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요네자와 호노부] 가을철 한정 구리킨톤 사건 - 상, 하

일루젼 2024. 5. 30.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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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출판 : 엘릭시르
출간 : 2017.04.17


 

저자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출판 : 엘릭시르
출간 : 2017.04.17


 

 

<여름철 한정 트로피컬 파르페 사건>으로 시작한 <소시민 시리즈>.

순식간에 빠져들어 끝까지 달리게 만드는 힘은 장르 소설 특유의 매력이다.

<파리 마카롱 수수께끼>까지 다 읽어버린 지금, 내가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대망의 완결편 <겨울철 한정 봉봉 쇼콜라 사건>.

 

'구리킨톤'이라고 하면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지만, '구리과자'나 '구리볼' 또는 '상투과자'라고 하면 감이 온다. -아마도?-

작품 내에서는 '마롱글라세'와 대비되며 두 주인공의 향후 방향성을 결정짓는 무척 상징적인 장치로 등장하는데... 

 

몇 겹이나 되는 시럽을 농도를 바꾸어가며 덧입혀 마침내 본성을 변화시키는 '마롱글라세'. 

작품 초중반에서 오사나이는 스스로를 이 마롱글라세처럼 소시민화 하고자 했다.

디저트와 연결해서 생각한 적은 없지만 고바토 또한 마찬가지. 평범하면서도 매력적인 나카마루와의 연애를 통해 '평범'한 고등학생이 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삼투압을 통해 서서히 스며드는 단맛은, 과연 밤에게 필수적인 것일까?

"밤이 꼭 달아야만 해?"라는 고바토의 질문은 아마도 <겨울철 한정 봉봉 쇼콜라 사건>에서 답을 찾을 예정이다.

 

다시 본편으로 돌아오자. 두 주인공은 각자가 생각하는 '평범'하고 '소시민'적인 인물을 옆에 두어 스스로를 변화하거나 위장하고자 한다.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랄까. 이런 것도 나쁘지 않지만 역시 이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된다. 

 

독자인 나로서는 공감과 부러움이 동시에 피어오른다. 두 사람에게는 괴로운 일이겠지만 그런 '포기할 수 없는' 영역을 일치감치 발견하는 것은 사실 홍복이라고 생각한다. 삶에서 변화시키고 싶는 영역과 지키고 싶은 영역을 찾아냈다는 것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선택할 때 굉장히 강력한 길잡이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오사나이와 고바토는 작품의 마지막 대목에서 함께 구리킨톤을 먹으며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눈다.

 

"고바토는 어느 게 좋아?"
하고 싶은 말은 알겠는데, 난처하게도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다. 살짝 익살을 떨며 말했다.
"마롱글라세는 먹어보질 못해서."
오사나이는 내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는지 생긋 웃었다. 

"다음에 먹게 해 줄게.”

  

오사나이의 질문은 단순히 취향을 묻는 게 아니다.

위화감이 느껴지더라도 계속 껍질을 입히는 '마롱글라세', 즉 소시민 프로젝트.

괴롭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부서지고 뭉쳐지는 '구리킨톤', 즉 여우와 늑대.

어떤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자 하느냐는 물음인 것이다.

 

툭 던지는 말처럼 보이지만 속내를 녹여낸 오사나이와, 

그 의미를 놓치지 않고 읽어냈으면서도 의뭉스럽게 대답하는 고바토.

 

오사나이는 '더 나은 -잘 맞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라고 선을 그었지만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고, 스스로도 그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의 재결합은 밤과 '구리킨톤'처럼 이전의 상부상조와는 조금 다른 관계성을 띤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내용들을 포함해서 이들의 앞으로의 이야기까지 좀 더 읽어나가고 싶은 마음.

막 시작되는 여름의 초입에서 '겨울'을 간절히 기다리게 되는 한 이유다. 

 

덧붙여, 이미 <여름철>을 읽으신 분들은 오사나이가 고바토와 우리노를 대하는 모습에서 미묘한 차이들을 발견하는 재미를 놓치지 마시길. 물론 고바토의 경우도 마찬가지.

어쩌면 <가을철> 결론은 샬롯 사건 때부터 예정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즐거웠다.   

   


   

 

 

- 약속 시간까지 도서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고등학생이 된 후로는 도서실에 발길이 뜸했다. 독서가는 아니지만 도서실에 자주 드나들면 남들 눈에 독서가로 보일 것이다. 악인을 흉내 낸답시고 사람을 죽이면 그 또한 악인이요, 흉내일지언정 현명한 이에게 배운다면 그 역시 현인이라 불러야 마땅하리라. 나는 독서가 흉내도, 악인 흉내도, 현인 흉내도 내지 않는다. 그렇게 부정을 켜켜이 쌓은 끝에 보이는 숭고한 모습이야말로 내가 진정 바라는 '소시민'이다. 

- 슬슬 나갈까. 벽시계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 들고 있던 소설책을 선반에 돌려놓을 때, 블라인드 틈새로 쏟아지는 붉은빛이 보였다. 여름방학이 끝나니 해도 짧아졌다. 벌써 날이 저물어간다. 일 년에 몇 번쯤 이런 순간이 있다. 눈이 따가울 정도로 오싹하게 붉은 저녁노을이 드리우는 날이.
복도를 가득 채운 붉은색은 좁고 긴 학교 건물을 구석구석 비추고 있다. 나는 그 복도를 걸어갔다. 주머니 속에 든 종잇조각을 의식하면서.

- 학교도 이만큼 오래 다니다 보면 싫어도 아는 얼굴이 늘어난다. 방금 지나친 남학생도 자주 본 얼굴이다. 분명 학생회 소속이거나, 그도 아니면 어느 동아리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거나. 요컨대 얼굴은 알지만 누군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물론 이름도 모른다. 상대방은 나를 모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일 없이 스쳐 지나간다. 어디까지나 서로에게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 중성적인 이목구비는 남자가 봐도 상당히 빼어나, 경박한 환호성이 쏟아지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나는 이 녀석의 외모가 아니라 두뇌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어떤 일이든 이해가 대단히 빠르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이 후나도 고등학교에 들어왔지만 히야는 여유롭게 입시 문턱을 넘었다. 혼자만 공부를 잘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남들을 가르치는 재주도 뛰어나다. 학원에서는 제법 신세를 졌다.
이 녀석에게 조금만 더 패기가 있었어도 뭔가 재미있는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이렇게 세상 모든 것에서 한발 물러나 있겠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을 뿐, 눈에 띄는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지금도 저렇게 웃고만 있다.
"네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해. 확실히 우리 학교신문부 활동은 시시하지."

- "벌써 반년이 지났어. 너는 수학을 잘하니까 알겠지. 삼 년 동안 반년은 여섯 번밖에 없어."
그러나 히야는 여전히 에두른 표현으로 대답했다.
"좋은 마음가짐이야. 하지만 수단이 신문부라는 게 좀 잘못되었네. 입신양명을 바란다면 조금 더 대중적인 방향을 노렸어야지."
약점을 찌르다니. 입을 다물어버린 내게 히야가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뭐, 응원은 하고 있어. 언제나 응원은."
응원의 대상은 누구든 상관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 솔직히 말해 나는 히야에게 응원을 바라는 게 아니다. 아군이 되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걸 입에 담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나는 성질을 부리며 교실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 직감은 믿을 게 못 된다. 메모의 글씨를 보고 남자가 썼으려니 했는데, 방과 후 교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여학생이었다.
눈이 따가울 정도였던 저녁노을은 선명한 빛을 잃고 단숨에 어둡게 변해갔다. 그 여학생은 창가에 서서 창문을 열고 있었다. 바깥은 바람이 강한지 하복에 달린 스카프가 불어오는 바람에 나부꼈다. 
그녀가 누군지는 알고 있다. 같은 반 학생이다. 추리는 당연히 적중했다. 하지만 이름까지는 모르겠다. 무슨 이유로 날 불러냈는지도. 

 

- "5시 반, 정확하네. 약속 시간에 칼같이 왔어."
가시 돋친 구석이 없는 어른스러운 목소리였다. 귀에 익다. 어쩌면 1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을지 모른다.
위험한 호출은 아닐 줄 짐작했지만 상대가 여학생 한 명임을 확인하니 역시 마음이 놓였다. 편지를 받고 아무 생각 없이 나갔다가 흠씬... 그런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나한테?"
지금의 내게 뭔가를 묻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이제 남의 문제에 끼어들지 않는데. 마음 한구석이 술렁거렸다.

솔직히, 부탁을 받으면 조금쯤은 지혜를 빌려줄 수도 있지. 뭐가 궁금한 걸까. 가능하다면 조금은 복잡한 문제였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은 한 번에 파악하지 못할, 어려운 부탁이면 좋겠다.

- 하지만 질문은 엉뚱했다.
"고바토, 그 애 하고 헤어졌지?"
누구 얘기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오사나이 유키. 바로 얼마 전까지 나와 함께 '소시민'을 꿈꾸는 동지였다. 연인이나 의존 관계가 아니라, 상부상조하는 관계로 우리는 서로를 감시했다. 소시민을 향한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그 관계는 여름방학에 끝났다. 지금 와서 돌이켜봐도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각자 알아서, 착실하게 조금씩 소시민으로 변화해갈 것이다. 하지만 이 동급생은 그걸 어떻게 아는 걸까? 

- 그 여학생은 불쑥 찾아와 인쇄 준비실 문을 열었다. 파이프 의자에 앉아 있던 도지마 부장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대뜸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댔다.
뭔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 키와 얼굴만 두고 본다면 어디로 봐도 절대 동급생 같지 않은, 어디 중학교에서 몰래 숨어든 듯한 여학생. 그런데 귓속말을 하는 순간에 가늘어지는 눈, 도지마 부장의 귀에 맞추어 몸을 숙이는 날렵한 동작에 그만 오싹했던 것이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성적인 매력이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외모와 표정, 동작이 서로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 이상하게 눈길을 끌었다. 요염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표현이라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당시에는 입을 쩍 벌리고 그저 쳐다만 보고 있었다.  
여학생이 귓가에 속삭이자 도지마 부장은 눈알만 데구르르 옆으로 굴렸을 뿐 팔짱도 풀지 않았다. 좋은 이야기인지 나쁜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다.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이윽고 부장이 "알았어"라고 중얼거리자 여학생은 귓가에서 입술을 뗐다.

 

- 그녀는 지금 막 존재를 깨달았다는 듯이 홱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방금 전까지 가늘게 뜨고 있던 눈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등줄기에 땀이 맺혔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비쳤다. '너한테는 상관없는 일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다시 둘만 남자 도지마 부장에게 방금 전 여학생이 누군지 물어보았다. 부장은 묘하게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사나이라고, 상당히 골치 아픈 녀석이야."

-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책상에 내려놓더니 두 손으로 책상을 짚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나한테 무슨 용건이야?"
온화한 말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벽을 두는 것도 아니다. 뭐랄까, 거리를 재는 듯한 느낌... 이럴 때 여자들은 다 이런가? 아니면 오사나이만 이런 분위기를 가진 걸까?

- 누가 있는 줄 모르고 우연히 앉았을 뿐이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너무 아까운 기회다.
도서실에는 아무도, 카운터 맞은편에서 눈길도 들지 않는 도서 위원 말고는 아무도 없다. 오사나이는 몇십 센티미터 거리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런 우연은 예측할 수 없는 기회에 찾아오고, 나는 아무런 각오도 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우리노 다카히코의 특징은 언제나 각오만큼은 금방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사나이가 내 말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말하자. 지금 말하자.

- 내가 생각해도 대단한 배짱이다. 나는 한마디도 더듬거리지 않았고, 미소까지 머금고 있었다.
오사나이는 눈을 깜빡거렸다. 농담이나 장난의 근거를 찾으려는 듯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여기서 웃음을 터뜨리거나 눈길을 피하면 기회는 사라지고 만다. 그걸 알기 때문에 나는 오사나이의 시선을 똑바로 받아들였다.
이 순간까지도 몰랐는데, 저녁노을이 유난히 붉은 날이었다.

- 오사나이가 웃었다. 내 눈을 들여다보며 작게 피식 웃었다.

"솔직한 남자는 싫지 않아."
몸에서 힘이 빠졌다. 대범한 척 가장하느라 몸이 잔뜩 굳어 있는 줄도 몰랐다. 오사나이가 웃어주었다. 싫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오사나이는 책상 위에 내려놓았던 책을 집더니 가만히 입가를 가렸다.
"좋아. 하지만 도서실에서 이야기하기는 싫어. 좋은 가게를 알아. 가토 프레즈가 굉장히 맛있는 가게야."
나는 벌떡 일어섰다.
"그럼, 가자."

- "오사나이는 몇 반이야?"
오사나이는 언젠가 내가 그렇게 물을 줄 예상했던 모양이다. 게다가 일종의 재미를 기대하는 것처럼 키득키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 C반."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나도 C반이니까.
나는 여전히 오사나이라는 아이를 잘 몰랐다. 그래서 완곡한 농담의 일종인 줄 알았다. 어중간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사실은?"
"사실이야. 정말 C반이야."
"거짓말 마. 내가 C반인데."
"나, 거짓말쟁이란 말을 들은 적은 있지만 이건 진짜야. C반이야."
오사나이는 내 얼굴을 밑에서 올려다보며 살짝 덧붙였다.

"... 2학년."

- "선배, 였어요?"
오사나이는 그렇게 기뻐 보일 수가 없었다.
"응, 이대로도 괜찮잖아. 선배로 보이지 않으니까. ... 우리노?"
실제로 선배로는 보이지 않았다.
나와 오사나이가 사귄다는 사실을 안 히야는 그 일을 이런 말로 놀렸다.
"뭐야. 우리노가 롤리타 취향일 줄은 몰랐네."

고약한 농담에 나는 보디 블로로 응답했다.

- 12월에 접어들 무렵, 오사나이를 따라 수업이 끝나고 카페에 갔다. 얼그레이2라는 이름의 카페는 아담하니 딱 여자애들이 좋아할 만한 가게였다.
오사나이는 자주 이런 가게에 갔다. 커피나 홍차를 좋아하는 게 아니다. 케이크를 좋아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 가게에서도 메뉴판도 보지 않고 주문했다.
"케이크 세트, 홍차는 밀크티, 케이크는 티라미수로 주세요."
나는 용돈이 그리 넉넉하지 않다. 자연히 "나는 커피만"이라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재미있었어?"
누가 오사나이에게 '거짓말쟁이'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때 오사나이는 틀림없이 진실을 말했다. 한 치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했다.
"평범했어."
나는 쓴웃음을 흘렸다.
"평범하다니, 좀 더 괜찮은 표현은 없어?"
"응. 딱 중간치의 평범함, 유례없는 평범함. <월간 후나도>를 읽으면 늘 비범하리만치 평범하다고 생각해."

- 설명이 부족한 것 같아 덧붙였다.
"유명해지고 싶은 게 아니라, 뭐랄까, 어딘가에 우리노 다카히코가 후나도 고등학교에 있었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어. 이상하게 들려?"
"아니."
오사나이가 이번에는 생긋 웃었다.
"그건 알 것 같아. 눈 내린 아침에, 누구보다 일찍 길거리에 나가서 발자국을 내고 싶은 기분이겠지."
낭만적이다. 역시 오사나이는 소녀다.
"그런 다음엔 다른 사람이 발자국을 내지 못하게 눈을 싹 쓸어버리는 거야."
"왜?"
"어? 말했잖아, 다른 사람이 발자국을 내지 못하게."
오사나이의 개그센스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 오사나이는 뭔가 결심한 듯이 스푼을 빠르게 놀렸다. 반쯤 남아 있던 티라미수를 단숨에 먹어치웠다. 어찌나 급하게 먹었는지 입가에 코코아 파우더가 묻었다. 오사나이는 그것도 모르고 말했다. 
"좋아, 나 우리노를 응원할 테야. ... 괜찮지?"
응원은 히야도 해주고 있다. 얼마 전에는 "파이팅, 파이팅!" 하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오사나이의 응원은 히야의 그것과는 다르다. 정말로 기운이 날 것만 같았다.

- "자선 바자회니까 수익은 기부한대요. 그럼 딱히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니니까 도와줄 수 없겠냐고... <월간 후나도>는 그런 신문이 아니라고 말은 했는데."
뭐라고 한 사람도 없는데 변명조가 되었다. 그 심정은 조금 이해한다. 도지마 부장이 팔짱을 끼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확실히 박력이 있다.

-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쓰카이치가 책상 위의 <월간 후나도>를 뒤집었다. 집게손가락으로 맨 뒷면의 한 곳을 가리켰다.
"여길 줄이면 칼럼 자리를 만들 수 있어요."
편집후기 자리였다. 한 페이지의 4분의 1을 이용해 신문부원 전원이 간단한 후기를 쓴다. 한마디라고 하기에는 길고 뭔가 주장하기에는 너무 짧다. 듣고 보니 어중간한 자리였다.
"이걸 반으로 줄이면 8분의 1 페이지를 확보할 수 있어요."
누군가가 "호오" 하고 감탄했다. 도지마 부장도 몬치도 아니니 기시인가? 아니, 어쩌면 내가 무심코 중얼거렸는지도 모른다. 한참 침묵이 흘렀지만, 이쓰카이치의 제안을 묵살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 반대였다. 제법 좋은 아이디어다 싶어 놀랐기 때문이리라. 이쓰카이치의 시시한 칼럼은 그렇다 쳐도, 지루하고 길기만 한 편집후기가 간결해지는 건 그것만으로도 이점으로 보였다. 

- 그때 예상치 못한 구원의 손길이 뻗어 왔다.
"돌아가면서 쓰면 어때요?"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기시가 불쑥 끼어든 것이다.
"어차피 한 달에 한 번이니까. 돌아가면서 맡아도 되겠죠."

- 나카마루 도키코는 조금 경박해 보이는 외모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격 좋은 소녀였다. 그날, 방과 후 편지를 받고 불려 나간 이후로 나의 행복한 고등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아, 충실하게 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함께 둘러보았던 교내 문화제. 밤바람이 조금 쌀쌀했던 크리스마스, 설에는 나란히 신사를 찾았다. 건전한 고등학생이자 소시민인 나로서는 과분한 하루하루였다. '사소한 오해로 인한 질투로 말싸움'을 하게 될 날이 다시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검은 롱코트를 입은 나카마루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얀 목도리에 신발은 부츠. 날씬한 나카마루에게 잘 어울리는 어른스러운 패션이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미안, 추운데 기다리게 해서."
나카마루가 생긋 웃었다.
"아니, 나도 방금 왔어."
평범한 대화. 아아, 행복한 기분.
나란히 1월의 거리를 걸었다. 날은 맑은데 시리도록 추워서 우리의 하얀 입김은 허공에서 한데 얽혀 사라졌다.
손을 잡고 싶을 정도였다.

- 목적지인 파노라마 아일랜드에는 버스로 가기로 했다.
이웃 도시라고 해도 그리 멀지는 않다. 이 추위에는 벅차겠지만 나 혼자라면 자전거로 갈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나카마루가 버스로 가자고 했다. 나카마루는 통학용으로 시내구간 학생 할인 정기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여태껏 대중교통은 별로 타본 적이 없었다. 
기라 시는 동서 방향으로 전철이 다닌다. 역 주변은 고가철로로 되어 있고 역 앞에는 버젓한 버스 터미널도 있다. 하지만 역은 마을 안에 기라 역 하나뿐이라 전철을 타고 시내를 이동할 일은 없다. 버스 노선도 꽤 많지만 웬만한 곳에는 자전거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 줄줄이 올라타는 승객들 때문에 차내 인구 밀도가 단숨에 올라가 눌리고 잡아채이고 시달리다가 급기야 나는 두 손을 든 채로 나카마루에게 바싹 붙게 되었다. 코롱 향기가 풍겼다.
방금 전 나카마루가 했던 "이제부터 시작이야"라는 말은 차 안이 붐비는 건 이제부터라는 뜻이었다. 나는 감탄했다. 지옥의 행렬이 늘어선 이곳에서 하나 앞선 정류장을 약속 장소로 정한 나카마루의 지혜에. 그리고 이 아비규환을 알면서도 굳이 버스를 선택한 나카마루의 용기에 이 평범한 여학생을 다소 얕잡아봤던 나는 깊이 반성했다. 
하지만 나카마루는 감탄하던 나를 가볍게 배신했다.
"왜 이리 붐비지...?"
오늘의 아비규환은 나카마루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뭐, 평일이라고는 해도 정월이니 아무래도 평소와는 다르겠지.

- 이마에는 땀까지 맺혔다. 더군다나 옆에는 나카마루가 있으니 무례하게 몸을 붙일 수도 없다. 어쩌다 보니 나는 승객들의 압력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온몸의 힘을 쥐어짜 내는 꼴이 되었다.
그런 내 고뇌를 아는지 모르는지, 나카마루가 말했다.

"세 정거장만 더 가면 조금 편해질 거야."
그렇다면 인내심 싸움이다. 평소 쓰지 않는 등 근육에 잔뜩 힘을 주었다.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나카마루를 지켜내리라. 그런 비장한 각오를 다진 내 귀에 어딘가 사람을 골리는 듯한, 밝은 목소리의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 문득 고개를 들었다가 깨달았다.
눈앞의 단추에 묻은 오물이, 몇 초 사이에 닦여 있었다. 깔끔하게 닦인 건 아니지만 문지른 것처럼 길게 퍼져 있었다.
그 이유는 명백했다. 내 근처에 있는 누군가가 단추를 눌러 벨을 울린 것이다. 서 있는 승객이 저 단추를 누르려면 나카마루나 내 어깨너머로 팔을 뻗어야만 한다. 혹은 몸을 숙여 밑으로 팔을 뻗거나. 
그런 일은 없었으므로 단추를 누른 사람은 이 악몽 같은 혼란 속에서 속 편하게 자리에 앉아 있는 신선일 것이다. 몇 사람이 내릴지는 모르겠지만 이 밀도가 조금이라도 낮아진다면 대환영이다.
하지만 다음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기묘한 상황과, 몹시 거북한 시간이었다.

 

- 버스가 멈췄다. 정류장에 승객은 있었지만 운전사는 중간문을 열지 않았다. 만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앞문은 열었다. 손님이 내려야 하니까.
그런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도 없고, 내리려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운전사가 차내 마이크로 알렸다.
"히노키 정 2가, 도착했습니다."
그래도 움직임은 없었다. 무명의 대중으로 변한 승객들은 의례적 무관심의 미덕을 어딘가에 갖다 버린 것처럼 아예 대놓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누가 벨을 누른 거야, 그 녀석 때문에 버스가 멈췄어. 그건 봐줄 테니까 내리려면 냉큼 내려. 그런 무언의 분위기가 부풀어 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갑갑한 차 안은 이런 위험한 긴장감으로 충만했다. 
하차 전용 앞문으로 누가 타려고 한 모양이다. 운전사가 불쾌한 목소리로 제지했다.
"앞문으로는 타시면 안 됩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자리가 없습니다."

- 나는 알고 있다.
벨을 누른 사람은 내 주위 자리에 앉아 있는 두 사람 가운데 누군가다. 앞뒤로 나란히 있는, 1인용 좌석 두 자리.
앞자리에 앉은 사람은 재킷 교복 차림에 헤드폰을 쓰고 문고본에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는 학생. 뒷자리에는 앉은 채 지팡이를 짚고서 불쾌한 차 안 분위기를 참을 수 없다는 듯 등을 구부리고 있는 할머니. 둘 다 일어설 낌새는 없다. 

- 우리는 얼굴을 마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버티고 서 있기 급급했던 머리가 약간의 여유를 얻은 순간. 나는 내 눈앞에 어떤 기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무심결에 신음까지 흘렸다.

- 앞자리에는 여학생, 뒷자리에는 할머니.
이 두 사람 가운데 누군가는 방금 전 실수로 하차 벨을 눌렀다. 다시 말해 조만간 내릴 가능성이 있다. 지금 나는 앞뒤 어느 한쪽으로 몸을 움직일 수 있다.
내릴 승객 앞에 서 있으면 그 승객이 일어났을 때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아니, 내가 앉으려는 게 아니다. 내가 아니라, 내 귀여운 여자친구, 파도치는 머릿결을 가진 나카마루 도키코에게 자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지옥 같은 차 안에서 어중간한 태도는 용납되지 않는다. 여학생 아니면 할머니, 어느 한쪽의 눈앞으로 확실하게 나카마루를 유도하지 않으면 의자 뺏기 게임에서 이길 가망은 없다. 남은 시간도 별로 없다. 아마도 기회는 길게 잡아서 다음 정류장까지. 그전에 나는 판단해야 한다. 여학생과 할머니. 누가 버스에서 내릴 것인지를.

- "잠깐만 기다려."
"기다리라니, 뭘?"
선물을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자리를 선물할게.

내 생각에 이건 면밀하고도 신속한 관찰로 해결할 수 있다.

- "고바토 짱."
숨통은 조금 트였지만 여전히 북적거리는 버스 안에서 나카마루가 나를 불렀다. 주위를 의식한 낮은 목소리로.
나는 관찰 대상으로부터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응? 왜 그래?"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
글쎄, 좋은 일이라... 짐작 가는 구석이 없다.
"별로, 왜?"
"왠지 기뻐 보여서."
기쁘다라. 글쎄.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얼굴에 드러내다니 방심했다. 인상을 쓸 것까지는 없지만 표정 관리는 조금 해야겠다.

- 이제 곧 내린다고도, 아직 내리지 않는다고도 판단하기 어렵다.
나카마루의 목소리가 들렸다. 
"있지, 파노라마 아일랜드에 도착하면 구두 가게에 먼저 가도 돼? 부츠를 사고 싶은데 학교에는 신고 다닐 수 없으니 고민이야.”
부츠가 안 된다면 설피는 어떨까. 짚신하고 분간이 되면 다행인데.
버스에서 내릴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할까? 소지품을 정리한다. 모자를 쓴다. 그리고 인파를 헤치고 버스에서 내려 거리에 발을 딛는다. 그게 전부일까? 내가 만약 다음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다면 무엇을 할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선택의 순간, 신속하게 추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버스에서 내릴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할까?

 

- 아, 그런가...
쾌재와 욕지거리를 동시에 내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째서 깨닫지 못했을까. 너무 어리석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평범한 미소와 평범한 대화, 영화와 쇼핑, 거짓된 웃음으로 뇌가 녹슬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답은 당연히 동전이다.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열쇠는 동전이다.
내 주머니가 힌트를 주었다. 시영 버스라면 선불. 하지만 기라 버스는 다르다.

- 결론을 도출했지만 나는 만족할 수 없었다. 이런 수준의 문제에 시간을 이렇게나 빼앗기다니 고바토 조고로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 이런 문제는 일목요연하게 간파해야만 한다.
그래도 뭐, 너무 늦지는 않았다. 어, 뭐더라, 무슨 목적으로 버스에서 내릴 사람을 알아내려고 했더라? 참, 그렇지, 좌석이었지.

- 하지만. 
일단 시동이 걸린 내 관찰력은 실로 아슬아슬한 순간에 패배를 막아주었다. 나는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얼어붙었다.
그 순간 멈칫한 이유를, 스스로도 좀처럼 설명할 수 없었다. 어째선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놓친 요소가 있다고 느낀 것이다. 무엇을?

- 철칙만 상기하면 내가 어디서 위화감을 느꼈는지 알아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몸을 움직여 넌지시 나카마루의 소매를 끌었다.
"이쪽으로 와."
"응? 왜?"
살짝 항의하기는 했지만 혼잡한 버스 안에서 수십 센티미터 이동하는 게 딱히 수상한 행동은 아니다. 나카마루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처음부터 거기에 설 예정이었던 것처럼 여학생 옆에 섰다.
버스 정류장에서 다음 버스 정류장까지의 사고. 그것을 나카마루는 이해해 줄까? 

 

- 하지만.
그건 이상하지 않은가? 이상하잖아?
시내 학생 할인 정기권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보여주고 버스에서 내린다. 경로 패스를 가진 사람은 그것을 보여주고 버스에서 내린다. 그것은 이상하지 않다. 경로 패스의 혜택은 방금 전 안내 방송에서 말해주었다. 시내 학생 할인 정기권도아까 나카마루가 사용하는 모습을 보았으니 전혀 이상하지 않다. 
거기에 이상이 없다면, 다른 점이 이상하다.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로 몇 차례 이런 경험을 했다. 덤벙거리는 친구가 코코아를 탔을 때, 코코아와 컵에 문제는 없었다. 문제는 그 주변에 있었다. 그 녀석이 암호를 남겼을 때도 그랬다. 결론은 외부에 있었다. 사고는 집중해야만 한다. 눈동자도 외연부가 어둠을 꿰뚫어 본다.
"알았다. 드디어..."


- 답은 관찰로 도출할 수 있었다. 이런 종류의 내 직감은 절대 빗나가지 않는다. 할머니와 여학생만 관찰해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다. 관찰력도 시야를 넓혀야만 했다.
나는 나카마루의 행동을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야 했다.

- 애초에 그렇게 생각한 것이 착각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나카마루는 그런 행동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 나카마루는 동전을 바꾸었다. 버스로 시 경계를 넘을 때는 정기권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사정은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경로 패스도 또한 기라 시내에서만 유효하다. 방금 전, 안내 방송에 그렇게 나왔다. 

 

- 이러한 사고의 과정을 나카마루는 이해해줄까?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무리겠지."
나카마루에게 파노라마 아일랜드에 가기 위해 동전이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까. 지식의 차이를 지혜로 메우는 것은 늘 그렇지만 참 힘들다.

- 버스가 멈추고, 운전사가 말했다.
"이번 역은 히노키 정 도서관입니다."
벨은 누군가가 이미 눌렀다. 여학생은 아쉬운 듯 책을 덮고 인파를 헤치고 앞문으로 향했다. 나카마루의 눈앞에 빈자리가 생겼고, 여학생은 정기권을 내보이고 버스에서 내렸다.
나카마루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빈자리를 보더니 꽃처럼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 러키!"

-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행동하지 않는 자를 두고 아둔하다고 한다.
기회를 살리지 못하는 녀석은 요컨대 얼간이다.
그렇다면 나는 얼간이에 가깝다. 손안에 굴러들어온 8분의 1 페이지. 거기에는 어떤 내용이든 쓸 수 있다. 분명 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다. 그런데... 

- "파노라마 아일랜드에서 전자레인지를 훔친 녀석이 있어. 잡히진 않았으니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고등학생 소행인 것 같다는 소문을 들었어."
"그렇구나."
"E반 녀석이 사고를 당했어.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우회전하는 오토바이에 치인 거야. 다리가 부러져서 입원한 상태야."
"그런 일이!"
히야는 꼬박꼬박 맞장구를 치고는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어중간한 격려보다 침묵이 고마웠다.

- 잠시 우물거렸다.
"그러면 기회에 등을 돌리는 것만 같아. 고등학교 생활은 삼 년이잖아."
히야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장을 노려보다가 작은 한숨을 쉬더니 난처한 녀석이라고 말하고 싶은 눈치로 미소를 지었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행운의 여신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건가. 나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사는 게 나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 나는 다른 장점이 없으니까 초조한 걸지도 몰라."
"설마 그 정도일까. 난 잘 모르겠는데."
히야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가방에 손을 뻗었다. 집에 가려나보다 했는데 아무래도 아닌 듯하다. 가방을 열더니 검은 서류철을 꺼냈다.
"어설프게 도우려고 들면 네 자존심을 긁을 것 같았는데, 보아하니 각오가 상당한 모양이니까 괜한 눈치는 보지 않을게."

- 서류철은 뭐가 들어 있기는 한가 싶을 정도로 얄팍했다. 하지만 대개 정말 중요한 사실은 한 장의 메모지로도 전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히야가 눈앞에 내민 그것이 금서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 히야는 볼일은 끝났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쓸 만해 보이면 써. 하지만 결과는 나도 몰라. 쓰지 않더라도 따지진 않을게."
코트를 껴입고 교실을 나서는 히야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큰일 났네... 
이제 오사나이는 물론이고 히야에게도 멋진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 조사에 임하면서 나는 두 가지 방침을 세웠다.
한 가지는 오사나이에게 들키지 않을 것. 또 한 가지는 조사하다가 막히면 망설이지 말고 히야의 도움을 구할 것.
오사나이에게 들키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체면 때문이다. 히야 쪽은 조금 더 복잡하다. 나 혼자 힘으로 기사로 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히야가 가져온 정보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 "하지만 혼자서는..."
그래도 부장은 내가 못 미더운 눈치였다. 그만 울컥했다.
"아무도 필요 없다고 하잖아요. 그렇게 못 믿겠으면 그만두라고 하시죠. 언제든지 나갈 테니까."
부장은 한숨을 쉬었다.
"그거야. 그 성격 때문이라고."
부장이 몸을 슬쩍 내밀고 말했다.
"혼자서 하고 싶은 네 마음은 잘 알아.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그 점은 신용하고 있어. 그런데 너는 성미가 너무 급해. 이제 와서 기사를 쓰지 말라고는 안 하겠어. 다만 네가 말하는 그 기삿거리라면 아무래도 외부 사람들도 인터뷰해야 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말릴 사람이 없으면 신문부나, 후나도 고등학교의 체면을 깎을 만한 실수를 저지를 것 같아 걱정 돼."

- "그럼 묻겠는데, 자재 창고에서도 방화로 의심되는 불이 났다고 했지. 너, 그 자재 창고에 안 들어가고 배길 수 있어?"

사람 우습게 보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똑같은 수준으로 맞받아칠 정도로 감정에 휩쓸리지는 않았다. 그 말을 듣고 고민했다. 거기가 방화 현장이라는 걸 알면서, 자재 창고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현장에는 울타리도 시원찮을 것이다. 철조망이라도 둘러쳐져 있다면 망설일지 모르지만 공터 같은 장소라면.
말로는 시인할 수 없지만 답은 명백했다. 분명 나는 들어가고도 남을 것이다.


- "누가 보고 '누구야. 거기서 뭘 하고 있어'라고만 해도 신문부가 저지른 사건이 된다는 걸 알고 있어? 내가 그 장소에 있다면 말릴 수 있어. 정 들어가야겠다면 주인의 허락을 받으러 가겠지. 네가 그런 세세한 원칙을 제대로 지킬지..."
다른 사람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기시는 처음부터 듣고 있지 않았고, 이쓰카이치는 얼빠진 얼굴이었다.
몬치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도지마 부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부장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하는 이상 맡겨보는 수밖에 없겠지. 우리노, 신중하게 조사해. 만약에 누가 뭘 물어보면 후나도 고등학교 신문부에서 방화 특집 기사를 준비한다고 해. 그래도 문제가 생기면 일이 꼬이기 전에 내게 전화하고, 알겠지?"

- 그날, 나는 두 가지 사실을 알았다. 하나는 내가 은근히 관찰당하고 있었다는 것.
또 하나는 도지마 선배는 역시 부장의 면모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 일단 원예부부터 시작하는 게 순리겠지.
솔직히 이 학교에 원예부가 있는 줄도 몰랐다. 후나도 고등학교는 동아리 활동이 왕성한 편이 아니다. 같은 문화 계열인 신문부에 속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런 비주류 동아리에 들다니 얼마나 음침한 녀석일까 싶었다. 
그런데 조사해 보니 같은 반에 원예부원이 있었다. 시시한 편견은 빗나갔다. 문무겸비라 해도 과언이 아닌, 반에서도 눈에 띄는 여학생이 원예부원이었다.

- "운동도 하지? 발이 빠르던데."
"누구 발이 크다고?"
사토무라는 그렇게 장난을 치며 손을 들어 올리는 척했다. 히야가 있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니 대화에 꽃이 핀다. 그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굉장한 이득이라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방해하지 마."
"아아, 미안, 미안. 빠져 있을게."
히야는 반걸음 물러났다.

- 나는 사토무라에게 다시 물었다.
"원예부에서 있었던 일을 묻고 싶은데 괜찮을까?"
"응, 괜찮아. 신문부만큼이나 뭘 하는지 알 수 없는 동아리니까."
신문부는 매달 전교 학생들에게 일일이 여덟 페이지짜리 신문을 돌리는데. 뭐, 대화의 실마리는 되겠다.

- 사토무라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그전에! 한 가지 해둘 말이 있어. 어라, 두 가지, 아니, 세 가지인가?"
굳이 처음에 숫자를 정할 필요가 있나?

 

- "애초에 너 그 얘기는 누구한테 들은 거야?"
나는 주저 없이 대각선 뒤를 가리켰다.
"이 녀석."
"자, 잠깐, 우리노, 제보자를 보호해 주는 저널리스트 자세는 어디 간 거야?"
잠자코 듣고 있던 히야가 갑자기 튄 불똥에 황급히 외쳤다. 나는 딱히 저널리스트가 아니니까.
그런데 사토무라는 대뜸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뭐야, 히야였어?"
정말이지, 히야는 앞으로 남은 인생길도 참으로 편할 것이다. 공격이 누그러진 틈에 질문에 대답했다.
"기사로 쓰지 말라고 한다면 안 쓸게. 메인은 따로 있으니까. 하지만 가르쳐 줘. 어째서 야마다 씨 공터에 난 불 때문에 너희가 야단을 맞은 거야?"
"다나카 씨라니까."

- 아니면 쓸데없이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주의를 준 것 아니었을까.
한 가지 더, 마음에 걸리는 점을 물어보았다.
"그 비닐하우스나 공터 말이야, 후나도 고등학교하고 관계가 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어?"
"모르지. 우리는 간판을 내건 것도 아니니까."
그렇다면 딱히 후나도 고등학교를 노리고 불을 지른 건 아니다. 모처럼 쓰는 칼럼이니 어떻게든 후나도 고등학교하고 엮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쉽다. 

- 일단 메모했다. 하지만 내심 실망했다. 연쇄 방화와 망치분실이라니, 급이 너무 다르다.
사토무라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그건 학교 비품이니까 없으면 곤란하거든. 결국 다 함께 돈을 모아 변상했는데, 정말 화가 나."
"한 사람당 얼마씩 냈는데?"
사토무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 300엔?"
아무리 생각해도 급이 다르다.

- "이 방화에 뭔가 공통점이 없는지 찾아볼 거야."
"오호라..."
히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서렸다.

"그런 게 있으면 다행이지만."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없는 게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불을 지르고 다니는 정신병자에게 일관된 취지가 있다는 보장은 없다. 어쩌면 완전히 무작위일지도 모른다. 생각해 봤자 헛수고일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해볼 가치는 있다.

-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공통점을 찾아낸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기사를 쓰기 편하겠지."
히야는 농담을 던지고 나서 생각에 잠겼다.
역시나 히야는 내 의도를 꿰뚫어 보는 데 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아아, 그런가. 다음으로 불이 날 곳이 어딘지 예측해 보려는 거구나."

- 나는 고개가 떨어져라 끄덕였다.
만약 연쇄 방화에 공통점이 있다면 규칙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기사는 단순히 방화 소식을 전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이 도시에 방화범이 있다. 그자는 네 곳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다음은 이곳을 노리고 있다.
그런 기사를 쓸 수 있는 것이다.
빗나가더라도 아쉬웠다는 말로 끝난다. 반대로 적중하면 ...

- "보아하니 우리노는 이게 연쇄 방화 사건이고, 동일 인물의 범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맞아."
"그 이유를 못 들었어. 내가 신문기사를 보여주기는 했지만 같은 범인의 소행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잖아."
조금 놀랐다. 히야가 그 점을 깨닫지 못했다니.
... 아니, 그렇지 않다. 히야는 알고도 남을 녀석이다. 알면서도 굳이 내 입으로 말하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히야의 배려를 알아차렸다. 말을 하도록 유도해 내가 생각을 정리하도록 도우려는 것이다.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 "0시가 넘었으니 정확히는 토요일이지만. 게다가 달력을 잘 보면 알 수 있는데, 전부 두 번째 금요일이야."
히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짓으로 뒷말을 재촉했다.
"화재 규모도 비슷해. 조금 타오르다가 금방 진화돼. 하마에 때는 애초에 제대로 불이 붙기나 했는지 의심스러워. 뭐랄까, 이렇게 비슷한 수준의 폭력성을 고려할 때 범인은 동일인물일 것 같아."
말하는 도중에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비슷한 수준이 아니네. 조금씩이지만 심해지고 있어. 처음에는 베어낸 풀더미였고, 불은 치솟지 않았어. 다음은 휴지통이었는데 불이 붙었다가 꺼졌지. 그리고 자재 창고. 만약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견해가 옳다면 세 사건의 범인이 동일 인물이라는 논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 "그렇군. 그럼 다음에 불이 나면 도움이 되겠다. 데이터가 늘잖아."
위험한 소리를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하지만 이야기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나는 네 번의 방화에서 공통점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공통점은 없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 가령 마작에서는 '일만' 패가 세 개 모이면 '커쯔'라고 한다. 하지만 일만, 이만, 삼만으로 이어지면 '슌쯔’라고 부르고, 이 역시 완성된 패다. 가령 방화 현장에 항상 'A'라고 적힌 종이가 떨어져 있다면 그것은 공통점이다. 그리고 'A' 다음에 'B', 'B' 다음에 'C'라고 적힌 종이가 떨어져 있다면 이 역시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하마에, 니시모리, 고사시, 아카네베. 

순서대로, 혹은 그 위치에 따라. 뭔가 숨겨진 의미가 있지는 않을까?

- "갑자기 미안. 전에 의논했던 거. 그 후에 어떻게 됐나 궁금해서."
전화 너머에서 당혹스러워하는 기색.
"의논? 뭐 말이야?"
그러고 보니 그건 의논이 아니었다. 오히려 경고나 충고, 그런 종류였을까. 어쨌거나 겐고가 기억해 낼 수 있도록 말해주었다.
"왜, 신문부가 간섭받고 있다고 했잖아. 방과 후에 일부러 불러내서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며 신신당부했다고."
"아아..."
기억난 모양이다.
 
- 작년 11월 말이었을까, 12월 초였을까. 웬일로 겐고가 전화를 했다. 용건은 아리송했다. 겐고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모르는 눈치였다.
오사나이, 오사나이 유키가 겐고를 불러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도지마, 여름방학 때 있었던 일은 신문에 쓰지 마. 하지만 ... 

- 끙끙대봤자 딱히 떠오르는 생각도 없고, 무엇보다 너무 추워서 감기에 걸릴 것 같아 걸음을 돌렸다.
아아. 그나저나 아침 산책은 상쾌하구나. 소시민은 건강이 제일인데, 매주 습관으로 삼는 게 좋을까? 조금 더 따뜻해지면 고려해 보자.

- 내 기사는 바람대로 일종의 예언서가 되었다.

 

- 오사나이 앞에서 나는 소원대로 무뚝뚝한 표정으로 툭 내던지듯 두 개의 기사를 나란히 내밀었다.

오사나이의 반응은 실로 의아했다.
원래 오사나이는 감정 기복이 그리 크지 않다. 아니, 사실은 클지도 모르지만 얼굴에 드러나는 일이 거의 없다. 웃을 때도 미소, 화가 난 것으로 보일 때도 그저 입을 다물 뿐이라 뚜렷하게 감정이 드러났다고 할 만한 표정을 보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기사를 보았을 때는 강렬한 반응을 보였다. 마치 목덜미에 칼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얼어붙더니 두 기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교통사고나 다름없는 방과 후 고백으로부터 이제 곧 반년. 하지만 나는 오사나이의 이해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직 확신이 없었다. 평소에는 멍하니 케이크에 대한 관심밖에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애초에 내가 오사나이에게 끌린 이유는 도지마 부장에게 보였던 신비한 옆얼굴이었다. 잊고 있었던 그 표정을 떠올렸다. 기사를 보는 오사나이의 눈은 숨을 삼킬 정도로 날카로웠다.

- 나는 이 기사에 대해 매우 자부하고 있었다.
이 넓은 기라 시에서 다음 방화 현장을 정확히 맞혔다. 그것도 경찰관도 기자도 아닌, 일개 후나도 고등학교 신문부원인 우리노 다카히코가!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통쾌한 일인지. 이 훌륭한 기사에 오사나이가 어떤 찬사를 보내줄지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하지만 오사나이는 겨우 몇 초만에 기사에서 눈을 떼더니 긴장을 풀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맞아떨어지네."

- 오사나이가 그 짧은 시간에 <월간 후나도>가 실제 사건을 예측했다는 사실관계를 인식했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놀랍기는 했다.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것은 그러고 나서 살짝 웃으며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한 번만으로는 아직 몰라."

- 내가 <월간 후나도>에 필사적으로 열을 올리는 이유는 첫 번째가 우리노 다카히코의 이름을 후나도 고등학교의 역사에 새기기 위해. 하지만 오사나이와 사귀면서 오사나이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게 두 번째 목적이 되었다. 히야에게 빚을 갚는 게 세 번째.
그런 오사나이가 인정해주지 않으니 모처럼 쓴 기사도 평가가 반감했다. 내 낙담은 그 정도로 컸다.

- 벌써 사귄 지 반년이나 되는데 오사나이와 휴일에 만난 적은 거의 없다. 동아리에 들지 않은 오사나이는 만나고 싶다고 문자를 보내면 바로 승낙해 준다. 다만 어쩐지 휴일의 사생활을 방해하기가 미안했다.
그렇게 투명하고 얇지만 부서지지 않는 껍질 같은 것이 우리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방해하고 있다. 억지로 밀어붙이면 산산이 부서져서, 그대로 오사나이까지 부서질 것만 같아 여태 손 한번 못 잡아보고 있다.
이번에도 용기를 쥐어 짜내서 겨우 연락했다. 그런데 대답이 어찌나 쌀쌀맞은지, 이건 어떻게 좀 고쳐줄 수 없을까. "낮에 잠깐 만날 수 있어?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라고 보냈더니 돌아온 대답은 "응"이 전부였다. 손재주가 좋아 보이지는 않으니 문자 입력이 서툰 걸지도 모른다.

- 약속 장소인 교차로. 오사나이는 셔터를 닫은 가게 처마그늘에 숨어 문고본을 읽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렸어?"
말을 걸자 오사나이는 앞머리에 가린 시선을 살짝 들더니 문고본에 책갈피를 끼웠다.
"조금."
손목시계를 보니 십 분쯤 지각했다. 히야와 통화하느라 그랬는데, 문자로 연락할 걸 그랬다.

- 그나저나 오사나이와 사귀는 반년 동안 나는 대체 카페를 몇 군데나 들어갔을까.
"있지. 좋은 가게가 있어."
그런 한마디로 오늘도 낯선 가게에 끌려간다. 조금 낡은 빌딩 반지하에 있는 탈리오라는 가게였다.
오사나이는 숙고 끝에 "오늘은 이거" 하고 크림 브륄레를 주문했다. 나는 평소처럼 커피만. 주방에만 신경을 쓰는 오사나이 앞에 <월간 후나도> 3월호와 토요일 신문 지역면 기사를 나란히 펼쳤다.

- 바로 기사를 읽어주길 바랐지만 이 순간의 오사나이는 행복 그 자체나 다름없는 표정을 짓기 때문에 이쪽 좀 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캐러멜리제를 깨는 순간에는 늘 금단의 쾌락을 연상해."

오사나이가 스푼을 들어 표면의 캐러멜을 몇 번 찔러대자 이윽고 챙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캐러멜이 깨졌다.
그나저나 오사나이의 금단의 쾌락은 무엇일까. 무전취식 같은 걸까?

- 첫 한입을 삼킨 뒤에도 오사나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표정이 멍하다.
"어때?"
한 번 더 묻자 오사나이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어째선지 자랑스럽게 말했다.
"커스터드 슈가 그렇게 맛있으니 여기 크림 브륄레 맛이야 확실하지. 달걀의 승리야."
그거 다행이네. 다음은 내 차례다.
"어때?"
세 번째로 묻자 오사나이는 마침내 진지한 표정으로 스푼을 거두었다. 기사를 손에 들고 진지하게 보고 있다. 두 번째라 그런지 그리 반응이 크지 않았다. 

- "그런 걸 묻는 게 아니라고 하잖아, 이 자식이!"
나는 혼란스러웠다. 부장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하고 있다. 너무 태연자약해 건방져 보일지도 모르지만 질문에는 빠짐없이 대답하고 있다. 선생님이 정말 묻고 싶은 게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부장이 이야기를 가로챘다.
"선생님. 그러니까 피해를 예측한 게 마음에 안 드시는 겁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손바닥이 아니라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그나마 남아있던 서류도 바닥에 떨어졌다.
"입 다물어, 내가 말하고 있잖아! 마음에 들고 안 들고 하는 문제가 아니야, 너희는 고등학생씩이나 되어서, 해도 될 일과 안 될 일도 구분 못 해!"
선생님이 잔뜩 구겨진 <월간 후나도>를 움켜쥐고 우리에게 내밀었다.
"확실한 근거도 없이 멋대로 써대다니. 무슨 일이 생기면 너희가 책임질 수 있어? 혹시 너희가 직접 불을 지른 건 아니겠지?"

 

- 부장은 한동안 침묵했다.
불같은 고함을 쉴 새 없이 듣다 보니 아무래도 주눅이 든 건가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윽고 부장은 아까보다 훨씬 차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선생님은 신문부가 방화범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엉?"
그래도 위협하는 선생님. 하지만 부장의 비난이 제대로 먹힌 것은 명백했다. 아차 하는 기색이 눈가에 똑똑히 묻어났다.
대조적으로 도지마 부장은 조용한 분노를 드러냈다.
"신문부를 범죄자 취급하신다면 고문이신 미요시 선생님도 함께 모시고 말씀을 들어야겠는데요."
신문부 고문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미요시 선생님을 실제로 본 적은 없다. 그분이 굉장한 선생님인 건지, 아니면 단순히 다른 사람이 끼면 곤란한 건지, 학생 지도교사는 노골적으로 혀를 찼다.
"어린놈이 입만 살아서, 너 같은 녀석이 나중에 말만 번드르르한 인간쓰레기가 되는 거야! 남이 하는 말은 잠자코 들어!"
이쯤 되면 완전히 트집이다. 나도 더는 못 참겠다 싶었는데 부장이 살짝 손을 들어 막았다. 그러더니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근거 없는 기사는 쓰지 않도록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심려를 끼쳐 죄송했습니다."
아마도 선생님은 아직 할 말이 더 남아 있었을 것이다. 아니, 사실상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인 부장과 눈이 마주치자 이렇게 내뱉었다.
"처음부터 그래야지, 멍청한 녀석. 나가 봐."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는 부장을 따라 나도 꾸벅 인사를 하고 둘이서 학생 지도실을 뒤로 했다.

- 복도를 걸어가는데 위가 쓰릴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방금 전의 억울함. 다나카 씨 공터에 불이 난 일로 원예부에 트집을 잡은 것도 아마 저 선생일 것이다.
그리고 화가 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도지마 부장이 나를 감싸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화나고 분하고 한심해서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무의식 중에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제기랄."
부장은 그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유난히 착잡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분한 마음은 이해해. 저건 그냥 트집을 잡는 거지. 닛타 선생님도 작년에는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 속도를 늦추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며 부장이 말을 이었다.
"원래 까다로운 선생님이긴 한데, 저래서야 히스테리 부리는 꼴밖에 안 되지. 이런저런 일 때문에 정서가 불안정한 건 알지만 괜한 불똥을 맞았어."
"이런저런 일이라니, 우리 말이에요?"
부장이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니야. 닛타 선생님 사생활인데, 이혼했다나 봐."


- 나도 십 년째 학교에 다니지만, 교사의 결혼 생활을 체크한 적은 없었다. 선생님이 하는 말은 하늘의 소리, 선생님 쪽에 불편한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발상 자체를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부장은 여전히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이번에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제기랄.

 
- "어떻게 다음 방화 현장을 예측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똑바로 써. 칼럼 지면이 부족하면 자리는 마련해 줄 테니까."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 못 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하지만..."
"뭐, 지면은 편집회의 때 다 함께 정해야 하나."
"그게 아니라..."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말을 꿀꺽 삼켰다. 지금 부장에게 할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다른 말을 했다.
"더는 쓰지 않겠다고 닛타 선생님한테 말했잖아요?"
부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말은 안 했어."

- "내가 말한 건 '근거 없는 기사는 쓰지 않겠다'는 거였지. 네가 근거를 쓴다면 이야기가 달라져. 닛타의 입을 막고, 너도 마무리를 지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나는 한심하게도 입을 쩍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확실히 부장이 하는 말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이런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전혀, 그런 인상을 못 느꼈다.

- 용건은 끝났다는 듯이 계단을 내려가려는 도지마 부장에게 이것만큼은 간신히 말할 수 있었다.
"정말 써도 돼요?"
내가 생각해도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부장이 쓰라고 했는데. 도지마 부장은 어깨너머로 돌아보며 아주 조금, 찡그린 인상을 폈다.
"뭐 어때. 이혼했거나 말거나, 아까는 나도 꽤 열받았거든."

뒷모습을 보며 나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또다시 분한 마음이 치밀었다.

- '비밀'을 밝히라는 말을 듣고 내가 선뜻 대답하지 못한 이유는 뻔했다.
며칠 후, 히야에게 의논했을 때 녀석은 대번에 내 심정을 꿰뚫어 보았다.
"그건 아까운데. 아직 더 써먹을 수 있는 소재잖아. 그건."

 

- 꿈같은 소리인 줄 알면서도 말했다.
"어쩌면 더 좋은 소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나중에 연쇄 방화는 시시한 뉴스였다고 웃을 수 있을지도 몰라."
히야가 어깨를 움츠렸다.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
뭐, 가능성이 낮은 건 알고 있다.
마지막 버터롤을 먹어치운 히야가 작게 하품을 했다.
"후우...  뭐, 어쩌면 대반전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우리노, 내가 충고 한마디 할게. 똑똑히 들어."


- 히야는 묘하게 예언 같은 '충고'를 했다.
"기사는 두 가지 준비해 두는 게 좋을 거야. 하나는 너희 부장 말대로 '비밀'을 밝히는 기사지. 다른 하나는 그간의 사건 경위를 정리해서 다음 현장을 예측하는 기사. 신입생들이 경위를 이해하고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꾸미는 거야. 막판에 바꿔치기해도 늦지 않도록 준비해."
히야는 '총정리' 기사를 준비해 두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미래를 염두에 둔 행동이다. 과연 미래가 있을까?

-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의도를 가늠할 수 없었다. 분하지만 히야의 사고는 가끔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다.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면 들어줄까? 그런 생각을 하는 내 귀에 밝은 목소리가 들어왔다.

- 그리고 봄방학.
나는 휴일에 오사나이와 함께 거리로 나섰다.
오사나이가 어디 사는지는 모른다. 가족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적이 없다. 알 수 있는 것은 제법 유복하다는 점. 휴일에는 거의 만나지 않지만 만날 때마다 사복이 달랐다. 오늘은 상큼한 흰 셔츠에 검은 타이로 멋을 냈다. 키가 이십 센티미터만 더 컸어도 듬직해 보였을 텐데.

 

- 자주 못 만난 탓도 있지만 아직도 오사나이의 취향을 잘 모르겠다. 어딜 가든 즐겁게 노는 반면 어딜 가도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 같지 않다. 가령 얼그레이2에서 티라미수를 먹었을 때처럼, 탈리오에서 크림 브륄레를 먹었을 때처럼, 그런 순수한 미소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방법을 몰라 또 극장을 선택하고 말았다. 

- 로맨스 영화라고 하더니만 광고가 완전히 사기였다. 확실히 처음에는 달착지근한 이야기였다. 연애에 서툰 청년과 가련하고 불행한 여주인공, 파란만장한 사랑의 결말은. 그런데 중간부터 분위기가 바뀌었다. 여주인공 주변에서 자꾸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오페라의 유령' 같은 스토커의 소행인 것처럼 나오더니. 
어두운 극장에서 나는 옆에 앉은 오사나이의 표정을 살폈다. 가련한 여주인공은 요컨대 상습 보험 사기범이었다. 순정파 청년은 차츰 위기에 몰린다. 억울한 누명. 어느 틈에 갖춰져 있는 자살도구. 그는 여주인공을 믿으려 하지만 그녀의 전화를 받고 마침내 얼어붙는다. 
어렸을 때 그런 동화를 들은 기억이 있다. 로맨스 영화를 볼 셈으로 그만 여성판 <푸른 수염>을 선택하고 만 것이다. 포스터에 속았다. 결말은 유난히 찝찝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에 불이 들어오자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우리만 커플끼리 온 게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야유에 가까운 신음소리와 다투는 소리가 났다.
나도 바로 사과했다. 이렇게 찝찝한 서스펜스 영화인 줄 몰랐다. 하지만 오사나이는 고개를 저으며 짧게 말했다.
"아니야. 재미있었어."

 

- 요즘 특히나 더 그런 생각을 한다. 나는 후배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 선배의 눈치를 너무 보는 게 아닐까. 웃어주길 바라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비위를 맞추고 있는 게 아닐까.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는 초조함 속에서 때로는 강하게 밀어붙일 필요도 있지 않을까 고민할 때도 있다.
 
- 장소는 기라 시 번화가에서 조금 들어간 복합 건물 1층. 벚꽃 암자라는 가게였다. 빌딩 외관은 낡았는데 가게 안은 고즈넉한 전통 일본 스타일로 통일되어 있고, 메뉴에도 말차와 사쿠라모치가 있었다. 여기도 단골가게인지 오사나이는 역시 메뉴도 보지 않고 "아이스크림 2종 세트, 검은깨 하고 두유맛으로 주세요. 음료는 커피로요"라고 술술 주문하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덧붙였다.

"콩가루도 뿌려주세요."
나는 이번에도 커피만 영화표를 사자 용돈은 바닥났다. 아르바이트를 진지하게 고민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오사나이가 중얼거렸다.
"아르바이트..."
깜짝 놀랐다. 머릿속 생각이 밖으로 새어 나간 줄 알았다. 적어도 얼굴에 동요는 드러난 모양이다. 오사나이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 오사나이가 시선을 흘깃 던졌다.
"저기 있는 웨이트리스, 우리 학교 애야. 몰래 아르바이트하는 거야."
몇 자리 떨어진 곳에서 주문을 받고 있는 아이 말인가? 생글생글 웃으며 "주문 확인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외모가 어른스러워 말해주지 않았으면 고등학생인 줄 몰랐을 것이다. 
"봄방학이니까 학교에서 허락해 준 것 아닐까?"
"번화가 카페는 안 돼. 허락해 준다면 나도 하고 싶었는데."
오사나이가 웨이트리스로 일하면 사회 체험 현장학습으로 보이지 않을까.

(리뷰자 주 : 아마도, 나카마루.)

 

 

- "무허가 아르바이트는 다들 하는 일이잖아."
"아마도. 나는 도저히 못 하겠지만. 하지만 그래, 친구가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그럼 왜 그렇게 신경 쓰는 거야?"
오사나이는 다시 한번 웨이트리스를 곁눈질하더니 입을 살짝 비죽거렸다.
"화장이랑 옷만으로도 저렇게 바뀌는구나 싶어서..."

- 내 커피가 먼저 나왔지만 오사나이가 시킨 디저트가 나오길 기다렸다.
이윽고 나온 것은 옻칠을 한 검은색 나무 스푼. 주홍색 사각 접시에 담은 흑백의 아이스크림. 첫 숟가락으로 검은 아이스크림을 떠서 한 입. 오사나이는 스푼을 입에 문 채로 생긋 웃었다.
"검은깨로 만든 아이스크림은 드물지는 않아."
능숙하게 스푼을 놀리며 말했다.
"하지만 검은깨 맛이 너무 강하면 비리니까 디저트라고 할 수 없어. 검은깨 껍질이 혀에 닿는 것도 싫어. 식감도 좋고, 검은깨와 우유 맛이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끔찍해. 그런 점에서 이 가게는 완벽해. 지금까지 먹은 검은깨 아이스크림 중에서 가장 절묘해." 

- 생각해 보니 오사나이와 이야기할 때 항상 내가 말하는 입장이었다. 오사나이는 스푼을 사용해 뭔가를 먹으면서 '그래?' 혹은 '정말?' 하고 맞장구를 칠 뿐이었다. 오사나이가 적극적으로 말하는 경우는 디저트 이야기를 할 때뿐일까?
나는 디저트에 관심이 없다. 그래도 어떻게든 분위기를 띄우고 싶어 필사적으로 화제를 찾았다.
"정말 디저트를 좋아하나 봐."
"응?"
스푼으로 흑백 아이스크림을 골고루 떠먹던 오사나이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아이스크림이나 케이크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
"... 어. 응."
오사나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마치 '너는 사람이구나'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시선은 곧바로 접시 위로 돌아갔다.
"좋아해."
"싫어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응, 좋아해."
"이유는?"

 

- 스푼이 우뚝 멈췄다. 너무 시시한 이야기라 황당한 걸까. 오사나이는 뜻밖에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뭘 죽이지 않고 먹을 수 있으니까. 소를 죽이지 않고도 우유는 짤 수 있어. 닭을 죽이지 않고도 달걀은 얻을 수 있어."
눈빛은 뜻밖에도 싸늘했다.
오사나이는 다시 스푼을 놀리더니 검은 아이스크림의 마지막 한입을 날름 삼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농담이야. 달콤해서 좋아해. 그뿐이야."

-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아무래도 오사나이의 농담은 잘 모르겠다. 이렇게 휘둘리는 것도 슬슬 그만두고 싶다.
"우리노는 달콤한 디저트가 싫어?"
"글쎄."
오사나이와 카페에 들어갔을 때 다른 걸 시키지 않는 이유는 단지 돈이 없기 때문이다. 취향을 묻는다면.
"어느 쪽도 아니야."

- 한 가지 생각났다. 이것으로 오사나이와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여 입을 축이려고 커피를 마셨다.
"저번에 아버지가 어디서 받았다며 과자를 가져왔는데 그건 맛있었어. 뭐라더라. 밤인데, 사탕 같은."
"마롱글라세?"
"아아, 맞아, 그거야."

 

- 오사나이는 하얀 아이스크림도 마저 먹어치우고 가만히 숨을 내쉬더니 커피를 홀짝였다. 어쩌면 뜨거운 걸 잘 못 마시는지도 모른다.
커피가 아직 뜨거웠는지 체념한 듯 잔을 내려놓더니 오사나이는 어딘가 꿈을 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롱글라세... 지금이 가을이었다면 이 가게에서 '구리킨톤'을 팔 텐데. 그것도 맛있어. 햇밤이 나는 계절에 오면 좋겠다."
"그러네. 꼭 같이 오자."
"우리노. 마롱글라세는 어떻게 만드는지 알아?"

- 오사나이는 내가 알 거라고 생각하고 물은 건 아닌 듯했다.
"마롱글라세는 밤을 삶아 껍질을 까서 시럽에 담가 만들어. 그러면 밤에 설탕 막이 생기거든."
"아아, 그렇게 만드는구나."
오사나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럼 겉만 달잖아."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
"부족해. 다시 조금 더 진한 시럽에 담가. 그럼 설탕 막 위에 또 설탕 막이 생겨. 또 조금 더 진한 시럽에 담가. 또 설탕막이 생기지. 또 조금 더 진한 시럽에... 그렇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하는 거야."

 

- 오사나이는 소중한 보물을 지키듯 두 손으로 커피잔을 감싸고 있었다. 눈은 테이블 위를 향하고 있지만 아마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을 것이다.
"달콤한 설탕 옷 위에 또 설탕 옷을 입고, 몇 겹이나 겹쳐 입는 거야. 그러다 보면 밤도 어느새 사탕처럼 달콤해지거든. 원래는 그렇게 달지 않았는데, 설탕 옷만 달콤했는데, 표면이 본성과 뒤바뀌는 거야. 수단은 언젠가 목적이 돼... 난 마롱글라세가 정말 좋아. 왜, 좀 귀엽잖아?"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사나이가 옻칠이 된 스푼으로 나를 가리켰다.
"네가 바로 나의 시럽이야."
지금 한 이야기가 오사나이의 완곡한 농담인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 덥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이게 좋다. 봄철에도 밤은 그럭저럭 추우니까.
둘이서 만나는 게 주목적이므로 궁극적으로는 둘만의 데이트에 목적지는 필요 없다. 하지만 그래서야 도시 한복판을 정처 없이 헤맬 테니 일단 어디에 갈지 정했다. 오늘은 나카마루의 바람대로 전시회를 보러 가기로 했다. 색이 예쁜 판화를 볼 수 있다고 한다.

 

- 먼저 도착한 나는 역 앞 분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대로 십 분쯤 멍청히 있는데 이리로 다가오는 나카마루가 보였다. 연분홍색 카디건이 유난히 우아해 보여 '놀 줄 아는 고등학생'인 나카마루 치고는 조금 새침을 떠는 것처럼 느껴졌다.

- "으음. 이것보다 지그소 퍼즐이 더 좋은 것 같아."
설마 나카마루가 지그소 퍼즐을 좋아할 줄은 몰랐다. 편견대로 말한다면 퍼즐을 맞추는 사람 뒤로 몰래 다가가 '시시한 놀이야!' 하고 테이블을 뒤집어엎을 것 같은데. 실례했다. 사람은 겉보기로는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오빠가 좋아했거든. 나는 망치는 쪽이었어."
편견이 맞았다.

- 이십 분 만에 둘 다 질려서, 아니, 만족하고 자연히 돌아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어쩐지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뚫어져라 쳐다보았지만 누가 봐도 우리는 소시민다운 고등학생이니 붙들리는 일은 없었다.

(리뷰자 주 : 아마도 이쪽이 진짜 애인이 아니었을까? 혹은 그 친구?)


- 몇 개 떠오르는 가게를 말했다.
"여기라면 벚꽃 암자가 가까우려나. 전통 찻집인데 편안한 가게야. 베리베리가 제일 가깝긴 한데 의자가 불편해서."
나카마루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홱 돌리고 토라진 것처럼.
"고바토 짱은 이상하게 둔하단 말이야. 사실은 둔하지 않을 것 같은데, 이따금 정말 둔해."
뭐 마음에 들지 않는 소리라도 했나?

 

- "전통 찻집은 싫어?"
"아니, 그게 아니라."
나카마루가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거기에서 당혹스러운 기색밖에 발견하지 못했는지, 나카마루는 요란하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몰라? 고바토 짱, 그런 가게를 너무 잘 알잖아. 디저트가 맛있는 가게나."
"아, 응. 그럭저럭."
그렇다고 끄덕이는데 나카마루가 집게손가락으로 내 가슴께를 가리켰다.
"왜, 어째서 알고 있는 거야?" 

- 그런 뜻이었나.
내가 아는 디저트 가게는 대부분 오사나이가 가르쳐준 것이다.
"알겠어? 고바토 짱이 이 가게 저 가게 말할 때마다 예전 여자친구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단 말이야. 그런 건 싫어."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군, 그럴지도 모른다. 할 말이 없다. 나카마루가 또 한숨을 쉬고 말했다.
"조금 걷자. 모처럼 날도 좋으니까."
정처 없는 산책은 바라는 바다. 나카마루만 좋다면 말이지만.

(리뷰자 주 : 하지만 어쩐지 이런 생각을 해본다. 오사나이가 본 벚꽃암자의 아르바이트생은 나카무라. 나카무라는 벚꽃암자를 알고 있는 고바토를 떠보는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만나고 있던 대학생이 관련된 전시회 티켓으로 관람을 한 게 아닐까? )

 - 봄방학 시기라 평일 낮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나카마루의 연분홍색 옷을 필두로 레몬옐로 티셔츠나 에메랄드그린 셔츠, 오프화이트 바지 등등 산뜻한 색조가 눈에 들어왔다. 기라 시 중심가는 세상 모든 상점가가 그렇듯 불황이라 셔터를 닫은 가게가 많았다. 그래도 겨울을 지나온 이런 날에는 어느 정도 활기를 찾는 듯했다. 

- 걸음을 떼면서 나카마루가 이런 말을 꺼냈다.
"있지. 이제 와서 묻기는 그렇지만 뭐 좀 물어도 돼?"

"달콤한 디저트에 관한 거라면,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

"아니야."

울컥 토라진 목소리가 돌아왔다.

 

- "그게 아니라... 작년에 내가 교실로 불러냈을 때 말이야. 솔직히 말해 봐, 고바토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어?"
조금 놀랐다. 아닌 게 아니라 왜 이제 와서 묻는지 모르겠다. 반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똑똑히 기억한다. 나는 나카마루의 이름조차 몰랐다.
그렇지만 지금은 정직의 미덕을 발휘할 때가 아니다.
"같은 반이라는 건 알고 있었어."
"그래. 그것뿐이야?"

- 더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는지 기억을 더듬어보았지만 아무래도 나올 게 없어 보였다. 뭐, 없는 이야기를 지어낼 수는 없으니까.
"그래. 그 정도였던 것 같아."
너무 박정한 것 같아 얼른 덧붙였다.
"물론 지금은 더 많이 알지만."
별안간 등짝을 찰싹 얻어맞았다. 지금의 나는, 그렇다. 예를 들면 나카마루가 의외로 부끄럼을 탄다는 사실을 안다.

- "그럼 말이야, 잘 알지도 못하는 내 고백을 왜 받아들였어?"
그게 궁금한 거군.
걸어가면서 나누는 대화인지라 나카마루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나는 나카마루의 옆모습을 훔쳐보듯 살펴야만 했다. 눈길이 마주치면 대번에 대화가 심각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카마루는 길 건너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봄에 어울리는 태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태평하게 대답했다.
"방과 후 교실이었지. 가까이서 직접 보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착한 애 같았거든."

- "고바토 짱, 빈말도 잘하는구나."
확실히 빈말이었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아마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싫어도 거짓말이 는다.
하지만 피차 마찬가지다. 나만 거짓말을 해야 하다니 불공평하다. 나카마루도 뭔가 거짓말을 하게 만들지 않으면 공평하지 않다. 딱히 궁금한 건 아니지만 괜히 짓궂게 물어보았다.
"그럼 나도 이제 와서 묻기는 그렇지만... 어째서 나였어?"
나카마루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지난 반년, 내가 물어주기를 줄곧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얼굴이 이상해서."
거참. 표정 개그는 전문 분야가 아닌데.

- "남자는 말이야,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애들이 많잖아. 시시하다고 말하는 게 멋지다고 생각하는 거 말이야. 나, 고바토 짱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어. 예전 여자친구, 오사나이랬나? 걔도 뭔가 무난한 수준에서 타협한 눈치였고, 귀엽기는 해도 수수하잖아."
그건 조금 잘못된 인식이지만, 뭐 됐다.
"그런데 왠지 조금 달랐어. 달관한 것도 아니고, 염세적인 것도 아니고. 벽이 높은 건 알았지만, 그래도 뭐랄까, 이성을 거부하는 벽도 아닌 것 같았고. 이상한 얼굴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여자친구랑 헤어졌다길래 한번 물어본 거지."

 

- 왠지, 거짓말을 하게 만들려던 처음 의도는 완전히 빗나가 버린 모양이다.
나카마루는 아무래도 사실을 말하는 듯했다. 거짓말이라기에는 영문 모를 소리였다. 요컨대 나카마루는 이상한 사람을 좋아하고,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았다는 뜻일까? 
아니, 설마 그럴 리가. 일그러진 웃음이 나왔다. 소시민으로서 집단에 녹아들었다고 자부했는데, 내 가면이 그렇게 어색했나? 

 

-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친구들도 날 이상하다고 해?"
나카마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고바토 짱, 그런 게 신경 쓰여?”
"당연히 쓰이지. 내 얼굴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입을 비죽이자 나카마루가 웃었다. 소리 높여, 재미있어죽겠다는 듯이.
대체 왜 웃는지 모르겠다. 알 수 있는 사실은 나카마루도 참 이상한 아이라는 점뿐. 지난 반년, 소시민 클럽의 일원인 줄로만 알았는데.

- 나카마루는 눈물이 맺힐 정도로 웃다가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더니 내 등을 탁탁 두드렸다.
"걱정 마! 고바토 짱을 그렇게 본 건 나쁜 일 테니까. 오히려 '고바토, 좀 재미있지 않아?'라고 물었더니 다들 '평범하다'고 했어."
뭐, 그렇다면 다행인데.

- 이대로 가면 차코라는 카페가 가깝다. 이곳은 오사나이가 아니라 도지마 겐고 때문에 알게 된 가게다. 하지만 정황상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낫겠다. 둔하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다.

- "하지만 허세를 부리느라 경찰을 부르기 전에 집 청소를 했다지 뭐야."
그래도 되나. 감식 작업에 방해가 될 것 같은데.
아케이드 상점가를 빠져나와 빌딩 사이 골목으로 들어갔다. 원래는 뒷골목이었지만, 지금은 손질을 해서 짧은 산책로로 탈바꿈했다.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다.
"경찰을 불렀더니 도둑맞은 물건값을 묻더래. 오빠는 온 집안을 뒤져서 뭐가 사라졌는지 확인하다가 결국 깨달았어. 고바토 짱, 뭘 것 같아?"
피해 금액을 확인하려다가,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결론은 뻔하다.

 

- "도둑맞은 게 없었던 것 아니야?"
나카마루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이 정도로 놀라면 곤란한데. 나는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피해가 없었다니 다행이다."
"응, 뭐 그렇긴 한데."
"아마 창문에 뭐가 부딪혀서 유리가 깨졌을 뿐이지, 도둑은 아니었을 거야. 이렇게 말하긴 그렇지만, 방이 엉망진창이었던 건 오빠가 어지른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말하자 나카마루가 씨익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지?'라는 듯이. 그 웃음은 내 자존심을 약간 자극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거든."

- "방이 더러운 게 오빠 잘못이라는 건 맞아. 하지만 누가 방에 침입한 건 틀림없대. 창문에는 이중으로 커튼을 쳐놨었는데 그게 열려 있었거든. 만약 공이 날아와 유리가 깨진 거라면 커튼까지 걷히지는 않았겠지."
그건 모를 일이다.
확실히 사고로 깨졌다면 커튼은 그대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 하나로 '누가 침입한 게 틀림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바람 탓일 수도 있고, '침입하려고 했지만 들어가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나카마루는 나와는 다르다. 이런 이야기에 세심하게 파고드는 타입이 아니다.
그래도 단정하는 말투가 마음에 걸렸다. 나카마루는 오빠의 집에 누군가가 침입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알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이미 끝났고, 결말까지 나온 이야기다. 진상이 밝혀졌다면 이것은 수수께끼에 도전하는 게 아니다. 고작해야 퀴즈 맞히기다.
... 아니. 아니다. 실망한 표정을 지어서는 안 된다. 두 손 들었다는 듯이 거짓 웃음을 지었다.

- "그래? 그럼 누가 침입한 거구나."
나는 웃어야 한다. 연인끼리, 시답지 않은 대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실로 바라마지않던 소시민의 휴일이 지금 결실을 맺고 있지 않은가!
"응."
나카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 반대로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그래서 말이야."
내 사고를 가로막듯 나카마루가 말을 이었다.
도둑 이야기를 하는데 불순물이 많다. 나카마루가 욕실과 화장실이 분리된 집을 원한다는 사실이나, 면허를 따면 여행을 떠나려 한다는 사실이나, 과거에 유리창을 깬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핵심과 동떨어져 있다. 귀로 들으면서 알아서 정리하지 않으면 뒤죽박죽 섞일 게 뻔했다. 
그렇구나. 내 생각에 이건 정보의 취사선택으로 해결할 수 있다.

- "오빠는 틈새바람이 기분 나빠서 아예 창을 활짝 열고 하룻밤을 나고서야 위험하다는 걸 깨달았대. 고바토 짱, 뭐가 위험한지 알겠어?"
집에 누가 침입한 흔적은 있는데 도둑맞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럴 때 무엇을 걱정해야 하는가?
나 같으면 드라이버를 손에 들고 일단 콘센트 덮개를 벗기겠다.
"도청기 같은 게 의심스럽네."
나카마루는 또 눈썹을 찌푸리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응, 오빠도 그렇게 생각했어."
내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본다. 아무것도 안 묻었을 텐데... 아마.
"... 고바토 짱, 정말 내가 이 얘기 안 했어?"
"처음 들어."

- 석연치 않은 기색이다. "안 들었어도 그 정도는 알아"라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눌렀다.
"알았어. 그런데 오빠네 집 콘센트는 커다란 오디오 세트뒤에 있어서 뭘 설치하려면 품이 들어 힘들어. 하지만 오디오 세트를 건드린 자국은 없었으니 도청이나 도촬 우려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대. 아침 일찍 공인중개사무소에게 가서 말했더니, 여행 갔다가 전날 늦게 돌아와서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고 하기에 유리값만 이야기하고 점심때 집으로 돌아왔더니... 누가 기다리고 있었게?"

 

- 글쎄, 이번에는 즉답하기 어렵겠다.
일부러 묻는 걸 보니 부동산에서 돌아온 오빠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은 뜻밖의 인물이다. 지금 나카마루가 들려준 이야기에 등장인물은 많지 않다. 오빠. 동아리 친구. 경찰, 공인중개사무소. 그리고 나카마루.
하지만 정말로 뜻밖의, 그러면서도 이야기의 결말로 이어질 만한 인물이라면... 한 사람밖에 없다.

- 범인 아니야?
그렇게 말하려다 간신히 말을 삼켰다.
나카마루는 나를 수상쩍게 생각하고 있다. 질문에 정답을 연발하는 내가 영 못마땅한 기색이다. 표정을 보면 알 수 있고, 경험에 비추어 보면 더욱 명백한 사실이다. 나는 뼈저리게 느끼고도 아직 진심으로 이해하지는 못한 것이다. 정말이지, 나카마루 말이 맞다. 나는 좀 둔한 걸지도 모른다. 
여기서 '정답'을 말하는 건 정답이 아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이년, 소시민 생활을 통해 배운 교훈이 있다. 소시민은 대화할 때 '적절한 맞장구'를 치지 않는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상대의 이야기를 넘겨보는 것은 금물이다.
나는 또 거짓말을 해야 했다.
"음, 역시 모르겠어.”
그렇게 말해야 했던 것이다.
보라, 그러니 대화 상대가 이렇게 환하고 생기 넘치는 표정을 짓지 않는가.

- "모르겠지? 있잖아, 세상에... 범인이 있었대!"
"우와아! 완전 공포다!"
"그치, 그렇지?"
기분 탓인지 발걸음마저 가벼워 보인다.

 

- "오빠도 깜짝 놀랐대. 말로는 으스대지만 오빠도 별로 힘이 센 건 아니거든. 꽤 겁먹었을 거야."
그 공포는 이해한다. 트러블은 원하지 않아도 알아서 굴러와 평온을 실컷 헤집어놓고 어디론가 가버린다. 부조리한 트집, 부당한 요구... 그렇기 때문에 자고로 군자와 소시민은 위험을 멀리하라 했다. 

- "그 녀석한테 물어봤대, 어째서 그런 짓을 했느냐고. 생각해 보면 황당한 얘기지만, 그 도둑이 오빠를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뚫어져라 쳐다보더라는 거야. 그리고 왜 유리를 깨고 남의 집에 들어갔는지 설명을 했는데... 그게 또 이상해. 고바토짱,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짐작 못 하겠지?"
'그러네. 이런 걸 두고 오리무중이라고 하나 봐. 하나도 전혀, 짐작도 못 하겠어!'
나는 물론 그렇게 대답하려 했다. 아마도, 그러려고 했을 것이다.

 

- 하지만 그때 심각한 불운이 나를 덮쳤다.
아쿠아파크의 분수, 그 한가운데에 있는 세 개의 천사 조각상. 그 트럼펫에서 물기둥이 치솟고, 물속에서 일곱 가지 빛깔이 반짝이더니, 음악까지 아련하게 흘러나온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름대로 멋을 부린 연출이겠지만 천사가 트럼펫을 부니 아무래도 묵시록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 같다고.
그래서 그만 정신이 산만해졌다. 소시민으로서 지켜야 할 절도가 소리 없는 트럼펫 때문에 멀리 날아가버렸다. 나는 중얼거렸다.
"그건 분명..."

- 이것도 '특이한 도둑' 이야기가 되지 못한다.
그럼 물은 어떨까? 욕조에 물을 틀어놓고 니가타로 떠났다. 하지만 오빠의 집은 아마도 1층일 테니, 아래층에 물이 샐 염려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가장 의심스러운 건 소리다.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 퍼지고, 심야에도 멈추지 않는다. 하루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시끄럽다. 문을 두드려도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외출한 모양이다. 나라면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오빠의 아파트는 좁고 지저분하다고 했으니 벽이 두꺼울 리 없다.
게다가 오빠는 아침에도 밤에도 아르바이트를 한다. 자연히 아침에는 잠에서 깨려고 뭔가 모닝콜을 준비했을 게 분명하다. 알람 시계? 휴대전화 알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오디오 타이머 기능도 효과는 똑같다. '알람 시계'와 '오디오 타이머 기능'의 결정적인 차이는 일단 선곡 범위가 다르다는 점. 그리고 내버려 두었을 때 정지 기능의 차이가 있다. 알람 시계는 대개 울리다가 꺼진다. 하지만 오디오 세트는 설정에 따라서는 직접 꺼야만 멈춘다.

 

 

- 나카마루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그 표정에는 이미 숨길 수 없는 의혹이 드러나 있었다.
되살아난 기억이 나를 얼어붙게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말을 했던 중학교 시절. 모두가 나를 인정해 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말이 많아질수록 내 발밑은 무너져갔다.
모두 사라지기 전에 소시민이 되기로 결심했는데.

 

- 커다란 자부심에 흥분하는 것도 사실이다. 과거의 나였다면 말로 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할 뿐. 하지만 생각한다는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봐라, 그 정도로 내게 수수께끼를 던지다니 우습기 짝이 없네. 조금 더 어려운 문제를 들고 다시 찾아오겠어?
말할 수 없다. 그런 말은, 이제는.
나카마루 앞에서 나는 다음에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나카마루가 혐오하리라 확신했고, 나아가 만약 그렇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뻔뻔하게 체념하기까지 했다.
내 얼굴을 뚫어져라 지켜보던 나카마루는 불쑥, 이렇게 말했다.
"역시 내가 얘기했구나? 그런 것 같았어."
"... 아, 응."

- 이날 내가 발휘한 최고의 기지는 도둑 이야기의 결말을 예상한 것이 아니다. 그다음에 튀어나온 한마디는 내가 생각해도 절묘했다. 구원의 밧줄에 매달리듯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맞아. 하도 오래전에 들어서 나도 깜빡했네!"

- 나카마루의 오빠는 깨진 창문을 열어놓은 채로 하룻밤을 보냈다고 했다. 그렇다면 아마도 작년 여름에 있었던 일이리라. 분명 늦어도 초가을이었을 것이다.
사건이 오래된 덕분에 내 실언도 아슬아슬하게 넘어갔다. 나는 이 순간을 덮어버리려고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어디 가?"
천사의 트럼펫에서 마지막 물줄기가 솟아올랐다가 떨어졌다.

- 그때 일을 떠올렸다. 오사나이와 함께 영화를 보았던 날. 오사나이는 내게 교직원 인사이동 기사를 보여주었다.
오사나이가 어째서 그 기사를 가지고 있었는지 고민하기도 했다. 닛타가 내 활동을 방해한다는 걸 모른다면 그런 기사를 내게 보여주었을 리 없다. 오사나이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보원은 도지마 부장일 수밖에 없다. 
부장은 평소처럼 팔짱을 끼고 떡 벌어진 어깨를 과시하듯 당당하게 앉아 있다. 처음 오사나이를 보았을 때, 도지마 부장에게 귓속말을 하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두 사람은 생각보다 관계가 깊다. 

- 따끔한 곳을 찔렀다고 확신했다.
몬치는 그랬다. 도지마 부장은 그럭저럭 소임을 다하고 있다. 그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몬치는 제대로 된 활동을 한 적이 없다. 건설적인 제안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도지마 부장의 아첨꾼도 아니다. 별 기력도 없이 타성에 젖어 시키는 대로 글자 수를 메운다는 점에서는 기시나 몬치나 똑같다. 그래놓고 짐짓 신문부의 질서를 지킨다는 얼굴로 나를 방해한다. '하기 싫다'는 의사 표시를 확실하게 내비쳤던 기시가 차라리 나았다. 
몬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도 물러설 마음은 없다. 이쓰카이치 혼자 어쩔 줄 몰라 시선을 두지 못하고 두리번거렸다.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잘난 척하기는. 동네 끝이든 어디든 네가 좋아서 멋대로 간 거잖아. 누가 부탁했어? 네가 자랑하는 그 기사도 어차피 신문에 실린 지역 소식을 베낀 거잖아? 그 정도로 뭘 자랑질이야?"
"베껴서 다음 현장을 예측할 수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아직 몰라? 바로 나야. 이 연쇄 방화 사건의 규칙을 찾아낸 건 바로 나라고! 나니까 쓸 수 있었어. 신문도 못 하는 일이야. 선배, 당신 같은 사람은 절대로 못 쓰는 글이야!"

- "네 기사가 폄훼당할 이유는 없어. 하지만 우리노가 노력한 것도 사실이야. 꼼꼼히 조사했고, 신중하게 고민했어. 내가 생각했던 방향 하고는 전혀 달랐지만 대단했어. 그걸 갑자기 그만두라고 하면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겠지. 닛타의 이동소식을 듣고 얼씨구나 기사를 바꿔치기했다면, 그 마음은 이해해." 
몬치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부장이 자기 편을 들어줄 줄 알았겠지. 한편 나도 도지마 부장이라면 나를 이해해주지 않을까 하는 아련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부장은 그렇게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몬치, 내가 얘기할게."
책상에 손을 짚고 나를 번득 노려보았다. 몬치와 달리 표정이 험악한 건 아니지만 나는 움찔 놀라 자세를 가다듬었다.
"우리노, 몇 가지만 묻자."

 

- 오프닝 쇼는 끝났다. 긴급 회의는 이제부터가 진짜다.

- "생각만 따지자면 내 생각도 그래. 하지만 확인한 건 아니잖아."
"그건..."
당장 말문이 막혔다. 닛타의 말은 부당했다. 하지만 닛타가 아니라 학생 지도부의 결정 자체가 부당했을지도 모른다... 
"뭐, 일단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지켜봐야지. 아무 일 없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어. 아직 모를 일이야. 그리고 또."

- "이 기사 마지막에 신입부원을 모집한다는 소리를 썼지."
"4월호니까 당연히."
"평범하게 썼다면 말이지."
부장의 눈이 기사 위를 빠르게 훑었다.
"이건 평범하지 않아. 앞으로도 연쇄 방화 사건을 다룰 테니, 이 사건에 관심이 있으면 신문부로 오라고 썼잖아. 잘 들어, 편집회의를 통해 네게 페이지를 줬어. 하지만 올해 활동방침까지 네게 맡긴 기억은 없어. 자격까지 묻지는 않겠지만 이건 도가 지나쳐."
확실히, 그건 조금, 스스로도 지나치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펜이 미끄러졌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핑곗거리가 있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칼럼 차원에서 모집한 겁니다. 신문부차원의 모집도 일면에 버젓이 실려 있잖아요. 그래서 상관없을 줄 알았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씨알도 안 먹힌다.
"일면에 신입부원 모집 기사를 실은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칼럼에 아무 글이나 써도 되는 건 아니야. 오히려 반대지. 일면에서 정식으로 모집했으니 다른 지면에서 모집할 때도 서로 말이 맞아야 해. 네 부하를 모으는 게 아니라 신문부원을 모집하는 거니까. 올해도 신문부에서 이 문제를 추적하겠다고 정한 기억은 없어."

- "하지만 현실은 네 명뿐인 작은 동아리야. 뜻을 한데 모으자고 따져봤자 괜한 수고만 들지. 그 문제는 정말로 부원이 온 뒤에 생각해도 늦지 않아. 네가 쓴 글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제대로 자각하고만 있다면 일단은 넘어가겠어."
지금 저 말은 자조일까? 아무런 변화 없는 심각한 표정으로 보아하니 그럴 것 같지 않지만.

- "마지막으로..."

기분 탓인지 부장의 눈빛이 더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아니, 분명 도지마 부장은 이 '마지막' 이유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부장은 내가 그 사실을 이해하도록 충분한 뜸을 들이고 말했다.
"네가 네 손으로 쓴 기사가 소중해서 도를 넘은 거라면 그 마음도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우리노, 미안하지만 나는 너를 그 정도로 믿지 못하겠어."
짧은 침묵과 팽팽해지는 긴장.
"나는 네게 '비밀'을 털어놓는 기사를 쓰라고 했지. 너는 기사를 썼지만 닛타의 인사이동 사실을 알고 기뻐서 예비 기사를 실었다고 했어. 자, 그럼 보여줘야겠어. '비밀'을 쓴 기사가 정말 존재한다면, 보여 줘." 

- 하마터면 신음을 흘릴 뻔했다.
그 기사가 없다면, 처음부터 편집회의의 결과를 따르지 않을 셈이었다는 뜻이 된다. 반대로 존재한다면 내 말을 뒷받침해 줄 것이다.
부장이 문제로 삼는 것은 내 행동의 옳고 그름이 아니다. 그것이 용서할 수 있는 행동인가 용서할 수 없는 행동인가. 그리고 그 판단 기준은 기사의 유무에 달려 있다. 그 점을 파고들다니. 
덜렁대는 수구파인 줄 알았던 도지마 부장의 인상이 자꾸만 바뀐다. 3월, 학생 지도실 밖에서 맛보았던 상반되는 감정이 또다시 솟구쳤다. 감탄과 분개... 그것이 내 침묵의 이유였는데, 뭘 착각했는지 몬치가 으스대며 나섰다.
"있을 리 없지, 이 녀석은 제멋대로 굴고 싶었던 것뿐이야."

- 기사를 내밀려다가 잠시 망설였다. 그것은 나만 알고 있던 '비밀', 연쇄 방화의 규칙을 남에게 보여준다는 사실에 대한 망설임이었다.

- 몇 분. 어쩌면 일 분도 채 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긴 시간이었다. 부장은 눈을 뜨고 중얼거렸다.
"이건 내 실수야."
"예?"
팔짱을 낀 채로 말하는 부장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무거웠다.
"내 생각이 짧았어. 결과론이지만 우리노의 기사가 실려서 다행이야. 큰일 날 뻔했어."

- "이 기사 내용은 내 지시를 거의 따른 거야. 편집회의 때도 그런 식으로 쓰기로 했지. 하지만 몬치, 만약 이 기사가 실렸으면 어떻게 됐을까?"
"어떻게라니."
의견을 묻자 몬치는 대번에 당황했다.
"어떻게 되긴, 학생 지도부 지시도 지켰고, 영문 모를 연재도 끝나고, 만사 오케이잖아?"

- "그렇다고 연쇄 방화가 사라지는 건 아니야. 오히려 방화사건이 또 일어난다면 신문부는 극단적으로 위태로운 처지에 처했을 거야. 큰일 날 뻔했다고."
몬치는 아직도 모르고 있다.

- "방화 사건이 발생한 요일과,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는 사실. '방재 계획', 우리노, 네가 찾아낸 공통점은 이게 다야?"

"아, 예."
우물거리고 말았다. 그 빈틈을 부장은 놓치지 않았다.
"또 있으면 있다고 말해. 이제 와서 네가 숨기고 있는 비장의 카드를 억지로 캐내지는 않겠어. 있으면 있다. 그것만 말해."
부장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데 비장의 카드가 있다는 것을 내 태도만으로 꿰뚫어 보았다.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된다면야. 나는 마지못해 수긍했다.

- 부장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내게는 그런 조심성이 없었어. ... 몬치. 만약 기사에서 전부 털어놓았다면, 그 규칙을 똑같이 흉내낸 모방범이 나와도 진범과 분간할 수 없어. <월간 후나도>가 모방범을 낳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거야. 그렇게 되면 치명상이야. 폐부로 끝나면 다행이겠지."
몬치는 말문이 막힌 기색이었다.
"하지만 쓰지 않았으니 아직 방법이 있어. 똑같이 모방할 수는 없을 테니까. 신문부는 진범과 모방범을 구별할 수 있다, 어리석은 짓을 하면 바로 알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그걸로 멍청한 녀석이 나오지 않도록 막는 거야. 진범에게 죄를 떠넘길 수 없다는 걸 밝혔는데도 모방하는 놈이 나온다면 그건 그냥 단독 방화범이야. 우리하고는 상관없다고 부정할 수 있어. 어쨌거나 방화를 보도하는 것은 일반 신문도 하는 일이니까."
부장의 말은 마치 독백 같았다.
"우리노의 독단 덕분에 살았군. 역시 나는 이런 문제는 맞지 않아. 미리 의논했어야 했는데."
기묘한 혼잣말이었다. 부장은 분명 의논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누구에게? '이런 문제'에 맞는, 누군가에게 의논했어야 했다고 중얼거린 건가?
내 머릿속에 어째선지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의자에 앉은 도지마 부장에게 가만히 귓속말을 하는 여학생. 어째서 지금 오사나이의 얼굴이 떠올랐을까. 스스로도 당혹스러웠다. 

- 그러려면 내용도 강화해야 한다. 사실 다음 피해 지역을 예상하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지속적으로 독자의 관심을 끌려면 새로운 전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학교 안에서의 평판도 조금씩 높아지겠지. 기대를 품게 하고, 그 기대에 부응하는 식으로 <월간 후나도>의 가치를 높여간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다.

-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다.
부실에 혼자 남아 해야 할 일을 정리하다 보니 너무 열중한 모양이다. 어쨌거나 일단은 신입부원을 모집해야 한다. 이쓰카이치에게도 아이디어를 내라고 해야겠다.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인쇄 준비실을 뒤로했다.

 

- 복도로 나가자 창문으로 석양이 비쳐 들고 있었다. 그날은 노을이 유난히 붉었다.
하교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는데 복도에는 인기척이 거의 없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붉은빛에 묻힌 누군가가 벽에 기대어 있었다. 손에는 문고본, 신입생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자그마하지만 저래 봬도 3학년. 오사나이 유키.
"이제야 나왔네. 농성이라도 하는 줄 알았어."
"기다린 거야?"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놀랍다 못해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오사나이는 꾸밈없는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응."

- "부장이 됐다면서? 축하해."
"아, 응."
어떻게 알았지?
"고마워."
그렇게 말하면서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알았을까. 답은 하나. 도지마 선배가 알려준 것이다.
도지마 선배가 알려준 이유는 무엇일까? 신문부가 아니면 상관도 없을 그런 일을.
뇌리에 떠오른 것은 도지마 선배에게 귓속말을 하는 오사나이. 유연하게 몸을 숙인, 요염한 옆모습.

- 오사나이는 또 한 걸음 내게 다가왔다.
"걱정이 돼서 기다렸어."
"뭐가?"
"있지. 우리노가 부장이 되면, 그 사건을 더 깊이 추적할 것 같아서... 그게 걱정됐거든."
그럴 생각이다. 나는 그 사건을 더 추적할 것이다.
 
- "방화범의 행동 유형은 파악했어. 범행 현장을 사진으로 찍어 경찰에 넘겨서 체포하게 만들 거야. 어째서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못 했는지 이상할 정도야. 할 수만 있다면 내 손으로 직접 잡고 싶어."
후나도 고등학교 신문부 부장, 연쇄 방화범을 체포하다.
얼마나 매혹적인 아이디어인가! 신문부의 명성은 단숨에 올라갈 것이고, 나는 신문부는 물론이요, 후나도 고등학교 역사에 이름을 남길 것이다. 그야말로 내가 바라던 일이었다.
직접 체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겠지. 방화범의 체격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싸울 줄도 모르는 내가 사람을 제압할 수나 있을지 의심스럽다.
하지만 범행 순간을 촬영할 수만 있다면.

- "<월간 후나도>는 달라질 거야."
오사나이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도지마도 못 했는데?"
그 한마디에 시커먼 감정이 불쑥 치솟았다. 역시. 오사나이와 도지마 선배는 지금도 뭔가 접점이 있다. 어떤 오사나이는 도지마 선배를 어디까지 믿는 걸까?

"그 자식은 아무것도 안 했어. 있으나 없으나 매한가지야."

적어도 연쇄 방화사건을 조사할 때 도지마 선배가 도와준 적은 없다.

- 그렇다. 생각났다. 언제였더라, 로맨스 영화인 줄 알았는데 서스펜스 영화를 보고 말았던 날. 나를 아이스크림이 맛있는 가게로 데려간 오사나이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말썽은 그만 피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최선이야.]

"내가 이 사건을 조사하는 걸 반대하는구나."
"... 우리노, 표정이 무서워."
"어째서? 나를 못 믿겠어? 도지마가 더 믿음직스러워? 비장의 카드를 쥐고 있는 건 나야.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 아직 더 있어. 도지마는 아무것도 몰라."
오사나이가 손에 들고 있던 문고본을 가슴에 품었다. 그 작은 책으로 자기 몸을 지키려는 듯이.
"도지마는... 그래, 믿음직스러워, 편리하거든. 하지만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

- 오사나이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부탁이야, 화내지 말고 들어... 나, 노력가는 싫지 않아. 하지만..."
목소리가 작아졌다.
"좋아하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응. 난 소시민이니까. 그리고 소시민을 좋아해."
잠겨서 거의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였다. 방과 후 복도가 이토록 조용하지 않았다면 묻혀버렸을 것이다.

 

- 아아, 오사나이...
어쩜, 어쩌면 저렇게 거짓말이 서툴까! 나를 말리기 위해 저런 어색한 거짓말까지 해가며, 이런 말로 나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난 아니야."
똑똑히 선언했다. 오사나이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나는 아니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소시민이 아니야. 나한테 맡겨, 괜찮아. 기다려봐, 석 달 후에는 최고로 멋진 모습을 보여줄게."

- 오사나이가 뭐라고 해도 그만둘 생각은 없다. 오사나이가 내 능력을 의심한다면, 증명하면 그만이다.
"내 말 좀 들어, 우리노."
"안 들을 거야."
나는 두 팔을 뻗어 오사나이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자그마하고 가녀린, 힘을 주면 부서져버릴 듯한 어깨. 그대로 끌어당기며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지금까지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행동을, 했다. 오사나이에게 키스를 한 것이다.

- 오사나이의 입술에서는 아무 느낌도 나지 않았다. 보드랍고 따스한 느낌을 기대했는데 모래라도 씹은 것처럼 푸석푸석했다.
눈을 감을 작정은 아니었는데 감고 말았던 모양이다. 위화감에 살그머니 눈을 떴다.
종이 한 장.
오사나이는 얇고 작은 종잇조각으로 나를 막고 있었다. 입술에 대고 있는 종이는 영수증이었다. 오사나이의 왼손에는 문고본, 오른손에는 영수증. 새하얘진 머리 한구석으로 아아, 영수증을 책갈피 대신 끼워놓았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바로 십 센티미터 앞에서 오사나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못써."
어딘가 즐거운 기색으로, 영수증은 아직 입술 앞에.
"들으라고 하면 들어야지."

- 폴짝, 오사나이는 점프라도 하듯 뒤로 물러났다. 뒷짐을 지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우리노, 맡겨보라고 했지? 멋진 모습을 보여줄 거지?"
나는 고개를 꾸벅했다.
오사나이가 웃었다. 그렇게 웃기려고 애썼는데 미소밖에 짓지 않았던 오사나이가.
날아갈 듯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좋아. 기대할게."

(리뷰자 주 : 고바토였다면 바로 눈치채고 기겁했겠지만... 웃고 있는 오사나이는 여러 가지 의미로 매우 위험하다.)


- 오사나이는 그렇게 말하고 치마를 펄럭이며 등을 돌렸다. 그 어깨너머로 하얀 물체가 한들한들 떨어졌다. 영수증이다. 오사나이의 얇은 방패.
"줄게. 기념으로."
몸을 숙여 주워 들고 고개를 들어보니...
오사나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붉은 저녁노을 대신 어스름만 남아 있었다.

 

- 4월부터 입시 준비라니 내가 생각해도 기특한 일이다. 하지만 아마 그리 오래가지는 않겠지. 다음 달 쯤에는 싫증이 날 테고, 다시 학업에 박차를 가하는 건 여름방학일 것이다. 그 무렵에는 이 학습실도 꽉 차겠지.

- 오늘은 무난한 대학 입시 문제집을 가져와 시험 삼아 풀어보았다. 정확히 시간을 재가며 실전처럼.
모르는 문제도 몇 개 있었다. 가령 어떤 확률 문제는 앞으로 배울 내용이다. 아니, 고등학교에서 삼 년 동안 대비해야 할 입시 문제에 이제 막 3학년이 된 내가 도전했는데 그럭저럭 풀 수 있다니 뭔가 이상하다. 원칙적으로 3분의 1은 아직 안 배운 내용인데. 

- 화학이 조금 약하지만 그리 불안한 수준은 아니다. 다만 아무래도 현대국어 점수가 들쭉날쭉하다. 만점을 받을 때도 많지만, 60점 수준에 그칠 때도 있다. 
원인은 아마도 성격 때문이리라. 가령 'B는 A 때문에 소중한 보물을 잃었다. A를 다시 만난 B의 심정을 선택하시오'라는 문제가 있다고 치자. 객관식 문제니 분하다거나 억울하다는 뜻의 선택지를 찾아내면 된다. 그건 아는데, 나는 이따금 '아니, 이 흐름이라면 B의 마음속에 있는 건 분명 환희일 거야'라는 식으로 의식이 흘러간다. 진실을 보다 깊게 바라보기 위한 증인을 다시 만났으니 기쁘지 않을 리 없다. 그런데 알맞은 선택지가 없다. 그래서 고민 끝에 틀릴 때가 있다. 현대국어, 특히 문장 독해는 한 문제당 배점이 크다. 이런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 이 나쁜 버릇을 입시 전까지 고칠 수 없을까?
... 어렵겠지. 타고난 성격이니. 앞으로 아홉 달. 무한하게 느껴질 만큼 긴 시간이지만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유구해 보였던 초등학교 육 년의 세월도 끝났고, 영겁보다 길 줄 알았던 중학교 삼 년 세월도 끝났다. 고등학교 삼 년 세월도 당연히 끝날 것이다. 안다. 알고는 있지만 뭐랄까, 갑자기 시간이 영원히 순환하지는 않을까? 
그럴지도 모르니 이다음 공부는 그때 하자. 짐을 정리해 얼른 퇴장. 아아, 피곤하다.

- 돌아가기 전에 통로에 놓인 자판기에서 커피를 사야겠다. 뜨거운 걸로 마실까 시원한 걸로 마실까 망설여지는 시기다. 이제 춥지는 않지만 아이스커피 생각이 날 정도는 아니다. 결국 뜨거운 커피를 사서 자판기 옆 벤치에 앉았다.
한 모금 마시고 숨을 푹 내쉬었다.

- 거리를 두었으니 이제 와서 오사나이가 무슨 짓을 하든 신경 쓰지 않는 게 맞다. 하지만 어쩌면, 일 퍼센트 정도는,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내 우려가 맞는다면... 그때는 내가 할 일이 늘어나겠지.

- 나는 자전거에 올라타 중얼거렸다.
"겐고 녀석... 어떻게 할까."
걱정만 할 바에야 일단 덤벼들고 본다거나 무작정 움직이고 보는 것은 소시민의 덕목이 아니다. 그것은 굳이 따지자면 영웅의 자질이다. 겐고에게 물어보면 그것만으로도 내게 박힌 가시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무래도 망설여지는 이유는, 겐고와 내가 역시 그렇게 죽이 맞는 사이는 아니기 때문이다. 

- "아까는 미안. 여기 있는 줄 알았으면 문자를 보내는 건데."
"깜짝 놀랐어. 전원을 안 꼈던 나도 잘못이지만."
"아니, 서두를 필요는 없었는데."
겐고는 나를 힐끗 보았다.
"어떻게 당황하지 않을 수 있겠냐? 넌 대개 보통 일이 아닐 때만 전화하잖아. 급한 용무일지도 모르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한다. 늘 신세가 많다. 그리고 '보통 일이 아닐지도 모르니 서둘러 전화를 받으려고 당황한' 겐고에게는 언젠가 제대로 신세를 갚아야겠다. 

- "지난번?"
겐고가 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동차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잖아. 네가 하는 말이니 사정은 나중에 설명해주겠지 싶었는데... 잊었냐?"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네. 일부러 설명하지 않은 건 아니고 그 후에 이것저것 고민하다 보니 그만 깜빡하고 말았다.

- "그래. 그런가, 몬치한테 들었다고 하면 이해가 가네."

그렇게 생각하면 자연스럽지만 그러면 그 이후의 사실들과 부합하지 않는다. 아니면 내 생각이 빗나갔나? 아니, 하지만...
"몬치라는 친구는 학교 밖 문제를 다루는데 찬성했어?"
"아니, 반대했어. 우리노를 싫어하는 눈치였어."
그렇군. 그렇다면 역시 내 생각이 맞다.
"뭐, 그건 됐고, 겐고는 오사나이의 말을 들어도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고 했지?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무슨 뜻이야?"
자기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자 겐고는 당연히 의아해했다. 표현을 조금 누그러뜨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겐고는 오사나이를 감싸주려고 우리노의 제안에 반대한 거지. 그 후 우리노가 몇 번을 말했어도 역시 반대했을 거야. 하지만 오사나이의 한마디로 겐고는 반대 의견을 고집할 필요가 사라졌어. 찬성하기 쉬워진 거지. 적어도 오사나이는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오사나이가 겐고에게 한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노 말에 찬성해 달라'는 의미니까." 
겐고는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 "듣고 보니 그러네. 날 갖고 논 건가?"
"설득당한 거지.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야."
"그렇다면 오사나이는 우리노하고 아는 사이라는 말이야?"

"아마도. 몬치 하고도 접점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불확정 요소가 튀어나온 줄 알았는데, 몬치는 우리의 주장에 반대했다니까. 오사나이는 우리노를 응원한 거야." 

- 겐고는 팔짱을 풀고 커피를 찔끔찔끔 마시더니 뭔가 생각난 듯이 손길을 멈추었다.
"잠깐, 그건 이상한데, 결과적으로 칼럼은 우리노가 독점했지만 처음에 칼럼을 쓰고 싶다고 말한 건 이쓰카이치야."
"그럼 이쓰카이치가 그렇게 주장하도록 꾸민 것도 오사나이일 거야."
그 정도는 놀랄 일도 아니다.
그런데도 눈이 휘둥그레진 겐고를 내버려 두고 말을 이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어. 하나는 오사나이가 이쓰카이치에게 딱 한 번만 칼럼을 쓰게 하려고 암약했을 가능성. 또 하나는 오사나이가 최종적으로 우리노가 칼럼을 독점하게 만들려고 암약했을 가능성. 전자라면 널 들쑤실 이유가 없어. 이쓰카이치가 쓴 칼럼도 읽어봤는데, 그 유괴 사건을 쓸 우려는 없어 보였으니까. 후자였기 때문에 널 들쑤실 이유가 있었어. 갖고 놀았다고 해야 하나, 오사나이가 조종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건 이쓰카이치일 거야. 그리고 우리노는 이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연쇄 방화 사건을 추적하기 시작했지."

- "왜?"
겐고가 언성을 높였다.
"무엇 때문에 오사나이가 신문부에 참견을 해?"
대조적으로 내 목소리는 작아졌다.
"글쎄... 그 점이 마음에 걸려. 장난으로 그랬을 리는 없으니까. 여기서 네가 보내준 사진이 단서가 되는 거야."
크림색 라이트밴. 내가 보았을 때는 숯덩어리였다.

 

- 겐고의 표정에 긴장이 서렸다.
"사진 속 자동차라니, 너 그건..."
"그래. 오사나이가 납치당했을 때 사용된 자동차야. 그게 강변에서 불에 타버렸어. <월간 후나도>에서 예언한 것처럼."

 

- "그럼 단순한 우연일까?"
나는 저도 모르게 벤치 앞으로 다리를 힘없이 쭉 뻗고 있었다.
"가능성은 높아. 나는 십중팔구 그럴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겐고, 오사나이는 자동차에 불을 지를 만한 사람일까?"
겐고는 말을 하지 못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이 강직한 남자가 차마 대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많은 말을 해주었다.
오사나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겐고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왜소한 모습 주변에 드리운 그림자가 너무나 짙다.

- 나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오사나이는 그럴 필요가 있다면 행동할 것이다. 재작년 사기 사건 때처럼. 작년 유괴 사건 때처럼. 예전처럼. 꼭 그래야만 한다면 뭐든지 할 것이다.
오사나이는 '소시민'을 표방하고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거짓말이다. 우리가 상부상조 관계를 끊은 뒤로 반년도 더 지났다. 그사이 오사나이가 내면의 '늑대'를 길들이지 못했다면 그녀는 행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법이 노골적이야. 오사나이 스타일이 아니야."
나는 잠시 겐고의 존재도 잊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 오사나이는 달콤한 디저트와 복수를 사랑한다. 오사나이를 건드리면 반드시 반격을 당한다. 오사나이는 복수를 좋아하니까.
하지만 그 복수는 세일러복에 기관총을 들고 적을 몰살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오사나이는 덫을 치고 적을 유혹해 함정에 빠뜨린 다음 그 위에 강철 뚜껑을 덮어 복수한다.
그것은 내가 그냥 넘길 수 없는 악행을 발견해도 고테쓰를 허리춤에 차고 "악은 보는 즉시 베어버리겠다"고 날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불'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동시에 오사나이의 스타일도 아니다.
하물며 그 일이 널리 알려지도록 손을 쓰다니, 분명 이상하다. 우리는 자신의 성격을 안다. 나는 오사나이의 성격을 알고 있다. 우리는 자의식 과잉. 언제나 누군가가 우리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아 몸을 숨긴다. 그렇기에 자기 현시욕은 왕성하지 않다! 

- "겐고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어, 어어."
이야기가 넘어가자 겐고는 어쩐지 안도하는 눈치였다.
"오사나이하고 우리노 다카히코가 어떤 사이인지, 신문부전 부장인 겐고는 뭐 아는 거 없어?"
물론 나는 답을 알고 있다. 지금까지 나눈 대화에서 겐고의 반응을 보면 불을 보듯 뻔했다.
겐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몰라. 미안하지만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

그렇겠지.
뭐, 새로운 정보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고, 휴일 오후 담화 치고는 그럭저럭 즐거웠던 편이다. 그렇게 마무리를 지으려는데, 역시나 도지마 겐고. 모른다는 한마디로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정보라면 요시구치한테 물어보면 알지도 몰라."

- "우리 반 여학생이야. 어쨌거나 누가 누구랑 사귀는지 감시하는 걸 삶의 낙으로 삼고 있는 녀석이거든. 난 너하고 오사나이가 헤어진 것도 요시구치한테 듣고서야 알았어."
그런 정보 수집가 같은 학생이 있었나...?
뭐, 세상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다. 강직한 신문부 부장이나,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하는 자칭 소시민이 있다. 연쇄 방화사건에 눈을 빛내는 후배도 있다. 같은 나이에 약물에 손을 대거나 빈집을 터는 아이도 몇 명은 알고 있다. 남의 연애사에 다대한 관심을 갖는 여학생은 오히려 평범할지도 모른다. 

- "조고로... 나도 한 가지 물어봐도 돼?"
"뭐든지."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조금 꺼림칙했다. 사무적인 정보 교환을 넘어선 대화를 나누면 겐고와 나는 반드시 어긋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겐고의 질문은 내 의표를 찔렀다.

"너는 어째서 이 문제에 끼어드는 거야?"
"어째서냐니..."
"신문부 문제도 그렇고, 연쇄 방화문제도 그래. 네가 관여할 이유는 전혀 없을 텐데?"

- 아니, 뭐, 그렇긴 하지만.
그렇긴 한데, 겐고가 그걸 눈치챌 줄은 몰랐다.
사실 이 문제는 '나하고 상관없어'라고 사절하는 게 소시민의 기초 덕목, 기본 태도다. 겐고가 그 점을 지적했다는 게 의외였다. 겐고는 언제나 소시민이고자 하는 나를 비굴하다고 비난해 왔는데.
혹시 시험당하고 있는 걸까? 겐고 이 녀석이 나를 떠보려고 하다니. 괜히 화가 나서 짧게 대답했다.
"오사나이가 불을 지르고 다녔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
"헤어졌는데도?"

- 발밑의 가방을 두드렸다.
"올해는 입시 준비를 해야 하는데 신경 쓰이는 문제가 있으면 거추장스러워. 공부에 전념하고 싶어."

겐고는 피식 웃더니 손을 설레설레 저었다. 얼른 정리하고 그만 가보라는 뜻 같다. 주저하지 않고 걸음을 돌렸다.

- 겐고에게 인간관계를 망라한 정보 수집가라는 말을 들은 터라 슈퍼마켓 비닐 봉투를 들고 이웃들과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떠는 데 여념이 없는 여성을 상상했다. 완전히 빗나갔다. 헤어스타일은 예뻤지만 그 외에는 눈에 띄는 구석이 없는, 얌전해 보이는 여학생이었다.
요시구치라는 이름은 낯설었다. 얼굴을 마주했지만 역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요시구치는 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 오랜만이네."
요시구치를 교실에서 데리고 나온 겐고도 혼자 끄덕거리고 있다.
"아, 그렇지. 아는 사이였지."
겐고와 여학생과 나? 어디에 접점이 있을까? 적어도 겐고와 같은 반이었던 적은 없으니 우리 셋이 반 친구였을 리는 없다. 뭐 지혜라도 부렸나?

- 기억을 더듬어가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요시구치, 나를 용케 기억하고 있었구나. 아마도 그거다. 후나도 고등학교 입학 직후 손가방을 도둑맞았던 여학생. 겐고의 부탁으로 내가 찾아주었다.
그리울 정도였다. 이 년 전에 조금 인연이 있었을 뿐인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과연 기억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우리는 서로 아는 사이로 인식되는 것 같으니 아는 사이인 것처럼 행동하기로 했다. 싱긋 웃으며 인사했다. 
"그러게, 오랜만이야. 궁금한 게 있어서."

- "나한테?"
요시구치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겐고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으로 대충 감이 왔다. 겐고는 요시구치를 소문을 좋아하는 정보통으로 보고 있지만 요시구치 본인은 그런 자각이 없는 듯하다. 재미있는 관계지만 관찰하고 있을 겨를은 없다. 쉬는 시간은 십 분이니까.

- "오사나이 알아? 오사나이 유키.”
"아, 응. 알아. 헤어진 여자친구 얘긴 왜?"
정말 알고 있네...
여자친구가 아니라 상부상조하는 파트너였을 뿐이지만.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오사나이에 대해 아는 게 있으면 좀 알려주겠어? 특히, 그래, 2학년 우리노하고 어떤 사이인지."
요시구치가 내 말을 잘랐다.
"아, 응, 그 두 사람, 사귀고 있어."
시원하게도 말한다.
"가끔 하교도 같이 하고 데이트도 하는 모양이야."
그런 걸 어떻게 아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무서운 일을 많이 겪어봤지만, 역시 무서웠다. 아니면 요시구치가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을 자주 이야기하는 것일 뿐 알고 보면 다들 은근히 남들의 관계를 관찰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생각하는 건 좋아하지만 사람들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래서 놓치는 진리도 제법 되겠지. 그런 생각까지 하고 말았다. 

- 요시구치가 내 안색을 살피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왜? 헤어진 여자친구가 신경 쓰여? 의외로 한심하네."
혹시 '고바토가 오사나이의 정보를 물으러 왔다'는 사실도 새로운 정보로 유포되는 걸까. 게다가 '미련이 철철 남은 한심한 남자'라는 부가 정보까지 붙어서.
그건 싫은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겐고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아니, 내가 부탁했어. 우리노는 신문부원이거든. 조고로가 오사나이의 정보를 알고 싶은 게 아니라, 내가 우리노 정보를 알고 싶어 하는 거라고 생각해 줘." 
꼭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없다. 진실이 포함되어 있다. 내가 3학년이 된 것처럼 겐고도 고등학교 3학년이다. 이 녀석도 성장했겠지.
하지만 요시구치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흐응..."
뭐, 상관없나.

- 이걸로 용건은 마쳤다. 요시구치의 정보는 내 추리를 뒷받침해 주었다. 오사나이와 우리노의 교제가 정말 연애인지, 아니면 뭔가 다른 비밀 거래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워. 미안해, 쉬는 시간인데."
그렇게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그러자 요시구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 그게 다야?"

- 요시구치는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입가에 웃음이 걸린 것도 아닌데 몹시 즐거워 보였다.
그런데 목소리만은 연극적으로 느껴질 만큼 동정으로 가득했다. 요시구치가 말했다.
"그렇구나. 양다리 걸치고 있어."

- "도키코는 항상 남자친구를 갈아치우니까. 걔가 차지 않고 계속 사귀다니 드문 일이지만, 벌써 두 번째 양다리야. 실은 걔, 진짜 남자친구는 따로 있어. 대학생. 아, 그렇게 따지면 양다리가 아니라 세 다리네."
무슨 소리를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엉뚱해도 너무 엉뚱한, 전혀 필요 없는 정보. 하지만 요시구치가 지나치게 으스대며 가르쳐준 까닭에 미안해서라도 뭔가 충격을 받아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뭐, 그건 그것대로 충격을 받은 태도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요시구치는 만족스러워 보였으니 그걸로 충분할 것이다.

- 요시구치는 교실로 돌아갔다. 겐고가 빠르게 물었다. 
"뭐 알아냈어?"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응... 내 생각에 이건 정보 조작으로 해결할 수 있어."

 



 

- 표면적인 이유는 모방범 방지, 도지마 선배의 말처럼 만약 <월간 후나도> 기사를 토대로 모방범이 나오면 큰일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물론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다.
진짜 이유는, 아마 모두들 알고 있을 것이다. 유효기간은 길수록 좋다.

- 5월에 접어들자 새로운 체제도 자리를 잡았다.
자극적인 기사가 제대로 부채질을 했는지 신입부원은 절로 모여들었다. 다섯 명이 입부했다.
속내를 말하자면 두 배는 와주길 바랐다. 남자뿐인 것도 다소 아쉬웠다. 여학생도 들어오면 시야가 넓어져서 좋았을 텐데, 이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다.
강하게 붙들면 유령 부원 정도는 되어줄 듯한 여학생이 한 명 견학하러 오기는 했는데 억지로 붙들지는 않았다. 앞으로 신문부는 정예부대가 되어야만 한다. 별 의욕도 없는 녀석은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 도지마 선배가 그만둔 뒤에 몬치도 금방 그만두었다. 그러는 편이 서로에게 좋다.

- "이게 우리가 가진 전부야."
이 말에 얼마나 큰 의미가 담겨 있는지 1학년들은 모를 것이다. 선배들이 있었을 때는 내가 가진 정보를 전부 내놓지 않았다. 도지마 선배나 몬치에게 내 아이디어를 빼앗기기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정이 바뀌었다. 신문부원들은 내 손발이 되어주어야 한다. 정보는 숨기지 않는다. 물론 거기에 숨겨진 연관성까지 써놓지는 않았다. 그 점은 1학년들이 스스로 깨달아야 할 부분이다. 
보여주었는데도 모른다면 어쩔 수 없다. 그 녀석이 쓸모없는 인재라는 뜻일 뿐이다.

- 길모퉁이 그늘에 숨은 내 휴대전화에 문자가 연달아 들어왔다.
이치하타로부터 "2가 삼거리 부근에 있습니다."
1학년 혼다로부터 "예정한 지점에 도착했습니다."
마찬가지로 1학년 하라구치로부터 "준비됐습니다."

그리고 이쓰카이치로부터 "1가 가미노마치 세 번째 교차로 부근."
어디서 대기하는지 연락하라고 했는데 지시를 따른 건 이치하타와 이쓰카이치뿐이다. 설명해 줬는데도 이해를 못 했나.

뭐, 됐다. 오늘밤 중요한 건 머리가 아니라 눈이다.

- 불이 아니다. 경광등이다. 순찰차가 경광등을 켜고 좁은 길을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놀랐고, 이어서 화가 났다. 경찰이 순찰을 하고 있는 것이다. 평소에도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연쇄 방화 사건을 의식한 조치일지도 모른다.
저렇게 요란한 불빛을 쏘아대면 범인이 겁을 집어먹을지도 모른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방화범이 무슨 짓을 저지르기 전에는 사진을 찍을 수도, 붙잡을 수도 없다.
"냉큼 꺼져!"
혼잣말처럼 욕지거리를 했다.

- "혹시나 내가 범인을 잡으면 나 혼자만의 공적이 되잖아. 신문부, 아니 우리노의 꾸준한 노력을 무시하고 그럴 수는 없어"라며 거절했다. 맞는 말이다. 히야의 배려가 고마웠다. 
문자를 보내자 발신 시간이 찍혔다. 그걸 보고서야 비로소 날짜가 5월 9일 금요일에서 10일 토요일로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분 지났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히야에게 문자를 자주 보내는 건 아니지만 답장이 늦는 편은 아니었는데. 뭐, 이제 곧 새벽 1시 잠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 즈음 겨우 답장이 왔다. 
[냉수 마시기엔 좀 추울 텐데. 그나저나 멋진 밤이야.]
아무래도 히야가 잘못 입력한 것 같아 바로 답장을 보냈다.
[이쪽은 초조한 밤이야. 뜬금없이 냉수는 왜?]
그렇게 보낸 다음 자전거에 올라타 페달을 밟다가 금방 깨달았다. 히야는 '냉수 먹고 속 차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솔직히 부정할 수는 없다. '이렇게 추운 밤에 순찰을 돌려면 긍정적인 생각이라도 해야지'라고 보내려다가 히야의 답장을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대로 자전거를 몰았다.

- 우회 도로를 가로지르는 횡단보도가 나왔다. 네거리에 있는 하얀 시계 기둥을 올려다보았다. 11시 47분. 이제 곧 0시다. ... 아니, 이상하다. 아까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휴대전화 시계가 잘못되었을 리는 없다. 저 시계가 고장난 것이다. 모처럼 공원에 어울리는 디자인으로 멋지게 만들어놓고 시설관리가 형편없다.

- 문자가 아니라 전화라는 걸 깨닫고 허둥지둥 자전거에서 뛰어내려 휴대전화를 꺼내자 화면에 예상치 못한 이름이 떠 있었다.
오사나이 유키.
오사나이가 이 시간에 내게 전화를?
여자친구의 전화는 당연히 언제든지 기쁘다. 지금도 얼굴이 헤벌쭉 늘어졌다. 하지만 바로 생각을 가다듬었다. 오사나이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한밤중에 전화를 한 적이 없다. 아니, 문자는 그렇다 치고 전화 자체를 받아본 기억이 없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 "아, 우리노, 드디어 받았네."
생각보다 밝은 목소리였다. 다행히 나쁜 소식은 아닌 모양이다.
"무슨 일이야. 이렇게 늦게?"
"응. 깨어 있을 줄 알았거든."
평소에는 되도록 일찍 자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오사나이가 내 수면 시간을 몰라도 이상할 건 없지만.
"맞아, 오사나이는 뭘 하고 있었어?"
"책을 읽고 있었어. ... 우리노, 그냥 깨어 있기만 한 게 아니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맞혀볼까?"
장난기 섞인 목소리. 나는 자전거를 밀면서 우회 도로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어디 말해봐. 하지만 아마 못 맞힐걸?"

 

- 대형 트럭 한 대가 옆을 지나갔다. 타이어 소리와 엔진 소리가 전화기 너머에도 들린 모양이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자신 있는데."
"말해봐."
"음."
잔뜩 뜸을 들이더니.
"... 가미노마치에서, 순찰 돌고 있지?"
발이 우뚝 멈췄다.
또 한 대, 이번에는 스포츠카가 우회 도로를 쏜살같이 달려갔다. 고막을 찢는 엔진 소리는 분명 전화 너머 오사나이에게도 들릴 것이다.
"소리로 알았어?"
또 웃음소리.
"아니. 오늘밤 그럴 것 같았거든.

- 방화범이 두 번째 금요일 심야에 활동한다는 사실은 <월간 후나도>에 쓰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오사나이는 스스로 그 결론에 다다른 것 같다. 기사를 꼼꼼히 읽으면 알 만한 사실이지만.
행동을 들켰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지만 생각해 보면 다 설명할 수 있는 일이다. 딱히 이상하지는 않다.
"맞아. 제법 추워."
"응. 오늘밤은 춥네. 겉옷이 필요하겠어."
휴대전화를 다른 손에 바꿔 들었다.

- "아니야. 전에 그만두라고 하긴 했지만, 오늘은 그런 말 할 생각 없어.”
"그럼?"
"오늘밤은 추우니까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라고 말하려고 했어. 내가 걱정하는 게 싫어?"
오사나이가 토라진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어떤 표정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자 이게 전화 통화라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기뻐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 갑자기 잡음이 끼어들어 오사나이의 목소리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순간 또 대형 차량이 우회 도로를 지나간 줄 알았다. 타이어와 엔진 소리 때문에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라고. 그런데 아니었다. 오사나이 쪽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낯선 소리는 아니었다. 규칙적이면서도 묵직한 소리. 철도다. 열차 소리가 오사나이의 목소리를 지웠다.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오사나이는 이야기를 멈추었다. 소리가 그칠 때까지 몇십 초 동안 나는 그저 조용히 휴대전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오사나이도 그랬을 것이다.
예기치 못한 방해로 흥이 깨진 걸까. 열차 소리가 잦아든 후에 들려온 것은 단 한마디뿐이었다.
"배터리가 다 됐어."
그리고 전화는 뚝 끊겼다.

- 불러 모아서 주변을 수색하자고 말하려던 차에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소방차인가? 아니면 순찰차?
"아, 왔다..."
구원의 신이라도 만난 것처럼 긴장이 풀린 얼굴로 웃는 혼다를 꾸짖었다.
"지금 그런 소릴 할 때야? 젠장, 너무 빨라!"
"네?"
"달아나야 할 것 아냐!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는데, 아직 아무것도 조사하지 못했는데!"

- "우리가 불을 지른 게 아니잖아요."
"뭐라고 설명할 건데? 저게 경찰이면 어떻게 하려고? 단순한 야간 순찰차량이라고 해도 수상하게 여길 거야!"
나는 머리를 굴렸다. 필사적으로 굴렸다. 이렇게 된 이상 달아나는 수밖에 없다. 지금 다가오는 게 아까 보았던 순찰차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달아나버리면 오늘밤 순찰은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한다. 무능한 후배에 대한 화를 억누르고 명령했다.
"다른 녀석들에게 연락해. 문자 말고 전화로, 소방차가 왔으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해. 경찰한테도 들키지 않게 조심하라고 하고."

- 주위를 살폈다.
혼다는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자료는 넘겨주었으니 주의 깊게 읽으면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아무도 모른다. 그건 그들의 능력 문제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방화범은 현장에 표식을 남긴다.

- 작은 홈이 잔뜩 나 있었다. 작고 단단한 물체로 여러 번 찍은 흔적이다. 나는 그 '작고 딱딱한 물체'가 무엇인지 안다. 간판에는 홈뿐만 아니라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긁은 듯한 새로운 흔적도 있었다. 그 부분만 페인트가 벗겨져 원래의 금속 빛깔이 보였다.
 
- 그리 작은 편도 아닌데 자세가 엉거주춤해서 겐고 옆에 서니 몹시 왜소해 보였다. 물론 도지마 겐고와 나란히 서서 덩치를 겨룰 사람은 운동부에도 몇 안 되겠지만.
"데려왔어."
평소와 다름없이 굵은 목소리로 말하는 겐고에게 나는 평소 이상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던졌다. 이쓰카이치는 잔뜩 불안한 기색으로, 여기로 오는 길에 이미 몇 번은 물었을 질문을 또 던졌다. 
"저, 부장, 아니다, 선배. 왜 부르셨어요?"
겐고는 약간 지긋지긋하다는 투로 짧게 대꾸했다.
"나도 몰라. 이 녀석이 할 말이 있대."

- 저런 자세는 곤란한데, 겐고는 내 편에 붙어, 내가 하는 말이 곧 겐고가 하는 말로 받아들여져야 하는데. 애초에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사전에 미리 설명했다. 다소 말이 부족했을지도 모르지만.
뭐, 이제 와서 눈치 없는 겐고를 탓해 뭐하랴. 나는 싱긋 웃으며 이쓰카이치에게 자리를 권했다.
"일단 앉아. 미안해, 방과 후에 불러내서."

- "나는 고바토라고 해. 겐고 부탁으로, 이것저것 조사를 좀 하고 있어. 이 녀석도 참 너무하지, 어디서 모르는 척이야."
어깨를 으쓱하자 이쓰카이치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좋다. 이제 됐다.
"자, 앉아."

- "이쓰카이치라고?"
"맞아요."
"신문부지?"
"네."
예스 외에는 답이 없는 질문을 거듭해 상대의 입을 가볍게 풀어주었다. 기본 화법이다. 이어서 익살을 떨었다.
"겐고가 부장이라니 죽을 맛이었지?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으니까. 융통성도 없지, 농담도 안 통하지."

겐고가 울컥한 기색으로 끼어들었다.
"그런 소릴 하려고 이쓰카이치를 부른 거야?"
"이것 보라니까. 농담이 전혀 안 통해, 그럴 리 없잖아, 가벼운 인사치레야."
"인사치레는 됐으니 본론으로 들어가."
"이러니까 센스가 없다고 하는 거야. 너도 고생했겠다."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이쓰카이치는 웃고 싶어도 웃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래, 좋은 반응이다. 겐고 녀석, 혹시 다 알면서 놀림받는 역할을 맡아준 걸까? 설마, 그럴 리가.
하지만 겐고의 말이 맞다.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자.

- "자전거 여러 대가 한꺼번에 불에 탔다던데. 다친 사람이 없어서 천만다행이야. 예측이 또 적중해서 우리노도 콧대가 높겠어."
"아뇨."
뜻밖에도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억울해하던데요. 반드시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다면서."

 

- 처음 듣는 정보였다. 옆을 흘낏 쳐다보자 겐고도 고개를 저었다.
우리노가 방화 사건을 흥미진진해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행동파라는 것도. 그렇다면 조만간 피해 지점을 예측하는 데 그치지 않고 범인과 직접 접촉하려 들 것이다. <월간 후나도>의 기사도 그런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었다. 놀랍지는 않았지만 놀라는 척했다.
"그런 짓까지! 정말 보통 일이 아니네."

- "하지만 범인은 못 잡았구나."
끄덕이는 이쓰카이치. 시선을 들어 우리 눈치를 보고 있다. 진의를 가늠하지 못하는 것이다.
시원스레 말했다.
"실은 우리도 방화범을 잡을 작정이거든."

"네?"
이쓰카이치는 할 말을 잃었다가 펄쩍 뛰어오를 기세로 겐고를 쳐다보았다. 팔짱을 끼고 서 있던 겐고는 이쓰카이치의 시선을 받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두면 분명 뭔가 오해할 것이다.
"미리 말해두겠는데, 나는 신문부나 우리노하고 아무 상관없어. 겐고도 신문부하고 대항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범인을 막고 싶은 거지. 불은 위험하잖아. 이 사건, 지금까지는 장난 같은 작은 화재뿐이었지만 더 커지기 전에 막아야 해.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너는 어때?" 
덜컥 묻자 이쓰카이치는 몹시 거북한 표정을 짓더니 오락가락하는 시선으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여기는 3학년 교실이야."
그렇게 넌지시, 무슨 말을 해도 신임 부장 우리노는 모른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이쓰카이치는 겨우 입을 뗐다.
"... 저는 경찰 소행이라고 생각해요."

- "만약 우리노가 경찰도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신고해야 한다고 전부터 생각했어요. 그 녀석이 알 만한 일이면 경찰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런데 우리노는 특종이다 뭐다, 그걸로 유명해질 생각밖에 안 해요... 너무 태평하다니까요. 그런 일에 우리까지 끌어들여서는, 나중에 경찰에 호출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될지 생각도 않고."
이쓰카이치가 점점 흥분했다.
"지난번 순찰도 위험했다고요. 자전거로 순찰을 돌던 경찰이 1학년을 한 명 붙잡았거든요. 집이 근처라 운 좋게 잘 둘러댄 모양인데 가여울 정도로 잔뜩 겁을 먹었더라고요. 그런데 우리노는 신경도 안 써요. 선도 기록이라도 남으면 입시에도 불리해질지 모르는데 그런 건 생각도 안 해요. 하려면 혼자 할 것이지!" 

 

- "하지만 같이 갔구나."
후배를 지켜주려던 용기를 칭찬할 셈이었는데 이쓰카이치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네... 거절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 아아.
내 인생의 스승이 여기에.
위험한 일에는 얽히기 싫다. 만약 얽히게 되면 경찰에 신고하고 손을 떼면 그만이다. 뭔가 알면서도 잠자코 있다니 어불성설, 시민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개하지만 그런 생각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스스로 신고하지는 않는 것이다.
표정이 절로 누그러졌다. 이런 행동이야말로 소시민의 자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마지막이 최고다.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일 때는 거절하지 않는다. 아름다울 정도다! 나는 이쓰카이치에게서 이상적 모델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닐까? 

- 무심결에 가르침을 청할 뻔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오사나이가 방화범일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사나이를 사법의 손에 넘겨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기나긴 전쟁의 서막이 열릴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시민 이쓰카이치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그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 "네가 꼭 도와줘야 할 일이 있어."
아마 겐고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게 처음이리라. 이쓰카이치는 깜짝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확증이 없어서 단언은 못 하겠어. 하지만 이것만은 말해둘게. 나하고 여기 고바토는, 우리 친구가 불을 지르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어."
"..."

이쓰카이치의 얼굴에 뚜렷한 두려움이 스쳤다.

- "가능성이라고 했어. 그래서 우리는 신문부하고 별개로 범인을 찾으려 해. 막고 싶어. 하다못해 자수라도 하게 해야지. 그러려면 네 도움이 필요해. 너도 그런 사건은 이제 그만 일어났으면 좋겠지?"
참으로 겐고다운 설득이다.
이쓰카이치가 조금만 더 현명했다면 아까 겐고가 '어째서 불러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것과 모순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텐데.
"..."

"너는 항상 훌륭했어. 나는 사실 네가 부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여차할 때 우리노를 막으려면."
이게 거짓말이나 빈말이 아니라는 게 겐고의 대단한 점이다. 이쓰카이치의 표정이 조금씩 바뀌었다.
"우리노의 행동은 위태롭지만 근본적으로 잘못된 건 아니야. 하지만 이대로 사건이 계속된다면 녀석뿐만 아니라 신문부도 어찌 될지 몰라. 네가 도와준다면 끝낼 수 있어."
내가 도지마 겐고를 신용하는 것과 비슷한 만큼 이쓰카이치도 그를 신용하는 것 같았다.
망설임을 후련히 떨쳐버린 건 아니겠지만 이쓰카이치는 이렇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겐고는 요란한 답례를 하지는 않았다. 한마디, "미안해"라고 했을 뿐이다.

- 연합전을 맹세하는 현직 신문부원과 전직 신문부 부장. 가슴이 벅차오르는 구도로구나. 수수방관하고 있는데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저, 그래서 저는 뭘 하면 될까요?"
이로써 해결을 위한 최소 조건이 충족되었다

 

- 이쓰카이치가 해줄 일은 이래저래 많지만 그전에 궁금한 문제가 있었다.
"일단 궁금한 게 있는데."
"네."
헛기침을 하고 미소를 지었다.
"... 우리노 말인데, 요즘 제대로 일해?"

- 이쓰카이치가 돌아가자 겐고가 내 맞은편 자리를 차지했다. 표정이 상당히 험악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기에 선수를 쳐보았다.
"역시 대단해. 제대로 설득했네. 난 자신 없었는데."
모처럼 칭찬해 줬는데도 도지마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여전히 험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이쓰카이치를 직접 보니 어때?"
"뭐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정직은 미덕이지만 말 한마디에 천냥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있다. 인상을 후하게 평가한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은 없다.
"고분고분한 후배네."
겐고가 나를 지긋이 쳐다보더니 끄덕였다.
"맞아. 소심하지만 고분고분한 녀석이야. 부탁을 받으면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 가여울 정도지. 그러니까 조고로."
"왜?"
"올가미도 적당히 쳐."
아아,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나.

- 나는 요란하게 어깨를 움츠리고 웃었다.
"그런 짓은 안 해."
겐고의 시선이 은근히 싸늘하다. 신용이 없다. 이거 억울한데, 조금 울컥해서 반박하고 말았다.
"뭔가 착각한 모양인데, 이런 건 원래 내 전문 분야가 아니야. 올가미라니. 아까도 설득 하나 제대로 못 했잖아?"
내 말에 주눅이 든 건 아닐 텐데 겐고는 조금 당황하는 듯했다.
"그건, 뭐, 그렇지. 혼을 더 빼놓을 줄 알았는데."
"겐고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농락이나 회유는 내 전문 분야가 아니야. 그런 건..."

반박하다가 그만 말을 흐리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 뒷말은 험담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래?"
"아냐, 아무것도."

 

- 그런 건 오사나이의 전문 분야다.
사람을 안심하게 만들어 품속으로 파고든다. 이용당하는 척하면서 이용한다.
이제는 그립기까지 한, 이 년 전 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 사건. 그 사건에서 오사나이는 딱 한 번 만난 겐고의 누나로부터 결정적인 정보를 얻어냈다. 그리고 작년, 여름철 한정 트로피컬 파르페 사건에서 오사나이의 협력자 역할을 했던 상대는 가엽게도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중학교 때만 해도 흐릿했던 오사나이의 자질은 고등학교에 들어온 뒤로 조금씩 드러났다. 오사나이는 정보를 조작하는 재주가 있다.
이번 일련의 방화 사건에서 오사나이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분명한 점은 우리노 다카히코라는 신문부원과 오사나이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겐고에게 우리노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다. 우리노 본인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쓰카이치를 불러달라고 한 것은 오로지 오사나이에게 정보가 전달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정보전이 되면 불리하니까.

- 그런 생각을 하다가 쓴웃음을 흘렸다.
작년 여름방학에 헤어졌는데, 또다시 오사나이를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다. 나와 오사나이 사이에 있는 게 최상의 디저트가 담긴 접시냐 연쇄 방화사건이냐 하는 차이는 있지만.

- 내게 문자를 보낼 사람은 두 명뿐. 겐고가 눈앞에 있으니 누가 보냈는지 안 봐도 뻔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정신을 가다듬었다.

 

- "바로 그거야. 나는 방화범을 몰아세우는 데 이쓰카이치가 필요하다는 말밖에 못 들었어. 그래서 불안한 거야. 그 녀석한테 뭘 시킬 셈이야? 우리노가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는 왜 물은 거야?"
말투가 딱딱하다. 후배를 끌어들여 걱정되는 걸까? 착한 선배다. 나도 동아리 활동을 하나쯤 할 걸 그랬다.

- "겐고, 농락이나 회유는 내 전문 분야가 아니야. 덧붙여서 착실히 자료를 조사하는 것도 굳이 따지면 서툰 편이지. 그래서 이건 네가 해주길 바랐어."
일부러 에두른 표현으로 말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겐고가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내가 뭘 안 했다는 거야?"
"그래, 안 했어. 너만 그런 게 아니었지만."
클리어파일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것을 흘깃 쳐다본 겐고가 잠깐 동요했다.
"맞아. 신문부는 이걸 조사해야 했어. 정보 자료는 정확하게 검증해야만 해."

- "그래. 새로운 '방재 계획'에는 소방 분서의 관할 구역이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아."
겐고는 그러고 있으면 관할 구역 표기가 튀어나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복사지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사용한 건 비밀 잉크가 아니다. 

- 유난히 심각한 얼굴로 끙끙대고 있다.
어찌나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지, 혹시 겐고가 제대로 이해를 못 한 게 아닐까 불안해졌다. 굳이 말할 필요는 없는 문제지만 이야기를 정리했다. 
"다시 말해 육 년 전에 발행된 '방재 계획'을 본 사람만 그 분서의 배열과 관할 구역에서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야."
"알아. 그건 아는데."
겐고의 말투에 짜증이 섞였다.
"그게 뭘 뜻하는데?"
그게 뭘 뜻하는지 내 눈에는 명백해 보였다.  

- 그리고 그것은 다른 흥미로운 사실을 시사한다.
답을 바로 말할 생각은 없었다. 혼란스러워하는 겐고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주 조금 재미있었기 때문에.
대신 이렇게 말했다.
"뭐, 계획이라고 해도 조급해할 것 없어. 성과가 나올 때까지 한 달, 그 후에... 그래, 한 번 더 요시구치의 힘을 빌릴 수 있다면 딱이야."
너무 의지하면 정보료가 올라갈 것 같지만.
"그때까지 느긋하게 수험 공부나 할까?"

- 처음에는 아무리 밤이 늦어도 둘 다 빨리 돌아가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일요일에 만나면 다음날 학교에 가야 하니 적당한 시간에 헤어지지만 토요일에 만나면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아마도 봄방학 전후가 아니었을까. 나카마루가 통금이 있다는 말을 했다. 아무래도 부모님께 밤에 싸돌아다닌다고 야단을 맞은 모양이다. 그동안 실컷 놀러 다녔는데 뒷북 같기는 했지만 억지를 부릴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 오늘도 당연히 통금이 있을 줄 알았다.

 
- "왜 빨리 돌아가야 하는지 안 물어?"
아아, 응, 그런가.
"집안일 아니야?"
나카마루는 일부러 저러나 싶을 정도로 두리번거리다가 이렇게 말했다.
"슬슬 정신 차리고 수험 공부를 해야겠다 싶어서. 머리가 나쁘면 역시 초조해져."
나카마루의 성적이 어느 수준인지는 모르겠지만 슬슬 정신 차리고 공부해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토요일 데이트를 몇 시간 줄인다고 어떻게 될 문제는 아니다. 저렇게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할 거라면 왜 물어보라고 한 걸까?
뭐, 섬세한 소녀의 마음이란 그런 거겠지만.

- 나카마루는 잠시 속마음을 살피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더 이상 묻지 않을 줄 알았는지 이번에는 조금 장난스럽게 두 손으로 배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직 점심을 못 먹었어. 어디 좀 들어가면 안 될까?"
물론, 나는 웃으며 끄덕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돼지고기 생강구이 정식을 먹는 게 아니었는데.

- 가령 바로 눈앞에는 햄버거 가게가 있다. 저 가게 카운터 자리에서는 버스가 정차하는 역 앞 교차로가 잘 보인다. 목적을 갖고 감시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다.
"저기는?"
그렇게 물어봤지만 나카마루는 "으음" 하고 신음했을 뿐 찬성하지 않았다. 음식을 가리지는 않는다고 해도 모처럼 데이트를 하는데 햄버거 하나로 식사를 때우기에는 아쉬운 기분도 이해한다.

- 햄버거 가게 말고도 떠오르는 가게는 있었다. 하지만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달콤한 디저트가 맛있는 카페를 말했다가 '예전 여자친구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고 야단맞은 것이 바로 이 산야도리를 걸었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 데이트 코스가 뻔한가? 역 앞 산야도리 산책 코스와 복합 영화관 코스 두 가지뿐이다. 예전에 갔던 파노라마 아일랜드는 즐거웠지만 둘 다 또 가자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마을 변두리의 자동차학원이나 철거 직전의 체육관에 가자는 말은 할 수 없으니 조금 더 궁리해 보는 것도 좋겠다. 

- 전에도 몇 번이나 걸었던 길인데 중화요리점이 있다는 걸처음 알았다. 입구가 좁아 눈에 띄지도 않고, 중화요리를 먹으려고 산야도리를 돌아다닌 적이 없어 기억에 남지 않은 것이리라. 눈짓으로 여기는 어떠냐고 물었더니 나카마루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농담이지?"
지저분한 유리문 너머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속에서 아저씨들이 잔뜩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도지마 겐고라면 몰라도 나카마루는 저런 곳에 절대 들어가지 못하겠지. 
하지만 태평하게 고르고 있을 수만도 없다.
"2시가 넘으면 거의 문을 닫을 텐데."
"나도 지금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 음, 어디 좋은 데 없을까?"

- 선술집 같은 가게는 드문드문 보였다. 그렇다고 그런 곳에 들어갈 수도 없고, 점심 때는 열지도 않는다. 괜한 질투만 아니라면 벚꽃 암자가 좋을 텐데. 핫샌드위치도 맛있어 보였고. 
그때 나카마루가 길 반대편을 가리켰다.
"아, 저기 어때?"
깃발 간판이 나와 있었다. 패밀리 레스토랑이다. 우회 도로를 따라 몇 군데 있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곳에도 패밀리 레스토랑이 있는 줄은 몰랐다. 최근에 열었나?
"봐, 이벤트를 하고 있대. 더우니까 차가운 파스타가 좋겠어."

- "고바토짱, 저기 가도 돼?"
"응, 좋을 것 같네. 드링크바도 있을 테고."
나카마루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점심은 안 먹을 거야?"
"아아, 응, 난 먹었어. 하지만 양이 조금 부족해서 가벼운 게 있으면 좋겠다 싶었어. 패밀리 레스토랑이면 딱 좋네."
"그렇구나. 미안..."
어째선지 나카마루는 굉장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1시에 만날 때는 대개 점심을 먹고 만났는데... 오늘따라 어째서 이렇게 작은 일로 침울해하는 걸까? 조금 불안정해 보인다. 난처한 일이 있다면 이야기를 들어줄 수도 있는데.
가게에 들어가면 눈치를 봐서 물어보자.

- 점심때가 지났는데도 가게에는 그럭저럭 손님이 있었다. 냉방을 기대했는데, 아직 에어컨을 켜지 않았는지 가게 안은 별로 시원하지 않았다. 오늘이 유별나게 더울 뿐이지 달력은 아직 5월이니 어쩔 수 없나.

- "금연석과 흡연석이 있는데요."
어디로 보나 미성년자인데 그런 걸 물으면 어쩌란 거지. 뭐, 흡연을 즐기는 동급생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일개 소시민은 스무 살이 되기 전에는 술도 담배도 금지다.
"금연석요."
"이쪽으로 오세요."

- 연수생 웨이트리스는 웃는 얼굴로 "메뉴를 정하시면 그쪽 벨을 눌러주세요"라고 말하고 물러갔다. 그렇게 말했으니 메뉴판이 있겠지, 테이블 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메뉴판이 없다. 테이블 밑에 있나 싶어 들여다보았지만 나카마루의 다리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를 어쩐다.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나카마루가 물었다.
"저기, 있지... 고바토 짱은 배 안 고픈 거지?"
어째서인지 나카마루는 고개를 떨구고 있다. 그렇게 마음에 걸리나?
"응. 근데 괜찮아, 그 정도는."
"게다가 나 오늘도 지각했잖아. 고바토 짱, 많이 기다린 거 아냐?"
"별로... 신경 안 쓰는데."
지각이 잘못인 줄은 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만났을 때 거기에 대해 아무 말도 안 하기에 본인도 신경 쓰지 않는 줄 알았다.

- 새삼스럽게 나카마루를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은근히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확실히 표정이 어둡다. 어둡달까, 조심스럽게 내 태도를 살피는 느낌이다. 왜 저럴까. 얼굴에 생강 소스라도 묻었나 싶어 저도 모르게 얼굴을 문질렀다.
"서로 마찬가지잖아.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이라니?"

"나야 모르지."
알지도 못하고, 별로 생각하고 싶은 문제도 아니지만.

- "고바토 짱, 굉장히 다정한 편이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마음의 준비도 못 했는데 갑자기 칭찬을 받았다. 근데 보통 사람들의 다정함이란 뭘까?
"그런가?"
"그래!"
매섭게 단언한다. 그럼 그렇다고 치지 뭐. 뭔가 결심한 듯 나카마루가 말했다.
"예를 들어, 예를 들어서 말이야, 고바토 짱은 내가 무슨 짓을 하면 용서 못 할 것 같아?"
"... 이상한 걸 묻네."
"예를 들어서라고 했잖아."
이것도 섬세한 소녀의 마음인가?

- 자타의 평가에 간극이 생기는 것은 흔한 일이므로 나를 다정하다고 말하는 나카마루에게 이의를 표할 생각은 없다. 토끼 씨,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마음은 그렇지만 말로 할 생각은 없다. 그렇게 다정한 내가 나카마루를 용서하지 않는 경우라면.
이건 몹시 어려운 문제다.
뭐라고 대답해야 정답일까? 어떻게 대답하면 나카마루 마음속의 내 이미지와 부합할까?
"지나치게 비상식적으로 군다면 용서할 수 없겠지. 갑자기 물을 끼얹는다거나."
"아냐, 그런 게 아니라."
나도 안다. 그러고 보니 테이블에 물도 없다. 아까 그 웨이트리스, 연수생 배지는 장식이 아니었구나.

- "그런 게 아니라면... 무슨 짓을 해도 결국에는 용서할 것 같아. 다들 그렇지 않을까?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사죄를 받아들이고 용서하거나, 시간이 흘러 용서하거나, 아니면 후련하게 복수를 해서 용서한다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런데 나카마루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렇지, 용서할 것만 같아. 다정하니까."
어째서 오늘 갑자기... 지난주까지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민망하기도 하고 너무 뜬금없는 소리라 영문을 알 수가 없으니 일단 말을 돌려보기로 했다.
"하지만 메뉴판이 없는 건 용서할 수가 없네. 점원을 부를게."
메뉴를 정하면 누르라고 했던 벨을 누르자 생각보다 훨씬 요란한 소리가 났다. 뭔가 말하려던 나카마루는 요란한 벨소리에 타이밍을 놓친 듯했다.

- "아보가도 샌드위치 커피 세트, 연어 크림 파스타 맞으신가요?"

아니요, 아보카도인데요.
물론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는다.

- 웨이트리스가 주방으로 물러나자 우리는 얼굴을 마주 보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었다. 이 가게에 서빙하는 직원이 저 사람 하나일 리는 없는데 어째서 같은 사람이 계속 오는 걸까?
... 그건 그렇고, 지금 약간 위화감이 우리의 질서 정연한 세계에 일말의 혼돈이 끼어들었다.
그렇다. 내 생각에 이건 약간의 배려로 해결할 수 있다.

- 나카마루가 컵을 들고 물을 한 모금 꿀꺽 마시더니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나저나..."
"응."
"우리, 벌써 오래됐지."
뭐, 그렇지. 지금도 기억하는 방과 후, 그날은 분명 작년 9월이었다. 손가락을 꼽아보았다.
"아홉 달인가. 그럭저럭 흘렀네." 
"이제 와서 말하기도 그렇지만, 우리 은근히 잘 맞는 것 같아."
나는 평온한 얼굴로 끄덕였다. 나카마루는 시선을 살짝 돌리더니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사귀는 줄 모르는 애들도 제법 많아."

"그래?"
"아는 애들은 알지만."

-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이야기의 목적지가 보이지 않아 나는 아리송하게 맞장구를 칠 수밖에 없었다. 나카마루는 웃고 있지만 기분 탓인지 뺨이 경직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애들도 있지만. 어째서 그런 것까지 아는지 신기한 타입."
"그런 사정?"

"그러니까 이런 사정."
우리가 사귀는 걸 말하는 걸까? 나카마루가 돌연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고바토 짱도 그런 애 알지 않아?"

뭔가 속을 떠보고 있다. 탐색하는 티가 팍팍 나는 걸 보면 나카마루도 탐색이 상당히 서툴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토마토 좀 먹을게."
나카마루의 샐러드에서 토마토를 낚아챘다. 번개 같은 포크 공격, 나카마루가 반응했을 때 토마토는 이미 내 입 안에 있었다.
"... 어?"
나카마루의 표정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어리둥절했다.
"어? 아니, 상관은 없는데 고바토 짱, 토마토 먹고 싶었어?"

나는 꿀꺽 삼키고 말했다.
"먹고 싶었달까, 나카마루는 토마토 싫어하잖아."

"내가?"
나카마루는 심오한 질문을 받은 듯 진지한 얼굴로 샐러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나카마루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째서 내가 토마토를 싫어한다고 생각했어?"

- 나는 웃었다.
아주 간단한 이유다. 생각할 필요도 없다. 굳이 설명할 만한 문제도 아니지만 궁금하다면 말해줘야지.
"그야 나카마루, 이 가게를 고를 때 그랬잖아. 차가운 파스타가 좋다고."
"응."
나카마루는 순순히 끄덕였다.
"실제로 주문한 건 뜨거운 크림 파스타였지."

- 이것은 이상 사태다. 차가운 파스타를 먹으러 들어간 가게에서 뜨거운 파스타를 주문하다니. 저온에서 고온으로, 그야말로 비가역적인 엔트로피 증가.
나는 그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다.
"이유가 궁금했어. 분명 깃발에 적혀 있던 차가운 양송이 파스타는 품절이었지. 하지만 차가운 파스타는 그 외에도 있었어. 토마토 파스타도 있었는데 그걸 주문하지는 않았잖아. 차가운 걸 먹고 싶어 들어간 가게에서 뜨거운 음식을 시켰으니까 뭔가 이유가 있구나 싶었지."
가볍게 천장을 가리켰다.
"가게 에어컨 바람이 강력했다면 차가운 걸 먹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을 수도 있어. 하지만 아직 냉방이 돌지 않아서 오히려 더운 편이야."
나카마루가 불쑥 중얼거렸다.
"아, 그래서 알았구나."
"응. 여전히 더운데도 차가운 파스타를 포기한 건 남은 선택지, 토마토 파스타를 싫어하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대신 먹어준 거야."

- 나는 웃었다.
나카마루가 심각해 보여서 고민거리라도 털어놓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튀어나온 것은 그저 완곡한 견제뿐. 이대로는 조금 심심하니 살짝 머리를 굴렸다. 나는 토마토를 싫어하지 않으니 여자친구에게 작은 배려를 선물할 셈이었는데.
"있지."
적잖이 질린 얼굴의 나카마루.
"고바토 짱, 이따금 이상한 걸로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 그것도 굉장히 즐겁게."
"지루하게 말하는 것보다 낫잖아.”
"하지만..."
나카마루는 토마토가 사라진 샐러드를 보면서 말했다.
"나, 토마토 싫어하지 않아."
"어, 그래?"

- 이런 질서의 회복을 갈구한 내 면밀한 추리가 일언지하에 부정당할 줄이야.
패배감에 몸부림치며 물었다.
"그럼 왜 그랬어?"
어디 들어보자. 나카마루가 목표물인 차가운 파스타를 포기하게 만든 두려운 진실을!

- "메뉴판 사진으로 보니 토마토보다 크림 파스타가 더 맛있어 보였어."
오호라.
"백 엔 더 쌌고."
뭐, 타당한 이유로군.

- 나카마루는 그 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간신히 결심했는데 중간에 엉뚱하게 방해받아 이야기할 마음이 사라진 모양이다. 나카마루는 크림 파스타를, 나는 크리미 아보카도 샌드위치를 음미했다.
물론 나는 안다. 나카마루가 정말로 알고 싶어 하는 게 무엇인지.
내가 아는, 후나도 고등학교 남녀 교제 상황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는 인물. 그것은 당연히 전에 겐고의 소개로 만난 요시구치를 뜻한다. 나카마루는 내가 요시구치와 아는 사이인지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직접 물어봤다면 안다고 대답했을 텐데 어째선지 나카마루는 목구멍에 뭐라도 걸린 사람처럼 굴었다. 그 서툰 모습이 안쓰러워 화제를 돌리려고 한 건데. 어느 정도는 먹혀들었다고 봐야 할까? 

- 커피를 앞에 두고 나카마루가 중얼거렸다.
"있지."
목소리는 밝지만 고개는 떨구고 있다.
"있지. 고바토 짱 말이야... 내 어디가 좋아서 사귀는 거야?"
어디냐고 묻는다면 여기저기인데.
하지만 데이트에 늦은 여자친구가 '미안, 기다렸어?'라고 물으면 '아니, 나도 방금 왔어'라고 대답하듯 그 질문의 답을 나는 이미 마련해 두었다.
엄지손가락에 묻은 진득한 아보카도를 냅킨으로 닦으며 대답했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이유를 말로 표현하는 건 오해의 씨앗이야. 너도 알잖아?"
나카마루는 잠자코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고개를 들고 웃었다.
"전혀 모르겠는데."

- "직접 발견한 사실만 기사로 쓰겠다는 뜻이야?"

"아니, 아니야."
히야는 생각보다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나는 힘주어 말했다.
"그런 싸구려 프라이드 문제가 아니야. 더 중요한 이유가 있어. 처음 한두 번은 확실히 비장의 카드는 아껴두려고 쓰지 않았어.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이유가 있어." 

- "그때 선배가 그랬어. 신문부는 파이어맨과 모방범을 구별할 수 있도록 연쇄 방화의 규칙을 숨겨야 한다고. 둘을 구별할 방법이 있다고 명기함으로써 신문부는 다음 현장을 예측하면서, 모방범죄를 방지하려 노력했다고 주장할 수 있어. '방재 계획'의 규칙은 신문부원 모두가 알고 있어. '해머 자국'은 비장의 카드야." 
짧은 침묵 끝에 히야가 중얼거렸다.
"그 문장은 그런 뜻이었어? 어쩐지, '진범만 아는 진실'을 준비했다 이거구나. 제법인


데?"
역시 이해가 빠르다. 히야가 신문부원이었다면 얼마나 든든했을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래서 기사로 쓸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네가 발견한 단서를 가볍게 여기는 건 아니야. 이해해 줘."
히야는 내 어깨에 손을 얹더니 예상보다 온화하게 말했다.
"우리노도 좀 변했네. 자리가 사람을 바꾼다더니. 설득력이 있었어. ...나도 딱히 마음이 상했던 건 아니야. 이유가 있으면 됐어."

- "봐, 저거."
히야가 가리킨 것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는 정자 같은 건물이었다. 사방을 에워싼 잔디 사이로 좁은 길이 뻗어 있다. 건물은 쉼터로 안성맞춤인지 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유심히 보았다. 지금은 쉬는 사람들이 있지만 심야라면 아무도 없겠지. 사람들 몰래 접근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심지어 목조 건물이었다.
"그러네. 불도 잘 붙을 것 같고 노리기도 쉽겠어."

파이어맨의 6월 표적으로 알맞아 보였다. 히야는 쓴웃음을 흘렸다.
"정말 무섭네. 그게 아니라 더우니까 저기서 좀 쉬자는 뜻이었어."
아. 확실히 이 습도에는 지친다.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하지."
민망함을 감추려고 그리 말하자 히야는 소리 없이 웃었다.

- "흔치 않은 그림이네."
히야가 말했다. 하긴, 공원 정자에서 남고생 둘이 더위를 식히는 모습은 조금 우스꽝스러울지도 모른다. 뭐, 실제로 더우니 부끄러울 건 없지만, 히야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사과할게 하나 있어."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히야의 시선이 내려왔다.
"작년 여름방학 직후였을 거야, 우리노는 어떤 사건을 다루고 싶어 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여름방학에 있었다는 유괴 사건을 기사로 쓰고 싶었다. 생각해 보면 그게 시초였다.
"어째서 그런 걸 쓰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갔어. 그랬더니 너는 당당하게 내세울 만한 일을 하고 싶다고 했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졸업하기는 싫다, 그래서야 중학교 삼 년 생활을 반복하는 꼴이라고. 이제 와서 말하지만 나는 그때 이 녀석 참 어린애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하고 조금 한심하게 생각했어." 
히야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 일정대로 따라가기만 해도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 게다가 명성을 원해도 후나도 고등학교 안에서나 통하는 거지. 그런 작은 명성을 원하다니 어리석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 후로 우리노는 훌륭하게 명성을 높였지. 부장도 되었고, 아직은 일부에 그칠지 모르지만 학교에서 소문도 자자해. 그 사건은 점점 커져서 동네에서는 자체 순찰이나 방재 훈련을 실시하려는 움직임도 확산되고 있어. 신문에도 나왔고." 

- "그런데 나는 일주일에 엿새 학원에 다니는 게 고작이야. 예상대로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어."
히야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솔직히 지금 나는 한 달에 한 번, 우리노가 쓰는 기사를 보면 마음이 정말 후련해, 통쾌해. 뭐랄까, 기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이 녀석 정말 열심히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해지는 거야. 그러니까 그날, 속으로 널 비웃었던 걸 사과하고 싶어."
히야는 말을 마치고 잠시 입을 다물더니 장난스레 웃었다.

"이상한 얘기를 했네."

- "읽어준 건 고마워."
오사나이는 <월간 후나도>를 배포한 1일에도 문자를 보내주었다. 역시나 "읽었어. 고생했지?"라는 문자였다. 이미 했던 말을 굳이 또 하는 이유는 달리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 뭐가 생각났다는 거야?"라고 묻자 오사나이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별건 아니야. 정말 사소한 일인데."
"응."
"기사가 조금 틀렸길래..."
오사나이가 미안한 기색으로 말해서 그런지, 나는 생각보다 충격을 덜 받았다. 하나의 기사를 오래 쓰다 보면 약간 실수할 수도 있다. 나는 가볍게 물었다. 
"어디가 틀렸어?"
"응, 방화범이 10일 토요일에 고가 밑에서 자전거에 불을 질렀다는 부분... 사실은 금요일인데."
그렇게 썼던가? 상세한 부분은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 그러니 억지를 부릴 수 없다. 오사나이가 내게 뭘 요구한 적도 없으니 휘둘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 눈빛이 달라졌다. 오사나이와 사귄 지 이제 곧 일 년. 이 정도는 안다. 이것은 케이크 이야기를 할 때의 오사나이다.
"있지. 파이가 맛있는 팅커 링커라는 가게가 있었어. 작년에 문을 닫아서 이제 못 먹을 줄 알았는데... 역 근처에 새 가게를 열었어. 팅커 테일러라는 이름인데, 복숭아 파이도 그대로 있어." 
역시나. 나는 쓴웃음을 흘렸다.
"그거 다행이네."
"응. 다행이야. 그래서 말인데, 내일은 아마 태풍도 지나가고 날이 갤 거야. 우리노, 주말에 뭐 해?"
아무 예정도 없었다. 다른 일이 있어도 오사나이가 부르면 무조건 따라간다.

- "슬슬 돌아가는 게 낫겠어."
"그러네. 그런데 세 번째 얘기는?"
"세 번째?"
오사나이가 이상하다는 듯이 되풀이했다.
"처음에 할 얘기가 세 가지 있다고 했잖아."

- 오사나이는 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열쇠를 꺼냈다.
"미안한데 이거 교무실에 반납해 줘. 오늘 당직 선생님, 좀 거북하거든."
그쯤이야 식은 죽 먹기다. 열쇠를 내게 건넨 오사나이는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그럼 내일, 날이 개면 만나!"
오사나이는 가방을 어깨에 메더니 인쇄 준비실을 박차고 나갔다. 서두르는 심정은 이해한다. 비도, 바람도 더 거세질 것이다. 오사나이가 어디 사는지는 모르지만 자전거로 통학하니 가깝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그만 돌아가자. 그렇게 생각하면서 무심코 부실을 둘러보다가 발견했다.
책상 위에 놓인 문고본. 아까 오사나이가 읽고 있던 책... 서둘러 돌아가려다 깜빡 잊은 것이다.

- 별일이다. 오사나이가 똑 부러진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분실이나 지각과는 인연이 없어 보였는데. 집에 가져갔다가 내일 날이 개면 만나서 돌려줄까? 아니, 이 폭우 속에 돌아가면 책도 젖어버린다. 여기 두었다가 월요일에 돌려주는 게 나으려나.
책은 뒷면이 위를 향해 있었다. 별생각 없이 뒤집어보니 제목이 조금 이상했다. 어떤 소설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페이지 사이로 보이는 하얀 종이는 영수증일 것이다. 전에도 영수증을 책갈피 대신 사용하는 걸 보았다. 그보다 더 전에 봤을 때도 그랬다. 버릇인가?
 
- 겐고의 문자를 받기 전까지 나는 오늘이 '그날'인 줄 몰랐다.
한여름이 한 걸음 먼저 찾아온 듯한 무더운 날로, 아침부터 지금까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찜통더위 속에서 나는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이 동네에는 제프 벡이라는 케이크 가게가 있다. 가게도 작고 점원도 친절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여름이 되면 특제 샬럿을 판다. 샬럿은 케이크 이름인데 모자에서 따왔다고 한다. 
작년, 끔찍하도록 더웠던 어느 날, 나는 그 샬럿을 먹었다. 환상적이었다. 나는 달콤한 디저트를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만큼은 한 번 더 먹어보고 싶었다.

- "겐고도 생각 좀 하는데?"
겐고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 정도로 뭘 생각까지 해?"
'저는 어려운 생각은 못 합니다'라는 주장이나 다름없는 소리를 굳이 할 필요는...
"웃지 마."
"안 웃었어. 확실히 그래. '미리 스케줄을 짜놓았다는 가설'은 그럴싸 해. 나라면 그쪽을 밀겠어. 이유가 있으니까."

- 겐고의 얼굴과 태도가 말보다 뚜렷하게 '다 아는 얘기를 왜 하느냐'고 말하고 있다. 박력 넘치네. 고등학교 3학년쯤 되면 1학년 때와는 분위기도 달라진다.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겐고, 기라 시에 소방 분서가 몇 개나 있는지 세어 봤어?"
이것도 얼굴과 태도로 알 수 있었다. 안 세어봤구나. 정말 솔직한 녀석이다. 앞으로 겐고가 빗나간 길을 걷는다 해도 사기꾼만큼은 되지 못할 것이다.

- 칠판 위 시계를 보았다. 낮이 긴 계절이라 아직 저녁이라고 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운동장에서는 운동부가 자외선을 뒤집어쓰고 있다. 신문부 작전 회의는 언제 끝날까?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니 냉큼 끝내주면 좋겠다. 제프 벡이 언제 문을 닫는지는 모르지만 샬럿은 늦게 가면 다 팔리고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이번에는 겐고가 속을 꿰뚫어 보았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네."
전 신문부 부장의 관찰력은 우습게 볼 수 없다. 아니면 나도 얼굴에 잘 드러나는 타입인가? 설마, 그럴 리가.

- "이런 문제에는 투덜거리면서도 신나게 덤벼드는 녀석이 어쩐 일이야? 뭐 마음에 안 드는 점이라도 있어?"
그렇게 말하는 겐고야말로 마음에 안 드는 점투성이라는 듯이 짜증스러운 표정이다. 사실은 더워서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이유로 짜증이 난 거지만, 그렇게 말하면 체면이 서지 않으니 변명을 해보기로 했다.
"맞아.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안 드는 이유가 세 가지쯤 돼."
세 가지나 될까?
"먼저 첫 번째. 문자로도 충분할 텐데 어째서 학교에서 기다려야 하지?"
"네가 통 연락을 안 받으니까 그렇지. 문자면 된다고 미리 말했으면 이쓰카이치한테도 그렇게 전했을 거 아냐."
뭐, 그 점은 확실히 내 잘못도 있다. 아까까지 잊고 있었고.

- 자, 이것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를 두 가지 들었다. 울분도 대강 쏟아냈다. 하지만 나는 아까 세 가지 불만이 있다고 말해버렸다. 둘보다 셋이 깔끔해 그만 그렇게 말해버렸는데 어쩐다?
"그래서 세 번째는?"
겐고의 재촉에 고민에 빠졌다. 이 사건에서 마음에 안 드는 점은... 
"수동적인 자세가 마음에 안 들어."
갑자기 겐고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 "그래. 나는 보다시피 시시한 사건을 끝내려고 애쓰고 있어. 오사나이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 아직 잘 모르지만 어쨌거나 끝내고 싶어. 그런데 한 번은 피해를 지켜봐야만 해. 이건 수준 낮은 계획이야. 기사로 쓰려고 방화를 방관하는 신문부와 별 차이가 없어. 어떻게든 더 이상 불을 내지 않고 끝낼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게 마음에 안 들어."
뭐라고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겐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무엇보다 심기가 불편했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책상 위 원고가 눈에 거슬렸다.
대화를 하지 않을 거라면 나는 따로 할 일이 있다. 주머니에서 단어장을 꺼내 영어 숙어를 외우기 시작했다. 겐고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 "글쎄..."
겐고가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딱히 놀라는 눈치는 아니었어. 내 말을 안 믿는다면 다른 녀석들에게도 물어보겠지. 경찰이 찾아오기만 해도 이 녀석 무슨 짓을 했나, 하고 소문이 퍼지니 학생들을 만날 때는 조심한다고 했어." 
조금 이상했다. 경찰에는 고등학생만 상대하는 부서도 따로 있을 텐데. 방화 사건을 조사하는 건 다른 부서란 뜻인가?

"그나저나 연쇄 방화가 이렇게 이어지면 경찰도 체면이 구겨지겠어."
"푸념하더라. 방화는 불만 붙여놓고 달아나면 알아서 타니까 수사가 어렵다. 이번처럼 작은 화재는 증거가 잘 안 남아서, 현행범으로 잡지 않으면 어쩔 도리가 없다나 봐. 피해 규모도 작으니 일손을 내주지도 않는다더군. 난 잘 몰랐는데, 십 년쯤 전에도 이 마을에서 연쇄 방화사건이 있었대. 넌 알고 있었어?" 
안타깝게도 범죄사에는 어두워서. 그보다 경찰관이 겐고에게 푸념을 했다고? 역시나 겐고...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아마 약점을 보여줘서 이야기를 끌어내는 화법이 아니었을까? 그 자리에 있었다면 재미있었을지도 모른다.

-경찰이 아무리 '후나도 고등학교의 소문'을 믿는다 해도, 기타우라에 모든 자원을 투입했다가 뒤통수라도 맞는 날에는 체면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아하, 겐고의 심기가 불편한 이유를 알겠다.
"어쨌거나 이렇게 오래 계속되고 있으니 경찰도 금요일 밤에는 순찰을 강화할 수밖에 없을 거야."
"음."
"네가 무슨 말을 했든 똑같아."
"그렇겠지."
"그러니 오늘밤, 만약 신문부원이 경찰에 걸리더라도 겐고가 후배를 팔아넘긴 건 아니야."
순간 겐고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는데 결국 "그래"라는 한마디뿐이었다. 좋은 선배 노릇도 힘든 일이다.

- 그 얼굴을 보면서 나는 약간 망설였다.
사실은 한 가지 더, 겐고에게 말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야기로 추측건대 경찰은 용의자를 찾아낸 것 같다.
전에 학생 지도부의 어느 선생님은 방화 현장을 예측하는 걸 보니 신문부가 방화범이 아니냐고 의심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사를 쓰고 있는 우리노를 의심했다는 뜻이다. 

- 겐고의 교실에서는 몇몇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교실에도 몇 사람은 남아 있을 줄 알았다.
미닫이문을 열었다.
굽슬굽슬한 머리카락을 어깨에 늘어뜨린 나카마루가 창을 등지고 서 있었다. 창문이 조금 열려 있는지 불어오는 바람에 여름 교복 스카프가 하늘거렸다. 지어낸 미소가 딱딱해 보인다. 교실에 다른 아이들은 없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언젠가, 본 듯한.
... 아아, 그런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어쩐지 기억난다 했다.
작년, 아직 더웠던 9월 방과 후. 책상 속에 들어 있던 한 통의 쪽지를 보고 만나러 갔던 그날과 똑같은 장면이다. 여름교복도, 바람마저도 똑같다. 내 기억이 옳다면 하늘빛만 다르다. 그날은 분명 저녁노을이 아찔하리만치 붉지 않았던가? 오늘은 맑고 푸르다. 아침부터 구름 한 점 없어, 짙은 하늘색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 "왔네."
나카마루가 그렇게 말하며 창문을 닫았다. 나도 교실로 들어가 뒷손으로 문을 닫았다.
"아무도 없네. E반은 애들이 꽤 남아 있던데."
"방금 전까지는 있었어."
나카마루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나가달라고 했지만."
그 광경이 눈에 선하게 떠올라 조금 유쾌해졌다. 천진한 사교성을 가진 나카마루는 아마도 '자자, 나가요, 나가. 내가 좀 쓰게'라고 말했으리라. 나카마루에게 우선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남아 있던 아이들은 쓴웃음을 흘리며 고분고분 나갔을 게 틀림없다. 인생을 편하게 사는 타입이기는 하다. 나는 그렇게 못 한다. 

-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해."
목소리에 기운이 없다.
"괜찮아. 나카마루가 부르면 언제라도."
그렇게 웃으며 말하는데 나카마루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고바토 짱은 그대로네."
난데없이 무슨 소리지? ... 뭐, 아까 겐고에게 들킨 후로 불편한 심기가 얼굴에 드러나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기는 한데.

- 이윽고 나카마루가 눈길도 마주치지 않고 물었다.
"고바토 짱,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나 궁금한 거 없어?"

"딱히 없는데."
곧바로 대답했다. 그러자 나카마루는 날카로운 한숨을 푹 내뱉고 고개를 들었다. 뭔가 결심한 표정이었다.
"그대로야.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가는데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야. 설레지 않는 대신 지루하지도 않아. 늘 웃고 있지, 그렇게."
내가 웃고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웃고 있겠지.

- "요시구치한테 들었어. 내 소문, 알고 있지?"
요시구치가 누구지? 나카마루의 친구인가 본데...
나카마루와 나눈 대화에서 요시구치라는 이름이 나온 적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멍청한 짓만 하는 게 미우라, 의사를 꿈꾸는 '엄청 똑똑한' 친구가 다키. 그리고... 어쩐다. 요시구치라는 이름에는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허세 부리지 말고 솔직하게 물어보자.
"요시구치가 누군데?"
내가 시치미를 뗀다고 생각했는지 나카마루가 사나운 눈길로 쏘아보았다.
"전 여자친구에 대해서 물었다면서. E반 요시구치 말이야."

- 내 불찰이다. 기억해내지 못했다. 이름이 겐고 입에서 튀어나왔다면 알아차렸을 텐데, '가방을 도둑맞았던 정보통'과 나카마루가 하나로 연결되지 않았다. 우려한 대로 '고바토가 전 여자친구에 대해 물었다'는 게 정보가 되었나.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어. 부득이한 이유가 있긴 했는데."
나카마루는 이유를 들어주려 하지 않겠지. 일이 귀찮게 됐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카마루가 문제를 삼은 것은 그 일이 아니었다.
"굳이 변명 안 해도 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 소문도 알고 있지 않느냐는 거야."

- 그때 들은 건 '오사나이와 우리 사이에는 연결고리가 있다'는 이야기. 어렴풋이 예상은 했지만 확실한 정보가 들어오니 훨씬 작전을 짜기 쉬웠다. 그리고... 
그렇다. 분명히 들었다. 나카마루에 대한 이야기도.
양다리를 걸친 데다가, 진짜 상대는 따로 있다.


- "고바토 짱이 알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계속 눈치를 살폈어. 고바토 짱이 어떻게 나올까 싶어서. 하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어."
"그런가?"
"그랬어. 지난번 데이트 기억해? 나는 혼자 눈치 보느라 급급했는데 고바토 짱은 토마토만 신경 썼잖아."
토마토라면, 치밀한 추리 끝에 나카마루가 토마토를 싫어한다는 결론을 내렸던 날을 말하는 건가. 안타깝게도 변덕스러운 인간 심리에 묻혀 내 추리는 빗나갔다. 그리고 그날, 나카마루가 내 눈치를 보느라 급급했다는 기억은 내 머릿속에 없다. 그랬단 말인가?

 

- 평소에는 쾌활한 나카마루의 목소리가 오늘은 나직하다. 냉담한 것은 아니다. 격정을 억누른 듯한 목소리.
"처음에는 날 믿어주는 줄 알았어. 날 믿으니까 요시구치한테 들은 소문은 들은 체도 안 하는 거라고. 그래서 괴로웠어. 고바토 짱이 믿어준다면 내가 너무 나쁜 애잖아." 
그렇다면 요시구치의 정보는 정확했나. 역시 겐고가 보증할 만하다.
"하지만 아니었지."
뭐, 응. 그건 아니야.
"고바토 짱, 내가 양다리를 걸쳐도 신경도 안 썼지? 사실은 다른 사람을 좋아해도.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 태연했던 거야."
덥다. 나카마루는 왜 창문을 닫았을까?
창문을 열고 싶었지만 나카마루가 똑바로 노려보고 있어서 눈길을 돌릴 수가 없다. 옴짝달싹 못 하겠다.
"... 그전에도, 지금까지도 그런 남자애는 있었어. 자기는 신경 안 쓴다고, 어른스러운 척하는 애. 내가 그런 타입을 좋아했으니까."
나카마루가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애들도 내 소문을 듣고는 동요했어. 화를 내기도 하고, 다정하게 굴기도 하고, 울기도 했어.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다들 반년쯤일까."
그런 모습을 보면서 즐긴 걸까? 그만 버릇이 나와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 고바토 짱은 그대로였어. 한결같았지... 그래서 굉장히 다정하고 속이 넓은 사람이라고 오해할 뻔했어."
"오해라니 너무하네."
내 말은 나카마루의 귀에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혼자 이야기하고 있었다.

- "아니었어. 고바토 짱이 그대로였던 이유는 나를 믿었기 때문도, 속이 넓어서도, 다정해서도 아니었어. 난 알았어. 고바토 짱은 처음 그대로야. 작년, 학교에서 이렇게 사귀자고 고백한 뒤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 그렇게 데이트를 많이 했는데, 여기저기 다녔는데. 웃는 얼굴이 처음 만난 날 그대로야! 봐, 지금도!"
내게 손가락을 들이댔다.
나카마루, 섣불리 삿대질을 하면 못써. 그런 걸 못 참는 사람도 분명 있을 텐데.
나는 괜찮지만.

- 나카마루가 갑자기 생긋 웃었다.
"고바토 짱. 농담으로 시작했어도, 벌칙 게임으로 시작했어도, 껍데기뿐이라고 해도, 사랑은 사랑이야. 체온이 올라가. 난 그게 좋아. 하지만 고바토 짱은 아니었던 거야."
평소의 발랄한 미소가 아니다.
"너 뭐야? 일 년 내내 똑같은 표정이라니, 정말 뭐야? 나, 고바토 짱을 하나도 모르겠어. 차가운 사람인 거야? 아니면 사람들이 다 우스워? 고바토 짱은 이해 못 하겠지만 나, 사귀던 애랑 헤어질 때면 늘 조금 분해. 나하고 헤어진 뒤에 이 사람은 다른 아이랑 사귀어서 다른 표정을 지을 거라 생각하면 분해. 하지만 지금은 안 그래. 고바토 짱은 누구하고 사귀어도 분명 똑같을 테니까. 전 여자 친구하고도 똑같았겠지?" 
빗나갔다. 그건 아니야.
나카마루는 평생 이해 못 하겠지만.

- "고바토 짱도 알겠지만, 이제 끝이야."
"응. 그건 알겠어."
"마지막으로 소원이 하나 있는데, 괜찮을까?"
나카마루의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조라고 불러도 돼? 멋지잖아."
나는 생글거리며, 재빨리 거절했다.
"싫어."
나카마루도 웃으며 발길을 돌렸다. 교실 가운데에서 내 옆을 지날 때 어깨너머로 이렇게 말했다.
"바이바이, 고바토 짱. 나도 그렇지만, 너도 나쁜 녀석이었어."
그래, 아마도.

- 침대에 파고들어 긴 한숨을 내쉬고 꿈을 꾸며 잠들었다.
삼도천에서 돌탑을 쌓는 꿈.
쌓고 또 쌓아도 제 손으로 무너뜨린다. 쌓고, 쌓고, 또 무너뜨린다. 정말 쌓을 마음이 있기나 한지 의심스럽다.
꿈이었는지 아니면 새벽녘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멍하니 생각한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 어느 쪽이든 이튿날 아침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휴대전화 주소록 삭제.

[나카마루 휴대전화]

- 썩 기분 좋은 밤은 아니었다.
나는 과거에 타인의 비밀을 폭로하거나, 뒤엉킨 상황에서 진실을 지적하곤 했던 적이 있다. 나는 그 쾌감에 취했다. 주위 사람들이 영문을 모르고 우왕좌왕할 때 진실을 툭 던져준다. 그것은 어쩐지 폭탄을 던지는 기분과 같아, 내 장난기와 자존심을 크게 충족시켜 주었다.
많은 일들을 했다. 많은 동급생들이 듣도 보도 못했을 상황도 여러 번 맞닥뜨렸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런 경험은 없었다. 한밤중에 잠복해 본 경험은... 

- "그거 다행이네. 조심해, 칼이나 흉기를 가졌을지도 모르니."
어쩐 일로 겐고가 쓴웃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하고 다니면 정말 험한 일만 생겨. 조심할게. 나도 또 베이고 싶지는 않으니."
그러고 보니 겐고는 나이프에 베인 적이 있다. 작년 여름방학... 벌써 일 년이나 지났다는 말인가?  

- "그때는 끌어들여서 미안했어."
뜻밖에도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괜찮아. 지나고 보니 그것도 재미있었어."
"재미... 있었나? 그때는 필사적이었는데."
"그랬지. 숨이 찼어."

- 말이 끊겼다. 오늘밤 작전에 문제가 없다면, 겐고는 어째서 전화를 한 걸까?
"야, 조고로, 오늘밤이 마지막이겠지?"
"그러길 바라."
작전은 순조롭지만 어떤 돌발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 나머지는 뭐, 겐고의 능력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겐고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 "아니, 방화범 얘기가 아니야... 우리도 이제 3학년이 아니야. 슬슬 입시 공부도 시작해야지."
"난 벌써 시작했어. 겐고는 느긋하네.'
"나도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건 아냐."
농담에 일일이 반응한다. 이렇게 골려먹는 재미가 있는 녀석도 드물다.

 

- "사람이 진지하게 얘기하는데 말 돌리지 마."
"미안.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려고?"
겐고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하고 함께 귀찮은 문제에 끼어드는 것도 오늘밤이 마지막일 것 같아서."
 
- "생각해 봤어. 내가 너하고 사이가 좋았던 건 아니잖아. 뭐랄까, 나는 네 행동이 마음에 안 들었으니까. 친한 녀석은 반에 얼마든지 있어. 신문부에서는 좋은 선배도 만났어. 후배도 그럭저럭."
고등학생 무리가 눈앞을 가로질렀다.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CD 가게로 들어갔다.
"그런데 지난 삼 년 사이에 잊을 수 없는 일이 생길 때마다 어쩐지 네가 꼭 얽혀 있단 말이야. 일 년에 겨우 몇 번 얘기하는 정도인데... 왜 그럴까?"
나한테 물어도, 글쎄다.


- "나는 딱히 네가 변하길 바라는 건 아니야. 우리가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하지만 항상 드는 생각이 있어. 내일부터는 또 한마디도 안 하겠지. 그렇게 시험을 치르고 졸업하면, 어쩌면 앞으로 평생 이야기할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오늘밤 말하지 않으면 개운하지 않을 것 같아." 
괜히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아, 달이 멋지구나.

"야, 조고로. 내가 생각하기에 넌 결국 소시민이 못 돼."

응.
맞아.
뒷북이 심하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정곡을 찔려도, 그때마다 굉장히 허무한 기분이 들어도, 도지마 겐고하고 완전히 인연을 끊지 못하는 거잖아. 누군가의 이름을 잊어도, 휴대전화에 남은 주소가 거의 없어도.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이름이 도지마 겐고인 거잖아.
뒷북도 한참 뒷북이다. 브론토사우루스도 아니고, 뇌가 결론을 내리는 게 너무 느리다.

- "있지, 오늘밤에는 많은 일이 있을 거야."
"조고로."
"휴대전화 배터리는 아껴야지. 결정적인 순간에 배터리가 떨어지면, 상황이야 재미있지만 한심하잖아."
"조고로!"
"시간이 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릴게. 사고 싶은 CD도 있고. 그럼."

 

- 한 바퀴를 돌아 창고 뒤로 돌아왔다.
환한 불꽃 속에 검은 그림자가 서 있었다.
그것은 교복이었다. 한여름이라 반소매지만 색은 남색이었다. 남색이 너무 짙어 검은색으로 보였다. 가슴께에 묶여있는 빨간 리본, 반소매 세일러복이었다. 
후나도 고등학교 교복은 아니다. 후나도 고등학교 여름 교복 셔츠는 흰색이다. 어디 교복이지? 나는 이 주변 교복 정보에 어둡다. 이 동네 학교 중에 하복으로 남색 교복을 입는 곳이 있던가? 

- 그 세일러복이 어느 학교 교복이든, 혹은 교복이 아니든, 그것을 입고 있는 사람은 후나도 고등학교 학생이었다. 중학생으로 보이지만. 교복을 입고 있으니 그래도 초등학생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후나도 고등학교 3학년, 오사나이 유키가 그곳에 있었다.

- 불길은 그칠 줄 몰랐다. 불똥이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우리는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거리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은 서로 놀랐기 때문일까. 어쩌면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있는 곳은 안전하지만 오사나이에게는 열기가 쏟아지고 있을 터.
작은 손에 해머가 들려 있었다. 붉은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 금속 머리, 못은 물론이고 쐐기도 박을 수 있을 커다란 해머가. 장도리가 아니라 양쪽 다 편평한 모양인 게 투박함을 더했다. 직접적인 폭력을 암시하는 도구는 오사나이에게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았다.

- 잠시 똑바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시간으로 따지면 몇 초나 되었을까.
먼저 움직인 것은 오사나이. 낯선 것을 발견한 사람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머를 두 손에 움켜쥐고.
시선을 휙 돌렸다.
그러더니 작은 몸을 비틀어 해머를 치켜들었다. 왼발을 살짝 내딛는다. 어깨에 위로 치켜들었던 해머를 힘껏 내리꽂았다.
불길에 휩싸인 창고에서 불똥이 터져나갔다. 거기에 낮고 묵직한 소리가 섞였다.

- 이윽고 벽에 구멍이 뚫렸는지 오사나이의 스윙이 바뀌었다. 왼발을 크게 내딛자 해머의 궤도가 낮아졌다. 오사나이는 징을 치듯이 해머를 휘둘렀다. 불꽃은 뺨을 달굴 정도로 거셌다. 
플라스틱 탱크 보관함이 무너져 내린다. 뿌드득 소리를 내며.
"... 아핫!"
그만 신이 난 모양이다.
오사나이가 무심코 웃음소리를 흘렸다. 퍼뜩 깨닫고 입을 꾹 다물었지만 이미 늦었다. 웃음을 채 감추지 못했다. 그 심정은 이해한다. 아마 나도 웃고 있었을 것이다. 
불길이 치솟고 있다. 해머를 휘두른다. 옆구리에 힘을 주고 몸을 비틀어, 희미하게 웃으며, 머리카락이 나풀거린다. 꿈이 아닐까?

- 오사나이가 무릎을 꿇다시피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무거워."
나는 쓴웃음을 흘렸다.
"내가 할게 비켜."
"응."

- 해머를 쥔 오사나이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플라스틱 탱크 손잡이를 붙들고 보니 생각보다 무거웠다. 작은 구멍 속으로 팔을 넣다 보니 자세가 나빠서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발밑의 흙이 물러 힘을 받기 어려웠지만 그래봤자 플라스틱 탱크다. 단숨에 힘껏 잡아당겨 잡초가 뻗어 있는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오사나이가 바로 달려와 플라스틱 탱크를 두 손으로 들고 휘청거리며 불이 닿지 않는 곳으로 들고 갔다. 두 번째 탱크도 마찬가지.

- 이걸로 끝. 불은 계속 타오르고 있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환한 불꽃 속에서 나는 오사나이와 마주섰다.

- 그때, 오싹한 파열음이 울렸다. 창고 안에도 불에 타기 쉬운 물체가 있었나?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오사나이도 굉장한 반응 속도로 물러났다.
소리는 컸지만 날아온 물체는 없었다. 긴장이 풀려 다시 쳐다보니 작은 몸을 웅크리고 경계하는 오사나이가 묘하게 우스웠다. 내 자세도 조금 이상했을지 모른다.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었다.
오랜만이야, 우연이네. 할 말은 많았다. 그 교복은 어느 학교 거야? 해머가 무거워 보여. 하지만 내가 입을 열기 전에 오사나이가 먼저 중얼거렸다.
"오늘, 어쩐지 마주칠 것 같았어."
듣고 보니 언젠가 마주칠 것 같기는 했다.
"그러네. 난 오늘밤일 줄은 몰랐는데."
"도지마 때문이야?"
"아니야."

- "아,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내 쪽을 돌아보는 오사나이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뭔데?"
작년 여름이 지난 뒤로도 학교에서 이따금 오사나이의 모습을 보았다. 반 친구들과 웃고 있는 모습도, 지각할까 봐 달리는 모습도 보았다. 하지만 역시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랜만에 만났기에, 깨달은 점도 있다.

- "혹시."
"응."
"키 컸어?"
오사나이가 눈을 깜빡거렸다.
함박웃음을 지었다.
"응. 이제 150이야."
"축하해. 우유 마셨어?"
"마셨어."
창고에서 뭔가가 무너졌는지 묵직한 물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놀라지 않았다.
"그렇구나. 그런데 왜 이런 짓을 했어?"
예상대로 걸려들지 않았다.
"고바토, 하나만 묻는다고 했지? 그러니까 대답은 '우유를 마셨으니까'야."

- 어느새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왔나 싶지만 아마 오분도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래 머물 필요는 없다.
"그럼 또 봐."
나는 그렇게 말했고, 오사나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한여름 밤의 대화는 끝난 줄 알았다.
나는 몰랐다. 오사나이도 뒤늦게야 깨달은 듯했다.
어느 틈에 이 자리에 또 한 사람, 추가된 등장인물이 있었다.

 

-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학생으로,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어쩐지 이름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오사나이는 이 자리에 내가 있을 줄은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의 등장도 예상했으리라. 그에게 시선을 던지더니 생긋 웃었다.

- "왜 그래, 우리노? 끝났다니 섭섭하게."
그 말에도 조롱하는 기색이 짙었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이제 와서 변명이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건 오사나이도 아는 사실이다. 저건 그냥 허세다.

 

- 두 걸음, 세 걸음, 나는 오사나이에게 다가갔다. 출입구를 등지고 오사나이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췄다.
"다 봤어. 끝났어."
"오해야. 아까 그 애라면 지나가다 마주쳤을 뿐이야."

"그게 아냐!"
안 되겠다. 그만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어금니를 질끈 악물었다.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알잖아?"
오사나이의 태도는 변함이 없다.
"뭘? 뭘 알아?"
내 입으로 듣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 "네가 불을 질렀잖아."
한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말했다.
"작년 10월부터 시작된 연쇄 방화사건 범인은 너야."

"왜 그렇게 생각해?"
목소리가 바뀌었다. 낮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딘가 오싹한 울림. 그런 거에 일일이 주눅들 줄 알고? 오사나이는 더 이상 달아날 길이 없다. 힘껏 노려보았다.

- "어째서 거기 있었어? 뭘 하고 있었지?"
"산책하다가 불이 난 걸 발견했어. 누구나 다가가지 않겠어? 불나방처럼.”
"산책? 너희 집은 히노키 정이잖아. 장난해?"
어둠 속에서 오사나이가 피식 웃었다.
"알고 있었어? 내가 말해줬나? 응 말했나 보네."
히노키 정은 기라 시 남쪽 끝, 북동쪽인 이곳까지 오려면 시가지를 완전히 가로질러야 한다. 자전거로 와도 몇십 분은 걸린다. 산책이라니 말도 안 되는 변명이다.
"우리 집은 그 끝이야. 그래, 산책하기엔 멀겠네. 하지만 직접 본 건 아니잖아?"

- "6월 12일 목요일, 23시 51분. 산카이도 서점 기타우라 점에서 세금 포함 609 엔짜리 문고본을 산 영수증이야. 어디서 발견했을 것 같아?"
"그렇게 세세한 건 다 기억 못 해."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마음이 딴 데가 있는 게 보인다. 말하면서도 거북한 듯 눈길을 떨어뜨리고 있다. 직감으로 알 수 있다. 나는 단박에 판단했다.
"거짓말이야."
"너무해."
"바로 그다음 날이었어. 6월 13일 금요일. 비가 너무 많이 내려 신문부는 감시를 중단했지. 방과 후에 부실에 누가 있나 살펴보러 갔더니 바로 네가 있었어. 오사나이, 그때 네가 깜빡 두고 간 문고본에 영수증이 꽂혀 있었어." 


- 밤의 어둠 속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찰나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사나이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오사나이를 다그치고 있다. 기묘한 기분으로 이 신선한 상황을 즐겼다. 오사나이와 사귀면서 주도권은 거의 늘 내가 쥐고 있었다. 오사나이는 케이크에 관한 것만 빼면 먼저 의견을 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쩐지 속을 알기 어려웠다. 늘 순순히 따르다가도 마지막 순간에 슬쩍 피한다. 그런 애타는 거리감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밤, 나는 오사나이를 몰아세우고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이렇게까지 고양되다니, 스스로도 의외였다.

 

- "나중에 한꺼번에 말할 거야. 그러니까 계속해."
눈을 내리뜨고 작은 어깨를 움찔움찔 떨고 있다. 그래도 봐줄 마음은 없었다. 이건 일 년 가까이 나를 기만한 오사나이에 대한 분노일까?
"알았어. 계속할게. 5월 방화 현장에 있었고, 6월에는 사전 답사를 갔다는 걸 알고서 너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봤어. 작년 9월부터 사귀는 동안 뭔가 이상한 점이 없었는지. 처음에는 정보를 얻으려고 내게 접근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했어. 내 곁에 있으면 신문부 동향을 알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다행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 
오사나이에게 사귀자고 고백한 건 나였다.  

- "응. 이게 좋겠다. 문고본 얘기."
내 말은 듣지도 않고 혼자 끄덕거리고 있다. 위화감이 가슴속에 퍼져나갔다.
"기다리던 책이 있었어. 문고본인데 굉장히 재미있어. 앞권이 굉장히 재미있는 부분에서 끝나서 빨리 뒷이야기를 읽고 싶었는데... 우리노가 아까 관심 없다고 딱 잘라 말했으니 내용은 말하지 않을게. 하지만 발행일에 대해서는 우리노도 관심이 있을 거야. 6월 13일이었어." 
그런가. 뭐가 기묘한지 알겠다.
오사나이는 아직까지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조금도.
내 안색을 살피며 오사나이가 말을 이었다.
"발행일 하루이틀 전에는 서점에 들어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 그랬는데 폭우가 내렸잖아? 비가 오는 날에 서점에 가는 건 정말 못 할 짓이야. 하물며 자전거라면 더더욱. 고생을 무릅쓰고 가도 책이 들어왔는지 알 길이 없고, 만약 들어왔다 해도 모처럼 기다린 책인데 흠뻑 젖어버리면 싫잖아. 굳이 전화해서 확인하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지.  
그래서 친구한테 부탁했어. 학교에는 비밀로 서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친구야. 만약에 책이 들어오면 대신 사다 달라고. 그랬더니 목요일에 들어왔다는 거야. 금요일에 학교에서 받았지. 당연히 대신 사다 준 거니까 돈을 내고 서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애라 그런지 젖지 않도록 비닐로 꽁꽁 포장해 줬어. 어찌나 착실한지 굳이 영수증까지 챙겨주더라고."  
오사나이는 으스대는 기색 없이 그저 담담히 말했다.
"그렇게 된 거야. 난 6월 그날에 기타우라 정에는 가지 않았어."

- "... 누가 믿을 것 같아? 지금 지어낸 거잖아."
"미안해. 큰아버지 댁에 왔다는 건 거짓말이야. 아까 그런 거짓말을 해서 이제 날 못 믿는 거야?"
오사나이가 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이것부터 얘기하는 거야. 분명히 믿어줄 테니까. 우리노가 원한다면 걔한테 전화할 수도 있어. 뭐든 물어봐. 걔한테 보낸 문자도 보여줄게. 날짜도 찍혀 있으니 그게 낫겠다."
오사나이는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 "우리노가 부장이라 그래. 생각한 걸 부장한테 다 털어놓을 순 없어. 만약 그랬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 내가 해머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그 서류철을 봤기 때문이야. 인쇄 준비실에 부주의하게 방치했잖아. 열쇠는 교무실에서 쉽게 빌려주니까 자주 읽었어. 물론 '범인은 현장에서 해머를 이용하고 있다'고 써놓진 않았지. 하지만 증언이나 모아놓은 현장 사진을 보면 적어도 우리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어."
생각났다. 6월, 폭우가 내리던 날. 어째서인지 오사나이는 인쇄 준비실에 있었다.
오사나이는 다시 한번 떨어진 해머를 톡톡 걷어찼다.
"직접 수집한 자료를 우리노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아까 불에 타고 있던 창고 옆에서 만났을 때 바로 알아차렸어야 해. 내가 가지고 있는 건 도둑맞은 해머가 아니야. 만약 지금까지 똑같은 해머로 현장에 흔적을 남겼다면, 그건 이렇게 생긴 물건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야 해. 그런데 우리노가 이 해머를 날 고발할 근거로 삼으니까 어쩌면 좋을지 고민했어."

- "아아, 그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그런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아차 싶었지만 늦었다.
나는 허세를 부리고 말았다. 오사나이는 눈치챘을 것이다. 알면서도 다정하게 웃었다.
"그래, 그렇지? 아까는 경황이 없어 세세한 걸 놓쳤는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알지? 이 해머에는 노루발이 없다는 걸."

- "게다가 범행 장소는 조용한 밤에 해머로 쾅쾅 두드려도 괜찮은 곳만 있었던 게 아니야. 주택가나, 시끄럽게 굴면 사람들이 모여들 만한 장소에 남아 있던 '흔적' 중에는 날카로운 노루발이 없으면 내지 못할 자국들도 몇 개 있었어." 
나는 전부 기억하고 있다. 껍질이 벗겨진 가로수, 갈기갈기 찢긴 오토바이 안장, 비스듬히 긁혀 있던 출입 금지 간판. 확실히 몇 개는 둔기로 낸 흔적이 아니었다. 

- "그럼 그건 왜 가져온 거야? 방화범이 아니라면 넌 여기에 뭘 하러 왔지?"
오사나이는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마치...
마치, 손이 가는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아아, 우리노, 조금 더 생각해 봐! 난 5월 현장에 있었어. 그건 맞아. 보다시피 8월 현장에도 있었어.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범인 말고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을 나는 알아. 우리노도 알잖아?" 
5월에도, 8월에도, 방화 현장에 있었던 사람.
모를 수가 없다. 

 

- 어째서 그런... 그럴 리가 없다.
"... 너도 방화범을 쫓고 있었어?"
"훌륭해, 우리노."

오사나이는 더없이 다정했다.
"좋은 대답이야."

어디선가 불어온 시원한 바람이 스쳐갔다.
"바람이 상쾌하네."
오사나이가 귀에 걸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바람이 불어온 방향을 보았다.

 

- 달빛 속에서 나는 보았다. 가늘게 뜬 눈, 유연하게 움직이는 손가락, 시선마저 요염하다. 짙은 남색에 가까운 낯선 세일러복과 발밑에 떨어진 붉은 해머.
상황은 전혀 다르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내가 처음 보았던 오사나이였다. 언제였던가, 인쇄 준비실에서 도지마 선배에게 귓속말을 하던 요염한 소녀. 그 모습과 표정, 동작에 너무 격차가 커서 관심이 갔고, 나는 오사나이에게 사귀어달라고 고백했다. 
오사나이는 속은 알 수 없지만 평범한 소녀였다. 그렇기에 잊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던 건, 그렇다, 내가 신문부 부장이 된 날. 억지로 끌어안았더니 훌쩍 빠져나가서, 웃었다. 그때 오사나이는 바로 돌아갔다. 
오늘밤, 오사나이는 떠나지 않았다.

 

-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오사나이가 무슨 소리를 할지 두려워 마구 떠들었다.
"그럴 리 없어. 그렇다면 숨어서 그럴 필요가 없잖아... 내게 미리 한마디라도 했을 거야.”
그 말에 오사나이가 표정을 흐렸다.
"그렇게 슬픈 소리는 하지 마."
"어...?"
"우리노는 뭘 선택했지? 사람의 말이나 성의가 아니라 확실한 사실만을 믿고 비밀을 폭로하는 쪽을 선택한 것 아니었어? 그렇게 추리한 결론인데 '그럴 리 없어', '미리 한마디라도 했을 거야'라니 이상하잖아. 내가 아무 말도 안 한 이유야 수십 개라도 댈 수 있잖아?"

나는 아무것도 선택한 적이 없다. 방화범을 체포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게... 그런 뜻이 되나?


- "말할 생각은 없었어. 하지만 오늘밤이 마지막이라면 가르쳐줄게. 나, 그동안 몰래 우리노를 도왔어."
"네가 나를..."
"예를 들면, 그래, 도지마한테는 꽤 여러 가지 부탁을 했어. 자선 바자회를 어떻게 홍보할지 고민하는 애가 있어서 이쓰카이치에게 부탁하면 된다고 가르쳐줬지. 그리고 이쓰카이치는 교내 신문을 이용해 홍보해 줬어."
이쓰카이치가 편집회의에서 칼럼을 만들자고 제안했을 때 맥이 빠질 정도로 쉽게 승인받은 사실을 기억한다. 이상하다 싶긴 했는데...
"그게."
"호박이 넝쿨째 굴러든 줄 알았어? 말할 생각은 없었어, 진짜야. 네 자존심이 상처 입을 테니까."
오사나이는 그런 말을 태연히 했다.

- "우리노가 자유롭게 기사를 쓰고 싶다고 해서 뒤에서 몰래 도왔던 거야. 하지만 부장이 되자 이번에는 직접 방화범을 체포하겠다고 나섰어. 내가 말렸지? 충고도 했어. ... 하지만 우리노는 듣지 않았어."
그날 일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겨우 넉 달 전의 일이다.
"게다가 우리노는 자기 입장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고 있었어. 교내 신문에 '거기서 화재가 발생한다'고 쓰면 정말 현실이 돼. 언제 경찰이 찾아와서 경찰서로 같이 가자고 해도 이상하지 않아. 지금까지 무사했던 건 경찰이 이 연쇄 방화를 성실하게 조사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성실하게 조사해서 우리노가 꼬리를 드러내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 아닐까?"
오사나이가 바로 옆에 있는 나무를 천천히 가리켰다.
"나는 저 나무 뒤에 무서운 사람이 숨어서 감시하고 있다 해도 이상할 것 없다고 생각해."
나는 그 나무를 차마 쳐다볼 수 없었다. 오사나이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 "그런 우리노를 위해서, 그래도 뭔가 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름대로 조사했어. 그걸 이렇게 완전히 오해해서 나를 범인으로 몰다니. 그만두는 게 낫다고 충고한 이유, 기억하나 보구나. 난 소시민을 좋아한다고 했어. 정확히 말하면 조금 달라. 만약 네가 직접 범인을 잡으려고 한다면 분명 스스로가 평범한 소시민임을 깨닫게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야."
"내가? 소시민?"
앵무새처럼 따라 하자 오사나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총명함이 조금 모자랄까. 그리고 교활함도, 사람을 부리는 방법도 그래, 조금만 더 능숙하면 좋을 텐데. 그리고 의심할 줄도 알아야 하고. 아까 내가 폭우가 내리던 날 친구한테 부탁해서 책을 샀다고 했을 때 확인 안 했지? 그럴 때는 말이야. 아무리 확실하다고 생각해도 최소한 확인은 하는 게 나아. 
행동력은 합격점일까? 가망이 없어도 현장을 확인하는 자세는 중요해. 효율은 그래, 조금 더 노력해야지. 열 달이나 들였는데 우리노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용의자를 충분히 추려내지는 못했어.
굉장한 점도 있어. 직접 방화범을 잡기 위해서라면 피해도 무릅써야 한다고 생각했지? 누가 피해를 입어도 상관없다고 말이야. 그 이기적인 생각은 비밀을 폭로하는 사람에게 걸맞은 성격이야. 총점은, 으음..."
밤바람에 등이 얼어붙었다.

 

- "실망하지는 않았어."
시선을 들자 오사나이가 웃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거든."
그토록 보고 싶었던, 눈앞에 케이크가 있을 때와 똑같은 환한 웃음이었다.
오사나이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의미는 나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오사나이를 크게 실망시켰고, 오늘밤 대화는 끝났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오늘밤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 고개만 돌려서는 오사나이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차마 몸까지 돌리지는 못하고, 그대로 물었다.
"방화범은 어떤 녀석이었을까?"
시야 밖에서 오사나이가 흔쾌히 대답해 주었다.
"겉보기는 우리하고 비슷한 또래였어. 남자애 같아."

그리고 가벼운 웃음소리.
"아마 지금쯤 붙잡혔을 거야. 여우가 어슬렁거리고 있었으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지금 저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도 내가 소시민이기 때문일까?

 

- 어슬렁거리다니 말이 심하네.
우리노가 떠날 때까지 나는 거북한 심경으로 멀거니 있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로 나무 뒤에 기대어 있었다. 겨우 몇 미터 떨어져 있을 뿐인데 조용히 있으니 의외로 들키지 않았다. 도중에 문자가 와서 휴대전화가 한 번 울렸지만 역시나 들키지 않았다. 오사나이가 "저 나무 뒤에"라고 말했을 때는 당황했지만 공원에 둘 뿐이라는 선입견이 있는지 그래도 들키지 않았다. 

 

- 마음속으로 그만 나가도 될지 몇 번이나 물었다. 어쨌거나 생각지도 못한 위태로운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고 말았다. 생각 없이 고개를 내밀었다가 오사나이와 우리노가 아직 서로 마주 보고 있기라도 하면 낭패다. '이거 실례, 젊은이들끼리 잘해보게' 하고 떠날 수도 없고.


몇 번째인지 모를 마음속 질문에 대답이 돌아왔다.
"고바토, 나와도 돼."
조금 경계하면서 나무 뒤에서 나갔다. 우리노는 없었다. 등을 돌리고 있는 오사나이는 역시나 작았다. 그 뒷모습에 대고 말했다.
"여우라니 너무하네, 우리노는 못 알아들을 텐데. 솔직히 나도 내 얘기인 줄 나중에야 알았어."
"못 알아들어도 돼, 이젠."
오사나이는 여전히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해결했어. 겐고가 잡았어."

- 겐고가 혼자서 범인을 잡을 경우 동정심이 일어 놓아주지나 않을지 우려했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뭐, 범인은 마지막 순간에 운이 없었던 모양이다.

- "아까 소방차 소리에 섞여서 경찰 사이렌도 들리던데. 알고 있었어?"
"아니. 이야기하느라 바빠서."
그래. 뭐, 그랬겠지.
"아마 그 차로 연행되었을 거야."
"그렇구나... 고바토가 추리한 거야?"
1학년 때였다면,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나는 소시민을 지향하며 비밀을 폭로하는 짓은 하지 않겠노라 맹세했기 때문이다.
2학년 때였다면, 그렇다고 했을 것이다. 의지는 해이해지고 행동에 허점이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으니까.
지금은, 이렇게 대답하련다.
"나도 조금은 도왔지. 하지만 모두의 힘이야!"
오사나이는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웃었다. 시시한 농담에 억지로 장단을 맞춰주는 듯한, 메마른 웃음이었다.

- 아까까지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던 불꽃의 빛도 사라졌다. 사이렌 소리도 사라져, 어느새 주위는 여름밤에 어울리는 차분한 정적을 되찾았다.
오사나이가 물었다.
"그래서 방화범은 누구였어?"
휴일을 만끽한 친구에게 속세의 예의상 '어제 라이브 어땠어?'라고 묻듯 무관심한 태도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나는 쓴웃음을 흘렸다.
"정체는 아직 몰라. 정신이 없었는지 겐고가 어중간한 문자를 보내서 짐작은 하고 있지만."
"추려냈구나."
"한 사십 명까지는. 그다음은 정보통 덕분일까."

 

- "가르쳐줘, 고바토, 고바토가 뭘 했는지."
오사나이를 힐끗 보았다.
이번 사건의 전말은 언젠가 이야기하게 될 줄 알았다. 딱히 숨길 생각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방과후 학교 어디선가, 그런 일도 있었지, 하고 떠들게 될 줄 알았다. 이야기 상대는 분명 쾌활한 반 친구. 
그런데 오늘밤 여기서 오사나이에게 말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일 년 가까이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지 않았는데 화제가 방화범이라니. 오사나이도 딱히 궁금하지는 않을 텐데. 나는 뺨을 긁적였다. 
"뭐, 나중에 얘기할게. 여기서 서서 말하기도 그렇고, 오늘밤은 여러 가지 일이 있었잖아. 그만 돌아가야겠어."
"말해줘."
뜻밖에도 강경한 태도였다.
"부탁이야. 오늘밤, 전부 끝내고 싶어."

- 그런가... 부탁한다면 어쩔 수 없지.
하다못해 벤치에라도 앉고 싶은데, 이 공원에 있는 벤치는 닥스훈트 모양이다. 멍청하게 혀를 쑥 내밀고 있는 디자인이라 차마 못 앉겠다. 서서 말해야겠다.
그래, 어디서부터 말하면 좋을까.

- "알았어. 그런데 오사나이는 어디까지 알고 있어?"
"아무것도 몰라."
그럴 리 없지만, 뭐 상관없나. 처음부터 얘기한다면 시작은 이거다.
 
- 오사나이가 예상도 못 했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게 계기였어?”
"아, 역시 알고는 있었구나."
나는 그 연쇄 방화에 별 관심이 없었다. 작년, 오사나이는 내가 수수께끼를 발견하면 불나방처럼 흐느적흐느적 다가간다고 착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도 이 세상 모든 것을 재미있게 여기는 건 아니다. 연쇄 방화사건에 기껏해야 세상이 험하다고 눈썹을 찌푸리는 게 고작이었다.
불에 탄 자동차가 호조의 차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넘어갔을 것이다.

- 나는 연쇄 방화와 작년 납치 사이에 관련이 있다는 추측을 재빨리 버렸다. 우연인지 아닌지는 당연히 검토해야겠지만, 있을 수도 있는 우연을 검증하겠다고 언제까지 매달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 그 차가 표적이 된 이유가 있기는 하다.
호조는 당시 열여섯 아니면 열일곱이었으므로 부모의 자동차를 몰래 끌고 다녔을 것이다. 자동차는 아마 작년 납치 사건 이후 줄곧 방치되어 있었으리라. 계속 비바람을 맞은 데다 차량 내부도 지저분했다. 
그런 황폐한 분위기는 그것만으로도 떳떳하지 못한 놈들을 불러들인다.

- "그래서 조금 관심이 생겨서 겐고하고 이야기하다가, 오사나이가 신문부에 개입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
"개입..."
"음, 표현은 그냥 넘어가. 어쨌거나 난 겐고에게 자료와 정보를 받았어. 연쇄 방화를 추적하고 있는 신문부원의 이름이 우리노라는 것과, 우리가 이 도시의 '방재 계획'이 사건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조금 묘했어. 방화범이 소방 분서 관할 지역을 의식하다니, 견강부회로 들렸거든. 하지만 사건은 정말 그대로 일어나고 있었지. 그래서 들은 정보만으로는 의심스러워서 도서관에서 확인해 봤어. 웃음이 나왔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쓴웃음이 나왔다.

- "그렇지 않아도 한계가 있어 보이는 과정에 조건이 또 붙었어. 그렇게 되면 '방재 계획' 가설은 버리는 게 낫지. 오히려 당연히 스티그마 효과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어." 
오사나이를 상대로 보충 설명을 할 필요는 없겠지만 일단 풀어서 말했다.
"방화범은 <월간 후나도>의 기사를 보고 다음 범행 현장을 결정했을 거야."
표정을 훔쳐보았다. 오사나이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이미 예상했던 걸까? 적어도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 아마도 전화번호부나 재해 예측도, '시민 생활 도우미' 같은 자료를 말하는 것이리라. 훗날 증거의 신빙성을 확인하느라 내가 참고한 자료이기도 하다.
"우리노는 방화 현장의 공통점을 조사했어. 그리고 찾아냈지. 찾아내고 말았어. 나는 그 시점에서는 우리노의 존재를 몰랐어. 하지만 아마 그 후배는 공통점을 찾을 때 거기에 함정이 있는 줄 몰랐을 거야." 
열심히 조사하면 예상한 자료를 찾을 수도 있다. 그 순간, 그 예상이 옳은지 의심해봐야 한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만다.
오사나이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노의 성격을 알 테니 짐작 가는 구석이 있는 것이다.

- "모집단이 작으면 공통점은 쉽게 찾을 수 있어. 복숭아와 유자, 파인애플은 나무에 열린다는 공통점으로 묶을 수 있지."
"파인애플은 나무에 열리지 않아..."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나쁘게 말하면 어떤 식으로든 갖다 붙일 수 있다는 말이야. 하마에, 니시모리, 고사시, 아카네베에서 있었던 네 번의 방화에 범인이 사전에 마련해 놓은 공통점은 없었어. 하지만 우리노는 그걸 만들어내고 말았어."

 

- "아마 칼럼을 막았어도 사건은 이어졌겠지. 그렇다면..."
그대로 두고 유인해서 낚는 게 낫다.
"그래서 사전 준비를 조금 했지. 부원을 한 명 포섭했어. 이쓰카이치, 오사나이도 알아? 걔가 도와줬어. 역시 겐고는 후배들 신임이 두텁더라. 설득할 때 도움을 받았어." 
"그렇구나."
오사나이가 중얼거렸다.
"4월까지는 몬치가 내 정보원이었는데. 고바토도 스파이를 파견했을 줄이야... 미처 몰랐네."
저렇게 아쉬워할 필요가 있나? 게다가 스파이라니 듣기 거북하게. 내부 협력자일 뿐이다.

- "이쓰카이치한테 신문부 분위기가 어떤지 물어봤어. 특히 우리노의 일하는 태도를. 그랬더니 연쇄 방화 사건에만 매달려 기본적인 일들을 내팽개치고 있다는 거야. 기사를 배분하거나, 오탈자를 찾거나, 몇백 부를 인쇄하거나, 아침 일찍 등교해서 학생들 책상에 신문을 배포하는, 그런 자잘한 일들을 말이야..." 
안된 일이지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마 우리노의 인망은 겐고에게 미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도 자잘한 작업은 기피하는 타입이라 남 이야기 할 처지는 못 되지만. 
"그래서 작전을 세웠지. 범인을 추려낼 작전을."


- 말하다가 깨달았는데 이 작전, 이쓰카이치의 작업량이 어마어마하다. 뭐, 전부 원활하게 진행된 걸로 보아 어쩌면 겐고가 몰래 도왔는지도 모른다.

-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 사실은 한 번에 알아내고 싶었어. '다음 현장은 모동네 모 카페'라고 바꿔 써서 그 카페를 몰래 감시하고 싶을 정도였어. 그러면 한 번에 끝나니까. 하지만 후나도 고등학생은 천 명이야. 1학년을 빼더라도 약 육백육십 명. 그만한 용의자를 전혀 추려내지 않고 그대로 잠복하려니 불안했어. 확실하게 몰아넣을 수 있는 정보가 필요했어."
 
- 이미 마음속으로는 마무리 지은 일이었는데, 생각이 얼굴에 드러난 걸까? 오사나이가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건 어쩔 수 없어. 방재도 방범도, 고바토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니까 책임은 느끼지 마."
책임이 아니다. 보다 완벽한 작전을 세우지 못했다는 게 불만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고마워."
오사나이는 웃음기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데 범인은 신속하게 <월간 후나도>를 참고했어. 우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방화범이 1월에 이미 우리노 가설을 알고 있었다는 거였지. 그렇다면 방화범은 우리노로부터 비밀스러운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뜻이 돼."
"알겠어."
오사나이의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평탄했다.
"어째서 고바토가 그 부분을 슬쩍 넘어가려 했는지도 알겠어."
이 정도면 알 수밖에 없나. 아니면 역시 보통이 아니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 이 문제 때문에 나는 꽤 오랫동안 오사나이가 방화범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이미 풀린 의혹을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 뿐.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 나는 두 손을 펼쳤다. 하리미 제1 어린이 공원에는 희미한 벌레 울음소리뿐. 철책과 화단이 높아 주변이 잘 보이지 않는다. 최고의 감시 장소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매복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겐고가 잠복하고 있었지."
오사나이가 의미심장한 눈길을 힐끗 던졌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대충 알겠다. 어째서 내가 직접 잠복하지 않았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그야, 모기가 있을 것 같아서.
나는 밤이 조금 더 깊어지면 다른 장소에 숨어 있을 작정이었다. 다만 범행 시각이 생각보다 일러서 타이밍을 놓쳤을 뿐이다. 마음속으로 변명했다.

- "흐응."
밤바람이 뺨을 어루만졌다.
붕붕, 귀에 거슬리는 날갯소리가 들려왔다. 모기가 우리 사이를 지나갔다. 나는 무심코 두 손을 들어 모기를 노리고 손바닥을 찰싹 맞부딪쳤다. 잡은 줄 알았는데 날갯소리가 사라지지 않는다. 괜히 팔을 뻗어 박수만 친 꼴이 되었다.


- 오사나이가 시선을 돌렸다. 얼굴은 내 쪽을 향한 채로 눈으로만 모기를 좇더니 순간 팔을 뻗었다. 내지르는 듯한 동작으로 허공을 움켜쥔다. 오사나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폈다. 부웅, 날갯소리. 오사나이의 시선이 허공을 오갔다. 
"놓쳤어."
"그냥 보내주자."
어쩌면 지옥으로 떨어졌을 때 부처님이 천국에서 밧줄을 내려주실지도 모르니까.

 

- 오사나이는 가만히 손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포기한 듯 팔을 내리고 말했다.
"훌륭해, 고바토."
모기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못 잡았는데."
"응, 나도. 그게 아니라..."
... 알아.

- "아까 화재 현장 근처에서 만났을 때 어쩐지 예감은 했어. 고바토는 거의 방화범을 잡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이번처럼 범인일지도 모르는 사람이 수백 수천 명이나 되는 사건은 고바토의 특기 분야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그래도 분명 잡을 줄 알았어. 어째서일까?"
"글쎄, 나도 모르겠네."
"내가 고바토를 그 정도로 신용했던 걸까?"
나는 힘없이 대꾸했다.
"시간도 걸렸고, 피해도 발생했어. 칭찬받을 솜씨가 아니야."
"그거 알아? 이번 연쇄 방화, 다들 꽤 관심이 많아. 역 앞이나 오래된 주택가, 불이 나면 대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는 곳에서는 자경단 같은 조직도 만들었어. 순찰하는 경찰도 상당히 늘었고, 임시 방재 훈련을 실시한 동네도 있다고 신문에 실렸어. 고바토는 그런 사건을 해결한 거야. 평범한 고등학생인데."

- "훌륭한 추리와 훌륭한 실천."
조금,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내게 그 말은 오지랖의 유의어다. 분명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지만 이쓰카이치를 끌어들였을 때부터 나는 이 사건을 즐기고 있었다. 귀찮은 자료 조사도 대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힘들지 않았고, 범인이 감쪽같이 덫에 걸려 정체를 드러냈을 때는 실실 웃음이 나와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공공복지에 도움이 되어 자랑스러웠던 게 아니다. 그저 즐겼을 뿐이다. 오사나이도 그걸 알면서 괜히 심술궂게 말하는 것이다.

- 한편으로 내가 일방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부분도 있었다.

"그래서 오사나이는 정말 어디까지 알고 있었어?"

"나?"
"오사나이가 이 사건에 얽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이건 대체 누구에 대한 어떤 복수일까 하는 생각부터 들었어. 오사나이가 움직이고 있다면 분명 복수를 위한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지." 
오사나이는 보란 듯이 뺨을 부풀렸다.
"너무해."

"미안."
"... 아까도 말했잖아. 난 아무것도 몰랐어. 고바토처럼 확실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방화범은 분명 신문부의 작전을 알고 그 허점을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신문부가 감시하지 않는 곳을 노려서 잠복했지. 지난달에 방화범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발견했어. 너무 멀어서 잡지 못했지만 저 사람이겠거니 싶었지.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고작 그 정도였어."

 

- 나는 잠자코 있었다. 오사나이는 거짓말쟁이 소녀다. 정말 그뿐일 리가 없다.
오사나이도 그런 나의 의심을 알고 억지로 밝은 목소리로 화제를 바꾸었다.
"고바토, 여자친구하고는 어떻게 된 거야?"
뜬금없는 질문이라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나카마루 말이야."
이름을 듣고서야 겨우 기억해 냈다. 응, 즐거운 추억이 참 많았지. 나는 웃었다.

- "헤어졌어. 아니, 꽤 일방적으로 차였어. 나카마루는 진짜 애인이 따로 있었는데 그걸 알면서도 그전처럼 똑같이 굴었더니 사람도 아니라는 듯이 불같이 화내더라."
"아, 응, 그건 좀 문제가 있네."
그런가...

 

- 오사나이가 뒷짐을 쥐고 가볍게 바닥을 찼다.
"나도 오늘밤 헤어진 셈일까?"
"그야."
그런 말을 듣고도 태연히 계속 사귄다고 생각한다면 아마 마조히스트가 아닐까. 우리노는 그런 타입은 아닐 것 같다. 오늘밤 새로운 취향에 눈을 뜨지만 않았다면.
그보다 설마, 그게 결별 선언이 아니었다는 건가? 

 

- 오사나이가 다시 한번 바닥을 걷어차더니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안 믿을지도 모르지만, 난 정말 우리노를 돕고 싶었어."

그렇게 노골적으로 반응할 셈은 아니었는데, 매서운 눈총을 샀다.
"진짜야."
"어, 응."
오사나이의 입술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정말이야. 고백을 받고 기뻤어. 우리노는 왜, 제법 멋지고 자신감이 넘치잖아. 그 자리에서 사귀기로 했어. 난 궁금했거든.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피가로?
"사랑을 해보려고, 우리노를 뒷바라지했어. 연인이란 그런 건 줄 알았거든. 행동이 마음을 키운다고 생각했어. 제법 잘하고 있었다고 믿었는데. 하지만 내 행동을 우리노가 어떻게 보았는지... 아까 고바토가 본 대로야. 내 바람은 헛수고였어. 나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어."
신문부 뒤에 유난히 오사나이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던 이유가 이건가.

- 하지만...
오사나이가 남자 뒷바라지를 했다는 것 자체를 믿을 수 없지만, 그 뒷바라지의 내용이 뒤에서 손을 써서 기사를 쓸 공간을 마련하거나, '연쇄 방화범'의 포위망에서 벗어난 곳을 몰래 감시하는 것이어서야 당연히 헛수고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사랑이 아니다.
아아... 그런가, 남의 문제는 잘 보이는구나.
뭐, 그래도 그 점에서 나는 자제를 잘했다고 자신한다.

- "나도 나카마루가 사귀자고 했을 때 기뻤어. 왜, 알다시피 여자친구는 중학교 때 사귀었던 걔가 마지막이었으니까. 나카마루는 실제로 과분한 아이였어. 내게는 아까울 정도였지."
활발하고 유행하는 화제도 잘 알고 있고, 무엇보다 감정이 풍부했다. 잘 웃고, 때때로 토라지기도 하는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사귀는 상대에게 대놓고 자기는 이상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구석도 실로 익살스러웠다. 하지만...
"많은 이야기를 했어. 그랬더니 글쎄, 난처하게도 무슨 말을 할지 다 보이는 거야. '이렇게 이상한 사건이 있었어'라며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게 이상하지가 않아. 그때마다 그런 말을 하면 미움을 살 것 같아 정말 많이 참았어."
"끝까지 참지는 못했구나."
응, 그러니까 그렇게 뒷이야기를 넘겨짚으면 안 된다니까.

 

- "내가 생각해도 제법 눈치 빠르게 행동했어. 다행히 나카마루는 그런 일로 나를 싫어하지는 않았어. 내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기쁘게도 그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거든."
나카마루와 보낸 즐거운 나날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그건 어떤 기분이었어?"
때마침 오사나이가 그렇게 물어서 매끄럽게 대답할 수 있었다.
"호박에 침주는 기분."

- 남들보다 먼저 사건의 진상을 맞히는 일은 굉장히 즐거운 한편, 오지랖이라고 반발도 산다. 의외로 강한 그 반발에 나는 겁을 먹고 얌전히 굴기로 했다. 그런 내게 나카마루는 함께 있으면 편안한 상대가 될 예정이었다.
칭찬을 받으면 기쁘고 미움을 받으면 슬프다.
그렇다면 인식조차 못 하는 것은 어떨까? 나카마루와 있을 때 나는 '아니, 잠깐만. 지금 내가 수수께끼를 풀었는데, 뭐 할 말 없어?'라고 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불만은 시간과 함께 쌓여갔다.
그래도 그대로 아무 일도 없었더라면 나도 익숙해졌을지 모른다. 어떤 비밀을 어떠한 지혜를 짜내서 풀어내도 '아, 그렇구나'가 전부인 반응에 익숙해지면 내 허영심은 언젠가 지치고 닳아빠져 끝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어쩌면 괜찮은 결말일 것이다.
하지만 내 눈앞에는 연쇄 방화 사건이 있었다. 한편으로 나카마루 역시 내게 불만이 있었다. 나카마루의 인생관으로 볼 때 나는 질투에 미쳐야 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 그래도 조금은, 인간적으로 문제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사나이도 말했다.
"호박에 침주기. 그래, 나도 우리노하고 사귀면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
딱딱한 미소.
"얘 참 시시하다고."
어.
난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 "고바토, 기억해? 작년에 우리가 헤어졌을 때."
"물론. 하지만 두 번 다시 만나지 말자는 말은 하지 않았지."
"응... 근데 그런 게 아니라. 헤어진 이유도 기억하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기억한다.
우리가 소시민을 표방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의식 과잉 때문이다. 혼자 있으면 뼈저리게 느낀다. 하지만 오사나이와 함께 있으면 그 비참함이 가벼워진다. 오사나이는 나의 자만심을 용서해 주고, 나는 오사나이의 자만심을 용서한다. 상부상조라고 이름 붙인 어린 자아와, 그래도 소시민을 지향한다는 방침이 서로 충돌해, 우리는 더 이상 함께 있을 수 없었다. 

- "그때 말한 건 거짓말이 아니었어. 대충 둘러댄 것도 아니야. 하지만 일 년이 지나니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
구두 바닥으로 땅을 긁는 소리. 오사나이가 살짝 다가왔다.
"우리는 그렇게 똑똑하지 않아. 정말 똑똑하다면 실수가 훨씬 적어야 해. 자제할 수 있어야 해. 무엇보다 아무도 상처 입히지 않았을 거야."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무능하다는 것도 거짓말이지.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고바토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우리가 똑똑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역시 아무 재주도 없다는 건 거짓말이야. 
우리노의 어설픈 행동을 보면서 생각했어. 만약 고바토라면 조금 더 능숙하게 처리할 텐데. 그게 단순한 콩깍지가 아니라는 걸 오늘밤 고바토는 증명해 줬어." 
"나카마루하고 했던 데이트는 즐거웠어. 여자애들 쇼핑은 제법 전략적이더라. 영화를 고르는 것도, 화제를 고르는 것도 정말 즐거웠어. 하지만 내 진짜 관심사는 이쪽이야. 오늘밤 나누고 있는 이런 대화가, 해결 편이, 몇 배는 두근거려. 말할 기회를 줘서 고마워. 역시 이쪽이..."
말을 신중히 골랐다.
"체온이 올라가."

- 달이 눈부시다.
나는 깨달았다. 일 년이나 떨어져 있었는데도, 아무래도 내가 어렴풋이 도달한 결론과 오사나이가 말하려는 결론은 비슷한 모양이다.

- '소시민'이란 평범해지기 위한 슬로건, 다시는 고립되지 않기 위한 방침. 나는 쓸모없으니까 그냥 내버려두라는 백기.
그런 슬로건을 삼 년이나 내걸고서야 깨달았다. 정말 평범해지고 싶다면, 마지막 순간에 자아를 꾹 눌러 담는 데 그런 슬로건은 필요 없다. 백기를 흔들수록 본심과의 간극이 군소리가 된다. 마음속으로 상대를 우습게 보는 마음이 쌓여서 썩어간다. 
그게 아니다. 필요한 것은 '소시민'의 가면이 아니다. 단 한 사람, 이해해 줄 사람이 곁에 있다면 충분하다.

- "일 년이나 걸려서 겨우 제자리로 돌아왔네."
오사나이가 중얼거렸다.
"누가 내 자의식을 깨부수어주길 기다렸는데 누군가 위에서 자만하지 말라고 말해주기를 기다렸는데. 하지만 이제 끝났어. 오래 기다렸으니까, 이젠 늦었어." 
고개를 들었다. 자연스러운 표정이지만, 오사나이의 얼굴은 조금 굳어 있었다.
"난 고바토가 최고의 상대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분명 언젠가 더 똑똑하고 다정한 사람하고 만날 기회가 있을 거야. 난 그날이 올 거라고 믿어. 
하지만 고바토, 이 동네에 사는 한, 후나도 고등학교에 다니는 한, 백마 탄 왕자님이 내 앞에 나타나기 전에는... 내게는 네가 차선책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아무리 내가 인간적으로 문제가 있어도 여자애한테 끝까지 말하게 하는 건 너무 비겁한 짓이다. 한껏 폼을 잡고, 하지만 누가 봐도 다급하게 손을 펼쳐 오사나이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니, 잠깐만 기다려."
"응."
오사나이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똑같은 의견이야. 오사나이에게 내가 그렇다면 최고의 조합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일단 지금 한때만이라도..."
"응."
"내게는 오사나이가 필요해."
그리고 침묵.

- 오늘밤은 정말 덥다. 아까보다 더 더워진 것 같다.
부웅, 모기가 끈덕지게 날아들었다.
오사나이가 입가를 가렸다.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웃음이 치밀었다. 한번 새어 나오자 더는 막을 수 없었다. 어두운 공원에서 우리는 소리 높여 웃었다.


- 오사나이가 웃음을 그칠 줄 모르고 눈가를 훔쳤다.
"우리노였다면 사귀어달라는 한마디로 끝냈을 이야기를 하려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말을 포개야 하는 걸까? 역시 우리는 생각밖에 할 줄 모르는 걸까?"
나도 계속 웃으며 끄덕거렸지만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고민하고 시행착오를 거쳐서 그저 결락과 보완, 수요와 공급을 위해 함께 있기로 결정했을 뿐이라면.
"그래, 고바토, 곁에 있자. 아마 그리 길지는 않겠지만."

그저 그뿐이라면, 지금 이런 기분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 어딘가 멀리서 또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다. 바람을 타고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슬슬 11시가 되어간다.
밤도 깊었으니 그만 돌아가자고 해야 할까. 이 시간에도 열려 있는 맛있는 케이크 가게로 안내해 달라고 해야 할까.
이건 신중히 고민해야 할 문제다. 정말, 어려운 문제다.

-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여름방학인 8월에는 학원 시간표가 바뀌어 범행 시간도 바뀔 가능성'을 놓쳤다. 이건 내 실수다.
현대사회가 어쩌고 하는 소리는 어려워서 잘 모르겠지만, 히야는 그러다가 우리노가 사건을 기사로 쓰는 게 재미있어 방화를 되풀이하게 된다. 게다가 그 방화는 우리노가 쓰는 기사의 내용을 따르고 있었다. 우리노가 '방재 계획'을 토대로 기사를 쓰고 당당히 발표한다. 히야는 그 기사를 보고 불을 지르고, 아마 '역시 우리노, 또 맞혔네!'라고 말했을 것이다.
말이 좋아 "법석을 떠는 게 우스웠다"지, 히야는 우리노를 완전히 바보 취급하며 조롱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노가 찾아낸 해머 자국도 히야가 우리노를 위해 일부러 만들어낸 것일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히야는 타인이 쓴 가설에 의존해 범행 계획을 세우는, 스트레스 발산조차 자율적으로 하지 못하는 가여운 범죄자였는지도 모른다.
아마 둘 다 맞을 것이다.

- 우리노는 오래도록 친구에게 바보 취급을 당했고, 여름방학에는 연인이라고 믿었던 소녀에게 호된 소리를 듣고, 이번달에는 부하라고 생각했던 동급생에게 기사를 통해 비난을 받았다. 지금쯤 이 세상은 어둠 속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기는 유능한 인재라고 믿었을 텐데. 우리노의 향후를 생각하니 아무래도 안쓰러웠다. 

- 벽시계를 보고 슬슬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에 들고 있던 교내 신문을 가방에 넣었다. 창밖은 아직 밝다. 바람에는 가을 기운이 묻어나는데 해는 아직도 길다.
복도로 나갔다. 학교에는 아직 남아 있는 학생들이 많아 여러 아이들과 스쳐 지나갔다. 대부분 모르는 얼굴이지만 딱 한 사람, 눈이 마주친 순간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던지는 소녀가 있었다. 요시구치. 
이번 사건에서 요시구치의 소문 수집 능력은 큰 도움이 되었다. 학교에서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 보기에는 평범한 여학생인데 정말 얕잡아 볼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얕잡아볼 수 없는 인재는 의외로 사방에 널려 있을지도 모른다. 이 작은 고등학교 안에서 유능한 인재는 성과를 내고 무능한 인재는 사라져 간다. 왠지 내 눈에도 세상이 수라장처럼 보이기 시작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요시구치는 이미 나와 오사나이의 재결합을 알고 있는 것이다.

- 스쳐 지나갈 때 요시구치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제법이네!"
요시구치 눈에는 내가 우리노에게서 오사나이를 빼앗은 승리자처럼 보이겠지. 전에는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와 오사나이는 단순히 상부상조하는 사이였으니 그런 소문은 오히려 유리하기까지 했다. 
지금은...
그런 오해는 되도록 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 그런 생각을 하면서 뺨을 긁적거리며 계단을 내려가자 중앙현관에서 오사나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벽에 기대 심심한 기색으로 다리를 흔들고 있기에 얼른 달려갔다.
"미안. 기다렸지?"
오사나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나, 기다리는 건 좋아하거든."
"오늘은 무슨 일이야?"
문자를 받고 왔지만 무슨 용건인지는 모른다. 대체로 오사나이의 문자는 생략이 심하다. 오늘 문자는 "중앙 4시?"였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으니 괜찮지만.
"응, 벚꽃 암자에서 가을철 한정 구리킨톤을 팔기 시작했어. 하지만 그 가게는 혼자 가면 카운터 자리로 안내하잖아? 난 박스석에서 느긋하게 즐기고 싶어..."
나는 머릿수 때우기라는 말인가.
뭐 이것도 오사나이답다.

- 전통찻집 벚꽃 암자에는 한 번 가보았다. 작년 일이다. 그때도 오사나이와 함께 갔다. 언제였나, 나카마루를 데려가려고 한 적이 있었다. 이 부근을 산책했을 때였다. 그때는 어째서 가게에 들어가지 않았더라? 이제는 기억도 잘 안 난다.

- 낡은 빌딩 1층에 있는 벚꽃 암자는 칠기와 주단이 연상되는 검은색과 붉은색을 기조로 꾸며져 있다. 둘이서 가자 예상대로 웨이트리스가 "저쪽 자리로"하고 박스석으로 안내해 주었다.
벽에 "가을철 한정 구리킨톤 판매 개시"라는 종이가 붙어있다. 이게 그건가 생각하고 있는데 오사나이는 메뉴를 손에 들고 집중해서 쳐다보고 있었다. 어찌나 심각한지 무슨 암호라도 적혀 있는 줄 알았는데, 겨우 손에서 떼고 한숨과 함께 한다는 소리가.
"아이스크림 세트는 다음에 먹어야지."
혼잣말이다. 오사나이라면 구리킨톤과 아이스크림 둘 다 태연히 먹어치울 수 있을 텐데, 무슨 걱정이지? 혹시 오사나이만의 미학이 있는 걸까?

- 소매가 있는 앞치마를 입은 웨이트리스에게 오사나이가 먼저 주문했다.
"구리킨톤하고 말차 세트 주세요."
"저도 같은 걸로."
한정 상품이라 그런지 구리킨톤 세트는 가격이 상당했다. 뭐, 가끔은 괜찮겠지.

- 이윽고 쟁반에 얹힌 구리킨톤 세트가 나왔다. 말차가 담긴 찻잔은 분명 시로시노라고 부르는 도자기였던 것 같은데, 사각 칠기 접시에 얌전히 놓인 구리킨톤 두 알, 차분한 노란색으로 알이 굵다. 질끈 묶은 찻수건처럼 맞물린 주름이 앙증맞다. 흑문자 나무로 만든 화과자용 이쑤시개가 함께 나왔다. 확실히 스푼이나 포크보다 이쪽이 운치가 있다.

- "아아, 이걸... 얼마나 기다렸는지."
그렇게 사막에서 물 한 방울 얻은 것처럼 만감을 표현하지 않아도.
"그렇게 기다렸어?"
"응. 전에 말했을 때부터 계속 먹고 싶었어."

"전에?"
구리킨톤 얘기를 한 적이 있었나?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쑤시개를 든 오사나이가 손을 뚝 멈췄다.
"아, 미안. 얘기한 적 없네."
아하.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들은 건 우리노란 말이렷다.
전에 나카마루가 카페를 잘 아는 내게 화낸 적이 있었다. 무신경하다고 했다. 직접 당해보니 화가 날 정도는 아니지만 은근히 찝찝하기는 하다.

- 나는 일단 말차를 마셨다. 오사나이는 고대했다는 듯이 구리킨톤을 먼저 먹었다. 한 알을 반으로 잘라, 이쑤시개로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
황홀한 표정이다. 지금이라면 공격할 수 있겠는데. 그런 위험한 생각이 들 정도로 무방비한 웃음이다.
나도 똑같이 따라서 한 알을 반으로 잘라 입에 넣었다.
아아, 정말... 
훌륭하다. 밤의 풍미가 입안에 확 퍼졌다. 톈진 단밤은 흔히 먹지만, 이 구리킨톤을 먹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평소 먹던 톈진 단밤의 맛이 밋밋하다는 걸 깨달았다. 강렬하고 묵직한 맛이 아니라 굳이 표현하자면 아련한 풍미인데도 자연히 미소가 퍼질 정도로 맛있다. 
단맛은 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달지 않은 것도 아니다. 어찌나 매끄러운지 입속에서 도르르 굴리고 싶을 정도다. 촉촉한데 입에 달라붙지 않고, 사르르 부서지는데 껄끄러운 느낌이 전혀 없다. 일반적인 서양과자와 달리 지방분이 없어서 그런지 텁텁한 느낌도 전혀 없었다. 
나는 어쩌면 원래 서양과자보다 화과자가 더 입에 맞는지도 모른다. 오사나이가 알려준 디저트 중에서도 이건 으뜸을 다투는 일품이다.

- "굉장해..."
오사나이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말차를 마셨다. 그리고 겨우 의식을 되찾은 것처럼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이렇게 맛있었나?"
"평소보다 더 맛있어?"
"응. 올해는 풍작인가 봐. 이제부터 제철이니까 더 맛있어질지도."
남은 구리킨톤 반쪽을 다시 반으로 잘라 음미하고 계신다. 그 심정은 이해한다. 통째로 꿀꺽 삼키기에는 아깝다.

- 이윽고 내 접시에서도 오사나이의 접시에서도 한 알이 사라지고 한 알이 남았다. 동시에 찻잔을 들었다.
나는 보았다. 찰나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사나이가 내 구리킨톤을 날카롭게 쏘아보는 것을. 노리고 있다. 만약 내가 지금 화장실에라도 간다면 돌아와서 빈 접시를 보게 될 것이다. 슬그머니 쟁반을 끌어당기자 그것만으로도 나의 견제는 전달되었다. 오사나이가 작은 한숨을 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 "고바토, 구리킨톤은 어떻게 만드는지 알아?"
전에 텔레비전 정월 특집인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가물가물한 기억으로 말했다.
"설탕물에 삶는 거 아냐?"
"그건 정월 잔치 음식이고..."
또 사냥감을 노리는 늑대의 눈으로 내 구리킨톤을 보고 있다.
"그게 삶은 단밤처럼 보여?"
듣고 보니 이건 그냥 밤을 삶은 게 아니다. 빻아서 찻수건 모양으로 반죽한 것이다. 하지만...
"똑같이 생긴 화과자를 무라마쓰야에서 구리차킨이라는 이름으로 팔았던 것 같은데."
그렇게 중얼거렸더니 오사나이가 대뜸 반박했다.
"그건 그거. 이건 이거."
똑같은 거 아닌가... 뭐, 이름이 다양한가 보다.

- "이건 삶은 밤을 잘 빻아서 설탕을 넣고 약한 불로 덖은 다음 밤에서 나오는 물기만으로 반죽해서 삼베로 싸 모양을 내어 만드는 거야. 어때, 간단하지?"
"듣기에는."
"정말 간단해. 밤만 있으면 집에서도 만들 수 있어. 하지만..."
또, 또, 내 접시를 보고 있다. 아직 자기 접시에도 남아 있는데!
"이렇게 맛있게는 안 돼. 뭔가 비결이 있나 봐."
뭔가 있기는 하겠지. 단순히 밤과 설탕의 품질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다른 첨가물이 있다면 일반인들은 알 길이 없다.

- "그럼 마롱글라세 만드는 법은 알아?"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마롱글라세가 뭔데?"
이 대답은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말문이 막힌 기색으로 오사나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르쳐주었다.
"음. 서양의 구리킨톤이라고나 할까."

- "밤을 그대로 이용하는 디저트라는 점에서는 비슷해. 하지만 구리킨톤하고는 만드는 법이 완전히 다르거든."
나는 잠자코 뒷말을 기다렸다. 달콤한 디저트 이야기를 할 때, 오사나이는 행복을 느낀다. 방해할 수는 없다.
"밤을 삶아서 껍질을 벗기고 시럽에 재워. 그러면 설탕이 밤을 감싸. 그러면 또 조금 더 진한 시럽에 재워, 설탕 위에 설탕이 붙지. 또 조금 더 진한 시럽에 재워.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하는 거야." 
일본에서도 검은콩을 삶아서 그렇게 조금씩 진한 설탕물에 재우는 간식이 있지 않나? 정월 요리를 해본 적이 없어 장담은 못 하겠지만.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표면의 설탕옷이 아니야. 그건 그냥 설탕이지. 하지만 그렇게 옷을 입혀가다 보면."
시선이 얽혔다.
"밤 자체가 어느새 달콤해져."
정말?

- 나도 찻잔을 내려놓았다.
"밤이 꼭 달아야만 해?"
"꼭 그럴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역시 떫잖아. 어쩌면 그 맛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누구나 먹기 쉽도록 단맛을 가미하는 거구나."
"응."

- 오호라.
그냥 먹기에는 떫은 밤을 누구나 사랑하는 디저트로 만드는 방법.
삶아서 곱게 빻아 반죽해서, 설탕을 넣어 덖은 게 구리킨톤. 조금씩 진한 시럽에 재워 어느새 알맹이까지 달콤해지는 게 마롱글라세.

- 오사나이가 어쩐지 울적한 표정으로 물었다.
"고바토는 어느 게 좋아?"
하고 싶은 말은 알겠는데, 난처하게도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다. 살짝 익살을 떨며 말했다.
"마롱글라세는 먹어보질 못해서."
오사나이는 내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는지 생긋 웃었다. 

"다음에 먹게 해 줄게."
그리고 이쑤시개를 들어 두 번째 구리킨톤을 반으로 갈랐다. 구리킨톤은 반쪽이 났지만 접시 위에서 쓰러지지 않았다.

- 잘 알겠다. 그대로는 떫은 자칭 소시민이 사람들 사이에 녹아들기 위한 방법.
시럽처럼 달콤한 연인 곁에서, 설탕옷을 겹쳐 입어 자기도 달콤해지려는 것도 한 가지 방법. 오사나이는 그것을 기대했다고 확실히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결국 그 방법은 실패했다. 마롱글라세 방식은 실패였다.
우리는 한번 삶아서 빻기 전에는 변하지 못한다. 몇 번이나 빻아서 체로 걸러냈을 텐데도 아직 거칠었던 모양이다.
사랑스러운 구리킨톤. 용케 이토록 맛있게 변하는구나.

- 그러고 보니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마침 좋은 기회니 지금 말해버리자.
"그런데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응. 뭔데?"
둘로 갈라진 구리킨톤을 다시 네 조각으로 가르려고 이쑤시개를 살짝 들고 있던 오사나이. 하필 지금 말을 걸다니, 노골적으로 불만스러운 표정이다. 방해해서 미안해, 빨리 끝낼게.

- "응. 저번에 가미노마치 고가 밑에 가봤어. 그래서 전철이 올 때까지 기다렸어. 그랬더니 시끄럽긴 했는데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어."
"다행이네. 시끄러운 걸 잘 참는 사람은 대학 가서 자취를 해도 방값이 덜 든대."
"그렇겠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하숙집 방값이 아니라, 그날 밤 일이야."
이쑤시개를 든 채로 오사나이가 눈길만 내 쪽으로 돌렸다. 

"그날 밤?"
"응. 5월 방화 사건이 있었던 밤."
오사나이는 바로 구리킨톤으로 시선을 돌렸다.

- "우리노는 그날 오사나이가 가미노마치에 있었다는 걸 논증했어. 오사나이는 사건 발생을 금요일로 착각했지. 현장에는 고장 난 시계가 있었고, 그걸 보면 요일을 착각하게 돼. 그러니까 오사나이는 현장에 있었던 셈이지. 오사나이는 우리노를 시시하다고 평가했고, 나도 우리노를 높게 평가하지는 않아. 하지만 요행일지 몰라도 그 시계 추리만큼은 나쁘지 않았어. 실제로 오사나이는 거기에 있었으니까."
오사나이는 이쑤시개를 신중하게 눌렀다. 정확하게 네 조각으로 잘린 구리킨톤이 꽃잎처럼 활짝 벌어졌다.

- "고장난 시계로 논증이 끝났으니 우리노는 전철 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 하지만... 전철 소리가 났으니까 선로 옆에 있었다. 사건 현장은 선로 옆. 그러니까 오사나이는 사건 현장에 있었다. 만약 시계가 멈춘 줄 몰랐다면 우리노는 아마 그렇게 주장했을 거야."
오사나이는 네 조각으로 잘린 구리킨톤 중 한 조각을 이쑤시개로 푹 찔러 가만히 입에 넣었다.
"다시 말해 우리노는 전화 너머로 들린 전철 소리라는 유력한 단서가 있었어. 하지만 실제로 전철은 그렇게 시끄럽지 않았지. 사소한 일이지만 그게 조금 마음에 걸렸어."

- "하지만 그럼 새로운 의문이 생겨. 오사나이는 무슨 목적으로 휴대전화 마이크에 테이프레코더를 갖다 댔을까?"
밤의 맛을 음미했는지 오사나이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테이프레코더는 이제 고물이야."
작년 여름방학 때는 테이프레코더도 썼으면서...
뭐 그건 넘어가자.
"이유는 '오사나이가 가미노마치에 있다고 우리노가 믿도록 만들기 위해서'지?"
또 대답이 없다. 오사나이는 먹기 시작하면 속도가 빠르니까. 또 한 조각을 입에 쏙 넣고 있다.
나는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 천천히 즐길 생각이다. 지금은 말차로 목만 축였다.

- 연기가 조금 과했나 보다. 슬쩍 올려다보는 오사나이의 시선이 유난히 차갑다.
헛기침.
"다시 말해 전화로 들은 소리는 우리노가 오사나이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만들기 위한 유도 장치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어."
"맛있어..."
"오사나이는 어떤 이유로 우리노에게서 '범인은 바로 너!'라는 말을 끌어내려했어. 그런 다음 실제로 여름방학 때 그런 것처럼 모질게 반박하고 싶었지. 그건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노의 자존심을 박살내는 행위야. 우리노의 자존심은 실력이 수반되지 않는 반쪽짜리였어. 언젠가 필연적으로 큰코다쳤겠지. 적당한 충고였다면 오히려 다정한 교훈이 되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오사나이의 행동은 도가 지나쳤어. 그냥 충고가 아니었어."

- 최고의 디저트와, 즐겁고 스릴 넘치는 대화.
이런 방과 후에는 역시 근사하다는 표현이 걸맞다.
나는 오사나이를 믿는다. 오사나이가 신문부 뒤에서 암약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 그것은 무언가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했다. 오사나이는 이렇게 설명했다.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뒤에서 손을 써서 우리노를 도왔다.
아마 사실이겠지. 하지만...
"사건을 정리해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오사나이의 행동은 5월을 경계로 바뀌었어. 그때까지는 그림자처럼 우리노를 도왔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5월 이후에는 변했어. 우리노가 오사나이를 고발했을 때, 논거는 전부 5월 이후에 있었던 일들 뿐이었어."
세 번째 조각을 입에 넣은 오사나이가 이윽고 고개를 들어내 눈을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내 말의 어느 부분을 긍정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 "5월, 아니면 4월에 오사나이는 마음이 바뀌었어. 그리고 우리노에게 복수할 준비를 했어. 그건 언젠가 빗나간 추리를 하도록 만드는 거였지."
내가 궁금한 건 하나뿐이다. 나는 몸을 살짝 내밀고 물었다.
"가르쳐줘... 우리노는 뭘 잘못한 거야?"
오사나이의 사각 접시에는 구리킨톤이 4분의 1조각 남아있다. 그 마지막 한 조각에 이쑤시개를 뻗던 오사나이가 손을 멈추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손을 거두고, 시선을 들었다.
시선 끝에 목표물은 하나. 내 구리킨톤.
말없이 교섭을 강요하고 있다. 아차, 이야기할 타이밍을 잘못 짚었다. 거래 재료를 남겨두고 요구를 하다니 내가 서툴렀다. 나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손길로 사각 접시를 조용히 내밀었다.
거기에 만족했는지 오사나이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 "고바토라면 분명 이해해 줄 줄 알았어."
내 구리킨톤을 거두어갔다.
"맞아. 난 고등학교에 들어온 뒤로 처음으로 진정한 복수를 했어. 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 사건은 기껏해야 분풀이 정도였고, 여름철 한정 트로피컬 파르페 사건은 방어 수단이었어. 복수란 그런 게 아니야. 복수란 상대에게 패배감을 심어주고 자기 행동이 어리석었다는 걸 깨닫게 해서 본인이 진심으로 무력하다고 믿게 만드는 거야. 
난 내가 거짓말쟁이에 나쁜 아이라는 걸 알아. 이런 짓까지 하는 건 나도 내키지 않아. 이번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 거야. 평소에는 이런 짓 안 해."
내게는 나만의 미학이 있다. 오사나이에게는 오사나이만의 미학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다시 함께 행동하더라도 서로의 미학을 이해하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할 수 있을까? 졸업까지는, 앞으로 반년.

- "우리노는 대체 어떤 용서받지 못할 짓을 한 거야?"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짓이었어. 뭐냐면..."
손대지 않은 구리킨톤을 앞에 두고, 오사나이가 살포시 웃었다.
"나한테, 멋대로 키스하려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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