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최민우] 힘내는 맛

일루젼 2024. 8. 14. 12:12
728x90
반응형

저자 : 최민우
출판 : 문학동네
출간 : 2024.04.24


              

'힘이 나는 맛'이 아닌 '힘내는 맛'. 

이 제목 안에 담긴 오묘함이야말로 각각의 단편을 꿰뚫는 진리다. 

 

본질에서 약간 비켜선 닮음.

당위라는 이름 뒤에 숨은 강요. 

살아가기 위해 겪어야만 하는, 혹은 한다고 믿는 지난한 고통.

 

익숙하다면 익숙한 표리다.

 

그런데도 최민우의 글은 불편하지 않다.

괴로운 부분을 적나라하게 헤집어 드러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까.

은은하게 비치는 천으로 한 겹 덮어둔 것 같은, 그래서 무언가가 있음을 짐작할 수는 있지만 폭력적이라 느껴지지는 않는 폭로.

약간은 신비하게까지 느껴지는 드러냄.

그야말로 <힘내는 맛>이다.

 

전체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가을의 곡선>.

신선하다고 느꼈던 건 <요시히로의 자리>.

가장 강렬한 울림이 있었던 건 <우주의 먼지>.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싶은 건 <보호색>이다. 전직장인 '회사'가 찾던 인물과의 우연한 조우. 어떤 회사인지 본문 안에서는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현실적으로라면 대부업 관련 회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상상은 멀리 뻗어나간다. '나'의 이야기를 더 길게 읽고 싶었다. 

 

그리고 또, <보라색 사과의 마음>.

 

"그 사람은 자기가 사람들과 다른 색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무척 늦게 깨닫거나, 어쩌면 영원히 모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누군가 그 사람에게 사과가 무슨 색이냐고 물으면 그는 빨간색 아니면 녹색이라고 대답해 왔으니까. 사과의 색은 빨간색 아니면 녹색이라고 배워왔으니까. 다시 말해 그 사람에게는 보라가 빨강이고 회색이 초록이니까. 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 누구도 그 사람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공감각을 가진 사람들에 관한 책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타인이 느끼는 감각 -그가 인지하는 세계- 은 온전히 그만의 것이다. 언어를 통해 교류하며 서로 같은 것을 감각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거대한 착각일 뿐이다. 

결국 우리는 각각의 독립된 섬처럼 존재하는 개별자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나 서로에 대한 이해와 연결을 갈구하며 각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핀다. 

상대의 안에서 자신을 볼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사랑 혹은 혐오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자신을 향한 어떤 것이다. 

그리고 그 외의 것은 없다. 

'나'라는 경계를 넘어 더듬어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결국 사랑으로 시작되는 깊은 이해다. 

'너' 또한 '나'임을 알게 하는.

 

즐겁게 읽었다.   


    

 

- 한철이 기억하기로 표정 얘기를 처음 들은 건 설악산에서였다. 1박 2일 내내 거래 회사 직원들을 식당으로 안내하고 맥주와 소주 궤짝을 실어 나르던 중 펜션 복도 벽에 기대 잠깐 쉬는데 꼭지까지 취한 거래 회사 상무가 지나가다 한철의 뺨을 톡톡 쳤다.
"박 과장 힘든 건 내가 잘 아는데 표정이 너무 뻣뻣하다. 아무리 싫어도 그렇게 티를 내면 안 되지. 영업이 그런 얼굴 해서 쓰겠어?"

- 자기 방으로 돌아온 한철은 욕실 거울을 보았다. 당연하게도 성실하고 차분한 인상의 남자가 서 있었고, 펜션 벽은 지나치게 얇아서 옆방에서 누군가 엉터리 랩을 하다가 야유를 받는 소리가 다 들렸다. 

- 일주일 뒤 한철은 업무용 경차를 몰고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거래처를 찾았다. 논의 끝에 이번 발주까지는 종전대로 진행하되 다음번에 중국산 부품을 쓸지 인도산을 쓸지는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합의를 봤다. 실향민 출신 사장이 중간에 고집을 좀 부렸지만 한철은 능숙하게 노인네를 어르고 달랬다. 얘기를 마치고 제품 카탈로그를 가방에 집어넣는데 사장이 한철을 빤히 보다가 말했다.
"난 가끔 박 과장 버겁더라. 어째 그렇게 늘 표정이 벽처럼 밋밋하나?"
한철은 적당한 대꾸가 생각나지 않아서 눈과 코와 입에 동시에 주름을 만들며 웃었다.
"박한철 하면 살인 미소인데요."
"죽긴 하겠다. 무서워서." 사장이 말했다. "그게 웃는 건가. 쥐어짜는 거지.”

- 회사로 복귀하는 길에 한철은 늦은 점심을 먹으러 백반집으로 들어갔다. 주문한 육개장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물티슈로 얼굴을 닦고 휴대폰으로 어머니 계좌에 용돈을 부쳤다. 동생이 용돈을 제때 보냈는지 궁금했지만 확인해 보기가 좀 그랬다. 동생은 결혼한 뒤로 가장의 책임감 때문에 돈 문제에 몹시 예민해졌다며 투덜거리곤 했는데, 특히 새로 시작하는 사업에 필요하다며 한철이 들었던 예금까지 깨게 해서 빌려간 뒤로는 더 그랬다. 
한철은 식사를 끝내고 계산대에 있는 이쑤시개를 집어 거울 앞에 섰다. 여전히 성실하고 차분한 인상의 남자가 이빨에 낀 고춧가루를 빼내고 있었다. 

- 당연히 노인네가 몽니를 부린 거다. 제 고집대로 안 됐다고 사람 웃는 얼굴에다 쥐어짠다는 말을 쓰는 게 심술이 아니면 뭔가? 한철을 싫어하는 게 분명한 곽차장도 그 정도로 심한 표현은 쓰지 않았다. 그저 요즘 왜 그렇게 얼굴이 뚱하냐고, 일하기 싫은 거냐고 타박을 줬을 뿐이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세월은 쉬지 않는다. 한철은 서른여섯이었고, 부양할 부모가 있었으며, 제조업 분야 영업사원은 마흔 전에 자기 사업을 시작하지 않으면 출구도 퇴로도 없었다. 지적을 받으면 속히 개선해야 했다. 

- 다음날 한철은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다이소에 들러 얼굴 마사지에 쓰는 롤러를 샀다. 거래처까지 걸어가던 중 횡단보도 앞에서 속이 불편해졌다. 오전에 방문한 거래처 다섯 곳에서 잇달아 커피믹스를 마신 게 탈이 난 모양이었다. 
마침 발견한 주민센터 화장실에 한참 앉아 있다 나왔지만 얹힌 듯 거북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한철은 주민센터 입구에 설치된 자판기에서 콜라를 뽑아 단숨에 마시고는 ...

- 한철도 거시적으로는 강좌 개설에 공헌한 셈이다.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
한철은 시청 홈페이지로 들어가 수강 신청을 했다. 이틀 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 어떤 여자가 수강 여부를 확인한 뒤 첫 강의는 연습실이 아니라 극장에서 진행된다고 했다. 
"마지막 시간에 거기서 공연을 하거든요. 문자로 약도 보내 드릴게요."

- 빈자리를 찾아 주차장을 빙빙 도는 동안에도 한철은 자기가 옳은 선택을 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사실 딱히 세금을 많이 내는 편도 아니잖은가? 그러나 어떤 충동은 여드름처럼 단순하고 집요하므로 얼른 짜내버리는 편이 낫다. 구경 삼아 앉아 있는 것도 나쁠 건 없었다. 

- 극장 안으로 들어가자 예닐곱 명 정도의 남녀가 객석에 앉아 있었다. 그들 앞에 서 있던 배트맨 티셔츠에 감색 면바지를 입은 남자가 한철을 보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사는 젊지도 늙지도 않아 보였다. 한철이 연극인에 대해 막연히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턱수염도 문신도 없었으며, 자세가 반듯했고 어딘지 모르게 초연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 강사가 강좌에 대해 설명했다. 육 주 뒤에 있을 시민 연극제준비를 겸하여 진행되는 수업으로, 시민과 배우가 함께 무대에 서는 게 목표라고 했다. 자기가 다른 작가와 같이 쓴 단막극을 공연할 생각이라면서, 첫째 주와 둘째 주는 몸을 움직이는 법과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법에 대해 소개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 거기까지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극장의 불이 꺼졌다.
사방이 깜깜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긴장이 어둠 속을 맴돌았다. 냄새와 감촉과 의식만 남았다. 누군가 낮게 신음을 토했다. 한철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팔다리가 지워진 채 몸통만 둥실 떠다니는 기분이 들었고, 눈을 뜬 채 잠이 든 것 같았으며, 놀랍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잠시 뒤 무대에 조명이 켜졌을 때 그는 누가 자기를 이불에서 억지로 끌어낸 듯한 기분을 느꼈다.


- "무대에서 객석은 이렇게 보입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관객도 보이지 않고 입구와 출구도 사라집니다. 관객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비웃을지, 욕을 할지, 칭찬할지 하나도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무대 위에는 여러분뿐입니다. 여러분은 자유롭습니다." 

 

- 빛이 닿지 않는 저편, 여전히 어두운 객석에서 강사가 말했다. 

"자기 자신이라는 배역을 연기한다는 마음으로 자기소개를 해보세요."

- 첫 수업이 끝나고 나서 한철은 얼떨떨한 기분에 휩싸인 채 밤거리로 나왔다. 조금 전 경험한 극장의 어둠과, 뒤이어 천장에서 쏟아지던 빛이 짧고 강렬한 꿈처럼 망막에 새겨진 것 같았다. 한철의 차례가 왔을 때 그는 자기가 중소기업 영업사원이고 언젠가는 자기 사업을 하고 싶은데, 평소 표정이 딱딱해 보인다는 소리를 들어서 연극을 배우면 좀 나아질까 하는 마음에 강좌를 신청했다고 말했다. 회사일 때문에 얼마나 많이 출석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거짓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한철 본인의 귀에도 그 말은 딱히 진짜처럼 들리지 않았다.

- 주차장 앞에서 한철은 정신을 차렸다. 혼란스러워할 이유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신선하고 낯선 환경에서 회사와 가족에 대한 생각 없이 누린 작은 여유가 즐거웠을 뿐이다. 그만한 여유도 없이 사는 게 문제지 여유 자체가 문제일 수는 없었다.

- 두 번째 수업에서 수강생들은 바닥에 일자로 그어진 선 위를 비틀거리며 걸었다. 종이비행기를 일직선으로 날려 보내려 애썼고 닭싸움 자세를 한 채 미동도 않으려 노력했다. 시민 기자라는 젊은 여자가 나타나 고양이 발처럼 손을 오므린 사람들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고 갔다. 
강사는 연극이란 몸과 인식을 일깨우는 예술이며, 쓰지 않던 정신의 근육을 되살리는 행위라고 설명했다. 그 이론에 따르면 한철의 많은 부분은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움직임을 의식할수록 몸이 뻣뻣해졌다. 어느 날 불현듯 자기 다리가 사실 수십 개였다는 걸 깨닫고 어쩔 줄 몰라하는 지네가 된 기분이었다. 

- 조별로 나눠 좋아하는 동물을 표현하던 중, 첫 시간에 검정고시 준비 중이라고 자기소개를 했던 열여덟 소년이 큰 소리로 개처럼 짖기 시작했다. 소년은 개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자 갑자기 주인과 산책을 나가고 싶어져서 그랬다고 해명했다. 그러는 동안 금붕어를 담당한 한철은 꼬리와 지느러미를 흔들며 어항을 탈출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 형이 장인을 설득하는 걸 봤어야 한다고, 진짜 존경스러웠다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병원비와 생활비와 아버지와 제수에 대해 어머니가 늘어놓는 하소연을 듣다가 한철이 원룸으로 돌아왔을 때는 새벽이었다. 포장만 겨우 풀고 조립은 시작도 못한 채 일주일째 방치한 이케아 옷장 뼈대가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 한철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오늘 그는 수업시간에 사물의 내면을 표현하는 법을 배웠어야 했다. 강사는 메소드 연기에 대해서도 설명할 거라고 했었는데 그게 대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는 상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며 잠들었다.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를 자기 안에 집어넣은 채 영원히 잠긴 상자가 되면 좋을 것 같았다. 

- 한철이 자리에 앉자 기러기아빠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호쾌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한철이 들고 있는 대본을 가리켰다.
"내가 연극을 잘 모르긴 해도, 그거 재미있더라고요."
그날 수업의 목표는 감정을 자유롭게 털어놓는 것이었다.

- "선이라도 보여주시게요?" 

한철이 웃었다.
"꿈도 크네." 

사장이 실소를 터뜨렸다가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내 친구 중에 큰 욕심 안 부리고 뭘 좀 해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거든. 근데 자기 주변에는 딱 봐도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면서 나한테 묻더라고. 어디 열심히 하는 친구 없냐고. 그 말을 듣고 내가 떠오른 사람이 있어서, 혹시 시간이 맞으면 한번 보겠느냐, 하니까 좋대." 
한철이 사장을 보았다. 구체적인 단어는 하나도 사용하지 않으면서 억양과 뉘앙스만으로 정확하게 뜻을 전하고 있었다. 이런 게 강사가 설명했던 대사 전달력이라는 걸까? 

 

- 사장이 계속 말했다. 
"누가 위 하자 아래 하자, 그런 게 아니라 같은 눈높이에서 보자, 그런 생각인 거 같던데. 근데 일정이 빠듯한가 봐. 시작이 너무 늦으면 곤란하다, 내가 듣기로는 그러더라고. 박 과장이 이제 나이나 경력이나 차지 않았나. 이래저래?"
한철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장이 지금 건네주려는 건 한철의 꿈이었다. 당장 머리를 조아려도 모자랄 판이었다. 한철은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 

사장이 잠깐 침묵했다. 

"생각해 보겠다고?"

"네."
"그래, 생각해 봐야겠지. 그래도 너무 오래는 말고, 목 좋은 상가 같은 거라서 얼른 가계약이라도 하지 않으면 다른 누가 와서... 알지?"

- 지하 극장을 찾은 관객은 한철까지 다섯이었다. 부채꼴의 객석에 앉아 휴대폰을 끄고 십여 분쯤 기다리자 조명이 꺼졌다. 어둑하던 객석이 완전히 컴컴해졌다.
한철은 눈을 크게 떴다. 거래처 방문 일정을 신용대출마냥 이리저리 돌려 막아가며 연극을 보러 갈 때마다 켕기던 마음도 이 순간이 되면 편안해졌다.
연극이 상연되는 동안 한철은 배우들의 눈빛과 손짓, 억양, 발음을 유심히 살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영업 일을 배우는 것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관찰하여 모방하고 응용한다. 물론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하지만 따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달음이 오고, 깨달음이 오면 요령이 생긴다. 

- 대본을 읽다가 고개를 들자 구석에서 어떤 남자가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흘리며 한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라는 걸 알아차리기까지 잠시 시간이 걸렸는데, 그 순간 한철은 시선이 들어와야 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지만 느낄 수 있었다. 태어나 처음 보는 생물 앞에 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 기분이었다. 그게 뭔지 설명은 못하지만 그 존재를 부인할 수는 없다. 한철은 들떴다.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른 채 줄곧 원하던걸 방금 손에 넣은 것 같았다. 지금껏 답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흙에서 막 고개를 내민 새싹처럼 올라와 파릇하게 흔들렸다.  

 

- <우주의 먼지>

 

- 은영의 눈에 빛나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은 수영장에서였다. 잠영 연습을 하려고 물속으로 들어갔는데 풀장 바닥에서 뭔가 조그만 것이 인어의 비늘처럼 빛나고 있었다. 은영은 코로 공기 방울을 내보내면서 빛이 보이는 쪽으로 다가갔다.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빛도 사라져 있었다. 아마 빛이 얼비쳤거나, 뭐라더라, 투과되고 굴절된 모양이었다. 

- 며칠 뒤 은영은 친구를 기다리며 카페에 앉아 있었다. 옆 테이블에서 무언가가 아릿하게 빛나며 은영의 시선을 끌었다. 창밖 하늘은 구름이 끼어 흐렸고 맞은편 자리에서는 와이셔츠 소매를 걷은 깡마른 남자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휴대폰을 노려보고 있었다. 은영은 눈을 비비고 테이블을 다시 보았다. 목제 테이블은 물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

- 이런 일이 몇 번 더 반복되었다. 작고 동그란, 동전만 한 것이 은영의 주변에서 반딧불처럼 빛을 발하다가 사라지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다가 작업 중에 노트북 화면 구석에서 불량 화소처럼 하얗게 빛나는 동그라미를 발견하자 은영은 진짜로 걱정스러워졌다. 

- 안과의사는 젊고 수다스러웠다. 그는 조그만 빛 같은 게 보인다고 해서 백내장이라 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은영이 인터넷에서 알아보고 온 증상이 전부이니 안심하라고도 했다. 하지만 뭐가 문제인지는 집어내지 못했다.
"눈을 많이 쓰는 직업에 종사하시나요?"
"번역을 해요."
은영이 말했다.
"많이 쓰시겠네요. 최근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있나요? 두통은요?"


- 은영은 잠시 생각하다 둘 다 없다고 했다. 최근에 두통을 느낀 적은 없었다. 실은 그것도 인터넷으로 알아봤다. 두통과 시력 저하는 뇌종양의 전조 증상이라고 했다. 스트레스는? 삼 주 전 일요일에 은주의 일주기를 맞아 부모님과 추모 공원에 다녀왔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슬픔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애쓰는 모습이 눈에 다 보였다. 은영은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덤덤할 수 있었고 내색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걸 스트레스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 "우리 몸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발목이 시큰거리는 이유가 알고 보면 허리를 다쳐서일 수도 있습니다. 머리에 종양이 있으면 시력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죠. 인터넷에서 알아보셨겠지만."
의사가 의료인 특유의 무신경한 말투로 쾌활하게 대답했다. 은영은 약국에서 인공 눈물을 구입한 뒤 그 자리에서 눈에 몇 방울을 떨어뜨렸다. 눈앞이 씻기듯 맑아진 듯했다. 눈을 깜박이자 점안액이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은영은 자기가 언제 마지막으로 울었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 은영의 가족이 합의를 받아들였다면 더 가벼운 형을 선고받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일 년만 죽은 듯 살면, 아니, 살던 대로 살면 남자는 자유의 몸이 된다. 전과는 남겠지만 잘 둘러댈 수 있을 것이다. 불행한 사고였다고. 살다 보면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 남자가 최후진술을 할 때 은영도 법정에 있었다. 큰 키에 잘생긴 남자였다. 모양을 보건대 어깻죽지에서 시작된 듯한 불꽃무늬의 문신이 목뒤까지 피어올라 있었다. 그는 구부정하게 앉아 속기사가 있는 쪽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선처를 호소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얼굴을 후회와 가책으로 일그러뜨린 채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해준다면 일평생 참회하고 반성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다른 곳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만난다면 모두 남자를 마음에 들어 할 것이다. 호감 가는 인상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 남자가 이별을 통보한 여자친구의 턱을 주먹으로 때린 뒤 머리채를 붙들고 이리저리 흔들어대다 길바닥에 패대기친 다음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죽여버리겠다면서 포르셰를 몰고 여자에게 돌진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순간 제풀에 겁을 먹어 운전대를 꺾었다고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 골목에서 느닷없이 사람이 튀어나왔을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 알고 난 뒤에도, 남자에 대한 인상이 조금 바뀌긴 해도 다들 납득할 것이다. 불행한 사고였다고. 살다 보면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 남자는 달아나지 않았다. 그날 밤 남자가 유일하게 한 올바른 행동이었다(이는 양형에 크게 참작되었다). 남자는 차에서 내려 119에 전화를 걸었다. 구급대원들이 왔을 때 은주는 의식이 없었고, 응급실에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벽과 차 사이에 끼어서 장기와 뼈가 모두 망가진 상태였다. 망가졌다, 보다 더 적나라하고 정확한 표현들이 있었지만 은영은 동생의 마지막 모습을 그런 말들로 기억하고 싶지는 않았다. 망가졌다. 만으로도 충분했다. 말할 수 없는 부분들은 모두 은영의 눈에 새겨졌으니까.

- 사고 소식을 듣고, 상황을 파악하고, 장례를 치르고, 공판에 참석하는 동안 은영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럴 수 없었다. 어머니는 무너졌고 아버지는 무력해졌다. 은영이 거의 모든 걸 다 도맡아야 했다. 아직은 울 때가 아니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울 수 있을 것이다. 죄를 저지른 인간이 합당한 벌을 받으면 울 수 있을 것이다.

- 재판이 끝난 다음에도(민사소송은 포기했다. 변호사는 사실상 실익이 없다고, 소송에 들어갈 비용과 시간을 고려하면 오히려 손해라고 말했다) 은영은 울지 않았다. 가족과 친구들은 이해했다. 충격이 크면 그럴 수 있다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댐이 무너지듯 슬픔이 밀려올 거라고. 은영도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비슷한 사연을 읽은 적이 있었다. 여자친구가 사고로 죽었는데 그 뒤로 평소보다 더 즐겁게 지내고 있다고, 하나도 슬프지 않다고, 자기가 사이코패스가 아닌지 걱정된다는 글이었다. 사람들이 댓글을 달았다. 그건 슬픔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했다. 은영은 자기도 그런 경우일 거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울 수 있을 것이다. 적당한 때가 되면.

- 안과에 다녀오고 얼마 뒤 은영의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요즘은 좀 괜찮니?"
은영은 머뭇거리다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머뭇거린 건 질문의 진의를 바로 파악하지 못해서였고, 모르겠다고 대답한 건 입에서 괜찮아요,라는 대답이 나올 뻔해서였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해, 진심으로 괜찮다고 대답할 뻔했기 때문이었다. 은영은 은주 일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사고도 장례식도 법정도 모두 신기루처럼 희뿌옇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굳이 기억을 들춰내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오래전 풍경처럼. 고작 반년 남짓 지났을 뿐인데도 은영은 아무렇지 않게 지내고 있었다. 


- "좋은 책이에요. 예전 직장에서 검토를 했었는데 팔리지 않을 것 같다면서 안 하기로 했었거든. 그때 기회 닿으면 꼭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책이에요. 은영 씨랑 하면 영광이죠. 한번 훑어보고 결정하면 연락 줘요. 은영 씨 승낙하면 계약서 작성해서 등기로 보낼게요." 
은영도 편집자도 이 대화가 어느 정도 의례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일을 골라 받을 수 있는 번역가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만나기로 한 시점에서 이미 승낙을 한 것이고, 책을 받아 든 시점에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은영은 바쁘지 않았다. 사고 소식을 듣고, 상황을 파악하고, 장례를 치르고, 공판에 참석하는 동안 당시 번역 중이었던 책은 물론 그전에 했던 계약까지 죄다 파기해야 했으니까.

- 서문에는 작가가 자기 책을 직접 영어로 옮긴 이유가 나와 있었다.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는 중요한 걸 잃게 마련이므로 그 잃어버림을 가능한 최소화 하고자 직접 번역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번역 과정에서 종종 이것이 자기 글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고, 결국은 새로 글을 쓰는 기분으로 작업을 마쳤다면서 결과적으로 두 번에 걸쳐 쓴 이 책을 즐겁게 읽어주길 바란다고 했다. 

- 은영은 눈두덩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빛이 점점 더 자주 보였다. 어느 날 아침에는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하고 있는데 거울에 비친 눈동자에 새하얀 구멍이 뚫렸다. 은영은 하마터면 양치컵을 떨어뜨릴 뻔했다. 

- 편집자의 말은 역시 반만 믿어야 한다. 내용 자체가 어렵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문장은 번역하기 까다로운 편이었다. 간결하지만 품위가 있고, 프랑스어 특유의 묘한 비약과 여운이 남아 있는 문장이었다. 책은 길지 않은 에세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널리 알려진 윤리적, 철학적 소재들에 문학적 필치를 가미하여 저자 자신의 경험, 서양 고전, 동시대의 사회경제적 사건이나 인터넷 밈과 연결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트롤리 문제 같은 것.

 

- 이쪽 철로에는 한 명이, 저쪽 철로에는 다섯 명이 묶여 있다. 당신이라면 어느 쪽으로 선로를 변경하겠는가? 이소벨은 이 문제에는 자유주의자들이 파놓은 함정이 있다면서 우리가 정말로 신경 써야 하는 것은 트롤리를 모는 운전자라고 했다. 트롤리가 어느 선로로 가든 그걸 결정할 권한이 있는 유일한 사람은 운전자이니까. 우리는 쉽게 눈에 띄는 개인에게만 책임을 묻고 윤리를 따질 뿐, 그 뒤에서 실제로 무언가를 조작하고 있는 존재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 은영은 자기 앞에서 눈물을 떨구는 여자를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다가 법정에서 그 사실을 증언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하겠다고 했다. 그게 자기가 붙들고 있는 유일한 동아줄인 양 절절한 눈빛으로 약속했다. 
다음날 그녀가 메시지를 보냈다. 급하게 해외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그녀는 은영의 전화를 받지도, 메시지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은영은 여자가 죄책감을 덜고 싶어서, 오로지 그 때문에 자기를 만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굳이 그 골목을 지날 필요가 없었다. 그 길로 가면 정류장까지 더 돌아서 가야 했다. 그 골목을 지나가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은주에게는 그랬을 것이다. 누군가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면 그가 남긴 모든 것은 수수께끼가 된다. 그가 살아 있을 적에는 지극히 당연했던 것들,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보였던 것들 전부가 해명을 기다리는 것으로 변한다. 남은 사람들은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언제까지고 그 수수께끼를 붙든다.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것 자체가 의미가 되어버린 존재에 대해 생각한다. 아무 단서도 남아 있지 않은 고대의 문자가 새겨진 비석 앞에서, 해독이 불가함을 알면서도 떠나지 못하고 계속 비석을 쓰다듬는 사람처럼. 

- 은영은 번역을 계속했다. 이제 이소벨은 감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늘 사과의 색깔을 보라색으로 여겨온 사람을 상상해 보자고 했다(사실 그건 나일 수도 있다. 누가 알겠나?'). 잘 익은 사과는 보라색, 덜 익은 사과는 회색.

 

- 그 사람은 자기가 사람들과 다른 색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무척 늦게 깨닫거나, 어쩌면 영원히 모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누군가 그 사람에게 사과가 무슨 색이냐고 물으면 그는 빨간색 아니면 녹색이라고 대답해 왔으니까. 사과의 색은 빨간색 아니면 녹색이라고 배워왔으니까. 다시 말해 그 사람에게는 보라가 빨강이고 회색이 초록이니까. 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 누구도 그 사람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또 다른 예를 들면 좀비가 있겠다. 누군가가 실은 좀비인데 사람처럼 그럴듯하게 행동한다면 우리는 그가 사람인지 좀비인지 알 수 없다. 우리는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통해 타인을 추측할 뿐이다. 박쥐의 경험을 상상할 수 없듯 좀비의 내면도 알 수 없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라는 집에 연금된 죄수인데, 이 집에는 문도 창도 없다. 나는 당신이 무엇을 느끼는지, 당신은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모른다. 우리는 오로지 언어라는 가느다란 실을 통해서만 연결되어 있는데 언어란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다.

 

- 그러니 묻겠다. 당신에게 세상은 어떻게 보이는가? 당신은 어떻게 우울한가? 어떻게 즐거운가? 어떻게 슬픈가? 혹은 어떻게 슬프지 않은가? 당신이 감각하는 슬픔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혹시 나의 기쁨과 같은가? 아니면 나의 평정과 같은가? 우리는 어떻게 자아라는 껍데기를 부딪치는 것 이상으로 서로를 만날 수 있나? 

- 저자가 자기 책의 번역자를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은영은 당신의 책을 최선을 다해 번역할 것이며, 앞으로의 작업에 행운이 있기를 바란다는 인사말로 메일을 마무리한 뒤 전송 버튼을 클릭했다.

- 이소벨에게서 답장이 온 건 그로부터 삼 주 뒤였다.
메일은 두통이었다. 하나는 '번역자에게'라는 제목으로, 은영이 질문한 사항들에 대한 답변이 적혀 있었다('프랑스에서는 나름 떠들썩했던 사건이었답니다. 분재용 가위로 남편의 성기를 절단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죠. 제 친구는 그게 무척 일본적인 행위라고 하더군요. 혹시 <감각의 제국>이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 다른 메일에는 '은영에게'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당신의 편지를 잘 읽었습니다'로 시작하는 메일에서, 이소벨은 동생을 잃은 상심이 얼마나 클지 모르겠다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제게도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요. 저는 침식을 잊고 슬픔에 빠져들었습니다. 마치 슬픔이라는 쇠사슬에 묶인 광인처럼 몸부림을 쳤지요. 오랜 시간이 지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제가 그렇게 정신없이 슬픔에 빠져들 충분한 시간이 있었던 것이 결국 어느 정도는 행운으로 작용했던 듯합니다. 저는 슬픔 속에 제 상실을 흘려보낼 수 있었지요. 흘려보내지 못했다면 슬픔은 결국 단단한 칼이 되어 저를 계속해서 찔렀거나, 혹은 갑옷이 되어 저를 세상으로부터 차단시켰을 것입니다. 당신의 경험과 현재의 처지를 함부로 재단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저는 당신에게도 그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닌지, 지금이라도 필요한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책을 번역하는 것보다 그 일이 우선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당신이 제 책을 계속 번역해주었으면 합니다. 자신의 글에 공명하는 번역자를 만난다는 건 저자 입장에서 대단한 행운이니까요.  
물론 인간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오래전 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설사 우리가 끝내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아무리 희미할지언정 어떤 식으로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종이컵에 실을 이어 만든 장난감 전화로 속삭이는 어린아이들처럼. 당신의 번역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한국어 공부를 해둬야겠군요. 이소벨. 

- 골목에 가보기로 한 건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은영은 그동안 한 번도 사건 현장을 찾지 않았다. 

 

- <보라색 사과의 마음>

 


- 머릿속으로 되새겨보았다.

'프로듀서 B씨의 선의를 믿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했어요. 하지만 그도 궁극적으로는 시스템의 일부이자 강압적 조직의 일원인 이상 책임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 시스템의 궁극적 일부이자 강압적 조직의 일원이 지금 글쓴이에게 글을 내려달라고 요청코자 차 뒷좌석에 아동극 소품용 수조를 올려놓고 안전 운전에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대표는 거의 열 달 가까이 지난 일을 새삼 끄집어내는 저의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무조건 글을 내리도록 설득하라고, 필요할 경우 법적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는 점을 분명히 고지해 놓으라고 지시했다. 

- 저지르는 사람과 수습하는 사람은 따로 있게 마련이고, 그건 수습될 가망이 없는 일이라도 마찬가지다. 상진이 부탁한다고 윤미 선생이 바로 글을 내릴 리는 없다. 글을 내리라느니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느니 따위의 얘기는 전화나 이메일로 주고받아도 충분하다. 요즘 같은 때는 더. 결국 대표가 상진에게 맡긴 건 욕받이 역할인 것이다. 일단은 이 정도로 분을 푸시죠,라는.

- 그냥 모른 척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전화도 문자도 무시하고, 휴직이 길어져서 구직 중이라고 하면서, 유준 씨도 회사 형편이 호전되기는 어려울 거라고, 그러니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는 편이 나을 거라고 대놓고 충고를 해줬었다. 그럼에도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이렇게 움직이는 건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나 하는 막연한 무력감 때문일 것이었다. 지금 시국에 이직이 쉬울 리 없었다. 복직도 장담할 수 없었지만.

- 수많은 생명과 일터가 속절없이 무너져내리는 과정을 인터넷을 통해 목격하며 공포에 가까운 감정에 휩싸였던 지난봄, 상진과 효주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집에 갇힌 채 그동안 사놓기만 하고 뜯지도 못했던 보드게임 상자들의 포장을 하나둘 풀면서 과연 지금 이 상황이 오래된 세계의 끝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의미하는지 토론하곤 했다. 어느 쪽도 가능해 보였고, 둘 다 옳지 않아 보이기도 했다. 세상이 과연 그렇게 쉽게, 순식간에 영원히 바뀌는 것이 가능할까? 그런 생각은 지나치게 안이한 듯했다.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전태일 평전>에 대한 대표의 생각과 바이러스의 존재 유무는 상관이 없을 것이다. 윤미 선생의 언중유골 본능이 화상회의를 한다고 억제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를 우리답게 유지하도록 해줬던 수많은 것들이 언제까지도 변치 않을 것 같았던 것들이 참으로 간단하게, 마치 티슈로 닦이는 입가의 케첩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 <변함없는 기분>

 


- 표지판을 앞에 두고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으며, 수염이 덥수룩한 턱 위로 순진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는 공항에 막 도착한 사람들이 자주 그러듯 이곳에 무사히 당도한 게 새삼 놀랍고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하늘을 흘끗 올려다보고는 진송에게 말했다.
"비가 오기 전에 얼른 출발하는 게 좋겠어요."
비? 진송은 크리스티안과 같이 걸으며 바깥을 내다보았다. 화창한 가을 하늘에 구름이 몇 조각 걸려 있었다.

- 주차장에서 진송은 대표에게 아티스트를 픽업했고 호텔에 도착하면 다시 연락하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 다리를 건너는데 거치대에 올려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진송은 액정에 뜬 혜진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전화기가 그대로 떨리도록 내버려 뒀다. 요즘 진송은 회사일을 제외하고는 전화를 거의 받지 않았다. 자기에게 걸려오는 전화를 무시해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고 나서부터 그랬다. 다만 지금 이 전화는 일종의 회색 지대에 놓인 것이었다. 혜진은 지난주부터 출근하지 않았지만 아직 정식으로 퇴사처리는 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 진동이 멈췄다가 다시 시작되었다. 진송이 룸미러로 크리스티안을 보았다. 그가 몸을 움찔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계속되는 진동에 피아니스트의 눈꺼풀이 그에 반응하듯 떨렸다. 진송은 문득 지금 이 상황이 자기와 자기 전화기가 아니라 전화기와 크리스티안의 수면 사이에서 벌어지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자신의 인생이 종종 당사자를 제외한 채로, 그러니까 정작 진송 본인은 자기 삶의 부산물인 양 흘러가곤 하는 것처럼. 

- 진송은 저녁까지 호텔 라운지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손님은 진송과 외국인 커플이 전부였다. 혜진에게 전화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 그만큼 또 빨리 사라졌다. 이미 금요일로 정했다는데 뭐. 그때 봐서 참석 여부를 결정하면 될 일이었다.

- 혜진은 문화재단의 공채 최종 면접을 통과하자마자 사직서를 냈다. 진송은 혜진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합격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설명하기 어려운 당혹감에 휩싸였는데, 그녀가 진송을 포함한 회사 사람 모두에게 지원 사실을 숨겨서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에 누가 봐도 모를 수 없는 기쁨이 드러나서만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진송이 전부 다 가르치다시피 하면서 점심 메뉴까지 똑같이 고르던 찰떡궁합이었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일이 힘들어 죽을 것 같다며 울던 혜진을 위로하다 자기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아서만도, 그래서 혜진이 회사에서 진송의 비밀을 알게 된 유일한 사람이 되어서만도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이 이유일 수도 있었지만, 그중 어떤 것도 아닐 수 있었다. 
 
- 이유야 어쨌든 진송의 입에서 맨 먼저 튀어나온 말은 "그럼 영수증 결산은 누가 해?"였다. 말의 내용이 아니라 어조에 진송 본인도 놀랐다. 뭔가 날카로운 걸 앞뒤 재지 않고 휘둘러버린 기분이었다. 진송은 혜진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알아차리고는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이제 공연 지원 문의 전화할 때 네 목소리 듣는 거 아니냐며 농담을 했지만 이미 무언가 어긋난 뒤였다. 마치 상영 중에 스크린이 잘려버린 영화 화면처럼. 

 

- 통유리 밖으로 해가 저물어가는 게 보였다. 진송은 어두운 유리에 비친 자기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자기 얼굴이 아닌 것 같았다. 요즘 들어 늘 그렇게 느껴왔듯이. 

- 약속 시간이 되어 크리스티안을 로비에서 만났을 때 진송은 그의 손을 슬쩍 보았다. 마디지고 긴 손가락이 해먹에서 잠든 사람처럼 평온하게 늘어져 있었다.

- "메트네르와 라흐마니노프는 평생을 알고 지낸 친구였어요."

진송도 자료를 조사했기 때문에 대략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냥 맞장구를 치듯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티안이 계속 말했다.
"하지만 메트네르는 친구에 비해 인정을 받지 못했어요. 슬프지만 사실이죠. 어떤 사람들은 메트네르의 음악을 '기억할 만한 멜로디가 없는 라흐마니노프'라고 평하기도 했죠. '가난한 사람의 라흐마니노프'라는 말도 했고요. 둘 다 같은 뜻이에요. 잔인하죠. 하필이면 친구의 음악과 비교하다니. 저는 그게 정말 부당한 평가라고 생각해요. 평생을 그게 아니라고 주장하며 싸워왔고요. 내일도 마찬가지예요. 내일은 베토벤과 브람스도 연주할 거고 사람들은 베토벤과 브람스가 더 익숙하겠지만, 저는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메트네르 음악의 아름다움을 들려줄 거예요."

- "어쩌다 그렇게 메트네르에게 빠져들게 됐나요?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나요?"
 
- "실은 메트네르는 제 선생님이 무척 싫어하는 작곡가였어요. 그냥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증오하다시피 했죠. 이유는 모르겠어요. 저한테는 말을 안 해줬으니까. 그저 그런 음악은 연주하면 안 된다고 할 뿐이었어요. 그래서 저도 제가 메트네르를 몰래 연습하는 이유를 선생님에게 말하지 않았죠. 그렇게 시작된 거예요. 그러던 중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음악의 별자리가 하늘에 그려져 있었던 거고요. 선생님은 정말 훌륭한 음악가이자 교사였고, 결국 제 선택 때문에 선생님과는 사이가 멀어졌지만 후회는 없어요." 
"인상적인 사연이네요."
"살다 보면 언젠가는 과거를 버려야 하는 순간이 오죠. 안 그러면 거기에 매몰될 수밖에 없어요. 그럴 때는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해요. 무대에 설 때는 더요." 
"선생님도 결국엔 자랑스러워하셨을 거예요. 세계를 누비는 훌륭한 음악가가 됐으니."
"글쎄요. 지금은 돌아가셨으니까 물어볼 수가 없네요."
크리스티안이 잔을 비우고 진송을 보았다. 녹색 눈에 고집스런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아무튼 저는 저 자신을 믿어요. 그게 제가 믿는 전부예요."

진송은 화제를 돌렸다.

- "그래도 좋은 친구들을 사귀어서 즐거웠어요."
진송은 크리스티안이 새로 사귄 좋은 친구들 따위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자들이 술병과 함께 객실에 나자빠져 있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그럼 이거라도 드세요."
진송이 숙취 해소 음료 뚜껑을 열어 그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크리스티안이 묻자 진송이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동양의학의 정수를 모아 만든 신비의 물약이에요. 그 새로 사귀었다는 좋은 친구들도 지금쯤 다 마셨을 거예요."

- 한강을 건너는 동안 진송은 입을 꾹 다물고 운전했다. 룸미러를 흘끗 쳐다보니 크리스티안은 지구대에서 잠이 깬 취객처럼 앉아 있었다. 이제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크리스티안이 상상 속의 피아노 건반을 짚듯 무릎 위로 손을 놀리는 게 보였다. 움직임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 "괜찮으세요?"
진송이 걱정을 담아 말하려 애쓰면서 먼저 말을 걸었다. 오늘 짜증과 분노를 가라앉히고 인내심을 쥐어짜야 하는 사람은 크리스티안이 아니었다.
"네, 괜찮아요. 그 동양의학... 신비의 물약이요..."
그가 나무뿌리를 씹은 듯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효험이 있네요. 혹시 더 있나요?"
"한 병이면 충분해요."
"그렇군요. 아무튼 저는 괜찮습니다. 송은 어떻습니까? 괜찮은가요?"
"저요? 제가 왜요?"
"아뇨, 별 뜻이 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물어보는 겁니다."
"괜찮죠. 물론, 저는 괜찮아요."
진송이 평온함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말했다. 음악의 별자리라는 둥 잘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돌연 돌부리에 발이 챈 듯 불쾌해졌다. 지금껏 진송은 괜찮냐, 괜찮다 따위의 섣부른 위로가 오갈지 모를 상황을 가능한 한 철저하게 차단해 왔다. 진송의 소식을 전해 들은 사람들이 연락을 해왔지만, 결국 혼자 남는 순간엔 다 소용없지 않은가? 연민이란 물처럼 아래로만 흐를 뿐이고, 마음은 창호지처럼 쉽게 젖고 찢어진다.

-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송. 잘할 수 있어요."
"알아요."
진송이 크리스티안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대답했다.
"정말입니다. 충분히 쉬어서 힘이 넘쳐요. 어젯밤에는 낯선 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기분이 조금 들떴나 봐요. 서울은 생각보다 훨씬 흥미로운 도시더군요."  

- "걱정시킨 거 압니다. 충분히 그럴 만해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잘할 수 있으니까 그냥 마음 놓고 믿어주시면 저도..."
"제가 안 믿으면 어쩔 건데요? 제가 안 믿으면 연주 안 할 거예요? 그냥 집에 갈 거냐고. 공연이 몇 시간 남았다고 아직도 취해서 징징거려? 청중이 기다리고 있잖아. 싸운다면서. 이제는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 거 아냐. 도착하면 화장실 가서 세수부터 하라고. 그리고 피아노 앞에 앉아서 연습을 하란 말이야 알겠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진송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말라붙은 참을성, 강탈당한 인내심. 결국 저질러버렸다. 그녀의 잘못이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크리스티안은 침묵했다. 갑자기 터져 나온 한국말을 당연히 알아듣지는 못했을 테지만 진송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억양과 표정으로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가사 없는 음악이 리듬과 선율로 만국 공통어 노릇을 하듯, 크리스티안은 뒷좌석에 기대어 앉았고, 도착할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 공연장은 갤러리와 함께 운영되는 실내악 전용 홀로 어쿠스틱이 좋고 잔향도 적절히 울려서 인기가 많은 곳이었다. 달팽이 집처럼 둥그렇게 쌓은 외벽을 따라 붙여놓은 무지갯빛 타일 때문에 멀리서도 눈에 잘 띄었지만 막상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는 어려운 장소에 위치해 있었다. 붉고 노란 단풍나무가 홀을 둘러싸고 있었고, 옆으로 난 이차선 도로에서 헬멧을 쓰고 몸에 딱 붙는 옷을 입은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 진송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크리스티안과 함께 내렸다. 공연장으로 들어가자 대표와 직원들이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진송은 어쩐지 현상수배범을 넘기는 기분이 들었다. 
"반가워요. 컨디션 좋아 보이네요!"
대표가 크리스티안과 악수를 했다.
"어제 못 가서 미안해요. 급한 사정이 있었거든요. 숙소는 마음에 드셨어요? 한국은 처음이죠? 일정이 여유로우면 서울관광을 해도 좋은데..."


- 대표가 크리스티안을 데리고 연주자 대기실로 사라졌다. 진송은 공연장 사무실로 가서 무대감독을 만나 공연 진행에 대해 상의했다. 사전에 몇 번씩 연락을 주고받아도 현장에 가면 언제나 말이 달라졌다. 채무 관계를 따지는 것도 아닌데 각자의 기억이 깔끔하게 일치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 얘기를 끝내고 사무실을 나왔을 때 로비는 눈 덮인 새벽의 거리처럼 조용했다. 통유리 밖으로 갤러리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보였다. 진송은 시간을 확인하고 홀 밖으로 나와 산책로로 향했다. 삼사십 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 산책로가 끝나는 곳에 단순 명료한 형태의 잿빛 직사각형 건물이 있었다. 그곳이 갤러리였다. 입구 벽면에 붙어 있는 포스터가 진송의 눈에 띄었다. 팔다리가 조각조각 갈라진 남자의 사진이 인쇄된 포스터였다. 
진송은 벽에 붙은 포스터를 유심히 살폈다. '연금술: I-X'라는 제목 아래 흙을 빚어 만든 남자의 전신상 사진이 있었다. 사지가 갈라져 보였던 건 남자의 몸에 굵은 금빛 선이 이리저리 그어져 있어서였다. 마치 육체라는 껍데기가 갈라지면서 내부에 있던 빛이 새어 나오기라도 하듯. 
"긴쓰기에서 힌트를 얻은 거예요."
진송이 뒤를 돌아보자 낯선 여인이 서 있었다. 언제 나타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여인이 진송에게 미소를 지었다. 진송도 답례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인상을 설명하기 힘들다는 것이 여인의 첫인상이었다. 키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늙지도 젊지도 않았고, 뚱뚱하지도 마르지도 않았다. 전체적인 인상이 딱 떨어지지 않아서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아니냐로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 "깨진 그릇을 옷으로 붙이고 금가루로 이음매를 장식하여 수선하는 기술이에요. 깨진 부분을 감추는 게 아니라 더 돋보이게 하는 거죠. 그러면 오히려 그릇의 가치가 처음보다 더 올라가요... 그 아이러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기법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저는 제가 구할 수 있는 가장 질 낮은 물건에 긴 쓰기 기법을 적용해 봤답니다." 
여인이 계속 말했다.
"이 포스터에 있는 남자는 문구용 찰흙으로 만들었어요. 그 외에도 재활용이 안 되는 플라스틱이나 병, 길바닥의 돌, 오물이 묻어 못 쓰게 된 골판지 상자 같은 것들을 조각낸 다음 그 틈에 도금을 해서 보수해 봤어요."
"그렇군요."
"시련의 가치에 대해 표현해보고 싶었거든요."

- "네. 흔히들 그러잖아요. 시련이 사람을 강하게 한다고. 저는 긴쓰기가 그 생각에 기반을 둔 기법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시련의 흔적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거죠. 하지만 도로 고친다 한들 더는 아무 쓸모 없어진 존재에게 시련이란 무얼까요? 더러워진 골판지 상자를 긴쓰기로 수선한다 해도 누가 거기에 물건을 넣을까요? 그럴 때도 시련이 가치를 갖는 걸까요? 어쩌면 시련을 극복할수록 더 엉망이 되지 않을까요?" 
진송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인의 말은 질문이라기보다는 대답처럼 들렸다. 흰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 새까만 두 눈이 주의 깊게 진송을 바라보았다. 
"안에 들어가서 작품을 보시겠어요?"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부드러웠지만 냅킨에 적힌 환영 인사처럼 중립적인 느낌을 주는 웃음이었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그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마른 잎이 매달려 있는 나무들에서 메마른 박수 소리가 났다.
"그러고 싶지만 공연 준비를 해야 해서요.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진송이 말했다.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네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진송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뒤돌아 걸었다. 등뒤에서 뭔가가 몸을 부드럽게 누르며 앞으로 미는 듯한 기분이 들더니 이내 사라졌다. 돌아보니 여인은 없었다. 갤러리 건물만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 아래 서 있었다. 그제야 진송은 포스터에 작가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처 못 본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돌아가 확인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건가요?"
진송이 물었다.
"네, 연주 일정이 잡힌 게 없거든요. 어쩌면 앞으로도 없을지 모르고."
진송이 크리스티안을 보았다. 그가 계속 말했다.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로 했어요. 당분간은 그 일에 집중하려고 해요.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기약은 없지만."
"왜요? 피아니스트로 아직 한창인데."
크리스티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에이전시와 계약이 곧 만료돼요. 연장하자는 얘기는 없고, 저도 말을 꺼내지 않았고요. 그 정도면 서로 좋게 헤어지는 거죠. 다른 에이전시를 찾기도 어려울 것 같고요."
"술을 끊어도요?”
진송이 말했다. 크리스티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문제는 본질적인 게 아니에요. 제가 아르헤리치나 지메르만이었으면 재활원에 집어넣고 회복될 때까지 계약서를 들고 기다렸겠죠."

 

- 크리스티안이 커피를 홀짝였다.
"포기하는 건 아니에요. 그만두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한걸음 물러서서 잠시 기다리려는 것뿐이에요. 어제 했던 말은 모두 진심이에요. 과거를 버려야 할 순간이 오면 자신밖에는 믿을 수 없는 거죠. 하지만 어제와 오늘 있었던 일은 사과해야겠죠. 프로답지 못했습니다. 미안해요. 학교에 있는 동안 이 문제도 고칠 거예요."
"저도 미안해요. 화를 내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으니 상관없어요."

- 둘은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진송은 피곤이 몰려오는 걸 느꼈지만 아직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휴대폰은 테이블 위에 얌전히, 거의 무력하다시피 한 상태로 놓여 있었다. 생각해 보면 퇴근 이후에는 늘 그랬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지만 언젠가부터 그렇게 되었다. 이제는 흔한 광고 문자 하나 오지 않았다. 이 세상 모두가 해가 지면 진송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물론 그건 반가운 일이었다. 평온한 일이었다. 바라 마지않던 일이었다. 

 

- "저기 말이죠."
크리스티안이 입을 열었다.
"말씀하세요."
"이제부터 할 얘기는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네."
"다음에 전화가 걸려오면 꼭 받으세요. 제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전화를 하셨어요. 그 전화를 받지 않은 게 ..."

 

- <가을의 곡선>

 


- "사업상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 스스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면 늘 할아버지를 찾아간대요. 가서 할아버지랑 레슬링 시합을 하는 거죠. 벌거벗고요."
"벌거벗는다고요?"
"네, 올리브유였나. 몸에 그걸 바르고, 그게 아마 고대 그리스식인가 본데, 아무튼 저택에 체육관이 있대요. 굉장하죠? 거기서 경기를 하는 거예요."
"굉장하네요."
"그런데 그 시합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할아버지가 이겨야 한대요. 마빈 아빠는 죽일 듯이 달려든대요. 아버지라고, 노인이라고 봐주는 거 없고요. 그러니 할아버지도 전력을 다해 아들을 꺾어야 하는 거죠. 그러다 할아버지가 이기면 아빠는 패배의 충격으로 머리가 맑아지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게 되는 거예요. 아, 나는 아직 아버지를 넘으려면 멀었구나. 이러면서." 

- 나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연하 씨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얘기를 꺼내는 건지 여전히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나는 핏줄로 이어진 두 남자가 대저택에 마련된 체육관에서 장어처럼 미끌미끌한 알몸으로 서로를 넘어뜨리려 드는 광경을 떠올려보려 했다. 잘 안 됐다. 경기도 외곽의 기차역과는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라 그런지 상상력이 기름이 다 떨어진 자동차처럼 털털거리다 이내 멈춰버렸다. 

- "마빈 말로는 그게 뒤집힌 인정 욕구래요."
연하 씨가 말했다.
"아빠는 그런 식으로 할아버지한테 인정받고 싶어 한다는 거예요. 지는 게 바로 자기가 당신 아들이라는 증거인 셈이니까. 아직 할아버지의 보호 아래 있는 존재라고 인정받는 거죠. 그래서 죽도록 달려드는 거예요. 제대로 인정받기 위해서 할아버지도 필사적일 수밖에 없죠. 지면 당신이 시작한 사업에 타격이 갈 수도 있으니까." 
"재미있네요."
내가 말했다. 이제야 감이 좀 잡혔다.

- "사진관 주인한테도 그런 욕구가 있다는 말씀인가요?"
"모르죠. 하지만 아버지를 그렇게 싫어하면서 아버지 가게터 앞에 아버지랑 똑같은 업종의 가게를 내는 심리가 뭘까 싶잖아요. 아니면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연하 씨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하다 결론을 내렸다.
"그냥 성질이 못 돼먹은 거죠."
나는 웃었다. 연하 씨도 따라 웃었다.

- 연하 씨의 표정이 딱딱해지더니 나를 보며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잠시만요. 그런 다음 고개를 까딱하고는 걸음을 서둘렀다.
나는 역사 밖으로 나가는 연하 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대합실 의자에 앉아 사방을 둘러보았다. 세금 낭비와 전시 행정의 전형 같은 건물이었다. 으리으리하고 번쩍였으며, 누군지 모르는 위인의 동상처럼 공허했다. 하루 이용객을 손발로 꼽을 수 있을 듯했다. 상가는 역에서 직접 운영하는 편의점 하나를 빼고는 죄다 비어 있었다. 

- 나는 잠시 후 일어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 역시 맨 구석 좌변기 칸을 제외하고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볼일을 보고 손을 씻은 다음 핸드드라이어로 손을 말렸다. 화장실은 여전히 조용했고, 닫혀 있는 좌변기 칸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그만 나오세요."
침묵. 나는 다시 말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걸쇠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좌변기 칸 문이 열리면서 '안필성 스튜디오'의 주인이 걸어 나와 내 앞에 섰다.
우리는 가만히 서로를 마주 보았다.

 

- 어느 병원의 어떤 의사 작품인지는 몰라도 좋은 병원의 뛰어난 의사였다. 거기에 주인은 살도 찌웠고, 푸근해 보이는 풍성한 턱수염까지 길렀다. 언뜻 봐서는, 아니 자세히 봐도 회사가 오랫동안 찾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나 역시 그렇게 가까이에 앉아서 쳐다보면서도 처음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메스로 조율하고 턱수염으로 파묻은 얼굴 뒤편의 진짜 모습이 내 무의식 깊은 곳에서 떠오르자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물론 본명이 안필성이 아닌 '안성 스튜디오' 주인은 나를 즉시 알아봤을 터였다. 그러니 당장 어떻게든 아무 말이라도 해서 나를 쫓아내는 게 급선무였을 것이다.

- "무슨 걱정을 하지 말라는 건지 모르겠네."
주인이 천천히 말했다.
"내가 대체 무슨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까?"
나는 잠자코 선 채 그를 유심히 관찰했다. 주인의 말투는 공격적이었지만 자세는 딱히 그렇지 않았다. 어깨는 축 처져서 경계심을 느낄 수 없었고, 비어 있는 두 손은 무방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물론 뒷주머니에 뭘 집어넣고 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 대면 업무는 스트레스가 많다. 이런 식으로.

"안 믿어도 할 수 없지만 말이죠."

나는 말했다.
"저는 진짜로 인터뷰를 하러 간 거였어요. 당신이 하겠다고 약속한 그 인터뷰. 가업을 잇는 사람들. 나라고 당신 알아봤을 때 막 반갑고 그랬을까요?"
화장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잠시 뒤 주인이 입을 열었다.
"사람은 정말 이상한 동물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주인은 상관없다는 듯 계속 말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왜 애초에 인터뷰 같은 걸 하겠다고 했나 생각을 해봤단 말이지요. 들킬 게 빤한데 어떻게든 물 위로 머리를 내미는 이유가 뭘까. 아가미로 숨 쉬고 사는 데 만족해야 하는데. 왜겠어, 괜찮지 않을까 싶은 거지. 바깥공기가 그립고, 맘 놓고 햇볕을 쬐어도 되는지 확인하고 싶고. 혹시 헤밍웨이 읽어봤습니까?" 
 

- "읽어보세요. 그 사람 소설 중에 킬러가 자길 죽이러 올 걸 알면서도 도망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는 권투 선수가 나오는 얘기가 있어. 지친 거지. 갈 데도 없고 가고 싶은 데도 없고. 누워 있다 죽으나 도망가다 죽으나 제 팔자가 다를 게 없을 것 같거든. 오늘 오전에 당신 얼굴을 보고 그 소설이 생각났어요. 그 마음이 뭔지 진짜 잘 알겠더라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주인은 그 권투 선수처럼 가만히 누워있는 대신 내 뒤를 밟았다. 그렇게 당할 생각은 아직 없다는 뜻일 테다. 그는 지치지도 포기하지도 않았으며,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체격도 튼튼했다. 

- "저는 퇴사했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주인의 말을 이어받았다.
"이제 회사 하고는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아무 관계도 없어요. 좋게 떠난 것도 아니고요. 사실 저도 지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을 보면 안 좋은 기억만 떠오르니까. 그러니 여기서 그냥 조용히 헤어집시다. 회사에는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약속해요. 침대에 계속 누워 있을지 말지는 당신이 결정할 문제겠지만."  
주인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퇴사라."
"이젠 그만하고 싶어서요."
"그만하고 싶다, 라."
주인이 또 내 말을 따라 했다.
"그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이거죠? 날 만난 오늘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주인이 입꼬리를 올렸다. 
"뭐, 잘해보쇼. 행운을 빕니다, 진심으로."

 

- 주인의 눈에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빛이 떠올랐다. 사파리에서 미모사를 씹는 기린의 표정처럼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나는 더 할 말이 없었고, 합의가 이뤄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리고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뒤를 돌아보고 싶은 욕구를 있는 힘껏 억누르고 있다는 티조차도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화장실을 나왔다. 

- 우리는 군데군데 보도블록이 깨진 인도에 서 있었다. 낚시 도구를 판매하는 단층 건물들과 참돔이 수면에서 역동적으로 뛰어오르는 그림이 그려진 현수막을 내건 횟집, 그리고 편의점이 나란히 늘어서 있었고, 그 건물들 뒤로는 방파제가, 방파제 뒤로는 바다가 자리해 있었다. 소금기 어린 바람이 불어왔다. 파란 하늘을 새파랗게 받아치는 잔잔한 수면 위로 짧고 가느다란 포말이 하얀 누비 선처럼 띄엄띄엄 나타났다 사라졌다. 
"네?"
"차였다고요."
연하 씨가 아까보다 똑똑히 발음했다.
"오늘 정말 재수 더럽게... 다이내믹한 하루네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 <보호색>



- 102호에 드디어 사람이 들어올 모양이었다. 인테리어 업체 직원이 공사 소음이 생길 수 있다며 정화에게 양해를 구하고 동의서에 사인을 받아갔다는 것이었다.
"굳이 현관까지 들어와서 사인을 받아가더라고."
"공사는 언제부턴데?"
"모레부터래."

- 샤워를 하고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정화가 배달 앱으로 주문한 족발 세트가 도착했다. 내가 테이블에 음식을 차리는 동안 정화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왔다. 우리는 텔레비전 뉴스를 틀어놓고 각자의 하루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특별히 할 말이 없었지만 정화는 있었다. 주차권 때문에 쇼핑몰 ... 

- ... 까지 말하다가 마지막 자제심을 발휘하여 아니다, 하며 웃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청첩장 모서리를 접었다 폈다 하면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 "위선자 주제에."

정화가 위스키 잔을 세 번째로 채웠다.

"인스타에서는 맨날 작은 행복 타령했거든. 고양이가 어쩌고, 책 속에서 찾는 안온과 다정이 어쩌고, 소박하고 건강한 밥상이 어쩌고. 근데 오늘은 명품으로 도배를 하고 나왔더라, 예비 남편 뭐 하냐니까 건물 관리한대. 지 아버지 건물에서 연애할 때는 그냥 성실하고 착한 사람인 줄만 알았대. 어떻게 만났는지는 절대 얘기 안 하더라. 신혼여행은 그리스로 간대고."  
"결혼식은 언제야?"
"아, 맞다. 청첩장 깜박 놓고 왔다. 그러게 요즘 누가 청첩장을 종이로 주냐." 

정화가 치즈에 이쑤시개를 꽂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나중에 애들한테 물어보지 뭐."

- "바닥을 뚫었던데."
"바닥을 뚫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와 눈이 마주쳐서 뒷걸음질을 치는 사이, 남자의 어깨너머로 거실 한가운데 파놓은 커다란 구멍이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직육면체 모양으로 반듯하게 파놓은 구덩이였다. 언뜻 보아도 사람 하나는 거뜬히 들어갈 만큼 깊고 넓었다. 

 

- "잘못 본 거 아냐?" 

정화가 말했다. 

"그런 공사를 하면 관리실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아파트 바닥은 거미줄이야. 난방 배관에 수도 배관에 엑셀 파이프에 내장재에... 이 아파트 연식이면 축열재로 경량기포콘크리트 말고 콩자갈을 썼을 수도 있겠다." 
정화가 발로 바닥을 굴렀다.
"오, 전문가."
"전문가 아니고, 서당개 삼 년."

정화가 술기운이 오른뺨에 삐딱한 미소를 지었다.

"망한 집에서 그거라도 배우지 않으면 뭐가 남겠어."
시청 건축과 과장이던 정화의 아버지는 뇌물죄로 영장 심사를 받기 전날 결백을 주장하는 유서를 쓰고 자살을 기도했다.

- "흡혈귀는 대상과 수직적인 관계를 맺죠."
화면이 바뀌면서 연미복 차림의 흡혈귀가 관에서 깨어나자 부하가 달려와 시중을 드는 영화 장면이 나왔다. 부하는 곱사 등에 못생긴 남자로 표정은 비굴했으며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 교수가 계속 말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흡혈귀가 자본가를 은유한다고 주장하기도 해요. 흡혈할 대상을 신중하게 선정해 효율적으로 피를 빨아먹고, 한 방울도 낭비하지 않으니까요. 피를 빨린 사람은 기꺼이 흡혈귀의 부하가 되어 그에게 봉사하죠. 흡혈귀는 수직적 상상력의 괴물이에요. (이때 카메라가 교수의 강의에 집중하고 있는 개그맨의 얼굴을 잡았다.) 반면 좀비는 수평적 상상력의 괴물이죠. 좀비에게 물려 좀비가 되어도 자기를 문 좀비의 부하가 되지는 않잖아요. 좀비는 서로 평등해요. 부자도 빈자도, 자본가도 노동자도 좀비가 되면 모두 똑같아져요. 식욕밖에 없는 괴물이 되니까. 망하면 모두 똑같이 망한다는, 그랬으면 좋겠다는 상상력에서 태어난 게 좀비인 거예요. 요즘은 좀비가 흡혈귀보다 확실히 인기잖아요. 그죠? 그 현상이 암시하는 게 있을 거예요. 좀비처럼 사는 게 두려운 한편 좀비처럼 살고픈 소망이 숨어 있는 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런 소망은 어떻게 보면 도피에 불과해요. 살아 있는 사람은 좀비가 될 수 없으니까요. 사람은요, 살아 있는 한..."

- 나는 리모컨으로 채널을 바꿨다. 특수부대 출신의 유튜버가 자기 집에서 콩나물불고기를 만들고 있었고, 스튜디오에 앉아있는 진행자들이 그 영상을 보며 리액션을 했다. 유튜버가 고추장양념을 한 돼지고기를 열심히 주물럭거리자 진행자들이 팔근육 좀 보라며 감탄했다. 나는 정화의 옆얼굴을 보았다. 시무룩했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밖에 좀 나갔다 올까?" 

내가 말했다.
"뭐 하러?"
"오늘 재활용 쓰레기 수거일이야. 버리고 오자."


- 배달 음식 포장재, 편의점 도시락 용기, 청량음료와 생수 페트병, 캔커피 등을 다 모아놓고 보니 양이 제법 됐다. 요령 있게 잘 늘어놓으면 설치미술처럼도 보일 듯했다. 
"앞으로는 집에서 밥 해 먹어야겠다." 

정화가 말했다. 

"뭐가 이렇게 많아."
나는 그럴 필요 없다고, 그냥 먹고 싶은 걸 먹는 게 제일이라고 얘기했다. 세상이 돈만 내면 밥을 차려주겠다고 대기하고 있는데 왜 굳이 손에 물을 묻히나?

- 실버타운에 도착한 건 느지막한 오후였다. 로비에서 직원에게 신분증을 맡기고 출입증 발급을 기다리는 동안 수영복 위에 가운을 걸친 노인들이 지나갔다. 노인들의 몸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마치 남은 수명이 흘러내리는 듯했다. 
출입증 발급 절차가 끝난 다음 사방이 유리로 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왼쪽으로 스포츠센터와 정원이, 오른쪽으로 신록에 뒤덮인 산과 명상센터가 보였다. 보증금과 생활비가 얼마인지 들었었는데 잊어버렸다. 무척 비싸다고 생각했던 기억만 남아 있었다. 

- 고객은 창가 의자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장으로 퇴역 후 군납 식자재 사업을 벌여 큰 성공을 거둔 남자로, 짧게 친 백발에 등이 여전히 꼿꼿했다. 준비해 온 서류를 보여주자 노인은 안경을 쓰고 고개를 뒤로 슬쩍 뺀 자세로 서류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대부분의 고객은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상담하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제 손으로 종이를 쥐고 확인해야 만족했다. 실제로 인쇄된 글을 봐야만 마음이 놓이는 것이었다. 

 

-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창밖의 경치를 내려다보았다. 서류 속 숫자와 그래프는 너무 비현실적으로 잘 들어맞지 않도록 세밀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차분하면서도 격조 있는 색으로 그래프를 채웠고 군인 출신임을 고려해 폰트는 휴먼명조체를 사용했다. 밤에 집에서 열심히 매만진 결과였고, 내가 봐도 그럴싸했다. 이제 와서 실수가 있다 해도 상관없었다. 노인이 맡긴 돈은 어차피 한 푼도 안 남았고 그 내용은 노인이 신중하게 읽고 있는 서류에는 당연히 없었다. 내가 일부 고객들이 금융상품에 투자한 돈으로 주식거래를 하다가 모두 날려버렸고, 나름 손실을 막아보려 애를 썼지만 더는 방법이 없다는 걸 알게 되자 다른 고객들의 돈까지 건드리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적혀 있지 않았다. 처음에는 겁이 났지만 세상 모든 일들이 그렇듯 나는 금세 적응했고, 마음이 편해졌다. 숫자를 만지다 보면 늘 빠져나갈 방법이 있는 것 같았고, 실제로 지금까지는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돈이 이동했다는 기록만 확인할 수 있도록 해놓으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 노인이 몇 가지 질문을 했고, 나는 현재 투자한 상품을 철회하는 것은 시장 상황을 볼 때 권하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나 노인이 가입한 상품의 조건과 수익률은 현 경제 상황에서는 다시 나올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노인은 납득했고, 전화로 처리해도 될 일을 굳이 여기까지 불러서 미안하긴 하지만 그 정도는 고객으로서 당연한 권리 아니냐고 했다. 노후 자금을 전부 털어 넣었기 때문에 예민할 수밖에 없고 여기 생활비도 오를 예정이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나는 당연히 이해한다고,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다고, 다 잘되고 있다고 노인을 다독였다. 사실 잘될 방법은 절대 없었지만 그렇게 말하자 정말 잘될지도 모르겠다는 기분이 잠깐 들었다. 

- 정화에게는 돈을 빼돌릴 명의가 필요해졌을 때 얘기했다. 정화는 잠깐 놀랐지만 이내 현실을 받아들였고,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아빠가 자살 시도를 하기 전에 재산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거든. 그것만 해놨어도 우리 집이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아도 됐는데." 

- 주차장에 차를 댔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차에서 내리기 전정화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봤지만 이번에는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나는 오는 길에 산 햄버거 세트를 들고 집으로 갔다. 공동현관 앞에서 비밀번호를 누르자 유리문이 조용히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는데 순간 몸이 멈칫했다. 센서 등이 고장이 났는지 켜지지 않았다. 바깥은 어두웠고 안쪽은 컴컴했다. 어깨 근육이 저절로 긴장되면서 등과 목뒤가 뻐근해졌다. 내게 동물적인 감각 같은 게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그 감각이 깨어나고 있었다.
102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 처음에는 어둠과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둠에 눈이익자 사람의 윤곽이 차츰 눈에 들어왔다.
중키의 야윈 남자였다. 후드가 달린 검은색 코트와 검은색 바지, 검은색 구두 차림이었으며,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검은 옷의 남자는 말없이 102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하듯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들었는데, 돌연 그 이유를 깨닫자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남자의 숨소리 말고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어떤 빛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밤이고 아파트 단지가 길 안쪽에 있다지만 거리의 소음과 빛이 미치지 않을 정도로 외지고 어둠침침한 곳은 아니었다. 배달 오토바이가 지나가는 소리도, 누군가 술에 취해 지르는 고함도 당연히 들려야 했다. 가로등 불빛이, 네온사인과 교회 십자가와 음식점 간판에서 나오는 빛이 공동 현관 안을 비춰야 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마치 널찍하고 두꺼운 천에 뒤덮인 것처럼 암흑과 침묵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 알고리즘에 따라 유튜브를 돌아다니던 중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흡혈귀와 좀비 강의를 한 교수였다. 나는 동영상을 클릭해 그때 내가 보지 못했던 뒷부분을 재생시켰다. 교수가 말했다.
"철학적으로 흡혈귀와 환대를 연결할 수 있을까요? 뱀파이어는 반드시 집안에 있는 사람의 허락을 받아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해요. 이 설정을 제목으로 삼은 영화가 있지요. 여러분이 많이 보신 작품일 텐데요..."


- 굳이 현관까지 들어와서 사인을 받아가더라고.

- 시외버스에서 내렸을 때 나는 경찰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찰은커녕 서운할 만큼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나는 택시를 타고 시외버스 터미널을 빠져나갔다. 기사가 정치 얘기를 하려고 운을 뗐지만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택시에서 내려 다시 한번 정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 아파트 단지는 조용했다. 우리 집 창문은 새까맸다. 102호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공동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센서 등이 켜지지 않았다.
갑자기 그때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암흑과 침묵과 나와 (분명) 요시히로 씨만이 존재했던 그날 밤의 감각이 주위는 무덤처럼 조용했고, 짙은 어둠이 나를 통해 쌕쌕거리며 숨을 쉬고 ...

 

- <요시히로의 자리>

 




이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들은 2017년부터 2023년 사이에 쓴 것들이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망망대해에 무인도를 하나씩 띄우는 기분이었는데 막상 한데 묶고 보니 개울에 얼기설기 놓아둔 징검다리처럼도 보여서 어떤 시기를 건너왔다는 실감이 조금은 든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생물의 진화는 특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변하는 환경에 그때그때 적응하는 땜질의 연속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모두 진화의 산물이다. 작업을 끝낼 때마다 앞으로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 다짐을 지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매번 다른 문제가 생겨서 같은 잘못이 다시 끼어들 기회 자체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어찌어찌 소설을 마무리하고 처음에 품었던 바람과는 아주 많이 달라진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고 나면 어째서인지 이게 바로 내가 처음에 원했던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마음이 조금 놓이면서 이제부터는 정말로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할 수 있었다. 

결국 나는 지금까지도 스스로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셈인데, 그 모름이 계속 소설을 쓰게 하는 원동력인 것 같다. 가격표 앞에서는 돈을 내느냐 마느냐의 선택지밖에 없듯 다 아는 이야기는 굳이 되풀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독자분들에게도 이 단편들이 몰랐던 이야기로 다가갈 수 있다면 기쁘겠다.


2024년 봄
최민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