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쓰네카와 고타로] 천둥의 계절

일루젼 2024. 8. 10.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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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쓰네카와 고타로 / 이규원
출판 : 고요한숨
출간 : 2021.02.03


       


일조량을 늘리기 위해 일부러 낮에 돌아다녔더니, 더위를 먹은 건지 컨디션이 영 저조하다. 종종 나는 낮보다는 밤에 속한 사람인 것 같다고 농담을 하곤 하지만 -사실 살짝 진지하게- 실제로 일종의 광알러지처럼 약한 햇빛 거부반응이 있는 건 아닐까 의심되긴 한다.

 

자신에게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한 환경을 찾는 방법은 무엇일까. 

자기 자리라고 느껴지는 안정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많은 책과 가르침들은 지금 자신이 존재하는 자리가 바로 그 자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설한다.

하지만 그 모든 흔들림은, 결국 한 번은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야만 가라앉는다. 

 

둥. 둥. 둥. 

북소리가 들린다. 

  

이 책을 환상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틀림없이 초현실적인 설정이 등장하는데도 고민이 되는 건 왜일까.

처음 읽는 쓰네카와 고타로는 미즈와리한 츠루우메 같은 느낌이다. 깔끔하고 독특하고 맛있지만, 여운이 길지는 않다. 

 

<천둥의 계절>은 일본 안에 존재하지만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인 일종의 독립국 '온'에 관한 이야기다.

밤길을 따라 사자(死者)들이 찾아오는 마을의 유일한 입구. 

그곳을 지키는 문지기와 '바람와이와이'라는 마물에 씌인 소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교차하는 이야기는 '풍령조'와 함께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뇌계에 찾아드는 마물인 줄 알았던 것이 사실은 마을의 귀신조였음이 밝혀지며 땅으로 내려앉았던 이야기는, 

다시금 죽여도 죽지 않고 되살아나는 도바로 인해 하늘 어딘가로 떠오른다.

 

둥. 둥. 둥.

풍령조의 날개를 빌려 지상과 창공을 오가는 진동을 담은 이야기.

 

누구나 마디를 가지고 있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것을 계기로 삶의 방향성이 크게 바뀌었음을 깨닫게 되는 그런 마디.

겐야의 마디는 아카네의 마디와 닿아 있고, 아카네의 마디는 이토의 마디와 닿아 있다.

그렇게 연결된 고리 사이로.

 

바람이 분다.

여름이었다.    


    

- 천둥소리가 들리면 내 마음은 어두워진다. 천둥은 이곳이 아닌 머나먼 땅의 어두운 기억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그곳의 이름은 '온’.
온은 바닷가 어촌을 중심으로 하는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주민들은 주로 바다나 밭에서 일을 하여 생계를 잇는다.
내가 알기로 온은 일반 서적에 이름이 오른 적도 없고 지도에도 소개되지 않았다.
기억 속의 그 땅 온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외에 또 하나의 계절, 신의 계절이 있다.

- 온에 사는 사람들은 겨울과 봄 사이에 찾아오는 그 짧은 계절을 신계해, 혹은 뇌계라 불러서 봄이나 겨울과 분명하게 구별했다.
뇌계, 이름 그대로 '천둥계절'이다.

 

- 겨울이 끝나면 바다 건너에서 뇌운이 몰려온다. 뇌운은 2주 정도 온에 머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둥을 쏟아낸다.
천둥계절 동안 온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다. 집 밖에서는 바람이 미친 듯 불어대고 어떤 날은 아침부터 밤까지 천둥이 그치지 않는다. 

 

- 아득히 먼 곳에서 최초로 번개가 번쩍인다.
그것이 천둥계절의 신호다.

 

- 나의 오랜 기억 속의 천둥계절.
액막이 부적을 붙인 덧문을 꽁꽁 닫아건 어둑한 방에서 어린 나는 숨을 죽인 채 회벽에 기대어 누나의 손을 잡고 있다.
세상에 균열이 가는 듯한 소리가 그칠 새 없이 울린다.
여인이 울부짖는 듯 꼬리를 길게 끄는 소리가 켜를 이루듯 바깥 도로를 치달린다. 마을 전체가 바람에 부대끼며 악기처럼 진동한다.
누나가 내 손을 꼭 쥐며 속삭인다.
"'바람와이와이'가 우는 거야."
"바람와이와이?"
"바람와이와이는 바람의 정령이야. 구름에서 내려와 온갖 곳을 죄다 쓸고 다니다가 사람이 보이면 무작정 덤벼들어 씐대."
나는 바람와이와이가 인기척 없는 골목을 쏜살같이 지나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 온에는 풍장 관습이 있어서 바람의 정령이라고 하면 대개 조상의 영혼을 연상하게 된다.
멀리서 낙뢰, 바람의 비명, 다시 낙뢰.
"무서워."
"여기에는 귀신들도 여기저기 돌아다닌대."
바람와이와이에 귀신까지. 누나는 더 무서운 이야기를 꺼낸다.
"귀신은 사람을 잡아가."
천둥계절은 많은 괴이한 재앙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도처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계절이다.
"잡혀가면 어떻게 되는데?"
"오오토시 신(大年神, 매년 정월에 각 가정을 찾는다는 신)의 부하 귀신이 되지 못된 아이는 멀리 지옥으로 끌려가고."
나는 누나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그러니까 말을 잘 들으라는 것일까?

- 잠시 뜸을 두다가 누나가 속삭인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거 알지?"
나는 고개를 주억거린다. 누나 말대로 시간은 흘러 사라진다. 1초 또 1초, 과거가 된다.
강풍이 가로수 우듬지를 요동치게 하고 덧문을 흔들어 덜컹덜컹 소리를 낸다.
"가만히 떠올려봐. 지난 한 해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누나는 계속 말한다.
눈을 감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기억해 봐. 그리고 모든 것을 잊어. 지금은 그걸 하라고 있는 시간이니까. 그러다 보면 봄이 올 거야. 나는 누나가 시키는 대로 한다.

- 온에서는 천둥계절 동안 묵은 세계가 정화되고 새로운 세계가 준비된다고 믿는다. 그곳에서는 달력과는 상관없이 뇌계가 끝나면서 한 해가 시작된다.
온에 사는 사람들은 흙속에 묻힌 씨앗처럼 그저 가만히 집안에 틀어박혀서 새봄이 도래하기를 기다린다.
어느 날 천둥이 그친다.
가까이 떨어지던 벼락들이 점차 뜸해진다. 하늘을 흔드는 북소리 같은 굉음도 뜸이 길어진다. 마침내 마지막 한 발이 어느 머나먼 바다 위에서 울려 퍼진다.
바람소리가 바뀌고 대기가 느슨해진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들 정령들의 잔치가 끝났음을 안다.
덧문이 활짝 열리고 새해 첫 바람이 집 안으로 춤추듯 날아든다. 봄은 그렇게 시작된다.
 

- "그럼 전혀 쓸모없는 지도잖아요."
"온을 아는 사람이 만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곳을 아는 사람이 없는 건가요?"
"온을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지도에 표시하지 않았어요. 그럴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왜지?
"우리는 이 지도에 그려진 세계를 피해서 숨어 있는 거예요."

숨어 있다고? 이상한 울림이었다.
"왜죠?"
"아주 복잡한 사정이 있지만, 뭐 간단히 말하자면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예요. 전쟁이란 많은 사람들이 이쪽 편 저쪽 편으로 갈라져서 서로 죽이는 거예요. 온은 그런 짓에 말려들고 싶어 하지 않아요. 이해하겠어요?"

- 우리가 따라 걸었던 높은 돌담이 경계가 되어 생명의 마을과 죽음의 마을을 명확하게 갈라놓고 있었다.
우리가 서 있는 바위 위에서 문 뒤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하지만 호다카나 료운은 내려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위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던 것이다.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오늘 바위에 올라가 무덤촌 구경한 거, 절대로 비밀이야" 하고 다짐했다.
이런 샛길을 알고 있는 친구는 아마 호다카 말고는 없을 것이다. 나는 호다카를 존경했고, 세 사람만의 비밀을 가졌다는 우월감을 맛보았다.

- 무덤촌에 셋이서 찾아간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때는 그냥 작은 모험일 뿐이었지만, 그 후 가끔 무덤을 몽상하게 되었다.

- 꿈속에 나타난 온에는 늘 달이 떠 있었다. 한낮에는 모두 잠을 자는 무덤촌 주민들도 밤이 되면 무너진 건물이나 초목 뒤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한결같이 투명한 그림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달빛 아래 그림자 같은 주민들이 우리가 사는 마을로 향한다. 그들은 절벽에 뚫린 동굴을 지나 아른아른 흔들리며 온으로 건너온다.
그것은 악몽이라기보다는 조금 애잔한 인상을 남기는 꿈이었다. 가미쿠라 아주머니에게 무덤촌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다.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근데 무덤촌이 뭐예요?" 하고 물었다.
아주머니는 고개를 가로젓고 낙담한 얼굴로 한숨을 지었다. 그러고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괜히 위험한 짓을 하면 안 돼"하고 꾸짖듯이 말했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 놈은 바보야. 어른 말 잘 듣고 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는 아이가 똑똑한 거야.
"저번에도 봐라, 구조 씨네 아이가 바닷가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잖니. 위험한 짓을 하면 결국 그런 꼴을 당하게 돼. 너도 그걸 항상 명심해야 돼."
나는 그저 무덤이 무엇이냐고 물어봤을 뿐인데 아주머니의 설교는 구구절절 이어졌다.

- 셋이서 무덤에 다녀오고 며칠이 지났다. 나는 광장을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광장에는 나밖에 없었다.
그때 광장 건너편에 눈부시게 하얀 옷을 입은 노부인과 힘이 세어 보이는 사내가 나타났다.
노부인이 나를 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노부인의 찌르는 듯한 눈초리에 흠칫 긴장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노부인은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나에게 노부인이 말했다.
"아가야. 무엇이 씌었구나."
내가 잠자코 있자 노부인이 내처 말했다.
"무슨 목소리가 들리지 않니? 내 목소리 말고, 너한테만 들리는 목소리 말이야."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부인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초리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북함을 느꼈다. 노부인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놀라는 표정.

- 기분 나쁜 분위기였다. 팔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되물었다.
"씌다니, 뭐가 씌었다는 거죠?"
새. 새 같은 거야. 노부인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바람와이와이란다. 그건 가만히 놔두면 없어질 수도 있어. 그러면 좋으련만 어떤 때는 그것이 재앙을 부르거든. 그러니까 혹시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 싶으면 빨리 몰아내야 해." 
노부인의 말투가 조금 상냥해졌다.
"아직 너도 모르는 모양이구나. 앞으로 혹시 무슨 목소리가 들리면 나를 찾아오렴."
노부인은 자신을 온의 주술사라고 소개했다.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며 덧붙여 말했다.
"공연히 겁주는 것 같아서 안됐다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 주술사 노부인과 동행인 남자가 곁을 떠나자 나는 광장 구석에 있는 벤치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옆에 호다카나 료운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뭔가에 씌어 있었다.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남한테 이야기하지 못하는 나만의 비밀이었다.
나한테 들어온 그것.

- 그것이 찾아온 것은 3년 전 천둥계절이었다. 아직 호다카와 어울리지 않을 때라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만 해도 누나가 있었다.
나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 누나였다. 누나가 몇 살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나보다 꽤 나이가 많은 것으로 느끼고 있었다.
나와 누나는 어두운 방에서 천둥소리를 들으며 무위의 시간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새 잠들었다가 문득 봉지를 구기는 듯한 푸드득 소리에 눈을 떴다.
어두운 방 안에 기척이 느껴졌다.
누나야? ... 어디 있어?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기척의 주인공을 찾으려고 했다. 실내를 구석구석 살펴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누나가 돌아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방 안에 분명히 뭔가가 있었다. 기척을 낸 주인공의 눈길을 등 뒤에서, 천장에서, 가구 뒤에서 느낄 수 있었다.
잠시 나는 기척과 대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집중은 오래 버텨내지 못했다. 마침내 의식이 몽롱해지다가 툭 끊기고 말았다.
잠든 것일까, 정신을 잃은 것일까.
그다음은 흐릿한 어둠과 기억에 남지 않은 평평한 시간들.
천둥계절이 끝나고 가미쿠라 씨가 우리 집의 덧문을 열었다. 그때 나는, 볼이 움푹 패고, 눈에는 핏발이 서고, 두드러기가 돋아 온몸을 박박 긁어서 짓무른 상처투성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도 나중에 들어서 안 사실이고 나는 그때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 그 봄부터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누나가 사라진 날, 누나의 빈자리를 채우듯 방 안으로 들어온 그 무엇인가는 천둥계절이 끝날 무렵에는 이미 나의 내부에 들어와 있었다.
내가 무엇을 보면 그것도 내 눈을 통하여 같은 것을 보았다. 내가 무엇을 맛보거나 만지면 그것도 역시 내 혀나 피부를 통하여 같은 감촉을 느꼈다.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내 몸을 자동차에, 내 정신을 운전자에 비유한다면, 조수석에 그것이 앉아 있는 것과 같은 상태였다.
그것은 나에게 말을 거는 일이 없었고, 육체의 주도권을 주장하거나 빼앗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식물처럼 조수석에 얌전히 앉아만 있었다.
이것은 나만의 비밀로 간직해야 했다. '뭔가에 씌었다'는 사실이 온에서 살아가는 데 아주 불리하게 작용하리라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 주술사 노부인이 첫눈에 알아보았을 때는 내 인생이 끝장났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나만의 비밀이었던 것을 낯선 사람이 너무도 쉽게 간파한다는 사실에 몹시 놀랐다.
하지만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어서 그 후 한동안 주술사에 관한 것은 기억의 밑바닥으로 밀려나고 이름도 주소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 아마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이를테면 누나가 온 어느 곳에서 비밀스러운 일을 맡았고, 그 때문에 내 앞에 나타나지 못하는 거라고.
그런 생각을 하며 길을 걷고 있을 때면 석양에 물든 저기 앞쪽에 누나가 길을 가로지르는 것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어떤 집에서 흘러나온 웃음소리가 틀림없이 누나의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 허깨비 같은 단서는 늘 의식에 잡히는 순간 소멸하곤 했다. 흠칫 놀라 모퉁이로 달려가 봐도 아무도 없었다. 어느 집에서 흘러나온 소리인지 귀 기울여봐도 이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나는 3년 전 사라진 누나를 어디에서 보았다고 우기다가 반 아이들에게 비웃음을 샀다. 내가 따돌림을 당하는 처지가 된 데에는 그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호다카나 료운과 어울리게 된 뒤로는 더 이상 누나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 아이들한테마저 빈축을 사서 외면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마음속에서 누나와 거리를 두었다.

- 호다카네 집은 변두리에 있었다. 밭은 제법 넓었는데, 고구마와 배추, 당근 따위를 기르고 있었다. 당근에서는 하얀 꽃이 피어나 있었다.
작업은 오전 중에 얼추 끝났다. 그러니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호다카의 오빠가 다가와 과자를 먹겠느냐고 물었다.
호다카보다 키도 훨씬 크고 어른스러운 인상을 풍겼다. 이름은 나기히사였다.
나기히사는 키가 클 뿐만 아니라 어깨가 넓었으며 이목구비도 또렷했다. 나도 저렇게 멋진 남자로 커야 할 텐데,라고 생각될 만큼 그는 내 이상형에 가까웠다. 

- 나는 등에 섬뜩한 기운을 느끼고 다시 문 쪽으로 뛰어서 돌아갔다.
벽에 의자가 기대어져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사내 옆에 옮겨놓고 앉았다.
"조금 무서운데요."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하지. 이곳의 어둠은 살아 있단다. 지금은 이 문이 온과 바깥 세계의 경계가 되어 있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지기란 거, 보통 일이 아니네요."
사내는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아무래도 지난번 새벽에 스스로 문지기라고 밝힌 것을 잊어버린 듯하다.
"아저씨가 그랬잖아요. 새벽에 만났을 때 나는 문지기라고. 그래서 문지기가 뭘까, 하고 생각했었거든요."

 

- "그냥 와봤어요."
나는 쫓겨날까 걱정하면서, "귀신이 오면 아저씨가 저 창으로 해치우겠네요" 하고 감탄하는 시늉을 했다. "정말 대단해요."
사내는 의외로 단순한 성격인지 흡족한 표정을 짓더니 옆에 세워둔 창으로 손을 뻗었다.
"당연하지. 우리 온으로 마귀가 들어오게 할 수는 없으니까."

- "하지만 만약 엄청 힘센 귀신이라면요?"
"그래도 내가 지는 일은 없어."
"든든하네요. 하긴 그 창 너무 근사해요."
그때 사내가 말을 막았다.
"쉿!"
나는 문지기 사내에게서 그가 주시하는 큰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몇 미터 앞에 무엇인가가 서 있었다.
검은 그림자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림자는 소리도 없이 다가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의자를 뒤로 물렸다.

 

- 제등 불빛에 드러난 그림자는 머리를 길게 기른 부인의 모습이었다.
온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 꽃무늬 옷을 입고 있었다. 발은 맨발. 나이는 많아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젊어 보이지도 않았다. 표정에 생기가 없고 피로가 짙게 배어 있었다.
부인의 온몸은 반투명하여 건너편 어둠이 언뜻언뜻 보였다. 나는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눈치챘다.

"저어."
부인은 주저하는 기색으로 문지기 사내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사내가 대답했다.
"무슨 일입니까?"

- "부모님 성함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참 드문 일이군요. 하지만, 미안한 말씀이지만, 어서 잊어버리는 것이 좋을 겁니다."

부인은, 그런가요, 하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소중한 이름이라서, 잊지 말자, 잊지 말자, 되뇌면서 걸어왔답니다.
하지만 실은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고 어떤 분이었는지도 거의 생각나지 않아요.
기억나는 건 15년 전 잇달아 돌아가셨다는 것. 병이었어요. 내가 이렇게 되고 나서 많은 기억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부모님 성함을 주문처럼 외우며 걸어온 거예요.
이름을 잊어버리면 이 여로에 우연히 마주쳐도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아서요.
부인은 사람의 이름으로 만든 주문을 낮은 소리로 중얼중얼 외운 다음, 고개를 들고 지인으로 짐작되는 몇몇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사내는 장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고는, 찾으시는 분은 여기에 온 적이 없습니다, 유감입니다. 하고 말했다.
부인은 어깨를 떨어뜨리고 다시 사내 뒤에 있는 대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 "거기에서 왼쪽으로, 그래요, 바다 쪽으로 계속 걸어가세요. 육신이 없는 사람만이 걸어갈 수 있는, 피안의 나라로 가는 길이 있을 겁니다. 모든 것을 잊으세요. 저는 압니다. 부인은 틀림없이 행복한 삶을 사셨군요. 걱정거리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부인의 표정이 밝게 빛났다. 여기 도착할 때의 침울하고 괴로운 표정 하고는 정반대였다.
"물론 행복했고 말고요."

부인이 웃었다.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요. 말씀하신 대로 가보겠습니다. 마지막에 이렇게 훌륭한 문지기님을 만나서 정말 다행입니다."
사내는 여전히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볼이 희미하게 움직이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 "꼭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는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부인은 뭔가 작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망이 높지 않다는 것은 압니다만, 혹시 앞으로 언제고 제 남편이 여기 오면 말씀 좀 전해주세요. 행복했다고. 언젠가 또 만나자고요."


- 이젠 돌아갈래요 하고 일어서다가 나는 다시 물었다.

"내 머리 위에 뭐가 있나요?"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나를 보았다.
"새 귀신."
역시 이 사람도 작년에 그 주술사가 본 것을 보았구나.
"안 좋은 건가요?"
사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나도 잘 몰라. 가령 나쁜 거라고 해도 이미 씌었으니 어쩔 수 없겠지. 그런 마물이 어떤 재능을 가져다줄 때도 있어. 혹은 그 사람의 육신이 성장하면 사라질 때도 있고. 어쨌거나 네 몸은 네 거야. 너무 신경 쓰지 마라."


- 나는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마물과 나의 관계가 잘 풀릴 경우의 얘기다. 좋지 않은 방향으로 풀릴 가능성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래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는 문지기의 말은 나에게 구원처럼 들렸다. 
"알았어요. 또 올게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뛰기 시작했다.
재미난 것을 보았다. 조금 졸린 것도 같았다.
다시 그 동굴을 지나 산 사람들의 마을로 귀환하자 왠지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무덤보다 훨씬 밝은 온의 골목을 전속력으로 달렸다.

- 마침내 이불속으로 들어가자, 안도감 때문이겠지만 왠지 무척 행복한 기분이 들어서 혼자 쿡쿡 웃었다.
그 뒤로 나는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몰래 무덤촌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 문지기 아저씨의 이름은 오도라고 했다.
오도 아저씨는 처음 얼마 동안은, 어린애가 한밤중에 이런 데오면 안 된다는 말을 거듭했지만, 몇 번째부터는 체념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탁자 앞에 나타나는 것은 대개 사자였지만, 그 밖에도 다양한 성질을 가진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큰 뱀이나 도마뱀이 찾아올 때도 있고, 이목구비가 괴상하게 자리 잡은 새하얀 옷을 입은 행자가 찾아올 때도 있고, 온몸이 털로 덮인 정체불명의 야수가 찾아올 때도 있었다. 
오도 아저씨는 무엇이 나타나든 침착하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문 너머 마을에는 들어갈 수 없으니 그냥 돌아가세요."

말을 듣지 않는 상대는 창을 휘둘러 쫓아냈다.

- 연령을 짐작할 수 없는 '여자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1년 전 주술사의 말이 떠올랐다. 무슨 목소리가 들리지 않니? 내 목소리 말고, 너한테만 들리는 목소리 말이야.
나는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마음속으로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누구지?'
목소리가 딱 그쳤다.
대답이 올 때까지 조금 기다려야 했다.
'글쎄, 누굴까요?'
'바람와이와이?'

나는 속으로 말했다.

 

- '네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 그게 언제였더라. 그 천둥계절에...'

나는 한숨을 지었다.

'너는 말도 할 수 있었구나.'
가만히 놔두면 없어질 수도 있어, 하고 주술사는 말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던 것이다. 밤중에 무덤을 드나든 것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른다. 
'말할 수 있어요. 하려고만 들면.'
 
- '뭐가 기분 나쁘다는 거죠? 밤중에 무덤촌에 드나드는 것이 훨씬 더 기분 나쁜 일인 것 같은데.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지금까지 아무 짓도 안 했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이렇게 말을 하더라도 하루 종일 떠드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잘 지내면 좋잖아요.'
바람와이와이는 내처 말했다.
'염려 마세요. 내가 당신 속에 계속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러다 조만간 사라집니다. 굳이 몰아내지 않아도 인간은 참 제멋대로군요. 바람와이와이가 씐 사람이 무슨 잘못을 하면 다 바람와이와이 탓이라고 하죠. 무슨 상관이 있다고. 바람와이와이에 씌지 않아도 나쁜 짓 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는데. 안 그래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바람와이와이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은 알 수 있었다.
'바람와이와이가 씐다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들과 똑같지 않다는 것이 싫은 거예요. 그런 사람들, 신경 쓸 것 없어요. 아, 그렇지. 첫인사 대신 당신이 아무래도 모를 것 같은 것들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을 가르쳐 드리죠.' 
불안을 느끼면서도, 뭔데? 하고 재촉했다.
'바깥 세계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내심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당신이 바깥 세계에서 들어온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현기증이 일어났다.

- 나름대로 생각을 할 줄 알게 되었던 어린 시절은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 말을 듣고 보니 내 기억 속에 온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풍경들이 조각조각 흩어진 채 숨겨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금속 뼈대로만 만든 탑이 우뚝 서 있는 언덕, 역시 금속이 반짝반짝 빛나는 탈것. 나는 그런 기억들을 꿈에서 본 세계라고 믿고 있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에요. 나는 당신 마음 한쪽에 연결되어 있어요. 내가 새라면 지금은 당신이라는 샘물에 내려앉아 쉬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샘물 밑바닥에 무엇이 가라앉아 있는지 내 눈에는 다 보여요. 온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바깥 세계에는 존재하는 많은 것들이 물론 지금 당신은 이곳 사람이에요. 여기서 성장하고 아마도 여기에서 삶을 마치겠죠. 당신이 속한 곳은 바로 여기예요.' 

- '왜 나한테 들어왔지?'
'글쎄, 왜일까요?'
바람와이와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뜸을 두었다.

'당신이 불러서가 아닐까요?'

- 오도 아저씨는 조금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미안하구나. 네가 어떻게 하고 싶으냐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문제지. 신중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 아가씨 말에 따르면 아마 사체는 무덤촌에 있을 것이고... 우선 내가 사체를 찾아야겠다. 가능하면 빠른 시일 안에 시시노에게 보고하는 것은 그다음이겠지. 그렇게 사건을 만들어놓은 다음에 망령이 나기히사의 이름을 말했다고 신고해야지. 네가 싫다면... 꼭 증언할 필요는 없다. 친구의 오빠라니 힘들겠지."
오도 아저씨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시시노는 온의 법을 천 년 동안이나 지켜온 집단이야. 물론 가끔은 태만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일처리가 능숙해."
나는 무거운 마음 탓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 "자, 이제 아침이구나."
오도 아저씨는 의자에서 일어나 탁자를 옮겨 벽에 기대 세웠다.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너는 정말 조심하지 않으면 위험하겠다. 네 처지를 알겠지? 오늘 밤 여기 온 것, 본 것, 들은 것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라. 너는 여기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알겠지? 나기히사인지 누군지를 만나도 아무런 티도 내지 마라. 모르는 척해야 한단 말이다."
"하지만 히나 누나의 유령이 거짓말을 한 거라면 범인은 나기히사가 아닐지도 모르잖아요."
오도 아저씨가 지친 눈으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 그 긴박한 상황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뇌리를 울렸다.

'도망쳐요!'
바람와이와이였다.
신선천에 놀러 갔다 와서 다툰 뒤로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가까이에 사람이 있을 때 말을 걸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발이 움직이질 않았다.
온몸은 떨리고 있었을 것이고, 얼굴 또한 공포로 바르르 떨며 나기히사를 향한 눈은 요사스러운 마귀라도 바라보는 양 동그랗게 열려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나는 내가 나기히사한테 어떻게 보일까 하는 점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 "정말이지 너는 구제해 줄 길이 없구나. 하계 출신에다 마물한테 씌기까지 하고. 어떻게 된 거야? 앞으로 온에서 어떻게 살아갈 거야?"
나는 할 말을 잃고 나기히사를 쳐다보았다. 이것이 그 나기히사인가? 분별 있고 친절한 청년의 자취는 아무 데도 없고 유치하고 못된 악동처럼 눈알을 반짝이고 있다.
"어이, 그 지저분한 눈깔로 쳐다보지 마."
어느새 멱살이 잡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신기하게도 별로 아프지 않았다. 나기히사가 나를 발로 걷어찼다.

- 도대체 너는 천둥계절에 무덤촌이 어떤 곳으로 변하는지 알기나 하는 거냐?
처형장이야.
천둥계절에는 머리가 돌아버린 놈이나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자들을 여기로 끌어다가 죽인다고.
귀신조라는 게 있거든. 평소에는 온에서 평범하게 사는 어른처럼 보이지만 천둥계절에는 가면을 쓰고 도롱이를 걸치고 귀신이 되는 거야.
점찍어둔 집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지. 가족들도 다 양해하는 거야. 귀신조에 부탁하는 것이 대개 그 가족이거든. 그런 골칫거리를 꽁꽁 묶어서 이리로 끌어다가 죽여서 내던져버리는 거야. 그래 놓고 다들 입을 모아 말하는 거지.
"천둥계절에 귀신이 하는 일인걸.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하고 말이야. 
올해 천둥계절에는 네 차례가 될 거다.
마물에 씐 데다 하계에서 온 애물단지, 축제일에 혼자 무덤촌을 어슬렁거리는 말썽꾸러기. 제대로 성장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다들 알고 있을 거야.
그게 네 운명인 거야.
네가 오늘 여기 오지 않았더라도 다음 천둥계절에는 이리로 끌려올 게 분명해. 어쨌거나 올해는 네 인생의 마지막 해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이제 다른 세상에 가서 노는 게 어때? 

- 귀신조.
천둥계절이 되면 무덤에서 은밀하게 처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는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능히 있음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 추적을 완전히 벗어나면, 이를테면 하계에 도착하면 말이다. 일단은 네가 이긴 거야.
알겠지? 지금부터가 중요해.
만약 추격대가 따라오면 주저하지 말고 싸워야 해. 살아남기 위해 이것저것 따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인정사정도 두어선 안 돼.
추격대는 너를 죽일 작정으로 따라가는 거야.
산 채로 잡으려고 할지도 모르지만, 결국 온에 연행되면 너는 사형이야. 죽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
죽이러 오는 자는 죽여도 괜찮다는 것이 철칙이다. 그걸 잊지 마라.
네가 살아남아서 어느 다른 세계에서 잘 살아가기를 나는 기원한단다. 그렇게 기원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나마 여기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 가라. 
다시는 만날 일이 없겠지.

- 잘못했다고 빌며 변명하는 주리의 모습을 보면서 나기히사는 내심 실망했다.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이제야 죽여주는 거니? 고마워, 하고 말해주기를 기대했는데. 그랬으면 얼마나 멋있었을까.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신비감은 연기였을 뿐이다.
아마도 사람의 언행이란 것이 다 연기일 것이다.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자신이 아직 어린 것일까?
"이미 늦었어. 한번 말을 뱉었으면 책임을 져야지, 안 그래?"

주리는 그날 밤 칼에 찔려 죽은 몸으로 숲 속 낡은 창고의 처마 밑에 버려졌다.

- 그해 천둥계절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집 안의 문이란 문에는 다 액막이 부적을 붙여놓았지만, 그런 것에 효력이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규짱 때하고는 다르다. 자기가 죽인 것은 하계 출신의 방화범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천상가에 가까운 혈통을 가진 양갓집 규수를 죽인 것이다. 
귀신조의 정체가 실은 분장한 인간이라고 해도 주리가 말한 도바 무네키인지 누구인지처럼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사람이 없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온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꿰뚫어 보고 있는 존재가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 귀신조는 나타나지 않았다.
봄이 되자 나기히사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나는 또 구원을 받은 것 같다.

- 벽에는 액자에 담긴 그림이 걸려 있었다.
기묘한 날개를 펼친 새 같은 생물이 푸른 초원 위를 날아가는 그림이었다. 현실의 새는 아니었다. 날개가 네 개나 달린 괴수 같은 생물이었다.
왼쪽 아래 구석에 Shiori라는 사인이 들어가 있었다.
"이거 전부 시오리가 그린 거니?"
"그래, 나, 예술에 조금 눈을 떴거든" 하고 말하고는 시오리가 웃었다.
시오리가 다시 말했다.
"냉장고에서 먹을 것 좀 가져올게."

- 아카네는 시오리가 방을 비운 동안 그림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것은 분명 열세 살 소녀의 수준이 아니었다. 열세 살 수준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기술로 보나 감각으로 보나 그림 한 점 한 점에서 느껴지는 정열의 크기로 보나 자신을 표준으로 그어지는 원을 크게 뛰어넘은 작품들이었다.
그때 아카네가 시오리에게 품은 감정은 티끌 하나 없는 존경이자 부러움이었다.

- "방에 틀어박혀 있던 6학년 때 그린 거야. 그냥 그리고 싶어서."

"왜 갑자기 그림을?"

"설명하기 곤란해. 아니, 전부터 그림 그리는 것은 좋아했어. 자, 여기 방석."
시오리가 방석을 건넸다.
그림 이야기는 일단 중단되었다. 아카네와 시오리는 서로 학교생활이나, 시오리가 다니지 않을 때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일 따위를 두서없이 이야기했다.

 

-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다가 아카네는 벽에 걸린 그림에 등장하는 이상한 새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저 새가 정말 있는 건 아니지?"
"저건 풍령조 風靈鳥야."
바람의 영혼을 가진 새.
"내가 지은 이름이야."
아카네는 방안 공기가 아주 조금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 "풍령조는 공서생물이야."
공서? 아카네가 묻자 시오리는 설명을 시작했다. 뭍에 사는 생물은 육서생물, 수중에 사는 생물은 수서생물.
풍령조는 공중에 사니까 공서생물.

- "하지만 보통 새는 모두 육서생물이야. 하늘을 날 수는 있지만 둥지는 지상에 마련하잖아. 공중에 산다고 할 수는 없지."
공서생물은 평생을 공중에서 살아. 인간은, 적어도 평범한 인간은 감지할 수 없는 영역에서 살아가지. 살아 있든 죽어 있든 그림자도 형체도 확인할 수 없어. 그래서 인류의 기록에 실재 생물로 기록된 적이 없어. 
공중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양한 것들이 살고 있거든. 

- "풍령조는 공중에서 잠을 자?"
"공중에서 잠을 자. 공중에서 생활해."
아카네는 시오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멋진 공상이야, 재미있네, 하고 얼버무리거나 하지 않았다.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기색을 조금이라도 드러내면 이 이야기는 즉시 끝나버리고, 다시는 풍령조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신 같은 것이구나."
"응, 거의 그렇지. 인간이 보자면 풍령조를 일종의 신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풍령조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을 인간의 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야생동물이지... 지적인 야생동물."

-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어. 잔뜩 비를 품은 것처럼 보이는 짙은 구름이 한여름의 태양을 가리고 있었지.
방금 그 소리는 뭘까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머릿속에서 수많은 영상이 솟아나는 거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새하얀 탑이나 역사가 꽤 오래됨직한 외국 도시,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산호섬과 구름의 바다, 별이 총총한 하늘, 깎아지른 절벽, 그리고 고원을 걷는 내 모습. 
기억이 이중으로 펼쳐져서, 방금 전까지 내가 하늘을 날고 있었던 것 같았어.
그리고 힘을 느꼈어.
내가 문득 굉장히 강해진 것 같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그래서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생각해 보니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

- 수많은 색과 꼴이 가슴속에 대기하고 있는 것 같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는 신비한 상태였어.
조금 떨어진 곳에 엄마가 서 있는 것이 보였어.
나는 엄마한테 걸어가서 말하고 싶었어.
저어, 엄마. 그림을 그리고 싶어. 이제 돌아가서 그림을 그리자. 나, 지금이라면 대단한 그림을 그릴 수 있어.
 
- 정신을 차려보니 어둠 속이었어. 내 몸은 어디로 옮겨지고 있었어.
온 힘을 다해서 눈을 뜨려고 했지만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어.
어둠 속에서 여관 종업원들과 이야기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렸어.
'무슨 일입니까? 일사병인가요?'
'현기증 같아요.'


- 내 기억이 아닌 것이 분명한 낯선 이미지들이 잠깐씩 나타났다가 사라졌어. 하늘이라든지 언덕이라든지 바다라든지, 구름 사이를 선회하며 바다뱀 아닌 하늘뱀을 잡고 있는 장면이라든지.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나는 그때 생각했어.
투명하고 신비한 새가 있다는 것을.
공중에서 생활하고 공중에 있는 것을 먹고 아주 드물게 지상에도 내려오는 새.
그 새가 내 가슴에 내려앉은 거야.
하지만 매끄럽게 자리 잡지 못하는 것 같았어. 혼합되지 못했어. 딱 결합되지 못했어.
새는 아직도 내 안에 있어.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날아가겠지만, 아직은 희망이 있어. 나의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깨끗하게 정리해서, 내려앉은 새를 위하여 공간을 비워주고 적당히 균형을 잡으면 잘될 것 같기도 해.

- 내가 실려 간 곳은 커다란 객실 같은 곳이었어.
눈앞이 여전히 캄캄해서 그곳이 객실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어. 에어컨 소리가 들리지 않고 통풍이 잘되고 다다미의 풀 냄새가 섞여 있는 곳이었어.
이상하다, 병원이 아니네, 하고 생각했어.
누구인지 노파 같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어머니로 짐작되는 사람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내용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어. 
규슈 산골의 방언인지 낯선 단어가 몇 개 들렸어. 온이라든지 와이와이 물리치기라든지.

- 향내가 짙어지고 경을 외는 듯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
마침내 아주 멀리서 북소리 같은 소리가 들렸어. 두웅, 두웅, 하고 말이야. 멀리서 거인이 산을 한걸음에 건너오는 듯한 소리가 서서히 다가왔어.
두웅, 두웅.
경인지 주문인지 모를 소리는 그 소리하고는 다른 주파수대에서 계속 들리고 있었어.
너무나 신비로운 기분이었어. 두웅, 두웅 하는 세계와 경을 외는 소리가 웅얼웅얼 들리는 세계가 머릿속에서 겹쳐졌어.
주문이 뚝 그쳤어.
갑자기 무슨 대나무 판 같은 것으로 볼을 한 대 얻어맞았어. 아프다기보다 뭔가 번쩍하는 밝은 충격이 손가락 끝까지 치달았어. 온몸에서 땀이 솟아났어.
바람이 휘익 일어나고, 다시 한 대.
파닥파닥 하는 날갯짓 소리.
그리고 나는 의식을 완전히 잃었어.

- 나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흘렸어.
그것이 떠나버린 걸 알았던 거야. 그것이 내 곁에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었을 텐데. 초라하고 텅 비어버린 내가 남아 있었을 뿐이야. 엄마한테 이상한 객실에 눕혔던 적이 있냐고 물어보았지만, 그런 곳에 간 적이 없다는 거야. 꿈이라는 거야.
일사병으로 쓰러져서 이상한 꿈을 꾼 거라고. 나는 병원에서 분명히 의식이 깨어났고, 링거를 맞고 약을 복용하고 택시를 탔다가 잠이 들었다는 거야. 

- 집에 돌아와 그림을 그렸어.
공중에 사는 생물. 나에게 아주 짧은 기간 머물다가 어디론가 날아가버린 형체 없는 존재.
정말로 몰입했어. 풍령조는 없어졌지만 그 힘은 아직 백분의 일쯤은 남아 있었던 거야.
혹시 잘 그리기만 하면 그때 느꼈던 힘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어. 하지만 그건 아니었어. 마침내 그런 마음은, 최소한 잊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점점 변해갔어.
수도 없이 그렸어. 여름방학이 끝나고 학기가 시작되었지만, 더는 학교에 갈 수 없었어.
어떤 낯선 사람이 와서 천재일지도 모른다고 했어.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새가 남긴 것은 빠르게 ... 

- 틀림없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시오리의 머릿속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아이는 그것을 버릴 수 없었다. 시오리는 여자로서는 이상적인 점도 있지만 풍령조하고는 맞지 않았다.
나는 달라. 나는 그럴 마음만 먹으면 모든 걸 버릴 수 있어. 꼭 붙들어 두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풍령조가 날개를 접고 쉴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있다. 자식의 변화를 즉시 알아채고 그걸 몰아내기 위하여 빠르게 대처할 현명한 엄마도 나에게는 없다.
풍령조야. 나에게 오렴.
노랗게 물든 구름을 향해 아카네는 중얼거렸다.
내 마음속 샘물에 내려와라.
나라면 괜찮아.
이 몸을 빌려줄 수 있어.
까마득한 태곳적부터 거듭되어 온 기도를 하듯 아카네는 남몰래 기도했다.

- 이토 시오리하고는 또 만나서 놀자고 말하고 헤어졌지만 얼마동안은 만날 기회가 없었다.

- 그렇게 수치스러운 소송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아아, 이젠 정말 죽여버리고 싶어!"
"겁난다, 얘."

시오리가 웃었다. 문득 웃음을 거두고, "네 말을 들으니까 전에 들었던 무서운 얘기가 생각나네" 하며 괴담 같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 "우리 친척 아저씨가 아는 사람 중에 예전에 두메산골에 살던 사람이 있어. 그 마을에는 살인을 대신해 주는 사람이 있었대. 매년 겨울에 신사 새전함에 죽이고 싶은 사람의 이름과 왜 죽이고 싶은지 그 이유를 적은 편지를 넣어두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기 전에 지목된 사람이 살해되었다는 거야." 
"세상에 이름을 적은 편지를 넣어두면 정말 죽는다고? 어느 현얘기야?"
"어느 현인지는 몰라. 물론 신이 죽이는 것은 아니야. 신주가 그 편지를 어떤 사람에게 전하면 그 사람이 편지를 읽고 죽일지 말지를 판단한다는 거야. 호소가 정당하다고 판단되면 그 편지는 살인 대행자한테 전달된대. 살인 대행자가 누구고,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마을 사람들도 전혀 모른다는 거야."
"거짓말, 시오리, 그거 그냥 도시 전설이지?"
"내가 아니라 친척 아저씨가 들려준 이야기라니까."
시오리는 화제를 바꾸어, 그런데 너희 학교에 멋진 남학생은 없니? 하고 물었다.

- 시오리네 집을 나서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공원 옆 은행나무 가로수 길에서 아카네는 이상한 여자를 보았다.
신비하게 생긴 스카프를 두른 사람이었다.
원래 컬러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스카프는 석양을 받아 분홍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카네의 눈은 빛을 발하는 듯한 그 스카프에 못 박혔다.
스카프에 그려진 무늬 같은 것이 도드라져 보였다. 덩굴무늬, 담쟁이덩굴무늬 같았다.
뭐지, 저 옷감은? 향수를 일으키는 애절한 느낌. 어디서 저런 걸 판매하고 있을까?
아름답다.
봄바람이 가로수길을 스쳐 지나간다.
스카프가 바람에 나부낀다.
여자의 나이는 스무 살에서 서른 살 사이. 얼굴에 어딘지 비장하고 엄숙한 인상이 배어 있다.
여자는 어? 하듯 아카네에게 시선을 향했다. 아카네는 쑥스러워 시선을 피하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몇 발 걷다가 궁금한 마음에 뒤를 돌아보니 노을 진 은행나무 가로수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 비를 그었다.
어디 멀리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이 울부짖는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릎을 껴안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야생마일 가능성도 있고(몇 마리를 본 적이 있다), 추적자가 다시 쫓아왔을 수도 있었다.
만약 추적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승률이 매우 낮은 도박이었다.

 

- 비를 긋는 동안 아주 고약한 꿈을 꾸었다.
아까 보았던 환상의 집에 가족이 살고 있는데, 내가 그들을 몰살하는 꿈이었다.
꿈에서 나는 강하고 잔인한 괴인이었다. 그리고 그 집에 사는 가족들은 모두 이목구비가 없는 밋밋한 얼굴이었는데도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아버지로 보이는 민둥 얼굴, 어머니로 보이는 민둥 얼굴, 딸로 보이는 민둥 얼굴, 아들로 보이는 민둥 얼굴.
나는 처음에 그 집을 빼앗을 목적으로 들어갔다. 그 집에는 밖에는 없는 안락과 풍요가 있어서 어떻게든 빼앗아야만 했다. 하지만 집에 들어가자 애초의 목적은 금세 망각하고 약자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힘을 휘두르는 쾌락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연약한 민둥 얼굴들은 내 힘 앞에 미친 듯이 떨었다. 애초의 목적은 죽이지 않고도 달성할 수 있었지만, 그냥 놓아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분간은 괜찮아도 이들이 도망치면 나중에 커다란 재앙이 들이닥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한 명씩 확실하게 죽였다. 전부 끝내고 잠시 쉬려고 소파에 앉았다. 그때 문득 집은 사라지고 나는 백일몽에서 깨어났다.
비가 풀을 적시고 있었다.
악몽이 너무나 강렬하여 사고가 마비된 것 같았다.
바람와이와이가 흥분하여 날개를 치켜들고 떨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빗소리 속에서 나와 바람와이와이의 흥분은 차차 식어갔다. 혹시 똑같은 꿈을 꾸었던 것일까? 그것은 나의 본능이 희구한 환영일까, 아니면 바람와이와이가 가지고 있던 기억일까? 
나는 바람와이와이에게 그것을 물어보지는 않았다.

 

-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태양이 얼굴을 내밀자 나는 풀잎에 맺힌 물방울을 차며 천천히 걸었다.
초원이 불타는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멀리 나지막한 언덕이 있고, 그 정상에 석조 건물이 보였다. 몇 분 안에 사라지는 환상과 달리 그 건물은 계속 시야에 남아있었다. 앞으로 다가갈수록 커졌다. 그 건물은 실제였다.
저기에서 잠시 쉬자, 하고 결정했다.
구릉을 다 올라가 새삼 건물을 살펴보았다. 원기둥 모양의 탑이 있는 한창 무너지고 있는 폐가였다.

 

- 나는 바람와이와이와 대화한다.

'전에도 물었었지?'
'무엇을요?'
'너에 대해서 지금도 잘 모른다는 건 이상하잖아. 어디서 태어났지? 그동안 어디에 있었어?'
'나는 태어난 곳은 기억하지 못해요. 이 대지였던 것도 같고 어느 신비한 곳이었던 것도 같은데, 아무렴 상관없어요. 악한 영혼이 바람와이와이가 된다고 하니까 나는 전생에 악행을 일삼던 사람이었을지도 모르죠.'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아주 옛날에는 정말 인간이었을지도 몰라요.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전혀 기억이 없어?'
'사람에 관한 기억은 있어요. 하지만 그것이 인간이었던 시절의 내 기억인지 내가 전에 씌었던 다른 사람의 기억인지 분간할 수 없어요. 우리는 타인의 기억을 옮겨 다니는 종족이니까요.'
'공중에서는 혼자 지냈어?'
'대개는. 하지만 동료를 만날 때도 있어요. 그럴 때는 서로 정보를 교환하죠.'
'동료도 있었구나.'
'온의 먼바다에 무인도가 있어요. 우리들은 매년 봄 그곳에 모이죠. 그렇게 모이는 장소가 몇 군데 있어요. 동료를 만나고 싶으면 그곳에 가서 많은 이야기를 나눠요. 최근엔 백 년 이상 가보지 않았지만.'
'이름도 있어?'
'바람와이와이면 충분해요. 당신은 우리들끼리 부르는 이름을 발음조차 하지 못하니까요.'


- '왜 나에게 왔지?'
'당신이 불렀으니까.'
'그것뿐이야?'
바람와이와이가 웃었다.
'재밌으니까요. 우리 종족은 온갖 것에 내려앉아서 상대방의 생을 즐긴답니다.'

- 사나운 야수에 씌어 사냥의 기쁨을 즐기거나 약한 동물에 씌어 도망치는 스릴을 맛보거나 나무에 씌어 차분하게 명상하거나 사람한테 씌어 고뇌해 보거나 하는 식이죠. 괴롭고 슬프고 아프고 배고프지만, 각 생물마다 다 나름대로 기쁨이 있어요. 나중에 공중으로 돌아가면, 아, 참 즐거웠구나, 하고 생각하죠. 
신기하게도 우리 바람와이와이는 자기가 씌고 싶다고 생각한 생물한테 씌지만, 결국 어디에 쐴지는 미리 정해져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것도 우리 동료들하고 늘 토론하는 얘깃거리랍니다. 

- "멍청한 여자지? 그런 사람이랑 사는 것도 힘들 거야. 하지만 세상은... 정의니 뭐니 하는 것이 움직이는 게 아니야. 필요 있냐 없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애완동물도 취직도 친구도 연인도다 그래. 말하자면 아카네 짱은 이제 필요 없게 되었다. 뭐 이런 말이지."
아카네는 다시 오른팔을 움직이려고 시도했다. 아주 조금 움직였지만 역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팔뚝이 무릎 위로 툭 떨어졌다. 아마 코코아에 약을 탔던 모양이다. 
"어린 나이에 살해되는 것은 잔혹한 일이지만, 하는 수 없지. 그리고 앞으로는 고생하지 않아도 되잖아. 누구를 욕할 일도 욕먹을 일도 없고. 입시도 없고.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 이 아저씨는 말이야, 요절한 사람을 모독하는 것을 좋아하거든. 죽은 놈 묘지에 오줌을 누거나 개똥을 공양하거나 예전에 종종 그랬어." 

- "아카네 짱, 말해도 모르겠지만, 온이라는 곳이 있어. 아저씨는 60년 전에 거기에서 여기로 출장을 나왔지."
온. 뇌리에 떠오른 한자는 '恕'이었다.
일본에 그런 곳이 있었나?
설마, 시오리 친척의 지인이라는 사람의 출신지일까? 완전히 도시 전설 같은 산골 마을의 살인 대행자 이야기에 자신이 말려든 것만 같았다.
"온에는 묘라는 것이 없어. 풍장을 하고 남은 뼈는 큰 동굴에 ... "


- "실은 거기 사는 놈들은 다 시대에 뒤떨어진 바보들뿐이야. 하지만 온 주민에게 살해된다는 것은, 이쪽 사람들이 볼 때는 신의 손에 죽는 거야. 늙어서 죽거나 병으로 죽는 것보다 못할 게 없단 말이지."
"죽고 싶지 않아."
아카네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남자가 중얼거렸다.
“죽고 싶지 않아? 그래... 경우에 따라서는 죽지 않을 수도 있어."
스쳐 지나가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 "너는 아직 어리고 어쩌면 무슨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지. 테스트를 해서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게 밝혀지면... 뭐,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죽지 않고 온에서 살 수도 있어. 온은 능력 있는 일손을 원하니까. 후천적인 능력보다는 선천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 말이야. 세계가 전쟁으로 멸망할 때, 온에서 우수한 인물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이끌게 되는 거야. 그래서 그들은 우수한 유전자를 보존하고 싶어 하지. 그러니까 천재라면 희망이 있어."  
남자는 그 대목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미안하다. 헛된 기대를 품게 해서. 아카네 짱은 사실 희망이 없어. 발탁될 가능성이란 것도, 백 명이 와도 아흔아홉 명은 불합격이니까."
창밖의 어둠 속에 보이던 불빛이 점차 그 수가 줄어갔다.

 

- 덜컹, 하는 커다란 소리가 났다.
10초 정도 신비한 부유감이 차량 안에 감돌았다.
다시 덜컹. 타이어가 땅을 밟는 감촉이 돌아왔다.
아카네는 회전의자에서 뱅뱅 돌고 난 것처럼 어지러웠다.
맥이 탁 풀린 채 창밖 풍경으로 시선을 던졌다.

여기가 어디지?
전봇대에 달린 등도 이미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었다. 창밖에는 가드레일, 주택의 담, 교통 표지판 등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자동차는 어두운 바다처럼 탁 트인 벌판을 달리고 있었다. 온에서 왔다는 사내는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조금 전에 느낌이 이상했지? 그게 국경을 넘는 순간이었어. 다음 정차할 곳은 다카마가하라(일본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 산다는 천상의 나라옮긴이), 다카마가하라입니다."

 

- 싱거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었다. 농담이라 해도 전혀 재미가 없었다.
아니, 필시 진심일 것이다. 이 나라 간토지방에는 육로로 넘을 수 있는 국경이 있었던 것이다!

- 스웨트 팬츠는 웅크린 자세로 두 팔뚝 밑으로 얼굴을 처박듯이 하고는 바르르 떨었다.
니트 모자는 쪼그리고 앉더니 조금 상냥해진 말투로, "이봐, 아무 짓도 안 해.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다음 체조만 할 거야. 당신 때문에 뒷사람들이 기다리잖아" 하며 스웨트 팬츠를 안듯이 하여 일으켰다.
니트 모자의 말은 거짓말이 분명했다. 하지만 스웨트 팬츠를 입은 사내는 새빨갛게 부어오른 얼굴을 쳐들고는 니트 모자에 이끌려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가야 했다.

 

- 침묵이 이어졌다.
도바는 무표정과 위압적인 자세로 버티고 서 있었다. 그때 무엇인가가 보였다.
... 어?

도바의 어깨 위에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저기에 있는 게 뭐지?
자세히 보니 그림자가 어떤 모양을 보여주고 있었다.
... 새?
거대한 까마귀 같은 새였다. 새카만 깃털, 몸길이가 1미터를 넘는 섬뜩한 괴조의 그림자가 도바의 어깨에 앉아 있었다.

 

- 집중했던 의식을 늦추자 새 그림자는 스르륵 사라졌다. 의식을 집중하면 다시 형태가 짙어졌다.
아카네는 숨을 들이 삼켰다.
풍령조다! 정말 있었구나!
어젯밤 내내 도바에게 느꼈던 위압감의 정체가 바로 이거였나, 하고 생각했다. 어제는 보이지 않던 것이 지금 보이는 것은 비정상적인 일상과 극한의 밤을 보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풍령조의 다리는 도바의 어깨에 녹아든 것처럼 보였다. 아카네는 풍령조의 다리에 묶인 쇠사슬을 보았다. 진짜 쇠사슬은 아니었다. 풍령조가 일종의 그림자인 것처럼 쇠사슬 역시 그림자였다.
도바가 풍령조를 자기 몸에 묶어놓았던 것이다.
풍령조의 얼굴은 도깨비를 닮았다. 부리 같은 것이 있는데, 끝이 부러지고 깨져 있었다. 두 눈은 막혀 있고 고름 같은 것이 맺혀있었다. 고통스러운 부상을 당하여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살아있는지 죽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 "그럼 시작해 볼까."
도바가 아카네 건너편 의자에 앉더니 조금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그는 따분하다는 표정이었다.
"지금부터 열 가지를 물을 겁니다. 대답을 하지 않으면 당신은 죽습니다. 질문에 따라서는 정답 오답이 없는 것도 있지만, 당신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대답해 주십시오. 대개 네 능력을 측정하는 질문이니까, 그런 줄 알고."
"열 가지밖에 없어요?"
"그래. 온이 필요로 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그 정도면 알 수 있어."
 
- 도바의 어깨너머로 목수 출신의 남자가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아카네는 도바에게 눈길을 돌렸다. 도바는 아카네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에 있는 거대한 검은 귀신은 존재감을 키우고 있었다.
니트 모자는 이쪽으로 시선을 힐끔 던지고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물러갔다.
정말로 끔찍한 기분이었다.
"그럼 질문하겠습니다. 자, 물음. 내 어깨 위에 무엇이 보입니까?"

- 질문 열 개 가운데 아카네가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첫 번째 질문과 온에 가고 싶으냐는 열 번째 질문뿐이었다. 아카네는 첫 번째 질문에 검은 새 같은 것이 보인다고 대답하여 도바를 놀라게 했다. 열 번째 질문에는 여기서 죽기는 싫으니까 온에 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두 번째부터 아홉 번째 질문까지는 너무 어려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제한시간 30초 안에 여섯 자릿수 암산을 하거나 전기회로 같은 도형을 10초쯤 보고 있다가 다른 종이에 기억나는 대로 옮겨 그리는 아이뷰 테스트 같은 것도 있었다. 
모든 질문에 대답을 마쳤을 때 도바 뒤로 네 사람이 죽어 있었다. 아카네는 총성과 살려달라는 애원을 무시하려고 애썼지만, 풀밭에 널브러져 있는 사체들은 어쩔 수 없이 시야에 들어왔다.
 
-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테스트 치른 뒤에 죽는 것만 해도 호강이지. 보라고, 저기 뒹구는 놈들은 테스트고 뭐고 없이 죽었잖아. 뭐, 좋아. 특별히 질문 하나를 추가해 주지. 자, 그럼, 너는 무엇을 할 수 있지? 자, 대답해 봐. 뭐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말해봐. 무엇이 있지?"
아카네는 대답을 못 했다.
대체 뭐라고 대답하면 살 수 있을까? 살아날 길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이놈들을 죽이고 도망치는 것뿐이다.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그거라면 협력할게요.'
아카네의 등줄기로 차가운 기운이 기어올랐다.
'이 남자를 죽여요. 나를 풀어주세요.'

- 아카네는 도바의 어깨에 올라탄 검은 새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변함없이 잠들어 있는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그것이었다.
'부탁해요.'
알았어, 하고 아카네는 속으로 대답했다.
'기회를 놓치지 말아요.'
"그것 봐, 아무것도 없잖아."
도바는 으스대는 듯한 웃음을 짓고 니트 모자를 쓴 동료에게 얼굴을 돌렸다.

- 풍장이란 결국 이 들판에서 살해된 사람들을 그냥 한 군데 모아놓는 것을 말하는 걸까?
우두둑 우두둑 뼈를 밟는 소리가 뒤에서 쫓아왔다.
"이런, 이제 도망치지 않는 거야?"
돌아보니 새카맣고 거대한 새를 어깨에 태운 남자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입술은 웃음을 지은 상태로 굳어 있고 눈은 음침한 악의로 가득 차 있었다.

- "봐라. 신성한 자의 증거다."
도바의 어깨에서 흘러나온 피는 강풍에 날려 공중에 나부끼다가 다시 곧바로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내 피는 땅바닥에는 떨어지지 않아. 나는 하늘에 속한 존재거든. 지상에 속한 자의 피는 대지에 떨어지고, 하늘에 속한 자의 피는 하늘로 돌아간다." 
도바의 눈이 득의양양하게 빛났다. 피는 흐릿한 하늘을 향해 곧게 혹은 바람에 흔들리며 올라가고 있었다.

- 대단하지?
물론 내가 신화시대 사람들의 피를 이어받은 신의 나라 온에서 태어났기 때문만은 아니야.
이 새, 바람와이와이가 나에게 내려앉은 것은 내가 어릴 때였지. 처음에는 재잘재잘 시끄러웠지. 내가 참 심하게 대했어. 봐, 도망치지 못하게 묶어놓았잖아?
병약했던 나는 이놈이 떠나면 죽을 거라고들 했어. 다행히 이놈의 힘으로 살아 있는 거라고. 그래서 묶어둔 거야. 하지만 이놈은 몇 번이나 나를 조종하려고 했어. 내 몸을 빼앗으려고 했어. 그래서 비틀어 꺾고, 흠씬 때려주고, 징벌을 내리고, 깃털을 뽑고, 부리를 부러뜨리기도 했지. 나중에는 이놈이 아파, 아파, 하며 울어대는 모습을 보는 데 재미가 붙더군.  
병약했던 나는 마침내 강해졌어. 육체가 강해진 뒤에는 쇠사슬을 풀어서 쫓아낼 수도 있었지만 왠지 두렵더군. 싫지만 떠나보내기도 두려운 마음. 너도 14년을 살아왔으니까 이런 딜레마가 어느 인생에나 꼭 있다는 것을 알 거야.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좋았어. 이놈과 내내 함께 있었던 덕분에 언제부턴지 피가 하늘로 향하게 되었어.
 
- 죽을 때까지 내 거야. 너는 재미있거든. 죽을 때까지 내 거야. 너는 죽지 않으니까, 영원히 내 거야. 아무한테도 넘겨주지 않아.
나는 구토를 참았다. 잔뜩 위축되었고, 그저 그 목소리 하나로 죽어버릴 것 같았다.
'미안했어요.'
문득 암흑이 흩어졌다.
안정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지금 그 목소리는 누구였지?'
'미안해요. 나한테도 복잡한 사정이 있어요. 어쨌든... 여기에는 온의 귀신조 출신자가 있어요.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요. 조심하세요.'
어떤 능력인데?
'일단 죽어도 어떤 조건만 갖춰지면 사망 시점까지의 기억을 승계한 채 어디선가 부활하는 골치 아픈 능력이죠. 말하자면 불사의 능력 같은 거죠. 자칭 천상인인데, 사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대책이 없는 인간입니다.’ 
 
- 어차피 아무도 막지 않는다면 알아서 빈방에서 자도 괜찮을 터였다.
기와지붕을 얹은 2층짜리 여관에는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테라스가 달려 있었다.
서랍에서 이불을 꺼냈다. 
정말 오래간만에 보는 이불이었다.

- 나는 테라스로 나가 해 질 무렵의 평화로운 거리를 바라보며 상념에 빠졌다.
소리 없는 세계에 단둘밖에 없다는 느낌은 여전했다.
이 격리감이 마침내 사라질지 계속될지는 알 수 없었다.
도시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므로 옷이나 식사나 잠자리 같은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문제를 일으킬 염려도 없었다. 그것은 그냥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최고의 상황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래서는 누구와 이야기도 못 하고 인연을 맺는 일도 없이 그저 시간만 흘러갈 것이다.
 
- "온이 당신들에게 자객을 보내는 일은 물론 없을 겁니다. 하지만 도바 무네키가 어떻게 할지는 알 수 없어요. 그는 아마 1년 후, 혹은 3년 후면 어딘가에서 부활할 거예요. 도바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 해도 두 번이나 죽었어요. 하지만 두 번 모두 소생했지요. 온에서도 즉시 대처하겠지만 당신들도 충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조심하라고 하지만 뭘 어떻게 조심하란 말일까. 하야타는 조바심이 나는 듯 몸을 흔들었다.
"온을 한자로 쓰면 원한의 '원(일본어에서는 怨과 穩의 발음이 같다 - 옮긴이)' 자인가요?"
"평온의 '온'입니다. 실제로 평온한 곳입니다."
아카네는 속으로 한자를 써보았다.
온. 의외였다.

- '아직 목이... 칼칼하지만, 그 사슬이 있는 한 영영 놈한테서 떨어질 수 없었을 텐데, 정말 잘해주셨어요. 그건 그렇고, 당신은 길을 잃었나요?'
아카네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온도 좋고 도쿄도 좋으니 어디든 사람 사는 곳에 가고 싶었다.
'어느 쪽에서나 너무 멀리 와버렸군요. 이 냇물을 따라 잠시 거슬러 올라가면 샘물이 나올 거예요. 오늘 밤 우마차 무리가 그곳을 지나갑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온으로 갈 거예요.' 
'어떤 사람들인데?'
'세계를 횡단하는 여행단입니다. 온도 아니고 도쿄도 아닌 다른 영역에서 오랫동안 여행을 해온 사람들입니다. 이 광대한 벌판은 무수한 세계와 통해요. 그리 흉포한 자들은 아닌 것 같으니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합류하세요.' 
'고마워.'
'또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나요?'

- '그래요? 지금이야 그렇겠죠. 혹시 그런 사태가 닥치면 힘이 돼 드리죠. 나는 인간으로 비유하자면 아무 죄도 없이 백 년 동안 도바 무네키라는 감옥에서 고문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아무튼 지금은 그놈이 너무나 원망스럽습니다. 놈의 적은 누구든 내 편이라고 생각할 정도예요. 다음에 놈이 육신을 갖추고 나타나면 다시는 부활하지 못하게 해 줄 겁니다.' 
하지만 그자는 불사의 존재가 아닌가?'
'나도 불사니까 그 점에서는 같아요. 그놈이 불사가 된 것도 내 덕분이에요. 그건 그렇고, 또 도울 게 없나요?'
아카네는 엎드려 자고 있는 겐야에게 시선을 돌렸다.
'부탁이 있기는 한데.'
'뭡니까, 말씀하세요.'
'혹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아이를 도와주겠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에리도 죽기 5초 전까지만 해도 자기가 곧 죽는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 풍령조한테는 염치없는 부탁인지 모르지만, 만약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소년을 상인들에게 인도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이 아이가 길을 잃으면... 네가.' 
'좋아.'
풍령조는 차분하게 말했다.
'언제든 이 소년이 길을 잃을 때는 내가 힘이 돼주겠어요.. 그럼 건강하세요. 당신이 가는 길에 행운이 따르기를.'
푸드덕푸드덕하는 날갯짓 소리와 함께 아카네의 온몸에서 거대한 존재감이 스르륵 분리되었다.

- 아카네는 전에 '이토 시오리는 못 한 일이지만 나라면 풍령조를 붙잡아둘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을 떠올리며 웃었다.
이제야 알았다. 이 거대한 힘을 붙들어놓는다는 것은 누구한테나 어려운 이야기라는 것을. 그것은 원할 때면 언제든 하늘을 날아야 하는 존재였다. 
그런 존재를 억지로 묶어두면 무서운 일이 생긴다. 산타클로스를 감금해 두었다고 해서 매일 신나는 일이 일어날 리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도바 무네키는 대단한 금기를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초원에서 소녀 옆에 이 아이가 있는 것을 보았을 때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 것들을 이 아이에게 가르쳐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 아이는 적의 존재를 영혼에 각인해 두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주술로 보호되는 비밀의 마을에서 많은 고생을 하겠지만 동료들 틈에서 성장할 것이다. 어둠은 계속 어둠으로서 물밑 바닥에 가라앉아 있으면 된다. 
가만히 지켜보며 자기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주자.
이 아이의 샘물은 마음을 편하게 한다. 숱한 사람들한테 내려앉아 보았지만 역대 최고의 궁합이다. 잠시 여기에 머물도록 하자.
바람의 새는 희미하게 웃었다.
어쩌면 이 소년이야말로 진정한 '몸체'일지 모른다. 이 아이가 살아남고, 한 소녀가 자신에게 보호를 부탁한 것은 인연이 주관하는 일이라는 기분도 들었다.

- 자, 무네키. 너는 어디서 부활할 작정이냐.
공중에서 생겨나 공중으로 돌아가는 너를 죽일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겠지?
 
- 13층짜리 아파트의 한 집에서 도바 무네키는 냉장고를 열고 방금 사 온 차를 유리잔에 따랐다.
무네키가 이 집을 구입한 것은 12년 전이다. 침실 세 개에 거실과 주방이 딸린 이 아파트에는 생활하는 데 충분한 생활용품이다 갖춰져 있다. 그에게는 마당이 딸린 주택 따위는 필요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알몸으로 다카마가하라에 쓰러져 있었다. 세 번째 죽음이 끝나고, 네 번째 삶이 시작되었다. 주위에 뒹구는 사체에서 신발을 벗겨 신고 그대로 걸어서 도시로 돌아왔다. 
도시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알몸을 드러낼 일은 없었다. 무네키는 하계인이 생활하는 층과 포개져 있는 또 다른 층을 걸었다.
그 층에서는 소리가 소멸하고 존재의 그림자만이 조용히 움직인다. 수중에 들어간 것과 비슷한 상태다.
너무나 오랫동안 밖에 있던 인간은 이 층에 들어오면 잠시 동안은 이 '틈새'에 있는 영령의 세계에 육체가 머물게 된다. 부상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부상과 잠복의 요령을 터득한 무네키는 스위치를 조작하듯 자유자재로 어느 쪽으로든 오갈 수 있었다. 

 

- 육신이 재구축되기까지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이 없었다. 옷을 훔치러 들어간 가게에서 달력을 보고 연도를 확인했다. 소멸해서 부활하기까지 3년이 걸렸다는 것을 알았다.
몸단장을 마친 무네키는 심호흡을 한 뒤 부상하여 도시의 혼잡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 아파트 내부는 온통 곰팡이 천지였다. 무네키는 업자를 불러서 청소를 시켰다.
인생의 세 번째 부활에 따른 어수선한 상황도 마침내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새가 없었다. 과거 두 번은 함께 사라졌다가 함께 부활하여 거의 신체나 다름없던 그 새가 지금은 없었다.
무네키는 기억을 더듬으며 혀를 찼다.
막 하늘로 올라가려는 참에 그 빌어먹을 계집애가 낡은 쇠사슬을 부숴버렸다.  

 

- 무네키는 거기에서 사고를 멈추었다. 이것은 '나는 하계인한테 벌벌 떠는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싶어서 억지로 만들어낸 가설이 아닐까? 진실은 무엇인가? 하야타 고지가 자기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정체를 밝히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그리고 1년이 지났을 때, 놈은 모습을 드러낼 마음이 없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자신을 상대로 생각하지도 않는 것이다.
놈의 놀이는 벌써 한참 전에 끝나버렸다.


- 무네키는 흐느적흐느적 아파트 밖으로 나섰다.
갈 곳도 없이 인파 속에 파묻혔다.
누가 자기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노란 셔츠의 남자가 스쳐 지나갔다. 흠칫 놀라 돌아보았지만 하야타 고지가 아니었다. 노란 셔츠를 입은 남자는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무네키는 세계의 음량을 줄였다. 
소란은 멀어지고 심해처럼 정적이 찾아들었다.
언젠가부터 인간이 무섭다.
편하게 쉴 때는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고 지금까지 죽여온 자들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떠올리면 된다. 이것이 바로 승리한 인생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제 그것으로는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놈들은 한결같이 빙글빙글 웃고 있다. 안면을 다시 그려 붙인 것처럼 모두들 똑같은 얼굴로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다. 다친 상어는 작은 물고기들에게 잡아먹히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마침내 너도 최후의 순간을 맞이했다고 말하려는 것처럼. 

- 아파트옥상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문득 기척을 느꼈다.
세계의 소리는 꺼둔 상태였다.
그러니까 알 수 있었다. 완전한 정적으로 고여 있는 물 위로 작은 돌멩이가 파문을 일으키는 것 같은 기척.

- 무네키는 감각을 바짝 세웠다.
다시 조금 더 커다란 파문.
무네키의 마음은 오랜만에 두근거렸다.
구원의 징조.
여기 있으니 이리로 오라는 신호. 무네키는 파문의 근원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척이 사라져 버릴까 두려웠다.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바람에 희미한 냉기가 깃들어 있었다. 여름이 끝나고 있었다. 

- 무섭다.
현명하게 대응해야 한다. 도망칠 수는 없다. 후퇴를 준비할 뿐이다. 발길을 돌렸다.
 
- "남은 일들도 다 끝냈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누나는, 그러니까 이젠 다 잊어, 하고 말했다.
아주 오래전 천둥계절에, 모든 것을 잊고 봄을 기다리렴, 하고 말했던 것처럼.

- 나는 상상한다. 그 사내는 소리 없는 세계 어딘가에서 심장 없이 부활한다. 하지만 심장 없이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몇 발만 걸어도 고통스러워하며 쓰러지고 숨통은 곧 끊어진다. 분해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다시 때가 되면 심장 없이 소생한다. 몇 발 만에 고통스럽게 쓰러져서 숨이 끊어진다. 몇천 번, 몇 번을 거듭 소생하고 거듭 죽는다. 끝없는 영겁의 고통이라는 고리 위에서 사내는 계속 헤매는 것이다.

- 어디에서 훔쳐왔는지 호다카는 은팔찌를 차고 있었다. 온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것이다. 청바지를 입기도 하고 반바지를 입기도 하는 등 소녀의 복장은 올 때마다 바뀌었다. 너무 많이 훔친다. 누나가 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도시에 꽤 익숙해진 모양이다.
"나, 이쪽에 있을 동안 이것저것 다 먹어보면서, 연구라고 할까 공부라고 할까, 아무튼 온에 새로운 요리 문화를 전할 생각이야."

"오, 대단한 결심을 하셨네. 오늘은 뭘 드셨는데?"
"너희 누나랑 미트소스 스파게티."

- 바람와이와이는 내가 병원에 실려올 때만 해도 있었던 것 같다. 그 새가 언제 날아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의 몸과 마음이 모두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내 곁을 떠났다.
바람와이와이가 있던 자리가 텅 비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날 밤, 나는 한없이 약해졌다고 느끼고 크게 낙담해서 훌쩍훌쩍 울었다.

- 인사도 없이 떠나간 바람와이와이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그 나약함이 바로 나의 본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앙을 부르는 강인함은 필요 없다.
하늘의 새는 하늘로 돌아갔다.
그녀는 늘 하늘을 날아다니며 언젠가 다시 누군가에게 내려앉을 것이다.

- 호다카와 누나가 또 찾아왔다. 마지막 날, 호다카는 파란 버튼다운 셔츠를 입고 한 손에 과자 봉지를 들고 있었다.
"나, 모레 온으로 돌아가. 9월 보름날 온으로 가는 여행단이 도시 바깥을 지나간다. 그 사람들과 같이 갈 거야."
나는 누나에게 눈길을 옮겼다.
"나도 같이 가니까 괜찮아."
"잘됐구나."
호다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가 여기 올 때 입구 근처에 샘물이 있었지? 그곳으로 온다고 하더라."
나는 잠자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내게 가장 소중한 두 사람이 나를 떠나려는 것이다.

- 꿈인 것 같았다.
커튼 틈새로 햇살이 비쳐 들고 새소리가 들렸다.
사복 경관이 몇 번 와서 잠깐씩 대화를 나누었다.
어디에서 왔지? 모르겠어요. 무슨 일이 있었지? 모르겠어요. 그런 문답이었다.

 

- 나의 신원이 끝내 판명되지 않자 그들은 곧 나를 시설에 넘겼다. 가을이 찾아오고 겨울이 끝났을 때, 이 땅에는 천둥계절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나는 볕이 드는 곳에서 살짝 눈을 감고 누나의 말을 떠올렸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거 알지?"


- 그렇다. 시간은 흘러서 사라진다.
전에 나를 덮쳤던 커다란 파도는 나를 물가로 번쩍 밀어 올리고 나의 소년 시절을 앗아서는 끝없는 대양으로 데려갔다.
새로운 세계의 온갖 정보가 눈사태처럼 내 속으로 밀려들어 저항도 못 하는 나를 또다시 누군가로 변질시켰다.
저쪽에서 또 다른 파도가 밀려올 것이고, 그 파도는 나를 다시 새로운 바다로 데려갈 것이다.
그 옛날 누나의 말처럼 마침내 새로운 계절이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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