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김동식] 회색인간

일루젼 2024. 8. 4.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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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동식
출판 : 요다
출간 : 2017.12.27



여기저기서 자주 언급되어 한 번쯤 읽어보고 싶던 책이었는데, 마침 기회가 닿았다.

 

<회색인간>이 보여주는 공포는 알면서도 외면하던 것들이 눈앞에 드러나는 끈적함과 섬뜩함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짧은 호흡의 단편들이 실려 있었다. 기발한 착상도 있고, 인간 군상의 모습을 그대로 녹여낸 장면도 있다.

저자는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들려준다. 누구의 목소리도 평가하거나 반박하지 않는다. 그저 들려준다.

그것을 통해 느껴지는 당황스러움과 그 아래 꿈틀대는 감정들은 원래부터 내 안에 있던 것들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공포스러웠다. 

 

나 또한 그러지 않으리라고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이. 

이미 우리 대다수는 비슷한 경험들을 해봤으리라는 것이.

 

여름에 어울리는 서늘함을 준다. 


   

- 인간이란 존재가 밑바닥까지 추락했을 때, 그들에게 있어 문화란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다.

 

- 아무것도 없는 땅속에서 그들이 버틸 수 있는 건 그 악마 같은 희망 하나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땅을 팠다. 사람이 죽어나가도 땅을 팠다. 몸이 후들거려도 죽기 직전까지 땅을 팠다. 

나중에 와서는 그 희망이란 것도 너무나 희미하여 망각하게 되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땅을 팠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는 듯이. 

 

- 인간이란 존재가 밑바닥까지 추락했을 때, 어떻게 될까?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그저 배고픔을 느끼는 몸뚱이 하나만 남을 뿐. 

이곳의 인간들에게 삶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일어나면 땅을 파고, 하루 종일 배고파하고, 지치면 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면 땅을 팠다. 

회색 인간들의 입은 말을 할 줄 모르는 것 같았고, 귀는 듣지 못하는 듯했고, 눈은 그저 죽어 있는 것만 같았다. 

인간들을 살아 있는 송장이라고 표현하기에도 아쉬웠다. 이곳을 무의미의 지옥이라고 부르기도 아쉬웠다. 

 

- 그날 또 한쪽에선 한 남자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몰매를 맞았다.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이 새끼가 벽에다 돌멩이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

 

- 그는 지상에서 화가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화가는 필요가 없었다. 

땅을 파기에도 모자랄 그 힘으로, 그런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다니?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도 당연했다. 

분노한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은 그는, 쓰러져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서로를 돌봐주지 않았다. 부상을 당한 자에게 빵을 나누지 않았다. 쓰러지면 그걸로 끝이었다. 

지상에서 노래를 부르던 사람이든, 그림을 그리던 사람이든, 소설을 쓰던 사람이든, 이곳에서 예술은 필요가 없었다.  

 

- 여전히 사람들은 죽어나갔고, 여전히 사람들은 배가 고팠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회색이 아니었다. 

 

- <회색인간>

 

 

- 누구도 재산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실제 돈을 쓰듯이 신중하게 사용했다. 그들에게 그 재산은, 마치 사회와 무인도를 연결해 주는 현실의 끈처럼 느껴졌다. 그 돈을 장난처럼 치부해 버리는 순간, 구조에 대한 그들의 희망도 사라져 버릴 것처럼 느껴졌기에 더더욱 진실로 대했다.

 

- 소설을 써서 들려주고 돈을 받는 이도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돈을 벌기 위해 무언가를 했다. 

그것이 그들의 무인도 생활을 버티게 했다. 그리고 결국, 그날이 왔다. 

 

- "그날 그 자리에서 살고 싶어서 거짓말을 한 거야... 미안하네."

사람들은 노인을 돌아보았다. 그들 모두 노인에게서 수천만 원씩 받을 돈이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노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게 다였다. 그냥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 사실, 그 노트도 이곳에 없었다. 서로의 재산이 오고 간 그 노트는 무인도에 두고 왔다. 아무도 그걸 챙기지 않았다. 그 노트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무인도 생활을 버티게 해주는 것. 그거면 충분했다. 

 

- 이후 방송에 출연한 그들은 항상 말했다. 

"통조림 몇 개 때문에 한 노인을 죽이려고 했을 때, 저희는 짐승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한 노인을 살려주고 나니, 그제야 저희는 사회 속에 사는 인간이 되어 있더군요. 그래서 저희는 살았습니다."

 

- <무인도의 부자 노인>

 

 

- 끔찍한 신의 저주를 받게 되었다. 

전 인류가 모두, 좀비가 되고 만 것이다. 

세계는 커다란 혼란에 빠졌지만, 그럼에도 현재까지 문명이 유지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사람들이 늘 좀비 상태는 아니었던 것이다. 

특정 시간을 기준으로 인류의 절반은 낮에만, 나머지 절반은 밤에만 좀비로 변했다. 

자연스럽게 인류는, 밤에만 좀비로 변하는 인간들을 낮인간, 낮에만 좀비로 변하는 인간들을 밤인간이라 부르게 되었다.   

 

- 사람들은 좀비의 위협을 받아도 쉽사리 좀비를 죽일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좀비에서 사람으로 변하므로, 좀비를 죽여도 살인죄를 적용했다. 물론, 죄의 경중은 융통성 있게 적용됐다. 그래서 정당방위성이 매우 중요해졌다. 

 

- 개인들 스스로는, 본인이 낮인간인지 밤인간인지를 파악한 뒤, 좀비로 변하기 전에 스스로를 가두기 시작했다. 괜히 좀비가 되어 돌아다니다가 죽으면 본인만 억울하기 때문이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비에 의한 인간 살해, 인간에 의한 좀비 살해 사건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결국 낮인간은 낮인간끼리, 밤인간은 밤인간끼리 마을을 이뤄 살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낮인간들은 낮에 일을 하고, 밤인간들은 밤에 일을 하는 사회시스템이 갖춰졌다. 하지만 곧 불반이 피어났다.

 

- 원래 하나였던 인간이란 종이 마치 낮인간, 밤인간이라는 두 종족으로 나뉘어버린 듯했다. 

언론 역시 낮의 언론, 밤의 언론으로 각자 나뉘게 되었고, 각자의 언론들은 서로를 씹어대기 바빴다. 

 

- 가장 큰 원인은 소통의 부재였다. 

일어난 문제에 대해 대화를 하고 싶어도, 상대는 좀비였던 것이다.

풀지 못한 실타래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인류는 어느새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낮인간, 밤인간 간의 좀비 살해 행위로 이어졌다. 

 

- 서로를 죽이는 데 그다지 죄책감은 없었다. 여성, 노약자,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겉모습은 끔찍한 좀비였고, 그런 괴물을 없애는 것엔 거부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서로의 언론들이, 복수엔 복수라고 말하는 대중들이 그들의 의견을 조롱하고, 묵살했다.

 

- <낮인간, 밤인간>

 

 

- 김 군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는 사람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작은 흠집만으로도 김 군은 인류 멸망의 씨앗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또다시 말했다. 

"저런 인성을 가진 자가 혹시라도 인류에게 해가 되는 소원을 빌면 어쩐단 말입니까? 인류의 안전을 위해 김 군을 죽입시다!"

휩쓸린 사람들은 동의했다. 

그렇게 김 군은 완벽하지 못한 죄로 주인 없는 칼에 맞아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 사람들은 다시 빛이 내리쬐는 김 군의 시체를 보며 신을 기다렸다.

[내일 밤 12시에 다시 소원을 말하라.] 

 

- <신의 소원>

 

 

- 걱정된 사람들은 차별에 극도로 예민해졌다. 그것은, 놀라운 결과를 불러왔다. 

"뭐야? 누가 장애인을 차별하는 거야? 법은 또 왜 이래?"

"인종차별이 아직도 있다니? 이거 뭐 하자는 거야! 방송국들은 이런 걸 알리지 않고 뭐 하나?"

"뭐? 성 소수자를 차별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어디서는 아직도 동성 결혼이 불법이라고?"

"세상이 이래 가지고, 나중에 신인류 아이들이 자라서 평화롭게 살 수 있겠어?"

 

- 사람들은 작은 차별에도 크게 분노했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정부는 시스템으로, 법적으로 최대한 지원했다. 언론들은 연신 고쳐야 할 차별을 뉴스로 내보냈다. 

지금의 사회 분위기가 그랬다. 무엇이든 차별을 하는 것들은 희대의 몰상식한 것들이고, 매장당해 마땅한 것들이었다. 

그러자, 

"뭐야? 가능하잖아?"

 

- 세상에 모든 차별이 사라졌다. 사람들 스스로도 놀랐다. 세상에서 차별을 없애는 게 가능했다니?

 

- 시간이 흘러 신인류 아이들이 자라난 뒤에도, 아이들의 여섯 손가락을 놀리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들 스스로도 창피해하지 않았다. 

그냥 별 것 아닌 당연한 일이었다.

 

- <손가락이 여섯 개인 신인류>

 

 

- 게다가 온 가족의 뇌 스캔을 통하여 구현한 완벽한 가족 아바타가 함께하기에, 노인들에게는 실제 현실과의 차이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더 나았다. 함께 살지 못하던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었으니까. 

 

- 가상 세계 속 노인들은 그곳이 가상 세계라는 자각조차 못 하였기에, 정부에서 내건 광고 멘트는 이러했다.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사랑하는 자식들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꿈을 이루었습니다.]

 

- 처음에는 엄청난 반발에 부딪쳤다. 

사실상 부모 살인이라는 얘기까지 나오며, 디지털 고려장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또 자식들의 설득으로, 가상현실 이주는 조금씩 이루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반인륜적 행위라 욕했지만, 당사자들은 자신의 아바타가 부모님과 함께 사는 모습을 보며 만족했다. 그들은 묻곤 했다.

"1년에 두 번도 안 찾아가는 것들이, 우릴 욕할 자격이 있나?"

 

- 점차, 가상현실 이주의 여러 가지 장점이 밝혀졌다. 

부모님의 건강하고 행복한 모습을 어디서든 접속하여 볼 수 있다는 점. 부양비의 완전 삭감. 어차피 자신의 뇌를 스캔한 아바타이기에, 가끔은 부모님과 싸우기도 하는 완벽한 현실성.

거기다 정부에서 각종 혜택까지 밀어주니, 점점 이주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단, 하나의 단점이 있었다. 

 

- 가상 세계 속 가족들의 아바타에 갱신이 필요하단 점이었다. 

만약 노인의 손녀가 고등학생일 때 뇌 스캔을 했다면, 가상 세계 속에서도 손녀는 영원히 고등학생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했다. 현실 속 가족과 언제나 똑같은 아바타이기에 거부감 없이 이주하는 것이지, 현실과 다르게 제멋대로 변화하는 인공지능 따위였다면 아무도 이주하지 않았다.

 

- 이주 노인의 가족들은 보통 1년에 한 번씩 뇌 스캔을 통해 가상 세계 속 아바타를 업데이트했다. 

그러나 뇌 스캔의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게 문제였다. 정부에서는 첫 1회 만을 무료로 지원해 주었고, 나머지 갱신은 가족들의 부담이었다. 

그러자 초기에 비해 2년, 3년, 뇌 스캔을 미루는 가족들이 점점 생겨났다. 

물론,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노인들은 가족들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마치 만화 캐릭터 짱구가 영원히 유치원생인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 참 신기하게도 똑같았다. 현실에서 부모님을 찾아뵙지 않던, 신경 쓰지 않던 그 모습들이, 가상현실에 모셔두고도 똑같이 나타난 것이다. 

혹자는 이 서비스를 한마디로 표현했다. 

"마음속 죄책감에, 할 만큼 했다는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

 

- 자신도 늙으면 아버지처럼 가상 세계로 이주해야 할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지금 딸의 표정이 그랬다.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했다. 전혀 나쁜 말을 한 것 같은 얼굴이 아니었다. 

하긴, 아주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가 가상 세계에 있는 걸 봐왔으니, 딸에게는 당연한 문화일지도 모른다.  

 

- <디지털 고려장>

 

 

- "그렇네. 지킬 건 지켜야지. 그걸 놓쳤네, 내가."

"맞아.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는 건 도덕적이지 못하지."

"그럼 그럼. 상황이 핑계가 될 순 없어."

인류 최고의 지성들이라는 벽 너머의 그들은, 대표의 결정에 수긍했다.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옳은 결정이었다고 판단했다. 

지성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훌륭한 결정이었다며, 그의 공명정대함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 <소녀와 소년,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

 

 

- 오히려 전쟁과 분쟁 같은 무의미한 일들이 사라졌고, 전 세계의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기적 같은 구원이 펼쳐지기를 기원하고 응원했다. 

물론, 사회적 파장이 없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을 내뱉었으니까.

"1년 뒤에 세상이 망할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살 필요가 있나?"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일하던 사람들, 모욕을 참아가며 굽신거리던 사람들, 현실에 부딪혀 하기 싫은 일을 하던 사람들, 모두가 그만뒀다. 여행을 떠나고, 하고 싶었던 것을 하고, 쉬고 싶은 만큼 쉬었다.

일하는 사람이 없으니 물가가 치솟았지만, 그만큼 사람의 가치도 치솟았다. 일하는 사람만큼 귀한 사람은 없었다. 

 

- 그동안 쌓아둔 걸 놓을 수 없었던 기업들은 어떻게든 기업을 유지하고 싶어 했지만, 예전과 같은 대우로는 절대 사람들을 붙잡을 수 없었다. 직원을 하늘 같이 여기며 모셔야 할 지경이었다. 

서비스직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딴 을 취급을 당하면서 이 일을 왜 해? 안 해!"

 

- 이미 김남우의 희생은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다. 김남우가 거절한다고 해도, 강제로 로켓에 태워질 상황이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김남우 하나로 전 인류를 구할 수 있는 상황인데.

 

- 김남우는 매일 밤 울었다. 왜 하필 자신인가? 억울하다고 소리 지르고, 죽기 싫다고 화를 냈다. 그렇지만 운명을 거스를 수 없었다. 

가족들의 면회도 김남우가 마음을 추스르고 동의한 뒤에야 겨우 허락되었다.

 

- 자신의 목숨으로 세계를 구할 수 있다면, 기꺼이 바쳐야 하는 게 맞을까? 누구라도 당연히 그리해야 하는 걸까? 

 

- "아니지! 급하게 보내려다가 로켓이 폭발하기라도 해 봐! 김남우는 꼭 우주 멀리 가야 한다고!"

"근데 김남우는 왜 아직도 우리나라에 있어? 미리미리 좀 가 있지!"

"김남우를 죽이면 혹시 운석이 멈출지도 모른다! 일단 김남우를 죽인 뒤에, 안 되면 그 시체를 우주로 보내도 늦지 않다!"

"저 새끼는 왜 하필 운석을 몰고 다녀서 지구를 위기에 빠트려?"

 

- 로켓 발사가 확정된 후,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람들은 김남우에게 영웅의 연설을 기대했다. 

하지만 김남우는 단 한마디 물음만을 던졌다. 

"한 사람을 희생해서 모두를 살리는 게 정당합니까?"

"..."

김남우는 대답을 원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얼굴에 대고 변명을 주절거릴 사람도 없었다. 

 

- 왕복 계획이 없었던 김남우의 로켓은 앞으로 쭉쭉 뻗어나갔다. 환호로 시끄러운 지구에서 최대한 멀리, 아무것도 없는 곳을 향해 끝없이 벋어나갔다. 

그곳은 조용한 곳이었고, 그곳으로 가는 김남우도 조용했다. 

 

- 실로 고독한 항해였다.

 

- [긴급 속보입니다! 지구가! 지구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 지구가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을 떠나간 행성의 주인을 따라서, 아무것도 없는 조용한 곳으로, 고독한 항해사를 따라서.

 

- <운석의 주인>

 

 

- 김 대리는 꿈에도 몰랐다.

정 대리가 비 오는 날을 가장 좋아했다는 것을 몰랐고,

자신이 맑은 날을 가장 좋아했다는 것을 몰랐고, 

아내가 흐린 날을 가장 좋아했다는 것을 몰랐고, 

...

 

- 그렇게 자신하던 보물의 사용법을,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몰랐다.  

 

- <보물은 쓸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 

  

 

- 성공률의 3분의 1이라니? 두석규는 고민했다. 이런 미신을 믿어도 될까? 괜히 딸의 시체만 훼손하는 것은 아닐까?

 

- "내 딸을 살릴 수만 있다면, 뭔들 못 해!"

두석규는 미쳤다는 말을 듣더라도 해보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제 시간이 급했다. 그는 당장 수족들을 모아 소리쳤다. 

 

"어느 부위를 잘라 넣어야 내 딸이 부활할 확률이 높겠는가?"

누군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머리입니다. 신체를 지배하는 것은 뇌입니다. 뇌가 없다면 나머지는 그저 고깃덩어리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누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심장이 있는 상반신이 아니겠습니까? 원래 심장이 주술적인 상징으로도 유명하고, 사람은 역시 마음이지 않습니까."

누군가 생각 끝에 말했다. 

"생식기가 있는 하반신입니다. 번식이야말로 동물의 존재 이유, 인간도 결국에는 유전자를 퍼트리기 위한 동물일 뿐입니다."

 

- <인간 재활용>

 

 

- 고립된 사람 중 절반이 희망을 얻었고 절반이 절망했다. 

그렇다고 절망한 이들 때문에 구조를 늦출 순 없었기에 당장 작업이 시작됐다.

TV에서는 점점 희망에 찬 절반만을 비추기 시작했다. 절망에 빠진 절반의 소식은 점점 줄어들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두 그룹에 큰 차이는 없었다. 아주 운이 좋은 건물을 제외하고는, 지하를 뚫는 작업이 언제 끝날지 몰랐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진 그룹과 가지지 못한 그룹의 차이는 극명했다. 

여기서 누군가는 궁금해졌다. 

과연 끔찍한 디스토피아는 어느 그룹에서 먼저 펼쳐질까? 

 

- 대부분은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먼저 서로를 잡아먹을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불만의 목소리는 희망이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먼저 터졌다. 

"사형수를 허락해 주십시오! 우리 다 굶어 죽게 생겼습니다!"

"식물인간의 장기 기증을 이쪽부터 넣어주는 법안을 우선 추진해 달라!"
"혹 자살을 하시려는 분들은, 마지막으로 좋은 일 하고 가십시다."

희망은 인간을 악착같이 만들었다. 결국, 가장 먼저 제비뽑기를 결정한 것도 그들이었다. 

 

- "그렇게 당신들이 풀려난다고 해도 무사할 줄 알아? 세상 모두가 당신들을 손가락질하며 욕할 거야! 당신들의 그 행위 때문에 죽어간 다른 이들은 원수를 갚으려 들 거라고!"

"조금만 기다리면 정부에서 해결법을 찾는다니까요? 사형수도 배급한다고 했잖아요! 그걸 못 참으셔요, 왜?"

"이해할 수가 없네! 인류를 위한 행동을 해야지!"

저주와 같은 말들, 그냥 잠자코 희생하라는 말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들이 그들에게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그러나 어떠한 번복도 없는 와중에 예정된 정오가 다가왔다. 

 

- 그랬단 말인가? 정답은 내부에서부터의 공격이었단 말인가?

긴장하며 몇 시간을 대기해도, 검은 입술이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 이기적인 소수는 한순간에 영웅이 되었다.

 

- 그러나 건물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그 삐쩍 메마른 사람들은 전혀 우쭐대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살고 싶었을 뿐입니다. 살고 싶었던 소수였을 뿐입니다."

 

- 누가 인터뷰를 하든, 전자 상가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눈빛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들을 TV 화면으로 지켜보며 입을 가볍게 놀리던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감히 그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 <식인 빌딩>

 

 

- 한데 사람들을 더욱 경악하게 만든 건,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욕조 속 정화수가 서서히 불투명하게 응고되기 시작하더니, 끝내 인간의 형상으로 뭉쳐져 대표로 다시 돌아왔다. 

욕조 속의 정화수를 모두 흡수한 대표는 마치,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듯 상쾌해 보였다. 

"여러분! 이 정화수에서 한 시간만 물이 되었다 깨어나면,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상쾌함을 느끼게 되실 겁니다!"

 

- 정화수의 효능은 한마디로, 인간을 완벽한 컨디션으로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인간의 몸에 쌓인 모든 피로를 사라지게 해 주어 인생 최고의 컨디션으로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정화수를 사용해 본 사람들은, 그동안 어떠한 휴식과 숙면으로도 겪어보지 못했던 인생 최고의 컨디션에 깜짝 놀랐다. 

그것은 상쾌함을 넘어, 황홀할 지경이었다. 비유하자면, 평생 70퍼센트밖에 차지 않던 배터리로 살아오다가 갑자기 100퍼센트까지 완전 충전 상태가 된 듯한 기분.

 

- <흐르는 물이 되어>

 

 

-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내 죄를 씻는다 생각하십시오. 증오심을 버리고, 원망을 버리고 담담히 인정하세요. 마음의 수행이 닿는 순간, 신께서 구원을 내려주실 겁니다."

 

- 남자는 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간혹, 남자가 악마를 꾸짖기라도 할 때면 사람들은 희열에 온몸을 떨었다. 

사람들은 종교의 힘으로 지옥 생활을 좀 더 잘 버티기 시작했다. 남자는 그제야 깨달았다.

"악마들이 나를 이용한 이유가 이거였구나! 통제를 더 잘하기 위해서, 고통을 더 쉽게 주기 위해서!"

그렇다면 사내는 기꺼이 그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얼마든지 종교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순종적인 양으로 만들어줄 수 있었다. 

 

- "다 받아들이세요. 절대 반항하지 마세요. 고통을 주시는 것에 감사하시길. 욕할 시간에 기도하세요. 시련을 주시는 것에 감사하세요. 다 받아들이세요."

 

- 이미 지옥에서 환생교 교주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사람들은 악마들에게 기꺼이 협조했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아예 웃으며 벌을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남자는 그들을 비웃으며 편안함을 즐겼다. 지옥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호화로운 생활이었다. 

 

- 그리고 1년 뒤. 악마들이 남자를 찾아와 부탁했다. 

"이번에 저희 지배자 중 한 분께서 환생교의 신으로 등장할 예정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고, 물론입니다. 저만 믿어주십시오. 하하하."

남자는 자신만 믿으라며 호언장담을 하고 무대로 나섰다.  

 

- 신은 사라졌고, 사람들은 주저앉았고, 악마들은 낄낄거렸다.

이 지옥을 버티게 해 주었던 유일한 희망의 배신.

그것은 사람들이 이 지옥에서 겪은 고통 중 가장 큰 고통이었다.  

 

- <지옥으로 간 사이비 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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