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이재인] 호랑낭자뎐

일루젼 2024. 8. 4.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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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재인
출판 : 연담L
출간 : 2020.01.22


        

오랜만에 읽은 가슴 설레는 로맨스.

 

<호랑낭자뎐>은 판타지와 서스펜스, 무속과 조선 역사가 두루 뒤섞인 소설이다. 오작인이 등장하는 검시 장면은 <별순검>을 연상케 하고, 사령이나 새타니가 등장하는 장면은 <전설의 고향>이나 여타 무속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한성별곡>으로 튀면, 나도 모르게 찡- 하고 애잔해져 버리는 것이다)

 

현왕인 이광은 연산군을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광' '이휘'라는 이름이나 '대군'이라는 명칭 등으로 미루어 보아 기본적인 배경은 조선왕조를 기반으로 한 듯하다. 거기에 더해 국무(國巫)인 귀비와 본모습은 짐승이지만 사람으로 변신이 가능한 선족(仙族)들이 존재한다는 설정이다. 

(사족. 연산군의 이름은 융(㦕)이다.)  

 

취향도 많이 탈 것 같고, 중심인물들의 행보가 영 탐탁지 않은 부분도 있었지만.  

'무영'이라는 캐릭터와 귀비, 응선, 호선 등의 설정이 마음에 들어 결론적으로는 '호'다.

이건 취향의 영역이라 딱히 명확한 설명이 어려운데...

코스 요리까지는 아니어도, 좋아하는 반찬 위주로 차려진 밥상이었다고나 할까.

 

이전의 <야운하시곡>의 경우도 그렇지만 나는 전래동화 느낌이 나는 기담(민족이 달라져도 일단 설화 느낌이 나면 포함), 저고리나 두루마기가 나올 법한 시대 설정(무협도 포함), 무속이나 선계가 섞인 배경 설정(선협물 극호)에는 일단 호감을 느낀다. 거기에 너무 가볍지 않은 인물 중심의 서사나 탄탄한 조사가 느껴지면 호감은 점점 커진다. 

 

그러므로 귀비와 소화라는 인물들의 소비, 해랑의 아슬아슬한 여림(하지만 따지고 보면 세 살이니까 뭐), 이광의 급작스런 변모 등등의 약간 모호한 지점들은 다 흘려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를 넘어서는 호감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을 테니... 취향의 영역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해서 추천하기는 좀 조심스럽다.

이런 키워드들을 좋아하시는 분이시라면 한 번쯤 도전해보시는 것도 좋겠지만, 하나로 잘 통일된 느낌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시길.

 

이런 흐름의 작품을 추가로 읽고 싶은 갈증이 가시지 않는다.

음... <정령의 수호자> 시리즈와는 약간 다른 결인데...

마땅한 작품이 곧 찾아와주면 좋겠다.     



- 땅을 두드리는 듯한 북소리 사이로 길게 징이 울었다. 귀비(鬼妃) 태 씨가 뛰어오를 때마다 궁무들의 손에 들린 신령(神鈴)이 쩔렁쩔렁 소리를 내고, 휘장이 귀비의 치맛자락과 같은 모양새로 춤추듯 너울거렸다.

임금이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뱉었다. 속에서 천불이 이는 듯했다. 며칠째 그의 귓가를 맴돌던 불길한 날짐승 소리가 잦아드는가 싶을 때쯤 그날의 비명소리가 이명처럼 임금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 "천벌을 받으실 겁니다!"
"결코 편히 눈감지 못하실게요. 이년이 그리 두지 않을 것입니다. 내 기필코 악귀가 되어 주상 곁을 맴돌 것입니다. 두고 보세요!"
여인 둘이 째질 듯한 목소리로 악다구니를 했다. 핏발 선 눈이 형형하게 번뜩였다. 부러 물을 들이기라도 한 것마냥 온통 핏물에 절은 소복 끝에서 여직 마르지 않은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피 웅덩이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도 여인들은 꼿꼿하게 세운 허리를 굽힐 줄 몰랐다.

 

- 한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던 임금이 곁에 선 두 명의 사내아이를 향해 눈을 돌렸다.
"잘 보거라."
겁에 잔뜩 질린 아이들은 임금과 시선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이들의 어깨가 벌벌 떨리는 것이 가엾지도 않은지 임금이 비죽 웃음을 흘렸다.
"이 아이들의 신세가 꼭 세자 시절의 나와 같지 않습니까?"

- 눈을 뜨며 말을 잇지 못하는 여인들을 향해 임금은 또다시 입술 끝을 끌어올렸다.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것마냥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는 품새가 자못 장난스럽기까지 했다.
"그래, 꼭 같다고 할 수 있지. 눈앞에서 어미가 죽는 꼴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야."
조용히 뇌까리는 말이 하도 섬뜩해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 임금은 별일 아니라는 듯 엎드려 흐느끼는 아이들의 등허리를 가볍게 툭툭 쳤다. 그 모습을 지켜본 어미들이 태도를 바꾸었다.
"주상! 제발, 아이들은 살려주세요. 내 이리 빌겠습니다!"
"배가 다르다 하나 핏줄 아닙니까. 아우들에게 어찌 이러십니까? 제발 아이들은 살려주세요. 주상, 제발 자비를 베풀..."
"내가 부왕께 내 어미를 살려달라 빌었을 때, 그때 이리하셨어야지요. 내 어미가 폐서인이 된 것도 두 분의 탓이며, 또한 사약을 받은 것도 두 분 탓인데. 이제 와 저를 천륜도 모르는 폐륜아 취급하십니까?"
"그래, 맞습니다. 모두 이년의 탓입니다. 다 이년이 꾸민 짓이었습니다. 그러니 제발..."
다급히 말을 잇는 여인을 향해 임금이 쯧 혀를 찼다. 더 들을 것도 없다는 태도였다.
"듣거라. 소용 김 씨와 숙원 안 씨를 장살에 처한다. 두 왕자군에게는 유삼천리를 명하노라."
처분은 냉정했다. 심약한 왕자군들은 저들의 어미가 장살 되는 것을 지켜보며 벌벌 떨다가 기어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임금이 즉위한 지 보름 만의 일이었다.

(리뷰자 주 : 연산군이 모티브가 된 것으로 보인다.)

- 해괴제(解怪祭)를 마치자 임금은 주변을 모두 물리고 편전(便殿)으로 들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짜증스러운 기색이 묻어 나왔다. 제를 올린 것이 별 효과가 없었는지 밤낮으로 그를 괴롭히던 부엉이 소리가 여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 제법 거친 손길로 귀를 몇 번 문질거린 그는 편전으로 응선(鷹仙) 민도식을 불러들였다.

- "이리, 좀 더 가까이 오세요."
민도식이 임금의 지척으로 다가갔다. 주군의 하명을 기다리며, 나이 든 신하는 슬쩍 임금의 안색을 살폈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높게 선 콧날. 얇은 입술은 조금 고집스러워 보였다. 용포의 붉은빛보다 더 화려하고 선명한 얼굴의 젊은 사내. 그 눈매만큼이나 날카롭고 예민한 성정을 가진, 조선에 뜨는 단 하나의 태양. 임금 이광. 

- "휘 말입니다."
임금이 입을 열었다.
"무영 대감 말씀이십니까?"
되묻는 민도식을 향해 임금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찾아오세요, 최대한 빨리."
"대감이 도성을 떠난 지 세 해가 훌쩍 넘었습니다."
당혹스러운 낮으로 대답하는 민도식을 향해 임금이 놀리듯 물었다. 

"어찌 어렵겠습니까?"

- "내응방에 있는 그대의 수하들을 모두 움직이게 하세요. 그리고 해주목(海州牧)에 있는 그대의 가솔들도 합세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텐데, 내 말이 틀립니까?"
"명대로 하겠습니다."
기어이 민도식의 입에서 원하는 대답을 듣고 마는 임금이다. 흡족한 얼굴로 신하를 물린 그가 이번에는 상선을 불러들였다.
"채비하거라. 귀비당(鬼妃堂)으로 가야겠다."

- 귀비당.
귀비당은 말 그대로 귀비의 거처였다. 상선이 모시는 지금의 임금뿐 아니라 그 부왕 때에도, 또 그 선대의 선대에도 귀비가 존재했다. 새로운 임금이 즉위할 때마다 귀비 또한 바뀌었다. 귀비의 수발을 들고 각종 제의 준비를 돕는 어린 궁무들이 자라나면, 그 아이들 중 단 두 사람만이 수궁무(首宮巫)가 되었다. 그리고 그 둘 중 하나가 다음대의 귀비가 되는 것이다. 
궁 안에 사는 귀비와 궁무들을 제외하고 도성 사대문(四大門) 안에는 무녀들이 살 수 없었다. 지엄하신 국법이 그러했다. 천것  천것 취급을 받는 나라 안의 수많은 무녀와는 달리, 귀비는 어느 누구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임금의 승은을 입는 유일한 무녀인 까닭이다. 그것이 임금의 귀비였다. 

- 옥과 비단실로 만들어진 화려한 노리개가 두 개. 이 여인이 귀비임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그의 즉위식 직후 이 여인을 새 귀비로 공표했을 때 하사한 물건이니 눈에 익은 것이었다. 그리고 자그마한 향낭 하나. 귀비가 입은 옷은 해괴제를 위한 제복이었으니 향낭 안에는 필시 부적이 들어 있을 터였다.

- "이런 차림으로 몸을 여는 기분이 어떠한가? 응? 그대가 제복을 입은 채니 이 영기를 모두 내가 빨아먹을 테지. 그러니 다시는 요사스러운 귀기가 나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야. 그렇지? 응? 대답해 보게. 오늘 밤엔 내가 깊은 잠을 이룰 수 있겠는가?" 
임금이 다그치듯 대답을 종용하는 것이 무색하게도, 귀비의 입가에서는 연신 색스러운 소리만 흘러나왔다. 속절없이 제 아래에서 흔들리는 몸뚱이를 빤히 내려다보던 그의 입가에 비죽 미소가 떠올랐다. 

- 편전을 나서기 무섭게 민도식의 낯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이딴 것을 어명이라고 받들라니.'
불경한 본심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에게 무영은 껄끄러운 존재였다. 지금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저지른 일들을 무영이 알게 된 순간, 제 가솔들은 물론이고 응족(鷹族) 전체가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온 가문이 멸하고 개보다도 못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테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분을 참지 못해 붉으락푸르락하던 낮이 금세 차게 가라앉았다. 
그래, 누가 안다는 말이냐.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속으로 뇌까린 민도식이 제법 침착해진 낮으로 내응방 솟을대문을 넘었다.

- 응족의 사내들은 망건을 대신해 이마에 두른 비단 띠로 자신들의 출신을 표시했다. 뜰 앞에 선 자들 중 대다수는 황색 표식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보라부(甫羅部)의 식솔들이었다. 남은 사내들 중 절반은 푸른 표식을 한 해동부(海東部)였고, 다른 절반은 흰 표식을 단 송골부(松鶻)였다.
민도식이 어림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젊은이들의 면면을 살피기 시작했다.

- "송골은 해동을 따라 북쪽으로, 보라는 셋으로 나누어 남쪽으로 간다. 응사(鷹師)가 용모파기를 줄 것이니 그분을 찾아 모셔 오거라. 해동에서 셋을 차출해 보라의 각 무리를 이끌도록 하고, 송골은 전적으로 해동부 민형엽의 지시를 따르도록 한다." 

 

- 민도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송골부의 맏이라던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내는 언뜻 봐도 민도식의 막내아들인 민형엽보다 예닐곱 살은 나이가 많아 보였다. 사람의 모습일 때 그 정도의 나이 차라면 본모습인 매의 모습으로는 두 살쯤 차이가 나는 것이니, 사내의 입장에서는 저보다 한참이나 어린 애송이의 명을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다 해도 능력보다는 나이를 우선시하는 것이 응족이 오랫동안 고수해 온 질서였다. 실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많을수록 그에 비례해 재주가 많아졌다. 반은 동물이고 반은 사람인 그들의 세계에서 켜켜이 쌓아온 연륜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다. 

- "아까 스승님께서 궁에 가신다고... 임금께서 계시는 그 궁을 이르심입니까?"
예상치 못한 물음에 정 행수는 기어이 아, 하는 탄식을 흘렸다. 아무래도 해랑은 제 스승이 어떤 이인지 모르고 있는 듯했다. 정 행수가 아는 무영의 성격을 떠올리자면 그럴 것이 확실했다. 여기저기에 제 사연을 떠벌리는 그런 사내는 아니지 않은가. 
 
- 모든 궁인들이 무영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더 나아가면 도성 안에 사는 이들 대부분이 무영의 이름을 알았고, 그들 중 절반은 얼굴 또한 알고 있었다. 
무영 이휘, 선왕과 그의 귀비 김 씨 사이에서 태어난 조선의 제이 왕자 왕자이며, 동시에 천것인 사내.
임금의 얼자이기 때문에 왕자군의 칭호를 얻어야 마땅하지만 어미가 귀비였던 탓에 왕자군으로서 봉군 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자(字)인 무영으로 불렀다. 저자에서는 팔척귀신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남들보다 머리 둘쯤 큰 키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가 싶지만, 그것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말이었다. 무영은 귀비의 자식이 대개 그렇듯 사령(死靈)을 볼 줄 아는 사내였다.

- 임금이 마치 어제 만난 이에게 안부를 묻듯 여상한 투로 대꾸했다.
"어찌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형제를 보고자 함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느냐?"
임금의 말대로였다. 부왕을 꼭 빼다 박은 두 사람은 이백 보 밖에서 봐도 형제라 할 만큼 닮은 얼굴이다. 다만, 무영보다는 임금이 조금 더 화려하고 부리부리한 인상이었다.
임금은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듯 마주 앉은 무영을 바라보았다.

 

- "사흘 전 해괴제를 지냈다."
임금이 말 끝에 귀를 한 번 매만졌다.
"그런데도 여태 귓가에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사라지질 않는단 말이야."
무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뜻하는 바를 아는 까닭이다. 

"한 바퀴 돌아보고 가겠습니다. 필요하다면 부적을 써두지요."

"상선과 함께 가거라."

- 무영이 아무리 뒤지고 다녀도 궁 안에 사령이 있을 리 없었다. 근자에 궁 안에 떠도는 귀기라는 것들은 죄다 임금의 광증이 만들어낸 허상이었고, 온 도성 안에 그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상선의 입을 타고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런 상선을 달래듯 무영이 말을 붙여왔다.
"너무 심려치 마세요. 소란스러운 일들은 이미 다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지난 일을 입에 올리는 무영의 태도에 상선은 가슴 한구석이 선뜩해졌다. 그 사건 덕에 어미와 정인을 모두 잃고 삼 년이나 은둔했던 것치고는 무영의 태도가 너무 태연했다. 눈에 불을 켜고 야차 같은 모습으로 온 산을 뒤졌던 그이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 상선의 심경을 눈치챈 듯 무영이 설핏 웃는 낯을 했다.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게 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 말에 상선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쉬이 변하지 않는 법이다. 날카로운 생김과는 다르게 본디 유하고 다정한 무영의 성격은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그러나 정체 모를 묘한 불안감이 거듭 상선의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지난날보다 더 깊게 가라앉은 무영의 눈동자 때문이다. 밤의 어둠처럼 새까맣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 뒤로 분명히 수많은 감정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쉬이 읽어낼 수 없어 상선은 자꾸만 불안해졌다. 

- "원래 머물던 곳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찾으실 일이 있거든 그리로 사람을 보내시면 됩니다. 혹, 거기에 제가 없거든 운종가 정 행수 댁에 연통을 남겨두십시오."
말을 남기고 돌아서는 무영의 뒷모습을 상선은 그 후로도 한참이나 바라보며 서 있었다. 바람결에 무영의 감색 옷자락이 흔들리는 것이 어쩐지 눈에 선명하게 박혀왔다.

- "예? 어째서 스승님께서 궁으로 가시었느냐 여쭙지 않습니까?"
대답을 재촉하며 해랑이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정 행수는 난감한 듯 웃으며 입매를 굳혔다. 도성 안의 모든 이가 무영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사자가 입을 열어 제 정체를 밝히는 것과 남이 나불대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었다. 입안에서 맴맴 도는 말들을 골라내고 있자니 해랑이 다시 말을 이었다.

- "차차 가르치면 될 일입니다. 그저 물정이 어두워 그런 것일 뿐, 또래보다 훨씬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아입니다."
"그래, 말이 나왔응께 말인디. 갸한테 부적 쓰는 법을 가르쳤는가?"

걱정스러운 투로 묻는 정 행수의 미간에 깊게 골이 졌다.
"오히려 저보다 더 사령에 밝은 아이입니다. 감각도 예민하고요."

아무렴, 당연히 그럴 테지. 정 행수가 속엣말을 삼켰다. 그러고는 모르는 척 되물었다.
"그래서, 또 그 일을 한다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그것 말고 더 있습니까?"
무영이 새삼스럽게 무슨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한 투로 대답했다.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그렇게 다른 이들의 구질구질한 사연이나 좋으며 살겠다는 건지.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쏟아낼까 잠시 고민하던 정 행수는 결국 끙, 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다물었다.

 

-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정 행수는 어째서 무영이 저렇게 귀신 따위를 잡는 데 목을 매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귀비의 소생이라 왕자군의 칭호를 받지 못한 무영은 왕자들에게 주어지는 혜택 중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그에게는 왕자군에게 배속되는 배행 인원은 물론이고 토지와 택지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왕자로서 받는 유일한 혜택은 녹봉뿐이었다.
무예에 일가견이 있었으나 다른 종친들처럼 운검(雲劍)으로 차출되어 본 적도 없었다. 애매한 위치와 그로 인한 대우 탓에 왕가의 종친들 사이에서 늘 배제되었고 양반들에게는 업신여김을 당했다. 모두가 그를 '대감'이라고 불렀지만, 뒤에서는 천출이라 수군거렸다.
그의 자인 '무영(無影)'같이 출합(出閤) 전의 그는 궁 안에서 그림자도 없는 사람처럼 있는 듯 없는 듯하게 살아왔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성년이 되어 궁을 나왔을 때, 그제야 무영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었다. 사령을 보고 듣는 재주를 이용해 사람들과 하나둘 어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 정 행수는 가만히 무영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채 서른도 되지 않은 젊고 건장한 사내. 구릿빛 피부에 검은 머리칼, 속내를 알기 힘든 새까만 눈동자가 다소 서늘한 인상을 주었다. 먹으로 그린 듯 선명한 눈매가 날카로운 탓에 무영과 눈을 마주하면 사람이든 귀신이든 절로 속엣말을 줄줄 털어놓게 된다고 했다. 
그 속을 헤아려보려고 아무리 얼굴을 들여다보아도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그것은 무영이 도성을 떠나기 전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였다.
정수는 이 귀신 잡는 왕자의 고집을 이겨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번에도 그저 무영이 하는 대로 지켜보는 수밖에.

- 얼마간 우산을 들고 장난치던 해랑이 돌연 침울한 기색으로 어깨를 늘어트렸다.
"우산은 비가 올 때 쓴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이것은 종이 아닙니까? 망가지면 어쩌지요?”
제법 심각하게 묻는 말에 무영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쉽게 젖지 않게 만들어두었으니 비를 피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

"정말입니까?"
"그래, 비가 오거든 확인해 보려무나."
해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품새를 지켜보던 무영이 씩 웃고는 말을 이었다.
"닳아서 망가지면 내 또 새것을 사주마."
"참말이셔요?"
해랑이 기대에 찬 눈을 반짝이자 무영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음기 섞인 소리로 물었다.
"내 언제 네게 허튼소리를 한 적이 있더냐?"
해랑이 얼른 고개를 휘저었다.
"약조하시는 거예요? 정말로요?"

- 무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해랑의 얼굴에 볼우물이 움푹 팼다. '그래, 내 네게 무엇이든 사주마.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마!' 환히 갠 해랑의 낯을 새길 듯 눈에 담으며 무영은 몇 번이나 다짐 같은 속엣말을 삼켰다.

- 공 씨가 선전을 떠나자 그의 뒷모습을 빤히 보던 해랑이 물었다.

"스승님, 방금 저분에게서는 귀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어찌 부적을 주셨습니까? 제가 잘못 본 것이어요?"
영문을 통 모르겠다는 듯 갸웃거리는 해랑을 보며 무영이 빙긋 미소 지었다.
"네 말이 맞다. 사령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었지. 하지만 가끔은 의지할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또 거기서부터 좋은 기운이 생기기도 한단다."

- 해가 지자 거리에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한적한 곳은 단연 광통교 부근이었다. 이번 일 탓만은 아니었다. 본디부터 해가 지면 사람의 발길이 뚝 끊기는 것이 광통교였다. 대낮에야 워낙 오가는 사람이 많아 덜했지만 도성 안, 특히 운종가를 드나드는 상인들에게 광통교는 꺼림칙한 장소였다.
언제부턴가 도성에는 광통교에 대한 괴담이 떠돌았다. 한두 해로 다져진 일은 아니었다.
 
- 종친이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대군은 종주를 다시 사랑채로 불러들였다.
"아래에 있는 아이들 서넛에게 형님을 비호하라 이르거라."

"무영 대감 말씀이십니까?"
"그래. 형님께서는 모르고 계시는 편이 좋겠구나."

- 저녁나절, 집으로 돌아온 해랑은 내내 무영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무영은 이른 아침부터 궁으로 불려 갔다. 그가 다시 운종가로 돌아온 것은 해 질 녘이 되어서였다. 무슨 영문인지 묻는 정 행수를 향해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은 그는 이후 여태 이렇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늘 위로 덩그러니 달이 떠올랐다. 툇마루에 나란히 앉은 채 해랑은 흘끔흘끔 곁눈질로 무영을 살폈다. 제법 널찍한 앞마당으로 한차례 바람이 흘러들고 그 결에 해랑의 머리칼 몇 가닥이 뺨 위로 어지럽게 달라붙었다. 가벼운 손길로 제 볼을 쓱쓱 훑어낸 해랑은 또 한 번 흘끔 곁눈질로 무영을 살폈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해랑이 머쓱한 듯 웃음을 흘렸다. 그런 해랑의 눈을 빤히 보던 무영이 입을 열었다.
"일찍 자두거라. 내일부터 바빠질 게다."

- 해랑의 방문이 닫히자 무영은 그제야 작게 한숨을 흘렸다. 느릿하게 마른세수를 하는 것이 심사가 퍽 복잡한 모양이었다. 오늘 낮 궁에서의 일이 거듭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명은 간결했다. 좌포청의 사건 담당자와 함께 피마길 우물 사건의 내막을 조사하라는 내용이었다. 명하는 임금의 신경이 무척이나 곤두서 있었다. 그러나 종친불임이사(宗親不任以事)라 했다. 종친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이치로 무영이 이번 일에서 가지는 권한은 딱 포청 종사관만큼의 권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특별히 명을 내렸으나 이에 걸맞게 품계를 내리지는 않았으니, 수사관이면서도 수사관이 아니었다. 왕자이되, 또한 왕자가 아닌 본래의 처지와 별다를 것이 없었다.
그는 지금껏 늘 습관처럼 제 처지를 의식하며 살아왔다. 그랬기에 사람들의 청으로 해괴한 것들을 좇을 때에도 언제나 은밀히 움직였다. 무영의 움직임이 대부분 밤 시간에 이어지는 것이 꼭 귀신을 상대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 그런 그가 임금의 명에 군말 없이 "그리하겠습니다"라고 한 것은 단순히 그것이 어명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네 어미의 신분을 복위시켜 주마."
이 말에 무영의 마음이 절반쯤 기울었다. 그런 무영의 심사가 빤하다는 듯 임금은 빙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신분도 되돌려주마. 물론, 신분을 되찾을 테니 두 사람 모두 귀비당 신선각에 이름을 올릴 것이다."
이 어찌나 달콤한 제안인지. 무영은 처음부터 자신이 임금의 명을 거부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 핏줄인 임금의 성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무영 아니었던가. 임금은 절대 자신에게 손해가 날 만한 거래는 하지 않는 이였다.

- 무영이 제 생을 통틀어 사랑한 여인은 단둘이었고, 그 앞에서 그는 언제나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 사실은 두 여인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변함이 없었다.
밤공기 사이로 또 한 번 무영의 한숨이 흩어졌다. 그가 사랑해마지 않는 여인들이 또다시 무영의 삶을 쥐고 흔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주혁과 눈이 마주치자 해랑이 꾸벅 인사를 하며 눈을 접어 웃었다. 제 나름의 친근함을 표시하는 듯한 그 행동에 주혁 또한 웃는 낯을 되돌렸다. 하지만 해랑을 향해 다정한 웃음을 흘리던 주혁의 낮은 무영과 마주하자 조금 굳어졌다. 미세하게 변하는 그 표정을 무영 또한 모를 리 없었다. 피차간에 이번 일이 껄끄러운 것은 마찬가지인 탓이다.
"공 씨가 복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리로 가시겠습니까?"

주혁의 물음에 무영이 예,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곧 포청 뒷마당을 통해 검험소로 들어섰다.

- 곤란한 듯 미간을 찡그린 무영이 달래듯 해랑의 뺨을 살살 쓰다듬기 시작했다. 원체 겁이 많고 엄살이 심한 해랑의 성정을 무영 또한 알고 있는 탓이다. 해랑이 귀기를 감지하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다고는 하나, 형체 없이 어룽거리는 기운이 아니라 이리도 선명히 형상을 지닌 영을 마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가 지금 돌아설 것인데, 그동안 저 영을 붙잡아둘 수 있겠어?"
작게 속삭이는 무영을 향해 해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시선은 무영의 어깨너머를 향한 채였다. 방울은 여직 짤랑이며 소릴 내고 있었다. 그 소리 사이로 후, 하고 한숨을 내뱉은 해랑은 이내 무영의 손을 놓고 제품 안을 뒤적였다. 그런 해랑을 무영이 제지했다. 
"부적은 쓰지 말거라."
"그럼 어찌합니까?"
묻는 말끝에 울먹이는 소리가 매달려 나왔다.
"시선을 떼지 말거라. 눈길을 돌려서는 아니 된다. 알겠어?”

- 단속하는 말에 해랑이 고개를 끄덕이고 마침내 무영이 돌아섰다. 그러고는 재빠른 몸짓으로 해랑을 제 등 뒤에 숨겼다. 등 언저리로 맞닿는 해랑의 손길을 느끼며 무영은 저만치 앞에 서 있는 혼을 빤히 내다보았다.
무영의 입에서 하, 하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러니 잔뜩 겁을 집어먹은 게지. 속엣말을 삼키는 무영의 입가가 비뚜름하게 솟아올랐다. 제 눈으로 혼을 직접 확인하고 나니 무영 또한 해랑의 반응이 과장이 아님을 알겠는 것이다.
핏물이 잔뜩 든 도포를 입은 사내의 혼이 형형한 눈길로 무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혼령의 새까만 낮 위에서 오직 두 눈만이 불길처럼 타오르며 빛을 냈다. 

-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그것들은 죄다 구더기였다. 구더기들은 꼬물거리며 사내의 얼굴 위를 기어 다녔다. 그러고는 존재하지도 않는 피부를 야금야금 갉아 없애기 시작했다. 혼령의 얼굴에는 금세 여기저기 구멍이 뚫렸다. 그 구멍을 이번에는 다리 많은 벌레가 들쑤시고 다녔다. 벌레들이 혼의 얼굴을 뒤덮으며 내는 소리가 퍽 섬뜩했다. 악귀였다. 낮에 검험소에서 보았던 시신의 혼은 이미 악귀가 되어 있었다. 

- 잠시 후, 공 씨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시신의 입안에서 은비녀를 꺼냈다. 잔뜩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얼굴이 금세 환하게 개었다. 비녀가 검게 변색되어 있었던 탓이다. 숫제 콧노래까지 흥얼거려 가며 공 씨는 얼른 비녀를 조각수(皂角水)에 씻어냈다. 그러자 비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빛깔로 돌아왔다.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는 모양새가 꼭 저를 약 올리는 것 같아 공 씨는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이런 니미럴.

- "술지게미 좀 준비해 오거라."
곧 검험소 안에는 술지게미와 초 냄새가 진동했다.

- 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오작인 박 씨와 함께 시신을 들여다보던 공 씨는 끝내 실망한 듯 습관처럼 "니미럴, 니미럴 것" 하며 욕을 해댔다. 혹 시신에 오래 쌓인 독이 있었다면 시신이 검게 변해야 할진대, 술지게미 초를 걷어낸 시신은 마치 먹물을 들이다 만 종이처럼 애매하게 어두운 빛을 띠고 있었다.

- 수레 넘어간다. 수레 넘어간다. 피안길 언덕 따라 수레 넘어간다. 물길 열어라. 물길 열어라. 피안길 언덕 따라 수레 넘어간다.
노랫소리는 그들을 향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소리가 가까워지자 해랑이 눈을 홉뜨고는 눈물을 펑펑 쏟아내기 시작했다. 눈물범벅을 한 얼굴로 자꾸만 헛숨을 들이켜는 것이 심상찮았다. 노랫소리가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 무영이 수환을 향해 눈짓했다. 알아들었다는 듯 수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무영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 "그... 우물가에 나타난 그 시신의 혼 말이어요. 원혼이 아니라 악귀였습니다."
"해랑의 말이 맞습니다. 그런 형태로 보이는 혼은 악귀밖에 없으니까요."
제법 놀란 듯 주혁이 슬쩍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 형태라 하심은...?"
"그다지 듣기 좋은 내용은 아닙니다."
딱 잘라 말하는 무영의 태도에 주혁은 더 이상 캐묻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 한편, 무영과 해랑은 이제 막 광통교 아래 책방거리로 들어선 참이다.
다리 아래는 다리 위 운종가 거리만큼이나 복작복작했다. 벌써 군데군데서 전기수 몇 명이 자리를 잡고 앉아 사람들을 모으고, 길게 늘어선 책방들은 하나같이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안을 슬쩍 들여다보면 책값을 흥정하는 손님들과 주인네가 실랑이를 벌이는 것이 훤히 보였다.

- 햇빛 아래에서 해랑의 눈동자는 이따금 황금빛을 띠었다. 해랑의 눈가에 맴돌던 무영의 시선이 입술로, 또 목덜미로 옮겨갔다. 곱게 땋아 내려 묶은 머리 사이로 빠져나온 몇 가닥의 머리칼이 해랑의 귓가에서 나비가 날갯짓하듯 팔랑팔랑 느리게 춤을 췄다. 그 가벼운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또다시 시선이 해랑의 입술로, 눈동자로, 고운 얼굴로 되돌아갔다.
"스승님?"
한참 종알거리던 해랑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다 듣고 있었다는 듯, 태연히 대답하는 무영을 향해 해랑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여태 저가 한 말을 무영이 흘려들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 마주 선 해랑을 보며 무영은 한시라도 빨리 이 사건을 해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진원대군의 사랑채에서 변복한 해랑을 마주한 그 순간부터, 무영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본연의 모습 그대로 여인의 차림을 한 해랑의 낮은 너무 고왔고, 그래서 위험했다. 늘 고요하던 그의 마음에 이토록 큰 파문이 이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었다.
애써 붙잡히는 시선을 거두며 무영은 해랑을 한 발짝 앞질러 걷기 시작했다.

- 두 사람은 곧 전기수 엄 씨가 말했던 홍 씨 책방에 들어섰다. 이 거리 안에 책방이고 세책방이고 할 것 없이 문밖으로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 한가득이라,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운종가의 살생부를 찾으러 왔거든 돌아가십쇼."
해랑과 무영을 흘끗 본 책방 주인이 선수를 쳤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가?"
해랑이 짐짓 양갓집 규수 흉내를 내며 물었다.
"저도 모릅니다. 내일쯤 방각본이 풀린다 하던데요?"

- 해랑이 작게 속삭였다.
지척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무영은 가만히 손끝을 말아 쥐었다. 그래, 위험해도 너무 위험했다. 생각 끝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상에 이게 무슨 꼴인가 싶었던 탓이다. 이런 제 꼴을 무영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다.

- 책장 앞을 서성이던 대군은 서책 한 권을 꺼내 들고 창가에 앉았다. 창밖으로 자신이 가꾼 정원이 한눈에 보였다. 달빛을 받은 풀잎들이 대군의 시야로 희미하게 어룽거렸다. 그는 창가에 놓인 작은 서안 위, 서찰 바로 옆에 책을 내려두었다.
받아본 지 퍽 오래되어 보이는 서찰은 귀퉁이마다 종이가 해져 있었다. 접힌 종이 사이로 붉은 인장이 비쳐 보였다.
왕의 인장. 그는 마치 자그마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듯 인장이 비치는 자리를 매만졌다. 멍하니 그것을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옮겨 책을 펼쳤다.
오늘 밤 궁에서는 또다시 연회가 있을 예정이었다. 벌써 엿새 간에 세 번째 연회였다. 또다시 누군가가 죽어나갈지도 몰랐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대군은 다시금 멍하니 서찰을 매만졌다. 정인이 보낸 애틋한 연서를 다루는 듯한 손길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애착이 느껴져서 이러는 것인지도 몰랐다.
혼자 사랑채에 앉을 때면 대군은 늘 이렇게 서안 위에 놓인 서찰을 매만졌다. 오랜 습관이었다. 다시 손길은 서책으로 옮겨갔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글을 따라 손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통 그 내용에는 집중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이 또한 오랜 습관이었다. 오래 묵은 습관이라는 것은 이처럼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매일매일이 그러했다.

- 그저 남장한 계집이로구나, 싶었던 해랑을 정 행수의 선전에서 다시 마주쳤을 때, 그리고 그 아이가 제 형님의 식솔임을 알았을 때, 바로 그때부터 대군은 자꾸만 해랑이 눈에 밟혔다.
그날 이후 대군의 일상은 조금 달라졌다. 지루하고 단조로운, 고요한 수면이나 다름없던 일상에 해랑이라는 자그마한 나뭇잎 하나가 떨어진 격이었는데, 그는 이상스럽게도 그 이파리가 신경 쓰였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작고 연약한 이파리는 자꾸만 대군의 수면 위를 떠다니며 잔잔한 파문을 만들어냈다. 바람결에 쉬이 날아갈 잎은 아닌 모양이었다. 


- 태화관의 복면 호위들 사이에 있을 무영을 찾는 것이다.
독순법에 능한 무영이니 지금 여기서 벌어진 대화들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영이 나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해랑이 궁에 숨어든 것보다 무영이 변복해 숨어든 것이 더 큰 문제였으니 당연했다. 이대로 해랑이 변명거리를 찾지 못한다면 무영 또한 들키게 될 것이 자명했다.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쉰 해랑은 마침내 결단을 내린 듯 치맛자락 아래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눈길이 빠르게 상 위를 훑었다. 아직 다 채우지 못한 최택의 술잔을 흘끔 확인한 해랑은 제 앞에 놓인 술병으로 손을 옮겼다. 최택이 말을 다 마치기 전에, 기회는 단 한 번 뿐이었다.

- "맞습니다. 그 누가 입궐하였든 연회에 참석한 이들을 만족시키기에는 충분했을 테지요."
두 사내의 말대로였다. 도성 안에서 가장 큰 기루는 서린방에 있는 춘화관과 홍화관, 그리고 견평방에 있는 태화관. 그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재주를 가진 여인들만 모인 곳이 바로 태화관이었다. 
춤과 노래, 그리고 시, 서, 화에 이르기까지, 태화관 기녀들의 능력은 무궁무진했다. 그러니 풍류깨나 즐긴다는 양반네들이 문턱이 닳도록 태화관에 드나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였다. 꽃같이 아름다운 여인들이 말을 하고, 노래하며, 시를 읊는 모양새를 보고 그 어느 사내가 홀리지 않을 수 있냐는 말이다. 
하지만 도성 안의 모든 사내가 그 어여쁜 꽃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태화관 담장이 궁궐 담장보다 높다는 말이 우스갯소리처럼 저자에 떠돌았다. 어지간한 고관대작이 아니면 그 담장을 넘겨다보기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입궁 기녀들에 대한 소문이 이미 알음알음 퍼지고 있었으니 그들의 값어치는 점점 더 높아질 것이었다. 

- "태화관으로 다시 가야겠습니다. 남 행수를 만날 것입니다. 대감께서는 지난번 구해주셨던 참석 관리의 명단과 오늘 참석한 관리의 명단을 다시 확인해 주십시오."
세 사람이 좌포청을 나섰을 때는 해시가 막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들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곧 인정이 시작될 것인지라 거리는 무척 한산했다.
잘게 울렁이는 밤공기에서 가을 내음이 나는 듯했다. 발치에서 사르락 거리는 치맛자락을 정리하며, 해랑은 저보다 반걸음쯤 앞서 걷는 무영의 등을 바라보았다.

- 주혁과 대화하던 무영이 이따금씩 저를 확인하듯 돌아볼 때마다 해랑은 그 눈길을 피해 시선을 내렸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무영의 등을 볼 때마다 자꾸만 속이 울렁이고 입안이 마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불편한 기분이 어색한 옷차림 탓인지, 무영을 향해 흐르는 제 마음 탓인지 알 길이 없어 해랑은 애꿎은 치맛자락만 쥐었다 놓았다 했다. 

- "어찌 그래?"
무영이 의아한 기색으로 해랑의 어깨를 잡아왔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해랑이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가슴께로 들었던 손을 치맛자락에 닦아냈다. 손바닥 안이 축축했다. 기이하게도 자꾸만 뒷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해랑은 자꾸만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듯 다시 한번 한숨을 푹 쉬고 손을 말아 쥐었다.

짤랑.
해랑의 방울이 작게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세 사람은 멈칫하며 그 자리에서 발을 멈췄다.

- 무영은 조금 더 가까이, 그리고 단단히 해랑을 제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괜찮다는 말을 해랑의 귓가에 되뇌었다. 입으로는 해랑을 달래기에 여념이 없는 무영이었으나 저와 해랑 앞에 놓인 광경을 바라보는 눈길은 차게 식어 있었다.

- "그 여인만 또 따로 움직였다는 말이어요?"
퍽 순진한 기색으로 묻는 해랑의 말에 세 사내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해랑의 질문에 대한 답을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으나 쉬이 입 밖으로 꺼내기는 힘든 탓이었다.
"승은을 입은 것이다."
무영이 불편한 진실을 입에 올리자 해랑이 "예?" 하고 반문했다. 

"주상전하와 밤을 보냈다는 이야기다."
재차 던져진 무영의 말에 방 안의 공기가 급속히 가라앉았다.

 

- 두 종사관과 해랑이 말을 잇지 못하고 어물거리는 사이 무영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앞선 피해자들이 어쩌면 하사품을 받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이 월향이라는 여인도요."
"그렇게 단언하시는 이유는요?"
수환의 물음에 무영 대신 주혁이 쓰게 웃으며 두어 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제 친우 앞으로 초저녁에 이미 훑어보았던 방각본을 들이밀었다.
"여기 우리가 세 번째 피해자를 발견하기 직전까지의 상황이 묘사되어 있네. 앞선 두 번의 사건처럼 말이지."

- 수환의 눈동자가 주혁이 가리킨 자리를 빠르게 훑어 내렸다.

'운종가의 살생부'
그것은 범인이 남긴 예고장. 범행의 설계도. 그리고 명백히도 수사관들을 향한 조롱을 담은 기록이었다.

- 지금껏 해랑이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지독스러울 만큼 낯선 무영의 표정이 해랑의 가슴을 쑤시는 듯 후비는 듯했다.
"내게 약조하거라. 다시는 이렇게 위험하게 굴지 않겠다고."
무영의 말에 해랑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입안의 여린 살을 깨물어댔다. 차라리 호되게 야단을 치면 좋으련만.
고요를 가장한 무영의 눈 안으로 이는 태풍에 도리어 해랑의 마음이 술렁였다. 가만히 제 스승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쓰러질 적에 보였던 환상 같은 것이 다시 떠올랐다. 범인에게 맞아 눈이 가물가물 감기던 그 순간에 그때 저가 듣고 보았던 광경을 말해야 하는 것인지 해랑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난생처음 경험해 본 그 희한한 광경을, 아니, 어쩌면 환상일지도 모르는 것을 두고 뭐라 표현을 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실은 제대로 본 것이 맞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 결국 해랑은 말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그러고는 언제 이런 고민을 했냐는 듯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배시시 웃어 보였다.

- "도대체 어째서 이렇게 고집이 쇠심줄인지 모르겠구나."
무영이 탄식하듯 말을 뱉어냈다. 그러고는 가만히 해랑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런 무영의 훤칠한 이마 위로 얕게 주름이 졌다.
무영의 태도에 안절부절못하던 해랑이 기어이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았다. 
어둑한 방 안으로 잠시 정적이 일었다. 해랑은 무영의 눈치를 살피며 제 발치에 놓인 것들을 빤히 바라봤다. 정 행수가 구해주었던, 바로 얼마 전 해랑이 입었던 치마저고리며 속곳이며 하는 것들이었다. 
거기에 진원대군에게서 받아온 아주 값비싼 노리개까지. 본디 해랑 또래의 여인들이 늘 입는 바로 그것들이었다.
"본래의 모습대로 살고 싶으냐? 저런 것들이 갖고 싶어?"
무영의 물음에 해랑의 어깨가 파득 튀어 올랐다.
"아니, 아닙니다. 그저 빛깔이 너무 고와 들여다본 것뿐이어요. 저는 지금처럼 지내는 것이 좋습니다."
해랑이 양손을 휘저어가며 얼른 대답했다. 그 품새에 피식 웃음을 흘린 무영은 습관처럼 해랑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자, 언제쯤 내게 약조할 것이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이야기에 해랑이 작게 입을 삐죽였다.
"예. 다시는 위험한 일에 휘말리지 않겠습니다. 괜히 나서서 스승님과 두 종사관 나리를 곤란케 하지 않을 것이고요."
불퉁한 대답이었으나 무영은 흡족한 듯했다. 한시름 덜었다는 듯 개인 무영의 얼굴과 그것을 바라보는 해랑의 얼굴 위로 길게 호롱 불빛이 비쳤다.

- 뺨에 닿는 밤바람이 이제는 제법 서늘했다.
광통교 아래 천변. 저만치 다리 위로 운종가 거리에 등불이 별처럼 늘어져 있었다. 어둠을 타고 밤공기 사이로 어룽어룽하게 번지는 그 불빛들은 정말로 촘촘하게 박힌 별무리 같았다. 그 모양에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려 해랑은 치마 속에서 발을 동동 굴러댔다. 
아주 천천히, 깊게 숨을 들이마신 해랑의 광대가 봉긋 솟아올랐다. 예민한 후각 끝에 걸리는 익숙한 향이 해랑에게로 가까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기척이 등 바로 뒤에까지 다가오자 해랑은 재빠른 손길로 머리칼이며 얼굴을 정돈하고는 몸을 돌려 섰다. 
"오래 기다렸느냐?"
"아니, 아닙니다."
작게 고개를 가로젓는 해랑의 두 뺨 위로 분홍빛이 진해졌다. 다행인 것은 어둠에 가리어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당사자인 해랑도, 또 마주 선 무영도. 

- 잠시 말없이 서 있던 두 사람 사이로 가벼운 밤바람이 지나갔다. 그 결에 무영이 입은 짙은 보랏빛의 도포가 작게 들썩였다. 해랑은 홀린 듯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늘 감색 무복(武服)을 입고 있던 제 스승이 오늘은 어느 귀한 댁 도련님마냥 훤칠한 차림으로 제 앞에 서 있었다.
"무얼 그리 생각하고 있어? 이만 가자."
무영의 채근에 해랑이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크고 둥근 보름달 아래에서 그가 손을 내밀며 웃고 있었다.
해랑이 아는 한 이 세상에서 가장 훤하고 아름답게 빛나는 것은 딱 둘이었다. 하나는 달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 지금 이렇게 제 앞에 서 있었다.

- 해랑은 저가 딛고 선 세상의 모든 것이, 그것들 하나하나가 지독히도 선명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제게로 쏟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민한 감각들이 이전보다 더 선명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 가물거리며 닫히는 눈꺼풀 사이로 소근형의 얼굴이 어룽거릴 때, 해랑은 목에 걸린 방울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감은 두 눈너머로, 마치 환상처럼 방울 안에서 나온 여인이 저를 바라보는 것도 보였다. 해랑을 향해 생긋 웃은 여인은 곧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 [아이야, 내 어미는 무당이었단다. 그래, 별로 놀랄 만한 일은 아니지. 궁무였던 내 능력이 누구로부터 온 것이겠니? 무당의 딸이 무당이 되는 것만큼 당연한 이야기는 없지. 아, 그래. 너에게는 조금 놀랄 만한 일이기는 하겠구나.]

 

- [하다못해 평범한 양민 계집애였다면 그나마 좀 덜했을 텐데. 가족 하나 없는 천한 계집애는 누구에게나 노리기 쉬운 먹잇감이나 다름없었다. 그 덕에 아이는 저를 훑는 음험한 눈길과 손길들을 피하느라 늘 용을 써야 했다. 이 불쌍하기 짝이 없는 계집애의 처지가 바뀌게 된 것은 정말 별안간의 일이었다. 아니, 실은 운명이었을 것이다. 계집애의 핏줄을 타고 깊이 흐르는, 그리될 수밖에 없는 숙명.] 

- [글쎄. 나는 그때 내가 정확히 몇 살이나 되었는지도 잘 모른단다. 내 행색을 본 그분께서 "예닐곱 살이나 되었겠구나" 하시기에 그런 줄로만 알았지. 매일같이 구질구질한 것들만 보고 듣던 내게 그렇게 아름다운 광경은 처음 보는 것이었어. 내 동냥거리를 빼앗으려 달려드는 아이들을 피해 들어간 어느 골목 끝에서 나는 선녀님을 뵈었단다. 그래, 실은 그때까지 한 번도 선녀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지. 하지만 그분과 마주치자마자 나는 분명히 그분이 선녀일 거라고 생각했단다.
응? 아이고, 아서라. 내 어미의 얼굴은 그때보다 한참도 더 전에 이미 잊어버렸단다. 움막촌 어멈들이 나를 볼 적마다 혀를 차면서 "반반한 낯짝이 꼭 제 어미를 닮아서 저 모양이다" 하는 말들을 주워섬겼으니 그냥 그런 줄 알았지.]
 
- [이름을 묻는 그 말이 대체 뭐가 그렇게 서러웠을까. 내 대답을 기다리는 선녀님 앞에서 나는 이름 대신 울음소리를 뱉어냈단다. 왜 그렇게 눈물이 줄줄 났는지는 아직도 잘 몰라. 그냥 그럴 운이었나 보다 하고 생각했지. 선녀님 품에 안겨서 엉엉 울다가 조금 진정이 되었을 때 나는 그분의 품에서 익숙한 향내를 맡았단다. 갓난쟁이일 적부터 각인된 향이었지. 
그래, 그건 무녀들이 몸에 지니는, 신을 부르는 향낭에서 나는 향이었어.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내 어미의 것도 그 향낭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을 하고 있었겠지. 그래서였을 거야. 나도 모르게 선녀님의 향낭을 만지작거렸던 게 말이야. 
"우리 아가가, 이것이 무엇인지 아는 모양이구나?"
내 표정을 살피며 선녀님께서 물으셨을 때 나는 그것이 내 생에 찾아온 첫 번째 기회라는 걸 직감했단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으니 안다고 대답하기는 하였지만, 아마 몰랐어도 나는 안다고 거짓말을 했을 거야. 그만큼 절박했으니까.]

- [물론, 굳이 그렇게 물어 확인하지 않아도 그분께서 내 태생을 이미 알고 계셨다는 건 조금 나중에야 알았지. 선녀님이 궁 안에, 귀비당에 사는 귀비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한 시진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어. 궁으로 가는 길에 그분은 내게 소화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지. 내 낯이 꼭 하얗고 소담한 꽃을 닮았다고 생각하셨대. 그날부터 나는 귀비당의 애기 궁무 소화로 살게 되었단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 모양이냐고? 말했잖니. 긴 이야기가 될 거라고.] 

- [이런. 저기 너의 스승님이, 나의 오라버니께서 오시는구나. 자, 괜찮아. 조금 자두렴. 네 상처는 그리 깊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이 자는 내가 잘 붙잡아둘 테니 걱정 말거라.]

- [염려 마라. 아이야, 처음부터 그랬듯 나는 네 가까이에, 이렇게 지척에 늘 너와 함께 있으니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게다.]

- 백운대 위에서 내려다보면 도성 안이 한눈에 보였다. 막힘없이 훤히 보이는 풍광을 바라보며 선 사람 중 하나는 노인이었고 다른 이는 그보다는 조금 젊은 사내였다. 두 사람의 눈길이 향하는 곳은 같았다. 왕의 침전이었다. 
백운대에서 궁까지는 사십 리쯤. 이 시간에 이 어둠 속에서 그 거리를 내다본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인데 왕의 침전이라니.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사람이 아닌 이 둘에게는 가능한 일이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속은 사람이 아닌 자들. 둘 중 더 나이 든 이는 호족(族)의 수장 호선(虎仙)이었고, 젊은 자는 응족의 수장 응선이었다. 늘 그래왔듯 두 사람은 수하들을 모두 물리고 단둘이서만 어둠 앞에 마주 섰다. 

- "그들은 언제나 말이 많지요."
혀 차는 소리 끝에 나온 호선의 말에 응선은 설핏 웃음을 흘렸다.
"어찌해야겠습니까? 기행은 둘째고 여태 세손이 없는 것을 문제 삼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응선이 나직한 소리로 묻자, 호선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저들의 일이고, 저들의 결정입니다."
그 말에 응선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호선의 말에 별달리 대꾸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야속한 기분도 들었다. 호선이 이런 식으로 반응할 때마다 자신들의 관계가, 그리고 그들이 받는 대우가 완전히 공평하지는 않다는 사실이 저절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 상선이 돌아간 후 귀비당은 궁무들의 바쁜 움직임으로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이리저리 오가는 발걸음 속에서 귀비 김 씨가 가장 먼저 불러들인 것은 수궁무 소화와 영선이었다. 귀비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수궁무는 단둘. 그중 소화는 응족을, 영선은 호족을 담당하고 있었다. 만약 임금께서 이대로 붕어하신다면 이 둘 중 하나가 다음 귀비가 될 것이었다. 

- 온통 여인들 일색인 귀비당에 드나들 수 있는 사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귀비의 주인인 임금과 그를 바로 곁에서 보좌하는 내시부의 당상관들 정도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들 이외에 귀비당 출입이 허락된 이는 딱 하나뿐이었다. 무영 이휘. 현 귀비 김 씨의 아들이자 임금의 아들. 왕자이면서 왕자가 아닌 자.

- 왕가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유모 상궁과 보모 상궁의 보살핌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귀비의 자식들은 그렇지 않았다. 매사에 아주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귀비를 어미로 둔 아이에게 당연한 일은 없었다. 그러니 아이의 교육은 제 어미와, 어미를 따르는 나이 든 궁무들이 떠맡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였다. 어미를 닮아 사령을 보고 들을 줄 아는 아이를 그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상궁들이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 자미재(紫薇齋). 이곳은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지 않는 한 우연히라도 찾기 힘든 곳이었다. 그러나 어디에나 우연은 존재하는 법이었다. 그것이 누군가가 부러 만들어낸 것일지라도 우연은 우연이었다. 

- "귀비가 되고 싶다고요, 오라버니. 귀비님께서 출궁하실 때, 따라 나가는 건 영선이더러 하라 하고, 저는 궁에 남고 싶다는 말입니다."
소화가 이를 악물고 한 자 한 자 씹어 뱉듯 말을 할 때마다 또다시 계집애의 볼을 타고 눈물이 죽죽 흘러내렸다. 무영은 속으로 깊게 탄식했다. 긴말하지 않아도 소화가 말하는 바를 분명히 알고 있는 탓이다. 
애초에 소화가 수궁무가 된 것은 온전히 제 능력 덕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소화가 신력이 영 없었다는 말은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무영의 어미 귀비 김 씨의 편애가 큰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 가냘픈 어깨를 바들바들 떨어가며 우는 소화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무영은 생에 처음으로 제 처지가 원망스러워졌다. 그는 소화에게 그 무엇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세자가 아니었으니 이 아이가 원하는 대로 귀비가 되게 해 줄 수 없었고, 반쪽짜리 왕자로 이렇듯 숨어 살다시피 했으니 응선을 설득해 세자가 소화를 택하게 만들 힘도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애끓는 제 마음을, 소화를 향한 연정을 앞으로도 영원히 내보일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절망스러웠다. 

 

- 병중에 있는 임금이 붕어한다면 법도대로 제 어미는 출궁하게 될 터였다. 영선과 소화 중 다음 귀비로 선택받지 못한 이는 제 어미와 함께 궁을 떠나 도성 밖에서 살게 될 것이다. 
궁을 떠난다 해도 궁무들은 여전히 임금의 여인이었다. 그러니 소화가 귀비가 되든 그렇지 않든 무영에게는 기회가 없었다. 처음부터 그래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것은 천지가 개벽한다고 해도 변하지 않을 무영에게 내려진 숙명이었다. 

- 하늘을 가르고 땅을 두드리는 듯한 북소리를 따라 귀비 김 씨의 발끝이 가볍게 나부꼈다. 귀비의 발은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듯하다가, 또 딛고 선 자리를 다독이듯 가볍게 서성이기도 했다.
아버지, 줄곧 이런 자들을 충신이라고 곁에 두셨으니 말입니다.
속엣말을 짓씹으며 세자가 작게 혀를 찼다. 상석에 앉은 그의 입가로 금세 비뚜름한 미소가 걸리고 차게 가라앉은 눈길이 아래로 앉은 자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훑었다.
오늘 제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당상관 이상의 관리들이었다. 거기에 호선과 응선, 그리고 응족 각 가벌의 우두머리들이 더해졌다. 근엄한 체하며 앉아 있었지만 사실 그 자리에 모인 당상관들은 하나같이 넋을 반쯤 빼고 귀비의 몸짓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평소와 달리 오늘 귀비의 제복은 흰빛이었다. 무르익은 가을 햇빛이 제복 위로 앉을 때마다 옷감은 잠자리 날개마냥 투명하게 반짝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귀비의 몸놀림은 더욱더 빠르고 화려하게 변해갔다. 더는 젊지 않았으나 여전히 아름다운 무녀의 턱 끝을 타고 땀방울이 뚝 떨어질 때마다 다 늙은 영감들은 초조한 듯 목구멍 안으로 마른침을 밀어 삼켰다. 과장을 아주 약간 보태서 거기 모인 이들의  할이 그런 모양새였다. 

-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런 와중에도 제 잇속을 따지며 진정 제게 필요한 것을 탐색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해동의 수장인 호조정랑 민도식 같은 이였다.
세자며 왕후며 할 것 없이 모두의 시선이 귀비의 몸짓을 좇는 가운데, 오직 민도식의 시선만이 다른 데를 향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민도식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눈치채지 못했다. 귀비가 시선을 퍽 끌었던 까닭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그의 시선이 조심스러웠던 탓이기도 했다. 

- 귀비는 제를 위해 깔아 둔 멍석 한가운데에서 부채와 칼을 휘두르며 춤을 추었다. 그리고 그 주변 사방에는 북을 치는 궁무가 하나, 징을 치는 궁무도 하나, 신령을 흔드는 궁무가 둘. 쩔렁쩔렁 요란한 소리를 내는 방울을 쥔 둘은 수궁무였다. 

 

- 민도식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거기, 응족의 수궁무 소화가 앉은 자리였다. 해동의 우두머리인 민도식에게 지금껏 소화의 존재란 그저 천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질 예정이었다. 어떤 방식일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지만. 
민도식은 저 계집이 제게 아주 쓸모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가느다란 양손으로 방울을 움켜쥐고 흔드는 소화의 눈너머에 깃든 감정들을 민도식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제아무리 숨기고 있어도 그가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동류는 서로를 알아보는 법이니. 계집애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 박힌 야망, 탐심, 너무 간절해서 오히려 딱해 보일 지경인 욕심들.  


- 응족과 호족의 불공평한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들의 수와 부족의 생리에 대해 논하는 것이 우선이다. 응족은 다섯 부족, 곧 송골, 해동, 보라, 산진, 수진으로 나뉘었다. 또한 원래 새의 특성이 그렇듯 그 수가 호족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제아무리 신력을 가진 존재라 할지라도 수가 많으면 흔하게 여겨지고 그만큼 가치가 떨어지는 법이다. 호족의 수는 나라 안에 부족 전체를 다 합쳐도 스물이 채 되지 않았으니 그보다 적어도 스무 배는 많은 응족은 확실히 비교적 흔한 존재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지금처럼 응족이 약간 더 홀대받는 가장 큰 이유는 부족이 여러 가벌로 나뉜 데에 있었다. 하나의 우두머리를 두고 소수가 응집한 호족과는 달리 응족은 날 때부터 세력이 비슷한 여러 가벌이 경쟁하듯 제 식솔들을 이끌어나가는 형식이었다. 
수가 워낙 적어 사실상 없는 것으로 치는 수진을 제외하고, 또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제 부족에게조차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은 산진까지 제외하면 응의 주축은 언제나 송골과 해동, 그리고 보라였다. 세 가벌은 늘 서로 우두머리가 되고자 발톱을 세워댔다. 이 요사스러운 존재들 간의 다툼은 보통의 사람들에게까지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아주 먼 언젠가 같은 대지를 공유하며 살던 응족과 보통의 인간들이 공생하기로 결정한 그 순간부터, 응족 내에서도 자연스레 서열이 정해졌다. 
기실은, 응족이 존재하던 그 순간부터 서열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으뜸은 송골이고, 해동은 이인자였으며, 수가 많아 흔한 취급을 당하는 보라는 그다음이었다. 

- 삼각산에 기거하는 호선과 그의 식솔들이 도성 안으로 걸음 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호족에게 구청)할 것이 생기면, 임금이 내시부의 당상관과 호족의 수궁무를 삼각산으로 직접 보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만약 임금이 응족에게도 그리했다면 이토록 처우가 불공평하다고 느낄 만한 일은 생기지 않았을 터였다. 

- 응족 각 가벌의 사내들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궁 안에 있는 내응방에 기거하며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왜나 청으로 가는 사신단과 동행해 임무를 맡기도 했다. 때문에 응족의 사내들은 나이가 차면 관직에 나아가기 쉬웠고, 각 가벌의 수장이나 원로쯤 되면 상당한 요직을 차지할 정도로 특혜를 받았다. 보통의 인간 사내들이 일평생 공부하여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파격적인 특혜라 할 수 있었다. 

 

- 반대로 호족은 부족원 중 그 누구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니 표면상으로는 이처럼 응족과 왕가의 식솔들이 주고받는 것이 각각 하나씩, 제법 공평해 보일 법도 한 관계였다.  

- 하지만 세상 그 어디에도 완벽하게 공평한 관계는 없었다. 내응방에 소속된 응의 사내들 중에는 왜나 청으로 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고 거기서 머물게 되는 이들도 적잖았다. 이를테면 문위행에 따라나서는 이들이 그랬다. 이것이 호족에 대한 응족의 자격지심을 부추기는 가장 큰 이유였다. 누구는 언제나 직접 그 거처로 가 찾아뵙는 모양새인데 누구는 도리어 나라 안팎에서 일정 기간 볼모 같은 모양새로 붙잡혀 있어야 하니 밸이 아니 꼬일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왜나 청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 부족의 식솔들은 제 땅에서나 마찬가지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호의호식했다. 하지만 대부분 ... 

- 또 한 번 파안대소했다. 자유로운 만큼 다소 지루하던 그의 삶이 이제 조금 재밌어지려는 모양이었다.

- 금방이라도 임금이 붕어하고 세자가 임금이 될 것 같았다. 그러고는 영선이 그 계집애가 귀비가 되는 것이다.
저는 아직 세자의 마음을 얻을 기회를 얻지 못했는데, 아직 무언가를 시작하지도 못했는데. 세자의 마음은 기울어도 이미 한참 기울어 있었다. 세자가 영선을 퍽 총애한다던, 소문으로만 듣던 그 말을 눈앞에서 직접 확인한 것이 벌써 닷새 전의 일이었다. 
제를 마친 후 영선과 함께 동궁에 들었을 때 소화는 제게 일말의 기회도 없을 것임을 직감했다. 영선을 보는 세자의 눈빛. 그 눈빛은 소화에게도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반쪽뿐이라 하나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영선을 보는 세자의 눈빛은 무영과 꼭 닮아 있었다. 소화가 아주 잘 아는 눈빛이었다는 말이다. 
누군가를 향한 연정은 숨긴다고 해서 숨겨지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연모하는 여인을 앞에 둔 사내. 세자는 꼭 그런 사내 같은 모양으로 영선을 향해 웃고 있었다.
소화를 바라보는 무영이 늘 그러했듯이. 

 

- 호선이 응선을 죽였다.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호선이 임금을 배신했다. 지존의 병세가 위중한 것이 모두 호선의 탓이다.
호선이 호족의 수궁무를 죽였다. 그가 임금을 배신한 것을 알게 된 수궁무가 세자에게 입을 열 것이 두려워서. 


- 호선을 둘러싼 이 소문들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이것이 진실인지 궁금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소문은 점점 더 빠르게 퍼져나갔다. 추문을 두고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는 호선의 태도가 이 기세에 불을 지폈다.

 

- 호선 강대호의 성정이 본디 그러했다. 무근지설(無想之說)을 두고 가타부타 입을 가벼이 놀리지 않았으며 또한 제 귀에 들어온 말을 가지고 함부로 뒷공론하지도 않았다. 그를 따르는 자들이 많은 것은 모두 이런 성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상사가 늘 그렇듯 모두가 그를 칭송하는 것은 아니었다. 제 편이 많은 호선은 그만큼 적도 많았다. 다만, 지금껏 그 누구도 직접적으로 그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곤란에 처하게 하는 이가 없었을 뿐이다. 이 또한 연유를 찾자면 따르는 자들이 많은 탓이었다. 엄밀히는 임금이 늘 그의 편이었기 때문이다.  

- "이대로 가만있는 것입니까?"
송골의 새로운 수령 박지순 영감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 모습에 민도식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저 반쪽이는 젊어서나 늙어서나 한결같이 주제를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박지순은 정통 송골이 아니라 송골과 보라의 피가 반씩 섞인 자였다. 핏줄과 뿌리를 중시하는 응족 사이에서 늘 배척받을 수밖에 없는 반쪽짜리. 그러나 그 집안이 대대로 송골 내에서 큰 권력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누구도 박지순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특히나 박지순의 부친이 이축선 이전에 송골을 이끌던 수령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 생각 끝에 강대호는 눈을 감았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감은 눈꺼풀 안으로 저를 찾아왔던 영선의 혼이, 그 애의 마지막 모습이 어룽거렸다. 
열 보쯤 떨어진 자리에서 단정히 인사를 올리던 영선은 호선이 손짓해 보아도 더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그저 애달피 웃으며 고개만 가로저었다. 성정이 온순하던 계집애는 살아서와 마찬가지로 죽어서도 요란한 울음소리 한 번을 내지 않았다. 호선을 향해 무어라 두어 마디 입을 벙긋거리기는 하였으나 그뿐이었다. 
애초에 영선의 혼이 하는 말을 호선이 알아들을 방도는 없었다. 호족의 재주가 본래 그러했다.
사령을 보고, 듣는다. 또한, 만약 그 사령이 악귀라면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멀리 쫓아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기실 저 세 가지의 재주 중 '듣는다'는 것에는 모순이 있었다. 혼이 흐느끼는 것을 듣고 그 기운이 악한 것인지 아닌지 정도는 쉬이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듣지 못했다. 삿된 것에 휘둘리거나 현혹되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 모든 재주는 성체가 된 후에야 온전히 얻을 수 있었다.

- 강대호는 다시 한 번한번 영선의 모습을 되새겼다. 급사했다던 아이가 예까지 찾아와 인사를 올리고 떠날 양이면 분명히 무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단 한 번도 허튼 행동은 하지 않았던 영선이었으니. 
그래, 나 또한 위험하다는 말이었겠지. 뇌까린 호선이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히 영선을 없앤 것 또한 민도식이 주도한 일일 것이나 직접 손대지는 않았을 것이다.
민도식이 누구의 손을 빌려 영선을 죽였을지 이 또한 빤했다. 그러니 다시 원점이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먼저 칠 것인가, 다가오기를 기다릴 것인가. 장수를 쓰러트릴 것인가, 장수의 말을 먼저 잡을 것인가.
강대호에게도 민도식에게도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갈 터였다. 그러니, 결국 이것은 시간 싸움이 될 것이다. 

- 누군가를 현혹하고자 할 때 가장 손쉬운 방법은 상대가 원하는 것을 내어주겠다는 약조를 하는 것이다. 약속을 꼭 지킬 필요는 없다. 모든 약속은 그저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내 편을 얻기 위한 방도일 뿐이다. 
민도식은 서로 다른 둘에게 같은 약속을 했다. 송골의 박지순과 보라의 박동석은 민도식이 자신에게만 이 은밀하고 달콤한 약속을 한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 말은 언제나 힘을 가진다. 몇 마디 말의 위력이란 것이 이토록 대단하다. 제 주제를 모른 채 갑신거리는 자와 야망은 드높으나 똑똑하지는 못한 자를 속이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었다. 부추기면 부추기는 대로, 흔들면 흔드는 대로 움직이는 박지순과 박동석이었다. 
검푸른 빛의 밤하늘이 아주 새까맣게 보이도록 무리 지어 날아오르는 송골과 보라의 모습은 가히 절경이라 할 만했다. 민도식은 사랑채의 문을 활짝 열어둔 채로 그 광경을 감상했다. 곧 자정이니 그다지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자신은 그저 해가 뜰 무렵에나 찾아가 상황을 정리하면 그만이었다.  

- [아이야, 내가 산 아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온 산에 피 내음이 진동하고 있었단다. 역한 피 냄새가 어찌나 속을 울렁이게 하던지. 나는 천천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단다. 부지런히 오르면 동이 트기 전에 닿을 수 있을 터였지.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어. 피 냄새가 짙어지는 방향을 따라 걷고 걷다 보면 여기도 하나, 저기도 하나. 걷는 자리마다 죽은 날짐승의 수가 늘어갈수록, 그것이 내가 길을 제대로 찾았다는 증거였으니. 
그래, 내가 지금 이런 모양이 된 것은 방심했던 탓이란다.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호족의 사내 둘은 이미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어. 그 아비와 아들, 둘 모두 비슷한 모양새였지. 호선의 식솔 중 그나마 멀쩡한 것은 계집뿐이었어. 뭐, 하지만 그마저도 그리 볼 만한 모양은 아니었단다.
그 셋 중 가장 먼저 숨이 끊어진 것은 호선의 아들이었단다. 남편이 죽자 아내는 단장이 끊어질 듯 울었지.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어. 제 목숨이, 또 제 뱃속에 있는 새끼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그래, 이쯤에서 너는 사람인 내가 어째서 이 존재들의 싸움에, 그들이 싸우는 자리에 제 발로 찾아갔는지 궁금하겠지. 
아이야, 나는 함정에 빠진 거란다. 나는 그저 사라진 내 물건을 찾으려 했을 뿐이야. 정말이란다. 그것을 되찾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어.]  
 
- [내게 주어진 기회는 단 한 번이었고 나는 그것을 놓칠 생각이 없었어. 하지만 늘 그렇듯 만사가 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지. 
나는 가만히 손끝에 힘을 주었단다. 그러자 늙은 수컷과 젊은 암컷, 호선과 그 며느리가 동시에 자신들의 마지막 힘을 짜냈어. 새끼가 어미의 배 밖으로 나왔지. 그리고 나는 짐승의 발톱 아래에 목이 눌린 신세가 되었단다. 곧 호선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저주였어. 명백한 저주였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이 된 바로 그것 말이다. 제 어미를 잡아먹고 태어난 호선의 마지막 핏줄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어. 그래, 예정보다 빨리 세상에 나왔으니 온 힘을 다해 스스로를 보호한 게지.
호족이든 응족이든, 힘이 없어 각성하지 못한 어린 짐승들은 으레 사람의 모습을 하는 법이거든. 그래야 사람들 틈에 섞여 살아가기 쉬우니까 말이야. 
내 숨이 꺼져가던 그 순간에, 나는 호선의 저주대로 어린 짐승을 떠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단다. 어린 짐승의 목에 걸린 방울 안이 당분간 내가 살아갈 곳이 되었지. 참 우습지 않누? 내 손으로 없애려던 생명을, 이제 내 손으로 지키게 생겼으니 말이야.]

- [아이야, 내 마지막 순간에 나는 똑똑히 보았단다. 나의 오라버니께서 늙은 수컷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는 것을. 식은 내 몸뚱이를 붙들고 한참을 울던 사내가 방울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내 혼을 보며 눈물을 멈춘 것을. 그리하여, 미약한 소리로 울고 있는 어린 핏덩이를 품 안에 안아 드는 것을. 언제나 나를 사랑하던 사내의 검은 눈동자가 더욱더 깊게 가라앉는 것을.] 

- [아이야, 나는 짐승의 발톱에 목이 졸려 죽었단다. 내 숨통을 향해 파고든 발톱의 기세가 어찌나 대단한지. 그래, 꼭 잘 벼린 칼날 같더구나. 
그렇게 내가 죽었단다.
그렇게, 네가 태어났단다.]

- 늦은 밤, 무영과 해랑이 돌아간 후에도 수환은 주혁의 집무실에 남아 있었다.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주혁 혼자서만 은밀히 조사하던 사건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이 누군가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음이 분명했다. 그 사건이 무엇일까. 사건과 관련한 것들을 주혁은 어디에 숨겨두었을까.
주혁의 오랜 습관들을 모두 꿰고 있는 수환이다. 스스로의 감을 믿고, 그래서 다소 직관적으로 행동이 앞서는 저와는 달리 주혁은 매사에 논리를 모두 따져 물은 후에야 행동에 나섰다. 확신하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았으며, 확신을 위해 자신이 마주하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그러니 분명히 어떤 기록이나 자료가 존재할 것이었다. 
잠시 서성이던 수환은 주혁이 늘 앉는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러고는 앉은 자리에서 보이는 모든 것을 하나하나 아주 천천히 눈에 담기 시작했다. 

- 짧은 순간 주군과 신하의 눈길이 정확히 마주쳤다.
"어찌할 텐가, 나와 거래를 할 텐가?"
묻는 투로 말했지만 대답을 요하는 말이 아님을 두 사람 모두가 알고 있었다. 목울대가 울리도록 마른침을 밀어 삼킨 수환은 결국 "예"하는 대답을 되돌렸다. 맺혀 있던 식은땀이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감각이 선명했다. 

- 해랑이 빈집을 혼자 지키는 것은 처음이었다. 좌포청을 나선 후 선전으로 향하던 길, 멀리서 손을 흔드는 정 행수를 보며 곤란한 듯 미간을 접던 무영은 저를 먼저 집으로 돌려보냈다. 마치 잊고 있던 무언가를 기억해 낸 듯 난감해하던 그의 표정을 해랑은 곱씹고 또 곱씹었다.
툇마루에 앉아 해랑은 가만히 제 무릎을 끌어안았다. 밤공기 속에서 우는 벌레 소리와 이따금 이는 바람에 나뭇잎이 팔랑이는 소리 사이에서 저더러 '아가'라 부르던 여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꿈이었을까.
배우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해랑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무영에게 늘 묻고 또 물었다. 귀찮은 기색 한 번 없이, 단 한 번도 대답을 게을리하지 않던 제 스승은 이번에도 답을 줄까. 소화라는 이름을 아느냐고 물으면, 그는 뭐라고 대답할까. 
마당 안으로 달빛이 들 때, 해랑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꿈을 꾼 그날 이후 한결 예민해진 감각들이 정말 우연일까. 


- 마당을 서성이던 달빛이 툇마루를 밟고 올라섰다. 그 결에 마당으로 어룽진 제 그림자가 어떤 모양을 했는지 해랑은 미처 알지 못했다.

- 이른 아침. 의금부 문턱을 넘던 주혁의 입가로 마른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누가 보면 내가 아니라 자네가 문초를 받았다 하겠군."
농을 거는 주혁의 말에 수환이 내내 접고 있던 미간을 펴고는 으쓱 어깻짓을 했다. 잠시 마주 선 채로, 주혁은 제 친우의 낯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정말로 어디서 잔뜩 시달리다가 온 사람마냥 수환의 얼굴은 하루 새에 핼쑥해져 있었다. 작게 혀를 찬 주혁이 입매를 굳혔다. 수환의 낯이 저 모양인 이유를 모를 만큼 주혁은 눈치 없는 사내가 아니었다.
내내 말이 없던 주혁은 제 집무실에 도착해서야 입을 열었다.

"왜 그랬어?"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주혁의 말속에는 약간의 질책이 섞여 있었다. 

"내가 뭘?"
"모른 체할 텐가? 붙잡혀 갈 때보다 더 갑작스럽게. 게다가 아무런 처분도 없이 풀려났는데 그게 자네 덕이 아니라고?"
"내 덕인 줄 알면 앞으로 잘하든지."
제법 날카로운 주혁의 말에도 수환은 대수롭지 않은 태도를 고수했다. 그것이 못마땅한지 주혁이 느릿한 손길로 눈가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 "첩선, 초피, 채라."
"뭐?"
"국법으로 금한 물품들이 어째서 천변 장물아비들 사이에 돌아다니느냔 말이야. 그것도 엄청나게 많은 양이. 그리고 최 씨 무리를 누가 죽였을까? 내게 뒤집어씌우려 한 것을 보면 내가 이들의 코앞까지 좇아왔다는 것을 아는 모양인데..." 

주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리저리 늘어진 증좌들, 사건은 잡힐 듯 말 듯하며 자꾸만 그의 손을 빠져나갔다. 마치 모래 같았다. 움켜쥐려 하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체념해 손을 털면 떨어지지 않고 손이며, 옷이며,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던 주혁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수환 또한 한참이나 입을 닫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 같았다면 벌써 뭔가 단서가 될 만한, 주혁이 놓치고 지나간 것들을 꼬집어내고도 남았을 텐데. 어쩐 일인지 수환의 낮은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혁아."
심각한 품새와는 다르게 수환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그래서 주혁은 조금 겁이 났다. 수환이 저를 이런 식으로 부를 때에는, 언제나 예사롭지 않은 일들이 뒤따랐음을 체득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 일을 캐는 건 이만 접는 게 좋겠다. 그렇게 하자."

- 수환은 한바탕 대거리를 하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자꾸만 거친 손길로 벅벅 마른세수를 해댔다. 제법 침착한 체했던 처음의 태도는 말 그대로 그런 체했을 뿐인 것이 자명해 보였다.
평소 같았다면 수환에게 무른 주혁이 이쯤에서 먼저 굽히고 들어갔을 것이나, 오늘은 달랐다. 일이 일인지라 더욱 그랬다.
주혁더러 양 포청의 보살이라느니,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느니 하는 것은 그를 잘 모르는 치들이나 하는 말이었다. 수환은 속으로 혀를 찼다. 융통성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을 수가 없는 데다가, 또 고집은 얼마나 센지 수환쯤이나 되니 아는 주혁의 성미였다. 그러니 이번에는, 아니, 수환의 주장대로라면 '이번에도' 먼저 백기를 드는 것은 수환일 수밖에 없었다. 
"지난밤, 그분을 뵈었어." 

- 여상한 수환의 태도에 주혁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하지만 주혁이 그러거나 말거나 그를 바라보는 수환의 눈길은 여전히 평온했다.
"그러니까, 이쯤 하자."
달래듯 이어진 수환의 말에 주혁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주혁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쯤에서 손에 묻은 모래알갱이들을 모른 체하며 씻어낼 시간이 된 것이었다. 

- 대답을 마친 종주가 방을 나섰다. 떠나는 수하의 뒷모습을 볼 새도 없이 대군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의 손끝은 서안 위를 일정한 간격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불편한 감각이 자꾸만 대군의 뒷목을 잡아당겼다. 사소한 듯 지나가는 이 일이, 후에 기어이 누군가의 발목을 잡을 것을 예감하는 대군이다. 언제나 그렇듯 불안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법이다. 

- 시장 뒷골목. 주점이 늘어선 거리는 늘 그렇듯 떠들썩했다. 가게마다 주점임을 알리려 달아놓은 등불 덕에 골목 안이 대낮처럼 훤하니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모두가 잠든 시간이었지만 이 거리를 오가는 이들에게 밤은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밤바람에 주점 앞 등불이 작게 흔들렸다. 작은 술집 마당, 평상 위에 앉아 술상을 받은 박 씨는 그 모양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술잔이 두 개, 숟가락 젓가락도 두 쌍. 그러나 박 씨의 앞자리는 비어있었다. 
소삭하게 이는 밤바람에서 잘 여문 과실 내음이 나는 것을 보니 완연히 가을인 모양이다. 밤바람에 기대어 박 씨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눈꺼풀마저 닫아 내리니 골목 안의 요란한 소리가 멀어지는 듯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마당 안에 촘촘하게 진 나무 그림자 위로 길게 인영이 어룽졌다.

- 바람발이. 박 씨의 오랜 친구는 단 한 치도 변한 것이 없었다. 이치의 천성이 그러했다. 손해를 보고도 허허 웃어버리고 마는, 약은 구석은 눈 씻고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는 사내. 어찌 보면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이 거리에서 나고 자란 사내들의 삶이 그렇듯 바람발이의 생 또한 그리 녹록지는 않았다. 그것은 박 씨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참으로 기이하게도 바람발이는 마치 제 삶이 단 한 번도 팍팍했던 적이 없는 것처럼 늘 무사 순탄한 삶을 살았던 것처럼 굴었다. 
한 번에 술잔을 털어내고 나니 바람발이가 또다시 박 씨의 술잔을 채웠다. 한 잔. 또 한 잔. 두 사람은 밤공기 사이로 스미는 생의 소리들을 안주 삼아 연거푸 잔을 비워냈다. 이렇게 보니 벗이라는 것이 참으로 오묘한 관계란 말이다. 말없이 기울이는 술잔이 어색하지 않았으니 그저 마주 앉아 있음에 위로가 되는 것이니. 

- 박 씨는 연신 중얼거리며 또 한 잔을 채웠다.
"... 그래서 약조를 잊었다는 말인가?"
바람발이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 사내들 중 하나가 스쳐 가며 해랑의 오른쪽 어깨를 툭 밀쳤다. 그러고는 퍽 껄렁거리는 품새로 고개만 까딱여 미안한 체했다. 그 후로 두어 걸음. 기어이 해랑이 발길을 멈추었다. 그 기척에 무영이 돌아보았다.
"어찌 그래?"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해랑이 무영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벌써 저만치 달음박질로 멀어지는 해랑의 머리꼭지를 바라보며, 무영 또한 뛰기 시작했다. 

 

- "별일 아닙니다.”
무영의 부름에 해랑이 얼른 돌아서고는 생긋 웃어 보였다. 손에는 아침나절 무영이 쥐여준 향낭이 들려 있었다.
두 사람 사이로 잠시 정적이 일었다. 무영의 시선은 해랑의 손으로, 해랑의 시선은 그런 무영에게로 엇갈리는 시선을 따라 마음 또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다치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해랑이 말간 얼굴로 또 한 번 웃어 보이며 무영의 곁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섰다.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가까워졌다가 이내 무영을 스쳐 지나갔다. 두어 걸음이나 걸었을까. 돌아보지 않은 채로 해랑이 무영을 향해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요?"
 
- 말을 마치자 골목 안으로 작게 바람이 일었다.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무영이 해랑을 향해 돌아섰다. 바로 얼마 전 어느 날처럼, 이는 바람에 해랑의 귓가에서 머리카락 몇 가닥이 꽃잎 팔랑이듯 하느작거렸다. 무영은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조했다. 바람에 요동치는 것이 해랑의 머리칼인지, 제 마음인지 알 길이 없었다. 아니다. 기실 알고 있으나, 또한 알고 싶지 않았다. 속으로 한숨을 삼킨 무영이 해랑의 어깨를 한 번 꾹 잡았다 놓고는 이내 앞서 걷기 시작했다.

 

 

- 날 때부터 지니고 있었다던 신묘한 방울은, 어느 날부터 혼을 보고도 울지 않는 대신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휴, 정말... 아씨는 잠도 없으셔요? 지금이 한밤중이라는 건 아십니까?"
해랑이 작게 속삭였다.
"귀신한테 밤낮이 어딨니? 이렇게 축시가 넘어갈 때쯤이 귀신들이 활개치기 제일 좋은 시간이라는 것도 모르니?"
소화의 대꾸에 해랑이 "어휴" 하며 가슴팍을 툭 쳤다.
"저도 좀 자야 할 것 아니에요!"
해랑이 퉁명스레 대꾸하며 눈을 감았다. 옆방에 있는 무영의 숨소리를 좇는 것이다. 깊이 잠든 무영의 고른 숨소리를 확인한 해랑은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벽 너머로 무영의 모습이 보이기라도 하는 듯이 가만히 눈을 뜨고 어둠 속을 응시했다. 
"가끔 그림자가 이상해요."
해랑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 "그것 말고, 또 다른 재주가 있는지 묻는 거란다."
소화의 말에 해랑이 음, 하며 고민하는 기색을 했다.
"잘 모르겠어요. 전 그냥 하던 대로 하는 건데요? 달리고 보이고 들리고 냄새 맡고 하는 것들 말예요. 그런데 사람은 다 눈도 귀도 코도 달려 있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잘 들리고 잘 보이는지 그 정도를 제가 알 수 없는데, 이런 걸 재주라고 할 수 있을까요?" 

- "배우지 않은 것을 아는 재주는 제게 없습니다."
해랑은 소화더러 들으라는 듯 한숨을 쉬며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제 배움은 모두 스승님으로부터 옵니다."
"오라버니께서 말해준 것이 아니니 내 말은 믿을 수 없다?"

빈정대는 소화의 말투에 해랑이 대답 없이 이불을 움켜쥐었다.

 "그럼 오라버니께 어째서 묻지 않는 거니? 내가 누군지, 네가 누군지, 왜 널 거뒀는지, 왜 네가 그렇게 달음질이 빠른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큭큭거리는 소화의 목소리에 해랑은 눈을 감았다. 목소리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저를 비웃는 얼굴도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든 탓이다.
"그럼, 오라버니가 하는 말은 다 믿을 수 있니? 무슨 말을 해도?"

- "그라지 말고 야도 데리고 가랑께 야 말마따나, 그 아짐이 야한테 부탁을 했응께 얼굴은 비쳐야제."
중재하는 정 행수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무영이 이마를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먼저 선전을 나섰다.
좌포청을 향해 가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 흘렀다. 포청이 지척으로 다가왔을 때 해랑이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스승님."
돌아보는 무영을 향해 해랑이 향을 내밀었다.
"돌려 드리겠습니다."
무영은 대답 없이 해랑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것 때문에 머릿속이 너무 시끄럽습니다."
별다른 동요 없이 해랑의 말을 듣고만 있던 무영이 이내 손을 뻗어 향낭을 집어 들었다. 아주 잠깐, 향낭을 들여다보던 그는 이내 그것을 품 안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던 해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될 거예요."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롭니다. 스승님께 쓸모 있는 사람이 될 거라고요."
해랑의 눈가로 투명하게 막이 차오르자 무영은 속으로 한숨을 흘렸다.
쓸모 운운하는 것을 보니 선전에서의 일을 두고 이러는 모양이었다. 남아 있으란 말이 이렇게 울 정도로 서운한 말인가 싶다가도 막상 해랑의 눈이 그렁그렁한 것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이미 충분하다."

- "그래. 내 언제 네게 허튼소리 한 적이 있었어?"
해랑이 고개를 저어 제 볼을 감싸 쥔 무영의 손을 털어냈다.
"정말로, 정말 지금으로 충분하다는 말씀이지요?"
"그래. 충분하다."
한숨 섞인 무영의 대답에 해랑이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한 번 꾹 누르고는 포청을 향해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 "이토록 사령이 많이 떠도는 동네는 처음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해요."
"나는 보고 들을 수 없는 것들이니 네가 그리 말하면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구나."
"형체가 없습니다."

- "연기처럼 희끄무레합니다. 척 봐도 둘 이상인 듯하게 무리 지어 있기도 하고, 또 하나이기도 하고... 그것도 온 마을에 말이에요."
"아직 해가 다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말이냐?"
산을 넘어가는 해를 보며 주혁이 물었다.
"이렇게 해가 기울 때 음과 양의 경계가 가장 흐려집니다. 이승의 시간도, 저승의 시간도 아닌 때거든요."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는 해랑에 주혁이 놀란 눈길을 되돌렸다. 그러자 해랑이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역시 좀 이상하긴 합니다."
해랑은 말끝에 이마를 긁적이다가 이내 가슴에 매달린 방울을 만지작거렸다.
"시구문이 지척인 마을이라 그렇다."
어느새 다가온 무영이 해랑을 향해 말했다. 그는 해랑의 손끝을 흘끗 보더니 곧 주혁을 향해 말을 이었다.

- 주혁이 검험소로 들어서며 묻자 공 씨가 대답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 씨의 반응에 주혁은 작게 혀를 차며 시신을 향해 다가섰다. 시신은 네 구. 넷 모두 대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듯한 아이들이었다.
"검험은 마쳤습니까?"
무영이 해랑과 함께 검험소 문턱을 넘으며 물었다. 이제 막 첫 번째 시신을 살피던 주혁이 고개를 들어 두 사람에게 알은체를 했다.

"네 아이 모두 아사(餓死)했습니다요."

- 이제 무영의 차례였다. 대체 이 아이들에 대한 정보를 어디서 얻었는지, 또 사라진 상엽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털어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무리 지어 다니며 빌어먹는 아이들은 나이가 많아봐야 열대여섯입니다. 나이가 차면 무리를 떠나게 되는데, 그 아이들이 어디로 가는 줄 아십니까?"
"그야 당연히..."
무영의 물음에 주혁이 말끝을 흐렸다.
"예. 맞습니다. 천변 깍쟁이 토굴로 가거나 성문 밖으로 가지요. 왈패짓을 하자면 성문 밖 난전거리만큼 좋은 곳도 없으니까요."

- "이런 아이들이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 보통의 또래보다 발육이 더딜 것을 감안하면 넷 모두 많아야 예닐곱 살쯤 되었을 텐데, 혼자서 무리를 이탈해 살아갈 방도를 찾기에는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예. 누군가 이 아이들을 꾀어낸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먹을 것으로 유인한다... 그런데 결국은 굶어 죽게 한다. 제법 익숙한 이야기인데요. 제 예상이 맞습니까?"
주혁의 물음에 무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확인한 주혁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 산이라기엔 작고, 언덕이라기엔 너무 큰 이 희한한 산은 초입에서부터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주변을 기웃거리는 사람이 없으니 더욱 그랬다. 시구문이 지척인 탓이다. 또한 산 아래에서도 훤히 보이는, 버려진 신당 탓이기도 했다. 
한때는 도성 사대문 너머의 무당들 중 이름깨나 날린다는 이들은 죄 모여 지냈던 곳이라 거짓말을 조금 보태자면 걷는 걸음마다 하나씩 신당이 있었다. 그 탓인지 이 이름도 없던 산은 언젠가부터 무당산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지니 음침한 기운이 한층 짙어졌다. 멀리 부엉이 우는소리에 상엽은 몸서리를 치며 제 무릎을 더욱 단단히 껴안았다.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튀어나와 목덜미를 확 움켜쥘 것 같았다. 

- "그만두세요. 곧 사람들이 올 것입니다."
차가운 투로 말하는 해랑을 향해 여인이 픽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웃음소리인지, 쇳소리인지 분간하기 힘든 소리를 내며 자꾸만 해랑과 상엽을 향해 다가왔다. 입에서, 또 눈과 코에서 빗물 새듯 줄줄 흐르는 핏물이 여인의 움직임을 따라 붉게 자국을 남겼다. 여인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신당 안에 걸어둔 방울들이 쩔렁거리며 소리를 내고 깃발들이 춤을 췄다. 
기괴하고 소란한 그 광경 속에서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은 해랑과 상엽, 그리고 해랑의 방울뿐이었다. 여인의 손이 해랑의 신발 끝에 닿았을 때, 그제야 여인은 앞으로 나아가던 것을 멈추었다. 마지막까지 미련을 놓지 못한 손끝이 해랑의 발치에서 조금 바르작거리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움찔거리던 모양 그대로 굳은 듯 움직임을 멈췄다. 

- 요란하게 울며 날뛰던 신당 안의 방울과 깃발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고요 속에서 들리는 것이 저와 상엽의 숨소리뿐이라, 해랑은 여인의 신이 떠났음을 직감했다.

- "너는 도대체...?"
나직하게 말하는 무영에 해랑은 대답 없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무영의 시선은 해랑의 바지춤에 붙들려 있었다. 아이들을, 또 상엽을 태주삼아 새타니가 되려던 여인이 잡아쥔 자리였다.
단 한 번, 숨이 꺼져가기 직전 온 힘을 다해 쥔 바로 그 자리가 마치 낙인처럼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주혁과 그 수하들이 피운 횃불로 대낮처럼 훤한 숲에서 일렁이는 불길들이 해랑의 바지춤을 붉게, 또 노랗게 물들이는 와중에도 아주 선명하게 제 존재감을 드러내는 핏자국이었다. 

 

- "다치지 않았습니다. 제 피가 아니에요."
힘없이 중얼거린 해랑이 무영과 눈을 맞췄다.
"어째서, 어째서 제가 다칠까 신경을 쓰십니까?"
묻는 목소리에 설움이 묻어났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해랑의 태도에 무영이 당황한 기색을 했다. 두 사람 모두 평소 같지 않은 태도였다.
"어째서 제 달음박질이 스승님보다 더 빠른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으셨습니까?"
해랑은 평정을 가장하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떨리는 손끝이 들킬까 꽉 움켜쥔 손바닥에, 길지도 않은 손톱이 파고들듯 자국을 남겼다.
"어째서 제가 남들보다 더 빨리 자라나는지, 몸에 난 상처가 어째서 그렇게 빨리 아무는지. 정말로 이유를 모르셔요?"
애써 태연한 체하던 것이 무색하게도 말끝에 기어이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계집애는 얼른 손을 들어 그것을 닦아냈다.
"왜 저를 곁에 두십니까? 제가...?"
말에 섞이는 울음소리에, 해랑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막아놓은 둑이 터지듯,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달래는 말도, 혹은 어떤 변명도 없이 무영은 가만히 해랑을 끌어안았다. 그의 품 안에서 계집애의 훌쩍이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 여인의 손이 해랑의 신발 끝에 닿았을 때, 그제야 여인은 앞으로 나아가던 것을 멈추었다. 여인은 해랑의 발목 언저리를 먼 이야기 속 호랑이가 동아줄을 잡듯 꽉 잡아챘다. 
해랑의 발목을 붙들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듯하던 여인이 별안간 작게 노랫가락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일각 전 해랑이 숲에서 들었던 바로 그 노랫소리였다. 기이하고 섬뜩한 광경에 해랑은 미처 여인의 손을 피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잠시 흥얼거리던 여인이 해랑을 향해 눈을 치켜들었다.  
"네 욕심이 셋 모두를 지옥으로 이끌겠구나."
마치 해랑을 놀리듯 여인은 선명하고 정확한 투로 말을 이었다.
"불쌍한 계집이 하나, 사람이 아닌 계집이 하나, 미련한 사내가 하나."
그제야 해랑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제게 달라붙은 여인의 손을 털어내듯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에 여인이 피식 웃고는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퇴물이 되었을 리가 없지. 그렇지."
그것이 끝이었다. 그것이 여인이 살아 내뱉은 마지막 말이었다.

- 마지막까지 미련을 놓지 못한 여인의 손끝이 해랑의 발치에서 조금 바르작거리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움찔거리던 모양 그대로 굳은 듯 움직임을 멈췄다. 요란하게 울며 날뛰던 신당 안의 방울과 깃발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고요 속에서 들리는 것이 저와 상엽의 숨소리뿐이라, 해랑은 여인의 신이 떠났음을 직감했다.

 

- "그래, 매사에 조심스러운 그 성정이 달리 어디 가겠는가?"
임금이 혀를 차며 혼잣말 같은 소릴 했다. 이에 민도식이 변명하며 황급히 대답했다.
"하지만 미끼는 확실히 물었으니 곧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허수아비는 제대로 세운 게요? 의심이 많고 조심스러운 성경이라 자칫하면 역으로 덜미가 잡힐 수 있단 말입니다."
"아닙니다. 확실히 그 어느 정보통을 이용해도 배후를 알 수 없을 만한 자를 내세워두었으니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줄곧 신경질적인 임금의 태도에 민도식의 뒷덜미 위로 찔끔 식은땀이 새어 나왔다. 젊은 임금의 성정이 이처럼 불같은 것이야 늘상 있는 일이라 이미 이골이 날 대로 난 민도식이었으나, 오늘의 대화는 주제가 주제인지라 그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자칫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그간 쌓아온 모든 것이 죄 소용없어질지도 몰랐다. 주군의 침묵에 민도식은 덩달아 입을 다물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임금은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대체 그 비본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기에 휘가 그렇게 공을 들이는 것이오? 그 녀석이 어디서 그런 물건이 났을꼬?"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저는 내용을 모릅니다."
"내용을 모른다? 천하의 응선이 모르는 것도 있다는 말인가?"
임금이 답지 않게 놀란 기색을 했다. 아니, 어쩌면 빈정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라 안에 그 비서의 내용을 아는 자가 아예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비문으로 되어 있어, 그것을 취한 무영 대감조차 그 내용을 해독할 수 없으니 해독할 만한 이를 찾느라 이리저리 줄을 대는 것입니다."

- 무영이 지녔다는 비서는 삼 년 전 죽은 호선의 물건이었다. 어떤 연유로 무영이 그것을 해독하려 용을 쓰는지 짐작하는 바가 없지 않았으나, 민도식은 모른 체 입을 다무는 쪽을 선택했다. 그 책이 정말 쓸 만한 물건일지도 모른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무영에게 쓸모가 있는 물건이라면 제게는 위험한 물건일 수도 있었다. 다행히 임금은 물건의 출처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는 민도식을 향해 임금이 말을 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휘보다 먼저 그 내용을 알아내야 합니다. 평생 물욕이라는 것은 알지도 못하던 녀석이 그토록 집착하는 물건이라면 분명히 뭔가 있을 겁니다."
"예. 은밀히 행하고 있으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허, 무엇이든 빠르다는 그대가 이렇게 쩔쩔매는 것을 보니 정녕 보통 물건이 아닌 게로군. 어쨌든 수하들에게 조심하라 이르세요. 의심도, 조심성도 많은 녀석이니."

- 진원대군의 입가에 다시금 얕은 웃음이 스쳤다. 그것을 확인한 무영이 대군과 비슷한 모양새로 입술 끝을 당겨 웃었다. 두 사람 모두 곤란한 체할 때나 짓는 표정이었다. 서로가 알고 있는 형제의 유일한 닮은 구석이었다. 

- "예. 맞습니다. 이런 옅은 물빛 시전지를 쓰는 이는 널리고 널렸지요. 왕가의 식솔은 물론이고 고관대작들 사이에도 말입니다."
무영은 말을 멈추고 대군의 눈을 바라보았다. 은근하게 미소 띤 형제의 낯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번에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내색하지는 않은 채로, 무영은 재차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전지의 바탕과 유사한 색으로 문양을 꾸미는 이는 없습니다. 물색 종이 위에,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색으로 마치 정말 물이 번져 저절로 생기기라도 한 것마냥 문양을 내는 것 말입니다."
무영이 말을 마치자 내내 생글거리고 있던 대군이 조금 더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내 웃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수색으로 그린 모란이라... 이런 시전지를 쓰는 이는 나라 안에 단 한 사람뿐이지요. 다시 여쭙겠습니다. 형님께서는 제가 쓰는 이 시전지를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제가 근자에 형님께 저도 모르는 서신을 보낸 적이 있던가요?"
무영을 향해 물으며 대군이 서안 위에 놓인 시전지를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그 결에 귀퉁이가 그을린 물빛 종이가 가볍게 팔랑거렸다.
"서린방 일대 화재 현장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대군은 과장된 품새로 웃음을 흘렸다. 그 태도에 무영이 입을 다물자 둘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죽었습니까?"
대군이 물었다.
"무예에 능한 사내더군요. 칼에 익숙한 손이었습니다."
"죽었군요."
대답을 피하는 무영이었으나 대군은 용케도 알아들은 모양이다. 

"대감의 사람입니까?"
"대답해야 합니까?"
대군이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나 무영은 개의치 않는 듯 말을 이었다.

- "업보지요. 괴괴한 소문을 따라다니는 것만큼 저와 어울리는 일이 또 있습니까?"
무영이 설핏 웃으며 대꾸했다. 곧 껄끄러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한참 날이 선 말이 오가던 것이 무색하게도 형제의 눈은 이내 같은 빛을 띠었다. 제 처지에 대한 체념이 짙게 묻어 있는 눈으로, 두 사람은 결국 서로를 향해 헛헛한 웃음을 흘렸다.  
 

- 주혁은 말끝에 난감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글쎄요. 외부인이 반촌에 숨어드는 것은 촌부가 궁문을 넘는 것만큼 어려운 일 아닙니까?"
"범인이 '반인'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주혁의 물음에 무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범인이 이 주변 방각소에서 버리는 종이를 주워 괘서를 썼다 해도 그 양에 한계가 있습니다. 용케 절반쯤은 그런 식으로 종이를 구했다 하더라도 나머지 절반은 어디서 구했을까요? 게다가 범인은 어쭙잖게나마 문자깨나 쓰는 이의 흉내를 내고 있지 않습니까? 성균관에서 잡역을 하는 반인들 중 언문에 능한 자들이 있으며, 그런 자들 대부분이 유생들의 개인적인 일을 봐주고 이런저런 이득을 취한다는 것쯤은 종사관께서도 이미 아실 텐데요." 
"하지만 대감께서도 아시다시피 금란(禁亂)도 미치지 못하는 곳이 반촌입니다."
"들어갈 방법이 영 없는 것도 아닙니다."
(저자 주 : 소나무 벌채 금지, 임의적 도살 금지, 양조 금지를 금란이라고 한다. 반촌은 포교가 출입할 수 없는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이기 때문에 금란을 어긴 범인이 반촌에 들어가면 더는 추적할 수 없었다.)

- "어찌 오셨소?"
무영이 반촌 현방(懸房) 앞에 서자 주인 고 씨가 물었다. 대답 없이 빙긋 웃기만 하는 무영이 못마땅한 듯 고 씨는 짧게 혀를 차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팔척귀신이 도성으로 돌아왔다는 소문이 돌기에 그런가 보다 했지. 예서 볼 일이 있을 줄은 몰랐구먼."
고 씨가 쥐고 있던 칼을 고깃덩어리 위로 거칠게 꽂아 넣었다. 그러고는 반으로 갈라진 고깃덩이 중 하나를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본디 반촌 안의 것은 물건이든 사람이든 그 어느 것도 밖으로 내돌리지 않는다는 걸 대감께서도 아실 텐데요."
"아직 저는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무영이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에 고 씨가 반촌 경계 너머를 흘끗 보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어째서 저 종사관 나리와 함께 오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는 것이 없소이다. 나뿐이 아니라, 반촌 그 누구를 붙잡고 물어도 원하는 대답은 못 들으실 겁니다."
"그렇습니까?"
무영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자, 가지고 가십쇼."
고 씨가 갈무리하던 고깃덩어리를 내밀었다.
"명철방 권 객주 댁에 전해주십쇼."
무영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군말 없이 돌아서는 무영의 등 뒤에서 고 씨가 속삭이듯 말을 덧붙였다.
"이걸로 지난날 대감께 진 빚은 다 갚은 겁니다."

- 무영이 떠난 후, 해랑은 여태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두 사람의 태도에 답답증을 앓을 법도 하건만 정 행수 또한 이러쿵저러쿵하는 일 없이 입을 다물었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저자를 떠도는 말들 중에는 불이 난 기루로 뛰어들었다던 누군가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캐묻지 않아도 무슨 일이 있었을지 정 행수의 눈에도 훤했던 것이다
이런 정 행수의 심사를 어지럽히는 것은 단 하나. 기이하게도 빠르게, 벌써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는 해랑의 생채기뿐이었다. 
저와 무영 이외에 또 다른 누군가가 이런 해랑을 알아챌까 싶어, 정 행수는 몇 번씩이나 선뜩해지는 뒷목을 자꾸만 쓸어내렸다.

- "좌포청에서 화소사로 결론지었습니다."
"형님께 퍽 편리한 친우가 생겼군요."
설핏 웃으며 하는 대군의 말에 무영의 미간에 옅게 주름이 졌다. 그 모양에 대군이 재차 말을 이었다.
"아니, 감사하다는 뜻입니다."
"글쎄요, 최 종사관께서는 그자의 최종 사인이 화소사이기에 화소사라 보고를 올린 것일 뿐입니다. 어떤 연유로 그자가 불길에 던져졌는지, 납득할만한 이유를 알 때까지는 최 종사관도, 저도 그자에 대한 수사를 중단할 생각이 없습니다."
"제 뒤를 캐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지난번에는 대감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무영의 말에 대군이 말없이 이마를 짚었다. 잠시 이마를 문지르던 대군이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어느 쪽이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만."
"예. 그러셨지요.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이후로, 대감께서는 그자와 관련된 수사에 대해 그 어떤 정보도 얻으실 수 없을 겁니다."
무영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 무영이 떠난 후,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대군이 서안 위에 시전자를 펼쳤다. 옅은 물색 바탕 위에 같은 색으로 희미하게 모란이 그려진 시전지위로 검은 글씨 몇 마디가 빠르게 새겨졌다. 서찰을 전하는 이도, 받을 이도 그리 달갑지는 않을 말을 새긴 채로 대군은 한참이나 먹이 지나간 자리를 바라보았다.

- 소나무처럼 살자 약속하고 

사모하는 정 바다처럼 깊었건만 

강남에서 날아오는 소식은 끊기고 

깊은 밤 홀로 마음만 태우는구나

(<故人>, 이매창(1529~?), 한역: 김이삭)

- 서찰을 손에 쥔 노인이 낮을 잔뜩 구기며 헛웃음을 흘렸다. 언뜻 정인의 연서 같은 서찰의 내용이 실은 저를 비난하는 뜻임을 아는 까닭이다. 저가 아는 이들 중 이처럼 비밀리에 서찰을 두고 갈 수 있을 만한 수하를 둔 인물은 서넛쯤 되었으나 이와 같은 내용을 보낼 만한 이는 단 한 사람이었다. 원수를 노려보듯 애꿎은 서찰을 노려보기를 잠시, 서안 옆에 있는 작은 화로에 서신을 던져 넣자 물색의 종잇장은 금세 까맣게 재가 되었다. 

- 노인은 잠시 서안 위를 훑어보다가, 한편에 놓인 가죽 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붉은 주머니를 열어 기울이자 그 안에서 장기알처럼 생긴 것이 굴러 나왔다. 손바닥 위에 올려진 작고 둥근 금속을 이리저리 살피던 그는 그것을 가만히 귀에 가져다 댔다. 
일정하게 울리는 작은 소리에 한 번, 금빛으로 번쩍이는 겉모양에 또 한 번 자꾸만 움푹 패는 입가를 감추지 않은 채 노인은 엄지 끝으로 뒷면에 작게 튀어나온 자루를 눌렀다. 곧 둥근 것이 반으로 갈리고, 노인의 사랑방 안에 조그맣게 소리를 남겼다. 연달아 열두 번. 또 잠시 후에는 두 번, 둥근 것이 비명처럼 낸 소리를 마지막으로 노인의 사랑은 이내 고요에 휩싸였다. 

- "무슨 독인지는 모르겠고?"
"예. 시신에 푸르게 변한 곳들이 일정치 않고, 은비녀 또한 큰 반응이 없어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독에 대한 반응이 미미하기는 하나사인으로 여길 만한 다른 징후 또한 없어 검험소로 가 복검을 해야 알 일입니다."

- 벌써부터 집 안에는 곡소리가 가득했다. 사랑 앞마당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시종들을 바라보며 수환은 속으로 혀를 찼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평시서 제조 송종오의 죽음이 곧 도성 안을 떠들썩하게 할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탓이었다. 범인을 색출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송 제조에게 원한을 품을 만한 자가 도성 안에 널리고 널렸음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중에는 대놓고 그 이름이 오르내리며 저자에 소문이 짜하게 난 자들도 있었다. 지끈대는 이마를 쓸어내리며 수환은 대문턱을 넘었다. 지난한 사건이 될 듯한 예감이 들었다. 

- "어디, 똥강아지 상처는 아물었어?"
단숨에 다가간 수환이 해랑의 턱 끝에 손을 올리고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스승님께서 잠시 자리를 비우셔서 제가 먼저 왔습니다. 정수 어르신께서 말씀 전한다 하셨어요."

"그래, 그런데 벌써 소식이 전해진 모양이구나."
무영이 굳은 얼굴로 막 포청 문턱을 넘는 중이었다.
여태 해랑의 볼을 주물럭거리던 수환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거참, 어찌 이리 속을 숨기지 못하실꼬. 꼭 이런 때만 말이야.'

속엣말을 한 수환은 해랑을 붙잡고 있던 손을 거뒀다. 그러고는 슬쩍 해랑의 어깨를 감싸며 검험소를 향해 떠밀었다. 
"자, 가서 복검을 어찌하는지 봐야지?"
검험소 문턱을 넘으며 수환은 기어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살아온 이래, 이리도 뒤통수가 따가웠던 적은 또 없었을 것이다.

- 해랑이 허리를 숙여 탁상 위에 놓인 물건을 향해 고개를 들이밀었다. 장기알만 한 그 물건을 집어 올린 수환이 익숙한 듯 물건을 반으로 갈라 열었다.
"문시종(問時鐘)이군요."
물건을 알아본 무영이 말했다.

 

- 어쩐지 뾰족한 무영의 대답에 수환의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말려 올라갔다. 눈에 띄게 치솟는 무영의 왼 눈썹을 보고도 수환은 모르쇠를 대며 어깨를 들썩였다. 
"진심이십니까? 겨우 도제조 영감댁 셋째인 제가요?"
대답하는 수환의 입은 웃고 있었으나 눈은 웃지 않았다. 묘하게 냉랭한 수환과 무영 사이에서 애먼 해랑과 공 씨만 눈치를 살피기를 잠시, 수환이 씨익 웃으며 해랑을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아무래도 이번 사건은 우리 둘이서 짝패 놀음을 하기는 힘들 모양이다."
수환이 말끝에 괜히 해랑의 볼을 주물럭거렸다. 그 손길을 따라 무영의 미간에 깊게 골이 팼다. 그것을 확인한 수환은 새는 웃음을 눌러 삼키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 "알겠으니 이만 물러가 보거라."
종주가 나간 후에도 대군의 사랑채에서는 한동안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기실, 달그락거리는 것이 손끝에 부딪는 서안인지 제 마음인지 알 길이 없어 대군은 멋대로 움직이는 손끝을 내버려 두었다. 
두 형님의 성정을 훤히 아는 대군이다. 무영은 얼마 전 말했던 대로 자신의 뒤를 캐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대군과 관련된 죽음이 또 하나 늘어난 것을 눈치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 큰형님은 또 어떠한가. 평소에도 자신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임금 아니던가. 무영이 조사하고 다니는 것들은 반드시 그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다. 그것만큼은 자명했다. 운이 나쁘면 역모로 몰릴 수도 있었다. 임금과 척을 진다면 운이 좋든 나쁘든 그 끝은 죽음이겠으나, 무영과 척을 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영과 척을 진다면 반드시 임금과도 척을 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선은 무영의 마음을 잡아야 했다. 좋은 쪽으로 구슬리든, 혹은 약점을 잡고 흔들든. 예나 지금이나 무영의 약점은 단 하나였다. 그러나 그 단 하나를 이미 임금이 쥐고 있으니 대군은 다른 것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대군은 그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정작 무영 본인은 아직 모르는 듯했지만. 
내내 방 안을 떠돌던 달그락 소리가 멈췄다. 이제 새로운 판을 벌일 시간이다.

- "아! 혹, 귀신종 말씀이십니까요?"
개동 아범이 제 허벅지를 짝 소리 나게 치며 반색했다.
귀신종이라... 그래, 그리 부를 법도 하지. 수환이 작게 중얼거리자 개동 아범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예, 무슨 물건인지 알고 있습죠. 영감마님께서 평소에도 무척 아끼시던 물건입니다. 사랑에 머무시는 동안은 주로 서안 위에 올려두셨고, 바깥 걸음을 하실 적에는 늘 몸에 지니고 계셨즙죠."

-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기어이 소란을 피워야 나오시겠습니까?"
어둠이 일렁이는 듯하더니 이내 인기척이 났다. 무영과 열 보쯤 떨어진 자리에 검은 복면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종주, 어찌 저를 좇고 계신지 물었습니다."
무영의 말에 종주가 복면을 벗고 고개를 숙였다.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날이 밝은 후 선전으로 서신을 보내시면 될 일을 이 시간에 그대를 번거롭게 하는 것을 보니 썩 좋은 일은 아닌 듯합니다만."
무영이 꼬아 말하자 종주가 고개를 들었다.
"'원치 않으시면 굳이 청하지는 않겠습니다. 허나 형님. 오늘 밤이 지나면 다시는 형님의 쥐방울을 만나지 못하실 겁니다'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쥐방울이라니. 해랑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 껄끄러워 무영은 대답 없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침묵이 내린 골목 안으로 인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두 번째 종소리가 울렸을 때 무영은 별도리 없이 걸음을 옮겼다. 종주를 앞질러, 진원대군의 궁가를 향해서.

- "소담하게 핀 흰 꽃처럼 낮이 고왔지. 나는 몇 번 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회상에 잠긴 진원대군의 말에 해랑이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은밀히 할 이야기가 있다더니. 네 스승에 관해 네가 꼭 알아야 할 이야기라더니. 누구의 입을 통해 들어도 그리 달갑지 않을 말을 저 대군대감께오서는 어찌 이리 천연덕스럽게 늘어놓고 계시는가.
"정녕 하실 말씀이 이것이셔요?"
"네가 형님에 대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 이것인 줄 알았는데?"
대군이 말끝에 해랑을 향해 빙글빙글 웃는 낯을 들이밀었다.
"스승님께서 직접 말씀하지 않으신 일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에 그런 것일 테지요. 구태여 들추고 다니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단호한 해랑의 말에 대군이 파안대소했다. 보지 못한 새에 제법 단단해진 해랑이었으나 대군의 상대가 되기엔 한참이나 일렀다.
"형님의 비밀이 궁금해 얌전히 따라온 것 아니더냐? 이제 와 그런 말을 하기엔 좀 늦은 것 같은데?"
"그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 제 발로 온 것일 뿐입니다."
"확인하고 싶은 것?"
대군이 흥미롭다는 듯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어쩌면 대군이 예상한 것보다 해랑은 훨씬 더 단단해져 있는 듯했다.
 
- "주상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언제부터 저를 대감의 수하로 두셨습니까?"
무영이 입 끝을 삐뚤게 말아 올리며 물었다.
"아이고,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형님."
대군이 짐짓 난처한 체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제 수하의 언사가 거칠었을 것입니다. 종주는 제가 시킨 대로 말을 옮긴 것뿐이니 노여움 푸시지요."
"제가요? 대군 대감의 수하에게 감히 제가요?"
답지 않게 꼬아 말하는 무영에 내내 짓궂은 미소를 띠던 대군의 입매가 굳었다.

- "예, 압니다. 그것을 어찌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망설이던 대군이 이내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았다. 그러고는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듯 제 형님의 새까만 눈동자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본 적이 없으니, 어떤 형태로 기록하여 보관했을지는 저도 모릅니다. 허나, 송 제조의 성정이라면 분명히 어딘가에 기록해 두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단 하나도 놓침 없이 확인하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제가, 혹은 대감께서 얻는 이득이 무엇입니까?"
"이 사건의 범인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대군의 말에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무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느물거리는 대군에 무영이 고개를 가로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퍽 아끼시는 모양이지요?"
웃음기 섞인 대군의 말에 무영이 문고리에 손을 올린 채로 대군을 돌아보았다.
"형님의 쥐방울 말입니다. 아, 이리 부르면 언짢으시지요?"

기어코 신경을 긁고 말겠다는 듯 한껏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는 대군의 눈매에 무영은 대꾸 없이 목례하고는 사랑채를 나섰다.

- 제 형님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대군은 작게 숨죽여 웃기 시작했다. 주상과 저가 각각 하나씩, 무영의 약점을 알고 있으니 어느 쪽이 더 큰 약점을 쥐고 있을지는 머지않아 알게 될 터였다.

- "얼른 솜을 모두 거두어라."
공 씨의 말에 오작인들의 손이 빨라졌다. 그들이 시신의 아홉 구멍을 막고 있던 솜을 걷어내자 공 씨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를 찼다. 검게 변한 솜을 치워낸 자리마다 구멍을 막아두었던 수수밥이 시커멓게 모습을 드러낸 탓이다.
공 씨가 제 왼편에 선 오작인을 향해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오작인이 날래게 은비녀를 공 씨의 손에 올려주었다. 비녀를 든 공 씨가 조심스럽게 시신의 입술을 들어 올리고는 그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잇몸이 모두 검푸르게 변한 모습에 공 씨의 입에서 하, 하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홉 구멍에서 나온 검붉은 혈즙과 검푸르게 변한 죽은 자의 잇몸. 씩 웃은 공 씨가 비녀를 내려두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시장과 시형도를 써야겠으니, 준비해 오거라."

- "붉게 남은 것을 보면 공 의관님 말씀대로 생전에 생긴 상처인데, 아무리 작다고 해도 이 정도 상처이면 따끔할 정도는 되었을 텐데요."
"무엇에 찔렸는지보다는 이 정도 상처로 흡수될 양이면 독이 극소량이었을 텐데, 그 독이 무엇인지를 찾는 게 더 중요하지 않겠어?"
수환이 대꾸하자 해랑이 고개를 주억이고는 시신의 엄지 끝에 다시 얼굴을 들이밀었다.
"헌데 나리, 혈즙이 있기는 한데... 상처 주변 살색이 좀 이상한 걸요?"
해랑의 말에 공 씨가 씩 웃고는 해랑을 일으켜 세웠다.
"그럼, 이상하고말고. 거참, 이리 영특한 것을 보니 잘만 가르쳐놓으면 요놈이 저보다 훨씬 소문난 검험 의관으로 밥벌이를 하겠습니다요."
해랑의 어깨를 한번 툭 친 공 의관이 세 사내를 바라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고는 재차 입을 열었다.
"일단, 강종사관 나리 말씀처럼 이 정도 상처를 통해 흡수될 수 있는 독의 양은 아주 소량입니다. 문제는, 극소량으로도 죽음에 이르는 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인데, 사실 그 독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상처 구멍이 이 정도라면 한 방울도 되지 않을 독일 텐데, 그 정도의 양이 치사량인 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요. 무엇보다 검험 과정에서 사자에게 쓰인 독이 무엇인지 이미 알아낸 참이고요." 

- "서망초 독에 중독되어 죽은 것입니다요. 검푸른 잇몸, 몸의 아홉 구멍에서 나오는 혈즙 같은 반응은 일부 다른 독을 검출할 때도 볼 수 있습니다만, 서망초 독은 다른 것들과 달리 은비녀를 비롯한 각종 법물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하룻날 저녁이나 지난 다음에야 검출되는 독입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이 지나야 독 검출이 가능한 것은 둘 중 하나의 상황밖에 없습니다. 쓰인 독이 서망초 독이거나, 치사량의 독이 아닌 미량의 독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경우입죠. 송종오영감의 경우 둘 모두에 해당되고요." 

- "보십쇼. 해랑이 요 녀석 말처럼 상처 주변 살 일부가 다른 곳보다 색이 짙습니다. 엄지가 전체적으로 약간 얼룩덜룩한 형상이지요. 간혹 검험 중에 오래된 상처가 드러나기도 하는데, 이것이 그런 경우입니다. 상처 구멍 자체가 드러나지 않은 것은 이번에 난 상처처럼 아주 미세하고 작은 상처였기 때문인데, 이미 새 살이 돋아 사라진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상처가 났던 흔적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고요. 그러니까, 이렇게 살색이 어두운 부분은 모두 이번에 발견된 상처와 비슷한 크기로, 이전에 여러 번 상처가 났던 자국입니다. 오랫동안 미세한 독에 노출되다가, 그것이 쌓여 사망에 이른 것입니다요." 
공의관의 말을 끝으로 검험소는 적막에 휩싸였다.

 

- "...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어요. 시키는 대로만 했다고."
해랑의 말에 수환이 눈가를 찡그렸다.
"그래, 그리 말했다면 더 길게 말하지도 않았겠지. 단숨에 목숨을 끊은 것을 보니 약점을 잡혀도 아주 크게 잡힌 모양이구나. 고생했다."
수환이 해랑의 어깨를 두어 번 다독였다.
해랑은 말없이 피 묻은 제 손을 바라봤다. 얼룩덜룩한 손바닥을 빤히 보던 시선은 이내 무영에게로 옮겨갔다. 핏물이 든 무영의 옷자락을 보니 가슴 한구석이 선뜩해졌다. "네 욕심이 셋 모두를 지옥으로 이끌겠구나" 하던 목소리가 떠오르자 손끝이 떨려왔다.
아니, 너무 놀라 그런 것이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서 너무 놀라서. 속으로 저를 달래며 해랑은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 "일단은 돌아가겠습니다. 내일 아침 포청에서 뵙지요."
말끝에 무영이 해랑의 손을 잡았다.
저를 지나쳐 걷는 무영의 뒷모습을 보며 수환은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랑의 손을 꼭 붙들고 걷는 무영의 손아귀에 제법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세게 쥐며 단속하지 않아도 다른 곳으로는 흘러가지 않을 마음입니다. 깨져 없어지면, 그땐 후회해도 늦습니다.

따위의 말이 목구멍 끝에서 맴돌아, 수환은 한동안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 "함정일 가능성은?"
"글쎄..."
주혁이 모호한 대답을 남기며 무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는 무영에 수환이 또 한 번 마른세수를 하고는 입을 열었다. 
"호조판서 민도식은 주상 전하의 최측근 아닙니까? 누군가 그를 잡으려 놓은 덫이든, 혹은 그가 정말 이 약초 사건의 배후이든 수사하기 쉽지 않을 텐데요?" 
"약초 밀수 이외에도 관련된 것이 있다면 얘기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무영의 말에 수환이 당황한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 "다른 사건과도 관련이 있다는 말씀이어요? 지난 독살 사건을 이르심입니까?"
작게 고개를 끄덕인 무영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비단을 들어 올렸다.
어떤 일들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간혹, 너무 정교하게 쌓아 올린 것들은 미세한 틈만 생겨도 와르르 무너지기도 하는 법이다.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던 아주 사소한 것. 
해동부 사내들의 표식인 푸른 비단을 보며 무영은 자연스레 얼굴 하나를 떠올렸다. 늘 마음에 두었으나 차마 함부로 꺼내 그릴 수는 없던 흰 꽃처럼 고운 낮, 영민하고 총기 넘치던 아이. 
소화.

 

- "입안의 혀처럼 구는 자들은 늘 그 뿌리 아래 칼을 숨기고 있는 법이지요."
대군이 말끝에 미소를 짓자, 임금이 들으라는 듯 혀를 찼다.
"난 늘 네놈의 그 웃음이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뾰족한 말의 내용과는 달리 임금의 목소리 끝에는 웃음기가 묻어있었다. 본디의 성정대로라면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반응이었다.
그러나 오늘 밤은 달랐다. 기별도 없이 이리 불쑥 대군의 대문간을 넘어온 것부터가 평시라면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 구름이 끝내 달을 가리고 멈춰 섰다. 짙은 어둠이 두 형제의 얼굴을 가리고, 달빛을 잃은 뜰 안의 화초들도 마치 죽은 것마냥 어둠 속으로 검게 가라앉았다. 임금도 대군도 오늘 같은 대화는 다시 없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이 바라보는 것이 하나임을, 한치의 다름도 없이 같은 것임을 아는 탓이다. 

- 모든 크고 작은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어둠을 밟고 다니며 역사를 만드는 이들의 대부분은 어딘가 떳떳하지 못한 구석을 숨기고 있는 자들이게 마련이다. 
지난밤, 야음을 틈타 단련사 김 씨를 없앤 이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었다. 
마치 경고하는 것처럼, 보란 듯이 김 씨의 시신을 흩어 펼쳐놓은 작태에 주혁이 이를 갈았다. 여태 포청 종사관 생활을 하면서 본 그 어느 죽음도 이토록 참혹하지는 않았다. 
거래 장부를 주고 떠나며 자신은 살아서 한양 땅을 밟지 못할 것이라 했던 그 담담한 목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다음은 우리 차례입니다. 더 정확히는, 저일 것입니다. 감히 대감을 어찌하지는 못할 테니까요." 
짓씹듯 말하는 주혁을 향해 무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그럴까요?"하고 묻는 목소리가 담담해 위화감이 들었다.
"목적을 위해선 그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는 자들도 있는 법입니다."
이어진 무영의 말에 주혁이 입술을 깨물었다. 강을 통해 국경을 넘은 지 고작 하루. 부지런히 간다면 내일 신시 즈음에는 의주목에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주혁은 도성 안을 떠돌던 장물을 떠올렸다. 단련사 김 씨가 건넨 거래 장부 속 품목과 일치하던 것들. 그리고 지난날 그 물건들을 쫓으며 찾아낸 이름들. 거기에 의주목사의 이름이 있지 않았던가. 의주목에 당도한다 하여 안전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오늘 밤일 것입니다."

- 오래된, 그러나 새로운 싸움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한양으로 돌아가야 했다.

- "이런 누추한 곳까지 다 행차를 하시고. 내일은 해가 다른 방향에서 뜨려나 봅니다?"
진원대군이 찻잔을 들며 비꼬았다.
"뜻이 같은 자들은 결국 만나게 마련이지요."
마주 앉은 민도식이 대군과 같은 모양새로 찻잔을 들었다.
"같아요? 저와 영감이요?"
"다를 것이 있습니까?" 
민도식이 히죽 웃으며 눈을 찡긋했다.
"대군께서 찾으시는 아이,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만."
대군이 모르쇠를 대자 민도식이 사랑채 동편 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 창밖에 온갖 진귀한 화초를 두고 혼자서만 보신다지요?"
"귀하다 해봤자 한낱 풀 쪼가리일 뿐인데요. 영감께서 도처로 나르는 물건들만 할까요?"
대군의 말에 민도식의 시선이 되돌아왔다. 잠시 대군의 눈을 들여다보던 민도식이 돌연 크게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다 알고 계시니, 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아이, 저 창밖의 화초들보다 더 귀한 아이입니다. 귀하기로는 제가 나르는 채라 따위의 것들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대군은 별다른 대꾸 없이 민도식이 마저 떠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하도 귀해서, 대군은 취하실 수 없는 아입니다. 허나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아, 제가 그 아이가 계집애라는 말씀을 드렸던가요?"
"겨우 근본도 모르는 계집애 하나 때문에 제가 영감과 이리 마주 앉아있어야 하는 겁니까? 나가실 문은 바로 뒤에 있습니다만."
해랑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대군은 자꾸만 태연한 체했다. 무영의 약점인 줄 알았던 해랑이, 자신의 약점이 되어 발목을 붙잡을 줄 몰랐던지라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 아이, 대군께 바치겠습니다. 대신..."
해랑이 바로 네 약점이라는 듯 쐐기를 박는 민도식의 말에 대군은 결국 얼굴을 굳혔다.
"대신, 대군께서 왕이 되셔야겠습니다."
말끝에 민도식의 입꼬리가 길게 호를 그렸다.

- "어떻게 제가 여기로 오게 된 걸까요?"
마른 잎이 뒹구는 뜰을 내다보며 해랑이 물었다.
"예가 어딘지는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지?"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소화의 목소리에 해랑이 가만히 제 목에 걸린 방울을 쓰다듬었다.
"누가 저를 거기서 꺼내주었을까요?”
해랑이 재차 묻자 소화가 짓궂은 웃음소리를 냈다. 고민하듯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해랑은 제 앞에 펼쳐진 풍경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쓸쓸한 곳이네요. 주인이 자리를 비운 지 오래된 곳인가 봐요."
낮게 읊조리는 해랑의 목소리는 눈앞의 풍경을 닮아 있었다. 고요한 시간, 적막한 풍경, 그 안에 우두커니 앉아 해랑은 제 무릎을 끌어안았다.

"지난번 그 우물이라면 힘들겠지만, 저만 한 담을 넘는 건 일도 아닐 텐데?"
소화가 부추기듯 속삭였다.
"여기서 나가면."
말을 멈춘 해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벗들 모두가 위험해질 것이라고, 아씨께서 그리 말씀하셨잖아요? 도처에서 저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고요."
이어진 말에 묻어난 두려움에 소화가 혀를 찼다. "담이 이리 작아서야" 하는 소리도 덧붙였다.

- "아가, 잘 듣거라."
해랑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눈앞에 소화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언젠가 나를 이리로 불러냈던 자가 곧 여기로 올 거다. 너를 만나러 말이지. 반드시 그자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그자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돼. 그러면 너도 나처럼 될 거다."
"제가..."
"죽는단 말이지, 나처럼."
망설이는 해랑의 말끝을 소화가 잡아챘다.

- "너무 걱정은 말거라. 그치를 상대하는 법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거든. 말했잖니? 내 쓸모는 너를 지키는 데 있다고. 넌 그저 내가 일러준 대로만 하거라. 약조할 수 있겠니?" 
소화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해랑을 달래듯 속삭였다. 예, 하고 대답을 남기던 해랑은 어쩐지 소화가 미소 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분명히 그렇게 느껴졌다. 

- 구름이 손톱 달을 가리자 뜰 안으로 짙게 어둠이 내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달이 모습을 드러내고 마당 안으로 희미하게 달빛이 들자 해랑이 번뜩 몸을 일으켰다. 저만치 담 곁에, 앙상한 나무들이 만들어낸 그림자 사이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저를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이의 낯을 보며 해랑은 제 기억을 헤집어댔다. 그러다가 눈을 크게 치떴다. 지난가을, 무영과 함께 숨어 들어간 임금의 연회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 이름을 떠올리려 애를 쓰고 있자니 어느새 해랑과 마주 선 이가 위에서 아래로 해랑을 훑어보았다.
"너로구나? 살아남은 새끼 호랑이가."
그믐밤. 자미재 뜰 안으로 민도식의 목소리가 차게 내려앉았다.

- "대감!"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무영이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했다.
당황한 기색으로 무영을 바라보던 수환이 입술을 한 번 꽉 깨물었다.
"대감."
"괜찮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차분하게 얘기해 주세요."
"죄송합니다. 제 탓입니다. 제가 잘 돌보겠다고 약조해 놓고..."
"탓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 된 연유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시라도 빨리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책은 접어두시고, 그간의 일을 말씀해 주세요."
내내 일관된 무영의 태도는 무서우리만치 침착했다. 그러나 두 종사관과 정 행수는 무영이 차분하게 갈무리한 입술 너머로 틀어막은 분노와 고요한 눈동자 뒤로 숨긴 슬픔을 알아챘다.

- 수환이 이야기를 마치자 무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사시에 여기서 다시 뵙지요."
뭐라 대답할 틈도 없이 무영이 선전을 나섰다. 멀어지는 무영의 발소리를 듣는 세 사람의 낯 위로 깊게 그늘이 졌다.

- 반쯤 기대 누워 서책을 넘기던 임금이 흥미를 잃은 듯 책을 덮었다.
'응선 민도식의 짓입니다.'
가늘게 떨려 나오던 맹랑한 것의 목소리가 귓가를 떠날 줄 몰랐다. 여태 누군가의 말에 휘둘려본 적이 없는 임금인지라, 여직 그 말을 잊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가 퍽 당황스러웠다. 
달포 전, 호판 민도식이 데려왔던 '재미난 것'은 예상치 못한 얼굴이었으나 익히 아는 얼굴이기도 했다. 감히 연회에 숨어들었던, 반쪽짜리 제 형제가 끼고도는 쥐방울. 
 
- "그래, 호판이 어째서 너를 데려왔을까?"
"모, 모릅니다."
말끝에 마른침을 삼키는 해랑의 목이 작게 울렁였다. 그 모양에 임금의 시선이 해랑의 목을 향했다. 내내 해랑의 볼을 쓸던 임금의 엄지 끝이 다시 턱으로 내려와 해랑의 고개를 조금 밀어젖혔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구나."
엄지 끝이 목 한가운데를 느릿하게 타고 내려왔다. 제 손길을 따라 해랑의 목 위로 소름이 돋자 임금은 놀리기라도 하는 듯 해랑의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하는 양을 보니 여태 덜 자란 것은 아닌 모양인데, 어째서 목이 이리 매끈할꼬?"
울대뼈가 없는 것을 지적하는 소리에 해랑이 당황한 듯 얼굴을 굳혔다.
"그, 그것이..."
더듬거리는 해랑의 눈을 들여다보며 임금이 입꼬리를 한껏 당겨 웃었다.
"내가 남색(男色)에는 흥미가 없음을 감사히 여기거라."
"요 맹랑한 계집아" 하는 말을 덧붙이지 않은 것은 당혹감을 감추려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해랑의 모양새가 제법 귀여워서였다.
"곁에 두면 머지않아 중요한 쓸모가 있을 것이라 하니 그리하기는 하겠다만, 글쎄... 나는 아무리 봐도 네가 그리 쓸모 있어 보이지는 않는구나."

- "한동안 그 아들놈이 평소에는 꿈도 못 꿀 값비싼 옷을 해 입고 저자를 돌아댕김서 거들먹거리드만, 어느 날 사라져부렀습니다. 그 댁 부인과 며느리까지 싹 다요."
"처음부터 그 댁 가솔들 중 누구도 살려둘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군요."
무영이 탄식하듯 한 말을 끝으로 방 안에는 잠시 정적이 일었다. 네 사람 모두가 같은 이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민도식. 모든 사건의 원흉.

- "시간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일을 저지를 인원이 부족했을 수도 있지요."
무영의 대답에 수환이 예? 하고 되물었다.
"호판은 지금 무척 초조할 겁니다. 어젯밤, 제가 그 댁에 선물을 보냈거든요."
영문을 알 수 없는 무영의 말에 정 행수와 두 종사관의 고개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방향으로 기울었다.

- 말을 마친 무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자네는?"
정 행수의 물음에 무영이 입꼬리를 단정하게 끌어올렸다. 

"저는, 제 제자를 찾으러 가야지요."

 

- 세 번째 사건이 일어나자 가장 크게 동요한 것은 임금이었던 모양이다. 한동안 잠잠하던 임금의 이런저런 기행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소문이 저자에 파다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행렬을 꾸려 법궁과 이궁을 오가기 일쑤에, 매일 밤을 궁무들과 난잡하게 지새우며 하루가 멀다 하고 사냥을 다니느라 나랏일은 뒷전이라는 늘 그랬듯, 별달리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의 말들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도성 곳곳으로 퍼진 이런 소문에 골머리를 앓는 것은 임금이 아니라 진원대군이었다. 가뜩이나 속이 시끄러운 차에, 황해도에서 돌아온 종주가 전한 소식이 더해지자 없던 두통도 생기는 듯한 기분이었다. 
사랑채 창가에 앉아 밤을 지새우며 대군은 습관처럼 해진 서찰을 매만졌다. 접힌 종이 사이로 비치는 왕의 인장을 따라 덧그리듯 손을 놀렸다.
처음부터 틀렸던 것이다. 그 시작부터 잘못된 생각이었다. 임금이 어떤 성정을 가진 이였던가. 날 때부터 왕이 될 운명을 가진 사내가 그저 주색에만 눈이 먼 천치일 리가 없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쓰고 버릴 패.
차가 아닌 졸.
민도식이 사사로이 축적한 재물과 그것을 얻기 위해 저지른 모든 일을 임금은 알고도 눈감아준 것이다. 그러니, 곁에서 간악한 말로 임금의 눈과 귀를 가리는 민도식을 끌어내리면 제 형제가 성군이 될 것이라는 대군의 생각은 처음부터 틀려먹은 것이었다. 
그의 주군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과 같이 앞으로도 영원히.


- 대군은 서안 위로 물빛 시전지를 펼쳤다. 이제, 제안에 답을 할 때였다.
그의 형제가 버린 패는, 졸이 아닌 차가 될 것이다.
 
- "제가 각성하여 성체가 되면, 저주가 풀리고 아씨께서 성불할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래."
소화가 작게 속삭였다.
"스승님은... 연경에서 그걸 구하셨을까요?"
"글쎄."
소화가 또다시 속삭였다.
"아마, 구하셨을 겁니다."
대답 없는 소화를 두고 해랑은 기억을 더듬었다.
소화가 제게 들려주고 보여준 것들 사이에서 보았던 무영의 얼굴. 저는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무영의 눈길. 사랑에 빠진 사내의 시선.

- 왼손을 들어 눈앞에서 팔랑거리던 해랑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스승님을 뵈어야겠습니다."
"네 스승과 벗들을 죽이고 싶은 게야? 도성 안으로 들어간 것을 들키기라도 하면..."
"꼭 제가 가지 않아도 되지요."
말끝에 해랑이 입술을 끌어올리며 웃었다. 호를 그리며 올라붙었던 입술이 금세 제자리를 찾고 해랑의 눈에서 이채가 번득였다.

- "제가 그랬을 리 없습니다."
"뭘 믿고 그렇게 자신하는지 알 수가 없구나."
혀를 차는 소화의 말을 귓등으로 넘기며 해랑이 방울을 다시 목에 걸었다.
"제가 배운 것의 팔 할은 스승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처음으로 환도를 손에 쥔 날, 스승님께서 제게 뭐라고 하셨는지 아세요?"
소화가 대답하든 말든 해랑은 읏챠 소리를 내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무심한 손길로 옷자락 여기저기 붙은 마른풀들을 털어내고는 소매 안쪽을 뒤적거렸다.
부적 두 장을 꺼내 들고 허공에 날렸다. 불이 붙어 사라진 부적을 보며, 해랑이 중얼거렸다.
"살생하지 마라."

- "모두, 제 몫이 될 겁니다. 그자가 그리 약조하더군요."
진원대군의 말에 찻잔으로 향하던 무영의 손이 멈추었다.

"돈에 욕심이 있는 분인 줄 처음 알았습니다."
꼬아 말하는 무영을 향해 대군이 빙긋 웃는 낯을 되돌렸다.
"제 몫이니, 어떻게 쓰든 가타부타하지 않겠다고도 했지요. 모두 나눠줄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또한 호판이 그 재물을 끌어모으느라 희생된 사람들에게. 여태 올봄 같은 기근은 없었습니다. 정말로, 최근 일어난 사건 때문에 백성들이 문을 걸어 잠그는 줄 아십니까? 문을 걸어 잠근 가호들 중 절반은 빈집입니다. 과도한 조세를 감당하지 못해 산으로 들로 도망간 이들이 태반이란 말씀입니다."
"대감께서는 그자의 재산을 이득으로 취하시고, 그럼 그자가 얻는 이득은 무엇입니까?"
"늘 생각하지만, 제가 퍽 매정한 형님을 두었지 뭡니까? 일이 이 지경이 되어서야 제가 하는 일에 관심을 두시는군요? 그자가 원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그것을 내어줄지는 제게 달렸고요. 저는 그저, 그자보다 형님께 먼저 기회를 드리고 싶은 것뿐입니다." 
"정녕 역모를 하시겠다고요? 그것도 민도식과 손을 잡고요?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연경에는 뭔가를 찾으러 가셨다지요?"
도리어 묻는 대군의 말에 무영의 입매가 굳었다.
"듣자 하니 원하던 것을 얻으신 모양이던데, 그걸 제게 주세요. 그 아이도 함께요. 그러면 민도식을 형님께 내어드리지요."
대군이 말끝에 장난스레 눈가를 찡긋했다. 그러고는 재차 말을 이었다.
"오랫동안 하던 고민을 두고 이제야 결심이 선 것뿐입니다. 명선대부께서 늘 제안하셨던 일이지요."
"원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뜻에 따를 뿐이다... 그렇게 뜻을 모은 이들 뒤로 숨는 것은 비겁하지 않습니까?"
뾰족한 무영의 말에 대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님께선 그새 정말로 큰형님의 개라도 되신 모양이네요."
"그리 보인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무영이 비뚜름한 웃음을 입에 올렸다.
"저와는 달리, 두 분은 아버지를 꼭 빼닮으셨지요. 외모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고집도 말입니다. 큰형님은 절대 변하지 않을 분입니다. 민도식 그자가 연경에서 쓸어 모으듯 가져오는 물건들. 그 물건으로 기술을 습득한 자들. 다들 어디로 가는 줄 아십니까? 궁으로 갑니다. 관상감으로요. 왜 민도식의 재산이 한양이 아니라 그 가솔들의 터인 해주목으로 모일까요? 그렇게 모으는 것들을 주상께서 눈감아주시는 이유를 정말 모르십니까?" 
"제가 알 필요가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무영이 더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북을 정벌하겠다 나서면, 가장 피해를 입는 것은 결국 백성들입니다. 명분도, 실리도 없는 일로 애먼 사람들이 피를 흘리겠지요. 주상께서는 지금 단지 피에, 살육에 미쳐 있을 뿐입니다! 그걸 정말 모르십니까?"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 "대군."
저를 비웃는 듯 아닌 듯 오묘한 무영의 표정에 대군이 낮을 굳혔다. 여태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대군께서는 그 아이가 아직도 자미재에 '갇혀' 있는 줄 아시는 모양인데... 민도식이 그리 일러주던가요? 그런 정보력으로 어찌 역모를 하겠다 하십니까? 그 아이는 제가 가장 잘 압니다. 해랑 또한 저를 잘 알고요.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약점이 될 만한 사이가 아닙니다. 해랑이 대군께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대군의 미간이 접히는 것을 본 무영이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이내 단호한 음성이 대군의 귓가로 떨어졌다.
"대군. 그 아이는, 제 아입니다."
무영이 사랑채를 떠나고도 한참이나 대군은 자리에서 움직일 줄 몰랐다.

- "어찌 그러셨습니까?"
"뭘 말이오?"
모르쇠를 대는 임금에 민도식이 애써 불편한 표정을 숨겼다.

"그 쥐방울 말입니다."
"글쎄... 누구 목에 달려는 방울인지를 모르겠어서 말이오."

"전하."
어디 계속해보라는 듯, 임금이 손짓했다.
"근자에 또 부엉이 소리가 들리시지요? 궁 안 어디에도 부엉이는 없는데 말입니다."
"내가 미친 게 아니냐는 말을 잘도 돌려하는군."
잔뜩 비틀린 웃음을 입에 걸고 임금이 손에 쥐고 있던 술잔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탁 소리가 나게 내려진 잔에 민도식이 다시 술을 채워 넣었다.
"제가 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속삭이듯 말하며 민도식은 제 손길이 떨리지 않도록 술 주전자를 ... 

- 멀리서부터 하늘을 새까맣게 물들이며 몰려오는 것은 먹구름이 아니었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해랑이 다시금 잰 발을 놀렸다.
부러 저 들으라는 듯 푹푹 소리 내어 한숨 쉬는 소화를 모른 체하며 해랑은 좀 더 깊은 산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산중턱 즈음, 나무가 적고 풀이 많은 제법 널찍한 곳을 발견했을 때 해랑이 걸음을 멈췄다.
"이쯤이면 되겠네요. 누가 먼저 올지는 모르겠지만요."
털썩 주저앉은 해랑이 풀 사이로 길게 몸을 뉘었다. 바람이 눕는 방향으로 따라 눕는 풀을 매만지며 눈을 감았다.

-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또한, 누군가 일러주지 않아도,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도 있었다. 
어느새 튀어나온 짐승의 귀를 쫑긋거리며 해랑은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두 손을 얼굴 앞에 대고 신기한 눈길로 짐승의 발을 들여다보았다. 코를 대어 킁킁 냄새를 맡아보고, 손가락을 옴죽거리듯 힘을 주기도 했다.
기다림에 지쳐 살풋 잠이 들려는 찰나, 예민한 해랑의 귓가로 날짐승의 소리가 들려왔다. 무영과 하산하던 날 들어보았던, 날짐승이 길게 우는소리. 누운 채로 잠시 그 소리를 감상하던 해랑이 몸을 일으켰다. 이제, 시간이 되었다. 

- 무영이 몸을 돌려 섰다. 여태 이 모든 걸 지켜보기만 하던 대군을 향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원하는 걸 모두 가질 수는 없는 법이지요. 적어도 하나는 갖게 되실 모양이니, 이제 솔직해지셔야 할 겁니다. 비겁한 자는 용상에 앉을 수 없는 법이니까요." 
무영이 열고 나간 문을 통해 대군의 사람들이 몰려 들어왔다. 역모였다.

- "어찌, 우리 도련님께선 아직도 사령이니 하는 것들을 믿지 않으십니까?"
산을 오르며, 주혁이 수환을 향해 농을 쳤다. 수환이 피식 웃으며 손에 들린 칼을 흔들어 보였다. 칼자루에 무영이 감아준 부적들이 노랗고 붉게 빛을 냈다.
"내가 우리 똥강아지 때문에 하다 하다 별 걸 다 하네."
"어째서 해랑이 자네 똥강아지 모르겠네만?"
주혁이 불퉁하게 하는 말에 수환이 허, 코웃음을 쳤다.
"이따 녀석을 만나면 물어볼까? 우리 중 누굴 더 좋아하는지 말이야."
"자신 있나 보군?"
"네가 연경에 가고 없는 동안 내가 고 녀석을 잘 구워삶았거든."

수환이 자신 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웃자 주혁이 그의 등을 툭 치며 따라 웃었다.
"아 참,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나를 이길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지."
주혁이 의문을 띤 얼굴로 수환을 바라보았다. 그런 친우의 낯을 하나하나 곱씹듯 뜯어보던 수환이 씨익 웃고는 입을 열었다.
"원래, 여인들은 나처럼 낮이 고운 사내에게 끌리는 법이지. 그것이 자연의 섭리 아니겠어? 우리 종사관 나리처럼 매일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하면, 오던 여인도 달아나는 법이지." 
"자네... 알고 있었군?"
주혁이 놀란 얼굴을 되돌리자 수환이 혀를 찼다.
"네가 아는 것 중, 내가 모르는 것이 있었어?"
피식 웃은 수환이 주혁을 조금 앞질러 나갔다. 무영이 일러준 장소가 곧이었다. 긴장을 감추려 아무리 농을 치며 웃어보아도 눈치 없는 입꼬리가 자꾸만 제자리로 내려갔다. 손에 차는 식은땀에 쥐고 있는 칼이 미끄러질까 싶어, 수환은 걸음을 옮길수록 더욱 세게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런 수환의 등을 바라보며 주혁 또한 긴장으로 마르는 입안을 감추려 애를 썼다.

- "겨우 이런 것에 놀라려고?"
주혁이 놀리듯 말하자 수환이 이마를 찡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는 일이라더니, 과연 무영이 칼자루에 빼곡하게 감아주었던 부적이 효과를 보이는 것인지 두 사람의 칼에 닿는 족족 매들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칼에 맞아 죽은 매는 더러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기도 했다. 또 어떤 때에는 연기처럼 허공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그 사이를 헤쳐 걸으며 두 사람은 끊임없이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해랑에게 다가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던 탓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분신은 알아서 구분해 주는 부적도 달라고 할 걸 그랬지? 암만 봐도 대감께서 우릴 골탕 먹이려고 이러시는 거야."

"언제는 귀신이니 부적이니 하는 것들은 안 믿는다면서?"
등을 마주대고 어깨너머에서 대답하는 주혁에게 수환이 젠장할 하며 칼을 고쳐 쥐었다.

- "제 흉을 보고 계셨습니까?"
무영의 목소리를 따라 두 사람이 고개를 휙 돌렸다.
"궁에서는 별일 없으셨습니까?"
주혁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무영이 품 안에서 부적 서너 뭉치를 꺼내 들었다.
"이러면 조금 쉬워질 겁니다."
무영이 날린 수십 장의 부적들이 팔랑거리며 매 떼 사이로 향했다. 등에 부적이 붙은 매 중 분신이었던 것들이 부적과 함께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입을 쩍 벌리고 그 모양을 지켜보는 수환과 주혁을 남겨두고, 무영이 등을 돌렸다.
"먼저 가겠습니다. 뒤를 부탁드리지요."

- "반쪽 왕자가 오셨군. 그래, 해괴제는 볼 만하던가?"
삼 년 전, 소화가 죽었던 그날의 그곳에 민도식이 서 있었다.
앞세운 해랑의 목에 긴 발톱을 들이민 채로 이죽대는 민도식과 마주 선 무영이 효상을 꺼내 들었다.
무영의 칼을 유심히 살피던 민도식이 파안대소했다.
"귀기를 감지하는 칼이라... 그래, 그 정도면 나보다 어린 쭉정이들은 죽일 수도 있겠지. 그래서 그 종사관 놈들의 칼에도 부적을 감아준 모양이군."
"제 가솔들을 쭉정이라 부르는 자가 가문을 이끄는 수장이라니요."
"제 형제를 죽인 자가 왕도 되는 세상에 이 정도를 가지고 그리 말하면 쓰나."
민도식의 말에 무영은 들으라는 듯 혀를 찼다.

- "그래, 호족의 비서에는 무슨 말이 적혀 있던가? 가문의 오랜 비법과 주술이 있었을 테지. 네놈이 그토록 그 책 나부랭이에 집착했던 이유를 내가 모를까 봐? 이 호랑이 새끼의 몸을 취해 소화 그 계집에게 주려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았느냐?"
민도식의 말에 해랑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런 해랑을 바라보던 무영이 입을 열었다.
"예. 그리고 몸을 얻게 된 소화가 입을 열면 영감께서 곤란하실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요."
"설사 네놈이 성공하여 이 아이의 몸에 소화의 영혼을 불러들인다 한들, 누가 그것을 믿어주겠느냐? 나와 내 가문은 몰락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날 죽이지 못해 감히 인간 따위가!"
"그럴까요? 허나 치명상 정도는 입힐 수 있겠지요. 영감 같은 존재를 상대할 때는 인간의 힘이 아닌 것으로 상대해야 한다고 적혀 있더군요. 보신 대로 제가 쥔 칼이 사람의 힘으로 만든 것은 아닌지라, 꽤 쓸만할 겁니다."
말을 마친 무영이 순식간에 민도식의 지근거리로 다가섰다. 손을 내뻗기만 하면 칼이 닿을 듯한 거리였다.

- "아니, 너는 나를 죽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이 호랑이 새끼도 함께 죽을 테니. 자, 이제 선택을 하세요, 군 대감. 정인의 복수를 위해 이 아이를 죽이시렵니까? 아니면, 이 아이를 살리고 정인을 배신하시렵니까?"
민도식이 과장된 품새로 말하며 몸을 움직일 때마다 해랑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목에 감긴 팔을 떼어내려 버둥거리자 민도식은 무영을 보며 이것 보라는 듯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이쯤에서 무영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 눈앞에 선 이 사내는 불쾌하고, 지독하며, 잔인하다. 자신만만한 이치의 말대로, 무영은 영원히 이 사내를 이길 수 없을지도 몰랐다. 칼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 제아무리 무예에 능하다 한들, 사람은 그저 사람일 뿐이다. 여기저기 상처를 매단 무영의 몸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씩 웃은 민도식이 뽐내듯 짐승의 발톱을 허공에 휘적였다.
"네 계집들 곁으로 보내주마. 그리 고통스럽진 않을게다."
자비라도 베푸는 양 말하는 모습에 피식 웃은 무영이 또 한 번 칼을 고쳐 쥐었다. 팔을 타고 흘러나온 피가 칼자루를 붉게 적시고 있었다. 어쩐지 칼이 무겁더라니.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무영은 칼을 놓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 몇 번이나 무영의 칼끝과 민도식의 발톱이 맞부딪쳤다.
민도식의 날카로운 발톱이 살점을 쥐어뜯듯 허벅지 위를 스칠 때, 무영은 이길 수 없을 싸움임을 직감했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날일 이었다. 비굴한 성정은 못 되는 무영인지라, 민도식에게 목숨을 구걸하느니 죽는 쪽을 선택했다. 그러자 칼이 조금 가벼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영감, 때로는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발톱을 한껏 내뺀, 놀고 있던 다른 쪽 손을 민도식의 눈앞에 내보이며 해랑이 말을 이었다.
"영감이 제 가족들을 죽였던 것처럼, 저도 영감을 죽일 수 있지요. 우리는 서로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니까요."
말을 마친 해랑이 망설임 없이 민도식의 목에 마저 발톱을 박아 넣었다. 여태까지의 일이 꿈이었던 것마냥 모든 것이 한순간이었다. 산짐승의 긴 발톱이 목에 박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너무도 쉽게 민도식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목이 꺾인 날짐승의 모습으로.

- "하지 말라고 배운 것을 행하였으니, 이제 혼을 내실 건가요?"

무영과 마주 선 해랑이 물었다.
저만치 해가 기우는 것을 바라보던 무영이 해랑을 한 번, 죽은 민도식을 한 번 바라보았다.
"글쎄다."
"스승님은 언제나 제게 확실한 답을 주지 않으시네요."
해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고는 목에 걸린 방울을 풀어냈다.
"그래도 꽃분 아주머니께서 제때 스승님을 찾아뵌 모양이에요. 생각보다 일찍 오신걸요?"
방울을 매만지던 해랑이 그것을 무영의 손에 쥐여주었다.
"민도식 영감의 말 때문이 아닙니다.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 쓸모 같은 것 말이어요."
살풋 웃는 해랑의 눈꼬리를 타고 눈물길이 났다. 달래주지 않는 것이 서러울 법도 하건만, 해랑은 투정 없이 제 입술만 꽉 깨물었다. 그러고는 여태 망설이는 무영의 손을 끌어 칼자루에 얹어주었다.

- 무영이 한 번 더 짐승의 몸통을 향해 칼날을 박아 넣었다. 짐승의 살을 파고든 칼이 길게 울었다. 무영은 칼자루를 쥔 손끝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칼끝으로부터 짐승의 심장이 파닥이는 것이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 잠시간 서서 그 미세한 파닥거림을 헤아려보던 무영이 이내 칼을 거두었다. 칼날이 빠져나간 자리를 따라 붉게 피가 솟구쳤다. 가엾은 짐승은, 마치 그 모양을 되새기듯 제 피가 솟는 것을 따라 느릿하게 눈을 굴렸다. 그러고는 그 시선 끝에 가만히 무영의 낯을 들여다보았다. 물먹은 듯 반질거리는 짐승의 눈동자 위로 무영의 모습이 잔상처럼 새겨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게 떨리던 짐승의 눈꺼풀은 꺼져가는 제 숨과 같은 모양새로 조용히 닫혔다. 
무영은 그 모양새를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어떤 연유인지, 여직 손끝에 짐승의 심장이 파닥이던 그 감각이 남아 있었다. 제 손과 짐승을 잠시 들여다보던 무영은 이내 고개를 들었다. 
길게 이는 바람에 풀과 나무가 눕는 소리가 선명했다. 차르르 소리를 내며 쏟아지던 바람이 산을 넘어가는 해를 잡으려고 멀리멀리 해를 따라 사라졌다.
식어가는 짐승의 몸뚱이 위로 해가 토해낸 마지막 빛이 부서져 내렸다. 그 붉은빛이 눈부셔 무영은 몇 번이나 눈을 찡긋거렸다.

- "형님께서는 어찌하고 계시더냐?"
"어제와 같습니다."
종주의 말에 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큰형님께서 어찌하고 계신지 물은 것이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더는 찾아오지 말라 이르셨습니다. 제 낯을 보면 안 들리던 부엉이 소리가 들릴 지경이라 하시며 다시는 오지 말라 하셨사온데..."
윤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님, 저를 이렇게 과중한 격무에 시달리도록 해놓으시고, 형님께선 그렇게 편히 계시겠다고요? 언제 적 부엉이 타령을 아직도 하시는 겁니까.
투정이 새어 나왔다.

- 그날. 기어이 궁문을 밀고 들어온 역모의 무리를 마주한 임금의 얼굴에 떠오르던 홀가분함을 알아챘던 순간, 속이 시원하다는 얼굴로 웃으며 저를 향해 장난스레 눈을 찡긋거린 임금이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내던진 그 순간, 그제야 윤은, 저는 어찌해도 제 형제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번에도 윤은 처음부터 틀렸던 것이다. 날 때부터 왕이 될 운명이었던 자는 쥐고 있던 자리를 내려놓는 순간에도 행여 그 역모에 반기를 드는 자가 있을까, 있는 힘껏 광대놀음을 한 것이었다. 
누가 그 자리에 앉든, 그 어떤 누구에게도 왕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도록.

적통이 아닌 자라 하여 업신여김 당하지 않도록.
조선 땅의 모든 권력이 왕에게서 시작해 왕으로부터 끝나도록.

- "종주야, 귀비당에 일러 날을 받게 하거라. 큰형님을 뵈러 가야겠구나."
"하오나..."

"원래 오지 말라 하면 더 가고 싶은 법이다. 모르느냐?"
윤이 종주를 향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지난번에 보내 드린 차가 떨어질 때가 되었지, 이보다 더 좋은 핑계가 없군.'
속으로 뇌까리며, 윤은 상소문을 덮었다.

- 봄꽃을 닮은 분홍빛 노리개를 바라보다가 입안의 여린 살을 씹었다. 이런 것이 갖고 싶으냐 했을 때 아니라며 그저 너무 고와 바라본 것이라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어느 가을밤, 꽃잎처럼, 나비처럼 제 눈앞에서 팔랑이던 머리칼과 햇빛 아래에서 투명하게 옅어지던 호박색 눈동자와 제 소매 끝을 슬그머니 붙잡던 자그마한 손끝이 눈을 감지 않아도 눈앞에 훤했다. 눈동자보다 훨씬 안쪽에, 저 깊은 곳에 박혀 떨어지지 않는 잔상이 무영의 가슴을 움켜쥐고 숨을 막히게 했다. 괜찮다며, 제 쓸모를 이미 알고 있으니 뜻대로 하라며 칼을 쥐게 하던 손의 감촉이 떠오를 때면,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너무 겁을 먹어 그 혼이 도망친 것일지도 몰랐다. 이리될 줄 알았으면 괜찮다. 편해질 게다. 아파도 조금만 참거라, 달래는 말이라도 해둘 것을. 늘 다정한 체하면서 정작 필요한 순간에는 한 번도 다정하지 못해서 그렇게 울렸구나 싶었다. 
무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대체 뭐가 잘못되었을까. 틀림없이 거기 전해진 대로 했을 뿐인데. 아직도 그 내용의 점 하나, 획 하나까지 이렇게 머릿속에 선명한데.
뭔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미움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다시는 꼴도 보기 싫어서, 그래서 혼이 달아났는지도.

- "또 그러고 계십니까?"
들려온 소화의 목소리에 무영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툇마루에 놓인 물건들을 바라보던 소화가 손끝으로 그것을 툭 건드렸다.
"세 분 다 틀렸네요."
이리 눈치가 없어서야... 작게 중얼거리며 소화가 마당으로 나섰다.
"닷새 뒤가 수릿날이라 온 도성 안이 시끌시끌합니다. 정말 가보지 않으실 거예요?"
소화의 물음에 무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요? 오라버니, 후회하실걸요?"
샐쭉한 얼굴을 하던 소화가 아! 하고 손뼉을 쳤다.
"아니지요, 분명히 가시게 될 거예요."
어느새 다가온 소화가 무영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손에 턱을 괴고 깊이를 모를 무영의 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소화가 살풋 웃음을 흘렸다.

- "그때는 왜 몰랐을까요?"
"무얼 말이냐?"
"아니지, 사실 전부 알고 있었습니다. 알면서도 모른 체했지요."

"그랬느냐?"
"예. 그런데, 지금 보니 몰랐던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소화가 조용히 일어나 무영에게서 두어 발 떨어져 섰다.
"몰랐던 게 확실해요. 오라버니 마음이 변한 줄은 꿈에도 몰랐지 뭐예요? 아니지요, 오라버니 잘못입니다. 그동안 저 아이를 애지중지하신 게 저 때문인 걸 제가 정말 몰랐으려고요?"
소화의 말에 무영이 손끝을 말아 쥐었다.
민도식이 해랑의 목을 움켜쥐고 비서에 대해 얘기했을 때 깊게 가라앉았던 그 눈동자가 떠올랐다. 해랑도 소화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소화에게 내어줄 몸이라 어디 한 군데 다치는 일 없게 돌봤던 것이라고, 그래서 그토록 소중히 대했던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을까. 

 

- "그래요, 처음에는 그 책에 적힌 대로 제 혼을 거두어주실 줄 알았지요. 그러니 여태 제가 이렇게 기다린 것 아니어요?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고... 미련한 사내가 불쌍한 계집을 구해줄 거라고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불쌍한 계집이 제가 아니라 저 아이였지 뭐예요?"
소화가 말을 이을 때마다 무영은 숨이 막히는 듯했다. 스스로의 마음도 제대로 들여다볼 줄 몰랐던 미련함이 후회가 되어 자꾸만 무영의 목을 옥죄었다.
"비서에 적힌 대로, 오라버니께서 저 아이를 사람으로 만드셨으니, 이제 사람이 아닌 것은 저 아이가 아니라 저인걸요. 그걸 왜 더 빨리 알아채지 못했을까요? 천 번이나 밤이 지나는 동안, 제가 이렇게 욕심을 부리고 있었으니 우리 셋 모두 불행해질 수밖에요." 
샐쭉하게 웃은 소화가 치맛자락을 손에 쥐고 자리에서 뱅그르르한 바퀴를 돌았다.
"어여쁘지요?"
"어여쁘구나."
소화의 새파란 치맛자락이 무영의 눈꺼풀 저 깊숙한 곳에 각인되어 있던 모습 그대로 파도처럼 출렁였다.
"오라버니."
"그래."
무영이 작게 대답했다. 떨리는 손끝처럼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제 몫은 여기까지예요. 불쌍한 계집애에게 전해주셔요. 인간이 아닌 계집은 이제 떠나니, 맘껏 욕심부려도 된다고요. 그러니, 함께 어여쁘게 나이 들라고요." 
싱긋 웃은 소화가 무영을 향해 손을 팔랑였다. 동이 트고, 마당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 줄기가 소화의 치맛자락을 통과했다. 희미하게 흩어지는 소화의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던 무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 "누구십니까?"
해랑의 물음에 무영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해랑의 키가 무영의 무릎만 할 때 처음으로 말문을 뗀 해랑이 물었던 말. 그땐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렸지. 다시 처음처럼 묻는 그 말에 무영이 환하게 웃었다.

 

- "네 정인이다."

- 무영의 대답에 해랑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가 싶더니 이내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처음으로, 제게 확실한 대답을 하셨다는 건 아십니까?"
"처음은 아닐 텐데?"
짓궂게 웃는 얼굴과는 다르게 해랑의 머리를 쓰다듬는 무영의 손길은 떨리고 있었다.
몇 번이나 확인하듯 해랑을 만져본 후에야 손끝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내 약조하지 않았느냐?"
"무엇을 말씀이셔요?"
"그새 우산이 많이 낡았더구나."
짐짓 능청을 떠는 말에 해랑이 키득거리며 무영의 손을 잡았다. 커다란 손에 얼굴을 묻고, 해랑이 작게 속삭였다.
"네, 새것으로 사주셔요. 곱고 예쁜 것으로요."

- 열린 문을 넘어 방 안으로 길게 아침 햇살이 들었다. 천 번의 밤을 지나 내린 빛이 앉은 해랑의 얼굴이 곱고, 또 고와서 무영은 한참이나 그 낯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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