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마키메 마나부] 가모가와 호루모

일루젼 2024. 7. 25.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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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마키메 마나부 / 윤성원
출판 : 북폴리오
출간 : 2010.10.20


     

 

마키메 마나부라는 작가를 좋아하게 되었다.

<가모가와 호루모>, <로맨틱 교토 판타스틱 호루모>, <사슴 남자>. 

이 작가의 소설들은 모두 기발한 상상력과 생생한 현실감이 매력적인데, 가장 큰 진입장벽이라면 아마도 표지가 아닐까? 선뜻 손을 뻗기 어렵지만 일단 한 번 손에 쥐면 단숨에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다.

(단, <가모가와 호루모> 경우는 겉표지와 속표지의 차이를 비교해 보는 게 재미있으니 꼭 확인해 볼 것)

 

한국어로 번역된 책은 모두 읽어버려서 슬프다. 다른 작품들도 틀림없이 취향일 텐데.

 

<가모가와 호루모>는 <로맨틱 교토 판타스틱 호루모>와 연결되는 작품이다. 읽는 순서는 크게 상관이 없을 것 같다. <판타스틱>의 경우는 일종의 외전 모음집으로 <가모가와>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각 단편의 주인공이 된다. 내 경우는 <판타스틱>부터 읽어서 <가모가와>에서는 쭉 이어지는 흐름으로 반가운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반대의 경우를 상상해 봤는데,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하지만 가지 않은 길은 언제나 상상으로만 남는다.)

 

'호루모'란 인당 100마리의 귀신(요괴)을 부리는 팀 대항전이다. 교토 황궁을 중심으로 각각 동 청룡, 서 백호, 남 주작, 북 현무에 해당하는 네 대학 동아리는 격년으로 10명의 신입생을 모집한다. '냄새가 나는' 될성싶은 학생들을 모으면 어느새 10명이 맞추어지는 모양이다. 하지만 당연히 처음부터 요괴다, 호루모다,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6개월 정도 교토 곳곳을 돌아다니는 여행 및 레저 동호회의 탈을 쓰고 있다가- 7월, 한여름의 기온마쓰리에 본격적으로 '호루모'에 대해 알려주고 구전으로 귀어를 가르친다는 모양. 그리고 이듬해 '대물림 의식'을 치르고 나면 그때부터 회장을 제외한 선배들은 은퇴하고, 후배들의 호루모 전이 시작된다. 

 

<가모가와 호루모>는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져 온 것들과, 지금 이 순간이기에 일어나는 것들이 마구 뒤섞인다. '가모가와'였기 때문에 '아베'가 17조를 발의하게 된 것인지, 발의하게 되었기 될 것이기 때문에 '가모가와'가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무섭지 않느냐'고 말하는 스가에게 '전 저예요'라고 답하는 아베에게서 나를 본다. 무엇이 어떻게 되었건, '아베'는 '아베'이고 지금은 지금이다. 

 

레스토랑을 지휘하던 구스노키 후미를 다시 만나 반가웠다. 그때 말하던 '마음에 둔' 사람이 누군지도 확인할 수 있어서 기뻤고. 그녀가 횡단보도에서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보았던 건 역시 단순한 귀신(요괴)이 아니었다... 

 

다른 이야기지만 500 교토대 청룡회는 '여포'와 '제갈공명'을 모두 갖추었으니 질래야 질 수가 없을 것 같은데. 비와코를 머리에 품은 다카무라와 리쓰메이칸대의 백호대 회장 다마미의 오토바이 데이트도 궁금하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통보인' 아베 씨의 이야기와 회중시계에 관한 이야기도 더 읽어볼 수 있다면 좋겠다. <판타스틱>에 수록된 <레몬>에서 다루고는 있지만... 그 시절 호루모에 대해서도 더 읽고 싶다!! 사실 이미 발표되었는데 나만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긴 하다. (차라리 그랬으면...!)

 

아, 가장 강렬한 부분은! 바로 작가 후기다. 

'지금도 나는 이 새전함 앞에 서면 어김없이 옛날 일이 생각난다'라니. 

대체 어디까지 믿고 어디서부터 웃으란 말인가!

 

마키메 마나부가 보는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떨까.

아마도 조금은 더 괴이하고, 조금은 더 낭만적일 것 같다. 

 

교토 여행을 다시 떠난다면, 이번에는 조금 다른 코스와 목적으로 돌아다닐 것 같다. 

가을쯤 기회가 오기를 바라며.

 

즐거웠다.    


   

- '호루모'라는 말을 아는가?
그래, 호루모다.
아니, 호르몬이 아니라 호루모다. 'ㄴ'은 필요 없다. 말꼬리를 끌어주는 느낌으로 '호루모' 하고 발음해 주기 바란다.

- 아마 여러분은 이런 단어를 모를 것이다. 만에 하나 이와 흡사한 우렁찬 외침을 실제로 들어본 적이 있다고 할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뜻은 모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호루모'라는 말의 뜻, 나아가 이 말의 저편에 존재하는 심오한 세계를 알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일정한 단계'에 도달해야 하고, 일단 '일정한 단계'에 도달한 후에는 타인에게 쉽사리 말할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말할 마음이 없어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 이렇게 '호루모'라는 말은 최소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다이쇼, 메이지, 에도, 아즈치모모야마, 무로마치, 가마쿠라, 헤이안 시대에 아는 사람만이 알고 전하는 자만이 전해 그 옛날 왕도(王都)의 땅, 이곳 교토에서 명맥이 계승되어 왔다. 오늘날에도 이즈모 부근에는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은 또 다른 건국 설화가 은밀히 한 부족의 구전으로 대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호루모' 역시 실로 은밀하고 조용히 오랜 역사를 거치며 살아남았다. 

-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말이 가진 숙명적인 폐쇄성 때문에 발생하는 폐해도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호루모'라는 말을 아느냐고 여러분께 물어봤지만, 실은 우리 친구들 중에도 이 말의 정확한 뜻을 아는 이는 하나도 없다. 설령 옛날로 돌아가 야나기타 구니오(일본의 저명한 민속학자 -옮긴이) 선생님이나 오리쿠치 시노부(일본의 저명한 민속학자이자 국문학자 -옮긴이) 선생님께 여쭤본다 해도 알 길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이 세상의 말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드니까. 예전에는 그 의미에 관한 대화도 한정된 사람들 사이에서만 오갔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오랜 세월을 거치며 어디에서 단절되었거나, 아니면 애당초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 그렇다면 '호루모'란 도대체 뭘까?
'호루모'란 요컨대 일종의 경기 이름이다.

 

- '호루모'는 대항전 형식의 경기다. 그러니까 상대와 겨루어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 목적이다. 경기 인원수는 스무 명으로, 적군과 아군이 각 열 명씩. 원칙은 상대편의 마지막 한 사람이 경기장에서 사라질 때까지 경기가 이어져 어느 한쪽이 전멸한 시점에서 승패가 결정된다. 그렇지만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경기가 계속되는 경우는 드물고, 실제로는 어느 한쪽 대표가 항복을 선언한 시점에서 끝난다.

- 그렇다면 왜 '호루모'라고 하는 것일까?
단어의 본래 의미도 알 수 없는 데다 어원조차 분명치 않다면 '호루모' 같은 기상천외한 말을 고집할 필요 없이 게이한이든 교토오하라 절이든 아네산 다코야키든 마음대로 이름을 붙이면 되지 않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
경기에서 탈락해 경기자가 '호루모'를 계속할 수 없어지는 순간 그 이유는 돌연히 밝혀진다. 패배한 경기자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다음 콧구멍을 한껏 부풀리고 전혀 주위에 아랑곳 않고 폐 안의 공기를 깡그리 내뱉으며 외쳐야 한다.
'호루모오오오오오!' 하고 목청껏.

- 시조가와라 한복판에서 탈락한 여자 아이가 글로는 도저히 묘사할 수 없는 끔찍한 표정을 지은 채 '호루모오오오오오!' 하고 외치는 모습을 접하면 비록 적일지라도 정말이지 가슴이 아프다. 그렇지만 아무리 창피한 상황이더라도 당사자는 외치지 않을 수 없다. 혹시 교토 거리에서 '호루모'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외침을 들은 적이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한 전사가 힘이 다한 순간 어쩔 수 없이 터뜨린 단말마적인 외침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목청껏 '호루모' 하고 외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녀석들과 맺은 '계약' 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모든 것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졌기는 하지만. 

- 이제는 나도 단언할 수 있다. 만약 '호루모'를 겨루게 된 스무 명이 가차 없이 패자에게 찾아오는 그 끔찍한 순간을 이전에 한 번이라도 목격한 적이 있다면, 결코 '호루모' 세계 같은데 발을 들여놓지는 않았을 거라고. 하지만 교묘히 놓여 있는 덫(맞다. 그것은 덫이다!)에 걸려 우리는 결국 그 녀석들과 '계약을 하고 말았다.

- 모든 일의 발단은 교토 3대 축제의 하나인 아오이마쓰리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생이 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나와 다카무라, 그리고 훗날 행동을 함께하는 다른 회원 모두 아오이마쓰리에 엑스트라로 참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쓰리가 끝난 다음 교토대 청룡회라는, 무슨 폭력단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이름의 동아리 회원에게서 꽤나 늦은 감이 있는 신입생 환영회 광고지를 건네받은 것이다. 

- 옛날 헤이안 시대에는 '마쓰리'란 아오이마쓰리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한다. 매년 5월 15일 아오이마쓰리 거리 의식이 열린다. 교토 황궁 겐레이몬에서 시모가모 신사를 거쳐 가미가모 신사에 이르는 길을 화려한 헤이안 의상으로 휘감은 500여 명이 1킬로미터에 이르는 행렬을 지어 수도의 대로를 줄줄이 누빈다. 

- 슬슬 마루타마치에 있는 자취집으로 돌아갈까 하던 차에 나는 사무소 앞에서 한 남자를 스쳐 지나갔다.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상대방도 똑같은 느낌을 받은 듯 얼간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 그 남자를 그대로 지나칠 수도 있었다. 아니, 여느 때 같으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수고했어요"라는 말을 주고받은 다음, 왜 그랬는지 나는 그 남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 시작했다. 그뿐이 아니다. 둘이 같은 대학 신입생이라는 것을 알고 자기소개까지 하고 말았다. 귀신에 씌었다고밖에 달리 말할 길이 없다. 아니, 이 경우 신이 들렸다고 해야 할 것인가?

남- 자는 '나카무라'라고 자신을 밝혔다. 피부가 하얗고 얌전해 보이는 남자였다. 머리도 짧은 데다 호리호리한 몸집 때문에 얼굴이 무척 작아 보였다.
"흐음, 아베는 전공이 종합인간학이구나. 그런데 그건 뭘 공부하는 건데?"
얌전해 보이는 생김새와는 딴판으로 말을 섞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척이나 스스럼없는 태도로 나오는 남자였다.

- "어째서 대학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가입을 권유하는 건가요? 비효율적이지 않나요?"
다카무라는 여전히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그렇지만... 늘 아오이마쓰리가 열리는 날에 여기서 권유하기로 돼 있어요. 뭐랄까. 그래요, 전통이죠."
여자가 약간 난처한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이상하게도 이 두 사람에 대한 인상이 분명치 않아 아까부터 묘하게 갑갑한 기분이 들었다.

- 딱히 이 두 사람에게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건네준 광고지 내용은 분명 어딘가 이상하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광고지의 이상한 점에 대해 변명하거나 구체적으로 수정을 가할 생각도 전혀 하지 않는다. 결국 이대로 괜찮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역시 가장 이상한 것은 이 광고지를 나눠주는 두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인가.


- "꼭 환영회에 나와요. 묻고 싶은 게 있으면 연락을 줘도 좋고요. 이 광고지 밑에, 여기요, 내 휴대전화 번호가 있으니까."
스가 씨는 내 어깨를 가볍게 툭 치더니, "아, 또 온 모양이야"하고 소리 지르는 여자를 뒤따라갔다. 나는 뒤돌아서, 꼬불꼬불한 곱슬머리가 유난히 눈에 띄는 스가 씨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수상해."
나처럼 뒷모습을 지켜보던 다카무라가 중얼거렸다. 나는 광고지로 눈길을 돌렸다. 꾸불꾸불 굽이도는 용 위에 '스가와라'라는 이름이 휴대전화 번호와 함께 적혀 있었다.

- 나는 길을 걸으면서 내내 어떤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교토 대청룡회의 그 두 사람이 어떻게 나와 다카무라를 교토대생이라고 판단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휴식 시간에 들은 주변 사람들 얘기로는 오늘 엑스트라에는 도시샤대학, 리쓰메이칸대학, 교토산업대학 등 그야말로 교토 내의 온 대학생이 참가한 모양이었다. 그때 가미가모 신사의 참배 길에는 나처럼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학생들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다른 학생들에게는 눈길도 안 주고 우리 둘을 콕 찍어 말을 건 것이다.

- 그리고 또 하나 의문스러운 점이 있었다. 어째서 나를 신입생이라고 생각했는가 하는 점이다. 삼수 끝에 합격한 나는 지난 4월 3일에 생일을 맞아 신입생이지만 스물한 살이다. 잘 풀렸더라면 지금쯤 3학년이 되었을 처지인데 그 두 사람은 처음부터 나를 신입생이라고 판단하고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오늘 아르바이트는 신입생 모집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일까?

- 교토대학 청룡회 제499대 회장 스가와라 마코토란 너무 길지 않나 싶다.
도대체 이 499라는 숫자가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훗날 나는 스가 씨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아무렇게나 지어낸 것이라고 스가 씨는 웃으며 대답하더니 그래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모든 것의 '시작'을 창조했다고 여겨지는 인물이 죽은 지 딱 천년이 되어간다고 하면서 아무튼 2년마다 대물림을 해야 하는 관습을 누군가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 "너랑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야."
천년 전에 죽은 인물이 과연 누구냐고 묻자, 스가 씨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내 얼굴을 가리켰다.
"그럼 일본인이라는 얘기군요."
"그렇겠지."
"혹시 아베 세이메이인가요?"
내가 목소리를 높이자 스가 씨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더니 윙크를 보내왔다.

- 대부분의 동아리는 해마다 대물림을 한다. 교토대 청룡회의 1학년 생도 2학년이 되면 선배에게서 운영권을 물려받는다. 여기까지는 다른 동아리와 똑같다. 단 일반 동아리와 다른 점은 2학년이 되어도 교토대 청룡회는 새로운 회원, 즉 1학년 생을 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대신 3학년이 되어 처음으로 신입생을 맞이한다. 이렇게 새로운 혈통을 2년에 한 번밖에 받아들이지 않는 관계로 자연히 2년마다 '대물림'이 이루어진다.

- 나는 어느 날 문득 우리 청룡회 500대 회원이 어느새 열 명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어느새'라는 부분에서 교토대청룡회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은 예정조화(豫定調和)에 따른 결과였다. 나. 다카무라. 사와라 교코, 그리고 아시야, 마쓰나가, 기노, 쌍둥이 미요시 형제, 사카가미, 구스노키 후미, 이렇게 열 명이 교토대 청룡회의 새로운 회원이 되는 것은 아오이마쓰리 날 스가 씨에게서 광고지를 받았을 때부터 이미 정해진 결말이었던 것이다.  


- 우리 모두는 5월 15일의 아오이마쓰리 '로토노기' 행렬에 엑스트라로 참가했다. 그리고 마쓰리가 끝나고 집으로 가던 중 가미가모 신사에서 스가 씨에게서 그 파란색 광고지를 건네받았다. 그때 나는 어떻게 스가 씨가 나를 교토대 신입생이라고 알아본 것일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내게는 알 수 없는 까닭이 있어 그렇게 판단했을 것이라고 적당히 결론지었지만, 스가 씨의 행동에 의문을 품은 것을 포함해서 나는 어떤 의미로는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스가 씨에게는 보였던 것이다. 나나 다카무라에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 스가 씨에게는 보였던 것이다. 스가 씨는 그저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광고지를 건네주기만 하면 되었다.

- 다이몬지 산 하이킹, 아라시 산 바비큐, 히에이잔 산 드라이브, 비와호 캠프. 5월 하순에서 7월 초순에 걸쳐 교토대 청룡회가 주관한 몇몇 야외 활동은 우리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스가 씨의 책략이자 요이야마 때까지 회원을 끌고 가려는 위장술이었다. 애당초 '소질'을 보였던 우리다(교토대 청룡회 내에서는 '냄새'를 지닌다는 전문 용어가 쓰인다). 스가 씨는 광고지만 건넨 다음 잇따른 계획을 내세워 우리가 동아리에 뿌리내리게 하면 되었던 것이다. 

- 물론 처음부터 앞서 열거한 열 명이 모인 것은 아니다. 열 명 중에는 산조기야마치 선술집 베로베로바에서 열린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하지 않은 이도 있고, 거꾸로 환영회에는 참석했지만 최종적으로 남지 않은 이도 있다. 스가 씨가 과연 '냄새'를 지닌 신입생 몇 명에게 광고지를 뿌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광고지를 나눠주기만 했는데 최면술처럼 회원들이 모여든 것은 아니다. 모임에는 참석했지만 왠지 내키지 않아 발길을 끊은 이도 물론 있으니, 일반 동아리와 마찬가지로 떠난 자도 있고 남은 자도 있는 미묘한 이치가 엄연히 존재하는 셈이다.

-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우리는 열 명이 되어 있었다. 스가 씨 때도 열 명이었다. 그 윗대도 역시 열 명이었다고 한다.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호루모'가 열렸던 이상 분명 열 명이었음에 틀림없다. 한 명도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딱 열명이 어느 대에도 어느새 모였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펼치자 나는 인지를 초월한 그 무엇의 존재를 언뜻언뜻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리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를테면 비가 오지 않기를 기원하며 처마 끝에 매달아 놓은 데루테루보즈 인형을 보고, 전국에 800만은 된다고 하는 이 나라의 신 가운데 하나가 슬쩍 내일 날씨에 장난을 쳐볼까 하는 정도의 그런 유의 이야기다. 

- 7월 16일 기온마쓰리 요이야마. 내가 처음으로 '호루모'라는 것을 알게 된 날로 평생 기억에 새겨질 초승달 밤이었다. 하기는 그때는 아직 '호루모'가 뭔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 오후 6시 반, 자취 집까지 데리러 온 다카무라와 함께 집을 나서 시조를 향해 가모가와 강가를 똑바로 나아갔다.
평소보다 유난히 눅눅한 공기가 교토의 밤을 감싸고 있었다. 그저 강가를 걷고 있을 뿐인데도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음을 실감했다.

 

- 선배들을 이끌고 온 스가 씨는 우리와 마주 보고 멈춰 섰다. 스가 씨 일행이 입고 있는 쪽빛이 감도는 짙은 파란색 유카타는 다리의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이 강변에서는 칠흑처럼 검어 이루 말할 수 없는 무시무시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 스가 씨는 뒷짐을 지고 천천히 우리를 둘러보더니 엄숙히 입을 열었다.
"금일 오후 7시를 기하여 요이야마 협정이 해제됨을 선언한다."

의미를 알 수 없어 멍해 있는 우리 마음의 빈틈을 뚫고 나가듯이, 강 건너에서 발사된 로켓 폭죽이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 스가 씨는 읊조리듯 중얼거리더니 천천히 요이야마 협정에 관한 설명을 시작했다. 이어서 교토대 청룡회와 호루모에 관한 이야기. 스가 씨가 제499대 회장이라는 것. 우리가 기념비적인 제500대라는 것 등 마치 농담 같은 내용을 스가 씨는 담담하게 늘어놓았다. 우리는 그 모든 이야기를 농담으로 여기며 묵묵히 들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딱히 스가 씨의 이야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단지 현실 세계의 이야기로 여겨지지 않았을 따름이다.

- 난데없기는 하지만 여기서 소책자 한 권을 소개하고자 한다.
종이 색깔은 완전히 바랜 상태이고, 표지에는 보강 셀로판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데 그것마저 이미 변색된 것으로 보아 이 소책자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왔는지를 여실히 전해 주는, 실로 오래된 물건이다.
표제는 솜씨 좋은 붓글씨로 <호루모에 관한 비망록>이라고 세로로 쓰여 있다. 그 안의 '총칙', '세칙'에 이어지는 '금지사항'에 관한 페이지, 그 제3조에 게재된 조문을 여기에 기록해두고자 한다.

- 제3조 : 기온마쓰리 요이야마 이전에는 신입생에게 '호루모'에 관한 정보 전달을 일절 금한다.

- 이것이 통칭 '요이야마 협정'이라고 불리는 것의 정확한 원문이다.
이 조문의 규정에 따라 기온마쓰리 요이야마 전에 신입생에게 용인되는 활동은 호루모에 필요한 열 명을 모집한다는 한 가지로 국한된다. 열 명이 모이는 시기와는 무관하게 출발점을 통일한다. 이 조문의 목적이 '공평한 경쟁'의 실현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똑똑한 여러분 중에는 벌써부터 의문을 품은 분도 있으리라. '요이야마 협정'이니 '공평한 경쟁'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누구와 누구의 협정이고 경쟁이란 말인가 하고. 
이에 대한 해답은 <호루모에 관한 비망록>의 표지 뒷장에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는 페이지 한가운데에 단 한 줄, 짤막하게 이렇게 쓰여 있다.
"동 청룡, 남 주작, 서 백호, 북 현무"라고.

 

- 축제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은 시조가와라를 뒤로하고 우리 교토대 청룡회 스무 명이 향한 곳은 시조가라스마 교차로였다. 교토 시 경찰 조사에 따르면, 이날 기온마쓰리 요이야마를 구경하러 몰려나온 이는 무려 46만 명이었다고 한다. 시조 대교 부근에서 보행자 천국이 된 시조 거리를 동서로 둘러보았더니 끝도 없이 이어지는 사람들의 머리가 거대한 강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시각은 오후 7시 30분, 혼잡이 극에 달한 인파에 뒤섞여 우리는 스가 씨를 선두로 시조 거리를 서쪽으로 나아갔다. 안개가 낀 것처럼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인파에 뱃멀미 같은 감각을 느꼈을 무렵 시조 거리 전방에 떡하니 오늘 밤의 주역이 나타났다. 

정면에 제등을 잔뜩 달고 지붕에 장대한 칼과 창을 꽂은 화려한 가마가 발광 해파리처럼 어렴풋이 빛나면서 도시의 대로를 오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기온마쓰리 가락에 스가 씨 일행이 딸각딸각 울리는 게다 소리는 실로 잘 어울렸다. 희미한 등불 빛에 드리운 파란 유카타 뒷모습도 제법 그럴듯했다. 다만 열 명이 하나같이 유카타 등에 하얀 테두리를 두른 용을 달고 있는 모습은 시골의 불량배들 같아 점수를 줄 수 없었다.
선배들의 뒤를 따라 우리 신입생 열 명도 마쓰리 분위기가 넘쳐나는 시조 거리를 아장아장 나아갔다.

- 시조가와라에서 난데없이 호루모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마치 유람이라도 나온 이들 같았다. 그러니까 누구 하나 스가 씨가 한 이야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마쓰리 가락에 한껏 기분이 고조된 우리가 귀엽게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에게서 액땜용 찹쌀떡이니 부적을 사기도 하고, 노점상에서 빙수니 야키도리니 파인애플을 사 먹기도 하고, 늠름한 칼과 창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하기도 하며 교토에 온 이래 처음 맞이하는 기온마쓰리를 천진난만하게 즐긴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그러했기에 시조가라스마 교차로를 눈앞에 두고 선두의 스가 씨가 갑자기 멈춰 서서 "지금부터 '시조가라스마 교차로 모임'이 끝날 때까지 사담을 일절 금지한다"라고 엄숙한 목소리로 통보한 순간 갑자기 현실로 되돌려진 듯했고, 이제까지 설쳐대던 우리를 스가 씨가 완곡히 책망하는 것 같아서 다들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우리는 찬물을 끼얹은 듯이 순식간에 조용해지면서 동시에 시조가와라에서 스가 씨가 했던 이야기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스가 씨는 안주머니에서 구식 회중시계를 꺼내더니 시각을 힐끗 확인했다나도 따라서 무심코 손목시계를 보니 오후 8시 정각을 가리키려는 참이었다.

- "동 청룡, 남 주작, 서 백호, 북 현무."
괴상한 구절을 중얼거리더니 스가 씨는 교차로를 향해 어슬렁어슬렁 걷기 시작했다. 그 기묘한 분위기에 완전히 휩쓸린 우리도 잠자코 뒤를 따랐다. 그것이 호루모라는 마계로 우리가 발을 들여놓은 기념비적인 첫걸음이었다.

- 꿈속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일이 돌연히 눈앞에 현실로 펼쳐졌다. 구라마 산에서 괴물을 만나고, 오에 산에서 도적 슈텐동자를 만나고, 이마데가와 거리에서 백귀야행과 맞닥뜨린, 그런 기분이었으리라.

- 시조가라스마 교차로는 동서남북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볐다. 교차로 앞에는 창과 칼을 꽂은 어마어마한 가마가 거대한 장기짝처럼 겹겹이 시조 거리에 우뚝 솟아 있었다. 가마마다 달려 있는 수십 개나 되는 제등은 마치 곶감이나 동그란 모양의 꼬치 경단 같았다. 우리 신입생은 이 순간에도 스가 씨 일행이 어떤 이유, 이를테면 동아리에 전해 내려오는 전통적인 장난 같은 것으로 우리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완전히 농담이라고 여겼던 일의 일부분이 눈앞에 현실로 일어난다면?

- 거듭 말하지만 우리가 딱히 스가 씨의 이야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도저히 현실 세계의 이야기라고는 여겨지지 않았을 뿐이다.

- 꼭 우리 같다는 생각이 스치며 문득 무엇인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 순간, 스가 씨의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
"술시(오후 8시)다. 지금부터 '시조가라스마 교차로 모임'을 개최한다."
선배들의 머리 너머로 높게 쳐든 스가 씨의 손이 보였다. 아까본 그 구식 회중시계가 네온 불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검은 유카타를 입고 오른쪽 맨 앞에 서 있던 남자가 갑자기 굵직한 목소리를 냈다.
"교토산업대학 현무파, 이상 열 명."
이어서 정면 하얀 유카타 일행의 선두에 서 있던 남자가 힘찬 목소리를 냈다.
"리쓰메이칸대학 백호대, 이상 열 명."
이어서 왼쪽 빨간 유카타 일행의 선두에 서 있던 여자가 쨍쨍한 목소리를 냈다.
"류코쿠대학 피닉스, 이상 열 명."

- 산조기야마치 선술집 베로베로바에 이르기까지 스가 씨가 앞장서서 보여준 일련의 행동은 제비뽑기의 결과였다고 한다. 요이야마 협정 해제 당일 새로운 호루모를 맡아나갈 열 명이 확정되었음을 4자가 선언하는 의식, 통칭 '시조가라스마 교차로 모임'을 도맡아서 운영하고 그 후의 연회 준비를 하는 것이 제비뽑기로 뽑힌 간사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 그날 밤 온통 야단법석이었던 시조가와라에서 "요이야마 협정 때문에 이제껏 알려줄 수 없었지만"이라는 말을 시작으로 스가 씨는 차근차근 호루모에 관해 설명했다. 이야기인즉 호루모란 열 명끼리 맞서서 대항하는 집단경기 같은 것으로, 대항전에는 수많은 요괴가 동원된다. 그렇기에 말로는 내용을 전달하기가 상당히 어렵지만, 전국시대의 합전도(合戰) 병풍 같은 것에 그려진 복작거리는 이미지를 떠올리면 된다고 했다.

- "넌 그게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얘기라고 생각하니? 그런 걸 믿을 바에는 차라리 남미의 수수께끼 흡혈동물 츄파카브라(Chupacabra)가 존재한다고 열렬히 믿겠다."
다카무라는 가시 돋친 내 말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고 일어나더니 근처에 세워둔 자전거 바구니에서 주황색 배낭을 꺼내 들고 왔다.
"실은 도서관에서 조사해 봤어."

- 다카무라는 배낭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이건 음양도에 관한 책이거든." 
"그렇겠지. 제목에 쓰여 있잖아."
"대학 도서관에서 찾았어. 율령제에서 음양서의 관료기능을 연구한 버젓한 학술서라고. 정확히 해두려고 하는 말이야."
 
-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런 거야."
다카무라는 발치에서 연필 굵기 정도의 잔가지를 줍더니 모랫바닥 같은 땅바닥에 부지런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아무래도 지도 같았다.
"이건 교토시의 지도야."

- "여기가 가모가와. 동쪽인 여기가 교토대."
"북쪽인 여기는 교토산업대. 가미가모 신사는 바로 남쪽의 이 부근이고.”
"여긴 이마데가와 거리이고, 좀 더 서쪽으로 간 이 부근이 리쓰메이칸대."
"조금 남쪽으로 내려가서 여기가 류코쿠대."
다카무라는 강과 거리의 이름을 읊으면서 땅바닥에 써넣더니 마지막에 나뭇잎을 주워 각 대학을 가리키는 지점에 놓았다.
"어때? 대략 교토 황궁 근처를 중심으로 북쪽이 교토산업대, 동쪽이 교토대, 남쪽이 류코쿠대, 서쪽이 리쓰메이칸대라는 배치가 되었지?"

- 그러더니 잠시 후 "잠깐 이것도 좀 봐봐"라며 내 넓적다리 위에서 책을 집어 들어 다른 페이지를 펼치더니 다시 시작했다.
눈길을 떨어뜨리니 거기에는 컬러사진으로 <아베 세이메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이 크게 실려 있었다.
"이건 그 유명한 음양사인 아베 세이메이잖아?"
"아, 역시 유명한 사람이구나."
"그렇지, 참. LA에서 온 네가 아베 세이메이 같은 사람을 알턱이 없겠네. 너도 참 이래저래 힘들겠다."
"아니, 모르는 게 나올 때마다 꼼꼼히 알아보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건 별 문제 아니야."
그 긍정적인 자세에 내가 적잖이 감명을 받고 있는데 다카무라는 당장 강의를 재개했다.
"음양사란 애당초 음양서의 관직명이었어. 아베 세이메이도 음양서 관리 중 하나였지. 실제로 아베 세이메이라는 이름이 사서에 올라간 건 세이메이가 마흔 살이 되고 나서야. 그러니까 출세를 못하고 말단으로 지낸 기간이 제법 길었던 모양이야. 여기 이 오른쪽 밑에 이상한 게 있지?"

- 그림 한가운데에는 수염을 기르고 관모를 쓴 영감 하나가 옛날 두루마리 그림에 나올 법한 흐늘흐늘한 의상을 입고 나지막한 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이 사람이 사상 최강의 음양사로 명성을 떨친 아베 세이메이인가 보다. 솔직히 그리 잘생기지는 않았다. 세이메이 오른쪽 밑에는 아닌 게 아니라 다카무라 말대로 이상한 것이 있었다.
"뭐야? 이 작은 아저씨는?"
"그게 시키가미라고 하네."
"이게 시키가미라는 거군. 음양사가 종잇조각에 대고 후 하고 불면 뭉게뭉게 나타나는 거지?"
"그래, 주인의 명령에 따라 상대에게 저주를 내리기도 하고, 소식을 전하기도 하고, 주인을 지키기도 하며, 자유자재로 출몰했다고 하네."

 

- 나는 페이지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서 찬찬히 시키가미를 관찰했다. 세이메이 곁에서 횃불을 들고 무릎을 꿇고 있는 그 얼굴은 그야말로 요괴다운 모습이었다. 키는 어른의 허리께밖에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이걸로 호루모를 한다는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농담 같다고. 이런 걸 데리고 다녀봐. 온통 난리가 날 거야. 교토 시 경찰기동대가 출동할 거라고." 
"하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아. 넌 요괴를 가리키는 귀(鬼)의 어원을 알고나 있니? '鬼'는 '숨을 은(隱)'이 전와된 거야. 숨은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거래. 덧붙여 말하자면 '옛날에는'이라는 글자도 오니라고 읽기도 했대. 요컨대 옛날에는 신이나 요괴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뭔가 특별한 존재로 여겨졌다는 얘기지. 그래서 호루모 역시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무엇을 동원해서 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문득 해본 거야."
유난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자신의 설을 펼치던 다카무라는 시큰둥한 내 시선을 알아차렸다.
"야, 그런 표정 짓지 마. 그저 생각을 해봤을 뿐이라니까."

그러고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얼버무리면서 얼른 책을 배낭에 집어넣었다.

- 그 자리에서 스가 씨는 당연히 1학년생들에게서 폭풍처럼 몰아치는 질문 공세를 받았다.

- 맨 처음 시작한 이는 아시야였다.
아시야는 180센티미터에 가까운 장신에 까무잡잡한 피부, 짧게 깎은 머리, 넓은 어깨로 한눈에 스포츠맨으로 보이는 외모의 법학부 남학생이었다. 늘 자기가 상황을 파악하고 컨트롤하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 전형적인 보스 기질을 가진 남자였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산뜻한 얼굴 생김새와는 다르게 그 성격의 바탕은 꼬여 있고 집요했다. 나는 결코 명랑하지는 않지만 열린 마음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렇다는 것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시피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평가한다. 하지만 아시야는 정반대인 남자였다. 겉보기는 명랑하지만 사실은 아주 폐쇄적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좀처럼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 결과 아시야는 명랑하고 유쾌한 남자라는 이미지로 통한다. 본심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은 속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그러니까 아빠진 남자라는, 내가 보는 이미지와 세상에 유포된 이미지 사이에는 커다란 괴리가 있다. 나는 그 사실이 못마땅하기 짝이 없다. 

- 더 이상 왈가왈부하면 마치 내가 아시야의 외모를 질투한 나머지 헐뜯으려고 하는 것 같을 테니 그만하겠다.마지막으로, 아시야가 1학년 남학생들 중에서 제일 잘생겼다는 사실을 못마땅하지만 덧붙여 둔다. 그렇다. 나는 늘 공정한 남자다.

- 아시야의 질문은 물론 호루모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질문 방식도 그답게 실로 집요했다. 단도직입적으로 "그런 게 있을 수 없잖아요?"라고 하면 될 것을 "요괴, 시키가미 같은 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의 존재이며, 그래도 민속학 관점에서 보면 당시 사람들의 습관, 사생관(死生觀), 밤의 어둠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가 작용해서 생겨난 문화의 한 양상이라고 파악하지 못할 것도 아니지만..." 하며 논리를 앞세워 질문을 되풀이했다. 지리멸렬한 방식이어서 도무지 내 마음에는 들지 않았지만, 논파란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스가 씨를 항복시키는 것, 그러니까 상식에 입각한 호루모의 진정한 내용을 자백하게 하는 것이 목적인 셈이다. 논리를 내세워 따지는 질문에 반론하려면 나름대로 논리적인 답변이 필요하다. 이만큼 꼼꼼하게 이치를 따져가며 요괴 시키가미니 하는 것들의 비현실성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아무리 스가 씨라도 손쓸 도리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막판에는 법학도다운 아시야의 논급에 은근히 혀를 내둘렀다.

- 그런데 교토대 청룡회 제499대 회장 스가와라 마코토는 이런 질문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존재하는 건 존재하는 거야."
스가 씨는 천연덕스럽게 잘라 말했다.

- 우리 질문의 화살을 누그러뜨린 다음 흐지부지한 상태로 놓아둔 채 여름방학에 들어간다. 그리고 2학기가 시작되고 나서 서서히 호루모 훈련에 들어간다. 이런 스가 씨의 계략은 기막히게 성공을 거두려는 참이었다.
그러나 그런 용의주도하고 간계에 능한 스가 씨 일행의 책략을 단 한 사람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느닷없이 무너뜨렸다. 

"보여주세요."

- 그 조용한 목소리는 방 한구석에서 아무런 전조도 없이 터져 나왔다.
만약 내가 똑같은 톤으로 똑같은 말을 했더라도 아마 누구 하나 돌아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한 사람이 구스노키 후미였기 때문에 그때까지 요란하게 떠들어대던 말소리, 웃음소리는 썰물이 빠져나가듯이 자취를 감추었다.
"보여주세요."

- "그건 무리라고."
순간, 말은 항복한 것처럼 해놓고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스가 씨의 태도에 신입생들 사이에서 일제히 야유가 터져 나왔다.
"자, 들어봐요. 진정하고 들어봐요. 내 이야기를 좀처럼 믿을 수 없다는 여러분의 심정 잘 알아요. 그럴 수만 있다면 여러분에게도 보여주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은 무리라고요."

- "여러분에게는 아직 보이지 않아요. 우리도 여러분 때는 보이지 않았어요. 무리를 했다면 우리도 볼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우리 선배님들은 보여주지 않았어요.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동시에 그래야만 했다는 생각을 이제 와선 하지요. 그러니까 어느 정도는 준비가 필요한 거예요.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중요한 건 여러분이 그들의 주인이 되는 거예요. 아아, 그들이라는 건 시키가미 무리예요. 그러니까 먼저 그들의 말, 우리는 귀어라고 하는데, 그걸 익혀야 해요."

- "호루모는 여러분이 그들에게 지시를 내려 그들을 움직이게 함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지는 거예요. 하지만 그들이 무조건 여러분의 말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에요. 그들을 움직이려면 먼저 그들이 여러분을 주인이라고 인정해야 해요. 그러려면 그들의 말, 귀어를 익힐 필요가 있지요." 
"그 귀어에는, 이를테면 어떤 말이 있나요?"
예의 바르게 손을 들고 다카무라가 질문했다.
스가 씨는 다카무라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동안 망설이는 듯싶더니 갑자기 "구아이잇!" 하고 목구멍으로 달걀이라도 뱉어내는 듯한 기세로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냈다.

- 그러자 뭐든 자기가 짚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아시야가 꼭 검증이 필요하다고 떠들어대며 3자 동시 실험을 소리 높여 제창했다. 그러니까 스가 씨 한 사람의 말이어서는 즉흥적으로 지어낸 것이라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으니 다른 선배 둘이 나와서 세 사람의 말이 일치하는지 시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아시아의 제안에 1학년생들이 대찬성을 해서 정말로 귀어가 존재하는지 당장 검증을 하게 되었다. 나는 아시야가 활기차게 자리를 이끌어나가는 모습을 머쓱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시아의 제안이 매우 의미 있는 내용임은 유감스럽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멈춰!'라는 말, 좋습니까?"

- "하나, 둘, 셋 다음에 일제히 외쳐주세요. 준비되셨습니까? 자, 하나, 둘, 셋..."
"후규잇파규!"
얼간이 같은 삼중주가 기막히게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 밖에 질문 있나요?"
우리 1학년 생은 하나같이 할 말을 찾고 있기라도 한 듯 복잡한 표정으로 잠자코 있었다. 그것은 스가 씨의 승리를 의미했다. 우리는 논파에 실패한 것이다. 

- 결과부터 먼저 말하겠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된 9월 둘째 주 수요일에 있었던 첫 정기 모임에 우리 1학년 생 회원 열 명은 모두 참석했다. 여름방학 동안 각자의 가슴에 어떤 갈등이 있었고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냄새를 지닌' 무리였다는 얘기다.  


- 귀어 연습의 기본은 구전이었다. 선배들의 말투에 맞춰 발성을 되풀이한다. 할 수 있을 때까지 되풀이한다. 젊은 시절에 경험하는 고생 중에 헛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만, 요괴니 시키가미와 의사소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귀어 습득에도 내일이 있는 것일까? 그런 의문은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하루에 열 번쯤은 떠올렸을 것이다. "이런 멍청한 짓은 더 이상 못해!"라며 모임에 발을 끊는 이가 있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탈락자 하나 내지 않고 우리 1학년 생 열 명이 3월을 맞이한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필연이었을까? 

- 나는 그것을 우연이라고 믿고 싶다. 왜냐하면 교토대 청룡회를 떠나려던 다카무라를 말린 사람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였으니 말이다. 아니면 그때의 내 행동도 모두 사전에 정해져 있었던 것일까? 이런 얘기를 소리 높여 외치고 있으면 어디에선가 "그래, 그렇고말고. 당연한 얘기 아니냐?" 하고 밑도 끝도 없는 선고를 받을 것 같아 두렵다. 그래서 선고를 받기 전에 일방적으로 선언을 해둔다. 그때의 다카무라는 어느 쪽으로 기울지 알 수 없는,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상태였기 때문에 나의 친절한 카운슬링과 정확한 조언 덕에 교토대 청룡회에 남을 의지를 굳힌 것이라고. 

- "만약 속이고 있다면 그 귀어는 죄다 날조라는 얘기가 되지. 그런데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잖아. 선배들은 모두 그 상당한 양의 귀어를 실제로 지식으로 공유하고 있다고. 그건 귀어 교습만 받아봐도 분명히 느낄 수 있어. 일부러 가공의 말을 만들어내서 단지 우릴 속이려고 그걸 외운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 그렇다면 그들은 정말로 진지한 거고, 귀어는 정말로 요괴의 말이라는 얘기가 돼. 분명 나도 처음에는 스가와라 선배의 말을 지지하려고 했어. 하지만 그건 내 나름대로 스가와라 선배 말을 해석했던 거야. 그러니까 아마도 스가와라 선배는 아직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을 요괴니 시키가미니 하는 말로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런데 스가와라 선배가 말하는 요괴니 시키가미는 바로 '그 존재 자체'를 가리키는 거지 비유도 뭣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요괴니 시키가미가 실제로 존재할 리가 없어.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귀어 교습이니 호루모 강의는 역시 엉터리이고 귀어는 날조라는 얘기잖아. 거봐, 원점으로 돌아갔잖아?" 

- "이봐, 다카무라. 이러니 저러니 골치 아픈 말을 늘어놓아 봤자 결국 스가 씨를 비롯한 선배들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한 가지 문제로 귀착되는 거 아냐?"
다카무라는 무서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더니 곧바로 불만의 소리를 높였다.
"그럼 아베 넌 스가와라 선배 이야기를 믿는 거야?"
"스가 씨의 이야기는 믿지 않아. 하지만 스가 씨라는 인간은 믿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선배들도 마찬가지야. 선배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지만 그들의 인격은 믿을 수 있어. 그들이 그런 형편없는 거짓말을 할 사람들은 아니야. 좀 더 마음을 크게 먹고 대해 봐. 나의 스승 마사시도 남자는 큰 강이 되라고 말씀하신다고."
"뭔가 본질에서 벗어난 것 같다."
"그렇게 초조해하지 말라고. 3월이 되면 틀림없이 진위가 가려질 거야. 만약 우리를 속였다는 게 드러나면 그들을 모조리 가모가와에 방류해 버리라고. 그땐 나도 나서서 도와줄게."

 

- "뭐? 무슨 얘기야?"
"뭐라니, 어떻게 봐도 이상하잖아? 어째서 팔팔한 열여덟 살이 곤도 이사미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는 거냐고. 도대체 그런 건 어디서 사 오는 건데?"
"요즘 역사 공부를 하고 있거든. 그러고 보니 햐쿠만벤 부근은 리쿠엔타이(나카오카 신타로가 무력 막부를 타도하고자 세운 부대 - 옮긴이) 주둔지가 있던 곳이지. 그곳을 사카모토 료마 같은 이들이 걸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니까."
"아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라..."
"난 줄곧 해외에서 살아왔어. 아무리 내가 영어를 잘해도 결국 늘 외국인이었지. 하지만 여기로 돌아와도 난 누구나 아는 걸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여기서도 난 마치 외국인 같아. 이젠 지긋지긋하다고 그런 외로움을 느끼는 건."
"잠깐만! 너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더 간단한 얘기라고."
 
- 모임이 시작되자 스가 씨가 난데없이 선언했다.
"다음 주 수요일에 '요시다 대물림' 의식을 치른다." 
둔한 반응만 보이는 우리 1학년생을 향해 스가 씨는 방긋 미소 짓더니 "여러분!" 하고 거창하게 불렀다.
"여기까지 잘 와줬어. 이제야 약속했던 것을 보여줄 수 있을 듯싶다."
우리가 일제히 숨을 삼키고 긴장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드디어 진상을 확인할 순간이 온 것이다.

- 거대한 녹나무 그림자가 하늘을 두껍게 가리고 있었다.
대학 시계탑 정면에 흰가시광대버섯 같은 실루엣을 드리우며 어둠 속에 우뚝 솟아 있는 녹나무 한 그루, 그 상록의 가지 아래에서 수상하게 꿈틀거리는 사람 그림자가 있었다. 바로 우리 교토대 청룡회 회원 스무 명의 모습이었다.

- "지금부터 '요시다 대물림 의식'을 집행하기 위해 요시다 신사로 향한다. 신사의 도리이를 통과한 후에는 사담을 엄중히 금한다. 지금부터 거행하는 행사는 교토대 청룡회의 가장 중요한 의식이다. 부디 여러분 모두 이 사실을 철저히 염두에 두기 바란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스가 씨는 목소리를 낮추고 한구석에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 사와라 교코와 구스노키 후미에게 얼굴을 돌렸다.
"이 요시다 대물림 의식 전반부는 여성 출입 금지야. 그러니까 잠시 여기서 여자 선배들과 기다리고 있어. 시간이 되면 그들이 신사로 데려갈 거다."
그렇게 말하고 스가 씨는 여자 선배 둘을 가리켰다.
"왜 따라가면 안 되는데요?"
사와라 교코는 추위로 곱은 손을 문지르면서 조심스럽게 항의의 뜻을 내비쳤다. 사와라 교코 옆에서 구스노키 후미도 강렬한 시선으로 스가 씨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미안하다. 부디 이것만큼은 아무것도 묻지 말고 따라주기 바란다."
질문할 틈을 전혀 주지 않고 스가 씨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평소 같지 않은 스가 씨의 모습에 압도된 듯, 두 사람은 불만스러운 표정이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 "남자들에게 알린다. 지금부터 우리는 요시다 신사로 향한다. 여기서 1학년 생들에게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 요시다 신사 안에서 우리는 춤 공양을 올릴 거다. 교토대 청룡회에 전해 내려오는 전통 춤이다. 그때 1학년 생 여러분에게 우리 상급생과 똑같은 춤을 추게 할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주 간단하고 단순한 춤이다. 선배들을 따라 몸을 움직이면 된다. 춤을 추면서 장단에 맞춰 소리도 내는데, 이것도 가능하면 따라 해 주기 바란다. 춤 공양이 끝나면 여학생도 합류해서 요시다 대물림 의식을 마친다. 그 시점에서 우리 상급생은 교토대 청룡회를 은퇴한다. 그 후 여러분을 '그들'과 만나게 할 때까지 부디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바란다."

-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스가 씨는 어디에 쓸 작정인지 우리 모두에게 각자 1엔짜리 동전을 꺼내라고 했다. 모인 동전 스무 개를 스가 씨는 작은 남색 염낭에 넣더니 자신의 점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나서 발치에 놓여 있던 기다란 나무 상자를 들어 올린 다음 수풀 단상에서 내려와 우리 사이를 뚫고 나가 걸음을 옮겼다. 손에 든 나무 상자 표면에는 '다마노히카리'라고 새까맣게 붓글씨로 쓰여 있었다. 나는 선배들을 따라 정문으로 향하면서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녹나무 그림자 아래서 사와라교코와 구스키 후미가 창백한 얼굴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구스노키 후미의 본짱 머리는 어둠 속에서 한층 더 부풀어 보였다. 상공의 시계탑을 올려다보니 시곗바늘이 오후 11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무로마치 시대에 요시다 신도가 탄생한 곳으로 알려지고, 지금도 성대한 세쓰분마쓰리로 유명한 요시다 신사. 그 요시다 신사의 도리이는 대학 정문에서 나가 왼쪽, 히가시이치조 거리를 똑바로 100미터쯤 나아간 곳에 있다. 교토대 청룡회의 남학생 열여섯 명은 스가 씨를 선두로 인적 없는 히가시이치조 거리를 똑바로 동쪽으로 나아갔다.

- 한낮에는 선명한 주홍빛 배전도 지금은 온통 회색빛으로 바뀐 채 생기를 잃고 어둠에 동화되어 있다.
배전 오른쪽에는 작은 무악전이 있고 대 위에는 쌀가마니가 세모꼴로 쌓여 있었다. 스가 씨는 그 무악전 앞에서 멈춰 서더니 조용히 말했다.
"각자 여기서 신발과 양말을 벗도록."
그 말에 말없이 신발을 벗기 시작한 선배들을 따라 나도 곱은 손으로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맨발이 되어 쭈뼛쭈뼛 내딛은 자갈의 감촉은 그야말로 정수리까지 관통할 정도로 차디찼다.
이어서 스가 씨는 기묘한 지시를 내렸다.
"상급생은 세 장 1학년 생은 네 장."
나지막한 목소리로 스가 씨가 짤막하게 설명한 바에 따르면, 세장, 네 장은 옷을 두고 한 말인 듯했다. 속옷, 바지, 셔츠를 각각 한 장으로 센다고 했다. 나는 뭐가 뭔지 영문을 모르는 채 팬티에 청바지에 티셔츠에 긴소매 셔츠라는 네 장을 선택하고 벗은 코트와 스웨터를 무악전 가장자리에 뭉쳐놓았다. 

- 그러고 나서 우리는 한동안 직립 부동의 자세로 꼼짝도 않고서서 기다렸다. 무엇을 기다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드넓은 신사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서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우리의 코와 입에서 솟아나는 희뿌연 숨결뿐이었다. 이미 발바닥의 감각은 사라졌고 뼛속으로 무딘 아픔만이 느껴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왜 이렇게까지 엄숙해야 하는가? '여성 출입 금지'라는 시대착오적인 규칙까지 만들어놓고 대관절 지금부터 무엇을 시작할 작정인가? 혹시 이대로 우리는 귀와 턱에 버터니 소금을 잔뜩 바르고 신전 안으로 들어가 다카무라가 보여준 그 작은 시키가미들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아닌가? 아아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지금 당장 배전 담 너머에서 "손님들, 어서 오시죠. 샐러드는 싫어하시는지요? 그렇다면 지금부터 불을 지펴서 튀김으로 해드릴까요?" 하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싫다. 끔찍하게 무섭다.

그때 앞쪽에서 삐삐삐 하고 새된 전자음이 짧게 울려 퍼졌다. 손목시계로 시각을 확인하니 정각 0시였다.
- "그럼 지금부터 요시다 대물림 의식을 시작한다."
스가 씨는 뒤돌아서더니 우리를 향해 엄숙하게 선언했다. 어느새 스가 씨의 손에는 방금 우리 모두에게서 걷은 1엔짜리 동전을 집어넣은 염낭이 쥐어져 있었고 발치에는 이미 나무 상자에서 꺼낸 '다마노히카리' 한 되들이 병이 놓여 있었다. 다마노히카리'란 말할 것도 없이 교토의 자랑거리인 순미양조 명주다.

 

- 스가 씨는 손에 들고 있는 염낭을 열어 네 닢, 세 닢, 두 닢, 한 닢 하고 간격을 두고 1엔짜리 동전 열 닢을 새전함에 던졌다. 쨍그랑 쨍그랑 알루미늄 주화가 나무 테두리를 튕기는 가벼운 소리가 났다. 이어서 스가 씨는 발치에 놓아둔 '다마노히카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뚜껑을 따더니 부정을 물리치려는 것인지 새전함 주변에 정성껏 술을 뿌려나갔다. 콘크리트 바닥에 술이 튀는 축축한 소리가 울렸다.
스가 씨는 한 되들이 병을 바닥에 놓고 다시 새전함 앞에 섰다. 등줄기를 곧게 펴고 정연한 동작으로 두 번 절하고 두 번 합장하고 한 번 절하는 예법을 행했다. 

- "이상으로 교토대 청룡회 대물림의 춤을 마치겠습니다."

다시금 정숙을 되찾은 신사 안에 스가 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심야의 신사 안에 발가벗은 남자가 모두 열여섯. 정말이지 이것이 무슨 광경이란 말인가. 여성 출입 금지인 것도 이해할 만하다. 어디 여성뿐이겠는가. 사회적으로도 금지령이 내릴 판이다. 만약 이 진묘하기 이를 데 없는 정렬 풍경이 교토방송 같은 데 방영되기라도 한다면? 공서양속 위반으로 우리는 즉각 검거될 판이다. 아아, 고향의 부모님이 우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얼른 옷을 입고 싶다. 

- "어! 큰일 났어. 시간이 다 됐다고. 앞으로 3분이면 여자들이 와."
이제까지의 엄숙함이 거짓인 양 우리는 앞을 다퉈 부근에 널려 있는 옷을 주워서 무악전 가장자리에 놓아둔 나머지 옷을 향해 달려갔다. 완전히 감각을 잃은 발을 질타하며 나도 무악전으로 내달렸다. 모퉁이에 걸터앉아 양말과 신발을 신었을 때의 그 말로 다할 수 없는 행복감이란! 자갈의 폭력적인 차가움에서 해방된 것만으로도 나는 황홀할 지경이었다.

- "그럼 지금부터 요시다 대물림 의식을 계속한다."
스가 씨의 손에는 다시 1엔짜리 동전을 넣은 염낭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스가 씨는 점퍼 주머니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2센티미터쯤 되는 푸른빛 도는 돌을 꺼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 돌은 청연석이라고 하는 납과 구리의 유산염이차 광물이었다. 예전에 다카무라가 설명해 준 동 청룡에 대응하는 금속, 즉 오금(五金)의 하나가 청연석이었다.

- 스가 씨는 우리 얼굴을 둘러보더니 가장자리에 서 있는 사람부터 차례로 한 명씩 이름을 불렀다. 그 말투에는 각자의 이름을 확인한다기보다는 마치 누구에게 들려주는 듯한 기묘한 울림이 있었다. 이름을 다 부른 다음 스가 씨는 새전함을 향해 돌아섰다. 스가 씨의 오른손에는 염낭이, 왼손에는 작은 청연석 조각이 쥐어져 있었다. 스가 씨는 먼저 청연석을 새전함에 던져 넣었다. 통통, 둔탁한 소리를 내며 돌은 새전함 깊숙이 굴러 들어갔다. 이어서 스가 씨는 오른손의 염낭에서 네 닢, 세 닢, 두 닢, 한 닢하고 아까처럼 간격을 두고 남은 동전 열 닢을 새전함에 던져 넣었다. 
"여기 서 있는 교토대학 청룡회 1학년 생 열 명은 오늘 이 시간부터 새로운 호루모 조종자로서 교토대 청룡회 제500대를 이어나갈 자들입니다. 부디 앞으로 2년 동안 조종자로 이 열 명을 인정해 주시길 이렇게 청하는 바입니다." 
스가 씨는 정중하면서도 진지한 말투로 말을 잇더니 마지막에 두 번 합장을 했다.

- 깍듯이 고개를 숙인 다음 스가 씨는 뒤돌아보았다.
"여러분 수고 많았어. 그들도 여러분을 인정해 준 모양이야."

눈가에 웃음을 띠고 크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리 뒤쪽을 가리켰다.
"자, 뒤돌아봐."

- 스가 씨의 집게손가락을 따라 우리는 뒤돌아보았다.
어느덧 상급생들은 왼쪽에 있는 무악전 앞으로 이동해 있었다. 그 대신 방금 우리가 정렬해 있던 언저리에서 도리이 바로 앞에 이르는 땅바닥에 작은 그림자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윽!"
소리가 채 되지 않은 누군가의 외침이 울렸다.

- 마치 울창한 나무숲 그늘에 실체가 갖추어진 듯한 기묘한 입체감과 더불어 '무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그늘에서 작은 인형 같은 물체 하나가 통통 튕기듯 힘차게 튀어나왔다. 얼떨결에 뒤로 물러난 우리 앞에서 그 물체는 마치 '셰' 포즈(한 팔을 수직으로 쳐들어 손목을 직각으로 꺾고 다른 팔은 팔꿈치를 구부리며 한쪽 다리를 들어 무릎을 구부리는 자세로, 만화 캐릭터에서 유래함 - 옮긴이)를 취하듯이 손발을 팔랑팔랑 흔들면서 "꾸르릉꾸르릉"하고 목에 가래가 고여 있는 것 같은 가느다란 소리를 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것은 녀석들이 환영의 뜻을 나타낼 때 내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요괴의 웃음소리를 난생처음 듣게 된 순간이었다.

- 멍해 있는 우리 뒤에서 스가 씨가 조용히 선언했다. 

"이상으로 요시다 대물림 의식을 마친다."

- 느닷없기는 하지만 여러분은 자킨시보리 과자를 떠올려 주었으면 한다. 그 자킨시보리 말이다. 그렇다. 찌거나 삶아서 으깬 재료를 행주나 헝겊에 싼 다음 짜서 자국을 내는 것이다. 흔히 고구마 맛과 밤 맛 과자를 볼 수 있다. 순박한 분위기를 가진 화과자다.
여기서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거기에 쏙 들어갈 정도의 자킨시보리를 떠올려 본다. 그리고 그 자킨시보리를 염두에 두고 사등신쯤 되는 가분수 몸을 마음속에 그려본다. 키는 기껏해야 20센티미터 정도. 머리가 자킨시보리라는 것 말고는 보통 인간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몸매다. 몸에는 무릎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바람에 펄럭거리는 넝마를 휘감고 있다. 물론 그 넝마는 교토대 청룡회 색상인 남색으로 물들어 있다.
머리 부분인 자킨시보리에서 짠 부분을 얼굴 한가운데로 가져오기 바란다. 그러니까 얼굴 한가운데가 살짝 비틀어 짠 느낌으로 튀어나와 있다. 살갗은 고구마의 단면 같은 옅은 흰색, 눈도 코도 입도 없다. 머리카락도 없다. 단지 한가운데에 '짠 자국'만 있다. 그 끝은 유두처럼 살짝 갈색이 돈다. 그 '짠 자국'으로 '뀨르르' 하고 소리를 내며 건포도를 쏙 빨아들이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거기가 입인 모양이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이'짠 자국'을 '주둥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귀는 작지만 얼굴 양쪽에 뾰족한 모양으로 쫑긋 달려 있다. 당연한 얘기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말하는 귀어가 통하지 않을 것이다. 

- 그런데 나는 아까부터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어쩌면 여러분도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그렇다. 자킨시보리 사등신이야말로 '그들'의 모습인 것이다. 그들을 뭐라고 부를 것인가? 사실 아무도 그 답을 알지 못한다. 그들 자신이 이름을 밝히지 않으니 도리가 없다. 그들에게는 말을 하기 위한 입이 없다. ‘주둥이'로 낼 수 있는 소리는 "뀨뀨" 같은 울음소리뿐이다. 호루모에 관한 모든 것을 상세히 기록한 <호루모에 관한 비망록>에조차 그들의 이름은 '그들'이라고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요괴니 시키가미니 하는 따위는 우리가 그런 유의 것이리라 여기고 멋대로 붙인 이름에 불과하다. 그러면 요괴와 시키가미 중 어느 쪽이 더 적절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요괴'에 한 표를 던지겠다. 물론 그들에게서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요괴의 뿔은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다카무라가 말했듯이, 예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은(隱)'이라는 의미에서 요괴라고 표현했다면 그들을 요괴라고 불러도 틀린 얘기는 아닐 듯싶다. 마찬가지로 시키가미도 일반인에게는 보이지 않았다고 했는데, 아베 세이메이의 초상화에 그려져 있는 것과 비교해도 전혀 모습이 다르다.
따라서 편의상의 조치로서 앞으로는 그들을 '요괴'라고 표기하겠다. 아니, 온갖 다른 잡귀들의 이미지와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도 굳이 '요괴'라고 기록하겠다.

- 그런 요괴들(당장 쓰기로 한다)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게 된 것은 분명 요시다 신사에서 의식을 거치고 나서다. 스가 씨 말로는 우리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고 춤을 춰대는 모습을 올려다보고 요괴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고 한다. 상급생들에게는 요시다 신사의 도리이를 빠져나간 순간부터 신사 안이 제 집인 양 마구 설쳐대는 그들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그들이 우리 춤을 보고 포복절도했기에 우리 눈에도 그들의 모습이 보이게 된 것이라고 스가 씨는 말했다. 거시기까지 드러내놓고 춤을 출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점에 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적지 않을 듯싶지만, 아마노이와토(일본 신화에서 다카마가하라에 있었다는 동굴의 문 - 옮긴이) 안으로 숨어버린 아마테라스오미카미도 밖에서 와글와글 즐겁게 춤추는 모습에 이끌려 불쑥 얼굴을 내밀고 말았다고 하니 스가 씨의 주장도 터무니없는 것은 아닐 듯하다.

- 우리가 요시다 신사에서 바보 춤을 춘 날을 전후로 다른 대학에서도 제각각 대물림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의식은 각 대학에서 가장 가까운 신사에서 열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교토산업대학은 가미가모 신사, 리쓰메이칸대학은 기타노텐만 궁, 류코쿠대학은 후시미이나리타이샤에서 무사히 대물림을 마쳤다고 한다. 그 내용까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각각의 대학에서는 대대로 계승되는 은밀한 의식이 행해진다고 한다. 은밀한 의식이라니 괜스레 거창하게 들리지만 그 내실은 십중팔구 우리가 요시다 신사에서 벌였던 행태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시답지 않은 내용이었음에 틀림없다고 나는 추측한다.
참고로 내 거시기는 떨어져 나가지도 않았을뿐더러 붓지도 않았다. 의외로 요시다의 신도 우리 춤을 보고 싫지는 않았나 보다.
 
- 우리 차례가 돌아온 것은 이미 행렬도 제2열의 끝 쪽, 추억의 소달구지가 덜거덕거리며 문에서 등장하려는 무렵이었다.
1년 전과 마찬가지로 수레를 끄는 소는 느릿느릿 마루타마치 거리로 나아갔다. 남이야 뭐라고 하거나 나는 소걸음이라는 듯 느릿한 걸음걸이를 바라보면서 나는 난데없이 서글픈 기분에 휩싸였다. 그도 그럴 만했다. 1년 전에 지금의 내 모습을 상상할 수나 있었겠는가. 교토대 청룡회의 독수에 고스란히 걸려들어 지금은 발치에 요괴가 100마리. 출발을 알리는 스가 씨의 신호에 맞춰 몇 마디 귀어를 지껄여보니 요괴들이 실로 기막히게 종대를 이루어 소달구지를 쫓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사도에 빠진다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생각을 하며 새삼 내 처지에 가슴 아파했다. 

- 가와라마치 거리를 북쪽으로 올라가는 기마대에 이어 나타난 녀석들의 모습이란 그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광경이던가. 눈부신 헤이안 의상을 휘감고 잔뜩 점잔을 빼고 대로를 누비는 귀인 차림의 엑스트라 발치에서 요괴들이 정연히 행렬을 지어 걷고 있었다. 가와라마치 거리 한복판을 자킨시보리 머리가 걷고 있는데 길가에 넘쳐나는 구경꾼들은 누구 하나 그 모습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 야릇한 대조도 웃기지만, 그들 넝마의 수수한 색조가 예스럽고 우아한 헤이안 의상과 의외로 조화를 이루는 것도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 실은 작년에 스가 씨 일행은 우리에게 귀어를 가르치는 한편 '제499대 호루모' 대항전을 치러왔다. 즉, 교토대 청룡회의 활동 스케줄은 1년 차는 귀어 습득, 2년 차는 호루모 실전, 3년 차는 신입생 유치 활동 후 다시 호루모 실전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2년마다 대물림을 하는 기이한 제도(다른 대학 동아리도 마찬가지다)의 이유도 이로써 분명해진다. 우리가 호루모에 관한 대략적인 경험을 하는 데에는 1, 2학년이라는 2년이 반드시 필요해서 지금 이 시기에 새로운 동아리 회원을 모집할 여유 같은 것은 전혀 없다. 

- 작년에 치러진 호루모 대회 결과는, 이미 여러분도 아시듯이 교토산업대 현무파를 선두로 리쓰메이칸대 백호대, 류코쿠대 피닉스, 그리고 교토대 청룡회로 이어진다. 스가 씨의 이야기로는 교토대 청룡회의 최하위 성적은 거의 10년에 걸쳐 이어진 불명예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한다. 한편 3년 연속 우승, 작년에는 전승을 기록한 교토산업대 현무파는 그야말로 황금시대를 구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최강 교토산업대 현무파와 최약 교토대 청룡회의 승부는 보나 마나 뻔하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고 한다. 우리 입장에서 들으면 마음이 편할 리 없는 그런 얘기를 스가 씨는 실로 평온한 표정으로 들려주었다. 우리의 요괴가 청색 넝마를 걸치고 있듯이, 현무파의 요괴는 현무파의 색상인 검은색 넝마를 걸치고 있었다. 이마데가와 가와라마치 교차로를 숙연하게 행진하는 '검은' 요괴 1000마리는 분명 우리의 '파란' 요괴와는 뭔가 달라 보였다. 리쓰메이칸대 백호대의 '하얀' 요괴, 류코쿠대 피닉스의 '빨간' 요괴도 마찬가지였다. 순백의 넝마를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은 그야말로 청렬한 인상을 주었고, 빨간 넝마를 나부끼는 모습은 맹렬한 공격의 이미지를 드러냈다.

- "왠지 우리만 유난히 약해 보이지 않나요?"
앞으로 시작될 호루모 대항전이 벌써부터 몹시 불안해져 옆에 서 있는 스가 씨에게 물었다. 그러자 스가 씨는 유유히 대답했다.
"자학적으로 생각하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야. 마음 상태도 그들의 움직임에 영향을 미쳐. 그러니까 늘 긍정적인 사고를 해라."

- 그런데 일일이 '제500대 호루모 대항전'이라고 하는 것은 좀 번거롭다. 그래서 편의상 교토의 지명을 앞에 붙여 호칭을 만드는 관습이 대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예를 들어 지난번의 제499대 호루모 대항전'은 '히가시야마 호루모', 그 전 대회는 '교코쿠 호루모'라는 식으로. 
네 대학이 돌아가면서 이름을 짓는다고 한다. 다른 대학의 회장이 이번 담당은 우리 청룡회임을 지적하자 스가 씨는 "아, 그래요?" 하고 느긋하게 대꾸하더니 "그럼 가모가와 호루모는 어떨까요?"라며 아주 간단하게 정해 버렸다.

- 장구한 호루모 역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길 '가모가와 호루모'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오후 8시 30분, 요시다 신사의 하늘에 상현달이 떠 있었다.
배전 정면에는 이미 요괴 1000마리가 정연히 늘어서 있었다. 희미한 달빛을 받아 그것은 마치 암실에서 밀치락달치락 복작 거리는 하얀 송이버섯 같은 풍경이었다. 우리가 '집합'이라는 신호를 보내자 그들은 숙연히 열 개의 집단으로 나뉘어 각 주인의 발치로 달려갔다.

- 여기서 <호루모에 관한 비망록>의 조문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총칙 제3조 '호루모를 거행하는 장소'에 기록된 내용이다.
1. 교토 시내에서 거행할 것. 2. 차도에서 거행할 것. 3. 씨족신을 모신 신사에서 거행할 것.
이상의 세 조항이 비망록에 명기된 사항이다. 씨족신을 모신 신사란 요괴가 본래 몸담아야 할 장소, 그러니까 우리는 요시다 신사, 교토산업대 현무파는 가미가모 신사, 리쓰메이칸대 백호대는 기타노텐만 궁, 류코쿠대 피닉스는 후시미이나리타이샤를 가리킨다. 실제로 가능한지의 여부는 제쳐두더라도 이 세 조항을 지키기만 하면 후지이다이마루(교토에 있는 대형 백화점 - 옮긴이) 1층에서 호루모 대항전을 실행해도 무관하다.

- 제비뽑기 결과 이번 호루모 대항전의 장소 결정권은 리쓰메이칸대 백호대에 주어졌다. 그 대신 다음 대항전의 장소 결정권은 교토대 청룡회에 주어진다. 이 방식을 우리는 '홈 앤드 어웨이(Home and Away) 방식'이라고 불렀다. 이번 호루모 대항전은 리쓰메이칸대 백호대의 '홈'에서 치러지는 셈이다. '홈'과 '어웨이'에서 각각 한 경기씩 치러 총 두 경기. 이렇게 네 대학이 상대를 바꿔가며 리그전을 치르니 한 시즌마다 각 대학은 총 여섯 ...

- 오후 9시 45분, 우리는 캠퍼스 북쪽에 위치한 정문을 통해 리쓰메이칸대학 기누가사 캠퍼스로 몰려 들어갔다.
정문에서 비탈길을 내려간 가로등 아래서 한 여자가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다가가 보니 류코쿠대 피닉스 제499대 회장인 다치바나 미카 씨였다. 다치바나 씨는 류코쿠대 피닉스라는 이름을 지은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체구는 작지만 예리한 눈길이 인상적인 여자 회장이다(어느 대학이나 우두머리를 '회장'이라고 부른다). 원래는 류코쿠대 주작단이던 동아리 이름을 대만 마피아 같아 싫다는 이유로 선배들의 맹렬한 반대를 물리치고 류코쿠대 피닉스라고 개명한 여걸이다. 

- "건포도는 잘 챙겨 왔지?"
아시아의 말에 사와라 교코와 구스노키 후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구스노키 후미의 손에는 건포도 봉지가 쥐어져 있었다.

-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율이 등골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느낌이 들어 몸을 굽혔다 폈다 했다. 몸을 굽힌 찰나 발치에 정렬한 녀석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니까 내 눈과 녀석들의 '주둥이'가 마주쳤다. 자킨시보리 얼굴을 흔들며 직립 부동의 자세로 녀석들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선두에 있는 요괴에게 살며시 손을 내밀었다. 예전에는 기분이 오싹해져 다가가는 것조차 망설였는데, 익숙해진다는 것은 역시 무섭다. 그 진묘한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대하고 있어도 이제 아무런 저항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내민 손가락은 녀석의 몸을 쓱 뚫고 나갔다. 하지만 녀석이 작정만 하면 내 손바닥에 올라탈 수도 있으니 신기한 노릇이다. 집게손가락을 얼굴 앞에서 멈췄더니 요괴는 '주둥이'를 가까이 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시늉을 했다. 그러더니 이내 얼굴을 옆으로 휙 돌려버렸다. 


- 나는 일어나서 심호흡을 했다. 옆에서는 긴 머리를 뒤로 묶은 다카무라가 굳은 표정으로 목구멍 깊숙이에서 가르랑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보아하니 귀어를 반복하는 모양이었다.
"걱정 마. 연습 때처럼 그냥 하면 돼.”
등을 툭 쳐줬더니 다카무라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평소의 우스꽝스러운 차림새로 보면 남이야 뭐라고 하거나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성격 같지만, 그 내면은 의외로 예민하고 필요 이상으로 꼼꼼한 타입이라는 것을 지금의 나는 훤히 꿰뚫고 있다.

- 다치바나 씨 저편에 열 사람의 그림자가 흔들거렸다. 말할 것도 없다. 리쓰메이칸대 백호대 회원들이었다.
다치바나 씨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마주 보고 섰다. 무언의 공간에 조용한 살기가 넘친다.
"지금부터 리쓰메이칸대 백호대와 교토대 청룡회의 호루모 대항전을 시작합니다. 오늘 호루모 대항전의 판정은 저, 류코쿠대피닉스 제499대 회장인 다치바나 미카가 내립니다."
다치바나 씨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서 우리를 번갈아 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정확을 기하기 위해 확인하겠습니다. 호루모 결전이 시작되면 제가 종료를 선언할 때까지 서로 육체적 접촉을 일절 금합니다. 설사 우발적인 접촉이었더라도 예외 없이 접촉이 일어난 시점에서 양자를 실격시킵니다. 나아가 그것이 고의였다는 것이 인정될 경우 접촉을 시도한 사람이 소속되어 있는 대학의 패배를 선언할 수도 있습니다. 모쪼록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싸워주십시오. 그 외의 호루모 종료는 어느 한쪽이 전멸하거나 대표자가 항복을 표명했을 경우 제가 선언합니다. 그런데 대표자는 이미 결정된 겁니까?" 

- "자, 3장(3丈: 약 9미터 - 옮긴이) 떨어지세요."
다치바나 씨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거리를 벌렸다. 리쓰메이칸대 백호대 뒤에서 밀치락달치락 하는 녀석들의 하얀 넝마가 마치 그 부분에만 잔디에 눈이 쌓여 있는 것처럼 도드라져 보였다.
이제껏 경험한 적이 없을 정도로 가슴이 요란하게 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아미 '장비'라는 명령을 받은 요괴들은 저마다 손에 곤봉과 커다란 갈퀴 같은 것을 들고 '주둥이'를 부들부들 흔들고 있었다. 둥근 머리에 넝마를 걸치고 곤봉과 갈퀴를 쳐드는 실루엣은 마치 그 옛날 헤이안 시대에 수도에서 마구 행패를 부리던 히에이잔 산의 승려 같은 광경이었다. '장비'라는 지령을 받자마자 녀석들은 일제히 넝마 속에 감춰두었던 무기를 끄집어냈다. 개중에는 자기 키보다도 기다란 칼 같은 것을 꺼내는 녀석도 있었다. 넝마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누구나 알고 싶어 했지만 녀석들을 직접 만질 수 없으니 도저히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10시를 알리는 알람이 울리자 다치바나 씨의 "시작!"이라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신호로 우리 입에서는 일제히 괴상한 귀어가 튀어나왔고 발치를 빠져나간 요괴들은 우르르 전방으로 돌진했다.
'가모가와 호루모' 1차전, '기누가사 호루모' 전투가 시작되었다.

- 마치 장난 같은 풍경이었다.
이것이 호루모 대항전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녀석들의 모습을 보고 배꼽을 잡고 웃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녀석들이 요시다 신사에서 발가벗고 춤추던 나를 보고 웃었던 것과 공평하게 상쇄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물론 현실은 그리 느긋한 것이 아니었다. 웃고 있을 여유라고는 털끝만큼도 없이 눈앞에서는 요괴들의 목숨을 건처절한 사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 녀석들의 전투는 실로 기묘한 것이었다. 설령 머리 바로 위로 굵은(굵다고 해봤자 폭이 3센티미터쯤이기는 하지만) 나무 곤봉이 내리쳐도 결코 기가 꺾이는 법이 없었다. 스가 씨가 말한 대로 피가 나지도 않고 혹도 생기지 않고 멍도 들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섭게 달려들어 반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손상을 입지 않은 것은 아니다. 툭툭 탁탁 쏟아지는 곤봉 세례를 받아 피가 솟아나고 뼈가 부러지고 살갗이 벗겨지는 대신 녀석들의 얼굴 한가운데에 튀어나와 있던 '주둥이'가 조금씩 꺼져가는 것이었다. 공격을 받을수록 '주둥이'는 파이더니 급기야 얼굴 표면의 일부분이 되고 말았다. 거기까지라면 그나마 요괴의 움직임에 변화가 없다. 아직 녀석들은 힘차게 갈퀴를 휘두를 수 있다.
문제는 그때부터다. 공격이 계속되자 이번에는 '주둥이'가 안쪽으로 푹 꺼져가는 것이었다. 안쪽에서 잡아당긴 것처럼 말이다. 그 모습은 마치 냅다 후려갈긴 펀치가 얼굴 한가운데를 움푹 파놓은 듯한 광경으로 진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순간 이것이 무슨 얼굴 곡예의 일종인가 하는 착각이 들었지만, 실은 요괴들에게는 커다란 위기를 의미했다.

- '주둥이'가 움푹 안으로 들어간 순간 요괴의 움직임은 갑자기 둔해졌다. 그대로 계속 공격을 받자 얼굴 한가운데에 생긴 소용돌이는 점점 깊어지고 서서히 커지더니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요괴의 몸이 흔들거리며 중심을 잡지 못하게 되었다. 급기야 손에 든 곤봉을 들어 올리지도 못하더니 결국은 힘이 다하여 땅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거기에 최후의 일격이 가해지자 "뾰로" 하고 참으로 서글픈 소리를 남기고 마치 빨려 들어가듯이 지면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물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 그렇다면 얼굴이 한번 움푹 파인 요괴는 단지 "뾰로"라는 임종의 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구제의 방법은 물론 있다. 거기서 등장하는 것이 건포도다. 
아까부터 사와라 교코와 구스노키 후미가 손에 들고 있는 건포도 봉지가 도대체 무엇인지 여러분도 틀림없이 의아했을 것이다. 그녀들이 들고 있는 건포도는 별다르게 특별한 것도 없는, 어디서나 살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건포도 팩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건포도가 이 호루모 전투에서 필요한 것인가? 

- 여기에 빈사(엄밀히는 소멸 직전이라고 해야 할까?) 상태인 요괴가 한 마리 있다고 가정하자. '주둥이'가 안쪽으로 깊숙이 꼬여 들어가 한 방 더 얻어맞기라도 하면 "뾰로" 하고 실로 슬픈 소리를 남기고 사라져 버릴 듯한 모습이다.
거기에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는 요괴 한 마리가 있다. 이 요괴야말로 구원 요괴다. 그 손에는 건포도 한 알이 꼭 쥐어져 있다. 구원 요괴는 손에 든 건포도를 쓰러져 있는 요괴의 얼굴로 가져간다. 작은 건포도 알이라고는 해도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든 크기 정도의 요괴 얼굴에는 상당히 큰 물체다. 구원 요괴는 그 건포도를 움푹 파인 '주둥이' 부분에 다짜고짜 쿡 쑤셔 넣는 것이다.
"뽕."
참으로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건포도는 빈사 상태 요괴의 '주둥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빨려 들어가자마자 파였던 '주둥이'가 튕겨 나오듯이 원래 상태로 돌아온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쓰러졌던 요괴는 순간 힘차게 일어난다. 그 얼굴 한가운데에는 이제 보란 듯이 '주둥이'가 튀어나와 있다. 요괴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에 든 곤봉을 휘두르면서 용감하게 전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 이런 일련의 과정이 호루모 대항전에서 '보급'이다. 이 '보급 건포도'를 나르는 일이 사와라 교코와 구스노키 후미가 이끄는 구원 요괴의 역할이었다. 호루모 대항전이 시작되면서 그들이 땅바닥에 뿌린 건포도에 요괴들은 앞을 다투며 모여든다. 요괴가 건포도를 만지면 마치 분열한 것처럼 요괴의 손에 건포도가 옮아간다. 그런데 실제 건포도는 그 자리에 남아 있다. 그 원리는 모르겠다. 건포도 한 알로부터 몇 번이라도 건포도를 추출할 수 있는 모양이다. 건포도 한 알에 양손을 뻗어 잽싸게 건포도 두 알을 손에 쥔 요괴는 전선의 아군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으러 쏜살같이 달려간다.

 

- 구원 요괴가 도중에 무장을 하고 전투에 들어가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 양손은 오로지 건포도를 나르는 데에만 쓰인다(백호대도 마찬가지다). 이 구원 요괴의 움직임은 모두 사와라 교코와 구스노키 후미의 판단에 따라 이루어진다. 전황의 추이에 따라 정확하고 신속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매우 어려운 임무라고 할 수 있다.

- 보급 부대를 얼마만큼 보유할 것인가 하는 제한은 없다. 전투력과 균형을 맞추어 두 사람분, 총 200마리의 요괴를 보유하는 것이 이론인 모양이다. 또 그 성격상 여성이 임무를 맡는 경우가 많다. 그야말로 교토대 청룡회는 이론대로 조직을 편성한 셈이다.

- 여기서 늦은 감은 있지만 호루모 대항전의 규칙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호루모 대항전이 시작되기 전에 다치바나 씨가 주의 사항을 열거했는데, <호루모에 관한 비망록> 금지 사항 제1조에는 호루모를 겨루는 동안 상대방과 접촉을 금한다는 규정이 있다. 이 조문이야말로 호루모 대항전의 모든 것을 나타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까 호루모란 어디까지나 쌍방이 부리는 요괴의 싸움인 것이다. 우리가 승패에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은 자신이 이끄는 요괴에게 귀어를 전달하는 한 가지뿐이다. 그 외에는 요괴를 부리는 자들끼리 육체적 접촉을 비롯해 상대방에 대한 직접적 간섭은 모두 금지된다.

- 호루모의 승패는 두 가지 결말을 통해 결정된다. 하나는 상대측 요괴를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전멸시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상대측 대표자에게 항복을 선언하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어느 한쪽이 전멸할 때까지 계속해서 싸우는 경우는 없고, 대부분 대표자가 항복을 선언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 '기누가사 호루모'는 시작한 지 63분 만에 승패가 결정되었다. 하지만 내게는 마지막 10분을 제외한 '기누가사 호루모'의 중간 과정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아마 앞뒤를 가릴 틈도 없이 정신없이 귀어를 내지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호루모를 시작하고 약 50분이 경과한 시점에 교토대 청룡회가 리쓰메이칸대 백호대를 마구 몰아붙이고 있었던 것만큼은 또렷이 기억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10년에 걸쳐 가장 약한 팀이라는 오명을 누려온 교토대 청룡회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 모든 것은 아시야의 움직임에 의한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시다 신사에서 훈련할 때부터 아시야가 이끄는 요괴들은 다른 요괴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영리하고 날렵해서 조종자의 명령을 실로 재빠르게 실행했다. 두 번쯤 명령을 되풀이하고서야 겨우 움직이기 시작하는 내 요괴들과는, 억울하지만 차원이 달랐다. 덕분에 아시야는 한껏 잘난 체하며 자기가 우두머리인 양 으스대왔고, 아까 대표자를 정할 때에도 다른 회원들의 의견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멋대로 스스로를 거하는 오만함을 보여준 것이다. 

-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다.
물론 스가 씨는 '그것'에 대해 사전에 우리에게 한마디도 알려주지 않았다. 실전 형식의 훈련을 스가 씨가 엄격히 금한 이유도 우리가 '그것'을 알게 될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리쓰메이칸대 백호대에게 먼저 '그것'이 닥쳤더라면 결말은 완전히 달라졌을 터다. 하지만 심각한 열세에 몰려 있기는 했어도 백호대는 누구 하나 탈락하지 않고 열 명이서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거꾸로 최초의 탈락자를 내고 만 것은, 얄궂게도 그때까지 압도적으로 전황을 우위로 이끌어가던 우리였다.

- 그렇다면 가엾은 최초의 희생자는 누구란 말인가?
바로 다카무라다.

- 그런데 여기에 생각지도 못한 승부의 오묘한 이치가 숨어 있었다.
실제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총을 꺼내는 속도도 사격 솜씨도 아니며 오로지 냉정함을 유지하는 일이라고 한다. 이때 다카무라는 전장에서 가장 중요시해야 할 것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단 한마디 '전개'라는 명령을 내리면 될 순간에 터무니없이 '집합'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만 것이다.

- 불과 몇 미터 거리가 그때만큼 멀게 느껴진 적은 없다. 바로 코앞에 있는 아군에게서 구원의 손길을 받지 못한 채 포위되고 불과 2분 만에 다카무라의 요괴는 전멸한 것이다.
나는 그때 바로 몇 발자국 옆에서 다카무라의 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카무라는 전멸 직전까지 울부짖듯이 귀어를 외쳐대고 있었다. 실로 가슴이 뭉클해지는 광경이었지만 요괴가 전멸한 순간 갑자기 다카무라의 모습에 이변이 일어났다. 마치 목소리가 사라진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더니 다카무라는 허공을 향해 물고기처럼 빠끔빠끔 입을 여닫기 시작했다. 
"나카무라?"
그 이상한 모습에 나는 조심조심 말을 걸었다. 그러나 다카무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해 할 수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때 다카무라는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폐 깊숙이 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다음 순간 '그것'은 아무런 전조도 없이 다카무라에게 들이닥쳤다. 그때까지 상급생들이 알려주려 하지 않던 '호루모'라는 명칭의 이유를 우리가 뼈저리게 이해한 순간이었다.
"호루모오오오오오!"
밤의 장막에 뒤덮인 캠퍼스에 다카무라의 비통한 외침이 최후를 맞이한 짐승의 포효처럼 길게 울려 퍼졌다.

- 각자의 자전거를 세워놓은 정문 앞 비탈길 아래서 다카무라는 아스팔트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진지하고 지나치게 섬세한 남자이니 어쩌면 그때 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도 다카무라의 몸을 일으키려고 하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방금 전 패전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다카무라의 절규가 원인이었다.
 
- 어둠을 가르는 사와라 교코의 비명이 캠퍼스에 울렸다.
만약 얼음처럼 냉철한 지휘관이라면 사와라 교코와 구스노키 후미, 두 사람을 희생해서라도 전체의 승리를 이끌어냈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의 압도적인 병력 차라면 보급 부대 없이도 어차피 적의 부대를 제압할 수 있었을 터다. 하지만 어느 누가 두 여성에게 다카무라와 똑같은 경우를 당하라고 요구할 수 있었겠는가. "뀨뀨뀨" 하고 곤봉을 휘두르며 리쓰메이칸대 백호대 요괴들이 사와라 교코의 요괴들을 일제히 에워싼 순간, 목구멍 깊숙이에서 쥐어짜 내는 원통한 목소리로 아시야가 항복을 선언했다고 해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실은 오늘 정기 모임에서 이제까지 아무 말 안 해서 미안하다고 모두에게 사과하고 온 참이야."
"그 마지막의 절규 말이죠? 그야 당연해요. 제게도 사과하세요."
"아베, 너도 무섭구나. 다들 굉장히 험악했어.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미리 말을 해야 할지 말지를 놓고 우리 사이에서도 마지막까지 의견이 분분했어. 하지만 설사 알려준다고 해도 좋을 일은 정말로 하나도 없다고. 그래서 결국 말하지 않은 거야. 우리도 선배들에게서 아무 얘기도 듣지 못한 채 첫 호루모 대항전에 나갔고, 그 일이 일어났을 때는 그야 공황 상태였지만... 막상 우리가 상급생이 되고 보니 역시 말하지 못하겠더라고."
스가 씨는 아주 느긋한 말투로 변명을 늘어놓다가 험악한 내 시선을 알아차리자 자세를 바로 하고 "미안하다" 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 "아무리 입을 굳게 다물고 외치지 않으려 해도 절대 안 돼. 결국 망측한 소리를 지르며 외치고 마는 거지."
"경험이 있으신가요?"
"한 번. 쓰라린 추억이지."
스가 씨는 자못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벌이라니, 누가 내리는 벌인데요?"
스가 씨는 순간 입가에 웃음을 띠더니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뒤에 있는 구스노키 후미에게서 아이스캔디 봉지를 받아 쓰레기통에 던졌다.
"아무튼 다카무라가 걱정이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까."
"무슨 뜻이에요? 마치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얘기 같네요."

"그래, 그걸로 끝이 아니지."
"네?"
얼떨결에 언성을 높인 내 시선을 피하듯 스가 씨는 얼른 천장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 "장난치지 말아 주세요."
"정말로 알 수 없다고. 다만 우리 경험으로는..."
"경험으로는?"
"뭔가 하나, 그 사람이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빼앗기는, 그런 걸까?"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더니 스가 씨는 홍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괜찮아. 분명 소중한 것이지만, 뭐랄까, 그 사람에게는 소중해도 다른 사람은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있잖아? 아아, 설명이 잘 안 되네. 아무튼 놈들은 그런 것을 노리는 모양이야.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스가 씨는 턱을 치켜들더니 자기 혼자서 "그래그래"하고 수긍했다.
 
- 대물림이 끝나고 '가모가와 호루모', 즉 '제500대 호루모' 대항전이 열리고 있는데, 여전히 회장은 499대라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지 모르겠다. 아닌 게 아니라 약간 이해하기 힘든 이중구조이지만, 신임 회장은 '가모가와 호루모' 1년 차를 모두 끝낸 후에 정하기로 되어 있다. 그때까지는 여전히 스가 씨가 회장으로,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절차의 조정이라든지 호루모에 관한 이런저런 조언을 하는 것이다(어느 대학이나 마찬가지다).

- "그리고 류코쿠대의 다치바나 씨에게 들은 얘긴데, 구스노키도 선견지명을 가지고 아주 바람직한 행동을 취했던 모양이더라. 앞으로 기대된다고 그러던데."
스가 씨는 뒤돌아보며 구스키 후미의 구원 요괴들의 움직임을 열심히 칭찬했다. 구스노키 후미는 고개를 숙인 채 수줍은 웃음을 띠며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리 볼 기회가 없는 구스노키 후미의 웃는 얼굴을 나는 희귀한 것이라도 보는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보조개가 살짝 들어가는 그 표정은 의외로 귀여워 슬며시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구스노키 후미가 불쑥 고개를 들더니 내 시선을 알아차리고 갑자기 험악한 표정을 짓는 바람에 나는 얼른 눈길을 돌렸다. 
"그럼 다음 주 수요일에 보자. 다카무라도 부탁한다."

- 그러나 일부러 내 자취방에까지 찾아와 준 두 사람의 호의에 나는 응하지 못했다. 그다음 주 수요일 정기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내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져 도저히 그런 자리에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본 적이 있는 주홍색 배낭을 손에 든 남자가 자전거에서 내리더니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남자의 머리는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밀어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정수리에만 머리카락이 없고 옆머리에는 좌우 양쪽 다 머리카락이 남아 있었다.
파리하게 민 남자의 정수리에 뭔가 얹혀 있다는 것을 문득 알아차렸다. 나는 눈을 부릅떴다. 그 기묘한 물체가 존마게(일본식 상투 - 옮긴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발 따위가 아닌, 틀림없는 진짜 상투가 남자의 머리 위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그것도 혼자서 틀어 올렸는지 상투 전체가 미묘하게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게다가 여기까지 장거리 자전거 주행을 하고 온 탓인지 옆머리가 바람에 흐트러져, 그것이 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희한한 리얼리티를 자아내고 있었다. 존마게를 한 남자는, 주춤거리며 숨을 삼키고 있는 학생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실로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내 옆으로 발걸음을 옮기더니 "정말 오랜만이야"라며 고개를 까닥였다. 강사가 조심스럽게 "나카무라?"라고 들릴 듯 말 듯 의문형으로 이름을 부르자 옆의 존마게를 한 남자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 너무나도 태연스러운 태도에 슬며시 두려움마저 느끼면서 다카무라의 상투를 쳐다보았다.
"그게 말이야, 멋대로 손이 움직이더라고."
"응? 너 날 놀리는 거야?"
"정말이라니까. 아무리 나라도 이런 머리를 하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고. 난 예전 헤어스타일이 아주 마음에 들었단 말이야. 그런데 손이 멋대로 움직였다고나 할까. 왠지 묘한 기분이 들더니 이렇게 되고 말았어."
농담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 곧은 시선을 던지며 다카무라가 대답했다. 그러나 설사 그것이 아무리 진지한 눈길이더라도 이것은 엄연한 존마게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바로 눈길을 돌렸다.

- "그때랑 똑같은 느낌이었어."
"그때?"
"기가사 캠퍼스에서 '호루모!' 하고 외쳤을 때 말이야. 뭐라고 해야 할까? 그때도 솟구치듯이 목소리가 높아지더니 저절로 입이 벌어지고 외치고 만 거야. 딸꾹질은 아무리 참아도 나오고 말잖아. 그런 식으로 배 속에서 '호루모오오오오오!' 하고 치밀어 오른 거야. 형태는 다르지만 그것과 좀 흡사했지. 정말이지 멋대로 손이 움직이고, 아니 손을 움직일 수밖에 없는 기분이 들더니 마구 머리를 자르는 거야. 그게 이상하게 또 솜씨가 좋은 거야."

- 다카무라는 웃음마저 지으면서 알루미늄캔의 내용물을 기세 좋게 목구멍으로 흘려 넣었다. 이렇게 둘이서 앉아 있는 동안에도 다음 수업을 위해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온 학생들이 줄줄이 우리 앞을 지나간다. 물론 하나같이 흠칫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다카무라의 머리를 힐끗 쳐다보고 지나간다. 그것은 놀랐다기보다는 위험한 것을 보았다는 표정이 틀림없었다. 당연한 반응이리라. 나조차도 이 남자는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머나먼 세상으로 가버리고 만 것이 아닐까 하고, 반쯤 진심으로 걱정하면서도 두려워했을 지경이니 말이다.

 

- 그러나 그 후 온화한, 아니 오히려 개운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하는 다카무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다카무라가 크게 낙심해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호루모'라는 절규를 강요당한 데다 아직 인과관계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토록 아끼던 머리카락을 빼앗기고 이런 존마게를 한 모습으로 변신하게 되었으니까.
그런데 현실은 완전히 달랐다. 낙심은커녕 다카무라는 정말로 괜찮았다.

- "이런 모습이 되고서야 비로소 진심으로 실감할 수 있었어. 아아, 난 일본인이구나, 그 누구보다도 일본인이라고 말이야. 네가 보기엔 바보스러운 짓일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자신의 뿌리를 확신할 수 있었던 적은 이제껏 한 번도 없었어. 그래서 난 기뻐."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존마게를 하는 것으로 다카무라는 오랫동안 행방불명이었던 자기 정체감을 되찾은 모양이다.
'그 사람이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없어지지만 괜찮아'
정말로 스가 씨가 말한 대로다. 그렇겠지. 괜찮은가 보네. 의기양양하게 유쾌한 심경을 털어놓는 다카무라의 옆얼굴을 보니 대번에 알 수 있다. 소중한 것을 빼앗긴다는 말을 듣고 혹시 요괴들이 다카무라를 기습해서 그 '주둥이'로 몸을 쭉쭉 빨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그런 그로테스크한 장면도 떠올렸지만, 생각해 보면 이것 역시 당연한 결말이었다. 녀석들이 매번 그런 야비한 짓을 한다면 호루모 같은 것을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 "그렇군. 장하다. 그런데 겁 안 나? 기분이 오싹할 거 아냐?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 마치 몸을 지배하는 것 같을 테니 말이야."
"아니, 그런대로 괜찮아. 게다가 지배라고 한다면, 녀석들의 모습을 보게 된 시점에서 이미 어느 정도는 녀석들에게 지배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지 않겠어? 나머지는 정도의 문제고."

- 부글부글 물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감각 속에서 다카무라의 목소리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벌써 사귄 지 1년은 되지 않았을까? 뭐가 좋은 건지 교코가 더 열심히 아시야를 쫓아다닌다니까."
어떻게 다카무라에게 인사를 하고 집에 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제정신이 들었을 때는 땀에 젖은 더러운 운동복 차림으로 "으악!" 하고 절규하며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밤이 되어서야 침대에서 빠져나가 집 근처 슈퍼에 가서 먹을 것을 잔뜩 사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다음 날부터 '재계(齋戒)'라는 명목으로 무기한 방에 틀어박힌 것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 다카무라가 말하기를, 그것은 완전히 첫눈에 반한 만남이었다고 한다. 내가 산조기야마치 선술집 베로베로바에서 열린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서 사와라 쿄고에게 첫눈에 반한 것처럼, 그녀도 아시야라는 남자에게 첫눈에 반한 것이다. 적극적으로 교토대 청룡회 행사에 참가하는 사와라 교코의 모습을 보고 도대체 이 동아리의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을까 의아하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정말이지 내 꼴이 얼마나 멍청했던가. 말하자면 나는 눈앞에 투사된 자신의 등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던 셈이다.

- 다카무라가 말하기를, 그 사랑은 좀처럼 결실을 맺지 못했다고 한다. 대학 입학 당시 아시야에게는 고등학교 시절 3년 동안 사귄 여자 친구가 있었다. 그 여자는 아시야가 다니는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고향의 재수 학원에서 막 재수 생활을 시작한 참이었다. 그래서 아시야는 사와라 교코와 비와호 캠프 준비로 둘이서 주류 판매점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그때 나는 구스노키 후미와 카레라이스 재료를 사고 있었다)에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그녀에게 그 자리에서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2주 뒤 사와라 교코는 시조에서 교육학부 모임을 마치고 집에 가던 중 아시야가 교토를 방문한 고향 여자 친구를 데리고 걷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했다. 충격을 받은 그녀는 가모가와 강을 따라 터벅터벅 걷다가 마루타마치 다리 부근의 벤치에서 혼자 훌쩍이고 있었다. 그 옆 벤치에 내가 드러누워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그 후의 일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다. 그렇다. 잊지도 못한다. 기온마쓰리 요이야마 사흘 전의 일이다. 

- 다카무라가 말하기를, 그것은 사와라 교코의 오해였다고 한다. 아시야는 그녀와 노닥거리려고 수험 준비로 한창 바쁜 고교시절의 그녀와 시조에서 만난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는커녕 사와라 교코를 새로운 파트너로 선택했기 때문에 3년에 걸친 교제관계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그녀를 만난 것이다. 그녀는 아시야의 결별 의지를 돌리려고 먼 지방에서 홀로 교토까지 찾아왔다.

(리뷰자 주 : 등장인물들은 <로맨틱 교토 판타스틱 호루모>와 이어진다)

 

- 내가 '재계'를 결행한 기간은 거의 아흐레였다.
문은 굳게 닫고, 창문에는 엄중히 커튼을 치고, 전화선은 빼고, 휴대전화 전원은 끄고, 오로지 사바세계에 만연하는 부정을 피해 나 혼자만의 깊은 세계로 몰입했다. 대학 강의에 들어가지 않고, 가정교사 일을 쉬고, 청룡회 정기 모임을 빼먹고, 교토산업대 현무파와 벌이는 호루모 대항전에도 나가지 않았다. 아시야와 사와라 교코가 함께 있는 공간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서 있는 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정기 모임이 있던 밤과 호루모 대항전 전날 밤 누군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는 헤드폰을 끼고 마사시의 콘서트 CD를 볼륨을 높여 들으면서 다카무라에게 빌린, 그가 이 나라 역사라고 착각하고 사버린 <삼국지>를 탐독했다.

 

- 메일 중에는 이틀 전 교토산업대 현무파와 치른 '교토부립식물원 호루모 대항전'의 결과도 있었다. 나의 불참으로 결국 교토대 청룡회는 모두 아홉 명이서 교토산업대 현무파를 상대로 어웨이 전에 임한 모양이다. 어차피 졌겠지 하고 결과를 읽던 나는 엉겁결에 "응!" 하고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상대보다 한 명 적었음에도 교토대 청룡회는 최강 현무파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메일을 계속 읽어보니 역시 이 대학살의 주역은 아시야였던 모양이다. 아시야의 요괴들은 '기누가사 호루모' 때보다도 한층 더 난폭해져서 현무파가 공격할 틈도 주지 않고 시작한 지 불과 36분 만에 상대에게 항복을 선언하게 했다고 한다. 메일 마지막에는 "그 엄청난 공격력을 칭송하여 아시야는 '요시다의 여포(呂布)'로 불리기 시작했어"라는 분통 터지는 촌평이 달려 있었다. 그렇다면 사와라교코는 초선(동탁의 시녀)이라는 말인가 하고 쓸데없는 상상의 날개를 펼치는 바람에, 뜻하지 않은 정신적 자해 행위로 나는 더 깊은 상처를 입었다.

- 스가 씨는 봉투 속에서 작은 마요네즈 팩을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그래서 왜 그만두는 게 무리인가요?"
"아니, 그만두겠다면 그만둘 수는 있어. 그래도, 그..."

"뭔데요? 또 뭔가 저희에게 숨기는 거라도 있나요?"
"어어, 예리하군."
놀랐다는 듯, 스가 씨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대충 한말이 맞아떨어지자 불현듯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스가 씨는 내 불안함을 떨쳐주기는커녕 이상하게 심각한 표정으로 다코야키에 마요네즈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뭐가 문젠가 하면, 그게 말이지, 너희는 이미 '계약'을 해버린 거야."

- 스가 씨는 자못 말하기 거북한 듯이 말을 이었다.
"계약이라고요? 무슨 뜻인가요?"
"그들이 너희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대신 너희는 '조종자'로서 다음 대물림 의식 때까지 그 임무를 맡는다는 계약이야."
"그런 계약을 한 기억은 없어요."
"그야 그렇지. 내가 대신 맺어두었으니까."
나는 다코야키에 마요네즈를 뿌리던 동작을 얼떨결에 멈추고 얼굴을 들었다. 모르는 척 딴청을 부리는 스가 씨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고 꽤 오랫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 "언젠가 말할 생각이었어. 정말이야. 그럼 이거 잘 먹을게."

"계약을 취소할 수는 없나요?"
"그런 융통성은 없을 거야. 아, 이거, 맛있네."
또다시 긴 침묵이 감돌았고 그사이 나와 스가 씨는 오로지 다코야키를 먹는 데 열중했다. 잠시 후 스가 씨는 다코야키를 입속에 넣고 후후 불면서 요시다 대물림 의식의 의미를 띄엄띄엄 얘기하기 시작했다.

- 스가 씨 얘기에 따르면, 그 의식의 핵심은 요시다 신사의 새전함에 1엔짜리 동전을 넣는 데 있었다고 한다. 즉, 우리 모두에게 걷은 1엔짜리 동전은 단순한 새전이 아니라, 실은 요괴 녀석들과 맺는 해약금 및 계약금이었다는 것이다. 춤을 추기 전에 던진 동전 열 닢은 스가 씨 일행 제499대 회원들의 '계약 종료'를 의미하는, 이른바 해약금이었다. 배전 앞에 1학년생들을 정렬시키고 청연석과 함께 던진 동전 열 닢은 새로운 '조종자'로서 계약을 요청하는 계약금이었다고 한다.

- "그럼 제가 중간에 교토대 청룡회를 탈퇴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게 혹시 '계약' 위반이 되나요?"
"응, 그런 셈이지."
"상당히 억지스러운데요."
스가 씨는 내 야유에는 대꾸하지 않고 우물우물 입을 움직일 뿐이었다.

- "분명히 말씀해 주세요. 그만두면 어떻게 되는데요? 뭐가 무리라는 말씀인가요?"
스가 씨는 힐끗 눈을 치뜨고 나를 보더니 다코야키를 꿀꺽 삼켰다.
"만약 중간에 탈퇴해서 녀석들이 '계약' 위반이라고 간주하면 벌을 받게 돼. 그것도 터무니없이 비인도적인 벌이야. 그걸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우리 때도 도중에 그만두고 싶다고 한 사람은 있었지. 하지만 사흘도 못 견디고 바로 동아리로 돌아왔어."

- "어느 날 눈을 뜨면 놈들이 방 안에 있어. 바닥에도, 침대 위에도, 부엌에도 말이야. 어디든 우글거리며 걸어 다녀. 방에서 나가도 어디까지고 따라오지. 대학에서 강의를 듣고 있으면 책상 위에서 녀석들이 뜀박질을 시작해. 연구실에서 실험을 하면 기계에 연결해 놓은 플라스크 안에서 녀석들이 씨름을 시작해. 욕조에 들어가면 욕조 밑에서 녀석들이 떠오르는 거야. 화장실에 들어가면 변기 밑에서 녀석들이 올려다보고 있어. 아침에 눈을 뜨면 이마 위에서 녀석들이 체조를 하고 있고." 
나는 다코야키를 막 집어넣은 입을 헤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그게, 벌인가요?"
"응, 24시간 내내 어디에 있든 어디를 가든 녀석들과 함께하는 생활이 끝도 없이 이어져. 나도 그리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무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야단법석이 벌어지는 모양이야. 물론 조용히 잠들 수도 없고, 혼자 차분히 사색에 잠길 시간도 없어. 명령을 내린들 전혀 따르지 않아."
마치 악몽과도 같은 벌의 내용에 전율이 일었다. 만약 실제로 그런 일을 당한다면, 나는 하루도 견뎌내지 못할 것 같다.

- "그, 그런 일이 언제까지 계속되는데요? 설마 죽을 때까지라고는 하지 않겠죠?"
"이론상으로는 다음 대물림 의식이 거행될 때까지 계속된다고 하는데, 그때까지 실제로 견뎌낼 사람이 있을까? 네 경우라면, 내년 3월에 차기 교토대 청룡회 회장이 대물림 의식에서 1엔짜리 동전을 던질 때까지 녀석들과 동거 생활을 계속하게 되려나?"
"중간에 그만두게 할 수는 없나요?"
"물론 그럴 수 있지. 호루모 대항전에 다시 참가하기만 하면 녀석들의 괴롭힘도 뚝 멈춰."
나는 그제야 스가 씨가 처음에 '무리일 거야'라고 말한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은 해도 너무하다. 새삼스레 알게 된 교토대 청룡회의 극악무도한 처사에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 색즉시공, 공즉시색. 시험 삼아 중얼거려 보고 나는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보았다. 내 마음은 지금 그야말로 '집착하지 않는 마음'과 대치한 상태다. 내 마음은 사와라 교코 내지는 사와라 교코의 코에 얽매여서 꼼짝도 할 수 없다. 다카무라에게 그 얘기를 할 상상만 해도 마음이 격렬한 거부 반응을 나타내는 지경이다.
그러니까 도리어 말해 보는 것이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사와라 교코와 결별하기로 결심했다. 상황으로 보면 애초부터 사와라 교코와 결별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남은 문제는 내 마음이다. 스스로 원해서 묶은 쇠사슬을 이번에는 내가 끊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다카무라가 말하는 '공(空)'의 가르침을 활용한다면 쇠사슬을 쳐부수려고 커다란 망치가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그야말로 힘을 빼고 자연히 쇠사슬이 풀리기를 기다리는 '집착하지 않는 마음'인 것이다. 

- "다 얘기할게. 그런데 그전에 차 한 잔 마실 수 있을까?"
다카무라가 부엌에 서서 차를 준비하는 동안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야기의 순서를 더듬어보았다. 다카무라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잘하는 짓인지 솔직히 나로서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주술을 풀어버리려면 뭔가 시작해야 한다. 게다가 지금 내게는 다카무라의 협력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쟁반 대용인지 작은 도마 위에 찻잔 두 개를 얹어 다카무라가 돌아왔다.
"마셔." 
"고마워."
나는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찻잔을 들여다보니 한가운데에 차의 줄기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 지난주 체육 시간 다음 날 '재계'에 돌입한 시점에서 나는 긴 이야기를 마쳤다. 다만 내 속에서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이틀 전 사와라 교코의 방문과 어제 아시야의 기습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 나는 슬며시 놀란 심정으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두 사람의 입을 지켜보았다. 언제나 온후독실, 누구에게나 다정한 태도를 잊는 법이 없다고 생각한 미요시 형제의 입에서 그 후에도 잇따라 쏟아져 나온 아시야에 대한 독설 어린 비판은 놈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던 나조차 불쑥불쑥 변호해 주고 싶어질 정도로 신랄하기 짝이 없었다. 아시야에 대해 거센 혐오감을 가진 인간이 나뿐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면서, 나는 전혀 분별이 가지 않는 미요시 형제의 얼굴을 새삼스레 번갈아 보았다. 정말이지 사람이란 겉으로 봐서는 알 수 없는 법이구나. 
"그래도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이런 일에는 무조건 강한 놈을 따르는 게 상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지. 아베한테는 미안한 얘기지만."
"그게 그렇잖아. 아시야와 싸우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야. 그런 괴물처럼 강한 놈에게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그런데 전화로 설득을 당한 거야. 그래서 서둘러 집에서 나온 거고. 어쩌면 가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는데 아직 두 사람이 있어줘서 다행이다."
전화? 나는 반사적으로 다카무라의 얼굴에 시선을 던졌다. 다카무라도 마찬가지로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교토대 청룡회 A, B라는 이름이어서는 멋이 없으니 교토대 청룡회에 이어지는 짧은 이름을 지어달라는 요청이었다.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빌리 할리데이의 서글픈 노랫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테이블을 둘러싼 네 명의 얼굴을 둘러보았을 때 문득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그 이름은 사와라 교코를 향한 짝사랑에서 출발한 일련의 사건을 더할 나위 없이 그럴듯하게 표현해 주는 것 같았다. 당장 다른 이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파랑이 우리 색상이니 괜찮을 것 같네."
다카무라의 말에 다들 별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교토대 청룡회 블루스.
나는 시험 삼아 중얼거려 보았다. 나쁘지 않은 울림이었다.

- 집회에서는 교토대 청룡회 회장이 '제17조'를 발의함으로써 정식으로 '가모가와 제17조 호루모' 개최가 결정되었다.
이어서 '가모가와 제17조 호루모' 개요가 발표되었다. 여름방학이 끝난 9월부터 승자 진출전 형식으로 한 조당 총 세 번의 호루모 대항전을 치른다고 한다. 그러니까 새로이 탄생된 총 여덟 조(네 대학×2조)는 승자 진출전 형식으로 대항전을 치르고, 진 팀은 진 팀끼리 순위를 정하게 된다. 그렇게 총 세 번의 대항전성적으로 1위부터 8위까지 순위를 매긴다고 한다.
집회 마지막에 네 회장이 특별 성명으로, 이 '가모가와 제17조 호루모'는 어디까지나 한시적인 형태이며 내년부터는 통상적인 호루모 대항전이 이루어지길 강력히 바란다는 이례적인 메시지를 덧붙이고 나서 모임은 해산되었다.

- 폐회 후 화장실에 간 다카무라를 기다리고 있는데 유난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다카무라가 돌아왔다.
"아베, 얼른 여기서 나가자. 아무래도 분위기가 안 좋아. 화장실에서 다른 대학 녀석들이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다들 화가 많이 나 있는 모양이야."
그럴 만도 하다고 나는 바로 수긍했다. 다른 대학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만큼 성가신 일도 없다. 자기들은 누구 하나 원하지도 않는데 교토대 청룡회의 발의 때문에 동아리가 두 동강이 나버린 것이다.
"원망을 살 수밖에 없어. 이럴 땐 얼른 줄행랑을 놓는 게 상책이야."

 

- 현관 신발장에서 신발을 꺼내고 있는데 복도 끝에 있는 포렴 사이로 스가 씨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아베, 잠깐만."
포럼 사이로 쉴 새 없이 내게 손짓을 한다. 하는 수 없이 다카무라에게는 먼저 가라고 하고 신발을 다시 신발장에 넣고 스가 씨에게로 갔다.

 

- 그곳은 주방이었다. 중앙에 있는 커다란 스테인리스 조리대 앞에 노인 하나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점장님, 아베를 데리고 왔습니다.”
스가 씨는 '점장님'이라고 부른 남자 앞으로 나를 끌고 갔다. 하얀 주방장 모자에 요리사 복장의 노인이 조리대에 펼쳐놓은 장부에서 얼굴을 들었다.
"이분은 우리가 늘 신세를 지고 있는 베로베로바의 점장님이셔. 말하자면 점장님은 호루모 경기 위원장 같은 분이시지. 이럭저럭 50년 동안이나 호루모 일을 봐주시고 계신 우리의 대선배님이시지."
"엄밀히는 51년이야."

- "점장님은 학창 시절에도 호루모를 하셨어. 졸업 후에는 가업을 이어 이 가게를 경영하시면서 이곳에서 줄곧 '통보인' 역할을 하고 계셔."
"'통보인'이라고요?"
낯선 말에 나는 무심코 되물었다.
“그래, 너희가 요시다 신사에 가면 늘 녀석들이 기다리고 있지? 하지만 평소에는 거기에 가봐도 아무것도 없잖아. 그건 내가 호루모에 관한 일정을 사전에 점장님에게 전하고 있기 때문이야. 점장님은 그걸 야사카 신사에 '통보'하러 가시는 거야. 교토에는 야사카 신사를 중심으로 신사들을 잇는 '용혈'이라는 지하 통로가 종횡무진으로 뻗어 있어. 녀석들은 거기를 통해 통보받은 날에 제각각의 신사에 나타나는 거야. 그렇죠, 점장님?"
"흐음, 대충 그런 셈이지."

- "도대체 야사카 신사에서 어떻게 녀석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거죠? 이제 가르쳐주세요."
"그건 가르쳐줄 수 없어. 너희가 모르는 말을 내가 좀 더 많이 알고 있는 정도일까?"
점장은 입가에 웃음을 띠고 스가 씨의 질문을 슬쩍 얼버무렸다.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들으면서 '그렇군. 말하자면 여기가 호루모의 거물이 경영하는 술집이었구나' 하고 이해했다. 일이 있을 때마다 연회를 열고, 오늘처럼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고 마치 마을 회관처럼 쓸 수 있는 이유도 이로써 분명해졌다. 그러나 한 가지 알 수 없는 점이 있다. 그것은 왜 내가 여기에 불려 왔는가 하는 것이었다.

 

- "그런데 왜 갑자기 아베를 만나고 싶다는 말씀을 꺼내신 거죠? 점장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긴 처음이잖아요."
나의 의구심이 전해졌는지 스가 씨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때맞춰 질문을 던졌다.
"50년 만이니까."

- "내가 2학년 때였어. 우리끼리 하찮은 문제가 생겼지. 그래서 내가 앞장서서 '제17조' 발의를 밀어붙였어. 그 후로 처음이야. '제17조'가 발의된 건 말이야. 그래서 말을 꺼낸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 봐두고 싶었던 거야."
뜻밖의 고백에 스가 씨와 나는 마주 보았다.

- "아냐, 됐어. 나도 남 얘기를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 하지만 조심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점장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너무 간단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

- 아닌 게 아니라 그것은 나도 느끼던 바였다. 하지만 장애물은 낮을수록 좋은 법이다. 그랬기에 나도 '제17조'를 실현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점장은 일흔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매끈매끈한 손가락으로 장부의 가죽 표지를 톡톡 쳤다.
"자넨 고스란히 걸려들었다는 얘기지."

- "아니, 이상해서 말이야. 내가 점장 앞에서 아베 네 이름을 입밖에 낸 적은 한 번도 없거든. 문제가 될 여지가 있어 다른 대학회장들에게도 누가 '제17조'를 발의했는지 전하지 않았어. 너희에게도 덮어두라고 했잖아. 그런데 오늘 점장이 갑자기 아베를 불러달라는 거야."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스가 씨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아무튼 '제17조'가 잘돼서 다행이야. 응. 다행이야."

- 내가 점장의 말뜻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산조기야마치 선술집 베로베로바에서 '제17조'가 성립된 다음 날 바로 나는 그 의미를 알게 된 것이다. 그것도 뼈저리게. 기온마쓰리 요이야마를 사흘 앞둔 밤이었다.

- 정확히 1년 전 이 가모가와 강변에서 사와라 교코를 만났던 밤처럼 나는 벤치에 드러누워 있었다. 닷새 동안 이어진 열대야에 견디지 못하고 방에서 뛰쳐나온 것이다. 아직 방에 에어컨을 달지 못했고, 요즘 들어 선풍기마저 시원찮다. 방이나 별 차이 없는 눅눅한 공기가 감도는 강변에 누워 이제 에어컨을 사야 하나 하고 생각을 펼쳤다.
그때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에 실려 온 듯한, 아득한 여운을 남긴 그 소리는 한순간 사람의 비명처럼 들리기도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둠에 휩싸인 강변에 사람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 나는 인사를 하고 점장 맞은편에 앉았다.
"그걸 본 건가?"
조리대에서 보리차가 들어 있는 잔을 들더니 점장이 물었다. 

"네."
점장은 이미 내가 찾아온 이유를 아는 듯했다. 나는 어젯밤 마루타마치 다리에서 본 광경을 전했다. 그동안 점장은 양손에 든 보리차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랑 똑같구나."
한숨과 함께 점장은 보리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 "그건... 뭔가요?"
"해방된 거야."
"해방이라고요?"
"물론 진실은 누구도 알지 못해. 다른 호루모처럼 말이야. 하지만 이건 내 생각이긴 한데, 아마 '제17조'라는 건 뚜껑 같은 걸 거야."
"뚜껑이라고요?"
"그래, '제17조'가 성립되는 순간 녀석들은 해방되는 거야. 하긴 녀석들이 모습을 드러낸 건지, 아니면 단순히 자네 눈에 보이게 된 것뿐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야. 어쨌든 결과는 마찬가지야. 자넨 뚜껑을 열고 말았다는 얘기지."

 

-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가요?"
"아무 일도 일어나진 않아."
서슴없이 말하더니 점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녀석들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야. 자넨 단지 무엇이 녀석들에게 기습당하는 비명 소리를 매일 밤 듣게 돼. 그뿐이야."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 점장의 말을 들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머릿속이 점점 마비되어 갔다.

- "가르쳐주세요. 저는 어떡해야 하나요?"
"간단하지."
점장은 눈가에 주름을 지으며 희미한 웃음을 떠올렸다.
"17조 호루모 대항전에서 이기면 돼. 우승을 하면 녀석들은 다시 봉인돼."
"만약 이기지 못하면요?"
"알 수 없어. 난 내가 알고 있는 경험밖에 말할 수 없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점장은 집게손가락을 세웠다.
"이것만은 명심해야 한다. 결코 호루모를 쉽게 봐서는 안 돼. 우리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무서운 놈들과 대적하고 있는 거야.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말았어야 했지."

-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에 대한 무례함을 사과하고 떠나려던 나를 점장이 불러 세웠다.
"그게 보이는 건 너뿐이 아니야. '제17조' 발의에 찬성한 다른 이들도 똑같은 일을 겪게 돼. 어쩌면 벌써 보고 말았는지도 모르지. 어서 그들에게 가봐라."
점장은 음식 재료를 담은 봉지에서 동글동글한 가지를 꺼내더니 말문이 막혀버린 나를 향해 "가지고 가거라" 하며 하나를 던져주었다.

- "정말 미안해."
두 시간 전 베로베로바의 점장에게 들은 얘기를 나는 숨김없이 털어놓고 납작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너희도 방금 내가 말한 걸 보게 될지도 몰라."

너무나도 충격적인 내용 탓인지 아까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는 회원들에게 머리를 조아린 채 어물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벌써 봤어."
다카무라가 한마디 툭 던졌다.
깜짝 놀란 나는 고개를 들었다.
"우리도 봤어. 어젯밤 농학부에서."
미요시 형제가 이어서 말했고, 구스노키 후미도 긴가쿠지 산책로에서 봤다고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할 말도 없었다. "미안하다"라며 나는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사과할 것 없어. 너도 알고 한 건 아니잖아. 게다가 새로 시작하는 호루모 대항전에서 이기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그러니까 이기면 된다고."
나는 얼떨결에 얼굴을 들었다. 강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다카무라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 늠름한 존마게 얼굴이 한순간 오다 노부나가 같아 보인 것을 나는 솔직히 고백하겠다.
"딱히 우리가 위험에 처한 건 아니잖아."
"그렇다면 소음이라고 생각하고 견디면 돼."
미요시 형제도 웃음마저 지으며 다카무라와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구스노키 후미도 딱딱한 표정이기는 하지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다들 고마워."

- 사실은 모두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실제로 다카무라는 이런 말도 했다.
"그걸 본 순간 무서워서 전속력으로 도망쳤어."
그런데도 내가 너무 기가 죽어 있었던 탓인지 다정한 말을 건네준다. 오로지 나의 이기적인 이유 때문에 이렇게 되고 말았는데도 말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관용인가. 만약 반대로 내가 그 입장이었더라면 고소를 하겠다고 펄펄 뛰었을 텐데 말이다. 새삼스레 테이블을 둘러싼 네 명에게 참회하는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복받쳐 나는 세 번째로 고개를 조아렸다. 

- 호루모 개최일은 여름방학이 끝난 9월 둘째 주 토요일로 결정되었다. 아울러 요괴의 숫자는 기존과 마찬가지로 1000마리대 1000마리 형식을 유지한다고 덧붙였다. 한 팀당 조종자가 열 명에서 다섯 명으로 줄어든 대신 한 명이 이끄는 요괴의 숫자를 200마리로 늘린다고 한다(실제 조종은 '통보인'인 베로베로바 점장의 임무가 되는 모양이지만). 
그 결정을 듣고 내가 맨 먼저 떠올린 것은 아시야였다. 그렇지 않아도 막강함을 자랑하는 아시야의 요괴가 단번에 곱절로 늘어나는 것이다. 틀림없이 이제는 천하무적의 강세를 으스댈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교토대 청룡회 블루스와 아시야의 대전은 대진표상으로 우리가 계속 이겨서 마지막 1, 2위 결정전에서나 실현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아시야가 식중독에라도 걸려 도중에 퇴장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었다.

 

- '까만 녀석'은 여전히 밤이면 밤마다 교토의 거리거리마다 나타났다. 햐쿠만벤 교차로에서, 가와라마치 거리에서, 게이한산조역 입구 지붕에서 우글우글 꿈틀거리는 까만 그림자를 보면 나는 곁눈질도 않고 자전거를 타고 줄행랑을 쳤다.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녀석들에게 기습당하는 '무엇'의 비통한 외침이 푹푹 찌는 공기를 타고 교토의 하늘에 메아리쳤다. 잠잘 때 귀마개착용은 이미 필수 사항이었다. 아무리 더워도 창문은 열지 않았다. 어둠을 틈타 녀석들이 방으로 들어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베로베로바의 점장은 '제17조'로 인해 녀석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녀석들을 볼 수 있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했지만, 나는 후자일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아마도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상은 천 년도 넘는 세월 동안 이 거리에서 매일 밤 되풀이되어 온 익숙한 풍경일 것이다. 어쩌면 그 옛날 헤이안 시대에 음양사라고 불린 사람들은 불행히도 녀석들의 모습을 보게 된 불쌍한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른다. 

- 8월 16일의 고산 오쿠리비(교토를 둘러싼 다섯 개 산에 큰 대(大) 자를 만들어놓고 거기에다 불을 붙이는 축제 - 옮긴이)를 다카무라와 함께 대학 옥상에서 바라보았다. 열반 세계를 향한 불길이 산의 표면에 자를 어슴푸레 그려내고 있었다. 눅눅한 공기를 타고 숨이 넘어가는 온갖 요괴의 외침은 여전히 교토의 밤하늘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다이몬지 신을 올려다보면서 다카무라와 나는 그 비명 소리를 이제는 바람 소리처럼 여기며 듣고 있었다. 

- 분명 우리는 이 세상의 진짜 모습을 목격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새로운 세계를 앞으로도 지켜볼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마계와 결별하는 것을 목표로 우리는 귀중한 청춘의 한때를 오로지 호루모 훈련에 쏟아부었다. 교토대 청룡회 블루스를 결국은 내가 이끄는(정식으로 나는 대표에 취임했다) 까닭에 공격력이 미흡한 것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는 갈망은 강한 단결력을 낳아 호루모 결전에 임하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우리는 길고도 짧은 여름방학을 마쳤다.

-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들 정도로 푹푹 찌는 한여름 날씨가 이어진 여름방학에 구스노키 후미는 고향 집에 일주일쯤 다녀온 후 호루모 훈련과 병행해서 기타시라가와에 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구스노키 후미가 상냥하게 웨이트리스 일을 하는 모습은 좀처럼 상상하기가 힘들어 과연 그녀가 플로어서비스 스태프인지 아니면 주방스태프인지 슬쩍 물어봤다. 하지만 뭐가 비위에 거슬렸는지 본짱은 안경 너머로 나를 쏘아보더니 대답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여름방학 동안 교토대 청룡회 블루스 회원들과 학생식당 같은 곳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지내다 보니 구스노키 후미 자신이 이제껏 결코 남에게 보이려 하지 않던 진면모를 조금씩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이를테면 그녀는 자취방에 컴퓨터를 두 대 가지고 있는데 오로지 수식의 해답을 구하고자 그것들을 24시간 켜놓는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메일이나 검색하는 것 외에는 컴퓨터의 용도를 알지 못하는 남자들은 그 지적인 일면에 감탄했다. 또, 교토대청룡회 블루스의 첫 호루모 훈련이 있던 날 그녀가 손수 바느질해서 만든 부적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건네주었을 때도 솔직히 꿈에도 생각지 않던 그녀의 여성적인 일면에 우리 모두 크게 감동했다. 또, 소나기를 맞은 그녀가 식당에서 안경을 벗자 의외로 귀여운 그녀의 민얼굴에 남자들은 꼭 콘택트렌즈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겁이 나서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한 채 아쉬워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밤 거대한 사자좌 유성군을 볼 수 있다는 뉴스에 화제가 무르익자 "별이 쏟아진다는 표현은 잘못된 거야. 그건 유성군의 궤도에 지구가 돌진한 거라고"라는, 분위기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발언을 하는 바람에 남자들은 황홀한 기분이 산산조각이 나 의기소침했다. 

- 이렇게 해서 나와 구스노키 후미는 교토대 청룡회 블루스 회원들과 함께이기는 하지만 점차 대화다운 대화를 주고받게 되었다. 그러나 왜 미요시 형제를 설득하면서까지 내게 협력해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밝히려 들지 않았다. 내가 그 얘기를 물으려고 할 때마다 구스노키 후미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드러내 내 '질문권'은 아주 간단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 나는 다카무라의 부상 소식을 전해 들은 다음 날 구스노키 후미에게 전화를 했다.
다카무라는 전화로, 조종자에게 많은 움직임을 요구하지 않는 구원 요괴들의 지휘라면 최소한의 역할은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나는 구스노키 후미에게 다카무라와 배치를 바꿀 것을 타진해 볼 생각이었다. 이렇게 되었으니 다카무라가 호루모에 참가하려면 구원 요괴들을 지휘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구스노키 후미와 함께 요괴 400마리를 움직여 보급활동을 한다는 것은 전체적인 균형으로 봐도 숫자가 너무 많다. 
하지만 내 제안에 구스노키 후미가 지독한 난색을 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표면상은 남녀평등, 기회균등을 표방하는 호루모이지만 실제로 여성과는 성격적으로도 맞지 않는 부분이 아주 많다. 전멸하는 순간 질러대는 그 절규만 봐도 그렇다. 맨 뒤에서 대기하는 보급 부대와 달리 전투부대로 참가할 경우 절규를 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구스노키 후미가 그런 리스크를 순순히 받아들일 거라는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았다. 힘든 교섭이 될 거라는 각오를 다지고 구스노키 후미와 전화 회담에 임했다. 
그런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내 제안에 구스노키 후미는 정말이지 맥이 빠질 정도로 쉽게 그러겠다는 의사를 나타냈다.

- "저, 정말 괜찮아?"
"괜찮아. 늘 뒤에서만 보다 보니 한 번쯤은 앞에서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으니까."
담담하게 말하는 구스노키 후미에게 '흐응, 그건 네가 실제로 요괴들을 다뤄본 적이 없기 때문이야'라고 선배로서 나무라고 싶은 기분이 불끈불끈 솟아올랐지만, 여기서 쓸데없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럼 내일 잘 부탁해."
나는 웃는 얼굴로 대꾸한 다음 구스노키 후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전화를 끊었다.

- 오후 2시 40분, 우리는 요시다 신사를 출발했다.
시모가모 신사 도리이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짐칸에 앉아있던 다카무라를 내렸다. 요즘에야 간신히 분간할 수 있게 된 미요시 형이 존마게를 한 남자에게 목발을 건넸다. 
제비뽑기 결과, 장소 결정권이 주어진 교토산업대 현무파 점판암이 지정한 장소는 시모가모 신사의 다다스 숲이었다. 다다스 숲이란 시모가모 신사 내에 있는 초목이 우거지고 청정한 기운이 감도는 곳을 말한다. 
도리이를 빠져나가 졸졸 흐르는 세미노고가와를 건너자 가와이 신사가 보였다. <호조기>로 유명한 가모노 초메이는 이 신사의 신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 가와이 신사 북쪽의 트인 장소에 이미 교토산업대 현무파 점판암 회원들이 모여 있었다. 오늘의 중재인인 류코쿠대 피닉스 제499대 회장, 다치바나 미카 씨가 우리에게 설 위치를 지시했다. 다치바나 씨는 목발을 짚은 다카무라를 보고 한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바로 정색을 하고 준엄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지금부터 교토대 청룡회 블루스와 교토산업대 현무파 점판암의 호루모를 시작합니다."

- 오후 3시 정각, 청량한 숲을 가르는 다치바나 씨의 목소리를 신호로 '가모가와 제17조 호루모' 초전 다다스 숲 호루모' 전투는 막을 올렸다.

-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기세를 몰아 쇄도하는 현무파 점판암의 요괴들이 구스노키 후미의 요괴들을 에워싸려 한 순간, 그때까지 아무 말 없이 우두커니 서 있던 구스노키 후미의 입에서 짤막한 귀어가 튀어나왔다. 다음 순간, 상상도 못 할 민첩함으로 구스노키 후미의 요괴들은 한 자루의 창과도 같은 진형으로 배치를 바꾸었다. 지체 없이 구스노키 후미가 외친 귀어에 '파란' 요괴들은 "뀨뀨뀨" 하고 요란한 함성을 지르면서 일제히 돌진하기 시작했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구스노키 후미의 요괴들을 단숨에 에워싸려고 좌우로 뻗어 있던 현무파 점판암의 중앙부가 한순간 허물어진 틈을 타 구스노키 후미는 전광석화의 기세로 돌진했다.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멋진 기교로 현무파 점판암의 전선을 돌파한 구스노키 후미는 바로 부대를 되돌렸다. 그러더니 돌파된 중앙부를 수복하려다가 허물어진 상대의 좌측에 다시 한번 송곳 같은 일격을 날렸다.
어느새 그런 기술을 익혔는지 절로 넋을 놓고 바라볼 정도로 완벽한 전회 공격이었다. 완전히 균형을 잃은 현무파 점판암 부대를 구스노키 후미는 먹구름을 몰아내는 청룡의 기세로 짓밟았다. 곱절 가까운 병력으로 구스노키 후미를 공격하던 '검은' 요괴들은 완전히 혼란 상태에 빠졌다. 조종자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와꺄꺄" 하고 우왕좌왕하는 '검은' 요괴들이 여기저기서 속출했다.

- 그런데 이 기회를 타서 단번에 공격할 것이라고 여겼던 구스노키 후미는 갑자기 부대를 물러나게 했다. 놀라며 바라보다 갑작스레 의아해하는 교토대 청룡회 블루스 남자들을 한 명씩 가리키며 구스노키 후미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아베, 눈앞의 적을 끌어들이면서 배후를 치고 들어가!"
"미요시 동생은 오른쪽에서 일단 거리를 둬!"
"형은 왼쪽에서 이쪽으로 몰아붙여!"
"다카무라는 왼쪽으로 전개해서 건포도를 형에게 보급해!"
교토대 청룡회 블루스 남자들은 한순간 전기 충격을 받은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한 순간, 다들 그녀의 지시에 따라 민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다. 구스노키 후미는 순식간에 교토대 청룡회 블루스를 지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호루모 개시 35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 그야말로 고도의 기예였다.
어릿광대가 저글링을 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막상 귤 세 개를 손에 들어보면 첫 번째 귤을 던져 올리는 타이밍조차 알 수 없다. 축구 선수가 페인트를 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막상 공을 눈앞에 두면 어떻게 몸을 움직여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어려운 일도 쉬워 보이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고도의 기예다. 

- '다다스 숲 호루모'에서 구스노키 후미는 실로 간결한 지시를 내리는 것으로 형세를 역전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나는 그 경과를 상세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같은 상황을 앞에 두고 구스노키 후미와 똑같이 해보라고 해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스키 후미가 내린 여러 지시의 발상의 근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구스노키 후미의 지휘는 산만해서 언뜻 보기에는 제각각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 지시들은 섬뜩하리만치 정확한 궤적을 그려내며 한 곳으로 수렴되어 갔다. 구스노키 후미 단 한 사람만이 그 완성된 그림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 아마 현무파 점판암 회원들도 자신들이 왜 그런 사태에 몰렸는지 마지막까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구스노키 후미의 지시에 따라 이동하는 우리를 맹렬히 몰아붙이고 있는 줄 알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보급 부대를 제외한 모든 부대가 중앙에 집결해 있었다.
구스노키 후미의 지시를 기다릴 것도 없었다. 눈앞에 있는 열매를 거둬들이기만 하면 되었다. 우리는 현무파 점판암을 단번에 포위했다.
그 후 펼쳐진 포위 섬멸전은 유사에 남을 완벽한 섬멸전으로, 기소 요시나카가 벌인 구리카라 고개 전투, 베트남 해방군이 벌인 디엔비엔푸 전투에 필적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포위된 요괴들이 눈에 띄게 힘을 잃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카무라에 얽힌 쓰라린 경험으로 배웠다. 그 규모가 어떻든 간에 똑같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는 이 섬멸전을 통해 새삼 깨달았다. 
 
- "정말이지 자랑스러워서 가슴이 벅차네."
스가 씨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2주 후에 있을 '가모가와 제17조 호루모' 1, 2위 결승전에 우리 교토대 청룡회 블루스와 아시야가 이끄는 교토대 청룡회 신센조의 대결이 결정되었음을 알려주었다.
"멋진 호루모 대항전을 기대한다."
스가 씨는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듯이 태평한 말을 남기더니 전화를 끊었다.

- 내 마음은 허탈했다.
허탈한 나머지 한 조각 조개구름이 되어 가을 하늘 높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허탈한 기분에 잠겨 들어도 주위는 그와는 반비례해서 '가모가와 제17조 호루모' 최종 결전을 앞두고 점점 쾌활해지고 시끌벅적해져 갔다.
교토산업대 현무파 점판암과 류코쿠대 피닉스 단니쇼와 겨룬 두 결전을 통해 구스노키 후미의 이름은 온 교토 내에 퍼졌다. 이제 구스노키 후미는 그 전략의 절묘함을 인정을 받아 '요시다의 제갈공명'이라 불린다고 한다. 항간에서 이번 결승전은 '요시다의 여포'와 '요시다의 제갈공명'의 대결, 즉 무략과 지략의 대항이라고 왁자하게 소문이 퍼져 다른 대학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고 한다.

- 승리의 맛이란 무시무시하다. 미요시 형제는 물론 다카무라조차 아시아의 콧대를 꺾을 절호의 기회라는 말을 꺼내는 판국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가 아시야보다 뛰어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1차전에서는 리쓰메이칸대 백호대 시키부마이(式部舞)를 28분 만에, 2차전에서는 교토산업대현무파의 다몬텐(多聞天)을 불과 16분 만에 해치웠다. 인간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그 공격력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나는 우울해진다.
그리고 나를 우울하게 하는 일이 또 있다.
말할 것도 없다.
사와라 교코라는 존재다.

-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좌우를 둘러보았다. 학생 식당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교토대 청룡회 블루스 회원들이 식후의 수다에 열을 올리고 있다. 정면에 앉은 다카무라는 아직 깁스도 풀지 못했으면서 내년에는 자동 2륜 면허를 따고 싶다는 얘기를 미요시 형에게 하고 있다. 옆에서는 구스노키 후미가 미요시 동생에게 이 우주는 초끈 이론에 따르면 10차원, M 이론에 따르면 11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둥, 그런 얘기를 늘어놓고 있다. 
다음 결전으로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는, 인생을 좌우하는 결전이 치러지는 판에 이 느슨함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자 소용없어. 우린 이기는 수밖에 없어 다카무라는 그렇게 말한다. 분명 맞는 말이리라. 긍정적인 사고가 완전히 몸에 밴 다카무라를 보고 있으면 나도 한번 존마게나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다카무라의 뒤에서 지금도 손가락질을 하며 웃는 여학생들을 보면 그 대가가 터무니없이 비싸다는 것을 알게 된다. 

- 결과는 메일로 알려주면 된다고 했는데도 다카무라는 밤 9시가 지나 일부러 내 자취 집까지 찾아왔다.
"왜 이제껏 비밀로 한 건데?"
다카무라는 현관에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첫마디부터 몹시 앙칼진 말투로 질문을 쏟아냈다.
"무, 무슨 얘긴데?"
"잡아떼지 말라고. 사와라 씨랑 아시야 일 말이야."
당황한 기색을 드러낸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다카무라는 목발을 현관 옆에 놓고 한쪽 발로 깡충깡충 뛰어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다카무라는 뒤이어 방석에 앉은 나를 오오카 에치젠(에도 시대의 명재판관 - 옮긴이)처럼 날카로운 눈초리로 한동안 관찰하더니 끔찍한 발언을 거침없이 던졌다.
"이 방에서 아시야에게 맞았다면서?"

- "직접 그 얘기를 듣고서야 처음으로 이번 '제17조'에 얽힌 소동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는 거지. 자기 때문에 이렇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며 '오랑주'에서 울더라고."
나는 헝겊이 너덜너덜해진 양말 뒤꿈치를 집게손가락으로 만지면서 이제 이것도 수명이 다했다는 생각을 멍하니 했다.
"이상이 진상이야. 넌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 그때 그 일도 사와라 씨는 전혀 마음에 담아두고 있지 않아."
나는 묵직한 머리를 들었다. 다카무라의 번듯한 상투를 바라보면서, 그래서 호루모 개최 장소는 어디로 정해진 걸까 하고 전혀 관계도 없는 생각을 했다. 
긴 침묵이 흐르는 동안 다카무라는 깁스의 표면을 쓰다듬고 있었다. 우리가 대화를 재개하기를 재촉하듯 창밖에서 찌르르 벌레 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나는 손을 들어 다카무라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제 됐어."
벌레 소리가 그치고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공기가 방을 가득 채웠다.
"그러니까 난 두 사람의 사랑싸움에 말려들었을 뿐이라는 얘기네."
내 중얼거림에 다카무라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입을 꼭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 피처마운드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두꺼운 구름이 엄청난 기세로 흐르고 있었다.
오늘 밤부터 새벽에 걸쳐 태풍이 온다고 한다. 술렁거리는 공기 속에서 폭풍 전야의 달짝지근한 냄새를 감지한다. 나는 이 냄새가 싫지 않다.
장소는 요시다 캠퍼스 내의 요시다 운동장. 다카무라와 사와라 교코가 상의해서 결정한, 내일 치를 호루모 대항전 장소다. 입학 이래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지나다닌 장소이니 이제 와서 사전 답사를 할 필요 따위 없을지도 모른다. 야구 베이스가 쓸쓸히 놓여 있는 것 말고는 끝없이 흙 땅이 이어지는 전혀 색다를 것 없는 운동장이다.  

- 마운드에 올라서서 구스노키 후미는 머리카락을 누르면서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길 수 있을까?"
"알 수 없어, 해보지 않고는. 그래도 이겨야 해."
대단하다 싶어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다카무라든 구스노키 후미든 어떻게 그리도 굳건한 의지를 지속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아마 미요시 형제도 태연스럽게 같은 말을 할 것만 같다. 리더인 나는 아직도 아시야의 공격에 맞설 자신감을 전혀 가지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 지금도 구스노키 후미는 반응 없는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물론 대답해 줄 낌새는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는다.
"혹시 구스노키도 아시야를 좋아하는 거 아니야?"
눅눅한 공기에 감도는 메마른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나는 적당한 말을 찾았다.
"하하, 그냥 해본 소리야."
물론 구스노키 후미는 얼토당토않은 내 농담에 웃음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아아, 또 시시껄렁한 얘기나 지껄이고 말았구나. 나는 일찌감치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 문득 구스노키 후미의 입가에서 시선이 멈췄다.
굳게 닫혀 있던 구스노키 후미의 입가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얼굴을 들었다.

- 구스노키 후미는 단지 순수하게 나를 걱정해서 궁지에서 구하려고 무상의 협력을 자청한 것이다. 단 한마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설명도 없이.
그런 것도 모르고 나는 왜 교토대 청룡회에 들어왔느냐, 왜 '제17조'를 지지했느냐, 왜, 왜라며 다그쳤다. 그런 내 말이 얼마나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겠는가. 시야가 뿌예질 정도로 세차게 내리치는 빗속을 달려가는 구스노키 후미의 작은 등을 바라보면서 나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몸서리치며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총탄이 박히는 것처럼 빗줄기에 지면이 꿈틀거리는 텅 빈 운동장에서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다카무라와 미요시 형제와 구스노키 후미가 그토록 굳건한 마음을 가지는 까닭을. 그것은, 그들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힘을 믿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친구의 힘을 믿고 있다. 아시야보다 강하다느니 약하다느니, 그런 하찮은 비교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어떤가? 나는 나의 힘을 털끝만큼도 믿지 않았다. 지금도 아시야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나의 친구를 믿지 않았다. 나를 위해서 줄곧 힘이 되어준 사람조차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만이 아니다. 다카무라도 미요시 형제도 그렇다. 그들이 나를 도우려고 얼마나 힘이 되어주었던가. 그런데 나만 그들을 믿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 이대로 비에 녹아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나는 여태껏 오로지 나만을 위해 호루모를 해왔다. 사와라 교코와의 일도 그렇고, 아시야와의 일도 그렇다.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오로지 머릿수를 맞추려고 친구를 이용하고 입으로만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사실은 그들의 힘을 전혀 믿지 않았던 것이다.
비는 돌멩이가 되어 증오를 담고 내 뺨을 후려쳤다.
이기고 싶다. 가슴속에서 불끈 솟구쳐 올랐다.
물론 우리에게는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보다도 더 소중한 것을 위해서 싸우고 싶었다.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카무라를 위해서, 미요시 형제를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스노키 후미를 위해서 이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태풍이 지나가고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시계탑 위로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집합 시간인 오후 3시 20분이 지나도 구스노키 후미는 나타나지 않았다. 약속 시간에서 10분이 지났을 때 나는 그녀의 불참을 확신했다. 왜냐하면 구스키 후미가 집합 시간에 늦은 적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화를 해도 연결이 되지 않는다. 남자 넷이서 싸울 수밖에 없다고 각오를 다진 순간, 구스노키 후미가 이상하게 느릿느릿한 속도로 자전거를 몰면서 정문에 나타났다. 위태위태하게 자전거를 모는 구스노키 후미는 먼발치에서 봐도 뭔가 달라 보였다. 위화감의 이유는 곧 판명되었다. 구스노키 후미는 트레이드마크인 본짱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우리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기 무섭게 다카무라가 물었다.
"어? 안경은 어쨌어?"
구스노키 후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제 무지 화나는 일이 있어서 깨버렸어."
그 말을 그저 농담으로만 여기고 킬킬거리는 미요시 형제와 다카무라 옆에서 나는 홀로 전율했다.
그래도 구스노키 후미가 와준 것에 얼마나 안도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와줘서 고마워."
나는 구스노키 후미에게 머리를 숙였다. 구스노키 후미는 잠자코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주머니에서 무엇을 꺼내 내 눈앞에 쓱 내밀었다.
"이왕 만든 거니까 줄게."
몸을 슬쩍 뒤로 젖히면서 받아보니 그것은 손바느질로 만든 부적이었다. 이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일부러 만든 모양이다. 그것도 이번 것은 고급스러운 푸른 천 한가운데에 금실로 고보세이(五星星 : 음양도에서 고보세이는 마귀를 막는 주술이 담긴 부적으로 전해짐 - 옮긴이)라는 글자에 별 모양 자수까지 놓여 있다.

- "이거, 자세히 보면 녀석들 얼굴 같네."
녀석들의 '주둥이'를 떠올리면서 그 얼굴을 희화화하면 이런 느낌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고보세이를 바라보았다.
"아냐, 이건 오행의 상극 상관도에서 유래한 거야."
옆에서 다카무라가 끼어들더니 아는 체를 해댔다. 나는 발끈할 만도 했지만 우리 대화를 들은 구스노키 후미가 살짝 뺨을 누그러뜨리는 옆얼굴을 보고 다카무라의 헤살을 불문에 부치기로 했다. 안경을 벗은 탓인지 오늘 구스노키 후미는 평소보다 감정을 읽기 쉬운 것 같았다. 하기는 화가 나서 안경을 깨뜨릴 만큼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 "지금부터 우리는 교토대 청룡회 신센조와 벌일 결전을 향해 나아간다. 스스로를 신이 선택한 팀이라고 일컫다니 그 얼마나 자만에 빠진 아시야더냐. 분수도 모르고 그렇게 으스대는 놈에게 이제야 뜨거운 맛을 보여줄 때가 왔다. 이는 교토대 청룡회 블루스의 마지막 싸움이다. 모두 힘을 다해 싸워라. 적을 두려워하지 마라. 승리는 반드시 우리 손아귀에 있다."
남자들은 조용한 투지를 얼굴에 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승리를 손에 넣은 순간에는 우리같이 칠칠찮은 남자들에게 부적을 두 개나 만들어주고 여기까지 이끌어준 구스노키에게 그 승리를 바치자."
빙 둘러선 남자들은 저마다 "와!" 하고 소리를 지르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내밀었다. 모두의 손에는 고보세이가 빛나는 부적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구스노키 후미에게 눈짓을 보내고 나서 원진 가운데에 손을 포갰다. 구스노키 후미는 내 얼굴을 말없이 올려다보더니 "고마워"라며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지막으로 손을 포갰다. 

- 아시야, 사와라 교코와 대면하기는 석 달 만이었다. 행렬 선두에선 아시야는 나와 눈이 마주쳐도 무뚝뚝한 표정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한편 그 옆에 선 사와라 교코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사와라 교코는 예전보다 뺨 언저리가 조금 마른 듯했다. 어쩌면 여러분 중에는 사와라 교코에게 지독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분도 있을는지 모른다. 분명 나의 연정은 형편없이 이용당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녀의 행위에 분노를 느낄 수 없었다. 그것은 아직도 견딜 수 없이 매혹적으로 보이는 그녀의 콧날 때문이 아니다. 나도 남자인 이상 한때는 진심으로 좋아한 상대를 어떤 이유에서건 나쁘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조금은 있다. 하지만 그것을 제쳐놓더라도 왠지 겁먹은 모습으로 땅바닥을 내려다보는 그녀를 앞에 두고 서글픔이 느껴지기는 할지언정 그녀를 책망할 기분은 들지 않는 것이다. 
그런 심정은 아시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는 그 오만불손한 면상을 언뜻 보기만 해도, 아니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흐트러지곤 했다. 하지만 불과 몇 미터 지척에서 아시야와 마주한 내 마음은 신기할 정도로 고요한 상태였다.
나는 놀라움과 함께 내 마음을 받아들였다. 아시야는 지금도 꼴 보기 싫은 녀석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내가 겨뤄야 할 상대는 아시야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내가 사와라 교코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고 녀석을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사와라 교코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내 마음의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내 마음은 조용히 어떤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내 마음이 사와라 교코 내지는 사와라 교코의 코에서 이미 자유로워졌다는 사실이었다.

- 용서한다.
교토대 청룡회 신센조의 회원들을 둘러보고 나는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나는 모든 것을 흘려보낸다. 나 자신의 고집스럽던 마음을 흘려보낸다. 나는 모든 것을 용서한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창공을 가슴 가득히 품었다.
그러나 내 마음에 싹튼 용서의 마음과 지금부터 겨룰 승부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나는 구스노키 후미를 위해서 오늘의 승리를 맹세했다. 게다가 용서한다고 말해 놓고 모순되기는 하지만, 얻어맞은 답례는 해야 한다. 이것은 남자로서 중요한 매듭이다. 

 

 

- 불과 2미터 거리임에도 구스노키 후미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결국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순식간에 회원들 사이에 동요가 일자 다카무라는 건포도 팩을 따면서 일동에게 말했다.
"이봐, 다들 진정하라고. 넝마 색깔로 적과 아군은 분간할 수 있으니까 잘 안 보이는 정도는 괜찮아."
하지만 그 말을 꺼낸 순간 나와 미요시 형제는 물론 당사자인 다카무라조차 깜짝 놀란 표정으로 교토대 청룡회 신센조 회원들의 발치에 시선을 던졌다. 거기에는 당연히 우리와 똑같이 교토대 청룡회 색상인 청색 넝마를 두른 요괴들이 정연히 줄지어 있었다.
갑자기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남자들의 얼굴빛도 하나같이 창백하다. 그럴 만도 하다. 구스노키 후미의 두뇌 없이 교토대 청룡회 블루스의 승리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음을 남자들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대응책을 강구하기도 전에 스가 씨는 손목시계를 얼굴 앞으로 가져가더니 천천히 손을 들었다.
시작을 알리는 스가 씨의 날카로운 음성은 무정하게도 파란 하늘 아래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이렇게 '가모가와 제17조 호루모' 최종전, '요시다 호루모'는 우리에게 최악의 상황으로 시작되었다.

- 만약 아시야가 이제까지 치러온 두 대항전과 같은 기세로 우리 청룡회 블루스를 몰아붙였더라면 아시야가 세운 개시 16분 만에 호루모 종료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더욱 단축해서 꿈의 한자릿수를 돌파하고 우리는 산산조각으로 분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혼란의 정점에서 "개시!"라는 호령이 떨어지자 단지 조개처럼 오므라들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아시야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돌격해 오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일단 우리의 동태를 살핀다는, 매우 진중한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그 모든 것이 교토 안에 이름을 떨친 구스노키 후미의 평판이 이루어낸 업적이었다는 사실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야말로 죽은 공명이 살아 있는 중달을 몰아낸 격이었다. 구스노키 후미라는 존재 때문에 상대는 침묵 뒤에 뭔가 도사리고 있을 거라는 의구심을 품게 된 것이다. 

- 하지만 아시야가 우리 동태를 살피기를 단념하는 것도 빨랐다. 호루모 개시 10분이 지나도 전혀 공격할 조짐을 보이지 않는 우리에게 아시야는 그 답지 않은 전략을 얼른 내던지고 앞장서서 공격을 가해 왔다.
우리도 어느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파괴력이리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그만큼 '요시다의 여포'의 돌격은 무시무시했다. 아시야가 지나간 자리에는 "뾰로"라는 임종의 대합창과 함께 요괴들이 우르르 안개가 걷히듯 사라져 갔다. 아시야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은 미요시 동생은 요괴 3분의 1을 단방에 잃고 말았다. 똑같은 요괴를 부리고 있다고는 도저히 여겨지지 않았다. 너무나도 차원이 다른 파괴력에 다카무라는 "독을 발라놓은 거 아니야?" 하고 아시야의 요괴들이 휘두르는 곤봉을 가리키며 의심을 품기도 했다. 

- 구스노키 후미는 시력 0.04의 근시인 까닭에 전투에는 거의 참가하지 않고 다카무라의 원호를 맡고 있었다. 참모가 없어도 서로를 격려하며 우리 교토대 청룡회 블루스 남자들은 실로 용감히 싸웠다. 이제까지 치른 두 번의 전투를 바탕으로 구스노키 후미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그런대로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버젓이 증명해 보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 "화가 나서 깼다는 건 거짓말이야. 사실은 오늘 자취 집 대문을 나오다가 심하게 넘어지는 바람에 깨졌어. 마침 안경을 닦으면서 걷고 있었는데 발치의 타일이 어제 내린 비로 젖어 있었거든."
구스노키 후미는 손에 든 손수건을 펼쳤다. 거기에는 한쪽 안경알에 크게 금이 간 본짱 안경이 하늘의 해님을 반사하고 있었다.
"넘어졌어?"
"응, 안경만 날아가 버렸어."
구스키 후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등의 상처와 재킷 소매에 묻은 얼룩을 보여줬다.
"이런 건 창피해서 쓸 수가 없어."
구스노키 후미는 조심조심 금이 간 오른쪽 안경알을 만졌다. 금이 잔뜩 가 있는 부위에는 안경알이 조금 빠져 있었다.

 

- "있잖아, 부탁이 하나 있는데."
구스노키 후미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작은 평소의 목소리보다 더 가냘픈, 들릴락말락한 목소리였다.
"응? 뭔데?"
나는 절로 이끌리듯이 그녀의 얼굴에 귀를 가까이 가져갔다.
"다음에..."

손 언저리를 바라본 채 구스노키 후미는 쉰 목소리를 냈다.

"나 데리고 어디 놀러가 주지 않을래?"

- 나는 물끄러미 구스노키 후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구스노키 후미는 온 얼굴이 새빨개져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 끝에서 본짱 안경이 투명한 파란 하늘을 비추었다.
"물론이고 말고."
스스로도 놀라우리만치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이 순순히 목구멍에서 튀어나왔다.
"정말?"
구스노키 후미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얼굴을 들었다.
"정말이지."
나는 그녀의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순간 구스노키 후미의 입가에 작은 보조개가 잡히더니 희미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하는 수 없네."
구스노키 후미는 깨지지 않은 쪽의 안경알을 손수건으로 닦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얼굴을 들자 한쪽 안경알에 잔뜩 금이 간 본짱 안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저런 멍청한 남자한테 지곤 못 살아."
구스노키 후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것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은, 구스노키 후미가 내린 아시야에 대한 평가였다.

- 양쪽으로 늘어선 남자들에게 구스노키 후미는 짤막하게 작전을 설명했다.
"어떻게 그런 걸 알 수 있니?"
다카무라가 작전의 '근거'에 대한 솔직한 의문을 제기하자 구스노키 후미는 그 이유를 간결하게 설명하고 나서 마지막에 덧붙였다.
"확증은 없어. 그래도 해보는 수밖에 없어."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하자. 난 구스노키를 믿어."
내 목소리에 미요시 형제는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였다. 다카무라도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 해보자."

- 작전 설명을 마친 구스노키 후미는 그녀답지 않게 긴장한 목소리로 남자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말했다.
"기회는 단 한 번 뿐이야." 
오후 4시 40분, 호루모를 개시한 지 40분이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 우리는 일제히 퇴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구스노키 후미의 작전에 따른 행동이었다. 운동장에는 어제의 태풍이 남기고 간 물웅덩이가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스가 씨가 운동장 한가운데를 호루모 개시 장소로 선택한 것은 주변에 물웅덩이가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물웅덩이를 찾아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목표 지점은 운동장 남동쪽 구석이었다. 거기에는 어제 태풍으로 내린 비가 가득 고여 있는 거대한 물웅덩이가 있었다. 다카무라와 내가 큰 대자로 뻗고도 남을 만한 큰 물웅덩이는 요괴들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연못' 만큼 넓어 보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진짜 패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작전이었다. 실제로 아시야는 우리의 행동을 보고 단번에 끝을 내려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추격을 개시했다. 
중요한 것은 몰리는 척하면서 운동장 남동쪽의 '연못'으로 그들을 유인하는 것이었다. 그 점에서 우리 연기는 완벽했다. 실제로 우리는 추격해 오는 아시야에게서 죽을힘을 다해 도망쳐 가까스로 '연못' 앞에 다다른 것이다.
남은 것은 광대한 '연못'을 눈앞에 두고 우왕좌왕하는 우리를 향해 아시야가 최후의 일격을 가해 오기를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 "괜찮아. 저 녀석이라면 한다고."
과연 아시야가 함정에 빠질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다카무라에게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는 피부로 느끼는 확신이 있었다. 머리에 피가 솟구쳐서 진위도 가리지 않고 남의 자취 집에 쳐들어오는 그 경솔함을 나는 믿었다.
내 예상은 들어맞았다.

- '연못' 가장자리에서 미요시 형과 나는 좌우로 일제히 방향을 돌리도록 명령했다. 급작스러운 방향 전환에 쫓아가지 못한 요괴들은 줄줄이 '연못에 빠졌다. 하지만 미요시 형과 나는 주저하지 않고 방향 전환을 강행했다.
그제야 비로소 아시야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시야는 필사적으로 요괴들을 멈추게 하려 했다. 그러나 가속이 붙은 요괴들은 덩어리가 되어 진흙탕 '연못'에 처박혔다. 아시야는 바로 '연못'에서 탈출을 시도했으나 그때는 이미 구스노키 후미가 '연못'에 요괴들을 흩어지게 한 상태여서 퇴로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아시야를 궁지에서 구하려고 마쓰나가, 사카가미, 기노가 물밀듯이 몰려왔다. 하지만 방향 전환을 끝낸 미요시 형과 내가 그 앞에 버티고 서서 아시야를 향한 구원의 손길을 단호히 저지했다.
아시야와 구스노키 후미, 이윽고 두 영웅은 '연못' 안에서 마주 섰다.

- 그러나 언제까지고 싸움은 시작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시야의 요괴들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어느새 아시야의 요괴들 얼굴에서는 '주둥이'가 사라져 버렸다. 이제 아시야의 요괴들은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어 보였다. 귀신의 몰골로 귀어를 외쳐대는 아시야의 목소리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한편 구스노키 후미는 아시야가 움직일 수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 유유히 '연못'에서 퇴각하기 시작했다. 구스노키 후미의 요괴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주둥이'가 움푹 들어간 상태였지만 양손에 건포도를 든 다카무라의 구원 요괴들이 과감히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 구스노키 후미의 요괴들에게 한 알, 똑같이 '주둥이'가 움푹 들어간 자신에게도 한 알씩 재빠르게 보급했다.
"뽕." "뽕" "뽕." "뽕." "뽕"
건포도가 빨려 들어가는 요란한 소리와 더불어 구스노키 후미의 요괴들은 무사히 땅으로 귀환하는 데 성공했다. 반대로 아시야의 요괴들이 흙탕물에 소리도 없이 쓰러져 가는 모습을 우리는 어안이 벙벙한 채 바라보았다.

- 모든 것은 구스노키 후미가 노린 대로였다. 녀석들은 물에 약하다. 생각지도 못한 녀석들의 약점을 구스노키 후미는 기막히게 이용한 것이다. 우리는 새삼스레 외경심을 가지고 본짱 머리에 눈길을 던졌다. 금이 간 안경알을 햇살에 반사시키며 구스노키 후미는 조용히 전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성미 넘치는 그 모습은 흡사 애꾸눈의 영웅, 마사무네 같은 광경이었다.

- 아닌 게 아니라 이 작전을 처음 들었을 때 우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요괴들이 물에 약하다고 하는데, 우리는 실제로 빗속에서 요괴들을 지휘한 경험도 있었던 데다 비 오는 밤에도 어김없이 그 비명 소리는 들려오지 않느냐며 다카무라가 곧바로 반론을 펼쳤다.
이에 대해 구스노키 후미는 지난번 기야마치에서 목격한 사건을 빠른 말투로 설명했다.
구스노키 후미가 말하기를, 기야마치에서 과 모임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녀석들에게 기습당한 '무엇'이 날뛰면서 보도에서 다카세 강으로 떨어지는 순간을 우연히 목격했다고 한다. 그때 그녀의 눈에는 마치 그 '무엇'이 일부러 다카세 강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평소 같으면 뛰어서 도망갈 텐데 그날은 발길을 멈추고 산조 대교에서 강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러자 강에서 대굴대굴 구르는 그 '무엇'의 몸에서 요괴들이 잇따라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불과 수십 초도 지나지 않아 녀석들은 모두 강으로 가라앉아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그리고 녀석들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유- 명한 다카세 강이지만 그 수위는 평소에는 5센티미터에서 10센티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어째서 비를 맞아도 끄떡없는 요괴들이 기껏해야 허리께 정도밖에 오지 않는 물에 잠긴 정도로 목숨을 잃었는가?
구스노키 후미가 말하기를, 그것은 넝마 안으로 물이 들어갔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여러분도 아시듯이 '장비'라는 지령을 받자마자 녀석들은 무릎까지 오는 넝마 속에서 일제히 무기를 꺼낸다. 어떻게 생각해 봐도 넝마 안에 들어갈 리도 없는 물건이 제멋대로 튀어나온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곳에 이 세상의 것이 섞여 들어가면 녀석들의 몸에 이변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구스노키 후미는 그렇게 말했다. 
물론 구스노키 후미 자신도 인정하듯이 어디까지나 추측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였다. 애당초 그 까만 요괴들과 우리가 호루모에서 부리는 요괴들이 '같은' 요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래도 우리는 구스노키 후미의 작전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리고 멋지게 이긴 것이다.

- 호루모 승패는 다음 두 가지 결말을 통해 결정된다. 하나는 상대측의 요괴를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전멸시키는 것. 또 하나는 상대 대표자에게 항복을 선언하게 하는 것이다.
개시를 선언한 지 58분, 아시야가 이끄는 마지막 요괴가 거품처럼 사라졌다.

- 우리는 마른침을 삼키고 기다렸다. 아시야의 입에서 "호루모!"라는 절규가 울려 퍼지는 순간을 그리고 스가 씨가 우리의 승리를 선언하는 순간을.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절규는 들려오지 않았다.
다들 어리둥절한 채 아시야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시야의 얼굴은 새빨갰다. 온 얼굴에 피가 몰리더니 그 빛깔은 거무칙칙해졌다. 굵은 목덜미에는 혈관이 솟아 있고 굳게 움켜쥔 두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정신력, 그렇지 않으면 턱의 힘이었다. 그렇다. 아시야는 솟아오르는 '호루모'라는 절규를 이를 악물고 참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인간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몰골로 아시야는 굴욕의 순간을 1초라도 늦추려고 버텼다. 하지만 절규는 바로 목구멍 언저리까지 올라와 있는 듯했고, 나는 아시야의 굳센 자존심과 지기 싫어하는 근성에 찬사마저 보내며 머지않아 찾아올 종말의 순간을 기다렸다.

- 불쑥 아시야의 몸에 그림자가 비쳤다.
날이 흐려졌나 싶어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잘못 봤나 하고 시선을 돌린 순간 나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 이봐, 아베, 저건..."
다카무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아시야를 가리키고 있었다.

- 흔들거리는 그림자가 아시야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림자는 순식간에 칠흑빛을 띠기 시작하더니 불과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전신을 까맣게 물들인 요괴들의 모습이 한 마리 한 마리 또렷이 윤곽을 드러냈다.
"꺄꺄꺄꺄..."
지옥 바닥에서 기어오른 것 같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아시야의 하반신에는 이미 녀석들이 빼곡히 들러붙어 청바지를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남은 상반신이 급속히 그림자에 휩싸이려는 순간 나는 자신도 모르게 튕겨나가듯이 내달리고 있었다. 
시야에 비치는 모든 것이 슬로모션이 되어 흘러갔다. 

- 지면을 뒤덮고 있는 '파란' 요괴들이 머리 위를 건너 달려가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 올려다보고 있었다. 손가락을 내밀고 뭐라고 외치는 마쓰나가와 사카가미를 힘껏 밀쳐냈다. 스가 씨는 입을 떡 벌리고, 사와라 교코는 눈을 크게 뜨고 달려가는 나를 지켜보았다.
"아시야! 외치라고! 빨리 '호루모'라고 외치란 말이야!"
멈춰버린 듯한 시간 속에서 나는 불현듯 알 것 같았다. '호루모'라는 말의 의미를, 그리고 '호루모' 그 자체의 의미를.

- 예전에 스가 씨는 말했다. '호루모'라는 절규는 요괴들을 전멸시킨 것에 대한 벌이라고. 하지만 아니었다. 그렇지 않다. 그 절규는 벌 따위가 아니다. 분명 벌은 존재한다. 하지만 한 번뿐이다. 다카무라가 존마게를 하게 된, 그 장난 같은 처사뿐이다. '호루모'라는 절규는 벌이 아니다. 도리어 그 절규는 인간을 위해 마련된 '안전장치'였던 것이다.

- '호루모'라고 외치는 것으로 우리는 녀석들의 게임에서 해방된다. '제17조'를 발동하고 나서 밤이면 밤마다 들어야 했던 비명. 아마 그것은 녀석들의 게임(물론 어떤 게임인지는 알 수 없다. 단순히 살상을 목적으로 한 '사냥'인지도 모른다)에 패배한 그 '무엇'에게 주어진 '진짜 벌'이었을 것이다. 한편 우리가 호루모라고 부르는 이 기묘한 경기는 녀석들에게는 놀이 같은 것이리라. 아니, 애당초 이 호루모 자체가 인간과 녀석들이 함께하는 놀이로 만들어진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 즉각 교토대 청룡회 블루스의 실격을 선언했다.
이의를 제기하려는 다카무라를 나는 진흙투성이 얼굴로 제지했다. 설사 이의를 제기한들 스가 씨에게 유효한 설명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 운동장에서 까만 녀석들의 모습을 본 것은 우리 교토대 청룡회 블루스의 다섯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 "아베는 아시야를 구해 준 건데 말이야."
다카무라의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강물 소리에 허무하게 씻겨 내려간다.
하지만 기필코 이뤄야만 했던 '가모가와 제17조 호루모' 우승을 놓치고 말았는데도 나는 아직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 분명 요괴들의 전멸 타이밍은 조종자가 '호루모' 하고 절규를 외쳤을 때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만약 '호루모'라는 말에 대한 나의 해석이 올바르다면, 아시야의 요괴들이 전멸한 시점에서 승패는 이미 결정 난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뒤따르는 '호루모'라는 절규는, 이미 승패와는 관계없는 외치느냐 외치지 않느냐 하는 개인적인 사정에 따른 문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시야가 승부에 '패배'했기에 그 까만 녀석들이 나타났던 것이 아니던가?

- "시간이 다 돼가네."
손목시계는 이제 곧 오후 8시를 가리키려 하고 있었다. '제17조' 발의 다음 날부터 지난 석 달 동안 밤마다 울려 퍼지던 비명은 늘 오후 8시가 지난 무렵부터 들리기 시작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귀를 기울였다. 우리는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희미한 바람 소리, 산조 대교를 걷는 젊은이들의 그림자가 강물에 출렁일 뿐이었다. 우리는 두려움에 몸을 떨며 긴장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심야에 한번 다 함께 기야마치에 가서 라면을 먹고 다시 강변으로 돌아와 히가시 산의 하늘이 밝아올 때까지 앉아 있었다. 

- 새벽 5시, 아침이 밝아오는 것을 보며 우리는 마침내 일어났다. 결국, 비명 소리는 단 한 번도 들려오지 않았다.
석 달 만에 찾아온 고요한 밤이었다. 우리는 조용히 빙 둘러서서 서로 부둥켜안았다. 원 안에서 다카무라가 "누가 내 발을 밟았어"라며 정말로 아픈 것인지 아니면 기쁜 것인지 눈물을 글썽이며 웃고 있었다. 

- 산조 대교 위에서 교토대 청룡회 블루스는 흩어졌다.

- 또 하나는 여자의 코에 아무런 관심이 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아름다운 코를 순순히 아름답다고 찬미하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감정의 하나로 남아 있다. 하지만 단순히 코 모양만으로 마음이 마구 끌리는 일은 뚝 멈췄다. 역시 '반칙 패배'는 유효해서 녀석들이 나의 소중한 것을 앗아가 버린 것일까? 아니면 내가 열심히 했다는 것을 인정해 준 요시다의 신께서 구스노키 후미의 코를 만지게 함으로써 코에 대한 비뚤어진 나의 생각을 떨쳐준 것일까?
진실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 대학 시계탑 앞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녹나무 아래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 저편으로 나무의 신록이 햇살을 받아 싱그럽게 빛나고 있다.
"잘 지냈어?"
갑자기 말을 걸어와 눈길을 들어보니 쏟아져 내리는 태양에 압도되어 눈이 부신 얼굴로 스가 씨가 서 있었다.

- "으응, 분명 여기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와본 거지."
스가 씨는 올봄부터 이학부 대학원생이 되었다. 연구실에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진정한 통일 이론을 모색하고 있다고 했다. 그게 뭐냐고 되묻자, 스가 씨는 우주의 정체성 찾기 같은 것이라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한없이 난해한 문제에 임하고 있는 모양이다.
"얘기 들었어. 요즘 들어 다른 대학에도 자주 얼굴을 내밀고 있다면서."
"전부터 베로베로바 점장님이 그러셨거든요. '제17조'에서 중요한 것은 뒤처리라고요. 그래서 저 때문에 불편을 끼쳐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고 다녀요. 요이야마 때는 다 함께 사이좋게 한바탕 놀아야 하니까요."

- 때맞춰 정문에 나타난 그림자를 가리켰다. 스가 씨는 잠시 갸우뚱거리며 그쪽을 바라보다가 가슴속에서 쥐어짠 듯한 경탄의 소리를 냈다.
"아, 아아! 저 사람이 구스노키인가? 저렇게 예쁜 여자가 되었다니... 전혀 몰랐네. 지난달에 만났을 때는 이제 안경을 쓰지 않나 싶었는데, 저렇게 헤어스타일까지 바꾸니 꼭 딴 사람이네. 정말이지 놀라운걸."
학부까지 자전거를 가지러 간다며 요괴들을 우리 앞에 정렬시켜 놓고 바로 자리를 뜬 구스노키 후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스가 씨는 감개무량한 듯 중얼거렸다. 

 

- "벌써 3학년이에요. 세 번째 아오이마쓰리죠."
"광고지는 만들었어?"
"네, 그런데 뭐라고 써야 할지 몰라 결국 2년 전에 받은 광고지 문장을 그대로 썼어요."
"그랬어? 실은 나도 우리 전대 걸 그대로 썼어. 이런 식으로 앞으로도 계속 쓰게 되겠지."
스가 씨는 감개가 깊은 듯 끄덕이더니 혼자 히죽거렸다.

- "맞다. 또 잊어버릴 뻔했네."
그러면서 옆에 놓아둔 숄더백에서 소책자 한 권을 꺼냈다.
본 적이 있는 책자의 낡아빠진 표지에는 능숙한 붓글씨로 <호루모에 관한 비망록>이라고 쓰여 있었다.
"요전에 베로베로바에서 줄 생각이었는데 깜빡 잊고 말았지 뭐야. 이거 앞으로 네가 가지고 있어."
"안 돼요. 소중한 물건인 모양인데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에요."
"그러니까 잘 보관해. 아니, 실은 규칙이 있어 봐, 이 총칙 마지막 부분에..."
스가 씨는 책자를 팔랑팔랑 넘기더니 한 면을 펼쳐 내게 내밀었다.

- 나는 스가 씨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제18조 : 이 비망록은 청룡, 주작, 백호, 현무의 각 우두머리가 보관해야 함.
반론의 이유를 잃은 나는 묵묵히 <호루모에 관한 비망록>을 받아 가방에 넣었다.

 

- "걱정 마. 다 함께 뽑은 거야."
스가 씨는 내 어깨를 툭 치더니 정색을 하고 그리 도움도 되지 않을 충고를 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떻게든 되는 법이라고."

-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 나는 교토대 청룡회 제500대 회장이 되었다.
모든 것은 지난달 산조기야마치 선술집 베로베로바의 2층 방에서 열린 회장 선거로 결정된 사항이었다.

- 스가 씨 입회하에 무기명 1인 1표 투표가 이루어졌다. 내 예상으로는 가장 유력한 후보는 말할 것도 없이 아시야였다. 나는 설사 아시야가 회장이 되더라도 묵묵히 따를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시야에게 투표하는 것도 못마땅해서 다카무라라고 적어 투표했다.
첫 번째 투표 결과는 아시야 다섯 표, 나 네 표, 다카무라 한 표였다. 아무래도 교토대 청룡회 블루스 회원들은 모두 나를 뽑아준 모양이었다. 그 의리에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 당선에 필요한 표수는 사전에 여섯 표로 정해져 있어 최다 득표였어도 당선자가 정해지지 않아 나와 아시야는 결선투표에 돌입했다. 내 이름을 써준 사람들을 위해서도 이 마당에 '아시야'라고 쓸 수는 없어 하는 수 없이 내 이름을 적어 투표했다. 애당초 결선투표에서 동점인 경우는 1차 투표에서 많은 표를 얻은 자를 당선자로 한다는 원칙이었으므로, 어쨌든 결과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내가 교토대 청룡회 제500대 회장에 당선된 것이다.
결선투표 결과는 내가 여섯 표, 아시야가 네 표였다. 그러니까 교토대 청룡회 신센조 중 누가 나에게 한 표를 던진 것이다. 다카무라는 사와라 교코가 그 한 표를 던지지 않았겠느냐고 추측했지만, 물론 진실은 알 길이 없다. 덧붙여 말하면 아시야와 사와라 교코는 지금도 사귀고 있다. 다카무라 얘기로는 싸움이 끊이질 않는다고 하는데 이미 내게는 완전히 관심 밖의 일이었다. 

- 오토바이 소리가 가까워져 다카무라인가 싶어 얼굴을 들었더니 다른 오토바이가 달려갔다. 다시 시선을 떨어뜨리니 거기에는 찬란하게 쏟아지는 햇살 아래 구스노키 후미가 두고 간 요괴 400마리가 '주둥이'를 내밀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2년 전에 이 녀석들을 데리고 계셨던 거네요."
"그랬지. 거리 의식에 참가했다가 가미가모 신사에 도착한 후에 '냄새가 나는' 신입생 뒤를 따라가라고 명령했지."
스가 씨는 몸을 앞으로 내밀고 요괴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요괴들은 일단 스가 씨 쪽으로 '주둥이'를 돌리더니 이내 획 돌아서 다른 쪽을 바라보았다.

- "거기에 저랑 다카무라가 나타난 거로군요."
"그랬지. 하긴 그리 반가운 반응은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야."
"무슨 말씀인가요?"
"죽이 잘 맞는 상대일 때는 뒤에서 쫓아가다가도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하거든. 그래서 아시야와 구스노키가 나타났을 때는 정말 야단법석이었다고."
"그런 것까지 알 수 있는 건가요?"
"그래, 우리 대학에는 입만 살아 있는 고리타분한 녀석들이 많아서인지 대체로 반응이 영 시원찮지."
강의가 끝났는지 부쩍 사람이 많아진 정문을 바라보면서 스가 씨는 유유히 중얼거렸다.

- "그래서 아시야와는 어떻게 지내는데?"
스가 씨는 내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사이좋게 지내는 거냐? '가모가와 제17조 호루모'를 했으니 올해 거리 의식이야 물 건너간 얘기지만, 내년에는 꼭 맨 앞줄에 섰으면 좋겠다. 우리에게는 구스노키와 아시야가 있으니 이런 기회도 없다고. 그래서 아시야와는 어떤데?"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어요. 요즘에는 인사 정도는 하게 되었으니까요. 맞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해나갈 수 있겠죠."
"그런 거야. 나도 괜찮았으니까."
"네? 그런 사람이 있었나요?"
"있었지. 말도 하지 않을 만큼 사이가 나쁜 놈이 하나 있었지만 너희는 전혀 몰랐잖아? 그러니까 어떻게든 될 거야."
스가 씨는 그렇게 말하더니 킥킥거리며 웃었고 나도 따라서 같이 웃었다.

- "그래그래, 얼마 전에 베로베로바 점장한테 재밌는 얘기를 들었어. 듣고 싶으냐?"
뭔가 있는 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스가 씨는 이상하게 히죽거리면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대뜸 스가 씨는 말했다. 

"점장이 아베였어."
어리둥절해하는 내 표정을 즐기는 듯, 틈을 두고 나서 말을 이었다.
"점장 이름이 아베였다고. 실은 이제껏 내내 점장님이라고만 불렀지 이름은 물어본 적도 없었거든."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스가 씨가 불쑥 꺼내는 이야기의 결말은 십중팔구 허접스럽다. 나는 일찌감치 경계하면서 스가 씨 이야기의 행방을 지켜보았다.

- "그것도 50년 전에 점장이 '제17조'를 발의했을 당시의 호루모 이름도 '가모가와 호루모' 였던 모양이야. 정말이지 우연이란 게 무섭지 않니?"
조금도 무서워 보이지 않는 얼굴로 스가 씨는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점장 전에 '제17조'로 인한 호루모가 거행된 것도 50년 전이래. 그때도 말을 꺼낸 이의 이름은 아베였다더군. 호루모 이름도 역시 '가모가와 호루모'였고. 너, 기억해? 내가 처음 점장에게 널 데려갔을 때의 일을. 아마 그때 점장은 이미 널 알고 있었을 거야. 어쩌면 네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부터, 아니 50년 전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무섭지 않느냐고 중얼거리고 스가 씨는 또다시 말을 이었다. 

"덧붙이자면 점장이 아는 한 역대 '통보인'은 모두 '제17조'를 발의한 사람이 맡아왔대. 그래서 '통보인'의 이름은 모두..."

- "그만하세요."
나는 손을 들어 스가 씨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런 거 전 몰라요. 전 저예요."
쏘아보는 내 시선에 스가 씨는 어깨를 흠칫하더니 "그렇지? 우연이지? 나 역시 아무 생각 없이 '가모가와 호루모'라고 붙인 거야"라며 수습하듯 말을 잇고는 더 이상 그 화제는 꺼내지 않았다.
강의가 끝났는데 다카무라는 뭘 하고 있는지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수풀 안쪽의 잔디에 손을 딛고 녹나무를 올려다보니 가지 틈새로 가냘픈 새싹이 나무의 정령처럼 움터 있었다.

- "왜 우리는 지금도 호루모 같은 걸 하고 있는 걸까요?"

나는 문득 떠오른 의문을 스가 씨에게 던졌다.
"글쎄..."
스가 씨는 나와 똑같은 자세로 앉아 녹나무를 올려다보다가 태평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녀석들의 심심풀이에 상대를 해주고 있는 게 아닐까? 분명 녀석들은 내기 같은 걸 하며 즐기고 있을 거야."

- 그로부터 몇 번인가 질문을 되풀이했지만 '녀석들'이라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스가 씨는 결국 가르쳐주지 않았다. 나는 나름대로 생각을 펼쳐 전국에 800만이나 된다는 그분들을 떠올렸지만 물론 확인할 길은 전혀 없다. 추론은 영원히 추론으로 남는다. 그래도 나는 녹나무를 올려다보면서 스가 씨의 말은 그런대로 진실이 아닐까 하고 야릇한 확신을 가졌다.

- 이윽고 다카무라가 오토바이를 타고 등장하고 구스노키 후미도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자, 스가 씨는 "마음 편히 다녀와. 결국 될 대로 될 테니까 말이야"라는 말을 남기고 연구실로 돌아갔다.

- "구스노키 씨, 타고 갈래? 헬멧이라면 있어."
다카무라는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오토바이의 뒷자리를 가리켰다. 그 밑에는 요즘 소문으로 들려오는 다카무라의 여자 친구 헬멧이 매달려 있었다. 실은 그 여자 친구라는 이는 리쓰메이칸 대학 백호대의 제500대 회장이었다. 자동 2륜 면허를 따려고 다닌 사이인의 교습소에서 우연히 일반 자동차 교습을 받으러 와있던 그녀와 만나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친목을 다진 모양이다. 참고로 다카무라는 존마게를 그만두었다. 사귀는 조건으로 그녀가 맨 먼저 제시한 존마게와의 결별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인 것이다. 까까머리가 되어버린 다카무라의 머리를 보고 있으면 예전의 상투머리가 그립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다카무라의 어머니를 위해서도, 교토의 안녕을 위해서도 이것으로 되었다. 

- "그럼 첫 번째 도리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구스키 후미에게 뒷자리 승차를 깨끗이 거절당한 다카무라는 "그야 그렇겠지"라며 나와 구스노키 후미를 히죽거리며 번갈아 보더니 시동을 걸고 씩씩하게 떠나갔다.

- 시모가모 신사 부근은 이미 아오이마쓰리 거리 의식 행렬이 통과한 후여서 담당자들이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데마치 다리 입구에서 강변길로 내려가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들으면서 가모가와 강변을 따라 가미가모 신사로 자전거를 몰았다. 뒤돌아보니 구스노키 후미의 자전거 뒤로 녀석들이 바짝 붙어 따라오고 있었다.
"아아, 아무것도 모르는 무구한 젊은이를 끌어들여도 괜찮은 걸까? 죄책감이 느껴지네."
어깨에 멘 가방에 넣어둔 옅은 청색 광고지 50장을 유난히 무겁게 느끼면서 나는 구스노키 후미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 이상한 일도 많지만 분명 즐거운 일도 많을 거야."

"그럴까?"
"난 그렇다고 봐."

구스노키 후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강으로 시선을 휙 돌렸다. 굵은 웨이브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다카무라의 상투와는 얘기가 다르지만 예전의 본짱 머리가 그립게 느껴질 때도 있으니 신기하다. 하기는 본짱 머리와의 결별은 나의 강력한 요청이었으니, 그 헤어스타일도 나름대로 개성이 있어 좋았다는 따위의 말은 이제 와서 결코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 주위에 요괴들 모습이 보이지 않아 물었더니 구스노키 후미는 잠자코 강물을 가리켰다.
깜짝 놀라 벤치에서 일어났다. 당황한 나는 구스노키 후미 옆에서 강을 들여다보았다. 수면은 햇빛을 받아 은빛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녀석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녀석들은?"
"헤엄치게 하는 방법을 알아냈어."

- 구스노키 후미는 내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이제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귀어를 조용히 내뱉었다. 갑자기 강에서 물고기가 뛰어올랐다. 한 마리가 아니다. 수십 마리나 되는 물고기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일제히 뛰어올랐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에서 가뿐히 10미터를 뛰어오를 수 있는 물고기가 있을 리 없다. 그렇다. 
요괴들이었다.

- 구스노키 후미는 귀어를 지껄이면서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서서히 요괴들과 타이밍을 맞추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요괴 100마리가 구스노키 후미의 손 움직임과 동시에 일제히 강에서 뛰어올라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나는 그 광경을 입을 떡 벌리고 올려다보았다.
"뭐야? 이건?"
"귀어로 날아오르라고 했어."
"다, 다들 물속에 빠졌잖아?"
"아니야, 내가 헤엄치라고 명령한 거야."
"어디서 배웠니? 녀석들이 헤엄을 칠 수나 있어?"
내 물음에 구스노키 후미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할 수 있을 거 같아 해 봤더니 됐어."

- "혹시 녀석들과 대화도 할 수 있는 거야?"
조심스럽게 물은 내게 구스노키 후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겠어."

 

- 광고지 설명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던 나 자신이 불현듯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들고 있던 광고지를 가방에 넣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요괴들이 파란 하늘을 드높이 가로질러 갔다. 넝마를 펄럭이면서 '주둥이'를 부르르 흔들면서 요괴들은 기분 좋은 듯이 포물선을 그리더니 강으로 사라져 갔다.

구스노키 후미의 손 움직임에 맞추어 다시금 일제히 날아오른 요괴들 저편으로 미소노 다리를 건너 가미가모 신사 쪽으로 나아가는 행렬이 보였다. 그 행렬 어딘가에 아직 만나지 못한 '제501대' 회원들이 틀림없이 새침한 표정으로 걷고 있을 것이다. 
'냄새'를 풍기는 화려한 모습으로. 


 

 

얼마 전, 교토 시 사쿄쿠에 있는 요시다 신사 안에서 요괴를 봤다.
세쓰분마쓰리로 시끌벅적한 신사 안을 하카마 차림의 요괴가 마쓰리 행사 요원인 어린이 발걸음에 맞춰 걷고 있었다. '소귀래복(笑鬼來福)'이라고 적힌 얇은 판을 머리에 꽂기 위해 요괴 앞에는 사람들이 빼곡히 모여 있었다. 나도 그 줄에 들어가 순서를 기다리면서 문득 1년 전 이 장소에 만난 어린 형제를 떠올렸다.

이 작품을 시작하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그곳을 작품의 무대로 삼을 요량으로 나는 사전 답사에 나섰다. 새해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매섭게 추운 날이었다. 해는 이미 저물고 밤이 서서히 다가와 요시다 산을 감싸려 하고 있었다. 
본당으로 올라가는 긴 돌계단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계단 중간에 멈춰 서 있는 어린 형제의 모습이 보였다. 기분이 상하는 일이라도 있었던지 어린 동생은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있고, 그 옆에는 유치원생쯤 되어 보이는 형이 보따리를 한 손에 들고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돌계단 위에서는 아버지 같아 보이는 체격 좋은 남자가 "빨리 와"라며 손짓을 하고 있었다. 형은 아버지와 남동생을 번갈아보며 어쩔 줄을 모르더니 아버지가 돌계단 저편으로 사라지자 황급히 동생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울면서 형에게 끌려 비틀비틀 계단을 올라가는 동생의 뒷모습을 올려다보며 나도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이 끝나려는 곳에서 나는 어린 형제를 따라붙었다. 동생은 계속 울고 있었는데 신사 안에 들어가려는 순간 형이 목소리를 낮추며 동생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렇게 울면 신이 와."
그 순간 옆에 있던 내가 다 깜짝 놀랄 정도로 동생의 울음소리가 뚝 멈췄다. 엉겁결에 얼굴을 들여다보니 뺨에 작은 눈물방울을 매달고서 동생은 눈을 크게 뜨고 형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 손으로 보따리를, 다른 손으로 동생을 끌고 형은 사무실 앞에서 관리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아버지 곁으로 달려갔다. 형에게 보따리를 받아 든 아버지는 그것을 관리인에게 건네고 부자 셋이서 고개를 숙였다.

나는 자갈을 밟으며 새전함 앞으로 나아갔지만, 방금 전 들은 형의 속삭임이 귓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어린 형제에게 신은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어 있다는 사실이 아주 강하게 인상에 남았다.

나는 새전함에 동전을 던져 넣고 앞으로 잘 써낼 수 있도록 해주십사 기원했다(지금도 나는 이 새전함 앞에 서면 어김없이 옛날 일이 생각난다. 여기서 춤춘 밤은 눈이 내려서 참 추웠지,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남의 속옷을 잘못 입었던 녀석이 있었지 하고). 
해가 완전히 저물기도 해서 결국 제대로 사전 답사도 하지 못한 채 터덜터덜 퇴장했다. 사무실 앞에서 아직도 관리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부자의 웃음소리가 신사 안에 울려 퍼졌다. 

요괴로부터 복을 받을 차례가 되어 나는 머리를 숙였다. 어린이의 노랫소리와 더불어 요괴는 살며시 판을 머리에 꽂아주었다.
사람에게 다정한 요괴가 있는가 하면 무시무시한 신이 있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얼굴을 휙 들었다.
눈앞에 아주 무서운 요괴의 얼굴이 있었다.


마키메 마나부

 


 

역자 후기



먼저 일본어의 '가미(神)'라는 어휘부터 잠시 언급해야 될 듯싶다.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낸 나 역시 일본인들의 가미 개념은 참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알기는 아는데 만져지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그런 것들을 신봉하는 그들이 조금은 우스꽝스럽고 동시에 생소하기도 하다. 

그래도 그들의 '가미'를 조금은 이해해야 될 듯싶다. 그러지 않고는 재미가 덜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사실 이 '가미'라는 말이 여러 작품에 등장할 때마다 역자인 나도 적잖게 애를 먹는다. 왜냐하면 일본어의 '가미'는 너무나 포괄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하느님이, 신이, 천황이 되었다가, 때로는 일본 신사에 산다는 사자(死者)의 영혼이 되었다가, 때로는 선한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두려운 존재가 되기도 한다.

즉, 가미란 일본인에게 신앙 및 외경의 대상이다. 이러한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을 가리켜 그들은 가미라고 표현한다. 오죽하면 야오요로즈(八百萬)의 가미라는 표현이 있겠는가. 그러니까 모든 사물에 '가미'가 깃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즉, 일본인들이 말하는 '가미'란 영혼과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그런 '가미'를 숭배하는 것이 그 나라의 문화이며, 신화 및 민화가 삶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등장하는 요괴는 어디쯤에 자리매김해야 할 것인가? 그들이 섬기는 신들이 영락한 존재쯤으로 이해하면 무난하지 않을까 싶다. 영락이라는 말에 조금은 어폐가 있을까? 아무튼 여기에 등장하는 요괴는 그리 악하지도 밉지도 않은, 오히려 우스꽝스럽고 귀여운 존재다. '도깨비'로 옮기고 싶기도 했지만 뭔가 좀 뉘앙스가 달라 요괴를 고집하게 되었다. 

그런 요괴들을 등장시켜 일본의 과거가 녹아 있는 교토를 무대로 한바탕 요괴 놀이를 보여주었다.

그렇다. 이 책은 분명 오락 소설이다. 저마다 독서 취향은 다르겠지만 이 책은 '즐거움'을 위해 아주 색다른 소재와 형식을 가지고 쓰인 작품이다. 무슨 이런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있느냐고 할 것이 아니라 그냥 터무니없는 세계로 들어가 철없던 젊은 시절이라도 돌이켜보며 편안히 책장을 넘기면 된다.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이만큼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는 것도 분명 작가의 역량이 아니겠는가. 비판의식은 떨쳐버리고 그저 작가의 유머 감각을 공유할 수 있다면 이 책은 좀 더 유쾌해질 것이다.

한편, 영문을 알 수 없는 요괴들이 등장하는 호루모 대항전에 관한 설정은 이 작품의 향신료라고 볼 수도 있다. 작가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이다. 설정은 판타지 소설이지만 내용은 엄연한 청춘 소설이다. 어찌 보면 호루모라는 조어 자체가 젊은이들의 기발함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거기에 청춘의 발랄함이 깃든다. 그리고 약간의 허무도 실린다. 그리고 청춘 소설이니만큼 사랑 이야기도 큰 줄기를 이룬다. 그들의 사랑 역시 여느 사랑처럼 고뇌도 깊지만, 지나치게 끈적이지 않고 아픔을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성장하는 모습이 산뜻하다. 

무엇보다도 이런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는 작가의 기발한 발상이 돋보인다. 게다가 요괴의 묘사는 또 얼마나 우습던지 읽다 보면 요괴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입가가 올라간다. 정말이지 대단한 상상력이다. 그들의 전투 광경은 또 어떤가. 건포도로 보급이라니, 웃음이 절로 난다. 요괴뿐이 아니다. 등장인물의 캐릭터도 참 흥미롭고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역마살이 끼었는지 어쩌다 보니 해외 여기저기에서 살았던, 그리고 살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귀국자녀인 다카무라의 얘기도 남의 일 같지 않다. 구스노키 후미 같은 캐릭터 역시 한 명쯤은 내 주위에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의 엉뚱한 좌충우돌 이야기는 나의 대학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대학 시절을 그들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엉뚱하고 바보스럽게 보낸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것도 아닌 일에 목숨 걸듯이 집착했고, 괜스레 삶의 허무에 빠져 허덕였다. 마치 여기에 등장하는 젊은이들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보낸 시간이 후회가 되기는커녕 도리어 그립다. 요즘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영어 공부니 취업 준비니 하는 것들로 이런 좌충우돌 바보짓을 할 시간은 없는 것일까. 어느 시점이 되면 젊음만큼 엉뚱한 것도 없고 젊음 자체가 특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쉽다고 느끼는 순간, 젊음은 어느덧 한 발짝 물러나 있으니 지금 맘껏 즐기는 것이다. 그들처럼. 아니, 그럴 시간이 없으면 이 책을 통해 그들의 기상천외함, 진지한 우정, 사랑의 고뇌, 그리고 웃음 같은 것들을 실컷 만끽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어려운 일도 쉬워 보이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고도의 기예라는 말이 이 책 어딘가에 나온다. 인상 깊은 구절이었다. 그렇다. 이 이야기는 아주 쉬워 보이게 쓰였지만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임을 옮기는 작업을 하며 실감할 수 있었다. 색다른 형식의 이야기를 엮어낸 이 교토 작가에게 응원을 보낸다. 


윤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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