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도진기
출판 : 시공사
출간 : 2012.05.14
도진기 작가의 책을 한 권 더 찾아냈다.
이 저자의 책은 가독성이 무척 좋다. 그러면서도 아주 세세한 부분에서 '앗'하고 허를 찌르는데, 이번 소설 같은 경우는 굉장히 기초적이면서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트릭이었다.
일본의 본격추리소설들은 주로 현실에서는 도저히 일어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한 트릭을 사용하는 편인데, 중심이 되는 사건 또한 밀실 살인이나 연쇄 살인 같은 이상 사건이다. 그에 반해 도진기 작가는 스쳐가는 뉴스로라도 한 번쯤은 접했을 법한 한 건의 사건을 주제로 주변인들을 살펴 나간다. 독자로서 진범을 추리하는 일은 동일하지만, 전자가 정답을 맞혔을 때의 희열에 집중한다면 후자는 심증이 가는 인물의 무고함이 드러날 때의 놀라움에 집중한다는 느낌이다. 거기에 판사로서의 경험이 녹아들었기 때문인지 '누구나 자신만의 사정은 있구나'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덤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인물 구성이 다소 정형화된 것 같다는 점.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와 겹쳐 보이는 부분들이 많았다.
하지만 내가 읽어본 동저자의 작품이 많지 않으니 확정 결론은 잠정 보류.
더 찾아 읽게 될지는 미지수다.
재미있었다.
- 현관 앞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려 도구로부터 손에 전해지는 감각에 집중했다. 뭔가 이상했다. 딸깍하고 해제되는 소리가 나야 하는데 분명 자물쇠 실린더가 헛돌고 있다. 도구를 빼고서 둥근 현관 손잡이를 쥐고 힘을 주니 스르르 돌아간다. 문득 으스스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박민서가 문을 잠그지 않고 외출했나. 그렇게 허술하게 보이지는 않았는데? 문을 당겨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장 위 센서가 작동해서 전등이 켜졌고, 덕분에 스위치를 더듬어 찾는 수고를 덜었다. 그리 밝진 않았지만 집 안을 둘러보기엔 충분했다. 진구는 신발장 센서가 꺼지기 전에 거실등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켰다.
- 현관문을 열 때의 묘한 기분을 지울 만큼 집 안은 평온했다. 방 한 칸과 비교적 널찍한 거실 겸 부엌, 욕실만으로 단출하게 이루어진 독신자용 연립이다. 눈앞에 보이는 거실과 부엌 쪽은 방문 목적에 별로 도움 될 것이 없어 보였다. 허름한 집에 어울리지 않게 거실에 빽빽이 구비된 오디오 시스템은 진구의 눈길을 끌었다. 프리앰프와 파워앰프, 소스기기, 그리고 천장까지 닿을 듯한 톨보이형 스피커가 방문객을 압도했고, 기기 위에서는 아캄, 탄노이, 오디오 아날로그 따위의 이름만 들어본 브랜드 로고가 차갑게 빛났다. 벽면 한쪽 진열장을 꽉꽉 채운 CD와 DVD, 그리고 빈티지 느낌이 물씬 나는 LP판들. 대부분 클래식과 재즈 음반, 그리고 유명 오케스트라의 공연실황 DVD였다. 구석에는 지금은 사라진 매체인 LD도 몇 장 보였다.
'음악 취향도 평소 이미지대로군.'
어둠의 경로로 무단 다운로드 받은 MP3 파일이나 영화 파일로 얄팍한 문화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진구는 일순 침을 흘렸지만 오늘의 방문 목적은 그것이 아니기에 더 이상의 구경은 단념했다.
- 의뢰인 문성희가 원하는 것은 물증이다. 곧 전남편이 될 박민서를 몰아붙일 물증. 단서가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럴만한 것은 모두 저 침실 안에 있을 것이다. 거실에 컴퓨터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침실 안에 있는 모양이다. 이제부터 방에 들어가 박민서의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방 안을 샅샅이 뒤질 것이다. 휴지통 또한 조사 대상이다. 프로들은 휴지통이야말로 정보의 보고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진구는 박민서에게 딱히 이렇다 할 만한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굳이 호오를 가리자면 호의 쪽이었다. 박민서는 채권 담당이었는데, 증권회사 특유의 허풍과 장담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그의 업무는 비교적 공정하고 정확했다. 회사 내에서 허튼소리도 거의 하지 않았고, 고객들의 신뢰도 높았다. 진구에게도 가끔 점심을 사주면서 잘해주는 편이었다. 건실한 회사에서 조건 좋은 BW(신주인수권부사채)나 CB전환사채) 같은 것이 발행될 때는 진구한테 알려주기도 했다. 목돈이 없는 진구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었지만 마음이 통할 수 있는 끈끈한 사람은 아니어도 괜찮은 사회인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 진구는 그가 여직원을 대하는 태도를 떠올려보았다. 베리타스 증권회사 내에서도 미녀가 많기로 유명한 을지로 지점이지만 그의 언행은 그야말로 무심하고 적절했다는 기억밖에 없었다. 은근한 유혹이 전혀 깔려 있지 않은 담백한 신사의 매너였다.
그에게 다른 여자가 있을까?
생각하기 힘들었다. 겉으로만 보면 충분히 있을 법했다. 매끈하게 면도한 푸르스름한 피부에, 착하게 보이는 큰 눈, 늘 청결하고 깔끔한 슈트 차림. 그리고 적절한 매너. 화려한 캐릭터는 아니지만 딱히 흠잡을 구석도 없다. 여자의 눈으로 보면 과하지 않아서 오히려 친근하고 좋은 남자일 수 있다. 하지만 그에게서 희희낙락하는 바람둥이의 이미지는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3차, 4차로 질퍽해진 회식 자리에서조차 넥타이 한 번 풀지 않았다. 하지만 문성희 역시도 단지 감으로만 그러는 건 아닐 성싶었다. 근거 없는 억측으로 큰돈을 약속해 가며 진구를 고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박민서는 지나치게 깔끔해서 사귀기 힘든 사람이었다. 어지간하면 진구도 그 아내의 소개로 취업한 입장이라 사석에서는 '형님' 소리가 나올 법도 한데, 박민서에게는 늘 '박 과장님'이라고만 부르게 되었다. 그만큼 박민서 자신이 예의를 갖추고 늘 반듯했기에 대하기가 쉽지 않았던 탓이다. 넓게 보면 사람과 끈적하게 얽히기 싫어하는 점에서는 진구와 비슷한 과였다. 여직원들 사이에서의 인기는 상당했다. 잘생기고 매너 좋은 남자는 늘 그런 법이다. 그중 특히 서른이 어지간히 넘은 노처녀 한서원의 애정 표현은 진구가 보기에도 유별났다.
- "널 버리고 떠났잖니."
"엄마면 왜 날 돌봐야 하는데요? 왜 남의 인생 땜에 억지로 눌러살아야 하죠?"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는 진구에게 아버지는 희미하게 웃어주었다.
"그래, 이치상으로는 맞는 말이야. 그래도 섭섭한 마음은 있겠지?"
"아뇨. 그런 마음 없어요. 왜 날 좋아해 달라고 떼써야 하나요? 엄마가 뭐길래 내가 그렇게 매달려야 하죠?"
사랑을 주면 받겠지만, 비록 부모에게라도 애정을 구걸하며 매달리지는 않겠다는 어린 진구의 고고한 자존심 앞에 아버지는 작은 탄식을 했다.
"아마 세상은 너와 좀 생각이 다를 거야."
아버지는 마치 혼잣말처럼 진구를 다독였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겠지... 그래서 네가 수학에 몰두한다는 건 아주 반가운 일이란다. 거긴 인간사 선악놀음, 사람 타령이 없으니까 말이야..."
- 도덕의 지진아인 진구가 밝은 세상과 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가치중립의 수학임을 아버지는 일찌감치 꿰뚫어 보았었다. 진구가 수학과목에서 기록적인 성적을 거둘 때마다 아버지는 기분 좋게 칭찬했지만 실은 학교 성적 자체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다만 진구가 수학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잃지 않는 것만이 기쁜 듯했다. 진구도 수학이 좋았고, 수학을 공부하면 한 걸음이라도 더 세상의 비밀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고, 또 그것으로 성공이란 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 꿈을 꾸었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는...
- 아버지의 학술조사단에 끼어 같이 먼 여행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하지만 그러지 않았더라면 바로 눈앞에서 만난 아버지의 죽음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10년간 얼간이 같은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달리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끝이었다.
- 상자를 뒤적이던 진구는 신분증 비슷한 것을 집어 들었다. 예전 강현 살인사건을 캘 때 이용했던 반쯤 위조된 경찰공무원증이다. 독수리 문양이 희미하게 비치는 노란색 바탕에 딱딱한 얼굴로 노려보는 듯한 진구의 증명사진이 붙은 채로 비닐 코팅 되어 있다. 영락없는 경찰공무원증이지만 한 가지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아래쪽에 경찰청장의 직인 표시가 없다. 뒷면 또한 백지다. 이 유사신분증은 유사(有事) 시 경찰 행세를 하기 위해 진구가 특별 제조한 것인데, 지갑에서 꺼내며 슬쩍 위쪽 부분만 보여주면 사람들로 하여금 경찰로 여기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굳이 신분증을 완전히 꺼내 보여달라는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아래쪽을 비워놓고 만든 데는 이유가 있다. 신분증 아래쪽에 경찰청장 직인까지 있으면 공문서위조죄와 위조공문서 행사죄가 성립되어 버린다. 하지만 경찰청장 직인이 없으니 설사 들통이 나더라도 공문서 위조에 해당되지 않는다. 경찰 행세를 한 건 경범죄처벌법상 '관명사칭죄'라고 하여 기껏해야 몇만 원의 벌금 처분을 받는 데 그친다. 남이 걷지 않는 뒷길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현실뿐 아니라 법에 대해서도 연구해야 한다는 진구의 지론이 낳은 결과물이다.
- 진구의 눈으로는 그랬다. 박민서는 업무에는 성실하고, 사람에게는 예의를 잃지 않는 정석에 가까운 인물이었고, 달리 말하면 한국인이 국어를 배울 때 처음으로 만나는 캐릭터, 모범시민 '철수'에 가까운 남자였다. 박민서에 대한 여직원들의 평가는 좋았다. 어린 왕자라는 닉네임까지 붙었을 정도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동료들이 어울리기 불편할 정도로 지나치게 매너가 깍듯한 남자라고 평할 수도 있다. 낙지발처럼 걸쭉하게 치근덕거려야 인간미 있다고 평가받는 한국의 회사 풍토에서 어디까지나 담백한 태도를 유지한 점에서는 별종이라면 별종이었다.
- 그런 박민서의 가정생활에서는 좀 더 퍼스낼리티가 드러나는 것 같다. 그는 진실한 사랑을 갈구한다는 말을 남기고, 아내와 별거하고 있었다. 아내인 문성희를 보면 망상성 성격장애가 있지 않나 의심스러울 때가 있지만, 정작 정신과를 다닌 사람은 박민서였다. 마음의 병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허울뿐이지만 아내였던 문성희도 그 내막을 모르고 있다. 박민서의 죽음은 그 내면의 고뇌와 무슨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 다음 날 오후, 만나자는 해미의 말을 과감하게 뿌리치고 진구는 혼자서 신촌으로 향했다. 나이가 들어 보이게끔 수염은 일부러 깎지 않았다. 가죽점퍼에 청바지를 입고, 낡은 운동화를 꺼내 신었다. 실제 형사의 옷차림은 다르지만, 진짜 형사가 아니라 사람들이 형사의 모습이라고 믿는 이미지를 연출하면 그걸로 족하다.
- "심플하지만 그래서 더 세련된 디자인이야. 좋은 디자인은 더하는 게 아니라 빼는 거거든."
디자인 전공자로서의 품평도 곁들였다.
"다이아 알도 빼면 더 좋았을까?"
진구의 말에 해미가 눈을 흘겼다.
- "성희 언니 성격에 그게 통할까?"
문성희 편인 해미마저 의문스러운 모양이었다.
"반지는 연인 사이에선 영원한 로망이야.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혁명 때 궁전에 감금되어 있으면서 애인인 페르센에게 반지를 보냈어. 뜨거운 피의 온도가 차가운 반지에 간직되도록 사흘간 끼고 있다가 보내는 거라고 하면서 '그녀를 저버리는 이는 비겁한 사람'이라고 새겨서는 말이야. 벨기에에서 그 반지를 전해 받은 페르센은 감격했지. 당시 프랑스에서 페르센은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몸이었고, 발각되면 즉시 살해될 형편이었는데도 마리 앙투아네트를 만나러 프랑스로 목숨을 걸고 찾아갔어."
"어쩜, 정말 낭만적이다!"
"죽기 전에도 마음을 전한 건 반지였어. 마리 앙투아네트는 탑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면서 페르센에게 마지막으로 소식을 전했지. 감옥 속에서까지 유일하게 손가락에 간직하던 반지가 있었는데, 거기에 새겨진 글귀를 몰래 밀랍에 찍어 보냈어. '이 글이 지금보다 더 가치가 있었던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라고 하면서 그 반지의 글귀는 '모든 것이 나를 당신께 인도합니다'였대."
- 진구는 거실 소파에 앉아 티브이라도 볼까 하는 생각에 리모컨을 찾았다. 소파의 등받이 틈새에서 겨우 리모컨을 발견하고 끄집어내려 힘을 쓰고 있으려니, 진구의 휴대전화가 정적을 깨고 울렸다. 꽤 큰 소리였지만 이 정도로 해미가 깰리는 없다.
발신번호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조금 전까지 해미가 나쁜 여자라며 침을 튀기던 방수연이었다. 지난번 인천에 찾아갔을 때 명함을 받아 번호를 입력해 놓았었다.
"지금 서울인데 잠깐 만날까요? 할 이야기도 있고."
서울에 무슨 볼일이며, 무슨 할 이야기란 말인가. 어떻든 나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 방수연은 커피숍에 앉아 한 손으로 에스프레소 잔을 들며 눈웃음을 지었다. 용건이 있어 전화했다더니 은근히 친밀한 대사를 날리고 있다. 감귤색 블라우스 깃이 멋스러웠다. 지난번 만남으로 환상에 금은 갔지만, 역시 매력 있는 여자였다. 고상함의 지수는 조금 줄어든 만큼 요염 지수가 대폭 상승함으로써 보상되고 있었다.
"어쩐 일이세요?"
"그냥 이쪽에 볼일이 있어서 왔어요."
진구가 물은 건 왕십리에서의 볼일이 아니라 진구에게 전화한 용건이었는데 엉뚱한 답을 했다. 캐묻는 것처럼 비칠까 봐 진구는 방수연이 스스로 용건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 방수연은 눈을 흘기면서 요염하게 웃었다. 도둑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묘하게도 그 말이 '마음의 도둑'이란 말로 멋대로 해석되었다. 순간 해미의 영상이 겹쳐졌다. 진구가 여자 앞에서 해미를 떠올린다는 건 단 하나의 이유에서다. 그 여자에게 매력을 느꼈다는 이유. 그 마음의 떨림이 해미에 대한 작은 미안함과 큰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이다.
- 진구는 해미가 집으로 돌아갔다는 말에 왠지 안심했다. 바 구석자리에 앉은 방수연은 메뉴판을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어머, 여기 발베니도 있네." 하며 양주를 주문했다.
"발베니란 술은 처음 들어보네요."
"맛있어요. 그렇기도 하지만 요즘 가짜 양주가 너무 많아서 대중적인 브랜드는 의심스럽거든. 이렇게 희귀한 거면 가짜일 가능성도 적어요."
- 방수연은 의외로 의심이 많고 조심성도 있는 여자였다. 발베니가 주문한 모듬 치즈 안주와 함께 도착하자 방수연은 또 마구 들이켜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술이 센 여자였다. 진구도 질세라 방수연 이상으로 마셨다. 싫지 않은 여자 앞에서 허세를 부리게 되는 건 남자라면 피할 수 없다. 적어도 '술'과 '운전'은 여자보다 못하다는 인상을 남기고 싶지 않은 것이 남자의 최후의 허영이다.
- 조미연은 살포시 웃음을 지었다. 시끄러운 횟집에 어울리지 않는, 결이 고운 미소였다. 유행에 민감한 종류의 아름다움은 아니었다. 남자들의 영원한 로망, 여성성. 해미가 나이 들면 저런 분위기가 날 수 있을까. 진구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해미는 그냥 왈가닥으로 나이를 먹을 것이다.
- 헐렁한 껄렁패로 보였던 임재엽이지만 의외로 치밀한 구석이 있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그 물건에 관해선데요..."
진구는 말투를 의도적으로 공손하게 바꾸었다. 불손한 말투든 공손한 말투든 일관되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오히려 불안감을 준다. 진구는 다짜고짜 말했다.
"언제 훔쳐냈습니까?"
그러면서 사정을 다 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훔치다니. 무슨 소리야. 지금 설마 뭐 녹음이라도 하는 건가?"
"녹음 같은 거 할 줄도 모릅니다. 그럼 말을 바꾸죠. 그 물건을 조미연 씨, 그러니까 전처 집에서 가져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게 언제였습니까?"
"웃기는군. 아쉬워서 왔으면 먼저 나한테 아뢸 말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임재엽은 상황의 손익계산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처음 만나 멍한 상태에서 어물쩍 답을 얻어낸다는 전략은 먹혀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 문기동이 같이 있을까 조심했던 진구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필요 없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매사에 조심하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신중함이야말로 진구가 장수할 수 있게 하는 원칙이다. 또 한 가지, 어떤 상대라 할지라도 결코 쉽게 보지 말 것이며, 그의 욕심을 과소평가하지 말라는 원칙을 두고 있지만 이쪽이 지키기는 더 어렵다. 바로 얼마 전 가장 가까운 사람인 해미의 눈치를 과소평가했다가 호되게 당하지 않았던가.
"잠깐 말씀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가까운 커피숍에 가셔도 좋고, 괜찮으시다면 집에서라도."
"그럼 집으로 들어오세요."
- "그게 아니라, 그 상황에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이거지. 20대 중반인 남자의 고민이 뭐가 있겠어. 여자와 취업, 두 가지지. 그런데 여자 친구하고 사이좋게 같이 왔으니 여자 문제는 아닐 테고, 남은 건 취업 문제잖아. 청년실업이야 요즘 사회문제니까, 일반론으로 보아도 내가 곧 취직하기 어려운 여건이지. 쉽게 취직할 수 있을 사람 같으면 점집까지 올 리도 없고. 또 취직하기 힘들다고 해야 부적이든 뭐든 처방을 해서 추가 수입이 생기지 않겠어? 그러다가 덜컥 취업하면 '역시 그 부적이 효험 있었어.' 하는 거고, 취업이 안 되면 '역시 그 점쟁이 말이 맞았어.' 하는 거고."
"뭐, 그렇게 볼 수도... 그래도 내 경우는 너무 잘 맞혀서 소름 끼치던데."
해미는 못내 점쟁이의 신통력에 감탄했다.
"뭘 맞혔는데?"
"스물한 살 때 좋은 인연이 있었는데 놓쳤다는 거."
"어떤 남잔데?"
"싫어. 오빠한테 이야기 안 할 거야."
"내가 그런 거 갖고 질투하는 사람이야?"
"하긴, 오빠가 그런 쿨한 점이 있어서 내가 좋아하지. 이상하게 아무리 잘난 남자 이야길 해도 오빠는 콤플렉스 같은 게 없더라."
해미의 말에 진구 옆자리의 여자가 힐긋 진구를 돌아다보았다.
- 진구는 잠깐 생각한 뒤에 말했다.
"글쎄, 그런 걸 심리학에서는 바넘 효과라고 하는데..."
- "그럴듯하군요. 역시 예전에 우수한 경찰이셨던 걸 알 수 있겠네요. 순간적으로 만들어낸 변명치고는 훌륭합니다."
"끝까지 못 믿겠나?"
"그럴 수밖에요. 그렇다면 문 경위님은 왜 그 물건을 곧장 폐기하지 않았죠?"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문기동은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절 아직도 쉽게 보시는군요. 전 그것이 어떤 것일지도 대충 짐작이 가거든요."
- 문기동은 자신도 모르게 그 물건이 문성희의 머리띠가 아니라는 걸 실토하고 만 꼴이 되었다. 문기동은 헛기침을 했지만, 진구는 그런 것에는 아랑곳 않고 말했다.
"그것을 폐기하지 않고 있었던 이유는 이런 거죠. 그것은 성희 씨의 범행의 증거가 되기도 하지만, 만에 하나 성희 씨의 범행이 밝혀져 체포될 경우에는 재판에서 실제로 매우 쓸모가 있는 물건 아닙니까? 그래서 그대로 갖고 있었던 거죠. 어때요? 이래도 제가 상상도 못 할 물건입니까?"
문기동은 벌게진 낯빛으로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그의 입이 열렸다.
"정말 놀랐다, 놀랐어. 진구 넌 정말 무서운 놈이군."
진구는 말없이 차가운 눈빛을 쏘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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