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남세오 외] 살을 섞다 - 2019 환상문학웹진 거울 대표 중단편선

일루젼 2025. 3. 21.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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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남세오, 곽재식, 심너울, 엄길윤, 엄정진, 온연두, 유이립, 이로빈, 전혜진, 지현상
출판 : 아작
출간 : 20.04.05


       


전생과 현생을 뒤섞는 듯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어딘가 몽롱하고 낯설면서도 익숙하고 편안한.

 

6개월 정도 비워뒀던 집의 짐과 급히 쓸 물건들로만 지내왔던 방의 짐이 뒤섞이면서,

지난 세월의 소유물들과 새롭게 마련한 소유물들이 뒤섞이면서.

 

아직 정수기 및 가전들의 설치가 남아있긴 하지만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는 모양새다.

아. 이제 쿠팡과 알리 쇼핑을 좀 줄여야 할 것 같은데.

 

<살을 섞다>는 환상문학웹진 거울의 중단편선 모음집이다.

표제작인 <살을 섞다>는 아작을 통해 접해봤었는데, 타인의 경계선을 침범하는 묘한 기류를 '살을 나누어 먹는다'는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표현한 것이 흥미로웠다. 무형이었던 것을 유형으로 빗댄 것만으로 그 무자비함과 그로테스크함이 잘 드러났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그 외에도 심너울, 남세오, 전혜진 등 다양한 작가들의 아이디어와 표현력들이 빛나는 작품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고양이 그림 그리기 유토피아>. 이제는 그림뿐 아니라 소설과 시 같은 다양한 창작 분야에서 AI의 보조가 당연해지고 있다. 미래에는 과연? 확실한 것은 그때도 고양이는 귀여울 것이라는 것뿐. -아니면 귀여운 것에 고양이란 이름이 붙거나-

 

<감정을 감정하기>는 어딘지 모르게 김초엽을 떠오르게 하는 글이었는데, 나의 이런 감상이 저자에게 실례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감정이란 과연 무엇에 뿌리를 두고 있는 어떤 메커니즘인가. 어디까지가 '자신'의 것인가. 인상적인 소설이었다.

 

<삐거덕 낡은 의자>가 보여주는 북유럽 느낌의 파편적인 이미지즘.

 

<라벤더의 고요한 하루>에 담긴 전혀 고요하지 않은 고요한 활강의 순간. 이글라이딩이라니. 아름답고 아름답다.

 

<문 뒤에 지옥이 있다>의 '닫힌 문'이 주는 긴장감.

 

<하트 투 하트>. 어디까지가 진실이지? 젠트리피케이션 이상의 시니어피케이션과 왜곡. 언급된 카페는 꼭 한 번 방문해보고 싶다.

 

<교환 및 반품은 7일간 가능합니다>는 <심판>이나 <저승 최후의 날>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고르고 골라 지금의 내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묘한 기분이 든다.

 

 

발췌를 정리하는 동안 다시 읽는 기분이 들어 즐거웠다.

새 집에서는 '드디어' 소장 도서들을 장르별로 분류해 볼 생각인데, 일단 계획은 세워뒀으나 실행은 미지수다. 

겨우 집어넣은 책장들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좋은 나날이다.

  


   

 

- 46도도 아니고 정확하게 45도 각도를 계산해서 만든 그림은 내 그림과 비슷하기는 했지만, 약간은 달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컴퓨터로 만든 그림과 느낌이 아주 비슷하기는 한데, 또 조금씩은 다르네요."
"그렇죠. 아무래도 사람이 상상을 해서 손으로 그리면 약간씩은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런 게 또 완전 수제 만화의 특징이자 재미죠."

 

- PD가 카메라 컴퓨터를 다루고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여기에서 그 전문가 인터뷰 결과 넣죠."
"네, 알겠습니다."
그러자 카메라 컴퓨터의 화면에는 이다음에 나올 무슨 만화 평론가의 해설 장면을 녹화해 놓은 것이 보였다.

- "사람의 그림에서만 볼 수 있는 그 미묘한 차이, 그 작은 차이 속에 사람의 감성이 들어 있고, 무심코 사람이 생략하려고 하는 게 뭔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림을 그리면서 무심코 왜곡하고 싶은 게 뭔지, 그 세세한 차이가 표현되어 있는 것이죠. 어떻게 보면 이런 세세한 차이가 우리 정신세계의 깊은 면, 무의식적인 면을 끌어와서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바로 이렇게 사람이 그린 약간은 정확하지 않은 그림을 보았을 때, 그 그림을 보는 사람도, 사람 심리를 안정시켜 주는 알파 컴포넌트를 안정화시키는 파장이 증가할 개연성이 10퍼센트 정도 높아질 수 있다고 추정한다는 그런 연구 ..."


- PD와 제작진은 그 후에도 몇 가지를 더 시켰고, 내가 그린 만화들을 잠깐 소개하는 영상을 찍어 가기도 했다.

 

- 촬영하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돌아가는 시계를 살폈다. 점심때 잠깐 시간을 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1시를 넉넉히 넘겨서도 방송국 사람들의 작업은 끝을 마칠 줄 몰랐다. 원래 나는 1시 전에 촬영이 끝나면 1시부터는 다시 만화 그리는 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히 1시가 되자마자 바로 의욕이 넘치는 모범적인 만화가로 돌아가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모습으로 돌변한다. 사실 그런 행동은 로봇이나 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촬영을 수락할 때만 해도 나는 그런 가정으로 시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시부터 6시까지면 5시간. 5시간 동안 부지런히 작업을 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그려서 분량을 다 채우려면 1시간에 몇 칸씩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러면 저녁 전에 일을 마칠 수 있다. 그런 희망적인 추산을 했다. 

- 그래서 나는 계속 시간을 끌며 머물고 있는 촬영팀을 계속 초조하게 보았다. 그런데 촬영팀이 머무는 동안 묘하게도 이상한 편안한 마음이 몰래 마음속에서 피어나고 있는 것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촬영이 늘어지는 바람에 그림을 그릴 시간을 까먹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마음 한편으로 기분이 좋았다. 까뒤집어놓은 주머니처럼 내 모든 마음을 다 뒤집어 보인다면, 그때 나는 마음 한편으로는 일정이 어찌 되거나 말거나 하여간 만화 그리지 않을 핑계가 있어 일을 미루고 있을 수 있다는 점 자체만으 ...

- "그래서 여러 가지 줄거리 선택지 중에 조회수가 많을 법한 이야기로 추산되는 선택을 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제가 원하는 이야기를 못 만들잖아요."
"요즘 만화 그리거나 소설 쓰는 사람들 다 일일이 이야기 안 만들어요. 그냥 대충 자기가 보고 싶은 거 정한 뒤에, 컴퓨터가 뒤에 갖다 붙여주는 이야기 만들어내는 거로 가는 거예요. 컴퓨터가 만들어주는 게 팔릴 만한 이야기로 평가 점수 높게 받을 수 있는 거거든요. '조선 시대 수양대군이 현대로 와서, 가족과 같은 대우를 해준다고 선전하지만 사실은 악덕 회사인 곳에 취업해서 고생하는 이야기 보고 싶다'. 이 정도 써주면 프로그램이 줄거리 쭉 뽑아줘요. 마음에 안 들면 다시 한번 더 돌려보면, 조금 다른 줄거리로 또 뽑아주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여러 번 계속 돌리고 돌리다 보면, 마음에 좀 드는 게 나오겠죠. 그러면 그게 그냥 내 만화 줄거리다, 내 소설 내용이다, 하는 거예요." 
"그래도 줄거리는 자기가 직접, 자기가 좋아하는 쪽으로 짜야죠."
"아니라니까요. 올해 하반기부터 유행은 그게 아니에요. 작가들이 다 천재도 아니고, 그냥 사람 머리로 궁리하고 생각해 봐야 어지간하면 고만고만한 줄거리밖에 안 나오잖아요. 아무래도 뻔히 생각할 수 있는 것 위주로 생각하게 되고, 그런데 컴퓨터가 무작위 선택을 많이 하게 해서 이런 식으로 계속 돌리다 보면, 가끔 진짜 기발한 게 걸리고 신기하고 재밌는 게 걸릴 때가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그런 재밌는 조합으로 줄거리가 나올 때까지 ... " 

- "도대체 경찰서에 왜 잡혀 온 거예요?"
"열받아서 '재미재미' 통신망에 확 한마디 했다가 위험조사 대상자로 바로 찍혔어요."
"무슨 말을 했길래요?"
"아. 참. 자기는 아직도 하나도 안 변했네. 이게 문제라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내가 왜 열받았는지부터 먼저 관심을 가져줘야죠."
자경은 웃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왜 열받았는데요?"

- "제가 사이버 시냅스 컴퍼니에서 일하잖아요. 그런데 사이버시냅스에서 컴퓨터 작곡 프로그램을 기본판은 싼값에 팔지만, 프리미엄판은 요금을 좀 더 받거든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돈 있는 사람들은 프리미엄판으로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고, 돈 없는 사람은 그걸 못 쓰니까 공정한 경쟁이 안 된다, 프리미엄판을 없애라, 뭐 그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뭐 거기까지는 그러려니 하겠는데요. 그게 문제라서 어떻게 그걸 해결할지 시민단체에서 지적 들어오면 개선 방안도 여러 가지로 고민하고 개발하고 있고요. 그런데 제가 사이버 시냅스 컴퍼니 기술직 직원이라는 걸 아니까 갑자기 이상한 사람 몇몇이 그런 나쁜 회사의 나쁜 짓 하는 사람이라고 바로 막 욕을 하는 거예요." 
"괜히 욕먹으면 열받을 만도 하죠."
"보통은 그러다 마는데, 그중에 하나는 욕을 좀 심하게 하더라고요. 아니, 저는 제 계정을 누가 그런 데 공개해 버린 것도 황당한데, 욕까지 먹으니까 갑자기 확 짜증 나죠. 그래서 도저히 못 참고 한마디 해줬죠."
"뭐라고 했는데요?"
"요즘 너도나도 다 창의적인 활동을 하며 인생을 살겠다고 나서는데, 팔리지도 않는 창의적인 걸 만드는 동안 먹고살 수 있도록 복지 비용 대주는 세금은 누가 내주는데? 다 자동화 기술회사가 돈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버니까 거기서 떼는 세금으로 그 창의적인 삶 살겠다고 하면서 돈 한 푼 못 버는 사람들 다 먹여 살리는 거 아니냐. 복지 제도가 생기고 그 복지 제도를 지탱하는 기둥이 다 돈 잘 버는 기술 회사들인데, 누가 누구를 욕하느냐. 복지 사회에서 인간적인 생활은 보장되어 있으니 남는 시간에 자기 적성에 걸맞은 자유로운 창의적인 활동을 한다는 사람들, 사실 인공지능 기술 회사 같은 데서 버는 돈에서 적선해 주는 거로 사는 거 아니냐."

 

- 그냥 보통 사람이 떠들어도 심각한 문제가 될 만한 주장이었다. 사이버 시냅스 같은 회사의 직원이 그런 말을 한다면, 기술도덕위원회나 시민 감시 단체에서 바로 적발될 이야기였다.


- <고양이 그림 그리기 유토피아>


-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취업에 성공했다. 드디어.

- "아. 축하해. 근데 거기... 글쎄, 어떨지 모르겠네. 나쁜 회사라는 뜻은 아니야. 오히려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그냥 너와는 좀 안 맞지 않을까 싶어서. 네가 좀 민감해하는 부분이 있잖아. 근데 거기는 완전 반대거든."
선배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선배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보고 있는지는 분명하니까. 선배는 내게 살을 나눠 먹자는 제안을 했었고 나는 그걸 단호하게 거절했다.

- 자신의 살을 남에게 주지 않을 권리. 다른 사람의 살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 이게 지극히 당연하게 지켜야 할 인간의 권리라는 걸 이제 사람들은 머리로는 알았다. 아니 입으로는 말했다.

 

- 하지만 사람들은 동의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내가 그어놓은 선을 수시로 넘으려 했고 난 결국 피곤함에 못 이겨 연필로 그어놓은 그 선을 시커먼 유성매직으로 벅벅 덧칠해야 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저는 살을 나눠먹지 않습니다. 절대로요.

- 그건 적당히 효과적이었다. 선배는 나의 선언에 깔끔하게 후퇴했고 그 뒤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선배는 나와 다른 사람이지만 선만 넘지 않으면 상관없다.

 

- 하지만 세상은 선을 넘으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다른 사람을 덧칠하려는 사람들. 물감이 흠뻑 묻은 붓을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사람들. 제 영역에 질펀하게 부어놓은 물감이 번져나가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는 데 무심한 사람들. 나는 때로는 적극적으로 막고 때로는 수동적으로 도망 다니며 내 삶을, 내 살을 지켜왔지만 발목에 매인 현실의 무게에 나는 더 이상 한 걸음도 뗄 수 없었다.

- 선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회사에 들어가야 했다. 나는 돈이 필요했다.

- 첫 출근 날. 나는 내 주변에 그어진 경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명확하게 말하면 돼.

저는 살을 나눠 먹지 않습니다. 절대로요.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 "강요는 안 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능력이 아까워요. 최선을 다해 도와줄 테니까 그 점만 알아주세요."

 

- 불안한 느낌은 역시나 틀리지 않았다. 부장이라는 사람은 선배가 경고했던, 내가 우려했던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팀장은 나를 김 대리와 함께 구석 테이블에 앉히고는 자신의 옆자리를 비워놓았다. 느지막하게 나타난 부장은 사람들을 한번 휙 훑어보더니 자리에 앉으며 팀장의 어깨를 툭 쳤다. 
"좀 늦었지? 먼저 먹고 있지 그랬어?"
"부장님 안 계시는데 어떻게 먼저 먹습니까. 얼른 앉으시죠."

"오늘 신입들 환영회지? 어딨어?"
"이쪽입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장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부장은 내 옷차림을 보더니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부장은 내 앞에서 보란 듯이 팔뚝을 걷어붙이고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에는 축축하게 땀이 배어 있는 채였다. 팀장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손을 내밀었다. 옷은 여전히 꽁꽁 싸매고 있었다. 

- "자, 시작하지!"
테이블 위에 놓인 불판에 불이 들어왔다. 제일 먼저 팔을 걷어붙인 부장은 나이프를 집어 들고는 얇게 팔 안쪽 살을 저며 내기 시작했다. 팀원들도 저마다 팔을 걷고 자신의 살을 잘라냈다. 불판 위에 올라간 살들은 치지직 소리와 함께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익어갔다. 갈색으로 변해가는 살들 위로 붉은 육즙이 배어 올라왔다. 
"정 대리는 다이어트 좀 해야겠어. 저 기름 나오는 것 좀 봐. 완전 삼겹이네, 삼겹. 핫핫."
"어유.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렇게 좀 비계가 있어야 맛있죠. 살만 있으면 퍽퍽해서 맛없어요. 부장님 어디, 한 점 드셔보시겠습니까?"
정대리가 잘 구워진 자신의 살을 가위로 잘라 부장 앞으로 밀어 놓았다. 부장은 혀를 날름거리며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살을 ...

- 어느새 사람들 앞에 부장의 붉은 피가 섞인 소주잔이 하나씩 돌아가 있었다. 부장은 한 손에는 소주잔을, 다른 한 손에는 잘 구워진 자신의 살을 들고 나를 노려보았다. 지금 말해야 한다. 저는 다른 사람과 살을 나누어 먹지 않습니다. 피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장님의 살과 피라서 그런 게 아니라, 저는 제 살만 먹고 제 피만 마십니다. 그냥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죄송합니다.

- 모든 팀원의 시선이 내게 꽂혀 있었다. 팀장이 내 눈치를 살폈다. 사실 그랬다. 부장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겠다고 덤비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는 건 어찌 보면 호의였다. 원치 않는 호의를 거부하는 것 역시 권리였지만 이 자리에서 그런 걸 주장하기엔 무리였다. 무엇보다 팀원들의 눈이 내게 외치고 있었다. 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우리라고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왜 이렇게 이기적이야.

- 그랬다. 당장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회사를 그만둔다고 해도 나를 막을 사람은 없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걸 주장하려면 차라리 그렇게 해야 했다. 하지만 난 일자리가 필요했다. 그럴 순 없었다. 난 정말 이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면서 내 욕심만 차리는 이기적인 사람인 걸까.

- "아이고! 늦었습니다! 어? 부장님이 피 돌리셨어요? 와, 오늘 무슨 날입니까!"
"안녕하십니까! 어제부터 근무 시작한 신입입니다!"
입구가 금세 시끄러워졌다. 외근 나갔다던 팀원과 신입이 도착했다. 신입은 부장 앞으로 달려가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하고는 크게 자기 이름을 외쳤다. 부장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이야, 아주 군기가 바짝 들어 있구만! 요즘 젊은 사람들 같지 않아. 박 팀장 이제 보니 인복이 있어. 핫핫."
"부장님, 팀장님.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살 한 점씩 돌리고 싶습니다."
"에이, 그만둬. 요즘 그러다 큰일 나.”
"제가 좋아서 하겠다는데 무슨 문제입니까! 개인의 취향과 자유를 존중하는 게 진짜 민주주의 아닌가요. 저는 이런 가족 같은 분위기가 좋아서 이 회사에 지원했습니다. 아, 물론 싫은 분께 억지로 권하진 않겠습니다. 부장님, 혹시 제 살이 맘에 안 드시는 거면 말씀해 주세요."
"아냐, 아니야. 아주 좋아. 우리가 서로 좋아서 살을 나눠 먹는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나 잡아가려면 잡아가라고 해! 나도 안 무서워. 자, 어디 한 점 구워보게!" 
"예! 영광입니다!"

- 싸늘한 긴장감이 맴돌던 회식 자리는 금방 왁자지껄해졌다. 나는 슬그머니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신입은 나를 슬쩍 보더니 눈을 한 번 끔벅하고는 살을 권하지도 않고 다음 자리로 넘어갔다. 나는 불판 위에서 익고 있던 내 살을 집어 입속에 욱여넣고는 아주 오랫동안 씹고 또 씹었다.

- "아까 제가 너무 나댔죠?"
회식이 끝나고 돌아와 팀원들과 커피를 한 잔씩 마신 뒤에 나와 다른 신입, 그러니까 내 동기는 다른 사람들과 헤어져 칸막이 없는 책상으로 돌아왔다. 동기는 그제야 내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아니에요.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오히려 덕분에 살았어요."

"이런 거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지만, 왜 여기에 왔어요? 유명하잖아요. 이 회사. 가족 같은 회사로. 이런 분위기 안 좋아하시는 모양이던데."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어요."
동기는 크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백 번 동감해요. 세상이 바뀌었는데 이 회사도 바뀌어야죠. 싫다는 걸 억지로 강요하면 안 되잖아요? 혹시라도 그런 경우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저도 적극 도울게요."

- "아, 저는 이런 분위기 좋아하니까요. 싫어하는 것도 취향이지만 좋아하는 것도 취향이에요. 안 그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나랑 비슷하다고?"
"응. 다른 사람하고 살을 나눠 먹는 걸 아주 즐기는 것 같더라고. 그걸 강요하지 않는 것도 선배하고 비슷하고."
"바보. 그 사람 아주 고단수야. 너보고 계속 그 회사 분위기에 ..."

회사 생활은 생각보다는 무난했다. 팀장은 내가 불편한 상황을 겪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해 주었고, 첫날의 회식 이후로 부장을 다시 볼 일도 없었다. 간혹 선을 넘어오는 팀원들은 동기가 받아주었다. 누구도 내 살을 요구하지 않았고 내게 살을 권하지 않았다.

 

- 그렇다고 회사 생활이 만족스럽진 않았다. 나는 적어도 이 직장의 사람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걸 알았고 그렇기에 더더욱 일에서 성과를 보여주려 했다. 다른 팀원의 일을 떠맡는 것도 마다치 않았다. 온화하고 겸손해지려 애썼다.

 

-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점점 겉돌았고, 공허했다. 내가 내는 성과와 내가 건네주는 호의에도 팀원들의 눈길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완고하게 살을 나눠 먹기를 거부했으며, 그걸 성공하고 있었다. 나라는 증거로 인해 사람들은 둘 중 하나를 인정해야 했다. 자신들이 이 불합리를 거부할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살을 나눠 먹는 걸 진심으로 좋아했거나. 어느 쪽도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마지막 한 가지 길이 더 있었다. 내가 워낙에 특이한 케이스고 그래서 예외 취급받는다는 결론. 이 회사에 어울리지 않는 문제아지만 너그럽게 받아주고 있다는 합리화. 그런 측면에서 내가 일을 잘 해내는 건 그들의 마지막 퇴로까지 불태워버리는 잔인한 일이었다. 그럴수록 그들은 자신들과 잘 융화하는 동기를 추켜세우며 내 성과를 애써 폄하하고 외면했다. 내 성과를 제대로 인정하는 건 팀장뿐이었지만 오히려 회사에는 팀장과 내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서로 살을 섞는 사이라는 소문, 심지어 회사 내에서 그런 광경을 봤다는 어이없는 말까지 돈다고 했다.

- "물론 말도 안 되죠. 저는 절대로 그런 말 안 믿어요. 근데 뒤에서 그런 소문이 도니까. 제가 먼저 나서서 아니라고 하고 다닐 입장도 아니고. 여하튼 조금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괜히 말 만들 필요 없잖아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나는 옷을 걷어 올려 훤히 드러난, 여기저기 베어져 나간 자국이 선명한 동기의 팔에서 애써 시선을 돌리며 그렇게 말했다.

- 그래. 신경 쓰지 말자. 누가 믿겠어. 회사 안에서 그런 짓을,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문이잖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 "동기, 어디 갔어요? 어제 요청한 시장 현황 조사 지금 바로 필요한데."
팀장이 다급한 얼굴로 달려와 동기를 찾았다. 바로 시작될 회의에 자료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아. 아까 분명히 다 끝냈다고 한 것 같은데요. 지금 잠시 부장님 호출받고 갔어요."
"부장님? 부장님이 왜? 연락 좀 해봐요."

- "괜찮아요. 꼭 내 옆에 앉아요."
내가 함께 간다는 말을 들은 팀원들은 의아한 표정이었고 일부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팀장은 생각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뭐라고 토를 달지는 않았다.

- 하지만 2차로 찾아간 회식 장소에 들어선 나는 그게 정말 잘한 일이었는지, 멱살을 잡아서라도 동기를 회식 장소에서 끌어내야 했던 것 아닌지 고민해야 했다. 음침한 조명이 켜진 회식 장소에는 중앙에 커다란 테이블이 하나 있었고 그 위에는 업소 직원 하나가 벌거벗겨진 채 묶여 있었다. 그렇게 묶이고도 환하게 웃으며 우리에게 인사하는 광경에서는 소름까지 끼쳤다.

 

- "자, 우리 오늘 한번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보자고! 핫핫핫!"

오늘따라 부장은 들떠 보였다. 1차부터 술을 들이켠 부장은 이미 만취 상태였다. 나와 동기를 잡아끌려는 부장을 팀장이 겨우 만류하며 자기 옆에 앉혔다.
"야, 이거 놔, 어, 박 팀장. 이거 뭐 하는 거야?"
"아이, 부장님. 오늘 같은 날, 놀 줄 아는 사람들끼리 놀아야죠. 괜히 신입들 끼워봤자 분위기만 깹니다. 경험 좀 더 쌓으라고 하고 오늘은 저희하고 노시죠."
"그럼요! 부장님! 제가 오늘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정 대리가 거들었다. 부장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동기 옆에 꼭 붙어 있는 나를 노려보며 자리에 앉았다.
그 뒤에 벌어진 일은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테이블 위에 비참하게 묶여 있는 직원의 팔과 다리에서 저

부장은 몇 번이나 동기에게 같이 살을 베어 먹으라고 강요했지만, 그때마다 나는 동기의 손을 꼭 잡았다.
"야! 너 그렇게 자꾸 분위기 깰 거면 당장 꺼져! 좋다 좋다 하니까 정말 좋은 줄 알아! 봐주는 것도 정도껏이지, 너 같은 것들 때문에 대한민국이 발전을 못 하는 거야! 알아?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키워놨는데..."
"부장님, 참으십쇼. 그래도 이제 이렇게 따라는 오지 않습니까. 자꾸 겪다 보면 또 깨닫는 게 있겠죠."

 

- 팀장의 만류가 오히려 더 나를 아프게 찔렀지만 나는 참았다. 걸림돌이라도 되고 싶었다. 여기까지 따라온 이상 누가 무슨 짓을 어떻게 하는지 이 자리에서 똑똑히 보고 싶었다.
"내 참, 맘대로 하라 그래! 야! 오늘 아주 끝까지 간다! 각오들 해!"
정대리를 비롯한 팀원들의 절반 정도가 환호성을 질렀다. 부장은 웃통을 벗어젖히더니 칼로 자기 살점을 한 조각 도려내 테이블에 묶여 있는 직원의 입에 쑤셔 넣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입에서 아주 살살 녹습니다!"
직원은 힘겹게 살점을 씹어 대며 억지웃음을 보였다. 그게 부장의 눈에 어떻게 보였는지 부장은 껄껄 웃으며 소리쳤다.

"나 같은 손님 없지? 자, 단두대살 준비해!"
부장의 외침에 직원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지폐 다발을 꺼내는 부장을 보며 이내 표정을 걷어내고 소리쳤다.
"역시 사장님 최곱니다!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 나는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직원들 몇이 더 들어와 벌거벗은 직원을 테이블 위에 단단히 묶고 천장에 날카로운 칼날을 매달았다. 네모난 중국식 식칼처럼 생긴 칼날은 시퍼렇게 날이 서있었다.
"자, 간다!"
부장이 테이블 옆에 있는 레버를 당기자 매달려 있던 칼날이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직원은 이를 악물며 눈을 감았다. 칼날은 직원의 오른팔을 스치며 얇게 살점을 베어냈다.

"와!"
아까보다는 적었지만, 여전히 몇몇이 환호성을 질렀다. 꼭 잡고 있는 동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만해! 이 미친 자식들아!"

- 순식간에 회식 장소가 조용해지고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부장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당황하거나 놀란 눈빛이 아니었다. 덫에 걸린 사냥감을 보는 뱀 같은 눈빛이었다.
"미친 자식? 자네 방금 나한테 미친 자식이라고 했나?"
"그럼 이게 미친 짓이 아니고 뭡니까? 이걸 정말 즐겁다고 하고 있는 겁니까? 직원분 표정 안 보여요? 저게 정말 좋아서 하는 거로 보여요?"
"아니지. 누가 이런 일을 좋아서 하겠나? 돈을 받으니까 하는 거지. 자넨 왜 우리 회사에 다니고 있는 건가. 돈이 필요해서 그런 거 아닌가? 그게 아니면 왜 맞지도 않는 회사에 버티고 있나? 조직 분위기 다 해치면서."

- "돈이면 다 됩니까? 아무리 그래도..."
반박하려던 나는 누워 있던 직원의 표정을 보고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짜증이 가득 담긴 직원의 눈은 전혀 나를 응원하고 있지 않았다. 현실은 너무나 공고했으며 벽을 무너뜨리지 않고 썩은 조각 하나만 빼낼 방법은 없었다. 평생 나를 감싸고 있던 끈적한 패배감이 다시 나를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나 하나의 고집이고 나 하나의 이기심 아닐까. 내가 머뭇거리는 걸 본 부장은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말했다.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 누구 하나 자네에게 뭘 강요한 적이 있나? 자기가 한 선택 하나도 책임지지 못하면서 대체 무슨 일을 하겠단 건가? 세상이 그렇게 만만해 보여? 회사가 자선 사업하는 곳인가? 자네 알량한 신념 지켜주려고 우리가 고생하면서 이 회사를 여기까지 끌어올린 건 줄 알아? 어? 긴말 필요 없네. 자네 정규직 전환 건은 없던 거로 하겠네. 당장 여기서 나가."

- 부장의 시선이 동기에게 옮겨갔다.
"자네는 어쩔 건가. 자네도 같이 나갈 건가?"
동기가 고개를 푹 숙였다. 꼭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절박하게 소리쳤다.
"안 돼요! 다시 저 사람들에게 살을 뺏기고 살 거예요?"

 

- "... 이제 앞으로 어쩌죠? 이렇게 계속 버티면서, 재수 없는 새끼들이 재수가 없기를 바라야 하는 걸까요?"
나는 동기를 바라보았다. 강해져야죠. 그렇게 말하려 했지만, 그 말이 예전처럼 쉽게 나오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동기의 손을 꼭 쥐었다. 서로의 살이 경계를 잃고 섞일 때까지.

 

- <살을 섞다>



- "히히, 고등학교 때 배우는 건 맞는데, 다들 잊어먹곤 하죠. 저도 그랬어요."
이예슬은 장난스러운 웃음소리를 내고는 설명을 이었다.
"기자님은 심장을 마음대로 뛰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 맥박 수를 늘리거나 할 수 있을까요?"
"어, 아니요, 그게 됐으면 부정맥으로 군대를 안 갔겠죠."
나는 곧바로 이 어처구니없는 헛소리를 후회했다. 이예슬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아 내가 느끼는 회한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 "자율신경계가 그런 걸 조절한다고 하거든요. 더울 때 땀나고, 무서울 때 심장 뛰고, 먹을 때 침 흐르고, 삼키면 소화하고, 이런 건 우리가 의식적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그렇게 되는 거지."
그 이야기를 하고 이예슬은 잠시 말을 멈췄다. 어떤 질문을 기다리는 것 같아서, 나는 당장 떠오르는 의문 하나를 던졌다.
"저, 그런데, 지금 얘기하시는 거 보면 감정이 사라진 게 가장 중요한 문제인 거 같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자율신경계가 감정이랑 관련이 있는 건가요?" 
내가 그 말을 끝마치자마자 이예슬은 손가락을 튕기는 딱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바로 그거죠."

- 이예슬은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거 아시잖아요. 무서우면 심장이 뛰고, 슬프면 눈물이 나고, 무서우면 소름이 돋고, 이런 거 의식적으로 할 수 있는 거 아니잖아요. 근데 그게 감정이랑 엄청 연결되어 있는 거 같지 않아요? 아무리 무서운 영화를 봐도 심장이 안 뛰면 공포를 느끼는 걸까요? 짝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그 가슴을 억누르는 답답하고 울고 싶은 느낌이 느껴지지 않으면 그게 사랑일까요?"
이예슬은 질문을 마구 던지기 시작했다. 바라는 답은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안 그렇겠죠?"
"그러니까요. 의사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감정은 진짜 머리만으로 느끼는 게 아니라고요."

- 휠체어에 달린 스피커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갈수록 빨라졌다.

"그러니까 보통, 우리가 무서운 걸 보면, 그 무서운 걸 보면 무섭기 때문에 소름이 돋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그 아름다운 얼굴을 보기 때문에 심장이 뛴다고,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근데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러니까 신체의 반응이 먼저라는 거죠. 뇌가 무섭고 설렌다고 생각해서 심장이 뛰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 놓이면 먼저 심장이 뛰고, 그걸 사람의 뇌가 해석하는 거라는 거예요. '어, 내 심장이 뛰네, 왜 뛰지? 아, 내 앞에 내 애인이 있구나. 그래서 설레는 거구나' 하고 설레는 감정을 느끼는 거죠.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 같이 무서운 영화를 보라고 하잖아요? 심장이 쿵쿵 뛰는 걸 옆에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거라고 착각하니까."

- "그래서 자율신경계가 고장 나면..."
"그렇죠, 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요. 갑자기 감정이 날아간 게, 다른 게 아니라 운동 피질이 타버리면서 자율신경계 신호까지 망가져서 생긴 문제라고요. 그것도 운동 피질을 전자뇌로 바꾸면 다 낫는다고. 저 같은 증상 겪는 사람이 몇몇 있었다더라고요. 하하, 그래도 극소수인지 의사 선생님이 제 케이스로 논문 좋은 데 쓰셨다는데."
"그럼, 지금 감정이....”
"전자뇌 이식하면, 다 괜찮아진다고 했죠."
나는 내 노트북으로 눈길을 돌렸다. 내가 설치한 전자뇌는 알아서 일을 잘 처리하고 있었다. 의심 없이.

- 나는 전신 마취를 하지 않고, 머리 쪽의 통증만 차단한 상태에서 전자뇌 이식 수술을 받았다. 전자뇌의 동기화 과정에서 내 피드백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두개골을 딸 때 고통은 없었지만, 소름 끼치는 진동이 느껴졌고 톱으로 해골을 가르는 끔찍한 소리를 들었다. 실제로 소름이 끼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눈이 천으로 덮여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소리는 들렸다.  

- 쓰러진 후 몇 주 동안 또 2047년의 세상은 뭐가 그리 바쁜지 급히도 바뀌어 있었다. 내가 쓰러지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서울의 마지막 남은 그린벨트 몇 뙈기에다 아파트를 지어서 집값을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가 가장 큰 문제였던 것 같은데 말이다. 이제 사람들은 최신형 안드로이드에 대한 강력한 규제 없이는 고용 개혁도 없다는 이야기에 매달리고 있었다.

- 내가 쓰러진 새에 웬 최신형 안드로이드가 발표되었다고 했다. 공장에서 6개월이면 조립할 수 있는 기계 인간이었다. 독창성보다는 생산성에 주목하는 한국의 한 기업에서 안드로이드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팡팡 찍어내는 방법을 마침내 찾아낸 것이었다. 5개월이면 인간의 신체와 겉보기에는 전혀 차이가 없는 껍질이 만들어지고, 또 남은 1개월이면 그 내부의 전자뇌에 용도에 맞게 적합한 지식을 입력해 넣을 수 있다고 했다. 원래는 하나당 5년 정도 걸리는 공정이었다. 

가장 낙관적인 사람이 보아도 이 안드로이드들은 노동 시장에 떨어진 거대한 운석이었다. 대기업 회사원의 1년 치 연봉만 지급하면, 한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지고, 전혀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으며, 또 인간적인 융통성을 가진 최신형 안드로이드를 사무실이나 작업장에 배치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죄다 공룡의 운명을 따라갈 판국이었다.

- 안드로이드들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과 위기감은 실로 놀라워서, 그동안 있던 사회의 수많은 갈등을 단번에 봉합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가짜 인간들에게 그 어떤 권리도 줄 수 없으며, 그 어떤 일자리도 줄 수 없다는 집회가 자주 열렸다.

- 나도 꽤 공감하는 바였지만, 소정은 생각이 좀 달랐다.
"사람이랑 똑같이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면 그것도 사람인 거지. 사람들은 사람이라는 칭호에 너무 큰 무게감을 두는 것 같아."
병실에 갇혀 안드로이드 반대 시위 생중계 현장을 TV로 함께 보면서, 소정은 그렇게 말했다. 당시의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 "아니지, 그래도. 똑같이 말하고 행동하더라도, 쟤들 머릿속에 든 게 우리 생각이랑 감정과 같은 거라고 확신할 수 없잖아."
"하지만 그러면 사람들이 느끼는 건 어떻게 다 같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어? 그렇지 않잖아."
소정이 항변하자 나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TV에서 불타는 전자뇌 그림이 보였다.

 

- "그래도 사람은 다들 생물학적 존재니까. 적어도 존중하려면 최소한의 공통점은 가져야 해."
"사람들끼리 느끼는 감정이 같을까? 내가 느끼는 슬픔과 네가 느끼는 슬픔이 서로 완전히 똑같은 경험일까? 모르잖아. 그래도 어쨌든 겉으로 보면 비슷하거나 거의 같으니까, 같은 셈 치고 서로 인간이라 공유하는 거 아니야?"
"그래도 나는 나랑 더 비슷한 사람들에게 마음이 가. 안드로이드는 공장에서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잖아. 다 큰 채로, 똑같은 지식을 가지고. 하지만 실업자 한 명 한 명들은 전부 다 자기 역사가 있고, 뭐라도 돼보려고 노력했고 눈물 흘렸던 사람들이야. 그 사람들을 동정하는 게 뭐가 잘못된 건지 나는 모르겠네."
"사람들을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야. 저 안드로이드들도 일단 만들어지고 난 다음부터 자기 자신만의 경험과 역사를 쌓아가는 건 우리와 똑같아. 굳이 저렇게 그들을 배척할 필요는 없잖아? 사람이나 다름없는 존재를 찍을 수 있다고 찍어놓고 보는 사람들이야말로 책임이 있는 거 아니야?"

- 그렇게 책임의 근원의 근원을 따라가면 세상에 탓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나는 가벼운 한숨을 쉬고는, 소정의 얼굴을 바라보고 답했다.
"그래, 우리 이 얘기는 그만하자."

- 그날은 그렇게 넘어갔지만, 그 이야기는 절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그러겠는가. 서로 의견이 배치되는 것을 서로 확인했는데 말이다. 그 주제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 균열을 스스로 치유가 되나? 나는 심지어 '반(反) 안드로이드 시민협의회' 같은 단체의 명부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는 걸.

- 어쨌든 정말로 수많은 사람들이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에 안드로이드 산업에는 굉장히 빡빡한 규제가 가해졌다. 생산라인에서 뽑혀 나온 안드로이드들은 심각한 혐오업무나 위험업무에만 배치되었다. 특히 옛 38선 근처의 개발 사업이 가속화되면서, 비무장지대의 수많은 지뢰와 불발탄을 제거하는 데에 안드로이드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가끔씩 소정은 안드로이드들의 끔찍한 노동 환경을 내게 보여주었다. 지뢰를 밟거나 불발탄이 폭발해서, 산산조각이 난 안드로이드들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껍질은 사람의 것과 지나칠 정도로 유사했다. 아니 같았다. 그래서 더 불쾌하고 역한 모습이었지만, 안타깝지는 않았다. 저러려고 만든 존재들 아닌가.

- 소정은 안드로이드들의 권리 운동에 진지하게 나서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 모습이 못마땅했다.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이 아닌 기계들이 하수처리장에서 쓰레기를 건져내다 오수에 휩쓸려 작동이 정지된다 해도, 거기에 무슨 비극이 있나. 


- 나는 지금 당장 퇴원해 학교에 다니면서 다시 일자리를 찾을 것이 무서웠다. 동기들 중에는 이미 당당히 큰 기업에 합격해 경력을 쌓아나가는 아이들이 있었다. 난 그들에게 뒤처져 평생 말도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며, 조롱당하고 모멸을 곱씹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두려웠다. 심지어 입원한 시간 동안 자기 계발을 하지 않은 것이 안타까웠다. 
안드로이드들은 내가 반드시 통과해야 할 좁은 문을 더 좁게 만드는 악한 존재들이었다. 소정에게는 알리지 않았지만, 기존의 안드로이드들을 폐기하는 운동 따위에도 참여하곤 했다. 내 행동, 인터넷 북마크, 그리고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소정도 대충 눈치를 챘던 것 같았지만.

-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는 것이 다르면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두 사람이 서로 증오하는 것이 다르면 사랑하기 어렵다. 관계의 균열은 더 이상 봉합할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고, 우리의 관계는 오직 관성으로만 굴러가고 있었다. 

- "근데 조금 전에 뉴스 보니까, 걔들이 비무장지대에 3만이나 있어요? 아니 정부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그걸 그렇게 많이 뽑은 거예요."
이유엽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대충 묶은 재킷도 어찌 압박이 됐는지 뭔지 조금씩 스며 나오는 피도 줄어들고 있었다. 매일같이 하는 운동 덕에 내 근력이 늘어난 덕분이었다.
"에이, 무슨, 안드로이드가 3만 기나 있겠어요."
"네? 뉴스에서는 안드로이드 3만 기라고 하던데..."
"그러니까요, 사실 안드로이드가 나오자마자 그렇게 반대에 부딪혔는데 어떻게 3만 기나 있겠어요. 한 3천 기 정도 있을 걸요. 그것도 지금 저 위에서 다 박살 나고 있을 거고.”
"그럼?"
"전자뇌 단 거는 전부 거기 몰리고 있잖아요. 하긴 걔들도 좀 범위를 넓히면 안드로이드들이긴 한데."
"뭐라고요?"
"음... 아니에요. 아이구, 다리야..."

- 이유엽은 감정을 숨길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다리에서 오는 고통에 어느새 익숙해진 것 같았고, 표정에 말실수를 했을 때의 당혹감이 자라나고 있었다. 갑자기 다리 어쩌고 할 위인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나는 머리를 굴렸다.
"아, 저희 외할머니가 치매 조기 증상이 오셔서, 보조 기억 장치 설치 시술을 받으셨거든요. 그것도 따지고 보면 전자뇌잖아요."

- "전자뇌에, 사고를 주입할 수, 그렇게, 안드로이드처럼, 커억! 어흐흐헉, 한 거예요! 그 괴물들이, 반란에 참여하도록 유도해서! 죄송해요. 죄송해요. 할머니한텐, 제가... 고칠게요!"
아. 하고 탄식을 내뱉고 나는 주저앉았다. 이유엽의 총상에서 내 손가락이 빠지자 피가 규칙적으로 퐁퐁 솟아올랐다. 이유엽은 그 꼴을 보고서 괴로워하며 자기 상처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내가 왜 굳이 대피소에 들어가지 않고 전쟁터를 구경하러 갈 생각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전쟁에서 유용하도록 병사의 몸을 만들고 싶었기에 운동이 그렇게 재미났을 것이다. 분명 빈 도시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그들을 용케도 잘 피해서 전쟁을 구경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다 이 전자뇌 덕인가.

- 아마 뇌경색이 뇌의 다른 부분까지 침범했으면 지금쯤 나도 의정부에서 국군과 싸우고 있었겠네. 소름이 돋았다. 이 소름이 돋는 감정조차 내 머릿속에 있는 기계 뇌가 시발점이란 생각을 하니 더 무서웠다.
이유엽, 이 지랄 맞은 새끼가, 자기가 영웅적인 일 하고 왔다는 마음에 완전 들떠 있었던 거였구만. 총은 어쩌다 맞은 거야.

사회의 증오가 더 깊어질 거란 확신이 가슴속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 증오의 촘촘한 그물망에 나도 빠져나갈 수 없으리라. 나는 온몸에서 피를 깨끗이 닦은 채로, 화장실 변기에 비틀대며 걸어가 앉았다. 그리고 거기서 몇 시간이고 서럽게 울었다. 내가 머리에 넣은 기계 덕에 느끼는 감정은 원래 내가 알던 것과 전혀 구분할 수 없었다. 강소정이 보고 싶었다.

- 정말이다. 나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정말 이상한 이유로 온갖 괴상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냥 적당히 재미있고 적당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걸로 적당히 재미있는 기사를 올릴 수 있었고, 운이 좋으면 많은 댓글과 높은 조회수를 받을 수 있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저널리즘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붙이는 것도 뭐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기자라기보다는, 기인들의 인터뷰를 모아 정리하는 콘텐츠 창작자 정도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보통 기자라고 하면 시사 쪽의 모습을 생각하니까. 나도 그랬고.

- 그런데 이건 너무나도 거대한 이야기였다.

- 나는 이예슬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한마디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전자뇌를 다시 떼어내신 겁니까?"

 

- "인터뷰 끝나면 바로 남반구로 갈 거예요.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 사실 기밀을 말한 이유가 그것도 있죠. 한 달 뒤에 기사가 올라온다고요? 가서 곧바로 망명 신청을 할 거예요."
"아, 그럼, 그분이 간..."
"네, 소정이랑 얼마 전에 연락이 맞닿았어요. 가서 다시, 거기서 전자뇌 이식할 거예요."
"그럼 다시 일어서시는 거군요. 또 감정도... 평온함에서 벗어나서..."
스피커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나는 다시 물었다.
"그 전자뇌를 달아서 자율신경계가 회복되면, 그 감정이 정말 자기 감정이라고 확신하실 수 있나요?"
"글쎄요, 또 생각해 보면 심장이 뛰고, 가슴이 답답하고 한 게 감정의 전부는 아니죠. 어쨌든 제 뇌의 다른 부분이 그걸 또 해석해서 총체적으로 감정이 생기는 거니까."
"아, 그럼 그게 정말로 감정의 근원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는 거네요."
"네, 그냥 감정이라는 구조의 부분, 뭐 이런 거겠죠. 그러니, 그냥 제 감정에 도움을 받는 거고. 뭐 사실, 그게 진짜 제 감정이 아니더라도 다 무슨 상관이겠어요. 어쨌든 제가 느꼈던 건 진짜 있었던 사실인데, 그리고 나조차도 다 똑같게 느꼈는데, 누가 가짜랑 진짜를 구분하겠어요."

- 이예슬은 자연스러운 웃음을 들려주었다. 그 말을 끝으로 이예슬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는지, 어느 정도 공개할지는 그냥 내 마음대로 하라며, 의례적인 작별인사를 나눈 뒤 카페를 떠났다. 하긴, 내가 무슨 대단하고 이름난 기자도 아닌데 내 취재를 굳이 받아들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남반구로 떠나겠다고 결심하기 전에 이야기를 한번 털어낼 용도로.

- 이예슬이 나를 어느 정도 인물로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어쨌든 데스크에 내가 인터뷰한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정리해서 올릴 생각이다. 이유엽과 그 뭐냐, 반안드로이드 시민협의회라는 단체에 대해서도 좀 더 조사하고, 한반도에서 안드로이드가 싹 정리된 이후로 그 단체는 인간 순혈주의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요새는 정당 설립에 기를 쓰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이 정도 이야기를 터뜨리면,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 오묘한 사람들의 차이를 애써 구분하려 쓸데없이 용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예슬이 내게 가르쳐준 대로 말이다. 누가 감정을 진짜나 가짜라고 감정할 수 있겠나.

 

- <감정을 감정하기>

 


- "클래식한 우리 건물하고 잘 어울려서 내 눈엔 아무리 봐도 그림 같지 뭐겠어요. 포아 애비뉴로 진입하면 제일 먼저 보이는 곳이라 외관을 알아서 꾸며주더군요."
동의를 구하려고 눈 맞추려는 아주머니를 향해 나는 살며시 웃었다.
"교통도 편리해요. 번화가로 진입하기 전에 핸들만 살짝 꺾으면 나오니까요. 길이 안 막히니 시간 잡아먹을 일 없고, 업타운 쪽은 살짝 미끄러지기만 하면 '어머, 도착!'이에요."
아주머니는 열쇠를 선반에 올려놓음과 동시에 사설 기숙사 칭찬을 쉴 새 없이 늘어놓았다. 난 기계적으로, 하지만 무성의하진 않게 끄덕이며 나름대로 집 안을 살폈다. 아주머니가 방문과 창문을 여는 동안 마음이 내키는 대로 구경하다 어느 한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발아래 나뭇결을 따라 시선을 이어가니 거실 모서리가 나왔다. 바닥에서 벽으로 각을 틀어 이어지다 얼마 가지 못해 낮게 경사져 낯선 공간을 드리우고 있었다. 허리나 무릎 중 하나는 낮추어야 하는 그곳은 집에서 가장 구석지고 어두운 부분이었다. 천천히 계속 걸었다. 홀린 듯 이끌린 걸음이었다. 경사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나무 바닥에 네모난 영역을 만들어 얼핏 아래층으로 통하는 비밀 문처럼 보였다. 

- 빛과 그림자가 나뉘는 경계를 자세히 보면 숨은 문고리가 보일 것도 같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온 정신을 집중해 네모진 부분의 틈을 찾으려고 애썼다.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로 깜박임을 참고 참다 마침내 보고야 말았다. 부유하는 작은 먼지 알갱이들이 자기네들끼리 얽히고설켜 길고 촘촘한 세로결을 만들어내는가 싶더니 그 결 뒤편에서 한 부분을 벌린 투명한 손가락 하나가 힘겹게 틈을 비집고 내밀려는 움직임을.

- 어느새 강해진 먼지층이 뜯어지며 투둑 소리가 났다. 나는 참지 못하고 도와줄 생각으로 손을 들었다. 무심한 창 아래로 손가락을 대려는데,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덥석 나를 잡아 세웠다.

"내부도 괜찮지요?"
반짝이는 먼지들의 영향 아래에서 순식간에 벗어난 나는 잠꼬대하는 사람처럼 대답했다.
"네. 정말 근사하네요."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아주머니는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렇죠, 그렇고 말고요."

- 실내는 깔끔했다. 오전 사용자는 짐이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내 짐을 어디에 두면 좋을지 생각하며 시선을 무심코 침대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내가 침대를 바라본다고 생각했는지 내 팔을 잡더니 주의를 돌렸다.
"아니야. 아무렴 사용자가 오전 오후로 나뉜다고 침대까지 같이 사용하게는 안 한다고. 아가씨가 사용할 침대는 맞은편 방에 있어."

 

- 아주머니는 조바심을 내는 듯했다. 여러 달 방이 안 나간 것으로 보아 시간대를 나누어 방을 셰어 하겠다는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하긴, 나도 오늘 안으로 기숙사를 구해야 하는 사정이 아니었다면 이런 집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닌 게 아니라 집 안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이 공간에 소속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고백해야겠다. 문밖에서부터 늘어놓은 설명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머니가 애써 감추려 드는 오래되고 낡은 느낌이나, 살짝 기울어진 곳에 서면 삐걱거리는 울림, 동화책에서 봄 직한 구조의 번거롭지만 아기자기한 선반 같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 이상할 정도로 내 마음을 끌어당겼다.

- "정확하게 제가 이 방을 몇 시에서 몇 시까지 사용할 수 있는 거죠?"
드디어 방이 나가는구나 싶은지 아주머니 얼굴에 환하게 화색이 돌았다.
"아이고, 이렇게 빨리 결정해 주다니 고맙기도 하지. 그 사람은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사용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가씨가 좀 더 써도 상관없겠지요. 서로 부딪히는 일이 없도록 1시간씩 교대 시간에 텀을 뒀으니까 서로 시간만 잘 지켜주면 문제 될 일도 없을 거예요." 
자신의 답변이 꽤 맘에 들었는지 아주머니 얼굴에 흡족함이 넘실댔다. 나는 다시 침대와 책상, 선반 같은 것들을 찬찬히 바라봤다. 선택에 흔들림 없음을 스스로 확인하면서.

- 나는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꿀꺽 소리 나게 삼켰다가 목구멍에 통증이 느껴져 콜록거렸다.
"안 되겠어. 앞으로 너 프리마켓 갈 땐 나를 불러.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한 것 같아."
"응. 그럴게."
렉시는 빈 커피잔을 들고 싱크대로 가져가 설거지를 했다. 그녀의 애정 어린 행동을 보며 덕분에 이곳에서도 보살핌을 받으며 지내겠구나 싶었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뱃속 깊은 곳이 따뜻해지며 온몸이 충만해지는 기분이 들고는 했다.

- 여지없이 삐거덕 기우는 소리가 났다. 나무 바닥의 찬 기운이 발바닥 전체를 감싸고돌아 약하게 소름이 돋았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새하얀 원피스 잠옷 차림으로 손에는 나무로 만든 의자를 들고 있었다. 유아원에서나 쓸 법한 아주 작은 의자였다.
어두운 거실 한가운데 멍하니 서서 경사진 벽 아래의 공간을 바라봤다. 창문 아래 바닥과 벽과 모서리는 작당하고 어둠의 소굴을 차려 호기심과 두려움의 갈퀴를 숨긴 채 나와 눈싸움을 했다. 온통 까만 사이로 날카롭게 빛나는 눈동자라도 보여주길 바랐지만, 그들의 고집에 나는 그만 패배를 인정하고 먼저 가까이 다가섰다. 
모서리를 더듬어 가장 구석진 곳으로 나무 의자를 끼워 넣듯 들이밀고 그 위로 두 발을 밟고 올라가 쭈그려 앉았다. 겨우 올라간 상태에서 꼼짝할 수 없게 되자 양팔로 무릎을 끌어안고 머리를 벽에 기댔다. 무게 중심이 옮겨지자 낡은 바닥은 덕분에 버티는 중이란 것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나는 그 아우성을 듣고도 매정하게 무시하는 여주인 같은 표정을 지으며 다리 저림을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될 때까지 이 자세를 고수하리라 다짐했다.

- "... 어어?"
벽에 기댄 상체를 앞쪽으로 불쑥 일으켰다. 믿기 어려운 일이 발생한 것이다. 눈에 힘을 줘가며 찾으려 했던 아래로 통하는 문이 아주 선명하게 나타났다. 눈을 여러 차례 비비며 거듭 확인할수록 문은 점점 현실이 되었다.
손잡이를 잡고 열어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손을 뻗다 몸이 앞으로 완전하게 기울었다. 의자 다리 한쪽이 들리자 바닥에선 여지없이 고통에 찬 외마디가 끼익 하고 들려왔다. 아랑곳하지 않는 나의 행동에 원망이라도 하듯 소리는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길고 좀 더 흐느끼는 울음 같았다. 머리가 쏠리자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 나는 딱딱한 바닥 위로 쿵 하고 떨어졌다.

- 눈을 번쩍 뜨고도 눈앞이 깜깜했다. 그러다 얇은 이불을 머리에만 뒤집어쓴 채 침대에서 머리부터 떨어져 볼썽사나운 모습을 연출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꿈이었다. 잠결에 들었던 끼익 소리는 아마도 침대 끄트머리에서 몸을 뒤척이느라 나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일어나 이불을 잡아 내리 끌어 몸에 두르고는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머리를 쥐어 감쌌다. 싸늘한 공기에 손은 절로 이불로 향해 몸을 꽁꽁 둘렀다. 꿈속에서 떠올린 어떤 상상이 기억나 방 안 가득한 한기가 더욱 강해지는 듯했다.

 

- 마룻바닥에 생겨난 문을 열지 않았지만, 이미 머릿속으로 어떤 이미지를 떠올렸다. 열려고 시늉하긴 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절대 손잡이는 만질 수 없으리라는 것을.
문 아래 낮고 좁게 파인 안쪽에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남자가 손을 곱게 모은 채 누워 있을 것이다. '죽은 것일까?' 생각하는 순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번뜩 뜬 사백안(四白眼)은 처음부터 시선을 나에게로 향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체의 희번덕이는 눈동자에 나는 몸을 떨었다.
침대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차디찬 남자가 어느새 자리를 차지하고 누워 절대 감지 않는 사백안으로 나만 바라보는 망상에 사로잡혀 꼼짝할 수 없었다. 망상이라는 것을 알지만, 한 번 생각해 버린 이상 절대 뒤를 돌아보지 못할 것이다.

- 도움을 요청하고 싶은 마음이 들자 렉시가 생각났다. 동시에 휴대전화가 침대 머리맡에 있다는 것 역시 떠올랐다. 뒤를 돌아볼 수 없으니 모든 상황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찬찬히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인정했다. 갑자기 떠오른 말도 안 되는 상상과 괜한 두려움의 근원이 무엇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건 생각의 콜라주 같은 것으로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정보를 제멋대로 혼합하며 이상한 결론으로 도출한 것이다.
새로 구한 사설 기숙사의 오전 사용자가 남자라는 것과 프리마켓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것, 그리고 창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환하게 네모진 영역을 만드는 것을 보고 그 모양대로 비밀의 문이 생겨나길 바라는 환상을 꿈꿨다는 것. 단지 이것들이 새로운 생활에 대한 설렘과 근심으로 인해 호러적 상상을 끌어냈다. 그냥 그런 것일 뿐이다.

 

- 아, 잠깐만. 오전 사용자가 남자라고 했던가.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진 않은데.
이불을 머리 위까지 뒤집어쓰고 시야를 최대한 가렸다.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여러 번 더듬거린 후에야 스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탁.
소리와 함께 사방이 환해졌지만, 기대했던 마음의 평화는 오지 않았다. 나는 이제 차디찬 남자가 사백안에 길어진 입으로 나를 향해 가부좌 틀고 앉은 모습을 상상하기에 이르렀다. 
복도와 거실도 불을 밝혔다. 오전 사용자의 방으로 가기 위해선 집 안이 밝아야 했다. 거실을 지나는 동안 눈동자만 움직여 흘낏 경사진 벽 구석 쪽을 바라봤다. 당연하게도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구석에 놓인 낡고 작은 나무 의자를 빼면.

- ... 나무 의자 의자라니.
의자는 원래 없었다. 꿈속에서 내가 가져다 놓은 물건이니까.

- 방 창문이 열려 있었다. 집 소개하던 아주머니가 문과 창문을 열었던 것이 기억났다. 조심스레 스위치를 켰다. 옷장과 침대 밑을 가장 먼저 확인하고 (어린이적 공포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까닭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법진이나 이상한 문양이 새겨진 곳은 없는지 구석구석 확인했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런 행동을 하면서도 내가 정신 나간 짓을 한다는 걸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었다. 어쩌면 밤마다 나는 이렇게 확인에 재확인을 하려고 들지도 모른다. 불안의 근원이 방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지만, 근원을 파헤치는 건 나 같은 겁쟁이에게 무엇보다 두려운 일이라서 수고스럽더라도 '아무것도 없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결과적인 상태를 확인해 일시적 만족을 얻는 것을 택했다.

- 이미 본 방이지만, 정말 짐이 없었다. 낮엔 집에 있고 저녁과 밤엔 집을 비우는 사람이라니. 뭘 하는 사람인 걸까. 괜한 호기심이 들었지만, 이내 관심을 접었다. 다만 이 방의 주인이 정말 남자인지를 알아야 했다. 옷을 확인하면 될 것이다.

- 외투 몇 벌과 바지 몇 벌, 다른 쪽으로는 수트가 걸려 있었다. 남자 옷이었다. 대체로 얌전하고 수더분한 스타일이었는데, 안쪽에 걸린 검은 옷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라이더 재킷. 치수가 작아 보이는 데다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젊은 사람인가 생각하며 옷을 잡아 빼자 뒤에 가려져 있던 원피스 하나가 보였다. 커다란 꽃잎이 풍성하게 프린트된 시폰 원피스.

동작을 빨리해 여자 옷이 더 있는지 확인했다.
없었다.

-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내 뒤에 따라다니는 창백한 얼굴이 남자에서 여자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흡혈귀에게 물린 후 이제 막 마지막 숨이 끊겨 영원한 죽음으로 변모하기 직전의 모습.

- 빼낸 옷을 가지런히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지문이라도 지워야 하는지 잠시 갈등했지만, 낮에 아주머니와 함께 만진 것까지 다 사라진다면 더 의심을 받을 수 있어 그만두기로 했다.
의심이라니, 누가 의심을 한단 말이지. 지문 감식할 일이 뭐가 있다고.

- 고개가 절로 시폰 원피스로 향했다. 치수 작은 라이더 재킷은 시폰 원피스 위에 걸치는 것이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남자 방에서 발견한 여자 옷과 근처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피해자를 연관 짓는 것은 지극히 억지이며 망상이었다.
하지만 이 망상 덕분에 살인사건의 범인을 잡게 된다면. 그런 거라면?

- 나는 점점 의심 편을 들기 시작했다. 방에는 남자 혼자 지내고 아내나 여자친구 흔적은 없었다. 옷은 버릴 곳을 정하지 못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장소가 정해지면 버리거나 태우겠지. 굳이 살인사건 기사 부분만 모아 따로 가지고 있는 건 범인으로서의 자연스러운 행동일 것이다. 어느새 나는 내 생각을 믿고 있었다.

놀랍게도 방 주인을 살인범으로 결정하고 나자 줄곧 등 뒤를 따르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사그라들었다. 의지와 상관없는 자연스러운 평화가 마음에 스며들었다. 나는 남자의 방을 나와 여전히 어둠 안에 조용히 자리한 낡은 의자를 바라봤다. 거기에 나를 노려보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 문이 철컥 열리더니 발소리가 들려왔다. 느릿한 발걸음이 지극히 일상적이어서 죄지은 자의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 <삐거덕 낡은 의자>



- 잔잔한 위로의 물결에 둘러싸인 기분은 어느 정도 묘했고, 어느 정도 쪽팔렸고, 많이 고마웠다.
그래, 라벤더는 다시금 생각했다. 아무래도 화성 장교가 낀 일이니까 경찰도 곤란할 거야. 저 블랙마켓 새끼야 재활소를 제집 드나들듯 할 테니 뭐 신경이나 쓰겠어? 뭘 해야 공공소란, 경범죄 정도로 걸리는 게 다일 텐데.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맹해 빠진 화성놈한테까지 사기를 치냐? 해도 해도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 라벤더가 멍하니 케이크를 한 입 두 입 떠먹으며 그리 생각하는 동안 김화성은 양 뺨을 수줍게 붉히며 되지도 않는 고백 비슷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우리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전, 전 라벤더 씨가 좋아요."

"그래?"
"전 이렇게 착 가라앉은 사늘 사늘한 라벤더 씨의 분위기가 특히 좋은 것 같아요. 제가 좀 방방 뜨는 타입이라 그런지, 하하핫!"
"그래, 그렇구나?"
"네, 맞아요! 어제 안절부절못하다가 틈새마켓에 가길 잘했어요. 전 이런 자리 처음이라 무지 긴장했었거든요. 그런데 선 보는데 누구랑 같이 가는 건 좀 아니라고 해서, 그러면 어쩌나 했는데 마침 이런 서비스가 있다고 해서 참 기뻤지 뭐예요? 지구에는 이벤트라는 풍습이 있다면서요!"
"그래, 기뻤구나?"
"네, 지구는 참 신기한 곳인 거 같아요! 뭐랄지, 참 이런저런 도움이 섬세하게 준비된 곳 같아요. 그에 비하면 화성은 뭔가 좀 융통성이 없고 죄 자동화에..."

- 김화성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라벤더는 이제 어쩌지?라고만 계속 생각할 뿐이었다. 아까는 화가 좀 나기도 했지만 이제는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이 김화성이는 그냥 사기를 당한 것뿐이다. 자기가 사기를 당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 같다. 왠지 막막했다. 자신은 애당초 선 보러 나올 생각부터가 없었다.
뭐가 문제인 걸까? 라벤더는 자신의 인생을 쭉 되짚어보았다. 자기한테 선을 안 보면 안 되는 어떤 조급함, 불안함이 있나? 그런 건 없다. 저 말 많은 화성놈이 마음에 드는가? 그건 아니다. 내가 왜 내 인생에 저런 어벙한 걸 끼워 넣어야 하는가? 그럴 이유라고는 반세기 전에 문명사회에서 사라진 생리만큼도 없다.

하지만 엄마는... 엄마는.

- 라벤더는 자신의 엄마를 잘 알았다. 비록 자기에게는 선이나 결혼, 번식 같은 게 무의미할지라도 엄마한테는 그게 무척 큰일이라는 걸. 그것도 그냥 큰일이 아니라, 자기 딸이 평생 독신으로 산다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는, 어떤 감정적인 큰 산이라는 것을그게 자기 책임인가? 그렇지는 않다. 엄마의 감정 문제는 엄마 책임이다. 그러나 그렇게 깔끔히 딱 자를 수 있는 일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리고 설령 그렇게 딱 자른다고 양방에게 다 좋게 해결될 일인가? 역시, 그렇지는 않다. 어쩌면 이런 일은 다 좋게 해결되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 블랙마켓맨과 저 먼 하늘의 독수리와 라벤더를 보았지만 아무도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블랙마켓맨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라벤더에게 "더, 더할 나위 없는, 끄윽, 영광입니다!"라고 말했고, 라벤더는 그런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닌 놈과 불필요한 말을 섞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 독수리는 유유히 하늘을 날아서 라벤더 앞에 착지했다. 날개의 끝과 끝까지 2미터에 달하는 너비라 김화성과 블랙마켓맨은 재빨리 라벤더에게서 멀어져야 했다.
라벤더는 독수리가 입은 경량화 조끼와 금색 발판을 쓰다듬었다. 이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조금 마음이 울렁거렸고, 기뻤다.
귓가에서 통화 요청음이 울렸지만 라벤더는 그냥 검지를 까닥해서 종료시켰다. 지금은 엄마하고 통화할 기분이 아니었다. 라벤더는 독수리의 등으로 한 발을 올렸고, 경량화 도구끼리 호환하며 순식간에 몸이 가벼워지는 감각에 휩싸였다. 그다음은 곧바로 이륙이다.

 

어째서 독수리인지는 라벤더도 잘 몰랐다. 첫 이글라이더조차 자신의 먼 조상 이야기에서 떠올린 아이디어라고 한 바 있다. 아직 인류가 바다로 갈려져 있었던, 불을 만들기 위해 화로에 불씨를 간직해야 했던 멀고 먼 과거의 어느 한 때부터 전해져 내려온 신성한 새 이야기. 천둥으로 빚어졌거나, 창조주와 인간을 잇는 성스러운 새이므로 아무나 아무 때나 죽여서는 안 되는, 그런 새.
'그것도 웃겨. 그렇게 성스러운 새라면 아예 죽이질 말아야지. 뭐 인간 맘대로 언젠 죽여도 되고 언젠 안 되고 그런 건가? 아무튼.'


- 라벤더의 몸은 독수리의 날개 위에서 기나긴 바람을 가르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무거운 물결 같던 중력의 그물이 한순간에 수만 가지의 깃털처럼 흩어지며 떠돌아 갔다.
날 수 있다는 것은 이런 일이었지.
라벤더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 라이딩 고글은 눈만 보호하는 게 아니라, 얼굴과 목까지 얇은 공기 장벽으로 둘러쳐준다. 바람과의 마찰이 심해질 때마다 순화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비행 중에도 말을 할 수는 있다. 보통은 어차피 안 하지만.
비행 중의 통신은 전체적 사념 순환 체계를 통하는 것이 보통이다.
사념 통신이 가능은 하지만 보통은 채널을 열어놓지도 않는다. 생각 자체로 소통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라벤더는 엄마하고도 사념 통신을 하지 않았다. 엄마도 딱히 라벤더에게 사념 통신을 하자고는 않았는데, 엄마한테도 부담스러운 일이기 ...

- 아버지를 볼 때마다 미친 듯이 난리를 쳐서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했다는데, 그러고 보면 참 선견지명을 지닌 독수리였다.
라벤더는 열세 살 때 마리아를 만났다. 이글라이딩 시뮬레이션 테스트를 만점으로 통과하고도 엄마의 못 미더움을 통과하지 못해서, 원래 계획보다 3년은 늦게 만나게 된 독수리였다. 그나마도 삼촌의 강력한 서포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엄마는 라벤더가 이글라이딩하는 걸 썩 좋아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에어카가 날아다니는 세상에 굳이 다 지나간 과거의 이글라이딩을 계속해서 뭘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거야 물론 그렇지만, 삼촌은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서 하는 건데 굳이 뭘 복잡하게 따질 필요는 없잖아? 누나야말로 왜 더는 안 날아? 브리 이글라이더는 말없이 손사래를 쳤다. 

- 약간의 논쟁 이후, 삼촌은 라벤더를 이끌고 오래된 에이비어리로 갔다. 브리 이글라이더는 여전히 투덜거리며 좀 떨어져서 따라왔다. 이글라이더 가의 특별한 새장 입구에 도달하려면 먼저 정원을 지나야 했다.
정원은 항상 아름다운 곳이었다. 부엌의 곁문을 열면 바로 정원으로 연결되었는데, 정원 자체가 육각형의 특화 유리로 둘러싸인 공간이었다.
날이 맑은 날에 정원에 가서 서 있으면, 특화 유리를 거치며 최적화된 광선이 수정 조각처럼 쏟아져 내렸다. 벽을 따라 소용돌이치듯 배치된 수경재배 계단을 타고 물 흐르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고, 때때로 가동되는 내부 바람에 머리칼이 쓸렸다.
정원의 벽으로는 수경 재배되는 한해살이풀들이 있고, 좀 더 안쪽에는 흙과 바위로 조성된 지대가 있다. 이곳에는 다년생 식물과 나무가 자란다. 정원의 천장은 매우 높아서 아직까지 나무의 높이 때문에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다. 정원의 중심에 에이비어리가 있었다. 독수리를 위해 지은 거대한 새장은 개폐가 가능한 특수 지붕에, 둥글게 몰아치며 상승하는 바람의 흐름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 새장의 문이 열릴 때는 정원의 모든 잎사귀가 흔들린다.
바람이 일어나기 바로 전에 가장 강렬해지는 종류의 침묵이 있다. 엄마는 그 느낌을 비행의 어떤 열쇠라고 부르고는 했다. 라벤더는 이글라이딩을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냥 아는 어떤 것이었다. 한순간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피보다 유효하며 호흡보다 친숙한 감각이었다.

- 감각을 무시하는 존재는 빨리 죽기 마련이다. 세상은 아무리 흘러간들 언제나 과거에 불과하며 인간은 살아남지 못하면 현실에서 탈락당해 썩어 없어질 뿐이다. 그래서 옛날에 이미 자본주의가 살아남기 위해 순환주의로 환골탈태했으며, 순환 기록과 가치조절이 자동화된 화폐가 탄생했고, 구닥다리 지배 체제와 정부들이 부서지는 혼란 중에 다른 개체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났던 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사람들에게 영웅이라고 불렸고 존경받았으며 때로는 욕망당했다.

- 에이비어리는 부서지는 빛과 회전하는 바람과 산란하는 침묵으로 꽉 차 있었다. 라벤더는 잠시 눈을 뜰 수 없었고, 귓가에서는 바람의 끄트머리가 연신 사각였다. 온몸이 가벼웠다.

- 어린 라벤더가 새장 속에서 처음 깨달은 것은, 새는 혼자 날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날개가 있든 없든, 날개가 얼마나 크든, 뼈가 얼마나 가볍든 그런 건 나중 문제였다. 새는 바람에 모든 걸 맡긴다약간 죽음과도 비슷한 항복을 해야 비로소 바람은 새를 받쳐 올린다. 날갯짓은, 날갯짓 소리는 그야말로 바람 속 깃털 같은 것이었다. 아무리 크고 사나운 새라도 바람을 거꾸로 탈 수는 없다. 그리고 라벤더는 난생처음으로 자신만의 독수리를 만났다.

- 새는 햇빛을 그으며 난다.

- 독수리가 날아오르는 모습에서 라벤더가 느낀 경외감의 이유에는 그러한 이유가 있었다. 날기 직전 자신을 바람 속에 통째로 포기해 버리는 새의 모습에서, 라벤더는 힘이 한 개체에 허락되는 과정을 보았다. 이유도 논리도 없었고 또한 부질없었는데, 가장 무력했고 텅 비었으며 허무했는데, 바로 그러했기에 허공을 얻었다.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몸이 떠오르는 순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생각이 하얗게 지워진다. 속절없는 아름다움이 점점이 번져 나와 투명한 떨림으로 공간을 물들여 간다.

- 라벤더는 자신의 독수리 이름을 역사상 첫 이글라이더인 할머니의 이름을 따서 마리아라고 지었다.

- 라벤더는 열여섯 살이 되던 날 있었던 일을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했다. 생일 파티라며 삼촌이 갑자기 들이닥쳤고, 블랙마켓에서 사 왔다며 진짜 막걸리를 자랑스럽게 내놓았다.
정작 주인공인 라벤더는 별 감흥이 없었지만(일반 막걸리와 그다지 맛이 다르지도 않았다. 알코올이 들어가 있다지만 그런 걸 먹어서 무엇하는가?) 엄마와 삼촌은 실컷 퍼마신 후 수육을 삶아 먹고서 쓰러져 잠들었다.
페퍼 잭 이글라이더는 잠들기 전에 이제는 블랙마켓에서도 진짜 수육을 구할 길이 없다며 세상이 정말 빨리 변한다며 한참 한탄을 늘어놓았고(그야 진짜 수육을 구하려면, 삼촌, 돼지를 불법으로 구해서 죽여야 하잖아? 그런 건 안 하기로 인류가 결정한 지 벌써 반백 년인걸? 아, 몰라! 나 어릴 때만 해도 진짜 수육을 먹을 수 있었어!) 라벤더는 생일 케이크를 독차지할 수 있어서 아무튼 땡큐였다.

- 너 근데 좋은 거 볼래?
뭔데?
비밀이야. 근데 알았지? 약속해.
약속. (그런데 누구한테 비밀이라는 거야?)

 

- 라벤더는 삼촌이 눈은 다 감겨서는 간신히 손가락만 움직여 영상 띄우는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았다. 페퍼 잭 이글라이더는 오른손 검지에 삶의 모든 자부심과 벅찬 감격을 담아 재생 버튼을 찔렀고, 곧 잠들었다.

- 사방으로 바람이 휩싸이듯 했다. 창백한 푸른 색상이 끓어 넘치듯 퍼져나갔다. 숨이 턱 막히는 기백에 라벤더는 저도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기는 이제 하늘이었고, 바람의 바다였으며, 눈앞에 선 이는 엄마였다. 동시에 엄마가 아니었다. 라이딩 고글로도 가릴 수 없는 형형한 광채가 담긴 두 눈을, 라벤더는 현실의 엄마에게서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 브리 이글라이더는 씩 웃었고, 아마도 영상 촬영모드인 삼촌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철썩 때렸다. 그리고 돌아서는가 했더니 더는 그 자리에 없었다.
어어...?
아니다. 아주 멀리에 있었다. 라벤더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왠지 심장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 바람이 등 뒤에서 뒤늦게 쓸려나간다.
엄마는 하늘을 바람으로 잘라버릴 것처럼 날았다. 발밑의 독수리가 독수리라기보다는 독수리의 그림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아무리 이글라이더라지만) 날 수 있다니 말도 안 된다. 브리는 삽시간에 멀리 갔고, 천둥소리 같은 걸 이끌며 눈 깜짝할 새 또다시 라벤더의 정수리 위로 지나갔다. 바람과 바람이 때로는 부딪혔고, 때로는 겹쳐 흘렀으며, 멀리서는 일렁였으며 가까이로는 조각조각 베여나가 흩어졌다. 날아다니는 몸의 그 어디에도 무게감이 없었다.
라벤더는 숨 쉬는 것도 잊었다가 몰아서 쉬었다. 호흡은? 호흡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라벤더는 온 힘을 다해서 엄마를 관찰했지만 아무리 봐도 숨을 쉬는 것 같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숨을 쉰다면 저렇게 날 수가 없다.

 

- 브리 이글라이더는 가끔 멈춰서 동생 쪽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바람을 모조리 이끌며 흘리며 잡아당기며 쏟아내며 엎으며, 칼날처럼 파도처럼 깃털처럼 날았다. 바람의 소리가 높다가도 더욱 높아져서 희게 투명해졌고, 무더기로 쏠려갔다가 돌아오는가 하면 발밑이 뻥 뚫리듯 무너졌다. 바람에 휩싸인 엄마는 무자비하게 자유로웠고 하늘은 깊고도 깊어서 끝이 없었으며 라벤더는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고, 심장의 통증도 그래서 아련하게만 느껴졌고 눈가의 눈물은 남의 것만 같았다.
왜 포기한 거지? 이걸? 이렇게 날 수 있으면서?
라벤더는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나 때문이다.

- 영상이 끝난 후로도 한참을 라벤더는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어지러웠다. 가슴이 아팠다. 천천히 곁을 둘러보니 삼촌은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서는 코 골며 자는 중이고, 엄마는, 엄마도 소파에 드러누워 쌔액쌕 잘만 잔다.
잠이 와? 지금?
라벤더는 복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후로도 계속, 이날만 기억해도 속이 뒤집힐 듯했다.) 저걸 버리고도 잠을 잘 수가 있어? 밥을 먹고 물을 마실 수 있어? 어떻게? 어째서?

- 그날 라벤더는 그렇게 좋아하는 케이크를 손도 대지 않고 고스란히 내다 버렸다. 쓰레기통은 케이크가 쏠려 들어가자마자 센서를 깜빡이며 분해 처리를 시작했고, 라벤더는 차라리 엄마가 나는 모습을 안 보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날 밤에는 전혀 말이 안 되는 생각들이 맞춰지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고 인정할 수도 없는 괴로움들이 밤새 라벤더의 심장을 쑤셔댔기에, 한숨도 잘 수 없었다.

- '지금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야.'
라벤더는 마리아의 방향을 돌렸다. 자신이 비행을 그만두게 된 것은 (여러 요인이 있었다고 해도)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렇게 날 수 있는 사람이 비행을 그만둬버린 세상에서, 자신이 비행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왜 그렇게 되어야 했는가? 왜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고, 왜 자신은 세상에 태어났는가?

 

- 라벤더는 더더욱 이대로는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차마 엄마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괜히 아랫입술을 물었다. 어린애처럼 운다 해서 뭐가 달라지는가.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집이 아니라면, 카페가 아니라면, 잠시라도 미디어의 눈을 의식할 필요 없이 나다닐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일까. 아까의 경험 때문에 그다지 내키지는 않지만 그래도 역시 블랙마켓뿐이다. 

- 블랙마켓이라고 해봐야 별건 없다. 아직 정돈되지 않은 구역, 자동화가 덜 된 곳을 블랙마켓이라고 부르는 것뿐이다. 거래가 자동기록되지 않는 구식 지폐가 아직 쓰이며, 진짜 술과 담배를 ...

- 마리아가 스스로 날아와 대청마루에 얼씬거린 것은 밤이 다 깊어서였다. 그제서야 라벤더는 자기가 마리아를 찾아 들어왔던 것을 기억해 냈다.
보은사 주지는 이번에는 바람개비 벽에서 금박 바람개비 하나를 쑥 뽑아 라벤더에게 건네주었다.
"담에 언제 다시 놀러와유. 와서 커피도 혀고."
라벤더는 공손히 커피가 정말 맛있었으며 다음에 꼭 또 오겠다고 작별 인사를 올렸다. 옆에서 마리아가 날개로 방바닥을 탁탁 쳤다.

- 보은사를 나온 후, 라벤더는 어떻게 집에 갈까 하다가 택시를 불렀다. 날아갈 수도 있지만 그러면 새장 지붕을 열어 집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러면 에이비어리 개폐 알람음에 엄마가 단박에 자기가 왔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기왕이면 조용히 집에 들어가서 조용히 씻고 자고 싶었다. 이쪽도 성공할 확률은 낮았지만.
이제 집에 들어가서 아무튼 언제든지 간에, 말을 해야 할 것이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 이글라이딩도 더는 참지 않을 것이다. 날고 싶을 때 날고, 맛있는 걸 찾아서 먹고, 결혼은 안 할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독립이라도 해야겠지. 작은 에이비어리라도 맞춤 제작을 한다면 마리아 한 몸쯤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자세한 건 더 알아봐야 하겠지만, 바람의 상승 작용도 맞춤이 될까? 
'엄마라면 아마 안 자고 기다리고 있겠지.'
그리고 역시 그러했다.  

- "너 설마 저거 때문에... 지금까지 어물쩍어물쩍 소개팅이네 맞선이네 나간 거니?"
"엄마가 약한 척하면서 죄책감 자극했잖아. 눈물까지 흘리면서."
"그건 네 생각이고! 눈물이야 나이가 드니 잘 나오더라. 저거 때문에 아까 뭐가 자기 때문이라는 둥, 너 때문에 내가 이혼 늦게 했다고 헛소리한 거야? 응?"
"그야..."

그럼 아니야?
브리는 관자놀이를 양손 엄지로 지그시 눌렀다. 라벤더는 엄마의 입에서 "페퍼 이 새끼..."라는 소리를 확실히 들었다. 매우 나지막이 들릴락 말락 하게 나온 소리였지만 분명 들었다.
그러고 보니 삼촌이 엄마한테는 비밀이랬는데. 그러고 보니... 왜지?


- "너 잘 들어."
브리는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을 두어 번 왕복했다. 엄마는 팔짱을 끼고서 혼자서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가, 바닥에 앉은 딸을 향해 검지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내가 비행을 그만둔 건 자식 때문이 아니야. 단지 내 성질이 드러워서다."
"응?"
"그리고 내가 이혼을 그때 한 건 너 때문이 아니야. 그놈이... 네 생물학적 애비가 그때 떨어져 나가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지. 왜냐면."

- "대체 왜? 아오, 엄마! 답답하다고!"
"DNA가 아니니까."
"뭐?"
브리는 팔짱을 꼈다가 풀었다. 이제는 뭔가 체념한 듯한 표정이었다.
"이글라이딩은 피로... DNA로 이어지는 능력이 아니라고. 왠지 아니?"
라벤더는 고개를 저었다. 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몰라. 과학자들도 모르고 엄마도... 네 할머니도 몰라. 아무도 몰라. 사실 난 친딸이 아니거든. 이런 건 대중에 공개된 사실은 아닌데."
브리는 라벤더의 멍해진 얼굴을 향해 최대한 차근차근 설명을 해보려 애썼다.

- 최초의 이글라이더는 옛 지구의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 출신의 소녀였다. 장식용이 아니고서야 굳이 성씨를 지정하지 않는 요즘과는 달리, 그때에는 성씨가 주로 혈족을 타고 이어져 내려갔다. 초대 이글라이더의 성은 박이었고, 이름은 마리였으며, 정부 체제가 통합되고 나서는 스스로의 이름을 마리아라고 등록했다.

- 다시 쿵 하는 소리가 에이비어리를 울렸다.

"아아악 아아아아아악!"
한숨소리.

"자, 다시!"
쿵, 쿵, 쿵, 라벤더의 고함은 점차 울음소리로 바뀌어 갔다. 브리는 팔이 아팠다. 오늘따라 어째 애가 떼쟁이 모드네. 꼭 이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이게 뭐야! 난 이글라이더도 아니란 거야? 엄마도 그렇게 생각해? 이래서 그렇게 나더러 결혼이나 하라고 그랬던 거야? 어차피 날지도 못하는 거 연애라도 하라, 뭐 그런 거야?"
"얘는 뭐 맨날 이리 비관적이야..."
브리는 멀리 달을 바라보며 팔을 주무르다가, 주저앉은 딸의 뒷모습을 보았다.

- 자신도 마리아도, 딱히 나는 법을 전해 받거나 가르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입양 전부터 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그런 정보는 입양 기록에는 없다. 브리는 자신이 처음 날았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해보려 했다. 한 살 때 입양된 터라 일단 그 정도로 오래된 기억은 나지 않는다.
마리아는 여기서 자주 날았었다. 브리는 미소 지었다. 정원에서, 에이비어리에서, 홀로, 때로는 독수리와 나란히, 가끔은 비가 올 적에도. 허공에 떠오른 채 바람의 흐름을 따라 연꽃처럼 떠다니다가, 자신이 손을 뻗으면 잡아주었다. 그러면 곧 자신도 공중으로 떠올랐다. 햇빛은 마치 물결 같았고, 바람은 떨림의 몸통 같았다. 허공은 해바라기 꽃잎 같은 감촉이 편편이 쌓여 들어서 한없이 치밀한 한 몸의, 동시에 수많은 몸으로 이루어진 물질이었다. 
브리는 잘 생각해 보았다. 피도 DNA도 아닌 다른 것이 나를 날게 했지. 그건 무엇이었을까.

- 브리는 라벤더를 다시 바라보았다. 자신의 딸은 괜한 것으로 고민하고, 지나치게 스스로를 괴롭히는 면이 있다. 아기 때부터 좀 그랬다. 뭐든 열심히 열심히 하다가, 안 되면 앵 하고 세상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안아 올리면 또 언제 울었냐는 듯 금세 방글방글 웃었지만.
'그건 어느 애기나 그런 거 아닌가? 아냐, 보통 우는 그런 게 아니라 굉장히 슬프게 울었지, 천지에 사무치는 서러움으로.'
브리는 자신을 잡아주던 엄마가 뭘 어떻게 했더라, 기억하려 애썼다. 그렇지만 그냥 잡아 올려줬던 거 말고 별다른 건 없었다. 그냥 잡아서 공중에 놓아주었다.
'그냥, 허공을 건네주듯이.'

 

- 브리는 왼손을 오른 손등에 얹었다. 난다는 건 어떤 일인가. 그것도 그런 일이다. 그냥 놓듯이 하면 날게 된다.
그럼 내가 아니라 딸내미를 날게 하려면 어째야 하지? 브리는 아아, 하고 손을 뻗어 라벤더의 등을 두드렸다. 잔뜩 그늘진 라벤더의 얼굴이 한참 후에야 자신을 본다.
'엄마는 그때 내게 엄마를 건네줬던 거야.'
브리는 라벤더의 눈가를 손등으로 훔쳤다. 그리고 라벤더의 손을 잡아 일으켰고, 한 발 뒤로 디뎌 날아올랐다.

- 라벤더는 한숨 늦게 떠올랐다. 놀랐는지 눈이 둥그레진다. 브리는 좀 더 높이 날았다.
"있어 봐, 엄마가 뭐가 기억난 게 있는데. 어디 보자."
바람이 둥글게 돌아간다. 브리는 에이비어리를 회전하는 바람과, 새장 바깥의 바람, 밤하늘의 허공을 온통 메운 바람, 공간의 모든 끄트머리까지 다 채우고서 물결처럼 일렁이는 바람의 큰 한 몸을 남김없이 느꼈다. 자신의 몸과 바람의 몸은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 브리는 새장의 열린 천장을 지나 떠올라 갔다. 집이 까마득해져서야 공중의 한 지점에 멈추었다.
"날고 싶니?"
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날 수 없으니까 날고 싶은 거니, 아니면 날 수 있는데도 날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니?"
"그건...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모르니까."
"너 걸음마할 적 생각난다, 얘."
브리는 한 손을 놓았다. 라벤더는 잠시 허우적대다 엄마 비슷한 자세로 공중에 섰다.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걸어본다. 여전히 날고 있다.

- 브리는 새삼 자신이 엄마라는 것을, 그게 어떤 일인지 생각했다. 날 만큼 날아서, 더는 알아야 할 것도 배울 것도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구나. 끝없는 것은 말 그대로 끝없어서 계속해서, 계속해서 나아가는 일이구나. 딸의 손을 쥔 손이 조금은 아렸다. 엄마도 그래서 갈 길을 간 거지. 나도 언젠가는 갈 거야. 쉽지는 않겠지만. 쉬울 수가 없는 일이겠지.

- 영원히 잡아주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브리는 라벤더의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 내렸다. 애는 엄마의 이혼이 제 탓이라고 생각해서 자책해 온 모양이지만, 사실은 엄마가 자기를 낳은 것을 세상에서 제일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래서는 영 헛똑똑이다.

- "이 손도 이제 놓을까?"
"아니 아니, 잠깐만!" 
라벤더는 하늘 한쪽을 가리켜 보였다.

"저기로 가볼래!"

브리는 딸이 가리킨 쪽으로 천천히 날았다. 이끌려 오는 라벤더의 팔이 더는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아니, 몇 번 이러다 보면 너도 혼자 날지?"
"그럴까?"
"그래. 넌 걷기도 금방 걸었으니까."

- 브리는 왠지 시원한 심정이었다. 난다는 것에 대해 생각만 하면 더러워지던 기분도 이제는 많이 깔끔해진 것 같았다.
아마도 몇 번만 더 연습하면, 엄마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자신도 딸에게 전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냥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이 전달되는 것인지는 자신도 몰랐다. 그저 피가 흐르기 이전에, 심장이 뛰기 이전에, 바람이 불기 이전에 일어나는 무언가였다.
아주 오래전에 엄마는 그걸 자신에게 건네주었고, 자신은 그걸 받았다. 주는 것과 받는 것이 다 완전해야 무효가 되지 않는다.
달빛이 바람의 물결 속으로 얇디얇게 겹치며 내려앉았다.

라벤더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서 마리아가 한없이 높이 더욱 높이 날아오르다가 곧 구름을 뚫고 사라졌다. 바람 한 줄기가 매끄럽게 다가와 라벤더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리고는 곧 방향을 틀어 멀어져 갔다. 엄마의 턱선을 따라 달빛이 물방울처럼 튕겨 나갔다. 라벤더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조금은 졸렸고, 이미 반쯤은 꿈꾸는 것만 같았다. 
'어디로 가는 걸까.'
라벤더는 어디든 이렇게 단맛의 바람이라면, 푹신한 허공이라면 날아갈 만하다고 생각했다. 눈을 감았다.

- 진작에 날 걸 그랬어. 그러면 아마도 덜 괴로웠을 거야.

아마 엄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확실히 아는 건 아니었지만, 라벤더는 어쨌든 막연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엄마도 지금 굉장히 오랜만에 너무나도 홀가분하게, 가볍게, 행복하다는 것을.

- 모든 것이 점차 고요해졌다. 아니, 모든 것은 본래 고요했다. 뺨을 스쳐가던 바람의 밀도마저도 줄줄이 마치 설탕 녹듯 부드러워지다가 마침내 마지막 저항력의 얇은 막까지도 벗어 내리고서 부서져 깃털처럼 흩날려 갔다.


- 라벤더는 세상이 통째로 떠오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조차 잠시 후 어디론가로 떠올라 갔다. 눈을 뜨니 세상이 온통 뒤섞인 광채로 범벅되어 어지러웠다. 온몸의 감각이 곧이어 가벼워지더니 한없이 투명히 허공으로 뻗어나가서 밤하늘의 별빛과 달빛 속으로 번져 들었다. 세상은 본디 고요한 무언가였고 고요함을 감싼 껍질들이 제각기 별이나 구름이나 사람 같은 형식의 골격에 휩싸인 채 저마다의 궤도를 그려나가는 것이었다. 날아오르는 것은 물질의 껍데기가 일방적으로 자아내는 꿈의 방향선을 박차고 뛰어올라 곧바로 고요함의 고동으로 진입해 녹아드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모든 것을 버리고, 이것이 본래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누구에게든, 무엇에게든, 어떻게든. 

- 그러므로 라벤더는 부드럽게 엄마의 손을 놓았다. 동시에 엄마도 라벤더의 손을 가볍고도 사뿐히 놓았다.
그래도 괜찮은 일이었다.

 

- <라벤더의 고요한 하루>

 
 
- 상태가 소강된 게 아닐까.

- 사람들은 모두 미쳐 있었다. 범죄를 저지르긴 너무 쉬워졌고, 또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치기도 너무 쉬워진 세상이었다. 경찰은 무의미했고 그 빈자리를 강간범과 살인마가 차지했다. 내가 먼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고 말 거라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하다못해 재미로 인간을 사냥하는 놈들까지 있었다. 창밖의 모두가, 모두가 미쳐 있었다. 

- 그런 세상에 민아가 혼자 떨어져 있었다.


- 안 돼. 나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손잡이를 잡았다. 아내의 눈을 마주 보았다.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오고 갔지만 그래도 문을 열었다.

- 문이 열리는 족족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고 어딘지도 알 수 없는 장소들이 튀어나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을 잠그고 숨어있기 때문일까.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한국이라 생각되는 장소도 나오지 않았고, 아예 야외의 장소가 나오지 않는 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곳조차 거의 없다는 거였다. 방이든 음식점이든 웬만한 장소는 거의 문이 한두 개씩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 열고 있는 문 하나, 그리고 꽉 닫혀서 어디로 통할지 모르는 문 한두 개. 

우리가 원하는 장소는 꽤 까다로웠다. 한국.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곳. 위험한 사람이 없는 곳.
몇 번째였나. 운 좋게도 문을 여닫은 지 스무 번이 되지 않아 가능성이 찾아왔다. 평범한 한국 아파트의 탁 트인 옥상이었다.

- 벌써 그렇게 됐다니. 나는 핸드폰을 건네받아 서둘러 딸의 번호를 눌렀다.
뚜, 뚜. 수화음이 흘러갔다. 한참을 그러더니 자동응답이 나오기 시작했다. 민아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수화음이 가는 걸 보면 전화기가 꺼져 있는 건 아닌데. 
아내가 불안하게 나를 바라봤다. 전화를 끄고, 다시 걸었다.
수화음이 반복될수록 걱정이 커졌다. 불안감이 차올랐다. 그렇게 몇 분을 기다리자 마침내 통화가 연결됐다.
"여보세요? 민아야? 여보세요?"

- "민아야아? 여보세요오오오?"
남자가 한 번 더 놀리듯 말을 따라 했다. 그러자 역겹고 비열한 목소리 뒤로 시시덕거리는 남자들의 낄낄거림이 들렸다. 한 둘이 아니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전화기를 잡고 있었다. 웃음소리 사이사이에 흐느끼는 여자애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신음 소리가.
신음 소리가.
아니겠지. 부디 아니겠지. 온갖 상상이 머릿속에 끓어올랐다. 딸을 가진 아빠의 격정이자 분노였다. 욕을 퍼부으며 당장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 "우린 이게 꼭 필요할 거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이 많은 걸 대체... 어디서 난 거야? 응? 여보?"
아내가 거의 기절할 듯이 다그쳤다. 상자들은 정말 끝도 없이 들어와서 작은 방을 바닥부터 천장까지 빈 공간 없이 채우고, 큰 방도 절반 이상을 채웠으며, 거실에도 잔뜩 들어찼다. 24평짜리 집이 절반 이상은 식료품에 점령당해 꼭 필요한 동선만을 가까스로 유지한 모습이었다.
의아한 눈으로 상자를 나르던 배달원들이 모두 철수하고 나자, 나는 아내를 앉혀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문 뒤의 공간이 뒤섞이는 이야기. 민아의 이야기. 아내의 이야기. 과거로 돌아오고 겪은 이야기들을.

- 아내는 전혀 믿지 않았다. 열이라도 있는 건가 내 머리를 만져보며 119에 신고를 해야 하는지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짓말이 아니었다. 분명 내 손과 발에는 상처가 여전히 있었고, 그건 건드릴 때마다 눈물이 나도록 쓰라렸다.
"여보, 당신은... 그냥 꿈을 꾼 거야... 그럴 리가 없어. 말도 안 돼.”
아내가 조용히,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며 타일렀다.
"헛소리가 아니래도. 무슨 꿈을 꾸면 이렇게 다쳐서, 피가 잔뜩 묻은 채로 거리 한복판에서 깨어날 수 있겠어?"
아내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니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기야 내가 아내의 입장이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해할 수 있었다.

- 나는 아내를 달래기 위해 그녀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하나씩 하나씩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내가 미치지 않고 멀쩡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옛날이야기들을. 우리만 아는 이야기들을, 그리고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 겪었던 슬픈 이야기들을 다시 한번 아내의 귀에 속삭였다.
"제발 사흘만 믿고 기다려줘. 그때도 내가 틀렸다면 기필코 여기 있는 박스들 전부 반품해 올게. 당신이 정신과에 가보라 해도 군소리 없이 갈게. 이제 사흘도 아니고 이틀 조금 넘게 남았을 뿐이야. 제발 조금만 조금만 참고 기다려줘."
내가 속삭였다. 그리고 다시는, 다시는 당신과 민아를 잃고 싶지 않다고 애원했다.
아내는 그제야 조금 누그러진 기색이었다. 시간이 좀 걸렸지만. 아내는 어색하게나마 내 등을 토닥였다.

- 하지만 딸의 반응은 아내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밤 11시,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도착한 딸아이는 온 집 안에 들어찬 식료품을 보며 제 아빠가 미쳤다고 확신했다. 반응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지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춘기가 다시 온 것만 같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민아는 듣지 않았다. 딸은 됐다고 정색하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을 뿐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결국 애써 밀어내던 침묵이 사방에 흘러넘쳤다. 아내가 애매하게 나를 바라봤다. 나는 이것도 저것도 ...

- <문 뒤에 지옥이 있다>

 

- 본래 인천역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인천 라인이라고 부는 건 원래 동인천 라인으로 그 끝에는 동인천 라인의 종착역 동인천역이 있었다그러나 어느 날 동인천역 이름이 옆 역으로 한 칸 밀려나더니 인천역으로 변했다. 위치가 변했나 하면 아니다위치는 그대로이고 역 이름만 옆으로 한 칸 밀렸다. 갑자기 생긴 인천역 때문에 동인천역, 도원역, 제물포역 이름이 순서대로 옆으로 밀렸다. 지금 도원역이라 불리는 곳은 본래 제물포역이었다. 

- 제물포라는 단어는 인천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한 번쯤 들어봤던 명사이다.
굉장히 번화한 지역으로 한때 인천의 명동이라 불렸던 곳이다. 그런데 지금 제물포역 위치가 도원이고, 현재 제물포역은 명성에 맞지 않게 그렇게 큰 곳이 아니다.


- 두 번 말하지만 이름이 한 칸 밀렸냐고? 그렇다. 그런데 아무도 그렇다는 것을 기억 못 한다.

- 만델라 이펙트라는 현상이 있다. 몇 년 전에 만델라가 사망하자 깜짝 놀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만델라는 칠팔십 년대에 이미 죽지 않았느냐고? 장례식 행렬을 방송에서 봤다는 사람들이 속속 증언하고 있다. 만델라뿐만이 아니다. 수에즈 운하가 완공되고 한참 후에도 사람들은 결국 운하 건설이 보류된 거로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예가 있다. 유명 놀이동산에 특수한 놀이 장비가 설치되는 계획이 있었다. 당시 한국 최초였다. 그런데 아직도 그 장비가 설치되지 않은 거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너무 위험하기에 설치하지 않기로 결정 났다는 뉴스를 봤다고 주장한다.

- 왜 이런 기억의 오류들이 발생하는 건가? 우주가 끊임없이 팽창하면서 변화하기에 역사가 바뀔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의 저장된 기억은 변하지 않기에 이러한 불일치가 생긴다고 한다. 어쩌면 우주의 확장 때문에 평행세계로 갈라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도 한다.

인천역 얘기로 돌아간다. 나는 인천에서 20년 넘게 살았기에 동인천역이 인천역으로 이름이 바뀌고, 역 이름들이 옆으로 한 칸씩 넘어간 이상한 일을 기억한다. 
그러나 같이 20년 넘게 산 친구들은 아무도 이상한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원래 인천 라인 종점이 인천역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결단코 아니다. 원래 인천 라인 종점은 동인천역이었다. 분명 세상이 바뀌었다.

- 나는 이런 지역 소재가 '이야기'를 쓰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 철없는 서브컬쳐 덕후 마인드로 경망되게 다룰 '이야기'가 아니다. 이 소설 자체가 '이야기'로 나아가는 설계도면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형식은 <HHhH>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혹은 <세컨드핸드타임>처럼 전위적이다. 사실 이 소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가 중요하다. '이야기'에 앞으로 무엇이 포함될지 소재 조사 소설을 쓰겠다. 쓰고 있으니 본문으로 넘어가겠다. 

- 미리 말했지만 이거 다 소설이다. 이 소설에 언급되는 관계자가 고소를 고려해 봤자 소용없다.

- 두 번 말하지만 이거 다 거짓말이고, 하찮은 장르소설이다. 개인적으로 소설가로 버는 페이도 얼마 안 되고, 이상한 이름의 상도 필요 없다. 계속 말하지만 지금부터 쓰는/쓰고 있는 소설은 원래, 모두, 다, 거짓말이다. 그냥 '이야기'를 위한 소재 조사 결과이다.

- 다만 학생들을 살려야 한다. 제목도 이미 정해 놨다. 'Heart to Heart'이다.

- 본래 도원역이었던 동인천역에 내린다.
동인천역 건너편에 골목길 사이로 거대한 돔 지붕의 건물이 있다.
인천학생문화교육회관이라는 건물로, 1999년에 일어난 화재사건과 연관이 있다.

 

- 인천호프집사건으로 명명된 화재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학교축제 뒤풀이를 즐기던 수많은 중고등학생들이 유독가스에 노출되어 질식사망 했다. 본래 무허가였지만, 뇌물을 받은 공무원들과 어린 학생들에게 술을 팔아 영리를 취하고 싶었던 업주의 노력으로 술집이 들어설 수 있었다. 
여기서 복잡해지는 것이, 미성년자에게 술을 팔고 싶었던 사람이 한 명이 아니었다. 화마를 피하려 대피하던 학생들을 막아서고 돈을 내고 나가라고 윽박질렀던 바지사장과, 1 끝까지 뇌물을 주지 않았다며 당당한 태도를 보이다 5년 복역 뒤 CCM 찬양가수로 변신해 찬양사역을 하는 실소유 사장, 두 명이다. 사람들은 복잡함보다 단순함을 찾았다. 

 

- 화재사건 뒤에 어린 학생들에게 음주를 판매한 게 바지사장이냐 실소유 사장이냐보다, 왜 미성년 신분으로 술집에 갔다며 학생들을 비난하는 여론이 불었다. 이게 단순해서 쉽고, 무허가 술집에 연관된 사악한 자들 모두가 살 수 있는 길이었다. 하지만 사악함이 도가 지나쳐 뻔뻔하자 사람들은 좀 더 관심을 기울였고, 그래서 매장되려던 정의가 조금은 실현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른 후, 죽은 학생들을 넋을 위로하기 위해, 또 살아 있는 학생들의 건전한 문화생활을 위한 보금자리로 학생문화교육회관이 세워졌다. 

- 이곳을 중심으로 골목이 여러 갈래 나뉘는데, 주목할 만한 골목으로는 모텔가와 점성촌 길이 있다. 모텔 골목은 겉으로 보기에 쇠락한 도시의 낡은 건물로 보이지만, 이 일대는 전부 개화기 시절 건물로 앞과 옆만 리모델링했고 뒷면은 개화기 시절 모습으로 아직도 건재하다. 한때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 시절 부유층과 외국인들이 살았던 주택단지이지만 현재는 진물이 흘러나올 정도로 오래된 골목에 불과하다. 이 골목 벽면 곳곳에 미국 빈민가처럼 그라피티들이 그려져 있다. 수상한 암호 같은 그림과 문자들. 누가 남겼을까?

점성촌 길로 들어서면 곳곳에 역술가의 집 간판들이 보인다. 이곳은 길을 잃는 걸로 유명한 거리인데, 골목이 복잡해서 길을 잃는 게 아니다. 같은 자리를 뱅뱅 도는 거로 유명하다.
왜냐하면, 애기 신들이 장난으로 기가 약한 사람들을 홀려 같은 자리에서 길을 잃게 만든다고 한다. 언제가 학창 시절에 들었던 얘기로 기독교 학생모임에 참석했던 학생이 이 일대를 지날 때 무서워서 속으로 찬송가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자 갑자기 어느 집 대문이 벌컥 열리더니 무당이 나와 "시끄러워! 노래 그만 불러!"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 여러 갈래의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뒤엉킨 이곳에서 '이야기'주인공들(아직 정해지지 않았던/지금은 정해진)은 길을 잃어버리며 위험한 순간을 겪는다,라고 구상한다.

 

- 소재는 차곡차곡 쌓인다.

- 골목 밖으로 나와 외곽 대로를 따라 걸으면 신포국제시장으로 가는 길이다. 이 일대 건물들은 앞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 때 건물들이어서 오밀조밀하게 서로 맞붙어있다. 과거 로마군 병영처럼 하나의 넓은 공간을 중심으로 외곽을 경계하듯 성벽처럼 맞붙어 세워졌다. 골목이 복잡하여 외지인들은 중심 공간에 절대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미궁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중심 공간도 개발되고, 산업화 기간 동안 많은 건물이 재건축되어, 그냥 건물들이 빽빽하게 세워진 평범한 장소가 됐다.

 

-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 현대 건물들이 함께 뒤섞여 존재하는 이곳에는 두 가지 버전의 도시 전설이 있다.
첫째, 일본 제국 패망을 받아들이지 않고, 무력으로 조선 강제점유를 맹세한 강경파가 일본으로 귀향하지 않고 끝까지 남아서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한때 이 건물들 사이 중심 공간에서 집회를 가졌다고도 한다. 
둘째, 일본 제국 패망 후, 일본과 조선 좌익계열 젊은 학생들과 운동가들이 중심공간에 모여 해방된 대한민국도 아니고 일본 제국도 아닌 이상주의적 유토피아 국가설립을 선포하며, 이곳을 수도로 선언했다고 하는데...

- 이 두 개의 전설 끝은 똑같다. 결국 한국 전쟁 때문에... 전설 속 인물들과 사건들이 소멸한 것으로 알려진다. 대로에서 이어지는 신포국제시장은 본래 화교들이 조선 말기에 진군한 청나라 군대를 보급하기 위해 세운 곳이다. 그 이후로 계속 조선과 대한민국에 살았던 화교들 사이에서 세대 간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전설들이니 확인하기 까다롭다. 
거짓말 같은 얘기라고 안 믿는 이도 있을 것이다. 두고 보자.

- 신포국제시장을 지나 골목길을 계속 나아가면, 오르막길로 이어진다.
이 근방 골목 모든 오르막길 끝은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는 자유공원으로 귀결된다.
이곳을 유령처럼 배회하는 사람들이 있다. 집에서 아침을 먹고, 65세 우대권 지하철 표를 이용해 점심 경에 이곳에 도착한다. 자유공원 아래에 펼쳐진 차이나타운 입구 언저리에 있는 중식집에서 3,000원짜리 짜장면을 먹고 자유공원에 오른다. 남은 시간을 300원짜리 커피와 장기나 바둑으로 보내다가 노을이 지면 집으로 돌아간다. 세월이 흘러도 맥아더 동상 아래 모여든 자들은 줄어들지 않고 언제나 일정한 수를 유지한다.  
세상 말대로 장군을 숭배하는 늙은 꼰대들이 아니다. 세상이 너무 변해서 적응 못 하는 사람들이고, 집에 있기에는 자식들에게 눈치 보여 오갈 데가 없을 뿐이다. 일제 강점기 때 전구를 처음 본 사람과 태블릿 PC가 당연한 세대가 현재에 같이 살고 있다. 2000년 때까지 이곳에는 고종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화석이 되어버린 옛 시절을 생생히 체험한 자들의 만남의 광장. 하지만 광장은 오갈 데 없는 이들로 가득 차 있다. 

- 지금 SNS에서는 사납고, 이기적이며 트렌드의 최첨단을 달리는 젊은 세대들이 빠른 재사회화를 당연하게 여긴다. 모두가 자신들처럼 의식 높은 서구 사회 용어를 써가며, 최신 기계를 조작할 줄 아는 SNS 트렌드 세터인 줄 알기에 최신 문물에 서투른 올드 세대를 비하한다. 
이들 중 일부는 타인의 일거수일투족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의식 수준 높다고 자부하지만, 자영업자들을 굴복시킨 대자본이 주도하는 패스트푸드 음식 치킨을 주로 소비하며, 독재자의 3S정책 중 하나인 야구에 열광한다. 어떤 야구팬들은 상대편을 조롱하기 위해 인천호프화재 사건을 희화했다. 그리고 그런 희화한 야구팬들의 SNS에는 어김없이 의식 높은 문구들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 세상이 너무 변해서 적응 못 하는 사람들과 세상이 너무 변한 걸 모르고 잘 사는 사람들.
괜히 꺼내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음 장소로 이어진다. 다음 장소에서 의미가 이어진다.

- 차이나타운 주위에는 어떤 관광마을이 연결되어 있다. 본래 이곳은 일종의 고려장 마을이었다.
인천 이 일대가 낙후되어 집값이 싸고 수도권과 연결되어 있기에, 불효자식들은 늙은 부모에게 이곳에 월세를 얻어주고 방치했다.

 

- 시간이 흘러 이 일대를 개선하기 위해 마을 곳곳을 정비하고, 집 벽면에 만화 캐릭터들을 그려 넣었다.
이거 다 거짓말이고 소설이니 책임질 필요 없는 얘기를 하겠다. 개선작업에 투입된 미술가가 벽면에 만화 캐릭터들을 그리다가 온종일 골목 구석에 앉아 있는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고 한다.
"어르신, 거기서 뭐 하십니까?"
"거기가 우리 집인데..."
미술가는 어르신과 대화 중에 이곳이 고려장 마을이라는 걸 알고 충격받았다고 했다.

- 완성된 마을은 더욱 충격이었다. 주위와 조화를 무시하고 불쑥 튀어나온 만화캐릭터들로 인해 컬트마을이 돼버렸다. 단층건물의 구식 문과 오래된 방범창이 이어지는 골목길은 쇠락했지만, 만화 화장으로 억지로 모습을 감추려는 것 같다. 그러나 하루 관광하러 온 젊은이들은 정말 재미있는 곳에 관광 왔다며 골목길을 지나간다. 만화 캐릭터와 과시용 사진을 찍고 SNS에 올린다. 골목에서 할 일 없이 앉아 있는 노인들은 말없이 지켜볼 뿐이다.

- 과거 인천에 쪽방촌 마을이 있었는데, 그곳에 쪽방촌 체험프로그램이 생기자 많은 젊은이들이 아픔에 공감하는 훌륭한 성인이 되고자 지원했다고 한다. 

 

- 이 도둑맞은 가난은 후에 서울에서 한 번 더 반복된다. 어느 도시에나 빈민가와 의식 높은 젊은이들이 있기에 매력적인 기획이었던 것 같다. 학창 시절 이 일대를 지날 때, 골목에서 시간을 보내는 노인들이 많았는데, 관광지로 이름이 올라가자 자취를 감추었다.

- 사는 곳이 침범받을 때 노인들은 어디로 갈 수 있을까? 갈 데나 있었을까?

- 젊은 관광객들이 '최신 문화행동' 셀카를 들이밀어 거주민들의 안녕을 침해하고 욕심을 채우는 건, 여러 테마 마을에서도 벌어지는 보편적인 악이 됐다.
"우리 집 사진 못 찍게 하니까 담을 넘어서 찍으려 들어, 말리니까 젊은이들이 눈을 부릅뜨고 달려들어 어린것들이 무서워서 관광마을 지위 빼 달라고 청원 넣었어요." 

 

- 이야기는 시사성이 있어야 한다. '이야기'에 들어갈 시사성은 여기서 만들었다.
하지만 아직 명쾌히 한 줄로 정리되지 않아, 확정시키지 않고 최우선 후보로 올린다.
그러나 관광 마을을 언급했기에 겁이 덜컥 난다. 굳이 초를 칠 필요가 있을까?

관광마을의 내력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과거가 잊힌 것은 분명 지역을 살리고자 했던 노력의 결실이다. 굳이 불편한 과거를 들춰야 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무슨 권리로? 스토리 논리에 혼란이 생긴다. 고소를 피하기 위해 거짓으로 쓴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관광마을에 대해 이렇게 써버리면, 쪽방촌 주민을 기만하며 가난 체험하는 지원자들과 다를 바 없다. 

 

- "과거 고려장 마을을 보고 왔으니 과거를 들추어서 좋은 글을 쓸게요."
이럴 수는 없다. 어느 부분까지일까? ...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진짜 이름을 가리고 단순하게 관광마을이라 고친다.
소설가로 살아온 몇 년의 세월과 그간의 작업경험이 있기에 금방 선택한다.

- 세상이 너무 변해서 적응 못 하는 사람들과 세상이 너무 변한 걸 모르고 잘 사는 사람들... 은 너무 의미가 크다. '이야기' 중요도가 바뀌어버린다. 아쉽지만 이 소재들은 빼야 한다.

 

난 지금 장르소설을 구상하고 있다.
오락물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독자의 수용이 다이렉트해야 한다.
주로 인터넷 활동이 활발한 젊은 사람들이 장르소설을 소비한다.
치킨을 좋아한다... 셀카에 적극적이다... 의식 높은 문구에 좋아요 버튼을 누른다... 야구에 열광한다... 지적 수준이 높다고 생각한다... 올드 세대와 거리감(?)이 있다.
읽는 이와 연관이 적거나 보편적인 비판대상으로 감정을 몰아야지 읽는 이가 스스로를 의식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건 순문학이다.
순문학도 아니고 장르소설로 독자를 가르치려 하면 안 된다. 그리될 수 없다.
스스로가 누구인지 잊지 말자. 난 오락물을 쓰는 장르작가이다. 나 자신을 검열한다.

- 내 생각만큼 난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과거를 들추고 개선이 잘 됐나, 안 됐나를 판단하는 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이다.
첫 구상 때 '이야기'에서 주인공들은 여기 관광마을의 관광객실종괴담을 듣고 조사하기 위해 방문한다...라고 설정했지만, 정리하는 현재, 주인공들은 관광마을 주민들로 자신들의 마을에 방문하는 관광객 실종괴담을 듣고 조사에 나선다,라고 바꾼다. 주인공들은 아름다운 관광마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지키고 싶다,라는 동기로 움직인다.
그래서 맥아더 동상과 옛 세대 이야기와 회화 사건은 사라진다.

- 내가 쓰려는 '이야기'는 학생들이다.
필터 학생에 맞게 그 외에 다른 소재들도 거르거나 제한해야 한다.
인천호프화재사건을 희화한 것은 치가 떨리지만, 내가 누구를 심판할 자격은 없다.

- 난 복수를 위해 쓰는 것도 아니다. 성공한 지역사업 이면의 불편함을 들추는 지적 과시를 위해 쓰는 것도 아니다. 무엇을 위해 쓰는지 분명히 알고 있으니 경계 없는 사유 확장을 억눌러야 한다. 쓸데없이 감정이입이 넘쳐 자아가 비대해졌다.

- 한 번에 한 가지 이야기만 할 수 있다. 이 원칙을 명심해야 한다.

- '이야기'가 수용할 주제와 소재 크기가 정해진다.
포스트잇에 학생이라 적고 모니터 옆에 붙여둔다. 앞으로 이 필터를 통과하고 연관된 사유와 소재들만 사용하기로 스스로를 검열한다.
현장에서 무분별하게 뻗어 나갔던 감정과 공상은 노트북 앞에서 차분히 정리된다.

- 위 문단을 여러 번 고쳐 썼다. 위선자들을 욕하면서 나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긴장이 풀리지 않는다. 누굴 욕할 자격이 없으니, 학생에 집중하여 오락물로만 충실히 쓰기로 다짐한다. 많은 지인들이 나한테 그랬다. 넌 아는 척을 너무 한다고... 

"응. 그래."
마음이 편해진다.

- 차이나타운에 왔으니 간단한 화교 역사가 소재로 작동한다. 과거에 중식집에서는 쌀밥을 팔 수 없었다. 쌀밥이 주식인 한국에서 화교들의 자본성장을 억제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화교의 자본독점을 억제하기 위한 정책은 곳곳에서 진행되어, 끝내 화교들이 자발적으로 대한민국 군대에 입대하는 결과까지 이끌어냈다. 과거에는 군대 안 가면 한국사람 아니라는 핍박에 군대에 갔지만, 현세대는 성인이 되면 중화국가 중 한 곳으로 귀화한다고 한다.

현세대의 설명은 단순하다. 한국 사람도 군대 안 가려 하는데 우리가 왜?라고 한다.

 

- 화교 근거지는 본래 을지로 부근이었다. 근거지 이름이 중국을 물리친 을지문덕 장군 이름으로 바뀔 때부터 억제가 심해져서, 서울에서 인천 앞바다 끝자락인 이곳으로 밀려나버렸다. 
일반 사람들은 체감할 수 없는 투쟁을 오랫동안 겪은 거주민들은 인근 관광마을 주민들인 주인공들이 겪는 기이한 사건들을 자연스럽게 이해한다. 
차이나타운과 인접한 관광마을에서 관광객 실종괴담이 발생한다. 걸어서 10분 거리이기에 차이나타운 관광객은 관광마을 관광객이기도 하다. 주인공들은 기이한 사건을 해결하려 조사에 나서고 차이나타운의 화교와 그 외 외국인 거주민들은 조사에 협조한다.
비일상적인 차이나타운에서 벌어지는 비현실적인 사건이 마치 일본만화나 게임 설정 같다. 중국인 마을에서 일본만화 같은 소재를 떠올린다. 그럼 주인공들은 꼭 한국인일까? 여기서 캐릭터가 다양화될 여지가 생겨난다. 

- 차이나타운 내부에 조계지가 있다. 외국이 땅을 임대하는 걸 조계지라고 한다.
청과 일본 군대가 조선 말기에 각자 땅을 차지하고 경계로 삼았던 조계지에, 지금은 청일전쟁을 추모하는 추모석들이 나란히 서 있다. 중앙에 굳게 선 공자 동상 뒷길에 화교 학교가 이어져 있다. 오후가 좀 지나면 화교 학생들이 조계지 무덤을 가로질러 하교한다. 대만 청춘영화에서나 봤을 깔끔한 하얀 교복을 입고, 예쁜 하얀 새처럼 중국말을 재잘거린다. 이곳에서 처음 하교 풍경을 봤을 때부터 주인공들 이미지가 정해졌다. 주인공들은 학생이다.  
이야기 주요 주제와 소재가 학생들이니 주인공들이 학생인 건 당연하다.
처음부터 무의식에 정해져 있었던 것이지만 화교 학생들의 이국적인 교복을 통해 생생히 의식하게 된다. 어린 학생 주인공들은 야밤에 부모님 몰래 집을 나와 무덤가를 떠돌며 어떤 악들과 맞서 싸우거나 기이한 실종사건을 조사한다. 이미지가 또 떠오른다. 그라피티가 요란한 모텔 밤거리와 점성촌 길목을 뛰어다니며 도시 전설 속 미궁을 찾는다. 

- 이 카페 이름은 말하기 꺼려진다. 조계지 무덤 부근에 한 카페가 있는데...
이곳은 차이나타운이라는 비일상적 공간이기에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카페 건물이 아니다...라는 것만 말할 수 있다. 집권여당이 좌파든 우파든 가리지 않고 무조건 대항하는 반골 당원들과 특수한 사회체제를 지향하는 비주류 당원들이 모이는 비밀 아지트이다(물론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카페다). 이곳 서가에 날이 갈수록 정당 인쇄물이 빼곡히 쌓이고, 비공식 집회참여자들이 늘어난다고 한다. 참고로 이들 두 세력은 일반 국민의 지지를 얻기 힘든 매우 마니아한 정치이념이기에, 굉장히 폐쇄적이고 극단적이며 매우 공격적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언젠가 정권을 구축(이들이 주로 쓰는 표현이다)할 때를 준비한 미래 계획서 인쇄물도 있다. 바로 살생부 리스트이다. 

- 그런데 이들은 아웃사이더 기질이 강해 서로를 밀어내어 사이가 좋지 않다, 라는데... 양쪽 살생부에 모두 이름을 올린 제삼자의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검색해 보니 그리 유명하지 않은 재야정치인물이다.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상상이 안 간다. 비주류&아웃사이더들이 증오하는 평범한 인물이라... 사연을 알고 싶다. 그리고 신념은 단단하여 순교자를 자처하지만, 이런 중요 인쇄물을 카페에 보란 듯이 방치하고 다니는 허술한 아웃사이더들. 게다가 살생부는 이면지를 사용했다. 두 가지 버전의 도시 전설이 품은 특별한 정치집단들은 명맥이 단절되지 않고 허술한 후대들을 통해 아직도 계승되고 있다. 내가 두고 보자고 했잖아.

- ... 못 믿겠다면, 직접 찾아가 보시길. 이 카페의 특징은 '앉을 수' 있다. 어디에? 차이나타운 모든 카페를 뒤져서 (일반적인 카페 건물이 아니다) 찾을 수 있다면 알겠지만 앉다... 가 무슨 소리인지 한눈에 알게 된다.

- 학생 주인공들은 방과 후 이곳에서 모여 작전을 논의하며 사건을 추리한다.
평범한 제삼자가 의뢰한 사건(실종괴담)을 해결하려는 학생 주인공들은, 제삼자를 사연 모르게 증오하는 카페에서 모임을 갖는다, 라 괜찮은 역설이다. 여기서 실종괴담에 대한 참여는 직접에서 의뢰로 살짝 바뀐다. 아직 확정시키지 않고, 유연하게 흘러간다.

- 차이나타운의 여러 카페들은 개화기 건물에 속해 있어 아주 운치 있어 보이지만 그중에 가장 탁월한 카페가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 목조건물을 그대로 유지한 곳인데... 관광마을 언급같이 복잡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상호는 밝히지 않겠다. 인사동에도 일부 건물들이 일제 강점기 때 건축되어 내부가 비좁고, 여러 번 꺾이는 좁은 복도를 가지고 있다. 이곳은 인사동처럼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건물이 아닌 오리지널 옛날식이다. 2층은 다다미가 깔린 일반 일본 가정집처럼 돼 있는데, 분위기가 싸늘하고 음기가 강해서 일본공포영화를 연상케 한다. 2층은 옛날 모습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반드시 운영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화교 학교 졸업생에게 들은 얘기로는 이곳이 화교 학생들의 담력시험장이라고 한다. 학생들은 자정에 무단으로 담벼락을 넘어 뒤뜰을 통해 2층 계단을 올라간다. 옛날 일본식 계단이라서 거의 엉금엉금 기어 올라갈 정도로 가파르고 좁다. (어떻게인지 밝힐 수 없지만 나도 이곳에 들어간 적이 있다. 옛날 가정집 내부에 불과하지만, 특유의 음기가 강해 날이 어두워진 후 들어갈 장소는 아니다.) 그런데 자정에 무서운 곳에 들어가 담력시험 한다는 얘기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다. 화교 학생들이 옛날 일본 집에 담력 시험을 하러 들어간다. 이야기를 듣는 한국인인 나는 전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시아인들의 정서는 많이 비슷하다.
 
관광마을 이후로 실명을 언급하지 않아 못 믿겠다면, 직점 차이나타운에 가서 아무나 붙잡고 이 설명을 그대로 보여주면 된다.
여기서 분기점이 있다. 주인공들은 실종자의 의상과 핏방울을 2층 방에서 발견한다.
가뜩이나 음기 강한 그 무서운 방에서 발견되면 추리공포물이 된다. 그러나 추리공포물은 내가 '이야기'하려는 학생들과 거리가 멀다.

- 차이나타운, 관광마을, 실종괴담, 모두 비일상적이며 환상적인 소재이다. 술술 적는 동안 제대로 밝히지 않았지만... 내 안에서 정해진 학생들 이미지는 밝고 건강하다. '이야기'는 밝고 건강한 학원물 추리이다. 내가 알고 있기에 남도 알고 있을 거라는 착각을 했다. 제대로 전한다. '이야기'는 강한 긍정이다.

- 그러면 세계관에 따라 비주류& 아웃사이더 당원들의 분위기도 바뀐다.


- 모임 때마다 선인장 화분을 안고 온다거나 고양이를 데리고 와서 같은 당원이라 주장하는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다. 너무 이상주의자들이어서 매우 예민하고 까다롭다. 집회 때 당원들 모두가 커피 메뉴 고르는 데만 해도 1시간이 넘게 걸린다.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이는 별로 없고, 경제적으로 무능력자에 속한다. 공격적이라는 집단특색과 달리 개개인은 좀 게으르고, 오컬트나 점술을 신봉하며, 허무맹랑한 얼치기 이상주의여서 대화하다 보면 유치하게 느껴지고, 짜증도 나지만 아주 무해하다. (난 실제로 이들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딱히 근거를 대지 않고 제3의 무명 재야정치인이 세계를 멸망시킬 마왕이라 주장하며 암살모의를 한다. (그럼 마왕이 학생들에게 의뢰했다는 반전이 들어갈까?) 학생 주인공들은 이상한 생각을 주장하는 어른 같지 않은 유치한 어른들이 득실대는 카페의 단골이다. 카페는 학생들이 미래의 당원이 되리라는 착각으로 찻값을 받지 않으려 한다. 주인공들은 이런 기대와 연관된 소소한 에피소드를 겪는다.

- 2층 방 역시 담력시험 에피소드를 통해, 무서운 공간에서 신비한 공간으로 바뀐다. 어디든지 통하는 게이트가 된다. 학생들은 게이트를 통해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여 힘을 얻어야 하나? 무기를 얻어야 하나? 응?

- 무의식 밑바닥 근간에서 게임 페르소나 3&4가 떠오른다. 아름다운 마을. 비일상적인 공간, 야밤에 무덤가와 골목미궁을 뛰어다니는 학생들. 주인공이 학생, 주인공에게 협력하는 마을주민들. 기이한 실종괴담. 게다가 주인공들의 대적자, 적, 악을 초자연적인 존재로 구상하고 있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한 번도 검열하지 않고...

- 나도 모르게 페르소나에 빗대어 상상하고 있었다. 사유는 순간의 깨달음을 통해 상상력의 원형을 찾는다.  

- <하트 투 하트>



처음 이곳에 와서 "규칙"에 대해 들었을 때, 나는 실없이 웃었다. 이 과정을 곧바로 클래스로 나누고, 적당한 알고리즘대로 움직이게 만들어서, 길게 설명할 것 없이 바로 자동화하는 과정을 머릿속에 떠올려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내게 머릿속이라고 할 무언가가 남아 있다면 말이다. 나는 죽었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는 건 보통 인간의 몫이 아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사흘 만에 부활할까 걱정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내 몸은 죽은 지 날짜로 사흘, 시간으로는 고작 36시간도 되지 않은 시점에 활활 불태워졌다. 

-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밤에 아직 안 먹은 저녁 대신 야식으로 뭘 먹으면 좋을지 생각하며 회사에서 일하다가 잠깐 책상에 엎드렸고, 그대로 죽었다. 멀쩡히 야근하다가 갑자기 송장을 치우게 된 우리 회사 사람들에게는 애도를 표하고 싶지만, 어쨌든 이 상황에서 애도의 대상은 그 사람들이 아니라 나다. 적어도 그 사람들은 내가 그리 죽어버린 것을 보고 한동안은 조금이라도 일찍 퇴근하고, 잠을 10분이라도 더 자려고 애는 쓰겠지. 효과가 있을지 의심스러운 녹즙이라도 챙겨 마실 테고, 내겐 그런 기회라는 것도 주어지지 않았으니, 내가 그 사람들을 딱하게 여겨봤자 내 주제 파악 못 하는 일에 불과하다. 

- 어쨌든 그동안 나도 정확히는 몰랐지만, 대체로 장례라는 것은 죽은 당일을 1일로 쳐서 사흘째 되는 날 아침에 발인하는 법이라 한다. 새벽 1시에 죽었든, 밤 11시에 죽었든 상관없이 다시 말해 사람의 몸이란 어쨌든 대체로 숨이 멎고서 길어야 60시간 안에는 잿더미가 되는 모양이었다. 사실은 그것도 죽은 다음에야 알았다.
그나저나 완전히 정지한 몸뚱아리라도 남아 있으면 어떻게든 해 볼 수 있을까. 이걸 어쩌란 말인지.

- 나는 규칙을 듣고 혼자 알고리즘을 짜보며 낄낄거리다 말고, 심각해졌다. 나는 이곳의, 그러니까 신인지 천사인지 시스템 운영자인지 뭔지 모르겠는 존재를 향해 물었다.
"저기, 제가 가족한테 해야 하는 말이 있는데요."
"죽었는데 무슨 수로 말을 해요."
"아니, 꿈에 나타난다거나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조상이 로또 번호도 알려준다는데, 로또 번호 알려줄 재주는 없어도 보험이랑 저금이랑 그런 건 알려줘야지."
"산 사람은 알아서들 다 삽니다. 돌아가신 분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아니,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그래도 가족인데."
말끝을 흐렸다. 시스템 관리자는 나를 좀 딱하게 여기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이 문제를 도와줄 생각은 요만큼도 없는 듯한 눈치였다. 그는 내게 다시 말했다. 
"기회는 한정되어 있어요. 시간제한도 있고요. 가족들 생각은 이제 그만하고, 이제 님의 앞일이나 생각해 보세요."

- 그가 '앞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 전까지 내게 설명하던 그 규칙에 대한 문제였다.

이곳에서도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른다. 그리고 죽은 사람은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자기가 원하는 곳에 선택해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지역은 고를 수 있다. 물론 특정 지역으로 희망자가 너무 몰리면 밀려날 수는 있다고 했다. 그래도 인연이 있거나 원래 살던 곳이라면 우선순위가 주어진다고. 살아 있을 때, 기회 되면 가보고 싶었던 곳들은 있었다. 하지만 경쟁에 밀려 엉뚱한 곳에 잘못 태어나느니, 안전빵이 최고였다. 적어도 한국 정도만 되어도, 의료보험이 빵빵하니까 태어나자마자 병 걸려 죽진 않겠지. 내가 원래 살던 지역 근처를 고르자, 시스템 관리자는 그런다고 원래 가족과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굳이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 자, 이다음부터는 확률 싸움이다.

- 죽은 사람에게는 각각 저마다 랜덤하게 환생 가능한 후보지들이 일곱 곳까지 제시된다. 한 후보지에서는 현실 시간으로 최장 7일까지 머무를 수 있는데, 7일째 되는 날 여기로 환생할 것인지 결정하거나, 혹은 중간에 거부하고 다음 후보지로 넘어갈 수 있다. 한 번 거부한 후보지는 목록에서 삭제되는데, 자신에게 주어지는 후보지 중 어느 것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인지는 알 수 없다. 

 

- 그러니까 이거, 알고리즘이잖아.

- 나는 학교 다닐 때 배웠던, 공주 100명을 차례로 만나보고 그중 가장 아름다운 공주와 결혼해야 하는 남자의 알고리즘을 떠올렸다. 증명 과정까지는 생각나지 않았지만, 결론은 알고 있다. N이 무한대로 발산할 때, 가장 아름다운 공주를 고를 수 있는 확률은 1/e에 수렴한다. 여기서 e라는 것은 자연로그의 밑인 2.718 어쩌고를 말하는 것이고. 그러니 100명이라고 가정하면 37명까지의 공주를 만나보고, 이후 그 37명 중 가장 아름다운 공주보다 더 나은 상대가 나타나면 바로 결혼하면 된다는 뜻이다.

- 하지만 지금은, 후보지가 일곱 곳밖에 없다. 두 번째나 세 번째까지 본 뒤, 그보다 나은 자리가 있으면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게 말이 되나?
생각하는데, 눈앞이 환해졌다.
눈은 제대로 뜨이지도 않았다. 억지로 눈을 열었더니 보이는 것은 온통 하얀 천장뿐이고, 사방에서 온통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문득 생각했다. 생각만큼 젖비린내가 나진 않는 게 다행이지.

- 뭔가 생각을 하면 그게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비 맞고 앓는 아기고양이 같은 울음소리가 되어 나왔다. 자기 자신을 특별히 귀엽게 비유하고 싶은 게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손발을 들어 올릴 수도, 목을 가눌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몸에 갇혀버렸다는 생각에 짜증을 내면, 흐릿한 덩어리가 다가와 나를 안아 들었다.
"아이고, 우리 아기. 응가했어요?"
그러니까 여긴, 말로만 듣던 산후조리원이었다.

- 이곳에서의 하루는 한 달 같았다. 소리는 웅웅 울리듯이 들렸지만, 앞은 아직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애써서 눈을 떠도 흐릿한 덩어리들이 움직이는 것이 겨우 보일 뿐이었다. 갓난아기는 색깔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더니, 정말 그랬다. 그저 온통 뿌연 막에 싸인 채, 나는 온종일 먹고 자고, 먹고 자기를 반복했다. 
나는 꾸벅꾸벅 졸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나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아는 것들, 그러니까 알고리즘이라든가, 내 원래 가족이라든가, 회사라든가, 그런 것들을 잊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때마다 나는 고양이 같은 소리로 울었고, 덩어리들은 다가와 내 입에 젖병을 물렸다. 
간혹, 진하고 맛이 다른 것들이 입안으로 밀려들어 오기도 했다. 서투르게 젖을 물려 오는 여자의 품에 잘못 안겨서, 숨을 못 쉬고 캑캑거리기도 했다. 

- 그건 혹시 시혜적인 관점은 아니었을까? 몸이 다 불태워져 뇌세포도 남아 있지 않은 지금, 나는 곰곰 생각해 가며 그걸 구별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런 수사를 덕지덕지 붙이는 것도 우스웠다.
문득 대학에 진학한다고 서울에 올라와서 딱 한 번 사투리를 잘못 썼다가 같은 과 남자 선배에게 한참 동안 괴롭힘을 당했던 게 생각났다. 못 알아듣겠으니 사투리 쓰지 말라고, 그럴 거면 네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그래, 솔직히 말하자. 나는, 내가 다문화가정 아이로 태어나 차별을 받는 게 두려웠다.

대학에 진학한다고 서울에 오기 전, 내 또래의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말에서 사투리를, 고향에서 듣고 자란 억양들을 지워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서울 아이들은, 또 서울에 와서 서울 아이들보다 더 큰 목소리로 자기 지역의 억양과 언어로 떠들고 다닐 수 있는 아이들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차별받지 않으려면 자신의 언어를 바꿔야 했다. 하지만 쉽게 바꿀 수 없는 것에서 출신이 드러날 때는, 그래서 차별을 받을 때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 다문화라는 말이 아이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디 가서 두들겨 맞고 돈을 빼앗겨도, 쟤네 엄마는 학교에 와서 말 한마디 못할 거라고 낄낄거릴 게 뻔했다. 여기서 태어나서 자랐는데도,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소리나 들을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이 사람에게 정말 미안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환멸이 나지만, 난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정말 그랬다.

- 세 번째로 눈을 뜬 곳은, 또 다른 조리원인 모양이었다.
여긴 카페의 배경음악처럼 죽 이어지는 클래식 자장가 소리를 제외하면 무척 조용했다. 조명도 부드러웠다. 트로이메라이의 낯익은 선율과 나긋한 간호사들의 목소리에,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금세 잠이 들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먹고 자고 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한 뒤의 일이었다.

- 사실 산후조리원이라고 해도, 엄마들이 육아에서 손을 놓고 그야말로 산후조리에만 전념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생아실에서는 두어 시간에 한 번씩은 수유하라고 갓 출산한 산모들을 불러들였고, 그러면 산모들은 아직 덜 아문 상처 때문에 앉기도 힘들고, 가슴은 돌처럼 단단하게 부어 스치기만 해도 아픈 몸을 이끌고 신생아실에서 아이를 데려갔다. 그리고 아프다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그 갓난아이에게 안 나오는 젖을 굳이 물리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나는 신생아실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런데 윤지영 산모는 아직도야?"
밤이 되자, 신생아실 간호사들이 아기들에게 분유를 먹이 ...

-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아와도 칭찬 한 번 제대로 못 듣고, 오히려 남동생 기죽인다는 소리나 듣고 살았다. 아르바이트하고 회사 다니며 피땀 흘려 번 돈도 거의 다 집안 빚 갚고 그 녀석 학교 보내는 데 들어갔다. 그런데도 그 누구도 내게 고맙다는 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입장이 바뀌는 거다. 내가 바로 그, 남동생으로 태어나는 거다. 집안의 기대를 모으고 사랑을 듬뿍 받는, 위로 자신에게 설설 기어 줄 누나가 줄줄이 있는 외아들 말이다. 그것도 꽤 잘 사는 집의 남자아이로. 
그게 역겨웠다.

- 나는 젖을 토했다. 그냥 그러면 되는데, 받아들이고 편하게 살면 되는데, 나의 비위는 그런 것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바보, 바보 멍청이. 일생을 두고 그런 걸 부러워했는데, 막상 그게 내 몫이 된다고 하니 도망쳐버리다니. 
하지만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 몰염치한 인생은.

- 벌써 다섯 번째다.
문득, 여기까지 와서야 생각해 냈다. 사십구재라는 것. 사람이 죽으면 7일마다 명부에서 심판을 받고, 마지막으로 49일이 되면 염라대왕의 최종심판을 받아 다음 생이 결정된다고 한다. 환생을 할지, 극락이나 지옥에 갈지. 그래서 내세에 좋은 곳에 태어나라고 49일째에 지내는 제사가 사십구재다.
그게 아주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에 와서야 그 생각이 든 것을 보면, 나도 어지간히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지.
7일씩 일곱 번 기회가 주어지고, 그 안에 환생할 곳을 고르기는 하니까. 그런 점에서는 내세에 좋은 곳에 태어나라고 지내는 제사라기보다는, 전생의 기억을 싹 잊고 새로운 인생을 살라고 지내주는 제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그다음에, 기제사니 명절 차례니 그런 건 다 의미가 있는 걸까? 명절마다 제사마다 큰 집에 가서 그렇게 전을 부쳐댔는데, 다 의미 없다고 하면 그것도 또 기분이 나쁜데. 

- 나는 죽음이나 장례식 같은 것에 대해 잘 몰랐다. 내 죽음은, 내가 직접 맞닥뜨린 최초의 죽음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너무 어려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고3이었고, 공부는 좀 하는 편이라 장학금 받으며 대학에 다니다가 졸업한 뒤에는 집안을 일으킬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었다. 정확히는 기대라기보다는, 집안 빚을 갚아나갈 자원으로서 평가받고 있었다고 해야 하겠지만. 사람이 죽고 죽이는 스릴러 소설은 수도 없이 읽었지만, 현실에서 죽은 사람을 본 적도 없었다. 


- 어쨌든, 이번에야말로 어지간하면 그냥 선택을 할 생각이었다. 딸이 줄줄이 딸린 집의, 오랫동안 집안 모두의 기대를 받으며 겨우겨우 태어난 막내아들이라고 해도, 그 아이가 성장하며 자기 누나며 엄마며 집안 여자들을 어떻게 빨아먹든 상관없이, 양심에 털 난 것처럼 그냥 버티고 살아볼 생각이었다. 몇 번이나 거듭해서 생각해 봤지만, 아까웠다. 그렇게 살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리다니. 

 

- 그때, 갑자기 시스템 운영자가 나타났다.
"뭐예요?"
나는 물었다. 그 소리가 이제는 제법 사람 같아진 아기 울음소리가 되어 튀어나왔다. 시스템 운영자는 곤란한 듯 말했다.
"그냥 웬만하면 여기로 정하려고 하는데요. 아주 막장만 아니면..."
"아, 그게. 여기는 안 되겠어요." 
"왜요?"
"아이의 조상님들께서 반대하셔서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죽으면 환생을 하는데 조상님이 어디 있어요."
"있어요."
"... 어쩌라고.”
"음, 그러니까 유교에서 귀신에 대해 연구한 바에 따르면요."
"유교는 괴력난신을 배척하는 게 메인스트림이지 않았어요?"

"배척을 하려면 연구를 해야죠. 하여튼 간단히 설명하면 이런 거예요. 인간은 혼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혼은 양이고 백은 음이죠. 학자에 따라 혼은 신명이 되고 백은 귀신이 된다는 사람도 있고, 혼이 둘로 나뉘어 신명과 귀신이 되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는 사람도 있지만, 결론만 말씀드리면 사람이 죽으면 신명과 귀신으로 나뉘어요. 환생 루트를 타면 귀신이 안 되는 거고, 이걸 제대로 못 타면 귀신이 되는 거죠. 아시겠어요?"

 

- "그러면 환생을 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 아이의 고유한 혼백 중에 나중에 신명이 되는 부분이, 이렇게 환생한 부분과 결합해서 새로운 인격이랄까, 혼백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전생의 기억을 가져가진 않아도, 습관이라든가 생각하는 방식이라든가, 이런 건 그대로 가니까."
"... 예."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시스템 운영자가 마저 설명했다.

"그러니까 제사를 받아 잡수시는 분도, 지금 님이 이 아이로 환생하는 걸 반대하는 것도 모두, 이 아이의 조상신 격인 거죠."

- "잠깐, 그러면 어딘가는 나의 일부가 제사를 받아먹는다거나, 그런 거예요?"
"님은 자손이 없으니 어차피 제사는 받기 힘들어요. 요즘은 그런 신명도 많으니까요."
"... 좋아요. 그럼 그 조상이라는 분들은 왜 반대하는 건데요?"
"음, 그러니까 이유가 둘이 있네요. 하나는 젊어서 죽었다는 것."
"젊어 죽은 것도 서러운데, 그걸로 차별을 하고 있어."
"실제로 그런 건 아니고, 통계적으로도 밝혀져 있는데, 옛날 조상신 중에는 젊어서 비명횡사를 한 사람이 환생하면 원래 살아야 할 수명의 나머지만큼만 살고 일찍 죽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기분 문제죠. 그다음은..."

- "원래 다들 이래요?"
내게 주어진 마지막 선택지, 일곱 번째의 선택지로 들어가기 직전, 나는 물었다.
"원래 다들 이렇게 엿 같은 선택지밖에 없냐고요."
"저기, 첫 번째와 네 번째 정도면 아주 양호했어요. 다섯 번째도 괜찮았는데 조상신들이 극성이라 못 한 거고."
"아, 예."
"두 번째도, 아빠는 개차반이지만 엄마는 좋은 사람이었고, 세 번째도... 아이 엄마도 아빠도, 정말 힘들게 아이를 가져서, 태어날 아이를 무척 기대하고 또 사랑했어요. 엄마가 그렇게만 되지 않았어도 진짜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겠죠. 이만하면 당신이 딱히 나쁜 선택지만 받은 것도 아니긴 해요." 
"남일이라고 말 편하게 하네요."
"그런 것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이 운이 나쁜 것도 아니었고. 일곱 번째에서 그렇게 되었으면, 다시 윤회를 시작해야 하니 더 큰 일이었을 거예요."

사실 나는 여섯 번째에서 제 아비에게 붙잡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아기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윤회를 시작해야 한다는 말에,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왜..."
그렇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대체 왜. 아무리 인간의 삶이 고통의 바다를 건너가는 일과 같다지만, 이렇게까지.

- "이럴 거라면 그냥 랜덤으로 아무거나 찍어서 딱 던져줄 것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스템 운영자가 부드럽게 말했다.
"직접 선택하는 쪽이 그나마 낫지 않아요?"
"낫긴... 그래놓고는 네가 선택한 인생이라며 태어난 아이에게 책임 떠넘기기 딱 좋은 시스템이잖아요."
"아, 그럴 수도 있긴 있겠다."
"설마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거예요?"
"음, 아니. 이쪽에서는 부모 후보들도 거부당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교환 반품하는 것처럼 말이죠."

 

- "음, 그래서 이제 일곱 번째인데, 갈 준비는 되었어요?"
"준비되고 말고...."
나는 중얼거렸다. 그때 문득, 조금 전과는 다른 감각들이 밀려왔다.
최초의 감각이 청각이라고 한다. 죽은 뒤 최후까지 남는 감각도 청각이라고. 그래서일까. 그녀는 계속 내게 목소리로만 와서 닿았다. 사람의 몸을 입지 않으면 시각이라는 게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죽은 뒤에야 알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다고 느꼈다.

- 그 낯설고 새로운 감각과 함께, 촉각이 느껴졌다. 부드럽게 나를 끌어안는 느낌. 배냇저고리가 이제는 조금 작게 느껴질 만큼 통통하게 살이 오른, 어리고 새로운 몸. 그 몸에 착 감기는. 포근하고 보드라운 속싸개의 감촉. 그 위로 끌어안고 등을 두드리는 따뜻한 체온, 눈을 떴다. 아직 완전하지 않은 시각 너머로, 뒤로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누군가의 어깨 위에 젖을 토해놓고, 아기는 딸꾹질을 해댔다. 그 딸꾹질에 맞춰 여자가 등을 쓸었다.
"추운가 보다. 맘마 조금 더 먹을까?"

나직한 자장가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어쩐지 시스템 운영자의 목소리와 닮아 있었다. 어른이 아닌, 어린아이인 나를 대하는 그 상냥한 목소리는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 포근해서, 나는 마치 어디서부터가 꿈이었고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긴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입술에 익숙하게, 마치 처음 맛보는 것인 듯 젖이 물려졌다. 눈을 깜빡이며 작은 손으로 가슴을 더듬었다. 꼴깍. 꼴깍. 꼴깍.

레테의 강물을 삼키듯이, 마침내 전생의 기억은 흐려지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 <교환 및 반품은 7일간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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