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민혜련] 타로 스퀘어 - 22장의 아르칸에 담긴 역사와 미래, 인간과 우주의 이야기

일루젼 2024. 6. 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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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민혜련

출판 : 의미와재미
출간 : 2020.01.30


       

어디선가 이런 내용을 접한 적이 있다. 다이어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후, 과거 자신이 입던 옷을 몸에 대어보며 '이만큼의 나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생각하게 되었다는. 

 

최근의 내가 그러하다. 정신적 다이어트라고 해도 좋겠다. 치워도 치워도 끊임없이 솟아나는 -사실 그간 외면해오고 있었을 뿐인- 것들을 분류·선택하며 오래도록 묵힌 것들과 다시금 마주하는 중이다. 그것들 중에서는 그때는 왜 이런 것들을 모았을까 싶은 것도 있고, 이런 것이 있었나 싶은 것도 있지만, 때로는 여전히 반가운 것들도 있다. 

 

<타로 스퀘어>는 그 중간 어느 지점쯤에 위치하는 책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타로와 신비학에 관한 내용들은 완전히 검증된 바는 아니니 참고사항으로 생각하고 즐겁게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사실, 정답이랄 게 존재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보니 백인백색이 될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럼에도 가지를 뻗어나가기 좋게 정리된 내용들과 생각할 거리들이 많이 담긴 책이라고 본다.

 

생각해 보면 어떤 책이든 '읽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적인 일이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 권씩 쏟아져 나오는 가없는 책들 중에, 어떤 한 권이 어떤 경로에서든 한 개인의 손에 들어가 끝까지 '읽힌'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읽게 되었다'면 나름대로 인연이 있었던 책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라고 좋게 넘어가기에는 등 뒤에 가득 쌓인 책들이 너무나도 무겁지만) 

 

개인적으로는 초중반부가 훨씬 좋았다.        

끝.

   


   

 

- 이는 인간 존재와 우주라는 같은 주제를 두고 다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 과학 또한 출발은 인생을, 우주를 사유하던 철학에서부터였다. 고대의 기라성 같던 과학자들은 철학자였고, 과학은 인문학의 일부였다. 근대에 철학과 과학이 완전히 다른 길을 가기 전까지도 과학자와 철학자, 신학자, 인문학자 사이의 구분은 없었다. 다만 개개인의 정신적 특성이 있었을 뿐이다. 좀 더 분석적인 정신 Analysis과 좀 더 직관적인 정신 Intuitus의 차이라고나 할까? 만유인력의 법칙과 관성의 법칙 등을 수학적으로 정교하게 설명한 뉴턴이나, 행성의 운동을 정리한 케플러 등 이름만으로도 존경심이 우러나는 위대한 과학자들이 사실은 사제이자 그 시대의 명성 있는 점성술사였다는 사실을 아는가? 달과 화성에 우주선을 보내며 법석을 떨기 전까지 우주는 미신과 과학 사이를 오가며 인간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 데카르트의 '코키토 에르고 숨 Cogito Ergo Sum'이란 명제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Homo Sapiens Sapiens라는 지성체 知性體의 실존에 대한 회의였다. 주체로서 세계를 의식하는 '나' 외에는 그 아무런 진실도 알 수 없다는 절망 끝에 나온 회의 말이다. 인간은 자신은 물론이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알고', '소유'하고 있다고 굳게 믿으며 살고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또한 착각일 뿐이다.  

- 기독교 교리에 부합되지 않는 모든 사상을 금지했던 천 년의 암흑을 열고 아랍세계에서 보존하고 있던 저서들이 유럽으로 물밀듯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철학과 예술, 문학뿐 아니라 천문학, 수학 등 바빌로니아나 중국, 인도로부터의 위대한 가르침이 유럽의 정신을 깨웠다.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 Renaissance의 정신이다.

- 서구의 정치, 사회, 종교 등 모든 세계관이 송두리째 뒤바뀌기 시작했다. 아랍을 통해 들어온 중국의 나침반이나 화약, 지도 등이 없었으면 과연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중국의 종이가 마침 그때 전해지지 않았다면 과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빛을 발할 수 있었을까? 이 시대에 수도사들이 양피지에 손으로 일일이 베껴서 만들던 책은 어마어마한 고가여서 신분이 높은 사람만 소유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귀족이나 엘리트 사회에서 쓰던 언어는 라틴어였으니, 문맹에 가까웠던 절대다수의 민중에게 책은 그림의 떡이었고, 지식은 권력자의 전유물이었다. 1450년 구텐베르크는 납 활자와 와인 추출 기계에서 착안한 압착기술로 인쇄술을 완성했다. 여기에 일이 되려니까 값싸게 책을 만들 수 있는 종이가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것이다! 이는 현대의 인터넷 혁명에 버금갈 정도의 정보 확산으로 지식의 평준화를 가져왔다. 

- 이슬람으로부터 들어온 저서에는 점성술과 수비학, 연금술 등 수많은 고대의 비전도 함께 들어있었다. 때마침 1453년 로마의 마지막 숨통을 잇고 있던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투르크의 이슬람 제국에 멸망,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었고 수많은 학자가 이탈리아반도로 삶의 터전을 옮겨갔다. 이들이 인문주의자라는 새로운 지식 엘리트층과 네트워크를 구축하면서 상상을 초월한 인재풀이 형성되었다. 종교개혁의 기폭제가 된 이런 지적 움직임 한쪽에는 점성술이나 연금술에 기초한 '신비주의' 철학에 접근한 지성인이 많았다. 이들 중에는 로저 베이컨이나 성 토마스 아퀴나스, 아베로에스, 에크하르트처럼 쟁쟁한 학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 활자를 통한 매체의 발달은 상상을 초월한 혁명을 가져왔다. 20세기말 아날로그에서 디지털의 시대로 넘어온 것 이상의 충격이었을 것이다. 인쇄 미디어는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지리적으로 아무리 멀어도 서신으로 의견을 교환하고, 저서나 팸플릿으로 선동하여 여론을 조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슬람 세계로부터 들어오는 각종 책 가운데는 초기 헬라어나 콥트어로 쓰인 성경 원전과 이단적인 내용이 섞여 있었다. 중세 내내 교황청의 입맛에 맞는 내용만 추려서 가르치던 교리와는 상반된 것들이 너무 많았다. 이제 더 이상 신과 인간 사이에 중간자 역할은 필요치 않다고 느낀 개혁파는 성경의 말씀으로 돌아가 정직하게 일해서 번 돈으로 현재를 열심히 사는 것이 천국에 가는 길이라 믿기 시작한 것이다. 

- '개혁'이라는 폭발적인 사상의 분출 와중에 '마르세유'라는 새로운 타로가 출현한 것은 확실하다. 아득한 고대의 역사와 상징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전문가들을 자극하면서 미스터리한 성격의 옷을 입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한 독일 화가이자 수학자 알브레히트 뒤러는 타로의 비밀스러운 상징을 흡수하여 자신의 작품에 재현했다. 그래서 신화학, 신지학, 신비적 연금술 영역의 강력한 교감을 그의 작품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 타로가 최초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1375년, 이탈리아의 로마 근교 비테르보라는 마을에서부터다. 수면 위로 떠올랐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문서상의 기록이 발견된 연대라는 의미다. 하일 Hayl이라는 아랍인이 카드를 가져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일'은 아랍 이름이지만 템플기사단의 박해 때 마지막 남은 자들이 터키 남부로 피신해 갔으므로 그가 이들의 후예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 이후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여기저기에서 파편과 같은 기록이 나타날 뿐이다. 이 중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타로는 1392년에 프랑스의 왕 샤를 6세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주문했던 것으로, 이탈리아 북부에서 제작되었다. 현재 18장의 카드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하나하나 손으로 직접 그렸으며, 테두리는 꽃과 리본의 모티프에 얇은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중 16장이 현재 마르세유 타로의 메이저 카드에 해당하고, 한 장이 마이너 카드다. 이로써 마이너 카드도 타로가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 한 장의 카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상징과는 전혀 달라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 이후 15세기가 되며 이탈리아 밀라노의 공작이던 비스콘티 스포르자 가문을 위해 만든 타로들이 전해진다. 비스콘티 스포르자 판이라 불리는 78장 중 74장이 전해지며 이 중 24장은 후에 복원된 것이다. 비스콘티 가문은 아들의 대가 끊겨 외동딸을 용병 대장이던 프란체스코 스포르자와 혼인시켰는데, 결국 이 사위가 권력을 승계받아 스포르자 가문의 지배 아래 들어간다. 이후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예술가들을 후원하며 밀라노의 찬란한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 이탈리아와 국경을 마주한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나 랑그도크 지방은 중세부터 신비에 잠겨있는 지역이다. 2000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예수의 죽음 이후, 열두 제자와 가족 사이에 예수의 정통성에 관한 기득권의 싸움이 있었고, 여기에서 제자들이 승리했다는 설이 있다. 가설이건 진실이건, 열두 제자 중 제1 제자인 베드로는 바울을 만나 공동체 시스템을 구축하고 온 유럽에 선교 활동을 펼쳐 지금의 기독교를 만들었다. 베드로는 초대 교황이 되었고 로마에서 순교하여 교회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는 우리 모두 알고 있는 기독교 주류의 역사다. 그럼 역사의 뒤로 사라진 가족, 즉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 형제자매는 어찌 되었을까? 그들이 박해를 피해 배를 타고 망명한 곳이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던 프랑스 마르세유라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그래서 프랑스 남부는 중세 내내 교황청의 눈엣가시였다. 왜냐, 교단에서 그토록 없애고 싶은 신의 아들 예수를 둘러싼 인간적인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배 The Holy Grail 이야기도 유래한다. 예수의 가족이 프랑스로 가지고 왔다는 '예수의 피를 받은 신성한 컵'이 무엇인지,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 질문은 지금까지도 서양인들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바그너의 오페라 <페르치팔 Parsifal>, <로엔그린 Lohengrin>, 소설 <다빈치 코드>, <원탁의 기사> 등의 주제가 되었다. 

- 이탈리아에서 전해진 타로는 프랑스 남부의 신비주의자들이 그 구조를 완성했다. 마르세유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 도시에서 만들어졌다는 이유보다는 예수 시대의 전설이 주는 상징성 때문이다. 지중해변의 랑그도크와 프로방스 지방은 정통 가톨릭에 반한 이원론적인 카타르 학파가 세를 이루던 곳이다. 남부의 유력한 영주들이 지지하던 카타르 파는 템플리어의 주축을 이루기도 했다. 이들은 정통 기독교 사상과는 달리 유일신 하느님만이 최고가 아니라 이 세상은 밝음과 어둠, 즉 선과 악이 동일한 에너지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는 유대 신비주의인 카발라나 영지주의 Gnosticism적인 사상과 통한다. 게다가 이들은 경건한 기독교도였지만, 예수가 신이라기보다는 인간이었다고 믿었다. 권력을 잡은 주류 기독교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이단이었다. 십자군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프랑스 남부의 대영주들과 템플기사단(성전기사단)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지만, 이들의 힘이 점점 강해지며 남프랑스가 거의 프랑스에서 떨어져 나갈 정도가 되자, 프랑스 국왕과 교황청은 덜컥 겁이 났다. 결국 카타르파와 템플기사단을 모두 싸잡아 이단으로 몰기에 이른다. 그냥 주동자들만 종교재판에 회부하는 정도가 아니라, 왜 그렇게 했을까 의문이 남을 정도로 마지막 한 명까지 씨를 말리는 역사상 유례없는 내전을 치른 것이다. 카타르파 템플기사단은 프랑스 남부 알비 Albi 근처에서 마지막 힘을 다해 교황과 왕의 군대에 저항하다 함락된다. 그토록 상식 밖으로 집요하게 가톨릭 주류파가 이들을 멸족시키려 했던 이유나, 이들이 목숨을 걸고 끝까지 지키려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아직도 소설의 주제가 되곤 한다. 

- 간신히 살아남아 탈출한 카타르파 템플리어들은 영국이나 소아시아 등으로 흩어져 자신들이 지키고자 했던 사상을 암호나 상징으로 남겼다고 한다. 이렇게 떠돌던 신비주의 사상들이 어떤 경로인지는 모르지만 여러 학자들을 통해 어렴풋한 그림자로 명맥을 유지했다. 이들을 사로잡은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기라성 같은 학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당대를 주름잡던 합리적인 접근법과는 동떨어진 비밀스러운 지식의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직접 타로를 언급하거나 그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사상 속에 고대의 비전이라는 후광과 상징이 비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 프랑스에서는 마르세유 타로를 노스트라다무스(1503-1566) 타로라고도 한다. 노스트라다무스는 마법사로 낙인찍혀 종교재판에서 처형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상징적 그림과 난해한 암호로 예언서를 저술했는데, 여기에 타로의 이미지들이 확연히 들어있다. 

 

- 유대인인 노스트라다무스 마르세유 근교인 생레미 드 프로방스에서 태어났고, 근처의 몽펠리에 대학에서 공부한 남프랑스 토박이다. 노스트라다무스의 할아버지는 독실한 유대교 카발라 신비주의 학자였다. 대학에서 약학과 의학을 공부한 그는 주로 약종상(일종의 약국)을 운영했고, 의술 자문도 했는데 그의 처방이 잘 들어 명성을 얻었다. 당시 의학이나 약학은 우리의 한의학처럼 인간과 우주의 기를 연결하는 일종의 철학적인 면이 강했다. 점성술에 탁월한 지식을 가진 그는 개인의 별자리와 체질에 따라 처방했던 것이다. 

- 이후 점성술을 바탕으로 예언적인 저술을 했는데 당시 프랑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의 부름으로 1555년부터 왕실의 점성술가로 일하게 된다. 카트린 드 메디치는 이탈리아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딸로 프랑스 왕가로 시집와 국왕의 바람기와 외국인이라는 따돌림을 모두 극복하고 아들 셋을 국왕의 자리에 앉혔으며, 수렴청정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장악했던 여걸이었다. 메디치 가문이 약종상에서 시작해 재벌이 된 가문이니, 카트린 드 메디치가 노스트라다무스를 아끼고 신뢰한 이유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카트린 드 메디치는 당시 종교개혁으로 신교와 구교가 유혈 낭자한 싸움을 하던 시대, 가톨릭의 수장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노스트라다무스는 왕비에게 한 예언을 절대로 문서로 남기지 않았다. 

- 영국의 뛰어난 수학자이자, 과학자였던 존 디 John Dee(1527-1608)도 점성술과 신비주의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여왕의 점성술사가 되어 왕실의 중대사에 관여하였는데, 특히 당시 영국이 신대륙을 향해 탐험에 나설 때 조언을 하고 항해 기술에 관한 책을 쓰기도 하였다. 그의 저서 곳곳에서 신비한 가르침의 흔적이 보인다. 합스부르크 왕실의 루돌프 2세는 케플러나 튀코 브라헤, 알브레히트 뒤러 등 르네상스 시대의 기라성 같은 학자들을 후원한 것으로 유명한데, 사실 이들 역시 점성술의 대가였다.

- 물리학자이던 미카엘 마이어 Michael Maier (1569-1622)는 루돌프 2세의 지원으로 연금술을 연구하였다. 다양한 지식을 가졌던 그는 아랍어로 된 유클리드 기하학을 번역하기도 했고,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비율 이론에 관한 저술을 쓰기도 하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성술과 카발라 등의 신비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학문에 깊이 몰두했다. 그의 저서들에 언급된 '신비학적 연금술의 체계'는 타로의 신비로운 가르침과 흡사하다.

- 신학자이던 야코프 뵈메 Jakob Bohme (1575-1624)나 엘리자베스 1세 치하 명문가의 자손으로 의사였던 로버트 플러드 Robert Fludd(1574-1637) 등도 과학적인 태도를 거부하고 신비주의에 몰두하였다. 특히 로버트 플러드는 중세 말 종교재판을 피해 영국으로 피신했던 템플기사단 Knights Templars의 후신인 장미십자회 단원이 되었다. 플러드 저술의 대부분은 과학적 경향과는 동떨어진 17세기 신비주의 경향의 극치를 드러낸다. 유대교의 신비철학, 연금술, 점성술 등에 심취했고, 신이 자신의 이미지를 투영한 인간과 세계의 상징을 연구했다. 플러드는 생전에 이런 신비주의적인 사상 때문에 마술사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세기 영국의 평론가 토머스 드 퀸시는 플러드의 모호한 저작들을 프리메이슨의 상징적 이념의 주요 원천으로 보았다. 

- 현대인이 타로와 친밀해진 것은 18세기의 프랑스 학자 앙투안 쿠르드 제블랭 Antoine Court de Gébelin의 덕이다. 여러 방면의 고대 지식에 통달한 그는 <고대세계와 현대세계의 비교 분석>(1782)이란 책을 출판하였다. 그는 어느 날 지인의 모임에 갔다가 카드를 다루고 있는 한 사람을 보게 된다. 그는 이 카드를 보자마자 고대 이집트 신관들이 비밀로 전수하던 지식의 후광이 있음을 직감하고는 각 카드를 연구하여 주석을 달았다. 이것이 현재 마르세유 타로라 불리는 22개의 메이저 카드로, 당시 목판으로 찍은 것이다. 이후 많은 학자가 자신의 해설을 내놓았고, 여러 장인이 타로를 다시 그렸다. 타로는 한편으로는 예언적으로 사용되며 수많은 새로운 카드들에 영감을 주었다. 우리에게 친숙한 트럼프도 마르세유 타로로부터 온 것이다. 

- 나는 여전히 타로가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모르지만, 인간의 내면에 깊이 침잠한 무의식을 깨우는 고대의 상징임을 믿는다. 나 역시 과학적 정신을 선호하지만, 결코 신비주의적인 면을 무시할 수 없다. 세상의 진리는 아직 아무도 모르고, 과학조차도 현재의 문명에서만 참이지 시간이 가면 또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다. 고대부터 인간의 삶 한 부분을 그토록 오래도록 지배했던 사상에는 분명 무언가가 있고, 그 안에는 인간의 염원과 에너지가 깃들여있기 때문이다.
 
- 사용한 기술 그리고 여기에 불어넣은 종교적인 메시지 그리고 그 밑의 미사 집전 의식. 모든 것이 현대 기술로도 다시 재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공학적 비밀은 일개 동네 석공들의 작품이 아니다. 시차가 수십 년이건 수백 년이건 누군가 천재적인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듯 일사불란하게 꽃피었기 때문이다.

- 타로가 중세에 돌을 다루던 장인들과 그 후견인들의 신비한 사상을 비밀리에 전수하기 위한 발명품일 수도 있다는 견해는 프랑스의 수많은 성당 건축물을 연구한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파리 남서쪽에 자리한 샤르트르 Chartres라는 도시에 프랑스 고딕 양식의 최고봉이라 일컫는 성당이 있다. 1240년경에 완성한 샤르트르 대성당은 전면에 수천, 수만 개의 조각품이 새겨져 있는데, 가까이서 하나씩 뜯어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는 파리의 노트르담 사원이나 다른 고딕 성당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다빈치 코드>류의 소설과 중세의 숨겨진 비밀을 찾는 역사가들,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늘 관심의 대상이었다. 기독교적이라 하기에는 너무 괴상한 모티프들이 많기 때문이다.

- 타로가 인도하는 신비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십자군 전쟁 당시 흰 바탕에 붉은 십자가의 망토를 휘날리던 템플기사단 Knights Templars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십자군에 참전한 수도사 기사단 중 가장 강력한 전사 조직이었다. 7세기경 시작된 이슬람은 점점 세를 넓혀 12세기가 되자 예루살렘이나 베들레헴을 포함, 중동지역 대부분뿐 아니라 이집트와 스페인에 이르는 대제국을 이루었다. 기독교도는 죽기 전에 예루살렘을 순례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지배하던 시대에 성지뿐 아니라 무역 중심지이던 지중해마저 빼앗긴 것이다. 예수가 죽고 부활한 예루살렘'이라는 화두는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양보할 수 없는 고지였고, 그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들은 1096년에 시작하여 1270년까지 총 7~8차례의 전쟁을 치른다.

 

- 템플기사단은 성지를 지키고 예루살렘 순례단을 호위하는 고도의 숙련된 특전사로 자리를 잡았다. 그들 중 비전투 병력은 뛰어난 두뇌로 성지와 유럽을 잇는 자금을 장악하며 엄청난 부와 권력을 장악했다.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던 템플기사단원들은 예루살렘과 이슬람 세계를 하며 기독교 정신과는 다른 과학이나 신비적인 지식들을 접하게 된다. 

- 그런데 이슬람으로부터 밀려오는 다양한 지식 중에는 기독교의 입맛에 맞는 이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교황청이 치를 떨며 금기시하던 카발라 신비주의나 그노시즘, 지동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주의 등 기존의 교리를 위협하는 사상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상들은 기본적으로 예수의 신성보다는 인간성에 집중했고, 선의 존재인 하느님 밑에서 찌질하게 덤비는 악마의 싸움이 아니라, 선과 악이 동등하게 우주를 이루는 기본 요소라고 보았다. 프랑스 남부의 랑그도크와 프로방스부터 스페인에 이르는 지역은 끈질기게 교황청을 위협하는 이런 신비적인 이론이 우세하던 지역이었다. 이 지역의 힘 있는 영주들이 지지하던 조직이 바로 템플기사단이었다.

- 남프랑스 유지들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던 템플기사단의 세력과 부가 너무 막강해지자 교황청과 프랑스 국왕이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이들의 이해관계는 맞아떨어졌고, 눈엣가시 같던 남부의 귀족과 템플기사단을 이단으로 몰아 해체하기 위해 연합한다. 거의 4세기에 걸친 종교재판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마지막 불씨도 남기지 않으려는 듯한 집요한 추적이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탈리아 북부나 소 아르메니아의 킬리키아 등지로 목숨만 유지해 피난한 이들은 지하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 타로는 고대의 전통을 바탕으로 14세기경에 완성되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아무도 타로가 어느 날 문득 나타났다고 믿지 않는다. 최초의 원시인이라는 호모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뼈 쪼가리가 아프리카에서 우연히 발견된 것처럼, 기원을 알 수 없는 역사의 여명기로 거슬러가다 보니 수많은 사상이 잡다하게 담겨있다. 머나먼 중국이나 인도의 흔적도 보이고, 하늘의 모든 것이 땅에 대칭을 이루고 있다 믿은 이집트적인 점성술의 개념도 들어있다. 유대의 신비주의 카발라와는 거의 직접적으로 부합된다. 히브리어로 '전통'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카발라 Kabbala'는 인간과 자연, 나아가 이 세상이 '신의 언어로 된 책'이라 말한다. 그리고 성경에 신의 이름이 비밀스럽게 기록되어 있어 신비의 지식 Gnosis을 습득한 자는 신을 만날 수 있다고 여겼다. 여기에 만물의 근원은 수라 생각하여 수에 깃든 신비한 힘을 믿은 수비학적인 세계와 금과 불로장생의 약을 찾는 연금술도 타로 안으로 흡수되어 들어갔다.

- 또한 22개의 타로 카드는 육체를 얻어 유년기와 배움의 시기를 지나 지혜를 얻는 인생의 순례길을 표현하기도 한다. 성 야고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그의 아이들이라 자신들을 명명했던 템플리어와 석공들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이다. 왕·귀족·신하·평민으로 이루어진 중세사회를 표현하는 듯한 이 그림들은 민중에 퍼지며 인기를 얻었고, 영속성과 전파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것이다.

- 신기한 것은 타로에 어떤 이상한 시스템이 작동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놀이로 여기던 타로가 어느 순간 미래를 점치는 기능을 가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만든 이들의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아웃사이더로 음지에서 핍박받던 지식 전수자들이 지녔던 이원론적인 사상의 그림자가 아닐까?

- 타로 안의 많은 상징은 끝을 알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물음을 담고 있어 뽑는 순서에 따라 직관적으로 읽힌다. 타로의 이미지들을 통해 뽑은 사람의 에너지는 읽는 사람의 에너지와 충돌한다. 여기에 타로 안에 아주 오랜 시간을 거치며 쌓인 에너지가 솟아나는 것이다. 타로나 카드는 이로써 민중들의 손에서 놀이와 도박, 또는 미래를 보는 점술 같은 것으로 인류 역사에 남아있을 수 있었다. 일종의 처용가같이.

- 무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흐르는 '원형 Archetype'이라는 과학과 초현실의 임계점 Threshold, Critical Point을 제시했다. 신기하게도 타로가 제시하는 다양한 상징을 따라가다 보면 언어와 수, 도형 등 다양한 기호들이 조합된 신비스러운 영역에 다다른다. 융이 말한 그 '원형'에 다다른 느낌을 받는 것이다. 애써 외면하던 '신비주의'라는 인문학적 수원지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고나 할까. '신비주의'라는 카테고리는 고대로부터의 초현실주의적인 생각들, 우주나 영혼 등 '과학적이지 않고, 비주류적인' 철학이나 종교, 또는 초과학적 사상들로 빼곡히 채워진다. 하지만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신관들로부터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나 마니교, 초기 기독교의 그노시즘, 유대의 신비주의 카발라, 연금술로 알려진 헤르메스주의 등으로 이어지는 신비주의는 생각보다 인류의 문명사에서 제외할 수 없는 큰 정신적 물줄기다. 동정녀 마리아의 수태나 예수의 기적을 믿지 않으면 기독교도가 될 수 없듯, 모든 종교란 사실 초자연적인 측면을 부정하기 어렵다. 다만 지구의 헤게모니를 잡은 서유럽이 기독교 정신 아래 세워졌기 때문에 교리에 부합하지 않는 사상들은 이단적이고 악마적이라는 누명을 쓰고 폐기 처분되었을 뿐이다. 사실 이는 현대의 언론통제나 여론살해와 다름이 아니다. 금지된 사상들은 꽃잎이 떨어져 더 처연해지듯 음지에서 더욱 강한 신비주의적 색채를 띨 수밖에 없었다.

- 인류 역사상 위대한 철학자나 과학자 중 신비주의에서 비껴간 사람은 많지 않다. 플라톤이나 피타고라스 같은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나 수학자들, 중세의 많은 신학자,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가까이에는 로저 베이컨이나 셰익스피어, 뉴턴과 케플러, 심지어 아인슈타인도 신비적 사상에서 우주의 영감을 받았다. 현재 지구의 가장 유력한 종교인 기독교와 이슬람교도 고대의 신비주의 사상과 그 맥을 함께한다. 구약은 메소포타미아의 다양한 신화와 이집트의 사후세계 같은 모티프들이 집약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레위기는 모세 오경에 들어있지만,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 유수(BC 597~BC 538)를 끝내고 돌아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안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24:17~23)'라는 함무라비 법전의 내용이 그대로 들어있다.  

- 카발라, 점성학, 연금술 등의 신비주의는 서양의 정신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카발라는 서양 정신사상의 기본 토대가 되었고, 점성학은 천문학의, 연금술은 화학의 기본 바탕이 되었다. 이 와중에 기독교와 양립하지 못하는 부분은 마법이니 마녀니 이단으로 몰리기도 했다. 암흑의 힘은 언제나 존재하지만, 이를 부정적인 의미로 상상해 의인화한 것은 결국 인간일 뿐이다.

- 구약성서, 탈무드와 함께 고대 히브리의 세 문헌 중 하나인 카발라는 언제, 누가 그 체계를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 카발라는 모세 오경에 다 담지 못한 하느님의 말씀을 수천 년간 구전으로 전하다 1세기 초에 여러 랍비가 집대성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히브리인들에게 '구약성서는 전통의 몸체고, 탈무드는 이성적인 혼, 그리고 카발라는 불멸하는 영’이다. 구약이 유대인의 역사이자 종교 경전이라면, 탈무드는 실천 윤리고, 카발라는 우주 창조의 비밀을 전하는 철학 체계다. 

- 신비 사상 이전에, 히브리인에게 카발라는 경전을 연구하는 중요한 방법론이다. 카발라주의자들 뿐 아니라 히브리인은 누구나 하느님이 모세에게 주신 토라(모세 오경)에 말씀이 그대로 문자에 화석이 되었다고 믿었다. 모세 오경에 쓰인 문자 하나하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기호로, 하늘의 언어인 숫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히브리어 알파벳 22개에 숫자 값을 준 다음 성경의 모든 내용을 숫자로 치환하는 고도의 수비학적 방식이 발달했다. 이런 사상을 바탕으로 쓰인 신약도 히브리 알파벳과 숫자와의 관계를 알지 못하면 이면의 뜻을 이해하는 데에 한계가 있게 된다. 깊이 들어가다 보면 정통 기독교 교리와 상충하는 부분이 있지만, 수많은 신학자들이 카발라에 매료될 수밖에 없는 이유기도 하다. 인간이 죽으면 영혼이 되어 구천을 떠돈다는 옛말 역시 빈말은 아니다. 


- 기의 흐름, 또는 주고받는 상대적 작용으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뒤에 오는 세피라에 대해서는 '주는 Give' 능동적 양(+)의 상태이고 앞선 세피라로부터는 '받는 Receive' 수동적 음(-)의 상태이다. 앞의 세피라에게는 수동적으로 받고, 뒤에 오는 세피라에는 방출하는 남성성을 가지므로, 각 세피라는 남녀 양성의 특성을 모두 갖는다. 칼융은 인간 본성 안에 내재하고 있는 이런 양성적인 속성을 아니무스와 아니마로 표현했다. 
연금술의 상징인 헤르메스가 뱀이 감겨있는 지팡이 카두세우스 Caduceus를 들고 있거나, 아담과 이브가 나무에 감긴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우연은 아니다. 헤르메스의 지팡이가 에덴동산의 나무 즉 생명나무이고, 아담과 이브가 훔친 지혜는 음과 양이라는 우주 창조의 비밀, 에너지의 흐름이었던 거다. 

-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에서는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물어 원을 만드는 형상을 우로보로스 Ouroboros 뱀이라 표현했다. 자연계에서 자신의 꼬리를 입으로 물어 완벽히 동그란 원을 만들 수 있는 동물은 뱀이 유일하다. 뱀은 이렇게 자신의 꼬리를 물어 허물을 벗는다고 한다.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는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이 다시 소환되는 시점이다. 그래서 뱀은 그 모양새로 인해 수많은 신화적 스토리텔링의 주인공이 되었다. 인간의 DNA에 뱀을 악마적인 유혹에 결부하는 두려움이 각인된 이유도 동그란 원이 되어 영원히 새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지금 있는 곳에 안주하고 싶은 인간에게 "어서 네가 속한 그 세계를 파괴하고, 또 한 단계의 깨달음을 향해 길을 가라"고 속삭이기 때문이다.

- 이 생명나무에 특별히 중요한 것이 32라는 숫자다. 32는 카발라가 신성하게 여기는 '테트락티스 Tetractys', 즉 10에 히브리 알파벳 22개를 합친 숫자로 타로의 메이저 아르칸도 22개이다. 또 황도 12궁에 태양계의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8개의 행성과 태양과 달을 합한 숫자이기도 하다. 

-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세계는 수학 언어로 쓴 한 권의 책이다"라고 했다. 현재 우리가 존재하는 3차원과 시간을 통해 인식하는 4차원의 우주는 수에 기초하고 있다. 현대물리학은 물질세계의 자연 현상을 수학적 질서로 설명한다. 그리고는 그 질서를 표현하는 기호인 숫자를 기반으로 화폐나 시간이라는 사회 경제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래서 수란 일상생활에서 물건을 사고팔 때 돈을 내고 거스름돈을 받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사는 현실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인터넷으로 전 지구가 관리되는 현대에 수가 없다면 도시 문명은 멸망하고 다시 원시 시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며 이성을 통한 실험정신으로 과학혁명의 문을 연 데카르트는 위대한 수학자였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과학은 철학과 이별하고 수학에 기반을 두고 발전했다. 사인이나 코사인, 원 방정식 등 곡선을 수로 나타낼 수 있는 수학이 없었다면, 파장을 수로 나타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20세기 과학자들은 물질의 파동을 방정식으로 나타내고, 상대성 원리나 양자역학도 간단한 공식으로 나타낼 수 있었다. 수는 현상세계를 이해하는 통로이며, 언어 이전에 인간 모두에게 공통된 원형이자 커뮤니케이션 체계인 것이다. 

- 피보나치가 위대한 수학자인 이유는 수열을 발견했다는 사실보다, 인도인들이 생각했던 0의 개념과 1~9까지의 숫자를 유럽에 보급했다는 업적 때문이다. 우리가 아라비아 숫자라고 하지만, 사실 이 숫자는 아라비아를 통해 유럽에 전해졌을 뿐, 인도에서 고안된 것이다.

- 수로 만들어진 세상의 이치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 피타고라스학파는 눈에 보이는 현상의 세계와 보이지 않는 이면의 세계를 연결해 주는 것이 수라는 믿음을 갖게 되고, 신비 종교의 색채를 띠게 되었다. 그래서 피타고라스의 사상은 근세로 오며 확연히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학문적 전통은 물리학의 발전에 기여해 현대과학의 토대를 이루었고, 수비학의 세계는 신 피타고라스학파로 남아, 남부 프랑스를 비롯한 지중해 지방에 널리 퍼져있던 유대교 신비주의인 카발라나 그노시즘(영지주의)에 깊이 스며들었다. 마치 천문학과 점성술, 연금술과 화학처럼 수학과 수비학으로 갈라진 것이다. 게다가 수비학은 중세의 정통 기독교신학자들도 심취했는데, 중세 교부들의 신학 체계는 플라톤의 이상주의와 접목된 신비적 색채가 짙었기 때문이다. 

- 교부철학의 대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적 지혜는 수를 통해 드러나고, 수는 모든 사물에 내재한다"고 <자유의지론>에 쓰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하느님이 세상을 6일 만에 만드시고 7일째는 쉬셨던 것도 모두 수비학적 비밀로 풀이되었고, 8은 7 다음에 오는 새로운 숫자이므로 부활과 영생을 의미하는 세례의 개념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중세 성당 옆의 세례당과 세례반은 8각형의 형태를 지니는 것이다. 미국 국방성의 8각형 펜타곤에 깃든 은밀한 의미일 수도 있다. 

- 유대교의 신비주의 학파인 카발라는 12세기경부터 프랑스 남부에서 발전했는데, 그 핵심이 수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히브리어에는 숫자가 없이 문자로 수를 표기한다. 카발라는 수를 우주적인 법칙으로 믿었고 문자로 나타난 힘을 믿었다. 그래서 각 알파벳에 숫자 값을 주어 모든 문자는 숫자로, 숫자는 문자로 치환할 수 있다. 로마자 알파벳으로 예를 들면, A는 1, B는 2, C는 3... 이런 식으로 22개의 알파벳을 수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문자와 숫자가 상응하다 보니 경전을 수를 통해 연구하는 '게마트리아 Gematria'라는 수비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카발라식 경전 연구는 신비주의 이전에 유대의 뿌리 깊은 전통이므로, 게마트리아 해석을 통해야 비로소 성경의 행간에 있는 참뜻을 이해할 수 있다. 

- 게마트리아를 연구하는 이들은 피타고라스처럼 테트락티스가 우주의 특성을 나타내며, 10개의 신성으로 우주에 표현되고 있다고 믿었다. 우주의 모든 이치가 수로 되어 있다는 믿음에서, 물질적 언어를 천상의 언어인 수로 표시하고, 또 수에 깃든 신성을 언어로 해석하고자 했다. 이런 상징적 해석이 게마트리아의 핵심이다. 이는 히브리어 알파벳 22개 하나하나를 모두 숫자로 치환하여 문자를 수로 바꾸어 풀이하는 학문이다. 즉, 한 단어를 이루는 문자들의 총 숫자 값을 계산하고 그와 동등한 숫자 값을 갖는 단어로 바꾸는 것이다. 앞의 알파벳 10개는 1~10, 그다음은 10 간격으로 20~90, 나머지 4개에는 100, 200, 300, 400의 값을 주었다. 이렇게 각 철자에 대응하는 숫자를 넣어 이를 계산하여 그 숨겨진 뜻을 알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성경의 모든 내용을 숫자로 표현 가능하기 때문에 666은 악마의 숫자라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영어의 알파벳을 숫자로 치환하는 암호가 만들어진 것 역시 우연은 아니다. 이는 카발라 사상의 핵심일 뿐 아니라 유대교를 이해하고, 성경을 이해하는 데도 필수적이다. 또한 알파벳 하나하나를 신의 이름과 연결했기 때문에, 글을 쓰고 수를 열거하는 행위 자체를 신성한 것으로 보았다.  

- 20세기 물리학의 위대한 두 업적인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은 완벽한 물리적 가설과 공식으로 증명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결점이 있었다. 둘 다 물리적 세계의 현상을 다루는 이론인데, 각자 따로 논다는 것이다. 원자라는 미시의 세계를 다루는 양자역학과 우주라는 거시의 세계를 다루는 일반상대성이론은 양립하지 않았다. 중력을 양자역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를 고민하던 아인슈타인은 끝내 이 문제를 풀지 못하고 죽어 후세에 숙제로 남겨두었다. 원자든 우주든 모두 4차원의 물질세계인데 두 이론이 합쳐지지 않는다는 찜찜함에, 현대물리학은 이를 통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많은 이론을 내놓았지만 '유레카'를 외칠 만한 것은 없었다. 

- 그러다 20세기 후반에 만물을 연결하는 여러 버전의 '초끈이론'이 등장한다. 원자 안의 중성자, 양성자를 포함한 원자핵과 그 주위를 돌고 있는 전자를 쪼개고 또 쪼개면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는 일종의 초끈(에너지 끈)이 존재하며 이 끈의 진동수, 즉 에너지 값에 따라 물질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입자가 결정된다는 거다. 그동안 통합되지 못했던 거시와 미시적 물리의 세계가 초끈이라는 에너지의 파동으로 모두 설명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이론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우리가 사는 차원에 대입하면 들어맞지를 않는데, 차원을 넓혀가다 보니 11차원에서 딱 들어맞는다는 거다. 부처님의 11천계가 여기에 나오다니! 그 심오한 이론은 세세하게 이해할 수 없지만, 아직 물리학이라기보다는 과학철학에 가까운 듯하다. 카발라나 피타고라스, 때로는 불교나 도교 같은 동양철학의 숨결이 느껴지는 거다.

- 초끈이론의 황당무계한 듯한 이론을 간단하게 보면, 우리는 시간을 포함하여 4차원의 시·공간에 사는데, 이 안에 우리가 모르는 6개의 차원이 숨어 있어서 총 10차원의 공간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피타고라스나 카발라의 테트락티스 그 자체다. 테트락티스 10은 모든 물질적인 형태의 기본이 되는 점, 선, 면, 입체를 포함하고 있는 가장 작은 수다. 1차원은 선, 2차원은 면, 3차원 공간, 4차원은 여기에 시간을 더한 시·공간을 말하는데 1+2+3+4=10이므로 우주는 10차원의 공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2는 1을 포함하고, 3은 2를 포함하고 4는 3을 포함한다, 그리고 10은 4를 포함하는데, 4와 10 사이에는 5, 6, 7, 8, 9라는 5개의 숫자가 숨어 있다. 여기에 10까지 총 6개의 차원을 4차원의 물질적 존재인 우리는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시간이라는 또 하나의 차원을 더해 총 11개의 차원으로 되어 있다고 보는 거다. 몇 년 전에 상영된 <인터스텔라>는 이 초끈이론은 다룬 SF 영화였다. 

- 하지만 현대과학은 실험을 통해 입증하고, 이를 숫자로 된 공식으로 표현할 수 없다면 과학의 범주에서 제외한다. 아무리 훌륭한 이론도 객관성이 없는 망상이 되어버리는 거다. 우주와 차원을 다루는 빅뱅이나 초끈이론 등이 그렇다. 그런데 바닷가 모래사장의 모래 한 톨 만한 인간이 이 이론들을 실험하기엔 너무 보잘것없이 작은 존재다. 진정한 과학이론으로 가야 할 길은 멀지만 그렇다고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는 역 실험을 해서 공식을 내놓을 수도 없으니, 그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1356-1374) 단테의 <신곡>에 비견되는 시집 <승리 Trion (트리옹피)>를 썼다. <승리>는 사랑, 고결, 죽음, 명예, 시간, 영원의 총 6개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화려한 세상만사에서 한 걸음 물러나 인간의 내면을 관조한 작품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작품에 카발라나 타로의 길을 암시하는 듯한 내용과 삽화가 수십 장 들어있는 것이다. 이후에도 여러 화가가 페트라르카의 시를 모티프로 타로를 그렸고, 16세기에 이탈리아어로 타로치 Tarocchi, 프랑스어로 타로 Tarot라 불릴 때까지 타로를 'Trionfi(트리옹피)'라 불렀던 사실도 눈여겨볼 만하다. 게다가 페트라르카의 친구였던 보카치오의 작품 <데카메론>에 영감을 받은 이탈리아의 일러스트레이터 지아신토 가우덴지 Giacinto Gaudenzi는 1993년에 성인용 에로틱 <데카메론 타로>를 출판했는데, 그 출판물이 여전히 유명세를 타는 것도 재미있는 사실이다.

- 르네상스 시대 밀라노와 페라라의 궁정에서 그려진 타로는 당시 학자들 사이에서 놀이를 빙자해 내용에 비의를 담은 인문학적인 표현 방식이었다. 종교재판이 두려워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고대의 사상 등을 비밀스레 담아 놀이처럼 유포한 것이다. 중세의 회화처럼 그 안에는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 찼고, 비주얼적인 언어를 통해 지식을 전달하고자 했다.  


- 현재 많이 사용되고 있는 라이더 웨이트 타로는 20세기 초 영국의 아서 에드워드 웨이트 Arthur Edward Waite, ite가 극장 무대 디자이너인 파멜라콜만 스미스 Pamela Colman Smith에게 의뢰해 만든 것이다. 이 당시는 중세부터 이어져 내려온 신비주의 사상이 과학의 발달과 산업혁명으로 역사의 뒤안길에서 미신으로 몰려 지하로 스며들던 시기였다. 에드워드 웨이트는 자신의 방식으로 전통적인 타로의 상징체계를 수정했고, 디자인을 맡은 파멜라는 윌리엄 워터하우스와 당시 유행하던 일본풍 그림인 우키요에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당시에 두 사람은 이 타로가 공전의 히트를 하며 마르세유 타로를 뒤엎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타로 같은 감성적 세계는 주로 여성들의 관심사다 보니 딱딱한 중세적 상징보다 아름다운 순정만화 같은 카드가 마음을 끌었기 때문이다. 현재 대중화된 유니버설 웨이트 타로 Universal Waite Tarot는 메리 핸슨 로버트 Mary Hanson Roberts라는 일러스트레이터가 1990년대에 현대적인 색감에 맞추어 다시 컬러를 입힌 버전이다.

- 분석심리학에 다양한 신비주의적 이론을 접목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무의식을 의식화하지 않으면 무의식이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우리는 이를 두고 '운명'이라 하는 것이다."
모든 신비주의 사상가들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물질세계의 현상이란 매 순간 내 선택의 결과물이라는 말이다. 지금의 현실이 괜히 이루어졌겠는가. 현실이란, 보이지 않는 우주 저편의 에너지를 받아 태어난 내가 무의식적으로 이 에너지를 쓴 결과물이다. 이는 고대 카발라부터 성경에까지 이어진 '하늘에서의 뜻이 땅에서도 함께'라는 상응의 사상과 맥을 함께 한다. 칼 융의 매우 철학적인 이론인 '동시성의 원리'도 이와 다름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인간 무의식의 에너지가 물질세계로 방출된 결과물이 현실이므로, 이 무의식을 의식화하여 선택을 달리하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다. 즉, 태어난 날과 시간에 따른 에너지의 숙명은 바꿀 수 없지만, 내면의 파동, 내면의 삶을 의식 위로 끄집어내 좋은 방향으로 치유함으로써 운명을 수정하는 것이다.  

- 고대 메소포타미아부터 헬레니즘 시대까지 신과의 영적인 합일을 추구하던 종교의 다양성이 사라지고, 오직 '알라'에 헌신하는 유일신의 종교로 바뀐다. 중세의 기독교 세계를 지나며 교리에 부합하지 않는 많은 사상들이 묵살되고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폐기되었듯이, 이슬람 지역에서도 주류 뒤편으로 침잠된 사상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수피즘 Sufism이다. 고대로부터의 전통을 따르던 중세의 수피주의자들은 카발라주의자들 또는 힌두나 불교의 승려들처럼 요가나 고행 같은 수행을 통해 자비와 사랑으로 신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카발라의 생명나무와 같이 수피주의자들이 명상의 도구로 사용하던 도형이 에니어그램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다. 시간이 지나며 전쟁이나 강력한 종교 탄압으로 인해 대부분의 기록은 소실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 결국 우리가 지금 학교에서 배우는 이 세상의 지식들을 제외하고는 정신적 인간문명의 대부분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이 지식들은 수천 년간 서로 다른 시대를 지나는 동안 구전으로 전해지며, 어디에선가 불쑥불쑥 떠오르는 상징이 되어 이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만 전수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비밀조직이니 프리메이슨이니 실체가 만져지지 않는 정신적 권력을 믿기도, 믿지 않기도 쉽지 않은 것이다. 어차피 확률은 50% 아니겠는가.

- 에니어그램을 이야기할 때 가장 의미 있는 사람으로 신비철학가 죠르쥬 그루지예프 Georges Gurdjieff(1872-1949)를 들 수 있다. 그리스인 아버지와 아르메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러시아인으로 태어난 그는 태생자체가 신비적일 수밖에 없는 문화적 배경을 지녔다. 음유시인이던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수메르의 <길가메시 서사시> 등의 고대 신화를 가르쳤다. 그는 인도, 네팔, 중앙아시아 등을 수없이 여행했는데, 1897년경 아프가니스탄에서 수피 비밀공동체의 한 늙은 고행자를 만나 투르키스탄의 수도원에 가게 되었고, 이곳에서 에니어그램을 알게 되었다.


- 알아듣지 못하지만, 약속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의사소통의 수단이 된다. 우리가 수화를 배우지 않으면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 기호 자체에는 생명력이나 힘이 없다. 그래서 독립된 기호만으로는 기능을 못하지만 약속을 통해 적절하게 조합되면 문장이 되고 악보가 된다. 이 약속이 바로 문법이다. 더 나아가 문학, 철학, 정치, 경제, 예술 등 인간의 모든 사고를 구체화하는 것이다. 즉, 언어는 무형의 정신에 물질적 구조를 준다. 그래서 언어학자들은 한 언어의 문법적인 구조를 알면 인간이 어떤 사고체계를 가지고 서로 소통하는지, 나아가 그 언어를 쓰는 사회의 구조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꿀벌이나 돌고래의 언어를 안다면 그들의 사고체계와 사회 구조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메커니즘은 같기 때문이다. 의식의 분석작업을 통해 존재의 심층에 내려가 상징과 만나는 것도 바로 이 기호 덕분이다. 반면에 상징이란 인간에게 원초적으로 주어져 있는 어떤 것으로, 그 자체로 의미를 전달한다. 도로 표지판이나 교회의 십자가, 한나라의 국기 등. '이순신' 하면 장군이나 영웅이 생각나는 건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그 자체로 상징이 되었기 때문이다.  

- 그런데 더 심층의 무의식 안으로 내려가면 인간으로 태어나며 잊어버린 우주의 감추어진 상징이 있다.
20세기 초 상징주의 시인들은 이 세상에 나타나고 있는 우주적 상징을 해독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는 자기도취에 빠졌다.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 네르발, 로트레아몽 등의 프랑스 시인들을 중심으로 미국의 에드거 알랜포우, 러시아의 투르게네프, 영국의 예이츠, 독일의 릴케 등 많은 시인이 상징주의에 열광했고, 자신들은 저주받아 지상으로 쫓겨난 천사이므로 평범한 인간 사회에서는 이해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대의 신관이나 점성술사처럼, 우주의 웅대한 언어를 해석해 시로 표현하려 애썼다. 

- 이는 과학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위대한 과학자들은 우주에도 상징 언어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상징 언어를 보편적인 공식으로 풀어내려 칠판을 가득 채우곤 했다. 결국 풀어낸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는 'E=MC2'이라는 간결하고 아름다운 상징으로 우주의 비밀을 표현하였다. 이런 상징은 아는 사람만 해독할 수 있다. 내면에 대해서 오랫동안 탐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주적인 상징에 관해서 거의 알 수가 없다.

- "현실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은 하나의 상징이며, 그 상징은 열린 문이다. 그 열린 문을 통하여 우리는 내면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 소수의 사람만이 상징의 문을 통과하며, 그 길과 문을 통해 영혼과 영혼이 서로 이어지는 것이다."

- 헤르만 헤세 <의자와의 대화> 中


- 기호나 상징을 좀 더 깊이 생각하다 보면, 인간의 자아에도 이중성이 있듯이 이 세상이 표상되는 것과 그 뒤의 또 다른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생을 한 차원 위에서 관조하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프랑스의 상징 인류학자 질베르 뒤랑 Gilbert Durand은 '인간은 원래 상상의 기능, 꿈의 기능, 그리고 대상에 대한 정서적 이해 기능을 원초적으로 갖고 있다'고 말했다.

- 프로이트나 칼 융 등의 정신분석학자들은 꿈이 무의식으로부터 올라오는 상징이라 보았다. 프로이트는 억눌린 성적 욕망이나 트라우마의 분출로 보았고, 칼 융은 무의식보다도 더 밑, 그 끝을 알 수 없는 원형적인 심층 무의식으로부터 오는 상징들이 혼합되어 있다고 보았다.

-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예감이나 직감처럼 꿈이 현실의 어떤 사건을 예언하는 경우도 있다. 돼지꿈이나 조상꿈은 길몽이고, 이가 빠지는 것은 흉몽이라는 등 꿈을 해석하는 전통이 일리가 있다. 육체는 물질에 매여있어 3차원에 붙박여있지만, 정신은 시공을 떠나 자유롭게 오간다. 과거에 관한 기억들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 
 
- 같은 공간에 사는 생명체끼리 똑같은 형상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본다면, 우리가 보고 있는 사물만이 현실이고 참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또한 곤충은 사물의 색도 인간과는 전혀 다르게 인식한다. 개나 고양이는 색맹이라서 이 세상이 총천연색이 아닌 흑백에 가까운 세계로 보인다. 또 곤충은 빨간색을 검은색으로 보거나 자외선을 보기도 한다. 아마도 벌이나 나비의 세상을 카메라로 찍으면 360°의 원형으로 펼쳐진 세상에 여기저기 검은 점과 형광의 자외선으로 물들여진 외계일 것이다. 포유류 중에서도 고양이나 호랑이 같은 야행성 동물은 인간이 감지하는 빛의 100분의 1만 있어도 세상을 훤히 볼 수 있고 뱀은 적외선을 감지한다고 한다. 할리우드 첩보영화에 나오는 적외선 탐지기에 비친 모습으로 만다라같이 돌아가는 세상을 본다는 말이다. 

- 우리 눈에 보일 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별이다. 그 거리는 인간의 경험으로는 가늠할 수조차 없다. 속도가 너무 빠르다 보니 빛은 입자인데도 부피를 가지고 있지 않다. 속도로 인해 부피를 잃고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빛의 속도에 도달하면 부피가 0이 되므로, 물질로 이루어진 시·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과거나 미래로의 시간여행이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 그러므로 빛이란 세상을 이루는 물질 중에 가장 근본적이고, 마치 숫자의 0이나 무한대와 같은 존재다. 즉 이 세상의 물질이지만 동시에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물질이기도 하다. 창세기에서, 빛의 속도나 입자, 파동을 모두 뛰어넘는 존재인 하느님께서 자신의 능력과 비슷하거나 아니면 살짝 떨어지는 뭔가를 만든 것이 다름 아닌 '빛'이 아니었을까. 카발라나 힌두교, 불교의 사상은 사실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초월적인 빛의 세계에 살던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고 물질세계에 갇혀버렸다. 즉, 육체를 가지게 되었다. 원죄란 다름 아닌 3차원이라는 물질세계에 갇히는 것이 아니었을까. 

- 결국 인간이 색을 지각한다는 것은 눈에 들어온 빛의 파장 중 뇌가 인지할 수 있는 파장만을 선택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색이란 우주에서 오는 빛과 인간이 만나는 접점이다. 빛과 색을 쫓던 인상주의 화가 폴 세잔이, "색은 우리의 두뇌와 우주가 만나는 장소다"라고 한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화폭이란, '바로 이 순간' 내 눈에 비쳐 산란하는 빛이자, 다시 오지 않을 현재의 삶 그 자체였던 거다. 지금 도달한 빛이 나의 망막에 맺히고 사라지듯, 빛 속에 사는 인간의 삶은 절대로 다음 날이 오늘과 같지 않다. 인생이 허무해서 절망하는 이에게조차 내일 내 눈에 도달하는 빛은 오늘과는 다른 빛이다. 누군가 말했다. "어둠은 어둠을 거두지 못한다. 오직 빛만이 어둠을 거둘 수 있다"고. 

- 이렇듯 인간이 보는 사물은 빨, 주, 노, 초, 파, 남, 보 7개의 가시광선이 조합해서 프로젝션 Projection 하는 세계다. 우리가 스크린에 PPT를 투영하듯이 인간의 망막에 세상의 형상이 투사된다는 의미. 그래서 인상파 화가들은 빛, 즉 색이란 플라톤의 주장대로 물질 너머의 영적인 그 무엇으로부터 오는 상징이라고 보았다.

- 플라톤은 그 무엇을 이데아 idea라고 했다. 색이란 색맹이 아닌 한, 개개인의 자각 능력을 뛰어넘어 인간 모두에게 적용되는 본질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다. 개인을 넘어 사회, 문화적 차이를 넘어가도 색을 인식한다는 이상의 더한 공통점은 없는 거다. 색이란 삶과 죽음만큼이나 인간종 전체에 진리이자 본질이며, 무의식의 가장 뿌리에 있는 원형의 일부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색을 통한 상징적 표현은 인간에게 가장 원초적인 것으로, 알타미라의 동굴에서부터 인류의 수많은 예술가는 색을 통해 사물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왔다. 

- 그 안에 신이나 진리에 이르는 길은 각자의 내면에 층층이 파여있는 어둡고 좁은 무의식의 세계를 파내려 가야 도달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때마다 내면의 그림자라는 폴더 안에 또 하나의 반대되는 자신을 숨기며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 타로는 깊은 심층의 무의식으로부터 오는 희미한 빛을 거울처럼 반사해 또 하나의 나를 세상에 드러낸다. 무의식 속에 숨겨진 그림자의 상징을 드러내는 것이다. 타로는 카드를 선택하는 사람뿐 아니라 읽어주는 사람 역시 자신의 무의식과 만나는 일이다. 진정 에너지가 통한다면, 인쇄된 종이 한 장의 그림을 가운데 두고 이 세상의 겉모습 이면의 진리와 만날 수도 있는 거다. 황당한 것 같지만 나는 실제로 살면서 이런 경험을 가끔 한다. 그것이 꿈일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과의 만남에서 올 경우도 있고, 정말 열심히 몰두하는 어떤 작업에서 어느 날 무언가가 내게 온 경우도 있다. 물질을 넘어 무언가 초월적인 힘을 느끼는 순간이 있는 거다. 

- 타로의 해석이란 인간의 아프고 상처받은 마음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나침반의 역할이다. 그 누구도 한 개인의 미래를 설계하거나 책임지지는 못한다.  

- 인간은 태어나서 어른이 되고 늙어 죽는다. 그래서 우리는 사물의 변화를 보며 시간이 연속적으로 1, 2, 3, 4, 5... 처럼 수를 따라 일직선으로 흐른다고 믿는다. 그래서 역사에 연대기 Chronologic를 중요시하지 않는가. 그런데 조금만 뒤돌아보면 역사성이라는 연대기에는 완전한 객관성이 없다. 이는 한 인간의 일생도 마찬가지다. 그저 우리 주변에 특별한 관계를 주고받는 사람들끼리 함께 한 기억의 공유일 뿐, 이 기억이 그 시대의 역사나 문화사라는 큰 흐름과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의미를 두고 있는 사건 외에는- 큰 연관성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그냥 기억의 저장소 어디에선가 꺼내온 이미지일 뿐인 거다. 결국 시공간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며, 우리 집단의식 안에서 사건 사이의 관계만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거다. 하나의 문명, 하나의 국가, 하나의 단체 등 큰 의식 범위 안에서 어느 권력자가 남긴 자료만 있을 뿐, 사실 과거는 뒤죽박죽이다. 아프리카 수단에 사는 모르는 한 존재와 내가 어떤 인생을 살다 죽던 서로 아무 관계가 없다. 즉, 나의 빛이 비치는 범위에서 엄청나게 멀리 존재한다는 의미다. 이 거리감은 안드로메다나 수단이나 그다지 다를 바 없다. 우주의 별은 내가 눈으로 보기나 하지 지구 어딘가에 사는 모르는 존재는 삶을 공유할 그 무엇도 없다. '현실'이라는 내 에너지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는 한 화성인이나 목성인 만큼이나 먼 존재다. 

- 결국 현실은 빛을 함께 공유하며 존재하는 영역이다. 즉, 내가 인식하고 보는 프레임 Frame 만큼의 영역이 현실이라는 의미다. 원래 인간은 그렇게 생겨났다. 원시인은 자기가 빛 속에서 보는 만큼만 삶의 전부로 알고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은 과학과 미디어의 힘을 통해 내가 공유하지 않는 삶까지 투사 Projection 하고 산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TV나 인터넷의 작은 화면을 통해 우리가 지구의 모든 삶을 공유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이미지는 허구다. 한낱 꿈과 다를 바 없이, 일상의 내 물질적 삶과는 관계없는 이미지일 뿐이라는 거다. 결국 인간은 어느 순간 죽음으로 이 홀로그램이 꺼지면 스위치 내린 텔레비전처럼 파동이 0인 상태로 돌아간다. 

- 만약 빛이 없다면? 물리적인 논리를 떠나, 일단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현실의 의식 자체가 의심스러울 것 같다. 현실의 가족과 나의 모든 사회적 위치들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이루어진 빛의 산물이다. 보이지 않으면 예쁨과 못생김, 젊음과 늙음, 어쩌면 물질적 죽음조차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고대문명부터 태양은 문명의 가장 강력한 힘을 상징했다.

- 창세기에도 하느님이 처음 빛을 만드셨듯이, 빛이 없었으면 호모 사피엔스의 모든 문명은 의미가 없다. 지구의 생명은 빛이 더해져 만들어져 온, 또는 만들어져 갈 영역이다. 그러므로 빛이란 인간의 생명을 작동하고, 세계를 인식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 문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빛이 있다 보니 밤에도 그 빛을 쫓기 위해 전기를 발명한 것이지, 원래부터 빛이 없다면 인간은 우주 공간에 그냥 의식상태로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 인간에게 있어 과거가 무엇인가는 조금 윤곽이 잡힌다. 빛을 통해 만들어진 문명에서, 과거란 함께 빛을 공유한 물질의 총체이다. 즉, 내가 보고 듣고 나와 파동을 함께 한 기억의 총체가 과거다. 내가 경험한 정치, 외교, 사회, 문화 이 모든 역사는 그냥 그 실체를 알 길 없이 동시대가 함께 기억할 뿐이다. 매 순간들은 끊임없이 복사되어 삽입된다. 융의 이론을 빌리자면 이런 기억의 총체가 집단 무의식이다. 이를 더 깊이 파고 내려가고 또 내려가면 이런 기억이 없는 인간이 처음 출발한 그 빛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융은 확실히 유대교 신비주의인 카발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 그럼 현재란 무엇일까? 시간과 공간에 빛을 통해 내가 존재함으로써 물질화 materialization 하는 그 순간이다. 빛이나 내가 없으면 시공간이라는 개념도 의미가 없다. 바로 지금 빛이 통과하는 이 순간,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찰나'만이 현재일 뿐 현재는 머무르지도 흐르지도 않는다. 그저 그 순간의 섬광이 지속할 뿐이다. 시간이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기보다 그저 상태만 있을 뿐인데, 인간이 '시간의 흐름'이라는 의식을 만들어냈을 수도 있다. 결국 인간은 시야라는 2차원 화면에 담긴 사물을 바라보며, 이 사물을 입체로 인식하고 3차원의 공간에서 존재하며, 4차원의 시간을 '살고 있다'. 

- 어쨌든 현재는 우리가 확실하게 물질을 보고 만지고 느끼며 경험하기에 실재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미래는? 인간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미래란 무엇일까'라는 불안을 안고 산다. 하지만 과학도, 종교도, 그 누구도 확실한 답을 줄 수는 없다. 다만 유추할 뿐이다.

- 고대로부터 어느 문명권이나 초월적인 어떤 힘과 소통하는 능력자들이 존재했다. 신관이나 신녀, 주술사나 마술사, 무당 등으로 불리던 이들을 사람들은 때로는 신격화하고 때로는 두려워하며, 또 때로는 평범함에서 벗어난 삶을 이유로 경멸하기도 했다. 기독교나 불교 등 사회에서 공인받은 주류 종교 안에서도 마귀를 쫓는다거나 방언을 하는 등 우리가 알 수 없는 힘과 연결된 성직자들이 항상 있었다. 특별한 접신의 능력이다. 이들이 본 것은 무엇일까?

- 드라마를 보며 생뚱맞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타나타노트>가 생각났다.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이야기지만 '웜홀'이라는 공통적인 주제가 보였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호불호가 극명한 작품인데 아마도 난해한 과학, 철학적인 이론에 또 너무 두려운 '죽음', '임사 체험'이라는 부분을 건드려 어떤 이들에게는 거부감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타나타노트 Thanatonautes라는 의미는 죽음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타나토스 Thanatos와 항해자를 뜻하는 노트 Nautes를 합성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죽음의 세계를 탐사한다'는 의미다. 

- 사후세계의 탐사 프로젝트는 사형수 중 지원을 받아, 정신과 육체의 조건을 삶과 죽음의 임계점까지 데려가 체험케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삶으로 귀환하지 못하는 희생자들만 나오던 중, 마침내 펠릭스라는 죄수가 죽음을 체험하고 삶으로 귀환한다. 이로써 죽음의 세계가 그 베일을 조금씩 벗기 시작한다. 이후에도 몇 번의 탐사가 더 진행된 후, 결국 이 프로젝트를 계획했던 연구자들까지 탐사선에 오르면서 사후세계의 모습이 드러난다. 사후세계에는 7개의 천계가 존재하며, 천계의 마지막 관문에는 좁은 문, 또는 터널과 같은 곳이 있어 사자들은 이곳에서 심판을 받고 통과한다는 것이다. 그 이후는 환한 빛의 광선이 충만하다는 표현으로 끝난다.

- 죽음의 세계에서 7개의 천계를 지난다는 것은 티베트와 유대교의 신비주의, 불교적인 철학 세계와도 상통한다. 게다가 아인슈타인 이후의 현대과학을 총망라한 베르베르적인 해석이 가득 들어있어 깊이 매료되었던 작품이다. 한 영혼이 천계의 마지막인 7단계에서 심판을 받는 장면은 베르베르가 기독교적인 서양인의 정신세계를 풍자하는 듯하다. 여기서 죽음의 맨 마지막 단계에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 어느 순간 빛이 보인다던 엔딩은 참으로 동양과 서양, 종교와 과학이 만나는 듯한 융합의 느낌을 준다. 사자들이 빨려 들어가는 영계의 입구는 블랙홀이고, 7개의 천계라는 웜홀을 지나 심판이라는 화이트홀을 통해 나가는 것을 표현한 것 같았다.

- 자아를 의식하고 인격 있는 삶을 시작하면 출발 시점의 혼돈된 원형은 기억을 상실한다. 그리고 다시는 그 기억을 되돌릴 수 없다. 이는 무의식의 맨 아래층인 원형 깊숙이 가라앉아 있으므로 결코 의식 표면으로 올라오는 일은 없다. 하지만 문득문득 이 세상의 어떤 표상 -언어학자들은 기호라 하는데, 나는 표상이 더 와닿는다- 들을 볼 때마다 기억의 심연으로부터 무언가 희미한 연기처럼 떠오른다. 상징주의자들이나 융 등의 심리학자들은 이를 '상징 symbol'이라고 했다. 인간의 합리적인 언어 대신 추상적인 이미지의 형태로 인식되는 일종의 교감, 또는 무의식 언어라는 말이다. 꿈도 무의식에서 오는 상징의 일종으로 보았다. 고대의 모든 문화권에는 상징이 존재했고 현대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이는 인간이면 누구나 가진 생명 이전의 우주적인 심연으로부터 오는 메시지이기 때문에 어느 문화권이건 표현 방식에 차이가 있지만, 그 본질은 같다.

- 상징은 어느 날 우리가 만나는 타인으로부터 올 수도, 문득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았을 때 구름 사이로 보이는 별 하나로부터 시작되어 가슴속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고대부터 흥망성쇠를 반복했던 수많은 문명 속에서 인간은 언제나 이 상징을 파악하고 우주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종교의식을 반복해 왔다. 인간은 물질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비물질적인 신비로운 세상으로부터 온 원형적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아인슈타인은 그동안 우리가 굳게 믿고 있던 3차원이라는 공간 안에서 물질이 시간의 흐름을 타고 변해간다는 개념을 깨 버렸다. 우주는 뉴턴이 생각했던 것보다 무한했고, 뉴턴의 역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본 우주는 따로 떡하니 존재하는 공간을 시간이 흘러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합체된 시공 spacetime이라는 4차원의 세계였다. 게다가 시간은 우주에 있는 모든 물체에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관찰 대상자의 상황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특수 상대성이론'이라 한 이유는, 뉴턴의 역학이 맞춤복처럼 들어맞는 일상생활에서는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해서, 특수한 우주적 상황에서만 성립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생각을 아인슈타인이 제일 먼저 한 것은 아니다. 독일의 과학자인 라이프니츠(1646-1716)는 18세기에 이미 '자연에 지각의 기준이 되는 절대적인 것은 없으며, 시공간이란 물체 사이에 상대적인 순서나 관계 그 자체일 뿐'이라고 했다. 여기에 더해 우리가 제트기의 속도를 말하는 '마하'의 기원이 된 과학자 마하(1838-1916)는 '시공간이란 물체가 변화하는 것을 보고 인간이 생각해 낸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라 하였다. 모든 운동은 다른 물체가 있는 위치나 움직임에 따라 인식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비교 대상이 없다면 존재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이 현실도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 이는 죽음이라는 실존적 문제까지 생각하게 한다. 나는 언제까지나 보호해 줄 것 같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죽음이라는 현실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마주하게 되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 아버지는 완전히 물질의 힘을 잃고 홀연히 사라져, 내 기억에 저장된 이미지로만 남았다. 나는 놀랐다. 그럼 아버지는 정말 존재했던 것일까? 그가 있었다는 가족과 친지의 기억뿐, 실재했다는 그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사진이나 유품도 별 의미가 없었고, 여러 명이 공유한 기억이 있다고 해서 아버지가 손에 잡히는 것도 아니었다. 물질로 존재하지 않으니까. 

- 뉴턴이 생각했던 우주는 눈에 보이는 단 하나였지만, 이제 우리는 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우주는 하나가 아니라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삶과 죽음의 차원에 동시에 있었듯이 평행일 수도 있다. 아니면 평행을 넘어 수많은 확률의 상태별로 무궁무진한 우주가 동시에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우주 자체가 아무 존재도 없는 무의 상태인데 그저 전자의 움직임으로 홀로그램처럼 물질의 이미지와 감각이 떠도는 건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이런 이론을 물리학자들이 제시했다는 데에 더욱 당혹감을 느낀다. 20세기 후반, 물리학자 휴 에버렛 3세 Hugh EverettI와 브라이스 드위트 Bryce Dewitt, 안드레이 린데 Andrei Dmitriyevich Linde 등은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발을 딛고 있는 우주가 수많은 우주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했다. 모든 것이 뚜껑 열기 전까지는 확률로만 존재한다면, 우리 각각이 삶을 살며 선택할 수 있었던 그 가능성만큼의 우주가 존재하고, 선택하는 순간마다 새로운 세계가 분리되어 탄생한다는 이론이다. 동양인에게는 친숙한 불교적인 향취를 느낄 수 있다.

- 타로에는 어떤 힘이 작용하는 것일까? 내 정신 영역에서부터 전해진 파동이 분명 카드를 선택하게 했을 것이다. 초현실적인 측면이 아닌, 이성과 과학적인 견지에서 납득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타로 한 장을 선택하기 전까지의 세계는 과거 속에 갇혀있는 즉, 수많을 가능성이 중첩된 다차원의 세계다. 그러다 카드를 뽑아 여는 순간 가능성으로 열려있던 미래가 3차원의 현실로 들어오고, 내가 존재할 우주를 선택하는 것이다. 현재는 정해져 있지만, 미래란 아직 물질화되지 않은 무한히 가능한 우주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것도 매번, 이 얼마나 신비로운 경험인가!

- 우리는 또 길을 떠나야 한다.

- 어머니로부터 생명을 받을 때 인간은 물질의 때가 묻지 않은 영적인 존재로 태어난다. 식물의 씨앗 안에는 나무와 숲을 이룰 모든 인자가 들어있듯이, 수정란 안에는 인간을 이룰 모든 DNA가 들어있다. 자연의 순환법칙에 따라 우주의 씨앗으로부터 온 아기는 그 안에 인간이 될 모든 인자뿐 아니라 대자연과 하나가 되는 영적인 능력까지 모두 지니고 온 것이다. 하지만 시공간이라는 물질의 벽 속에 갇히는 순간 이 무한한 잠재성은 깊은 무의식의 세계로 서서히 가라앉아 버린다. 사회에 적응하며 자아가 강해질수록 더 깊이, 이는 마치 동물이 야생성을 잃어버리는 것과도 같다. 생텍쥐페리가 <인간의 대지 Terre des Hommes>에서 말했듯이 인간은 누구나 자신 속에 모차르트가 될 천재성의 씨앗을 품고 태어난다. 그 천재성이 사회에 의해 살해당했을 뿐이다. 학교, 종교, 군대, 회사 등 국가와 사회가 원하는 충직한 인간이 되는 과정은 창의력을 버리고 '모두'와 비슷하게 되어가는 과정이다. 아기 모차르트가 무의식의 심연으로부터 끌어올릴 수도 있었던 그 황홀한 심포니의 음은 잊고,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이다.

- 타로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위로는 이런 것이다. 현재는 순간이고, 인생은 끝까지 살아봐야 안다고 위로한다. 그래서 현재의 슬픔도 고통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하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허공에 공허하게 울리는 메아리가 아니다. 더 단단하게 되기 위해서는 밖으로만 나갈 것이 아니라 자신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보려 노력해야 물질의 숲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

- 세상은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화건 역사건 아는 만큼 보인다. 타로의 세계도 그렇다, 아는 만큼 보인다. 마르세유 타로에는 어느 하나도 그냥 그려진 것이 없다. 인물의 시선, 의상, 자세, 머리, 모자, 이름까지 모든 것에 의미가 있다. 게다가 역사가 긴 만큼 여러 버전이 있어 공부하는 재미도 있다.

- 르네상스 시대의 버전은 온전한 세트로 전해지지 않고, 그 이후 17세기에 장 노블레 Jean Noblet, 18세기에 장 도달 Jean Dodal, 니콜라 콩베르 Nicola Convert 등의 타로 장인들이 마르세유 타로를 복원하였다. 하지만 이 시대는 잉크나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아 보존 상태나 색채가 좋지 못하기 때문에 현대에 폴 마르토 Paul Marteau, 쟝-클로드 플로르노이 Jean-Claude Flornoy, 크리스 아다르 Kris Hadar, 벤도프 Ben'Dov, 조도로스키 Jodorowsky 등의 전문가들이 색을 복원하여 자신의 버전을 내놓았다. 디테일이나 색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의 큰 그림은 동일하므로 이 중 어떤 것을 선택하라고 할 수는 없다. 자신과 가장 맞는 버전이 진리다. 

- 하나하나의 카드를 프랑스어로는 아르칸 Arcane이라 하는데 이는 중세 연금술사들이 귀중한 금속이나 불로장생의 약을 만들던 '비법'이라는 의미다. 이는 각 그림이 뜻하는 비밀스러운 상징이 모여 하나의 결과를 조제해 낸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동양과는 역사나 기질이 다른 서양 문화권에서 전해온 정교한 그림이다 보니 중세나 르네상스 회화처럼, 도상학, 신화, 역사적 배경 등 상호 관계를 통해 전체를 보아야 조금이나마 그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그래서 타로의 상징체계를 단기간에 이해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교도적이면서도 그 시대의 주류인 기독교적인 가면을 쓰고 있어 더 불확실하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신비적인 사상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아무도 모르듯, 타로도 역사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어떤 학자는 타로가 인간 문명의 여명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다양한 지식의 상징을 포함하고 있다 하고, 또 어떤 학자는 그저 단순한 놀이에 불과했던 타로가 18세기쯤 되며 신비주의 사상과 결합한 것이라고도 한다. 타로뿐 아니라 고대의 단편적인 역사나 신화에는 "그렇다더라..."는 외에는 그 누구도 확실한 증거를 댈 수가 없다. 공룡을 본 적이 없으니 그저 있었다고 믿는 외에는 방법이 없는 거다. 그러니 각자 자신이 보는 관점만 있을 뿐이다. 

- 또 세상에는 완전한 참도 거짓도 없듯이 모든 카드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가져, 뽑힌 위치나 주변에 함께 뽑힌 카드를 통해 긍정이나 부정적 해석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 우선, 마르세유 타로의 상징을 이해하려면 순서에 대한 개념과 숫자, 그 안에 들어있는 다양한 스토리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타로는 구상화라기보다는 추상화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피카소의 그림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작가의 시대적 배경이나 표현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면 낙서와 다름없다. 반면 피카소의 삶 자체에 모든 그림을 대비하는 것처럼, 너무 이성의 틀에 갇혀 글자 그대로만 외우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 무지는 죄지만, 너무 아는 것도 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타로의 전체적인 테두리를 알아가다 보면, 카드를 여러 장 뽑았을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기가 온다. 

- 타로의 메이저 Major/Mageur 아르칸 역시 '중요한' 상징을 모아놓은 시리즈다. 메이저 아르칸은 인생의 중요하고 큰 그림을 보여주므로, 커다란 변화나 사건을 상징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매 순간 선택의 연속이며, 이 순간이 모여한 사람의 인생이 된다. 매 순간의 현상이나 사건들은 그냥 우연이 아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로부터 오는 근본적이고도 영적인 파동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내가 무의식적으로 선택한 메이저 아르칸 위의 상징들은 인생의 커다란 변화나 사건을 암시한다. 

- 22개의 메이저 아르칸을 순서대로 따라가면 그 자체로 한 인간의 영적, 지적, 사회적인 삶의 여정과 발전을 이야기하고 있는 아름다운 서사시가 된다. 삶의 모양새는 제각기 다르지만 어느 인간이나 태어나서, 자아가 생기고, 가족과 사회에서 교육을 받아 성장의 기간을 거친 후, 자기의 인생을 성찰하는 영적인 시간에 다다르며, 인생을 마감하는 것은 동일하다. 이 시간은 개인마다 모두 다르고, 어떤 이들은 높은 수준의 영적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타로의 이런 전체적인 서사와 각각의 그림이 주는 상징체계를 알면, 전체에서 뽑아낸 몇 장의 타로를 보며 직관적으로 보이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 메이저 아르칸은 1번부터 21번까지 번호가 매겨져 있고, 맨 마지막 카드는 '방랑 광대 Le Fou'로 훗날 게임용 트럼프의 조커가 되었다. 조커가 게임의 사이클 바깥에 있다가 원하는 순간에 끼어들듯 타로의 광대도 사이클 바깥에서 처음과 끝을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한다.

 

- 방랑 광대를 제외한 나머지의 카드에는 1~21까지 숫자가 주어져 있다. 이 중 21번은 열외로 하고, 1부터 20번까지는 5장씩의 카드가 카테고리를 이룬다. 5장 중 맨 먼저 오는 카드는 일종의 대문이다. 그 뒤를 따르는 4개의 카드가 하나의 그룹이 되어 총 4단계의 카테고리가 된다. 마지막 21은 '세계'라는 이름을 가진 카드로, 앞의 4단계가 총 조합되는 합일의 지점이다. 4라는 숫자는 물, 불, 공기, 흙의 4원소를 의미하며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물질이다. 또한 뒤에 오는 방랑 광대를 통해 다시 앞으로 돌아가는 순환의 마지막 단계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무한한 우주 순환의 개념, 원 Circle과 우로보로스 뱀의 상징이 또다시 상기된다. 카발라의 세피로트가 완성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이로써 타로의 메이저 아르칸 22장은 우주의 창조를 상징하는 심포니 오케스트라로, 조화로운 교향곡을 완성한다. 

- 첫 번째 카테고리의 문은 1번 마술사 Le Bateleur다. 뒤따라오는 2번 여교황, 3번 여왕, 4번 황제, 5번 교황, 이 4장의 카드는 물질화된 세계로의 환생, 즉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서의 현현, 탄생을 상징한다. 자아가 완성되지 않아 자신이 출발한 영적이고 우주적인 세계 속에 연결되어 있으며, 아직 다이내믹한 인생의 여정을 시작하기 전 단계이다. 인생으로 따지면 유년기다. 그래서 이 4장의 카드는 정지 상태의 그림으로, 흔히 사회적이거나 가족적인 상황을 말해준다. 
 
- 보이지 않는 정신적 세계를 상징한다. 구조를 이루는 기둥들은 종교 건축물의 전형적인 요소들이다. 기둥은 지성의 상징이고, 두 개의 기둥 사이는 통로, 문, 입구를 상징한다. 이 두 개의 기둥은 솔로몬 신전의 기둥을 상기시킨다. 프리메이슨의 전통에서 두 개의 기둥은 금색의 삼각형에 그려진 정면의 문을 둘러싸고 있다. 또한 프리메이슨의 법칙에서 수련생들은 오른쪽 기둥 앞에, 정식 단원은 왼쪽 기둥 앞, 스승들은 그들의 중앙에 위치한다. 교황과 그 앞의 두 사람을 보면 이런 암시가 느껴진다. 정통 가톨릭의 수장이면서도 장갑에는 템플리어의 한 일파인 말트 십자가로 장식된 것도 의미심장하다. 

- 그 앞의 두 사람은 정수리부터 둥글게 삭발한 수도사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교황 앞에 무릎을 꿇어 등을 보이고 앉아있는데, 용서를 통해 영혼을 씻어내고 재탄생하는 의식이다. 이들은 존경심에 가득 차 교황의 메시지를 기다리는 듯이 보인다. 오른쪽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인물은 오른쪽 팔이 프레임에서 잘려나가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에게 인도되어 교황 앞에 온 것으로 보인다. 열광적으로 교황을 우러러보고 있지만, 아직 외부세계에 열정이 남은 속세의 성직자로 갓 입문한 수련생임을 나타낸다. 왼쪽의 수도사는 영성을 표하는 노란색 모자를 뒤에 달고, 서양에서 상석을 의미하는 권력자의 오른쪽에 있는 것으로 보아 정식 단원으로 보인다. 이들은 다양한 카드와의 조합이나 질문에 따라 약혼이나 동맹을 떠올릴 수도 있고, 신혼부부로 해석될 수도 있다. 또한 이 두 사람은 내면세계에 대한 가르침과 조언을 들으러 온 순례자일 수도 있고, 할아버지 주변에 모여든 아이들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 3중(트리플) 십자가는 교회, 지상의 세계, 하늘을 상징하며, 바티칸의 교황 자신을 나타낸다. 때로는 예수 수난의 십자가로 표현되기도 한다. 타로의 3층 십자가는 고대의 엘레우시스 Eleusis 십자가 croix Hiérophante를 환기하게 하는데, 본능, 의식, 지식의 삼 단계 또는 종교적인 계급의 단계를 상징하면서 교차한다.

- 그런데 자신의 심장을 향하고 있는 왼팔의 소매는 노란색이다. 공평함을 나타내는 노란색과 감성과 열정을 나타내는 심장의 조합이니 저울질이 참으로 힘들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어려운 저울질을 통한 결정이므로 판단이 옳건 그르건 간에 거절하고 싶은 관계를 단호히 자른다는 의미가 있다. 불필요한 사회적 관계로부터의 해방을 뜻하기도 한다.

- 하지만 습관 같은 구속을 거부하는 데에는 책임이 따른다. 삶의 에너지에 충만해 새는 알을 까고 둥지에서 날아오르지만, 허공에 홀로 날아오른다는 것은 두려움이기도 하다.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일생으로 보면 사춘기가 끝나가는 시기지만, 개인적 차이가 있어 이 시기를 늦게 사는 사람도 있고, 전혀 살아보지 못하고 인생을 마무리하는 사람도 있다. 능력과 독립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어떤 이들은 이 시기를 더 어렵게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알을 깨는 행위가 없이는 창의적인 에너지가 해방될 수 없다. 이 카드가 나왔을 경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때는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를 떠올리자. 이것이 판단의 기준이 될 수도 있다.  

- 해골의 척추가 밀알의 이미지를 가진 것은 영적인 재탄생, 성장의 의미를 함축한다. 잉여적인 것을 모두 벗겨버리고 새로운 존재에 도달한다는 의미도 있다.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 카타니아라는 도시에 가면 광장의 개선문에 불사조 피닉스와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구가 있다. '나는 나의 재로부터 부활한다 Melior De Cinere Surgo'. 바로 옆에 있는 에트나 화산의 수 없는 폭발로 끊임없이 화산재에 뒤덮이고 파괴되었지만 카타니아는 수백 년간 꿈적 않고 그 자리에서 재건을 거듭하며 생명을 이어왔다. 화산 폭발로 인한 파괴란 불사조 피닉스처럼 매번 다시 찬란한 날개를 펴기 위한 시작인 것이다.

-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격렬하고도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내야 온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그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라고 한다'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의 구절도 이를 의미한다.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지금 안주하는 세계를 파괴할 만큼 엄청난 용기와 에너지가 필요하다. 거듭나기 위한 이런 과정을 칼 융은 '밤의 항해: La Traversée Noctume'라고 표현했다. 태양이 저녁이 되면 서쪽의 수평선 아래로 가라앉지만, 아침이 되면 다시 새로운 태양이 되어 동쪽 하늘에 떠오르는 것과 같다는 의미다.


 


에필로그



하룻밤의 꿈처럼, 천계를 다녀온 느낌이다.

내가 타로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림을 좋아하는 시각적 감성 때문일 거다. 거기에 마르세유 타로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부터 프랑스 근대사까지 아우르는 대하드라마 같은 스토리텔링이 담겨있어 까도 까도 속을 알 수 없는 양파와 같다. 그 매력 하나 믿고 타로라는 요물로 출발해 인류의 역사와 우주를 논한다는 자체가 무모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갓 태어나 자신이 도달한 곳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우주를 향해 '응애!' 하는 무모한 포효부터 출발하지 않았던가. 이 무모함은 생명, 즉 현존의 표현이다. 

그저 타로라는 매력적인 예술품을 통해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의 발자국을 더듬고 싶었을 따름이다. 인간이 디지털화되고 과학이 발전할수록 초현실적인 영역은 더 뚜렷하게 다가온다. 밤이 있기에 낮이 밝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이다. AI가 지구를 정복하든, 외계인이 UFO를 타고 오든 여전히 우주는 신과 함께 초현실적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신비주의에서 무언가 실마리를 찾고 싶어 기웃거렸건만 여전히 나는 우주와 세상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열정은 점차 숙연함으로 바뀌어 간다. 

"여기 이 풀잎과 별들의 냄새, 밤, 마음이 느긋해지는 저녁나절들, 내가 이토록 저력과 힘을 실감하는 이 세계의 존재를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상의 모든 지식은 이 세계가 나의 것이라고 아무런 확신도 주지 않는다. 세계를 묘사하고 분류하는 방법, 열거된 우주의 법칙... 나는 알고자 하는 갈망으로 그 법칙들에 동의한다. 분해된 우주의 메커니즘에 나는 희망에 찬다. 이 거대하고 잡다한 우주가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원자 자체는 전자로 환원된다니...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시의 세계 속에서 전자들이 하나의 핵 주위를 회전하고 있다니, 결국 과학은 이 세계를 이미지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시 아닌가. 내가 이해하기에는 이미 글러 버렸다. 아니, 그러기도 전에 또 다른 이론이 탄생했다. 이렇듯 나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줄 것 같던 과학은 가설로 끝나고, 그 명증성은 비유 속으로 가라앉고 그 불확실성은 예술 작품이 되어 버린다. 

"나는 출발점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과학을 통해 현상을 파악하고 열거할 수는 있겠지만, 세계를 포착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 확실한지도 모르는 가설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니."

- 알베르 카뮈 <시치푸스의 신화> 中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 경계선은 철학인지 종교인지 모호한 지대일 뿐이다. 영원한 시치푸스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알베르 카뮈의 아름다운 독백이 너무도 와닿아 가슴 시리다. 

 



참고도서



<탤리즈먼 이단의 역사>, 그레이엄 헨콕·로버트 보발 지음, 오성환 옮김, 까치, 2006
<중세의 빛과 그림자>, 페르디난트 자입트 지음, 차용구 옮김, 까치, 2001

<미스티컬 카발라>, 다이온 포춘 지음, 정은주 옮김, 좋은글방, 2009
<수학기호의 역사>, 조지프 마주르 지음, 권혜승 옮김, 반니, 2017
<기호와 상징>, 미란다 브루스 미트포트·필립 윌킨스 지음, 박지구 옮김, 21세기북스, 2010
<기호 상징·신화>, 뤽 브노아 지음, 박지구 옮김, 경북대학교출판부, 2006
<유럽의 폭풍>, 페터 아렌스 지음, 이제원 옮김, 들녘, 2006
<만들어진 신>,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김영사, 2007
<세상을 움직이는 수학>, 정갑수 지음, 다른, 2010
<장인 : 현대문명이 잃어버린 생각하는 손>, 리처드 세넷 지음, 김홍식 옮김, 21세기북스, 2010
<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창의 옮김, 세종연구원, 2015

<물리법칙의 특성>, 리처드 파인만 지음, 안동완 옮김, 해나무, 2003

<푸코의 진자>, 움베르코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01

<엘레건트 유니버스>,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승산, 2003

<서양철학사>,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지음, 강성위 옮김, 이문 출판사, 1999
<16세기 문화혁명>, 야마모토 요시타카 지음, 남윤호 옮김, 동아시아, 2006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연설>, 피코 델라 미란돌라 지음, 성염 옮김, 경세원, 2009
<교황의 역>. P.G. 맥스웰 스튜어트 지음, 박기영 옮김, 갑인공방, 2005

<황금가지>, J.G. 프레이저 지음, 신상웅 옮김, 동서문화사, 2007
<신의 거울>, 그레이엄 헨콕 지음, 김정환 옮김, 김영사, 2000
<성배와 잃어버린 장미>, 마가렛 스타버스 지음, 임경아 옮김, 루비박스, 2004
<빛과 꽃의 세기 르네상스> 민혜련 지음, 기파랑,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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