스승 밑에서 배우게 하는 게 옳다."
"스승님, 제가 충분히 말씀드리지 못했군요."
레오나드는 어째서인지 나를 걱정스럽게 한 번 보고는 벡리의 귀에 대고 작게 말했다.
"저 아이는 그러니까... 좀 지나치게 뛰어난 편입니다."
그 순간만큼은 내 얼굴이 조각처럼 굳었으면 했다. 도저히 표정을 통제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못 들은 척하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썼지만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 "아."
벡리는 뭔가 알았다는 소리를 냈다.
"그렇다면 시세로는 안 되는군. 안 되고말고."
"예, 안 됩니다."
노인의 눈동자가 새삼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이번만큼은 제대로 보는 것 같았다. 나도 그의 백태가 잔뜩 낀 죽은 것 같은 눈을 마주 보았다. 불편할 만큼 긴 응시였다.
"좋다. 그렇다면 내가 데리고 있으마."
- "어쨌든 시세로는 아니니까 잘된 거죠. 아닌가요?"
내 물음에 레오나드는 복잡한 얼굴을 했다. 나와 벡리의 방을 한 번씩 번갈아 본 그가 갑자기 내 어깨를 짚었다.
"어쨌든 이것으로 정식 도제가 되었구나. 축하한다."
"뭔가 대답을 회피하려 한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뭐죠."
"그럴 리가 있니. 가장 훌륭한 스승님 밑에서 배우게 되었잖아. 넌 아주 운이 좋은 거란다."
"글쎄, 정말 그런 거면 왜 눈을 못 마주치는데요?"
"난 원래 좀 사시였다."
레오나드가 그렇게 온갖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대답을 회피하자 불안해졌다. 눈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면서 정말 나를 가르칠 수 있을까? 차라리 험하게 배우더라도 시세로의 밑이 나았던 건 아니었을까?
결국 나는 몇 번 더 추궁하다가 포기했다. 이미 결정된 이상 벡리 스승님 밑에서 배워보는 수밖에 없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가 공방에서 가장 높은 위치니 앞으로 시세로나 마로가 함부로 하지는 못할 터였다.
- "시세로가 가장 뛰어나다면서, 어째서..."
지나치게 뛰어난 아이는 못 가르치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내 자신을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릴까 봐 우물쭈물했다. 다행히도 레오나드는 알아들었다.
"아, 그에게는 그림 실력에 비해 가르치는 재능이 없거든."
"그래요?"
아까 그게 정말로 그런 느낌이었나? 어딘지 석연치 않았지만 레오나드가 대답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서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 의외인 점은 시세로의 괴롭힘도 뚝 끊겼다는 거다. 스승님께 별로 공손한 태도가 아니어서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였다. 게다가 그는 공방 안에서 마주쳐도 내가 아예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처음에는 잘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내 몫까지 합쳐서 그가 레오나드를 아주 못살게 굴었던 것이다.
"그냥 결투라도 신청하지 그래요."
"결투라고?"
아침부터 세 번이나 부당한 욕을 들어먹고도 레오나드는 그저 재미있다는 듯 반문했다.
"자존심 안 상해요? 다른 도제들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그러는데."
"글쎄. 가만히 들어보면 그가 하는 말이 그리 틀린 것도 아니란다."
"진짜 사람이 좋다고 해야 할지 답답하다고 해야 할지."
레오나드는 조용히 웃기만 했다. 시세로가 나에게 했던 행동이 단지 심술이라면 레오나드에게는 정말로 악에 받쳐있는 듯 보였다.
- 그녀는 잠시 나를 믿을지 말지 가늠하는 눈길로 훑었다. 그러더니 도도한 태도로 고개를 홱 돌렸다.
"길을 안내해. 돌아가야 하니까."
나는 물동이를 지고 그녀의 앞쪽에서 길을 헤치며 골짜기를 내려갔다. 거의 다 내려오고 나서야 이제는 하인도 아닌데 왜 아가씨의 명령을 듣고 있는 건지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길에 대해 불만을 표시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연달아 사과하며 열심히 나뭇가지를 쳐냈다. 평민의 본능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 "그런데 저... 왜 일부러 미친 척하시는 거예요?"
그녀는 대답해 줄까 말까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아무렴 어떠냐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정말 미쳐버리고 싶은데 미칠 수 없을 때는, 미친 척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어."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명랑한 걸음으로 그녀가 쏙 들어갔다. 이해할 듯 말 듯했기에 한동안 서성이던 나는 물동이를 떠올리고 얼른 공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 정문 앞에서 프리우스는 정중히 인사하고 사라졌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니 더 굉장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커도 이렇게 클 수가 있다니. 과장을 좀 섞어 말하자면 이 도시 사람 전부는 아니어도 반은 들어갈 듯한 크기였다.
내부는 또 어찌나 견고하고 아름다운지, 돔 아래 원형으로 세워진 황금 제단은 위에서부터 쏟아져 내리는 햇빛으로 찬란했다. 바닥은 매끄러운 대리석이었고 제단의 뒤쪽 벽면을 수천 개는 되어 보이는 파이프 오르간이 웅장하게 뒤덮고 있었다. 그 중앙에 있는 하얀 공백이 바로 제단화가 그려질 자리인 듯했다. 그것을 보자 괜히 내 가슴이 뛰었다.
- "정말로 굉장하지 않느냐?"
"예. 사람이 이걸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네요."
"무서울 정도지. 나는 가끔 사람이 무엇까지 할 수 있을지 생각하면 두렵다."
"그게 왜 두려운 일인가요?"
"모든 걸 인간이 만들었다고 생각해 보아라. 이 성당, 그 위로 쏟아지는 빛, 그리고 어쩌면 신까지도."
차갑고 섬뜩한 기분이 등골을 찔렀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방금 스승님이 아주 위험한 발언을 했다는 것만큼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성당 안은 넓고 텅 비어있었다. 분명 스승님의 목소리가 작지 않은 크기로 울렸을 것이다. 나는 얼른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우리밖에 없었다.
- 그날 이후 나는 뒤벨 자작의 초상화를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물감으로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스승님은 결코 붓을 잡게 해주지 않았고 불만스러워하는 나에게 뜬구름 잡는 말만 했다.
"화가는 붓을 잡기 전에 빈 화폭을 보면서 무엇을 그릴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붓을 쥐고 나서는 그것을 어떻게 그릴지 더욱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정작 화폭 위에 붓을 찍고 난 다음부터는 아무것도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손이 가는 대로 그려야 하느니라."
- "'너는 다 좋은데 섬세함이 조금 부족하더구나.' 그 무렵 아이는 전적으로 시세로에게 의지하고 있었고 그렇게 자신에게만 모든 것을 쏟아붓는 사람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단다. 시세로만이 진정한 스승이라고 여겼지. 때문에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조금씩 휘둘리기 시작했어. 재능 있고 경험 많고 자신을 사랑해 주는 스승의 말이기에 틀림없는 진실이라고 믿었던 거야."
나도 레오나드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레오나드는 조금 지친 기색으로 말했다.
"알고 있니? 아무리 굳건한 탑이라고 해도 옆에서 조금씩 꾸준히 흔들면 결국 무너진다는 것을. 그것도 끈기와 인내와 열정 -그걸 그런 식으로 말해도 되는지는 모르겠구나- 을 가지고 한다면 더욱더 무너뜨리기 쉽지. 언젠가부터 그 아이의 그림이 이상해졌어. 자신이 무엇을 그리는지 모르고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도 잊어버린 것 같았어. 하지만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열심히만 했지. 곁에서 지켜보고 있기 안타까울 만큼. 오직 시세로의 말에 따라 그를 만족시킬 그림을 그리기 위해 노력했던 거야. 하지만 시세로는 늘 만족하지 못했어. 아니, 안 했지. 곁에서 계속 아이에게 희망을 불어넣을 뿐이었어. '네겐 재능이 있어. 이 부분만 조금 고친다면 틀림없이 훌륭한 화가가 될 거다. 그리고 이 부분도.' 하지만 아이가 아무리 그의 말대로 해도 좋은 그림은 나오지 않았어. 결국 아이는 자기 재능에 회의를 품었고 시세로의 말을 의심하기 시작했단다. 오래도록 자신을 일부러 무너뜨렸다는 사실은 모른 채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는 거짓말만 했다고 생각했어. 결국 그 아이는 자기 손을 엉망으로 자해하고 공방을 나갔단다."
- 레오나드는 그 아이를 떠올리는 듯 잠시 허공을 보다가 우울하게 웃었다.
"아마 그때부터가 아니었나 싶어. 시세로가 자기 외에 모든 재능 있는 사람들에게 적의를 품은 건. 예전에도 질투는 했지만 예술가라면 누군들 그러하지 않겠니. 그 정도는 아니었어. 아이를 그렇게 망가뜨리는 동안 시세로의 내면에서도 뭔가가 망가진 거지. 아무튼 그 일이 있은 후로 스승님은 시세로에게 함부로 도제를 맡기지 않아. 시세로 또한 겉으로야 내색하지 않지만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는 걸 두려워하고 있어. 아마 그래서 너를 미워하는 걸 거야. 네가 처음 시세로 앞에서 그림을 그렸을 때부터."
그의 말에 가슴 한 부분이 뜨끔했다. 딱히 시세로가 나를 미워한다는 게 새로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잊고 싶었던 아버지와의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내가 아카데미에 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아버지.
- "이해할 수 없어요. 어째서 그처럼 뛰어난 사람이 그렇게 조바심을 내는 거죠? 시세로는 충분히 훌륭한 화가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래, 맞아. 그렇기에 더 그러는 거야."
"부자들이 돈이 많을수록 더 돈에 집착하는 것처럼요? 귀족들이 높은 신분일수록 더 신분에 엄격한 것과 마찬가지로요?"
"그것과 비슷한 맥락인 것 같구나."
- "뭘 알았다는 거지?"
"그런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고요."
"어떻게 하면 되는데?"
"위협이 되지 않으면 돼요. 부자 앞에서는 가난한 척하고 귀족 앞에서는 비굴해야지요. 시세로에게는 재능 없어 빌빌거리는 도제 정도가 되면 적당할 거예요. 그렇게 하면 무시는 당할지언정 적으로는 취급받지 않아요."
- 레오나드는 놀랐다는 듯이 나를 보다가 물었다.
"마음에 드는 방법은 아닌데, 할 수 있겠니?"
"길거리 인생이 늘 그랬는걸요. 어렵지 않아요."
"어쩌면 너한테 모욕을 주고 더 괴롭힐지도 모르는데?"
"차라리 그게 다행이지요. 내게 친절히 대해줄 때야말로 진심으로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니까요."
- "뭘 그리느냐고? 그걸 지금 나한테 묻는 거냐? 화가건 조각가건 장식가건 남한테 자기가 뭘 만들어야 하느냐고 묻는 놈이야말로 예술가 중에 가장 쓸모없는 놈들이다. 네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
"아, 예에."
몇 대 맞긴 했지만 도구를 들고 나오는 내 가슴은 두근거렸다. 드디어 물감이란 놈을 써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자세히는 몰랐지만 어릴 때 아버지가 다루는 모습을 종종 보았으니 어렵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이것저것 눈으로 보아두게. 나중에 모두 재료가 될 테니까."
그는 말을 마치고 음울하게 웃었다. 어쨌든 충고인 것 같아 고맙다고 말하려는데 그는 자기 말을 들었든 말든 관심 없다는 태도로 왔을 때처럼 훌쩍 자리를 떠났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다시 연회장을 바라보니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 "어!"
내 탄성이 너무 컸던지 주위 몇몇 사람들이 돌아보았다. 나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시선이 거두어졌을 즈음이 되어서야 다시 슬쩍 고개를 돌렸다. 맙소사, 진짜다. 그 사람이 와있었다. 스승님과 같이 왕성으로 갔을 때 만났던 기사.
호칭도 멋있다고 생각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하얀 눈의 기사 혹은 자비 없는 블레이젝. 처음 봤을 때 입었던 번쩍거리는 갑옷 대신 무도회에 걸맞은 예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그런데도 정말이지 심술이 날 정도로 멋있었다.
훔쳐보는 게 나만은 아닌 듯 여러 귀부인들이 그를 곁눈질했다. 그런 눈길을 받는 게 나라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하고 잠시 행복한 망상에 빠졌다.
- "오늘 이처럼 오래간만에 뜻깊은 자리를 마련한 것은 그에 대한사이기도 하며 또한 여러분들께 알려드릴 기쁜 소식이 있어서입니다."
그가 말을 끊더니 곁에 있는 사라사 아가씨를 내려다봤다. 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주목하니 아가씨도 당황하는 것 같았다.
"여기 있는 내 여식은 비록 지금 몸이 조금 불편하지만 라잔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유일한 후계자입니다. 그동안 이 아이를 위해 조용히 진행해 온 일이 마침내 성사되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께 말씀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나는, 나의 여식 사라사 모르프 라잔과 훌륭한 기사 가문의 자제인 폰 블레이젝의 약혼을 발표하는 바입니다."
- 잠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의 말이 왜 그토록 충격적인지 알 수 없었다. 나만 그런 건 아닌 듯했다. 틀림없이 축하해야 할 소식임에도 장내에 아주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방금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믿을 수 없고 믿고 싶지도 않은 얼굴들이었다. 평민에 불과한 나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귀족인 그들이야 오죽할까. 이 결혼은 기사 계급과 귀족 계급, 그것도 제삼귀족인 라잔 가문과 어느 이름 없는 가문의 결합인 것이다.
- "어디든 갈 거야. 여기만 아니면 돼."
하지만 말은 자기 이름과 똑같은 단어를 듣지 않았고, 몇 번 더 신경질적으로 고삐를 잡아당기던 아가씨는 그만 짚단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는 신경질을 내며 발을 굴렀다.
"왜 이렇게 되는 거야? 믿을 수 없어. 아버님은 어떻게 내게 한마디 말씀도 없이 그런 결정을 해버리실 수가 있지?"
그거야 말해도 이해 못 할 것 같은 모습을 보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굳이 그녀의 실수를 지적함으로써 더 화를 돋울 필요는 없었다.
"일단 지금이라도 가서 아가씨가 그동안 거짓말해 왔다는 걸 고백하세요. 그런 다음 차분하게 말씀드리면 그분도 아마 다시 생각해 보실지도..."
"바보 같은 소리 마! 이미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표했는데 그걸 없었던 일로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기사 가문과 결혼하는 것보다 더한 수치야. 아버님께서 그런 짓을 하실 리 없어."
- 그때 대답이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간단한 일입니다. 공표한 그대로 나와 결혼하면 됩니다."
나는 너무 놀라 뒤로 돌다가 하마터면 여물통에 처박힐 뻔했다. 아가씨는 그런 나를 보지도 못했다. 나보다 더 놀라있었으므로.
한쪽 어깨에 망토를 늘어뜨린 (젠장, 언젠가 꼭 따라 하고 싶을 정도로 멋있는 차림이었다.) 하얀 눈의 기사는 차분한 걸음걸이로 마구간에 들어섰다. 그가 들어서니 오물과 냄새로 점철된 그곳조차 비장한 전장이 되는 느낌이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블레이젝 가문의 후계자인 폰 블레이젝입니다. 4년 전 기사 서임을 받고 현재 왕성 치안대의 부대장을 맡고 있습니다."
아가씨는 의혹 가득한 눈으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볼 뿐 이렇다 할 답례의 말을 하지 않았다. 블레이젝은 별로 실망한 기색도 없이 한 걸음 다가와 대담하게도 아가씨의 머리카락에 손을 대었다. 아가씨는 반사적으로 그 손을 쳐냈다.
"감히, 무례하군요. 아무리 아버님께서 당신을 약혼자로 정해주셨다 한들 아직 정식으로 혼약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실례했습니다. 허락을 먼저 구했어야 하는 일인데."
블레이젝의 손에서 작은 지푸라기가 떨어졌다. 그걸 보고 나서야 아가씨는 방금 자신이 너무 정상적으로 행동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놀라는 것을 보고 블레이젝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당신이 거짓으로 아픈 척하는 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었다고요? 어떻게...?"
"제가 오랫동안 모셔온 어떤 분께서 바로 당신이 연기하고 있는 그 병을 실제로 앓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 아가씨의 가문을 통해 성장하려는 의지와 맞아떨어지는 일이었지만, 그는 별로 기뻐하는 기색도 없이 담담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아가씨와 나의 관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 이야기는 우선 접어두고, 그림으로 이야기를 돌려보자.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레오나드의 말에 따르면 나는 눈부신 성장을 이뤄냈다.
- 처음에는 물감에 용해제를 얼마나 섞어야 하는지도 몰라 그림이 엉망진창이었지만 점점 도구들을 다루는 것에 익숙해졌다. 스승님은 늘 뜬구름 잡는 말씀만 하실 뿐 직접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가르치지 않았기에 뭐든 혼자 배워가야 했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그건 훨씬 효과가 있었고 스승님은 처음부터 그걸 의도한 듯이 말했지만 그럴 때마다 시선은 항상 다른 곳으로 향했다.
- 한 가지 놀라운 일은 마로와 내가 그동안 상당히 가까워졌다는 거다. 어쨌든 마주칠 때마다 서로 눈살을 찌푸리거나 욕을 내뱉지 않는 사이가 된 것만도 가까워진 게 틀림없다. 가끔 밉살맞게 굴 때도 있지만 마로는 내가 이론적인 것을 배우지 못해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지나가는 투로 조언을 해주곤 했다.
"이봐, 소실점은 그렇게 잡는 게 아니야."
어쩌면 단순히 잘난 체하고 싶은 걸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내게 꽤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 묘한 것은 시세로의 태도였는데 그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괴롭히다가도 이따금 어리둥절해질 정도의 친절을 베풀었다. 레오나드에게 약속했듯 재능 없는 비굴한 놈처럼 굴려고 했지만 오래가지 않아 내 실력은 공방 사람들 모두가 알게 됐다. 그림처럼 명확하게 실체가 남는 분야도 없으니 애당초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세로의 태도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고 그래서 좀 불안한 한편 실망스럽기도 했다. 내가 그에게 전혀 위협적이지 못하다는 의미였으니까.
어쨌든 점차 그림 그리는 것에 애정을 느끼게 되었고 정말로 화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다른 도제들이 들어오면서 허드렛일도 많이 줄었고 공방에서의 생활이 점차 만족스러워졌다.
- 말할 수 없이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그림만이 전부인 삶에서 갑자기 눈이 멀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만두거라. 나까지 침울해지는구나. 눈이 나빠질수록 다른 사람의 감정을 더 잘 느끼게 된다. 나로서는 달가운 일이 아니지."
"... 스승님, 오래 사십시오."
"갑자기 웬 끔찍한 소릴 하느냐. 눈이 먼 늙은이가 오래 살아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너나 오래 살거라."
"전 단명할 겁니다. 천재는 단명한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스승님은 잠깐이지만 헛웃음을 지었다.
"건방진 놈. 하긴 젊은 놈들에게는 그런 치기가 가장 어울리지. 부디 네 말대로이길, 또한 네 말대로이지 않기를 바란다. 그럼 난 이만 눈 좀 붙여야겠구나. 자고 일어나면 가장 아끼는 제자들이 내 말을 거역한 일 모두 꿈처럼 느껴질지도 모르지. 정말로 꿈이었으면 좋겠구나..."
- 그는 치우던 걸 내려놓고 피곤한 듯이 말했다.
"넌 더 이상 어리고 건방진 꼬마가 아니다. 내게 무례하게 굴지 마."
"물론 내가 좋아하는 그 레오나드에게는 그러지 않겠죠. 하지만 비겁한 겁쟁이에게는 얼마든지 무례하게 굴 거예요."
울컥해서 한 말이지만 나도 과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아무 말 없이 짐을 마저 정리하더니 등에 멨다. 그가 인사하려는 듯 내 앞에 와서 섰지만 미안함과 분노, 기타 여러 감정들이 겹쳐서 어린애같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물론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신경 쓰지 않았다.
"너는 앞으로 크게 성장할 거야. 하지만 예전에 네가 걱정했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계속 노력해야 한다. 그쯤은 너도 알고 있겠지. 언제 어디서든 침체기는 올 수 있고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거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리다 보면 어느 순간 다시 편해질 날이 올 거야. 그런 일이 영원히 반복되는 게 예술가들의 인생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 허무하다고 느껴질지 몰라도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면 수많은 그림들이 네 곁에 남아있을 거야. 그러니 의심하지 말고 계속 그리도록 해."
-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게 영원한 이별은 아니니 언제든 만나고 싶다면 찾아오렴. 잘 지내."
자기 할 말을 마친 그는 가뿐하게 짐을 들고 작업실을 나섰다. 내 인사는 필요하지도 않은 듯했다.
- "캔버스도 스스로 짜는 완벽주의자야. 그런 사람이, 같은 작품이 두 개 필요하다고 해서 모사가에게 자기 일을 맡길 것 같아? 형님은 그게 몇 개가 됐든 전부 다 자기가 그려낼 사람이야. 그런데도 그걸 다른 사람에게 맡긴 건 그게 다름 아닌 레오나드여서야. 레오나드이기 때문에 맡긴 거라고!"
녀석의 말에 괜히 가슴이 따끔거렸다. 하지만 나는 지기 싫어서 대꾸했다.
"그게 뭐?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마로는 대답 없이 증오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밖으로 나갔다. 녀석이 사라진 곳을 노려보던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그쪽에 집어던졌다.
- ['나는 너희들과는 달라.' 그게 네 이마에 꼿꼿이 써 붙이고 다니는 재수 없는 표식이란 말이다.]
시세로의 그 말이 이따금씩, 아니 사실은 훨씬 자주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의 말대로 나는 내가 가장 싫어하던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 걸까? 스승님과 레오나드의 아낌없는 칭찬 속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그림을 그려왔기에?
시험도 부정도 없이 공방에 들어왔고, 다른 누구도 아닌 최고 스승의 도제가 되었으며 누구보다도 빨리 붓을 잡았다. 마로를 비롯한 몇몇 도제들이 대놓고 시샘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맹세코 내가 잘난 놈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남들이 칭찬하는 그림 실력에 대해서도 스스로 확신하지 못했고 괜찮다고 하니까 괜찮은가 보다, 그 정도로만 생각할 따름이었다.
- "그럴듯한 포장을 하고 있었지만 한눈에 알아봤지. 그가 직접 고른 게 아니라는 걸. 아마 부하나 하인을 시켰을 테지. 그는 그런 사람이야, 따스함이라곤 조금도 아주 조금도 없는 사람이야..."
사라사, 내 사랑. 감히 품어서도 바라서도 안 되는 사람. 그녀는 하얀 눈의 기사를 사랑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공교롭게도 내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과 비슷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초기에만 해도 블레이젝의 무섭고 차가운 태도(전장을 오래 헤쳐온 기사다운 분위기)를 그녀는 치를 떨며 싫어했다. 온화하고 부드럽던 그녀의 오라버니와는 정반대의 인물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하지만 언제부턴가 내가 눈치채지 못한 어느 시기에 그녀의 감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나는 그녀가 블레이젝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이야기한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대부분이 그에 대한 험담이었지만 그만큼 그를 신경 쓰고 관찰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주 가끔 그에게서 괜찮은 면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 부분을 언급하며 내 의향을 물어보았다. 마치 이 정도면 사랑해도 좋지 않겠냐는 듯이.
그럴 때마다 마음이 텅 빈 듯 공허해져도 항상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고 그러면 그녀는 안심한 듯이 다시 블레이젝을 비난했다.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녀의 태도는 스스로의 마음을 보호하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는 사실 견딜 수 없어하고 있었다. 블레이젝이 의무적으로 약혼자 역할을 하는 것에, 공적으로가 아니라 사적으로 찾지 않는 것에, 그녀를 사랑해 주지 않는 것에. 그래서 끊임없이 내게서 사랑을 확인받고 내 사랑에 안심하고 기대려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 "피곤해. 조금 누워 있을래."
그녀가 내 무릎을 베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고요한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추운 듯 떠는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생각 같아서는 끌어안아 따스하게 만들어주고 싶었지만 안 될 일이었다.
다각, 다각, 다각.
멀리서 자갈길을 따라 올라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로부터 반 시간쯤 지난 뒤였다. 제법 가파른 골짜기를 말을 타고 올라오다니 숙련된 기수인 모양이었다. 누구인지 몰라도 아가씨와 이렇게 있는 모습을 보여도 될지 고민스러웠다.
그때 말머리와 함께 기수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더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급히 아가씨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세요. 어서요!"
- "아가씨를 사랑하십니까?"
그는 걸음을 멈추고 이 기막힌 상황을 잠시 이해해 보려는 듯 시간을 두었다가 내 쪽으로 돌아섰다. 그가 나를 당장 벨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라면 차라리 기쁠 것 같아서 그럽니다."
그건 내 모든 용기를 끌어내 한 말이었다. 그는 놀랍게도 화를 내지 않고 잠시 나를 보다가 대답했다.
"기대를 저버려 유감이지만 나는 약혼자에게 성실히 책임을 다할 뿐, 애정을 근거로 너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역시나. 그는 아가씨에게 결코 개인적인 애정이 없다. 마음이 무거운 한편 안심이 되다니 내가 이처럼 간사할 수가 없다.
"그리고 무례를 책망하는 대신 온전히 대답한 것은, 내 살의를 그대로 받고도 끌어낸 너의 용기를 존중해서다. 그러나 두 번은 용납하지 않겠다."
말을 마친 그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아가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아가씨는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궁금하다는 듯 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웃는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 뒤로 블레이젝이 훌쩍 올라타더니 말을 돌려 내려갔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은 그림을 그리면 그대로 동화 속 한 장면이 될 것처럼 잘 어울렸다.
- 하마터면 붓을 잘못 놀릴 뻔했던 나는 놀라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돌아보았다. 문가에 서 있는 것은 역시나 키리오니였다. 그는 음울한 태도로 손을 흔들었다.
"열심히 그리고 있군. 소개해 준 보람이 있는 것 같아."
"또 당신이군요.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내가 나타날 때마다 감히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게 자네밖에 없다는 걸 아나? 하지만 용서하지. 나는 재능 있는 자들에게는 너그러우니까."
그는 허락도 없이 작업실 안으로 걸어 들어와 내 그림을 훑어보았다.
"자네 그림 좀 구경해도 되겠나?"
"이미 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이것 말고 다른 그림도 보고 싶다는 이야기야. 오, 그런데 이건 뭐지? 물감으로 어떻게 이런 걸 했지?"
그가 가리킨 것은 내가 들판의 흙무더기를 그린 부분이었다. 미숙한 솜씨를 지적당한 듯 부끄러워서 작게 말했다.
"그게, 아무리 해도 물감만으로는 만족스러운 표현이 안 되더군요. 그래서 흙이랑 풀을 물감에 섞어서 칠해봤습니다."
- "실력이 부족하니 이런 수라도 내야지 별 수 있겠습니까. 스승님께선 그림 그리는 방법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으시더군요."
"벡리는 훌륭한 화가를 길러내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
그의 말에서 나는 두 가지 거부감을 느꼈는데,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 게 좋은 방법일 리 없다는 것과 그가 스승님 이름에 아무런 존칭도 붙이지 않았다는 데에서였다. 그러나 그에 대해 따져 묻기 전에 문 밖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게다가 키리오니는 스승님에게 하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거의 아버지와 아들뻘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문득 파티 때 어느 귀족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심지어 그가 교황의 숨겨둔 아들이 아니냐는 소리도 있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거나 그에 근접한 듯싶었다.
- "무슨 그런, 망할 녀석 같으니. 나가서야 자기 그림을 그리더란 말입니까?"
"나도 처음 보았네. 숨기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았지."
"형편없군요."
"그 반대일세. 너무 아름답고 너무 시대를 앞서갔지. 무엇보다도 본인이 본인 그림을 사랑하기에 그것으로 족하는 것 같았네."
스승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놀라서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너무 아름답고 너무 시대를 앞서간 그림이란 대체 어떤 걸까. 그게 그의 집에 있다고? 차가 식어간다는 생각은 못하고 정신없이 두 사람의 이야기만 엿들었다.
- 사실이라면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오늘 신기한 일이 여러 가지로 많다고 생각했다.
베일을 쓴 여성에게 줄 그림을 포장한 지 보름 가까이 지났다. 점차 회의적이 되었고 더 이상 정원에 글도 남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애타게 기다렸음에도 전혀 반갑지 않은 사자가 도착했다.
- "파도 조르디. 왕성에 계신 고귀한 분으로부터 너를 데려오라는 명을 받았다."
언제나 자기 직책에 충실한 블레이젝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텐데도 격식을 갖춰 대했다.
"당신이 직접요?"
"그래. 말을 탈 줄 아나?"
"아뇨."
"그렇다면 마차가 필요하겠군. 라잔 가문에서 빌려올 테니 채비를 갖추고 기다리도록."
그가 멋지게 말을 몰고 사라지자 숨어서 지켜보던 공방 사람들이 모두 뛰어나왔다.
- "설마 귀족한테 초상화 의뢰라도 받은 거야?"
"그런 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작업실에서 포장이 된 그림을 들고 나오니 사람들의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진 것 같았다. 마로는 얼빠진 얼굴이었고 멀찌감치 팔짱을 끼고 서있는 시세로도 삐딱해 보였다. 왜인지 신물이 나서 마음대로들 생각하지 싶었다.
- 마부는 내 얼굴을 알아보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 하인이었고 지금은 도제에 불과한 나를 마차에 태워야 한다는 사실에 자존심 상한 것 같았다. 어쨌든 내가 올라타자마자 마차는 출발했고 블레이젝은 호위하듯 곁에서 말을 몰았다. 창밖으로 사라사 아가씨의 모습이 점차 작아졌다. 묻고 싶은 게 가득한 얼굴이었다.
- 왕성까지 가는 긴 시간 동안 늠름한 기사의 뒷모습을 훔쳐보았다. 생각해 보면 아가씨가 그에게 반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그를 질투하는 한편 동경했다. 그의 모습도 언젠가 그려보고 싶었다. 그려서 아가씨의 결혼 선물로 주면 완벽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비참한 생각을 하며 킬킬거렸다.
- 잠시 후 블레이젝이 말의 속도를 늦추더니 창문 근처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봐서 내심 놀랐다. 설마 지금 나에게 말을 걸려고?
"물어볼 것이 있다만 대답을 강요하지는 않겠다."
참 친절하시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뵈러 가는 그분과는 어떤 관계인가?"
어떤 관계냐고? 딱히 정의할 수는 없었다. 처음 가넬 신부님의 성당에서 뒤벨 자작님과 함께 만난 일과 정원에서 두 사람을 목격한 일, 마지막으로 자작님이 죽던 날까지 차례대로 스쳐 지나갔다. 그걸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난번 벡리 스승님과 함께 왕성에 갔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그때 처음 뵈었습니다."
"그럼 오늘은 무슨 일로 가는 거지? 스승의 심부름을 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상체를 젖혀서 창문 사이로 포장한 그림이 보이도록 했다.
"이걸 전해드리러 갑니다."
그는 묘하게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 무릎을 꿇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그림을 든 채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손짓했다.
"이쪽으로 오거라."
블레이젝의 눈치를 보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황송하게도 그녀의 바로 맞은편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늘 딱딱한 작업용 의자에만 앉았던 나는 푹신한 감촉이 엉덩이에 착 감기는 것을 느끼고 잠깐 황홀해했다.
"폰, 차를."
그녀가 말하자 블레이젝이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맙소사. 도저히 어울리지 않지만 그가 차 시중을 든단다. 묘하게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
-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동안 몇 번 만났음에도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사라사와는 확연히 다르게 성숙한 느낌이 드는 여성이었다. 얼굴 전체가 섬세하면서도 특징 없이 부드러웠고 두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강하고 위엄 있다. 언젠가 꼭 그려보고 싶은 얼굴이었다.
- "나를 관찰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구나."
그녀가 미소와 함께 말하자 흠칫 놀라 시선을 거두었다.
"죄송합니다. 화가 흉내를 낸답시고 주제넘게 살펴본 것 같습니다."
"괜찮다. 덕분에 나도 네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예전에 봤을 때보다 많이 자란 것 같구나. 그때는 그저 어리기만 한 소년 같았지."
"지금은 스물두 살이나 됐습니다. 소년 같아서는 곤란하지요."
"그래. 새삼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걸 알겠구나."
그녀의 시선이 창밖 어디론가 향했다. 시간이 흘렀다는 스스로의 말과는 다르게 그녀는 변한 것이 없는 듯했다. 특히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눈이.
- "아참, 가지고 온 것을 보여드려야죠."
내 말에 그녀는 놀란 기색이었다. 가지고 온 그림의 포장을 뜯으려 하자 어째서인지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나는 포장을 뜯었다. 다시 보아도 정말 잘 그려진 그림이었다. 장인자격증을 받았더라면 서명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그녀의 반응이 어떨까 기대하며 쳐다보았지만 여전히 그림을 외면하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그녀는 천천히 그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뜻 모를 탄성을 흘린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눈가가 일그러졌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그녀의 손이 망설이듯 그림을 향해 다가가다가 거두어졌다. 어째서인지 안타까운 기분이 들어 자작님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자작님의 곁에 그녀도 같이 그려 넣을 걸 그랬나 보다.
- "그래. 기억에 있는 모습보다 선명하구나. 이런 사람이었지. 그래... 늘 그리워했는데도 어째서인지 잊어버렸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저도 제 기억에 있던 모습을 그린 거라 정확한지 어떤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니. 얼굴은 조금 다를지 몰라도 이 미소는 그대로구나. 그는 이렇게 웃는 사람이었어."
나도 특히 그 자상한 미소가 마음에 들었으므로 그녀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 철문이 힘겹게 열리고 블레이젝이 아닌 시녀가 차를 들고 들어왔다. 나는 얼른 그림을 창 쪽으로 돌려서 시녀가 보지 못하도록 했다. 슬쩍 왕세자비의 눈치를 보니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딱딱한 얼굴이었다. 귀족들은 어릴 때부터 표정을 가장하는 법이라도 배우는 걸까?
시녀가 나가자 블레이젝이 뒤이어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문지기처럼 지키듯 섰다.
- 나는 블레이젝의 눈치를 보며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건넸지만 그녀는 괜찮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다. 자작에 대해서도 알고 있지."
"알고 있다고요?"
"나 혼자 이곳에서 나가기는 힘들지. 항상 그가 도와주었단다."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도 그의 책무인 걸까?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왕족의 명령이라 해도 그가 불륜을 도울 것 같지는 않으니, 왕세자비의 명이 무엇보다 우위에 있는 게 분명했다.
- "아니. 나는 이 그림이 무척 마음에 든다. 제값을 주고 사고 싶구나."
그녀의 말에 무척 기뻤지만 손사래 치며 대답했다.
"값을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선물로 드릴 생각이었으니까요."
"나는 받은 것에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이처럼 훌륭한 예술 작품이라면 더욱 그렇지."
- "내가 예술에 깊은 조예가 있는 건 아니지만 여러 좋은 작품들 틈에서 숨 쉬며 살다 보니 약간의 식견이나마 가지고 있다. 네 그림은 섬세하고 따뜻하다. 그리고 선 하나조차 함부로 그은 것이 없어. 얼마나 스스로의 그림에 최선을 다했는지, 완벽을 추구했는지 알 것 같다."
그녀가 한 말은 내 가슴을 관통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거야말로 내가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었으니 말이다.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르면서 가슴이 뜨거워졌다.
-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왕립 아카데미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오래간만에 듣는 그 단어는 내게 무서운 기분을 안겨다 주었다.
- "꼭 내 입으로 네놈의 특출한 재능을 칭찬해야 만족할까? 눈이 멀었다고 코앞의 재목을 두고 몰라볼 정도는 아니다. 그러니 듣거라, 이 녀석아. 네놈이 전생에 무슨 공을 세웠는지 몰라도 타고난 무언가가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그것을 극복해내지 않고서는 훌륭한 화가는 될지언정 유일한 화가는 되지 못할 것이다."
그 말이 어쩐지 가슴을 뒤흔들어서 나는 큰소리로 외쳤다.
"아니, 그 반대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훌륭한 화가는 못 될지언정 유일한 화가는 될 테니까요. 누구와도 같지 않고 그 누구도 그릴 수 없는 그림을 제가 그릴 겁니다!"
스승님은 의외라는 듯 나를 보다가 이가 다 빠진 입으로 커다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들끓는 낮은 웃음을 한참이나 웃었다.
"다 늙은 화가의 가슴을 이리도 두드려 깨우느냐. 네가 여태까지 해온 말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말이로다. 그래, 두고 보마. 어디 나도 세상도 깜짝 놀라게 해 보려무나."
- 놀라움과 전율을 동시에 느끼며 스승의 하얗게 퇴색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분도 내 걱정을 눈치챘는지 단호하게 말했다.
"그게 내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다. 그리고 네가 말했던 대로 내 이름을 널리 알릴 역작이니라."
- "네가 도울 일은 하나뿐이다. 내가 작업을 하는 동안 누구도 그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일 말이다. 심지어 너 자신도 아니 된다."
"예? 하지만 어떻게 그런... 설마 혼자서 그걸 전부 다 그리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 할 수 있겠느냐? 누가 와도, 심지어 왕이나 교황이 행차해도 절대 문을 열어줘서는 안 된다."
그게 가능이나 한 일일까? 하지만 굳게 결심한 스승님의 눈을 보면서 차마 못 하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만으로는 안 된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
- "어찌 보이기 전에 입으로 먼저 말할까. 명심하거라. 화가는 오직 그려서 보여주는 것으로만 말해야 한다."
나는 그 말을 가슴에 새겼다. 스승님은 여태껏 무거운 짐을 지다 내려놓은 사람처럼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어찌 보면 초연한 듯 보이기도 했다. 문득 불안한 느낌이 들어 물었다.
"설마 위험한 일을 하시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 나이가 되면 모험이라는 것을 하고 싶어도 못하느니라. 죽기 전에 꼭 그리려 하던 것이 있다. 완성되기 전에는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구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제 목숨을 내놓기 전에는 누구도 그 그림을 볼 수 없게 하겠습니다."
"고맙구나. 하지만 정말로 목숨을 내놓지는 말아라. 네 남은 생은 나보다 훨씬 길며 또한 소중할 것이니."
- 그림을 그리는 이상 나는 쓸모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소중해질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배웠다. 그것이야말로 스승님으로부터 받은 여러 감사한 것들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었다.
- 공방에 스승님의 결정이 알려지자 당연히 난리가 났다. 고작 스물두 살에 불과하고 도제 생활을 4년도 못 채운 내가 장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보통 도제가 된 뒤 3년간 허드렛일을 해야 처음 붓을 잡을 수 있고, 그 후 장인이 되려면 천재라는 소리를 들어도 최소 5년 이상이 걸렸다. 길게는 15년까지 도제 생활만 한 사람도 있으니 내가 장인 자격을 얻은 것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처사였다.
순수하게 화가가 된 것에만 기뻐했던 나는 여러 가지 문제(주로 인간관계)가 남아있다는 걸 깨달았다.
- "스승님은 눈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멀어버리신 모양이군."
가장 격분하리라 생각했던 시세로는 의외로 그 말 한마디만 던지고 신경을 끄는 듯했다. 하지만 마로는 달랐다. 조금씩 관계가 나아져 이제는 드디어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일이 터진 것이다. 마로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예전에는 조금 빈정거리는 투라고 해도 먼저 말을 걸고 농담도 했는데 이젠 나를 피하기만 했다. 시장에 재료 사러 나가는 일도 더 이상 하지 않으니 녀석에게 말 붙일 기회도 없었다.
- "내버려 두거라."
대성당으로 향하는 길에 스승님은 내 고충을 듣더니 간단히 대답했다.
"그 나이에 질투하는 것이 어쩌면 발전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려갈수록 알게 될 게다. 누구보다도 적으로 여기고 또 넘어야 할 상대는 따로 있다는 걸."
"그게 누굽니까? 설마 너 자신이라는 그런 식상한 말씀을 하시려는 건 아니죠?"
스승님은 잠시 침묵하다가 버럭 화를 냈다.
"이 녀석아, 그게 왜 식상하겠냐? 진리니까 그렇지!"
"아, 예."
"그렇게도 다른 대답을 원한다면 한 가지가 더 있다."
"뭡니까?"
스승님의 손가락이 대범하게 위를 가리켰다.
"아."
- "머지않았느니라. 너도 당해보면 알 것이다. 여기저기서 쇄도하는 종교, 종교, 또 종교에 관한 주문들. 언젠가부터 너 자신이 종교 그림 이외엔 아무것도 못 그린다는 것을 깨달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건 두렵고 무서운 일이지."
그렇게 말하는 스승님이야말로 매일 대성당의 천장화를 그리러 가고 있었다.
- 창백한 회벽과 삭막한 외길. 지붕이 낮은 건물들 뿐인데도 이상하게 그곳엔 햇빛이 들지 않는다. 어쩌면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음울한 기운 때문인지도 모른다. 희망, 꿈, 즐거움. 그런 긍정적인 단어를 사치로 생각하는 사람들. 단지 하루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벅찬 곳이었다.
레오나드는 집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다닥다닥 붙어있는 일층짜리 창고 중 하나에 살고 있었다. 비록 모사만 해왔다지만 꽤 오래 공방 생활을 했는데 제대로 된 집을 구할 돈도 모을 수 없었던 걸까?
- "레오나드."
문을 열고 휘장을 걷으니 여러 개의 캔버스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대체로 공백이었는데 한쪽에 세워둔 캔버스만 천으로 덮여 있었다. 무언가 그려져 있다는 의미이리라. 어쩌면 키리오니가 말했던 대로 그의 그림일지 몰라 천을 걷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누군가 내 그림을 허락 없이 살펴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하고 꾹 참았다.
그의 작업 의자에 앉아 반시간쯤 기다렸을까. 마침내 레오나드가 돌아왔다.
- 그는 약간 변한 모습이었다. 차분히 어깨 위로 늘어뜨리던 머리는 끈으로 묶었고 하얗고 곱상하던 얼굴은 햇빛에 그을려 까무잡잡했다. 소매를 걷어 드러난 팔뚝에는 얼룩이 잔뜩 묻었고 입고 있는 옷의 상태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이 상했다.
"이게 무슨 꼴이에요? 공방을 나가더니 그래, 좋던가요?"
"일을 하고 왔더니 더러워져서 그래. 잠깐 씻고 올 테니 기다리렴. 그동안 그림을 구경해도 돼."
그는 부드럽게 웃고 뒷문으로 나갔다. 그만이 지을 수 있는 자상하면서도 우울한 웃음은 그대로였다. 어쨌든 허락을 받았으므로 계속 궁금해했던 천에 싸인 그림으로 다가갔다.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물이 날 정도로 멋진 풍경이 들어 있을까? 혹은 극적이고 장엄한 종교화일까? 아니면 자화상?
- 마침내 천을 걷어내자 그림이 드러났다. 그걸 보고 느낀 감정은 은밀한 놀라움과 비슷했다. 처음에는 예상외로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니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화폭 안에 있는 것은 아마도 열여섯 혹은 열일곱쯤 되었을 법한 평범한 소녀. 하지만 소녀의 눈동자에 담긴 깊이와 의미를 알 수 없게 살짝 벌어진 입술, 어둠 속을 달려가다 누군가의 부름이라도 들었는지 상체만 조금 틀어 뒤를 돌아보는 듯한 자세까지 모든 것이 신비로웠다. 소녀의 주위엔 배경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고 단지 어둠에 둘러싸여 있었다. 평온한 곳인지 무서운 곳인지 짐작도 할 수 없는 그곳에 그녀는 단지 홀로 아름답게 존재했다. 어째서인지 눈을 뗄 수 없는, 놀랍도록 보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그림이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몰라도 화가로 하여금 이렇게 그려내게 할 수 있는 대상은 하나뿐이다. 말로는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이 사랑하는 사람인 것이다.
- 키리오니의 말이 맞았다. 너무 아름답고 너무 시대를 앞서갔지. 보통 사람들은 그 그림을 그저 평범한 소녀의 초상이라 말할 것이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은 내 그림 인생을 걸고서 감히 말하자면 그것은 단지 초상화라고만 불릴 게 아니었다. 이는 새로운,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나처럼 물감에 이런저런 것을 섞고 남들이 그리지 않는 주제만을 그리려는 조잡한 시도가 아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그걸 보고 있구나."
퍼뜩 정신을 차렸다. 레오나드가 문가에 기댄 채 얼굴에서 물기를 닦아내고 있었다. 새삼 그동안 알아왔던 레오나드가 아닌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대답 없이 바라보기만 해서인지 그는 멋쩍게 웃었다.
- 레오나드는 피식 웃고 수건을 널어놓은 뒤 의자에 앉았다. 내가 곁에 앉자 우리는 나란히 소녀의 그림을 바라보게 되었다.
"저게 바로 당신의 그림이군요."
"그래, 내 그림이지. 너는 처음 보겠구나."
허무할 정도로 쉽게 대답하는 그에게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결국 밖으로 나와서 이렇게 자기 그림을 그릴 거면서, 왜 공방에서는 그리지 않겠다고 한 거죠?"
레오나드는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나도 무어라 확실히 말할 수는 없구나. 그곳에서는 여러 가지에 얽매여 있었지. 속죄해야 할 것도 있었고. 하지만 다 버리고 나오니 뭐랄까... 이제는 다른 방법으로 속죄를 해도 될 것 같았어.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말이야."
- 그는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듯 내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무엇보다 그리움을 견딜 수 없었지. 그녀를 세상 밖으로 꺼내주고 싶었어. 내 기억이 점점 흐려지는 것도 무서웠고."
- 차차 일그러지던 그의 얼굴이 눈앞의 그림을 보고 결심한 듯 굳어졌다.
"내 그림 때문이야."
"당신 그림 때문이라고요?"
"내가 그려서는 안 되는 것을 그렸거든."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갔다. 그는 내 표정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 말이다."
정확히 그걸 어떻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주 무섭고 심각한 일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스승님도 그렇고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결코 신을 형상화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가들은 관념 자체를 그려내는 걸 끔찍이 두려워해. 그래, 키리오니가 한 말이었다.
- 추궁하듯 들리지 않도록 애쓰며 덧붙였다.
"왜 그런 걸 그렸죠?"
순간 그는 맥이 탁 풀려버린 것 같았다. 갈피를 못 잡고 그의 고개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네가 그걸 이해할지 모르겠다. 젊었을 적 나는 그러니까, 세상에서 내가 가장 잘났다고 생각하던 놈이란다."
스승님과 키리오니의 대화에서 얼핏 들은 내용이긴 하지만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새로웠다. 지금 그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 나는 짐짓 놀란 척 물었다.
"정말인가요?"
"그래. 어려서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고 스스로도 실력에 자신이 있었으니까. 발전도 빨랐고 그림 그리면서 어려움이라곤 느껴본 적이 없었단다."
"지금 들어도 참 얄밉네요."
레오나드는 잠깐 웃었다.
"어려서 그랬던 거니까 이해하렴. 그때는 시야가 좁았어. 아직 거장들의 진정한 위대함을 알기 전이었고 치기 어린 마음에 누구보다 내가 잘 그린다고만 생각했단다. 주위에서 칭찬만 해댄 탓도 컸어. 끝도 없이 콧대는 높아졌고 스승님조차 내 상대가 안 된다고 여겼지."
입이 떡 벌어졌다. 레오나드는 내 얼굴을 보고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나도 내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니 지금은 어디에라도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다. 어쨌든 그렇게 자만심이 끝을 모르고 치솟은 덕에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부분까지 손을 대고 만 거야."
과거를 되새기는 그의 눈동자가 단단해졌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결코 두려움을 몰랐던 시절에 했을 법한 눈이었다.
"모두가 벌벌 떨며 그리길 거부하고, 누구도 완벽하게 그려낼 수 없다는 금지된 주제. 생각해 보렴. 세상에서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매력적인 주제가 아니었겠니?"
무서우리만치 이해가 갔다. 당연히 도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 "스승님의 하나뿐인 딸이라고 하지 않았니. 어려서부터 공방에서 자랐으니 물감보다 친한 친구는 없었단다. 게다가 꽤 실력 있는 화가였어."
"여류화가라는 거군요. 멋진데요."
"그래. 처음 그녀를 좋아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니까. 어쨌든 그렇게 성탄신일을 하루 앞두고 그림이 완성됐지."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 "그녀는 알고 있었던 거야. 완벽하게 숨겼다고 생각했지만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었지. 함께 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숨길 수 있었겠니. 그녀는 알면서도 나를 막지 않고 내버려 뒀어. 그리고 자기가 대신 죄를 뒤집어썼지. 왜 그런 길을 택했는지 지금도 알 길이 없다. 나는..."
"화가였잖아요."
나도 모르게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을 내뱉었을 뿐인데 레오나드는 홱 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번뜩거렸다.
"뭐라고?"
"같은 화가였잖아요. 그건 분명 비극적인 일이었고 잘했다고 말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같은 화가로서 말하자면, 만약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와 같은 일에 도전한다고 한다면 아마 전..."
"너도 아직 어리긴 마찬가지구나!"
그가 갑자기 크게 소리 질렀다. 나는 움찔하며 말을 멈췄다. 그가 그토록 화를 내는 건 처음 보았다.
- "그게 그렇게 대단해 보이더냐? 그래? 내가 말하지 않았니. 나는 그저 오만한 녀석에 불과했다고! 우월감에 취한 나머지 그게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생각도 못 했던 거야. 너희들이 못하는 걸 나는 이렇게 할 수 있다, 그저 저열하게 자랑하고 싶었던 거라고. 그게 그리도 멋져 보이니? 말리지 않고 부추겨야 할 것으로 보여? 너는 어쩌면 그렇게도 나와..."
그는 가까스로 말을 멈췄다. 스스로가 하려던 말에 놀란 것 같았다. 그의 표정을 보고 내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당신과 뭐요? 나도 그때의 당신과 같아요? 오만하고 건방진가요?"
"아니... 아니다. 좀 흥분했구나. 서로 가라앉히도록 하자."
"말해줘요! 나 건방진가요? 자만하고 있는 거예요?”
레오나드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굳은 얼굴을 보고 있으니 내가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떨렸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렇게만은 되고 싶지 않았다. 레오나드는 한참 후에야 조용히 말했다.
"파도. 너는 아직 어리고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그려서는 안 되는 것을 그리겠다고 날뛸 정도여서는 곤란하지만, 벌써부터 움츠러드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야. 너는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돼."
- "하던 이야기나 마저 끝내자꾸나. 어쨌든 나 대신 잡혀간 그녀를 위해 나는 그녀의 결백과 내 죄를 입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림에 무지한 무리는 내 그림을 그녀의 것으로 판단, 결국 심판했지."
지금까지 괴로워하며 이야기했던 것에 비해 무서우리만치 담담한 결론이었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우리의 그림은 좀 닮았거든. 서로 사랑했기 때문인지, 늘 서로의 그림을 보아왔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실력 있는 화가라면 차이를 알 수 있는데도 그들은 그러한 노력조차 하지 않았어. 사실 그들에게는 누가 죽으나 마찬가지였겠지. 단지 심판하는 것, 그것만이 목적이었으니."
- 스승님은 이상하게 뜸 들이다가 물었다.
"녀석은 잘 지내더냐?"
"솔직히 별로 잘 지내는 것 같진 않았습니다. 본인은 지금 생활에 만족한다고 했지만요."
"녀석의 그림도 보았고?"
"... 예."
"어떠하더냐?"
레오나드의 아내이자 스승님의 딸이었다는 여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걸 말해도 좋을지 알 수 없었다.
- "놀라웠습니다. 아름답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닌, 쉽게 두드러지지 않으면서도 누구와도 같지 않은 그런 그림이었습니다."
"무엇을 그리더냐? 종교화냐?"
내가 대답을 지체하자 스승님은 다시 물었다.
"어떤 여자의 초상화더냐?"
나는 놀라움을 담아 스승님을 바라보았다. 그것으로 대답이 되었다는 듯 스승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테지. 그래야 했을 테지. 그러지 않으면 안 되었겠지."
- "좋아. 그렇다면 벡리의 안목을 믿고 이 새로운 화가에게 맡겨보지."
너무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스승님도 놀란 것 같았다. 사라사는 축하한다는 듯 웃었고 라잔 경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무심코 시세로를 쳐다봤던 나는 얼른 고개를 바로 했다. 다른 사람의 벌어진 상처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불편한 감각이 몸을 찔렀던 것이다. 나는 무례하게도 라잔 경을 향해 다시 물었다.
"정말이십니까?"
"나는 내 결정을 번복하지 않는다, 소년."
"알겠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를 소년이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제 이름은 파도 조르디입니다."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건방진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이 내 화가 인생에 있어 중요한 첫 발이 되리란 걸 분명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내 이름을 말해주고 싶었다.
- "젊다는 건 좋은 거군. 하지만 파도 조르디, 행동으로가 아니라 그림으로 나를 놀라게 만들어 보아라."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결의를 다지며 고개를 숙이자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에 대한 볼일은 끝나신 것 같군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시세로는 그렇게 말하고 허락도 받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꽤 무례한 일이었지만 라잔 경은 이상한 미소를 보이며 고개만 살짝 저을 뿐이었다.
"그럼 이제 네가 무엇을 그려야 할지 말해주겠다. 우리 가문에 곧 뜻깊은 경사가 생긴다. 여기 있는 내 여식의 결혼이지."
-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스승님과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 잠시 지체한 뒤 사라사가 따라 나가자 나는 근처에 있던 의자에 털썩 앉았다. 문득 허무한 웃음이 나왔다. 어쩌자고 이런 것을 기쁘게 맡으려 했을까. 블레이젝과 아가씨의 초상화를 그리라고? 그런 것 따위 시세로에게나 줘버릴 것이지!
그러나 그녀는 귀족 아가씨이고 나는 이제 갓 장인이 된 화가일 뿐이다. 감히 탐내어서도 바라서도 안 된다. 그리는 수밖에 없다. 괴로워하고 분노하고 끝없이 비참함에 떨면서도.
- 초상화를 그리기에 앞서 공식적인 내 첫 작품이 될 그림을 위해 물감을 새로 만들기로 했다. 직속으로 두고 있는 도제도 없고 얼마 전까지 친구였던 도제들에게 시키고 싶지 않아 직접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물감 만드는 공정실로 가자마자 그런 내 결정을 후회했다. 한창 거기서 광석을 빻고 있는 시세로가 보였던 것이다. 마로의 말대로 그는 정말 자기가 쓸 물감을 직접 만들고 있었다.
그는 내 얼굴을 보더니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아닌 기묘한 표정을 짓고 시선을 돌렸다. 그대로 되돌아나가기도 뭐해서 한쪽 구석에서 홍화 잎을 물에 담가 휘젓기 시작했다.
- 조용히 젓고 빻는 소리만 이어졌다. 잠시 후 강한 산 냄새가 났다. 시세로가 침전물을 녹이는 모양이었다. 그대로 그가 산을 들고 와 내 머리에 부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 시세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초상화라 쉽지는 않을 거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서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시세로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혼잣말하듯 계속 말했다.
"한 사람일 경우에는 그의 자세와 표정, 소품과 상징에만 신경 쓰면 되지. 하지만 두 사람일 경우에는 대상을 어떻게 배치하느냐가 가장 중요해. 서로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균형이 흐트러진다. 더군다나 라잔 경은 까다로운 사람이라 웬만큼 해서는 안 될 거야."
조언임이 분명했지만 그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자기가 맡을 일을 나에게 빼앗겨 화가 난 줄 알았는데?
- 침묵을 지키고 있자 시세로는 고개를 들고 픽 웃었다.
"왜, 내가 선배다운 말을 하니까 이상하냐?"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요."
"어찌 됐든 앞으로 너도 라잔 공방의 일원이고 이런저런 의뢰를 맡아할 테지. 일일이 거기에 기분 나빠할 생각은 없다. 네가 우리 공방의 명성을 해치면 안 되니 돕는 척이라도 해야지."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레오나드가 했던 이야기가 다시금 떠올랐다.
- 심란해서 물감 만드는 일을 그만두고 나왔다. 시세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별 뜻 없이 마당을 왔다 갔다 하던 그때 시세로의 작업실이 눈에 들어왔다. 살짝 열린 문 안쪽에 캔버스 몇 개가 세워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그림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그의 작업실로 향했다. 허락 없이 그림을 살펴보는 건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지만 잠깐 보고 나오는 것 정도야 어떠랴 싶었다.
완벽주의자답지 않게 문을 열어두고 나간 걸 보면 어지간히 급했다는 소리였다. 다시금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이미 벌어진 일. 나중에 레오나드에게 죽도록 사죄하자고 마음먹었다.
- 시세로의 작업실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작업실 네 귀퉁이마다 각각 작업대와 재료, 완성된 작품과 작업 중인 작품들로 나뉘어 있었다. 중앙에는 책상과 많은 서적들이 있었다. 그가 책을 본다니 조금 의외였다. 좀 더 둘러보다가 그림들로 다가갔다.
그림을 그려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을 거다. 그림에서는 그걸 그린 사람의 성품이 어떤 식으로든 묻어난다는 걸. 그렇기에 처음 시세로의 그림을 봤을 때 나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것은 드높은 자존심과 약간의 권태, 그리고 극도의 경건함이었다.
- 앞의 두 가지는 그의 첫인상과도 일치하는 것이었지만 마지막 부분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머지 그림들도 꼼꼼히 살피며 다른 느낌은 없는지 찾아보았다. 어떤 것에서는 신경질적인 흔적이 어떤 것에서는 약간의 냉소기가 묻어나기도 했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도대체가, 경건함이라니? 그의 그림 중 대다수가 역사상 의미 있고 극적인 사건들을 그리기는 했지만 단지 소재 때문에 그런 분위기를 풍기는 건 아닌 듯했다.
나는 다시금 시세로라는 인물을 찬찬히 떠올렸다. 처음 그를 만나던 날부터 공방에 들어와 보여준 태도, 레오나드에게 드러내 보이던 적의 등. 하지만 어떤 장면에서도 경건함 따위가 들어갈 틈새는 없었다. 도대체 그의 내면 어느 부분과 연결되어 있는 걸까?
분명한 건 그의 그림이 매우 훌륭하다는 점이었다. 단순히 잘 그렸네, 하고 감탄이 나오는 수준이 아니라 보는 순간 숨을 멈추게 되는 그런 그림이었다. 하지만 내 안의 반항심 혹은 그에 대한 적의가 그래봐야 레오나드만큼은 아니라고 항변했다.
- "완성된 후에 보는 게 좋을까? 하지만 아버님께서는 무척 까다로운 안목을 가지고 계셔. 아무리 공을 들여 완성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폐기하실 거야. 그러니 내가 미리 봐두는 게 좋을지도 몰라."
"그때가 되어 폐기하게 되더라도 저를 믿고 한번 맡겨보세요."
내 말에 그녀는 빙긋 웃었다.
"당연히 믿지. 내 파도인데."
작업을 위해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썼건만 그녀의 말 한마디로 물거품이 되었다. 말뿐인 걸 알면서도 이상한 기쁨과 희망이 솟구친다. 악의 없이 잔인한 사람 같으니라고.
- 그때 정중히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라사는 살짝 놀라더니 시녀에게 다급히 손짓했다. 금세 머리 손질이 마무리되고 시녀가 문을 열었다. 드디어 고대하던 사람이 들어섰다.
"제가 조금 늦게 도착한 모양이군요."
하얀 눈의 기사였다. 평소에도 빌어먹을 만큼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그날은 정점을 찍었다. 내가 부탁했던 대로 그는 은색 갑옷을 입고 한쪽 어깨엔 푸른 망토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허리에는 길고 날렵한 장식검을 찼고 손엔 붉은 깃털이 풍성한 투구를 들고 있었다. 그날따라 서로 색이 다른 눈동자도 두드러졌다.
- 그녀는 약간 난처한 기색이었지만 약혼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블레이젝도 자연스럽게 손을 잡은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마주 보는 두 사람의 표정을 보는 순간 내 직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때처럼 묘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내가 그리려 한 것은 예전에 골짜기에서 블레이젝이 사라사를 말에 태워 에스코트하던 모습이었다. 내 머릿속에 그 장면은 아름답고도 아프게 박혀있었다. 결혼식 초상화에 어울리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꼭 그려내고 싶었다.
사실 말에 탄 사라사의 모습을 그린다고 해도 실제 높이를 그대로 재현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눈을 내리깔고 있는 사라사의 모습, 위를 올려다보는 블레이젝의 모습을 따로따로 그려 그림 속에서 일치시키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서는 도저히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볼 때의 미묘한 표정이 제대로 나타날 것 같지 않았다. 특히 사라사의 표정이.
- "안주인이라고는 해도 어차피 우리가 지낼 곳은 이곳 라잔 가문이 아닙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조소가 깔려있었다. 그럴 만했다. 결혼식 이후 사라사가 그의 집으로 가는 대신 블레이젝이 라잔 저택에 들어오기로 되었던 것이다. 신분 차이가 현격할 때는 종종 신랑이 신부 집으로 들어가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라잔 가문의 체면을 살리기 위한 일이겠으나 반대로 블레이젝의 체면은 형편없이 낮아진다고 할 수 있었다.
사라사도 그 기색을 느꼈는지 얼굴을 조금 굳히며 말했다.
"어디에 있든 한 사람의 부인으로서 마음가짐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저를 위해주고 계셨다니 솔직하게 감사드려야겠군요."
"만약 여기 머무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거라면 제가 아버님께 말씀드려서..."
"그런 일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언젠가 제 힘으로 자립하여 나갈 생각입니다."
사라사가 조금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자 블레이젝은 있는 듯 없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당신과 함께 말입니다."
- 하지만 곧 후회했다. 다시 블레이젝을 바라보는 사라사의 얼굴이 놀랍도록 부드러워져 있었다. 애정과 더불어 신뢰에 찬 눈빛이었다. 블레이젝은 그 시선을 조금의 당혹스러운 기색도 없이 받아냈다. 마치 모든 것이 그가 생각했던 대로인 양.
- 그날 해가 질 때까지 블레이젝의 얼굴과 상체를 다 그렸다. 그는 표정과 자세가 거의 흐트러지지 않았기에 작업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에 비해 사라사의 표정은 자꾸만 변했으므로 가닥을 잡기 어려웠다. 어느 쪽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작업이 끝나자 블레이젝은 내내 한 자세로 서있었음에도 전혀 힘든 기색 없이 사라사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격식 때문이겠지만 내게도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를 남겼다.
- 사람들이 몰려가는 성당 쪽으로 꽃이 뿌려지고 아련한 풍경 속을 종소리가 메운다. 성당으로 오르는 새하얀 계단에는 붉은 융단이 깔려있고 그 옆으로 은백색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정렬한 채 서 있었다. 푸른 하늘 아래 모든 것들이 눈부시고 아름답게 빛났다.
드디어 신부와 신랑이 등장했다. 안에서 식을 마치고 나온 것이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베일 사이로 수줍은 미소가 언뜻 보인다. 신랑은 평소처럼 표정 없는 얼굴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목례하고 있었다.
- "안녕히. 내 사랑."
나는 손 안 가득 담았던 꽃잎을 버렸다.
그로부터 사흘 동안 잠도 자지 않고 그림만 그렸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사라사, 행복하게 웃고 있는 사라사, 골짜기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사라사... 그제야 조금은 레오나드가 이해될 것도 같았다.
- 시세로가 레오나드를 찾아간 이후 그를 한 번 더 방문했다. 그의 작업실에는 여전히 죽은 아내의 그림들만 가득 있었다. 시세로가 별다른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는지 우려하며 묻자 그는 우울하게 웃으며 답했다.
"왜 안 했겠어. 모든 그림을 부숴버리고 갔어."
"뭐라고요? 그걸 그냥 놔뒀어요?"
"놔뒀어. 다시 그리면 되니까."
그는 엉망이 된 캔버스들을 쌓아놓은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시세로는 종종 그 후로도 술에 취해 그림을 부수러 찾아온다고 했다.
-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어. 지금 네게 다 말해주기는 어렵지만 어쨌거나 그가 하는 짓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덕분에 필사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지."
"필사적이라고요? 곧 부서질 그림들인데요?"
"그러니까 더욱 필사적이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 사라사가 떠난 뒤 마음은 괴로운데 반대로 그림은 끝없이 나왔다. 나 자신도 놀라울 만큼 그려지고 또 그려졌다. 어쩌면 단순히 그리는 걸 반복하는 것이야말로 발전하기 가장 좋은 길인지도 몰랐다. 스스로도 성장한다는 게 느껴질 만큼 실력이 쑥쑥 올라갔다. 더 이상 공방에서 나를 운이 좋아 장인이 된 놈 취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 끝없이 샘솟는 그림에 대한 열망. 먹고 자는 시간도 아깝고 오직 그림만 그리고 싶었다. 그대로 죽어버린다 해도 좋으리라. 나에 대한 의심도 아버지에 대한 우울한 기억들도 점차 희미해졌다. 아무것도 나를 막을 것은 없어 보였다.
- "그랑프리라, 그렇지. 지금의 네게는 그게 가장 중요할 테지."
스승님께 당분간 대성당에 가지 못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가을에 그랑프리가 마감되므로 시간이 촉박했던 것이다. 당연히 불호령을 내리실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스승님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당분간 혼자 생각할 것이 좀 있었느니라. 그랑프리가 끝날 때까지는 따라오지 않아도 좋다."
죄송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다. 그림을 향한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는 무엇도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한데 역시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 "내가 나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냐?"
우리는 서로를 냉정히 대했지만 이상할 만큼 거리낌 없이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의 치부를 들추었다.
"레오나드가 출품을 안 한 뒤로는 안 나가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모르는 게 없구만. 그래서 뭐?"
"제가 나간다니까 따라 나간다는 건 레오나드만큼 저를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인가 해서요."
시세로는 물론 기막혀했다.
"이 건방진 자식아. 네 그 잘난 콧대를 꺾어주려고 그런다. 어디 그랑프리에서 내게 무릎 꿇고도 그렇게 오만하게 구는지 두고 보자."
"그런 말 하다가 저 혼자 입상하면 얼마나 창피할지는 알고 있는 거죠?"
"어이구, 제발 그렇게 되게 해주십쇼. 천재 화가 양반님."
그럴 때마다 오히려 이상한 친근감이 느껴졌다. 친해지자는 건지 미워해 달라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에게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따금 경계가 풀렸다. 어쩌면 이럭저럭 잘 지낼 수도 있다고 기대했던 것 같다.
- 사라사가 떠나고 두 달이 지난 여름, 또다시 부름을 받고 이데아를 찾아갔다. 겨우 세 번째에 불과한데 왕성에 들어서자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몇 년 전만 해도 감히 이 근처에 발을 디딘다는 건 상상도 못 했는데.
그녀가 있는 곳은 철문이 있는 방 그대로였다. 전처럼 그녀는 창가에 앉아 있었고 무릎엔 왕자가 어린애처럼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곁에 폰 블레이젝이 서 있었다.
"당신..."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물으려는 순간 그의 눈이 꾸짖듯 노려보았다. 나는 엉거주춤 이데아에게 먼저 고개를 숙였다.
"오래간만에 찾아뵙습니다."
이데아는 희미하게 웃더니 자신의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블레이젝의 표정을 살피며 앉았다. 반년으로 예정된 신혼여행길에 올랐던 사람이 두 달 만에 여기 돌아와 있는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사라사도 함께 돌아온 걸까? 묻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 "잘 지내는 것 같구나."
"예, 덕분입니다."
나는 가까스로 블레이젝에게서 눈을 떼고 이데아를 바라보았다.
조용하며 위엄 있게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였다.
"갑자기 불러서 미안하구나. 부탁할 것이 있어서."
- 그녀는 고개를 들어 블레이젝을 바라보았다. 그는 방 한쪽으로 걸어갔다가 손에 무언가 들고 되돌아왔다. 바로 내가 그린 뒤벨 자작의 초상화였다. 한데 멀쩡하지 않았다. 자작의 얼굴 한쪽에 물이라도 엎지른 듯 얼룩이 번져있었던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겁니까?"
안타까운 마음에 그녀를 채근하듯 물었다. 그녀의 부주의함에 조금 화가 났다. 내심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이기도 했고 다른 누구도 아닌 자작의 그림이었으니 말이다. 이데아는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내 잘못이다. 그곳이 안전할 거라 믿었는데."
"비라도 새어 들어왔던 건가요?"
이데아는 순간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고 나도 묻고 나서야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왕성, 그것도 왕자의 방에 비가 샌다니.
이데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눈을 질끈 감고 어린애처럼 웃어서 나도 놀랐다. 그녀는 곧 정갈한 태도로 돌아갔지만 눈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 "오, 아카데미 그랑프리라고."
그녀는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하고 중얼거렸다.
"좋은 생각이다. 그랑프리는 화가들에게 크나큰 기회지. 내가 레이번에게 특별히 네 그림을 잘 지켜보라고 일러두겠다."
"저, 그런 일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째서?"
"정당하지 않은 것 같아서요."
"정당하지 않다?"
그녀는 살짝 웃고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어라, 뭔가... 당혹스러워하는 내게 그녀가 손을 뻗었다. 그 손은 내 얼굴에 닿았다.
"너처럼 젊고 재능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반짝거리는 빛이 나지.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감, 설레면서도 조심스러운 확신. 그런 따뜻하고 보기 좋은 빛이 있어."
"그... 렇습니까?"
"그래. 사람들이 생명력이라고 부르는 건 아마 그런 거겠지."
그녀의 낮은 목소리는 어떤 말이든 신비롭게 들리게 하는 힘이 있었다. 나는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나를 지그시 지켜보고 있었다. 어딘가 묘하고 어색한 상황인데도 거기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 그때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얼른 이데아에게서 떨어졌다. 열려 있던 문으로 블레이젝이 들어서고 뒤이어 시녀가 와서 차를 내려놓았다. 설마 본 것은 아니겠지? 나는 블레이적의 표정을 살폈지만 별다른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차를 마신 다음 그림을 가지고 돌아가도록."
이데이는 다시 차분한 태도로 돌아가 말했다.
"예. 그런데 정말 다시 가져오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그게 나을 것 같구나."
그녀에겐 더 이상 어떤 미련도 없어 보였다.
- 잠시 후 왕성을 떠나오며 나는 얼룩진 자작의 얼굴을 심란한 마음으로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저는 자작님의 그림을 주는 것으로 그녀에게 계속 자작님을 사랑하라고 강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눈동자는 지워져 보이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남은 입가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 사람을 영원히 사랑한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까요?"
초상화 속 그에게는 어리석은 질문일 것이 틀림없었다. 죽음에 못 박혀 원하지 않아도 영원히 그대로일 테니.
- 사라사는 여행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하인 시절 얼굴을 알던 라잔 가문의 시녀에게 물어본 결과 블레이젝이 임무를 핑계로 신혼여행에서 혼자 돌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문에 라잔 경이 불같이 화를 냈다는 것도.
사라사는 젊은 귀족들이 자주 찾는 서쪽 휴양지에 홀로 남아있었다. 라잔 경이 돌아올 것을 명했으나 그녀가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다운 자존심으로 예정된 여행 기간을 채울 것이란 짧은 답장을 해왔다.
신부가 집에 없으니 블레이젝이라고 라잔 가문에 머물 리 만무했다. 그는 정리하기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자기 저택에서 지내고 있었다. 라잔 경의 노여움은 점점 커졌으며, 설상가상 블레이젝의 작위는 기사에서 남작으로 대폭 승격되었다. 지위도 치안대장에서 근위대장으로 바뀌었으니 더 이상 라잔 경이 함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인물도 아니었다.
블레이젝은 이제 만족할까? 고민해 보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어떤 것을 원하거나 그렇지 않은 의도를 함부로 내보이지 않았다. 끝이 어딘지는 본인만 알고 있을 터.
- 나는 사라사가 없는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여름을 보냈다. 그대로 있으면 속 안의 무엇이든 끊어질 것 같아 참지 못하고 다른 여자들을 찾기도 했다. 그러나 순간의 쾌락이 지나간 뒤에는 더 큰 허무와 고통이 밀려왔다. 외롭고 외로워서 그대로 죽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낮에는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지만 밤이 오면 신음뿐이었다. 뜯어낼 듯 이불을 부여잡고 땅을 뒹굴어도 텅 빈 가슴은 시원하게 긁어지질 않았다. 오직 붓을 쥐거나 누군가를 안을 때만 잠시 그것을 덮어둘 수 있을 뿐이었다.
- "그래. 그런 것 같다."
"같다고만 말씀하지 마시고 좀 자세히 봐주십시오. 제 생각엔 뭔가 부족한 것 같은데 그게 무언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찾는다 해도 고치기엔 늦지 않았느냐? 그랑프리 마감이 며칠 안 남은 걸로 아는데."
"그래도 그때까지 최선을 다해봐야지요."
"옳은 말이구나. 그렇다면 잘 찾아보아라."
"도와주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제자를 부려먹는 스승은 봤어도 스승을 부려먹는 제자는 못 봤느니라. 스스로 찾아내도록 해야지."
- "여기서 그리던 그림을 공방에 들어가서 그린다고 뭐가 달라져요?"
"많이 다르지. 나는 이 그림들은 팔 생각도 전시할 생각도 없어. 오직 자기만족을 위해 그릴 뿐이야. 하지만 공방에 들어가면 그렇게 내 고집만 부릴 수가 없지. 의뢰를 받고 일을 해야 해. 다시 모사를 시작해야 할 거야. 알다시피 다른 화가들의 경멸을 받고 공방의 이름을 떨어뜨리는 일이지. 폐가 된다고."
"아무튼 고집 한번 세네요. 앞으로도 평생 저 여자분의 그림 말고는 그리지 않을 생각이에요?"
"그래. 그렇게 하기로 맹세했어."
- 그의 외골수 같은 행동이 못마땅했지만 별 수 없었다. 솔직히 그렇게 실력 있으면서 수도사적인 결심을 지켜가는 거야말로 대단한 일이었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일생 동안 사라사의 그림을 그리라고 말한다면 (그녀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그림을 포기해 버릴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다른 그리고 싶은 것도, 터무니없이 아름다운 것도 많기 때문이다. 자기 욕망을 억누르고 그리고 싶지 않은 것만 그려야 한다면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다.
한데 레오나드에게는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걸까. 단지 속죄 때문인가? 아니면 나로서는 짐작할 수 없는 깊이의 사랑이 그에게만 존재하는 것일까.
- 레오나드는 잠깐이지만 뭔가를 눈치챈 기색이었다. 하지만 고맙게도 그것을 확인하려 들거나 묻지 않았다. 그에게 매번 이것저것 캐묻던 나와는 다르게도.
"마음고생이 심했겠구나. 하지만 시간이라는 약은 꽤 잘 드는 편이지. 곧 잊고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 그럼 당신은요? 평소의 나였다면 그렇게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위해 모른 척해준 그를 위해 나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 주위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내 목소리는 어둠 속에 나직이 울렸다. 분명 그를 만나자마자 욕설을 퍼부어 줄 거라 생각했는데 놀라울 만큼 차분한 기분이었다. 시세로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등만 보이고 있었다.
"당신을 믿어본 적도 없어요. 당신한테 처음으로 마음을 놓았던 그날, 당신이 나를 바닥에 내팽개쳐 버렸기 때문이죠."
3년쯤 전이었다. 내게 목말을 태워줬다가 인정사정없이 떨어뜨린 일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에 대해서만큼은 최소한의 선을 지킬 거라 생각했어요. 아무리 내가 미워도 내 그림에 손을 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림에 대한 당신의 태도만큼은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진지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그림 그리는 게 얼마나 힘들고 또 행복한 일인지 당신이야말로 잘 알고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설마, 나를 망치는 한이 있어도 내 그림은 망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냐?"
그가 몸을 일으켜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짧은 사이 술이 완전히 깬 것처럼 보였다. 모르는 척하는 그의 표정을 보는 순간 머리를 다시 테이블에 처박아 주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하지만 간신히 참고 말했다.
"당신이란 사람에게 내가 터무니없는 기대를 했던 모양이네요. 내가 보았다고 믿은 게 전부 틀렸던 거죠. 당신은 그림에 대한 어떤 애정도 존경심도 없어요."
- '괴로움이 나를 끝내기 전에 내가 먼저 괴로움을 끝내야 했거든.'
꿈에 뒤벨 자작이 나왔다. 그가 바로 시세로가 인생을 망쳐버린 천재 소년이었다. 어디서 들어본 말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목을 맨 뒤벨 자작의 몸이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어깨가 보이고 등이 보이고 다시 어깨가 보이고... 그대로 더 돌면 보랏빛으로 변한 그 끔찍한 얼굴과 마주할 터였다.
안돼.
필사적으로 보지 않으려 했지만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눈도 감기지 않았다. 안 돼, 안 돼! 이대로라면 그 얼굴과 마주친다. 뒤벨 자작의 몸은 거의 다 돌았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 등골에 섬뜩한 소름이 끼치는 것과 동시에 눈을 떴다. 비단 꿈에서뿐만 아니라 그동안 알아온 세계와 전혀 다른 곳으로부터 깨어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이유를 잘 몰랐지만 서서히 제정신이 돌아오면서 깨달았다. 그 강렬한 느낌을 불러일으킨 정체는 꿈이 아닌 눈앞에 정면으로 보이는 천장화였다. 정신이 몽롱한 탓인가? 아니면 새벽빛이 만들어낸 착각인가? 감히 몸을 일으킬 생각도 못 하고 한없이 그림을 바라보았다.
- 그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위대함, 장엄함, 숭고함. 그런 단어들의 나열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다만 압도당하여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한눈에 관람자를 사로잡는 자유분방하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는 구도 같은 계열이면서도 채도가 모두 다른 현란한 색감. 무엇보다 극도로 자신감에 찬 필치가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보면 볼수록 절망과 함께 환희가 차올랐다.
- 그것은 내가 그동안 흉내 내온 가짜들과 다른 진짜였으며, 나 같은 화가는 결코 따라갈 수 없는 걸작이었다. 어찌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작은 성당에 이 같은 그림이 존재하는가? 스승님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그건 성 바이니 대성당에 그려졌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법했다. 어디에서건 모두를 압도할 수 있는 역작이었다.
지금껏 이러한 그림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내내 성당에서 지냈는데 왜 한번 천장을 올려다볼 생각도 못했을까? 부당하고 억울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스승님은 여기에 이런 그림이 있다는 걸 알까? 공방의 누구라도 이것을 알았을까?
아니, 모를 것이다. 그랬다면 누구라도 이렇게 말해주지 않고서는 못 견뎠을 테니까.
'가서 가넬 신부의 작은 성당에 있는 천장화를 보거라. 그것이야말로 너희들이 추구해야 할 진정으로 완성된 예술이니라.'
- 이런 것을 이제야 보았다니, 이제야 느꼈다니. 내가 그린 부서진 종교화는 그저 어린애 낙서일 뿐이다. 그럴듯하지만 속은 텅 비어있는, 괜찮은 그림일지언정 훌륭한 그림은 아니었다. 마음속에 신앙이 없는데 어떻게 그림에서 경건함이 묻어날 수 있을까. 종교화를 그린 것은 단지 상을 타기 위해서였지 내가 바라고 추구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토록 어딘가 모자란 가짜 냄새를 풍겼던 거다.
- "글쎄다. 꽤 오래전의 일이라. 작은 성당이고 돈이 없다 보니 어느 이름 없는 화가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단다."
나는 거의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름 없는 화가라고요? 이걸 그린 사람이요?"
"지금은 어쩌면 유명해졌는지도 모르지. 가난하고 배고파했던 그를 위해 그러기를 빌자꾸나."
-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이 들었지만 화가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는 소망보다 간절한 것은 없었다. 틀림없이 지금은 유명하고 위대한 화가가 되어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나라 최고라는 레이번일지도 모른다. 그래, 그래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정당하다.
그가 누구이든 만나고 싶었다. 그 사람이라면 괴로움이 자신을 끝내기 전에 먼저 괴로움을 끝내는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라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 불을 피운 자리에 캔버스 조각들을 하나하나 넣으면서 결심을 다졌다. 다시는 진심이 담기지 않은 그림을 그리지 않으리라. 원하는 것을 원하는 대로 표현할 때까지 멈추지 않으리라. 그리고 반드시 성공하리라.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지 않으리라. 괴로움이 나를 끝내기 전에 내가 먼저 괴로움을 끝내리라.
- "이젠 네가 없으니 더더욱 다른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하실 테지."
아까 짐을 정리하던 게 그래서인가? 그러도록 종용한 게 나였지만 지금에 와 이뤄지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하필 내가 공방에서 쫓겨난 이때에.
"혼자 지낼 곳을 찾고 있다면 여기도 나쁘지 않을 거다. 이 방은 남겨두고 갈 테니 필요하다면 네가 쓰렴."
필요 없어요. 나는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에요.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다고.
- 그는 말을 마치고 짐을 들어 올렸다. 멍하니 서서 그걸 보고만 있었다. 내 마음이 이토록 괴로운데 바로 곁에 있는 그가 몰라준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도 막막하고 친구가 필요한 이때 그가 훌쩍 떠나려 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도, 스승님에게도, 사라사에게도,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 것이다. 갑자기 형언할 수 없는 외로움이 느껴졌다.
"파도."
레오나드가 마침내 떠나려는 듯 나를 불렀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었다. 그가 와서 나를 달래주기를, 이 끝없는 상실감을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 누군가 이유를 묻는다 해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나도 몰랐으니까. 누구든 내 그림을 보고 관심을 가져주기를,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절박함에서 나온 행동이었는지 모른다.
하루 종일 멍하니 누워있는 게 생활의 전부였다. 아무 의욕이 나지 않고 그림에 대해서는 떠올리기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 이럴 거였다면 나를 공방으로 데려가지도 말았어야지. 내게 눈속임 같은 짓을 해서 홀릴 때는 언제고 간신히 그림에 대해 진지해진 이때에 버린단 말인가? 차라리 귀족가의 하인으로 남는 게 좋을 뻔했다. 그럼 적어도 사라사의 얼굴을 매일 볼 수 있었을 테니까.
- 그렇게 산 채로 말라가던 어느 날, 평소의 나였다면 전혀 달가워하지 않을 사람이 찾아왔다. 그러나 너무도 외로웠던 그때 나는 그의 방문조차 반가웠다.
"여기 있었나."
빈민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귀족적이고 깨끗한 자태의 블레이젝이었다. 방만하게 누워있던 나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 "그래. 하지만 이번에는 그분의 개인적인 용무 때문이 아니다. 네가 그랑프리에 출품한 그림 때문이지."
"제 그림이요?"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감 이틀 전에 뭔가를 가져다 냈었다. 그게 뭐였더라.
"내 아내를 그린 이유를 설명해라."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랬다. 그동안 그려둔 사라사의 그림 중 하나였다. 그림에 대한 비판을 들을지언정 그린 이유에 대해 답해야 할 줄은 몰랐는데.
"두 분의 초상화를 그릴 때 습작했던 그림입니다."
"습작이라고."
블레이젝은 창고 안을 다시 둘러봤다. 그의 시선이 잠시 세워둔 캔버스들에 머물렀다. 오, 안 돼. 만약 그가 저걸 본다면...
"평소에도 그렇게 남의 아내를 습작하곤 하나?""
"아닙니다. 더 나은 초상화를 위해 이런저런 구도로 연습해 봤을 뿐입니다."
"연습이라."
손에서 식은땀이 다 났다. 그나저나 사라사가 안중에도 없는 사람치고는 집요하게 따져 묻고 있었다. 이제는 조금 달라진 건가?
"마음에 안 드는군. 이따금 너에게 칼을 휘두르고 싶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주지 않더군. 영리하게도."
속에서는 심장이 얼어붙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럼 앞으로도 영리하게 행동해야겠군요."
"그래야 할 것이다."
그가 문을 열고 나오라는 고갯짓을 했다.
- "감히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아카데미 회원 자격이라는 것이 어떤 건지 듣고 싶습니다."
나는 최대한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반백 머리 남자와 이데아가 서로를 한 번 보더니 남자 쪽에서 입을 열었다.
"쉽게 말하자면 이곳 아카데미에 네 거처가 생기는 것이다. 작업공간은 물론이고 미술 재료들과 식사, 잠자리까지 제공하지. 그 밖에도 생활에 필요한 다른 것들을 무상으로 지원한다. 원하는 때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며 그림 의뢰를 받거나 거절하는 것도 오로지 본인의 결정에 따르지. 또한 모든 부수적인 것들을 차치하고라도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라는 명예가 생긴다. 이 나라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일컬어지는 화가들 틈에 속하게 되는 것이지."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흥분으로 가슴이 떨려왔다. 이것은 머릿속으로 계산할 그런 일이 아니었다.
"제가 그런 자격을 받아도 되는 겁니까?"
"원래는 그랑프리 수상자에게만 주어지는 권한이다. 그러나 이번에만 특별히 네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네가 그린 이 초상화는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 깊이가 담겨 있다. 또한 어디에서도 본 적 없던 화풍이지. 아직 덜 여물었다는 생각은 들지만 네가 앞으로 어떻게 완성시켜 나가는지 지켜보고 싶다."
-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 "저는 언제나 모든 것을 드릴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아가씨께서 무언가를 원하신 적이 없지 않습니까."
사라사는 변명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얼굴을 했다. 묘하게도 나를 향한 게 아닌 그녀 자신을 향한 듯 자조적이었다.
"원하는 건 있어. 그걸 원하는 게 너무도 이기적이고 잔인하기에 말하지 않았을 뿐이야.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의 아내가 되어서도 나만 사랑해 줄 것을 어떻게 강요할 수 있겠어."
"강요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여전히 아가씨를 사랑하니까요. 그런 제가 병신일 뿐입니다."
- 그녀가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자신의 목덜미 근처를 더듬더니 옷 속에 감춰져 있던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간단한 동작으로 그것을 풀어낸 그녀는 내 목을 끌어안듯 목걸이를 채웠다. 어리둥절하게 목걸이를 만지는 내 손을 그녀가 꽉 붙들었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주문처럼 말했다.
"그렇다면 제대로 이기적으로 굴겠어. 감히 나를 마음속에서 지우지 마. 죽는 날까지 오직 나만을 사랑하고 원하고 그리워 해. 심지어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해도, 영원히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변하지 마. 그것이 억울하고 분하고 화가 나도,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스스로를 원망하면서 끝까지 나를 사랑해."
도망치고 싶은 동시에 그 강한 손아귀에 단단히 붙들리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차분한 얼굴 뒤에 어떻게 그토록 강렬한 소유욕을 숨길 수 있을까.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나는 어느 때보다도 사라사에게 매료되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가씨."
- 시세로를 만난 건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뒤의 텅 빈 전시장 안에서였다. 해가 지는 어스름 속에 나는 홀로 그곳에서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아스라한 고대 벽화라도 보듯 신비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닌 시세로의 그림이었다.
그를 인정하기 싫던 치기 어린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만히 그림을 보니 사람들의 평가가 이해가 가는 듯싶었다. 그것은 엄숙한 동시에 고요한 역동성을 지니고 있었다. 일전에 그의 그림에서 느꼈던 경건함은 희미한 대신 자신의 재능과 기교를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마치 모두에게 보란 듯이 지나칠 만큼 빼기고 있었다.
나는 확신했다. 그가 그 걸출함으로 오히려 모두를 기만하고 있음을. 다른 그림에서는 모르겠으나 눈앞의 그림에서 만큼은 분명했다. 그는 단지 뽐내며 비웃고 있을 뿐이다. 그의 그림에 찬사를 던질 사람들과 오직 그것만을 목적으로 그림을 그려낸 자기 자신을 동시에.
- 어둠 속에 한숨이 섞여 흘렀다. 그가 이런 짓을 하도록 몰아붙인 나 자신도 공범처럼 느껴졌다. 레오나드의 부인과 시세로의 관계를 알게 된 후 그에 대한 시각이 조금 바뀌었다. 어쩌면 연민이라도 느끼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에 기뻐해야 할지 분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하게 깨달은 것은, 스승님과 레오나드의 말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거다. 자존심 강하고 오만한 그는 얼핏 다른 이들을 하찮게 여기는 듯 보이지만 그렇다고 결코 심술로 남의 그림을 부술 사람은 아니었다. 이유를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이런 그림을 그린 사람이 그런 짓을 할리 없다는 맹목적인 신뢰라고 해야겠다. 이건 내가 그에게 바치는 찬사이기도 하다.
- "감동이라도 했냐?"
어둠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왜인지 그런 상황이 올 것을 염려하면서도 기다렸던 것 같다.
"별로요. 당신답네요. 잘난 체만 잔뜩 해놓고."
비웃는 소리에 뒤이어 복도를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의 형체가 조금씩 분명해졌다.
"이것 봐라."
충분히 가까워지자 그가 걸음을 멈추고 천에 감긴 한쪽 팔을 들어 올렸다. 다른 손에는 술병이 들려 있었다. 나는 어깨만 으쓱했다.
"미안해요."
"미안하다면 다냐? 두 달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팔이 시큰거린다."
"원한다면 똑같이 내 팔을 부러뜨려도 좋아요."
"그럼 너도 똑같이 내 그림을 부술 거고?"
나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막상 인정해야 할 순간이 오니 내 입으로 내뱉기가 쉽지 않았다.
"당신이 한 게 아니라는 거 알아요."
마침내 말했다.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 "궁금한 건 당신이 왜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았는가 하는 거예요."
"그럼 뭐라고 해야 했을까. 마로 녀석이 겁에 질려 거짓말을 한 거니까 가서 나 대신 그놈 팔을 부러뜨리라고?"
의외의 반응이었지만 시세로가 마로를 너무나 아껴서 그런 말을 한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그런 행동이 그의 성격에 지독히도 맞지 않았을 거다.
- "당신이 그렇게 말했어도 안 믿었겠죠. 너무 흥분한 상태였거든요."
"그래 보이더군. 마로는 어떻게 할 거냐?"
"어떻게 할 생각 없어요. 지금은 시간도 많이 지났고 그 녀석은 미워하기 어렵군요."
"동정이냐?"
"설마요. 그런 건 마음에 여유 있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거죠. 그냥 부서진 그림에 더 이상 미련이 없어졌어요. 사실 그거 엉망이었거든요."
"잘 알고 있군. 참새가 공작 꼬리 달고 펼쳐보려는 짓이었지."
그의 비유가 너무 정확하다는 생각이 들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시세로도 사납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가 악의로 그런다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조금 그의 성격을 알 것 같았다.
- "미안해요."
"그 말은 아까 한 것 같은데."
"팔 부러뜨린 것 말고, 심한 말을 한 거 말이에요."
"아하. 내가 망쳤다던 그 녀석 이야기."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꽤 충격을 받았다. 그가 그렇게 쉽게 입을 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레오나드한테 들었냐? 하긴 녀석밖에 없겠지. 언제나 결백한 척, 착한 척하는 레오나드의 말은 모두들 잘도 믿어버리니까. 특히 스승님 하고 네가 그렇지. 신이 나서 떠들어댔겠지? 내가 한 천재 소년을 어떤 식으로 괴롭히고 망쳤는지, 내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 왜 가까이하면 안 되는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모두가 나를 비난하는 그 사건에 대해 말해볼까. 처음 그 아이를 보았을 때는 깜짝 놀랐지. 정말 대단했거든. 재능을 타고난다는 게, 천재라는 게 뭔지 처음 알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한 것과 달리 난 결코 녀석을 미워하지 않았어. 오히려 경외했지."
경외라고? 나는 눈앞의 형체가 시세로가 맞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천재란 건 말이야. 태어나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이미 완성된 채로 태어나는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걸 깨달았지. 그 아이에게는 가르칠 것이 없다는 걸, 아니 처음부터 배울 게 없었다는 걸. 그래서 뭐랄까, 조바심 비슷한 걸 느꼈지. 금세 내가 필요 없다는 걸 깨닫고 떠날 것 같았어. 그래서 난 어떻게든 스승답게 굴어야 했지. 그 아이에게 전혀 필요하지 않은 조언을 하기 시작했던 거야."
- 시세로의 얼굴에 내가 그에게서 한 번도 본 적 없던 표정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사람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내가 녀석에게 뭐라고 말하는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줄 알았지. 내가 원한 것은 그저 녀석이 내가 필요하다고 느끼도록 만드는 것뿐이었어. 그렇다고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조언을 한 것은 아니야. 이미 완벽한 그림에 이 부분을 보완하면 더 완벽해질 거라고 말하는 식이었지. 한데 결과는 끔찍하더군. 완벽한 그림에 붓을 대니 더 완벽해지기는커녕 훨씬 나빠졌어. 완벽 이상의 완벽은 없었던 거지."
그가 그렇게까지 솔직히 말하는 것에 나는 순수하게 놀랐다. 그러면서 다른 생각도 하고 있었다. 천재 소년의 완벽한 그림이라는 걸 보고 싶다는 생각.
- 할 말이 남은 듯한 느낌이었는데 그 말을 끝으로 시세로는 입을 다물었다.
긴 침묵과 함께 밤이 흘렀다. 가슴은 이상하게 두근거렸고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레오나드가 해준 이야기와 결과만 놓고 보자면 같았지만, 과정과 당사자의 마음은 판이하게 달랐다. 무엇이 진실인지 고민하지는 않았다. 다만 시각의 차이가 이렇게까지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 "농담이야. 그냥 건방져서 싫어."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농담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난 뒤였다. 시세로는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어. 내심으로는 나 또한 네가 내 도제가 될까 봐 걱정했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바라기도 했어. 기회를 얻고 싶었으니까. 나는 그걸.. 젠장. 나는 다시 한번..."
뭔가 말하고 싶지만 그의 자존심이 그러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듯했다. 결국 그는 혼자 힘겹게 싸우다가 져버렸다.
"됐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자. 목덜미가 다 간지럽다."
- "왜 스승님과 레오나드에게는 이 이야기들을 해주지 않는 거죠? 두 사람 다 똑같은 오해를 하고 있는데요."
사실 정말 묻고 싶었던 건 그 일을 왜 내게만 이야기해 주는가다. 레오나드의 이름이 나와서인지 그의 얼굴은 대번에 삐뚤어졌다.
"멋대로들 판단하게 내버려 둬. 두 사람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너 사실은 그렇게 나쁜 놈이 아니었구나.' 하면서 친근한 얼굴로 다가오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나려고 하니까."
"나는 그래도 괜찮고요?"
"너 그럴 거냐?"
잠시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엔 당신한테 당한 게 너무 많네요."
"그러니까 얘기했지."
픽 웃으며 그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이상하게도 어느 때보다 가깝게 느껴졌다. 결국은 그가 우려한 대로 되어버린 셈이다.
- "행여 앞으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따끔하게 한마디 해줄까? 저기 있는 네 그림 말이다."
그가 손으로 내 그림이 있음직한 어둠을 가리키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 그림이 왜요?"
"너 어쩌다 저 그림을 그리게 됐냐?"
전에 추궁했던 사라사와의 관계를 묻는 거라고 생각했다.
"지난번 아가씨의 결혼 기념 초상화를 그릴 때 습작한 겁니다만."
"설마, 아닐걸."
"아니라니요?"
"자세히 봐. 이런, 어둠 속이라 자세히는 힘들겠군. 그냥 네 그림을 머릿속에 떠올려 봐라. 그리고 어떤지 가만히 지켜봐."
그의 말대로 사라사의 초상화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어디에서부터 붓을 대서 어디에서 끝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세로가 뭘 말하고자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 "그럼 그건 한쪽에 치워놓고, 이제 레오나드의 그림을 하나 떠올려 봐라."
레오나드의 그림이라고? 그의 그림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그의 아내 그림이다. 처음 창고로 찾아갔을 때 천을 걷어내고 본 그림 말이다. 어둠 속에서 신비롭게 존재감을 드러내며 뒤돌아보던 소녀. 형용할 수 없는 눈망울과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한 입술. 누구와도 같지 않고 어디에도 없던 그만의...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이제 좀 알겠냐?"
그는 웃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지만 내게는 잔인한 비웃음처럼 들렸다. 범죄라도 저지른 듯 심장이 은밀하게 뛰었다. 부정하고 싶다는 듯이, 숨기고 싶다는 듯이.
"아니에요."
무얼 말하는지도 모르면서 변명부터 내뱉었다. 사실은 이미 다 알고 있음에도.
- "우연히 닮은 거라고? 정말 그럴까? 너는 저택 아가씨의 그림을 많이 그렸지. 그렇다면 레오나드의 그림을 보기 전과 후, 그러니까 예전의 네가 그리던 것과 요즘 것이 어떻게 다른지 냉정하게 비교해 봐라."
하고 싶지 않았다. 서늘하던 어둠 속 공간이 덥게 달아올랐다. 가만히 있는데도 몸에 열이 나고 식은땀이 흘렀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머릿속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장면들이 되살아났다.
그의 말대로 나는 사라사의 그림을 제일 많이 그렸다. 특히 그녀가 결혼식을 올리고 떠났을 때 미친 듯이 그리고 또 그렸다. 내가 주로 그린 것은 정원을 뛰어다니는 그녀,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 꽃 틈에 섞여 있는 그녀였다. 항상 내가 좋아하는 풍경과 같이 그렸다. 그런 것을 좋아했기에.
그리고 지금은... 그녀는 어느 그림에서나 혼자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텅 빈 공간이고 주로 어둠이다. 그녀는 예전처럼 해맑게 웃거나 뛰어다니는 대신, 신비스러운 미소를 짓고 뜻을 알기 어려운 눈을 하고 있다. 그건 원래 내 그림이 아니었다. 그건...
-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일부러 따라 한 게 아니에요!"
내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외치자 시세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만둬라. 일부러 했다고는 안 했다."
"그럼 뭐예요? 저게 뭐예요? 왜 저런 것이, 나는 어쩌다가, 나는, 저건 내가 그린 게 아닌..."
"네가 그린 것 맞아. 이미 네 그림을 보기 전에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영향을 받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 레오나드의 그림은 충격적이었을 테니까."
- "존경하는 그림을 무의식 중에 따라 하는 일은 아직 배워가는 예술가들에게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일이다. 너도 아직 한참 멀었다는 이야기지."
"하지만 상을 받았어요. 남의 것을 따라 한 그림으로 상을 받았다고요. 이건 말도 안 돼요. 나는 상을 반납해야 해요!"
"그건 네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알고나 있는 거냐? 그렇게 하면 아카데미에서도 쫓겨난다."
"그래야 마땅해요! 정말 부끄러운 짓을 했어요. 쫓겨나도 할 말 없어요. 다시는 이러지 않을 거예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예요."
시세로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고소해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는 매우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 예술가라면 그 정도 자존심은 있어야지. 처음으로 네놈이 내 마음에 드는 짓을 한다."
- 다음 날 나는 레이번을 찾아가 모든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했지만 그는 수상은 취소하더라도 아카데미에는 그대로 남아있어도 좋다고 했다. 의아해하는 내게 그는 간단히 설명했다.
"세상도 그림도 돌고 도는 것일세. 우리 모두 옛 대가들의 작품과 기법을 모방하며 그림을 배워왔지.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고 자기 혼자 모든 걸 이룩했다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건방진 일이야. 자네에게 완벽을 바라고 아카데미에 들인 게 아니네. 앞으로가 기대되기 때문이었어. 이 일을 계기로 반성하고 좀 더 자기만의 것을 계발하도록 하게."
- 덕분에 아카데미에는 남을 수 있었지만 레오나드에게 사과해야 하는 일이 남았다. 어쩌면 이번 일로 나를 경멸할지도 모르지만 레오나드라면 그러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들어가도 되겠니?"
온화하지만 어딘가 우울함이 묻어나는 목소리. 놀랍게도 그는 내가 찾아가기 전에 먼저 아카데미로 찾아왔다.
- 전보다 더 야위었고 어딘지 지친 기색이었다. 공방에서의 생활이 평탄치 않은 모양이었다. 엉망으로 흩어진 물감들과 캔버스를 치우고 그를 자리에 앉혔다. 선 채로 바라보니 훨씬 더 왜소해 보였다.
"생각보다 쾌적한 환경은 아니구나."
그가 방 안을 한번 둘러보더니 농담처럼 말했다. 나는 고개만 주억거렸다.
"반갑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그때 너만 남겨두고 그렇게 가버렸으니."
자기가 그랬다는 걸 기억하긴 하는 모양이다. 알면서 한 번 찾아오지 않았다니 그게 더 괘씸하지만.
- "용서해 주지 않을래? 나도 네가 내 그림을 따라 한 것을 용서할 테니."
직격으로 가슴에 무거운 것을 맞은 느낌이었다. 나는 어렵게 고개를 들었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떨구었다.
"미안해요. 직접 가서 말하려고 했는데."
"괜찮아."
- "고의로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알고 있어. 놀라지 마라. 시세로가 네 편을 들어주더구나. 결국엔 너도 나도 똑같이 나쁜 놈이라며 끝내기는 했지만."
"시세로다운 결론이군요."
"그렇지."
또 쓴웃음.
- "예전보다는 시세로가 많이 편해진 모양이지?"
"네?"
"전하고는 왠지 반응이 좀 다른 것 같아서."
"그런가요."
시세로도 그렇고 레오나드도 남다른 관찰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스스로 확신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쉽게 눈치채니 말이다.
- "그런데 화나지 않았어요?"
"화가 나? 왜?"
"따라 하는 거, 기분 나쁠 것 같아서요."
"전혀. 어떤 마음이 드는지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오히려 네가 기분이 더 나쁠걸."
"왜요? 어떤 마음이 드는데요?"
레오나드의 얼굴에 희미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했을 만큼 미세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그것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이 말했던 그의 오만한 과거를 증명할 법한, 그건 비웃음이었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는 것을 동정하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는 쓸쓸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기분 상했니?"
- "아니요."
내가 듣기에도 내 목소리는 너무 이상했다. 그가 믿을 리 만무했다. 본래 내 잘못이니 그런 취급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 나는 그에게 분명히 죄를 지었다. 분하다면 뉘우치고 다시는 하지 않으면 된다. 다시 그런 말을 들을 짓을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메스꺼울 만큼 속이 너무 이상했다.
얼굴이 빨개진 채로 입을 다물고 있는 내 꼴은 온몸으로 그에게 상처받았다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는 다행스럽게도 '그것 봐라, 네가 더 기분이 나쁠 거랬지'라는 등의 말은 하지 않았다. 잠자코 내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안 할 거예요. 다시는."
하나하나 힘주어 말했다. 그때보다 그 말을 더 가슴 깊이 새긴 적도, 레오나드의 과거를 완전히 이해한 적도 없다. 레오나드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가 찾아온 이유는 그게 아니야. 스승님의 그림이 완성되었어."
놀라움과는 별개로 그가 왜 그 이야기를 그토록 심각하게 말하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 사람이 없는 한밤중의 대로는 신비스러웠다. 세상에 나 혼자인 것처럼 은밀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어둠의 저편은 비록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안다 해도 여전히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미지의 세계였다.
하지만 분위기에 도취되려는 나를 곁에서 자꾸만 누군가가 몸을 치며 깨웠다.
"왜 자꾸 때리는 거예요."
- "전 이 성당의 높이를 알아요. 어지간한 불빛으로는 안 보일 거예요. 차라리 스승님이 작업할 때 쓰는 사다리차를 찾는 게 어때요? 거기 올라가면 적은 빛으로도 보일 텐데."
"거기 올라가서는 더 안 보일 거다. 이 천장을 다 채울 정도라면 정말 어마어마한 크기의 그림인데, 코앞에서 들여다보고 그게 어떤 건지 파악하기는 어려울 거야."
- "아카데미 생활은 어떠니?"
"아주 좋아요. 하지만 거기 거주하는 화가들은 서로에게 그다지 친절하지 않아요."
"어디든 사람이 모이면 마찬가지야. 마음이 맞는 사람은 소수지. 예민한 예술가들끼리는 더 그렇단다."
- "우리 머리 위에 있는 게 무엇이든 그건 스승님의 마지막 그림이지. 따라서 누가 공방을 물려받을 것인가를 놓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고 있어. 아무래도 나보단 시세로 쪽이 지지를 많이 얻고 있지. 하지만 내가 될 거라 믿고 접근해 오는 화가들도 있어."
"구역질 나네요."
내 강한 어조에 다소 놀랐던지 레오나드가 반문했다.
"구역질 난다고?"
"아무도 슬퍼하지는 않네요. 평생에 걸쳐 그림을 그려온 사람이 퇴장한다는 사실에는."
"슬퍼하는 것과는 또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네 말이 않은 것 같구나."
그가 다시 뒤척였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말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는 이미 고르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잠이 든 거라 생각한 나는 숨소리를 낮추었다.
- 어둠이 무척 짙다. 어둠에도 질감이 있을까? 온통 어둠만을 그린다면 그건 또 무엇이 될까. 그걸 그림이라고 할 수는 있을까? 분명한 것은 어둠도 움직인다는 사실이었다. 어둠은 내게서 점점 멀어졌다. 왜일까? 좀 더 눈을 크게 뜨고 확인하려 해도 반대로 눈은 점점 감겼다. 그대로 꿈의 영역으로 넘어갈 때까지 나는 계속 어둠을 잡으려고 애썼다.
- 나는 고개를 스르르 돌려 레오나드를 바라보았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자세로 말문이 막힌 듯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 닫은 레오나드도 곧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둘은 침묵으로 서로를 완전하게 이해했다.
그 그림은 파괴되어야 했다.
- "아, 이런 미친놈들! 뭐 하는 거냐고!"
"갑자기 당신을 사랑하게 되어서 납치하는 건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내 말에 레오나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동의했고 납치 중인 대상의 몸은 경직되었다. 결국 그는 온갖 욕설을 퍼부어대면서도 나와 레오나드에 의해 끌려갔다. 공방 구석 레오나드의 방으로 들어온 우리는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그를 놓아주었다. 시세로는 불쾌한 듯 옷을 털고는 험악한 표정으로 우리 둘을 쏘아보았다.
"어디 이 미친 짓을 납득시켜 보시지."
- 시세로의 얼굴이 굳었다. 레오나드를 말려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민했지만 레오나드는 그가 평소에는 절대 짓지 않는 표정, 비웃음까지 섞어가며 말했다.
"왜 못하겠어?"
다음으로 시세로가 보여준 행동은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격분하며 가버릴 줄 알았던 그가 오히려 품에서 종이와 목탄을 꺼내더니 성당의 모습을 빠르게 그려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단순한 전경화가 아니라 구조물을 분석하는 설계도 비슷한 것이란 걸 깨닫고 나는 솔직하게 놀랐다. 고개를 돌려 레오나드를 바라보니 그는 겨우 웃음을 참고 있었다. 눈짓과 표정뿐이었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시세로라는 녀석은 이렇게 다루면 되지.'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기분과 절레절레 내젓고 싶은 기분을 동시에 느꼈다. 얼굴까지 벌게진 채 성당을 몇 바퀴씩 돌며 종이와 사투하는 시세로의 모습은 흡사 일생일대의 역작이라도 그려내려는 사람 같았다.
- "이제 더는 못 해. 여기까지다. 내부는 너희들이 말해준 걸 토대로 얼추 짜 맞췄고, 프리우스가 고전 양식 그대로 네 개의 기둥이각 귀를 지지함으로써 무게를 분산시키는 방법을 썼을 거라 예상하고 결론을 산출했다. 저 정도 크기와 무게의 돔이라면 아치의 구조도 탄탄해야 하고 기둥의 크기와 위치도 한 점의 오차 없이 정확한 자리에 세워져야 해. 물론 프리우스가 얼간이가 아닐 경우에만 정확한 위치에 있겠지."
나와 레오나드가 동시에 그 얼간이 같은 표정을 지은 게 틀림없었다. 시세로는 우리 표정을 보고 짜증스러워했지만 드물게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네가 어떤 그림을 본다고 해봐. 소실점이 어딘지 쯤은 잡아낼 수 있을 거 아냐. 원근법을 통해 그림 속 인물과 사물의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도 짐작할 수 있을 거고, 좀 더 정확히 재어보면 축척을 통해서 실제거리를 거의 완벽하게 계산해 낼 수 있겠지. 물론 그 화가가 원근법과 소실점의 원리를 알고 제대로 구현해 냈을 경우에만."
- "관두자. 내부에 뭐가 더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기둥 중 한 개만 부수면 돔을 무너뜨릴 수 있을 거야."
그 대목만큼은 우리 둘 다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 "그 선택이 자살이라고 해도 말리지 말아야 한다는 거냐?"
"너는 그때 자살하기 위해 그런 짓을 했냐?"
레오나드가 대답하지 않고 얼굴만 굳히자 시세로는 비웃듯이 말했다.
"아니겠지. 너는 그저 자기가 얼마나 잘났는지 내보이고 싶어 안달하던 놈이니까. 하늘을 찌르던 그 자만심이 결국 누굴 해쳤는지 떠올려 봐라."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잘 기억하고 있어. 이제 와 상기시켜 줄 필요 없어."
시세로는 거칠게 발을 굴렀다.
"바로 이게 스승님의 마지막 그림이야! 너도 그걸 부인하지는 않겠지. 그분은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이걸 그렸어. 누구처럼 자기 그림을 그리지 않는 조악한 방법을 쓰는 대신 직접 복수하기 위해!"
자기 말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시세로가 스승님을 두둔하듯 말했을 때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더 이상의 말없이 서로를 길게 노려보았다. 나는 그들 사이에 오래되었으며 녹슬지 않는 증오 이외에 다른 게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는 걸 보자는 거냐. 비극을 대물림하자고? 복수를 한다면 그건 내가 해. 스승님은 아니야. 너도 아니고."
어둠 속에서 분명하게 흠칫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레오나드는 담담히 말하고 있었지만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비통함이 중첩되고 중첩되어 더 이상 스스로가 비통함인지도 모르는 그런 목소리 같았다.
"우리가 서로를 그렇게 부를 수 있는 날은 아주 오래전에 나로 인해 끝나버렸지. 하지만 나는 또다시 어리석은 회한과 고통에 사로잡혀 너를 이렇게 부르겠어. 친구여, 이번 한 번만 내가 바로 잡을 수 있게 도와줘."
고요하면서도 격정적인 침묵이 흘렀다. 숨조차 함부로 내쉴 수 없는 소리의 질식 상태에서 어둠을 헤매는 시선만이 오고 갔다. 마침내 그것을 깨뜨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그 뒤를 따르는 또 다른 발걸음 소리도. 나는 잠자코 그에 동참하는 세 번째 사람이 되었다.
- 하늘을 찌르는 높디높은 세기의 건축물은 그들이 파괴자인 줄도 모른 채 문을 열고 우리를 맞이했다.
어둠 속에서 그것이 어떤 표정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자신을 부수리라 짐작한다면(물론 그 존재가 실재한다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매우 격노할 터였다. 우리가 지금부터 하려는 짓을 서사적으로 표현한다면 굉장한 언어도단이 될 수 있었다. 우리는 신을 죽이려 하고 있다.
- 대성당에 그려진 그것. 결코 누구에게도 보여서는 안 되는 그것은 수년에 걸쳐 한 노화가가 말없이 분노하고 인내하며 그려낸 신이었다. 무엇으로도 정의할 수 없고 다만 무섭고 기괴한 그것을 그 외의 다른 존재로는 생각할 수 없었다. 게다가 끝없이 타오르는 그것은 사람들을 향해 억겁의 불꽃을 던지고 있었다. 산 채로 불에 타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예배석 바로 위에 소름 끼칠 만큼 실감 나게 그려져 있었다. 즉 신은 당신의 신도들을 향해 너희를 고통으로써 심판하겠노라 외치고 있는 것이다.
- 단지 심각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이단행위였다. 이 도시에서는 결코 신을 그릴 수 없으며 문학에서도 신을 의인화해서는 안 된다. 신은 그 자체로 신. 실재하지만 결코 현세에 재림해서는 안 되는 존재다.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에 비해 신은 변화하지 않는 궁극적 완성형의 개체다. 따라서 그리는 사람 혹은 표현하는 사람에 따라 신의 모습이 제각기 달라지는 것을 종교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신의 절대성은 그것을 증거할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예술은 특히 경계되어 왔다. 성인의 초상화나 신의 기적이 행사된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것은 허용되었지만 신 자체는 조금의 침범도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금단의 영역이자 순백의 영역이며 그런 만큼 매혹적이었다. 그래서 레오나드는 그것을 그렸고, 그래서 그의 부인이 대신 죽었다.
- "얼마 전까지 네 녀석이 내 주변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림이 공개되면 너 또한 나를 도왔다는 혐의를 벗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내쫓고 찾지 않았던 건데."
서운함과 원망이 감격으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러셨습니까? 전 그것도 모르고 얼마나 스승님을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반드시 성공해서 절 쫓아낸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드리려고 했지요."
"차라리 그렇게 하지 그랬느냐."
스승님이 힘없이 웃었다. 억지로 짜내어 웃는 것 같은 미소였다. 나는 새삼 짧은 시간 동안 스승님이 얼마나 늙었는지를 깨달았다. 눈도 잘 보이지 않는 분이 그 어마어마한 크기의 천장화를 홀로 그려냈다. 틀림없이 엄청난 자기 소모였을 것이다.
- "레오나드에 이어 저 건방진 녀석까지 쫓아냈던 게 바로 당신이 아끼는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까? 그럼 다른 제자들은요. 천장화가 공개되었을 때 공방에 남은 다른 화가들과 도제들에게는 해가 안 갈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혹은 알면서도 무시했던 겁니까."
"시세로."
레오나드가 경고하듯 불렀지만 물론 시세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요! 빌어먹을, 지금까지 필요 없는 고생을 해가며 공방을 지켜온 나에 대해서는 일말이라도 염려해 봤습니까? 했을 리 없지요. 당신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으니까. 작업을 맡길 때도 도제를 줄 때도 언제나 레오나드, 레오나드, 레오나드! 당신의 그 레오나드만 예뻐하셨지요. 심지어 딸을 줄 때에도!"
- "항상 내가 나쁜 놈이로군. 뭘 해도, 뭘 해도!"
사납게 시선을 돌리던 그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눈동자에 선 핏발 하나하나에서 분노가 뚝뚝 묻어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순간 다른 것이 섞여 있는 것을 본 듯했다. 분명치 않아서 자세히 보려는 순간 그가 들킨 것을 감추듯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방을 나갔다.
남아있던 우리가 서로에게 말을 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기에 방안은 한참 동안 침묵 상태였다. 하지만 곧 스승님이 생기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맙기도 하구나. 날 살리겠다고 저지른 너희들의 패륜이."
- "그것은 내 마지막 작품이었다. 모든 것을 다해 그린 역작이었다. 잃어버린 내 딸에게 바치는 추도화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목이 메고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울지 않기 위해 이를 꽉 물었다.
"복수를 위한 이 늙은이의 추악한 발악이었다. 한데 너희들이 그것을 망쳤다. 내가 가르친 내 손으로 길러낸 제자들이 스승의 그림을 파괴했다."
무언가 변명의 말 혹은 사죄의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입술이 덜덜 떨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스승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나의 시대는 끝났다. 다시는 붓을 들지 않겠다. 제자를 받지도 공방에 관여하지도 않겠다. 생에는 미련이 없지만 그렇다고 스스로의 목숨을 끊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죽은 듯이 살아가리라."
- "안 듣고 있었구나."
이데아는 서운한 대신 재미있어하는 얼굴로 사라사가 준 목걸이로 손을 뻗었다. 나는 하마터면 목걸이를 감출 뻔했지만 다행히 그런 짓을 저지르기 전에 그녀가 먼저 목걸이를 잡았다.
"고급스러운 물건이군. 어디서 났지?"
"아... 어머니께서 주신 겁니다."
- "기다려라. 곧 잠드실 거다."
"하지만..."
"이곳에 눕혀드리고 너와 나는 침실로 들어가면 된다."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은 어쩌면 별다른 의미가 아닐 수도 있었다. 전에도 그녀의 침실에서 함께 차를 마신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날따라 조금 다르게 들렸다. 내 기색을 알아챈 듯 그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알았을 텐데."
신에게 맹세코 그런 적은 없었다.
"몰랐습니다."
"이제 알겠구나."
- "도대체 왜..."
이데이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이해하지 않으려는 건가?
"예?"
"여성에게도 욕망이 있다는 게 네게는 새로운 이야기인가?"
왜인지 낯이 뜨거워 시선을 내렸다. 이데아는 똑같은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너도 돈을 주고 여자들을 품어본 적이 있겠지. 해본 적이 없다고는 말하지 마라, 파도 조르디."
"제가 그런 여자들과 같은 처지란 겁니까? 저는 몸을 팔지 않습니다."
"나도 돈을 주고 사려는 게 아니다."
"그럼 대신 애정을 주는 척해서 사려는 겁니까? 자작님에게 그랬던 것처럼요?"
-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올라갔다. 곧바로 고개를 숙여 사과했지만 그녀는 조금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나는 애정을 주는 척하지 않아. 마음에 둔 자들은 진심으로 아낀다. 그런 자들과는... 그래, 너 말고도 다른 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속에 뒤벨 자작을 포함시켜서는 안 돼. 안 되고말고."
나는 잠시 기다렸다가 최대한 정중하게 물었다.
"그건 무슨 뜻인지요?"
"나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 가슴 한구석이 이상했다. 그녀가 하는 말이 어떤 느낌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나도 사라사를 놀랄 만큼 사랑하는데. 그러나 그녀와 이야기하고 만나는 것을 소소하게 기뻐한 적은 없었다. 늘 그녀를 욕망했기에 만나고 나면 지독한 갈증과 비참함만이 남았다. 나는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기는 한 걸까?
- "그런 감정은 이전에도 느껴본 적 없고 이후로도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가 가까이한 남성들은 모두 그를 대신했을 뿐이다. 너도 마찬가지고."
그녀가 갈구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결정을 기다리겠다는 듯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침묵했다. 생각에 잠겨있는 듯 보이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 실제로 복잡한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그녀의 말은 명쾌하고 솔직했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잠드셨군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였던 왕세자비는 이내 고개를 내려 왕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녀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군."
더 이상은 말없이 서로 완벽하게 일치하는 행동을 했다. 죄책감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분명한 이유가 있듯 내게도 같은 이유가 있었다.
나 또한 사라사를 대신할 사람이 필요했다.
- "파도?"
화려한 흰 드레스에 보석이 잔뜩 박힌 머리장식과 깃털 달린 부채. 내가 기억하던 것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의 사라사였다.
그녀는 얼마 전 남편을 따라 왕성으로 거처를 옮긴 상태였다. 표면상의 이유는 블레이젝의 업무 때문이었지만 그를 가까이 두려는 왕세자비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였다. 왕성 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허영인 듯 이리저리 꾸민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아가씨."
고개를 숙이자 그녀의 곁에 있던 블레이젝이 말했다.
"오랜만에 만난 듯하니 이야기라도 나누십시오. 나는 전하를 뵈러 가겠습니다."
"네."
블레이젝은 무심한 태도로 곁을 지나치며 나를 힐끗 보았다. 마치 왕세자비와의 일을 다 알고 책망하는 듯하여 가슴이 뜨끔했다. 하지만 설마 그걸 알 리가.
- "왜 말하지 않았어?"
순간 그녀가 나와 이데아의 관계를 알고 있다고 착각했다.
"예?"
"그가 왕세자비를 사랑하고 있다는 거."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을 '그'라고 지칭하는 것은 좀 이상할 뿐더러 나는 왕세자비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차츰 그녀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는 건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폰, 그 사람이지!"
나는 간신히 블레이젝의 이름이 폰이었음을 기억해 냈다. 그러자마자 경악했다.
"뭐라고요?"
"몰랐단 말이야?"
- 이데아에게 좀 지나치게 충성하기는 해도 사랑할 거라고는, 그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해 보지 못했다.
"사실이야. 내 눈으로 확인했어."
"하지만, 물론 그가 이데아 님 곁에 항상 가까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사랑이라고는..."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바로 옆에서 봤는데, 눈앞에서 그 사람의 행동을, 그 표정을 봤는데!"
- 우리 사이에 누군가 달려든 것은 그때였다. 커다란 힘에 떠밀려 내가 뒤로 넘어지자 사라는 소리를 질렀다. 허리가 부서지는 고통과 함께 고개를 드니 사신처럼 나를 내려다보는 하얗고 푸른 두 개의 눈이 보였다. 사라사는 그 사람의 품에 반쯤 안겨있었다.
- "정신 차리십시오, 부인."
나직한 목소리가 말했지만 사라사는 더욱 몸부림쳤다. 결국 블레이젝은 사라사의 두 어깨를 강하게 잡으며 말했다.
"사라사."
그녀의 몸부림이 멈췄다.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 속에 처연한 두 눈으로 블레이젝을 바라보았다. 블레이젝은 한 번 더 말했다.
"사라사."
"사실... 이에요?"
블레이젝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녀의 질문이 부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방금 뛰어든 사람에게 사실이냐니. 하지만 블레이젝의 대답은 더 불합리했다.
"뒤벨 자작과 저 화가의 경우에는 그녀의 정부인 것이 맞소."
온몸의 털이 쭈뼛 선다는 건 이런 느낌일 것이다. 충격받은 듯 꼿꼿이 서있던 사라사는 갑자기 풀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블레이적은 그녀를 안아 들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 도망쳐야 할까? 하지만 블레이젝이 나를 처벌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어디에서든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네 죄를 알 텐데?"
"사실을 말한 것도 죄입니까?"
"맨 처음 말한 것은 사실이 아니었지."
나는 머리를 굴려 내가 가장 먼저 뭘 말했던가를 떠올렸다.
"당신이 이데아 님을 사랑한다는 것 말입니까? 사랑하지 않으신다고요?"
"그분은 유일하게 나를 부술 수 있다."
블레이젝은 그 이상 분명할 수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 "나는 어떠한 순간에도 신념을 지킨다. 또한 어떤 일이든 내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는 반드시 수행한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사람보다도 내 칼을 더 믿는다."
그는 딱 자기가 말하고 있는 사람 그대로였다. 결혼도 필요해서 했고 결혼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아도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이데아 님은 그 모든 걸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
그가 덧붙인 말에 적잖이 놀랐다. 블레이젝은 그런 내 기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분 앞에서 내 신념은 무너질 수 있고 그분이 원한다면 어떤 부당하고 비도덕적인 일도 할 수 있다. 그분의 명이라면 내 책임과 의무 모두 저버린 채 굴복할 수 있으며 수백의 적을 앞에 두고도 칼을 버릴 수 있다. 오직 그분만이 그런 식으로 나를 부술 수 있다."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극히 그답다는 생각만 들었다.
- "사랑만이 당신을 부순다는 거군요."
"네가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것은 네 정의이지 내 정의가 아니야."
"그래서 제가 사실과 다르게 말했다는 겁니까?"
"아니. 네가 사실과 다르게 말한 부분은 그다음이다. 나는 그분과 함께 침소에 들어간 적이 없다.”
솔직히 놀랐다. 겉으로 표현은 안 해도 이데아가 가장 아끼는 게 그일 거라 내심 생각했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인정하기 싫지만 눈앞의 남자는 적어도 겉모습으로만 따지자면 여태껏 만나본 어떤 사람보다도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내 정의에 따르면 지고지순하다 말해도 좋을 만큼 이데아를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 "너는 그런 식으로 사실을 왜곡하여 신실한 부부 사이의 신뢰를 깨뜨렸다. 어떻게 책임질 건가."
"신실했다는 말을 잘도 하시는군요. 아가씨는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당신 논리에 따르면 이데아 님이 유일하게 당신을 부술 수 있다는 걸요."
"그것은 감정의 문제이지. 아내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것도 당신 논리일 뿐이지요. 단지 처소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고 해서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남편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더군다나 함께 있을 때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요. 당신이라면 용납할 수 있습니까?"
그는 또다시 아까처럼 가만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내 질문이 뭐가 잘못되었나 되새기던 그때 어떤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앞에 있는 남자는 이데아를 지극히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조금 전 그녀의 침실에서 나왔다. 남자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앉아있다. 이 단순한 사실을 이제야 깨닫다니.
"용납하지 않아도 할 수 없다. 어쨌든 나는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고 그녀에게 남편으로서 충실할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을 그녀 뜻대로 움직이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겠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새로이 깨달은 사실에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절대로 이곳에서 무사히 나가지는 못할 것이다. 뭐라고 했더라. 혀를... 제기랄. 내 눈, 내 목을!
- "이제 가라."
고개를 퍼뜩 들었다.
"예?"
"그분께서는 지금 너를 아끼지. 그리고 필요로 하신다. 그러니 그분에게 충실해라."
명령하듯 말하는 그의 태도에 울컥했지만 그가 몰인정하긴 해도 공평한 성격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남이 자기 마음에 침범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이상 그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행동으로 책임을 다하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그가 사라사에게 그러하듯이.
"아가씨에게는..."
"그녀에게서 말이 새어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너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겠지.
그가 눈짓으로 경고했다. 서로 다른 색의 눈이 주는 희한한 공포. 나는 공포 때문이 아니더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당신 말대로 아가씨에게 충실하십시오."
경쟁심에 결국 불필요한 말 한마디를 덧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블레이젝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테이블에 쌓여있던 책 중 하나를 꺼내 조용히 읽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나눈 대화들에 대해 더 이상 아무런 관심도 유감도 없다는 듯이.
- 의뢰받은 그림이 없었기에 마음대로 그리면 되지만 막상 빈 캔버스를 보고 있자니 뭘 그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상상력이 완전히 고갈된 것 같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그리고 싶은 것도 없었다. 아니, 없진 않았다. 언젠가 꼭 가넬 신부의 작은 성당에 있는 천장화와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하지만 시도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직 그런 것은 그릴 수 없다.
- 탄식 같은 한숨이 흘렀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그저 산과 들, 수많은 꽃과 그윽한 향기만 그려도 행복했다. 보고 싶을 때마다 사라사의 얼굴을 그리는 것이, 스승님으로부터 핀잔을 듣고 레오나드의 작업을 구경하고 가끔은 마로와 투덕거리던 것까지도 즐거웠다.
나는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뭘 위해서 그림을 그렸더라. 갑작스러운 허무와 정체였다. 어딘가로 열심히 걷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잊어버렸을 때 느낄 법한 기분이었다.
- 결국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았던 부정하고픈 현실과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왔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던 침체기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아무런 징조도 예고도 없이 이토록 쉽게 찾아올 수 있을까?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아카데미에는 이미 그런 화가들이 있었다. 보고 있기 딱할 정도로 우울한 얼굴을 하고 다니며 하루 한두 번 식사 때를 제외하고는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열심히 그리는 다른 동료들을 보면 질시하거나 더 큰 실의에 빠져 오래도록 헤어나지 못했다. 몇몇은 이를 악물고 그리기도 하지만 그중 끝까지 완성해 내는 사람은 드물었다. 대체로 화폭을 찢어버리고 다시 우울함에 빠지기 일쑤였다. 마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얼마 전까지 나는 그런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그리면 될 걸 왜 안 그려진다고 하는 거지? 자기가 그리기 싫은 건 아니고? 게을러서 그런 건 아니고?
하지만 겪어보니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조금 있으면 나아지겠지 했던 게 1년 반 이상이나 지속될 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
- "왕세자비 품에서 뒹굴고 노니까 좋냐? 그렇게 즐길 거 다 즐기고 시간 남을 때나 그림을 그리니 그렇게 되지."
분노와 별개로 너무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 그는 내 표정을 보더니 씩 웃었다.
"뭘 놀라고 그래. 모를 줄 알았어? 이미 소문 쫙 퍼졌는데."
"그게 무슨, 언제부터 그런 소문이..."
"왕세자비가 레이번한테 네 녀석이 제단화를 그리게 하라고 종용했을 때부터."
레이번이라니, 그럼 그가 떠들어댔단 말인가?
"할아범을 의심하나 본데 관둬라. 그 사람은 한마디도 안 했어. 하지만 이 바닥에서 감출 수 있는 소문은 별로 없지. 잘 나가는 누구누구가 사실은 자기 도제의 그림을 훔쳐 그리고 있다더라, 누구누구가 인맥을 동원해서 모 백작의 초상화 건을 물었다더라, 누구랑 누구는 그렇고 그런 사이더라. 이런 건 절대 숨겨지지 않아."
- "없다... 없다고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아니,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그런 끝나지 않을 괴로움을 가지고 있지."
그의 드문 진중한 목소리에 침을 삼켰다.
"끝나지 않는 괴로움이라고요?"
"그 길을 계속 가는 한."
- "파도. 왜 괴로움을 끝내야 하지?”
안도하는 것도 잠시, 나는 처음으로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차마 대답하지 못하자 그는 놀랍게도 달래듯이 이야기했다.
"대답해 봐."
"그건 괴롭기 때문이죠."
"그 괴로움 자체가 우리가 하는 일의 의미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어?"
- "세상에는 수많은 고행자들이 있어. 그들은 멀고 먼 성지에 이르기까지 몇 년에 걸쳐 삼보일배하며 걷지. 말하지 않아도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짐작할 수 있겠지? 그렇다면 그들의 그런 행동은 쓸데없는 짓인가?"
나는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고통스럽게 울리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아니요."
"우리가 하는 일도 그처럼 성지에 이르려는 것이라면?"
"하지만 성지에 다다르는 것이 바로 괴로움을 끝내는 일 아닌가요?"
그는 탄식했다.
"그렇지 않아. 그들이 먼 순례길에 오르는 이유가 단지 괴로움을 끝내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아니, 그럴 거면 처음부터 시작할 필요도 없지. 순례길에 오르지 않으면 괴로움도 없는 거니까."
-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뭔가 깜빡이는 것 같았다. 그가 말하려는 게 뭔지 알 듯 말 듯했다.
"화폭에 붓을 찍는 매 순간이 우리에게 삼보일배의 순간이라면?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게 바로 그 성지에 이르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마침내 그곳에 도달했다 하여 괴로움이 끝나는 걸까? 아니야. 우리는 다시 똑같은 길에 올라야 해. 또 하나의 작품, 또 하나의 순레길. 그렇게 우리는 매 순간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걷고 또 걷는 거야. 네가 괴로움이라고 부르는 길을."
어째서인지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슬프면서도 벅찬,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그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걸까. 어떻게 그와 이런 대화가 가능한 걸까.
시세로는 그가 말하는 고행길에 서있는 사람처럼, 고통스럽지만 어쩐지 초연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곳에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 괴로움은 끝나지 않아. 이 길을 선택하면서부터 준비된 수순이지. 그렇지만 그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결코 괴롭기만 한 일은 아니야. 오히려 축복에 가깝지. 그곳으로 가기 위해 매번 같은 길을 걸을 의지가 있는 것. 기꺼이 괴로움의 길을 걷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예술가로서 스스로를 증명하는 일이니까."
- 눈을 꽉 감았다. 온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진동하는 이것, 범람하는 이것을 도대체 무어라 불러야 한단 말인가. 잊고 싶지도 그대로 흘려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못 박아두고 싶었다. 나는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입을 열어 물었다.
"이 천장화는 언제 그린 거지요?"
- 영원히 끝나지 않을 밤이 흘러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새벽이 온다.
- 고행길. 내가 제단화의 주제로 그걸 선택한 것도 놀라울 일이 아니다. 나는 전통적인 기법대로 화면을 세 폭으로 나누어 구성했다. 중앙에는 멀리 찬란하게 빛나는 성지가 있고 왼쪽에는 삼보일배하며 걷는 고행자들의 모습이, 오른쪽에는 성지에 다다른 자들의 모습이 그려질 것이다.
나는 일부러 두 종류의 사람들을 크게 다르지 않게 표현할 생각이었다. 고행길에 있다 하여 고통스럽기만 하지도 않고 마침내 성지에 다다랐다 하여 뛸 듯이 기뻐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해서 영원성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 자체가 당신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며 신에게 닿는 길이라는 것을.
머릿속에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분명하게 완성된 그림이 있었다. 남은 건 손으로 옮겨내는 일뿐이었다. 주제가 결정되고 거기에 완전히 빠지자 놀랄 정도로 집중력이 발휘되었다.
- 식사를 거르기는 예사고 붓을 손에서 놓은 후에도 계속 그림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게, 낮이 계속되지 않는다는 게 그토록 답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싶다. 그리고 싶다. 그리고 싶다. 죽을 때까지 그림만 그리고 싶었다.
- "몰두해서 열심히 하는 모습은 보기 나쁘지 않아. 하지만 기억하도록. 원하는 것이 저 멀리에 있다고 무작정 달려가다 보면 언제부터인가 주위에 아무도 남지 않는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소중히 하고 아낄 줄 알아야 해. 감사해야 할 사람에게 분명히 감사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잊지 않고 사랑을 말해야 한다. 그리고 적은 만들지 않는 게 좋아. 언젠가 예기치 못하게 네 발목을 잡을 수도 있으니까."
말을 하면서 그녀의 얼굴에서 점차 웃음기가 사라지더니 마지막에는 무서울 정도로 굳었다. 그녀가 단지 친절한 조언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이데아님."
"돌아가라. 다음에는 시간을 두고 부르지. 그때는 거절해선 안될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말했으니 결코 거절할 수 없을 터였다.
- 한데 도무지 그 황량함이라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적색 흙과 건조한 바람 그리고 오래도록 침식된 바위 등인데 물감만으로는 제대로 느낌을 살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나는 오래도록 착오만 거듭해 온 실험, 즉 재료 섞기를 제단화에 시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 하지만 그렇게 말했을 때 시세로는 전보다 더욱 경멸감을 드러냈다.
"화가가 물감 이외의 다른 것을 쓰는 건 편법이다. 물감 다루는 솜씨가 아주 형편없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거나 다름없지. 흙의 느낌을 표현하고 싶다고 흙을 바를 거면 처음부터 그림이란 게 왜 필요하냐. 흙을 갖다 놓고 바위를 갖다 놓고 성지까지 아예 가져다 놓지 왜."
"하지만 레이번은 좋은 시도라고 했어요."
"평생 물감 냄새만 맡고 살아온 고루한 늙은이에게 뭔들 새롭지 않겠냐. 그렇지만 난 내 그림 밑에 흙이나 풀 따위를 섞은 조잡한 그림이 그려지는 거 참을 수 없다."
"젠장, 그럼 도제일 때 물감 다루는 법 좀 성실하게 가르쳐주시지 그랬습니까?"
"네놈이 내 도제였냐? 스승님 도제였지. 하다 못해 그렇게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닐 때 레오나드한테라도 배웠어야지. 물감 다루는 솜씨는 그 녀석이..."
거기서 시세로의 말이 끊어졌다. 의아해하던 나는 그의 얼굴이 혐오감으로 굳어지는 걸 보고 깨달았다. 방금 레오나드를 칭찬할 뻔했고 그런 자신에게 경악했다는 걸.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 나는 어깨만 으쓱였고 그는 등을 돌려 자기 자리로 가버렸다.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을 때마다 시세로는 그런 식으로 선을 긋고 물러나는 일을 반복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나 역시 그와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으니까.
- 압도하고 있다. 압도하고 있다.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다. 직감적으로 느낀다. 이것은 장렬한 예술사의 한 페이지이며 언제까지고 사람들의 기억에 아로새겨질 걸작이라는 것을.
완벽하게 채색된 부분은 아직 일부에 불과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덮여있던 천이 걷히듯 저 그림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낼 때 아마도 나는 마주하리라. 하염없이 무릎 꿇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진실로 경애하는 어떤 것과. 만일 존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신과 가장 가까운 종류의 것이 될 터였다.
- 나는 시세로를 존경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렇게 되면 그 아래 내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그것을 그리고 있는 나를 미워하게 될 것 같았다. 일부러 보지 않고 마음에 두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완성에 가까워질수록 차이가 난다.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
- 붓을 내려놓고 한숨도 내려놓고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괜찮아. 나는 나만의 그림을 그리면 되니까. 내가 그리고 싶은 건 단지 훌륭한 그림이 아니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유일한...
그러나 머릿속에 찬란했던 성지의 모습은 점차 희미해진다. 빛이 바랜다. 걸어가면 갈수록 더욱 멀어진다. 고통스럽다. 그것이 바로 이 일을 하는 의미라는데도 괴로움은 어쩔 수 없이 괴롭다. 괴롭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는다.
끝내고 싶다.
그건 괴로움이 끝나는 게 아니야. 내가 끝나는 거지.
그렇다면 끝나고 싶다.
그러나 미련이,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타협 섞인 미련이 나를 붙잡는다. 소용없는 일에 안간힘을 쓰게 하고 붓이 나아가게 만든다. 물감을 섞고 칠하고 씻어내고 물감을 섞고 칠하고 씻어내고... 시간만이 미칠 듯이 흐른다.
- "그냥, 예전보다 좀 친근해 보여서. 같은 공간에서 작업하면서로 예민해서 싸우기 십상인데 의외로구나. 워낙 서로 미워하기 때문에 반대의 결과가 나온 건가."
그의 말에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난 이제 그를 미워하지 않아요."
레오나드는 피식 웃었다.
"결국 다들 그렇게 되지."
"결국이라니요. 놀라지 않아요?"
"화가로서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니. 저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데."
그가 천장 쪽을 눈짓했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겨우 다시 그림에 집중하고 있는 지금 그의 그림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 기색을 눈치챘는지 레오나드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 쓸데없이 스스로를 소모하는 짓이야."
- "시세로와 너 자신을 비교하는 거 아냐? 그럴 필요 없어."
하여튼 두 사람 앞에서 내가 뭘 숨길 수나 있는지 궁금하다.
"누가 하고 싶어서 한대요? 바로 머리 위에 저런 게 있는데 어쩌라고요."
"오히려 그걸 기쁘게 여기도록 해. 네가 시세로의 그림 때문에 괴로움에 빠진다는 건 그의 뛰어남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지. 몇몇 젊은 화가들처럼 자기가 가장 잘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야. 너에겐 식견이 있고 겸손함이 있어."
"차라리 내가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면서 그렸으면 좋겠어요. 식견 따위 겸손함 따위 몰랐으면 좋았을걸."
"그렇지 않아. 내 말을 믿어, 파도. 그런 사람은 결코 오래가지 못해. 자기가 가장 잘났다고 생각하는 이상 아무것도 배우려 들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진짜 좋은 그림이 뭔지 알고 있는 너는 그렇지 않아. 왜 그런 좋은 점을 괴로워하는 데 낭비하지? 그보다는 그에게서 뭔가 하나라도 배우려고 노력해 봐. 넌 정말 운이 좋은 거야. 머리 위에서 그가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으니까."
그런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건가?
- 무심코 고개를 돌려 시세로가 작업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 거대한 크기의 화폭을 세밀화를 그릴 때나 쓸 법한 아주 자그마한 붓으로 메우고 있었다. 맨 처음 작업을 시작할 때는 깜짝 놀랄 만큼 뭉텅뭉텅 물감을 칠해서 제대로 할 생각이 있는 건지 의심스러웠는데 말이다. 그 후로 사용하는 붓이 조금씩 작아지더니 커다란 윤곽들도 점차 정교하게 변해갔다. 의미 없이 마구잡이로 그어놓은 선인 줄 알았던 것이 옷의 주름이나 그림자가 되고, 구석에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사람들은 몇 날 며칠 매달려 아주 세밀하게 그려내더니 아무렇지 않게 슥 뭉개버리기도 했다.
그의 그런 작업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세세히 그리는 나와는 너무도 달라서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배우라고?
- "왜 스승님은 제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은 거죠? 당신과 시세로에게는 저런 걸 다 가르쳤으면서."
"우리가 스승님으로부터 많은 걸 배운 건 사실이지만 모든 것을 다 배운 건 아니야. 특히 시세로는 혼자 그려온 시간이 더 길었지."
슬쩍 남의 탓으로 돌렸던 나는 낯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시세로가 가넬 신부 성당의 천장화를 그린 것도 가난했던 시절이라 했으니 공방에 들어가기 전이었을 터. 그는 이미 혼자서 그 모든 걸 익혔던 것이다. 배우지 못해서라는 변명 따위나 내뱉고 있는 나는 어찌나 한심한지.
- "네가 보통 도제들과는 좀 다른 과정을 거친 건 사실이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둔 스승님의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옳았다고요?"
"넌 특징이 분명하니까. 정석대로 배웠으면 오히려 그게 사라졌을지도 몰라."
"그런가요? 특징이 분명하다고요?"
"그래. 색감이라고 해야 할지, 그게 참 따뜻하거든. 명암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입체감도 뚜렷해. 어릴 때 흙에다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생겨난 특징 같구나. 그리고 무엇보다 작은 것 하나하나도 섬세하게 그리는 표현력이..."
그가 내 얼굴을 힐끗 보더니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세상 가장 달콤한 음악인 양 그의 말을 듣던 나는 몽롱하게 물었다.
- "그럴까요?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언젠가 정말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있을까요?"
"물론, 네가 그것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그의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요즘 죄다 관둬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 "하지만 날 믿을 수가 없어요. 날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해요. 아무리 해도 안 될 일에 비참하게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단지 이 길을 너무 멀리 걸어왔기에 멈추거나 되돌아가는 게 두려워 떠밀려가고 있을 뿐은 아닌가, 그런 생각들을 해요. 목표로 하는 게 너무 멀어서 언젠가 이룰 수 있을 거란 희망도 현실감도 들지 않는다고요."
레오나드는 조용히 웃으며 내 머리를 문질렀다.
"그런 걸 심각하게 고민한다는 건 좋은 일이지. 하지만 너무 멀리 보고 걷다가는 눈앞의 작은 틈도 놓치기 십상이야.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한 발 한 발 똑바로 내려다보며 걷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멀다고 투덜거리지 말고 일단 나아가는 거지. 그러다 보면 언젠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다다라 있을 테니까."
- "듣기로 네가 왕세자비와 친하다고 하던데, 이게 뭔지 아니?"
시세로가 보여준 것과 똑같은 초대장이었다. 시세로에게 설명해 주었던 대로 레오나드에게도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다 듣고 난 그는 조금 난감해하는 기색이었다.
- "반짝거림이라고요?"
"향기와도 같은 반짝거림. 자네도 어느새 이 도시에 물들어버린 모양이더군. 꽃과 향기처럼 진실로 살아있는 것들을 그리지 않아. 자네도 종교를 택했어. 또 종교지. 그 점이 좀 맥 빠졌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좀 당황스러웠던 것도 같다.
"하지만 제단화니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제단화에 종교가 아닌 다른 주제를 어떻게 그리나요.”
"다른 주제를 말한 것은 아니야. 뭐랄까, 내가 기대한 건 자네 다운 특별함이었네. 다른 수많은 종교화들과 차별되는 어떤 점 말이야. 다른 수많은 풍경화와 차별되었던 향기와도 같이."
- 힘겹게 변명하려는 내 어깨를 키리오니가 잡았다.
"그냥 내가 원하던 것일 뿐일세. 자네 그림은 지금도 훌륭하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봐야 마음 쓰이지 않을 리가. 차라리 처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속상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써야 했다. 키리오니의 말은 내가 쭉 목표로 하던 것에서 완전히 엇나갔음을 선언하는 바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누구와도 같지 않고 그 누구도 그릴 수 없는 그림을 제가, 그릴 겁니다.'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홱 돌렸다.
"이 녀석은 확실히 그때의 그걸 잃어버렸죠. 하지만 대신에 얻은 것도 있습니다. 하다 못해 마음가짐만이라도."
그의 얼굴엔 드물게 비웃음이 없었고 목소리마저 진지했다. 게다가 지금 나를 두둔해 주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시세로가 말이다.
- "아하."
키리오니는 그것만으로 다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자네에게 진심을 담은 경의를 표하네. 그것은 결코 말 한마디처럼, 그림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자네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군. 극복한 모습일지, 아니면..."
- "제가 존경하고 또 좋아하지 않는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하더군요. 괴로움을 끝내고 싶다는 내 말에 왜 굳이 괴로움을 끝내야만 하느냐고요. 괴로움 자체가 사는 의미일 수 있다고. 어쩌면 아가씨의 질문에도 같은 대답이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괴로움이 삶의 의미라고?"
"영원히 행복한 상태로 사는 사람은 본 적 없습니다. 아마도 그건 사람에겐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그렇다면 아가씨도 아마 저와 같은 길을 가야 할 겁니다."
"그게 무슨 길인데?"
"괴로움을 위해 기꺼이 괴로움을 선택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길입니다."
- 그녀는 힘없이 웃었다.
"스스로를 학대하는 길?"
"아니요, 그건... 아니, 역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신에 그 길을 가는 동안 수많은 부산물들이 생겨나지요. 아름다운,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어쩌면 영원할... 저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요."
- 놀라우리만치 분노가 두려움을 모두 날려 보냈다. 그의 앞에서만큼은 떨고 싶지 않았다. 죽음에 미련이 있다면 단지 사라사를 한번 더 품에 안아보지 못하는 것, 제단화를 완성시키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 때문이었다. 적어도 이로써 아버지의 곁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사랑하고 또 질투했던 아버지. 그곳에 가면 물어볼 수 있겠지. 이제 아버지는 괴로움을 끝내셨느냐고. 그리고 웃으며 이야기해 줄 수 있겠지. 처음부터 그것을 끝낼 필요는 없었노라고.
"뒤벨 자작은."
뜻밖의 이름에 고개를 들었다. 블레이젝은 팔짱을 낀 채 한가롭다고도 할 수 있는 태도로 말했다.
"진실로 귀족다운 사내였지. 그를 죽이는 건 내키지 않았다. 왕세자비께서도 그를 정말 아끼셨으니까. 하지만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수행해야만 했지."
- "그의 하나뿐인 여동생과 결혼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것이 내 업보라고 생각했다. 내 아이가 그의 이름을 가지게 된 지금 어느 때보다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지."
지금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는 경멸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머리를 굴려라, 파도 조르디. 자살하여 죽은 것으로 된 뒤벨 자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 "당신이, 그럼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겁니까?"
"그랬지. 그 외에도 많은 이들이 죽었거나 죽은 것으로 되었다. 언젠가 너는 궁금해했었지. 네 정의에 따르면 왜 그토록 사랑하면서도 그녀의 침실로 들어가지 않는지. 그건 그곳이 무덤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침실, 이데아의 침실이 무덤이라고?
"처음부터 나는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모시는 분은 왕자라고."
- 오래전의 이야기인데 왜 지금 이 자리에서 꺼내는 걸까. 그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심사숙고에 들어갔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에 그런 태도를 보이자 애가 탔다. 차라리 도망을 칠까? 무슨 말을 하려고 저리 고민하는 거지?
"그런데 생긴 것 같다."
마침내 결론을 내린 듯 그가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부서지지 않도록 온전하게 잡아줄 수 있는 존재가 말이다."
그의 말과는 반대로 나는 와르르 무너졌다.
- "뒤벨."
뜻밖의 이름이었다. 잠시 온화한 자작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가 말한 것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그 아기가 나를 지탱한다. 그럴 수 있으리라곤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나도 그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는 생경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사라사가 말했을 법한, 세상에서 처음 보는 이상한 물건을 들고 있는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나와 똑같은 눈을 가진 그 아기가 있는 한 나는 명령과 도덕과 의무를 떠나 어떤 의미 없는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너는 그런 기분을 모르겠지."
물론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그에게서 어떤 비슷한 기분을 느낄 것도 같았다. 갑자기 어느 때보다도 자비 없는 기사가 가깝게 느껴졌다. 가슴속에 진 응어리와 두려움이 마침내 풀어졌다. 나는 안도했다.
-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급박한 바람이 머리 쪽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닫지 못했지만 본능적인 섬뜩함을 느꼈다. 옷 속에서 뭔가 움직이더니 땅으로 툭 떨어졌다. 사라사가 준 목걸이였다.
"그리고 이건 내가 회수하지."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지만 블레이젝이 더 빨랐다. 단지 칼로 툭 쳐올려 손으로 잡았다. 끊어진 줄이 그의 손에서 힘없이 흔들렸다. 그걸 보고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도로 빼앗을 자신이 없었다.
- 나는 긴 시간 동안 고통 속에서 잠을 잤다. 꿈에서든 깨어나서든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 깨어있는 상태라고 생각될 때 보이는 얼굴들이 있었지만 기억에는 남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레오나드였던 것도 같다. 레오나드라고? 그제야 나는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곁에는 또 다른 사람도 있었다. 누구였더라. 내가 아는 사람인 것 같기는 한데 확실치 않았다. 다만 그를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증오가. 애가 타는 안타까움이 솟구쳤다.
틀림없이 당신은 나를 절망 속으로 밀어 넣었다가 다시 구원해 준, 그런 악독한 사람일 테지.
그러나 어쨌든 고통 속에서는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 어느 날에는 너무도 의식이 또렷했다. 눈을 뜨고 내 주위의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들을 인지했다. 그러자마자 꿈속에서 쭉 하고 싶었던 말을 입으로 내뱉었다.
"살고 싶지 않아요. 죽여줘요. 그냥 죽여주세요."
따가운 것이 뺨을 때리고 사라진다. 옆에서 말리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차게 타오르는 눈동자는 나를 경멸했다.
"너 살리려고 수일간 밤낮을 지킨 사람들한테 할 말이 아냐."
억울하고 아파서 눈물이 났다. 그런 건 내가 원한 게 아니었다.
"아파요. 너무 아프다고요. 아파서 죽을 것 같아. 당신이 이 고통을 느껴봐요. 살고 싶은가 느껴보라고요. 팔이 타는 것 같아요. 아니 이미 타고 있어. 온몸이 다 타고 있어!"
- "살려줘서 참 고맙군요, 여러분. 그런데 미안하지만 이제 그만 죽어야겠어요."
진심으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 어깨의 상처가 낫는 동안 레오나드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다행히 처벌은 이걸로 마무리됐어."
다행이라고요? 남의 이야기라고 쉽게 말하는군요, 레오나드.
"시세로는 여전히 천장화를 그리고 있지. 네가 그리던 제단화는 어떻게 할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 같아."
그래서요? 이제 와서 천장화니 제단화니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죠?
"공방에 있는 한 녀석이 그러는데 자기가 아는 사람도 태어날 때부터 두 팔이 없었대. 하지만 마부니 심부름꾼이니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지금은 자기 가게를 가지고 있다나 봐."
그러니 지금부터 열심히 두 팔 없이 사는 법을 익혀 언젠가 내 가게를 갖겠다는 꿈이나 가지고 살라는 건가요?
"제발 그 입 좀 닥쳐요, 레오나드."
할 수 있는 일을 열거하던 그는 입을 다물었다. 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미안한 감정은 분노가 남김없이 덮어버렸다.
"그렇게 쉽다는 듯 이야기하지 말아요. 두 팔 없이 살아가야 하는 게 나지 당신이 아니니까요. 억지로 희망을 주려고도 하지 마요."
- 그림이 그리고 싶다. 훌륭한 작품이 아니어도, 유일한 작품이 아니어도 좋았다. 어린아이 장난 같은 그림이라도 상관없었다. 팔 하나. 아니 손가락 단 두 개만이라도 돌려받을 수 있다면 무엇과도 맞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림이 그리고 싶다.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간절히,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것밖에 못한다고 해도 영원히 그림만 그리고 싶다. 내 제단화, 나의 제단화를 완성시켜야 한다. 붓의 감촉, 물감의 냄새, 화폭 위로 번져가던 색채의 희열... 그림이 그리고 싶다. 미치도록 그리고 싶었다.
- 한동안 우리는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레오나드의 경우에는 담담하게, 나는 죽일 듯이.
왜 이토록 미칠 듯한 분노와 온갖 부당함을 그에게만 쏟아내고 싶은 건지, 그로 인해 그가 상처받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도 당했으니 너도 당해봐라 그건가? 가장 다정하게 대해주는 사람에게 제일 못되게 굴고 싶은 건 대체 무슨 심보란 말인가.
"알았다. 그게 네가 바라는 거라면."
레오나드는 딱딱하게 내뱉고 방을 나갔다. 그렇게 되길 바랐음에도 허탈감이 밀려왔다. 그런 듯 보이지만, 혹은 그러려고 노력하지만 레오나드는 절대로 너그럽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어쩌면 다시 나를 안 보려 할지도 모른다.
-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야.
오기로 그 사실을 무시하고 책상 위에 놓인 물건들을 치우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한동안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가 의아해했다.
아, 그래. 이제 더 이상 손이 없지.
왜 계속 잊어버리는지, 그럴 때마다 엄습하는 이 무시무시한 상실감은 언제쯤 사라질지 아득하기만 하다. 모든 걸 포기한 채 그대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나 억지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 팔이 없으면 입으로 하면 된다. 뭐든지 이대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나가면 돼.
책상 위의 물건들을 입으로 하나씩 물고 남아있는 어깨로 떠받쳐가며 열심히 옮겼다. 사실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 레오나드에게 미안했다.
그가 없을 때는 그를 필요로 하지만 곁에 있으면 짜증과 미움이 치솟는다. 이유를 알 수가 없다. 팔뿐만 아니라 내 머리도 크게 잘못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그는 내가 이렇게 불행해진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
혹 아무 상관도 없기 때문일까.
- 그럴 생각이었다면 정말 제대로 성공했다고 말해줄 수 있었다. 이보다 더 끔찍한 기분을 느낄 수는 없을 테니까. 시세로였다면 차라리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속은 쓰릴지언정 체념했을 것이다.
그런데 레오나드라고 한다. 자기 그림은 그리지 않는다고 고고한 척 굴던 사람이 이제 와 그걸 그리겠다고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자리를 빼앗아서, 내 그림을 덮어가면서 그렇다. 그는 이게 내 자리를 빼앗는 일이기 때문에 받아들인 거다. 절망하는 내 꼴을 보기 위해, 보란 듯이 내 앞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날 비웃기 위해.
용서할수없어용서할수없어절대로용서할수없어당신이나한테 이러면안되지내게이럴수없지내태도가그렇게당신을견딜수없게 했나그럼하루아침에갑자기두팔을잃어버린사람이 무슨말인들하겠어항상그렇게사람좋은얼굴뒤에감추고있는어쩔수없는오만과경멸당신은늘그걸가지고있지난알고있어알고있었단말이야냐하면나도나도나도...
- 내가 그렇게 미웠는지, 꼭 나에게 이렇게 해야만 하는지 묻고 싶다. 내가 그에게 무슨 큰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까지 복수하는 건지 따지고 싶다. 억울하다, 원망스럽다, 끓어오른다. 분노와 증오와 온갖 부정적 감정들이.
온몸이 떨려와 내가 제정신인 게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나는 라잔 저택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심장이 평소와 다른 이상한 박자로 뛰고 숨 쉬기도 힘들었다. 나는 한참 동안 꺽꺽거리며 숨을 쉬려고 노력했다.
- 왜 나에게만.
스스로의 처지가 이렇게 된 것에 특별히 증오할 사람이 없을 땐 그저 불합리한 세상을 탓하게 된다. 그런다고 세상이 나에게 공정함이나 관대함을 보여주는 것도 아닌데, 피해 의식과 억울함만이 가득 담긴 저 한마디를 떠올리는 순간 나는 저항하지 못하는 바보가 된다. 세상의 장난질에 하필 내가 얻어걸린 것에 지독히도 운이 없었다고 원망하고 욕을 하고 주저앉아 운다. 그것뿐.
- "꼭 그렇지는 않아. 물론 예전 네 그림의 장점은 세밀함과 완벽성에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아주 독특한 개성을 보이고 있어."
"독특한 게 아니라 그냥 엉망이에요."
"그렇지 않다니까."
레오나드가 다가와 제단화를 어루만지듯 손을 움직였다.
"이 짧은 선들의 연결, 네게는 신체적인 한계 때문에 생겨난 특징이겠지만 덕분에 그림이 아주 흥미로워. 꼭 빗속에서 젖지 않는 그림을 보는 기분이야."
솔깃하긴 했지만 레오나드야 워낙 다른 사람의 장점만 보는지라 덮어놓고 믿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 객관적으로 말해줄 만한 사람이... 시세로라면 정말 한 치의 배려도 없이 직설적으로 말해줄 텐데. 그래서 오히려 물어보기가 무서웠다.
"어찌 됐든 내가 추구하는 건 이런 게 아니에요."
"하지만 언젠가 그렇게 말했다며? 누구와도 같지 않은 너만의 그림을 그리겠다고, 스승님한테 들었던 것 같은데."
분명히 그렇게 말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건 단지 다른 화가와 차별되는 특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그러니까...
"나 말고는 누구도 그릴 수 없는 그림을 말한 거예요."
- 그건 개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보적인 위대함. 그래, 마치 가넬 신부의 성당에 있는 그림과 같이 도저히 말로 표현하기 힘든 자신만의 분위기를 풍기던 레오나드의 그림과 같이.
"아."
레오나드는 알아들었다는 듯 내뱉고 내 머리를 투박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욕심도 많구만, 이 녀석."
"당신은 해냈잖아요. 시세로도 그렇고. 그러니 나도 할 거라고요."
"그래. 언젠가 꼭 그렇게 되려무나. 할 수 있을 거야, 분명히."
별말도 아닌데 괜히 가슴이 울컥한다. 나는 코를 킁 삼키고 다시 붓을 물었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고 어깨와 목이 말도 못 하게 아팠지만 고통을 느낄 때야말로 내가 살아있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시 힘겹게 선을 긋는다. 언젠가 완성에 다다를 때까지.
- 한 남자가 아기를 높이 들어 올렸다가 내려주었다. 아기가 까르르 하고 웃는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다시 그 행동을 반복했다. 그러자 아이가 또다시 웃었다. 가엾게도 남자는 완전히 당황해 버렸다. 무엇이 아이를 즐겁게 한 건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사라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제법 아버지답지?"
"그러게요. 아이와 놀아주면서 당황해하는 자비 없는 기사라니, 상상해 본 적도 없는데."
"서툴지만 노력하고 있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일이지."
"네. 기대 이상으로 열심히 하는 것 같네요."
"그와 아버님은 요새 뒤벨을 돌볼 사람이 필요할 때마다 서로 양보하지 않으려고 해."
근엄한 라잔 경과 무시무시한 폰 블레이젝이 서로 아기를 돌보겠다고 싸우는 모습이라니, 도저히 상상이 불가능했다. 다만 보기 드물 만큼 재미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그거 정말 한번 그려보고 싶은 주제네요."
내 말에 그녀가 또다시 웃었다. 행복한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 위에 감도는 따스한 빛이 햇빛 때문인지 미소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아름다웠다.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된 이후 희한하게도 그녀에 대한 증오와 도피하고 싶은 욕구는 사라졌다.
- "돌아가시려는 거죠? 블레이젝에게로."
아무 말도 못 하는 그녀를 보고 내 짐작이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그럴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블레이젝이 변화한 것을 보고 희망을 가졌다고 말할 테지만, 아마 그가 변하지 않았어도 분명히 돌아갔을 거다.
"비슷하긴 하지만 완전히 맞지는 않아."
그녀가 체념한 듯이 말했다.
"그를 이 집으로 불러들이기로 했어. 원래 그렇게 하기로 되어 있었으니까."
"그렇군요."
"나 때문만이 아니야. 아기에게도 아버지는 필요하잖아."
"제게 변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여긴 아가씨의 거처지요. 아가씨 마음입니다."
- 그녀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말했다.
"화났구나."
아니라고 말하려는 순간 가슴속에서 뭔가 욱신했다. 하마터면 신음을 토할뻔했다. 요즘 자주 그렇게 가슴께가 아팠다. 내가 이를 꽉 문 채 침묵하고 있으니 사라사는 정말로 화가 났다고 믿어버린 모양이었다.
"어떻게 해야 네 화를 달래줄 수 있을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처음부터 언제나 아가씨에게 가장 소중한 건 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유감스럽지만 지금의 제게도 가장 소중한 건 아가씨가 아니에요."
-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하지는 않더라도, 여전히 친구일 수 있겠지?"
"물론이죠."
내 대답을 듣고 만족한 듯 일어서서 걸어가는 사라사를 보며 나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어떤 예감이랄 수도 있었다. 블레이젝에게서 아이를 건네받고 해맑게 웃고 있는 사라사의 모습이 먼 과거의 기억처럼 보였다. 이제 다시는 그녀와 예전처럼 지내거나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아기 때문이든 블레이젝 때문이든.
"안녕히. 나의 아가씨."
내 작별인사를 들은 것처럼 하얀 눈의 기사가 잠시 이쪽을 바라보았다. 사라사가 내게 입 맞추는 모습을 보고 그러나 싶었지만 그는 짓는 듯 마는 듯한 미소를 보이고 다시 아기를 향해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결코 변할 것 같지 않던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 묘한 위안을 주었다. 할 수 있다면 나도 변하고 싶었다. 어느 쪽이든, 지금과는 다르게.
- "어이가 없네. 뭘 어떻게 그리면 이 지경이 되냐?"
한 손에 술병을 든 시세로가 뒤에 와서 내 그림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천장화를 완성시킨 뒤 자아도취에 빠진 그는 요즘 대성당으로 찾아와 남의 속을 긁는 것만이 유일한 낙이었다.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입으로 그리면 되지요."
"진심으로 부끄럽다. 이런 그림이 내 그림 아래 있다는 것이 못 견디게 부끄러워."
- 짧은 선을 길게 하나인 것처럼 보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연습했고 덕분에 희미하지만 나아지는 기미도 보였다.
그림은 거의 다 완성되었고 손으로 그린 것보다는 못했지만 처음 걱정했던 것처럼 그렇게 엉망진창도 아니었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교황이 마음에 들어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낙담하고 싶지 않아 기대는 아주 조금만 했다.
- 대성당 공개를 앞두고 일주일. 드디어 나는 완성된 그림 앞에 마주 섰다. 입에서 붓을 떨어뜨리고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림이 잘 되었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이보다 더 형편없을 수는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이 그림이 내 것이라는, 지금까지 그려온 다른 어떤 그림보다도 특별하고 소중하다는 느낌을 분명하게 받았다.
훗날 이와 같은 그림을 남겼다는 것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나고 부족한 내 분신이기에 오히려 애틋함이 컸다. 앞으로 사람들에게 비난받고 조롱당할 게 분명하기에 나라도 아껴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 다음으로 내 신경은 온통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세로에게 쏠렸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가는 내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칭찬 같은 건 바라지도 않으니 너무 지나친 조롱만은 안 하기를 바랐다.
그가 마침내 그림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비스듬히 올라가 있는 입 꼬리가 분명 좋은 말이 나올 기세는 아니었다. 나는 두려워하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움찔거리는 나를 보고 그가 픽 웃었다.
"뭘 그렇게 기대하고 있냐?"
"네?"
"무슨 말을 해주길 바라는 건데."
그의 말에 잠시 머뭇거렸다. 해주길 바라는 말이야 많았다. 하지만 내가 기대하는 말을 시세로가 해줄 리 없었다. 그라면 틀림없이...
"뭐든 네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이 있겠지. 그게 내가 할 말이야."
- "화가들이 자기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주관적이기에 본인 작품의 완성도를 제대로 판단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생각보다는 잘 알고 있거든.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상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 아마 네 작품에 가장 잘 맞는 말일 거다."
젠장. 그렇다면 좀 더 너그러운 말을 상상할 걸 그랬다.
- "개인적으로는 정 떨어질 만큼 완벽한 시세로의 그림보다 자네의 그림이 더 좋았다네."
너무도 의외인지라 말문이 막혔다. 겸손하려는 게 아니라 시세로의 그림에 그런 평가는 진실로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세로가 그 말을 들으면 굉장히 서운해할걸요. 당신에게 특별한 관심이라도 있는 것 같던데."
"그는 내게서 인정받고 싶어 하니까."
쉽게 대답해 버리는 그에게 깜짝 놀랐다. 이상한 질투 같은 걸 느꼈던 것도 같다. 놀랍게도 나는 시세로의 편을 들고 싶었다.
"그는 남의 인정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럴 리가. 그런 사람은 없어. 적어도 화가들 중에는 확실히 없다고 단언할 수 있지."
"어째서요?"
"글쎄. 어째서일까."
그는 뜻 모를 미소를 짓고 있다가 말했다.
"시세로의 자존심은 스스로 남의 인정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끔 만들지. 그러나 어쨌든 화가라면 반드시 인정이 필요하고 그래서 시세로는 찾아다니는 거야. 감히 자기를 평가해도 괜찮을 만한 사람을. 내가 꽤나 적당해 보였겠지. 기행을 일삼고 귀족들을 마음대로 하고 예술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나. 아마 특별해 보였을 거야."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그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도 같았다.
- "나는 그런 게 싫다는 거죠."
"한 줄로 정리되는 것이 싫다."
"사람들은 모를 거 아니에요. 그냥 부고란에 쓰인 글만 보겠죠. 내 이름이 무엇이고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죽음의 원인은 무엇인지, 그 정도만요."
"하긴. 그 사람의 인생은 무척 길었고 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말도 많았을 텐데 그건 좀 허무하겠네."
"그렇죠? 그러니 스스로 작성할 수 있다면 아가씨는 아가씨의 부고란에 어떤 말을 쓸 거죠?"
"글쎄, 생각해 본 적이 없는걸. 난 그런 문구보다는 그냥 내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많이 슬퍼해 줬으면 좋겠어."
"슬퍼해 줬으면 좋겠다고요?"
"응. 이기적인 바람이겠지만 그래야 쓸쓸하지 않을 것 같아. 내가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이 나 때문에 많이 울기를 바라. 그리고 오래도록 기억해 주길 바라."
- "전 모두 다 쓸 거예요."
"모두 다?"
"네, 전부 다요. 이를테면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이 세상을 열심히 살아갔던가, 내 꿈은 무엇이었나, 그 꿈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 등등. 정말로 중요한 것들을 적을 거예요. 그렇게 처음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 모조리 제 이야기로 채울 거예요. 그게 제 부고란이에요."
-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던 것이다.
처음에는 슬픔을 간신히 감내하는 어머니의 얼굴로 그렸다. 하지만 그건 성전의 해석과 맞지 않을뿐더러 지나치게 인간적이었다. 다음으로는 아이를 담담히 신에게 건네는 초연함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그건 그가 납득할 수 없었다. 아무리 신을 사랑한다 한들 자신의 아이를 그런 얼굴로 바칠 어머니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는 그 표정마저 지워버리고 공백이 된 성녀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러다 잠시 후 성을 내며 붓을 바닥에 던졌다. 어머니의 얼굴 따위 알게 뭐란 말인가.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을 어떻게 그려내라는 건가.
- "저는 맨 처음에 그린 게 마음에 들었어요."
시세로도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남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 건 다른 문제였다.
"누가 네 의견 물어봤어?"
"뭐든 처음에 그려낸 게 정답일 때가 많다고 그랬어요. 자꾸 수정하는 건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어서 그럴 뿐이라고요."
- 평소 에드나는 시세로에게 절대 먼저 말을 걸지 않았고 시세로가 말을 걸어도 우물쭈물할 뿐 대답도 잘 못 했다. 그런데 그림을 보고 있는 지금은 눈동자 속에 어떤 강렬한 열망 같은 게 비쳐 보였다. 게다가 평소처럼 말을 더듬지도 않았다.
그림에만 푹 빠진 소년은 시세로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보지 못했다.
"그렇게 잘났으면 네가 올라가서 한번 그려보지 그래."
시세로의 말에서 찬 기운을 감지했는지 에드나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 "에드나!"
제법 건장한 몸집의 사내가 소년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섰다. 시세로는 만약 그 대단하신 아빠가 나타난 거라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기엔 너무 젊었다. 오히려 형이라고 해야 어울릴 듯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가까이 오면서 시세로를 노려보는 사내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 "네가 그렇게 칭찬하던 그림이 저거냐?"
두 사람 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언제 들어왔는지 한가롭게 지팡이를 짚은 벡리가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에드나는 너무 놀랐는지 목탄을 떨어뜨렸고 시세로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벡리는 두 사람의 반응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성당 안을 천천히 걸어 다녔다. 고개를 천장에서 조금도 떼지 않았는데 그러고도 의자에 부딪히지 않고 잘도 돌아다녔다. 시세로는 저명한 화가가 자신의 그림을 어떻게 평할지보다 에드나가 그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노인이 알게 될까 봐 그게 더 신경 쓰였다. 왜인지 완성하게 놔두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에드나의 생각도 같았는지 벡리가 천장화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캔버스를 돌려 그림이 보이지 않게 벽에 세워놓았다.
- "네 부탁 때문이 아니다. 어쨌든 저 녀석이 제법 그리는구나. 레오나드와는 다른 화풍이야. 함께 두면 서로 배우면서 실력을 쌓을 수 있겠지."
막 기분이 좋아지려던 찰나 그 이름을 듣자 시세로는 오히려 기분이 나빠졌다.
"제가 왜 거길 들어가서 그런 놈한테 배워야 한다는 겁니까?"
"시, 시세로."
에드나가 애원하듯 바라보았지만 시세로는 아무리 그녀의 부탁이라고 해도 레오나드의 도제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놈 밑에서 도제로 사느니 예전처럼 막일이나 하고 말죠."
"누가 네놈더러 레오나드의 도제가 되라고 했더냐?”
벡리가 맞받아치자 이번에는 시세로도 할 말을 잃었다. 레오나드의 도제가 되란 소리가 아니었다고?
"우선은 내 도제인 것으로 해두겠다. 하지만 보통의 어린 녀석들이 하는 그런 잡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 들어와서 시키는 대로 군말 없이 그림을 그린다면 3년 후에는 장인 자격을 주마."
- "한 공방의 장으로서 거짓을 말하겠느냐? 대신 한 가지 조건이 더 있다."
"뭡니까?"
시세로가 얼른 물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게 그의 화가 인생에 있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인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딸에게 먼저 고개를 돌렸다.
"넌 나가 있어라."
"네? 하, 하지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 시세로도 그녀에게 재촉하는 눈빛을 보냈다. 조건이 뭔지 얼른 듣고 싶었던 것이다. 에드나는 약간 침울한 표정으로 성당을 나갔고 딸이 나간 걸 확인한 벡리가 말했다.
"조만간 내 딸과 레오나드를 결혼시킬 생각이다. 나중에 내 자리도 레오나드가 물려받을 테지. 이 부분에 있어 네놈이 아무 문제가 없어야만 내 공방에 들어올 수 있다."
시세로는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쉽게 대답할 수 없을 만큼 노인이 형형한 눈빛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거짓말은 금세 탄로 날 것이다.
'뭘 고민하는 거야. 이건 도제 생활을 면하게 해주는 거나 다름없어.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조건이야. 게다가 다른데도 아니고 라잔 공방이잖아. 3년. 딱 3년만 지나면 나도 장인 자격을 얻을 수 있다고.'
그러면 그랑프리에 출전해서 그 재수 없는 레오나드의 콧대도 꺾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져서 굴욕감으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는 건 퍽 재미있을 터였다.
정말 그럴까? 에드나의 미소를 보는 것보다?
- "그거 따님의 의견은 어디까지 반영되어 있는 겁니까?"
어리석은 질문이다. 그런 걸 생각했다면 벡리가 일부러 에드나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을 테니.
벡리 역시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네놈이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만 내 딸은 당연히 내 말을 듣는다. 벌써부터 후회가 되려는 참이니 생각할 시간 같은 건 달라고 하지 마라. 이대로 돌아서면 그걸로 내 제안은 끝이다."
벡리는 정말로 가려는 것처럼 지팡이를 짚었다. 노인이 그런 잔인한 행동을 하지만 않았어도, 하다 못해 반나절만 생각할 여유를 주었어도 시세로도 그렇게 쫓기듯이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말에 따르겠습니다."
- 시세로는 아까부터 옆에 두고 있었지만 내내 외면하고 있던 걸 드디어 집어 들었다. 그의 얼굴이 스케치된 캔버스였다. 그녀의 스케치는 언제나처럼 완벽했다. 사실 때때로 그녀의 그림은 채색한 것보다 스케치가 더 나았다. 단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그림 속 그가 짓고 있는 표정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부드럽게 웃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 "이제 필요 없어. 난 그 약속 못 지킬 거야. 공방장은 되지 못할 거라고."
"어째서?"
시세로는 대답하는 대신 캔버스를 내밀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드나가 그걸 강하게 쳐서 떨어뜨렸다. 깜짝 놀란 시세로는 얼른 그림을 주워 들고 상한 곳이 없나 살펴보았다.
- "버려."
그녀는 조금도 더듬지 않고 분명하게 말했다.
"부숴버리든지 태워버리든지 당신 마음대로 해."
- 레오나드는 잠깐 뭔가 떠올려보는 듯하더니 대수롭게 않게 말했다.
"지금도 마음대로 오가고 있지 않나?"
"마음대로? 네 눈에는 그렇게 보이냐?"
"스승님의 딸이잖아. 에드나는 이곳에서 뭐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
- 시세로는 태평하기 그지없는 그가 한심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이런 둔감한 형태의 인간들은 타인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다. 그저 자기 그림에만 몰두한 채 그림이 잘 그려지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굴다가 잘 그려지지 않으면 또 내일 당장 죽을 것처럼 굴지 본인에게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삶이란 얼마나 이상적이고 이기적인가.
- "어쩔 수 없지. 우린 서로 다르게 살아왔는 걸."
"너 그래서 그때 나한테..."
"응?"
- 반대할 거라 생각한 레오나드는 의외로 가장 먼저 축하한다고 말해주었다. 심지어 축하주 명목으로 둘이 함께 술을 마시기까지 했다. 헤어지기 전 레오나드가 술값을 지불하겠다고 말했을 때, 시세로는 그를 거의 친구라고 부를 뻔했다.
에드나는 레오나드와 함께 자신의 서명을 만들었다. 처음으로 자기 그림에 서명하는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고 곁에서 지켜보는 레오나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에드나가 단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거라고 생각했던 그도 곁에서 그녀의 그림을 지켜보며 생각이 달라졌다. 레오나드는 그녀를 한 명의 화가로 존중했고 이때부터 시세로도 그가 조금씩 덜 미워졌다.
- 에드나의 그림과 레오나드의 그림이 서로 닮아가기 시작했다. 공방 사람들은 누가 누구의 그림을 닮아가는 것인지 두고 의견을 나누길 좋아했지만 시세로가 보기엔 의미 없는 짓이었다. 레오나드의 스케치는 어느새 에드나의 스케치가 가진 장점을 흡수했고 에드나가 물감을 다루는 방식은 어느새 레오나드의 방식을 닮아 한층 더 표현이 깊어졌다. 서로가 서로에게서 좋은 것을 배워가는 모습을 보며 시세로는 그들이 연인이라는 사실보다 더 깊은 질투를 느꼈다.
- 장인 자격을 받은 해 시세로는 그랑프리에 참가했다. 그러나 밀려드는 주문 속에서 자신의 그림을 따로 그려야 했기에 시간이 많이 부족했다. 어떻게든 완성해서 내긴 했지만 최하위 성적으로 간신히 입상했을 뿐이다. 반면 레오나드는 2등상을 받았고 당연히 그걸 가지고 시세로를 한참이나 놀렸다. 하지만 시세로는 의외로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일일이 화낼 수 없을 만큼 바쁘기도 했고 또... 레오나드의 그림이 탁월하다는 건 그도 인정했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이 영원히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고 그런 만큼 성과가 보였다...
-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레오나드도 어떻게 해줄 수 없었다. 대신 그는 달래듯 속삭였다.
'나중에 내가 공방장이 되면.'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것을 약속하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 시세로는 그때까지 간직했던 에드나가 그려준 그의 초상화를 불태워 없앴다. 슬프기보다는 그로써 마침내 해방된 기분이었다.
- 사람마다 모욕에 대처하는 방식은 제각기 다르다. 시세로의 경우에는 그림으로 당한 모욕은 그림으로 갚아주자는 주의였다. 하지만 당연히 모든 사람이 시세로처럼 반응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레오나드가 비웃고 다닌 사람은 시세로 하나가 아니었다.
벡리는 이미 레오나드에게 여러 번 경고했었다. 거만하기 짝이 없는 그 성격을 고칠 수 없다면 적어도 겉으로 드러내지는 말라고. 아무리 사소해 보여도 한번 사람의 원한을 사면 나중에 어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 모른다고 말이다. 하지만 당시의 레오나드의 귀에는 어떤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최연소로 그랑프리 대상을 받은 데다 그토록 원하던 사람과 결혼하고, 심지어 벌써부터 차기 공방장감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니 무서울 게 뭐가 있었을까.
- 레오나드가 신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공방에 돌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다들 쉬쉬했지만 뒤에서는 둘 이상 모이면 누구나 그 이야기를 했다. 여론은 둘로 나뉘었다. 그가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쪽과 그 레오나드라면 신을 정말로 그려낼 수도 있다는 쪽이었다.
그들은 은밀히 시세로를 찾아와 그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싶어 했지만 시세로는 언제나 귀를 닫고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 작업에만 깊이 몰두했다. 그 시기에 그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그림에 집중했다. 그리고 또 그릴수록 무언가 손에 잡힐 듯했다. 세상에 어떤 진리라는 게 있다면 그건 모두 그림 안에 담겨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레오나드처럼 그걸 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신은 단 한 번도 그에게 매력적인 주제로 다가온 적이 없었다.
- 마침내 그것이 작업실 밖으로 나왔을 때 공방 사람들, 특히 늙은 벡리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일평생 그림을 그려온 그조차 그런 그림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보는 순간 어째서인지 서늘함이 느껴짐과 동시에 눈을 돌려야 할 것 같은, 오래 마주 보고 있기 어려운 그림이었다.
'훌륭하네.'
시세로는 레오나드의 그림을 흘끗 보며 생각했다. 병사들의 지시 아래 모두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었기에 마치 신을 앞에 두고 경배하는 사람들 같았다. 이제 그런 탁월한 그림을 그린 대가로 레오나드가 병사들의 손에 붙들려 개처럼 끌려 나올 터였다.
느지막이 그에게 좀 더 분명히 경고를 해줬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가 친구여서라기 보다는... 이대로 사라지기엔 너무나 아까운 재능이 아닌가.
- 자신은 꿈도 꿀 수 없는 그런 용기가 대체 어디에서 나왔을까?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가넬 신부의 성당 앞에 서있었다. 그녀와 이곳에서 함께 했던 기억이 꿈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안으로 들어간 그는 예전처럼 성가대석 의자에 누워 자신의 천장화를 올려다보았다. 몇 년이 지나 다시 보니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때 왜 이 그림이 부족하게 느껴졌는지.
'내가 그들을 대상으로서 바라보고 있군.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나와는 별로 상관이 없었던 거야.'
이제는 상관이 있다는 걸 안다.
- 언젠가 에드나는 성녀의 얼굴이 시세로를 닮았다고 말했었다. 그걸 말끔히 지워내고 거기에 그려져야 마땅할 얼굴, 지금 그가 그리고 싶은 유일한 대상을 그려 넣었다. 울면서도 간신히 웃어 보이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곳에 이렇게 그녀가 있으면 찾아올 때마다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이 성당이 남아있는 한 언제까지고 그녀는 존재할 수 있다. 사람들은 저 밑에서 그녀를 위한 경건한 찬송을 부르고 신부는 듣기 좋은 기도문을 읊어줄 것이다. 그녀는 그런 대접을 받아야 마땅했다.
그림은 스스로 놀랄 정도로 금세 완성되었다. 어느 때보다도 완벽했지만, 완벽하지 않더라도 별로 상관하지 않았을 거다.
- 그날 시세로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천재라고 불렀다.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로도 없었다. 소년이 그려낸 건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그린 사람을 열렬히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림이었다.
그의 등장은 여러모로 공방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에드나의 일이 있고 나서 죽은 듯이 고요했던 공방이 조금씩 떠들썩해졌다. 다들 소년의 그림을 볼 때마다 감탄해 마지않았고 다른 장인들도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시세로도 오래간만에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치솟는 걸 느꼈다. 그의 세상이 조금씩 색채를 되찾았다. 소년의 존재는 그에게 구원과 같았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건 소년이 너무 뛰어났으며 스스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가끔은 시세로의 그림에도 한두 가지 지적을 하곤 했다. 그런 행동이 어딘가 자꾸만 레오나드의 예전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안 돼. 너만은 그렇게 되어선 안 돼.'
소년은 겸손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자신이 이미 완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를 필요가 있었다.
- 그렇게 해서 그가 소년에게 한 짓이 결국은 레오나드가 에드나에게 한 짓과 뭐가 다를까.
- 그는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고 간신히 그림을 볼 용기를 냈다. 마침내 캔버스를 돌려보는 순간 할 말을 잊었다. 거기엔 그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비록 색이 바래고 한쪽 구석엔 물감이 번져 있었지만 그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화풍이었다. 아직 레오나드와 같이 그림을 그리기 전이라, 그녀만의 특징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에드나의 그림. 언젠가 그려주겠다고 약속했던 그의 초상화였다.
- "어째서... 직접 전해주지 않은 거야. 이걸 줬으면, 그때 이걸 나한테 줬더라면..."
달랐을까. 모든 게 과연 지금과 달라졌을까.
- 그림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형상이 전부가 아니다. 거기에는 그림을 그린 자의 시간이 그가 쏟은 노력과 영감이 들어있다. 혼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어떤 것들이 여전히 그 안에 남아 그림을 지켜보는 자에게 들리지 않는 음성을 전한다.
알아줘. 내가 그림을 그릴 땐 언제나 당신 생각을 한다는 걸.
이렇게 가슴이 미어질 만큼 그녀가 보고 싶었던 적이 또 있었을까.
- 만약 그곳에 다다르는 일이 고통이라면 그는 기꺼이 그 고통을 감내할 것이다. 오히려 행복하게 흠뻑 맞이할 것이다. 어쩌면 예술을 한다는 것은 그렇게 한 사람에 대한 사랑과 기억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그녀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려야 한다는 것뿐.
그는 캔버스를 소중히 품에 안고 괜찮으냐고 물어보는 사람들 틈을 헤치고 걸어갔다. 그에게는 지금 물감이, 붓이 필요했다. 캔버스든 낡은 종잇조각이든 무엇이라도 그릴 화폭이 필요했다. 지금 붓을 잡으면 틀림없이 그가 스스로 역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나타나리라.
그것이 부디 그녀의 얼굴이길, 시세로는 간절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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