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김봉철
출판 : 웨일북
출간 : 2020.01.11
<여자 친구와 만원>이란 글은 나도 읽어본 적이 있는 글이다. 아... 싶은 글이었는데, 이걸 이 책의 저자가 썼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숨고 싶은 사람들을 위하여>는 전체적으로 <여자 친구와 만원> 같은 느낌에 더해 조금 더 끈적한 뭔가를 뿌린 듯한 글이었다.
'들개이빨'의 글을 읽었을 때 느낀 강렬함과도 비슷하다. 뭐랄까... 허구인지 사실인지 알 수 없어 아득해지고 마는.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묘하게 사실적이라 읽는 동안 괴롭기도 했다.
그리고 저자가 지금은 덜 괴로웠으면 좋겠다. 인생의 수많은 단면 중 가장 웅크렸던 순간들만 떠올려 쓴 글이었으면 좋겠다.
웃음의 해학 뒤에 섣불리 입을 댈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
그의 글들이 독자들에게도, 그 자신에게도 깊은 공감과 위로가 될 수 있기를.
여자 친구와 만원
어느 날 여자 친구가 이발하라고 돈 만원을 쥐어 줬다.
그다음엔 목욕탕 가라고 또 만원을 줬다. 목욕 다 하고 탕 앞에서 바나나우유 마시며 기다리고 있으니까 얼굴 뽀얘져서 막 빨간 볼 하고 바나나우유 두 개 들고 나오다가 나 먼저 먹고 있는 거 보고 뒤로 감췄다.
상설매장 가서 옷 깔끔한 거 사주고막 맞춰 보면서 잘 어울린다고 좋아해 주고 내가 수줍어하니까 귀엽다면서 막 웃고 데려다주는 길에 집 앞에서 이제 깔끔해지고 말쑥해지고 멋있어졌으니까 자기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라고...
이게 마지막 사귀었던 애랑 마지막 날 했던 일인데. 내가 다시 연애 같은 걸 해볼 수 있을까?
웅크린 이들을 위한 글
<여자 친구와 만원>이라는 글은 어느 날 갑자기 썼다. 쓰는 데는 아무 이유가 없었다. 방바닥을 뒹굴다 그냥 생각이 나서 썼다.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던 이 글은 여기저기로 퍼져 나갔고 사람들은 이 이야기로 만화를 그리고 비슷한 추억들을 적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사연이라 이야기했지만 나는 안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며 내가 지어낸 완벽한 허구다.
"언제나 당당하게 가슴을 쭉 펴고 고개를 꼿꼿이 들자. 휘어질 수는 있어도 부러질 수는 없다."
이런 말들에 지쳤다. 나는 차라리 이렇게 말한다.
"숨자. 숨어 버리자. 누구도 나를 찾을 수 없을 때까지 끝까지 숨어 버리자. 버틸 수 없으면 피하자. 지칠 것 같으면 포기하자."
내가 쓴 글이 여기저기 퍼져 나갈 때 나는 글을 쓰는 일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왜 이 글이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는지 몰랐다. 그저 잔뜩 웅크린 나의 모습만 생각했다. 꽃과 닮은 그 모양새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웅크리고 있는 이들에게 닿았으면 한다. 숨어 있는 당신의 그 모양새는 참으로 아름답다. 꽃이니까. 피기 전의 봉오리니까.
- 나이 서른여섯에 백수로 산다는 것.
- 아버지는 밤에 수위 일을 하느라 낮에 주무시고, 엄마는 새벽에 식당에 나가서 밤늦게 들어온다. 나는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며 반찬을 축내는 게 미안해서 하루 세끼 라면을 먹기로 작정했는데, 몰랐다. 요즘 라면 값이 그렇게 비싼지. 라면에 말아먹기엔 역시 찬밥이 제일이라 밥솥의 전원을 빼놓았는데 아버지가 일 나가기 전에 일어나서 "정전 됐었니?" 하고 물어보셨다. 자는 척했더니 아버지 혼자 부엌에서 찬밥에다 물 말아 드시고 출근하셨다. 엄마가 돌아와 "아빠 찬밥 먹고 나가게 하니까 좋아?" 하고 묻는데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엄마 미안해.
이 말이 매일같이 목구멍까지 차오르지만 한 번도 이야기해 본 적은 없는 거 같다. 이런 아들이라 미안합니다... 하고, 하루에 백 번 천 번도 더 생각하곤 한다.
나이 서른여섯에 백수로 산다는 것. 서른여섯, 백수, 산다는 것. 셋 중에 어떤 게 더 잘못된 걸까? 셋 다라고 말하기엔 내일이 오는 게 너무 무섭다.
- 우울하고 마음이 가라앉는 날이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숨을 쉬기도 힘들고 마음이 무거워 움직일 수 없다. 나쁜 생각만 계속하고 커피를 마시러 나가는 것도 힘들다. 집에서 펑펑 노는 것도 슬퍼서 책도 읽을 수 없고 영화를 볼 수도 없다. 시간 가는 것이 두렵다. 나를 자꾸 어딘가로 몰아가는 것만 같다.
- 뭘 할 수 있을까? 나는 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지? 이런 생각에 숨이 턱 막혀서 호흡이 가빠지고 힘들다. 통장에는 이천사백 원뿐이다. 이걸로는 담배 한 갑도 사기 힘들어 금연 일보 직전에 있다. 백 원만 더 있으면 마지막으로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을 텐데... 집에 있는 커피믹스를 마시면 되는데도 나는 허세를 부려 커피숍 커피를 마실 궁리를 한다.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 뭘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실제로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밖에도 안 나가고 매일 방바닥에 눌어붙어서 정말이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결국 '아, 하나쯤은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화가 나서 당당한 척하며 엄마 지갑에서 천 원짜리 하나를 꺼내 밖으로 나갔다.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생각했다.
오늘 또 한 걸음, 사람의 길로부터 멀어져 버렸구나. 눈물이 조금 나와 버렸다.
- 눈을 보기 어려우면 인중을 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사실 그것도 우스운 말이다. 눈을 보기 창피한 사람에게는 인중을 보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눈이 아닌 다른 부분을 보고 있으면 대번에 알아차린다. 처음부터 약한 것을 인정하는 것보다, 아닌 척하는 허세 때문에 비웃음을 살 수 있다.
- "사람 눈을 똑바로 봐라. 숨기거나 거리낄 것이 없으면 눈을 피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느냐" 하고 말하는 사람들은 잘 모른다. 누군가 정말 뭔가를 속이고자 할 때는 오히려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상대의 눈을 뚫어지게 보는 법이다. 수줍음이 많다는 것은 남을 속일 의도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 여하튼 나도 세상에 조금 적응해보고자 나름 연구한 방법이 있다. 바로 '매직아이'로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다. 눈과 눈 사이 미간에 한 점을 생각해 그곳을 집중해서 바라보면 무섭게 생긴 사람도 눈이 세 개로, 코가 두 개로, 입이 두 개로 보여 얼굴을 당당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 힘든 사람은 상대의 미간을 보라. 인중 따위의 허황된 조언과 차원이 다르다.
- 친구가 연인이 되고 연인이 친구가 되는 데는 대체 뭐가 필요한 걸까?
정신이 말똥말똥하다가 스르륵 잠에 빠져들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걸까? 그럼 선잠에 들어서 잠결에 비몽사몽 하는 건 썸 탄다고 그러나? 나는 잠을 잘 자지 못한다. 침대에 누워서도 몇 시간을 깨어 뒤척이다가 겨우 한두 시간쯤 자고 일어나 몽롱한 상태로 매일을 살아간다. 그러니까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결코 알 수 없다.
- 쓸데없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한 건 아닌가? 나만 신나서 상대방 생각도 안 하고 지루한 이야기를 혼자 떠들어 댄 건 아닌가?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으면 어쩌지? 다른 사람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아 버린 건 아닐까? 내가 못생겨서, 내가 입은 옷이 허름해서. 내 말투가 어눌하고 바보 같아서, 내 표정이, 내 걸음걸이가, 어깨가 굽은 내 자세가 이상해서, 나랑 같이 다니기 창피하지는 않았을까? 어제의 나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을까? 남들만큼은 아니어도 그래도 사람처럼 보였을까? 이 말은 하지 말걸, 그 이야기는 내가 들어도 지루했을 텐데, 그런데도 웃어주던 사람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인 것만 같아서 그게 더 미안하고, 후회되고, 신경 쓰이고, 걱정되고, 불안하다.
- 어제는 그렇게 즐겁고, 재밌고, 신나고, 사람이랑 이야기도 했는데, 오늘의 나는 눈을 뜨자마자 또 아무것도 못한다. 이야기할 사람도 없고, 마음 나눌 곳도 없이 이불속에만 있다. 나는 이제 또 뭘 해야 하지? 더 쓸쓸해진다. 이럴 거면 차라리 사람을 만나지 말걸. 어제는 그렇게 행복했는데 왜 나는 오늘 또 불행해진 거지. 막심한 후회를 한다.
- 매번 돌아오는 설렘마다, 새로운 것 같아도 익숙한 반복마다. 이 사람은 진짜일 거야, 이번에야말로 진짜일 거야, 나를 보듬어 주고 너를 생각하며 서로를 아끼고 챙겨줄 수 있을 거야.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하고 생각했지만 전부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야말로 진짜가 아니었단걸.
- 이상해 보여서 애들이 그렇게 나를 괴롭힌 거였구나. 그래서 나도 나름대로 애들이 이야기했던 거 하나하나 기억하면서 괴롭힘 당하지 말아야겠다 하고 고치려 노력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괴롭히는 이유들이 점점 사소해져 갔다.
"넌 걷는 게 이상해.", "넌 웃는 게 이상해.", "넌 생각하는 게 이상해.", "넌 생각을 왜 해?", "넌 그냥 이상해."
- 그러다 보니 내 스스로도 웃는 게 이상하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사람 같아서 가급적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웃지도 않으려고 했다.
- 진짜 매일같이 그러니깐 못 살겠고, 미칠 것 같고, 죽을 것 같아서, 하루는 성냥이랑 라이터 사다가 아버지 옷 주머니마다 다 집어넣었다. 그날 밤도 또 싸우시기에 '아, 이제 됐다. 다 끝났다. 드디어 끝이다.' 이불속에 숨어서 좀 안도했다. 그런데 분명 아버지가 주머니 속을 뒤지는 것까지 봤는데, 또 라이터를 못 찾았다고 밖으로 나가셨다.
분명 내가 라이터 넣어 둔 옷이었는데...
- 열심히 살아보려고 이런저런 노력을 하던 중에 인터넷으로 '내면 아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 어린 시절의 나쁜 기억을 가진 사람이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너는 멋지고 훌륭해." 그런 말들을 하며 치료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 나는 어린 시절의 봉철이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의 봉철과 지금의 봉철은 둘 다 낯을 가려서 서로 눈도 못 마주치고 땅만 보고 있었다.
- 왠지 낯간지럽고 쑥스러워서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다가 결국 "저기... 이런 말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넌 잘못이 없어. 그냥 다들 잘 몰랐던 거야. 아버지는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할지, 엄마는 그런 아버지의 어떤 점이 잘못됐는지, 그리고 나를 어떻게 달래 줘야 했는지, 그리고 너는 학창 시절과 가정에서 겪었던 폭력들에 어떻게 대처해야 했는지, 그냥 잘 몰랐던 것뿐이야" 하고 말해줬다. 그러자 어린 시절의 봉철이가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더니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너는 지금 왜 그래?"
- 이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사무실 끝에 '진실의 방'이라고, 내가 이름 지은 테이블이다. 진실의 방에 끌려간다는 것은 정말 큰 사고를 쳤다는 의미로, 고객 클레임이 심하게 들어왔거나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한 경우에 해당한다. 나름 조심한다고 했지만 나는 결국 진실의 방에 끌려가게 됐다. 진실의 방에 가게 되면 팀장님과 나란히 앉아 이어폰을 한쪽씩 다정하게 나눠 끼고, 문제가 되었던 통화 녹취를 듣는다. 나의 목소리를 다른 사람이 같이 듣는 건 정말 치욕의 극치라고 볼 수 있다. 통화 중에 내가 얼마나 당황했고, 또 얼마나 비굴했는지, 대화의 침묵은 얼마나 길었는지, 내 발음이 얼마나 웅얼웅얼 대는지, 단어의 선택과 문장의 구성이 유치원생보다 못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얼마나 말을 못 하는지, 계속해서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 나는 고객님이 얼마나 화가 났고 내 대응 방식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듣고 '나는 왜 이렇게 못났지? 나는 왜 잘하는 일이 하나도 없을까?' 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괴로워했다. 그러자 팀장님이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잘 설명한 다음 "알았지?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하고 말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죄송합니다.", "아유, 아니야. 죄송하다는 말 하지 마. 왜 이렇게 얼굴이 빨개졌어? 속상해서 그래?"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 더 감당 못할 만큼 감정이 차올라서 "죄송합니다. 화장실 가서 조금만 울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얼굴을 가리고 소녀처럼 콩콩 뛰어서 화장실로 갔다. 눈물을 그치고 세수를 하는데 물이 차가워서인지 계속 눈물이 나왔다.
- 하루 아홉 시간 한 달 내내 일을 해도 월급이 이백만 원이 채 되지 않는다는 것은 꽤나 슬픈 일이다. 이럴 거라면 막노동을 다시 나갈까, 하고 생각하지만 비만 오면 쑤시는 어깨와 무릎 때문에 주저하게 된다. 부자가 되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나중에 독거노인으로 고시원 쪽방 같은 곳에서 살아갈지도 모르니,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 세상에 남아 있을 때 돈을 더 모아 둬야 한다. 나중에는 정말 한 달에 피자 한 번 시켜 먹는 일도 힘들어질지 모른다. 외롭고 쓸쓸하게 늙어 죽는 일이야 이미 예정된 미래라 어찌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굶어 죽지는 말아야 하지 않나 싶다.
- 삼십 대 중반에 처음으로 직장을 다니며 깨달은 건 어쨌거나 살아있는 동안에는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이지 월급은 통장을 순식간에 스치고 지나간다. 땡전 한 푼 없는 통장 잔고를 볼 때면 나는 바보 맹추인 것만 같지만, 그래도 월급을 받아서 의미 있는 곳에 쓸 때면 나름 보람도 느낀다.
- 아버지가 빌려 간 책은 '사람들에게 상처받지 않는 법' 뭐 그런 종류의 내용이었다.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들 때문에 이 책을 산 건데 아버지가 이 책을 읽으려는 이유는 뭘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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