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김세희] 가만한 나날

일루젼 2024. 6. 2.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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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세희
출판 : 민음사
출간 : 2019.02.15


       

순문학과 대중소설의 구분은 어느 지점에서 갈라지는 걸까. 

저자가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강력한 메시지나 선명한 한 장면이 있으면 순문학인 걸까?

혹은, 딱히 의미를 알 수 없는 여상함과 자기(瓷器)의 표면 같은 매끄러움이 있으면?

 

뭐라 딱 잘라 구분 지을 수 없음에도 그 특유의 분위기가 난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평이한 일상을 보여주고 있는데도 8mm 필름에 담긴 독립 영화 같은 향이 난다. 글쎄, 이런 것을 예술성이라고 불러야 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 적어도 한 걸음 떨어져서 관찰하고 있는 정도의 독특한 일상감이라고는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순문학이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은 바로 그 거리감에서 잉태된다. 

다음 전개를 위한 복선을 준비하지 않아도 좋다. 박진감 넘치는 플롯과 반전이 필요하지도 않다. 

다만 지금 이 순간, 단 한순간을 가장 그 순간다운 모습으로 담아내는 것. 

혹은 그저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보여주는 것. 

그 비어있는 공(空)에서 독자는 자신이 불러낸 것을 마주하게 된다. 

 

<가만한 나날>은 내게는 그러한 순문학과 대중소설의 미묘한 경계지점에 위치한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물나들이에 갔을 때>를 제외하면 이 단편집 안의 대부분의 화자는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젊은 여성 특유의 시선, 고민, 불안은 낯설면서도 친숙해서-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는 어느덧 하나의 통일된 목소리로 합쳐져 간다. 

 

보이는 이들에게만 보이는.

들리는 이들에게만 들리는. 

그런 미묘함이 매력적인 단편집이었다. 

 

첫 번째로 수록된 <그건 정말로 슬픈 일일 거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직전에 읽었던 <단순한 진심>에서도 '우주'라는 이름의 아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어서 읽고 있는 <도덕의 시간>에서처럼 생활을 염려 중인 프리랜서 카메라맨이 중심인물이다. 나에게는 이런 연결고리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여름의 나날을 표류 중이다.

청량한 얼음 소리가 듣고 싶다. 

끝.

 

 


   

 

- 지하철을 갈아타고 약속 장소로 가는 동안 연승은 들뜨고 초조한 기색이었다. 기대감으로 상기된 얼굴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울긋불긋한 점퍼를 입은 중년의 등산객들 사이에 비좁게 끼어 앉아 한쪽 다리를 달달 떨면서 이따금 미소 지었다. 그런 그를 맞은편에서 진아가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혼자만의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 맞은편에 앉은 두 살 아래 남자 친구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보름 만에 보는 연승의 얼굴은 생각보다 밝았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인데 왜 그게 의외로 여겨지는지 알 수 없었다. 우울한 것보다야 낫지 싶으면서도, 속이 끓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진아는 어서 이 부담스러운 방문이 끝나고 둘만 남게 되길 바랐다. 둘이 할 말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보기에 연승은 자신과 얘기하기를 피하고 있었다. 저 아이는 왜 항상 채근하고 따져 묻게 만드는 걸까. 왜 꼭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까. 이런 역할은 질색이었다.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애야. 

- 그녀는 연승이 대학 시절 영상에 상당히 진지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2, 3편의 작품을 만들었고, 공모전에 출품도 했다. 하지만 4학년이 되자 당연한 수순이라는 듯 도서관에 틀어박혀 취직 준비를 했고, 일반 기업에 취직했다. 대형 할인점 체인의 유통 분야였다. 길게 보면 전망이 밝진 않았지만, 어차피 3, 4년 경력을 쌓고 이직해야 했다. 진아는 연승 또한 그렇게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간다고 여겼고, 내심 안도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현실적이고 앞가림을 잘하는 자신,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해 실제적인 조언을 해 줄 수 있었던 자신의 공이 있다고 생각했다. 

 

- 그런데 연승이 더 늦기 전에 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그거야,라고 마음속으로만 품고 한없이 지연시키는 게 스스로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고 했다. 
"아침에 출근해 책상에 앉아서, 아, 지금 이게 아니라 그걸 해야 하는데, 이렇게 맑은 정신으로,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늘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렇게 말할 때조차 그는 진아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고, 어쩐지 자신 없어 보였다. 그렇게 강하고 지속적인 열망이었다면, 왜 연승은 한 번쯤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 진아는 이 얘기를 친구 화영에게만 털어놓았다. 연승이 영화를 찍겠다며 회사에 사표를 냈다고. 그러자 화영이 말했다.
"야,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
"무슨 소리?"
"인생 종 치는 소리."

- 평소에 화영의 필터 없는 표현을 내심 즐겼지만, 그 화살이 연승을 향하자 그렇지가 않았다. 심기가 무척 불편했다. 진아는 자신을 연승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 진아는 꼭 광인이어야 영화감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영화 나름일 테지. 원래 예술가들은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말도 기억났다. 연승은 좋은 감독이 될 수도 있었다. 연승은 굉장히 예민했다. 연승을 한두 번 만난 사람들은 그가 낙천적이고 유쾌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진아가 아는 남자들 중 제일 예민한 편에 속했다. 그 때문에 처음 사귈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예민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예술을 하는 건 아니다. 세상에 예민한 사람들은 정말로 많다. 그리고 연승은 예민하다기보다는 소심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연승은 소심하고, 질투도 심하다. 가끔 단둘이서 술을 마시다가 진짜 생각을 털어놓아 깜짝 놀라게 할 때가 있었다. 대부분 주변 사람들에 대한 논평이었다. 진아도 아는 사람들, 연승과 같이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진아는 연승이 그때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줄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런 마음이었다면 왜 내색하지 않았을까? 왜 굳이 끊임없이 분위기를 띄우려 하고, 다른 사람들이 웃는 모습을 보며 안심하는 걸까. 

- "형이 조금 늦는다고 카페에 들어가 있으라는데."
연승이 전화를 끊더니 말했다.
"카페에 들어가 있으라고? 그게 무슨 뜻이야. 얼마나 걸린다는데?"
연승은 대답 없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물어봤어야지."

- 진아가 듣기로, 국사학과에서 중한은 나름 유명한 모양이었다. '소중한'이라는 다소 독특한 이름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만능 스포츠맨으로, 특히 달리기 실력이 출중해서 별명이 '말'이었다. 국사학과가 가을 체육대회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시기가 바로 소중한이 재학 중이던 때였다.  

- 흥미로운 대목이 하나 있긴 했는데, 그가 4학년 때 스님이 되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때 캠퍼스 커플이었는데 말이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러니까 그가 출가할 작정이라고 처음 털어놓았을 때 여자 친구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군에 징집되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자발적으로 세속의 모든 인연을 끊겠다는 연인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정말 황당한 일일 거라고 진아는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그런 일을 겪게 되면 상당한 충격이 남을 것이다. 만약 그의 결심에 내 탓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어떻게 하나. 반대로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결정이라 해도 그것대로 충격일 터였다. 

- 그런데 출가를 결심한 소중한 앞에는 가족과 연인을 떼어 내는 일 못지않은 해결 과제가 가로놓여 있었다. 그건 빚이었다. 사회 부채가 있는 사람은 출가하기 전 모든 부채를 변제해야 한다는 조계종단의 원칙 -출가는 자신과 모든 중생을 구하기 위한 위대한 결단이지 도피가 아니다- 이 있었다. 사회에 어떤 빚도 남겨 두어서는 안 됐다. 그는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6개월간 세 가지 일을 동시에 했다. 그러고 나서 최종적으로 출가 날짜와 행자 생활을 시작할 사찰이 정해졌다. 그는 삭발한 모습으로 마지막으로 학교를 방문해 교수님과 친구들에게 인사를 했다. 

 

- 그 후 어찌된 일인지, 그는 결국 출가를 하지는 않았다. 얼마 뒤 복학해서 졸업을 했고, 환경 단체에 취직해 실무를 보며 영상 찍는 일을 했다. 나중엔 그곳을 나와 프리랜서로 촬영 일을 하면서 몇 편의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현재는 1인 방송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결혼을 했다. 한때 스님이 되려 했던 그 남자의 집에는 지금 아내와 아기가 있었다. 아내도 환경 단체 쪽에서 일한다고 했다. 진아가 생각하기엔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이제 연승은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까? 

- 나오려고 하는데 아기가 울어서 지체되었다며, 그는 몹시 미안해했다. 그러고는 진아에게 멀리까지 와 주어서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가까이서 그와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는 반듯한 이목구비에 섬세한 은테 안경을 썼고, 어깨는 운동선수처럼 두꺼웠다.
"형, 데리러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희가 알아서 찾아가도 되는데."
연승은 순식간에 그의 대외적인 모습 -명랑하고 싹싹하며, 약간은 비굴한 하인의 모습- 으로 돌아와 있었다.


- "고맙긴. 우리 집이 찾아오기가 힘들어. 차로 나오면 금방인데, 마을버스 정류장에서도 꽤 걸어 올라가야 해서."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저음이지만 무겁지 않고,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 그는 어쩐지 자신없어 하며 말했다.
"너희들 떡국 좋아하니?"
"떡국 좋지요."
연승이 재빨리 말했다. 진아는 연승을 쳐다보았다. 연승은 앞을 보고 있었다. 연승이 싫어하는 유일한 음식 중 하나가 떡이었다. 떡과 낙지. 아예 못 먹는 건 아니지만, 거의 손대지 않았다.

 

- "우주 계속 우나요?"
"아빠를 애타게 찾고 있어요."
웃음 섞인 아내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곧 도착할 거예요. 떡국 맛있게 부탁해요?"
그는 아내에게 깍듯하게 존칭을 썼다. 한 마디 한 마디 반듯하고 정성스럽게 했다. 진아는 자신이 날마다 마주하는 회사 사람들, 늘상 서로 힘을 재어 보며 재치 있는 말 한마디에도 숨은 의도가 담겨 있어 곱씹어 보게 만드는 사람들 -자신도 그중 하나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을 떠올렸다. 그래서인지 소중한의 태도가 뜻밖에 신선하게 여겨졌지만, 사무실 안에서라면 그런 부류의 인물은 잘해봐야 외계인, 지루한 샌님쯤으로 여겨지며 고립될게 분명했다.  

- 그러자 소중한이 말을 이었다. 조금 신이 난 눈치였다.
"알겠지만, 아이가 금세 나오는 게 아니거든. 내가 처음 들어가서 봤을 때 주먹만 한 얼굴이 이 사람 가랑이에 꽉 끼어 있었지. 시뻘겋고 쭈글쭈글한 얼굴에, 자기도 힘든지 오만상을 하고." 
그는 두 주먹을 꽉 쥐고 장난스럽게 얼굴을 잔뜩 찌푸려 보였다. 아내가 아기를 품에 안은 채 몸을 뒤로 젖히며 웃었다. 진아는 따라 웃으려 했지만 어색한 웃음이 되었다. 연승이 진아의 얼굴을 흘깃 살폈다. 그러자 소중한이 빠르게 눈을 움직여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애도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엄마만 힘을 주는 게 아니에요. 아기도 나오려고 같이 안간힘을 쓰는 거더라고요. 그렇지, 우주야? 너도 힘들었지?"

- "왜요, 얼른 얘기해 줘요. 다 알아야 해요."
진아는 그게 뭔지는 몰라도 알고 싶지 않았다. 이미 필요한 정보는 충분히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소중한이 입을 열었다.
"아니, 친한 여자 동기가 말해 줘서 나도 아는 건데, 병원에서 분만하려고 누워 있으면 지나가던 의사가 불쑥 거기에 손을 넣어 보고 그런대."
잠시 침묵이 흘렀다.

- "그게, 그냥 상태 확인하려고 그러는 건데, 잘 모르는 의사들이 와서 그런다는 거지. 침대에 누운 엄마는 힘들어 죽겠는데."
"네에."
진아와 연승 모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때 마침, 다행히 아내가 벌떡 일어서더니 주방으로 떡국을 보러 갔다. 소중한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진아와 연승도 따라 일어나 떡국을 날랐다. 

- 뭘 알았어야지. 어디 가서든 자기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부쩍 그런 푸념을 입에 올렸다. 진아는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쨌거나 지금 와서 후회해 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는 가장 빛나던 시절 자신의 활약을 회상하는 노인처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진아에게 말했다. 내가 수리 영역만 빼고 수능성적이 전부 1등급이었어. 말했나? 나중에 보여 줄게, 고향 집에 아직도 수능 성적표 안 버리고 있어. 

- "내 방에 들어가서 짐을 챙기는데 문득 어떤 생각이 들더라. 갑자기 말이야. 별건 아닌데, 뭐라고 해야 할까. 내 방은 이미 다 정리를 해서 짐이 별로 없었어. 책도 나눠 줘 버렸어. 부모님과의 관계도 정리가 되어 있었고, 충분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 내가 지금 절로 가거나 가지 않거나 원하는 건 이미 이룬 것 아닌가 하는 생각. 이제는 내 뜻대로 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래서 방에서 나와서 어머니 아버지한테 말했어. 안 가겠다고." 
소중한은 커피잔의 작고 둥근 손잡이에 손가락을 끼워 조심스럽게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쑥스럽게 웃었다.
 
- "이 누나가 갑자기 왜 이래. 술 마셨어?"
그러고는 테이블 위 자기 손에 눈길을 주며 말했다.
"당연히 해야죠. 그런데 당장 제가 모아 놓은 돈도 없고, 앞으로는 더 그럴 테고."

 

- 잠시 후에 소중한이 말했다.
"연승이도 생각을 많이 했겠지. 본인이 지금 뭘 선택하려는지 알 거야."
그는 테이블 너머로 연승을 건너다보았다. 연승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는데,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얼굴이었다. 연승은 다큐멘터리 제작에 관한, 맨땅에서 감독으로 커리어를 쌓아 가는 일에 관한 실제적인 충고를 기대했지만, 소중한의 입에서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만난 여러 사람들에 대해 말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쪽 길을 택했으나 점점 자신의 선택을 세상에 원한을 품는 알리바이로 삼게 된 사람들에 대해. 비슷한 부류와만 어울리며,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보통 사람들과는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는 이들에 대해 긴 얘기를 늘어놓았다.

 

- < 그건 정말로 슬픈 일일 거야>



- 꽃을 사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 번은 상률이 그녀의 달라진 형편을 지적하며, 매주 되풀이하는 사치스러운 습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꽃은 너무 아름답잖아. 내겐 아름다운 것이 필요해."

- 오늘도 그녀는 정류장 앞 가게에서 꽃을 샀다. 1월의 첫 금요일이었다. 그녀가 집에 돌아왔을 때, 불은 꺼져 있었고 상률은 없었다. 퇴근이 늦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병에 물을 담고 엷은 분홍색 튤립 세 송이를 꽂아 식탁에 올려놓았다. 물기 묻은 손을 의자에 던져 놓은 앞치마에 문질렀다. 그러고는 고요한 집 안을 죽 훑어보았다. 곧 이곳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들은 내일 오전에 부동산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 일로 인해 그녀는 골치가 아팠다. 
방 두 개짜리 집으로 이사를 가야겠다는 상률의 주장은 합당했다. 그는 밤 10시면 자리에 누웠고, 양질의 잠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그러나 밤 10시는 원희에게는 너무 이른 시각이었다.

- 어느 날 밤, 잠든 줄 알았던 그가 벌떡 일어나 안대를 벗어던졌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는 더는 못 살겠다."
참을 만큼 참았다고, 원룸에서 사는 걸 더는 견딜 수 없다고 했다. 한 사람이 놀고 싶을 때 한 사람은 다른 방에서 조용히 잠을 자고, 한 사람이 자고 있는 아침에 다른 사람은 달그락거리며 아침을 먹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원희는 그게 어쩐지 자신을 전처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들려서 서운했지만, 그렇게 말하진 않았다.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는 화를 냈을 것이다. 아니면 한숨을 쉬면서 바보 같은 소리 좀 하지 말라고 했거나. 그래서 그들은 집을 보러 다녔고, 이윽고 그가 원하는 집이 나타났다. 그들은 몇 주간 일대의 부동산을 돌아다닌 끝에 그 집을 볼 수 있었다.  

-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상률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언젠가부터 자신의 괴로움을 숨기게 되었다. 그녀는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난 성인이야. 그녀는 스스로 되뇌었다. 하지만 그게 엄마한테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았다. 그 생각은 그녀의 기운을 쏙 빼놓았다. 그 생각만 하면 길을 걷다가도, 무심한 마네킹의 얼굴에 속눈썹을 붙이다가도 힘이 빠졌다. 언젠가 상률에게 그걸 설명해 보려 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 상률은 말했다.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말씀드리자. 이해하실 거야. 지금 사정이 그런 걸 어떻게 하겠어? 그런데 대체 너희 부모님은 네가 어떻게 월세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야?"

- 그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자. 옳고도 합당한 방법이었다. 분명히 그래서 그녀는 상률을 사랑했다. 합리적인 사고,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강인함. 그러나 그녀의 가족은 결코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자신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도, 인정할 줄도 모른다. 상률이 그런 식으로 일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건 그녀의 가족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의 가족을 움직이는 건 그들이 속한 집단에서 공유되는 일종의 믿음, 금기, 평판에 대한 강한 의식 같은 것들이다. 이것들은 한데 얽혀 구분이 되지 않았고, 일상적인 두려움을 만들어 냈다. 삶에 대한 두려움. 그녀는 그녀의 엄마를 구속하고 있던 그 막연한 두려움, 공포로부터 도망치려고 애를 써 왔고, 어쩌면 자신의 인생 전체가 내내 거기서부터 벗어나려는 도주의 과정이라는 걸 그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 시작은 서울로 오는 것이었다. 그걸 위해 그녀가 얼마나 싸워야 했던지. 엄마를 떠나면서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첫날 저녁, 편의점에 가기 위해 기숙사에서 나와 탁 트인 캠퍼스를 가로지르면서, 그녀는 그럴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때까지 밤에 아무런 용건 없이 집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 그녀가 가슴을 떨리게 하는 밤공기를 마시는 대가로, 그녀의 엄마는 매일 새벽 기도를 다녔다. 그녀가 한번 전화를 받지 않으면, 그사이에 엄마의 상상 속에서 그녀는 교통사고로 촌각을 다투며 병원에 실려 가는 중이거나 더 험한 일을 당해 죽어 있었다. 
"세상이 얼마나 악하고 무서운데."
마침내 통화가 되었을 때, 엄마는 울고 있었다. 이런 일들은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 엄마는 딸의 무고를 확인한 뒤 엄청나게 화를 냈는데, 그녀가 더 화가 나 있다는 걸 알고는 당황해 우물쭈물했다. 엄마는 말하곤 했다. 
"널 걱정해서 그러지. 너를 생각해서 그러지. 넌 잘 모르지만, 세상이 그래."

- 4학년 여름방학에 그녀는 혼자서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갔다. 중간에 한 번, 바르셀로나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 집에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그녀에게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며 울었다.
"엄마, 나 여행 온 거야. 내가 밖을 안 돌아다니려면 유럽까지 왜 왔겠어?"
그녀는 웃으며 말했지만 눈물이 나려 했다. 그녀는 사실 여행을 즐기지도 않았고, 꼭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해가 질 때까지 악착같이 돌아다녔다. 원한다면 어디든 가 볼 수 있으며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불길한 예감이나 꿈 따위는 힘이 없다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결국 그녀 안에도 그런 두려움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녀는 끝내 여행을 즐기지 못했지만, 그래도 죽지는 않았다. 

- 다음 날, 그들은 지하철역 앞 부동산으로 갔다. 중개인이 상률과 원희를 맞았다. 중개인은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는데, 탁구공처럼 동그란 두상이 드러나도록 긴 머리를 바짝 묶고 있었다. 찌푸린 인상이어서 원회는 처음에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번 한나절 동안 같이 집을 보러 다니면서 그녀가 무척 꼼꼼하고 유능한 중개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 조금 전부터 이 자리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중개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이 작아지는 기분, 자기 자신을 잃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느낀 기분이었는데, 기습적이었기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무력하게 느껴졌다. 권위 있는 어른 앞에서 가끔 이렇게 될 때가 있었다. 좋은 배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난 흠잡을 데 없는 사람들 앞에 설 때. 그녀는 곧 어떤 질문이 나오리라는 걸 예감했고, 그에 앞서 자신의 표정과 마음을 준비시키려 했다.  

- 현기증이 일어나는 순간이 있다. 현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순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채 인식하지도 못했던 광경이 갑자기 빛을 비춘 듯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낼 때,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고 싶지만, 그조차 허락되지 않을 때.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상률과 하려는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들은 살림을 꾸리고 있었다. 이건 결혼과 다를 바가 없었다. 집을 구하고, 그 집을 채울 가전제품을 사러 다니고 있었다. 그게 결혼의 뜻이었다. 이번 이사는 이전 생활의 연장이 아니었다. 그저 방 하나 더 많은 집으로 이사를 가는 게 아니었다. 

- 그녀는 준비되지 않은 무대 위로 등을 떠밀리는 기분이었다. 이건 아니라고, 자신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결혼은 이런 게 아니었다. 언젠가 결혼이란 걸 하게 된다면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보러 다니고, 성가시지만 행복한 고심 끝에 가구를 결정하리라고 생각했다. 텔레비전에서 봤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웨딩숍의 샹들리에 조명 아래 흰 커튼이 열리는 장면. 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환하게 빛을 발하는 얼굴. 그녀는 힘주어 눈을 감았다. 이런 식은 아니었다. 돈도 없고 소속된 직장도 없는 처지에서 이런 일을 치를 거라고는, 이렇게 참담한 심정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정규직이 아니야. 정규직이라고 해도 예전 같은 평생 직장이 아니라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니. 다들 네가 어디가 모자라서 못 버텼다고 생각할 거야. 거기서 일할 능력이 안 돼서 그렇다고들 생각할 거야."
"나를 위한 거 맞아? 나를 위해서라면 그만두라고 해야 해."

- 엄마는 한 달 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나뿐인 딸에 대한 기대를 점점 내려놓았다. 하지만 엄마뿐만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 자신이 누릴 수 있을 줄 알았던 것. 때가 되면 손에 들어올 줄 알았던 모든 것들. 어릴 때부터 보고 배웠던, 교과서와 텔레비전이 말하던 이미지와 삶의 방식들을. 그리고 그녀는 훌륭한 딸이 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였다. 훌륭한 딸이 되려 할수록, 그녀는 불행해졌다. 어쩌면 훌륭한 딸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야 할 거라고. 

- 그녀의 엄마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원희야, 너 정말 신천지 같은 거 들어본 적 없지? 엄마가 어제 밤새 생각을 해봤다. 왜 착한 우리 딸이 설날에 집에도 안 온다고 하고... 그 사람들이 그렇게 가족을 갈라놓고 못 만나게 하고 그런단다."
그녀는 이제 인내심이 바닥났다.
"엄마, 제발 좀. 내가 그런 얘기까지 들어야 돼? 그렇게 걱정할 일이 없어? 이사한다고 했잖아. 왜 말을 하면 그대로 믿지를 않고 다른 생각을 해. 나 지금 바빠. 나중에 통화해."


- 그녀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싱크대 앞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았다. 오전 11시였지만 부엌은 어두컴컴했고 사방은 조용했다. 신천지라니. 혼자 앉아서 그녀는 피식 실소했다. 엄마는 그런 게 무서워? 난 때려죽여도 그런 거 안 믿어. 그러나 그 순간, 한때 자신이 절대 남자와 동거할 일 없다고 생각했던 게 머릿속을 스쳤다. 그래, 모를 일이었다. 인생에 장담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아무것도.
그녀는 나중에 혹시 아이를 낳게 된다면, 그 애에 대한 걱정은 절대 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뭘 걱정하든 그 아이의 현실은 거기서 아주 아주 멀리 있을 테니.

- 바위가 흔들거리고 위험한데, 너는 모르고 그 위에 서서 웃고 있는 거야. 위험한 줄도 모르고 웃고 있어. 엄마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때렸다.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넌 모르지만, 세상이 그래.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참았다가 내쉬었다. 그렇게 심호흡을 몇 번 반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개수대 옆 창문으로 햇볕을 반사해 번쩍이는 맞은편 건물의 붉은 벽돌 벽이 보였다. 결국 이사를 했구나. 그녀는 사방에 박스가 쌓인, 새로운 집을 둘러봤다. 그녀는 자신이 먼 훗날 이번 이사를,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기억할지 궁금했다.

 

- <현기증>



- 지하철역 출구의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이 규칙적으로 밀려오는 파도처럼 일렁이며 끊임없이 지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그 앞을 지나다가 출구 한쪽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재화 언니를 보았다. 영어 학원에 다닐 때 친하게 지낸 언니로, 그때 언니는 이미 회사원이었다. 길에 서서 서로 근황을 전하다가, 나는 내일부터 작은 마케팅 회사에 출근한다고 말했다. 언니는 활짝 웃으면서 축하해 주었다. 그러더니 내가 몹시 긴장한 상태라는 걸 알아채고 깔깔 웃으며 놀려 댔다.
"맞다! 너 인생 첫 출근이지! 완전 떨리겠네?"

- 나는 갑자기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 되어서, 언니의 팔을 붙잡고 사회생활 선배로서 조언해 줄 게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언니는 놀려 대기를 멈추고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말했다.
"음.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너 자신을 프로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도 어디서 들은 얘기인데, 난 도움이 됐거든. 신입이어도 난 아무것도 몰라, 난 초짜야,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프로야, 나는 프로페셔널해, 마음가짐을 그렇게 갖는 거지. 난 이 일을 프로답게 해낸다. 그런 자세로다가." 

- 언니가 계속해서 말했다.
"난 일할 땐 좀 까칠한 편이거든, 약간 완벽주의자 기질이 있어서. 그렇게 안 보일지 모르지만 내가 좀 그렇단다? 그래서 공과 사를 더 구분하려고 하는 편이야. 그런데 일할 때 말고 회식하거나 할 때는 일부러 좀 풀어. 바보 같은 소리도 하고. 그럼 사람들도 오히려 좋아해."
그때 언니가 무슨 말을 했어도 나는 황금처럼, 귀인의 귀띔처럼 받아들였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하는 만원 지하철 안에서, 그리고 낯선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나는 주문을 외듯 나는 프로다, 나는 프로다, 중얼거리고 있었다.

- 신입은 나를 포함해 세 명이었다. 회의 준비로어수선한 사무실에서 우리는 서로 어색한 목례만 나눈 채 앉아 있다가 9시 정각에 복도 맞은편 회의실로 이동했다. 앳된 얼굴의 직원이 빠른 걸음으로 테이블을 빙 돌며 자료를 나눠 주었다. 프린트 열기가 채 식지 않은 따끈따끈한 종이를 집어 드는데, 어쩐지 쑥스러워서 입가가 실룩거렸다. 진짜 회사원이 되었구나. 실감이 났다.  

- "자, 이번엔 어떤 인물을 만들어 볼까?"
한 선배가 자료를 한 장씩 나눠 주었다.
[남.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30대 후반의 돌싱]
큰 테마 아래 그가 구상한 인물의 라이프 스타일과 관심사가 정리되어 있었다. 친한 형을 모델로 만들어 본 인물이라고 했다. 그는 평일 출근 전에 한강변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주말엔 암벽 등반을 다니며, 여름엔 서핑을 한다. 그는 형제가 몇 명일까? 즐겨 방문하는 커뮤니티는 챙겨 보는 예능 프로그램은 무엇일까? 

- 팀장은 상상력을 강조했다. 그는 말하곤 했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블로그를 광고 글로 도배하는 방식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딱 보면 광고 느낌이 오는 리뷰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기계적인 문구 말고, 상상력을 발휘해서 진짜 살아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N포털은 블로그마다 등급을 매겼고, 일정한 점수에 도달해 '최적화 블로그'가 되면 그때부터 게시글이 검색 결과의 상위에 올라갔다. 그러면 광고에 투입할 수 있었다.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팀장은 우리 신입들에게도 각자 1호기를 준비하라고 했다.

- 일주일 뒤, 우리 세 사람은 회의실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마지막으로 팀장이 들어왔다. 홍성식 -나보다 다섯 살이 많았다- 의 인물은 홍대와 합정에 이어 당시 새로이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기 시작한 망원동에 거주하는 30대 초반 힙스터 남자였다. 예린 씨 -나와 동갑이었다- 는 뮤지컬을 비롯해 고급문화생활을 향유하고 배우의 출퇴근길까지 챙기는 등,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문화산업의 일원으로 여기는 30대 중반 전문직 여성을 내세웠다.
그리고 내 차례였다. 홍성식은 내 자료를 건네받는 순간, 피식, 또는 그와 거의 흡사하게 들리는 짧은 소리를 뱉었다. 그가 나를 세상 물정 모르는 문과 출신 애송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게 느껴졌고,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는 나를 거의 딱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팀장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돌이켜보면 막 시작된 내 사회생활 이력에서 중대한 기점이 된 장면이었다.
"아, 채털리 부인이라는 말 오랜만에 듣네. 명작 중의 명작이지. 대학 때 이 소설을 원서로 읽었는데 말이야."

- 우리는 곧이어 리뷰 업무에도 투입되었다. 음식점의 비중이 높았다. 가게에서 매장 사진과 메뉴판. 맛깔스럽게 찍은 음식 사진을 보내 주면 그걸 조합하고 배치해서 직접 가 본 것처럼 후기를 작성했다. 광고주가 삽입해 달라고 요청한 특정 문구를 자연스럽게 강조하는 요령도 생겼다. 
내가 보기에 리뷰에서 가장 중요한 건 디테일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곧 깨달았다. 구체성이 리뷰의 생생함을 좌우했다. 직접 먹어 본 것처럼, 직접 사용해 본 것처럼. 업체에서 보내 준 정보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이메일을 보내 추가로 요청했다. 그렇게까지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더 잘 해내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스스로 프로라고 여겼으니까. 

- 이렇게 해도 괜찮나? 싶을 때도 있었다. 병원이 제시한 문구를 넣어 사각턱을 절제했다는 후기를 작성할 때였다. 치아 교정, 라식 수술 체험 후기를 쓸 때도 그랬다. 이래도 되는 건가? 그러나 곧 그 감각도 사라졌다.

- 게다가 내가 지금껏 뭔가를 사고 찾을 때마다 검색해 참고했던 블로그 후기들도 죄다 업체를 통해 작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반인이 운영하는 블로그 글이 검색 결과 상위에 노출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맛집이나 병원처럼 사람들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일수록 그랬다. 많은 사람들이 자주 검색하고 참조하기 때문에 시장이 되는 것인데, 시장이 되면 사람들이 원하는 진짜 정보는 닿지 않는 곳으로 밀려난다.
이것이 경제구나. 
나는 세상의 이치를 목도한 사람처럼 약간의 경이로움과 체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나의 1호기 채털리 부인이 초고속으로 최적화에 성공한 뒤, 팀장은 내게 중요한 건들을 맡겼다. 채털리 부인은 신생아부터 6세까지 사용 가능한 '3단계로 변형되는 프리미엄 토들러 침대'에 아기를 재우고, 토요일 밤에는 일본에서 수입한 '개 샴푸계의 샤넬' 제품으로 개를 목욕시켰다.

- 돌이켜보면 20대 중에서도 가장 열정적이던 시기였다. 내가 채털리 부인에게 얼마나 정성을 쏟았던가. 그보다 더 열심히 일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 완전히 자발적으로. 20대 중반까지는 돈을 지불하고 뭔가를 학습하고 받아들이기만 했다. 그런데 이젠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 받았고, 내 머리와 손끝을 써서 뭔가를 생산해 냈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쓸모 있는 존재라는 느낌. 조금만 더 시간을 할애해 정성을 기울이면 결과물이 더 좋아지는 게 눈에 보였다. 

- 리뷰 업무를 하느라 하루를 다 보낸 날에는 저녁을 먹고 사무실에 남아 일상 게시글을 작성했다. 개인 블로그로 보이기 위해 일상적인 내용을 담은 글을 올려야 했고, 직원들은 가족과 친척들, 그 반려동물들 사진까지 활용했다. 이웃 수를 유지하려면 이웃을 맺은 블로그를 방문해 댓글도 남겨야 했다. 업체들 간에도 쉽게 알아보지 못했다.  


- 그는 내게도 불만이 많았다. 그렇게까지 일할 게 뭐 있느냐고, 그러지 좀 말라고 못마땅해했다. 경진 씨가 아직 어려서 모르는데, 그렇게 뼈를 갈아 넣어 봤자 미련한 짓이라며 비아냥거렸다.  


- 그리고 예린 씨는, 사무실에서 노골적으로 찬밥취급을 받았다. 나는 그녀를 보면서 일을 잘 못한다고 평가되는 것, 그것도 첫 직장에서 일을 잘 못한다고 낙인찍히는 것이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되었다. 몇 가지 상황이 겹쳐 일단 상사가 그런 견해를 갖게 되자, 스스로에 대해 홍성식만큼 자신감이 없던 예린 씨는 점점 더, 진짜로 일을 못하게 되었다. 반년 사이에 그녀의 얼굴은 놀랄 만큼 달라졌다. 내성적이지만 때로 굉장히 발랄하게 웃는 해맑은 사람이었는데, 자꾸 눈치만 살폈다. 회의에서도 의견을 내지 못했다. 팀장이 진행 상황을 물어보면 당황하며 대답조차 우물쭈물했다. 그녀는 업무뿐 아니라 모든 일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할 자신감을 잃었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견해를 말하지 못했다. 

- 팀장은 홍성식에게는 감히 그러지 못하면서, 그녀에겐 짜증을 냈다.
"잘 모르겠으면 경진 씨한테 좀 물어보고 배우라고."
잔인하게 느껴질 만큼 싸늘한 얼굴로, 팀장이 그녀에게 말했다.

- 나는 저러지 않아서, 그러니까 일을 잘해서 다행이다 싶었다. 처음부터 동기들과 거리를 두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대학로 인파 속에서 재화 언니가 해 주었던 말을 되새겼다. 굳이 회사 사람들과 사적인 친분을 맺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내 일만 잘하면 된다.

- 예린 씨는 결국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퇴사했다. 홍성식은 영업팀장의 제안을 받아 영업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개를 들 때마다 낮은 파티션 너머로 보이던 그의 무테안경 낀 윗얼굴이 사라지자 속이 후련했다. 그는 밖으로 돌며 업주들과 미팅을 했다. 나를 볼 때마다 이 업계에는 미래가 없다고 아는 척하며 열심히 일하는 내 기운을 빼놓으면서도, 어찌 된 일인지 정작 자신은 그만두지 않고 계속 회사를 다녔다. 

- 채털리 부인이 무엇 때문인지 '저품질'을 먹었을 때는 충격이 컸다. 처음엔 믿을 수 없었고, 여파가 오래갔다. 블로거들은 저품질에 걸린 걸 '무기징역', '안드로메다행'이라고 불렀고, 업계에서는 '총 맞았다'고 표현했다. 그러면 그냥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한번 불량 블로그로 분류되면 벗어나기 어려웠다.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새 계정을 만드는 편이 빠르다는 건 분명했다. 어떤 글을 올려도 검색 결과에 노출되지 않았다. 선고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뾰족한 해결책도 없었다. 추측은 가능했다. 그 주에 광고 글을 두 번 올렸는데, 그 두 건 모두 조회 수가 무척 높게 나왔다. 불법 프로그램을 쓴 어뷰징으로 간주됐을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다른 업체를 의심했다. 일부 업체에서 검색 결과 상단에 있는 글을 끌어내리고 자리를 만들기 위해 매크로 공격을 하곤 했다. 끌어내리고 싶은 글의 조회 수를 일부러 폭발적으로 올려 주어, 포털 모니터링 팀의 시야에 포착되길 노리는 수법이었다. 

- 결국에는 채털리 부인의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래도 계정은 삭제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그동안 쌓은 포스팅이 너무 아까웠다. 그것들이 전부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하자 상실감이 밀려왔다. 채털리 부인이 의식 없이 누워 있을지라도, 그래도 가끔 방문해서 그녀를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두고 싶었다. 예전에는 어떻게 썼었지? 싶을 때마다 그녀를 방문해 기록을 훑어보았다. 그러면 그 글을 쓸 때의 열정이 되살아나는 듯했고, 거의 순수하게 느껴지는 밀도 높은 에너지가 다시 나를 데워주었다. 

- 그러던 11월의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 나는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있었다. 유독 힘든 날이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날 나는 수십 개의 블로그에서 수십 명이 되어 리뷰를 썼다. 30명이 넘어갈 즈음엔 의식이 몽롱했다. 그야말로 타자 치는 기계였는데, 차라리 진짜 기계라면 편할 것 같았다. 재깍재깍 다음 사람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스스로 기계라고, 다이얼을 한 칸 돌리면 다른 채널로 바뀌는 머신이라고 중얼거렸다.

- 남아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퇴근하고, 나도 슬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던 일을 정리하고 프로그램을 종료하기 전 오랜만에 채털리 부인을 방문했다. 그녀는 거기 그대로 있었다. 모든 기록을 간직한 채. 마지막 포스팅 날짜까지 그대로였다. 그녀의 삶은 얼음 속에 보존되어 멈춰 있었다.
별생각 없이 쪽지함을 열었다. 예전에 이웃들과 주고받은 쪽지들 맨 위로, 아직 읽지 않은 새로운 쪽지가 와 있었다. 최근에 받은 것이었다.

- 메시지를 클릭했다. 글씨가 빼곡했다. 광고인가, 싶었는데 광고는 아니었다. 블로그 이웃이라는 여자였는데, 그 여자는 자신을 B기업의 뿌리는 살균제 피해자라고 소개했다. 두 아이 중 갓난아기를 잃었고, 다섯 살 아이는 폐가 손상돼 평생 산소 호스를 끼고 살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이것이 B기업의 뿌리는 살균제 '뽀송이' 때문이라는, 그 안에 포함된 독성 물질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 [채털리 부인님이 올린 후기를 보고 구매해서 쓰기 시작했거든요. 날마다 사용한다고 했는데 괜찮으신지... 아무 일 없으시길 바라지만 혹시나 무슨 일이 있었다면 이쪽으로 연락 주세요.] 

- 심장이 세게 뛰고 있었다. B기업 살균제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뉴스에서 봤고,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도 들었다. 하지만 내가 사용 후기를 올린 적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 내가 언제 이런 글을 썼지?
포스팅 날짜를 보니 벌써 2년이 다 되어 가는 일이었다.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2년 전에 쓴 뽀송이 리뷰, 그리고 지금 여자가 내게 보낸 메시지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지, 둘 사이가 연결되지 않았다. 이 사람은 왜 내게 메시지를 보낸 거지.

- 나는 아이디를 클릭해 여자의 블로그에 들어갔다. 개설한 지 5년째인 블로그였다. 메뉴별로 차곡차곡 게시글이 쌓여 있었고, 총 방문 누적수며 이웃 수를 보니 한때 활발하게 활동한 흔적이 보였다. 포스팅은 끊겼다가 최근에 다시 시작되었는데, 최근 글은 거의 B기업 뽀송이와 관련된 기사를 갈무리한 것이었다.
과거의 포스팅을 훑어보았다. 잔디밭을 배경으로 돗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들의 사진이 있었다.

- 하지만 그는 빠르게 걸어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나중에라도 그가 한마디 해 주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는 그 화제를 다시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아마 너무 바쁘고 압박을 느끼고 있어서, 회사일 말고 다른 문제에 신경을 쓸 시간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까맣게 잊어버렸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 무렵 그는 정말로 옆에서 보면 어떻게 정신을 챙기나 싶을 정도로 궁지에 몰려 있었으니까.

- 돌이켜보면, 이미 업계의 상황은 혼란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3월 말 N포털이 예고한 기자회견을 앞두고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N포털은 기자회견에서 신뢰도 있는 콘텐츠 생태계를 위해 검색 알고리즘을 대폭 바꾼다고 발표했다. 그러고는 그때까지 속설과 루머로만 전해졌던 알고리즘을 공개, 배포했다. 이후로 최적화 블로그의 게시글이 검색 결과 상단에 나오지 않았다. 최적화 블로그가 유일한 수익 모델이던 소규모 회사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우리는 월가의 사무실 직원들처럼 종이 상자에 소지품을 챙겼다. 영화 속 인물을 연기하는 것처럼 현실이라는 실감이 없었다. 

 

- <가만한 나날>
 


- "잘 지내? 자기 목소리 듣는 거 정말 오랜만이다."
"네. 팀장님도 잘 지내시죠? 무슨 일로..."
"요즘 바빠? 얼굴 한번 봤으면 해서."
선화는 가로수 아래, 거대한 플라타너스 낙엽 위에 서 있었다. 갑자기 왜 만나자는 거지. 망설이는 기색을 감지했는지 그녀가 말했다.
"나 회사 그만둔 지 좀 됐어. 일이랑은 상관없이 그냥 한번 보자고 연락한 거야. 내가 자기 회사 쪽으로 가도 되고."

- 선화는 그녀가 반년 전 회사를 그만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미 선배가 메신저를 걸어와 알려 주었다. 선화가 이직한 뒤에도 미미는 가끔씩 연락을 해왔다. 친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그랬다. 대개 선화를 떠보거나 옮기니까 좋아? 거기 분위기는 어때? 아니면 뭔가 입이 근질거릴 때였다. 그날도 형식적으로 안부를 묻더니, 슬쩍 흘리듯 말했다.
[임은정 팀장님 이번 달까지만 일하는 거 알아?]
순간 뭔가 큰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김미미에게 넘어간 서류는 돌아오지 않았다. 물어도 알았다고 말할 뿐이었고, 급할 땐 아예 옆에 서서 지키고 있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선배 티를 내며 조언하려 드는 스타일이었다. 선화는 소심한 성격이라 자기보다 연차 높은 선배에게 업무를 재촉하기가 어려웠다. 한 번은 그날 중으로 시청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를 주지 않았다. 오전 내내 전전긍긍하다 점심시간 전에 말하러 갔다. 그때 임은정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내가 듣는 것만 해도 선화 씨가 몇 번을 얘기했는데, 그걸 아직도 안 넘겼어? 뭐 하는 거야 진짜? 애한테 똑같은 얘기를 몇 번을 하게 만들어!" 

김미미는 고개를 들지 못했고 선화는 눈물을 찔끔 흘릴 만큼 속이 시원했다. 누군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 나서 준 적이 있었던가.

 

- 그런데 임은정이 나중에 선화를 회의실로 따로 불렀다. 
"자기한테도 문제가 있어."
선화는 무슨 말인가 싶어 그녀를 봤다.
"자기가 만만하니까 그러는 거야."
그러더니 본인도 처음에 일할 때 꼭 '자기' 같았다고 했다. 회사 일이란 게 서로 좋은 얼굴로만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고.

 

- "왜냐면, 사람이 그렇거든."
그녀가 옆에 앉아 말했다.
"내가 네, 네, 할 때는 이거 언제까지 해 줘, 이러던 사람이 몇 번 까칠하게 굴면 다음에는 와서 이것 좀 언제까지 해 줄 수 있을까? 이렇게 묻는다고."
기분은 나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돈은 우리 팀에서 나와. 직원들 통장에 돈 넣는 사람도 우리야. 당당하게 해. 사무실을 전쟁터라고 생각해. 사교 생활하라고 자기 뽑은 거 아니야."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 그녀가 한 말이었다.

- 선화는 면접 때 봤던 그녀를 처음 봤을 때 그녀가 자신에게 어떻게 보였는지를 기억했다. 왼쪽 맨 끝에 앉은 커트머리에 작고 네모난 무테안경을 낀 여자였다. 희고 긴 얼굴에 차갑게 보이는 인상이었다. 질문은 별로 하지 않았고, 무표정으로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다 때때로 가죽 표지를 씌운 다이어리에 뭔가를 적었다. 합격 전화를 받고 상사가 그 사람만 아니길 바랐는데, 출근해 보니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러나 의외의 면도 있었다.  

- 입을 가리고 통화하는 모습을 종종 보곤 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그녀는 점심에 유치원에 다녀오겠다고 나갔다. 1시 30분쯤 송구스러워하는 얼굴로 -가끔 정시에 퇴근할 때도 그런 표정을 짓곤 했다- 사무실에 들어와 오후 내내 화장실도 안 가고 일만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도 야근을 했다. 

- 저녁을 시켜 먹으면서 그녀는 선화에게 점심때 이야기를 해 주었다. 유치원에서 크리스마스 트리에 매달 과자를 준비해 오라고 한 날이었다. 먼저 트리 장식을 하고 나서 남은 과자를 먹기로 했는데, 준이가 장식도 하기 전에 보란 듯이 테이블 위의 과자를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고 했다. 아이들은 화가 났고 교사가 야단을 쳐도 준이는 과자 먹기를 멈추지 않았다. 준이의 행동이 점점 통제하기 힘들어진다고, 그녀는 몹시 괴로워하며 말했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 보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선화가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점심에도 늦었는데,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 그녀는 늘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그리고 선화 또한 자신이 의식하는 것들을 의식하도록 만들었다. 그 많던 금기들... 여름이 되어 선화가 반바지를 입고 출근하던 날 아침, 멀리서 눈이 휘둥그레진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책상 사이를 지나, 그녀에게 다가와 바지를 보며 말했다.
"세상에, 난 자기가 팬티만 입고 온 줄 알았어."
그녀는 책상을 짚고 다른 손을 자기 이마에 올렸다. 아, 놀래라. 그러고는 철없는 딸에게 하듯 손바닥으로 선화의 등짝을 세게 때렸다. 그날 선화는 종일 무릎에 담요를 덮고 있었고, 다시는 짧은 옷을 입지 않았다. 

- 그래도 선화는 그녀의 유일한 부하 직원이었고, 그녀는 자기 방식대로 선화를 챙겼다. 과일이나 마른반찬을 가져다주기도 했고 어느 날은 비닐봉지에 잡채를 담아 주었다. 내 팀과 다른 팀의 구별이 엄격했고, 다른 팀원들에게 유독 공격적이었다. 누군가 다가와 업무에 관해 얘기할 때, 선화는 자신을 주시하는 그녀의 시선을 느꼈다. 조금이라도 무르게 대응하는 듯하면 파티션 너머에서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선화도 미간을 찌푸리고, 딱딱하게 말을 했다.  


- 그녀가 감탄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초록색 앞치마를 두른 종업원이 고풍스러운 쟁반에 커피 두 잔을 받쳐 들고 왔다. 커피잔이 각자 앞에 놓이는 동안 둘 다 침묵을 지켰다.
"나 6월까지 다니고 회사 그만뒀어."
종업원이 멀어진 뒤에 그녀가 말했다.
"네. 미미 선배한테 들었어요."
"그래? 미미 씨랑은 연락하고 지내나 봐?"
"아뇨. 그냥 그만두신다는 얘기만 들었어요."

"그래..."

 

- 그녀가 테이블 건너편에서 선화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준이와 함께 상담을 받기 시작했는데, 상담만으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그만큼 아이의 병이 깊었다. 회사에 사정을 설명하고 장기 휴가를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라고, 바쁠 텐데 간단히 얘기하겠다고 그녀가 말했다. 아이의 문제 때문에 시작한 상담이 뜻밖에 인생을 돌아보게 만들었다고. 지금껏 살아온 방식, 세상 일과 사람들을 바라보고 대하는 방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자기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어.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어. 미안해."
선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이런 얘기가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거부감이 앞섰다.

- "사실 미안하다는 말은 전부터 하고 싶었어. 근데 자기가 전화를 안 받았잖아."
"네, 그랬죠."
"자기도 참 그래. 차라리 전화번호를 바꾸지 그랬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누군가 작은 성냥을 그어 치익 불을 댕긴 것 같았다. 마음속에 저항감이 일었다. 내가 전화번호를 왜 바꿔. 당신이 나한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인 줄 알아? 항상 이렇게 다른 사람의 의중을 넘겨짚고 터무니없이 비약했지. 게다가 퇴사할 무렵 이미 둘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사이에 금이 간 건 훨씬 전이었다. 언젠가부터 그 많은 금기들이 어리석은 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 "이렇게 중요한 자리일 줄 몰랐네요."
"뭐라고?"
그녀는 변한 것 같지 않았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조차 그대로였다. 촌스러운 옷차림도. 그녀가 다른 회사에 가서 적응할 수 있을까. 젊은 직원들과 어울릴 수 있을까. 쉽지 않을 터였다.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선화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왜 그렇게 내 전화 안 받았는지 물어봐도 돼?"

임계점을 넘은 듯, 마음속이 들끓기 시작했다. 선화는 작게 한숨을 쉬고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전화를 받고 싶을 거라 생각하셨어요?"
그러고는 또 침묵이 흘렀다.

- "끝까지 저한테 잘될 거라고 안 하셨죠."
선화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정말 미안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난 정말 자기가 잘될 거라고 생각 못 했어."

 

- 모든 게 똑같았다. 순간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선화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플러와 손지갑을 챙겨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따라오지 않았다.

- 그녀는 아마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을 터였다. 그 코가 쑥 빠진 창백하고 긴 얼굴을 하고. 그녀는 올해 마흔네 살이고, 새로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자기가 받지 못한 축복과 격려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선화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 <드림팀>



- 루미는 카탈로그를 받아 들고 검지로 훑으면서 전기장판 더미에서 몇 개를 꺼내게 했다. 나는 한걸음 떨어져 그 모습을 바라봤다. 새삼 루미가 없다면 어떻게 옷과 물건들을 고를까 싶었다. 나는 쇼핑을 골치 아파 하지만, 루미와 있으면 안심이 된다. 그녀가 없으면 일상생활이 곤란해질 것이다. 물론 그녀는 내 곁에 있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요즘 나는 자꾸만 혼자 남은 내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게 된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루미가 나를 불렀다. 몇 가지 후보가 있었다. 우리는 그중 표면이 고무지우개처럼 부드럽고 네 귀퉁이가 튼튼해 보이는 황토 장판을 골랐다. 

- 나는 찌그러뜨린 맥주 캔을 재활용 쓰레기를 모으는 종이 상자에 던지고, 주방으로 간다. 맥주를 따라 마신 유리잔을 개수대에 집어넣는다.
"뭐 해?"
곧바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와, 움찔한다.
"한번 헹궈서 엎어 놓으면 되잖아. 왜 그냥 넣어놔? 누구한테 치우라고?"
루미가 말한다.
"난 지금 뒤집개도 안 쓰는 거 안 보여?"
 
-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벗은 옷가지를 정리하고 보관함 문을 닫는다. 누군가 탕에서 나올 때 잠깐 유리문이 열리고, 그 틈으로 뜨거운 수증기와 물냄새가 흘러나온다.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다니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잠시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아빠."
나는 장난스럽게 부른다.
"아빠, 난 걔 없으면 안 돼요."
"이기적이고, 돈도 안 벌고, 네 엄마랑 똑같아."
팔다리는 마르고 배만 볼록하게 나온 아버지의 몸을 바라본다. 가슴은 어린아이처럼 얄팍하다. 아버지는 심각한 수준의 간경화를 앓고 있다.

- "배에 복수가 찼어요. 앞으로 계속 그럴 거예요. 어지간하게도 드셨네요. 이제 정말 술은 못 드시게 해야 돼요."
커다란 안경을 낀 읍내 병원의 의사가 3주 전에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만취한 상태에서 문턱에 걸려 넘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잠시 멍했다. 또 술을 마셨구나. 결국 그랬구나.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나는 아버지의 하루를, 물나들이에서의 일상을 알지 못한다. 친한 사람도 없는 적막강산에서 뭘 하고 지내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 사물함을 열쇠로 잠그고 내 배를 내려다본다. 몸집이 크고 팔다리에 근육이 붙어 있다는 점은 다르지만, 내 배의 모양 역시 심상치 않다.
"20대에 이 정도 간 수치는 만 명 중에 한 명 있을까 말까예요. 젊다고 방심하면 큰일 나요."
이건 지난 건강 검진 뒤에 의사가 전화를 걸어와 한 말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루미에게 들려줬고, 그녀는 그 뒤로 내가 술을 마실 때마다 질겁했지만 요즘은 포기한 상태다. 하루는 일어나 보니 냉장고 문에 내 간 수치와 혈압, 몸무게가 적힌 노란 정사각형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나는 루미가 보는 앞에서 그걸 거칠게 떼어 낸 다음 구겨서 던져 버렸다.

- "다른 사람이 아무리 말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나도 이래라저래라 하기 싫어. 진짜 싫어, 이런 거."
그녀가 말했다. 

- 그랬다. 아버지를 혐오했지만 좋은 것들을 해 드리겠다고 다짐하던 때도 있었다. 부산에 집이 있고 가족이 있는데 왜 말년을 이렇게 보내야 하는지, 속이 답답해진다. 엄마와 누나는 아버지를 자기들 눈앞에서 치우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엄마가 원망스럽다.

- 루미는 다른 입장이었다.
"난 너희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언젠가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평생 얼마나 시달렸겠어?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은 거지. 왜 그걸 참아야 돼?"
이런 말도 했다.
"그러는 넌 도망쳤잖아. 그렇게 말할 권한이 없지. 아버지 꼴 보기 싫어서 서울로 대학 왔다며?"

- 나는 엄지와 검지로 뜨거운 물의 표면을 튕기면서 지금쯤 루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상상한다. 던킨도너츠 매장으로 전기장판을 메고 들어가 한쪽 구석에 내려놓고, 그 옆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그려 본다. 
루미는 엄마와 다르다. 엄마는 아버지가 술에 취해 목소리를 높이면 똑같이 소리쳤고, 아버지가 식탁에 있던 엄마를 향해 담뱃갑을 던졌을 때는 벌떡 일어나 앉아 있던 의자를 집어던져 버렸다. 내가 흥분하고 소리 지를 때 루미는 입을 다문다. 작은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고, 그러다가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 루미는 엄마와도 다르고, 우리 가족 누구와도 다르다. 그녀는 조용하지만 야심에 차 있다. 계획을 세우고, 실천한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는 이제 책을 읽지 않으며 신문도 인터넷으로만 건성으로 훑어볼 뿐이다. 주말에는 점심때까지 잠을 자고 운동도 하지 않는다. 예전엔 이렇지 않았다. 나는 루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논문 진행 상황에 관해 말했던 게 언제인지 떠올리려 애쓰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지막 섹스는 언제였을까. 확실히 3주 전 내가 물나들이에 다녀온 이후로는 없었다.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자꾸 이런 장면을 상상하게 된다. 어느 날 퇴근해서 보니 집안이 어딘가 달라져 있는 것이다. 방에 들어가 보면 옷장이 비어 있고, 신발장에는 내 신발만 남아 있고, 식탁 위에는 쪽지 한 장이 붙어있다.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그녀는 받지 않는다.

- 나는 아버지의 등 뒤에서 말한다. 친척집에 방문하자고 말하는 것처럼, 애써 밝은 목소리로. 
"겨울 동안만이라도 거기 있다 오세요."
아버지는 요양 병원이라는 말을 한 번에 알아듣는다.
"내가 거길 왜 가."
양말 신은 발로 댓돌에 서서, 결국 소리가 높아진다.
"비싼 돈 내면서 거기엘 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 아버지와 내가 서로를 향해 소리 지를 때, 루미는 마루에, 아버지 뒤쪽에 서 있다. 그녀는 섬뜩할 정도로 아무 표정도 없이 마당의 한 점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욕설을 내뱉고 대문을 나선다. 어디로 가겠다는 생각도 없이 골목을 걷는다. 뒤에서 삐걱거리는 대문 소리가 나고, 루미가 따라 나온다.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나가자, 눈앞에 폭이 넓은 강물이 나타난다. 잔잔한 물결이 오후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때의 햇살을 받아 반짝거린다. 

- "밖이 더 따뜻한 것 같아."
루미가 말한다. 그러고는 비탈을 따라 내려가서 손끝을 물에 담그고 다시 올라온다. 물기를 바지에 문지른 다음, 주변을 둘러보고 "굉장히 아름다운 곳 같은데." 하고 말한다. 그녀의 평온한 얼굴이, 조금도 해를 입지 않은 듯 보이는 모습이 갑자기 내 속의 뭔가를 건드린다. 나는 그녀의 친구들이 가끔 우리 아버지 이야기를 꺼낸다는 사실을 안다.

 

- "우리 집에 모시고 가자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강물을 바라보면서, 내가 말한다.
"당분간만 그렇게 하자고 하면?"
그녀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한다.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거, 너도 알 거라고 생각해."

나는 숨을 들이마신다. 더 밀어붙이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괜한 짓이라는 걸 느낀다. 양쪽 어깨에 통증이 느껴진다. 너무 피곤하다. 대신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 
"내가 아버지처럼 되면 너도 날 떠날 거야?"
루미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 프라이팬 손잡이를 잡는다.
"이거 생각보다 무거운데?"
"힘으로 하는 게 아니야."
루미가 피로한 얼굴로 미소 짓는다.

- 나는 그녀가 했던 것처럼 프라이팬을 앞뒤로 흔들다가 위로 튕긴다. 튕겼다고 생각했는데, 엉거주춤하게 팬을 허공으로 높이 들어 올렸을 뿐이다. 부침개는 그대로다.
"다시 해봐."
그녀는 뒤로 물러나 식탁 의자에 앉는다. 나는 팔에 힘을 주고 손목을 튕긴다. 손목 안쪽에 잔 근육들이 불거지고, 이번에는 부침개가 떠올랐다가 팬 끝으로 쏠리면서 귀퉁이가 접힌다. 한 번 더 시도하지만 꼼짝도 안 한다. 

- "이거 뭐야? 어떻게 하는 거야?"
루미가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한다.
"그게,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해."
나는 이게 정말 중대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걸 뒤집으면 모든 게 바뀌기라도 할 것처럼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다. 눈꺼풀 안으로 빛 조각들이 춤을 추며 한데 모였다가 흩어진다. 루미에게 말하고 싶다. 낮에, 강변에 갔을 때, 자꾸만 거기 혼자 서 있는 늙은 내가 그려졌다고. 두렵다고. 70살이나 80살 먹은 내가 물 건너편에 있었다고. 등 뒤로 루미가 다가오는 게 느껴지고, 내 어깨에 두 손이 올라온다. 나는 여전히 감은 눈꺼풀 안으로 흐르는 물을 보고 있다. 팬을 꽉 쥔 채로. 

 

- <우리가 물나들이에 갔을 때>



- 미려는 흔들리는 서핑 보드 위에서 상체를 높이 세웠다. 엎드린 채 팔꿈치를 쭉 펴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모래사장에서 시선을 거두어 양옆을 아득하게 펼쳐진 수평선 위를 훑었다. 정운은 어디로 갔을까. 어디선가 적당한 파도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눈을 가늘게 뜨고 최대한 멀리까지 훑어보았지만 정운은 보이지 않았다. 미려는 주변의 소리가 한꺼번에 멎은 것 같던 그 순간의 정적을 기억했다. 음소거된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느린 화면을 보고 있는 것처럼. 철썩거리는 물소리와 개 짖는 소리와 바람 소리가 사라졌다. 들리는 것은 자신의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뿐이었다.

- 조금 전까지 미려는 보드 위에 엎드려 물결에 따라 흔들리는 움직임을 즐기고 있었다. 양손을 포개 턱을 얹었는데 가끔 짠물이 입술까지 올라왔다. 눈을 감고 힘을 빼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모르는 사이에 얕은 잠에 들었을 수도 있었다. 미려는 미끌거리는 보드 위에서 다리를 끌어올려 앉아 보려고 했다. 그러자 오른발에 연결된 체인이 발목을 묵직하게 잡아당겼다.  

- 그다음에 어느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야 할지 몰라 멍하게 서 있는 일이 있었다. 정운과 여러 번 갔던 장소를 혼자 찾아갈 때였다. 미려는 거기까지 몇 번 버스를 타고 갔는지, 심지어 그 버스가 서는 동네의 정류장이 어디였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길눈이 어두운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정운만 따라다녔기 때문이었다. 그걸 모른다는 게 말이 돼? 나 없으면 어떡할래? 미려가 전화를 걸어 물어보면 정운은 믿을 수 없어했다.

- 미려는 일단 해변으로 올라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당장 서핑 보드가 짐이 되었다. 초급자용 보드는 미려의 키보다도 더 길었고 두께도 한 뼘은 되었다. 거의 보트 같았다. 파도를 타면 단숨에 미끄러져 갈 수 있겠지만, 도와주는 사람 없이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보드에 아랫배와 가슴을 붙이고 엎드린 자세로 양팔을 팔꿈치까지 물속에 넣어 노처럼 저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금은 흡족한 기분으로 초록색 물 위에 떠 있었는데, 아름답게만 보이던 바다가 이제 거대한 자석처럼 보드를 잡아당겼고 철썩거리는 물살은 겨우 나아간 거리보다 훨씬 뒤로 그녀를 밀어 보냈다. 보드는 해변까지 똑바로 가로질러 나아가지 못했다. 자꾸 옆으로 밀려났다. 미려는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고 규칙적으로 호흡하려 노력하면서 양손을 오므려 빽빽한 물살을 뒤로 밀어냈다. 

-  그녀가 닿은 곳은 모래사장이 아니었다. 땅은 짙은 색깔에 축축했고, 젖은 고무를 밟는 느낌이 났다. 군데군데 풀이 한 줌씩 뿌려진 것처럼 흩어져 자라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시시각각 색깔이 달라지는 바다에 정운은 없었다. 시야가 미치는 범위는 너무 좁았으며 해변은 끝도 시작도 없이 그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미려는 거기서 자신을 밀어내는 것 같은 무심함을 느꼈다. 자연의 무심함. 군데군데 떠 있는 구름이 분홍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 이런 곳에서 태어났다면 뭐가 됐을까? 뭔가 다른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글쎄.

정운이 대답했다.
대학에 갔을까?
미려는 그렇게 말하고 손을 창밖으로 뻗었다. 여기서는 바깥이 보이지 않는, 상쾌한 공기가 통하지 않는 막힌 공간에 들어앉아 시간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럽게 생각되었다. 이런 곳에서 태어났다면 쉬는 날 해변에 나가서 수영을 하고, 날마다, 정말 날마다 텅 빈 바다 위로 해가 지는 모습을 보고, 너무 복잡한 생각은 하지 않고 지낼 것 같았다. 
그럴까. 정운은 한숨을 쉬었다. 여기가 외국도 아니고, 사는 게 다 똑같지. 그렇게 쉽게 달라지겠냐.

- 그들은 6년 동안 같이 살았고 만나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도 더 전이었다. 둘 다 여행을 즐기지 않았으므로 미려는 정운이 분위기를 바꾸고 싶다면서 어느 날 밤 침대로 노트북을 들고 와 몇 가지 여행 상품을 보여 주었을 때 깜짝 놀랐다. 남쪽 해안의 작은 호텔에 일정 전부를 예약하고 왔는데, 정운은 도착하자마자 후회했다. 해변에는 이른 아침부터 자정까지 관광객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 있었다. 모래사장에 누워 팔을 쭉 뻗으면 누군가의 손가락이나 머리카락이 닿았다. 이게 출근 지하철하고 뭐가 달라? 정운은 불평했다. 

- 섬의 북쪽은 아주 달랐다. 해변의 폭은 좁았지만 모래가 깊었다. 탁 트인 바다는 푸른색이 더 짙은 듯했고 파도가 높게 일어 대양의 가장자리에 서있는 실감이 들었다. 관광객도 훨씬 적었다. 정운은 환호성을 지르며 한 차례 수영을 하고 나오더니 일일 서핑 강습을 하는 가게를 찾아냈다. 미려는 서핑을 원하지 않았다. 서핑 같은 건 한 번도 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자기가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정운은 새로운 일을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고, 미지의 체험을 덮어놓고 거부한다고 비난했고, 미려 역시 그 평가를 의식했다. 지금 안 하면 언제 해 보겠어. 정운이 말했다. 미려는 정운의 기분을 맞춰주고 싶었다. 의외의 모습을 보여 그를 놀라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려는 벌떡 일어났다. 좋아, 한번 해보지 뭐. 죽기야 하겠어. 그러나 위아래 검정색 유니폼을 입고 눈썹에 피어싱을 한 남자가 발목에 체인을 채웠을 때, 자신이 수영을 못한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 수영을 못한다고요? 피어싱한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남자의 옷자락에서 미려의 발등으로 미지근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떻게 해? 난 수영 못하잖아. 미려가 외쳤다.
정운은 단발머리를 뒤로 묶고 짙은 선글라스를 낀 다른 남자와 함께 있었다. 그 남자도 똑같이 광택이 나는 검정색 스태프용 옷을 입고 있었다. 두 스태프는 자기들끼리 좀 떨어진 곳으로 가서 의견을 주고받았다. 피어싱한 남자는 등을 돌리고 있어 미려 쪽에서는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황당하다는 듯 웃었고 어깨를 으쓱했다. 피어싱한 남자가 말을 마치고 다가오더니, 해변과 가까운 얕은 곳에서 연습을 하자고 했다. 이런 경우는 별로 없지만요, 하고 덧붙였다. 
미려는 정운과 떨어지는 것이 불안했지만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만두기에는 늦었다. 정운은 먼저 바다로 들어가면서 미려를 안심시킬 때 늘 그러듯, 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지그시 끄덕여 보였다.

-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아주 얕은 잠이었다. 이럴 수가 있나? 미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핑을 시작한 해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그렇지만 풍경이 달랐다. 풍성하던 모래가 사라졌고, 관광객들이 보이지 않았다. 곳곳에 자라난 관목들은 어쩐지 쇠락한 기운을 자아냈으며 공기에는 희미한 물비린내가 감돌았다. 조금 떨어진 물웅덩이에는 기름이 만든 오색 무지개가 얇게 끼어 있었다. 

- 이 근처에는 그런 걸 빌려 주는 데가 없어.
남편 역시 모른다는 사실을 표정에서 읽고 할머니가 대답했다. 머리에 두른 스카프를 턱 아래에서 작은 매듭을 지어 묶고 있었는데, 입 주변은 박물관에 전시된 토기처럼 실금으로 뒤덮여 있었다. 처진 눈꺼풀 아래로 보이는 작은 눈동자가 탁했다.  

- 미려는 정운이 나타나기를, 늘 그랬듯 듬직한 태도로 단숨에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울면 안 돼. 미려는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너 지금 울려고 하잖아. 다시 발에 모래가 밟히기 시작했다. 저만치 눈앞에 모래사장이 펼쳐졌다.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고 확신하자 미려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석양이 바다 가득 넘실거렸다. 바람이 부는 대로 수면은 잘게 부서졌고 풀들이 흔들렸다. 부드러운 바람이었다. 해변은 텅 비고 황량했지만 너무나 평화로웠으며 고요했다. 

 

- 소리를 질러야 할까? 미려는 생각 했다. 지금 나는 응급 상황인가? 보드를 끌고 한 발짝도 더 움직일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주변은 너무나 조용하고 또 아름다웠기 때문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풍경은 자신의 다급함과 극명하게 대조되었다. 고통을 느끼는 것은 그녀뿐이었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막, 얇은 피부 안은 공포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 밖에는 한없이 무심한 입자들이 떠돌고 있었다. 미려는 자신의 몸 밖으로 나간 것처럼, 하늘 높은 곳으로 솟구쳐 거기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자신을 바라보았다. 수영복을 입고 알록달록한 초급자용 서핑 보드를 옆에 끼고 텅 빈 해변에 서 있는 자신이 보였다. 줌 아웃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자, 동그란 지구의 표면에, 대양 가장자리에 서 있는 점처럼 작은 자신이 보였다. 그녀가 스스로 마음을 가라앉힐 때 쓰는 방법이었다. 

- 아주 비참한 모습인 것만은 확실했다.
서핑을 했는데, 보드는 어디에 있지? 남자가 입을 열었다.
미려는 몸을 떨었다. 떨면서도 최대한 목소리를 가라앉히려 애쓰면서 설명했다. 호텔들이 모여 있는 곳까지만 자기를 데려다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남자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미려는 기다려야 하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다. 다가오는 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통로 한쪽에 놓인 흙 묻은 운동화 두 켤레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하나는 검정색이고, 다른 하나는 갈색이었다. 막 벗어던지고 들어간 것처럼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지만 둘 다 같은 사이즈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다른 신발은 보이지 않았다. 문득 남자의 훤칠한 키와 두상이 학부 때 교수님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교수님도 머리가 거의 벗어졌고 뒤쪽은 아주 짧게 유지했다. 자기가 머리를 하러 가면 그날 그 미용사는 완전히 횡재한 거라고 수업 시간에 얘기한 적이 있었다. 누워서 떡 먹기니까요, 커다란 손바닥으로 자신의 머리를 훑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어느 날 강의하러 나오는 길에 이발소에 들렀는데 좀 수상한 곳이었다고 했다. 들어가서 앉은 다음에 알았다고, 예의 바르게 거절하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고 했다. 알죠? 너무 좋아서 받을 수가 없죠, 그런 건. 

- 남자가 다시 나왔다. 한 손에 체크무늬 긴소매 셔츠와 탄산수 병을 들고 있었다.
여긴 초보자들이 서핑할 만한 바다가 아니야.
그는 미려를 지나쳐 앞장서 걸으면서 말했다. 불평하는 듯한, 짜증을 억누르는 것 같은 말투였다. 그는 픽업트럭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미려는 머뭇거렸다.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의 차를 타는 것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 중의 하나였다. 가장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라고 미려는 생각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되자 이전에 생각했던 규칙이라는 것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려는 올라탔다.

- 차는 진입로를 통과해 이차선 도로를 천천히 달렸다. 미려는 셔츠를 두르고 탄산수를 마셨다.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연한 어둠이 고루 내려앉았다. 미려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방향이 잘못됐다는 것을, 상아색 호텔이 있는 쪽과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미려는 겨우 물었다.
보드를 두고 왔다면서? 남자가 룸미러로 미려를 흘긋 보고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당연하지 않느냐는 투였다. 미려는 방금 자신의 말이 의심하는 것처럼 들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려는 보드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보드를 가지러 가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려야 해, 미려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정신 차려. 

- 아가씨를 데려다주고 나도 어서 가야 해. 아가씨도 급하겠지만 나도 바쁘다고.
남자가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미려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긴장하고 창밖을 주시하다가, 모래사장이 끝나는 곳에서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아래로 내려갔다. 보드는 그 자리에 있었다. 보드가 거기 그대로 있다는 것이 몹시 놀라운 일처럼 여겨졌다. 미려는 어둠에 녹아들어 있는 보드를 발견하고 자신의 일부를 보는 것처럼 묵직한, 거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감정을 느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보드의 한쪽 끝을 들어 올렸다. 미려는 반대쪽을 잡았다. 그들은 바람을 맞으면서 보드를 운반해 픽업트럭 뒤에 대각선으로 실었다. 체인이 트럭 바닥에 긁히면서 묵직한 쇳소리를 냈다.

- 피어싱한 스태프는 대여용 보드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진열대 근처에 있었다. 문을 닫을 준비를 하다가, 멀리서 미려를 보고 혼자서 뭐라고 말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대머리 남자가 수상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드를 빼앗듯 넘겨받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스태프가 보드를 훑어본 다음 물었다.
멀리 떠내려가 버렸어요. 미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같이 왔던 사람은, 정운은 어디 있느냐고 다급하게 물었다.
그 사람은 갔어요.
갔다고요?
피어싱한 스태프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우린 그쪽이 어떻게든 숙소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주변을 다 뒤졌는데 없었으니까요. 그 남자분은 호텔로 간다고 그랬어요. 혹시 여기로 오면 주라고 쪽지 남겼어요. 안에 있어요. 

- 미려는 안으로 들어가 옷과 지갑이 들어 있는 비치백과 정운이 남긴 쪽지를 받았다. 얇아서 잉크가 번지는, 흰색 정사각형 쪽지였다. 정운은 거기에 호텔의 주소와 버스 번호, 내려야 하는 정류장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 그게 전부였다. 쪽지를 뒤집어 보았지만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았다.
상황을 이해하는 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 미려는 순간 이 모든 것이 장난이 아닌가, 무슨 속임수가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것은 정운의 글씨가 맞았다. 정운은 자신을 기다리지 않았다. 무슨 오해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도저히 이럴 수 없다고 생각되었지만, 기다리지 않고 떠났다.

- 스태프가 데스크 건너편에서 미려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꼭 울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미려는 허리를 세우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몸의 물기는 완전히 말라 있었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보니 체크무늬 셔츠를 그대로 걸치고 있었다. 미려는 서둘러서 비키니를 벗고, 속옷을 입고, 민소매 티셔츠와 반바지를 꿰어 입었다. 반바지는 보송보송한 하늘색 타월천 재질로, 이번 여행을 위해 정운과 같은 디자인으로 구입한 것이었다. 미려는 벽에 걸린 거울을 보았다. 작은 사각 거울 속에 하얗게 질린, 핏기 없는 입술의 여자가 있었다. 미려는 양손으로 머리를 정리해 가라앉히고 밖으로 나갔다.

- 아가씨, 괜찮겠어?
대머리 남자가 셔츠를 건네받고 나서 한숨을 쉬며 물었다.
픽업트럭은 탁 트인 도로를 달렸다. 미려는 조수석에 앉아 낯선 섬의 어두운 밤거리를 바라보았다. 자기가 자기가 아닌 것 같았다. 그렇지만 머릿속은 맑았다. 상점들이 모여 있는 환한 교차로를 지나자 다시 불빛이 적어지고 주택가가 나왔다. 

 

- 나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굉장한 서핑을 한 것 같네. 남자가 미려 쪽을 흘긋 보고 말했다.
미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양손을 모아 무릎에 내려놓고 낮에, 벌써 유리 몇 겹 저편에 있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낮에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보드 위에 벌떡 일어설 때의 감각을 떠올리려 애썼다. 처음에는 눈물이 고일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정말 몰입했다. 단계별로 감각을 하나하나 되살려냈다. 마치 보드와 한 몸이 된 것처럼 가슴과 아랫배와 허벅지를 붙이고 납작 엎드려 있을 때, 멀리서 파도가 다가올 때의 조짐과 흥분과 망설임, 난 일어날 수 없어, 이건 불가능해, 그러나 물살이 보드의 뒤쪽을 둥실 들어 올리자 눈을 질끈 감고 벌떡 일어났을 때, 미려는 한 몸처럼 포개져 있던 보드를 짚고 벌떡 일어났다. 가슴과 배와 다리가 서늘해졌다. 그 느낌을 미려는 기억했다. 다음 순간에는 물 위를 미끄러지고 있었다. 해변에 가까워질수록 속력이 점점 느려졌다. 흔들리는 물 아래로 땅이, 물결의 흐름대로 무늬가 새겨진 부드러운 모랫바닥이 투명하게 비쳤다.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 픽업트럭이 자갈을 튀기며 진입로에 들어섰다. 남자가 헤드라이트를 껐다가 켰고, 다시 껐다. 왼편에 창마다 불을 밝힌 긴 단층집이 있었다. 미려가 먼저 트럭에서 내렸다. 남자가 시동을 끄자 사방이 조용해졌다. 바람이 나무줄기 사이를 빠져나가는 소리가 났고, 멀리서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도 들렸다. 이곳도 해변이 멀지 않은가 보다고 미려는 생각 했다.

- 카드 게임 할 줄 아나?  

 

- <얕은 잠>



- 김정일이 죽었다는 소식은 점심시간에 전해졌다. 월요일이었다. 그날 아침, 상미는 좀 늦게까지 잠을 자고 말았다. 그녀는 지난달에 회사 근처로 이사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요즘 지각이 잦았다. 마을버스를 타면 10분 만에 회사에 도착하는데 말이다. 게다가 월요일부터 지각을 하다니. 상미는 오전 내내 파티션 사이에서 몸을 낮추고 있었다. 

- 마침내 점심시간이 되었다. 상미는 효정 선배와 커피를 사러 나갔다. 날은 흐렸지만 따뜻했고, 축축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두 사람은 크리스마스 트리가 장식된 입주기업협의회 1층 카페에서 커피를 사고 밖으로 나왔다. 효정 선배가 벤치에 커피를 내려놓고 담배를 꺼냈다. 상미는 한쪽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진하게 주문한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그날의 첫 커피였다. 오전 내내 한 잔도 마시지 못했다. 아침 9시에 시작하는 전체 회의에 늦는 바람에 컵을 들고 왔다 갔다 하기에도 눈치가 보였다. 


- "상미 씨, 군기 빠졌네."
효정 선배가 말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꺾어 우아하게 담배 연기를 흘려보냈다.
"너무 빨리 변하는 거 아니에요?"
웃음기 있는 얼굴로 말했지만 가시가 있었다. 상미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효정 선배는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 인턴 기간을 거쳐 둘 중 한 사람을 채용한다는 것이 회사의 조건이었다. 상미는 이런 중소기업까지 인턴제를 채택한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지원율은 꽤나 높았다. 태영은 상미보다 다섯 살이 위였다. 학벌도 더 좋았다. 늦게 군대를 다녀왔고, 대학원 석사 과정을 2학기 다니고 중단한 상태였다. 내성적인 성격에 바닥만 보고 걸어 다닐 정도였지만, 언뜻언뜻 강한 자의식이 엿보였다.

- 상미는 은연중에 두 사람의 경쟁을 부추기며 구경하는 분위기를 느꼈다. 불쾌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런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어쩌다 경쟁 구도에 놓이게 되었을 뿐 두 사람이 서로 싸울 이유도, 미워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대단한 회사도 아니잖아, 상미는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렀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상미는 어느 순간 자신이 그를 꺾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실수하기를 바라며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언젠가부터 상미는 실제로 그를 미워하고 있었다. 입을 가리고 웃는 습관조차 보기 싫었다.

- 그 무렵엔 늦은 시각까지 야근을 해도 모닝콜이 울리기 1분 전에 눈이 떠졌다. 눈매가 또렷해 보이도록 아이라이너로 강조했고, 굽이 높은 구두를 신었다. 집을 나서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까지, 전쟁터에 임하는 것처럼 스스로 무장했다.

- 김태영은 똑똑했지만, 혼자 하는 일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학자나 마라토너처럼. 사무실의 일상적인 잡담에 끼지 못했고, 전화 응대하는 걸 특히 어려워했다. 두 달이 넘어갈 즈음, 상미는 자신이 그를 제치고 정규직 자리를 차지하리라는 걸 거의 확신했다. 부장으로부터 슬쩍 암시하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도 상미는 그를 싫어하는 일을 멈추지 못했다. 왜 이다지도 그가 꼴 보기 싫은지 스스로도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루 종일 파티션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채 지내는 사람을 맹렬하게 증오한 나머지 오후가 되면 머리가 지끈지끈거렸다. 그가 없어졌으면, 하고 생각했다.

- 그렇다고 해서 상미가 적극적으로 뭔가를 한 건 아니었다. 상미가 실제로 한 일은 아주 작은 것 - 말 한마디, 비웃듯 입을 꽉 다무는 표정 같은- 이었다. 평형대에서 균형을 잃고 허우적대는 사람을 미는 손가락 하나 같은 것.

- 그런 자신의 마음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태영은 알았을 것이다. 그는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다. 상미는 생각했다.
반면 그는 끝까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둘만 있을 때도 상미를 그런 식으로 대한 적이 없었다. 상미는 이겼지만 패배한 기분이었다. 그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동안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흔히 말하듯 사람마다 그릇이라는 게 있다면, 자신의 그릇이 그다지 넓지 않다는 건 스물여섯 해를 사는 동안 이미 깨달았다. 그래도 내심 중요한 순간에는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 바라던 대로 정식 직원이 된 날, 상미는 설립자인 대표를 만날 수 있었다. 4층 사장님의 방에 처음으로 올라가 봤다. 그는 전망이 좋은 창가에 놓인 커다란 책상에 앉아 있었다. 펜을 쥐고 뭔가를 읽는 중이었는데, 고개를 들어 상미를 보고는 말했다.
"우리가 에이급도 써 보고 비급도 써 봤는데, 에이급들은 금방 그만두더라고."
대체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여전히 알 수 없다.
악의는 없어 보였다. 진심을 말한 것뿐이었다.

- 그리고 이제 맞은편 자리는 비어 있다. 그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김정일 사망 소식을 듣고, 태영 씨도 이곳을 떠올리겠지. 상미는 생각했다. 만에 하나 폭격이라도 일어난다면, 그가 더 운이 좋았던 셈인가. 그는 사망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확인하겠지. 속이 후련하다고 생각할까.

- "아니, 왜 이런 걸 나한테 얘기해. 나한테 어쩌라고."
누구한테 하는 말도 아니면서 책상에 앉아 짜증을 냈다. 그러더니 "상미 씨." 하고 불렀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부장이 말했다.
"사장님 방에 비가 샌다는데, 밑에 아저씨한테 가서 말 좀 해 줘라."
"밑에요?"
그녀는 알아들었으면서 되물었다.

 

- 그 아래 바닥에도 흘러내린 물이 고여 있었다.
"어떻게 건물을 이렇게 만들까요. 지은 지 몇 년이나 됐다고."
상미가 말했다. 그러자 효정이 대꾸했다.
"전에 건축학과 학생들이 찾아온 적 있었어요. 목에 카메라 걸고, 안에 들어와서 구경해도 되는지 물어보더라고요. 내가 진짜, 비 오는 날 오라고 하고 싶었다니까요."

- 멋진 건물이긴 했다. 구조가 특이했고, 어디에서 고개를 들어도 벽이 만드는 선과 면이 독특한 각도로 겹쳐졌다. 복도 어느 지점에 서면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구도가 근사했다. 그러나 사람이 활동하기에는 엉망이었다. 계단은 너무 가파른 데다 좁아서 오르내릴 때마다 굴러 떨어질 것 같은 공포심이 들었고, 무엇보다 방수 기능은 건너뛴 모양이었다.

- "당연히 아무 일 없지. 뭔 소리예요."
최 대리도 말했다.
"지금은 떠들썩해도 또 조용해질 걸요. 항상 그렇잖아요. 참, 효정 씨."
그가 쭈그리고 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효정을 봤다.
"오늘 퇴근 몇 시에 하실 거예요? 그 동네 갈 일 있는데 태워다 드릴게요."

- 상미는 회의실에 두 사람을 남겨두고 나왔다. 바깥은 저녁처럼 어두웠다. 긴 복도의 바닥 양쪽에 양동이와 양은 양푼 따위가 띄엄띄엄 놓여 있었다. 통유리 너머로 단지 중앙로가 보였다. 북쪽으로 가는 차선에 군용 지프와 트럭들이 한 줄로 달리고 있었다. 트럭 뒤에는 얼룩덜룩한 옷을 입은 군인들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우산도 쓰지 않고 비를 그냥 맞았다. 그때 코앞에서 똑하고 맑은 소리가 울렸다. 상미의 발치에 놓인 흰색 양동이 안으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 그런데 인터폰 화면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 걸 보니 옆집인 모양이었다. 갑자기 잠에서 깨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쁜 꿈을 꿨을 때 같았다. 누군가 계속 벨을 눌렀다. 세 번 네 번 소리가 났고, 그 뒤로는 벨이 울리는 것인지 귓속에서 이명이 반복되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 한참 뒤에, 거의 눈이 감기려 할 때쯤,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옆집에서 나는 소리였다.
"119입니다. 문 열어 보세요. 119입니다."
젊은 남자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침착한 목소리가 들렸다.
"119입니다. 문 좀 열어 보세요."

-침대에서 일어나 작은 등을 밝혔다. 옆집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상미는 옆집에 사는 여자를 잘 몰랐다. 얼굴만 아는 정도였다. 그 집에 샴고양이가 한 마리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창틀에 앉아 있는 모습을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 이 소동에 샴은 어떻게 하고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 화면을 켰다. 문 앞은 텅 비어 있었다. 사람들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도 없었다. 맞은편 집의 문과 그녀의 집 사이 공간에는 아무도 없었고, 왼쪽으로 계단의 일부가 보일 뿐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 상미는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었다. 밖은 연기 같은 안개가 자욱했고, 건물 아래 구급차가 있었다. 붉은빛이 젖은 도로 위에 번쩍거렸다. 계단에서 무거운 쇠붙이가 떨어져 구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쾅쾅 내리치는 소리가 연달아 났고, 사람들의 말소리도 들렸다. 새벽 2시에 들릴 법한 소리는 아니었다. 상미는 맨발을 차가운 슬리퍼에 넣고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그녀가 착각한 것이었다. 소리는 옆집이 아니라 아래층에서 나고 있었다. 계단을 서너 개 내려가자 경찰들이 보였다. 그중 한 명이 고개를 들어 상미를 흘긋 보더니 올라가라고, 거만하게 손짓했다.

 

- 상미는 집 안으로 들어와 현관에 잠시 서 있었다. 어째서 경찰들이 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고 막연하게 불길한 마음이 일었다.  


- <감정 연습>



- 고현진은 대학을 졸업하고 보험회사의 팀 비서로근무하다 결혼했다. 상대는 계리사였다. 현진이 담당한 부서 소속은 아니지만 같은 층을 써서 자주 마주치던 남자였다. 그녀의 부모님은 보험 계리사에 관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앞에 '보험'이라는 말이 붙지 않았다면 아마 닭과 관련된 일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녀 인생의 첫 번째 사회생활은 그렇게 사내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면서 막을 내렸다. 결혼을 앞두고 회사를 그만둘 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봉 잡았다거나, 얼마 못 갈 거라는. 그때 현진은 스물여섯이었다. 어깨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깔깔대며 말했다.
"살아 보고 아니면 이혼하죠 뭐. 위자료만 많이 받으면 돼요."
친구들에게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한 말이었지만, 반복하는 사이 스스로도 암시가 되었다.

- 결혼 생활은 생각보다도 더 빨리 끝났다. 잠실의 그 9층 아파트, 현관 바닥의 오색무늬 타일, 자동차 시트에 밴 방향제 냄새. 전부 또렷하게 떠오르는데, 그 속에 자기가 있었다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고 그녀는 이야기했다.
그곳을 나와 경기도의 부모님 집으로 돌아갔다. 가족과 싸우면서도 악착같이 머물렀다. 1년가량 쉬다가, 아는 사람 소개로 미술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조금씩 만화를 그려 무료 연재를 하기 시작했다. 학원 수업은 일주일에 사흘 나갔는데, 그 외의 시간에는 뭘 하는지 모르지만 늘 바빴다. 가족들에게 전화가 자주 왔고 만나는 남자도 있는 듯했다.  

- 나는 현진의 삶에 관해, 그녀가 직접 들려준 부분 말고는 거의 몰랐다. 주말은 누구와 보내는지, 친한 친구가 있는지. 그해 봄과 여름, 가을을 지나는 동안 그녀와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매번 다른 장소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낯선 동네의 낯선 공간을 물색했다. 친숙한 물건이 없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낯선 곳. 눌린 베개가 지난밤의 잠을, 가운데가 움푹 팬 왁스 양초가 그것을 선물한 사람과 보낸 시간을 불러내 훼방 놓지 않는 곳으로. 눈에 익은 사물들이 익숙하게 배열된 공간에서는 이야기도 이미 패어 있는 홈, 늘 가던 경로로 흘러가려 했다.

 

- 우리가 나눈 말들 중 친교를 위한 말은 거의 없었다. 그녀와 나의 몸이 닿는 일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불필요한 말과 몸짓이 어찌나 많은지! 어떤 때는 주요 참고인으로서 캠코더 앞에 앉아 진술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야기가 시작되고 거기 집중하면 자세는 점차 느슨하게 허물어졌지만, 의식은 아주 추운 날, 텅 빈 밤거리를 혼자 걸을 때처럼 팽팽했다.

- 주변에서 들으니 좋은 평가를 얻고 있더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갸웃했다. 내가 보기에는 아마추어 티를 벗지 못한 평이한 일상툰이었다. 자기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낸. 

- "왜요? 관심 있으면 하면 되죠."
"사람 나름이긴 한데, 전 안 돼요. 자기 스토리도 있어야 하고 좀 섬세해야 하는데, 저는 그런 쪽이안 되더라고요."
그리고 그녀가 나타났다. 내 자리는 출입문을 등진 쪽이라, 그녀가 도착했다는 걸 깨닫자마자 거기 그녀가 있었다. 고개를 드는 순간 가슴 아래쪽에서 조각 하나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예상을 벗어나는 많은 일들 앞에서 그렇듯, 평정을 가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현진은 사진으로는 결코 짐작할 수 없었던 성숙한 스타일이었다. 이목구비는 사진과 같았지만 인상은 완벽하게 달랐다. 새까만 긴 머리에 눈이 반짝반짝했고, 입술에는 원색 빨강립스틱을 칠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얇은 카디건자락 사이로 풍만한 몸매가 언뜻언뜻 드러났다. 

- 고현진이 합류한 뒤로 나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자꾸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게 되었다. 내 주변에는 그렇게 원색 빨강 립스틱을 칠하고 다니는 여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현진에게는 잘 어울렸다. 무엇보다 그녀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떤 타입의 사람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허세 있는 소리를 하는 사람에게 가차 없이 무안을 주었는데, 그러면서도 냉소적이지가 않았다.
"근데, 본인이 진짜 이상한 거는 알죠? 자기 정상 아니야, 진짜로."
그러고는 턱을 비스듬히 들고 오호호호 웃었다.

 

- 가끔 수위가 좀 아슬아슬했지만, 그것조차 매력적으로 보였다. H가 이 자리에 있다면 얼마나 매혹되었을까. 분명 정신없이 찬미하고, 공격당하고 웃고,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눈을 떼지 못했으리라. 

- "H가 내 만화에 관심 있다는 말. 전해 달라고 했다면서."
속이 쿵 내려앉았다. 눈앞에서 그녀의 새빨간 입술이 무자비하게 움직였다.
"내 기억으로는 그날 H 얘기가 여러 번 나왔는데.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안 했네?"
현진은 나를 빤히 보다가 조롱하듯 덧붙였다.
"뭐 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겠지."

- 다시는 현진을 만날 일이 없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맞아, 이런 사람이었지. 이런 면이 있었어. 나는 현진을 딱 한 번 만났고, 그 뒤로 마음속에서 그녀를 왜곡하고 자의로 해석하고 있었다. 내 모든 왜곡과 해석과 신비화에 관련 없이, 그녀는 자신의 모습대로 존재했다.

-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봤다.
"너 그 사람한테 관심 있니?"
그러고는 또 오호호호 웃었다.
"그 사람 결혼하지 않았니?"

 

- 돌아오는 길에, 혼자 카페에 들어가 생각했다.
나는 세상 속에 있고, 세상과 접촉한다. 나의 눈, 나의 몸으로. 그렇지만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오는 것들, 나와 세상 사이에서 어른거리는 것들. 그것들은 또 한 겹의 피부처럼 나와 세상 사이에 분명히 자리하고 있었다. 어떤 때는 그것들이 전부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내 안에서 목소리들이 자루에 갇힌 유령들처럼 와글거리며 서로 자기 주장을 하고 힘을 겨루었다. 마치 내가 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 2층 유리창 밖으로 무성한 녹색 잎사귀들이 흔들렸다. 아래는 4차선 도로가 뻗어 있었다. 활기 넘치는 거리를 나는 한참 내다보았다. 그러나 내가 보고 있다고 믿을 때조차, 나는 어디까지 내 눈으로 그걸 보고 있는 걸까?

- 그것이 일어났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는 관계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돌아가며 장소를 정했고, 한 달에 한 번씩 만났다. 살면서 만난 흥미로운 사람들, 기이한 인물들, 여행에 관해서 말했다. 자기 자신 외에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고 맥락조차 분명치 않은, ...  

- 교환학생으로 하와이 대학에서 수업을 들을 때, 강사 중에 원주민 여자가 있었다. 미국 근현대사 수업 담당이었다. 자그마한 몸집에 팔과 다리는 마라톤 선수처럼 근육질이고 피부가 초콜릿색인 여성으로, 하와이 왕가의 피가 섞인 로열패밀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카메하메하 학교는 왕실 후손들만 입학할 수 있었다고 가르쳐 주었다. 여자는 그 학교출신이었다. 

- 나는 미국 영토 안의 유일한 왕궁이라는 이올라니 궁전을 찾아가 봤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오래전 하와이 왕가 사람들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식으로 방을 꾸미고 살았는지 궁금했으나, 이올라니 궁전은 뜻밖에도 완벽한 서양식 건물이었다. 
잘 가꿔진 잔디밭을 지나 '하얀 창문'을 보러 궁전 뒤편으로 갔다.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고개를 들고 같은 쪽을 바라보고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얀 창문'은 마치 액자에 끼워진 미술 작품 같았다. 단지 높은 곳에 걸려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인 것이다. 마지막 여왕 릴리우오칼라니는 백성들을 일으켜 반란을 꾀하려다 침실에 감금되었고, 백인 사업가들은 그녀가 자신의 대지와 백성들을 볼 수 없도록 창문을 하얗게 칠했다. 전날, 강사는 하와이와 대한제국의 멸망 과정이 상당히 흡사하다고 했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황후와 여왕의 존재 역시 비슷했다. 그녀는 한국에 관해 상당히 자세히 알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한국은 주권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하와이는 그러지 못했다. 

- 궁전 안으로 들어가자 유리 진열대 안에 여왕의 사진들이 있었다. 중년의 릴리우오칼라니는 한국 아줌마들처럼 친숙한 생김새였는데, 표정에 위엄이 넘쳤다. 거무스름한 살결에 짧은 머리는 컬을 넣어 부풀렸고, 민소매 드레스를 입어 굵은 팔뚝이 드러났다. 그녀가 사용했던 테이블과 식기는 베르사유의 진열대 안에 놓여 있어도 가려낼 수 없을 듯했다. 그리고 영국 여행 중 구입했다는 커다란 보석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바래지 않고 지금도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아름답게 세공된 그 돌멩이들. 
 그녀는 백인들에게서 왕궁을 되찾기 위해 반란을 도모했지만, 궁전 내부를 서양식으로 꾸미고 서양식 드레스와 보석으로 자신의 몸을 치장했다.  


- <말과 키스>

 

 


 

 

작가의 말


2015년부터 2018년까지 발표한 소설들을 묶어 세상에 내놓는다. 이 소설들을 쓰는 동안 나는 스물아홉에서 서른둘이 되었고, 삶의 몇몇 국면을 지났다. 사회에서 완전히 적이 없어졌고, 결혼을 했고,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거쳐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이 소설들을 쓰고 있었기에 그 모든 순간에 나 자신을 열어 놓을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문학은 늘 내게 감당해야만 하는 것을 감당하겠다는 용기를 주었다.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변화와 혼란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원고를 다시 읽으며 여러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중에는 절친한 친구가 된 이들도 있고, 멀어진 이들도 있다. 그들 모두에게 감사한다. 그들의 조언을 듣기 전 단계의 초고가 얼마나 단순하고 빈약했는지 기억한다. 좋아하는 작가와 책들에 대해, 서로의 글에 대해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돌이켜 보면 소설을 쓰면서 좋은 동료들을 참 많이 만났다. 나 역시 그들에게 그런 존재였기를 바랄 뿐이고, 앞으로도 다정한 친구이자 자극을 주는 동료일 수 있게 노력하겠다. 

이 책을 만들어 준, 소중한 친구가 된 민음사의 김화진 편집자에게 감사한다. 부족한 글들을 나만큼이나 아껴 주고 함께 고민해 주어서 작업 내내 마음이 든든했다. 잊지 못할 해설을 써 주신 신샛별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해설을 읽으면서 이 여덟 편의 이야기가 나의 작은 세계를 떠나 세상 속에서 자기들의 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코끝이 시큰한 경험이었다. 

첫 번째 독자인 남편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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