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정해연] 누굴 죽였을까

일루젼 2024. 7. 1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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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정해연
출판 : 북다
출간 : 2024.02.28


       

정해연은 <홍학의 자리>가 무척 인상적이라 기억하는 작가다.

이번 <누굴 죽였을까>는 새로 시작한 독서모임에서 선정되어 읽게 되었는데, 매력적이고 잘 읽히지만 <홍학의 자리> 때만큼의 전율이 남지는 않았다. 대신 등장인물 선혁의 말처럼 끈적한 뒷맛이 남는다.

 

'대체 우린 누굴 죽인 걸까'

 

피해자의 삶이 망가진 것처럼, 가해자의 삶도 망가질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죽음으로 몇 사람이 죽거나 죽음에 버금가는 삶을 살게 되었는가?

 

피해와 가해의 경계를 흐리고자 하는 의도는 없다. 끝없이 이어지는 폭력의 연쇄고리 사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는, 맺음 외에는 방법이 없는 걸까? 증오와 공포는 전염병처럼 퍼져나간다. 

 

그런 종류의 감정에 바치기에 자신의 삶은 너무 소중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이 남아있다면, 다시 일상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그런 상황에 놓여보지 않은 이의 단순한 상상일지도 모르겠다. 

 

부정은 긍정보다 전염력이 강하다. 정신을 잘 차리지 않으면 앗차하는 사이 닮아버리고 만다. 어쩌면 선혁은 스스로를 그렇게 휩쓸려버린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나는 '누구를 죽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소비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시간과 에너지다. 자신 하나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연쇄의 끝을 기다리며 함께 하기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아깝다.

 

결국 결정은 '얼마나 잃을 것이 많은가'에 달려 있는 것 같다.

부모로부터 아이에게, 과거로부터 미래로 이어지는 업보들은 '카르마'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그리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미 결정된 과거가 아닌 지금, 바로 이 지점뿐이다. 

   


   

 

- 아주 잠깐, 선혁은 어둠 속에서 남학생의 눈과 자신의 눈이 마주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뭔가를 부탁하듯 애절한 눈빛이었다.

 

- 출입구에서 양쪽으로 길게 늘어진 복도 옆으로 흰색꽃이 잔뜩 달린 거대한 화한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중간중간에 있는 방들에서 직원인 듯한 사람들이 수시로 들락거렸다. 그들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선혁에게는 오늘 받은 부고 연락이 기가 막힌 것이었지만, 여기서는 이렇게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이 새삼 기이하게 느껴졌다. 

 

- 민 팀장의 말대로 대동맥 절단이었다면 엄청난 피가 순간적으로 분출됐을 것이다. 그러나 양옆에 세워져 있는 차에도 피가 튄 흔적이 없었고, 땅 쪽으로도 통행판이 붙어 있지 않은 걸로 봐서는 혈흔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물론 보닛 위에 피가 흘러 있기는 했지만 이것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시신에서 흘러나온 피라고 봐야 옳았다. 그렇다는 것은.

"살해 후 옮겨졌군요."

"길게 설명을 안 해도 돼서 뿌듯하군."

 

- 게다가 떡하니 차 위에 올려놓았다. 시신의 상태도 마찬가지다. 배에 칼이 꽂힌 상태 그대로였다. 최대한 눈에 빨리 띄어야 한다고 안달이 난 범인이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선물."

민 팀장이 내민 것은 니트릴 장갑이었다. 장갑을 끼고 만져야 할 증거품이 있다는 뜻이었다. 

 

- "윤호권은 사기 사건 이후에 이혼을 했어요."

"1억은 큰돈이지. 부부간의 신뢰가 깨질 수 있어."

 

- 만약 돈을 잃고 이혼까지 하게 된 것이 끝이 아니라 인생이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면 그 원인의 근간인 고원택을 찾아 살인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 사기를 당한 피해자의 삶이 더욱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를 강차열이나 최인욱 둘 모두 많이 보았다.

 

- "사기를 칠 사람을 찾기 위해 나온 겁니다. 바보같이 제가 거기에 걸려들었고요. 형님, 형님 하며 따르는 통에 그 자식을 가까이했습니다."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걸로 봐서는 사기 사건 이후에 꽤나 자신을 탓했던 것 같았다. 사기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자주 보이는 모습이다. 가해자를 원망하지 않고, 그런 가해자의 말에 속은 자신을 질타한다. 짙은 괴로움이 그의 주름 켜켜이 찌들어 있었다. 

"그런데도 출소한 고원택 씨에게 한 번도 찾아가지 않으셨다고요?"
"그놈이 출소했습니까?"
출소한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다. 

 

- 강차열은 그의 반응을 주시했다. 단번에 이 사람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정확한 것은 조사해 봐야 했다. 느낌은 느낌일 뿐인 것이다. 
윤호권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설마 내가 그놈을 죽였다는 소리를 하는 겁니까?"
카페 안의 모든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을 것임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강차열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고, 최인욱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맞은편에 앉은 윤호권만이 카페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고는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 거예요? 지금?"
"그런 건 아닙니다. 고원택 씨의 지인들과 주변인들을 모두 만나는 중입니다. 형식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니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사실 지금 하는 말이 형식적인 것이다. 알리바이까지 묻는 것은 ‘당신을 의심하고 있다’와 다르지 않다.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고원택을 죽이고 싶을 만큼의 원한이 있는 사람은 윤호권이었다.  

 

- "죽이고 싶은 마음으로야 백번도 더 죽였죠, 내가. 할 수만 있다면 그랬을 겁니다."

 

- "광판시? 갈 수 있어."
차를 이용할 생각은 없었다. 그것이 나중에 어떤 식으로 자신의 발목을 잡을지 몰랐다. 평소 잘 만나지 않던 두 사람이 원택의 죽음으로 자주 연락하고 만난다면 더욱 의심을 살 것이었다. CCTV가 많은 지하철도 좋지 않다. 차라리 CCTV가 없는 곳에서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게 좋을 것이다. 술에 취하거나 특별한 옷차림을 한 손님이 아니라면 택시 기사의 기억에 그다지 남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섰다. 
"운정모텔이라고 있어. 거기로 와. 내가 먼저 들어가서 호수를 알려줄게."
"운정모텔. 알았어. 문자로 찍어."


- 전화를 끊었다. 별 같지도 않은 설명을 해주느라 애를 먹었다. 어떻게 선혁 자신을 의심할 수 있는가. 이래서 머리가 나쁘면 평생을 고생한다고 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 선혁은 흠칫 놀랐다. 생각해 보면 자신은 필진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필진은 가끔 원택과 연락을 했던 걸로 알고 있다. 돈을 빌려준 적도 있었다. 원택의 전화를 잘 받지 않는 자신과 달리 마음 약한 필진은 매번 전화를 받아주었을 것이다. 혹시 돈을 목적으로 원택이 협박을 하지 않았을까? 9년 전 사건을 빌미로. 말싸움을 하다가 욱해서 죽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9년 전 사건을 알고 있는 다른 한 놈도 죽여버리자...

 

- 아니, 아니다. 자신 역시 바보 같은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선혁은 고개를 저었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얘기는 아니지만,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지금 한 생각은 자신이 비난해 마지않던 필진의 생각과 같은 것이었다. 만약 범인이 필진이라면 굳이 쪽지를 남겨 9년 전 사건을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혁은 거실의 불을 끄고 나갈 준비를 했다. 문득 창밖으로 보이는 도심의 야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 문자가 도착한 것은 택시를 타고 광판시에 진입한 즈음이었다.

 

- "나한테 걔 이야기를 물어봐야 나올 건 없을 거요. 나도 당신네만큼이나 걜 모르니까." 
그 말을 제외하고 어머니 쪽에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없었다. 장례식 때 태도만으로 기대할 게 없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남처럼, 아니 남보다 못할 정도로 여자는 고원택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그 지역에서 40년을 살았다는 옆집 사람에게 문의해 보자 고원택은 어릴 때부터 방임되어 살았다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문득 고원택의 삶이 불쌍해졌다. 자신을 낳아준 사람에게서도 애정을 받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가둔다. 나는 사랑을 받을 자격도 없다는 틀에. 그렇게 자란 결과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타인의 눈살 찌푸린 시선에는 이미 적응이 되어버린 채로.

 

- 선혁의 집으로 들어간 자희는 거실 테이블에 케이크를 놓고 바로 주방 쪽으로 갔다. 그녀는 싱크대를 열어 앞접시와 와인잔을 꺼냈다. 흥얼거리며 냉장고를 연 자희는 안에 들어 있던 치즈를 찾아 쟁반 위에 올렸다. 선혁은 자신의 주방에서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그녀를 보며 마음이 무거웠다. 자희가 저만큼이나 자신의 생활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이제 자희가 없는 생활을 상상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 그녀를 알기까지 끝이 없는 외로움 속에 갇혀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버림받은 인생이었다. 자신의 첫 기억은 보육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곳에서의 삶이 아주 불행하지도 않았지만 행복하지도 않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보육원에 사는 애라고 왕따를 당했다. 중학교에 이르러서 도저히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두른 이후, 자신이 또래의 아이들보다 힘이 세고 싸움을 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강하면 아무도 자신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도. 그러다 필진과 원택을 만나 지금까지 왔다. 외로움을 잊을 수는 있었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는 늘 갈증 같은 외로움에 치여왔다. 자희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촛불 켜자."

 

- 만약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했는데, 놀라서인지 잠깐 침묵했던 상대방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백도진이라면, 전데요. 누구세요?"

 

- "남자 둘이?"

누군가의 혼잣말에 여기저기서 실소가 터졌다. 차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도착은 허필진이 먼저 했고, 투숙한 호수를 오선혁에게 문자로 전송했습니다. 이후 도착한 오선혁이 허필진의 시신을 발견하고 신고한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당시 오선혁이 이용한 택시를 찾았는데, 그날 운정모텔이 아닌 5분 거리의 바로모텔에서 내려 걸어간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 "왜 굳이?"
"그럼 그놈이 죽인 거 아냐?"
여기저기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침묵이 내려앉기를 기다렸다가 화면을 넘겼다. 사람들의 표정이 단번에 진지해졌다. 차열이 넘긴 장면은 사건 현장이 담긴 사진이었기 때문이다. 침대 위, 누런 벽지 위로 엄청난 양의 피가 흩뿌려져 있었다. 차열이 다른 설명 없이 다음 장을 넘겼다. 시신이 매달렸던 모텔 방 입구의 사진이었다.

 

- 살인 현장은 범인이 오선혁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상황들이 일제히 오선혁을 가리키고 있었다.

 

- 노크하자, 대답이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남자는 출입문 정면을 마주 보는 방향의 책상에 앉아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 각진 얼굴, 두툼한 가슴살, 까맣게 그을린 피부와 좁고 얇은 눈매. 아무리 9년 전 일이라 해도 그 애가 아닌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 "만약 그렇다면 또다시 저희가 가진 모든 질문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없습니다. 왜 이제 복수극이 시작됐는지, 왜 전시 살인인지, 어떻게 반항도 없이 사망하게 됐는지. 그리고." 
차열은 마이크를 조금 더 앞당겼다. 
"왜 오선혁은 이 와중에도 신변 보호를 요청하지 않는지."

 

- 이야기를 마치기 전에 강차열은 다시 한번 이승주의 사진을 꺼내 여자에게 내밀었다. 직업의 특성상 가게를 자주 옮겨 다니는 여직원들이라면 한 번쯤 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라고 말했다.  
"이런 타입은 이런 쪽엔 거의 없어요."


- 두 사람이 계단을 올라 지상으로 나왔을 때 아직도 햇볕이 뜨겁게 도로를 달구고 있었다. 차열은 손부채질을 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두 번째로 가야 할 '살롱키티'도 이 근처에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술만 마시면 자기가 사람 죽였다는 얘기를 하긴 했나 보네요."
"술만 마시면 그랬다기보다는, 누가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다고 느꼈을 때 이야기했겠지. 우월감을 느끼려고."

 

- "사람 잘못 보셨고요. 알았으면 그만 저리 가시죠,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내가 이 나이에도 눈이 2.0이야. 저런 미인이 어디 흔할 것 같아?"

허, 하고 선혁은 헛웃음을 지었다. 예쁜 것도 이럴 때는 피곤한 일이 된다. 그래도 어딜 감히. 자희는 누가 봐도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대화를 할 때에도 상식이 뛰어나다는 걸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것이 그녀의 움직임과 얼굴에서 곧장 드러난다. 가늘고 긴 팔을 살짝 흔들며 걷는 모습은 발레리나처럼 보일 때도 있다. 누가 보아도 그런 곳에서 일할 사람이 아닌 것이다. 

 

- "절 아세요?"

 

- 그곳은 유명한 낚시 포인트는 아니었다. 자희를 만나기 전 가끔 심심할 때 드라이브를 하다 우연히 찾아낸 곳이었다. 한적하고 깨끗한 강가. 오래전 사용하다 방치해 둔 것 같은 텐트가 하나 있기는 했지만, 이곳에서 낚시를 할 때 사람과 마주친 적은 거의 없었다. 선혁은 이곳을 좋아했다. 자주 자희에게도 이야기한 곳이었다. 상담사, 친구, 안정제. 그런 것들과 같은 뜻이라고 말했을 때 자희는 이곳에 함께 가보고 싶다고 말했었다.

  
- 선혁은 오늘 자희에게 이곳을 보여주려 한다. 
저녁노을이 강가를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낚시 중에 최고는 밤낚시라고 선혁은 생각해 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래서 남들도 나를 보지 않는 곳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고민하던 것이 가끔 풀리기도 하고 물에 빠진 것처럼 사라지기도 했다. 선혁은 자희가 잘 찾아올 수 있도록 옆에 세워둔 랜턴을 켰다.

 

- 여기까지 떠올리자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체 우린 누굴 죽인 걸까?

 

- 더 생각하려고 했지만, 거기에서 선혁의 정신이 암흑 속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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