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도진기]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일루젼 2024. 7. 26. 00:00
728x90
반응형

저자 : 도진기
출판 : 황금가지
출간 : 2016.05.27


 

도진기 작가는 <모래바람>으로 처음 만났던 작가다. 당시에는 딱히 강한 이미지가 남지는 않았는데,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는 상당히 재미있었다. 다 읽은 후 찾아보니 부장 판사 출신이시라고. 경험이 녹아들어서인지 현장감 넘치는 법정물이 되었다. 

 

이 책은 변호사 고진 시리즈의 마지막인 5편에 해당한다. 시리즈를 순서대로 읽어나가는 것도 좋겠지만, 나처럼 단권만 읽어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스쳐 지나가듯이 언급되는 '이탁오'나 '김진구', '이유현'과의 관계는 전편에 담겨 있을 것 같다. (앞선 시리즈를 더 찾아 읽을지는 현재 고민 중이다. 궁금하긴 한데 읽을 책들이 너무 많이 쌓여 있다...) 

 

비틀리고 삐딱하지만 자신만의 기준이 확고한 변호사, 고진. 

이번 작품에서는 법정에도 등장하고 나름대로 양지에서(?) 변호인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중점적으로 비춰졌지만, 이전까지 '절대 법정에는 서지 않고' 뒤에서 사건을 풀어나갔던 모습 또한 궁금하다. 

 

캐릭터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사건을 풀어나가는 방식은 살짝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지만. 기본적 법정에 대한 탄탄한 지식이 받쳐주는 만큼 검사와 변호사의 법정 공방 장면은 흥미롭게 읽으실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을 청부 살해하기 위해 찾아왔던 미모의 여인이 몇 달 뒤 살인 용의자로 피고석에 서게 된다. 

당신이라면 이 변호를 맡을 것인가?

 

의뢰인의 무죄를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변호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변호사로서의 딜레마가 잘 담겨 있었다고 생각한다.

잘 읽었다.    


   

 

 "남편을 죽여 주세요."
여자가 말했다.

 



- 고진은 고개를 떨구고 담배를 찾았다.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 입에 가져가다 말고 여자의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살인 운운하는 말이 나오리라고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조그만 입술이었다. 엷은 화장으로 더 빛나는 희고 맑은 피부를 보면 42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다. 겁먹은 듯 큰 눈은 보호하고픈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살짝 고개를 돌린 여자의 이마에서 코로 흐르는 선은 마치 예술가의 붓에서 탄생한 것 같다. 여기에 만약 젊음까지 더해졌다면 고진은 그녀 앞에서 제대로 숨쉬기조차 어려웠을지 모른다.  
무척 아름답지만, 손톱으로 한 번 긁으면 금방 찢어져 버릴 것 같이 얇은 실크. 하지만, 이 여자는 정말 오랜 세월 손상을 입지 않았군.

- "그런데 왜?"
"'죽음의 변호사'라는 별명을 갖고 계신 고진 변호사님 아니에요? 합법을 가장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으신 걸로 알고 왔습니다만..."
고진은 "와." 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제가 좀 안 좋은 별명들을 갖고 있습니다만 그중에 죽음의 변호사란 별명은 없습니다. 당연히 청부를 받아 누굴 죽이거나 하는 일도 안 하고요."
고진은 그러다가 혼자 피식 웃었다.
"하긴 지난번엔 누군가가 '뒷골목 변호사'라고 부른 일도 있긴 했어요. 그분도 여성이었죠."
"혹시 액수가 적어서 그러시는 거라면..."
고진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누군가가 잘못된 소문을 낸 모양이네요. 솔직히 합법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저는 하지 않습니다."

-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어느새 눈가가 빨개졌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여성 앞에서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는 단호한 태도를 취해선 안 되지만, 고진은 지금이 그 예외적인 경우라고 판단하였다. 그럼에도 왠지 자신이 잘못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 하지만 이유현은 걸어 들어오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수의를 입지 않았다. 얇게 화장을 했고, 차분한 재색 톤의 재킷과 무릎을 살짝 덮는 에이라인 스커트를 입었다. 굽이 있는 구두 덕에, 원래 작지 않은 키의 그녀가 더욱 늘씬해 보였다. 패션 감각이 뛰어나 방송에도 출연하는 여자 변호사가 법정에 막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 이유현은 보존된 그녀의 아름다움에 자신이 왠지 안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자의 옆얼굴은 표정이 처연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미모를 방청객들에게 충분히 각인시켰다. 압도하지 않는 압도적인 미모. 방청석에서 약간의 술렁임이 일었다. 만약 외모만으로 결정하라면 이 여자에게 유죄표를 던질 사람이, 적어도 남자 중에서는 있기나 할까? 이유현은 방청객의 반응을 보고 확실하게 예감했다. 이 여자의 미모만으로도 이 사건은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끌고 유명해지리라는 것을. 
여자는 피고인석에 섰다. 머리는 틀어 올려져 있었고, 법대를 보고선 그녀의 하얀 목덜미가 자연스레 방청객을 향해 노출되었다.
 
- 하지만 피고인에게 동정이 인 건 검사의 태도 때문이 아니었다. 유죄판결을 위해서라면 어떤 비열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조현철 검사. 그는 교도소 안에서 '악질 중의 악질'로 통하다 못해 '살모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최근 부장검사 승진을 앞두고 한층 지독하게 변했다는 소문이었다. 

- 그에게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잘나가던 건설업자가 돈 문제로 고소를 당했다. 수사가 지지부진했고 증거도 부실했지만 조현철 검사는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일단 구속해라. 그러면 자백한다.' 그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래 놓고 그는 곧장 영장담당판사를 찾아가서 구속영장을 기각해달라고 부탁했다. 자기가 청구한 영장을 기각해달라고 부탁하는 일은 바보짓일지는 몰라도 '악질'이 될 수는 없을 터였다. 그가 덧붙인 말이 없었더라면.

"형식상 영장은 쳤지만 정말로 구속하려는 건 아니거든요. 피의자는 이 업계에선 큰손이에요. 영장을 슬쩍 기각해주시면 잊지 않을 겁니다."

판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고 한다. 영장을 기각했다가는 업자의 청탁을 받아 업무를 처리했다는 더러운 누명을 뒤집어쓸 판이었다. '영장이 기각된 전날, 업자의 부탁을 받은 검사가 영장담당 판사실로 찾아왔다'는 의혹 기사만 떠도 끝장이다. 판사는 바로 영장발부란에 도장을 찍었고, 증거가 엉성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건설업자는 바로 교도소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 그때 법정 뒷문이 벌컥 열렸다. 누군가가 들어서며 큰 소리로 말했다.
"이거, 죄송합니다. 출입구를 못 찾아서요."
법대를 향한 목소리의 방향으로 보아 이 사건의 변호사인 모양이었다. 이유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변호사가 매일 다니는 법원 출입구를 몰랐다고? 이걸 변명이라고 하는 얼간이 변호사는 대체 누구야? 그런데 왠지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이유현은 고개를 뒤로 꺾어 법정에 등장한 변호사를 보았다. 
놀라움에 이유현의 입이 쩍 벌어졌다. 실실 웃음을 흘리며 법정 앞으로 걸어 나오는 '얼간이 변호사'는 고진이었다.
'저 형님이 왜 여기에?'

- 변호사가 법정에 있는 건 당연하겠지만 고진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는 한 번도 법정에 나간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어둠의 변호사'라는 별명까지 붙어 있지 않은가. 오로지 뒷길에서 사건을 의뢰받아 법의 허점을 찌르는 변칙적 해결을 도모했던 그였다. 법정에 서는 일이 끔찍하게 지루하기 때문이라는데, 그게 진정한 이유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그를 법정에서 보는 건 백록담에서 네시를 발견하는 일만큼이나 상상하기 어려웠다. 

- 고진은 호리호리한 몸을 조릿대처럼 휘청대며 걸어와 김명진 옆에 앉았다. 흙에서 막 빠져나온 듯 거무스름한 낯빛, 작게 찢어진 눈, 움푹 꺼진 뺨,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치 약 올리는 듯 보이는 비뚤어진 입매는 여전했고, 불안정한 걸음걸이, 깡마른 몸에 비옷처럼 두른 감색 양복과 흰 셔츠도 그대로였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자줏빛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었고, 다리를 꼬고 앉지 않았다는 정도다. 둘 다 고진이 싫어하는 것들이다. 아마도 법정에 나오지 않는 사소한 이유 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 "그런 식이라면 살인자가 누구인지도 중요하지 않겠군요."
"그건 중요합니다. 그 살인자는 변호사님의 의뢰인이니까요."

논박을 지나 유치한 말꼬리를 잡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유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렇지만 이건 앞으로 이어질 두 사람이 벌일 길고 긴, 치사한 말싸움의 서두에 불과했다. 
김명진은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낯선 남자들이 자신의 운명을 논하고 있건만 그녀는 마치 풍미 좋은 차를 감상하는 자리에 초대받아 온 귀부인처럼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엷은 화장이나마 없었다면 수녀쯤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 이유현은 문득 혼란스러워졌다. 자신이 수사했고, 유죄라고 확신했음에도 그 사실을 잠시 잊어버렸다. 느낌이 증거를 대체할 순 없겠지만, 찰나적인 회의가 밀려들었다. 이 여자는 과연 독부일까? 아니면 심금을 울리는 사연을 품은 사실상의 희생자일까. 이도저도 아니면 아예 무고하고 억울한 피고인일까.

- "본 검사는."
조현철이 불쑥 일어섰다. 마치 콩나물이 솟듯 머리가 솟아 올라갔다. 어조가 심상찮았고,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재판의 흐름을 깨는 듯한 검사의 다소 돌출된 행동 때문에 이유현도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조현철은 이어 귀를 의심하게 하는 말을 던졌다.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합니다."
이유현의 입이 자신도 모르게 벌어졌다. 표정 관리를 해야 할 판사 세 사람도 제각기 미간을 모으거나 눈썹을 치켜세움으로써 격한 반응을 드러냈다. 고진은 보일락 말락 얼굴을 찌푸렸다. 방청석에는 그다지 동요가 일지 않았지만, 재판 실무를 아는 이들에게 검사의 참여재판 신청은 법정에서 물구나무를 서는 것만큼이나 어색한 일이었다. 국민참여재판, 달리 말해 배심재판은 항상 피고인 측이 신청해 왔기 때문이다.

- 엄격한 법리와 관행에 충실한 판사의 재판은 결론이 예측되는 면이 있다. 하지만 배심재판은 다르다. '재판 아마추어'가 생활인의 상식과 감성으로 내리는 판단이기에 의외의 결론이 내려질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피고인들은 사안에 따라 이쪽을 선호하기도 한다. 하지만 검찰은 극력 기피하는 절차였다. 결론을 예측하기 어렵고, 공판준비도 어려운 때문이다. 지금껏 검사가 신청한 경우는, 이유현이 알기에 단 한 건도 없었다. 
우발적인 결정일 리는 없다.
아마 사전에 준비한 시나리오일 것이다.
조현철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 후일 고진이 법정에 나오게 된 의미를 깨닫게 되고, 그것은 재판의 향방을 뒤집을 만한 큰 사건으로 번지게 되지만, 지금 이 순간 이유현은 얼버무리는 고진에게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김명진의 옷차림을 떠올렸다.
"그래서 법정에 수의 대신 사복을 입혀 내보낸 거죠?"
재판이 진행 중인 미결수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사복을 입고 법정에 출정할 수 있다. 수의를 입는 건 유죄라는 선입견을 줄 수 있기에 강요하지는 못하게끔 되어 있다. 물론 대부분은 수의를 입은 채로 나오지만 사복 차림을 시킨 건 미모를 돋보이게 하려는 고진의 전략임이 분명했다. 
"맞아. 미녀잖아. 게다가 남자의 애잔한 마음을 부르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 피고인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요소야. 이걸 왜 활용하지 않겠나? 아까 법정에서 그 고리타분한 판사가 김명진한테 물 갖다주라고 한 것 봤지?"
이어 미녀가 재판에서도 훨씬 후한 대접을 받는다는 미국의 실증적 연구 사례를 고진이 줄줄이 읊는 동안 이유현은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 "얼굴 한번 보자고 성화였어요. 우리 중엔... 뭐, 모르죠. 아직 명진이를 마음에 품고 있는 녀석이 있었을지도. 하하. 농담입니다. 그래도 궁금하더라고요. 변호사님도 그렇지 않아요? 아줌마가 된 걸 알아도 옛날 첫사랑이 어떻게 변했나 궁금해서 한번 만나보고 싶은 심정 같은 거."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고진이 밋밋하게 대꾸했다. 머쓱해진 남궁현은 웃음을 지우고 말을 이었다. 
"몇 달 전에 같이 서울에서 만났는데, 야아, 놀랐어요. 옛날 미모가 그대로더라고요. 아니, 더 깊이가 있어졌다고 할까요. 솔직한 심정으로, 완전히 아줌마로 변해서 실망했으면 했거든요. 아무 미련도 안 남게 말이죠. 하하. 나이가 있으니 피부야 어쩔 수 없겠지만, 그 성숙하고 무르익은 분위기 하며..."
옆에 김해나가 있음에도 남궁현은 거침이 없었다.
"첫사랑의 동생분과 결혼을 하시는 거군요. 기묘한 인연인데요."

"우리 둘 다 외롭던 처지에 가까워진 거죠. 제가 곧장 프러포즈를 했어요."
김해나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남궁현의 무신경한 말에 심기가 상한 듯했다.

- "아무튼 이번에 떠나면 다시는 한국으로 오지 않을 작정이었습니다. 아마 이번에 명진이를 만나는 게 이 사람한테는 살아생전 언니를 만나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죠."
"그래도 언니인데 그렇게까지 안 보게 되려고요?"
고진이 김해나를 향해 물었다. 그녀는 창밖 어딘가를 응시하며 말했다.
"너무 멀잖아요. 어차피 한국에 있을 때도 자주 보지는 못했어요."

어딘가 변명조였기에 고진은 더 묻지 않았다. 품속에서 담배를 찾다가 금연 중임을 불현듯 깨닫고 슬쩍 손을 뺐다. 대신 진하게 우려낸 차를 홀짝이는 것으로 니코틴을 대신했다.

- 고진은 문득 김명진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머뭇머뭇 봉투를 내밀던 하얗고 긴 손. 상처 입기 쉬운 살결. 거칠게 잡아당기면 속절없이 찢어지고 말 것 같은 여성성, 수동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해야 할까. 비록 '살인'이라는 말을 입에 올렸지만 그건 그녀에게 사악한 울림을 덧씌우기보다는 오히려 속에 묻은 이유를 알고 싶게 만들었다. 그건 돈과 욕망으로 얼룩진 악의가 아니라 핏빛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내면 같은 종류가 아닐까. 그녀는 남자의 마음에 편서풍을 일으킨다. 항상 '그녀'라는 한 방향으로만 부는 바람. 이 여자와 적대한다면 상대는 그 이유만으로 자기편을 모두 잃을 것이다. 그런 기분이 들었었다. 

- "예전엔 김해나 씨한테 왜 관심을 두지 않으셨을까요? 이렇게 미인이신데."
"첨 봤을 때 해나는 고3이었어요. 애라고만 생각했죠. 물론 얼굴은 예뻤죠. 명진이하고 꼭 빼닮았었어요. 하지만 고등학생인데, 이왕이면 대학생인 명진이를 만나야죠? 그땐. 하하하." 
그러자 김해나가 남궁현을 흘기고는 말했다.
"첫인상이란 게 큰가 봐요. 고등학생일 때 첨 봐서 그런지 1년 지나고 대학생이 되었어도 오빠들은 날 애로만 생각하던걸요. 여자로는 보지 않은 거죠." 
아마도 김명진이 없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고진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저 조그맣게 미소 지었을 뿐이었다.

 

- "명진이는 따로 나와서 살고 있더군요. 같이 만나서 시내 구경하고 밥 먹고 술도 한잔 했습니다. 오랜만에 즐거웠죠. 옛날 생각도 났고요."
"옛날 생각이 났다고요... 그럼 혹시 옛날 감정은 되살아나지 않던가요?"
남궁현은 훗 하고 웃었을 뿐 굳이 대답하지는 않았다. 김해나가 고진을 쏘아보았고 움찔한 고진은 시선을 외면했다. 하지만 이 순간 질타 어린 김해나의 시선보다 고진에게 더 크게 다가온 건 남궁현의 '매끄러움'이었다.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대답할 질문과 대답할 필요 없는 질문을 적절히 가려낸다. 찰랑거리면서도 넘치지 않는 술잔처럼 그의 말은 늘 적절한 수위를 유지하고 있다. 대화의 진정성 대신 흐름을 타는 기술만이 몸에 배어 있다. 이야기를 통해 무언가를 캐내기에는 가장 어려운 인물 유형이었다. 

- "뭐랄까, 김명진 씨 일에는 아직도 예민하게 촉수가 뻗어 있는 것 같아서요."
고진은 너무 무거운 분위기로 흐르지 않도록 표현을 조절했다. 한연우가 웃었는데, 어이없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그건 아마 명진이가 우리 젊은 시절의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일겁니다. 유독 우리 세대는 청춘이란 게 짧았으니까요. 모두가 명진이를 아꼈죠."
"아꼈다는 표현을 하시는군요... 좋아하셨던 거 아닙니까?"
"물론 좋아했죠. 근데 명진이는 좀 특별했어요. 그땐 다른 여자가 명진이를 대체한다는 생각을 못 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오디오 기기에 취미를 갖기 시작하면서 마크 레빈슨으로 먼저 소리를 들어 버린 사람과 비슷하달까요? 그건 오히려 비극이죠. 다른 기기를 전부 평범하게 만들어 버리니까요. 명진이는 정말 좋은 여자지만, 젊은 시절 명진이를 만난 건 오히려 불운이었는지도 모르죠. 그 뒤로는 어떤 여자를 만나도 한동안 명진이하고 비교하게 되었으니까요." 
"김명진 씨를 줄곧 그리워하셨던 것처럼 들리는군요.”
"그렇게 받아들이셨다면 제가 좀 표현을 잘못한 것 같네요. 그런 감정은 아닙니다. 좀 이해하시기 어려울 것 같은데..."

한연우가 탁자 위에 팔꿈치를 세우자 마른 어깨가 쑥 올라갔다. 

"20년 만에 연락이 되었을 때 솔직히 가슴이 부풀었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았어요. 내가 비록 세파에 찌들어 살아왔지만 옛날을 완전히 잊은 건 아니구나, 하고요..."
그는 말을 잠시 끊고 빙그레 웃었다.
"아, 또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사랑 같은 건 아니고, 불륜같은 감정도 아닙니다. 예전의 소중한 것에 대한 추억? 소풍 가기 전날 잠들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설렘 같은 거?" 


- 고진은 흥미를 느꼈다. 초면에 이 정도로 속마음을 털어놓는 한연우는 그 나이대의 남자로서는 확실히 보기 드문 유형이다. 진심일까, 자기도취일까.
"솔직하시네요. 남궁현 씨나 임의재 씨도 그랬을까요."
"그 친구들 마음이야 모르죠. 하지만 모두 아는 겁니다. 명진이가 어떤 아이인지 하는 것만은 말입니다. 명진이가 사람을 죽인다는 건상상조차 할 수 없어요. 그래서 그 친구들도 믿는 겁니다. 아무런 의심 없이. 저처럼요." 
로맨스 연극의 대사 같았지만 한연우의 말은 전혀 감상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역시 진심이어서일까? 나쁘게 해석할 가능성은 점점 줄고 있었다.
"흥미로운 말씀이네요. 하지만 여기서 어떤 종류의 동기를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하필 모두 혼자이시고, 김명진 씨가 좋은 여자라는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한 선생님을 포함해서 모두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무슨 가능성이요?"
"가령 신창순이 사라지면 옛사랑 김명진과 다시 이루어질 수 있다는."

 

-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두 분의 성격으로 본다면 어떨까요?"
"제가 무슨 정신분석학자라도 됩니까?"
"분석보다 직관이죠. 전 '꿈의 해석'보단 '꿈의 해몽'을 더 좋아하거든요. 친구들을 옆에서 관찰해 오신 한 교수님의 예리한 직관으로는 어떠실까 해서요." 
한연우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친구가 명진이를 차지하려고 살인자가 되는 위험을 무릅쓰고 창순이를 어떻게 할 수 있는 남자인가 하는 거 말입니까? 글쎄요, 그 정도로 행동하려면 오히려 인간이 순수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흠,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그 분석대로라면 그 두 분은 동기를 찾기가 어렵겠군요. 이거 고민인데요..."

 

- "고민을 더 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아쉽게도 변호사님이 기대하시는 주간지 기사 같은 분위기는 없었으니까요. 20년 만에 연락이 됐을 때는 다들 반가워했지만 두어 번 만난 뒤에는 곧 시들해졌어요. 원래 다 그렇지 않습니까, 추억이란 게 향수에 젖는 건 딱 거기까지였어요. 의재는 창순이하고의 동업에 열을 올렸고, 현이는 해나하고 열애하기 시작했으니까요... 아, 그나마 제가 제일 의심스러운가요?"
"다른 분들보다 더 그런 건 아니죠."

- "아니 어쩌면 방어장치인지도 모르죠. 너무 심각해지지 않도록 말이죠."
"방어장치라."
"사랑의 아픔이란 누구나 쉽게 견딜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조금은 예상 밖의 말이었기에 고진은 한연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 전 노래를 무척 좋아합니다. 음악은 대부분의 고통을 치유하죠. 사람들은 사랑과 이별을 노래한 가요를 들으며 추억에 잠깁니다. 비 오는 날에는 달콤한 회상에 빠지기도 하죠. 하지만 사랑으로 인한 고통이 너무 심하면 그런 이별 노래들이 절대 위안이 못 되는 곳까지 가버릴 때가 있습니다. 노래조차 치유가 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면... 사람이 택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요?"

- 한연우가 피식 웃었다.
"그건 변호사님 나름의 방어 장치인가요? ... 하긴 사랑의 아픔은 경험 삼아 한번 겪어 보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니겠죠."
휘이. 고진은 대답 없이 휘파람을 짧게 불었다. 익숙하지 않은 대화였다. 한연우는 읊조리듯 말을 이었다.
"사랑은 필연적으로 손해를 보는 게임이에요. 시작될 때 갖는 잠깐의 설렘을 제외하면 천상의 행복 따위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반면에 깨어질 때면 무자비한 고통이 따라오죠. 하나둘 상처가 늘수록 우린 이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게 되고... 그래서 찬 개울물에 발을 담그는 사람처럼 살짝 걸쳤다가 얼른 뺄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둡니다. 결국 우리가 나이 들며 익숙해지는 건, 가볍게 걷어내 버릴 수 있는, 물 위에 뜬 기름 같은 사랑? 그렇게 되는 게 아닌가 싶군요..."

- "하긴 그 일을 생각하면 기분이 썩 좋지는 않으실 테죠."

"네."
"그 시합의 승리자가 남편인 신창순 씨였던 거니까."
고진이 확인하듯 말했다.
한연우는 입술을 조금 움직여 대꾸했다.
"아뇨. 승자는 저였습니다."

- 김명진은 말없이 테이블 위 어딘가에 시선을 보냈다. 고진이 한번 더 다짐을 받듯 말했다.
"검사가 아무리 주장해 봐야 소용없거든요. 외부에서 증거를 대봤자 무시하면 그만입니다. 어디까지나 부부 사이의 일이다. 김명진 씨가 그렇게 말한다면 어떤 다른 증거를 들어 반박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김명진의 어두운 낯빛은 회복되지 않았다. '검찰 측의 증거가 부족하다, 이대로는 곧 나갈 수 있다'라는 이성적인 설득은 김명진의 어디엔가 자리 잡고 있을 정서적인 영역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것 같았다. 고진에게는 미지의 지대인지도 모른다. 지구에서는 볼 수 없는 달의 뒷면. 

- "변호사님은... 의뢰인이 무죄라고 믿지 않으면서도 무죄라고 변호할 수도 있는 거군요."
고진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법에서 말하는 무죄란, 죄를 짓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증거가 부족하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그럼 역시 변호사님은..."
고진은 그녀의 반응을 무시하고 말을 이어 붙였다.
"그리고 변호사는 무죄를 믿어 주는 사람이 아니라 무죄를 입증하려는 사람이고요."

- 고진이 반대신문을 모두 생략하고 변론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는 모습 또한 의도적이고 전략적인 연출이 아닐까 싶었다. 부실한 검찰측 증거에 아득바득 다투다가 오히려 상대가 짜놓은 판에 말려들어 반대의 신빙성을 부여할 우려가 있다. 무언가 '다툴 만한 거리'가 있구나 하는 느낌. 무시 전략, 혹은 적극적으로 다투지 않는 편이 오히려 무고하다는 신뢰감을 줄 수도 있는 사건이다. 과연 이 정도에서 유죄평결이 나올 수 있을까. 

 

- 검사는 넥타이를 조금 풀었다. 이어 책상 위 노트북 화면으로 얼굴을 숙였다. 오른손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유현은 문득 배심원석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쪽에서 굵은 탄식이 들린 탓이다. 중년 남자 배심원이 낸 소리였다. 이어 이번에는 방청석에서 으음, 하는 신음소리가 여기저기서 솟구쳤다. 왜 그러지. 두리번거리던 이유현은 검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검사는 스크린에서 눈을 떼고 방청석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모른 척 시치미 떼는 눈빛. 
배심원과 방청객의 시선이 한 점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법정 벽면의 스크린이었다. 이유현도 그제야 그곳으로 눈을 돌렸다. 
하얀 스크린에는 국과수의 소견서가 사라지고 대신 다른 문서가 떠 있었다. 조금 전의 소견서와 마찬가지로 노란 형광펜으로 어떤 부분이 굵게 색칠까지 되어 있었다. 
[남편을 죽이지 않았다는 피검사자의 대답은 거짓으로 판명되었음.]
이유현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서류였다. 김명진에 대한 거짓말탐지기 분석 결과였다. 그리고 그건 고진이 동의하지 않아 법정에 나올 수 없는 서류였다. 

- 이유현은 변호인석에 앉은 고진을 힐끔 보았다. 고진은 각진 턱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화면을 골똘히 쳐다보고 있었다. 돌발적인 사태에 그도 당장은 화면에 비친 서류를 읽어 내느라 정신이 빠져 버린 것 같았다. 조현철만은 스크린을 보고 있지 않았다. 시선을 배심원석으로 향한 채 법정 안의 소요를 분명히 음미하고 있었다. 
이유현은 조현철 검사의 의도와 지금 이 순간의 행동까지 순간적으로 모두 이해했다. 배심재판을 신청한 것도, 부족한 증거에 자신만만했던 이유도, 그리고 지금 분명히 자신의 손가락으로 터치패드를 조작해 놓고 모르는 척 엉뚱하게 방청석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시간을 번 행동도. 
재판장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검사님, 엉뚱한 화면이 나왔습니다. 화면을 바꿔 주시죠."
"아, 그렇습니까."
검사는 그제야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노트북 터치패드를 몇번 두드렸다. 잠시 후 스크린에서 문서 화면은 사라졌다. 하지만 이미 법정 안의 모든 이가 내용을 읽기에 충분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 "지금 보신 부분은 증거능력이 없습니다. 배심원 여러분은 증거판단에서 지워 주십시오."
재판장이 말했지만 너무도 공허하게 들렸다. 이미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눈이 이미 보아 버렸다. 지워질 리가 없었다.

- 이유현은 수사할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김명진은 물론 유력하고 유일한 용의자였고 심각하게 의심스러웠지만, 살인을 했다고 단정 짓지는 못했다. 불구속 상태에서 하염없이 수사가 길어지려나 싶었다. 그랬던 이유현이 그녀가 유죄라고 확신한 계기가 있었다. 거짓말탐지기 분석 결과가 나온 때였다. 
배심원은 물론, 판사, 방청객까지, 얼마 전 이유현이 결과를 접했을 때와 비슷한 당혹감을 지금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지울 수 없는 짙은 의혹을 마음에 드리운다. 이유현은 그랬었다. 이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효과는 극적이었다. 강하게 대놓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스치듯 비쳐졌기에 오히려 깊게 각인되었다. 법정 안은 증거법칙이 지배하지만 사람의 심리란 따로 있다. 그러지 않을 리가 없다. 

- '남편을 죽였는가'라는 질문에 김명진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은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갈등하던 이유현에게 유죄라는 심증을 주었던 그 사실을 배심원들도 바로 눈앞에서 확인한 것이다. 
 
- 고진의 대답에 한연우가 움찔했다.

"물론 유죄라고 믿지도 않습니다."

"무슨 얘깁니까."
"한 교수님이 지난번에도 그러셨죠. 김명진 씨의 무죄를 믿지도 않으면서 변론을 하려는 거냐고. 저도 그 점이 문제라는 겁니다."
"... 무슨 말씀입니까."
한연우가 눈을 껌벅였다. 고진은 느긋하게 커피 잔을 기울였다.
"변호사란 존재는 어떻게 보면 이율배반적입니다. 스스로 모순을 안고 있어요. 단순하게 말해서, 민사사건에서 원고나 피고 둘 중 하나는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렇다면 변호사도 50%의 확률로 거짓말쟁이 편에 서서 일한다고 볼 수 있죠. 그러면서도 변호사들은 서로 자기 의뢰인이 옳다고 적극 다투죠. 증거를 두고 상식으로 생각하면 뻔히 보이는 결말 앞에서도요... 과연 정말, 그렇게 믿는 걸까요? 형사사건은 어떻게 보면 더합니다. 기소된 사건의 95% 이상이 유죄 판결을 받습니다. 그 무죄도 법리상 무죄나 증거 부족 무죄를 빼고 나면, 정말 억울한 무죄 사건은 가뭄에 콩보다 드물죠. 그런데도 대부분의 형사 변호사들은 자기 의뢰인이 억울하다며 입에 거품을 뭅니다. 전 국민이 다 아는 살인자를 변호하면서도 변호인 혼자만은 무죄라고 확신한다며 강변합니다. 마치 변호사용 상식이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 그렇게 믿는 걸까요? 아니면 단지 그가 돈을 지불하는 의뢰인이기 때문에 그러는 걸까요? 그 이성이 확률의 편에 선 이성입니까? 뻔한 범죄자를 변호한다는 여론과 양심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혼자만의 신념이라는 장막 뒤로 숨는 건 아닐까요?" 
한연우는 물끄러미 고진을 쳐다볼 뿐이었다.

- "그게 변호사로서 편한 방식일지는 모르죠. 내 의뢰인이니까 무조건 무죄이며, 소송에서 이겨야 한다는 믿음, 혹은 믿지 않지만 의뢰인을 믿는 척함으로써 자신의 양심과 세상의 비난을 무마하는 코스프레. 하지만 글쎄요, 그것도 나름의 합리성은 있겠습니다만 전 아무튼 그런 방식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네요." 
솔직한 화법이 한연우의 경계심을 풀어 준 듯했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 사람은 말이 통할 수 있구나 하는 느낌 정도는 주었으리라. 날이 섰던 한연우의 얼굴이 풀렸다.

- "다만 김명진 씨 사건도 마찬가지란 거죠. 거짓말했다고 믿으면서 그걸 기초로 변론할 순 없단 겁니다. 같잖게 정의니 뭐니 그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솔직히 전 누가 정의를 가지고 있느냐는 관심 없습니다. 누가 돈을 가지고 있느냐에 더 관심이 있죠. 돈을 지불한다면 어떤 의뢰인이든 그에 걸맞은 비즈니스를 제공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제 이성 때문이 아니라 그 돈 때문에 이 사람이 정의다, 무죄다 외치기에는 스스로가 낯간지러워서 말이죠." 

- 재판장이 무의식적으로 작게 고진의 말을 따라 했다. '다음'이 있다는 게 무척 의외였던 모양이다.
"거짓말탐지기 분석에 대한 증거조사를 요청합니다."
열리려던 재판장의 입이 도로 닫혔다. 이유현은 자기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형님이 궁지에 몰리니까 악수(惡手)를 남발하는 거 아닌가. 재판장은 입가에 손을 대고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그는 거짓말탐지기 분석을 슬쩍 넘어가 주려 했던 모양이다. 비록 변호인이 지난번 기일에 증거동의를 했지만 정말로 그런 의지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으리라. 검사 측이 비열하게 거짓말탐지기 조사 결과를 스크린에 흘리기까지 했으니 피고인에게 한 번은 기회를 주어야 했다. 그래서 핵심적인 증인이 있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중시해 기일을 속행했던 것 같다. 거짓말탐지기 부분은 어물쩍 생략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기어이 변호사가 거짓말탐지기 분석에 대한 증거조사를 하자고 나왔다. 판사는 예상치 못했던 것 같다. 이유현도 마찬가지였다. 조현철도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진을 바라보았다. 
"정말 증거조사를 원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재판장은 곤혹스럽게 이마를 찡그렸다.
"검찰이 제출한 거짓말탐지기 조사는 피고인이 동의한다 해도 증거능력을 부여하기 어렵습니다. 증거로 채택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증거조사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재판장이 말했다. 그는 명백히 피고인 측을 도와주고 있었다. 거짓말탐지기 조사 결과를 속속들이 배심원들이 보게 된다면 김명진에 대해 치명적으로 나쁜 인상을 받게 된다. 변호사의 멍청한 짓을 보다 못해 판사가 차단하고 나선 것이다.

- "검찰 측 증거로 제출되지 못한다면."
고진은 앉지 않았다. 
"피고인 측에서 증거로 제출하겠습니다."
법정이 크게 술렁였다. 방청석에서 이런저런 말소리가 들렸다. 형사재판에서의 증거법칙 같은 건 모른다 해도 이건 상식적으로 터무니없었다. 피고인이 거짓말했다는 분석 결과를 피고인이 증거로 내겠다고?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피할 도리는 없었다. 검찰 측에서 증거를 내는 경우와 달리 피고인 측에서 제출한다면 원칙적으로 증거능력 문제는 없다. 형사소송법상 증거능력을 둘러싸고 거미줄처럼 쳐져있는 증거법칙들은 전부 검찰 측을 겨냥한 제약이다. 자신을 방어해야 하는 피고인은 사실상 아무 증거나 던질 수 있는 것이다. 일단은 법정에 등장하게 되고 어떻게든 증거조사를 해야 한다. 

- "증거조사의 방법으로, 먼저 거짓말탐지기 조사 당시의 영상을 통째로 틀어 주기를 요구합니다."
고진이 이어 말했다. 재판장은 잠시 고진을 마주 보았다. '이 사람이 진심인가?' 하는 눈이었다. 혹은 바보짓을 되돌릴 마지막 기회를 주려 했는지도 모른다. 잠시 후 판사는 할 수 없다는 듯 입술을 실룩하고는 말했다. 
"알겠습니다. 동영상 틀 준비를 하세요."

- "하지만 그 조사의 오류가 드러났으니 피고인을 구속했던 가장 큰 이유도 사라졌습니다. 피고인에 대한 재판이 검찰의 요청으로 속행된다면 피고인은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검찰의 편의 때문에 피고인이 구금 생활이 연장되어선 안 됩니다. 피고인을 즉시 석방해 주십시오." 
검찰의 속행 신청 사유가 무엇이든 고진의 보석 신청에는 그것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이유가 있었다이유현은 고진의 노림수를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살인사건에서의 황당한 보석신청은 이 경우를 대비한 거였군. 거짓말탐지기 결과를 뒤집어 이날 곧장 배심원의 무죄평결을 받아내면 가장 좋겠지만, 재판이 입맛대로만 될 순 없다. 틀림없이 조현철 검사가 공판 속행을 강력하게 요청해 올 거라고 생각했으리라. 이땐 그것과 맞바꾸어 피고인의 석방을 재판의 공평한 처리로서 당당히 요구한다. 검찰 측 사정으로 재판이 연장되는 것이다. 만약 피고인이 무죄라면 그 탓에 더 구금되는 셈이다. 그건 동의할 수 없다는 뉘앙스, 도무지 거절할 명분이 없다. 
상당히 유리한 거래다. 재판 결과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다음 기일에 조현철이 어떤 증거를 들고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하지만 보석으로 당장 석방된다면 이날 무죄 판결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재판은 끝난 거나 다름없다. 신체가 당장 구금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도 크지만, 살인사건에서의 석방은 그 자체로 '얼마나 증거가 부실하면 그럴까' 하는 인상을 심어 준다. 재판에 직접 참여하는 배심원들 스스로도 그런 암시를 받을 게 틀림없다. 그리고 사람의 심리란 게 묘해서, 이미 구금된 사람에게 몇 년의 징역형을 내리기는 쉬워도 멀쩡한 사람을 눈앞에서 구금하는 결정을 내리기란 어렵다. 더구나 구금되었다가 보석결정으로 일단 나온 피고인을 나중에 다시 구금하도록 결정하기란 더욱 어렵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머리를 당겼다가 다시 눌러 버리는 격이다. 판사들이 법정구속에 신중한 이유도 비슷하다. 잠정적 무죄라고 해도 좋다. 

- 재판장은 좌우 배석판사와 잠깐씩 상의를 했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모양이나 표정으로 보아 어떤 결론을 낼지 대충 짐작이 갔다. 재판장은 얼굴을 정면으로 되돌리고 말했다. 
"우리 재판부는 공평하게 양측의 요청을 다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례적이지만 이 재판은 한 번 더 속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이례적이지만 피고인에 대한 보석신청을 허가하겠습니다. 보석 보증금은 보증보험증서로 대체해도 좋습니다."

- "슬픈 김명진이라고요...?"
"찢기고 깨지기 직전의 그런 것 말이죠. 색칠되기 전의 새하얀 캔버스, 지켜주어야 할 완전무결한 백색. 그게 제가 명진이에게 가졌던 느낌입니다."
"그게... 그래서요?"
고진의 말이 꼬였다.
"지금의 명진이는 제 생각과는 많이 달라졌어요. 예전의 명진이는 아니에요. 더 이상."
"혹시, 그럼. 단지 어제 밝게 웃었다는 이유로 그게 달라졌단...?"
한연우는 잠깐 침묵하다가 엉뚱한 화제를 꺼냈다.
"고대 로마의 작가 페트로니우스가 쓴 <사티리콘>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거기에 유리 직공 이야기가 나오죠."
고진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한 유리 직공이 오랜 연구 끝에 깨어지지 않는 유리잔을 만들어냈습니다. 그걸 황제에게 상납하죠. 황제는 그 잔을 곧장 바닥에 던져 보았는데 잔은 역시 깨지지 않았습니다. 황제는 어땠을 것 같습니까?"
한연우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황제는 기뻐하기는커녕 그 유리 직공의 목을 쳤습니다. 유리는 깨지기 때문에 유리이며 그 불안함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거라고. 만약에 유리가 깨지지 않는 거였다면 그 아름다움이 돋보일 리 없다, 깨진다는 긴장감이 있기 때문에 유리는 아름답게 빛나는 거라고, 깨지지 않는 유리잔은 그 무미건조함으로 미(美)를 모독하는 물건이라고. 그래서 황제는 분노했던 거죠." 

- "김명진 씨가 유리 같다는 겁니까?"
한연우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 명진이는 자주, 크게 웃었죠. 하지만 그건 슬픔이 깃든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웃음이었죠. 항상 몇 배 더 크게 울었습니다. 전 그 명진이를 좋아했습니다. 어제 밝게 웃는 모습은 명진이가 아니었어요. 억울한 혐의를 벗었으니 이젠 인생이 장밋빛으로 변할 거라고 믿기라도 하는 걸까요. 살인자로 법정에까지 섰다가 겨우 구제되었는데 그 치 떨리는 상황을 벌써 잊는단 말입니까." 
"한 선생님은 잘 깨지지 않는 코렐 같은 그릇은 아무리 쓸모가 높아도 값어치가 없단 거군요. 대부분의 주부들은 견해가 다를 것 같은데요."
한연우는 고진의 이죽거림을 받아주지 않았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이젠 자신에게 닥친 불운을 뼈저리게 자각하지도 못하는 바보가 되어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자아가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한 마음의 방어기제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어쨌든 불행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달까요. 어이없고 근거도 없는 긍정만이 남았습니다. 비극이 사라진 비극에 어떤 매력이 있겠습니까."
한연우는 고개를 돌렸다.
"솔직히 이젠 어떻게 되든 관심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냥 제 마음이 그러네요. 법정에 나가지 않더라도 절 찾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아 주세요."

- 고진은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한연우는 분명 진심이었다. 그가 말하는 변심의 이유도 통념에서 벗어나 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한연우라는 이 인물은 종잡을 수 없는 면이 있다. 별것 아닌 화제에 조심하다가 어느 순간 내면의 이야기를 함부로 털어놓는다. 이 기묘한 균형 감각은 그가 문학을 전공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는 것 같지만 어쨌든 보통 사람과는 다른 감성 안에서 사는 건 분명했다.
고진은 작별 인사를 건네고 천천히 연구실 문으로 걸어갔다. 고진은 문손잡이를 잡은 채 고개를 돌려 말했다.
"한 선생님은... 살아 있는 김명진이 아니라 김명진이라는 관념을 좋아하신 것 같군요."
"그렇게 해석하셔도 좋습니다. 어느 쪽이든 내 마음이니까요."
한연우는 희미한 웃음으로 고진을 배웅했다.
연구실 문이 닫히는 순간 알코올 향이 훅 번졌다.

-  "자, 어떨까요? 남편이 사용하던 낚싯줄을 아내보다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신창순 씨가 한국에서 다원파이버의 낚싯줄을 구입한 기록이 있는지, 증거를 내주십시오."
고진이 말했다. 조현철은 대응을 피해 버렸다.
"그런 게 꼭 필요할지는 배심원 여러분들이 판단해 주십시오."
배심원석을 향해 말했을 뿐, 고진 쪽으로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이건 치사한 수법이다. 이유현은 속으로 욕을 했다. 법리적으로는 공소사실의 입증 책임이 검찰에 있으니 고진의 입증 요구는 정당했다. 하지만 검사는 배심원의 판단 사항인 것처럼 만들어 버렸다. 그들 중 일부는 이 정도로 의혹이 입증되었다고 판단해 버릴지 모른다. 

- "그러니 징계니 뭐니 하는 기록은 결국 남지 않았어요. 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된 거였습니다."
말투에서 신창순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역력히 드러났다. 세월이 한참 지났음에도 여전히 앙금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조현철은 자리로 돌아갔다. 증언의 마지막 부분은 그에게 큰 관심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유현은 불쾌했다. 의뢰인의 억울한 사정은 도외시한 채 자신이 사건의 이면을 주물러 왔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위창남의 증언은 이유현의 정의감을 깊숙이 건드렸다. 표 나게 나쁜 짓을 하지는 않지만 실은 나쁜 짓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뿐인, 자신을 특별하다고 여기는 자가 풍기는 은밀한 역겨움. 차라리 울컥한 감정에 솔직해 죄를 짓는 쪽이 이 사람보단 더 인간적이다. 이유현은 고진을 보았다. 이런 자에 대한 반감이라면 자신 못지않을 텐데. 그 역시 배기가스 냄새라도 정통으로 맡은 듯한 낯빛이었다. 


- "반대신문으로 증인한테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위창남은 말없이 턱만 쳐들었다. 고진이 자신보다 젊어 보여서 은근히 '선배 변호사'로서의 권위를 세우려는 듯했다. 고진이 변호사이면서도 변호사 사회에 아무런 미련이 없는 인물이라는 걸 그가 알턱이 없다.
"증인은 알고 있었단 얘기군요."
 
- 신창순의 전과 기록에 주목을 했더라면. 수사 과정에서는 용의자의 전과 기록만이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것도 언제 어떤 죄목으로 처분을 받았는지에만 관심을 둔다. 주로 누범 기간에 해당하지 않는지, 집행유예 기간은 아닌지 하는 법률 적용 문제 때문이다. 범행 내용까지 살펴보는 일은 동종 범행을 반복했을 때 상습성 자료로 삼기 위한 경우 외에는 거의 없다. 더구나 피해자의 전과 기록을 살펴보는 일이란 전혀 없다. 범죄의 피해를 입은 사람의 범죄 전력을 조사한다는 발상 자체가 모순인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의 특수성을 간과했다. 부부간에 발생한 일이었고, 동기가 불분명한 사건이었으니 신창순 측의 전과를 한 번쯤은 확인해 보는 일도 의미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로 지금 그 의미가 드러나지 않았는가. 

- 이유현도 혹시나 싶어 신창순이 수사받은 전력까지는 확인해 보았었다. 어린 시절 소년보호처분 한 번, 그리고 상해로 벌금 1회. 이유현이 확인한 건 목록과 처분 결과뿐이었다. 그게 이런 내용이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전과자라는 존재가 놀랍고 두렵겠지만 경찰 일을 하다 보면 모래알보다 흔한 게 전과 기록이다. 사실 주변의 멀쩡한 사람들도 수사 자료를 보면 음주운전이라든가 하다못해 향토예비군설치법 위반이라도 한두 건씩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피의자의 전과 조회를 했을 때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오히려 급격하게 이미지가 좋아지게 된다. 실제 재판에서 초범 운운하면서 선처를 받는 것도 그런 탓이 크다.

- 법정은 바람에 흔들리는 대숲처럼 술렁였다. 이유현도 놀랐지만 조금 다른 이유였다. 충격적인 증언 내용보다, 신창순이라는 인간의 이면이 밝혀지는 모든 과정을 지켜본 김명진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둑에 구멍이 난 것처럼 울음이 터져 나와야 할 일 아닌가. 그녀를 알던 남자들은 그녀가 울 때면 목을 놓아 엉엉 울었다고 했다. 아무리 세월에 깎여 무덤덤하게 변했다 하더라도 발가벗겨진 자신의 운명에 이렇게까지 무심할 수 있는 걸까. 
성공한 남자들에 혹해 착한 남편과 이혼하려고 살인을 저질렀다며 검사가 목청을 높였을 땐 가슴이 막혀 왔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내가 얼마나 힘들게 견뎌 왔는지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넘겨짚지 말라고, 사무치게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비록 원치 않은 시기와 장소에서, 검찰 측 증인의 입을 통해서라는 원치 않은 방법으로지만 어떻든 이제 자신의 과거가 통렬히 공개되었다. 가슴 깊이 숨긴 남편의 악행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서러움에 가슴을 치며 눈물을 쏟아낼 법도 하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마치 타인의 소문을 듣는 사람처럼 담담했다. 이 의연함이 반드시 그녀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만은 않을 텐데. 어떤 무의식이 자제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어쩌면 갖고 싶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닌 자기 방어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약하디 약한 속살을 보호하려 생겨난 조개껍질처럼.
울고불고하는 거짓말쟁이들이 법정에서 자주 승리하는 걸 이유현은 잘 알기에 그런 그녀가 안쓰럽기까지 했다. 김명진은 어쩌면 있는 힘을 다해 감정의 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눈물을 참고 있는지도 모른다. 

- 명진이 1년형을 받든 무기징역형을 받든 검사에게 큰 차이는 없다. 오로지 그녀가 유죄 언도를 받으면 된다. 그러면 기소는 성공이다. 통상의 경우 무죄를 받으면 수사한 검사와 공판 검사 모두 일단 평점이 깎이지만, 유죄 판결만 받아내면 문제는 없다. 형량이 얼마든 사실 그들의 큰 관심사는 아니다. 그건 판사나 배심원이 재량으로 정하는 영역이니 검찰은 어쩔 수 없다는 논리다. 하지만 결론 자체를 뒤집는 무죄 판결이 나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건 수사를 잘못했거나 공판 수행을 잘못했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것이니까. 그래서 검찰은 무죄 사건에는 치를 떨며 100% 항소한다. 억울한 사람을 법정에 세운 게 아니라는 무언의 항변이다. 특히 이번 사건처럼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사건에서 유죄를 향한 검찰의 의지는 상상을 초월한다. 
피고인의 입장도 어떻게 보면 반대의 측면에서 닮아 있다. 만약 피고인이 억울하다면 형을 얼마큼 받느냐는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오로지 무죄만이 가치를 가진다. 설사 선처를 받아 짧은 형을 받는다 하더라도 살인자의 낙인을 찍는 유죄판결은 그 자체로 피고인에게 통분할 일이다. 

 - 재판장은 그제야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래도 그렇게 일방적으로 일어나서 발언하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지금 검사님이 너무 일방적으로 이야기하시고 있거든요."

김해나가 물러서지 않자 오히려 판사가 조금 물러섰다.

"그럼 피해자 측으로서 뭐 꼭 하실 말씀이라도 있는 건가요?"

"네. 너무 억울해서요."

 

- 재판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정식으로 지금 증인 채택 절차를 밟아서 발언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김해나는 그러겠다며 법정 앞으로 성큼 나섰다. 고진이 말릴 새도 없었다. 그 옆에 앉았던 남궁현은 난처한 듯 자신의 뒷머리를 쓸었고, 임의재는 팔짱을 낀 채 미간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다.

- 이유현은 그다지 좋지 못한 전개라는 생각을 했다. 고진도 낭패스런 표정이었다. 반면 조현철 검사는 느긋한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듯이, 판사가 피고인 측 가족의 돌발적인 행동을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정식 발언 기회를 주었다는 건 피고인에게 유리한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를 암시하는 상황이다. 어차피 이길 상대방이라면 구구절절 발언 기회를 줄 필요가 없다. 승소가 모든 걸 무마한다. 하지만 반대라면, 적어도 기회는 줘야 한다. 피고인의 유죄를 예감했기에, 할 말을 다 하게 해서 절차적인 만족감이라도 주고 재판 결과에 불만을 덜 가지게 하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종종 오해돼서 그쪽 당사자에 유리하게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고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 물밑의 흐름은 반대인 것이다.
여기서 김해나가 증언한다고 해서 도움이 될 리가 없다. 피고인의 가족이 늘 그렇듯이 흥분해서 언성을 높이거나 감정적인 발언을 해서 도리어 반감을 살 여지가 크다. 조현철 검사도, 이유현도, 고진도 이미 알고 있다. 밀물이 썰물로, 썰물이 밀물로 바뀌었음을. 판사는 김명진에게 불리한 심증을 이미 굳혔고, 같은 판단자의 입장에서 배심원들 또한 마음의 가는 길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 김해나는 증인석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앉았다. 선서를 하려고 손을 드는 걸 판사가 말렸다. 증인선서는 지난번에 했기에 필요 없다는 말과 함께.
"하고 싶은 말씀을 자유롭게 해 보세요."
재판장이 말했다. 자유롭게 말해 보라니. 새로운 사실을 캐내려는 의지가 전혀 들어있지 않은 말이다. 역시 이 증인신문은 모양 갖추기다. 이유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김해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켜더니 입을 열었다. 

- 하지만 죽일 놈이라고 해서 그녀가 실제로 신창순을 죽였다는 증명은 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는 그렇다.
김해나는 검사의 태도에 조금 감정적으로 반응한 듯하다. 그녀가 돌연 목소리를 높였다.
"언니는 신창순을 죽이지 않았어요. 하지만, 설사 언니가 죽였다고 해도 그건 정당방위 아니에요? 저게 짐승 잡는 거지, 사람을 어떻게 저렇게 때릴 수 있어요? 너무 겁에 질려서 차마 이혼소송을 낼 생각도 못 했대요. 신창순이 안 죽었으면 언젠간 언니가 죽었을 거예요. 맞아 죽든, 말라죽든." 
조현철이 빙긋이 웃었다. 김명진은 당혹스런 얼굴로 고진을 돌아보았다. 고진은 어쩔 수 없다는 양 손바닥을 펴서 마주 들었다. 이유현은 어이가 없었다. 김해나의 돌발 행동. '죽였다고 해도 정당방위'라니. 이건 패착이다.

- 무죄를 다툰다면, 더구나 '살인'쯤 되는 사건에서 본인이 억울하다면 어디까지나 철저히, 단호하게 부인해야 한다. 오리발을 백 번 내밀어야 믿어 주는 사람 하나가 있을까 말까다. 그런데 정작 피고인 본인이, 만약에 내가 죽였다 하더라도 사정이 있었다는 식으로 미적지근한 주장을 해버리면 무죄라고 외쳐 주려던 사람들도 맥이 빠져 버린다. 민사에서는 이런 종류의 예비적인 주장이 자주 있다. '그 증서는 상대방이 써 준 차용증입니다, 설사 차용증이 아니라 하더라도 지급보증의 의미로 준 것입니다.' 하는 식으로, 왼손 스트레이트가 안 먹히면 오른손 훅을 찔러보는 것이다. 유효하고 필요한 전략이다. 하지만 형사사건에서는 한번 스트레이트를 뻗었으면 주구장창 그걸로 써야 한다. 오리발을 내밀었다가 닭발로 바꿔 내밀어서는 안 된다. 단일하고 절대적인 사실을 입증하고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에'라는 유보적인 태도는 금물이다. 본인이 흔들리지 않아야 믿어 주는 이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김해나는 지금 자기감정에 빠져 재판을 그르치고 있었다. 
이유현은 복잡한 상념에 빠져 증인석을 떠나는 김해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남편이 없어졌으면? 그렇게 말한 겁니까, 아니면 그런 뜻으로 말한 겁니까?"
"몇 달 전 일이라 그대로 기억이 나진 않아요. 어쨌든 그런 뉘앙스로 고민을 토로했던 건 맞아요. 뭐, 예전에도 막 활발한 애는 아니었지만 그때보다 말수도 더 적고, 그랬어요. 어쨌든 제가 그렇게 알아들은 거니까... 그러면서 규란이한테 들은 저 이상한 변호사님 이야기가 생각이 난 거예요. 듣기로는 제대로 된 사무실도 내지 않고서 법정에도 절대 안 나간다고, 은밀하게 사건을 맡아서는 법의 허점을 이용해서 사건을 확실하게 해결한다고. 합법적으로 남의 재산을 빼앗거나 심지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나. 그땐 그렇게 들은 것 같았는데, 그건 아무래도 좀 제가 과장해서 기억한 거였던 것 같아요." 
구옥영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묻지도 않은 변호사 소개 과정까지 단번에 증언해 버렸다. 아마 검사와 사전에 조율된 증언이리라. 배심원들의 안색이 굳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이제 김명진이 아니라 고진을 향해 있었다. 지독한 불신과 함께. 

- 고진은 무표정했다. 하지만 내면의 파장은 작지 않을 것이다. 졸지에 법정 안에서 협잡꾼 이미지를 뒤집어썼다. 이건 김명진에게는 더욱 치명적이다. 피고인의 입이 되는 유일한 사람인 변호사에 대한 배심원의 신뢰에 금이 갔다. 그가 지금까지 했던 주장과 앞으로 할 주장에 무게가 실릴 수 있을까. 검사는 구옥영의 신문을 통해서 피고인 본인뿐 아니라 그를 옹호하던 변호사마저 쏘아 떨어뜨려 버린 것이다. 조현철은 거기다 확인사살까지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확실히 저 변호사님은 법정에선 보기 힘든 분입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안다고 하지요. 법정 밖에서 법의 허점을 이용해서 사건을 탈법적으로 해결하고 상대방을 엿 먹이는 일을 주로 하신다고요. 그런 특징들 때문에 뒷구멍 변호사라는 별명이 붙어 있기도 한데, 그런 것도 알고 있습니까?" 
지독한 모욕이었다. 게다가 별명까지 질 낮은 걸로 바꾸었다. 분명 의도적인 것이었다. 조현철은 발언이 도중에 제지를 받더라도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고진의 수상한 실체를 배심원들에게 각인시키려는 모양이다. 고진이 일어섰다.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 대신 빈정거림이 섞여 있었다.

- "검사님, 그런 발언은 삼가 주십시오. 인신공격이 될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조현철의 얼굴은 흐뭇해 보였다. 이미 목적은 달성한 것이다. 그는 다시 구옥영에게 향했다.
"그래서 김명진 씨의 의뢰와 어울리겠다 싶어서 저 변호사님을 소개해 주었단 얘기군요."

- "반대신문 있습니까?"
재판장이 고진을 향해 물었다. 형식적으로 들렸다. 이유현은 고진 대신 마음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 악의에 찬 아줌마를 상대로 반대신문을 할 이익이 있을까. 저런 증인은 말을 더 시켜 봤자 거꾸로 이쪽이 더 타격만 입게 될 터였다.
하지만 이유현의 생각과 달리 고진은 "있습니다."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그리고 그 상대방은 사무실도 없고 법정에도 나가지 않는 정체불명의 요상한 변호사이며, 그 변호사가 지금 법정에서 변론을 펼치고 있다. 그 변론을 배심원들이 믿어 줄 것인가. 피고인과 변호사의 말에 이제는 어떤 믿음도 가질 수 없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런 고진이 구옥영을 상대로 무엇을 물을 수 있을까. 이유현은 걱정되었다. 구옥영처럼 일방적인 악의를 가진 증인을 상대로는 아무리 신문을 해봤자 절대 득이 되는 일은 없을 텐데. 피고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기회만 더 줄 뿐이다. 

- 구옥영은 엉겁결에 대답했다. 그러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잠깐만요. 무슨 의도로 그렇게 물으시는 거죠?"
"반대신문을 마치겠습니다."
고진은 자리에 앉아 버렸다. 이유현은 보았다. 구옥영만이 볼 수 있는 각도와 찰나 속에서 고진이 남의 속을 확 긁어 버리는 예의 그 비릿한 비웃음을 띠었음을.  

- 재판장이 다시 나섰고, 조현철은 또다시 "알겠습니다." 하며 반발짝 뒤로 물러났다.
고진은 멍한 시선을 법정 한구석으로 보내고 있었는데, 부글거리는 심사를 숨기려는 품이 역력했다. 바깥이었다면 끊었던 담배를 꼬나물었을 법했다. 
"변호사님은 김명진이 구속된 후에 사건을 맡은 걸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전에 이미 김명진을 만났던 것입니다. 왜 굳이 숨겼을까요? 법정에 절대 나오지 않는 저 변호사님이 왜 이번 사건에서는 법정에 나와서 변론을 하고 있는 걸까요? 혹시 자신이 의뢰를 거절한 탓에 김명진이 남편을 직접 죽이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고서 일말의 책임감을 느껴서는 아닐까요?" 
여전히 고진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유현이 더 조마조마했다. 고진은 어처구니없는 공격을 견뎌 내는 도라도 닦고 있는 것일까.
"DNA와 지문만 없을 뿐 범행 입증의 모든 요소가 갖추어졌습니다. 피고인이 남편을 살해했다는 건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그러자 아까 피고인의 동생이 이렇게 주장했죠. 이건 정당방위라고." 
또다시 조현철이 말을 끊고 배심원들을 보았다. 이유현은 울컥 짜증이 밀려왔다.

- "틀립니다. 정당방위는 당장 급박한 공격이 있을 때 그걸 피하기 위한 행위를 말하는 겁니다. 누가 막 몽둥이를 들고 습격해 올 때 공격을 피하기 위해 그자를 때려눕히는 행동 같은 것 말입니다. 이 사건에서 그랬습니까? 신창순이 피고인을 그날 그 뒷골목에서 먼저 습격했습니까? 아니죠. 범인은 낚싯줄을 신창순의 뒤에서 감아 죽였습니다. 신창순이 먼저 습격했다면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마도 피고인 측은 평소에 무지막지한 폭력이 있었고, 그 때문에 남편을 죽였으니 정당방위라고 주장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틀립니다. 신창순은 물론 나쁜 인간입니다. 혼이 나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죽어야 할 놈은 아닙니다. 그는 어쨌든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피고인이 한 행동은 정당방위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폭력에 대해 또 다른 폭력으로 갚은 행위에 불과합니다. 피고인은 함정을 파서 남편을 유인했고, 계획에 따라 목을 졸라 살해했습니다. 충동적인 살인이 아니라 사전에 정밀하게 준비된 모살입니다. 정당방위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피고인의 결혼생활은 비극이었고, 동정이 갑니다. 하지만 그것은 양형에서 참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피고인의 불행이 유죄를 무죄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피고인은 그게 남편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단지 잘못 판단한 겁니다. 정상적인 법 절차나 다른 방법을 통해 얼마든지 구제받을 수 있었습니다. 피고인은 두려워서 그러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직접 범죄에 나선 비약적 행동이 그녀가 마음이 약하다는 이유로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이것은 절도나 폭행처럼 결과를 되돌릴 수 있는 종류의 범죄도 아닙니다. '살인'입니다. 피고인은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올바른 방법을요. 하지만 그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인 복수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우리 법은 사적 구제(私的救濟)를 엄격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 "그러니까 그렇게 된 거군."
고진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자네가 무심코 조 검사한테 내 아파트 아래층에 사는 경규란을 소개해서 김명진 사건을 맡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거지."
"그랬어요. 그땐 가볍게 흘려 넘겼는데, 생각해 보니 김명진이 구속되고 나서 사건을 맡은 걸로 안다는 말에 검사가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 같아요."
"그전에 내가 김명진을 만난 사실을 검사는 알고 있었다는 얘기지.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과 자네 말이 다르니 그걸 이상하다고 느꼈던 거야. 그래서 날 소개했던 경규한테 이것저것 물어보았을 거고, 그러다 구옥영이란 여자의 이름도 나왔을 거고... 경규란은 김명진의 절친이었던 구옥영이 저런 증언을 할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겠지. 배배 꼬여 있던 구옥영과 달리 경규란은 콤플렉스가 없었으니까." 

- "김명진이 검찰에서 조사받을 때 얼핏 그런 얘길 했던 모양이야. 몇 시간씩 조사받다 보면 할 얘긴지 아닌지 헷갈리는 법이니까. 이해는 가. 더구나 그 말이 이런 식으로 활용되리라곤 생각할 수 없었을 거야. 날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그다지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된다고 여기지 못했을 테니까. 자네가 이렇게 뒤늦게 경규란과의 인연을 검사에게 말할 거라고는 예상할 수 없지 않았겠어?" 

- "형님이 생전 처음으로 법정에까지 나섰던 건 처음의 의뢰를 거절한 데에 결과적으로 어떤 책임을 느껴서였습니까? 이런 사태로까지 번진 것에..."
이유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고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 탓이잖아."
"네?"
"그 당시엔 사정을 몰랐어. 그렇게 지독한 놈한테 시달렸을 줄이야. 하긴, 남편을 죽여 달란 통에 웃어넘기고는 더 들어보려 하지도 않았지."
"뭐가 형님 책임이에요. 그럼 의뢰를 받아들여 신창순을 대신 죽여주기라도 해야 했단 말입니까?"
고진은 한동안 묵묵히 있다가 불쑥 말했다.
"... 이탁오 박사나 김진구라면 어땠을까?"

- 그의 돌연한 말에 이유현은 딱히 어떤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대신 그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날 의뢰를 받던 자리에 고진 대신 이탁오나 김진구를 머릿속으로 세워보고 있었다. 어땠을까? ... 어떤 경로로든, 누군가가 그때 신창순을 멈추었더라면 모두가 불행한 이런 재판은 없지 않았을까? 이유현은 경찰로서 할 수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는 급히 머리를 흔들었다. 고진이 화제를 되돌렸다. 
"김명진은 신창순을 죽여서라도 결혼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긴 해. 나한테 그런 의뢰를 장난으로 할 리는 없을 테고 말이지. 그날의 태도를 돌이켜봐도 그래. 하지만 말이야, 내가 거절한 후에 정신이 번쩍 들어서 그런 생각을 지웠다고 구옥영이나 경규란한테 이야기했잖아. 그것 또한 사실일 거란 생각이 들어. 살해 의사가 계속 있었다면, 나한테 그런 의뢰를 했다는 사실을 친구에게 털어놨을까? 이미 그때는 의사가 사라진 상태였다고 보는 게 상식에 맞지 않을까?"  
"하지만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경규란은 형님 바로 아래층에 살고 있었어요. 김명진도 그걸 알았을 거고, 형님을 소개한 걸 보면 꽤나 가깝게 지내고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이일 거라고 생각했겠죠. 그래서 형님이 자기를 만나고 나서 경규란에게 '그 여자 황당했다. 남편을 죽여 달라는 의뢰를 하더라.'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던 거죠. 그래서 미리 경규란이나 구옥영에게 해 둔 겁니다. 사실 그런 의뢰를 했다가 거절당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참 바보 같았다는 식으로, 이제는 완전히 살해 의사를 버린 것처럼 보이도록 말이죠. 또 남의 입을 통해 들으면 뭔가 엿들은 기분에 충격적으로 다가오지만 본인의 입으로 털어놔 버리면 뭔가 장난처럼 흐지부지되는 면도 있고요." 

 

 

- 고진이 고개를 홱 돌렸다.
"뭐야, 그럼. 그래서 자네가 잘했다는 건 아니겠지?"
"으음, 그건 아니지만..."
이유현은 말을 흐렸다.
"그래서 김명진한테 사과하러 가는 거잖아요."

두 사람은 지금 김명진이 입원한 목동종합병원에 찾아가는 참이었다.

- 김명진이 조그맣게 울먹이기 시작했다.
눈물은 일찌감치 맺혀 있었던 듯하다. 임의재의 윽박에 터져 버린 애달픔이 소리가 되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병실 안이 조용해졌다. 가늘게, 아주 가늘게 김명진의 흐느낌이 어스름 속 한줄기 모닥불 연기처럼 병실 안에 퍼졌다. 
침묵 위로 시간이 흘렀다. 임의재가 다독이듯 침상 위쪽으로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제 성질을 못 이겨 불타올랐던 임의재가 약간의 이성을 회복한 것 같았다. 아니면 전략을 수정했거나. 김명진은 조용히 임의재 손을 밀어냈다. 
이윽고 김명진이 양손을 얼굴로 가져가는 것이 보였다. 울음소리가 가늘게 새어 나왔다. 설움이 깊은 계곡에 깔린 메아리처럼 묻어 나왔다. 김명진이 울먹이며 말했다. 
"이렇게... 변해도 돼요?"
서운함, 세월의 무자비함, 그런 것들이 목소리에 깃들어 있었다. 이유현은 착잡했다. 재판 내내 운명에 굴하지 않겠다는 듯 의연한 김명진이었기에 지금 흘리는 눈물의 반향은 더 컸다. 

- "잘 생각해 봐."
임의재는 낮게 말했다. 굵은 목소리 탓에 오히려 다그치는 것처럼 들렸다. 자기 볼일에만 급급한 말투. 완전한 남인 이유현에게조차 공명을 일으킨 그녀의 눈물이 정작 예전에 그녀를 좋아했다던 임의재에게는 큰 감명을 주지 못한 듯했다. 적어도 9억 원을 잊을 만큼의 슬픔은 전해주지 못한 모양이었다.
"... 의재 오빠가 맞아?"

- "그럼 우리 형사님한테 이런 질문을 한번 해보죠."

돌연 질문을 하겠다는 남궁현의 태도가 불쾌하게 다가왔다.

"뭡니까."
"학교 폭력에 시달리다가 자살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또 모욕이나 무고에 항의하는 뜻으로 자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왜 그럴까요? 자기가 죽을 거라면, 폭력을 행사한 아이나 모욕이나 무고를 한 사람을 죽여 버리는 게 차라리 이익일 텐데요. 그걸로 감옥에서 한 15년 썩는다 해도 자기 인생을 끝장내는 것보다는 백배이익 아닙니까? 어쨌든 자신은 살아남았고 원수는 해치웠으니까 말이죠." 
"인생도 그런 계산이 통할까요? 남궁현 씨가 그렇게 계산에 밝은지는 몰랐네요."
"내가 하려는 얘기가 바로 그런 겁니다. 형사님들처럼 비열한 범죄자만 상대한 사람들은 잘 모르는 종류의 인간도 있단 겁니다. 애당초 그런 사람들은요, 상대한테 아무리 괴롭힘을 당하고 견디기 힘들어져도 자기를 파괴할지언정 남을 파괴하지는 못해요. 하지만 단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오히려 비난을 받기도 하죠. 왜 저렇게 바보같이 사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니냐, 그럴 리 없다, 하고요. 하지만 그런 친구들은, 쉽게 말하자면 그저 남달리 착할 뿐입니다. 남을 해칠 수 있을 만한 악의 자체가 마음에 없는 거예요." 
이유현은 더 대꾸하지 않았다. 내심으로는 조금 놀라는 중이었다.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남궁현이 의외로 진지한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임의재라는 친구를 정말 위하고 있다는 느낌. 늘 무심한 태도를 후광처럼 두르고 있던 남자의 맨 얼굴을 엿본 기분이었다.

- "잠깐 이야기 좀 해요."
경규란은 거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소파에 털썩 걸터앉았다. 머리를 뒤로 질끈 동여매고 검은 뿔테 안경을 낀 수수한 차림이다.

"술도 한잔?"
고진이 부엌 냉장고로 향하는데 경규란이 손을 내저었다.
"아뇨, 그냥 마실 거 하나만 줘요."
고진은 냉장고 문을 열고 빼곡히 들어찬 맥주 틈을 비집고 콜라캔 두 개를 꺼내 와 거실 탁자 위에 놓았다. 이어 접이식 간이 의자를 탁자 건너편에 가져다 놓고 경규란과 마주 앉았다. 경규란은 콜라에 손을 대지 않았다. 가구가 거의 없는 텅 빈 거실 공간을 한심하다는 듯 둘러보다가 고진에게 시선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 "일종의 삼각관계였군요. 먼지 같은? 뭐, 전 그 세 역할 중에 하나도 해본 적이 없어서... 공감은 가지 않지만 민망한 상황일 것 같긴 하네요."
고진은 무언가를 생각하듯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런 걸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하셨단 게 놀랍네요."
"그런 거라뇨?"
고진이 의아하다는 듯이 눈을 들었다.
"연애 말이에요."
"무슨 말씀. 충분히 했죠. 미녀를 보고도 찬탄을 보내지 않을 만큼 타락하진 않았어요."
"그런 건 연애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런가요. 뭐, 좋은 의견이군요."
고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경규란이 실소를 흘렸다.

- "김명진 씨를 둘러싸고는 그런 일이 그 한 번만 있었을 것 같진 않단 생각이 드네요. 20년 전의 달리기 시합도 마찬가지고."
"그럴걸요? 여성적인 면에서는 명진이를 따라갈 애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시샘받기도 하는 거겠죠. 옥영이가 명진이하고 친했으면서도 그러는 거 보세요." 
"어쩌면 그런 압도적인 재능이랄까 매력은 축복이 아니라 불행을 부르는 건지도 모르겠군요. 남자들은 원하면서도 그게 지나쳐 부수려 들고, 여자들은 가지지 못한 것을 부수어 놓기라도 하려 들고."
고진은 의자 등받이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잔뜩 비틀려 올라가는 나무 같은 형상이었다. 경규란은 몇 초 동안 물끄러미 고진을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고 변호사님은 인간을 참, 자신의 입술하고 비슷하게 보시는 것 같아요."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경규란이 대답했다.
"삐딱하게요."
하하하, 고진은 세 번째로 크게 웃었다.

- 호텔을 나서 윤태권이 이끄는 대로 도로가를 따라 언덕 아래로 걸었다. 재밌다면 재밌는 모습이, 도로의 주행 방향은 우리와 같은데 승용차의 운전대는 모두 오른쪽에 달려 있고, 반면에 버스의 운전대는 모두 왼쪽이다. 꽁무니의 브랜드를 유심히 보니, 승용차는 도요타, 닛산, 버스는 대우, 현대다. 버스에는 '부산진역'이라고 한글 안내판이 그대로 붙어 있기까지 했다. 이유현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도로 체계는 마찬가지지만 승용차는 일본에서, 버스는 한국에서 수입하다 보니 이런 뒤죽박죽의 시스템을 갖추게 된 것이다. 고진도 같은 것을 생각한 모양이었다.
"신창순이 한국 중고 버스 수출 사업으로 재미를 보려 했다더니 그럴 만한데." 
"저 버스는 신창순이 수출한 건지도 모르겠군요."
이유현은 지나간 '부산진역 행' 버스에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 호텔 1층에 붙어 있는 한국식당 해금강에서 저녁을 먹었다.
"이 맥주는 뭔가요? 번호가 적혀 있는데."
이유현은 식탁에 날아온 맥주병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병에는 키릴문자와 함께 숫자 3이 크게 적혀 있다.
"발티카라고 하는 러시아 맥주예요. 그중 3번이 우리 맥주하고 비슷하죠. 8, 9번은 거의 약한 소주입니다."
윤태권이 말했다.
"구수하고 달작지근하기도 하고, 색다른 맛인데요."
고진이 음미하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웨이터를 불러 9번 맥주를 따로 주문했다. 고진의 그 선택만은 이유현의 맘에 들었다. 알코올 함유량 8%.
"이건 거의 소맥인데?"
한 모금 들이켠 고진의 평가였다. 이유현도 그 말에 동의했다. 

 

- "여긴 어떤 뎁니까?"
고진이 맥주잔을 내려놓고 윤태권에게 물었다.
"어떻다뇨?"
"사람들은 서로 한 방 칠 듯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고, 날은 춥고, 전혀 감이 안 잡혀서요."
하하하, 윤태권은 크게 웃었다.
"여기 사람들이 좀 무섭긴 하죠. 뭐니 뭐니 해도 총기가 돌아다니는 곳이니까요."
"총기요?"
이유현이 놀라 물었다. 고진도 눈을 크게 떴다.

- "그래도 러시아인들은 덩치가 큰 만큼 쪼잔한 면은 없다고 할 수 있죠. 그런 점에선 각기 장단점이 있어요. 이 사람들하고 거래하려면 그거 하난 꼭 알아야 돼요. 러시아 말에 '잡트라'라는 단어가 있어요. '내일'이라는 뜻인데, 어떤 협상이든지 당일 오케이를 받고 사인을 받아내야지 내일로 미루면 안 된단 겁니다. 오늘 아무리 분위기가 좋아도 '잡트라'라고 하면 그 거래는 끝입니다. 그런 점은 남녀관계도 마찬가지예요. 러시아 아가씨들은 말이죠, 사귀다가 헤어지면 내일부턴 완전히 남이 됩니다. 다시 우연히 만나더라도 우리가 언제 봤느냐는 식이죠. 엄청 차갑죠. 우리나라 여성들처럼 안부 묻고, 미련 가지고 그런 거 절대 없어요. 하하하." 
윤태권은 러시아에 살며 얻은 감상과 경험담을 풀어놓았다. 이유현은 이야기를 들을수록 왠지 이 나라에 대해 그나마 남아 있던 친밀감이 점점 더 소진되어 가는 걸 느꼈다. 머리로는 그저 '차이'이고, '문화'일 뿐이란 걸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정서적인 거리감이었다. 

 

- "이곳은 항구 도시고 지리상 한중일 삼국의 접점 같은 곳이어서 나라별로 거래를 할 기회가 많습니다. 그럴 때면 그 나라 사람들 특성에 맞춰서 처신해야 합니다. 한국인들은 유독 정에 약하고 말발에 약하죠. 그래서 끈적끈적한 인간관계를 쌓아야 하고, 허세 섞인 화려한 언변이 먹힙니다. 약속을 한두 번 어겨도 말로 적당히 비비고 무마하면 아무 문제가 없고요. 중국도 한국하고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반면에 일본 같은 경우는 말발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과 거래하려면 깍듯해야 하고 상냥해야 하고 예의를 갖춰야 합니다. 무엇보다 약속을 잘 지켜야 해요. 그러면 다음번 거래도 보장이 됩니다..."
윤태권의 이야기는 아시아 삼국의 비교까지 이어졌다. 풍부한 경험이 녹아든 그의 화려한 언변에 고진과 이유현은 빨려 들어갔다.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어느새 자정이 다 되었다. 윤태권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더니 "그럼 내일 또." 하며 인사를 건네고는 먼저 자리를 떴다.

- 이유현이 불쑥 말머리를 꺼냈다.
"괜히 왔단 생각 드시죠?"
"왜."
"현장 확인이라면 구글 지도로 충분했을 텐데."
고진은 삐딱한 미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이번 휴가로 더 손해를 본 사람은 이유현이었다. 그가 후회를 부채질해 봐야 자신을 향한 게 될 수밖에 없었다. 

- "누군지는 몰라도 여기서 신창순을 해치운다는 계획이 탁월했다는 점은 인정해야겠네요. 한국에서라면 이 정도로 감쪽같이 해치우긴 어려웠겠죠."
"반면에 범인 입장에선 용의자가 대폭 줄어 버린 단점은 있지. 범인을 한국인으로 국한한다면 몇 명 안 되잖아?"
"결국 우리의 논리를 수긍하신 거군요."
"맞는 논리니까."
고진은 고개를 까딱했다. 이유현은 고진의 이런 점이 좋았다. 관점에 집착하지 않고, 사람에 열광하지 않으며, 논리라는 이유 말고는 어떤 고집도 피우지 않는다. 그의 뇌에는 강력한 쿨링 팬이 가동되고 있는 듯하다. 

- "제가 빠짐없이 재판에 참관했잖아요. 근데 형님이 왠지 열성적이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내가?"
"네. 검찰 측 증인에 반대신문도 변변찮았고, 검사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다투기보다는 그저 비꼬기만 하고,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영화에서 자주 보는, 피고인의 무죄를 확신하는 변호사의 열렬한 변론, 그런 게 안보였거든요." 
고진은 이유현의 말을 대놓고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맥주잔을 들이켰다. 이유현은 더 말을 이었다.
"제가 형님 성향을 알잖아요. 다른 변호사들처럼 그 의뢰인한테서 사건을 수임했다는 이유만으로 무죄를 믿는 코스프레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거. 오직 사실만이 중요하다는 거. 결국 형님은 김명진 본인이 직접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던 거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껏 재판에서 적극적이지 못했던 거 아닙니까?" 
정곡을 찌른 것일까. 고진은 빈 맥주잔을 빙빙 돌려 대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뭐, 내 마음이 그랬는지도 모르겠군."

- "그럼 뭡니까. 전부 의심스럽고 전부 애매하고, 하나마나한 이야기들 아닙니까."
"범행 동기란 게 원래 애매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잖아."
고진은 히죽 웃었다.
"그저 우리의 용의자 모두에게 동기가 있을 수 있단 걸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야.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살인 그 자체뿐, 살인을 한 사람의 내면이란 건 영원히 볼 수 없는 달의 반대편일지도 모르지."
이유현은 의아했다. 알리바이에 몰두해 왔던 고진이 왜 갑자기 동기나 기질 같은 모호한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있는 걸까.
어쩌면 객지에서의 밤이 모처럼 그에게 애잔한 감상을 던져 준 건지도 모른다.
고진은 맥주잔을 기울였다. 이유현도 단번에 잔을 비웠다.
소중한 휴가로 얻은 러시아의 첫날밤은 발티카 맥주의 강렬한 알코올 향에 젖어 속절없이 저물어 갔다.

- 한쪽으로 기운 시선은 위험하다. 변호인들 가운데는 무죄 주장에만 집착해 편향된 시각으로 증거를 해석해 전혀 공감되지 않는 논리를 펴는 사람도 있다. 사건에 깊이 빠지면, 무고한데도 억울하게 기소되어 재판을 받는 드문 경우가 하필 자신에게 돈을 지불하는 의뢰인에게 일어났을 가능성이 낮다는 점을 돌이켜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고진이 지금껏 객관적일 수 있었던 건 법정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어제만 해도 고진이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기분이 든다. 생각해 보면 이 사건에는 남다른 변수가 있다. 그건 범의나 알리바이 같은 것이 아니라 김명진이라는 여자 자체다. 그녀의 미모와 분위기는 묘한 데가 있다. 유사처럼 흐르며 사람을 못 떠나게 한다. 흡사 블랙홀 같다. 발산하는 미는 상대를 찬탄케 하는 데 그치지만, 내재된 미는 상대를 빨아들인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고진은 겉보기와 다르게 일순간 격정으로 가버리는 발사장치 같은 것을 뇌 어딘가에 숨기고 있는 인물이다. 혹시 그는 김명진의 여성성에 매료되어 이성을 저당 잡힌 채 판단을 흐리고 있는 건 아닐까. 그가 재밌는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게 환영받는 건 어디까지나 논리의 테이블 위에서다. 법정에서는 재미 삼아 내건 누군가의 가설이 한 명의 인생 전체를 건 기회를 빼앗는 덫이 될 수도 있다. 그가 혼자만의 결론에 빠져 그러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이유현은 블라디보스토크의 거리를 내다보면서 관광객의 심정으로 편안하게 술을 마실 수만은 없었다. 고진은 보드카 잔을 들고 몽롱하게 풀린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 한연우의 흐릿한 입매에서 놀라운 정도로 냉정한 말이 쏟아져 나왔다. 고진은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임의재의 성질머리를 감안했을 때 이건 성난 소 앞에서 붉은 천을 펄럭거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아니나 다를까, 임의재의 양미간이 굶은 사자처럼 사납게 일그러졌다.
"이, 이 자식이!"
급기야 그의 입에서 막말이 튀어나왔다. 임의재가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넘어지고 잔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하지만 한연우는 탁자 위에 손을 올려놓고서 시선이 반원을 그리며 위로 향했을 뿐 미동도 없었다.

- 임의재를 보니, 선 채로 눈이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흰자위가 절반쯤 보였다. 좀 지나치게 흥분한 거 아닌가 싶었는데, 다음 순간 휘청 하더니 임의재가 고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임의재가 바닥에 쓰러져 버린 것이었다. 마치 쌓아 놓은 나무토막이 무너지듯 갑작스러웠다. 이미 넘어져 있던 의자와 테이블을 치는 바람에 쿠당탕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테이블 위의 양주병이 그 충격에 넘어졌다. 이미 비어 있어 술이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어, 난 손 안 댔는데?"
고진이 어리둥절해 맨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한연우는 훨씬 침착했다. 당황한 눈빛을 했지만 잠시였다. 그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침대 머리맡 나이트테이블로 서둘러 다가가 객실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프런트죠? 투숙객이 쓰러졌네요. 119 좀 불러 주세요."

 

- "다른 분들한텐 연락을 안 했습니까?"
"다들 자고 있을 시간이라... 별 대단한 것도 아닌 것 같고 해서요."
김명진한테 연락한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안 했을 법하고, 밤중에 다른 이들의 단잠을 깨울 일도 아니라고 판단한 듯했다.
"하긴, 임의재 씨 자존심으론 괜히 법석 떨고 하는 걸 더 싫어할 수도 있겠네요."
"맞습니다. 저 친구를 잘 알아요. 깨어나면 쓰러진 일보다 그 모습을 우리한테 보인 일을 더 못 견뎌할걸요."
몇 초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한연우가 불쑥 사과했다.
"변호사님한테는 미안하네요. 괜히 같이 가자고 해서 이런 폐를 끼치고..."
"천만에요." 
고진은 손을 내저었다.
"변호사란 사람은 갈등 상황에서 여러 용도로 이용되는 법이죠."

한연우가 고진을 잠시 쳐다보다가 곧 시선을 거두고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변호사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농담하는 괴상한 습벽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 것 같네요."
"의재하고 둘이서만 만나는 것보단 변호사님이 있는 쪽이 더 얘기하기에 낫다고 생각했던 것뿐입니다. 변호사님 하고는 좀 더 말이 통할 것 같아서요... 정말 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게 변호사님한테는 이런 말을 듣지 못할 걸 알면서 왜 연락했는지 모르겠네요."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한연우를 보며 고진은 괜찮다거나 그럴 수도 있다며 무마하거나 위로하는 말 따위는 던져주지 않았다.

 

- "신창순..."
고진이 지긋지긋하다는 듯 머리 뒤로 양손을 깍지 꼈다.
"이래서 법률가들이 싫다니깐."
김해나는 법률가를 욕하는 '법률가' 고진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녀는 고진을 그저 법정에 나오기 싫어하는, 좀 취향이 별난 변호사 정도로만 생각할 뿐인 것이다. '법'이니 '변호사' 하는 게 고진에게는 변검에서 떨어져 나가는 가면보다 가벼우며, 그가 변호사들의 사회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 인물이란 걸 알 턱이 없다. 그가 좋아하는 인간 중에 이유현 같은 의리파에는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발길을 돌려 이탁오나 김진구 같은 인물들을 만난다면 이 의뢰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될지 모른다.  

- "한 번 더 말하지만, 변론의 필요에 따라 모든 걸 밝혀야 할 수도 있습니다. 만에 하나 여기 계신 분 어느 누구라도 진실을 숨기려 한다면 그땐 정말 모든 걸 그만두겠습니다."
"알겠다니까요."
김해나가 강하게 말했다. 이어 세 명의 남자를 쿡쿡 찔러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고진이 말한 의미는 둘째치고 그가 법정으로 복귀한다는 사실만이 그녀에게는 중요해 보였다. 
"그럼 모두들 분명히 동의하셨으니까 그렇게 알고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김해나는 휴우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연우와 남궁현은 안심한 기색을 띠었고, 임의재는 여전히 화난 표정이었지만 일단은 폭발을 자제하는 눈치였다.

-  "변론을 계속하겠습니다."
새파랗게 질려 있던 김명진은 고진이 돌아와 옆에 앉자,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에 띄게 반가운 기색을 띠었다.
"변론을 계속 맡으시겠다는 겁니까?"
재판장은 미덥지 않다는 듯이 한 번 더 확인했다. 고진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판사가 목청을 높였다.
"왜 왔다 갔다 하시는 겁니까. 법정이 놀이터도 아니고, 변호사님 맘대로 변덕 부리고 들락날락하셔야 되겠습니까? 피고인의 인생이 걸린 문젠데."
판사가 화난 음성으로 말했다.
"변덕은 아닙니다. 조금 전 변론을 그만두려는 건 진의였습니다. 의뢰인의 지인들이 하도 간곡히 부탁해서 다시 법정에 서게 된 겁니다."

고진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판사는 입술을 움찔했지만 더 이상은 추궁하지 않았다. 변호사를 몰아붙여 질책하고 사과를 받는 일이 중요한 계제가 아니다. 자칫하면 다름 아닌 살인사건에서 국선변호인을 급히 선정해서 변칙적인 재판을 진행하게 될 뻔했다. 그런 상황을 피하게 된 것만으로 고마움을 느낄 지경인지도 모른다. 판사는 고진이 마음이 변하기 전에 재판을 마무리 짓겠다는 듯 서둘러 참여관으로 하여금 국선변호사실에 전화해 호출을 취소하도록 했다. 이번에는 맞은편 서기가 대신 바쁜 걸음으로 법정을 빠져나갔다. 재판장이 말했다. 
"그럼 변론을 계속해 주시죠."

- "이의 있습니다!"
조현철이 다시 일어섰다. 아까보다 더 강경한 어조였다.
"변호인은 입증되지 않은 사실을 전제로 질문을 하고 있..."

"그럼 이것도 묻지 않은 걸로 하겠습니다."
고진은 두루뭉술하게 피해 버렸다. 김명진의 답변을 굳이 들을 필요는 없다. 이미 던진 질문만으로 '그럴지도 모른다’는 강한 '의심'을 배심원들에게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유력한 물증의 증명력을 뒤흔든다는 소기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셈이었다. 확실히 이런 면에서는 방어가 유리하다. 형사소송에서 검사는 '확신'이 필요하지만 피고인은 '의심'이면 충분하다. 

- "검사님이 방금 입증되지 않은 사실이라고 하셨습니다만, 과연 그런지 배심원 여러분은 다음 증거를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고진은 말을 던져 놓고 자리로 돌아가서 서류 한 장을 집어 들고 법정 가운데로 다시 나왔다. 그 동작이 불필요하게 느렸기에 성질 급한 이들은 짜증이 솟구칠 정도였다. 이유현의 눈에는 좌중의 의식을 집중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태업 행위로 보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