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마키메 마나부 / 권일영
출판 : 작가정신
출간 : 2009.04.20
<로맨틱 교토 판타스틱 호루모>를 읽은 후로 마키메 마나부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그 길로 <가모가와 호루모>와 <사슴 남자>를 연이어 읽을 수밖에 없었다.
교토는 우리로 치면 경주 같은 천년 도읍지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오랜 역사적, 문화적 이야깃거리를 자랑하는데 거기에 신선함까지 더했다. 주위에 '마키메 마나부의 솜씨로 다듬어진 교토와 나라로 함께 가보시죠'라고 권하고 싶을 지경이다.
아. <사슴 남자>를 읽으며 <스즈메의 문단속>을 다시 떠올려보게 되었다. 당시에는 완전히 신선한 해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슴 남자>에서 '다이묘진'에 대한 내용을 읽고 나니 일본인들에게는 친숙한 이야기였겠구나 싶다. 다이진, 사다이진이라는 이름은 '다이묘진', '가스가다이묘진'에서 따온 것일 테다.
사전 지식 없이 접했던 것들을 후에 다시 곱씹어 보며 새로운 감동을 느끼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이제는 그 당시에 알았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보다는 지금 알게 되어 기쁘다는 마음이 더 크다. 한 번에 끝날 수도 있었던 즐거움을 여러 차례 나누어 느끼는 것도 좋지 않을까. 좋은 감정들은 그 크기보다는 느끼는 횟수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더 자주, 더 많이.
그런 의미에서 마키메 마나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토속 신앙이나 세시풍속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이제는 한국인들에게도 낯설어지고 있는 다양한 옛이야기들이 다시 힘을 얻었으면.
끝으로 주성치의 <월광보합>과 <선리기연>이 다시 보고 싶다. 지금 다시 본다면 어떤 것들이 보일까. 누군가는 <어린 왕자>가 읽을 때마다 새로워 매해 한 번씩은 읽었다는데, 그 정도는 아니라도 10년에 한 번씩 정도는 다시 감상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무엇이건 자신만의 기준점을 만들어 둔다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언제고 되돌아갈 수 있는 지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지점.
나만을 위한 세이브 포인트를 곳곳에 만들어 두는 삶을 지향하며.
마지막 뱀발.
<가모가와 호루모>와 <사슴 남자>는 각각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일본에서는 더 큰 인기를 얻었던 모양.
보고 싶으면서도 보고 싶지 않은 이 기분.
- 아주 어렸을 때 이야기다.
침대에 누워 막 잠이 들기 시작하면 이따금 난쟁이 고적대가 머리맡을 지나갔다. 나는 눈을 감고 있다. 그래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짠짜라짠짠 소리를 내며 뭔가가 지나가는 걸 꿈과 현실 사이에서 듣고 있다. 어떻게 보지도 않고 그게 난쟁이인 줄 아느냐고 물으면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다. 그 무렵, 나는 밤중에 '짠짜라짠짠' 하는 식으로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건 난쟁이 고적대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하지만 시간이 흐르다 보니 나도 철이 들었다. 초등학교에도 들어갔다. 난쟁이가 머리맡을 어슬렁거린다고 계속 생각한 것은 아니다. 어느 날 밤, 또 난쟁이들이 머리맡을 지나갈 때 나는 처음으로 꿈속으로 빠져들지 않고 '일어나라'고 스스로에게 명령할 수 있었다. 천천히 눈을 떴다.
베개 바로 위에 침대 헤드보드가 있다. 나무 두께는 2센티미터 정도. 고적대가 그 보드 위를 한 줄로 지나가고 있을 거라고 나는 멋대로 상상하고 있었다. 얼른 몸을 일으켜 난쟁이들의 모습을 확인해보려고 했다.
- 물론 거기에 난쟁이는 한 명도 없었다.
- 그날 밤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짠짜라짠짠'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어리석은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아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이야기를 아빠에게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신경이 허약한 녀석이라고 놀렸다. 엄마에게도 말했는데 엄마는 그래그래 하며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건 네가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란다,라고 잘 이해되지 않는 설명을 해주었다. 어른이고 뭐고, 난 그때 자기 이름을 한자로 제대로 쓸 줄도 모르는 일곱 살짜리 꼬맹이였다. 네 마음이 순수하다는 증거야,라고 엄마는 애써 칭찬해 주었다. 그런 마음씨를 가진 녀석이라면 그런 순간에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귀찮아서 잠자코 있었다.
- 내 스물여덟 해 인생에 일어난 이상한 일이라면 이런 정도뿐이다. 그 뒤로 나는 이상한 경험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 내가 묻자 교수는 컵에 든 보리차를 꿀꺽 마셨다.
"나라에 있는 고등학교야."
"나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상당히 먼 곳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꽤 괜찮은 제안이야. 나라라고 하면 사슴도 그렇고 대불도 그렇고, 아무래도 느긋한 느낌이 들지 않나? 유서 있는 도시의 여운과 깊이, 마음의 여유를 되찾기엔 맞춤한 곳이지."
- 그때 불쑥 교실 뒷문이 열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드니 가방을 든 여학생이 막 교실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학생은 아무 말도 없이 그대로 정면에 있는 줄 뒤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았다.
홋타의 자리에 앉았다는 건 저 학생이 홋타 이토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할머니 이름 같지만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그런 홋타 이토가 마치 지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는 표정으로 책상에 올려놓은 가방을 열었다. 교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무척 도전적인 태도였다.
- "홋타 이토?"
내가 목소리에 힘을 주고 말했다. 그러자 진짜로 내 존재를 깨닫지 못했었다는 듯이 내가 다 놀랄 정도로 움찔 몸을 떨며 튕기듯 고개를 들었다. 말을 이으려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삼켰다. 왜냐하면 홋타가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성까지 부른 게 그렇게 쇼크였나? 아니면 내 얼굴에 뭐라도 묻은 걸까?
- "그럼 모르시겠군요."
"뭘 말이지?"
"나라 사람들은 사슴을 탑니다."
"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나도 모르게 둥근 의자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언성을 높였다.
- "정말이에요. 나라공원 주변에 가면 사슴을 탄 사람을 얼마든지 볼 수 있거든요."
나도 모르게 어제 나라공원을 산책했을 때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사슴도 많이 보고 사람도 많이 보았지만 사슴을 탄 사람이 있었던가? 기억에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홋타의 이야기에 깜빡 말려들었다는 걸 깨닫고 나는 거칠게 머리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농담도 어지간히 하라는 내 말에 홋타는 끄떡도 하지 않고 어제도 엄마가 역 앞에 있는 비브레(일본의 패션 전문점 - 옮긴이)에 사슴을 타고 쇼핑을 하러 갔다는 둥, 상당히 현실감 있는 사례를 늘어놓았다. 너무나도 거침없고 또릿또릿한 홋타의 표정에 나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아무래도 농담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주위 학생들을 보더라도 다들 진지한 표정으로 나와 홋타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과연 홋타의 말이 사실인지 맨 앞에 앉은 학생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학생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뿐 도무지 대답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미소만 지을 뿐이어서 전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다른 학생들에게 물어도 다들 똑같은 반응이었다.
분명히 나는 이 나라라는 지방에 관해 거의 모른다. 아는 것이라고 해봤자 기껏 절이나 커다란 불상, 사슴이 있다는 정도다.
- 후지와라 군이 뭘 그런 정도 가지고 그러느냐며 학생이 철없는 농담을 한 거라고 달랬다.
물론 분명히 농담이었다. 하지만 아주 질 나쁜 농담이다. 내가 잘 모른다는 걸 알고 녀석들이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홋타는 물론이고 시침 뚝 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있던 다른 학생들까지 속으로 나를 비웃고 있었던 것이다. 진짜 잔인한 녀석들이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신임 교사에 대한 배려 따윈 전혀 없다. 뭐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기른다'인가. 이건 모든 교실 칠판 위 액자에 적힌 이 학교의 교훈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얼른 저 창밖으로 펼쳐진 헤이조궁 유적에 갖다 버리는 게 낫다.
- 이쪽을 보는 것 같지가 않아 나는 홋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학생지도실 왼쪽 높은 곳에 있는 창문으로 저물기 시작한 오후의 햇살이 들어왔다. 레이스커튼을 통과한 햇빛이 홋타의 얼굴을 비스듬하게 가로질러 옅은 그림자를 그렸다.
나는 한동안 홀린 듯이 홋타의 얼굴을 주시했다. 어스레한 방에 홋타의 얼굴이 반만 둥실 떠 있는 것 같았다. 왠지 묘하게 거룩하고 성스럽다. 그 무거운 분위기가 감도는 방에서 홋타에게 차원이 다른 중력이 걸려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공연히 부아가 났다. 하지만 한참을 바라보다 보니 홋타의 얼굴이 어딘지 물고기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과 눈 사이가 넓다. 물론 무슨 물고기를 닮았는지는 모르겠다. 서늘한 눈빛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그 표정은 고등학교 1학년치고는 무척 어른스러웠다. 창문으로 들어온 빛의 띠가 정확하게 눈과 눈 사이를 비스듬하게 지나갔다. 햇빛이 비친 오른쪽 눈동자에는 이지적인 빛이 감돌았다. 또한 그늘이 가린 왼쪽 눈동자에는 고집스러운 빛이 떠돌았다. 야무지게 보이는 짙은 눈썹 아래서 두 눈동자는 약간 떨어져 있으면서도 제각각의 빛깔로 야생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그야말로 야생적인 어류다.
- 오챠즈케를 다 먹은 뒤 시게 선배는 할머니가 깎아준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물었다.
"하지만 이상하네."
"뭐가요?"
"홋타 말이야. 나도 수업에 들어가봐서 아는데, 그런 애가 아닌데, 무슨 일이 있었나?"
그런 질문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다. 내게 홋타는 새로 부임한 교사를 놀려놓고 야단맞자 되레 원망을 하는 못 말리게 질 나쁜 학생에 불과하니까.
"뭐 자네는 기분이 좋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난 홋타가 좋아. 그 애는 정말 예뻐."
"예뻐요? 그렇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어딘지 물고기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던데."
내 말에 시게 선배는 소리 죽여 크크크 웃었다.
"자네 재미있는 비유를 하는군. 뭐, 분명히 약간 독특한 얼굴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앤 스무 살이 넘으면 훨씬 더 예뻐질 얼굴이야."
미술 교사의 말이니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렇게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가 없다.
- 아침이면 늘 6시에 눈을 뜬다.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나는 어머니와 함께 할아버지 집에서 살았다. 할아버지 집은 새벽 6시에 일과가 시작되었다. 잠자리가 바뀌어도 이십 년에 걸쳐 몸에 밴 습관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하숙집 아침 식사 시간은 7시다. 세수를 한 뒤에 나는 혼자 산책하러 나갔다.
- 할머니 하숙집은 현청 뒤에 있는 자그만 집들이 늘어선 동네에 있다. 현청은 도다이지의 드넓은 부지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다. 집을 나와 바둑판 눈금처럼 그어진 좁은 길을 걷자 도다이지의 당당한 데가이몬(도다이지 경내 서북쪽에 있는 문 - 옮긴이)이 나를 맞이했다.
데이몬 아래 고양이 세 마리가 누워 있었다. 옆에 있는 팻말에 이 문은 국보라고 적혀 있다. 국보에 누워 있다니 상당히 호사스러운 고양이들이다. 문을 지나 도다이지 안으로 들어서니 이번에는 사슴이 앉아 있었다. 자갈을 밟으며 길을 걷자 이윽고 대불지 너머 대불전의 치미(전통 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장식 기와 - 옮긴이)가 보였다. 밝은 아침 하늘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황금빛 치미가 조용히 빛났다.
- 분지에 자리 잡은 나라는 더위가 무척 심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9월도 하순에 들어서 햇살이 제법 누그러졌다. 아침 공기에 가을 냄새가 솔솔 풍기지만, 여름의 여운은 짙푸른 나무와 함께 아직 남아 있었다.
대불전 뒤편은 아무것도 없는 들판이다. 나라로 온 첫날 산책하러 왔을 때부터 나는 사람이 없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풀밭에 주춧돌들이 촘촘하게 깔려 있다. 나는 그 돌 가운데 하나에 걸터앉아 바지 뒷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냈다.
어제 받은, 엄마가 보낸 편지였다. 어제는 공휴일이라 학교도 쉬는 날이었지만 짐 정리 때문에 바빠서 얼핏 보기만 하고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 편지를 다시 처음부터 꼼꼼하게 읽기 시작했다. 편지는 세 장이지만 그래봐야 한 줄씩 비우고 쓴 데다가 한 글자 한 글자 흘려 쓴 초서체라서 내용은 별로 없다. 너는 코는 별로 골지 않지만 이는 심하게 가니 신세를 지는 댁 분들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라, 서쪽 지방은 분명 음식 간을 약하게 할 테니까 음식 맛이 없다고 멋대로 판단하고 간장을 뿌리거나 하지 마라, 엄마도 여학교를 나와서 아는데 그 또래 아가씨들은 어쨌든 심술궂으니 조심하거라 등 이런저런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 봉투 밑바닥에 뭔가 딱딱한 것이 있어 거꾸로 들어 손바닥에 받아보니 표면이 맨들맨들한 하얀 물체가 나왔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편지지 세 번째 장을 읽었다. 거기에는, 어제 묘한 꿈을 꾸었는데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별로 좋지 않은 꿈이었다는 건 기억한다. 왠지 네가 걱정된다. 가시마진구에 가서 부적을 받아 오고 싶은데 오늘아침 세수하다가 재채기를 하는 바람에 그만 허리를 삐끗했다. 그래서 한동안 가시마진구에 가기는 힘들어 대신 예전 부적을 보낸다. 다이묘진의 영험이 뛰어난 부적이니 방의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여두도록 하거라.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 편지에는 부적이라고 했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부적이 아니었다. 희기는 하지만 옅은 갈색도 띠고 있었다. 엄지손가락 반만 하고, 마치 숫자 9를 뚱뚱하게 만들어놓은 모양이었다. 9의 고리 부분에는 보라색 끈이 걸려 있었다. 아마 목에 거는 끈인 모양이다. 부적이라고 생각하고 넣은 걸 테지 만 도통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이었다.
다만 어디서 본 느낌도 드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더 찜찜했다. 끈을 잡고 빙글빙글 돌려보았지만 역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때 문득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암사슴 한 마리가 약간 떨어진 나무 그늘에서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편집자 주 : 고대의 철기 鐵器 명문 후지하라 가마타리의 후예들이 가스가타이샤에서 철기를 보급하고 만들고 거두는 등 모든 작업을 주관했는데, 후에 그곳이 신당으로 변신했다. 이 신당에 모신 네 신을 통틀어 가스가다이묘진이라 불렀으며, 여기서 다이묘진 혹은 묘진은 '제철·무기의 신'을 뜻한다. 이중 두 신은 원래 간토지방에 있는 가시마진구와 가토리진구에 있는 신이었는데 후지하라의 후손이 후대에 나라의 가스가타이샤로 모시고 와버린 것이다. 제철의 두 신은 흰 사슴을 타고 입성했다.
- 된장국을 먹고 싶었지만 그래도 엄마가 하는 이야기를 스스로 정리해 가며 들어주었다. 말하자면 어젯밤 다이묘진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다이묘진이란 물론 가시마다이묘진을 말한다. 할아버지 집안은 대대로 가시마진구를 받드는 집안이었다. 새해 들어 첫 참배를 할 때는 매년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드는 가시마진구까지 나를 데리고 갔었다.
"우와, 대단한 꿈이네."
시게 선배가 감탄사를 토했다.
"다이묘진도 참 변덕스럽게 나타나는 거 아닌가요? 진짜로 믿는 사람도 있으니 큰일이죠."
"그런 이야기는 옛날이야기 같은 데 자주 나오던데 정말 그런 일이 있구나. 하지만 꿈에 등장한 게 가시마다이묘진이라는 걸 용케 아셨네. 상대방이 자기소개라도 한 걸까?"
시게 선배는 묘한 부분에 의문을 품었다.
"그야 메기를 누르고 있었으니까 알 수 있죠."
- "아, 참."
여기는 나라다. 나야 어렸을 때부터 지겹도록 들은 이야기지만 시게 선배는 알 리가 없다.
"가시마다이묘진은 힘이 아주 센 신이에요. 옛날부터 땅속에 있는 커다란 메기가 몸부림을 쳐서 지진을 일으키려고 하면 그걸 눌러 막아주었어요. 그래서 옛날 그림 같은 걸 보면 수염을 엄숙하게 기른 가시마다이묘진이 커다란 메기 머리를 누르고 있는 모습이 자주 나오는 거예요."
지금도 엄마 방에는 마치 서핑보드에 서서 파도타기를 하듯 커다란 검은 메기에 올라탄 가시마다이묘진 그림이 붙어있다는 사실은 창피해서 입 밖에 내지 않기로 했다.
- "맞아, 가시마다이묘진은 그런 신이었지."
마치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투였다. 아니, 시게 선배도 알고 있었나요? 내가 물었다.
"응, 알지. 이 지역 사람들은 아마도 다들 이름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
시게 선배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어떻게요?"
"그야 그 신은 가스가타이샤에서 모시는 신인걸. 초등학교 때도 배웠어. 아주 오랜 옛날 흰사슴을 타고 자네 고향 쪽에서 왔다고."
- 나는 산책할 때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것을 꺼냈다. 시게 선배는 운전을 하다가 잠깐 고개를 돌려 보더니 중얼거렸다.
"아아, 곡옥(옥을 반달 모양으로 다듬어 끈에 꿴 옛날 장신구 - 옮긴이)이로군."
맞다, 곡옥이었구나. 그래서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무척 정겨운 느낌이 드는 단어다. 어쩌면 중학교나 고등학교 역사 시간 이후로는 이 '곡옥'이란 단어를 들은 것이 처음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봐도 부적 같지는 않죠?"
"뭐 어떻게 보면 또 부적 같기도 하지. 하지만 상관없잖아. 아무려면 어때."
시게 선배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 "인간이란 무방비 상태에서는 속마음이 얼굴에 드러나기 마련이죠. 학생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분명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뭐 우리에겐 매일 그런 시선으로 지켜봐 줄 사람이 없기는 하지만요. 하기야 이 나이에 누가 매일 지켜본다면 싫을 테지만."
"뭐? 그렇지만 자네에겐 부인이 있잖아."
"너무 가까우면 오히려 보이지 않기 마련이에요.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별로 진지하게 보고 싶지 않다고 해야 할까? 꽤 어려운 문제죠. 말하자면 적당한 거리가 중요하단 겁니다."
"아하, 그렇군."
나는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콩처럼 밋밋한 얼굴이지만 속은 꽤 깊다. 특히 학교에서 학생과 일대일로 이야기할 기회가 거의 없다는 지적에는 겨우 하루 교사 경험을 한 나로서도 크게 느끼는 바가 있었다.
- 문득 정면을 바라보니 정장 차림의 여성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아마 그쪽 화장실에서 나온 모양이다. 손님용 슬리퍼 소리가 복도에 요란하게 울렸다. 여성은 벽에 걸린 팻말 아래서 걸음을 멈췄다. 팻말에는 '제3회의실'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가 막 문손잡이에 손을 대려 할 때 나는 그 옆을 스쳐 지났다. 그 순간 그늘져 보였던 그녀의 얼굴을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또렷하게 비췄다.
"안녕하세요?"
여자가 인사를 건넸다. 차분하고 깊이가 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얼른 멈춰 서서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여자가 다시 가볍게 고개를 숙이더니 손잡이를 돌려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출렁거리는 긴 머리카락과 입가의 희미한 미소가 잔상으로 남았다.
한동안 문 앞에 서 있었다.
- '쾌적하죠? 그거 다행이군요. 아, 실은 교수에게 선생은 신경이 예민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약간 염려했거든요.'라며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아갔다. 교수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는 생각에 창피하달까 화가 난달까 하여간 얼굴을 붉히는데 이번에는 오하리다 교감이 다가왔다.
"아, 선생, 지낼 만한가요?"
마치 짜고 그러듯 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느낌은 전혀 달랐다. 교감에게서는 그야말로 성실한 인상이 풍긴다. 고급스러운 양복을 입고 가슴주머니에 손수건까지 꽂은 옷차림으로 인해 주위 분위기가 긴장되는 느낌이 들었다. 풍성한 회색 머리카락이 멋지게 구부러졌다. 호텔 라운지 같은 데서 있으면 배우인 줄 알 것이다.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는 교감의 시선에 기가 눌려, 예, 그럭저럭, 하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교실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얌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저런 표정이 수상하다. 그 두꺼운 얼굴 가죽 아래 어떤 심술궂은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대답이 없자 맨 앞줄에 앉은 학생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학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깐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작은 목소리로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석장에 천 엔이면 너무 싸다고 생각합니다."
"바보, 그런 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
이 녀석들은 늘 이런 식이다. 이렇게 얼버무리지 절대로 정면 대응을 하려 들지 않는다. 분명히 나중에는 이것도 깜빡해서 그렇다고 할 것이다. 정말이지 철저하게 삐뚤어진 녀석들이다. 가슴속에서 어두운 분노가 똬리를 틀었다. 이렇게 불쾌한 기분이어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수업을 해야만 하니 교사란 정말 힘든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막 수업을 시작했는데 나는 이미 지친 마음으로 교실을 둘러보았다. 뒷자리에서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홋타와 눈이 마주쳤다.
- "넌 어떻게 생각하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몰래 이런 짓 하지 말고 확실하게 이야기해."
야생 어류 같은 눈을 잠깐 반짝거린 뒤, 홋타는 천천히 일어섰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데 그 얼굴에 왠지 고후쿠지에서 본 사슴이 겹쳐졌다.
"남자의 멋은 속옷에서부터."
차분한 목소리가 교실 안에 울렸다.
"뭐야, 이 바보!"
나도 모르게 책상을 두드렸다. 잘못 두드렸는지 오른쪽 손목에 심한 통증이 왔다. 하지만 참고 학생들을 노려보았다.
무겁고 어색한 분위기가 교실 안에 가득 찼다. 그때 뭔가가 툭 끊어졌다. 나는 교재를 옆구리에 끼고 그대로 교실을 나왔다.
- 시게 선배는 미술부 고문이어서 퇴근 시간이 나와 맞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헤이조궁 유적 입구에 솟은, 복원된 거대한 주작문 앞을 가로질러 신오미야 역까지 걸어 전차를 타고 집으로 간다.
현청으로 뻗은 언덕길 중간에서 한 할머니가 사슴 센베이를 팔고 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산 적이 없어서 시험 삼아 하나 사보았다. 150엔을 내자 할머니는 주름이 많은 손으로 센베이 묶음을 건네주었다. 가느다란 종이 띠를 열십자 모양으로 묶은 안쪽에 열 개쯤 되는 사슴 센베이가 있었다. 현청 너머에 있는 들판으로 가자 땅거미 내리는 하늘 아래 사슴들이 여기저기 누워 있었다. 처음에는 다가가는 나를 경계하는 듯하더니 사슴 센베이를 보자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수그리며 천천히 다가왔다.
- 나라에 와서 처음 사슴들의 이런 인사를 보았을 때는 깜짝 놀랐다. 그때는 나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 바로 앞에서 외국인 관광객 꼬마가 사슴과 똑같은 동작으로 인사를 하면서, 플리즈, 하고 앳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어째서 사슴에게 '플리즈'라는 표현을 쓰는지 그저 놀랍기만 했다. 나뭇잎이나 삭정이처럼 보이게 자기 몸을 의태하는 곤충들을 볼 때 느끼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그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타자의 시선이 무슨 뜻을 담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가시마진구에도 울타리 안에 많은 사슴이 있지만 이렇게 인사하는 사슴은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나라에서는 어린 사슴마저도 사슴 센베이를 든 사람에게 인사를 하며 다가온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집에 돌아가자마자 그 이야기를 꺼냈는데, 인사하는 사슴은 세상에 이곳 사슴들뿐일 걸, 하고 ...
- 나는 홋타의 말을 무시하고 교탁으로 돌아왔다. 교과서를 펼치고 소란이 가라앉지도 않았는데 수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칠판에 판서를 하면서도 마음은 완전히 흐트러져 있었다. 그 들판에는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아니 가령 1미터 옆에 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내가 한 행동을 볼 수 있었던 존재는 괘씸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던 사슴뿐이리라.
판서를 하면서도 분필을 잡은 손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등에 땀이 났다. 게다가 배까지 아파왔다.
- 수업이 끝나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갔다. 변기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누군가에게 감시를 당하는 기분이 들어 천장과 문 틈새를 신경질적으로 살폈다. 상태가 아주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무실로 돌아오니 후지와라 군이 내 안색이 좋지 않다고 했다. 사슴 센베이 때문이라고 대답하자, 뭐라고요? 그런 걸 드셨어요? 그랬다면 속이 좋지 않겠네요. 라며 묘하게 직감이 뛰어난 농담을 하는 바람에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 다들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염려해 주었다. 하지만 다른 교사의 학생 지도에 참견하면 매우 복잡 미묘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모두가 바깥에서 들여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후지와라 군마저도 경계선 바로 밖에서 막과자 병을 옆구리에 끼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분명히 다들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낼 때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오도 가도 못할 상황에 빠졌다면 나도 주위에 도움을 청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 아침, 사슴이 말을 했다는 소리를 하면 어떻게 될까. 자넨 신경쇠약이니까. 교수의 말이 귓속에 맴돌았다. 수업에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판서를 하면서도 내가 정말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이 수시로 들었다.
- 식사를 마치고 엽차를 마시는데 마주 앉은 할머니가 내 얼굴을 보며 무슨 까닭인지 웃음을 지었다.
"선생은 자다 망할 일은 없겠어."
시계 바늘이 오전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토요일은 학교가 쉬는 날이라 시게 선배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다.
"무슨 말씀인가요, 자다 망하다니요?"
"오사카는 먹느라 망하고, 교토는 옷 해 입느라 망하고, 나라는 자느라 망하고,라는 말이 있지."
할머니는 노래하듯 가락을 붙여서 말했다.
'오사카는 먹느라 망하고', '교토는 옷 해 입느라 망하고'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지만 '나라는 자느라 망하고'란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 주전자의 뜨거운 물을 따르면서 할머니가 말을 이었다. 지금도 천연기념물이고 나름대로 대단한 가스가타이샤의 사슴이지만 예전에는 더 대단한 대우를 받는 신록이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벼슬아치들도 신록과 우연히 마주치면 수레에서 내려 땅바닥에 엎드려야 했다. 혹시라도 사슴을 죽이거나 하면 큰일이었다. 죽인 사람은 당연히 죽음을 면할 길이 없었다. 신의 사자이니 인간보다 훨씬 높을 수밖에.
- 그랬기 때문에 옛날엔 아침에 자기 집 앞에 사슴이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기라도 할라치면 온 집안이 난리가 났다. 가만히 있다가는 사슴을 죽였다는 의심을 받는다. 집안사람들은 서둘러 사슴 사체를 다른 집 처마 밑으로 옮겨 재앙을 피하려 했다. 끔찍한 일은 아무 죄도 없이 그 사슴 사체를 떠맡게 된 집안사람들이다. 아침에 일어나 처마 밑에서 죽은 사슴을 발견하게 된 집안에서는 벌집을 쑤신 듯 소동이 일어난다. 얼른 다른 집 앞으로 옮긴다. 이 소동이 계속되어 사슴은 결국 늦잠을 자는 집 마당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느라 망하는 꼴이다.
"... 왠지 흉흉한 이야기네요. 진짜 잠도 제대로 잘 수 없겠어요."
사슴 이야기라면 편한 마음으로 들을 수 없는 입장이었지만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대답했다.
"선생이라면 걱정 없어. 휴일인데도 이렇게 일찍 일어나니."
- "가시마진구에서 가스가타이샤라니. 마치 다케미카즈치노미코토(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칼의 신, 궁술의 신 - 옮긴이) 같군요."
한 번 들어서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는 어려운 이름이었다. 전에 엄마한테서 같은 이름을 들은 느낌이 들었으니 분명히 가시마다이묘진의 이름이리라. 그래도 다이묘진이 나라에 왔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니, 역시 역사 교사다.
- "이게 진짜 곡옥일까요?"
더운물에서 올라오는 김에 축축해진 표면을 쓰다듬으며 내가 자연스레 물었다.
"그렇다면 야요이 시대(기원전 10세기 중반부터 3세기 중반 - 옮긴이), 고분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미입니까?"
"예, 그런 셈이죠. 곡옥은..."
리처드는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았다.
"일반적으로 곡옥은 비취, 마노, 수정, 유리 같은 걸로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빛깔도 파란색과 녹색이 많죠. 그래서 으음, 이런 흰색은 별로... 보기에는 수정이나 유리 같지도 않고... 그거 잠깐 봐도 되겠습니까?"
리처드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곡옥을 목에서 벗겨 건네주었다. 리처드는 표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고 천장 전구에 비춰보기도 했다.
"이건... 사슴이로군요."
"사슴이요?"
"사슴뿔을 가공한 겁니다. 아, 이렇게 만드는 것도 나름대로 멋있군요. 나중에 아는 기념품 가게 주인한테 말해볼까."
- 눈웃음을 지으며 손바닥에 얹은 곡옥을 들여다보던 리처드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거 어디서 난 건지 이야기를 들었습니까?"
"아뇨, 모릅니다. 불쑥 보내신 것이고 뭔가 착각하신 것 같기도 하고요. 아마 물어보면 산책하다가 주웠다고 할 겁니다."
"그럴 리가요. 조금 전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머니가 신심이 깊으신 것 같으니 분명히 영험한 물건이겠죠. 부디 잘 간직하세요."
- 가스가타이샤 숲은 오래되었다. 가시마진구 숲도 장엄하지만 이곳 숲이 더 넓어 훨씬 깊이가 느껴진다. 울창한 나무들이 햇빛을 가려, 조용한 숲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신비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단순하게 오래되었다는 말만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는 뭔가가 있다. 나무 목 木자가 세 개 모여 숲 삼 森이라는 글자를 만드는 것처럼 옛 고자를 세 개 겹쳐 쓰지 않으면 이 엄숙함을 표현할 길이 없다.
- 사슴 센베이를 손에 들고 나는 참배객들이 지나다니는 길가에 있는 돌 울타리를 넘어 이끼가 낀 오래된 석등 사이를 지나 숲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숲 속 바닥에 부드러운 햇살이 작은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 원 안쪽에서 엄마 사슴과 아기 사슴이 느긋하게 나뭇잎 카펫에 누워 있었다. 내 발소리에 놀라 일단 벌떡 일어났지만 사슴 센베이를 보여주자 두 사슴은 망설이지 않고 천천히 다가왔다.
- 사슴이 나를 경계하듯이 나도 사슴을 잔뜩 경계했다. 궁둥이를 뒤로 잔뜩 빼고 센베이를 내밀었다. 사슴은 고개를 쭉 빼고 센베이를 입에 물더니 우물거렸다. 두 마리에게 번갈아주다 보니 센베이는 금방 떨어졌다.
- 센베이를 다 준 뒤에도 나는 계속 거기 서 있었다. 사슴도 말없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숲은 조용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나무들 사이로 울려 퍼졌다. 사슴이 말을 할 눈치는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나를 살피고 있었다. 이제 말을 하려는 걸까? 아니면 아직도 뭔가 더 주기를 바라는 걸까? 사슴과 나 사이에 기분 나쁜 긴장감이 흘렀다.
사슴은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내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살짝 틀어 계속 나를 살폈다. 내가 조금만 움직이면 다른 쪽을 향하고 있던 큰 눈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사슴은 잔뜩 긴장한 채로 숲 속의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아기 사슴이 움직이자 어미 사슴도 재미없다는 듯이 내게 꽁무니를 보였다. 두 사슴은 나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가버렸다.
- "어째서 어제는 줄행랑을 쳤지? 할 이야기가 있는데 그러면 곤란하잖아."
사슴이 짜증 난다는 투로 나무랐다.
"정말이지 왜 이런 변변치 못한 남자를... 뭐 할 수 없지. 그래도 선생이라니까."
그렇게 말하더니 사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고개를 살짝 흔든 것처럼 보였다.
"이봐, 듣고 있는 거야?"
- 듣고 있느냐고? 당연하지. 하지만 내가 듣고 있는 것은 이른바 '목소리'가 아니다. 귀의 고막을 진동시켜서 뇌에 전달되는 '음파'가 아니다. 이건 역시 쇠약해진 내 신경이 잘못 들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사슴이 사람 말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 "아, 너희들 식으로 이야기하면 보물이지. 신의 보물. 나라에 순서가 돌아왔어. 그러니 선생이 받으러 가야겠어."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인데 사슴은 모든 것이 다 결정되어 있다는 듯이 말했다. 묘하게 짜증이 났다.
내가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무슨 소린지 도무지 모르겠군."
"괜찮아. 자네는 아무 생각 하지 않아도 돼.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상대에게 받아 오면 되는 거니까."
- "그러면 상대방은 누구지?"
내가 물었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사슴은 시치미 뚝 떼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여우야. 그쪽도 실제로는 선생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심부름꾼'으로 보낼 테지만."
"여, 여우라고?"
"그래, 교토 후시미이나리 신사에 있는 여우지."
- 무릎께까지 개울물에 잠긴 나는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양쪽에서 에워싸듯 한 마리의 암사슴과 다섯 마리의 수사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프지, 선생? 이건 선생의 망상이 아니야. 우리는 지금 여기 분명히 있어. 선생은 내 말을 듣고 있고. 알겠나?"
암사슴이 여전히 차분한 중년 남자의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잘 들어, 선생. 선생은 선택된 거야. 그러니 역할을 똑바로 해내야 해. 만약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큰일이 나. 운반책으로서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란 이야기야. 조만간 선생은 교토로 가게 될 거야. 거기서 후시미이나리의 여우한테서 중요한 것을 받게 될 테고. 아, 실제로는 여자한테서 건네받게 될 테지만."
- "심부름하는 역할은 여자로 정해져 있지. 특별히 어려울 건 없어. 자네는 그저 받은 걸 가져오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게 뭔데?"
"이야기했잖아, 눈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면 뭔지 어떻게 알아?"
"보물이야. 우리에게나 자네에게나 아주 소중한 보물이지."
"뭐지, 그... 보물이란 것이?"
"선생은 몰라도 돼. 자루에 넣어 전해줄 테니까, 그대로 가져오는 거야. 그러고 보니 인간의 말로도 이름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뭐라더라? '삼각' 뭐라고 하던데. 뭐 어쨌거나 시원치 않은 이름이었어."
- 말을 끊더니 사슴은 위에서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때? 믿기 어려운가, 선생?"
사슴 뒤편으로 보이는 하늘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뭘?"
"지금 보고 들은 것들 모두."
"모르겠어."
- "역시 야마토배가 아니면 이름이 이상합니다. 그 뒤에 육상부와 유도부가 생기고 우승도 만들면서 야마토배라는 이름이 생겼어요. 그래도 검도부만은 지금도 개교 초기부터 내려오는 플레이트를 우승한 학교에 수여한다고 하더군요. 부끄럽게도 나도 이런 이야기는 전혀 몰랐어요. 이름도 특이하던데, 각 학교 검도부에서는 삼각이란 애칭으로 부르는 모양이에요."
"뭐라고!?"
내가 느닷없이 소리를 지르자 후지와라 군은 과자를 꺼내려다 병을 떨어뜨릴 뻔했다.
"아니, 왜 그러세요? 갑자기."
"지금 삼각이라고 했지?"
"아, 예. 그랬죠. 삼각이에요. 생김새가 삼각형이라서 그렇게 부른대요. 교장 선생님 말씀으로는 교토, 오사카, 나라에 있는 세 학교의 관계를 상징한 것인 모양이에요."
- 도저히 우연의 일치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필연의 결과로 받아들이는 건 더 이상하다. 왠지 등골이 오싹했다. 어제 사슴에게 받힌 궁둥이가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 "10월 들어서 동쪽에서 지진이 잦은 모양이군. 지진은 무서워서 싫어."
- 나는 편지지를 접어 봉투에 다시 집어넣었다. 아마 할아버지와 엄마는 잘 지내는 모양이다. 잘 지내지 못하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다. 편지 끄트머리는 요즘 지진이 잦아 골치다. 10월에는 다이묘진도 자리를 비우는데 어서 돌아와 주면 좋겠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어떻게 지내는지 일일이 캐묻는 것도 두렵지만 이렇게 내게 무관심한 것도 서운하니 사람 마음이란 참 묘하다.
- "아뇨. 좀 더 있어야 할 모양인데 괜찮기는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 그쪽은 지진이 잦나요? 편지에 그렇게 적혔던데."
"그래, 맞아. 10월 들어 기사가 자주 나네. 작은 지진들이기는 하지만 매일 계속되면 기분이 좀 나쁘지. 동쪽에는 자네의 가시마다이묘진이 계실 텐데 어떻게 된 거야?"
신문을 접으며 시게 선배가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아니에요. 가시마다이묘진은 어머니가 떠받들죠. 그리고 지금은 다이묘진이 자리를 비웠다네요."
"엥? 어째서?"
"간나즈키(10월이면 일본 전국의 신들이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에 모이기 때문에 신사를 비운다는 설화에서 온 이름 - 옮긴이)니까요. 모든 신들이 이즈모에 집합하기 때문에 출장을 간 거죠.”
"그런가? 그래서 신이 없는 달이라고 간나즈키라는 거로군. 그거 골치네. 커다란 메기가 난리를 치겠군."
"괜찮아요. 에비스(바다·어업·상가의 수호신 - 옮긴이)가 있으니까요."
-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한테 들었던 이야기를 시게 선배에게 해주었다. 10월에 가시마다이묘진이 이즈모에 가 있는 동안은 다이묘진의 명을 받들어 에비스가 대신 지켜준다. 그런데 에비스는 힘이 다이묘진보다 떨어지기 때문에 커다란 메기가 이따금 말썽을 부리기도 한다.
"그래? 에비스의 힘이 부족해서 메기가 꿈틀거리는 거로군."
그거 그럴듯한 이야기네. 시게 선배가 웃었다. 저녁 식사준비가 끝났다는 할머니의 말에 우리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 어떠세요? 연습 삼아 한 장? 끈덕지게 조르는 바람에 결국 커다란 도리이를 배경으로 한 장 찍혀주었다. 사진부 출신의 솜씨가 어떤지 보여줘, 라며 카메라를 들여다보자 후지와라 군은, 디지털카메라가 아니라서 볼 수 없어요, 라며 물러섰다.
"뭐야, 아직도 필름 카메라를 쓰나?"
"그럼요. 필름에는 디지털로는 낼 수 없는 맛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건 고등학교 때부터 쓰던 카메라예요."
그러면서 카메라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쓰다듬었다.
- 고노하는 후시미이나리의 도리이에서 걸어서 오 분쯤 걸리는 곳에 있었다. 오츠 교장의 친가는 대대로 요리여관을 운영하고 있다고 후지와라 군이 담 너머의 당당한 창고를 올려다보며 설명해 주었다. 왜 요리여관을 하는 집안에서 여학교를 세 개나 세웠을까,라고 내가 중얼거리자 후지와라 군이 자기도 궁금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담을 따라 잠시 걷자 이윽고 입구가 나왔다. 문에 걸린 커다란 간판에 고노하라고 노란색으로 쓴 멋들어진 글씨가 있었다. 먼지를 재우려고 물을 뿌려놓은 현관에는 '야마토배친목 모임'이라는 팻말이 보였다. 나는 후지와라 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손가락에 침을 발라 살짝 두 눈썹에 발랐다. 예로부터 눈썹에 침을 바르면 너구리나 여우에게 홀리지 않는다고 했다.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할 때는 상대방의 눈썹 개수를 헤아린다고 한다. 눈썹에 침을 발라 달라붙게 해 두면 제대로 셀 수가 없어 여우가 둔갑하지 못한다. 어렸을 때 엄마가 해준 이야기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젖은 손가락으로 눈썹을 열심히 문지른 뒤에야 고노하 안으로 들어섰다.
- 실례합니다. 하고 말을 건넸지만 역시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후지와라 군과 둘이서 어쩔 줄을 모르고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때 오른쪽 벽에 걸린 오래된 그림이 든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에비스로 보이는 뚱뚱한 남자가 오른쪽에는 대합을, 왼손에는 가다랑어를 안은 모습으로 백조에 올라탄 그림이었다. 엄마 방에서 보았던 가시마다이묘진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옆에서 후지와라 군이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아아, 이와카무츠카리노미코토 磐鹿六雁命로군요."
"엥? 뭐라고?"
"이와카무츠카리노미코토요. 요리의 신이죠."
후지와라 군은 그림 한구석을 가리켰다. 역시 역사 교사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어려운 한자 이름을 읽다가 '사슴 록 鹿 자'를 본 순간 오만 정이 떨어졌다. 눈썹에 바른 침의 효과가 일찌감치 사라져 버리는 기분이었다.
- "이 사람은 뭐지? 사슴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
"별로 없어요. 그냥 이름일 뿐이죠. 원래는 천황을 가까이서 모시던 신하였답니다."
흐음 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갑자기 기선을 제압당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눈썹에 침을 발라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불쑥, 어서 오십시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병풍 앞에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 마돈나라고 불리는 만큼 역시 대단한 미인이었다. 결코 화려한 얼굴은 아니지만 지성미가 느껴지는 수려한 이마, 온화한 눈매, 조심스러운 미소가 떠나지 않는 입가, 모두가 차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품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낡은 냄새가 나는 별명이라고 생각했지만 절묘하게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는 분명히 '빛깔'이 있다. 마음에 담아두지 않을 수 없는, 조용하지만 깊은 여운이 있다.
- 마돈나는 네 살 때부터 검도를 시작해 대학에서도 검도부였다고 했다.
"대학 다닐 때는 수학과 검도밖에 몰랐어요. 옛날부터 계산하는 걸 좋아해서 지금도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몇 시간이고 수학 문제를 풀곤 하죠. 오늘도 여기 오는 전차 안에서 내내 수식을 풀었거든요."
마돈나는 오른손으로 허공에 수식을 쓰는 시늉을 했다.
"이상하죠?"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 그러자 마돈나는 자기도 사슴에게 옷을 물어뜯긴 적이 있어서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왠지 묘한 부분에서 마음이 맞았다. 물론 어쩌다 그런 일을 당했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 마돈나는 한 손에 잔을 들고 부끄러운 듯이 웃었다. 조금 전부터 무척 빠른 속도로 컵에 든 맥주를 비워내고 있는데 긴 목은 아직 눈이 부시게 희다. 역시 대학 운동 동아리 출신이다.
- "그럼 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선생은 돌아가서 더 어울리세요."
백을 차에 실은 리처드가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괜찮겠어요?"
창문을 내리더니 리처드가 불쑥 물었다. 뭐가 괜찮으냐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술 이야기라 생각하고 대답했다.
"아, 괜찮습니다."
리처드는 그거 다행이라며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이만. 그는 손을 슬쩍 흔들더니 차를 출발시켰다. 모든 것이 눈 깜빡할 사이의 일이라 리처드가 타고 떠난 차의 미등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다가, 그제야 그가 싣고 간 백에 삼각이 들어 있었을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왠지 여우에게 홀린 느낌이 들었다. 눈썹을 슬쩍 만져보았다. 물론 눈썹은 완전히 말라 있었다.
- "선생님께 드릴 게 있어요."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마돈나가 말했다. 무엇을 준다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다 불쑥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상대에게 받아 오면 되는 거니까"라는 말이 떠올랐다.
갑자기 심장 박동 소리가 커지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이미 여기에는 삼각이 없을 텐데. 그러면 마돈나는 무엇을 주겠다는 걸까? 다 읽은 줄 알았던 책에 느닷없이 이어지는 페이지가 나타난 것처럼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마돈나는 미사키실 옆에 있는, 조금 전 리처드가 짐을 정리하던 그 방의 문을 열고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집게손가락에 침을 발라 눈썹을 문지르고 나서 마돈나를 뒤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 구석 쪽에서 마돈나가 내게 등을 지고 짐에서 무엇인가를 꺼내고 있었다. 벽 쪽에 늘어놓은 가방이나 백으로 보아 이 방은 교사들의 짐을 놓아두는 방인 모양이었다.
"선생님, 이걸 받으세요."
마돈나가 일어서더니 내게 갈색 물건을 내밀었다. A4 크기의 봉투였다.
나는 말없이 봉투를 받아 들었다. 무의식 중에 "자루에 넣어 전해줄 것"이라던 사슴의 말이 생각났다. 봉투는 무척 가벼웠다. 안에 아무것도 없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크기만 따지면 상패 모양을 하고 있다는 삼각이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너무 가벼웠다. 봉투를 뒤집어보니 셀로판테이프로 봉해져 있었다. 바로 뜯어보려고 했다.
"선생님, 아까부터 왠지 얼굴이 창백하세요. 취하신 거죠? 잃어버리면 안 되니 댁에 돌아가서 뜯어보세요."
마돈나의 손이 내 손을 눌렀다. 그 손이 차가웠다. 마돈나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댁에 가서 뜯어보세요,라고 반복하더니 살며시 손을 떼고 그만 가보겠다면서 얼른 방에서 나갔다.
- 미사키실로 돌아온 내게 마돈나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술을 권했다. 오사카의 난바 선생은 올해는 기필코 야마토배를 차지하겠다면서 힘주어 포부를 밝혔다. 나는 기회를 보아 호구 갑에 새겨진 그림에 관해 물어보았는데, 분명히 여우와 쥐 그림이 있지만 그 유래에 관해서는 두 사람 다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난바 선생은 사슴과 여우라면 몰라도 쥐는 왠지 격이 떨어진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마돈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도중에 후지와라 군이 내 옆으로 와서 자꾸 성가시게 굴기 시작했다. 시끌시끌한 분위기에 휩쓸려 술을 계속 마시다 보니 나도 완전히 취하고 말았다.
-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생각하기도 귀찮았다. 참으로 심란한 밤이었다. 봉투를 뜯을 때 긴장했던 탓인지 갑자기 갈증이 느껴졌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할머니와 시게 선배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가파른 계단을 내려갔다. 근처에 있는 자동판매기에서 차가운 음료수라도 사려고 현관 밖으로 나섰다가 나도 모르게 우뚝 멈춰 섰다.
바로 앞에 커다랗고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마치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그림자는 천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둠 속의 사슴 실루엣이 말했다.
"자, 이제 내게 줘, 선생."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들려왔다.
- 현관 앞 외등 불빛 아래로 암사슴의 머리가 쓰윽 드러났다.
"받으러 왔어. 선생."
- "뺏겼군..."
더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물론 사슴은 여전히 앞에 있었다.
"뺏기다니... 무엇을?"
속으로 실망하면서 내가 물었다.
"눈 말이야, 이 얼간아. 눈 뻔히 뜨고 뺏겨놓고도 아무 눈치도 채지 못했어?"
늘 잠만 자는 사슴에게 얼간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내 언성이 높아졌다.
"잠깐만. 내가 잘못했다는 이야기야? 우, 웃기지 마. 난 학교 일 때문에 후시미이나리에 갔던 거야. 심부름꾼이니 신의 보물이니 하는 네 그 뜬금없는 이야기 때문에 간 게 결코 아니라고. 네 말대로라면 내가 가만히 있어도 여우의 심부름꾼이 뭔가를 줄 거라고 했잖아.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내게 접근하지 않았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 건너야. 그런데 왜 내가 얼간이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거지? 이건 말도 안 돼."
사슴은 바람 소리라도 듣는 듯이 귀를 쫑긋 세웠다. 전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얄미울 정도로 침착했다.
- "선생, 잘 들어.”
내 말이 끝나자마자 사슴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차분하지만 말로 표현하기 힘든 위압감이 느껴졌다.
"난 어떻게 되든 별로 상관없어. 분명히 잃는 것도 있을 테지만 너희들이 잃을 것에 비하면 미미하지. 알겠나? 오해하지 말란 말이야. 선생은 우릴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니야. 너희들을 위해 우리가 움직여주고 있는 거지. 신의 보물을 내게 가지고 오느냐 마느냐는 선생 맘이야. 하지만 가지고 오지 않아서 초래되는 결과는 선생 혼자 힘으로 감당해 내기 힘들 거야. 듣기 싫은 소리는 하지 않겠어. 신의 보물을 찾아와 간나즈키가 지나기 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어. 그때까지 내게 눈을 가져와."
사슴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저히 흘려들을 수가 없는 묘한 박력이 있었다.
- "뭐, 뭐지? 그 눈이란 것이?"
"이 세상의 보물이야. 오랫동안 너희들의 목숨을 지켜주어 온 보물."
"그게 삼각인가?"
"그래."
- "... 누구에게?"
"뻔하잖아. 쥐지."
멍해진 나는 사슴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숨에 맥이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나라에 사는 사슴에, 교토의 여우에... 이번에는 쥐라니. 그야말로 검도부 호구의 갑에 새겨진 그림과 똑같았다. 그런가?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것은 내 망상이다. 갑 이야기를 미리 들었기 때문에 사슴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네 정체는 역시 나야. 넌 내 생각이 만들어낸 망상이지. 신경쇠약이 이렇게까지 심하다니, 큰일이군."
사슴은 나를 바라보며 보란 듯이 혀를 찼다. 혀를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모르지만 쯧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이지 인간들은 어리석기 짝이 없어. 자기들이 대단한 줄 알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바보가 되어 가. 그래서 현실을 회피하는 행동이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도무지 깨닫지 못해. 정말이지 짜증 나는 녀석들이야. 애당초 변변치 못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하긴 이제 와서 이런 소리를 이제 와서 해봐야 아무 소용없겠군."
- 사슴이 한 걸음 다가왔다. 머리를 앞으로 쑥 내밀더니 갑자기 내 손바닥에 코를 쏙 들이댔다. 차가운 그 감촉에 나는 얼른 손을 뒤로 뺐다. 외등 불빛을 받아 사슴의 침이 손바닥에서 빛났다.
"선생, 섭섭하지만 자네는 운반책으로 실격이야. 그래서 표시를 해놨어."
얼굴을 찡그리고 셔츠에 손등을 문지르는 나를 사슴이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뭐? 표시라니?”
사슴은 내 질문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잘 들어, 선생, 쥐한테서 '눈'을 되찾아 와."
- "쥐의 심부름꾼이 여자일 필요는 없지. 뭐 지금 자네에게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을 거야. 마음이 바뀌면 하기야 표시된 걸 보면 싫어도 맘이 바뀔 테지만. 그럴 마음이 들면 강당 유적으로 와."
"강당 유적?"
"대불전 뒤에 있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 말이야."
사슴이 돌아섰다. 꼬리가 정면으로 나를 향했고, 항문에서 보란 듯이 작은 똥을 내뿜었다. 배설을 마치자마자 사슴은 '휘이이' 하고 짧게 울었다. 검은 실루엣이 데가이몬 쪽으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 나는 그것이 '귀'라는 사실을 또렷하게 알고 있었다. 어제까지 '귀'가 있었던 부분을 쓰다듬어보았다. 원래 거기서 느껴져야 할 감촉이 없었다. 머리카락치고는 지나치게 밀도가 높은, 이상하게 빽빽하게 난 털의 감촉이 느껴졌다.
고개를 숙이고 칫솔을 입에서 뺐다. 아직 이를 제대로 닦지도 않았지만 칫솔을 씻고 입을 헹궜다. 수건으로 입 주위를 닦으며 될 수 있으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다시 세수를 했다. 요즘 이래저래 완전히 약해졌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는 흔히 이상한 것을 보기 마련이다. 수건으로 열심히 얼굴을 닦았다. 그사이에는 한 번도 거울을 보지 않았다. 눈두덩과 눈초리는 특별히 세게 닦았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다시 천천히 정면을 바라보았다.
핏기를 잃어 해쓱해진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째서 사슴 귀가 생긴 걸까.
- 손을 뻗어 조심조심 사슴 귀를 만졌다. 옆머리에서 비스듬히 솟아난 귀는 틀림없이 이곳 나라에 온 뒤로 눈에 익은 사슴의 귀였다. 한편 내가 이십팔 년간 보아온 귀는 짙은 갈색의 짧은 머리털로 변해 있었다. 쓰다듬어보아도 손가락 끝에는 머리카락 감촉만 느껴졌다. 사슴 귀 옆에서 손가락을 튕겨보았다. 이어서 어제까지 귀가 있던 부분에서도 손가락을 튕겼다. 내 청각이 완전히 사슴 귀 쪽으로 옮겨 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시게 선배에게 오른쪽 귀도 잡아당겨달라고 부탁했다. 거울을 보니 시게 선배의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갔다. 분명히 오른쪽 귀를 잡아당기는 감각이 느껴졌다. 시게 선배 다음에 내가 만져보았지만 역시 귀가 만져지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사슴 귀 부분을 만져봐 달라고 부탁했다. 시게 선배의 손가락은 사슴 귀를 빠져나갔다. 나는 사슴 귀를 손가락으로 꼬집었다. 분명히 손가락 감촉이 느껴졌다. 하지만 시게 선배의 손은 귀를 그냥 지나쳐버린 것이다.
- 사슴 귀가 보이지 않느냐고 물으려는데 중요한 부분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나도 모르게 기침을 했다. 할머니는, 이런, 감기가 걸렸나? 하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나는 사과하고 다시 말했다.
제 머리에 사슴 귀가 보이지 않나요?
그렇게 물으려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설마 싶어 숨을 크게 들이쉬었지만 역시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나는 '지난번에 사슴이 말을 걸어왔다', '사슴의 운반책이 되었다', '여우의 심부름꾼은 여자다'라는, 지금까지 한 번도 남들에게 이야기한 적 없는 사실을 다 털어놓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사슴 이야기를 하려고만 하면 마치 약속이라도 된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 "어라? 매실장아찌가 바뀌었나요?"
"아니, 어제 먹던 것과 같은 건데."
"왠지 더 짠맛이 나서요. 내 입맛이 이상한 건가?"
고개를 꼬며 연어 자반구이에 젓가락을 가져갔다. 생선껍질을 벗기면서 나는 기분이 우울해졌다. 아무래도 더 심한 신경쇠약에 걸린 것만 같았다. 환각, 환청에 더해 그런 상황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강렬한 자기 암시까지 하게 된 모양이다.
- 밥과 함께 입에 넣은 연어는 무척 짰다. 아무래도 오늘은 혀가 민감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맞은편에 앉아 뜨개질을 시작했다. 돋보기안경 너머로 코를 세며 어젯밤에 이즈 앞바다에서 큰 지진이 났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즈에 사는 시게 선배의 아버지도 전화로 상당히 큰 지진이었다고 이야기한 모양이다.
"언젠가 아주 큰 지진이 쾅하고 오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 겁이 나."
할머니는 뜨개질하던 것을 내려놓더니, 꼽등이(귀뚜라미 비슷한 곤충 - 옮긴이)하고 지진은 싫어,라고 중얼거리며 엽차로 입을 적셨다.
- "아, 삼각이요? 그게 왜요?"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대꾸했다. 나가오카 선생으로부터 수리 이야기를 들었는데 대회 당일에 가지고 오는 데 문제가 없는지 신경이 쓰여서 연락했다고 말하자 난바 선생이 대답했다.
"어제 얼른 수리를 맡겼습니다. 야마토배가 열리는 날에는 가지고 갈 수 있으니 그날 깨끗이 수리된 걸 보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올해야말로 우리가 우승할 테니 바로 오사카로 가지고 돌아오게 되겠지만요, 으하하하."
- "삼각이란 것이, 눈을 닮았나요?"
"눈이라뇨? 눈알 말입니까? 아뇨, 삼각형이기 때문에 아무리 봐도 눈을 닮지는 않았는데요."
그야 그럴 것이다. 내가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눈알이 있기는 하군요."
- "앞면에 여우와 사슴과 쥐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아, 이건 선생님이 지난번 고노하에서 말씀하신 호구의 갑에 그려진 그림과 같죠. 그러니 눈이 있다면 있는 셈인가?"
왜 그런 걸 묻는 거죠? 의아하다는 듯이 묻는 난바 선생에게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인사한 뒤에 전화를 끊었다.
시게 선배는 먼저 퇴근했기 때문에 혼자서 학교를 나왔다. 조명을 받는 주작문을 올려다보며 정말로 난바 선생이 쥐의 심부름꾼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신오미야 역에서 전차를 탔다. 맞은편 유리창에 사슴 귀가 돋아난 남자가 우두커니 앉아 있는 모습이 비쳤다.
- 학교로 가는 차 안에서 할머니가 만들어준 주먹밥을 먹는데 시게 선배가 갑자기 후지 산 이야기를 꺼냈다.
후지 산 기슭의 양끝에는 옷 만들 때 쓰는 시침바늘처럼 안테나가 잔뜩 꽂혀 있는 모양이다. 그것은 후지 산이 부풀어 오르지 않는지 점검하는 장치라고 한다. 후지 산에 지각변화가 없는 한, 그 안테나들의 간격은 일정하다. 하지만 후지산 내부가 부풀어 오르면 안테나들이 기울어지면서 서로 멀어지게 된다.
"후지 산이 부풀어 오르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안에 있는 마그마의 양이 늘어나는 걸 의미해. 여드름이 커지는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꺼낸 건데요?"
"요즘 후지 산이 부풀어 오르고 있대. 아직은 수십 센티미터밖에 안 되지만 안테나와 안테나의 간격이 벌어지고 있다고 오늘 아침 텔레비전에서 보도하던 걸. 화산 작용에 따른 지진도 미약하기는 하지만 관측되고 있어. 최악의 경우에는 분화할 가능성도 부정할 수는 없다고. 뭐 그런 이야기야 텔레비전에서 늘 하는 소리이고,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지만 요즘 유난히 지진이 많아서 말이야. 약간 무섭지. 어쨌든 평화롭고 조용한 게 최고야. 그렇게 생각하면 라쿠고의 세계는 그야말로 늘 평화로워."
시게 선배는 태평스럽게 이야기를 마무리하더니 라쿠고 CD를 넣고 스위치를 눌렀다.
나는 뺨이 굳어지는 걸 느끼면서 사이드 미러로 시선을 옮겼다. 주먹밥을 손에 들고 사슴 귀에 사슴 코를 한 남자가 창백한 표정으로 이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 몇 번이고 같은 높이에 도전하는 높이뛰기 선수를 바라보면서 과연 저런 검도부로 삼각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아침, 사슴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 삼각을 손에 넣지 못하면 이 나라는 끝장이야."
그러더니 사슴은 그 귀가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마음에 들 리가 없지 않느냐고 대답하자 건방진 소리라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고는 사슴 귀라면 뒤에서 나는 소리까지 잘 들릴 테니 사람 귀일 때보다 훨씬 편리하지 않겠느냐며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했다.
- "왜 너는 암사슴인데 목소리나 말투는 아저씨 같지?"
아저씨? 사슴은 대불전을 올려다보던 얼굴을 불쑥 내 쪽으로 돌렸다.
"무례한 말투로군. 나는 아저씨가 아니야. 이 목소리는 내게 '진정의 역할'이 맡겨졌을 때 받게 된 목소리야. 그때 나는 가스가(나라의 한 지명 - 옮긴이)에서 가장 힘세고 긍지 높은 수사슴이었지. 하지만 나도 불사신은 아니야. 육신이란 언젠가 쇠약해져서 사라지지. 그때마다 될 수 있으면 어린 혼으로 바꿔 타게 돼. 그런데 이번에는 우연히 암사슴이었을 뿐이야. 아, 지난번에도 암사슴이었던가? 아, 그전에도 암사슴이었군. 암사슴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으니 요즘 같은 시대에는 덕을 보는 편이지. 먹이도 많이 주고. 수컷은 뿔이 잘리기도 하고 어린아이들은 무섭다며 울기도 하기 때문에 불편해."
농담하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사슴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물론 사슴의 진지한 표정이 어떤 것인지는 본 적이 없다.
- "글쎄. 자세한 건 기억나지 않아. 천팔백 년 전부터 시작된 일이니까."
전에 시게 선배로부터 사슴의 수명은 수컷이 십오 년, 암컷이 이십 년 정도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평균 잡아 십팔 년이라고 하면 내 앞에 있는 사슴은 백 번을 다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된다. 정말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 풀밭에 앉은 사슴은 이따금 엉덩이 부분에 코를 디밀고 털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천팔백 년 전부터 계속되어 온 '진정 의식'의 기나긴 역사에 관해,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묘하게도 그건 내가 아는 이야기였다.
- 물론 모두 다 아는 것은 아니었다. 또 알고 있었다고는 해도 나는 그걸 한 번도 진짜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어렸을 때 내가 엄마한테 자주 들었던 이야기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예전부터 녀석의 움직임을 눌러왔어."
녀석? 내가 무심코 물었다.
"메기 말이야."
- 사슴이 천천히 대답했다.
"선생이 섬기는 가시마다이묘진은 메기의 머리를 누르고 있지. 우리는 메기의 꼬리를 누르고 있어. 그래서 땅속에 있는 커다란 메기가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아주 얌전히 있는 거야. 하지만 그것은 우연이라면 우연한 결과야. 왜냐하면 가시마다이묘진에게는 특별히 메기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겠다는 생각이 없어. 아마 그런 생각은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을 거야. 다이묘진은 그냥 그 자리가 좋아서 그러고 있을 뿐이지. 자기가 앉은자리 아래 메기 머리가 있다는 사실마저도 어쩌면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원래 신이란 다들 그렇게 꼼꼼하지 못한 존재들이지.
이따금 다이묘진도 행선지를 말하지 않고 훌쩍 여행을 떠나는 일이 있어. 메기도 평소 다이묘진에게 머리를 밟혀 있기 때문에 거의 포기 상태에 빠져 쓸데없이 움직이지는 않지. 대부분 잠을 자며 지내. 하지만 이따금 몸을 뒤채듯 움직이는 경우가 있어. 그때 머리 위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 그러면 이때다 싶어 마구 움직여. 평소의 울분을 풀려는 듯이 발버둥을 치지. 동쪽에서 엄청난 지진이 일어날 때는 대부분 다이묘진이 어디론가 놀러 갔을 때야. 신사의 신령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백 년 전 간토 지방에서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여행에서 돌아온 다이묘진은 주위의 참상을 보더니 가시마진구의 사슴들에게 하늘이 무너졌느냐고 물었다더군. 자기 밑에 메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증거지.
우리는 이곳에서 메기 꼬리를 누르고 있어. 우린 가시마다이묘진 하고 달라. 메기 꼬리를 누르기 위해 여기 있는 거지. 여행은 하지 않아. 여행을 떠나봤자 차에 치이거나 인간이 쏜 총에 맞아 죽는 것이 고작이야. 여기 있으면 먹이도 그냥 줘. 아주 잘 보살펴주지. 여긴 극락이야. 다른 녀석들이 늘 부러워하지."
"다른 녀석들?"
사슴이 구부리고 있던 앞발로 땅을 짚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나라에 있는 사슴, 교토에 있는 여우, 오사카의 쥐. '진정의 역할'을 맡은 이들의 이름이지. 셋이서 메기의 꼬리를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해왔어. 이곳에서 '진정의 역할'을 맡은 지 이미 천팔백 년이나 되었지."
- 풀밭에는 거의 2미터 간격으로 주춧돌이 늘어서 있었다. 사슴은 땅바닥에서 나뭇잎을 입에 물더니 주춧돌 위에 살짝 얹어놓았다. 그리고 또 다른 나뭇잎을 물어 다른 주춧돌 위에 얹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세 점으로 떠받쳐야 비로소 안정이 되는 법이야."
사슴은 세 장째 나뭇잎을 주춧돌 위에 놓았다. 직각 삼각형 모양을 그리는 주춧돌 위에 놓인 나뭇잎 세 장이 산들바람에 흔들렸다.
- "육십 간지, 그러니까 육십 년에 한 번 찾아오는 간나즈키에 '눈'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가. '눈'의 힘을 빌려 우리는 메기를 누르지. '눈'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나사를 돌리는 도구 같은 것이야. 세 개의 나사를 단단히 조여야만 뚜껑도 쓸모가 있지. 하지만 나사는 자꾸 느슨해져. 메기도 항상 가만히 있지는 않고, 때론 짜증도 내지. 그래서 육십 년에 한 번 찾아오는 간나즈키마다 사슴에서 쥐, 쥐에서 여우, 여우에서 사슴으로 '눈'이 옮겨가야만 나사가 다시 단단하게 조여지는 거야.
왜 간나즈키에 그러느냐고? 당연히 신들이 없기 때문이지. 신들은 우리가 메기를 누르고 있다는 걸 알지도 못해. 만약에 신들이 '눈'에 관해 알아봐. 당장 빼앗으려 들 거야.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생각지도 않고 신들은 실컷 놀다가 질리면 아무 데서나 지내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래서 간나즈키, 신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눈'을 몰래 옮기는 거지. '눈'의 능력은 간나즈키에만 발휘돼. 신의 보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을지도 몰라. 신들에겐 비밀로 하고 있는 보물이니까.
이곳에서 '눈'의 능력을 쓴 지 이미 백팔십 년이 지났어. 봉인에도 상당히 문제가 있을 거야. 아무래도 요즘 메기의 심기가 불편한지 움직임이 유난히 거칠어졌어. 동쪽에서는 요즘 지진이 자주 일어난다고 하지 않나? 선생도 이야기는 들었을 테지?"
- 나는 물리 교사다. 자연과학의 진리를 탐구하고 공부하는 사람이다. 지진은 지하에 있는 판의 이동이 지층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일어난다. 절대로 메기가 몸부림쳐서 일어나는 게 아니다. 하지만 내가 지닌 올바른 지식도 말을 하는 사슴 앞에서는 슬프게도 헛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알겠지? 선생은 '눈'을 찾아와야만 해. 일단 열린 봉인은 다시 원래 상태로 돌이킬 수가 없어.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가 없다고 해야 할까? 뭐 그건 그렇고, 메기는 마구 몸부림치고 나서 이곳에서 떠날 테니까 그다음에는 걱정할 일이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오랜 시간 이유도 없이 갇혀 있었기 때문에 녀석은 원한이 뼈까지 사무쳤지. 틀림없이 이 나라는 망할 거야. 꼬리를 누르고 있었어도 지금까지 여기저기서 엄청난 지진이 일어났어. 이동이 자유로워지면 메기는 어디든 갈 수가 있어. 그렇게 되면 가시마다이묘진의 힘도 소용이 없게 돼."
시원한 아침 공기는 부드러운 바람이 되어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갑자기 물들기 시작한 나뭇잎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하지만 구부린 내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쥐에게서 '눈'을 되찾아, 선생. 이제 간나즈키도 얼추 반이 지났어. 봉인은 분명히 느슨해지고 있고. 메기의 상태를 보면 간나즈키에도 그리 방심할 수가 없는 상태야. 만약 이달을 넘기면 자연히 '눈'의 능력은 닫히게 될 거야. 그때는 이미 늦어."
- "그렇다면 왜 쥐가 방해를 하는 거지? 그러니까... 쥐도 메기를 봉인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동료잖아?"
"동료? 누가 그런 소릴 해? 쥐와 동료라는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 없어. 누가 그런 지저분하고 교활한 거짓말쟁이할망구와 동료래? 절대로 그러고 싶지 않아."
갑자기 언성을 높이는 사슴의 태도에 내가 움츠러들자 사슴은 후우 하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싸움인 거야."
"엥? 뭐라고?"
"그 쥐 할망구는 옛날부터 지독한 피해망상증이고, 게다가 히스테리가 심해. 나하고 여우가 함께 자기 험담을 한다고 공연히 오해해서 매번 싸움을 걸어. 그때가 언제더라... 아마 다섯 번 전일 거야. 맞아, 내가 쥐에게 '눈'을 건네주기 전, 다섯 번 전의 간나즈키 때였어. 그때도 그 할망구는 마지막까지 운반책을 뽑지 않아 자칫하면 봉인이 벗겨질 뻔했어. 봉인을 다시 단단하게 하고 나서도 메기가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아 세상이 무척 시끄러웠지. 정말이지 천팔백 살이나 먹은 할망구 주제에 꼭 어린애 같아. 자기도 능력을 잃게 될지 모르는데도 한번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하면 앞뒤 안 가리는 성격이야. 나는 싸움과 '진정 역할'은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저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아주 성가셔. 그래서 이번에도 늘 그러듯 심통을 부리는 거야."
-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짐승들끼리 벌이는 말도 안 되는 다툼 때문에 이 나라가 망하다니.
"그, 그런 무책임한 짓이 어디 있어?"
"무책임? 아니야. 말했잖아. 이건 우리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니란 말이야. 너희들, 인간을 위해서 하는 일이야. 우리는 메기가 발버둥을 쳐도 특별히 곤란할 일이 없어. 그때는 산이 우리를 지켜주지. 모두가 인간 때문이야. 인간을 위해 우리는 천팔백 년이나 이런 이상한 짓을 계속 해오고 있어. 고맙게 생각하지는 못할망정 무책임하다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되는 거야. 옛일은 모두 잊고 태평하게 살고 있는 인간들이 오히려 더 무책임하지."
"그, 그럼 너희들은 왜 인간을 위해 그런 일을 하는 거지?"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야."
"부, 부탁이라니... 누구한테?"
- 사슴은 갑자기 뒷발을 귀 옆으로 당기더니 다리를 요령있게 움직여 귀 뒤를 긁기 시작했다. 다 긁고 난 뒤에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려나 보다 생각했는데 또 긁기 시작했다. 말을 하고 싶지 않을 때는 평범한 사슴으로 돌아가버리는 모양이다. 정말 제멋대로다.
시계를 보니 슬슬 돌아가야만 할 시간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계속하다가는 학교에 지각할 것 같았다. 할머니나 시게 선배도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 "아니 대체 넌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있는 거지?"
"말을 까먹지 않았으니까. 옛날엔 다른 동물들 가운데도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 녀석들이 무척 많았어.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죄다 인간의 말을 까먹은 거지. 어쨌든 다들 인간을 싫어하니까. 내 경우에는 '눈'의 능력을 빌려 쓰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거야."
"그럼 여기 있는 사슴은 다들 말을 할 줄 아는 건가?"
"아니. 그렇지 않아. 나만 할 줄 알아. 그래서 다른 사슴들에게도 가르쳐주고 있지. 인간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라고, 그러면 인간이 먹이를 줄 거라고 말해."
나도 모르게 살짝 웃고 말았다. 이 사슴이 나쁜 녀석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가르쳐줘. 나, 나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나?"
사슴은 고개를 기울이더니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진정 의식이 무사히 끝나면 네 소원을 딱 한 가지 들어주지. 원래 모습을 원한다면 그 소원을 들어주겠어. 어떤 소원이건 들어줄 수 있을 거야."
사슴은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 모습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사슴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이니까."
나는 말없이 일어섰다. 역시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사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삼각을 찾아올 수 있을까. 도무지 자신이 없다. 지금 상태로는 교토여학관, 오사카여학관의 검도부를 당해낼 수가 없다. 지금 당장 난바 선생에게 수리를 맡긴 가게를 물어봐서 그것을 억지로 빼앗아버리면 어떨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랬다가 삼각이 구리로 만든 평범한 판이었을 때는 어떻게 하나? 아무도 없는 강당 유적에 내가 삼각을 손에 들고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당연히 사건이 될 것이다. 남들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할 방법도 없다.
- "그러니까 천간과 지지를 뜻하는 거예요. 갑, 을, 병으로 시작하는 10간과 자, 축, 인으로 이루어진 12지를 조합하면 1과 12의 최소공배수인 육십 가지 조합이 생깁니다. 예전에는 햇수를 셀 때 이걸 썼죠. 병오년이라는 이야기 들어보셨죠?"
"알아. 미신이 있잖아. 그해에 자식을 낳으면 좋지 않다던가 뭐라던가."
"그렇죠. 병오도 육십 년 주기로 돌아와요. 옛날 사람들은 정말로 병오년에 애를 낳으면 좋지 않다고 믿었죠. 과거 출생률 그래프를 보면 육십 년마다 숫자가 뚝 떨어지는 해가 있어요. 그리고 환갑이란 말도 마찬가지예요. 태어난 지 육십 년 되는 해에 환갑을 치르죠."
"아하, 그런 거로군."
- 후지와라 군의 강의를 흘려들으며 나는 사슴이 한 말을 떠올렸다. 사슴은 다섯 번 전 '눈'을 맡았을 때 큰 문제가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했다. 다섯 번 전이라면 삼백 년 전이다.
- "무려 쉰아홉 번이나 우승했어요."
고노하에서 난바 선생이 기세를 올린 것도 올해야말로 교토의 아성을 무너뜨리겠다고 각오했기 때문일 겁니다. 계속되는 후지와라 군의 목소리가 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나는 말없이 죽도가 든 비닐봉투를 열면서, 지도에 자신이 없어요,라고 말하던 마돈나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럼, 삼각은 대회 시작 이후로 내내 교토에 있었던 거로군."
"예, 그래서 그걸 본 적이 없었던 거죠. 교토여학관은 진짜 대단해요. 요즘은 출전하지 못하는 때도 있지만 인터하이에 단골로 출전했던 만큼 대학에 들어가서도 동아리로 검도부를 선택하는 학생이 많고, 3학년이 되어도 은퇴하지 않아서 멤버 대부분이 3학년 생이란 것도 강점이죠."
이럴 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59연속 우승이라는 농담 같은 숫자에도 물론 놀랐지만 무엇보다 삼각이 육십 년 동안 교토에 계속 있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 "작년에 난바 선생님이 마돈나에게 고백했을 때 마돈나가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면서 거절했다고 하거든요."
"어떻게 자네가 그런 이야기까지 알지?"
"교사들 세계는 아주 좁아요.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니 이런 이야기는 무서울 정도로 빨리 퍼지죠."
나는 난바 선생의 햇볕에 그은 넓적한 얼굴을 떠올렸다. 마돈나에게 고백한 용기는 인정해주고 싶지만, 그가 쥐의 심부름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동정심은 일지 않았다.
누구일까, 마돈나가 마음에 담고 있다는 행운의 사나이는? 내가 중얼거리자 후지와라 군은 자기나 나는 아닌 것이 분명하니 걱정할 것 없다며 밉살맞게 대꾸했다. 시끄러, 하며 옆구리를 쿡 찌르고 그다음 장소로 이동하자며 전시관을 나섰다.
- 돌원숭이, 오니노셋친과 오니노마나이타(나라 현 아스카 마을에 있는 화강암 유적들 - 옮긴이), 돌거북. 어느 시골에나 있을 법한 오솔길 주변 여기저기에 묘한 돌이 놓여 있었다. 돌거북 같은 것이 민가의 처마 밑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웅크리고 있기도 했다. 후지와라 군과 내가 손을 잡고도 에워쌀 수 없을 정도의 크기였다.
대체 누가 이런 걸 만들었지? 내가 묻자 후지와라 군은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 후지와라 군의 '모른다'는 고고학적으로 모른다는 뜻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부근에서는 거대한 돌을 이용한 석조물이 많이 발견되는데 문헌자료가 적어 대부분이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얼마나 오래전에 만든 거지? 내가 묻자 대략 천사백 년쯤 전에 만들어진 걸 거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무슨 목적으로 만든 것인지 알아내지 못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이렇게 큰 것을 만들었는데도 누가 만든 것인지 모르게 되어버렸다니."
나는 등 뒤에 있는 이시부타이 고분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그렇죠. 인간은 문자로 기록해두지 않으면 어떤 일이건 언젠가는 잊고 마니까요."
후지와라 군은 미간을 찡그리며 잔뜩 무게를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사카부네이시 석조물, 거북 모양의 석조물, 아스카데라 飛鳥寺를 보고 가시하라진구마에 역에서 자전거를 반납했다. 아스카데라에서는 현존하는 일본 최고의 불상이라는 아스카 대불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박력 있는 자태를 우러러보았다. 얼굴 여기저기에 보수한 흔적이 있어서, 블랙 잭(데즈카 오사무의 만화에 나오는 얼굴에 상처가 많은 천재 무면허 의사 - 옮긴이) 같다, 고 중얼거리자 후지와라 군이 천벌 받을 거라며 무섭게 노려보았다.
- 갈아탄 전차는 단선이었다. 단선이기는 하지만 바로 JR 나라역까지 연결되니 나라는 이상한 곳이다. 평화로운 경치를 바라보는데 후지와라 군이 저기 보이는 게 미와 산이에요, 저기가 하시하카 고분이고요, 하며 계속 설명했다. 내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히미코(야마타이국 여왕 이름 - 옮긴이)가 어떠니 야마타이국이 어떠니 동경 銅鏡, 동검 銅劍, 동모 銅鉾, 동탁 銅鐸 등등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 골치 아픈 이야기들을 다 흘려들으며 나는 오히려 방금 지나친 역이 무인역이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 "작은 동네지만 고고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곳이에요. 리처드도 분명히 이 부근으로 여러 차례 발굴을 하러 왔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리처드도 차 안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언덕을 올라가자 연못이 보였다. 연못 건너편에 작은 동산이 살짝 솟아 있었다. 구로즈카 고분입니다. 후지와라 군이 관광 가이드처럼 손바닥을 펼쳐 안내했고 우리는 그 옆 공원 구석에 있는 전시관으로 향했다.
- 전시관 현관에 들어서니 커다란 항공사진이 바닥에 붙어있었다. 야마토 고분군이라고 자주 듣기는 했지만 해자가 둘러싼 전방후원형 고분이 땅 위에 뚫린 열쇠 구멍처럼 여기저기 보였다. 안쪽에는 구로즈카 고분의 내부를 재현해 놓은 코너도 있었다. 생각보다 좁은, 갱도 같은 고분 내부에는 붉게 칠한 돌을 따라 오래된 10엔짜리 동전 같은 색을 띤 원반이 기와처럼 세워져 있었다. 저게 뭐지? 내가 묻자 후지와라 군이 동경, 즉 구리거울이라고 대답했다. 이 고분에서 발견된 구리거울은 매우 센세이션을 일으켰죠, 그가 사진을 찍으면서 설명했다.
- "아, 그렇군. 그럼 자네는 야마타이국이 어디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지?"
내가 아무리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다 해도 야마타이국이 규슈 쪽에 있었다. 나라 쪽에 있었다 하는 논쟁이 있다는 정도는 안다.
"저는 규슈라고 믿는다고 해야 할까요? 역시 당시 선진국이었던 중국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현실적인 것 같아요. 하지만 요즘 고고학적 발굴 자료를 보면 단연 나라죠. 물론 아직 어느 쪽이라고 결정을 내릴 만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어요. 중요한 사실은 히미코의 것임이 분명한 물적 증거가 나오는 쪽이 이길 거라는 점이죠."
"물적 증거? 그게 뭐야? 히미코가 도장이라도 찍은 적이 있다는 건가?"
"그럴 리가 없죠. 그때는 야요이 시대(기원전 10세기~기원후 3세기 - 옮긴이)니까. 문자에 의한 기록은 중국 문헌에만 나와요. <위지동이전>의 왜인 항목에는 히미코에게 거울을 많이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죠. 그러니까 그 거울이 나오면 그곳이 히미코가 살던 곳이 되는 거잖아요."
- "분명히 여기서 서른 개도 넘는 구리거울이 한꺼번에 발견되었을 때는 '와, 히미코의 구리거울인가 보다' 하며 큰 소동이 벌어졌지만 아무래도 중국에서 선물로 받은 거울은 아닌 것 같아요."
"어떻게 그런 걸 알 수 있지?"
"문제는 중국에서 저런 모양의 구리거울이 전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죠. 선물을 받았는데 준 쪽에서는 나오지 않는다는 건 이상하잖아요? 지금은 이 지역에서 만든 오리지널 거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요."
"다 둥근 모양에 똑같아 보이던데."
"각각 미세한 차이가 있어요."
- "리처드 같은 경우에는 나라에 야마타이국이 있었음을 증명하려고 삼십 년 가까이 매달려왔어요. 그야말로 평생을 걸고 하는 일이죠. 틀림없이 이 아래 어딘가에 히미코의 거울이 잠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꿈을 꾸며 발굴을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정말 존경스럽죠."
해가 기울자 황소개구리들이 일제히 울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 굵은 울음소리를 들으며 봉분 꼭대기로 이어지는 짧은 계단을 올라갔다.
"그런데 히미코라는 사람은 어느 시대 사람이야?"
"야요이 시대 말기요."
- 엄청나게 오래 전이로 군. 내가 중얼거렸다. 계단을 다 올라가니 갑자기 시야가 툭 트여 나도 모르게 와아 소리가 나왔다.
봉분 위로 펼쳐진 하늘이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정면이 고분으로 막혀 있어서 깨닫지 못했는데 낮은 산줄기가 둘러싼 야마토 분지를 뒤덮듯 보랏빛 노을이 펼쳐져 있었다.
머리 위로 어둠이 번지기 시작하고, 발그레하게 물든 구름이 펼쳐져 있었다. 후지와라 군과 나는 보랏빛 베일로 뒤덮인 하늘을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해자 수면을 보니 마치 하늘이 내려다보이듯 맑은 보랏빛이었다. 논의 벼이삭들이 서쪽 산줄기에 걸린 저녁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출렁거렸다. 가지를 한껏 펼친 소나무의 실루엣은 마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했다.
- "이거 놀랍군."
"이 경치를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오늘 날이 좋아 다행이네요."
"왜일까? 학교에서 보는 저녁노을과 전혀 다르네. 정말 아름다운 보랏빛이야."
"헤이조궁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의 도읍은 여기서 좀 더 남쪽에 있었어요. 거리로 따지면 30킬로미터도 되지 않는 이동이었기 때문에 옛 도읍을 그리워하는 와카가 여러 수 남아 있지요. 내가 생각하기에 이 석양을 볼 수 없게 되자 다들 예전 도읍을 그리워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 하늘로 시선을 되돌리자 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내 사슴 귀가 흔들렸다. 가을 향기에 내 사슴 코가 벌름거렸다.
- 홋타는 스트레칭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침착하게 해."
"알았어요."
"저쪽은 모두 3학년들이야. 각오 단단히 하고 상대해."
홋타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 죽도를 집어 들었다.
"몇 학년이냐는 관계없잖아요."
호면 안쪽에서 뜻밖에 언성을 높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상대가 3학년이니 져도 좋다는 건가요? 선생님은 야마토배를 차지하고 싶지 않은가 보죠?"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물론 나도 야마토배가 탐이 난다. 하지만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1학년인 홋타가 교토 사립학교 검도 대회에서 우승한 3학년 선수들을 다섯이나 물리쳐야 한다. 간단한 일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홋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호면 안쪽에 있는 홋타의 눈에서 묘한 빛이 났다.
"선생님, 야마토배 차지하고 싶지 않아요?"
"... 차지하고 싶지."
홋타의 눈빛에 밀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럼 차지할 거예요.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시라구요."
- 무슨 일인지 물어볼 틈도 없이 다음 시합이 시작되었다. 교토여학관의 2위는 시작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일단 한 걸음 물러서서 상황을 살피는 자세를 취했다. 홋타는 그런 상대 선수의 태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다가갔다. 상대가 당황해 머리를 공격했다. 홋타는 죽도를 눕혀 그 공격을 받아냈다. 다시 죽도 끝을 마주 대려는 순간, 홋타가 죽도를 쭉 뻗었다. 상대방이 그 공격을 막아내려고 팔을 치켜들자 홋타가 날카로운 손목 공격을 가했다. 흰 깃발 세 개가 펄럭였다.
- 홋타의 시합을 보고 있으면 검도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홋타의 검도는 상대 선수와 죽도 끝이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다. 죽도가 격렬하게 부딪치는 것은 승부가 갈리는 순간뿐이다. 홋타와 싸우는 상대는 묘하게 먼저 승부를 걸어온다. 홋타가 유지하는 간격이 그렇게 유도하는 것이다. 죽도 끝이 뒤엉키며 죽도 자루에 가까운 부분이, 그리고 몸이 부딪친다. 두 사람이 떨어졌을 때는 대개 승부가 결정난 상태다. 마치 매듭이 소리도 없이 풀리는 것만 같았다. 홋타가 매듭의 한쪽 끄트머리를 잡으면 아무리 복잡하게 묶인 매듭이라도 술술 풀려버리는 듯했다.
홋타의 승부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오로지 두 선수의 죽도가 마주치고 먼저 결정타를 날리는 쪽이 이기는 것이다. 그래서 홋타의 검도는 바보처럼 단순해 보이기까지 했다.
- 나는 이상하게 말문이 막혔다. 응? 고작 이 말밖에 못 하는 내게 홋타가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 기필코 이길 거예요."
나는 홋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공격적인 눈빛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홋타는 그 눈으로 교토여학관 주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전히 땀을 흘리고 있는 야생 어류 같은 홋타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아. 얘는 정말 아름답구나.
- 열 번째 연장전이 시작되었다. 나가오카 씨의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두 선수는 격렬하게 싸웠다.
어린 풀 같은 홋타는 다시 기운을 되찾아 하늘을 향해 우뚝 선 나무 같은 상대편 주장에게 과감하게 싸움을 걸었다. 하지만 잠시 숨 돌릴 시간을 가졌던 것은 홋타만이 아니었다. 교토여학관 주장의 동작도 생기를 되찾았다.
- 홋타의 오른쪽 호완이 무방비 상태로 드러나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상대 선수의 죽도가 허공을 갈랐다.
거의 피하기 힘든 각도에서 들어온 공격을 홋타는 팔을 치켜들어 피했다.
그야말로 놀라울 정도의 반사 신경이었다. 허공을 가른 상대의 죽도가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내려갔을 때 홋타의 몸은 이미 상대 옆에서 뛰어오르고 있었다.
두 발로 바닥을 차고 올라 마치 그 작은 몸이 순간 허공에 정지한 것처럼 보였을 때였다.
퍽!
아주 경쾌한 소리와 함께 홋타의 죽도가 상대 주장의 호면을 때렸다.
흰 깃발이 일제히 올라갔고, 동시에 환호성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 "이봐."
긴 침묵 끝에 드디어 사슴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뭐지?"
"뭐라니? ... 삼각이잖아."
"아니야."
"아니라니, 뭐가?"
"이건 '눈'이 아니야."
- "아, 잠깐, 이, 이건 진짜 삼각이야. 육십 년 동안 내내 교토에 있던 거야. 여우와 쥐와 사슴이 새겨져 있잖아. 간신히 우승했어. 이건 틀림없이..."
"잘 들어, 선생. '눈'이라고 했어. 어디에 이렇게 생긴 눈알이 있나?"
어둠에 녹아들어가 버릴 것만 같은 낮은 목소리로 사슴이 내 말허리를 잘랐다.
- "속았다고? 누구에게?"
"쥐. 아무래도 내가 한 방 먹은 모양이로군."
그게 무슨 말이냐는 내 물음에 사슴은 침묵으로 답했다. 달이 다시 구름 밖으로 나오고 달빛이 비쳤다. 어두컴컴한 가운데 사슴의 눈이 검게 빛났다.
- "간나즈키가 되기 조금 전의 일이었어."
사슴이 목소리를 잔뜩 깔고 말했다.
"쥐가 여기로 찾아왔어. 육십 년 만에 만났지. 여전히 지저분하더군. 꾀죄죄한 할망구였어. '눈'을 옮겨야 할 시기가 되면 늘 찾아와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곤 하지. 여우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얘기해 줬어. 쥐는 여우가 심부름꾼이 될 인간을 이미 정했다고 말했어. 요즘 인간들이 '눈'에 삼각이란 이름을 붙였다고도 했고. 나는 그 이야기를 선생에게 전했지. 그런데 선생 눈앞에 삼각이 나타났어. 하지만 그건 '눈'은 아니었지..."
사슴은 뭔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 뒤에서 수사슴이 뿔을 천천히 흔들었다.
"거참, 상당히 용의주도하군. 쥐는 분명히 교활해. 하지만 근본은 단순하지. 아무래도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과는 달라."
- "날 보고 어떻게 교토로 가라는 거지? 전차를 갈아타며 가라는 건가? 그렇게 해봐. 다들 나를 잡으려 들 거야."
"산을 타고 후시미까지 가면 되잖아."
"여우는 이제 거기에 없어."
"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 그럼 어디 있어?"
"우리 안에 있지... 여우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교토시 동물원에서 지내고 있어. 이제 후시미에는 야생 여우가 없는 모양이야. 하기야 매일 먹이를 주니까. 좁은 것만 빼면 동물원에서 지내는 게 훨씬 더 편하겠지. 옆 우리에 있는 너구리를 못 살게 굴면서 재미있어하는 모양이더군."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신들을 모셔야 할 존재들이 신들 곁을 떠나 동물원에서 한가하게 지내도 되는 건가?
"어쩔 수 없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 자체가 죽어버리니까.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원인은 너희 인간들에게 있어."
한마디 해주려고 표현을 고르던 내게 사슴이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자, 잊지 마. 몇 번이나 이야기했지만 이건 선생을 비롯한 인간들의 문제야. 여우는 이미 '눈'을 심부름꾼에게 맡겼어. '눈'이 여기 오면 내가 책임지고 진정 의식을 진행하지. 우리 역할은 거기까지야. 나머지는 너희들이 해결해야 해. 너희들 세상이니 너희들이 지켜."
- "쥐가 선뜻 내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 그리고 이번에는 쥐의 태도가 이상해. 이렇게 교묘한 술수를 부릴 만큼 뛰어난 두뇌를 가진 할망구는 아닌데. 어쨌든 여우의 심부름꾼을 찾아 '눈'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야 해."
- 내가 여우를 만나 물어볼 수 있느냐는 질문에 사슴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여우는 절대로 심부름꾼 이외의 인간과는 이야기를 하지 않으며, 평범한 여우인 척만 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말없이 삼각을 집어 들었다. 흙을 털어 봉투에 도로 집어넣었다. 손에 공허한 무게를 느끼며 내가 물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가르쳐줘. 대체 '눈'이라는 게 뭐지? 네가 모양새만이라도 미리 가르쳐주었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태가 되지는 않았을 거야."
"그건 말할 수가 없어."
"어차피 이 지경이 되었는데 말해도 괜찮잖아."
억지로 화를 누르며 나는 언성을 높였다. 그 목소리에 여태 꼼짝도 안 하던 수사슴들이 갑자기 살기를 띠고 앞으로 나섰다. 그걸 말리듯 암사슴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존재는 '눈'과 함께 해. '눈'이 정하는 것을 거스를 수가 없지. 오해하지 마. 여우나 쥐나 나나 절대로 죽지 않는 존재도 아니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지도 않았어. 병이 나기라도 하면 죽을 고생을 하지. 내가 지금까지 살아 이렇게 선생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은 '눈'에게 힘을 받은 덕분이야. '눈'과 함께 살아가는 거지. 그게 우리 역할이야."
- "그러니까 '눈'을 찾아, 선생. 모든 답은 거기 있어.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야. '눈'에는 힘이 있어. 만약에 '눈'이 스스로 필요를 느낀다면 반드시 선생 앞에 모습을 드러낼 거야."
마치 선문답 같은 대화였다. 나는 들으라는 듯이 혀를 쯧쯧 차고, 숄더백에 삼각을 넣은 다음 일어섰다. 손목시계의 조명을 켰다. 날짜는 이미 21일이었다.
- "진정 의식은 달밤에 해야 해. '눈'이 지닌 힘을 풀어내기 위해서는 꽉 찬 달의 힘이 필요해. 기한은 간나즈키의 마지막 날이 아니야. 보름밤이지."
"자, 잠깐 보름밤이라니. 대체..."
말을 하다 말고 나는 얼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에는 반달보다 약간 살이 찐 달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분명히 간나즈키에 의식을 하면 메기는 조용해져. 하지만 보름이 지나 기울어진 달밤에 하면 '힘'이 크게 떨어지게 돼. 다섯 번째 전에 그랬었지. 보름날 밤에 하지 않으면 메기가 조용해지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리거든."
11월, 후지산, 호에이 대분화, 후지와라 군의 자료집에 적혀 있던 글씨가 눈앞에 또렷하게 떠올랐다.
"어, 언제지? 보름이?"
달빛을 받은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사슴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25일 밤이야. 앞으로 닷새 남았어. 선생."
- "신을 모시는 무리들이요. 가스가타이샤라면 사슴, 이나리는 여우인 것처럼 쥐에게도 모셔야 할 신이 있어요."
"아, 알아. 다이코쿠텐(복을 가져다주는 신 - 옮긴이)이잖아."
"어라. 잘 아시네요."
- "그러니까 쥐는 다이코쿠텐의 부하죠. 어엿한 신의 사자입니다. 사슴이나 여우와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죠. 그리고 오사카인데, <일본서기>에 나니와궁(645년에 나니와로 도읍을 옮기고 652년에 지은 궁전 - 옮긴이)을 지었을 때 쥐가 우르르 이사해 왔다는 기록이 있어요."
"사람이 옮기면 쥐도 따라 옮기는 게 당연한 거 아냐? 그걸 근거로 삼는다는 건 좀 억지스러운 것 같은데?"
"분명히 그렇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니와궁이니까요. 오사카여학관은 나니와궁 옆에 있어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래서 쥐를 그린 것 같습니다. 뭐 이제는 그 진상을 알 수가 없지만요."
- "교토시 동물원이 어디 있는지 알아?"
"알죠. 헤이안진구 바로 옆에 있어요. 오카자키라고 하는 곳 부근이죠."
조금 전에 마돈나가 그곳에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자 후지와라 군은, 마돈나와 동물원에서 데이트하는 건가요? 좋겠네요, 아, 부럽습니다, 하고 태평스러운 소리를 하더니 체육관으로 갔다.
멍하니 의자에 앉아 책상에 놓인 달력을 보았다. 25일이라는 날짜에는 큼직하게 붉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보름날까지 앞으로 사흘.
- 어째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못 먹는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릴 때마다 시게 선배와 할머니는 늘 싫은 표정을 지었다.
"선생은 꽃꽂이 해본 적이 있는가?"
할머니가 물었다. 나는 낫토를 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선생도 한번 해보는 게 어떤가. 다음 모임에 데리고 갈 테니."
"꽃꽂이는 됐습니다. 어떻게 꽂는지조차 모르는걸요."
"틀이 있으니 그대로 하면 엉망이 되지는 않을 거야."
"예? 그런 게 있습니까?"
그럼, 있고말고. 할머니는 힘주어 대답하더니 도록 같은 그 책을 내게 내밀었다. 항아리 같은 그릇에 소나무가 꽂힌 그림이 있었다.
"천지인이라고 하지."
할머니는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분명히 붓으로 그린 세 방향으로 뻗은 소나무 가지 옆에 천, 지, 인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모두 다 이 틀에 따라 꽂는 거야. 유파에 따라 부르는 방법은 다르지만 내용은 같아. 이걸 봐."
- "정말이네요. 모두 세 개의 포인트가 있군요."
"천, 지, 인. 꽃꽂이는 말이야, 말하자면 이 세상을 상징하는 거지.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야만 비로소 균형이 이루어져 하나라도 빠지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보기에도 좋지 않아. 이상한 일이지."
할머니는, 내가 과장이 좀 심했나? 하며 웃었지만 나는 낫토 팩을 손에 들고 숙연한 자세로 듣고 있었다. 왜냐하면 할머니의 말은 그야말로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천이란 자연이며 태양이고, 지란 대지이며 나무들이고, 인은 인간이라고 했다.
"요즘 지진 뉴스를 듣다 보면 왠지 하늘님이 화가 나신 것 같아 걱정이야."
주전자의 물이 끓자 할머니는 책을 내려놓고 불을 끄러 갔다.
- 사슴이 내게 표시를 했다.
그리고 사슴은 홋타에게도 표시를 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나한테서 불똥이 튄 것이다. 아니, 사슴이 이야기한 대로, 너희들 세상은 너희들이 구해, 가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 이튿날부터 홋타는 사슴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사슴에게 이야기한 삼각 이야기를 사슴으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 홋타는 그 자리에서 검도부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야마토배에서 홋타와 나는 완전히 같은 목적을 공유했던 것이다. 사람 얼굴을 되찾고 싶다는 열망으로 홋타는 야마토배에서 이겨 멋지게 삼각을 차지했다.
하지만 홋타의 기대는 다시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야마토배를 치른 다음 날, 홋타는 사슴한테 삼각이 그냥 구리로 만든 판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시는 사람 얼굴을 되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을 안고 홋타는 비틀거리며 학교로 왔다. 지각해서 들어온 교실에서 하필 내가, 얼굴이 엉망이구나,라는 소리를 했다. 그때 홋타의 인내심은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이틀 동안 누워 있던 홋타는 시게 선배 집을 찾아왔다.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가 없다. 그게 홋타가 내린 결론이었다.
- "아, 이런. 이건 역시 안 나왔네."
왜 그래? 후지와라 군이 든 사진을 들여다보는데 빛 때문인지 온통 뿌옇게 나와 있었다.
"이건 뭐지?"
"구로즈카 고분 전시관에서 찍은 거울 사진이에요. 빛이 반사되어 거의 다 제대로 나오지 않았어요."
역시 플래시 때문에 안 나왔다면서 침울해하는 후지와라 군에게 디지털카메라였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사진이 제대로 찍히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을 거라고 소곤대자, 역시 디지털카메라를 사야 하려나, 하며 갑자기 풀이 죽어 중얼거렸다.
- "삼각... 뭐라고 했잖아?"
"아아, 삼각연신수경이라고 했어요."
뭐? 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후지와라 군은 옆에 있던 종이 귀퉁이에 '三角緣神獸鏡'이라고 써서 보여주었다.
"저번에 설명했잖아요. 히미코의 거울이 아니냐며 한때 크게 주목을 받았던 거울 말이에요."
후지와라 군은 비교적 빛 반사가 덜한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푸른빛이 도는 오래된 구리거울이 찍혀 있었다.
- "어디가 삼각이지? 아무리 봐도 둥근 거울이잖아."
"좋은 질문이에요."
후지와라 군은 무척 기쁜 표정을 지었다.
"생김새가 삼각이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삼각연... 그러니까 테두리의 단면이 삼각형이라는 뜻이죠."
- "이 거울을 피자처럼 잘랐다고 해보세요. 그걸 옆에서 보았을 때 바깥쪽 테두리 부분이 삼각형이거든요. 테두리 단면이 삼각형이고 거울 뒤에 신성한 짐승 모습을 새겨놓았기 때문에 삼각연신수경이라고 하는 거죠. 사실 이해하기 힘든 이름이기는 해요."
후지와라 군의 그림은 잘라낸 피자의 단면이었다. 피자라면 바깥쪽 테두리 부분이 약간 반원 모양일 테지만 후지와라 군이 그린 그림은 삼각형이었다. 그래서 그런 이름이 붙은 모양이다.
- "이 삼각형이 유명한가?"
"유명한 정도가 아니죠. 이 삼각형 테두리를 지닌 거울이 일본 고고학계를 단숨에 발전시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에요."
"히미코가 선물로 받은 거울인가 뭔가 하는 그 이야기인가?"
"그래요. 이 사진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거울 한가운데 글자들이 둥근 모양으로 새겨져 있어요. 이걸 명문이라고 하는데 2차 세계대전 뒤에 발견된 삼각연신수경 명문에 히미코가 살았던 시대와 일치하는 연호가 적혀 있었던 거죠. 물론 그건 중국 왕조에서 쓰던 연호예요."
- "리처드는 삼각연신수경을 중국에서 받아 온 것이 아니라 국산 거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삼각연신수경이 주로 교토, 고베, 오사카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고 있기 때문에 당시 가장 큰 권력을 지닌 세력이 이 부근에 있었던 게 아닌가, 그러니까 그게 히미코의 야마타이국이 아니겠느냐고 추론하고 있는 거죠."
"히미코는 어느 시대 사람이지?"
"야요이 시대 말기쯤이요."
"그게 몇 년 전이야?"
"대략 천팔백 년 전이죠."
후지와라 군의 대답을 들은 순간 흐릿했던 머릿속에 바로 한 줄기 길이 뚫린 느낌이 들었다.
- "그러니까 '눈'을 찾아, 선생, 모든 답은 거기 있어."
사슴의 말이 문득 되살아났다. 천팔백 년 전, 삼각, 리처드, 삼각연신수경 그리고 눈.
- "히미코는 어떤 사람이었지?"
"귀도로 사람들을 현혹시킨다,라고 <위지동이전>에 적혀 있어요. 귀도라는 것은 주술을 뜻하죠. 히미코는 신을 모시는 무당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많은 나라를 굴복시킬 정도였으니 상당한 힘을 지녔겠죠. 하지만 그 정체는 거의 밝혀지지 않았어요."
"무덤 같은 것도 발견되었나?"
"후보가 몇 개 있기는 하지만, 그걸 찾아내는 일이 야마타이국이나 히미코를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의 꿈이죠."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막과자를 천천히 앞니로 씹었다.
- "제대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예를 들어서 히미코의 존재를 직접 증명할 수 있는 거울을 발견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이야기지."
"그야 발표하죠. 세기의 대발견이니까요. 그야말로 국보가 될 텐데요."
"하지만 남에게 말할 수가 없어.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돌려줘야 해. 일단 갖다 주면 아마 다시는 되찾지 못하겠지. 그럴 경우에는?"
"세상에 알릴 수가 없다고요? 싫어요. 그럼 그 누군가에게 돌려주지 않을 거예요."
후지와라 군은 막과자 병을 껴안더니 도리질을 쳤다.
-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리처드 쪽을 보았다. 물잔만 놓여있을 뿐 아무도 없는 책상에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삼각에 '눈'. 답은 진작부터 거기 있었던 것이다. 애당초 내가 눈치챌 수 없는 답이었지만.
후지와라 군의 책상에서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었다. 테가 있는 동그란 거울을 바라보며, 그래 '눈'이야,라고 중얼거렸다.
- "그게... 삼각연신수경이었기 때문인가요?"
호오 하고 중얼거리더니 리처드가 고개를 들었다.
"선생도 아셨습니까?"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삼각연신수경. 정확하게 말하자면 삼각연삼신삼수경 三角緣三神三獸鏡입니다. 세 명의 신에 세 마리 짐승 모습이 그려져 있죠. 물론 짐승이란 사슴과 여우, 쥐입니다. 그런 거울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어요. 땅속에 묻힌 적이 없었겠죠. 금도금한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게다가 명문에는 이름이 있었고..."
리처드는 눈앞에 실물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뭔가에 홀린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히메미코라는 이름입니다. 히메미코가 사슴과 여우, 쥐의 힘을 받는다는 내용이죠. 히메미코 바로 히미코입니다. 히미코라는 이름은 중국에서 멋대로 붙인 이름이죠. 그 거울에는 히미코의 진짜 이름이 나오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게다가 3세기 중반, 아니 그 이전 것인데도 훌륭한 한자를 쓰고 있어요. 이건 엄청난 발견입니다."
-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야기하는 리처드의 옆얼굴을 나는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건 모르겠습니다. 저는 흥미 없습니다."
"세기의 대발견, 그야말로 인류의 보물입니다."
"그렇다면 모두를 위해 사용해야 진짜 보물이죠. 이런 상태라면 교감 선생님 한 사람을 위한 보물에 불과합니다."
나는 리처드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내 시선을 피했다. 공허한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자신감 넘치는 평소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괴로운 듯이 찡그린 입가에서 리처드의 갈등이 짙게 드러났다.
- "이 삼각의 디자인에도 놀랐습니다. 정말로 '눈'을 닮았으니까요. 모양은 삼각형이지만 거울을 의식한 만듦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마치 '눈'에 관해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 동물 그림. 그야말로 이런 불가사의한 우연이다 있더군요. 하기야 이번 일에 관계하면서부터 뭐가 우연이고 무엇이 필연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었지만요."
리처드는 자랑스럽게 중얼거리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30 미터쯤 떨어진 곳에 긴테츠선 철로가 있었다. 야마토사이다이지 역 방향에서 전차가 덜컹거리며 왔다. 리처드와 나는 잠시 침묵했다.
"필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멀어지는 전차소리를 들으며 내가 입을 열었다.
"스스로 필요하다고 느끼면 눈은 반드시 모습을 드러낸다고 사슴이 말했습니다. 이렇게 교감 선생님이 눈을 돌려주시게 된 것도 역시 필연이라고 생각합니다."
- "맞아, 선생."
불쑥 하늘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두운 나무 그림자만 보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상관없다고 하더군. 도무지 위협을 할 수가 없었어. 그 '눈'에 완전히 정신이 팔린 거지. 뭐 내 입장에서는 이렇게 썩어빠진 인간들만 사는 세상이니 그 눈을 잃어버려 메기가 소란을 떤다고 해도 별 상관없어. 오히려 좋은 약이 될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돌려주지 않으면 그 사슴이 진짜 평범한 사슴이 되어버리잖아? '눈'의 힘이 없으면 신성을 잃게 되니까. 여전히 재미없는 아저씨지만 없어지면 내가 그만큼 따분해지는 걸."
나무줄기를 타고 내려온 목소리가 다음 순간 바로 내 발 아래를 지나갔다.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순간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 눈앞을 스쳐갔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 오하리다. 돌려줘. 당신 역할은 이제 끝났어."
- "역시 안 되겠어... 싫어."
갈라진 목소리가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이걸 사슴에게 넘겨주면 다시는 내게 돌아오지 않을 거야. 이건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해. 대단한 문화유산이야."
"이리 주세요, 교감 선생님. 안 그러면 정말로 메기가 소란을 피워 대지진이 일어납니다. 후지 산도 분화할지 몰라요. 교감 선생님도 뉴스는 보셨을 거 아닙니까?"
- 리처드는 비닐봉투를 가슴에 안고 뒷걸음질 쳤다.
"싫어, 싫어, 싫어. 이걸 넘겨주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라는 건가? 앞으로 평생이 걸려도 찾아내지 못할 수 있어. 엄청난 것이 여기 있는데... 그런데 그냥 버리라는 건가?"
"버리라는 게 아니에요. 살리는 거죠. 유리 진열장 안에 걸려 있는 것보다는 몇 천 배, 몇 만 배 더 의미가 있는 방법으로 활용하는 거죠."
"아니야."
리처드가 바로 소리쳤다.
"너 따위가 무얼 안다고. 우리가, 조상들이 얼마나 고생해서 오늘날까지 연구를 이어왔는지 알기나 해? 이거 하나면 그 많은 사람들의 고생이 결실을 맺게 되는데, 그걸 알기나 해? 너 따위가 알 리가 없지."
- "거대한 메기 같은 게 어디 있다고 그래. 정말로 그런 소리를 믿는 건가?"
"적어도 우리 엄마는 믿어요. 난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조화가 무너지려 하고 있고, 뭔가 엄청난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요. 그걸 막을 수 있는 건 어쩌면 이 세상에 나밖에 없을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난 이 세상을 지키고 싶어요. 그러니 교감 선생님, 그걸 이리 주세요. 제발."
- "이, 이런 물건에 이상한 힘이 있어선 안 되는 거야."
떨리는 목소리가 어둠을 타고 들려왔다.
"박살을 내버릴 테야. 그렇게 하면 능력이 없어질 테지. 그다음에 내가 복원해서 제대로 된 거울로 만들 거야."
리처드는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철로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둠 저편에서 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흘러나오는 불빛을 보니 나라 방면에서 오는 특급열차였다.
- 그 등에는 홋타가 타고 있었다. 홋타는 손에 흰 비닐봉투를 들고 있었다.
사슴은 리처드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그 옆을 지나쳐내 바로 앞에서 멈췄다. 사슴 등에 걸터앉은 홋타는 '눈'을 내밀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마이 사슴이에요, 선생님."
- "이봐, 언제까지 타고 있을 작정이야? 난 신의 사자야. 이제 그만 내려."
짜증을 내는 사슴 목소리에, 어렸을 때부터 사슴을 타고 달리는 것이 꿈이었어요, 하고 홋타는 기쁜 표정으로 말하며 풀밭으로 내려섰다.
"늦어서 미안해요. 선생님."
"나라공원에서 여기까지 타고 왔니?"
내가 묻자 홋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렇게 멀리 나오기는 백팔십 년 만에 처음이로군. 아, 인간 세상이 이렇게 무서워졌으리라고는 예상치 못 했어. 나라공원 주변에서도 차에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자동차에 놀라 걸음이 멈춰버려 몇 번이나 죽을 뻔했네. 백팔십 년 뒤의 일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우울해지는군."
- "일이 어떻게 된 건지는 오늘 점심때 저 할망구가 사과하러 찾아왔을 때 전부 들었어. 이번에 큰 고생을 했군, 선생. 이렇게 진땀을 빼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눈'을 되찾았군. 정말 다행이야."
- "이 부근 아닌가?"
쥐가 물었다.
"응. 이 근처야."
사슴이 멈춰 섰다. 좌우를 둘러보더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둥근 달이 밝은 빛을 뿌리고 있었다.
조당원 유적 1차 발굴지라고 리처드가 중얼거렸다. 무얼 하는 곳이죠? 드넓은 벌판을 둘러보며 내가 묻자 리처드는 귀족들이 조정의 의식이나 잔치를 하는 장소였다고 대답했다.
- "아니야. 진정 의식을 하는 장소지."
사슴이 리처드에게 말했다.
"여기나 헤이안궁이나 나니와궁 모두 메기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지은 도읍이지. 옛날 사람들은 '눈'의 존재에 관한 지식을 이어받아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었어. 그래서 메기를 누를 수 있는 곳에 궁전을 짓고, 그곳을 지켰던 거지. 하지만 칼이나 창, 활을 가진 야만스러운 놈들이 힘을 갖게 되면서 인간들은 점점 어리석어졌어. '눈'의 존재를 까맣게 잊을 정도로 말이야. 요즘 인간은 '눈'에 관해 아무도 몰라. 우리 동물들만 그런 사실을 기억해 오면서 인간을 위해 메기를 누르지. 정말 이상한 일이야. 인간이란 생물은 문자로 남기지 않으면 다 까먹는다니까.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문자로 써서 남기면 안 돼. 말이란 혼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런 사실을 인간은 싹 까먹어버린 모양이야."
세 사람은 사슴의 말을 다소곳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그저 땅바닥만 내려다보았다.
- "미안해요. 번거롭게 만들어서."
리처드가 옆에서 펜라이트를 비춰주었다. 홋타가 아래를 잡고 내가 비닐을 뜯어냈다. 그 안에서 멋진 보랏빛 비단 주머니가 나왔다. 나는 한가운데에 묶인 끈을 풀고 그 주둥이를 벌렸다.
펜라이트 불빛에 후지와라의 사진에서 본 것과 같은 거울의 뒷면 무늬가 비쳤다. 직경 20센티미터 정도 되는 그것을 두 손으로 들었다. 그 테두리는 후지와라가 설명한 대로 삼각형이었다. 거울에 금도금을 한 흔적이 반쯤 남아 있었다. 여기에 세 명의 신과 세 마리의 동물이 새겨져 있습니다. 리처드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한가운데를 둘러싸듯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세 인물 사이에 약간 닳아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사슴과 여우, 쥐가 새겨져 있었다. 여우는 사슴, 사슴은 쥐, 쥐는 여우 쪽을 보고 있었다. 여기 명문이 있습니다. 히메미코가 능력을 물려준다고 적혀 있죠. 리처드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명문이 새겨진 줄의 폭은 5밀리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아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 "히메미코라... 그리운 이름이로군. 그러고 보니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지. 우리는 히메라고 부르는데."
사슴이 툭 내뱉었다.
"아니, 아나? 그 이름을?"
리처드가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킥킥 웃으며 쥐가 대답했다.
"아는 정도가 아니지. 우리는 히메에게 이 진정 역할을 지시받고 지금도 이렇게 계속하고 있으니까."
- "히메가 부탁했다는 이야기지."
사슴이 중후한 목소리로 말하며 리처드를 쳐다보았다.
"이 땅에는 옛날, 가시마다이묘진과 비슷한 정도로 능력이 뛰어나고 중요한 신이 있었어. 하지만 어느 날 불쑥 모습을 감추고 말았지.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나, 그래서 다른 나라로 가버린 거야. 그때 신은 히메에게 능력을 물려주었어. 거대한 메기를 누르는 역할을 맡겼지. 그 후에나 전에도 신으로부터 능력을 물려받은 인간은 히메 이외에는 없을 거야. 그만큼 히메는 대단한 능력을 지닌 존재였지. 신이 사라진 뒤에도 히메는 진정 역할을 혼자 잘 해냈어. 하지만 히메의 능력은 너무나도 뛰어나서 뒤를 이을 만한 인간이 없었지. 그래서 히메는 죽기 직전에 자기 힘을 '눈'에 옮겨 담았어. 그게 선생이 들고 있는 거야. 거기에는 히메의 능력, 신의 힘이 담겨 있지."
- "히메는 숨을 거두기 직전 저기 있는 쥐와 여우와 나를 불렀어. 그때 우리는 이 부근에서 가장 능력이 뛰어난 존재들이었지. 히메는 우리들에게 거대한 메기를 누르고 인간 세상을 지키는 역할을 맡기려고 했어. 물론 우리에겐 히메 만한 능력이 없었지. 그래서 히메는 '눈'의 힘을 이용해서 셋의 힘을 모아 메기를 봉해두는 방식을 만든 거야. 우리는 히메의 청을 받아들였어. 진정 의식을 각자 하기로 약속했지."
나는 새삼 손에 든 낡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뒤집어도 까끌까끌한 감촉만 느껴질 뿐 거울 역할은 전혀 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얇은 거울에 엄청난 힘이 담겨 있다니. 신의 힘이라고는 하지만 솔직히 내겐 실감이 나지 않았다.
- "그, 그럼 히메미코는... 어디서 죽었지? 그 무덤은 어디 있어?"
리처드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무슨 소리야? 그런 건 알아서 뭐 하려고?"
"그게 이 남자 직업이야. 무덤은 어디 있는지,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런 것만 일 년 내내 조사하고 다니지. 살아 있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중요한 모양이야. 이 남자에겐."
쥐가 빈정거리는 투로 설명했다.
- "내가 아는 인물 가운데 가장 위대한, 아니, 유일하게 위대한 인간이야. 너희와 같은 인간인데 좀 더 경의를 표할 수는 없는 건가?"
사슴은 매우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말에 리처드는 입을 다물고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 리처드와 나는 조금 떨어져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왜 사슴이 여우의 심부름꾼은 여자로 정해져 있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마돈나도 그렇고 홋타도 신을 모시는 무녀 역할인 것이다.
- 홋타는 땅바닥에 내려놓은 가방에서 물통을 꺼냈다. 그리고 거울 위에 물통에 든 것을 따랐다.
"대불지로 흘러드는 개울에서 떠 온 그냥 물이야."
사슴이 설명했다. 그 물은 후지와라 군이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해 주던 삼각 테두리 안쪽에 고였다. 그 광경을 정신이 팔린 채 들여다보던 리처드가 참을 수가 없었는지 쉰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 때문에... 그 모양으로 만든 것인가?"
- "아아, 아마 그럴 거야. 물이 고이도록 하려고 히메가 궁리를 했으니까. 이런 의미도 모르면서 후세 인간들은 똑같이 만들고는 좋아해. 묘한 광경이지."
으음 하고 리처드가 신음했다.
- 거울에 채운 물 위로 보름달이 작은 점처럼 비치며 날카로운 빛을 냈다. 사슴은 천천히 얼굴을 그곳으로 가져가더니 혀를 내밀어 물을 핥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물이 마치 점토처럼 둥근 모양이 되어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보름달을 향해 뭉친 물이 와라비모치(고사리 전분으로 만든 떡 - 옮긴이)처럼 흔들리며 다가가더니 나중에는 작은 공처럼 되었고 그 안에 눈부시게 빛나는 보름달이 담겼다.
"한번 더."
사슴은 빛나는 구슬을 코를 이용해 살짝 거울 구석으로 굴리더니 홋타에게 물을 따르라고 재촉했다. 거울을 채운 물을 다시 혀로 굴렸다. 보름달을 담은 물 구슬이 또 하나 만들어졌다.
- "그럼 이제 메기를 누를까?"
사슴은 고개를 들더니 인간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아, 부탁해."
의식이 너무나도 간단하게 시작되는 바람에 당황해서 고개를 숙였다. 리처드와 홋타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 사슴은 보름달이 담긴 구슬을 살며시 입에 물었다.
빛나는 보름달이 담긴 구슬을 입에 물고 사슴은 두세 걸음 걸어가더니 툭 구슬을 놓아버렸다.
빛나는 구슬은 마치 거기 구멍이 있는 것처럼 땅바닥에 떨어졌다. 어찌 된 까닭인지 거기에는 흙이 있고, 풀이 나 있는데 빛만 땅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빛이 어둠에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고 조금 지났을 때 갑자기 땅바닥이 흔들렸다.
비틀거리는 나를 리처드와 홋타가 붙잡아주어 간신히 균형을 되찾았다. 땅이 오초 정도 심하게 흔들리더니 서서히 조용한 떨림으로 변했다.
- "도달한 모양이로군."
흔들림이 완전히 가라앉자 쥐가 툭 내뱉었다.
"갑자기 꼬리를 묶였으니 깜짝 놀랐겠지."
아마 거대한 메기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 이어서 사슴은 홋타를 불렀다. 거울 위에 남아 있는 구슬을 손으로 집어 들라고 턱짓을 했다. 하지만 거울을 들여다보기만 할 뿐 홋타는 손을 내밀려 들지 않았다. 괜찮아, 걱정할 거 없어. 사슴이 웃으며 말했다. 홋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빛나는 구슬을 들었다.
"괘, 괜찮아? 뜨겁지 않아?"
내가 물었다.
"물을 만지는 느낌이에요."
홋타가 대답했다. 물로 만들었으니 당연하다.
"그걸 내 눈에 넣어줘. 그래. 그대로 내 눈에 갖다 대면 돼."
사슴은 얼굴을 비스듬히 내밀었다. 홋타는 당황한 모습을 보였지만 사슴이 재촉하자 천천히 구슬을 사슴 눈으로 가져갔다.
눈에 댔을 때 아주 잠깐 빛이 환해진 뒤 눈동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 "눈이야, 선생."
사슴은 왼쪽 눈을 내게 보여주었다. 커다란 눈동자 안에서 불빛이 파도처럼 흔들리다가 점점 작아졌다.
"다음 진정 의식까지 백팔십 년 동안 나는 이 힘과 함께 살아갈 거야."
사슴은 위엄 있게 말하더니 고개를 꺾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촉촉한 눈동자가 달빛에 빛났다.
- 내내 참고 있던 숨을 훅 내쉬었다. 이제 끝났느냐고 사슴에게 물었다.
다 끝났어. 사슴이 천천히 대답했다.
- 주작문 앞에서 리처드와 헤어졌다.
그 거울은 어떻게 할 거냐고 조심스럽게 묻는 리처드에게 사슴은 산으로 가지고 갈 것이며, 육십 년 뒤까지 인간들이 알아낼 수 없는 곳에 숨겨둘 거라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리처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오늘은 무척 힘든 하루였어요. 나 때문에 고생 많이 했습니다. 하며 고개를 숙이고 학교로 돌아갔다. 어깨를 늘어뜨린 그 뒷모습이 폭삭 늙어버린 느낌을 주어서 살짝 측은하단 생각이 들었다.
- 쥐는 헤어질 때 불쑥 이렇게 말했다.
"선생은 어떻게 운반책으로 뽑혔는지 아나?"
숨을 곳도 마땅히 없는 주작문 앞 광장이었다. 땅바닥에 스며든 그림자처럼 쥐의 실루엣이 보였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둔하군, 선생도 뻔하잖아. 그 목에 건 뿔 때문이야. 그건 가시마다이묘진의 사자라는 증표지. 그러니 운반책이 될 수밖에 없었어."
아연실색하는 나를 쳐다보며 쥐가 킥킥 웃었다.
"참 이상한 일이야. 사슴의 운반책이 될 남자는 항상 동쪽에서 오거든. 꼭 그 곡옥을 몸에 지니고 있어. 아무것도 모르나? 아니면 전부 다 예측한 건가? 신들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니까."
- 계속해서 혼자 멋대로 지껄이는 쥐의 말을 들으며, 그런가? 그럼 너는 처음부터 내가 운반책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라고 사슴에게 물었다. 사슴은 그렇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왜 지금까지 이 곡옥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쓸데없이 이야기를 했다간 곡옥을 벗어버릴 테니까. 난 그 곡옥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 좋거든, 하며 사슴이 시치미 뚝 뗀 표정으로 대답했다. 흐음, 냄새였군. 나는 한숨을 내쉬고 중얼거리면서 셔츠 안에 있는 부적을 매만졌다.
- 그런데 아가씨, 쥐가 홋타에게 말을 걸었다.
"체육관 천장에서 아가씨가 검도 시합 하는 걸 봤어. 정말 멋진 시합이었지. 대단하더군. 체구는 작지만 머리가 좋아. 나하고 마찬가지로. 나는 아가씨가 진짜 마음에 들었거든. 아가씨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 잘 알아. 멍청한 남자들에 둘러싸이면 여자가 고생을 하기 마련이지. 히메가 바로 그랬어. 주위에는 별 볼일 없는 남자들뿐이어서 늘 히메 혼자 애를 썼지. 잘 들어, 아가씨. 만약에 곤란한 일이 생기면 내가 의논 상대가 되어줄게. 저 선생뿐 아니라 사슴까지 다들 별 볼 일 없는 것들이라서 이러는 거야. 그러니 결국은 그런 이상한 얼굴로 변해버린 거지... 에구, 불쌍해라."
- "자. 그만 갈까?"
쥐의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사슴이 한숨을 길게 내쉬고 나서 걷기 시작했다.
두 시간쯤 걸려 사슴을 나라공원까지 데려다주었다. 셋이서 신오미야 역 앞까지 왔을 때였다. 나와 홋타 사이에 끼어 사슴이 걸어가는 모습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밖에 없었다. 늦은 시간이기도 해서 홋타 먼저 전차를 태워 보냈다. 홋타와 헤어진 뒤에야 나는 홋타가 '눈'을 가지고 갔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돌아가려 했다. 그러자 사슴이 걱정 말라며 나를 불러 세웠다. 나는 사슴에게 산으로 가지고 간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건 거짓말이야. 그 남자를 포기시키려고 그렇게 말했어. 눈은 앞으로 심부름꾼이 계속 보관할 거야."
- "무도를 가르치는 도장에 가시마다이묘진을 그린 족자가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을 테지? 가시마다이묘진은 무술의 신이니까. 그 애는 가시마다이묘진이 선택한 심부름꾼이야. 선생이 운반책으로 뽑혔듯이. 인간으로서는 대단히 명예로운 일이지. 앞으로 육십 년 동안 '눈'은 저 애 집에서 계속 보관하게 될 거야."
- 보관하다니, 어디에? 내가 묻자 사슴은, 가미다나(신을 모시는 선반 - 옮긴이)에 보관할 거야, 라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런 곳에 놔두면 들키잖아? 신들에겐 비밀로 해야 할 보물이라면서?"
"그러니까 가시마다이묘진이 이상하다는 거지. 메기도 그렇고,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혀 감지하지 못해. 그러면서도 심부름꾼이나 운반책을 뽑아서 알려주지. 나도 그런 면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가시마다이묘진은 멍청이인가?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사슴을 에스코트해 횡단보도를 건넜다. 사슴은 국도를 오가는 수많은 차량에 당황하여 몇 번이나 백팔십 년 뒤가 걱정이라고 투덜대면서 가스가타이샤를 향해 계속 걸었다.
- 가스가타이샤의 도리이 앞에서 사슴과 헤어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그만 쉬게 해달라는 말에 내일 아침에 강당 유적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 자, 이거. 내가 빼빼로 다섯 개를 내밀자 사슴은 내 앞에 턱 앉아 사양도 않고 받아먹었다.
"진정 의식이 끝나면 내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했지?"
"그래. 알아, 선생. 너무 서두르지 마."
사슴은 우물우물 빼빼로를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결정했나?”
"물론이지. 이 얼굴을 원래대로 돌려줘. 그 소원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흥, 한심한 소원이로군. 더 큰 소원은 없어? 부자가 될 수도 있잖아? 어째서 그 얼굴에 그렇게 매달리는 거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네."
"그럼 넌 네 얼굴이 사람 얼굴이 되어도 참을 수 있겠어?"
"그건 사양하겠어."
사슴은 바로 중얼거리더니 다시 내민 빼빼로 다섯 개를 입에 물었다.
- "학교를 만들 수도 있어. 예를 들면 선생이 사는 곳에."
학교? 무슨 이야기지? 내가 물었다.
"선생이 다니는 학교 말이야. 그 학교는 육십 년 전에 쥐한테서 '눈'을 받아 여우에게 운반한 운반책이 세운 것이거든. 그 미친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야. 무사히 진정 의식을 마친 뒤에 운반책 역할을 해낸 남자가 여우에게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했어. 여우는 남자의 소원을 들어주었지. 남자는 여우가 시킨 대로 투기를 해서 단숨에 큰돈을 벌었어. 인간의 욕망은 여전하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 남자는 번 돈을 모두 들여서 학교를 세웠어. 그것도 교토, 오사카, 나라에. 모두 진정 의식을 하는 곳 근처야. 분명히 그 남자 나름대로 뭔가를 지키려고 했던 모양이야 인간치고는 드물게도 기특한 마음을 지닌 남자였지."
- 교토 후시미이나리 여관 아들이 어떻게 해서 갑자기 고등학교를 세 개나 세웠는지, 나는 이제야 그 진상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삼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거울 비슷한 삼각형판에 새긴 여우와 사슴과 쥐. 그리고 검도부 갑에 새겨진 그림들. 어쩌면 그것은 선대 교장이 세 마리 동물에게 뭔가 감사의 마음을 담아 만든 것이 아니었을까?
-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야. 좀 더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보는 게 어때? '눈'의 능력은 신의 능력이지. 무슨 소원이건 이루어질 거야."
"내 얼굴을 원래 상태로 되돌려줘. 내 소원은 그것뿐이야."
내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 알았어. 사슴은 마지막 빼빼로 다섯 개를 힘차게 씹더니 일어섰다.
- 물론 홋타도 함께 원래 얼굴로 되돌려줘야 해. 나는 봉지 안에 남은 반으로 부러진 빼빼로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그건 무리야, 선생.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은 딱 하나뿐이야. 그렇게 하면 소원이 두 개가 되잖아."
빼빼로를 다 먹은 사슴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을 때, 나는 먹던 빼빼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 "자, 잠깐 그럼 내 얼굴을 되돌려달라고 하면 홋타는 어떻게 되는 거지?"
"변함이 없는 거지. 지금 상태 그대로 살게 돼."
사슴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홋타는 따로 소원을 들어줄 건가?"
"아니, 소원을 들어주는 건 운반책을 맡은 사람뿐이야."
사슴이 쌀쌀맞게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네 멋대로 그렇게 만든 거잖아. 네가 책임지고 돌려 놔."
"나는 표시를 지우는 방법을 몰라. 히메에게 배운 건 표시를 하는 방법뿐이야. 인간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때 가장효과가 있을 거라고 히메가 가르쳐주었지. 하지만 지우는 방법을 배우기 전에 세상을 떠나버렸지."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사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 "어쩔 수가 없었어, 선생, 잘 생각해 봐. 그 애가 있었기 때문에 메기를 무사히 누를 수가 있었어. 선생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지. 내 판단은 틀림없어."
사슴은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나는 눈으로부터 선생의 소원을 딱 하나 들어줄 능력만 받았어. 그 능력은 말하자면 히메가 선생에게 표시하는 감사의 마음이야. 아마 이해하기 힘들 테지만 선생 얼굴을 원래 상태로 되돌린다고 해도 그건 표시를 지우는 건 아니야. '눈'의 힘을 이용해서 사람 얼굴로 바꾸는 거지. 그래서 나는 그 애를 원래 상태로 되돌릴 수는 없어."
나는 벌떡 일어섰다. 목청껏 소리쳤다. 내가 아는 욕이란 욕은 죄다 퍼부었다. 빈 빼빼로 상자를 집어던졌다. 그걸 맞고도 사슴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 후지와라 군과 시게 선배는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갑작스럽다며 화난 듯 말했지만 이사장이기도 한 교장이 내린 결정인 만큼 아무리 불만스러워도 어쩔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도 거의 없고 존재감도 희미하기로 유명한 교장이 내린 결정 치고는 상당히 터무니없다며 시게 선배가 보기 드물게 언성을 높였다. 후지와라 군이 옆에서 물었다.
"이건 들은 이야기인데요, 전임 선생님은 좀 더 쉬고 싶다고 했는데 리처드가 억지로 복귀해 달라고 부탁했답니다. 리처드와 무슨 일 있었어요?"
별일 없었다고 대답은 했지만 나는 그제야 이해가 갔다.
- 방과 후, 비품을 정리하고 다른 교사들에게 인사를 하러 다녔다. 맨 나중에 리처드에게 갔는데, 나도 무척 섭섭하군요. 부디 어디를 가시더라도 잘되기 바랍니다. 라며 그야말로 정감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제야 나는 할머니가 리처드를 조심하라고 한 이유를 뼈저리게 느꼈다. 나이 든 사람의 말은 잘 새겨들어야 한다고 반성했다.
- 나는 리처드에게 컴퓨터 ID 플로피 디스크를 반납했다.
"사실은 사슴한테 히미코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슬쩍 들었는데 교감 선생님에게는 절대 가르쳐드릴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신세 많이 졌습니다. 그럼 이만. 건강하십시오."
그렇게 거짓말을 하고 얼른 자리로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리처드는 자기 자리에서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놀리는 표정을 만들어 보이자 그는 사우나를 할 때보다 더 얼굴이 빨개졌다.
- 얼마 되지도 않는 짐을 택배로 부치고 나니 방이 갑자기 텅 비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지붕들 너머로 듬성듬성 나뭇잎들을 떨어뜨린 와카쿠사 산이 보였다. 처음 나라에 온 날, 시게 선배가 창밖으로 와카쿠사 산을 가리키며, 매년 정초에 산에 풀과 나무가 잘 자라도록 불을 지르는데 그걸 늘 여기서 구경했지. 그때는 불꽃놀이도 함께 해,라고 가르쳐주었다. 유명한 행사라서 그걸 보고 대학으로 돌아가겠구나 생각했는데 ...
- 나는 고개를 저었다. 대학원으로 돌아가시는 거죠,라고 하기에 그것도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마돈나는 그러냐며 쓸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검도는 다시 해볼 생각입니다."
정말이세요? 그럼 다음에 이쪽에 오실 때는 우리 도장에 꼭 들러주세요. 한번 겨뤄보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마돈나의 목소리가 다시 밝아졌다.
- 나라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돈나는 동료 교사가 얼마 전 '40일 이론'이란 걸 가르쳐주었다면서 그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좋은 일이 일어나는 시간도, 멋진 상대를 만나는 기간도, 날짜로 따지면 일 년에 기껏 40일뿐이라는 이론이라고 한다.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일을 하고 토요일 하루는 집에서 쉰다고 하면, 새로운 환경에 접할 수 있는 날은 일요일뿐이다. 결국 365일의 7분의 1이니 약 50일. 하지만 일요일을 전부 마음대로 쓸 수는 없으니 조금 빼서 40일. 일 년에 멋진 상대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기껏해야 40일뿐이라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이다.
- 함께 빼빼로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사슴에게 건강 상담을 했다.
지금까지 두려워서 물어보지 못했는데 얼굴이 점점 사슴을 닮아가기 시작한 뒤로 대변이 사슴 똥처럼 동글동글하게 나오고, 기름진 음식을 잘 못 먹게 되었었다. 입맛이 아무래도 이상해졌어. 아는 게 있으면 분명하게 이야기해 줘. 나는 이대로 계속 진짜 사슴이 되어버리는 거야? 하고 물었다.
사슴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선생, 그건 신경쇠약이야."
- 엥? 하고 내가 이상한 소리를 지르자 사슴이 말했다. 똥이 동글동글하게 나온다고? 그건 변비잖아. 기름진 음식을 먹지 못한다고? 그건 속이 거북해서 그런 거지. 입맛이 이상해? 그건 자율신경 계통에 문제가 있는 거지. 얼른 병원 가서 약을 지어먹어.
"그, 그럼 난 초식동물에 가까워지고 있는 게 아니었어?"
"그럴 리가 없잖아. 완전히 망상이지. 기분 나쁜 소리 하지 마."
- 그런가? 그저 신경쇠약이었을 뿐이었나. 공연히 마음이 밝아져 중얼거렸다. 하기야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당했으니 신경쇠약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말 한심한 이야기다. 신경쇠약이 아니라는 걸 증명할 생각으로 나라에 왔는데 진짜 신경쇠약이 되어 돌아가게 되다니.
고마워, 고민이 해결되었어. 내가 말하자 사슴은 재미없다는 듯이, 천만에,라고 중얼거렸다.
- "아, 참. 마지막으로 하나만 가르쳐줘."
뭔데? 사슴은 내 손에서 빼빼로를 받아먹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넌 어째서 아직도 이런 일을 하는 거지? 너뿐만 아니라 여우나 쥐도 마찬가지야. 당사자인 인간은 잊은 일을 너희들은 꾸준히 해오고 있잖아. 물론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너희가 메기를 눌러주었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솔직히 이해할 수가 없어. 내가 사슴이라면 이러지 않을 거야."
사슴은 우물거리며 빼빼로를 먹던 입을 멈추더니, 뭐 제각각 이유가 있지,라고 중얼거렸다.
- "예를 들면, 여우는 어쨌든 이해득실을 따져서 움직이는 녀석이야. 히메는 여우에게 '진정 역할'을 받아들이면 눈의 힘을 이용해 사람으로 둔갑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했어. 여우는 옛날부터 호기심이 이상하게 많거든. 히메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지. 인간으로 둔갑하는 게 뭐가 재미있는지 나는 도통 모르겠지만. 여우 입장에서는 메기가 어떻게 되건 아무 관심도 없고, 메기를 누를 때 얻는 '눈'의 힘이 중요한 거지. 쥐는 선생도 봤다시피 쓸데없이 참견하는 할망구야. 히메가 살아 있을 때도 틈만 나면 성가시게 굴었어. 히메가 죽은 뒤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진정 역할'을 떠맡았고."
그럼 너는? 내가 묻자 사슴은 불쑥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이 꽤 밝았는데도 짙은 구름에 가려 해는 보이지 않았다. 오후가 되기 전에 비가 내릴지도 모르겠다.
"그때 히메가 이렇게 말했지. 넌 정말 아름답다고."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며 사슴이 중얼거렸다. 나는 무심코 뭐? 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기와는 다른 동물을 아름답다고 인식할 수 있는 생물이야. 우리는 결코 다른 생물을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동료들 이외의 생물로부터 아름답다는 말을 들었어. 정말 기뻤지. 그때 나는 결심했어. 이 사람의 소망을 죽을 때까지 지켜주자고.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선생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 사슴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궁리를 해보았다. 아무래도 이 아저씨 목소리를 지닌 암사슴이 하는 이야기의 의미는 하나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기도 했고 낭패스럽기도 했다.
"너, 너 혹시... 사랑한 거야?"
사슴은 대답이 없었다. 말없이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 이럴 수가. 이 사슴은 인간 여자를 사랑한 것이다. 그 사랑 하나로 천팔백 년이나 줄기차게 약속을 지켜온 것이다.
- "나뿐만이 아니야. 여우나 쥐도 분명히 히메를 좋아했을 거야. 여우가 아무리 히메를 이용해 먹었다고 쓸데없는 소리를 하건, 쥐가 히메는 자기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 착각을 하건 간에 다들 그녀를 좋아했던 거지."
사슴이 갑자기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늘 같은 표정이던 사슴의 얼굴이 왠지 부드러워 보였다.
- "나도 네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어."
"고마워, 선생."
- "그게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들리나?"
"우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알아듣겠지. 히메 시대에는 많았어."
- "사실은 나도 선생에게 부탁이 하나 있어."
사슴이 갑자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뭔데?"
"그 가슴에 있는 뿔, 나 줄래? 난 그 냄새가 너무 좋아."
"그야 간단하지. 그런데 무슨 냄새인데?"
"신의 냄새야."
나는 곡옥 목걸이를 벗어 코로 가져갔다. 아무 냄새도 안 나는걸. 내가 고개를 꼬며 주춧돌 위에 곡옥을 내려놓았다.
그럼 갈게. 사슴에게 말했다.
"건강에 신경 써, 선생."
"아, 너도 오래 살아야지. 빼빼로는 이제 끊고."
- 나는 사슴을 등지고 걷기 시작했다.
풀밭에서 아스팔트가 깔린 길로 나와 뒤를 돌아보았다.
사슴은 위엄 있게 서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진짜 마지막 질문 하나."
"뭔데, 선생?"
질문이 궁금해 견딜 수 없다는 목소리로 사슴이 말했다.
"혹시... 외로워?"
잠시 뜸을 들이던 사슴이 턱을 들고 이상한 소리를 냈다.
"휘이이."
그럼 잘 있어.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차에 타기 전에 선배가. 저쪽으로 가면 대학원으로 돌아가는 건가? 하고 물었다. 올해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고, 그 뒤에도 잘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시게 선배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대학 연구실이 답답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더 큰 곳에서 활약했으면 좋겠어. 가까이서 보고 안 거지만 자넨 무척 강한 사람이야. 교사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더군."
고맙다면서 멋쩍은 표정을 짓고 고개를 숙이자 선배는, 그럼 잘가 하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다가 안으로 들어왔다. 나라에 와서 처음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짐을 어제 보냈으니 오늘 오후에는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나도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하자 엄마는 왜 그리 갑자기 돌아오게 되었느냐고는 묻지도 않고 이제야 허리가 나아 어제 널 위해 가시마다이묘진에게 부적을 받으러 다녀왔는데 이제 소용이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만 했다.
그 말을 듣고, 전에 편지에 오래된 부적을 동봉했다고 적었는데 안에는 전혀 다른 것이 들어 있었다, 그게 뭐냐, 고 물었다. 그러자 엄마는 틀림없이 부적을 넣었다면서 집에 돌아오면 부적이 붙어 있던 곳을 보여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것을 떼어낸 벽에 네모난 자국이 남아 있다고 했다. 곡옥을 보여주면 좋을 텐데 사슴에게 줘서 이제는 없다. 더 이상 이야기를 해봐야 쓸데없는 말씨름이다. 통화료만 아까울 것 같아 알았다고 하고는, 그럼 그 자리에 새 부적을 붙이면 되겠네,라고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러자 엄마의 목소리가 바로 밝아지더니 그게 좋겠다고 했다.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 전화를 끊었다.
- 내가 뭐든 의논해 주겠다고 약속했지? 아무튼 요즘 그렇게 기개 있는 남자는 보기 드무니까, 그랬어요.
할머니는 자기가 표시를 지우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어요. 히메라는 사람이 할머니에게만 가르쳐주었대요. 이런 사실은 사슴이나 여우에게는 비밀로 해야 한대요. 하지만 표시를 하는 방법은 모르는 모양이에요.
이건 여자만 할 수 있는 일이고, 간단하지만 어렵다고 했어요. 그래도 선생 얼굴을 원래대로 돌아가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사슴의 힘을 받은 심부름꾼인 아가씨뿐이야, 잘 생각해서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해.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더니 사라졌어요.
바로 후쿠하라 선생님 댁으로 전화했더니 그 집 할머니가 선생님은 벌써 떠났다고 하셨어요. 할머니가 말씀하신 기차(신칸센을 말하는 거죠?) 출발 시간에 늦지 않으면 좋겠어요.
이 편지는 교토로 가는 긴테츠 전차 안에서 서서 쓰고 있어요. 긴테츠 전차는 많이 흔들려요. 글씨가 엉망인 건 다 그 때문이에요.
지금 저는 쥐 할머니가 이야기한 표시 지우는 방법을 선생님에게 쓰려고 해요. 저는 처음 해보는 거지만 그게 선생님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럼 다음 직장에서도 열심히 해주세요. 안녕.
11월 1일, 홋타 이토
- 멍한 상태에서 편지를 다 읽었다.
편지가 끝나는 부분에는 스티커 사진이 붙어 있었다.
홋타와 내가 서로 묘한 표정으로 마주 보고 있는 장면이었다. 나는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둘 다 사람 얼굴이었다.
- 신칸센이 터널로 들어가 귀가 먹먹해진 순간, 나는 얼른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터널을 배경으로 창문이 거울이 되어 내 모습을 비추었다.
사람 얼굴로 돌아온 내 얼굴이 거기 있었다.
역자 후기
황당무계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판타지입니다. 하지만 허무맹랑한 판타지가 아닙니다. 동물이 말을 한다는 설정 이외에는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 실제로 존재하는 신화와 전설을 씨실날실로 얽어 꾸민 이야기입니다. 그런 까닭에 황당무계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여러 일본 신들은 모두 일본인들이 알고, 섬기고, 함께 사는 신들입니다. 거기에 야마타이국이라거나 히미코에 관한 역사와 전설 또한 실제로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고 설화나 전설로 남아 있습니다. 작품 안에 언급되는 사건들 또한 모두 역사 기록으로 남아 있는 내용입니다.
고백이라고 할 것도 없이, 일본의 신들은 너무 많기도 하여 제대로 아는 바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 소설을 우리말로 더듬더듬 옮기며 책을 뒤지고 검색을 하면서 조금씩 배웠습니다. 욕심 같으면 그 조사와 검색 결과들을 모두 함께 담고 싶지만, 소설이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조금 번거롭더라도 검색하며 읽거나 다 읽은 뒤에 궁금한 내용들을 검색해 보면 한 권 책으로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 더 커지리라 생각합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검색에 조사가 다 무엇이냐고 하지 말고 한번 해볼 것을 권합니다. 한글 웹에도 많은 분들이 소중한 정보를 올려두어 저도 종종 참고하며 작업했습니다.
- 2007년, 마키메 마나부의 데뷔작과 이 작품을 연이어 즐겁게 읽었습니다. 두 편을 읽고 나서 작가에 대한 인상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발랄한 상상력' 이었습니다. 우리 작가 가운데 누가 경주나 부여, 공주 같은 곳을 배경으로 이런 근사한 상상력을 발휘해 주면 얼마나 즐거울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
- [사슴을 물리치는 주술 같은 거야?
와카에 쓰이는 마쿠라코토바(와카에 쓰이던 수사법으로 특정한 단어 앞에서 어조를 고르는 수식어. 다섯 음절로 된 것이 많다)예요. 와카에서 어머니 앞에 '다라치네노'라는 말이 붙듯이 아오니요시 다음에는 나라가 오죠. 그게 무슨 뜻을 지닌 말이냐고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靑丹(あおに)よし라고 건물에 칠한 파란색과 붉은색이 선명해서 도읍의 경치가 기가 막히구나, 하는 뜻인 모양이에요.
후지와라 군은 아는 것도 많네. 내가 감탄하고 있는데 이 친구 가린토라는 막과자가 담긴 병을 허벅지 사이에 끼우고 북처럼 병 바닥을 탁 두드리더니 낭랑한 목소리로 읊기 시작했다.
"아오니요시 나라 도읍은 활짝 핀 꽃의 향기처럼 지금 한창이로구나."]
- 또 한 가지. 저는 사슴 우는 소리를 직접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검색해 보니 '끼에에엑'이라는 설도 있고, '피이이잇'이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신령스러운 동물이라 그런지 인간의 글로는 표현하기 힘들게 우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소설 안에서 사슴 울음소리를 우리말로 어떻게 표기하나 걱정했는데 마음에 딱 들게 표현되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이 작품의 배경인 일본 나라공원에서 녹음한 사슴 우는 소리를 인터넷상에서 직접 들어볼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습니다.(http://blog.naver.com/jakkajungsin)
- <사슴 남자>와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운 시간이었기를, 유쾌하고 기발한 이 소설이 일상의 작은 위안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 권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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