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임이랑] 아무튼, 식물 - 그들에게 내가 꼭 필요하다는 기분이 소중하다

일루젼 2024. 7. 2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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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임이랑

출판 : 코난북스
출간 : 2019.03.22


       

식물을 키워볼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전에 시도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몇 번이나 안타까운 죽음을 배웅했던 전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색 친구들을 데려올까 고민 중인 이유는 움직이는 친구들은 현재 우리 집의 환경에서 버티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왜 친구를 들이려고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이유는 지금은 넘어가기로 하자)

 

지금까지 내 곁에서 최장기간 살아남은 친구는 '하트 호야'인데 반년 정도 되어가는 것 같다. 어느 날 새벽의 변덕으로 도착한 하트 모양의 다육이는 가끔씩 돌봄을 까먹는 내 곁에서도 잘 살아남아 주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할 수 있길.

(하지만 이 친구가 행복한지는 모르겠다)

 

사람의 변덕이란 묘한 구석이 있어서, 아무런 문제없이 '하면 되는' 일에는 관심이 시들해지고, 외부에 핑계를 돌리기 좋은 '하기 힘든' 일에는 열정이 솟는 것이다. 그러저러한 이유로 반려동물을 무척 들이고 싶은 나날인데- 그들의 행복을 고려할 때 적어도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미래를 기약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남겨진 아쉬운 마음은 돌고 돌아 반려식물에게로 날아들었다.

 

그런데 말이다. <아무튼, 식물>이 내게 있었다는 건, 잘 기억나지 않는 그 언젠가의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어쩌면 몇 차례의 이별 중 몇 번은 완전히 같은 마음으로 만남을 시작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번에 필요한 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각오와 새로 만날 친구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우선 베란다는 준비가 되었는데...

나도 저자처럼 낮 인간이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창밖으로 은은하게 자줏빛 광선을 흘리는 나는 잘 상상이 되지 않지만, 어떤 변화 속에서도 행복은 있을 거라 믿는다. 행복은 상태가 아니라 감정이니까. 

 

어떤 친구를 데려올까. 

오늘도 고민은 깊어진다.  

 


 

 

 

- 만드는 걸 보시던 정인 언니의 엄마는, 미대 출신답게 그림을 판판하게 펴서 프레임에 고정시키는 일을 도맡아 해 주시고는 정말 맛있는 떡볶이까지 만들어주셨다. 재미있었던 그날의 기억으로 더 소중해진 액자와, 컴퓨터가 놓인 책상이 이 방에 있는 정물의 전부다. 
그렇다고 방이 썰렁하리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나는 식물 애호가니까. 방의 나머지 자리는 모조리 식물들이 차지하고 있으니까.

- 먼저 우리 집에서 키가 제일 큰 휘카스 움베르타가 있다. 이 휘카스는 원래 한국에 오랫동안 산 외국 친구가 키우던 나무였다. 그는 나에게 이 휘카스를 비롯한 나무 몇 그루를 맡기고 본국으로 영영 떠났다. 멀리 떠난 친구를 대신할 휘카스와 커피나무가 생긴 셈이었는데, 그나마 커피나무는 적응하지 못하고 금방 죽어버렸다. 휘카스 옆에는 고무나무가 서 있다. 이 친구는 간접광을 좋아하는 완벽한 실내 식물이다. 하지만 식물에 대해 뭣도 모르던 몇 해전 시들해진 고무나무를 여름 직광에 내놓은 나의 무지한 실수로 요단강을 건널 뻔했다가 꼬챙이 같은 모양새로 목숨만 부지하고 몇 년째 계속 회복 중이다. 그의 회복은 도대체 언제까지 이어질지 정말 궁금하다. 나는 그저 단 두어 시간 그를 직광에 내놓았을 뿐인데, 몇 해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볼품없는 모습이다. 그래도 이 고무나무 덕분에 본격적으로 식물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니 꽤 고마운 인연이기도 하다. 그 앞에는 벌써 7년째 키우고 있는 긴기아난, 핑크색 줄무늬가 매력적인 칼라데아 진저, 브레이니아, 박쥐란과 립살리스 쇼우 등등 수십 종의 식물들이 살고 있다. 

- 그래서 이 방은 썰렁하기보다는 오히려 복잡한 편이다. 책상 위, 화장실 옆, 테라스 앞, 해가 잘 드는 자리와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지나가는 모든 자리에 식물들이 살고 있다. 직광을 좋아하는 식물들은 모두 테라스에 살지만, 실내 식물들 중 일부는 이 방에 산다. 물론 다른 방에도, 거실에도, 부엌에도 식물들이 살고 있다.

- 보통 나는 이 방에서 요가를 하거나, 글을 쓰거나, 식물을 돌본다. 천장이 특이한 방의 모양새 때문에 오직 방의 가운데에서만 요가를 할 수 있다. 방의 중간으로는 해가 지나가지 않아서 다행이다. 창으로 들어온 햇볕은 방의 가장자리를 따라서만 움직이기 때문에 요가 매트를 펼 때마다 화분 열댓 개를 치우는 상황은 피할 수 있다.


- 보통의 아침에는 식물들과 노는 편이다. 아침이면 집 안팎의 식물에 물을 주거나 시든 이파리들을 정리한다. 여러 가지 흙을 배합해서 분갈이를 하고 각 흙에 따라 달라지는 식물의 성장세를 구경하는 것도 좋아한다. 지난밤에 어떤 일이 있었건 아침이 오면 늘 똑같은 일을 할 수 있어서 좋다. 이 소소한 일상이 흐트러지지 않을 수 있기를 남몰래 빌기도 한다.

- 디어클라우드 4집 앨범을 작업 중이던 몇 해전, 나는 보이지 않는 덫에 걸린 기분으로 살고 있었다. 앨범 작업은 한참 동안이나 진전이 없었다. 우리는 마치 곡이 모래성인 양, 쌓아 올리고 무너뜨리고 쌓아 올리고 무너뜨리기를 반복했다. 그 앨범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었지만 그 시기의 나는 확실히 지칠 대로 지쳤으며, 아팠다. 무엇을 봐도 즐겁지 않았고 무엇에도 집중하기 어려웠다. 밥을 먹을 때도 영화를 볼 때도 샤워를 할 때도 아무 이유 없이 쉽게 불안해졌다.

- 외면하고 싶었다. 도망칠 수 있는 데까지 도망치고 싶었다.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힘껏 도망쳐야만 했다. 어떻게든 도망치고 나면 밤이 오니까, 밤이 오고 나면 또 잠으로 도망치곤 했다. 이상한 굴레를 거듭 반복한 시절이었다.

- 신기하게도 나는 이 시기에 식물에 깊이 매료되었다. 아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우리는 금방 친구가 되었다. 나를 소개할 필요도 없었고, 스스로를 치장하거나 즐거운 표정을 짓지 않아도 괜찮았다. 식물들은 내가 애정을 쏟은 만큼 정직하게 자라났다. 그 건강한 방식이 나를 기쁘게 만들었다.

- 테라스에 식물들을 내놓고 키우면서부터 나는 비를 좋아하게 되었다. 번개가 치는 날에는 비에 질소가 풍부하게 담겨 있다고 한다. 질소는 비료의 훌륭한 원료로 사용되기 때문에 식물 애호가들은 비를 보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돈 주고 사서라도 식물에게 뿌려줄 영양분이 하늘에서 내리니 비 오는 날이 반가울 수밖에.

- 비가 많이 오는 날엔 온 집 안의 빈 통들을 모아다가 빗물을 받는다. 언제부터 집에 있었는지 본래 용도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는 스테인리스 대야들과 버킷들은 물론이고 잘 안 쓰는 화분 받침, 입구가 좁은 화병까지 테라스로 입장한다. 온갖 그릇들을 테라스 바닥에 있는 대로 늘어놓고 온몸을 흠뻑 적셔가며 빗물을 받다가 문득 정신을 차린다. 바닥에 널브러진 그릇들과 나의 모습이 궁상맞기 짝이 없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극성일까. 물론 좋은 것을 주고 싶은 욕심이다. 그리고 수돗물을 줄 때보다 빗물을 줄 때 식물들이 더 기뻐 보인다고 믿는 나의 망상 때문이다. 비가 찔끔 오는 날엔 아쉽고, 비가 한없이 내리는 장마엔 물을 많이 좋아하지 않는 식물들이 걱정이다. 비가 화분을 흠뻑 적시고 적당한 순간에 그쳐주는 날이 좋다. 그렇게 적당한 날은 흔치 않지만 말이다. 비는 늘 모자라게 찔끔 오고 말거나, 넘치게 쏟아지곤 한다. 

- 내리는 비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적당함이란 언제나 지키기 어려운 선이다. 단단하게 잡고 있던 머릿속 끈이 살짝만 느슨해지면 적당함을 놓쳐버린다. 바짝 긴장하고 있지 않으면 금방 적당함을 벗어나는 실수를 하게 된다. 담백한 사람 앞에서 살짝 질척하게 굴기도 하고, 따뜻한 사람의 온도에 맞추지 못하고 냉하게 돌아서기도 한다. '아차 실수다!' 알아차리지만, 너무 늦었다. 적당하지 못한 죄로 관계는 쉽게 고장 난다.  

- 벌들이 좋아서 서울에서 양봉을 할 수 있는지 찾아보기도 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는데, 까딱하다간 주변에 매우 큰 민폐를 끼치는 일이 될 것 같아 포기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많은 일이 '서울'이라는 걸림돌에 걸려서 고꾸라진다. 그래도 여전히 서울을 포기할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는 걸 보면 도시가 어지간히도 좋은 모양이다.

- 하루는 테라스 바닥에 벌 한 마리가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벌은 이미 죽은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치우려다가 다시 자세히 보니 벌은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머리 몸통 다리 날개는 모두 멀쩡해 보였다. 어디선가 설탕물을 한 방울 먹이면 탈진한 벌이 다시 살아난다는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났다. 빨리 움직여야 했다. 급하게 티스푼에 설탕을 담고 물을 적셔서 벌의 얼굴 앞에 두었다.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벌은 마치 냄새를 맡는다는 듯 더듬이를 까딱까딱 움직이고는 설탕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고 한참을 쉬었다가 날아갔다. 벌이 살아나서, 벌을 살려서 정말 기뻤다. 그날 오후의 짧은 해프닝은 그해 내게 일어난 제일 큰 기쁨 중 하나가 되었다.

 

- 봄과 여름에는 벌들이 테라스로 잔뜩 놀러 온다. 화분 받침에 물이 찰랑하게 고이도록 두고 물 구멍으로 물을 끌어올리게 저면 관수로 키우는 식물들이 있다. 테라스 문을 열고 나갈 때마다 매번 벌들이 그 받침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물을 마시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떤 날엔 홀로 물을 마시고 있는 벌이 있고, 다른 날엔 두 마리 세 마리가 함께 찾아와서 물을 마시기도 한다. 벌들은 그 줄무늬 엉덩이를 들썩이며 한참 물을 마시고 나면 30센티미터쯤날아오른다. 그러고는 나와 눈을 마주치려는지 공중에서 잠시 멈춰 날갯짓을 하고서 다시 어딘가 멀리로 날아간다.

- 벌들 중 단 한 마리도 나에게 공격적으로 굴지 않는다. 벌들은 내가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별 위협을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벌들은 벌들대로, 나는 나대로 자기 볼일을 본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혹시 설탕물을 먹고 살아난 벌이 벌들의 왕국으로 돌아가서 그 집은 안전하며 그 사람이라면 믿어도 괜찮다고 소문을 퍼트린 게 아닐까. 내가 생명의 은인이라고 모두에게 말했을 수도 있다. 벌들의 신뢰를 받고 있다고 착각하며 혼자 즐거워한다. 믿음에 답하고자 벌들이 계속 물을 마시러 올 수 있도록 절대 화분 받침에 물이 마르게 두는 법이 없다. 가드닝의 즐거움과 함께 작은 벌들을 구경하는 즐거움도 느끼며 살아간다.

- 거실에 앉아 책을 읽는다. 책의 네모반듯한 모양새가 좋다. 종이 냄새 또한 좋다. 책의 무게가 딱 적당하고 안정감 있다. 한 장 한 장 종이가 손에 닿는 감촉이 좋다. 까슬까슬하지만 친절한 느낌. 그 냄새와 무게와 질감 때문에 아직 전자책을 시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손 뻗으면 닿는 곳에 아이패드와 노트북, 핸드폰이 있다. 진득하게 집중해서 책을 읽기가 쉽지 않다. 나는 역시 금방 산만해지고 만다. 그런데 나의 집중을 흩트린 건 애초에 경계했던 전자기기들이 아니라 화분이다. 

- 지난달에 분갈이를 해둔 이후로 분갈이 몸살중인 아레카야자 화분에 손을 푹 찔러 넣고 말았다. 식물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서 자꾸 화분에 물을 부어주다가 결국 과습으로 식물들을 죽이던 시기에 야자를 데려왔다. 화원이나 식물 가게에서는 아레카야자처럼 크기가 큰 식물들을 심을 때 화분 안에 스티로폼을 넣는다. 멋모르던 시절에 흙 속에 든 스티로폼을 보고 얼마나 억울했는지 모른다.
'아이고 내가 사기를 당했구나, 흙 값이 아까워서 화분에 스티로폼을 넣는 장사꾼에게 당했네.'
알고 보니 큰 화분 속에 스티로폼을 넣는 데는 사실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스티로폼은 무게가 가볍고 배수도 잘 되고 뿌리를 숨 쉬게 할뿐더러 쉽게 부식되지도 않는다. 게다가 가격까지 저렴해 스티로폼은 나름 우수한 충전재로 널리 쓰인다. 

- 그렇지만 아레카야자를 한참 키우다 보니 분갈이를 해줘야 할 시기가 왔고, 뿌리와 엉킨 스티로폼을 잘라내고 적당히 분리하느라 한참 애를 먹었다. 아무리 스티로폼이 우수한 충전재라고 해도 내 화분 안에 넣고 싶지는 않다. 아레카야자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면 온통 중심을 흔들리고 뿌리가 뜯겨버렸으니 분갈이 몸살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사였다.
 
- 나는 아레카야자를 토분으로 옮긴다. 가드너들 사이에서 가장 호불호가 갈리는 화분이 바로 토분이다. 다른 화분들이 위아래로만 물과 공기를 움직이는 것에 비해 몸체로도 공기가 통하는 토분은 뿌리를 말리기에 매우 유리한 화분이다. 무겁고 쉽게 깨진다는 단점이 있지만, 실내에서는 화분에 물이 너무 오래 정체되어 있지 않도록 도와주는 쪽이 식물생장에 유리하다.

- 토분을 일정 기간 이상 사용하다 보면 백화 현상이라는 얼룩이 생긴다. 백화 현상은 화분이 숨을 쉬다 보니 흙과 화분에 있는 염류와 비료 성분이 화분 밖 표면으로 나와 쌓이는 현상이다. 이를 자연스럽게 여겨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고, 지저분하다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많이 쓰이는 플라스틱 화분이나 도기 화분, 토분을 제외하고도 유리 화분, 나무 화분, 시멘트화분 등 재질에 따라 여러 화분이 존재한다. 어떤 화분에 어떤 식물을 심을 것인지는 취향의 문제이지만, 식물의 생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식물 친구들이 많이 생기기 전에는 화분을 살 때 색깔이나 형태에 따라 결정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분류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 흙도 마찬가지다. 흙, 자갈, 돌멩이 정도의 분류로 존재하던 것들이 이제는 수십 가지 각기 다른 이름과 특징으로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 일반 상토를 기본으로 구비해두고 동생사, 녹소토, 펄라이트, 숯겨, 마사토, 난석을 적절히 배합해 식물에 맞는 흙을 쓴다.

 

- 나는 흙을 가볍게 써서 물이 빨리 마르도록 하고 금방 또 물을 부어주는 걸 좋아한다. 물이 마르기 좋은 토분에 식물을 담아두고 흙까지 가볍게 쓰면 확실히 손이 많이 가기는 하지만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얻은 나와 가장 잘 맞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이파리도 줄기도 금방 자란다. 물을 충분히 머금고 통통해질 대로 통통해진 이파리들이 좋다. 나와 기질이 다른 가드너들은 흙을 무겁게 쓰거나 물을 매우 아끼기도 한다. 겨우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물을 주면서 꼭 적당한 만큼만 해를 보여준다. 이렇게 자라난 식물들은 예민한 선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도 역시 옳고 그른 것은 없다. 취향의 문제일 뿐이다. 선이 얇고 예민한 식물에겐 그만의 매력이 있고, 줄기가 두껍고 튼튼하게 자라난 식물도 그만의 매력이 있다. 어떻게 사는지에 따라 모양과 순환 체계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초보 시절엔 흙을 돈 주고 사려니 어색했다. 지천에 널린 게 흙인데 산이나 들에서 한 삽 퍼 와서 쓰면 안 되는 걸까 궁금했다. 알고 보니 땅에서 퍼올린 흙 속에는 수많은 벌레와 세균이 존재하기 때문에 집 안에 두기엔 곤란하단다. 영양분도 부족하고 배수도 불량하다. 산에 사는 식물들에게는 괜찮을지 몰라도 집 안에서 사는 식물들에게는 해로운 흙이다. 친구가 던졌던 명언이 생각난다.
'원래 사람이 안 키우는 식물이 제일 잘 커.'

- 가드닝도 자기를 알아가기 위한 끝없는 여정이다. 내 집에 맞는 식물, 나에게 맞는 흙, 내가 좋아하는 수형,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질감이 존재한다.

- 꽤 많은 식물을 돌보느라 일상도 꽤나 달라졌다. 과거의 나는 오후 두 시 전에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새벽 두 시부터 여섯 시까지, 타인이 살지 않는 시간의 고요함과 어두움에 갇혀 그 감정을 통해 얻은 것들로 노래를 짓고 연주했다. 10년 넘게 규칙적으로 남들과 다른 시간을 아침이라고 부르고, 남들과 다른 시간에 식사를 했다. 영화는 무조건 심야 영화만 봤다. 평일의 심야 영화는 정말 근사하다. 거대한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영화를 보러 온 사람은 고작 대여섯 명. 양 옆자리가 비어있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앞뒤로 두어 줄이 내 차지가 된다. 이런 호젓함이 새벽 한 시에 시작하는 영화의 묘미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팝콘 소리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뒷자리 사람의 발길질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심야에 운전해서 영화관을 오가는 길과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며 조용하게 서 있는 8차선 도로의 적막함을 좋아한다. 새벽의 길을 달리는 운전자들은 함부로 경적을 울리지 않는다. 적막한 도로 위의 차들은 소행성들마냥 천천히 맴돈다.

 

- 그렇게 사는 것이 익숙했다. 늦은 밤과 새벽에만 잠깐 존재하고 사라지는 것들이 좋았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비밀스러운 것들. 가끔은 위험한 기분과 상상이 좋았다.

- 새벽 세 시는 편안하고, 새벽 네 시엔 무언가 창작해내기가 정말 좋지만 이제는 그 정적과 어둠보다 햇살 속에서 식물들과 노는 시간이 더 좋다. 그동안 아무도 바꾸지 못했던 나의 패턴을 식물 친구들이 바꿔놓았다. 식물들은 해가 뜨면 광합성을 하고 이파리를 열고, 해가 지면 숨죽여 잠을 잔다. 해가 있는 시간 동안 물 마시기를 좋아하고, 활발하게 숨을 쉰다. 식물에 대한 애정이 자라나면서 한시라도 일찍 일어나 창문을 열어 정체된 공기를 바꿔주고 싶었고, 조금이라도 일찍 물을 줘 소화시킬 시간을 충분히 주고 싶었다. 물론 아직도 보통 사람들이 일어나는 시간보다는 매우 늦은 시간에 일어나긴 하지만 적어도 오전 중에는 일어나게 되었다.

- 모두가 꽃을 피우는 삶을 살 필요는 없으니까.

- 세상은 계속해서 달라진다. 한순간도 한자리에 멈춰 서 있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다는 사실에 불안해하기도 하고 안도하기도 한다. 식물을 좋아하는 취미가 오직 어른들만의 것으로 여겨지던 시절도 있었고, 그러다 갑자기 전 연령대가 즐길 수 있는 취미로 탈바꿈하기도 하는 것처럼 사람을 이루는 가치관이나 행동, 말버릇에 대한 판결도 달라진다.

 

- 내 삶 속에는 불편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는 힘든 것들이 늘 있었다. 적당히 덮어두고 지나가기엔 억울했다. 그렇지만 어설프게 끄집어내 봤자 긁어 부스럼이 되고 말거나 결국은 나만 상처를 받곤 했다. 그래도 계속해서 불편한 것들을 똑바로 마주하고, 괜찮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막는다. 똑바로 행간을 읽어낸다. 세상은 계속해서 달라진다.

- 이제 나는 이 세상에 내가 키울 수 있는 것과 키울 수 없는 것이 극명하게 나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라날 가능성도 없이 공들여 키워왔던 것들 중에는 뜨겁고 건조한 땅이 고향인 식물도 있었고, 사람의 마음도 있었다.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내 커리어의 어떤 부분도 그렇다.

- 매일같이 공을 들이고 최선을 다해 키워도 결코 자라나지 않는 것, 슬프지만 그런 것들은 엄연히 존재한다. 아무리 키워봐야 자라지 않는 것을 놓지 못하는 마음은 빠르게 늘어나는 화분의 개수를 더 이상 세지 않음으로써 계속 식물을 들이고 싶은 마음과 비슷하다. 어렴풋이 모르는 척 계속해나가고 싶은 마음. 결국 벽에 부딪혀 멈추게 되더라도 계속 키우고 싶은 간절한 마음.

- 다행히 삶에는 대단히 공을 들이지 않아도 쉽게 자라나는 것들도 있다. 나의 기질과 내가 가진 환경에 맞는 식물들은 태양과 바람만으로도 별 탈 없이 무럭무럭 자랐다. 그리고 아주 가끔 운이 좋은 날엔 어떤 노래들이 쉽게 자라났다.

- 쉽게 자라는 것들과 아무리 공을 들여도 자라지 않는 것들이 뒤섞인 매일을 살아간다. 이 두 가지는 아무래도 삶이 쥐여주는 사탕과 가루약 같다.

- 이번 생은 한 번 뿐이고 나의 결정들이 모여서 내 삶의 모양이 갖춰질 테다. 그러니 자라나지 않는 것들도 계속해서 키울 것이다. 거대하게 자라나지 않아도 괜찮다. 그냥 내 삶 속에 나와 함께 존재하면 된다. 물론 달콤한 사탕도 포기하지 않는다. 입속에서 사탕을 열심히 굴리면서 가루약을 조금씩 뿌려먹는 삶을 살아가야지. 아무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고단하고 행복한 매일이다.

- 책을 쓰는 건 이번 생에 처음이다. 언젠가 책을 내게 된다면 내 홈페이지에 적어온 일기를 모아서 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십수 년 전 나모 웹에디터로 얼기설기 만든 홈페이지를 아직까지 사용 중인데, 언젠가 해킹당해서 일기와 사진이 모조리 사라질 것이라는 공포를 늘 가지고 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사라지기 전에 책 한 권으로 남겨놓고자 하는 마음. 그렇지만 지금 나는 식물과 함께 사는 이야기를 글로 쓰고 있다. 역시 삶이 어느 방향을 향해 어떤 모양으로 변해갈지는 직접 살아보기 전까지는 모르는가 보다.

- 식물의 세계에 들어서면 누구도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안전하고 커다란 초록색 원이 생긴다. 그 안에 들어간다. 불안은 나를 쥐고 흔들지만 식물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나는 조금씩 평화를 얻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시기가 자연스럽게 스르륵 지나간다. 물론 언제고 다시 돌아올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번엔 무사히 지나간다. 지옥을 맛보고 연옥의 문턱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계속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냥 하루하루 살아지는 것보다 더 능동적으로 살고 싶어 지기 시작했다. 다시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되면서 스스로 구원하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 나의 불안에는 두어 가지 단계가 존재한다. 가장 고통스러운 단계는 저면에 깔려 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다. 그렇지만 간혹 금방 지나갈 얕은 불안들과 마주한다. 이 불안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손가락을 목구멍에 집어넣으면 끄집어낼 수 있을 것 같은 불안이다. 누군가 불편한 사람과 대화를 할 때도 그렇고, 계산을 할 때나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도 슥! 나타나는 불안이 있다. 이 감정들은 묵직하고 거대하기보다는 가볍고 방정맞다. 그래도 방치했다가는 더 커다란 어둠이 될 가능성이 있기에 얼른 치워야 한다. 아주 간단한 생각의 전환으로도 가벼운 불안을 없앨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적 전환이 필요했다.

- 그럴 때면 머릿속으로 스티비 원더의 <서 듀크(sir duke)>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중반부에 등장하는 18초 남짓한 유니즌 라인(unison line)을 연주한다. 유니즌 라인은 음악에서 모든 악기가 같은 음을 연주하는 부분을 뜻한다. 빠르기가 104인 <서 듀크>의 유니즌 라인은 여덟 마디나 되는 기나긴 라인이다. 라인이 불규칙하고 박자가 복잡해서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머릿속에서도 그 흐름을 놓친다. 짧게 집중해서 뇌를 전환시키기에 매우 효과적인 라인이다. 나는 갑자기 나타난 불안이 그 18초가 지나고 나면 살짝 잠재워지기를 기대하며 열심히 연주한다. 드럼이 맞춰주는 비트 위로 관악기들과 기타, 베이스기타까지 함께 연주한다. 분명 곡의 시작에는 빠르기가 104인데, 첫 번째 유니즌으로 들어서면서 박자가 슬슬 빨라진다. 연주자들이 흥이 나서 눈빛을 교환하며 점차 빠르게 연주를 하는 장면이 상상되어나까지 덩달아 흥이 오르고, 박자는 110을 넘게 치솟는다.

- 그냥 음을 연주한다고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 원곡에 맞춰 스티비 원더와 함께 연주해보고, 조금씩 빨라지고 느려지는 박자를 느끼고 그 그루브까지 연주해야 완성인 라인이다. 이 여덟 마디를 머릿속으로 연주하고 나면 가벼운 불안이 사라질 확률 50퍼센트.

- <서 듀크>로 나아질 수 없는, 더 깊은 곳에 깔린 불안들을 다스리는 방법도 있다. 낮잠, 수영, 공원산책, 요가 그리고 식물 구경. 이 다섯 가지가 나를 나아지게 한다. 이것들은 고작 18초로는 힘들지만 효과는 비슷하다. 불안이 사라지거나, 사라지지 않거나. 50 대 50.

- 잠깐 낮잠을 자거나, 수영을 하거나, 공원을 산책하거나, 요가를 하거나, 식물들을 구경한다고 해서 갑자기 마음이 불행에서 행복으로 전환되지는 않는다. 그저 불행의 굴 깊숙하게 들어갔던 감정이 불행과 보통의 중간 어디쯤에 서 있도록 도와준다.

- 마음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도 마법의 단어들을 잊지 않으려고 여기저기 써두고 자꾸 생각하곤 한다. 그동안 나름대로 무기력과 불행에서 벗어나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나에게는 저 다섯 가지 행위가 가장 효과적이었다. <캡틴 플래닛>의 '땅, 불, 바람, 물, 마음'처럼 단단히 한 팀으로 나를 도와주는 것들이다.

- 나는 수영을 매우 좋아한다. 물이 좋다. 물속에서의 자유로움이 좋고 완벽하게 혼자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더 좋다. 귀에 방수 이어폰을 꽂고 평일 낮의 한산한 수영장을 스무 바퀴, 1000미터 도는 게 나의 수영 루틴이다. 귀찮아도 스무 바퀴까지는 채우려 한다. 스무 바퀴를 꽉 채워 돌기 위해 자주 음악 목록을 바꿔가며 재생한다. 천 번 만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 노래 몇 곡은 매번 빼지 않고 놔둔다. 레너드 스키너드(Lynyrd Skynyrd)의 <디 엔드 오브 더 월드(the End of the World)>나 비치 보이스(The Beach Boys)의 <갓 온리 노우즈(God Only Knows)>같은 노래들이다. 노래 구석구석의 아주 디테일한 악기 라인까지 모조리 다 외우고 있는데도 질리지 않는다. 내가 환장하는 노래들 중 몇몇 곡은 과거 누군가와의 연애에 주제곡으로 쓰였다는 이유로 내 플레이리스트에서 잘려나가기도 했는데, 저 두 곡은 어떤 연애에서도 주제곡으로 쓰인 적이 없고, 씁쓸한 감정을 남기지 않은 보석 같은 노래들이다.

- 그 노래들 사이로 심장 박동을 빠르게 해 줄 노래들을 적당히 섞어둔다. 아무리 좋아하는 운동이라지만 팔다리를 계속 움직이기 위해선 적당한 연료가 필요하다. 욘시(Jonsi)의 <고두(Go Do)>와 더티 프로젝터스 앤드 데이비드 바이른(Dirty Projectors & David Byrne)의 <노티 파인(Knotty Pine)>, 이 두 곡이면 딱 좋다. 그리고 더 천천히 헤엄치기 위한 노래들도 넣어둔다. 언제나 나를 무장 해제시키는 골드프랩(Goldfrapp)의 <드루(Drew)>. 

- 물속에서 듣는 음악에는 특별한 마력이 있다. 소리의 공간감이 풍부해지면서 푸르고 커다란 세상 속에 혼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은 소리의 디테일들을 뭉개는 대신 내가 듣고 싶은 소리를 더 근사하게 만들어준다. 가끔 같은 레인에서 수영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때는 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고 수영을 한다.

- 너무 무리했거나 세상을 향한 독을 품고 잠든 날의 다음 날엔 십중팔구 나쁜 하루가 펼쳐진다. 나쁜 날엔 뭘 해도 좋은 것을 만들어내기가 힘들고, 말실수가 잦다. 신발이 불편하고, 소화가 안 되어 울상으로 하루를 보내게 된다. 어두운 기운은 한차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를 흔들고도 성에 안 차는 모양이다.

 

- 나는 자꾸 식물의 세계로 도망친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변해가도 나에게는 흙과 식물이 있다. 식물이 주는 에너지가 아직까지 나에게 영험함을 발휘하고 있다. 내가 모두를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그들이 계속 나를 도와줄 것이다.

- 한참 어둠에 허우적거리던 시절처럼 불행을 기다리는 태도로 살지 말자고 다짐한다. 그렇지만 혹시 불행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살게 되더라도 스스로를 미워하지는 말자고 다짐한다. 다짐을 쌓아두지만 말고 최선을 다해 지키자, 다짐한다. 다짐을 이렇게 열심히 했으니 마지막 다짐이 더 중요해진다. 다짐한 일들을 지키지 못하게 되더라도 자학하지 말자, 다짐한다.

- 선명한 자주색 빛이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집이 우리 집이다. 과거의 나 같은 누군가가 우리 집을 보며 수상하게 여기고 있을까? 저 집의 정체가 뭔지, 저 집에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자기만의 추론을 펼치기도 할까?
이제 어딘가 낯선 길을 걷다가 창문 밖으로 자줏빛 불빛이 흘러나오는 집을 발견하면 예전처럼 놀라거나 그 불빛의 정체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저 반가운 마음이 들뿐. 
'저 집에도 자기 행복보다 식물의 행복이 더 중요한 식물 애호가가 살고 있구나.'
나는 누가 봐도 수상한 자주색 불빛을 온 집 안에 켜두고 살지만 연금술사도 흑마법사도 아닌 보통의 평범한 식물 애호가다.

- 그리고 이제 식물들로 인해 새로운 꿈이 생겼다. 바로 계속 식물을 키우는 음악가로 살면서 정원이 있는 남향의 단독주택을 짓는 것이다.
마당에는 유리온실을 짓는다. 그리 크지 않아도 괜찮지만, 통풍창이나 흰색 철골 프레임에 특별히 신경을 써서 짓는다. 온실로 들어가는 문은 커다란 두 짝 여닫이문이 좋겠다. 작은 전구들로 온실 천장을 꾸민다. 밤이면 비밀스러운 숲의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겠지. 방수 처리한 커다란 원목 테이블에 흙이며 가위며 화분이며 삽이며 마구 늘어놓는다. 라탄 의자도 두 개 놓아야지.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에서처럼 도란도란 식물들에 둘러싸여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 마당에서 유리온실을 제외한 공간은 텃밭으로 만들 것이다. 봄, 여름, 가을 동안은 제멋대로 자란 야채와 과일을 수확해 먹어야지. 집 안에 전면부와 천장 일부가 유리로 된 선룸을 지어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그 안에서 온종일 식물들을 구경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식물들 한가운데에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가 한 대 자리 잡고 있으면 좋겠다. 

- 나는 이제 이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다시는 예전의 나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때와 영영 다른 사람이 되었다. 예전의 나는 예전의 나로서, 지금의 나는 지금의 나로서 스스로를 사랑하고 혐오한다. 그 커다란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옥수수를 심고 온 정성을 다해 길러 따 먹어봤다는 경험 때문에 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단지 수확 직후부터 빠르게 당도가 떨어진다는 옥수수를 최고로 맛있게 먹어보려고 물을 팔팔 끓여두고 테라스에 올라가 옥수수를 땄던 기억 그 자체가 즐겁고 사랑스럽다.  

- 어떤 식물들은 이파리에 물방울이 맺히는 '일액현상'이라고 불리는 배수 현상을 보인다. 이는 식물이 수증기로 뿜어내거나 자라는 데 쓰고 남은 수분을 배출하는 현상이다. 일액현상을 발견할 때마다 커다란 이파리에 맺힌 물방울이 예뻐서 매번 호들갑을 떨며 사진을 찍어둔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전혀 신기하거나 대단한 일이 아니다. 쓰고 남은 수분을 밖으로 버리는 아주 단순한 작동 원리다. 그렇지만 막상 내가 키우는 식물들이 뿌리에서부터 물을 끌어올려 이 파리 끝에 영롱하게 맺은 방울을 구경하는 건 매번 이성보다 감성을 건드리는 일이다. 내 식물 친구들의 일액현상은 거의 내셔널 지오그래픽 감이다.

- 아보카도 씨앗은 내가 발아시켜 본 수많은 씨앗 중 가장 거대하다. 씨앗의 엉덩이 부분만 살짝 물에 넣어두어야 한다고 해서 플라스틱 컵, 이쑤시개, 나무젓가락 같은 물건들을 사용해 아보카도가 물에 완전히 잠기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다. 열댓 개의 거대한 씨앗을 여러 통에 제각각인 모양으로 넣어두었더니 뿌리가 내리기를 기다린 몇 주 동안 주방이 마치 유치원생의 실험실 같았다.
하필 한겨울에 발아를 시도하느라 몇 번을 실패하고 결국 딱 하나의 씨앗이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뿌리를 내렸다. 뿌리가 자라나며 새싹을 틔우기에 흙에 옮겨 심어주었다. 그렇게 발아시킨 씨앗이 쑥쑥 자라 세 번의 겨울을 지나고 이제는 내 키보다 커다란 나무가 되었다.

- 아보카도 나무가 너무 자랑스러워서 집에 친구들이 놀러 올 때마다 자랑한다.
"얘는 원래 씨앗이었어.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며) 요만 한 씨앗이 몇 년 만에 이렇게 크게 자라난 거야. 너무 멋지지!"
식물 자랑을 할 때면 신이 나서 촐싹 맞은 성격이 나온다. 언젠가 아보카도 나무에 열매라도 맺히는 날이 오면 광화문에 현수막이라도 내걸 기세다. 
(슬프게도 아보카도 나무가 열매를 맺으려면 지금보다 더 크게 자라야 하는데, 겨울의 서울을 견딜 수 없는 나무라 층고가 어마어마하게 높은 집으로 이사를 가지 않는 이상 열매를 맺기는 어려울 것이다.)

- 내 냉장고 속에는 봄에 발아시켜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씨앗들이 가득하다. 이건 마치 수천 개의 가능성을 남몰래 지니고 살아가는 것 같은 기분인데, 다음 해 봄까지 무언가 기대할 것이 있는 상태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좋다. 이 세상의 모든 씨앗이 얼마나 근사한 가능성을 지녔는지 온 세상 사람이 다 알아야 할 텐데.

- 나는 지금 과도기를 겪고 있다. 내 삶에는 변화가 찾아오고 있다. 나를 비롯한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무엇이 어디에 가닿을지는 아직 모른다. 어떤 소중한 것이 날카로운 것에 찔려 터져 버릴 수도 있을 것이고, 천천히 떠다니다가 둔탁한 곳에 퍽! 하고 부딪혀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혹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각자의 자리를 찾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변화는 끔찍하게 무섭고 겁이 난다.

 

- 그러나 살면서 언제 과도기가 아닌 적이 있었나. 삶의 모든 순간은 과도기였고, 위기였다. 쉽게 주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열심히 노력해서 겨우 손아귀에 들어온 것들도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지곤 했다.

- 어떤 일이 일어나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더라도, 다시 천천히 채우면 된다. 흩어진 것들을 모으며 살아가면 된다. 적당한 날의 아침에 식물들에게 물을 주는 일상만 놓지 않으면 된다. 바로 앞에 주어진 것들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해나가면 된다.

- 지금 내가 겪는 이 변화가 좋은 변화인지 아닌지 지금은 알 수 없다. 한참을 더 살아봐야 비로소 느껴질 것이다.

- 식물도 나도 완벽한 어둠 속에선 살 수 없다. 해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음지식물에게조차 빛이 필요하다. 빛이 부족한 식물들은 볼품없이 키만 쭉 키워 웃자라는 한이 있어도 빛을 향해 한껏 몸을 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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