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출판 : 엘릭시르
출간 : 2016.04.29
'소시민 시리즈'는 겉표지와 속표지 모두 산뜻하고 예쁜 색감이다. 디저트를 닮은 화사한 표지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표지와 제목만 보고 요리 소설이나 달달한 소설을 떠올려서는 곤란하다. 이 제목에서 방점이 찍히는 부분은 다름 아닌 '사건'이기 때문이다.
달력 상으로는 아직 5월.
하지만 긴팔보다는 반팔이 더 잘 어울리는 날씨가 찾아왔다.
지금은 아마도, 늦봄보다는 초여름이 맞을 것이다.
자신의 본성을 억누르고 눈에 띄지 않는 '소시민'적 삶을 추구하기로 결심한 두 사람, 고바토 조고로와 오사나이 유키.
그 목적을 위해 필요할 경우 서슴지 말고 서로를 이용하기로 약속한다.
이 두 사람이 겪는 일상 속의 사건들 -때로는 소소하고 때로는 '사건'이다- 이 바로 '소시민 시리즈', <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 사건>이다.
오사나이와 고바토는 대외적으로는 연인에 가까운 관계로 보이지만, 사실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도 부르지 않는 사이.
그럼에도 상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꽤나 굳건한 신뢰를 보여주곤 한다. 어쩌면 신뢰란 특정한 관계성이 아닌, 대상에의 깊은 이해에서 나오는 걸지도 모르겠다.
같은 순간, 같은 공간에서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감각으로 순간을 경험한다.
타인은 읽어내지 못하는 영역을 알아차리고 만다는 건, 어쩌면 축복은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착각과 망상의 위험을 잊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는 이들의 이야기에서 중고등학생 다운 치기를 읽을 것이고, 누군가는 자신의 학창 시절을 읽을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지향점 혹은 지양점을 발견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틈새 사이사이에서 반짝이는 달콤한 디저트들.
단 것을 잘 먹지 못하는 나로서는 글만 읽어도 입이 달아지는 느낌에 살짝 괴롭기도 하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예정에는 없었지만 당분간은 '계절 한정' 시리즈를 읽어나갈 예정.
아마도 다음 독서는 <가을철 한정 구리킨톤 사건>이 될 것 같다.
- 대뜸 꿈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도 식상하지만, 곰곰이 생각하건대 역시 이걸로 시작하는 게 가장 나을 듯하다. 꿈으로 끝나는 이야기보다야 낫겠지.
꿈속에서 나는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반 친구를 고발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다시 말해 XX, 지금까지의 논증으로 알 수 있듯 사실은 명백해. 내가 처음 생각한 대로 이건 시간 트릭을 깨면 해결될 일이야. 증거가 있어야 시인하겠다면 보여줄 수도 있지만, 뭐, 그렇지. 더는 달아날 길이 없어."
- "멋져, 정말 멋져.”
나는 그들을 향해 두 손을 들어 끝없는 찬사에 응답했다. 득의양양. 그 정도 간계로 내 눈을 피하려 들다니 어리석다 못해 원숭이 수준이다. 그런 생각마저 했다. 나 참, 정말이지 허무할 정도다. 나를 쩔쩔매게 만들 만큼 영악한 자는 어디 없는 걸까?
- 그렇게 자만에 빠져 있는 나를 꿈을 꾸는 주체인 나는 씁쓸하기 짝이 없는 기분으로 보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 꿈에 영향을 미쳤는지, 환호성을 질러대는 관중 속에서 누가 한 걸음 걸어 나왔다.
저건 누굴까. 짐작 가는 사람은 몇 명 있다. 내게 그런 소리를 해줄 만한 상대는. 그 혹은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정말 훌륭해. 완벽한 추리. 깔끔한 증명. 하지만 글쎄, 음, 뭐랄까, 이런 말 하긴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 "너, 좀 짜증 나."
- 거참 실로 끔찍한 꿈을 꾸었다.
- 그렇지 않아도 밝지는 않았던 오사나이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앞으로 시작될 고등학교 생활에 뿌리치기 어려운 암운을 느꼈으리라. 그 심정은 잘 알지만 나는 겐고를 조금 변호해주고 싶어졌다.
"걱정할 필요는 없어. 겐고는 좋은 녀석이야."
그렇게 말한 뒤에 바보 같은 소리를 했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사나이는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좋은 사람이라면 더 걱정 돼. ... 그냥 두질 않으니까. 고바토도 나쁜 사람이 더 다루기 쉽다고 그랬잖아."
- 아아, 그랬다.
하지만 겐고는 우리가 우려하는 '좋은 사람'은 아니다. 무엇을 위한다는 기치를 내세워 다른 사람을 몰아세우는 '좋은 사람'은 아니다. 물론 나쁜 사람도 아니다. 그 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입을 다문 나를 보고 오사나이는 당황한 기색으로 말했다.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하는 거야? 괜찮으니까 걱정 마. 고바토가 친구로 지내고 싶다고 생각할 만한 사람이라면 분명 날 귀찮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 응. 아마, 그럴 거야."
- 어쩐지 건성으로 둘러댄 것 같아 마음에 걸렸지만 나는 조금 남은 커피를 홀짝거리며 비웠다. 오사나이도 덩달아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셨다. 친하지는 않지만 나는 겐고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오사나이도 겐고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만 그건 오사나이가 결정할 일이다. 참견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 우리의 컵이 바닥을 드러냈을 때.
오사나이가 마음을 굳힌 듯 힘차게 말했다.
"고바토, 달아나고 싶을 때는 날 핑계로 대. 사양할 필요 없으니까."
나는 가만히 웃었다.
"물론 그럴 생각이야."
그것은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이 우리 사이의 약속이다. 내가 오사나이를 핑계로 대는 것처럼 오사나이는 나를 핑계로 댄다. 나는 오사나이를 방패로 삼고 오사나이는 나를 방패로 삼는다. 우리는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만들어낸다.
- 그렇다. 이제 곧, 우리는 고등학생이 된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우리는 이제부터 완전한 소시민으로 비약할 것이다.
- 손가방이라.
손가방이 겐고의 소지품일 리는 없다. 나는 겐고 뒤에 서있는 세일러복 여학생을 보았다. 외모로 사람을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지만 어딘가 멍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이목구비도 얌전하지만 반듯해서, 평하자면 연약한 일본 미인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연약하다는 기준으로 비교한다면 오사나이에게는 미치지도 못하지만.
내 시선을 알아챈 겐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친구 손가방이야. 도둑맞았어."
- "여자 가방을 훔치다니 별 시시한 짓을 하는 녀석도 다 있어."
"시시한 짓이야?"
그렇게 묻자 겐고는 나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무슨 뜻이냐?"
"아니, 아무 뜻도 없는데."
변명이 먼저 튀어나왔다. 하지만 겐고는 그런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 어디 말해보라는 듯이 턱을 까딱거린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말을 이었다.
"가방 안에 돈이라도 들어 있었다면 시시한 짓이 아니라 범죄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돈이 들어 있지 않아도 범죄야. ... 하지만 맞는 말이네. 요시구치, 안에 귀중품은?"
요시구치는 손가방을 도둑맞은 여학생의 이름이었다. 요시구치는 겉보기와는 달리 또박또박 대답했다.
"아니. 립크림 하고 볼펜, 그리고 가위. 아, 수첩도."
- "손가방도 그렇지만, 겐고가... 저 녀석이 찾아내자고 억지를 부린 것 아니야?"
그렇게 말하자 요시구치가 문득 표정을 누그러뜨리더니 작은 한숨을 쉬었다.
"아니, 억지를 부린 건 아니야. 찾아주는 건 고마운 일이고 손가방을 잃어버려서 난처한 것도 사실이거든. 하지만 저렇게 열을 올리면 조금... 남자들 손만 셋이나 빌리다니 왠지 꼬드긴 것 같아서 불편해."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른 친구들에게 남자를 꼬드겼다고 오해를 사는 게 불편한 것이리라. 이 여학생, 보아하니 '우리 쪽' 당원이다. 우리 소시민 클럽에 영광과 평온 있으라.
- 오사나이는 계단 출입구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삼십 분도 넘게.
"미안. 엉뚱한 용건으로 기다리게 해서."
오사나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나, 기다리는 건 좋아하니까."
최근 나도 그렇게 되었다. 왜냐하면 기다린다는 건 거의 완벽하게 상대가 주도하는 행동이니까. 그래도 기다리게 하는 건 역시 불편하다. 오사나이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이라도 갈래?"
"크레이프 가게 말이지? 가자. 근데 그전에 잠깐 이야기 좀 해도 될까? 궁금한 게 있어."
- "뭘까?"
이런 게 튀어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사실 나는 도청기 같은 걸 상상했다. 안감을 갈라 도청기를 숨기고 도로 꿰매어 놓는 작업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평범한 봉투였다. 햇빛에 비추어 보려 했지만 두터운 구름 때문에 하늘이 어두워 전혀 보이지 않았다.
-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걸 가방 안에 넣었는지 알겠지?"
우리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 뭐. 세상에는 방편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미리 짠 것처럼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번에야말로 걸음을 돌려 재빨리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 "오사나이였다면 그랬을까?"
오사나이는 잠시 나를 비스듬히 올려다보더니 살그머니 웃었다.
"못 했을 것 같아. 너무 뻔뻔하잖아."
- 나는 오사나이의 말을 들으며 이 크레이프는 역시 너무 달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우리라면 이해할 거라고 했지만..."
그만두자. 오사나이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게는 벅차다. 초코 바나나 크레이프를 쟁반에 도로 얹어놓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어. 나한테는 인연이 없는 상황이라."
뭐, 우리가 그걸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조만간 이해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현재는 굳이 따지자면, 아무래도 상관없다. 오사나이도 내가 평범한 속도로 크레이프를 먹었다면 이런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으리라.
- 거리에 노을이 드리웠다.
"그렇지... 나도 그래."
창밖을 바라보는 오사나이를 붉은 노을빛이 감쌌다.
- 지금이 최고다 싶은 순간이 있다. 기나긴 인생에서 몇 번이나 찾아올 정점 중 하나가 아니라 정말 단 한 번뿐인 순간이. 우리는 그 순간을 동경하고, 그 순간을 단 한 번이라도 보고자 간절히 원한다. 왜냐하면 그 순간을 스스로 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누가 만들어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그런 순간은 그리 흔히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어쩔 수 없이 보상 행위로 자신을 위로한다. '지금만'이'나 '여기서만', '이것'이라는 한정에 거듭 이끌리는 것도 불가피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하물며 '당신에게만'이라고 하면, 몇 번을 들어도 대단히 강력한 유혹이 될 수밖에 없다.
- 금세 나를 알아본 겐고는 어째선지 빨리 오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용건도 없는데 겐고가 내게 반가운 표정을 짓다니 이상한 일이다. 겐고가 만화 코너에 있는 것도 이상했다. 내가 아는 한 겐고는 만화책을 읽지 않는다.
겐고는 팔짱을 끼고 눈살을 약간 찌푸리고 있었다. 무슨 용건일까 하며 가볍게 말을 걸었다.
"야, 서점에서 다 만나고 이게 웬일이야? 뭐 찾는 거라도 있어?"
겐고는 나를 힐끔 흘겨보더니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뭘 찾는지 나도 모르지만. 너, 머리 하나는 좋지?"
"뭐야, 뜬금없이."
어이없다. 하지만 겐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괜찮은 만화책 있으면 추천 좀 해줘."
허. 픽션에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 고지식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만화책이라도 읽을 마음이 생긴 건가? 겨우 그런 일로 저렇게 뚱한 표정을 짓다니 유별나기는 너무 쉬운 부탁이라 김이 샜지만 나는 웃으며 승낙했다.
- 특별히 만화에 박식한 건 아니지만 적당히 추천작을 골라줄 수는 있다. 처음부터 상상력이 풍부한 작품이나 성도착적인 작품은 좋지 않겠지. 역시 스포츠 만화가 무난할까. 손에 잡히는 책을 한 권 뽑았다. 딱히 눈에 띄는 구석은 없지만 읽기 쉽고 권수가 적어서 사는 데 부담이 없는 책이다.
겐고는 내가 손에 든 만화책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고로. 그건 훌륭해?"
"그림이 훌륭한 작품을 찾는 거야?"
"... 그런 셈이 되나."
"그런 셈이라니, 답답하네."
"그러니까 말했잖아. 뭘 찾는지 모르겠다고."
그래서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그림이 훌륭한 작품이라면... 청년 만화 선반을 뒤져 두 권 정도 뽑아 왔다. 덤으로 순정 만화에서도 한 권.
"이 정도면 어때?"
- 유난히 진지한 표정으로 만화책을 받아 든 겐고는 끙끙거렸다. 읽을 생각이라면 엉뚱한 내용도 섞여 있다고 말해주려는 찰나에 겐고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군. 아까 그 책보다는 솜씨가 정교해 보이네."
"표지만 정교한 책도 있지만."
"그럼 넌 그림도 볼 줄 알아?"
"그림?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만화가 아니라 예술로서의 그림을 말하는 거야?"
"그래."
- 멍청아,라는 말을 꾹 집어삼켰다.
"... 그림을 잘 그리는 만화가를 아는 것과 예술적인 그림을 볼 줄 아는 심미안은 별로 상관이 없어."
"그래?"
"난 인상파를 좋아하지만."
그 말인즉슨 나는 그 정도 소시민적인 눈밖에 갖추지 못했다는 농담이었다. 하지만 겐고는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허, 그런 걸 좋아한다면 나보다는 훨씬 낫겠네."
... 뭐, 그런 비교 문제라면 확실히 낫겠지만.
- "고바토, 같이 가줄래?"
불러주셔서 영광이지만, 그 이유는 절절할 정도로 잘 안다. 물어봤자 서글퍼지기만 할 줄 알면서도 나는 묻고 말았다.
"그 타르트 한 사람당 한 개만 살 수 있구나?"
"응!"
오사나이가 묘하게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확성기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멀리에서 다가왔다. 시민이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겠습니다. 밝은 미래를 열어나가겠습니다. 주절주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시의원 선거 선전 차량이다. 법적 무능력자인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다. 엉금엉금 기어가는 선전 차량 때문에 뒤따라오는 자동차들이 쭉 밀려 있었다. 저 사람들은 저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을 것 같다.
- 앨리스에는 전에도 몇 번 가보았다. 오피스텔 1층에 있는 자그마한 케이크 가게다. 케이크 가게에 혼자 들어가는 취미는 없으니 매번 오사나이와 함께 갔다는 소리다. 길은 기억하고 있었다. 쭉 늘어선 주택가 저편에 널찍이 펼쳐진 야구용 백네트가 보인다. 미나카미 고등학교의 운동장인데 이정표로 안성맞춤이다. 앨리스는 미나카미 고등학교와 가깝다.
- "그 문자 덕분이야."
진실로 행운은 어디에서 굴러다니는지 모를 일이다.
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는 상자에 담겨 있었다. 이래서는 일반 딸기 타르트와 어떻게 다른지 알 재간이 없다. 상자를 두 개 겹쳐 들고 흐뭇해하는 오사나이에게 봄철 한정이 일반 타르트랑 어디가 다른지 물어보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매년 다르니까 몰라. 올해만 맛볼 수 있는 맛이야. 설레어..."
나는 최근, 아니, 태어난 이래로 저토록 뭔가를 기대하는 표정을 지어본 적이 있었던가? 무심결에 내 지난날을 되돌아보았다. 오사나이는 보물이라도 담듯이 상자 두 개를 자전거 바구니에 넣었다. 아무리 애써도 타르트가 기울었지만 이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다. 돌아갈 때는 최대한 얌전히 페달을 밟아야겠다.
- 자전거를 도둑맞은 것과 봄철 한정 타르트를 먹지 못한 것, 어느 쪽이 오사나이에게 더 큰 충격을 주었는지는 모르겠다. 자전거는 새로 살 수 있지만 딸기 타르트는 올봄에만 맛볼 수 있는 한정품이고, 딸기 타르트는 두 개에 삼천 엔도 안되지만 자전거는 최소 세 배는 비싸다. 망연자실한 오사나이는 내가 손을 잡아끌 때까지 꼼짝도 않았고, 도중에 우유가 든 비닐봉지를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이름을 불러보고 위로를 해봐도 반응이 없었다.
- Q. 물고기? 미술실에서요?
오하마 : 아뇨, 집에서 미술실에서 그리면 비린내 때문에 쫓겨날 거예요. (웃음)
Q. 하긴 그러네요. (웃음) 그나저나 전 유화라고 하면 굉장히 고상한 느낌이 드는데,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오하마 : 고상하다는 생각은 해보질 않아서 가볍게 시작할 수 있었죠. 장난 삼아 그린 낙서로 출발했지만 지금도 근본은 그리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Q. 낙서는 자주?
오하마 : 그렇죠. 전 고상하다는 게 뭔지 잘 몰라요. 고상하고 저속한 것 중에서 항상 저속한 쪽이 많다면, 그건 단순히 수의 많고 적음을 따지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Q. ...
오하마 : 미안합니다. 이상한 얘길 해서.
Q. 슬슬 진로를 정할 시기인데요. 향후 목표는 있습니까?
오하마 : 어딜 가든 결국 그림은 그리겠지요. 직업으로 그리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Q. 가족분들도 오하마 씨의 그림을 기대하는 것 아닙니까?
오하마 : 글쎄요. (웃음) 나이 차이 나는 형이 자주 놀러 오는데, 제 그림을 즐겁게 봐주는 건 형하고 조카뿐이라서요.
Q. 오늘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오하마 : 저야말로.
- 나는 입을 다물었다.
"왜 그래? 뭘 알아냈어?"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본을 겐고에게 돌려주었다. 헤어질 때 겐고가 말했다.
"너도 모르면 어쩔 수 없지. 뭐, 기삿거리가 이거 하나뿐인 것도 아니고."
아주 조금 죄책감을 느꼈다. 저 사본은 중요한 단서다. 이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다.
하지만 꾹 삼켰다.
영악한 지혜 싸움은 결코 보기 좋은 행동이 아니다. 그것을 나는 알고 있다. 지혜를 빌려줄지 말지는 사정을 들은 뒤에 결정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안일했다. 얌전히 있으려면 처음부터 사정 같은 건 듣지 말아야 했다.
- "말하기 싫으면 됐어. 내가 너무 눈치 없었나 봐."
도리질을 쳤다.
"말하기 싫은 게 아니야. 실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거든."
꼭 오사나이를 안심시키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나는 두 장의 그림에 대해 설명하기로 했다. 가쓰베 선배의 과거 이야기나, 오하마란 선배가 한 말도 대충 정리해서 설명했다. 멀리서나마 두 장의 그림을 본 오사나이는 이해도 빨랐다.
- "뭐, 그런 사정으로 겐고는 다른 기삿거리를 찾기로 한 모양이야."
그렇게 마무리했다.
하지만 오사나이의 곁에 있던 내가 그녀의 취향이나 행동을 자연히 읽을 수 있듯이, 내 곁에 있던 오사나이도 내 심정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는 듯했다. 내가 화라도 낼 줄 알았는지 오사나이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말했다.
"고바토, 안 도와줄 거야?"
"그림에 대해선 잘 모르니까."
"실마리는 잡았잖아?"
여간내기가 아니군. 아직 알아낸 건 아니지만.
- "내 기분 탓에 잘못 생각한 거라면 미안해. 하지만 고바토, 초조해 보여."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뭐, 그렇지. 어렴풋하게나마 해법이 보였으니까. 하지만 오사나이도 알잖아. 탐정은 정말이지, 소시민 지망생이 할 짓이 아니야. 지금은 못 들은 척하는 게 나아."
"그걸로 만족한다면..."
- 오사나이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천천히 되물었다.
"하지만 정말 괜찮아?"
그렇게 묻는다면.
그다지 친한 사이도 아니지만.
아직 완전히 알아낸 것도 아니지만.
상대가 믿고 부탁했는데 이대로 물러서는 건, 아무래도...
"인정머리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가 딱히 인정 넘치는 사람들은 아니다. 하지만 냉혈한도 아니다. 의례적인 무관심이라면 몰라도 냉담하거나 무심한 건 소시민의 덕목이 아니다.
- 문제는 해결 방법이다.
"가령 알아냈다고 해도 그걸 알리는 게 싫어. 이러저러해서 여차저차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설명 말이야."
"응. 알아."
좋은 방법이 없을까? 내가 나서지 않으면서도 무사 해결을 전할 수 있는 방법. 그렇게 입맛에 맞는 방법이 있을 리 없나? 내가 거리낌 없이 추리를 털어놓을 수 있는, 이해력 있는 누군가에게 맡길 수 있다면 또 모르지만.
눈앞에 있는 오사나이처럼.
- "응? 나?"
시선으로 알아차렸다. 역시 여간내기가 아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건 불가능했다. 내 의리를 지키겠다고 낯을 가리는 오사나이에게 움직여달라는 건 못할 짓이다. 의리만이라면 몰라도 개인적인 욕심도 섞여 있으니 더더욱 그러하다. 덧붙여 말하면 추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엄밀하게 따지면 오사나이와의 약속을 어기는 짓이다.
- 그런 고민을 하고 있자니 오사나이가 불쑥 말했다.
"그만두지 못하겠다면... 날 핑계로 삼아도 돼."
"아아, 그런 방법이 있었지."
오사나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 가쓰베 선배는 겐고처럼 순순히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냐니까?"
가쓰베 선배는 의미심장하게 질문하는 내가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 모양이다.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눈앞에서 누가 탐정 시늉을 하면 기분 좋을 리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가쓰베 선배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도 미안한 일이고, 오사나이를 핑계로 내세우는 것도 불편한 일이다.
선배의 심사가 본격적으로 틀어지면 난처하다. 그냥 답을 말하기로 했다.
- 겐고와 가쓰베 선배가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깜짝 놀란 표정으로. ... 연출이 조금 과했는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담담하게 풀어나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무래도 나쁜 버릇이 완전히 빠지지 않은 모양이다. 그냥 단숨에 결론을 말해버리자.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 "오하마 선배는 단 한 사람의 취미를 겨냥한 그림을 그렸어. 선배의 생각, 아니, 선배가 조롱하고 싶었던 사고방식에 따르면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작품이었겠지."
- "아니야. 그렇다면 내게 한마디 정도 해줘도 됐을 텐데."
아아, 눈치챘나. 눈치챘어도 굳이 말하지 않는 게 좋았을 텐데.
"요컨대 잊어버린 거구나. 그리고 잊어버려도 되는 그림이었던 거야."
말해버렸군.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언젠가 서점에서 있었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우리는 지금이 최고다 싶은 순간을 동경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순간을 만들어낼 수 없으니까. 이 그림이 최고였던 순간은, 누구의 눈에도 들지 못하고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 물론 그런 순간이 과거 이 그림에 존재했다면 말이지만.
- 그날, 일요일, 나는 거리에서 오사나이를 발견했다.
나와 오사나이는 상부상조하는 사이지만 의존 관계는 아니고, 하물며 비익연리 같은 사이는 절대 아니다. 방과 후에 달콤한 디저트를 함께 먹으러 가거나 나란히 서점에서 책을 뒤적거리는 일은 있어도 일요일에 둘이서 외출 약속을 나눈 적은 없다. 어느 한쪽이 말을 꺼내면 서로 싫다고는 하지 않겠지만, 의미 없이 붙어 다니고 싶은 마음은 둘 다 없다.
- 오월의 일요일, 화창한 날씨에 정처 없이 거리로 나가보니 상점가 한 골목의 휴대전화 가게에서 어디서 본 듯한 소녀가 나타났다. 유심히 보니 오사나이였다. 어째서 평소 학교에서는 자주 붙어 다니는 오사나이가 '어디서 본 듯한 인상'에, '유심히 보지 않으면 분간이 가지 않았느냐' 하면 원인은 오사나이의 복장 때문이다.
세일러 교복을 입은 오사나이는 존재감을 억눌러 '음울', '수수', '음침'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린다. 하지만 오늘 오사나이는 복숭앗빛 탱크톱에 하얀 상의를 걸치고 무릎 위까지 오는 크림색 데님 바지를 입었다. 단발머리는 낙낙한 가죽 모자에 덮여 눈에 띄지 않는다. '평소에는 발랄한 여고생, 하지만 오늘은 조금 울적해'라는 분위기다. 같은 반 아이들 눈에 띄어도 언뜻 보면 오사나이 유키인 줄 모를 것이다.
이미지가 이만큼 다르면 변장의 영역에 가깝다. 뭐, 실제로 오사나이로서는 변장인 셈이리라. 우리 소시민은 언제나 남의 눈을 의식한다.
- "잠깐 기다려. 맛있는 코코아가 있어."
"... 코코아?"
오사나이가 의아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우악스러운 겐고와 달콤한 코코아의 이미지가 어울리지 않는 것이리라. 뭔가 심오한 유머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나는 바로 그 생각을 부정했다. 겐고에게는 표리가 없다.
- 얼마 지나지 않아 겐고가 돌아왔다. 손에는 쟁반, 쟁반에는 커피잔, 잔 속에는 코코아. 찰랑찰랑하다. 겐고는 쏟지 않도록 조심스레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각자 손을 뻗어 가까운 잔을 쥐었다.
"맛있는 코코아라고 했지?"
"그래. 반 호텐 거야."
- 반 호텐이라니, 그 말인즉 평범한 코코아라는 말이잖아. 슈퍼마켓에 가면 보통 모리나가 코코아와 나란히 팔리는 제품이다. 맛은 비교해 본 적 없지만 특별한 코코아는 아니다. 모처럼 맛있다고 으스대는데 기를 꺾을 필요는 없으니 잠자코 있었지만, 흘깃 쳐다보니 오사나이는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이었다.
- 더운 날에 에어컨이 도는 거실에서 뜨거운 코코아를 마신다. 컵에 입술을 댔을 때는 그리 뜨겁지 않은 것 같았는데 코코아 자체는 적정 온도보다 뜨거웠다. 생각해 보면, 아니, 생각해보지 않아도 차가운 음료가 훨씬 고마웠을 것이다. 뭐, 초대받은 입장에 배부른 소리는 할 수 없다. 게다가 실제로 제법 맛있었다. 놀랍다. 겐고가 코코아를 맛있게 탈 줄 안다니.
"이건 뜨거운 우유에 코코아 가루를 탄 거지?"
"물론, 그렇지."
"잘 녹였네. 이렇게 녹이긴 힘든데."
나는 오사나이처럼 단 걸 좋아하지 않으니 당연히 코코아에 관한 지식도 없지만, 내가 탄 코코아보다 훨씬 맛있다는 건 알겠다. 코코아는 아무래도 가루가 남는다는 점이 싫다. 하지만 겐고가 탄 코코아에는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다.
- "솔직히 묻겠는데, 너 중학교 때 무슨 일 있었어? 분위기가 너무 다르잖아. 죽여도 죽지 않을 것 같던 고바토 조고로는 어디 간 거냐?"
"그런가? 예를 들면?"
일단 시치미를 뗐다.
겐고의 말투는 의외로 온화했다.
"예를 들라고? 전부야. 지금도 그래. 코코아 녹이는 법 하나 배웠다고 '재미있는 이야기였어, 고마워'라고?"
나는 코코아를 홀짝였다. 역시 더운 날에는 시원한 음료가 좋은데.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예전의 내가 어땠다는 거야?"
겐고는 화는 내지는 않았지만 나를 노려보았다. 아이고, 그리워라. 예전에는 흔히 겐고와 눈씨름을 했다.
"알고 있는 건 전부 입 밖으로 내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았지. 자기가 모르는 걸 남이 알고 있으면 얄미운 소리에 변명까지. 그런데 지금의 너는 훨씬 질이 나빠. 잠깐 얘기해 보면 원만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입이 거칠고 성격 나빴던 꼬마가 얼굴만 웃을 뿐 뱃속은 시커먼 불쾌한 놈이 되어버렸어."
- ... 큰일이군. 그렇게 보이나? 나는 열심히 얼굴로도 마음으로도 싹싹하게 웃는 소시민이 되려고 애쓰는데, 방심했을 때 들어오는 공격이 가장 대처하기 어렵다. 말을 잘라줄 오사나이는 없다. 아까 내가 끼어드는 데 실패한 탓이다. 겐고의 추궁을 어떻게든 피할 수 없을까 머리를 굴렸지만 쉽게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민하는 사이에 괜히 화가 치밀어서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조용히 말했다.
"질문을 정리하자면, 중학교 때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다는 거네?"
"그런 셈이 되나."
또 한 모금, 코코아를 마셨다. 컵을 내려놓고 두 손을 살짝 들었다.
"그럼 간단해. 아무 일도 없었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겐고 네 말처럼 그랬을지도 몰라. 하지만 졸업할 때는 자연히 이런 성격이 되어 있었어. '소시민'으로서 말이야."
날카로운 시선.
"... 안 믿어."
"그건 네 자유고."
- 나는 겐고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눈씨름은 이제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겐고는 한숨을 쉬었다.
"네 입에서 '그렇군'이니 '그 말이 맞아'라는 소리가 나오는 걸 들으니 짜증이 난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예' 한마디로 넘어간 적이 없었던 남자가."
그렇지는 않다. 남의 이야기는 고분고분 들으려고 마음에 새기고 있다. 뭐, 아직 완벽하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수양 중이니 눈감아줬으면 한다.
나는 내 말투가 차츰 냉소적으로 바뀌는 것을 자각했다.
"짜증 난다면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겠네."
"그건 말실수야.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잖아.”
- 나는 다시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겐고가 불쾌해하는 게 보였다.
"아. 화장실 좀 다녀올게."
"맘대로 해."
- "둔하네. 겐고가 너희한테 코코아를 끓여줬잖아?"
코코아는 끓인다고 하지 않는다. '끓인다'는 표현은 '적신다'는 의미가 있으니 녹차에는 당연히 쓸 수 있고, 커피에도 쓰지 못할 표현은 아니다. 하지만 코코아에는 걸맞지 않다. 물론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이런 걸 '뱃속이 시커멓다'고 한다면 나도 억울하다.
- "코코아, 그것도 우유를 사용한 밀크 코코아라면..."
지사토 선배는 그렇게 말하며 넓은 부엌 전체를 가리키듯 손을 펼쳤다.
"여기에는 당연히 편수 냄비가 있어야만 해."
아아, 무슨 소린가 했더니. 밀크코코아를 만들려면 우유를 데워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유를 데운 냄비가 있어야 마땅하다. 꼭 편수 냄비가 아니더라도 중국 냄비든 솥 냄비든 사용하는 데는 문제가 없겠지만.
- "씻었겠지요."
내가 밑도 끝도 없이 그런 소리를 하자 대뜸 지사토 선배가 나를 손가락질했다.
"둔하다니까! 싱크대는 말라 있다고!"
- 기운이 넘치네...
겐고와 나눈, 솔직히 말해 즐겁지는 않았던 대화 때문에 나는 마음이 조금 상해 있었다. 거기에 지사토 선배의 과도한 기운까지. 스스로도 뜻밖이었지만 의외로 마음이 편해졌다. 쓴웃음이 떠올라, 그 덕분에 우울한 기분은 제법 누그러들었다. 웃음이 좋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종류는 상관이 없는 모양이다.
- "싱크대를 적시지 않고 뜨거운 밀크코코아를 만든다... 그게 가능할까?"
"글쎄요? 겐고가 머리를 굴렸나 보네요."
"그럼 지금 네게 똑같이 해보라고 하면..."
"못 합니다.”
"나도 마찬가지야. 저 애도 그렇고."
손가락질을 받은 '저 애'가 작게 끄덕였다.
- "바보 겐고가 할 수 있는데 우리가 못 하다니 분하지 않아?"
"그건 분하네요."
반사적으로 말해놓고 아차 싶었다. 진심이 새어 나왔다. 오사나이가 나직하고 날카롭게 외쳤다.
"고, 고바토!"
지사토 선배는 대단히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렇지? 그렇지? 그럼 나하고 함께 겐고의 행동을 파헤쳐보자고."
- 일이 묘하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한번 내뱉은 말을 도로 주워 담는 것도 꼴불견이다. 애초에 겐고가 짜낸 꾀라면 머리를 굴리면 충분히 풀 수 있다. 시험 삼아 해볼 만하다.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냄비를 쓰지 않고 우유를 데우면 된다. 이 부엌은 넓지는 않지만 전기 제품은 잘 갖춰져 있다. 당연히 그게 있을 터.
한 바퀴 둘러보자 역시나 있었다. 전자레인지. 생각보다 크다.
- "그래서 전자레인지로 우유를 데웠다고 생각하는 거군. 너는."
어딘가 조롱 어린 말투를 의식하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자레인지를 쓰면 냄비는 필요 없으니까요."
"대신 금속이 아닌 그릇이 필요하지. 세라믹이든 플라스틱이든, 여기에는 이것저것 많지만 말이야. 거기 그릇 정도면 딱이네. 하지만 너 정말 둔하구나? 이걸로 세 번째지만, 싱크대는 말라 있었어."
- 그런가. 별 차이가 없구나.
아니, 꼭 우유를 한꺼번에 데우라는 법은 없다. 나는 손가락을 세 개 세웠다.
"그렇다면 이겁니다. 커피잔을 세 개 준비한다. 우유를 붓는다.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뜨거운 우유 세 잔이 완성되지요."
- "고바토, 우리가 마신 건 그냥 코코아가 아니야..."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다가 깨달았다. 그렇다, 겐고가 우리에게 대접한 건 그냥 코코아가 아니다. '맛있는 코코아'다. 만드는 방법은 방금 들었다. 코코아 가루가 든 컵에 뜨거운 우유를 조금 붓는다.
다시 말해 최종적으로 코코아가 든 그릇과, 거기에 우유를 부을 그릇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싱크대는 말라 있다. 나도 모르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우와..."
- "아니, 네 개면 돼요. 우유를 세 잔 데우고, 그것과는 별개로 ‘맛있는 코코아를 타기 위한 컵'을 준비합니다. 그걸로 코코아 가루를 녹이면 코코아가 한 잔 완성되고, 컵이 하나 비죠. 이걸 세 번 반복하면 세잔의 '맛있는 코코아'가 완성돼요."
또다시 정정이 들어왔다.
"아니야, 고바토. 그렇다면 처음 한 잔을 만든 시점에서 스푼이 젖어버려. 코코아 가루를 봉투에서 세 번 떠내야 하니까, 그렇다면 싱크대에 스푼이 두 개 있어야 해..."
아까까지 소극적인 태도였으면서 오사나이는 지사토 선배가 던진 수수께끼와 내 고집에 어울려줄 모양이다.
- "겐고 성격에, 젖은 스푼을 코코아 가루 속에 넣는 칠칠치 못한 짓쯤이야 하고도 남을 거야."
- 하지만 이곳은 탁 트인 부엌, 오사나이는 어디에도 숨지 못한 대신 몸을 움츠리고 고개를 숙인 채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
"우유를 넣은 커피잔 두 개를 전자레인지에 넣어서 두 잔의 뜨거운 우유를 만드는 거야. 그리고 빈 컵을 또 하나 준비해서, 그 안에서 코코아 가루를 녹여 맛있는 코코아를 두 잔 만들어. 여기까지는 고바토가 처음에 한 설명하고 같아. 그런 다음 그 두 잔에서 3분의 1씩 빈 컵에 따르는 거야. 그러면 세 개의 잔에 세 잔의 맛있는 코코아가 채워져."
그렇다. 하지만...
'하지만' 다음에 이어질 말은 오사나이가 직접 말했다.
"하지만 그러면 어느 컵에도 코코아를 육십육 퍼센트 정도밖에 못 넣어. 우리가 받은 코코아는 세 잔 다 컵에 넘칠 만큼 차 있었어..."
- "그걸 알면서 왜 말하는 거야?"
지사토 선배의 지당한 말에 오사나이는 얼굴을 붉혔다.
"이야기를 이어나가려고..."
애틋하다. 너무나 애틋하다.
내가 마음속으로 감동의 눈물을 쏟아내고 있을 때 지사토 선배가 별안간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지사토 선배는 시키는 대로 우유팩을 만졌다가 손가락을 쑥 거두었다. 예상치 못한 촉감에 신음까지 토해냈다.
"아..."
"뜨겁죠?"
해방감과 성취감. 나는 번지는 미소를 억누를 수 없었다.
겐고는 우유를 팩째 전자레인지에 넣어 가열했던 것이다. 케이크도 구울 수 있는 대형 전자레인지라면 크기도 충분하다. 금속 용기에 들어 있다면 물론 전자레인지로 데울 수 없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종이는 전자파를 차단하지 않는다. 네 번째 젖은 물건은? 정답, 우유팩.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후우, 깊은 한숨이 나왔다. 지사토 선배가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저 게으름뱅이가!"
- 그 후로는 무난한 담소. 오사나이가 있으니 겐고도 민감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너무 늦기 전에 물러났다.
저녁이 되기에는 아직 이른 귀갓길. 나는 지사토 선배의 말을 떠올렸다.
'제법인데, 너! 초등학생 꼬마일 때부터 머리는 잘 돌아간다고 생각했는데. 겐고가 널 걱정하더라. 하고 싶은 말도 하지 않고, 묘하게 체면만 차린다고.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나 보네. 너, 충분히 잘해나가겠어. 꽤 괜찮은 반응이었어. 아주 물 만난 고기 같던데? 사이좋게 지내렴. 바보 같은 동생이지만.'
- 괜찮은 반응. 물 만난 고기. 둘 다 소시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오사나이는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마음 상할 만한 짓이라도 한 걸까? 그런 소시민적인 동요가 이윽고 내게 돌아왔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오사나이가 잠자코 있는 이유를.
- 오사나이의 맨션 앞에서 인사 한마디로 헤어질 분위기다. 이대로 잠자코 돌아가면 월요일에 한층 거북해질 것 같다. 나는 자그마한 뒷모습의 오사나이를 불러 세웠다.
- "괜찮아. 이런 짓은 이제 안 할 거야. 일요일이니까, 조금 들떴던 것뿐이야."
긴 스커트를 펄럭이며 오사나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힘없이. 물론 고등학생 오사나이의 미소는 대개 힘이 없지만.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오사나이."
"우리는 약속을 했어. 하지만 고바토가 어떤 사람이 될지까지 규정한 건 아니야. 오늘 고바토는 처음 만났을 때 같았어. 그쪽이 즐겁다면 그런 고바토가 되면 되잖아. 난 신경 안 써."
- 그렇다. 우리의 상부상조 약속은 그걸 위해 모든 것을 버려야만 할 정도로 우선순위가 높은 것은 아니다. 소시민이 되는 것은 공통의 목적이지만 상대가 그만두겠다고 하면 말릴 이유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그만둘 생각이 없다. 나는 말했다.
"일요일이라 그래. 너무 놀았어. 그뿐이야. 나는 이제 머리싸움은 그만뒀어."
잠시 동안 오사나이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마치 관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을 때, 오사나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사나이가 집으로 사라졌다.
나는 조금 더 거리를 산책하다. 강가를 조금 걸어야겠다.
- 엽록체의 기질로, 암반응인 캘빈벤슨 회로의 기본이 되는 부분을 뭐라고 부를지, 그것이 문제였다. 분명 외웠는데 통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문제만 빼고는 빈칸을 대충 채웠다. DNA 내부의 ATGC 네 종류 단백질로 이루어진 것이 뉴클레오티드였는지 뉴레클오티드였는지 헷갈리거나, 그 밖에도 감과 운에 내맡긴 선택 문제가 있기도 했지만 일단 답은 적어 넣었다. 남은 문제는 정말, 캘빈-벤슨 회로의 기본 하나뿐이다. 첫 한 글자만 알면 대번에 떠오를 것 같은데. 가. 나. 다. 안 되겠다. 시간이 없다. 뛰어넘자. 아. 야. 어. 의미가 없다. 아아, 분명히 외웠는데, 힘내라, 해마. 이어져라. 뉴런. 하는 김에 시간도 멈춰준다면 금상첨화겠다.
하지만 해마도 뉴런도 시간도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종이 울리고 제한 시간 종료.
- 집으로 돌아가 가벼운 점심을 먹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꾸벅꾸벅 졸면서도 설마 잠들 줄은 몰랐는데 전화벨 소리에 눈을 뜨니 삼십 분 가까이 지나 있었다. 깊이 잠들었던지 머리가 이상적으로 맑았다. 지금이라면 스트로마든 스트로마톨라이트든 간단히 기억해 낼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스트로마가 맞다. 캘빈-벤슨 회로. 이미 늦었지만. 아니, 그보다 전화를 받아야지.
가벼운 걸음으로 거실로 나가 따르릉 울려대는 전화를 받았다. 상대는 오사나이였다.
-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 귀에는 오사나이의 말투가 늘 기운이 없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상당히 미묘한 차이가 있다.
"지금 할 일 있어?"
"아니, 없는데."
"그렇구나."
안도한 듯 내쉬는 숨소리.
"저기, 잠깐 나올 수 있어?"
별일도 다 있다. 집으로 돌아간 오사나이가, 마찬가지로 집으로 돌아온 나를 불러내다니. 뭐, 시험도 끝났고 잠도 깼으니 어지간하면 응할 생각으로 밝게 대답했다.
"좋아, 어디?"
- 오사나이는 묘하게 뜸을 들이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험프티 덤프티."
뭐? 수화기를 쥔 손에 무심결에 힘이 들어갔다.
"설마, 험프티 덤프티는 분명..."
"말하지 마. ...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런가, 뭔가 사정이 있는 걸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험프티 덤프티'를 봉인한 것은 오사나이였다. 그런 오사나이가 가기로 결심했다면 내가 말릴 문제는 아니다.
- 봄옷을 입기에는 조금 덥지만 여름옷을 입기에는 조금 추운, 애매한 날씨다. 중간에 지갑이 얇은 걸 깨닫고 은행에 들렀다. 그렇게 볼일도 보면서 느긋하게 갔는데도 붉은 벽돌로 지은 작은 가게 앞에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동백나무 화단으로 둘러싸인 과자집 같은 벽돌 건물. 야트막한 삼각 지붕 위로 튀어나온 굴뚝이 참 앙증맞다. 소시민 남성이 혼자서 들어갈 만한 가게는 아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케이크 가게다. 가게 간판을 보는데 경쾌한 노란 글씨체로 험프티 덤프티라고 적힌 것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케이크숍 험프티 덤프티. 일본어로 바꾸면 엎질러진 물 양과자점이 되려나. 한입의 디저트를 주저하기에 충분히 인상적인 이름이다. 이전의 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 가게도 앨리스였지만 이 동네 디저트 가게 주인이 모두 도지슨의 팬은 아니다. 앨리스에 얽힌 가게 이름은 내가 아는 한 이 두 곳이 전부다. 엄밀히 따지면 험프티 덤프티의 유래도 앨리스가 아니라 머더 구스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카페 재버워커라는 가게가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재미있을 것 같다.
메뉴는 주로 단맛이 강하고, 버터나 브랜디 같은 풍미도 비교적 뚜렷하다. 그렇지만 거칠지도 않은 오묘한 밸런스 때문에 오사나이가 무척 좋아하는 가게다.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과식을 하기 때문에 오사나이는 이 가게에 두 번 다시 오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는데. 참고로 그렇게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먹으러 왔을 때도 나는 따라왔다. 그때 먹어치운 케이크의 부피는 분명 오사나이의 위장보다 컸다.
- 오사나이의 표정은 딱딱했다. 이거 정말 무슨 일이 있었구나.
"가자."
오사나이는 한마디만 하고 재빨리 가게로 들어갔다. 한숨을 쉬며 뒤를 쫓아가려는데 문에 붙은 작은 전단지가 보였다. 금일 2시부터 5시까지 케이크 뷔페 1인 1500엔.
그래, 뷔페였구나...
- "나, 스탠더드 시폰 케이크하고 커피."
먼저 시폰 케이크로 준비 운동인가 했는데.
"... 그리고 밀푀유하고 판나코타 하고 딸기 쇼트 케이크."
다짜고짜 전력질주입니까.
나는 우선 커피를 시키고, 함께 왔으니 케이크도 먹어야 할 것 같아 몽블랑을 주문했다. 두 개까지는 먹지 못할 테니 뷔페가 아니라 단품으로 시켰다. 2인용 테이블에 앉은 뒤에야 밤이 나올 철도 아닌데 이왕 시키는 거 계절에 맞는 케이크를 시킬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오사나이가 굳이 같은 딸기가 들어가는 밀푀유와 쇼트 케이크를 주문한 이유는 그런 생각 때문이었나. 심오하다.
-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즉답. 밀푀유 조각을 푹 찌르는 오사나이. 물론 오사나이는 내가 어떤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고 있다. 그래서 나를 부른 것이다. 혼자서 케이크 가게에 들어가지 못할 만큼 오사나이는 주변 없는 아이가 아니다. 하지만 순순히 털어놓을 마음은 없는 모양이다. 내가 눈치가 없었다. 커피를 홀짝 삼켰다.
- "교실 뒤 사물함에서 영양제병이 떨어져 깨지는 바람에 쨍그랑하고 큰 소리가 났어. ... 그래서 전부 잊어버렸어. 시험이 끝난 뒤에 치우느라 고생했어. 빈 병이었지만."
"고생했겠다."
오사나이는 또 눈을 흘깃 치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속내를 살피듯이 가만히. 그리고 내 말이 더 이어지지 않을 것을 알았는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왠지 슬퍼져서... 고바토를 찾았어."
- 왠지 이야기가 비약한 것 같은데.
하지만 조금 생각하니 설명이 부족할 뿐이지 비약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쨌든 오사나이는 '슬퍼져서' 나를 찾은 건 아니다. 내기를 해도 좋다. 그녀의 본심은 '화가 나서'가 맞다. 절대 그렇게 말하지 않겠지만.
나는 시치미를 뗐다.
"어, 시험이 끝나고 계속 찾았어?"
"응."
세상에, 그랬구나. 그렇다면 어쩌면 오사나이는 점심도 안 먹었을지 모른다. 술 들어가는 배가 따로 있고, 장기를 두는 머리가 따로 있고, 디저트가 들어가는 배가 따로 있다지만, 배를 곯은 오사나이가 케이크 뷔페에 도전하고 있는 거라면 이 결말은 흥미진진하다. 아니, 그건 됐고.
- "찾으려면 휴대전화로 문자라도 보내지 그랬어."
그러자 오사나이는 원망스러운 듯이 중얼거렸다.
"보냈어. 답장은 못 받았지만."
"어?"
황급히 주머니를 뒤졌다. 없다. 어디에도. 생각해 보니 교복주머니에서 꺼낸 기억이 없다. 아니, 주머니 속에 있기는 한가? ... 아아, 그런가.
"아, 휴대전화, 학교에 있어."
"그래?"
"응. 시험 전에 전원을 끄고 책상 속에 넣었는데 잊고 있었네."
- 오사나이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 가지러 갈 거야?"
으음.
뭐, 상관없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잠깐 다녀올게."
"난 여기서 케이크 먹고 있을게."
오사나이는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시폰케이크 조각을 자르기 시작했다. 달콤한 디저트에 탐닉하는 오사나이를 구경하는 것도 어떤 의미로는 재미있지만 지금은 빨리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와야겠다.
간단한 일이다. 내 생각에 이건 현장 검증으로 해결될 일이다.
- 보는 사람이 없다고 이렇게 내 생각을 증명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만 봐도 나는 정말 수양이 부족하다.
어딘가에 증거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시험 중에 떨어진 병이 가지는 의미를 알려줄 증거가 내 생각이 옳다면 증거를 처분할 만한 시간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처분했으리라는 법은 없다. 범인이 자만하거나 방심했다면 뭔가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범인이 있다.
오사나이는 그것을 알고 있다.
- 그런데 병은 왜 깨졌을까? ... 깨지도록 조작했기 때문이다.
일단 뚜껑을 벗겨야 한다. 어린 시절 장난으로 배운 경험에 의하면 병은 뚜껑의 유무만으로도 강도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리고 흠집을 낼 필요가 있다. 가급적 금을 내놓는 게 좋지만, 입맛에 맞게 금을 내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한번 깬 병을 접착제로 붙여두는 게 더 쉬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병은 자연 낙하로 자연히 깨진 게 아니다. 작위적으로 깨진 거라면 떨어진 것도 작위적이란 뜻이다.
시험 중에 병이 떨어져 깨지도록 누가 꾸민 것이다. 오사나이는 그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걸 알고 누군가 시험을 방해한 사실에 화를 내며 험프티 덤프티의 금기를 깬 것이다.
- 다만 오사나이는 누가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나를 부른 것이다. 그렇지만 자기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불러내서 하소연하는 짓은 하지 않기로 약속한 바 있다. 우리는, 소시민이니까. 그래서 나를 불러내 이야기를 유도해서 때를 보아 상황을 설명하고... 그리고 어쩔 작정이었을까?
- 사각지대에 붙여 놓았으니 이것도 들킬 리 없다. 범인의 심정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입학 후 첫 시험에서 너무 나쁜 점수를 받고 싶지 않은 마음은 굳이 소시민이 아니더라도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뭐, 시시한 장난질이긴 하지만.
나머지는 적당한 타이밍에 병을 떨어뜨릴 방법인데, 사실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휴대전화를 갖고 있다. 주머니에 숨겨놓고 타이밍을 맞춰 전화를 건다. 전화는 사물함 속. 진동이 울리면 미묘한 균형이 무너져 병이 떨어진다. 예를 든다면 그런 장치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얼음이나 드라이아이스를 써도 상관없지만.
-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아무리 오사나이라 해도 가게를 떠났을지 모른다. 문자를 보냈다.
[아직 케이크 가게?]
신호가 바뀌기 전에 답장이 왔다.
[지금 호박 푸딩.]
그러니까 그 후 시폰 케이크와 쇼트 케이크를 해치우고도 부족했단 말이군. 대단하다.
- 지금 접시에 놓인 몫까지는 자신 있다는 뜻이리라. 모름지기 뷔페에 도전하려는 자는 이런 자세여야 한다. 오사나이는 표면에 잼이 탐스럽게 발린 구운 치즈 케이크에 가만히 포크를 찔러 넣었다.
"... 그래서?"
오사나이가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내게 던진 질문인 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단도직입적으로 성과를 묻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나는 일단 어중간한 미소로 둘러대기로 했다.
"뭐가?"
아주 잠깐이었지만, 오사나이는 나를 노려보았다. 시치미 떼지 마, 이 자식아, 이건가. 하지만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오사나이의 시선은 금세 부드러운 케이크로 돌아갔다.
- 한 박자 침묵. 포크가 접시에 닿는 찰그랑 소리가 묘하게 크게 들렸다. 잘라낸 한 조각을 입으로 가져간 오사나이는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이윽고 내게 항복할 기미가 없다는 걸 깨달은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 아무것도 아니야."
알면 됐다. 오사나이가 음료수 병을 떨어뜨린 범인이 궁금하다고 말하면 오사나이가 약속을 깨는 셈이고, 만일 내가 진상에 관한 증거를 확인했다는 걸 알게 되면 내가 약속을 깨는 셈이다. 틈을 봐서 추리를 시킬 셈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는 안 된다. 약속을 한 이상 내가 오사나이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푸념을 들어주는 것 정도다.
- 나와 오사나이는 약속을 했다. 서로 상대방에게 달아날 길을 터주기로. 나는 더 이상 교활한 꾀를 부리지 않기 위해 달아나기로 했다. 마찬가지로 오사나이에게도 이유가 있다. 겐고는 내가 변했다고 화를 냈지만 오사나이도 예전에는 지금과 달랐다. 소시민이 되겠다고 맹세한 건 오사나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소시민은 사적인 이유로 시험을 방해받았다 해도 언제까지고 원망하지 않는다. 오사나이는 변했다.
케이크 소비량은 변하지 않았지만. 아니, 오히려 늘었지만.
- 그렇다고 해서 갑갑함을 견디지 못해 튀는 일도 없이 눈에 띄지 않게 수수한 나날을 보내기를 하루하루의 목표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나도 자발적으로 소시민을 꿈꾸지만 그런 방면의 노력은 오사나이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집단에 파묻히려는 내 노력을 '소극적'이라고 표현한다면 오사나이의 노력은 '둔갑술'이다.
- 가느다란 목소리로 그렇게 말은 했지만 오사나이도 그게 가능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후나도 고등학교 등록 스티커가 붙어 있는 자전거가 버려져 있다고 불편 신고가 들어왔대. 그래서 혼났어. 관리가 소홀하다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소리는 전에도 들었잖아."
"그치."
며칠 전 호출로 후나도 고등학교 학생 지도부도 학교 스티커가 붙은 오사나이의 자전거가 도난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걸 알면서도 굳이 관리 책임을 들먹이다니 말도 안 되는 억지다. 하지만 오사나이는 그 부조리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당연한 일이다. 부조리를 흘려 넘기는 것은 소시민의 최고 덕목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사나이의 표정이 어두운 이유는, 그것이 자전거 도난과 얽혀 있다고 가정하는 이상 한 가지밖에 짐작가지 않는다.
- "바퀴 하나로 끝났으니 다행이잖아."
오사나이는 거의 광대처럼 부자연스럽게 호들갑을 떠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집게손가락을 조용히 들어 앞바퀴를 가리켰다. 딱히 문제는 없는 것 같았지만 말로 하기 전에 자세히 살펴보았다.
"... 그렇구나."
앞바퀴도 망가졌다. 림은 괜찮았지만 바퀴살이 몇 개 휘었다. 하지만 탈 때 조금 불편할 수는 있어도 그리 심각한 고장은 아니다.
- "휜 건 괜찮아. 그런데 저거 발자국이야."
분명 몇 개의 바퀴살에 한 번에 충격을 가한 느낌이다. 진흙도 묻어 있다. 듣고 보니 자전거를 옆으로 쓰러뜨려놓고 밟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셜록 홈스라면 이 진흙을 보고 사카가미가 어디를 지나왔는지 맞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정도는 아니다.
오늘 오사나이는 평소보다 더 눈썰미가 좋았다. 이어서 자기 발밑을 가리키며 얼른 보라고 채근했다.
- "고바토. 어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째서 내 자전거가 이런..."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럴 필요가 없는 일에는 교활한 소리를 하지 않는다. 그건 오사나이도, 아니 오사나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묻는 걸로 보아 분명 추측이라도 상관없으니 경위를 이해해야만 마음이 풀릴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망가진 자전거를 보고 몸을 돌려 언덕을 본 다음, 어제 본 사카가미의 모습을 떠올렸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비교적 명료했다. 나는 방금 전까지의 고의적인 호들갑을 버리고 평소 말투로 설명했다.
"그래, 대충 이렇게 된 일이겠지."
- "어제 본 대로 사카가미는 상당히 서두르고 있었어. 헐레벌떡 이 언덕을 오르는데 중간에 무리하게 변속이라도 했는지 체인이 벗겨진 거야. 이 비탈은 꼭 자전거를 끌고 가야 할 만큼 가파르지는 않으니까. 바쁜데 체인이 풀렸으니 사카가미는 짜증이 났겠지. 하지만 거기서 자전거를 내팽개치지는 않았어. 그렇게 단순한 일은 아니라는 뜻이겠지. 체인이 풀린 자전거는 오르막이나 평지를 오를 때는 쓸모가 없지만, 내리막을 내려갈 때는 유용해. 언덕 꼭대기에서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 힘껏 비탈을 내려갔겠지. 내리막 끝에서 여기까지는 오십 미터쯤 될까? 속도가 줄어들어 달리는 게 더 빠르겠다 싶자 사카가미는 자전거를 내팽개쳤어. 그게 이 지점이야. 그러고는... 급한데 고장 난 자전거에 화풀이를 한 거야.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퀴살을 냅다 짓밟은 거지. 그리고 이번에는 제 발로 뛰어갔을 거야. 이 길, 저쪽으로."
-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금 내가 가리킨, 길 반대편을 살펴보기 위해.
그러다가 바로 깨달았다. 국도에서 벗어나 언덕을 하나 넘은 이 주변에 보이는 것은 논, 논, 논, 드물게 밭, 비닐하우스, 그리고 농기구 창고가 몇 개. 길은 눈앞에서 바로 T자형교차로에 접어들어, 오른쪽으로 가면 이윽고 본격적으로 산을 넘어가는 길이 나오고, 왼쪽 길은 전원 지대를 품고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이윽고 마을로 돌아간다. 당황해서 말문이 막힌 나를 대신해 오사나이가 말했다.
"어딜 가느라? 설마 농사에 몸을 바친 것도 아닐 텐데."
무심하면서도 조롱 섞인 오사나이의 말투에 나는 움찔 놀랐다. 오사나이는 자기가 타고 온 모스그린 자전거에 팔꿈치를 얹고 약간 비스듬한 자세로 서 있었다. 입가에는 흐릿한 미소. 방금 떨쳐냈던 불길한 예감이 다시 돌아왔다. 원래가 빈말로도 표리일체라고 할 수 없는 오사나이지만 분위기가 다소 험악했다.
- "분한 마음도 이해는 하지만 자전거도 이렇게 돌아왔으니 그만 돌아가자."
그러나 돌아온 것은 묘한 대답이었다.
"분하지는 않아. ... 그리고 삼분 삼십 초만 더 있을 거야."
그래, 좋아. 그 정도라면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답하려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분 삼십 초? 무슨 일이 있어?"
오사나이는 길 좌우를 살피고 있었다. 학교에서 보는, 어떤 사태에서도 당장 달아날 수 있도록 주위를 경계하는 눈빛과는 전혀 딴판이다. 싸늘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빈틈없고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삼분 삼십 초 후면, 어제 고바토하고 그 모습을 본 시간이거든."
- 오사나이는 딱히 초조해하는 기색 없이 몹시 태연하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다시금 위화감을 느꼈다. 교묘한 유도에 걸려 그만 어제 일어난 일에 대해 이런저런 추리를 하고 말았지만. ... 오사나이의 태도가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차분히 생각해 보면 오사나이가 지금 표방하는 입장이라면 '어머나, 남의 자전거를 훔치고, 그걸 내팽개쳐 망가뜨리다니 너무해! 하지만 이렇게 되찾았으니 이젠 됐어. 수리비는 조금 속상하지만' 이 정도 태도가 타당하다. 어째서 사카가미의 행동에 저렇게 집착하는 걸까?
- "나 참. 하지만 뭐, 이걸로 결론이 났네. 끝났어. 그만 돌아가자. 자전거는 어쩔래? 고칠 거지? 괜찮으면 체인만이라도 고쳐줄까?"
그 말에 버스가 달려간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오사나이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해맑게 웃었다. 아무런 근심도 없는 아름다운 미소. ... 나는 오싹했다. 후지산은 아름답다. 옐로스톤 국립공원도 아름답다. 하지만 옐로스톤 공원에 후지산이 솟아 있다면 오싹할 것이다. 그런 감각.
아니, 이건 예전에 보았던 미소다. 그렇기에 오싹했다.
"끝났다고? 아니, 고바토. 이제 시작인걸. 모처럼 꼬리를 잡았잖아."
- "안 돼, 오사나이. 도둑맞은 물건은 돌아왔잖아. 만족해야 해. 그 이상 생각해서는 안 돼. 흘려보내. 소시민이 되겠다고 약속했잖아. 소시민이라면 여기서 억울함을 참아야 해."
나는 손을 펼쳐 열심히 호소했다. 오사나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 응. 하지만 난..."
"참아. 지금이 참아야 할 때야."
오사나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더니 자기가 타고 온 자전거를 보고, 도난당해 망가져서 돌아온 자전거를 보고, 다시 버스가 지나간 방향을 보았다.
- "고바토는 소시민에게 가장 소중한 덕목이 뭐라고 생각해?"
단박에 대답했다.
"현재 상황에 만족할 것."
오사나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소시민에게 가장 소중한 건... 사유재산의 보전이야."
- 오사나이는 착각하고 있다. 우리가 지향하는 소시민은 그런 복수심을 품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오사나이를 막지 못했다.
막지 못한 이상 차라리 도우려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도 거부당했다. 우리는 피신을 돕겠다는 약속은 했지만, 공격을 돕겠다는 맹세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사나이와 나는 상부상조하는 사이지만 의존하는 관계는 아니다. 어느 한쪽이 무엇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을 때를 제외하면 우리는 단순한 지인에 지나지 않는다. 오사나이는 그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했다.
요컨대, 이렇게 말한 것이다.
"고바토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참견 마."
-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다. 확실히 오사나이가 자전거 도둑에게 어떤 복수의 철퇴를 내리든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 만일 복수에 실패해서 오사나이가 궁지에 몰린다 해도 자업자득이다. 역시 내가 도와줄 이유는 없다.
그렇게 치부할 수 있는 문제인지 나는 잠시 검토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 문제에서 오사나이의 '실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민해봐야 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굉장히 불길한 예감이.
- "다행으로 끝날 얘기라면 날 부르지 않았겠지?"
"정답."
헛기침 한 번.
"오사나이가 자전거 도둑한테 복수를 하려고 해."
겐고는 물고기가 하늘을 날았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귀신에 홀렸다는 건 이런 표정을 가리키는 건지도 모른다. 겐고가 곧바로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그거 멋지네. 남의 물건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그 멍청이한테 가르쳐 줘."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겐고가 웃음을 거두기를 기다렸다.
"... 웃을 일이 아니야. 겐고라면 여차해도 엉터리 권법으로 혼쭐을 내줄 수 있겠지. 나라도 간신히 어떻게든 될지도 몰라. 하지만 오사나이라고. 상대가 적반하장으로 나오면 그대로 끝장이야."
- 그리고 뭔가 깨달은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었다.
"설마 나더러 경호원 노릇을 하라는 건 아니겠지?"
"크게 보면 그런 셈인데."
"오사나이가 부탁한 거야?"
말문이 탁 막혔다.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지만 금방 들킬 일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대답했다.
"아니, 내 독단이야."
겐고가 입을 벙긋 뗐다. 아마도 그럼 자기가 나설 일이 아니라고 말하려 했을 것이다. 나는 틈을 주지 않고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 "오사나이에게 위험이 닥쳤다고 판단할 만한 이유 말이야."
위험이라는 단어에 중대성을 느꼈는지 겐고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말해 봐."
나는 우물거렸다. 실수했다. 표현이 서툴렀다. 이래서야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는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 그건 내가 가장 하고 싶지 않은 행동이었다. 솔직히 아직 그 이유를 완벽하게 추리해내지 못했다. 지금은 대강 설명하고 유사시에 겐고의 도움을 확보하기만 해도 됐다.
아니, 아직 둘러댈 여지가 있으려나?
- 겐고가 내 눈을 지긋이 들여다보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짧게 깎은 머리카락을 쓱쓱 문지르며 겐고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넌 짜증 나는 놈이었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었지. 머리를 좀 쓸 줄 안다고 으스대기나 하고."
... 옛날 일이다.
겐고는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그런데 지금 한 이야기는 뭐야? 어설퍼도 정도가 있지. 그럴 의도는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네가 하려는 게 '마음대로 사람을 조종하는 짓'이라는 걸 몰라?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똑바로 말해. 말을 못 하겠으면 부탁도 하지 마. 이런 어중간한 얘기를 듣고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할지도 모를 일을 부탁하다니 너무 뻔뻔한 것 아니야?"
- 나는 머리를 싸맸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싸맸다. 겐고는 둔하지만 바보가 아니다. 사람은 좋지만 얼간이는 아니다. 나는 아직 어딘가 내 지혜를 자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겐고의 반박은 타당하다. 요컨대 나는 겐고를 우습게 봤던 것이다.
- "할 얘기가 그것뿐이라면 난 그만 간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겐고를 무의식적으로 불러 세웠다. 겐고는 그런 나를 시험하듯 가만히 쳐다보더니 천천히 팔짱을 꼈다.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 그렇다고 말해. 지금은 말할 수 없으니 다 끝난 뒤에 설명하겠다고, 그렇게 말하면 되잖아?"
"그런 사정은 없어. 솔직히 말해서 아직 전부 파악하지 못했거든."
"그럼 파악이든 뭐든 한 다음에 말해."
- "생각하는 바가 있지? 그걸 알아낼 자신도 있잖아? 그런데 왜 안 해? 그런 건 네가 좋아하는 상황이잖아."
"좋아했던 상황이지."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만만했던 예전의 나를 아는 상대 앞에서는 아무래도 입장이 약하다. 길은 세 가지. 겐고의 조력을 포기하거나 여기서 목청껏 추리를 늘어놓거나, 그도 아니면.
나는 세 번째 길을 택했다.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자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는 싫어. 그런 걸 좋아했던 때를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이 끼쳐."
- "실은 있어. 흔해 빠진 트라우마가. 정확하게 삼 연발. 카운터로 스트레이트를 얻어맞고, 로프에서 튕겨나가 훅을 얻어맞고, 쓰러지는 순간에 어퍼컷을 먹었지."
겐고는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용케 살아남았네."
"살아남았지. 하지만 완벽한 녹다운이었어. 나는 영악했지. 하지만 그건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걸 통감했어. 다시는 자만심에 빠져 머리를 굴리지 않겠다고 결심하기에 충분한 타격이었어."
"난 그런 두루뭉술한 소리는 못 알아들어. 구체적으로 말할 생각은 없어?"
-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 하지만 대충 그런 식이었어. 거드름을 피우다가 때를 놓쳐서 괜한 원망을 샀어. 사람들의 환상을 깨서 울리기만 했지, 무엇 하나 호전되지 않았어. 자신 있게 떠벌렸다가 압도적으로 눌렸어. 흔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럴지도 몰라. 게다가 그런 것보다 더 충격이었던 건 따로 있어. 난 깨달았던 거야. 누군가가 열심히 생각했는데도 풀리지 않아서 고민하던 문제를 옆에서 끼어들어 풀어버리는 상대를 환영하는 사람은 얼마 안 돼. 고마워하는 사람은 훨씬 적어. 그보다 경원당하거나 미움을 사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걸 깨달았지!"
"그렇지 않아. 네 착각 아니야?"
"너는 이해 못 할지도 몰라. 너도 네 누나도 너그러운 사람이니까. 내가 조금 영악한 걸 알고 이런저런 부탁을 하지. 해결하면 굉장하다고 칭찬해 줘. 하지만 너도 알고 있지? 그런 사람은 소수야. 겐고, 그림 사건 때 가쓰베 선배가 내게 고마워했을 것 같아? 감사는 바라지도 않아. 좋아서 한 일이니까. 하지만 불쾌한 표정을 짓다니 너무하잖아. 대놓고 괜한 참견 말라는 소리를 들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야. 네 말투가 잘못되었다. 배려심이 부족하다는 말도 들었어. 그럴지도 모르지. 유치원 때부터 남들보다 먼저 상황의 진상을 꿰뚫어 봤으니 비뚤어질 만도 하잖아. 그렇다고 어쩌란 거야?"
- 입안이 바짝바짝 타서 불쾌했다.
"행복을 가져다주는 파랑새는 가까이 있었다는 이야기처럼, 괜한 생각을 할 바에야 아무 재주 없이 현재 상황에 만족하는 소시민을 지향하기로 결심했어. 그걸 비판하고 속이 시커멓다고 하면 나더러 어쩌란 거야!"
아차. 목소리가 조금 컸던 모양이다. 아직 학생들이 많이 남아 있는 방과 후 교실에서 전압이 상승하고 말았다. 진정하자.
... 오케이, 미소 복구 완료.
"뭐, 그런 사정이니 이쯤에서 봐주면 안 될까?"
- 지금 털어놓은 이야기는 군데군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진실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진실을 털어놓은 건 손익 계산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남들 앞에서 탐정 노릇을 할 바에야 이쪽의 약점을 드러내고 동정을 사겠다는, 요컨대 눈물 작전을 쓴 것이다.
- 그리고 나는 또다시 오판했다. 그것도 두 가지나. 한 가지는 겐고가 그런 비굴한 태도를 싫어한다는 사실. 또 한 가지는 눈물 작전을 쓰려면 애절한 목소리를 냈어야 했는데, 그러기에는 아직 내 자존심이 너무 세다는 사실이다. 본성은 너무 드러났고, 연기는 너무 어설펐다. 그래서야 생각대로 될 리가 없다.
겐고는 의연하게 내 책략을 맞받아쳤다.
"그럼 더더욱 고민해야지. 넌 그러는 게 어울려."
- "네가 속내를 털어놓은 것 같으니 나도 똑바로 말하마. 다운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난 지금 너처럼 뒤에서 구질구질하게 구는 녀석하고는 어울리고 싶지 않아. 옛날 인연으로 이 자리에 오기는 했지만 지금 아무 말도 안 하면 다음은 없을 줄 알아. 예전의 넌 짜증 나는 놈이었지만 난 싫지 않았어. ... 소시민 같은 게 되고 싶다면 그러지 그래? 하지만 나는 그런 녀석의 부탁을 들어주긴 싫어."
나는 얼간이처럼 입을 떡 벌렸다. 아니, 뭐라고 해야 하나. 정말이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잘도 저런 소리를. 한참 겐고를 바라보던 나는 겐고가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게 아니라 저 어색하게 뚱한 표정이 민망함을 감추려는 가면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겐고는 울컥했지만 이윽고 실실거리더니 웃음을 참느라 끙끙거렸다.
"거참. 까다롭네, 겐고. 이쪽 사정도 좀 봐줘야지."
"미안하게 됐군, 조고로, 솔직함이 장점이라."
- "겐고, 난 이제부터 도박을 할 거야. 오사나이한테 전화해서 이번 문제에서 손을 떼라는 말을 들으면 그걸로 그만. 그게 불가능하면 미약한 지혜를 짜내서 오사나이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말로 설명할게."
- 사태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
초인적인 관찰력과 추리력을 갖춘 인물이 비약적으로 결론에 도달하고, 비약적이기에 보통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심하는 이야기는 몇 번 읽은 적이 있다. 이 몸은 다행히도 관찰력도 추리력도 초인 수준이 아니다. 비약적이지 않은 대신 추리 과정 자체가 설명이 될 터. 연쇄 추리의 결과,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거나 제자리를 빙빙 돌지도 모르지만 내 머리를 믿을 수밖에 없다. 밑져야 본전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생각하게 조금 기다려달라는 말로 시간을 벌었다. 이마에 주먹을 대고 고민하는 나를 겐고는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 "알았어. 그건 네 말이 맞아. 이야기를 방해했네."
나는 살짝 웃었다.
"아니. 그런 검증이 중간에 있으면 여러모로 편해. 오사나이의 안위가 걸려 있으니 실수하지 않도록 엄밀히 따져주면 나도 고맙지."
겐고는 팔짱을 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분명 그렇다.
하지만 나는 '사카가미는 면허를 따려고 한다'는 결론에서 더욱 큰 의혹을 느꼈다. 면밀히 따져보았지만, 사카가미가 자동차학원 버스를 탔다고 생각한 시점에서 여기까지는 자동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이다. 겐고의 말처럼 '그게 무슨 문제'라는 건가?
그게 무슨 문제인가 하면...
- "첫 번째 차량 운전 허가를 얻기 위해. 두 번째, 신분증을 입수하기 위해. 여기에 추가할 세 번째, 네 번째 이유가 있을까?"
겐고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어. 두 가지 중에서 고르라면 당연히 전자겠지."
"'당연히 무엇이다'라고 말할 때, 그건 대체로 당연하지 않아."
나는 격언 같은 소리를 아무렇게나 지껄이며 말을 이었다.
- "십중팔구 교칙에 걸리지는 않을 거야. 게다가 사람을 겉보기로 판단하면 안 되지만 사카가미는 면허를 따면 안 된다는 교칙이 있다고 해서 주저할 타입은 아니겠지."
흠. 하고 겐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보류라는 걸까? 나는 원래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래서 아까 하던 이야기인데, 사카가미가 그저 평범하게 면허를 따려고 했다는 결론에는 의문이 남아. ... 조금 시간을 주지 않겠어?"
그 의문이라는 건 사카가미가 성실하게 면허를 따려고 했다고 생각하기 싫은 심리적 반발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가급적 그런 편견을 배제하려 했다. 어차피 그럴 리 없으니까, 어차피 그럴 테니까, 그런 소리를 하면 탐정 노릇도 할 수 없다. 편한 길을 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탐정은 참으로 소시민과 거리가 멀다.
- 이분, 삼분. 지루할 텐데도 겐고는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고마운 남자다.
머릿속에서 정보가 소용돌이친다. 정리한다. 의미를 부여한다. 이럴 때의 나를 오사나이는 종종 즐거워 보인다고 평했다. 이윽고 생각이 정리되었다. 의문점은 세 가지.
- "당연히 무엇이다'라고 말할 때, 그건 대체로 당연하지 않아."
"남의 말 가로채지 마. 흔하고 통속적인, 시시한 격언일 뿐이야. 만약 추리가 의심스럽다면 채점해주지 않을래? 의심스러운 부분과 믿을 만한 부분을 비율로."
"비율이라고?"
겐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6.5 대 3.5로 믿을만해."
- "이렇게 생각하면 자연스러워. 사카가미는 자기보다 서열이 높은 누군가의 지시로 면허를 따려는 거야."
겐고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팔짱을 힘껏 꼈다.
"누군가라고? 그런 짓을 왜 해?"
나는 깜짝 놀랐다. 이상하다, 서열이 높은 누군가라니,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을까? 나는 서열이 높은 누군가가 얽혀 있다고 직감한 걸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카가미 패거리에서 홀로 곱상해 보이던 남자... 아니, 아무런 증거나 논거가 없다면 지금은 생각할 때가 아니다. 나는 말을 흐렸다.
"아니, 뭐, 말이 그렇다는 거야. 어쨌든 판단 좀 해줘. 자전거 도둑의 성실한 태도가 의심스러운지 의심스럽지 않은지."
가벼운 한숨.
"그래. 7대 3으로 의심스럽지 않아."
(리뷰자 주 : '7대 3으로 의심스럽다'여야 의미가 맞다.)
- "내 의문은 그 세 가지야. 그럼 네 생각에 사카가미가 얼마나 의심스러운지 잠깐 계산해 볼까?"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메뉴에서 전자계산기를 선택했다.
- 하지만 나는 굳이 그 점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연령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육십오 퍼센트와 칠십 퍼센트라면 확신은 오십 퍼센트를 넘는다. 반반의 확률로 오사나이가 위험하다면, 나는 당연히 움직일 테고 겐고도 힘을 빌려줄 것이다. 그런데 덫을 쳤으니 재수 없는 놈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도 어쩌면 자업자득이다. 몹쓸 근성이다. 소시민으로 향하는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 살짝 축였다. 이제부터가 클라이맥스인가. 머릿속이 차갑게 얼어붙는다. 자주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이다. 입은 돌아가지만 혀가 둔하게 굴러갔다.
- "잠깐 기다려."
겐고가 도통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말하는 오사나이란 그 오사나이를 말하는 거지? 아직 성밖에 모르지만, 요전에 우리 집에 왔던 여자애. 그... 뭐랄까, 소극적인 태도가 사람의 탈을 뒤집어쓴 듯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오사나이 유키 맞아."
"그런데 목덜미를 물어뜯는다느니 협박해서 돈을 뜯어낸다느니."
내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갔다.
- "이건 비밀인데, 오사나이도 마찬가지야. 둘이서 소시민의 꿈을 이루자고 맹세했어. 다만 오사나이가 버리려 했던 건 영악함이 아니야."
주위를 살폈다. 오사나이는 소리도 없이 뒤에 나타난다. 괜찮다. 없다. 그래도 목소리를 낮추었다.
"내가 옛날에 여우였다면, 오사나이는 늑대였어."
- 떡 벌어진 입이 겐고의 심정을 여실히 대변해주고 있었다.
"요즘의 오사나이는 기껏해야 달콤한 디저트를 마주했을 때나 기쁜 표정을 짓지만, 전에는 달랐어. 오사나이는 자기한테 위해를 가하는 상대를 철저하게 짓밟을 때 가장 즐거워 보였지."
오사나이를 건드린 사람이 어떤 카운터펀치를 먹었는지, 그 공격을 위해 오사나이가 얼마나 교묘하게 움직였는지, 그걸 겐고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 말로 충분하다. 사실 나도 전부는 알지 못한다.
- 자전거를 도둑맞은 것도, 그게 망가진 것도, 어쩌면 봄철한정 딸기 타르트를 먹지 못한 것도 사실은 오사나이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 사건의 정말 중요한 측면은, 오사나이에게 복수를 꾀할 대의명분을 주었다는 점이다. 오사나이는 오랜만에 짜낸 복수 계획에 설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소시민이 되기로 결심했다. 나는 영악함을 버리겠노라 결심했다. 그리고 오사나이는 강한 집념을 버리겠노라 결심했다. 자전거를 도둑맞은 이튿날, 오사나이는 지금은 생각할 거리가 있는 게 마음 편하다며 어울리지도 않게 나를 도와주었다. 그건 사건의 충격을 잊기 위해 다른 문제를 생각하려던 게 아니었다. 오사나이는 그렇게 기특한 아이가 아니다.
그날, 오사나이가 잊으려고 애썼던 것은 복수를 꾀하고 그걸 기뻐하는 자신의 성향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 겐고는 자기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고 했다. 그것도 좋겠지. 오사나이도 분명 그 편을 고마워할 것이다. 중요한 건 오사나이의 과거가 아니다. 그 애의 현재 상황이다. 나는 겐고의 동요가 가라앉기를 기다려 말을 이었다.
"어쨌든 오사나이는 위험한 놈들에게 접근하고 있어. 아까 계산한 수치로는 구십이 퍼센트였지?"
- "조금 정리할 시간을 줘."
나는 그러라고 입을 다물었다. 겐고는 계속 끼고 있던 팔을 풀어 피가 통하게 두어 번 흔들더니 다시 팔짱을 꼈다. 눈살을 찌푸리고 곰곰이 생각하는 기색이다.
겐고는 아무 생각도 할 필요가 없다. 방금 전 내 추리가 사실인지 아닌지 검증하지 않아도 대충 받아들인 뒤에 내가 실제로 도움을 청하면 그때 생각해도 될 일이다. 하지만 받아들인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는 것이리라. 이러니 의지하게 된다. 나는 몇 가지 측면에서 겐고를 얕보고 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측면에서 그를 인정하고 있다. 그건 아마 겐고도 알고 있을 것이다.
- "그쪽에 맡기면 확실하거든. 그나저나 사카가미가 아니야. 오사나이가 선수를 쳤어."
뭐라고?
"어제 오사나이가 똑같은 부탁을 했대. 멍청한 누나, 오사나이가 너한테서 사카가미로 갈아탄 줄 알고 불쌍해하더라."
웃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사토 선배의 착각이 아니라 오사나이의 행동력에.
"오사나이가 지사토 선배하고 그렇게 사이가 좋은 줄은 몰랐네."
"아니. 누나 기준으로는 한마디 말을 나눠본 사이는 다 친구야. 너희는 집에도 왔었으니 절친 취급일걸."
뭐, 사실 집에 찾아가기만 한 사이도 아니지만 지사토 선배와 오사나이와 나는 함께 '겐고의 도전'을 물리친 사이다.
- 체온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상을 감지했는지 겐고가 다가왔다.
"왜 그래?"
"아니... 모르겠어. 이게 뭐지?"
화면에는 오사나이가 보낸 문자. 거기에는 아무 내용도 없었다. 제목도 없고, 내용은 URL 한 줄뿐. 그 URL로 들어가 보니 빈 페이지였다.
그냥 빈 문자라면 괜찮다. 하지만 무슨 이유로 이런 짓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꾸 나쁜 방향으로 연상이 된다. 나는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설마 문자를 치고 싶어도 칠 수 없는 상황인 건..."
- 그 말을 들은 겐고의 판단은 재빨랐다.
"조고로, 너 학교엔 걸어왔어?"
"아, 응."
"그래? 그럼 둘이 타야겠군. 기라 북부 자동차 학원이지? 가자!"
- 그 말만 남기고 겐고는 교실을 박차고 나갔다.
아니, 사실 겐고가 정말로 교실을 박차고 나갔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왜냐면 겐고보다 내가 한발 먼저 뛰쳐나갔기 때문이다.
- 가장 위험한 순간에 나는 오사나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어느 한쪽이 달아날 때는 다른 한쪽이 방패막이가 되기로 했다. 그런데...
아니, 아직 결론이 난 건 아니다. 오사나이가 보낸 빈 문자에 나는 상상도 하지 못할 뭔가 심오한 의미가 있거나, 그도 아니면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만큼 여우도 뭣도 아닌 그냥 얼간이라 아까 세운 추리 자체가 완전히 빗나갔을지도 모른다.
- "올 거야. 버스가 와. 나한테 맡기고 자전거나 묶어놔."
말하는 사이 길 저편에서 눈에 익은 셔틀버스가 나타났다. 나는 가방을 가슴에 품고 버스를 향해 바인더를 높이 들었다. 그리고 그게 국가 공인 허가증이라도 되는 것처럼 머리 위로 천천히 좌우로 흔들었다. 셔틀버스에 대한 내 추리가 맞고 운전사의 시력이 내가 원하는 만큼 나쁘다면.
바인더를 몇 번 흔들다가 팔을 내렸다. 숨을 삼켰다.
셔틀버스의 불빛이 깜빡거렸다. 확인했다는 신호가 틀림없다.
가까이 다가오면 내가 들고 있는 물건이 기라 북부 자동차 학원에서 만든 서류철이 아니라는 것을 들키고 만다. 나는 태연한 얼굴로 바인더를 가방에 넣었다.
- "조고로, 너란 놈은..."
기가 막히다는 듯한 겐고의 목소리. 이렇게 초보적인 속임수에 감탄하다니 뜻밖이다. 눈앞에서 버스가 멈췄다.
- 중학생이었던 나는 때를 맞추지 못했다. 잘난 척 추리를 늘어놓다 보니 모든 게 끝나버렸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일이 벌어지고, 해결이 누구에게도 의미를 갖지 못한 적도 있었다. 뒷북. 이번에도 그렇게 될까? 나는 또 때를 놓친 걸까?
- 겐고가 문을 닫자 소녀는 모자를 벗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렇게 빨리 올 필요는 없었는데."
오사나이 유키 변장 완료. 패션 아이템으로는 꽝인 모자는 단발머리를 숨길 때 빼놓을 수 없는 소도구다.
늦지 않았다. 그것도 여유 있게. 아니, 늦지 않았다는 표현은 이상하다. 늦어서는 안 될 위험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 "오, 오사나이? 이게?"
겐고가 무례하게도 오사나이를 손가락질했다. 세일러복을 입은 오사나이와, 예전에 집에 찾아왔을 때 본 수수하기 그지없는 오사나이밖에 모르는 겐고에게 이 모습은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변장한 모습을 들킨 오사나이는 미소를 슬그머니 거두더니 내게 속닥거렸다.
"어째서 도지마까지 있는 거야?"
사정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오사나이가 이렇게 무사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괜한 걱정을 했다는 뜻이다. 나는 손해 봤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어째서긴. 나 혼자서는 위험한 상황에 대처할 수 없어서 데려왔지."
- 서로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도움을 청했잖아?"
"그런 적 없는데."
"문자를 보냈잖아. 빈 문자."
아아. 하고 오사나이가 환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꺼냈다. 카메라가 달린 신형이다.
- 증거 사진을 보냈다고? 나는 오사나이가 보낸 문자를 열어 화면을 보여주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링크밖에 없는 문자에, 게다가 링크를 눌러봐도 아무것도 없었어. 이런 걸 보내면 걱정하는 게 당연하잖아."
오사나이는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모니터에 떠 있는 것은 X 마크 하나뿐.
- "그런 쓸데없는 기능은 없어. 심플한 게 좋단 말이야."
오사나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림 파일을 표시 못 하는 건 심플한 수준이 아니야..."
"그럼 무슨 수준인데?"
"... 구석기시대?"
- 온몸에서 흐느적흐느적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겐고를 돌아보았다. 겐고는 눈앞의 보이시한 소녀와 오사나이 유키가 아직 동일 인물로 보이지 않는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다.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변명했다.
"어, 그러니까 겐고, 열심히 페달을 밟았는데 헛수고였네. 오사나이는 벌써 미션을 끝냈다."
"아니, 뭐, 그건 잘된 일인데 너 정말 오사나이 맞아?"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겐고에게 오사나이는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윽고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거짓말처럼 밝은 태도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처음 뵐게요, 유키의 쌍둥이 동생 마키예요."
잡아떼시겠다?
점점 더 혼란에 빠진 겐고와, 속이 훤히 보이는 거짓말을 태연히 하는 오사나이를 번갈아 보며 나는 목구멍 속에서 쿡쿡 올라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 오사나이 유키는, 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의 빚을 멋지게 갚았다.
복수했다고 마냥 기분이 후련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이젠 안 그러겠다고 결심했는데..."
오사나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하며 메이플시럽을 들어 핫케이크 위에 뿌리더니 마지막 한 방울까지 똑 떨어지기를 기다려 덧붙였다.
"소시민이 되기로 결심했는데."
- 버터를 피해서 나이프로 먹음직스러운 핫케이크를 네 조각으로 자른다. 그러나 오사나이는 식욕이 없어 보였다. 단발머리 밑으로 살피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미안해, 고바토. 약속대로 말리려고 애써줬는데."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약속은 나도 깼어. 이제 탐정 노릇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기억나는 것만 해도..."
하나 둘 셋, 손가락을 꼽았다. 손가방, 두 장의 그림, 맛있는 코코아. 깨진 음료수 병은 셈하지 않더라도 사카가미 사건을 더하면.
"네 번은 했어."
"... 업보구나."
- "너나 나나."
거의 동시에 깊디깊은 한숨을 토했다. 펼친 신문을 보면 점점 더 한숨이 나올 것 같아, 신문을 몽땅 접어 제자리에 갖다 놓으려고 일어섰다. 자리로 돌아와서 마음을 가다듬고 마시고 싶지도 않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 오사나이가 중얼거렸다.
"그만둘까?"
커피잔을 손에 든 채로 나는 오사나이를 쳐다보았다.
"집념이 강한 게 내 성격이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게 고바토의 성격이야.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포기하면 안 될까? 아무리 스스로를 속여도 결국 허점이 드러나는걸. 참고 또 참아도 결국 실수하게 된다면 처음부터..."
잔을 내려놓았다. 컵받침이 찰그랑 소리를 냈다.
"마음이 약해지는 건 이해해. 하지만 오사나이, 우리는 딱히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게 아니야. 단점을 고치려는 거니까 힘든 게 당연해. 예전에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함부로 행동하는 건 자제심이 부족한 증거라고 가르쳐준 건 오사나이였잖아? 지금은 교정 기간이야."
- "버릇은 하루아침에 못 고쳐. 바로 완벽해지려 하다니 우리가 너무 성급했어. 노력하자. 포기하지 말고 느긋하게 가자고."
우리는 체념과 의례적 무관심을 마음속에 키우며 언젠가 거머쥘 것이다. 소시민의 별을.
오사나이도 나를 마주 보았다. 눈동자에 굳건한 의지가 보였다.
"응."
-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오사나이의 뒤통수에.
촤악 소리와 함께 물이 쏟아졌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한 오사나이는 눈을 깜빡거리며 뒤를 홱 돌아보았다.
오사나이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나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똑똑히 보았다. 우리보다 안쪽 자리에 앉아 있던 커플 중 여자가 남자에게 물을 끼얹은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끼얹으려고 했다. 남자는 잽싸게 몸을 틀어 물벼락을 거의 맞지 않았다. 뒤를 좀 살펴보고 피했어야지.
- 어이없는 상황에 오사나이는 말도 나오지 않는 기색이었다. 나도 그랬다. 여자는 빈 컵을 테이블에 힘껏 내려놓더니 "이제 끝이야!"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를 나갔다. 남자는 정신을 차리고는 바로 일어나 계산대에 몇천 엔을 함께 내고 여자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그 뒤를... 소리 없이, 오사나이가 손수건으로 뒤통수를 닦으며 따라갔다.
- 남이 울적해하고 있을 때 소녀의 상처 입기 쉬운 머리카락에 냉수를 뿌리고 사과 한마디 없다니 이 멍청이들이, 이런 심정일까? 말려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테이블 위의 핫케이크와 토스트를 굽어보았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커플이 있던 테이블을 보았다. 마시다 만 커피, 홍차, 모닝세트, 담배, 볼펜, 그리고 조금 흥미로운 물건이 몇 개.
- 휴대전화를 꺼냈다. 문자 발신 상대는 오사나이.
내용은, 이렇다.
[급하게 쫓아가지 않아도 돼. 보아하니 그 두 사람은 평범한 커플이 아니야. 켕기는 구석이 있어. 내 생각에 이건 유류품 분석으로 해결할 수 있어.]
- 뭐, 그거다. 버릇은 하루아침에 고치지 못한다.· 내일부터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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