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구병모] 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일루젼 2024. 6. 30.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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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구병모
출판 : 창비
출간 : 2009.03.30


       


한 발짝씩 늦는 느낌이다. 뭔가가 유행일 때는 한켠에 비켜서있다가, 시들시들 잊혀졌을 즈음에야 뒤늦게 뛰어드는 느낌? 

2 페이즈가 되어서야 진입하는 거라고 포장해 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조금 겸연쩍다. 

 

예전에는 '인디병' 비슷한 게 있었다. 남들이 다 좋아하는 것 같으면 좋아하던 것도 싫어지던 삐뚤어짐. 그래서인지 '베스트셀러'라거나 'top 10' 같은 수식어가 붙으면 기를 쓰고 피하려 했었는데, 이제 중년에 접어들고 나니 뭐가 유행인지조차 잘 모르게 되어 버렸다. 여기에는 시대적인 변화도 한 몫하는 것 같은데, 채널들이 워낙 다양하게 분산되다 보니 이전처럼 '국민적 대유행'이 힘들어진 것도 한 요인 아닐까.   

 

흰소리를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좋았기 때문이다.

 

남들이 좋다고 하면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지만, 안 좋은 것도 아니라는 걸 다시금 느낀다. 저자의 특기인 기발한 상상력과 단단한 설정이 빛나는 이야기였다. 다만 초기 작품이라서인지 훨씬 맑다고 할지, 지긋한 날카로움보다는 쨍하고 경쾌한 선명한 인상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읽어본 구병모의 작품들 중에서는 <바늘과 가죽의 시>가 가장 마음에 든다. 기존의 요정 설화와 매끄럽게 어우러지는 설정도 좋았지만, 특유의 분위기가 너무나 취향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차갑고, 매끄럽고 배타적인 우윳빛 유리 같은 느낌. 

 

<위저드 베이커리>의 제빵사는 '얀'과 닮아 있으면서도 훨씬 젊다. 치기 어린 실수와 후회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그래서 냉소와 경멸을 내려놓지 못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래서 조금은 더 인간적이다.

 

주인공이 학생이라는 점이 컸겠지만, 또 동화 같은 설정들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이 작품이 '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사실에 생각이 많아진다. 저자의 다른 작품들보다 경쾌하다는 건 동저자의 작품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결코 가벼운 이야기는 아닌데. 당시에도 추천되는 건 많이 봤지만 '파격'이나 '충격'이라는 수식어는 못 봤던 것 같은데. 2009년에 이 정도는 그다지 매운맛이 아니었던 걸까. 

   

라고 생각하며 뉴스 창을 잠시 열었다 바로 닫는다.

언제나 현실이 가장 소설적이다.

 

즐겁게, 그리고 또 무겁게 읽었다. 

Y의 경우도, N의 경우도 만나야 할 사람들은 다시 만났고 소년은 웃을 수 있게 되었다. 

그거면 됐다. 

떠나온 자리가 제 자리일 수도 있다는 걸, 당시에는 알기 어렵지만 언젠가는 알게 된다는 걸.

14년이 지나 읽은 내가, 그 14년 전의 나에게.   


    
- 중불에 달구어진 설탕 냄새가 난다.
그와 함께 다른 모든 것들이 감각의 뒤편에서 들고일어난다. 방금 막 치대어 풍부한 글루텐을 함유한 중력분 밀가루 반죽의 탄력과, 프라이팬 위에 원을 그리며 녹는 노란 버터에서 일어나는 거품과, 커피에 얹은 부드럽고 촉촉한 생크림이 그려내는 물결무늬, 나는 그 가게 앞에 설 때마다 발효된 이스트의 활발한 움직임을 인식할 수 있었고, 그날의 타르트 위에 얹을 무화과잼 또는 살구잼의 풍미를 섬세하게 식별할 수 있었다. 

- 아파트 단지에서 100미터쯤 내려오면 마을버스 정류장 근처에 24시간 영업하는 제과점이 있다. 야식 본능이 출몰하는 새벽 한두 시에, 얇게 썬 햄을 돌돌 말아 넣은 크루아상이나 담백하다 못해 밋밋한 허브 향 베이글 같은 걸 먹고 싶어 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지만, 굳세게 24시간 불을 밝혀놓고 언제라도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곳. 

- 쇼윈도 너머에 나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조금 어린 여자애가 있다. 낮 동안 계산대를 돌보는 애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 계산대 너머로 제빵실이 보인다. 거기서 이십 대 후반이나 서른 초반쯤 돼 보이는 남자가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를 풍기면서 빵을 굽는다. 밤에는 여자애가 없고 그 제빵사가 계산대와 제빵실을 오가며 손님을 맞는 모양이다. (실은 그 시간에 손님도 별로 들지 않으니.) 프랜차이즈 아닌 작은 동네 빵집들이 대체로 그렇듯 점장이 곧 제빵사인 듯했다. 

- 그곳은 동네 빵집치고는 빵을 무척 많이 만드는 편이었다.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밀가루가 공기 속에 감돌다 코끝을 간질이고, 설탕 입자가 혀끝에 녹아들었다. 택배 용달차는 이틀에 한 번꼴로 들러 적지 않은 수의 박스를 장물처럼 싣고 떠났다.

- 밤샘 영업이나 가게 규모에 비해 터무니없는 대량 생산만이 이 제과점의 황당한 특징은 아니다. 문제는 그 점장이 좀 심각하게 똘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몇몇 사례를 종합하여 나 혼자 내린 결론일 뿐, 사정을 모르고 가게를 드나드는 다른 손님들도 거기에 동의해 줄지는 모른다. 

- 입만 열지 않으면 모종의 신비감과 함께 수수하면서도 전문가나 장인다운 지성미가 넘쳐 보이는 사람. 조금 우스꽝스러운 종이 모자와 그 아래로 어깨에 살짝 드리워진 꽁지머리. 곱게 걸러진 베이킹파우더 색의 얼굴과 빈틈없고 우아하며 집약적인 몸짓. 프랜차이즈 체인점을 얻지 않더라도 입소문만으로 먹고살 만한 솜씨 좋은 제빵사.  
나도 그때까지는 그런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때까지는 어느 날, 곰보빵과 조금 닮긴 했으나 여러모로 수상쩍게 생긴 빵을 집게로 가리키며 이 속에 뭐가 들었느냐고 묻기 전까지는.
계산대 여자애가 막 대답하려던 참이었다.

- "손님, 그 빵은 귀리랑 호밀에다가..."
그때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간. 말린 거."
고개를 들어보니 여자애의 경직된 어깨너머로 제빵실문 옆에 서 있는 점장이 보였다.
"갓난아기의 간을 말려서 빻은 가루 밀가루와 3대 7 정도 비율로 섞었다."

- 집게가 손가락에서 미끄러졌다. 카당, 하고 바닥을 긁는 금속성이 났다. 정말로 빵 속에 생간이든 말린 간이든 들어있을 거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설령 들어 있대도 갓난아기가 아니라 돼지의 간이겠지. (그 당혹스러운 맛은 차치하자.) 그러나 농담치고도 정도가 지나친 악담이다. 자기 딴에 농담이 아니라면, 약간 맛이 간 남자가 동네에서 빵가게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도는 건 시간문제다. 집값이 떨어질 것을 걱정하는 아파트 단지 부녀회에서 힘을 합해 쫓아낼 수도 있다. 


- 계산대 여자애는 그의 배를 손등으로 툭 치며 장난치지 말라고 핀잔을 주었다.
당연히 장난이겠지. 나는 한숨을 쉬고 허리를 굽혀 집게를 줍다가 그 옆 진열대에 있는 웨이퍼를 돌아보았다. 내 시선의 방향을 보고 점장은 말했다.
"비스킷 사이에 티티새의 똥을 얇게 펴 바른 거다. 겉에 바른 시럽은 까마귀의 눈알을 우려 만든 건데 단맛과 쓴맛, 신맛이 에티오피아산 커피처럼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아이 참, 도대체 장사할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여자애가 다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저 남자는 왜 나에게 이런 재미도 없는 장난을 거는 걸까? 어디까지 하나 보자 싶어 이번에는 젤리처럼 보이는 것을 가리켰다.
"고양이 혓바닥 3종 세트야. 페르시안, 샴, 아비시니안."

나는 집게를 계산대 위에 탕 소리 나게 올려놓았다. 여자애가 집게를 세척하러 안쪽으로 모습을 감추고, 점장은 모자를 다시 쓰며 웃었다.
"장난 아니야. 어린애라면 이해해 줄 줄 알고 솔직히 말한 건데."
대체 누가 어린애라는 건데.

-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분홍과 노랑이 교직되어 연속적인 네모 무늬를 이룬 벽지는 나름 따뜻해 보였다. 그 벽에 남루하게도, 매년 어디 은행이나 교회에서 나눠줄 법한 투박한 디자인의 달력. 빵들이 질서 정연하게 놓인 진열대의 유리문은 손자국 하나 없이 투명하게 잘 닦여 있었고, 그 문을 열기 위한 손잡이 고리는 가게 조명에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무튼 전체적으로 그리 세련된 편은 아니었고 굳이 따지자면 허름한 쪽에 가까웠다. 그러나 벽에 금이 가서 갈라져 있다거나, 그 틈으로 시원(始原)을 알 수 없는 물이 흐르며 악취와 함께 음산한 분위기를 풍긴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위생 상태는 나쁘지 않은 편.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깔끔하고 소박한 동네 빵집일 뿐이었다. 점장의 인상착의나 이목구비도 사뭇 정상적이었다. 아무리 봐도 그가 말한 것 같은 괴기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 이 집엔 평범한 사람이 먹을 만한 게 없는지 추천 좀 해봐달라고 더듬더듬 말하면서, 나는 소시지나 치즈 등 아무 부재료도 들어 있지 않은 모닝 롤 봉지를 들어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설마 여기에 밀가루나 달걀, 우유를 비롯한 최소한의 재료 외에 무엇이 더 들어 있을까 하고. 신경 쓰지 않는 척했지만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그런 몰상식한 재료 이름을 듣고 태연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점장은 제빵실에서 나오던 여자애와 엇갈려 들어가면서 묻지도 않은 대답을 했다.

"그 모닝 롤은 밀가루 대신 라푼첼의 머리에서 떨어진 비듬을 모아서..." 
여자애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나는 손을 들어 보임으로써 그의 말을 막고, 동전으로 이천오백 원을 세어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이로써 또라이 확정.

- 문을 열고 나왔다. 순간 이 보잘것없는 동네 빵집을 둘러싼 곳이 음울한 숲으로 느껴졌다. 그 숲에는 한 마법사가 살면서 매일같이 다른 재료로 과자를 만들어내어, 바람 한 점불 때마다 나뭇잎들이 서로의 살을 비비며 숲 속의 냄새를 밖으로 밖으로 내보내곤 했답니다- 와 같은 말로 시작될 법한, 민담 속에 나오는 그런 숲.


- 집에 돌아가면 당장 이 사실을 얘기하고,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세 번째 건물 1층에 있는 제과점의 이상한 남자를 아파트 단지의 교육적 측면에서 어떻게 좀 으샤으샤 해봐야지 않겠느냐고 물어봐야지... 
대체 누구에게 물어본다는 거지?
이대로 돌아가 집 현관문을 연다는 건, 그곳에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러기에 지금 이 난감한 가게에서 빵을 사 갖고 나온 거잖아. 빵 한입에 우유 한 모금 물고서, 건조하지도 눅눅하지도 않은 오늘분의 감정을 꼭꼭 씹어, 마음속 깊숙이 담아둔 밀폐 용기에 가두기 위해. 

- 남 얘기는 그만. 실은 나부터가 타인의 정신 상태를 감정할 만한 주제가 못 되면서. 세상 사람들 눈에는 작으나마 장사거리라도 가진 젊은 남자보다는, 나야말로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녀석으로 보일 터였다. 

 

- 말을 더듬기 시작한 것은 사 년 전부터다. 책을 소리 내어 읽을 때는 조금도 망설이는 법이 없고 발음도 새지 않는다. 오랜 시간 공들여 머릿속 생각을 종이에 적어 넣은 뒤 그것을 소리 내어 읽을 때도 아무런 불편이 없다. 대신 눈앞에 글이 없으면 예, 아니요 수준의 간단한 대답도 명쾌하게 하지 못한다.

몸속 어느 통로가 고장 나거나 감염된 걸까? 머릿속의 생각이 입이라는 기관을 통해 시원하게 나오려면 반드시 글자라는 여과기를 거쳐야 하니. 내게 있어 글자는 무기력에 빠져 게으르게 허우적대는 시냅스를 자극하는 신경전달물질이었다. 그게 없이는 내 생각도 내 것이 아니었다. 생각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도 민망한 무엇, 출력해 봤자 이면지 낭비밖에 안 되는 오류 메시지. 잇새로 움푹 잘려나가고 군데군데 송송 구멍이 난 불완전한 말마디들. 

 

- 담임이 조금만 더 머리가 돌아갔더라면, 문제의 유기(遺棄) 경험과 말을 더듬기 시작한 시기 사이의 시간적 격차에 의구심을 품고 그 둘 사이의 상관관계가 거의 영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터다. (이 무렵의 경험은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자.)

- 이런 문제적 특징을 갖고 있을 경우 꼭 시비를 거는 놈들이 몇 명 나타나게 마련. 고만고만한 체구에 싸움도 해보지 않은 나는 보편적인 싸움 기법 설명서에서 주로 여성 전용 호신술로 소개되는 방법으로 이기고 말았다. 맞을 때 허리를 최대한 깊이 숙이고 있으면 상대의 팔도 점점 따라 내려오는 법인데(너무 바닥에 붙어버리면 발길질로 바뀌니까 요주의), 그때 팔을 딱 붙잡고 매달렸다가 그 상태에서 몸을 갑자기 위로 솟구어 팔 관절을 뽑아버린 거였다. 

- 늘 바빠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사이에, 시간과 시간 사이에 문득 스며드는 감각이 아주 없지는 않을 텐데. 혼자서 내내 가게에 있으면 외롭지 않을까? 그보다 대체 당신은 언제 잠이 들지요?
그러나 그 24시간 영업 방침 덕분에 지금 나는 이렇게 문밖에 서 있다. 도망갈 곳이 있다.

- 나는 다급하고 간절한 나머지 더듬지도 않고 순식간에 말했다.
"나 좀 숨겨줘."
내가 최대한 멀리 도망가는 대신 아파트 단지에서 몇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빵집으로 뛰어들어 왔으리라고는, 그들 중 아무도 생각 못할 거야.
그는 전후 맥락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렇다고 달리 입을 열거나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다만 달콤한 초콜릿 냄새가 남아 감도는 제빵실 문을 열었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넓은 등은 이리 들어오라는 허락처럼 보였다. 

- 배 선생이 우리 집에 왔을 때 내 나이는 열 살. 현실과 동화를 구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나이였다. 
어릴 때는 인지능력의 미분화로 인해 현실과 동화를 구분하지 못하지만, 일정한 나이를 넘어서면 현실을 떠나고 싶어 하는 마음과 누구나 조금씩 갖고 있는 피터팬신드롬 때문에 인격은 복합적인 혼돈을 일으킨다. 그중 대다수는 잠깐의 방황 뒤 그저 그렇게 동화를 잊은 채 살아질 뿐이고, 극소수 일부는 천장에 목을 매달거나 돌아버린다. 나는 지금 대다수 가운데 하나다... 
... 가 아니라 나는 이미 여섯 살 때 청량리역의 인파 속에서 동화를 잃었다. 그때 점퍼 주머니 속에 무심코 손을 넣은 순간 오백원짜리 동전 네 개와, 셀로판지에 터질 듯 빵빵한 공기와 함께 싸인 빵, 겉봉에 노래방 이름이 적힌 질 나쁜 휴대용 휴지 따위의 현실이 만져졌던 거다. 

- 아버지는 호화로운 재혼식을 올리기가 남들 보기 민망하다며 그냥 합가하여 살림을 바로 차리고 싶어 했다. 그러나 배 선생은 자기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야반도주한 불쌍한 여자도 아니고, 보쌈당해 온 과부도 아닌데 혼인신고만 간략하게 하고 구차하게 살림부터 살아야겠느냐고, 반드시 내가 보는 앞에서 비눗방울과 드라이아이스 기체가 윤무를 추는 성대한 결혼식을 올릴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신부에게 축하의 꽃을 건네주는 화동은 나여야 한다고. 
그것은 아마도 일종의 선언.

 

- '나는 구질구질하게 네 밥 차려주고 빨래하러 들어온 식모가 아니라 처음부터 명실상부 네 아버지의 부인이다. 따라서 어떠한 경우라도 너에게 모친의 권력을 휘두를 위치에 있다는 것을 두 눈 뜨고 똑똑히 확인해라.' 
이런 요지의 선언까지 눈에 띄지 않게 (내 귓속에는 노골적으로 메아리쳤다!) 했을 정도면 배 선생도 나름 불안했던 모양이다. 내가 텔레비전 드라마 속의 사춘기 아이처럼 당신 같은 건 엄마로 인정할 수 없어! 하며 등교 거부에 들어가거나 밥에 모래를 끼얹고 못살게 구는 등 촌스러운 반항이라도 하리라 예상했나? 그래서 기선을 제압하고 주도권을 잡음으로써, 이런 종류의 집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의 싹을 잘라버리겠다고 결심했나. 

- 그렇다면 한참 잘못짚었다. 그런 마음을 먹을 만큼 나는 엄마의 빈자리를 안타까워해 본 적이 없었고, 그런 귀찮은 행위를 할 만큼 아버지와의 관계가 돈독하지도 않았다. 사람은 자기가 애당초 가져본 적이 없거나 너무 일찍 빼앗긴 것에 대해서는 미련을 품지 않는다. 

- 그렇게 장황하게 예를 들 것까지도 없이 나는 추후 아버지의 행보에 대해 코딱지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마치 내가 뒤뜰에 나만의 서낭당을 차려놓고 엄마의 영혼이 깃든 개암나무 가지를 흔들며 배 선생을 저주하기라도 할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개암나무 가지란 생전의 엄마가 아이를 깊이 사랑하고 남겨진 아이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 때에만 그 신비한 힘이 발휘되는 것일 텐데도. 
아버지의 조심스러운 위로와 설득의 몸짓 속에서 나는 사실 이런 일방적인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미 일이 여기까지 되었는데 네가 별수 있겠어? 깽판이라도 놓을래? 곱게 포기해, 응?'
안 그래도 나는 헤살 놓을 생각이 없었는데, 아버지는 내가 과도한 긍정을 하고 두 분의 행복을 빌어드려야 이 결혼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 듯 지속적으로 대답을 강요했고 굴종을 기대했다. 

- 아버지는 동화 속의 새엄마가 '절대로' 없다고 단언했으나 '절대로'만큼 폭력적인 말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동화가 아무리 가공의 이야기라도 덮어놓고 허튼소리는 하지 않는다. 시대와 문물이 변한대도 사람의 속성에 그리 극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배 선생도 처음에는 웬만한 새어머니들이 밟는 절차대로 플레이스테이션 같은 환심 살 만한 선물을 내게 갖다 안겼다. 첫 만남에서 그녀는 옆에 당시 두 살 난 딸의 손을 붙잡고 왔다. 이제 막 걸음마를 마치고 뛰어다니기 시작한 아이였다. 그 애와 내가 눈이 마주칠락 말락 한 순간, 그녀는 딸의 어깨를 자기 허벅지 쪽으로 감싸듯이 꼭 끌어당겼다. 그리고 딸은 나를 올려다보며 두려운 듯 어깨를 움츠렸다. 

- 그 애가 나를 꺼려서 어깨를 움츠리고 그걸 본 배 선생이 자기 몸에 끌어당겨 붙여서 안심을 시켜준 것인지, 배 선생이 끌어당겼기 때문에 거기에 반사작용이나 호응이라도 하듯 아이가 어깨를 움츠림으로써 뒤늦게 나를 꺼리는 감정이든 것인지 앞뒤 관계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미묘한 순간의 차이였기 때문에 나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갔다. 뒤이어 바로 배 선생이 내민 플레이스테이션 박스 때문에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 이른바 영역 싸움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동거 생활은 성공적일 터였다. 서로 꼭 필요한 만큼만 관심을 갖고, 일 년에 수차례 반복되는 집안 어른들의 생일이나 제사, 명절 등의 가족의례를 형식적으로나마 마찰 없이 치르고, 서로의 역할이나 의무를 다하는 모습을 남들에게 전시하면 그만이었다. 
내게 있어서는 한마디로 시한부 역할놀이. 에둘러 말할 것 없이 그저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생각이었고, 굳이 평범한 다른 집 열 살짜리들처럼 응석을 부리거나 하여 곁을 준다는 느낌을 갖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딱히 별다른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 경우도 배 선생이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무언의 기선제압 의욕을 보여서 내가 마음을 열지 않은 것인지, 내가 처음부터 배 선생을 소 닭 보듯 하여 그녀로 하여금 반감을 갖게 한 것인지는 역시 알 수 없었다. 

- 각자가 들이마실 공기의 부피를 침범하지 않기. 나는 잠잘 곳과 먹을 음식이라는 최소한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안정적인 미래로의 발판을 제공받고, 배 선생은 남편을 갖게 되어 자신의 딸과 함께 사회적으로나 법적으로 여러 가지 보호 및 보장을 받는 일. 지나치게 팽팽하지도, 하염없이 느슨하지도 않은 적당한 긴장감. 그런 테두리나 조건 안에서 우리는 '우리'일 수 있었다. 그때까지는. 

- 배 선생은 최초의 결혼 생활이 실패로 돌아간 뒤 그것을 새 남편에게서 보상받고 싶어 했으나, 아버지는 기대에 부응해주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하지. 아버지는 단지 '남는 장사'를 위해 결혼한 거였으니까. 따로 사는 친할머니를 챙겨주고 살림을 도맡아주며 사회적 지위까지 괜찮은 여자를 얻기 위해 결혼 시장에 목돈을 지불했는걸. 


- 그러나 그녀의 개인적 아픔을 이해한다고 해서 전처 아들인 내가 그 상처를 보듬어줄 의리나 책임 따위 없잖아? 더구나 그 전처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대강 아는 내가. 부탁이야, 아버지를 증오하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배터리가 모자라, 제발. 나는 언젠가 스스로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무언가를 두 손에 쥐게 되면, 그대로 떠나버릴 사람이야. 그때까지만 나를 참아주면 안 될까, 당신. 그냥 좀 무거운 공기가 옆에 있다고 생각해 주면 안 될까. 당신이 필사적으로 그리고 싶었던 가족사진, 그것이 영원한 화석이 될 때까지, 거기서 나 좀 빼주면 안 될까. 

- 술잔 채우는 소리에 배 선생의 의견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금방 잊혔지만, 당신 딸 무희만큼은 그렇게 두지 않겠다고 두 번 강조한 점이나, 나를 보는 대신 식탁 위의 구운 조기 눈알을 내려다보면서 얘기한 것이나, 얼마나 잘났는지 모르겠다는 '본인'이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나인지, 또는 언론에서 부풀리는 천재들인지) 이 정도면 거의 나올 말 다 나온 것 아닌가 싶다. ... 참고로 당시 나는 몇몇 글 관련, 그것도 교내 대회에서 작은 상을 받았을 뿐 지극히 평범한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배 선생은 누구도 묻지 않은 영재교육 운운함으로써 이미 감정의 과잉을 스스로 폭로한 셈이었다. 
사실은 어느 눈치 없고 철딱서니 없는 친척이, 모두에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림일기'와 '구구단' 사이에 '얘가 제 엄마 닮아서 그렇게 글재주가 좋잖아' 소리를 한 것이 좀 더 직접적인 화근이었을 터다. 그 친척은 물론 나와 엄마 사이에 벌어진 문제의 청량리역 사건을 모르고 있었다. 

- 배 선생이 내게 사소한 장면들을 하나하나 얹어주어 무게감과 압박감을 키운 것 못지않게, 그녀 자신에게도 누적되는 고통들이 있었으리라는 짐작은 쉽게 갔다. 따로따로 떼어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 그러나 마치 원소들이 모여 분자를 이루는 것처럼.
... 그렇지만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 나는 단지 거기 존재했을 뿐인데.

- "저녁을 먹었으면 밥값 좀 하지? 설거지하는 것까지 시범을 보여줘야 하니? 나는 살림하는 가정부로 이 집에 취직한 게 아니란 사실을 알아둬라."
"이제 중학교에 들어갔으니 하는 말인데, 교복 와이셔츠는 알아서 다려라. 학생 주제에 그것 말고는 입을 것도 없잖니. 온 집안의 옷을 다 다리라는 것도 아니잖아."
이런 말들이 단순히 가사노동의 불공정한 분배에 대한 비판 및 대안 제시 차원이라면 마땅히 존중하는 게 가정의 평화 유지에 도움이 될 듯하여 아무 말 없이 실천에 옮겼다. 

- 학생 신상 정보에 자연스럽게 기록으로 남았으며, 나는 정신 치료가 요망되는 '적당히 불쌍한 아이'가 되었다.
이런 쑥덕거림이 들려오다 어느 날은 상담실 담당인 국어 선생의 특별한 배려로 방과 후 개인 면담까지 진행됐다. 자꾸 나더러 마음을 열란다. 이유를 알면 극복할 수 있을 거란다. 그러나 그걸 누구에게 말할 수 있겠어. 가재는 게 편. 당신들과 똑같은 일을 하는 유능한 선생님이 있어요. 내 아버지의 아내이기도 하지요. 나는 단지 이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내가 원해서 내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난 것도 아닌데, 그 선생님에게는 그 모든 것이 문제고 건수예요. 상담이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그 선생님이에요-라고? 생각만으로도 구차한 데다 몇 다리 건너 후환마저 뒤따를 법한 이야기.  


- 이유를 안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질 일도 아니고, 남은 거라곤 원인이나 치유에의 희망이 아니라 피투된 현상뿐. 그저 혓바닥과 입천장의 불필요한 마찰을 통제할 수 없는 현상. 점점 말하기를 피하는 나. 점점 말을 잃어가는 나. 

- 몇 차례의 설왕설래가 있으나 결론은 경제적으로 그럭저럭 혜택을 누리는 중산층 집안의 자식들이 하는 일이 대개 그렇듯이, 현실적이고도 건조한 이야기로 중지가 모아진다.
[본전 못 찾을 짓 말고 다 잊어버려. 그냥 눈 딱 감고 더러운 꼴 몇 년만 참아. 대학 가서 기숙사로 들어가 버리거나, 일자리 구하고 나면 누가 말려. 지금은 힘이 없잖아. 우리 시대에 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거 알잖아.] 
그래, 얼마 남지 않았어, 길어야 이 년.

- 내가 두렵고 불편했던 것은 배 선생이 대놓고 내 머리를 욕조 속에 처박는 게 아니라 지능적으로 피를 말리기 때문이었다. 인정받는 학교 선생다운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태도로 말이다. 최소의 행동으로 가능한 한 많은 충격을 주기. 겉으로는 보랏빛 멍조차 보이지 않으나 실은 심각한 내상을 안겨주기. 
텔레비전 주말 드라마를 보면서, 사람들은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고 참고 또 참는 캔디형 주인공을 보고 말한다.

'저 병신 천치 같은 것, 왜 저러고 당하고 살아? 다 일러바치고 확 나와 버리면 되잖아?'
그러나 그리 말하는 이들도 실은 알 거다. 이상과 철저히 거리를 둔 현실을,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이 주는 무게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최소한의 금전적인 지원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조금은 감수해야 할 여러 유형의 폭력이 있다는 체념적인 단정. 일단 닥치고 집을 나와 청소년 쉼터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아이들은 아마도 생명의 위협에 가까운 폭력을 피해 도망쳤거나, 견뎌본들 나중에라도 얻을 것 없는 가난한 집에 미련을 버렸거나 둘 중의 하나이리라는 폭 좁은 편견. 기타 강간이나 임신 절도 등의 문제는 가난과 폭력의 별책부록 같은 것이리라고.

 

- 영악한 건지 고지식한 건지, 대학에 가면 당면한 문제 가운데 최소한 몇 가지는 해결된다는 전통적이고 막연한 중류 계층의 믿음. 남들이 밟은 대로 따라가는 길. 그리로 가려면 물질적인 조건은 가능한 한 충족될수록 유리하다. 그 길을 벗어난다는 것 자체가 배 선생이 비치는 적의 앞에 무릎 꿇는 셈이라 싫기도 하고. 그런 앞일을 고려해 가며 행동의 폭을 결정하는 나는 머저리라기보다는 오히려 계산적이다. 
언제가 됐든 떠나기 위한 계산기 두드리고 있는 나.
그런데 가감승제 부호 중 무엇을 잘못 눌렀는지, 계산이 어그러졌다. 어디서부터였을까.

 


 

- 악마의 시나몬 쿠키

물품명: 악마의 시나몬쿠키 2개 1입 9,000원.
성분: 중력분, 계피가루, 흑설탕, 건포도, 그 밖에 특제 비밀 엑기스, 엑기스의 원료는 특정 재료에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을 위해 비밀에 부치니 양해 바랍니다.

(주인장 왈: 단, 일반적으로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식품류가 아니니 이 점은 염려 마세요. 사실 자기가 직접 먹을 것도 아니잖아요?)

상세 정보: 반드시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에게 먹이세요. 평균 2시간 동안 뇌신경세포를 교란시켜 그가 무슨 일을 해도 실수를 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중요한 발표나 발언을 할 때도 주어 서술어가 하나도 맞지 않고 주제에도 벗어나 누가 보아도 맛이 간 사람처럼 보일 것이며, 포만 상태라면 괄약근을 조절하지 못하고 옷에 실례할 수도 있답니다. 공복 상태에서 이것만 섭취했다면 지속적인 구역질을 일으킬 것입니다. 실명은 밝힐 수 없지만, 휴정 시간에 이것을 먹은 뒤 법정에서 퇴장당한 악덕 변호사가 그 후 다시는 사건 수임을 하지 못했다는 전설도 전해져 온답니다!

사용 시 유의사항: 반드시 처음 제품을 싸고 있었던 갈색 기름종이 그대로 소지해야 합니다. 봉투를 바꾸면 효과가 떨어지니 주의하세요. 그리고 사용 당일 새벽 5시경, 해가 뜨기 전에 이 제품을 서쪽을 바라보게 놓아두고 이렇게 말하세요.

"나의 분노와 증오를 담아 ㅇㅇㅇ에게 꼭 맞는 처분을 부탁드립니다."

(※ 위저드베이커리닷컴에서 제품마다 제공하는 모든 주문은, 원래는 라틴어 또는 고대 헬라어로 쓰인 것이나 사용자의 편의를 위해 번역 및 풀어쓰기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런 만큼 주문의 효과가 약해질 수 있으니, 얕잡아보지 마시고 반드시 정성을 다해 또박또박 외어주십시오.) 

 



- 이 쇼핑몰에서는 유형 또는 무형의 신비주의적이고 수상쩍은 물품들을 팔고 있었다. 그런 만큼 포털 사이트 카페처럼 음성적인 소규모 거래가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했으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물품 주문을 하고 문의 게시판에 글을 올리며 사용 후기에 별점을 매기고 있었다. 단 상당히 고가의 물건들이 있음에도 신용카드 결제 시스템은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유효한 '사랑의 묘약'이니 ‘부두인형’이니 하는 것을 신용카드 받고 팔았다가는 거래의 흔적이 남아 당장 영업 정지는 둘째치고 경찰에 잡혀갈 것이었다. 물론 법적으로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경우를 대비하여 그는 외국 계정을 빌려다 쓰고 있었다.  

 

- 그러나 마법사의 쇼핑몰에서 파는 것들은 그런 일종의 해프닝이나 우스갯거리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 그럼 이제 마법사가 일상적으로 파는 물건이 어떤 것인지 좀 보도록 하자.
무엇보다도 그 정체불명의 빵들. 가게에서 파는 것과 겉보기는 비슷하지만 성분은 좀 달랐다. 그러니까 내가 빵마다 무엇이 들어 있냐고 물었을 때에 그가 대답했던 것은, 적어도 매장에 진열된 빵에 한해서는 농담이었다. 그러나 그와 꼭 같이 생겼으면서 그가 말한 여러 가지 사악하거나 악취미적인 재료가 들어간 빵들은, 잘 포장되어 원하는 사람들에게 택배로 보내졌다. 

- 어떤 사람들이 대체 이런 빵을 찾는 걸까?
각각의 빵은 상세 이미지와 함께 들어 있는 재료 일부에 대한 소개가 있었고, 그와 함께 자신 또는 타인이 먹었을 때의 효과가 명시되어 있었다. 마지막 줄에는 사용 시의 부작용도 꼼꼼하게 소개해놓았다. 그리고 물품 상세 설명이 끝나는 곳에는 그것을 산 사람들의 사용 후기가 빨간 별점과 함께 올라와 있었다. 단지 재미로 사본 것이었으나, 우연인지 간절히 소원을 빌었기 때문인지 뜻밖의 효과를 보았다는 이야기들과 함께 빨간 별점은 다섯 개 만점에 대체로 평균 네 개나 최소 세 개 반은 되었다.  


- 비즈니스 에그 머핀 : 새 사업이나 장사를 시작하는 집에 선물 세트로 갖다 안기세요. 엄청난 성공이나 부귀를 안겨주진 못하지만 장사를 꾸준히 지속하고 싶다면... 이게 행운을 가져다줄 거예요. 최소한 말아먹을 일은 없을 거랍니다. 그러나 자꾸만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려는 욕심 많은 사람에게는 듣지 않아요.

- 메모리얼 아몬드 스틱 :걸 먹고 명상에 잠기면 잊어버렸던, 또는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일이 머릿속에 또렷이 떠오릅니다. 나의 잠재의식 속에는 뭐가 있을까? 내가 모른 척 덮어둔 기억은 무엇일까? 모험심과 호기심이 넘치는 분들이라면 시도해 볼 만하네요.

- 에버앤에버 모카 만주 : 전학이나 유학, 이민 등 멀리 떠나는 벗에게 선물하세요. 당신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 사람의 힘든 순간, 기쁜 순간마다 당신이 떠올라 당신을 찾지 않고는 못 견딜 거예요.

- 도플갱어 피낭씨에 : 주문에 따라 이걸 먹고 잠들면 다음 날 내가 가기 싫었던 학교나 회사에 또 하나의 내가 대신 가줍니다. 맘 편히 집에 있거나 땡땡이를 치세요. 단 정말로 도플갱어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가보면 절대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둘을 동시에 발견하거나 둘의 눈이 마주치면 둘 중 하나가 영원히 사라져 버릴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겠어요?

- 그리고 각 물품의 맨 마지막 줄에는 인상적인 경고문이 곁들여져 있었다.
'긍정이나 부정, 자기가 바라던 어느 쪽의 변화든 간에 이것은 물질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계의 질서에 변화를 일으키는 일입니다. 따라서 모든 마법의 이용 시 그 힘이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하십시오.' 
이건 뭐, 이용을 하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그러고 보니 초기 화면의 회원 가입 안내문에도 그런 내용이 있었다.
'모든 마법은 자기에게 그 대가가 돌아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자신의 행위로 인한 결과를 책임질 수 있는 분만 가입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단의 체크박스에 볼록 튀어나온 '예, 동의합니다' / '아니요, 동의하지 않습니다'.

 

- 오른쪽 벽면은 벽난로와 그 앞에 마주 바라보게 놓인 1인용 벨벳 소파. 벽난로는 성냥을 그어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는 운치 있는 것까지는 아니고 전기 벽난로긴 했지만, 어쨌든 가열은 되는 모양이고 불꽃도 제법 일어나게끔 되어 있다. 불꽃은 그 위에 올라앉은 커다란 검은 무쇠솥을 어루만지며 핥고 있었다. 벽난로 양쪽에 고리로 걸게 되어 있는 둥그런 무쇠솥이라니. 모든 것을 부패시키고 발효시키는 마녀의 자궁에 비유되곤 하는 솥. 그야말로 마법사의 집에 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무쇠솥에서는 하얀 김이 꿈틀거리며 흘러나와 공기 중으로 퍼졌다. 그 안에서 뭐가 끓고 있는지 슬쩍 훔쳐보았으나 조금 실망스럽게도 그저 투명한 물이었다. 

- 그래도 그 솥을 보자 그전까지 그에 대해 가졌던 또라이 의혹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솔직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이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명 같았다. 내 앞에 어느 날 미지의 존재나 마법사가 실제로 나타난다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러나 당황하거나 볼을 꼬집어보기보다는 이상하리만치 편안하고 긍정적인 심정이 되었다. 절대신이나 영혼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믿을 수 있는데, 하물며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임에야.

- 그 현실을 받아들이자, 바닥에 그려진 커다란 원에 직선, 곡선이 조합된 그림도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마법진일 거였다. 꼭짓점이 여섯 개인 작은 별을 감싸고 꼭짓점이 열두 개인 더 큰 별이 그려졌는데, 각각의 선이 모여 만든 공간에는 짤막한 히브리어 같은 말과 수학 공식이 적혀 있었다. 그 별은 두 개의 커다란 원이 감쌌다. 

- 원래 모든 이야기 속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바로 저런 것, 굳게 닫힌 문에 격렬한 호기심을 느끼고 다가가 문손잡이를 돌려보거나 서랍을 당겨보는 법이었다. 처음에는 잠겨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 어느새 손잡이는 스르르 돌아가고 또 다른 세계가 열린다... 내지는 그 안에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들어 있다... 는 게 대략의 설정이며, 그런 이야기 속에서 반복되는 화소(話素)란 대체로 함정이었다. 금기의 문을 열면 푸른 수염의 컬렉션이 되어버린다. 또는 몸이 돌덩이가 되어 굳어버린다.

- 절로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직업을 바꿀 생각 없나?
"아무라도 그 정도는 보면 알아. ... 하지만 뭐, 단골손님이니까 한 번이라도 더 보게 되는 건 있지."
파랑새는 다시 날아올라 뻐꾸기시계의 장식 위에 앉아서 고개를 숙였다. 처음부터 그 장식의 일부였던 듯.

- 그는 내게 초극세사 차렵이불 한 장과 약병 두 개를 던져주었다.
"굳이 바닥에서 자고 싶으면 그렇게 해. 단 바닥에 그린 그림과는 멀리 떨어질 것. 여러 가지 정신 사나운 일이 많아서 잠이 안 온다면 약을 두 종류 먹어봐. 거기 투명한 약은 잠 오는 약이고 -수면제는 아니니까 안심해도 돼.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는 것뿐이니까- 보라색은 좋은 꿈을 꾸게 해주는 거야. 꼭 좋은 꿈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몽마(夢魔)가 접근하지 못하게는 해주지. 둘 다 허브 향이 나는 정도니까 물 없이 그냥 먹어도 돼."

- 온라인상에서 물건을 사고는 이런 식으로 오프라인으로 쳐들어오는 손님은 일주일에 한 번꼴로 나타났다. 점장은 늘 그렇듯이 어딘가 귀찮아 보이지 않으면 화가 난 얼굴이었다. 왠지 모르게 자기 물건을 산 사람들에 대한 경멸이나 혐오에 가까워 보이는. 

- "그래서 지금 와서 어쩌란 말이지? 그걸 필요로 해서 산 사람은 너야. 네가 그런 결과를 얻은 건 물건이 철저하게 효과를 봤다는 뜻이겠지? 거기에 애프터서비스라도 해달라고?"
그는 교복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전자레인지에 큰 머그잔을 넣고는 작동 버튼을 눌렀다. 기분이 어쨌든 간에 손님으로 온 아이에게 그렇게까지 쌀쌀맞게 굴 건 없잖아.
"그게 아니고요. 나는 이제 어떡하면 좋냐고 묻는 거잖아요. 이렇게 큰 부작용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단 말이에요. 필요 때문에 어울리긴 했지만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었는데, 앞으로 남은 날들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죠? 그 애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나도 못 살 것 같아요.”
점장은 희미한 조소를 입가에 머금다가 힘주어 내뱉었다.
"그럼 죽어. 왜 살아?"

- 교복이 분통을 터뜨리면서 식탁에서 일어선 것과, 내가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의 멱살을 잡아 벽에 밀어붙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 당신이 한 일이 아니라 해서 함부로 남의 불행을 비웃어도 되는 거야? 나는 머릿속으로 말을 정리하고는 입을 천천히 열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머리에서 완성되었던 말은 한 음절씩 더듬더듬 혀끝에서 미끄러질 뿐이었다.

- 옆얼굴에 교복의 시선이 느껴졌다. 교복은 점장에 대한 당장의 분노보다도, 제삼자인 웬 남자애가 멱살만 기세 좋게 잡았다뿐 얼굴이 새빨개진 채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고 우물거리는 게 더욱 혐오스럽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 "... 평생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면서 살아라. 비록 과실치사긴 하지만, 죽는 날까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야. 여기까지는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인간 같으면 보편적인 얘기고... 너한테 하나만 더 추가하자면, 네가 저지른 일의 무게만큼 악몽을 꾸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거다. 잊을 만하면 꿈속에 그 애가 찾아올 거라고." 
교복은 입술을 바들바들 떨다가 문을 밀치고 나갔다.
점장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요란하게 흔들리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파랑새는 되도록 멀리 떨어져서는 중얼거렸다.
"마지막 말은 굳이 할 필요 없었잖아요. 당신이 말한 건 그대로 사실이 되어버리는데... 아, 물론 저 손님이 그래도 싸다는 건 인정하지만요,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악감정을 갖고... 우리가 경찰의 방문이라도 받으면..."
"너 나랑 살면서 경찰 조사 한두 번 받아봐? 새삼스럽게. 신경 쓰지 마."
점장은 피식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고는 나를 보며 턱짓을 했다.
"너는 이만 들어가 봐."

- 모든 강렬한 충동은 후각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빵 냄새, 돈 냄새, 욕망의 냄새, 증오의 냄새.
문을 밀고 들어갔다. 거기서 파랑새와 그 너머 서 있던 점장을 처음 보았다.
라푼첼의 비듬과 고양이 혓바닥 얘기를 들은 뒤로도 이틀에 한 번쯤은 이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곤 했다. 그런 나를 보고 아마도 점장은 나름 강적이라고 느꼈을지 모르겠다. 아파트 재개발 계획으로 인해 원래 있었던 편의점 자리에 부동산이 들어선 이후, 나는 더욱 이곳에 일용할 양식을 의존했다. 어쨌든 집에서 저녁 식사라고 해본 지가 수천 년은 되는 듯했다. 

- 식빵이나 모닝 롤은 금방 지겨워졌다. 하지만 그 밖에도 그곳에는 골라 먹을 만한 수많은 빵들이 있었다. 다진 체리와 으깬 사과를 넣은 애플 소스 케이크를 조각으로 나누어 팔았고, 밀겨를 넣어 노란 광택이 나는 비즈 브레드가 있었다. 달지 않은 커피 롤 쿠키, 한 사람이 먹기 좋을 만큼 작게 만들어 파는 파운드케이크, 살구 잼으로 코팅한 위에 얇게 썬 아몬드를 꽂은 오르땅씨아 한 조각. 카스텔라와 조린 밤을 넣어 굳힌 마롱 젤라틴 푸딩. 껍질이 바삭바삭한 별 모양의 카이저 롤. 생크림과 피스타치오로 장식한 독일식 치즈 크림 케이크, 캐러멜 시럽을 넣은 감자를 속재료로 쓴 이름 모를 빵까지 돌아가며 이용할 수 있는 레퍼토리는 차고 넘쳤다. 언제나 주머니 사정이 그만큼 받쳐주느냐가 문제였지만.

- 그런 그에게 어째서 그처럼 호화로운 침대가 필요한가 하면, 한 달에 단 하루, 보름 되는 날에는 스물네 시간 꼬박 죽은 듯이 잠자기 때문이다. 그날 한 달 치 잠을 몰아서 자고, 가게 문은 하루 종일 닫혀 있으며, 파랑새는 사람 모습을 하고 쇼핑을 하거나 영화를 보는 등 사람 같은 휴일을 즐긴다. 기억을 돌이켜보니 정말로 보름째 되던 날이면 가게 덧문이 내려져 있어 나는 빵을 사지 못한 채 등을 돌리곤 했더랬다. 보름달 아래 아무런 마법도 쓰지 못하고 시체처럼 깊이 잠드는 마법사라니. 마녀의 저주에 걸려 불완전체로 살아가야 하는 반요(半妖)나 늑대인간처럼. 그는 오븐 속 방에서 하루 종일 자면서 무슨 꿈을 꿀까.  

- 벽에 이마를 붙이다시피 한 채 모로 누워 자고 있었다. 그의 옆에 코끼리를 올려놔도 자리가 남을 것 같았다.
"... 불... 편해... 보여."
잣말로 중얼거리는데 파랑새가 내 어깨를 손가락으로 꾹 찔렀다. 파랑새는 손가락을 자기 입술에 대어 보이고는 나오라는 듯 손짓했다.
우리는 오븐 문을 열고 가게로 나갔다. 덧문을 내려 햇빛이 들지 않는 가게는 어둠침침했다.
"아주 예민한 성격이라서 수도꼭지에서 물 한 방울만 떨어져도 뒤척거려. 푹 자게 해줘야 해. 안 그러면 그달 내내, 적어도 그 주 내내 신경질적이거든." 

- 그런 자세로 깊이 잠들어봤자, 일어나면 삭신이 쑤실 것 같은데.
"그가 그렇게 불편한 모양으로 자는 건 몽마들의 습격을 되도록 피하기 위해서야. 한 달에 하루 자는데 귀찮은 파리떼가 달라붙으면 싫잖아. 사람을 위해 몸에 결계를 치는 약은 만들 줄 아는데, 그게 자기 자신한테는 통하지 않거든. 너도 그동안 봐서 알겠지만 성격이 그렇게 둥글둥글한 편이 아니라서 그를 미워하고 노리는 것들이 많아... 저런 모양새를 하고 있어도 웬만큼 잠들 수는 있어. 중간에 깨우지만 않으면 돼. 성질도 성질이지만 어설프게 자다 깨다 하면... 잠자는 자세가 흐트러져서 몽마가 꿈의 급소를 찾아내기가 쉬워지거든. 그러면 악몽에 시달려, 밤새도록."
"그, 그럼, 주, 죽어?"
파랑새는 웃음소리를 죽이려고 키득거리며 손사래를 친다.
"평범한 사람 같으면 그럴 수도 있어. 그건 일종의 쇼크사라고 보면 되는데, 그는 그렇게 약하지 않아. 그래도 고통은 고스란히 겪는대... 꿈을 꾸면서 자기도 모르게 죽여달라고 소리칠 정도라고. 꿈에서 손목이라도 잘리면 깨고 나서도 그 자리가 생생하게 아플 정도래, 손목은 붙어 있지만. 나는 안 꿔봐서 몰라, 하지만 보통 인간이 일상적으로 꾸어도 좋을 만한 게 아니라는 건 분명해."

- 그러면 그는 죽을 때까지 썩 개운치 않은 채로 수면 부족에 시달리면서 자기 목숨을 노리는 것들과 싸워야 한다는 뜻인가. 마법사란 참으로 고단한 삶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이런 귀찮은 일을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째서 사람들한테 마법을 제공하고 때로는 그것 때문에 욕을 먹으면서 살아야 할까.

- "그건 있잖아, 마법사도 아닌 내가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내가 이런 얘기했다는 거 비밀이다. 물질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야." 
파랑새의 말에 따르면 그랬다. 우주는 크게 물질과 비물질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세계 곳곳에서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비물질계를 변화시킨다. 그 주체는 주로 민속신앙의 집행자들이나, 특정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 또는 마법사나 주술사 들인데 간혹 평범한 일반인도 있다. 그런데 그 변화는 사람(들)의 원망을 에너지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힘들이 쌓여서 커지면 조금씩 물질계에도 변형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친 세계의 불안정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저편에서 누군가가 뒤틀어놓은 물질계와 비물질계를, 이편에서 다른 힘으로 붙들거나 되돌려야 한다고. 세상의 마법사들은 모두가 함께 존재하지 않거나, 모두가 같이 존재해야만 하는 딜레마를 안고 살아간다고. 그것은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소망이라는 게 없어지지 않는 한―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남아 있는 한 계속되는 현상이라고. 

- "흔한 예를 들어볼까. 평범한 인간 여자가 한 손으로 자동차를 들어 넘어뜨릴 수 없잖아? 사이드브레이크가 풀려도 앞뒤 두 방향으로만 밀릴 뿐이고. 하지만 트럭 밑에 자기 아기가 깔리면 어머니가 트럭을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는 일이 종종 벌어지지. 그 여자에게 다시 트럭을 들어보라면 들 수 있을까? 어림도 없지. 그 여자가 순간적으로 터뜨렸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아드레날린이 갑자기 폭발하더라도 그것이 호응할 수 있는 물리적 힘에는 이론적으로 한계가 있거든. 사람들은 그걸 기적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 에너지가 비물질계에서 오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어. 그런데 모든 사람이 아무 때고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면 물질계는 어떻게 되겠니." 


- 확률 이론이 발달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연이나 기적의 완전한 종말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어딘가에서 평소와 다른 어떤 힘이 발생하면, 그것과 일상성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또 다른 유형의 힘이나 반대 극에 있는 힘이 한편에서 작용하여 지나치게 확산된 에너지의 흐름을 잡아당긴다. 그럼으로써 생성과 소멸의 논리를 이루어나간다.
사라져야 할 무언가가 사라지지 않으면, 우주를 구성하는 원소의 힘이 그 사라짐을 대신할 것을 찾아낸다. 그리하여 규칙과 질서를 평균적으로 유지하고 신성에 가까운 궁극의 원리, 즉 본질과 기초에 변동이 없게 한다. 
따라서 마법사로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가 숙명이자 일종의 업이며, 동화 속에서 보는 것처럼 행복한 꿈이나 즐거운 유희와는 거리가 멀다. 

- 하지만 마법사에게... 요컨대 '우주를 지켜야 할 의무'는 없는 거 아닌가? 물질의 이변이 어디서 일어나든, 그로 인해 물질계가 깨지고 비물질계가 뒤틀리며 지구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든, 수수방관하고 있으면 안 돼? 이도 저도다 끝장나버리면 나의 시시한 문제 따위는 얼마나 작고 시시한 것인지 알게 되련만. 

- "아쉽게도 마법사는 그런 삐딱한 노선을 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파랑새는 말했다. 마법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의 모든 요소에 오감이 열려 있는 자. 양극성의 원리에 의해 하나의 힘은 그와 반대 극에 있는 다른 힘을 자석처럼 끌어당긴다는 거였다. 마법사는 그 자기장 안에서 생동하는 원소의 움직임까지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우주를 구성하는 대원리에 종속된 한 개의 원소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의지와 무관하게 누군가는 탄생하고 누군가는 흙으로 돌아가 분해되는 것처럼, 자신이 아무리 숙명을 거부해도 어느새 그것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 무형의 의지라는 것이 자신의 삶의 자리를 결정할 수만 있다면. 그럼 나는 처음부터 이곳에 들어올 일이 없었을 터다. 늘 강조했듯이 나는 단지 거기 있었을 뿐인데. 단지 거기 있었을 따름인 내게, 배 선생은 왜.

- "숙명과 현상의 관계는 닭과 달걀 같아. 약간 종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사람과 사물과 사건은 이유를 갖고 거기 있는 거라고들 해.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라. 아무런 목적도 의지도 없는 채로 우연히 거기 있었던 것들이 서로를 향해 손을 뻗으면서 그때부터 이유를 만들어간다고 해. 그렇게 만들어진 이유들의 흩어짐이 대원리 또는 숙명을 이뤄. ... 이건 그의 생각일 뿐이고 너는 나름대로 네 사정에 맞게 생각해. 그는 우주의 소리를 듣지만 실은 우주에 대해 다 알지 못하니까. 그걸 알면 진작 그의 육체와 영혼은 분자 단위로 흩어져서, 존재도 비존재도 아닌 상태가 되지 않았을까." 
그때였다. 바깥에서 덧문을 거칠게 두드리며 발로 차는 바람에 우주 만물의 법칙에 대한 우리의 고민은 거기서 중단되었다.
 
- '목을 감아 죄어버린다는 걸 잊지 마세요.'
종류를 불문하고 감정의 폭발적인 상승은 언제나 경계할 대상이다. 비이성적인 행위를 촉발하는 에너지의 출처는 대체로 욕망과 맥락이 닿아 있으니까. 고대부터의 모든 종교가 보여줬듯이 극단적이고 끓는점이 낮은 사랑은 공격과 폭력을 부른다. 
사람의 감정이 한 덩어리의 밀가루 반죽과 같다면, 나는 아직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지만 그럴 만한 사람이 설마라도 나타나면, 한 덩어리의 감정을 최대한 가늘고 길게 뽑을 거다. 솜씨 좋은 장인이 뽑아낸 면발만큼이나 가늘고 길게. 굵고 짧게 토막 나는 감정이라면 분노만으로도 충분해. 

- 내가 봐도 좀 미심쩍었고, 그녀가 부정하는 속물적인 이유가 이별에 충분한 근거가 됐을 것처럼 보였지만, 점장은 거기에는 별로 토를 달지 않았다.
"물론 사정은 딱하지만... 무책임하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지. 그러니까 처음부터 심사숙고하라고 물품 설명에 몇 번을 적어두었잖아."
"언제나 옳은 답지만 고르면서 살아온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당신은 인생에서 한 번도 잘못된 선택을 한 적이 없나요?" 
그때 순간적으로 점장의 얼굴에 미세한 표정 변화가 일어나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표정과, 언젠가 가게에 일어났다는 화재의 근본적 원인 사이에 관계가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그는 말했다.

"틀린 선택을 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게 아니야. 선택의 결과는 스스로 책임지라는 뜻이지. 그 선택의 결과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너의 선택은 더욱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란 말을 하는 거야. ... 그리고 일 년도 안 되는 사이에 동일한 사람에게 완전히 상극의 힘을 쓴다는 것도 문제야. 그로 인한 부작용이 반드시 너한테까지 미칠 테니까. 가장 단세포적인 예를 들면 믿을지 모르겠는데, 그의 눈이 먼다고 치면 너 또한 사고로든 다른 무엇으로든 적어도 한 눈 정도는 멀게 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 
그는 보통 사람이 들으면 섬뜩할 얘기를 오늘의 메뉴 설명하듯이 했다. 여자는 잠깐 멈칫하다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몸의 일부를 떼어내야 거래가 가능하다는 거군요. 한 눈이라."
점장의 대답은 더욱 거침없고 신랄했다.
"최소한 한 눈이라는 거지,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무궁무진하고 그 종류도 일정치 않아. 한 눈이 될지 두 눈이 될지, 얼굴 전체일지 아니면 미래에 태어날 너의 아이가 될지. 우리의 일은 대개 동종요법의 원리에 따라 일대일 대응을 이루지만, 그로 인해 네가 돌려받을 결과는 상대방이 받은 고통의 크기에 비례하기 때문에, 눈이나 다리 같은 인체의 부위가 중요한 게 아니야. 거기에 대한 준비는 되었나?"  

- 미래에 태어날지 어떨지 모르는 아이에 대한 언급은 좀 심하지 않아? 하지만 마법사에게는 당연한 일이겠다. 허영에 들뜬 평범한 소녀는 황금실을 잣고, 황금실을 하루 만에 대신 자아준 요정은 네가 왕비가 되는 대신 태어날 아이를 달라고 하고, 철없이 덜커덕 약속을 해버리는 소녀. 막상 인간이 아기를 낳고도 약속을 지키려 하지 않자, 요정은 꼭 세 번의 기회를 줄 테니 나의 이름을 알아맞혀 보라고... 끝내는 스파이를 풀어 룸펠슈틸츠헨이라는 이름을 알아내고 황금실과 왕관과 아이를 모두 차지하는 소녀. 어쩐지 인간의 욕심에 미지의 힘을 가진 이들은 예로부터 대개 손해 보는 분위기다. 
여자는 말이 없었다.

- "안 봐도 뻔해. 그런 준비 따위 됐을 턱이 없지, 남 못 되게 비는 데 정신 팔린 사람이 이번에야말로 신중하게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 자, 내 말은 끝났어. 결심이 선 다음에 다시 오겠어?”
"... 알았어요. 생각해 보고 다시 올게요."
그는 이미 등을 돌리고 안쪽으로 반쯤 들어간 상태였다.

"영업 방해가 되기는 하지만,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그 작은 의자에 앉아 지내도 상관은 없어. 밤길이 위험하다고 했지?"
"물론 위험이 없지는 않아요. 그래서 지금 집으로 돌아가기는 힘들 것 같네요. 집이 많이 멀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 되나... 뭐, 나온 김에 간만에 찜질방에 가려던 참이기도 했으니까 오늘은 거기서 자야겠네요."

- 오븐 속 방으로 다시 들어간 점장은 벽으로 돌아누웠다. 머리를 대기만 해도 스르르 눈이 감길 만큼 부드럽고 포근한 베개, 서걱거리며 스치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푹신한 이불이 있음에도, 몽마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구석에서 모로 누워 자야 하는 사람. 한 달에 한 번이나마 유밀과처럼 바삭바삭하고 달콤한 잠 속에 깊이 빠지는 줄 알았으나, 실은 그조차도 최소한의 육체적 피로를 풀기 위한 선잠에 지나지 않았던 사람. 

- 나는 꿈을 꾸지 못하는 그가 조금은 마음 아팠다. 그는 어쩌면, 인간들이 꾸는 꿈이란 그들만의 불필요한 환각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냉소적으로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타인의 꿈속에서 어떤 상징과 배열을 읽어내는 능력이 있으나, 그 꿈을 자기 것으로는 할 수 없는 사람. 우리가 꿈이나 환상이라고 치부하는 것들이 그에게는 모두 명백한 현실일 터이니. 

- 때로는 한없이 어리석지만 그것밖에는 선택할 수 없는 남들의 바람을 이루어지게 도와주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소원이 없는 사람. 남들의 감사만 받아도 모자랄 마당에 단지 뒤틀린 결과 때문에 비난을 받아야 하는 사람.

 

-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탓할 상대가 있어서 편할 것이다.
'당신이 그런 수상쩍은 물건을 만들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면 손대지도 않았을 금기를...'
여자가 생각을 정리하고 돌아오면, 무엇이 될지 모르는 자기 신체 또는 영혼의 어느 부분을 제물로 내놓겠다고 약속하면, 그러면 당신은 그녀에게 부두인형을 만들어줄 거야?

- "... 저 여자 다신 안 와."
등을 돌린 채로 그가 중얼거렸다. 자는 거 아니었어?
"못 오지. 인간의 몸은 그 자체가 우주라지만, 사랑을 위해서조차 내놓기에 턱없이 작고 모자라. 그런데 고작 증오를 위해 내놓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다시 졸음 속으로 묻혀가는 듯 그의 목소리는 피아니시모로 점점 작게 잠겼다.
"이런 일을 하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너는 행여나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그의 어깨의 움직임이 숨소리에 따라 고르게 분포되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다시 가게로 올라갔다.

- 불 꺼진 가게에서는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대신 풍부하고 따뜻한 냄새만이 코끝을 간질였다. 이렇게 감미로운 냄새로 가득 찬 공간이, 실은 남을 돕기도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를 망가뜨리기도 하는 그 무엇을 만드는 공간이라는 사실에 점점 실감이 더해지고 있었다. 
계산대 앞에 앉아 손을 올려놓았을 때 매끄러운 멜라민 접시가 만져졌다. 그 위에는 가끔 물건을 기다리는 손님들을 위해 놔둔 작은 드롭스들이 있었다. 손가락이 닿자 드롭스 봉지들은 서로 맞닿아 바스락거렸다. 
조심스럽게 그중 한 개의 봉지를 찢었다. 입속에 밀려드는 적당하고 완벽한 둥글기와 레몬 맛.

 

- 옛이야기에서와 달리 지금 사람들이 마법의 과자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건 당장의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필요보다는 대체로 추상적이고 감정적인 문제 때문. 과열된 감정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수소를 가득 담은 풍선만큼이나 끝없이 상승할 수 있다. 감정과 풍선의 공통점은 비가시권의 높이에서 제풀에 폭발해 버린다는 것.  
그에 비하면 현실이란 그넷줄이나 위로 튀어 오르는 공과 같이 얼마나 건조하고 절망적인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곳까지밖에 오르지 못하며, 땅이 잡아당기는 힘을 뿌리치지 못하고 다시 내려오니까. 

- 이곳에 평생 머물 수 없고 언젠가는 내려와야 하는 걸 아는데.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데. 알고는 있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야 싸움의 끝을 볼 수 있고, 아버지 또는 배 선생과 삼자대면을 해야 할 것이며, 그동안 배 선생이 어떤 조치를 취했느냐에 따라 약간의 복잡한 조사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걸. 그리고 이 가족이란 명분과 틀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잘못을 빌어야 할 것임을. 그런데 배 선생이 그때까지 나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면, 과연 나의 아버지와 결혼생활을 유지하려고는 할지 의문이었다. 
그래도 이 모든 일에서 피해 갈 수는 없다는 것을. 현실은 쓴데 입속은 달다.

- 허브힐 스파에 큰 불이 일어나서 이용객과 직원을 비롯한 20여 명이 다치고 그중 여성 1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방화 용의자인 27세 김 모 씨가 체포되었다는 기사는 그다음 날 뉴스에 나왔다. 김 모 씨는 전신에 2도 화상을 입은 여성과 연인 관계라고 했으나, 여성은 이를 강력히 부인했다 한다. 그 여성은 응급처치를 받고 현재 1차 수술을 기다리고 있으며, 충격으로 인한 가벼운 정신분열증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 이것은 그날 밤에서 새벽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예민한 점장이 잠에서 깨어 부두인형을 만들어달라던 여자와 실랑이를 벌이고 난 뒤 다시 잠들고 나서 생긴 일. 
드롭스가 혀끝에서 다 녹아 사라졌을 때쯤, 나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잠이 들었다. 나의 제자리는 언제나 바닥. 점장이 자신은 거의 쓰지 않는 침대에서 자도 좋다고 했지만 나는 몇 주일 내내 바닥을 고집해 왔다. 
사실 이왕 염치없이 신세 지는 거 굳이 불편한 장소를 고수할 필요는 없었다.  

- 이윽고 소녀가 입을 열었다. 나는 소녀를 노려보았다. 이건 꿈이야. 꿈이고말고. 그러지 않고서야 내가 이렇게 멀쩡하게 말할 리가 없잖아.
"그건 무슨 헛소리야? 어서 이거 풀어줘."
"그러니까 소용없다고 했지요. 이건 내가 한 게 아니라 그 자신이 한 일입니다."
"이 사람이 왜 자기한테 이런 짓을 한다는 거지? 대체 넌 누구야?"
"이미 눈치채지 않았나요... 지금 눈앞에 보이는 건 그를 속박하는 꿈속의 이미지입니다. 나는 다만 그 이미지가 좀 더 살아 움직이도록 도울 뿐이에요."

- 몽마다.
어둠의 냄새를 피우며 사람의 꿈을 휘발시켜서 그것을 악의의 에너지로 삼는 존재. 극단적으로 굴곡이 진 몸매에 요괴 얼굴을 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으나, 몽마는 뜻밖에 무희만큼이나 작고 귀여운 소녀였다. 전설로는 섬뜩하게 생겼지만 꿈속에 나타날 때는 미모로 찾아든다고 하지. 그러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소녀는 역시 꿈일까. 꿈과 현실의 경계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꿈속의 꿈과도 같은 느낌. 

- 그녀가 내 몸 위에 올라타 한 손으로 목을 눌렀다. 그리고 내 이마에 자기 이마가 거의 닿을 만큼 가까이서 내려다보며 차가운 숨결을 내뿜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에서는 심연에 잠겨 있던 검붉은 물풀 냄새가 났다.
"어디 한번 즐거운 시간 가져보세요. 영원히 못 깨어나도 난 모릅니다. 그것도 당신이 선택한 거니까." 
그리고 나는 에테르가 얼굴에 끼얹어진 듯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을 감았고 급격히 꿈속으로 떨어졌다. 역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꿈인지 알 수 없었다. 꿈속의 꿈. 꿈속의 꿈속의 꿈. 

- 내 몸은 여섯 살로 돌아가 작아져 있었다. 내려다본 바닥이 훨씬 눈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팔을 들어보니 아버지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크고 헐렁한 남방셔츠 소매가 보였다. 이곳은 어디?
허공에 육중한 곡선을 그리며 유리구슬들을 알알이 빛내는 샹들리에가 어쩐지 낯익었다. 샹들리에 아래로 검은 띠가 늘어져 매달려 있었다. 어디서 바람이 들어오는지 띠는 하느작하느작 흔들렸다.  

 

- 반만 남은 팔로 상처를 누르며 입을 열었다.
[이제 만족하지요.]
꿈속에서 처음으로 내 목소리가 나왔다. 배 선생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네가 뭔데, 너 따위가 감히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해.
[이게 현실이든 꿈이든 상관없어. 나한테는 이미 당신 하나쯤 때려눕힐 만한 힘이 있어. 그렇지만... 지금부터는 내 의지로 당신을 불쌍하게 여기기로 했어... 당신은 이미 내가 그런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잖아. 내 목을 조를 시간에 무희를 괴롭힌 진범이나 찾아보는 게 현명할 거야.] 
이런 게 악몽이라면 조금은 꿀 만한 가치가 있다. 이렇게 끊기지 않고 말해본 게 수백 년은 된 옛일 같다.
[나 알아요. 나도 처음부터 거절하고 당신한테 아무것도 주지 않으려 했다는 거... 내가 받고 싶은 게 없었으니까. 그게 가장 바람직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당신이 나한테 했던 일들은 내 선택에 대한 대가 정도로 생각해 둘게요. 이젠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지요. 여긴 당신들만의 공간으로 삼아도 돼요. 알아서들 행복한 미래 구상도를 그리라고요. ... 내가 이 그림에서 빠진다고 해서 당신들을 적으로 돌리지는 않을 거예요...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것 같으니까. 단 이제는 나도 그만 내버려 둬요.]
그러자 배 선생은 그건 그것대로 약 오른다는 듯이 펄펄 뛰며 내 배에 주먹을 꽂았다. 오장이 빠져나간 어둠의 자리에 주먹은 그대로 내 몸을 꿰뚫었다.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은 내 얼굴에 배 선생의 발길질이 날아왔다. 부러진 이가 입술 사이로 비어져 나오고, 어찌 된 일인지 꿈속에서도 찝찔하고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얼굴을 감싸거나 저항하지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견디면 끝이야.
조금만, 조금만 더. 

- 눈을 떴다. 격렬한 꿈에 시달리다 깨어난 것 같지 않게, 뺨과 몸을 어루만지는 감촉은 황홀감 그 자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몸은 찬 바닥이 아니라 어느새 침대에 뉘어져 있었다. 공단 이불이 태곳적의 양수처럼 아늑하게 내 몸을 감고 있었다. 이렇게 기분이 좋으니까 이 침대에 들어오고 싶지 않았던 거야. 나는 머리를 베개에 깊이 파묻은 채 영원히 꿈속으로 들어가도 좋을 것 같았다.

- "아- 저, 저기... 그, 그러... 니까... 그..."
그리고 내 쪽은 보지 않고 젖은 손을 일회용 키친타월로 깨끗이 닦았다.
"그, 그게... 나, 나는..."
순간 눈앞에 기습적으로 상향등이 켜진 듯 불이 번쩍였다. 갑작스러운 충격 때문에 나는 조금 휘청거리다가 두세 발자국 정도 뒷걸음질하여 버티고 서서 넘어지는 걸 막았다. 옆에 서 있던 파랑새는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말없이 카운터로 나가 버렸다. 왼뺨에 남은 통증은 머릿속까지 전해져 쩌렁쩌렁 울렸다. 
"... 낄 만한 데 껴. 누가 너더러 그따위 짓을 하랬냐."

"..."
순간의 긴장이 풀리자 뜻밖의 눈물이 찔끔 제멋대로 새어 나왔다. 학교 선생이, 또는 배 선생이 내게 똑같은 일을 했을 때 나는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던가. 회피나 분노, 억울함 아니면 냉소, 나의 마음은 그런 것들로 채워져 지금과 같은 감정에 자리를 내줄 틈이 없지 않았던가. 누군가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데에서 오는 아픔에 ...

- "네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상대가 비교적 급이 낮은 마물이었기 때문에 힘이 크지도 않고 있는 힘이나마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는 거. 두 번째, 네가 나이도 어리고 살아오면서 겪은 불쾌하거나 끔찍한 경험의 폭이 터무니없이 작기 때문이야. 네가 조금만 더 삶을 살아봤거나 고통의 극한을 맛본 적이 있다면, 넌 그대로 못 깨어났어. 몸이 흙 속에서 완전히 썩어버릴 때까지 무의식 속에서 그 꿈만을 되풀이해서 꾸었을 거란 말이다. 그것은 몸에도 영향을 미쳐서... 정상적인 상태의 시체가 되기도 힘들다. 아마 나중에 무덤 헤치고 관 뚜껑 열어보면 볼만할걸." 


- 그러니까 꿈속에서 내가 본 일들은, 다른 누군가의 아픔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서 그것이 아주 점잖게 실체화되어 나를 상대적으로 덜 괴롭혔다는 얘기다. 자신의 아픔은 자신에게 있어서만 절댓값이다. 나는 그에게 민폐가 되었을 뿐일까. 몽마를 붙잡았을 때, 그것은 그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사실 나 자신의 후련함이나 만족을 위해서였을까. 잠에서 깨어난 그가 내 모습을 보고 어떤 기분이 들지는 생각지 않고, 단지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으로. 

- "주제 파악 좀 하자. 세상이 좁고 인생은 짧은 것 같아? 그래서 다른 세계 일에 발 좀 담가봐야 할 것 같냐고. 웃기지 마. 인간한텐 지금 주어진 세상조차 과분해. 자기 일 하나 감당 못하는 녀석이 누굴 상대로 오지랖을 떠는지." 
"미...... 미안... 합니..."
후끈거리는 뺨을 손등으로 문지르는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흘러내린 눈물이 같이 닦여 나갔다.

 

- 말마디는 채 이어지지 못하고 허공에서 흐느적거리다가 사라졌다. 그대로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문득 아래로 떨어뜨린 시선에 적당한 간격을 두고 나란히 놓인 그의 슬리퍼 한 쌍이 보였다. 나는 이렇게 고개를 숙인 채 얼마나 오랜 시간을, 내 눈앞에서 배 선생의 슬리퍼가 말없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던가.
그러나 이번에는 슬리퍼가 돌아서서 사라지는 대신 천천히, 조금 더 눈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이윽고 내 어깨를 다독거렸다.
"... 다시는 쓸데없는 일에 나서지 마라. 망가져도 안 고쳐주니까. 하긴 다음이라는 게 있을 리도 없지만."
그건 아마도 그가 그저께 밤과 같은 빈틈을 보일 일이 다시는 없을 거라는 뜻이겠지.
"네가 뭘 보고 그렇게 광분해서 끼어들었는지는 묻지 않겠지만, 나는 깨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아."

- 그라면 이렇게 말할 줄 알았다. 사실은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닐 거면서. 나는 삽질해서 면목 없다는 몸짓과 희미한 웃음을 보였다. 그래도 그건 내가 원해서 한 일이었고, 그것에 만족했다. 게다가 생각지도 못한 소득으로, 앞으로의 삶일지 싸움일지 어떤 형태로 다가올지 모를 것에 예행연습까지 해본 것 같았다. 조금씩,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집과의 거리는 한 발짝 더 가까워지면서 멀어졌다. 

- "힘들었을 텐데.”
그까짓 것 아무렇지도 않고 가뿐했어요-라고는 말할 수 없는 나약한 나 자신이 한심할 뿐.
"일단 인사는 해둘게."
점점 아래로 떨어뜨리고 있던 내 눈을, 그가 허리를 깊이 숙여 똑바로 마주 들여다보고 말했다. 나는 서러움도 체념도 아닌 순수한 기쁨과 감격 때문에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누군가 이런 단순한 한마디로 나를 오해 대신 인정해 준 적이 있었던가. 그것은 또한 끝나지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긴 밤의 시련을 견딘 나 자신에 대한 인정의 의미이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를 칭찬하는 데에 너무 인색했던 모양이다. 
 
- "미, 미, 미안... 해요."
"뭐가?" 
"어, 저, 오해..."
"소심하기는. 평범한 인간이니까 그런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그렇게 말하며 그가 어깨를 안마하는 내 손가락을 가볍게 쥐었다.

- "응, 덕분에 피곤이 풀렸어. 잠깐만 이대로 있자. 조금 더 쉬고 싶네."
"어, 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내 가슴에 기댄 머리를 받치고 서 있었다.
... 무엇보다도 사람의 감정은 어째서, 뜨거운 물에 닿은 소금처럼 녹아 사라질 수 없는 걸까.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참치 통조림만도 못한 주제에.
그러다 문득 소금이란 다만 녹을 뿐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어떤 강제와 분리가 없다면 언제고 언제까지고 그 안에서.

- 점장은 나를 생각해서, 혹시라도 경찰의 방문을 받게 되면 내가 곤란을 겪을까 봐 미리 빼주려고 하는 거였다. 오븐 속에 숨어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그들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장기간 자리를 비우기라도 하면 나는 오븐 속에서 나올 수 없게 되고 마니까.
이 오븐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었다. 환영받지 못하는 자가 이 오븐 문을 밖에서 열면 삼면이 꽉 막힌 검은색 안쪽 벽면과 반죽을 얹어놓는 트레이밖에 보이지 않는다. 평범한 오븐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곳에서 미적대고 있다가 이들이 예고 없이 없어져버리면 나는 영영 오븐 속에 갇혀 있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끝까지 이들의 짐이 되다가 하릴없이 가는구나.
내가 조금만 더 훌륭한 사람이었다면. 아니,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은 사람이었다면... 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내가 최소한 나 자신이기만 했다면. 그랬다면 지금 같은 절망이나 무력감은 없었을까.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도움이 안 되고 하찮은 존재인지를 깨닫는 순간과 마주하는 일은 견디기 힘들다. 

- 죽은 생물은 그것이 죽음으로써 이미 우주의 움직임에 한 부분을 구성하는데, 분해되어야 할 것이 분해되지 않고 살아 움직여버리면 물질계의 흐름에 부작용이 생긴다. 아주 미미하여 박테리아 크기만도 못한 변화에 불과하지만, 기본적으로 생물계의 먹이사슬 체계를 순식간에 교란시키는 원인이 된다. 그래서 마법사는 삶과 죽음이라는 우주적 원리에 첨삭을 가하는 행위를 알아서 자중한다. 
그러나 그건 또한 마법사가 언제나 부딪치는 유혹이다. 자신의 힘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은 충동, 삶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중력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 

- 한 번만, 딱 한 번만.
입술로는 이렇게 중얼거렸지만 사실 그가 뇌까린 한 번이란, 본격적인 인명 재생으로 들어가기 전 예행연습으로서의 한 번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는 무의식 중에 연습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면 자신감이 붙어서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했을까?

- 연습용 인간 실험용 마멋이 필요했다. 시도 끝에 부작용으로 다른 개체로 변해버리거나,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처럼 모습이 난감해지거나, 최악의 경우 고작 몇 걸음 걷다가 다시 스러지고 마는, 여러 가지 불상사가 생기더라도 상관없는 인간. 원래 이승에 존재했을 때부터도 그다지 중요 인물이 아니었던, 좀 더 자세하게는 별로 인류에 도움이 되지 않았던 사소한 인간.

- "그의 실수는...  바로 그 '사소한 인간'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믿었다는 데 있었겠지. 자신감 때문에 기본 중의 기본을 잊어버린 거였어. 사소한 생명이라는 게 있을 수 있다는, 마법사로서 가장 큰 자격 상실에 해당하는 생각이 잠깐이라도 들었다는 것은." 


- 나름 귀엽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단지 그뿐이고 거기까지였다. 인간하고 뭐 어떻게 엮일 처지도 아니었으니까. 다만 호감을 보여오는 상대를 무조건적으로 떨쳐내기보다는 최소한의 성의를 갖고 대했다. 그것만큼은 영업용 미소가 아니라,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에 대한 일종의 정중하고도 우회적인 거절이며 그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의 예의였다. 

- 그는 사진을 보는 순간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진정시켰는데, 그 침착한 태도가 오히려 경찰의 반감을 샀다.
'이거 보세요, 단골손님이 잔인하게 죽음을 당했다는데 정말 아무 느낌도 없어요? 정말? 그런 정신 가지고 어떻게 사람 상대하는 장사를 해 먹으시나?'


 

- 아버지 덕분에 나는 다음 주에 멀리 떨어진 학교로 전학까지 가게 됐다.
그러나 할머니는 아버지가 이렇게 된 게 나 때문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육 년 전, 결국 사진 속의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계집을 얻기 전에는 추석 때 얼굴 들이밀 생각 따위 하지 마라'고 펄펄 뛰고 갔다.
이유는 없었다. 아니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무언지는 몰랐다. 그러나 사진 속의 사람과 그 딸이 내 앞에 나란히 나타나 다녀간 다음, 이 아줌마와 결혼할 거니까 가만히 보고만 있으라고 아버지가 말했을 때 나는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고개를 저었던 거다. 
"아니, 나는 싫어요."

- 처음에는 분명 상관하지 않으니 원하시는 대로 하라고, 말이 목구멍 밖으로 나오려 했다. 그런데 목구멍보다 더 깊은 곳, 저 마음 밑바닥에서 누군가 경보를 보내고 있었다. 조심해, 잘 생각해. 이건 왠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게다가 이토록 평범한 얼굴인데도 자꾸 어디선가 본 것만 같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 것도 꺼려졌다. 이상해. 

- 지금은 조금 성격이 다르다. 그때는 자석의 같은 극과 마주친 듯 되도록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 앞섰는데 지금 것은 강렬한 인력, 그리움에 가까운 무엇.
창밖에는 아직도 그 애가 그대로 있었다. 나는 창문을 열고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 애는 아직도 나를 향한 미소의 여운을 남기며 몸을 천천히 가게 쪽으로 돌렸다. 너는 누구지? 왜 나를 보고 웃은 거지? 버스 기사가 소리를 질렀다. 
"거기 학생! 위험하니까 머리 집어넣어."

- 굉음과 함께 마을버스가 출발했다. 나는 머리를 창 안쪽으로 끌어당겼으나 눈길은 아직 밖을 향한 채로였다. 그 애가 들어간 가게 문이 닫혔다. 쇼윈도 너머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창가 자리에 앉은 여대생이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짜증 난다는 듯 창문을 닫아버렸다.
그때 통제할 수 없이 눈물이 한 줄기 흘렀다. 이 눈물의 이유는 뭘까? 어쩌면 나는 오래전에 내 옆에 있었던 무언가를 잊어버린 채 살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무얼 잊어버리거나 놓고 온 걸까. 그 애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어느 평행우주 속에 살고 있어서 나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아이일까. 그 애뿐 아니라, 지금껏 내가 선택해오지 않았거나 거부해 온 모든 요소와 사람들이. 


- <Y의 경우>

 



- 그렇다고 해서 내일 이사 갈 집에까지 그걸 들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망설였는데 마침 엉망이 된 쿠키를 본 거였다.
그로써 나는 내 곁에 있었거나 내게 걸려 있던 마법이 모두 풀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타임 리와인더가 부서졌을 때부터, 아니 그들이 떠났을 때부터 마법은 모두 사라져 버렸는데도. 

- 상황이 최악의 정점까지 치닫고 나서 이틀 뒤, 위저드 베이커리에 가보았더랬다. 빠르기도 하지. 가게는 비워져 있었고 유리문은 열린 채로 휑뎅그렁한 내부를 고스란히 드러냈으며, 간판도 떼어져 있었다. 쇼윈도에는 견고딕체로 '내부수리 중'이라고 쓰인 A4 용지가 붙어 있었다. 두 명의 일꾼이 가게 안팎을 드나들며 벽과 바닥을 때려 부수고 있었다. 

 

- 결국 내게 남은 것은 그들에 대한 기억과, 그가 준 물건 두 가지. 이제는 아무 데도 쓸 수 없는 그저 머랭 쿠키 조각밖에 안 되는 것과, 나를 닮은 부두인형. 
그런데 냉동실 안에 너무 오랫동안 모셔둔 부두인형은 몸체의 결에 금이 가 있었고, 이사를 위해 냉장고를 비우고 플러그를 뽑아두었더니 빠른 시간 안에 해동되어 작게 난칼집을 따라 크게 금이 갔다. 

- 전철역을 향해 달린다. 세월이 흘러도 나이를 먹지 않는 그들이, 지금의 나를 보면 뭐라고 할지를 생각한다.
머릿속에서 이성의 목소리가 내게 말을 건넨다. 추억은 그대로 상자 속에 박제된 채 남겨두는 편이 좋아. 그 상자는 곰팡이나 먼지와 함께, 습기를 가득 머금고서 뚜껑도 열지 않은 채 언젠가는 버려져야만 하지. 환상은 환상으로 끝났을 때 가치 있는 법이야. 한때의 상처를 의탁했던 장소를 굳이 되짚어가는 건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아. 아직도 어린 시절의 마법 따위를 믿는 녀석은 어른이 될 수 없다고. 

 

- 그러나 나는 그 목소리를 무시하고 더욱 빨리 달린다. 추억이라니. 환상이라니. 그 모든 것은 내게 있어서는 줄곧 현재였으며 현실이었다. 마법이라는 것 또한 언제나 선택의 문제였을 뿐 꿈속의 망중한이 아니었다. 

- 위저드 베이커리의 간판이 멀리서부터 보였다. 이렇게 달리니 꼭 언젠가 그날 같아서 웃음이 난다. 그러나 그때는 나를 붙드는 현실에서 격렬히 도망치다가 그곳에 다다랐을 뿐이다.
지금은 나의 과거와 현재와, 어쩌면 올 수도 있는 미래를 향해 달린다.

 

- <N의 경우>

 


 

 

작가의 말 

 


- 문득문득 현실로 불쑥 살아오는 것들 모두 그건 약물과 같이 일시적으로 신경 회로를 차단하는 것이어서는 안 돼요. 그런 감각의 마비는 언젠가 풀리고 마니까요. 지속적이었으면, 가능하면 영원까지.

'... 고통의 정체가 너무 추상적이고 상대적이라 힘들단 말이죠. 그럼 할 수 없네요.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꼽아가며 지워달라고 하기에는, 오늘 밤이 너무 짧거든요.'

그러면 이건 어떤가요. 오늘 먹고 잠들면 내일 아침 세상이 뒤집어져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것도 안 되는군요. 최소한 나를 둘러싼 삶의 비루한 조건들이 조금씩은 달라졌으면 해요. 그런데 무엇보다 가장 바라는 건 찬란한 문장을 얻는 거예요. 그걸 얻으면 나는 다른 모든 걸 견딜 수 있어요. 그러면 끝없는 부딪침의 결과로 닳아지고 얇아진 삶에, 두꺼운 코발트색으로 붓질을 한 번 더할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의 과자에 그런 마법을 걸어줄 수 있나요. 

 

- 목적어의 자리에 무엇을 놓든 간에, 내가 바라는 건 '지금이 아닌 어떤 것'이에요. 

가공(加工)할 재료의 목록을 적어 내려가던 그는 레시피를 덮고 볼펜을 내려놓았다.

'힘들겠어, 당신한테는.'

나는 어째서냐고 묻지 않았다. 그의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도대체가, 지금을 부정하는 인간이 이런 걸로 조금도움을 얻어보았자 무얼 어떻게 바꿀 수 있다는 거지? 기억해 둬,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아니야.'

- 그저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틀릴 확률이 어쩌면 더 많은, 때로는 어이없는 주사위 놀음에 지배받기도 하는. 그래도 그 결과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상처가 나면 난 대로, 돌아갈 곳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사이가 틀어지면 틀어진 대로. 그렇게 흘러가는 삶을, 단지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이 실은 더 많을 터다. 그러다 보니 귀향이나 회복, 치유와 화해를 넘어 미래에의 전망에 이르는 성장의 문법을 무의식적으로 배제했다.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편집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빛을 보지 못했을 소설이다.  

짧지 않은 세월, 나를 견뎌준- 앞으로도 견뎌줄 분들께 인사드릴 면목이 생겨 다행이다. 


2009년 3월

구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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