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최민우
출판 : 은행나무
출간 : 2020.03.06
표지의 색감이 마음에 든다. 얼어붙은 빙하 같은 색감.
나의 취향은 대체로 환상 소설 쪽이고, 그러니 무작위로 고른 책에서 동일한 작가의 이름 -저자로든, 추천사로든- 을 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걸 알면서도 방금 구병모 작가의 책을 덮자마자 다시금 그 이름을 발견하게 된 일이 어쩐지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최민우 작가의 글은 처음이었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분절되지 않는 환상들이 연결되는 것 같으면서도 명확하게 그어지는 시간의 흐름.
단 며칠 간의 소용돌이.
담백한 듯 시니컬한 문장들도 취향이었고, 노아와 님로드, 요릭 같은 상징적인 이름들도 눈에 띈다.
내가 받은 느낌으로는 구병모 작가보다는... 뭐랄까 조금 다른 느낌이다. 회색이 섞인, 조금 더 단단한. 중성적이라기보다는, 성숙한 성인 남성의 코롱이나 쉐이빙솔이 먼저 떠오른달까.
지금 바로 떠오르는 작가로는 오노 나츠메.
<목요일>이 조금 이질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노인의 입을 통해 나온 구술이기도 했고, 다소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해도 이전까지의 환상보다 결코 덜하지 않은 -현실임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이야기였기에 통일감이 깨질 정도는 아니었다.
모든 수수께끼는 실재(實在)가 우선한다. 이미 존재하는 것에 무어라 이름을 갖다 붙이든-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나의 현실이 타인의 허구가 되고, 타인의 현실이 나의 허구가 되는 세계에서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점점 책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 리뷰가 되어가고 있는데...
아무러면 어떤가. 이런 것도 좋고 저런 것도 좋겠지.
틀림없이 '읽고 싶게 만드는' 자극이란 존재하지만, 결국 실제로 직접 읽어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작가가 무엇을 담아냈건, 독자는 자신만의 것을 읽어낸다. 그것들이 서로 닮아 있느냐 아니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순간의 나와, 내 눈에 걸린 문장들을 남겨놓을 수 있을 뿐이다.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기쁘겠다 정도를 바라며.
좋았다.
더 찾아 읽고 싶은 작가다.
- 우리는 개를 데려온 여자가 카페를 떠난 뒤에도 한동안 야외테라스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비는 30분 전에 그쳤고, 사람들은 접은 우산을 흔들며 인도를 지나갔다.
여자가 놓고 간 플라스틱 케이지에서 닥스훈트가 하품을 했다. 개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닥스훈트가 까불거리는 견종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케이지 철망 안쪽에 녹아내릴 듯 늘어져 있는 흑갈색 네발 생물은 지나치게 차분해서 마치 뒤늦게 철이 든 삼촌 같았다.
- 당시 나는 그의 '파트너'로 막 일을 시작한 참이었고, 노아가 개를 어떻게 찾았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잃어버린 개를 찾기란 어렵다. 인식표도 달려 있지 않은 조그만 흑갈색 개가 한밤중에 사람 눈을 피해 밖으로 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적어도 예닐곱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아차리게 된다면 더 그렇다. 그쯤 되면 필요한 건 기적과 요행이다. 개장수의 손아귀에 떨어지거나 강아지 공장에 갇혀 있지만 않길 바라게 된다. 하지만 노아는 자기 책상 서랍에서 연필을 꺼내듯 손쉽게 개를 찾아냈고, 우리는 전날 밤 모녀가 사는 비좁은 반지하방을 방문하여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다.
- 물론 요령을 배우기는 했다. 노아의 설명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것들을 끌어들이게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공중에 펼친 천에 묵직한 쇠공을 올려놓은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노아는 말했다. 쇠공이 놓인 부분이 아래로 내려앉으면서 공을 중심으로 하는 경사가 생기고, 쇠공 주변의 다른 작은 공들이 경사를 따라 중심을 향해 굴러가는 광경을 떠올려보라고도 했다. 그게 중력의 원리죠. 노아가 설명했다. 우주는 넓은 천이고, 별들은 중력에 의해 움직입니다. 우리는 우주의 일부이고요. 그러니 우주의 법칙을 따르면 됩니다. 경사를 따라가면 돼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문제의 핵심에 다다를 수 있죠.
- 듣지 않으면 못 알아챌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 소리는 정확한 타이밍과 올바른 맥락에서 나왔고, 변호사가 보여준 동영상 속에서 견주는 개가 질문에 대답을 할 때마다 손뼉을 치면서 광적으로 기뻐했으며, 개가 달아나자 모든 회의와 일정을 취소하고 식음을 전폐하여 드러누웠다. 낙하산처럼 내려와 로켓처럼 승진한 재벌가의 딸다웠다. 규모가 있는 기업인 만큼 대표가 없다고 회사 운영에 당장 차질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계속 그런 상태로 놓아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 "약속은 카일리가 돌아가야 전부 지켜집니다. 잊으면 안 돼요."
노아가 부드럽게, 동시에 단호하고 엄격하게 확인했다. 개에게 응당 그래야 하듯.
개는 대꾸하지 않았다.
- 우리는 노아의 은색 세단을 타고 견주의 저택으로 향했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케이지를 무릎에 올려놓았다. 러시아워가 시작된 탓에 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라디오 뉴스에서 25년 동안 도피 생활을 하던 강도가 임종 직전에 죄를 고백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수감 생활을 했던 사람의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노아가 라디오 채널을 돌렸다. 3587님의 신청곡입니다.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9번 <님로드>. 레너드 번스타인 지휘,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입니다. DJ의 멘트가 끝나자 층층이 쌓인 현악이 짙고 달콤한 선율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 소녀는 여전히 화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노아가 계속 말했다. 세상에는 여기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존재가 있어. 하지만 있게 된 이상 함부로 없앨 수는 없지. 그렇다면 그 존재를 가장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는 게 좋아. 그렇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을 수 있단다.
카일리는 그냥 개일 뿐이에요. 소녀가 입을 열었다. 봐요. 이렇게 조그만데.
폭탄도 그래. 조그맣지. 노아가 말했다.
- "이제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되다니요?"
"그러게요, 왜 이런 걸 묻는지 저도 잘 모르겠네요."
"신경 쓰이십니까?"
"아닙니다. 일은 일이죠."
"신경이 쓰였으면 좋겠습니다."
노아가 운전대를 꺾었다.
"많이들 그러죠. 일은 일이라고. 협회원 중에도 그런 말 하는 사람이 있고요.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일은 그저 일이 아니죠. 우리는 인간의 일도 아니고 유령의 일도 아닌 것을 다룹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가능한 한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내지도, 이해하지도 못할 겁니다."
-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지금쯤 늙은 변호사는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견주도 진정제 약효가 떨어지면 이를 갈게 될 것이다. 연희 학생의 아버지도 이를 갈 것이다. 노아가 카페에서 받은 문자에는 두려움에 질려 울먹이는 얼굴로 무릎을 꿇은 채 각서를 들고 있는 연희 학생 아버지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다시는 아내와 딸에게 접근하지 않겠다는 각서. 전문가들이 어련히 알아서 처리했을 것이겠지만 어쨌거나 이건 엄연한 범죄였고, 따라서 의뢰인 입장에서는 그런 일까지 해야 하는 게 내키지 않았을 것이며, 의뢰비 외에 추가 비용을 지출하는 것도 무척이나 짜증이 났겠지만, 노아는 자신이 제시한 조건이 이행되지 않을 경우 카일리의 숨통을 끊어버리겠다고 했다.
특유의 느긋한 말투로, 카일리가 듣는 앞에서.
- 그게 진심이었을지 궁금했다. 노아가 해구에 가라앉은 잠수함처럼 종적을 감추고 난 후, 조그만 주먹이 사무실을 노크할 때까지, 가끔.
- '사단법인 도서정리협회'는 전국에 열아홉 곳의 지부를 두고 있다. 나와 노아가 일하던 지부 사무실은 버스 종점에 위치한 적당히 낡은 3층짜리 상가 건물 3층이었다. 창문에 셀로판지를 오려 붙인 협회 이름은 밥상 위의 나물 반찬처럼 도시의 풍경에 잘 녹아들었다.
- 우리는 수수께끼를 다뤘다. 그게 우리가 하는 일이었다. 세계는 비유이자 실재이고, 수수께끼는 그 사이의 틈에서 발생한다.
- 1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비가 내리는 산골 마을에서 일어난 가뭄, 새로 펼칠 때마다 내용이 바뀌는 소설책,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아기.
- 하지만 사실 그런 수수께끼들은 중요하지 않다. 물론 이상하면서도 중요한 일이 없지는 않다. 예를 들어 상자에 갇힌 채 죽음과 삶의 중간에 놓여 있는 고양이는 이상하면서도 중요하다. 거기에는 우주의 진리가 있으니까. 하지만 대개의 수수께끼는 삶과 무관하다. 막다른 골목에서 난데없이 사람이 나타날 때가 있다. 어제 현관에 놓아둔 빨간색 우산이 아침에는 검정색으로 바뀌어 있기도 하다.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잠시 당혹스러워하지만 이내 웅덩이를 뛰어넘듯 대수롭지 않게 지나친다. 못 보거나 못 본 척한다.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런 수수께끼는 풀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런 걸 지나칠 수 없다. 우리에겐 그게 중요하니까. 노아는 가끔 말하곤 했다. 중요하지 않은 것이 중요한 거죠. 그는 그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화분 아래 감춰둔 열쇠처럼 언젠가 발견되기를, 이해받을 날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 하지만 지금 여기서 내가 말하려는 건 수수께끼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수수께끼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아니다. 마을에 대해서도, 소설책에 대해서도, 아기에 대해서도 아니다. 한 소년에 대해서다. 내게도 이해는 필요하니까.
- "저기, 잠깐."
나는 소년의 말을 잘랐다.
"무슨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이 사람 조수가 아니야."
"그래요? 아무튼 조수라고 하셨어요. 탐정님은."
"너 이거 어디서 났니?"
"탐정님이 주셨다니까요."
-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소년을 보았다. 평온한 월요일 오후였다. 조금 전까지는. 나는 업무용 노트북 컴퓨터로 <뇌과학이 밝혀낸 4번 타자의 비밀>이라는 기사를 읽던 중이었다. 기사의 요점은 감각과 뇌에 대한 통상적인 인식을 재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시각 정보가 뇌로 전달되고 그 정보에 따라 뇌가 근육에 명령을 내린다고 생각하지만 과학의 손가락은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육체가 먼저 반응하고 뇌가 그 상황을 나중에 인지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4번 타자가 투수의 손에서 공이 떠나기도 전에 공이 어디로 오게 될지 본능적으로 이는 이유다.
한가한 오후를 심오한 사색으로 보내기에 적당한 내용이었다.
- "탐정님이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셨거든요."
소년의 연갈색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흥분한 숨결에서 희미하게 냄새가 풍겼다. 떡볶이, 아니면 닭강정, 아니면 둘다.
- 목 뒤로 시원한 공기가 와닿았다. 창문으로 들어와 열린 사무실 문을 지나 아래층 계단으로 매끄럽게 달음박질치는 5월의 바람에는 여전히 수액 내음이 배어 있었다. 수목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시청에 고용된 일꾼들이 오전 내내 가로수에 전기톱을 휘둘러댄 여파였다.
소년의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어쩌면 여기까지 잰걸음으로, 적어도 뛰다시피 걸어와 한 번에 두 칸씩 계단을 올라온 다음, 사무실 문 앞에서 숨을 가다듬고 할 말을 생각한 뒤 노크를 했는지도 몰랐다. 방금 불고 지나간 이 바람이 소년의 달구어진 이마와 뺨을 식혀주었을 것이다.
-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게 편한 어른은 없다. 조숙해 보이는 아이라면 더 그렇다. 요즘 아이들이 대체로 조숙하기는 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어른의 눈에 아이는 늘 조숙하다. 어른은 아이를 얕잡아 보니까. 앞뒤가 적당히 맞는 말을 실수 없이 하기만 해도 조숙하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이 아이의 조숙함은 그와는 조금 다른 구석이 있었다. 손님이 찾아온 날짜를 휴대폰에 기록해 두는 조숙함.
- 소년이 남은 음료를 다 마시고 입맛을 다시면서 창밖을 흘끗 보았다. 창틀에 갇힌 하늘이 파랬다. 길 건너 교회 첨탑 뒤로 유리판에 얹은 듯 바닥이 납작한 뭉게구름이 떠 있었다. 이번 여름은 길 것이다. 문득 그런 예감이 들었다. 일찍 찾아오고 늦게 물러갈 것이다. 이맘때의 바다가 궁금해졌다. 색깔은 얼마나 푸를지, 파도는 얼마나 높을지, 바람은 얼마나 짤지. 바다에 가본 지 오래되었다.
- "알아요."
"안다고? 뭘?"
"엄마를 찾아달라고 온 게 아니에요. 여기가 흥신소가 아니라는 거 정도는 알거든요. 탐정님도 그랬어요. 자기는 그런 일을 하는 게 아니라고."
소년의 말이 조금 빨라졌다.
"자기가 우리를 찾아온 데는 이유가 있다고 그러셨어요. 언젠가 엄마가 집을 떠나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때 너무 슬퍼하면 안 된다고요. 근데 저도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엄마를 찾고 싶은 게 아니에요. 그건 괜찮아요. 어쩔 수 없다는 걸 아니까."
내가 그때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입을 바보처럼 벌리지 않도록 꽤나 애를 썼다는 건 분명하다. 소년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엄마를 찾고 있다는 말은 전해야 해요."
- "여기서 한번 골라보시죠."
파일 페이지에는 온갖 색깔과 글자의 명함들이 나비 표본처럼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각종 심부름, 절대 비밀 보장, 도감청 전문, 불륜은 죄악입니다, 신용 문제 전문, 무엇이든 맡겨만 주세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신뢰 100%, 확대경 그림, 자동차 사진, 이쪽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비키니 차림으로 해먹에 누워 일광욕을 하는 여자 사진.
"저는 단순한 게 좋겠는데요."
나는 파일을 덮어 돌려주었다.
"이름하고 전화번호만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깔끔하게. 공무원 명함처럼 명함만으로는 뭘 하는지 잘 알 수 없게 말이죠."
- 거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해서 장사가 되나요?"
"크게 상관없을 겁니다. 타겟 고객이 한정되어 있거든요."
거인이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그런 듯했다. 처져 있던 입술 양끝이 올라오면서 저울처럼 수평을 이루는 것을 미소라 할 수 있다면.
"여기 위층에 기획사가 하나 있는데 거기도 간판 없이 장사해요. 손님 부업처럼 거기도 단골 장사죠. 간판이 없어도 상관없답니다. 정식으로 사업자등록을 하면 세금이다 정품 소프트웨어다 해서 골치 아프다고. 그렇게 살아도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긴 한데, 그래도 가끔 그런 생각이 들죠. 떳떳하게 등록도 하고 세금도 내면서 남부끄럽지 않게 사는 편이 가족들 보기에도 낫지 않겠나.”
"각자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내가 대답했다.
- "그렇죠. 각자 말 못 할 사정이란 게 있죠. 그러니까 손님 같은 분이 먹고 살 테고. 다만 그 말 못 할 사정이란 게, 오래 끌어안고 살다 보면 좀 뭐랄까... 자기 멋대로 굴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기 전에 그런 사정 같은 거 깨끗이 털어버리면 좋겠지만, 사람 일이란 게 원체 그렇게 간단히 풀리지는 않거든요."
"그러면서도 그 끌어안고 사는 것 때문에 살기도 하고요."
"바로 그거죠."
거인이 동의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나는 우리가 조금 전 말로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공유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분위기를 깰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유감이었다.
- "그래서 어떤 디자인을 원하시는 겁니까?"
"이런 식으로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코트 주머니에서 노아의 명함을 꺼내 책상에 놓았다. 긴 침묵이 흘렀다. 거인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끼고는 표적까지의 거리를 재듯 실눈을 뜨고 나를 유심히 보았다.
"사장님 자제분이 이 명함을 가지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 "10시 반입니다."
"벌써? 사무실 문 너무 늦게 여는 거 아닌가?"
나는 대꾸하지 않고 협탁으로 가서 전기주전자 스위치를 켰다. 물은 금방 끓었다. 나는 머그잔에 녹차 티백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뒤 잔을 들고 책상에 앉았다.
"잘 지내지?"
곰선생이 말했다.
"누가 열쇠도 없이 들어오지만 않으면요."
"이렇게 늦게 출근할 줄은 몰랐지."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열쇠를 복사해 드리죠. 편하게 들어오세요."
"불편하게 들어온 적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 괜히 그런 거 갖고 다니다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더 성가셔."
곰선생이 차를 입에 머금고 헹구듯이 굴리다 꿀꺽 삼켰다. 고급 남색 여름양복 차림에, 무릎 위엔 모서리가 우아하게 닳은 가죽 서류가방이 놓여 있었다. 왼손 약지에 낀 다이아몬드 반지가 창백하고 두툼한 살에 파묻혀 있었다. 눈가가 불그스름했는데 수면부족인지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 중간관리자란 대개 위쪽과 아래쪽 모두에서 안 좋은 소리를 듣게 마련이지만 곰 선생의 주변에서 그런 잡음이 나온 적은 내가 아는 한에서는 없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들어본 기억도 나지 않았다. 밀가루가 빵이 되기 위해 태어나듯 곰선생은 매니저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강자에게 약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약자에게는 확실히 강했다. 의무를 수행하는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책임은 확실히 잘 피해 갔다. 거짓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진실을 제대로 말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그를 곰 선생이라 부르는 건 그의 외모가 비에 젖은 채 거리에 버려진 곰 인형을 닮아서만이 아니었다. 곰이란 본시 음흉한 짐승인 것이다.
- "무슨 일이신가요? 이렇게 일찍."
내가 말했다.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면 안 믿겠지."
"제 장점입니다. 사람 말을 잘 믿는 거."
"노아 선생 말도 잘 믿었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요즘 많이 바쁜가?"
"약간요."
나는 달력을 흘끗 보며 대답했다. 추수가 끝난 들판처럼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탁상 달력을 곰 선생도 확인했을 것이다.
- "부탁 하나 들어줬으면 싶어서. 어려운 일은 아니야."
"작년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죠."
"그랬던가?"
"종이를 반으로 접는 것만큼 간단한 일이라고요."
"아."
곰선생이 이제야 기억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 말이지."
- "그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합의를 했던 것 같은데."
"그랬죠. 그때 거기 계시지는 않았으니까요."
"안타까운 일이긴 했어. 다친 곳은 괜찮고?"
"몸은 괜찮습니다. 아직도 밤에 자다 악몽 때문에 가끔 깨곤 하죠."
나는 왼쪽 귀 뒤에 남은 흉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곰 선생이 씩 웃었다. 그는 나를 싫어했는데, 그건 그가 노아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분명히 있기는 했는데 노아도 곰 선생도 그 일이 무엇인지는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언젠가 노아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지만 그는 이렇게만 대답할 뿐이었다.
"곰선생께서는 협회를 너무 사랑하시는 감이 좀 있죠."
- 아무튼 곰선생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물론 곰 선생은 경찰도 아니고 내 상사도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의무가 아니라도 해야 하는 일이 있고 명령이 아니라도 따라야 하는 말이 있다. 그래서 향후 일정이 대학 구내식당의 주간메뉴만큼이나 빈틈없이 짜여 있어도 도서정리협회의 매니저가 회원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면 회원은 만사 제치고 그 일부터 처리해야 했다. 일정이 사기꾼의 영혼처럼 텅 비어 있다면 말할 나위가 없고.
- "신문에서 한두 개 정도 뉴스가 뜨긴 했지만 이 건들을 하나로 연결한 기사는 아직 나오지 않았어. 물론 안심은 못 하지. 기자는 믿을 수 없는 족속이니까. 아마 지금쯤 한창 자기들끼리 눈치게임 중일걸. 그러다 똥 마려운 개처럼 특종이 급한 누군가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제대로 확인도 안 한 사실을 질러버리는 거지. 그럼 난리가 나는 거고, 해골 91개가 별안간 땅에서 튀어나왔는데 안 뒤집어지겠어?"
"냉소적이시군요."
"그런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는 게 냉소는 아니지. 보라고. 어제 가스 누출 사건 판결 나온 거. 벌금형에 집행유예잖아. 이제 법원 판결도 나왔으니 훌훌 털어버리자는 사설이 쏟아지고 있다고. 그런 게 기자고 언론인 거지."
"그 일에 관심 갖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갖기 싫었어. 우리 큰삼촌이 가스를 들이마시지 않았다면 몰라도 됐겠지."
"유감입니다."
"큰 피해는 안 입으셨어. 좀 떨어진 동네에 사셨으니까. 아무튼 기자들에게 그럴싸한 이야기를 제공해 줘야 돼. 그 친구들이 납득할 만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그러려면 우리는 이게 진짜로 무슨 일인지 알아야겠지. 진실을 알아야 거짓말을 할 수 있으니까."
- "알겠습니다. 뭘 하면 될까요?"
"우리가 늘 하는 일. 가서 보고 들어. 중요하지 않은 중요한 걸 찾아.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알고 있겠지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는 모두 의미가 있어."
"중력처럼 말이죠."
"중력?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무튼 뭐든 좋으니까 보고 들은 걸 다 말해주면 돼. 그럼 우리가 다른 보고와 종합해서 가설을 세운 다음 현장에서 살펴봐야 할게 뭔지 다시 알려줄 거야. 몇 번 해봐서 알잖아?"
"안 좋은 일은 빨리 잊어버려서요. 제 두 번째 장점이죠."
곰선생이 나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한숨을 쉬고는 다 마신 찻잔을 책상에 놓았다.
"오늘 저녁까지 보고해. 그전이라도 언제든 연락하고."
- "제가 이 '1번' 현장을 맡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경해 선생 사무실과 제일 가까우니까. 다른 질문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곰 선생이 문으로 걸어갔다. 나도 뒤를 따라갔다. 곰 선생이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나도 멈췄다. 우리는 잠시 그 상태로 서 있었다. 내가 곰 선생의 듬성듬성한 정수리를 덮고 있는 불그스름한 두피에 시선을 두고 있는데 그가 몸을 돌렸다.
"혹시 최근에 노아 선생 소식 들은 거 없나?"
"없습니다."
- 책상으로 돌아가 '1번' 서류를 다시 펼쳤다. 스마트폰의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열어 호텔 공사장 주소를 입력한 다음 손가락으로 지도를 확대하면서 주변 지역을 살펴보았다.
처음 서류에서 주소를 확인했을 때 머릿속에 떠올랐던 대로였다. 첫 번째로 유골이 발견된 장소인 호텔 공사장은 창신인쇄와 직선거리로 약 20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소년이 찾아오고, 뼈가 드러나고, 거울이 나타났다.
경사를 따라가면 돼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핵심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노아는 예전에 그렇게 말했다. 내 눈앞에서 무언가가 경사를 따라 굴러가기 시작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뭔지는 알 수 없었다.
- 노아가 어째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이유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가설은 많았다. 아주 많았다. 그게 우리가 하는 일이니까.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일이 생겼을 때 뭘 해야 할지 알아내는 것. 회원들은 한동안 일 문제로 마주칠 때마다 노아가 친 사고를 주제로 토론을 벌였다. 몇몇은 노아가 우리 모두의 신뢰를 강탈해 간 것이라며 성토했다. 대개는 노아가 왜 그랬는지 궁금해했다.
그러나 모두를 설득시킬 만한 가설은 나오지 않았다.
- 선글라스를 꼈으며 머릿기름을 발라 머리가 새까맣게 반짝이는 덩치 좋은 남자가 믿지도 않는 종교를 전도하듯 심드렁한 말투로 본인이 모시는 '회장님'이 원하는 걸 말했다.
"좌우가 바뀌지 않는 거울이라고 합니다. 회장님 말씀으로는."
"그렇군요."
노아가 말했다.
"오른쪽은 오른쪽에, 왼쪽은 왼쪽에 비친다고 하시네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께서 그런 물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는 것도 알겠고요."
"저는 회장님께 들은 대로 전할 뿐입니다."
- "일본에서 실제로 그런 거울을 개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대리인이 손톱 거스러미만 한 호기심을 보였다.
"흔히들 거울이 좌우대칭이라고 생각하죠. 오른쪽이 왼쪽으로 보이니까. 하지만 사실 거울은 전후대칭입니다. 그 원리를 이용하면 좌우가 바뀌지 않는 거울을 만들 수 있습니다. 빛이 들어오고 나가는 각도를 교묘하게 조정하는 거죠."
"흐음."
"물론 회장님께서 찾고 계신 건 그런 조잡한 장난감이 아니겠죠."
- "어쨌든 투자가 이뤄진 건 아니었군요."
"그 여자는 사기꾼이었어요."
대리인이 짜증을 냈다.
"이제 와서 그 문제를 따지는 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아닙니다. 중요하지는 않아요."
노아가 느긋하게 대꾸했다.
"다만 저희 모토랄까, 그게 좀 그렇습니다. 중요하지 않은 게 중요하다. 사소한 거라도 확인을 하는 게 좋다는 뜻이죠. 과거는 중요하니까요. 과거가 우리를 만들죠."
- 대리인이 떠난 뒤 노아가 말했다.
"이 일은 제가 맡겠습니다. 쌍둥이 문제는 혼자 마무리할 수 있겠죠?"
나는 알겠다고 했다. 얼굴이 하나도 닮지 않은 일란성쌍둥이에 대한 일은 거의 다 끝나가는 중이었다. 마무리라면 혼자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다음 날부터 노아는 사무실에 나오지 않았다. 그를 다시 만난 건 일주일 뒤였다. 잠시 볼일이 있어 외출했다가 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노아가 책상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 "오셨어요?"
나는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책상에 컴퓨터 모니터 정도 크기의 납작한 종이 상자가 놓여 있었다.
"찾으셨군요?"
"어찌어찌요."
그때 노아의 손에 눈길이 갔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칼에 베인 듯 길쭉한 상처가 나 있었다. 상처 위에 딱지가 말라붙었고, 주변은 불그스름하게 부은 상태였다. 상처에 세균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별거 아닙니다. 거의 다 나았어요."
- "거울은 참 신기한 물건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신기한 거울이죠."
"아뇨, 거울이라는 물건 자체가 신기하다는 겁니다."
노아가 말을 이었다.
"보세요, 자기 모습에 관심을 기울이는 종은 인간뿐이에요. 다른 동물들은 상대의 모습과, 상대가 나를 어떻게 볼지에만 관심을 가져요. 생존에는 그 정도면 충분하니까. 자기가 자기를 볼 필요는 느끼지 못하는 거죠. 하지만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엄청나게 관심이 많습니다. 자기가 세상에 어떻게 보일지 알고 싶어 하죠. 하지만 거울은 좌우가 반대로 비쳐요. 그런 점에서 거울은 은유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는 건 가능하지만 자신의 진짜 모습은 볼 수 없다는 은유. 하지만 이 거울은... 이 앞에 서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은유로나, 실제로나 그래서 '회장님'이 이걸 원하시는 거겠지요."
노아가 '회장님'을 발음하면서 양손 검지를 까딱였다.
- "본인의 진짜 모습을 보려고요?"
"그보다는 남에게 보여주려 하겠죠."
"남에게 왜요?"
"경해 씨는 자기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나요?"
노아가 말했다.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밖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거울처럼 변한 검은 유리에 노아와 내 모습이 비쳤다. 물론 응당 그래야 하듯, 좌우가 바뀐 채.
- 유리거울 속 노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옥상에서 뛰어내리기 전에 리사 씨는 이 거울에 자기를 비춰봤을까요?"
몇 분 뒤 노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노아가 전화를 받아 짧게 대답하고는 거울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봐요."
- 나중에 곰 선생의 사무실로 불려 가 그날 저녁의 기억을 되살리는 동안 나는 수십 번씩 이 대화를 되새겨야 했다. 나중에 보자고 했다고? 그게 무슨 뜻이지? 나중에 어디서 보자는 건데?
- 그 후로 대리인을 다시 볼 일은 없었다. 내 등 뒤에 잘 숨어 있어서는 아니었다. 노아가 사라지고 두 달쯤 뒤, 러시아와 중국을 오가며 사업을 하는 무역회사 대표가 체포되었다는 기사를 인터넷 뉴스에서 발견했다. 지방의회 의장에게 뇌물을 건넸다는 혐의였다. 읽다 보니 어쩐지 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 같아 흥미가 동해 기사를 따라갔다. 일주일쯤 지나자 이야기가 재미있어졌다. 대표가 뇌물을 준 건 맞는데 의장은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정황상 '배달 사고'가 일어난 듯했다. 이를테면 대표와 의장 사이를 중개하던 대리인이 돈다발을 챙겨 증발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러다 돈 얘기가 쏙 들어가더니 무역회사 대표가 러시아에서 불법무기류를 밀수한 혐의로 구속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기사가 끊겼다. 혐의 변경 사이에 나름의 곡절이 있었던 듯했다.
- 노아는 그 이후로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별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동안 그의 번호로 전화를 걸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병에 편지를 담아 바다에 띄워 보내는 기분으로.
- "쫓아낸 게 아니고, 사장님도 장사하신다니까 아시잖아요, 재개발 들어가니 임대계약 해지하겠다, 하니까 거기 세입자들이 좀 버티고 그런 거요."
"난 거기 벌 받을 줄 알았어."
노인이 투덜거렸다. 식당 주인이 얼굴을 찌푸렸다. 베트남 여자가 접시를 차곡차곡 쌓은 다음 한 손으로 받쳐 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니, 아버지는 맨날 그걸 천벌이라고 그러시는데, 여기만 사람들 내보내고 그러냐고요. 아버지 말씀대로라면 재개발하는 데마다 사람 뼈가 사방에서 튀어나와야죠. 어째 다른 데는 아무 일없이 빌딩만 척척 올리고 그래요?"
"그러니까 네가 뭘 모른다는 거다."
주인의 아버지가 말했다.
"벼락이 사람 골라 떨어지는 거 봤냐? 업보는 원래 불공평한 거야. 인과응보는 저지른 놈에게 그대로 돌아온다는 말이 아니란 말이다. 죄지은 놈은 끝까지 잘 살아. 대신에 엉뚱한 사람들이 그 죄를 다 떠안아야 한다고. 저거 봐라."
노인이 텔레비전을 가리켰다. 계란과 도주 장면이 다시 나왔다.
"사고는 저놈들이 쳤지. 가스 누출시켰어. 그런데 피 토하고 식물인간 된 건 누구냐?"
"사고 낸 사람들도 벌 받았잖아요."
"하!"
주인의 아버지가 코웃음을 쳤다.
"집행유예가 벌이냐? 저 판결 뒤에 국회의원 놈이 있다는 거 세상이 다 아는데, 그게 벌이냐고. 그리고 설사 저 놈들이 징역을 산다고 식물인간이 깨어나나?"
"하지만 아버지, 아버지 말씀이 맞다고 쳐도요, 뼈 나온 게 무슨 벌이예요. 신라시대 유물 같은 게 나와야 천벌이지. 그럼 공사가 중단됐을 거니까. 근데 아니잖아요. 결국 따지고 보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거죠."
"안 일어나긴 뭐가 없는 척한다고 있던 게 없던 게 돼? 다 돌아오게 돼 있어."
노인은 아들을 경멸스럽게 흘겨보고는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렸다. 식당 주인이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 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제가 뭐 사장님 장사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할 건 아니고, 어쨌든 별거 아니에요. 혹시 미신 같은 거 믿으시나?"
"아닙니다."
"저는 교회 다니거든요. 아무 신경 쓰실 거 없습니다."
주인이 사람 좋게 웃었다. 노인은 음식을 치우던 베트남 여자에게 동작이 굼뜨다며 신경질을 부렸다.
- 문득 내가 어떤 흐름에서 튕겨져 나와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출발하여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끝을 향해 거침없이 전진하는 현실이라는 흐름. 나는 강 건너편에 서서 현실의 아지랑이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인생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될지는 몰랐지만 궤도에서 이탈할 일은 없으리라 믿었다. 주어진 일에 충실하고, 화분에 물을 주고, 개와 산책하고, 누군가와 함께 늙고 병들어가리라 믿었다. 이제 그런 삶은 수평선을 향해 멀어져 가는 여객선처럼 더 이상 내가 탈 수 있는 것이 아닌 듯했다.
- 어쩌면 아직 기회가 남아 있을지 모른다. 지금이라도 그만두면 된다. 바로 여기서. 이렇게 멍하니 서서 무엇을 찾는지도 알 수 없는 것 따위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지 말고, 지금 저 현장으로 찾아가 책임자를 만난 다음 뭐든 좋으니 일자리를 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일이 쉽게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 "근데 엄마는 어떻게 찾으실 거예요?"
"난 그러겠다고 한 적 없는데."
"그럼 여긴 왜 오신 거예요? 아빠 다시 설득하러 오신 거 아니었어요?"
"그랬다면 내가 걸어 다니고 있지 못하겠지. 다른 일로 왔다."
"그거 참 놀라운 우연의 일치네요."
"그러는 너는 무슨 일로 여기 온 거냐?"
"학교가 여기니까요. 수학 학원 가고 있는데 아저씨가 멍 때리... 멍하니 서 계시더라고요."
- 한별이 콜라를 홀짝였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식판을 옆에 치워놓은 채 참고서를 펼쳐놓고 공부 중이었다. 무선 헤드폰을 머리에 쓰고 턱수염을 기른 남자가 태블릿 PC를 들여다보며 치킨너겟을 오물거렸다. 소년의 말대로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연이어 일어나고 있었다. 절벽에서 몸을 던졌는데 마침 그 아래를 날던 행글라이더 날개에 튕겨 올라가 하필이면 그 옆을 지나가던 열기구 속으로 들어가는 수준의 우연이.
그 우연의 저편에서 노아가 손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뭘 꾸물거리냐는 듯.
- "그래서, 어쩌실 거예요?"
소년이 나를 보았다.
"내가 못하겠다고 그러면 어쩔 거냐?"
"안 그러실 것 같은데요."
- "생각이 아니에요. 내 눈으로 본 거예요."
소년이 남은 콜라를 모두 마시고 고개를 들었다. 근심보다 더 오래되어 보이는 억눌린 고통이 연갈색 눈동자에 어른거렸다. 이 아이는 너무 빨리 자랐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 일은 제가 해결해야 해요."
소년이 말했다.
- 한별이 학원에 간 뒤에도("공부는 해야죠") 나는 롯데리아에 앉아 이것이 곰 선생에게 보고를 해야 할 일인지 생각해 보았다. 소년에 대해 말하려면 노아 얘기를 먼저 꺼내야 할 텐데, 그러면 문제가 쓸데없이 복잡해질 수 있었다. 내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곰 선생은 노아의 잠적에 대해 내가 뭔가 숨기고 있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는 진짜로 뭔가 숨기게 되고 말았지만. 무엇보다, 나 또한 지금으로서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정확히 모르는 처지였다. 그러니 보고는 사태를 좀 더 분명히 파악한 다음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우선은 당면한 일, 소년의 부탁을 먼저 처리하기로 했다.
나는 전화기를 손에 쥐고 잠깐 고민했다. 그 사람에게 연락하기 전에 늘 그러듯.
- 정부인이 웃자 토끼 같은 입매에 장난기가 감돌았다. 그녀는 빗자루처럼 뻗치고 엉클어진 잿빛 단발을 손으로 대충 정리하고는 손짓으로 직원을 불러 메뉴판은 보지도 않고 비엔나커피를 주문했다.
"이쪽에 이런 데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오래 영업한 가게 같은데요."
내가 말했다.
"여기? 아니에요. 길어야 반년? 잘 보면 낡아 보이려고 노력을 엄청 쏟아부은 게 티가 나지 않아요? 내가 저번 주에도 친구들이랑 여기 왔는데, 자기가 작년에도 여기 온 적 있다고 주장하는 애가 있는 거야. 너 그러는 거 보니 우리 다 슬슬 가고 있나 보다. 하면서 빙수나 먹고 속 차리라고 했어요."
- 나는 웃었다. 정 부인이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방송국에서 찍어갔대요. 거기서는 오래된 카페라고 소개가 됐고요."
"거짓말을 했군요."
"정확히 말하자면 오해를 교정하지 않은 거죠."
직원이 카페라테와 비엔나커피를 테이블에 놓고 갔다. 정부인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걸 마셔봐도 여기가 옛날 집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죠. 예전에는 비엔나커피에 아이스크림을 얹었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생크림을 얹어요. 이 커피처럼. 그런데 비엔나커피는 원래 생크림을 얹는 커피예요. 그게 진짜죠. 하지만 옛날에 다들 가난했을 때에는 생크림을 구하기 어려워서 임시방편으로 아이스크림을 얹었던 거고요. 그건 가짜죠. 하지만 여기가 진짜 옛날 카페였다면 가짜 비엔나커피를 냈을 거예요. 그게 전통이니까."
"복잡하네요."
"그렇진 않아요. 진짜가 늘 진짜일 필요는 없다는 거죠. 내 얘기만 막 늘어놓네. 그래서 노아 씨가 뭐가 어쨌다는 거죠? 드디어 논두렁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나요?"
"그건 아닙니다."
"실망스럽네. 그럼 무슨 일인가요?"
- 나는 간략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정 부인은 고개를 한쪽으로 약간 기울인 채 내 말을 들었다. 주인이 레코드를 바꿨다. 가늘고 달콤하고 청승맞은 바이올린 선율이 그녀와 나 사이를 종이비행기처럼 매끄럽게 날아 지나가 창밖의 허공으로 사라졌다.
- "말투에 불신이 있네요."
"아닙니다. 그냥... 늘 익숙한 듯 낯설어서 그렇습니다. 애가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죠. 게다가 아이는 저를 찾아온 게 아니니까요."
정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노아 씨와 경해 씨를 알고 지내는 동안 참 여러 가지를 보고 듣기는 했는데... 뭐랄까, 이번 경우는 이상하네요."
"우리 일이 원래 그렇죠."
"아니, 제 말은 평소보다 덜 이상해서 이상하단 얘기예요. 납득 가능한 신비랄까. 불사(不死)는 모두가 상상하고 소망하니까요. 하지만 세상 모든 소망에는 늘 허점이 있죠. 쿠마에의 무녀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나요?"
"아뇨."
"쿠마에는 나폴리 근방의 지역이에요. 그곳의 무녀가 태양신 아폴론의 사랑을 받았죠. 아폴론이 무녀에게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겠다고 하자, 무녀는 손에 모래를 한 움큼 쥐고 내밀면서 이 모래의 개수만큼 살고 싶다고 했답니다. 아폴론은 그 소원을 들어줬어요."
"잘됐네요."
"문제는 무녀가 늙지 않게 해 달라는 얘기를 하는 걸 깜박했다는 거예요. 불사를 불로와 혼동한 거죠. 천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무녀는 늙고 쪼그라져 항아리에 담기게 되었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몸은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게 되었죠."
- "그래서 경해 씨 이야기를 듣다 보니 궁금해졌어요."
"뭐가요?"
"그 아이의 어머니는 무슨 소원을 빌었던 걸까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 부인도 딱히 대답을 원한 질문은 아니었던 듯했다. 그녀가 창밖을 건너보며 말했다.
"어떤 사람은 사는 게 고통인데 말이죠."
나는 그녀가 보는 방향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어렵군요."
정부인이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아뇨. 이 분을 찾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이 일을 맡을지 결정하는 게 어렵다고요."
정부인이 말했다.
"왜냐하면 노아 씨가 제게 빚을 졌으니까. 아시겠지만 저는 그런 문제에 무척 민감해요. 거울 때문에 노아 씨가 절 찾아왔어요. 그때 말씀드렸죠?"
"네."
"제가 그 물건이 있을 만한 포인트를 노아 씨에게 몇 군데 짚어줬죠. 그런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쏙 하니 숨어버렸단 말이에요. 그럼 그게 빚이 되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우선 그것부터 정리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비용은 제가 어떻게 해보겠습니다."
"돈 얘기가 아니에요. 빚이란 돈만으로 교환되는 게 아니죠. 바보들이나 그렇게 생각하지. 빚은 관계예요. 사슬 같은 거죠. 제가 노아 씨에게 그 '포인트'를 짚어주기 위해서 다른 곳에 진 빚이 있는데, 노아 씨가 신뢰를 깨고 사라지면서 저도 그 빚을 제때 갚지 못했단 말이죠."
나는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정 부인이 계속 말했다.
"그러니 제게 일을 부탁할 생각이라면 경해 씨가 노아 씨의 빚을 대신 갚아줘야 해요."
"제가요?"
"당연하죠. 빚은 관계니까."
"어떻게요?"
"우선 약속부터 하세요. 대신 빚을 갚겠다고."
"어떻게 갚아야 하는지도 모르는데요."
"부담스러우시다면 어쩔 수 없고요."
정부인이 눈을 지긋이 감고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 그녀의 이런 태도 때문에 노아도 나도 정 부인에게 연락을 취하기 전에 늘 신중히 고민하곤 했다. '빚'을 어떻게 갚을지는 전적으로 정부인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살인이나 강도 같은 범죄를 저지르라고 한 적은 없지만 그녀가 나중에 맡기는 일은 하나같이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우리가 부탁했던 일보다 훨씬 더 하지만 정부인의 말에 따르면 그것이 바로 빚의 논리였다. 주는 쪽이 자기가 받은 것보다 더 준다는 느낌이 들어야 받는 입장에서는 받을 만큼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쪽 분야에서 정부인만큼 확실한 사람은 없었다. 정부인에게 부탁하면 언제나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녀는 벽에 가로막혔을 때 우회로를 소개하는 게 아니라 폭탄으로 벽을 무너뜨려주는 사람이었다.
- "알겠습니다."
"좋아요."
정부인이 빙긋 웃었다. 린넨을 살짝 구겼다 편 듯 부드럽게 접힌 주름 사이로 크고 검고 총명한 눈동자가 유리처럼 반짝였다.
- 나는 바로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정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따라 일어섰다.
"아무튼 조심하세요."
정부인이 말했다.
"뭘 말씀입니까?"
"뭐든지요. 산다는 게 늘 그래야 하지 않나요?"
-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곰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곰 선생은 특별한 걸 알아내지 못했다는 내 말을 듣고 실망했다.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드린 게 전부입니다."
"제대로 한 거 맞아?"
곰 선생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다른 곳은 어떻습니까?"
"다른 데는 신경 쓰지 말고 맡은 곳이나 잘 살펴봐. 내일 오전에 다시 전화해."
- 내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세상을 자기 본위로 파악하는 데 익숙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은 대개 폭력적이다. 남의 고통에 둔감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에게는 강하게 보여도, 약하게 보여도 별 효과가 없다. 상대가 어떻게 나오든 폭력을 쓸 구실을 찾으니까. 그러니 하고픈 대로 하는 게 차라리 낫다.
- "여기서 거기까지 명함을 파러 가?"
"소비자의 현명한 선택이지."
"그럼 이건 뭔데?"
회초리 남자가 양복 주머니에서 노아의 명함을 꺼내 흔들었다. 경천동지 할 일은 아니었다. 나라도 당연히 사무실을 뒤져봤을 것이다.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되지."
내가 팔을 뻗어 명함을 잡은 순간, 회초리 남자가 손목을 탁 꺾으며 명함을 내 손에서 빼앗듯이 빼내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그게 신호라도 된 듯 등 뒤에서 커다란 남자가 한 발짝 다가왔다.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회초리 남자가 손을 들어 커다란 남자를 제지했다.
- "도서정리협회인가 하는 데가 뭐 하는 곳인지도 알 바 아니야. 난 너한테 충고를 해주러 오신 거야. 고맙게 생각해. 어설프게 끼어들어서 까불지 말란 말이다. 이건 가족 문제야 알겠어?"
그다음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내 어깨에 묵직한 두 손이 얹혔고, 그와 동시에 회초리 남자가 왼뺨을 후려갈겼다. 약하지는 않았지만 세지도 않았다. 딱 나를 경멸하고 있다는 걸 드러낼 만큼의 강도였다. 그런 다음 내 얼굴에 침을 뱉었다. 박하향을 머금은 따끈하고 끈끈한 액체가 뺨을 따라 흘렀다.
- 그들이 사무실을 나간 뒤 나는 창가로 갔다. 어쩌면 그들이 타고 온 차 번호판을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어떤 자동차도 나오지 않았다. 먼 곳에 주차를 할 줄 아는 신중한 사람들이었다.
- 아침부터 구름이 짙게 끼더니 사무실에 도착할 때쯤에는 하늘이 컴컴해졌다. 나는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녹차를 끓였다. 차를 마시며 노트북으로 뉴스 기사를 읽었다. 국제 뉴스 섹션에 영국의 한 연구 단체에서 최근 10여 년간 UFO 나 괴생물체 등의 사진을 찍었다는 주장이 전 세계적으로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해당 단체의 연구자는 이런 현상이 스마트폰 카메라의 발전과 인과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누구나 선명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자 사진을 조작하는 일이 어려워졌다는 것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연구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더 이상 어떤 것도 착각하지 않습니다. 신비와 애매모호함은 멸종을 맞이했어요. 세계는 투명해졌습니다.'
어째서인지 이런 연구는 늘 영국이 한다. 이 세상의 허다한 수수께끼 중 하나다.
- 오른손이 또 욱신거렸다. 나는 손에 난 상처를 살펴보았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피는 금방 멎었고 딱지도 가볍게 앉아서 아침에 샤워를 할 때 떨어져 나갔다. 겉으로 봐서는 불그스름한 줄 하나만 희미하게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불쾌한 통증이 가시질 않았다. 마치 피부에 따개비 같은 것이 붙어 있다가 내킬 때마다 깨무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 상처의 위치는 노아의 손에 났던 상처와 같았다. 소년이 찾아온 뒤부터 내게 벌어지는 일들이 내가 모르는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였다. 그 자체는 신기한 게 아니었다. 내가 지금껏 여기서 해왔던 일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으니까. 처음에는 새벽안개 속 산등성이처럼 막연한 윤곽으로만 눈앞에 나타났던 것이 차츰차츰 형태를 이루어가면서 나중에는 부인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출현하는 것. 문제는 늘 그 과정이 얼마나 빨리 진행되느냐였지,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지 아닌지 따지는 것은 아니었다. 존재는 모든 것에 앞선다. 아무리 말도 안 되는 것이라 해도, 아무리 기이한 것이라 해도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인정받아야 한다. 적어도 노아와 함께한 몇 년간 내가 봐온 바에 따르면 그랬다. 그리고 그런 견지에서라면 소년이 나를 찾아온 것도, 그 이전에 노아가 소년의 가족을 찾아갔던 것도, 죽지 않는 여인이 사라진 것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뼈가 사방에서 나오기 시작한 것도, 회초리 남자와 앨리스가 나를 찾아와 어설픈 협박을 하고 돌아간 것도 모두 어떤 흐름의 일부였다. 다만 아직 그 흐름의 정체와 방향을 알 수 없을 뿐이었다. 노아는 사태가 모호할 때 어디로 가야 할지 잘 알았다. 마치 단테를 이끄는 베르길리우스처럼. 그게 그가 가진 노련함이었다. 나는 늘 그의 뒤를 따라갈 뿐이었다.
- 빗줄기가 점차 굵어졌다. 먹물빛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가 작은북 위로 한꺼번에 쏟아지는 콩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거리를 두드렸다. 나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던 작고 단단한 소음이 차츰 한데 뭉치면서 일정한 리듬을 타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음악처럼 인공적인 규칙을 따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떨어지지도 않았다. 질서와 무질서 사이, 인식할 수 있는 것과 감지할 수 없는 것 사이 어딘가에서 빗소리가 출렁였다. 출렁이는 소리가 공기에 눌리면서 마치 허공에 치는 파도처럼 철썩이는 소리로 바뀌었다.
- 나는 의자에 앉은 채로 깜박 잠이 들었다.
- 눈을 떠보니 의자에서 거의 미끄러질 것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얼마나 오래 이러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바깥은 여전히 어둑했다.
잠에서 깬 건 노크 때문이었다.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초침 소리처럼 작고 규칙적인 노크였지만 잠을 깨우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신음소리를 내며 자세를 바로 한 뒤 손가락으로 콧등을 주무르면서 문에 대고 말했다.
"들어오세요."
노크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조금 더 크게 말했다.
"들어오세요. 안에 있습니다."
노크가 멈췄다. 나는 기다렸다. 복도에 서 있는 사람이 머뭇거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나는 의뢰인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호리호리한 몸매에 옅은 베이지색 반팔 블라우스와 무릎 바로 위까지 올라오는 갈색 스커트 차림의 여성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은색 에나멜 구두를 신고, 오른손에는 검은색 악어가죽백을 들었다. 왼손 약지에 낀 반지가 형광등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반지에는 녹색 감람석으로 만든 보석이 박혀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없었기 때문이었다.
- 정확히 말하자면 얼굴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보다는 뭉개졌다고 표현하는 쪽이 더 적절해 보였다. 까다로운 화가가 초상화를 그리고 나서 작품에 만족하지 못해 물감이 채 마르기 전에 손가락으로 그림 속 얼굴을 사정없이 문지른 것 같았다. 원래대로라면 눈동자와, 코와 입술과, 눈썹을 구성했을 색깔과 형태들이 붉은색, 검은색, 갈색, 백색, 살구색의 점과 선과 면으로 얽히고설켜서 뭉뚱그려진 채 인중이 있어야 했을 자리에 뚫린 작고 검은 구멍을 향해 빙그르르 돌면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꿈.
그제야 나는 지금 내가 꿈을 꾸는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태연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꿈속이라 해도 할 일은 해야 한다.
- "앉으세요."
꿈속의 내가 손님용 의자를 펼치며 말했다. 여자가 의자에 앉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차라도 마시겠느냐고 물어보려다가 이 의뢰인이 차를 마실 수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차를 마실 수 있느냐고 묻는 것도 실례인 것 같아서 잠시 망설이다가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어색하게 앉아 서로를 마주 보았다. 꿈속에서 어색함을 느끼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여자는 반듯한 자세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런 것 같았다. 얼굴은 계속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전동반죽기에서 회전하고 있는 묽은 반죽 같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 여자가 손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하얀색 종이봉투로,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몰라도 꽤 두툼했다. 여자가 고개를 들어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사실 할 방법도 없었겠지만) 나는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탐정님은 자리에 안 계십니다. 다시 약속을 잡고 오시죠."
소용돌이가 중심을 향해 느릿하게 돌았다. 그 회전으로 의사소통을 대신할 수 있다는 듯.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지금은 내 꿈속. 다시 말해 내 의식 속이었으니까. 냉장고의 냉기가 공기를 통해 전달되듯 여자의 생각이 그대로 내게 전해졌다.
- 여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와 동시에 얼굴의 소용돌이가 조금 전보다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거부 의사는 명백히 표하고 있었다.
나는 난감해졌다. 어떻게 해야 하나? 여자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도 쉽게 물러설 수는 없었다.
"저는 예전에 서투르게 행동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같은 실수를 두 번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 잘못 때문에 누군가가 고통받고 상처 입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그럴 바에는 그냥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고만 싶습니다."
소용돌이가 느려졌다. 마치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다는 듯. 그러다가 순간 멈추더니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의 부탁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는 듯. 나는 계속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한번 저지른 잘못은 돌이킬 수 없어요. 저는 그 일로 많은 걸 잃었습니다. 설사 제가 이번에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해도 처음의 잘못을 만회할 수는 없어요. 그 잘못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저는 이대로 계속 가만히 있고 싶습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아요."
소용돌이의 모양이 복잡해졌다. 여자가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 책상에 놓았다. 감람석 내부에서 녹색의 광채가 어른거렸다. 마치 창밖에서 엿보는 벽난로의 불빛처럼.
"아뇨, 안 됩니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
- 소용돌이의 속도가 빨라졌다. 하지만 내 의지 역시 확고했다. 다시 한번 거절의 뜻을 표하려고 하는데 또 다른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했던 조심스러운 노크와는 달랐다. 지금 문밖에 있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는 성문을 부수고 들어오려는 군대처럼 둔중하고 묵직하게 노크를 하고 있었다. 그건 문을 열어달라는 요청이 아니었다. 문을 박살내고 이 안으로 쳐들어오겠다는 악의로 가득 찬 두드림이었다.
나는 여자를 보았다. 얼굴의 소용돌이가 두려움에 가득 차 격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노크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급기야 건물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눈을 떴다. 이번에는 현실이었다. 아마도.
-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표가 계속 말했다.
"흠. 뭐 별 생각이 없나 보네. 당신이 그걸 직접 못 봐서 그래. 나는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서 불로불사 그런 거 나오면 웃어요. 작가들이 뭣도 모르니까 막 써대는 거야. 그게 옆에 있고, 그거랑 이야기도 해야 하는 기분이 어떤지 지들이 어떻게 알겠어. 묘진이가 우리 사이에서 연락책을 맡았어요. 일 들어오면 가서 받아오고, 물건 나오면 가서 건네주고. 다른 사람은 안 썼어. 쓸 필요도 없었지. 아무도 그 애 얼굴을 기억 못 했으니까. 그때도 그건 참 희한했어. 왜 돌아서면 잊어버릴까. 젊은 여자라는 거 말고는 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까. 지금도 우리 멤버들하고 사부님 얼굴은 생생한데 그거 얼굴은 아무리 애를 써도 기억이 안 나. 눈앞에 꼭 안개라도 낀 것 같다니까. 인태 놈만 묘진이한테 정신을 못 차렸지. 한 번은 우리가 그랬어요. 돌아서면 콧구멍 하나 생각도 안 나는 게 뭐가 좋냐고. 심지어 사람도 아니잖느냐고. 그러니까 걔가 뭐랬는지 알아요? 그럼 돌아서지 말고 계속 바라보면 된대요. 얼굴은 뚱한 놈이 그런 소릴 하니 어이가 없었지."
"사부님이 지금 어디 계신지 아십니까?"
"세상 하직하셨어요. 술에 취해서 다리를 건너다가 강으로 떨어졌지."
"유족은요?"
"거기까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우리가 지금 몇 년 전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는 알고 있는 건가? 나도 지금 당신과 얘기하면서 막 기억을 살려내고 있는 거예요."
- 반지는 흙이 묻어 지저분했지만 흠집은 없어 보였다. 물에 잘 씻어 깨끗이 닦으면 새것처럼 다시 반짝일 것이다.
결혼식 날 아내의 왼손 약지에서 그랬듯이.
- 어쩌면 나는 진작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니, 솔직하자,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곰 선생이 건넨 보고서 첫 장을 펼치는 순간 알았다. 꿈에서 회전하는 얼굴의 여자가 반지를 책상에 놓았을 때도 알았다. 그저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까지 스스로를 속여왔을 뿐이었다.
나는 유골들이 어디서 왔는지 이미 알았다. 뼈들은 문 저편에서 돌아온 것이었다.
- 식사는 훌륭했고, 우리는 호기롭게 레드와인 한 병을 통째로 땄다.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나는 공무원에게 왜 그런 부탁을 했는지 물었다.
"축하받고 싶으니까. 제삼자가 축하하고 인정해 주는 의식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서. 다른 뜻은 없어."
아내가 말했다. 와인이 그대로 혈관으로 흐른 듯 뺨이 발그레했다.
"그분 엄청 당황하던데."
"알아. 내가 떼 좀 썼지. 하지만 가끔은 우리만 행복하면 그만일 때도 있어야 돼. 우리도 비축할 에너지가 필요하잖아. 이제부터 우리가 상처 줄 사람들이 있는데, 그럴 때 상대방 기분을 일일이 헤아리다가는 우리가 견딜 수 없게 돼. 우리도 버틸 에너지가 있어야지."
- 아내가 손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감람석은 아내의 생각이었다. 반지에 쓸 만큼 괜찮은 품질의 감람석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고, 보석상에서는 이 보석은 경도가 약하기 때문에 다른 보석과 섞이지 않게 잘 보관해야 한다고 주의를 줬다. 8월에 태어난 것도 아닌데 왜 감람석을 원하느냐고 농담처럼 물었을 때, 아내는 이 보석은 사악한 것으로부터, 어둠으로부터 주인을 지켜준다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런 거라고 대답했다.
"감람석은 밤에 더 빛나."
- 거인이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바닥에 고여 있는 과거의 어느 한 지점을 응시하고 있기라도 하듯. 그러다 그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유골에 대해 모른다는 얘기는 사실이오. 내가 지금 이일에 대해 아는 건 방금 말한 게 전부요. 실종 문제도 마찬가지고. 사실 아내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지. 같이 보낸 시간은 길어요. 인쇄소 시절부터 치면 벌써 30년이 넘었으니까. 출소하고 만났을 때부터 세면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고. 그 사람이 말해준 사실들은 알아. 어떤 삶을 살았고, 어디서 뭘 했는지, 그런 것들. 하지만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몰라요. 알려고 하지도 않았어. 그게 낫다는 걸 알았거든. 만약 내가 그 사람이 말해준 것 이상을 스스로 알아내게 되면 그 사람을 영원히 잃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요. 사람들이 보통 말하지. 사랑한다면 모든 걸 공유해야 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내 경험상 가끔은 모르는 게 나을 때도 있는 거요. 어떤 건 묻지 말아야 하는 거고. 누구도 상대방의 모든 걸 다 알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아내는, 선생도 알겠지만, 무척 특별한 사람이고."
"그래서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고 아내가 떠나도록 놔두셨습니까?"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고 확신했으니까. 선생은 모르겠지만 우리 사이는 그랬어요. 내가 기다리고만 있으면 결국에는 내게 돌아왔지. 난 그걸로 만족했고."
"죄송합니다만, 저는 그런 관계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런 건 이해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지. 각자의 삶의 방식이니까. 어쨌거나 선생은 내 아내를 만난 적도 없잖소?"
- "그게 늘 우리의 고민거리였지. 아이가 이걸 어떻게 납득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어. 우리는 늘 이별을 염두에 두고 살았으니까. 하지만 아이는 그럴 수가 없지. 여섯 살 땐가 한별이가 나한테 와서 그래요. 엄마가 언제 떠나느냐고. 엄마가 말하길 자기가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는 없다고,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고 그랬다는 거요.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그때 엄마는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어야 했겠지. 하지만 나는 그렇다 해도 우리끼리 잘 지내야 한다고 말했지.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한별이도 그런 식으로 말했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 속마음은 달라요. 난 알지. 제 엄마를 정말 사랑해. 마치 시한부 판정을 받은 환자를 사랑하는 것처럼. 언제 자기 곁을 떠날지 모르니까."
"그게 아이에게 좋은 일일까요?"
"그럼 내게 다른 방법이 뭐가 있을까? 이건 가족 문제요. 여기서 토론할 건 아니지."
- "그 말을 이번 주에 두 번째로 듣는군요."
"두 번째?"
"사장님을 찾아갔던 친구들이 저도 찾아왔습니다. 커다란 덩치와 침 뱉는 홀쭉이 말이죠. 제게 이건 가족 문제니까 끼어들지 ..."
- "혹시 그런 건 어떻게 처리하는지 알아요?"
나는 주민센터에 문의해봐야 할 것 같다고 대답했다. 할머니는 무척 상심해 있었다. 할아버지의 혼백이 살생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듯했다.
- 나는 한별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사거리에 설치된 현수막 게시대의 광고를 읽으며 소년을 기다렸다. 지하철역 3분 거리 오피스텔. 초단기 내신 향상 강의, 운동 없이 살 빼는 다이어트. 광고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중요한 걸 숨길뿐이다. 오피스텔에 3분 내로 가고 싶으면 전력을 다해 뛰어야 하고, 내신 성적을 올리고 싶으면 예습과 복습을 해야 하며, 운동 없이 살을 빼고 싶으면 당뇨나 심혈관 질환을 일으킬 수도 있는 다이어트 약을 복용해야 한다.
- 한별이 잠이 든 뒤에도 나는 거실에서 뉴스를 보았다. 밤이 깊어지면서 뉴스는 통계의 영역으로 옮겨갔다. 경찰에서는 아직 정확한 숫자를 공개하지 않고 있었지만 비공식적인 제보를 통해 들어온 바에 따르면 현재까지 수습이 완전히 이루어진 유골의 수는 181구로, 정리 작업이 끝나지 않은 유골까지 포함하면 최소 300명에서 많게는 400명까지도 늘어날 가능성이 있었다. 다른 한편, 방송에 공개된 유류품을 본 사람들이 경찰과 방송국에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앵커는 방송국에 현재까지 52건의 제보가 들어왔으며 이 역시 앞으로 계속 늘어날 수 있다고 밝혔다. 다만 유골의 DNA를 대조하여 최종적으로 신원을 파악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 기차를 타고 아내를 만나러 간 건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나는 역에 내리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당황하는 것 같더니 늘 보던 곳에서 보자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말하는 곳은 바닷가에 위치한 작은 카페였다. 특별한 카페는 아니었다. 스타벅스 같은 체인도, 맛있는 커피로 이름난 곳도 아닌, 그저 평범한 커피와 종잇장처럼 얇은 샌드위치를 파는 가게였다. 그러나 그 카페의 딱한 자리, 제라늄 화분 옆에 있는 자리에 앉으면 바다가 그림처럼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바다에 갈 때는 늘 그 카페의 그 자리에 앉으려 했다. 매번 성공하지는 않았지만 운이 좋을 때가 더 많았다.
- 그날도 나는 그 자리에서 아내를 기다렸다. 하늘은 맑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는 쪽빛이었다. 잔잔하게 일어나는 포말이 싱싱한 생선의 배처럼 새하였다. 커피를 마시고 나서 해변을 산책해도 좋을 것 같았다. 자주 그랬던 것처럼.
아내가 카페로 들어왔다. 옅은 베이지색 반팔 블라우스와 무릎 바로 위까지 올라오는 갈색 스커트, 은색 에나멜구두를 신고 오른손에 검은색 악어가죽 백을 든 차림이었다. 아내가 내 앞에 앉았을 때 나는 그녀의 왼손을 보았다. 반지는 없었다. 사악함에서 우리 둘을 보호해 주던 반지.
- 그 자리에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생각나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다음 일어난 일에 충격을 받아 그 전의 기억이 희미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 잘못했다는 말을 가장 많이 했을 것이다. 너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내가 잘못이라고, 네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내가 잘못했다고 거듭 말했을 것이다. 이제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느냐고, 마음이 정리되었으면 오늘이라도 같이 돌아가자고 설득했을 것이다. 말하는 동안 아무 장신구도 없는 아내의 긴 손가락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건 기억이 난다. 실은 반지를 끼고 왔는데 내가 못 보고 있기라도 한 것인 양. 오래 바라보면 반지가 저절로 나타나기라도 하는 것인 양.
- 어리석었다.
그 순간에조차도 나는 아내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내 말만 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아내에게 사과한다고 말하려고 했을 뿐이고, 아내에게 잘못했다고 말하려고만 했을 뿐이었다. 아내의 말을 듣고 싶다는 마음은 없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나는 애초에 아내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먼저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을 듣지 않은 것은 나였으니까.
- 아내는 내 얘기가 끝난 다음에도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내가 슬슬 불편해지기 시작할 때쯤 아내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녀가 카운터를 돌아 화장실이 있는 좁은 복도로 나갔다.
-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얼마가 지났건 내게는 길게 느껴졌다. 바다의 색깔이 쪽빛에서 짙은 청색으로 바뀌었다. 몇 점 없던 구름은 사라졌다. 멜빵 치마를 입은 여자아이가 신발을 벗은 채 모래 위에 서서 해변까지 밀려온 약한 파도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다가온 파도가 아이의 발목 높이까지 무심하게 차올랐다가 도로 물러갔다. 마치 자신의 깊이를 다 보여줄 생각은 없다는 양. 한 인간의 깊이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타인이라는 바다의 해변에 서 있을 뿐이다. 가끔씩 밀려와 발목을 적시는 파도에 마음이 가벼이 흔들리도록 자신을 내맡기면서, 언젠가는 저 바다 끝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스스로도 믿지 않는 헛된 희망에 매달리고 있을 뿐이다. 평생 그 해변에 머물다 갈 생각이면서.
-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기다리다 지쳐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아내는 복도에 서 있었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그녀의 뒷모습뿐이었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았다. 인기척을 분명 느꼈을 텐데도, 아내는 돌아보지 않은 채 뭔가에 홀린 듯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보고 있던 건 카페에 설치된 장식품이었다. 합판으로 만든 문으로, 그럴싸한 분위기를 살릴 요량으로 놋쇠 손잡이까지 달려 있었다. 그러나 가짜문이었다. 그저 붙어 있기만 할 뿐인 가짜문. 나는 아내의 이름을 부르려고 입을 벌렸다.
그때 아내가 앞으로 걸어가 문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딸깍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 분명히 들었다. 딸깍, 하는 소리를.
- 문이 열리면서 안이 보였다. 문 뒤는 어둑했다. 잿빛 안개가 두텁게 끼어 있는 것 같았다. 저 멀리 희미한 주황색 불빛이 달무리처럼 흐릿한 둥근 윤곽을 그리며 반짝거렸다. 깊은 새벽의 외로운 골목에서 불을 밝히는 가로등처럼.
다음 순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눅눅하고 선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문 밖으로 그 잿빛 안개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꼼짝도 못 한 채 굳어 있었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이마에 닿아 가려웠지만 팔을 올릴 엄두를 내지도 못했다. 아주 작고 축축한 물방울 같은 것들이 공기 중을 날아 내 살갗에 닿아서...
꾸물꾸물 움직였다.
- 안개가 내 몸에 달라붙더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셔츠 안으로 파고들고, 바지 안쪽으로 스며들고, 손등을 쓰다듬고, 눈을 덮었다. 나는 얼어붙었다. 무한에 가까운 공포가 밀려왔다. 저 바깥에 아직도 해가 떠 있고, 멀리서 음악이 들리고, 아이들이 웃는 소리도 들리는데, 잿빛 안개는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냉기를 뿜어내면서 내 몸 구석구석을 건드렸다. 마치 관심 없는 먹이를 살피는 동물이 장난을 치듯.
- 새벽 뉴스가 끝나자 탐사 프로그램이 재방송되었다. 담당 PD가 가스 누출 피해자 연대의 대표와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대표는 작은 체구의 중년 여성이었다. 그녀는 인터뷰를 하는 내내 시선을 편안히 두지 못했다. 자신의 위치가 버거운 듯했다. 그렇지만 말은 막힘이 없었고, 말투는 덤덤하면서도 단호했다. 저희는 이해가 안 가는 거죠. 어째서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가, 이제는 심지어 기업의 정당한 활동을 방해하는 가해자라는 오명을 써야 하느냐는 거예요. 왜 그들은 받아야 할 벌을 받지 않느냐는 거예요. 한 마을이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평생 안고 가야 할 질병을 얻었습니다. 우리는요, 매일매일이 투쟁입니다. 여기로 가면 저기서 따지라고, 저기로 가면 이곳에서 말할 게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우리가 보상금을 노리고 특정 세력과 결탁해서 의도적으로 일을 키웠다는 식으로 우리를 음해하고 있단 말이에요. 어째서 우리가...
- 실종자들은 대부분 말 못 할 고민을 안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 취재를 할수록 실종자들이 품고 있던 사연이 하나둘 드러났다(다음 호의 특집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족 문제, 돈 문제, 학업 문제, 취업 문제, 성 정체성 문제, 등등. 하지만 그게 과연 별안간 사라질 만한 이유가 될까? 누구나 살면서 한두 가지의 고민은 가지고 있다. 물론 그중에는 심각한 것도 있다. 그렇다고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그런 식으로 사라져 버리지는 않는다.
- "그냥 단순히 사라진 게 아니에요."
임 대표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그건 일종의 상징적 죽음이죠. 자살을 했다는 뜻이 아니에요. 둘은 달라요."
어떻게?
"사라졌으니까요. 자살은 눈에 띄는 행위예요. 그건 세상에 대해 나를 보라고 선언하는 거죠. 하지만 사라진다는 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거예요. 똑같이 소멸하는 거지만 그건 선언하는 죽음이 아니라 상징적 죽음인 거예요. 그 사람들은 죽고 싶었던 게 아니라 눈에 띄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유골이 되어 돌아오지 않았나?
"기자님은 아직 이해를 못 하고 계신 거예요. 죽음과 상징적 죽음의 차이를요."
- 루머로만 떠돌던 문제에 대해 임 대표에게 물어보았다.
문. 정말로 대실종의 실종자들이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문을 열고 사라졌는가?
그 질문을 하자 임 대표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헛소문이에요."
목격자들이 있는데?
"적어도 우리 단체 사람 중에는 그런 걸 봤다는 사람이 없어요. 우리가 정부에 계속해서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하는 것도 그 때문이에요. 확인되지 않은 헛소문이 너무 많아요. 제가 들은 것 중에는 정체불명의 단체가 경찰에 압력을 넣어서 더 이상 수사가 진행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는 얘기도 있었어요. 이 나라에 프리메이슨 같은 비밀조직이 있단 소리예요?"
- 그럼에도 사람들은 계속 존재하지 않는 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느 실종자의 아내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글이 맘카페를 중심으로 퍼진 적이 있었다. 글쓴이에 따르면 그녀는 남편과 심한 언쟁을 벌였고, 남편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아 방으로 들어가 보니 남편은 없었다. 부부는 아파트 19층에 살았고, 창문에는 방범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벽에는 남편이 이벤트에 당첨되어 받았던 대형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마법의 정원으로 통하는 커다란 문이 그려져 있는 영화 포스터였다("방이 눅눅하고 서늘했어요. 방 안에 젖은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실종자의 아내는 이 이야기를 실진연의 인터넷 카페에 썼다가 글이 삭제되고 강퇴를 당했다면서, 그곳에서는 문과 관련된 이야기를 쓰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했다. 글쓴이는 임 대표와 지도부가 그 문제에 대해 무척 민감하다고 주장했다. 그런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정부와의 협상에 지장을 초래할까 봐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 사람들은 돌아왔다. 아니, 돌아오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 오랜 세월을 고통 속에서 보낸 사람들,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모르고 가족과 친지를 애타게 찾아 헤매고 그리워하던 사람들은 이제 자신이 오랫동안 짊어져왔던 과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는 그들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 "악플이 엄청 달렸어요."
임 대표가 말했다.
"자기네 문제에 세금을 쓰겠다고 요구한다는 거죠. 하지만 어떤 문제는 사회와 국가가 나서야 해요. 우리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게 아니에요. 떼를 쓰는 게 아니라고요. 만약 경찰이 그때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가졌다면, 우리 사회가 서로를 더 많이 ..."
- "쐐기요?"
"정확히 말하면 내 가설이지. 어딘가에 쐐기가 박힌 거였어. 쐐기가 잘못 박히면 벽이 뒤틀리면서 금이 가잖아. 마찬가지로 이 세계의 어딘가가 어긋나고 뒤틀리면서 틈이 생겨난 거지. 사람들이 그 틈으로 빨려 들어간 거야. 그러니 그 어긋난 지점을 찾아서 바로잡아야 한다. 그게 내 가설이었어."
"알 듯 말 듯하네요."
"경해 선생은 아직 배울 게 많으니까."
"솔직히 말해 쐐기란 게 뭔지 감이 잘 안 잡힙니다."
"글쎄, 뭐라고 해야 하나... 이게 감이 있으면 그냥 아는 건데, 모르겠다니 설명을 해줘야겠지."
곰선생이 말을 이었다.
- "우선, 쐐기는 비유야. 세계 자체가 거대한 비유라고 얘기할 때의 그 비유. 왜냐하면 세계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는데, 언어는 입 밖에 나오는 순간 필연적으로 무언가에 대한 비유가 되거든. 그런 의미에서 세계는 비유야. 이해가 됐지?"
"알 것 같습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 봐봐. 세계는 비유이자 동시에 실재야. 말과 문자의 관계를 생각하면 돼. 말은 실체가 없지. 하지만 문자는 말을 고정시켜 쐐기 역시 그렇게 생각해야 해. 그러니까 그때 내가 세운 가설은, 쐐기가 일종의 실체화된 힘이라는 거였어. 힘도 근본적으로는 말과 마찬가지야. 그 자체로는 형태가 없어. 힘은 그것이 작용하는 사물을 통해 드러나지. 날아가는 야구공은 보이지만 그걸 날아가게 하는 힘은 안 보이잖아, 그렇지? 힘이란 늘 간접적으로 관찰하는 거야. 하지만 만약 그 힘이 실체로 화해서 이 세계의 어딘가에 틈을 냈다면? 그럼으로써 뭔가 꼬이고 헝클어져버렸다면? 그렇다면 그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 게 놀랍지 않다는 거야."
- "힘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힘입니까?"
"지금 이 난리를 일으키는 힘이지. 동어반복 같겠지만, 원래 세상에 하나뿐인 건 동어반복일 수밖에 없어. 이런 일이 예전에 또 일어났던 적은 없잖아?"
나는 곰 선생의 설명을 잠시 곱씹었다. 이런 말을 할 때 곰선생은 놀랄 만큼 노아와 비슷했다. 그건 어쩌면 이 바닥 사람들의 근본적인 특징인지도 모른다.
- "어쨌거나 중요한 건 그게 어떤 종류의 힘이냐가 아니야. 잘못된 장소에 있는 잘못된 힘이라는 게 문제지. 그러니 바로 잡혀야 '하는' 거고."
"바로잡힌다는 게..."
"제거. 빼내야 한다고. 그럼 모든 게 원상태로 돌아올 테니까. 남은 문제는 그 쐐기가 어디 있느냐는 거였는데, 결국 찾지 못했어. 실종이 한참 일어나다가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멈춰버렸거든. 그때 내가 분명히 말했어. 이번에 이 쐐기를 못 찾으면 다음 ..."
- "이름을 지었어야 했는데, 죽고 나서야 그 생각이 떠오른 거야. 살아있을 땐 원숭아, 원숭아, 이래도 충분했거든. 혹시 뭐 적당한 이름 같은 거 없을까?"
"요릭."
노인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 "요릭. <햄릿>에 나오는 이름입니다."
"흠."
"광대였죠."
노인이 회초리 남자를 보았다.
"너보다 열일곱 배는 똑똑한데?"
"선생이잖아요. 얄팍하게 많이 아는 종족이에요."
회초리 남자가 말했다.
- "맞아, 그랬지. 영어 학원 선생이었지. 아니, 강사인가, 그럼? 내 미리 좀 알아봤습니다. 미안해요. 그래도 내가 만날 사람이 누군지는 알아야 하잖아. 나는 사람을 거의 안 만나거든. 아는 사람만 만나는데, 이젠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다들 나보다 먼저 죽는 바람에. 그래서 사람 만나는 게 신중해요. 아무튼 요릭, 요릭이라."
노인이 생각에 잠겼다.
"기각. 발음하기 너무 어려워. 옛날 같았으면 사형이야, 선생."
그가 킬킬거렸다.
"흰소리 집어치우고, 피차 바쁜 처지에 용건부터 말해야겠지. 나는 한별이 외삼촌이오."
노인이 그렇게 말하고는 내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내가 경악한 표정으로 거실에서 재주넘기를 하지 않자 실망했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
- "헛수고하셨네요, 할, 아, 버, 님."
"입 다물어라."
"그냥 저희한테 맡기시죠. 딱 10분만 이 선생을 빌려주시면 1등급 소고기처럼 야들야들하게 만들어드린다니까요."
"다물라고 그랬다."
"공동주택에서 층간소음은 곤란할 텐데."
내가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 시궁쥐. 이 아파트 위, 아래, 옆집이 다 우리 거거든."
"우리 거? 여기 네 것이 있다고? 거 참 대단하시네. 그 나이에 자기 아파트도 있고, 응?"
노인이 회초리의 말을 끊고는 내게 씩 웃었다.
"좀 공격적으로 투자를 하긴 했지. 뭐, 괜찮아. 곧 재건축 허가가 떨어질 거야. 내가 들은 게 있거든. 그전까지는 이렇게 오붓한 대화방으로 쓰면 되는 거고, 손자 놈 말대로 층간소음은 너무 걱정할 거 없어요. 이 집에 들른 사람들이 다들 목청껏 소리도 지르고 발도 굴렀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거든. 부자 동네 좋은 게 그거지. 사회간접자본이 하도 튼튼해서 이런 데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줄 안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반응할 방법이 없었다. 노인이 입안에서 혀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내 얘길 하나 해주지."
마침내 노인이 입을 열었다.
- "이 이야기를 듣고도 선생이 내 제안을 거절하겠다면 그땐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하지만 그전에 일단 내 얘기를 들어보시오. 그런 다음에 다시 논의를 해보지."
노인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회초리 남자의 눈빛이 어디서 온 건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반사광이 없는 새까만 눈, 수없이 많은 뱀들이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메마른 우물 같은 눈.
- "아직 그 정도 시간은 있으니까."
노인이 말했다.
- "어리석은 작전이었어. 어리석기 그지없었지. 국군이 자기네 국민을 적으로 간주하고 실시한 작전이었단 말이야. 더 웃긴 게 뭔지 아나? 당시 국군은 낮에만 마을에 주둔했다가 밤에는 철수했어. 그러면 밤에는 빨갱이들이 몰려와서 밥을 내놓으라고 성화를 부렸다고. 민간인들이 그걸 무슨 깡으로 거부하나? 그랬다간 다 죽게 생겼는데. 빨갱이들에게 밥을 주는 게 싫었으면 밤에도 마을을 지켰어야지. 성벽은 마을에 쌓았어야지. 자기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방기해 놓고서는 빨갱이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다 죽여버렸단 말이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노인이 계속 말했다.
"어리석고 끔찍해. 근데 말이요, 선생, 그게 역사야."
- 노인이 수면 위를 스치듯 날아가는 새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그게 역사라고. 역사는 어리석음과 끔찍함으로 가득한 피바다야. 우리는 그 바다에 떠 있는 섬의 주민이고, 매일매일 해풍을 타고 섬으로 피비린내가 몰려와. 섬에 사는 똑똑한 자들은 그게 우리의 적들이 풍기는 냄새라고 주장해 저 바다 저편에 피 냄새를 풍기는 적들이 있다는 거야. 그리고 우리 안에 그들과 내통하는 적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거지. 냄새가 나는 게 그 증거라면서.
그런데 알고 있나? 저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어. 적이고 동지고 없다고. 있는 건 역사라는 피바다뿐이야.
똑똑한 친구들도 그걸 알아. 그런데 왜 그러느냐? 내부의 적을 해치울 구실이 필요한 거야. 그래서 그 피 냄새에 민주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같은 이름을 편한 대로 붙인 다음에 역사는 자기편이라고 주장하면서 자기들에게 방해되고 보기 싫은 인간들을 피바다에 처박는 거야. 당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불운이 없지.
하지만 더 똑똑한 사람들은 역사 자체가 저주라는 걸 알아. 역사가운 없는 사람에게 저주를 내리는 게 아니야. 역사가 이미 저주야. 무슨 말인지 알겠나? 그걸 깨닫고 나면 길은 둘 중 하나야. 섬을 탈출하느냐, 거기서 그렇게 살면서 언제 무슨 말도 안 되는 구실로 죽을 날을 기다리느냐. 나는 고향에서 벗어났듯이 역사에서 벗어나야 했어. 어리석고 끔찍한 역사에서 왜냐하면 나는 그럴 수 있었고, 그래야 했으니까.
서울로 돌아와 보니 창경원은 다 파괴되어 있었지. 낙타는 목만 남아 있었어. 굶주렸던 사람들이 동물을 전부 다 잡아먹었거든. 허망한 마음으로 폐허가 된 동물원을 둘러보다가 부상당한 원숭이 한 마리를 발견했어. 그게 이 녀석이야. 그 뒤로 쭉 키웠지."
노인이 머리뼈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 "그 이후로 난 조용히 살았어. 조용히, 아주 조용히. 그게 내가 세운 유일한 원칙이었지. 역사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것. 역사라는 피바다를 아무도 모르게, 물보라 하나 일으키지 않고 항해하는 것. 몰살당한 빨갱이 마을의 생존자답게, 토벌당한 공비의 자손답게 어렵다 하면 어려운 일이지만 쉽다 하면 길이 보이게 마련이야. 당연히 돈도 큰 도움이 되었어. 침묵에는 돈이 들지."
-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잠시 뒤 곰 선생이 툭 내뱉고는 전화를 끊었다.
"노아 선생이나 당신이나 똑같아. 없는 문제도 사서 만드는 사람들이지."
- 아내는 학교에 사표를 낸 다음 사흘을 내리 잤다. 사흘째 되던 날 밤, 오늘까지도 자고 있다면 병원에 입원시켜야겠다고 마음먹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는 평상복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태연한 표정으로 내게 인사했다. 내가 옆자리에 앉자 아내가 말했다.
사표 냈어. 기쁘게 받아주더라. 고생했다는 인사도 없던데.
- 나는 아내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이를테면 이런 말들을 내게 퍼붓길 기다렸다. 그래, 네 뜻대로 했어. 무서우니까 관두는 게 아니라 더러우니까 관두라고 그랬잖아. 네 말대로 했다고. 네 말대로 사서 문제를 만든 건 나니까, 내가 책임을 진 거야. 아무도 나서지 않은 일에 나선 건 나니까, 내가 책임을 진 거야. 이제 만족하지? 이제 밤중에 말없이 끊기는 전화는 없을 거야. 네 메시지 창에 모르는 번호로 나에 관한 소문이 들어오는 일도 없을 거야. 네 말이 맞아. 바뀌지 않는 건 바뀌지 않더라. 신고를 하고 청원을 넣고 호소를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가 않았어. 네 말대로 쓸데없는 분란만 일어났을 뿐이고, 모두가 불편했을 뿐이고, 학생들이 학습권을 침해당했을 뿐이고 기쁘지 않아? 네 생각이 옳다는 게 증명되었잖아. 틀린 건 나지. 언제나 그랬듯이 옳은 건 너야. 늘 현실적이고, 늘 이성적이고, 늘 뒤로 물러서서 지켜보는 너. 언제나 네가 옳아. 이번에도 그렇지? 너만 잘났지?
- 하지만 아내는 다시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때 나는 내가 중요한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내와 나 사이에 생겨난 틈, 마치 별을 관측할 때 아주 약간 잘못 조정했던 각도가 끝내 한없는 심연 같은 오차를 낳듯이 그렇게 생겨난 틈이 있었고, 말을 하건 행동을 취하건 그 틈을 건넜어야 했는데, 방금 막 그 기회가 사라진 것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무언가 해야 한다는 막연한 느낌만 있었을 뿐,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음날 아내는 친정에 가겠다고 했다.
- 아내가 없는 동안에도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손에 잡힐 듯 분명하게 느꼈던 건 밉고 싫은 마음뿐이었다. 지금 이 상황이, 아내가, 아내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이, 여기까지 상황이 흘러가는 동안 아내에게 어떤 의지도 되지 못했던 나 자신이. 그 상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고, 아내가 친정으로 떠난 다음에는 거의 폭발하다시피 터지면서 내 마음을 할퀴어댔다.
그러나 여전히 그건 내 상처였을 뿐이다. 당사자의 상처가 아니라.
- 노아가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이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어요. 확실히 징조가 좋지 않습니다. 쐐기가 박힌 틈이 점점 벌어지고 있죠. 그 안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를 상황입니다. 지금은 당사자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들만이 나오고 있지만, 틈이 더 벌어지면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 틈이라는 것도 비유인가요?"
"비유이자 실재이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닙니다. 생각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은 생각에 따라 행동하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란 그런 거예요."
- "알겠습니다. 그래서, 뭘 정해야 한다는 겁니까?"
노아가 다시 오솔길을 보았다.
"제가 보여드렸던 그 거울, 기억하십니까?"
"네."
"묘진 씨가 지금 그 거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요, 곰 선생이 찾았다고 기뻐하고 있을 거울은 일제죠. 늘 속이는 재미가 있는 사람입니다."
노아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 "자, 다시 한번, 세계는 비유이자 실재입니다. 그리고 그 거울은 그 거울을 보는 사람의 진짜 모습을 비춰주지요. 그렇다면 거울 앞에 세계를 놓았을 때 거울이 세계의 진짜 모습을 비춰주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논리적인 비약이 있는 아이디어이지만, 한번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잘 사라지지 않지요."
노아가 말을 이었다.
"저 학교에는 묘진 씨가 밤을 지새우며 앉아 있던 교실이 있습니다. 젖먹이 아이를 품에 안고 가족들과 함께 앉아 있던 교실이죠. 경해 씨가 오기 전에 우리는 거울을 통해 그 교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거울 속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어요. 맞아요, 그 장소는 철저하게 무(無)가 되어버린 겁니다. 죽음과 절망과 좌절이 통과했으니까요. 하지만 딱 한 곳, 교실로 들어오는 문이 거울에 비춰 보였어요. 마을 사람들이 아직 이 모든 것이 조만간 지나갈 일이며, 살아서 아침을 맞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들어왔던 입구 말입니다."
- "잠깐만요."
내가 노아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가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그게 가능할 리가 없습니다."
"왜요?"
"왜냐하면 그런 문이 있다 쳐도 그건 거울 저편에 있고... 여기에 있는 건..."
- 나는 말을 멈췄다. 노아가 울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문득 팔에 소름이 돋았다. 마치 아내가 사라진 그날 문 너머에서 스며 나온 안개가 다시 한번 내 팔을 휘감기라도 하듯.
"그 문 너머로 한별 소년이 가야 합니다."
노아가 판결을 내리듯 천천히 말했다.
- 나는 노아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노아는 피하지 않았다. 주먹은 노아의 턱에 명중했고, 나는 주먹을, 노아는 턱을 감싸 쥐고 비틀거렸다.
"그러자고 여기까지 데려온 겁니까?"
내가 소리치듯 말했다.
"똑같은 결과를 보려고?"
"다릅니다."
노아가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 친구들은 한별 소년의 목을 자를 생각이었으니까요. 적어도 그 노인, 한별 소년의 외삼촌은 그럴 생각이었어요. 그건 물리적으로 제거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죠."
- "한별이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바로 그 생각에 대해 지금쯤 이야기하고 있을 겁니다."
노아가 말했다.
"여러모로 고민해 봤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 방법을 강요할 수는 없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그래서 한별 소년의 가족이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눈 다음 그들의 뜻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이 해결책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말이 돼요? 그런 위선이 어디 있습니까? 외통수잖습니까. 그 사람들이 이 제안을 어떻게 거부해요? 안 그랬다간 더 큰일이 벌어진다는데!"
- "왜 못합니까?"
노아가 받아쳤다.
"누구나 행복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부당하게 짊어진 역사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펼 권리가 있어요. 더 큰일이 벌어진다고요? 세계가 멸망한다고요? 그런 세계가 앞으로 지속될 가치는 있을까요? 왜 저 사람들이 그걸 생각해야 합니까?"
- "그러다가 해결책을 거부하면요?"
"그럼 그걸로 끝입니다."
노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더 이상은 방법이 없어요. 누군가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싶다면 그 정도 각오는 해야 하는 겁니다."
- "열 살입니다. 겨우 열 살이라고요. 그런 것까지 어떻게 생각합니까?"
"열 살이건 백 살이건 마찬가지입니다. 열 살이면 자기 존재에 대해 생각하기에는 충분한 나이예요. 게다가 한별이는 생각이 깊고요. 경해 씨도 이미 보셨잖습니까."
나는 대꾸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사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노아가 옳았다.
- "그럼 우리는 이제 뭘 하면 됩니까?”
"기다려야죠. 한별 소년의 가족들이 결정을 내릴 때까지."
노아가 말했다.
우리는 폐건물 안으로 들어가 기다렸다. 나는 부뚜막이었던 곳에, 노아는 문턱이었던 곳에 걸터앉았다. 밤이 깊어졌다.
- "잘하셨네요."
어둠 속에서 휴대폰 액정이 빛났다. 노아가 휴대폰을 내게 내밀었다. 발신자표시 제한 번호로 보낸 문자메시지였다. 늙은 닥스훈트의 얼굴을 찍은 사진 밑에 앙증맞은 글씨체로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가장 안전한 곳.
"잘됐군요."
"네, 잘된 일이죠."
- "이 일이 끝나면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곰 선생이 단단히 벼르고 있던데."
내가 물었다.
"그게 참 곤란하죠. 당분간 사무실은 못 돌아갈 것 같습니다. 가더라도 곰 선생이 마음에 들어 할 만한 일을 하나 마련해서 가야겠죠."
"어떤?"
"글쎄요. 도서정리협회의 미래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어야겠죠.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곰 선생은 사명감이 너무 강해요. 아마 이번 일을 맡은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그 노인이 정재계 쪽에 친구가 많거든요. 협회의 위상을 높일 기회라고 생각했겠죠."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려고 합니까?"
"곰선생의 그 주장이 아예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한별 소년이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가 말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런 관점에서는 사람의 형태일 뿐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그러나 인간이란 때로 형태가 곧 본질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류에 빠지게 되죠. 저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는 주장으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괴롭혀왔을까요?"
- 대화가 끊겼다. 나는 노아가 아내 이야기를 일부러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뉴스를 못 봤을 리가 없었다. 감람석 반지를 알아보지 못했을 리도 없었다. 내가 노아를 만나 아내를 찾아달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꺼낸 이야기가 그 반지에 대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아직 자기가 나설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 '저는 우리가 가능한 한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밤이 어둠보다 더 깊어졌다.
눈을 떴을 때 눈앞에 길쭉한 실루엣이 서 있었다.
- 나는 눈을 깜박이며 거인을 올려다보았다. 노아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늘이 검푸른색에서 연한 노란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었다. 바지와 신발이 축축했다.
"아내와 한별이가 여러분에게 고맙다고 전해달랍니다."
거인이 예의 바르게 입을 열었다.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인의 표정은 오솔길을 올라갔을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피곤해 보이고, 여전히 슬퍼 보였다. 그리고 덩치가 작아 보였다. 여전히 큰데, 정말로 작았다. 오른손에는 백팩을 들고 있었다. 플라스틱 테두리가 닳기 시작한 녹색 백팩.
작가의 말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집에서 멀지 않은 도시에 다녀왔다. 깨끗하고 조용하며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서가에 나란히 꽂힌 두 권의 책처럼 또렷한 경계선을 그리며 맞닿아 있는 도시였다. 기차역 앞 시장과 시청 근처 공원과 백화점이 들어선 번화가를 배회하던 중 문득 내가 이 도시 사람들의 삶에 멋대로 침입하려 들다가 계속 튕겨나가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사람들에게는 목적이 있었고 내게는 아무 목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어딘가로 가거나 무언가를 하기 위해 그 장소에 있었고 나는 그냥 그곳에 있었다. 그들에게는 자신만의 삶이 있을 텐데 나는 그것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었다.
이 감정은 당연히 자기 연민이다. 자기 연민은 소설의 적이다. 스스로를 과도하게 긍휼히 여기는 자는 남을 이해하는 데 인색해진다. 그런 이들에게 타인의 본질은 두세 단어로 요약 가능하고 세계는 선과 악의 전장에 불과하다. 하지만 소설 쓰기란 다른 이가 품고 있는 비밀과 수수께끼를 언어로써 들여다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남에게는 두세 단어짜리 가십일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삶 그 자체인 비밀을. 그 비밀과 수수께끼는 때로 물에 던진 나트륨 덩어리처럼 폭발하면서 세계를 위협하고 겁줄 수 있다. 한 사람의 삶에서 응축된 에너지를 얕봐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자기 연민을 버리는 게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자신을 바라보고자 애쓰지 않는다면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발 디딜 곳을 찾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때 자기 연민은 스스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에 따르는 약소한 보상이다. 왜냐하면 사실 나는 작고 보잘것없으며 우주는 내가 보인 관심에 호응할 의향이 별로 없으니까. 이는 당의를 입혀야 삼킬 수 있는 진실이다. 그래서 특히나 일인칭 화자가 이끄는 소설에서 많건 적건 풍기는 달달한 멜랑콜리의 향기는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 하물며 비밀을 파헤치고 이면을 들쑤시려 드는 화자라면 말할 나위가 없다. 들쑤셔진 비밀과 이면은 파헤치는 자의 기대를 늘 배신할 테니까.
작업을 하면서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이 소설은 문예지 Axt에 2017년 여름부터 2018년 여름까지 연재했던 원고를 고치고 보완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몇 가지 새로운 아이디어를 추가했고 결말을 변경했다. 수정의 폭이 작지는 않지만 첫 연재분을 쓰기 시작할 때 막연하게나마 떠올렸던 상에서 크게 멀어진 것 같지는 않다. 연재 당시에는 즉흥적이라고 생각했던 결정이 결과적으로는 필요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아전인수일까? 이미 둬버린 수를 물릴 수 없다 보니 자기 합리화에 몰두하는 중일까? 그건 내가 판단할 문제는 아닌 듯하다.
소설 후반에 언급되는 사건은 역사적 사실에서 모티프를 얻었으며 관련 저술과 자료를 참고했다. 특정 사건을 직접적으로 옮겨오지는 않았고 실존 인물과도 연결 짓지 않았다. 묘사와 서술에는 작가의 상상이 상당 부분 가미되었다. 다만 글을 쓰는 내내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려 노력했으며, 실제 역사 속 희생자들의 명예와 존엄에 누를 끼치지 않고자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만에 하나 미흡한 점이 있다면 그건 작가의 몫이다.
2020년 3월
최민우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 > Book1'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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