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보후밀 흐라발 / 이창실
출판 : 문학동네
출간 : 2016.07.08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체코 작가인 보후밀 흐라발의 작품이다. 원제와 번역제 사이에 약간의 어감 차가 존재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 마음에 든다.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표현은 주인공 한탸의 모습 그대로다.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 그 내부의 수많은 생각들, 끊임없이 흐르는 생각들의 시끄러움. 동시에 그만이 볼 수 있는 책들의 시끄러움이기도 하다.
한탸는 지하로 쏟아져 들어오는 폐지들을 압축해 내보내는 일을 한다. 폐지라고는 하지만 종이만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시든 꽃, 부러진 면도날, 어린아이의 관.
그런 사이로 온전한 책이 함께 흘러들어오는 일이 있다. 한탸는 책을 발견하면 소중히 집어 들고 살펴본다.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펼친 채로 압축하기도 하고, 그 책에 어울릴 법한 그림이 인쇄된 종이로 감싸 압축하기도 하고, 그대로 집으로 가져가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이 쌓인 책더미에 추가하기도 한다.
한탸에게 압축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정지해 기록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은퇴할 때 모은 돈으로 압축기계를 인수해 집에서도 작업을 계속하고 싶어 한다. 그에게 폐지 압축은 직업이 아닌 하나의 정체성이다.
독자는 그의 머릿속을 흘러가는 과거와 현재를 함께 바라본다. 현실과 환상은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한탸의 속에서만 생동감을 가진다.
나치와 함께 사라진 그의 집시 여자. 천사가 되어가는 그의 어린 날과 젊은 날의 만차.
주머니에서 튀어나오는 전쟁 중인 쥐들. 이마와 손에도 말라붙어 있는 금속성으로 빛나는 파리들. 고기를 쌌던 종이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핏물들.
그 위로 떠오르는 붉은색과 옥색의 치마. 예수. 노자. 젊은이들.
영원할 것 같았던 한탸의 세계는 기계화된 다음 세대에 의해 압축된다. 노동과 일상은 분리된다. 산뜻한 복장에 맥주가 아닌 우유를 마시며 '근로'를 파는 젊은이들. 그들은 폐지 압축을 수단으로 벌어들인 재화로 그리스로의 휴가를 계획한다. 그들의 그리스는 한탸의 그리스가 아니다. 한탸의 그리스는 관념적인 것으로, 수많은 철학과 사상이 시작된 곳이자 형체가 없는 지점이다. 그들의 그리스는 반짝이는 젊음과 햇살, 관광이 있는 실체가 있는 공간이다.
한탸는 자신의 삶 또한 하나의 완결성 있는 무언가로 압축하기로 결정한다. 그의 끝은 응당 그래야 하는 그대로 결말지어질 것이다. 가장 어울리는 형태로.
'무와 존재의 극한까지 갈 것이다...'
'내 승천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스스로 기계 안으로 들어가 녹색 버튼을 누르는 무릎 꿇은 한탸.
꽉 맞물린 두 압착판 사이로 흘러나오는 무언가.
그 위로 미하라 미츠카즈의 <돌 Doll>이 겹친다.
좋았다.
태양만이 흑점을 지닐 권리가 있다
- 괴테
- 1장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지난 삼십오 년간 나는 그렇게 주변 세계에 적응해 왔다. 사실 내 독서는 딱히 읽는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그런 식으로 나는 단 한 달 만에 2톤의 책을 압축한다. 하지만 이 일을, 신께서 축복하신 이 작업을 완수할 힘을 얻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맥주를 마셨다. 지난 삼십오 년 동안 내가 마신 맥주의 양이면 올림픽 경기장의 풀이나 잉어 양식장도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뜻하지 않게 현자가 되었고, 이제는 내 뇌가 압축기가 만들어놓은 수많은 사고로 형성돼 있다는 걸 깨닫는다. 머리털이 모두 빠져버린 내 머리는 알리바바의 동굴이다. 모든 사고가 오로지 인간의 기억 속에만 각인되어 있던 시절은 지금보다 훨씬 근사했을 것이다. 그 시절엔 책을 압축하는 대신 인간의 머리를 짜내야 했겠지. 하지만 그래 봐야 부질없는 건, 진정한 생각들은 바깥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국수그릇처럼 여기, 우리 곁에 놓여 있다. 세상의 종교재판관들이 책을 태우는 것도 헛일이다. 가치 있는 무언가가 담긴 책이라면 분서의 화염 속에서도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진정한 책이라면 어김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다른 무언가를 가리킬 것이다.
- 진정한 책에 내 눈길이 멎어 거기 인쇄된 단어들을 지우고 나면, 남는 것은 대기 속에서 파닥이다 대기 중에 내려앉는 비물질적인 사고들뿐이다. 대기에서 자양분을 얻고 다시 대기로 돌아가는 사고들. 면병 속에 있으면서도 없는 성혈처럼 만사는 결국 공기에 불과하니까. 삼십오 년째 나는 책과 폐지를 꾸려왔고, 십오 대에 걸쳐 사람들이 글을 읽고 써온 나라에서 살고 있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그보다 더 큰 슬픔이 담긴 생각과 이미지를 머릿속에 차근차근 쌓아가는 습관과 광기가 항시 존재해 온 유서 깊은 왕국에 나는 거주한다. 단단히 동여맨 한 보따리의 개념에 기꺼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살고 있다. 이제 그 모두가 내 안에서 되풀이된다. 삼십오 년째 나는 내 압축기의 붉은색 버튼과 녹색 버튼을 누르고 있지만, 삼십오 년째 수리터들이 맥주를 마셔온 것도 사실이다. 마시려고 마시는 게 아니라(난 술꾼이라면 질색이니까) 사고의 흐름을 돕고 텍스트의 심부까지 더 잘 파고들기 위해서였다. 나에게 독서는 기분 전환이나 소일거리가 아님은 물론, 쉽게 잠들기 위한 방편은 더더욱 아니다. 십오 대에 걸쳐 사람들이 글을 읽고 써온 나라에 사는 내가 술을 마시는 건, 독서로 인해 영원히 내 잠을 방해받고 독서로 인해 섬망증에 걸리기 위해서다. 고상한 정신의 소유자가 반드시 신사이거나 살인자일 필요는 없다는 헤겔의 생각에 나 역시 동의하기 때문이다. 나라면, 내가 글을 쓸 줄 안다면, 사람들의 지극한 불행과 지극한 행복에 대한 책을 쓰겠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책을 통해, 책에서 배워 안다. 사고하는 인간 역시 인간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것도.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고라는 행위 자체가 상식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내 손 밑에서, 내 압축기 안에서 희귀한 책들이 죽어가지만 그 흐름을 막을 길이 없다. 나는 상냥한 도살자에 불과하다. 책은 내게 파괴의 기쁨과 맛을 가르쳐주었다. 세차게 퍼붓는 비와 건물 폭파 기사들을 나는 사랑한다. 거대한 타이어에 바람을 넣듯 폭파 기사들이 집과 거리를 송두리째 날려 보내는 광경을 나는 몇 시간이고 서서 지켜본다. 벽돌과 돌과 지주가 몽땅 들리는 그 첫 순간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뒤이어 집들이 고요히 내려앉는다. 옷이 흘러내리듯, 기관이 폭발한 대형 여객선이 홀연히 바닷속으로 가라앉듯. 나는 그 자리에 남아, 먼지구름 속에서 우지끈 대는 음악에 싸여 생각한다. 내가 일하는 깊디깊은 지하실과 희미한 전구 불빛 아래 삼십오 년을 만져온 압축기를 내 머리 위 마당에서 사람들이 오가는 발소리가 들린다. 천장에 난 통로로, 마치 하늘에서 풍요의 뿔들이 쏟아져내리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 뚜껑문으로 포대나 나무상자 혹은 종이상자에서 폐지가 무더기로 쏟아진다. 시든 꽃이나 포장지다발, 또는 유효기간이 지난 연극 티켓이나 팸플릿, 아이스바 껍질, 낙서로 뒤덮인 커다란 종잇장, 핏물 밴 정육점 종이, 예리한 필름 조각, 타자기 리본이 가득 든 바구니, 생일 꽃다발도 있다. 때론 누군가가 무게를 늘리려고 포석을 쑤셔 넣은 신문지 뭉치가 지하실로 떨어져 내리기도 한다. 못 쓰는 가위나 칼, 망치, 장도리, 정육점 칼도 있고, 커피 찌꺼기가 들러붙은 거무스레한 잔이나 시들 대로 시든 웨딩 부케, 멀쩡한 장례 화환이 끼어 있을 때도 있다.
- 나로 말하자면 삼십오 년째 이 모두를 내 압축기에 넣어 압축해 왔다. 그것들은 한 주에 세 번씩 트럭에서 화물열차로 옮겨져 제지 공장으로 향한다. 그러면 그곳 인부들이 꾸러미를 묶은 철사를 잘라낸 뒤 내 작업물을 산과 알칼리 용액에 던져 넣는다. 걸핏하면 내 손을 베는 면도날도 녹여버리는 강력한 용액이다. 그런데 밀려드는 폐지 더미 속에서 희귀한 책의 등짝이 빛을 뿜어낼 때도 있다. 공장 지대를 흐르는 혼탁한 강물 속에서 반짝이는 아름다운 물고기 같달까. 나는 부신 눈을 잠시 다른 곳으로 돌렸다가 그 책을 건져 앞치마로 닦는다. 그런 다음 책을 펼쳐 글의 향기를 들이마신 뒤 첫 문장에 시선을 박고 호메로스풍의 예언을 읽듯 문장을 읽는다. 그러고 나서야 그 책을 상자 안의 내 값진 발견물들 사이에 넣어둔다. 누군가가 기도서 몇 권과 함께 내 지하실에 실수로 내다 버린 성화 카드들로 장식한 상자다. 뒤이어 나를 위한 미사인 독서 의식을 행하고, 내가 만든 꾸러미 안에 그렇게 읽은 책을 올려놓는다. 각각의 꾸러미를 아름답게 꾸며 하나하나에 나의 개성을 부여하고 내 서명을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꾸러미들이 저마다 뚜렷이 구분되게 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는다. 그러려면 매일 두 시간씩 초과근무를 하고 한 시간 먼저 출근해야 한다.
- 나 홀로 예술가요 관객임을 자처하다 결국 녹초가 되어버린다. 날마다 죽을 것만 같은 피로에 찢기고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이 피로를 덜어내고 자아의 막대한 소진을 줄이기 위해 나는 쉴 새 없이 맥주를 마시고 후센스키 주점으로 향한다. 다음 꾸러미에 대해 꿈꾸고 명상할 시간은 충분하다. 그러기 위해, 미래를 좀 더 분명히 보기 위해, 나는 몇 리터고 맥주를 들이켠다. 각각의 꾸러미마다 귀중한 유물을 숨겨두기 때문이다. 시든 꽃이나 알루미늄박 술 장식, 천사의 머리칼에 덮여 보이지 않는 활짝 열린 어린아이의 관. 이 지하실에서 나 자신의 현존만큼이나 놀라운 현존을 과시하는 이 책들에게 나는 작고 아늑한 보금자리를 만들어준다. 내가 일을 끝내지 못해 늘 허둥대는 이유가 그것이다. 종이 더미가 산처럼 쌓여 지하실 천장의 뚜껑문까지 막아버리는 지경에 이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결국 곤경에 처한 소장이 이따금 갈퀴로 폐지 사이에 길을 내고는 화가 나 벌게진 얼굴을 뚜껑문 안으로 들이밀며 나를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탸, 거기 있나? 맙소사, 책에 한눈팔지 말고 좀 움직여봐! 마당이 종이로 뒤덮였는데 자넨 밑에서 바보 같은 짓거리에나 빠져 있긴가!" 그러면 종이 더미 발치에 있던 나는 손에 책을 든 채 수풀 속에 숨은 아담처럼 몸을 잔뜩 움츠리고 겁에 질린 시선으로 낯선 주변 세계를 둘러본다. 한번 책에 빠지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책 속에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일이지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 순간 나는 내 꿈속의 더 아름다운 세계로 떠나 진실 한복판에 가닿게 된다. 날이면 날마다, 하루에도 열 번씩 나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소외된 이방인이 되어 묵묵히 집으로 돌아온다. 그날 찾아낸 수많은 책들, 내 가방 속에 든 책들 생각에 골몰해 길을 걷는다. 전차와 자동차와 보행자들을 피해 가면서, 녹색등이 켜지면 기계적으로 길을 건넌다. 행인이나 가로등과 부딪치는 일도 없이 걸어간다. 몸에서 맥주와 오물 냄새가 나도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건, 가방에 책들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녁이면 내가 아직 모르는 나 자신에 대해 일깨워줄 책들.
- 결국 진상을 알아냈다. 노베 스트라셰치 인근에 헛간 하나가 있는데 볏짚에 책이 얼마나 많이 묻혀 있던지 까무러칠 지경이었다고 했다. 나는 군 사서와 함께 스트라셰치로 향했다. 벌판에 모습을 드러낸 헛간은 하나가 아니라 셋이었는데 하나같이 프로이센 왕실 도서관의 책들로 넘쳐났다. 애초의 도취 상태에서 벗어나자 우리는 이 일을 두고 논했다. 그 뒤 한 주 내내 군용차들이 줄을 지어 그 책들을 프라하의 외무성 부속 건물로 실어 날랐다. 난세가 좀 진정되면 책들을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누군가 책들의 은신처를 누설하는 바람에 프로이센 왕실 도서가 전리품으로 규정되어 트럭에 도로 실리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단면에 금박을 입힌 가죽 장정의 이 책들은 기차역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한 주 내내 억수 같은 비를 맞으며 열차의 무개차량들에 실려 있었다. 마지막 트럭이 역에 도착했을 때 열차 차량들에서는 검댕과 인쇄용 잉크가 뒤섞인 금빛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 광경을 목격한 나는 가로등에 몸을 기댄 채 할 말을 잃었다. 마지막 차량이 안개비 속으로 사라졌을 때 내 얼굴에서는 눈물과 빗물이 뒤섞여 흘러내렸다. 역에서 나오는데 순경이 보이기에 그에게 다가가 두 손을 교차시켜 내밀며 애원했다. 손에 수갑이든 포승이든 채워달라고. 나는 죄를, 인륜을 거스른 죄를 범한 참이라고. 순경이 결국 나를 경찰서로 데려갔는데, 그곳에서 나는 조롱거리가 되는 것으로도 모자라 구덩이 속에 처넣겠다는 협박까지 받았다.
- 그러고 나서 수년이 지난 뒤 나는 부르주아 저택들이나 성들의 장서를 통째로 떠맡는 데 익숙해져 버렸다. 고급스러운 모로코 가죽 장정의 아름다운 책들이었다. 그것들을 나는 화물열차에 가득가득 실었고, 서른 번째 차량에 책이 채워지면 스위스나 오스트리아행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중한 이 장서들은 그곳에서 킬로그램당 1 코루나에 팔릴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걸 보고 놀라거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기차가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내 안에는 이미 불행을 냉정하게 응시하고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자리했다. 그렇게 나는 파괴 행위에 깃든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 열차의 차량들에도 화물을 실었고, 수많은 열차가 킬로그램당 1 코루나에 팔릴 짐을 싣고 서방으로 떠나갔다! 나는 가로등에 기대서서 마지막 차량의 후미등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 광경을 응시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자신의 기마상을 산산조각 내려고 총을 겨눈 프랑스 군인들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 삼십오 년째 나는 내 꾸러미들을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아넣어왔다. 내 압축기와 함께 은퇴할 날만을 기다리며 여러 해, 여러 달, 여러 날을 머릿속에서 삭제해 버린다. 그리고 날마다 가방 속에 책을 챙겨 와 내 집에 정리해 둔다. 홀레쇼비체 거리 삼층에 있는 내 거처는 책들로 넘쳐난다. 저장실과 창고는 물론 화장실에도 책이 가득하고, 찬장도 마찬가지다. 주방은 창문과 화덕으로 이어지는 통로로만 겨우 다닐 수 있고, 화장실엔 비집고 앉을 자리만 남아 있다. 변기 위로 150센티미터 높이에 번듯한 나무 선반을 짜 넣어 책들을 천장까지 쌓아둔 것이다. 단 한 차례의 경솔한 몸짓이나 부적절한 동작, 미미한 접촉도 금물이다. 몸이 기둥에 부딪히는 순간 500 킬로그램은 나가는 책들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나를 바지가 내려진 채로 짓이겨놓고 말 테니까. 단 한 권도 더는 올려둘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서야 내 방의 침대 둘을 합쳐 그 위로 관 뚜껑처럼 닫집 형태의 선반을 짜 넣었고, 거기에 지난 삼십오 년 동안 찾아낸 2톤의 책을 쌓아두었다. 잠이 들면 끔찍한 악몽처럼 나를 짓눌러오는 책들이다. 나는 잠결에 돌아눕거나 잠꼬대를 하거나 몸을 뒤척이다가 책들이 미끄러져내리는 소리에 질겁하곤 한다. 몸이 살짝 스치거나 소리만 질러도 눈사태처럼 책들이 선반에서 와르르 떨어져 나를 덮칠 것이다. 풍요의 뿔에 담겨 있던 희귀한 책들이 쏟아져내려 나를 한 마리 이처럼 뭉개놓고 말 것이다. 내가 날마다 짓뭉개는 무고한 생쥐들의 원한을 갚기 위해 책들이 공모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종종 있다. 악행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는 법이니까. 수킬로미터 되는 책들의 천개 아래 몽롱한 상태로 누워 위를 바라보고 있으면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이런저런 일들이 떠올라 공포에 사로잡히곤 한다.
- 책들이 내게 반기를 들고 공모를 해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정신의 균형이 깨져버린다. 책들이 우선 나를 모기처럼 짓이겨놓겠지. 그런 다음 샤프트 속을 오르내리는 승강기처럼 곧장 마룻바닥을 뚫고 지하실까지 떨어질 것이다. 그런 무시무시한 광경이 상상되면 나는 차라리 창가 의자에 앉은 채로 잠드는 편을 택한다. 운명은 피해 갈 수 없는 것인가 보다. 내 지하작업실에서는 책들을 비롯해 병이나 잉크스탠드 스테이플러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집에서도 매일 저녁 책들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내 목숨을 앗아가거나 중상이라도 입히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니 말이다. 화장실과 침실 천장에 나 자신이 걸어둔 다모클레스의 검이다. 그것이 나를 밖으로 내몰아, 그 근사한 종말에 맞설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방편인 맥주를 사러 가게 만든다.
- 내가 헤겔에게서 배운 것들을 생각하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서 단 한 가지 소름 끼치는 일은 굳고 경직되어 빈사상태에 놓이는 것인 반면, 개인을 비롯한 인간 사회가 투쟁을 통해 젊어지고 삶의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야말로 단 한 가지 기뻐할 일이라는 사실 말이다.
- 프라하 거리를 정처 없이 걸어 내가 일하는 지하실로 돌아가노라면 내 시선이 엑스선처럼 보도를 뚫고 하수구까지 가닿는다. 쥐들의 참모부가 군대를 조종하는 곳, 장군들이 무전기를 통해 이런저런 전선의 교전을 강화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곳이다. 그들의 뾰족한 이빨이 딱딱 마주치는 소리가 발밑에서 들린다. 영원히 건설 중인 저 음울한 세계에 생각이 미친다. 그렇게 시궁창을 철벅이며 걷다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면 이제껏 한 번도 보거나 깨닫지 못했던 것이 불쑥 시야에 들어온다. 공공건물들과 아파트들의 정면과 박공이 괴테나 헤겔이 꿈꾸었던 모든 것과 내 모든 갈망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모범이자 목표인 헬레니즘, 즉 그리스의 아름다움을 반영한다. 도리아 양식과 그 기둥들과 트리글리프 장식과 코니스가 그렇고, 이오니아식 소용돌이 장식과 프리즈, 코린트식 아칸더스 이파리 장식과 사원 입구, 여인상 기둥과 난간 그리고 집들의 지붕 역시 그렇다. 이 그리스를 나는 프라하의 외곽 지대에서, 벌거벗은 남녀와 이국적인 식물군으로 장식된 평범한 집들의 문과 창문에서도 발견한다. 그렇게 걸어가노라니. 대학을 나온 한 운전기사의 말이 떠올랐다. 동유럽은 프라하의 문전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고전적인 옛 역사가 더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된다고 그러니까 그리스 정신이 진동하는 고막맨 끝자락, 갈리시아의 어딘가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프라하의 경우, 건물들의 정면이나 주민들의 머릿속이 그리스 정신으로 넘쳐난다면, 그건 오로지 수많은 체코인들의 뇌를 그리스와 로마로 가득 채우는 인문고등학교와 문과대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도의 하수구에서 두 패로 나뉜 쥐들이 서로 밀어내며 어이없는 전쟁을 벌이는 동안, 추락한 천사들이 각자의 지하실에서 일하고 있다. 전투에서 패한 교양인들이다. 한 번도 이 전투에 가담한 적이 없지만 세상을 완벽히 설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다.
- 나는 폐지를 압축한다. 녹색 버튼을 누르면 압축판이 전진하고, 붉은색 버튼을 누르면 후진한다. 이것이 세상의 기본적인 움직임이다. 헬리콘의 밸브나 반드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원처럼. 만차는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채, 자신의 잘못이 아닌 치욕을 견뎌야 했다. 그녀에게 닥친 일은 인간적인, 지나치게 인간적인 일이었다. 그런 일을 두고 괴테라면 울리케 폰 레베초프를 용서해 주었겠고, 셸링이라도 카롤리네를 용서해 주었을 것이다. 라이프니츠라면 그의 아름다운 정부 조피 샤를로테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고, 과민한 횔덜린 역시 타르트 부인에게 그랬을 테지만... 오 년 뒤 나는 모라비아에서 만차를 다시 만났다.
- 나는 대번에 이해했다. 만차의 삶에서 이제 제2막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명예를 지키지 못하고 치욕을 견뎌야 하리라고 예견된 삶이었다. 사업가 이나는 황금산의 앙상한 소나무 뒤 어딘가에서 만차가 자신의 스키 위에다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는 마음이 불편해져서 오후 내내 사지가 마비된 사람 같았다. 만차의 얼굴 또한 붉게 달아올라 모근까지 새빨개졌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으며,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폐지 꾸러미를 차례로 압축기에 넣고 압축한다. 꾸러미마다 한복판에 책 한 권이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가 펼쳐진 채 놓인다. 나는 압축기 옆에서 일하지만 생각은 만차에게 가 있다.
- 4장
어느 오후, 도살장에서 피 묻은 종이와 상자가 트럭 가득 실려왔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들쩍지근한 냄새가 났다. 졸지에 내 몸은 푸주한의 앞치마처럼 피로 뒤덮였다. 나는 복수를 할 요량으로 첫 번째 꾸러미에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가 쓴 <우신예찬>을, 두 번째 꾸러미에는 실러의 <돈 카를로스>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말씀이 피가 흐르는 육신이 되도록 세 번째 꾸러미에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에케 호모>를 활짝 펼쳐서 넣어두었다.
- 내가 맥주를 네 단지째 비우고 있을 때 압축기 근처에 우아한 젊은이 하나가 나타났다. 나는 그를 대번에 알아보았다. 예수였다. 연이어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 그의 곁으로 와 섰다. 노자가 아니면 누구랴. 한눈에 그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둘은 나란히 함께 서 있었고, 그 참에 나는 젊은이와 노신사를 비교할 수 있었다. 무수히 많은 푸른 파리들이 사방에서 미친 듯이 날아다녔다. 날개와 몸이 금속성을 내며 소용돌이무늬의 살아 있는 거대한 화폭을 만들어냈다. 얼룩으로 가득한, 잭슨 폴록의 커다란 그림들 같았다.
- 나는 그 둘의 출현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내 조상들 역시 술을 좀 과하게 마셨을 때는 환영을 보았고, 동화 속 인물들의 방문을 받곤 했으니까. 내 할아버지는 술집을 차례로 돌다가 물의 요정들을 만났고, 증조할아버지는 리토벨 양조장의 맥아 제조소에서 도깨비불과 꼬마 악마와 선녀를 보았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에게도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났었다. 2톤의 천개 아래서 잠을 자다가, 같은 해 같은 날 태어난 셸링과 헤겔을 본 것이다. 그리고 말을 탄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가 내게 바다로 가는 길을 물어온 적도 있었다. 그러니 오늘 내가 좋아하는 그 두 사람이 방문했다고 해서 뭐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사고를 통찰하는 데 그들 각자의 나이를 아는 게 필수 조건임을 깨달은 건 처음이었다.
- 세상을 바꾸고 싶은 열정적인 젊은이와 체념 어린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는 노인. 삶의 근원으로 회귀함으로써 안감을 두둑이 댄 영원의 옷이 만들어진다. 예수는 기도를 통해 현실을 기적으로 만들려고 한 반면, <도덕경>의 노자는 순진무구의 지혜에 도달하기 위해 자연법칙들을 유일한 방편으로 삼았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 그들은 담배를 피우며 자기들처럼 집시인 인부들과 잡담을 나누었다. 수많은 집시들이 이곳 도로 공사에 투입되는데, 그렇게 일거리가 생기면 그들은 정성을 다해 일한다. 웃통을 벗어젖힌 그들이 단단한 땅과 포석에 곡괭이질을 하는 광경이 보기 좋다. 제무덤을 파듯 허리께까지 땅 밑으로 내려가 있는 그들을 보는 것이 좋다. 나는 이 집시들을 사랑한다.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이 항시 그들이 일하는 주위를 맴돈다. 그들이 파기 시작한 구덩이를 여자 하나가 치마를 걷어올리고 넓혀가는 동안, 젊은 집시 남자가 아이를 무릎에 앉힌 채 장난을 치고 있는 광경과 심심찮게 마주친다. 그렇게 놀면서, 아이의 응석을 받아주면서, 그들은 기력을 회복하는 게 아닌가 싶다. 육체가 아닌 정신의 기력을 실제로 그들은 감정이 몹시 풍부한 사람들이어서, 아기 예수를 안은 체코의 아름다운 성모처럼 더없이 인간적인 분위기를 띠기도 한다. 오래전에 잊힌 문화의 지혜가 가득한 그들의 커다란 눈을 보고 있노라면 정맥 속의 피가 얼어붙는다...
- 우리가 아직 도끼를 들고 뛰어다니며 염소를 치던 시절, 집시들은 이 세상 어딘가에 국가를, 이미 두 차례나 쇠락을 경험한 사회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불과 두 세대째 프라하에 정착해 살고 있는 이 집시들은 자신들이 일하는 곳에 제의의 불을 지피는 걸 좋아한다. 오로지 기쁨을 위해 타오르는 유목민의 불이다. 대충 쪼갠 장작개비들에서 피어나는, 인간의 모든 사고 이전에 존재하는 영원의 상징이며 어린아이의 웃음 같기도 한 불이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린 선물 같은 무상無償의 불이며, 환멸에 젖은 행인은 더 이상 알아챌 수 없게 된 요소들의 생생한 표징이다. 방황하는 눈과 영혼을 덥혀주려고 장작개비들을 태우며 프라하 거리의 구덩이들에서 태어난 불이다... 눈과 영혼을 덥혀주면서 추운 날에는 손도 그렇게 녹여주는 불이라고, 나는 후센스키 주점으로 들어가면서 생각했다. 여자 종업원은 내 단지에 반 리터들이 네 컵 분량의 맥주를 채운 뒤 넘치는 거품을 내가 마시도록 잔에 따라 매끄러운 카운터에 올려두자마자 등을 돌렸다. 내가 술값을 치르려던 순간 생쥐 한 마리가 내 옷소매에서 튀어나온 게 어제일이었으니까. 아니면 피가 덕지덕지 말라붙은 내 손이 역겨웠거나, 내가 손으로 후려쳐 짓이겨놓은 파리들이 내 이마에 끈적끈적하게 들러붙어 있었기 때문인지도.
- 내가 보는 세상만사는 동시성을 띤 왕복운동으로 활기를 띤다. 일제히 전진하는가 싶다가도 느닷없이 후퇴한다. 대장간 풀무가 그렇고, 붉은색과 녹색 버튼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내 압축기가 그렇다. 만사는 절룩거리며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지는데, 그 덕분에 세상은 절름발이 신세를 면하게 된다. 나는 삼십오 년째 폐지를 꾸리고 있다. 그런데 이 일을 제대로 하려면 대학 교육을 받았거나 적어도 제대로 된 인문학 교육을 받았어야 하리라. 최적의 조건은 신학 학위가 아닐까 싶지만 내 직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는 나선과 원이 상응하고, 프로그레스 아드 푸투룸과 레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이 뒤섞인다. 그 모두를 나는 강렬하게 체험한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행복이라는 불행을 짊어진 사람인데, 프로그레스 아드 오리기넴(progressus ad originem '근원으로의 전진')과 레그레수스 아드 푸투룸(regressus ad futurum '미래로의 후퇴')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이제야 깨닫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저녁식사를 하며 <프라하 석간신문>을 읽듯이, 이제 나는 그런 생각들을 소일거리로 삼는다.
- 그 덕분에 다소 진정된 느낌이었다. 녹색 버튼과 붉은색 버튼을 누르면 압축판이 전진하거나 후진했다. 기계가 멈출 때마다 나는 술을 마시며 칸트의 <천계론>을 읽었다. 한 불멸의 정신이 침묵 속에서, 밤의 절대적인 침묵 속에서, 그때까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물론 이해할 수는 있지만 정녕 설명할 수는 없는 개념들이다. 너무도 놀라운 글귀들이어서 나는 저 높은 곳의 별이 총총한 하늘 한 자락을 보려고 건물의 배기까지 뛰어가야 했다. 그러고 나면 역겨운 종이 더미와 솜뭉치에 둘러싸인 생쥐 가족들에게로 돌아왔고, 그들을 갈퀴로 찍어 압축통속에 던져 넣었다... 폐지를 압축하는 사람 역시 하늘보다 인간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건 일종의 암살이며 무고한 생명을 학살하는 행위이지만, 그래도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 내 마음을 사기 위해 그러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불은 그녀 안에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이 없다면 그녀는 살 수 없었을 게 분명하다. 그렇게 나는 이름도 모르는 그 집시 여자와 함께 살았다. 그녀도 내 이름을 알려고 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저녁마다 우리는 말없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다시 만났다. 그녀는 내 집 열쇠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내가 시험 삼아 자정 넘어 귀가한 적도 있는데, 그때마다 문을 열기 무섭게 슬그머니 그림자 하나가 끼어들어왔다. 그녀가 곧 성냥을 그어 종이에 불을 붙일 테고, 얼마 안 가 난로에서는 그녀가 집어넣은 장작이 타며 불꽃이 튈 것이었다. 창문 밑에는 그녀가 정성껏 쌓아둔 장작이 한 달 치나 있었다. 전구 불빛 아래서 조용히 빵을 쪼개는 그녀는 마치 성체를 받아 모시는 사람 같았다. 그녀가 치맛자락에 빵 부스러기를 모아 담아 경건한 몸짓으로 불속에 던져 넣었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불이 모두 꺼진 방안에 누워 천장에 눈길을 고정한 채 빛과 그림자가 춤추듯 일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위에 놓인 맥주 단지를 집어들라치면 해초와 수중식물로 가득한 수족관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아니면 보름달 밤에 깊은 숲 속에서 흔들리는 그림자들과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나는 맥주를 마시며 알몸의 집시 여자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흰자위가 반짝이는 눈으로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환한 조명보다 이런 어스름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땅거미가 지는 해질 무렵을 너무도 사랑했다. 하루 중에서 무언가 굉장한 일이 닥칠 것만 같은 기분에 젖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이런 불확실한 시각에는 모든 거리와 장소가 평소보다 더 근사해 보였다. 사람들의 표정도 명상에 잠긴 듯 온화해졌고, 그 순간만은 나 역시 아름다운 청년이 된 것 같은 환상에 빠졌다. 거울이나 상점 진열창을 힐끗거리면 주름살 하나 없는 내 모습이 보였고, 놀란 내 손가락들이 얼굴을 더듬었다. 날마다 해 질 녘이면 아름다움을 향해 가는 문이 열렸다. 반쯤 열린 난로 속에서 잉걸불이 붉게 타올랐다. 집시여자가 일어나 다시 장작을 집어넣었다. 카렐 광장에 자리한 성당의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성인처럼 그녀의 몸이 금빛 후광으로 빛났다. 그녀는 내 몸 위에 길게 엎드려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손가락 하나로 내 코와 입술 선을 따라 그리며 간간이 입을 맞추었다. 우리는 손으로 모든 것을 말하며 망가진 쇠난로에서 타는 불똥을 응시하면서 그렇게 누워 있었다. 난로는 꺼져가는 장작이 나선형 불빛을 토해내는 동굴처럼 보였다. 우리는 그렇게 영원히 사는 것 외에는 달리 바라는 것이 없었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이미 오래전에 서로 합의를 본 것 같았다. 이 세상에 함께 온 우리는 한 번도 서로를 떠난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 함께 체포해 강제로 끌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마이다네크 혹은 아우슈비츠의 어느 소각로에서 태워져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아직 인간적이었다... 전쟁이 끝나도 그녀가 돌아오지 않기에 나는 마당에서 연을 태웠다. 더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 어린 집시 여자가 반짝이 종이로 장식했던 긴 연꼬리와 연줄도 함께. 전쟁이 끝나고 한참 뒤인 1950년대에 내 지하실은 나치 문학에 파묻혀 있었다. 동일한 주제가 반복되는 수통이나 되는 책과 팸플릿을 나는 열성을 다해 파기했다. 내 어린 집시 여자의 감미로운 소나타에 이끌려서 착란과 황홀경에 빠져 경례를 붙이는 남자들과 여자들의 사진이 수백 쪽에 이르는 책장을 뒤덮고 있었다. 노인, 노동자, 농부, 친위대원, 군인, 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열정적인 경례를 붙였다. 나는 해방된 그단스크로 입성하는 히틀러와 그의 수행원들이 내 압축통 속에서 사라지도록 온전히 내 일에 몰입했다. 해방된 바르샤바와 해방된 파리, 빈과 프라하로 입성하는 히틀러, 혼자 있는 시간의 히틀러, 추수감사절의 히틀러, 히틀러와 그의 경호견, 전선의 군인들을 방문 중인 히틀러, 대서양 장벽을 순찰 중인 히틀러, 동유럽과 서유럽의 점령 도시로 향하는 히틀러, 참모부에서 지도를 들여다보는 히틀러... 나는 이 히틀러와 열광하는 남녀들과 아이들을 파쇄하고 짓이겼는데, 그럴수록 나의 집시 여자가 더 간절히 생각났다. 열광이라고는 모르던 여자. 내 난로에 불을 지펴 자신의 스튜를 끓이고 내 맥주단지를 채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던 여자. 빵을 성체처럼 쪼개고, 그런 다음에는 난로와 불꽃과 열기, 타닥타닥 타오르는 감미로운 불길을 보며 명상하는 것 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던 여자. 이 불의 노래는 그녀가 유년기부터 알아왔고 그녀의 종족을 신성한 유대감으로 묶어주던 것이었다. 그 빛은 사람들의 얼굴에 우수 어린 미소를 그려 넣으며 모든 고통을 물리치는 것이었고, 그녀에게는 절대적인 행복의 그림자였다.
- 술과 노동으로 멍해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틀 동안 내 지하실을 청소하며 생쥐들을 희생시킨 참이었다. 그저 책이나 갉아먹고 폐지 더미에 뚫린 구멍 속에 살며 그 작은 둥지 안에서 새끼들을 낳고 키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소박한 짐승들인데, 추운 밤이면 내 품 안에서 공처럼 옹크렸던 내 어린 집시 여자처럼 몸을 사린 생쥐들이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 발전소에서나 볼 수 있는 제어판이 색색의 버튼 십여 개를 달고 반짝였다. 우리가 손 안의 전차표를 무심코 움켜쥐듯 수직 나사가 쓰레기들을 눌러 압착했다. 나는 겁에 질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노동자들의 옷이 햇빛에 환히 빛났다. 스웨터들과 캡들이 앵무새나 꾀꼬리, 물총새의 깃털처럼, 요란한 색깔의 향연 속에 길을 잃고 있었다. 소름 끼치는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나는 상황을 정확히 이해했다. 저 거대한 압축기가 다른 모든 압축기에 치명타를 가할 것이고, 내가 몸담고 있는 직업에도 상이한 유형의 사람들과 작업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었다. 실수로 그곳에 버려진 책들과 사소한 기쁨도 끝이었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처럼 늙은 압축공들이 누렸던 좋은 시절도 끝이 나고 만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게 되었으니까. 매꾸러미에서 책을 한 권씩 골라 보너스로 준다 해도 나는 거기서 끝장이었고,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책 속에서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찾겠다는 열망으로 우리가 종이 더미에서 구해낸 장서들도 모두 끝장이었다. 그러나 내 용기를 결정적으로 꺾어놓은 건 그 젊은이들이었다. 양다리를 벌린 채 손을 허리에 갖다 대고 우유와 코카콜라를 병째 들이켜는 젊은이들. 더럽고 지친 늙은 일꾼이 일감에 매달려 혼신의 힘으로 맞붙었던 시절은 완전히 끝이 나고 만 것이다!
- 올해는 그리스와 불가리아를 짧게 다녀올 계획이라고, 그들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르며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여행에 빠짐없이 참여하도록 서로를 부추겼다. 이미 중천에 뜬 해에 몸을 그리려고 그들이 반벌거숭이가 되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들은 오후 시간을 어떻게 쓰면 좋을지 망설이고 있었다. 강에서 수영을 할 것인지, 아니면 모드르자니에서 축구 시합을 할 것인지를.
- 그들의 그리스 휴가 계획은 나를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았다. 헤르더와 헤겔의 책들은 나를 고대 그리스에 던져놓았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가르쳐주었건만 내가 막상 휴가를 떠나본 적은 없었다. 일을 따라잡느라 휴가는 늘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하루라도 결근을 하면 소장은 가차 없이 추가로 이틀을 더 근무하게 했다. 어쩌다 하루 쉬는 날이 찾아와도 나는 수당을 받고 일하러 갔다. 일이 항시 밀려 있는 데다, 내 역량을 넘어서는 종이 더미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으니까. 사르트르 양반과 카뮈 양반이, 특히 후자가 멋들어지게 글로 옮겨놓은 시시포스 콤플렉스는 지난 삼십오 년 동안 내 일상의 몫이었다. 그러나 부브니의 사회주의 노동단원들은 일이 밀리는 법이 없었다. 고대 그리스의 미소년들처럼 볕에 그을린 젊은 남녀들이 작업을 재개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도, 괴테도, 불멸의 고대 그리스도 모르는 그들은 헬라스에서 여름을 보내는 일에도 그저 무덤덤하기만 했다. 불안에 곤두선 책장들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며 그 안에 숨겨진 가치 따위는 전혀 아랑곳없이 냉정하게 작업을 이어갔다. 누군가가 쓴 책들이었다. 누군가가 교정을 보고, 읽고, 삽화를 넣고, 잇달아 인쇄에 들어가 제본되어 나온 책들일 것이다. 누군가가 가독성이 없다는 결정을 내리고, 검열하고, 쓰레기장으로 보낸 책들이었다. 그렇게 책들은 트럭에 실려 이곳에 왔을 것이다. 노란색과 오렌지색 장갑을 낀 노동자들이 책들의 내장을 꺼내 곤두선 책장들을 무정한 컨베이어 벨트 위로 던진다. 그것들은 거대한 피스톤 밑으로 조용히 흘러들어 보따리 크기로 압축된 뒤 제지 공장에서 생을 마친다. 거기서 글자로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새 종이로 탄생해 머지않아 새로운 책들로 인쇄될 날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 이제 나는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책이라면 질겁하며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던 만차가 말년에 성스러움의 경지까지 올랐음을... 어둠이 땅거미를 집어삼켰지만, 늙은 예술가는 하늘에 매달린 듯한 자세로 흰 바지와 구두가 환히 비추는 사다리 위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만차가 내게 따듯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내게 몸을 기대오며 사정을 털어놓았다. 저 노신사는 그녀의 마지막 연인이고, 그녀가 만난 남자들의 사슬에서 마지막 고리에 해당한다고. 하지만 이제는 정신적인 사랑밖에 줄 수 없게 된 그가 보상의 의미로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즐길 수 있도록 정원에 거대한 조각품을 만들게 되었다고. 그녀가 죽으면 저 천사가 관의 누름돌처럼 그녀의 무덤을 장식하게 될 거라고. 노예술가가 사다리에 올라서서 천사의 얼굴에 정확한 표정을 부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달빛이 끌을 쥔 그의 손놀림을 밝혀주었다. 그사이 만차는 나를 자신의 저택으로 데려가 지하실에서 다락까지 안내해 주었다.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천사가 그녀 앞에 나타났었고, 그 천사의 조언대로 그녀는 한 토목공을 유혹했노라고. 그리고 가진 돈을 털어 전원에 땅을 샀는데, 토목공이 그녀와 함께 텐트에서 밤을 보내며 낮에는 이 땅에 집을 지을 기초공사를 했다고. 하지만 그녀는 이 토목공을 차버리고 석수와 살았고, 이 석수 역시 ...
- 만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상도 하지 않았던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평생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멀리까지 간 사람이 만차였다. 책들에 둘러싸인 나는 책에서 쉴 새 없이 표징을 구했으나 하늘로부터 단 한 줄의 메시지도 받지 못한 채 오히려 책들이 단합해 내게 맞섰는데 말이다. 반면 책을 혐오한 만차는 영원토록 그녀에게 예정된 운명대로 글쓰기에 영감을 불어넣는 여인이 되어 있었고, 심지어 돌로 된 날개를 퍼덕이며 비상했다. 깊은 밤 환히 불 밝혀진 왕성의 두창문처럼 부드러운 빛을 발하는 날개였다. 리본과 장식 줄, 황금산 산등성이에 자리한 레너 호텔 앞에서 그녀가 신고 있던 스키를 장식한 똥, 그 모든 사연이 담긴 우리의 러브 스토리를 그 날개는 멀리멀리 사라지게 만들었다.
- 내 압축기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곧 제집에 온 사람들처럼 스스럼없이 행동하며 내 탁자 위에 깨끗한 종이를 한 장 더니 자신들의 우유병을 올려놓았다. 굴욕감에 잔뜩 긴장한 나는 뼛속 깊이 퍼뜩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새로운 삶에 절대로 적응할 수 없을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더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걸 밝혀내자 대거 자살을 감행한 그 모든 수도사들처럼. 그때까지 삶을 지탱해 준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그들은 상상할 수 없었던 거다. 소장은 나더러 마당에 나가 비질을 하라고 했다. 일손이 필요한 곳에 가서 거들든지, 그것도 내키지 않으면 아무 일 안 해도 좋다고. 다음 주면 나도 그곳을 떠나 멜란트리흐 인쇄소 지하실에서 백지를 꾸리도록 되어 있다고.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삼십오 년을 잉크와 얼룩 속에서 일해온 내가, 더럽고 냄새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선물과도 같은 멋진 책 한 권을 찾아낼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매 순간을 살아온 내가, 이제 비인간적인 백색 꾸러미들을 만들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다니! 이런 통고를 받자 나는 평정심을 잃고 벌렁 나자빠졌다. 흐느적대는 꼭두각시처럼 계단 맨 아랫단에 주저앉았다. 소장의 통고에 마음이 몹시 갑갑해졌고, 입가에는 실성한 미소가 떠올라 사라질 줄 몰랐다. 그렇게 나는 두 청년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따지고 보면 청년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그리고 두꺼운 안경알 너머로 말처럼 휘둥그레진 눈을 뜨고 안경을 만지작거리면서 말을 더듬었다. "그렇소. 더 잘 찾아보라고..."
"찾으라니." 내가 받았다. "대체 무얼 말이죠?"
그러자 그는 알아듣기 힘든 소리로 중얼거렸다. "또 다른 기회를, 다른 데서."
그는 몸을 숙여 인사한 뒤 뒷걸음치며 돌아서서 불행의 본거지를 막 벗어난 사람처럼 사라져 갔다.
- 작업장 안마당으로 들어서자 내 압축기가 취한 결혼식 하객을 싣고 눈 위를 달리는 썰매처럼 명랑한 방울 소리를 울려대고 있었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었다. 더 걸어갈 수도, 내 압축기를 다시 볼 수도 없었다. 나는 홱 돌아서서 보도로 다시 나왔다. 햇빛에 눈이 부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채 그곳에 남아 있었다. 내가 신봉했던 책들의 어느 한 구절도, 내 존재를 온통 뒤흔들어 놓은 이 폭풍우와 재난 속으로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 나는 타데우스 성인의 기도대 앞에 털썩 주저앉아 양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잠에 빠져들었다... 그저 잠이 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내 존재를 오롯이 덮친 모욕으로 말미암아 실성해 버린 걸까? 손바닥으로 눈을 비빈 순간 별안간 내 압축기가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압축기가 되어버린 녀석이 아가리를 벌려 도시 전체를 위협하고 있었다.
- 하던 대로 나도 그에게 대답했다. "말씀하신 대롭니다." 그러자 프란티크 슈투름은 내게 봉투 하나를 내민 뒤 또 한 번 허리 굽혀 예를 표했다. 그러고 나면 그는 사제관에 있는 자신의 작은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을 것이었다. 자신의 서가를 장식할 귀중한 책을 내게 증정받는 날이면 늘 그렇듯이, 그날 그가 연미복 차림으로 옷깃을 빳빳이 세우고 배춧잎 색 넥타이까지 맨 건 순전히 내게 편지 한 통을 건네기 위해서였으니까. 나는 봉투를 열어 그 안에 적힌 글귀를 읽었다. 상단에 문양이 있는 흰 종이에 글자들이 인쇄되어 있었다.
- 나는 생각에 잠겨 카렐 광장으로 돌아오면서 편지를, 마지막이 되고 만 이 감사의 전언을 찢어발겼다. 내 지하실의 내 기계가 이 모든 사소한 일들과 작은 기쁨을 끝장내고 말았기 때문이다. 내 놀라운 기계가 나를 배신한 것이다.
- 나는 꼼짝 않고 선 채로 성당 박공에서 눈부신 빛을 발하는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그의 몸 전체가 후광에 싸여 있었다... 나팔처럼 요란한 소리를 질러대는 황금빛 원에 둘러싸여 빛을 발했다. 하지만 내가 본 건 이 후광이 아니라 커다란 금빛 욕조였다. 이제 막 칼로 자신의 손목 동맥을 자른 세네카가 거기 누워 있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사고가 정확했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였고, 내가 좋아하는 책 <마음의 평정에 관하여>를 쓴 것이 헛일이 아니었음을 입증하고 있었다.
- 8장
카페 '검은 양조장' 카운터에 기대앉아 나는 맥주 한 잔을 마신다. 이봐, 오늘부터 넌 혼자야. 홀로 세상에 맞서야 해. 마음이 안 내키더라도 사람들을 보러 나가 즐기고 연기를 해야 할 거야. 이 땅에 발붙이고 있는 동안은 말이야. 오늘부터는 수심에 찬 원들만 소용돌이치는군... 전진이 곧 후퇴인 셈이지. 그래, 프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과 레그레수스 아드 푸투룸은 같은 말이야. 너의 뇌는 압축기에 짓이겨진 한 꾸러미의 사고에 불과하지.
- 햇살을 받고 앉아 맥주를 마시며 카렐 광장을 쉴 새 없이 오가는 사람들의 무리를 지켜보았다. 젊은 사람들, 젊은이와 학생뿐이다. 그들의 이마에는 모두 별이 하나씩 새겨져 있다. 삶이 시작되는 순간 저마다의 내면에 싹트는 천재성의 표징이다. 그들의 시선은 힘을 발한다. 소장이 나를 바보 천치라 부르기 전에는 내게서도 샘솟던 힘이다. 나는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바라본다. 전차들이 돌며 한 방향에서 내려와 다른 방향으로 되올라간다. 그것들의 붉은 띠들을 보니 내 마음도 유쾌해진다. 내게는 이제 시간이 있다. 프란체스코회 수사들이 운영하는 병원을 한번 보러 갈 수도 있겠지. 그 병원의 이층 층계는 1621년 구시가 광장에서 체코 귀족들이 처형당했을 당시 사용한 단두대를 분해해 나온 목재로 만들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형이 집행된 뒤 프란체스코회 수사들이 그 골조와 판자를 사들였다고... 아니, 그보다 스미호프로 가서 킨스키 공원의 정자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바닥의 버튼을 발로 누르면 벽이 사라지고 밀랍 기마병 하나가 들어오는 곳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마법의 방이 그렇다. 보름달이 뜬 어느 밤에 그 방에서 육손이 괴물이 시동 장치를 잘못 누르는 바람에 좌정한 밀랍 차르가 위협적인 모양새로 나타났다. 유리 티냐노프의 밀랍 형상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 내용이다. 아니다. 난 분명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것이다. 그저 눈만 감아도 모든 게 현실에서보다 더 선명하게 떠오르니까. 차라리 거리의 행인들을 바라보겠다.
- 어쩌면 운명의 암시일지도 모르는 이 치명적인 경고를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 당시 이미 나는 책들을 가까이하기 위해 폐지 압축공이 될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 나는 맥주 여러 잔을 더 가져다 마신다. 카페의 열린 문가 난간에 기대앉아 있으려니 햇빛에 눈이 깜박인다. 클라로프 성당까지 걸어가면 가브리엘 대천사의 아름다운 대리석상을 볼 수 있고, 근사한 고해실도 있다. 이탈리아에서 천사를 운반해 올 때 사용한 상자의 목재로 주임신부가 만들게 한 고해실… 하지만 나는 한 발짝도 떼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렇다, 난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것이다. 계속 술을 마신다. 참담했던 그 보라색 양말 사건이 있고 이십 년이 지난 뒤 스테틴의 변두리 동네와 벼룩시장이 열린 골목길을 성큼성큼 걷고 있는 내 모습이 다시 보인다. 맨 끝자리에 앉은 초라한 행상인의 좌판에 오른쪽 샌들과 보라색 양말 한 짝이 놓여 있다. 틀림없는 내 샌들, 내 양말이었다. 발 치수도 41, 내 치수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불가사의한 출현을 목격한 사람처럼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 고물상은 세상 어딘가에 발 치수가 41인 외다리 남자가 존재할 거라 믿었을 뿐 아니라, 이 남자가 멋을 내려고 스테틴까지 와서 오른발에 신을 샌들과 보라색 양말 한 짝을 살 거라 믿었던 것이다! 그 놀라운 장사꾼 옆에서 한 노파가 월계수 잎 두 장을 손에 들고 사라고 졸라댔다. 나는 망연자실했다.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내 샌들과 보라색 양말이 세상의 수많은 고장을 보고 난 뒤 어느 날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질책하듯 내 길을 막아서며.
- 나는 빈 잔을 돌려준 뒤 전찻길을 건넌다. 공원의 모래가 발밑에 밟히며 얼어붙은 눈처럼 저벅거린다.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참새들과 꾀꼬리들이 목청을 돋워 노래한다. 유모차 몇 대가 보인다. 젊은 엄마들이 햇살 가득한 벤치에 앉아 머리를 젖혀 얼굴에 따스한 햇볕을 쪼인다. 나는 벌거숭이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는 타원형 풀 앞에 한참 동안 머물러 있다. 아이들의 배에 난 팬티고무줄 자국에 마음이 동해서... 갈리시아의 경건파 유대인들은 밝고 선명한 색깔의 허리띠를 착용해 자신들의 몸이 둘로 뚜렷이 구분되게 했다지. 심장과 폐와 간과 머리는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고, 그 밖의 장과 성기는 그저 감내해야 하는 대수롭지 않은 부분이었다...
- 신부들과 수녀들의 몸을 둘로 구분하는 선이 다시 떠오른다. 유대인들의 허리띠가 보인다. 인간의 몸은 모래시계라는 생각이 든다. 위에 있던 것이 밑으로 가고 밑에 있던 것이 위로 가며, 두 개의 삼각형이 서로 통한다. 솔로몬 왕의 봉인. 그의 젊은 시절 작품인 <아가서>와 노년의 결산인 <전도서>가 고백하는 바니타스 바니타툼 사이의 균형. 이제 내 눈은 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성당을 훑고 지나간다. 성인이 요란한 금빛 후광에 싸여 번쩍인다. 반면 체코의 위대한 문인들은 이상하게도 모두 휠체어에 앉아 있다. 융만과 샤파르지크, 팔라츠키는 뻣뻣한 자세로 돌 의자에 앉아 있고, 페트르진 공원의 마하는 기둥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다. 하지만 가톨릭 조각상들은 기세가 등등해서, 네트 위로 쉴 새 없이 공을 던져 올리는 배구선수들 같다.
- 이 두 가지를 떠올리면 어김없이 머릿속에 새로운 감탄이 차오른다. 생각하면 전율이 인다... 폐지를 한아름씩 들어다 압축통을 채운 뒤 녹색 버튼을 힘껏 누른다. 머리 위에 펼쳐진 별이 총총한 하늘을 능가하는 무언가를 생쥐의 눈 깊은 곳에서 발견한다. 그 순간 내 어린 집시 여자가 선잠에 빠진 나를 찾아온다. 압축기가 악사의 손에 들린 아코디언처럼 몸을 비튼다. 나는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복제화 한 점을 내 상자에서 꺼내놓고, 성화들의 둥지 속에 숨어 있는 책들을 추려 마침내 한 페이지를 고른다. 프로이센 여왕 조피 샤를로테가 시녀에게 말하는 부분이다. "울지 말거라. 네 궁금증을 풀어주려고, 이제 나는 라이프니츠조차 가르쳐줄 수 없었던 그걸 보러 갈 테니까. 존재와 무의 극한까지 갈 것이다..." 압축기가 땡그랑거리고, 붉은색 신호에 압축판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내 책이 손에서 떨어져 내린다. 내벽에 기름칠을 해 녹기 직전의 얼음처럼 미끄러운 통을 가득 채운다... 부브니의 거대한 기계는 내 압축기 열 대에 맞먹는 일을 해치운다. 사르트르와 카뮈가 그에 대해 멋진 글을 쓰고 있다. 반짝이는 책들의 장정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푸른 작업복과 흰 무도화 차림의 노인이 사다리 발판을 딛고 서 있다. 난데없이 먼지구름 속에 파닥이는 날갯짓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린드버그가 대서양을 가로질러갔다. 나는 녹색 버튼의 작동을 중단하고 폐지가 가득한 압축통 속에 나를 위한 작은 은신처를 마련한다. 아무렴, 나는 여전히 쾌활한 사내다. 그런 내가 자랑스럽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욕조에 들어가는 세네카처럼 나는 한쪽 다리를 압축통에 넣고 잠시 기다린다. 다른 한쪽 다리도 마저 통 안으로 무겁게 떨어져 내린다. 나는 똬리를 틀고 살핀 다음 무릎을 꿇은 자세로 녹색 버튼을 누르고 완충물인 책과 폐지 속에서 몸을 웅크린다. 한 손에 들린 나의 노발리스를 꽉 쥔다. 내가 좋아하는 글귀에 손가락이 올라가고, 입술엔 지복의 미소가 떠오른다. 나는 만차와 그녀의 천사를 닮기 시작했으니까... 이제 완전한 미지의 세계로 진입한다. 책을, 책장을 쥐고 있다... '사랑받는 대상은 모두 지상의 천국 한복판에 있다.'라고 쓰여 있다... 멜란트리흐 인쇄소 지하실에서 백지를 꾸리느니 여기 내 지하실에서 종말을 맞기로 했다. 난 세네카요 소크라테스다. 내 승천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압축통 벽에 눌려 내 다리와 턱이 들러붙고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이 이어진다 해도 결단코 두 손 놓고 천국에서 추방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무엇도 나를 내 지하실에서 몰아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자리를 바꾸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책의 단면이 내 늑골을 뚫고 들어온다. 입에서 비명이 새어 나온다. 궁극의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가혹한 고문을 겪는 것일까? 압축기의 중압에 내 몸이 ...
옮긴이의 말
1960년대 공산주의 체제하의 체코 프라하가 배경인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보후밀 흐라발(1914~1997)의 자전적인 영감에서 탄생한 소설이다. 흐라발은 42년 동안(1948~1990) 체코를 지배한 공산주의 체제의 감시 아래 글을 쓴, 삶이 몹시 파란만장했던 작가다. 그는 프라하의 카렐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1939년 나치에 의해 대학이 폐쇄된 뒤에는 공증인, 서기, 창고업자, 전보 배달부, 전신 기사, 제강소 노동자, 철도원, 장난감 가게 점원, 보험사 직원, 약품상 대리인, 단역 연극배우, 폐지 꾸리는 인부 등등의 다양한 직업을 전전한다. 나중에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긴 했어도 공산주의 체제 아래서 법조인으로 일한 적은 한 번도 없다. 1963년 첫 소설집 <바닥의 작은 진주>를 발표했는데, 1968년 소련의 체코 침공 이후로 그의 책들은 금서로 분류되어 그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출판이 금지되었다. 그래도 흐라발은 끝까지 조국 체코를 떠나지 않고 체코어로 글을 썼는데, 그와 동시대를 산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1929~)가 프랑스로 망명해 프랑스어로 작품을 쓰기까지 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그가 전전한 직업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았던 작가라기보다 살아 있기에 글을 썼던 사람이며, 그의 작품들은 작가 자신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매혹적인 실존의 기록이다.
130쪽 분량의 짧은 소설인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주인공 한탸의 일인칭 고백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폐지 압축공인 한탸는 더럽고 끈적끈적한 지하실에서 자신이 사용하던 압축기와 맨손으로 겨루며 술에 젖어 사는 고독한 인간이다. 날마다 천장에서 온갖 종류의 폐지가 소장의 질책과 함께 쏟아져내린다. 그래도 한탸는 일의 속도에 박차를 가하기보다는 파괴될 운명인 종이 더미에서 찾아낸 것들의 매력에 끌려 필요한 책들을 추려서는 꾸러미를 만들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한다.
(...)
폐지 처리장을 방문해, 거기서 거대한 새 기계와 비인간적인 컨베이어 작업을 목격한다. 여행과 여가 활동을 꿈꾸는, 유니폼을 입은 쾌활한 노동자들에게서 그는 규격화된 개인주의적 문명의 타락상을 본다. 결국 한탸는 현대화된 작업 방식에 밀려나 잉크와 얼룩을 버리고 새로운 작업장에서 백지를 꾸려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이제까지는 일을 사랑함으로써 불가피한 파괴 작업에 나름대로 저항해 왔지만 더는 자신의 세계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된다. 마침내 그는 책들과 운명을 함께하기로 마음먹고 자신의 압축기 속으로 들어간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무엇보다 책을 고독의 피신처로 삼는 주인공 한타의 독백을 통한 책에 바치는 오마주다. 화자인 한타는 책이 있기에 살 수 있는 사람이며, 그가 혼자인 건 생각들로 가득한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압축된 책 더미는 그의 손을 거치면서 근사한 꾸러미가 되고 그의 흔적을 지니게 된다. 그는 자신의 일을 좋아해서 은퇴한 후에도 자신이 사용하던 압축기를 사들여 계속 그 일을 하리라 꿈꾼다. 지하실에 감금된 몽상가이자 정신적인 인간인 한탸는 자신이 숭배하는 대상을 파괴하는 일로 먹고사는 모순된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아름다움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이렇게 그는 부조리와 겨루며 죄의식을 느끼지만 결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지는 않으며 스스로를 지킬 줄도 안다. 그렇더라도 한타의 입에서 나오는 비통한 독백은 전체주의 사회의 공격에 맞선 저항의 외침으로 들린다. 한탸는 책을 구해내면서 인간의 정신과 문화를 구하려 하지만, 효율적이고 균일화된 세계를 상징하는 젊은 세대에 직면해 이 문화의 불가피한 종말을 목격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무분별한 발전으로 인해 오히려 퇴보하는, 노예화되고 우둔해진 사회에 대한 정치적이며 철학적인 우화로도 읽힐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 그 시대의 사회상을 대놓고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한 세계의 종말을 목격하는 늙은 노동자의 긴 명상에 가까우며, 책이 그저 종이쪼가리로 취급받게 된 냉혹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화자의 정신 상태를 섬세한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는 압축기의 리듬을 타고, 한타의 사소한 일상사는 시적이고도 숭고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그의 사고는 때로 취기와 환각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시종일관 명징함을 잃지 않아서, 우리로 하여금 무리가 아닌 개인에 대해 생각하고 꿈꾸게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 일깨워준다.
(...)
이처럼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읽노라면 문학의 마술적인 힘에 휩쓸려 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첫 문장이 작품 전체의 색조를 암시하며, 라이트모티프처럼 되풀이되는 문장들은 주문을 외우는 것 같은 효과를 자아낸다. 정치적이며 역사적인 담론을 포함해 존재론적인 물음이 담긴 이 책은 야만에 직면한 인간성에 대한 숭고한 확신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렇더라도 이 작품을 규정하는 키워드가 있다면 자유나 저항 같은 거창한 단어보다 '연민'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도처에 허무가 널려 있어도 삶은 자체의 생명력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불가항력적이면서 매력적인 것임을 흐라발은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일상의 삶이 신성화되어 예배의 노래 같기도 한, 짧지만 강렬한 이 책을 읽노라면 책을 관통하는 한 줄기 바람, 성령이기도 한 숨결에 단숨에 실려가는 느낌이 든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두고 흐라발 자신은 자신의 삶과 작품 전체를 상징하는, 그가 쓴 책들 가운데 가장 사랑하는 책이라고 고백했다. 그가 세상에 온 건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쓰기 위해서였다고.
1977년 프라하에서 지하 출판 samisdat으로 유통되었던 이 작품은 1980년 독일에서 출판되었고, 체코에서는 1989년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출간되었다. 본 역서는 막스 켈러 Max Keller가 번역한 프랑스어 판(1983년 로베르라퐁 사 출간)을 대본으로 사용했는데, 이 대본에서 프랑스식으로 변형된 인명과 지명은 되도록 체코어 원본대로 돌려놓았다.
2016년 여름
이창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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