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오정희] 오정희의 기담 - 이상야릇하고 재미있는 옛이야기

일루젼 2024. 7. 18.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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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오정희 / 이보름
출판 : 책읽는섬
출간 : 2018.09.28


       

7월 들어 중고도서로 판매한 책만 백 권이 넘어간다. 그런데도 아직 난 자리가 선명치 않으니 가야 할 길이 너무도 멀다.

그래도 조금씩이나마 겉을 걷어내고 나니 미처 있는 줄 몰랐던 책들이 드러난다.

 

<오정희의 기담>도 그렇게 만났다.

정답고 소담스런 그림이 눈길을 끌었다. 바로 손에 들고 앉은자리에서 여덟 개의 이야기를 내리읽어 내렸다. 

 

옛이야기들은 다들 조금씩은 닮아 있고, 또 조금씩은 달라진다. 

강원도에서 채록된 구전설화들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이야기들은 '신부', '초혼', '바리데기', '돌 삶는 이야기', '장군 설화', '프시케' 등을 떠오르게 한다.

 

그런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낯익음이 이런 옛이야기들의 매력일 것이다. 

매력적인 색감의 그림들과 함께 어우러져 더욱 즐거웠다. 

       

좋은 여름밤이었다.      


   

- 어른, 아이, 남녀노소가 두루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책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꽤 오래전부터 해왔다. 어린 시절, 할머니나 주변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옛날이야기, 또래 동무들끼리 지어내어 나누던 이상하고 으스스하고 괴기스러운 이야기들을 나름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해보고 싶었다.

- 옛사람들의 소박한 삶 속에 깃든 꿈과 소망, 슬픔과 그리움, 열망 들은 지금 이곳, 우리들의 삶에도 웅숭깊게 배어 있다.  

 



- 일찍 부모를 여의고 단둘이 살아가는 남매가 있었다. 누나인 윤옥과 남동생 윤호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생김새며 나이에 비해 헌칠하고 늘씬한 체격이 마치 쌍둥이처럼 똑같았다. 

- 윤옥은 윤호를 극진히 사랑하고 돌보았다. 삯바느질부터 부잣집 허드렛일까지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하면서 동생을 먹이고 입히는 데 정성을 다했다. 부모 없는 아이 티가 나지 않도록 애썼다. 윤호 역시 누나를 어머니처럼 믿고 의지했다. 불과 세 살 위였지만 윤옥은 생각이 깊고 행동거지가 어른스러웠다. 윤옥은 일하러 나가면서 가끔 윤호에게 '오늘은 강가에 나가 놀지 말라'거나 '산에 올라가지 말라'고 이르는 일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런 날에는 동네 아이들 중 누군가 강물에 빠지거나 산에서 뱀에 물려 죽는 일이 일어났다.

- "사람이 글을 배워 도리를 알지 못하면 짐승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윤호가 열세 살이 되자 윤옥은 그를 마을 서당에 보내었다.

- 윤호는 글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서당에 다니는 학생들 중 가장 나이가 어렸으나 하루종일 조는 일도, 한눈파는 일도 없이 열심히 공부했기에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고 한번 배운 것은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다. 

- 서당에 글 배우러 오는 사람들 중에는 나이 든 떠꺼머리 총각들도 많았다. 그들은 대체로 글 읽기보다 술 마시고 노는 일을 더 좋아하였다. '그저 까막눈이나 면하면 되지' 하는 마음에 도통 공부에 마음 쓰지 않았다. 훈장님은 언제나 윤호와 견주어 게으른 제자들을 나무랐다.

- "소매 속에 부어버려라. 술이 솜 속으로 배어들어 남들은 그것을 모를 것이다. 절대로 술을 먹으면 안 된다."
누나의 말대로 형들은 전에 없이 친절한 태도를 보이며 저마다 윤호에게 술을 권했다. 윤호는 누나가 일러준 대로 돌아앉아 먹는 시늉만 하고는 소매 속에 부어버렸다. 

- 어느새 해는 서산으로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아. 오늘 하루 잘 놀았다. 아까운 술이 아직 남았으니마저 먹고 가자. 윤호, 이 녀석, 공부만 하는 샌님인 줄 알았더니 쬐그만 게 여간 아니네. 우리가 준 술을 다 받아먹고도 이렇게 멀쩡하잖아? 아무래도 술이 모자랐는가 보다. 모름지기 사내라면 한 말 술은 먹어야지." 
형들이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고 추켜세우는 바람에 마음이 풀어진 윤호는 그만 누나가 한 말을 깜박 잊고 한 잔 받아 마셨다. 속이 이상하게 울렁거리고 몹시 어지러웠다. 비틀대며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으나 그 길로 쓰러져 숨이 끊어졌다.

- 윤옥은 죽어버린 동생을 끌어안고 슬피 울었다.

- 그런 후 남자 옷으로 갈아입고 댕기머리를 올려 무명수건으로 질끈 동여매었다. 영락없이 총각의 모습이었다. 방문에 자물쇠를 채우고 간단한 봇짐을 꾸려 집을 떠났다.

- 윤옥은 남자 차림새로 남자 행세를 하며 이곳저곳 떠돌았다. 농사철이면 남의 집 농사를 거들고, 가축을 많이 기르는 집에서는 목부 노릇을 하기도 하고, 서당의 머슴을 살며 어깨너머로 글을 배우기도 했다. 일을 시켜본 사람들은 그 훤칠한 인물이며 성실함이며 문물의 이치에 두루 밝은 점을 들어 윤옥을 칭찬해 마지않았다.

- 일 잘하고 신실한 떠돌이 일꾼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어느 대감 집에서 윤옥을 불러들여 청지기 노릇을 맡겼다. 집 안팎의 잡일을 하고 주인집 식구들의 시중을 드는 일이었다.

대감은 아들이 없이 달랑 외동딸 하나만을 두고 있었다. 그 딸은, 비록 남의 집살이를 하지만 점잖은 기품이 있어 보이는 데다 남모를 슬픈 사연을 지닌 듯 때로 우수 어린 표정으로 혼자 생각에 깊이 빠져들기도 하는 젊은 청지기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 "인물도 잘나고 맘씨도 좋고 부지런한 저 총각에게 시집가고 싶습니다."
"안 된다. 어디 신랑 자리가 없어서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놈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하느냐? 집안망신을 시키려느냐?"
아버지는 노발대발하였으나 사랑에 빠진 딸은 막무가내였다. 아무리 으르고 달래도 소용없었다. 종내는 새파랗게 날을 세운 비수로 제 가슴을 찌르려 하였다. 

- 예로부터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 딸이 죽는 꼴을 보느니 아무 놈에게나 주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한 대감은 하는 수 없이 혼인을 시키기로 했다. 하긴 근본을 모른달 뿐 뚝 떼어놓고 보면 어느 재상집 자제라 해도 속을 만큼 됨됨이며 인물이 출중한 청지기 총각이었다. 지체가 낮은 것이 못내 아쉽지만 그런대로 착실한 데릴사위 노릇을 잘할 것 같았다. 

- "우리는 부부고 이젠 나도 이 집 식구 아니오? 그렇게 귀중한 보물이라니 더욱 보고 싶구려. 한 번만 살짝 보여주시오."
윤옥이 졸라대자 아내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그 궤에 손을 얹고 중얼거렸다.
"라오아돌고입몸고입혼라나아살여자은죽(죽은 자여 살아나라. 혼 입고 몸 입고 돌아오라)."
그러자 궤가 스르르 열렸다. 궤 안에는 빨간꽃 하얀꽃 노란꽃 세 송이를 달고 있는 나뭇가지가 있었다.
"이것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꽃이랍니다. 빨간꽃은 살살이꽃, 흰꽃은 뼈살이꽃, 노란꽃은 숨살이꽃입니다."
아내는 윤옥이 그것을 자세히 보기도 전에 재빨리 궤에 손을 얹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궤는 언제 열렸었느냐는 듯 감쪽같이 닫혔다.

- "똑같이 닮았으니 그 집에서도 네가 나인 줄 알 것이다. 부디 잘 살거라. 그러나 내외간의 정에만 매여 혼자 남은 이 누이를 잊으면 안 된다. 내년 이날, 복숭아꽃이 필 때 꼭 날 보러 오너라. 나는 널 보듯이 네 옷을 지으면서 기다리마."


- 때는 봄이었다. 마당 귀퉁이, 해묵은 복숭아나무 가지에는 분홍빛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었다. 집을 떠나 대감집에 당도한 윤호는 누나가 일러준 대로 먼저 대감의 방으로 가 큰절을 올리며 금강산 유람은 즐거우셨는가를 여쭈었다. 아내에게는 무사히 탈상을 치렀노라고 말했다. 윤호는 예쁘고 살가운 아내가 좋았다. 아내 역시 속 깊고 의젓한 남편이 좋았다. 부부의 정이 새록새록 도탑고 깊어졌다. 행복한 나날 속에서 고향집과 누나를 잊었다.

- 어느 봄날, 아내와 후원의 연못가를 거닐던 윤호는 연못물에 하르르하르르 떨어져 내리는 복숭아 꽃잎을 보며 문득 까닭 모르게 찌르르 가슴이 저려왔다. 그 애달픈 연분홍빛이 그대로 마음에 물드는 것 같았다.

- '왜 이리 가슴이 아플까.'

'왜 이리 슬플까.'
가슴앓이의 까닭을 몰라 물 위에 떠서 흐르는 꽃잎만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윤호의 눈에 문득 이처럼 복숭아꽃 만발했던 어느 봄날의 정경이 떠올랐다. 그리고 '복숭아꽃 필 때...'라고 말하던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로소 까맣게 잊고 있었던 누나와의 약속을 기억해 냈다. 꼽아보니 누나가 오라는 날에서 하루가 지나 있었다. 윤호는 연못가에 아내를 남겨둔 채 그 길로 부랴부랴 말을 타고 고향집으로 달려갔다. 삽짝문 앞에 당도하여 말에서 미처 내리기도 전 소리쳤다.
"누님, 제가 왔습니다."

- 집은 금방이라도 폭삭 주저앉을 듯 퇴락해 있고 윤옥은 윤호가 떠날 때와 똑같은 자리,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다만 펼쳐놓았던 한 필의 명주가 한 벌의 남자 옷으로 거의 다 지어져 있는 것이, 방바닥 군데군데 풀들이 돋아나 자라고 있는 것만이 시간의 흐름을 말해줄 뿐이었다. 

 

- <어느 봄날에>


 
- 강원도 시골 마을에 아들 삼형제를 둔 부부가 살았다. 비록 살림은 넉넉지 못했지만 건강하게 잘 자라는 아들이 셋이나 있으니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다만 예쁜 딸이 하나쯤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딸이 하나 있으면 빨강치마 노랑저고리를 입혀 매일 데리고 다니며 자랑할 텐데..."
 

- 남편의 바람대로 아내는 또 아기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열 달이 지나 낳은 것은 사람이 아니라 구렁이였다. 남편은 아내가 낳아놓은 구렁이를 보고는 너무 놀라 그대로 집을 나가버렸다. 필시 자기 집에 내린 커다란 재앙이거나 아내와 세 아들들이 실은 구렁이일는지도 모른다고 겁을 먹었던 것이다.

- 어머니는 자기가 낳아놓은 것이 사람이 아니라 흉측한 뱀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끔찍하고 무서웠지만 차마 자기 손으로 죽일 수는 없었다. 저절로 죽으라고 이불을 씌워 추운 윗목에 밀쳐두었다. 그러나 구렁이는 죽지도 않고 이불속에서 대가리를 꼿꼿이 쳐들며 애처롭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뜨뜻한 아랫목에 끌어다 놓고 젖을 짜서 대접에 담아 주니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 구렁이는 어머니의 젖을 먹으면서 무럭무럭 자랐다. 방안에 가두어두고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애썼으나 구렁이를 낳았다는 소문은 곧 멀고 가까운 동네에 퍼졌다.
"엊저녁, 용수 엄마가 그 집에 간장 한 종지 얻으러 갔다가 해괴한 걸 봤다는군. 글쎄 그 집 안방 들창 문턱에 뱀대가리가 턱 하니 얹혀 있더래. 그 뱀대가리가 눈깔을 두릿두릿, 둘로 짝 갈라진 혓바닥을 날름날름하면서 쳐다보더라네."  

- 우물가에서, 개울가 빨래터에서, 정자나무 아래서. 김매는 밭두렁에서 사람들이 둘씩 셋씩 모이기만 하면 구렁이 이야기였다. 급기야 사람들은 그들 가족 모두 구렁이가 둔갑한 것이라고 말했다. 낮에는 멀쩡한 사람이었다가 밤이 되면 구렁이로 변신하여 스르스르르 돌아다닌다고, 두 눈으로 본 듯이 이야기하기도 했다. 음식을 나눠먹고 서로 품앗이로 일을 해주며 가깝게 오가던 이웃사람들은 그 집에 얼씬도 하지 않았고 그 집 앞을 피해 굳이 먼 길을 택해 돌아 다녔다.  

- 불룩해진 구렁이의 가슴은 방금 삼킨 먹이의 몸부림으로 꿈틀꿈틀 요동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구렁이의 얼굴도 할퀴고 쪼인 상처로 피투성이였다. 필시 동네 어느 집의 닭을 잡아먹었음에 틀림없었다. 어머니는 구렁이를 불러 앉히고 조용히 말했다.
"네가 이제 고기맛을 들였으니 목숨 가진 것들이 네 앞에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과 뱀의 사는 길이 서로 다르니 이제 이 집을 떠나거라. 그것만이 너도 살고 우리도 사는 길이다. 언젠가는 허물을 벗고 사람이 되어 돌아오거라."
구렁이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어머니가 정성껏 차려준 음식들을 다 먹은 후 집을 나가 뒷산으로 사라졌다.
그 후로 다시는 구렁이를 볼 수 없었다.

- 세월이 많이 흘러 마을 사람들은 구렁이를 잊었다. 그리고 형제들까지도 구렁이 이야기를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지만 어머니는 궂은날에도 맑은 날에도, 추운 날에도 더운 날에도 늘 집 나간 구렁이 아들이 사라진 산 쪽을 바라보며 눈물지었다.
"얘야, 내 아들아, 불쌍한 구렁이 아들아.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느냐, 살아는 있는 것이냐." 

- 아무도 들을 수 없는 혼잣말로 웅얼거리며 구렁이 아들을 그리워하던 어머니는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어느 추운 겨울날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그날 밤, 갑자기 한줄기 서늘한 바람과 함께 문이 열리며 구렁이 아들이 스륵스륵 방 안으로 기어들어오는 것이었다. 형들이 깜짝 놀라며 동생을 맞았다.
"어디 갔다 이제 오느냐. 어머니가 널 생각하시며 눈도 못 감고 돌아가셨다."
구렁이는 어머니의 시신을 온몸으로 휘감고 그응그응 울었다.
"아무리 울어본들 어머니가 살아오시겠느냐. 돌아가신 몸이라도 편히 쉬실 좋은 묏자리나 하나 잡아다오."

형들의 말에 구렁이는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형들을 이끌고 앞장서 산으로 갔다. 구렁이가 멈춘 곳은 산속 깊은 골이었다. 아직 한겨울이라 사방이 눈천지인데 어쩐 일로 그곳만은 보송보송 마른땅이었다. 달꽃삼꽃까지 발갛게 피어 있었다.

- 마당의 빨랫줄에 내걸었다. 뱀 허물이 눅눅해져 곰팡이라도 슬까 봐 햇볕과 바람을 쐬어주려는 것이었다. 마침 놀러 온 언니들이 빨랫줄에 널린 뱀허물을 보고 질겁을 했다.
"이따위 징그럽고 흉측한 것을 내다 버리지 않고 왜 집안에 두고 있느냐?"
"아니에요. 언니. 남편이 과거를 보러 가면서 그것을 잘 보관하라고 신신당부했어요."
"아니다. 그대로 두면 어느 날 또 이걸 뒤집어쓰고 구렁이가 될지도 몰라."
아내가 부엌에서 점심 준비를 하는 동안 언니들은 동생 몰래 그 허물을 걷어내어 마당에서 태워버렸다.

- 무심결에 부엌창 밖을 흘깃 내다보던 아내는 저만치 동구 밖 미루나무가 이켠으로 오는 듯하다가 멀어지는 것을 보았다. 점점 작아지다가 아주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상한 느낌과 함께 퍼뜩 남편이 남기고 간 알쏭달쏭한 말이 떠올랐다. 게다가 마당 쪽에서 수상한 누린내가 풍겨오고 있는 게 아닌가. 사색이 된 아내는 한달음에 마당으로 뛰어나왔지만 허물은 이미 기세 좋은 불길 속에서 형체 없이 스러지고 있었다. 아내는 한 줌의 재로 변해버린 허물을 움켜쥐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 신랑은 돌아오지 않았다. 달이 가고 해가 가도록 소식 한자 없었다.
아내는 마침내 남편을 찾아 나섰다. 천리만리 아무리 험한 길이어도 기어코 찾아내어 잘못을 빌리라 했다. 산, 산, 산, 산을 넘고 강, 강, 강, 강을 건넜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꽃이 피고 꽃이 지고 푸르른 나뭇잎 낙엽 되어 떨어지고 모진 눈보라가 휘몰아치기를 몇 번, 머리칼은 헝클어져 수세미가 되고 옷은 누더기가 되었다. 산길 들길 가시덤불과 자갈밭을 헤매고 다닌 발은 짓물러터졌다. 

- 이렇게 헤매고 다니던 어느 날 아내는 양지바른 무덤가에서 잠시 다리 쉼을 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꿈속에 흰 강아지를 안고 있는 백발노인이 나타났다.
"얼마나 고생이 심하냐. 네 정성이 갸륵하구나. 내가 이 강아지를 네게 줄 테니 이 강아지가 가는 대로 따라가면 남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꿈에서 깨어보니 이게 웬일인가.  

- < 그리운 내 낭군은 어디서 저 달을 보고 계신고>



-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마현리에 사는 한 젊은이가 과거를 보기 위해 괴나리봇짐을 지고 집을 떠났다. 한양까지 가려면 화천읍 냉경지 나루를 건너 용암리와 삼화리 마을을 지나 용화산을 넘어야 했다. 용화산은 경치 좋기로 유명하였지만 그만큼 험하기도 한 곳이었다. 한낮이 조금 지나 용화산에 당도한 젊은이는 까마득히 버티고 있는 산을 보고 숨이 턱 막혔지만 내친걸음에 산을 넘기로 하였다. 과거 날짜에 맞춰 한양에 당도하기까지의 시간이 빠듯하여 마음이 급한 탓도 있었다. 또한 열이틀 지난 달빛에 의지해 그럭저럭 밤길을 갈 수 있으리라는 요량도 섰던 것이다.

 

- "이 시각에 산을 오르다니. 산에서는 날이 쉬이 저문다오. 곧 어두워질 텐데 도로 내려갔다가 내일 날 밝는 대로 산을 넘는 게 좋을 거요."
산에서 내려오던 나무꾼이 걱정스레 만류했으나 젊은이는 귀담아듣지 않고 부지런히 산을 올랐다.

- 나무꾼의 말대로, 겨우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 서산마루에 아슬아슬 걸리던 해가 꼴깍 넘어갔다. 날이 저물고 어두워졌다. 나뭇가지 울창하고 수풀 우거진 산속에서는 달빛도 길잡이가 되지 못했다. 바위 밑이나 굴속을 찾아들어가 밤을 지내야 할 판이었다. 어물어물하다가는 호랑이 따위 사나운 산짐승의 밥이 되기 십상이렷다.

-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두두릿 살펴보니 저 멀리 지붕 모양의 아주 큰 바위가 어둠 속에 시커먼 형체로 서있는 것이 보였다. 저렇게 큰 바위이니 어딘가 이 한 몸 숨길 틈은 있겠지 하고 그곳을 향해 허둥지둥 걸어갔다. 그런데 가까이 가다 보니 그곳에서 까물거리는 불빛이 보이는 것이었다. 도깨비불이냐, 사나운 산짐승의 눈빛이냐, 아니면 깊은 밤 산중에서 천지신명에게 치성을 드리고 있는 사람의 호롱불 빛이냐.

무릇 살려고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게 되리라고 했거늘! 불안하고 어지럽게 떠오르는 추측들을 떨어 버리며 젊은이는 자신의 운을 하늘에 맡기고 용기를 내어 불빛을 향해 걸음을 떼어놓았다.

-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가까이 다가가 보니 큰 바위라고 생각했던 것은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었고 불빛은 그 집의 들창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젊은이는 이제까지의 두려움과 긴장이 풀려 그만 폭삭 주저앉을 것처럼 맥이 풀렸지만 점잖게 목청을 가다듬어 주인장을 찾았다.
"이리 오너라."
그러자 대문이 열리며 하얀 소복 차림의 젊은 여자가 나와 공손히 절하며 물었다.
"어디서 오신 손님이신데 이 밤중에 주인을 찾으십니까?"

- 젊은이는 갈 길이 바빴지만 그 여자의 어조며 눈빛에서 왠지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이산중에 고래등 같은 집을 짓고 젊고 아리따운 여자 둘이 살아가는 사연이 여간만 궁금한 게 아니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 젊은이가 떠나려 하자 주인아씨가 또 만류했다.
"지금 가시면 위험하니 해질 무렵에 가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는 수 없이 어둑어둑 땅거미가 질 무렵 그 집을 나설 때 주인아씨가 말했다.
"이곳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계곡이 나오는데 그 계곡을 따라 계속 올라가시되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라도 절대로 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가십시오."

- 주인아씨가 일러준 대로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데 산을 넘기도 전 해가 꼴깍 넘어가버렸다. 캄캄한 밤 낯선 산길을 오르는 마음이 황망하기 그지없었다. 일찍 나설 것을 괜시리 그 여자의 말을 따른 것에 후회가 되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가시나무 덤불에서 굴러 긁히면서 간신히 한 걸음씩 떼어놓는데 등뒤에서 '여보시오'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얼결에 힐끗 돌아보니 환히 불 밝힌 등롱을 든 백발노인이 너댓 걸음 뒤에 서 있었다.
"어디로 가는 누구신데 어두운 밤길을 이리 분주하게 가십니까? 웬만하면 내 집에서 나하고 이야기나 하면서 하룻밤 묵어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 그제야 젊은이는 누가 불러도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던 주인아씨의 말이 퍼뜩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 밤의 산중에 홀연히 나타난 백발노인의 정체가 수상기 짝이 없었다. 젊은이는 갈 길이 바쁘다는 구실로 사양하였으나 노인은 거의 애원조로 그를 잡아끌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거늘, 이런 늙은이가 내게 무슨 짓을 하랴. 불안을 누르며 노인을 따라갔다.

 

- 하긴 겁 없이 산을 넘다가 호랑이에게 물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먹히고 머리통만 달랑 바위 꼭대기에 얹혀져 데굴데굴 구르는 꼴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그 광경을 떠올리며 젊은이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호랑이는 짐승을 잡아먹고 난 뒤 반드시 대가리만을 남겨 높은 바위 위에 올려놓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 몸통 없는 대가리들은 까마귀 까악까악 울부짖고 독수리 빙빙 돌며 날아들면 무서워, 무서워 소리치며 데구르르 데구르르 굴러다닌다고 했다.

- 여차하면 방문을 박차고 뛰어 달아날 작정이었다. 젊은이의 이러한 경계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은 휴우, 긴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사실은 내가 사람이 아니고 용이 되려다 못 된 늙은 이무기요. 지금부터 수백 년 전, 이곳 깊은 웅덩이 속에서 용이 되려고 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 날 난데없이 큰 지네가 나의 영역을 침범해 왔다오. 일곱 낮 일곱 밤 동안 엎치락뒤치락 죽을힘을 다해 싸웠지요. 결국 구사일생으로 나는 살고 지네는 죽었는데 그 죽은 지네의 딸이 몸종과 함께 사람으로 둔갑하여 용화산중턱 큰 바위를 집 삼아 살면서 자기 애비의 원수를 갚겠다고 매달 보름날이면 싸움을 걸어온다오. 어찌나 힘이 세고 날랜지 늙은 나로서는 도저히 당할 길이 없구려. 게다가 그 암지네가 갖가지 도술까지 부리는 통에 어찌할 수가 없답니다. 그렇지만 않았다면 벌써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을 터인데 지금 이 지경이 되어 몸만 점점 늙어가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구려. 지금이라도 저 두 암지네들만 죽여 없앤다면 용이 되어 승천할 수 있을 거요. 선비께서는 나를 도와주실 수 있는지요?"
노인의 하소연에 동정심이 생긴 젊은이가 말했다.
"도와드리지요. 그런데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자세히 가르쳐주십시오."


- <용화산>



- 스님에게 가져가다가 아차, 그만 쇠죽가마에 노란 알을 빠뜨렸다. 펄펄 끓는 쇠죽 속에서 달걀은 순식간에 푹 익어버리고 말았다. 총각은 하는 수없이 익은 달걀 하나와 날달걀 한 알을 스님에게 갖다 주었다. 

- 스님은 달걀 두 알을 주머니 속에 넣고는 곧바로 집을 나섰다. 왠지 수상쩍은 마음이 들어 총각은 몰래 스님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스님의 발걸음은 노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재발랐다. 누덕누덕 기운 승복 자락에서 휙휙 바람소리가 나는 듯하였다. 스님은 가리산 중턱에 이르러 멀고 가까운 산의 능선과 저 멀리 보이는 강줄기, 골짜기들을 오랫동안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아, 바로 여기다' 하는 표정으로 무릎을 탁 쳤다. 스님은 발밑의 흙을 조금 파고 달걀 두 알을 묻었다. 그런데 잠시 후 얇게 덮은 흙이 들썩이더니 하얀 닭 한 마리가 퍼드득 날갯짓을 하며 나오는 게 아닌가. 총각은 자신의 눈이 의심스러웠다. 눈을 비비며 그 모양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 "이상하다? 왜 한 마리는 안 나오지?"
스님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중얼거리며 흙 속에 남아있는 나머지 달걀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총각이 보니 그것은 쇠죽가마 안에서 익어버린 노란 달걀이었다. 스님이 그것을 손에 들고 무어라고 중얼거리자 그 달걀에서도 누런 닭이 양 날개를 퍼득이며 나와 꼬끼요오, 우렁찬 소리로 울었다.

 

- 숨어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총각이 스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애원하였다. 
"스님, 도력이 정말 높으십니다. 진작 알아 뵙지 못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제게는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지난겨울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여태 편안히 모실 자리를 마련해드리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를 제 아버지의 묏자리로 쓰게 해 주십시오."
"이 자리에는 아무나 묘를 쓸 수 없다네. 반드시 금관을 쓴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묏자리일세."

- 금관을 쓴 사람이란 바로 임금님을 이르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것은 왕실의 묏자리, 즉 천하명당이라는 뜻이겠다. 천하제일의 명당을 본 뒤인지라 앞으로 다른 묏자리가 눈에 들어올 리 없을 것이다. 남의 집 밭두둑에 아무렇게나 묻히신 아버지는 언제나 편안한 당신의 집을 갖게 될 것인가. 
스님은 낙심천만한 총각이 고개를 푹 숙이고 터덜터덜 산을 내려가는 것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여전히 그 자리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무심한 눈길로 산이며 들이며 강이며 골짜기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가당찮은 욕심을 버리자고 아무리 마음을 비워도 두 마리의 닭이 꼬끼요오! 우렁차게 목청을 뽑으며 힘찬 날갯짓을 하던 그 자리가 눈에 아른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하늘이 내려주는 큰 복일수록, 받을 자격이 없는 자가 탐내면 오히려 큰 화와 재앙이 되는 법! 임금의 묏자리를 건드렸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모를 만큼 어리석은 총각이 아니었다. 산에서 내려온 총각은 쇠죽을 마저 끓이려고 가마솥에 물을 더 붓고 주걱으로 휘저어대었으나 도무지 일손이 잡히지 않고 일할 기력도 없었다. 주걱을 내던지고 여동생이 혼자 지키고 있는 오막살이로 돌아와 이불을 쓰고 누워버렸다. 

 

- "이걸 어쩌나. 우리 오라버님이 큰 병이 나셨구나.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말씀 좀 해보시오."

분명 오빠가 큰 병에 걸린 것이라 여긴 누이동생은 미음을 끓이고 찬 물수건을 이마에 갈아대며 여간만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천정을 바라보고 누워 눈만 껌벅이던 총각은 마침내 누이동생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다.

 

- "오라버님, 그게 무에 그리 어려운가요?"
누이동생은 오빠의 말을 다 듣고 난 후 방긋 웃고는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노란 귀리 짚을 한 아름 안고 들어왔다. 그 귀리 짚을 엮어 관을 만들어 오빠에게 씌웠다. 얼핏 보면 노란 금관처럼 보이기도 했다. 총각은 귀리 짚 관을 쓰고 산으로 내달았다. 스님은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는 듯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 "스님, 저도 금관을 썼으니 이 묏자리를 저에게 주십시오."
마침 해 질 녘이어서 넘어가는 저녁 햇살을 받은 귀리짚관이 휘황하게 빛을 뿜는 찬란한 금관처럼 보였다. 스님은 총각이 쓰고 있는 귀리 짚 관을 보고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허허 웃었다.
"너의 정성이 이토록 지극하니 어쩔 수 없구나. 이 묏자리는 네가 쓰도록 하여라."
감읍한 총각이 엎드려 절하고 일어나 보니 스님의 모습은 간 곳이 없었다. 스님이 앉았던 자리의 흙이 동그마니 눌려 있을 뿐이었다.

- 총각은 그해 가을 새경을 받아 그 묏자리에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고 장사를 잘 치렀다. 좋은 자리에 아버지를 모셨으니 마음이 홀가분하고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여전히 머슴살이는 면하지 못했지만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그에 대한 주인의 신임이 깊어졌다. 새경도 올려주고 작은 논을 하나 떼어 맡겨주니 힘든 일도 고된 줄 모르고 즐거웠다.

- 어느 날 이 시골 마을에 커다란 방이 하나 붙었다.
"짚으로 만든 북을 짚으로 만든 방망이로 쳐서 북소리를 울리는 자를 찾는다."
그것은 후계자가 없이 붕어한 중국 천자의 유언이었다. 천자가 이러한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자 그 명에 따라 짚으로 북과 방망이를 만들어놓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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