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김나영] 야수의 나라

일루젼 2024. 8. 6.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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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나영
출판 : 네오픽션
출간 : 2015.02.18


       

가독성이 무척 좋다. 중간중간 수학적인 계산이 들어가는데도 영상미가 느껴지는 글이었다.

(다만 주제가 주제니만큼 <올인>이나 <타짜>가 자동 연상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엄청나게 신선하다거나, 놀라운 반전이 있었다는 아니지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상당한 도박 실력을 갖춘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을 도와나가는 구성은 소설 <카지노>와도 비슷하지만, 도박판 자체의 분위기는 <야수의 나라> 쪽이 훨씬 현장감이 느껴진다. 저자에 따르면 진짜 하우스 사장과도 전화 인터뷰를 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게임 룰이나 디테일에 대한 설명도 좋다.

 

본문에는 포커라고만 나오지만 딜러가 바닥에 까는 카드를 두는 걸 보면 작중 포커 게임은 전부 텍사스 홀덤으로 보인다. 세븐포커와 홀덤의 차이점은 내 손패로만 조합하느냐, 다른 플레이어와 공유하는 커뮤니티 카드를 두느냐인데 아무래도 수싸움은 홀덤이 더 치열할 것 같다.

 

리뷰를 쓰면서 찾아보다 보니 이세돌 바둑 9단과 바둑 6단이자 <올인>의 실제 모델인 차민수 플레이어가 참가한 홀덤 경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두 사람 외에도 다양한 포커 플레이어들이 참가한 것으로 보이는데, 다시 보기가 가능하다고 하니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한 번쯤 찾아보시는 것도 좋겠다.

 

직접 플레이하는 것보다는 관전을 더 좋아하는 편인데- 바람 쐬러 다녀오기에 정선은 너무 멀다.

<더 오프닝>이나 정주행 해야겠다. 

 

재미있었다.   


   

- 늦은 밤 시골 논둑 사이에 비닐하우스만 홀로 불을 밝혔는데, 그 앞이 고급 외제차로 만원이다. 채 서른 가구가 살까 말까 싶은 촌구석에는 당최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다.  

 

- "아유, 아저씨들도 참 딱하셔. 내가 몇 번을 말해요? 포커는 카드 패를 보는 게 아니라 육감으로 치는 거라니까요." 
용팔은 돈을 챙기며 일어설 때마다 패자를 향해 훈수를 두듯 말했다. 그러면 좌중에 있던 다른 일꾼들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배가 아프긴 했지만 용팔은 꾀가 있고, 눈치가 빨라서 곧잘 다른 이의 패를 짐작해 맞췄다. 때문에 으레 포커만 쳤다 하면 용팔이 이기기 마련이었고, 자신감은 하늘을 찌르다 못해 하느님 발바닥에 닿을 지경이었다. 

- 하지만 그런 대단한 용팔도 딱 한 사람 맥을 못 추는 양반이 있었는데, 그가 일명 '타짜'로 불리는 송 씨였다. 그는 왕년에 도박판에서 이름을 날렸지만 패가망신하고 지금은 노가다 판을 전전한다고 했다. 그런 과거사 때문인지 포커 판에 껴서 돈을 거는 법은 일절 없었으나 어쩌다 음료수 내기를 걸면 거의 그의 승리로 끝났다. 그래서 용팔도 그 앞에서는 잘난 체를 하지 않고 넌지시 승리의 비법을 물어보곤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이 "그걸 알면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겠나?" 하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때쯤 해서 뜻밖의 일이 생겼다. 같이 미장을 하던 어느 영감이 일을 그만두더니 하루는 번듯한 중형차를 타고 사무실에 놀러 왔다. 어찌 된 영문인지 물어보니 변두리에 차려놓은 불법 도박장에서 돈을 엄청 땄다고 싱글벙글했다.

 

- "씨발, 지금 그거 묻자고 이렇게 때린 거야?"
그는 담배를 쭉 빨아 길게 한 모금 뱉었다.
"어떻게 한 건지나 말해."
"카드 카운팅은 딱 보면 그냥 아는 거야. 숫자가 날아다니는 게 보이거든.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물으면 나도 답할 도리가 없어. 내 눈에는 보이는 거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운팅 잘하는 게 능사는 아니지. 확률이 낮더라도 상대에게 좋은 카드가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그럴 때는 눈을 봐야 해. 그럼 진카인지 뻥카인지 알 수 있거든." 

 

- 용팔은 자기가 늘 입버릇처럼 훈수를 두던 말을 떠올렸다. 육감으로 친다는 말. 녀석은 그 육감을 눈을 통해 알아본 것인가. 하지만 어떻게? 눈빛만 보고도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정연은 어리벙벙한 그를 보고 히죽거렸다.
"딜러가 카드를 돌리면 자기 패를 먼저 보지 말고, 상대의 얼굴을 봐야 해. 그럼 카드를 확인하는 상대의 미묘한 표정이 보이지. 맹수가 먹잇감을 사냥할 때 동공이 커진다는 걸 아나? 사람도 마찬가지야. 목표를 발견하면 저도 모르게 눈에 나타나. 찰나의 그 눈동자를 놓치지 않아야 해. 동공의 크기는 의지로 쉽게 조절되는 게 아니거든." 

 

- 오늘 돈을 못 따면 참말 앞으로가 큰일이라, 마음을 굳게 먹고 대머리 사장이 앉은 포커 테이블로 향했다.
테이블에 앉은 사람은 사장과 용팔, 선수 둘 해서 모두 넷. 오늘의 먹잇감인 사장을 놓고 하우스 측 소개를 받아 참여한 세 도박꾼이 각축전을 벌여야 한다. 
용팔은 같이 앉은 선수들을 훑었다. 하얀 투피스를 입고 화장을 여시처럼 한 중년의 아줌마와 순금 개목걸이를 찬 러시아 불곰 같은 사내.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까딱 눈인사를 나눴다. 어차피 하우스에서 돈을 대주는 게임도 아니고, 각자 소개비를 내고 들어온 자리니 여기서 이기든 지든 온전히 자신의 몫, 엄연히 모두가 경쟁자다. 
하지만 세 도박꾼 사이에도 불문율은 있었다. 절대 먹잇감이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지 말 것. 세 사람은 적당히 푼돈을 잃어주면서 사냥감이 긴장을 풀고 ‘날 잡아 잡수' 할 그 순간을 기다렸다. 

- "계산이 아니라 정말로 그냥 보면 아는데."
재휘는 천진난만한 얼굴이었다.
"아, 뭐. 그래, 내 확률이 얼마인지 계산한 건 그렇다고 치자. 그건 쉬우니까. 하지만 플러시 확률은 테이블에 있는 하트 카드를 모두 세지 않는 이상 어려워. 그런데 그걸 모두 셈했단 말이야? 네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거지?"
"음... 숫자가 보여요. 그게... 하늘에 둥둥 떠다니거든요. 둥둥."

 

- 용팔이 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드는 순간 선영이 끼어들었다.
"만약! 만약 절 강 회장 하우스에 넘기면 다, 다 불어버릴 거예요."
두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 돌아갔다.
"뭐?"
용팔이 되물었다. 선영은 부들부들 눈물을 흘리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강릉시 저동 94번지. 경포대 펜션. 블라인드 5~10만, 선수 여덟 명. 이거 강 회장이 알아도 되는 건가요?"
순간 두 사람이 입을 다물었다. 방금 전 통화 내용을 몽땅 외워서 읊을 줄이야.
"씨발..."
다시 용팔의 입에서 욕이 새 나왔다. 하우스 정보를 아는 이상 강 회장에게 넘겨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태우고 가다가 어디 내려줄 수는 있냐? 아니. 경찰서로 달려가 이 모든 걸 불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인데 뭘 믿고. 용팔은 머리를 북북 긁으며 욕지거리를 한바탕 쏟아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일단 데리고 가야겠다."

 

- 재휘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이 바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용팔을 쩔쩔매게 하는 여고생은 처음이었다. 

"너 꽤 영리하구나."

 

- 선영은 포획당한 맹수처럼 눈을 매섭게 뜨고 재휘를 응시했다. 곱상한 얼굴에 부드럽게 미소 띤 이 젊은 남자가 나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경계심을 풀 순 없었다. 
"어딜 데리고 간다는 거죠?"
"경포대 펜션. 내일 아침에 게임이 끝나면 서울로 갈 거야. 그때 집에 보내줄게. 그러니까..." 

 

- "널 친척 여동생이라고 설명했어. 좀 이상하게 여기는 눈치지만 어차피 내일 아침까지 다들 못 나가니까 그러려니 할 거야. 참, 음식은 전부 공짜야. 먹고 싶은 거 있음 아무거나 먹어. 술 빼고."
펜션 구석에 앉은 선영에게 재휘가 음료수를 내밀었다. 하지만 선영은 물 한 모금조차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어찌어찌 구사일생으로 몸을 피했지만 아버지는 자살했고, 졸지에 무일푼 거지 신세로 쫓기게 됐다. 선영은 그제야 참담한 현실이 실감 나 눈물을 뚝뚝 흘렸다. 

 

- 선영은 눈을 부릅뜨고 테이블을 바라봤다. 테이블 중앙에는 쉴 새 없이 칩이 쌓였고, 카드를 나눠주는 딜러의 손길은 한시도 쉬지 않고 분주했다. 그녀는 테이블의 카드가 돌아가고,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렸다가 폈다 하면서 돈 던지는 걸 구경했다. 포커룰은 생각보다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숫자와 무늬를 맞추는 거구나. 낮은 패부터 보자면 두 개의 숫자가 같을 때를 원페어, 원페어가 두 개일 때 투페어, 숫자 세 개가 같으면 트리플이다. 그 위가 숫자 다섯 개가 이어지는 스트레이트고, 그보다 높은 건 무늬 다섯 개가 같은 플러시, 그보다 더 높은 게 풀하우스. 그 위는 숫자 네 개가 같은 포카드와 동일한 무늬로 숫자 다섯 개가 이어지는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있지만 이건 저 사람들 말처럼 나올 가능성이 희박해.' 

 

- '처음부터 모든 걸 다 계산하고 있었구나! 저 사람의 칩은 결코 줄지 않아. 게임은 둘째 치고, 칩을 얼마나 따고, 잃을지까지 다 계산에 넣은 거야. 그러니 표정의 변화가 있을 리가 없지. 그 정도로 자신 있구나.' 
선영은 재휘가 주도하는 게임 테이블을 넋 나간 사람처럼 쳐다봤다. 그는 교묘하고도 치밀하게 사람들의 칩을 땄다가 잃었다가 하면서 한편에 자신만의 탑을 쌓아 올렸다. 그리고 그 탑은 절대 무너지는 법이 없었다. 선영은 재휘의 눈동자 속에 유유히 빛나는 무언가를 봤다.
'모든 판이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어. 대단한 남자다. 천재라고 할 수밖에 없어. 만약 내가 강 회장에게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이 카드밖에 없다면, 그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 "올인."
순간 재휘가 테이블 위로 자신의 칩을 모두 쏟아부으며 '올인'을 불렀다. 계속 콜을 부르며 판을 쫓아가던 한 남자가 잠시 주춤했다.
"아... 씨..."
남자가 갈등하는 표정으로 씩씩거렸다. 죽자니 이제껏 쏟아부은 돈이 너무 많고, 따라붙자니 그럴 깡은 모자랐다. 시간이 자꾸 흐르자 딜러가 숫자를 셌다.
"20, 19, 18..."
5초쯤 남자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그런데 그때 용팔이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더니 놀란 얼굴로 호통을 쳤다.
"야! 이재휘! 너 제정신이냐? 한 시간만 치라고 했더니 너 왜 내 돈으로 올인을 하고 난리야?"
말투는 재휘를 타박하는 듯했지만 선영은 용팔의 목덜미를 보고 알았다.
'조금도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지 않았어. 긴장하지도, 걱정하지도 않아. 처음부터 아는 거야. 이재휘라는 저 남자가 이길 거라는 걸.'
"죄송해요. 다 잃으면 노가다를 뛰어서라도 갚을게요."
재휘의 대답에 하우스에 있던 사람들이 하하 웃었다. 모든 플레이어와 구경꾼의 눈은 이제 딜러의 손끝으로 모아졌다.

 

- 그때 용팔이 커피를 홀짝이며 선영에게 말을 걸었다.
"아유, 십년감수했네. 저 녀석, 어쩌려고 저러나 몰라. 그런데 뭘 그렇게 유심히 보고 있어? 포커 치는 게 재미있어 보여?"
"글쎄요. 재미있다는 건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를 때 재미있다고 하는데, 저건 별로 재미있어 보이지 않네요."
용팔은 생각지 못한 대답에 뭔가 뜨끔한 표정으로 선영을 쳐다봤다.

 

- '말도 안 돼. 알아봤을 리 없잖아.'
머리를 흔들며 돌아서려는 그때, 선영이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우스 끝나면 저도 서울에 데리고 가주세요."

"뭐?"
용팔이 잘못 들은 사람처럼 휙 몸을 돌렸다. 선영은 그의 뚫어질 것 같은 눈빛을 담담하게 마주했다.
"포커를 배워야겠어요."

 

- "아버지는 판돈을 다 잃자 결국 저까지 걸더군요. 강 회장은 절 강릉에 있는 닥터 황에게 보내겠다고 했어요. 갈 곳도 없는데 어쩌겠어요? 이렇게 죽을 운명이라면 죽어야지요."
'닥터 황'이라는 말에 두 사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선영이 구태여 그 사람에 대해 더 설명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 "재휘야, 그만 가자!"
그는 불룩하게 챙긴 돈 가방을 들고 펜션 문을 쾅 열었다. 그러나 재휘는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너 우리가 나쁜 사람들이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 정도 보는 눈은 있어요."
"눈이 있다?"
"네, 아저씨가 진카와 뻥카를 알아맞히듯 저도 보는 눈이 있단 말이에요."
"하지만 강 회장 하우스로 돌아간다는 협박 같은 건 통하지 않아."
"제가 하는 말이 거짓말 같아요?"
그때 밖에서 용팔이 성화를 해댔다.
"더 얘기하고 자시고 할 게 뭐 있어? 어서 가자!"
재휘는 선영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당장 벼랑 끝에 섰으면서 그 눈빛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그녀의 뜻을 깨닫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선영에게 남길 말은 하나뿐이었다.
"부디 네 말이 거짓이길 바란다."

 

- "아저씨가 올 거라고 믿었어요."
"날 믿었다고? 어떻게 믿어? 뭘 보고?"
선영은 울먹거리면서도 재휘의 사나운 기세에 눌리지 않고 대답했다.
"알아보잖아요. 아저씨는 상대방 말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알아보잖아요."
"모른 척할 수도 있었어."
"아뇨. 모른 척 안 하는 사람이에요."
"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제가 말씀드렸죠. 저 그 정도 사람 보는 눈은 있다고. 봐요. 아저씨 지금 여기 왔잖아요."

 

- 선영은 용팔이 월세로 내놓으려고 했던 별채 방 한 칸을 차지하게 됐다. 용팔은 돈도 안 되는 군식구가 늘었다며 선영을 홀대했지만 그의 태도가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선영이 온 뒤로 퀴퀴하던 홀아비 냄새도 싹 사라졌고, 한 번도 세탁한 적 없었던 창문의 커튼 색까지 원래의 빛을 찾았다. 부엌에서는 저녁으로 생선구이와 찌개가 올라왔다. 만성 위염으로 고생하는 용팔을 위해 녹즙도 매일같이 갈았다. 이쯤 되자 용팔의 냉정했던 마음이 눈 녹듯 녹지 않을 수 없었다. 반년쯤 지나자 용팔은 모르는 사람에게 선영을 자기 딸이라고 소개할 정도로 변했다.

- 하지만 재휘는 달랐다. 선영이 아무리 살갑게 굴어도 그는 좀처럼 상냥하게 변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가 다정하고 친절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는 선영의 끈질긴 요구에도 포커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어쩌다 카드 만지는 걸 보면 카드를 뺏기 일쑤고, 용팔에게도 절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도박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었고,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는 지옥 불구덩이였다. 하루는 선영이 포커를 가르쳐달라고 떼를 쓰다 씨알도 안 먹히자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인가요?" 하고 쏘아붙인 날도 있었는데, 그때 그는 한 치의 미동도 없이 냉랭하게 대답했다. 
"꼬마야, 난 호텔 카지노학과 졸업했고, 곧 카지노 딜러로 취업할 거야. 하우스 도박장을 들락거린 건 현장 실습을 겸해서 호기심과 재미로 다녔을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조금도 없어. 하지만 넌 그렇지 않잖아. 네겐 그 무엇도 가르쳐줄 수 없어. 이쯤에서 너도 다시 생각해. 원하면 대학 등록금을 내줄 수도 있으니까." 

 

- "정 그렇게 소원이라면 그 돈 밑천 삼아서 배워보란 말이다. 인생 짧은데, 어쩔 거야? 우물쭈물하다가 늙어 죽지 않으려면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야지."
선영은 감격한 표정으로 돈 봉투를 품에 안았다.
"아저씨, 그럼 저 이제 포커 가르쳐주시는 거예요?"
"혼자 김칫국 원샷 하지 말고, 잘 들어라. 내가 가르쳐주겠다는 소리는 아니니까."
"그러면?"
"도박사에게 제일 중요한 건 세 가지다. 빠른 눈, 의연한 손, 정확한 머리지. 이 셋 중 하나만 없어도 도박사가 아니다. 난 이미 퇴물이라 눈이 흐리고, 셈도 틀려. 게다가 재휘 같은 포커페이스도 아니지. 난 너에게 단 한 가지도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다." 

 

- 다이사이는 주사위 세 개를 굴려 홀짝, 대소 등 숫자를 조합해 경우의 수를 맞추는 확률 게임으로 룰은 매우 간단했다. 선영은 칩을 받자마자 노란 칩 세 개를 '대'에 올려놓았다. 숫자의 합이 11 이상이 나오면 그녀는 30만 원을 따게 되지만 10 이하가 나올 경우 30만 원을 잃는다. 재휘는 선영을 노려봤다. 무슨 돈으로 여길 왔는지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사람들은 마감시간이 되자 우르르 칩을 놓았다. 
"No more bet."
재휘가 손을 들어 베팅을 제한했다. 주사위가 돌아갈 시간이었다. 다르르르, 양쪽에 걸린 모니터에서 주사위 구르는 게 나타났다. 6, 1. 5. 합은 12. '대'였다. 테이블에 수북했던 칩은 이제 불이 켜진 쪽과 불이 꺼진 쪽으로 나누어졌다. 칩을 잃은 사람들의 표정이 참담하게 구겨졌다. 몇몇은 담배를 피우러 가버렸다. 그에 반해 돈을 딴 사람들은 열에 들떠 딜러가 제 몫을 나눠주기를 기다렸다. 

 

- 그는 정말로 돌아설 마음이었다. 그런데 선영의 말 한마디가 그 걸음을 붙잡았다.
"시험하려는 건 오빠가 아니라 저예요."
"뭐?"
"아저씨는 절 보내주시면서 그러셨어요. 오빠에게 포커가 아니라 복수심을 내려놓는 법을 배우라고. 궁금해요. 그 방법이 뭔지, 그게 되긴 되는 건지."
순간 재휘는 뒤통수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오빠가 가르쳐주세요."
선영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재휘는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가족을 잃은 슬픔과 들끓는 복수심이 그 까만 눈동자에 비쳤다. 그 역시 그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아니, 너무 잘 알았기에 그녀를 안고 토닥토닥 등을 쓸어주고픈 강렬한 욕구가 솟았다. 그러나 재휘는 포옹은커녕 어떤 따뜻한 위로도 건네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차분했다. 
"좋아, 기회를 줄게. 하지만 내가 주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도박을 그만두기로 약속해."
"약속할게요."
펑펑. 두 사람의 뒤로 형형색색의 불꽃들이 꽃처럼 피어올랐다.

 

- 그녀는 슬롯머신 기계 의자에 앉아 돈 봉투를 열었다. 안에 든 돈은 백만 원이었다.
'오빠는 얼마나 땄었을까. 천만 원? 아니면 2천만 원? 글쎄, 오빠 실력이라면 VIP실까지 올라가서 억을 뽑았을지도. 만약 그런 큰 금액이라면 내가 이길 가능성은 희박해. 그는 절대 포커를 가르쳐주지 않을 생각인 걸까?' 
온갖 의문과 의심이 머리를 헤집었다. 그러나 무참히 깨질지언정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긴 싫었다. 선영은 제 손으로 양 뺨을 짝 때렸다.
'정신 차리자. 모든 건 심리적 압박을 주기 위한 장치야. 시간제한도 마찬가지고. 오빠를 이기려면 승률이 가장 높은 게임부터 찾아야 해. 내가 이길 방법은 그것뿐이야.' 

- 그녀는 먼저 룰렛부터 찾았다.
'룰렛의 경우 번호가 서른여덟 개니 맞출 확률은 1/38 이야. 하지만 돈은 서른다섯 배로 받으니 환산 승률이 46퍼센트, 한 번에 두 개씩 베팅한다고 하면 확률이 1/19이지만 건 돈의 열일곱 배를 받으니 승률이 45퍼센트로 떨어져. 네 개씩 베팅하면 1/9.5인데 여덟 배를 받으니 승률은 42퍼센트로 더 떨어지고. 차라리 다이사이가 낫겠어.'

- 수첩에는 이제까지 카지노 게임의 승률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49.3퍼센트, 42.8퍼센트... 그 어떤 것도 50퍼센트의 승률은 없었다.
'계속 앉아 있을수록 돈을 딸 가능성은 더 떨어지고, 출목표같은 건 하등 도움이 안 돼. 확률적으로 카지노를 이길 가능성은 없다. 큰돈 몇 판으로 승부를 봐야 하지만 운이 없으면 한 번에 다 잃게 될 거고, 설령 딴다고 해도 절대 만족하고 일어나질 못해. 돈을 잃으면 시드머니를 복구하기 위해 더욱 베팅 금액을 늘릴 수밖에 없고, 위험은 더 커져. 게다가 난 오빠가 얼마나 땄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계속 게임을 해야 하는 부담이 있고, 베팅 금액도 점점 높일 수밖에 없어. 이건 절대 이길 수 없는 시험이야. 덫이다.’ 

- 선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돈 백만 원은 한 푼도 쓰지 않았고, 제한 시간은 아직도 열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그녀는 카지노에서 나와 재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금방 입구로 나왔다. 생각보다 너무 일찍 부른 탓인지 그는 좀 맥 빠진 얼굴이었다.
"돈을 다 잃었어? 아님 포기하는 거야?"
"둘 다 아니에요."
선영이 봉투를 내밀었다.
"시험을 일찍 끝내려는 것뿐이에요."

 

- "연습한 게 맞아? 대답하는 데 10초나 걸려서는 실제 테이블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맞는 말이었다. 담배 연기와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 음악, 오가는 술잔, 심리적 압박감을 모두 고려하자면 하우스 도박장에서의 카운팅 기술의 정확도와 시간은 더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선영은 밤이고 낮이고, 카드가 다 닳아 없어질 정도로 카운팅 연습을 했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나자 카드를 보자마자 확률부터 나오는 수준이 됐다. 그러나 재휘는 거기에 대해서도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 
"카드 카운팅은 기본 중의 기본이야.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베팅이지. 노련한 겜블러는 백 번을 죽더라도 한 번의 기회가 오길 기다려. 다른 겜블러를 관찰하고 그 각각에 확률을 붙여야 해. 어떤 카드에 돈을 얼마나 거는지, 콜을 많이 부르는지, 레이즈를 자주 부르는지, 시드머니 대비 몇 퍼센트의 위험을 걸고 승부를 보는지 각 겜블러의 모든 확률을 계산할 수 있어야 해." 

- 선영은 그 후로 며칠 동안 가상의 적을 만들어 확률을 계산하고, 해외 도박 사이트에서 소액의 현금을 걸고 이를 시험했다. 물론 결과는 예상보다 훨씬 좋았고, 한 번에 서너 개의 멀티테이블을 유지하면서도 높은 승률을 유지했다.
"그럼 이제 나하고 제대로 붙어봐."
"좋아요."

 

- 그러나 이런 묘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의 진전은 없었는데, 두 사람이 워낙 숙맥이기도 하거니와 재휘가 마음을 강경하게 먹은 탓이 컸다. 
'선영이는 나한테 수업을 받는 입장이야. 만약 선영이도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그건 사랑 고백이 아니라 폭력일 뿐이야.'
재휘는 그런 생각을 한 후로 오히려 수업에 더욱 칼같이 굴었다. 선영은 그런 재휘가 때때로 야속했지만 그녀 역시 겨우 붙잡은 스승을 섣부른 사랑 고백으로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 "잘했어. 드디어 상대를 제대로 카운팅할 수 있는 실력을 갖췄구나. 전쟁터에 들어가기 전에 네가 쓸 칼을 준비한 셈이야. 앞으로 이걸 어떻게 사용할지는 너한테 달렸으니 잘 관리하도록 해. 술, 담배를 하지 않고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면 그나마 두 시간 정도는 완벽하게 쓸 수 있을 테니까." 
"겨우 두 시간요?"
선영이 '에?' 하는 얼굴로 물었다. 으레 도박꾼들이 하우스에서 보내는 시간은 네 시간 이상이고, 반나절에서 하루 정도 아예 합숙을 들어가기도 한다. 그런데 최고의 기술인 카운팅이 두 시간밖에 쓸 수 없는 무기라니. 하지만 재휘는 그조차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래, 나 역시 마찬가지야. 내가 하우스 도박장에서 한두 시간만 게임을 하는 이유지. 물론 억지로 버틴다면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쓸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돈을 잃을 확률도 더 높아져. 돈을 잃게 되면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기 때문에 컨디션은 더 떨어지게 될 거고 점점 더 엉망이 돼. 그러니 도박은 적당한 선에서 멈춰야 되는 거야." 

- 재휘는 다음으로 '블랙', 즉 속임수를 가르쳤다.
"하우스 도박장에서 블랙을 쓰다 걸리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게다가 그 후엔 아예 게임을 하기가 어려워지지. 도박장 사장끼리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서 공유하니까. 난 네가 실력만 있다면 블랙 따위를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최소한 그걸 알아보는 눈은 있어야겠지. 카지노 딜러와 달리 하우스 도박장 딜러는 블랙을 쓰기도 하니까. 바보처럼 당할 순 없잖아." 

 

- 재휘는 카드를 정리해서 셔플 한 뒤 선영에게 한 장을 뒤집게 했다. 무늬는 스페이스 6이었다.
"영화 <타짜>를 보면 눈보다 손이 빠르다는 말이 있어. 우린 그 손을 알아봐야 해. 딜러가 속임수를 쓸 때와 쓰지 않을 때의 손놀림이 어떻게 다른지."
놀라운 일이었다. 스페이스 6은 하트 6으로, 하트 6은 다이아 6으로, 다이아 6은 클로버 6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 마술같은 쇼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여러 번 셔플 한 뒤 선영에게 카드 네 장을 고르게 했다. 
"네가 고른 카드 무늬를 맞춰볼게. 클로버 2, 하트 퀸, 다이아 8, 다이아 킹."
선영이 카드를 뒤집자 과연 그의 말대로였다.
"어떻게 이걸... 나눠주기 전에 본 것도 아닌데. 어떻게 맞힌 거예요?"
"이 카드는 뒷면 무늬에 속임수가 있거든. 자세히 보지 않으면 일반인들은 눈치채기 어려워. 하지만 이 카드로 계속 연습을 한 사람들은 단번에 패를 읽을 수 있지. 게다가 포커는 플레이어들이 직접 카드를 만지는 만큼 겉면에 손톱자국을 내거나 살짝 구부릴 수 있어. 물론 이걸 방지하기 위해 플랍, 턴, 리버 카드의 윗장을 버리긴 하지만 가능하면 큰판에서는 카드를 한 번만 플레이하고 바꾸도록 해."

- 재휘는 선영에게 이런저런 블랙 기술을 알려주고, 완벽한 수준으로 마스터할 때까지 훈련시켰다. 그리고 두 달쯤 지나 선영이 블랙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되자 그는 휴가를 써서 선영을 데리고 서울로 향했다. 하우스 도박장에서 '현장 실습'을 하기 위해서였다. 용팔은 두 사람을 뛸 듯이 기뻐하며 맞았다.
"어, 그래. 잘 지내다 왔어?"
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차분히 그간 익힌 것들을 용팔에게 선보였다. 그런데 그녀의 설명을 들을수록 용팔의 표정이 도리어 어둡게 변했다.

 

- 강 회장도 테이블 멀찍이 자리를 잡았다. 원래 큰 판에서는 선수를 제외하고 테이블에 남을 수 없지만 강 회장 하우스에서는 그가 참관을 한다는 조건으로 선수를 한두 명씩 적게 내보냈기에 별 트집을 잡을 수도 없었다. 
"노 리밋, 슛 아웃(마지막 한 명 남을 때까지 하는 게임)이에요. 무조건 쇼다운(베팅 끝난 뒤 카드를 오픈하는 것) 해야 합니다. 블라인드는 한 시간마다 3천씩 올리고, 나중에 원하시면 더 올리는 걸로 합시다. 불만 없으시죠?"
사람들이 말이 없자 딜러는 카드를 전부 펼쳐 이상 없다는 것을 확인시킨 뒤 셔플을 시작했다. 시작은 가볍게 1~2천부터라고 했지만 최소 베팅 금액이 2천, 또는 그보다 큰 금액이어야 하기 때문에 실제 판이 돌아가면 한 판에 수천에서 억을 웃돌 것이다. 
 

- '재휘 오빠는 강 회장에게 자기 목숨을 구걸할 사람이 아니야. 죽으면 죽었지 자기 아버지 원수 밑에서 일할 사람이 아니라고. 그런 오빠가 치욕을 당하면서도 견디고 있는 건 용팔이 아저씨와 나 때문이야. 그런데 난 바보처럼 죽을 생각만 하다니.' 
선영은 두 손으로 자기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때 거울 속 여자가 물었다.
[죽기로 했던 것 아니었어?]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이재휘가 살아 있다는 얘길 들으니 마음이 바뀐 거야? 하지만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려고?
"오빠, 오빠를 다시 찾아야겠어."
[네가? 그게 가능할 것 같아?]
그녀가 비웃었다. 선영은 거울 속 여자를 노려봤다.
"오빠 혼자 그곳에 둘 순 없어. 오빠가 나를 구해줬듯 나 역시 오빠를 구할 거야."
[강 회장을 상대로? 불가능한 일이야. 절대로, 절대로 이길 수 없어. 솔직히 말해봐 두렵잖아? 무섭잖아?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죽을 수도 있어. 무슨 끔찍한 일을 당할지 모른단 말이야.]
"가장 두려운 건 고통도 죽음도 아니야. 혼자 남겨지는 거지."

거울 속 여자가 코웃음을 쳤다.
[흥! 겁을 먹고 도망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죽음조차 두렵지 않다는 거야? 더러운 위선자.]
그 말이 비수처럼 와서 꽂혔다. 그러나 선영은 여자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위선자라고 욕해도 좋아. 하지만 더 이상은 도망치거나 숨지 않겠어. 난 반드시 오빠를 찾아올 거야."
[지금의 네 꼴을 봐. 대체 네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뭐든지, 뭐든지 할 거야. 그게 무엇이라고 해도 오빠만 구할 수 있다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해내겠어."
[웃기지 마. 넌 그저 패배자일 뿐이야!]
선영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니, 천만에. 열등감에 절어 있는 패배자는 내가 아닌 바로 너야."
선영은 빈 술병을 집었다. 거울 속 여인이 주춤거렸다.
[뭘 하려는 거야? 그만둬.]
"오선영은, 옛날의 오선영은 이제 없어."
[안돼!]
"꺼져버려!"
선영은 비명을 지르는 여자를 향해 빈 술병을 던졌다.

 

- "홍후와 종루는 둘 다 바둑에 재능을 보이기에 내가 포커 선수로 영입해서 키운 아이들이에요. 포커도 두뇌 싸움이니까요. 난 언젠가 이 두 아이가 강 회장을 꺾으리라 생각했죠. 하지만 연습 삼아 보낸 게임에서 둘 다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강 회장 손에 붙잡혔어요. 아마 당신이 없었더라면 돌아오지 못했을 거예요. 그 점에 대해선... 정말 미안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홍후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추 마담은 공중으로 흩어지는 담배 연기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뱉었다.
"홍후가 포커페이스라고 생각하나요?"
이제껏 그녀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날 게임을 하면서도 도통 움직임이 없던 그 얼굴을 보고 속으로 재휘에 버금가는 포커페이스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선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거의 표정 변화가 없죠. 자연스럽게 근육을 움직일 수 없도록 성형수술을 했거든요. 이 아이의 장점이라면 속을 알 수 없고, 카운팅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 다만 그뿐이에요. 포커는 읽히지 말아야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읽어내야 하죠. 홍후가 아닌 당신이어야 하는 이유가 그거예요."   

 

- 추 마담의 눈동자가 표적을 노리는 맹수처럼 또렷하게 빛났다.
"당신과 내 목표가 같다고 해서 이 제안을 덥석 물진 않아요. 당신 역시 공짜로 날 도와줄 리는 없으니까. 만약 내가 실패한다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거죠?"
선영이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추 마담은 그조차도 마음에 든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공짜는 없는 법이죠. 난 당신이 이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예요. 그게 돈이든, 힘이든 그 무엇이라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실패한다면 그땐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겠죠." 
"그 대가가 제 목숨인가요?"
"잘 아는군요."
솔직한 대답이었다. 선영은 멈칫했다.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교차했다. 확실히 추 마담의 제안은 일리가 있는 데다 달콤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 칼날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선영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할까?'
그때 문득 테이블 아래로 추 마담이 다리를 꼬고 앉은 게 보였다. 그녀의 발목에는 흰 구렁이가 입을 벌린 채 똬리를 틀고 있었다. 섬뜩한 문신이었다.
'우아한 백조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구렁이를 품은 여자...'
선영은 고개를 들었다.
"생각해 볼게요."

- 추 마담은 선영이 방을 나가자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 아까 카드 점으로 골라놓은 카드 두 장을 뒤집었다. 첫 번째 카드무늬는 스페이드 A, 두 번째 카드 무늬는 하트 10이었다. 
"이 카드들은 무슨 뜻인가요?"
홍후가 물었다.
"하트 10은 카드 점괘에서 가장 막강한 카드지. 나쁜 일을 없애고 성공과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뜻이야. 하지만 스페이드 A는... 약속이 깨지는 걸 말하는데. 흠, 이 두 카드가 같이 나왔다? 재미있는 점괘군, 재미있는 점괘야."
추 마담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 선영은 기꺼이 성형수술에 응했다. 얼굴 윤곽과 눈, 코, 입, 가슴, 성대, 지방 이식까지 전신에 걸친 대수술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진행됐고, 이후 두 달간 고통스러운 날들이 계속됐다. 추마담은 음식도 제대로 씹지 못하는 그녀에게 외국인 교사를 붙여 영어와 중국어 공부를 시키고, 전문 트레이너로부터 강도 높은 훈련을 받게 했다. 
그렇게 또 두 달쯤 지나자 선영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마른 몸은 탄탄한 근육이 붙어 건강 음료 모델처럼 보였고, 올이 얇은 갈색 머리는 인조 가발을 붙여 허리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흑발로 변신했다. 요염한 가슴골이 드러나는 검정 미니 드레스와 새빨간 립스틱, 미끈한 킬힐과 은근한 목소리까지, 거울 속에 나타난 창잉이라는 여자에게서 선영의 그림자는 찾으려야 찾을 수도 없었다. 

 

- "뭐든지 하겠어요. 재휘 오빠만 구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나 역시 내가 해줄 수 있는 모든 걸 지원할 거야. 나머지는 모두 너 하기 나름이겠지. 강 회장 하우스 선수로 이재휘도 나오게 될 테니까. 만약 네가 그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그를 구할 수도 없어. 우리의 약속을 명심해."
선영은 그녀의 말을 가슴에 새겼다.
'재휘 오빠를 이겨야 오빠를 구할 수 있다.'

 

- "세 번째로 소개해드릴 메인 선수 이재휘도 마찬가지입니다. 강 회장에게 붙잡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있죠. 실력이야 이미 다 아시겠지만, 그 집 선수들이 무서운 건 비단 실력 때문만은 아닙니다. 목숨줄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이에요. 죽음에 대한 공포로 초인적인 발버둥을 치는데, 어떻게 이기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추 마담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선영을 쳐다봤다. 이길 수 있겠느냐는 의심의 눈초리였다. 그러나 선영은 조금도 기죽은 표정이 아니었다.
"그들이 살기 위해 발버둥 친다면, 난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 건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 "그, 그렇지요. 하지만...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재휘는 게임 전에 꼭 한번 만나보세요. 선수로서의 이재휘는 당신이 아는 이재휘와는 완전히 다를 겁니다. 무서운 사람이에요." 
추 마담이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갑자기 깔깔 웃었다. 그녀는 이 상황이 재미있는 듯했다.
"승부가 너무 쉬워도 재미없지. 나야 강 회장한테 얼굴 팔리면 곤란하니 됐고, 선영이와 이재휘 만날 자리 한번 마련해 줘."
"네, 낼모레 강남으로 원정 나온다고 하니 그날 연락드리겠습니다."
문어 교수가 돌아간 뒤 선영은 처음으로 포커 게임을 쉬고 술을 마셨다. 술이라도 마시지 않는다면 도통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밤이었다. 

 

- 그 사달이 일어나고도 그가 윤구네 가게에서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졌다. 선영은 오늘 아침 '마음을 굳게 먹어야지' 하고 다짐했던 것을 떠올리며 카드를 쥐었다. 그러나 그 눈은 자꾸만 재휘의 왼쪽 눈으로 향했다. 
'겉보기에는 괜찮아 보이는데, 정말 실명한 걸까?'
그런데 그때, 술집 아가씨가 칩을 걸면서 경박스럽게 낄낄거렸다.
"홍콩언니, 이 오빠한테 반했나 봐. 오자마자 아주 눈을 못 떼네. 오빠, 게임 끝나고 이 언니 홍콩 한번 보내줘야 되는 거 아냐?"
재휘가 그제야 선영을 의식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선영은 그가 오른쪽 눈까지 돌려 자신을 확인하는 걸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말 왼쪽 눈은 그녀를 보지 못했던 게 분명했다. 선영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수천 번을 다졌던 마음이었건만 실제로 그를 마주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러나 재휘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칩을 걸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식 웃었다. 
"레이즈."

 

- 무서운 플레이였다. 문어 교수의 찬사는 눈곱만치도 과장된 게 없었다. 선영이 잠깐 혼을 빼놓은 사이 그녀의 칩 두 줄이 감 똑같이 그 앞으로 옮겨 갔다. 그는 대충대충 치는 것처럼 빠르게 게임을 진행하며, 상대를 압박했다. 그의 오른쪽에 앉은 기둥서방은 카운팅 능력도 떨어지거니와 그 의미 없는 속도를 맞추느라 고전을 면치 못했다. 재휘의 모든 베팅은 빠를 뿐 아니라 완벽했다. 
'이 테이블의 왕은 오빠다. 눈을 잃었는데도 불구하고 변한 것이 없어.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 월등해졌다. 그동안 얼마나 게임을 해왔던 걸까? 얼마나....?'
선영은 그의 빼어난 포커 전략 앞에 마음이 숙연해졌지만 그럴수록 오늘 이 자리에 나온 목적을 한 번 더 곱씹었다.
'여기서 감탄만 하고 있을 순 없어. 오빠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오빠를 이겨야 해. 오늘 이 자리는 그러기 위해 나온 자리야. 내 포커 기술이 통할지, 통하지 않을지 시험해야 돼.'
선영은 재휘에게 승부를 걸었다.
 
- "다들 포커를 칠 때 자신만의 사소한 버릇이 있지. 칩을 만지면서, 얼굴을 만지면서, 다른 사람을 살피면서, 카드를 들추면서... 하지만 정작 본인은 잘 몰라. 다른 플레이어들도 눈에 띄는 행동이 아닌 이상 그런 버릇을 일일이 잡아내진 못하고. 그런데 네 동영상을 백 번쯤, 천 번쯤 보니까 그게 보이더군. 놀라운 일이었어. 내 눈앞에 오선영과 똑같은 버릇을 가진 여자가 또 있다니 말이야." 
그가 선영을 쳐다봤다.
"나한테 속을 들키지 않으려고 눈 감는 버릇 있는 건 여전하더군."

 

- 선영은 그의 맹수 같은 눈매를 똑바로 쳐다봤다. 검게 번쩍이는 눈동자가 마카오로 떠나던 그 두렵고 무서웠던 밤바다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선영은 주눅 들지 않았다. 그녀의 두 어깨에 재휘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선영은 용팔의 말을 기도문처럼 되뇌었다. 
'복수심을 버려야 그를 이긴다. 복수심을 강 회장을 두려워해서도, 저주해서도 안 돼. 그래야 그의 마음을 꿰뚫을 수 있어.'

 

- "반갑습니다, 창잉 아가씨. 소문대로 미인이시군요."
"별말씀을요."
두 사람은 입에 발린 가벼운 대화로 첫인사를 나누며 안쪽룸으로 들어갔다. 넓은 포커 테이블에서는 벌써 플레이어들이 제각각 자리를 잡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톱스타 강동민과 창연 엔터테인먼트 최 전무는 며칠 전 다른 하우스에서 있었던 얘기를 하는 중이었고, 박사는 바텐더에게 음료를 주문하고 있었다. 나비는 전보다 살이 많이 빠져 퀭해 보였는데, 긴장한 탓인지 연신 줄담배를 피워댔다. 그리고 테이블 가장 안쪽에는 재휘가 있었다. 그는 명품으로 차려입고, 유창한 외국어로 중국왕 장군과 통성명을 하고 있어 마치 성공한 청년 사업가처럼 세련돼 보였다.

 

- "올인."
선영이 응수했다. 두 사람이 카드를 뒤집었다. 나비의 카드는 다이아 A와 하트 J였다. 선영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 어떤 카드가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단 두 장의 카드를 놓고 승률을 따지자면 나비가 66퍼센트, 선영이 34퍼센트였다. 
"하하. 미녀들의 싸움이라, 재미있는 그림이군."
강 회장이 기쁜 얼굴로 테이블 곁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나비가 이기기만 한다면 게임은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딜러는 두 사람의 카드를 커뮤니티 카드 라인에 좌우로 붙이고 세 장의 카드를 열었다. 다이아 J, 클로버 9, 클로버 Q. 이제 승률은 나비가 73퍼센트, 선영이 27퍼센트였다. 
나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남은 카드는 단 두 장이었고, 이 순간만 지나면 강 회장이 약속한 자유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딜러가 네 번째 카드를 열었을 때, 그녀는 손을 들어 환호했다. 클로버 7, 두 사람 모두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카드였다.
재휘는 눈을 감았다. 이 순간 선영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제 얼굴에 슬픔이 스치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 짧은 찰나에 아버지를 떠올렸다. 

 

- 재휘와 선영은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봤다. 칩은 산처럼 쌓였고, 그 산의 정상에 남은 사람은 둘 뿐이었다. 달그락달그락 두 사람이 칩을 만지는 소리가 카지노의 머신 돌아가듯 울렸다. 이제 블라인드는 10억이 올라 17억이 됐다. 
두 사람은 카드 두 장을 받자마자 서둘러 승부를 결정지어야 했다. 일찍 죽든가, 계속 가든가. 막판까지 따라붙었다가 접기엔 리스크가 커도 너무 컸다. 열 차례가 넘는 짧은 핸드가 이어졌다. 승부는 거의 막상막하였고, 칩도 변화가 없었다. 
지지부진한 레이스 속에 째깍째깍 시곗바늘이 자꾸 돌았다. 큰돈이 걸린 만큼 사람들은 말이 없고, 분위기는 팽팽한 긴장감만 감돌았다.

 

- 강 회장의 선전포고에 방 안은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살벌했다. 수하들은 입을 다문 채 서로 눈치만 살필 뿐, 누구 하나 꼼지락거리는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근 20년간 회장이 직접 포커를 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만큼 지금 그의 행동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질 일이었다. 
"첫째, 여기서 네가 이기면 너와 이재휘, 둘 다 살려줄 뿐 아니라 저 돈도 모두 주겠어." 
강 회장이 놀랄 만한 제안을 했다.
"둘째, 네가 질 것 같아 중간에 카드를 접었는데, 정말로 그 패가 나보다 낮은 패였을 경우 정상참작을 해서 30억을 주고, 너희 둘 중 하나를 살려주도록 하지. 셋째, 네가 카드를 접었는데 그게 날 이기는 패였을 경우, 또는 끝까지 갔지만 내가 이겼을 경우, 저 돈은 모두 내 것이 될뿐더러 너흰 둘 다 죽는 거야."
강 회장의 무서운 선전포고에도 선영은 아까의 재휘처럼 담담했다.
"좋아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강 회장이 딜러에게 셔플을 시작하라는 눈짓을 줬다. 딜러는 후들거리는 손으로 카드를 섞은 뒤 그들에게 각각 두 장의 카드를 던졌다. 어차피 승부는 단 한판이었기에, 강 회장은 카드를 받자마자 바로 오픈했다. 스페이드 9, 스페이드 5였다. 선영도 카드를 오픈했다. 하트 3. 스페이드 3이었다. 승률은 반반이었다. 

- 딜러는 이를 딱딱 부딪치며 세 장의 플랍 카드를 열었다. 스페이드 6, 스페이드 7, 스페이드 3. 순간 강 회장이 "으하하!" 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아직 두 장의 카드가 남아 있음에도 그는 이미 스페이드 플러시였고, 선영은 3 트리플이었다. 선영은 승률을 계산해 봤다. 강 회장은 66퍼센트, 그녀는 34퍼센트. 승리의 여신은 그에게로 향하는 듯했다. 

 

- '만약 다음 카드로 8이 나온다면 강 회장은 5-6-7-8-9 스트레이트 플러시까지 노릴 수 있다. 내가 이기기 위해서는 8 카드가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6이나 7이 나와 풀하우스가 되는 것, 또는 3 포카드 뿐이다. 여기서 내가 이길 가능성은...?' 


- 딜러는 두 사람의 카드를 커뮤니티 카드 양옆으로 붙였다. 선영은 굳은 표정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계속 간다는 뜻이었다. 딜러가 네 번째 카드를 펼쳤다. 하트 K. 승률은 강 회장이 76퍼센트, 선영이 24퍼센트로 변했다. 강 회장은 바에서 술을 가져와 느긋하게 한 잔 들이켰고, 선영은 침묵했다. 끝까지 가야 할까, 여기서 접어야 할까. 이제 정말 마지막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딜러가 선영의 대답을 기다리며 리버 카드를 내밀었다. 선영은 복잡한 실타래처럼 엉킨 카드 뒷면을 가만히 응시했다. 저 카드의 무늬에 따라 그녀와 재휘의 생과 사가 달라진다. 선영이 재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 납골당 주위를 에워싼 매화나무를 가리켰다. 가지마다 하얀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 바람결에 은은한 향기가 묻어났다. 제비 한 쌍도 하늘 속을 유영하듯 자유롭게 날았다. 바야흐로 세상은 봄,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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